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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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동북아FTA와 한국의 손익계산서 댓글:  조회:2573  추천:33  2009-02-20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동북아FTA와 한국의 손익계산서  그동안 아시아지역의 FTA체결 경쟁은 일본과 중국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은 아세안과 FTA를 통해 자국의 거래시장에 아시아 각국들을 흡수하는 전략으로 아시아 경제의 주도권 장악에 한 걸음 앞서 가고 있다. 한국은 이들에 비하면 아직도 초보단계다. 하지만 앞으로 한국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힘의 비등점 역할을 하며 동북아 FTA의 주역이 되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한국은 지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다. 지난 2001년 한중일 3국간 FTA문제에 관해 한중일 삼국이 공동연구를 한 바 있다. 당시 공동연구에는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일본의 종합연구 개발기구(NIRA) 그리고 중국의 국무원발전연구센타`(DRC) 등 권위있는 국가 연구기관들이 참여 했는데, 그 중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그것은 한중일 FTA가 시행될 경우 최대 수혜국은 한국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한중일 3국간에 동북아 FTA가 체결되면 3개국 모두 이익이 되지만, 특히 한국이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학술토론회에서도 같은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9월에 있었던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회장 이승률)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창재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과 아베 가즈토모 일본 도쿄전기대 공학부 교수, 리싱즈훙 중국사회과학원 박사 등은 한ㆍ중ㆍ일 3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경우 3국 모두 국내총생산(GDP)과 수출, 교역조건이 개선되며 특히 한국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창재 소장은 2005년 연구결과를 근거로 한ㆍ중ㆍ일 FTA 체결시 한국은 장기적으로 GDP가 5.15% 상승할 것으로 예상돼 중국(1.54%)이나 일본(1.21%)보다 큰 경제적 효과를 얻을 것으로 평가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3국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는 정치적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한국 정부가 동북아경제공동체(NAEC) 설립을 주창하고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아베교수도 한국이나 일본 모두 급성장 중인 중국과 가까운 시일 내에 FTA를 체결할수록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면서도 중국과의 FTA 체결로 타격을 입을 특정 산업 분야의 반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국내 정치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시행 초기에는 FTA체결상대국에 따라 한국의 무역흑자가 일시적으로 줄고, 일부산업의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수출 증대, 국가 산업의 효율적 구조조정, 통상마찰 축소, 외국인 투자 확대, 국민후생 증대로 국가경쟁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일본은 선진기술을, 중국은 우수하고 값싼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순수과학 및 군사기술은 발달했으나 연구개발(R&D)의 현장응용은 미흡한 상태다. 일본은 90년대 이후 10여 년 동안의 장기 경기침체로 시장의 역동성이 상실됐고, 고비용과 자국 R&D에만 의존하는 폐쇄성이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이에 비해 한국은 우선 기술 측면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갖고 있고, 60년대 섬유 및 신발, 70년대 전자 및 조선, 80년대 자동차 및 철강, 90년대 컴퓨터 및 반도체 등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산업으로 성장시킨 성공경험을 가지고 있어 ‘동북아 R&D 허브’로서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 또 인구대비 고학력 인구비율이 세계 5위 이내로 우수한 인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점도 동북아 허브 구축 가능성의 잠재력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된 것이다.  바로 이런 평가들로 인해 동북아 FTA의 최대수혜국이 될 한국이 이를 성급히 추진했다가는 양국에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오해를 살 입장에 처한 것이다. 또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우리 국내 사정도 걸림돌이다. 북한 핵문제, 장기적인 노사분규 및 파업, 산업기반 공동화현상, 국내정치 불안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국제경쟁력은 지금 심각할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게다가 동북아 FTA의 당사국인 일본과 중국이 FTA에 대한 반론이 거세다. 특히 일본은 중국과의 FTA를 꺼리고 있다. 양국 간 시장이 개방됐을 때 일본농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같은 문제로 중국과의 FTA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도 한국이나 일본과 FTA를 맺기에는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산업기술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에 경쟁력이 뒤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중국은 또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의 FTA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한중일 FTA가 그리 다급하지 않다. 따라서 세 나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고 이해득실이 균등하게 분배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역사적, 산업구조적, 사회정서적인 차이가 극명한 세 나라가 최종공동합의에 이르기까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다 실제로 세 나라는 국가차원의 제도적인 협력경험도 적을뿐더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력한 국제정치적 리더십도 부족한 상태다. 그래서 필자는 미국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최근 국회 동의를 앞두고 있는 한미 FTA체결과 한·EU FTA를 성사시킨 후, 그 여세를 몰아 한·일 FTA와 한·중 FTA를 추진하고, 최종적으로 한·중·일 다자간 FTA로 가는 방법이 최선책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인 금융공항을 초래할만한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졌다. 지난 10월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정부는 연일 계속되는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으로 각계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우려 속에서 마땅한 대안을 찾는 데 숨 가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한 대책으로이명박 대통령이 10월 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한·중·일 금융정상회담’ 제안과 함께 삼국간 통합금융체제 방안을 주장한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평가된다. 이와 공조하여 정부는 10월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MF 연차총회에서 차관급 회의를 갖고 한국·중국·일본 등 3국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8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 공동펀드를 만드는 방안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세계 경기의 본격적 불황에 대비, 한·중·일 3국이 재정지출을 확대해 경기 부양에 나서는 등 동북아 경제권이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중국과 일본 정부에 제안하기도 했다. 사실 아시아펀드의 경우, 그동안 중국과 일본이 주도권 싸움을 계속해오던 터라 만일 이에 실패할 경우 우리의 대외 신인도에 피해가 있을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 어느 쪽도 상대가 동북아 역학구조의 주도권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가 심적 부담이 적은 편이다. 즉, 중국과 일본이 부상할수록 동북아의 역학조절의 주도권은 한국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게 돼 있는 것이다. 그 분위기를 파악한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동북아 역학구조의 중재자로 도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북아 FTA룰 이끌어내는 일에 새로운 창의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경제저널리스트인 샤오민제는 한국의 이런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한국 경제는 1997년 이후 매우 건실해졌으므로 국내 상황에만 함몰돼 조급해 하지 말고 큰 시각으로 3개국 FTA의 틀에서 회복의 열쇠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금융 차원의 논의를 넘어 3개국 FTA 논의를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동아시아 3개국이 함께 하지 않으면 국면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성장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협력하느냐 에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FTA를 하면, 3개국 경제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경제의 회복 시기를 앞당기게 될 것이다. 세계경제의 판도를 바꾸며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자신감과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일본의 저력, 그리고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의 IT인프라와 반도인의 독창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교역규모 10위권의 경제력을 합성해서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돈과 기술과 시장과 문화를 갖춘 배타적인 지역경제권(Regional Economic Block)으로서 동북아경제협력체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과 경제공동체 관계에 놓여있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연결되면서 장차 1,2O년 안에 세계경제총량의 3분의 1 이상이 동아시아시장을 통해야만 순환하게 되고, 마침내 북미와 유럽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3등분하는 지구촌 3지역권 정립시대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즉, 9.11 사태 이후 일방적으로 국제사회의 신질서를 창출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화정책을 완화시켜 진정으로 이 지구촌 사회의 안정과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견인차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가 서로 협력할수록 이익이 극대화되는 상생관계임을 인식시키고, 경제적으로는 각기 자국의 민족주의적 폐쇄논리에서 벗어나 3국 일체의 정신으로 동북아 통합시장을 창출하도록 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는 한자문화권의 이상향인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주창함으로서 정서적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다시 말해 전국가적인 총력을 쏟아부어서라도 삼국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경제문화 협력 통합시장 모델을 개발해 동북아 FTA의 매치메이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샤오 민제는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동북아에서만큼은 위기가 아니라 동북아 FTA성사에 결정적인 기회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와 더불어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을 동북아시대의 매치메이커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말하고 싶다. 기회를 잡아야 한다. 놓치면 위기가 되어 돌아온다.
56    시대의 키워드 FTA와 T&T 댓글:  조회:2578  추천:33  2009-02-19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유럽의 나라들은 2천년 동안 반목의 세월을 살아왔다. 북극에 인접한 북유럽인들은 해적으로 불렸고, 중부유럽의 프랑스와 독일은 방탕한 문화로 비난받았으며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은 잔인한 살육과 독재의 땅이라며 서로를 비난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가 2001년 동구유럽 8개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인 이후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아 25개회원국은 강력한 공동체로 변신했다. 그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건 유럽대륙을 티켓 한 장으로 오갈 수 있는 철도망과 대륙과 섬을 연결하는 터널이었다. 시대의 키워드 FTA와 T&T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독특한 세계 경제 흐름의 하나는, 특정지역 국가들 사이에 배타적인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 블록화 현상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952년 유럽지역 내 석탄산업체연합에서 시작돼 1993년에는 단일통합화폐인 유로를 사용하는 유럽공동체(EU)가 탄생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994년, 미국을 중심으로 캐나다와 멕시코가 가입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출범했고, 이에 긴장한 중남미와 미주지역 34개 국가들이 연합해 지난 2005년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발족시켰다. 이런 추세 속에서 우리가 속한 동북아지역만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유일한 대룩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유럽, 미주지역의 경제 블럭화에 밀려 씁쓸한 경험을 거듭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뒤늦게 지역경제연합체를 구성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촉발된 동아시아 지역경제권(Regional Economic Block) 통합운동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2003년 10월 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 국가연합(ASEAN) + 3국(한중일)정상 회의’를 계기로 아시아에서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또 연이어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아시아 국가간 FTA체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최근 FTA전략은 체결 당사국간 무역협정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다자간 협상을 우선하는 새로운 세계무역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추세 속에서 앞으로 가장 크게 주목받을 만한 아시아지역 경제공동체가 바로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FTA이다. 아시아 최대 제조공장이자 소비시장인 중국, 아시아 제일의 경제강국인 일본, 거기에 세계 유수의 IT대국이자 인터넷강국인 한국이 공동으로 FTA를 체결한다는 것은 곧 삼국의 시장을 통합한다는 의미고 그것은 인접한 주변 아시아국가의 시장판도를 좌우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경제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새로운 시장이 등장함을 예고하는 빅이슈이기 때문이다. FTA가 한중일 삼국의 시장통합을 의미한다면 T&T(turnnel & turnnel)는 물류통합을 의미한다. 즉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일해저터널과 한중해저터널이 복합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한·중·일 삼국을 1일 경제생활권으로 거듭나게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교통망은 TCR, TSR ,TMR등과 접속되어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유라시아 뉴 실크로드’의 활로를 열어놓게 될 것이다. FTA와 T&T의 기능적인 결합, 바로 이것이 동북아시대를 여는 두 개의 축이고 이 두 개의 과제를 어떻게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이상적으로 성사시키느냐에 동북아의 미래가 걸려있는 것이다.
55    한반도는 동북아시대의 성지 댓글:  조회:2549  추천:42  2009-02-12
 두 번째 이야기 동     북    아    시   대     의         주    역    들  한반도는 동북아시대의 성지    또 한 가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반도인의 독특한 기질이다. 흔히 동아시아의 자궁에 비유되는 한반도는, 중국을 거쳐 온 모든 아시아문명의 정수가 찬란하게 꽃피운 곳 일 뿐 아니라, 그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보고다. 그것은 문화예술분야에 독창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특유의 능력에도 기인한 바 있겠으나,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영향도 결정적이다. 반도란 원래 대륙을 바라보고 뒤로는 배수진을 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산실인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다양한 문화충격들을 더 이상은 보낼 곳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 거대한 가마처럼 고스란히 품고 곪삭여서 이를 완성시키고, 원형을 보존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 흔적들이 우리 역사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가장 최근의 예를 든다면 조선왕조의 성립이다. 조선왕조는 중국대륙에서 출발한 성리학의 기본 이념인 인의예지신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아 실제로 도덕정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다. 중국에서조차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으면서도 결국은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뛰어넘지 못한 채 그저 이상적인 도덕정치이론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달랐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고 성리학의 도덕론에 입각한 여론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근대적인 관료정치체제를 갖춘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이후 600년간 사림과 학계, 여론과 사법부가 막강한 힘을 발위하며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실현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정치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성리학의 기준에 의해 철저하게 검증받았고, 모든 과정이 공개적으로 결정되고 상세하게 기록됐다. 왕은 관료들의 신뢰와 동의 없이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통유교국가로 세계 유교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 600년의 치열한 자취는 오늘날 세계학계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중세 도덕국가 연구에 가장 정통적이면서도 신뢰할만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다. 그 때문에 창덕궁과 종묘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세계의 내로라하는 불교유적들과 나란히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신라의 치열한 위민사상,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이 땅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이상적인 불국을 만들고 싶어했던 고대 한반도 통치계급의 염원이 기하학이라는 최첨단 과학속에 용해된 불가사의다. 이 외에도 한국은 아시아문화의 정수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로 주목받고 있다. 고대 한자의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 유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라, 중국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선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나라.......이것이 바로 반도인의 저력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근대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현대 정치사회사상 유일한 나라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건국 60주년을 즈음하여 세계평화포럼의 김진현 이사장이 한 일간지를 통해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1945년 이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세계 140여개의 제 3세계 국가 중에서 정치민주화, 시민자유, 근대경제성장, 교육과 과학기술의 고도화, 사회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개방과 해외 진출이라는 근대화의 요소를 완벽하게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절대 가난 탈출은 역사적인 일이지만 이들의 근대화진입은 아직 에너지, 환경, 인구구조변화, 물, 전염병 등 문제군의 대국이 된 것일 뿐, 문명적 선진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싱가포르 경제가 최선진인 듯 보이지만 정치 언론의 자유는 아직 후진이어서 부자세습 정권이 끝난 뒤의 운명은 불투명하다.          지금 대한민국 5천만 시민은 현대적 모든 자유 - 선거, 표현, 결사, 거주와 이동, 외국여행, 소비와 직업과 교육선택, 그리고 전통적 신분계급으로부터의 자유 - 를 누리고 있다. 동으로는 일본열도에서 서로는 우랄산맥에 이르는 아시아 50개국 40억 인구 중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근대시민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일본은 아무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신분사회요, 신민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 과학기술, 예술, 산업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수준과 겨루고 있다.         ......동양의 전통문명에서 2천년 이상 성숙한 한국인들이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그것도 일본같은 제국주의가 아닌 평화적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은 문명사적 기록이다. 즉 우리는 동양의 전통문명을 가지고도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한 지구촌 유일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 역시 반도인의 독특한 기질을 증명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통찰하는 시각으로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문명사적 쾌거로 정의한 김진현 이사장은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가 충돌하고 대결하는 단층으로 보는 시각에 단호히 반기를 든다. 대신 그 양극의 문화와 가치들을 성공적으로 융합해낸 민족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현 이사장은 더 나아가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근대화혁명을 세계 보편적 모델로 승화시켜 21세기 후반에 전개될 지구촌 인류사회의 새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중국과 일본을 넘어 지구차원에서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지역과 세계, 전통과 근대의 융합점이 되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력을 갖고 있는 반도인이다. 주변의 이질적인 문화를 품는 완충지대로서 핵심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질적인 외부의 충격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품고 곪삭혀서 완성시키는 독보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기질을 생각하면, 반도인은 사실, 외부 충격을 겁낼 필요가 없다. 최대한 문을 넓게 열고 다양한 문화와 충격을 받아들여 그것을 새로운 문화창출의 밑천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대를 앞두고 왜 우리가 반도성을 회복해야 하는 지는 이쯤이면 납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에 할 일은 오직 하나, 누구와도 손을 잡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인 서울대 하영선 교수는 이를 그물망국가에 비유했다. 즉 세계와의 관계를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는 네트워크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구한 동양적 전통 위에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한 저력을 바탕으로 반도인의 기질을 발휘하여 이제는 국제사회 속에 탄탄한 그물망을 갖춘 동북아의 매력국가가 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인접 해 있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배우고, 한편으로는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동북아시대를 꽃피울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윤활유가 되어야 하고, 길이 되어야 한다. 대륙으로 가고자 하는 일본, 태평양연안으로의 진출을 원하는 중국, 그들은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들과 최상의 관계를 갖는 것은 단순히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자국의 안위나 도모하는 피동적인 전략이 아니다. 다가오는 아시아대륙시대를 앞두고 도도한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즉,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시작해 환태평양시대를 거쳐 흘러온 서진(西進)의 역사 흐름을 다음 시대의 주역인 아시아대륙시대로 안내하는 민족도약의 기회를 잡자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와 최대한의 서비스기능을 발휘해 양국을 고객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독보적인 가치를 극대화해서 최상의 서비스로 포장해 부가가치를 챙겨야한다. 균형과 포용으로 동북아의 평화로운 공존과 발전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천성이고,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두바이에 세계의 투자가들이 몰리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곳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아랍과 서방이 만나는 독보적인 완충지대이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의 최대 강국은 바로 이런 관계성이 높은 나라다. 부가가치 높은 관계성으로 세계 교류의 장이 되는 나라가 강대국이다. 두바이가 지금 세계 최고의 소득을 올리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라. 두바이에는 지금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다. 동북아엔 홍콩과 싱가폴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게 거리나 문화적 친밀감으로 볼 때 한국만한 완충지역은 없다. 더구나 IT와 정보화, 관계성이 국력이 되는 21세기를 맞아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부가가치를 활용해, 역사상 최초로 세계중심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동북아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가 한국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시대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시각을 넓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안에서만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그래서 사회를 이분화하고 친북이니 반미니 싸우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동북아를 무대로 세계로 나가 그물망같은 국제관계를 만들라고 말한다. 동쪽으로만 향했던 우리의 외교중심을 이제 서쪽으로 더 넓혀서 중국대륙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바라보고 미래를 구상해야 한다는, 역사의 요구는 지금 우리의 결단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 연해주, 환황해 지역경제권, UNDP 관련 지역 및 한반도 국제정세에 관해 그동안 협의하고 구상해왔던 생각들을 간추려 국민들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동북아경제중심국가론’에 대한 담론을 다시 시작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중·일 3국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는 동북아 FTA와 해저터널(T&T) 프로젝트를 한 묶음의 대안으로 구체화시킴으로서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한반도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54    신이 내려준 축복,반도성 댓글:  조회:2789  추천:33  2009-02-11
두 번째 이야기 동북아시대의 주역들  신이 내려준 축복, 반도성 한 때, 우리 사회에서 동북아란 용어가 식자들 사이에서 약방의 감초 격으로 풍미했던 적이 있었다. 중국수교가 이루어진 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정, 경, 관,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가장 폭넓게 다루어 온 정책과제 중 하나가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종종 대두된 화두가 한반도 동북아 허브론이다. 동북아허브의 역할이란 한마디로, 대륙의 상징인 중국과 해양의 상징인 일본을 연결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이를 인프라삼아 동남아, 연해주, 시베리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과 연결시켜 미래사회를 아시아, 유럽대륙 간 경제공동체시대로 이끌어냄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도도하게 서진하는 인류 역사의 흐름이 한국에 요구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아직도 동북아의 진로는 윤곽이 잡히지 않은 상태다. 아니 오히려 중국과 일본의 무관심속에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감이 없지 않다. 최근에 한중일 삼국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사건들, 즉 고구려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나,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집요한 망언과 일련의 시도,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한국의 지나친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대응 방법들은, 동북아 세 주역의 관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게다가 숯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북한 핵문제로 인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태이고,  동북아 관계성 확립에 중심역할을 해야 할 한국은 내부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와 경기침체, 이로 인한 심상치 않은 국론분열조짐으로 스스로 족쇄를 채운 듯 한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반도가 동북아 사회에서 허브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우리에게 중국도 일본도 갖지 못한 독보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반도성이다.  즉 천운이라 불러도 좋을 역사적 기회를 눈앞에 두고, 우리가 반드시 회복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 바로 반도성이라는 기질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이 반도성이라는 것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아니,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우리는 반도국이란 표현을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다. 반도인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외면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와같이 반도인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인식은, 일제강점기에 싹튼 것이다. 대륙도 섬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지대, 너희는 그저 대륙과 섬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그러니 너희는 대륙진출을 꿈꾸는 일본을 위해 존재하는 한낱 길에 불과하다던 일본의 집요한 세뇌의 결과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한반도인 우리의 지정학적인 운명에 대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가진 반도성이란 게 그런 아무쓸모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반도성이란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고서도 그토록 기피했던 것일까. 지난 8월, 건국 60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 각계 각층의 석학 60명이 60일에 걸쳐서 연속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첫 번째 연사는 많은 이들이 예상한 대로 20세기 한국 최고의 석학이신 이어령교수였다. 그날 그는 조국이 탄생하고 성장하며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60주년을 맞는 감동적인 과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생애 가장 큰 기쁨이라고 전제하면서 ‘우리말에 내일이라는 순 우리말은 없어도 모레, 글피라는 순 우리말은 있다. 당장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말로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심오한 사색과 책임있는 각성으로 우리들이 일상에 묻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현대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와 같은 지식인이라고 할까. 그런 이어령 교수 만큼 우리의 반도성에 대해 극명하게 해석한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          ‘.....흔히 한국은 반도라서 지정학적으로 불운하다고 말합니다. 중국과 일본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끊임없이 시달려야 한다구요. 그래서 동북아시대니 뭐니 하는 것도 그리 반가와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 두 나라만으로 동북아시대가 잘 돌아갈 거라고 보십니까? 전형적인 대륙문화국가인 중국과 전형적인 해양문화국가인 일본은 충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충돌하는 한 동북아에 평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기 위해선 제 3의 완충지대가 필요한데 두 나라 사이엔 반도인 한국 밖엔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북아시대의 성패는 한국의 반도성 회복에 달려 있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한국의 반도성 회복에 중국, 일본의 공존과 번영과 평화가 걸려 있는 겁니다. 열쇠가 우리 손안에 있어요. 이건,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원래 반도국가가 그래서 중요한 거죠. 이탈리아반도의 로마가 유럽지역의 모든 문화를 융합해서 위대한 문명을 싹틔웠죠. 이슬람교와 불교가 인도차이나 반도 안에선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죠. 그게 반도국가가 꼭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완충지대가 없다면 어떤 문명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반도국가라는 것은 한계나 약점이 아니라 축복이고 장점이고 기회죠. 우린 반도성 회복과 반도국가의 역할에 우리의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걸 잘해야 주변국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도 우리 조상들이 그 역할을 기가막히게 잘 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떻게 하고 있는 줄 압니까. 반도라는 걸 부인하면서 자꾸 한 쪽으로 치우쳐요. 한때는 대륙문화 흉내 내면서 해양문화를 극렬히 배척하고 비하했지요. 그래서 일본의 침략을 자초했구요. 최근에는 또 어떻습니까. 해양문화인 일본의 싸구려상업문화를 추종하면서 중국 문화를 얕보는 경향이 강하죠. 한쪽 편에 기울면 이건 죽자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를 소화해야 합니다. 균형을 지키면서 모두 감싸 안아야 합니다. 양팔을 연결하는 어깨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요. 세상 어느 나라도 할 수 없는, 한국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그거고, 그러니까 양국이 강대국이 될수록 우린 좋아해야지요. 두려워할 게 아니라. 왜냐, 우리의 상품가치가 그만큼 높아지니까요.’   얼핏 들으면 기발한 역발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반도성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이처럼 냉정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선언한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어령교수의 지적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여실히 입증된다. 과거, 우리가 겪은 국가적 위기는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 데서 시작됐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 역사에 치명적인 치욕을 안겨주었던 병자호란과 일제강점이다. 병자호란때에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나치게 의식해 신흥세력인 후금을 자극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당시 수많은 조선의 처녀들이 유린을 당했고, 귀족의 자제들이 인질로 끌려갔으며 왕이 후금의 장수 앞에 세 번 머리를 땅에 찧으며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했다. 그때 만일 왕이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를 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후금에 편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2천 년간 중국의 왕조가 수없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도 그들과 외교관계를 통해서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해온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빠져 절대 흔들려서는 안되는 대외정책까지 틈새가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이 우리의 땅을 강점하고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잠식하는 동안에도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일본을 파악하고 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변화와 야심을 잠재울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댓가를 우리는 톡톡히 치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보는 시각은 지금이나 그때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감정적으로 일본을 대할 뿐, 그들을 연구하고 그들식으로 접근해서 그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노력은 여전히 드물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정치사회문화경제, 모든 면에서 아직도 일제 강점의 후유증을 앓고 있고, 지금도 그들의 주도면밀한 한국연구를 따라갈 일본전문가들이 없는 형편이다.  어쩌면 한반도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 자신보다 그들이 더욱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한번쯤 중국과 일본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살펴본다면, 한반도의 존재가치를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속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한반도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그 중요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집요하게 독도에 대해 미련을 갖고 심지어는 망언도 서슴치 않는 것이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을 감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를 자국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필사적인 전략이자 경쟁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한반도를 보는 양국의 시각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동쪽 끝, 그러니까 중국이 태평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혜의 연안반도다. 동으로는 일본열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태평양바다에서 일어나는 태풍과 홍수, 해일을 온몸으로 막아준다. 때문에 태평양으로 뻗어갈 천혜의 항만시설이 즐비하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일본은 가장 먼저 동해안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포구를 조성했다. 포항, 속초, 원산, 청진 등 많은 항구들이 그때 조성됐다. 또한 태평양에서 흘러드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접점으로 삼면의 바다엔 풍부한 해양자원이 있고, 동서양 어느 나라로든 공해 상을 통한 접근성이 뛰어나다. 실제로 지금도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해외로 나갈 때는, 일본의 서부해안에 있는 항만을 이용하는 것보다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물류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천혜의 길목에 위치한 한반도의 주권을 한국이 차지하고 있음으로서 중국은 동북지역경영에서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해야 했다. 실제로 중국의 동북삼성은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중국문화와 산업의 심장부인 산동반도와 동북삼성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한반도와 필연적으로 유대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일본에 있어 한반도가 갖는 가장 커다란 매력은 대륙의 일부라는 점이다. 작은 섬나라라는 치명적인 왜소함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도 직접 국경을 마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과 지상교역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그토록 집요하게 무력과 불법을 동원해 한반도를 점령한 뒤, 영원히 그들에게 복속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일본화 시키려 했던 것이다. 더구나 요즘 같은 글로벌시대에는 ‘존재감’ 만큼 중요한 것이 ‘관계성’이다. 얼마나 많은 나라들과 원활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존재가치가 높아진다. 그 나라들이 강대국일수록 징검다리역할을 하는 나라의 존재가치도 높아진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중국과 일본에겐 한반도와의 관계, 특별히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자 거의 선진국에 근접한 한국과의 연대가 절실하다. 전혀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진 두 나라, 장차 다가올 역사의 주역이 되고 싶어하는 두 강대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53    반도국가 한국의 두 가지 얼굴 댓글:  조회:2844  추천:40  2009-02-06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주역들 반도국가 한국의 두 가지 얼굴 2002 월드컵이 끝난 직후 외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2002월드컵이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얼마나 높여주었는지 실감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미국이나 유럽을 가면 아시아인에게 대개는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하고 물었다. 하지만 월드컵 이후에는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혹시 코리안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생긴 것이다. 왜소한 체격의 한국선수들이 유럽 강호들을 차례로 무릎꿇게 만든 것이 단순히 홈그라운드의 잇점 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고 또 호감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애써 끌어올린 한국의 긍정적인 대외이미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연구에서 드러난 거짓과 불법행위들이 세계인들을 경악시킨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다시한번 세계인들의 격찬을 한 몸에 받으며 한국인의 저력과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과시했다. 그 과정에서 히딩크에 비견되는 또 한사람의 스타감독이 탄생했다. 야구감독 김경문. 그는 특히 선수들을 신뢰하는 힘으로 선수들이 필드에서 잠재적인 능력까지 아낌없이 발휘하게 하는 마법으로 컨디션이 바닥이었던 타자 이승엽, 큰 경기에 경험이 전혀 없었던 약관 스무살의 투수 류현진에게 세계 최강팀을 능히 압도할 만한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베트남에서 한 한국인 대학생이 사귀던 베트남 여대생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을 지켜보던 베트남의 한 수사당국자는 사의를 표하기 위해 달려간 외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화를 잘 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려요.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 비춰진 한국의 양면성이다. 단 한번의 월드컵 유치로 많은 선수들을 세계적인 축구명문클럽에 진출시킨 나라, 뛰어난 상상력으로 매년 세계적인 영화제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걸작들을 만들어내는 나라, 세계적인 과학자와 예술가, 목사와 건축가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나라, 그러나 그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 캠퍼스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매너의 스포츠인 골프장에서 캐디를 때려 물의를 빚는 등 자기 통제가 되지 않는 민족, 자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며느리들을 학대해서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하는 배타적인 민족....... 그래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서구 열강들의 눈빛은 늘 불안하다. 뛰어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민족,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불안정한 이면을 갖고 있는 나라. 그래서 완벽하게 신뢰하기엔 뭔가 부족한 나라, 이것이 한국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여기에 북한의 핵문제도 한몫 단단히 한다. 세계인들에게 신흥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는 두 나라, 중국과 일본, 그 사이에 있는 우리의 이미지는 냉정하게 말해 아직은 선진국이 되기엔 뭔가 약간 부족한 그런 나라일 뿐이다.   그것은 이웃국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지난 여름 베이징 올림픽이 치러지는 기간 내내 우리는 당혹스런 경험을 했다. 거대한 한류시장인 중국에 강력한 반한감정이 확산됐던 것이다. 계기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자양궁경기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반한감정은 올림픽경기가 치러지는 기간 내내 곳곳에서 볼상 사납게 불거져 우릴 불안하게 했다. 그 한 켠에서 일본인 관람객들은 오성기와 일장기를 함께 흔들며 적극적으로 중국선수들을 응원했다. 일본은 경기침체의 위기를 겪는 동안 중국의 등극을 지켜보며 중국을 향한 외교노선을 노골적인 ‘친화작전’으로 선회했다. 일본은 중국을 더 이상 경쟁자로 대하지 않는다. 아시아패권을 공유할 파트너로 대우하면서 일본 특유의 민첩함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이 아시아지역내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 데 중국과의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급변하는 위상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단언컨대 앞으로 중국이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력은 지난 반세기 미국이 이 나라에 미친 영향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날 것이다. 지난 2세기, 세계적인 역사대국에서 세계 최고의 빈곤국가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중국은 한반도문제에 막강한 힘을 미쳤다. 하지만 미국의 보호아래 반세기를 살아온 우리는 사실, 그런 중국의 진면모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의 조상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우리가 종종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오긴 했으나, 우리 조상들은 전 역사를 통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중국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것은 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생존전략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의 중심 질서를 이루고 있는 오늘까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당당한 독립국가로 중국과 대등하게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결은 바로 준비된 관계정립이었다. 조상들은 치열하게 중국과의 관계정립을 연구했고 준비했고 실천에 옮겼다.    이를 위해 선조들은 중국식 예와 가치관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비록 한반도의 작은 나라였지만, 세계의 중심이라 자처하는 중국을 감동시키는 우방이 됐고, 심지어 공자는 생전에 ‘진정으로 예를 알고 이를 지킬 줄 아는 동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런 조상들의 비범한 능력과 치열한 노력 덕분에 강국이 약소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그 정글과 같은 시대에 - 물론 종종 나라를 잃을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그들과 철저한 신의와 예의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국호와 자국의 영토를 지키며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중국의 저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며 지난 100년간의 경험만을 앞세워 묘한 우월감에 빠져있다. 물론 70년대 이후 우리가 이룩해온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과정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해내지 못한 감동적인 성과요, 자랑스런 역사다. 그러나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불과 4천만의 인구로 우리가 이룩한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건 경이로운 기록이다. 그와 함께 얼마 전까지도 한국을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로 바라보던 그들의 시각이 현저하게 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두 마리의 거대한 공룡, 즉 13억의 경제대국 중국과 세계 2위의 경제강국 일본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이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갈수록 그 나라가 갖고 있는 재화가치만큼이나 주변국과의 관계능력이 그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면에서 한국은 아직 국제사회에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분명 전쟁의 폐허위에서 순식간에 개발도상국의 단계를 지나 선진국의 잠재력을 갖춘 중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건, 차원이 다른 싸움이다. 비유하자면 아마추어가 프로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아마추어의 세계에서는 50점짜리와 80점짜리가 싸운다. 당연히 80점짜리가 연승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80점에 머물러 있는 한 그는 프로세계에서 단 1 승도 올릴 수 없다. 프로의 세계는 99점짜리와 100점짜리의 싸움이다. 100점이 되어야 선진국이고, 99점의 함량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중진국이다. 1%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다. 그러니 80점짜리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기란 그만큼 치열하다. 때문에 지금 한국이 경주해야 할 것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1%인데 그것이 나는 관계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없다. 마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긴 했지만, 단 한 게임도 이기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고 월드컵 4강을 이룩하고도 그에 못지않은 부도덕과 비인간적인 사고들로 우리의 우방에 종종 실망과 불안감을 안겨준 것처럼, 더구나 동북아에서 가장 작은 영토와 인구를 갖고 있는 나라로서 인구 13억의 중국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하기 위해서라도 ‘선진국의 잠재력을 가진 만년 중진국’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52    이자나기 신드롬 일본의 부활 댓글:  조회:2993  추천:43  2009-01-28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주역들제 2의 이자나기 신드롬을 꿈꾸다, 일본의 부활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거울, 칼, 곡옥(曲玉)을 가리켜 신기삼종, 즉 건국신 이자나기(伊邪那岐)가 세명의 일본인 선조에게 내려준 세 가지의 신기라고 말한다. 일본 고유문화의 뿌리가 되는 이 세가지가 현대에 와서는 세계에 메이드인 재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 시기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일본열도에 결정적인 재기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힘겹게 전후복구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고 있었던 50년대말부터 60년대 초,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로 벌어들인 달러를 밑천으로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일본은 이 천운의 호경기를 건국신 이자나기가 선물했다 해서 ‘이자나기 경기(景氣)’라고 불렀는데, 최근 일본기업들 사이에선 다시 한번 일본경제 회복을 꿈꾸며 ‘신 신기삼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신 신기삼종은 바로 디지털 카메라, DVD 리코더, PDP TV를 의미한다. 이 세 상품은 모두 디지털 상품이자 묘하게도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강자로 군립하고 있는 한국의 주력상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에 밀려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일본 반도체 업계가 이 세가지 상품의 시장을 다시 석권함으로서 일본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최근 일본 경제내부에서는 그동안 미국에 휘둘리던 컴퓨터와 IT시대가 지나가고 드디어 일본이 기다리던 디지털 가전제품의 시대가 왔다는 판단 하에 상당히 시장상황을 고무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은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일단 내부적으로는 고령화와 부실채권, 정경유착과 구조적인 디플레이션 등의 악순환을 극복해야 하고 밖으로는 기필코 아시아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여야 한다.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지 않는 일본은 결국 침몰하는 항공모함과도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임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여년 간 일본사회를 움직여온 것은, 아시아를 시장으로만 바라보고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볼 줄 모르는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변화를 거부하는 관료집단, 그리고 재계의 뿌리깊은 기득권 세력과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연대’였다. 그동안 일본의 모토는 일본은 결코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세기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일본은 아시아지역 내에서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대동아공영이라는 미명아래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목숨과 재산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 씻을 수 없는 역사적 만행을 부인함으로서 아시아사회 속에 공분을 일으킨 바 있다. 지금도 일본은 과거의 만행은 아랑곳없이 미국의 비호아래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며 중국과 한반도 및 러시아 극동지역을 최신예 첨단무기로 포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시대의 도래와 함께 중국만큼이나 중요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문제는 당사자인 일본 뿐 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및 환태평양지역의 모든 관계국들에게 비상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경기회복을 선언했다. 10여년간 계속된 기업의 혹독한 구조조정과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51    아시아의 블랙홀,중국의 비상 댓글:  조회:3154  추천:54  2009-01-15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주역들                                                지난 200년간, 한중일 삼국은 제각기 남들처럼 살았다. 담벼락을 높이 쌓아 올리고 각자의 색깔을 만들고 각자의 목소리만 높여가면서 살아왔다. 그 세월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와 미움을 키워 왔으며, 그만큼 멀어져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소통의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는 이제 담을 허물어야 한다. 나를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중일 삼국은 이제 아시아의 허브이자 세계역사를 이끌어갈 아시아대륙시대의 삼두마차다.  아시아의 블랙홀,중국의 비상인류역사상 가장 앞선 선진국은 어느 나라일까. 미국, 프랑스? 혹은 영국? 최근 100년간의 역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만 더 거슬러 올라가도 이 대답엔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이전, 대략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의 대답은 또 다르게 변한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 나라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모든 시대 세계의 석학들은 한결같이 말하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선진국. 그 해답의 주인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이다.   1820년 이전까지 중국은 세계 GDP의 33%정도를 차지하는 대국이었고 그 이전 2000년 동안 중국은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2세기까지는 서방세계의 1인당 GDP보다 높았고 18세기까지는 세계 평균보다 더 높았다. 콜럼부스가 미국대륙을 발견했던 16세기 대 항해 시대에도 중국은 포르투칼이나 네덜란드보다 더 큰 규모의 앞선 기술을 가진 선박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략 1820년경부터 중국은 내전과 기근으로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청왕조의 부패와 민중의 극심한 빈곤,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내란과 소요 속에서 세계 최고의 대국 중국은 서서히 침몰해갔다. 이때가 중국으로선 진시황 통일 이후 가장 참담한 시기였다. 이때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내전과 공산화를 거치느라 세계 3분의 1을 차지했던 경제규모가 불과 2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아에 허덕이는 11억 인구의 나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그 막대한 인구를 빈곤의 고통 속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지리한 공산혁명에 이어 수많은 지식인들을 암흑세계로 내 몰았던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중국에 그 누구도 희망을 걸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중국엔 무서운 태풍이 불고 있다. 침몰해가던 거함 중국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중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빠른 경제성장, 그리고 최대의 인구를 가짐으로서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자존심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가고 있다. 그들의 자존심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주요 사회 경제 지표들이다. 중국은 지금 세계 최다 외자유치`(2008년 1월 현재, 1조6,000억불)국이며 매해 두 자릿수의 초고속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계 최대 생산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13억이라는 세계 최대 인구와 전 세계 화교권과 홍콩을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 경제공동체 보유국이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년 10월 15일에는 중국인들의 자신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가 성공적으로 우주탐사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일을 두고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이룬 쾌거’로 보고 있다. 중화민족 천년의 꿈이란 항아(嫦娥)’의 전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전설은 사약을 훔쳐 용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갔다?미녀에 관한 전설로 그 사건이 얼마나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는지 짐작케 한다. 한껏 고조된 자긍심을 반증하듯 중국항공우주국은 3년 안에 달 탐색선 항아 1호 발사계획을 발표했다. 거기에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지금, 진시황의 중국통일이후 역사적으로 늘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패권주의적인 중화의 자존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충천해 있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의 놀라운 성장은 1980년대 초,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그가 중국재건을 위해 채택한 것은 중화사상과 경제건설, 그 두 가지였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다. 흑묘백묘론이란, ‘검은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즉 사회주의건 시장경제건 중국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면 뭐든 좋은 것이며 그것을 채택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방세계는 이러한 덩 샤오핑의 결정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가장 중국적인 선택이었다. 어떤 정치이데올로기가 지배를 하고 있건 중국인을 지배하는 사상은 중화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덩 샤오핑은 일부 중국공산당 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주의의 중요한 대 원칙인 계획경제를 버리고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초, 중국 동남부지역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 선전을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세계 시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홍콩과 대만의 기업들 그리고 동남아에 있는 화교자본들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탄생했다.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 이어 장쩌민의 국가발전 3대 지향론, 즉 현대화, 미래화, 세계화는 세계 시장질서 속에서 중국이 다시 한 번 세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특히 후진타오는 21세기형 리더로서 2010년까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완성하기 위해 선진 생산력대표, 선진문화대표 그리고 폭넓은 인민이익대표 라는 이른 바 `3개 대표론‘을 주창해 경제, 문화예술, 복지의 세계핵심분야의 선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후진타오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샤오 캉(小康:풍요한 수준의 삶)‘, 즉, 인민 하나하나가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관된 정책속에서 부패한 청나라 왕조와 오랜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던 중국의 민중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위해, 내일을 위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국민으로 변했다. 그 결과, 20여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공룡, 중국의 위협에 맞서 자국의 경제 챙기기에 골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국은 이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태풍의 눈으로 등극했고, 세계는 중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경제전문가 마틴 울프는 중국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으며, 이제 세계는 적당한 대응책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할 때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미국에게 있어 지금의 중국은 20세기 일본과 옛 소련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강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의 부상 이후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인 미국과 유럽연합의 경제가 위축되고 있으며 중국의 성장과 함께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아시아대륙에서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온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중국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지도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부시보다는 후진타오가 더 환영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최대 교역국이 미국에서 중국으?바뀌었다. 한반도에 끼치는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지대하다. 많은 사람들이 북핵문제를 풀어가는 주도권이 미국과 북한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막후에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동북아뿐만 아니라 아시아대륙 전체를 역동적인 대륙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중심 진원지에 있는 중국은 국제 정치, 외교, 통상, 금융, 문화, 기술 등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당제국`(大唐帝國)의 부활’ 또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 중국중심의 세계질서)의 재현‘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켠에서는 뜨는 중국, 지는 미국이라는 시니컬한 비유도 흘러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중국의 부상과 함께 세계 질서의 중심이 아시아 대륙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50    동북아시대의 신호탄, 아시아경제가 살아난다 댓글:  조회:3156  추천:42  2009-01-12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新 풍속도> 동북아시대의 신호탄, 아시아경제가 살아난다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미국으로부터 초유의 금융재앙이 불어 닥쳤다. 대미 경제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직접적인 손실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도 달러가 폭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거의 원폭투하를 당한 듯한 상황의 미국금융계는 물론이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아시아까지 강력한 후폭풍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아시아의 실물경제 회복은 최소 1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이 사태를 지켜보던 일본의 한 경제전문가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의 경제리서치 회사 다이와 소켄의 샤오 민제 책임 이코노미스트는 이번의 경제위기는 내년 2/4분기부터 한·중·일 중심으로 회복세로 돌아서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얘기다. 세계 경제의 물꼬는 늘 미국이나 유럽선진국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심각한 금융위기가 한·중·일 삼국으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경제 회복과 성장으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회복되고 이어 주변 국가들과 세계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경제권력이 서구사회로부터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국제경제를 연구하는 한국인 경제전문가들도 같은 시각이다. 맥킨지 한국 금융기관 전문가 그룹의 리더인 김용아 파트너는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다소 아시아를 주춤하게 했지만 그러나 아시아의 성장엔진은 여전히 힘차게 박동하고 있다고 전제하며 최근 아시아 경제를 이끌어가는 네가지 트렌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그 첫 번째는 아시아경제의 회생이다. 1980년대 아시아의 총생산은 세계 총생산의 19%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7년 현재 36%로 성장했고 2020년이 되면 45%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아시아는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유럽과 북미가 부상하기 까지 아시아가 누렸던 황금기를 되찾아 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같은 지역내에 있는 우리의 경제에도 긍정적인 파급효과가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두 번째는 중간시장이 발달하고 있어 세계일류 대국중심의 고가시장과 중국, 인도와 같은 저가시장의 사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우리 한국과 같은 나라가 점유할 수 있는 시장규모가 전체 시장의 50%규모로 확대됐다. 세 번 째는 아시아전역에 도시화와 사회간접자본 투자 그리고 교육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20년 뒤에는 아시아의 도시인구가 10억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보다 약 두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응하는 다양한 사회간접자본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어서 건설, 철강, 중공업 분야에서 경쟁력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10년 내에 경영자급 산업인재가 적어도 10만명이상 추가로 요구될 것이며 중간직급 수요는 지금도 매년 평균 25%씩 증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1500개 이상의 신규 대학과 직업학교가 필요해진다. 교육인프라가 발달한 한국으로서는 새로운 시장 확대가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국가간 연대현상이다. 10년전만 해도 아시아국가 들 사이에 연대현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2010년까지 한국을 비롯한 32개국가를 연결하는 총연장 만 4천킬 로미터 길이의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가 건설된다. 26개 국가를 연결하는 철도네트워크도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싱가폴 국립대학의 키쇼어 마흐부바니교수도 그의 저서 <헬로 아시아>에서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글로벌 리더는 미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중국과 인도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세계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비서구가 성장하면 세계는 더욱 평화로워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아시아의 도약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므로 서구 입장에서도 이를 환영하고 이같은 변화를 서구가 수용하면서 세계질서를 재편성해야만 세계 평화와 안정이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죤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도 일찍이 아시아를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메가트랜드의 하나는 아시아 시대가 열릴 것이며 이미 세계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서양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이후 아시아지역 내의 무역총액이 아시아와 미국, 유럽간의 무역 총액을 넘어섰고 세계 GNP(국민총생산)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구촌이라는 대형 화물트럭을 역동적으로 달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이전처럼 구미 각국이 아닌 바로 이 아시아, 그것도 우리를 포함한 일본과 중국이 있는 이 동북아라는 의미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동아시아의 경제규모가 유럽이나 북미를 넘어서는 날이 멀잖아 올 것이다. 그 동아시아의 핵심국가가 바로 한국, 일본, 중국이며 이를 동북아라고 부른다. 즉 아시아대륙시대는 동북아시대를 의미하는 것인데, 최근 이 세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다.  
49    동북아,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댓글:  조회:3515  추천:50  2009-01-05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新 풍속도> 동북아,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이미 3년 전의 일이다. 모스크바 코스타(KOSTA:한국유학생회) 강의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북경을 경유하게 됐다. 그런데 그날, 공항의 국제선 청사탑승구역 곳곳에 대형 화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공항직원에게 물었더니 설날을 맞아 고향을 찾는 대만기업인들에게 중국 정부가 특별히 대만 타이페이로 직항하는 항공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비록 상설 항공편은 아니었지만, 중국과 대만간의 직항노선이 시작된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동안 중국본토와 대만 사이에는 이른바 3불통(不通)이라고 하는 장벽이 있었다. 통행·통상·우편교류가 그것이었는데 그 중 통상과 우편교류는 이미 무너졌고, 마지막 남아있던 직접통행금지조항마저 이날을 기해서 끝내 무너진 것이다.         ‘2005년 1월 29일은 우리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 주요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들은 모두 이렇게 흥분했다. 중국과 대만의 TV와 신문들은 앞 다투어 직항항공이 뜨고 내리는 감동적인 활주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날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에서 각각 출발한 비행기들이 타이베이(臺北)와 카오슝(高雄)의 공항에 도착했다. 실로 56년만에 중국과 대만을 가로막고 있던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동북아시대를 위해 달려온 나에게 그 사건은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 하지만 그 사건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의미있게 받아들일 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일본에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설연휴를 기해 후쿠오카에 갈 일이 있었다. 마침 일본 건국기념일(2월 11일)과 겹쳐 일본관광객과 대만과 홍콩, 상해, 청도 등에서 설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중국인들이들로 호텔이 북적댔고 내가 일행과 함께 노천온천탕에 갔을 때도 탕안에는 한국과 중국, 대만 등에서 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원래 아시아 사람들은 목욕탕 같은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쉽게 말을 걸지 않는다. 대개는 아시아인 특유의 숫기없는 성품 때문이고 일부분은 말을 걸어봐야 별로 좋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아시아인들 사이의 오랜 불신과 비하심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시아인들 사이에 이런 오랜 감정의 장벽이 많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한류열풍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확실히 과거보다는 아시아인들 상호간에 호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그날 그 노천온천탕에서 나는 그 진면목을 확인했던 것이다. 모두 알몸으로 탕 안에 앉아 있었으니 조금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국과 일본, 대만사람들과 진지하게 각자의 모국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어, 일어, 영어와 한국말이 하나의 공간 안에 떠돌며 격의없이 어울려 대화하는 정경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꿈꾸고 바라는 공생하는 아시아의 모습이 결코 멀지 않다는 사실에 감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대륙에서 온 중국인 상인들과 대만 청년들이 지난 1월 29일의 직항항공운행에 대해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그들은 중국 정부가 2030년까지 해저터널을 뚫어 중국 베이징과 대만의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정치적 대립감정 없이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그런가 하면 나가사키(長崎)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50대 일본인 한 사람이 더듬거리는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욘사마’열풍과 한류의 영향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혀를 내두르면서 소니, 히타치, 후지쯔 등 일본 10대(大)기업들의 순이익을 모두 합쳐도 이루지 못한 ‘순이익 100억불’ 실적을 한국의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이뤄낸 일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이 한국에 대해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그는 일본의 경제재건 뿐 아니라 한일간 FTA를 위해 문화교류와 경쟁과 충격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해 나를 무척이나 감동시켰다. 홍콩의 투자자문회사에서 일한다는 한 30대 중국인은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화상대회를 한국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동안, 부동산, 물류 등 전통산업에 주력해왔던 화상기업들이 최근에는 IT·금융·게임·에너지 부문 등으로 투자영역을 확대해가는 추세이므로 이 분야의 한국기업들과 윈-윈(Win-Win)관계 형성을 기대할만 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나도 그동안 외신을 통하여, 세계 500대(大) 화상기업들의 시장가치만 6천억 달러에 이르며, 또한 전 세계 곳곳에 약 6천만 명에 이르는 화상들이 동남아, 북미 등에 네트워크를 구축해놓고 그 활동영역을 빠르게 확장해가고 있는 만큼, 한국기업들이 화상들과 세계무대로 동반진출 할 경우 상당한 시너지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던 중에 뜻하지 않게 일본의 한 노천온천탕에서 중국 화상들의 세계경영전략과 투자계획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한·중·일의 시장통합에 관한 기대와 관심은 비단 나와 같은 몇몇 사람들 소수만의 생각이 아님을 다시한번 감격스럽게 확인을 한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앞으로 동북아시장통합을 이룩하려면, 정치와 경제는 나라마다 그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고 그래서 마찰도 뒤 따르지만, 기술과 문화는 함께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기술과 문화교류를 통해 중·일·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고, 중국·한국·일본의 수도를 잇는 ‘베세토(Be-Se-To) 관광벨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으며, 이때 각국 주민들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동북아 통일 한자체’를 제정해서 공용화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성주박사의 지론을 빌려 동북아 통합시장이 ‘다양성 속의 하나’를 이룬 유럽연합(EU)과 같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정치적 타협과 제도권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미래 동북아의 주역인 한·중·일 젊은이들에게 ‘친구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민간차원의 노력이 더 급선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동북아 FTA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주역인 아시아 경제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의 젊은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교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동북아 삼국 젊은이들의 문화, 학술, 기술 교류를 위한 대규모 공동펀드 (가칭 에라스무스 펀드 Erasumus fund)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일본인 중년신사가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의 발언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중국과 한국간의 역사왜곡과 영토분쟁 등으로 인한 단절의 벽을 깨고 동북아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삼국 공동역사연구회 및 공동역사교과서를 만들어 내는 일이며, 화합과 통일을 의미하는 ‘화(和)의 철학’을 동북아 3국이 공유하고 있는 만큼, 서로를 이해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각국이 솔선수범하며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매우 고차원적인 의견을 제시해 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최근 ‘중국은 날아가고, 일본은 뛰어 온다’ 는 말이 유행하는 반면 한국은 북한 핵문제와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로 좌충우돌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한·중·일 FTA 문제는 삼국간의 이해충돌로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어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뜻하지 않던 이 온천대화를 통해 깊은 위로와 치유를 받았다. 이날 내가 느낀 것은 한·중·일 구성원들 사이에선 어느 새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사적인 앙금과 풀어야 할 숙제가 우리들 사이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가 과거의 기억은 흘러가는 시간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새로운 이웃이 되고 싶어하고 있었다. 동북아시대는 그렇게, 가슴을 열고 마음을 나누는 일부 동북아인들을 통해 이미 시작되고 있는 듯 했다. 
48    동북아 시대가 오고 있다 댓글:  조회:6102  추천:55  2008-12-31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여태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우리는 이제부터 치열하게 그리고 정말 열심히 동북아라는 말과 친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도 한국인에서 동북아인으로 확대해석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한국인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정한 동북아인이 되는 데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동북아는  우리 후손들의 풍요와 선진한국의 자존심이 걸린 생존코드다.  동북아 시대가 오고 있다나는 세계지도 보기를 좋아한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한쪽 벽에 칠판 크기로 붙어있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계지도를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한국은 가까이 다가서야만 겨우 보이는 작은 나라이지만 묘하게도 그 세계지도의 한 가운데, 중요한 거점처럼 위치하고 있다. 그 의미심장해 보이는 점 위에 서서 동서남북으로 드넓게 펼쳐진 오대양 6대주를 보고 있노라면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말했던 세계역사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역사의 시작은 동양에 있고 발달은 서양에 있다. 정신만이 높고 물질은 낮다는 말이 아니요, 발달만이 장하고 지킴은 작다는 말이 아니다. 높음 낮음도 없다. 다 제 할 것을 할 뿐이다. 정신문화의 씨가 동양의 흙에 떨어지자 역사의 주역은 서양으로 갔다. 그리하여 충분한 분화의 자유로운 토구(討究)가 허락되었다. 만일 동양에 그대로 있었다면 약해지고 갇혔을는지 모른다. 분석에 또 분석, 의심에 또 의심, 비판에 또 비판하는, 가만 두는 것이 하나도 없는 서양의 손으로 갔으니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 그 물질의 큰 힘으로 동양사람을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동양은 그 밑에서 자유와 진보가 귀한 것임을 배워야 했다.                  이제 오늘은 서구 문명의 폐해가 끝에 오르게 된 때다. 이제 동양은 그 품갚음을 하여 서양을 건질 때가 되었다. 그 교만하던 서양의 입에 동양소리가 차차 높아가고, 동양은 그 힘든 곤학(困學)을 거의 마칠 때가 되어온다. 이제 당한 문제는 동서종합을 하는데서 한 단 높은 새 지경에 오르는 일이다. 이러한 세계역사의 테두리와 방향 안에서 우리의 자리와 할 일을 발견해야 한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함석헌 선생의 이 글은 내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소중한 가르침 중의 하나다. 이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한국이 인류 역사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되새겨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도도한 인류 역사의 흐름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됐는데, 그런 시각으로 인해 나는 인류가 흘러온 역사를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짓는다.   <지중해시대> 기원 전후, 중앙아시아와 북부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부유럽이, 반도국가 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인류역사상 최초의 복합적인 지역통합 문화권을 탄생시킨 시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으며, 법 제도와 군국주의 공화정치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 화려했던 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것은 그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팔레스타인 반도의 작은 바닷가마을인 갈릴리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를 탄생시켰고, 이후 수많은 고난과 핍박속에서도 불길처럼 전 세계로 확산됐다. 마침내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 의해 기독교는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다. 기독교는 인류 역사상 서진(西進)을 일으킨 출발점이 됐다.   <유럽대륙시대> 로마제국의 분열과 멸망 이후 세계 역사의 중심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대륙으로 옮겨갔다. 이른바 유럽대륙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의 특징은 강력한 전제정치제도와 카톨릭에 기반을 둔 귀족중심의 문화였다. 이 시대의 리더는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그 시대 파리는 세계 문화와 산업, 문학을 지배하는 강력한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소비문화와 갈수록 심각해지는 계층 간의 극심한 신분격차와 빈부격차로 인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자각하는 정치적 실험정신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서는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사회과학의 발달, 부국강병을 위한 중상정책, 종교개혁 및 시민운동 등이 파생했다. <대서양시대> 침체된 유럽대륙문화에 뒤를 이어 세계 질서를 지배한 세력은 뛰어난 경험주의적 수용능력과 해양성기질에 바탕을 둔 진취성이 뛰어났던 영국이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의 서쪽에 있던 섬나라였다.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데 그 어느 나라보다 열심이었다. 여기에 기독교(성공회)를 국교로 받아들여 민심을 결집시킴으로서 섬나라의 한계를 뛰어넘어 쟁쟁한 유럽 국가들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서양시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대서양은 섬나라 영국의 앞마당이 되었으며, 그 후 영국은 남유럽의 스페인, 포르투칼 등과 함께 제국주의적 경향을 같이 하면서 세계의 3분의 1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함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미주대륙시대> 1500년대 들어서자 영국은 인구증가와 더불어 심각한 실업율에 시달리게 됐다. 자연히 콜럼부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런 흐름은 당시 런던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연극이 ‘서쪽으로!’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드디어 1606년 영국인 105명이 신천지를 향한 꿈을 품고 미주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신대륙에 영국의 법률과 가치관이 똑같이 적용되는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그들은 결국 인디언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모두 몰살당함으로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최초로 미주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은 1620년 영국 성공회의 핍박을 피해 상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대륙으로 향했던 102명의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이전의 영국인들이 허황된 꿈을 품고 금광을 찾아다녔던 것과는 달리 스스로 땀흘려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일구었으며 인디언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아나감으로서 미국대륙을 발판으로 인류역사의 전환기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청교주의는 미국대륙에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를 심는 원동력이 되었고, 귀족중심의 사회를 완벽하게 탈피해 진정한 시민사회를 미주대륙에 정착시키는 주역이 된다. 미주대륙시대를 특징짓는 두 축은 유럽대륙문화의 반성과 영국의 영향력이었다. 유럽대륙 문화의 반성은, 크게 정치적, 종교적 개혁, 상업과 교육과 기술을 숭상하는 시민사회 등장,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 등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영향력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근면과 정직, 땀과 평등을 중시하는 도덕관 형성과 증기기관 및 기계식 동력장치 같은 영국의 발달된 기술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주의의 발달, 그리고 경험론적 가치관과 입헌 민주주의 체제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미주대륙에 뿌리내린 법치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합리적 실용과학주의 등의 가치규범은 다양한 인종, 문화, 개성을 폭넓게 통합하는 국가통치 질서를 낳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투쟁과정에서 세계정의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이후 소련의 몰락과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에는 대중민주주의와 세계화 정책의 기수로서 국제정치, 외교, 통상, 경제, 군사, 교육, 과학, 기술,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석권하는 초강대국`(Pax Americana)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환태평양시대> 20세기 세계에 가장 큰 변화와 영향을 끼친 2대 사건은 소련의 몰락과 일본의 등장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의 지식층 관료들과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가 일본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흔히 말하는 20세기 후반의 환태평양시대는 미국과 일본의 합작품이다. 두 개의 핵폭탄으로 제국 일본의 단말마적인 야욕을 잠재운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의 정치안정과 경제회복을 지원함으로써 반미감정을 해소하고 친미노선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적성국가인 중국과 소련을 방어하는 태평양지역 최전방 군사전략 요충지로 필리핀과 일본(한국포함)을 선택하고 두 나라에 막대한 군사력을 지원했다. 그 덕택에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한국전쟁 특수를 계기로 세계가 놀랄만한 빠른 속도의 경제건설에 성공했다. 성공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태평양을 발판삼아 미국, 캐나다, 호주, 남미, 동남아, 중동, 유럽 등에 메이드 인 재팬 선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탈 아시아’정책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 국가이기를 거부했던 일본은 패전 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미국 다음가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과 함께 환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아시아 대륙시대> 우리는 잘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일본의 세기적인 성장 이후 전 세계 국가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아시아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18세기말부터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와 상인 그리고 일본과 청을 통해 들어온 신기술들이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동안 잠복상태에 있다가 20세기 중반 광복과 더불어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 뒤 국토분단이라는 상처 속에서도 한국은 민주공화국의 통치체제를 갖춘 뒤, 빠른 근대화과정과 국제화, 그리고 개방사회로의 변신을 거듭한다.  북한과의 긴박한 대치상태, 군사정권의 독재로 야기된 정치적 갈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월남전 파병, 중동건설 붐,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내수산업의 활성화, 그리고 수출입국의 목표를 달성하면서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60년대부터 치열하게 계속되어온 민주화운동은 86년 민주항쟁으로 결실을 맺었고, 마침내 88서울올림픽을 통해 불과 30년전 전쟁의 폐허였던 한반도의 기적같은 성장과 변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한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신생 독립국가로서 50년 만에 이룩한 세계 경제교역규모 10위, OECD가입, 개인소득 1만불, 등의 주요 경제지표가 말해주듯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발전모델로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20세기 후반 최대의 역사를 만든 주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여기에 최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 오랜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새롭게 아시아의 리더로 재등극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는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년간 서구중심의 역사속에 깊은 침체기에 빠졌던 아시아의 불꽃이 다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47    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 댓글:  조회:6073  추천:55  2008-12-2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4]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따지고 보면 나도 시쳇말로 꽤 글로벌한 사람이다. 아이들이 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교회를 나가게 된 후 유명 목사님들을 따라 선교 여행차 세계를 많이 돌아다녔다. 아내와 함께 미국, 유럽, 러시아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숱한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남들은 그저 TV나 책에서 간접경험에 그친 곳들을 나는 직접 찾아가서 그 땅을 밟아보고 그 공기를 마시며 그 나라의 체취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름대로는 화려하게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인생치고는 지금 내가 들고 다니는 명함에 박힌 용어들이 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명함은 각각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이승률’,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회장 이승률’  ‘연변은 뭐고 또 동북아는 뭐야? 그게 언제 유행했던 말이더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언론인들이 한 때 떠들다가 지금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묻혀진 말 아니었던가. 한국인이 우주를 오가는 시대에 이 무슨 캐캐 묵은 용어들이야?’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의문에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작 이 화두를 붙들고 살고 있는 내 자신도 사람들에게 ‘연변’과 ‘동북아’란 단어를 설명할 때마다 무척이나 답답하다. 첫 번째는 사람들에게 전혀 흥미를 주지 못하는 화두를 뒤늦게 붙들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해서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붙들고 몸살을 앓아도 부족할 화두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답답해서다. 1990년 가을. 내 삶을 뒤흔든 한 크리스챤 지도자(연변과기대 김진경 총장)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동북아라는 개념과 조우했을 때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리에 어느 날 실수로 뚝 떨구어 놓은 귀찮은 분실물같이 느껴졌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밀어내기를 계속하다가되려 그것이 내 운명이자 동시에 시대의 화두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미래와 희망이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제껏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본과 미국이 있는 동쪽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역사의 중심은 늘 그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 100년 동안에 일어난, 서양세력의 영향에 물든 겉모습 현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세월은 우리들에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역량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었지만 한편, 2분법적인 이념 분쟁?전통사회와의 단절을 가져온 갈등의 세월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이전의 수천년에 걸쳐 인류역사의 저변을 흘러온 근원적인 물결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동쪽에서 불어온 강력한 서구화의 바람에 휩쓸려 우리의 중심좌표를 勞儲値홱?것이다. 지난 백년, 우리 민족이 겪어온 난관과 위기는 어쩌면 이와같은 방향 감각의 혼돈과 미숙함에 기인했는지도 모르겠다.  ‘방향이 잘못 되었다면 속도는 무의미하다’ 간디가 한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성장 신기록을 세운 민족이라 해도, 아무리 위대한 문화적 역량과 독창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난 민족이라 해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우리에게 오늘이 험난했듯이 미래 또한 그럴 것이다. 모두가 동쪽을 바라보며 일본과 미국을 향해 박수치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을 등에 업고, 그들이 가르쳐 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중국이 있는 서쪽으로 향하리라. 관용과 조화의 미덕을 가슴에 품고, 잠자고 있는 땅 - 21세기 지구촌의 신천지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하는 서부 개척사를 펼치리라.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와 유럽을 지나 중동지역 팔레스타인 땅에 까지 나아가리라. 그 길에 우리 민족의 미래가 있으므로, 동북아를 변화시킬 새로운 활로가 있으므로, 그리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땅에 깃들어 있으므로 나는 그 길로 나아가리라. 이와 같은 역사의식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갖고 자신을 회고 해 볼 때, 나는 한동안 내게 가장 가까운 분이면서도 의식적으로 멀리 대하고 있었던 나의 선친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끊임없는 탐구욕에 이끌려 이리저리 방황했던 젊은 날의 과오는, 결국 누구보다 맏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의 상처를 남겼다.그런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 내게 유업처럼 남겨주셨던 고문서와 일기문과 사진 자료들은 이제 세상에서 어느 귀한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그것은 한마디로 자식으로 하여금 한민족 역사의 회복을 꿈꾸게 만든 거룩한 각성의 유품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나는 이를 “나의 아버지와 테라우치문고”란 글에서 자세히 썼다.그리고 이 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과 희망을 내 마음속에서 재발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뜻 깊은 효도의 길이 되었다.  
46    [역사는 어디로 흐르느가]-프롤로그 댓글:  조회:3045  추천:45  2008-12-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   내가 중국의 변방지역인 “연변”과 “동북아”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한분의 크리스챤 지도자를 만나면서 부터이다. 그 분을 만나고 그 분과 함께 연변과학기술대학 운영을 위해 18년이라는 세월을 동고동락 해 오는 동안에 나는 자연스럽게 동북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연변”과 “동북아”를 기반으로 하여 아시아 존에 새로운 희망의 역사(“동북아공동체사회”)가 펼쳐지기를 꿈꾸며 활동하고 있다. 이런 과정속에 그때그때 마다 부닥쳐온 국제 정세의 사안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연우포럼(한민족 칼럼공동체)」에 기고해 온 글들을 묶어서 만든게 이 책이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탁월한 학문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랜세월 동안 축적된 경험적 지식과 감각을 토대로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세차게 구비치고 있는 세계역사의 한 흐름을 해석 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껴왔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동북아시대 역사의 흐름에 대한 내재적 통찰을 추구하는 한 어린 탐구자의 고백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점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조금 설명하는것이 독자들께 편퓔?제공하는 방법이 된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사람의 행岵訣嗤? 이를 이해하는 바탕위에서 책을 읽을 때, 비로소 저자의 생각과 꿈과 희망의 진면목이 전달되지 않겠는가! 사람이란 결국 그가 살아왔던 삶의 총체적인 이념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인격적인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45    [프롤로그-3] 나이 마흔 셋,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 댓글:  조회:3055  추천:41  2008-12-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3]나이 마흔 셋,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이런 것을 신의 섭리라고 하는 걸까. 그렇게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던 그 해 가을,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종류의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 때가 1990년 10월 초, 북경 아시안게임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아내와 함께 주로 골프장 조경공사를 맡아서 일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앞으로 중국의 골프장 사업이 상당히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업허가를 얻기 위해 중국을 오가곤 했었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곤 북경과 상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단 두 곳 뿐 이었다. 아직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 중국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수교 전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선점효과가 있을 것 같아 주변 건설업자들과 컨소시엄을 만들기로 하고, 이 사업의 대표가 되어 매월 청도(靑島)시를 방문해 중국측 관리들과 협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국제관광개발지역 내 골프장으로 허가 난 땅을 적정가격으로 매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국제협상경험이 전혀 없는 청도시 책임자들이 값을 터무니없이 부르며 배짱을 내미는 통에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당시 중국 양상곤 국가주석의 아들 양소명이란 이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만나러 베이징의 한 호텔로 올라갔을 때 나는 다른 또 한분의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는 분이었기에 그에게 먼저 말씀을 하시라 양보를 하고 옆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나는 그가 무슨 일로 이 실력자를 찾아왔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내심으로 너무 시간을 빼앗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경청을 했다. 이윽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귀만 곤두세운 채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얘기가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내가 이제껏 세상가운데서 부대끼며 만났던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히 나와 같은 공간 안에 있었고 내 눈앞에  존재하면서도 오늘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는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원래는 한국 출신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20년 넘게 생활하는 동안, 대학교수도 됐고 또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을 한 편입니다. 그 후 1986년도에 중국사회과학원 초빙 교수로 북경에 와있는 동안, 우리 동족들이 사는 연길, 길림, 장춘, 하얼빈 지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보니 조선족들이 그들의 고유한 말과 글은 지키고 있지만 고등교육기관이 없어서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와서 연길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고 하니, 당신 부친께서 국가권력자이시므로 내가 하는 일을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중국에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투자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중국에 선진교육을 전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중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분야의 교육을 통해서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어서 대학을 세우려고 하는 겁니다. 선생께서 나를 한번 도와주세요” 그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에 버려진 조선족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애와 이제껏 살아오면서 쌓은 학식과 재산을 가져다가 황량한 중국 동북 땅에 대학을 세우게 해달라고 중국지도자를 설득하러 온 사람이었다. 나는 중국에 골프장을 지어 돈 벌 기회를 얻고자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웬지 모르게 자신의 존재감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것을 깨달았다. 그가 꿈꾸는 미래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꿈이 없었다. 그점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을 무참하게 느껴지도록 까지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동안 내 자아에게 물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쩌면 이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거센 폭풍우처럼 내 가슴을 뒤흔들었다. 서울에 돌아온 다음, 나는 잠시 내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2주후에 서울에 출장오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제발로 찾아갔다. 그래, 그가 꿈꾸는 미래를 나도 믿어보기로 하자. 그 미래를 내 꿈 삼자. 그의 손발이 되고 그의 도움이 되고 아예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버리자. 오늘은 일단 접어두고 미래를 믿어보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를 만나 그와 함께 일할 것을 먼저 제의해보자.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 내 모두를 던져도 좋다고 느껴지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 셋, 베이징의 그 어수선했던 호텔에서 느낀 감동이 지금까지도 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4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느가]-목차 댓글:  조회:3465  추천:51  2008-12-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목차  프롤로그    85년, 비닐하우스의 봄 나이 마흔 셋,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 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 나의 아버지와 테라우치 문고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동북아 시대가 오고 있다  <新 풍속도> 한중일의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동북아시대의 신호탄, 아시아경제가 살아난다 두 번째 이야기 동북아시대의 주역들    아시아의 블랙홀, 중국의 비상 제 2의 이자나기 신드롬을 꿈꾸다, 일본의 부활 반도국가 한국의 두 가지 얼굴 신이 내려준 축복, 반도성 한반도는 동북아시대의 성지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시대의 키워드 FTA와 T&T 동북아FTA와 한국의 손익계산서 KTX 등장과 한반도의 미래 한일해저터널,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해저터널건설은 시대의 흐름이다 한중해저터널 논의의 출발점 세계의 해저터널과 동북아 T&T 한중해저터널을 뚫고 T&T 시대로  한·중·일 해저터널과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  네 번째 이야기  코리안 섬 게임을 창출하라 흥부의 재해석, 포용의 성공전략 길을 닦아라, 미래는 꿈꾸는 게 아니라 달려가는 것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먼저 이야기 하라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섬김을 받으려면 경쟁을 포기하라. 이기고 싶다면    문제가 아닌 꿈을 공유하라 다섯 번째 이야기 중화를 품고 중원을 넘어가라 중화경제권이 뭉치고 있다  인류역사상 최강의 요새, 중화(中華)의 현주소 중국, 패권주의와 평화공존의 기로에 서다    조선족 사회 대망론(待望論) 한․중․조 삼자합작, 두만강유역개발사업에 거는 희망 여섯 번째 이야기  희망의 역사를 위하여   중국땅에 꽃피운 동북아의 희망, 연변과기대 연변과기대의 성공비결 북한 영변과 두 가지의 핵폭탄 사랑의 핵폭탄, 평양과기대를 낳다 평양과기대, 남북한이 함께 만든 기적  일곱 번째 이야기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민박회 사람들 경희궁의 밤 백두산의 소수민족 올림픽 오리엔탈 쇼크, 중국과의 미래를 기대하며 역사는 서쪽으로 흐른다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운동 거듭나는 천년의 꿈 여덟 번째 이야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요한바오로 2세와 마하트마 간디 일곱가지 사회악과 일곱가지 리더십 네덜란드식 리더십 - 공백 제로의 원칙 T림프구의 상생 매직-공생을 위한 후퇴 에필로그  
43    『후쿠오카 이니셔티브』 댓글:  조회:5315  추천:54  2008-12-11
       『후쿠오카 이니셔티브』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회장 Ⅰ 이제 며칠 후면(12/14)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린다.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성립된 ‘아세안(동남아 국가연합)+3 정상회담’에서 그동안 보조역할에 머물러 있었던 3국 정상들이 별도의 독립된 공식 회담을 갖게 된 것이다. 이 회담은 앞으로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간의 관계발전을 위해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해 주리라고 본다. 그것은, 첫째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시작하여 세계경제가 침체 일로에 빠져들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중·일 3국간 통화협력체제를 논의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에 개최된다는 점이다.아시아 공동펀드 조성, 한·중·일 금융 스와프 확대방안 등 공동체적인 경제협력방안이 논의될 것이 분명한 이번 회담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만큼 미국의 최대 채권국인 중·일·한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전선을 펴야한다.”고 하는 일부 중국학자들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드리는 수준까지 나아갈지도 모른다.어쩌면 이보다 더 큰 걸음으로, (중앙일보 배명복 논설위원 같은 이는) 미국(달러 화) 중심의 일극체제를 벗어나 다극체제로 갈수밖에 없는 세계금융통화질서를 예상하여 아예 이번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아시아 단일통화협력체제’를 모색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기를 요청하고 있다.이와함께 장기적인 협력방안으로 2002년부터 3국의 공신력 있는 국·공립 경제정책연구기관들이 공동연구 해 온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일괄적으로 추진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한다던가 또는 만성적인 3국간 무역수지 불균형 및 기술격차를 완화, 시정하기위한 동북아 통합시장 경제협력체 구상을 적극 검토하는 수준까지 나아갈지도 모른다. 만일 이렇게 되면, 이번 후쿠오카 한·중·일 정상회담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2000년 5월 제정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보다 훨씬 강도 높은 수준의 국제금융협력체제로 평가되는 “후쿠오카 이니셔티브”를 제창하게 될지도 모른다.한마디로, 미국이 흔들리고 따라서 EU까지 흔들리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3국이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선두그룹으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이 시점에 개최되는 후쿠오카 한·중·일 정상회담이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둘째, 이번 한·중·일 정상회담이 일본의 주도하에 개최되지만, 그 회담 장소가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환황해경제권의 관문도시인 후쿠오카에서 열린다는 점, 즉 그 ‘포지셔닝’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주지하다시피 후쿠오카는 큐슈지역의 최대 무역항으로서 한국과 중국, 대만 및 동남아지역을 향해 열려있는 국제도시다.역사적으로도 한·중·일 교역 및 문화교류, 인력이동의 관문이 되어왔으며, 무엇보다 일본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큐슈지역의 인재배양과 국제화를 이끈 지역 거점도시로 정평이  나있다. 최근 부산 시(市)와 후쿠오카 시(市)간에 ‘초광역경제권 경제협력협의회’를 창립하여 한·일간 교류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으며, 또한 오래전부터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위한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 및 전문연구기관 간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 온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따라서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이번 한·중·일 정상회담은 그 위치가 한·중·일 3국을 하나의 통합경제권(환황해경제권)으로 유도할만한 일본 측 적지(適地)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후쿠오카 이니셔티브”를 단순한 통화협력체제의 기능에 한정시키지 않고, 국제SOC사업과 같은 지역경제권(Regional Economic Block) 경기부양대책을 이끌어 내는 창의적인 기회가 되어지기를 기대 해 본다. Ⅱ 이야기를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자.지난 11월 4일 미국 대선에서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 앞에 놓여진 경제위기 상황은 1930년대 대공항에 직면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황과 비교하여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오바마 당선자는 결국 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대책으로 1950년대 연방 고속도로시스템 이후 최대 규모의 사회간접자본투자(SOC)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하였다.이른바 ‘新 뉴딜 정책’으로 불려지는 미국 사상최대의 인프라건설을 경제회복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중국도 세계금융위기와 내수경제 침체에 대응하는 경기부양책으로 ‘중국판 뉴딜’이라고 불려질만한 철도건설 총력전에 돌입했다.앞으로 10년간에 걸쳐 지구 한바퀴 거리에 해당하는 4만km 구간의 철도공사를 추진하겠다는것이 중국 측 대안이다.이른바 ‘로코모션 이코노미(Locomotion Economy : 기차경제)’라고 할 수 있는 이 거대한 SOC 건설사업에 투입될 자금은 1차적으로 2009년∼2011년 3년간 3조 5,000억 위안(元)에 이를것으로 보도되었다.또한 이와함께 경제 성장률 8%를 고수하려는 중국 당국의 의지는 확고하다.푸단(復旦)대학 쑨리젠(孫立堅)교수는 “10년전 중국은 도로 투자로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를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했다.”며, “이번에는 철도가 중국 경제를 살리고 더 나아가 중국을 세계경제의 맹주로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번 세계경제 위기가 중국엔 새로운 국가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경우는 또 어떤가?최근 국제금융질서 재편 과정에서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 바로 ‘일본의 역할론’이다.일본은 세계경제 위기로 고통받는 국가들을 돕기 위해 IMF에 약 1,000억 달러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최근 10년간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지탄받아왔던 일본의 금융시스템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세계경제에 새로운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물경제와 국제금융통화관리에 안정성을 확보해 온 일본 측 입장에서는 넘치는(?) 엔화를 무기로 국제교류기금을 확대하거나 해외 유수기업 및 부동산 매수와 국제SOC건설 사업에 투자할 의향을 비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위기 대응책은 무엇인가?보도에 의하면, 국회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중단된 ‘한반도대운하사업’의 후속타라고 할만한 4대강 하천정비사업 등에 일정 규모의 경기부양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 필요성을 제기하며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을 한푼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애쓰는 반면, 민주당은 건설예산의 효과가 기대만큼 나지않기 때문에 차라리 서민들의 생활보호를 위한 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야간에 이전투구 식(式) 다툼을 벌리고 있는 실정이다.(이럴 때,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눈앞의 땅에 떨어져있는 모이를 주워 먹으려고 싸움을 하고 있는 닭이 되지말고, 저 높은 하늘의 기류를 타고 유유히 활공하며 큰 먹이를 취하는 독수리가 되어볼 생각은 없는가”라고) 이런 판국에 후쿠오카 한·중·일 3국간 정상회담이 열린다.‘타이밍’과 ‘포지셔닝’이 뛰어난 이번 기회를 활용하여 한국과 한반도를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의 중추적인 거점지역으로 만들 수 있는 어떤 묘수를 찾아낼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든다.우리가 비록 중국과 일본이라는 2대 강국 사이에 끼어있는 중위권 샌드위치 국가라고 하지만, 이번 세계경제 위기에 봉착하여 모처럼 한·중·일간에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고 또 국가간 컨소시엄으로 경기부양을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는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여 중국과 일본이 할 수 없는, 오직 한국과 한반도만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찾는 묘수가 되지 않겠는가?그리하여 우리가 제시한 대안으로 한국이 살고 (북한도 살리고) 중국 및 일본에도 유익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 동북아 평화발전과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국제협력의 상생 모델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일명 ‘동북아 T&T (Turnnel & Turnnel)프로젝트’라고 하는 국제교통인프라건설 사업을 감히 제안해 보고자 한다.최근 부산발전연구원과 경기개발연구원이 중심이 되어 일본 측 및 중국 측 전문연구기관과 한·중·일 복합 해저터널 건설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부산과 후쿠오카를 연결하는 한·일간 해저터널 그리고 평택, 인천 또는 황해도 용연(장산곶) 가운데서 한곳을 택하여 산동반도 위해와 연결하는 한·중간 해저터널이 바로 그것이다.한·일 터널은 아시아나 금호그룹(거가대교 침매터널 공사를 하고 있는 대우건설 인수 그룹)이 주축이 되어 한국 전경련과 일본 전경단의 협력을 유도하고 있고, 한·중 터널은 중국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많은 관심과 지원 의사를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요약해서 말하면, 한·중·일 복합해저터널건설(국제SOC사업)과 아시아 단일통화협력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양 기둥으로 세워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집’을 지어보자는 것이 필자가 소망하는 동북아 미래상이다.이 일은 한국(한반도)만이 제안할 수 있는 지정학적 절대 조건이며, 또한 한국이 중추적인 리더십을 갖고 중국과 일본을 한마당 연합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지경학적 특수대안이 될 것이다.특히 환황해권 민·관·연 합동 SOC프로젝트로 협상이 가능한 한·중·일 복합해저터널 건설사업은 당사국인 한·중·일 3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 지역에 걸쳐 미국의 오바마 식(式) ‘新 뉴딜 정책’이나 중국 공산당이 추진하는 ‘로코모션 이코노미(Locomotion Economy)’ 국책 사업을 능가하는 경기부양과 투자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동북아 사회를 하나의 통합시장 경제공동체로 탈바꿈시키는 세기사적인 대역사(大役事)가 될 것이다. Ⅲ 지구촌 하늘의 기류를 활용하여 높이 비행하는 새가 있다.독수리는 결코 눈앞의 작은 모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고공을 활공하며 유유히 자신의 목표를 찾는다.한국의 미래상이 이랬으면 좋겠다.생각의 틀을 넓히고 뜻을 높이 세워 미래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더 높고 멀리 보는 국가전략을 세워야 한다.우리의 마음과 몸(한반도)을 열어 중국과 일본을 한반도의 양 어깨에 매다는 작업을 한번 기획해 보자. 중간지대에 끼어있는 우리의 약점을 최선의 강점으로 변화시켜 보자.그래서 마침내 중국과 일본을 독수리의 양 날개처럼 달고 유라시아 대륙과 환태평양지역을 넘나들며 지구촌 높이 비상하는 국가가 되어보자.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저 멀리 블루오션의 새 하늘이 보인다. 며칠 후(12/14) 열리는 후쿠오카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이명박 대통령께서 이런 독수리의 기상과 비전을 갖고 3국을 리드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 주었으면 좋겠다.노도광풍처럼 밀어닥친 세계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한국(한반도)을 동북아 국제협력의 중립적인 자유무역지대로 활용하는 지혜가 3국 정상들의 가슴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기를 기대한다.이러한 창의적인 ‘후쿠오카 이니셔티브’의 동지애가 기초가 되어 마침내 한반도를 중간매체로 하여 동북아경제공동체사회가 구현되는 새로운 역사의 지평이 새벽하늘처럼 환하게 열리기를 온 마음으로 기원해 본다. (※그런데 어제(12/9) 신문을 보니, 취임 2개월만에 지지율이 20%대 초반으로 급락한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일본 내 정치에서 사실상 리더십을 상실하게 됨으로서 오는 14일 열릴 예정인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에서 정책공조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자국 내 통치 기반이 확고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 5년 임기가 보장돼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아소 총리의 발언권과 입지가 상대적으로 좁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따라서 자금 동원력이 풍부한 일본이 소극적으로 나설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한·중·일 3국간 정책공조도 겉돌게 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이다. 우리 동북아 3국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이렇게 멀고 힘든 길인가?아! 그래도 희망을 잃고 싶지 않다.내일 세계가 망한다 할지라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노 철학자의 희망을 다시한번 가슴에 새겨본다.희망이 곧 삶의 에너지임을 믿기에, 나는 결코 이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42    [프롤로그-2] 85년,비닐하우스의 봄 댓글:  조회:3514  추천:48  2008-12-03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2]85년,비닐하우스의 봄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내가 동국대학 불교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75년 3월. 결혼을 하고 첫 아들까지 낳은 뒤였다.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조숙하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남들처럼 공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게 그리 시답지 않게 보였고, 그래서 극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는 가운데 연거푸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대학을 다시 들어간 것은, 오랫동안 스스로 정상궤도를 벗어난 삶을 살아온 듯한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즈음, 뜻하지 않은 생활고를 겪게 됐다. 당시 차남 동헌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세들어 살던 갈현동의 집 주인이 사채를 값지 못해 집달리가 들이닥치는 통에 갓난 아이와 산후 몸조리도 채 하지 못한 아내를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것이다. 다급했던 나는 채권자와 협상을 해 그 집을 다시 450만원에 구입하기로 했다. 수리를 해서 팔면 8백만원은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돈을 빌려 집을 사들인 뒤,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인부들을 데리고 집을 수리했다. 그리고 목표했던 대로 집을 8백만원에 팔고 나니 빌린돈을 갚고 날릴 뻔한 전세금 100만원과 공사비를 제하고도 100만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그 다음 해인 1978년에 강남 영동시장 앞에 12평짜리 사무실을 임대해 아내의 전공분야를 살려 회사를 차렸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반도환경개발의 전신인 반도조경 & 종합환경계획연구소였다. 사업분야가 내 전공(불교철학)과는 전혀 다른데다가 나는 공부를 마치면 교수로 나갈 계획을 갖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아내 혼자서 사업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 한국전력, 현대건설 등에 근무하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조경설계 및 시공관련 업무를 맡을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그렇게 발로 뛴 결과 개업 후 2년까지는 좀 고전을 했지만 3년째가 되던 해 평택화력발전소의 설계 및 시공에 턴키베이스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성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돼서 이후 국내 원전 및 각종 발전소 부지의 공원화계획을 우리 회사의 기술력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을 지금도 회사의 큰 실적과 보람으로 삼고 있다. 여하튼 그 일을 계기로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세계에 빠져 살던 나는 시장경제의 돈 맛과 사업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3년간 아내는 주로 조경공사를 진행했고 나는 주택건설사업으로 영역확장을 시도하며 순탄하게 사업을 키워갔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짓기로 한 주택공사 현장을 점검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택시기사가 도로변에 있는 화단 분리대를 보지 못하고 들이받는 바람에 차가 순식간에 전복되는 대형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아내는 얼굴 전체를 80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수을 받았으며 나는 머리두피가 심하게 깨졌다. 3개월간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해있는 동안 나는 별여놓은 주택공사를 중단할 수가 없어 아내의 동창인 강남의 부동산 업자에게 일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그해 말 우리가 퇴원을 했을 때  현장공사는 도중하차 상태였고 인건비와 자재비는 고스란히 외상으로 남겨져있었으며, 그 여자는 종적을 감추고 난 뒤였다. 하루아침에 힘들게 발전소 공사를 해서 번 돈을 다 날리고 빚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아내와 나는 그 이듬해 봄 모든 것을 채권자들에게 내주고, 역삼동에 있는 빈 땅을 빌려서 지은 다섯평짜리 비닐하우스로 이사를 가야 했다. 도로변에 조경수를 심어 행인들의 눈에 비닐하우스가 띄지 않도록 가리고 전기와 상수도는 담장 너머에 있는 연립주택의 한 마음씨 좋은 주부의 도움으로 공급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부부와 세 살 난 딸 현주까지 세 아이를 데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어린이날이 됐다. 아내는 봄철이라 한창 조경공사가 바빠 현장에 나갔고 나는 아내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으로 놀러나갔다. 뚝섬에 애들을 풀어놓고 노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그늘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며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강물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데, 무심히 그 물결을 보고 있던 나는 그 물결 위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며 흘러가는 게 아닌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달타>에서도 싯달타가 젊은 시절,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수많은 얼굴들과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싯달타는 그것을 영겁의 흐름으로 윤회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현재의 내 참담한 상황을 생각하며 허탈하게 강물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한 얼굴이 희죽희죽 웃으며 커다랗게 다가왔다. 그는 15년 전에 자살한 내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온 몸이 떨리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갖고 있던 술병을 깨서 그 조각을 손목에 갖다 댔다. 죽고 싶었다. 손목을 긋고 그 손목을 흘러가는 강물에 담근 채 5분만 지나면 나는 조용히 이 모든 아픔과 상처와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살충동!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자살충동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손목을 그으려고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병조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찌를 수가 없었다. 맘 속에선 찌르고 모든 것을 끝내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그렇게 혼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딸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큰 아들이 달려오며 현주가 넘어졌어요 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딸아이에게로 달려가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나서 한참 뒤 마음을 진정한 후, 강가로 다시 돌아온 나는 깨진 병조각을 주워모아 부근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그 강가를 떠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두 아들 놈이 조금만 더 놀다오겠다고 보챘다. 그러라고 하고선 딸아이를 데리고 비닐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갑자기 옆집 담장 쪽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듯한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난 도둑들이 들어왔나 싶어 빗장을 올려 밖을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놀러나갔던 두 아이가 담장을 넘어온 것이었다. 호통을 치며 까닭을 묻자 아이들이 시무룩해지며 이렇게 말했다. ‘앞쪽으로 들어오기가 싫어서요.......’ 아이들은 비닐하우스로 들어오는 게 너무 창피했던 것이다.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으면 담장을 타고 들락거렸을까. 두 아이는 마치 옆집 연립주택에 사는 아이들처럼 행세 하려 했던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공사장에서 돌아온 아내를 붙들고 밤새도록 울었다. 그 비닐하우스는 나의 현실적인 무능한 삶의 밑바닥이었다. 또한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부모와 친구를 비롯한 모든 지인들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오면서 지푸라기 잡듯 남몰래 지켜온 일말의 자존심마저 무참히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 밑바닥에서 현실의 참혹한 진실을 깨달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 자신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비애를 느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한가운데서 나는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내는 내게 교회를 나가 하나님께 어려움을 의탁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했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존심과 철학적 의지를 상처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인내하며 살아오다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신앙을 권해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업부터 살려야 할 것 아니냐고 버럭 화를 냈다. 교회 가는 건 막지 않을 테니 나에게도 강요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시켰다. 이후 오년간, 나의 완강한 태도로 우리 가족은 매년 연초부터 이산가족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내는 오랜 관습대로 기도로 한해를 시작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고 나는 그런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으로 가곤 했다. 그런데 89년 연말, 나는 스키장으로 여행갈 준비로 바빴는데 세 아이가 내 방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올해는 스키장을 가지 말고 엄마와 함께 신년금식기도회를 가자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상황앞에서 나는 일단은 그러자고 대답을 해놓고는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도 아닌 기도원을, 그것도 금식기도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래 한번 굶어보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1월 1일 새벽 일찍 가족들과 함께 오산리 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무 기대없이 기도원에 갔던 나는, 둘째날 오후 쉬는 시간에 어느 장로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이 척박한 세상 한가운데서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지금까지 내가 찾아 헤맸던 진리의 주체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나의 영혼을 구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불교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그토록 원했던 해탈의 찬란한 극점을 통과하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마치 100살의 나이에 눈이 멀고 나서야 심안이 열려 평생을 찾아오던 진리를 깨닫고 천상으로 인도되어진 파우스트처럼 “저 밑바닥에서 벽공으로”라는 외침을 토하면서 나는 거듭나는 부활의 기쁨을 깨닫게 되었고, 그 다음날 기도원을 내려올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41    미래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댓글:  조회:5315  추천:58  2008-11-27
미래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이승률생애 처음으로 간 학교에서 억울하게 바보 천치 취급을 당한 천재 에디슨의 심정을 알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고차원의 수학공식과 수의 세계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던 교사들은 그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기만 했다. 그러다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최종결론이 점잖게 표현하자면 ‘홈스쿨링’, 그냥 통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진퇴학’ 조치였다. 도무지 에디슨이 학교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학교가 에디슨의 세계를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때 에디슨을 포기하지 않고 그가 가진 내면의 세계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에디슨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두렵고 막막했지만 그 어린 아들의 눈빛이 향하는 허공을 함께 바라보며, 그 내면의 열정이 쫒고 있는 미지의 세계를 함께 찾아 나섰다. 오늘 에디슨은 학교교육에조차 편입되지 못한 문제아였으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이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 선수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그와 함께 마라톤을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믿음과 헌신에 힘입어 에디슨은 타고난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 여년 뒤, 특허수가 1,000종을 넘을 정도로 많은 발명의 업적을 쌓았다. 초등학교 교과과정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실은 인류 전체의 삶을 수백 년이나 앞당긴 위대한 과학자였던 것이다. 그 어머니가 에디슨의 미래를 믿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에디슨이란 보통명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특히 큰 사업체를 이끌고 있는 오너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지금 회사가 궁지에 몰려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최후 승리를 확신하며 모든 것을 올인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회사가 승승장구하며 잘 돌아가고 있는데도 역설적으로 초긴장분위기를 조성하는 이들이 있다. 도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보았는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 이건희 회장이다. 그는 ‘메이드인 삼성’의 물건들이 일본제품들과 나란히 전 세계 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 멀쩡하게 잘 팔리고 있는 삼성전자의 인기 상품들을 가져다가 임원들 앞에서 망치로 내리치며 다 다시 만들라고 외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그때 배석했던 임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식은 땀만 줄줄 흘렸어야 했다. 그리고 충격에서 채 헤어나올 틈도 없이 임원들은 애써 개발한 신제품을 모두 폐기처분하다시피 한 뒤 새롭게 업그레이드 된 제품을 개발하고 연구하는데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손실액을 지켜보면서 이러다가 회사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에 불안해하며. 그러나 그로부터 약 7년 뒤 IMF사태가 터졌고, 한국의 버블경제가 몰락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창 세를 불려가던 내로라 하는 재벌기업들이 속무무책으로 침몰했지만, 이미 기술과 선진조직으로 개혁을 시도한 이 건희 회장의 삼성그룹은 ‘노아의 방주’에 비견되며 버블경제의 대 몰락이라는 일촉즉발의 폭풍우를 유유히 빠져나가 자신만의 항해를 계속했다. 그 결과 다시 10 여년이 흐른 지금, 삼성의 순수익은 무려 수십 배로 늘었고 부채비율은 5분의 1로 떨어지면서 한국을 뛰어넘어 일본과 미국 굴지의 기업들이 벤치마킹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초 이건희 회장은 이미 미구에 닥칠 아시아 금융위기와 그 뒤의 10년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일찍이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주인들은 오늘을 보지 않는다. 오늘이 아무리 달콤해도 오늘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현혹당하지 않는다. 미래의 주인들은 언제나 미래를 바라본다. 그리고 언제나 한 가지 의문을 안고 산다. 다가올 미래를 살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40    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댓글:  조회:3647  추천:80  2008-11-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           평양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마지막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대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식당 바깥으로 나가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새벽기도를 하러 갈 작정이었다.나는 요즘 새벽기도 가는 일에 상당히 충실해졌다. 미국 유학 갔던 막내 딸(현주)이 지난 년말에 귀국해서 SK건설에 입사했는데, 근무지가 시내라서 남산 기슭에 있는 숭의교회에 갔다가 딸을 회사에 출근시켜주고 집으로 돌아와도 아직 7시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그래서 우리 내외는 딸과 같이 새벽기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애를 출근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재미가 났고, 또 아침시간 관리상 매우 유익했다.버릇이란게 참으로 무섭다.전에는 게을러서 새벽기도를 엄두도 못 냈던 사람인데, 요즘은 거의 자동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진다.마을 뒷산 언덕으로 올라가는 곳에 콘크리트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양쪽에 붉고 노란 천으로 만든 깃발이 수십개 꽂혀 있다. 계단 입구에 안내판이 하나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어제 저녁에는 일행들과 함께 급히 올라가는 바람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엔 시간이 많으므로 차분히 내용을 읽어봤다.「古樹名木 三胎松」이라는 제목 아래 세 그루 소나무에 대한 내력이 자세히 적혀있었다.(참고로 전문을 게재한다.) 『목명 : 적송, 수령 : 천 여년연변주 림업국 과학연구소 감정.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합수목마을 동쪽 산자락에 고수 세 그루 소나무가 있다.1. 제일 아래쪽 노송 : 높이 7.5m, 둘레 2.3m, 수관폭 13m,                  모양 : 천자가 행차 시 사용하던 일산(햇빛 가리개 우산)과 같다.2. 두 번째 노송 : 높이 9.3m, 둘레 2.6m, 수관폭 14.5m,                  모양 : 대붕이 하늘을 치솟아 오르려는 듯하다.3. 세 번째 노송 : 높이 10m, 둘레 2.3m, 수관폭 17.5m,                  모양 : 거룡이 꿈틀거리는 듯 하다.이 세 그루의 노송은 부르하통하(河) 건너 고구려, 발해시기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동하국(東夏國)의 수도 성자산성(城子山城)과 약 1km 떨어져 있고, 해란강 건너 고구려 발해시기 중요한 평원성(平原城)이었던 하룡토성(河龍土城)과 약 1.2km떨어져 있다.청조말기 광서(光緖) 30년(1904)과 광서 32년에 전후하여 조선 함경북도 명천 밀양박씨(明川密陽朴氏) 박중근(朴重根)형제, 길주 양천허씨(吉州陽川許氏) 허웅범(許雄範)3형제가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노송을 발견하였다. 그 후 명천, 영안, 길주, 화태군 등에서 박씨, 허씨 몇호와 리씨(李), 김씨(金), 강씨(姜)가 몰려왔다. 民國 18년(1928)에 이르러 80여호의 큰 마을 하룡촌(河龍村)이 중심 마을로 되고 신룡갑(新龍甲)이라 하였다.그 당시 국자가로 이루어진 연길시 근처(연길분지)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박씨, 허씨들의 마을이었다. 세 그루 소나무를 주민들은 신룡툰(新龍屯)의 상징으로 성송(聖松)으로 모시면서 대대로 살아왔다. 3송(松)은 나무마다 천여개의 년륜이 똑같이 새겨진 삼태송(三胎松)이라고 한다.무궁무진한 재부를 가진 「古樹名木 三胎松」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재벌나무의 하나이며, 가장 인기를 끄는 관광물로 장백산과 더불어 연변의 지명도를 높여주고 있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관광객으로 인하여 고향의 륙모진 모래길은 팔모진 모래길로 되어 가고 있다.현재 매년 춘추 가일(假日)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산에 도착해서 본 지역을 앙연(昻然)한다.연길시 소영진 하룡6툰 로년회(小營鎭 河龍六屯 老年会)』 좀 길게 인용되었지만, 전문을 다 수록하고 싶은 이유는 이 지역이(안내판에서 본 것처럼)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아마도 이 마을로 이주하여 온 조선인들은 당시 연도로 보아 이조말기 일본의 합병과 수탈에 저항하여 두만강을 넘어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그들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하는 이곳에 농경지를 가꾸고 수전(水田)을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을의 지형지세가 자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아마도 마을 뒷산 언덕에 있는 세 그루 노송을 삼태송(三胎松)이라 부르며 신주처럼 숭상했을 것 같다.언덕에 올라서서 보니 멀리 연길 시(市)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나는 세 그루 소나무 사이의 공지에 관광객들을 위해 설치해 놓은 벤치에 걸터앉았다.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우선 소하룡(小河龍) 마을이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合水)되는 지점에 있다는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마치 조선(한반도)과 청나라(중국)가 함께 합류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부르하통이란말은 본디 만족어로서, 버드나무가 많다는 뜻이다.)그리고 주변에 1km정도 밖에 안 떨어진 곳에 고구려성과 발해성이 있다고 하니, 이곳은 원래 한민족의 고토임에 틀림없다. 단절된 천년의 역사가 일순간에 현실로 재현되어 그 맥을 같이 이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곳 한 가운데 입지한 소하룡(小河龍) 마을 뒷산에 천년도 넘게 살아온 세 그루의 노송이 버티고 있다. 그것도 삼태송(三胎松)이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리며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이 땅을 살고 간 선조들은 왜 이 소나무들을 삼태송(三胎松)이라고 불렀을까?'아이 밸 태(胎)'자인 이 말은 분명히 아이를 잉태하거나 씨앗을 배태할 때 쓰는 용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세 그루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무슨 꿈을 잉태했고, 무슨 소망을 배태하였을까?잃어버린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는가?, 아니면 멀리 사라진 고토의 회복을 소망했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듯한 전율을 느꼈다.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닫고 이해하고 결단해야 할 역사의식은 무엇인가?이 천년송 아래 벤치에 앉아 새벽기도를 올리며,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미래 천년을 향해 나는 무엇을 꿈꾸고 소망해야 할 것인가?나는 더 깊이 묵상에 빠져들었다.멀리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소생한 한 줄기 청량한 기운이 지중해를 건너 로마와 유럽으로 뻗어 나가는 환상이 보인다."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사도행전 16:9)"원래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쪽으로 바꾼 이 환상은 단순히 일 개인의 심중에 나타난 계시였지만, 장차 세계역사 흐름의 진로를 백팔십도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그 후 제3차 선교여행(AD53~57년)을 마친 뒤 결국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군선에 이끌려 지중해를 건넜던 바울의 로마행을 두고,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 장면을 "세계역사를 싣고 가는 배"라는 극적인 표현을 썼다.신세계를 향한 역사흐름의 새로운 진로는 결국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AD313년)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갔으며, 그 후 영국과 대서양을 건너 미국 신대륙에 정착함으로서 그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그 후 1,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 온 복음의 물결은 일본을 지나 한반도에 머물면서 오랜 세월동안 일제 압박과 민족의 분열과 동족상잔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한민족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그 결과로 한국은 급기야 전후 최대의 급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국가로 변신했으며, 지금은 제2 세계선교대국으로 발전하여 이웃나라 중국과 세계 여러지역을 섬기며 선린의 우정을 나누는 복된 국가가 되어있다.오늘날 중국에 전파된 기독복음화의 물결은 단순한 종교의식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봉사와 구제를 통해 인간적인 신뢰를 증진시키고 생활문화 정서를 윤택케하는 도덕의식의 규범으로 부각되고 있다.그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의 노력이 중국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변화된 중국과 함께 천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중동으로, 마침내 예루살렘 시온성에 까지 이르는 서진화 복음의 물결, 이것이 내가 꿈꾸는 세계역사의 흐름이다. 이것이 또한 한국 기독교가 세계역사 앞에 나아가야 할 길이다.1930년대 미국 시카고에서 발원한 CBMC 사역의 길이 한국을 거쳐 중국에 이른것도 이와같은 서진화 운동의 한 증거로 인식된다.다시 말해 1994년 8월 1일 중국 최초로 한인 기독실업인회가 연길에 창립된 이래, 이를 계기로 중국 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CBMC 사역의 길은 마침내 중국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그 열기가 중앙아시아, 중동지역까지 뻗어 나가는 실크로드 미션의 새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연길은 조선족 사회의 중요한 핵심도시 일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에 있어서 1990년 10월 이후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한 육영사업의 터전이 되어 주었으며, 또한 CBMC사역의 첫 열매가 되어 주었고, 나아가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집필하는 요람이 되어 주었는가 하면, 마침내 최근에는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를 통하여 두만강유역개발사업(UNDP 프로젝트), 환동해·환황해 경제권개발계획, 남북한 경제공동체, 동북아기반시설 및 물류체계 개선을 위한 R&D 분야까지 섭렵하는 기회의 땅으로 부상해 있다. 【※ 참고 자료】지난해 9월 18일 창립총회를 거쳐 11월 1일부로 통일부 등록 사단법인으로 출범했던 동북아공동체연구회의 설립취지와 사업목표를 '회장 인사의 글'로  대신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날 지구촌사회는 지난 세기 냉전시대를 주도했던 이념의 장벽들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국제협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남· 북한의 문화교류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 통일의 꿈을 이루어내는 일은, 이제 남한과 북한만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가 국제협력을 통해 함께 이루어 내야 할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동북아공동체연구회는 바로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깊이 인식하면서, 1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즉,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는 동북아 역내 시장의 자유화와 경제공동체 조성을 위한 국제협력 방안을 연구하고, 정책 대안 개발, 자문 및 용역 등의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환경 조성과 동북아공동체 형성에 기어코자 하는데 그 기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전략으로 한미동맹의 기반위에 중국과 일본을 한반도의 양 날개로 접속함으로써 동북아가 ‘한 몸’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일본 열도와 한반도, 중국 대륙 및 러시아 극동지역을 한마당의 통합시장(동북아 FTA)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교통망 · 물류유통망· 정보통신망 등을 연구· 개발(R & D)하여, 실질적인 비즈니스 프로젝트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동북아 사회를 유기적인 국제 협력의 경제공동체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 한반도가 명실상부한 동북아공동체의 중추적인 중립지역이 되고, 그 결과 우리들의 숙원 과제인 남북한 통일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우리 함께 꿈꾸며 나아갑시다.동북아공동체 실현을 위한 노력이 곧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한 지름길이요, 남북한경제협력체 건설이 곧 동북아 통합시장으로 나아가는 길목임을 깨닫고, 우리 다함께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 나가는 일에 한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과업을 위하여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기원합니다.』 누가 나에게 당신의 경영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인재(人材)중심의 경영철학, 즉 교육을 기반으로 하여 인적자본(Human Capital)을 널리 육성하고, 이들을 통하여 기업의 목표를 창의적으로 극대화시키는 일이 경영의 핵심가치(Core Value)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그동안 만 18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연변 지역을 통하여 만나고 교제하고 협력하며 동고동락해 왔던 인재들이 그 얼마인가!또한 이곳을 발판으로 시작된 CBMC 사역의 확장을 위해 중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는 도중에 만났던 수많은 중국 기업인들과 중앙민족대 학위를 통하여 교류했던 소수민족 엘리트들의 수는 또 얼마인가!사람, 사람, 사람........중국의 인재들, 기업인들, 친구들.......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기초가 바로 이곳 연길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이 땅은 곧 내 인생 후반전에 있어서 새로운 꿈과 소망을 잉태한 기회의 땅이 아니었던가!어쩌면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수하는 이 소하룡(小河龍) 마을에 정착한 선열들도 바로 이와같은 인간관계의 중첩속에 꿈과 소망을 잉태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시작도 끝도 없이 샘솟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온갖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이 땅을 활동무대로 삼아 말 달리며 독립 운동했던 김좌진, 홍범도, 이동녕 등 선구자들의 모습이 망막에 떠오른다. 나무 잎에 이는 바람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조렸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이 기억난다.이 땅을 배후지로 삼아 청(淸)나라를 일으켰던 누루하치의 변발한 모습이 눈에 띄고 그 청(淸)나라가 망할 때, 황실의 마지막 지도자로서 연변에서 생산된 "동백미"를 먹고 살았던 부의(溥儀) 황제의 초상도 눈에 띈다.TV 드라마상으로 본 고주몽(송일국)과 대조영(최수종)의 모습이 망막에 떠오르고 그때 그들이 착용했던 갑옷과 머리띠와 장검이 분장도구가 되어 내 몸에 입혀진다. 그리고 그 갑옷을 입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장검을 손에 든 채 또 한사람의 새로운 내가 적토마를 타고 천하를 호령하며 중원을 향해 내닫는 환상이 꿈속에서 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고 상식적으로 수습이 안되는 잡념들이 계속 출몰하다가 드디어 뇌리속에 "도쿄에서 런던까지" 달려가는 KTX의 장쾌한 모습이 떠올랐다.이와함께 일본 열도를 출발한 대중교통·운송 수단들, 즉 승용차, 버스, 트레일러들이 한·일해저터널을 통과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부산에서 원산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 보이고, 이들 중에 어느 차들은 한·중해저터널을 통과하여 산동반도를 거쳐 아시안 하이웨이를 타고 상해, 심천, 홍콩으로, 더 밑으로는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달려갔으며, 또 어떤 차들은 서울과 평양, 신의주, 원산을 거쳐 북방으로 나아가 TCR, TMR, TSR등과 연결되어 중국 내륙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까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동시에 그 선로와 하이웨이를 따라 올림픽 성화가 봉송되는 장면이 망막에 클로즈업된다.1964년 동경올림픽의 성화가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장에 이송되고, 그 성화가 다시 2008년 북경올림픽 냐오차오 스타디움의 성화대에 점화 되었다가 대회가 끝난 후 다시 중국 내륙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져 마침내 2012년 런던올림픽 경기장 성화대에 점화되는 장면이 생생하게 눈에 떠올랐다.수많은 국가의 인종들과 소수민족 구성원들이 "도쿄 올림픽에서 런던 올림픽까지"가는 장거리 레이스에 참가해서 무리를 지어 달려가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KTX도 달려가고, 승용차와 버스와 트레일러들도 줄지어 달려가는 그 사이에 성화를 높이 든 주자가 머리띠를 동여매고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이 계속 얼굴이 바뀌면서 망막에 떠오른다.그 주자들 가운데는 「민박회」일원인 우런 박사의 부군되시는 걸투 박사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달려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는 내몽고 출신의 몽골족으로서, 영국 옥스퍼드에서 석사를 했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중국 바이오(Bio)산업 육성을 선도하는 국가급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번 북경올림픽 성화봉송 시 후허하우터 시내를 뛴 주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천년송 고수 삼태송(古樹 三胎松)의 그루터기에 앉아 인류역사의 강이 어디로 흘러 갈 것인지를 묵상할 때, 내 마음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난 한줄기 청량한 기운은 차츰 나의 의식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나가기 시작했다.「민박회」소수민족 엘리트들과 함께 어울려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소하룡이라면 그럼 대하룡(大河龍)은 어디에 있는가?북경인가? 우루무치인가? 알마티인가? 이스탄불인가?'뜻으로 본 세계역사'의 흐름은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21세기 실크로드의 시발점이 어쩌면 이곳 연길을 중심으로 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지금은 남북한이 단절되어 있어서 교통과 물류가 제대로 흐르지 않는 변방의 오지로 남아있지만, 만일 한반도의 양 진영이 서로 공존하거나 통일되는 시기가 온다면 이 지역은 UNDP의 두만강유역개발계획과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북진흥전략'이 맞물려 국제사회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시너지를 유발하는 지역으로 변모될 것이다.또한 흔히 간도땅이라 불려왔던 이 지역은 '잠자는 땅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연해주 일대)와 어깨를 맞대고 있어서, 장차 중국의 '시장'과 시베리아의 '자원' 그리고 한국,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융합시키는 새로운 희망의 기지(基地)로 삼기에 족한 곳이다.다시말해 이곳은 많은 경제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이 예견했듯이 중국, 러시아, 북한이 3중으로 직접 접경해 있고, 그 주변에 주요 이해당사국인 한국, 일본, 미국이 둘러싸고 있는 이상적인 퓨전지역(Fusion Area)이다.앞으로 아시아적 협조사회(Cooperative Society)의 테스트 베드(Test Bed)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윈윈(Win-Win)패러다임의 현장이다.다만 이러한 전망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단연코 북한 핵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고, 또한 중국 정부가 한반도와 접속되어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한민족 경제교류협력지역으로 용인해 줄만한 도량을 보여야 가능 할 것이다.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될 때 등소평 주석이 심천을 창구로 삼아 홍콩과 동남아지역의 화교자본을 끌어들인 것이 성공적인 시발점이 되었듯이 북한과 러시아 접경지역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이민자들(Korean Diaspora)이 남북한 통일경제를 위한 배후기지로 이 지역을 중립적인 자유무역지대로 거리낌없이 투자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문호를 대폭 개방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6자 회담을 통하여 북한 핵 문제가 풀리고, 그런다음 북한의 전면적인 경제개선조치와 더불어 두만강유역 일대에 중국식 경제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FTA(자유무역협정) 수준의 다자간 국제경제자유구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면, 환동해권 경제개발 및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을 위한 주요 거점으로서 중국의 변방인 이곳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제 세계역사 앞에 숨겨진 보물의 진가를 발휘하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압축 경제성장을 해 온 중국의 경제발전과정을 중국특유의 연안(沿岸)경제개발 유형으로 정리해 보면, 기초단계로서 홍콩과 연계된 심천,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주강(珠江)경제권, 그 다음 2단계로 상해, 저장(浙江)성, 장쑤(江蘇)성을 중심으로 한 장강(長江)경제권, 그리고 최근 후진타오 정부가 주력하고 있는 대련, 천진,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발해만(渤海灣)경제권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그러나 이것만으로 중국의 경제발전과 국력 신장의 단계가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닐것이다.여러분들, 고개를 들어 중국 지도를 한번 일별해 보라.큰 닭 모양을 하고 있는 영토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 어떤곳인가?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중공업이 가장 발달했던 자원보고지대이며, 또한 북방 군사안보전략지로서 러시아 시베리아 및 몽골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동북3성(東北三省), 내몽골지역이 바로 그곳 아닌가?또한 그곳은 남쪽으로 한반도와 직접 접속되어 있지 않는가.그 넓고 중요한 산업, 경제, 군사 전략지역을 배후지로 삼아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강이 무슨 강인가?바로 두만강 아닌가!중국 정부가 UNDP의 두만강유역 개발사업과 함께 동해로의 출해권을 얻고자 북한, 러시아에 줄기찬 협상을 벌리고 있는 현실도, 바로 이곳이 중국 동북지역의 물류 및 경제발전을 위해 사활이 걸린 요충지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이곳을 서부내륙 개발과 함께 중국 국가장기발전전략의 마지막 단계인 제 4섹타(SECTOR)지구로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중추구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고, 주(州) 수도인 연길시(市)가 핵심도시로 자리잡고 있다.또한 그곳 동쪽 어귀에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소하룡(小河龍)이 있다. 그리고 이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문화를 공부했던 「민박회」회원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유서 깊은 천년송 고수 삼태송(古樹 三胎松) 그루터기에 앉아 미래를 관망하여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성터가 남아있는 이곳 연변 땅이 정녕 중국 동북지역의 발전과 남북한 통일경제를 아우르는 시범구역이 되고 나아가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을 위한 환동해 경제권의 GATE & HUB로서 자리매김 한다면, 이곳이야 말로 뉴 실크로드 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시작하는 관문지대가 되기에 합당하다.시베리아 극동지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대륙과 북태평양을 연결하는 북위40도상의 중개기지로서, 이 지역을 통관하는 도도한 물류의 흐름이 동북3성(東北三省)을 지나고 북경을 거친 후 우루무치와 알마티를 통과하여 마침내 동서양을 연결하는 관문도시인 이스탄불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21세기 실크로드 문명의 대 부흥은 아시아의 차원을 넘어 유럽과 세계를 퓨전(Fusion)하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대하룡(大河龍) 프로젝트라고 이름지어 불러도 좋을만한, 다가오는 미래의 세계, 그 새로운 천년의 꿈을 거듭나게 하는 'Future Vision'이 내 마음속에 차오르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트오는 새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오, 역사는 서쪽으로 흐른다. 하나님, 이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동역할만한 사람들을 붙여 주십시오. 흩어져 있는 변방 소수민족들이 함께 교류하며 뜻을 모아 이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신 노마드운동의 일꾼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일에 민박회가 쓰임받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새벽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갔더니, 「민박회」회원들이 모두 일어나 저 마다의 아침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몇 명은 마을 산책을 나가기도 했고, 또 몇 사람은 방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운기조식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분은 마당에서 우슈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되시는 박기식(朴基植) 선생께서 마당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어제 밤에 미리 부탁해 두었지만 한번 더 확인했다."선생님, 아침식사가 끝나는대로 곧바로 출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식사 준비도 다 되어 있습니다. 이 회장님께서 먼저 식사하시지요. 다른 분들은 시간이 많다고 해서 천천히 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호텔까지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오늘 12시 30분 비행기로 연길을 떠나게 된다.민박회 일행들은 저녁 비행기나 기차로 각자 임지로 돌아간다고 했다.나는 주방에서 독상으로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마친 후 바쁘게 짐을 꾸렸다.그동안 「민박회」팀들과 어울리느라 다른 볼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오전중에 몇 분들을 만나서 업무 처리를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다.나는 인생을 왜 이리 바쁘게 살고 있나 싶다.그러나 마음속에 갈등이 있거나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모든 일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친구들이 가끔, 넌 돈도 안 생기는 그런 일을 왜 하고 다니냐고 물을때가 있다.연변과기대 운영과 평양과기대 설립, 그리고 CBMC 사역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건 내 사명이야"라고 대답하고는 씩 웃는다.오늘 아침에도 나는 주인되시는 박 선생님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회장님은 사명자이시군요"그렇다. 나는 동북아공동체사역을 위한 일에 자부심과 함께 큰 사명감을 느낀다.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올해 11월경에 평양과기대가 개교할 예정으로 있는데, 이제 학교가 개교되면 한·중·일 지식인들과 기업인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한 마당이 필요하지 않겠는가!(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가 이를 위해서 기초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때 나는 「민박회」회원들이 통로가 되어 중국내 소수민족들이 중국뿐만 아니라 북한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폭넓게 교류하면서 이 시대, 동북아시대의 새로운 비젼과 대안을 위해 협력하는 일이 있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했다.드디어 일행들과 헤어질 시간이 왔다.나머지 뒷일을 전신자 교수께 맡긴다고 부탁을 드린 후, 손춘일 원장과 함께 두분의 손을 굳게 잡고 어제 '홍기촌'을 다녀온 이후 가졌던 내 생각을 전했다."여기 소하룡 마을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손 원장님께서 정년퇴직 후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계신다는데, 내가 한가지 건의를 하겠소. 이 마을 앞에 해란강과 부르하통하(河)가 합류하는 강 어귀에 조선족 수전사(水田史) 박물관을 하나 세우도록 해봐요. 전 선생님이 박물관 일을 잘 알고 계시니까 많은 도움이 될 꺼예요. 만일 손 원장님께서 뜻을 정하시면 나도 이 일에 함께 동참하겠습니다. 이건 어쩌면 우리 민박회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한번 계획을 세워 보세요."얼마 후 마을 산책 나갔던 분들이 다 돌아오고, 주인되시는 박 선생님의 승용차에 짐을 다 실은 후, 나는 마당에 빙 둘러 모인 일행들을 둘러보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연변과기대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늘상 내가 잘하는 제스츄어가 있다.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세운 다음 팔을 가슴 앞으로 쭉 뻗는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눈을 직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우리, 할 수 있어. 우린, 해 낼 거야. 그리고 널, 사랑해" 나는 「민박회」회원들에게도 팔을 뻗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라고 가르친 다음, 큰소리로 따라서 외치라고 주문했다."민박회여, 영원하라. 우리, 할 수 있습니다. 우린, 해 낼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나는 그들을 한분 한분씩 내 가슴에 꼬옥 껴안아 주면서 다시한번 속삭였다."사랑해요. 우린 친구입니다. 다시 만날때까지 잘 있어요."눈에서 눈물이 난다.가슴속 깊은 심연에서부터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그런가 하면, 나는 이 순간 정말 너무나 행복했다.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격체요. 생명을 나눈 한 가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집주인되시는 박 선생 내외분들이 아침 일찍 교회를 가셔야 된다고 하면서 그들의 승용차로 나를 8시까지 연길시내에 있는 국제호텔로 데려다 주셨다.박 선생님은 대학에서 미술(서양화)을 전공해서 개인전도 여러번 열었고, 또 그사이 시집을 3권이나 내신 경력이 있으신 분이다. 우리 연변과기대 건축과에서 다년간 색채학 강의도 하셨고 연변일보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하신 분이다.그런 경력보다 더 내 마음에 가깝게 여겨진것은 그 분들이 신앙인으로서 일터(한정식당)를 통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남들을 섬기는 일에 충성하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진실된 기독실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에 좋았다.그것은 어쩌면 신앙보다 더 깊은 사랑의 능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8시 10분전에 호텔 커피숍에 도착한 나는 짐을 프론터에 맡겨놓고, 천천히 업무파일을 꺼내 한 장씩 들춰봤다.8시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상무국 이용남 실장을 만나서 8월 29일 예정인 동북아 미래포럼 국제세미나(주제 : "동북아물류체계 및 두만강유역 발전전망") 준비 업무를 협의해야 한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가 공동주최하는 국제세미나를 연길 국제박람회 기간(8월 28일~30일) 중에 개최하기로 합의 되어있다.9시에는 이 세미나 발표자인, 연변대학 경제관리학원 현동일 원장을 만나 발표 논문내용 및 자료집 인쇄건에 대해 업무 협의를 해야 한다.10시에는 연길담배제조창의 김홍천 부사장을 만난다. 그동안 코웰(주)이라는 회사에서 담배 피울 때 나오는 CO를 줄이는 촉매제를 개발해 왔는데, 이 일에 대한 최종적인 기술검토와 이를 첨가한 담배의 북한 제조계획 및 한국 반입(통일부 허가사항)과 판매업무 전반에 대한 업무 협의를 해야 한다.나중에 영업 수익이 발생하면 연변과기대를 지원하는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채택하기 위해 미리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일이다.그리고나서, 11시에 호텔을 떠나 11시 30분까지 연길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나면 12시 30분 비행기로 거뜬히 출발할 수 있게 되리라.그렇다.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1990년 가을, 우연히 북경에서 한 분의 크리스챤 지도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해서 나는 지금 여기까지 달려 왔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열린 3박 4일간의 민박회 모임을 통하여 또 한번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 크게 눈을 뜨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역사의 서진화 현상에 대해 매우 실감나는 인식과 사고의 확장을 체험했고, 그리고 그것이 21세기 동북아시대를 통하여 거듭나는 천년의 꿈으로 내 마음속에 뚜렷이 자리잡는것을 깨달았다."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길이 뚜렷이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순례자의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고난과 역경을 동반하는 새로운 꿈과 희망의 길이 될 것이다.(끝)「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글 싣는 순서Ⅰ. 민박회Ⅱ. 경희궁의 밤Ⅲ. 백두산 소수민족 올림픽Ⅳ. 올림픽 이후 중국의 과제Ⅴ. 흐름의 미학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39    [인터뷰] "中진출에 북한 IT인력 활용하라" 댓글:  조회:5109  추천:71  2008-11-02
"中진출에 북한 IT인력 활용하라" 12월 평양과기대 문여는 이승률 옌볜과기대 부총장 ◆제7차 세계한상대회◆ "평양과기대는 남북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을 위한 상징이 될 것이다." 제7차 한상대회에 참가한 이승률 옌볜과기대 부총장은 29일 매일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7년간의 준비 끝에 드디어 오는 12월 평양시 락랑구역에서 과학기술대학을 개교한다"고 말했다. 평양과기대는 남북 교육분야 첫 협력사업으로, 옌볜과기대가 주축이 된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 국내외 기업과 재외동포 등의 기부를 받아 연면적 8만7000㎡(약 2만3000평) 규모로 건설 중이다. 현재 본관과 학사동 기숙사 등 97% 이상 공정이 완료된 상태다. 개교를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가 한상대회를 찾은 이유는 앞으로 평양과기대를 운영하는데 재외동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운용자금 조달뿐 아니라 교수자원 확보, 산학연계 프로그램 개발 등이 절실한데 한국은 정치적으로 제약이 있어 재외동포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부총장은 "북한은 중국보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의 경우 주문 생산에 최적지"라며 "한상들이 북한 IT인력을 키워 거대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데 활용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도 평양과기대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와 관련해 이 부총장은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대를 나와도 인재들이 딱히 일할 곳이 없는데 평양과기대가 산업복합단지로 자리를 잡으면 북한 IT인력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320억원이 투자된 평양과기대는 우선 △정보통신 △산업경영 △농업식품공업 등 3개 단과대학으로 출발해 보건과 건설을 추가할 계획이다. 선발 인원은 매년 500~800명 선이다. 한국에서 건설업을 하던 이 부총장이 남북 교육협력에 뛰어든 것은 90년 중국 출장이 계기가 됐다. 골프장 건설을 위해 중국 내 실력자를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김진경 옌볜과기대 총장과 동석하게 된 것. "미국에서 성공한 학자이자 기업인이 전 재산을 처분해 옌볜에서 동포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면서 그는 "그때 평생을 재외동포 육영사업에 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특별취재팀 = 박재현 부국장(팀장) / 최은수 기자 / 김대영 기자 / 김기철 기자 / 박만원 기자 / 박동민 기자 / 고승연 기자 / 정석우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 김호영 기자]
38    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 댓글:  조회:3404  추천:56  2008-11-02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           평양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백두산에서 돌아온 일행들을 위하여 연길시 근교에 있는 별장형 한정식 식당에 숙식이 마련되었다.임대버스가 마을에 도착하것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이 마을(小河龍)은 연길시를 관통해서 흘러온 부르하통하(河)와 용정 벌을 지나온 해란강이 만나서 구비 돌아가는 합수(合水)목 마을이다. 여기서 차량으로 5분정도만 더 올라가면 한국의 참빛그룹(眞光集団)에서 운영하고 있는 해란강 골프장(36홀)이 나오는데, 어제 밤에 묵었던 백두산 천상관광호텔도 이 회사의 소유다.마을 어귀에 버스가 진입하자 나는 마이크를 잡고 멀리 마을 뒷산 언덕에 보이는 세 그루의 노송(老松)을 가리키며, 이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저 소나무들 때문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수령이 천년 넘는다고 해서 흔히 천년송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 소나무들은, 산기슭 한곳에 삼각형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는데다 그 모양과 크기가 우산형으로 똑같이 생긴 거목인지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고 한다.나는 짖꿎은 생각이 들어서 일행들에게, 저녁 먹기 전까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다들 가서 세 그루 천년송을 껴안고 한번씩 소원을 빌어보라. 그러면 산신령이 도와서 소원성취케 해 줄지도 모르지 않겠냐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일행들이 버스에서 내려 한정식 식당으로 들어가자 주인 내외와 종업원들이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주인 내외는 한국인들로서 이곳에 와서 생활한지 벌써 15년이나 되는 분들이다.2층으로 지어진 이 집의 형태는 소나무 원목을 많이 사용해서 지은 황토집 한옥이었고, 기와지붕 위에 장독을 얹어 놓아 토속적이면서도 유니크한 맛을 물씬 풍겼다.실내 복도와 거실의 벽은 황토로 마감되어 있고, 천장에는 묵화 그림들이 여러장 가지런히 발라져있으며, 노출된 소나무 서까래에 옥수수, 조, 조롱박들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주방이 넓고 깨끗하게 설비되어 있으며, 실내 한쪽 구석에는 한증막도 시설되어있다. 그리고 온돌 구조의 크고 작은 방들이 여러개 있어서, 단체 숙박이나 연수활동이 가능한 식당이었다.이 한정식 식당을 소개받고 출입한지가 벌써 사오년이 지났다. 주인 내외는 독실한 크리스챤으로서, 연길 기독실업인회(CBMC) 회원이기도하다. 그래서 연변과기대 교수들과 회원들에게는 특별대우를 해주었다.그리고 또한 감사한 일은 이 댁의 부군되시는 분이 화가여서, 실내 여러곳에 크고 작은 유화작품들을 전시해 놓았기 때문에, 이 집에만 오면 마치 화랑(갤러리)에 온 것 같아서 늘 기분이 좋았다. 민박회 일행들은 남자, 여자로 구분해서 큰방을 2개 공동사용하기로 했다.내 방은 크기가 작지만 독방을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짐을 다 풀어 놓고나서 우리들은 저녁 식탁이 준비되기까지 약 30분정도 여유가 있어서 천년송이 있는 마을 뒷산으로 산책을 나갔다.나도 이 마을에 여러번 왔지만, 그때마다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지 소나무가 있는 동산에 직접 올라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판에 찍어낸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거의 비슷한 이 세 그루 노송의 자태는 내가 예상했던것 보다 휠씬 더 크고 우람차며, 아름다웠다. 일행들은 어둡기전에 또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다. 해가 뉘엿뉘엿지는 황혼을 바라보며, 내가 가르쳐준대로 천년송을 끌어안고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기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가 깔깔대며 노는 모습이 마치 개구쟁이 어린아이들 같다.식당으로 돌아오자 이 집에서 가장 큰 방에 만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정식 메뉴로 차린 정결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하다. 술은 동동주 막걸리를 담아 놓았다고 해서 그걸로 우선 목을 추겼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기호에는 맞지 않아 평시대로 맥주와 고량주를 주로 마셨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음주를 하는 중간 중간에 본격적으로 노래와 춤판이 벌어졌다. 방안에 노래방 기기가 준비되어 있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고와 박사의 딸 애리가 디스코 춤으로 우리들을 마냥 즐겁게 해 주었다. 손수건을 돌려가면서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정서적으로 우리 한민족 마음에 가장 가깝게 와 닿고 심금을 울린 노래는 역시 몽골민요였다.아래에 소개하는 노래는 몽골민족들이 즐겨 부르는 목가풍의 민요로서 그들의 삶의 원천인 초원을 노래하고 있다. 우런 박사와 진영충 박사가 함께 불러준 이 노래는, 그 가사 내용이 밝고 명랑한데 비해 음색은 듣는이로 하여금 한(恨)을 느끼게 했다. 잃어버린 역사의 슬픔을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마음에 찡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러한 느낌은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을까?가사 내용이 너무 좋아 여기 한수 번역해 적어 본다. 『아름다운 초원은 나의 집』1. 美麗的草原我的家,風吹綠草遍地花,彩碟紛飛百鳥唱,一彎碧水映晚霞,駿馬好似 踩雲朵,牛羊好似珍珠灑,啊哈呵,牧羊姑娘放聲唱,愉快的歌聲滿天涯,牧羊姑娘放聲唱,愉快的歌聲滿天涯 "아름다운 초원은 나의 집바람은 초록 풀 위에 불고 대지는 꽃동산다채로운 나비가 날고 새들은 노래 부르누나푸른 물결에 저녁 노을 비치고 준마는 구름을 타듯 달린다.소와 양들은 진주를 뿌린 듯 한데아하아, 목양 처녀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유쾌한 그 노래 소리 하늘가에 울려 퍼지네.목양처녀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유쾌한 그 노래 소리 하늘가에 울려 퍼지네." 2.美麗的草原我的家,水清草美我愛他,草原就象綠色的海,氈包就象白蓮花,牧民描繪幸福景,春光萬里美如畫,啊哈呵,牧羊姑娘放聲唱,愉快的歌聲滿天涯,牧羊姑娘放聲唱,愉快的歌聲滿天涯  "아름다운 초원은 나의 집물은 맑고 잔디는 아름다워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초원은 녹색의 바다와 같고 몽골 집은 백련 꽃과 같다.목민들은 행복한 정경을 새기고만리의 봄빛은 그림같이 아름답다.아하아, 목양 처녀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유쾌한 그 노래 소리 하늘가에 울려 퍼지네.목양처녀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유쾌한 그 노래 소리 하늘가에 울려 퍼지네." 시간이 많이 흘러가자 모두들 술이 거나해진 모습이다.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벽에 기대앉아 여러가지 의견을 발표하는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먼저 내년도 민박회 모임을 어디에서 할 것인지부터 논의하였다.이 안건은 내가 먼저 제안했다.그동안 내몽고와 조선족 사회를 둘러보았으니, 이제 내년에는 신장지구 우루무치와 뚜루판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있는 뚜루판의 고성(古城)에 가서 삼장법사를 만나 한판 종교적인 영적 싸움을 벌려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일행들이 떠나갈듯 웃어제꼈다.다들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겠지만, 그때 내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간 비젼은 이런 내용이었다."내가 이곳 연길에 중국 최초의 기독실업인회(CBMC)를 창립한것이 1994년 8월 1일이었다.그 후 올해까지 만14년이 경과하는 동안 중국 전역에 한국인 CBMC 40여곳, 중국한족 CBMC 20여곳, 조선족 CBMC 5곳으로 확대 발전했다. 또한 2000년도에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에 한국인 CBMC를, 카자스탄 알마티에 고려인 CBMC를 창립했으며, 그 다음해인 2001년도에 터키 이스탄불에 한국 기업인과 터키인들로 구성된 기독실업인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그때 서울에서 KAL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항공기 좌석 뒤 포켓에 있는 항공잡지를 꺼내들고 세계지도를 펼쳐보는 순간 지구 북위40도 선상에 거의 일직선으로 CBMC를 기초로하는 뉴실크로드 미션의 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놀라며 감격해 했는지 모른다.거기 북위40도 선상을 중심으로 세계지도에 나타나는 도시들을 살펴보면, 아시아대륙 맨 동쪽 끝에 옌지라고 적혀있는 도시가 나올것이다. 그곳이 바로 이곳 연길이다. 그리고나서 시선을 왼쪽으로, 즉 서쪽으로 옮겨보라. 거기에 심양, 북경이 있다. 또 시선을 서쪽으로 옮겨보라. 서안, 우루무치가 나온다. 또 시선을 서쪽으로 옮겨보라. 알마티, 타쉬켄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또 한번 더 시선을 왼쪽으로 옮겨보라. 그러면 아시아대륙 맨 서쪽 끝에 이스탄불이 나올것이다. 이것이 바로 1994년 8월 1일 이후 하나님께서 내 손을 붙잡고 차례대로 CBMC 창립을 통해 이끌어 가신 실크로드 미션의 길이다. 이것은 곧 세계역사의 서진화 현상과 궤를 같이 하는 흐름이어서 나는 이 CBMC 사역의 길을 통하여 섭리사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Back To Jerusalem에 대한 남다른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그런가운데, 2005년 9월 서울 영동CBMC팀들과 함께 카작스탄 알마티를 거쳐 우루무치에 선교여행을 갔다가 인근에 있는 뚜루판 고성(古城)을 관광하고 돌아가는 길에 와이프가 우연스럽게 위구르 소녀 한명을 입양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후일 그 소녀의 이름을 한나로 고쳐주었는데, 관광지 잡화점에서 풍물 장사를 하던 일을 그만두게 하고, 중학교 때 중단되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도록 지원하여 올해 지금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맞고 있다.눈이 맑고 웃을 때 너무나 천진스러워 보이던 한나는 이제 우리 부부가 매일같이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위구르족 선교 비전의 마스코트가 되어있다. 『지금 울란바토르의 몽골국제대학(MIU)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용규 박사(하버드대, 역사학)에 의하면, 원래 '위구르'란 말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한다.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전파된 초기 기독교의 대종(大宗)을 흔히 네스토리안파(Nestorianism) 교회라고 한다.AD 5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를 석권했던 투르키스탄, 위구르, 몽골, 티무르 등 왕조역사의 부침과 함께 유목민에게 나타났던 기독교 역사는 천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부흥기와 침체기를 반복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지역에 널리 전파되었다.실크로드가 그 중심 교통로였으며, 뚜루판은 당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중간 교통요충지였다. AD 15세기 이후 중동지역 대상(隊商)들에 의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쇠락한 기독교세력을 대체하여 이슬람권 상업 종교 세력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그 후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스탄'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20세기에 들어와 소비에트 연방에 참여한 중앙아시아 5개국(CIS)국가 중 카작스탄과 중국의 국경문제가 대두되면서 천산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위구르 족들이 카작스탄과 중국 신장지역으로 분할됨에 따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국가체제 아래 놓이게 된 실정이다.내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점이다.조선족사회는 한반도라는 모국이 있으면서 중국에 이주한 자생적인 소수민족 집단이지만, 위구르는 중앙아시아에 개입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침탈에 의해 분리된 비운의 역사를 갖고 있다.나는 이들과 접하면서 폐쇄적인 민족심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불행의식을 극복하고,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가르쳐 주는 일은 CBMC 사역을 통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3년 알마티(카작스탄)와 우루무치(중국) 양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기독실업인들을 연계하여 BMF(Business Mission Fund)라는 소액융자대출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서 위구르족들에게 복음전도와 함께 생산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돕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이런 가운데 한나를 입양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원래 기독교인이었던 위구르족과의 관계를 복원하는)아주 특별한 기회요. 영적인 선물이라고 믿어진다.특히 중국과 카작스탄에 흩어져 있는 위구르족들이 과거역사에 매이지 않고, 주어진 현실여건 안에서 중국과 카작스탄 사이의 가교역할을 한다는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을 구성할 수 있다면, 그 중간고리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위구르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마치 조선족사회가 중국과 한국,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간매체 역할을 잘 할 수 있는것처럼 말이다.이런 희망과 전략개념을 갖고 CBMC 실크로드 사역을 통하여 위구르족의 앞날을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이 일은 나로서는 참 행복한 일이다.우리 부부가 한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것은, 위구르족이 바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그 가운데 교통요충지인 뚜루판의 고성(古城)에 살고 있는 한나가 바로 예표적 인물로 내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를 돕고, 그 가족을 지원하고 그 족속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또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것은 한나의 집을 거점으로 주변 위구르족 농가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건포도생산을 위한 자립생활공동체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원래 그 지역은 사막지대라서 일교차가 심하고 여름에는 영상 45도,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오르내리는 연중 기온편차가 극심한 지방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자고로 세계에서 당도가 제일 높은 포도생산지로 유명하다.지금도 대부분의 생산량을 유럽으로 출하하고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그곳이 프랑스에 있는 '때제 수도원'과 같은 신앙공동체로 발전 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 기초를 닦는 일을 준비하고 싶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 나는 그곳을 「화염산 포도수도원」이라 이름짓고,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고성(古城)에서 한판의 일전을 벌려 볼 생각이다. 이 영적 싸움은 누가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싸움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믿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전달해서 고행자의 약점을 보완하고 갈등을 해소시켜 줌으로서 마침내 그 자신이 스스로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 줄 작정이다.이는 희생적인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고, 이런 사랑을 위해서는 내 생명을 바쳐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있어야 가능한 싸움이다. 그런 영적 싸움을 한번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이것이 내년에 「민박회」일행들과 함께 뚜루판을 찾아가고 싶은 나의 궁극적인 희망의 메세지다."이런 생각이 찰나적으로 압축되어 뇌리 속에 저장되었다.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은 벌써 뚜루판의 화염산 위를 힘차게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천산산맥을 넘어, Back To Jerusalem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민박회」일행들도 동역자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일행들은 나의 제안을 모두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다만 내년 8월 초에 일단 북경에서 만나 그동안 뵙지 못했던 학교(중앙민족대) 스승 교수님들을 모시고 세미나를 가진 후, 다같이 우루무치로 갔다가 뚜루판과 서안을 거쳐 각자 임지로 돌아가는 코스를 결의했다. 그러고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영 박사가 지난해 우리 일행들이 다녀왔던 징기스칸 유적지 주변 사막지대에 한국 KAL 직원들과 시민단체들이 녹화 사업을 많이 지원해줘서 큰 진전을 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우리들의 대화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번져 나갔고, 중국 내몽골 지역의 초원을 지키기 위한 한 방안으로 태양광발전과 풍력발전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급기야 유목민의 기질과 성향, 대 몽골제국의 성립이 가능했던 이유 등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야기의 초점을 (민박회에는 몽골족 출신들이 많기 때문에) 원(元)나라의 역참제와 글로벌 네트워크 기능을 비교하는 쪽으로 대화를 풀어 나갔다.결국 이 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면, 신 노마드(유목민)운동을 기초로하는 가치경영에 승패가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한국의 IT기술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인터넷 강국이란 점이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가장 첨단적인 능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한 후에, 나는 과거 750여년전 대 몽골제국 쿠빌라이 시대에 마르크 폴로가 썼던 「동방견문록」이 같은 베니스 동향인 컬럼버스에게 꿈을 심어 주어 마침내 미주 신대륙을 발견 하는 계기를 이루었듯이, 징기스칸의 후예들인 「민박회」 몽골족 여러분들이 장차 「서방견문록」을 쓰게 된다면, 이 「민박회」가 신 노마드의 꿈과 용기를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를 잊지 말고 기록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한번 건배 제창을 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시대는 탈(脫) 중심화를 지향하는 지식정보 시대입니다. 이제 모든 개인들이 네트워크상(上)의 중심 역참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 민박회의 소수민족들처럼 변방에  위치해 있는것이 오히려 외부와의 다양한 접촉을 통해 복합적인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중심에 갇혀있는 큰 자들보다 변방에 있는 작은 자들이 더욱 민첩하게 세계의 변화에 직면하고 소통하는 감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우리 민박회가 이 시대의 흐름을 변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서 이웃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 시대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촉진자(促進者)가 될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건배 합시다. 내가 당신하면 멋져라고 건배하세요. 이 말은 당당하게 살자. 신나게 살자. 멋지게 살자. 그리고 가끔은 져주면서 살자는 뜻입니다. 우리 함께 건배합시다. 당신!  멋져!"이것이 내가 「민박회」를 통하여 소수민족 엘리트들에게 거는 기대였다.밤새도록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은 술이지만, 시간이 너무 깊어서 모임을 파하기로 했다. 오늘밤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는것을 상기시키면서 부회장 서영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건배 제창을 했다. "우리, 마지막 잔을 폭탄주로 듭시다. 각자 다 폭탄주를 만들어요. 저는 다시한번 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너무나 크게 감동했습니다. 우리들은 올림픽 개막식 입장권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 값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 그걸 포기하고 이곳으로 달려와 주셨습니다. 우리 민박회 일동은 이 일을 영원히 잊지않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이 회장님을 사랑합니다. 이 회장님과 함께 영원히 변치않는 우정으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한마음으로 건배합시다. 다같이 사랑을 위하여, 건배!"저마다 머리 위에서 맥주 잔 안에 작은 술잔이 부딪혀 딸랑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일어나 손에 손을 잡고 서로를 부등켜 안았다. 누구는 울고 있었다. 급기야 우리들 대부분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렸다.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제2차 민박회 모임의 마지막 밤은 여러 가지 상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엎치락 뒤치락 거리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인 그런 불면의 밤이 되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글 싣는 순서Ⅰ. 민박회Ⅱ. 경희궁의 밤Ⅲ. 백두산 소수민족 올림픽Ⅳ. 올림픽 이후 중국의 과제Ⅴ. 흐름의 미학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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