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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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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과유불급의 중용법칙 댓글:  조회:3280  추천:0  2012-03-09
                         과유불급의 중용법칙         혹자는 간고분투에 관한 따분한 혁명전통교양을 되풀이하는것으로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오색찬연하고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은 항상 간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것만이 홀가분하고 자유스럽다는 인생철리를 기억해두어야 할것 같다.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들은 간박한 생활을 선호하면서 물질적욕구에 얽매우지 않고 정신적자유를 우선적수요로 내세운것으로 알고있다. 사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생존과 건강에 필수되는 물건은 많지 않는바 이를 초과한 부분은 분수에 지나치거나 생활의 필요정도에 넘치는 물품 즉 사치품이라 할수 있다. 물론  현대인들은 예전과 달리 갈수록 복잡하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생활을 하면서 많은 향수를 누리고있는것만 사실이다. 하지만 생활의 내용이 많아졌다고 해서 꼭 행복스러운 생활을 한다고는 할수 없는바 가지는것이 많을수록 자유스럽지 못할 때가 있다는 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한뉘인생 “서발막대 휘둘러야 가로 거칠것도 없고” “물에 빠지면 주머니부터 뜰 처지”로 가난에 쪼들리면서 나라도 하기 어려운 가난구제의 대상으로 지내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육체적수요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따스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것이기에 이 온포의 필요이상으로 지나치게 치레가 많은것을 집요하게 따른다면 사치한 생활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일단 사치한 생활에 흥미를 가지고 거기에 빠져만 들어가면 그 수요가 끝이 없는줄로 안다. 온포는 자연적수요이지만 사치적욕망은 간단없이 팽창되고있는 시장의 자극에 의해서 움찔움찔 일어서는것이다. 돈을 많이 벌거나 부자가 되는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심리상태를 가지고 인생을 꾸미는가 하는것이 매 사람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주기때문이다. “뛰는 놈우에 나는 놈이 있는” 격으로 아무리 잘사는 부자라고 하여도 그를 초월한 대부호가 있기마련이기에 항상 “말 타면 천리마 타고싶은” 심리상태를 가지고 현상태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데서 항상 스트레스가 쌓인 긴장한 분위기속에 말려든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문제점이 되지 않을수 없다. “돈 많은 부자가 잠 못잔다”는 말이 그른데 없는줄로 안다.       곰곰히 따져보면 인간의 육체적수요는 그 자체의 생리적구조에 의해 결정되였기에 매우 제한되여있다. 은나라 주왕이 아무리 “술로써 못을 이루고 고기를 쌓아 숲을 이룬(以酒为池,悬肉为林)” 생활을 향유하였다지만 그도 보통 사람의 위를 한개만 가졌을뿐이다. 진시황이 자기의 영원한 거처로 “동서로 5백보, 남북으로 5십장(东西五百步,南北五十丈)”되는 대 규모의 호화로운 아방궁을 만들어놓았다지만 그 역시 5척(五尺)의 신구(身躯)를 가진 보통 사람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었다. 미식가로 동네방네 소문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산해진미를 감칠맛나도록 냠냠 먹을수는 있다지만 꼭 쉬염쉬염 포식하여야지 줄기차게만 먹는 날이면 소화불량으로 드러눕게 된다. 녀색에 각별한 흥미를 두고있는 전국시기의 등도자(登徒子)와 같은 호색가라고 하여도 “침상지락”을 절제있게 끌고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이 허해져 역시 신체가 망그러질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그 어떤 생리적, 육체적 욕구든지 자의로 염족할 정도로 챙길수는 있어도 과유불급(过犹不及)의 중용법칙 즉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또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도 않는 알맞춤한 상태나 정도를 벗어나기만 하면 몸을 망친다는 얘기이다.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포식하고 돈을 물쓰듯 하며 호색황음하고 주지육림속에 빠져있는것은 필수적인 물질적향수나 육체적수요를 만족하기 위한것이라고 할수 없다.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수많은 물건들이 필요되는것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그런것들을 갖추고 살아왔기때문이다. 해마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따뜻한 봄날씨가 찾아와 집안을 위생청결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보노라면 비슷한 물건들이 너무도 많지만 모두 용처가 있어서 실로 버리기 아깝다. 그러나 가령 뜻밖의 연고로 매우 비좁은 집으로 옮겨서 살게 될 경우라면 부득이 매우 적은 물건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야 비로서 진정 어느 물건이 딱 필요되는걸 느낄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령 더 널직한 집에 옮겨가더라도 비좁은 집에서만 쓸수 있는 기준으로 필수적인 물건들만 장만해놓음으써 아름답게 장식한 거실에 더욱 큰 자유공간을 시원하게 마련하면 더 좋은 일이 아닐가?        그리고 실생활에 있어서 얼기설기 뒤엉킨 매우 복잡한 많은 일들을 아까운 시간을 팔아가면서라도 우리가 일일이 다 처리하는 리유가 무엇일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이러한 복잡한 사항들을 생활의 주요일정에 언녕 올려놓았기때문이다. 가령 지금에 와서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중의 일부 사항을 처리하지 않고 방치해두거나 아예 포기해버린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헌데 우리 매 사람마다“인생칠십 고래희”와 같은 삶의 여생단계에 이르러서는 이일저일 다 고려하고 처리할 시간도 없거니와 그런 능력도 없다보니 자연히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란 바로 이런 로후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어느것이 꼭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는것을 따끔하게 직감하게 되는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창 젊은 시절에 로후단계의 기준을 참작하여 필수적사항들만 선택하여 처리함으로써 생활에 더욱 긴 자유시간을 남겨두고 긴장상태에서 해탈되여 여유작작하게 살아가면 더 좋지 않을가?        기실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물건들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것들이 있다. 어떤 물건은 있으면 이채를 돋굴수 있지만 없어도 생활에는 무익무해한것들도 있다. 물론 어떤 물건은 확실이 없다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것이 필요불가결의 물건들인가 하는것은 어느 한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이 면에서는 인류를 키워주고있는 대자연만이 유일한 권위를 갖고있는 스승이다. 자연은 생명으로 하여금 해빛과 땅을 떠나서는 생존할수 없도록 하였고 인류로 하여금 꼭 땅을 갈아 농사를 짓고 대를 잇도록 하였다. 이처럼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내용은 기실 매우 평범하고 간소하고 소박한것이지만 그것이 정녕 인류생활의 영원한 핵심이라는걸 가슴에 항상 아로새기고 자기 삶을 간단하면서도 티없이 깨끗하고 윤택나게 꾸며야 한다고 본다.  
16    떡도 좋고 함도 좋았으면… 댓글:  조회:3855  추천:30  2012-03-07
     올 3월 5일은 “뢰봉을 따라배우자”는 모택동동지의 위대한 호소가 발표된지 49돐이 되는 날이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사회 제 분야의 “뢰봉따라배우기”활동이 화창한 봄기운에 동반되여 부쩍 열기를 띤다. 수천만을 헤아리는 중소학교 학생들과 청년자원봉사자대오가 솔선적으로 사회, 가두, 농촌에 심입하여 “뢰봉따라배우기”활동을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분위기에 휩싸여 진행하는데 정녕 아름다운 춘색의 풍경선을 돋구고있다.       헌데 최근에 와서는 “3.5”를 맞을 때마다 미지근한 마음이 앞서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여 수십년동안 진행하여온 “뢰봉따라배우기”활동이건만 시종 새로운 주제로 보충됨이 없이 여전히 간단하고 고착된 형식으로 에때워지는 페단이 로출되고있으니 문제가 아닐수 없다. 해마다 “3.5”를 전후하여 상징적인 자원봉사자활동, 공익성활동이 하루이틀 성세호대히 진행되다가 “굿 해먹은 집”처럼 인차 조용히 자취를 감추다보니 청소년들한테 “‘뢰봉따라배우기’활동은 ‘3.5’에만 가지는 상징적인 기념활동인가” 하는 착각을 주기가 일쑤다.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은 우리들한테 참신한 시각과 리념으로 “뢰봉따라배우기”활동을 다시한번 반성해보고 검토해볼것을 요구하고있다. 사실 남을 관심하고 사랑하는것은 전 인류의 고유한 미덕품성이다. 일본인들과 처음 접촉할 경우 흔히 대방으로부터 “도조요로시꾸(どうぞ宜しく)”라는 인사말을 받게 되는데 우리 말로는 “잘 부탁드립니다”는 뜻으로, 한어말로는 “많이 보살펴주세요(请多关照)”의 의미로 전달된다. 피뜩 느끼건대 첫 만남에서부터 대방한테 자기에 대한 관심을 부탁하는것이 무례한 인사말로 생각될수도 있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여기에는 일리가 있다. 세계적으로도 인사치레가 유명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남을 관심하는것은 당연히 일종의 미덕으로 점찍어진것이 분명하기에 초면의 사람들에게 전달해도 대방의 호감을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실 우리 나라에도 오래전부터 “남들은 나를 위하고 나는 남들을 위한다(人人为我,我为人人)”는 내용을 담은 전통미덕문화가 전해져왔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것”과 “남이 나를 사랑해주는것”은 서로 분리될수 없는 상호의존, 상호작용의 긴밀한 관계로 떨어질수가 없다.       “뢰봉따라배우기”활동은 우리 나라에서 인정미가 짙고 인성화가 구현된 사회문명시스템프로젝트로 규정된지 오래다. 대방을 관심해주는것은 말그대로 생활의 구석구석을 자상히 보살펴주는것이라 할수 있다. 례하면 차에 오를 때 로인을 부축해준다거나 어린애를 업은 유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맹인을 거들어 십자가를 건너는것 등등 남한테 사랑을 베푸는 방식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피뜩 보기에 이런 소행은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로 취급될수도 있지만 이는 당사자뿐만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더운 인간애를 차분히 느끼도록 하고 주위 사회는 진정 조화로운 분위기로 밝게 꾸며지고있다는 생각으로 가슴만 벅차게 한다.       아쉬운것은 어느때부터인지 이와 같은 성스러운 활동이 기껏해야 상급의 호소에 응부하는 이른바 “임무, 과제 완수”의 성격을 띤것이다. 이와 같이 응부식, 임무완수식의 활동을 치르고서야 어찌 인간사이에 진정 사랑의 마음을 베풀수 있으랴. 또한 짧디짧은 하루이틀의 봉사활동을 통하여 친절미 넘치는 봉사자들의 갸륵한 마음을 읽는다는것은 좀 허구픈 일이 아닌가싶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3.5”만 닥쳐오면 어떤 양로원에서는 도리여 시끄러움을 느끼고있다. 금방 한패의 봉사를 받고 바래여주었는데 또 한패의 봉사자들이 들이닥치는데서 “울며 겨자먹기”로 봉사를 받지 않을수가 없다. 양로원의 뜰안과 방안을 금방 깨끗이 쓸었건만 또 한패가 와서 쓸고… 금방 곱게 개여놓은 로인들의 이불이건만 또 한패가 와서 다시 개여놓고…       우리 말에 실지 내용물도 좋지만 그것에 따르는 형식이 더 좋음을 이르는 말로 “떡도 떡이려니와 함이 더 좋다”는 속담이 있다. “뢰봉따라배우기”활동 자체는 그 의미가 깊기에 나무람할바는 못된다. 문제는 이 활동의 진행 경로나 방법이 구체적 정황이나 환경에 맞게 신축성있는 다양한 활동모식으로 꾸며졌으면 좋겠는데 봉사활동 자체가 하루이틀에 국한되다보니 자원봉사자들의 활동방식 거개가 기계적인 모방이 아니면 너무 틀에 잡히고있다. 그러니 새로운 정세에 결부시켜 학습의 방식, 방법을 개진함으로써 경상적으로 견지하고 실제적인 효과를 따져보는데 더욱 주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근 50년동안 중국인민들 특히는 광범한 청소년들의 훌륭한 본보기로 된 뢰봉의 정신은 중화민족전통미덕의 불가결 내용의 하나로 굳어져왔다. 그러나 새 력사시기에 처한 청소년들이 어떻게 뢰봉정신을 리해하여야 하고 뢰봉정신은 어디에서 구현되여야 하며 뢰봉정신을 어떻게 따라 배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시대의 과제로 나서고있다. 청소년, 특히는 광범한 중소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3.5”기념활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형식을 추구하는것으로 시작하지 말고 평소 자기 주변의 일과 사소한 일을 착실히 처리하는것으로 뢰봉정신의 실질을 가슴깊이 아로새기도록 가르쳐주는것이 해당 부문의 급선무이다. “3.5”기념활동을 전개함에 있어서의 관건은 장기적으로 견지할수 있는 행위규범을 청소년들한테 심어주고 그 와중에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을 가슴깊이 터득시키도록 하는것이다.
15    “반포”보은 및 기타 댓글:  조회:3273  추천:0  2012-03-01
                                   “반포”보은 및 기타                                          (2010년4월13일)        최근에 “반포(反哺)”란 말이 퍽 류행되는줄로 알고있다. 더우기 “공업이 농업을 반포하고 도시가 농촌을 반포하여야 할” 시대적과업을 내용으로 한 “중앙1호문건”을 하달하면서부터 “반포”에 대한 지성인들의 관심과 주의를 더욱 끌고있는 상황이다.         직업적예민감이라고 할가, 아무튼 나름대로 “반포”란 어휘풀이에 궁금증을 풀지 못하여 사전을 펼쳐보았더니 어원의 뜻으로는 “새끼까마귀가 자란 다음 도로 어미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것”이였고 비겨 이르는 말로는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갚는 자식의 효성이라는것”이였다. 확실히 예로부터 항간에서 까마귀를 흉조(凶鸟)로 여겨왔다. 특히 까마귀울음소리는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침에 까마귀가 울면 아이가 죽고 낮에 울면 젊은이가 죽으며 오후에 울면 늙은이가 죽고 한밤중에 울면 살인이 날 징조라고 여겨왔었다. 까마귀는 또한 시체를 즐겨먹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 말 속담에 “까마귀밥이 되다”는것도 생겼는데 그것은 죽음을 뜻한것임이 분명하다. 지금도 인도 등 나라들에서 조장(鸟葬)이 성행하고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내다버려 까마귀가 뜯어먹도록 한다. 그래야만 죽은이가 승천(升天)할수 있다고 믿기때문이다.        그러나 중의학의 시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나라 리시진의 “본초강목”에 따르면 새끼가 어미를 먹여살리는데는 까마귀만한놈이 없다고 한다. 까마귀는 새끼를 낳은후 흔히 산후통으로 점차 눈이 먼다고 한다(물론 우리 어머니들도 아이를 낳을 때면170여개뼈가 움직일 정도로 분만고통이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그래서 새끼까마귀들이 앞을 못보는 엄마에게 먹이를 물어다준다고 한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눈이나 사람을 비겨이르는 “까막눈”이란 우리 말 고유어도 여기서 유래된줄로 짐작된다.        이러고보면 선인들이 까마귀의 되먹이는 습성을 두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갚는 자식의 효성”의 뜻으로 비겨서 “반포”라는 올림말을 사전에 올린것은 정말로 지당한 처사라 하겠다. 새끼까마귀들의 “반포”행위는 지극한 효도를 의미한다. 자오반포(慈乌反哺),반포함식(反哺衔食), 반포보은(反哺报恩), 반포지사(反哺之私), 반포지효(反哺之效) 등 고사성구도 까마귀로부터 유래된것이라 점찍는다면 실로 까마귀는 흉조(凶鸟)에 앞서 효조(孝鸟)라고 칭송하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하다면 당중앙과 국무원에서 무엇때문에2004년부터2010년 올해까지 련속6년간 해마다 “3농문제”를 언급하였고 또 최근에는 당중앙 전원회의에서 “3농문제”에 대한 중시강도의 시점을 “공업이 농업을 반포하고 도시가 농촌을 반포하여야 한다”는 두가지 “반포”에 둘데 대하여 강조하고있는가를 두고 우리 모두가 심사숙고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니 “반포”란 개념을 두고 단순한 동물학적, 어학적 내포를 깨닫는데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반포”의 정치적, 시대적 내포를 깊이 터득하여야 한다.         우선, 우리 나라가 “농업, 농민, 농촌을 반포”할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 현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최근년간 나라의 징수액의 장성속도가 이미30%를 초과하였기에 “3농의 반포”에 일정한 물질적토대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농촌기초발전수준이 뒤떨어진 상태는 우리 나라의 소비분야의 확대와 경제의 새로운 도약행정에서의 병목지대로 되고있다. 그러하기에 농촌에 대한 투입을 늘이는것은 실제상 전반적국면의 발전을 돕기 위한 수요인것이다.        다음으로 민생수요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 비록2007년에 농민들의 실제소득이15% 가깝게 증대되였다고 하지만 절대치면에서 놓고보면 도시와 농촌 주민 소득분배의 격차는 여전히 커서 농민소득을 높여주는것이 우리 나라 당면한 최대의 민생문제로 나서게 되였다.         그리고 “물 마실 때 우물판 이를 잊지 말라”고 하였듯이 농업대국으로서의 우리 나라의 오늘과 같은 번영과 발전은 농업, 농민, 농촌의 뒤받침을 떠나서는 이루어질수가 없다. 례컨대 제일 어려웠던 지난 세기60년대초3년 자연재해시기를 전승한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 나라 고대의 성인 공자의 “론어”에 따르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본능적인것이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는 미덕으로는 될수 있지만 본능적인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확실히 그런가보다. 우리 주위를 두루두루 살펴보아도 부모를 알뜰살뜰 봉양하는 효자, 효녀들이 물론 많고많다지만 부모를 박대하는 후레자식도 가끔 눈에 띄우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모든 분야에서 본능적인 자세로는 되지 못하더라도 “3농”을 “반포”함에 있어서 진정 인정미 짙고 친절미 차분하게 자기 “부모”를 섬기는 “효자, 효녀”로 되여야지 남의 눈에 날가봐 눈가림으로 “반포”행위를 꾸민다면 “부모에 대한 푸대접”으로밖에 될수 없으니 절대 삼가할바이다.
14    항상 주는 마음 갖고살자 댓글:  조회:2755  추천:0  2012-03-01
                    항상 주는 마음 갖고살자          중국은 예로부터 례의지국으로 세인들게 널리 전해져왔다. 사회문명수준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법도 엄하게 준수해야겠지만 자신의 욕망만을 앞세우지 않고 남을 우선의식하고 남의 어려움을 먼저걱정해주는것과 같은 례의들도 잘 키켜야 한다. 사회생활에서의 동료간, 손우손아래간, 이웃간, 부부간 등등 관계에서의 적지 않은 모순의 산생과 격화는 흔히 각자의 각이한 립장과 크게 관련되고있기때문에 우리 매 사람마다 당분간 자기의 립장에서 해탈되여 대방의 립장에 서서 문제를 사고하고 문제를 처리한다면 대방의 희로애락을 쉽게 체험할수 있고 대방과 쉽게 공명감을 가질수 있어 평소 티각태각하는 사이라도 지어는 “살점을 뜯어먹어도 시원치 않은” 정도의 척을 지고 지내는 관계라도 인차 조화로운 분위기에 휩싸여 언제 그런 일 있었느냐 싶도록 “고운 정 미운 정”으로 웃으면서 생활을 영위할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법도 없이 살 분이다.”라고 평판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기실 “무법천지”의 세월을 지향하고 주장하여서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것이 절대  아니다. 이들은 법도 남들보다 더 엄격히 지킬뿐만아니라 더우기는 사회생활에서의 기본적인 례의들도 항상 념두에 두고 항상 남을 관심해주고 사회생활에서의 내조를 잘하고 얼기설기 뒤엉킨 각종 모순을 척척 풀어가는 능력을 가졌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판과 존경을 받고있다.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례의는 법률처럼 엄한 체계에 관련 조항을 자상히 분류한 기성문이 아니다.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를 먹지 않고서는 배길수 없는 상태이지만 남의것을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의식을 가진다거나자기 혼자서 먹어도 “간에 기별도 안가는” 정도의 음식이지만 그것을 덜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인정미 등등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례의는 실로 한마디로 점찍기 어렵다. 옛사람들도 “례의에서는 서로 오고가는것을 존중한다. 가는것이 있고 오는것이 없으면 례의가 아니며 오는것이 있고 가는것이 없어도 례의가 아니다.(礼尚往来。往而不来,非礼也;来而不往,亦非礼也)”는것을 인간교제생활의 준칙으로 엄하게 지켜왔었다. 그뜻인즉 인정이란 서로 주고받는것이지 일방적일수 없다는것으로서 오늘날 우리 말의 “가는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있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이 크다”는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를 두루두루 살펴보면 생활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례의마저 너무 가볍게 무시되고있어 실로 가슴아픈 일이아닐수 없다.        요즈음 두가지 뉴스를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기게 된다.        그중 한 뉴스는 도시에서 훌륭한 직업을 가진 다섯 자녀(도무 성가했음)가 늘그막에 재혼을 하려는 부친을 법정에로 떠밀었다는 내용이다. 모친이 세상뜨자마자 부친이 주책없게 자기보다 퍽 젊은 녀성한테 마음이 끌리여 늘그막의 재혼을 서두른데서 곧 들어올 계모가 이미 세상뜬 생모의 재산을 장차 많은 몫으로 차지할가봐 두려워 생모의 유산 즉 부모가 아껴쓰며 모은 돈으로 마련한 부동산의 일부분이라도 상속받으려고 자녀들이 선손을 써서 부친을 피고석에 내세웠다는 이야기다. 하긴 소식이 전해진후 다섯 불효자녀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과 질책이 끊임없었지만 법원은 여전히 법대로 불효자녀들의 승소를 인정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는 부친더러 3개월내에 8만원(부동산의 부분적가치)을 다섯 자녀에게 지불하도록 판결했다.         다른 한 뉴스는 우리 주변의 편벽한 시골에서 전해온것이다. 한 농촌마을의 안로인이 집에 할일도 없고 하니 소일삼아 젖은 명태를 말리우는 이웃의 일을 돕고저 그 집의 높은 다락에 명태를 걸다가 자신의 불찰로 떨어진데서 왼쪽 다리의 뼈가 골절되여 치료비 만원을 썼다. 일손을 도와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지만 자기 집 일을 성심스레 도와주려고 나섰다가 상한것을 두고 이웃은 너무나도 미안하여 인차 돈 만원에 보양품까지 사가지고 찾아가 년로한 로인한테 관심을 돌리지 못한것이 죄송하다면서  연신 사과했었다. 헌데 상했던 안로인의 자녀들은 돈을 정작 받고보니 어쩐지 속이 개운치 못했다. 하여 이웃의 일을 크게 돕지도 못하고 페만 끼친다는 마음에서, 또한 상한것은 본인의 탓이지 이웃의 허물이 아니라는 리유에서 그리고 이웃에 손실을 부담시키면 이웃간의 화목한 관계가 서먹서먹해진다는 생각에서 안로인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그 돈을 되돌리고 자원적으로 어머님의 치료비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동리사람들은 “이웃이 사촌보다 낫다더니 과연 이웃간의 정은 돈으로도 바꿀수 없는 귀한것이다.”고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인기를 끈 두편의 뉴스라기보다 희극적인 두 사회적극단의 일례라 하는 편이 나을것 같다.        조화로운 인간관계란 항상 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줄로 안다. 무슨 일에서나 먼저 남한테서 받자고만 한다면 조화로운 분위기가 열려질 길이 없다. 그러니 항상 인정스럽고 후한 마음을 가지고 남한테 돈독하게 베풀어주려는 마음을 앞세운다면 우리 주변은 너무나도 밝아진 세상으로 꾸며질것이 아닐가. 가령 명태를 말리우는 이웃에서 “자기절로 찾아와서 일하다가 상했으니  네탓이지 내탓이냐”는 격으로 모르는척 시치미를 따고 홱 돌아앉았다면 아무리 가까운 이웃사이라도 이 일이 어떻게 번져지게 되겠는지 누가 장담할수가 있으랴? 바로 남의 립장에 서서 남의 고충을 헤아려 돈 만원에 보양품까지 들고 주동적으로 찾으니 이웃집 자식들의 마음을 크게 울려준것이라 생각된다. 가령 안로인이 상한후 “강건너 불보듯”이 안로인의 치료비는 관계치도 않아서 이웃간에 정말로 치료비배상으로 인한 송사놀음을 벌려도 민법상의 “수익자배상원칙”에 의해 “명태집”에서 치료비를 얼마간이라도 배상하게 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한 가정의 자녀들은 법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자기의 합법적권리를 주장하고 쟁취하기 위하여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례의는 물론 인간정리, 육친의 정마저 내동댕이쳤다지만 다른 한 가정의 자녀들은 례의와 인정, “사촌보다 낫은” 이웃간의 정을 금같이 여기면서 그것을 보존할지언정 응당 향유하여야 할 합법적권리마저 서슴없이 포기하였다.        법치사회라고 해서 전민의 법제의식도 크게 높여주어야겠지만 사회생활에서의 필요한 례의들을 자각적으로 지키도록 전민의 도덕의식을 크게 틔워주는데도 큰 중시를 두고 이를 급선무로 내세워야 할것 같다.        가령 사람마다 사회적례의와 인정, 도덕, 공중리익은 팽개친대로 이른바 법률상에서의 자기의 합법적권익만 집요하게 추구한다면 이 사회는 장차 너무나도 숨막히는 진공상태가 되지 않을가 하는, 근심이 아닌 근심이 앞선다…
13    “지도자의 책임”이란 무엇일가? 댓글:  조회:3631  추천:4  2012-02-28
         개혁개방의 심화와 더불어 “지도자의 책임”이란 화제가 점차적으로 매스컴에 떠올라 뭇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있다. 공정한 립장에서 이른다면 제반 사회분야에서 “지도자의 책임”을 따지는것은 매우 기꺼운 일이라고 할수 있다. 일단 사고가 생겨도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없는데 비하여 지도자가 선뜻 나서서 책임을 고스란히 받아안으니 이를 두고 거대한 시대적진보라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최근 년간 “지도자의 책임”을 추궁한것과 관련한 많은 보도기사를 보노라면 어쩐지 개운치 못한 마음을 삭일수가 없다. 그도그럴것이 어느때부턴가 “지도자의 책임”의 진정한 의미가 색바래져가고있기때문이다.       설사 제1책임자에게 “지도자의 책임”을 안겼다 하지만 그 책임의 강도가 보통 너무도 낮아서 “옷을 입히고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격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닌상 싶다. 례하면 중대사고나 특대사고의 처리에 있어서 직접적책임자에 한해서는 흔히 수년의 징역살이를 판결하거나 지어는 사형에도 처하기도 하지만 “지도자의 책임”은 기껏해야 경고처분, 기과처분, 강직처분으로 끝내지 않으면 당적제명과 공직해직을 최고처벌기준으로 정해놓고있는 상황이다.       이보다 더 한심한것은 “원 사업부서에서 전근시킨다.”는것으로 “지도자의 책임”을 에때우는 경우도 가끔 있는것이다. 사업부서에서의 전근은 합법적인 행정행위로서 처벌수단으로 될수가 없다. 황차 공무원제도가 세워진후에는 강직전근도 모두 정상적인 행정관리조치의 범위에 속하기에 이를 두고 “지도자의 책임”을 추궁한것이라고 하는것은 추호의 근거도 없다고 느껴진다.       때문에 “지도자의 책임”과 관련한 문제를 자상히 밝히는것은 법치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매우 특수한 의의가 있다.       우선 “지도자의 책임”은 일종의 조직적인 책임이지 개인적인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지도자로서의 책임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언행에 대한 책임인것이 아니라 그가 인솔하는 전반 조직체에 대한 책임이라는것이다. 가령 한 지도일군이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에만 한해서 책임진다면 조직적책임은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자의 품행이 평소 빙청옥결의 경지를 보존하였다 할지라도 그가 이끌고있는 조직체의 문제가 엄중하다면 그 지도자는 책임을 밀어버릴수가 없다.       다음으로 “지도자의 책임”은 직접적책임자의 책임보다 더 무거워야 한다고 느껴진다. 그도 그럴것이 직접적책임자의 행위는 이 조직체행위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지도자는 전반 조직체에서의 모든 행위의 대표자로 지정되기때문이다. 한 기업에 있어서 무슨 일이 발생하였던간에 최종적책임은 이 기업의 법정대표인이 짊어져야 한다. 기업의 기타 인군들은 각종 조직적행위에 한해서 부분적인 책임을 걸머질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도자의 책임”이라면 1인자 즉 제1책임자가 짊어지는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의 해당 법률규정을 살펴보아도 이 점을 내세울 충분한 법적근거가 있다. 헌법이나 조직법에 비추어보아도 향진일 경우 향장책임제 또는 진장책임제가 통용되는거지 부향장책임제 또는 부진장책임제가 허용되지 않으며 현정부일 경우 현장책임제가 통용되는거지 부현장책임제가 허용되는것이 아니다. 상향하여 국무원일 경우라도 총리책임제가 통용되는거지 부총리책임제가 허용되지 않고있다. 정부의 제 분야도 모두 모두 부장책임제, 청장책임제, 국장책임제가 통용되는거지 부부장책임제, 부청장책임제, 부국장책임제가 허용되는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른바 “지도자의 책임”을 추궁함에 있어서 법률기준이나 실제상황에 비추어보더라도 제1책임자를 대상하여야지 부직을 끄집어내지 말아야 한다.       전국적인 특대사고의 처리에 있어서 모 부청장이나 모 부국장의 “지도자의 책임”을 추궁한다는 보도기사를 볼 때마다 저도모르게 부직을 가진 그들한테 동정심이 가는걸 어쩔수가 없다. “똥 진 오소리”의 신세라고 할가? 아니면 “남의 똥에 주저앉는다”고 할가? 아무튼 일단 특대사고가 나면 평소에는 한개 그룹의 “교량”이요, “윤활제”요, 집단의 내조들 잘하는 “가무댁”으로 사회적으로 높이 떠받들리던 2인자 즉 부직들한테 “지도자의 책임”을 가차없이 안겨주는 경우가 많으니 참으로 리해가 되지 않는다.        “지도자의 책임”을 아래로 내려보낸만큼 부직들은 왜서 그 책임을 더 아래로 내려보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그스란히 받아안을게 있냐고 걱정해주고싶기도 하였다. 성과가 있으면 제1책임자의 공로요, 문제가 생기면 부직의 과실이라니 억울한 감투를 뒤집어쓴것 같기도 하다. 부직한테 모든 “지도자의 책임”을 들씌우는것은 법적으로나 행정적규범으로나 인지상정의 견지에서나 사람들을 설복시킬 리유가 없다. 가령 부직자가 분관(分管) 또는 주관(主管)의 책임을 가졌다 하더라도 부직자는 분관책임 또는 주관책임을 추궁받을수는 있어도 “지도자의 책임”을 질 근거는 없다.       사회주의법치제도가 건전화됨에 따라 “지도자의 책임”의 무게가 직접적책임자의 책임보다 더 무겁고 부직이 더는 제1책임자를 대신하여 “지도자의 책임”을 지지 않을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가 서서히 확립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12    선량지심 항상 간직해야 댓글:  조회:2330  추천:0  2012-02-27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우리 매 사람들은 가정, 친척, 친지에 대한 책임과 자기 직무에 대한 책임으로 부터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에 이르기까지 제반 책임을 선뜻이 짊어지고 선량한 마음씨로 착실하게 책임과 관련한 제반 의무를 리행하지 않을수 없다.       책임감이란 무엇일가? 질환에 시달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해주면서도  환자의 마음까지도 편하게 하여 삶의 용기를 북돋어주는 의사, 학생을 자상히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학생들과 마음으로 호흡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면서 학생들의 창발정신을 키워주는 교원, 법절차에 어김없이 사건을 처리하지만 언제나 피고나 원고에게 법률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대도리를 깨우쳐주는 법관… 등등 우리 주변의 사회에는 그래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이런 책임감을 사람마다 꼭 참답게 짊어지도록 엄한 사회적제도나 법규로써 강요할수가 없다. 그러니 이 사회에 몸을 잠그고있는 매사람은 항상 타인과 사회, 나라에 대한 책임감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남을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간주하면서 남을 많이 배려해주는것과 같은 인간의로서의 량심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량심(良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글자풀이 그대로 선량지심(善良之心)으로서 국학시조인 공자어른이 주장했던“충서지심(忠恕之心)”즉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남을 너그럽게 대해주는것이라 할수 있다.        강희 14년 즉 1675에 가정(嘉定—오늘의 상해)의 지현(知县)으로 부임된 청나라의 관리 륙롱기(陆陇其)는 어느 한번은 해명하기 매우 어려운 살인사건을 처리하게 되였다. 사건경개는 이러하였다. 서씨 성을 가지 한 상인이 피살되였는데 그 가족에서는 살인자가 장씨 성을 가진 백정이라고 딱 잡아뗐다. 붙잡힌 장씨는 문초를 당하자 조상무덤자리로 인한 갈등으로 확실히 평소에 서씨가문과 척을 지고 지냈지만 살인만은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며칠사이 다른곳에서 며칠밤을 보낸 일까지 자상히 털어놓았다. 말하자면 오늘날 일컫는 알리바이 즉 현장부재를 증명하려는 타산이였다. 그런데 현장부재증명이 그를 괴롭힐지를 몰랐다.       타지방에서 며칠을 지냈음을 증명하려면 증인을 대야 한다는 륙롱기의 호령에 장백정은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어망중에 자기와 눈이 맞아서 간통관계로 재미를 본지 오랜 한 유부녀와 함께 지냈다고 실토정하고야 말았다. 말을 꺼내고보니 문제가 커져 장씨는 더없이 후회하였다. 하긴 당시의 사회에서 량가의 유부녀로서 외간남자와 간통한 사실이 들어난 날이면 그 죄책은 “하늘에 사무치고” “천추에 용서못할 일”이였다. 하여 하찮은 백정의 신분이였건만 장씨는 억울한 살인죄를 뒤집어쓰더라도 한 녀인을 불구덩이에 밀어넣지 않으려고 현장부재증명을 뒤엎고 여차여차하게 살인했다고 사건과정을 꾸미는 어려운 선택을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의 “천하 제1의 청렴관”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물망에 오른 륙롱기도 장씨보다 못지 않는 매우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골치거리가 생겼다. 그 당시의 법에 따르면 타인의 고발로 잡히운 범죄혐의자가 심문시에 벌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범행을 승인하기만 하면 전반 사건심리를 깨끗하게 종결지을수가 있었다. 장백정에게 억울한 루명을 씌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백정이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한 소행이니 륙롱기와는 무관하고 아무런 책임을 질 우려가 없어서 몸을 뺄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심리가 깊어질수록 륙롱기는 이 사건의 배후에 다른 살인흉수가 숨어있다는 예감이 파고들어 장백정을 잠시 풀어놓았다. 그런데 진짜흉수를 잡아낸다는것이 “삶은 개  눈빼기”로 매우 쉬운 일이 아니였다. 가령 진짜흉수를 인차 잡아내지 못하여 피해자가족에서 흉수를 감싼다고 관청에 고발하는 날이면 륙롱기는 자기의 봉직을 영 떼울수도 있었다. 그러나 륙롱기는 자기의 벼슬자리를 내놓더라도 량심을 어기고 무책임하게 처사하지 않으려는 결심을 가지고 끝내는 진짜흉수를 잡아내고야 말았다.       관직을 떼울 위험을 무릅쓰고 공정하게 사건처리를 한 륙롱기나 사회적으로 제일 천대받는 백정의 신분을 가졌음에도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자기와 정을 나눈 량가의 한 녀인을 배반하지 않았던 장씨(물론 장씨의 불륜을 찬미하려는 뜻은 아님—필자주)나 매우 어려운 선택을 서슴없이 할수 있은것은 모종의 엄한 사회제도나 법규의 위압감을 받아서가 아니라 타인,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인간의 량심을 앞세우려는 리념을 굳혔기때문이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 일단 개개인에게 매우 불리하고 시끄러우며 위험한 일에 봉착할 경우라면 인간의 본능적인 리기욕의 지배를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량심이든 책임감든 뒤전에 두고 남이야 불구뎅이에 빠지든 관계치도 않고 자기 안속부터 차리면서 살짝 발뺌을 하는이들을 가끔 불수가 있다.       량심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은 책임감을 두고 보잘것없는것으로 취급하여 구중천에 날려보낸지도 오래다. 따라서 이들은 조화로운 사회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무책임과 관련한 수많은 사회문제를 초래한다. 그러니 이들을 두고 잠재된 사회불안정요소로 지목하여도 분수에 넘치지는 않는다.  시장경제의 도전앞에서 량심이 도대체 몇푼어치의 값이나 가느냐 하고 희떠운 소리를 하는이들이 있다지만 량심을 저버리는자는 일전한푼의 값에도 미치지 못한다는것을 따금히 울려주고싶다.
11    현대판“남곽선생” 없애려면 댓글:  조회:2494  추천:3  2012-02-15
     전국시기 제나라에 아무런 재간도 없고 게으른데다가 진취심까지 없어 궁핍하게 지낸 남곽이란 서생이 있었는데 어느날 일자리를 얻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에게는 왕국악대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있었다. 제나라의 제선왕은 생황연주, 그것도 생황합주를 듣기 좋아하였다. 몇이나 여라문이 아니라 딱 300명이나 되는 악사들이 함께 생황을 불어제께야 된다는 국왕의 엄령이 떨어지자 악대를 책임진 벼슬아치는 악대의 인원이 그렇게 많지 못하여 수심에 잠겼다. 이러구러 악사들은 그러모았으나 연주하기로 지정된 기일이 바득바득 다가왔지만 꼭 한 사람이 모자랐다. 이 소문을 들은 남곽서생은 자기 친구에게 비라리청을 해 끝내 왕국악대에 들어가고야말았다. 그는 남의 어깨너머로 남들이 생황을 부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생황으로 얼굴의 하반부를 가리우고 머리를 흔들어대며 신나게 부는 시늉을 냈지만 워낙 생황을 불줄 모르므로 생황에 입김조차 불어넣지 않았다. 그가 하도 참답고 성수나게 부는 시늉을 잘 냈는지라 남들의 의심을 받지 않았다. 국왕을 위해 생황합주를 하는 시각이 되자 300명 악사들이 동시에 생황을 울렸다. 소리가 우렁차고 기세가 대단하여 온 왕궁이 찌렁찌렁 울렸다. 합주가 끝나자 국왕은 너무 기뻐 300명 악사들에게 진수성찬을 베풀었다. 남곽서생은 이때로부터 기타 악사들과 함께 먹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였고 호강스럽게 지낼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생황을 쥐여보지도 못한 사람이 생황연주가로 지목될수가 없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사회를 꼼꼼히 살펴보면 업무실력이 차하고 실적이 수수하지만 여전히 업무골간대오에 편입되여 후한 대우를 받는 현시대의 “남곽선생”들이 적지 않는줄로 안다. 그러나 오늘날의 “남곽선생”들은 옛날과 달리 남들의 눈을 속일 필요도 없거니와 남들도 “생황”을 불줄 모르는 그들을 두고 비난도 하지 않으며 지어는 그들에게 관심과 동정까지 베푸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지하다싶이 한개 단위 또는 그룹의 업무골간들은 언제나 소수이기마련이다. 이딸리아 경제학자 파레토에 의해 출범된 “20/80”법칙에 따라도 한 단위나 그룹에서 80%의 사업 실적이나 성과는 언제든지 20%  좌우의 중점업무골간들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다. 때문에 여러 층차 일군들의 적극성과 창발성을 동원하여 사회적재부라는 이 “단설기”도 큼직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를 합리하게 나누자면 상기 20%의 중점업무골간의 범위를 정확하게 확정하는것이 급선무가 아닐수 없다. 물론 관건적인 항목의 연구와 완성에서 뛰여난 실적을 올린 업무골간 또는 보조적역할을 한 일군 지어는 아무런 실적을 따내지 못한 일군이라 할지라도 저마끔 자기의 리익을 최대화시키려는 욕망을 갖기마련이기때문에 20%의 범위를 확정한다는것은 지도일군들에게 있어서 난제가 아닐수 없다.      한 지도일군으로서 가령 상기 제 군체의 리익을 골고루 돌보아주느라면 자연히 다수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수가 없다. 사실 우리의 일부 지도일군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소수를 다수에 복종시키는” 사업원칙에 관습되다보니 또한 한개 그룹의 내부균형조절에 지나친 신경을 쓰다보니 자연히 우리 말 속담의 “어른도 한그릇 아이도 한그릇”이라는 평균적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경우가 많다. 한개 단위나 그룹에서 이와 같은 사업메커니즘이 오랜 시간을 두고 굳어진다면 특출한 인재들이 “억울함”을 느끼게 되고 또한 평범한 일군들마저 도리여 중점항목을 뛰여나게 완성한 업무골간들이 남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가 하여 늘 시샘심리를 가지고 살피며 나아가서는 사업실적이 수수한 사람도 업무골간대오에 편입될수도 있고 뛰여난 업무골간들이건만 간혹 20%의 밖으로 밀려나갈수도 있다. 때문에 어느 분야에서든지 우리 지도일군들은 항상 중점과 일반의 관계를 옳바른 위치에 놓고 처리하여야 한다.      우선 단순한 인상 또는 경력, 사업년한 등에 비추어 업무골간범위를 확정하는것을 가급적으로 피면하고 사업의 성과, 실적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반영된 중점인물을 포착하는데 치중점을 두어야 한다. 실력, 실적 특히는 창의성예비력이 부족함을 번연히 알면서도 내부균형 또는 “전반적국면”을 돌보아 “알묘조장(揠苗助长)”의 방법으로 명실불부의 중점을 억지로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난쟁이속에서 장군을 뽑을수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부득이한 응급지책에 지나지 않는것으로서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간다면 장군은 몽땅 난쟁이가 되여버리고말것이다.      다음으로 중점의 일반화, 확대화를 꼭 막아야 한다. 한 단위, 한 그룹에 있어서 많은 일군들을 대상하여 중점으로 내세운다는 자체가 기실 중점을 취소해버리는거나 다름없다. 중점을 부추겨줌에 있어서 그 범위를 일정한 비례에 국한시키는것이 매우 간단한 도리지만 이를 항상 념두에 두지 않을 경우 재능도 없이 끼여들어 악사의 수자만 채운 남곽서생의 현대판이야기가 진짜로 재현될수 있다. (연변인민출판사 주임편집)  
10    “개인주의”와 “인민” 그리고 댓글:  조회:2840  추천:4  2012-01-11
                                                         “개인주의”와 “인민” 그리고                                                                                                                        사전의 올림말 해석에 따르면 개인주의란 사회적, 집단적인것보다 개인적, 리기적인것을 앞에 내세우며 사회와 집단의 리익을 개인의 리익에 복종시키려는 부르죠아사상이나 그 경향이라고 일컫고있다. 그러하기에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개인을 조금도 서슴없이 희생시키더라도 집단을 우선적으로, 절대적으로 내세우는것을 철같은 원칙으로 엄하게 지켜오면서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추풍이 락엽을 쓸듯이 호되게 답새겨온줄로 안다..       위인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든 사람들의 자유발전의 조건으로 된다”는 위대한 론단을 우리에게 남겨놓았다. 이 론단을 두고 “개인주의선언”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상싶다. 맑스주의학설에 따르면 집단의 발전은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떠나서는 이루어질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장기간 전통적인 관념에 관습되여 개인적인것이라면 무작정 개인주의라고 호되게 비판해온데서 개인주의를 리기주의의 쌍둥이로, 동의어로 착각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전통적인 정치적시야보다도 새로운 시각에서 개인주의를 새롭게 평판하고 분석하여야 할 때가 왔지 않았는가싶기도 하다. 리기주의는 타인을 배척하고 타인의 리익을 해치면서 자기중심을 내세우지만 개인주의는 타인의 개인적본위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량자가 크게 구별된다는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공통한 견해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집단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집단을 하늘처럼 떠받들어왔다. 바로 이와 같은 집단주의기치를 높이 추켜든 상황에서 개인의 모든것은 리유가 정정당당하게 침해당하고 박탈당할수가 있었다. 따라서 사람마다 “나사못”정신을 가지고 큰 병을 지니더라도 출근하며 지어는 일터에서 영영 쓰러지더라도 집단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해야만 선진일군, 선진생산자로 인정받을수 있었다. 이와 같은 범집단주의의 리념으로 말미암아 페기 또는 무가치의 집단재산일지언정 이를 건져내기 위해서 마구 사품치는 큰물이나 홍수 또는 불바다에도 서슴지 않고 뛰여들었다가 귀중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인줄로 알고있다. 집단을 상대한 개인적인것은 생명을 망라하여 너무도 보잘것없는것으로 취급되였다는 얘기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구호를 수십년동안 불러왔지만 복무대상에 대한 선택에서 오리무중에 빠질 때가 적지 않았다. 한것은 여기서 “인민”이란 개념은 집합적개념으로서 어느 개인을 상대하여 제기되지 않았기때문이다. 기실 인민이란 개념은 국가, 정부의 대용어로 사용된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개인이든지 “인민”범주에 귀속될수가 없기에 어느 한 개인을 위해 복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왔다. 따라서 전 인류를 구제하는것은 매우 쉬운 일로 간주되였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어느 한 구체적대상을 구제하기는 매우 어려울 때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가장 광범한 인민 리익을 대표하여야 한다”고 평소 크게 웨쳤지만 발해만이란 근해에서 해상조난을 당한 “대순호(大舜号)”려객선마저 제때에 구조할수가 없어서 282명의 려객이 목숨을 잃었다. 해당 부문에서 구조신호를 받은 이틀후에야 구조작업에 나섰다고 하는데 모종의 의미에서 말한다면 “대순호”에 대한 적시적인 구조작업을 하지 못한것은 범집단주의에 관습된 해당 부문의 사업작풍의 페단이 아닐수 없다.       개인을 위해 복무한다는 의식이 크게 결여되고있기에 기능부문에서도 복무대상개념을 확고히 수립하지 못하고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대정치”는 항상 앞세웠지만 어느 한 납세인을 위해 복무한다는 “소의식”은 공백이나 다름없다. 큰길이나 공공장소에서 “법에 의해 납세하는것은 공민의 신성한 의무이다”는 큼직한 선전간판은 쉽사리 볼수 있어도 “납세인의 합법적권리를 보호하는것은 정부의 의무이다”와 같은 표어는 구경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오랜 시간을 두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기치를 높이 추켜들었어도 “인민”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추상적이여서 인민복무는 구체적대상을 잃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인민”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물론 최근에 와서는 제 분야마다 “인간본위”의 원칙을 앞세운다지만 여기서의 “인간”도 여전히 애매하고 추상적인 인간이지 살아숨쉬는 구체적인간이 아닌상싶다. 매우 간단한 일례로 당금 쓰러질 환자라고 해도 병원에 가면 반드시 진찰권수속(挂号), 값매기기(划价), 진찰(门诊), 화학검사(化验), 수금납부(交费) 등등의 많은 수속을 하면서 병원의 구석구석을 누비지 않으면 안된다. 이뿐이 아니다. 일부 도시에 가보면 밖에서 눈이 내리거나 비가 퍼붓거나 혹은 혹한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있건만 공공뻐스운전수들은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데 취지를 둔 “엄격한 규정제도”를 철같이 지키면서 시발시간이 되지 않는 한 절대로 문을 열어줄념을 하지 않는다. 공동변소라고 큼직한 이름은 박았건만 관리의 편리를 위해서 관리일군만 퇴근하면 열쇠를 꽁꽁 잠가놓기도 한다.       우리는 평소 사업에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나 가장 광범한 인민 리익을 대표하나 항상 “인민”이란 개념을 어느 한 구체적대상에 두어야 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 또 하나의 개체적이고 개별적이며 개인적인 대상에 대한 복무를 통하여서만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신성한 의무를 완벽하게 리행할수 있다는 새로운 사업모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9    련쇄반응 신론 댓글:  조회:6608  추천:2  2011-12-21
       련쇄반응은 순 화학술어이지만 우리의 사회생활에서도 련쇄반응과 비슷한 사항들이 가끔 나타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 때가 있다.       명나라 말기에 관외(关外)의 녀진족이 관내로 침입하면서 나라의 안정에 매우 큰 위협을 주게 되자 이 강대한 적을 대처하기 위해 숭정황제는 내내 가슴앓이를 하였다. 우선 녀진족을 물리치자면 대전역을 벌려야 했는데 엄청난 군비와 군량을 당분간 마련할래야 할수가 없었다. 이 긴요한 고비에 환관(宦官)이 나서서 현역에 복무하고있는 역졸(驿卒) 30만명을 축감하면 은 50만냥을 절약할수 있어서 국고의 궁핍한 상황을 풀수 있지 않느냐는 주견을 내놓자 숭정황제는 훌륭한 지모책이라고 쾌히 이를 받아들이였다. 그리하여 30만명의 역졸들이 “정리실업”을 당하였는데 이들속에는 후에 천하를 뒤흔들었던 리자성도 들어있었다.        실업당한 역졸 대부분이 세습받은 병사들이였다. 명나라때에는 병사직에 대하여 세습제를 실시하였기에 일단 병사직만 가지면 대대손손 이 직을 이어받을수 있어 땅을 붙이지 않고도 군인의 봉록으로 가정을 영위할수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오늘처럼 정리실업을 당한후 인차 “재취업”을 할 경로가 없었기에 30만명의 역졸들은 류랑민으로 나앉지 않으면 안되였다. 헌데 한뉘 인생 집을 나서지 못하고 땅만 붙여온 보통 농민들과 달리 실업당한 역졸들은 평소 남북으로 전전하면서 보고들은것이 많다보니 사회를 보는 시야도 퍽 넓었다. 그러하였기에 이들은 년년의 가물재해로 고생에 허덕이던 농민들을 인차 묶어세워 농민봉기를 일으킬수 있는 핵심적력량으로 될수가 있었다. 결과 숭정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리자성을 위수로 하는 역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득이 당년에 수십만 역졸들을 “정리실업”시켜 절약하였던 군비의 몇배 지어는 몇십배나 되는 거액의 자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안되였는다. 이뿐이 아니다. 이로 인하여 숭정황제는 나중에 한개 왕조를 멸망시킨 거대한 대가를 치렀다.        력사적 교훈과 경험은 흔히 오늘날 사회생활의 문제점을 바로잡음에 있어서의 훌륭한 귀감으로 될수 있다. 오늘날 공정한 립장에서 따져보아도 녀진족을 막기 위한 군비해결을 위해 당시 환관의 주견을 받아들인 숭정황제의 결책이 완전히 그릇된것이라기보다 적절하고 적시적인 응급지책이라고 할수 있다. 문제의 관건은 그 어떤 옳바른 결책을 내리든간에 필연코 그에 따르는 련쇄반응에 대해서 숭정왕이 예견하지 못한데 있다. 녀진족침입을 막기 위한, 군비 50만냥을 마련하는 결책때문에 농민봉기 수령 리자성이 뛰쳐나와 명나라를 뒤엎어줄은 숭정황제로서는 예견할수 없었다. 아무리 영명하고 적시적이고 능률적인 결책이라고 하여도 눈앞에 닥친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할수는 있어도 예견치 못한 부정적효과가 동시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최근 우리의 GNP(국민생산총액)는 대폭적으로 장성되였다지만 지불한 대가는 엄청난것이다. 그러하기에 일부 사람들은 GNP를 두고 “국민오염총액” 또는 “자연자원훼멸총액”이라고 풍자적으로 비판하고있다. 일부 지방의 각급 정부는 여전히 전통적인 관리모식에 관습되여 GNP의 수치를 가지고 자체의 관리수준여하를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있었기에 수출액을 높일수 있는 대상이라면 과학적론증이 없이 후과를 고려하지도 않고 대생산의 결책을 하루 아침새에 결정한다. 1회용저가락생산이 그 일례로 된다. 삼림피복률이 69%나 되는 일본이건만 1회용저가락의 국내생산에 흥미를 가지지 않고 삼림피복률이 13%밖에 안되는 중국에서의 수입에 장기간 의거하여 국내수요를 충족하였다. 중국은 1998년에 450억모의 1회용저가락을 생산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166만립방메터의 원목을 소모하였다. 그해에 일본과 한국에 수출한 1회용저가락만 해도 140억모나 된다고 한다. 2000년에 갑자기 닥친, 유사이래 보기드문 황사바람(沙尘暴)의 피해를 받고서야 사람들은 실책의 엄중성을 느끼고 원래의 결책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큰 결책의 련쇄반응에만 중시를 둘뿐아니라 세부적인 결책 례하면 도시건설과 관련한 일부 간단한 방안을 내옴에 있어서 도시의 가로수 한대를 베여버린다 할지라도, 자연늪 한개를 메워버린다 할지라도 기정결책을 집행하는데만 집착하지 말고 인문적, 력사적 인자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형상을 흐리울수 있는 부정적효과가 생길수 있다는 점을 항상 념두에 두고 다시 한번 기정결책을 자상히 검토하는것이 바람하다고 느껴진다. 작은 결책이라도 일단 부정적효과가 생기여 그에 따르는 류사한 반응이 사슬처럼 되풀이되여 일어나는 때면 그 후과를 수습하기 어렵다.         이름난 과학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북경의 하늘에서 나비 한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면 그 다음날 이로 인하여 뉴욕에 폭풍이 일어날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는 복잡다단한 요소에 의해 일어나는 련쇄반응을 형상적으로 비유한 명구라고 생각된다.   
8    “생태환경문제” 단상 댓글:  조회:4769  추천:2  2011-11-30
        “생태”란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를 일컫는것인데 자연법칙에 따른다면 문제점으로 지목될 리유가 없고 골치 아픈 일로 수많은 사람들의 물망에 오를 까닭이 없다.         곰곰히 따져보면 기실 “생태환경문제”는 인간을 본위로, 중심으로 한 사회적견지에서 제기된것이 틀림없다. 주지 하다싶이 자연계는 인류의 출현으로 하여 존재하게 된것이 아니다. 자연계는 인류를 떠나서 자체의 당당한 존재의 리유를 갖고있다. 가령 인류가 지구촌에서 생기지 않는 상황이라 하여도 물질로 이루어진 자연계는 어떻게 변천되였던간에 자연발생적이고 합법칙적인 경위를 갖게 되기에 문제점을 초래할수가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 일컫는, 자연계에서 발생되는 “재해”란 인간의 생존을 상대하여 제기된것이다. 가령 지구촌에 우리 인류만 없다면 아무리 큰 지진이라 할지라도 말하자면 미진, 경진, 약진, 중진, 강진, 열진, 격진중 진도계급이 제일 높은 격진이 발생하였다 할지라도 또한 백년일우의 특대 홍수나 가뭄이 닥쳤다 할지라도 이런것들은 퍽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다가도 자연스럽게 물러가게 되기에 그 어떤 문제를 초래할수가 없다. 여기서 볼수 있다싶이 “생태환경문제”의 개념은 매우 짙은 속인성(属人性)을 띠고있는것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생태환경문제”의 개념을 적절하게 해석하자면 “인류생존에 불리하거나 또는 해를 끼치는 생태환경문제”라고 길게 풀이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싶기도 하다.        자연계는 본래 인류에게 매우 훌륭한 생존환경을 마련해주었었다. 끝없이 펼쳐진 맑고 파아란 하늘, 계곡 사이로 잔주름잡으며 도란도란 흘러가는 푸른 물, 거울같이 맑은 호수, 살진 잉어들이 유유하게 헤염치는 못, 개끗하고 청신한 공기, 들판을 푸르게 누비는 싱그러운 록음의 대지, 꽃이 피고 새가 우짖는 자연풍치, 그 속에서 한가로이 새김질하면서 노니는 동물들… 이와 같은 자연그대로의 화폭이 시야 한가득 인류앞에 펼쳐질 때가 없은것이 아니다. 그러나 환경과 자원을 부당하게 개발, 리용하고 생태권에 대량의 페기물을 배출하였거나 진귀, 멸종직면 야생동식물을 씨까지 없애버릴 정도로 포살, 채집하여 고로한 생물사슬을 끊어놓는 행위를 꺼림낌없이 수행한것으로 하여 오늘의 생태는 인류와 척을 진 사이로 되였다.        수년전 우리 주변에서 발생한 생태환경오염사건을 돌이켜본다.  2005년 11월 13일 송화강 상류에 위치한 길림석유화학공업회사 산하의 벤졸공장(双苯厂) 당직직원이 발브관리작업에서 태만함으로 하여 특대폭발사고가 발생하여 8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당하였을뿐만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벤졸, 아미노벤졸, 니트로벤졸, 디메틸벤졸 등 화학제품들이 송화강에 흘러들어 길림시, 송원시, 할빈시 등 송화강연안의 도시들에서 수일간 식수공급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또한 오염물은 나중에 로씨야경내에까지 흘러든데서 나라의 망신이건만 중국정부는 부득이 로씨야에 심심한 사과를 올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인위적인 생태파괴, 환경오염 사건은 기수부지여서 일일이 렬거하기 어렵다. 그러하기 “생태환경문제”를 두고 우리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말하자면 “생태환경문제”를  인류의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생활방식을 개변하는 문제, 후손들에게 생존공간을 마련해주는 문제, 간단없이 장성하는 GDP의 통계수치를 요구하느냐 아니면 인류의 건강에 유조한 자연환경을 가꾸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여건을 마련하느냐 하는 문제의 높이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된다.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는 인류와 자연간의 모순을 처리함에 있어서 “인간이 하늘을 꼭 전승할수 있다.”는 리념을 시종 앞세우고 자연과의 대결에서 인류는 언제든지 새로운 발명, 창조의 기적을 올리면서 인류의 발전을 막는 모든 애로를 척척 풀어나갈수 있다고 믿어왔었다. 뿐만아니라 지구촌의 에너지자원을 깡그리 소모할지라도 새로운 에너지대체물을 만들어낼수 있고 나아가서는 지구촌에서 더는 생존할수 없다 하더라도 우주의 다른 혹성에 이주하여 인류의 행복한 생활을 계속 누릴수 있다는 신심에 벅차있기도 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비리성적인 락관주의를 기초로한 유토피아와 같은 신화를 엮는다는것은 “독장사구구”의 격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가 아무리 자유자재로 능동성을 발휘할수 있다고 해도 또한 과학기술의 일진월보의 발전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인류가 닥치게 되는 모든 문제를 척척 풀어나갈수 있다고 들떠있지 말아야 한다. 황차 그 어떤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할지라도 그 와중에 또 새로운 문제들이 로출될수 있다는 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우선 관념상 우리는 무제한적인 경제장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도 그럴것이 지구상의 자원은 제한되였기에 물질재부에 대한 인류의 점유욕과 향수욕도 상응하게 절제되여야 하기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무엇이든 다 개발하고 무엇이든 다 리용하려는 전통적인 생산방식에서 해탈되여야 한다. 더우기는 무엇이든 다 향수하려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량심과 리성마저 서슴없이 저버리는 생활방식은 꼭 개변하여야 한다.        우리 옛선조들도 아름다운 산수풍경을 선호하여왔었다. 하기에 우리 말 속담에  “가을물은 소발자국에 고인 물도 먹는다”고 했다. 산 좋고 물 맑았던 때의 옛이야기인것 같다.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금수강산, 우리도 후손들에게 이를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신성한 책임감을 짊어지지 않을수가 없다. .  
7    “3농”문제 재론 댓글:  조회:3206  추천:1  2011-10-09
        최근년간 농민문제는 “3농”문제의 핵심이고 농업문제는 “3농”문제의 관건이며 농촌문제는 “3농”문제의 집중적구현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많아지고있다. 그 뜻인 즉 “3농”문제는 서로간 매우 밀접한 련관을 갖고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3농”문제의 관계를 리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여러 층차로 심오하게 연구, 분석한다 할지라도 결국엔 농민이 농촌사회의 주체이자 주인이고 또한 “3농”문제의 당사자, 감당자라는 점만은 의심할바가 없다. 황차 농업문제와 농촌문제의 해결도 궁극적으로는 농민문제의 해결에 말하자면 농민들로 하여금 빈곤과 고생의 기반에서 영원히 해탈되여 인격과 존엄을 가지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누리도록 하는데 취지를 두고있으니 농민문제를 “3농”문제의 핵심으로 내세우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느껴진다.        사실 곰곰히 따져보면 “3농”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되지 말아야 한다고 느껴진다. 뿐만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절대로 농민들한테 돌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농업은 국민경제의 제1차산업이고 농촌은 지역적개념을 의미하는데다가 농민은 농촌이라는 곳에서 농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군체이기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의 창시자로 명망이 높았던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는 “로동은 재부의 아버지요, 토지는 재부의 어머니다”는 명언을 남긴적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스러운 로동과 비옥한 토지의 결합이 도리여 우리 농민들한테 장기간 빈곤을 안겨주었으니 이를 두고 무작정 농민들이 빚어낸 문제라고 힐난하는것은 너무나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을수 없다. “3농”문제을 자상히 따져보면 우리 나라의 복잡한 국정이 반영되고있거니와 우리 나라 사회구조에 존재하는 문제점도 투시되고있다. “3농”문제을 직관시하면서 우리는 공업화, 도시화 및 현대화의 건설행정에서의 사회적 공평 및 정의(正义)에 대한 기본적기준을 새롭게 잡기 위한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수 없다.         13억 인구를 가진 우리 나라에 있어서 5억의 인구가 도시생활을 누리고 7억의 인구가 농촌생활을 어렵게 영위하고있다. 광활한 농촌의 존재는 우리 나라의 기본국정으로 지정된지 오래다. 인류의 거주지력사를 살펴보아도 농촌은 예로부터 있은것은 물론 도시자체도 농촌에서 기원된것임은 조금도 의심할바가 없다. 바로 사회적분업, 생산력의 발전, 물질의 교환과 무역, 인구의 류동, 자본의 축적, 과학기술의 발전, 통치정권의 수요 등등의 요소가 도시 및 도시문명의 도래를 촉구하였을뿐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도시는 통치자, 결책자 및 각 분야의 영재들이 운집한 곳으로 와짝와짝 붐기고있는 상황이다.         문제의 관건은 가령 도시가 진정 농촌을 내동댕이치고 홀로 번화하고 아름다운 안식처로 뜰수 있을가 하는것이다. 사실 도시와 농촌은 지역상거리에 의해 상대적으로 독립되여있는상 싶지만 량자는 고유한 내재적련관과 의존, 상호추진의 사이로 어느 일방도 타방을 떠날수가 없다.        주지하다싶이 혁명전쟁년대의 공농무장할거의 혁명모식을 실시할 때거나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실행할 때거나를 막론하고 중국의 농민들은 모두 거대한 기여를 하여왔다. 중화인민공화국창립후에는 공평하지 못한 공업품과 농산물의 부등가교환이 시행되고 세계적으로도 매우 엄격한 호적제도가 실시된 상황에서도 우리 농민들은 아무런 타발이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중화민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생존수단(生存手段)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20세기 70년대말, 8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농호별생산량책임제”에 발벗고 나서 우리 나라 사회변혁의 첫불을 지피여 풍족한 알곡과 품종이 다양한 농부산물을 생산함으로써 향후의 시장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에 사업에 튼튼한 물질적담보를 제공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중국의 농민들은 참으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농민들로서 착한 마음씨에 순박하고 어진 성미로 갖은 고생을 소리없이 겪으면서 맡은바 일에 몸을 바쳐가고있는 군체임을 온 사회, 온 나라가 인정해주지 않을수가 없다.         농민문제에 있어서 관건은 농민들이 빈곤한것이다. 농민들이 왜서 빈곤하냐 하고 물으면 혹자는 소농경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민들 자체의 문제이지 전반 사회 또는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고 희떠운 소리를 하는분들도 있을것이다. 특수한 력사시기에 실시되였던, 농민들에 대한 불공평과 차별시를 적라하게 보여준 나라의 각종 정책법규가 농민들을 변연화(边缘化), 약세화의 군체에서 맴돌도록 눌러놓았기에 광범한 농민들은 도시의 시민들과 공동으로 국민의 대우를 받을수가 없어서 빈곤의 상태에서 허덕이였다는 점은 모든 우리 모두가 기억해둘바이다.        수위가 높은 정언(政言)이라고 하여도 “3농”문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몇마디로 재삼 개괄하고 싶다. 농업의 발전이 없이는 전반 국민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질수 없고 농업의 현대화가 없이는 전반 사회의 현대화를 운운할 여지도 없으며 농촌의 안정이 없이는 전번 국가의 안정이 마련될수 없고 농촌의 발전이 없이는 전반 사회의 발전은 공담에 지나지 않으며 농민의 초요생활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전국의 초요생활을 실현할수가 없고 농민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고서는 전반 사회의 만족도를 유지할수가 없다.    
6    “화이트”의 곤혹 댓글:  조회:2692  추천:2  2011-09-14
                                   “화이트”의 곤혹                                                            리명근      일전에 친구아들의 결혼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산듯하고 눈부신 하얀 셔츠에다 고급넥타이까지 받친 양복차림을 한 점잖은분으로부터 덥석 손을 잡아주는 인사를 받고 멍하던 와중에 한참 기억을 더듬어서야 20여년전 국영기업이 파산되면서 막벌이로 고생하던 이웃임을 알아보게 되였다. 어렵게 지내는 이웃을 돕고저 한번은 단위의 총무과 과장을 꼬드겨 단위의 차고를 증축하는 자그만한 일감을 그한테 청부하도록 알선해준것을 잊지 않고 반기는줄로 알고 제나름대로 반갑게 인사를 받으면서 롱을 걸었다.       “인젠 따궁(打工)신세를 영 벗어낫겠지?”       롱담조가 분명한데 옛 이웃은 인차 얼굴이 지지벌개나더니 거칠게 한마디 내쏘는것이였다.       “따궁같은 말을 하지도 마오. 빠이링(白领)생활을 한지도 십여년이 넘는다니!”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어깨를 으쓱하면서 배포가 유하게 늘쩡늘쩡 결혼잔치석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내 롱담이 지나쳤을가?. 아마도 그전날의 막벌이삶을 두고 이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면 치욕으로까지 느끼고있는상 싶었다.       “빠이링(白领)”은 우리 말로 옮겨놓으면 “사무직” 또는 “화이트(칼라)”로 일컫는다. 근년에 사회적으로도 “화이트”와 관련한 화제들이 본의를 떠나서 너무도 많이 거론된줄로 안다. 말하자면 “화이트족”에 이르자면 천문수자의 년로임에 호화로운 자가용은 물론 우아한 기품을 가진 별장까지 갖추고 매일 으늑한 정취가 흐르는 바에서 식사하는것… 등등의 “화이트”적격기준이 적지 않은 사람들의 심목에 굳어진상 싶다. 그러나 이처럼 “화이트”의 소비수준, 소득정도거나 생활양식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있는 사람들은 매우 많지만 도대체 “화이트”란 무슨 재간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분들이냐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갖고있는것 같지 않다. 따라서 옛 이웃을 망라한 많은 사람들은 “화이트”의 개념을 두고 현대인들의 선진적이고 고급적인 생활방식의 일종으로 리해하고있는게 분명하다.      가령 고로임계층의 기준으로 “화이트”를 규정한다면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높고 로임도 괜찮다는 대학교 교수라 할지라도 진정 화이트의 문턱을 넘어설 사람은 매우 희소할것이다. 기업분야라고 할지라도 상장한 대회사의 “로쭝(老总)”부류에 휩쓸려야만 명실상부한 화이트로 인정받을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과소비계층, 과소득계층의 기준으로 화이트를 점명한다면 주식투기매매시장에서 한번의 기회를 다잡고 일조일석에 수백만, 수천만원을 딴 “벼락부자”도 “화이트”의 적임자로 점찍을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나 아랍추장국련방의 왕자일 경우라면 “화이트”의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라고 해도 분수에 넘치지는 않을것이다. 경제개발정책의 힘을 입어 토지가 징용되여 고액의 징용비용을 받고 향후의 로후생활까지 담보되여 고급아빠트에서 여유작작한 삶을 꿈처럼 황홀하게 꾸미고있는 대도시주변의 농민들도 실로 화이트와 같은 생활을 누리고있어 정녕 화이트행렬에 보무당당히 들어섰지 않을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을 “화이트족”이라고 긍정할수 있을가?      기실 “화이트칼라”란 업무를 수행할 때 신사복(흰색 셔츠)과 넥타이를 입은데서 비롯된 용어로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육체로동을 주로하는 “블루칼라(蓝领)”에 대응된다. 그러하기에 “화이트”와 “블루”의 구별은 근근히 사업성격의 차이에서 생길뿐이다. 량자의 수입을 따져볼 경우 “화이트”의 로임이 꼭 “블루”보다 높은것은 아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있어서 일부 트럭운전수들의 소득은 대학교의 일부 교수들보다도 높아서 생활도 교수들보다 못지 않게 윤택한 삶을 누리고있다고 한다. 그러나 트럭운전수는 “화이트”가 아니라 알짜배기 “블루”이다. 그러나 그들은 “화이트”보다 사회적신분이 떨어졌다는 자비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열심히 자기 삶을 엮고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화이트”나 “블루”를 대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 즉 “화이트”이든 “블루”이든 모두 자기의 신근한 로동으로 밥을 벌어먹고있다는 점이 망각되고있다. 대학교 교수가 밤을 패면서 과학적론증과 철리가 담긴 훌륭한 론문을 내놓는거나 농민이 일년사시절 비지땀을 흘리면서 알뜰히 농사하여 무공해쌀을 시장에 내놓는거나 모두 그들의 알찬 로동의 결실이 아닐수 없다. 물론 교수의 생활방식과 농민의 생활방식에는 구별이 있다지만 이런 차이점은 직업성격에 의한것이지 인격이나 신분의 고상여부에 의해 규정된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화이트”와 “블루”를 두고 흔히 사회적신분의 구분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화이트”를 단순히 특권적신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대명사로만 간주한다면 이런 “화이트”는 위진남북조시기의 “사족(士族)”과 같은 무위도식(无为徒食)의 벼슬아치들이나 청나라의 “팔기제자(八旗子弟)”와 같은 건달배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사회의 흐름을 주도함에 있어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날이면 우리의 사회는 인격평등의 리념을 앞세운 시대발전의 요구와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져갈것이다.      현대화하고 문명한 사회는 부자만이 판을 치는 사회가 아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물질적 및 문화적 수준이 높을수록 인간의 자유와 독립적인격이 보장되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등관계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굳어진다. 물론 정신로동자를 일컫는 “화이트”를 사회발전을 추진함에 있어서의 중견력량으로 지목하여 그 힘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동원시키는것은 과학적발전관의 리념에는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를 신분이 높고 특권이 있는 우위적인 계층으로 내세우는 날이면 우리 사회는 우리 말 속담에 이른 그대로 “한솥의 밥먹고 송사가는” 격이나“오추(五驺)에 다리를 드는” 격이 되여 결집력이라곤 없이 불안정상태에서 곤혹을 치를것이다.  
5    구멍은 깎을수록 커지나니 댓글:  조회:2936  추천:1  2011-08-18
       오늘날 우리 주변사회를 자상히 살펴보노라면 만가지의 리유를 척척 내놓을 지언정 하나의 오유라도 집요하게 승인하지 않는거나 이를 덮어감추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줄로 안다. 사실 오유를 승인하지 않거나 숨긴다는 자체가 향후 더 큰 우환을 빚어낸다는 대도리는 모를 사람이 없을것이다. 문제는 당분간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거나 긴장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재치있는 수완으로 오유를 슬쩍 감추는 사업작풍이 항다반사의 일로 취급되고있으니 일종의 사회적페단이 아닐수 없다는 얘기다.       개원 2년 즉 기원 714년의 2월에 대당왕조의 태사(太史)가 엄중한 오유를 범한적이 있었다. 본래 예측하였던 날에 일식이 생긴다고 통보하고는 일식을 구경하기에 알맞춤한 명소에다 황제 당현종까지 정중히 모셨다. 그런데 웬걸 한나절이나 지났건만 관측의기에 고장이 생겼는지 아니면 계산에서 오차를 빚어냈는지 태양은 시종 모양새가 변할줄 모르고 동그란 모습을 자랑하면서 중천에 떠있었다. 오늘날의 경우라면 책임사고쯤 취급하고 스쳐버리면 별문제이겠지만 당시에 있어서는 특대사고가 아니면 “황제모독죄”로 해당 관리들의 목이 썩뚝 잘리울 소름이 끼칠 일이였다. 두 눈섶까지 이그러진 황제의 앞에서 질겁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던중 재상이였던 요숭(姚崇)이 당황한 와중에 그래도 난처한 국면을 수습할수 있는 묘수가 피뜩 떠올랐다. 그는 인차 다음과 같은 허위적인 조서를 꾸며서 황제에게 올리였다.        “황제의 영명하고 옳바른 선정(善政)이 하느님을 감동시켰기에 본래 오늘 나타나야 할, 하늘의 꾸짖음(天谴)을 상징하는 일식마저 사라져버렸으니 과시 대덕대성(大德大圣)하오나이다. 황제께서 하늘을 정복한 기적적인 이 사연을 소인은 사책에 기록하여 후세에 널리 전함으로써 후인들이 황제의 영명과 위대함을 알도록 하리옵니다.”        꾸며낸 조서를 받아 본 황제 당현종은 흡족한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자리를 떴다. 눈치 빠른 재주로 허물을 제꺽 좋은 일로 돌려붙인 요숭의 처사를 두고 우리는 웃음으로 스쳐버릴것이 아니라 심사숙고의 과제를 풀어야 한다.        지금 적지 않은 단위들에서는 상급에 사업회보를 하거나 사업총화를 할 때면 쌓은 성적에 대하여서는 매우 전면적이고 상세하게 피력하지만 존재하는 문제를 언급할 때는 “객관적원인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우리 사업에는 일부 부족점들이 있다.”는 식의 공식적인 말로써 간단하게 스쳐버린다. 말하자면 “객관적원인”이 사업에 존재하는 문제를, 지어는 엄중한 오유까지 덮어감쌈에 있어서의 관용어로 굳어진지가 매우 오래다.        어느 분야의 사업이든간에 아무리 열심히, 까근히 한다고 하여도 완전무결하게 마무리지을수는 없는바 꼭 일부 문제나 부족점들이 나타나기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사업상의 허물을 적시적으로 실사구시하게 총화하거나 상급에 반영하는것은 앞으로의 사업을 힘있게 추진함에 있어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다. 이와 같은 리치는 입으로 줄줄 외울 정도로 환하지만 일단 상급의 검사에 봉착하거나 총화보고서를 상급에 올릴 때면 시종 자기의 허물을 끄집어내기가 그리도 어려운지 자라목이 되지 않으면 가재걸음을 치는 경우가 많다.        실사구시는 우리 당의 일관적인 사업작풍으로서 무슨 일을 하던간에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성적은 성적대로 내놓고 허물은 허물대로 밝히는 “맺고 끊는” 사업작풍을 키워야 한다. 사업에서 이미 구멍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두터운 보자기로 꽁꽁 덮어감추려거나 펑한 구멍을 살금살금 “칼질”하면서 곱게 분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메워지거나 작아질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 조상들은 “결함을 감싸고 얼버무려두면 둘수록 점점 커진다.”는 뜻을 일러서 “구멍은 깎을수록 커진다.”는 생활의 좌우명과도 같은 속담을 우리한테 남겨놓기도 하였다.        실제 사업중에 결함, 부족점 지어는 중대한 문제점이 로출된 중대사건이 생겼다 할지라도 때때로 오유를 시정하고 가급적으로 손실을 보완하는 대책을 대는것이 현명한 처사라 하겠다. 밑천까지 다 부려먹었음에도 리윤을 창출하였다거나 중대한 손실을 초래하였음에도 기꺼운 수익을 올리였다는 식의 허위적인 보고는 나라와 인민에게 해만 끼치는 일이니 삼가하고 또 삼가하여야 할 일임을 경계하고싶다. 나라와 인민앞에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지도일군의 자격을 가지자면 오유를 덮어감추지 않는 사업작풍부터 배워야 한다고 심심히 느껴진다.        대담하게 오유를 승인하고 오유를 시정하는것은 우리 당의 사업이 생기발랄하게 전개될수 있는 내재적인 힘의 원천이다. 불멸의 업적을 쌓아올린 중국공산당의 90년의 력사를 두고 세인들이 탄복의 마음을 보내고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백방의 수완으로 오유를 감추는 사업작풍에 미련을 두고있는 간부들이 있으니 스스로 반성해보고 조직적으로 이에 각별한 주의를 두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4    질투심 그 산생의 시공간법칙 댓글:  조회:3264  추천:3  2011-08-05
                   질투심 그 산생의 시공간법칙                                                                                 리명근         질투란 무엇이냐고 많은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거개가 “남의 일이 잘되는것을 미워하는게” 아니냐는 간단명료한 대답을 줄줄로 생각한다. 정작 사전의 올림말해석을 헤쳐보아도 질투는 “남이 잘되는것이나 자기보다 앞서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것 등을 공연히 미워하며 깎아내리려 하는 마음 또는 그런짓”을 뜻하는것이니 상기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사전의 해석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아무튼 질투는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 배일대로 배여 깊은 락인을 찍어놓을 정도로 사람마다 너무 익숙한것이라 할수 있다.       질투란 인간의 심리상태의 일종이고 더 나아가서는 보편적인 사회현상이라고 할수 있다. 뿐만아니라 질투는 현대사회의 “새 제품”이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대물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질투에 관한 명언들을 적지 않게 엮어놓았다. 례하면 질투를 삼가하라는 뜻에서 질투를 롱하는 말 즉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한다”, “심사는 없어도 이웃집 불 난데 키 들고 간다”, “패는 곡식 이삭뽑기”, “되는 호박에 손가락질”, “나 못 먹을 밥에는 재나 넣지”, “논두렁게 구멍뚫기” 등등은 참으로 형상적이고도 생동하게 우리 사회생활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있다.        질투가 우리 생활과 밀접히 련관되여있는 만큼 그것이 산생되는 시공간에 대하여 따져볼 필요도 있다고 느껴진다. 종종의 질투현상에 대하여 자상히 살펴보면 질투의 산생은 시공간의 거리와 반비례를 이루고있음을 심심히 느낄수 있다. 말하자면 시간적으로 오래 지나서 현존하지 않는 사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질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가령 질투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 할지라도 자기 주위에서 살아숨쉬는 현존의 대상에 대하여 질투심을 가질뿐 고대인 또는 아득히 먼 옛날의 낯설은 사람한테 대한 질투심은 가질수가 없을것이다. 또한 아득히 먼 지구촌 어느 일각에서 여유작작하게 유족한 살림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시샘의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는 말이다.       승진의 갈망으로 불태우던한 한 직원이 자기의 동료가 일약 과장급으로 승진한데 대해서는 “자기의 복”을 빼앗았다고 내내  가슴앓이을 하면서 그 동료를 자기의 적수로, “눈에 가시”처럼 대할수는 있어도 저 멀리 태평양피안의 오바마가 하루밤새로 미국태통령보좌에 성큼 올랐다고 해서 시샘은 절대 내지 않을것이다. 금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유망한 작가일 경우 자기의 동료가 자기보다 더 우수한 작품을 내놓아 대상을 타게 되면 질투심으로 낑낑 발편잠을 잘수는 없어도 결코 조설근이나 쉐익스피어와 같은 대가나 문호들을 새암하지는 않을것이다. 이와 같은 “질투심산생의 시공간법칙”으로 말미암아 성공한자는 흔히 자기의 동료들이거나 가까운 주위의 사회로부터 오는 미움, 비방과 중상을 받기마련이다. 그러나 상응한 한계 즉 질투심이 생길수 있는 시공간을 벗어난, 보다 넓은 사회권에서는 성공자의 실적은 승인과 존중을 받을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가. 이것이 철같은 법칙이라고 제나름대로 굳게 믿어왔건만 최근 년간에는 질투심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심술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지구촌 저 멀리 서방세계에서 쩍하면 배률높은 “망원경”을 들고 지구촌 동방세계의 일거일동을 관찰하다가도 “남의 상사(丧事)에 머리를 푸는” 격으로 남의 가문의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소행을 보노라면 상기 “질투심산생의 시공간법칙”의 합법칙성이 무효가 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이 개혁개방의 30여년동안 온 지구촌을 놀래울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가져와서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점하는 13억 인구의 먹고입는 온포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을뿐아니라 날로 안정된 초요사회를 바야흐로 구축하고 또한 빈곤한 나라와 지역에 대한 지원의 력도도 갈수록 높이여 세계의 평화와 발전에 거대한 기여을 하고있는건 세인들이 다 아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종합적국력도 갈수록 높아지고있는 중국의 오늘과 앞날을 두고 온 나라 공민들은 긍지감으로 벅차지 않을수 없고 세계인민들도 축복의 마음으로 설레이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국의 거족적인 발전이 아세아권을 썩  벗어난, 공간적으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저 태평양피안의 미국을 비롯한 서방나라들한테 무슨 불편한 점을 갔다주었는지, 무슨 비위를 거슬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쩍하면 “인권”, “민주” 등등의 상투적인 “표본”을 들고 나와서는 다 여물어가는 남의 집 호박을 두고 손가락질 아니면 침질까지 하려고 하는걸보니 실로 “질투심산생의 시공간법칙”으로서는 비뚤어진 그들의 심사를 진단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또 미국 등 서방나라들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답습하고있는 노르웨이의 “노벨상위원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있는 “류효파”란 죄수의 목에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상징, 인권수호자”란 간판을 걸어주고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뛰여난 기여를 한 공로자에게만 주는 상—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는걸보니 중국의 발전을 두고 서방나라들의 머리는 시샘의 열이 오를대로 올라 인젠 미쳐날 지경이 아닐가 싶다.        류효파란 사람한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고 해서 중국의 백성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더우기는 관심이나 흥미도 가지지 않은줄로 안다. 한것은 13억 백성들의 유족한 살림을 위해 진정 로심초사하여 동방대국의 안정사회를 마련하고 세계의 평화와 발전에 탁월한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세상 뜰 때 유엔으로부터 반기를 드리워 애도의 뜻을 표한 대우까지 받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어른과 같은 위인한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것이 아니였으니말이다. 더우기는 13억 인구의 온포사회구축을 위해 “일전한푼”의 기여는 커녕 도리여 중국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을 담보해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고있는 중국의 현행 시정정책을 마구 비난하고 서방세계의 구미에 따라 횡설수설 많이 떠들어댄 류효파란 사람한테 일부러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니 이 평화상의 “함금량”을 누가 믿을수 있겠는가. 노벨평화상의 적임자를 뻔이 알면서도 내전보살(内殿菩萨)처럼 시치미를 뚝떼고있는 서방인들의 고약한 심보를 중국의 백성들은 꿰뚫은지도 오래다.        지구촌의 인류는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갈색인종 등 4대 인종에 2000여개 민족으로 분류되여 각이한 종교, 인정세태, 풍습, 문화, 세속을 가지고 200여개의 국가와 지역에 널리 분포되여있다보니 “외를 껍질을 깎아서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꼬리를 쥐고 대가리로부터 먹는 사람”도 있으며 지어는 “꺼꾸로 쥐고 꼭지가 달린 쓴데로부터 먹는 사람”도 있기마련이다. 말하자면 안정된 생활을 영휘하는 방식이 제마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미국식이나 서방식의 민주, 인권만이 지구촌 어디서나 본받아야 하고 엄하게 지켜야 할 “사회생활규칙”이라고 억지를 부리니 참으로 그 심술을 인젠 말려내기도 힘들다. 남이야 어떻게 살던 자기 실정이나 기호에 맞게 “갓 쓰고 박치기” 해도 좋고 “작두로 수염을 깎아도” 좋고 “전보대로 이를 쑤셔도” 다 제멋이니 그 가문만 흥성해지고 유족하며 안정하고 태평스럽게만 지내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선조가 다른 서방세계의 량반들이 남의 가문의 불청객이 되여 “사돈네 제사에 가서 감 내라 배 내라”는 식으로 떠들어대니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하겠다.       질투란 이처럼 안정되고 쾌락하고 행복하고 부유한 남의 생활을 두고 더없는 고통을 느끼다 못해 우울증까지 가지고 미칠 정도까지 될 때라면 심리적장애가 아닐수 없다. 물론 질투자에게 있어서 성공자에 비하여 볼진대 자기에게도 그만한 능력이 있고 기회도 있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면 자연히 시샘심리가  생길수 있으니 타할바는 못된다. 문제는 우리 나라처럼 특수한 사회환경에 봉착하여 13억 인구의 온포문제를 원만히 해결할수 있도록 자국의 특색을 띤 적시적인 결책을 내리여 기회를 포착하고 기적을 창조할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없음에도 시샘하고 성공자를 무작정 헐뜯으며 그 성과를 부정하고있으니 서방세계의 질투적인 행세는 세인들의 통책을 받으리라.                                                                                            (2010.12.12.)  
3    “꾸어다놓은 보리자루” 댓글:  조회:4103  추천:4  2011-07-30
     근년에는 우리 생활에 명절문화행사가 어찌도 많이 겹치는지 일일이 응하고나면 실로 피곤에 몰리는게 남성들이 아닌가 싶다. 전통명절은 제외하더라도 거의 매달마다 색다른 명절의 분위기로 하루 이틀쯤은 곤드레만드레한 기분에 휩싸이는줄로 안다. 우리의 셈평이 전보다 많이 펴여 별론 큰 근심걱정없이 여유작작하게 살아가다보면 자연히 사회적교제가 넓어지고 그에 따르는 다양한 파티나 모임이 많기마련인데 이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필경 즐거운 명절이건만 어떤 경우 일단 쇠고나면 남성들은 마치 가을하늘과 같이 휑뎅그렁한 공허감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걸 어쩔수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3.8절과 같은 명절을 쇠는 경우 제나름대로 둥둥 뜬 기분으로 녀성들을 배석하여 화끈하게 명절행사를 치른다고 하지만 지내고나면 어쩐지 남성은 별로 조용히 망각되여가고있는 존재로, “꾸어다놓은 보리자루”의 신세가 아니냐 싶도록 허무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수는 사오십대를 맞은 남성들한테 특별한걸로 짐작이 간다.       주지하다싶이 최근년간 전통명절외의 여러가지 의미가 부여된 명절이 수두룩하게 쏟아져나오고 그에 따르는 경축활동도 다양하고 풍요로운 내용으로 해마다 멋지게 꾸며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보건기구에서 매년 10월 28일을 “세계남성성건강일”로 확정한데 비추어 국가인구계획출산위원회에서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10여년전 즉 2000년에 매년 10월 28일을 중국 남성들의 명절로 즉 “남성건강일”로 지정한 일만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우리의 생활권에서 사라지고있다. 10여년전, 남성들은 자기명절이 생겼다고 그래도 나라적인 관심에 다소 위안을 받았지만 향후10년간 응당 명절을 챙겨주어야 할 자기 주위의 녀성들이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는지 아니면 “제좋은 멋에 매일다싶이 술문화에 심취되여 시간이 가는줄 모르는 남성들한테 무슨 명절을 따로 둘 필요가 있냐.” 하는 심리에서인지 누구도 이를 도외시하다보니 10월 28은 정녕 흐지부지한 명절로 빛을 영영 잃고만거나 다름없게 되였다.      나라적으로 10월 28일을 “남성건강일”로 정한것은 그로서의 특별한 의의가 있다. “남성건강일”의 주제는 가정의 생활질에 영향주는 “ED(발기기능장애)”에 관심을 돌릴것을 제시함으로써 전 사회에 특히는 녀성들에게 남성들의 건강 더우기는 남성생식계통건강에 주의를 둘것을 호소하는것이였다.      사실상 수년간 일부 사람들은 줄곧 중국남성들은 사나이기질이 없다고 나무랐으며 녀성의 체질이 남성들을 누르고있는것을 애탄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문가들을 이런 원인이 생기게 된것은 지금 남성들의 생식기계통건강과 직접 련관된다고 지적하면서 녀성들을 망라하여 전 사회적으로 남성생식기계통건강문제에 중시를 돌리고 그런 문제를 리해하는것이 당면의 급선무라고 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환경오염으로 하여 구라파의 어느 한 강의 웅성물고기가 몽땅 자성물고기로 변하고 번식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지금 생식계통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우리 주변 남성들의 생육능력도 내려가고있는 추세를 보여주고있다.       2008년에 벌린 남성병조사결과에 따르면 불임증비례가 4.8%였으나 어떤 지방은 이미 10%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질병, 영양불량, 장기적인 만성긴장증, 감정억제, 흡연, 술주정, 약물중독과 직업성유해물질 례하면 중금속, 살충제, 마취제, 방사 등 각종 환경요소가 모두 남성생식기건강을 해친다고 인정하고있다. 그리고 최근년간 남성생식기계통건강에서 홀시할수 없는 성기능장애(례하면 음위, 조루 등)가 엄중하게 생기고 이로하여 고민하는 남성들이 날따라 늘어나 부부간의 감정 나가서는 화목한 가정에 검은 그림자를 던져주고있다고 한다.      남성생식기계통건강상태가 날로 악화되고있는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있는것은 지금 전반 사회적으로 아직 이에 대하여 보편적인 중시를 돌리지 못하고있는것인데 남성들 자체를 망라하여 일부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취하고있다. 사회행위전통으로부터 보면 남성들은 자신을 망라하여 그 어떤 사람의 건강이든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남성들은 장시기 동안 건강문제를 홀시하는 습관을 형성하였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여 가령 안해가 신변에 없을 경우 사나이들은 집을 나가 친구들을 찾거나 술자리에서 허무한 시간을 보내거나 쏘파에 앉아 밤이 새도록 텔레비죤의 모든 프로를 시청하군 한다. 사실상 남성과 녀성들의 가장 큰 부동점은 남성은 일생동안 자신의 신체상태에 대하여 적게 근심하는것이다. 오늘날 응급환자의 2/3가 남성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남성들이 늘 건강한 사나이가 되여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고있어서 병원에 가서 암검사를 망라한 전면검사를 받기 싫어하는데 있다.       2001년 윈에서 개최된 “제1회남성건강국제회의”에서는 녀성이 남성보다 7년정도 오래 사는 리유에 대하여 열띤 토론이 있었다.      지난 세기 20년대만 하여도 녀성은 남성보다 겨우 1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녀성이 남성보다 1-2년도 아니고 7년이나 더 살수 있다니깐 문제점이 되지 않을수 없다. 누구한테 원인이 있던간에 너무나도 불공평하여 남성들이 받아들일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회학자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녀성들을 조폭하게 지배해온 남성들인만큼 당연히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전세계적인 사망원인으로 꼽히는 15가지 요인을 살펴보더라도 남성이 단연코 앞장선다. 심장-순환계 질병으로 숨을 거두는 경우 남성이 녀성보다 2배는 많고 암 역시 남성이 2배는 더 많이 걸린다. 뇌졸증도 강인한 성인 녀성보다 남성에게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게다가 알콜중독과 마약중독 등 원인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례도 남성이 녀성보다 훨씬 많다. 남성들의 몸에는 확실히 문제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점의 원인을 무작정 남성들한테 몽땅 들씌운다면 시비가 좀 전도되지 않을가 싶다.       수많은 의사가 남성의 수명이 짧은 주원인이 호르몬에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남성에게는 녀성의 뇌와 심장 그리고 뼈속에 충분히 들어있는 항스트레스호르몬인 에스트론겐(雌激素)이 없는데 이 상태는 갱년기까지 지속된다고 한다. 또한 호르몬 소마토트로핀(生长激素)과 멜라토닌(褪黑激素)의 생성도 같은 나이의 녀성에 비해 남성이 더 일찍 줄어든다고 한다. 멜라토닌은 로화를 방지하는 기적의 약으로 각광받고있다.       지금 사오십대가 되면 많은 남성들이 벌써 성기의 작동이 뜻대로 되지않는 등 문제를 안게 된다. 또 인류번식을 위한 중임을 떠멌던 이들만의 영광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그 찬란한 빛을 잃어가고있다. 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최근년간 남성의 정자수가 점점 줄어들고있다고 한다. 지난 세기 40년대부터 지난 세기 말까지 남성의 정액 1ml당 들어있는 정자수는 평균 1억 1천 3백만개에서 6천 6백만개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녀성은 페경기후에도 호르몬의 균형을 의학적수단으로 유지할수 있는 반면 늙은 남성의 테스토스테론(睾丸素)의 결핍은 약을 복용하여도 개선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년간 호르몬이 남성의 몸에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충분한 연구가 없었던것이 분명하다고 의학자들이 침통하게 느끼고있다. 이러한 리유는 여태껏 이른바 “남성의 갱년기”가 무시되여왔기때문이다. 수년전까지만해도 항간에서는 갱년기란 남성한테는 없는줄로, 정력이 약한 남성을 골려주는 대명사로 취급되였을뿐이다.      사오십대에 찾아오는 남성의 갱년기는 녀성의 페경기와 비슷한 시기로서 이때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리적, 심리적 변화가 남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것이 밝혀졌다. 갱년기에 나타나는 의욕상실, 우울증, 무기력증, 기억력감퇴, 자신감상실, 비만, 탈모증, 시력감퇴, 성욕감퇴와 성기능장애 등 여러가지 증후군은  이른바 “중년위기”로 인식되고있다.       자, 호르몬과 갱년기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아래와 같은 가정을 한번 해보면 어떨가? 오랜 력사와 전반 사회발전의 흐름을 자상히 돌이켜보면 녀성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자신이 떠맡아야 할 책임을 남성에게 미루었을뿐만아니라 권력과 함께 스트레스까지도 기꺼이 넘겨주었기에 남성의 건강을 해치는 불행을 초래한데 대하여 부분적인 책임이 있는것은 아닌지? 모종의 의미에서 말하면 남성이 사회진출과 출세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것은 모두 녀성이 원인을 제공하였기때문이라고 지적할수도 있지 않을가?       우리 주변을 두루두루 살펴보면 피상적으로 남성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회인듯하지만 기실은 우리 사회의 모든것은 녀성들의 막후조종, 더 쉽게 말하면 청나라말기의 통치자 자희태후가 선호하였던 “수렴청정(垂帘听政)”의 모식에 의하여돌아가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도그럴것이 녀성은 완벽한 남성을 선택하려고 애쓰고 남성은 완벽한 남성이 되여 녀성에게 선택당하기 위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정도로 노력한다는것이 일부 성심리학자들의 공통한 견해이기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앞장에 선 남성은 녀성에게 인기가 있는 법이다. 그렇기때문에 남성은 녀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터에서 파김치 되도록 일하고 격렬한 스포츠에까지 열중하여 목숨을 내걸기도 하는게 아닐가. 그뿐인가. 피로한 하루 근무를 마치고는 흔한 명태쪼박이나 칼로리 높은 쏘세지와 같은 간단한 안주에 독주까지 마셔대기가 일쑤니 건강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녀성은 단위나 사회구역에서나 주변사람도 잘 챙겨주고 그들과 잘 어울리는 등 사교성활동에 뛰여나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남성은 교제에 신경을 쓸 시간적여유가 부족하다. 배우자가 사망한다음 남녀의 모습에서 그 차이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홀아비는 안해를 잃은 슬푼 분위기에서 시종 해탈 못되여 과부에 비해 두배는 더 우울하게 지내는 반면 대부분의 과부는 인생에서 “두번째 봄”을 맞이한듯 새로운 이성과의 교제 또는  재혼의 달콤한 생활에서 점점 더 젊어지는듯한 쾌활한 모습으로 지내는 사례가 적지 않는줄로 안다.       여기에는 남성이 직업상 받아온 스트레스외에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남녀의 역할모델도 크게 작용하고있다고 보아진다. 례하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녀성이 서럽게 엉엉 울어대면 사람들은 우는 녀성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그녀가 우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똑 같은 경우라도 남성이 꺼이꺼이 울어대면 동정과 위로는 커녕 오히려 사내답지 못하다며 핀잔듣기 마련이다.      상기한 종종의 사회적분위기에 이미 많은 남성들이 자손심이 껶여있다. 요즈음 남성들이 안해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부분이 단지 정력에만 국한된것은 아니다. 남성이 사오십대에 들어서면 여러가지 생리적, 심리적 변화를 겪으며 그런 변화들에 적응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사회적, 경제적 위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사오십대 남성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우뚝선 가장으로서의 삶이란 그리 쉽지가 않다는것을 우리 모든 녀성들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바라고 지적하고프다.       나라적으로 “남성건강일”을 설치한 목적은 간단히 말하여  “남성을 관심하고 행복한 가정을 마련하자”는것이다. 이것이 그래 녀성들에게 복음을 가져다주는 좋은 일이 아닌가. “3.8”절이 있으므로 하여 녀성들은 기쁨에 잠겨있지만 그와 달리 남성들은 국가에서 자기명절을 설치하였다고 해서 어깨를 뻐개면서 으시대지는 않는다. 그 리유인 즉 온 사회가 “부녀절”, “아동절” 같은것을 중요시하고 해마다 다양한 경축모임을 가지는것은 녀성들이나 애들이 장시기동안 “피해”를 받아왔기에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기 위한것으로써 “강한자를 억누르고 약한자를 보살피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고 모든 남성들이 인정하기때문이다. 그런데 “남성명절”을 두는 목적은 무엇일가? 그래 남성들의 지위가 본래부터 높지 못하기때문인가? 아니면 현대남성의 천하가 점점 없어져서 더는 름름한 옛 풍채를 찾아보지 못하게 된때문인가?       기실 남성들도 관심이 필요하다. 황차 지금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때가 아닌가. 하지만 “남녀평등”은 절대 남녀차이를 부정한다는것이 아닌바 남성들은 선조들의 복을 타고나 여러가지 혜택을 받아왔기에 응당 무슨 일이든 자기가 꼭 짊어져야 할 책임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다면 단위에 나가서는 해종일 일은 축내지 않고 녀성들의 관심만 바라는 남성이나 집에 박혀서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고 밥만 축내면서 안해의 보살핌만 바라는 남편이 무슨 훌륭한 사나이라고 할수 있는가?       사오십대 남성들이 3.8절같은 명절때면 허무감에 빠져 좀 섭섭해하는 리유를 구구이 피력할 필요가 없을것 같다. 오직  주위의 녀성들이 평소 마음속에 남성들의 건강에 관심을 두고  그들의 건강을 위하여 무엇인가 간단한것이라도 챙겨주는것으로써 남성들의 마음을 쨍하게 울려주기만 한다면 “개밥에 도토리” 처지에서 해탈되였구나 하는 생각에서 시쁘둥하던 남성들의 신색이 언제 있었느냐 싶도록 말끔히 가셔질것이다. 정말 녀성들마다 평소 섬세한 눈길로 주위 남성들의 건강을 살피기만 한다면야 남성들에게 있어서 그 무슨 명절도 따로 필요없으며 가령 있다 해서 명절을 쇤다고 해도 좀 슴슴할것 같기도 하다.       나라에서 10월 28일에 특별한 뜻을 부여한후 많은 녀성들은 혹여 “남성건강일”을 단순한 남성들의 “성건강경축일”로 볼수도 있다. 10여년전에 나라에서 “남성건강일”을 설립한것은 남성들의 건강이 이미 전 사회의 주목을 받고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기실 남성의 성건강에는 신체건강, 행위건강, 심리건강 등 제 방면이 망라된다. 지금 남성건강이란 말이 나오기만 하면 녀성들은 일반적으로 한가지 내용으로만 인정하고있는데 기실 이는 오해인것이다. 그러므로 녀성들은 남성들 신체건강의 제반 요소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해마다 10월 28일을 잊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남성명절”을 맞이하며 그날이 되면 책임감을 갖고 3.8명절처럼 요란하고 굉장한 모임은 가급적으로 피하면서 남성들의 건강을 축하하는 의미로 간소한 행사를 조직하여 자못 뜻깊게 보내는것도 무방할것이다. 해마다 3.8명절을 쇠는 취지가 바로 남성들한테 절대 잊지 말고 평소 녀성들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그녀들을 많이 관심하고 이쁘게 봐주며 사랑의 손길을 많이 보내주라고 충고를 주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평소에 남성건강을 항상 념두에 두고있다는 의미에서 간소하게 남성명절을 쇠는것도 문제점으로는 되지 않는다.      녀성들이여, 안해들이여, 누나들이여! 남성들의 옹위를 받으며 3.8절의 즐거움을 만끽할 때 부디 “남성명절”—10월 28일을 명심해두시기를 부탁드린다.  
2    꽃의 련상… 댓글:  조회:3535  추천:2  2011-07-29
                                                       꽃의 련상…                                                                                                   리명근      가식 없는 창법으로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고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녀가수 리분희가 부른 명곡 “녀성은 꽃이라네”를 들을 때면 녀성들로 하여 오늘의 세월이 더 밝아져가고 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살아가는게구나 하는 감격으로 벅차 정녕 녀성들 모두가 한떨기의 아름다운 꽃으로 물망에 유표하게 오르는걸 직감하고있는게 오늘의 남성들인가 싶다.      꽃이라면 보통 “귀중한것이나 아름답고 훌륭한것”을 형상적으로 이르는 말로, 실생활에서는 아름다운 녀성들의 이미지를 비겨 이르는 대명사로 남성들이 많이 사용하는줄로 안다. 옛사람들도 녀성을 두고 “화용월태(花容月态)”,“화안월모(花颜月貌)”, “화지초전(花枝招展)”, “페월수화(闭月羞花)” “옥모화용(玉貌花容)”, “여화사옥(如花似玉)”, “도화인면(桃花人面)”, “류요화태(柳腰花态)”, “달도 부끄러워하는 꽃” 등등 꽃과 관련한 성구나 속담들 적잖게 엮었었다. 어디 그뿐인가. 녀성과 남성간의 애틋한 정이나 관계를 두고 꽃에다 나비까지 곁들어 또 적지 않는 명구들을 후세에 남겨놓기도 하였다. 례하면 “나비가 꽃을 찾아가지 꽃이 나비를 찾아가나”, “꽃본 나비”, “꽃본 나비 담 넘어가랴”, “꽃본 나비 불을 헤아리랴”, “꽃이 고와야 나비가 모인다”, “꽃이 시들면 나비도 안 온다“”, “꽃 없는 나비” 등등은 인젠 입에 너무 오른 말로 코흘리개 유치원 원생들도 술술 엮어대는 생활용어로 굳어진줄로 안다.       아무튼 남자뿐아니라 지구촌 어느 마을의 남녀로소든지 꽃을 보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느끼는줄로 안다. 또 향기가 있어 마음이 깨끗해지고 즐겁고 상쾌해진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환자를 문병갈 때 꽃을 들고가 머리맡에 놓아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뜻깊은 날이면 생화도 선사하고 돌아가신분의 명복을 빌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화환을 보내기도 한다.       이처럼 꽃의 사회성은 뭇사람들에 의해 보급화되였다고 할수 있지만 꽃받침, 꽃술, 꽃잎 같은것으로 이루어진 식물의 번식기관의 하나인 꽃의 자연성은 베일에 감추어진듯 뭇사람들의 눈에 잘 띄우지 않고있다. 조금도 의심할바 없이 꽃이라는것을 순 생물학적인 면에서 보면 “식물의 성기(性器)”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즉 암술, 수술이 꽃잎으로 둘러싸인것이 곧 꽃이다. 동물로 치면 암컷의 성기와 수컷의 성기를 보자기로 싸놓은것이 꽃인 셈이다. 그렇다고 만일 누군가가 생일을 축하한다고 고양이나 말의 성기를 보자기에 싸 선사한다면 미친짓이 될것이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 꽃을 선물하고 받았을때 식물의 성기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며 사람마다 아름다운 꽃을 받았다고 즐거워한다. 바로 여기에서 사물을 순 생물적인 관점에서 보는것과 심리적인 측면에서 사고하는것 사이에는 이렇게 엄청난 차가 있다는 점을 느낄수 있다.  특히 성에 관한 문제는 더욱 그렇다.       사람의 경우 성기의 로출은 법으로 금지되여있으므로 만일 이를 위반하면 지어 법으로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식물의 경우에는 꽃잎이 활짝 벌어져 암술, 수술이 로출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꽃구경하느라 밀치락닥치락 북적거리기까지 한다.       그러하기에 인간문명은 성기의 은페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의 나무잎으로 앞을 가리기 시작한것이 가장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인간의 옷이였으며 그것이 인류의 성문화가 시작되는 첫걸음의 상징이기도 했다.       상기한 문명의 스타트를 뗀건은 실로 인류의 걸작이지만 문제는 모든 사물이 대립면을 가지고있는것처럼 이렇게 신비한곳을 가리우니 고급동물로서의 사람들에게도 썩 좋지 않는 심리가 생기게 되여 적지 않은 사회문제를 조성하고있는것 같다. 말하자면 항상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느낌 즉 감추면 감출수록 이를 더 보고싶어 하는 역심리가 싹트게 되지 않았는가싶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항간에서는 목욕탕과 같이 녀성들이 알몸으로 지내는 장소를 두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여 조그만 구멍이나 틈새로 들여다보다가 목덜미를 잡혔다는 우스운 이야기를 많이 들은적도 있다.      사람은 어떤 자극이 가해지면 그것이 감각적인것이거나 상상적인것이거나간에 이에 반응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성문제에 있어서는 상상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정액이 많이 고여서 성적욕망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데 성적욕망 또는 성적충동은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기반에서 발생된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이 지적하고있다.      사실 성적인 행위 그 자체는 백프로 색정적것이라고 점찍기는 어렵다. 그 장면에 대한 상상을 환기하거나 암시하거나 이를 표현함으로써 색정적인것이 되는줄로 안다. 그런데 성에 대한 상상은 자기멋대로가 되기 쉽고 이것이 지나치거나 반대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면 변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 쉽다는것이 성심리연구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따라서 문명수준이 높아질수록 성은 바로 알고 보아야 하며 모르고 보면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잘못을 저지를수 있다. 사람의 성적자극은 후각,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보다 눈을 통한 시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시각은 어떤 특정한 부위에 집중시킬수도 있고 전체를 추상적으로 볼수도 있고 암시적으로 작용하여 상상력을 발휘할수도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점의 하나라고 하겠다.      남성에 있어서 가장 강한 성적자극은 옷을 벗은 녀인의 라체는 보는것이라 한다. 따라서 그 자체를 이상하다 할수 없으며 변태적이라고도 할수 없다. 가령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을 들여다보는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도덕적으로는 미풍량속을 해쳤다고 힐난을 받거나 좀 중하면 경범죄에 해당되여 치안처벌쯤 받으면 끝이 아닌가. 사실 정상적인 남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들여다보고싶은 욕망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자기 욕망을 눅잦힐뿐이라 생각된다. 그도 그럴것이 성욕은 인간으로서 자기의 대를 이어줌에 있어서 불가결의 욕구이고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관습, 도덕, 법률 등에 의해 규제되고 위반하면 비난받고 처벌까지 받으니 식욕과 같은 다른 욕구와는 달리 자제하거나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하기에 남성이 녀성을 볼 때 육체적인것에만 눈이 끌리는 경우, 녀성을 정신력을 지닌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육체라는 물건으로 보게 되고 소유하고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이는 마치 새로 디자인하여 뭇사람의 눈을 끄는 옷을 보는것과 같은 눈으로 녀성을 본 결과라고 할수도 있다. 그렇기때문에 특히 사춘기에 들어선 청소년들이 녀성의 부푼 가슴, 허여멀쑥한 허벅다리, 풍만한 엉뎅이 등을 보면 이를 소유하고싶다는 욕망이 생기고 이러한 욕망은 마치 녀성을 물건으로 보아 자기것으로 삼으려는 생각으로 발전된다.      만일 녀성을 자기의 의사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 자기와 동격인 사람으로 본다면, 나아가서는 꽃같이 화려하고 곡선미가 다분한 표준체형미를 가진 이쁜 녀성을 상대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조각품으로 보다면 성적폭력은 나올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환심을 사서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신비스럽게 여겼던 녀성의 육체에 대해서 알도록 하게 하여야 한다. 녀성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매력적인 녀성을 보면 무차별적으로 욕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일시적이나마 자기의것으로 하려는 생각을 하면 또 무의식속에 그러한 욕망이 자리잡고있으면 언제 행동으로 옮겨질는지 알수 없는노릇이다. 그렇기때문에 녀성을 볼 때 어떤 욕망 특히 소유욕을 지녀서는 안된다는점을 가르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고 심리학자들은 지적하고있다.      녀성의 몸에 대해 어떤 욕망이나 욕정을 느끼지 않고 보는 례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미술가가 라체화를 그리기 위해 발가벗은 녀성을 보게 된다. 그것도 그 특징을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델의 세부를 유심히 보기도 하고 포즈를 잘 취하도록 알몸을 이러저리 만져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성적인 충동이나 흥분을 느끼지 못한다. 또 상체를 벗게 하여 유방이 로출된 녀성을 진찰하는 의사, 특히 녀성의 성기를 만지며 진찰하는 산부인과 남의사는 녀성의 몸에 대해 어떤 욕망을 지니지 않는다. 단지 그 몸에 진행되고있는 어떤 병의 정체를 파악하고저 할뿐이다. 녀성의 몸이 욕망의 대상이 될수 없는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남성미술가는 녀체의 세부까지를 관찰해도 또 남성의사는 녀성 성기의 구석구석까지를 만져도 초연할수가 있다. 만일 결혼한 부부가 서로의 인격을 무시하고 단지 서로를 공인된 성적대상이며 성적소유물로만 생각한다면 불화속에 싸움이 련속되는 부부생활을 하게 될것이다.       례를 들어 부부가 동반해서 화려한 옷을 입고 어떤 모임에 나갔는데 뭇남성들의 시선이 자기의 부인에게 쏠리면 처음에는 자기 부인이 아름답게 보이기때문에 그러겠지 한다. 그러나 다른 남자가 와서 감탄어린 눈으로 보면 남편은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부인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기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일로 인해 남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파티에서 돌아온 남편은 안해의 몸가짐, 남자를 보는 눈에   문제가 있었다 해서 부부간의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녀성을 보는데 어떤 목적의식이 있어 사명을 갖고보면 녀성에 대한 욕정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녀성을 자기의 소유물같이 생각하면 다른이가 볼 때 자기의 소유물을 훔쳐보는것으로 여겨 공연히 불안해지고 갈등이 생기게 된다.       요컨대 녀성을 보는 시각문제에서 우리 남성들마다 옛 관념에서 해탈되지 않는다면 사회세포로서의 가정을 건전히 영위하기가 어렵고 나아가서는 녀성들과의 인간관계를 잘 처리할수가 없기에 당중앙에서 제기한 “조화로운 사회의 구축”이란 시대적과업을 완성한다는것은 공담에 지나지 않은줄로 안다.      아무튼 우리 남성들마다 꼭 기억은 해두어야 할바는 있다. 말하자면 녀성은 봄에 피였다 가을에 지는 화단의 꽃이 아니다. 어릴 때는 새싹으로부터 무성한 잎을 펼치고 젊은 시절에는 만발한 꽃을 활짝 피우며 중로년에는 알찬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우리 모든 남성들이 녀성은 당신의 손에 잡히는대로 꺽고 싶으면 아무때나 꺾을수 있는 화단의 갸냘픈 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고 이 사회에 조화로운 분위기를 마련하면서 제 분야에서 내조를 잘해 가는, 누구도 자의로 꺽다가는 사회적비난을 크게 받아야 할 영원히 시들지 않은 아름다운 꽃이라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1    술은 약간 얼큰한 정도로 마셔야 댓글:  조회:4291  추천:11  2011-07-25
                                      술은 약간 얼큰한 정도로 마셔야                                                                                          리명근             세상인심가운데 술인심만큼 좋은것은 없을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술자리가 벌어지면 술을 권하는것이 주도(酒道)처럼 되여있다. 안마시겠다 해도 억지로 마시도록 권하고 또 취해도 혼자 취하는것이 아니라 술친구와 더불어 취하겠다는 심사가 술선심의 발로이다. 다른것에 린색하면서도 술인심만큼 후해서 술돈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술을 권하여 같이 취하려고 선심을 쓰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리고 술만 마시면 노상 옹하던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지어는 평소 “고기를 만진 손도 국솥에 씻거나” “감기고뿔도 남을 안주는” 정도로 린색하기로 소문난 술군이건만 술만 들어가면 고까짓거 다 뭐냐 하면서 다 준다고 통이 크게 소리치는것은 또 왜서일가? 아무튼 “술 취한 사람 사촌 기와집 사준다”는 말이 그른데 없는것 같다.        술은 “취하는 맛”에 마신다고들 한다. 그 “취하는 맛”이란 단적으로 표현해서 대뇌의 억제작용을 흐리게 하여 루적된 스트레스를 푸는 맛이라고 할수 있다. 확실히 술을 마시면 뇌의 억제기능이 둔화되고 마비되기때문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또 술은 스트레스만 푸는것이 아니라 식욕을 증진시키는 역할,  전날의 술기운을 해소시키는 해장의 효능도 가지고있다. 하지만 식욕을 돋구기 위해 마시는 반주술과 간밤에 먹은 술의 기운을  풀기 위해 한잔하는 해장술은 가급적으로 혼자서 마셔야 한다.  예로부터 “술은 해장술에 망하고 투전은 본전 추다 망한다”고 하였은즉 반주술과 해장술을 턱대고 술병의 굽을 내고야마는 습관이나 아침 해장술을 친구들과 함께 저녁까지 마시는 주습은  삼가할바이다. 말하자면 술이 좋은 점만 갖고있는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예로부터 “술은백약의 으뜸이요, 만병의 근원”이라 하였듯이 술을 잘 리용하면 건강을 증진시켜 장수를 누릴수 있다지만 도를 넘긴 술은 신체를 때이르게 망가지게 한다는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중국의 국학시조인 공자가 애주가였다면 적지 않는 사람들은 놀랄수도 있을것이다. 사실 공자는 술을 좋아했거니와 그 주량도 매우 컸다고 한다.《십국춘추》의 기재에 의하면 “문왕은 술을 천잔을 마셨고 공자는 백그릇을 마셨다.”고 하였으니 공자의 주량이 술독이였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주량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에 “나는 술을 마시되 량을 정하지는 아니 하나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심신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는다.”고했다.《사기》에서는“주극즉란(酒极则乱)” 즉“술이 도를 지나치면 언행이 어지러워진다”고 정의하였으니 어찌술을 경계하지 않을수 있으랴!        동서고금에 있어서의 국가의 흥망성쇠와 영웅호걸, 시인문객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기록한 력사와 문헌을 뒤져보면 술이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또한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에서 술이 인간에게 매개하여주는 역할이 지대한 면도 있다지만 술로 인하여 호색황음하고 자신과 국가를 파멸시킨 군주가 있었는가 하면 개인적으로는 주가 있는 곳에 색이 있어 주색에 빠져 패륜패덕의 행위를 한 사람들도 적지 않은줄로 안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술과 관련한 명언들도 적지 않게 남기였다.  례하면 광음(狂饮)을 삼가하라는 뜻에서 술군을 롱하는말 즉“술먹은 개(정신없이 술에 취한 사람을 욕으로 이르는 말)”,  “술덤벙, 물덤벙(모든 일에 경거망동한다는 뜻)”, “술 받아주고 뺨 맞는다(남에게 후하게 대접해주고 도리여 모욕을 당한다는 말)”, “술과 안주를 보면 맹세도 잊는다(항간에서 전해지고있는 “술맹세, 개맹세”의 뜻과 비슷함)” 등의 말로 우리를 경각시켜주고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주도함에 있어 당대의 명장으로 일장월취하던 김유신이 화랑시절에 기녀 천관에게 탐닉하여 자주 그 집을 찾던차에 하루는 타처에서 술에 만취하여 귀가하던중 그가 타고 가던 말이 평소에 자주 가던 길에 익숙하여 천관의 집으로 길을 잡아 찾아 당도한후 연후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기녀집임을 알고 대오각성하고 차고있던 대검을 뽑아 애마를 참하고 분연히 귀가, 맹성하여 오직 화랑오계를 지켜 위국충정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였다는 미담은 오늘도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 이렇듯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 주량에 따라 천차만별인만큼 김유신은 술을 통음하고서도 삼국을 통일하는데 진충보국하였으되 삼천궁녀와 주지육림속에 방탕한 생활로 주야를 모르고 성충(成忠)과 흥수(兴首)의 충신간언을 마이동풍으로 흘렸던 백제의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의 최후는 어떠하였는가? 정녕 량자 모두가 술로써 건곤일척의 흥망을 극명하게 대조한 일이 아닐가 싶다.        술을 시작함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며 그 뒤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고 하니 삼가하고 삼가할 일이다. 그러니 술은 곤드레만드레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마시는것을 피하고 약간 얼큰할 정도에서 그치는것이 좋다. 술을 많이 마시면 자연히 말이 많고 말이 많으면 경망스럽게 수다스러운 행동을 하기 마련인 연고로 옛 지성인들은 “술마시면서 허튼소리 하지 않는 사람이 참 군자이다(酒中不言真君子)”고 하면서 근신절주(谨慎节酒)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여쭈기도하였다.        물론 술은 예로부터 사가의 관혼상제로부터 나라의 종묘사직에 이르기까지 필요불가결의 명물로 전해졌고 좋은 음식임이 틀림없다. 그러하기에 옛 시인들은 “술은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록봉이요/ 천하의 모든이에게 마음을 수양하고 바른 성정을 기르는 계기가 되는 명약이라”, “하늘과 땅이 모두 술을 사랑하니/ 애주는 하늘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로다/ 청주는 성인이요   탁주는 현인이라/ 청주와 탁주 다 마셨거늘/ 구태여 신선이 되려고 빌거야 있으랴…” 등등 술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로 술은 사람의 성정을 현우미추(贤愚美丑)로 만드는 묘약임에는 틀림없으니 약주로 끝내고 광약(狂药)으로 번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정말로 스트레스해소가 목적인 술은 퇴근길에 아무런 리해관계가 없는 친구와 더불어 작은 술집인들 관계없이 마른 명태라도 쪽쪽 뜯으면서 여유작작하게 권커니작커니 한잔 나누는 가운데 주변으로부터 세상에 보기싫은 사람들에 대한 욕, 총각시절에 짝사랑에 빠져 고민속에서 헤맸지만 곁도 주지 않았던 처녀에 대한 불만 그리고 나아가서는 바가지를 빡빡 긁어대는 지금의 안해에 대한 불평까지 털어놓으며 공감하고 껄껄하면서 마시는 술이라 하겠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실때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을 느끼는것이 술이며 또 그 술이 들어가는 창자는 따로 있는상 싶기도 하다. 아무튼 취기를 리용하여 평상시에 할수 없는 말이나 부탁을 성사시켜 보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이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신다면 그 와중에 술의 향연을 차분히 만끽할수 있어 마시고 또 마셔도 큰 탈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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