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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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평) 학자수필의 매력 댓글:  조회:5472  추천:63  2006-03-22
4. 학자수필의 매력 남계의 수필은 개인적 인생체험을 고백한 수필이든 사랑, 사회, 민족 문제를 담론한 수필이든 모두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감오와 삶의 참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색으로 달관의 경지에 이르고 있으며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사상, 섬세한 관찰과 차분한 분석,《학구적인 치밀성과 사고의 집중성》 등으로 학자수필의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특히 그의 수필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색적인 수필들은 개인 고백적이고 체험적인것에서 벗어나 사변적이고 론리적인 사고를 펼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며 지적인 정서속에 어떤 리치를 터득하게 한다. 남계의 사랑계렬 수필은 학자수필의 전범이라 할수 있다. 《사랑의 언어학》에서 《사랑》이란 낱말의 어원찾기도 상당히 치밀하고 학구적이지만 거기에서 도출해낸 문화적 비교는 더욱 독창적이다. 영어의《아이 러브 유》나 한어의 《워 아이 니》는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된 공업제품 같》이 개개인의 개성이 완전히 함몰된 규격화된 사랑표현이며 《조화(造花)와 같이 생기도 향기도 없는》 사랑표현인데 반해 우리 민족어에는 그런 규격화된 사랑표현이 없기때문에 두 사람만의 언어로 두 사람만의 사랑을 표현할수 있는 우리 민족의 사랑표현은 진한 생기와 향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랑표현에 대한 사색을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민족애로 승화시킨 위트가 아주 돋보인다. 《사랑의 민족학》에서 《사랑을 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과는 비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하다.》는 작가의 주장은 그대로 명언인데 그것이 상식적인 리론으로가 아니라 아랍계, 유태계, 조선계 민족의 비슷한 모티프의 고사에 대한 생동한 비교속에서 도출해냈다는데 위트가 있고 설득력이 있다. 세 민족의 고사비교를 통해 아랍공주는 철저하게 아랍민족의 상업주의원칙을 사랑에 적용시켰고 유태공주는 계약에 대한 실천을 선택의 가치기준으로 삼았고 조선처녀는 참사랑을 가치기준으로 삼았다는 결론을 내린후 《사랑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랑이 구성되는 방식은 사랑의 주인공들이 소속된 그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특성에 좌우된다》고 맺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참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가운데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체득하게 하며 민족애를 심어주는 수필이다. 《사랑의 사회학》은 현실사회에 눈길을 돌려 현실에 류행하는《사랑병》들을 들추어내여 그 반면에서 사랑에 대한 답안을 찾고 있다. 작가는 사랑의 자유가 확대되는 반면에 사랑의 안전성은 반비례로 축소되여 가고 리혼, 외도, 불륜 등 사랑의 타락이 만연되여 가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리혼과 외도의 확산이 부추기는 가정의 해체와 사랑의 황폐화는 이제 우리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지성인으로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 관찰의 예리성과 분석의 치밀성이 안받침되여 한편의《사회의 사랑학》을 낳았다. 《사랑의 신화학》은 고대신화로 거슬러 올라가 사랑의 기원을 찾고있다. 사랑을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하려고 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해석하는 플라톤의 사랑 기원설에서 사랑을 인간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큐피드의 금화살에 명중되여 일어나는 피동적인 행위로 해석하는 오비디우스의 사랑기원설에로, 다시《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으며 인간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기억을 정신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과 닮은 반쪽을 만나면 결합하려 한다는 융의 기원설로 확대된다. 수필은 계속해서 신화적 시각과 명언을 인용하면서《로맨틱한 사랑》의 가능성과《성숙된 사랑》의 의미를 차분히 비교분석한후 《두사람이 합일을 이루는 진정한 사랑은 성숙된 사람들의 몫》이란 결론을 도출해낸다. 신화-기원학적 시각에서 사랑신화를 개성적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역시 학구적인 치밀성과 론리성을 띠면서도 문학으로서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혼에 절어진 사랑의 축제》는 고도로 상업화된 《사랑의 날》축제를 비판하면서 《아무리 현대인들의 사랑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날》만큼은 돈과 관계없는 순수한 《사랑의 축제》가 되었으면 싶다고 고백하여 독자들의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사랑에 대한 진지한 사색, 투철한 감오, 절실한 체험, 학자로서의 학구적인 치밀성과 박학다식이 없었다면 사랑에 대해 그렇게 다양한 시각에서 개성적으로 생동하게 풀이하지 못했을것이다. 위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여타 수필에서도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 주제의 엄숙성, 분석의 치밀성, 풍부한 지식성과 설득성 등으로 학자수필의 향기를 풍긴다. 《고섬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는 착상부터 기발하다. 고섬도치는 몸의 가시침때문에 0거리 접촉을 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빌어 인간지간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담론을 《고슴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는 사실로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진정한 친구란 어떤것인가를 한수의 시로 생동하게 일깨워주는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와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이웃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한 인간을 그린 스벤 레게너는 장편소설《레만씨 이야기》는 서로 대조되면서 진정한 친구를 가진 인생은 보람있는 인생임을 더욱 설득시켜주고 있다. 수필은 계속해서 부부사이의 적정거리에 대한 반론을 심화시키면서 마음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는것은 《거리》를 없애지 못했다는 말인만큼 《거리》가 리혼을 부추긴것이지 《0거리》가 리혼을 불러온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수필은《사람지간의 관계나 사랑이나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그릇된 담론을 명언, 명작, 명시, 속담 등의 다양한 인용과 비유, 점진, 역설 등 수법의 다양한 활용으로 반박하면서 최대한의 설득력을 기하고 있다. 《군자의 교제는 물처름 담담하고》에서는 《군자지교 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를 《군자들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있》다고 엉뚱하게 해석한 어느 수필을 화두로 《장자(庄子)》의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원문-《군자의 교제는 물처럼 담담하고, 소인의 교제는 감주처럼 달콤하다. 군자는 담담하게 친분을 돈독히 하고, 소인은 달콤하게 그 친분을 끊는다.》를 풀이하고《군자는 리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교제를 하기때문에 뜻을 같이 할수 있고 따라서 친교가 돈독해진다.》는 해석을 붙혀 군자는 서로 교제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이른바《도합(道合)》이라는 최고경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한것이라고 바로잡아주고 있다. 이어서 수필은 동서고금 성현들의 명언들을 통해 참된 우정에 대한 리해를 심화시키고 있다. 수필은 리해타산을 앞세운 《소인》배들의 교제보다 계산이 없이 뜻을 같이 하는《군자》의 교제를 소망하면서 잠언을 인용할 때 아전인수식의 해석은 절대 금물이란 충고도 잊지 않았다. 수필 《잘못 채워진 첫 단추》에서는 수필 정의에 대한 남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어 흥미롭다. 작가는 원문에 대한 어원적풀이를 통해 《뜻하는 바를 앞뒤 가라지 않고 기록》한다는 말과 《붓 가는대로 쓴》다는 말은 서로 다른 뜻임을 피력하면서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고 김광섭이 잘못 채운 첫 단추때문에 우리 수필문학이 오랜 세월동안 비뚤어지게 옷을 입고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결말에서 작가는 《글 쓰기라는 업보가 원쑤 같다》(최인호), 《글을 쓴다는것은 누구에게나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란 말을 빌어 수필이란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의 령혼으로 씌여지는 글임을 강조한다. 작가의 진지한 사색과 수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 감미롭다. 《술과 수필이 만난다면》에서 술을 마시고 《취기를 빌미》로 쓴 수필이 많은 론리적, 철학상식적 오류를 범하고있음을 들추면서 《수필은 술을 마시고 흥분된 상태에서 쓸수 있는 글이 아니》라 가슴에서 생겨나고 머리에서 정리된 글이며 정서와 지성의 융합으로 구성되는 글임을 강조하고있다. 《수필과 진실》은 한 중국인이 외국에 나가 남의 안경을 빌려 중국을 들여다보면서 많은 상식적인 오류를 범한 수필을 읽고 쓴 수필이다. 수필은 오류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나서 가짜상품은 일차적으로 그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데 그치지만 잘못 씌여진 작품은《이와전와(以訛傳訛)》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루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그 위해성을 강조하며《진실은 수필창작의 본질이자 작품의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필과 보고서》는 출장가는 남편의 가방에 콤돈을 넣어준 이야기를 쓴 수필을 보고 쓴 수필인데 그 글에서는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글쓴이의 노력을 읽을수 없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와는 달리 수필은 나름대로 진실을 해명하고 어떤 정신과 운명을 제시하려 하는것이기때문에 삶의 진실을 해명해보려는 몸부림이 없이는 좋은 수필을 기대할수 없다고 모를 박고 있다. 위의 수필들은 학자로서의 박식과 학구적인 철저성, 진지한 사색과 지성, 수필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그대로 돋보인다. 《박대정심(博大精深)의 대륙적기질》, 《중국문화의 다양성》,《노랑, 빨강과 중국인》,《중국사람과 숫자》,《글로벌 에티켓과 중국인들의 예절》,《중국인들의 욕과 한국인들의 욕》 등 수필들은 문화비교학적인 시각에서 한국문화와의 비교속에서 중국문화를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을 리해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수 있는 수필들이다. 아주 상식적이면서도 또 홀시할수 있는, 그러면서도 중요한것들을 한국인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작가의 연박한 지식과 지적인 판단력을 보여주는 수필이다. 남계의 수필은 말 그대로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몸부림》이다. 우리는 그의 수필에서 삶의 진실을 탐색하려는 작가의 지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가슴으로 느낄수 있다. 그의 수필속에는 인생을 진실되게 천착하는 안목이 있고 인생에로의 새로운 해석과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얼음같이 랭철한 비평정신도 있으며 지성의 번뜩임도 있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가르치는 학자의 글이라고 할수 있다. 남계의 학자수필적 특징은 어느 한두편의 글이나 수필의 한두 대목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모든 수필에 슴베여 있다. 학자수필적 풍격은 그의 수필의 기본바탕이라고 할수 있다. 학자수필로서의 매력때문에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더욱 많은 사색을 던져주고 더욱 많은 지식을 주고 더욱 많은 일깨움을 주고 더욱 많은 즐거움을 준다.
49    (서평) 사랑의 미학 댓글:  조회:5083  추천:68  2006-03-21
3. 사랑의 미학 남계 수필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또 다른 한 매력은 수필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랑이다. 그의 수필은 사랑으로 충만되여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인생에 대한 사랑, 이성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등이 《감동의 바이러스》가 되여 독자들을 감염시킨다. 추억속에 담은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과 저녁노을처럼 봉사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다는 주장은 물론,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지순하며 계산되지 않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랑관, 어렵게 사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수 있을 때 모두가 행복해질수 있다는 인도주의 정신은 인간애가 날로 쇠퇴되여가는 우리 생활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멜로디로 안겨온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에서 작가는 《사랑은 동사》라는 담론을 화두로, 전신화상을 입는 12살의 최려나를 도와나선 대학생들의 쌈지돈 모금에 그토록 감동하며《그들의 자그마한 사랑이 나를 행복해지게 한다》고 기뻐하면서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한다. 인간애와 민족애의 감동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남계의 민족애는 유별나다. 어린시절 고향의 《담장마을》집에서 할머니들의 구수한《이바구》를 들으면서 전통문화의 감각을 체험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감을 키워온 작가는 동란의 년대에 겪었던 첫사랑의 실패에서《민족》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되였고 그때의 깨달음이 《조선족》에 대한 사랑의 씨앗이 되였다고 한다. 일생을 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고민하고 실천해온 작가의 헌신적인 삶과 같이 그의 수필에도 애틋한 민족애로 가득차 있다. 민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눈물겹도록 진지하여 진한 감동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와닿는다. 《사랑의 언어학》 계렬수필은 사랑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투철한 리해를 바탕으로, 언어학, 사회학, 민족학, 신화학 등 다각도에서 사랑의 참의미를 추적하여 그 가치를 파헤치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민족애로 귀결되고 있다. 사실상《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민족학》은 사랑의 비교학을 통한 민족애라고 할수 있다. 위의 수필은 여타 민족 문화와의 비교속에서 본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사랑을 표현했다면 《선택》 등에서는 민족의 단점을 들춰내서 비판과 기대속에 절실한 민족애를 담고 있다. 수필《선택》에서는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출산률의 급하강, 조선족처녀들의 섭외혼인과 유흥업 진출, 조선족남자들의 타락 등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제 《조선족호》라는 배도 방향없이 표류하다 침몰하느냐 아니면 여타 55개 민족호 배와 함께 시련을 극복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것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서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200만 조선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선택한 미래상이 합쳐져서 조선족공동체의 미래선택이 되기에 조선족 모두가 책임성 있는 인생길을 선택하여야 조선족 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이 담보될것라는 일깨움은 읽은이로 하여금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민족의 출로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사색과 뜨거운 민족애가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다. 《원일 아침 수상록》에서는 《나무군과 선녀》이야기를 빌어 돈벌이때문에 수많은 《리산가족》이 생기는 현실을 가슴아파하며 과연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번 돈이 래일의 행복을 기약할수 있을가고 의문을 제기하는가 하면 을유년에는 우리 민족의 《리산가족》들이 하루 빨리 《통일가족》으로 되기를 기원한다. 작가는 또한 한족문화에서 닭띠해가 불길한 《과부의 해》라는 민간속설과는 달리 우리민족에게 닭띠해는 광복을 맞은 행운의 해라고 긍정하면서 60년만에 다시 돌아온 을유년 닭의 해에 조선족 모두가 힘을 합쳐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면 싶다고 간절히 바란다. 진정어린 민족애, 동포애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항상 조선족의 발전과 출로를 고민하고 모색해오던 작가는 인재를 중시하지 않아 들어왔던 인재도 날려보내고있는 연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재인《금봉황새》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지금이라도《오동나무》를 심자고 충고하는가 하면 (《오동나무를 심자》) 입시교육 중심의 조선족교육 문제를 지적하면서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우라고 귀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며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하고 실패했던 사람이나 성공했던 사람이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이 중요함을 일깨우기도 하며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때 우리는 민족의 발전을 운운할수 있다.》(《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에 대한 절실한 사랑과 진지한 사색에서만이 우러나올수 있는 민족애의 고백이다. 작가의 민족의 출로를 위한 끊임없는 모색,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애타는 노력,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질수 있는 삶을 지향하는 마음은 읽는이로 하여금 숙연해지게 하며 저도 모르게 민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을 가지게 한다.
48    (서평) 깨달음의 미학 댓글:  조회:5080  추천:75  2006-03-20
2. 깨달음의 미학 남계의 수필은 그대로 깨달음의 미학이다. 작자는 온화하고 유려한 필치로 자신의 인생체험을 잔잔한 정서속에서 속삭이듯 말하기도 하고 지적인 필치로 인생, 사랑, 민족, 사회, 수필에 대해 자기나름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데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사색의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어떤 리치와 깨달음을 전해주기도 하며 지식의 샘물을 흠뻑 마시게도 한다. 때문에 그의 수필을 읽고나면 《얻는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계 수필이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매력은 우선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감오와 인생을 아름답게 볼수 있는 긍정적인 자세와 진취적인 태도에 있다.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에서 학기말시험에서 일등을 했지만 옷이 람루하다고 담임이 다른 학생을 대신 올려보내 상을 타게 하고 기념사진에도 빼놓은 아픈 추억속에서 《가난은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바가 더욱 많》다는것, 가난은 《세상을 바로 볼수 있는 혜안(慧眼)을 선물해주고 인간에게 의욕을 선물한다》는것,《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꿈이 있》고 《꿈은 인내심을 갖게 한다》는 명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감오가 있기에 가난을 힘으로, 긍지로까지 여길줄 알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볼수 있는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에서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인생이나 실패로만 이어지는 인생은 있을수 없》으며《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실패는 고통의 대가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선물해준다. 그 깨달음이 있기때문에 우리들은 성장할수 있다.》는 그대로 인생철리이고 명언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인 설교가 아니라 눈사람에 깃든 이야기, 첫사랑의 실패 등 절실한 인생체험을 통한 고백이여서 설득력있고 감동적이며 독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면서》에서는 갑자기 들이닥친 더위때문에 아름다운 꽃들이 화기도 못채우고 때이르게 지고만 《한순간》을 포착하여 문화대혁명의 혼돈속에 청춘을 묻고만 지난날을 반추하여 청춘도 《한순간》이기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일깨우고 있다. 《태항산기슭에 핀 들국화》에서는 《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로 운을 뗀후 가을례찬론과 가을혐오론에 대해 차분히 분석하는가 하면 가을의 이미지에 대해 자기나름의 사색을 펼친다. 락엽은 풍성한 열매들을 미련없이 인간과 동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려주기 위해 땅우에 떨어진것이라고 상상하며 늦가을,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와 락엽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있는 들국화을 찾아내여 가을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다시《찬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로 옮겨져《조국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즉 세계를 아름답게 볼수 있는 작가의 마음의 눈은 진한 감동을 준다.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에서는 이름에 담겨져 있는 자신의 인생경력을 통해 《나만의 이름은 없어도 나만의 인생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개성적인 인생관과 《이름이 없는 대신 나는 좀 더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대로 살맛이 난다.》는 락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너무 밝고 진지하여 감동을 준다.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는 두살 때 화상을 입고 할머니의 사랑으로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이야기, 1996년에 학술조사차 강소성에 갔다가 차사고로 사선을 넘나들었던 체험을 통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행운》이라고 고백한다. 살아있기때문에 할수 있는 일, 누릴수 있는 행복들을 렬거하면서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고 토로한다. 생명의 소중함과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텅빈 설교가 아니라 생생한 인생체험을 통해 얻은 철리여서 더욱 마음으로 공감하게 된다. 삶에 대한 투철한 감오가 있기에 작자는 살아있는 오늘에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하게 살아간다. 일생을 민족을 위해, 학문을 위해, 남을 위해 헌신해온 그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수필에서《생명은 죽기 위해 태여나지 않는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죽음을 위한 삶은 있을수 없다.》는 또 하나의 명언이다. 《이순의 인생》에서 늙음에 정신적성숙이란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여, 삶의 의미를 찾는 정신적 탐색을 멈추지 않을 때 이순의 경지를 이루어갈수 있다는 락관적인 인생관, 20대나 이순의 로인이나 《오늘의 하루는 모두 24시간이기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의 하루는 뜻있고 값질수 있다》는 인생풀이는 참으로 값진 조언이다. 남계수필은 인생에 대한 절실한 체험과 투철한 사색에서 걸러낸 인생수필이다. 때문에 그의 수필에는 철학이 있다. 만약 남계의 수필이 일상의 체험을 서술하는데 그치거나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쳤다면 모두가 평범한 이야기로 남았을것이나 도덕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보다 심원한 미학적인 세계에로 끌어올렸기에 읽고나면 현실세계에서는 접할수 없는 정신적인 만족을 얻게 되고 많은 지적정보를 얻을수 있는것이다. 유복자로 태여나 두살에 어머니까지 여의고 할머니손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올곧은 교육으로 가난속에서도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볼수 있는 바른 마음을 키울수 있었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의 유명한 학자로 성장할수 있은것이다. 때문에 그의 남다른 인생경력은 후세들의 훌륭한 거울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데, 수필에 담고있는 인생철리와 올곧은 인생관에 대한 일깨움은 그대로 한부의 인생교과서라고 할수 있다. 시장경제로 들어서면서 인간은 날로 리기적으로 변해하고 인간정신은 날로 황페화되여가는 오늘, 그의 수필은 우리에게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가르치는 수필임에 틀림없다. 특히 유복자로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볼수 있는 마음가짐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는 불굴의 인간의지, 참인생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수필 전반을 관통하면서 진한 감동을 준다.
47    (서평) 순수성의 미학 댓글:  조회:5361  추천:51  2006-03-17
깨달음의 미학, 학자 수필의 매력 -- 남계 수필집 《사랑의 사회학》읽기 오상순 (문학평론가, 교수) 조선족 사회는 물론 한국을 망라한 세계 조선민족 사회에서 황유복 교수 하면 으레《국제적인 학자》,《사회활동가》,《민족사학가》란 이미지를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학문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의 일생이였고 조선족 사회를 위해 고민하고 헌신해온 일생이였고 없는 자, 불행한 자. 약한 자를 동정하고 사랑하는 인도주의적인 삶이였다. 놀라운것은《세계적 석학》으로 불리우는 황유복 교수가 이순의 나이에 수필가로 변신하여 문단의 이목을 끌고있다는 사실이다. 남계 수필집에 실린 글 43편중《군 감자와 이바구》, 《옥년이와 봇나무》,《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 《첫사랑 이야기》 등 15편은 자신의 인생체험을 바탕으로 쓴 수감(隨感), 수상(隨想)류 수필이고 “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민족학”, “사랑의 신화학”, “중국사람과 숫자”, “군자의 교제는 물처럼 담담하고”, 《선택》, 《고슴도치도 0거리 접촉을 한다》, 《노랑, 빨강과 중국인》 등 28편은 사색적인 명상에 속하는 글이다. 유복자로 태여나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동년시절, 민족사학가, 사회활동가의 특이한 인생경력때문인지 그의 수필은 시작부터 남다른 개성으로 돋보인다. 남계 수필의 특징을 서영빈은《리성의 혼, 자유의 옷》, 장춘식은 《정체성과 삶의 참의미》, 김훈은 《인간의 향기와 철학이 있는 글》, 최순희는 《흑백사진과 컬러사진》, 남복실은 《인생달관자의 여유》로 이름했다. 남계의 수필을 읽으면서 필자는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에 다시 한번 깊이 공감하게 되였다. 1. 순수성의 미학 남계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은 순수함이다. 우리는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동년의 꿈, 자연의 아름다움, 할머니의 사랑, 아리숭한 첫사랑 등 순수성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자가 꾸준히 추구해온 순수한 인생, 순수한 사랑, 순수한 행복, 순수한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감동하기도 한다.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순수함》이란 말의 진미를 남계의 수필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할수 있다. 흔히 저녁노을은 인생의 만년으로 상징되는데 반해 수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에서 저녁노을은 인생의 꿈과 희망으로 상징된다. 유복자로 태여나 두살에 어머니까지 여의고, 들일을 나간 할머니의 귀가를 학수고대하던 어린 소년은 언젠가부터 저녁노을의 황홀경에 빠져 배고픔도, 초조함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되였단다. 그때로부터 《노을을 찾아 저 하늘 끝까지》 가려는 소년시절의 꿈은 가난과 고독에 쪼들리던 어린 가슴에 행복을 가득 채워주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키워주었단다. 여기서 저녁노을을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 상상한것도 개성적인데 그것을 참삶의 가치로 승화시키고 있어 수필의 무게를 더욱 실어주고 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여 혼신을 불태우는 저녁노을과 같이 사회와 민족, 나라에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란 인생체험이다. 그래서 《저 하늘 끝까지》 찾아가기 위한 능력과 의지력의 양성도 중요하지만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속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날로 리기적고 개인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오늘의 사회에 청순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전해진다. 그의 수필의 순수성은 《군 감자와 이바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화롯불에 둘러앉아 군 감자와 같이 구수한 할머님들의 《이바구》를 듣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독자들에게 지난날 고향의 오붓한 마을, 이웃간의 훈훈한 인정, 따스한 우정, 달콤한 사랑, 소박한 꿈을 되살려줄뿐 아니라 금전만능주의 풍조에 물젖은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너무나 청신한 공기를 가져다준다. 수필 《옥년이와 봇나무》에서 작가에게 봇나무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안겨오는것은 흰색의 줄기와 무수한 잎과 가지들로 수관(樹冠)을 이룬 미인형 《체형》때문이라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아름다움때문이란다. 가공된 아름다움보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단다. 그래서 쉰살이 넘으면서 흰머리가 많아지자 주변에서 《머리염색만 하면 십년은 젊어지겠다.》고 권고하나 단 한번도 염색해본적이 없단다. 젊어지는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젊어지고 싶지 않았기때문이란다. 작가는 계속해서 지금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때문에 미쳐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칼로 째고, 깎아내고 붙이고 해서 현대인들의 외모가 더 예뻐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때문에 싸우고 리혼하고 자식을 내다버리고 ⋯술로 자신을 마비시키고⋯ 그래서 우리들 생활속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고 모를 박는다.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가고싶다는 인생관, 내실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역시 순수하기만 하다. 자신의 인생체험을 통해 체득한 참사랑에 대한 추구 역시 순수하고 청초하기만 하다. 첫사랑 이야기속에 담은 《계산되지 않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란 진솔한 고백, 여타 민족과의 비교속에서 《사랑을 받기 위한 사랑보다는 사랑을 주기 위한 사랑이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사랑의 민족학)하며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사랑의 표현은 진한 향기로 되여 상대에게 전해질수 있다.》(사랑의 언어학)는 참사랑에 대한 사색, 로맨틱한 사랑보다는 두사람의 합일로 이루어지는 성숙된 사랑이 참사랑(사랑의 신화학)이란 주장, 《사랑의 날》만큼은 돈과 관계없는 순수한 《사랑의 축제》(상혼의 절여진 사랑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돈에 외곡되고 타락에 찌든 오늘의 사랑관과 대조되여 동년의 꿈과 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남계 수필의 순수성은 소재선택에서도 나타난다. 수필에 등장하는 할머니, 옥년이, 군감자, 《이바구》, 봇나무, 눈사람, 들국화 등은 그대로 《한장의 흑백사진》과 같이 순수함의 아름다음을 나타내며 노을을 찾아 저 하늘 끝까지 가려던 동년의 이야기, 화로불을 마주하고 할머니들의 구수한 옛말을 듣던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와 락엽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있는 들국화 이야기, 가슴속을 스쳐지나간 아리숭한 첫사랑 이야기도 아련한 추억속에 소박하고 청순한 향기를 풍긴다. 남계 수필의 순수성은 또한 꾸밈없이 진솔한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진솔성은 수필의 생명이며 수필이 갖는 첫째 특성이라 할수 있는데 우리는 그의 수필에서 구김살 없이 진솔한 고백을 대하게 된다. 첫사랑의 느낌과 사랑의 실패에 대한 솔직한 고백, 유복자로 태여나 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란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 할머니의 눈물겨운 사랑, 자기만의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온 인생체험, 두번이나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면서 깨달은 생명의 소중함, 참인생, 참사랑에 대한 사색, 이순의 인생에 대한 사색, 민족에 대한 사색⋯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진솔하고 소박할수가 없으며 그의 사색은 그렇게 진지할수가 없다. 진실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진솔한 고백속에 일깨움이 있기에 독자들은 잔잔한 감동속에서 참삶의 가치란 어떤것인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진실성, 순수성때문에 그의 수필은 더욱 인격적 품위가 돋보이고 감동이 크다 순수성은 남계수필의 기본바탕이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항상 청초하고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순수한 삶,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추구해온 남계만이 쓸수 있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수필이다. 그속에는 독자의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다. 우리는 그의 수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를 그대로 느낄수 있다.
46    (수필)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댓글:  조회:5536  추천:49  2006-03-16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왜 조선족 사회가 살아남아야 되는가. 중국의 200만 조선족 사회가 있었기에 한⦁중 수교 1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 중국과 한국은 급속한 경제교류의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통하게 했고 인맥을 닿게 하여 중국과 한국의 기술교류, 무역투자에 크게 기여를 했다. 이는 일본과 중국의 수교가 20년이나 빨리 이루어졌지만 그 관계가 중⦁한간 관계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00만 조선족이 있었기에 중국은 한국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고, 한국은 일본보다 빨리 IMF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조선족의 존재는 중국에도 한국에도 유리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족의 존재 가치인 것이며 중국과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개국 언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은 조선족뿐이다. 동북아시대에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95년부터 기술대학설립을 추진해 오고 있다. 조선족 처녀들이 한국에 시집가는 이유는 설문조사 해보면 돈 때문에 시집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 총각들이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럼 왜 조선족 총각들이 돈을 벌지 못하는가. 심양 서탑의 노무시장에서 조사해 보니 조선족 교육이 입시교육으로 일관돼 기술학교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 고 인식하고 있어 기술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족청년들은 기술자격증을 가지고 사회에 나와 취직하게 되지만 조선족 청년들은 기껏해야 고중졸업장 하나밖에 없어 취직이 어려운 것이다. 95년에 베이징에서 대학진학도 못하고 취직도 못한 총각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취지로 기술대학교설립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족 사회의 많은 변화가운데서도 조선족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흐트러진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잘 사는 것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도이치뱅크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2년 중국의 GNP는 7.5%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다른 보고서에서는 중국이 세계6위에서 프랑스를 따돌리고 제5위로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상당히 빨리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이 중국경제권으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이 미국경제권, 일본경제권에서 중국경제권으로 바뀐다는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 와서 성공해 중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족들이 늘고 있다. 조선족 기업가 중에는 인민페 1억 위엔 이상 가진 기업인들은 10여명 정도다. 중국에서도 조선족들만이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젊은 청년들은 기술을 많이 배워야 한다. 한 청년은 시골 출신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기술을 배워 중국에 가서 특허를 내 천진에서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청년은 기술력은 한국이 뛰어나지만 일하기는 중국이 훨씬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 조선족 청년들은 한국에서 기술을 배우라. 자기의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중국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02. 5. 6
45    (수필) 수교 10년 댓글:  조회:5442  추천:61  2006-03-15
수교 10년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먼 나라였다. 나는 1983년에 서울대학교의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한국이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갈수 없는 나라로 분류되던 시절이어서 한국 행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1990년에 다시 초청을 받고 어렵사리 한국 행 인가를 받을 수 있었으나 북경서 서울까지 가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먼저 홍콩으로 가서 다시 한국 행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10년 전에 '갈수 없는 나라' 내지 '멀고 먼 나라' 이던 한국과 중국은 한. 중 수교10년 사이에 '우호협력관계의 나라'를 거쳐 이제는 '동반자관계의 나라'로 되었다. 한∙중 수교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중국은 등소평의 "남방담화(南方談話)"를 계기로 개혁, 개방의 속도에 박차를 가할 시점에서 주변지역 환경의 안정이 필요했고 한국수준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한국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냉전시대의 분단국가로서 한반도 평화환경의 조성과 경제발전 차원에서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중∙ 일 수교보다는 20년 뒤늦었지만 서로가 모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 자연스럽게 수교를 단행했다. 때문에 근 반세기동안 막혀 있던 교류의 물고가 트이면서 두 나라간의 선린관계는 재빨리 복원 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간 두 나라는 냉전시대의 거리감을 극복하면서 '소이(小異)'를 접어 두고 '대동(大同)'을 지향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상호 충족시켜 주는 '동반자의 관계'로 발전해 왔다. 그 중 경제협력관계의 발전은 가장 뚜렷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중국은 한국의 첫 번째 투자대상국과 두 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부상 되였고 한국도 중국의 세 번째 무역대상국이 되였다. 두 나라의 무역규모는 이미 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두 나라의 문화교류도 해마다 약진하고 있는 추세이다. 수교10년간에 중국에서 유학하는 외국 유학생 중 한국유학생이 제1위를 점하게 되였다. 지난한해만 해도 1만 여명의 한국학생이 중국으로 유학 왔으며 그 추세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10년간 30여 개의 중국대학에서 한국어학과나 한국학연구소를 개설했다. 한국대학에서도 중국어학과가 호황을 부리고 있다. 수교 후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 리펑 전인대상무위원장, 주룽지 국무원총리 등 최고위급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두 나라 정상들의 상호방문으로 정치교류관계도 좋은 결실을 거둔 셈이 된다. 두 나라 국방부(부장) 장관들의 상호방문으로 초보적인 군사교류가 진행되고 있지만 경제, 문화, 정치교류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셈이다. 수교10년 간 두 나라는 이렇게 큰 결실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해결해야 한 여러 과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경제협력분야에서 무역수지 불균형의 극복, 산업협력관계개선 등이 꼽히고 있다. 중국의 통계에 따르면 2001년 한중무역에서 한국은 1백20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문제는 흑자폭이 해마다 늘어난다는 점이다. 무역수지의 불균형 때문에 '마늘분쟁' 같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해결책은 두 나라가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성의를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산업협력관계의 계선은 두 나라의 수요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기도하다. 한국은 중국의 시장점유만 생각하고 중국은 한국의 기술이전과 투자유치만 생각할 때 산업협력관계의 개선은 빈말로 될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문화 분야의 교류에서 해결 되여야 할 문제는 교류의 상호성이다. 한국이 계속 중국인들의 한국입국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문화교류의 상호성은 비뚤어 질 수밖에 없다. 지난 월드컵 때 상황이 바로 그렇다. 마지막으로 정치교류분야에서 두 나라는 동북아의 평화안정과 한반도 평화안정에 대한 인식의 공동분모를 넓혀 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동북아 평화안정을 기하는 데는 두 나라의 대미관계, 대일관계 그리고 미국주도하의 동북아시아 TMD체제형성의 움직임 등 상당히 민감한 부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안정과 평화통일에 관해서 두 나라는 상당한 국익일치와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별다른 갈등이 없이 인식을 같이 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한⦁중 두 나라는 상호의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때문에 앞으로의 관계설정은 두 나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말고 전체 동북아국제평화환경구축의 주역관계로 부상시켜야 한다. 가장 좋은 대안을 한⦁중 두 나라가 동북아경제공동체형성을 위한 주역과 협력동반자로 되는 것이다. 2002. 8. 19
44    (수필) 중국인들의 욕과 한국인들의 욕 댓글:  조회:5765  추천:86  2006-03-14
중국인들의 욕과 한국인들의 욕 어릴 적 일이지만, 어른들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아이들을 '양반'이라고 칭찬해주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애들을 '상놈'이라고 욕하는 것을 자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커가면서 친구들 간에 싸우게 되면 '개새끼', '상놈새끼', '빌어먹을 놈' 하는 식의 욕이 거침없이 오가곤 했다. 몇 달 전 한국 신문에서 모 국회의원이 술을 빙자해서 남을 '×새끼'라고 욕했다가 여론에 몰리자 사과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반세기가 지나갔지만 한국인들의 욕의 기본은 변한 것 같지 않다. 역시 어릴 적 이야기다. 내가 자라난 길림시 부근의 쌍하진이란 마을은 꽤 큰 마을이었는데 마을 주민의 절반은 조선족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족이었다. 소학교 다니던 시절, 등교나 하교 길에서 같은 또래의 한족 애들을 만나면 멀리 마주서서 욕을 교환하다가 갈 길을 가곤 했었다. 그때 배운 중국(한족)식 욕은 섹스를 의미하는 동사 뒤에 '너 에미'라는 말을 붙인 '×니마'나 자라나 거북이의 '알' 혹은 '새끼'라는 뜻의 '왕빠따안', '왕빠고우즈' 따위였다. 중국의 대 문호인 로신 선생은 상대방의 '에미'를 등장시킨 그 욕에서 동사를 생략 시킨 '타마디'라는 욕을 중국의 '국욕(國罵)'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지금도 중국인들 가운데 말끝마다 그 '국욕'을 난발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옛날 한국인들이 언짢을 때 내뱉은 '제기랄'이라는 말보다 더 많이 쓰는 셈이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국욕'에 등장하는 인물은 '에미'에서 '할미'로 승격하거나 더 심각할 경우 8대 조상에까지 누가 미친다. 중국인들의 '국욕'에 버금가는 욕이 바로 상대방을 거북이 '알' 내지 '새끼'로 몰아 부친 것이다. 중국 고대문화에서 거북이는 4대 영물(기린, 봉황, 거북, 용)중의 하나로서 선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신성시되던 거북이의 위상은 원 나라 이후 하늘에서 땅 밑 끝까지 굴러 떨어졌다. 송나라 때 유명한 문인이었던 소동파(蘇東坡)가 거북의 등뼈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녔던 기록이 있어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거북이를 신령한 동물로 섬겨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몽고인들이 통치했던 원 나라 때부터 중국 민간에서는 거북이를 비하시키는 '유언비어'들이 무성해졌다. 암 거북이는 수뱀과 교미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들이다. 교미하기 전 암 거북이는 둥근 원을 그리며 방뇨를 한다. 그 원 안에서 수뱀과 교미를 할 때 수 거북이가 그 것을 발견하고 노기충천하여 달려온다. 그러나 암 거북이가 오줌으로 그어놓은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혼자서 복장을 터뜨린다고 한다. '유언비어'의 근원은 한 나라 때 성행했던 '사신도'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방신인 '현무'의 그림은 거북이와 거북이를 칭칭 감고 있는 뱀이다. 따라서 '꿔이얼즈(거북의 아들)'이나 '왕빠따안(자라나 거북의 알)'이라는 중국인들의 욕은 '사생아'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욕의 문화적 의의를 욕하는 사람이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상대를 공격해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의 울분을 해소하려는데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욕이 뿌리내릴 수 있는 문화적 풍조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이어령 선생은 한국인의 욕이 아무리 심한 것이라 해도 그 핵심적 의미는 '나쁜 놈' 유형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상대방을 부도덕한 것이나 더러운 것으로 몰아감으로써 도덕적인 것을 중시해온 사회가치를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욕은 그들 의식구조에 고질화되어 있는 수직적 서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상놈새끼', '빌어먹을 놈', '개새끼' 그 모두가 상대방을 비천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왕조가 실시했던 신분제도 하에서 최하층 천민들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은 주변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이다. 따라서 '상놈'을 욕에 등장시킨 것은 상대방의 '비천'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빌어먹을 놈'이나 '거지 발싸개 같은 놈'도 마찬가지이다. 거지는 '상놈'보다 더 비천한 존재였고 거지 몸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발싸개라 할 수 있다. 옛날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개고기는 제사상에도 못 올라갈 만큼 '천'한 것이다. '개자식' 역시 비천한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욕은 사람의 신분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 대신 중국인들의 욕은 그 핵심적 의미가 '섹스'에 있다. 중국의 '국욕'은 상대방의 '에미'나 '할미' 혹은 8대 조상과 상간했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곤경으로 몰아간다. 거북을 등장시킨 욕들도 상대방이 '사생아'라고 몰아 부치기 때문에 역시 간접적으로 상대방 어머니의 부도덕한 성행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성행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중국인들의 욕은 그들의 성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의 고전명작 《금병매》나 《홍루몽》을 읽으면 중국 옛날의 성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오게 되는 한국인들이 꼭 주의해야 할 점은 한국에서는 문제되지 않지만 중국인들에게 선물을 할 때 거북이 모양이나 거북이 그림이 있는 물건들은 삼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2002. 7. 1
43    (수필) 글로벌 에티켓과 중국인들의 예절 댓글:  조회:6832  추천:65  2006-03-13
글로벌 에티켓과 중국인들의 예절 10여 년 전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 출신의 한 교수가 한국 신문에 중국 사람들은 '며느리와 시아버지도 악수로 인사'한다는 이상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의 예의 하면 곧잘 '며느리와 시아버지'를 들먹인다. 악수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사법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수인사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간의 인사로 악수를 하게 된다. 또 특별히 감사 드려야 할 사람에게 두 손으로 상대방의 한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의 말을 연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집식구 간에 악수하는 에티켓은 없다. 다시 말해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악수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부자지간, 형제지간,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들은 흔히 중국을 한국과 같은 '예의지국'으로 생각하다가 정작 중국에 와 보고 '예의를 잃어버린 나라'라고 놀라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인들이 예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한국과 다른 에티켓 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민족이든 간에 각자의 에티켓 문화를 갖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 에티켓 문화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 다양한 문화들 간에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의 에티켓 문화는 선진적이라든가 좋은 것이고 어느 민족의 에티켓 문화는 낙후하거나 나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에티켓 문화가 정착되기까지는 그 나라나 민족의 전통문화와 생존환경 등 복잡한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에티켓 문화는 상대적이다. 이러한 문화의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화 시대에 갖추어야 할 글로벌 에티켓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한국인들의 주거문화는 온돌방이나 마루방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중국인(중원지역)들의 주거문화는 침상과 의자 중심으로 되어 있다. 큰절인사는 온돌이나 마루에서는 적합하지만 침대나 의자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큰 절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중국 사람들은 '에티켓이 없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중국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 것은 한국인들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비방하는 일부 서양인들의 편협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선 자세로 몸을 굽혀 남에게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법은 중국에도 있다. '국궁(鞠躬)' 법이 그 것이다. 그러나 '국궁' 법은 윗사람이나 죽은 사람 시신이나 위패 앞에서 행하는 극히 제한된 예절이다. 조문을 빼버린다면 중국인은 일생동안 세 번 국궁 예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결혼식 때 천지신명에 한번, 부모님께 한번, 그리고 부부 대배 하는 것이 그 것이다. 서양의 악수법이 중국에 전해지기 전 중국인들의 인사는 '공수(拱手)' 법이었다. 두 손을 맞잡고 팔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면서 상대방에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법이었다. 지금도 일부 노자(老者)들 사이에 공수 인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근대화과정에서 서양식 악수에 밀려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 중국식 인사법이었다. '한국식 예절과 인사를 그대로 갖고 가서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주면 중국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많이 배우리라고 믿는'다는 생각은 자기 문화의 '우월성'에 도취된 편견일 뿐이다. 근대화 이전에도 중국인들은 한국의 큰 절이나 '국궁'식 절과 완전히 다른 '공수' 인사법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일부 문화의 상대성을 무시하는 중국인들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인사하는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의 인사법을 비생산적인 허위허식이라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 가운데 중국인들의 남녀, 상하 관계의 설정도 '에티켓이 없는' 못마땅한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가족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의 대인관계가 한국인들은 수직관계인데 비해 중국인들은 도리어 수평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든가, 교사가 학생을 체벌한다든가, 군에서 새로 입대한 병사에게 기압을 준다든가, 회사 상사가 부하 직원을, 공장 관리인이 노동자를 욕한다든가 하는 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심지어 집주인이 가정부를 함부로 욕하지 않으며 길가다가 시끄럽게 손을 내미는 거지도 욕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남과 여, 노와 소, 상급과 하급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대인관계를 나타내는 기본단어는 '너(你)', '나(我)', '저 사람(他)' 식으로 간단하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아들과 손자도 다같이 '나'고 '너'고 '저 사람'이다. 사실 한국어와 같이 까다롭게 상, 하, 존, 비를 구분하여 '나는 밥을 먹고', '아버지께서는 밥을 잡숫고', '할아버지께서는 진지를 드시는' 식으로 표현하는 언어는 세상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 해서 중국인들이 부모에 대한 효도나 윗사람에 대한 존경, 친구 간의 의리와 우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윤리관은 한국인들과 별 차이가 없다. 중국 속담에 '일일위사, 종신부모(一日爲師, 終身父母)'라는 말이 있다. '하루의 선생이라도 죽을 때 까지 부모같이 섬긴다. '는 뜻이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오래간만에 만나 악수를 청하고 '로우스 니호우(老師你好)'라고 인사를 해오지만 그들이 나에 대한 관심과 존경은 언제나 변함없다.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서비스 정신의 부재는 예절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가치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예절문화는 옛날부터 차이가 있었다. 근대화 과정과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중국인들은 인권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와 서양식 인사법(악수)을 선택하여 에티켓 문화의 세계화를 앞질러 가고 있다. 2002. 8. 26
42    (수필) 중국사람과 숫자 댓글:  조회:8310  추천:79  2006-03-10
중국사람과 숫자 요즘의 중국 매스컴에 따르면 이번 북경 국제모터쇼(자동차전시회)에서 중국의 부자들이 영국 산 벤트리(Benteley)차 "구입경쟁"을 벌렸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불티나게 팔린 그 차의 가격이 888만 위엔(미화 111만 불 정도) 고가였다는 점이다. 영국 여왕이 타고 다니는 차라는 것 자체가 중국 부자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했겠지만 중국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8'이라는 숫자를 가격에 이용한 마케팅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숫자에 음양의 개념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은 《주역(周易)》이라는 책에서부터이다. "천1, 지2, 천3, 지4, 천5, 지6, 천7, 지8, 천9, 지10", "홀수는 천수로서 양수라 하고 짝수는 지수로서 음수라 한다." (《주역·계사》) 그러나 홀수에 대한 기호는 《주역》보다 앞서 상나라 때부터 시작된다. 상나라를 건립한 민족은 '은'민족이고 은민족은 '동이'계였기 때문에 알타이계 고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은민족이 홀수를 좋아했다는 증거로는 상나라 때부터 사용된 태음력을 꼽을 수 있다. 태음력에서 명절날은 거의 모두 홀수 달과 홀수 날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춘절(1월 1일), 유두절(3월 3일), 단오절(5월 5일), 칠석절(7월 7일), 중양절(9월 9일)이 그렇다. 짝수 달에 홀수 날로 정해진 명절은 중추절(8월 15일)밖에 없다. 짝수를 기피하려 했으나 8월은 수확의 달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태음력은 중국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홀수 기호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해야 하겠으나 현실적으로 중국인들은 홀수를 기피하고 짝수를 좋아한다. 한국에서 선물을 주고받을 때에는 흔히 한 개로 준비한다. 넥타이 한 개, 시계 한 개, 구두 한 켤레 하는 식으로 선물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동료들의 파티초대를 받았을 때 주인의 특별한 부탁이 없으면 와인 한 병쯤 들고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보통 선물을 준비할 때 2개를 갖춘다. 와인이나 빼갈일 때는 2병을, 시계일 때는 신사용과 숙녀용으로 짝을 맞추어 준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숫자는 아마도 '4'일 것이다. 호텔에 가면 '4'층은 없고 'F'층이 있거나 '4'층을 빼버리고 '3'층에서 '5'층으로 연결시켜 놓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4'자를 가장 안정된 숫자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숫자로 시작되는 단어에 '4'자로 시작되는 것이 제일 많아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만 해도 '4계' (춘, 하, 추, 동), '4방' (동, 서, 남, 북), '4군자' (죽, 난, 매, 국), '4예' (금, 기, 서, 화)등 30여 개가 있다. '6'자는 '순조롭다'는 뜻을 대표하고 있고 '8'자는 '돈을 많이 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중국인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숫자들이다. 그런데 《주역》에서 해석하다시피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짝수들은 모두 '음수'에 속한다. 한국인들은 유교문화의 전통 때문에 '양수'인 홀수를 선호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로 유교문화의 본 고장인 중국에서는 '음수'인 짝수를 한결같이 좋아하고 있다. 그 원인을 청 말, 민국 초의 대학자인 주자청(朱自淸)이 《경전상담(經典常談)》이라는 글에서 무속의 유풍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여하튼 간에 중국인들은 상나라 때부터 사용해온 태음력에서 시작되는 양수(홀수)선호의 문화전통에 등 돌리고 음수(짝수)를 선호하고 있다. 3년 전 대학에서 교수아파트를 분양할 때, 6층과 7층중에서 내가 7층을 선택하니 다음 차례의 한족 교수가 내 손을 덥석 쥐면서 "나는 교수님이 6층을 선택 할 가봐 조마조마했었는데 6층을 남겨주어서 너무나 고맙습니다."라고 기뻐해 하던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 조선족과 한족 교수 간에 숫자문화의 차이로 생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또 한 번은 내가 젊은 교수들을 상대로 강의했던 전통문화강좌에서 중국의 숫자문화 이야기가 나와 "너희들은 중국의 여자 축구가 세계의 정상수준에 올랐는데도 남자 축구수준은 그냥 부진한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위 '음성양쇠(陰盛陽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질문 한 다음 "그것은 한족이 음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 겠는가?"라고 말해 모두가 웃었던 적이 있다. 중국에 진출했거나 중국 진출을 기획하고 있는 한국 경제인들도 벤트리 회사의 마케팅 전략에서 무엇인가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2002, 6. 17
41    (수필) 노랑, 빨강과 중국인 댓글:  조회:6141  추천:80  2006-03-08
노랑, 빨강과 중국인 이번 한·일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 팀이 유럽 축구의 강호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고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 축구 인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 팀의 선전에 못지않게 한국 팀 스포터스인 '붉은 악마'도 '매너와 열정의 붉은 응원'으로 축구응원문화의 새 장을 열어 세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중국의 방송사는 생방송에서 가끔 '붉은 색의 바다'라는 표현으로 '붉은 악마'의 응원물결을 소개하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보다가 무의식중에 중국으로 착각할 때도 있다. '붉은 색의 바다'는 중국에서 자주 보아온 광경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기호 색은 단연코 노랑과 빨강이다. 빨간 바탕에 노란 별 다섯 개로 디자인되어 있는 중국의 국기만 보아도 수긍이 될 것이다. 중국 전통문화에서 노랑은 지존의 색으로 황제와 황실 그리고 황궁의 독점 색이었고 그 대신 빨강은 민간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색이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의 자손들이라 생각한다. 중국의 신화에서 '황제'는 화하(華夏)계 민족의 최초의 제왕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단군'인 셈이다. 초주(譙周)의 《고사고(古史考)》에 따르면 '황제는 토덕왕(土德王) 인데 흙의 색이 황색이기 때문에 황제라 한다.' 염제는 황제의 이부형제인데 '화덕왕(火德王) 이고 불은 붉은 색이기 때문에 염제 혹은 적(赤)제라고 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가 '황은 땅의 색이다'라고 해석했듯이 황색은 중원지역 흙의 색에서 유래된다. 북경의 중산(中山)공원에 가면 중국 국토를 상징하는 '사직단(社稷壇)'이 있는데 중앙은 노랑, 북은 검정, 동은 청색, 서는 흰색, 남은 빨강으로 되어 있다. 한족의 발상지인 황토고원의 흙은 황색이고 황토고원을 흘러내리는 물은 누런 흙을 씻어 내리기 때문에 황하라 부르며 심지어 그 물을 받아들이는 중국 동쪽 바다도 누렇기 때문에 황해라고 한다. 그러한 자연환경에서 생활하는 중국인들은 당연히 황색을 천하의 중심 색으로 이해한다. 중국 전통문화에서 황색은 고귀하고 상서로운 색, 색 중의 지존 색으로 추대된다. 따라서 황제들은 황색을 독점했고 민간의 사용을 금단하였다. 신해혁명에 의해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쫓겨나면서부터 황색은 금단의 색에서 해방되어 지금까지 중국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제인들이 회사의 귀족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심벌 색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붉은 색은 서민들에 의해 널리 선호되는 색상이다. 《설문해자》는 '적색은 남방의 색이다'라고 해석한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남방은 빨간 색으로 표현된다. 사실 중국의 남방을 다녀보면 중원의 황색 토질이나 북방의 흑색 토질에 비해 남방은 거의 홍색 토질에 속한다. 그러나 전통문화는 붉은 색을 염제의 심벌 색, 불의 색과 태양의 색으로 해석한다. 옛날 중국 부자들은 집의 대문이나 기둥을 붉은 색으로 선정해 왔다. 지금도 중국의 서민들은 빨강계열의 색으로 페인트 된 자동차를 선호한다. 또 중국인들이 '촌지'나 '떡값'을 건널 때는 붉은 색 봉투에 담아주기 때문에 '훙보우'라고 한다. 보통선물도 빨간 색 포장지를 많이 사용한다. 중국 여자들이 시집갈 때는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색 가마를 타고 간다. 중국인들은 빨강을 벽사(僻邪), 경희(慶喜), 길상(吉祥)의 심벌 색으로 간주 한다. '붉은 악마'들의 응원물결을 지켜보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경제인들이 '레드' 아이디어를 마케팅 전략에 응용한다면 무슨 효과가 나타날까 생각해 보게 된다. 2002. 7. 8
40    (수필) 중국문화의 다양성 댓글:  조회:6405  추천:56  2006-03-07
중국문화의 다양성 중국과 ‘중국인’을 공부하기 위해 중국대륙을 여행해본 사람들은 중국문화의 다양성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큰 나라에서 다양성은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다양성은 미국의 그것과 다르다. 소수의 인디언 원주민을 제외한다면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이민들로 구성된 ‘이민대국’이다. 따라서 미국문화의 다양성은 ‘와스프(WASP-백색 영국계 개신교도)’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세계의 여러 인종과 민족들의 문화가 섞여서 만들어지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식의 문화로 대표된다. 중국문화의 경우는 55개 소수민족의 문화를 계산하지 않더라도 한(漢)족이라는 ‘단일민족’ 문화 속의 다양성만으로도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할 때가 많다. 내가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클라스 정원은 60명이었는데 한족이 52명, 소수민족 출신이 8명이었다.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만족, 회족 등 자기 민족언어가 따로 없는 민족이었고, 나 혼자만 대학 입학 전 소수민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었다. 처음 나는 중국어가 너무 서툴어 남들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를 걱정했다. 그런데 중국의 동서남북에서 모여온 학우들이 서로의 악센트에 익숙해지고 상대방의 말을 별 어려움이 없이 알아듣게 되기까지는 한 학기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도 그 시간을 이용하여 열심히 북경말을 배웠기 때문에 남들이 눈치 채기 전에 북경 출신 학생들 다음으로 중국어(북경말)를 유창하게 하는 학생이 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수많은 지역 방언들이 난립해 있다. 다 같은 중국어(漢語)이지만 한국의 영남, 호남 정도의 차이가 아니고 타 지역 사람들이 완전히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음식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비행기를 빼고는 날아다니는 모든 것을, 배를 빼고는 물에서 헤엄치는 모든 것을, 상(床)을 빼고 뭍에서 네발 가진 모든 것을 먹는”다고 자랑하는 중국이야말로 ‘음식문화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산초와 고추를 조미료로 사용하여 혀끝이 아리고 매운 사천요리, 단 맛을 돋보이게 하는 상해요리, 지독하게 매운 맛을 자랑하는 호북, 호남요리, 파를 많이 사용하는 산동, 북경요리, 생선 중심의 광동요리와 양고기 중심의 서북요리……지역에 따른 다양한 맛의 요리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지역별 음식들의 맛 차이가 너무 커 ‘단일민족’의 음식이 과연 이럴 수 있나 의심할 정도이다. 나는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어디 가서든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나를 울게 한 음식들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광서 유주(柳州)부근 농가에서 주인이 올챙이가 둥 둥 떠있는 쌀죽을 대접했을 때 쩔쩔 맨 적이 있다. 또 호북성의 어느 시골서 어린이들이 고추를 과일처럼 먹고 있어 나도 따라 흉내 내다가 너무나 매워 눈물을 짰던 일도 있다. 중국의 음식문화를 체험하면 할수록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체질인류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시각에서 봤을 때도 중국인(漢族)이나 그들의 문화는 다양하다. 우선 남방의 한족들은 체질인류학적으로 따지면 ‘인도네시안 말레이(Indonesian malay)’계열이고, 북방 한족은 ‘아시아티크 몽고로이드(Asiatic mongoloid)’계열이다. 북방인은 보편적으로 키가 크고 체질이 강한 대신 사유방식이 간단하고 순박하며 어려운 생활환경에의 적응성이 강하다. 그에 비해 남방인은 체구가 왜소하고 두뇌가 발달되었으며 안일한 생활을 좋아하고 상인(商人)적인 기질이 강하다. 남방인들도 지역에 따라 또 다르다. 임어당(林語堂)에 따르면 양자강하류 사람들은 문학가기질과 상인기질이 강하고, 광동인들은 성미가 급하고 모험을 좋아하고 개척정신이 강하며, 호북인들은 음모술수에 능하다고 한다. 정치인들에 의해 부추겨지는 지역감정만 빼면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지역문화의 차이를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서울을 다녀온 중국인이 한국을 보고 왔다고 한다면 적어도 50%의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경을 다녀간 한국인이 중국을 보고 왔다고 한다면 10%정도의 신빙성이 있다고도 평가하기 어렵다. 중국과 중국인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중국문화의 다양성을 파악해야 한다. 2002. 6. 10
39    (수필) ‘박대정심 (博大精深)’의 대륙적 기질 댓글:  조회:6660  추천:73  2006-03-06
‘박대정심 (博大精深)’의 대륙적 기질 동아시아 삼국인의 기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중국인의 대륙적 기질’, ‘한국인의 반도적 기질’, ‘일본인의 섬나라 기질’하는 따위의 말들을 자주 쓰게 된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중국인의 대륙적 기질이냐”라고 물었을 때 시원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중국인의 기질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넓다’, ‘크다’, ‘정밀하다’, ‘깊다’라는 뜻을 아우르는 ‘박대정심 (博大精深)’이란 말을 바르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나라가 크며 문화의 뿌리가 깊다. ‘중국인’이라는 말 자체도 한국인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에서는 ‘한(韓)민족’과 ‘한국인’ 을 동의어로 쓰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중국인’은 56개 민족을 포함시킨 복합적 의미로 쓰이고, 한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인’은 정확히 ‘한(漢)족’이라 부르고 있다. 40여 년 전 내가 중앙민족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했을 때 《중국민족사》강의를 담당하신 교수님이 첫 시간 강의에서 "한족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잡종(雜種) 그룹"이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다. '화(華)'족과 '하(夏)'족을 근간으로 형성된 한족은 수천 년 발전과정에서 수많은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흡수 통합시키면서 한어와 한자문화 그리고 유학사상으로 결집된 거대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글로벌 식구 5명 가운데 1명이 중국인이라 할 규모의 인구그룹과 한반도 면적의 44배나 되는 국토를 갖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스케일은 모든 것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오게 되면 먼저 찾게 되는 자금성이나 만리장성 그리고 진시황의 무덤 그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먼저 '크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서구식 근대화바람이 불기 이전 한국인들은 핵가족중심의 가족제도 하에서 생활해왔지만 중국인들은 확대가족제도를 고집해왔다. 같은 쌀(중국 남방의 경우)과 젓가락으로 특징지어지는 음식 문화권이라 할지라도 대가족의 많은 식구들이 모여서 먹게 되는 중국의 식탁은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사이즈가 크기 마련이다. 따라서 큰 식탁에 둘러앉은 중국인들은 먼 곳의 요리를 집기 위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큰 젓가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처음 중국에 도착한 한국인 여행객들은 회전판이 부착된 큰 식탁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이렇게 젓가락에서부터 자금성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대국인’답게 ‘큰’것을 선호한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에 대한 수용성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고시대 중국의 두 번째 국가인 상(商) 나라를 지배했던 동이계 은(殷) 민족은 한족에 흡수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중국의 북 반부를 통치했던 거란(료나라)인, 여진인(금나라) 들도 마찬가지다. 좀더 가까이는 중국전역을 지배했던 몽고인(원나라)들도 대부분 한족에 흡수 동화되었고, 만주족(청나라)의 경우 언어와 문화는 한족에 동화되고 지금은 혈연주의에 의한 민족그룹만 보존하고 있다. 때문에 ‘중국인’을 이해하려면 우선 큰 스케일을 지향하는 그들의 문화적 특성과 그들 문화의 강력한 수용성을 이해해야 한다. 2002. 6. 3
38    (수필) 문화의 상대성과 수필 댓글:  조회:6447  추천:68  2006-03-03
문화의 상대성과 수필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가운데 공통점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개고기식용이 그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료리방법은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식용한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개고기기호인구를 어림잡아 중국에서 년간 식용되는 개의 수자는 한국에 비해 60배는 넘지 않나싶다. 그런대 좀 이상한것은 서양인들이 개고기 식용을 문제 삼아 중국이나 중국 사람들을 비방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지만 한국이나 한국 사람을 매도하는 경우는 가끔 보게 된다. 2001년 한일 월드컵 때 프랑스의 녀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를 먹는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한국인들을 욕했고, FIFA(세계축구련맹)의 블라터회장은 월드컵 기간에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한국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에 앞서 1988년 서울올림픽 전야에, 미국 보스턴에 본부를 둔 《세계동물애호가협회》가《개를 먹는 나라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치를수 있는가》라면서 서울올림픽보이콧을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였다. 그 사건을 한국인들은《보신탕 악령》이라고 한다. 그때 나도 우연히 개고기 론쟁에 휘말려든적이 있다. 1988년 이른 봄의 어느 하루, 나는 보스턴한국학학회로부터 리셉션에 참석해 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지정되 시간에 케임브리지의 어느 음식점에 도착하여 나는 그날 리셉션은 한국 전남대학교 송기숙교수의 래방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되였음을 알게 되었다. 소개에 따르면 송교수는 《어머니의 깃발》등 여러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출간한 이름있는 소설가였다. 만찬회에 참석한 10여명중 두분의 한국교수와 나 외에는 모두 보스턴지역 각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백인교수들이였다. 식사도중에 화제는 자연스럽게 몇 달후에 개최될 88서울올림픽에 관한 이야기로 련결되였다. 그런데 연회의 주인측에 동물애호가협회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개를 식용할수 있는가?》라면서 흥분했다. 송교수는 한국인들이 식용하는 개는 미국인들이 기르는 애완용개가 아니고 식용하기 위해 기르는 똥개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미국 교수는 개면 개지 식용할수 있는 개가 어디 있을수 있느냐며 반박했다. 이 정도 되니 송교수는 궁지에 몰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는 들러리로 연회에 초대된 만큼 조용히 밥이나 먹고 있었는데 송교수의 처지가 너무 딱해 말참견을 했다. 《남의 이야기 같지만 우리 중국에서도 개고기를 먹기 때문에 한마디 하겠습니다.한국이나 중국에서 개를 식용하는것은 문화인류학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서양인들은 말고기를 먹지만 한국인들은 먹지 않습니다. 서울올림픽을 보이콧하기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도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뉴욕타임〉지에 난 기사를 보셨겠지만 미국인들의 쇠고기 소비량은 다른 나라의 3배 이상입니다. 나도 돈과 시간만 있다면 한달안에 세계에서 쇠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미국인들을 지탄하는 1000만명의 서명을 받아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인들은 소를 신으로 모시지 않습니까? 인도에 가면 인구도 많겠다⋯ 소도 개도 모두 동물입니다. 사랑하겠으면 다 사랑해야 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송교수를 괴롭히던 미국인 교수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서울올림픽 개최전야에 나는 서울올림픽국제학술회의에 초청되여 평생처음 한국을 갔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회의 조직자측의 요구에 응하여 한국의 10개 대학을 순방하면서 특강을 하게되였는데 마지막 강의를 전남대학교에서 하게 되였다. 특강이 끝나자 나는 송기숙교수에 끌려 광주 무등산정상에 있는 한정식집에 마련된 리셉션에 참석하게 되었다. 송교수는 20여명의 친구교수들에게 몇 달전 미국 보스턴에서 있었던 개고기 론쟁을 소개하면서 그때 내가 당신을 궁지에서 구해주었다며 재삼 감사하다고 했다. 개고기 론쟁에서 내가 응용한 리론은 문화의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원리이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간에는 그 어느 민족의 문화가 더 좋고 옳은것이며, 또 어떤 민족의 문화는 더 나쁘다거나 틀린것이란 평가를 할수없다는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민족문화만 우수하고 타민족문화는 렬등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문화중심주의에 빠지게 되거나 자민족문화가 렬등하다고 주장하는 민족문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는것은 문화간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있는 이른바 《세계화시대》에 수필 쓰는 사람들이 갖추지 않으면 안될 덕목중의 하나이다. 북경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나젊은 한족교수가 몇 일전 추천서를 받아가기 위해 나의 연구실에 왔다가 어느 조선족문인이 쓴 국호에 관한 수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갔다. 저녁에 시간을 내여 한족교수가 지적한 글(《연변문학》2005년 제5기)을 읽고 나는 그 교수가 흥분한데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의 수많은 조대들의 국호는 모두가 한글자이고 조선의 조대들의 국호는 모두가 두글자, 혹은 세글자이다.》라고 서두를 뗀 글쓴이는 《국호를 한글자로 쓰고있음은 내세움이 아닐가? 이 세상은 나 하나다.나 하나만이 영원하다. 드팀 이 없는 쇠소리나는 최강음은 둘 아닌 하나이다. 말하자면 하나는 으뜸이요 제일이다. 나는 이 세 상에 둘도 없는 천자(天子)이다. 반면에 하나는 고독하고 외롭고 안전하지 못하 다. 둘만이 서로 보완하며 의존되여 평형이 이루 어지고 그래서 안전감이 있다. 고려(高麗), 거룩 하고 아름다운 나라, 조선(朝鮮), 아름답고 싱싱 한 아침의 나라, 이름만 봐도 마음이 느긋하고 푸 근하다.》라는 주장을 폈다. 내가 보건대는 글쓴이의 전문 지식의 결핍으로 생긴 문제이지만 한족교수는 자기 민족문화중심주의의 문제, 즉 문화 상대주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 3국시대, 남북조시대, 5대(五代)시대 등 력사시대에는 《이 세상은 나 하나》가 아닌 여러나라들이 각축을 벌리며 공존했지만 그 나라들의 국호도 모두 한 글자였다. 중국의 한자는 뜻글이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모두 독립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한자를 최초에 만들어 쓸 때(상나라) 거부기의 등뼈나 소뼈에 칼로 새겨 넣었고 그후 주, 진, 한 나라 때에도 대나무쪽(竹簡)이나 나무쪽(木簡)에 써야 했기 때문에 글쓰기가 너무나 불편했다. 따라서 그때에는 될수록 한 자로 표현할수 있는것을 두 자로 쓰지 않았다. 곡식, 과일이나 동물 등 원산지가 중국인것는 다 한 자로 이름지어져 있다. 벼(稻), 기장(黍), 조(稷), 콩(豆),밀(麥), 배(梨), 대추(棗), 감(柿),소(牛), 돼지(豚), 닭(鷄) 등이 그렇다. 그러나 외부에서 전래된것들은 두자 나 두자이상으로 되는데 그원인은 원산지 사람들이 만든 이름을 음역하거나 형용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옥수수(玉米), 사과(萍菓), 포도(葡萄), 석류(石榴), 바나나(香蕉), 락타(駱駝), 앵무새(鸚鵡) 등 많은 이름들이 그렇다. 국호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한 글자인데 조선은 왜 두 글자인가?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이나 국가 이름을 적을 때 그들의 자칭(自稱)을 비슷한 한자음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몽골(蒙古), 주르친(女眞), 로씨야(俄羅斯-俄國), 잉글랜드(英格蘭-英國), 아메리카(美利堅-美國),프랑스(法蘭西-法國) 등이 모두 그렇다. 고려는 고구려라는 이름가운데서《구》자를 생략한것인데 당나라 때부터 이미 그렇게 사용했다. 고구려(高句麗)라는 한자(漢字)가 당시 고구려인들의 어떤 자칭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아직 정설이 없다. 나는 그것이 수리(높다는 뜻)구루(성)를 한자음으로 기록했다고 본다. 조선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조선》이라는 이름을 최초에 기록한 문헌은 중국의《관자(管子)》라는 책이다. 때문에 조선도 우리 조상들이 《조》자와《선》자를 골라서 지은 이름이 아니고 고대 중국인들이 고조선인들의 자칭을 비슷한 음의 한자로 기록했을 뿐이다. 국호를 한글자로 썼다고해서 《 이 세상은 나 하나다. 나 하나만이 영원하다⋯. 말하자면 하나는 으뜸이요 제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주(周)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국호가 어떻게 변하던지 관계없이 중국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두 글자로 자기 나라를 자칭해 왔는데 그 두 글자에는 《세상의 중심의 나라》라는 뜻이 있어 도리어《자기중심》이라 할수있다. 그리고 《고려(高麗)》나《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고대 중국인들이 비슷한 한자음으로 우리 조상들의 발음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아름다운》혹은《아름답고 싱싱한 아침》이라고 자화자찬할 문제가 아니다. 민족문화의 비교는 아니지만 하위문화(subculture)의 비교에서 문화의 상대성을 거부하는 수필도 가끔 보인다.《나는 촌스러움으로 승부한다》(《연변문학》2005년 제4기)라는 수필은 글쓴이가 농촌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도시학교에 진학하면서 경험하게 된 농촌문화와 도시문화의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시도한 비교가 처음부터 평형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시작부터 작심하고 도시인들의 단점을 골라 농촌인들의 장점에 비교시키고 있다. 도시사람들의 리기적 심리와 행위, 천박함을 들어 자신(농촌사람)의 정직함, 진솔함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촌스럽다.〉 나는 이 냄새를 고양하고 〈촌스러움으로〉 승부한다. 그때면 우리들의 이 세상은 훈풍의(이?) 도시의 가로수에, 거리에, 아빠트에가득 매달리고 그래서 세상은 칼라가 물결칠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다. 도시문화는 그렇게 부정적인것들로만 구성된것이 아니다. 그리고 농촌문화도 그렇게 긍정적인것으로만 구성된것 역시 아니다. 도시사람들 가운데도 정직하고 진솔하고 인정이 있고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정직함, 진솔함, 인정미 등도 시골사람들의《특허품》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 재해가 들어 피해가 막심할 때, 농촌의 실학어린이들을 위한 《희망공정》그리고 어느 개인이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치료비가 없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사회적인 모금운동은 거의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 진행된다. 《난로에 도시락을 차례로 올려놓고 훈훈한 누룽지냄새를 맡아가며 둥그렇게 삥 둘러앉아 서로 권하며 아기자기 나누어먹던》시골인정도 좋지만 도시에는 평생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모아온 거금을 《희망공정》에 희사하는 더 큰 도시인정이 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장점을 《촌스러움》으로 정의한 자체도 도시문화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이 생활하던 문화 환경을 떠나 새로운 문화 환경에 진입했을 때 《내것만이 좋다》는 자기 스펙트럼을 통해서《남의 문화》를 바라볼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장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빨리 습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도시환경에 와서 농촌문화만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옛날에 머물 수밖에 없다. 《때밀이군》,《구두닦이》,《웨이터》나 《웨이터리스》도 부동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의 직업에는 상하귀천이 없고 인간으로서 그들 또한 평등하다. 그들에 대한 글쓴이의 《촌스러움》의 리해도 바람직한것이 못된다. 도시문화에는 발전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도시화는 사회발전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도시문화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는 《촌스러움》의 고집은 나젊은 학도에게 있어서 현명한 인생 선택이라 할수 없다. 부동한 문화간의 교류가 부단히 빈번해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다른 문화권의 문화를 리해하고 존중할수 있는 문화 상대주의의 정신이 아쉽다. 2005. 8
37    (수필) 술과 수필이 만난다면… 댓글:  조회:5445  추천:45  2006-03-02
술과 수필이 만난다면… 10년전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함으로써 세인들을 경악케 했던 프랑스의 철학가 질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만남의 기술을 이야기한다. 가령 독은 사람을 죽이기때문에 《사람》과 《독》의 만남은 나쁜 만남이지만, 독사는 독을 필수로 하기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좋은 만남이라는것이다. 그렇다면 술과 문학의 만남은 어떤 만남일가? 중국에서 시성(詩聖)으로 불리우는 두보(杜甫)는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라는 시에서 《리백두주시백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고 하여 시선(詩仙) 리태백과 술의 만남은 좋은 만남임을 시사했다. 그리고 요즈음 우리 문학지들에 발표되는 조선족 시인이나 소설가들에 대한 문단회고록 같은 글에는 거개 술이 빠질수 없다. 그래서 나는 술과 시인, 술과 소설가의 만남은 좋은 만남일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리태백이 술을 마시면서 시를 썼듯이, 술을 마시면서 수필쓰기를 시도한 사람이 있어 나의 주목을 끌었다.《서재에서 술을 마시며》(《연변문학》2004년 9월호)라는 제목의 수필은 글쓴이가 《급한 회의재료를 쓰다가 자정이 넘어》서재에서 《사색을 안주로 삼아》《반컵 정도 흰술을》 마시면서 쓴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면 취기를 빌미로 사유는 더욱 활발해지고 사색은 마치도 날개를 단듯 동서남북의 넓디넓은 상공으로 빙빙 선회하군 하여 매우 흐뭇하다》고 하면서 글쓴이는 첫 모금을 마시고 《서재의 책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많은 책중에서 《로사의 ⟨참회록⟩》과 《한 지도자》가 《그의 슬하에서 일》한 적이 있는《나》에게 준 《헤겔사전》의 입수과정을 소상하게 밝히였다. 그리고 두번째 모금을 마시고 《옛사람은 ⟨만권의 책을 읽으면 만리 길을 간다⟩라고 했다》면서 자신의 독서경력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컵에 남은 술을 다 마시자 나의 사유는 굴레를 벗은 말처럼 광활한 상공을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철학가 디카르는 라고 했다.》《하여 나는 아무 생각이나 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나는 필을 들고 내 사상의 기록의 쪼각들을 적기 시작하였다.》《이튿날 다시 이런 문장을 읽어 볼 때 나는 실소하지 않을수 없다. 어떤것은 의미가 똑똑했고 내용도 괜찮았고 어떤것은 조금 관련되지 않고 자유산만하다. 그러나 내가 참답게 자세히 전날 저녁의 사유를 돌이켜보면 그런 주요한 사로와 관점은 점점 똑똑히 도드라지게 되어 나는 기쁘고 흥분한다. 이렇게 나는 한편의 문장을 얻게 되는것이다.》수필은 《서재에서 술을 마시면 락이 무한하다!》라는 말로 끝난다. 글쓴이는 마시고 싶은 술도 마셨고《취기를 빌미로》글도 쓰고 했으니 《락이 무한》하겠지만 그렇게 씌여진 글을 읽는 나로서는 괜히 먹지도 않은 술에 취해버린것처럼 오락가락하여 좀처럼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 우선 《로사의⟨참회록⟩》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북경의 향토작가중에 로사라는 유명작가가 있었지만 그는《참회록》을 쓴적이 없다. 아니면 중국에서《 루숴(盧梭)》로 번역하고 있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루소(Rousseau)와 그의 《고백록》(Confessions)을 말하는것인가? 그렇다면 《로사(盧梭)》는 루소의 한어번역어를 다시 우리식 한자어발음으로 옮긴 것이라 하겠는데 그러면 뒤에 나오는《헤겔》도 같은 방식으로 《흑격이(黑格爾)》라고 해야 할것아닌가? 그다음《헤겔사전》을 준 사람도 알쏭달쏭하다.《 슬하》라는 말은 우리말이나 한어에서나 다 부모의 곁을 뜻한다. 그렇다면 《헤겔사전》을 준 《지도자》는 글쓴이의 아버지나 어머니란 말인지? 그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주었다고 하면 더 쉽게 리해할수 있지 않을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재 중국의 사회풍토에서는 전혀 리해할수 없는 말이 되여버린다. 두번째 모금을 마시고 인용한 옛사람의 《만권의 책을 읽으면 만리길을 간다》라는 말도 그렇다. 왜 《책을 읽으면》 꼭 《길을 가》게 되는가?《읽는다》와《간다》라는 두개의 개념사이에는 절대적인 련관성이 있는것이 아니다.《만권의 책을 읽고》《만리길을》갈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가고 안 가고는 책을 읽은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그래서 《옛사람》은《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길을 가라》고 권유했을 따름이다. 술을 다 마시고 사유가 《굴레 벗은 말처럼 광활한 상공을 질주》할 때, 글쓴이가 인용한 《프랑스의 철학가 디카르는 ⟨나의 사색은 나에게 있다⟩》라는 말은 나를 더욱 당혹케 한다. 프랑스에는 《디카르》라는 철학가가 없다. 글쓴이가 말하는 《디카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 철학가이자 과학자, 수학가인 데카르트(Descartes)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 사색은 나에게 있다》는 말도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명제로 내세울 철학가가 이 세상에 있겠는지도 의심이 간다. 한사람의 머리는 그 사람의 몸을 떠나(참수당했을 때) 잠시 존재할수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사색(思索) 은 그 사람을 떠나 잠시도 존재할수 없다는 사실을 철학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알수 있는 리치일것이다. 글쓴이가 인용하려 했던 데카르트의 명언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아닌가 싶다. 1637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방법론서설》제4부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하는 자아》만을 철학의 기반으로 삼은 데카르트는 관념론(유심론)철학의 선구자이다. 사실《술》과《문학》의 만남은 들뢰즈가 지적한 《독》과《사람》, 그리고《독》과 《독사》와의 만남과 같은 그런 절대적 관계가 아니다. 술을 기호하는 시인, 소설가나 수필가가 있듯이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시인, 소설가나 수필가도 있다. 그리고 리백(李白)과 같이 주선(酒仙)이 시선(詩仙)으로 된 경우도 있고 영국의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처럼 술을 혐오한 유명시인도 있듯이 술은 한 문학인이 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할수 있다. 《서재에서 술을 마시며》라는 수필이 나의 관심사로 될수 있은것은 그 글이 《술을 마시면서 시를 쓸수 있다면 같은 상황에서 수필도 쓸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풀어줄수 있는 키워드로 될수 있기때문이다. 물론 그 글은 사회학학자들이 말하는 보편성을 확보할수 있는 선택된 샘플은 아니다. 다만 내가 볼수 있었던 술을 마시고 《취기를 빌미》로 쓴 유일한 수필이였다. 그런데 그 수필은 나를 《수필은 술을 마시고 흥분된 상태에서 쓸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인도했다. 가령 글쓴이가 술을 마시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수필을 썼다면, 수편의 《철학론문》을 발표한적이 있는 지성인이 과연 그 많은 론리적 오류와 철학상식적 우를 범할수 있겠는가? 수필은 가슴에서 생겨나고 머리에서 정리된 글이라고 한다. 한편의 좋은 수필에서는 정서와 지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일것이다. 시는 단적인 정서의 발로이기때문에 술을 마시고 흥분된 상태에서도 쓸수 있겠으나, 수필은 정서와 지성의 융합으로 구성되는 글이기때문에 아무리 뜨거운 가슴에서 생긴 뜨거운 열정이라 할지라도 랭정을 잃지 않은 머리에서 차분하게 정리되여야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 그리고 사색은 흥분된 상태의 정서보다는 세련된 지성에서 기대될수 있을것이다. 한사람의 생각이 《취기를 빌미》로 《넓디넓은 상공으로 빙빙 선회》하거나 《굴레를 벗은 말처럼 광활한 상공을 질주》하는 이상, 그것이 다시 인간들이 살고있는 지상으로 돌아와 차분한 상태로 전환되기 전까지, 독자들에게는 그 《사유》를 따라 다닐수 있는 재간이 없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주당(酒黨)이라 하더라도 술에 취해버린 수필을 읽으려는 사람이 있겠는지 의심이 간다. 《열》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져 식어버린 가슴과 달아오른 머리에서는 좋은 수필이 씌여질수 없다.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한가로운 기분을 지니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한편의 문장을 쓸 때, 그것은 곧 수필이 될것이다.》(김광섭:) 그렇게 씌여진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피천득:) 그래서 《시가 말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며, 소설이 인물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라면 수필은 마음을 놓는 자리에 놓는 글이다》라는 말이 생겼을것이다. 수필은 술로 흥분된 상태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씌여지는, 따스한 사랑의 마음이 담긴 지적인 글일것이다. 2005. 5
36    (수필) 수필과 진실 댓글:  조회:6482  추천:63  2006-03-01
수필과 진실 문화인류학에서 연구자와 연구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두 가지 색다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연구자가 연구대상으로 되는 그 사회의 구성원일 때 그의 연구는 그 사회를 《안에서부터 보여주는(emic approach)》 연구이고 연구자가 외부인일 때는 그 사회를 《밖으로부터 들여다보는(etic approach)》 연구로 된다. 최근에 문화인류학의 방법론을 도입한 수필이 발표되여 나의 시선을 이끌었다. 《밖에서 들여다본 ⟨중국식 1등주의⟩》(《연변문학》2004년 12월호)라는 글은 글쓴이가 40년간 중국에서 살다가 《최근 몇년간 중국밖에서 살》면서 《중국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는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던것들 중 새롭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라는 담론으로부터 시작된다. 국외에서 행해진 그의 중국들여다보기는 《중국》이라는 나라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5천년문명사》에서 《중국이라는 나라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여 진》것은 1912년에 성립된 《중화민국》인데 《머리글자와 꼬리글자를 취한 약자가 중국이 되였다》했고 그러나 조선에서는 세종대왕이《훈민정음》을 만들 때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라고 한것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쓰여왔다》는것이다. 글쓴이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조선이나 한국의 법률전공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관찰은 중국정부에 대한 《국명지적소유권》을 주장할만한 소재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 관찰은 고대 중국인들이 5방 개념에 따라 동, 남, 서, 북 4방의 중앙에 중국이 있다고 주장했고 중앙의 대표색은 노랑(黃)인데 그들 황제의 황(皇)자와 누를 황(黃)자가 발음이 같기때문에 《고전언어학에서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어휘는 같거나 비슷한 사물을 지칭한다⟩는 등식을 세울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보완하기 위하여 《임금은 누런 곤룡포를 입었다》는 보충설명도 잊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자기중심》주의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사고로 비판할수도 있지만 《자존자강》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했다. 이어서 글쓴이는 《요즘 중국의 대학가에 나타난 ⟨중국식 1등주의⟩ 역시 이런 자기중심주의의 현대판이라고 볼수 있다》라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중국안에서 관찰했으면 훨씬 더 편리하고 좋았을텐데 하필이면 외국에 나가 남들의 안경을 빌려 쓰고 《들여다보》면서 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글을 썼는지하는 유감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중국》이라는 명칭이 나라이름으로 쓰여진 력사는 주(周)나라 때까지 소급된다. 유학(儒學)의 경전중의 하나인 《례, 중용(禮, 中庸)》에는 《(명성이) 중국에서 널리 떨치다(洋溢於中國)》는 구절이 있고 《한서(漢書)》43권에는 한고조 류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을 다스렸다(統天下, 理中國)》라는 말과 함께 《중국의 사람수는 억으로 계산되고 땅은 사방으로 만리나 된다(中國之人以亿計, 地方萬里)》라는 말이 있어 《중국》은 이미 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등장했음을 알수 있다. 사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주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대가 어떻게 바뀌는가와 무관하게 변함없이 사용해온 중국의 나라이름이였다. 나는 전공자가 아니여서 《고전언어학》의 정체는 파악할수 없다. 그러나 글쓴이가 인용한것처럼 《고전언어학》에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어휘는 같거나 비슷한 사물을 지칭한다》는 《원리》가 존재한다면 그 학문은 사이비학문일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원(辭源)》에 올라있는 황(黃huang)자와 같은 발음의 뜻글만해도 무려 58개나 있다. 그 많은 어휘가 《같은 사물을 지칭》한다면 한어는 수십배로 위축되여 의사소통의 기능을 담당할수조차 없을것이 분명하기때문이다. 거칠다(荒), 두려워하다(惶), 다급하다(慌), 노랗다 (黃), 임금(皇) 등등의 어휘들이 어떻게 《같은 사물》을 지칭할수 있단말인가? 기원전 221년 진왕(秦王) 정(政)이 전국시대후기의 제후국들을 통일하고 진제국을 건립하였으며 하, 상, 주 시대의 국왕과 달리 자기가 황제의 시원(始原)이라는 의미에서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하였는데 그가 력사상의 진시황이다. 진시황으로부터 한(漢)나라 때까지 황제들의 면복(冕服)은 노랑이 아닌 검정이였다. 그리고 훗날《곤룡포》에 수놓은 룡도 한나라 때까지는 없었다. 때문에 글쓴이가 주장한 《황(皇 )=황(黃)》의 등식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허상일뿐이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를 보다가 중국의 대학들이 저마다 제각기 1등이란 표현을 쓴다는 기사를 읽》고 글쓴이는 《중국식 1등주의》가 《자기중심주의의 현대판》이라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글쓴이가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라면 중국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아전인수식으로 중국을 《들여다보았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중국에서 40년 이상 살아온 사람이라면 중국의 대학교육시스템은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어야 했다. 일본과 한국의 대학교육시스템은 종합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소수의 특수대학을 제외한다면 모든 대학들이 규모와 관계없이 모두 문, 리, 공, 의, 예, 체능이 갖추어진 종합대학이다. 그러나 중국은 1949년 이후 특성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교육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때문에 최근에 《211프로젝트(211工程)》가 실시되면서 대학합병 붐이 일어나기전까지 중국에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흔히 볼수 있는 종합대학이 한개도 없었다. 북경대학이라해도 공과, 의과, 예능, 체능 등 학과가 빠진 문리종합대학이였을뿐이다. 북경의 대학들만으로도 중국의 고등교육시스템을 충분히 설명할수 있다. 북경음악학원, 북경무도학원, 중앙미술학원 그리고 중앙공예미술학원은 북경에서 음악, 무용, 미술, 공예미술 분야의 유일한 예능특성대학이다. 그중 어느 하나도 중점대학은 아니지만 그들 분야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예능학과가 개설조차 되여 있지 않은 북경대나 기타 중점대학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것이 분명하고, 유일한 그 대학은 각자의 《제일》대학일수밖에 없다. 교육자들은 북경사범대학을, 법조계는 중국정법대학을, 외교관들은 북경외교학원을, 무역인들은 대외경제무역대학을 그리고 예비공무원들은 중국인민대학을 《제일》의 대학으로 대접하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공업대학은 더더욱 세분화되여있다. 항공항천대학에서 식품공업학원에 이르기까지 특성공대는 수십개나 된다. 어떻게보면 북경대학을 제외한 70여개가 넘는 북경의 모든 공립대학들은 남들이 흉내낼수 없는 자신만의 특별한 전공분야를 갖고 있기때문에 그 분야의 세계에서 《제일》대학임은 너무나 당연한 리치이다. 가령 연경맥주공장의 총공정사가 되고 싶은 수재라면 시험점수가 아무리 높더라도 청화대학을 가지 않고 북경식품공업학원을 간다는것이다. 중국의 대학들이 《저마다 제각기 일등》이라한다면 그것은 중국의 고등교육시스템의 문제이지 《자기중심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수필은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때문에 수필작품은 허구를 배제한 진실한 자기 삶의 리얼한 이야기일수밖에 없다. 수필작품에서 《진실》이란 작가의 주관과 객관이란 두 개의 층면에서 해석될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생활, 체험, 행위, 생각, 느낌을 진솔하게 서술함으로써 당신의 인생관, 사상, 감정을 작품에 투영시켜 주관적 진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수필을 《고백적인 글》 ,《개성의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객관에 대한 진실은 작가의 투철한 통찰력과 달관에 따른 객관세계나 지식, 학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서 확보될수 있다. 가령 지식이나 학문을 론하는 한편의 수필작품에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사이비지식이나 학문으로 충만되였다면 그러한 작품이 독자들에게 끼치는 유해성영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나의 가짜상품은 일차적으로 그 상품을 구입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데 그치지만 틀린 관찰이나 지식으로 쓰여진 작품은《이와전와(以訛傳訛)》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루가 파급될지 모른다. 진실은 수필창작의 본질이자 작품의 생명이다. 2005. 4
35    (수필) 수필과 보고서 댓글:  조회:5476  추천:67  2006-02-28
수필과 보고서 미국의 녀성학 학자 매릴런 앨룸은 1997년에 《유방의 력사》라는 녀성의 젖가슴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앨룸은 녀성의 유방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고 했다. 가령 유방을 보게 되였을 때, 아기는 음식을 생각하고, 남성은 섹스를 생각하고, 의사는 병을 생각하며, 장사군들은 그것을 달러의 기호로 보고,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을 변함없는 무의식의 가장자리에 유치시키려 한다는것이다. 하나의 객관적 존재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접근방법이나 관조의 시각은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다. 수필과 보고서는 모두 픽션이 아닌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진실을 보는 시각이나 접근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다르다. 사회학 학자나 문화인류학 학자는 제3자의 시각으로 관찰된 진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하지만 수필가는 감정이입이 된 자신의 느낌에 따라 나름대로 그 진실을 해명하고 어떤 정신과 운명을 제시하려 한다. 제1회 중국 조선족 어머니 수필공모 대상 수상작인 《콘돔을 넣으며》(《도라지》2003년 제6기)는 글쓴이가 생활하는 그 지역 성(性)풍속담론이다. 옛적(글쓴이가 어릴 때)에는 동네아줌마들이 모여서 불륜을 저지른 녀성을 집단 구타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 인간》들 사이에는 《내 안해 아닌 다른 사람의 녀자를 ⟨훔치고⟩ 내 남편 아닌 다른 사람의 남편을 ⟨도적질⟩하는것이 80년대 나팔바지 류행하듯 류행시세를 타고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만연되고 있다.》 그래서 《애인》을 《내여 놓고 자랑하는 축들도 많》아 그만큼 《그 ⟨붐⟩은 보편성과 정당성을 띠고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고 보아야 겠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이렇게 《가정하나 남편(안해)하나 건사하기도 퍼그나 힘든》 세월에, 글쓴이의 돈타령에《질린 남편이 자기도 돈 벌러 나가봐야겠다》고 한다. 《녀자는 돈 없으면 못쓰게 되고 남자는 돈 좀 벌면 못쓰게 된다던데 내가 돈돈하다 못쓰게 될가봐 남편은 근심인것이고 나는 그렇게 돈 벌러 떠나는 남편이 또 걱정이다.》 결국 남편도 외지에서 《 남의 녀자를 ⟨훔칠⟩것이》 뻔한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남편의 짐에 콘돔을 넣어준다. 글쓴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작품에 자신을 개입시키면서 사적인 생활의 가장 은밀한 치부까지 리얼하게 토로했다.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필요여건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품에서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글쓴이의 노력을 읽을수 없다는것이다. 작품의 전개는 시대의 《류행》에 따라 흘러가기이다. ① 옛적에는 민간에서 불륜을 엄하게 벌주었다. ② 그런데 요즘은 불륜이 《빠른 속도로 만연되고 있다.》 ③ 심지어 《애인 없다》면《축에 들지 못하는 사람으로 통하고 있다.》 ④ 남편이 돈 벌려 나선다. 결국 남편도 외지에서 불륜을 저지를것이 《불 보듯 뻔한것이다.》 ⑤ 남편의 행장에 콘돔을 넣어준다. 《왜서 우리들은 이런 생활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일가?》라는 질문을 하면서도 (사실 그런 ⟨생활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안될것도 없고, 또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 싶다) 더 이상 답안을 찾으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이러하니 나도 《류행》에 따를 수밖에 별도리 없다는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류행을 따른다》기 보다는 한 술 더 떴다는 인상을 준다. 가령 남편이 외지에서 다른 녀자와 간통을 했는데 그것을 《시대적 류행》으로 보고 그 불륜을 너그럽게 봐주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시름없이 자고 있는 아들애를 위해서라도 얇은 유리컵같이 쉽게 깨여지는 요즘 가정들을 본받지 않으려고》 아직 떠나지도 않은 남편에게 《간통면허증》을 먼저 만들어 준다는것은 아무리 불륜이 《류행》되는 시대라 해도 비약이 아닐수 없다. 《콘돔을 넣으며》는 삶의 진실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없기때문에 수필보다는 수필의 형식을 빌린 지역 성풍속보고서에 가깝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가령 글쓴이가 콘돔을 남편의 짐에 넣은 다음이라도 《내가 성관계의 배타적 독점권을 일방적으로 포기했을 때 우리 가정은 지켜질수 있을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다시 《그렇게 지켜진 가정은 행복할 수 있을가?》라는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해 보았다면 글의 결말은 확 달라질수도 있을것이고 《보고서》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좋은 수필로 탈바꿈할수도 있었을것이다. 혼외정사가 아무리 《사회적 류행》으로 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글쓴이는 관찰했어야 한다. 고대 로마제국말기 로마의 성풍속은 극도로 문란했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인들은 그런 《생활방식》을 거부했었고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기독교는 흥기했다. 《콘돔을 넣으며》가 작성될 그 무렵 세인들에게 큰 감동을 준 사랑이야기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1971년 조선에서 류학하던 베트남 청년 팜응 옥카인은 조선 처녀 리영희와 사랑을 나누게 되였다. 그런데 1979년 베트남과 조선의 국가관계가 악화되면서 두 련인은 통신마저 끈긴 상태의 생리별을 하게 되였다. 2002년 베트남국가주석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두 련인은 서로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확인할수 있었고 그해 10월달에 결혼식을 치르게 되였다. 그들이 31년간 생사마저 알길 없는 기약 없는 사랑을 인내하고 기다릴수 있은것은 오직 사랑에 대한 신념 하나뿐이였다고 당사자들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부부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듯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을것이다. 후자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외도나 불륜을 간단하게 매도할 수 없다. 부부간의 성행위 일지라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라면, 그것은 동물적인 성교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할수밖에 없다. 반대로 혼외정사라 해도 사랑의 진실이 확보되여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행위로 리해될수도 있다. 그런데 《콘돔을 넣으며》는 성욕에 관한 담론이면서도 사랑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도 아닌 긴 시간을 주체할수 없이 밀밀 치미는 욕구를 자제하라고 요구할수도 없고 또 자제하라고 해도 자제가 아니 될것이다. 결국 남편도 자기것 아닌 남의 여자를 ⟨훔칠⟩것이고 나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심신이 ⟨도적이 들⟩것은 불 보듯 뻔한것이다.》 성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끈질긴 욕망이다. 그러한 욕망은 통제가 없거나 제약이 없이 표출될 경우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올수도 있지만, 인간의 사랑을 통해 승화될 때는 창조의 에너지로 될수도 있다. 사랑의 유무에 따라 성욕은 두 개의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팜응 옥카잉과 리영희는 31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수도 있었지 않는가? 떠나는 남편의 행장속에 콘돔을 넣는 행위는, 사랑이 식지 않은 부부사이라면 그것은 남편에 대한 모독이나 불신으로 해석되기 십상이고,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린 부부사이라면 그것은 화사첨족(畵蛇添足)보다 더 쓸데없는 군일일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식기 시작한 부부사이라면 《엷은 유리컵같이 쉽게 깨여지는 요즘 가정》을 위해서 그보다 더 위험한 불장난은 없을것이다. 2005. 3
34    (수필) 잘못 채워진 첫 단추 댓글:  조회:5896  추천:54  2006-02-27
잘못 채워진 첫 단추 이순의 나이에 수필쓰기를 배우다 보니 쓰고 있는 한글자한글자마다에 조심이 간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수필인가 하는 의구심때문일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가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으면서 수필리론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수필쓰기 공부를 하다보면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많이 접하는 말이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이다. 수필가들은 원고지를 앞에 놓고 필만 들면 저절로 글이 씌여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초보자여서 그런지 아무리 필을 들고 앉아있어도 붓이 가주지 않아 글이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나는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경지에 이르는 첩경을 찾기 위해 《붓 가는대로 따라간》다고 풀이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한자어 단어의 원류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내가 쉽게 찾아 읽을수 있었던 수필리론가들의 글을 아래에 인용해본다. 《남송(南宋)시대의 홍매(洪邁:1123~1202)가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의 저술의 서문에서, 저술제목에 이란 말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민병덕 등:《현대문학》, 제 384페지 (동아출판사) 《수필이란 명칭은 중국 남송대에 홍매가 쓴 용제수필(容齊隨筆)에서 비롯되였다. 그는 수필이란 명칭을 쓰게 된 연유를 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수필을 이라 풀이하는 것은 아직도 약 800년전 홍매에 머물러 있다 할것이다.》 (김형진: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며, 《송화강》2003년 제5기) 앞의 두 인용문에서 홍매의 말에 대한 번역글의 차이는 있지만 《뜻하는 바를 앞뒤 가리지 않고 적었기》때문에 《수필》이라 한다는 기본 뜻은 거의 같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는 바를 기록》한다는 말과 《붓 가는대로 쓴》다는 말은 조금도 닮은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김형진의 글은 아무른 해석도 없이 《붓 가는대로 쓴 글》이란 말의 책임을 《800년전》의 홍매에게 전가시키고 있어 아둔한 나로서는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제는 뼈마저 진토(塵土)로 되어 있을 홍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억울함을 호소할 것을 기다릴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도서관에 쫓아가 홍매의 《용재수필》원본을 찾아보았다. 우선 김형진의 글이 《용재(容齋)》를 《용제(容齊)》로 잘못 쓰고 있음이 확인되였다. 홍매의 수필론 원문은 아래와 같았다. 《予老去習懶, 讀書不多, 意之所之, 隨卽記彔, 因其先后, 無复詮次, 故目 之曰隨筆. 》 (《容齋隨筆》序) 《나는 늙어가면서 게을러지게 되여 책은 별로 읽지 않으나 생각이 닿는대로 곧바로 기록하게 되였다. 그 기록의 선후를 다시 가려내거나 목차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이름하게 되였다.》 (《용재수필》서문) 홍매가 주장한 수필론의 키워드가 《수즉기록(隨卽記錄)》임은 첫눈에 나타난다. 중국의 권위적 고대한어사전인 《사원(辭源)》에 따르면 《필(筆)》자는 ①붓 ②서사, 기록 ③산문(散文)등 3가지로 해석되기때문에 홍매가 사용한 《수필》의 《수》는 《수즉(隨卽)》의 《수》로, 《필》은 《기록》의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수필》은 《수즉기록》을 두글자로 줄여 표현한것이다. 《수필》에 대한 《홍매정의(洪邁定議)》는 단연코 《생각이 닿는대로 즉시 기록한 글》이다. 그렇다면 우리 수필문단에서는 왜 《수필》을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해석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조선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이 본격화되던 시기(1930년대~1940년대)에 최초로 수필문학리론의 정립을 시도했던 사람은 김광섭일것이다. 그는 《수필문학소고》(《문학》19 34년 1기)라는 글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대로 쓴 글이다.》라고 했는데 수필이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식 해석의 장본인은 홍매가 아닌 김광섭임이 틀림없다.《글자 그대로》라는 수식어를 보더라도 김광섭은 《隨筆》이라는 두 글자를 리해할 때 조선에서 사용하던 《옥편》을 참조한 것이 분명하다. 《옥편》에서 《隨》를 《따를 수》, 《筆》을 《붓 필》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수필》을 《붓에 따른 글》, 즉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르른것이다. 따라서 《김광섭정의》는 한어문단어에 대한 틀린 판독(判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와전된 틀린 정의일 수밖에 없다. 김광섭이 잘못 채운 첫 단추 때문에 우리의 수필문학은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동안 비뚤어지게 옷을 입고있은 셈이다. 이제는 그 첫 단추부터 풀어서 바르게 채워야 하지 않나 싶다. 처음《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말을 접했을 때 먼저 생각났던 일이 있다. 1950년대나 60년대 초기 중국영화에서 자주 볼수 있었던 장면이였는데 첫사랑에 빠진 남녀주인공중의 한사람이 저녁에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일기를 적으려고 일기책을 마주했다가 련인에 대한 달콤한 몽환경에 도취된 나머지 붓 가는대로 손을 놀리다보니 공책 한페지는 전부가 련인의 이름자로 메워진다. 사실 《붓 가는대로 쓴 글》이란 앞의 경우 외에도 더 있을수 있겠는지 의문스럽다. 《글 쓰기라는 업보가 원쑤 같다》(최인호),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김현호)라고 말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글쓰기란 결코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인간의 령혼으로 씌여지는 글이 아닌가 싶다. 2004. 5
33    (수필) 순백의 꽃 《도라지》 댓글:  조회:5537  추천:55  2006-02-24
순백의 꽃 《도라지》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룡담산 정상에 엄청난 성을 쌓아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길림. 그 길림, 그 룡담산 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순백의 꽃을 피운 《도라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땅을 개척했던 선대들의 불요불굴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국 조선족 순수문학지의 백미로 자리 매김을 한 《도라지》. 이제 《도라지》홈페이지가 개설되면서 세계화시대의 벽지에서 피여난 《도라지》도 자신의 은은한 향기를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인터넷을 리용한 매스미디어에 실어 이 세상 저 끝에까지 전해줄수 있게 되였다. 《도라지》는 20세기의 마지막 하늘을 불태우던 밀레니엄 축제의 불꽃놀이와 같이 화려한것은 아니다. 이른 아침 샘터에서 길은 물동이를 이고 오솔길을 걸어오는 촌티 못 벗은 여인의 소박한 모습같은것이다. 《도라지》는 블루 마운틴 커피나,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루이 13세 브랜디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농가의 밥솥에서 우려낸 숭늉이나 농부들이 논둑에서 참으로 마시는 막걸리같은 것이다. 《도라지》는 세계화시대에서도 우직하게 우리 민족 문학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가려 하는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의 량심이기도 하다. 그들이 지향하는 민족문학이 비세계적이고 페쇄적인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다만 다양한 민족문화의 가치들이 조화롭게 공존할수 있는 21세기를 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뿐이다. 《도라지》홈페이지를 방문하시게 될 모든 네티즌들에게 후애와 편달을 부탁드리는바이다. 2003. 4
32    (수필) <오동나무>를 심자 댓글:  조회:5761  추천:41  2006-02-23
를 심자 2년전의 추석이였다.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족 석, 박사생들이 저녁에 회식을 갖기로 하고 나를 초청했다. 초청 용의를 물었더니《추석이 되여 집 생각도 나고 해서 우리끼리 모여 회포를 풀기로 했구요, 이 기회에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초청하는 겁니다》라고 했다. 나는 전화로 집사람에게 량해를 구하고 회식장소를 찾아갔다. 대화중에 연구생들은 《우리도 조선민족과 연변의 발전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변 친구들로부터 ⟨너희들은 일단 북경으로 가면 졸업하고도 다시 안 돌아오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마치 민족과 고향을 등진것 같아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한 학생은 자신이 체험한바를 이야기했다. 몇년전 청화대학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그녀는 연변의 경제 발전에 보템하겠다는 일념으로 북경의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졸업후 곧바로 연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생각밖에 자치주 인사부문에서 그녀가 전공한 분야의 인재를 수용할수 있는 단위가 없다는 리유로 그녀를 고향인 룡정으로 보냈고 룡정시는 다시 어느 중학교 수학교사로 배치해주었다. 중학교에서 2년간 고민한 끝에 그녀는 석사생 시험을 거쳐 다시 청화대로 돌아왔다. 조선족의 두뇌라 할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연변의 인재류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였다. 연변은 중국의 변경지역이고 또한 바다길이 없기때문에 중국 내수나 세계시장을 겨냥한 제조업이 기간산업으로 부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변의 발전전략은 하이테크 산업과 문화산업에 비중을 둘수밖에 없다. 문제는 하이테크 산업이나 문화산업은 상당 수량의 전문인재를 수요로 하는데 연변은 그런 인재를 유치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도리여 류실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연변에는 현지 자원을 리용한 극히 제한된 제조업과 백두산을 자원으로 한 관광업이 남아 있을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반도의 남북화해무드와 조선의 새로운 경제정책에 따라 언젠가는 한국인들이 《3.8선》을 넘는 륙로로 백두산 관광을 할수 있을것이라는점을 심각히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만약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관광업마저 죽어버린다면 연변의 경제는 어떻게 되겠는가를 걱정해야 할것이다. 보다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연변이 살아남는 길은 21세기에 걸맞는 하이테크 산업과 문화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1990년대에 미국은 실리콘벨리(중국에서 《硅谷》이라고 하는)를 중심으로 정밀 전자공학을 기초로 하는 컴퓨터, 통신 분야의 하이테크 산업을 발전기켜 일본에 뒤졌던 산업경쟁력을 다시 회복시켰고, 제조업으로 세계 제일 경제대국이라 자랑하던 일본은 도리여 경제침체상황에 빠져들게 되였다. 중국은 1990년대 이래 북경시의 중관촌(中關村)에서 IT산업 중심의 중국 실리콘벨리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북경시 해전구와 그에 린접한 창평구, 대흥구까지를 중관촌 하이테크 산업개발구로 지정했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관촌 개발구는 중국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견인차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존 네이스빗은 하이테크 (high tech), 하이터치(high touch)라는 단어로서 21세기의 기술문명에 대한 균형을 잡으려 했다. 중국에서 첨단기술, 고신기술이란 말로 통하는 하이테크는 전자통신공학(IT), 생명유전공학(BT),생태환경공학(ET)등 유망산업들로 익숙해졌다. 하이터치는 인간이 감수하게 되는 기쁨, 포근함, 편안함과 같은 감성적이고 문화적인것이다. 만약 연변에서도 연변의 중관촌이라 할수 있는 하이테크 산업개발구와 문화산업개발구를 조성한다면 조선족 전문인재 유치는 물론 한족을 포함한 국내 전문인재와 해외인재 유치까지도 가능해 질수 있다. 중국속담에《집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금봉황새가 날아온다.》는 말이 있다. 하이테크산업과 문화산업의 인재인 《금봉황새》를 유치하기 위하여 지금이라도 좋다. 《오동나무》를 심자. 2004. 4
31    (수필) 원일 아침 수상록 댓글:  조회:5220  추천:35  2006-02-22
원일 아침 수상록 설날 아침이다. 내가 나서 자라난 시골 고향 같으면 이 시각에 수탉의 세 번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질것이다. 이제 한창 도시의 빌딩숲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수십 마리로 무어진 비둘기떼가 아파트사이 공간과 푸른 하늘을 누비면서 빙빙 원무를 출연하고 있다.가까운 창밖에는 두 마리의 까치가 앙상해진 자귀나무가지를 오르내리면서《까-악》,《까-악》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있다. 어제 밤 자정, 요란스럽던 폭죽소리에 놀란 원숭이해는 꼬리를 감추고 영원속으로 사라졌고, 이제 을유년 닭의 해의 시작을 알리는 눈부신 태양이 바야흐로 빛을 발산하고 있다. 12년만에 딱 한번 찾아오는《조류(鳥類)》의 해여서인지 뭇새들이 유난스럽게 극성을 부리고 있다. 닭의 해 벽두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나무군 총각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포수에 쫓기는 노루 한 마리가 쫓아와서 살려달라고 한다. 마음씨 고운 나무군은 노루를 나무짐속에 숨겨두고 뒤쫓아온 포수를 속여 보내였다. 살아난 노루는 나무군을 인도하여 산속의 맑은 호수까지 간다. 그리고 래일이면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게 되는데 그 중 셋째 선녀의 옷을 숨겨 놓았다가 그 선녀를 안해로 삼되 네 아이를 낳기전에는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행복에 도취된 나무군은 세 아이를 낳은 선녀에게 옷을 돌려주었고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홀로 남아 고독해진 나무군은 수탉으로 변해버렸다. 수탉이 지붕이나 담장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우는것은 하늘에 있는 선녀 안해를 못잊어 그러는것이란다.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21세기 판《나무군과 선녀》의 이야기가 만연되여 있음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수없이 많은 《선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몰려가고 그런 가정에서는《나무군》만 고독하게 홀로 남아 안해가 돈 보따리를 이고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2년전 나는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조선족《선녀》를 만난적이 있다. 함께 간 한국교수들이 음식주문을 하면서 《이 분은 멀리 중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니까 맛있는것으로 잘 대접해 주세요.》라고 서비스 부탁을 하니까 주인아줌마가 30대 후반의 박씨라는 조선족 웨이트리스를 보내 음식시중을 들게 했다. 식사하면서 갈비를 구워주고 있는 박씨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는데 그녀는 길림성의 어는 작은 현성에서 왔다고 한다. 남편은 현정부 산하 기관의 공무원이고 자신은 소학교 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돈을 벌기 위해 브로커에게 5만원의 돈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다고 한다. 첫 2년동안,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도 억척같이 일하여 한국에 나오기 위해 빌렸던 빚을 몽땅 갚았고 금년(2003년)초에는 합법로무자의 자격을 취득하였는데 명년 5월까지 애 학비나 벌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집에 남아 있는 남편외에 외지에서 대학 다니는 딸애까지 세식구가 세곳에서 생활하고 있어 지금도 박씨는 혼자 있을 때 집생각 때문에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건강하시고 열심히 돈을 벌어 될수록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덕담을 남기고 박씨와 해여 졌다. 지난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박씨가 일하던 음식점에 들려 식사하게 되였다. 그런데 생각밖에 박씨를 다시 만나게 되였다. 《5월에는 집으로 가시겠다고 했잖아요?》라고 하니까 돌아가도 할 일도 없을것 같고 그래서 2~3년 더 일해 집 살 돈까지 마련해가지고 가기로 하고 눌러 앉았다고 한다. 돈이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버리면 개도 않 물어간다는 그 돈, 그러나 그 돈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수 없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다. 먹고 살만한 돈이 생기면 가전제품들을 갖추어야 하고 그것이 마련되면 좀 더 큰 내 집을 갖고 싶고 그 다음에는 자동차……그리고 끝없는 소유욕때문에 우리는 돈의 노예로 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들은 《나무군과 선녀》처럼 《리산가족》생활을 하고 있다. 과연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번 돈이 래일의 행복을 기약할수 있을가? 떠오르는 을유년의 저 밝은 해를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의 《리산가족》들이 하루 빨리《통일가족》으로 되기를 기원해본다. 2 《이아(爾雅)》 는 주나라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지은 책이라고 전해지는데 혹자는 공자의 제자들이 편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아》의 《익(翼)》조에는 닭의 다섯가지 덕목을 기록해 놓았다. 《머리위에 관(冠)을 썼으니 문(文)이요, 발에는 큰 발톱이 있으니 무(武)요, 적을 만나 필사적으로 싸우는것은 용(勇)이요, 먹이를 얻으면 서로 불러오는것은 인(仁)이요, 때를 맞추어 우는것은 신(信)이다.》(《首戴冠者, 文也; 足博距者, 武也; 敵前敢鬪者, 勇也; 得食相告者, 仁也; 鳴不失時者, 信也.》) 닭이 머리우에 볏을 달고 있는것을 관을 썼다고 했고 관을 썼다는것은 벼슬을 하는것과 같은 뜻이니 문덕이 있다거나, 큰 발톱이 있어 무덕이 있다고 한것은 닭의 외관적 모양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별반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용, 인, 신은 닭의 행위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인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탉은 적을 만나면 처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운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자기보다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용감하게 싸워서 쫓아내고만다. 영어에서도 《싸움닭과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 《투지에 불타다(feel like a fighting cock)》라는 관용구로 정착되여 있다. 싸움에 림하는 수탉은 오직 투지에 불탈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이아》에서 말하는 용(勇)이다. 그다음 수탉은 먹이를 발견하면 꼭꼭거리며 처자를 불러 함께 먹게 한후 새 먹이를 찾아나서는데 그것을 인(仁)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탉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려주는 광명의 예언자이기때문에 신(信)이라 했다. 옛성인들이 수탉을 극구 칭찬하여 수탉은 처자와 가정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와 식구들에게 먹이를 배려해주는 어진 품성을 구비했을뿐만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벽을 온 천하에 알려주는 지혜와 신의를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수탉을 리상형 남성의 화신으로 보았다. 다산 정약용은 《제변상벽모계령자도(題卞尙璧母鷄領子圖)》라는 시에서 암탉의 행위를 실감나게 묘사했다.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 닮았고,/제 새끼 건드리면 꼬꼬댁 쪼아 대네./....../낟알을 찾아내면 쪼는 체만하고서,/새끼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 시에서 제 새끼를 잘 보호하고 배고프더라도 먹이를 먼저 새끼들에게 먹이는 암탉은 모성의 사랑과 보호본능을 가진 리상형 어머니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닭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닭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지 안나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해 연길시 조선족의 리혼율은 68.4%,즉 3:2를 훨씬 초과한 상태이고 리혼녀성의 50%가 해외 돈벌이를 나갔다고 한다. (《흑룡강신문》05.1.26) 이제 우리는 조선족가정의 해체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리혼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 있고 가정의 해체와 녀성의 류실로 인한 출산인구의 감소는 바닥을 내리치고 있다. 중국의 대륙에서 유유히 흐르던 조선족이라는 이 큰 강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감소현상 때문에 원천에서부터 고갈되여가고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음악가인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가족(FAMILY)》의 서문에서 《가족은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우리의 마지막 기적이다. 가족의 사랑은 바람과 같다. 본능적이고 꾸밈이 없으며 부서질듯 연약하지만 아름답고 때로 서로에게 화를 내도 결코 멈출수 없는 사랑, 그것은 우리 모두의 숨결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다.》라고 피력했다. 우리 민족 남자들은 이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마지막 기적》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도, 능력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민족 녀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의 근원인 모성의 보호본능을 상실했단말인가? 옛 선비들이 칭찬한 닭의 덕목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반성해야 하지 않나 싶다. 3 한족(漢族)문화의 뿌리는 지신(地神)계렬에 두고 있다. 염제(炎帝)는 그의 어머니가 화양(華陽)이란 곳에 놀러 갔다가 신룡(구렁이)의 머리에 교감이 되여 염제를 낳았다. 황제(黃帝)족은 곰도템씨족(有熊氏)과 뱀도템씨족(蛇氏)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염황자손(炎黃子孫)인 한족은 한나라 후기 이전에는 구렁이를 룡이라하여 도템동물로 숭배하다가 불교가 전해 오면서 인도의 룡과 구렁이룡을 결합하여 오늘의 룡을 만들어 내였다. 우리 민족 문화는 천신(天神)계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군은 천체(天帝)의 아들과 웅녀사이에서 태여 났고, 주몽은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여났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여났고 그의 왕후 알영은 닭의 화신이였다. 김알지왕도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여 났는데 그의 탄생은 흰닭과도 관련된다. 그래서 한족문화에서는 땅의 색깔인 검은색이 숭상(한나라때 까지도 황제의 면복은 검은색이 였다)되였고 땅에서 기여다니는 구렁이(불교가 전해진후에는 룡이)가 도템동물로 숭배되였다. 그 대신 우리 민족은 하늘을 대표하는 밝은 색깔인 흰색(백의 민족의 옷, 조선조의 백자)을 선호하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숭배하며 조상이 알에서 태여났다(삼국시대)고 하거나 새를 수호신으로 (솟대, 목안, 닭)모시는 문화를 창조하였다. 중국 고대에 만들어진 천간(天干), 지지(地支)의 12지에는 뱀과 룡이 동시에 선정되여 있지만 그 많은 새들 가운데 유독 닭만 선정된것도 한족의 지신숭배문화와 관련되지 않을수 없다. 어제까지도 닭의 해가 시작되기전에 결혼을 서두르는 커플들이 몰려들어 결혼등록기관이 붐비고 결혼예식장, 웨딩 포토 스튜디오 등 결혼과 관련되는 업체들이 호황를 누렸다고 한다, 을유년에는 립춘이 빠졌기때문에 불길한 《과부의 해》라는 민간 속설때문이였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는 을유년은 미래형이여서 단언할수는 없지만, 어제 밤에 사라진 갑신년 원숭이해는 《립춘》이 두 번이나 있어 《대길(大吉)》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불길한 해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전쟁의 해였고, 남아시아 쓰나미로 25만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만 해도 지난 한해 각종 사고로 13만 7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개의 립춘을 가진 원숭이해에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생겼을까?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원숭이해가 마감하기전까지 결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것을 보면서 한족들에게 있어서 전통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게 된다. 한족문화의 속설과는 달리, 을유년 닭의 해는 우리 민족 민족사나 민족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운의 한해였다. 60년전, 그러니까 지난번 을유년 닭의 해에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우리 민족은 34년11개월 보름만에 나라를 찾았고 식민지시대에 금단되였던 우리의 성씨와 우리 말, 우리 글도 함께 찾았다. 중국 조선족도 일제와 위만주국의 통치에서 해방되여 처음으로 자신들이 개간한 땅의 주인으로 되였고 정권수립에 참여하여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다. 60년만에 다시 돌아 온 을유년 닭의 해를 맞이하여 조선족 모두가 힘을 합쳐 희망의 홰불을 다시 밝히고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격감 등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면 싶다. 2005년 설날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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