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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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흑백사진과 컬러사진 댓글:  조회:5176  추천:80  2006-05-22
흑백사진과 컬러사진 최순희(수필가, 교수) 남계선생님의 인생수필을 읽은 감수를 한마디로 얘기하라고 한다면 한장의 흑백사진과 다른 한장의 컬러사진을 같이 들여다보는 느낌이라고 말하고싶다. 선생님의 수필에 등장하는 할머님, 옥년이, 군감자, 이바구 등이 한장의 흑백사진이고, 빨간 홍당무코에 흰 옷을 떨쳐입은 눈사람도, 푸르고 무성한 잎의 흰 봇나무도 흑백사진으로 찍혀서 안겨온다. 설사 색을 낸다고 해도 슬프고 어두운 색조임에 틀림없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 시절은 설사 흑백사진으로 찍는다 해도 컬러으로 남는다. 세계 각국에서의 학술경력과 박학다식한 모습은 분명 화려한 컬러사진이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과 같은 저녁노을도 소년 유복(遺腹)에게는 흑백사진이고 성공한 유복(有福)에게는 찬란한 컬러사진이다. 수필을 두 가지 사진으로 바라보는 내 마음이 해사해서가 아니라고 말하고싶다. 남계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춥고 배고팠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시종일관 변함없이 남아있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인생, 미래, 사랑, 행복, 진실, 학문에 대한 진지한 추구였다. 선생님의 인생관이 오늘의 인생수필을 잉태했다. 남계선생님에게는 컬러사진이나 디지털사진보다도 흑백사진이 더 보귀하고 값지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도라지》2004.1)
69    인간의 향기와 철학이 있는 글 댓글:  조회:5444  추천:90  2006-05-18
인간의 향기와 철학이 있는 글 김훈(소설가) 지난해 저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해변문학제에 참가한적이 있습니다. 해변문학제에서 한국에서 온 한 수필가가 한국의 수필문학에 대해 피력하면서 《한국엔 수필독자보다 수필작가가 더 많다》고 개탄했습니다. 한국의 수필문학상황에 비해 중국 조선족수필문단은 날이 갈수록 활약적이고 또한 다른 쟝르의 문학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있는것만은 사실입니다. 대체로 소설은 재미로 읽는 글이고 수필은 감명깊게 읽는 글이라고 합니다. 아마 중국 조선족문단의 수필이 감명깊게 읽혀지는 글이여서 날이 갈수록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있는가봅니다. 황유복교수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황유복교수님의 글에서 예리한 관찰력, 풍부한 상상력, 박학다식한 사고력과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개성을 읽을수 있고 많은 지적정보를 얻을수 있다는점입니다. 워낙 교수님이 오래동안 민족학에 대해 전공해오시고 또 미국 하버드대 방문학자 경력까지 거치면서 세계적인 안목을 넓혀오신 학자여서 그런지 황유복교수님의 수필에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담은 사색적이고 충격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고향, 동년, 사랑, 자연에 대한 동경과 정감을 담은 글도 있고 또한 철학적 서정과 여운을 남기는 글도 있습니다. 심미적, 철학적 가치와 솔직한 정감이 겸비된 글이 수필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향기가 넘치고 철학이 있는 글, 독자들의 마음에 가장 먼저 와닿는 교수님의 력작이 새해에도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도라지》2004.1)
68    여운의 아름다움 댓글:  조회:5499  추천:95  2006-05-16
남호손의 수필《태항산기슭에 핀 들국화》 읽기 윤해란 꽃이 화두로 되였다면 누구라 할것없이 하고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우리가 제일 많이 사랑하고 례찬해온 자연물은 단연코 꽃일 것이다. 운치의 상징으로 꼽히는 매화나 련꽃, 부귀를 의미하는 모란이나 작약, 사랑을 대표하는 장미, 번영으로 비유되는 진달래나 무궁화를 망라한 수없이 많은 봄꽃과 여름꽃, 가을꽃들에 대하여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간직하고 있을 《꽃같은 시절》이나 기쁨으로 《웃음꽃피우》던 지난날의 추억에 대하여 그 누가 하고픈 말이 없겠는가? 남호손은 수필 《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에서 《기운이 쇠잔해진 가을햇살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찬서리를 걷어낼 때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과 락엽들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있는 들국화》를 화두로 삼고 있다. 어릴 때 할머님을 따라 가을걷이를 하는 논밭에 가서 메뚜기를 잡다가 조우하게 된 《숨막힐 정도로 예쁘게》 피여있는 들국화를 처음 보게 된다. 《아무리 임자없이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라도 일단 꺽었으면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할머니의 소박한 교육과 할머님의 사랑으로 한 겨우내 《들국화의 특이한 꽃향기에 취해》 잠들던 어린시절의 추억에서 작가는 《나는 들국화를 할머님의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고 《모든 꽃들 중에서 들국화를 제일 사랑하게 되였다》라는 고백을 이끌어 낸다. 대학을 졸업하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하던 작가는 천진시 교외의 들판에서 보게 된 들국화를 고향과 할머님을 향한 마음의 《망향초》로 인식한다. 그때 작가가 쓴 한시중《아시원(兒時願)》과《남호(할머님의 택호)심(南湖心) 》 에서 작가의 절절했던 그 때의 심정을 쉽게 읽을수가 있었다. 이제 《세계적 석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남호손은 이순의 나이에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기 위하여 태항산오지로 들어간다. 태항산 기슭에 묻힌 조선의용군 렬사들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그의 들국화사랑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 선렬들의 넋》으로 승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남호손 수필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작가는 들국화라는 화두를 빌려 자신의 일생을 쓰고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님의 사랑과 젊은 시절 할머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족사랑 이 오늘의 선렬들에 대한 추모로 대표되는 민족사랑으로 승 화되는 과정을 청초한 필치로 보여주고 있다. 청초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만이 쓸수 있는 청초한 글은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수필은 독자로 하여금 강요나 설득을 요구하지 않는 문학장르라고 한다. 독자들을 우선 배려해주는 여운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수필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 할수 있다. (《도라지》2004.1)
67    5. 나오면서 댓글:  조회:5447  추천:62  2006-04-28
5. 나오면서 지금까지 필자는 남계의 수필을 3개 항으로 나누어 해석해보았다. 남계의 수필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니까 남계는 수필을 통하여 참삶의 가치란 어떤것인지를 보여주면서 그러한 참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소모적인 외래의 류행문화에 물젖어 리기주의, 향락주의에 빠져가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인생태도를 비판하고있는셈이다. 그러면서 그런 인생가치의 구명 과정에 인간의 정체성, 나아가서는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다시 참삶의 가치를 구하려는것이 남계의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물론 문학작품으로서 남계의 수필은 여러가지 예술적인 장치도 동원하고있다. 인문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그리고 생활적 지식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론리적전개라든가 지나간 청소년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통한 순수미의 추구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문학적장치를 리용할 때 늦게 문학에 입문한 수필가로서의 한계도 더러 로출된다. 가장 눈에 뜨이는것이 딱딱한 문장구성과 한어(漢語)적표현의 흔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면에의 한계는 점차 극복될것으로 보이며 또 남계의 수필을 읽을 때는 이런것들보다 남계의 삶의 가치인식, 사회적책임의식을 리해하는것이 오히려 더 의미가 있는게 아닐가 한다. (《도라지》2004.1)
66    4. 민족의 정체성 확인하기 댓글:  조회:6006  추천:78  2006-04-26
4. 민족의 정체성 확인하기 일반적으로 정체성(identity)은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속에서 대답되여지는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자기다움의 사상을 뜻한다. 이를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은 《자아 외부의 변화에 직면하여 이루어지는 자아의 적응(adaptation)기제》로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정체성이 타자와의 차이―그것도 그 사회에 있어 문화적으로 강화된 차이를 만들어가면서 자신이 누구이며 그 사회속에서 자신의 존재의의와 위치는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한편 정체성은 순간적인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역할의 산물(상황적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역할, 상황, 그리고 집단들과의 관계속에서 고정된 의미로 남기도 한다(사회적정체성 및 개인적정체성). 정체성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정체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외부의 자극을 해석하고 해석된 의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사람은 진공상태에서 사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존재이기때문에 개인의 독단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개인이 소속감을 갖게 하는것은 피부색이나 얼굴모양과 같은 생물학적, 육체적 특징만이 아니고 오히려 공동의 력사적, 문화적인 관습과 전통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해 이러한 공동의 경험과 습관의 의미가 의심스러울 때 인간의 정체성은 도전받게 되고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정체성을 모색하게 된다. 민족정체성은 인간이 갖는 정체성의 한부분이다. 민족정체성은 광범위하게 정의한다면 공유된 민족적특성들로 인해 어느 한 개인이 어느 특정 민족집단에 대해 느끼는 소속감(a sense of belonging)이라고 볼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자아개념(self-concept)》의 일부분인데 이것을 통해 개인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를 스스로 정의하거나 또는 타인들에 의해서 정의되여질수 있다. 정체성 리론을 장황하게 설명한데는 물론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남계의 수필에서 그러한 정체성의 문제가 특별히 강조된데도 원인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 조선족사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있는것은 아닐가, 바로 이점이 남계가 자신의 수필에서 정체성의 문제에 특별히 주목하고있는 원인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다. 한 개인의 삶의 의미는 인간의 정체성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즐거운 삶이라고 하더라도 정체성을 상실하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기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가 이 경우다. 이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기호라 할수 있다. 그런데 남계는 이름다운 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유복자여서 유복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를 이름으로 써온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 사실상 소학교에 입학하는 날 김선생님이 유복(遺腹)이 아닌 유복(有福)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그것은 이미 고유명사가 된셈이다. 남계의 이름콤플렉스는 수필을 발표할 때 《남계》라는 호를 사용하고있는데서도 은연중 드러난다. 이 수필에서 남계가 말하고자 한것이 사실은 유복이라는 이름의 래력, 그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속에 담겨진 해방후 우리 사회의 정신사였다고 보여지지만 그 정신사속에는 남계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 확인과정이 드러나고있다. 그러나 남계의 정체성인식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민족적이다. 그는 첫사랑의 실패에서 그러한 민족적정체성을 처음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첫사랑의 실패는 가장 참담한 방식으로 나에게 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것도 내가 중앙민족대학 이라는 학과목에서 배울수 없었던 심층적인것을 터득케 했다.》(《내가 만들었던 눈사람》에서) 여기서 남계가 터득한 리치는 민족성을 통한 한 인간의 정체성 문제다. 그래서 《그때의 깨달음이 ⟨조선족⟩에 대한 나의 사랑의 씨앗이 되였고 오늘에 성취한 나의 학문의 에너지》가 될수 있었던것은 아닐가? 내가 알기로 남계가 이룩한 풍성한 학문은 한마디로 조선민족의 문화적특징 혹은 민족적개성에 관한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연구는 결국 남계가 소속된 집단, 즉 중국의 조선족이 다민족국가인 중국에서 존재할수 있는, 혹은 중국에 존재해야 하는 리유를 밝히고있는셈이고 이는 곧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확인과정이기도 하다.《사랑의 언어학》이나 《사랑의 민족학》 등 남계의 중수필들에는 이러한 남계의 학문적업적이 단편적으로나마 모습을 보인다. 《사랑의 언어학》에서 남계는 《아이 러브 유》나 《워 아이 니》형의 사랑표현은 마치 규격화되여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된 공업제품과 같아 개개인의 개성이 완전히 함몰된 상태라 하고 그래서 애쓴다거나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한번 구해놓으면 변하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쓸수 있는 조화(造花)와도 같은 말이며 거기에는 생기도 향기도 없다고 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민족어에는 그런 규격화된 사랑표현이 없기때문에 우리 말로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남과 녀는 개개인의 문화적개성을 추구할수밖에 없다고 했다.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사랑의 표현은 진한 향기로 되여 상대에게 전해질수 있다.》고 한 남계의 결론은 남계의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사랑의 민족학》에서는 더구나 비슷한 모티프를 가진 아랍, 유태, 조선 등 세 민족의 고사를 비교하면서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감싸안는다. 비록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사랑의 선택에서 철저하게 아랍민족의 상업주의 원칙을 적용시킨 아랍공주나 계약주의 원칙에 따른 유태공주, 그리고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을 선택한 조선처녀중에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모두 자신의 문화적인 기준에서 사랑을 선택한것일뿐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하다.》는 남계의 평가는 어쩔수없이 민족적이다. 비교하고자 한 세 이야기의 선택 자체가 그렇고 주는 사랑을 참사랑이라고 한 인식이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사랑은 문화적산물이다. 사랑이 구성되는 방식은 사랑의 주인공들이 소속된 그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특성에 좌우된다.》는 결론 역시 민족적인 견지에서 도출된것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중수필 《선택》에서는 그러한 민족애를 바탕으로 오늘날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의 현명한 선택을 촉구하고있다. 1999년 한해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신생아수는 3800명인데 이는 10년전의 4분의 1을 좀 웃도는 정도라 하고는 이대로 나간다면 2049년에는 0출생을 기록할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제시한다. 그 중요한 원인이 조선족녀성들의 한국 출가와 도시 유흥업소 류입에 있다고 보고 이런 국면을 역전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선족남성들이 열심히 배우고 일하며 책임성있는 인생길을 새롭게 선택하는것뿐이라고 지적한다. 남계의 민족적 책임의식을 나타낸 대목이라 하겠다. 남계는 또 이렇게 촉구하고있을뿐만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책임있는 립장에서 실천하고있다. 북경의 조선족을 위해 조선족학교를 운영한다든지, 민족문화의 생존을 위해 경제난에 처한 《도라지》잡지를 지원해준다든지, 우리 민족의 농업경제와 민족경제를 글로벌시대에 적응시키기 위해 China-corean.com이라는 인터넷싸이트를 창립 운영한다든지, 조선족집중촌건설을 추진하는 등 남계의 민족엘리트로서의 책임있는 실천은 또다른 측면에서 민족정체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있다.
65    3. 현대인의 타락한 도덕 꼬집기 댓글:  조회:5662  추천:68  2006-04-24
3. 현대인의 타락한 도덕 꼬집기 그러한 남계의 가치기준 혹은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또다른 화법이 있다. 현대인의 타락한 도덕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외관적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며 돈독에 찌들어(물질만능주의) 황페해진 마음을 가리려는 현대인의 현대병에 대한 비판은 앞의 《옥년이와 봇나무》에서도 보았거니와 남계는 그러한 꼬집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진정 가치있는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먼저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에 나오는 훈이의 이야기를 보자. 훈이의 이야기에 앞서 이 수필에서 남계는 마을 잔치집에 따라가려는 손자를 떼놓고가면서 하던 할머니의 의미심장한 타이름을 적고있다. 이 소년, 즉 어린시절 남계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언제나 엄격하시면서도 때로는 너그러우신 위대한 부성의 사랑과 자애로우시면서 항상 강인하신 모성의 사랑》을 함께 지닌 어버이다. 유복자로 태여나서 두살에 어머니마저 잃은후 줄곧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기때문이다.(《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참조) 그에 이어 훈이의 불우한 경력이 서술된다. 요약하면 부모의 리혼때문에 버려져 이집저집 옮겨지면서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해버린 무감각한 상태에 처한 아홉살짜리 소년이였다. 그 소년을 남계는 자신이 관여한 소학교 기숙반에 들여보내며 기를 살려주기 위해 옷이며 학용품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장만해준다. 할머니의 기억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남계가 훈이의 이야기를 꺼낸 목적이 자신의 소행을 자랑이나 하려는데 있는게 아니다. 어처구니없이 높은 리혼률때문에 훈이와 같이 버려지는 애들이 점점 늘어가고, 또 돈벌이를 나간다고 애들을 할아버지 할머니나 친척집에 맡겨놓고 한국으로, 국내 도시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꼬집기 위해서다. 일부일처제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리혼률은 당사자에 대해서나 그 자녀에 대해서나 모두 합리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급속히 늘어난 리혼률은 정상적이라 보기 어렵다. 그중에는 당사자 자신들에 대해, 혹은 그 자녀들에 대해, 아니면 당사자와 자녀들 모두에게 불리한 리혼이 상당히 존재한다고 보기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의 오류를 부채질하고있는것이 바로 향락주의와 리기주의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러한 향락주의와 리기주의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것이라 할수 있다. 신문을 통해 훈이의 부모를 찾아냈을 때 그 아버지라는 사람은 잠적해버린 대신 어머니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훈이를 데려다 키우겠다고 찾아온다는 이야기에서, 특히 기쁨에 도취되여 엄마의 손을 꼭 쥐고 따라가고있는 훈이의 모습을 통하여 남계가 우리에게 제시한 삶의 가치는 의미심장한것이 아닐수 없다. 현대인의 이러한 삶에 대한 무책임함에 대하여 남계는 《사랑의 사회학》에서 보다 예리하게 꼬집고있다. 사랑에 대한 TV특별토론에서 20대 젊은 처녀로부터 6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자신들의 남자친구나 남편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고있다고 불만이더라는것이다. 서양문화 특히 헐리우드영화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의 영향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곧이어 남계는 중국남자들은 《워 아이 니》라는 사랑표현을 람용하지 않는 대신 한번 결혼하면 쉽게 리혼하지 않는데, 즉 백년해로가 아직까지도 중국에서는 기성세대의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로 되여있지만 《어쩌면 숙녀들에게 저토록 친절할수 있을가》라고 감탄할 정도로 하루에도 수십번씩《아이 러브 유》를 곱씹어대는 미국남자들은 결혼후 쉽게 리혼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이제 TV나 영화를 통해 헐리우드문화에 물젖어가고있는 상황에서는 중국남자들의 《워 아이 니》라는 표현이 잦아질수록 리혼률도 높아질수밖에 없다는것이 남계의 견해이다. 리혼률의 상승은 곧 불행한 아이의 양산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모들의 사랑으로 커야할 어린시절, 가장 친밀했던 보호자들의 관계해체로부터 받은 상처는 평생을 두고 아픔을 줄수 있다.》(《사랑의 사회학》에서) 여기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실을 보게 된다. 1999년에 연변조선족의 리혼률은 2:1에 이르러 미국을 릉가했다는것이다. 그리고 이런 리혼률의 급상승은 한국인과의 위장결혼, 시골 젊은이들 특히 처녀들의 도시진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더욱 우려를 금할수 없게 한다. 남녀의 성적매력은 3년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보고가 있듯이 결혼제도와 사랑의 자유는 언제나 모순된다. 따라서 결혼제도는 사실상 사랑의 자유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 할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하에서 리혼도 마다하지 않고 사랑의 자유를 추구하는것은 대개가 리기주의나 향락주의때문이라고 볼수밖에는 없는것이다. 사랑의 자유를 위해 발굴(?)해낸 또다른 방법이 외도라고 남계는 말한다. 그러나 불륜은 사랑을 말초적이고 단순한 성접촉으로 전락시킨다. 그렇다면 《사랑은 없고 포르노만 남은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을 계속 희망할수 있을가.》라는 질문은 너무나도 절실한것이다. 남계가 현대인의 도덕적타락을 꼬집으면서 가장 많이 지적한 내용은 리혼문제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나서고있는 리혼률의 급격한 상승현상과도 관련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것은 그러한 리혼률 급상승의 리면에 무책임한 현대인의 리기주의나 향락주의가 도사리고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무책임함이나 리기주의가 한두사람의 개인의 문제라면 몰라도 그것이 심각한 사회적문제로 부상했을 때는 전반 사회의 가치관이나 도덕적기준이 해체될 우려가 있기때문이다.
64    2. 삶의 가치 찾기 댓글:  조회:5540  추천:96  2006-04-20
2. 삶의 가치 찾기《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그 다음날 날씨가 맑아진다. 다시 말하면 저녁노을은 세상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며 혼신을 불태우는것이였다.》(《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에서) 여기서 저녁노을은 희망이나 기대 혹은 꿈이다. 흔히 저녁노을은 가을단풍과 더불어 인생의 만년을 표현하는데에 사용되는데 남계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다. 개인적인 체험때문이다. 유복자로 태여나 두살때 어머니마저 잃은 남계의 인생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이 바로 저녁노을이였기때문이다. 혼자서 집을 지키다가 저녁이 되여 외롭고 배고플 때 할머니가 돌아오는 길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였으므로,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그러한 외로움과 배고픔마저 잊을 정도였으므로 소년은 실제로 그 저녁노을의 실체를 찾아나서기까지 한다. 당연히 불가능하였지만 남계는 그러한 노을의 아름다움을 인생의 꿈으로 승화시킨다. 그렇게 저녁노을에 깃들인 소년시절의 꿈은 가난과 고독에 쪼들리던 어린 가슴에 행복을 가득 채워주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키워주었다고 했다. 그것을 다시 인생의 가치에 련결시키고있다. 《가장 핵심적인 가치기준은 물질적인것이 아니라 정신적인것, 다시 말해서 마음의 풍요로움에 있다.》는것이다. 이러한 남계의 가치기준은 돈과 권력, 사회적지위 등 일반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것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풍요로움을 남계는 사회와 민족 그리고 나라에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하였고 그것이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삶》이라 했다. 작자의 가치관과 인격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남계는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로 터득한다. 학년말시험에서 1등을 하고서도 람루한 옷때문에 단상에 올라가 상장과 상품을 타지 못하고 기념사진도 찍지 못했던 소년기의 추억때문이다. 가난은 불행만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아쉬움일뿐이며 오히려 그러한 아쉬움이 아쉬움 없는 넉넉함을 지향하면서 더 노력하게 한다는 할머니의 가르침 또한 그러하다. 《부족함과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뜻의 넉넉한 삶을 살아갈수 없다.》는것이 남계의 깨달음이다.(《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에서) 이는 물론 무능이나 게으름때문에 가난을 영위하는 부끄러움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단지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속에서 세상을 보는 인간의 눈은 밝아》질뿐이라는것이다. 가난이 힘이 된다는 리치를 남계는 할머니에게서 배운다. 마을잔치에 따라나서려는 손자를 남들이 《저 할멈은 얻어먹이려고 손자까지 데려왔다》고 흉보며 그러면 인격과 자존심이 떨어진다고 한것이다. 가난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겨낼수 있지만 가난하다고 인격과 자존심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그건 구제불능이라는 가르침이다.(《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에서)이렇게 살면서 터득한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순수함이라고 했다. 순수한 삶, 순수한 아름다움을 남계는 원하고 주장한다. 그러한 순수한 아름다움, 순수한 삶을 그는 봇나무에 비유한다. 겉보기에 미인형이기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 가지를 마당비로 쓸수 있고 《이른 봄날 산에 올라 더덕을 캐다가 목이 마르면 손칼로 봇나무 껍질에 Y자형 상처를 내고 흘러내리는 즙을 그릇에 받아 마시면 시원한 음료수가 된다.》(《옥년이와 봇나무》에서)는 리유에서만도 아니였다. 외롭던 어린시절 처음으로 사귄 친구 옥년이와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있기때문만도 아니다. 대자연과 더불어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옥년의 모습을 보며 순수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서 《머리염색만 하면 십년은 젊어지겠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단 한번도 염색해본적이 없다. 젊어지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젊어지고싶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가고싶기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때문에 미쳐버린 세상》을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 성형수술로 외모가 아름다워지는것보다는 《돈때문에 싸우고 리혼하고 자식을 내다버리고, 자신의 무능과 비겁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술로써 자신을 마비시키》는 현대인의 타락을 치유하는것이 훨씬 더 요긴한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아름다움, 순수한 삶에 대한 지향을 키워준것이 고향이고 고향마을 사람들이다. 밤이 긴 겨울날 밤, 화로불에 감자를 구워먹으며 마을 할머니들에게서 들은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이바구》에서 남계의 가치관은 형성되였다고 한다. 《할머님들의 이야기동산에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즐거움과 함께 꿋꿋한 힘, 반짝이는 지혜, 따스한 우정, 달콤한 사랑, 소박한 꿈, 훈훈한 인정들이 가득 차있》었던것이다.(《군감자와 ⟨이바구⟩》에서) 그러고보면 남계의 가치기준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문화에 기반을 두고있는것 같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치관 자체만을 주장하는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최하층 인간들의 삶에서 가장 순수한 인간성을 체험하고 인간의 가장 진실된 삶의 가치를 터득한것이다. 즉 오늘날 물질적풍요에 의해 가려진 정신적풍요의 모습을 상기시키고있다 하겠다. 《나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행운》(《오늘날의 삶에 충실해야》에서)이라는 인생인식에도 결국 이러한 가치기준이 담겨져있는것이다.
63    정체성과 삶의 참의미-1. 들어가면서 댓글:  조회:5631  추천:75  2006-04-19
정체성과 삶의 참의미 -남호손 수필 읽기 장춘식(문학평론가, 연구원) 1. 들어가면서 수필평론을 쓰면서 매번 부딪치는 문제는 도대체 수필의 가치를 어떻게 보아야 하고 또 평가해야 하느냐 하는것이다. 여타의 문학쟝르들, 이를테면 시, 소설, 희곡 등에 대해서는 수많은 비평방법들이 개발되여 어떻게든 분석하고 평가할수가 있는데, 수필에 대한 비평방법은 아직도 모색단계에 처해있어 번마다 고민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남계(남호손)의 수필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즉 삶의 참모습을 찾아보려는것이 남계의 글쓰기 리유나 목적이 아닐가 하는것이다. 삶의 구경(究竟)을 찾으려는 시도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든 한두번은 있음직한 일이고 또 문학인생의 전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중심과제로 삼은 문학인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수필이라는 문체가 허구가 아닌, 실화이기때문에 남계가 수필을 통하여 그러한 삶의 구경, 삶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시도는 보다 더 치렬해보이고 또 독자의 마음에 와닿는것 같다. 그리고 삶의 구경이라는것은 어차피 한 인간의 정체성(正體性)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므로 남계의 수필은 결국 정체성 확인의 한 수단이 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62    리성의 혼 자유의 옷 댓글:  조회:5996  추천:73  2006-04-17
리성의 혼 자유의 옷-남계(남호손) 수필을 읽고 서영빈(문학평론가, 수필가, 교수) 1 여러 문학쟝르가운데서 수필만큼 작품과 작가 자신이 밀착되여있는 경우도 드물다. 《문이재도(文以載道)》나 《문여기인(文如其人)》의 전통적인 문학관을 이야기한다면 소설이나 시 쪽에서는 지난 세기의 고물쯤으로 취급받기 십상이지만 수필계에 있어서만은 그래도 관대한편이다. 수필을 통해 작가 자신의 인생관과 미학관을 추출해내는 일은 시나 소설에 비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작품과 작가 자신을 일치시키는 그 리유를 우리는 일차적으로 수필의 허구성 부재에서 찾을수 있다. 상상에 의한 허구를 철저히 배제하고 실제 사실만을 강요하는 수필의 이른바 진실요건이 일단 작품과 작가를 하나로 묶어놓는다고 볼수 있다. 따라서 수필의 담론은 통상적으로 일인칭이 될수밖에 없으며 수필에 등장하는 인물도 실재 인물일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 수필의 자유로운 문체적특징 또한 작품과 작가의 관계를 한층 밀착시킨다. 수필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시나 소설보다 훨씬 어려운 리유는 수필의 범위가 그만큼 넓기때문이다. 흔히 소설이나 시, 희곡이 아닌것은 다 수필이 된다. 오늘날 평론으로 통하는 많은 작품들도 따지고보면 수필인 경우가 많다. 이른바 《붓 가는대로 쓰는것이 수필》이라는 견해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누구나 쓸수 있는 글이 수필이요, 또한 그러기때문에 전문적으로 수필만 써서는 문인취급을 받지 못하는것이 수필이다. 수필인구의 량적팽창에도 불구하고 《수필가》란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는 오늘의 현실은 수필의 이러한 문체적특징의 반영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수필의 범위를 좁혀서 문예수필만이 수필인것처럼 인식시킴으로써 수필문단의 정통성과 권위성, 전문성을 인정받으려는 움직임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과연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이며 또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보인다. 이른바 《무형식의 형식》, 《자유로운 스타일》로서의 수필이 자칫 정형화될 우려가 있기때문이다. 어느 쟝르를 막론하고 좋은 글과 별로 좋지 않은 글은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꼭 수필의 범위와 련관되여있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형식의 형식》은 작가 개개인의 재능과 《끼》를 충분히 발휘할수 있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다이빙이나 체조에서 규정동작보다는 오히려 자유동작에서 선수의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규정을 지키기보다는 자유를 누린다는것이 훨씬 창조적일뿐만아니라 또한 더욱 큰 시련이 될수도 있다. 진짜 춤군의 실력은 타인이 안무한 무용에서의 역할로가 아니라 오히려 막춤에서 드러나는것과 일맥상통한것이다. 완전히 자유롭고 편안한 환경이기에 그 실력차이가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쟝르가 수필이다. 따라서 수필의 이러한 문체적특징은 작가와 작품을 하나로 묶어놓는 다른 하나의 요인이 된다. 주로 《도라지》잡지를 통해 발표되는 남계의 수필은 작품과 작가의 이러한 합일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례라고 하겠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것이지만 남계 수필은 한마디로 학자의 량심이자 스승의 가르침이며 선배의 충고이자 사나이의 고백이다. 그속에는 정직한 민족애가 있고 치렬한 학구적인 탐구가 있으며 따뜻한 고향의 숨결이 있고 감동적인 어제날의 추억이 있다. 저자 내면의 투철한 사상과 진솔한 감정, 희로애락의 력사가 수필속에 살아숨쉬는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수필이라는 자유의 옷을 떨쳐입은 리지의 혼으로 평가하고싶다. 2 력사학자로서 일찍 학계에서 탄탄한 립지를 구축한 남계로서는 어쩌면 이순(耳順)의 나이에 수필로서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그의 글 곳곳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문학적소양으로 보아서는 오늘날 그가 수필에서 이룩한 독보적인 위치가 우연이 아님을 가늠케 하지만 사회활동가, 민족사학가, 박사지도교수로서의 그의 행동반경을 감안할 때 만약 《도라지》잡지사의 간곡한 부탁이 없었다면 아마 그의 수필은 영영 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것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그의 수필은 출발이 특이하다. 문학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없기에 그의 수필은 첫시작부터 부담없는 편안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런 심리적부담이 없는 그의 이런 글쓰기 환경은 그에게 두개 층위의 자유를 부여하게 되는데 하나는 하고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점이고 다른 하나는 꼭 쓰고싶은 글이라야 쓴다는점이다. 물론 시간적인 제약 같은것은 있었겠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독자들의 평가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글쓰기에 림할수 있었을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그가 시나 소설이 아닌 수필을 선택하게 된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꼭 하고싶은 말을 자유자재로 할수 있는 쟝르가 수필을 제외하고 또 어디 있는가?! 꼭 하고싶은 말을 자유자재로 하기 위해 수필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필을 관통하고있는 가장 큰 흐름은 엄숙성이라 할수 있다. 남계 수필의 엄숙성은 제재선택, 단어사용, 작품구성을 비롯한 형식적인 측면의 섬세함과 치밀함에서도 나타나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수필에 림하는 저자의 자세에서 나타난다. 그의 수필은 수필을 위한 수필, 자아과시를 위한 수필, 문학유희로서의 수필이 아니라 《도라지》 칼럼명(남계인생수필)에서도 나타나듯이 인생을 위한 수필이다. 인생의 아름다움, 인생의 진지함, 인생의 행복, 인생의 진실을 찾아다니는 구도자의 자세가 글속에 그대로 드러나있는것이다. 일부 젊은이들의 글속에 죽음의 유혹을 찬미하고 죽음을 미화하는 경향이 나타나자 그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진지함을 역설한다.(《오늘날의 삶에 충실해야》) 그는 자신의 경륜과 인생 선배들의 잠언으로 죽음은 결코 회피할 성격의것이 아니지만 삶의 목표가 될수는 없다는 교훈을 심어준다. 이처럼 그의 글은 멋을 위한 글이나 한때의 호기를 위한 글이 아니라 사명감과 리성에 바탕을 둔 엄숙한 글이다. 하지만 그의 수필은 엄숙한 글쓰기가 쉽게 빠질수 있는 중세기적 도학자들의 설교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뛰여넘는다. 당위성에 립각한 보편적인 론리로서가 아니라 개성화에 바탕을 둔 정서철학으로서의 문학이 태여나게 되였던것이다. 남계수필의 근저에는 학자로서의 량식, 민족사학가로서의 력사의식이 자리잡고있지만 그것이 수필로서의 성공으로 이어지는데는 그의 박학다식, 탁 트인 국제감각, 몸에 배인 문학적소양이 크게 기여한것으로 보인다. 음악, 미술, 스포츠, 의학, 어학, 문학 제반에 걸친 그의 전문가적인 식견은 대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객관성을 보장하였고 미국의 명문 하버드에서의 연구경력과 세계 각국에서의 학술경력은 그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시야를 부여하였으며 중국고전에 대한 조예를 포함한 풍부한 문학적소양은 그에게 상징, 낯설게 하기, 대상화, 구체성을 아우른 탄탄한 문학적 기교를 제공하였다. 이러한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남계 수필은 우리 수필문단에서 좀처럼 발견할수 없었던 학자수필의 령역을 개척하게 되였던것이다. 남계 수필이 우리 수필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는 필자의 평가는 맹목적인 찬사의 언어가 아니라 그의 수필이 지니고있는 이러한 학자수필로서의 경지를 가리키는것이다. 엄숙한 리성의 혼과 자유로운 수필의 옷이 완벽하게 결합된 남계 수필에 있어서는 결코 과찬이 아닐것이다. 3 수필에서 문학의 여러 표현기법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리유는 허구를 배제한 실제 사실만으로 승부를 거는 쟝르이기때문일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도 저자 본인이 말하는 사실과 독자들이 느끼는 사실 사이에는 흔히 거리가 있게 된다. 이러한 거리를 가리켜 필자는 사실과 진실 사이의 거리라고 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독자들이 그것을 사실로 공감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서술이 진실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에서부터 진실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문학성의 획득과정이며 동시에 문학적장치의 실현과정이 되는것이다. 수필의 설득력은 의미화과정을 통해 부여되는것이 일반적인데 의미화의 기법은 작자에 따라 다르다. 그럼 아래에 남계 수필이 지니는 의미화기법의 몇가지 특성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자. 최근에 발표된 《사랑의 언어학》은 《아이 러브 유》를 언어에 따라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데서 시작된다. 하버드대학에서 만난 어느 외국인의 론문을 인용하여 일단은 사랑표현을 ①《나 사랑 너》류형과 ②《나 너 사랑》류형으로 대별하고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조선어의 표현에서 문제제기를 한다. 조선어의 사랑표현이 과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로 통할수 있느냐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은 저자는 《사랑》이란 낱말의 어원을 찾아나선다. 《춘향전》이나 《가루지기타령》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사랑표현방식에 《사랑》이라는 말이 결코 등장하지 않음을 확인한 저자는《석봉천자문》,《왜어류해》, 《신증류합》,《전운옥편》,《훈몽자회》 등 문헌을 통해 《사랑》이란 낱말의 등장시기를 밝히고 《광주본 천자문》을 통해 《사랑》의 어원이 《사량(思量)》임을 지적하였으며 문헌고증을 통해 사량이 사랑으로 바뀐 시기도 소상히 밝힌다. 《사랑》의 어원찾기에서 저자는 학구적인 치밀함을 잃지 않고 철저하게 언어학적인 방법론에 근거해 추적하지만 만약 거기까지라면 수필로서의 《사랑의 언어학》은 자격미달이 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어서 사랑의 개성적인 성격과 조선어 사랑표현의 개성적성격을 병치시킴으로써 규격화된 조화(造花)와 같은 《아이 러브 유》와 생기와 향기를 겸비한 조선어의 사랑표현을 대비시켜 언어사랑을 통한 민족애를 나타내고있다. 작품의 주제는 언어사랑을 통한 민족애지만 그러한 주제에 이르기까지의 진행과정이 탄탄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철저한 학구적 치밀함을 그 바탕에 깔고있다. 《사랑》이라는 낱말의 구체성을 통한 언어사랑, 언어와 사랑의 《개성》에 립각한 대상의 병치, 어원찾기에서 보여준 학구적인 태도, 이 세가지가 하나의 작품에서 통일을 이루면서 학자수필의 한 전범이 탄생하게 된것이다. 남계 수필의 이러한 학구적치밀성은 계렬수필인 《사랑의 민족학》, 《사랑의 사회학》, 《사랑의 신화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빛을 발한다. 이 계렬수필의 궁극적인 주제는 민족애지만 그의 이러한 보편화된 주제가 공허하게 안겨오지 않는 리유는 구체성의 획득과 학술적인 엄숙함을 겸비한 설득력에 있다. 필자가 루루이 강조하고있는 과정의 중요성(《무엇》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진가를 발휘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남계 수필의 또 다른 특징은 집중적인 사고력이라 할수 있다.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 차분한 분석, 정연한 구성은 바로 이러한 집중적인 사고력의 결실이다. 본인의 이름을 두고 쓴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는 이러한 집중적인 사고력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수필은 먼저 《이름 없다》는 말의 사전적해석에서 시작하여 이름의 기호적성격, 이름의 사회적성격, 개인 이름과 그룹 이름의 분별성에 대해서 서술하고있다. 여기까지는 구체화되지 않은, 일반적의미의 이름론에 해당된다. 다음 저자는 개체론으로 들어가 《유복》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다. 그룹 이름 유복(遺腹)에서 개인 이름 유복(有福)으로의 전환과정과 대학시절 이름으로 인한 고민, 엥겔스 어록으로 인한 봉변 모면, 성경에서 다시 찾게 된 《유복(有福)》의 의미로 이어지면서 결론부분에 와서는 나만의 이름과 나만의 인생철학, 나만의 가치관으로 대비된다. 일반론에서 개체론으로, 표면에서 심층으로, 기표에서 기의로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이 과정을 살펴보면 이름과 관련된 저자의 사고력이 얼마나 집중적인가를 알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물론 평소 루적된 지식의 축적이 깔려있겠지만 한국문단을 포함하여 이름과 관련된 많고 많은 수필중에서 아직까지 이처럼 설득력 있는 수필을 본적이 없다는 사실은 집중적인 사고력의 결실로 볼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남계 수필은 많은 특징들을 안고있다. 정서적인 색채가 농후한 상징물들을 통한 대상화의 기교(《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옥년이와 봇나무》,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군 감자와 ⟨이바구⟩》)거나 전문작가들을 뺨치는 정확하고 유려한 언어표현들도 지적될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두개의 례문을 통한 유머감각만을 제시하는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한 이제는 혼전성관계나 동거도 사회적간섭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며칠전 신문을 보다가 상해, 북경, 청도 등 대도시에서 《누드 신혼사진붐》이 일고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놀란 나머지 이제는 누가 공공장소에서 《라체결혼식》을 치렀다 해도 놀라지 않기로 작심했다. - 《사랑의 사회학》 중용론으로는 우리가 평시에 자주 듣게 되는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요, 과음하면 독약이다》라는 말이 있겠지만 그보다 더 해학적인 속담을 1992년 몽고를 방문했을 때 울란바또르의 한 애주가가 들려준적이 있다. 《술을 마시면 죽는다. 그러나 마시지 않아도 죽는다.》 -《남자․술 그리고 약속》 (《도라지》2004.1)
61    무궁한 위력 댓글:  조회:5834  추천:64  2006-04-13
무궁한 위력 황유복교수를 마주하면 하나의 커다란 위력을 느끼게 된다. 술담배를 일절 거부한다고 하여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고 몇십년 학술을 연구한다고 하여 틀이 있는것도 아니다. 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리해를 해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분명히 밝히며 상대방을 끌어가는 강한 힘, 항상 쉴줄 모르고 정열적으로 밀고가는 왕성한 투지력과 민족의 애환으로 가슴 끓이며 그것의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하나의 매력이 되어 커다란 위력을 과시하고있는것이다. 한생을 교육에 몸담고 교수를 해오면서 그는 학술연구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가 펴낸 저서로는 《조선족혁명투쟁사》,《중국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연구》,《중국 조선족 연구》등 26권에 달하고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우리 민족과 도라지》,《21세기를 지향하는 중국 조선족의 교육》등 9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론문과 저서는 거의가 조선족에 관한 연구로서 중국내 조선족연구의 권위로 꼽히고있다. 실로 그의 령혼과 마음은 조선족과 끈끈이 이어져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래서 흔들리는 조선족사회를 보며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기나 한듯 걺어지고서 아파하고 안타까와하며 해결의 방법을 모색하고있는 그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해마다 한차례씩 《조선족의 지속적발전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왔다. 민족문화 정체성에 관한 리념을 정리하고 민족발전전망을 탐구하는 차원에서 1994년부터 시작된 심포지엄은 지금까지 9차에 이어져왔으며 공동으로 관심하는 조선족의 인구문제, 경제발전, 민족교육문제, 문화사업, 벤처산업 등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리고 발전방향을 모색하여왔다. 황교수가 보기엔 현재 조선족사회는 격변기를 겪고있다. 특히 중한수교후 조선족사회는 커다란 구조적변화를 가져오고있는 상황. 우선 인구의 대이동은 조선족사회를 마구 흔들어놓았다. 한국으로 물밀듯 쓸어가고 연해도시의 한국기업으로 몰려가고 대도시로 자리를 옮기고. 그래서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 조선족 녀성들이 한국으로 시집가고 매춘녀로 빠지로 그 결과 인구의 격감을 초래. 또한 대도시에서 자란 애들은 거의가 우리 말을 못하고 녀자애들 60%이상이 한족에게 시집가는 등 민족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련쇄반응처럼 일어나는 조선족의 문제점을 진맥하고 그 해결책을 얻고저 전국 각지로부터 심포지엄에 모여온 학자, 연구원, 지도자들은 번마다 뜨거운 분위기속에서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쳤으며 실제적인 일을 성숙시키기도 하였다. 지난 8차 심포지엄에서는 21세기-지식의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로 젊은이들이 많이 동참하여 민족의 운명과 앞날을 론함으로서 생신감과 희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95년 황교수는 한국 령사관앞에 비자를 받으러 줄서있는 조선족처녀들을 설문조사한적 있다. 왜 꼭 한국으로 가려고 그러느냐는 물음에 《돈 벌어 잘 살기 위해서죠》라는 대답. 뒤이은 《조선족 남자들이 무능해서 평생을 의탁하여 살수가 없어요》라는 한마디는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또 심양시 로무시장에서 구직자들의 상황을 알아본 결과 한족들은 료리사, 운전면허증 등 각종 자격증을 갖고있지만 조선족 청년은 겨우 초중, 고중 졸업장만 달랑 들고있는 상태였다. 오래도록 조선족의 생존출로를 찾기 위해 모지름을 써오던 황유복교수는 이 두가지 사실에서 불현듯 답을 얻어냈다. 우리 조선족 청년들에게 기술교육을 시키는 대학을 설립하자. 청년들에게 삶의 길을 개척하고 고기 잡는 현대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기술을 익혀 생존의 길을 찾고 자립할수 있으면 조선족처녀들이 흘러나가지 않을것이고 그러면 인구감소도 적어질것이 아닌가. 사립대학의 설립을 위해 황교수는 미국에 가서 8개 대학을 돌아보며 이쪽 실정에 맞는 학교를 모색, 결과 그는 21세기에 걸맞는 벤처창업교육을 위한 대학을 세우기로 자리를 굳히였다. 벤처창업기술은 위험부담이 많고 성공률이 높지 못하나 일단 성공하면 엄청남 자본을 창출해낸다. 따라서 벤처창업교육이란 전 지구적인 치렬한 시장경쟁에서 딛고 일어설 새 천년의 현대화창업인재 즉 창조적이고 과감하며 기술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것으로서 이 대학을 나오면 인차 경영인이 될수 있고 창업할 수가 있다. 좋은 손재간, 기발한 아이디어와 발명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산출하는 벤처산업기술은 조선민족의 심리기질에 적성적이며 또한 민족문화심리에도 걸맞는다고 황교수는 그 가능성을 주장했다. 《조선족들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학문교육이 필요하다. 리론적인 교육은 다른 대학들에 맡기고 조선족을 빨리 국제적기술수준에 적응시킬수 있는 기술대학이 시급하다.》며 대학교에 못간 조선족 고중생들과 청년들에게 각종 산업기술과 민족언어문화, 외국어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켜 중국이라는 큰 땅덩어리우에서 생존하기 위한 능력, 경쟁력을 키워주는데 그 설립취지를 둔다고 황교수는 말한다. 이미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한국, 미국등으로부터 경제적원조를 받는 등 황교수는 대학설립의 적극적인 추진을 위해 오늘도 뛰고있다. 하냥 보면 황유복교수는 론문을 쓰거나 연구생을 지도하거나 손님을 만나는 바쁜 모습이며 국내외학술회의도 빈번하다. 중앙인민방송국, 《중국민족》잡지사, 《도라지》잡지사의 고문을 맡은 황교수는 정기적으로 방송에도 나가야 하고 원고집필도 해야 한다. 황교수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도라지》잡지사와 《중국민족》잡지사에서는 조선족기업가 정귀남회장으로부터 해마다 거액의 후원을 받는 행운을 가지기도 했다. 황교수는 문화사업을 적극 도와줄뿐만아니라 조선족기업인들에게도 항목과 기회를 마련해주는 등 조선족사회의 전반을 자기 일처럼 맡아나서는 분이다. 실로 그는 저명한 교육가이며 학자이자 출중한 사회활동가이기에 손색이 없다. 《21세기가 열리는 이 시점에서 저는 중국 조선족사회에 두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 하나는 산업경제시대가 지식경제시대로 바뀌고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면서 기술경제발전에 앞장서 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정체성 정립입니다. 잘 살기 위한 노력에 앞서 올바르게 살기 위한 노력이 더 요청되고있습니다. 옳바르게 그러면서도 잘 살수 있는 길을 다 함께 열어가야 합니다.》 2001년 1월 1일 중앙인민방송을 통해 황유복교수가 조선족사회에 드리는 신년 육성메시지를 들으며 민족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그이의 고상한 인격에 숙연해진다. 그리고 그 일개인의 위력에 의해 그토록 큰 이 사회의 한 공간이 움직이고있음을 우리는 보아낼수 있다. 바로 황유복교수와 같은 지성인들의 노력과 실천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사회는 보다 건실하고 아름다워지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60    학교설립은 그에게 숙명적인 과제였던가 댓글:  조회:6277  추천:96  2006-04-11
학교설립은 그에게 숙명적인 과제였던가 황유복교수의 경력을 듣고나면 한생을 쭉 학교를 설립하는데에 바쳐온분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그만큼 그는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사업을 열애하고있음을 알수 있다. 그의 첫 학교설립은 대학시절에 이미 완성되였다. 1961년 길림시 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며 전국대학통일시험에 합격한 황유복교수는 문과생으로는 유일하게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 민족사전공. 입학하고보니 소수민족학교졸업생이 대학입시에서 면제받은 고대한어와 외국어 과목이 문제로 제기되였다. 외국어란 별로 접촉 못해본 그를 외국어교원까지 다른 학과로 옮길것을 권고하는 상황에서 그는 반발심이 생겼다. 그는 첫 한달을 로어과 고비를 넘기는것에 투자하였다. 악을 물고 노력한 결과 한달만에 로어 6년과목을 끝내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으며 두 번째 달은 고한어과를 돌파하는데 매달려 기중시험에서 만점을 따내였다. 그것은 듣는것처럼 쉬운일이 아니였다. 소수민족학생으로서 그섯은 피타는 노력이 요청되는 일이다. 선생과 동학들을 깜작 놀래운후로 그의 외국어과성적은 줄곧 최우수점수를 지켰으며 고대한어에도 악착스런 집념을 보여 갑골문을 혼자 자습하고 전각(篆刻)에까지 재간을 피우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대학생활 몇 년간 그는 모든것에 열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이였다. 일찍 받은 할머니의 바른 교육과 꿈을 키우고 문학에 가까이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가지게 하였고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대학 4학년 황교수는 이족지구의 편벽한 산골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내려가게 되었다. 동하향 칙립사란 곳은 째지게 가난하고 환경이 험악한 곳이다. 이족자녀들이 학교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것을 보고 또 문화가 없어 사업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치는 이족간부들을 대하며 그는 꼭 이곳에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그는 상급에 청시하고 이족군중들을 동원하여 끝내 학생 20여명을 갖춘 학교를 세웠으며 사회주의교육공작대일을 해나가는 한편 솔선하여 이족말을 배워가며 그애들에게 문자를 가르치였다. 그가 학교를 세운 일은 실습내려간 전체 동학들중에서도 전형적인 사적으로 되었다. 대학에서 줄곧 우수한 성적을 따낸 황교수는 1966년 7월초 학생신분으로 학교에 남게 되었으며 1969년 중앙민족대학 당위판공실에 정식 배치를 받았다. 대학에서는 1970년부터 학생(공농병학원)을 모집하였다. 당시 민족출판사에 조선문조가 있는걸 감안하여 민족대학에도 조선어학과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황교수는 최재우선생님과 함께 학교지도부에 강력하게 신청하였다. 결과 1972년 9월 소수민족언어문학계에 조선어문학과가 정식 성립되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그는 1기생을 직접 가르치였으며 조선문학사에 최초로 《춘향전》등 작품을 강의하였다. 1기생을 졸업시키고 황교수는 자기 전공과 맞는 민족연구소롤 자리를 옮겼으며 그후 쭉 민족학계 교수로 지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족을 연구하는 한편 조선어학과 학생들에게 줄곧 조선력사를 가르치였다. 1977년말부터 1979년 1월까지 황교수는 북경군구 공병련대에 내려가 《단련》하게 되었다. 그 기간 그는 영어를 자습하였으며 로어, 일어, 이족어, 한어, 조선어 등 다종 언어를 장악한 능수가 되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민족연구소 지도사업을 책임지면서 그는 행정보다는 학문적으로 일을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학술연구로 들어갔으며 북방민족연구에 진력하였다. 1984년 황유복교수는 미국 코네티컷대학에 초청되여 처음으로 출국의 길에 올랐다. 그렇게 출국의 길이 열린 그는 선후로 미국, 일본, 한국, 카나다, 쏘련, 몽골, 홍콩 등 나라와 지구에 수십차 다녀오며 학술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게 되었다. 특히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초빙되여있는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한차례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시야를 넓히고 학술적으로 자신을 풍부히 살찌운건 물론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 여러개 대학들에서 초청강의를 하는 한편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교연구(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황교수는 조선민족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실제로 황교수는 그전에 이미 우리 조선족사회에 유익한 일을 많이 해오고있었다. 1984년 첫 출국에서 그는 외자를 인입하여 연변대학에 200만딸라를 지원해 공학계층사를 짓게 하였고 할빈조선족병원에 현대의료의기를, 길림시조선족예술관과 료녕민족출판사에 현대선진인쇄기를, 길림시 조선족중학교와 료녕성 조선족사범학교에 정밀선반기를 기증하였다. 당시로 놓고보면 이는 하나의 큰 움직임이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런 물질적지원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보아냄과 동시에 조선족 전반 사회를 위해 뭔가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였다. 갈수록 동화되고있는 조선족사회를 살리고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강화해야함이 급선무로 제기된다는것을 그는 보아냈다. 당시 미국의 한인(韓人)은 모국어를 잊어가는데 비해 중국 조선족은 자기 언어를 보존하고있는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는 그. 그러나 중국에 들어와서 현실을 보는 순간 엄청난 변화가 안겨왔다고 한다. 대도시의 80%정도의 조선족 청소년들이 우리 말과 글을 모르고있는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는 조선어학교를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모은 1만달러를 그는 그대로 학교설립에 넣었다. 교실마련, 교재와 학용품 구입, 교원초빙 등 모든 절차를 위해 친히 뛰며 하나하나 해결한 황교수는 1989년 4월 북경조선어학교를 정식 성립, 어린 아이로부터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제한 없이 조선글을 배울수 있는 북경조선어 주말학교는 설립되자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교원이 성의껏 가르치고 학생들이 열심히 배운 보람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한국회사인, 대사관직원, 번역 등 여러 업종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황교수는 차츰 그 영향을 지방에까지 넓혀 심양, 장춘, 할빈, 길림, 목단강, 단동, 석가장, 위해, 해남도, 내몽고 등 전국 10개도시에 북경조선어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다. 지금껏 졸업해나간 학생은 2000여명, 그중 한국과 미국에 류학보낸 학생만 해도 130여명이다. 가나다라도 모르던데로부터 번역을 척척 해내고 민족감이라고는 모르던 그들이 조선족임을 자랑스레 여기는 제자들을 대하며 황교수는 삶의 보람을 느끼고 의욕을 키웠다. 이 기간 황교수는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민족반을 꾸려 조선족 후예들이 어릴때부터 우리 말, 우리 글을 익히며 민족정서를 키우게 하였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 머리에 흰 서리까지 내렸건만 황교수는 여전히 정력왕성하고 탄력있다. 그가 이렇게 나이보다 젊어보임은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부지런히 뛰며 의욕에 넘치게 인생을 엮어가는것에 그 비결이 있지 않을가. 그에게는 부단히 새로운 꿈이 만들어지고 그는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한생을 뛰고 있다. 지금 황교수의 앞에 가장 큰 꿈으로 제기되는건 벤처(風險)창업교육을 위한 사립대학을 설립하는것이다. 학교설립은 여전히 그의 꿈이였다.
59    삶의 원동력 댓글:  조회:5605  추천:42  2006-04-07
삶의 원동력 황유복(黃有福), 글자 그대로 축복받은 생명이라는 뜻으로 소학교 입학 때 선생님이 지어준 이름이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유복(有福)이 아닌 유복자(遺腹子)로 태여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 그럼에도 그를 꼭 축복받은 생명이라고 말하련다면 아마도 농장을 운영하여 모은 적지 않은 돈을 독립운동에 지원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씨,그리고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엄한 교육으로 견강하게 성장시켜준 할머님의 사랑, 이 두가지를 선사받은때문이라고 할수 있겠다. 황교수는 1943년 2월 2일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한 농민가정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쌀쌀한 북풍은 방안 가득 추위와 가난을 더해주었고 아빠없이 태여난 새 생명의 불행을 짙게 물들였다. 더구나 갓 남편과 한 아들을 잃은 젊은 엄마의 심정은 납덩이에 눌린듯 아팠다. 이를 누구보다 환히 꿰뚫어 본 할머니는 그가 두 살 잡던 해 두 손자와 어머니를 불러앉히고 며느리의 개가를 권고하였다. 두 손자를 자기가 맡을테니 나이 젊었을 때 어서 개가하라며 젊은 청상과부의 앞길을 틔워주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절대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아직 기억이란걸 익히지 못했던 황교수는 그로부터 유복자로 태여난 신세에 이어 엄마의 얼굴마저 모르는 억울한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값진 선물이였다. 인격이 높고 의지가 굳센 할머니는 홀로 막내아들과 두 손자를 거느리고 생활을 억척스레 개척하였다. 어느 한번 동네 잔치집에 가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어린 그에게《우리는 이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다.너를 데리고 가면 남들은 저 할멈은 얻어먹이려고 손자를 데려왔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거지로 보는것과 다름없다. 가난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겨낼수 있지만 그러나 가난하다고 인격마저 지킬줄 모른다면 구제불능의 정신장애자로 될것이고 그럴수록 영원히 가난해질수밖에 없다.》고 할머니는 도리를 설명하였다.그 당시는 그 말뜻을 다 새기지 못했지만 자라면서 되새기는 과정에 그 참뜻을 깨달을수 있었고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수 있었다.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타이르고 격려해주신 할머니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가난을 이기고 견강한 의지와 강한 진취심, 높은 인격을 갖추게 하였다. 할머니의 그때 년세보다 더 높은 나이를 잡은 황교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하고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내 가슴속에 찡하게 남아있는 그리운 할머니의 초상은 조금도 멀어져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리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것이다.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때로는 너그러운 위대한 부성의 사랑과 자애로우면서 항상 강인한 모성의 사랑을 함께 읽을수 있는 초상이 바로 내 가슴에 새겨진 할머니의 초상이다.》 황교수에게 있어서 할머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아니, 그 이상이였다. 남호댁이라 불리웠던 할머니를 영원히 기리는 마음에서 황교수는 자신의 서재를 남호서재로 명명하고 자신의 호를 남계라 하였다. 그 뜻은 남호에서 흘러내린 내물이라는것이다. 황교수에게 있어서 할머님은 실로 정신적원천이였고 생명의 원동력이였다. 할머님의 엄격함과 자애로움은 황교수로 하여금 일찍 자립하고 철들게 하였다. 철부지 어린 시절, 그는 놀라울 정도로 조숙하고 집념스런 면을 보였다. 할머님이 삼촌과 형님을 데리고 일밭으로 가면 혼자 집에 남게 된 그는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울지 않았고 대신 창문에 매달려 새들이 재롱부리는걸 구경하고 울안에서 꽃이 피고 지는걸 지켜보았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남은것은 지는 저녁노을, 매일매일 그 황홀경에 빠져있노라면 배고픈것도 외로움도 잊고만다. 바로 그때의 집착이 집념스런 그의 성격을 결정지었는가보다. 저녁노을이 신기하고 그것에 매혹되다못해 옥년이란 년상의 여자에게 서산에 걸린 저녁노을을 따러 가자고 졸랐고 결국 옥년이는 그의 손을 잡고 서산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노을은 너무나 아득한 멀리로 달아나있었다. 그래도 꿈은 어린 가슴속에서 깨여지지 않았다. 동내 어른들이 홰불을 들고 어둠을 가르며 잃어진 아이들을 찾아 란리를 피울 때 그의 생각은 오직 따지 못한 노을로 아쉽다는 한가지뿐이였다. 그렇게 그는 매일 말동무도 없이 홀로 창가에 매달려 창문밖의 세상을 대하는속에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키우고 정감을 키우고 감수성을 키우고 사색을 키웠다. 그것은 훗날 그가 문학을 특별히 애호하게 된 기초로 되었다. 중학시절부터 그는 조선 명작과 세계명작들을 걸탐스레 탐독하는 속에 문학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래서 과묵한편인 그의 내면세계는 외롭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풍부하였다. 그는 시로 일기를 쓰고 글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운명에 도전하였다. 문학을 가까이하는속에 그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였고 인생에 대해 사색하였으며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해 애착을 느끼였다. 그리고 노을과 돌과 새들과 친구하는속에 그는 누구보다 꿈이 많은 동년과 소년, 청년으로 자랐다. 그가 어른으로 성숙하고 성과로 인생을 장식하는 과정은 바로 맘속에 간직한 하나하나의 꿈들을 현실로 실현하는 과정이였다.
58    영원으로 뻗은 꿈의길 댓글:  조회:5698  추천:54  2006-04-05
영원으로 뻗은 꿈의길중앙민족대학 황유복교수를 만나다 김홍란 섣달 그믐날, 그제야 보던 일을 마무리 짓고 서울-북경행 비행기로 총총히 귀국의 길을 줄이는 중년사나이가 있다. 그러나 일의 성취감을 감지할새도 없이 이튿날로 그는 설날의 폭죽소리속에 쓰러지고만다. 무리와 과로가 드디여 건장한 그를 허물어뜨린것이다. 사람들이 명절을 맞는 축제의 분위기속에 가족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시각, 그는 불덩이가 된 몸을 식히기 위해 모지름을 써야 했다. 그러나 나흘이 지나 겨우 허탈에서 빠져나온 허약한 몸을 가누며 또다시 집문을 나서는 그, 이 시각 그의 머리속에는 오직 자신의 결책을 기다리는 중대한 과제가 맴돌뿐이였다. 이렇듯 언제나 의욕적으로, 왕성하게 사는 그가 바로 오로지 우리 민족사업을 위해 몇십년을 로심초사하고 우리 사회에 유익한 일을 수없이 해온 중앙민족대학 민족학 교수이고 한국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박사생지도교수인 황유복교수이다. 학구적으로뿐이 아닌 실제적인 일을 결부하며 쉬임없이 뛰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행동하는 지성인》,《민족적량지의 학자이며 실천가》라고 칭하고있다.
57    만남 (5): 《도라지》의 부탁을 받고 댓글:  조회:5413  추천:45  2006-04-03
만남 (5): 《도라지》의 부탁을 받고 도라지잡시사의 부탁으로 취재를 위해 황교수님을 만나 그의 가슴속에 아직도 매듭처럼 남아있는 하나의 오랜 숙원을 알게 되였다. 북경에다 《기술전문대학》을 세우려는것이다. 일찍 그가 스무살 되는 해 중국 역사상에서 지식분자를《홍, 백》 색으로 획분하던 시기, 정치운동에 대한 열정보다 인간의 순수함을 더욱 사모했던 그에게는 홍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닌 그 중간색에 속하는 중간파학생으로 중국 대서남의 이족자치주에 재교육 받으러 내려 갔다. 인간의 인격은 그렇게 물감칠하듯 인위적으로 칠해놓고는 3인조를 무어 지방으로 내려 보냈는데 뜻밖에도 워낙 한곳으로 함께 가야 할 그 3인조가 두곳으로 나위여 가야 할 형편이 되여 부득불 홍색은 백색을 책임지고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함께 가고 중간 색갈인 황유복학생은 단독으로 가게 되였다. 극빈으로 참담한 이족들의 생활모습에 놀랐다. 특히는 그곳의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도 교육을 받지 못하여 온 마을이 문맹이였다.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귀중함이 그의 젊은 마음을 들끓게 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이족 언어를 배운 동시에 창고를 빌려 교실을 만들고 집집마다 동원하여 애들을 오전만 학교에 나와 배우고 오후는 집에서 일손을 돕게하는 반공반독의 학교를 개설했다. 세세대대로 가난과 몽매속에서 살아온 이족인민들은 공부하는 자식들 모습에 감개무량하였고 중앙민족대학 당위에서는 전국각지로 재교육받으러 나간 학생중에서 소수민족지구에 가서 학교를 설립한 황유복학생의 전형사적을 대서특필로 홍보하고 《화선》입당까지 시켰다. 일년후 귀교하여 자신의 사적을 그림 련환화로 만들어 대학가에 붙혀놓은것 앞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정치에 대한 열정으로 인정받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든 학교였고 그 학교를 만들고부터 뒤이어 중앙민족대학에 졸업 배치 되여 일하면서 본 대학에 조선어문학부가 없는것을 보고 1972년에 조선어문학부를 설립했으며 연변대학에 공과대학을 만드는데 일조했고1989년에는 북경에다 북경한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한중 수교후에 또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교육 자로서 민족문제전문가로서 그는 조선족사회 문제중 중요한 고리의 하나가 젊은이들에게 기술교육을 진행해야 함을 보아냈다. 중국에 조선족기술학교를 세워 한국축협, 농협, 그리고 산업기술학원 등과 손잡고 우리 민족 젊은이들에게 현대화한 양식업기술, 가공공예기술, 현대화농법 등을 가르치려는것이다. 바로 이미 조상이 닦아놓은 삶의 터전을 현대적 과학기술로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어주려는 선각자의 노력이고 꿈이고 바램이다. 2005년 7월, 《경제생활》잡지사가 귀국한 조선족로무자들의 재정착문제 특별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흑룡강성에서 온 한 젊은이가 발언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자리를 빌어 우선 황유복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번 장춘회의에 제가 참석해서 저의 인생이 바뀌여 졌습니다.. 교수님께서 중국조선족 농촌 청년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과 기대의 말씀은 저의 맘속에 불씨로 심어졌습니다.》그는 제 9회 학술 심포지엄참석자로서 그번 회의에서 계시를 받고 후날 오리농법을 시작하여 《김씨미업》이란 브랜드를 창출해낸 장본인이다. 황교수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대학에서 일생을 제자를 키우는데 힘을 바쳐온 나에게 참말로 자랑할만한 제자들이 많지만 그날 《김씨미업》이란 브랜드를 가지고 대도시로 진출할 앞날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얼마나 기쁘던지⋯기실 그번 회의에서 나는 그 젊은이를 알지도 못했지만 강단에서 한시간도 안되는 연설에서 이런 수확이 생기다니⋯참말로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앞날은 그런 우리민족의 젊은이들로 조상이 걸구어놓은 땅을 지키고 그 땅에서 나는 소산과 함께 우리민족문화을 만들어갈것임을 보는듯했으며 믿어마지 않는다.》. 김씨미업은 조선족농촌경제의 출로를 찾는 좋은 시작이 아닐수 없다. 문화의 21세기에 민족교육으로 조선족문화를 번영시키고 민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려는 그의 주장과 노력은 그의 《숙원》을 현실로 변화시킬줄 믿어마지 않는다. 유복자로 태여나서 이순의 오늘까지 그의 생명의 주선률은 멈출줄 모르는 탐구와 노력으로 연주된 교향악을 방불케한다. 취재의 마감을 황유복교수님의 글로 끝내고싶다. 《그 언제나처럼 때가 되면 20세기는 마감되고 21세기가 저절로 열린다. 그렇다 해서 우리 민족의 미래도 저절로 주어지는것은 절대 아니다.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 민족 모두의 엄청한 노력과 지혜를 통하여 만들어지는것이다.》 (황유복:〈조 선족 벤처산업 인재육성과 21세기 조선족사회의 미래〉) 2005. 8
56    만남(4) 커피숍에서 댓글:  조회:5385  추천:56  2006-03-31
만남(4) 커피숍에서 타자에 익숙하지 못하니 아예 만나서 이야기 할가요? 하는 황교수님의 메일을 받고 커피숍에서 만난것이 흰눈이 많이 내리고 난 뒤의 푸근한 오후. 많은 이야기중에서도 얌치없이 그냥 알고싶은것이 그 《첫 사랑의 주인공 ㅡ 진명》이란 여성에 대한 에필로그였다. 《아직 한번도 못만났어. 아니 안만나려고 했어⋯》황교수님의 그말씀에 진짜로? 설마…헌데 과연 그랬다. 지식이 새롭게 숭상을 받고 학술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때, 《진명》은 언녕부터 옛 련인을 찾고싶었다. 그녀의 불행한 혼인은 그녀로하여금 첫사랑을 잊어본적이 없게 하였다. 그의 곁으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 현실을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연구생시험을 치러서 중앙민족대학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였다. 황교수님은 그녀가 필요로하는 참고서와 도움을 청하는 모든것에 대하여 그 바쁜 와중에도 하나하나 다 챙겨서 보내주고 시험을 잘 치를것을 고무격려하였다. 하지만 황교수님은 진명이가 자기곁으로 오는것은 바람직 하지 않음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광주에 있는 중산대학 문화인류학 학과에 추천하여 입학시켰다.그후 그녀는 중국민족학학회 년회에서 만날수 있을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회의에 달려왔지만 황교수는 그것을 알고 다른 곳으로 출장갔다. 《옛날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깨고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고 각자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는데⋯이제 만나서 남은 인생과 사회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될것이 없는줄을 압니다. 더구나 이미 많은 보귀한 시간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중년의 방황으로 랑비하게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아직도 완벽주의자입니다. 순간이라도 자기한테 한 약속을 어기고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 황교수님은 지금도 누가 보든가 말든가 술을 마시지 않으신다. 젊은 날에 우파로 몰리여 비참한 마지막을 마치면서 조선족은 술을 먹고 망치니 너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스승의 그한번 부탁때문에 지금껏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결벽증있는 사람마냥 완벽할것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다. 20대후반에 대학교교단에 섰을때, 누가 북경군구 사령원의 《천금아가씨》를 그에게 소개해 왔다. 조건으로 말하면 흠잡을데 없었지만 첫 사랑이 민족문제로 깨여지면서 타민족한데는 장가들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뚜렷하게 밝혀 대방을 놀라게 했다. 조선어학과를 설립한후, 교수영입을 위해 인사권을 위임받고 동북3성으로 갈 때, 학교령도는 조선어학과 자료관리원 명액을 주면서 안해감을 골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명액으로 결혼후 장시간 견우직녀 생활을 하고있는 나이 많은 조선족선생님의 부인을 모셔왔다. 1972년, 북경에서 만나 곧바로 련인이 되여버린 처녀가 바로 지금의 부인ㅡ 최명희씨이다. . 황교수님 슬하에 아들 한분을 두고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부인 최명희씨는 국가기관에서 국장으로 임직하였고 지금 리직휴양중이다. 처녀시절의 그 어여쁘던 모습으로 결혼해서 오늘까지 변함없이 사업터에서는 우수한 간부로 가정에서는 사랑스런 아내로 학자와의 인생길을 함께 걸어왔다. 가진것을 쉽게 남을 위해 내여줄수 있는 그 마음, 행복은 바로 그가 즐거이 남을 위해 베푸는 맘에 대한 갚음의 선물이리라. 그래서 학비를 받지 않는 북경한국어학교를 설립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것이 어떤 학교인지도 모르면서 부모가 버린 고아를 황교수님한테 무조건 보내와서 교수님이 그애을 받아 길렀던 이야기나, 조선족 졸업생들중 엘리트를 한명이라도 북경에 더 남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나, 200여명의 조선족학생들을 미국과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면서 여러모로 되는 배려와 도움을 주는데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듯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와 명망을 자신이나 가정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보다 조선족의 앞날을 위해 이바지하는데 바치였다. 이것이 황교수님의 성품 이고 인격이며 그의 민족적 사명감뒤에 짙게 깔린 생명의 원색이다. 그래서 그날 커피값은 워낙 약속을 해온 황교수님의 몫이였지만 얻은것이 많은 쪽에서 내기로 했다.
55    만남 (3): 온라인ㅡ e- mail. 댓글:  조회:5456  추천:56  2006-03-29
그 귀중한 깨달음과 감동을 황교수님과 나누고싶어 만난것이 바로 온라인 ㅡ 이메일에서였다. 《청나라 아극돈의〈봉사도〉에 대한 초보적연구》란 론문 을 역사소설을 읽듯이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학계에서 《봉사도》내용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더군요. 특히 그림속의 기발이 태극기의 원형이 아닌가하는 학계의 주장은 지금까지 1882년 박영효가 처음 만들어 1883년 조선의 국기로 제정했다는 태극기의 역사가 기실 1725년 조선 영조의 장남 왕세자 책봉례에 파견됐던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그린 화집 《봉사도》에 나와 있으니 태극기의 기원은 교수님의 발견으로 인해 그 역사를 새롭게 써야할것 같습니다. .학술계의 지대한 관심과 높은 평가 읽으면서 민족사학자로서 교수님의 위치와 명망에 재삼 숙연해졌습니다. 한중 불교문화교류 천년 집대성이란 평판을 받고 있는 《중한불교문화교류사》와《해동입화구법고승전》이란 저서 그리고 〈중한불교교류사 연구〉란 론문도 승려들의 활동과 그 종파 및 불교사상을 년대기식적인 기술보다는 독립된 주제를 중심으로서술하였는데 천년사이 그 많은 승려들이 두나라 사이를 오가면서 구법활동을 했던 력사모습을 한눈에 보도록 하여 라고 했던 모택동의 시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두나라 사이 이와같은 교류활동을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불교사학계의 오랜 과제이자 바람이였었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과연 거시적인 조명으로 천년의 불교문화교류사를 집대성했습니다. 《세녀성에 의해 놓여진 다리》란 글을 읽으면서 역시 아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이곳 내몽골까지 그 《다리》는 교수님이 아니였더면 그렇게 멋지게 놓여질수가 없었을것입니다. 그 문장을 번역하여 어느 잡지사에 추천하고 싶은데 동의하시는지요? 《이름도 없이 이세상을 살면서》를 읽기 전에 교수님 이름의 《그룹성격》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선생님이 부모없이 컸다고 말씀하실 때 놀랐습니다. 수필을 읽으면서 그 놀라움을 지나 이름을 선사받고 살구나무숲으로 달려가는 장면 에서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메일을 하면서 그 장면을 보는것같아 가슴이 찡-합니다. 그 감동은 남들과 다른 감동, 교수님께서 어린 시절 부모없는 것이 한이였다면참말로 그것은 교수님으로서는 개변할수 없는 운명이였습니다저는 제 인생에 늘 는 한이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운명 때문이 아닌 저의 잘못때문인가고 자문해본적이 골백번, 하지만 더욱 색다른 감동은 김선생님의 그 사랑이 넘치는 부탁대로 교 수님이 오늘까지 그 이름자를 고스란히 지켜오신 것, 엥겔스로 부터 결국은 성경에 있는 이름임을 발견하기까지 고스란히 지켜 오신 교수님께 아름답고 순수하신 그리스도인 김선생님의 축복 이 시종 교수님과 함께 해준 력사였을수도 있다는 그점에 대한 감동이였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 그 노을을 따러 산정까지 간 소년이 훗날 미국 일류대학의 교정에서 그 노을을 보다 그것은 기나긴 세월의 흐름, 그 공간을 지워버리면 완벽하게 하나로 된 그림, 가난했던 동년의 동글동글한 꿈과 오늘 학자의 짙은 사색이 함께 어울어져 있는 앞에서, 그리고 참으로 고독하고 부족함이 너무 많았던 동년이 피운 그 의 아름다운을 이제 이순의 나이에 조금도 이순의 내음이 없이 그렇게 펼쳐보이는 재간만이 아닌 심경을 더욱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교수님의 수필은 허무궁씨가 표현한 대로 읽을때 《속도를 공제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다 읽어 내려가 버립니다. 절대 급히 일어서는 안되》는데 어느새 다 읽어버립니다. 《학구적 치밀성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학자수필》(서영빈)이여서 그렇게 빨리 읽어버리지 말고 《새김질》하며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군자지교 담여수》나 《잘못 채워진 첫 단추》는 읽는자로 하여금 은연중에 박식해지고 즐거움과 겸손함을 함께 수확하게 했습니다.《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신화학》, 《사랑의 민족학》,《사랑의 사회학》, 그리고 《원일아침수상록》 등은 글자체에 담고있는 고금중외의 그 많은 이야기와 성구가 수필이란 쟝르속에서 만났다는것 만으로도 짙은 미감을 주고있어 읽고난 감수가 너무 신선하고 산뜻한 합니다. 《첫사랑의 이야기》등 주인공의 인생에피소트와 관련된 글들에서는 작자가 삶에 대한 진지함과 솔직함 그리고 하냥 드팀없는 모습때문에 멋지고 다정하고 존경스러울 뿐 조금도 《신사》의 《자격》에 손상이 없습니다. 학구적으론 추호도 모호하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와 서정은 동년의 순수함과 젊은 날의 사색같이 조금도 색바램이 없이 《들국화》와 《저녁노을》처럼 눈부시고 찬연합니다. 그러나 학자의 량지, 민족사학가의 사명감으로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사랑과 관심을 토로할 때는 《사상가》이며 《정치가》입니다. 장춘식씨가 남계(황유복의 호)수필을 평론하면 서 《정체성 리론을 장황하게 설명한데는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 이유를 알듯 합니다. 《도라지》잡지사의 칼럼이 아니였더면 남계수필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생각이 이젠 남계수필은 기실 《조선족사회의 문화 재창조》를 위한 리론연구와 실천활동을 재천명하기 위해서 작가가 쓰지 않고서는 안될 글이였음을 알았습니다. 사마천 《사기》의 예술적 특색에 《호견법》이라고 있는데 바로 황교수님의 론문과 수필은 완전히 다른 분야지만 서로가 너무 잘 보완해주며 주인공이 인생철학, 조선족이란 민족집단에 소속된 삶, 그리고 삶의 의미가 정의되는 공동체의 활로를 찾기위한 《박학다식한 인생 선배의 잠언》(서영빈)을 독자의 맘속에 재확인해줍니다.
54    만남(2). 백문불여일견. 댓글:  조회:5713  추천:54  2006-03-28
만남(2). 백문불여일견. 중앙민족대학 황교수님 사무실로 찾아간것은 그날 그 미안함의 약속과 무관한 또 다른 하나의 사업에 관한 일때문이였다. 헌데 두벽을 꽉채운 서가에 총총이 꽂혀진 책들과 사무상 우아래 없이 쌓여져 있는 책들을 보면서 먼저 학자의 진솔한 모습과 그 풍요로움에 존경의 맘을 금할수가 없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속에는 《인도불교문화사》,《유교문화가 동양3국에 준 영향》,《리퇴계》등과 같이 한때 뿌리찾기 문화열조에 인기를 누렸던 서적들이 있는가하면 종래로 읽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이 즐비했는데 주인공의 연구분야와 그 성취에 대한 국내외 언론매체들이 《세계적인 석학》,《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한중문 화교류사연구의 1인자》,《민족적 량지의 학자이며 실천가》,《겨 레와 함께 숨쉬는 지성인》,《오로지 민족에 바치는 일편 단심》이라고 평가했던 그 이미지를 알듯했다. 이야기도중에 쉴새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때문에 대화는 자꾸 동강났지만 그 틈새로 상우에 놓인 책들을 이것저젓 뒤적여 볼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그날 교수님의 사무실을 나올 때 책을 한구럭 들고 나왔다. 이야기에서 다 못한것들을 책을 통해서 직접 보는것이 훨씬 더 나을것이라는 생각에 교수님도 동감이였다. 귀가하는 차안에서 책구럭속에서 골라 펼쳐든 책이 론문집.《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이였다. 황유복교수님의 인기와 그 사회적활동반경을 잘 보여준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밤, 그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개혁개방의 급물살이 조선족들의 재래식 삶에 준 충격은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고 그 미래를 우려하는 조선족 지성인들 에게 조선족공동체의 새로운 비전과 민족정체성의 재확립에 대한 리론적 연구와 발전방향 제시를 기대했다. 민족사학자로서 황유복교수님은 시대와 민족의 기대앞에서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학계의 시각을 모으는데, 그리고 .《우리는 누구이며 조선족문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민족구성원들의 바른 인식을 가질수 있도록 하는데 정력을 몰부었다. .《조선족이란 바로 국적과 민족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중국국적의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 호칭으로서 그들은 전통적인 조선민족 문화를 근간으로 새로운 중국조선족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이다. .《한세기가 넘는 시대적인 시련을 극복하면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형성된 조선족공동체가 이 시대 사람들의 방황으로 해체된다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귀추가 아니다. 》 오늘날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민족문화창달을 위한 문화의 재창출은 자기문화에 대한 확신과 긍지,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확립을 우선으로 요구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바로 1994년부터 시작한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과 우리민족의 언어를 상실해가는 우리민족의 도시청소년들을 위해 한국어학교를 세운 그 거사들은 한 학자로서 민족의 활로를 열어가기 위해 몰부은 정열이다. 미국하버드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때 모은 강의비용을 자본금으로 북경한국어학교로 시작하여 지금 전국각지 10개도시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고 10년간을 운영해 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오동나무를 심자》등 글을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의 고급인재류실과 기술인재부족 등 시급히 보완하고 중시해야 할 문제들을 깨우치기도 했다. 10회에 걸치는 조선족발전 학술 심포지엄에서 제기한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농촌총각들의 결혼문제, 한국진출로 인한 리혼과 가정의 해체문제, 도시청소년 민족언어상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민족교육. 벤체산업과 인재육성. 중국조선족 록색민족문화경제 기반 구축과 농촌경제발전전략 등 굵직한 주제들은 학자로서 그의 선견지명뿐 아닌 지성인으로 그 자신에 속하는 조선족 사회와 그 앞날에 대한 지대한 열애와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파워는 이와 같이 개혁의 격변기 조선족사회가 그 정체성이 도전받고 이미 이뤄놓은 공동체사회의 경험과 습관에 의심과 회의를 느낄 때 민족공동체의 귀중함과 필요성을 긍정하고 새로운 비전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리드해 온 그 점이다. 민족을 위한 그의 일편단심을 그가 쓴 저작과 론문에서 만나뵙게된것, 미상불 그것은 만남(2)의 귀중한 깨달음이고 경하 할 행운이였다.
53    만남(1)-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 댓글:  조회:5478  추천:53  2006-03-27
만남(1)-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 그날 북경거리는 명절을 위해 피워놓은 꽃들이 가을 태양 아래 찬란이 웃음짓는 환락의 분위기로 넘쳤다. 명망있는 예술가의 소개로 사업차 만난 분이 황유복교수님이실줄이야. 북경서사환에서 동륙환을 왕복하는 동안 장장 5시간을 차안에서 사업이야기는 고작 10여분으로 끝내고 사업과는 관계없는 동서남북, 고금중외의 화제로 시간가는줄 몰랐다. 왕징 옥류관에서 저녁식사를 마치면서 기실 황교수님을 6년전 어느 회의에서 뵙은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없으세요? 하고 작별인사 대신 재차 말씀을 드렸는데 교수님은 의연히 조금도 기억에 없으시단다…귀인은 잊음을 좋아 하신다고 옛사람의 말이있으니…그럼 저 혼자만 귀한 기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그 기억못한것으로 인한 미안함을 다음번 만남을 약속하는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니 결국 사무실이나 커피숍도 아닌 달리는 차안에서 명절분위기 젖어있는 북경거리를 바라보며 끝없이 나눈 무주제의 화제와 의연히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첫만남때문에 결국 그날 만남이 초면이 된 그것, 그것이 만남(1)의 포인트였다.
52    생명의 원색 댓글:  조회:5684  추천:56  2006-03-24
생명의 원색-중앙민족대학교 황유복교수님을 만나다 장경숙(소설가) 《설사 죽음이 래일아침에 찾아 온다 해도 나는 오늘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고싶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나의 래일은 또다른 하루의 오늘이될것이다. 》 -황유복:《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황유복 약력:1943년 2월 2일,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신농장에서 유복자로 태 여남. 1950년~1961년, 쌍하진, 길림시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1950년~1961년,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졸업. 1961년~현 재, 중앙민족대학 강사, 부교수, 교수, 박사생도사황유복저서및 론문:1)저서:《중국조선민족연구(중문)》,《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연구》,《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봉사도(중문)》, 《중조 불교문화교류사(중문,공저)》,《China's Minorrity Nationalities (공저) 》등 28권의 연구저서 및 역저. 그외 10권의 국제학술지 주필, 《사해(辭海)》등 2권의 사전편찬 참여.수필집: 《사랑의 사회학》2)론문: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 등 130여편.황유복사회활동 1964년, 사천성 량산이족자치주 희덕현 동하향 측립사 이족 소 학교 설립, 8개월간 강의.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 학부 창설.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소장역임).1989년, 북경조선어학교 창설 교장역임 (현 전국 10개도시에 분 교 설립). 1987년~1988년, 미국하버드대학 교환교수.1983년부터, 미국, 카나다, 쏘련, 몽골, 일본, 한국 등 나라와 홍콩 등 지역의 16개 대학 특강담당.1994년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제1회부터 2004년 제 9회까지 장장 10년을 이끌어왔음.중국조선사연구회 회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중국민족학회 리사중국도시인류학회 리사 조선족발전연구회 부회장구미동학회 학장북경하버드클럽 회원남호장학회 회장동북민족장학회 집행회장 《중국민족》잡지사 고문 《도라지》잡지사 고문 중앙인민방송국 고문한국독립기념관 해외연구위원중, 일, 한 3국 T.V제작자포럼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상기 적은 바와 같이 한사람이 일생동안을 이같이 여러분야 의 탐구와 그 결실을 맺는다는것은 생의 그 매 하루하루마다를 진지한 노력과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할것이다… 오늘도 황유복교수님은 왕성한 열정과 지성인의 책임감으로 쉼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 교육, 나아가서는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데 선각자의 의무와 직분을 다하고있다. 우리민족에 지극히 귀중한 그분을 처음 만나뵙기는ㅡ 타이틀이 《작가가 만나본 사람》이니 만남을 써야 하지 않을가 싶다.ㅡ 일년전 북경 향산의 단풍이 빨갛에 물들던 가을이였다.
51    (서평) 의미화의 매력 댓글:  조회:5226  추천:51  2006-03-23
5. 의미화의 매력 수필은 고백적인 글이다. 그러나 자아의 독백에서 독백으로 끝나는 글은 마치 메아리 없는 산울림과 같아서 수필의 경지로 오를수 없다. 수필에 나오는 한 사람의 독백이 여러 사람의 독백과 혼연일치가 되여야 참수필이 되는것이다. 남계의 수필은 한사람의 고백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고백이여서 참수필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작자의 고백을 어떻게 모든 사람의 고백으로 전환시키는가, 즉 어떻게 남들에게 공감시키고 감동을 주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수필의 매력은 어떤 인생철리나 보편화된 진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생철리를 독자에게 공감시키는 매력에 있다. 때문에 수필에서 기의보다 기의에 도달하는 기표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설득력인것이다. 이를테면 참사랑, 참인생에 대해 누구나 큰 도리로 설명할수 있고 리론적으로 풀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감동과 미감을 주면서 공명을 불러일으켜야 수필이다. 황유복의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 여기에 있다. 그의 수필속에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시키고 설득시키는 매력이 있고 자석처럼 독자를 이끄는 힘이 있다. 여기서 구성을 비롯한 형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성이란 수필의 주제를 담는 방식인데 흔히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라 한다. 어떤 형식의 구성이든 수필의 구성은 크게 예시(例示)의 부분과 일반화의 부분으로 나뉜다. 예시의 부분은 구체적 사례를 드는 부분이요 일반화의 부분은 구체적 사례가 의미하는것에 대한 필자나름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수필은 곧 개개의 사례를 귀납추상하고 의미화하여 보편성을 얻는 작업이다. 인생, 사랑, 민족, 사회⋯ 이는 상당히 보편화된 주제이다. 인생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인생의 아름다움, 인생의 진지함, 인생의 진실, 인생의 타락, 인생의 행복 등 상당히 보편화된 주제들을 많이 도출해낼수 있다. 남계 수필 역시 전형적인 인생수필로서 참인생, 참사랑, 민족애 등 보편화된 담론이다. 문제는 누구나 즐겨다루는 인생수필인데 우리는 그속에서 중복이 아닌 개성을 볼수 있고 많은 깨달음과 풍부한 지식을 얻을수 있고 감동을 받는다. 그것은 다름아닌 소재의 구체성과 개성성 및 보편적주제에로의 의미화과정의 설득성에서 온다. 남계 수필은 항상 자기만의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소재를 화두로 이야기를 이끌어낸후 대비, 비유, 유머, 풍자, 점진, 반전, 역설, 렬거 등 다양한 수법으로 읽는 사람의 주의력을 모으기도 하고 분석 확대시키기도 하면서, 인생에 대한 어떤 리치와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때로는 명구, 잠언, 명시, 명작, 신화, 고사 등을 다양하게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심화, 확산, 설득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명확한 수치와 사실적 근거로 설득력을 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의 수필이 다양한 문학적수법을 활용하여 최대한의 설득력을 꾀하고 있음을 발견할수 있다. 때문에 남계수필처럼 설득력이 강한 수필도 드물다. 이런 다양한 수법의 활용은 수필의 설득력을 강화할뿐 아니라 지식정보의 질과 량을 확대하고 수필의 철리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그것이 남계의 상당수 수필이 지적이고 사색적이면서도 문학이 되는 리유이고, 수필이 지니는 문학성이다. 문학성과 설득력을 획득하기 위한 다양한 수법가운데서 렬거와 점층, 유머와 위트, 대조적인 서술, 생동한 비유가 가장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 《상혼에 절어진 사랑의 축제》는 엉뚱하게도 《사랑의 날》을 앞둔 메스컴들의 기사를 뽑아 렬거하는 수법으로 고도로 상업화된 《사랑의 날》축제의 리면을 들여다 보는가 하면《사랑의 날》에 10억장의 카드와 1억 1000만 송이의 장미 그리고 11억 달러어치의 쵸콜릿을 판 미국시장, 《사랑의 날》을 계기로 젊은층 집중공략의 판촉전을 벌리는 일본의 상점들, 대방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수치로 알려주는《사랑탐지기》개발에로 확대해나가면서《상혼에 절어진 사랑의 축제》의 외곡된 현실을 까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랑탐지기를 개발한 회사는 떼돈을 벌어 좋겠지만 사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탐지기를 사용해서라도 진짜 사랑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탐지기⟩소비자들은 어딘가 측은해 보인다.》는 유머적인 표현은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수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밸런타인데이》의 력사는 500여년밖에 안되지만 우리에게는 3000여년전부터 전해내려온 명실공의 《사랑의 날》-칠석이 있다는것, 문명의 고국 인도에서는 《밸런타인데이》를 서양에서 들어온 문화오염으로 배척하고 저항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고대문명을 갖고 있는 중국은 무조건 서양문화만 흉내낸다고 꼬집으면서 《조상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개발에 게으름을 피워왔》다고 반성하고 있다. 수필은 구체적이고 생동한 사례들을 소재로, 렬거, 점층, 비교, 유머, 강조 등 다양한 수법을 활용하여 작가가 노린 주장에로 설득시키면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사랑의 사회학》은 사랑에 대한 텔레비전 특별토론장면에서 중국남자들은 사랑한다는말을 너무 아낀다는 중국 녀자들의 불만으로 시작되는데 반전과 역설, 풍자와 유머, 점층과 확대 등 다양한 수법을 재치있게 도입하여 설득력을 획득한 수작이라 할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풍자와 유머의 재치있는 도입은 작품의 생동성과 설득력을 훨씬 높여주고 있다. *《어쩌면 숙녀들에게 저토록 친절할수 있을까》고 감탄할 정도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아이 러브 유》 를 곱씹어대는 미국남자들은 결혼후 쉽게 리혼한다. * 요즘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들을 개의치 않고 포옹하고 싶으면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뽀뽀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 며칠전 신문을 보다가 상해, 북경, 청도 등 대도시 에서 《누드 신혼사진 붐》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놀란 나머지 이제는 누가 공공장소에 서《라체결혼식》을 치렀다해도 놀라지 않기로 작심했다.* 이제 리혼에 한해서만은 중국조선족이 미국을 향해 세계화개방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싶다.* 사랑이 모자라 《사랑실조(失調)》를 앓고 있다는 하소연도 아니고 남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에 너무 나 린색하여 달콤한 사랑의 표현에 굶주리고 있다 는 그녀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사랑도 어쩔수 없이 세계화되여가고 있구나》하는 기우지 심(杞憂之心)이 짙어진다. 《사랑의 사회학》은 풍자와 유머로 점철된 수필로서 작가의 문학적 기량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남계 수필에서 비유는 아주 생동하고 인상적이다. 4월에 들이닥친 더위를《온화해야할 해님이 마치 첫사랑에라도 빠진것처럼 갑자기 뜨거운 정열을 퍼붓기 시작했다.》고 비유했고 《문화대혁명》의 동란을《그때도 붉은 태양이 너무 많고 뜨거운 빛을 뿌리고있었다.》고 비유하며 조선족의 위기를 《중국의 대륙에서 유유히 흐르던 조선족이라는 이 큰 강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있는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감소현상때문에 원천에서부터 고갈되여 가고있다.》고 비유하고 있다. 이밖에도 《사회전반이 열병을 앓고있던 그 시대》,《박경식의 사랑은 이다.》, 《금주(禁酒)라는 호신부(護身符)》등 생동한 비유를 작품 곳곳에서 보게 된다. 남계수필에서 대조적인 서술 내지 대조법의 적절한 운용도 수필의 설득력을 높이고 주제를 심화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군 감자와 》에서 작가는 겨울날, 콩기름 등잔불아래서 화로불을 쪼이고 군감자를 먹고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할머니들의 《이바구》를 들으면서 전통문화의 감각을 체험할수 있었던 자신의 어린시절과 온돌도 없고, 화로도 없고, 군 감자도 없는 아파트 방 침대에서 한어로 우리의 옛말을 들으면서 자란 아들의 어린시절과 대조시키고 있다. 만약 지난날의 추억으로만 끝났다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로 전락되였을것이나 대조법을 재치있게 사용함으로써 평범성을 뛰여넘어 훌륭한 수필로 승화할수 있었고 강한 설득력을 기할수 있었다.《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내 아들은 정녕 어느 정도 우리 전통문화의 정서를 리해하고 있을가?》는 반문은 위트가 넘치는 결말이다. 이밖에도 《리혼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 있고 가정의 해체와 녀성의 류실로 인한 출산인구의 감소는 바닥을 내리치고 있다.》 (《원일 아침 수상록》에서)등 대조법의 재치있는 활용들을 수필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언어의 철학성은 남계수필의 다른 한 특징이라 하겠다. 남계수필은 철리성으로 특징되는데 그것은 인생에 대한 달관에서도 나타나며 언어의 철학성에서도 나타난다. 남계 수필을 펼쳐들면 전편이 인생에 대한 철학으로 점철되여 있으며 마디마디가 인생에 대한 명언이고 진리이다. * 《꿈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있을수 없 다》,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잘 살면서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면》)*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인생이나 반대로 실패로만 이어지는 인생은 있을수 없다》,《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기쁨이 기대 될수 있다.》(《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 부족함과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뜻의 넉넉한 삶을 살아갈수 없다.(《가남이 선물하 는 삶의 지혜》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불치병이다.》(《상혼에 절 여진 사랑의 축제》) 만약 학자로서의 박학다식, 사물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관찰력과 사회활동가로서의 세계적인 안목, 높은 문학적 소양이 없었다면 작가는 여러 가지 문학적수법을 그토록 다양하게 활용할수 없었을것이다. 남계 수필에는 철학이 있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민족에 대해⋯ 남계 수필에는 인간정신이 담겨져 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사랑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고 사명을 느낀다. 남계 수필에는 풍부한 지식이 담겨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속에 동서고금의 풍부한 지식을 섭취할수 있다.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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