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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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3] 조선족사회의 비전을 세워야 합니다 댓글:  조회:4161  추천:72  2008-10-25
 조선족동포에 고함 13조선족사회의 비전을 세워야 합니다                                      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는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발전을 위한 축적된 자본과 자원이 없고, 미래를 꿈꾸며 그것을 디자인(계획)할 사람이 없으며, 그래서 미래를 열어갈 비전(미래상)도 없었습니다.”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이 당돌한 평가는 제가 지난 2월에 출판한 저서 서문에서 언급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글을 접한 적지 않은 조선족동포들이 불쾌해 하고 또 분노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 이 무례한 평가를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대신 누군가가 나서 저의 평가가 잘못됐다며 오만방자함을 질책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수히 많습니다. 또 상황에 따라 각각의 요소들이 차지하는 비중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다양한 변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기도 하지만 추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그 사회는 흥하게 되기도 하고 또 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의지에 따라 세상이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또한 발전을 위한 자본을 축적하고 자원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조선족사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과 비관론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은 분명히 지나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표현한 것은 오늘날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저의 판단 때문입니다. 조선족사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조선족 개개인의 미래는 있을지언정, 전체로서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가늠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두 가지 요인이 눈에 띕니다. 하나는 조선족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밝힐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통상 꿈과 희망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한 사회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비전이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꿈과 희망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사회 전체를 결집시키고 또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갈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족사회에 비전이 없는 것은 지도자가 없는 것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지도자 부재’와 ‘비전 없음’이 조선족사회의 위기론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건강하고 부강한 조선족사회’를 가슴에 품자   지도자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혁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염원하며 조선족 모두가 ‘지도자 후보’가 되어 그 공백을 메워가자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지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고 지도자 부재에 대해 누구를 탓 할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또 다른 과제로서 ‘비전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비전 제시는 지도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지도자 후보로서 조선족 당신이 나서야 합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당신 개인보다 조선족 전체를 품는 것으로 비전 세우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부강한 조선족사회’를 만드는데 비전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와 함께 반드시 한국사회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전제해야 합니다. 조선족 당신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31    [4-3] 조선족의 사회문화 현실 진단 댓글:  조회:3910  추천:61  2008-10-19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3. 사회문화적 측면 0. 인구감소 문제중국은 급격한 인구감소 문제로 새로운 고민에 쌓여있다. 1970년대 이후 인구의 과잉증가를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인 산아제한정책을 취해왔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부메랑이 되어 급격한 인구감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에 따른 사회경제적 환경변화가 가져온 결과이다.조선족사회 역시 이러한 현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인구감소의 속도와 내용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족의 급격한 인구감소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광복 무렵 중국동북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약 2백16만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 2천5백만 명의 10%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그러나 일제의 항복 이후 절반 정도가 귀국하고 1940년대 말 중국거주 조선인은 대략 1백11만 명 정도로 추정됐다.(이재달, 2004) 연변지역에도 70만 여명이 살았으나 수십만 명이 한반도로 귀국하였다. 그 결과 조선족자치구가 수립된 1952년 연변지역의 조선족인구는 약 53만 명으로 자치구 전체 인구의 62퍼센트를 차지했다.이후 조선족 인구는 점점 증가하여 1987년에는 80만 명을 돌파하였다. 호구조사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95년으로 86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04년에는 82만 여명으로 줄었다. 전체 조선족인구 수는 1995년 이후 감소하였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내 조선족 비율은 1952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조선족 인구증가에 비해 한족 등 타민족의 유입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1952년 62퍼센트에서 1975년에 40.18퍼센트로, 1995년에 38.55퍼센트로, 그리고 2004년에 37.68퍼센트로 낮아졌다. 길림성 인구 및 계획생육심사조가 조사한 한 통계에 따르면 2007년 9월 현재 조선족자치주 인구는 2백23만 3천1백44명이고 조선족은 82만6백92명으로 전체인구의 36.75%를 기록했다. 37%대가 깨진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구감소 추세는 중국 내 조선족 인구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한중수교이전인 1990년 중국 제4차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조선족인구는 2백9만7천,9백2명이었다. 그러나 2007년 2월 중국 소수민족 인구통계는 조선족인구를 17만7천여 명이 줄어든 1백92만5백97명으로 기록했다.조선족인구의 감소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지만 주된 이유는 조선족의 출생률이 낮은 때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에 따르면 1990년 연변 조선족의 출생인구는 1만1천6백여 명으로 출생률이 13.83퍼센트였으나 2003년에는 2천9백여 명으로 3.53퍼센트에 불과했다. 자연출생인구와 사망자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인구자연증가율은 1996년부터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출생률이 낮은 이유는 조선족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중국당국이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의 일환으로 아이를 2명까지 낳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여성들은 대부분 한명만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문제를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경제력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중국사회의 풍조에 따라 경제적 여건을 따져 아이 낳는 것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임여성들의 해외로의 혼인이주 증가도 인구감소의 주된 원인의 하나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한국으로 혼인이주를 떠났다. 2006년 6월 흑룡강신문이 중국 관련부서의 통계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5년 한해 동안 한국남성과 결혼한 중국여성은 2만6백35명에 이른다. 한국남성과 외국인 여성 간 전체 결혼건수의 66퍼센트에 해당한다. 물론 대부분이 조선족여성이다. 1990년부터 2005년 4월까지 한국으로 혼인이주한 조선족여성은 무려 7만여 명이 넘는다. 가임여성의 해외 혼인이주가 늘어남에 따라 연변에는 장가를 가지 못한 조선족 노총각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일부에서는 연변 조선족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인구감소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연변 조선족동포들 중에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국열풍의 과실을 맛보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쪽에서는 충만한 과실을 맛보며 흥청망청 낭비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 빈곤인구의 58퍼센트에 이르는 14만2천6백82명이 조선족동포이다. 이는 연변의 전체 조선족의 17.39퍼센트나 되는 수치이다. 조선족동포들이 혼인을 위해서든 돈을 벌기 위해서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자본주의화 된 사회에서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로서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1970년대 말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취한 이후 1천8백만여 명의 중국인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세계 1백50여개국가로 떠났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 손쉽게 중국인을 만날 수 있는 이유이다. 또 한족 자본가나 농민들이 투자할 곳을 찾아 또는 일거리를 찾아 연변을 찾는 것 역시 자연스런 현상이다. 인구 13억의 중국에서 약 2억여 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는 통계가 이를 반증한다. 인구이동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수요가 있는 한 이를 막을 수는 없다.문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서 조선족 인구비율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계획과 2010년 전망계획에 따르면 두만강 하류지역의 개발과 관련해 연변지역 인구는 2010년에 250만 명, 2020년에 280만 명, 2050년에 380만 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조선족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인구증가는 한족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조선족 자치주에서 조선족 인구비율은 2010년에 대략 25%, 2020년에 20%, 2050년에 15%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조룡호·박문일, 1997) 0. 사회적  일탈  문제조선족사회는 지금 너무 많은 상처로 신음하고 있다. 당장은 상처가 눈에 띄지 않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얼마나 중병인지 모르고 희희낙락하고 있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만큼 심각하다. 그 심각성을 반영하듯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조선족사회의 중병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한 동포들의 사회적 일탈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사회적 일탈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하나는 청소년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가정문제이다. 두 가지 문제는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부부 또는 부모의 노동 이주와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양자 간에는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연변대학 채미화 교수와 김선화 전임연구원은 2007년 11월 2일 이화여대대학이 부설 한국여성연구원 설립 3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연변 조선족사회가 코리안드림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앓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채미화‧김선화, 2007) 특히 이 논문은 부모가 돈을 벌러 외지로 나감에 따라 자녀들과 격리됨으로써 청소년들의 일탈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발표한 논문 “재한 중국조선족 이주 노동여성의 자녀 조사연구”에 따르면 조사대상 학생들의 부모 중 한명이상이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난 결손가정 자녀가 무려 38.68%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학습능력 저하는 물론 갖가지 탈선의 유혹에 노출되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돈과 가정을 맞바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청소년들의 사회적 일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나가 청소년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데 따른 문제와 연변의 교육환경 문제가 그것이다. 두 가지 문제 모두 중요하지만 전자의 경우 훨씬 심각하다. 채미화교수팀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결손가정 자녀가 무려 38.68%에 이른 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출국한 것이 전체 조사대상 학생의 26.18%에 이르러 조선족 학생 4명중 한명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 이들 결손가정 청소년은 대부분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양육된다. 이외에 이모나 고모에게 맡겨진 경우도 있다.결손가정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동안 부모와 아이가 상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은 방황하게 되고 일탈의 과정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자녀들과 떨어져 있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비교적 넉넉하게 용돈을 주게 되는데 이 또한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탈선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정문제는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등 외지로 나가는 경우 흔히 발생한다. 이 보다 전 단계로 돈을 벌러 가기 위해 가정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즉 돈에 대한 가치를 크게 둠에 따라 가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돈을 벌려는 동기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이 경우 돈을 벌러 간 사람의 일탈과 함께 현지에서 돈을 쓰는 사람의 일탈 두 가지 경우가 다 문제이다. 심각한 것은 어느 경우에도 가정해체로 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조선족동포들의 이혼율은 30%선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사회의 이혼율은 이미 1990년대 초에도 한족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당시 연길시 이혼자 가운데 조선족이 72.4%, 한족이 25.5%, 기타 민족이 2.1%였다.(박민자, 2000) 인구구성 비율로 따지더라도 조선족의 이혼율이 현저히 높다.  0. 민족교육 문제 중국이 소수민족정책 차원에서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선양함에 따라 소수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언어로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해방이후 60여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한국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소련권의 고려인들과 달리 우리의 말과 글을 오롯이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민족교육을 통해 조선족은 한족을 포함한 여타 민족에 비해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소통의 시대를 맞아 한국과의 새로운 관계맺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출생률 감소현상 및 조선족 동포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인식변화 등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의 민족교육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있다. 학령아동의 급격한 감소와 함께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용이하다는 이유로 조선족동포들 가운데 자녀를 한족학교에 보내려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듬에 따라 조선족학교는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농촌지역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연변지역 소‧중학교 수의 변화추이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박금해, 2001) 1989년과 1999년 사이 농촌의 소‧중학교 수의 변화추이를 보면, 소학교는 188개교에서 43개교로 무려 1/4 이하로 줄었으며 중학교는 52개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흑룡강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에 소학교 382개, 중학교 77개였지만 1997년에는 소학교 51개, 중학교 15개로 대폭 줄었다. 농촌지역의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소학교부터 객지로 나가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기거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도 하지만 그중에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변화된 상황에서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증가하는 것은 자식들이 중국의 주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라는데서 비롯된다. 학부모들이 민족의식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학교에 다녀서는 한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어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연변에서는 희한한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아빠는 한국말로 아이는 중국말로, 그리고 엄마는 한국말과 중국말을 번갈아 사용하는 광경이다. 아빠는 중국말이 서툴고 아이는 한국말이 서툴어 엄마가 중간에서 통역 아닌 통역을 하는 셈이다.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현상은 지식인사회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0. 정체성 문제해외이민자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국가의식과 민족의식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보통이다. 국가의식은 스스로를 어느 나라 국민으로 간주하느냐의 문제이고 민족의식은 자신의 종족적 내지 문화적 귀속의식을 뜻한다.(권태환, 2005)개인의 자아의식 또는 정체성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집단 내 상호작용과 집단 간 상호작용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성원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대상 집단은 어떻게 정의하고 그 집단에 대해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상황적 인지는 어떠한가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인식은 결정된다.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은 여러 번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단순한 월경민에 불과했으며,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데 이어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연변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중국인 또는 만주인과도 구분되었다. 조선인의 신분은 형식적으로 일본인과 만주인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쪽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계인의 처지였다.조선조 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친 기간에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은 대부분 스스로 영주 이동자로 규정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이주한,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관념적으로 ‘디아스포라 정체성’ 또는 ‘나그네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조선인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발생한 귀환이동 물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2백16만여 명으로 추산되던 조선인이 1940년대 말 절반 가까운 1백11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그러나 해방이후 연변에 정착해 조선족으로 불리며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위상이 바뀌면서 점차 중국국민 의식이 자리잡아갔다. 이렇게 된 데는 한반도의 정치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중국 형성 직후 실시된 토지개혁과 이를 통한 토지분배였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로서는 중국공산당이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 주는 것에 대해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조선족 정체성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조국과 모국의 분리이다. 이는 전통적인 혼인의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족은 자기집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중국은 그들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이를 혼인에 비유하면 중국은 시집이고 조선은 친정에 해당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아버지집이 되고 조선은 어머니집이다. 조선족의 중국국민으로서 국가의식은 다른 해외한인들의 그것보다도 강하다. 그 배경에는 이주 1세대들의 신중국에 대한 고마움이 저변에 깔려있다.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조선족이 함께 집거하며 민족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문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민족의식과 함께 국가의식을 병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다. 조선족의 민족의식을 규정하는 모국은 한반도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해방 후 남과 북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이해관계도 완전히 달랐다. 따라서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북한(조선)을 모국으로 인식해 왔다. 지금도 적지 않은 조선족동포들이 북한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이같은 역사의 결과이다. 탈냉전적 상황에서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며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에 대해 모국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경제건설에 매진하던 중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전된 남한은 집나간 아버지가 떼돈을 벌어온 것과 같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상황은 많은 조선족동포들로 하여금 정체성 혼란을 겪게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새로운 관계맺기가 기대만큼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들은 한국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됐고 이로 말미암아 다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사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면서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보다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 하고 있다.정치적 동기에 의해 뒤늦게 중국의 소수민족 대열에 합류한 조선족동포들은 이중 또는 다중 정체성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에 더해 중국 국내정치상황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1960년대 중반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조선족동포들은 특별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족 최대 집거지인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피해가 더 컷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리고 한중수교로 조선족 동포와 한국국민 간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중국당국은 이 지역 동포들의 사회적 동요를 의식해 동포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왔다. 이런 점에서 연변지역 밖에 산재해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연변지역 동포들에 대해 “연변사람들은 눈치만 보고, 믿을 수 없다”고 평가하는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0. 가치관 문제50대 이상 중장년의 조선족은 대부분 혼인상대로 조선족을 선택했다. 한족 등 다른 민족과의 혼인은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조선족동포들이 집거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기 때문에 굳이 다른 민족과 결혼을 할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이런 공동체생활로 인해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게 형성된 반면 타민족과의 언어소통은 원활하지 못했는데 이런 점도 다른 민족과의 통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로 꼽을 수 있다.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선 조선족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결혼도 하지 못하고 늙어가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같은 민족만을 결혼대상으로 고집할만한 여유가 없다. 따라서 요즘은 조선족마을에서 한족며느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물론 나이든 부모들도 한족처녀를 마다하지 않는다.또 개혁개방과 문명화로 민족 간 문화적 교류가 커졌을 뿐 아니라 조선족사회에서 한족 등 타민족과의 접촉이 늘어나게 됨에 따라 이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다. 특히 중국의 급격한 경제발전을 지켜보면서 조선족동포들이 한족사회를 재평가하게 된 것도 결혼관의 변화를 촉발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결혼관의 이 같은 변화는 민족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민족에 대한 가치 보다 현실적 필요를 더 중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중국사회에 동화되는데 더 용이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족은 90여개 민족이 동화되어 이루어졌다는 연구결과는 조선족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낳는다. 중국 과학원 유전연구소 한 연구원은 한족의 70-80%는 원래 한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 구성원들이 동화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조선족 역시 동화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 이런 현상이 심화될 경우 개개인의 미래는 있겠지만 조선족의 미래는 없다. 조선족의 미래가 없으면 동북아시아의 미래도 없다. 조선족을 연변과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중국지향의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한민족 지향의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동북아시아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심적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글싣는 순서 1. 정치적 측면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0. 조선족자치주의 미래2. 경제적 측면0. 연변경제 현실- 개혁개방과 연변- 산업별 동향- 연변경제와 한국- 연변경제의 미래0. 주민생활과 소비- 주민생활 수준- 조선족의 소비행태0. 연변경제의 문제점- 지역 및 계층 간 부의 불균형- 관광 및 소비향락 산업 편향성- 한국 의존 심화3. 사회문화적 측면0. 인구 문제0. 사회적 일탈 문제0. 민족교육 문제0. 정체성 문제0. 가치관 문제
30    [4-2] 조선족사회의 경제현실 진단 댓글:  조회:3903  추천:56  2008-10-14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2. 경제적 측면 0. 연변경제 현실. 개혁개방과 연변 개혁개방정책 이전 중국은 국가안보에 우선적 가치를 둠에 따라 교통 등 인프라의 여건을 무시한 채 주로 내륙지방에 국가의 기간산업망을 구축했다. 또 지방산업을 통해 지역이 자체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조달토록 하는 사회주의국가의 일반적 산업정책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동북3성 지역은 일제시대에 자리잡은 공업지대로서의 면모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연변지역도 개혁개방정책 이전에는 전통적인 국가정책에 따라 내수시장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세하지만 2차 산업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지역경제의 주력산업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산업규모의 영세성은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지방정부의 자치권 강화, 지역별 독립성 확대 그리고 지역 간 경제교류의 활성화로 경쟁이 치열하게 되면서 지역별 산업분포와 부존자원의 차이가 지역경제 성장에 그대로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변지역 역시 그러한 정책의 영향을 받아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2차 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연변지역의 산업구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백두산관광 붐으로 연변을 찾는 한국관광객이 늘어나게 되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이를 새로운 활로로 받아들인 것이다. 주정부는 2차 산업 대신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한 3차 산업을 축으로 하여 지역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이후 연변에서는 2차 산업이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된 반면 3차 산업은 급속히 성장하게 됐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관광국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 해 동안 연변을 찾은 관광객은 281만 명에 이르며 이중 해외 관광객은 18만6천명이나 되었다. 관광수입은 21억7천만 위안(2천6백억원)을 기록했다. 백두산관광과 관련한 또 다른 통계도 있다. 한 중국전문 인터넷 매체는 2007년 4월 중국의 백두산보호개발관리위원회 자료를 인용, 중국측이 백두산 관광사업만으로 2005년에 관광객 50만 명으로 6천300만위안(75억원 상당), 2006년에 70만 명으로 1억위안(120억원 상당)의 수입을 올렸다고 전했다.그러나 바다와 접해있지 않아 내륙 변방지역의 한계에 갇혀있는 연변지역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부터 직접적인 수혜를 입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유엔개발계획이 추진한 두만강개발계획에 힘입어 훈춘시가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관심을 끌었으나 이 계획이 흐지부지되면서 훈춘개발도 중단됐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중국이 낙후된 지역에 대한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동북공정과 동북진흥계획을 수립함에 따라 최근 연변지역의 인프라 구축이 활기를 띄고 있다. . 산업별 동향연변지역이 3차 산업 중심으로 산업편재가 바뀌었지만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몇몇 분야는 이 지역의 주력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백두산지역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이용한 임업과 섬유업 그리고 연초산업 등이 이에 속한다.  연변지역은 총면적의 81.3%가 산림지역으로 되어있어 ‘장백의 임해’로 불린다.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중국의 주요 목재생산기지 중의 하나이다. 이를 반영하듯 연변지역은 업종별 종사 직공인수 비중이 목재채취 및 운송부문이 압도적으로 높다. 1995년 통계에 따르면 목재가공 26.3%, 제지 7.4%, 비금속광물제품 7.1%, 방직업 6.8% 등의 순이다. 특히 연변의 목재가공 및 제지공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배니아판, 톱밥판, 종이펄프, 신문용지, 가구 등이 주력 생산품이다.섬유공업 또한 연변지역에서 상대적으로 규모를 갖춘 주력 산업부문으로 분류된다. 방직 편직 등의 공장들이 있으며 주로 면직물 면사 방직품 아마사 등을 생산하고 있다. 금사 마사 화섬사 화섬혼방포 내의 셔츠 등의 제품은 지속적으로 수출하고 있다.  연변지역의 제조업은 대체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의 업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중화학공업 부문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기술수준이 낮고 공해유발적인 화학섬유제조업 및 프라스틱 제품 등으로 특화되어 있다. 이는 한국 등 외국으로부터의 투자유치가 주로 노동집약적이며 공해유발 업종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관련있다.1998년 연변통계연감에 따르면 연변의 2차 산업 기업규모는 소형기업의 비중이 94.9%, 중형기업 4.1%, 대형기업 1.0%로 절대다수가 소형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기업별 평균자본금도 중국전체 평균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이와 같이 연변 2차 산업 기업은 규모의 영세성과 산업기술의 후진성으로 인해 경제적 효율성이 매우 낮은 수준이다. . 연변경제와 한국연변경제는 한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연변경제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경제의 한국 의존도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그러나 이 지역과의 특별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업의 연변지역 진출은 제한적이다. 산동성 등지의 연해지역은 물론 내륙지역인 흑룡강성 보다도 오히려 적다. 연변지역의 지리적 한계가 투자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대기업이 투자한 연변기업은 거의 없다. 남한의 절반 가까운 면적에 고작 217만5천여 명의 인구를 가진 연변조선족자치주는 2차 산업을 유지할만한 내수시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데다 지리적으로도 내륙에 위치해 있어 물류수송이 어렵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연 지리적 조건과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한국기업들의 투자를 막는 가장 큰 이유이다.한 연구에 따르면 2006년 현재 연변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은 414개로 총투자액이 23,935만 달러에 이른다.(이승률, 2007) 연변에 투자한 전체 외자기업의 실제 총투자액의 58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중은 절반을 넘지만 내용은 그다지 평가할만하지 못하다. 연변에 투자한 한국기업은 공업 농업 식품 및 의료 위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2004년에 발표된 한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역에 투자한 비교적 큰 규모의 한국기업을 업종별로 분류하면 공업생산기업이 323개로 가장 많고 농업부문이 267개로 뒤를 이었다. 그리고 요식업 43개, 부동산관련업 11개 등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연길시에 투자가 집중되어 있으며 북한 및 러시아와의 국경무역이 가능한 훈춘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연길과 훈춘을 제외한 지역에는 한국기업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한국기업의 연변투자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갑을방직(현 대경방직)이 한국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연변에 투자했다. 이어 의류 방직 등 노동집약형 제조업체와 대우호텔 등 서비스업체가 잇따라 진출했다. 연변한국상인회에 따르면 이 지역의 역사성과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관광차 오는 한국인들은 많으나 투자하거나 정착하는 사람들은 적다. 2006년 말 현재 연변지역에 정착한 한국인은 약 1만 여명에 이르는데 상당수가 소자본을 투자한 생계형 이주자들이다.한국기업의 연변진출은 제한적이지만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연변경제를 떠받치는 중추이다. 2006년 한 해 동안 해외에서 연변으로 송금된 돈이 무려 10억5천만 달러에 이르는데 이중 한국에서 송금된 것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 연변경제의 미래개혁개방 이전 중국의 지방기업은 지역 내 경쟁자가 없었으므로 규모의 경제라는 경제원리가 무시되어 명맥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시장경제를 강화하면서 지역 간 경계가 허물어지게 되어 타 지역 업체들과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 지면서 연변의 2차 산업 역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력을 제고하거나 규모의 경제를 통해 중국 내 역외수출이나 해외수출 등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여건을 갖추기 어려운 실정에 있어 연변 2차 산업의 제품경쟁력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가 90년대 이후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한 3차 산업 위주의 지역경제 개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2차 산업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것도 연변의 2차 산업이 위축되게 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주목되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연변의 주력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3차 산업 발전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중국정부가 길림성 산하에 직할기구를 설치해 연변조선족자치주 관할 하에 있던 백두산지구를 관할토록하고 백두산에 인접한 통화시에 비행장 건설을 서두르는 등 연변지역의 관광산업 발전에 부정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는 연변의 3차 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더욱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한 간 교류협력 확대를 추진하는 가운데 현대아산그룹이 2008년 5월부터 직항로를 통해 백두산관광을 시작하기로 북한측과 합의함에 따라 연변지역의 관광산업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겪이다. 따라서 연변이 지금처럼 3차 산업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이런 점에서 향후 연변은 지역 특산물과 지역적 특성을 결합한 2차 산업 중심의 발전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즉 연변의 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2차 산업 중심의 산업전략을 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2차 산업 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재조정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도 최근 이런 현실을 감안해 연해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낙후되어 있는 연변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과학기술 인력 양성을 통한 IT산업을 특화시키려 하고 있다. 연변의 특성에 맞는 기술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IT산업을 선택한 것이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경제 또는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도 그런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기술 및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연변은 한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활용함으로써 그러한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연변은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의 핵심지역으로서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를 적극 추구하고 있는 한국정부와 한국의 우수한 IT기업으로부터 선진기술을 유인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있다. 실제 한국사회와 연변 조선족사회 간에 IT부문에서의 협력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다. 연길시정부와 길림성 정보상업청 등은 2007년 9월 6-8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백산호텔에서 한중IT포럼을 개최하고 한국IT벤처기업연합회(KOIVA)와 한중소프트웨어산업단지 조성에 협력키로 합의했다. 이 포럼에서는 연길정보산업협회와 연변대학이 KOIVA와 IT인력 양성 및 교류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으며 연변대학 졸업생 1백여명을 대상으로 한국 IT기업 취업설명회도 가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는 연길시 첨단기술개발구에 36만4천평방미터 규모의 한중소프트웨어단지를 조성하고 앞으로 200-300개의 한국 IT기업을 유치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도문시에도 북한 IT 기술인력이 참여하는 또 다른 소프트웨어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연합뉴스, 2007.9.11)연길시 IT벨리 투자관리위원회 한 책임자는 “IT가 연변의 미래”라며 “IT야말로 연변 조선족사회의 미래 먹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IT산업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족동포들이 상대적으로 IT환경에 잘 적응하고 연변 내에 IT관련 교육기관이 다수 자리잡고 있는 것 때문이다. 연변 자체의 IT 인력과 함께 북한의 고급 IT인력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의 앞선 IT산업과의 연계 가능성도 있다. 한국 IT기업들이 연변을 교두보로 하여 중국의 거대한 IT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연변경제의 미래를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농업부문을 특화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농사짓는 일은 당장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무조건 농사를 외면하며 토지를 버리고 일거리를 찾아 대도시로 또는 한국 등 외국으로 떠나기보다 중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농산물 재배를 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 남방지역 등지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농촌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나 조선족 농민들이 떠난 자리를 꿰차고 묵묵하게 농사짓고 있는 한족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연변지역은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콩 농사에 적합한 토질과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미 한국의 유수한 식품회사가 연변지역에서 대규모 콩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연변지역은 지리적으로 북한 및 러시아와 맞닿아 있는 변경지역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활용하여 인접국가와의 월경협력을 통한 무역을 주력산업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2005년 한 해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외무역액은 6억8천만 달러에 이른다. 이중 북한과의 무역이 2억5천만 달러를 넘어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과의 무역도 1억 달러에 이르는 적지 않은 규모다. 최근 중국은 연해주지역에서 러시아와의 교류협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연변지역도 훈춘을 거점으로 한 국경무역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0. 주민생활과 소비. 주민생활 수준연변지역은 도시를 중심으로 2차 산업이 발달하였지만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이 높다. 2005년 말 현재 농업인구는 76만7천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35.3%에 이른다. 조선족동포들 역시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호구조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 상황과는 차이가 있어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족동포들의 해외 및 연해도시로의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져 한국을 비롯한 해외로 나간 조선족이 30만 명을 넘어섰으며, 연해도시로 진출한 조선족이 50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변에서 운영되는 한 인터넷매체는 2007년 11월 11일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2007년도 1/4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소수민족 자치주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1/4분기 GDP는 44억4천만위안(5천339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8.5퍼센트 증가한 것이다. 이는 길림성의 평균 성장률보다도 2.5퍼센트 높은 것이다. 연변의 급격한 성장은 대부분 경제활동을 위해 연변 밖으로 진출한 동포들의 송금이 늘어난데 따른 것이다. 연해도시와 한국 등지에서 막대한 송금을 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동포들의 전체적인 생활수준은 높지 않다. 외지에 나가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연변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연변지역의 1인당 GDP는 중국평균보다 1000위안정도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송출에 따른 막대한 송금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1인당 GDP가 중국평균 보다 낮은 이유는 빈부의 차가 극심한데서 찾을 수 있다. 연변조선족 내에 거주하는 83만 여명의 조선족동포들 중 14만 여명 이상이 극빈자로 분류되고 있다. 중국정부는 전국적으로 가장 빈곤한 현과 현급시 500여개를 국가급 빈곤 현 및 시로 지정해 해마다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6개 시와 2개 현 중 용정과 화룡 등 2개 시와 안도와 왕청 등 2개 현이 국가급 빈곤 현과 시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8월에 제시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월평균 소득 130위안(한화 약 16,000원)이 안 되는 조선족 빈곤인구가 142,682명이나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 빈곤인구의 58퍼센트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서 조선족 극빈자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연길 등 도시지역의 조선족동포들의 생활수준은 매우 높다. 일부 부유층들의 소비생활은 한국의 중산층 못지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먹고 입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자동차구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노무송출로 인한 외화수입이 증가하는 것과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소비향락산업에 집중 투자되고 있는데 따른 현상이다. 문제는 연길시의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최저생활도 영위하지 못하는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연변경제가 기형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소비행태조선족사회는 한족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소비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행태는 개혁개방 이전보다 이후 더 심화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개혁개방 이전에 조선족 농민은 논 위주로 농사를 지었던 반면 한족 농민은 밭농사 위주로 농사를 지었다. 따라서 조선족 농민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윤택했다. 그러나 조선족 농민은 과소비 성향 때문에 겉으로는 풍족해 보였으나 실제는 저축을 하지 못하는 등 궁핍하게 살았다. 반면 한족 농민은 겉으로는 조선족보다 수입이 덜해 빈궁해 보였지만 실제는 근검절약하여 저축을 하는 등 오히려 여유있는 생활을 하였다.조선족의 이러한 생활습관은 개혁개방 이후 더 심화됐다. 적지 않은 조선족동포들이 연해도시나 한국 등지에 나가 비교적 큰 돈을 벌었으나 비생산적인 부문에 많은 지출을 함으로써 경제력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말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 농촌의 경우 연인원 6,000여명이 한국 등 외국에서 일해 몇 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는데 그중 3분의 1정도가 비생산적인 생활소비에 탕진했다.연변에서는 조선족의 과소비행태를 한족과 비교하여 전하는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연변에서 조선족이 택시를 타지 않으면 택시기사가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다. 한족들은 여간해서 택시를 타지 않기 때문이다. 한족은 3명 정도가 모여도 심사숙고한 후 택시를 타지만 조선족은 걸어서 갈만한 거리도 혼자 택시를 타고 간다는 것이다. 또 조선족은 돈이 생기면 그때그때 다 쓰지만 한족은 장롱 깊숙이 모아둔다. 그래서 겉보기와 달리 조선족이 한족들에게 돈을 빌린다고 한다. 이런 과소비 행태는 연길시내에 우후죽순처럼 늘어서 있는 소비향락산업에서도 반증된다. 다방 발마사지방 술집 등이 연길시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주 고객은 조선족동포들이다. 조선족사회의 과도한 소비성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우리민족의 낙천적인 성격과 가무를 즐기는 성향을 들 수 있다. 옛날부터 우리민족은 가무를 좋아해 때마다 함께 어울려 춤과 노래를 즐겼다. 이러한 전통은 연변 조선족사회에도 그대로 이어져 3.8국제부녀절, 5.1절, 6.1국제아동절, 8.15노인절, 9.3자치주성립기념일 등 주요 기념일을 기해 주민들이 함께 가무를 즐기고 있다. 이런 기념일에 한족들은 특별한 가무를 행하지 않는다.최근의 과소비행태는 돈을 쉽게 번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애써 고생해 돈을 벌었으면 그만큼 절약하고 의미있게 사용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흥청망청 거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쓰게 되고, 돈을 다 쓰고 나면 또 벌면 되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이어진다.조선족의 과소비행태를 이들의 이민성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조선족들이 중국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에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스스로 영주이민자로 인식하기보다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이주한,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때그때를 즐기는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조선족의 이러한 과소비행태는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이러한 소비문화를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보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과의 새로운 관계맺기가 역설적으로 연변 조선족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은 한국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0. 연변 경제의 문제점. 지역 및 계층 간 부의 불균형연변지역과 조선족 사회의 경제적 여건은 매우 극단적으로 나뉜다. 지역적으로는 물론 계층 간에도 부의 불균형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연길을 비롯한 몇몇 도시는 번성하고 있는 반면 여타 농촌지역은 점점 빈궁해지는 지역 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주민들의 경우에도 연해도시나 해외에 나가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지만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겹쳐 물질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지역 간에는 물론 주민들 사이에도 빈부의 차가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역적으로 몇몇 도시만 번성하고 있는 현상은 연해도시와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발전되고 또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연길 등 도시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번 연변지역 조선족동포들의 경우 자신이 성장한 곳보다 연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도시화 현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연변의 경우 보다 빠르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역 간 불균형 발전과 함께 조선족사회 내에서도 부의 편중현상이 심각하다. 개인 간 부의 불균형은 개개인의 능력보다 한국과의 연고가 있느냐의 여부와 직결되고 있다. 즉, 한국에 연고가 있으면 한국을 방문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찾게 되는데 정상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돈을 버는 사람에 비해 힘은 더 들며 돈은 더 못 버는 이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한국을 방문하려다 잘못되어 돈만 날린 사람이나 한국을 방문한 후 불법체류자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한국방문을 추진하다 사기를 당해 고통 받은 사람들이 한때 1만5천명에 달했었다는 것이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한국과의 관계가 연변과 조선족사회의 전체적인 부를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셈이다.    . 관광 및 소비향락 산업 편향성연변은 90년대 중반 한국으로부터 관광객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경제적으로 호황기를 맞았다. 이를 계기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경제정책을 2차 산업 대신 관광산업 중심으로 재편했다. 90년대 까지만 해도 연변의 관광산업은 한국인이 주 대상이었다. 한국인들의 연변에 대한 향수와 백두산에 대한 경외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 남방지역의 중국인들도 백두산지역에 대한 관광에 가세하면서 관광수요는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관광산업은 연변지역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 했다.관광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소비향락 산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일차적으로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한국과 연해도시에서 돈을 벌어온 조선족들이 앞을 다투어 소비향락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또 이용함으로써 소비향락 산업은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연길시내에 음식점과 함께 다방 발마사지방 등이 번창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연길시는 2004년에 소비산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중국의 100대 발전도시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었다.이러한 현상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개개인이 외국에서 벌어오는 돈의 액수가 적어 기업형 투자를 하기에 적합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자본으로 투자할 것을 찾다보니 소비향략 산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으로부터 송금되는 돈이 넘치면서 주민들의 씀씀이가 커져 상대적으로 소비향락 산업이 호황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기도 하다. 둘째, 특별한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조선족사회의 분위기도 소비향락 산업에 돈이 몰리는 이유이다. 투자비가 적을 뿐 아니라 인건비가 싸 운영비가 적게 든다는 것도 이런 심리를 부채질 하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셋째, 연변지역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제한적인 점을 들 수 있다. 연변의 전체면적은 남한의 절반에 가깝지만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불과 2백17만5천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장이 형성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농업을 제외하고는 자체적으로 산업 발달을 꾀하는 데 한계가 있다. 관광산업과 소비향락 산업 중심의 이러한 연변경제가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남북한이 백두산관광을 위해 2008년 5월부터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한국에서 직항로를 이용한 백두산관광이 이루어지면 연변지역이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은 불문가지다. 또 백두산지역 관할권이 길림성 산하 특별기구로 이관되고 백두산 인근의 통화시에 공항이 건설되고 있다. 이럴 경우 연변 관광산업의 주 대상인 한국인과 남방지역 중국인 모두 급격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 한국 의존 심화연변조선족자치주는 지역적 범위에 비해 인구밀도가 현저히 낮다. 남한면적의 42퍼센트가 넘지만 인구는 고작 2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선족동포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며 안분지족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새로운 관계맺기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그들에게 한국은 마음속에 그리던 모국일 뿐 아니라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신천지였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너나할 것 없이 금광을 찾아 서부로 달려가듯 조선족 동포들도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고 한국으로 몸과 마음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현재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동포들은 조선족 전체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약 7만 여명은 결혼이주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돈을 벌기위한 노동이주이다. 약 3만 여명은 불법체류자이다.중국 내 한국관련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족동포들도 적지 않다. 산동성을 비롯한 연해도시에 약 50만 명의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 중 다수가 한국과 관련된 기업에 종사하고 있다. 조선족동포들의 한국의존도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글싣는 순서 1. 정치적 측면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0. 조선족자치주의 미래2. 경제적 측면0. 연변경제 현실- 개혁개방과 연변- 산업별 동향- 연변경제와 한국- 연변경제의 미래0. 주민생활과 소비- 주민생활 수준- 조선족의 소비행태0. 연변경제의 문제점- 지역 및 계층 간 부의 불균형- 관광 및 소비향락 산업 편향성- 한국 의존 심화3. 사회문화적 측면0. 인구 문제0. 사회적 일탈 문제0. 민족교육 문제0. 정체성 문제0. 가치관 문제
29    [12] 함께 한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댓글:  조회:4431  추천:49  2008-10-14
조선족동포에 고함 12함께 한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지난 8월 28일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흑인 최초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수락연설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새삼 역사는 꿈꾸는 자의 편임을 실감했습니다. 오바마의 후보지명에 열광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스케치한 한 기자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오바마 상원의원이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하는 순간 덴버 인베스코 미식축구경기장은 터져 나오는 환호 속에 검은 눈물이 흘렀다.” 8만여 명의 청중 가운데는 백인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장에 검은 눈물이 흘렀다고 표현한 것은 흑인 대통령후보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에 흑인들이 느꼈을 진한 감동을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바마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은 실로 엄청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흑인들이 염원해온 차별없는 세상이 이루어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바로 45년 전 이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들의 가슴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고 그 꿈이 드디어 실현됐다는 사실이 이 역사적 사건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인 킹 목사가 워싱턴광장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연설을 들으며 가슴속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4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오바마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움으로써 그 꿈을 현실로 승화시켰습니다.    흑인들이 꿈을 이루어낸 과정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함께 꿈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일장춘몽과 같이 허망하지만 꿈꾸는 사람이 많을수록 현실이 될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는 것이지요. 구성원 모두가 함께 꿈꾸기 위해서는 그 꿈이 대의(大義)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가르쳐줍니다. 뭇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그 대열에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그러한 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킹 목사와 같이 구성원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역사는 계속된다는 믿음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난 역사가 고단하였고 당장의 삶이 버거울지라도 한민족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한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미래를 꿈꾸어야 합니다. 비록 당장은 이념이 다르고 감정이 상해서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아픈 현실을 여하히 극복하여 한민족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한민족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어쩌면 눈앞의 장벽이 너무 높아 그 꿈이 부질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의 꿈이 흑인 모두의 꿈이 된지 45년이 지나 현실이 된 것처럼 우리가 지금부터 함께 그 꿈을 꾸기 시작한다면 이 또한 멀지 않아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킹 목사와 같이 한민족 모두를 하나로 묶어 한민족공동체 건설의 꿈을 꾸도록 인도할 존경받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체념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지금부터라도 그런 지도자를 염원하며 그가 나타날 때까지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 ‘지도자 후보’가 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지도자가 해야 할 역할을 다하는 겁니다. 혹시 ‘내가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어’ 하고 겸연쩍어 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조선족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가 되어 함께 한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28    중국 조선족에게 연변의 의미와 가치(곽승지) 댓글:  조회:4039  추천:109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중국 조선족에게 연변의 의미와 가치 곽승지 정치학박사/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1. 지금 왜 연변을 말 하는가; 변화의 시대를 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저절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시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변화의 양과 질이 늘 같지는 않다. 변화를 초래하는 원인에 따라 그리고 그 힘의 크기에 따라 변화의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세상에서의 변화는 더욱 그렇다. 사람은 주체적 능동적으로 변화를 도모할 수 있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의 크기와 강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을 변화의 시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변화의 크기와 속도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고 말한다. 핵심적인 요인으로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곤 한다. 하나는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탈냉전체제에 의한 정치경제적 소통의 시대가 도래 한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적 측면에서 정보통신 및 교통의 발달이 소통의 시대를 추동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요인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오늘날의 변화하는 세상을 견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변화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을 가늠하는 일이다. 변화의 크기는 물론 그 결과 또한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변화의 방향을 미리 가늠하여 변화의 길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변화가 개인의 삶은 물론 공동체와 개별국가 그리고 지역국가 간 관계에 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변화의 내용과 속도를 감안할 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자칫 소홀히 할 경우 시대의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당연히 조선족과 연변지역도 그러한 변화의 대상이다. 조선족사회와 연변지역의 지문화적 및 지정학적 상황을 감안하면 조선족과 연변지역은 단순한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 핵심적 변화 대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변화가 미치는 파급도 훨씬 클 것이다. 조선족동포들도 이미 그러한 변화를 감지하며 주목해 왔다. 조선족사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관심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조선족사회와 연변지역에 몰아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은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실로 엄청난 것이다. 변화의 물결이 지니고 있는 위력이 큰 만큼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냉정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리고 다가올 변화의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 그 물결이 미칠 파급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따지는 일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어느 경우이든 구성원들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와 연변지역이 당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조선족동포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것도 그러한 작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 연변을 연변에 한정할 것인가; 열린 연변을 지향하다    연변의 의미는 복합적이다. 지역적 개념으로서 연변은 중국 동북지역의 연길을 중심으로 한 변경지역을 일컫는다. 규범적으로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줄여서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연변을 단순히 사전적 규범적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그 의미를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연변이라는 말이 생성되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시대적 상황적 필요에 의해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한정할 필요에 따라 연변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지고 지역적 범주가 설정되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조선족동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가 짙게 깔려있다.   따라서 연변이라는 명칭이 지닌 함축적 의미를 헤아릴 때 연변은 특정지역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뿐 아니라 중국 내에 조선족동포들이 집거해 살고 있는 지역을 보편적으로 가리키는 보통명사로도 해석해야 한다. 이럴 경우 연변의 의미는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기 이전 조선족동포들이 주로 살았던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 산재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연변의 의미를 광의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장하는 것은 협의의 의미에서의 연변, 즉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비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동포들의 삶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미칠 것이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연변이 하나의 독립되고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조선족동포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며 그들의 삶을 이끌어온 핵심지역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타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는 점에서 생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경우 연변의 범주는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정할 경우 명백해 진다. 적어도 연변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족동포들이 지금과 같이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을 구현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명백하다.   오늘날 조선족동포들이 거주지를 중국전역으로 확대해 가는 상황에서 민족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지리적 행정적 거점으로서 연변의 가치는 더욱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 조선족동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가는 한 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는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연변이 그 역할을 더욱 충실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연변이 조선족자치주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족사회 내에서 연변과 비연변지역으로 갈리어 지역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을 드러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연변지역 조선족동포들은 동포 집거지 출신으로서 산재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반면 비연변지역 동포들은 연변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곳에 사는 동포들의 역할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연변을 독립되고 단절된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으로서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소통의 축으로 인식하려는 것은 장차 동북아시아공동체가 형성될 때 연변지역이 한반도와 중국은 물론 주변국가들을 잇는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도 맞닿아 있다. 연변은 당장은 조선족동포들 간의 소통의 공간으로 기능하지만 미래에는 그 지정학적 지문화적 가치로 인해 동북아시아공동체를 만들어갈 미래의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변을 사전적 규범적 의미로 한정하여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연변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 무리일지라도 조선족동포들 모두가 연변에 대한 의미를 되새긴다면 그 의미를 확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연변과 조선족은 결코 분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분리해서도 안 된다. 3. 연변의 미래가치를 직시하자; 연변이 희망이다   0. 연변은 역사의 땅이다 (역사성)연변은 역사의 땅이다. 연변은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쳐서는 안 되는 우리 민족사의 우여곡절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고중세사는 물론 근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연변은 특히 우리 선조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온 삶의 무대였다.여기서 역사를 말하는 것은 역사논쟁에 불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다. 연변이 조선족동포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당위성을 지니고 있음과 함께 조선족동포들이 있어 그 역사성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연변의 역사만으로도 조선족동포들이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만일 연변에 조선족동포들이 살지 않는다면 한민족과 결부된 연변의 역사는 단절되어 그야말로 역사로서만 의미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동포들이 연변에 살고 있음으로 해서 연변의 역사는 한민족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그런 역사로 되살아나고 있다. 0. 연변은 한민족 교류의 장이다 (현재성)연변에는 4부류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 북한 국적의 조교, 남한 국적의 한국민,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제3국 국적의 재외한인 등이 그들이다. 조선족을 제외하면 한국민 2만여 명, 제3국 국적의 재외한인 수백 명 등 그 숫자는 미미하지만 그들이 연변을 무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한민족이 지난 세기에 겪은 아픔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이들 중에는 20세기에 한민족이 겪은 질곡의 역사가 남긴 상흔 --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남북분단 등 -- 을 여하히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 돌파구로서 연변을 찾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연변이 한민족의 아픔을 보듬고 또 극복하기 위한 치유의 장소인 셈이다. 연변에 이와 같이 다양한 한민족이 모여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은 연변의 역사성과 함께 북한과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철조망으로 단절되어 있지만 연변지역은 제한적이지만 북한과의 직간접적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변이 북한으로 통하는 우회로로 기능하고 있는 이유이다.이에 따라 연변은 남한과 북한 간의 소통을 위한 교류와 협력의 장소로 되고 있다. 이산가족의 상봉이나 학술교류, 그리고 대북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남북한 교류와 협력이 연변을 무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연변은 또한 북한으로 가는 통로로서 기능한다. 2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데 하나는 대북교역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폐쇄사회인 북한에 새로운 문물과 정보를 전파하는 대북 정보 및 문화 전달의 측면이다. 남한이 휴전선에 가로막혀 북한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연변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연변이 한민족교류의 장으로서, 북한과의 소통을 위한 통로로 역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조선족동포들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특별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자부심의 원천이 연변의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0. 연변은 미래의 땅이다 (미래성)연변은 역사의 땅일 뿐 아니라 미래의 땅이다. 연변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기회의 땅이다. 당장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저발전의 낙후된 모습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지만 오히려 온갖 오염으로부터 벗어난 청정지역으로서 훗날을 기약하고 있다. 연변은 또한 근현대 동북아시아 갈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갈등의 역사를 치유할 희망을 잉태하고 있다.연변이 동북아시아지역의 갈등의 역사를 치유할 미래의 땅임은 21세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헤아릴 수 있다.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를 마감하며 인류는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 왔다. 인류가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탈냉전체제에 따른 소통의 역사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고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라 지구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유무상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이를 위한 한 방법으로 지역 내 국가들이 연대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동북아시아지역의 역내 사정으로 인해 아직 그러한 움직임은 제한적이지만 경제공동체 안보공동체 형식으로 학자들 간에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지향하는 모델은 유럽공동체이다.이 같은 흐름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비록 아직 논의단계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여건이 성숙되면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의 움직임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이 구체활 될 경우 연변은 가장 각광을 받을 곳이다. 연변은 중국의 동북지역에 위치한 변방이지만 동북아시아 전체를 놓고 보면 중심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과 관련해 연변이 주목받는 이유 중에는 이곳에 조선족동포들이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족동포들은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추동할 중심국가인 한국 및 중국과 관계를 맺고 있어 양국이 절충점을 만들어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족동포들이 연변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것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도 중요하다.동북아시아지역에서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갈등으로 점철된 이 지역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꿈같은 일이다. 그러나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역내 국가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꿈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다. 조선족동포들을 포함한 한민족 모두를 위해,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역내 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을 위해 반드시 그 꿈을 이루어야 한다.연변의 지정학적 가치와 조선족동포들의 지문화적 가치를 감안하면, 연변지역과 조선족동포들은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작은 열쇠 하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0. 연변은 변방이 아닌 중심이다 (지정학적 가치)연변의 지정학적 가치는 이미 근현대 이 지역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을 통해 입증됐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단적인 예이다. 영국의 지정학자인 핼퍼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는 유럽중심의 지정학적 가치를 평가하면서 이른바 ‘심장지역(heartland)’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서 그는 “동부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지역을 지배하고 심장지역을 지배하는 자가 월드 아일랜드(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며 월드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의 핵심은 동부유럽이다. 맥킨더의 심장지역 이론을 동북아시아에 원용하면 연변지역이 동부유럽에 해당한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연변지역은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핵심인 것이다.맥킨더가 활약했던 19세기말의 지정학과 오늘날의 지정학은 확연히 다르다. 오늘날의 지정학이 더 이상 국가 중심적이 아니라는 것에서 달라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과거의 지정학이 국가전략에 의한 단절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주변과의 소통을 도모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연변을 맥킨더의 동부유럽에 비유한 것은 단지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연변지역은 단절의 역사에서는 갈등의 장이였지만 소통의 역사에서는 화합과 교류의 장이 될 것이다. 연변은 한반도와 접해 있으며 러시아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동해로 진출할 경우 일본과도 마주보고 있다. 통상 동북아시아공동체 대상국가로 남북한과 러시아 일본 몽골 그리고 중국을 말하는데 연변은 이들 국가 모두와의 지리적 접근성을 확보하고 있다.중심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모이는 곳이다. 연변은 바로 그러한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그래서 20년, 혹은 30년 후쯤 동북아시아공동체가 구체화될 경우 연변이 공동체의 수도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른다. 연변은 동북아시아 미래를 위한 희망이다.      4.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20세기 후반을 지배한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세계질서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탈냉전적 상황은 그 폭발성만큼이나 국제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절의 시대에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점이다.소통의 시대는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추동하고 있다. 이른바 탈영역화와 재영역화가 그것이다. 즉 구질서 하에서 획정됐던 영역들이 신질서 속에서 새로운 관계맺기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변 역시 탈영역화의 도정에 있다. 냉전체제하에서 철저하게 사회주의진영 내의 중국영역에 갇혀 있던 연변이 탈냉전상황에 따라 한중수교 등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면서 다른 세상과의 관계맺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연변에서의 탈영역화는 아직은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에 한정되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인들이 연변을 오가고 조선족동포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을 찾는 것도 탈영역화 과정의 하나이다. 현재로서는 연변에서의 재영역화 과정 역시 경제적 문화적 영역에 한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조선족동포들이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조선족동포들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현실적 정치적 정체성을, 한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이중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바이다. 조선족동포들의 재영역화는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변지역에서 21세기의 새로운 화두인 소통의 가치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연변지역이 단절되지 않고 지정학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사통팔달의 요충지로 거듭날 수 있어야만 연변의 미래가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변의 미래를 위해서는 또한 조선족동포들이 연변의 가치를 인정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그 가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야 희망이 있을 것이다.  (끝) 
27    [11] 그래도 한민족의 역사는 계속 됩니다 댓글:  조회:2644  추천:69  2008-10-06
 조선족동포에 고함 11그래도 한민족의 역사는 계속 됩니다                                          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전 세계 여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스페인이 낳은 전설적인 가수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즈음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그는 지금도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훌리오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특히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별거를 앞둔 부부가 그의 노래를 듣고 다시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세계적인 가수답게 그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 선 채로 죽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계적인 가수가 되기까지 겪었던 과정을 돌아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성공사례들에서 고통과 불행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감동을 접할 수 있는 것처럼 훌리오의 성공 뒤에도 그런 감동적인 장면들이 겹쳐져 있습니다. 훌리오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삶에 대한 그의 열정과 함께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는 아버지의 격려였습니다. 아들이 겪는 아픔을 지켜보면서 현재의 처지가 어떻든 간에 인생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며 그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 또한 자신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것이지요. 아버지의 격려를 되새기며 그는 하반신 마비의 불행을 딛고 일어서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la vida sigue igual)’를 부르며 가수로 데뷔해 명성을 쌓았습니다.     민족의 역사 역시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삶이 모여 민족의 역사가 이루어지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 민족의 역사는 구성원 개개인이 민족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은 미래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개인의 삶이 그렇듯 민족의 역사 역시 그 운명이 현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면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마음가짐 또한 달라지게 될 테니까요.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갈등을 접하다보면, 한민족의 역사가 미래에도 창창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는 사람이든 중국국민으로서 조선족으로 불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든 한민족이라면 한민족의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도를 넘어 한민족의 존엄성과 위상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한민족의 역사가 찬란하게 빛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족 당신은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 때문에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달갑지 않게 느낀 적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역사가 창창하게 지속될 뿐 아니라 당신이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한민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한민족의 일원이 된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현재와 미래의 삶을 가꾸어가야 합니다. 설령 고국과 고국의 동포들이 당신의 삶을 힘들게 하더라도 스스로 이겨내며 미래를 기약해야 합니다. 현실이 야속하다고 한민족의 일원임을 거부하게 되면 그 업보가 당신의 후대에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고단해도 조선족 당신의 운명은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계속됩니다. 
26    [10] 경계를 넘어 소통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댓글:  조회:2580  추천:78  2008-09-29
조선족동포에 고함 10경계를 넘어 소통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7월 중순 장백현을 경유해 다섯 번째로 백두산(장백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4개의 노선{동쪽(북한), 남서북쪽(중국)}을 모두 다녀왔습니다. 2005년 1월 1일에는 천지 한가운데서 새해를 맞았으니 저로서는 백두산을 보았다고 제법 호기를 부릴 수 있을 것도 갖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백두산에 대한 목마름은 가시지 않습니다. 백두산에 대한 민족의 신화 때문만은 아닙니다. 소통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에 겪었던 아픈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여전히 갈등과 반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백두산에 덧씌워졌기 때문일 겁니다.      이른바 남파로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사실상 경계가 무의미했습니다. 압록강이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며 협곡을 이룬 지역은 강이 자연스레 경계로 기능하지만 강이 발원한 위쪽부터 백두산 천지까지 이르는 곳은 딱히 눈으로 경계를 확인하기 어려운 형세였습니다. 그래서 자동차가 닿은 주차장부터 천지를 바라볼 수 있는 정상까지 이르는, 도보로 가야하는 200여 미터 구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경계가 불확실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곳에는 북한과 중국의 영토를 구분하기 위해 인위적인 표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서 경계를 지워버린 사람에게 인위적 경계는 그다지 큰 장벽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넘어서 극복해야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남파로 오르는 백두산 등정은 두 가지 색다른 묘미를 더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북한 땅 밟기와 경계 허물기가 그것 입니다.    중국을 자주 찾는 이유 중에는 북한 땅을 지척에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바라보고 있어도 북한과 소통하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남한 곳곳에도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어 휴전선 너머로 북한을 바라볼 수 있지만 왠지 거북스럽습니다. 경계가 너무 확고해 그것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답답함이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로 북한을 바라볼 때는 사뭇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경계가 흐르는 물처럼 가벼워 보입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고 말을 걸면 대답할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손을 흔들면 그들도 손들어 답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 단절의 시대를 넘어 21세기의 새로운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세계화에 힘입어 세상은 이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반도와 한민족은 아직도 그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한은 여전히 이념의 굴레 속에서 대립하고 있고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은 지난 세기에 만들어진 슬픈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반목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경계를 허물고 한민족 모두가 힘을 합해 새로운 소통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그날은 언제일까요.    조선족 당신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지워져 있습니다. 북한과의 소통을 중재하는 것과 한국사회와의 소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조선족 당신의 열린 마음이 북한의 변화를 촉진시키고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 간의 소통을 통한 좋은 관계맺기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조선족 당신은 한민족 소통의 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25    [4-1] 조선족사회 정치현실 진단 댓글:  조회:3549  추천:94  2008-09-25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나 역시 그런 길을 걸었다오, 친구. 나 역시 그대와 똑같은 아픔을 겪었어요. 하지만 일이 벌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모든 난관에는 교훈이 있어요. 과거를 후회하지 말아요. 오히려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이세요.- 로빈 샤르마의 <나를 발견한 하룻밤 인생수업> 중에서 - 1. 정치적 측면 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후진타오체제가 정착되면서 중국에서의 정치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2007년 10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전대)는 이러한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비록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정세변화를 반영하여 중국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정치민주화를 위한 조용한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북경에서 17전대를 지켜본 서울대 정재호 교수는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이번 17전대가 16전대에 비해 당내민주화에 대해 점진적이나마 지속적인 노력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그는 중국공산당내에 일정한 상호견제의 민주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17전대는 사회적 변화와 인민의 욕구를 당의 정치이념과 제도에 적절하게 용해시킴으로써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정치사회적 변화를 수용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재호교수가 관측한 것처럼 이번 17전대에서 정치적 민주화와 관련한 새로운 시도가 추진됐음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17전대 이후 이러한 요구가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민주화 목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온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17전대에서 조화사회를 강조하며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중화권 언론의 2007년 11월 22일자 보도이다. 안후이(安徽) 성 정협 상무위원인 왕자오쥔(汪兆鈞) 안후이 궈바오(國寶)그룹 이사장이 한 달 전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국무원총리에게 보낸 민주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공개한 것이다. (... ... ...)공개서한은 획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식 사회주의 기치아래 국가적 변혁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은 경제발전을 기본적인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개혁개방 정책과 이른바 ‘4항 견지노선’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개혁개방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체제인 중국에서 적용하기 위한 정책이라면 4항 견지노선은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만 체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적어도 여기서 제시하는 네 가지 사항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변화의 한계선인 셈이다. 지켜야 할 네 가지 준칙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독재, 인민민주주의, 그리고 공산당영도이다.사회주의체제의 특징을 간략히 말하자면 정치적 측면에서 일당독재 체제를, 경제적 측면에서 사적소유의 부인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중국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적소유가 광범하게 허용되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칭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체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공산당영도의 견지는 중국이 스스로를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로 칭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 ... ... ... ...)중국 중앙무대에서의 점진적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정치에서 민주화를 언급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 공산당 영도를 견지하고 있는 한 중앙정치에서의 정치적 민주화가 당장 지방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방에서의 정치적 민주화는 4항 견지노선의 유지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정치민주화 역시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논의 가능할 것이다.   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사회주의국가에서 일반주민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중국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일부 논객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발언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중국의 정치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지방의 정치환경은 중앙무대와 다르다. 지방에서는 상대적으로 중앙무대와 같은 융통성이 훨씬 더 제한적이다. 이른바 ‘공산당영도 견지’의 원칙이 보다 엄격하게 지켜질 뿐 아니라 그 역할도 공산당이 중앙에서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변의 조선족동포 역시 사회주의 중국의 국민으로서 이러한 정치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 즉 정상적인 정치적 메카니즘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섣불리 제기할 수 없다.더욱이 연변은 소수민족 자치주라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한반도와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조선족동포들의 정치의식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미국의 행태주의 정치학자들인 가브리엘 알몬드(Gabriel Almond)와 시드니 버바(Sydney Verba)의 분류에 따라 중국의 정치문화를 구분하면 중국은 아직 신민형 정치문화의 초기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정치 메카니즘상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연변 조선족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국민으로서 조선족동포들의 긍정적 국가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족동포들의 대다수는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동포들 스스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다수의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정치를 비교적 잘하고 있고 이에 따라 당장 고단할지라도 향후 중국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조선족 동포들의 이러한 국가관은 결국 한국 및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 및 관계맺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모국으로서 한국에 대한 동경이 크면 중국정부에 대한 신뢰감이 낮아질 것이고 반대로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기대치가 낮아지면 상대적으로 중국 국민으로서의 귀속감이 강화될 것이다. 현재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에 대한 동경도 한국에서의 기대치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중국국민으로서의 귀속감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중국국적을 포기하는 것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중국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장차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이들의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이다.  0. 조선족자치주의 미래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중국 특유의 정책 중의 하나이다. 소수민족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이들이 중국국민의 일원으로 중국발전에 기여케 하는 이 정책은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족동포들과 관련해서도 같은 평가가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족동포들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국가관을 지니고 있는 데서 입증된다.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소수민족정책도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정치경제적 환경변화로 인한 개개인의 사회적 욕구가 강화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이 소수민족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러한 변화가 기존의 소수민족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중국 소수민족정책의 핵심은 각 민족들이 고유의 문화와 풍습을 유지하면서 집단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지역을 설정한 제한적 범위에서의 자치지역 제도이다. 조선족동포의 경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 그리고 각 지역의 조선족 집거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족 자치향이 있다. 이와 함께 조선족과 만족을 묶어 조선족 만족 연합 자치 향 및 진도 설치되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관련해 최근 조선족동포들에게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될 당시 조선족 비율은 63퍼센트를 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호구조사 결과로 37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족 비율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낮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가 2050년에는 50만 명으로, 그리고 21세기 말이 되면 불과 19만 명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조선족 인구비율이 줄어드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족 스스로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족의 연변으로의 유입문제이다. 조선족 자체의 문제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족동포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과 관련된다. 중국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의 일환으로 산아제한정책을 펴면서도 소수민족은 두 명의 자녀를 둘 수 있도록 배려해 왔다. 그러나 조선족 동포들은 경제사회적 이유를 들어 대부분 한 명의 자녀만 두고 있다. 조선족여성들의 출산율이 한족보다 낮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둘째,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등지로 나가 결혼하는 국외혼인이 증가함에 따라 가임여성이 줄고 있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이후 대체로 연평균 2000여명의 가임적령 조선족 여성이 중국을 떠난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셋째, 새로운 직업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는 점이다. 물론 한국 등지로의 해외이주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포함된다.한족을 비롯한 비조선족들의 연변 이주는 조선족동포들의 경우와는 상반된 현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경우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 남방지역의 거대자본이 아직 저발전된 연변지역을 새로운 개발 대상지로 인식해 투자를 늘리고 있는 점이다. 연길시내에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고층빌딩들은 대부분 남방지역의 자본에 의해 건설되고 있다. 자본이 가는 곳에는 사람이 따라가게 마련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족동포들이 빠져나간 연변의 빈공간을 특별한 경제적 기회를 잡지 못한 한족들이 메우고 있는 점이다. 예컨대 연변 농촌지역에는 조선족동포들이 농사짓다 빠져 나가 버려진 땅들이 많이 있는데 한족들이 이 땅을 헐값에 사들여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제는 조선족 집거마을에서도 한족세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미래의 변화를 예시하는 듯한 정책들이 제시되어 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백두산지역의 관리를 자치주로부터 분리한 것 등이 구체적 사례이다. 연길과 용정 도문시를 묶어 이른바 연용도라는 광역도시를 세우려는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 역시 자치주를 새로운 광역도시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례 제1장 2조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관할 구역 내의 조선족 인민이 구역 자치를 실행하는 것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치주 조례에 자치주 성립요건으로서 조선족 비율이 얼마여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그 비중이 현저히 낮을 경우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자치주의 존립문제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주:일부 단락은 (...)로 삭제처리하였습니다. 저자와 네티즌 여러분의  양해를 바람니다.-편집자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글싣는 순서 1. 정치적 측면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0. 조선족자치주의 미래2. 경제적 측면0. 연변경제 현실- 개혁개방과 연변- 산업별 동향- 연변경제와 한국- 연변경제의 미래0. 주민생활과 소비- 주민생활 수준- 조선족의 소비행태0. 연변경제의 문제점- 지역 및 계층 간 부의 불균형- 관광 및 소비향락 산업 편향성- 한국 의존 심화3. 사회문화적 측면0. 인구 문제0. 사회적 일탈 문제0. 민족교육 문제0. 정체성 문제0. 가치관 문제
24    [9] 더불어 살기 위해 서로에게 길들여져야 합니다 댓글:  조회:2607  추천:69  2008-09-22
 조선족동포에 고함 9더불어 살기 위해 서로에게 길들여져야 합니다                                          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세상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 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조차 입장을 달리하며 때로 다투는 것도 이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의 생각을 존중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 생각을 존중하는 자세야 말로 복잡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미워하고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데도 뼈를 깎는 아픔을 견뎌내야만 하는데 하물며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마음속에 누군가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사람이라면, 타인을 이해하고 또 사랑하기는 그만큼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은 채 이룰 수 있는 선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미움과 증오의 절반 이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오해를 줄일 수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더 살만해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해를 줄일 수 있을까요. 소설 ‘어린왕자’의 작가 생떽쥐빼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지기’를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참는 것이 중요해.... 너는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이란 때때로 오해의 원인이 될 수도 있거든.... 너에게 길들여졌고 행복해. 날 길들인 게 너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서로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 나에게 네가, 너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래. 세상의 단 하나 뿐인 그런 사람....” 상대방에게 익숙해지면 그만큼 오해할 일이 줄어든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볼 때 옳은 말입니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와 손짓 하나마저 헤아릴 수 있도록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면 너와 나의 관계는 이미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날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관계를 살펴보면 무지와 오해로부터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증오하는 경우를 흔히 접하게 됩니다. 두 사회 간의 관계맺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누구를 탓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잘못의 원인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탓하기에 앞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먼저 반성하고 문제를 풀어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조선족 당신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국사회에 길들여지고 또 한국사회를 길들임으로써 한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앞장서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23    [3-2-2]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댓글:  조회:3306  추천:85  2008-09-20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 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현재 중국전역의 조선족 총수는 약 193만 여명에 이른다. 이를 연고별로 나누면 북한지역 출신이 전체의 50%, 남한지역 출신이 30% 정도이다. 전체 조선족의 절반 가까운 사람이 살고 있는 연변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북한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과 가까운 연변지역에 북한지역에 연고를 가진 사람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지에는 상대적으로 남한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조선족은 수적으로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12번째로 많다. 또한 배후에 남한과 북한이라는 민족적 배후국가를 두고 있다. 배후국가가 있는 소수민족은 몽골족과 신강위구르족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동포들 가운데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중국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조선족은 남한과 북한을 이어주는 매개자이다. 이는 남북통일의 중개자인 동시에 통일이후 문화융합자로 역할 할 것임을 의미한다.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변은 남한과 북한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중수교 이전 조선족동포들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경도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중립적 위치에서 남북한을 이어줄 수 있게 됐다.조선족은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차단된 북한사회에 새로운 정보와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북한변화의 촉매자이다. 북한이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고 있지만 자체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북한 스스로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족동포들과 북한사람들의 왕래는 북한이 외부세계와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북한도 이러한 문제를 의식해 최근 중국과의 영사협정을 맺어 북중국경의 출입을 제한하려하고 있다. 또한 조선족사회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이미 개혁개방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북한주민들의 문화적 충격을 줄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의 중국진출을 돕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중국 연해도시에는 많은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는데 한국과 중국 간의 지리적 접근성이나 같은 동양문화권에 있다는 문화적 동질성 등의 이유도 있지만 보다 큰 이유는 조선족동포들의 조력 덕분이다. 그들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언어적 소통을 원만히 하도록 도와준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글싣는 순서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자연지리적 환경- 사회문화적 환경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북․중 간 국경조약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0. 한민족의 연변이주-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북한변화의 촉매자- 남북관계의 매개자- 한중협력의 중재자-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22    [8] 다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댓글:  조회:2396  추천:85  2008-09-15
조선족동포에 고함 8다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한민족에게 있어서 민족은 하나의 신화와도 같습니다. 서구에 민족국가가 형성되기 훨씬 전에 민족통일을 이룸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단일민족국가의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 주된 이유일 겁니다.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20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들 수 있습니다. 외세의 침략을 받아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그도 부족해 해방과 더불어 민족분단을 겪어야 했던 슬픈 역사가 우리로 하여금 민족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으니까요. 말하자면, 단일민족국가의 오랜 전통에 20세기에 겪은 민족적 아픔이 더해지면서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민족이 신화와 같이 구조화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중수교 직후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사회와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작하던 때로 돌아가 보면 우리들이 민족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서로를 그리워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조선족동포들을 반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포들이 모국을 찾으며 가져온 약재들을 거리에 내놓고 팔라치면 약효는 아랑곳 않은 채 동포들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에 앞 다투어 물건을 사곤 했습니다. 40년 이상의 시간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민족이라는 유대감이 우리로 하여금 더불어 살아가도록 인도했던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마음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사람들은 동포들을 대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동포들은 한국사람들의 냉대에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민족이라는 감성은 점점 사라지고 현실적 이해관계를 따져야 하는 이성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적어도 이 부분만을 떼어놓고 보면 한민족 특유의 민족에 대한 신화는 이미 깨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구성원들이 민족적 유대감을 갖지 못한 채 형이하학적인 경제활동을 위한 대상으로만 서로를 대한다면 더 이상 같은 민족으로 부르는 것이 무의미할 테니까요.    여기까지만 말해도 울화가 치미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관계맺기가 뒤틀리면서 마음이 상해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조선족동포들에게 민족이라는 말이 더 이상 마음에 와 닿지 않을 테니까요. 새로운 관계맺기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마음이 상한 동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민족을 들먹이며 함께 한민족의 미래를 열어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이 21세기의 새로운 역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한민족이 다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민족을 넘어서자고 말입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한다면 다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조선족 당신은 중국국민인 동시에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때 미래 또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설령 서운한 일들이 많더라도 한민족임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이 민족에만 머물러 있는 다면 당신이 겪어야 하는 아픔도 그만큼 더 커지게 됩니다. 세상은 이미 민족의 범주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현실을 뛰어넘어야만 합니다.
21    [3-2-1] 한민족의 연변이주 댓글:  조회:3203  추천:79  2008-09-15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 0. 한민족의 연변이주 . 조선족 명칭의 유래와 현재적 의미조선족은 오늘날 중국국민으로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을 약칭하여 선족(鮮族)으로도 부른다. 그러니까 조선족이란 명칭은 한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히 중국의 국가정책을 반영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1945년 일제가 항복한 이후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민족의 지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정식화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람’ 또는 ‘조선에서 온 사람’ 등의 뜻으로서 조선인 등으로 불리던 것을 다민족사회인 중국사회가 이들을 중국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수용함에 따라 하나의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조선인이 중국 내의 여타 민족들과 동등한 정치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회 내부는 물론 주변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과정을 거쳐 조선족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이 지역 내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수십 년 간 일제로부터 억압받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조선인들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역내 질서 속에서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겪었을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들에게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주체는 중국공산당이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인 1946년 무렵부터 그 구체적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일제가 항복하고 빠져나간 연변지역은 중국의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이 맞서 싸우고 있었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러시아가 세력을 뻗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이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여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자리메김하기 위한 구체적 움직임은 1946년 12월 열린 중국공산당 길림성위 공작위원회 회의에서 였다.(임계순, 2003) 동북민주연합군 부사령관 겸 길림성주석 주보중이 “중국 내의 여러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모택동의 어록을 언급하는 가운데 조선인이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임을 강조하며 조선인의 이중국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즉 조선인은 조선의 백성이지만 또한 중국 내에 살고 있음으로 여타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이들과 같이 국민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이 중국 공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향유할 수 있고 나아가서 중국내전에 참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외적의 침략을 당할 때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조선 공민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8년 12월 중국공산당 연변지구 위원회는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승인하고 이들을 중국국민의 일원으로 선포했다.그러나 조선인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승인하여 중국국민으로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나서야 구체화됐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정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자 조선인들의 신분문제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를 반영하듯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50년 12월 6일 “중국 동북 경내의 조선 민족” 제하의 논설을 통해 “조선인민은 중국 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1952년 9월 연변지역에 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됐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구체화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황유복, 2002) 그러나 조선족의 법적지위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957년에 이르러서다. 산해관(山海館)을 기준으로 이북지역에 살던 사람은 조선족으로서 중국국민으로, 이남지역에 살던 사람은 조교라는 명칭으로 북한공민으로서 북한국적을 부여한 것이다. 산해관 이남의 조선인에게 북한국적을 부여한 것은 냉전체제하에서 중국과 한국이 적대관계가 있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조선족이라는 명칭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국가들, 즉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민족을 지칭해 고려인으로 부르는 것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자이니찌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다르지만 이러한 명칭은 오늘날 모두 보통명사화 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민족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역정과 현재의 위상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한민족이란 보편적 명칭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20세기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다.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러한 단어들은 한국사회에서 적지 않은 경우 차별화의 기제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각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명칭에 불필요한 감정을 개입시키기보다 그 연원을 살펴 객관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선족동포들은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 광복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만주국이 1940년에 행한 한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약 1백45만 명이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해 보면 광복 무렵 이 지역의 조선인은 216만 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 2천5백만 명의 10%에 육박하는 수치이다.(동북아역사재단, 2007) 그러나 일제의 항복 이후 절반 정도가 한반도로 귀국하고 1940년대 말 중국거주 조선인은 대략 1백11만 여명으로 집계됐다.(이재달, 2004)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은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해인 1949년 연변지역의 조선족 인구를 52만9천2백58명으로 적고 있다. 전체 조선인의 절반정도가 연변지역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된 1952년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남은 이유는 다양하다.(임계순, 2003) 확실한 결심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다 기회를 놓친 사람, 토지개혁을 통해 경작지를 재분배하고 조선인을 소수민족으로 우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받아들여 중국에 남는 것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한 사람, 중국에서 이미 생활기반을 갖춘 이주 2세대들과 같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를 못 느낀 사람, 고향에 돌아갔을 때 겪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움과 불확실성 등등.... 결국 오늘날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해방 후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중국공산당이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대우하며 국적을 부여하고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시점은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변하는시간적 기준이 된다. 즉 해방 이전은 중국에서 살지만 조선인으로서 생활했다면 그 이후에는 일정한 과도기를 거쳐 중국의 국민으로서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동포들은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하여 공산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항미원조(抗美援助) 보국위민(保國爲民)’의 기치아래 중공군을 도와 한국전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심화되면서 한국과는 단절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90년대 들어 탈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곧이어 한중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동포들은 다시 한국과 새로운 관계맺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연고가 있는 조선족동포들은 친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고 또 한국국적을 회복하여 한국인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성격이 변하였다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이루어진 조선족의 한국국적 취득은 조선족이 한국인으로 그 성격을 복원할 수 있는 계기였다. .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이해한국사회에서는 한민족이 연변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체로 1860년대로 이해한다. 한반도에 기근이 들어 생활이 어렵게 되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인근에 살던 주민들이 강을 건너 이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 같은 경우가 있었지만 대체로 춘경추귀의 형태로서 정착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이후 이주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1900년대 초까지의 경작을 위한 생계형 이주,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시점부터 1920년대까지 일제의 조선 강점에 분개하며 몸소 저항하기 위한 독립운동 참가형 이주,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일본총독부가 군량미 확보를 위해 추진한 강요에 의한 비자발적 농업이주 등이다.1900년대 초까지의 생계형 이주는 대체로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강을 건너 강 주변지역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연변지역에 북한과 연고가 있는 조선족 동포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1900년대 초부터 1920년대까지의 독립운동 참가형 이주는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대상지도 독립운동이 가능한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연변지역은 물론 압록강 이북의 서간도지역 그리고 연해주 지역과 흑룡강성 지역 일대도 포함된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요에 의한 비자발적 농업이주는 남한지역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으며 연변지역보다 요녕성과 흑룡강성 지역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그러나 조선족사회는 조선족의 연변이주가 시작된 시점을 훨씬 더 소급해 청나라시대로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선족의 역사적 전통을 확장함으로써 한반도와의 연관성 보다 독립성을 강조하려는 측면이 있다.  연변 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는 “2백년 전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동북에 와서 정착한 것이 중국조선족이주사의 주류이다”고 적으면서도 “그러나 중국 후금시기에 벌써 중국 땅에 건너와 산 조선사람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족 이주사를 기본적으로 2백년 전부터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 연원은 후금시대로까지 소급하고 있는 것이다.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글싣는 순서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자연지리적 환경- 사회문화적 환경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북․중 간 국경조약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0. 한민족의 연변이주-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북한변화의 촉매자- 남북관계의 매개자- 한중협력의 중재자-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20    [3-1-3]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댓글:  조회:3397  추천:91  2008-09-15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1. 동북아시아시대의 중심으로서 연변 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연변은 근현대사에서 동북아 역내 국가들이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충돌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중국대륙의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반도국가인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힘의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웅변한다.연변지역에서 주변 국가들 간의 갈등은 20세기 초 러일전쟁 만주사변 그리고 일제의 항복 이후 중국 내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세력간의 국공내전으로 이어진다. 연변지역 갈등의 역사에는 한국과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일본까지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한민족은 특히 이 지역의 역사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해 이곳을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장소로 활용했다. 또한 일본 패망이후 이곳에 자리잡은 한민족들은 중국공산당을 도와 국민당정부와의 내전에 참여해 중국공산정권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것은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이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과 동북아시아에 냉전체제가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소련과 중국은 이 지역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한 베이징 주재 미국기자에 의하면 1973년 소련은 세 차례에 걸쳐 동북지역 침입을 기도했으며 미국이 인공위성 관련 사진을 베이징에 제공하고 구소련에 압력을 가해 이러한 기도를 단념시켰다고 전한다. 소련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홍면기 박사는 “동북지방을 지배함으로써 신강‧몽골‧한반도를 지배하고 일본에 직접적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핵심지대를 장악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예증”으로 설명한다.(홍면기, 2006) 지정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근현대사에서 몇차례 힘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첫 번째는 청나라가 이 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해 무인지대화 했던 시기이다. 17세기부터 19세기 말엽까지로 이 지역은 사실상 청나라와 조선간의 국경지대로 기능했다. 이러한 힘의 공백상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한반도와 중국 산동성 등지에서 한민족과 한족 등이 이주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이후 일제의 노골적인 한반도 침략으로 삶이 고단해지면서 한민족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연변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민족 월경이주자들은 1910년 무렵 십만 명에 이르게 됐는데 이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두 번째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이후 한민족에 대한 치안을 명분으로 이 지역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해 직간접 통치를 한 시기이다. 당시 중국당국은 국력이 쇠하여 변방인 연변지역에까지 통치력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한데다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협약도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했다. 결국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 지역을 점령, 만주국을 수립했다.세 번째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일제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됨에 따라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물론 미국과 소련 등이 지정학적 요충지인 이곳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이미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던 북한과 연변에 자리를 잡은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공산당을 지원해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결국 북한과 연변의 조선족은 20세기 중반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패권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 한민족 인적․물적 교류의 무대연변에는 네 부류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 북한 국적의 조교, 한국 국적의 재외국민,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제3국 국적의 외국국적동포 등이다. 북한국적의 조교는 현재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한국국적의 재외국민 수는 2007년 말 현재 1만 여명에 이른다. 외국국적동포는 수백명정도이다. 연변지역이 한민족 교류의 새로운 무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이와 같이 다양한 한민족이 연변에 모여 살고 있는 것은 연변의 역사성과 함께 북한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철조망으로 단절되어 있어 왕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연변지역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북한과의 직접 소통도 가능하다. 조선족동포나 북한국적자인 조교들은 비교적 간단한 절차만 갖추면 통행이 가능하며 제3국 국적의 외국국적동포들도 일정한 여건만 갖추면 어렵지 않게 통행할 수 있다. 연변은 남한과 북한간의 소통을 위한 교류의 장소가 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남한과 북한  사람이 만나는 데는 많은 제약이 있다. 어떤 유형의 만남이라도 과정과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연변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공간이다. 실제 연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남북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학술교류도 한 예이다. 대체로 연변의 조선족 학자들이 중국측을 대표해 참여하는 남북한과 중국 간의 국제학술회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연변지역은 또한 1990년대 중후반 북한주민들이 기아로 허덕일 때 한국이나 제3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이 북한에 살고 있는 친인척을 만나는 재회의 장소였다. 이들이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자매를 아름아름 수소문하여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나 또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연변지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변은 앞으로도 한민족이 이산의 아픔을 달래는 만남의 무대가 될 것이다.  . 북한으로 가는 통로중국 국적의 조선족은 물론 북한 국적의 조교는 중국과 북한을 왕래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물론 연변에 친인척이 있는 북한주민들도 연변방문이 용이하다. 지리적으로 연변과 가까운 함경남북도와 양강도 지역 주민들은 물론 평양 등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자주 왕래한다. 연변이 북한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인 셈이다.북한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연변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나는 북한의 어려운 경제에 숨통을 열어주는 대북교역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폐쇄사회인 북한에 새로운 문물과 정보를 전파하는 것과 관련된다.이러한 역할을 하는 실질적 담당자는 물론 조선족과 북한국적의 조교들이다. 연변에 연고가 있는 북한사람들이나 두만강을 넘나드는 꽃제비들도 제한적이지만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연변의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최근 중국이 북한과의 교역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족들이 북한과 대규모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지만 북‧중교역에서 조선족과 조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보따리 장사의 수준이지만 연변에 연고가 있는 북한사람들도 직접 교역에 나서기도 한다.     보도에 따르면 2006년 상반기에 연변의 대외무역 총액은 3억6천7백만 달러였는데 이중 대북무역액이 1억2천4백만 달러였다. 연변지역 전체 무역액의 3분의 1이 북한과의 교역인 셈이다.  연변지역에서 북한을 상대로 사업하는 한국사람들도 적지 않다. 현실적으로 한국사람이 직접 북한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조선족동포들과 합작 형태로 이루어진다. 북한의 농수산물을 사들여 연변에서 가공하여 한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이 주된 사업형태이다. 연변지역이 북한으로 통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북한을 도우려는 사람들도 연변에서 활동한다. 한국사람도 있고 또 제3국사람들도 있다. 일부는 아예 북한을 염두에 두고 연변에 들어왔지만 일부는 연변지역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왔다가 북한주민들의 생활상을 접하고 이들을 함께 돕는 사람들도 있다. .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연변은 남으로는 백두산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으로는 러시아 연해주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북한 및 러시아와 맞닿아 있는 경계선의 총길이는 768.5km이며 이중 북한과는 522.5km, 러시아와는 246km이다. 북한과 중국 간의 경계를 이루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총 1,334km에 이른다. 이중 대부분 두만강과 압록강 수계로 이루어져 있고 육계는 불과 45km에 불과하다. 두만강은 중국의 연변과 북한의 함경북도 및 양강도 지방과 연해 있다. 압록강은 중국의 길림성 및 요녕성 지역과 북한의 양강도 평안북도 자강도 지방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압록강 접경지대는 현재의 연변과는 상관이 없지만 과거 서간도지역이다.북한과 중국은 월경협력을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 상에 모두 17개의 출입처(口岸)를 두고 경제문화적 관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중국에서 구안(口岸)은 출입통로, 출입처, 통상구, 교두 등으로도 불리며 세관, 변방부대(출입국 관리), 검역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다. 북한과 중국 간 출입문제는 2001년 체결한 “변경 출입처 설치 및 그 관리제도 협약”에 근거하고 있다. 북중간 출입처는 권하-원정, 사타자-샛별, 도문-남양, 개산둔-삼봉, 삼합-회령, 남평-무산, 고성리-삼장, 쌍목봉-상두봉, 장백-혜산, 임강-중강, 청석-운봉, 집안-만포, 노호초-위원, 태평만-삭주, 단동-신의주(육로), 단동-신의주(철로), 단지항-신의주항 등이다.통계에 따르면 2006년 한해 동안 출입처를 통해 북한을 방문한 중국인은 34만명, 중국을 방문한 북한주민은 12만 명에 이른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나갈 수 있는 출입처가 있다. 이곳은 연변과 러시아 연해주를 이어주는 한편 연변이 최단시간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의 동춘해운이 러시아의 자루비노항과 속초를 오가며 연변의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연변지역은 두만강 하구의 약 15km가 막혀 해상로가 봉쇄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연변지역은 훈춘을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해 왔다. 1860년 베이징 조약이전까지 지금의 연해주 지역은 중국의 관할 하에 있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진한시대 이후 민간에서는 훈춘으로부터 염주(鹽州)-호시네도-일본까지의 항로를 <동북아시아의 비단길>로 불렀다. 그리고 이 노선을 따라 일본으로 34차례, 일본은 중국으로 13차례나 왕래했다.북경조약으로 연해주지역이 러시아영토로 귀속되었지만 중국은 두만강하구를 이용하여 동해상으로 나가는 해상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1886년 이른바 <중-러훈춘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 기선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도록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두만강 입구가 봉쇄된 것은 1938년부터이다. 일본이 연변지역을 강점해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연해주지역의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데 이어 두만강마저 봉쇄한 것이다. 이후 연변지역은 해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잃고 내륙지역으로 고립되게 되었다.(차철구․한수영, 1994)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글싣는 순서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자연지리적 환경- 사회문화적 환경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북․중 간 국경조약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0. 한민족의 연변이주-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북한변화의 촉매자- 남북관계의 매개자- 한중협력의 중재자-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19    [3-1-2]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댓글:  조회:3354  추천:66  2008-09-11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1. 동북아시아시대의 중심으로서 연변 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연변은 냉전체제하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변방에 위치해 주변국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그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연변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재편시기마다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 주변 국가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근현대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연변지역은 19세기 말 이후 주변 국가들 간의 갈등이 충돌하는 각축장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청나라의 봉금조치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로 남아있었지만 불과 수십년이 지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조선과 청나라는 물론 일본과 러시아까지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함으로써 연변의 고단한 역사가 시작됐다.19세기 말에 이르러 주변 국가들이 연변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시기 세계정치가 보여준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즉 연변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를 평가하게 되면서 힘 있는 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관계맺기를 시도한 것이다.근현대사에서 주변 국가들이 연변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세동점의 시대상황 속에서 서양세력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제일 먼저 연변지역에 개입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1860년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지역을 할양받음으로써 이 지역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한 것이다. 부동항을 획득하기 위해 부단히 남진정책을 추진해 온 러시아가 중국이 쇠락해가는 틈을 타 흑룡강 이북 지역에 이어 연해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차지함으로써 현재의 중국과 러시아간 국경을 설정하게 됐다. 러시아는 이후에도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04-5년 러일전쟁도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함으로써 연변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을 양분하는 형태로 변했다.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독점적 위상이 약화되고 대신 일본의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대륙침략을 위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변지역은 주된 전장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부터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 간 내전에서 연변지역은 다시 성패를 좌우하는 격전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 러시아혁명을 통해 새로운 연방국가로 탄생한 소련도 과거 이 지역을 장악하려던 역사를 되새기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항복 직전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전후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 재편에 간여하는 가운데 연변지역을 중국에 넘겨주지 않고 북한에 편입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2007년 6월 포스텍 박선영교수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1948년 7월 10일자 중화민국 외교문서 사본과 지도를 발굴․공개했다. ‘소련이 장차 길림성의 연길을 포함해 목단강․목릉 지역을 조선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제목의 보고서는 “소련대표는 장차 이 지구를 북한영토로 획정하려 한다”며 “이 지역은 현재 우리 영토 내에 있으나 북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는 데다 조선인들이 해당 지역의 지방행정을 주관하고 있어 실제 이 지역이 북한에 합병된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평양협정’을 언급하며 1948년 2월 소련과 북한 및 중국의 공산세력 간에 체결한 이 협정에 따라 “장차 동북지역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획정해 주려한다”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안동(현재의 단동) 길림 간도 3개 자치구를 획정한 지도를 제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소련과 북한 및 중국의 공산세력이 1948년 무렵 연변지역을 한국의 영토 내지 특수관계가 있는 영역으로 인정하는 모종의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동아일보, 2007.6.27) .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19세기 중반까지 간도지역은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따라 주인이 없는 땅으로 남아있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조선 역시 청나라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대체로 순응했다. 그러나 양국정부의 봉금정책에도 불구하고 간도지역에는 조선인들이 진출해 주로 인삼과 사금을 채집하는 한편으로 농사를 지었다. 당시의 농사는 정착단계까지는 가지 않고 봄의 해빙기에 강을 건너 평야를 태우고 파종을 하고, 가을에 수확을 끝내고 돌아오는 이른바 춘경추귀(春耕秋歸)의 화전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0년대 말 자연재해로 인해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가까이에 살던 조선인들이 대거 강을 넘어 봉금지대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71년의 흉작 때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1,000호에 이르렀다. 이 무렵 조선의 지방관은 조선의 간도개척을 사실상 묵인함으로써 간도로의 이주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청나라도 자국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면서 점차 봉금정책은 빛을 발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조정은 1881년 정식으로 봉금령을 해제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조선인을 백두산정계비에서 정한 토문강 아래로 쇄환할 것을 요구한다. 청나라의 이러한 요구는 결국 백두산정계비의 적실성과 관련해 청나라와 조선 간에 국경문제를 재론케 하는 계기가 됐다.그러면 여기서 청나라가 봉금령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청나라가 봉금령을 통해 이 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외형적 이유는 이곳이 청나라 건국신화가 깃든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아래 두만강 발원지 인근의 원지(圓池)가 바로 청나라 건국신화가 깃든 곳이다.대체로 봉금령은 청나라 강희제가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인 1658년경에 내려졌으며 강희제가 왕이 된 후 봉금지대가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봉금지대가 설정됐다는 주장도 있어 봉금령을 발한 시점은 분명치 않다.계명대의 이성환교수는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한 것이 조선을 침략한 직후, 명나라를 공략하기에 앞서 이루어졌다는 시점에 주목한다.(이성환, 2004) 즉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하는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선제공격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봉금지대를 “정치적으로는 양국 간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지대 또는 비무장 중립지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봉금지대가 지속된 것과 관련해서는 조선과 청나라가 공히 백두산을 건국의 상징으로 신성시 한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또는 건국의 상징으로서 두 나라에 의해 오랫동안 소속이 분명치 않은 상태로 방치된 부주지로서 일종의 중립지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당시에는 아직 국경을 선의 개념이 아니라 지대의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무주지 봉금지대가 국경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이 교수에 따르면 봉금지대는 1881년 봉금령이 해제될 때 까지 2백년 여간 청나라와 조선의 경계를 이루는 비무장 중립지대로 역할했다. 오늘날 휴전선을 두고 남북으로 2km를 비무장지대로 두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조선과 청의 갈등“대청국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아 변경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다. 하여 강이 나누어지는 고개 위 돌에 새겨 기록한다 (大淸烏喇總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錄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백두산정계비에 쓰여 있는 글귀이다.백두산정계비는 천지 남동쪽 4km, 해발 2200m 토문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위에 높이 72cm, 아랫부분 너비 55.5cm, 윗부분 너비 25cm의 크기로 세워졌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 9월 28-29일 사이에 사라지고, 그 후 그 자리에는 대신 백두산 등산도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비석의 기록과 탁본, 사진 등이 남아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문제는 없다.백두산정계비는 한중간 영토갈등의 중심에 있지만 이미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간에도 이 정계비 내용을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이 비문의 핵심은 세가지다. 비석을 세운 주체가 청나라의 오라총관 목극등 이라는 점,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한다는 점, 비석이 서있는 자리가 압록강과 토문강이 갈라지는 지점이라는 점 등이다. 즉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정해 이를 표시하기 위해 두 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정계비-토퇴․석퇴-토문강이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이며 그 이남은 조선의 영토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비문에 적혀있는 토문에 대한 해석이다. 경계의 동쪽을 결정짓는 토문에 대해 한국은 정계비 부근에서 발원하여 만주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중국은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재야학계에서는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하면서 한국의 국경선을 토문강-송화강-흑룡강을 경계로 보려고 한다. 이 경우 한국의 영토는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함하게 되는데 연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의해 이미 러시아에 할양됐다. 따라서 베이징조약은 청나라가 조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처리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그 효력이 미치지 못하며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베이징조약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결국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가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도 있다. .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백두산정계비에 대한 갈등은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한 이후 본격화됐다. 봉금지대가 중립지대로서 조선과 청나라간의 사실상의 경계로 기능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곳에 이주한 조선인을 귀환조치하려 하면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청나라가 봉금령 해제와 함께 두만강 북쪽지역에 살던 조선인을 귀환조치 하려는데 반발한 조선인 주민들이 직접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해 목극등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지류임을 밝혔다. 즉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은 토문강이며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방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정계비의 기록은 물론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두만강 이북과 이서지역, 즉 간도라고 불렀던 지역이 조선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이들은 이같은 사실을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보고하고 동시에 조선인의 자격으로 이곳에 거주할 자격을 요청하였다. 조선관리들도 여러 차례 정계비와 분수령을 탐사하여 주민들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조선 조정은 도문강(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남의 중간지대는 조선 영토임을 청나라 조정에 정식으로 통고하고 이의가 있으면 다시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1885년 9월부터 2개월간에 걸쳐 현지를 답사하고 여러 차례 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양국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회담에서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협상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양국은 이 지역에 대해 각기 독자적인 정책을 취하였다.이런 상황에서 1895년 청일전쟁일이 발발하고 청이 패배하여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면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서 청나라에 국경문제를 재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세변화에 따라 양국 간 회담이 개최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조선은 독자적으로 이범윤을 간도에 관리사로 파견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다. 특히 이범윤은 조선인을 압박하는 청나라 관리와 군인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대적인 이민사업을 주도함으로써 간도 영유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간도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간의 영토갈등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미 19세기 말 이후 중국대륙 진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함에 따라 간도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05년 고종을 협박하여 맺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듬해 5월 만주문제협의회를 열어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 북부를 러시아의 세력범위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장춘 이남을 일본의 세력범위로 승인할 것”임을 언급, 간도를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정하고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패권을 시도했다. 일본의 이러한 속내는 1907년 7월 일본과 러시아간의 이른바 러‧일밀약으로 이어졌다. 결국 간도지역의 영유권문제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문제를 넘어 일본의 만주침략을 위한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국경문제를 조사하고 역사 지리 법률적 검토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권은 미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청나라의 간도영유권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이 지역을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일본이 간도지역의 영유권문제에 집착한 이유는 이 지역이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중국 동북지역 침략을 위한 요충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조선통감부는 “만약 간도를 점령하지 못하면 조선의 회령을 방어하지 못하게 될 것” 이라면서 “북부 조선에서 길림으로 진출하려면 우선 간도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고종 명의로 중국인보다 4배나 많은 5만세대의 조선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청나라에 압력을 넣고 이를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1907년 8월 일본군을 용정촌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간도의 영토 소속문제는 미해결된 현안이다” “조선정부의 대외관계는 일본정부에 귀속되었으므로 통감부 관원이 간도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구실로 용정에 조선통감부 간도 임시 파출소를 설치했다.임시 파출소의 주요 업무는 간도 영유권문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간도파출소는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을 답사하는 것은 물론 이와 관련된 사안들을 조사하고 관련된 인사들을 만나는 등 집중적인 조사를 펼쳐 <간도 경계문제에 관한 전말 및 의견>을 펴내고 이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제출했다. 이 조사의 결론은 간도가 조선영토이므로 청나라는 간도를 관할할 수 없고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조선인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나라 관헌이 발행하는 간도에 관한 모든 법령은 통감부 파출소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같은 시기 청나라 역시 일본의 주장에 반발하며 이 지역이 청나라 영토임을 주장했다.이 지역의 영유권과 관련한 일본과 청나라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의외로 쉽게 결말이 났다. 일본은 청나라에 대륙철도 건설권과 주요 지역의 탄광 채굴권 등 6개 안건을 제시하며 이에 대한 편의를 제공한다면 청나라의 간도영유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이를 즉각 받아들였다. 일본이 이 지역의 영유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토를 확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나라는 각각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이에 따라 일본과 청나라 대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만나 간도에 대한 청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협약/ 圖們江中韓界務條款)’을 체결했다. 결국 간도협약은 일본이 대륙침략을 도모하기 위해 연변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이용한 결과인 셈이다. . 북한-중국 간 국경조약일제가 항복하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한반도와 중국을 나누는 경계는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의해 지배되었다. 협약 체결 주체가 없어짐에 따라 실제로는 그 효력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입장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선에서 묵시적 타협을 한 채 구체적인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북한과 중국 간 국경문제가 구체화되어 효력이 발효된 것은 1964년에 이르러서다. 1962년 10월 12일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평양에서 만나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의 검토과정을 거쳐 1964년 3월 20일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공식 발효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된 사실은 1999년 말에 이르러서야 확인됐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총 5조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연합뉴스, 1999.10.20/ 중앙일보, 2000.10.16) 이 조약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 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의 산마루인 26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북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돼 있다.조중변계조약 체결로, 일본과 청나라가 백두산 동남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발 2200m)하고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하여 영토를 획정함에 따라 백두산일대와 천지가 한반도에서 분리됐었으나, 백두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천지 수면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키로 합의, 천지 안에서는 양측이 모두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이 조약은 또 백두산,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섬 및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백두산에는 압록강 최상류지역에서부터 천지주변을 거쳐 모두 21개의 국경표지비를 설치해 놓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총 451개 섬과 사주 가운데 북한이 2백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고 있다. 북한과 중국 간에 국경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백두산주변의 국경문제는 정리됐고 현재까지 현상황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글싣는 순서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자연지리적 환경- 사회문화적 환경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북․중 간 국경조약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0. 한민족의 연변이주-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북한변화의 촉매자- 남북관계의 매개자- 한중협력의 중재자-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18    [7] 조선족 당신의 꿈도 이루어집니다 댓글:  조회:2783  추천:71  2008-09-09
조선족 당신의 꿈도 이루어집니다곽승지 정치학박사 연합뉴스 영문북한팀장   “꿈은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는 이 명백한 진리 앞에 다시 한번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45년여 전 백인들로부터 차별받고 있는 흑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온 몸으로 부르짖던 그 외침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선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지난 6월 7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패배 인정에 따라 사실상 투표에 의해 확정된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작게는 오바마 개인의 꿈이 실현된 것이지만 백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온 흑인들 모두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규범적으로 보면 미국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흑백 인종차별을 종식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편견과 차별이 존재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흑인인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을 때 그 누구도 그가 후보지명을 받을 것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변화와 미국국민들의 성숙함으로 오바마는 당당히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실상부하게 킹 목사가 꿈꾸었던, 흑인과 백인간의 편견 없고 차별 없는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인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흑인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되느냐의 문제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킹 목사가 암살당한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가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의 한 모텔 발코니에서 저격수가 쏜 총탄에 맞아 짧은 생을 마감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그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킹 목사의 꿈은 1963년 8월 백만여 군중이 운집한 워싱턴 광장에서 행한 연설에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의 하나로 불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제목의 이 연설을 통해 킹 목사는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를 향해 흑인도 백인처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외쳤습니다. 킹 목사가 꾸었던 꿈은 이후 모든 흑인들의 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45년이 지난 오늘 오바마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확정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조선족 당신의 꿈도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면 조선족 모두의 꿈도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반드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킹 목사의 경우에서 보듯 조선족 당신이 꾸는 꿈은 단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 욕심을 넘어 모두에게 만족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눈앞의 작은 문제에 연연하기 보다 멀리 내다보며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큰 뜻을 품는 것이어야 합니다. 조선족 당신이 꾸는 꿈의 크기가 조선족사회의 미래의 모습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족 당신의 꿈이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밝히고 그래서 조선족 다음세대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당장의 고단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꾸는 꿈만으로 조선족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당신 자신과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꿈꾸어 보세요. 그리고 옆에 있는 조선족동포들도 그 꿈을 함께 품을 수 있도록 설득해 보세요. 함께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그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지게 되니까요. 갈등과 반목으로 분열된 조선족 동포사회가 서로 의지하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조선족 당신이 꾸는 많은 꿈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7    [3-1-1]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댓글:  조회:3236  추천:73  2008-09-06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중에서 1. 동북아시아시대의 중심으로서 연변 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연변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과 조선 러시아 3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변방지대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측면을 반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인 연길에 있던 핵심 공공기관인 연길변무공서의 명칭을 줄여 연변으로 부르던 데서 연유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일본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연변이라는 명칭보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던 간도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4년 12월에는 이곳에 간도성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졌다.일본이 항복하자 중국공산당은 이 지역을 간도라고 부르는 것이 일제의 유산이라며 거부하고 다시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 동북국과 길림성 공작위가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연변지위)를 구성하고 간도성을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로 개칭한 것이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각종 공식문서에서 간도 대신 연변이라는 명칭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연변지위의 결정에 앞서 중국공산당은 동만주 지역을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었다. 따라서 연변지위가 간도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기에 앞선 1945년 초부터 연변이라는 명칭이 두루 사용되었다. 1945년 당시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는 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예견하고 동북지역에 공산당조직을 재건하여 당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조선인 당원으로 구성된 연변지구 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0월에는 중국공산당 연변위원회(연변위)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한편, 간도를 연변으로 고쳐 부른 연원을 따져 볼 때 간도는 북간도를 지칭한다. 따라서 연변의 지역적 범주도 북간도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연변이란 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약칭해 부르는 것으로서 그 범주도 자치주에 국한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는 북간도로 불리던 넓은 지역을 통칭하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동만주지역을 연변으로 지칭했다. . 자연지리적 환경연변은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연해주와, 동북쪽으로는 흑룡강성과 이웃하고 있다. 북한과의 접경지역은 백두산에서 두만강 하류까지의 약 522키로미터에 이르며 러시아와의 접경지역은 약 246키로미터에 이른다. 연변의 총 변경길이는 768.5키로미터이다. 연변에는 장백산맥과 노야령산맥이 서남지역에서 동북지역으로 뻗어 있어 광활한 벌판으로 이루어진 길림성의 동부지역이나 요녕성 북부 및 흑룡강성 서부 지역과 달리 해발 500-1000미터의 높고 낮은 산들이 많다. 이 산지에서 나오는 하천은 동북지역 수계의 근원이다. 두 산맥이 만나는 지점에 연길분지가 자리하고 있다. 역내의 주요 하천으로는 두만강과 송화강 무단강 수분강 합이포통하 해란강 등이 있다.  장백산(백두산)을 포함한 울창한 삼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연변은 삼림면적 점유율이 80퍼센트를 넘는다. 이곳에는 국가급 자연보호구 2곳과 성급 자연보호구 6곳, 국가급 삼림공원 5곳, 성급 삼림공원 6곳이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은 또 1980년에 중국 최초로 유네스코로부터 생태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장백산은 중국의 10대 명산으로 불리는데 중국정부는 장백산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연변지역의 기후는 기본적으로 대륙성 기후로서 변화가 적다. 연평균기온은 섭씨 2-6도이며 1월 평균기온은 영하 14.1도, 7월 평균기온은 21.6도이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00-700미리미터 정도이다. . 사회문화적 환경연변의 공식 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행정구역상 길림성에 속하며 연길 도문 돈화 화룡 용정 훈춘 등 6개 시와 왕청 안도 등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면적 4만2천7백 평방키로미터로서 주도는 연길이다.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이 소수민족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족이 집거하고 있는 이 지역을 특화하기 위해 만든 특별행정조직이다. 1952년 9월 3일 조선족자치구로 설립됐다가 3년 후인 1955년 12월 등급을 낮추어 자치주로 변경됐다. 2007년은 조선족들을 위한 독립행정조직이 설립된 지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될 당시 행정구역은 1시5현으로 구성됐었다. 1958년에 돈화가, 1965년에 도문시가 각각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편입됐다. 그리고 1985년, 1987년, 1993년에 돈화 용정 훈춘 화룡이 각각 현에서 시로 승격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들 현과 시에는 하부 행정조직으로 15개의 향과 51개의 진 등 모두 66개의 향‧진이 있다. 한편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함께 조선족동포들이 집거하고 있는 자치지역으로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1958년 설립)과 30개의 자치향, 28개의 조선족‧만족 연합 자치 향 및 진이 동북3성 지역 내에 산재해 있다.중국 길림성 정부는 2007년 7월 연길‧용정‧도문 등 3개시를 광역개념의 한개 도시로 통합하는 이른바 연룡도프로젝트를 정식 비준‧공포했다. 중국의 한 인터넷신문은 7월 15일 “김림성 정부는 지난달 30일 ‘연길‧용정‧도문 시 공간발전계획 요강’을 정식 승인하고 이달 13일 대외에 공포했다”고 보도했다. 요강에 따르면 연길‧용정‧도문 등 3개 도시를 반시간권 이내의 단일 도로망으로 연결하는 일체화 개념을 통해 경제, 산업, 무역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기반시설을 공동 건설 또는 이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005년 말 현재 연변에는 조선족을 포함해 한족 만족 회족 등 24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전체인구는 약 2백17만5천명에 이른다. 이중 조선족은 81만6천명으로 약 3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한족 59.4퍼센트, 만족 2.6퍼센트, 회족 0.3퍼센트 등이다. 한족이 조선족보다 20퍼센트 이상 많다. 2007년 2월 중국 소수민족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중국 내 조선족은 192만 597명이다. 소수민족 중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내 조선족 중 42퍼센트가 연변지역에서 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 인구는 42만9천100명이며 이중 조선족은 전체의 57.7%인 24만7천700명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수치는 2007년 3월 16일 연길시 통계국이 발표한 2006년 국민경제 사회발전 및 통계 공보에 의해 밝혀졌다. 한족인구는 17만1천200명으로 전체의 39.8%이다. 연변은 중국 동북지역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여건이 매우 열악했다. 그러나 최근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통망이 다양하게 구축되었다. 장춘 길림 도문을 잇는 창투철도가 이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연변에서 화룡과 개산둔으로 지선이 분기한다. 도문에서는 목단강과 함경북도 온성으로 통하는 철도가 연결되고 있다. 도로는 철도를 따라 뻗어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과거 내륙지역인 연길에서 해외로 나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중수교 이후 한국기업의 지원으로 연길에 국제공항이 건설됨으로써 지금은 서울과 부산행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있다. 국내선으로는 북경과 창춘 심양노선이 있다.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글싣는 순서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자연지리적 환경- 사회문화적 환경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북․중 간 국경조약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0. 한민족의 연변이주-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북한변화의 촉매자- 남북관계의 매개자- 한중협력의 중재자-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16    [2-2] 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 댓글:  조회:3270  추천:67  2008-09-03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2. 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 우리는 지금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꿈꾸고 있는가. 우리는 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꿈꾸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동북아시아공동체는 언제쯤 어떤 과정을 통해 구체화될 것인가. 그리고 동북아시아공동체는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만들어질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아직 덜 익은 과일과 같이, 혹은 숙성되기 전의 술과 같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태다. 그러나 그 대답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0. 동북아시아에 대한 이해 . 동북아시아의 개념동북아시아의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것이 없다. 따라서 지리적 공간으로 볼 것인가, 경제적 혹은 역사문화적 개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인식 지역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이 지역이 광범위하여 지리적 공간과 경제적 공간, 그리고 역사문화적 공간으로 한정짓기 매우 어렵다는 점과 역내 국가 간에도 이해관계에 따른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점 등이 개념 정의를 어렵게 하는 이유이다. 동북아시아는 통상 서구인들이 만든 지도를 근거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몽골을 포함하여 일컫는다. 일부 논자들은 중국 러시아 등이 지리적으로 동북아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 국가를 편입할 경우 동북아시아라는 개념이 적절치 않다며 대신 동아시아라는 표현이 타당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시아지역의 동쪽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모두 지칭하게 되어 지리적 공간이 훨씬 넓어진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양문수 교수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협의의 지역과 광의의 지역으로 나누어 설명한다.(양문수, 2007) 전자는 지역개념으로서 남북한과 중국의 산동성 및 동북3성 지역, 러시아 극동지역과 일본의 환동해지역이 해당된다. 후자는 국가의 범주로서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다.대통령자문기구인 동북아시대위원회는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구상을 정립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동북아시아 협력공간을 지리적 공간과 기능적 공간으로 구분하여 적시했다. 이에 따르면 지리적 공간은 한반도를 기본으로 하고 중국과 일본을 중핵으로, 사안에 따라 러시아와 몽골을 포함한다. 기능적 공간은 동북아시아 공통현안 해결에 이해관계를 갖는 모든 국가와 협력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는 지리적 공간에 포함되는 국가들과 함께 미국과 ASEAN국가들이 추가된다. 이와 같이 학자 및 기관 사이에서 동북아시아에 대한 개념과 용어사용의 적실성 문제가 논란을 빚게 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새로운 논리를 제기하기도 한다. 경제적 개념과 역사문화적 개념, 그리고 인식지역으로서의 개념 등 각 사안별로 지역을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역시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대안이라고 하기 어렵다. 서울대의 이근 교수는 동북아시아라는 표현의 적실성을 언급하는 가운데 동북아시아를 ‘우리지역’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이근, 2004년 봄) 이 교수는 동북아시아가 한국의 ‘국가안전망(national safety net)'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동북아시아는 상상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우리의 공간’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국의 국가안전망으로서 동북아시아는 서로 같은 공동운명체의 지역으로 인식하는 동북아시아여야 한다고 말한다. ‘동북아시아의 일’이 ‘우리의 일’로 여겨지는 지역이여야 한다는 의미다. 역내 국가들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도와주고, 미래를 개척할 때 함께 협력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발전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지역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 개념은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이 함께 이 지역을 ‘우리지역’ 개념으로 인식하게 될 경우 상생과 상호의존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성이 있다. 따라서 어떻게 역내 국가들 모두가 이 지역을 ‘우리지역’으로 인식하도록 추동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결국 이 문제는 역내 국가들이 동북아시아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로 귀결될 것이다. . 동북아시아와 한국동북아시아 지역을 위에서 언급한 6개 국가가 포함된 것으로 인식할 경우 한반도는 그 중심에 위치해 있다. 대륙국가와 해양국가가 고루 포함되어 있는 이 지역에서 반도국가인 한국은 지리적 측면에서 여타 국가들을 상호 연결할 수 있는 중심 국가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선진국 문턱에 진입해 있는 한국은 선진국인 일본과 아직 발전도상국 또는 저개발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주변 국가들을 연결하기에 적합하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수준 등으로 인해 한국은 일찍부터 동북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지역의 미래를 위한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주장해 왔다. 우리사회에서 동북아시아공동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이 보다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3년 노무현정부가 출범하면서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을 대북정책으로 제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학자들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경제공동체, 동북아시아안보공동체 등의 형태로 동북아시아를 지역개념으로 인식하려는 노력들이 확산돼 왔다. 이런 움직임은 노무현대통령이 국제회의에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 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의를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노대통령은 2007년 3월 12일 서울에서 열린 국제기자연맹 특별총회 개막식 축사에서 “6자회담이 북핵문제 해결 이후에도 북핵문제를 푼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안보 협력을 위한 다자간 협의체로 발전해 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이제 동북아시아를 공동체로 한데 묶어 사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이러한 현상은 이근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동북아시아를 국가안전망(national safety net)으로 인식하려는 입장과 맞물려 있다. 세계화시대에는 지역국가 형성이 경제적 측면과 함께 안보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 속에서 경제적 측면과 안보적 측면이 동전의 앞뒤 면과 같이 상호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국가안전망으로서 동북아시아지역은, 세계경제가 규모의 경제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역시장의 확보는 물론 세계경제의 사이클 면에서 환율과 원자재가격 등 불리한 경제환경을 극복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안보적 측면에서 역시 지역은 역내 국가 간 안보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안전망은 지역안보에 이상이 없어야만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 망을 제대로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우리의 지역으로 진화 발전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가 우리의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면 자연스럽게 역내국가간에 환경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도 원활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면 동북아시아를 우리의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이근 교수는 동북아시아의 핵심국가들인 한중일이 모두 분단국가이거나 불완전한 주권국가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이 지역을 ‘우리지역’화 하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어 분단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을 정상국가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통일을 포기하고 현재의 상태에서 각각 주권을 인정하고 일본을 정상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전자이다. 동북아시아를 우리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또 다른 노력으로는 지역 구성원들끼리 서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한중일 3국 국민들이 상대 국가들의 정치 경제 문화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우리의식이 싹트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 지역을 우리지역으로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 동북아시아와 연변연변과 조선족은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 속에서 역내 국가들이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매우 특별하고 유용한 자산이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이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해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이들은 한중관계 발전의 걸림돌이 아니라 순기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역사해석 문제와 관련해 한중간 중요한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동북공정 문제 역시 자유주의 시각에서, 또 동북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질서 형성 가능성에 비추어 보면 새로운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즉 국가 간의 관계를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단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생각을 현재화한다면 연변이라는 지역과 이 지역과 관련된 역사해석 역시 편협한 데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미 그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연변지역은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이른바 봉금지역으로서 사실상 조선과 청나라의 힘의 완충지대로 기능했었다. 두 나라가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국경을 설정하기 전까지 서로가 소통 가능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일부 사학자들은 역사해석이 국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갖는 문제에 천착해 국사를 신화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 및 영토 갈등의 이면에 국사를 신화화하려는 관념이 깊고 넓게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동북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모두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임지현 엮음, 2004/ 임지현‧이성시, 2004)동북아시아에서의 이와 같은 역사 및 영토 갈등은 역내 국가들이 근현대사에서 겪었던 경험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의 역사를 뛰어 넘어 화해와 협력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 소통의 역사를 복원하여야 한다. 이것은 동북아시아국가 간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연변지역은 단절의 역사에서는 한중간 갈등의 장이지만 소통의 역사에서는 화합과 교류의 장이 될 것이다. 연변이 동북아시아공동체 시대를 열어가는 데서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이유이다.이근교수는 동북아시아를 ‘우리지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 언론과 2개 국어 이상을 사용할 수 있는 언어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에 귀 기울이면 연변지역과 조선족 동포의 존재는 매우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연변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족 동포들은 이미 2개 국어를 훌륭히 구사함으로써 동북아시아시대의 주역으로서 필요한 소양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0. 동북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상상력과 창의적 아이디어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은 가능한가. 그 누구도 현시점에서 이 물음에 대해 명쾌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함께 현재 이 지역 국가들 간의 갈등 양상이 워낙 첨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이 가능한가의 문제는 장차 역사적 트렌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과 역내 국가들이 이를 얼마나 유용한 것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의 가능성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그런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판가름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냉전종식 역시 사회주의권의 부조리와 저발전으로 인해 이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이를 유지하려는 사람보다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역사의 순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라는 공간이 있다고 믿고 그 공간에 실체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이를 실현하려는 창의적 아이디어는 더 많아지게 될 것이며 이를 구현하려는 노력 또한 커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동북아시아의 비전을 제시하며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을 역설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계체제론의 주창자인 미국 예일대학의 임마뉴엘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 교수는 동북아시아에서의 공동체 형성 가능성을 진단하며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에 주목한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함께 묶을 수 있는 조합, 제3의 부드러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10-15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문화일보>, 2007.8.14) 월러스타인교수에 의하면 한국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미래도 없다. 그만큼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연변과학기술대학의 김진경총장은 “동(북)아시아 연합”을 꿈꾸며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김진경, 2004) 그는 또 개교를 앞두고 있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설립을 “연변과학기술대학의 모델을 따라 북한사회를 국제사회로 이끌고 동아시아연합의 교두보로 삼고자 진행하고 있는 또 하나의 대학 프로젝트”로 설명한다. 인재양성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비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동경대학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명예교수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에서의 공동체 형성 필요성을 역설한다.(와다 하루키, 2007) 와다 교수는 특히 동북아시아지역에 산재해 있는 한민족에 주목하며 이들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구체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특히 20세기의 암울한 역사가 만든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21세기에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가꾸어 가는 핵심 역량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동북아시아는 창의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고 그것을 한국과 한민족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간다면 동북아시아는 우리에게 보다 유용하고 의미있는 지역이 될 것이다. 또 그 때가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것에 대비해 우리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열어 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임을 인정해야 한다. . 연대의 범위와 수준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안보공동체나 경제공동체와 같이 부문별 공동체 형성을 언급하는 수준에 있다. 논의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문별 공동체가 아닌 동북아시아지역 전체의 공동체를 논의하는 것은 성급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궁극적 지향점은 역내 국가들 간의 공존공영을 위한 동북아시아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유럽공동체가 이미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부문을 아우르는 포괄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과정으로서 먼저 부문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위한 국가 간 연대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이견이 있다. 강원대학교의 박사명교수는 동북아시아공동체와 관련, 한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에 갇혀서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박사명, 2006) 이른바 동굴현상, 착시현상 때문에 동북아시아시대를 부르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공동체가 타당하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박교수가 동북아시아공동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이 논의에 IT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아시아의 대국 인도가 배제되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추진할 경우 동남아시아권에 속하는 인도가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동북아시아국가들 간의 입장차이로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또 다른 이유로 든다. 동남아시아국가들을 포함하는 동아시아공동체는 이미 아세안 +3 등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어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박교수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이다.그러나 박교수의 주장 역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공동체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하여 실질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과 러시아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들이 배제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대안은 양자를 결합하는 것이다. 1단계로 동북아시아공동체와 아세안+3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궁극적으로 두 공동체를 통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EU가 결성 초기에 철강․석탄 공동체로 출발하여 점차 외연을 넓혀 동유럽 국가까지를 포함하는 거대기구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을 원용할 수 있다. 한국은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과정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양자를 동아시아공동체로 확대 재편하는 과정에서도 양쪽을 모두 아우름으로써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공동체 형성에서 경제적 측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공동체 형성의 궁극적 목적이 공존공영이라고 할 때 정치적‧문화적 측면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역내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는 역사와 영토 문제가 엉켜있는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동북아시아국가들 간의 연대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동북아시아공동체 논의의 궁극적 목적은 국가주권 차원의 동북아시아협력체 수준이 아니라 유럽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처럼 높은 차원으로의 지역통합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1단계로 동북아시아국가들 간의 연대를 추진하고 2단계로 동아시아권으로 확대하는 2단계 접근법이 보다 현실적이고 유용할 것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 역시 자신의 저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에서 일본이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가운데 이와 유사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와다 하루키, 2007) 즉, 동북아시아지역 내에서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를 아세안+3과 병행해 추진한 후 양자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이다.연대의 범위와 관련해서는 동북아시아 국제역학관계에 깊숙이 연계되어 있는, 역외국가인 미국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현실적 과제가 될 것이다.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안보협의체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대의 범위를 동북아시아 역내로 한정할 경우 미국은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당면 과제아시아는 역내 통합과 공동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유일한 대륙이다. 중남미와 북미는 자유무역지대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유럽은 유럽공동체를 통해 단일국가 건설을 준비하고 있다. 아프리카 역시 아프리카합중국 건설을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만은 아직 그런 노력이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에 대한 희망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고, 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국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는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과제들이 우선적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북한의 변화 ▲역내 국가들 간의 역사 및 영토 갈등 해소 ▲역내 국가들의 동북아시아공동체 미래에 대한 확신 등이다.동북아시아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폐쇄성이다. 역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화를 주저함으로써 공동체 논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될 것이다.  북한의 변화는 동북아시아지역의 단절을 극복하고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진전을 보이고 있어 긍정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북핵문제가 해결국면으로 들어가고 북한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혁개방정책을 취하게 되면 남북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출범과 함께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을 제시하며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지만 결국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함으로써 정책목표를 진전시키지 못했다.북핵문제가 해결되고 북한이 개혁개방정책을 취한다고 해도 북한이 국제사회에 정상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북한이 어떻게 동북아시아국가의 일원으로 공동체를 만드는데 동참할 수 있을까. 북한의 정치적 특성을 감안할 때 현실적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더욱이 북한이 주변 국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변화를 추진하려면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북한의 적극적인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연변지역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남한과 연변지역이 위아래서 동시에 북한의 변화를 추동하는 샌드위치화 전략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연변을 활용한 대북정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역내 국가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20세기 역사적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일본의 자세전환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다른 나라들도 과거보다는 번영된 미래를 열어갈 동반자라는 인식하에 상대에 대해 미래 지향적 열린 자세를 견지하여야 한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한국이 지금까지 보여준 바와 같이 인터넷분야에서의 혁신을 거듭할 경우 2030년 경 세계11대 거점국가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 중국 일본은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2030년 경 한국이 역내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세계 11대 거점국가가 되면 지정학적 중간자로서 한국은 실질적으로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 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탈리의 주장은 노무현정부가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하면서 균형자론을 제기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0. 관련 국가들의 입장. 한국의 입장오늘날의 역사적 트렌드를 감안할 때 동북아시아공동체는 이미 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이 대체로 그 대의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한국정부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 등을 감안해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안보협력 대화에 적극 참여하는 등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 간 협력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5월 제2차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개막연설을 통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과 별도로 유럽의 안보협력회의의 축소판과 같은 동북아시아지역의 안보협력체제 구축을 제의했다. 이듬해 5월 김대통령은 제1차 ARF고위관리회의(SOM)에서 동북아시아안보대화(NEASED) 설립을 제안했다. 이 대화 제안은 북한의 반대로 지연되다가 2003년 8월 성사됐다. 여기에는 남북한과 함께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했다. 이들 6개 나라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체인 6자회담 참가국이기도 하다. 노무현대통령은 북핵문제가 일정한 진전을 이룸에 따라 이 문제가 해결된 이후 6자회담을 동북아시아 안보공동체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제의한 바 있다. 노대통령은 2006년 9월 10일 헬싱키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 유럽의 신뢰구축과 통합의 경험을 동북아시아에 적용하는 ‘동북아시아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축에 관한 구상을 제시했다. 노대통령은 연설에서 동북아시아 정세에 대해 ▲한반도 분단과 같은 냉전시대의 잔존 ▲테러, 대량살상무기, 환경오염 등 새로운 안보위협 대두 ▲역내 세력관계 변화가 초래할 불확실성 등을 지적한 뒤 “유럽통합의 기초를 닦은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성공적 협력 사례가 동북아시아 다자안보협력을 위한 귀중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06.9.10)노무현정부가 출범하면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문제는 탄력을 받았다.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가운데 이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을 새로운 정책으로 제시함으로써 동북아시아시대에 대한 기대가 한층 고조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동북아평화번영정책은 정책추진을 위한 전제조건의 하나인 북핵문제의 해결이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말미암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함에 따라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정책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노무현정부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동북아시대위원회라는 대통령 자문기구를 두고 이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 왔다. 이 위원회는 그동안 남북협력방안 모색, 동북아시아국가들 사이의 경제협력 증진 및 사회문화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 및 주요 정책방향을 수립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해 왔다. 동북아시대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과제를 발굴하고, 추진상황을 관리하고, 나아가서 유관부서의 협조를 유도하기 위해 통일부에 동북아시대 추진단을, 그 밖의 기관에 추진팀을 둘 수 있다.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조직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지금까지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보다는 이를 위한 분위기조성 차원에서 관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지원하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역할해 왔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북핵문제가 해결 국면에 들어서게 되면 당장 6자회담을 안보공동체로 전환하는 문제가 구체화되는 등 새로운 상황이 마련될 경우 역할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존속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 북한의 입장북한은 동북아시아 역내의 공동체 문제에 대해 다소 소극적 입장을 보여 왔다. 소지역 모임의 경우 북한문제가 핵심주제로 제기되어 자신이 국제사회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안보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지역협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됨에 따라 1990년대 중반부터 안보문제를 중심으로 한 지역 내 다자간 모임에 관심을 가져왔다. 많은 국가가 참여하는 모임의 경우 의제가 비교적 광범하여 북한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록 안보문제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지역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은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북한 스스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북한이 다자간 안보협력 관련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정부차원의 ARF와 민간차원의 아시아태평양안보협력이사회(CSCAP)이다. 1994년 7월 태국 방콕에서 제1차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창설된 ARF는 이 지역 내의 다자안보대화를 위한 대표적인 모임이다. 북한은 1994년 12월부터 옵서버로 참여해 오다가 2000년 7월 2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또 현재 21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CSCAP는 1993년 6월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에서 비정부차원의 기구로 결성됐는데 북한은 이듬해 12월 러시아와 함께 가입했다. 동북아시아 소지역 정부 간 대화를 반대해온 북한은 민간차원의 동북아 모임에는 참여하고 있다.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 참여가 대표적 사례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고 분교 부설 세계분쟁 협력연구소가 주관하고 있는 이 모임은 동북아시아지역의 남북한과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 6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북한은 1993년 7월 준비회의에만 참석했다가 2002년부터 본회의에 참가하고 있다. 이 모임은 기본적으로 제2트랙(Track II)으로 불리는 비정부간 민간차원의 대화포럼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인사가 개인자격으로 참가하는 준정부간 회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6년 4월 동경에서 열린 NEACD에는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참가했었다. . 일본의 입장일본에는 동북아시아라는 말이 없다. 대신 북동아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표현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서명한 평양선언에서다. 이후 일본의 잡지들에서도 이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동북아시아라는 표현보다 영어표현을 차용한 북동아시아라는 표현이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동북아시아라는 용어 사용이 제한되고 있는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다. 일본이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에 소극적인 것은 역내국가와의 역사갈등도 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을 주창하며 이 지역을 침탈했던 역사를 감안할 때 일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지유신 이후 ‘탈아입구’(脫亞入歐)의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일본의 세계관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치 않다. 대신 동아시아공동체에 더 많은 관심을 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은 2003년 12월 동경에서 ASEAN과의 합동회의에서 “새천년의 역동적이고 영속적인 ASEAN과 일본의 파트너십을 위한 동경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일본은 ASEAN이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완전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을 지지하고 ASEAN과 더불어 “동아시아공동체를 위한 동아시아 협력관계를 심화시켜 나갈 것”을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은 ASEAN + 3과의 관계를 중시할 것임을 언급하기도 했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작업을 한국 및 중국과 함께 추진하겠다는 것이다.그러나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이 시대 동북아시아사람들이 실현해야 할 공통의 과제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제시한다. 그는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역설하는 가운데 일본이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북아시아 통합의 중심은 한반도며 이 지역의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 동북아시아시대의 주역임을 강조한다. (와다 하루키, 2007)   . 중국의 입장이른바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중국 역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하다. 중국은 경제발전을 국가전략 목표로 세우고 개혁개방과 4항 견지를 실천적 요소로 제시하고 있어 역내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협력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가전략 목표로서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은 군사적 모험주의 보다 주변 국가들과 상호의존적 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확대해 가는 한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설정하려 할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동북아공동체 형성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중국 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장윈링 소장은 한중일간의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 간의 협력과 신뢰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한다.(제주발전연구원․동아시아재단 공편, 2006) 그는 이 과정에서 정치적 신뢰와 협력이 절실함을 강조한다. 특히 중국과 일본 간의 신뢰회복을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꼽았다.중국은 이미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세계자본주의체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역할하고 있다. 또한 한국 및 일본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서두르고 있다. 적어도 역내에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 데는 적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중국이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질 경우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에도 적극 참여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글 싣는 순서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2. 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0. 동북아시아에 대한 이해- 동북아시아의 개념- 동북아시아와 한국- 동북아시아와 연변0. 동북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상상력과 창의적 아이디어- 연대의 범위와 수준- 당면과제0. 관련국들의 입장- 한국의 입장- 북한의 입장- 일본의 입장- 중국의 입장
15    [2-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 댓글:  조회:3161  추천:78  2008-09-01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중에서 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 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 20세기는, 인간의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국가 간의 관계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갈등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국제질서에 대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생각을 검증하는 시간이었다. 20세기 역사가 전쟁의 시대로 명명될 만큼 크고 작은 전쟁으로 점철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지난 세기 갖가지 형태의 갈등이 역사를 얼룩지게 한 현실을 직시하면 국제사회를 무정부상태로 인식하며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세기는 또한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시작된,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국가 간에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국경을 설정하여 정치적 단절을 추구해온 국제관계가 인류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였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국제정치의 행위자는 국가이다. 국제정치의 유일한 행위자로서 국가는 필연적으로 다른 행위자를 경쟁적 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국가안보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왔다. 따라서 각 국가는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체 무력을 강화하거나 자국의 안전을 지켜줄 국가들과의 연대를 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냉전체제하에서 세계를 자유민주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21세기 탈냉전적 상황은 인간을 보다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낼 수 있기에 국가 간에도 대화를 통한 타협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존 로크 (John Locke)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그 전통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시각이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세계화에 따른 보편적 가치의 확산 및 교통과 통신의 발달 등으로 국제사회가 유무상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 다양한 행위의 주체가 등장하게 됨에 따라 국제질서의 행위자는 더 이상 국가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게 됐다.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s), 다국적기업, 심지어 테러단체 까지를 포함하는 다양한 국제정치의 행위 주체가 등장하게 됐다.국제정치 이론으로 새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구성주의적 시각도 21세기의 변화된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 기존의 이론이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상호작용과 힘의 배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구성주의는 주권국가와 국제체제의 역사적․사회적 성격을 밝혀내고 국가의 행위를 규칙, 규범, 설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파악한다. 접근방식에서 기존의 이론과 다르다. 한반도통일과 함께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있어서 구성주의적 시각은 유용할 것이다. 최근 연성권력(soft power)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조지프 나이, 2004) 미국 하버드대의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교수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잠재력에 주목하며 대표적인 연성권력 국가의 하나로 지칭한다. 즉,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에 비추어 볼 때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문화적 잠재력이 새롭게 평가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국제정치에서 행위의 주체가 다양해지면서 국가의 목표도 달라졌다. 특히 주된 국가목표로서 안보에 대한 관심은 크게 변했다. 20세기의 안보개념은 다른 국가로부터의 침략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21세기에는 외부로부터의 침략 못지않게 체제내부로부터 초래되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어 안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체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을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국한했던 것에서 벗어나 환경문제나 마약, 빈곤, 인권 등 삶의 질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로 그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안보 개념의 이 같은 변화는 필연적으로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무력을 통한 보장보다 지역국가 간 협력을 통해 안보를 담보하는 등 이른바 포괄적 협력안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 간 연대를 강화하여 상호의존관계를 높여가고 나아가서 역내 안보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안보위협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을 형성했던 동북아시아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규범적으로 여전히 전쟁상태에 있는 남북한은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냉전시대에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 및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중요한 외교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북한은 제국주의 제1, 2의 원흉이라고 주장해온 미국 및 일본과 관계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안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북한핵문제도 해결국면을 맞고 있어 북한과 이 두 나라 간의 관계가 정상화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동북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면 현실주의적 시각이 가장 적합하였던 이 지역을 관찰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 즉 자유주의나 구성주의 시각이 보다 적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20세기 전반기에만 두 차례 세계전쟁을 치르며 전쟁의 역사를 만들었던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인 20세기 후반기에도 세계전쟁을 이어갔다. 미국과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여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세계를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해 대립한 이른바 냉전체제가 전개된 것이다. 결국 인류는 20세기 내내 국가 간에는 물론 적과 동지로 편을 갈라 상대에 대해 문을 걸어 닫음으로써 극단적인 단절의 시대를 만들어 왔다.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절의 역사는 중세이후 자신의 영토를 구획하여 이를 국경으로 중시하면서 구체화됐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무정부상태 하에서 갈등의 관계로 인식하며 그 기원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찾는 것도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 단절의 역사가 20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것이다. 21세기를 맞으면서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소통의 역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1990년대의 탈냉전적 상황이 가져온 결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현재화된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원리를 토대로 대체적으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2년 중국의 가입으로 명실상부한 세계경제의 사령탑으로 자리잡은 세계무역기구(WTO)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본과 인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글로벌 경제시대에 국가 간 소통을 가로막는 국경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소통의 시대를 만들어내려는 인류의 노력은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가려는 인간 욕구의 발로이다. 그것은 신화화된 국사를 토대로 역사와 영토에 대한 자국 중심의 해석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국가 간 단절을 정당화해온 데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소통의 시대가 열리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토 및 역사 해석을 둘러싼 역내국가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소통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인터넷세상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나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사람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새로운 미래로 나가도록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물결은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남은 고도인 북한에서도 넘실대고 있다.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북한에도 인터넷이 중요한 정보전달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고 나아가서 변화의 흐름을 타게 되면 동북아시아에서도 명실상부한 소통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21세기 국제질서는 20세기와 확연히 다르다. 20세기가 전쟁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평화와 화해의 역사가 될 것이다. 혹자는 박애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21세기가 이와 같이 긍정적 의미로 자리매김 할 것인지에 대해 확언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정의 속에는 새로운 시대에 즈음한 인간의 희망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하지만 21세기 국제질서는 이념을 뛰어 넘어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개인은 물론 개별 국가의 입장이 존중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핵심 종주국을 두고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양극체제에 의한 냉전적 질서는 여러 국가들로 힘이 분산되는 이른바 다극체제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여전히 유일초강대국으로서 세계질서의 관리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또한 국가를 구분짓는 경계를 훨씬 느슨하게 만들 것이며 이에 따라 국가의 역할 또한 약화될 것이다. 혹자는 18세기 경찰국가와 같이 국가는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역할만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제질서의 유일한 행위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빈자리는 다양한 새로운 행위주체들이 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 국제질서의 핵심적 갈등요인이었던 이념문제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질서에서는 경제적 요인과 함께 민족과 종교 그리고 문화로 대체됐다. 일본계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의 역저 <역사의 종말>에서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념적 대립의 역사가 종말을 고할 것임을 예견하며 대신 민족과 종교가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것임을 설파한 바 있다.(프랜시스 후쿠야마, 1992) <문명의 충돌>을 집필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억눌려 역사 흐름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문명 간의 갈등이 탈냉전시대 세계질서의 기본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새뮤얼 헌팅톤, 1998) 헌팅톤의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이 시대의 중요한 갈등요인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민족과 종교는 후쿠야마의 예견대로 탈냉전 이후 국가 간 분쟁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갈등요인들에 대한 지적이 반드시 미래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지적은 이를 뛰어 넘으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추동함으로써 오히려 희망적인 미래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세계적인 석학 조너선 색스 (Jonathan Sacks)는 문명 간 충돌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해법은 다른 문화와 종교가 어떤 방법으로 인종이나 피부색, 신앙 등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조너선 색스, 2002) 자신과 심각한 충돌을 빚을 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똘레랑스를 통해 너와 네가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하랄트 뮬러 (Harald Muller)는 아예 문명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인류역사를 ‘우리’와 ‘그들’과 같은 이분법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 조야한 퍼즐에 불과하며 패권주의의 야욕에 사로잡힌 미국정부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한다.(하랄트 뮬러, 2000) 뮬러는 오히려 21세기의 새로운 문명, 즉 세계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원거리 이동통신을 매개로 한 세계화의 추세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세계화는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단절된 채 대립정책을 펼 수 없도록 경제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킴으로써 문명충돌이 아니라 문명 간 대화와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21세기 세계정치의 화두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공존, 폐쇄가 아니라 개방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개방을 통한 소통의 시대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21세기 문화는 레고문화로 불린다. 오늘날의 문화적 경향이, 어린이들이 장난감 레고를 짜 맞추듯이 개개인이 스스로 필요한 문화를 선택하여 수용함으로써 문화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 문화를 조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유목문화로도 불린다. 유목인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풀과 물을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자유분방함이 오늘날의 시대적 트렌드와 부합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레고문화와 유목문화의 특성은 일견 무질서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시대에 적합하다. 집단적 문화보다 개개인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을 중시하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는 인종과 종교 그리고 관습의 차이를 인정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똘레랑스를 실천하게 한다.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의 문제가 정형화되지 않고 주관적 입장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 다른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본질적으로 차이를 없애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이러한 문화적 경향은 세계화를 촉진시킬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에도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문화적 소통은 궁극적으로 정치‧경제 분야에서의 소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한류 붐이 일고 있는 것도 레고문화의 확산과 무관치 않다. 21세기를 평화와 화해의 시대, 나아가서 박애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여 한다. 이는 20세기가 남긴 역사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글 싣는 순서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2. 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0. 동북아시아에 대한 이해- 동북아시아의 개념- 동북아시아와 한국- 동북아시아와 연변0. 동북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상상력과 창의적 아이디어- 연대의 범위와 수준- 당면과제0. 관련국들의 입장- 한국의 입장- 북한의 입장- 일본의 입장- 중국의 입장
14    [1-3] 무엇을 생각하나 댓글:  조회:2762  추천:57  2008-08-31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3. 무엇을 생각하나 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역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관통한다. 어느 한 시점에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일지라도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누구에게도 유사한 형태로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실도 과거사로 치부하거나 나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되풀이될 수 있는 보편적 사건일 뿐이다. 이른바 역사의 ‘동시성’의 문제이다.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기, 우리 민족은 서구화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 조상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또는 먹고살 길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연변은 우리 선조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구어낸 땅이다. 조선족 동포들은 그들의 피를 이어받아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질곡의 세월을 버텨온 인간승리의 장본인들이다.그러나 그들이 견뎌야 했던 혹독한 세월이 쌓아놓은 삶의 무게는 여전히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식민시대에는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爲國)’이라는 붉은 구호 아래 의용군의 이름으로 북한을 도와 남한과 싸워야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는 소수민족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으며 눈부신 발전을 꾀하며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개혁개방 시대에도 그들은 중국 동북지역에 위치한 변방의 한계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잘사는 모국이 있어 기뻐하며 그곳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 지난 세월의 설움을 한방에 날려 보내려 하나 이것 역시 그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이 되고 있다. 모국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있어도 따뜻하게 반겨주지 않으니 마음에 병이 도지고 있는 것이다.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과거에 겪었던 슬픈 역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업보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같은 동포인 우리들마저 여전히 그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책임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다. 연변과 조선족동포의 역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함께 우리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처럼, 21세기의 희망찬 미래 또한 그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한다. 그 일은 모국에서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의 고단함을 삭여주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역사의 동시성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아픔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 재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 항상 겸허해야 하며 남이 겪는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그 연원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민족 모두의 문제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살길을 찾아 불가피하게 선택한 결과였기에 우리민족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곳에 사는 그들을 외면하고, 우리 다음세대에서 다시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옥토를 일구어 낼 수 있을까. 그들이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참담한 세월을 당당하게 버텨 낼 수 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희망이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며 가치 없는 일은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일본 동경대학의 강상중 교수는 탈냉전적 상황과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현상 속에서 세계는 필연적으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탈영역화를 겪게 되고 이는 다시 지정학적 혼란을 거쳐 재영역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강상중‧이경덕, 2002) 즉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탈영역화와 국가 간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의 세 가지 요소인 주권국가, 영토적 통합, 공동체적 동일성에서 안정성이 흔들리게 됨으로써 ‘지정학적 혼란’이 야기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재영역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강교수는 또 재영역화 과정은 탈영역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한다. 탈영역화는 분열된 구질서의 신조나 관습, 실천이나 이야기의 단편을 활용하여 질서의 재영역화를 위한 조건을 생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면서 이른바 재영역화라는 형태로 새로운 관계맺기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로운 질서를 위한 재영역화는 구질서에서 경험한 다양한 조건들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강상중교수의 주장을 빌리면 연변은 현재 탈영역화의 도정에 있다. 냉전체제하에서 철저하게 사회주의진영 내의 중국 영역에 갇혀 있었던 연변이 탈냉전에 따른 한중수교 등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짐에 따라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족동포들도 다시 민족적 감정을 되살려 모국에 있는 친지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넘나들고 있다.연변의 이러한 탈영역화는 연변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한국과 연변,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에 특별한 관계를 상상하는 성급한 기대마저 낳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탈영역화가 탈 중국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연변에서의 탈영역화가 경제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연변에서의 변화를 지나치게 한국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연변의 탈 중국화가 반드시 우리 민족과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재영역화 과정에서 핵심적 사안은 조선족이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가 될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국민으로서의 현실적‧정치적 정체성을 선호할 것인가 아니면 같은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에 더 많은 의미를 둘 것인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과 조선족사회 간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판단할 때 상황은 결코 한국에게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탈영역화에 이어 재영역화를 추구하며 관계를 넓혀 갈 때 우리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한국과의 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공동체를 형성하는데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조선족사회가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재영역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21세기의 트렌드를 감안할 때 재영역화가 이루어질 경우 냉전시대와 같이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바램 이다. 그러한 바램은 조선족동포들이 우리와의 감정적 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질 때만 유효하다. 연변지역의 재영역화가 보다 보편적 질서를 수용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북아시아공동체라는 새로운 질서 형성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트렌드는 소통의 시대를 형성하는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은 치열한 기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변과 조선족이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어느 쪽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과 한국이 모두 조선족에 대해 한가지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이 연변과 조선족을 공동의 이익을 위한 연결고리로 인식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즉, 한국과 중국이 이 문제를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넌 제로섬(non zero-sum)게임의 차원에서 동북아시아지역의 공존공영을 위한 상생의 무대 및 행위자로 인식하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변지역의 재영역화는 그러한 과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공존공영민족주의와 세계화는 병존할 수 없는가.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이 논리들이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짓누르고 있다. 탈냉전적 상황에서 각국은 한편으로는 21세기의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다. 탈냉전체제하에서 소통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그러나 양자가 꼭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고를 확장한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불이사상(不二思想)도 하나의 대안이다. 불이사상이란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또 이것과 저것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즉 세상만사 모든 것이 어느 하나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중용의 도(道)이다. 이에 따르면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결코 상반된 둘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상충되어 보이는 논리들도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병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민족문제를 고민하면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말하는 것의 부조화를 불이사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민족주의자이며 동시에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동포주의)의 입장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불이사상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민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인류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며 21세기 역사가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기에 세계동포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얘기하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동북아시아 공존공영의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북아시아 공존공영의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할 과제로서 연변과 조선족동포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족문제로서 연변과 조선족동포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의 한 방편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역 간 연대의 형태로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또한 여기서 민족문제를 말하는 것은 지난 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온전히 털어냄으로써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성숙된 조건을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참담한 20세기를 살아왔다. 그리고 세계적인 탈냉전적 화해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반목과 갈등의 세월을 살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남북한 간의 갈등은 남남갈등으로 이어지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까지도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 20세기 우리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슬픈 역사가 아직까지 우리민족을 억누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민족 내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단순히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과제이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가고 나아가 세계동포주의를 앞장서 실천하기 위해 당장은 우리민족 모두 민족주의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나가고 세계동포주의를 실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장은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비치지만 이는 더 큰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 해결을 위해 민족적 차원의 주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대상황에 배치하는 것일까. 최근 한국사회에서 민족문화적 현상을 민족주의로 표현하며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볼 때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가 표출된 적이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일부 논자들은 한국민족주의의 태동을 동학혁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할 때 이는 민족주의라기 보다 사회내부에서 일어난 변혁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판단은 엇갈릴 수 있다. 또 작금에 우리사회에서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성향을 지적하며 이를 폐쇄적 민족주의로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민족주의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는 민족주의라기 보다는 단일민족의 오랜 전통을 강조해온 관성에 따른, 이른바 ‘우리의식’을 강조하거나 민족우월의식을 표현하려는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폐쇄적 민족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우리 민족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다른 민족은 경험하지도 못한 복잡하고도 어려운 민족문제로 끙끙거리며 지난 세기를 달려왔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민족 스스로 당면한 민족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민족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타민족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의 상흔으로부터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재외동포들을 끌어안고 이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려는 차원에서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여야 한다. 우리민족의 문제를 다른 민족이 해결할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민족주의를 시대상황에 적합지 않은,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현실적으로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은 물론 대부분의 국가들이 민족주의 이념을 사회발전의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민족만이 민족주의를 터부시해서도 곤란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배타적 차원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를 문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와 세계화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할 수 있는, 나아가서 서로 상통하여야 하는 가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적으로 민족주의를 외면할 수 없고 또 인류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면 양자관계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화합할 수 있는 논리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이다. 조화와 원융의 세계를 추구하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민족문제는 영토문제와 함께 근대 국민국가 간에 이루어진 갈등의 핵심 요소이다. 국제정치에 대한 현실주의적 시각이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과 영토 그리고 주권을 중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들어 각 국가들이 패권을 추구하며 전쟁을 불사했던 것도 민족 또는 국민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생각이 가져온 결과다. 오늘날 중국의 새로운 역사해석이나 동북아시아국가들 간의 역사갈등 및 영토갈등 역시 이러한 20세기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이 이와 같은 20세기적 사고를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주목하는 것도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심 고리로서 이들이 지닌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역으로서 연변지역과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중국과 한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조선족동포들이야말로 지정학적 및 지문화적 차원에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위한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한국과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공존공영의 미래를 기대한다면 연변지역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미래 공간으로 만들고 조선족동포들을 그 공간의 주역으로 삼아야 한다. 동북아시아공동체의 미래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조선족동포들이 우리와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국민으로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얘기하는 것은 결코 민족주의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글 싣는 순서『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1. 무엇을 왜 쓰는가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0. 연변에 대한 연민0.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3. 무엇을 생각하나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 공존공영
13    [6] 조선족 당신은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댓글:  조회:2673  추천:72  2008-08-31
조선족동포에게 고함- 6조선족 당신은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곽승지 연합뉴스 기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한민족 모두가 지난 역사의 아픈 상흔을 온전히 치유하고 반만년 역사를 만들어온 그 터전 위에서 다시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한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한민족공동체를 넘어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이 지난날의 반목과 갈등을 극복하고 이 지역에서 평화와 공존공영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는 원대한 꿈입니다.   오늘 꿈을 말하는 것은 꿈꾸는 자만이 미래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꿈은 곧 희망입니다. 사람에게 꿈과 희망이 없다면 미래 또한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은 오늘을 기꺼이 인내하고 또 희생할 수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있으면 원하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꿈과 희망이 없다면 그의 삶은 한층 고단할 뿐 아니라 미래 또한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것이 될 겁니다.    중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은 희망은 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없던 길도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길이 됩니다. 꿈과 희망도 마찬가집니다. 꿈을 꾸고 희망을 품은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 언젠가 현실이 됩니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그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꾸는 꿈은 곧 현실이 됩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꿈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또 다른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한민족공동체를 이루는데 조선족동포들은 물론 한민족 모두가 함께 나서는 그날이 멀지 않아 찾아 올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나아가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한민족은 물론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이 차별과 편견을 넘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갈구하며 한마음 한 뜻으로 참여하게 될 그런 날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꿈은 높이 두고 희망은 마음속에 밝히되 그것을 위한 노력은 냉철한 머리로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꿈이 실현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을 꾼다는 것은 그 꿈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전제로 합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은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수많은 좌절과 고통을 이겨낸 후에야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는 것 못지않게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조선족 당신은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행여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외면한 채 오직 자신과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며 스스로 위축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또는 조선족이 처한 현실을 버거워하며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그저 세상을 탓하기만 하며 슬픈 세월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꿈꾸고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는 순간 당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선족 당신의 꿈과 희망이 조선족동포는 물론 한민족과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끝)  <조선족동포에게 고함>글싣는 순서0. 칼럼 <조선족동포에게 고함> 연재를 시작하며1. 조선족 당신은 누구입니까2. 지혜로운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듦니다3. 당신의 삶에 무엇을 보태겠습니까4. 조선족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5. 조선족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6. 조선족 당신은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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