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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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건강일기》 댓글:  조회:2879  추천:117  2007-02-21
    양력설이 지나고 음력설마저 다 쇠였으니 올해 내 나이 예순 여섯, 어느덧 이순(耳顺)의 언덕을 넘어 고희(古稀)의 고개를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륙십청춘 닐리리"의 한창 나이이다.     우리 이 고장  한족들은 내 나이가 되여 생일을 맞게되면 출가한 녀식이 밀가루 여섯냥과 돼지고기 여섯냥으로 예순 여섯개의 물만두를 빚어 부모님더러 다 잡수시게하는데 "륙륙대순(六六大顺)"이라 장수한다는 풍속이 있다. 그런데 나는 한족도 아니고 또 딸자식도 없는데다가 자식들이 모두 곁을 떠나 멀리 해외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나와 안해는 자신의 건강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챙기거나 서로 알아서 챙겨주는 상황이다.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여나면 먼저 소금물로 양치질을 한다. 《건강문적보(健康文摘报)》에서  소개한 방법대로 매일아침 아래위 이발을 300회 좌우 맞부딪치면서 양치질을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딱히 알수없지만 약간씩 흔들리던 나의 앞니 몇대는 이몸이 예전보다 많이 든든해져 몇해째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고 있다. 양치질을 마치면 인차 빈속에 광천수 합컵을 들이 마신다. 밤새 자면서 소실된 수분을 보충하고 배속을 한번 쑤욱 씻어주면 그렇게 시원할수가 없다.     그리고는 서재에 들어가 컴퓨터부터 켠다. 신화넷, 신나넷, 야후코리아. 미디어다음, 연우미디어에 들어가 국내외 뉴스를 한번 쭈욱 훓터보고 하루에 딱 한 알만 먹으면 된다는 혈압약을 먹는다. 고혈압에 한번 걸리기만 하면 평생 혈압약을 입에 달고있어야 한다기에 달리 용빼는 수가 없다.  약을 먹고 반시간이 지나면 식초계란을 먹는다. 돈도 별로 안들고 혈관건강에 좋다고 하여 십년이 넘도록 계속 명심해서 먹고 있다.     2006년 새해를 맞으며 연우미디어(www.ckywf.com)개통 1주년을 기념하여 "연우"식솔들이 모이는 파티에 초대받고 갔다가 덕담 한마디 해달라는 김삼 포럼장의 청을 받고 이런 말 몇마디를 남기고 왔다."우리 세대가 미처 해내지 못한 큰 일을 너희 젊은 세대들이 해냈다. 참말로 장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연우미디어야말로 전세계가 우리 중국조선족사회를 들여다 볼수있는 훌륭한 창구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것이다."     사실 나는 연우미디어가 우리 중국조선족이 세계와 련결되는 좋은 창구라는것을  직접  체험한 바 있다. 한번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둘째아들과 메신저로 화상채팅을 하다가 그애가 고향소식을 묻기에 연우미디어의 인터넷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몇초후에 벌써 찾아 들어가 문장제목들을 훓터본다고 하였고 잠시후에는 연우포럼--명사미니홈에서 소설가 김혁선생이 쓴 《채플린을 다시 보며》라는 글을 읽어보았다고 하면서 글을 참 잘 썼더라고 독후감까지 말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연우미디어다.  이렇게 연우미디어는 세계의 그 어느곳에서나 아무때든 상관없이 우리 중국조선족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접할수 있는  인터넷 창구이다.     작년부터 나는 날마다 연우미디어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당일 《연변일보》와 전일《흑룡강신문》, 《길림신문》, 《료녕조선문보》가 아직 배달되기도 전에 나는 연우미디어를 통해 중국조선족사회에 관한 여러가지 소식들을 접할수 있다. 그리고 연우미디어  칼럼리스트들인 우리 중국조선족 대학교수, 문화평론가, 작가 ,학자 그리고 기업인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대학공부를 하는듯한 멋진 기분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双向交流)이 가능하므로 그저 그들의 좋은 글들을 읽기만 하는것이 아니고 나도 그들중에 끼여들어 나의 글도 올려보고 그들이 쓴 글에 대글(꼬리글)도 달아가면서 나의 의사를 표시하기도 한다. 그 실례를 하나만 든다면 얼마전에 청화대학 중문학부 정인갑 객원교수의 《심상치 않은 화제》라는 글과 이를 반박하는 연변대학 우상렬 부교수의 《정인갑 아저바이 》라는 글을 읽으면서 아래와 같은 대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두 교수님의 글을 배독하면서 느낀바 많습니다. 전혀 무의미한 론쟁은 아닌것 같고 합리적인 '핵'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읽어내려가면서 '소제대작(小题大作)'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없지 않았습니다만 녀권운운,  인권운운, 교육운운에서 많이 배웠습니다.그러나 '문인상경(文人相轻)'이라고나 할가. 두 교수님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어투에서 자존심싸움같은 느낌도 지울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갑론을박식 론쟁풍토가 몹시 미비한 오늘 현시점에서 보다 정상적인 론쟁이 많았으면 하는 기대도 크지만 좀 더 신사적인 론쟁을 기대하는것이 우리 연우미디어식솔들의 과욕은 아니겠지요?》     이렇게 대글을 쓰면서 어떤 때는 좀 싱겁지않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한국 네트즌들의 대글문화가 대단히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있는데 반해  우리네 네트즌들은 아직 대글문화에 너무나 낮설어하는 모습이기때문이다. 우리네 네트즌들도 너도 나도 대글을 달아가면서 이러쿵 저러쿵 론쟁을 펼쳐간다면 퍼구나 재밌을텐데...     거의 매일이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대개 반나절은 이렇게 눈깜박할 사이에 지나간다.      잠이 보약이라고 해서 나는  점심때가 되면 꼭꼭 오침시간을 갖는다. 한잠 자고 일어나서는 믹서기로 사과와 요그르트를 믹스해서 한 사발 마신다. 미국 버먼트주에는 "하루 사과를 한 개 먹으면 의사를 멀리 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요그르트를 매일 마시면 로년성변비도 예방할수있고 칼슘도 보충할수 있다고 하므로 요그르트-사과쥬스야말로 진짜 건강음료임이 분명하다.     나는 재직시 건강상태가 그닥 좋지 않았다. 정년퇴직후 지금까지 육체적 건강을 챙김에 있어서 나는 약물료법보다는 식이료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육체적건강과 함께 정신적건강도 소홀히 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로동에 종사하던 사람은 퇴직후에도 계속 머리를 써야 치매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지않는가. 그래서 나도 언녕 성쌓고 남은 돌이 되였지만 독서와 독보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고있다. 고금중외의 명작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연변일보》는 물론 《환구시보(环球时报)》,《문적순간(文摘旬刊)》,《건강문적보(健康文摘报)》 등 신문과 《연변문학》,《장백산》,《도라지》등 우리 민족 문예지들도 구독한다. 자료실에서 빌려보거나 인터넷에서 열독할수도 있지만 상기의 우리 민족 문예지들을 굳이 구독하는것은 자금난에 모대기고있는 그들에게 구독자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그보다도 이런 간행물을 통해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 민족의 참모습을 좀 더 많이, 좀 더 깊이있게 료해하고 싶었으며 우리 민족의 당면한 문제들을 우리 민족 지성인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고민도 고민이지만 독서요, 독보요, 인터넷이요 하면서 날마다 그냥 방안에만 들어박혀있어도 안된다. 로년에는 되도록이면 많이 움직이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침엔 운동을 하지 않는다. 게을러서가 아니고 늦잠을 자서가 아니라 연길시의 공기오염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밤기온이 낮기온보다 낮기때문에 밤이면 공기중에서 부침하는 오염물질 미세립자들이 찬공기를 따라 땅쪽으로 내리깔리게 되므로 아침공기가 결코 신선하지 않다. 그러나 해가 솟아올라 차츰 기온이 올라가면 오염물질 미세립자들이 다시 공중으로 상승하게 되여 낮공기가 아침공기보다 훨씬 신선한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침후 혹은 저녁식사전에 시간을 떼내 강뚝에 나가 산책을 한다. 두 팔을 휘드르고 활개를 치면서 연길시경제개발구 북쪽 강뚝 끝자락까지 걸어갔다오면  뒤잔등에 땀이 약간 났구나 하고 느껴질 때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마 이렇게 날마다 산책을 하면서 굴신운동도 견지하여온것이 나의 건강상태가 재직시보다 많이 나아진 비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저녁엔 안해를 동무하여 TV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그리고는 또 컴퓨터앞에 와 앉는다. 만약  아들애들이 인터넷에서 온라인 상태이면 그애들과 한참씩 채팅을 하기도 하고 만약 오프라인 상태이면  곧바로 연우미디어에 들어가 포럼글마당에 새로 올려진 글들을 읽으며 사회를 읽고 인생을 배운다.그리고 컴퓨터로 일기도 쓰고 독서필기도 한다. 컴퓨터 자판을 도닥거리는 손가락놀림도 뇌건강에 유익하다는 일설이 있다.     밤 열시가 넘으면 잠자기전에 두 발을 뜨거운 물에 한 반시간동안 담그고 족욕(足浴)을 하다가 따뜻한 우유 한컵을 마시고 자리에 누으면 잠이 잘 온다.     하루밤 푹 자고 깨여나면 래일은 또 래일의 태양이 솟아오를것이고 또 다시 드바쁜 하루가 시작될것이다. 비록 이미 별볼일 없는 몸이 되었지만 나는 하루하루가 지겹다거나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가 거의 없다.      나는 확신한다.아무리 성쌓고 남은 돌이라 할지라도 지레 무소작위의 허탈감에 빠져 남은 인생을 허송세월속에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의 심신건강에도 모두 리로울것이라고. 2006년 3월 10일 연변일보 B3 해란강 제1250기 (수필) 나의 《건강일기》
3    할머니의 증손들 댓글:  조회:2561  추천:100  2007-02-21
   나의 할머니는 1890년 경인(庚寅)년생, 범띠다. 할머니는 열여섯 나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강씨가문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 나이 겨우 열세살, 할머니는 년상의 녀인이였다. 아마 지금 이 또래 나이의 중학생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이거 진짜 웃긴다"고 폭소를 터뜨릴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너의 할아버지는 장가를 가구 홍진(홍역)을 했네라. 내가 시집와 너의 할아버지 홍진시중까지 다 들어주었네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끔 할아버지를 놀려주군 하시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갓 스므살되던 해에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고 아버지가 열살되던 1921년에 남부녀대하여 쪽박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화룡 우심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것은 머리태를 땋아드리운 열살난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우심산으로 걸어오는걸 어머니가 보았다는것이다. 우심산에 와 아버지는 나의 외할아버지가 교장으로 있은 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는데 열네살 되던해에 열여덟살이된 년상의 녀인인 나의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한다. 아마 조혼은 그때 우리 조상님네들의 풍속이였고 결혼년령 남소녀대(男小女大)가 그시절의 풍토였던모양이다. 지금 한국에서 적잖은 젊은 총각들이 년상의 녀인을 선호하는 그 취향은 아마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오랜 전통과 깊은 뿌리가 있는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대여섯살 되던 때부터 "누가 너의 고향이 어딘가고 물으면 함경북도 부령군 부고면 사구동이라고 대답해라. 그래야 똑똑한 애야"라고 가르쳐주었다. 고향이란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라 잃은 설음을 안고 살길 찾아 이역땅으로 떠나오면서 등을 돌리지않으면 안되였던 고국의 그 정든 땅이며,  두만강을 도강하여  새로운 낯선 세계에로 진출한 우리 가족 새력사의 출발점이다. 과 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딱히 잘 모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였지만 두고온 고향땅이 늘 그리워 나어린 손자들에게 자기의 근본을 잊지 말라고 이렇게 고향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던것이다.  어찌나 똑똑히도 가르쳐주셨는지 "도", "군", "면", "동"이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린 나이에도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알려준 고향주소 열세글자는 머리속에 깊이깊이 아로새길수 있었다.    1993년 가을, 나는 연변일보사대표단을 인솔하여 평양을 방문하게 되였다. 우리가 소형뻐스를 타고 회령에서 청진으로 가는 도중, 신문사 박춘민부장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선친의 고향이 부령이라는 얘기를 듣고 부령역광장에 차를 세우게하고 나로하여금 선친의 고향을 일별할수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한참동안이나 사위를 둘러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땅에서 기념사진까지 찍고 다시 차에 올랐지만  나의 마음은 선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하여 한없이 설레이였다. 나는 맘속으로 라고 웨치면서 저승에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모두 대견스럽게 여기시며 기뻐하실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환갑전에 일찍 세상을 뜨시였고 할머니는 83세까지 장수하시면서 두 손자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가는것까지 보시였으며 또 큰 증손녀도 안아보시였다. 큰 증손녀는 할빈공업대학를 졸업하고 북경의 한 연구원에서 연구사업에 종사하던 나의 형님의 큰 딸이다. 그애는 출생해서부터 줄곧 한족탁아소에서 자랐으므로 다섯살에 처음 증조할머니품에 와 안겼지만, 한어밖에 할줄 모르는 그애가 뭐라고 종알거리는지 할머니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어 퍼구나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이였다.      할머니는 집안살림이 하도 구차하여 독자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소학교밖에 공부시키지 못한게 늘 가슴속에 한으로 맺혀있어 손자녀석들의 공부뒤바라지에 적극 동참하면서 손자들이 대성하기를 크게 기대하시던 분이였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외지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여 집에 왔다가 돌아갈 때면 기차역까지 나오시여 고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민망스럽게 하고 웨치시였다고들하는데  아마 손자들이 잘 되는게 할머니의 제일 큰 소망이였으리라.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되여 크게 출세했다는 큰손자놈의 딸아이가 우리말도 모른다니 이게 웬 말이냐! 할머니는 "북경에 있으면 뭘하냐?새끼들이 자기말도 할줄 모르는데..">하시면서 이런 출세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형님의 딸애들은 둘 다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글도 모른다. 그애들은 자기집에서 중국식 볶음료리에 조선식 장국과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서 자라서인지 김치는 좋아하고 또 잘 먹는편이지만 그애들한테서 조선족의 다른 그 어떤 특징도 거의 찾아볼수 없을만큼 완전히 한족으로 동화돼버렸다.  큰조카딸이 일본 쯔꾸바와 니이가다에서 공부할 때 나는 일본의 어느 한 한식집에서 그애와같이 식사를 한적이 있는데 일본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김치를 좋아했다. 이것이 그애한테서 찾아볼수 있는 조선족 후손의 유일한 특징이라고나 할가. 하지만 김치를 좋아한다고 다 조선족인가?     큰조카딸은 북경에서 석사공부할 때 벌써 한족남자와 결혼하고 함께 일본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따냈는데 일본에서 취직했다가 어린아들애의 조기영어교육을 위해 몇해전에 또 카나다로 이민갔다. 작은 조카딸은 북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석사공부를 하였는데 노란머리 코큰 미국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말이 이미 국제상식으로 되여있다. 국제결혼,  타민족과의 결혼이 문제가 아니다. 그애들은 그저 혈연적으로 조선족인 형님과 형수님의 피줄을 이어받았을뿐 민족적 감정이라는게 젼혀 없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모르기때문에 그애들은 우리 조선족과의 문화적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과 카나다에 살고있는 그애들은 우리 가족과 더 나아가 우리 조선족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될것이고 그리고 또 언젠가는 우리 조선족과의 련관성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그애들은 자기들을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별일 다 있다. 내가 어떻게 돼서 조선족이지? 참 재밌다!"하는 식으로 호기심을 가질뿐이다.    두 조카딸을 이렇게 조선족답지 않은 으로 키워온 뼈아픈 교훈이 있기에 북경 형님은 나의 아들애들이 한족학교에 입학하는걸 견결히 반대했다. 내가 안도방직공장에서 근무할 때 나의 큰애가 방직공장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한족 보육원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한족말은 완전히 한족애들 수준이였지만 조선말은 겨우 알아들을수 있었을뿐 잘 하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소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우리는 하는수없이 한족학교에 보내야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북경 형님이 "아는것이 힘이라고 한가지 언어라도 더 아는것이 장차 경쟁에서 큰 힘이 될터이니 아이들을 꼭 조선족학교에 보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게 하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형님의 편지를 받고 우리 부부는 연변에 살면서 애들을 북경의 조카애들처럼 만들수는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큰애를 억지다짐으로 조선족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엔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몹시 힘들었는지 방과후면 선생님을 찾아가 한족말로 "선생님, 오늘 숙제문제를 다시 알려주시요"하고 숙제문제를 재확인했다고 한다. 사람은 언어로 사유하고 또 언어가 사유를 지배한다. 유치원까지 계속 한어로 사유하던 어린애가 갑자기 조선어로 사유하게되자 첫학기는 적응이 잘 되지않아 조금은 힘들어했지만 그후로는 차츰 적응이 되여갔다. 지금 그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한국기업 회사원으로 취직하고있는데 중국어, 한국어를 모두 잘 구사하고 두가지 문자로 서류작성도 잘하기때문에 한중무역 업무수행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의 둘째 아들애도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프랑스에서 국제무역 석사과정을 밟고있다. 조선어, 중국어,영어,프랑스어등 여러가지 언어를 다 배웠으므로 앞으로 국제무역에 종사해도 역시 크게 도움이 될거라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20세기 20년대초반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출발한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은 지금 이민 4세에 이르러 이렇게 한국, 유럽 더 나아가 저 멀리 북아메리카대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할머니 증손들중 절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고 절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모른다. 그 분수령은 바로 교육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민족어교육에 있다. 형님네는 북경에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가르칠수있는 여건이 없었지만  연변에 돌아온 나까지도 만약 아이들을 한족학교에 입학시켜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거야말로 진정 후대들에게 무책임한 엄청난 실책으로 되였을것이며 돌이킬수 없는 엄중한 후과를 초래했을것이다.    민족의 동화는 언어의 동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나의 두 조카딸의 경우, 물론 그애들 자신의 차실은 아니지만 동화는 이미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였다. 지금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재래식 농경사회의 탈출로부터 시작된 대도시로, 해외로의 대거 진출이 날로 증가됨에 따라 나의 두 조카딸과 같은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남으로써 지금 우리 민족의 일부 청소년들은 동화의 위기와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기원 70년,  로마제국이 유태인들의 봉기를 무참히 탄압하고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하였을 때 유태인들은 세세손손 살아오던 고향을 등지고 전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게되였다. 그러다가 거의 이천년이란 세월이 흘러간후 산지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오던 그들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다시 자기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수 있게된것은 그들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와 유태교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민족에게는 뭐가 있는가? 우리에겐 민족종교가 없다. 우리에겐 오직 이 있을뿐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생존, 발전, 번영하는데 있어서 첫번째 필수과목이다. 우리는 자기스스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조선어(한국어/조선족어)는 언어사용인구에서 세계의 언어중 12위권에 있는 결코 무시하거나 홀대할수 없는 언어중의 하나라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  6700여종 언어가 있고 우리나라에만 120여종 언어가 있는데 그 많은 언어들가운데서 우리 조선어가 세계사용인구순위 제12권안에 있다는것은 우리 민족의 긍지이며 자랑이 아닐수 없다.     언어는 인간의 교제도구이다. 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공동체의 교제도구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교제도구만도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일종의 특수한 문화이며  그 속에는 그 민족의 문화가 응집되여있고 그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들어있으며 그 민족의 력사가 슴배여있는것이다.     남영전 시인은 민족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다."민족은 문화적 개념이지 혈통적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문화로 구분되는것이지 혈통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북경에서 자라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지 못한 나의 두 조카딸은 혈연적으로는 조선족이 분명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이미 조선족이 아니다. 그애들은 우리말과 글을 배우지 못했기때문에 우리말과 우리글속에 응집되여 있는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모르며 우리 민족의 력사도 모른다. 그애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증조할아버니, 증조할머니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함경북도 부령군 부고면 사구동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때문에 그애들에겐 애틋한 민족감정이라는게 있을수 없다.    나는 오늘 이글에서 우리집과 나의 할머니 그리고 그 증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잘 모르기는 하겠지만 다른 가정이나 가족의 상황도 크게 다를바 없이 대동소이할것이다. 백여년전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후손들이 오늘 해외로, 대도시로의 민족대이동이 한참 진행중인 이 시점에서 자녀교육, 더우기 자녀들에 대한 민족어교육은 다른 동네 얘기가 아니다.민족은 일종의 문화유전인자라고 하는데 문화가 없으면 민족이 어떻게 유전되겠는가? 그래서 후대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대변혁의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 민족의 책임있는 구성원이라면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지금은 거의 집집마다 하나밖에 없는 자녀들이나 후손들의 입학, 진학등 진로문제를 결정할 때는 보다 진지하게 재사삼고(再思三考), 심사숙고해보는것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 2005년 10월 14일 연변일보 B3 해란강 제1245기
2    "세계 금연의 날" 단상 댓글:  조회:2704  추천:125  2007-02-21
    5월 31일은 "세계 금연의 날"이다. 애연가들은 좀 힘들겠지만 전 인류의 건강을 위해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담배를 피우지 말고 담배가게에서는 담배를 팔지 말아주십사 하는 국제적인 금연 캠페인이다.     금연 얘기가 나오면 나는 저도 모르게 자화자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모두들 그렇게 끊기 힘들다고하는  담배를, 그것도 25년동안이나 피워오던 담배를 하루아침에 뚝 끊어버렸으니 나 자신도 스스로  대견스러워 감탄사를 련발할 때가 있다.     (아, 담배 끊기가 참 힘들었는데 ...     내가 어떻게 천신만고끝에 드디어 금연에 성공했을가!...)      담배가 신체에 해롭다고, 앓지말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애들한테도 해로우니 제발 그 담배만은 좀 끊어 달라고 그렇게 애걸하던 안해의 말은 들은척 마는척 귀등으로 흘러보내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담배를 안 피우기로 작심했다고,  래일부터는 담배를 끊는다고 선포한 그 다음부터는 진짜 담배와 일도량단, 철저히 끊어버렸다.     그래서 안해는 나를 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어느 정도 수준급의 골초였는지를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 "문화대혁명" 시절  "현행반혁명분자"의 루명을 쓰고 령어의 몸이 되여 시도때도 없이 심문을  받을 때에는 하루에 담배 세갑---오전에 한갑, 오후에 한갑, 저녘에 또 한갑씩 피우던 날도 있었고 , 후날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근무할 때  밤을 새워가며 주장어른들의 연설문을 작성해야 하는 날에는 집에서 갖고 간 담배를 다 피우고나면 한밤중에 어디 가서 담배를 사올수도 없고 해서 재떨이에서 담배꽁초를 주어서 그걸 부셔가지고 원고지에 말아 피워야 작업을 계속할수 있었는데 그래도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구차하게 허리를 구부정하고 사무실 땅바닥에서까지 담배꽁초를 주었으니 그야말로 최고수준급의 애연가였다. 아무튼 글을 쓰자고 책상앞에 마주앉으면 먼저 담배를 한두대 피워물어야  문장제목이 머리에 떠오르고 연거퍼 줄담배를 이어대야 글을 써내려갈수 있었으니  나는 한평생 글을 쓰면서 살자면  이놈의 담배와는 인연을 끊을수 없는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  키보드로 이 글을 쓰고있는 이 순간에도  담배생각은  젼혀 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담배를 피워야 글을 쓰던 그시절이 마치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옛말처럼 느껴진다.     알고보면 흡연은 일종의 불량한 생활습관 즉 이미 생활화된 나쁜 버릇에 불과하다. 전세계에 11억으로 헤아려지는 애연가들의 이 나쁜 습관을 고쳐보려고  2003년 5월 21일 제네바에서 거행된 세계보건대회에서 192개 성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168개국이 정식서명하고 58개국에서 이미 비준절차를 마친 국제적인 "연초통제기본협약"(FCTC)이 금년 2월부터 발효되기 시작했다.  "협약"은 성원국들에게 가격정책으로 연초소비를 통제하거나 담배갑의 30% 내지 50%면적에 흡연이 건강에 해로움을 알리는 경고메시지를 인쇄하도록 하는 등등 여러가지 정책을 권유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국정부에서는  이 국제협약의 정신에 좇아 성년남자의 흡연률을 선진국수준인 30%이하로 끌어내리기 위해 담배가격을 재인상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차례 담배가격을 인상시킨 기초상에서 금년부터 또 담배값을 한갑에 한화 500원씩 올리기로 결정, 그리고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을 국민의료복지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0년전까지만해도 한갑에1000원 미만이던 담배값이 2000원대로 껑충 치솟아 올랐고  담배값 인상이 너무도 부담스러워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이어지고는있지만 이라는 신조어가 말하듯이 금연을 결심한 사람들이 1년을 버텨내는 성공률이 겨우 2%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뒤따르고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하듯 금연도 "외인이 변화의 조건이고 내인이 변화의 근거"이므로 흡연자 자신의 굳은 결심과 끈질긴 노력이 없이는 금연은 말그대로 작심삼일에 그치고마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실 담배를 피워 습관이 되고 인이 배기게 되면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게 아니라 사람 몸안에 배인 담배인이 담배를 피우는것이다 . 다시 말하면 장기간의 흡연으로 하여 인체 혈액속에서 산성과 알카리성의 균형상태에 있는 니코틴이  인체의 신진대사로 말미암아 그 함량이 감소되면 새로운 니코틴의 보충을 요구하게 되므로 이것이 곧바로 새로운 흡연욕구로 표현되는것이다. 그러므로 금연에 성공하려면 이처럼 생리적 욕구로 표현되는 흡연욕구를 능히 억제하고 극복할수 있는 한결 더 강화된 심리적 단속이 뒤따라야하는데 바로 이것이 어려운것이다.     이글의 서두에서 나는 마치 하루아침에 쉽게 금연에 성공한듯 비쳐졌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였다. 나도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여러차례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대학교 다닐 때 담배를 끊는답시고 각서를 써 기숙사 벽에 붙여놓고 동창들더러 감시해달라고 호언장담을 터쳐놓고는 겨우 일주일도 견디지 못해 교실도, 기숙사도 아닌 도서관 복도의 한 귀퉁이에서 한학급 동창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틈을 타 남몰래 도둑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결혼해서 아이들이 출생한 후에는 간접흡연이 아이들의 건강에 더욱 해롭다는 안해의 성화에 못이겨 안해앞에서 "남자대장부 일언중천금"을 운운하며 래일부터는 꼭 담배를 끊을터니 어디 한번 잘 지켜보라고 큰소리를 늘여놓고는 또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안해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무실이나 밖에서 안해 물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옷호주머니에 담배를 넣은채로 귀가하게 되는 경우,  집앞 복도에서 담배갑과 라이터를 복도의 어둑시그레한 구석에 감춰두었다가 이튿날아침 출근시에 도로 찾아내 밖으로 나서기 바쁘게 담배부터 꼬나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한번은 한국에 갔다가 국제망신까지 당할뻔 했다. 나의 금연실천이 여러차례 실패를 거듭하던중 나에게 또 한국으로 출장가는 기회가  생겼다. 나는 한국 체류기간 두주일이면 담배를 끊을수 있겠다고 생각,  천진공항 출발시부터 아예 담배를 휴대하지 않았다. 아마 이렇게 한 일주일정도 버티였을가,  춘천에 갔을 때였다. 춘천의 한 사장님이 풍광 수려한 소양강땜에서 우리 일행를 초대하면서 나보고 담배는 안피우시냐고 묻기에 동행했던 장연하기자가  입빠르게 "금연실천 일주일째"라는  비밀을 까밝혔다. 장기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분은 대뜸 "좋은 결심 하셨습니다. 연변일보 사장님이라면 연변조선족의 귀감이 되어야죠 "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의 금연결심을 극구 찬양하는것이였다. 이건 완전히 나를 물러설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는 셈이였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도 물러서고 말았다.     서울에 돌아와 다시 만난 다른 한 사장님이 나와 오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나의 기색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금방 한국에 오셨을 때보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꺼내시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윤태연기자가 "피곤"한게 아니고 금연으로 인한 금단(禁断)증세라고 그 비밀을 공개했다. 내가 "피곤"해 하는 내막을 알게된 그 사장님은 "담배를 끊으실려거든 연변에 돌아가서 끊으시고 서울에 계실 땐 담배도 맘대로 피우시면서 기분좋게 일을 보시다가 귀국하세요"라고 하시면서 운전기사를 시켜 담배 네 보루를 사오게 하여 나에게 안겨주었다. 이렇게 돼서 나는 한국에서도 사탕포탄(糖衣炮弹)의 진공에 그만 두손 들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몇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춘천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그 동안 별고 없으신가고 문안도 드릴겸 선생님께서 춘천에서 하신 약속대로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우시나 궁금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나는 그때 그 약속을 언녕 까맣게 잊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듯이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딱 한번 만났던 그 량반이 아직도 그때 그일을 기억하고 그 멀리에서 나한테 전화까지 걸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처럼 천만 뜻밖에 걸려온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고, 그리고 뒤이어 지금껏 나름대로 가꾸어오던 자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망가지면서 더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금할수 없었다.  이것이 나에겐 커다란 충격이 되고 최후의 계기가 되여 나는 흡연자로부터 금연자로의 철두철미한 환골탈태를 위해 아주 깨끗이 담배를 끊게 되였던것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담배를 끊는데는 별다른 묘방이 따로 없다. 나는 담배를 끊기 위해 "금연사탕"도 먹어봤고 "금연차"도 마셔봤으며 "금연중약"도 세첩이나 달여먹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무용지물, 소용이 없었다. 진짜 효험 있는 약은 딱 하나--- 흡연의 유혹을 물리칠수 있는 굳은 결심과 억센 의지 그 하나뿐이다.  마라손선수가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도중 힘들고 어려울 때 한숨 돌리며 쉬고싶은 생각이 어찌 전혀 없으랴만은 종점까지 완주하기로 결심한 선수라면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싶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종점을 향해 꾸준히 달려갈것이다. 마라손이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라면 금연도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다.  일단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남들이 담배 피우는 걸 보면 조건반사가 생겨 자기도 한대 피우고싶어질 때, 더우기 술자리에서 남들이 다 피우는 그 담배를 나도 딱 한대만 피웠으면 하는 생각이 오락가락 끈질기게 갈마들 때, 이렇게  흡연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려 금연을 포기하고싶은 생각이 마구 솟구쳐오를 때, ... 이럴 때일수록 한번 다진 굳은 결심 누그러뜨리지 말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끝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성공의 피안에 도달할수 있는것이다. 실패는 왕왕 하고 고삐를 늦추거나  여태껏 견지하여오던 립장에서 한발작 뒤로 물러설 때 걷잡을수 없이 찾아오는것이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17년 동안이나 피워오던 담배를  9년동안 끊었다가 담배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떨쳐버리지 못한 탓에 예전에 피워보지 못했던 미국담배 말보루의 유혹에 끌려들어 "딱 한대만 피워본다"고  다시 입에 댄것이 그게 그만 큰 화근이 되여 걷잡을수 없이 가 되였으며 또다시 8년간이나  담배를 더 피웠던 사람이다.  이처럼 금연실천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던 나였지만 금연에 재도전하여 지금까지 다시 성공할수 있게된것은  그 하찮은 담배때문에 인격마저 망가뜨려서는 안된다는 오직 이 한가지 집념과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인격완성을 위한 몸부림이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여러가지 약속을 많이 하게된다. 약속을 잘 지키는가  잘 지키지 못하는가? 이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이다. 진정으로 타인과의 약속은 물론, 자기자신과의 약속도 진솔하게 잘 지킬수 있는 사람은 비록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금연이기는 하지만  일단 결심을 했으면 기어이 성공하고야말것이다. 2005년 5월 27일 연변일보 7면 해란강 제1237기
1    어머니의 자식사랑 댓글:  조회:2562  추천:100  2007-02-21
요즘 나는 인터넷을 통해 프랑스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막둥이하고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다.컴퓨터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아들애에게 발송해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도 하고 자판을 두들겨 문자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부자간의 인터넷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안해는 저녁 일곱시가 넘도록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아들의 대답을 읽고 안달을 한다. "여보,그 애판테 잘 부탁하세요.끼니는 거르지 말고 꼭꼭 챙겨먹으라고..." 나는 프랑스와 중국의 시차가 7시간,그러므로 현재 이 시각이 바로 그곳의 점심때임을 안해에게 상기시키면서도 자식의 건강을 늘 걱정하고있는 안해의 마음을 헤아려 그의 당부를 곧이곧대로 아들한테 전했다. "엄마왈:아무리 바빠도 아침엔 우유 한컵,하루에 적어도 닭알 하나 그리고 토마토나 사과 한개씩은 명심해서 사먹어라..." 그러자 아들애가 발송해오는 대답이 재미있었다. "엄마,또 뭘 먹으람다?엄마는 인터넷에서도 바가지를 잘 긁으시네...ㅎㅎㅎ..." 그 애가 갓 프랑스에 갔을 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화를 걸어오거나 나한테 이메일을 보내왔었는데 지난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노트북을 샀다면서 요즘은 전화나 이메일외에도 메신저라는 통신서비스를 자주 리용하고있다. 막둥이를 그 먼곳으로 떠나보내고 여태껏 아들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있던 안해는 요즘 처음으로 컴퓨터화면에서 그새 퍼그나 여위여진 아들의 몰골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난 그 이후로는 하루도 근심이 잦을 날이 없다. 몇해전 그 애를 대학에 보낼 때만 해도 안해의 자식사랑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지나칠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편이다.그때 있었던 에피소드 한토막이다.애가 막 학교로 출발해야 할 그 시점에 나는 출장을 떠나야 했으므로 안해에게 아이를 학교에까지 데려다주고 챙겨줄것이 있으면 더 챙겨주고 오라고 부탁했다.그런데 내가 신강 우룸치에서 뻐스를 타고 투루판으로 달리고있는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글쎄 대학이라고 찾아와보니 한개 침실에 쌍층침대 세개,학생 여섯명이 한방에서 비좁게 생활해야 하는가 하면 또 제각기 밥그릇을 들고다니면서 식당밥을 사먹어야 하는게 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것이였다.차라리 이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이 가까운 연변대학에 입학시켜 집에서 먹고 자면서 학교에 다니게 하는게 아무래도 마음 놓일것 같다는 안해의 전화였다. 자식이 낯설은 고장에서 고생하는게 안스러워 대학생이 된 아들조차 계속 옆에 끼고 살고싶어하는 안해의 그 어쩔수 없는 모성애! 나는 하도 어처구니 없어서 신강 회의가 끝나는대로 서둘러 북경에 도착할테니 그때까지는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내가 부랴부랴 학교에 달려가보니 옛날 우리가 공부하던 대학교 기숙사와 별반 다를것 없이 한칸에 쌍층침대 세개가 놓여있었고 졸업생들이 떠나간후 방학동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인지 화장실냄새가 불쾌할 정도로 코를 자극했다.안해는 이렇게 어설프고 불결한 환경에 그만 실망하였을것이고 마음이 흔들렸을것이다.기숙사를 호텔식으로 운영하므로 이부자리 등 침구를 갖고오지 않아도 된다고 한 입학통지서를 보았을 때 안해는 아마 대학교기숙사를 호텔방 수준으로 착각하고있었을수도 있다.그래서 입학등록을 마치고 침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든것이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물론 대학에 가면 집에 있을 때처럼 독방을 차지하고 하루세끼 엄마가 지어주는 더운 밥을 먹을수 없다는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이처럼 어수선한 곳에다가 막상 애지중지 키워오던 막둥이를 홀로 남겨두고 에미 혼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 황당한 생각까지 하게 되였을것이다.안해는 이미 마음속으로 애를 데리고 돌아가기로 작심하고있었다.그는 다음해 다시 시험을 보게 되면 외지 대학은 아예 생각지도 말고 연변대학만 지망하면 얼마든지 붙을수 있다면서 아이를 설득시키려 했고 나는 아무때든 부모곁을 떠나가야 할 자식이므로 지금부터라도 고생을 좀 시키는게 유일무이한 정확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때 그 아슬아슬하던 순간을 다시 돌이킬 때마다 어머니의 모성애란 모성의 일종 본능적인 사랑이여서랄가,자칫하면 도를 넘어서기 십상이고 지나치면 리성을 잃을수도 있으므로 자식들의 성장에 오히려 역작용을 할수도 있음을 뼈속깊이 깨닫게 되엿고 또 자식들의 건실하고 옳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감성적인 "모성애"는 물론 없어서는 안되지만 아버지의 보다 리성적인 "부성애"도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것임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터득하게 되였다. 그때 아들애는 다음해에 시험을 한번 더 쳐보라는 어머니의 주장을 한사코 반대하면서 입시준비라는 그 지긋지긋한 "인간지옥"으로는 다시 되돌아가기 싫다면서 재수를 완강히 거부했다.그래서 결국 그 학교 그 학급 그 "6인침실"에서 4년간의 학업을 마치게 되였고 거기서 키운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멀리 해외류학의 길에 나섰다. 비록 국내에 있을때보다 몇만리 더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지금은 정보화시대라 맘대로 전화를 할수 있고 이메일도 수시로 주고받을수 있으며 요즘엔 또 메신저 서비스를 리용해 얼굴도 서로 볼수 있게 되였으니 내가 대학다니던 그 옛날과는 완전히 천지개벽 딴 세상이 돼버렸다. 나는 지금도 집을 떠나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이들때문에 매일같이 속을 끓이는 안해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머리속에 어머니의 옛모습을 떠올리군 한다. 내가 대학입시준비에 신경이 날카로와져 자주 밤잠을 설치던 그 시절,대학입시가 바로 한참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철이라서 그 가난했던 오막살이 초가집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무더위도 무색하리만치 빈대들마저 극성스레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어머니는 내가 빈대들에게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가 걱정되여 낮이면 미리 당콩잎을 따다 두셨다가 저녁이면 나의 잠자리둘레에 놓아주셨고 내가 잠든후면 조용히 전등을 켜고 당콩잎 보슴털에 발목이 잡힌 빈대들들 잡아주셨다. 이렇게 애면글면 길러낸 아들들이지만 정작 키워놓고보면 저마다 어머니곁을 떠나가서 보고싶어도 맘대로 볼수 없었으니 어찌 속이 타지 아니하고 애간장이 말라들지 않으셨겠는가.한해 두해도 아닌 그 지지리도 힘겨운 나날에 어머니가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는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자식들의 편지였다. 그런데 자식들한테서 막상 편지가 부쳐와도 어머니는 언제나 눈뜬 소경 신세였다.워낙 그 시절 많은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분이였으니 아버지가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셔도 그 편지를 속시원히 읽어보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 눈치를 보아가며 조금이라도 편지내용을 더 알고싶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으셨고 아버지께서 여차여차하게 얘기해주셔도 어머니는 글모르는 당신한테만 무언가를 감추지 않나하여 어떤 때는 아버지손에서 편지를 앗아다가 나더러 아버지 몰래 가만히 읽어달라고 하셨다.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는게 너무도 한스럽고 안타까우셨던지 서리 내린 하얀 머리카락만 썩썩 긁적이시였는데 나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어머니의 하나의 버릇처럼 비쳐지고 각인되여 지금도 나의 머리속 깊은곳에는 그 모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아마 내가 북경에서 공부할 때도 어머니는 매일 같이 나의 편지를 손꼽아 기다렸으리라.이러는 어머니이신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공부에 몰두한답시고 어머니를 잊고 있을 때가 더 많았고 편지를 자주 하지도 않았으며 편지를 한다 해도 번마다 "부친님전 상서"였을뿐 "모친님전 상서"는 한번도 없었다. 지금 나는 내곁에서 거의 날마다 나더러 두 아이한테서 이메일이라도 오지 않았나 확인해보라고 졸라대는 안해를 보면서 자주 이런 생각을 하군 한다. (오늘 이렇게 좋은 여건하에서도 나의 안해가 이처럼 아이들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는데 옛날 우리 어머니는 그 허구한 세월 자식들이 보구싶어 얼마나 속을 태우셨으며 또 그 많은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혼자서 묵묵히 참고 견디셨을가...) 사람은 누구나 부모님에게 평생을 두고 다 갚을수 없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부모가 자식을 백번 생각할 때 자식이 부모를 한번만 생각해도 효자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그 백분의 일의 효자,효녀 노릇이라도 제대로 하면서 살고있는지? 우리 집에는 큰아들애가 어머니한테 선물로 보내준 표 전기밥솥이 있다.그애가 이 전기밥솥을 어머니께 선물할 때는 아마 "모심"(어머니마음)이란 그 브랜드가 각별히 맘에 들어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나의 안해는 마치 "모심"을 읽어낸 자식의 "효심"이라도 한아름 받아안은듯 이 선물을 받은지 어언 몇년이 지났건만 여태껏 소중히 모시고 있을뿐 쓰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있다.어쩌면 그 언젠가 애들이 모두 자기 곁에 돌아와 옛날처럼 함께 살게 되면 이 전기밥솥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먹으면서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게 될 그날을 은근히 학수고대하고있는건 아닌지?세상은 넓고 아이들이 할 일은 많고 많은데 안해는 아직도 자식들을 곁에 끼고 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심"이란 무엇일가.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키워준 어머니의 그 따스한 젖줄기와도 같고 또한 우리들을 키워준 어머니의 그 따뜻한 밥과도 같은 그런 자양분 덩어리가 아닐가."어머니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워지는 사랑의 보금자리이며 우리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마음의 고향이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지고 세대가 끊임없이 교체된다고 해도,나의 할머니가 그랬고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또 나의 안해가 지금 여전히 그러하듯이 자식사랑 "어머니 마음"만은 세월과 더불어 마냥 변함없이 영원할것이다. 2004년 12월 17일 연변일보 7면 해란강 제122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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