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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혁 문학自敍傳 (1) 댓글:  조회:2790  추천:17  2013-09-06
. 문학자서전 1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동란의 문화대혁명이 일던 첫해의 어느 가을날, 고색 짙은 변강의 오지인 룡정현에서 시장부근의 한 교원가정은 암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봉당에는 보자기에 동여진 아기 하나가 그 무슨 물건처럼 내쳐져있었다. 태여 난지 이제 겨우 사흘이 되는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석현에 있는 어느 처녀가 결혼 전에 아기를 뱄는데 부모의 결사적인 반대와 항간의 눈이 무서워 룡정의 병원에 와서 아이를 낳고 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를 룡정 어느 소학교의 아이 낳이를 못하는 교원이 안아왔는데 아이가 풍을 일구고 담이 목에 막혀 우유도 넘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지라 막 버리려던 참이었다.   이때 이웃집 영감이 여느 때와 같이 마실 돌이를 왔다. 봉당에 놓인 들숨도 쉬지 못하는 아이와 그 사연을 들은 영감은 자기가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나섰다. 중의경력이 있다지만 고주망태로 이름 있는 데데한 영감인지라 집 식구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영감이 부엌으로 씽-내려가더니 솥 가마를 뽑아들었다. 웬일이냐고 모두들 경악하는데 영감이 가마 밑굽에 앉은 흙 그을음을 긁어내더니 대접에 물을 담아 그 먼지를 삭혀냈다, 먼지를 삭혀낸 물을 아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 목구멍에 꽉 막혔던 담이 내려갔고 아기가 급기야 미약하게나마 울음을 터뜨렸다.   민간토방법의 힘을 입어 가마 밑굽의 먼지를 삭힌 물을 먹고 살아난 아이, 불운의 화인(火印)을 찍고 세상을 버리지 않은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동 년   옹근 동년을 나는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엄중한 칼슘결핍증에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있었고 대신 머리만은 어른의 모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어릴 적 내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가 되 박처럼 크고 눈이 알전구만한 가분수모양, 꼭 마치 할리우드 공상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인 같은 형상이다. 나의 생모가 배속의 나를 떨어뜨리려고 각가지 약들을 람복한 결과였다.   신체가 약한 만큼 성정미도 여리였던 나는 종일 양모의 치마꼬리를 떠날 줄 몰랐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몇 년 간 휴학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심심풀이삼아 나에게 글을 배워주었다. 다섯 살에 나는 철자를 다 떼였고 독서가 가능하였다. 학교에 붙던 날, 나는 등록하는 선생들 앞에서 고과서 읽기는 물론 모택동주석의 이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시 이며를 줄줄 외워 모두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 장 출입에 온 몸 어디라 없이 주사바늘을 꽂고 부어오른 곳을 뜨거운 물어 담근 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며 아파서 우는 나를 달래는 방식의 하나가 바로 그림책을 사주는 것 이였다. 나는 병원에서 집에서 내내 그림책하고 벗해 지냈다. 어찌 보면 련환화(連環畵) 읽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48권으로 된 며, 40권으로 된 이며, 22권으로 된 며, 15권으로 된  과 같은 고전명작들, 그리고 구쏘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적 3부작  ,   ,  이며를 나는 맨 처음 모두 그림책으로 접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한꺼번에 한 질이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사이 두고 한 권 한 권씩 나오는 바람에 그 기다림 나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 이였다. 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매일이고 서점에 붙박여 신간 련환화들이 나오면 모조리 사들였다.(지금도 룡정 신화서점의 퇴직일군들은 당년의 극성스런 꼬마단골이었던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     아버지는 신발장에 페인트를 칠해서 책장을 만들어주었고 나중에 더 넣을 자리가 없게 되자 또 찬장을 고쳐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 신발장 책장에, 찬장 책장에 잃어질세라 서배에 번호를 단 련환화들을 차곡차곡 꽂아 넣었다. 이렇게 옹근 동년에 나는 천 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소장했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렸다.   그렇게 진중하다고 정평이 나있던 내가 어느 한번 온 룡정을 놀래 우는 사건을 저질렀다. 어쩌다가 방화범이 되여 헛간에 불을 질렀던 것이었다. 불은 헛간을 다 태우고 번져 나와 곁에 붙여지은 변소와 이웃집 반 채를 태워버렸다. 온 동네가 불끄기에 떨쳐나섰고 소방차 두 대까지 동원되어서야 드디어 불을 끌 수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김치 움에 숨은 채 큰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이웃 아낙에게 발견되어 어스름이 내릴 때에야 김치 움에서 끌려나왔다. 모두가 그 영문을 따져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내가 저지른 동기를 말했다.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홍군의 덕택으로 소작농이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토비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홍군토벌음모를 꾸미는지라 토비들을 소멸하게 위해 소작농의 아들애가 소중한 자기 집에 불을 다는 그런 이야기의 그림책, 그 그림책을 읽고 나는 소작농의 아들의 본을 내여 그처럼  거사를 치르려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후로 소학 시절 내내 나의 별명은 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장편도 손에 쥐였다.  ,   ,   ,   ,   ,  ... 지금처럼 어린이들의 심성에 맞는 아동도서가 많지 못했던 그 시절 죄다 어른들의 책을 읽었다. (많지 않은 아동도서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구 사회를 경유해온 이의 자서전적 소설였다)   그러다 비판용으로 앞머리에 모택동주석의 어록이 몇 폐지나 붙은   이 나왔는데 그 록림호걸들의 이야기는 나를 환혹시키기에 족했다. 수호전을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학교선생들이 아직도 철자를 바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훈시하는 말의 한마디가 아무 반급의 혁이라는 애는 장편을 왕왕 내리읽는다던데 너희들은 이게 무슨 꼬라지냐?였다.) 반급 애들이 내게서   이야기를 들으러 방과 후면 우리 집에 가맣게 모여들곤 했다. 개구쟁이들이 한 구들 모여 앉은 그 양말 구린내가 천지를 진동하는 방에서 재봉침우에 올라앉아 나는 중국 옛 찻집의 평서(評書) 이야기꾼처럼 장회체로  을 내리엮곤 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양부였지만 나에게 친아버지 못지않은 사랑을 몰 부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문화대혁명 때  나치스집중영 같은 에서 치른 옥고를 빌미로 장기간 투병 끝에 한 많은 눈을 감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장례 날, 동료들이 많이도 모여왔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리였다. 모두들 비감에 물젖어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조총을 쏠때 튕겨 나온 탄알 깍지가 못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허겁지겁 탄알 깍지를 줏는데 어머니가 하고 오열하며 나의 뒤통수를 철썩 아프게도 때렸다.(나의 첫 장편소설  중에 이러한 나의 동년의 모습이 가감 없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그때 탄알 깍지나 탐내던 개구쟁이였던 나는 양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덧쌓여지게 될 불행에 대해서는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3    김혁 문학自敍傳 (2) 댓글:  조회:2056  추천:13  2013-01-15
. 문학자서전  2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등 단   양부가 세상 뜬 5년 만에 의붓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내가 일곱 살 적에 우리 집에서는 오누이를 만들어준다며 또 3살짜리 여자애를 수양했다. 이로서 우리 집은 한 가정에 성씨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든 특수한 가정으로 어우러졌다. 특수한 가정이라 남보다 더 잘 보듬어야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그런 도량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어떤 작은 잡화점을 경영한적 있다고 자신을 경리님이라 불러야 흡족해 하는, 나의 양모가 네 번째 여자였던 의붓아버지의 출현은 외려 온가족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일 년 사철 하는 일이란 어중이떠중이들을 불러 술 마시는 짓거리, 입만 열면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들이 튕겨 나오고 이제 백만 원 잡아온다, 천만 원 잡아온다 하며 허풍을 쳐댔지만 결국 어머니의 퇴직비나 말아먹는 용모마저 추악했던 의붓아버지였다. 의붓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년내내 사사건건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교원가정의 청고한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는 의붓아버지로 인해 돌변하는  상스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했다. 따라서 의붓아버지의 눈에 나는 속곳에 든 가시였다. 나는   침묵으로 아버지에게 항거했다. 나중에 모순이 극화되어 꼬박 3년 동안 아버지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밥상에서 밥도 먹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야 나는 자기가 입양아라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일으키는 역작용에 또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엄청난 비밀에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꼬부라들기 시작했다.   한 가슴 가득 찬 실의를 이기지 못해 나는 사회의 불량배들과 휩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 새에 문제아로 변해버렸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외 쪽에 집을 잡고 나가버렸고 어린 나 혼자만 집에 남았다. 어머니가 때때로 와서 쌀 사주고 밥 지어주고 갔지만 그 짙고 쓴 외로움과 고독감은 내 소년기에 큰 응달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고독감을 달래준 것이 또 책이었다. 이때는 온 나라가 동란의 부진을 씻고 좌적인 철쇄에서 벗어난 시기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고 금서로 치부되었던 세계명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탐스럽게 독서를 했다. 세계명작들을 거의 다 이 시기에 읽었다. 어머니가 명심해 주문하는 , 외에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나오는   과   , 민족출판사에서 나오는  총서들을 빠짐없이 사들였다. 그 잡지와 총서들을 통해 나는 세계문학과 중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대량 접촉하게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화약 같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로는 다니엘 디포의   ,엑또르 말로의  , 로신의  과 구소련작가 라 쁠레예브의  , 중국 작가 량효성의  , 진국개의   와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과 호시가라 싱이치의 꽁트들, 그리고 연변작가들의 작품인 김성휘의  와 림원춘의  였다.   그리고 다빈치의 그림  , 일본영화 ,중국영화 ,브라질의 TV드라마   , 중국통속가수 등려군, 정림의 노래와 프랑스영화   중의 여배우 나타샤 킨 스키와 중국영화배우 장유와 통기타와 디스코음악과 나팔바지와 원숭이해의 원숭이 우표 등등을 나는 좋아했다. 나는 음식 탐을 하는 허기진 애 마냥 그 경전과 류행들을 내 작은 두뇌의 빈 동공(洞空)속에 아낌없이 부어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나는 줄곧 어문과대표를 맡고 있었고 작문 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다. 내가 쓴 작문이면 죄다 범문으로 낭독되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후 전국적으로 처음 있게 되는 제1회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도교원도 없이 나절로 써서 투고한 작문이 우수상을 수상하여 라디오와 상패를 수상하는 잊지 못할 벅찬 나날이 있었다,    나의 앳된 영혼을 들쑤셔주는 벅찬 문화적인 감수에 못 이겨 나는 필을 들었고 작문에만 그치지 않는  본격적 인 창작을 언감 시도했다.   당시 일본추리영화와 무협영화가 처음 나와 우리 또래는 그에 열광했다. 하여 나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썼고 학교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수학시간에도 썼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각각 3만 여자에 달하는 무협소설, 추리소설 을 써냈다. 는 무협영화의 고루한 형태의 본을 내여 절을 배반하고 나간 무림계의 흑세력을 동자중들이 성장하여 타승 하는 내용을 처럼 장회체로 썼고, 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흥행했던 일본영화 과 문화혁명 때 수사본으로 유행되었던 반 간첩 소설 을 한데 버무려놓은 모방작들이었다. 그중에도 나름대로의 창의성이 보인다면 주인공이 나처럼 남의 집 양자로 자랐다가 아버지를 찾고 보니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흑세력의 두목이었다는 그런 나만의 정감을 부여한 점이었다.   나의 이 소설이라 해야 할지 영화대본이라 해야 할지 작문이라 해야 할지 장르를 획분 할 수 없는 글들은 당시 학생들 중에서 로 대인기를 누렸다. 반급 애들이 다투어 돌려보고는 휴식시간이면 작중인물들의 무림초식(招式)이나 그들의 운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들은 자기신변에 선 작달만한 애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감감 잊은 채 어떤 명작이나 영화를 담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곁에서 눈을 슴벅이며 득의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했다. (지금도 82년 고중시절에 수학공책 뒷장에 쓴 이 글들을 나는 고이 보존해두고 있다. 일전 서가를 정리하다 다시 오점투성이인 그 글을 보면서도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스스로 대견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나는 교정 문만 나서면, 썰렁한 집에만 들어서면 다른 아이로 변하군 했다. 무리싸움에 이은 무리싸움, 그것이 방과 후면 하는 가장 큰 짓거리였다.   결국 고중2학년에 나는 룡정 말발굽 산에서 있은 어느 한차례의 큰 무리싸움의 주모라는  죄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애를 이제 완전 망쳤나보다고 어머니는 낙루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배짱이 있었다. 내가 가장 숭배했던 쏘련작가 고리끼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유명작가가 될 거라고 나의 퇴학소식을 접하고 걱정스레 모여온 친지들 앞에서 호기에 넘쳐 선언했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내가 쓴 작문이 또 중학생작문 콩클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허나 시상식날 수상자는 퇴학당하고 없었다. 학교교무처의 선생들과 반주임이 상품인 반도체라디오와 상장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와 장끼가 있는 학생인지라 다시 학교에서 받아들일 의향을 말했다. 허나 성숙치 못한 치기에 넘쳤던 나는 호의로 찾아온 선생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색안경 끼고 나를 사회 불량배 대하듯 하는 학교는 싫다, 광활하고 할일 많은 사회대학을 나와 이제 고리끼처럼 명작가로 될거다!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었던 나는 스스로 다가오는 어떤 기회를 잘라 던졌고 그 기회를 잃고 그 후로 내내 큰 대가와 무거운 부하를 겪어야했다.       나의 모교- 용정중학. 대성중학으로 불렷던 학교는 시성 윤동주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때의 용어를 빈다면 나는 취업대기청년이 되어버렸다. 직업은 없고 하여 친구들과 함께 샌들장사에 나섰다. 연길로 와서 그때까지도 시공 중인 서시장의 골목길에서 대련에서 넘겨온 샌들을 팔았다. 허나 장사에 재미를 붙일 무렵, 불량배들에게 샌들을 빼앗겼고 그 것을 지키려다가 늘씬히 얻어맞고 장사도 그치고 말았다.   다음에는 룡정 과수농장에서 꾸리는 주물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수도 덮개와 스팀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자전거로 오가는 출근길만 해도 반시간 푼히 걸려야하는 자그만 민영공장에 서 기능공들이 단숨에 100여차 휘두르는 메를 10여차도 못 휘두르고 헐떡이었고 지글지글 끓는 쇳물 바가지를 어떻게 주체할길 없어 그 앞에서 쩔쩔매었다, 그때 내 나이가 17세, 번중한 로동이 힘에 버거워 속눈물을 떨 군적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허나 처음 당착해보는 직장생활은 나에게 불꽃 튀는 영감을 주었고 그 주물공자의 생활을 모태로 하여 무협이나 추리가 아닌 순수소설이라 생각하고 작품 한편을 썼다.   ,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인종인 피그미라는 토착민들처럼 평균 키가 작은 주물공장의 몇몇 청년들의 사업과 사랑에 대해 쓴 1만 7천자짜리 단편소설이었다. 였던 나는 그때 이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중국작가 장자룡의 공업소설 에 못지않을 대작이라고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시 젊은이들 층에서 인기 높은 종합지였던 잡지에 투고했다.   석달 후엔가 편집부에서 신씨 성을 가진 편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양모의 학교를 연계주소로 했기에 편집들은 나를 40대의 교원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름도 필명인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애송이티를 가시지 못한 나를 본 편집이 헛 밟은듯 움찔했고 허구픈 실소를 머금었다. 편집부에 한번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고 두수 없는 행차를 한 듯 돌아가버렸다.   며칠 후 나는 토끼를 품은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추리며 연길에 있는 편집부를 찾아갔다. 편집선생들이 모조품을 보는듯한 웃는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얘기해주는 편집원들에게 나는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한편의 작품을 써 보이겠다고 배심 두둑이 여쭈었다. (나이가 어린지라 애초에 발표한 나의 작품들은 늘 표절이 아니면 번역 작품이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나의 글 수준을 고도로 인정해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배포를 머금었다). 편집들은 마지못해 나의 하회를 기다렸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또 한편의 작품을 썼다. 라는 제목으로 남을 위한 좋은 일만 해서 백치로 몰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의 밀월기간에 일어나난 사연을 소재로 단편을 만들었다. 여자 손목도 쥐여 못 본 애송이가 어떻게 밀월을 썼던지 모르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 편집원들이 내 어께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다.   드디어 1985년 8월호 지에 나의 첫 소설  이 실렸다.(그 이듬해에 나는 자매편  을   잡지에 발표하여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3부작으로 예정하고 을 창작, 아쉽게도 채용되지 못했다.) 편집들의 면려로 소설뒤끝에 짤막한 약력까지, 첨부되어 나갔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 값도 겨우 45전, 하지만 처녀작이 실린 그 잡지를 받아든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했다. 대번에 여섯 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초등학교 반주임이며 룡정에 있는 리태수 김재권 등 작가분 몇몇이 우리 집에 모여와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십대의 나이에 그것도 정학처분을 받은 내가 유명잡지에 당당하게 처녀작을 냈고 선생들과 의붓아버지 앞에서 나의 호언을 완수해 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하지만 의붓아버지의 빈축의 눈길은 여전하였다. 그 눈길이 싫어져 그 무렵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연길로 와서 동쪽 교외의 동광양계장에서 달걀을 깨우는 부란공일을 하게 되었다.   장장 21일을 자지 못하고 열을 고루 받도록 부란기의 손잡이를 반시간에 한번 꼴로 돌려주며  오리 알이며   종자달걀을 깨웠다. 그 부란기의 동음이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부화실에서 군용침대에 엎디어 나는 쉴새없이 읽고 또 썼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19살 그해에 련이어 ,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잡지에서 잡지 뒷면에 나의 작가사진을 실어주었고 작가협회 기관지 에서 조직한 문학 강습반에서는 우수학원으로 선정되어 중국의 대문호 로신의 반신상을 상패로 수상했다.   그 석고상을 부란실의 창턱에 놓고 바라보며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성취감에 나는 가정에서의 소외감이며 번중한 로동의 고달픔이며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운명의 신은 나와 글쓰기라는 짓거리를 단단한 동아줄에 옭매듭으로 칭칭 얽동여놓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    김혁 문학自敍傳 (3) 댓글:  조회:2912  추천:16  2012-10-23
. 문학자서전  3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입 사   그 이듬해도 나는   ,  ,  등지에 육속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나의 인생이 궤적이 느닷없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창간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 성급신문인 사에서 파격적으로 나에게 요청을 보내왔다. 하여 학교에서 장학처분을 받은 문제아였던 나는 , 어느 사영기업의 양계장에서 달걀이나 깨우던 허드레 부화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문학청년으로 인정받고 일조일석에 신문사기사로 변신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다. 중학교문도 채 나오지 못한 스무 살 내기가 일약 신문기자로 된다는 것은 그 당시 편집원들이나 내 곁 사람들의 경악에 쳐들린 눈초리가 보여주다시피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사회접촉면이 넓은 기자 사업에서 단련하면서 나의 눈과 필봉을 벼리여 당시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중국작가 호연과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뼈물어 먹었다. 한낱 뜨내기 부화공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가 한 푼도 없다는 조건이었다. 대신 원고비는 내준다고 했다. 이를 작가로 향발하는 길에서의 기회와 전환으로 여긴 나는 그 조건을 겁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86년 5월, 온 거리에 흩날리는 하얀 비술나무 씨를 축복처럼 맞으며 좀은 어리친 모습으로 나는 신문사 편집실에 발을 디밀었다. 배치되어 맨 처음 맡겨진 임무가 선배들과 함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편실화 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일찍 번역을 마치고 차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팥죽 땀을 흘려가며 번역에 매어있었다. 번역이 늦어져 부장이 곁에서 재촉하고 주필님까지 찾아와 지켜보는데 난해한 단어들이 많아 안달아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겨우 번역을 마무리했다.   내가 쓴 첫 기사는 86년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그네가 정식경기종목으로 되였다는 예고소식이었댜. 그런데 신문기자습작에 관한 강의나 학습도 없이 착수했던 나는 그 기사를 밥도 죽도 아닌 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머리에 그네에 대해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조를 곁들였고 소식에 그네 뛰는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서정까지 토로했다. 글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주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길림성을 상대로 한 성급신문이라 취재범위가 넓었다. 룡정을 작은 반경으로 다람쥐 채 바퀴 돌리 듯했던 나는 상경한 시골 닭처럼 전전긍긍하며 장춘, 길림, 교하, 류하, 통화, 매하구, 구태, 장백 등지를 사철 내내 돌아다녔다. 촌부락에 내려가서는 하도 어린 나이였기에 가짜기자로 의심받고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어스름이 내렸으나 잠자리도 찾지 못하다 학교접수실의 마음씨 고운 당직 아바이에게 청구하여 한 온돌에서 비비 닥이며 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덜 고운 의붓아버지에게 청구하여 호구부를 고쳐 나이를 한살 올렸고 콧수염을 무성히 기르고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기자 생활중에서 나는 문자라는 부호의 합의된 배열법칙과 음훈을 익혀나갔고 따라서 나의 필봉은 서서히 벼려지게 시작했다.    하지만 로임을 주는 날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감내를 겪어야 하는 날이었다. 매양 19일날, 모두가 희희락락 로임봉투를 타들고 음식점을 찾아 갈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군 했다. 신문사를 멀리한 상점으로 가서 가련한 원고 비를 잘라 홀로 맥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를 곧잘 다루는 합격된 기자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신문의   ,  와 같은 칼럼란에서 나의 이름과 필명을 하루 멀게 볼 수 있었다. 북향, 초군, 설봉, 각설이 그때 나의 필명만 해도 13가지나 되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 김학철선생의 신랄한 잡문에 홀딱 반해 나는 잡문쓰기에 커다란 열성을 보였다. 지어 선생의 풍격인 글 사이에 풀이표를 쳐주는 것도 꼭 같이 모방하여 잡문을 저그만치10여편 발표했다. 한편 기자생활에서 받은 감수로 20여 편의 소설과 100여수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8년간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 가지 리유로 학교 문을 갓 나서고 취업한 애송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할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 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신문기자행업에 투신한 17년이란 기간 그런 대우는 내게서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나는 졸업장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우렬을 제쳐놓고 락인부터 찍어놓는 그런 미완숙한 사회규제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망각한 그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한곳 향해 매진하는 외뿔 소마냥 문학의 뿔을 혼자서 갈고 닦으며 버텨내었다.   기자라는 것은 나에게서 직업이었고 문학은 본능이었다. 이를 나는 개인적 수행의 방법으로 간주했다. 그 방법을 통해 나는 어섯눈을 개안할 수 있었고 부족한 나의 천성을 다독이며 달랠 수 있었다. 넋 건지기에서 닭을 희생시키듯 하나의 제물로 나는 문학의 제단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 제물이 되여도 나는 유감이 없다.   8년간의 고험을 거쳐 글 다루기에서 제법 웃자라난 나를 두고 광복과 함께 창간된 조선족 최대의 일간지 에서 백락처럼 손짓했다. 94년, 나는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시작하여 1여년의 기자생활에서 제법 이름 있는 로기자라는 딱지가 앉게 되였고 그 기간 나는 1000건에 달하는 기사를 발표,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신문상을 비롯한 각종 신문보도상 20여차를 수상하게 되였다.   동호  (同好) 여려서 사회에 내쳐졌고 기자와 작가라는 이중신분으로 여러 계층에서 자맥질해왔던 만큼 나에게는 각종 부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서 물론 가장 도타운 친구들은 문학동호인들이다. 나는 문학인들과 적극 사귀였고 각종 문학협회를 꾸리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85년, 룡정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꾸렸다. 비서장을 맡고 각 현시 문학도들을 조직했고 한편 등사본잡지에 상당한 분량의 무협소설 를 련재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룡정의 유명작가들이 꾸린   협회에 가입, 보름에 한번 씩 열리는 작품합평회에 참가하러 퇴근 후면 늦은 밤 버스를 잡아타고 룡정으로 빠짐없이 다녔고 회의마다에 작품을 내놓았다.  에 입사한 86년 나는 또  문학협회를 만들었다. (협회 이름은 당시 의기투합됐던 지금의 사 최호사장과 함께 백조사진관에 가서 협회창립기념을 남기며 내가 사진관 이름을 본 따 단 것이었다.) 연길시 당안관 자리를 빌어 협회명의로  60여명의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이 참가한 대형 련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등사본잡지를 몇 기 발행, 창간호에 나는 설봉이라는 필명으로   이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한 우리 문학도들을 대견히 여겨 등사본잡지의 앞머리에 김학철선생과 리상각시인께서 왕붓을 허비해 제사까지 써주셨다. (그 동아리들 중에서 대부분이 사회 각 기관의 어마어마한 령도인물로 성장. 오직 나만이 외줄타기로 지금도 경황없이 글밭을 경작하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문학협회에 적극 참여, 청년시인협회인  의 부회장직을 맡고 수천원의 자금도 협찬 받아오고 내가 경영하고 있던 식당을 협회전용처럼 내밀고 각 잡지에 동호특간도 조직해내고 하면서 동호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동아리를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그러한 지인들지간의 이해와 교류의 분위기의 멋을 잊지 못해 몇 해 전에도 전국 각지의  기성문인들을 동원하여   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설립, 한국의 유명홈에 개설한 우리 동호회가 그중 가장 활약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의 동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즐겨 읽는 무협지중의 녹림인물들처럼 자신을 내던지곤 했다. 당년에 책을 쌓아 놓고 나면 엉덩이도 간신히 들이밀 나의 8평방짜리 셋방 집에 들리지 않은 동년배 동인이라곤 없다. 싸구려 생맥주에 북어끄트러기라도 맛나게 찢으며 문학을 안주삼아 밤을 지새곤 했다.문예부에서 편집을 하면서 나의 손으로 편집하고 그 작품이 상을 받은 내 또래 동인이 10여명이 된다.. 문학 외에 아는 것이란 또 문학밖에 없는지라 합격 못된 세대주로 첫혼인이 파렬된 후에 거칠 것 없는 나의 셋방 집은 아예 문학 살롱이 되다시피 했다.   우리집에 묵으며 꼬박 2년간 나와 함께 지낸 문학도들이 몇몇 있다. 석탄도 사지 못해 한겨울에 불 때지 못한 찬구들에 이불 몇 채씩 깔고 앉아 매운 소주에 청국장 하나만 달랑 놓고도 우리는 문학의 진미를 담론했다. 그사이 우리 집 식객이었던 그 문학도들의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해에는 연변일보 , , 을 몽땅 도거리해서 보람으로 기쁨에 눈굽을 적신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불경기로 로임까지 체불 받으면서 직장도 없는 그애들을 부둥켜안고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하는 극난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 나날에 나는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과 수십 수의 시를 발표, 4차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족 최대의 사회열점을 건드린 장편르포 를 집필, 연재, 출판해 내었고 첫 작품집 를 내놓았다. 그네들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원조하고 지지리도 어려운 그 나날을 버텨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요즘 세월에도 문학의 외길을 고집하며 함께 하는 그네들을 나는 좋아한다. 친지가 적은 내게서 그들은 살밭은 형제와도 같다. 바른 심성을 갖춘 그들이 문학에 불어넣는 생의 기미에 대한 전언을 읽어내고 서로 긍휼을 나누는 지음이 될수 있기를 나는 진심 바랬다.     무 드(mood)   신문기자로 발탁된 이듬해 연길로 이사 오면서 나는 28개의 사과배광주리에 나의 전부의 가산인 소장한 책들을 담아 싣고 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붙박이로 책 더미에 내 옹근 몸뚱아리를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나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편집광적인 독서광이다. 언감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좋은 책들을 모조리 읽고자 망상하고 있다. 시시때때 그 시대의  의식형태에 맞추어 나오는 각종 종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려 들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브의 실험용 동물처럼 좋은 책만 나오면 예민한 후각으로 알아내고 선참 사들여 허겁지겁 읽었다. (멋모르고 읽다나니 독일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한어로 읽고 중국인으로 여긴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기에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고 있다. 그 것이 이제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되었는가 보다.    나의 독서범위는  오지랖이 넓어도 무지 넓은 편 , 단 문학 류뿐 아니라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여러 부류의 책들도 대량 사들여 읽는다..신간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꼬박 10 여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도 다섯 10여 종류가 된다.   , , ,,,,,, , , ...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그 3분의 2는 잘라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책과 잡지를 한 아름 사드는 나를 두고 안해는 우리 집이 내내 쪼들리고 있는 까닭은 책을 너무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찬사절반 푸념절반을 섞곤 한다. 일찍부터 나는 책을 사면 책의 맨 앞장에 나의 이름 병음자모와 책을 산 곳과 일시를 적곤 했다. 그 날자가 적힌 5천여 권의 책과 매달기수가 빠짐없는 수천 권의 잡지들을 배열해놓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가 년보처럼 역력히 엿보인다. (89년도에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나는 주 공안국부근에 책방 하나를 차린 적 있다. 라는 대문호의 이름을 딴 서점, 그 서점을 꾸릴 적에 내가 소장한 책 수천 권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벽을 꽉 메운 책장과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까지 쌓여있는 책속에 파묻혀 나는 예이제 없이 신들린 듯 독서에 혼 줄을 앗긴다. 나를 잃는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 원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 사이에 3천 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내가 열광적인 영화디스크 수집애호가라는 것을 문인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심취되어왔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1    김혁 프로필 댓글:  조회:3485  추천:12  2012-07-12
 김 혁 (金革) 소설가, 언론인 중국 길림성 룡정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석사연구생 수료.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매체에서 20여년간 기자로 근무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로 등단   -  작 품 -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장편소설 "완용 황후"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인물전기 "주덕해의 이야기"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력사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민족" 편찬저서 “중국조선족전통이야기 대전서” (1.2부) 외 다부   - 수 상 -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연변작가협회 "김학철 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흑룡강신문 "한얼"문학상 대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연변작가협회 화림신인문학상, 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학상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 한국 계몽사 해외문학상 등 수차 수상 메일: ckkh99@hanmail.net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The last rose of summer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Gavin Co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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