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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7) 댓글:  조회:2994  추천:1  2020-03-01
                                          7. 의학과 맺은 인연 내가 6살 때 백부는 주역에 연구가 깊은 조양천의 명진사로 불리우는 최진사를 청하여 나의 팔자(출생 년월일, 시의 간지 두자씩)를 알려주며 나의 사주(四柱)를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때 최진사는 나의 사주팔자를 보고 역출한 운세에 따라 “이 아이의 천직은 명의(名医)이므로 이 아이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시우.”라고 당부했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으로 꾸었던 꿈이 의사였다. 나의 의학공부는 1945년 ‘8. 15’해방후 리시진의 ≪본초강목≫, 허준의 ≪동의보감≫ 등 의학서적을 자습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1947년초, 나는 룡정의과대학의 학생모집광고를 본 후 물을 만난 고기마냥 주저없이 소학교 교직을 버리고 응시한 결과 룡정의과대학에 합격되였다. 하지만 룡정의과대학을 룡정에 있는 군정대학에서 이관(移管)하면서 신입생들의 정치심사를 재심하게 되였는데 결과 우리 집 가정성분이 ‘규편중농’이라는 데서 정치심사에 걸려 락방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인 대동아전쟁 말기에 사회적으로 전염병이 류행되며 여러가지 이난병들이 나타났다. 그 때 우리 집에서는 내가 먼저 발진질부사에 전염되였고 내가 병이 나으니 백부와 7촌숙부 내외가 이 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때로부터 나는 의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 백부, 7촌숙부 내외가 련이어 전염병에 걸리자 의원들이 자주 왕진을 다녔고 나도 심부름으로 의원네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 집에 왕진을 다닌 의원들로는 중흥툰(지금의 촌급 단위)에 있는 나의 숙부벌이 되는 김재혁(金在赫) 등 세명이였다. 김재혁은 내가 중의에 흥취를 가진 것을 알고는 나에게 허준의 ≪동의보감≫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 동산 기슭 안굽에서 사는 한족인 왕의사한테도 종종 왕진을 청했는데 나는 약을 지으려고 그 집에 자주 다니기도 하였다. 왕의사는 50대 중년으로서 진단, 진맥을 잘했고 약첩의 음편(饮片)도 깨끗했으며 가루약종이 적었다. 나는 연길서시장에 가기만 하면 주머니를 거의다 털어서 낡은 책들을 구입하여 의사공부를 하였다. 당시는 전란 때여서 신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없었고 다만 낡은 책들을 회수하여 파는 간판도 없는 책가게들뿐이였다. 나는 해방전에 서울에서 출판한 ≪동의강화(东医讲话)≫라는 보급서적을 읽으면서 중의학기초리론을 공부하게 되였다. 토지개혁 때에 우리 집이 부농으로 청산되면서 이 책도 잃어졌는데 책 저자의 성명도 모르며 재독할 기회도 더는 없게 되였다. 해방초에 나는 연길서시장 고서점의 먼지 속에서 ≪편작심서(扁鹊心书)≫라는 작은 책을 입수하게 되였다. 편작은 중국 전국시대의 명의로서 당시 조(赵), 진(秦), 주(周) 나라에서 의술로 행세하였으며 그의 친필저서는 유실되였다고 한다. ≪편작심서≫는 송나라의 한 의사가 민간에서 편작의 약방문(药方文)을 수집하여 지은 책인데 이 책이 진짜로 편작의 약방문인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중의 리론과 림상을 겸한 론저로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에서 중심사상과 편작의 응용리론은 ‘대병의구(大病宜灸)’ 네 글자로 요약되였다. 즉 중병에는 뜸이라는 말이다. 내가 태양구활동중심에 다니며 모택동사상선전대 조직활동을 하던 때인1947년 봄의 어느 날이였다. 오후 세시경에 집에서 사람을 보내여 젖먹이가 생명이 위급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달음박질쳐 집에 도착하니 태여난 지 5개월밖에 안되는 둘째아들 상욱이가 낯이 새파랗게 질리고 들숨보다는 날숨이 더 많아 당금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아들이 사경에 이르렀는데 어디에 가서 의사를 모셔온단 말인가. 그 때에는 촌에 전화도 없어 의사를 모셔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대병의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담요에서 솜을 뽑아 뜸쑥을 대신하여 불을 붙인 후 용천혈(涌泉穴, 발바닥)과 신관혈(神关穴, 배꼽)에 뜸을 반복했다. 한참후 날숨만 심하게 쉬며 울지도 못하던 애가 불시에 “응아―” 하며 울기 시작하더니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고 경련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증상도 사라졌다. 이렇게 솜뜸으로 아이를 살려낸 후에 관찰해보니 아무런 부작용도 후유증도 없었다. 아이의 급병은 풍한감기(风寒感冒)로 온 소아경풍(小儿惊风)으로서 솜뜸으로 깨끗이 치유되였던 것이다. 그 후부터 ‘대병의구’ 네 글자는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강비법으로 되였다. 이 밖에도 몇가지 사례를 곁든다. 1) 1952년에 나는 신장결핵병에 걸려 혈뇨까지 보았는데 연변병원의 항균치료를 받으면서 지탱하다가 결국에는 1953년에 뜸으로 완치되였다. 2) 지난 50년대에 뜸으로 허리병으로 인한 ‘절름발’증상을 치료해 농학원의 뉴스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감기는 도꼬마리로; 배 아픈 병은 리질풀, 익모초, 쑥으로 치료하였다. 62세부터 병원을 몰랐고 94세인 지금도 뜸으로 몸건강을 지킨다. 3) 아들의 20년 허리디스크, 골증식도 한해 겨울 뜸으로 치료하여 완치하였다. 4) 며느리의 갑상선암 수술후 통증도 국부뜸으로 치료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유증이 없다. 5) 딸의 유종병(乳肿病)도 큰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장했지만 딸의 요구에 의해 뜸으로 해결했다. 지금 우리 집 식구들은 몸이 불편하면 나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절로 뜸을 뜨며 병을 치료한다. 2017년 초겨울 어느 날, 나는 창문 밑에 있는 침대에서 자다가 새벽에 문바람을 맞고 한동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생각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초기중풍증세라고 판단하고 정신을 차려 억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후 항상 준비하고 있던 보건상자 앞까지 겨우 기여갔다. 그런 후 용천혈에 뜸을 떴더니 한참후에 몸움직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부터 나는 한문으로 ‘죽음체험’이란 넉자를 침대머리에 붙여놓고는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다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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