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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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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년만에 다시 해빛을 본 소설 "희로애락" 댓글:  조회:3486  추천:4  2014-08-24
 1984년 아들이 태여나 아버지가 된것을 기념해 쓴 단편소설을 꼭 30년만에 다시 대하게 되였습니다. 저의 작품을 기억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글로 된 원작을 여기에 올립니다.) 제2차 중국소수민족문학작품 우수소설상(85년) 제1차 《작가》 문학상 (84년) 제1차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영예상(85년)                                            희로애락   머리말     희로애락은 인간상징이다. 인간의 정서적 측면에서 볼 때 인생은 희로애락의 부단한 연속이라 함은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나의 주인공들   나의 주인공들은 혹을 가진 청년들이다. 다리 부러진 노루 한곳에 모인다더니 그들은 다 종양병원 4호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들은 수술을 기다리는 청년들이다. 1호 침대는 위 속에 혹을 가지고 있는 상일이가 차지했고 2호 침대는 목에 새알만한 혹이 생긴 윤수가 차지하였다. 그다음 3호 침대는 팔꿈치에 달걀만한 혹을 달고 있는 철삼이가 차지했고 4호 침대는 아랫배 속에 혹을 안고 있는 승대가 차지했다. 이들의 외형은 검다, 희다, 크다, 작다라는 말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내두산 수력발전소 노동자인 상일이는 얼굴이 흑인에 짝지지 않을 정도로 검실검실했고 그와 반대로 예술단 독창가수인 윤수는 분 바른 처녀들의 얼굴처럼 하야말쑥했다. 양식 창고에서 마대를 메어 나른다는 철삼이는 농구선수처럼 키가 무척 컸다. 그와 침대를 맞대고 있는 승대는 가두 옷공장의 구입원이였는데 난쟁이나 다름없었다. 철삼의 절반 키나 좀더 될까 말까 한 그의 키를 제대로 말하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1미터 29.9센티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들은 외형도 달랐고 성격도 각이했다. 상일이는 반고수머리여서 그런지 아련한 편이였다. 그를 되다만 처녀라고 놀려주는 철삼은 키 큰 탓인지 꽤 싱거웠다. 난쟁이 승대는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나다니는 구입원이 되어 그런지 잠시도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하는 바람개비 성미였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열등감이 앞서 남들 앞에 나서기를 꺼린다지만 승대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을 대할 때에도 자기를 소개한 끝에 꼭 “난 팔삭둥이여서 키가 채 자라지 못했습니다.” 하고 우스개를 덧붙이였다. 승대는 병원에 입원한 그 시각부터 잠시도 병원에 누워있지 않고 종일 온 병원 안을 쏘다녔다. 맞은쪽 병실에 가서 암으로 입원한 늙은이와 장기판을 벌려놓고 장훈이야 멍훈이야를 불러대기도 했고 가끔 간병원실에 들어가 우스개를 풀어 간병원들로 하여금 배를 그러안고 뱅뱅 돌며 눈물을 찔끔찔끔 짜도록 웃기기도 했다. 심지어는 어느 여 환자가 유선암으로 젖통을 떼냈다는 말만 들으면 어김없이 찾아가 어느어느 곳의 어느어느 병원에선 인공 젖통을 만들어 붙여준다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누가 만약 주책머리 없이 별걸 다 말한다고 할라치면 승대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면서 자기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정신적 위안을 주었노라고 호기를 부렸다. 어쨌든 그는 뭇사람들의 재미를 끄는 인물이었다. 그와는 달리 윤수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진종일 그 해사한 얼굴에 짙은 그늘을 띄우고 시름에 잠긴 눈으로 천정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하여 철삼이는 가끔 가다 그를 버림받은 처녀꼴이라고 놀려주곤 하였다. 윤수와 머리를 맞댄 상일이는 눈만 뜨면 베개 밑에서 네 귀가 다 보풀이 인 중학교 교과서며 물리교과서며 화학교과서를 꺼내 놓고 말없이 그것들을 뒤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묻는 말에 겨우 대답이나 하는 정도인 그는 4호 병실에서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액외 사람이었다. 꺽다리 철삼이 또한 인물이었다. 그는 낮엔 짬만 있으면 주패로 처녀패를 놓는 것이 업이었다. 그러다가도 밤이 되기만 하면 간호원 몰래 침대 밑에 넣어 둔 가방에서 큼직한 권투장갑을 꺼내 가지고 창문으로 뛰어나가 밖에 있는 소나무에 대고 한참씩이나 따닥이를 먹인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지금 한창 권투 삼단을 꺾는 중이라고 한다. 넷의 외형, 성격, 직업이 달라서인지 병문안을 오는 사람들도 달랐다. 승대한테는 거의 모두가 말이 다사한 가두 옷공장의 아주머니들이 찾아왔고 철삼이한테는 따닥이패들이 자주 와서 어디 가서 술 먹고 주먹을 휘두르던 이야기로 왁작 고아댔다. 고아인 상일이한테는 간혹 가다 수력발전소에서 한두 사람이 올 뿐이었다. 윤수한테는 예술단 배우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중엔 칠칠한 처녀배우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올 때면 승대는 언제나 침대에 궁둥이를 눌러 박고 앉아 병실에서 서설거리며 예술단 처녀 배우들한테 자리를 권한다. 물을 따라준다 하면서 각별히 친절을 베풀었다. 어쨌든 승대와 철삼의 기분은 좋았다. 승대의 말대로 한다면 예술단의 처녀 배우들을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젠장, 날 찾아오는 아주머니 네들한테선 아이들 똥오줌 냄새만 펄펄 난단 말이야. 그리고 저 철삼이를 찾아오는 따닥이 패들한테선 피 비린내가 확확 풍기는 게 소름이 끼치거든. 그래도 예술단 배우들이 와야 분내, 향수 내가 풍기고 방안이 환하다니까.” 그러면 철삼이도 윤수도 상일이도 웃음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의 주인공들에게 있어선 소독내만 풍기는 병실에서 티 없는 옥처럼 말쑥하고 고운 처녀 배우들의 얼굴을 본다는 그 자체가 말 그대로 정신상의 유쾌한 향수였으니까. 허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종양수술을 받아야 할 그들에게 있어선 이러한 향수는 어디까지나 순간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순간적인 향수보다도 가끔 엄습하는 암에 대한 무서운 공포에 가슴을 졸일 때가 더 많았다. 몸에 혹을 가진 사람들 거개가 그러하다시피 그들도 자기 몸에 돋은 혹이 악성이면 어쩌랴 싶어 은근히 속을 썩이는 중이었다. 암이라면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 하기에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암에 걸렸다면 그를 저승의 문턱을 이미 넘어선 저세상 사람으로 점찍는다. 암에 대한 무서운 공포가 본격적으로 나의 주인공들을 엄습한 것은 승대와 자주 장기를 두던 맞은쪽 병실의 늙은이가 시체실 신세를 지게 된 그날 저녁이었다. 4호 병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고 나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얼굴에 슬픈 기색을 짓고 침대에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죽음이란 인생의 한껏 가는 슬픔이니 그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도 인간의 상정이리라…… 이날 넷은 잠들지 못했다. 한밤중까지 그들은 이리 궁싯 저리 궁싯 침대 소리만 요란하게 내다가 나중엔 약속이나 한 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승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안의 무거운 침묵을 찢었다. “젠장, 사내대장부들이라는 게 고양이 낙태상이 돼가지고 이게 뭔가? 이러다간 살 놈도 며칠 못 살고 지레 죽겠어.” “아무 때 죽으나 한번 죽겠지 체!” 철삼이가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치며 승대의 말을 받았다. “자, 이러지 말고 우리 지금부터 자기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일들을 말해 보자구.” 승대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발딱 일어나 전등을 켰다. “승대, 자네가 먼저 말해 보라구.” 그러면서 철삼이는 베개 밑에서 담배를 꺼내 셋에게 한 대씩 뿌려 주었다. 윤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받아 쥔 담배를 철삼이에게 뿌려 주었다. “쳇! 담배 한 대도 피우지 않으니 되다 만 처녀라지. 지금 계집애들은 담배 먹고 술 먹는 놈을 사내답다고 한다니까. 자넨 그저 간호원 계집애들의 환심밖에 못 산다니까.체!” 철삼이의 말에 윤수는 그저 허구프게 웃고 말았다. 승대가 에헴! 하고 일부러 건 가래를 떼고 말 주머니를 풀었다. “자, 모두 잘 들으라구. 이 어른이 지금부터 스물다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몇 마디 금싸락 같은 명언을 남기겠소.” 이렇게 나의 주인공들은 목을 옥죄이는 죽음의 공포를 밀어내기 위해 하나하나 차례로 자기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기뻤던 일   승대의 말에 의하면 그는 언젠가 한번 가두판사처에서 조직한 배구경기에서 주심판을 선 것이 가장 기뻤던 일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병실에서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난쟁이나 다름없는 승대가 높다란 심판대에 올라앉아 호기를 빼며 호각을 홱-홱- 불어 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폭소가 터질 일이었다. “볼만했겠소. 그날 배꼽이 빠진 사람 없었소? 으하하…… ” 철삼이는 침대 위에서 뒹굴면서 웃어댔다. “왜 없겠소. 경기장에 배꼽이 쭉 깔렸더구만, 하하하.” 한참 웃고 난 끝에 승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남들한테 쳐다보일 때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 하더란 말이오. 그래서 난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아주머니들에게 점잖게 말했소. ‘내가 키 작다고 웃습니까? 천만에, 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올려다보십시오. 난 이처럼 점잖게 발밑에 있는 아주머니들을 내려 다 봅니다.’ 하하하……” “으하하……” “하하하……” 병실엔 또 웃음이 터졌다. 이윽고 승대는 가까스로 웃음을 거두며 철삼에게 순서를 넘겼다. 철삼이는 선뜻 나섰다. “긴말 할 것 없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은 권투를 배운 첫 솜씨로 나한테 달려드는 녀석을 본때 있게 쳐 눕힌 거지……” “야, 벌써 피비린내가 풀풀 난다.” 승대가 살짝 꼬집었다. “체! 피비린내를 겁내구서야 주먹질을 배워 낼 수 있소? 이래봬도 난 주먹질을 배우느라고 벌써 열두 번이나 코피를 쏟았다, 열두 번이나!” “야, 그럼 빈혈이나 오지 않았소?” 승대가 비꼬는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고혈압이 올까 걱정이오, 쳇!” 철삼이는 손으로 이마를 착착 소리 나게 쳤다. “그래 누구를 쳤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상일이가 한마디 물었다. “들으나 마나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는 주정뱅이를 쳤겠지.” 승대가 또 비꼬았다. “내가 뭐 주정뱅이나 치고 다닐 놈으로 보이오? 주먹깨나 꽤 휘두른다는 자식을 쳤단 말이오, 쳇!” 철삼이는 주먹까지 내 둘렀다. “범이나 잡은 것 같소.” “야, 무조건 내 말이라면 쌍불을 켜고 달려든다……” “뭐, 쌍불까지야. 그저 한 눈만 딱 떴소, 요렇게.” 승대가 한 눈을 찔끔해 보이며 익살스런 웃음을 던지자 철삼이는 웃고 말았다. 다음은 윤수의 차례였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이란 건 작년 봄에 청년가수콩쿠르 대회에서 우수독창가수 칭호를 받은 그것이오. 헌데 지금 와선 다 지나간 일이오. 후-” 윤수는 말끝에 맥 빠진 한숨을 달았다. “당신은 그때 무슨 노래를 불렀소?” 철삼이가 묻는 말에 윤수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풀기 없이 대답했다. “이탈리아 민요 「아, 나의 벗이여」를 불렀소.” “그거 좋은 노래를 불렀구만. 야, 지금 기타나 있으면 내가 멋들어지게 반주해 주겠는데……” 철삼이는 자못 아수한 모양이었다. 윤수는 기타 치는 시늉을 내는 철삼이에게 허구프게 웃어 보였다. “이제 보니 당신은 그 단단한 소나무를 치고 박고하던 손으로 기타까지 칠 줄 아는구만. 기타동이 박살나지 않을까?” 승대가 또 웃으며 살짝 비꼬았다. “야, 조것이 주둥이 하나만은 여물었구나……” “그뿐인 줄 아오? 요 새끼발톱까지 땡땡 소리 나게 여물었소, 하하하” 이번에도 철삼이는 그저 웃고 말았다. 철삼이는 승대의 말주변을 당할 적수가 아니었다. 그다음 차례는 상일이한테로 돌아왔다. 상일이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없다구?” 철삼이가 부르짖다시피 물었다. 상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못해 뉘 처녀의 손목이라도 잡아 보던 이야기라도 하라니까.” 철삼이의 말에 상일이는 웃으며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없소?” 이번엔 승대가 물었다. 상일이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거 판이 시시하게 깨진다……” “그럼 가장 분하던 일이 있겠지?“ 승대가 재차 묻자 상일이는 잠깐 궁리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럼 그거라도 말해 보오.” 나의 주인공들은 화제를 바꾸어 자기 생애에서 가장 분하던 일들을 더듬었다……   가장 분하던 일   상일의 말은 아주 간단했다. “난 이전에 공부를 잘 하지 않은 나 자신을 가장 분하게 생각하오.” “그래서?” “그저 그것뿐이오.” “야야, 시시하다.” 철삼이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며 도리머리를 떨었다. “그저 신문을 읽는 것 같소. 당신한테선 더 들을 말이 없겠소. 난 말이오, 쌈할 때 먼저 내뛰는 자식이 제일 괘씸하더구만. 분김 같아서는 그저 단매에……” “이것도 들을 말이 아니구만. 난 말이오, 날 난쟁이라고 동정해 주는 것이 제일 분하단 말이오.” “배부른 소리는 잘한다. 욕하기보단 너무 좋아서 쳇!” 철삼이가 빈정댔다. “모르면 좀 가만있으라구. 난쟁이를 난쟁이라고 하는 건 욕이 아니란 말이오. 난쟁이를 키 크다고 해야 욕이지. 내 말은 말이오. 키 작은 사람을 깔보는 것도 분하지만 그 보다 자기를 인격자인 듯이 차리고 나서서 서푼어치도 가지 않는 동정을 표시하는 자들이 더 괘씸하다는 거요.” “체!” 철삼이가 입을 일그러뜨렸다. “체, 체 하지 말고 내 말을 마저 들어 보란 말이오. 한번은 내가 방직공장에 천을 구입하러 갔더니 철삼이처럼 키가 멀쑥한 자식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리면서 우리에게 천을 줄 수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게 아니겠소. 눈치를 보니 코밑 진상을 하라는 뜻이더구만. 그래서 난 하는 수 없이 그자를 개장집으로 데리고 가서 개 건너간 물을 서너 사발 퍼 먹였더니 그제야 흡족해서 하는 말이 내 처지에 동정이 간다는 게 아니겠소, 어찌도 분통이 치밀던지……” “동정이 간다는데 뭐가 분해서 쳇!” “동정은 무슨 개떡 같은 동정, 얻어먹고 할말이 없으니 그 따위 소리를 늘어놓은 거지. 내가 만약 키나 컸더라면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았을 거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키 작은 당신이 구입원질 하는 것이 무척 불쌍해 보인다는 말이었구만.” 윤수가 한마디 께끼었다. “기실은 나에 대한 조롱이란 말이오.” “욕도 말라, 동정도 말라, 그럼 어쩌라는 건가?” 철삼이가 바투 들이댔다. “한마디로 나도 사람인만큼 언제 어디서나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라는 거요. 키가 크든 작든 가리지 말고 말이오.” “이제 보니 승대는 인격주의자구만.” 윤수가 히죽이 웃으며 승대의 말을 받았다. “저 철삼의 주먹주의 보단 낫겠지.” 승대의 이 말에 철삼이는 주먹을 내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인격도 주먹에서 나온단 말이오!” 철삼의 말이 어찌나 어이없었던지 승대와 윤수는 입을 딱 벌렸다. 상일이는 입가에 쓴웃음을 흘리었다. “윤수, 당신이 분하던 일은 무엇이오?” 철삼이 묻는 말에 윤수가 자기에게는 아직 가장 분한 일이 없다고 대답하자 이야기판은 아주 깨지고 말았다. 승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윤수에게 한마디 던졌다. “자네에겐 인생이 늘 음악회 같으니까 분한 일이 없겠지……” “가수니까.” 철삼이는 비꼬는 어조로 말을 받고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음악회 같은 인생도 이젠 끝장이요……” 혼잣말처럼 내뱉는 윤수의 말은 탄식에 가까웠다. 철삼이는 일어나서 전등을 끄려다가 상일이가 베개 밑에서 교과서를 꺼내 드는 것을 보고 비웃었다. “까짓것, 코흘리개들이나 볼 걸가지구 박사나 되겠소? 나 같으면 언녕 파지나 했겠소. 이젠 자기요.” 상일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히죽이 웃으며 교과서를 도로 베개 밑에 넣었다. 전등이 꺼졌다. 방안엔 침묵이 깃을 폈다. 그 침묵은 이튿날 아침까지 흘렀다…… 이튿날 오전, 생각 밖으로 윤수에게는 가장 분한 일이 생겼다. 이날 윤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는 그 편지를 읽은 뒤로 종일 이불을 푹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승대도 철삼이도 상일이도 윤수의 반상적인 거동에 여러 번 의아쩍은 눈길을 보냈을 뿐 그와 말을 걸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승대는 창밖에 있는 화단에 물을 주려고 물통을 들고 나갔다. 그가 화단에 난 풀을 뽑고 한창 꽃에 물을 주는데 병실 창문으로부터 갈기갈기 찢은 종잇조각과 사진조각이 날려 나왔다. 호기심이 바짝 동한 승대는 땅 위에 널린 사진조각을 하나하나 주워서 손바닥 위에 맞추어 보았다. 곱살스레 생긴 한 처녀의 반신상이었다. 승대는 대략 짐작이 갔다. 그는 사진조각을 손바닥 위에 조심히 받쳐 들고 병실로 들어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윤수한테로 다가갔다. “윤수, 이 사진은 도덕법정에 보낼 거요?” 승대가 묻는 말에 윤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삼이는 제꺽 승대 곁에 다가와 그의 손바닥에 놓인 사진 조각을 내려다보곤 흘끔 윤수의 기색을 살폈다. “담배를 한 대 주오.” 윤수가 철삼이한테 손을 내밀었다. 철삼이는 제꺽 호주머니에서 답배를 꺼내어 갑 채로 윤수에게 건네었다. 윤수가 담배 한 대를 물자 철삼이는 이내 성냥을 그어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윤수는 담배를 한 모금 들이 빨기 바쁘게 기침을 토했다. 승대가 윤수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냈다. “못 피우는 담배를 억지로 피울 턱이 있소? 원……” 그러면서 승대는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윤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벌렁 침대에 누워 버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승대가 윤수의 침대 가에 걸터앉으며 그를 위로했다. “이까짓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럴 것까지야 있소? 남자로 생겨 이런 일에선 흔연해야 한다니까. 까짓것, 이 세상에서 계집애가 이년 하나뿐이라고 그러오? 자, 이러지 말고 우리 함께 밖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구” 윤수는 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야, 나 같으면 아주 봐란 듯이 나가서 이 계집애보다 훨씬 더 나은 처녀를 골라잡겠소.” 승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수가 발딱 일어나 앉으며 역정을 내었다. “내가 뭐 연애대장인 줄 아오?” “야, 이 친구가 이거……” 승대는 억이 막혔다. 윤수는 벌떡 침대에서 내려 씽하니 밖으로 나갔다. 그의 거동에 한참이나 입을 딱 벌리고 있던 승대는 손에 받쳐 든 사진조각을 창밖에 활 내던지고는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 붙는 불에 키질할 건 뭐요?” 철삼이가 나무라는 말에 승대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늘쩡한 어조로 한 마디 비꼬았다. “그래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 담뱃불까지 붙여 준 사람보다는 낫다니까……” “체, 난 그래도 당신처럼 연애 한번 못해 본 주제에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연애 고문질은 안 했다구……” “뭐라구?” 승대는 무섭게 소리 지르며 후닥닥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 돌연적인 거동에 철삼이는 두 눈이 휘둥그래서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승대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조그마한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쥔 채 한참이나 떡 버티고 서서 분노에 찬 시선으로 철삼이를 노려보다가 불시에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갔다. 철삼이는 입을 딱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이날 밤 승대는 이슥해서야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안에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썼다. 윤수와 철삼이는 미안에 찬 눈길로 침대에 누운 승대를 지켜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둘이 다 가볍게 한숨을 내뿜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이날따라 병실 안은 괴괴하기 그지없었다. 한밤중이 되자 승대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소리는 낮으나 애처로운 흐느낌이었다. 철삼이도 윤수도 상일이도 그때까지 자지 않았는지 승대의 흐느낌 소리가 들리자 셋이 다 일어나 앉았다. 상일이가 끌신을 신고 조용히 승대의 침대가로 다가갔다. “승대, 왜 이러오?” 승대의 흐느낌 소리는 끊어졌다. 윤수와 철삼이도 승대의 침대가로 다가갔다. “승대, 내 아까 잘못했소. 분김에 애매한 승대에게 화를 냈구만……” 윤수의 말을 이어 철삼이가 진정이 어린 목소리로 사과했다. “승대 내 아까 함부로 입을 놀려 당신을 노엽혔소. 실컷 욕하오.” 승대는 눈물을 훔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나직이 말했다. “모두 잠에서 깨게 해서 미안하오……” “아니아니, 우린 자지 않았소.” 철삼이가 바삐 말을 받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그러는 철삼이를 지켜보던 승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난 철삼이의 말을 다 탓하는 건 아니오. 그저 그 마지막 말이 내 가슴속의 아픈 상처를 쿡 찔러놔서…… 기실 난 내 설움에 운 거요. 당신들은 아직 모를 거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인지……” 승대는 가장 슬픈 일을 털어 놓았다.   가장 슬픈 일   “난 소설도 많이 읽은 사람이오. 그래서인지 연애편지쯤은 어렵잖게 쓸 수 있었소. 하기에 나보고 첫 연애편지를 써달라고 청을 드는 친구들이 많았소. 지금까지 내가 친구들을 대신해서 써준 연애편지만 해도 수십 통은 잘 될 거요. 허지만 난 여태껏 유독 나의 연애편지만은 한 장도 써보지 못했소. 받아 줄 사람이 없으니 말이요…… 인물 설움이 막 설움이라는 속담은 나를 두고 지어진 것 같소……” 승대의 말이 끝나자 철삼이는 와락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승대, 내가 잘못했소. 정말 잘못했소. 당신은 언제든지 꼭 자기의 연애편지를 쓸 때가 있을 거요. 꼭 있을 거요……” “고맙소……” 이렇게 화제는 가장 슬픈 일에 대한 토로로 돌아갔다. 승대 뒤를 이어 윤수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슬픈 일을 털어놓았다. “난 이미 전도를 망친 사람이요……” “그건 너무 기막힌 소리구만.” 상일이 말이었다. “사실이 그렇소. 만약 나의 목에 난 혹이 암이 아니라 해도 수술만하면 난 다시는 무대에 나서지 못할 것이오. 배운 게 노래 부르는 재간밖에 없는 놈이 무대에 나서지 못하면 그 무슨 전도를 운운할 여지가 있겠소. 실로 슬픈 일이오. 그 못된 계집애도 나한테 더는 바랄 것이 없으니 마음이 변한 거지……” “나 같으면 그 고약한 계집애를 단매에 쳐 눕히겠소.” 철삼이는 제 일처럼 분개해 하였다. “그 계집애는 양심의 버림을 받고야 말 거요. 윤수, 너무 속 태울 건 없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소.” 승대가 위안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오……” 이렇게 말하는 윤수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비꼈다. “상일이, 고아인 당신에겐 슬픈 일이 많았겠지?” 철삼이가 재촉하자 상일이는 아주 간단히 말했다. “난 고아 된 슬픔보다도 제 나이에 바로 배우지 못하여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이 가장 가슴 아프오.” “체, 또 그 소리구만. 정말 당신한텐 들을 말이 없소. 먹물깨나 먹어야 쓸모 있는 인간인 줄 아오? 나 같은 놈도 다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다니까. 하다못해 국가의 수입이 높아지게 남보다 술, 담배를 더 사먹어도 그게 다 공헌이라니까, 으하하……” 철삼이는 제 말에 우스웠던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철삼이, 당신한테 무슨 슬픈 일이 있소?” 상일이가 웃지 않고 물었다. “나 말이오? 없소.” “없다구?” “그렇소. 인생이 얼마라고 낯을 찡그리며 살겠소. 나에겐 금후에도 슬픈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소.” “너무 장담하지 마시오. 계집애들처럼 변덕이 많은 게 인생이라니까.” 윤수가 누운 채로 한마디 던졌다. “글쎄 두고 보라니까. 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이라도 나올 때가 있으면 성을 갈겠소, 정말이오!” 철삼이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며 으스댔다. “그럼 두고 보기요.” 승대의 말이었다. 그 이튿날 오후, 넷은 어쩌다가 처음으로 간호원 처녀와 함께 산보하러 병실에서 나왔다. 그들은 꽃을 심은 병원 담장 밑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막 담장이 굽이진 곳까지 이르렀을 때 홀연 자그마한 살구씨 하나가 날아와 간호원 처녀의 머리에 떨어졌다. “어머나!” 간호원 처녀는 와뜰 놀랐다. 순간 담장 위에서 징글맞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다섯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보니 담장 위에 청년 넷이 걸터앉아 살구를 먹으면서 웃어대고 있었다. “어이, 처녀동무, 병신들과 다니지 말구 여기 와서 우리 함께 살구나 먹기요, 으하하……” 이 말에 간호원 처녀는 낯빛이 새파래 가지고 침을 탁 내뱉었다. “퉤, 오뉴월 개살구처럼 떫구나.” “그래도 씹으면 제 맛이 날거다, 하하하……” 간호원 처녀는 너무도 분하여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철삼이, 한번 솜씨를 보이라구.” 승대가 철삼이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철삼이는 담장 위에 앉은 허우대 큰 네 청년을 올려다보며 망설이었다. “뭘 주저할 게 있소. 본때를 보이라 구.” 승대가 재차 하는 말에 철삼이는 한걸음 나섰다가 도로 물러섰다. “자신이 없소?” 이번엔 윤수가 물었다. “저…… 못 본 척하고 가기요……” “야, 병신이라고 모욕만 받고 그냥 돌아선단 말이오?” “저, 개똥을 무서워 피하겠소? 더러워 피하지……” “더러운 개똥일수록 피하지 말고 멀찌감치 쳐내야 한단 말이오. 난 키가 좀 컸더라면 맞더라도 나서겠소.” 이때 상일이가 말없이 담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거동에 간호원 처녀를 비롯한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일이는 담장 가까이 가서 낮으나 위엄 있게 네 망나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그 더러운 아가리를 놀려봐라!” “뭐야?” 사자머리를 한 자가 꽥 소리 지르며 담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상일이는 사자머리가 땅에 발을 붙이기 바쁘게 번개같이 몸을 날려 두 손으로 사자머리의 어깨를 잡는 동시에 딱 소리 나게 호된 골받이를 먹였다. 사자머리가 얼굴을 싸쥐는 순간, 상일이는 또 한쪽 무릎으로 그의 배 허벅을 모질게 올리 박았다. “윽!” 사자머리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배를 그러안은 채 마른 풀대 꺾어지듯 앞으로 폭삭 꼬꾸라졌다.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일이는 손을 툭툭 털더니 사자머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담장 위에 앉은 세 망나니에게 멸시에 찬 웃음을 보냈다. 눈이 휘둥그래진 세 망나니는 서로 마주볼 뿐 감히 내려오지 못했다. 상일이는 불시에 몸을 훌쩍 솟구치며 담장에 걸터앉은 한 망나니의 발을 한 손으로 홱 잡아챘다. 그자는 어쩔 사이도 없이 땅에 곤두 박혔다. 상일이는 한 손으로 덥석 그자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면서 다른 한 손으로 불이 번쩍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곤 뺨을 친 손으로 그자의 턱을 올리받치며 입가에 쓴 웃음을 지었다. “형, 형님 잘못했소. 제, 제발 비오……” 그자는 두 손으로 골을 싸쥐며 애걸했다. 상일이는 담장 위에 남은 두 망나니를 향해 내려올 놈은 내려오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겁먹은 두 망나니는 그저 혀를 홰홰 내두를 뿐이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왔다. 상일이는 머리를 부둥켜 쥐고 있는 그자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는 몸을 홱 돌려 아주 흔연한 기색으로 병실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 두 눈이 휘둥그래서 보고 섰던, 승대, 윤수, 철삼이와 간호원 처녀는 그제야 바삐 상일의 뒤를 따라갔다. 먼저 상일을 따라잡은 승대가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환성을 올렸다. “야, 솜씨가 대단하오! 난 막 영화를 보는 것 같더라니까.” 상일이는 그저 히죽이 웃었다. 철삼이가 따라서며 그의 어깨를 치면서 물었다. “보니 돈을 먹인 솜씨더구만. 어디서 배웠소?” 상일이는 역시 히죽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지 말고 말해 주오. 누구한테서 배웠소?” 철삼이가 짓궂게 달라붙자 승대가 곁에서 오금을 박았다. “누구한테서 배웠으면 찾아가겠소? 흥, 당신은 아무리 배워도 쓸데없소. 그저 소나무만 치고 박고 하오.” 그 말에 윤수와 간호원 처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철삼이는 얼굴이 지지벌개났다. 승대는 철삼이를 더 따끔하게 찔러 주었다. “당신의 그 우뚤우뚤한 성미는 방금 어디 갔소? 주먹에서 인격이 나온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던 당신은 너절한 자식들에게 병신이라고 모욕을 받고서도……” “그만 하지 못하겠소?” 철삼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든 말든 승대는 승대대로 도고히 말을 계속하였다. “횐소리도 여러 번 하면 곧이듣지 않는 법이오, 흥!” 철삼이는 낯빛이 퍼르뎅뎅해 가지고 한참이나 승대를 노려보다가 불시에 몸을 홱 돌려 쫓기듯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약간 휘청거렸다. 이날 저녁, 철삼이는 늦어서야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어디 가서 술을 마셨는지 두 눈이 게슴츠레해 가지고 휘청이는 걸음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승대, 윤수, 상일이는 적이 놀았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에 철삼이한테 모아졌다. 철삼이는 잠깐 문가에 기대서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안을 한번 쓸어보고는 승대한테로 다가갔다. 승대는 자못 긴장해졌다. 그는 애써 얼굴에 태연한 기색을 지으며 다가오는 철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술기운이 오른 철삼의 얼굴엔 종잡기 어려운 표정이 어리어 있었다. 그는 승대 앞에 와서 멈추었다. 역한 술 냄새가 승대한테 확 풍겨왔다. 철삼이는 승대를 내려다보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두어 번 움씰거리다가 종내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한 손으로 승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몸을 돌려 자기 침대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한참 후에 철삼이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밑에서 권투장갑을 꺼내 가지고 창문으로 뛰어나갔다. 승대, 윤수, 상일이는 서로 마주볼 뿐 말이 없었다. 이윽고 승대가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승대가 소나무 몇 그루 서 있는 정원에 나와 보니 철삼이가 한창 권투장갑을 낀 손으로 소나무에 미친 듯이 따닥이를 먹이고 있었다. 승대는 천천히 다가가 철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철삼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순간, 그는 승대를 보자 고개를 떨구며 권투장갑을 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승대는 잠자코 서 있었다. 이윽고 철삼이는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승대를 향해 부르짖듯이 말했다. “날 실컷 욕하라구. 그러면 내 속이 더 편할 거요. 난 오늘 인격을 개한테 떼웠소……” 철삼이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혼잣말처럼 한마디 내 뱉었다. “내 이렇게 슬퍼보긴 처음이야……” 철삼이의 두 눈에선 눈물이 몇 방울 굴러 내렸다. 그는 다시 몸을 홱 돌려 주먹으로 소나무를 쳤다. 이날 밤 철삼이는 슬픈 생각에 말려들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 앞에서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유아독존식의 인물일수록, 자존심이 상한 사람일수록 일단 자기의 단점이 드러나 남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때면 남에 대한 원망보다는 비난받는 자기 처지가 더없이 슬프게 생각되는 법이니까……   가장 즐거운 일   넷은 선후로 종양수술을 했다. 수술 결과 승대, 윤수, 철삼이의 혹은 양성이었다. 그들 셋은 구사일생에서 요행 살아나온 듯싶었다. 기뻤다. 즐거웠다. 암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실로 그들에게 있어선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유독 상일이만은 무자비한 판결을 받았다. 수술 진단에 의하면 그는 위암 후기였다. 그러다보니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병원 측에서는 환자 본인에게는 그저 몸조리 잘하고 음식에 주의하면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해 주었을 뿐이다. 승대, 윤수, 철삼이는 간호원 처녀를 통해 상일이의 수술 정황을 상세히 알았다. 그들 셋은 죽음의 문턱에 한 발을 들여놓은 상일이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무한한 동정이 갔다. 슬펐다. 그렇다고 상일이 앞에서 그렇다는 내색을 조금이라도 내서는 안 될 그들이었다. 아주 흔연한 척해야 했다. 왜냐하면 지나친 동정도 상일이의 의심을 자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일이는 자신의 불행을 몰라서인지 수술한 후 일주일이 되자 예전과 다름없이 베개 밑에서 중학교 교과서들을 꺼내 보기 시작하였다. 그를 말없이 지켜보는 승대, 철삼, 윤수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상일이는 수술한 지 스무날 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암병 환자에게 있어선 퇴원이란 말은 기실 돌아가서 일찌감치 묏자리나 봐두라는 말과 같았다. 하기에 승대, 철삼, 윤수의 눈에는 물건들을 수습하는 상일이가 저승의 사자 등에 업힌 사잣밥으로 보였다. 상일이가 퇴원하는 날, 철삼이는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곤 어디론가 나갔다. 그사이 승대와 윤수는 병원 문 앞에 있는 소매점에 가서 과일즙이며 통조림이며 우유가루 같은 걸 한 아름 샀다. 승대는 술 한 병을 더 샀다. 그들 둘은 병실에 돌아 오자바람으로 술 한 병과 통조림 한 통을 내놓곤 나머지 것은 우격다짐으로 상일에게 안겨 주었다. 연후에 그들 둘은 통조림 한 통과 술 한 병을 앞에 놓고 상일이와 마주앉았다. “자, 우리 송별주나 나누기요. 모두 수술한 몸이니 그저 마시는 흉내나 내기요. 상일이부터 술을 입에 댔다 떼오.” 승대가 술이 담긴 법랑 고뿌를 상일이한테 건네었다. 상일이는 법랑 고뿌를 받아 쥐자 이내 꿀꺽 소리가 나게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야, 흉내만 내라는데……” 승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상일이는 밭은기침을 깇으며 방금 넘긴 술을 몽땅 방바닥에 내 뱉었다. 이때 철삼이가 한 손에 과일꾸러미를 들고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들어오다가 다짜고짜로 승대를 꾸짖었다. “승대, 정신이 있나. 암 환자에게 술을 주다니!” 철삼이의 입에서 암이라는 말이 튕겨 나오자 승대와 윤수는 꽝 하고 머리가 작렬하는 것 같았다. 굳어진 그들 둘은 긴장한 눈길로 상일이의 기색을 살폈다. 그제야 자신의 불찰을 깨달은 철삼이는 손에 든 과일꾸러미와 기타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방안엔 무거운 침묵이 한참이나 흘렀다. 이윽고 그린 듯이 앉아 있던 상일이가 아주 태연한 기색으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지들 마오. 난 이미 며칠 전에 내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소.” “양?” 승대, 철삼이, 윤수는 놀랐다. “며칠 전 난 의사 사무실이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가 수술기록부와 화험 진단서를 들춰보았소.” “!” “자, 모두 가까이 오오. 우리 함께 술이나 들 자구.” 이 말에 승대, 철삼이, 윤수는 말없이 상일이한테로 다가왔다. 그들이 자리를 찾아 앉자 상일이는 술이 담긴 법랑 고뿌를 들며 말했다. “이제 갈라지면 친구들과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요. 비록 슬픈 일이지만 이 시각 낯을 찡그리고 잔을 들어서야 되겠소? 자, 우리 서로 즐거운 일들을 말하면서 술을 들기요. 내 먼저 친구들의 마음이 담긴 이 술을 들겠소.” “그저 댔다 떼오.” 철삼이가 제꺽 주의를 주었다. 상일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고뿌에 입을 가져다 댔다가 뗐다. “자, 그담은 승대 차례요.” 승대도 역시 법랑 고뿌에 입을 댔다가 뗐다. 윤수도 그랬다. 하지만 철삼이만은 법랑 고뿌를 받아 쥐기 바쁘게 가져다 대고 단숨에 술을 몇 모금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곤 법랑 고뿌를 상일이한테 넘기면서 약간 갈린 소리로 말했다. “내 오늘 취하도록 마시겠소……” 상일이가 히죽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취하기 전에 먼저 내 이야기를 듣소. 난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오. 허나 아직까지 삶에 대한 미련은 크오. 비록 그것이 현실적이 못되지만 절망보다야 낫지.” 상일이는 술을 입에 댔다 떼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한때는 주먹질을 배운다고 부산을 떨었소. 그래서 남을 치기도 했고 얻어맞기도 했소. 그땐 모래주머니를 치느라고 터진 손등도 별로 자랑같이 생각되었소.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이 다 뜨거워나오. 후에 차차 나이 듦에 따라 좀 헴이 들었는지 별반 주먹질은 하지 않았소. 남들은 내가 사람이 되었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고민과 절망에 빠졌더랬소. 이전엔 그래도 주먹이 세다는 점에서 삶의 흥분을 느끼고 정신상에서 위안을 받았지만 지식의 가치가 그 무엇보다도 높아진 오늘에 와서는 문맹과 다름없는 나에게 있어서 남은 것이라면 그저 생리적 기능만 갖고 있는 육체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삶에 대한 미련까지 포기하고 싶었소. 당신들은 내가 수력발전소에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아오? 말하긴 부끄럽지만 난 매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잡일이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허송해 왔소. 골에 먹물이 든 게 없으니 여태껏 한번도 발전기 앞에 서보지 못했소. 그러니 나한텐 어찌 기쁜 일이 있을 수 있었겠소. 들으라니 시인들은 우리 발전소 노동자들을 빛을 주는 인간세상의 태양이라고까지 노래한다오. 발전기 앞에 서도 못 본 나까지 망라해서 말이오. 나로선 부끄럽기 짝이 없소. 오늘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나 자신을 돌이켜볼 용기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오. 난 남들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생활에서의 강자라고 보오. 친구들의 생각은 어떤지?” 승대와 윤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철삼이는 두 눈을 내리깔고 연신 담배만 뻑뻑 빨았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눈길을 들어 상일이를 쳐다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발전기 앞에 서겠다고 중학교 교과서들을 들췄소?” 상일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곤 가볍게 한숨을 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이젠 늦었소. 저승의 사자가 너무 이르게 날 데리러 왔단 말이오. 허지만 난 이제 돌아가서 딱 한 가지 소원만은 풀어야겠소. 다문 하룻밤이라도 기술원과 함께 발전기 앞에서 당직을 서보겠다는 거요. 그러면 나에게 있어선 정신상의 큰 위안이 될 거요. 아마 나의 생애에서 이것이 가장 즐거운 일로 될 것 같소……” 상일이의 말이 끝난 뒤 병실 안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말없이 술이 서너 순배 돌았다. 철삼이만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고 그 외 셋은 그저 마시는 시늉이나 했다. 이럴 즈음 간호원 처녀가 들어왔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씽 달려와 술이 담긴 법랑 고뿌를 앗아 쥐었다. “어쩌자고 술을 마시나요?” 넷은 그저 잠자코 앉아 있었다. 간호원 처녀도 더는 말이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담배 한 대를 피워도 한바탕 따끔히 훈계를 할 그였지만 그도 넷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철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간호원 처녀한테로 다가갔다. “간호원 동무, 오늘만 용서하오. 우린 술을 입에 댔다 뗄 테니 그 고뿌를 주오. 내가 저 상일이한테 마지막 잔을 권하겠소……” 간호원 처녀는 잠깐 주저했다. “오늘만 용서하오……” 승대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간곡하게 말했다. 간호원 처녀는 넷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말없이 법랑 고뿌를 철삼에게 넘겨주었다. 철삼은 법랑 고뿌를 받아 쥐고 상일이한테로 다가왔다. “자, 상일이 이 술을 받소. 당, 당신은 죽, 죽지 않을 거요……” “고맙소. 기적이라도 생겨 내가 살수 있다면 꼭 당신을 찾아가겠소. 권투연습도 할 겸……” “아니아니, 난 이젠 그 권투와 인연을 끊었소.” “뭘, 그럴 것까지야 있소. 연습을 잘 해서 당당하게 권투시합에 나서란 말이오. 권투도 좋은 운동이라니까.” 철삼이는 한참이나 상일이를 지켜보다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 뒤로 승대가 일어서며 상일에게 술을 권했다. “상일이, 난 오늘 당신의 말에서 암은 비록 사람의 육체는 정복할 수 있지만 삶의 신조만은 꺾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알았소. 감사하오. 자, 영원한 삶을 위해 내 술을 받소.” “고맙소, 승대의 결혼잔치 술로 치고 받겠소……” 승대는 상일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내 잔치할 때면 잊지 않고 당신한테 술 석 잔을 올리겠소, 꼭……” 목 메인 승대의 말에 철삼이도 윤수도 간호원 처녀도 모두 고개를 돌리며 눈굽을 찍었다. 윤수가 일어섰다. “상일이, 우리 예술단의 공연을 보러 한번 꼭 오오……” “무대에서 당신을 찾으면 되겠구만.” “아니, 무대 천정에 올라가 집중광을 비추는 나를 찾소. 내 비록 이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무대에 나선 사람에게 빛은 줄 만 하오.” 상일이와 윤수는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철삼이가 침대에 기대어 놓은 기타를 쥐며 윤수에게 말했다. “윤수, 한 곡 넘기오. 내 반주를 할께.” 윤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었다. “상일이, 수술해서 목소리가 영 말이 아니지만 그저 우리 친구들의 작별 인사 삼아 들어주오.” 상일이와 윤수는 또 다시 악수를 나누었다. 철삼이는 기타로 이탈이아 민요 「아, 벗이여」 란 노래의 전주곡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노래의 전주곡을 다 쳤지만 윤수는 목이 메었는지 소리를 내지 못했다. 윤수의 눈에선 이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철삼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치곤 다시 전주곡을 치기 시작하였다. 이번엔 윤수가 갈린 목소리로 ‘아, 나의 벗이여, 안녕히, 안녕히…….’란 노래 구절만 불렀을 뿐이다.   아, 나의 벗이여 안녕히, 안녕히 내가 만약 쓰러진다면 산정에 묻어다오 아, 나의 벗이여 안녕히, 안녕히   노래를 부르는 상일이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했다. 승대, 철삼이, 윤수, 간호원 처녀의 두 볼에도 눈물이 골을 지어 흘러내렸다.   맺는 말   상일이는 떠나갔다…… 선후로 승대, 철삼이, 윤수도 병원에서 떠나갔다. 새로운 회로애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시발점이었다. 아무렴, 인생은 언제나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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