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자서전 3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입 사
그 이듬해도 나는 , , 등지에 육속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나의 인생이 궤적이 느닷없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창간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 성급신문인 사에서 파격적으로 나에게 요청을 보내왔다. 하여 학교에서 장학처분을 받은 문제아였던 나는 , 어느 사영기업의 양계장에서 달걀이나 깨우던 허드레 부화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문학청년으로 인정받고 일조일석에 신문사기사로 변신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다.
중학교문도 채 나오지 못한 스무 살 내기가 일약 신문기자로 된다는 것은 그 당시 편집원들이나 내 곁 사람들의 경악에 쳐들린 눈초리가 보여주다시피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사회접촉면이 넓은 기자 사업에서 단련하면서 나의 눈과 필봉을 벼리여 당시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중국작가 호연과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뼈물어 먹었다. 한낱 뜨내기 부화공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가 한 푼도 없다는 조건이었다. 대신 원고비는 내준다고 했다. 이를 작가로 향발하는 길에서의 기회와 전환으로 여긴 나는 그 조건을 겁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86년 5월, 온 거리에 흩날리는 하얀 비술나무 씨를 축복처럼 맞으며 좀은 어리친 모습으로 나는 신문사 편집실에 발을 디밀었다. 배치되어 맨 처음 맡겨진 임무가 선배들과 함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편실화 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일찍 번역을 마치고 차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팥죽 땀을 흘려가며 번역에 매어있었다. 번역이 늦어져 부장이 곁에서 재촉하고 주필님까지 찾아와 지켜보는데 난해한 단어들이 많아 안달아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겨우 번역을 마무리했다.
내가 쓴 첫 기사는 86년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그네가 정식경기종목으로 되였다는 예고소식이었댜. 그런데 신문기자습작에 관한 강의나 학습도 없이 착수했던 나는 그 기사를 밥도 죽도 아닌 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머리에 그네에 대해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조를 곁들였고 소식에 그네 뛰는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서정까지 토로했다. 글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주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길림성을 상대로 한 성급신문이라 취재범위가 넓었다. 룡정을 작은 반경으로 다람쥐 채 바퀴 돌리 듯했던 나는 상경한 시골 닭처럼 전전긍긍하며 장춘, 길림, 교하, 류하, 통화, 매하구, 구태, 장백 등지를 사철 내내 돌아다녔다. 촌부락에 내려가서는 하도 어린 나이였기에 가짜기자로 의심받고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어스름이 내렸으나 잠자리도 찾지 못하다 학교접수실의 마음씨 고운 당직 아바이에게 청구하여 한 온돌에서 비비 닥이며 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덜 고운 의붓아버지에게 청구하여 호구부를 고쳐 나이를 한살 올렸고 콧수염을 무성히 기르고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기자 생활중에서 나는 문자라는 부호의 합의된 배열법칙과 음훈을 익혀나갔고 따라서 나의 필봉은 서서히 벼려지게 시작했다.
하지만 로임을 주는 날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감내를 겪어야 하는 날이었다. 매양 19일날, 모두가 희희락락 로임봉투를 타들고 음식점을 찾아 갈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군 했다. 신문사를 멀리한 상점으로 가서 가련한 원고 비를 잘라 홀로 맥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를 곧잘 다루는 합격된 기자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신문의 , 와 같은 칼럼란에서 나의 이름과 필명을 하루 멀게 볼 수 있었다. 북향, 초군, 설봉, 각설이 그때 나의 필명만 해도 13가지나 되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 김학철선생의 신랄한 잡문에 홀딱 반해 나는 잡문쓰기에 커다란 열성을 보였다. 지어 선생의 풍격인 글 사이에 풀이표를 쳐주는 것도 꼭 같이 모방하여 잡문을 저그만치10여편 발표했다. 한편 기자생활에서 받은 감수로 20여 편의 소설과 100여수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8년간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 가지 리유로 학교 문을 갓 나서고 취업한 애송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할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 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신문기자행업에 투신한 17년이란 기간 그런 대우는 내게서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나는 졸업장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우렬을 제쳐놓고 락인부터 찍어놓는 그런 미완숙한 사회규제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망각한 그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한곳 향해 매진하는 외뿔 소마냥 문학의 뿔을 혼자서 갈고 닦으며 버텨내었다.
기자라는 것은 나에게서 직업이었고 문학은 본능이었다. 이를 나는 개인적 수행의 방법으로 간주했다. 그 방법을 통해 나는 어섯눈을 개안할 수 있었고 부족한 나의 천성을 다독이며 달랠 수 있었다. 넋 건지기에서 닭을 희생시키듯 하나의 제물로 나는 문학의 제단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 제물이 되여도 나는 유감이 없다.
8년간의 고험을 거쳐 글 다루기에서 제법 웃자라난 나를 두고 광복과 함께 창간된 조선족 최대의 일간지 에서 백락처럼 손짓했다. 94년, 나는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시작하여 1여년의 기자생활에서 제법 이름 있는 로기자라는 딱지가 앉게 되였고 그 기간 나는 1000건에 달하는 기사를 발표,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신문상을 비롯한 각종 신문보도상 20여차를 수상하게 되였다.
동호 (同好)
여려서 사회에 내쳐졌고 기자와 작가라는 이중신분으로 여러 계층에서 자맥질해왔던 만큼 나에게는 각종 부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서 물론 가장 도타운 친구들은 문학동호인들이다. 나는 문학인들과 적극 사귀였고 각종 문학협회를 꾸리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85년, 룡정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꾸렸다. 비서장을 맡고 각 현시 문학도들을 조직했고 한편 등사본잡지에 상당한 분량의 무협소설 를 련재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룡정의 유명작가들이 꾸린 협회에 가입, 보름에 한번 씩 열리는 작품합평회에 참가하러 퇴근 후면 늦은 밤 버스를 잡아타고 룡정으로 빠짐없이 다녔고 회의마다에 작품을 내놓았다.
에 입사한 86년 나는 또 문학협회를 만들었다. (협회 이름은 당시 의기투합됐던 지금의 사 최호사장과 함께 백조사진관에 가서 협회창립기념을 남기며 내가 사진관 이름을 본 따 단 것이었다.) 연길시 당안관 자리를 빌어 협회명의로 60여명의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이 참가한 대형 련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등사본잡지를 몇 기 발행, 창간호에 나는 설봉이라는 필명으로 이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한 우리 문학도들을 대견히 여겨 등사본잡지의 앞머리에 김학철선생과 리상각시인께서 왕붓을 허비해 제사까지 써주셨다. (그 동아리들 중에서 대부분이 사회 각 기관의 어마어마한 령도인물로 성장. 오직 나만이 외줄타기로 지금도 경황없이 글밭을 경작하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문학협회에 적극 참여, 청년시인협회인 의 부회장직을 맡고 수천원의 자금도 협찬 받아오고 내가 경영하고 있던 식당을 협회전용처럼 내밀고 각 잡지에 동호특간도 조직해내고 하면서 동호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동아리를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그러한 지인들지간의 이해와 교류의 분위기의 멋을 잊지 못해 몇 해 전에도 전국 각지의 기성문인들을 동원하여 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설립, 한국의 유명홈에 개설한 우리 동호회가 그중 가장 활약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의 동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즐겨 읽는 무협지중의 녹림인물들처럼 자신을 내던지곤 했다. 당년에 책을 쌓아 놓고 나면 엉덩이도 간신히 들이밀 나의 8평방짜리 셋방 집에 들리지 않은 동년배 동인이라곤 없다. 싸구려 생맥주에 북어끄트러기라도 맛나게 찢으며 문학을 안주삼아 밤을 지새곤 했다.문예부에서 편집을 하면서 나의 손으로 편집하고 그 작품이 상을 받은 내 또래 동인이 10여명이 된다.. 문학 외에 아는 것이란 또 문학밖에 없는지라 합격 못된 세대주로 첫혼인이 파렬된 후에 거칠 것 없는 나의 셋방 집은 아예 문학 살롱이 되다시피 했다.
우리집에 묵으며 꼬박 2년간 나와 함께 지낸 문학도들이 몇몇 있다. 석탄도 사지 못해 한겨울에 불 때지 못한 찬구들에 이불 몇 채씩 깔고 앉아 매운 소주에 청국장 하나만 달랑 놓고도 우리는 문학의 진미를 담론했다. 그사이 우리 집 식객이었던 그 문학도들의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해에는 연변일보 , , 을 몽땅 도거리해서 보람으로 기쁨에 눈굽을 적신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불경기로 로임까지 체불 받으면서 직장도 없는 그애들을 부둥켜안고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하는 극난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 나날에 나는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과 수십 수의 시를 발표, 4차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족 최대의 사회열점을 건드린 장편르포 를 집필, 연재, 출판해 내었고 첫 작품집 를 내놓았다. 그네들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원조하고 지지리도 어려운 그 나날을 버텨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요즘 세월에도 문학의 외길을 고집하며 함께 하는 그네들을 나는 좋아한다. 친지가 적은 내게서 그들은 살밭은 형제와도 같다. 바른 심성을 갖춘 그들이 문학에 불어넣는 생의 기미에 대한 전언을 읽어내고 서로 긍휼을 나누는 지음이 될수 있기를 나는 진심 바랬다.
무 드(mood)
신문기자로 발탁된 이듬해 연길로 이사 오면서 나는 28개의 사과배광주리에 나의 전부의 가산인 소장한 책들을 담아 싣고 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붙박이로 책 더미에 내 옹근 몸뚱아리를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나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편집광적인 독서광이다. 언감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좋은 책들을 모조리 읽고자 망상하고 있다. 시시때때 그 시대의 의식형태에 맞추어 나오는 각종 종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려 들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브의 실험용 동물처럼 좋은 책만 나오면 예민한 후각으로 알아내고 선참 사들여 허겁지겁 읽었다. (멋모르고 읽다나니 독일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한어로 읽고 중국인으로 여긴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기에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고 있다. 그 것이 이제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되었는가 보다.
나의 독서범위는 오지랖이 넓어도 무지 넓은 편 , 단 문학 류뿐 아니라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여러 부류의 책들도 대량 사들여 읽는다..신간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꼬박 10 여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도 다섯 10여 종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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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없는 박봉마저 그 3분의 2는 잘라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책과 잡지를 한 아름 사드는 나를 두고 안해는 우리 집이 내내 쪼들리고 있는 까닭은 책을 너무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찬사절반 푸념절반을 섞곤 한다. 일찍부터 나는 책을 사면 책의 맨 앞장에 나의 이름 병음자모와 책을 산 곳과 일시를 적곤 했다. 그 날자가 적힌 5천여 권의 책과 매달기수가 빠짐없는 수천 권의 잡지들을 배열해놓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가 년보처럼 역력히 엿보인다. (89년도에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나는 주 공안국부근에 책방 하나를 차린 적 있다. 라는 대문호의 이름을 딴 서점, 그 서점을 꾸릴 적에 내가 소장한 책 수천 권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벽을 꽉 메운 책장과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까지 쌓여있는 책속에 파묻혀 나는 예이제 없이 신들린 듯 독서에 혼 줄을 앗긴다. 나를 잃는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 원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 사이에 3천 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내가 열광적인 영화디스크 수집애호가라는 것을 문인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심취되어왔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