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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네는 누굴 위해 흔들리나? 댓글:  조회:2761  추천:7  2014-05-13
평론   그네는 누굴 위해 흔들리나 - 막언의 단편소설 “백구와 그네 (白狗秋千架)”   김 혁     막언, 이제 더는 소개가 필요없는 작가다. 서방작가들의 전용물이나 다름없던 노벨문학상의 트로피를 당당하게 앗아내 중국인들의 오랜 숙원을 이룩해준 큰 작가다.   평단과 독자들은 그를 세계적인 문호 “윌리엄 버크너, 마르케스와 비견되는 작가”,  “중국 현대 문학의 거장”이라고 극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막상 그의 작품은 영화때문에 더 알려진 “붉은 수수”정도에 그치고 더 풍요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다. 적어도 조선족문단과 독자들에게는 말이다. 막언의 작품중 굵직하고 호흡이 긴 장편외에도 단편수작들이 적지 않은데 “백구와 그네”가 바로 그중 한부이다.   소설의 배경은 막언의 여느 소설처럼 또 한적한 농촌 그의 고향마을이다. 고향을 떠난지 꼭 십년이 되여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도에서 그는 고향의 강아지와 그 강아지의 주인인 “난”을 만난다. 젊은 시절 두사람은 향 문예선전대의 골간이였다. 함께 노래부르고 악기를 다루었던 둘은 인민해방군에 가입하려는 꼭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한번 함께 그네를 타다가 그녀는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고 그 신체적 결손때문에 성정미도 포악한 벙어리 남자에게 숙명적으로 얹히게 된다. 그후 한사람은 시가지로 가서 강사로 되였고 한 사람은 오지에 남아 세쌍둥이 엄마, 데데한 시골아낙으로 전락해버렸다. 주인공은 아름답던 그녀의 비참한 조우를 피부로 부딪히고 호흡 가까이 느끼면서 고향의 실체에 대해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다.   전원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했던 독자들이고보면 이  소설은 너무나도 큰 형벌이다. 소설은 차겁게, 그리고 잔혹함에 가깝게 생활의 고단함을 원색 그대로 보여준다. 돌다리, 흰 강아지, 수수밭 이러한 흔히 볼수있는 고향의 다정다감한 풍경들과 그 풍경속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서로 상사한것 같지만 막언의 소설에서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매개물로 존재하고있다. “뿌리찾기(寻根)문학 류파”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막언의 작품들은 농촌의 우매함과 그 우매함에 갇힌 어둠에 대해 회피하지않는다. 고향은 그에게서 아름답게 동경하는 곳이자 루추한 현실이 숨쉬는 곳이다. 하여 그의 작품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설에서도 지어 다른 남자에게서 씨종자를 빌리는 락후한 행태마저 크라이막스로 보여주려한다. 그리고 거기서 뚝 끊음으로서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공간을 펼쳐 준다. 잔혹한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폭로속에 시골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질박한 추구가  슴배여 있어 이야기는 간단한듯 해보이지만 그 흙감탕의 밑바닥을 사정없이 파헤쳐 나중에 드러나는 하얀 옥석같은 내함은 실로 놀랍다.   이 소설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소설 곳곳에 장치한 상징의 적절한 리용이다. 소설에서 들머리에 등장하고 제목에도 나오는 백구는 하나의 상징이다. 농촌에서 흙길에서 뛰노는 백구는 도회지에서 재미삼아 기르는 애완견과 차이가 있다. 농촌의 토종개들은 집을 지키는 구실을 곧 잘하는 개로서 가족의 하나의 구성원이다. 여기서 강아지는 아직도 하대받는 농촌사람에 대한 상징이다. 또한 늙고 병든 강아지이지만 촌부락을 손금보듯 꿰지르는 강아지로 드팀없이 고향을 지켜나가는 그들의 신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저층에서 의연하고 구순하게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을 암시하는것이다. 그네 역시 상징의미를 갖는다. 그네는 농촌에서 유일한 오락기구일수 있다. 장바 한컬레와 나무조박으로 무어진 한낱 수수한 그 그네가 주는 그 재미는 도회지에서 돈 퍼주고 타는 공원의 놀이기구에 못지 않다. 그 간단하기 그지없는 툽상스러운 기구에 몸을 맡기고 사람들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쉬운다. 그런데 소설속에서 그 줄이 끊저져 버렸다. 이는 바로 전통과 현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 단절이 녀주인공 난의 신체의 결손을 빚었고 그 몸의 결손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빚는다. 작중인물의 이름도 나름의 뜻을 갖고있다. 녀주인공의 이름은 따스할 “난(暖)”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겪은 인생사는 차갑기만 하다. 이쁜녀로 부터 억척녀로 변한, 변해야만 했던 주인공, 차거운 세상의 밑바닥에 내쳐진 그녀는 그누구보다도 따스함에 대한 갈망으로 차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의 집 아이를 잉태하려드는 해괴한 거동은 바로 따스함과 희망에 대한 동경의 발로를 적라라하게 보여준다. 또 그녀의 애꾸눈은 아름다움이 상실된 편벽한 시안을 상징하며 작가의 눈에 이률배반으로 비친 고향의 모습을 말해 준다. 난의 벙어리 남편 역시 하나의 상징으로 볼수있다. 남편뿐만 아니라 그 벙어리와 낳은 세쌍둥이마저 벙어리이다. 실어는 대화와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세 쌍둥이는 바로 그러한 우매가 련속되여 감을 보여주며 고난의 련속성을 암시한다. 한 시골농가의 볼썽사나운 결손가족으로부터 도농간의 경제적 격차, 빈곤의 영속화, 황폐한 농촌마을의 풍경과 그들에게 내려진 운명의 잔혹한 세례를 보여주는것이다. 소설의 초반부터 주인공의 고향순방은 커다란 상징으로 시작된다. 리향과 귀향, 이는 바로 우리의 허다한 문학경전들이 즐겨쓰는 수법으로서 정신의 보금자리에로의 깃듦을 보여주는것이다. 고향은 시골마당에 두고 온 그네처럼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그냥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제날에 대한 회구의 마음으로 찾아 나선 고향, 고향은 아직도 무가내하게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막언은 토종개를 앞세워 우리의 독자들을 안내해서는 애꾸눈 녀주인공과 함께 하나지만 다른 눈동자에 비해 더 극명한 시선을 제공하면서 멀미 나는 그네대에 올려 놓고 흔들어 잠자던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멀미나는 경험 그것은 바로 령혼의 흔들림이요, 진통이다.   초기소설이고 단편이지만 이 소설은 막언의 창작에서 전환점인 작용을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부터 그의 작품들에는 고밀향이라는 환상의 고장이 처처에 나오기 때문이다. 막언은 어느 한번의 창작담에서 “고향의 산천과 시내가, 풍토와 인정, 가족들의 별난 경력, 고향에서의 그 혹독하고 어려웠던 생활, 고향 친지들의 입을 통해 들었던 전설과 지나간 이야기 등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제 앞에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 앞다투어 나타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소설로 써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가난한 소시민이 갑작스레 엄청난 재화를 얻은것처럼 소설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습니다. 쓸 만한 이야기 감이 없던 시절이 지나가고 미처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절을 맞이했습니다.”고 밝혔다. 바로 이 소설을 쓰면서 부터 막언은 중국과 해외의 우수한 작가들로부터 받은 깨우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문학 공화국”인 “고밀 동북향”을 세웠던것이다. 이곳은 단순히 고향이란 의미를 넘어 막언의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 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막언에게 가장 큰 고통은 쓸 만한 소재가 없다는것이였다. 종종 소재를 찾기 위해 잡지나 신문을 정신없이 뒤적이고 지방의 작은 마을을 찾아다니거나 공장을 방문해 취재를 하곤 했지만 돌아온 후에는 머리속이 텅텅 비여 있는것 같았고 원고지앞에 앉아서는 단 한 글자도 쓰기 어려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면서 “마치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알게 된 것처럼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습니다.”고 막언은 창작담에서 말했다.   막언의 작품으로 보면 짧고 단순한 내용,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극명하게 운명의 원색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막언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숙명감이 자주 보이는데 꼭 마치 희랍의 비극물처럼 처량미와 비장미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기쁨 혹은 슬픔, 격앙 혹은 저조의 행간을 오가며 기복이 높낮은 운명의 다단함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여타의 다른 작가와 같은 골격,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현대인들의 메마른 심성을 흔들리는 그네의 세례를 받게 하여 농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고를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근본적인 가원(家园)인 향촌의  정신적요의(要义)에 대해 재해석하고 있다.   “도라지”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    아픈 시간의 음반을 돌리다 댓글:  조회:1364  추천:9  2014-04-04
. 평론 .   아픈 시간의 음반을 돌리다 성가이 단편소설 “1937년의 축음기”   김 혁    저자 盛可以   소설 “1937년의 축음기”(북경문학 2013년 3월호)는 살육의 광기가 휩쓸고 지나갔던 1937년의 남경대학살을 배경으로한 단편소설이다. 1937년 남경이 일제의 마수에 함락되고 주인공은 며칠째 돌아오지않고있는 아버지를 찾아 길에 나섰다가 그 아비규환의 수라장속에서 일본군에게 륜간당한다. 밤, 만신창이가 되여 길녘에 버려진 그녀를 젊은 일본군관이 구해준다. 일본군관은 그녀를 집에 까지 업어다주고 며칠간 짬을 내여 보살펴 준다. 그 와중에 두사람은 사랑과 같은 미묘한 기운을 감지한다. 두 사람은 혹독한 사랑과 증오의 갈등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용서하는 시간을 보낸다. 몇달후 일본군이 물러가기 시작하자 그제야 돌아온 아버지는 집에서 뜻밖에 일본군을 발견하고 가차없이 그 일본군관을 사살해 버린다… 잔인한 전쟁, 민족의 애증, 인성의 발로가 이 간단한 이야기에서 그렇듯 생생하게 그렇듯 극명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인류의 반성이라는 깊은 주제를 이끌어 낸다. 소설은 남경대학살이라는 그 시간대, 력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배역의 육체와 령혼의 세례로부터 진실하게 피빛력사의 진실을 복원하고 있다. 한편 그 력사의 틈새에 찡긴 사람들의 인성과 선악을 적절하게 보여주고있다. 여기서 제목으로 달고 이야기 전반을 끌고나가는 축음기는 그 참안에서 생존해 남은 사람들의 진술을 상징한다. 소설속의 몇몇 안되는 인물들인 피해자 나와 일본군관 그리고 아버지가 그 “축음기”라는 전달구도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와 정감을 표출한다.   저자 성가이(盛可以)는 1973년 호남성 익양에서 태여나 심수, 심양, 광주, 북경등지에서 기자, 편집자, 증권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중국작가협회 1급 작가로 광동성 문학원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1994년에 최초의 산문을 발표했고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수유(水乳)”가 독자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2003년 “제1회 중화문학 미디어 대상 “을 수상했다. 그후 제14회 광동성 신인작가상과 제8회 광동성 로신문학상”, “중국녀성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도덕송”, “불타는 집”, “북매(北妹)”등 6부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가이(可以)”, "당신의 방 (留一个房间给你用)”등 중단편집을 펴냈다. 그중 적지않은 작품은 영어, 독일어, 일본어, 한국어 등으로 번역, 소개되였다. 중국문단에서는 “미래의 문학대가”로 미국, 영국에서는 “떠오르는 별”, “용감과 재능을 겸비한 녀작가”라 격찬을 받고 있는 그의 작품은 언어풍격이 강렬하고 문체의 실험성을 보이고 있으며 민감한 관찰력과 차거운 격조로 사회 여러 령역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아우르고 있다. 성가이의 소설들에는 그만의 독특한 리해와 그만이 구사하는 기법이 있다. 그의 필의 성향은 날이 선 칼마냥 날카롭게 생활의 면면을 해부하는데 그 문체가 섬뜩할 정도이다. “1937의 축음기” 역시 그러하다. 소설에서는 시작부터 잔인한 륜간장면이 나오고 그 결말도 아주 충격적이다. 하지만 책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 보면 잘 만들어진 소설의 스토리가 주는 충격보다 시대적 비극에 대한 충격이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사실 소설에 담긴 내용은 실제로 일어난 참극보다 아주 낮은 수위로 표현되여 있지만 그럼에도 읽기에 불편한 끔찍한 소재는 제국주의침략자들의 야욕과 잔학무도한 폭력성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있다. 이렇게 그녀의 작품들은 여타의 녀성작가들처럼 부드럽고 용이한 단어와 풍격에서의 화려하고 세밀함을 거부한채 정면으로 생활과 운명과 충돌한다. 때문에 평단은 그의 소설은 녀성작가의 필끝에서 나온것이라고는 믿기어렵게 “조폭”한 힘”을 갖고있다고 말한다. 그로서 미문과 환상을 버린채 혼란한 경험과 암흑한 령혼을 직면하고 포용한다. 랭정하고 예리한 필치로 도덕과 욕망이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복잡한 형국들을 그려내는것이다. 혹자는 이제는  남경대학살과 같은 소재가 낡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운것은 우리 작가들의 소재의 낡투나 중복성이 아니라 우리의 창작자들과 독자들이 안일하고 렵기적인 취미성 열독에 버릇된 독서의 미뢰(味뢰)에 버릇되여 어제의 력사와 그 진실을 잊는것이 아닐가. 거북하고 불편한 과거일지라도 일본의 군국주의가 망동이 더욱 우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있는 오늘이기에, 때문에 작가의 소명의식으로 인류력사상 전대미문의 참극이였던 남경대학살을 다시금 환기시킨 성가이의 이 소설이 더 값지게 읽혀지는게 아닌가 싶다. "도라지" 2014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    짧은 글을 위한 긴 타령 댓글:  조회:2743  추천:11  2014-03-28
칼럼   짧은 글을 위한 긴 타령 - 창작후기를 대신하여   김 혁       1 지난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가 빚은 이슈는 단편작가로는 첫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록이였다. 그로서 서점가들은 요즘 단편소설 읽기가 탄력을 얻고 있다고한다. 서점가와 인터넷을 보면 소설작품들이 그야말로 홍수를 이룬다. 장르나 작가들이 천문수자처럼 많고 그 수준여하가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풍성한 책의 향연앞에서 어떻게 옥석을 가려 낼가? 독자로서는 혼란에 빠질때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접근은 어떨까? 아주 짧은 시간내에 볼수 있는 작품, 그로서 작품의 진미를 재빨리 맛볼수 있는 작품, 그렇다면 짧은 소설이 그 적격이라고 본다. 단편이냐, 장편이냐 아니면 중편이냐하는 쟝르의 분량을 두고 창작의 우렬을 편가름하는것은 어리석은 짓거리일터지만 오래동안 창작실천을 해오면서 짧은 소설에 대한 매력을 때때로 느끼게 된다. 짧은 소설 쟝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부름말이 있다. 초단편소설, 미니소설, 미형소설, 콩트(conte), 혹은 장편소설(掌篇小說), 엽편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장편소설(掌篇小說)은 길다는 장(长)자가 아니라 손바닥 장(掌)으로서 손바닥 같은 정도의 량을 말하며, “엽편소설(叶篇小說)'이란 나무잎만한 크기라는 뜻, 개념도 장편(掌篇)소설과 동일한것으로 볼수 있다. 요사이 중국문단에서는 또 “미(微)소설”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위챗(핸드폰등 정보통신의 메신저)으로 볼수 있는 몇백자 소설로서 위챗(微信)을 말하는 중국어의 첫 단어를 따서 만든 용어이다. 쉽게 핸드폰 소설이라 리해해 두면 된다. 하지만 핸드폰 소설이라 해서 작난에 그치는 글장난이 아니다. 모든 군더더기를 뺀 짤막한 이야기들이라 부담 없이 읽기에 좋고 그 속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미소설”의 가장 현요한 특징은 현실에 접근하고 사회현실을 반영하며 시대풍모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중국의 위챗 가입자가 3억이라니 보수적으로 집계해봐도 그 독자수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자이다. 이렇게 부름법들이 다양하지만 한마디로 촌극(寸剧) 즉 지극히 짧은 소설을 가리킨다. 흔히 2천~3천자 좌우로 유머, 풍자, 기지가 넘치는 문체로 인생의 한 단면을 짧고 재치 있게 표현하면서 소설의 묘미를 나타내는 쟝르라 하겠다. 때문에 세계의 대문호들은 단편소설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현실의 편린을 포착한 생생한 감각에 력사적, 사회적 스케일을 담은 단편명작들을 량적으로 남겨 수세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짧은 글 짓기에서 빼여난 기량을 보인 세계적인 작가들로는 모파상, 체호브, 오헨리 등이 있다. 앨리스 먼로가 닮았다고 하는 단편소설의 대가 안똔 체호브만 봐도 무려 600편의 단편소설을 세상에 남겼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치의 선물”의 오 헨리는 오로지 짧은 소설을 닉애(溺愛)하여 “마지막 잎새”, “경찰관과 찬송가”등 300편에 가까운 잛은 소설을 남겼다. 하여 모파상, 체호브, 오 헨리는 세계 3대 단편소설 작가로 꼽힌다. 그외에도 도데, 뚜르게네브 그리고 헤밍웨이등의 작가들도 모두 짧은 소설에 심취하여 기꺼이 필봉을 바쳤다. “로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 글을 집필할때면 한쪽 발을 들고 쓰면서 자신을 강압하여 간결한 문장을 지어 낸다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써냈다. 그의 번쩍이는 천재성을 보여준 그 일화를 보면, 어느 한 글쟁이가 헤밍웨이에게 내기를 요청했다. "단 10개의 단어로 사람을 울리는 짧은 소설을 써내면 당신이 이기는겁니다." 이 얼토당토한 내기를 헤밍웨이는 단 6개의 단어로 이겨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그 소설은- 팝니다, 아기 신발, 한번도 신어보지 못한… 어쩌구려 어린 자식을 잃고 그 유품을 팔아야하는 신산한 부모의 처경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짧디 짧은 소설이였다. 여기서 유명 초단편소설 몇편으로 감흥으로 더 읽어 본다.   미국의 과학환상소설작가 프레드릭 브라운이 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과학환상소설- 지구의 마지막 사람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미국 “시대주간”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그물 (网)   세상에서 가장 짧은 현념(悬疑)소설- 남편이 아프리카로 사냥려행을 갔는데 안해에게로 전보가 왔다. “남편이 사자에 물려 죽었음” “시신을 보내시오” 하지만 도착한것은 사자의 시체였다. “사자가 아니라 남편의 시신을 보내시오.” “시신은 사자의 배속에 있음”…   세상에서 가장 짧은 황당소설- 길을 가던 빵은 지치고 배가 고팠다. 빵은 자신을 먹어 치웠다.   그야말로 기지와 위트가 번뜩이는 작품들이다. 단순하게 량의 다과(多寡)로만 장편과 단편이 구분되는것은 아니고 쟝르들이 어느것이 우위고 어느것이 하위인 우월의 관계가 있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대한 스케일과 복잡, 미묘한 사건의 전개로 오랜 시간 읽어야 하는 장편소설보다 단일한 사건전개와 결말의 반전, 단일한 주제가 주는 짜릿한 독서 쾌감은 짧은 소설만이 주는 독특한 맛이다.       2 근년래 중국문단에서 짧은 소설은 거족의 발전을 해왔다. 중국에서 소설은 고대신화, 진나라이전의 우화(寓言),륙조지괴(六朝志怪), 당대전기(唐代传奇)、송원화본(宋元话本), 명나라 청나라의 장회(章回)체등으로 각 력사시기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해 왔고 그 단편가작들은 모래알처럼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다. 사학가와 문학평론가들은 사실 포송령의 “료재지이(聊斋志异)”가 바로 짧은 소설의 전범이라 평하고 있다. 근년들어서도 이를 소소설(小小說)이라 지칭하면서 이에 투신하는 중국작가가 수천 수만명을 넘기고 그 전문간행물도 수백종을 넘긴다. 평론가들은 “이 20여년래 중국의 소소설 문학의 발전이 보여준 대중문화적 의의는 소소설로 하여금 현,당대문학사상 백화문이 나온 이래의 중요한 문학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높이 정평한다. 그에 편승하여 연변에서 꾸리던 중문판 “천지”도 일찍 재빨리 소소설 전문지로 탈바꿈하여 이제는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고있는줄로 안다. 하지만 타지역의 방흥미애(方兴未艾)에 비해 우리 조선족문단의 초단편소설창작은 내내 미온(微温적이다. 이 우수한 쟝르에 대해 망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조선족문단은 초단편소설에 대해 일찍 접해 왔었다. 80년대 조선족 간행물들에 호시 신이치라는 작가의 작품들이 적지않게 소개된적 있다. 일본추리소설붐이 일면서 모리무라 세이이치, 등 작가들에 곁들어 소개된 작가이다. 하지만 그 작가가 초단편의 대가인줄을 우리는 미처 다 알지못했다. 신이치는 현대 일본 대중문학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이름이다. 그를 일본문단은 “쇼트-쇼트”의 대가”라 부른다. 쇼트-쇼트(short-short)란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아주 작은것 또는 미세한것을 이르는 말) 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이다. 호시 신이치는 1997년에 작고할 때까지 그런 쇼트-쇼트를 1000편 이상 발표했다. 일본에선 전집이 출간되고 작품들이 교과서에까지 실렸으며 그의 작품들은 세계 3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여 3000만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작가들 하면 추리소설가들만 협애하게 기억하던 시기, 우리는 촌철살인(寸铁杀人)의 짧은 소설의 대가의 면모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도깨비 축문 읽듯” 읽어 왔던것이다. 지금 우리 작가들중에 전문 짧은 소설 창작에 주력하는 작가는 전무하다싶이 돼버렸다. 한때 훈춘의 조은철, 료녕의 김군등이 초단편에 열성을 보여 수상도 하고 창작집도 냈었다. 하지만 두분 다 애닯게 일찍이도 타계하면서 초단편 전문작가가 아주 단절되여 버렸다.    3 길지않고 론리적이면서 매력 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치여 매일매일을 분망히 뛰는 현대인들에게 긴 시간과 끈기를 요구하는 장편 읽기보다는 단숨에 읽어 인생의 지혜를 얻고 지적 쾌락을 맛보는 단편 읽기가 더 우선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문학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아직도 세부 단위와 낮은것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문학뿐아니라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온통 큰것만을 지향하는 일색이다. 큰것 위주로 굴러가는 이런 사회는 작은 단위에 의해서만이 진정 큰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것을 모른다. 초단편소설에는 순발력과 재치가 있으며 정보를 얻기에 앞서 읽는 즐거움과 평안함이 있다. 길기만 한 무색무취의 글에 비해 간결속에 숨은 좋은 소재, 엄밀한 결구, 풍부한 함의 그리고 의외의 결말로 독자의 의표를 찌른다.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쟝르의 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초단편소설은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글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 짧은 글에 핵심을 담으면서 촌철살인의 재치를 보여준 작품을 접했을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웅숭깊은 맛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힘.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것은 그런 재치와 감동의 맛일것이다. 요즘의 작가들을 보면 “대망(大望)”에 빠져 장편에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들 어느 정도 량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다음에는 호흡이 긴 장편을 쓰려는 은근한 심욕(心欲)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욕심, 혹은 부담감에 현혹되여 단편작품에 대해 홀시하는 경향이 보이며 때문에 급박한 그런 욕망으로 짜임이나 무게감이 미달인 장황설의 작품을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진들보다는 중견작가들의 경우 근년래 긴 편폭의 작품, 혹은 타쟝르에 매달려 수년이 지나도록 단편소설 한편도 내놓지 못하는 작가들이 수두룩한 현상이 그 점을 말해준다. 평론가들은 “장편을 발전시킬 필요는 있지만 먼저 단편으로 탄탄한 내공을 갖춘 뒤 장편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단편의 재발견은 의미가 있다”고 모를 박는다. 이처럼 문학도들 그리고 작가들은 문학적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단편의 미학부터 닦아야 한다. 정작 나자신을 보면 여태 펴낸 소설작품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스스로 놀란적이 있다. 100편에 가까운 다량의 소설작품중에서 중편소설이 단편보다 많았던것,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도 두, 세편을 제외한 외 거의 전부다가 중편이였던것이다. 짧은 글에 취약한것 같고 무얼 정리하려고 들면 한없이 길게 늘어진다. 잘 버리고 잘 비워야 청안한 법인데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은지 질질 끌고 꾸역꾸역 늘여놓기 바쁘다. 문학도의 초심으로 돌아가 초단편 습작으로부터 거듭나려 한다. 아 똘스또이의 “단편은 작가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학교”라는 금언을 명기하면서… 짧은 글에 대한 지론을 펼치다 또 긴 글이 되여 버렸다. 이만 차설(且說)하고 초단편 소설들을 련이어 선보인다.    "장백산"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    조선족위인의 업적을 기리는 드라마틱한 인물전기의 매력 댓글:  조회:2283  추천:6  2013-12-27
조선족위인의 업적을 기리는 드라마틱한 인물전기의 매력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를 평함   리광일(연변대학)   조선족 중견작가 김혁이 중국조선족청소년을 위한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를 펴냈다. “인민예술가”, “중국의 피카소”로 일컬어지며 주은래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느냐”하며 애석해했던 한락연의 전기가 조선족작가에 의해 드디여 완성되였다. 이는 한락연에 관한 처음으로 되는 인물전기이며 특히 조선족에 의해 만들어진 첫 청소년인물전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인물전기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쟝르로써 조선족작가들도 뒤늦게 주목하였고, 요즘들어 우리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의 “봇물”이 터졌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인물전기는 거의 불모지인 상황에서 김혁작가가 처음으로 ≪주덕해의 이야기≫로 이를 개척해냈고 또한 이번의 작품으로 이 령역을 계속 개척해가고있다.   작품 ≪한락연의 이야기≫는 아래와 같은 특점을 지니고있다. 첫째, 규묘가 방대하다. 15만자의 편폭에, 16개 장으로 구성되였으며 그 내용은 한락연의 인생전반에 소급되였다. 구체적으로 룡정촌 토성포(지금의 지신진 공농촌)의 조선인가정에서 태여나 간도국립보통학교 (그 전신이 서전서숙)에서 공부를 마친 한락연의 출생경위, 1919년, “3.13”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여 태극기와 프랑카드를 만들어 시위자들에게 나누어준 이야기, 일제군경의 검거를 피해 상해로 가서 상해미술전과학교 서양화학부에 입학한 이야기, 1923년, 여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조선족 그리고 중국미술계에서도 가장 먼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과정,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심양에 와서 당의 사상을 전파하고 조직을 건설하는 와중에 동북의 첫 사립 미술전과학교인 봉천미술전과학교의 설립과정, 1925년 할빈에서 중국공산당 동북지구의 통일조직인 중공만주림시성위를 설립한 경위, 치치할에서 공원감리의 신분으로 당사업에 종사하면서 치치할의 하나의 경관인 독특한 유럽식정자인 “격언정”의 설계, 1931년, 프랑스 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하여 프랑스에서의 고학, 1937년  프랑스와 독일에 류학한 10명의 공산당원과 단원의 일원으로 양호성장군과 함께 귀국, 무한으로 가서 주은래가 령도하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가하여 펼친 구국운동, 연안에서 모택동의 접견을 받은 이야기, “국민당 당정위원회” 소장지도원의 신분으로 산서성일대의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주둔지를 다니며 진행한 통일전선사업, 1940년,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여 서안 “국민당특종구류소”에서 치른 옥고, 석방된후 제자와 함께 섬서와 사천지역에서의 사생, 서북에서 화가의 신분으로 국민당고급장령들과 사귀면서 서북지역의 평화적해방을 위해 펼친 통일전선, 신강, 감숙, 청해 등지를 다니며 현지풍물을 그리고 돈황과 키질의 천불동석굴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 돈황에서 프랑스류학시기의 친구 상서홍(常书鸿)과 함께 한 벽화의 모사, 조수들을 거느리고 키질 천불동에서 벌린 3개월간의 발굴과 모사작업, 비행사고로 인한 사망, 후일담으로 한락연의 고향 룡정시에서 조성한 한락연의 이름으로 명명된  “락연공원”의 신축 등 한락연의 일대기를 생동하게 펼쳐보였다.   둘째, 예술가이고 혁명가이며 동방인인 한락연의 인생을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한락연에 대한 칭호는 많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중국의 피카소” …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련히 적혀있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채로운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는 락천적이고 활당한 인간미의 소유자로서 불굴의 혁명가적 기질을 드러냈으며 국제적인 반파시스트로서 국경을 초월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도 갖춘 걸출한 인물이였다. 또한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였던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것이 바뀌여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셋째, 기성인물전기, 평전 등의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기타 장르의 기법들을 재치있게 활용하였다. 전작인 ≪주덕해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몽따주수법을 도입해 전국과 세계각지를 주름잡은 한락연의 방대한 이야기들을 립체감있게 다각적으로 정리하였으며 또한 이야기의 공능을 충분히 확대시켜 자칫하면 년보식으로 풀이될 인물전기를 재미있게 엮은것이 특징이다. 한 인물의 사상적, 정신적 궤적을 깊이있게 다뤄야 하는 평전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력사와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이다. 감흥보다는 리성을 앞세우는 인물전기이지만 소제목으로부터 문자구성에까지 작품전반에 걸쳐 시종 아름다운 문체를 선보였다. 뿐만아니라 전작인 ≪주덕해의 이야기≫에 비해 스토리를 집약해 엮었고 방대한 사건과 인물들을 선정해내는 취사선택의 경지가 더 성숙했음을 보여주었다.   넷째, 기존자료를 충분히 참조하였지만 직접 새롭게 조사하고 발굴한 자료들이 돋보인다. 한락연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어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부가 나왔을 뿐이였고 한국에서 그에 대한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있었다. 인물전기라면 출처와 인용에 대한 근거확보는 인물전의 리얼리티를 담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것이다. 김혁작가는 이미 발표된 문헌에만 매인것이 아니라 방대한 관련 도서는 물론 사료의 연구에서 평면화되고 단일화된 연구자료뿐아니라 영상물까지 대량 보이면서 인물전의 신빙성과 가독성을 높였다. 뿐만아니라 위인에 대한 경의감을 품고 그의 자료확보에 모든 힘을 몰부었는바 사비를 털면서 동북지구를 포함해 한락연의 발자취가 담긴 곳들을 답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력사에 묻혀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하여 이 작품에 체현함으로써 작품의 전면성을 최대한 기했다. 그리고 한락연의 가족을 통해 진귀한 자료의 저작권1차성 사용권을 부여받음으로하여 기존 문장들에 비해 1차성적자료의 풍부성을 확보하였다. 김혁작가는 한락연의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심심한 사랑과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몸소 실천을 보여준 인생, 중외를 넘나들며 펼친 혁명활동, 예술활동들과 그의 중국과 서방예술에 대한 리해 그리고 력사와 생활에 대한 감수와 자세를 다각적으로 그려냈다.   주지하다싶이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빼여난 혁혁한 인물인 한락연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전기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실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작가로서 반드시 서둘러 기록해야 할 의무감을 안고 같은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김혁작가는 인물전기 집필에 착수해 2년간의 신고끝에 이 작품을 내놓았다.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시대의 단면을 총체적으로 증명한다. 이 인물전은 한 화가의 파란많은 려정을 비교적 완정하게 기록하는 한편, 민족의 항일, 중국공산당의 창건, 국공합작, 중국의 첫 미술학원의 탄생, 고고학의 발굴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중국력사와 중국미술사의 발전흐름을 보여줌으로써 중요한 사료적가치를 갖고있다. 뿐만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파란많은 근대중국의 력사를 파노라마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또 이 인물전의 가치를 사고싶으며 따라서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되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김혁작가는 몇해전부터 한락연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사비와 발품을 팔아 연구한것으로 알고 있다. 또 이 몇년간 한락연에 대해 여러가지 쟝르로 해내외에서 대량의 한락연 관련 전기와 신문기사, 칼럼, 수필들을 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차후 련이어 여러부의 청소년인물전을 펴낸다고 알고있다. 력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연예만 흥행하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하면 김혁작가의 청소년인물전기사업이 우리 후대들의 머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민족의 발전에 일조하기를 바라면서 큰 성원을 보내지 않을수 없다. 앞으로 더욱 성숙되고 완성도가 더욱 높은 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는바이다.   2013년 12월 26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    2013노벨문학상, 단편소설의 귀환 댓글:  조회:2418  추천:15  2013-10-12
. 칼럼 .   2013노벨문학상, 단편소설의 귀환 김 혁 해마다 시월이면 한차례의 이채로운 문학수업을 받는 기분이다. 수확의 계절인 이 달이면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TV, 인터넷, 핸드폰을 풀가동해놓고 그 소식을 기다리노라면 그야말로 월드컵시즌최강전의 결과를 기다리는것같은 마음이다. 올해 후보로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유력했다. 문학도시절 부터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하고 읽을지경으로 그에 대한 광팬인 나 역시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지난해 중국 작가 막언에게 밀렸듯이 이번에도 그는 고배를 마셨다. 여섯번이나 노벨상후보에 추천되였던 그에 대해 평단은 “가장 비장한 후보”라는 수식까지 달아주었다. 우리말 언어권에서 모두가 기대하던 한국의 원로시인 고은 역시 락방했다. 우리시간으로 10일 저녁 7시경, 스웨덴 한림원은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카나다의 녀류작가 앨리스 먼로라고 선포했다. 우리에게는 많이 생소한 작가, 중국에서도 그의 작품은 “떠남 (逃离)”이라는 단편소설집 한부가 달랑 소개 되였을뿐이다. 앨리스 먼로는 녀성으로서는 13번째, 카나다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북미권에서 수상자가 나온것은 1993년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0년 만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노벨문학상 사상 처음으로 단편소설로 상을 거머쥐였다는 점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스토리텔링이 정교하다. 명료하고, 심리적인 리얼리즘을 담아냈다”고 시상 배경을 설명했다.  “섬세한 관찰력과 빼여난 구성으로 짧은 이야기속에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한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 앨리스 먼로는 그동안 세계 주요 언론과 평론가들로부터 “단편소설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체호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전문작가”, “북미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 불려왔다. 1931년 캐나다 토론토 서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태여난 그녀는 1968년 단편소설집으로 등단, 이어 그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들의 춤”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70년대 미국의 정예 잡지 “뉴요커”에 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명(文名)을 얻었다. 세계3대문학상인 맨 부커 국제상을 비롯, 유수의 국제 문학상을 받았다. 먼로는 그간 “왜 장편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받아 왔다고한다. 하지만 그의 단편에 농축된 성찰과 감동은 웬만한 장편에 못지않았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인 스웨덴 한림원의 엥룬트 종신 사무총장은 "그녀는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은 단편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택했고 그것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갈고 닦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녀는 단 20 페이지 작품을 통해 보통 장편소설 한 편보다 훨씬 더 많은것을 말할수 있다. 그녀는 단편소설 하나에다 수십년간을 성공적으로 집어넣을수 있다"라고 극찬했다. 앨리스 먼로는 수상 발표 직후 카나다 관방TV의 전화인터뷰에서 “단편이란게 단순히 장편을 쓰기 위해 끄적거리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앨리스의 단편집 "떠남" 금번의 노벨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창작성향이 우리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점은 크다. 흔히들 어느 정도 량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작가이고 보면 호흡이 긴 장편을 쓰려는 은근한 심욕(心欲)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욕심, 혹은 부담감에 현혹되여 단편작품에 대해 그 창작초지를 잃거나 홀시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진들보다는 많은 중견작가들의 경우 근년래 긴 편폭의 작품, 혹은 타쟝르에 매달려 수년이 지나도록 단편소설 한편도 내놓지 못하는 현상이 그 점을 말해준다.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쟝르의 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단편소설은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글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 짧은 글에 핵심을 담으면서 촌철살인의 재치를 보여준 작품을 접했을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때문에 세계의 대문호들은 단편소설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현실의 편린을 포착한 생생한 감각에 력사적, 사회적 스케일을 담은 단편명작들을 량적으로 남겨 수세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앨리스 먼로가 닮았다고 하는 단편소설의 대가 안똔 체호브만 봐도 무려 600편의 단편소설을 세상에 남겼다. 길지않고 론리적이면서 매력 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다.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웅숭깊은 맛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힘.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것은 그런 재치와 감동의 맛일것이다. "연변일보" 2013년 10월 12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    “70후” 세대의 새로운 숨결 댓글:  조회:2597  추천:11  2013-05-20
 “70후” 세대의 새로운 숨결 - 김인순의 몇몇 대표작에 대한 해제   김혁        1970년대 이후 출생한 중국의 “70후(七零後)” 세대 작가중 선두주자로 달리고있는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씨가 중국 주류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의 작품중 대표작 몇부를 선정해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 보기로 한다.   동명영화로 김인순의 문명을 알린 “록차”     “록차”는 맞선을 자주보는 한 녀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오방(吴芳)은 맞선 자리에 나가 항상 록차를 시키는 녀자이고 유별나게 친구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녀는 데이트 자리에서는 반드시 록차를 주문하는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그녀는 한잔의 록차로 상대의 애정의 깊이를 점칠수 있다고 믿고있다   어느 날, 그녀는 진명량(陈明亮)이라는 남자와 맞선을 보게 되는데 그는 딱딱해보이는 맞선녀에게 관심조차 없다. 그녀는 진명랑에게 먼저 록차잎들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이 남자는 그녀의 록차를 마시는 습관을 조소한다. 첫번째의 실망스러운 만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들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나간다. 정작 그녀는 그의 진지한 고백을 받아주지 않고 련락까지 두절된다.   그렇게 상심해있던 남자가 친구를 따라 한 카페에 갔다가 피아노를 치는 아름다운 아가씨에를 보고 놀라게 된다. 피아노 치는 녀자가 오방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각각의 사랑에 관한 사고방식,각각의 과거의 연애 편력을 주축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사랑이 전개된다.   “인생의 배짝 찾기”라는 흔한 스토리같지만 작자는 주인공을 두 가지 내면을 가진 녀자로 분렬시켜 보여주었고 독자들은 그에서 각자 자신의 애정관과 숨겨진 과거를 지니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현대 도시 젊은이들의 사고와 생활자세에 대해 엿볼수 있게 된다.     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대번에 길림 백산시의 한 조선족 녀류작가를 전국에 알렸다. “붉은 수수”에서 열련을 펼치며 이미 스타덤에 올랐던 강문과 경요의 드라마 “환주거거”로 인기를 한몸에 받고있던 “새끼제비” 조미가 남녀주역을 맡았다.   중국문학대계에 수록된 “돈황”   단편소설 “돈황”은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되였다. 작품은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저명한 소설가 한소공등 10여명 중국문단의 유명 작가들과 나란히 소설선에 수록되였다. 소설선에 선정된 김인순의 단편소설 “돈황에서”는 문화유적지 돈황을 찾은 한쌍의 신혼부부의 이야기로부터 물욕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작품이다. 북방련합출판미디어유한회사와 춘풍문예출판사는 “전문가의 시각, 권위적인 선정, 세기의 문학을 위한 자료보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마다 중국문학의 정수를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 조선족 녀류작가로서 김인순이 처음으로 그 작품선에 선정되는 영예를 지녔다.   “준마” 수상작 장편소설 “춘향”     2009년 중국녀성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작품이다.   김인순의 “춘향”에 대해 출판계는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厢记)” 에 견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을 보냈다.   김인순은 “춘향”에서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있다. 그리고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도 선보이고있다. 소설은 원작에 과감하게 정형(整形)의 메스를 댔다.         우선 김인순의 “춘향”에서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퇴기가 아니라 약제사이다. 그는 미혼약을 제작해서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를 대처한다. 변학도의 집요한 스토커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춘향은 어머니의 가업을 계승해 미혼약을 제조하는 약제사가 된다.   리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보니 춘향은 어제날의 춘향이가 아니였다. 이에 몽룡은 커다란 실의에 빠진다.   영구불변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에 대한 찬가로 향그럽던 원작은 김인순에 의해 그야말로 미혼약에 취한듯한 이야기로 이목구비를 잃고 “성형”되여버렸다. 기존에 우리가 버릇되였던 고전 “춘향전”의  팩트(骨組)에 새로운 픽션을 입힌것이다.   작품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닳아도 님향한 일편단심”으로 점철되였던 우리의 경전적인 사랑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알쏭함에 이마살을 모으며 읽는 와중에 경전적인 설화가 퇴장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과 륜리의 중압감을 맛보게 된다. 김인순은 경전적이다 못해 찬란하기 그지없어 바라보기마저 눈이 아픈 모두가 선망하는 사랑속에서 고전의 금고(禁锢)에 얽동였던 몽룡과 춘향 두 사람을 마음껏 풀어주었다. 맹세나 언약 같은것으로만 위장되였던 사랑을 풀어주어 다른 감동과 해법을 독자들에게 전시해보였다. 이제는 죽어버린 고전의 시신우에 현대관념의 혼을 불어넣은것이다.    소설에서 몽룡은 더는 주인공이 아니다. 두번째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춘향의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춘향과 그의 어머니이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관조와 리행으로부터 두 세대 녀인의 정과 한 그리고 운명에 대해 소설은 말하고있다.   김인순은 준마상을 수상한 뒤에 있은 창작담에서  “춘향”은 우리의 경전적인 고전이지만 나는 그 뻔한 이야기에 어쩐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왔다고 말했다. 중국의 “백사전”, “량산백과 축영대” , “맹강녀”  등 고전에 비해보면 그 전기적색채가 좀 뒤쳐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자기나름으로 고전을 언감 재해석해보고싶은 충동을 가졌다고 한다.   김인순은 “중국문화권에서 생활하고있는 자신에게서 “춘향”의 집필은 자기 민족에 대한 마음의 귀향”이라고 말한다. “온 지구촌이 글로벌화로 박차를 가하고있는 요즘 세월, 소수민족작가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써내릴 때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량호한 소통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바 세계속에 자신을 융화시켜야 한다”고 자신의 창작주장을 펼치고있는 김인순은 그래서 과감히 민족의 고전에 메스를 가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사유의 실리콘을 넣어 봉합했고 춘향을 새로와진 심미안의 세상에 완벽한 “성형미인”으로 볼륨감있게 세워주었다.     소설은 전형적인 번안소설(翻案.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침) 형태를 띠고있다.   사실 번안소설은 오래전부터 독자들의 인기를 받아왔다.  “춘향전”처럼 또 하나의 고전인 “심청전”도 한국작가들에게서 몇번이고 번안되였다.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멘붕”(멘탈 붕괴를 줄인말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황을 뜻하는 신조어)의 주먹을 먹인 작품은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이 번안한 “심청전”이다. “련꽃의 길”이라 개칭된 이 소설에서 임당수에 빠졌다가 구조된 심청이는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지를 주유하며 부자의 첩으로 악사로, 만두집 사장으로,  기생으로 파란만장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번안소설은 원저를 벗기고 그에 다시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 시체옷을 입히면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정신을 디자인해 넣어 독자들의 심미변화에 동조한다.   흔히들 고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읽을만한 가치를 지닌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즐겨 고전을 선택하는 리유는 “고전을 통하여 도야(陶冶)된 정신이 인간관계나 사물에 관하여 판단하고 추리하는데 유용하기때문”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한다. 그래서 번안물이라는 쟝르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의 애대를 받으며 리메이크 (예전에 발표된 소설, 영화, 음악, 드라마따위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다시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를 거듭하고있는것이다.     중국작가들도 번안물에 커다란 흥심을 보인다.  중국의 고전인 “백사전”,  “후예가 해를 쏘다”,  “맹강녀” 등도 몇해전 모두다 소설로 번안되여 계렬도서로 나왔다. 춘향과 몽룡 시절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입밖에 내는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어제와는 다른 순수한 사랑에 대한 철저한 번안은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고있다.  그만큼 사랑이 물질에 둔화되고 순수하게 향유하려 하지 않는 황페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는 수요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춘향과 리몽룡의 사랑타령이 오페라로,  발라드로,  댄스가요로,  힙합으로 변용되여 지칠줄 모르고 번안되고 리메이크되고있는것이다.     동배기름 가르마에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받쳐입고 옷고름을 배배 탈며 두눈을 내리깔던 춘향이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받쳐신고 카페라떼를 마시는것 같은 기분의 춘향이를 보면서도 우리가 김인순의 “춘향”이가 결코 낯설지 않은것도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을 반기는 수요에서일것이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5월 20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  
2    이야기하는 자 댓글:  조회:2760  추천:13  2013-03-23
 . 칼럼 .   이야기하는 자 김 혁      1 지난 가을, 이사를 앞두고 가장 큰 고민이 집안의 구석구석을 잠식한 만여권의 책과 영화CD였다. 방대한 이사짐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안해가 그중 잡지들을 좀 처리하면 어떠냐고 제의해 왔다. 그렇게 안해가 짠 폐기처분의 “블랙 리스트”속에 “이야기 회(故事会)”라는 잡지도 들어있었다. “이야기 회”, 문학도 시기였던 80년중반 내가 가장 매료되여 애지중지 하면서 소장해왔던 잡지였다. 그렇게 저그만치 백여권이 되는 그 잡지를 언감 페기처분하려하다니! 나는 위험에 맞닥뜨린 병아리를 품는 어미닭처럼 그 잡지들을 부득부득 그러안았고 덕분에 잡지들은 폐기처분의 “블랙 리스트”에서 간신히 해금될수 있었다. 초라니같아 뵈는 얇은 부피의 잡지였지만 그 이야기 전문지 덕분에 나는 이야기의 매력에 대해 깨쳐 알기 시작했고 그후 각종 쟝르와 문체실험을 부지런히 하는 와중에도 나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공능을 우선시 해 왔었다. 그렇게 알게 된 “서사 창조”의 힘, 그 힘에 대해 오늘 다시금 감지하고있다. 요즘들어 부쩍 요즘 회자(膾炙)되고 있는 신조어- 스토리 텔링이란 낱말에서이다. 스토리 텔링. 스토리(story)와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함을 뜻한다. 즉 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방법론을 가리킨다.      일전 연변대학 민족교육연구소와 한국 제주대학교 스토리 텔링연구개발센터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스토리 텔링 연수반이 연변대학에서 개강했다. 이번 연수를 위해 교수진을 거느리고 제주도에서 날아 온 한국 제주대학교 사회교육학원 스토리텔링 학과 양진건 교수는 "제주도에서는 류배문화를 스토리 텔링해 성공했다. 이번 연수에서 스토리 텔링에 대한 필요성 및 적용방안에 대한 리해도를 증진시킴으로써 연변지역에 산재해 있는 조선족의 민족문화, 력사에 대한 스토리텔링 활용 방안을 론의할터”고 개강의취에 대해 밝혔다. 중한 량국의 10여명으로 무어진 작가, 교수, 작가진영에 함께 하면서 나는 스토리 텔링이라는 신종 학과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2 인류는 태고적부터 이야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기록을 남겨 왔다. 설화, 전설, 민담, 력사, 문학등 많은것들이 스토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만 봐도 알수 있다. 인간은 옛날부터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본능적 능력을 지니고 있나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를 무릎팍에 눕히고 다독여주면서 했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이야기는 사실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준 생생한 정보였다. 그런 이야기들은 듣는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지적 발달을 증진시키고, 사물에 대한 리해를 넓혀 한 사람이 갖는 지식의 범위를 확대시켜 준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며, 이야기는 인간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 된 원초적 교류의 형태였다. 기계문명의 도래와 함께 참조계가 다양해지고 다감각적인 매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스토리는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으며 스토리 텔링의 필요성은 급격하게 증가되고있다. 문학, 음악, 미술, 무용은 물론 번역 출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화, 연극, 만화 등 모든 문화 예술 령역에서 스토리 텔링은 어느 곳 어디에나 있다. 이러한것들을 포함하는 각종 콘텐츠에서의 핵심 요소가 바로 스토리이다. 스토리 텔링은 또한 이러한 콘텐츠의 령역을 넘어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인간 삶의 구체적인 부면(部面)들과 밀접하게 련관되여가고 있다.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실감케 해주는 실례로 불멸의 고전 “삼국연의”를 들수 있을것이다. 풍운의 력사를 통한 대영웅들의 로망을 보여준 파노라마적인 스토리로 하여 “삼국연의”는 영화나 드라마,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만화등으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번안되면서 수없이 활용되고 있다. 그로서 창조된 거대한 효익은 스토리 텔링과 각종 콘텐츠 기법의 융합이 얼마나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 올수 있는가를 보여준 실례이다. 우리민족의 고전 “춘향전”도 매 한가지이다. 사랑이 금전으로 치환되는 요즘의 부박한 풍토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원초적인 사랑의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사랑의 원형으로 창조된 스토리 텔링이 바로 “춘향전”이다. 그 낡은 스토리에 새 옷을 입혀 번안한 작품으로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도 얼마전 “준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었다. 문학, 특히 서사문학의 방대한 유산들은 스토리 텔링의 보고(宝库)이며 탁월한 개성을 지닌 안목있는 서사문학의 창작자들은 스토리 텔링의 주역들이다. 하지만 우리 문단, 우리 사회에서 아직 스토리 텔링이라는 신조어마저 낯설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문화 원형자료는 빈곤하고 생동한 이야기는 자리를 비웠다. 관광쪽으로 례를 들어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들만의 명소들을 찾아봐도 관광객들에게 응분의 만족을 주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스토리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간과한 탓이라고 본다. 유람지에 대한 단순 자료들만 설명서처럼 라렬돼 있을뿐 그에 깃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멋 등 문화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만의 특산인 사과배며 황소며, 벼에 대한 마케팅은 아직도 원활하게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 깃든 구수한 이야기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음식이야기도 없다. 한국에서는 음식테마를 이야기로 풀어내린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세아에서 폭넓은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에게는 랭면이며 개고기, 양꼬치등 타민족과 외빈들이 감탄해 마지않은 특색음식들이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느 민족처럼 우리 민족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민족이다. 설화, 민담, 전설… 우리의 산하, 우리의 력사에 깃든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유용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 룡정은 우물 이야기, 안도는 집단부락 이야기, 화룡은 청산리 이야기, 훈춘은 충청도마을 이야기… 이야기 생산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가공할 수 있는 원형들이다. 내 고향의 저변 곳곳에는 이렇게 복류(伏流)하는 력사가 약동하며 흐르고 있다. 지역의 다양성과 관련한 소재를 발굴해 지역의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곳곳마다 묻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지역성을 보다 매혹적으로 만든다. 그동안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의 다양한 인문자원에서 남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투신할 필요가 있다. 전통문화유산에서 실질적인 콘텐츠를 찾는 스토리 라인 발굴이 요구되는것이다.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이를 산업 측면으로 인식하고 문화 콘텐츠로 전환시키는것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산업이 더 큰 성공으로 가는 첩경이다. 따라서 우리의 작가들이 그 력사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이 시대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창작에 힘써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스토리 텔링이란 바로 이런것이다. 평범한 장소, 평범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력사적 사실이나 또는 문학적인 허구등이 덧입혀짐으로써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리해와 중시가 결여된 탓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있다. 일제와 맞선 15만원 탈취의거, 민생단사건의 교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 한락연의 일대기, 지어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의 조선인들의 활약상등 우리의 주인공 우리만의 이야기가 이미 해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장편소설로 엮어지고 연구론문으로 나왔다. 이제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 필요하다. 디지털시대는 작가들의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 서사문법에 익숙한 기존 작가에게 새로운 도전과제다. 본격문학의 완결성을 지향하면서도 소설과 독자와의 쌍방향성, 수용 의 접점을 찾아내여야 한다. 정보, 뉴스, 이미지의 과잉시대에 매력적인 작품을 출산하려면 스토리의 옷을 입혀야 한다. 잘 만든 스토리 하나가 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좋은 스토리는 독자들의 몰입과 공감도를 높이고 그 만큼 감정이입 효과도 크다. 인류의 보편적 소재를 응용한 지적인 스토리는 독자들의 뇌리에 쏙 들어온다. 이야기의 향연은 사람들을 절로 책을 들게 하는것이다. 난해한 서술로 대중과의 소통을 외면한 일부 작가들의 작태처럼 '”문학은 혼자 잘난 체하는 어떤 화석화된 관념”이 아니라 이제 “그 스스로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쟝르로 탈바꿈되고있다. 우리의 일부 작가들은 문단을 외면하는 독자들의 취미가 저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책임은 작가 자신에게 있다고 해야겠다. 자신도 읽고 싶지 않은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면 안된다. 영어권의 작가 100명의 작품을 선정한 결과를 보니 스토리가 강하고 캐릭터가 뚜렷하며 삶과 죽음, 사랑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고 어느 출판사이트가 집계했다. 세상의 진실, 인간의 내면과 그에 대한 리해, 풍부한 철학성 그리고 창작자의 상상력이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할때 비로서 매력있는 명작이 탄생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 우리 특색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 특색의 문학이란 곧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어떻게 간직할것인가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그 지역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반복적인 소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학은 매력과 탄력성을 잃게 될수있다. 그러면 주류문단과의 접목이며 세계로의 진출은 지상담론에 그칠수밖에 없을것이다. 우리문학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조선족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우리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낼수 있어야 한다.   3 지난 겨울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의 관문을 열어젖힌 막언이 스웨덴으로 가서 발표한 수상소감의 제목은 “스토리 텔러”였다. 막언은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속에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삶의 모습을 대륙적인 입심으로 풀어내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어린 시절 막언은 시장거리에서 이야기꾼들의 옛말을 듣고 와서는 효도의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필을 들었다고 했다. 결과 세계를 놀래운 중국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등극했다. 편편마다 그 부피가 만만치 않은 작품들이지만 책장을 모두 넘길때까지 전혀 지루하지 않은채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면은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끌어냈는지 알수 있을것이다. 이야기를 중요시했던 중국서사문학의 전통적인 장회체방식까지 다시 활용하면서 그에 현대인들의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막언의 창작성향에서도 우리는 서사의 힘과 그 성공사례를 어렵지않게 보아낼수 있다. 어느 한 평론가는 “작가는 서사의 관리자”로서 “이야기를 수집하고 경영한다”고 말했다. 더 좋은 작품으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우리 작가들의 작업은 좋은 이야기를 만날 때 더욱 빛을 발할것이다. 스토리 텔링을 통하여 선연한 이야기를, 영속(永续)하는 이야기를 경영하려는 진정한 “이야기꾼”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소명의식을 가진 선전(善战)을 보일때 우리 문단과 우리 사회는 더욱 윤택하고 풍요로워 질것이다.   “연변문학” 2013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    노벨의 잔치, 그리고… 댓글:  조회:3609  추천:12  2012-10-11
. 칼럼 .    노벨의 잔치, 그리고…   김 혁   Ⅰ 황금의 10월, 해마다 이맘때면 기다려지는것이 있다. (“몽룡의 알성급제를 바라 기다리는 춘향의 심정”이랄가). 은근히 기다려지게 되는 그것은 바로 세계인의 문학잔치 노벨문학상의 발표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장 마리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여난 업적을 남긴 작가로 새로운 출발과 서정적 모험, 관능적 황홀감, 인간애 탐험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그 선정리유를 밝혔다.  9일 저녁 8시, 수상자가 밝혀지자 곧 웹에 떠오른 소식을 서둘러 나의 문학 블로그에 담았다. 수상자의 략력이며 작품해제며 사진들을 정성껏 퍼서 소식은 종합해서, 조금 작아보이는 인물사진은 포샵처리를 해서 큼직하게 올렸다. (올해 수상자는 프랑스 배우 알랜들롱과 어딘가 비슷한 반듯한 얼굴이다. 지성과 미모가 빛나는 모습.) 이튿날도 사이트들마다의 문학코너를 메우며 쏟아지는 르 클레지오에 대한 평문들을 뽑아 블로그에 올렸고 내가 꾸리고있는 신문의 문화면에도 대서특필해 실었다. 마냥 문학적 행위에 걸신들려있는 나에게서 그 과정이 그렇듯 신날수가 없다. 이제 남은건 내가 읽을수 있는 어종(语种)으로 번역돼 나오는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들을 읽는 작업이다. (솔직히 변강의 오지인 이곳에서 국내국외의 이슈작이나 문학상 수상작들을 시효성있게 접해 읽기란 쉽지않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我的名字叫红)”은 상해인민출판사의 판본으로 2006년 11월에 출판되였지만 이곳까지 책이 당도하고나니 2007년 4월께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고,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의 작품도 “고양이는 정말 별나(特别的猫)”를 겨우 구했는데 절강문예출판사에서 2008년 3월에 출간된 판본을 올해 7월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읽자면 아마 명년 봄께 정도까지는 기다려야 할것같다. (그의 작품소개를 보노라니 “혁명”이라는 작품이 읽고싶어 진다. 태생지인 프랑스를 떠나 섬나라 모리셔스로 이민, 그 섬에 정착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장장 5대에 걸쳐 묘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자서전적인 소설, 그 력사와 애환이 우리 조선족들이 겪은 삶의 질곡과 사뭇 흡사하니깐.)   Ⅱ 올들어 노벨문학상 “잔치”를 기다리고 “주객”, “하객”으로의 참석을 목마르게 기다렸던 한국은 또 한번 그 문턱에 가닿지 못하고 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해외언론 등에서 유력후보로 거론돼 기대를 모아왔으나 시인 고은에게서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비껴갔다. 4해째 반복되는 일이다. 잔뜩 부푼 기대로 수상후보로 거론된 고은이나 황석영의 집앞에 죽치고 앉아 발표를 기다렸던 기자들이 아쉬움을 씹으며 되돌아 갔다. 문학인들의 비원(悲愿)이 결과를 보지못한것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현대 일본문학의 대명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기다렸지만 탈락되고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4명이 한꺼번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렬도전체가 다른 환희로 들끓었다. 그야말로 일가환희 일가우(一家欢喜 一家忧) 의 형국이다.   중국에서도 막언(莫言), 한소공(韩少攻), 소동(苏童) 등이 후보로 거론되였지만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1997년 석가장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창작좌담회에 참가했던 필자는 회의기간 내내 소동의 곁좌석이였다. 소동은 63년생으로 나보다 겨우 두세살 많은 나이, 하지만 짧은 시간에 크게 거듭나며 이룩해낸 그의 거족적인 성취와 작가적 변모는 나 그리고 우리세대 작가들에게 많은 귀감을 보여주고있다.) 동양권 작가들에게서 노벨문학상의 “벽”은 아직도 높다. 동양권에서는 지체높은 신분으로 “잔치”에 갔다가도 “문전박대”를 받기가 일쑤다.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동양인은 인도 시인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타리,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극작가 고행건 등 고작 4명에 불과하다. 1901년 노벨문학상이 시행된 이후로 106명의 력대 수상자들 가운데 서구작가들이 90명에 육박할 만큼 노벨문학상은 서구중심으로 운영되여 왔다. 근 10년 동안에도 이번에 수상한 르 클레지오를 포함해서 무려 9명이나 되는 유럽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또 하나의 병폐가 있다. 유럽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은 소설이 중심이기도 하다. 1996년 필란드의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 이후로 어느 시인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고 한 나라 한 민족 문학의 존재유무가 정해지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동양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다른데로 돌리는 행위는 그만두는것이 명지한 처사일것이다. 한 세기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되여 있는 그 황금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우리가 지닌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노벨문학상이 또 한번 한국을 비껴간 소식이 터지기 바쁘게 한국문학의 수준미달과 그릇된 문단풍토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고언(苦言), 한국문학의 발전방향과 대안에 대한 (高言)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합해 보면- 뽀르뚜갈어 번역가는 "한국문학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섬세하다. 반면 중남미 문학은 지성적이고 랭철하다. 한국문학작품을 번역해 놓으면 순수와 서정, 섬세함 같은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얼핏 유치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문학은 지성적 측면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스빠냐어 번역가의 판단도 비슷하다. "중남미 독자들은 수준높은 작가를 원한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높은 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영어권 번역가는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국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외국문단에 발 붙히려면 몇명의 우수한 작가에 집중해서 장편을 번역해 내놓아야 한다." 우선 동양권, 더우기는 한글문학이 너무 민족주의적인 패러다임(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리론적인 틀이나 체계.)에만 갇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어 낸다. 한국적인 미학 자체만을 추구함으로서 너무 “한국적”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세계성이나 보편성보다는 개별성, 특정성이 두르러지고 있어 한국이란 령역을 벗어나서 느낄수 있는 문학사적인 가치가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고 모두들은 입을 모은다. 그 특정성 자체가 오히려 주제의 다양한 파생과 변환을 막아왔다는것이다. 자기만의 력사적, 정치적 배경과 너무 밀착돼 있어서 이 배경을 충분히 알고있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쉽게 리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것이 작품에 대한 흫미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것이다. 이처럼 한글문학은 정서적, 환경적으로는 매우 복잡하고 론리로는 취약점을 안고있다. 서구 작가들의 수상작이나 유명한 작품을 보면 자신의 국가나 민족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데 앞장서고있다. (올해의 수상자 르 클레지오 역시 그러하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라는 조국을 가졌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유와 작품의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는 한민족의 김치와 설렁탕을 아주 좋아해 지한파(知韩派)라는 별호도 갖고있다. )   Ⅲ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도 이들의 경험은 적용된다. 중국문단과의 접목, 한국문단에로의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우리문단의 고충은 글로벌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문단의 몸부림과 닮은데가 있다. 전세계 문학인들의 “대향연”을 지켜보며 내내 우리 조선족문학의 중국문학 내지 세계문학과의 접근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사색을 더듬어 보았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문학중의 하나의 작지않은 지류(支流)이다. 여기에 중국조선족문학의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의 하나라는 조선족문학의 기본성격 그리고 넓은 의미의 한글문학으로서 한국문학과 무관한 존재일수 없다는것이 조선족 문학이 갖는 이중성인것이다. (우리의 조선족 문인들이 작품의 독자층으로 한국의 독자를 념두에 두라는 제안도 한국전문가들에 의해 나왔다. 이러한 발상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있어서 좀 미묘한 문제이다.) 우리들만이 가진 이 이중성은 분명 조선족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수 있을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어느 민족 못지않게 다채롭고 치렬하며 력동적인 시대를 살아왔다. 이민, 전쟁과 혁명, 개혁, 리산(离散)의 굵직한 사건들을 피부로 겪으면서 그 현장을 낱낱이 펜에 담았다. 민족은 불행했지만 그만큼 문학적 소재는 풍부했다. 그런데 감히 말하거니와 그 파란만장한 력사에 어필할 대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연변안이라는 공간적 제한성과 시간적 한정성에서 작품을 썼고 쓰고있다. 따라서 단순히 우리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아집은 이제 타당하지 않다고 봐야할것이다. 우리 작가들의 필끝에서 주조된 어딘가 고루하고 과장된 우리만의 정서가 타민족, 그리고 타지역인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힘들것이다. (일밭에서도 부엌에서도 무대복장처럼 때깔고운 한복을 떨쳐입고 랭면이나 찰떡같은 특색 음식만 먹으며 틈만 나면 장구치고 퉁소불며 춤추고 노래하는 연극무대위같은 과장된 모습들. 대외홍보용으로 쓰이는 우리의 이미지는 향용 이렇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억지스럽고 면구스러운데 타민족들은 공감해 줄런지?) 우리의 작품들은 창작적 기량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틀안에 대부분 잠겨 있다. 하기에 세공(细工)이 훌륭할지라도 동네 사당에 놓인 토우(土偶)에 그치고 도회지 번화대가에 놓인 거대한 청동의 조각에는 못 미치는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국에 정착해 살면서도 대륙적 나아가 동아시아의 횡단성이 아니라 연변식 진부한 사유체계에 내내 갇혀 있는것이다. 조선족문학이 같은 언어를 쓰고있는 한국에서의 출판이 어렵고 또 번역출판된후에도 중국문단과 시장에서 판매가 부진한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조선족 문학이 본령을 잡으려면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 교차의 흐름속에서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을 길러내고 그러한 작품을 출품해 내는 일일것이다. 다음 “개구리가 우물속의 풍경을 노래”하듯이 자화자찬에만 머물지말고 이러한 우리만의 울타리에서의 부글부글 괴여오르고있는 활력을 어떻게 국내, 국제화하느냐에 더 큰 과제가 있다. 우리의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저마다 이구동성으로 한목청 높이는 “어떻게 자체의 문학적 정체성을 보증하고 써내느냐” 하는 주제론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어떻게 세상과 만나느냐”는 방법론도 함께 연구되여야 한다고본다. 그렇지않으면 “깊은 골목의 술이 잘 팔리지않는” 형국, “규방처녀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형국이 될터이니. 물론 그동안 우리 문학계가 나서서 “조선족문학 알리기”를 힘써오지 않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문단과 세계화에로의 접목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닌만큼 장기간에 걸쳐 조선족문학 자체가 스스로 조성한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조선족문학의 좌표와 위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서 첫보조로 번역문제가 제기된다. 수준높은 번역을 통해 우리의 작품을 중국문단에 소개하는 번역작업이 꾸준히 시행되여야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많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명이나 배출한 일본의 경우, 지난 45년부터 국가가 번역사업을 지원해 다른 나라에 2만여 종의 문학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작품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그것이 노벨문학상과 같은 큰 성과로 이어지는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 중국문단에서 소수민족을 배려하여 제정한 상의 시상에 맞추어 한두편 선정해 그때 그때에 맞추는 성급한 번역작업같은 방식은 이제 바뀌여야 한다. 이런 수동(受动)적인 작업은 오히려 작품의 원색과 질을 떨어뜨리고 우리문학에 대한 중국문단의 혼란을 가중시키게 될것이다. 우리문단에서 해마다 수백권의 책이 쏟아지데 번역작품집이 나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해마다 잡지사 별, 민간단체별로 적지않은 상을 세우고 시상하고있지만 각종 쟝르중에 번역작품에 대한 시상은 없다. 번역에 있어서 번역유능자가 많지않고 젊은 일대가 단절을 보이는것도 큰 문제이다. 아직도 작가의 길을 꿈꾸는 작가지망생들은 있지만 번역지망생은 보이지않는다. 지망생들을 상대로 펼치는 각종 문학강습에서도 번역강습은 결여되여 있거나 그 비중이 아주 적다고 봐야할것이다. 번역가에 대한 대우를 높이는것도 필요하다. 조선족을 세상에 알리는 방대하고 번중한 번역작업은 개인의 취미나 사명감으로만 강요하는것은 무리이기에 작가협회 등 관련부서에서 나서야하며 여기서 연변을 “춤과 노래의 고향”으로육성한적 있는 우리 정부의 관심이 요청된다. 우수한 우리 문학을 조선족의 하나의 브랜드로 중국무대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바래본다. 번역을 앞두고 꼭 우리 시각과 입맛만이 아닌 어떤 작품들이 중국, 세계출판시장에 어필할수 있는지?  그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다음 연변작가협회를 비롯한 우리의 문학지, 언론지는 번역을 마친 좋은 작품이 중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될수 있도록 작가와 출판사를 련결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것은 중국, 외국문학을 우리 조선족작가들이꾸준히 접하여 우리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우리의 작가들이 책 안읽고 자체의 독선에 빠져있는 풍토에서 이러한 기대는 과연 너무 큰것일가?) 우리의 작가들은 마땅히 그러한 변화를 알고 세계작가들과 인식을 같이하며 공통의 주제의식에 동참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이 있어야 우리의 문학이 제자리 답보에서 벗어나 더 큰 족적을 남길수 있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지에 갇힌채 아직도 웃기는 독선에 사로잡혀  붕당(朋党)끼리 비생산적인 싸움에만 정력을 허비하지고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부단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새로운 문예리론을 게으름없이 공부하며 오로지 창작에만 전력투구해야 한다. 하여야만 범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될것이며 바로 그럴 때, 중국문단은 자연히 우리를 인정할것이고 세계문학은 우리를 포옹해 줄것이다. -------------------------------------------------------- 옛날, 마을에서 큰 잔치가 치러질적이면 담모퉁이에서 이쁜 색시를 내내 훔쳐보거나 틈을 타서 잔치고물을 훔쳐 먹는 “악동”들이 있었다. 이 시각 나도 들뜬 “악동”이 된 기분이다. 변강의 오지에서라도 세계 최대의 문학잔치를 지켜보면서 그 향기를 맡노라니 “배고프던” 마음은 나름 풍성하다.    "연변문학" 2008년 1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듣고 싶은 클래식 음악 12곡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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