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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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    (진언수상록 61)성명과 운명 댓글:  조회:2736  추천:0  2017-08-04
                                                                성명과 운명                                                                       진 언       대저 이름성명에 성(姓)은 가족계통의 부호이고 이름 (名)은 개인을 대표하는 특정된 부호로서 그것은 한 사람과 다른 사회성원들과 구별하는 첫째가는 표지로 된다. 그러나 자초에는 사람들이 저저 이름이란것을 모르고 진화하였다. 사회가 이뤄지면서 서로 교제할 때 근근히 그 사람의 모습과 목소리의 특징으로 서로를 구별하였는데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성부호가 새겨져 있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후에 사회활동범위가 확대되고 교제가 빈번하게 되였는데 대방의 형체와 목소리로 인지하는 이런 묵기(默记)방법으로는 역부족이였다. 더우기 해가져서 어둑어둑해진 때에 만나면 서로 대방의 얼굴을 알아볼수 없게 되였다. 하여 입으로 자신을 밝혀야 했으므로 어떤 부호로 자신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이름(名)은 “저녁석(夕)”밑에 입구(口)가 붙어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풀이하고있다.     원래 우리민족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리념과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인하여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보았기때문에 성명자(姓名字)를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상징으로 여겼다. 하여 자손에게 집안의 상징인 성씨와 그 안에서의 서렬인 항렬자와 자손의 장래를 념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선정한 한자를 조합하여 이름을 지어주고 과거, 현재, 미래를 특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이름을 잘짓느라고 하다가 도리어 화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오래전 관내에서 있은 일이다. 성이 학(郝)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련속 딸 다섯을 낳았다. 첫딸이 태여날 때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여서 학애중 (郝爱 中)이라 짓고 그아래는 차례로 학애화(郝爱华),학애인(郝爱人), 학애민(郝爱民), 학애국(郝爱国)이라 지었는데 셋째딸 학애인이 요절하다보니 딸넷이 남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어느 반란파동지가 총명이 폭발해서 네 딸의 이름을 쭈욱 이어봤는데 일호차착도 없는 “중화민국(中华民国)”이 되였다. 이건 그저 일이 아니였다. 이렇게 이름지은건 장가왕조를 복벽하려는 꿍꿍이속이 틀림없고, 이런 숨은 현행반혁명분자를 그대로 놔둘수가 없었다. 결국 학씨는 투쟁받다가 혁명열의 충천한 홍위병들의 기탄없는 몽둥이찜질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또 다른 곳에 성씨가 백가라는 한 농민이 있었는데 대약진년대에 낳은 아들에게 백약진(白跃进)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출생신고를 하고 호구를 올릴때까지도 파 출소에서 무슨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그런데 일년후 건덕지가 없어서 잡아내지 못하던 반우파운동이 벌어지면서 화가 눈섭에서 떨어졌다. (白跃进) 이라니? 이건 필시 “세폭의 붉은기”를 공격하고 대약진을 반대한 우경기회주의두목의 숨은 졸개가 아닌가? 그래서 느끼하도록 비판투쟁을 받고 이름을 고쳐서야 겨우 해결되였다.     이름이 그 사람의 표상이긴 하지만 이름대로 그 사람의 운명이 좌우지되고 인생이 만사대길하거나 길흉화복이 무상한가를 믿고 안믿고는 각자의 자유이다. 이름 한번 잘 가진 악한도 있고 망나니도 있고 패륜아도 있으니 말이다. 공자의“지식을 교묘히 다듬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것은 도둑놈보다 더 나쁘다”는 말을 가져다 붙이면 어방사할지 모르겠으나 이름자와 그 사람의 운명이 정비례되는게 아니다.     1920년대 조선작가 전영택의 단편소설 “화수분”에 주인공의 이름은 화수분이고 그의 맏형은 장자, 차형은 거부였다. 화수분(貨水盆)은 안에다 온갖 물건을 넣어두면 새끼를 쳐서 끝없이 나오는 보물단지라는 뜻으로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화수분을 얻었다.”는 속담도 있는데 그렇게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남의 행랑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길가 소나무밑에서 안해와 서로 껴안고 참혹하게 얼어죽었다. 이는 좋고좋은 이름이 엮은 아이러니인가?     한자속에는 글자마다 고유한 령(灵)이 깃들어 있는데 이를 부르고 쓰는 과정에서 령이 동(动)하여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긴다. 이런 사실이 성명학이 있게 된 연유가 되고 성명학은 후천적인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리유로 된다. 그런데 장파한뒤 갓쓰기같이 뒤늦게 남의 이름을 풀이하며 운세를 론하는데 절대적인양 하는것은 그저 별로이다. 지난해 말 호상명(胡相銘)이라는 중국의 역술인인지 하는 자가 이름자를 가지고 길흉을 점치고 횡설수설했는데 조금도 고명한데 없었다.     호씨는 "삼국지의 류비(刘备)는 “갖출 비(备)”로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준비만하다 말았으며 류선(刘禅)은 자리를 양보(让)한다는 의미로 위나라에 항복하고 나라를 넘겨주었다는식으로 해석하고있다. 그에 앞서 청나라 왕인지(王引之)라는 학자도 항우의 이름을“籍读如鹊,古音籍与鹊近,故鹊通作籍…楚项籍字羽,籍亦鹊之假借。鹊,鸟名也故字羽)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개세의 영웅이 류방에게 패한것이라고 말하려 했는지. 기실 이름때문이 아니라 성격에서 비롯된것이라는게 정설이다.    호씨의 추리대로라면 호(胡)씨에 상(相)은 서로 상, 재상이라는 상이고 명(铭)은 새길 명으로서 됴코됴흔 이름이라 재상의 운명으로 각인되였다는 뜻인가? 칼이 제자루를 깎지 못한다고 성은 호이나 상명이라 이름짓고 큰 기대를 걸었겠는데 좋게 말해서 역술가이지만 토속적으로 왜 점쟁이밖에 못되였는가? 혹시 아이를 보고 이름을 지으라했는데 아이가 그닥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웃기는 자가당착이 아닐수 없다.     악명이 자자한 A극전범인 도조 히데끼(东条英机)의 이름에는 일세영달하다가 교형당할 운명이라도 담고있었던가? 이름이 곧 그 사람이지만 이름이 곧 그의 절대운명일수는 없다. 리자성(李自成),홍수전(洪秀全)은 이름자가 나빠서 일패도지하였는가? 황소(黄巢)에서 “소”는 보금자리, 혹은 큰 피리라는 뜻인데 봉기를 일으켜 중원을 휩쓸며 도처에서 살인방화하고 무고한 백성 30여만을 잡아먹는 인간만행을 저지를 이름자였단말인가? 대력사가 사마천 (司马迁)은 이름자가 옮길천자여서 붓으로 천백년간의 력사사실을 종이위에 옮기는 일밖에 못했다고 말할수 있는가?     물론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의 뜻과 개성특징을 표달하고 싶어한다. 력사상 수많은 명인들의 이름은 다 래력이 있는것은 사실이다. 례컨대 장개석의 이름은《역경(易经)》“64卦中的“豫”卦,其卦辞为“利建侯行师”인데 건국봉후와 행군작전에 리롭다(有利于建国封侯和行军作战)는 길한 의미를 가진단다. 다른 학자들은(心志操 守,坚如磐石,不终日沉迷于享乐,是最吉利的.)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름이 좋아서  “패전장수”로 전전긍긍하다가 섬도로 줄행랑을 놓는 업적을 이루었을가?     무슨 궁금증이 발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음모가들의 사주를 받고 그랬는지 오지랖넓게 국계를 넘어 이름풀이하며 횡설수설한 호씨나 구천현녀의 천서나 얻은듯 덩더쿵 북치고 장구치며 대서특필한것이나 다 웃기는 작태들이다. 놀부도 아닌 현대인으로 남이 잘못되기만 바라고 산다면 제일로 불쌍한 넋들이 아니랴, 농촌말로 늘어나지 못할 “느지”를 하는것이라고 단정해야 할가? 점술이 시간이란 판관에게 뒤집혀져 당나발이 될때는 닭쫓던 개 울쳐다보듯 할가? 아니면 제혀를 꽉 깨물가?     사람의 앞날은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다. 모든것이 변하는 마당에서 절대적이란게 없는데 조석에 따른 풍운조화를 누가 예측할손가? 성명학이고 점성학이고 세상에서 보편적진리는 “두고봐야지” 이다. 말도 두었다가 할 때가 있다. 아니면 “예의 주시” 하던가, 말단집에 장이 쓰다고 말이 선행하면 언제든 불측한 법이다. 결국 점이 맞지 않아도 일만팔천리나 떨어졌으니 이제 무슨 점괘를 고안해낼수 있을랑가?                                                               2014년 1월 3일 초고
739    [수필] 늙음에 부치는 편지 댓글:  조회:3297  추천:0  2017-07-28
                                                수필                   늙음에 부치는 편지                                  최균선     무정세월 약류파(若流波)라 늙음도 잠간새 오는 듯, 리조 때 신계영 할배의 시조 를 곱씹으면 새삼스레 만단회포가 가슴에 그들먹해진다.     ‘아해 제 늘그니 보고 백발(白髮)을 비웃더니/ 그 더듸 아해들이 날 우슬줄 어이 알리/ 아해야 하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해로다.’     시조에서는 철없는 아이와 서정적 자아로서의 늙은 ‘나’를 설정하여 아이가 늙은이의 백발을 비웃지만 자신의 체험으로 볼 때 순식간에 자신도 늙어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경험론을 아이에게 깨우쳐주는 형식으로 되여있다. 표면적으로 아이를 교시 하는 말투로 읊고 있지만 독자들이 제 일처럼 받아들여지니 동병상련이런가, 세월을 이기는 장수가 없거늘 젊음과 늙음의 확연한 차이를 날로 나날이 절감하면서 ‘범을 잡던’ 당년의 호기는 세월따라 간 곳 없고 남은 것은 쇠잔함 뿐이여서 야금야금 줄어들기만 하는 앞날을 두고 혼자 당혹함을 찧고 까불리다가 추억을 지팽이 삼아 인생의 막바지에서 불타던 석양의 잔광을 바라보면 탄식 뿐이던가? 세상 일이 항상 동일하게 흘러간다는 법은 없다. 환경이 바뀌면 인생자세도 바뀌여지기 마련이다.     ‘아이는 아이답게,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늙은이는 늙은이답게…’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사실 늙은이의 ‘매력’은 인생극의 미성에 있지 않을가 싶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온 삶의 내용에서 발산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쨌든 젊어야만 볼 멋이 있고 값이 나간다는 공식이 성립된다면 늙음은 추하다는 의미가 아닐가?     누구든 늙으면 자연히 소외되는 관습이기에 그래서 저저 늙는다는 것이 제일 꺼림직한 일이 될 수밖에 없으렸다. 하지만 ‘젊어보인다’에 목매이지 말고 해묵은 삶이지만 끝까지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발굴하는데 ‘모지름’ 써야 초심을 지켜 젊어사는 인생자세가 아닐가 싶다.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으로 가로막을 수 없지만 세월을 막으려는 의지보다 더 빨리 와버린 늙음에 허탈해지더라도 느낌에 초까지 치지는 말자.     오랜 세월 산전수전, 온갖 풍상고초를 겪으며 속히운 적도 많고 실수한 적도 많은 파란만장한 인생길 굽이굽이를 회억을 앞세우고 휘적휘적 답사하다 보면 뒤죽박죽이 된 인생잡사가 별로 만족스럽지 않을 것은 당연지사, 무엇을 하며 살았든, 무슨 지위에 있었든, 혈기방장하였을 때 늙어서 어찌 될지에 거의 관심없다가 어언간 때가 되고보니 불현 듯 찾아온 듯한 로쇠에 억울한 마음이 겹치기도 하리라.     사람이 늙으면 도로 어린 아이가 된다는 말은 아마도 도로 미숙해진다는 의미인듯싶다. 물덤벙 불덤벙하던 아이때와도 정반대로 소심하고 의심이 많아지고 비관론자가 되여진다. 저도 모르게 자심해지고 마음의 터밭도 좁아지고 대신 그저 살고 있음에 안주하니 비상한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과 충돌이 극렬해진다.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삶에 대한 애착심만 끈끈해질 뿐 모든 욕망의 대상이 멀어지고 그 대신 급선무는 무병장수이다.     나이테가 굵어지는 것에 탄식하고 비통해하고 실망하겠지만 아예 체념해버려야 명지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아니다. 로소를 불문하고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일 수록 갈구는 불타오르고 마침내 탄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성이다. 유지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세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늙음을 재촉하고 그 종점에 사신 이 기다리는 상황을 누군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상상할손가?      스스로 ‘화로근불로, 신로심불로(花老根不老,身老心不老)’를 외워보아도 육신이 늙으니 마음도 자연 좇아 늙어가니 고달프고 반복무상한 인생살이에 무릎을 꺾고 짧은 탄식, 긴 한숨이 절로 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인생경험은 더쌓여 있고 처세술에도 로련하지만 자신심은 메말라서 무슨 일에 부딪치면 두 팔을 걷어부치고 달려들지 못하고 주저주저 주저심만 앞세우게 된다. 그렇게 자기를 부정하는데 차차 습관되면서 체념을 붙안기 십상이다. 장수를 내놓고 죄다 체념해버린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생명은 운동에 있다 할진대 정신기둥이 먼저 무너지고야 생명이 잘 연소될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인생경험에도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남을 잘 믿지 않고 제마음처럼 남을 못믿으니 긴가민가 의심병마저 점점 더 깊어가고 따라서 무 열정, 무 흥취, 무관심이 편견이 이끄는대로 뒤따른다면 절로 자초하는 랑패가 아닐 수 없다.     가난에 부대끼며 근근득실 생계를 도모해오던 그 심리관성에서 돈벌기가 얼마나 어렵고 써버리기는 얼마나 쉬운지를 절감했기에 돈에 관한 한 저도 모르게 린색해지던 심리관성이 그냥 작동하기도 하지만 늘그막에 거개 셈평이 펴인데다가 100세 시대에 살게 되여 ‘장생불로’가 최대의 욕망이라서 잡다한 보건품, 약광고에 각별하여 몸에 좋다면 값 비싼 약이라도 통이 크게 산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이 없 듯이 남에게 좋다고 내 체질에도 맞아서 즉각 효험을 보리라고 믿는 것은 무리이다.     차차차… 나이가 많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늘 추억에 잠겨들고 그 속에서 막연한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늙어간다는 표징이고 갈 수록 못 말리게 떠올려지는 추억이 아리고 쓰리게 새겨지면 이미 폭삭 늙어버렸다는 표지이다. 산이 다가오는 법이 없으니 내가 다가가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은 젊은이들에게만 유익한 계시가 아니다. 각자 생명에 지평이 있지만 생명은 평등하다.     무릇 젊음과 늙음에는 구별이 있지만 생명선 상에서는 점선으로 이어져있다. 젊음과 늙음 사이에 심리장벽이 쌓이지만 스스로 덧벽까지 쌓는다는 것은 자기학대이다.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고 지극한 아픔 마음 속에 (日暮途遠 至痛在心)’ 있나니 묵은 기억을 무찔러버리고 래일 죽을 듯 오늘을 알차게 사는 것이 명지하다. 보내고 곧 맞는 ‘오늘’이란 너무 평범한 날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산봉마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계절, 마음은 저 단풍처럼 붉게 타리라 벼르지만 미구에 불어오는 찬바람에 흩날리는 락엽을 보면 락엽귀근이라는 미쁜 생각도 서글퍼지고 들녘은 황금물결 설레이지만 고개길에 잡풀들은 시들어가고 미구에 백설이 분분 할제 또 한해 끝자락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지? 무엇을 바라고 저문 인생길을 허위단심 걸어야 할지? 자연은 이처럼 엄연한데 늙어진 마음만 정처없더라도 잠간만!     늙는다고 개탄만 하지 말고 그냥 인생의 막바지까지 익어간다고 생각하자! 생명이란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이다.     그냥 살아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몸이 쇠약해졌을 때 강장제를 먹는것과 같다. 감사하는 마음은 최상의 미덕일 뿐아니라 생명의 나무를 지탱하게 하는 뿌리이다.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늙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인생학교에 급제생이라 할수 있다. 가르칠수 없고 배워낼 수 없는 것, 반은 천성이고 반은 자기에 달린 것이 기질이다. 마냥 따스한 가슴을 열고 남을 받아들이지는 못할지언정 남을 해치는 늑대만은 되지 말자. 림종의 착한 유언으로 한생의 유감을 미봉 할 수는 없거늘 살아있을 때 적덕은 못할망정 패덕한 자는 되지 말아야겠지. 연변일보  2017-6-29
738    (진언수상록 60) 이른바 “체면”을 말해본다 댓글:  조회:3067  추천:0  2017-07-24
                                                       이른바 “체면”을 말해본다                                                                                          진 언       체면이란 하나의 동태적이면서도 모호개념으로서 자초에 체면이란 낯(얼굴)이라는 의미였는데 우리 말에서는 얼굴이라기보다 남을 대하는 도리,례의, 렴치지심을 가리킨다. 체면은 부동한 계층, 부동한 력사시대, 부동한 지점에서 부동한 내용을 가진다. 사람들이 그것을 사회심리나 행위를 분석하는데 리용하면서부터 그 함의가 유형무형의 사회심리존재로 부연되였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심목속에 비 춰지는 공공적인 이미지로 되였다.     그런데 이 체면은 다른 사람이 주는것이고 다른 사람의 체면은 “나”가 가늠하게 된다. 얼굴은 내게 있고 수치심은 내가 느끼지만 체면은 철저하게 타률적이기에 남의 눈을 벗어나면 어떤 짓도 할수 있는 취약성을 내포하고있다. 체면은 자아속에 무시로 저항감을 가지게 함으로 사람을 무척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남의 눈을 의식해서 생기는 체면때문에 자신을 숨기는 은폐증이 인간본성이 되였다.     얼굴에도 질적인 얼굴과 사회신분적인 얼굴이 있듯 체면에도 자주적인것, 교제성적인것, 능력적인것이 있다. 따라서 체면은 시간, 지점, 문화에 따라 부단히 연변될수밖에 없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했거늘 얼굴을 들고 다니는 정상인치고 체면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천생 체면과 등지고 살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다. 체면을 고려하거나 체면을 세우려는 심리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기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처럼 체면을 강구하는 행위의 근원은 우선 얼굴의 공능이 인상분식의 공능에 있으므로 단순히 수치를 느끼거나 노하는 등 정서파동의 “청우계”만이 아니라 처세학이 된것이다. 두번째는 사회교제공능으로서 체면과 감정이 융합되여진다. 나무는 한치 껍질로 살고 사람은 한치의 얼굴로 산다는 속담은 결국 례의와 수치지심에 근원을 두고 만들어진것이라 할수 있다.       우리 말에는 체면에 관한 표현이 많다. 례하면 체면이 없다. 체면이 서다. 체면이 깎이다. 체면차리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체면을 구기다. 체면치례, 체면불구하다 등, 그리고 량반은 물에 빠져도 개발헤염은 안친다. 량반은 얼어죽어도 겨불을 쬐지 않는다. 랭수마시고 이발 쑤신다. 가난할수록 기와지집 짓는다 등 속담들도 있고 이와 체면이 밥먹여주나? 체면차리다 굶어죽는다는 반대의미의 속담들도 있다.     우리 민족은 그런 문화배경하에서 얼굴은 자존과 존중의 의미가 고유되여 있는바 나의 체면만 생각할게 아니라 대방의 체면도 살려주는것이 긍정과 존중이다. 그래서 손바닥만한 얼굴에서 체현되는 체면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것은 자존의 표현이 된다. 즉 전통적의식에서 고찰한다면 체면은 바로 인간의 존엄이며 산사람의 징표이기도 한것이다. 한 사람이 체면이 서고있는가 하는것은 곧 그 사람이 얻은 사회적평가로 된다. 그리고 당사자로서는 감각문제이다. 즉 렴치와 직결된다.     이처럼 개인도 일단 체면이 깎이거나 구겨지면 더없는 수치감을 느끼며 심지어 모욕감으로 번지기도 한다. 흔히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것은 실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체면이다. 즉 다른 사람이 보아주고 내리는 평판이기도 한것이다. 돌고돌 아서 결국 체면이란 남에게서 평가받지만 자기를 위한것이다. 이점은 개방형이고 주체적인격을 내세우는 서양사람들의 안목에는 매우 불가사이한 문화심리이다.     물질생활이 풍요해지면서 현대인들의 체면의 내용은 더없이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졌다. 이를테면 고층빌딩에 주숙하는것보다 자기별장에 드나드는것이 더 체면스럽다고 느끼며 국산승용차보다 외국제승용차를 몰고다녀야 체면이 한껏 부풀려지는것으로 생각한다. 호화사치품을 사들이는 경쟁의 심릴바탕은 필수품의 수요인것이 아니라기 실 낯을 빛내기 위한 체면세우기 경쟁이다.     중국사람들의 체면차리기는 각별한바 어떤 때는 일종 절개와 골기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굶어죽는것은 작은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것은 큰일이다.”,“옥이 되여 부서질지언정 기와가 되여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유자는 죽을지언정 모욕을 받지 않는다”는 속담, 경구들이 만들어진것을 보아서도 그게 잘 읽혀진다.     체면을 중시하는것은 일종 세계적, 전인류적인 심리현상이지만 아마 첫자리에 앉히려면 중국사람들을 뒤로 미뤄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이 장기적으로 빈궁과 락후한 인문환경에서 서식하다보니 “체면”의 실질적의미는 다 알지 못하였다. 로신의《차개정잡문》에서 체면에 대하여 말한바 있는데 아마 아Q식의 자아승리법으로써 세우는 체면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형상공정일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이든 체면이란게 중요하다는것을 객관적으로 절감하게 된다. 체면이 밥을 먹여주지 않고 생명활동에 동력이 되지 않으며 나아가서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근간이 되지는 않지만 아무튼 인간은 체면을 알기에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할 행위는 절제하는 리성적인 고급동물이 된것이지만 자기 인격력량과 잔신감을 가지고있고 소탈한 사람들은 남의 눈치만 의식하며 체면으로 허례허식같은 얄팍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체면은 몰렴치, 몰량심과 정비례된다.     체면앞에서는 얼굴가죽이 얇다랗고 도덕앞에서는 소가죽같으면서 체면만은 챙기니 현대문명사회에서 체면이란 심오한 의미도 비틀어지는것인가?  도덕은 변해도 량심은 변하지 않는다고 격언이 있듯이  량심을 버린 인간에겐 진실로의 체면도 있을수 없다.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바람직한 행동규범이 도덕이라면 어떤 행위에 대해서 옳고그름, 선악을 구별하는 도덕적의식이나 마음을 뜻하는것이 량심이다. 우스운것은 도덕도 량심도 구겨박은 위군자들이 체면치례는 으뜸이라는 사실이다.     체면은 정상적인 도경을 통하여 얻는 성망으로 세워지는데 곧 명예라하고 다른 한방면으로는 자아팽창의 욕망의 체현인데 허영심의 결과물이다. 체면은 큰 범위로 말하면 사회지위와 명망의 상징이 되고 개체의 존중과 자존의 수요에 따른 외재적 반응이다. 체면은 개체가 지향하는 리상적인격과 보다 완성된 사회적자아형상수립을 추구하는 주관적욕망의 반영이다. 여기서 얼굴과 체면의 의미는 달라진다.     한국텔레비화면에 가끔 사이비한 정경이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인면수심의 극악무도한 흉악범들도 체면(낯짝)이 가려운줄 아는지 꽁꽁 가리우고 있는 모습들이다.  쪽제비도 낯이 있다더니 그래서인가? 곡조가 틀린 “인권타령”인가? 피해자들의 가정이 파탄되고 피해자는 영안실에 굳어져있는데 피해자의 피해회복은 외면한채 범죄자 인권타령만 요긴한가? 돼지굴앞에서는 모자를 벗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데 흉악범에게 이른바 체면을 감싸주는것은 아무래도 그렇다.     아무튼 인간으로 생겨나서 체면이란 곧 그 사람의 인격의 표상이다. 체면은 주체적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객체를 선택한다. 실속없이 체면을 살린답시고 혼자 잘난체, 군자연 “도모안연(道貌岸然)”을 표방하는것은 다 얄팍한 분식이다. 기실 체면치례에 정신을 못차리는 자들은 인간의 체면의 깊은 함의를 모르고있는것이다.     인간의 체면욕구는 종국적으로 자기표현의 추구이다. 그러나 “나”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서양인들에 비하여 “나” 보다 뭇눈길을 의식하다보니 손바닥만한 얼굴에 죽고사는 동양인들의 “체면문화”는 흔히 허례허식을 낳고 허영을 빚어가며 진짜 체면을 구긴다. “체면”은 살아가는데 중요한 가치이지만 “체면” 이 모든 가치를 능가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역시 인간의 원초적인 비애라 할가,                                                           2014년 5월 22일
737    (진언수상록 59) 무어나 보기나름 댓글:  조회:2854  추천:0  2017-07-13
                               무어나 보기나름                                          진 언       푸른색 안경을 끼고 보면 맑은 물도 잉크처럼 보이고 붉은색안경을 걸고 보면 피물처럼 보일수 있다. 이는 관념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례컨대 물이 절반 담긴 컵을 보고 비관론자들은“절반밖에 남지 않았군”하고 울상이지만 락관론자들은“아직도 절반이나 있네!”하고 웃는것은 사고방식, 관념의 차이가 낳은 결과이다.     사람은 자기의 리해득실로,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본성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만큼 보이고 보는만큼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객관적판단력이라곤 전혀없는 자라면 아름다운 장미에 하필이면 가시가 많이 돋았다고 푸념질할것이요 심정이 바른 자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하기에 이런 험한 가시덩굴속에서 아름다운 장미가 피였났다고 감탄하며 축복하기 마련이다.     사물을 보는데 본능도 장난친다. 이를테면 문인상경은 문인의 본능의 작간인것이다. 대방을 자기 개인의 자대로 잰다는 말이다. 본인은 공정한 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지 객관적이 되지 못하고있다. 즉 자기 안광으로 볼수 있는 가능한것을 볼뿐이지, 실제 있는 그대로를 보는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채로운 객관사물에 대해서 여러가지 그릇된 억측을 하는것은 조금도 이상할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신의 잘못의 아니다. 인격력량과 품질이 그 정도이니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마냥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대해 객관성은 알아야 한다. 그 기준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감정적인 쪽에 치우친것을 안다면 상대방이 피해를 보거나 상처를 입힐수도 있다는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흔히 남을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편견의 오유가 가져올 결과도 생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례컨대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은 단순히 현상을 기록해서 보여주려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깨달음에 이른것을 전달함으로써 함께 깨닫기를 시도해보는 작품이라는것, 그리고 그 깨달음도 시나 소설과 달리 읽는 사람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납득할수 있도록 정서적의미를 함께 제시하기때문에 론점을 론거로 증명하려 든다면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수필은 수필로 감상해야 할뿐 론리적시비를 걸 건덕지가 없다.     히냥 비평의 눈길에 모를 세우고싶다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집착의 관찰을 선행시키는것이 기본자세이다. 사람들이 대방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는것은 미묘한 집착과 편견에서 비롯되는것으로서 그것은 그 어떤 설득에 의해서도 제거되기 힘든것이다. 오직 그 자신의 내적인 통찰과 지혜에 의해서만 개진이 가능하다.     마치 땅에 떨어진 바늘을 찾을 때 바짝 엎드려야 하는것처럼 비평자는 순간순간 완전히 자세를 낮추고 보아야 명지하다. 객관성과 나란히 가고있는 비평은 경험의 주관적인 성질을 제거하는 탐조등이 되여야지 냄새를 맡는 수색견이 되여서는 바람직 하지 않다. 아집과 증오심, 그리고 어리석음이 진정으로 우리의 성정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몰각한다면 비평가로 자처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것이다.     감각대상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심오한 내적통찰의 경지에 이르는것을 방해하므로 무집착적인 관찰만이 공정성, 객관성의 체현을 가능하게 한다. 또 하나의 기본품성에는 긍정부정의 천평에 평가분동을 주어놓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정성은 객관성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평가저울의 눈금이 중도(中道)에서 벗어나지 않을것이다. 이는 “객관적”이라는 저울의 속성때문이다. 결국 극단을 피하는것이 바로 비평작업의 진수이다. 비평에서 작자에 대한 호악은 그 자신을 청맹과니로 만들고 만다.     재삼숙고하는것은 결코 우유부단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형평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란 표지이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수많은 편견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는 어렵기때문에 비평은 이런 혜안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감상하는것이지 닭알속에서 가시를 찾기가 아니다.     보이는것은 본대로, 들은것은 들은대로, 냄새맡은것은 본래의 냄새대로, 생각한것은 생각한대로 비평의 기틀을 세워야 공정성할수 있다. 세상에 모든것들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부수적인것들일뿐, 절대적이라고 할만한것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릇속의 물을 거울로 삼으려한다면 그릇속의 물은 자신을 비추어 보기에 충분할만큼 맑아야만 한다. 색안경을 쓰고 맑은 물을 보려한다면 우직하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 색이 섞여있다면 얼굴을 비추는 맑은거울이 되기는 아시당초 글러먹었다.     가령 그릇속의 물을 끓이면 거품을 일것이요 얼굴을 비추어 볼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말하자면 한편의 글을 읽기전에 그 작자에 대한 악감정을 앞세우면 “사악”한 마음의 불은 원한속에 풀어놓은 혹평을 끓이게 하며 그것은 깨끗이 비춰주는 기능을 망치고만다. 이끼덮인 그릇속의 물이 거울역할을 하지 못하는 도리와 같다. 바람에 흔들려 잔물결이는 호수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볼수 있을것인가? 비평자의 사심과 편견은 비평의 천평을 조작할수밖에 없다.     맹자는 "중용의 덕을 가진 사람은 중용의 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가르쳐주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재주가 없는 사람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현명한 부형을 갖기를 바라는것이다. 만약 중용의 덕을 가진 사람이 중용의 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버리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재주가 없는 사람을 버린다면 현자와 불초한 자의 거리는 한치의 차이도 없게 될것이다."라고했다. 탈절된 인용이지만 패러디할진대 곧 작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비평의 칼을 들었다면 “졸문”의 작자와 크게 나을것없는 졸자가 된다는 비슷한 해석이 되겠다.     남에게 완전완미함을 요구하기전에 “나는 완전완미한가?”라는 자문을 앞세워보라. 그러면 저도모르게 실어증이 생기지 않으면 소심성이 생겨날것이다. 충족과 부족은 동전의 량면과 같고 선량함과 악감은 한지붕아래서 티각태각한다. 편견의 색안경도 벗어야 하거니와 사심으로 녹쓸어버린 마음의 눈도 닦아야 사물을 바르게 볼수 있다. 마음이 비뚤어있으면 사팔뜨기처럼 사물을 사선으로 볼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진실이 변질하는것은 아니며 더구나 진실이 소실되는것이 아니다.     지구가 돈다고 주창한 갈릴레이가 이단자로서 당시 종교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재판관에게 "나는 당신을 설복시킬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망원경이 있으니 여기를 들여다 보시면 당신은 목성을 볼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은 그 망원경을 들여다 보기를 거절했다. 그는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지않는것으로 믿고 있었던 까닭에 아무런 증거도 그를 설복시킬수 없었던것이다. 편견의 힘이란 이처럼 무서운것이다. 무섭긴 하지만 종래로 진리로 되여진적이 없었다는것은 아이러니다.     문학도 예술이다. 예술의 의미는 일종 상상해낸 정감과 정서이다.“인간의 정감은 추리성부호와 보통언어로 표현할수 없다.”라는 니체의 말을 빈다면 수필은 론문이 아니기에 정서로 읽을것을 론리로 읽는다면 장님의 코끼리만지기와 같게 된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달린다던가, 바른 생각의 씨앗을 뿌려야 좋은 말의 싹이 나오고 좋은 언행의 줄기가 있어야 좋은 언론의 열매가 맺는다. 이건 상식도 아니다.    지혜는 그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운용된다는 말이 있듯이 글은 작자의 창조품이지만 독자에 공용된다. 그리고 비평자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무릇 모든 류형의 글의 생리이다. 이런 생리현상은 순탄해야 한다. 변비를 푼다고 억지로 설사를 시켜서야 되겠는가? 비평도 그렇고 그렇다.                                                   2014년 9월 22일
736    (진언수상록 58)허상(虛像)에 매달린 허상(虛想)들 댓글:  조회:3158  추천:1  2017-07-13
                                      허상(虛像)에 매달린 허상(虛想)들                                                                  진 언       허상(虛像)과 허상(虛想)은 별개의 뜻을 가지고있어 동의어는 못될지라도 허상 (虛像)은 허상의(虛想) 걸작이라고 말할수도 있겠다. 어쨋거나 허상(虛像)에 턱걸이 하려는 작동만큼 맹랑한 짓이 없을것이요 허상(虛想)에 전문이라면 세상에 그만큼 무모한 짓거리가 더 없을것이다. 허상(虛想)의 달인으로는 아마도 아Q를 추천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아Q씨를 닮았으되 아득히 초월하는 전문씨들이 지금 세상에도 번성하고 있으니 아Q정신에는 시대가 없는듯싶고 그래서 로신의 걸작 아!큐씨가 더없이 위대한 허상(虛像)이라 아니할수 없다.     아큐씨는 곳곳에서 릉멸당하는 불쌍한 약자여서 허상이나 허상에 매달려 자아를 위안하는 천고불후의 정신승리법을 고안해냈지만 한다하는 사회정영들이 허상(虛像) 에 매달려 장이야, 멍이야 하는 허상(虛想)들은 그 자체가 유모아라 하겠다. 사유의 비약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이 류의 허상은 너무 앞질러가는게 아니라 농촌말로 그저 납뜨는것이라 아니할수 없다.     무슨“…플랜B(비상대책)의 필요성”어찌구 역설하는 전문씨가 있는가 하면 성급한 “통일논의”나 비현실적인 급변사태 준비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새벽달 보려고 초저녁부터 나앉는 무모함을 고아대는 자도 있으니 참으로 허황하다. 사이비도 아닌 설익은 가설, 욕심껏 부풀리는 가설들을 실현가능한 정설인양 내돌리며 약을 파는 소리를 높이는데 찬물을 끼얹기인가, “다된 죽”에 코빠뜨리는 격인가,     고대인도의 쟈스나(伽斯那)라는 중의《백유경(百喻经)》이라는 책에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부자가 남이 3층짜리 집을 지었는데 높고 크고 화려하였다. 시샘이 난 부자는 뒤질세라 목수를 불러 더 멋진 집을 지으라고 했다. 목수가 1층을 짓기시작하 는데 부자는 “아래 두층은 필요없으니 3층만 지으라구,”하고 명령했다. 목수가 1,2 층을 짓지 않고 어떻게 3층을 짓느냐고 하자 “어쨋든 나는 3층만 요구하니 그렇게 짓게!”하고 고집을 부렸다…고명한 어떤 전문가들이 이 미욱한 부자같지 않은가?     코끼리를 만져본 세 장님들이 코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원통처럼 생겼다 하고 다리를 만져보고 기둥처럼 생겼다 하고 배를 만져보고 바람벽처럼 생겼다고 하는 경우는 눈물겹지만 이건 도대체가 아니다. 대저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 추측은 아무것이나 다 도출한다. 경험적인식과 선천적인식 차이의 구분점을 알지 못하는 사유의 오유가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 허상에 매달리다보니 허무맹랑 그 자체이다.     헛소리이지만 서투른 추론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론리학에서 우리들의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촉발될때 표상을 받아드리는 감수성을 감성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하여 표상을 스스로 산출하는 능력인식의 자발성을 오성이라고 한다. 감성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반면에 오성없이도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객관적판단력의 부재는 남가일몽의 허상의 수렁에서 물장구치게 할뿐이다.     중국에는 “수재의 반란은 십년가도 이루지 못한다”는 민간속담이 있는데 어떤 지방에서는 보통 “수재의 반란은 3년가도 이루지 못한다”고 통용되고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재란 이미 공명을 얻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독서인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고대의 독서인들이란 서재에서 상투를 대들보에 달아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일심불란 죽은 글을 읽다보니 몸이 형편없이 망가져 가는대로 해해년년 불사하니 대부분 “손은 무엇을 들수 없고 어깨에 무엇을 멜수 없으며 닭의 모가지를 비틀 힘도 없는 나약한 무리로 변형되여버렸다.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독서인들이 읽은것이 너무 많아서 소화불량에 걸린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형이상학적인 “유일서책주의자”로 기형화시키여 가슴속에 륙도삼략을 품고 머리속에 벼라별 잡생각들로 가득차있지만 거개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 억측을 하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무리들로서 일단 사회에 나가 립신양명하고 싶으나 도처에서 벽에 부딪쳐 코가 깨지다보니 오로지 “지상담병(纸上谈兵)”한 화끈함에 매료된 조괄 (赵括)류의 사회속물들로 전락할뿐이다.     마치 엎어놓은 호랑이를 칼질할 일만 남은듯이 호들갑을 떠는것은 수재들이 할 짓거리가 못된다. 인류력사상 동족상쟁, 이민족간의 침략, 략탈을 일삼지 않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인류는 모순의 집합체로 되여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족만이 천인공노할 존재인듯 덮어놓고 잡을공론하니 이보다 외눈시각적인 편견이 없으리라.     세상사가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장래 일을 두고 시왈비왈 골머리를 앓는것은 정력랑비, 시간랑비이고 무모한 짓으로서 지성적이면 삼가해야 할 일이다. 입만 열면 특정대상의 사사건건을 무조건 폄하하고 나쁘게 말해야 애국자라는 비미래지향적인 사유관성에 실려있다는것은 허상에 매달린 구제불능의 허상들이 아닐수 없다.     실제로 “북”을 좋게 말하면 소위“이적찬양고무죄로”라는 감투를 씌우고 징벌하는데 그게 어디 민족통합의 자세인가? 내가 가지면 자기지킴이고 남이 가지면 위협이라는 발구도매시비도 할탓인가? 북에서 쓰는 말을 써도 색깔죄를 써야 하니 한심하지 않은가? 건강한 사유라면 그게 누구의것이든 좋은것은 인정해야 한다. 왜 싫은데? 묻는다면 잘 모르지만 그냥 그저 싫다는 그런 속창으로 무엇을 어쩐단말인가?     “국민의식”이 고장난 가장 큰 리유는 이른바 “××문제전문”들의 덕분이 아닐수 없다. 무슨무슨…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탁상공론으로 치부하기도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리해는 접수의 전제이며 접수는 리해의 결과일진대 그저 잘못되기만 바라니 잘될듯싶으면 성공여부는 기다려봐야 한다고 신중론을 떠들다가도 잘못될듯 싶으면 두고봐야 할 일도 억측을 앞세우고 호들갑떠는데 그야말로 악구 (恶口)이다. “상황에 따라서, (惡口)는 남이 잘못되기를 바란다. (妄語)는 몹쓸말을 함이다. 이렇게 입으로 짖는 업이, (無間)지옥을 간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작정 비하와 지나친 해석은 자신의 무지와 천박함을 드러낼뿐이다. 개체들간에도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면 그 기운이 나에게 미쳐 내일도 잘못되기 쉬우나 남이 잘되기를 바라면 그 기운이 나에게 미쳐 내 일도 잘되나니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처벌이든, 포용이든 관용이든 강한자가 약자에게 하는 일이다.     정치적수사학에 열뜨지 말고 민족의 성산을 바라보라!성산을 굽어보는 만리벽공을 올려다보라!저 산, 저 창공이 모두 완벽한 조화의 생성이다. 저 하늘, 저 산아래에서 서식하는 동족들의 삶은 거기서 거기인데 내게만 생존권이 있는게 아니지 않는가? 좀 같이 살아갈 궁리를 하자! 강을 보지도 못하고 백리밖에서부터 떼목을 묶어서 메고가는 사람이 있다면 우자일가? 지자일가? 뛸데없는 허상들이다.     허상전문가는 사이비전문도 못된다. 현실을 직시하고 긍정부정의 철학을 바르게 해석하라, 력사의 거륜은 누구네 주관의지대로 굴러가는것이 아니라 자체의 궤적에 따라 굴러왔고 그냥 그렇게 굴러갈것이다. 그 궤적을 새로 쓰는것을 누가 보았는가? 허상(虛想)은 급진파일수도 있겠으나 역시나 이르는곳은 망상의 수렁이다.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지는 못할망정 붙는불에 키질하는 망언을 해서야 엇다 쓰것냐?      아하, 망쪼로다, 뛸데없는 망쪼로다!                                             2014년 12월 25일
735    (진언수상록 57) 명인광고의 효응 댓글:  조회:2976  추천:0  2017-07-13
                                                     명인광고의 효응                                                             진 언     광고란 각종 매체를 통한 확인 가능의 설득성 전파과정이다. 지금까지의 광고의 정의는 주로 영리조직인 기업이 매체를 구매하여 소비자를 설득함으로써 판매량을 확보하려는 취지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근래에는 비영리조직이 광고활동을 벌이기도 하고 반드시 유료로 매체를 구매하지 않고도 공익성을 위하여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 는 형태의 광고도 성행하고있다.     아무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것이 잡다한 광고, 광고, 광고이다. 광고시대, 중국은 광고왕국이라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대중들은 구매욕에의 자극보다 인제 넌덜 머리가 날지경이다. 광고는 목적성이 있지만 거짓말의 대명사로 되여있다. 연변의 경우, 유관부문에서 어느 한차례 검사한 결과 위법, 허구광고로 확인되였는데 위법률이 50%를 초과했다고 보도된바 있다.     조사분석결과 약, 보건품, 병원, 병치료관련 광고일 경우 무슨 조상밀방, 복용후 무조건완쾌, 50년동안 치료효과를 보장한다는 말도 안되는 광고 등 요란한 과장수법 과 그럴듯한 미사려구로 소비자들을 현혹시키고있다. 이른바 “명의”와 “전문가”, 환자의 얼굴을 빌어서 선전하여 신빙성을 기도하는데 이런 허위광고에 매료되여 약을 썼다가 효험을 보지 못하자 소비자신고와 분쟁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있다.        광고의 제1법보로서는 이른바 “명인효응”이다. 명인효응의 핵심은 증인광고로서 명인들의 광고과정에는 주요하게 세가지 인소를 바탕으로 각색에 충당되는데 정보 래원의 신임도, 정보의 흡인력과 명인의 감정이입이다. 쉽게 말하면 주의력을 끌고 산품의 실효성을 강화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상표가 다할수 없는 말할줄 아는 브랜드효응이다. 명인의 지명도와 신뢰성에 기대여 산품을 선전하는 작법은 결코 현대의 기발한 착상은 아니다.     “전국책 연2”에 기재된 말장사군과 백락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을것이다. 개괄적으로 말하면 한 말장사군이 며칠가도 팔지 못하던 말을 백락의 말 한마디로 즉시 팔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때는 백락의 실제적인 파악과 천거에 그쳐 진실성에 의심하지 않았기에 현대의 “백락효응”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백락은 실제판단에 의해 진가를 구별했지만 현대광고는 설계도안이 갈수록 요란하고 다채로워 보는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지고 혀가 저절로 나올지경으로 신경을 자극하는데 그 솜씨가 가관이다. 하지만 마가 한자높아지면 도도 한자 높아지는법이라 청중들도 그만큼 총명해져서 광고를 눈부시게 설계할수록 저의를 빤히 들여다고 보며 실소를 머금는다. “여기 은전 삼십냥이 없소”를 떠올리며,     광고주체에서 초빙한 명인과 산품형상은 아무런 련관성이 없다는것은 무식한 사람이 보아도 곧 느낄수 있다. 그저 명인의 지명도에 매달리다보니 많은 실제성을 몰각한 작동, 말하자면 명인광고를 하기전에 흡인력과 전업성, 품덕과 산품의 일치성을 고려해야 하는데도 그냥 같은 오구에서 헤맨다. 그러면서도 명인광고이면 대중을 사로잡아 구매욕에 불을 지피리라고 기대한다.     광고는 바다같고 명인은 마음껏 헤염치는 고기라 할가, 명인도 사람이니 리득에 등한할리 없음은 자명하다. 듣건대 차원에 따라 광고소득이 적어서 10만원, 많으면 백만원이 된다고 하니 입에서 뱀이 나가든 구렝이가 나가든 문제가 아닐것이다. 대중 이 먼저 떠올리는것은 신뢰성인데 요란한 광고일수록 잘 팔리지 않아서 그런게라고 넘겨짚게 된다. 일찍 80년대 후기, 당시 명인이던 번홍(潘虹)이 광고에 존안을 나타내면서부터 명인효응의 귀감으로 되여졌다. 기실 명인이란 각자 해당 분야에 명인일뿐 상품생산과 질검증에 명인이 아니라는것은 세인이 다 아는 일이다.     명인이 전업지식과 산품의 사용방면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자세, 혹은 모습으로 산품을 추천할때에만 명인의 광고효응이 진정으로 체현될수 있다. 하지만 광고주가 사람을 선정할 때, 누가 제일 명성을 떨치는가? 누가 제일 매력적인가에만 매달리지 그 명인의 기질, 행위, 그에 대한 대중의 감각 혹은 그의 어떤 방면이 산품에 적합 성이 있는가 하는 등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중이 조작감이라는 선입견을 앞세우고 거리감을 두게 된다는것은 상식문제이다. 반대로 보통사람이 광고에 나타나면 그의 소비생활에서의 체험일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친절감과 신뢰감이 더 돈독해질수도 있다. 얼마나 대단한 명인 이든 무소불위의 인간일수 없으며 한마디가 만마디를 담당하는 그런 호소력을 가질수 없다. 모두 제잘난 멋에 사는 시대에 명인신격화가 가당한 일일가?명인들 스스로 명인이라고 자호하더라도 산품에 대한 신뢰도는 그 자신들도 파악 이 없을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웃기는 일인것이다. 하다면 광고의 진실성은 어느 각도에서 판정해야 할가? 무엇을 진실이라고 하는가? 진리적진실은 절대적인 초험 (超验)적진실로서 영구적인것이다.     철학상에서는 진실에 대해 두가지 측면에서 리해하고있다. 첫째로 진리적 진실이고 둘째는 세속적진실이다. 플라톤, 데모크리스트 등 철학가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은 직접적지각으로서 믿을수 없다고 하였다. 사유, 즉 리성적진리만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선량하고 순박하다보니 명인들의 “가르침”을 쉽게 믿고 따른다.     명인들이 무슨 약이나, 보건품을 먹고 효과를 본것으로 맹신함으로써 서로 앞다투어 그 산품을 사는데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렇듯 좋다는 보건약이나 령단묘약을 볶은 콩알을 주어먹듯이 먹어도 아픈허리는 그대로 아프고 등이 쑤셔나는것은 그 본새로 쑤셔나고 다병한 사람은 그냥 다병한 상태이다.     만약 상품이 몇원 혹은 몇십원씩 하는것이라면 도적맞혔거니, 자선한셈 칠수 있지만 몇백원씩 헛쓰게 할때는 소비자를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며 웃는 야비한 짓거리 가 아닐수 없다. 중국에 명인광고로 소비자들이 골탕을 먹은일이 어디 한두가지던가? 명인들의 광고는 개인행위같지만 기실 공공행위로서 그 자체가 설복이기에 대중을 오도하지 말아야 명실상부한 명인이라 할것이다.     광고비로 백만부자가 된 명인들은 배가 아프겠지만 모든것은 전성기가 있고 사명을 다할때가 있는법이다. 마침내 중국에서 다양성 프로그램 방영을 제한한데 이어 TV 광고 방영도 제한다는것이다. 중국 방송지휘 감독부서인 국가광전총국 (国家广 电总局)에서 발표한 “라디오•TV 광고관리 강화에 관한 통지”에 따르면 시사관련 방 송프로그램 명칭이나 프로그램 소개에 기업 또는 제품명을 넣지 못하도록 했으며 특 히 영화나 TV 드라마에 삽입되는 광고규제도 대폭강화되였다.     지금 광고 범람은 그야말로 강제성적이고 련속적인 “문화폭력”이 아닐수 없는바 사람들은 이미 “명인광환효응”의 신뢰도를 믿지 않는다. 그런 기편성적인 시범, 황통의 모범, 사회신뢰의 파괴범으로 충당되지 말아야 한다. 장자는 “꿈속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있던자가 아침이 되여 슬픈 현실에 울기도 하고 꿈속에서 울고있던 자가 아침이 되여 즐겁게 사냥을 떠나기도 한다오”라고 하였다. 이는 화복의 무상함을 말함이니 사람이 너무 탐욕을 부리면 게도 구럭도 다 잃기마련이다.     세상엔《만사통》의 명인이 없건만 그냥 무소불위인체하니 그 아니 무모한가?                                   2011년 10 월 1     
734    산가불러 끝없어라 댓글:  조회:2689  추천:0  2017-07-11
                                 산가불러 끝없어라                                          최 균 선       원래 산가란 전야에서 일할 때나 혹은 정감을 토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가곡이다. 산가는 내용이 광범하고 결구가 간소하며 곡조가 명쾌하고 정감이 질박하며 절주가 자유롭다. 산가는 주요하게 고원, 내지, 산향, 어촌 및 소수민족지구에 많이 분포되여있다. 사람들이 길을 가거나 땔나무를 하거나 방목하거나 풀베기를 할 때보통 잘 불려진다. 노래없이 못사는 인간이기에 산간에는 산가요, 초원에는 목가요, 어촌에는 어가(渔歌), 선가(船歌)등이 불리여 노래하는 인생이기도 한것이다.     여기서 나의 산가는 산이 좋아서 나름대로 지어부르는것이다. 산이 왜 좋냐? 일찍 공자가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라 일렀으되 나에게 산이 좋고 물이 좋은데는 별도의 리유가 없다. 물을 좋아하지만 인자여서가 아니고 산을 좋아하지만 지자여서가 아니며 지자여서 움직이기 좋아하는것이 아니며 남달리 어진자여서 청정함을 좋아하는것이 아니며 지자여서 즐길줄 아는것이 아닌것처럼 말이다.     창공에 치솟은 아아한 산은 누구라없이 우러러보게 되여있지 않던가? 산은 륙지에 온갖 생물들의 발원지로서 날짐승, 들짐승이 그곳에 터전을 잡고 풀과 나무와 꽃들이 거기서 자란다. 만물을 길러내면서도 귀찮아하는 법이 없고 모두가 그 혜택을 나름껏 끝없이 누려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이 그곳에서 일어나 천지의 쌓인 기운에 숨통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자연히 산을 숭경하게 되지 않을가? 몇백, 몇천 억겁을 제자리에 지켜서서 그 모습으로 인간들의 우러름이 되고 무언의 교화로 감화시키며 세상의 막힌 기운을 소통시켜주는 소임을 다하는 산, 세속밖의 진풍경은 오로지 산에 있을뿐이다.     물론 산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산이 아무리 넉넉한 품일지라도 산은 결코 아무나 받아들이는것은 아니다. 산의 흉금과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과 산의 내속을 알아보려는 정성과 산을 아끼는 마음을 지녀야 산도 비로소 가슴을 열어 나를 아늑한 그 품에 안아줄것이다. 선인들은 오래 머물러 바라보면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切)의 호흡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왔다. 산을 안다는것, 산과 막역한 정을 주고받는다는것은 아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몇번 산에 올랐다고 산을 안다할수 있을가?     산은 고유의 의미가 색바랠수 없기때문인가, 형태적특성 이상의것인 산이라는 자연현상의 모양, 크기, 고도, 구성성분, 색채 등 각이하지만 산의 개념 등 의미차원의 범주에 포괄될수 있는 산은 모두가 정나미가 돌게하는 우주의 걸작이다. 나름의 감각, 경험을 가지고 형태적인것과 의미차원으로 구분하는것은 산에 대한 오해이고 모독이다. 산앞에 마주설 때마다 그 느낌이 하루한날 같다면 산을잘 모르는것이다.     북송의 위대한 산수화가 곽희(郭熙)는 《림천고치(林泉高致)》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이렇지만 몇리 떨어져서 보면 또 이렇고 십여리 떨어져 보면 또 이러하니 멀어질 때마다 달라진다. 이른바 산의 모습은 걸음마다 바뀐다는것이다. 산의 정면은 이러하고 옆면은 또 이러하며 뒤면은 또 이러하니 볼 때마다 달라진다. 이른바 산의 모습은 면마다 보아야 한다는것이다. 이와같이 하나의 산도 수십백가 지의 형상을 아우르고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을수 있겠는가? 산 하나의 모습이 이렇듯 천변만화일진대 려산의 진면목을 어찌 안다하겠는가? 다만 외경과 사랑을 담아 산을 바라고 산을 그리며 산과 닮아가기를 바랄뿐이다.”     산을 낀 마을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고향산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할것이다. 산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자별난 감정을 다져넣는 곳이다. 산은 그 높낮음과 무관하게 시간적, 공간적으로 항상 마음을 끄는 성스러운 존재물이다. 동년시절 내 마음속에도 비암산 일송정이 웅좌처럼 들어앉았고 청년시절엔 모아산이 인생의 한모퉁이로 새겨진후 세월이 아득히 흘렀어도 낮아질줄을 몰랐다.     산에 가면 그 산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던가, 산은 산마다 민족의 신화, 전설의 발원지인 명산일수는 없지만 그나름의 사연들을 간직하고있다. 이를테면 비암산은 일송정 선구자의 노래로 유명해졌고 모아산은 지금은 연길, 룡정사람들이 등산을 즐기는 명소로 되였고 내 기억속에는 농부시절의 땔나무터로도 의미가 있다.     청년시절, 엄동의 모아산에서 싸리나무를 힘에 버거울만큼 한짐 해놓고 땀을 식힐 때, 산은 나의 어니처럼 그윽하고 대견스러워 하는 마음으로 나를 반겨주는듯 싶었다. 그래서 이른봄, 한겨울이면 모아산꼭대기, 서쪽비탈, 골짜기를 누비며 초부의 산노래를 엮었다. 그러다가 팔자가 펴서 분필가루를 먹고사는 훈장이 되고 도시민이 되여서도 비암산, 모아산을 잊을세라 저만치 바라보며 살아왔다.     나는 사계절의 산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새봄의 산이 더욱 좋다. 라목의 헐벗음과 추위를 떨어버린 숲, 소생하는 생동함이 동년의 정서에 잘 맞기때문이였을가? 내 인생의 초년은 산이 베풀어주었다. 산은 푸른 숲을 이루고있을 때 더없이 후덕해보인다. 헐벗은 산은 너무 쓸쓸하다. 숲은 그늘을 주고 물을 주고 산소를 주지만 헐벗은 산은 눈보라와 추위로 준엄한 시련만 안겨준다.     고향의 산도 여느 산들처럼 흙과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곳이지만 사계절 마음을 열어 사람들을 품어준다. 진달래꽃이 분홍치마를 두르던 봄의 비암산,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신록의 모아산, 폭염을 식혀주는 은총같은 깊은 그늘을 지어주는 무더운 여름의 모아산기슭, 장려한 단풍으로 불타는 동서남북의 높고낮은 뭇산들, 고즈넉하게 마음을 닫는 한겨울의 눈덮힌 산발, 그 모든 산의 모습은 고향의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전이되여 사람을 산이 되게 한다.      산의 리용과 보존의 판단은 객관적상식이 통하는 기준에서 결정할 문제지만 그 기준은 사람의 편견에 지배되여왔고 멋대로 변형되여왔다. 명산이면 명산일수록 더 못살게 굴었다. 만고의 전설을 지니고있는 민족성산을 보라. 문명의 혜택으로 몸살앓는 산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격한것인가? 대답해야 할 산은 말이 없다. 천년천년, 만년만년 억만년을 침묵으로 치솟있어도 세상사의 모든 리치를 다 담고있다. 산은 만물의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척도로서 인류의 진화와 더불어 존재해 왔으니 말이다.      산에 오를 때 숨가쁜 인고의 발걸음도, 정상에서의 시원한 자연풍의 그 짜릿한 느낌도 모두 인생의 페지들에 많은것을 적도록 계시해주지 않던가!격식도 형식도 죄다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과 함께 숨쉬려는 사람들은 흐르는 땀의 무게만큼 산이 주는 의미를 새기게 될것이다. 언제나 함께하는 마음, 언제나 배려하는 마음, 언제나 바라지 않는 마음을 산에서 배우고 인생의 폭을 넓히면서 새로운 느낌들을 간직하며 산이 주는 향수에 취할것이다.      산은 인간들의 삶을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무한정 말없이 봉사해왔을뿐이다. 그러나 산을 고스란히 보존해 온것도 아니다. 인류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키려고만 해왔기때문이다. 산의 리용과 보존이라는 이률배반적인 존재가치를 합리화하는 인간의 론리는 얼마나 사이비한가! 바라건대 지구촌의 영원한 기념탑인 산을 아끼시라.                                        2015년 4월 4일            2017.6.1(연변일보)  
733    “죄”가 영광이 되도다 댓글:  조회:3238  추천:0  2017-07-02
                                           “죄”가 영광이 되도다                                                               진 언       2009년 7월 30일 남방일보(南方日报ㅡ广州)에 이런 글이 실렸다. 제목이《성농 업청, 부농을 핵심으로 농업현대화를 추진하자》인데 문장의 골자가 이러하다. “성농업청에서 청무회의를 소집했는데 성위15기전체회정신과 왕양(汪洋)서기가 성농업청에 내려와 한 연구보고정신을 전달했다.     회의에서는 진일보로 금융위기배경하에서의 우리성 농업농촌경제발전형세와 새 시기 농업개혁의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여 성향발전에서의 새로운 요구에 발맞추고 부유농민(富农民)을 핵심으로 농업현대화와 새농촌 건설에 박차를 가하자…(하략)”      물론 “부농”ㅡ부유한 농민은 구부농과 구별이 있겠지만도 글자그대로 부유농민이란 원뜻은 변하지 않는다. 하다면 계급투쟁밖에 모르던 때라면 대역부도한 일이다. 오래동안 착취자, “복벽을 꿈꾸는” 적대세력으로 저주의 기둥에 매달았던 “부농”을 핵심으로 농업발전을 촉진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리념과 시대변천에 따라 하나의 개념의 의미가 달라지는것은 력사의 발전인가? “개률”인가? 례하여 시대의 물결에 멀리 떠내려간 낡은 개념인 “부농(富农)”은 그때도 부유한 농민이지만 지주와 더불어 착취자의 대명사로 되여 타도되였고 그 후대들은 사이비하고 황당한 련좌제로 격세유전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한자로 (富农)이란 계급성분의 부호로 되였지만 기실 박래품으로서1920년대에 로씨야로부터 인입한 전문술어이다. 부농이 지주와 함께 타도된것은 “착취”라는 인소 때문이다. 맑스주의 관점에 의하면 땅을 소작주고 농민들의 로동성과를 나누는것은 착취행위로서 사람을 고용해서 수익을 얻는것과 같다는것이다. 지금은 없는가?     기실 중국이든 로씨야든 농민들사이에 서로 돈을 빌려쓰고 농망철에 일군을 고용 하는것은 농업생산과 농민생활에 늘 있는 일이다. 다만 부유한 농민들만이 이 방면에 서 상대적으로 고정적일 따름이다. 로씨야인들이 부유한 농민들속에서 보통농민을 갈라내 부농(кулак)이라는 이 개념을 창조했던것이다.     중국특유의 소농경제가 조성한 적은 토지를 점유한 특점은 특기할바이다. 농업생 산경영에서 능력이 있는 농민들이 직접 밭갈고 씨뿌리며 땀흘려 일했지만 력사의 이변으로 지주버금으로 타도당하였다.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실제상 중국의 절대다수의 농촌지구에는 구쏘련식의 소위 “농촌자산계급 (부농)”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구쏘련에서 말한 부농이란 근대로씨야 농민중에서 주요하게 자본주의 경영방식을 운용한자 즉 고용로동력으로 생산한 량곡을 상품으로 시장에 내다팔아 리익을 얻는 전통적인 지주처럼 땅세로 수익하는 농호가 아니였던것이다.     전통관념속에는 천하의 까마귀는 다검듯이 천하의 부농들은 두번째로 극악한 자들로 락인찍혔다. 만약 인간군체를 좋은 사람, 나쁜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나눈다면 부농들속에도 두가지 류형의 사람이 있게 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미명으로 일률 나쁘다는 일면만 강조되여 곧 주적의 동의어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지주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를 통털어 “검은 5류분자”라 하였고 부농은 이 검은무리들의 엄연한 “둘째”가 되였던것이다.     아이러니한것은 부농에도 신부농이 있었는데 “신식부농”이라 하였다. 당시 항일근거지의 광대한 농민들에게 감조감식의 정책하에 적극생산하고 근로치부할것을 호소하였다. 하여 수많은 빈고농민들이 이에 향응하여 신근한 로동으로 빈하중농으로부터 신중농 혹은 신부농으로 되였다. 항전이 결속된후 계급모순이 사회주요모순으로 상승하였는바 이는 당시 새로운 사회성적인 난제로 부상되였다.      당시 정책상 신구부농을 구별하라고 하였다. (《류소기선집》상권 388페지) 그러나 실제집행상 한몽둥이에 때려눕혔다. 례하여 동북지구에서는 신부농들이 투쟁받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임필시선집》411페지) 이리하여 근로치부하여 신부농이 된 농민들이 억울하게 생각하였으며 정치와 생산에 대한 적극성이 타격받았다. 임필시는 해방전쟁시기 토지개혁의 “좌”적사상을 규정하였는바 신부농의 문제는 당시로서는 토지개혁문제였지만 본질은 부유해진 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데 있었다.     학자들은 임필시의 사상과 주장은 개혁개방후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지고 나중에 공동히 발전하는 정책에 보귀한 력사적경험이라고 긍정하고있다. 그러나 력사는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다. 60여년후인 오늘, 현대부농들이 륙속 출현되였다. 새 사회에서 개인이 능히 70년 토지사용권을 살수 있다. 1980년대초에 헌법에서 이미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을 인정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백만부옹만도 102만명이란다. 그러니 부유한 농민- 부농은 또 얼마겠는가? 중국현대판 “지주”들에 비하면 구사회의 지주부농들의 재산, 생활소비, 문화층차는 큰무당앞에 새끼무당에 불과한것이다.       그때는 못살아서 영광스러웠는데 지금은 못살면 수치라 한다. 하여 돈이 많으면 사회공헌도 크다하고 몸값도 높다. 일부 부정축재자의 재산은 한 부유농민의 몇만년 농사수입보다 더많다. 경제학리론에서 말하는 재부를 추구하는 기회는 비슷한데 매개인의 결과는 부동하게 된다는 사실이 실천적으로 증명되였다. 이처럼 생활능력, 경제 두뇌는 “영광스러운” 빈궁을 달리 풀이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60여년래 부농의 변천사는 60여년을 랑비한것이 아닌가? 신구부농의 본질적인 구별은 나변에 있는가? 우리는 60여년전으로 돌아가는가? 물론 구부농으로부터 “현대신부농”의 출현원인,과정, 결과는 다르다고 할진대 구부농들도 다수가 로동하였으니 론리적으로 발바닥에 털이난 부농이 있을리가 없다. 지금은 나라적으로 빈곤호를 부축하고 부유농민이 되라고 권장하는데 왜 제피땀으로 치부한 구부농은 (착취성분이 있었더라도) 천추에 용납못할 죄인이 되여야 했는가?     가진것이 그때는 왜 죄악이였고 지금은 만민이 부러워하는 공로자인가? 더구나 출신은 선택이 아닌데 자제들마저 련좌죄에 시달려야 했는가? 개별적인 좋은 부농들이 있었다 해서 모든 부농들이 좋았다고 말할수 없듯이 실재한 “악질부농”들로 하여 소유의 부농들을 다 부정해서도 안된다. 이면에서 력사는 장난질하였던것 같다.     이런 유모아가 있다. 개혁개방초기, 한 간부가 미국농업을 고찰하고 돌아왔을 때 어떤 사람이 중미량국의 가장 큰 구별이 무엇이던가고 물었다. 그 간부는 중국에서는 지주부농을 멸살시켰는데 미국에서는 “빈하중농”을 소멸한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비록 우스깨삼아 한 이야기지만 사실을 말하고 있지않는가?     2천여년전 맹자는 “有恒产者,始有恒心”이라고 하였는데 뜻인즉 재산이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라야 일에 책임감이 있다는것이다. 한것은 자기 재산에 책임져야 하고 자기 가정에 책임져야 하며 자기의 명성에 책임져야 하기때문이다. 오늘도 “누가 가난하면 누가 영광스럽다”거나 “누가 부유하면 누가 죄악적이다” 등 관념으로 “현대 지주부농”들을 판정한다면 력사발전을 거슬리는 언어도단이 될것이 분명하다.     지금 천문수자의 재부를 가진 “신자본가”들이 숱하고 옛날 지주,부농들은 꿈에도 생각못할 “신지주,신부농”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임자의 명칭이 바뀌였을뿐 재부를 축적했다는것, 잘먹고 잘산다는 부자의 본질은 변한게 없다. 구빈농이든 신빈농이든 삶살이가 어렵다는 현상도 다를게 없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천하의“죄”가 최대의 영광으로 되였으니 리념에 따른 개률인가? 곤혹일세.                                                           2012년 2월26일
732    동정심을 말해보다 댓글:  조회:2804  추천:0  2017-07-01
                                         동정심을 말해보다                                                   최 균 선       흥안 대로변에 “3,6,9 농부산품시장”에서 본 일이다. 어떤40대의 한족사나이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팔목을 움켜쥐고 자동차나 삼륜모터를 몰고온 장사군들을 붙잡고 상처가 엄중하니 병원으로 실어다줄수 없는냐고 사정사정 하는데 아무도 응대하지 않았다. 선지피가 흐르는 팔목을 보면서도 그럴수가?     그가 어찌하여 팔목을 베였는지 알수는 없었으나 보아하니 상태가 장난이 아니였다. 혹시 정맥이나 동맥을 상했다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였다. 그런 다급한 사정을 보면서 내게 자가용이든 모터찌클이든 없는게 안타까웠을뿐이다. 하긴 이런 일이 내게 어쩌다 띄였을뿐 빙산일각에 불과할뿐이다. 당전 전국 각지에서 련속부절히 발생하는 일컬어“랭담사건”들을 두고 의론이 분분하다.     원래 동정심화제는 묵은 화제이지만 현시대 동정심의 존재의의와 가치에 대한 사고는 결코 묵은것이라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인간의 마음 또는 두뇌의 역할은 크게 지성, 감성, 의지로 나눌수 있는데 지성은 판단력, 정서는 동정심, 의지는 실천력이라 고 해석하고있다. 불행한 사람에게 보내는 동정은 일종 덕성이다. 동정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감으로서 그만큼 영원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륜리적화제가 될수 밖에 없기때문이다. 동정심은 사람이 태여나서부터 처음 배우는것이 자사자리이지만 희노애락이 분명한 정상인이라면 그에 앞서 동정심이 고유되여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할 때 왕왕 잘코사니를 부르는 심보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우는 소리가 당신과 다르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낄수 없단말인가? 얼어죽는 뱀을 품어준 농부의 그런 동정심은 불필요하지만 련민은 절반의 공평이다. 자신이 생사지경에 빠지면 누구보다 도와달라고 아비규환을 부를것이 아닌가?     루쏘는“동정심은 전 인류의 생존에서 가장 주요한것이며 또한 유일한 법칙”이 라고 피력하였다. 아무리 눈물도 피도 없는 철석간장의 무정한이라도 동정심과 아예 등지고 태여나지 않았다. 동정심은 생면부지의 사람, 아무인연도 없는 사람들이 순간 적으로 령혼심처의 거리를 단축시켜주는 자연발생적인 계기로 된다. 인간이 심장이 없는 령장동물로 진화하면 몰라도 동정심은 인간의 가슴에서 고갈될수 없다.     동서고금에 동정심에 대한 론술이 많다. 이를테면 맹자의 측은지심(恻隐之心)으 로부터 왕양명(王阳明)의 만물일체설. 하회웅(何怀宏)의 량지(良知之见)에 이르기까지, 아리스 토텔레스의 덕성으로부터 아담 스미스의(亚当.斯密)의 동정관, 휴머의 인성론, 루쏘의 동정론 등에 이르기까지, 선인들의 론하였듯이 동정심은 도덕의 기점이자 근원이다. 생명과 생명의 교류중에 동정심이 없다면 사랑이란것도 있을수 없으며 동정심이 있어야 베푸는 사랑도 없다.     쇼펜하우에르가“련민과 수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친밀하게 만든다. 련민은 일체 도덕의 기준”이라고 했듯이 동정심이 없다면 도덕이란것도 없거나 적어도 진정한 도덕이 생길수 없다. 동정심이 생기는 초석은 다른 사람과 자아지간의 무차이성을 보아내는것이다. 동정심은 사람들 지간에 호상 전달되고 함께 나누는 정감의 기초로서 정면적인것과 부정적인 감정을 포괄하고있다. 인간은 자연속성과 사회속성의 복합체로서 동정심에도 자연속성과 사회속성도 있게 된다.     플라톤은 “동정은 마치 커피와 같아서 처음엔 고통스럽지만 확실히 가장 유효한 구제와 치유의 령약이 된다. 그러나 만약 쏟아내는 동정심의 분량과 정지의 계선을 모른다면 무서운 독극물로 변해버린다.”고 깨우쳐주고있다. 악어의 눈물을 련상시 키는 그런 련민은 진정한 동정이 아니고 액수가 적혀있지 않은 송금통지서같은 눅거 리동정심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염오감을 던져준다.     어찌 론의되든 동정심의 심리바탕은 량심이다. 그런데 량심은 어디까지나 자률적이지 타률이 아니다. 인심에 내부법정의식은 바로 량심으로서 자률적이다. 량심의 소리는 인류령혼의 심처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서 가장 진실된 납함이다. 동정심은 한 사람의 인격적 성숙도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오직 심령이 정파답고 량심이 바르며 가슴이 따스한 사람만이 성근한 동정심을 가지고있다.     하건만 아이러니컬한 경우도 있다. 례컨대 원래는 인간감정에 타인과 공감할수 있는 능럭이 있는데 각자 바쁘고 자기에 집중하기때문에 그 능력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봉사하러 가는 도중에 정작 길거리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동정심은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기에 불온정하여 부동한 시대에 따라 특수한 내함과 사고가치를 가지고있다. 작금에 인정세계가 사막화되고있는 현황에서 동정심은 더욱 열점화제로 되고있다. 동정심은 천성적이지만 리성사유를 할줄아는 사람에게만 구비된다. 동정심에 리성인소가 주입된후 중용사상이 수요되여 동정심에도 합리성을 비롯하여 기준, 적당성 등 문제가 제기되였다.    례컨대 인간이 고매한 리상의 실현을 위해 헌신할 때 생기는 무자비함과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잔인한 충동을 완화하는것은 정의의 원칙이나 선악의 구별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부단한 쟁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힘은 동정심”이라고 피력한다. 즉 동정심이야말로 우리의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을 돕는 필수조건이라는것이다.     동정심은 사랑의 감정의 버금이지만 인심에서 가장 성결한 감정이다. 동정심은 선량한 마음에만 깃들어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애대받을수 있는 비결은 얼마간의 열 성과 동정이다. 그러나 체면치례로 눅거리동정심을 훌 내던지는 행위는 공백수표를 내주는것과 다름없이 얄팍하다. 즉 상대방의 감정호응을 얻지 못하는 동정은 위장된 사심이다. 베이컨은 동정심은 일체 도덕에서 가장 높은 미덕이라고 단언하였다.     생명을 지니고 있는 모든것에 대한 동정은 그가 도덕적인, 가장 희망적인 사람임 을 증명해준다, 원한이 사랑의 대립면이 아니라 랭담이야말로 사랑의 대립면이다. 동정심이 골수에 배여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으며 남을 비방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싶어한다.랭담은 의지와 사랑의 퇴보이고 축소이다. 도를 넘은 동정은 잘못이지만 너무 적은것도 착오이다.     한 사람의 불행한 조우에 대하여 공명감이 생기고 행동으로 도와주고 찬성, 혹은 힘을 보태주려는 정감은 고귀하다. 그러나 동정심은 약자에게만 베푸는것이 아니라 강자, 정의를 신장시키는 사람에 대한 지지도 동정심도 포괄되며 감정상에서 공명할 뿐만아니라 남을 돕는것을  의무로 삼고 정의를 신장하려는 동기와 행동도 포괄된다. 그만큼 인식, 감정, 동기, 행동이 서로 얽혀돌아야 보람있는 동정심이라 할것이다.     더불어사는 세상에서 동정심만큼은 돈독해야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라 말할수 있다. 동정심은 결코 통크게 던져주는 돈뭉치가 아니며 명리의 하사가 아니다. 동정심은 진정으로 위안을 보내는 눈길로도 충분하다. 아주 사소한 도움에서도 동정심의 심오한 내함을 읽을수 있다. 화해로운 사회건설에 참여하려면 동정심부터 갖추시라. 동정심은 절대 일방적일수 없다. 세상사가 조석으로 엇바뀌듯 내 처지도 동정심이 수요될지 그 누가 알소냐? 그래서 늘 동정심만세를 부르고싶다.                                            2015년 9월 10일 (연변일보) 2017년 5월 4일                                              
731    (진언수상록 56) 위험한 망각 댓글:  조회:3358  추천:0  2017-06-26
                                          위험한 망각                                                 진 언       “싹잊고 새 출발하라”는 말이 류행되는데 나쁠것 없는 충고이다. 그러나 잊으려는것과 잊혀지는것은 벌써 다른 일이다. 어떤 일은 잊혀지면 아쉽거나 크게 랑패를 볼수 있다고 여기지만 잊음ㅡ망각에도 위험한 망각이 있다.     모든 동물에게도 기억력이 있다. 우직함의 대명사로 되고있는 황소이지만 기억력이 놀라웁다. 주인에게 여물먹듯 늘 얻어맞고도 잊음이 헤퍼서인지 아니면 관용정신이 있어서인지 한번 “승치”를 할줄 모르는 미물이면서도 아무리 밤이라도 자신이 한번 걸어갔던 길은 눈을 감고도 외착없이 돌아올만큼 령물이기도 하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개도 천리밖에서 자기 집을 찾아올줄 알며 고양이도 눈을 싸매고 먼곳데 가져다 내버려도 용케케도 제집을 찾아온다. 그런데 가금류의 오리나 게사니의 기억력은 어떤지 모르나 닭은 기억력이 제로이다. 렴치없이 정주칸에 들어와 밥상을 뒤번져서 빗강대(비자루)에 혼쭐이 나고도 곧 들어와 한본새로 여기저기 똥을 싸는데 정말 한심할 지경이다.     어류가 다 그럴수는 없겠지만 일본의 한 생물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담수어들의 기억력은 비참하다고 한다. 맛나는 미끼를 한번 물었다가 생명이 경각에 이른 교훈이 있었건만 하루반 내지는 이틀 사이에 다시 미끼에 홀리워 덥썩 물거나 그중에서도 민하기 짝이 없는 물고기는 이틀어간에 십여번씩 낛시에 걸려들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생사의 고비마저 깡그리 잊고마는 고기의 비극과 운명은 이처럼 기억력 혹은 기억하려하지 않는데서 기인되고 사냥물의 운명을 벗어날수 없는것이다.     그런데 고급령장동물인 사람도 건망증 혹은 망각증이 있지만 류만부동이라 위험한 망각에는 특별히 경각성이 높다. 례하여 뱀에게 물린 놈은 십년이 지나서도 우물드레박줄을 보고도 놀란다는 말도 있고 자라에게 놀란가슴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이를 잘 말해준다. 달리 말하면 좋은 일은 잘 잊혀지고 나쁜일, 원한으로 새겨진 사연들은 종내 잊혀지지 않는다고 류추할수 있겠다. 그러나 특수 경우도 있다.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는 속담이 있는데 현재 중국에는 잊음이 헤픈 “귀인”들이 너무 많은듯하다. 이를테면 중국특유의 부호들의 경우가 그렇다. 지지리 궁상떨며 빈궁하게 살다가 어찌하여 부자가 된다는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리고 고생스럽던 생활이 자기세대에서 끝나 세월의 락엽속에 영원히 묻혀버리고 후대들이 세세대대로 먹을알없는 농사일을 썩 걷어치워도 풍의족식하며 귀족식으로 살기를 기원하는것도 가장 바람직한 일일것이다. 시야비야 할것없는 본능적인 소망이니 말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중국사람들의 부귀는 3대를 내려 이어가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 주요원인이 무엇일가? 좀 잘살게 되면 티를 내고 떠벌려먹고 마시고 돈을 분토같이 쓰기때문이란다. 이들과 너무 선명하게 대조되는것으로 례를 든다면 미국의 백년전의 갑부인 록크펠로가족은 지금도 미국에서 으뜸으로 가는 부호가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과 중국에는 백년전 부호들이 지금까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동서방의 부호유전의 이런 격차를 다른데서 더 찾아볼것없이 중국의 갑부들과 미국부호들의 식탁에서 일목료연하게 읽을수 있다. 중국의 3류부옹들이 예쁜 정부를 배동하고 보호동물인 “웅장”을 뜯고 프랑스인두마(5성급술집들에서는 한병에 2천원 씩한다고 함)를 마시며 흥청망청하는게 류행이 되였다. 그러나 아주 위험한 망각이다.     한번 대조해보자. 미국의 으뜸부자 록크펠로는 마른빵을 씹으며 고아원과 교회에 의연금을 보내느라 바삐 돌고 그의 귀공자는 려비도 푼푼히 가지지 않고 아프리카 신기네아의 원시림속에서 탐험에 몰두하고…미국의 부옹들은 기억력이 비상히 좋아서 언제나 오랜오랜 옛날 사무치게 빈궁한 생활과 굶주리던 쓰라림을 잊지 않고 아글타글 벌어들인 재부가 일조일석에 날아갈가봐 노상 전전긍긍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부호들은 부하면 먼저 건망증부터 득달하는지 유흥가(灯红酒绿) 에서 취생몽사하며 마치 날때부터 부자였고 상등인물인듯이 여기고 자손만대를 향락할것이라 확신하며 양양자득한다. 물론 가난뱅이로부터 일약에 갑부가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70년대까지 기한의 의미를 뼈속에 새겨두었던 민초들의 생활이 보편적으로 윤택해진것은 사실이나 먹고쓰고 남아돌도록 매우 부유한것은 아니며 오늘 잘 산다해서 배고프고 춥던 고생이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것을 표지하지는 않는다.     도처에서 “제비가 춤추고 꾀꼬리가 노래하던” 아주 좋은 형세하에서 특수한 “계급교육방식”이던 회억대비밥은 구중천에 날아간지 오래지만 중국의 부호네 귀공자들은 입맛이 높아져서 이것도 안먹고 저것도 가릴 때 미국의 중소학생들, 심지어 유치원아이들은 “회억대비밥(忆苦饭)”을 먹기도 하는데 한 때를 먹으며 형식을 피우는게 아니라 련속 사흘씩이나 먹게 한다고 한다.     미국아이들이 먹어보는 회억대비밥과 왕년에 우리가 먹던것과 내용상 대동소이하나 그 취지는 질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는 고생스럽던 암흑한 구사회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취지였다면 미국의 아이들은 량식이란 얼마나 귀중한것인가를 새삼스럽게 절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할줄 알고 직접,간접적으로 국제지식을 장악하여 창업의 간고함과 오늘의 풍의족식이 용이하게 오지 않았다는것을 가슴에 새기는것이다. 이것은 문화의식의 차이인가? 아니면 가치관념의 차이인가?     유감스러운것은 그들이 200년 넘게 모르던 기아의 맛이 어떤것인가를 다시 씹을 때 허다한 중국사람들은 이제 조금 배부르게 되고 등따스우니 불과 30여년전에만도 그렇게 곯던배가 불룩하게 나온것만 알고 잔뜩 내밀려는것이다. 이역시 변종의 아 Q 정신과 련관되는것은 아닌지 사색해볼 일이다. 다르다면 아Q는 “휘황”했던 과거를 꺼내들고 자아위안한것이고 건망증이 심한 현대중국부옹들은 오늘을 내세움으로서 불쾌했던 과거를 망각의 비자루로 아예 싹쓸어버리는것이다. 그런데 악몽은 깨였지만 정서는 그냥 남아있듯 그렇게 하고싶은 심사도 역시 지어먹는것이다.     하긴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아팠던 자리가 언젠가는 다시 아플수도 있겠다는 기억의 관성원리를 알배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것이다. 지난세기 60년대초 이른바 “자연재해시기”, “위성은 하늘에 오르고” 실제 량식산량은 곤두박질하여 수천만이 아사한 참사를 싹 망각하고 남의 나라에서 얼마 굶어죽었다니 가난뱅이 나라라니하고 비웃는데 여간 웃기지 않는다. 력사는 잊었을지언정 지워진것은 아니다. 조선민족의 지사였던 단재 신채호는 일찍 “력사를 잊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비극의 력사가 재연된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바라랴, 그러나 바라지 않는다는것은 념원에 속한 문제일뿐이다. 사람의 앞일을 누가 장담할수 있을것인가?     자족할줄아는 사람은 언제나 부자라고 하지만 소망은 해석하기 어려울때가 있는 법이다. 구름은 달을 가릴수는 있지만 달을 바꾸거나 그 본질에 영향주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력은 세월의 물결에 흐려지거나 씻겨버릴수는 있으나 력사의 흔적과 더불어 우리의 절실한 아픔은 의연히 영향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건망증이 심하다면 그것은 보통일이 아닌줄로 안다.     현시대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건망증”에 걸린 사람들은 이미 락마했거나 뒤미처 락마할 후보자들이다. 금전, 미색이 앞에서 양공질하면 미끼를 덥썩무는 고기들처럼 자신의 본분이나 신분, 장엄하게 맹세하던 붉은주먹도 까맣게 잊혀지는지 앞사람 쓰러져도 뒤사람이 이어서니 얼마나 비장한 망각인가?                                               2013년 5월 28일
730    눈내리는 날에 댓글:  조회:2697  추천:0  2017-06-17
                                                            눈내리는 날에                                                                        야 조       눈이 내린다. 송이송이 함박눈이 내린다. 헐벗고 삭막한 대지에 하늘이 전하는 늦편지인가, 눈이 내린다. 반가운 소식인양 꽃잎처럼 부풀어 사뿐사뿐 내린다. 눈이 내리는 날은 반가운 날이다. 아이들처럼 공연히 싱숭생숭해진다. 무작정 눈이 내리는 강녘에 서면 바람도 귀기울이고 모든 잡음들이 눈송이속에 스며드는듯 고즈넉하다.     시골에서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황둥개가 공연히 납뜨고 까치가 꼬리를 달싹이며 울어싸서 반가운 손님이라도 들이닥칠듯 공연히 기다림도 서성댄다. 모든것을 하얗게 덮으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그대로 일종의 애수이기도 하다. 그래도 눈이 내리는 날은 무작정 마음이 비워지는듯 여유가 생긴다. 철없던 아이로 돌아간듯 저도모르게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머리위에, 어깨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눈송이가 곰살궂다.     밤새 몰래 내린 눈에 추위에 떨던 가지들에 따스한 느낌을 주는 눈꽃들이 반갑 다. 눈이 내린다. 그옛날, 밤새 도둑눈이 발목이 넘도록 온 아침이면 엄마가 부엌문을 겨우 열며 “에구, 눈이 많이도 왔구나, 애들아, 일어나거라 저 건너마을 까치들이 다 얼어죽었다….”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 날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 쩍하면 눈보라가 터지던 그때는 비암산골짜기를 빠져나와 얼음강판에 해일처럼 굽이치던 눈보라가 가관이였다,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진군에 산천초목도 부르르 떠는듯싶었다. 해가 떨어지고 추운 밤은 오는데 눈발은 삭풍에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것이다. 늦은저녁 눈발이 휘뿌리는 그 풍경이 그때는 내게 별로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랑만적이다. 그때는 어찌 그리 자주, 그리 많이도 눈이 내렸던지…     눈이 함뿍 내리고나면 얼룰진 대지가 잠시는 순수해져서 좋다. 창백함의 상징색인 백설속에 풍경은 그대로 하나의 화폭이다. 겨울, 폭설만이 그려낼수 있는 그런 풍경은 북국의 이채이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눈에 펼쳐지는 은빛세계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설경은 먼지낀 내 마음속 깊은곳까지 청소해주는듯싶어지며 마음의 주름살도 펴지는듯하다. 눈이 오는 날은 그저 바라보아도 좋다.     한겨울에도 별로 쉴사이 없던 농부의 시절, 그냥 눈오는 날은 마음으로부터 일손을 놓게 되여 궂은비처럼 짜증나지 않았다. 고질같은 울적함도 원망스러움도 사그라져버리기때문이다. 비소리는 가실수도 없는 마음의 구름을 몰아다 쏟아내지만 하얀 눈은 그게 아닌것이다. 그냥 평범한 겨울날이건만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듯한 그런 기분에 답답한 마음도 없어진다.     눈이 오면 개와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말이 있지만 눈내리는 날은 공연히 마음이 들뜨면서 아무도 짓밟지 않고 내린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을 허허벌판이나 먼 산골길을 가고싶어진다. 내리는 눈발을 차분히 맞으며 무작정 걸으면 내 마음도 보이듯하여 설레발치게 되였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설원과 설원위에 눈보라를 일구며 거칠것없이 달리며 부는 바람의 휘파람소리도 듣고싶어진다. 그리고 까닭모를 그리움이 갈마드는것은 아마도 인지상달이기도 하리라.     아무튼 눈이 내리는 날은 나이에 맞지 않게 눈처럼 티없는 동년이 되여지는듯싶다. 아득히 흘러가버린 동심이 다시 찾아온듯싶다. 보이지 않는 어떤 구속력에서 벗어나서, 마냥 내모는 시간의 촉박으로부터, 온갖 욕망을 꼬드기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무한의 자유를 얻은듯싶다. 잃어버렸던 소년이 되고 얼룩진 심령을 깨끗이 쓸어내고 눈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듬게 되는 날이기에 눈이 오는 날은 참으로 자재적이여서 살맛이 풋풋해지는 날이다.     눈이 많이 오면 집마당에 눈을 쳐내야 하고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도 내야 할 때는 성가셨지만 으스스해지도록 순백의 고독은 아무도 없는 망망한 설원이나 천고의 밀림이다. 가장 적막한 설경에서 누군가와 함께 걷고싶어지고 그러면 자연히 적막과 고독감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 마음이다. 길잃은 나그네처럼 숫눈길속이 이리저리 허둥대면 가슴이 그만 하얗게 비워지고 순수함은 부풀어오른다. 이 눈길을 저끝까지 가면서 나만의 발자국을 찍어가며 흩날리는 겨울하늘의 엽서를 주어든다.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번째 순결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숫눈길을 가노란다. 바람에 생각을 부풀리면서 시간밖으로 무수한 기억의 휴지부를 남겨두고…해마다 심령속에서 쌓였던 묵은기억을 무찔러버린다. 눈은 어디서 오는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커텐뒤에서 녀인의 옷벗는 소리같이 미묘한 펑펑 눈내리는 소리, 싸락싸락 날리는 눈소리…그 소리는 겨울의 음악이기도 하다. 희다고만 할수 없이 사색적일수밖에 없는 눈도 있지만 찐득찐득한 눈물처럼 내리는 진눈깨비는 공연히 우울해지게 한다. 눈은 내리는 정경도 좋지만 눈이 멎고 펼쳐진 은빛세계가 더 정서적이고 감상적이다. 숫눈길속에 풋풋한 순수가 쌓이는 눈내리는 날이라 그래서 눈을 좋아한다면 쎈치멘탈하다고 할수도 있으리라.     산에 들에 눈내리여 백색의 세계는 문득문득 결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지구가 지구로 굳어져서 맨처음을, 인간의 마음이란게 생겨난 첫시각이 궁금하듯이 순결무구한 처음의 결백을, 략탈적인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서 때묻지 않은 결백을. 부패와 얼룩이 없는 결백의 처음을 상상해보게 하는 순백의 세계가 그래서 좋은것,      릴케는 "고독은 비와도 같은것"이라고 표현했지만 비는 죽어가는 혼백같은것이고 고독을 부르는것은 눈ㅡ백설이다. 순백의 눈세계에 홀로 서있다면 흔하게 찾아오는 느낌일것이다. 눈길이 거슬릴데가 전혀 없어서, 도무지 대상물에서 어떤 오점을 찾을수 없기에 고독을 부를수도 있는것이다. 니체는 순결을 지키기 힘든 자에게는 순결을 버리게 하라고 하였지만 말이다. 백설이 망망할 때면 저절로 읊조리게 된다.                                                 눈이 내리네. 모아산                                                      고개의 길 아스라하니                                                              눈내리여 하좋은 날은                                                                      젊어서 걷고싶은 날이요                                                                     은빛ㅡ백설세계속에서                                                       색바랜 계절을 읽으며                                                              하얗게 마음을 털어내고                                                                      감회가득 채우는 날이요                                                   송이송이 하늘의 축복인듯                                                          눈꽃이 내리여 하얀날에는                                                                숫눈길 나혼자 즈려밟으며                                                                        스스로를 찍고싶은 날이요                                                          2013년 11월 15일,     2016.11.24  (연변일보)
729    (진언수상록 55)“금전미학” 서론 댓글:  조회:3079  추천:0  2017-06-14
                                                         “금전미학” 서론                                                                                     진 언       고대중국인들이 돈을 어찌하여 공방형(孔方兄)이라 불렀는지 모르되 상품가치의 도량(度量), 교환의 도구로 충당되였다. 공방형은  지극히 대립적이고 이질적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 상품이라도 서로 접촉하게 하는 불가결의 매개물이였다. 그러면서도 돈은 그 자체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수단과 더불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수단을 내포하여 돈으로 악행을 할수도 있고 중생을 구하는 자선사업을 할수도 있는 모순체로 되였다.       그 와중에 인간의 물질문명이 돈을 통해 실현되였지만 결국 현대문화의 갈등과 비극을 빚었다. 돈은 절대의 신처럼 인간이 창조한 모든것을 지배하며 인간들이 무조건 복종하도록 예속하였는바 문명개화시대, 모든 가치의 절대적 등가물이 됨으로써 추상적인 수준에서 다양한 대상을 초월하게 되였기때문이다.     인간이 철두철미 금전관계로 예속됨으로써 불평등을 조성하는 악과를 빚어냈고 인류문명사를 악순환속에서 엮어오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적본질로부터 리탈하고말았 다. 그러나 돈의 잘못이 아니라 경제동물이 되여진 인간의 자업자득이다. 현대인의 일상적 삶이 금전적규정, 측정적, 비교의 론리를 따르다보니 마침내 인간이 스스로 령혼마저 팔아먹게 하였다. 가장 비근한 실례로 매춘이다. 돈의 관성으로 인해 돈과 매춘사이에 일종의 등가교환이 자연스럽게, 공공연하게 진행되게 한것이다.     결국 인간은 아이러니하게 자기의 창조물인 돈을 가장 객관적이면서도 비협동적이며 친인간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 그리고 가장 비천한 존재물로 전락시켰고 되돌아와 돈은 돈을 만든 자신들을 저주하는 부호로 되였다. 이 공방형이 인간을 탈인성화, 탈량심화한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인간의 비정한 행위에서 비롯된것뿐이다.     스마일즈가 뉘신지 모르되 악의 근원을 이루는것은 돈, 바로 돈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애착인것이라고 했다. 가령 산해진미를 배터지도록 먹고 탈이 났다면 “빌어먹 을것”이라고 욕할 천하부실이 있을것인가? 만악은 마음에서 생긴다(万恶由心生)는 말이 있지 않던가? 심성인즉 욕망이나 그에는 호불호가 있다.       돈은 수량이 유일한 규준이지만 이중역할을 하였다. 같은 돈이라도 임자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부동한 악과를 빚기도 했다. 돈을 만악의 근원이라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아니, 맞지 않기도 하다.마치 같은 샘물이라도 독사가 마시면 독즙이 되고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는 말처럼 말이다. 돈소리하면 배안에 아이도 손을 내민다고 하니 그 유혹력은 불가항력이라 하렸다. 가령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를 두고 쟁론할 때 닭이 좋으냐? 달걀이 더 좋으냐? 하는 문제로 번져놓으면 사물의 근원문제를 벗어나는 궤변으로 된다..     존 레이라는 사람이 “신은 인간을 만들고 옷은 인간의 외양을 꾸민다. 그러나 인간을 마지막으로 완성하는것은 돈이다.” 라고 했으니 돈의 무소부재(无所不在)와 무소불위(无所不为)를 이르는 말이고 니체가 “정당한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지나친 소유는 소유자체가 주인이 되여 소유자를 노예로 만든다”고 한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길이 전해질 경세지언이라 하겠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할가, 인간이 제손으로 만들어낸 돈이건만 스스로 루루천년 세세대대로 돈의 노예로 살게 만든것은 인간의 탐욕이다. 혹자는 일확천금하여 귀신도 부리다가 물극상반, 마침내 일패도지하여 천길나락에 떨어진것이 과연 돈탓이란 말인가?     례컨대 서××라는 락마관의2000㎡의 지하실에서 1t이 넘는 미국달러, 유로, 인민페와 당·송·원·명조의 골동품과 진귀한 보물 등 재물을 이송하는데 군용트럭이 10대가량 동원됐다고 한다. 각지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하이에서는 4살 된 그의 손자이름으로 된 부동산이 최소한 4채 발견됐다고 한다.     구××의 집에서 순금흉상, 황금세수대야, 모태주 수만병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국인들을 경악하게 했다. 압수된 물품을 이동하는데 트럭 4대가 동원되였는데 횡령액중 최고액에 이르는 200억원이였단다. 게다가 수백채의 집도 챙겼다고 한다. 류××은 6천 460만원을 해먹고도 아닌보살했다. 근근히 과장급의 수도공사경리란 자의 집에서 집에서 황금 37㎏, 현금 1억2천만 원, 68채의 부동산 서류가 나왔다니 공방형이 지랄처럼 곱새춤을 춘 탓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어떻게 돈을 벌것인가는 골이 아프지 않는데 다만 어떻게 돈을 감출것인가가 머리아프다.”고 한 훅호트의 마××는 부국장으로 임직 22개월간 매일 10000원씩 번셈인데 북경,훅호트의 주택에서 인민페 8800만원, 419만딸라에 향항돈 27만원, 유럽돈 30만원, 황금 43.3킬로그람이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아마 그 돈이 영원히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감춰두었을것이다. 쓰지않고 꽁꽁 넣어두는것은 마치 죽은물고기를 랭장고에 넣어두고 잘 보관하고 있다고 여기는것과 같다. 누가 흐르는 강물의 바닥에 메워지지 않는 구덩이를 팔수는 있는가? 그러나 락마관들은 그냥 더 깊이 파려고 혈안이 되여있다가 볼장을 다 보게 된것이다.     돈이 가지는 량적론리는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서 질적론리로 비약한다고 말한 다. 돈의 악과인 탈인성화와 탈럄심화로부터 해탈되여 인성화가 될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역설이다. ​칼릴 지브란은 “돈은 현악기와 같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줄 모르는 사람은 불협화음을 듣게 된다. 돈은 사랑과 같다. 이것을 잘 베풀려하지 않는 이들을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인다.” 돈냄새에 취하지 않을 사람이 없지만 그만큼 가장 치명적인 독성이 있기때문이리라.    《회남자》에 “도둑질로 잘사는 사람도 있으나 잘사는 사람이라고 모두 도둑질 한것은 아니다. 또한 청렴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가난한 사람이 다 청렴한것은 아니다.”라는 고훈이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모두 500명의 가난뱅이를 만들었거나 혹은 세동네를 망하게 한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이라 할것이다.     존 M케인스의 “마음대로 좋은 나뭇잎을 골라 뜯어먹는 목이 긴 기린의 행복을 생각할 때 목이 짧아 굶어죽은 기린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돈못번 사람들에게 복음이지만 거부들에게는 싱겁고 허황한 잔소리가 될것이다. 돈이 사회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돈의 한계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돈의 한계이다. 돈이 지배하는 시대, 갑부가 되는것이 모두의 리상이 되였기에 공방형이 옥황상제를 대체하고 관음보살을 대체하고 석가모니를 대체하였다.     돈은 종래로 길을 잘못들어서는 법이 없었고 류통에서 길을 외끼는법이 없었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5 백명의 가난뱅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서양 격언과 부자하나이면 세동네가 망한다는 속담도 있지만 돈자체에는 착오가 없다. 잘못이 있다면 인간이 처음 돈을 만들고 금전, 은전이라고 이름지은것이랄가,     칸트는 인간을 단순한 수단으로 리용해서는 결코 안되며 언제나 인간을 동시에 목적으로서 인정하고 취급해야 한다는 도덕규범을 제시했는데 매춘업에서는 네미덜머리이다. 서로가 원해서 하는 매춘은 아마 인간관계 가운데서 당사자가 서로를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가장 전형적인 경우일것이다. “돈에 웃고 사랑에 우는” 인간희비극과도 별개의 비극이다. 돈의 노예 인간의 귀속은 어딜가? 우문이렸다.                                                                      2014년 11월 6일
728    언제나 빛을 건지는 단풍잎처럼 댓글:  조회:2821  추천:0  2017-06-05
                                           언제나 빛을 건지는 단풍잎처럼                                             ㅡ “단풍수필회”성립 10주년에 즈음하여ㅡ                                                               최 균 선         언제나 빛을 건져 광합성을 하는 나무들처럼 “단풍수필회”가 수필화원의 한구석에 뿌리를 내린지 어언 10년째이다. 수필회가 서서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로작가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단풍수필”만의 고유한 빛갈을 재창조하고있다. 그동안 수필회를 헌신적으로 이끌어 당당하게 열고개를 넘을수 있게 한 김회장을 비롯한 여러 임원 여러분과 회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탄복하게 된다.     뭔가 남다르게 튀여야 하고 이질적인것으로 창신을 보여주어야 부가치가 오르는 시대에 단풍이라는 단풍이라는 단어는 마치 철지난 실락감을 느끼 할수도 있다. 그러나 뒤미처 단풍이라는계절의 특징을 상징하는 그 의미속에서 만년에 생명의 빛을 단풍처럼 불태운다는 의로움이 가슴깊이 와닿을것이다.     “단풍수필회”라는 이 특정된 그릇에는 얼마든지 다양하고 새로운 시대정신과 마음의 소산을 담을수 있으며 석양처럼 생명혼을 빛내며 서로 긍정적인 힘을 주고받으면서 좋은 글을 써내기 위해 여전히 단풍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고있다. 몸은 비록 쇠잔해가지만 시들줄 모르는 문학정신과 지성을 아우르며 생명력 있는 또 다른 문학의 원지를 가꾸고있기때문이다.     문학창작이란 원래 고독한 작업이고 고군분투가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해온 나이다. 그만큼 나는 그 어떤 규모의 문학인 활동이나 행사에 소외되여 있었고 그렇더라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문학은 소신대로, 문필로 세상과 대화하는것이지 인맥관계에 힘입어 자기를 나타내는것도 아닌것이다.     그러다가 약 일년전에 연변의 원로작가들로 구성되여 근 10년의 세월을 기록하고있는 “단풍수필회”에 신입생이 되였다. 안면있는 작가, 학자들도 있었고 초면인 작가들도 있었다. 비록 초면이고자주 마주앉지 않은 로선배님들이였지만 신정을 받아안는데는 아무 구애가 없이 마음이 편안하였다.     몇차례 활동에 참가한후 느껴지는 첫감수라면 단풍수필회에 성원들인 로문인들은 퇴직전 자기가 맡은 일터에서 무슨 감투나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음으로 양으로 기량을 발휘한적이 없었거니와 수필회내에서도 무슨 욕심이 없는 지성의 문인들이라는 존경심이였다. 특히 자기의 여윈 돈지갑을 털어내면서까지 수필회를 꾸려왔다는 김길련회장이 더구나 우러러 보였다.     매달 있게 되는 총회에서 서로 겸양하는 지성인들의 품격이 엿보이군 한다. 인생의 만년에 석양처럼 불타는 인생의 잔광을 문필사업에서 빛내려고 생명을 연소하면서 오로지 좋은 수필을 쓰고싶어하고 좋은 수필가를 만나는 즐거움으로 모이는 순수한 문학단체라는것을 다시금 실감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런 모임에서 그저 사양할수만은 없는 과분한 후대를 받았다. 참네한지 일년도 안되는 나인데 비서장을 하라는것이였다. 뜻하지 않은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많은 면에서 부족한 사람을 모임의 일군으로 추대해주니 몸둘바를 몰랐다. 전체성원 회의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젊은축에 드는것은 사실이나 원로문인들의 진지한 모습이 사명감을 더 무겁게 실어주었다.     온화한 인품으로 후학들에게 늘 용기를 주시고 좋은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라고 격려하시는 선배선생님들에게 다시금 존경을 고이지 않을수 없었다. 로년문학단체라 기보다 올곧은 선비들의 마음의 터밭을 가꾼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10년세월 많이도 로심초사한 문재가 빛나던 로작가님들과 연변대학의 학자분들, 여러 잡지사에서 실력 을 과시하던 편집자들이 수필회에 쏟아부었을 그 심혈이 가슴에 넘치게 흘러들었다.     선배님들의 극진한 뜻을 수락하고보니 근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소감을 말하고저 하니 사뭇 외람스러움이 앞섰다. 늦깎이문학지망생인 나, 작품다운 작품을 써내여야 조금 자신있게 나설수 있는 문학인모임이였기때문이다. 평생을 집구석에서 신들린 놈처럼 만년필과 씨름하던 자신이여서 마음의 여유와 포용력도 부족한데 덕망높은 선배님들앞에서는 더구나 미비함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존경하는 원로들앞에서 그래도 용기내여 소감을 말씀드릴수 있었던것은 단 한가지때문이였다. 문학을 시작하던 당시의 초심, 비록 부족한 재질을 미봉할수는 없어도 인생길 끝까지 필봉으로 문학의 터전을 갈고 가꾸리라 혀를 깨물던 그 황소의 열정이 아직도 가슴에서 불타오르고있기때문이다.     나는 문학의 길에서 우왕좌왕하며 어느 하나도 딱 부러지게 해놓은 쟝르가 없는 초학자이다. 수필이란 문학의 화원에서 세상을 살며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마음껏 자기 고백을 토로할수 있다는 그 한가지만으로도 수필은 좋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수필들을 만나는족족 읽는 애호를 가지고있지만 많은 명수필들을 섭렵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길량식이 없이 길을 떠난 려행객의 처사일지라도 혼자 느끼고 생각하는데는 오히려 주체성을 살려줄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성쌓고 남은 돌”들이 모여 문학마당을 이룬 단풍수필회라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요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닌데 이런 순수문학모임에 참석하는것의 의롭게 생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가? 순수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것을 이런 모임서 새삼 확인하는것 만으로도 가치로운 일이 아닐가? 글을 쓰는 일이 번거롭긴 해도 때론 작은 보람과 위안을 삼을수 있다는것은 사무한신이 된 내게는 더구나 보람찬 일이 아닐수 없다. 갈 수록 시비가 얽혀도는 문단을 감안할 때 아무 욕심도 없이 단순히 문학사랑으로 모이 는 로문인들의 모임은 내 인생의 사막에 록지이기도 한것이다.     저속한 인품의 바닥을 자꾸 드러내보이는 문필의 가식, 우러날것 없는 재탕, 미문(美文)의 간지러운 교태, 옹졸한 자아실현, 같잖은 오기, 하찮은 명예욕, 눅거리감상(感伤), 엉뚱한 기상(奇想) 이런 잡다한것들이 우리의 문학원을 얼마나 어수선하게 하며 우리의 붓을 얼마나 루추하게 하는가? 절실을 내세우면 생활현장을 투시할수 있을것이요, 가식없는 진솔한 마음을 담으면 좋은 수필글이 될것이련만…     비정과 비리에 대한 분노가 그속에 있고 인생에 대한 감수가 그속에 있고 진리가 또한 그속에 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와 한, 거짓없는 눈물과 웃음, 이것이 참다운 인생이다. 인생현장에서 느낀 감수를 에누리없이 고백하는것이 곧 수필이다. 혹자는 수필이란 정열의 부르짖음도 아니요, 비통의 하소연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정(情)을 아름다운 문구에 담는 자아가치실현이요, 한가함을 위로하여 재능을 빛내는것이라고 자긍할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어떤이는 가라사대 수필은 리론성도, 비판성도 수요되지 않고 다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소감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글이란다. 그래서 격정은 아예 시끄럽고 그저 담담한 물처럼 졸졸 흘러서 보는이의 눈을 즐겁게 하는것이여야 수필다운 수필이란다. 하긴 수림이 깊으면 벼라별 새들이 다 있고 저마끔 제 독창에 신나하듯이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세계에서 의론인들 한두가지랴.     일언이페지하고, 무엇을 고백하든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든 인생의 걸어온 자취 혹은 흔적을 드러내는것이 수필이 아닐가싶다. 고개길을 넘던 나그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어떤 상념에 잠겨볼수도 있고 무심히 발앞에 흩어진 단풍잎을 주어들고 생명의 막무가내함과 생활의 무상함을 느껴볼수도 있으리라.     우리 연변문학지들이 경제난으로 불경기를 겪고있는 와중에 로인들의 문학단체는 더 이를데없이 경비난에 고생하고있다. 이는 확실히 난제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 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수레가 산앞에 이르면 반드시 길이 있다고 하더니 고마운 분이 나타나서 정부차원에서 힘있게 밀어주겠다고 하니 “단풍”은 때지나 시들어버린 락엽으로 세월속에 묻혀버리지는 않을듯싶다. 옳거니, 그렇지 않을손가?!                                                    산첩첩, 물첩첩하여                           길이 없는줄 알았더니                           버들숲 지나 한굽이 돌아드니                           또 하나 꽃피는 마을이 나타났네            그 꽃피는 마을에 황혼을 불태우는 지성의 문인들이 새아침에 물려줄 진한 꽃 향기를 피워간다면 그보다 더 갚높은 일이 있으랴!                             2008년 3월 15일   ㅡ 6기
727    (시) 겨울풀을 읊다 댓글:  조회:3185  추천:0  2017-06-02
                                             겨울풀을 읊다                                                                               야 조                                                                      한껏 메말라 볼품없이                                   설한풍에 떠는 겨울풀                                   그래도 뿌리로 꿈꾸며                                   양춘을 기리는 절개여                                     엎드리고 허리도 꺾인                                   상처입은 몸이 되여도                                   동토를 깊이 파고들며                                   외계와 땅속을 잇느냐                                     적설에 파묻혀도 굳센                                   기개를 뿌리에 새기며                                   죽음까지 살아서 다시                                   마른 내가슴에 푸르다                                                                               2015년 12월 20일
726    (시) 그래 바로 그거였어 댓글:  조회:3007  추천:0  2017-06-02
                                                    그래, 바로 그것이였어                                                                         야 조                                                        열불나 이마가 불탈때에                                                    물수건 차분히 얹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참말이지                                                    되우나 행복함 외우겠지                                                     숭숭숭 뚫려진 내마음을                                                   보듬고 기워준 그런사람                                                   백년의 해로를 기린다면                                                   제일로 소중한 님이겠죠                                                     한두날 내곁에 없더라도                                                   기다림 조바심 부르는건                                                   만남의 즐거움 한때보다                                                   하도나 사랑이 소중함에                                                     된장국 냄새가 풍기는듯                                                   체취가 그리움 불러불러                                                   애타게 그리는 속마음에                                                   간절함 덧쌓여 산이되요                                                     너무나 익숙한 얼굴에도                                                   눈뜨면 새롭게 보이나니                                                   언제건 가슴이 따스함은                                                   함께하는 편안함 그때문                                                     한창때 격정은 식어가도                                                   볼수록 푸근해 넉넉하고                                                   싫은줄 모르는 마음인건                                                   백년의 미더움 반석같아                                                     입술에 애정을 바르기도                                                   토하기 무엇해 相间无语                                                   결약이 되여져 일편단심                                                   존중을 앞세운 마음인가                                                   해로의 부부가 서로에게                                                   관심과 배려를 고여주고                                                   맨나중 유언을 남긴다면                                                   한마디 “참으로 사랑했소!”
725    (시) 조화가 댓글:  조회:2918  추천:0  2017-06-02
                                                           조화가                                                              진 언                                                  흰구름 푸른하늘                                                        높은산 만리평원                                                                태양이 반겨웃고                                                                        바람결 부드러워                                                 꽃피고 스러지니                                                       섭리가 슬프도다                                                               류수는 가자하고                                                                       바위는 지키잔다                                                 자연은 제스스로                                                       조화를 챙기는데                                                           저봐라 인간들만                                                                   각축전 시끌하다
724    (진언수상록 54) 량지와 시비감 댓글:  조회:3270  추천:0  2017-06-01
                                량지와 시비감                                         진 언       한 사람의 내심에 시비감은 자기행위, 의도 혹은 성격의 좋고 나쁨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좋은 사람으로 좋은 일만 하려는 자률정신을 가늠하는 잣대로 되며 내심에 바른 시비감은 선악의 천평이 되기도 한다. 선량과 진심은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데 량심이 얼마나 값가느냐? 라는 질문 자체가 무모하다. 왜냐하면 선량과 진심은 무형의 존재로서 천층만층 구만층의 사람들이 부동한 시간, 부동한 장소에서 연출하는 각 색이 다르기때문이다. 장사군은 오로지 돈이 시비기준이기에 인간에게서 무가지보인 량심이 몇푼 안되거니와 오히려 일확천금에 걸림돌이라 생각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량심이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량심은 인간의 도덕의 대청을 받드는 금빛기둥이기에 그것이 없다면 인간정신이라는 대청이 곧 무너져버릴것이다. 량심은 한자루의 망치와 같아서 사람들의 선량한 심벽을 두드리고있다. 량심은 하나의 만능열쇠로서 인간의 마음의 골방을 열어제낀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떠올리면 그의 유명한 “단심가”가 외워질것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주지하다싶이 이 단심가는 음특한 리방원이 엮어댄 “하여가”에 대한 화답이다. 그먼저 리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이렇게 읊조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를 읊조린 리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공양왕이면 어떠하고 이성계면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고려가 조선이 된 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정몽주 당신과 내가 리성계를 모셔 백년동안 권세를 누려보자)”이다. 그런데 “단심가”로 맺고끊듯이 거절한 정몽주에게는 주군을 잃은후 부귀영화가 의미없고 오로지 옛군주에 대한 일편단심뿐이다.     물론 이 단심가의 핵심은 만고충신의 충절이고 기개이지만 결국 량심과 직결된 문제이다. 량심은 인생의 터넬속을 비추어주는 밝은 등불같아서 나갈길을 비추어주며 량심은 건들 불어오는 바람처럼 사회라는 하늘에 검은 구름과 비리의 안개를 산산히 헤쳐버리며 량심은 한 사람의 신의와 하는 일의 진속을 재이는 량지의 잣대이다.     량심을 가진 사람은 량심이 없는 사람을 감화시키고 량지가 있는 사람은 량지가 없는 사람을 교화시킨다. 만약 량심을 가진 사람이 량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관용하고 량지가 있는 사람이 량지가 없는 사람을 묵인한다면 사회도덕은 형성되기 어렵 다. 그리하여 일편단심 정몽주는 결국 선죽교에서 리방원의 살인패들에게 철퇴를 맞고 비명에 쓰러졌지만 선죽교의 전설과 더불어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 남게 되였다.      량심은 인정세계의 왕가물에 단비이며 한무더기 화토불처럼 사람들의 어두운 심신과 썰렁한 환경을 따스하게 녹여준다. 량심은 인생악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합주곡으로서 사람들을 화해롭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량심은 마를줄 모르는 옹달샘처럼 메말라가는 인정을 차분히 적셔준다.     화제를 조금 돌려서 글짓기에서 량심과 시비감문제를 말해보자. 작가로서의 량지와 시비감이 분명한 사람을 거론한다면 누구보다 조지 오웰을 손꼽아야 할것이다. 그에게는 “나는 왜 쓰는가?” 라는 에세이가 있다. 그는 사실적인 글쓰기를 지향했다. "에릭은 가고 오웰은 남다"는 그의 묘비에 쓰인 비문인데 파시즘, 전체주의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려했던 오웰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남아 시대의 실상과 아픔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례하여 식민지시절 경찰생활을 하며 겪었던 제국주의와 비인 간성에 대해서 고발하고있는 “코끼리를 쏘다”와 같은 같은 글에서 나타나듯이 그 시절에 그는 리상과 현실사이에서 많은 심리갈등을 암시하고있다.     례하여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때 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게 그의 지배조건이기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글 에서처럼 그는 이러한 정치적 주제에서 벗어나 글을 쓴다는건 그 시대에 살고 있었던 작가라면 넌센스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하고싶었던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였다고 밝힌다. 오웰이 우리에게 남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설파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정신이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의 경우, 소위 정치적인 글을 쓴다는것은 그 시대에서 어쩔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중국의 경우 로신선생이 암흑한 현실속에서 종횡무진하였다고 할수 있다. 그에게 장편소설이 없는데 아마 1930년대 중국의 환경에서 짧은 잡문들이 장편소설보다 더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 시대 사회병페를 찌르는데는 투창과 비수가 제격이였다. 투창과 비수는 야장간에서 뚝딱거려 만들수 있다. 그러나 대포, 포탄은 근현대화공장에서만 만들수 있다. 로신은 창을 든 필마단창의 열혈투사였다.     우리 시대의 글쓰기는 어떤가? 우리들의 전통관념속에는 문학은 문학일뿐이라고 한다. 지당한 말이다. 작가가 민감한 문제에 관여할 때는 일반시민으로, 한 인간으로 관여해야지 아니면 말썽을 불러오기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회민감구와 전혀 무관한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것이 가능할가? 좋은것은 좋다하고 나쁜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지만 작가의 곤혹과 고충은 이 가불가에서 온다.    오웰이 끝까지 파시즘에 대항하여 글을 쓰려 한것같이 지금도 거대한 권력에 맞서 글을 쓰려는 지자들이 있다. 그런 지성인들이 분발해야 우리 사회가 병들지 않고 발전한다. 이는 우리가 똑바로 보고있는 현실을 글로 옮기고 진실에 더욱 다가가는 글쓰기를 해야 하는 리유이다. 물론 이것은 붓을 든 사람이면 다 해낼수 있는 쾌거가 아니다. 이는 문학의 원초적비애인지 작가의 한계인지 모른다.     한편 화조월석이나 풍월하며 소일하는 문인들에게는 공자에게 대답한 로자의 말이 의미로울것이다. “마음이 곤하기만하지 알수는 없고 입이 닫혀져 말로 표현할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을 위해 대략 말해보겠습니다. 지극한 음기는 고요하고 지극한 양기는 동적인것입니다. 고요함은 하늘로부터 나오고 움직임은 땅으로부터 나오며 이 두가지 기운이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룸으로서 사물이 생겨나는것입니다. 누가 그 법 도를 다스리고 있는지는 모르고 그 형체도 본일이 없습니다.”                                                                                                                                                                                                                                                                                                                                                                                                                                                                                                                                                                                           “귤이 회남(淮南)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 (橘 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爲枳)'”라는 고사성어에 빗대여 같은 글이라도 작자의 관념에 따라 “격문”이 될수도 있고 “미문”이 될수도 있다고 리해해도 몰리해가 아니리라.                                                                                                                                                                                                                                                                                                                                                                                                                             아 아무튼 무지는 무위(无为)무능이요 풍월은 정서의 발로요 비평은 사유의 불꽃이다. 명철보신에 무지하다면 미련함이니 작가의 량지와 명철한 시비감은 어디 서야 하는가? 언어의 타락은 생각을 타락시키고 되돌아가 타락한 생각은 언어를 타락시키거늘….                                                                                    2014년 9월 5일
723    (펌글)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댓글:  조회:4410  추천:0  2017-05-27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기획-‘위안부’②] 강간을 ‘조선 정벌’이라 말해, ‘말 안 듣는다’며 칼로 찌르기도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5월 27일 토요일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박영심 할머니는 1921년 겨울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는 집에서 늘 외로웠다고 했다. 양복점에서 일을 하던 열일곱 살의 박영심은 친구와 함께 할머니 집에 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끌려갔다. 일본 순사는 검은 제복에 별 두 개를 달고 있었고 긴 칼을 차고 있었다. 평양역으로 끌려간 박영심과 친구는 다른 15명의 조선인 소녀들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압송됐다. 1939년의 봄이었다. 남경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는데, 병영으로부터 5백미터 떨어진 곳에 3층짜리 벽돌건물이 있었다. 빈 깡통들을 매달아놓은 가시철조망이 무시무시하게 드리워져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곳이었다. 일본군들은 그 곳을 ‘긴스이루’ 위안소라고 했다. 안으로 끌려들어가 보니 가로세로 약 2미터·2미터50센티 정도로 똑같은 크기의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방에는 침대만 하나씩 있었다. 박영심에겐 2층의 19번째 방이 배정됐다.     ▲ 등충의 위안소 인근에서 체포돼 곤명 포로수용소로 이동하는 여성들. 사진출처=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그들은 박영심을 우타마루(歌丸)라고 부르며, 19호실 방문에 우타마루라는 이름과 번호를 붙여놨다.   해가 뜨면 일본군들이 몰려왔다. 아침으로 쌀밥 한공기와 몇 조각의 무우 절임을 먹고 나면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하루 평균 30여명이 왔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하면 일본군은 그녀를 다락방으로 끌고 가 발가벗긴 뒤 매질을 하곤 했다. 일본군들은 보급 받은 ‘돌격1번’(콘돔)을 들고 왔다. 또한 그들은 위안부들을 강간하고 폭행하는 것을 ‘정벌’이라 표현했다. 2010년 공개된 일본 육군 제6사단 소속의 무토 아키이치 분대장의 1938년 일기에도 ‘오늘은 즐거운 나들이다. 이시카와와 둘이서 먼저 조선 정벌에 나섰다. 순서는 네 번째였다. 도미꼬, 경상남도’라고 씌어 있다. “일본군은 하나와 같이 포악무도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어느 날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한 장교 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놈은 나를 주먹으로 때리고 구두발로 차다 못해 긴 칼을 뽑아 나의 목에 대고 당장 죽일 것처럼 위협하고는 ‘황군’의 맛이 어떤가 보라고 하면서 자기의 수욕을 채웠다.” 어느 날은 일본군이 ‘요구대로 따르지 않는다’며 박영심의 배를 칼로 쑤셨다. 배의 정 가운데 5센티미터에 이르는 자상을 입었고 피가 쏟아졌다. 중국인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고 나서야 살아났다.   일본군들은 위안부들이 임신을 하면 자궁까지 도려냈다. 그리고 다시 위안부로 ‘사용’했다. 위안부로 쓰던 소녀들이 병에 걸리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면 어디론가 실어갔는데,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아니면 가차 없이 강물에 처넣어 죽이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 중에 상대인 일본군에 맞아 죽거나 다른 위안부들이 보는 앞에서 처벌을 당해 죽은 경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박 할머니의 증언에선 더 끔찍한 사실도 드러난다.   “어느 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 (중략)..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  일본군들은 말을 듣지 않는 소녀들을 가마솥에 넣었다고 태연히 말했다. 유사한 증언이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17살에 끌려간 피해자 유선옥 할머니(함경북도 경흥군)가 있던 위안소에선 일본군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위안부의 목을 잘라서 보여주곤 가마솥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삶은 물을 위안부들에게 강제로 먹였다. 14살에 끌려갔던 정옥순 할머니(함경남도 풍산군)도 같은 증언을 한다. 일본 장교는 “남자를 하룻밤에 백 명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손을 들으라”고 한 뒤, 손을 들지 않고 대들었던 15명의 소녀를 벌거벗긴 채 못 판에 굴렸다. 소녀들의 몸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일본 장교는 이들의 목을 칼로 베고 역시 가마솥에 넣었다. 그리고선 “개 죽이는 것 보다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 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다”  ▲ 1944년 9월 연합군이 송산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위안부들을 찍은 사진. 맨 오른쪽이 당시 22살이던 박영심. 사진출처=NARA.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긴스이루에서 3년여를 보낸 박영심은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끌려 상해를 거쳐 버마 랑군 부근의 라시오 위안소에 옮겨졌다. 여기선 다시 ‘와카하루’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이곳에선 7명의 위안부 가운데 4명만 살아남았다고 박영심은 기억한다.   라시오의 위안소에서 2년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버마-중국의 국경지대인 윈난성의 송산으로, 다시 라모로 끌려갔다. 이때가 1943년경으로 추정된다. 매일 수많은 폭탄과 포탄이 날아와 터졌고, 이곳으로 끌려온 12명의 조선 여성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전선에서 하루 30~40여명의 일본 군인을 치러야 했다. 이들 조선인 여성 12명 중 8명이 폭격에 죽거나 일본군에 맞아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 날 군기를 태운다는 일본군들의 말을 엿듣고 패전을 예감한 박영심은 남은 조선인 여성들과 함께 도망쳤다. 박영심은 어느 중국인 농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중국군에 의해 체포돼 곤명의 포로수용소로 가게 됐다. 그녀는 당시 만삭의 임신 상태였으나 포로수용소에서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다.   당시 곤명의 포로수용소엔 조선인이 25명(여성 23명, 남성 2명) 있었다. 조선인 여성 가운데 박영심을 포함한 10명은 송산 지역에서 체포됐고, 나머지 13명은 등충 인근에서 체포됐다. 등충의 위안소에선 중국군에 의해 등충이 함락되기 전 일본군들이 위안부 30명을 총살한 기록이 발견됐다.   박영심이 고향으로 돌아온 건 8년만인 1946년이었다. 박영심 할머니는 ‘종군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1967년 결국 자궁을 드러낸 데다 신경쇠약 등으로 힘든 여생을 살아왔다. 1993년 박 할머니는 피해를 알려 ‘한을 풀고 싶다’며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2000년 12월엔 여성국제법정에 증언자로 참가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방문했으나,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생각나 먹는 일도, 말하는 일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빠졌다. 박 할머니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됐다. 2003년엔 지원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중국 남경과 운남성 송산을 답사했다. 박 할머니는 남경의 위안소 건물에 들어선 뒤 소리 내어 울었다. 박영심 할머니는 2006년 8월7일 향년 85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 송산 위안소 터를 찾은 박영심 할머니. 사진출처=. 서울시 외.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722    (진언수상록 52) 썩은 사과배와 광주리 댓글:  조회:3295  추천:0  2017-05-23
                                                           썩은 사과배와 광주리                                                                                                           진 언       겨울나이로 사과배를 몇상자씩 사두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했듯이 고르고 골라 사느라해도 얼마 안가서 썩기시작하는 사과배들을 보게 되는데 수시로 골라내여 썩은곳을 도려내고 먹어치우든지 처치야 한다. 사과배는 알게 모르게 모종 충격을 받아서 흠집이 생긴것부터 먼저 썩고 그 썩은것이 옆에 사과배에 부패균을 전파시키므로 수시로 살피지 않으면 급기가 옹근 상자채로 썩어버리게 된다.     사과는 온도가 맞춤한 가을보다 호되게 추운 겨울에 덜 썩는법이다. 더구나 사과를 따로따로 랭장고에 넣어두면 그처럼 쉽게 썩지 않을것이다. 원래 생생하던 사과배도 그렇게 썩는것은 뭇사과배가 썩었기때문만이 아니라 사과상자에도 문제가 있기때문이다. 전사회적으로 만연되여 더는 방치할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회부패문제와 썩은 사과배와 광주리문제를 련계시켜 생각해 본다. 물론 부패균의 직접적 전파와 관가의 부패현상과 꼭 같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만연되는것은 비슷한 현상이라 하겠다.     근간에 거국적으로 정계촌의“썩은 사과”들을 부단히 골라내여 처리하건만도 련속부절히 속출되고있다. 사람들은 흔히“사과”자체의 부패인소를 너무 강조하면서 그것들이 썪은것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앙을 잃어버린 탓이라며 도덕수양을 가강하면 방지할수 있다고 한다. 수양의 최고경지는 군자의 사상경계이다. 옛글에 일렀으되 군자는 명리를 탐내여 자기를 속박하지 않고 재물에 유혹당하지 않으며 미색에 미쳐나지 않는다고 한다.     일언이페지하고, 과연 한 사람이 부패해진것이 순전히 그의 주관인소때문만일가? 서방의 발달국가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있다. 그들은 인간악이라는 이 방면을 특별히 강조하고있다. 사람은 날때부터 많은 악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 계렬의 엄정한 법률과 제도를 내와서 약속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있다. 그러나 위정자로서 저저히 만사를 대의(大义)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사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된다면 사회적병폐의 악순환의 반복을 근절시킬수 없다.     물론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내를 흐린다는 속담처럼 그런 자들은 소수로서 주류는 맑다고 하지만 인젠 소수라고 말할 계제가 못되고있다. 기실 미꾸라지 한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는것이 아니라 흙탕이 있으니까 미꾸라지가 서식하는것이다. 맑은물에는 미꾸라지가 살지 않는다. 흙탕을 가셔내여 물이 흐리지 않게 해야 미꾸라지가 진흙탕속에 파고들어 번성하지 못하게 할수 있다.     방안에 바퀴벌레 한마리가 기여다닌다면 보이지 않는 어느 축축한 구석에서 수많이 살고있다고 추측할수 있다. 아니면 잡아내도 잡아내도 줄어들지 않는 리유가 대관절 무엇인가? 부패분자들도 무섭게 날치는 뱀일수록 자기 독에 더 빨리 죽는다는 도리를 모르지는 않을것이다. 그런데 재미나는 곳에서 범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차설, 돌고돌아 말해도 역시《사과광주리》가 더 문제이다. 고서《태평광기》에 이런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있다. 일컬어 태평성세라던 당조 정관년간에“화도사” 라는 절에서 매현자라는 중더러 창고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렇듯 믿었던 매현자가 몇년후에 절에 재산을 싹쓸이해 가지고 알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중은 떠나면서 시한수를 남기였다.   《양을 승냥이의 턱주가리밑에 놓아두고/ 뼈다귀를 개앞에 놓아두었네/ 내 또한 아라한(阿罗汉)이 아니여늘 어찌 도둑질할 욕념을 피할수 있으랴,》시의 숨은 뜻인즉 만약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승냥이가 어찌 양을 잡아먹지 아니하며 개가 뼈다귀를 널지 않으랴. 탐관들도 그러하지 않을손가?     어떤 고승이 쓰고있다. "도란 만물을 덮고 싣는 곳이니 바다처럼 크다. 군자는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안된다. 무위(无为)로 다스리는것을 천(天)이라 하고 무위로 선양하 는것을 덕(德)이라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리롭게 하는것을 인(仁) 이라 하고 같지 않은것을 같이 모이게 하는것을 대(大)라 하고 행함이 다른 사람과 불화하지 않는것을 관용(寬容)이라 하고 만가지를 소유하되 똑같지 않은것을 부(富)라 하고 덕을 붙잡는것을 벼리라 하고 덕을 이룬것을 독립이라 하고 도에 순종하는것을 비 (备)라 하고 외물(外物)때문에 뜻을 꺾지 않는것을 온전(全)하다 한다.     군자가 이 열가지를 밝게 하면 정사에 관용하고 마음이 커질것이며 행실이 성 대하여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갈것이다. 그러한 자는 금을 산에 감추고 구슬을 못에 감춘것 같고 재화를 리(利)로 취하지 않고 부귀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장수를 즐기지 않고 요절을 슬퍼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자는 영달을 영화롭다 하지 않고 궁핍을 추하다 하지 않으며 일세의 리익을 가로채 자기가 사사롭게 얻은것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를 다스려도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혹 높은 자리에 있으면 밝기만하다. 그에게는 만물이 한몸이요 사생(死生)이 같은 모습이다."라고,     관원마다 군자가 될수는 없으니 도사의 이런 설교는 조금 현학적이나 인생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지남으로 삼을만하리라. 인간은 돈이 없어도 의연히 인간이지만 도덕이 없이는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빵이 없어도 못살지만 정신이 없어도 살지 못한다. 인간은 헐벗고도 살지만 삶의 어떤 의미가 없이는 살지 못한다. 무엇이 사람들에게서 도덕을 빼앗고 정신을 빼앗고 삶의 의미를 빼앗았는가?     돈,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종일 돈타령만 하는자와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도덕과 정신과 의미를 빼앗은것이다. 례컨대 등산자들은 어째서 산에 오르는가? 하는 물음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데“저기 산이 있으므로!”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등산을 멈출수 없다는 확답이기도 하다. 이 말을 패러디한다면 탐관들은 “돈이 절로 굴러들어 오니까,”라고 답할지 모른다. 그리고 부정축재를 추구하는 정답일게다.     한편 금고문을 단단히 잠근후에는 열쇠를 잃어버리면 어쩔가 하고 근심을 놓지 못하는것이 인간심사이다. 환언한다면 선택된 감독자를 감독하는 감독기관은 누가 감독할것일가? 하는 문제이다. 행정조직상 잠규칙은 상급이면 경이원지하고 동급이라 하더라도 삼가하여야 하는것이다. 그러니 썩은 사과를 주어내고 주어내도 내리내리 그냥 썩기만할게 아닌가? 이건 진퇴량난도 아니고 호미난방도 아닌 치국철학이다.     분노하기에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있다. 인간은 화가 나야만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고 하는데 분노한 집단과 분노하지 않은 집단의 문제해결 성과를 비교했을 때 분노한 집단이 더 성과가 높았다고 한다. 역반심리라 할가? 그러나 민초들은 분노하다가 체념에 이른 상황이지만 새롭게 강화되는 반부패력도를 기대한다.     얼마전까지만도 부패문제상에서 우리가 늘 들은것은 관방의 틀에 박힌 말이였는데 이를테면 부패분자는 극소수이고 개별현상이라는것이다. 그런데 부패문제에  사정없이 “금고봉”을 휘둘러 일망타진하려고 잡도리하면서부터 “부패가 개별현상”이라는 “정치적수(政治修辞)”를 신중하게 제기하거나 적게 하고있다. 이는 현실에 립각하지 않으면 안된 치국지도의 승화이다.     관원들의 부정부패는 전지구촌적으로 보편적으로 만연되고 있고 그 방지대책이 일대 난제이다. 미국의 학자 아미테 아이죠니가 반부패를 론하면서 관원들의 부패를 철저히 근절시키려면《한두개의 썩은 사과를 골라낼것이 아니라 마땅히 사과를 넣어둔 광주리나 상자를 검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심사숙고해야 할 경세지언이다.                                     2007 년 8 월 13 일 ㅡ2014년 9월 28일 수정보충
721    (중편소설) 어긋난 연분 댓글:  조회:4047  추천:0  2017-05-16
                                                                             어긋난 연분                                                                 최 균 선                                                                     1         참으로 세상은 넓고도 좁다하고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말 그른데 없다. 그사람, 평생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도 감히 만나볼 엄두도 못내였던 그 남자를 무도장에서 만날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필연은 아닐테지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우라 할것이다.     무도장에 늘 다니다보면 자연히 춤짝을 뭇고 차차 배짝도 되여 늘그막 로맨스로 열을 올리는게 관례이지만 그녀는 고독이 지겨워서 이 무도장 저무도장을 다니면서 요청하는 남자가 있으면 몇바퀴 돌며 소일할뿐 무슨 석양의 열련같은것에는 흥취가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조화인지 새로 개업한 석양무도청에서 잊은듯 차마 잊혀지지 않고 가끔씩 꿈자리에도 나타나던 그 사람과 해후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동안 세월은 몇십굽이를 휘돌아 흘렀건만 첫눈에 들어온 그 영상이 대번에 녹쓸어버린 기억의 대문을 활짝열고 들어섰다. 농사일에 찌들리는 청년답지 않게 그냥 패기에 넘치던 근육질의 남자, 훤칠한 체구에 어깨가 유달리 넓은 청년이였다. 비록 한창때처럼 숱이 많지 않았지만 굽실굽실한 반양머리의 흔적이 력력한데다 리지적인 너부죽한 이마아래 정나미돌던 그윽한 눈빛은 별로 색바래지 않았고 날선코마루와 거의 녀성적이여서 좀 이색적이던 입모양도 별로 변한게 없었다.      지금와서 말하기는 격에 맞지 않지만 분명 혹해버렸던 첫사랑이였다. 오래까지 사랑하지 못한자가 스스로 부끄러울뿐이라는 자기위안을 다림질할수록 이왕지사가 피 려지며 잠을 쫓아냈다. 그는 어떤 마음일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가? 자꾸 발을 헛디디며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는 자신이 민망했지만 팔리는 눈길을 거둘수 없었다.     한번도 녀자의 정에 젖어들어보지 못했다던 남자의 마음에 상처인들 오죽했으랴.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는것은 죄될것이 없을진대 나는 죄인이 아닌가? 그녀는 지금의 자기 감각과 마음을 자신이 장악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길 없었다. 결코 늙어서만도 아니였다. 어쩌면 인류의 언어로는 형용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참괴한 일이지만 거의 반세기 세월이 흘러갔어도 잊어버릴수 없었다. 망각해버리기엔 기억에 너무나 깊숙이 새겨졌고 평생 갚을수 없는 빚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였다. 숱한 빚은 갚을 날이 있어도 자신이 진 감정의 빚은 갚을수 없기때에 기억의 홈타기를 자괴감으로 채우면 가장 절절한 후회가 되는걸가? 워낙 잘 그리지 못한 그림에 검은색 크레용으로 마구 덧칠해버리는 심술난 아이의 마음같은것이랄가?                                                             2       기억도 생생한 처녀시절, 새벽농대를 다니던 때는 그야말로 신주대지를 진감하는 혁명년대인지라 저마다 렬화금강이 되려고 윽윽하던 격정시대였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속에서도 출신이 명랑하지 못했지만 동학들속에서 인끔이 높았고 웬간한 남자는 찜쪄먹게 못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공량을 바칠때는 200근짜리 콩마대도 등에 지고 아찔한 발판을 씨엉씨엉 올라가서 꼬리없는 암소라는 탁호까지 얻었다. 그래서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지 않는지 련애를 걸어오는 남자라곤 없었다.     세개 큰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에게는 두개의 큰산이 있었다. 첫산은 지주성분이고 두번째 큰산은 딸만 아홉인 집에 맏딸로 태여난것이다. 성분이 좋다하더라 도 처가가 될 집에 딸만 아홉이란 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뒤주춤할 일였다. 그러다보니 그런 란리판에도 련애하느라 야단들인데 그녀만 “수녀”질 하였다. 수녀원도 아닌 학교에서 남몰래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것도 아니여서 자신에 분통이 터질일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반에 차명훈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편지 한통을 건네여주었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설마 명훈이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처지에서 별스레 련애편지 따위를 쓸 그런 맹충이 아니였던것이다. 평시에 누구보다 잘 리해하여 주고 은근히 동정심도 쏟아주는 그였지만 성분도 마다하고 랑만적인 로맨스를 엮으려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터인데 이 무슨 장난질인가?     “무, 무슨 편진데 반장동지가 이렇게…”     “내사 알턱이 있나? 어떤 친구가 부탁한 편지니까 련애편지 아닐가?”     “련애편지? 무슨 생뚱맞은 소리요? 누가 나에게…그리고 그렇게 혁명적인 명훈동무가 나같은 사람에게 오작교를 놓아줄 생각을 다 하였소?”     “사정이 그렇게 되였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혁명은 혁명이구 인정은 인정이지, 실은 중학교때 절친했던 친구였는데…문학을 하는 친구라서 달착지근할걸…”     명훈이는 익살맞게 눈을 찡긋하고는 휘파람불며 돌아섰다. 암만 생각해도 지꿎은 명훈이의 장난질로 치부해버리는게 좋을것 같았지만 난생 처음 받아보는 련애편지라 면…가슴이 팔딱팔딱 뛰였다. 편지임자가 누구든간에 자기에게 편지를 쓸만큼 마음이 따스한 남자일것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확 붉어올랐다. 그는 한달음에 학교건물뒤 사람없는 곳에 숨어앉아서 읽고 또 읽었다.     춘여동무,     몹시 놀랍지요? 안면도 없는 처지에 이런 편지를 쓰는것은 지금같은 시기에는 너무 엄청난 일이니까요. 그러나 워낙 용기가 없는 사람이여서 편지로써 서로를 알고 지낼 길을 닦을수밖에 없음을 리해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사나이로서 벼르고 별렀던 마음을 곧이곧대로 쏟아내니 끝까지 읽어주면 고맙겠습니다.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로서 하많은 말을 억제할길 없군요. 나는 련애편지에 보통 잘 쓰듯 대번에 감동을 안겨줄 미사려구를 떠올릴수 있지만 동무에게 처음으로 쓰는 이 편지에는 화작을 부릴생각을 접고 그저 솔직하게 쓰겠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말하면 누구들보다 량심으로 진정성을 담보하겠습니다.    춘여동무는 나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지만 나는 유일하게 친구로 남아있는 명훈에게서 동무에 대하여 잘 료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처지는 못되면서도 같은 처지에서 오히려 서로를 송충이를 꺼리듯하는 때에 혹시나 춘여동무만은 나를 리해해주고 시작부터 비뚤어진 인생길을 함께 걸어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요행심리에 내 전부를 걸고 이렇게 씀니다. 리해는 사랑보다 높다고 하지요. 사랑이란 모든 젊은이들의 자연발생적인 감정이지만 나같이 못생긴 새끼오리로서는 본성인 사랑의 감정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그래서 동무라면 나의 사랑의 감정을 엿보아주시고 나의 실락원에까지 이어줍시사하고 하소연 하는 바입니다.     착하고 녀자다운 모습과 인품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동무에게 한 남자의 충정으로 고백합니다. 누구도 쉽게 받아주지 않을 운명을 타고난 나에게 이른바 행복을 안겨준다고 장담못하지만 적어도 사랑에 굶주리지 않도록 한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할수는 있습니다. 동병상련이 오히려 우습게 되여진 현실에서 우리 손에 손잡고 인생길을 끝까지 가줄수 있다면 이한 생명을 다바쳐 인생반려로서의 기쁨을 누려보려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빌어다가 빚는게 아닌줄 압니다. 동무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떤 공통점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요? 이렇게 고백은 하되 소중한 동무의 순정을 흐리우지는 않겠습니다. 저 울밑에 백일홍 이 내마음의 위로가 되여주듯이 리해하고 믿음이 되여주십시오. 불우한 내인생길에 지팽이가 되여주고 용기와 힘의 동력으로 되여줍시사 하고 내마음을 골방을 다 털어 냈으니 사랑의 천사, 아니면 내 어두운 삶의 마당에 외등이 되여줄수 없을가요? …………………………………………………………………………………………                                                        1968년 7월 12일                                                                       남이  드림       그녀는 마치도 감정이 풍부한 풋내기 소녀가 첫사랑의 감정에 미혼탕을 먹은듯이 생각의 문도 꽉 막혀버리는듯 하였다. 그는 낯모를 남자의 마음을 너무나 잘알것 같았다. 자신의 처지를 보아도 결코 순간적으로 떠올려보는 눅거리 동정심같은것이 절대 아니였다. 그는 자기 감정의 진실대로 살아왔던것이다. 자신도 외로움과 드러낼 수도 없는 괴로움으로 얽힌 삶의 진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평생을 기탁할수 있는 미더운 남편을 얻는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있었지만 득세하여 떵떵거리는 남편을 바란다는것은 그림에 떡이라고 단정한지 오래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바엔 차라 리 인정스러운 남자의 넉넉한 사랑속에서 농가부녀로 살고싶은 그녀였다.     장황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울리는 그의 고백에 감동의 여울이 일렁이였다. 한번 보지도 못한 남자이지만 정말 편지에서 비쳐지는 그런 풋풋한 사람이라면 마다할 리유도 없을것이다. 성분타령을 하다가 시집가서 한풀 꺾이고 사는 녀자애들을 많이 보고있는터이다. 인간의 감정에서도 가장 슬기로운 감정인 녀성적인 련민의 정도 씨알 마냥 저도모르게 익고있었다. 자신을 리해하는것은 위안의 고전적형태일세 자신을 벗어나서 아름다운것을 지향하는것을 랑만이라 하는가?     녀자들에게는 육감외에도 예감이라는게 특히 중요하다. 다른 녀자애들도 거개 그랬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봉건성이 짙은 가정에서 자라나서 보수적이였지만 괄괄한 성미를 가지고있었다. 회답을 쓰든 만나보든 헤덤비지는 말아야 했다. 편지한통으로 홀딱 넘어갈수는 없는 일이였다. 편지는 어쨋든 엮는것이다. 편지글을 직접 심장으로 쓸수 없지 않는가, 그녀는 기회를 보아 명훈이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명훈히, 나에게 속이지 말고 그 남자에 대해 죄다 말해줄수 있겠소?”     “그 친구 편지에 자기소개를 아니하던가? 좋소. 노여워하겠지만 사실 내가 그 친구에게 춘여를 소개해주었소. 그친구 참 불쌍한 친구야, 공부도 잘했고 작가꿈도 있는 애인데 그만 세상에 잘못 태여났지. 성실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이루지 못할줄 알면서도 글뒤주라오. 지금은 발표할수 없지만 쇠힘줄이라오…무엇을 속이고 감추고 할것두 없소. 그친구 치명적약점이라면 출신이 나쁜것 말구는 인간적으로 참 미더운 사내라구…낯모를 처녀에게 그렇게 편지질부터 먼저 하는 경망한 친구는 아닌데 아마 내가 군침을 삼키게 했는가봐 하하하…”     “나는 명훈이가 어떤 사람이란것을 잘 알고있기에 믿음이 가지만 그래도 처녀로서 어찌 허타이 회답편지를 쓰겠소?”     “그럼 한번 대면해서 대화해보던지.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구 만나보면 호랭인지 시라소니인지 알게 아니요? 사실 내가 말해도 생각해낼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춘여에게도 전혀 생면부지의 친구가 아니요. 참, 그런데 내가 춘여에게 남자를 소개해주었다는것을 남들이 모르게 해주기 바라오. 사연이야…”     “걱정말아요, 그럼 그 사람 한번 만나게 련락해주오”     “그 사람 룡산에 사는데…곧 기별해줄게, 허, 로처녀씨가 싱숭생숭해졌나?”     “정 그러기요? ”춘여가 얼굴을 붉히며 종알거렸다.     일요일, 한침실에 친구들이 다 집에 가고 없는 숙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외간남자를 숙소에 불러들인다는건 좀 모험적이긴 했지만 추운겨울 어디가서 이야기 를 나눌곳도 없었다. 약속한대로 오후에 명훈이가 한 청년을 데리고 슬그머니 들어섰다. 남자를 보는 처녀들의 눈은 천성적으로 혜안이다. 농사군답지 않게 끼끗하고 균형이 잘 잡힌 청년의 듬직한 몸가짐에 긴장으로 조금 경색된 눈에서 진심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좀 갈아앉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한 억양에서 내심의 격동이 은은히 메아리치고있었다.     그런데 이런 희한한 만남이 있단말인가? 명훈히 말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이 아니였다.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가끔 고마운 마음속에 떠올려지기도 한 남자였던것이다. 인연이였나? 지난 겨울, 공구량을 바치러 다니던 어느 날 밤이였다. 그날도 남자들과 함께 “량잔”에서 마대치기를 하였다. 처음에는 본때스레 메여올렸지만 차차 힘에 부침을 느끼였다. 필경 녀자라서인가? 아니면 온하루 너무 무리한탓인가?     마지막 벼마대를 어깨에 올려놓고 휘청거리는 발판을 오르는데 어쩐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힘이 싹 빠져나가는듯했다. 발판 중간쯤에서 정신이 아찔해나며 뒤로 번져질것같았다. 자칫 벼마대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날엔 죽지는 않더라도 크게 상 할판이였다. 다른 생산대 공량군들도 벼마대를 메고 뒤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급해났던지 모른다. “아차!”하는 순간이였다. 벼를 뒤주에 쏟고 내리는 발판으로 들 어섰던 한 청년이 눈치빠르게 “잠간만!”하고 소리치며 훌쩍 뛰여건너와서 벼마대를 받아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는 그녀의 팔도 잡아주었다….     …그때 그저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헤여진후 어디서 사는 사람인지 알수도 없었지만 뜨락또르위에서 마대를 메여주던 명훈이는 그 장면을 다 보았다. 그러나 춘여가 묻지 않는 일을 싱겁게 말해줄수는 없었다. 그후 언제가 길에서 만난 남이가 새벽농대에는 남자꼬부래가 그리 많아가지고 녀자를 마대치기를 시키냐고 힐난하였다. 그래서 말이 난김에 춘여가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다보니 늘 자진해서 적극성을 발휘하는데 정말 못말리는 녀자라며생각이 있으면 소개해줄 의향도 내비쳤더랬다. 물론 그녀는 그런 내막을 가지고 있는줄을 알리없었다.     “아이참, 알구보니… 어쩜 이렇게 공교로울수 있나요…그날 정말…”     “글쎄요, 그 발판이 오작교노릇을 한것인지도 모르지요.”     남자는 사람좋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정이 뚝뚝 흐르는 편지를 보내던 남자를 직접만나 몇마디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가슴속에 고요히 잠자고있던 녀자의 특성이 걷잡을수 없이 대번에 눈을 뜬것을 느끼며 그녀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방에 대한 인상은 첫 3초에 결정된다던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하고나서 곧 형성된 자신의 감정이 옳다고 판정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자신이 그랬다.     하긴 녀자 나이가 스믈다섯이니 그의 본능과 욕망은 한껏 성숙되여 터질때만을 기다린던 참이였다. 녀자로 태여나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였다는 신비로운 광환에 싸여 불행에 대한 동정심으로 온몸이 팽팽해졌고 가슴이 울렁거릴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가슴에 딱 찍어말할수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 그가 아무리 험난한 길을 멀리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 천실만실 사랑의 꿈을 엮는듯싶었다.    억눌리며 자라서 더없이 순해빠지고 성실한 처녀들이란 일단 한 남자를 믿기시작 하면 연분이라 생각할수도 있다. 그녀는 진실한 넋의 지향에 이미 끌려들었고 그 끌힘이 남자를 더 친근하게 다가서게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가슴속에서 미묘한 파문 이 일어나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면 안된다고 단속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신을 내맡기기로 작심했던것이다…                                                                                         3       남이도 심심풀이로 나가보던 무도장에서 늘 기억의 갑속에 꽁꽁 챙겨두고있던 아픔의 주인공인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해에게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해주었지만 자기의 그 복잡하게 얼킨 정한의 갈피는 다 말해줄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일때문에 한번 의심을 가져보지 않던 마음씨 너그러운 안해는 때때로 롱담하듯 혹시 그때 그 춘여라는 녀자를 안해로 삼았더라면 인생이 또 다르게 엮어졌을수도 있었는지 모른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춘여라는 녀자를 다시 만난것은 순전히 우연일세 더 깊이 생각한다는것은 안해 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 충격을 받은탓인가 달빛이 처량하게 비쳐드는 서재에 앉아 애꿎은 담배를 태우노라니 이왕지사가 담배연기처럼 스물스물 피여오른다. 세월은 반듯한 소녀의 이마위에도 깊숙한 흔적을 남겨놓는다. 함께 춤을 추면서 눈빗 질해 보니 모진 세월속에서도 탐스럽던 옛모이 용케도 남아있었다.     녀자는 용모가 뛰여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여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여나면 지성이 모자란다고 어느 책에 써있었는데…체대가 덜썩 크지 않지만 탄탄하게 생긴 녀자로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큼 요염하지 않았지만 잘 짜여진 몸전체에서 은근히 내비치는 아름다움은 오직 첫눈에 반해버린 사람만이 기쁘게 보아 내고 흔상할수 있는 그런 숨겨진 은은한 미였다.     그녀의 모습에는 진실한 감정이 깃들어있었으며 녀자로서는 남달리 씩씩한 기상이 넘치고있다.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고 남자의 이마와 같았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에서는 순정이 담기여 어덴가 애련한 멋까지 풍기고있었다. 야들야들하고 해맑은 얼굴살갗이 해볕에 그을어있었지만 여전히 보드랍고 섬세하였다. 특히 다소곳한 자태 가 탐탁하였다. 첫눈에 벌써 깨끗하고 성실한 덕성을 갖춘 녀자라는것이 읽혀졌다, 부드러운 감정같은것은 이 시대에 부차적인 자리밖에 안되였다. 그들은 인생을 자기 들의 어렴풋한 견해로 평가할뿐이다.       남들은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 자신도 느끼지 못할수도 있는 반듯한 이마아래 그윽한 눈길속에 사랑의 세계가 몽땅 깃들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 고 그의 눈모양과 눈시울이 움직임속에서 이렇다 꼭 말할수 없는 숭고하기까지 한 매력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것이 첫눈에 떨쳐버릴수 없는 욕심을 부풀리였다…     그처럼 지울수 없는 좋은 인상을 새겨주었던 녀자는 결국 함께 할수 없게 되였다. 차거운 세월은 그의 가슴속에 피가 림리한 상처에 소금물만 뿌려주었다. 그 세월에 그가 무엇을 애석하며 무엇을 부등켜안아야 하는가? 더 버덕거릴 일도 없고 자신마저 사랑할 리유도 없는데 심장을 박동하게 할 동력이 있었던가? 부정만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사방은 캄캄한 어둠의 절벽뿐이다. 이런것을 진퇴유곡이라 하는걸가?      그럼에도 떨쳐버릴수 없는 어떤 욕망이 속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며 올라오는 몸부림은 대체 무엇인가? 질기고 질긴 생명의 끈인가? “부딪쳐야 해, 이 절망의 심연속 에서 헤염쳐나가야 해, ” 사냥군의 총탄에 상처를 입고 일어서려고 버둑거리는 어린사슴이 그때의 남이의 모습인가…. 그때 남이는 그렇게 고통에 모대기였다. 인생이란 본디 끝없이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때론 유유히 흐르다가도 때론 거세찬물결에 물 바래일며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삶과 죽음, 영예와 치욕은 객관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하게 되여있으므로 사람의 욕망과 의지로는 도무지 돌려세울수도 없는 법칙이다. 인생무상이란 말을 알지도 못해서 그저 그렇게만 생각되였다.    사랑이란 일상적인 사소한 타산이나 충동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분노, 질투심, 일반적으로 모든 정열이 다 그것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것을 남이는 더 뼈저리게 절 감했다. 인생이란 변화무상한것이여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 꼭 잡아주는 보이지 않은 손길이 뻗쳐오고 숨돌릴 공간과 자신을 정리할 기회를 준다. 희망, 그리 고 창망한 앞날을 기약할수도 있다. 그리고 망연자실하여 어쩔바를 모를때 발밑에 또 한갈래 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그 녀자였다.     …그날, 녀자는 만약 녀동생이 여덟이나 되는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허락을 받자고 제의하였다.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은 격이라 남이로 서는 마다할 리유가 없었다. 너무 진도가 빠르다는 우려도 할 계제가 못되였다. 너무 로쇠해서 때시걱을 겨우 차려주는 로모를 생각해서라도 마른나무꺾듯해도 좋을듯싶었 다. 그러나 이 춘여라는 녀자는 대번에 마음을 주어도 랑패는 없을것으로 믿어졌다.     그들은 새벽농대의 넓은 교정을 나올때는 서로 떨어져 걷다가 인하촌으로 가는 대통로에 올라서서는 나란히 걸어갔다. 해질무렵의 겨울바람은 뼈를 저밀듯이 옷속을 칼질하였다. 동그마니 한족솜옷차림인 그녀의 얼굴은 익은 사과알이 다되였다. 남이는 두툼한 목도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춥겠구만. 목이라도 시리지 말아야하지, 얼른 감소.”     “동무는? 그러다가 감기걸리면 어쩌려구”     “괜찮소. 나야 남자구 또 고깔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지 않았소?”     말을 하고보니 좀 안되였다. 언제 친해졌다구 “하오”소리를 하다니? 녀자가 그냥 사양하자 큰 마음먹고 바싹 다가가 녀자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녀자의 뜨거운 입김이 코를 간질렀다. 둘다 얼굴을 붉혔다. 금방 사귄 녀자의 손을 잡는다는것은 대 역부도한 일이라 그러지는 못하고 벙어리장갑까지 내주었다.    녀자의 따스한 눈길에서 은근히 감동을 받았다는것을 느낀 남이는 칼바람이 몰아쳐도 세상끝까지 가고싶은 마음에 온몸이 후끈해났다. 그녀를 위하여 한 남자로서 무슨 행복의 동산은 못쌓아주더라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들은 나이도 어리지 않은지라 말없이 걸음만 재촉했다.     “참, 명구란 그 사람 친구인가요? 동무를 불러세워놓고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했나요? 혹시 저에 대해서…”     “아니, 두루두루 알게 된 사람일뿐이요. 춘여가 그사람을 어떻게 아오?”     “새벽농대 농장에서 뜨락또르를 몰지요. 평판이 하두 나쁘길래 나두 알아요. 친구가 아니라니 좋아요. 제가 괜히 물어서…”     녀자가 왜 캐여묻는지 까닭을 알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예감은 되였다. 사람을 그 저 깔볼 권리는 없지만 명구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두루 알게 된것이다. 그런 영광의 나날에 환난을 같이 겪은 친구였지만 그후 가끔 길에서 만나도 도무지 친해지지 않아서 별로 상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녀자와 함께 나오는것을 보자 불러세우고는 횡성수설 끝이 없었다. 저만치 떨어져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춘여를 기다리게 하는것이 안되여서 그냥 뿌리칠가 하다가 혹시 호사 다마일지 모를 일이라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명구가 하는 말을 귀등으로 흘리며 그가 춘여에게 단단히 악감을 먹고있다는것을 얼핏 간파해냈다. 지주성분에 딸이 아홉이나 되는 집에 사위가 되려하다니? 머저리같은 생각을 한다며 훈계조로 나왔다. 말은 다하지 않았지만 아마 깨진 남비에 꿰맨뚜껑이 되는격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으나 명구는 그런 말을 생각해낼 머리가 못되였다. 침을 튕기며 말을 하다하다 네 딱친구 성남이가 한마을에 성분이 나쁘지만 참한 녀자가 있는데 소개해주겠다고 하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성남이란 학교때 의기상투하던 태평촌에 친구로서 지금 어느 산골에 가서 선생질 하고있었다. 성남이는 진정으로 생각해 줄수 있다고 믿었지만 명구의 말은 믿기 찜찜 했다…그래서 더구나 명구가 한말을 녀자에게 곧이 곧대로 다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명구의 됨됨이로는 춘여를 먹고싶을 때 베여먹을수 있는 칼도마위에 고기덩이쯤으로 생각할수도 있어 아무짓이나 하고도 남을수 있었다. 춘여와 명구라는 존재를 련계지 여 생각하는것조차 불쾌해지면서 공연히 분통이 터지였다.     “명구란 그 친구에게 무슨 선견이라도 있소?”     “아니예요. 그런 사람과 무슨?”     녀자가 작정한듯 눈을 크게 뜨고 마주보았다. 남이는 정어린 고운눈과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선이 또렷한 입술, 그래서 청순하고 다정스럽게 보이는 춘여의 얼굴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늘져있었는데 맺고끊는 말에는 서리발쳤다. 남이는 녀자의 눈을 정시하며 전파를 날렸다. (피차 아껴주는 인생반려가 됩시다. 곧 쌓아가려는 애정탑이 하잘것없는 오해로서 무너져서는 안되겠지요? 근시의 남녀가 사랑을 하는것입니다. 터무니없는 편견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맙시다. 만약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험난 한 인생길을 굽이굽이 잘 휘돌아가리라 믿습니다…)     “남이동무, 그런데 제가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대담하게 나왔는지 궁금해요.”     “울릴줄 모르던 내 마음의 현줄이 우연하게 울렸다고 할가요?”     “너무 어렵게 말해서 어리벙벙해지네요. 호호호…”     그들은 완전히 련인이나 된듯이 어깨를 스치며 정답게 걸어갔다. 추운줄도 몰랐다. 화전자골로 들어가는 산기슭에 헐망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인화9대에 도달해보니 마을동켠쪽 가파른 산발들에 듬성듬성 박힌 소나무들은 푸른빛이 외롭고 가둑나무랑 잡나무들이 가난한 마을을 지키는 초병으로서는 너무 허수룩해 보였다.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초가삼간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참, 아버지 엄마에게 한마디 연통도 없이 웨간 남자를 데리고 불쑥 들어서면 어떻게 생각할지 막막해요. 그러나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    “이미 마음다잡고있소. 넘어져봐야 어떻게 아픈지 알게 아니겠소, 오히려 가자 고하니 덜썩 따라나선 내가 너무 경망한지도 모르지요.”     “아니예요, 저만 믿고 들어와요.”     남이는 머뭇거리며 집을 둘러보았다. 지은지 오랜 초가였지만 잘 꾸며져있었다. 흔한 가둑나무를 베여다가 박아놓은 울타리도 든든했고 집이영새도 깔끔하게 다듬어 져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허접스레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예로부터 집은 그 주인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보지 않아도 옛날 지주집 살림살이 전통은 말려내지 못할것인가보다. 딸이 아홉인 집에 맏사위가 된다면 한절반 아들노릇도 해야 할것이라 생각 하니 미묘한 느낌이 가슴을 메웠다.     집안에 들어서니 한구들 가득 앉았던 녀자애들이 제언니를 할끔거리다가 올롱해진 눈길들이 내몸을 구멍내고 있었다. 물론 춘여의 어머니도 바가지에 퍼담았던 물을 도로 독에 쏟고 어정쩡해하였다. 웃방에서 담배를 썰던 집주인도 검고 커다란 두눈에 놀라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구들에 올라와 앉자마자 춘여가 입을 열었다.     “아부지. 너무 제멋대로 한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남이는 들었는둥 말았는둥하며 딸을 건너다보는 50대초의 사나이를 눈빗질했다. 세상이 바뀌고 많은 시련을 겪었을 얼굴은 풍상고초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었고 나 이보다 많이 찌들려있었지만 구들에 턱 들어앉아있는 덩치가 놀라웁게 덜썩 커보여서 저도모르게 조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어, 그래? 아무튼 우리 집 내막과 내 딸냄의 사정도 잘 알면서도 찾아왔다니 고맙네그려. 아비된 나로서는 먼저 젊은이의 가정내막도 알아야겠지? 안그렇소? ”      남이는 생면부지여도 사회적으로 한통속인 사람앞에서 별로 꿀릴것도 없다싶어 곧이곧대로 이실직고하였다.     “허어, 아직 나이가 어린사람이니 나와는 다르겠지만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텐데 주눅이 들지않고 씩씩한 모습이 마음에 드네그려. 충분히 믿어지네, 그런데 어쩌나? 자네도 우리같은 사람들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란지 잘 알겠지? 동병상련이라 서루 마음이 못통할것두 없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구만. 툭 찍어말하면 저애가 정한 일이니 마다할 까닭은 없지만 내가 지금 너무 뒤몰리다보니 딸들만은 성분이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여 마음고생을 하지 않고 살게 하고싶다오.”     “그러시겠지요. 충분히 리해됩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마음을 제가 설득해서 곧 풀어질 일이 아니라는것도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른나무 꺾듯이 할 일도 아니니고 해서 오늘 제가 절을 올리고 허락받자고 온것은 아닙니다.”     “좀 까다롭게 생겼다하고 생각하는데 말 한번 시원허이. 그래 시국이 시국이고 한 딸애의 종신대사이니 사람을 더 지내보기두 해야겠지비, 그러니 오늘은 이쯤하세. 이제 밤이 되였고 모아산꺼정 가려면 길이 멀테니 저녁이나 드시고 나와 저 웃방에 서 묵고 래일 돌아가세.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말구 마음을 너르게 가지게나”    춘여는 고개만 푹숙이고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녀가 부모앞에서 항변이라도 해야 하는가? 남이는 그러는 녀자를 너무 잘 알것같았다. 마음같아선 당장 일어나고싶었지만 체면도 있고해서 눌러앉았다가 저녁밥을 얻어먹기로 작심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을 어떻게 할수 없는지라 그냥 먹던듯이 차린 저녁상이였지만 점심도 굻은 그로서는 별식이였다. 그래서 잡담제하고 맛갈스럽게 먹었다. 혼사말은 제쳐놓고 일 상얘기를 좀 나누다가 저녁설겆이도 끝나는것같아서 자리를 차고일어섰다.      “저녁까지 대접받았으니 전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집에 혼자 계시는 로모가 걱정도 하실터이니 아무래도… 여러가지로 페를 끼쳤습니다.”     밥술도 드나마나하던 춘여가 마침내 격한 목소리를 말했다.     “아부지,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한것은 제 잘못이지만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마음속에 결정한 사람임다. 그런데 제맘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그리고 먼길을 온 사 람을 단마디로 퇴박줄수 있슴까? ”    “쯧쯧, 이것아, 산전수적 다겪고 인정사정 다 아는 이 애비이기에 그러는거다. 내 라고 이러는게 마음이 좋을줄 아느냐?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세월을 탓해야지, 장래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두 이렇게 하지 않을수 없는게다. 사람이 평생을 두고하는 마음고생이란게 어떤지 너도 가히 상상수 있을거다. 후유ㅡ”     말꼬리를 사리는 아버지의 눈빛은 처절했다. 바람든 무우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토하며 웃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맏딸로서 그러는 아버지를 더 닦아세울수도 없 는 일이였다. 남이가 차려야할 례절은 다 차리고 녀자네 집을 나서니 랭기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뒤따라 나온 춘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 밤길을 어찌가나요? 원래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것 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말고 우리 장기전을 합시다. 예? 내마음은 절대 꺾이지 않을것입니다. ”    “나 춘여의 처지와 마음을 너무 잘 읽고있소.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소. 얼른 들어가보오, 옷도 걸치지 않고 그러다가 감기들겠소, 자, 그럼…”    그말은 둘사이에 묵계일가.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가장 깊숙이 숨겨둔 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춘여가 “앗차, 목수건!”하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바람같이 사라는것도 못본체하고 마을길을 내리다가 뒤돌아보니 춘여가 목수건과 장갑을 흔들 며 쫓아왔다.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필요없으니 더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하고는 홱 돌아서서 건정건정 내뛰였다.    신작로에서 숨을 돌리며 마을을 바라보니 동산에서 몰래 솟아오른 달이 찬란한 별무리를 거느리고 마을길을 여유롭게 산책하고있었다. 모멸감을 참아내던 육신에 더운피가 거꾸로 흘렀다. 사회에서 천덕꾸러기로 이런저런 수모를 받고나서는 아무데 나 퍼더버리고 앉아 꺼이꺼이 울다가 그대로 영영 잠들어버리고 싶었던 멍든 가슴이 이번엔 갈갈이 찢기는듯했고 고추물에 절어드는듯 쩌릿쩌릿하였다.    무엇을 어째야 하겠다는 의식도 뿌리채 흔들리고 래일을 바라고 애써 쌓으려던 사랑탑도 물먹은 토담처럼 무너졌다. 코허리에 매운 바람이 찡하니 맺히는걸 참아내 느라고 잠시 그대로 머리를 돌려버렸다. 참으로 견딜수 없이 마음이 아플 때, 금방 이라도 눈물이 솟구칠듯싶을 때 버릇처럼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녀에게 속한 한귀퉁이 하늘은 의연히 넓어보이고 구름은 의연히 유유자적한것을 보면 흐느낌도 갈앉을것이다. 죽는 일도 아닌데 왜 락심천만하는가?     남이는 그날이후 더는 춘여를 찾지 않았다. 몇달후 마침내 짤막한 편지를 썼다. 잊어버리기 위한 작별의 편지라고 할가?       “춘여, 나라는 사람이 일컬어 참된 사랑을 이루려는것이 얼마나 허황한것인지 비로소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시종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자존심마저 완전히 포 기할수도 있는 그런 남자로 자처해 왔습니다. 추호의 거짓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 랑을 춘여에게서 이루어지리라 믿었던것입니다. 나를 무서운 고민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줄듯 싶었던 녀자, 그러나 곧 그 혹독한 고독과 절망속에 던져버린 녀자로 충당 되여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합니다. 춘여씨의 본의가 아니래도 말입니다.    봄은 간다는 말도 없이 살그머니 여름의 록음속에 숨어버렸군요. 꽃과 나비춤, 그리고 푸른잎새를 기약해주고 가는새없이 가버린 봄, 뒤따라 하늘도 산야도 대기마저 다 짙푸르게 물들어버린 6월이 무성하는 7월을 불러올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시국은 시끌벅적해도 인간상정으로서는 꽃피는 아침에 꽃을 사랑하고 달이 밝은 밤이면 달에 매혹당하는 평화롭고 평범한 삶의 나날은 변할것이 없지요. 나는 그대와 꿈도 알락달락하게 지극히 감성적이고 향락적인 이성의 일면보다도 그렇게 해서 불태우는 정열이 가져오는 사그라들지 않는 생의 욕망과 용기를 안고 내 불우한 인생을 나름대로 가꾸려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결혼했기에 사랑하며 한가정을 꾸린다는 그러한 관념적인 사랑만이 아니였습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운명이 나를 그렇게 자위하게 만들었고 나름대로의 랑만을 보듬게 만든것이라고 리해하면 우습지 않을것입니다.    조물주가 남자의 마음에 심어준것은 사랑과 추구의 용기이고 녀자들의 마음에 심어준것은 두려움과 사양하는 담략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오름니다. 하긴 이 세상의 모든 남녀가 누리는 그런 일상의 애욕도 굽이굽이 풀내려가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한 순결한 처녀를 점유하는데서 오는 보통의 남자로서의 본능적추구마저도 나에겐 허무하군요. 춘여탓이 아니니 상심해 말아요. 춘여의 아버지가 세월탓이라고 하였는데 잘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세월을 이겨나갈수 있을가요?     …………………………………………………………………………………………………                                                                                     4     사람들은 서로 충성심을 불태우며 혈안이 되여 시간가는줄을 몰랐지만 화살보다 빠르게 도르래기 돌아가듯 빙빙 도는 지구는 백여도 자전하는 동안에 적설이 길길이 쌓였던 산과 들에 비단을 깔아놓은듯이 푸른 풀이 우거지고 강건너 룡처럼 굽이쳐 내 려가 룡산촌 뒤산에는 살구꽃들이 화사하게 웃기시작했다.     낮에 한동안 실실이 내린 첫비가 하늘을 말끔히 걸레질하여 더없이 청청했다. 고향의 동산에 둥실둥실 떠오른 달님은 금시 목욕을 하고 나온 소녀의 청신한 얼굴 마냥 유난히 아름답고 깨끗하였다. 남모르게 타들어가는 속을 식혀볼가해서 옛날 비 행기활주로에서 홀로 바장이던 춘여는 저도 모르게 해란강가에까지 나왔다.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흐르고있다. 멀리 서쪽켠에 모아툰으로 통하는 해란강다리가 커 다란 뱀이 걸린듯 우중충하게 안겨왔다. 그녀는 저도모르게 그 남자를 생각했다.     비록 깊이 사귀여보지 못했지만 그 남자네 마을의 생산대장에게 시집을 간 한마을의 소꿈친구 영자에게서 그 남자의 내속과 살아가는 모습을 전해들으면서 더구나 망각할수 없었다. 망각하기엔 너무나 깊숙히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어 마치 유리알같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잔인한 운명이란것도 빈구석이 없이 실감할수 있었다. 그는 비판투쟁을 밥먹듯하며 살고있단다. 만약 그 남자가 막연한 래일을 바라고 운명과의 사투를 포기했더라면 언녕 열번도 넘게 저승사자앞에 섰을것이다.     남들은 혁명하느라 밤낮으로 구호를 웨치며 돌아다녔지만 반란파에도 들 자격이 없는지라 맨날 똥진오소리처럼 일만하였다. 그녀의 뇌리에는 남자를 처음 만나던 일 과 남자가 둘러준 목도리의 따스함을 가슴으로 느끼며 함께 걷던 그날의 자기와 그후의 그럭저럭 지나간 나날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치 아득한 먼옛일처럼 운무에 가리운듯 아무리 그려보아도 그 영상이 좀처럼 눈앞에 똑똑이 안겨오지 않았다. 자책감과 후회가 클수록 절망이 커지는가? 자기와 같은 경우에는 후회가 뼈저릴수록 자책감이 무거워지는것인가?     그래서인지 눈만 감으면 그 남자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지척이 천리라고 한시간도 안걸리게 걸으면 모아산아래 그 남자네 동네에 이를수 있었지만 먼저 찾아 갈 용기가 종시 솟아니지 않았다. 그렇게 밤길을 더듬어간 그 남자는 마지막 결별의 편지를 보내고는 아무소식도 없다. 상념은 무리를 찾아헤매는 외기러기처럼 번민의 무리를 찾아 맴돌이치기가 그 몇십번이였던가,     혁명이 고조기에 이르면서 하루건너씩 “최신지시”가 내려올라치면 한밤중이라도 학교마당에 모여서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불멸의 태양이 내린 “최고지시”를 외 워대며 공사마당에 집중하여 경축대회를 열었는데 그 자신으로 말하면 국외인으로서 덩달아 해야 하는 충성이였고 남들이 웨치니까 웨치기만했다. 말이 새벽농업대학이지 그저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농사짓고 비판투쟁을 하는게 업이였다.     원래 자기와 같은 오류분자의 자제로 대학생이란 명칭을 띠기에도 하늘에 별따기 였지만 초대학생회 회장인 명훈이가 힘을 써서 입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니 훌쩍 떠나버리기도 안되였다. 졸업증이나 타겠는지 모르고 탓다고해도 크게 해볼데가 없는 줄 알면서도 그래도 어울려주는 무리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가 생산대에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는터였다. 동학들이 찬눈길로 보지 않는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누구의 도움도 바랄수 없는 꽉 막혀버린 자기의 처지에서 깊고 내밀한 아픔들을 혼자 보듬어야 하고 그러노라면 가슴은 온통 갈기갈기 찢긴 칼자리뿐이였다. 저절로 한숨이 애를 끓였다. 남녀사랑이란 그렇게 빈약하고 그렇게 쉬이 무너질줄이야, 높은 리상도 아니고 그저 마음에 드는 남자와 농가의 향락을 누리며 살려는 안일한 지향이 그렇게도 어려울줄이야, 남들은 그렇게 쉽게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사는데…     편지에 쓴것처럼 그 남자는 절절한 사랑의 애원이 있을뿐 애욕의 성급함이라 전혀없다는것을 녀자의 본능으로 느끼였다. 그를 바라볼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 나 그남자의 눈길은 가슴에 끓어넘치는 격정을 감추고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에는 똑같은 감정이 비끼여 있었고 두마음은 하나의 생각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마지막편지가 될줄은 생각못하고 난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남이동무:    안녕하십니까? 지금도 저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지요? 물론 저의 아버지가 그 냥 허락을 하지 않고있지만 사랑문제는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마음을 달리 먹지않기를 간절히 바람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는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먼저 사랑을 버리고 더 오래까지 사랑하지 못한자가 스스로 부끄러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서로 그런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래요.     눈에는 두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육체의 눈,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말이예요. 육체의 눈은 가끔 잃어버리는수가 있지만 마음의 눈은 항상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요. 비록 겪어보지는 못했으나 동무의 량심적이고 인격적인 정열을 그리며 몸이 달아오를 때 이것저것 망서리않고 한달음에 달려가 자신을 훌 맡겨버릴가 하는 생각을 한두번 한게 아니였습니다. 녀자로의 수치심을 덮어버린 진심입니다.     남이씨를 알고나서 오래 고이키웠던 로처녀의 순정과 단조롭던 생활에도 마침내 달콤한 시간이 찾아들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해빛이 나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룡산중턱에 진달래꽃도 더 붉어보였습니다. 성숙한 정염의 신비한 동경속에 부끄러운 욕망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쳤습니다.    우리들은 무엇때문에 이미 마련된 행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가? 무엇때문일가? 우리들은 남들보다 못하지 않는 아름다운것을 얻기 바라지 않는가요? 그런데 결과적 으로 얻기도 전에 왜 잃어버려야 합니까? 남은것이란 미봉할수 없는 가슴을 저미는 한단락의 추억뿐이여서 매양 후회의 심연속에서 모대기에 됩니다.    신화를 그리워하고 영원을 생각하는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해주던 그 말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순간에 있어서 주의를 생각하고 현실을 생 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순수성을 모독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고하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하든 그것이 남녀의 사랑의 특징이고 평범한 사랑의 생리임은 사실이지요.     슬픔에 찢어진 나의 가슴은 나날이 갈마들던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잠시동안이 나마 벗어나 순결한 넋이 안겨주는 더없이 살뜰한 애정과 감미롭고 미묘한 동경과 이성애의 환락속에 한껏 젖어보기도 하였던 저입니다. 몰래 한숨을 삼키고는 무겁게 마당을 나서던 동무의 뒤모습을 얼없이 지켜보면서 우리의 엉성한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서로 지나치도록 열정을 쏟으며 알뜰히 가꾸려던 사랑의 터밭을 이대로 내버린 다는것은 나로서는 너무너무 크낙한 고통이고 슬픔이였습니다. 나에 대한 동무의 감 정이 완전히 탈색한다 하여도 저는 완전히 지워질수는 없을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하더라도 말이예요.    휴식날 집에 돌아가 퇴마루에 앉았을 때 호젓한 앞마당에 떨어지는 나무잎 하나 하나의 소리는 저의 가슴속 깊이에 간직된 물음에 화답하는듯 싶었어요. 그러면 나의 마음은 또 소란스러운 번민으로 뒤범벅이 되여버렸습니다. 동무가 더 주동적으로, 더 용감하게 나올수는 없을가요? 나는 이미 한번 도끼질에 넘어갔지만 당신은 열번스므 번 찍어서 우리 아버지를 넘어뜨릴 그런 용기가 없나요? 기다릴게요…     그녀가 평생 장악한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말을 총동원해서 편지를 썼지만 남자는 종시 회답을 해주지 않았다.                                                                                                5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는 남이의 사나이다운 정열보다 현실성과 실효성을 지닌 명구의 지꿎은 추구가 고달픔을 한결 더 쥐여짜게 하였다. 그녀가 명구를 이를 갈며 미워하는데는 남에게 알릴수 없는 사연이 있었더랬다. 그녀는 원래 순진하고 성실한 자기의 성품대로 감정을 거슬리지 않고 자기의 믿음에 따라 인생을 가꾸려는 성미의 처녀였다. 그녀로 하여금 성분이 좋으면 다 백마왕자로 보지 않은것인지 모른다.     그가 갓 농업기계반에 입적하였을때다. 순진한 녀자애들로 말하면 거의 언제나 선량한것이라고 믿어버리거나 진실한것이라고 믿어버리는데로부터 실책이 저질러진다. 명구의 내막을 잘 모르는 그는 뜨락또른운전기술을 배우면서 명구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말을 곧이듣고 부르면 만났고 그의 말을 최신지시처럼 새겨들었다.     몸집이 갱핏한 남자였다. 가마노르께한 길쭉한 얼굴에 턱은 뾰족하고 입술은 곡선이 하나없이 다물려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입을 벌릴때마다 몸서리치게 하얀 이발 이 들어났다. 공연히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차거운빛이 내뿜기는 눈은 보통 말하는 뱀의 눈과 흡사하였다. 매부리코는 독살스러운 교활성과 짜내는 성실성과 리기주의적 욕심과 동시에 아무도 안중에 없다는 오만이 력력히 드러나있었다. 겉보기에는 흔한 남자같지만 독기를 품으면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 사람이라는것이 력연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체를 타도하는 혁명이 터지자 농장반란파의 두목이자 학교에 진출한 빈하중농대표랍시고 매양 개잡은 포수처럼 우줄렁거리였다. 명구라면 다른 녀 자애들도 딱 질색이였다. 같은 반란파지휘부에 있는 명훈이와도 수화상극이였다. 농 대의 천교장도 명구가 휘동하는 반란파들의 손에서 반주검이 되도록 박해받다가 자살하고 말았던것이다. 그리고 발구에 실어다가 남산덕이에 대충 묻어버렸다.    그건 그렇다치고 처음부터 개똥밭에 참외처럼 보았는지 기회만 있으면 지분거려서 소름이 끼치였다. 그러다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말았다. 어느 일요일날이였다. 반란 파지휘부로 오라는 명구의 호출이 내렸다. 곧장 득달하니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갔 는지 그가 혼자 있었다. 그는 걸상을 권하고는 다자고짜 엄정하게 선포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에, 말하자면 유훙유쫜”의 무산계급새일대 기술인재를 배양하는 이 전당에서 춘여같은 지주집 딸이 혁명일대들과 함께 공부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 아니겠소? 그래서 우리 관리위원회에서 의론했는데 아직 결론은 짓지 않았지만 생산대로 돌아갈 준비하라고 불렀소. 하긴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일이기도 한데…춘여동무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게 관건이지…”     순간, 가슴 한복판이 쿵하는 파렬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증을 타게 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명구가 무엇을 하자 는것인지 지각이 든 처녀로서 모를수 없었다. 남자들은 다 자기속에 동물의 모습을 감추고있다. 남자들은 자기가 잡아놓은 쥐를 오래오래 양공질하는 몹쓸 고양이를 가지고있다. 아니면 나비를 유혹해서 그믈속에 끌어넣은 다음 그피를 빨아먹는 독거 미를 가지고 있다고할가 명구가 지금 그 고양이로, 독거미로 현신한것이다.     “툭 찍어놓고 말한다면 이 방대장이 춘여를 좋아한지 오래오. 그동안 매우 점잖게 대했지만 혁명이 어디 칭커츠판이나 수놓이를 하는게요? 나의 사랑을 받겠소? 아니면 촌에 내려가 호미강대를 쥐겠소? 량단간 결정하오. 내각씨가 되면 이 무시무 시한 혁명폭풍속에서 무사히 살아갈수 있을것은 떼놓은 장땅이지? 안그러오? 어쨋든 나같이 고도의 혁명각오가 있는 사람이 능히 교육할수 있는 오류분자자제들을 책임지려 하지 성분이 좋은 어느 남자가 춘여를 요구하겠소, 내가 한평생 춘여와 처가집과 한구들이나 되는 처제들을 잘 책임져줄게 어떻소?”     아무리 막돼먹은 남자라도 이렇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것이다. 어리숙한 녀자라도 남편을 고를때는 아주 세심하다. 그러나 아무리 세심한 남자라도 열련에 빠 지면 바보가 되여버린다고 했다. 하다면 나는 아주 세심한가? 이 남자는 지금 열련에 빠져 바보가 되여버린겐가? 출신을 턱대고 아무짓이나 하는 망나니밖에…                            명구는 슬며시 다가와서 끌어안으며 정욕으로 달아오른 끈적끈적한 입술을 볼에 대며 가슴을 마구 헤치였다. “너무 좋아서 아닌체 하는거야, 얌전하게 있어,” 아무 방비도 없던차 그가 구렝이처럼 휘감들자 그저 몸서리쳐지면서 정신이 아뜩해났다. 출신이 나쁜녀자는 제하고싶은대로 하려는 이 동물에게서 자극받고 흥분하고 정복당 하고 어떤 쾌감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동물이 되여야 하는것이다.     녀자들은 보통 한 남자를 사랑할 때 귀간지러운 거짓말을 들으려 하지만 한 남자를 미워하게 되였을 때 듣고싶어하는것은 진실이다. 녀자가 소리도 못치고 그저 바들바들 떨고만있자 더욱 대담해진 명구가 교실바닥에 번져놓고 마구 깔아뭉갰다. 차디찬 세멘트바닥의 섬뜩함을 느끼며 마구 덤벼치는 야수에게 유린당할수도 있다는 괴로움 마저 얼어들어 꽛꽛해졌다. 인간생활은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상하다 하여도 결국은 두가지뿐이다. 하는 녀자의 생활, 하나는 남자의 생활이다.     비참한 오한에 전률하며 자신의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다가 극복의 문리가 차차 트이였다. 괴로움속에서 터진 울음끝에 오는것은 흐늑흐늑 흐느낌이다. 이대로 당하고 그이 노리개가 될것인가? 포악스러울만큼 거칠고 탐욕스럽게 옷을 벗기려는 미친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이 지킨 순정이 절대 안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자기의 입을 찾는 명구의 입김을 피해 몸음 비틀어대던 춘여의 눈에서 마침내 분노의 불길이 타번졌다. 그것은 원치않은 헌신을 강요당하는 약자의 굴욕감에서 서릿발치는 저항의 비수였다. 비애와 쓰라림은 짙은구름이 되여 얼굴이 무섭게 일그 러졌을것이다. 땅바닥의 랭기가 괴로움과 분노의 불덩이가 가슴에서 화산으로 터졌다.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한 그녀는 남자를 힘껏 뿌리쳤다. 힘으로 한다면 명구쯤은 헤까닥이다. 일어나서 자기를 잡으려는 남자를 콱 밀치고 밖으로 내뛰였다. 뒤에서 “쇠새끼 같은년, 두고보자!”하고 욕질하는 목갈린 소리가 날아와 귀청을 스쳤다…     명훈이를 찾아가서 학교지도부에서 정말 자기를 내보내려고 결정을 지었는가고 물어봤더니 그런 일이 없다고 도리질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명구가 너절한 수단으로 자기를 어째보려한 꿍꿍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더 있을 체면이 없었다. 명구는 자기가 매일 꼬리없는 암쇠를 올라타고 놀아댄다는 야비한 소문을 퍼 뜨리고 다녔다. 그런 더러운 소문이 마침내 그녀의 귀에도 들렸던것이다. 그날로 이불짐을 꿍져지고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본가집에 나들이를 온 영자에게서 가슴아픈 소식을 들은날 밤. 그는 집뒤 산기 슭에서 울고 또 울었다. 남이가 일을 저지르고 구류소에 갇혔다고했다. 영자의 말에 의하면 남이가 농대에 있는 어떤 사람을 죽도록 패놓았는데 문제가 크게 번져 잡혀가서 언제 풀려나올지 알수 없단다. 맞아댔다는 남자가 명구였을게 분명했다. 그는 그 남자를 위해서 통곡했고 자신의 가슴이 찢기여서 온밤을 흐느끼였다.     썩후에 명훈에게서 들어서 안일이지만 모욕받은 자기를 위해서만 그런게 아니였 단다. 자기가 소개해준다고 한 태평촌에 부농집딸이 일색인것을 보고 어떻게 구슬렸 는지 아니면 강다짐으로 잡아챘는지 안해로 삼았단다. 역시 성남이란 친구에게서 들은 말을 남이에게 하였는데 아무래도 분노가 겹치여 일을 친것같다고했다. 구류 소에서 반년넘게 고생하다가 풀려나오긴 했는데 그일 때문에 더 고생하게 생겼단다. …자기의 인생이 그렇게 비틀어지자 아름다운 사랑의 동산이고 뭐고 더 바랄것 없이 아버지 말대로 연길역전앞 마을에 시집갔다. 물론 출신이 좋은 집에 며느리가 되였다.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사는 동안 황당하던 질풍노도의 세월도 끝나고말았다. 긴긴 십년세월, 개잡은포수로 날뛰던 명구가 못된짓도 많이 한데다가 학교의 천교장의 학대사건으로 갈데로 들어갔다고 한다. 인과보응이라 할것이다.     영자에게서 들을라니 남이도 늦게 결혼하고 어느 시골학교에 민반교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에 드문히 문장을 발표한다고도 했다. 쥐굴에도 볕이 들었다고할가, 개천에서 룡이 났다고할가, 자신이 그 남자를 배반한것인가? 역시 연분이 아니였다고 자기를 위안하면서도 가슴은 그처럼 허전할수 없었다. 더구나 후에는 도문시내의 큰 중학교에서 교원질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람이야 만날 면목이 있으랴만 남이의 작품이 실린 신문이랑 잡지서껀 얻어서는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하는것이 그 남자에게 속죄하는 흉내라도 되랴만 감정의 빚을 덯쌓는것으로는 무관하리라 생각했다. 영자도 명동골, 도문으로 전전하며 선생질하는 남이에 대해 더는 소식을 전할수 없었지만 발표되는 작품에서 그남자의 후반생의 궤적을 추적할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그렇게 뿌리깊은 첫사랑일수 있느냐고, 늙도록 연연한 마음을 가지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마음은 그냥 한곬으로 흐르는것을 말려낼수 없었다. 더 구나 남편이 일찍 타계하고 새끼들도 다 출세하여 집에 혼자남게 된후 저도모르게 흘러간 세월을 더듬게 되고 그 세월의 언덕에는 어김없이 그 남자의 영상이 오롯이 서있군하였다. 더구나 그가 대학에 교수로 퇴직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인생무상을 느 끼며 한탄하였다. 일부러 하는것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것도 알지만 자꾸 생각이 난다. 참으로 녀자의 첫사랑이란 다 이런것인가?     어느 책에서 녀자가 늙으면 늙은 남자들보다 더욱 우울해지고 고독해진다고 썼더니 과연 그말이 맞는것같다. 지금 자신이 고독을 달래지 못하여 무도장출입이 잦아 지게 되였는데 혹떼러갔다가 혹을 붙여온다고 자기야말로 아픈 추억이라는 혹을 달고 왔으니 고독한 만년에 이 무슨 보응인가? 모르는게 약이라고 가끔씩 옛일을 떠올리며 무엇인가에 안위를 받아야 하련만…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남자에 대한 련모의 정을 못잊어 가슴태우는 녀자의 얼굴, 그 몸가짐이 젊은녀자라면 아름다울지 모르나 다늙어서 옛사랑에 모 대기는 자기의 모습은 결코 보기가 좋을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신을 내맡긴 그녀로 말하면 그래서 더구나 허무하였다.                                                                  6       남이도 가끔 옛일을 추억할 때마다 안해에게 자기의 이왕지사를 숨기지 않고 말해주군 했는데 안해도 시무룩하게 웃으며 잘 응대해주었다. 기실 모아툰에서 농사 일을 할 때 친하게 지낸 영자라는 녀자가 우정 들으라고 그랬는지 춘여란 녀자의 얘기도 몇번 하길래 그간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몇번은 영자와 연길에 장보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함께 가자고해서 용포동의 그녀자네집에 따라 가기도 했단다. 참으로 수더분하고 장생긴 녀자더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남편이 드문히 나가던 무도장에 며칠 안나가자 안해가 캐묻는 바람에 옛날 그녀 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제 무엇을 옴니암니 따지지 않는 늙은 이여서 그런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스스럼없이 주고받으며 남이는 회심의 미소를 짓 기도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녀자로서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이지만 시작도 못해보 고 흐지부지 막을 내린 그 사랑의 연극이 지금와서 무슨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인생의 저문언덕에 한가지 깊숙한 홈타기가 된것은 사실이다.     “그럼 한번 더 나가서 만나보구 국수라도 함께 나누구려. 나 절대 질투하지 않을 테니까유. 같은 녀자이고 나도 그런 풍파를 겪으며 당신에게 시집을 왔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아유. 그 녀자도 후에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애석해 할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요? 나라도 그럴것 같은데 호호호…”     “허허허…참으로 인생이란 새옹지마이지, 어쨋든 마누라가 도량이 넓어 좋구려”  진심어린 미소는 잔잔한 호심에서 이는 미풍과 같은것이다. 가슴에 뒤끓는 태풍을 안은채 진정한 미소를 지을수 없다. 시기와 질투와 불신의 소용돌이를 감춘채 진 정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기는 어려운것이다. 지난날을 다 리해하여주며 늘 동고동락을 기약하는 미소처럼 흐뭇한것은 없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기도 하다.     남이는 역시 버릇처럼 자기 허구픈 사랑철학에 빠졌다.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에 산이 있어 물이 있듯이 인간사회에 남성이 수요되고 그만큼 녀성의 존재는 불가결의 인소이다. 흔히 녀자는 감성적이고 유연하고 섬세하며 외유내강하다고 한다. 일컬어 녀자를 천사의 화신이라 칭송하면서 녀인은 “사랑”의 대명사로 된것이다.     반대로 남자가 없는 세계는 무질서하여 혼란할것이고 녀인이 없는 세계는 메말라 쇠갈될것이라는 아름다운 글귀들을 줄기차게 엮어왔다. 그러나 자신의 첫에덴동산엔 싸탄이 나타나서 인생을 다른길로 끌고갔다. 에머슨은 정직한 마음만큼 성스러운것은 없다고 하였다. 나자신은 애정에 얼마나 성실했는가? 따지고보면 춘여만 원망할 일이 아니였다고 늦게나마 반성해본적이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귀속되여 할 녀자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스스로 사랑을 구겨박은것이고 자기감정의 노예가 된것이다. 젊은시절 사랑함에서 가장 삼가해야 할것은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미래를 환상하는것이였고 늙어서는 어디까지나 서로의 지난날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라 할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련애사가 복잡하더라도 자기가 만나고 사랑했던 녀자를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애석해하면 할수록 녀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신비한 면사포를 쓰고 눈앞에서 하늘거릴뿐이다. 어찌생각하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 절절한지도 모를일이다. 아무튼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던 곳에는 애석함과 련민의 정이 남아있게 되는법이다. 녀자를 가지는것보다 어떻게 사랑했던가가 더 중요하고 자기와 어떻게 사느냐보다는 어디서든 행복하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사후에 청심환 같은 쓰잘것없는 사랑철학이리라.     그래 맞다. 흘러간 과거는 흘러가라 하라. 어차피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수 없거늘 추억이 눈물겹다면 그로써 자족하는것이 좋으리라. 남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말았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단떼의 “신곡”에 한구절이 생각났다.“여기서는 일체의 머뭇거림을 버려라  그 어떤 주저함도 여기 죽어마땅하도다”이것을 패러디한다면 지옥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입구에도 비슷한 요구가 써있을것이다.     그날밤, 남이씨는 꿈을 꾸었다. 춘여가 나타나서 비겁하고 무책임한 남자라고 질 책했다. 그리고는 꺼이꺼이 울어댔다….                                                             2015년 5월 8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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