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http://www.zoglo.net/blog/jinlongyun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홈 > 평론

전체 [ 8 ]

진실의 미궁, 그리고 유머와 황당성의 미학 -김정권의 단편소설 《모기정전》읽기 김몽  1. 머리글 《모기정전》은 “모기”와 인간의 대결을 다룬 작품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동화와 흑색유머기법의 결합으로 씌여진 작품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존재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흑색유머기법은 20세기 20,30년대에 미국에서 형성되였고 그후 남미주에 파급되여 적지 않은 작가들이 흑색유머작품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도 있다. 중국의 노벨문학 수상자 막언의 소설에도 적지 않게 흑색유머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흑색유머는 일종의 황당하고 변태(變態)적이고 병태(病態)적인 문학류파로서 지금까지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흑색유머는 현실의 황당성에 대해 깊은 고통과 분노를 토하며 흔히 무가내한 풍자와 유머를 함께 아우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눈물을 머금은 슬프면서도 잔인한 풍자와 유머로 특징지어진다. 작가가 황당한 현실을 폭로하고 질타하는 목적은 그러한 현실을 개변시키기 위한 데 있다.  《모기정전》을 읽기 앞서 흑색유머작가로 유명한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간단히 알아보기로 한다. 마르께스는 콜롬비아 출신으로 중남미 현대소설의 최고봉이라 평가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어릴 적부터 독재자가 살판치는 암흑한 현실을 직접 보고 느꼈다. 특히 어릴적에 마을 사람 3천여명이 미국인 바나나 농장주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받았는데 그러한 삶의 편린들이 기억의 굴레 속에서 형성된 신화적 요소들과 만나 독특한 마술적 문학세계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문학세계가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며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백년동안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1967.)인데 그 내용과 형식,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중남미인들의 집단창작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까닭은 대다수의 중남미 국가들의 백성들이 작품에서 펼쳐지는 그러한 암담하고 처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사실주의의 틀을 깨고 신화와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전개되어 인간의 운명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신화 속에 감추어 버린다. 이성주의와는 거리를 둔 채 마르께스는 마술적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이 세계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중남미 현실 그 자체를 대변한다. 신화적 시간과 력사적 시간을 중첩시켜 현실과 비현실의 벽을 허문 채 21세기의 중남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정권의 《모기정전》은 신화적 혹은 동화적 상상을 동원하여 일부 인간쓰레기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본질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부정부패 그리고 법이 아직도 제 구실을 못하는 사회현실을 유머와 황당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신랄하게 폭로하고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근래의 우리 소설계에서는 찾아보기 보기 힘든 흑색유머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나뉘여 살펴볼 수 있다. 2. 약자와 강자의 대립구도 이 소설은 선명하면서도 아주 간단한 구도로 만들어졌는데 구도의 특징은 대립구도이다. 물론 모든 소설은 대립구도를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모기정전》읽기에서 대립구도를 특히 언급하게 되는 것은 이 소설이 여느 소설들과는 다르게 대립구도가 시종일관 관통되여있고 그것이 너무나 선명하고 적라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이 세상에 진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진리가 꼭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작품 전반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모기어머니와 모기딸과 모기며느리이가 등장한다. 우리는 이 모기네들의 가정을 약자들의 대변인 혹은 약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한촌장과 돼지똥집여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강자의 대변인으로 부정부패와 패륜의 대표인물로 상징된다. 소설은 모기네 가정과 한촌장과 돼지똥집녀인과의 싸움에서 모기네가정의 철저한 파멸과 사회를 해치는 진짜 죄인 한심해와 돼지똥집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김정권은 몇천년 동안 철칙이나 법보로 되어왔던《권선징악》(勸善懲惡)의 미학관에 강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착한자가 이기고 악한자가 진다는 것이 천고의 진리로 되여왔지만 그 천년의 진리가 오늘 김정권의 손에 이르러 스르르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작자가 자기의 소설을 이렇게 매듭지은 것은 악하고 추악한 자들의 힘과 부정부패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암시해 주려는 데 있으며 궁극극적으로는 사회의 악세력을 제거하고 진리를 고수하려면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려는 데 있다. 작품의 한 대목과 만나보기로 하자.  “자! 그럼 지금부터 판결을 선포하겠습니다. 피고 암모기는 시종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거짓말을 밥먹 듯 하였으며 거기다 또 불륜까지 저질러 그 죄질이 극히 악렬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치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한다. 형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죄가 20년, 거짓말을 한죄가 30년, 불륜을 저질은 죄가 60년, 도합 110년 도형에 떨군다.” 이 판결문을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모기가 사람의 피을 빨아먹은 죄는 확실히 죄이지만 인간들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고 가벼운 죄이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선 피를 빨아먹지 않으면 아니되는 모기들의 처지,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큰 죄가 되어 며느리모기는 110년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결국 모기네가정은 한심해와 똥집녀인과의 대결에처서 처참하게 붕궤되여 딸모기와 엄마모기는 죽고 며느리모기는 죽을 때까지 옥살이을 하게 된다.  3. 아이러니로서의 하늘의 “그물”  이 작품의 다른 한 특색은 대결구도를 이루는 쌍방이 모두 죄인이라는 점이다. 모기는 사람의 피를 먹으며 살기에 아무리 변호해도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결코 지유로울 수 없다. 다만 그 죄질이 고의적이 아니고 생존을 위해 막부득이 범한 죄라는 점이 다르다, 피를 먹도록 생겨난 모기, 하여 모기는 자신들을 모기로 탄생하게 한 조물주를 원망한다. 딸모기의 일기를 보자. 일기1. 나는 조물주를 저주한다. 왜 하필이면 우리를 모기로 만들어놓았는지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를 범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로 만들었더면  누가 감히 우리를 깔보겠는가 헌데  우리는 가엾게도 모기로 태여나  남의 피를 먹지 않으면 아니 되고 항상 죽음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아, 저주로운 조물주여, 당신이 한번 모기나 파리로 태여나 보라. 그러면 이 세상의 불공정과 고통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일기2 나는 오늘 어린 아이의 피를 빨아 먹으려고 주둥이를 꼽으려다가 아이의 해맑간 눈망울을  보고 인차 주둥이를 거두어버렸다. 일기3  만약 자칼의 자궁이 있다면 나는  다음 생애에서는 부지런한 꿀벌로 환생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고 싶다. 우리는 이 일기를 통해 자신을 모기로 만들어준 조물주를 저주하고 원망하는 모기,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로서의 모기, 자신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싶어하는 모기를 보게 된다.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착한 마음을 가진 자는 설사 죄를 지었다 해도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도 이른바 진리의 하나로 각인되여왔다. 중국의 옛 성구에 天網恢恢 蔬而不漏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의 그물은 성기여도 누구나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고 내재된 진의(眞意)는 법은 공정하고 엄하여 그 어떤 죄인도 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저명한 시인 정호승은 이 성구를 전개시켜 《하늘의 그물》이라는 시를 써 정지용 문학상을 탔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이 시에서 새끼들을 데리고 그물을 빠져나가는 기러기들은 어떤 죄를 지은 기러기들이다. 이 시의 주제는 모성애 앞에서는 죄도 사면을 받는다는 뜻과 착한 마음을 가진 자는 용서를 받는다는 뜻이 함께 담겨져 있다. 만약 정말 이러하다면 모기네 식구들은 응당 그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까닭은 모기엄마가 바로 새끼들를 데리고 하늘의 그물을 벗아나려고 모지름을 쓰는 기러기와 같기 때문이다. 두번째 까닭은 딸모기는 비록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죄를 짓긴 하였어도 착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례를 딸모기의 일기를 통해 여실히 보아낼 수 있다. “ 나는 오늘 어린 아이의 피를 빨아 먹으려고 주둥이를 꼽으려다가 아이의 해맑안 눈망울을 보고 인차 주둥이를 거두어버렸다” 특히 모기며느리의 소행에서 우리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효성과 인간애를 발견하게 된다. 며느리모기는 시어머니모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의 피를 시어머니에게 먹이는데 그 모습이 눈물겨웁도록 아름답다. “며느리모기는 시어머니모기의 배를 타고앉아서 축 처지긴 하였지만 그래도 제일 만만한 젖꼭지에다 주둥이를 박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먹은 피를 토하여 시어머니모기에게 먹여주었다. 그제야 조금 제정신이 든 시어머니모기는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모기정전 》에서는 새끼를 거느린 모기엄마와 모기딸, 모기며느리는 모두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신 모기네들보다 천배 만배 더 큰 죄를 지은 한촌장 같은 인간들은 법의 그물에서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전도된 진리, 진리의 미궁을 보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크고 한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정권이 하늘의 그물을 쫙쫙 찢어버리고 이와 같은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펼쳐보이는것은 죄의 진의와 법의 진의를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 오늘 전 세계적으로 부정부패가 범람하여 부정부패척결에 총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도 례외가 아니다. 《모기정전 》이 노리고있는 점이 부정부패에 대한 폭로와 비판에 있으므로 중국의 부정부패현상에 대해 좀 자상히 말하려고 한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중국은 법치를 중요시하고 법 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원칙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흔히 우뢰소리는 크나 비방울은 작았으며 룡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법(法)은 제도이고 치(治)는 다스리는 것인데 제도는 멀쩡했으나 치가 제구실을 못해 부정부패가 련속부절하였고 이에 백성들이 원성이 높았다. 그러다가 습근평주석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는 전대미문의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부정부패척결이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대사중의 대사라고 판단하고 부정부패에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이 투쟁에서 휘황한 성취를 이룩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탐오, 비리, 횡령죄로 붙잡힌 당, 정 ,군 고위급간부가 이미 40여명을 웃돈다. 그 중에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주영강(周永康), 중앙군위 부주석 서재후(徐才厚),통전부 부장 령계획(令计划),공안부 부부장 리동생(李东生),사천성 성위주석 박희래(薄熙来)…등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이런 고위급에 속하는 부정부패분자들을 큰범(大老虎)이라고 부르고 있다. 큰범들은 또 새기치기를 하여 그들의 밑에는 수백을 헤아리는 새끼범들이 있다. 큰범, 새끼범들이 탐오하고 횡령한 재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서재후 한 사람이 탐오한 돈과 금은 해방패 한대에 다 못 실을 정도다. 범죄분자들이 해외로 빼 돌린 돈이 자그만치 3조억이 된다니 정말 기가 막힐 일이다. 금전과 부화방탕은 쌍둥이형제다. 주영강에게는 애첩만 29명이 있고 이외도 400여명의 녀성들과 성관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부패의 엄중성을 인식한 중국정부는 큰 결심을 내리고 나라를 해치고 백성을 해치는 큰 범, 작은 범들을 사정없이 잡아내고 있으며 정부의 이러한 쾌거에 속이 후련해진 13억 인민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습근평 주석이 말했 듯이 부정부패의 뿌리를 철저히 뽑자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의 5천년의 력사는 부정부패라는 암덩어리를 함께 안고 걸어온 력사이기도 하다. 원체 뿌리가 하도 크고 깊기 때문에 일조일석에 뿌리를 뽑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김몽,《법치를 말하다》, 《중국민족》잡지 2015년 6호) 중국의 이런 현실상황으로 볼 때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폭로, 비판하고 풍자 한 김정권의 《모기정전》은 커다란 현실적 의의를 안고 있다. 4. 유머와 황당성의 미학  김정권은 《모기정전 》에서 근래에는 보기드믄 멋진 유머와 해학, 황당성을 선보이고 있다. “더구나 운수가 개떡같이 사나운 날이면 뉘집 안깐의 오줌물에도 빠져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믐에 콩 나듯이 젊은 녀자가 별로 없는 마을에서 그 녀자는 살은 좀 쪘지만 대신 주름살 하나 없이 빤빤한 편이여서 아직 성감기능에 고장이 나지 않은 남정네들이 그런대로 꽤 봐줄만한 녀자였다. ” 이와 같은 유머성분이 다분한 표현들은 작품의 가독성 획득에서 큰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사상, 내용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예술기교상에서 가장 정채로운 것이 결미, 며느리모기를 재판하는 과정이고 판결을 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 유머와 황당성이 집중되여있다. 황당성과 황당성에 업히운 유머, 풍자가 서로 짝짝쿵을 치면서 괴이한 세계, 멋진 황당성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피고석에서 답변하는 모기며느리의 걸죽한 유머와 신랄한 풍자는 법정을 웃음판으로 만든다. 며느리모기는 자기가 한촌장의 사타구니의 피를 빨아먹은 것은 당뇨검사를 하기 위해서였고 돼지똥집녀자의 얼굴피를 빨아먹은 것은 미용을 해주기 위해서라고 답변한다. 가장 정채롭고 황당한 것은 황둥개와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법관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욕하자 되려 “요새 고양이와 쥐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못들었습니까” 라고 반문한다. 결국 법정에서는 며느리모기를 다음과 같이 재판한다. “자! 그럼 지금부터 판결을 선포하겠습니다. 피고 암모기는 시종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였으며 거기다 또 불륜까지 저질러서 그 죄질이 극히 악렬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치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한다. 형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죄가 20년, 거짓말을 한죄가 30년, 불륜을 저질은 죄가 60년, 도합 110년 도형에 떨군다.” 변호를 하는 며나리모기의 답변도 유머적이고 황당하지만 판결서도 그에 못지 않게 유머적이고 황당하다.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시머머니모기가 한촌장과 돼지똥집녀인이 공금을 떼먹고 땅을 투기한 죄를 까밝히면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정신병자로 취급되여 기소가 기각된다. 이 부분이 바로 소설이 최종적으로 노린 점이 아닐까고 생각해본다.  위에서 보다싶이 인용한 부분은 구구절절이 풍만한 유모와 싱싱한 풍자 그리고 푸등푸등 살이 오른 황당성이다. 작자는 엄엄하고 긴장한 기분이 도는 법정을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장난의 놀이터로 만듦으로써 무능한 법치에 침을 뱉고 있다.  작자는 결미에서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다. 처음에는 법정을 웃음의 놀이터로 만들다가 최후에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며느리모기는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피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이윽고 며느리모기는 차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부르릉거리며 달리였다.  이때 시어머니모기가 젖먹던 힘까지 다 해서 날아가더니 차창유리에 부딫쳤다.  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며 멀리 사라지였다. 모기네가정의 비극적인 파멸은 한 가정을 벗어나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것이 죄가 되어 세상한테 억울하게 당하고있는 모든 약자와 민초들의 운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진짜와 가짜가  혼돈되는 세계, 추와 악이 헛갈리는 세계, 오늘도 지구촌에는 이와 같은 불공정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활개를 치고있다. 이미 미궁으로 돼 버린 진리와 정의, 우리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죄수차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사색도 함께 달려가고 있다.  2016년 4월 21일 연길에서 씀
7    21세기의 수필문학에 대한 사고 댓글:  조회:1160  추천:0  2016-04-29
수필의 문학성과 상상력 오늘 필자는 수필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 성실한 독자의 신분으로 《길림신문》에 발표된 일부 수필들과 한자리에 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련다.  지금 수필을 쓰는 사람이 엄청 많다. 그러나 수필이 대량적으로 발표되고있다고 하여 수필의 질도 그만큼 높아졌다고는 말할수 없다. 수량적으로는 많으나 알찬 수필이 적은것이 큰 문제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허점이 수필의 문학성이다. 알고보면 수필은 결코 만만한 글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너무 쉽게 쓰고있다. 그리하여 수필은 무성하지만 오히려 사막화되고 오아시스를 찾게 된다. 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필을 진정한 문학으로 보지 않거나 “3류문학”이라고 홀대하고있다. 수필에 문학성이 가미되지 않는 한 수필가들은 이러한 비난과 홀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해  메타(초월)와 퓨전(융합)이라는  말에 모든것이 귀결되는 시대인것 같다. 퓨전이란 기존의것이 가지고있는 고유한 성격을 해체함으로써 다양한 가치와 그로 인한 존재의 의미를 확정시키기 위해 불기 시작한 바람이며 이 바람의 속성은 혁신이고 혁명이다.(윤재천)  퓨전문학을 둘러싸고 할 말은 많지만 주로 우리 수필의 가장 큰 문제 그리고 수필의 생명력이라고 할수 있는 문학성과 상상력만을 주로 다루련다. 우선 수필은 나눔의 고유한 미를 미적향기로 담아내야 하며 진한 인간미를 수용하여 창작적품위를 갖춰야 한다. 시가  언어의  집이라면 수필은 인간의 행로이고 결국은 인간학이다. 그러므로 인간적향기의 탐구와 탐색은 수필의 본령이다. 다음으로 수필은 감동적이여야 한다. 감동적인 수필은 단순히 자신의 서정이나 서사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대를 확인하면서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한채 인간을 예술적으로 형상화시킬수 있는 힘의 원천이 그 주체가 되여야 한다. 우에서 말한 인간미를 수용한 미적향기, 인간적향기의 탐구 등이 있어야만 감동의 출산이 가능하며 그러자면 수필은 감동의 잉태와 분만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잘 조률된 수필의 디자인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줄수 있다. 필자는 조률된 디자인을 총체적으로 문학성이라고 말하고싶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트, 비유, 은유, 기지, 해학, 과장, 유머, 아이러니 등 여러가지 수사기법이다. 문학성은 상상력을 떠날수 없다. 상상력을  펼쳐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고 언어에 날개를 달아줄 때 문학성이 탄생한다. 문학성과 상상력은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말할수 있다. 상상력이 없으면 문학성을 운운할수 없고 문학성이 없다는것은 곧 상상력이 없다는것과 같은 말이다. 인간적향기에 대한 탐구와 탐색은 필연적으로 문학성과 상상을 전제로 한다.  우리 수필에서 흔히 범하고있는 문제인데 작품에서 주제는 적극적으로 로출되지 말고 작품속에 은밀히 용해되여야 한다. 주제가 강하게 표면에 로출되면 문학적미감이 손상을 받고 문학성이 결여하게 된다. 음미의 미학은 시나 소설뿐만아니라 수필에서도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작품을 살펴보자.   김동진선생의 수필 “사라진 종소리는 메아리가 없다”는  표제부터  신선미를 안고 여운을 유발시키고있다. 문학성이 체현된 글이다. 작가는 수필에서 아픈 심정으로 민족의 교육위기를 절규하고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서술이  너무 많은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깨여진 마을에는 종소리가 없고 사라진 종소리는 메아리가 없다”라는 아주 좋은 구절이 있다. 작가는 응당 여기에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헌데 작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러고 보니 잃어버리고나서 그리워하는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것 없는것인줄 조금은 알것  같다”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써 화사첨족이 되였고 주제를 표출시키는 실수를 하고말았다. 김동진선생의 미니수필 “침묵에서 피여나는 시간의 꽃”은 한편의 서정시이다. 작가의 시적재능이 엿보이는 수필이다. 작가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왜소함을 노래하고있다. “자연이 침묵속에서 고독의 시간을 씹어 천만가지 무성의 꽃을  빚고있는줄 알겠습니다”, “나의 시간은 부끄럽게도 허공에서 부서진 꿈이였습니다”,  “침묵속에서 침묵보다 무거운 나의 시간의 꽃을 빚기 위해 스스로 가슴을 끓이는 생명의 모닥불을  지펴야겠습니다”. 보다싶이 이 수필은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며 그만큼 문학성이  강하다. 그런데 마지막구절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만 주제를  드러내고말았다. 총적으로 김동진선생의 수필은 괜찮은데 마지막 부분에 주제를 로출시키는것이 흠이다. 수필도 음미의 여지가 있어야 하고 그것 역시 문학성의 일부분이다.  수필에 상상력이 차한것은 다수의 수필가들이 안고있는 공통한 결함이므로 상상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련다. 한국의 수필대부 윤재천선생은 “상상력은 어머니 자궁에서 잉태되는  신성한 생명력”이라고 했고 시드니는 “신(神)이 무의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한것처럼 작가는 세상에 없는것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상상력을 크게 중시했던 칸트는 “감각적지각의 자료를 사유속에서  종합하는 능력이 상상력이고 상상력은 감각과 오성(悟性)을 종합하여 현실적인식을 성립시키며 현실에 체험하는것과 자유라는것을 련결시켜주는 의식적장치”라고 했다.   최진옥선생의 수필 “저 강뚝에는 봄꽃이  피여나고있다”는 자연으로서의 강뚝으로부터 민족정체로서의 강뚝을 유도해나가면서 리산으로 인한 민족의 비운을 가슴 아파하고 민족사회의 단결을 갈구하고있다. 표제도 좋고  문학성도 어느 정도 체현되였으나 주제를 너무 적라라하게 드러내고있어 결국은 문학성이 많이 삭감되였다. 례하면 “든든한 강뚝과 더불어 우리 민족사회의 기반을 더 든든하게 다져갈것을 기대한다”는 이 구절은 호소문, 연설문으로서는 제격이나 문학작품으로서는 크게 손색이 간다.  김영애선생의 수필 “바람이 있어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넣고있다. 작가는 바람우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 세상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함께 날면서 사색을 줏고있다. 그 와중에 “출렁이는 강물에 꿈을 동동  띄워”보기도 하고 “꿈과 함께 까르르 웃어보기”도 하며 때론 “망가진 꿈과 짓뭉개진 랑만을 수선해보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일컬어 자유에 날개를 달고 언어에 날개를 단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바람의 세례 즉 여러가지 시련을  겪는중에서 생명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고 꿈을 이룩할수 있다는 철리를 펴내고있다. 그런데 문장이 좀 지루한 감이 나고 마지막 부분에서 주제를 공개하여 작품의 맛을 좀 죽인것 같다. 이런  사례는 아마도 우리 수필이 안고있는 공통한 허점인것 같다.  김경희선생의 수필 “바다를 보셨습니까”는 한편의  서정장시를 방불케 한다. 수필이 보다 나은 문학의 한  분야로 성숙하기 위해 다른 문학쟝르가 갖고있는 우점을 수용하여 자기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다는 그 깊은 맛으로 들뛰는 정서를 차분히 길들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풀떡이는 감정덩어리들 같은 고기떼들”, 바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구절들이 있어 문학성을 획득했고 수필다운 수필로 될수 있었다. 그런데 좀 지루한 감이 든다. 수필은 될수록  짧아야 한다. 긴 수필을 쓰기 좋아하는것도 우리 수필문학의 공통한 약점인것 같다. 길림신문 2016-8-28  
6    불가사의,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 댓글:  조회:1051  추천:1  2014-11-11
    불가사의,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   ㅡ방산옥의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평함                                   김몽                        1. 방산옥시인이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출산했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방순애의 하이퍼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 다음으로 내놓은 두번째 하이퍼시집이다. 45년간 록색생식의학연구에 몰입하면서 수많은 아가들을 선물하였고 건강한 삶, 행복한 짝을 지어주었던 의학자가 이번에는 그 자신이 문학과 미친듯이 짝짓기를 하여 예쁘고도 포동포동한 아기,하이퍼시집을 낳았으니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다. 오늘 필자는 69세가 되여 늦둥이를 출산한 산모를 경하하려고 이 자리에 앉았다. 시집을 읽으면서 감탄과 경이로움도 함께 읽었다. 중국어로 «中华妇女临床医学研究»,«中华实用临床医学防治研究»,«健康你我她»를 내놓고 우리 글로 «성을 알면 삶이 아릅답다»와 그리고 60만자에 달하는 «삶과 짝»을 저술한 의학자가 불과 2,3년 사이에 동시집 «바람도 빼똘빼똘»을 만들고 200여수의 하이퍼시를 창작했으니말이다. 그중에서 92수를 골라 묶은것이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이다. 시집은 제목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여서 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시인은 책머리글에서 최룡관선생님을 알게 되여 세심하고 열정적인 지도를 받았다고 말하고있다. 이 세상에서 인연이라고 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만나 교향곡 제5번이 탄생했고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울이 로상에서 예수를 만나 결국 오늘과 같은 기독교가 있게 되였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문학의 경우 중국문학권의 영향도 무시할수 없지만 주로는 개혁개방으로 국문이 열린 덕분에 한국문학과 인연이 맺어져  서방현대파문학리론을 접수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현대파문학이 세워지게 되였다. 하이퍼시 경우도 마찬가지다. 디지털문학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나라들에서 하이퍼텍스트문학이 시작된지 오래다. 한국은 서구와 인연이 맺어져 십년 뒤늦게야 하이퍼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한창 실험단계에 있으며 론쟁도 많이 진행되는것으로 알고있다. 우리 문학은 이번에도 한국과 인연이 닿아 하이퍼시를 알게 되였고 지금 일부 시인들이 하이퍼시에 경도하는 바람이 일고있다. 최룡관시인을 주축으로 하이퍼시 동아리가 형성되였고 대련에서는 김파시인이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몰입하고있다.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읽으면서 생각이 깊었고 고민도 두터웠다. 비평문학은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감상괴 리해,해석과 가치판단을 통해 삶을 대하는 눈과 마음을 넓혀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걸어가도록 구도하고 그 자신이 순례자로서 걸어가는 삶의 길을 찾기에 다름 아니다. 무릇 시를 비평하는 사람은 독자의 눈과 귀를 가져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인의 마음과 손의 감각을 감지하여야 한다. 아니, 어쩌면 비평가란 그 어느쪽에도 속할수 없는 경계선상에 서있는 경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희려 그런 리유로  해서 그런 경계인이야말로 가장 첨예하게 시를 읽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산옥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것은 하이퍼시의 특성때문이였다.하이퍼시의 특성을 간단하게 개괄하면 탈관념, 초월과 건너뜀의 기법,시간경계의 무시, 다선구조, 무한한 공간 등등이다. 이런  특성들이 또 언어의 폭력조합과 어울려져  난해성 내지 불가사이성이 가중된다. 매 수의 시를 정확하게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최룡관선생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의  서평  «새로운 천지에서 타오르는 시의 불길»에서 다만 새로운 시 령역의 개척과  이미지폭력조합만 건드렸을뿐 구체적인 시해설은 한수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이퍼시를 일목료연하게, 깨끗하게 해석하고 분석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난해성이다. 문학의 한 류파인 포스터구조주의와 포스터모더니즘은 신비를 추구하고 사이비를 제창한다. 이들은 “불가사이한것이 언제나 아름답고 아름다운것은 언제나 불가사이하다고 주장한다.”하이퍼시의 초월과 건너뜀의 기법은 이들의 리론과 많이 닮아있다. 결국 하이퍼시와 대화한다는것은 불가사이한 물체와 대화하는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유일정확한 답이 있을수 없다. 명확한 풀이를 할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하이퍼시가 아닐것이다. 이런 리유에서 하이퍼시를 일목료연하게 해석한다는것 그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필자는 하이퍼시와 대화를 나누기로 하였다. 첫째는 비평가의 사명감이였고 둘째는 해석의 열쇠를 찾아보려고 미궁에서 헤매는것이 비록 피곤하고 고단한 일일지라도   바로 거기에 또 시 읽기의 다른  한 재미가 있기때문이였다.                   2. 방산옥시인은 소재발굴에서 새로운 령역을  개척하고있어 주목을 끈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이 주역과 의학소재를 다루고있다. 최근년에 우리 시단에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는 시인들이  나타나  시단에 활력소를  가미해주고있다.  광주의 박운호시인이 주역을 기본 핵으로 하여 미묘하고 신비한 마방진시를 쓰고있고 미국에 있는 홍군식시인이 순 불교를 소재로 130수의 시를 만들어 «원묘»라는 표제로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하고있다. 그 본인은 불교시라고 하는데 내가 보건대 소재는 불교이지만 형식은 하이퍼시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학을 소재로 시를 쓴는  시인은 방산옥 한사람뿐인것 같다.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시적상상력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있는 주역적사유와 의학적사유가 시의 내면공간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견인력으로 작용하고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독자적특수성과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특수성으로 하여 방산옥의 시는 남들과는 다른 개성적인 얼굴을 가지게 된다. 방산옥의 시를 여러가지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음양결합을 바탕으로, 주로 생명시학에 시각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방산옥의 시가 여러가지 내용을 포괄하고있지만 생명 또는 섹스에  관한 내용이 가장 비중있게,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있다. 표제들만 보아도 그것이 립증된다. “삼월이 분만한다”, “옥문”,“안개의 젖통을 스친다”, “짝사랑”, “자궁은 랭장저장고”, “송이버섯의 결혼” 등등. 그래서  필자는 시평의 표제를 «불가사이, 그 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이라고 달았다. 방산옥의 시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탄생하고 활발하게 숨쉬면서 푸덕이는것은 시인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시인 방산옥은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인줄로 알고있다. 그는 특히 성박사로 소문이 나있다. 그는 “성을 알면 삶이 아름답다”, “삶과 짝ㅡ생식과 전신건강”등 저서를 출간한 사람이다. 하기에  시인은 알게  모르게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생명례찬과 신비, 혹은 생명의 탄생과 부활, 성의 신성함을 시의 핵으로 다루고있는것 같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음과 양의 결합을 전제로 한다. «고물주를 수송합니다»가 전형적인 례로 된다. 시에서 남성의 생식기 남근은 «물구나무», «호랑이심장으로 만든 기차»로 은유되여 그 거대한 힘이 과시되고 있고 녀성의 생식기 질은 «불아궁이»,«동굴»로 은유되여  남근을  정복할수 있는 더 큰 힘으로 묘사되고있다.   남근이 «물구나무» 나 “호랑이처럼 힘이 세지만 녀성의 힘이 더 세여 그 “연장이”“불아궁이”에 들어가자  “그슬러 검정버섯이 ”된다. 성교를   해학으로 풀어낸 시라고 볼수 있겠다.     구들목에 앉았던 고양이 병아리소리에 연장이 부풀어납니다 질이라고 쑥 들어간 연장은 불아궁이에  그슬러 검정버섯이 되였습니다 ……중략 호랑이 심장으로 기차 만들고 위장으로 기차길을 닦았습니다 기차는 음낭역을 떠나 질역으로 고물주를 수송합니다   ㅡ«고물주를 수송합니다» 일부  “고물주”라는 단어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필자는 “고물주”를 남성의 “정자”(精子) 가 아닐가고 생각한다. “기차가 음낭역을 떠나 질역으로/고물주를 수송”했기에 이로부터 수많은   생명이 탄생하거나 부활하여 방산옥의 시들은 생명의 약동으로 부풀어오른다.   집안에서 나는 응아 소리에 태양의 빨간 청각, 파란 미각, 투명한 시각들이 창문을 깨고 날아들어옵니다   ㅡ«버들과 련꽃형제» 일부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환희가 시줄에 앉아 춤을 추고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얼마나 급했으면 “태양”이 아기를 보려고 창문을 깨고 들어왔겠는가. “빨간 청각,파란 미각,투명한 시각”이라는 언어조합이 전반 시에 감미롭고도 싱싱한 숨결을 부어놓고있다. «산문을 열다»는 굉장한 상상의 힘을 빌어 만물을 창조하는 대자연의   신비무궁함을 시화하고있다.   새들은 향기를 부채질하여 친구들을 부르고 꽃들은 구름을 펼쳐 새아침 목청을 그린다   목동의 초막에서는 천문가가 아침 정적을 울리는 첫울음을 터뜨리고 심산의 근육수축으로  양수가 터진다   천년송에 머리박으며 울부짓는 바람은 사지를 무겁게 끌고다녀도 정에 취한 청산은 건(乾)도 손(選)도리(离)도… 모두들 품어준다   ㅡ«산문을 열다» 일부    대자연으로서의 산은 하나의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이 된다. 그 자궁이 수축하여 양수가 터지자 삼라만상, 안개, 나무잎,아침이슬,꽃, 목동, 구름 등이 태여나 세상은 생명의 숨결로 굼실거린다. 이 시의 구조상의 특징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데 있다.원인이 마지막 련에 누어있고  결과가 앞부분에 서있다. 필자는 산문을 열다를 “자궁을 열다”로 리해하고있다. 어머니로서의 산은 단지 수많은 아기들을 낳을뿐 아니라 보호하고 따스하게 품어주는것도 있지 않고있다. 천년송에 머리 박으며 울부짖는 바람은 사지를 무겁게 끌고 다녀도 정에 취한 청산은 건(乾),손(選)도 리(离)도… 모두들 품어준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 이미지결합은 “목청을 그리다”이다. 시인이 화가가 되여 소리를 그리고있는것이다.  이상은 주역적사유속에서 만들어지고있는 생명을 소재로 한 시들의 일부였다.우에서도 말했지만 방산옥의 시에는 주역적사유 못지 않게 의학적사유로 만들어진 시들도 적지 않다. «초경»은 인체의 생리변화로 새로운것의 탄생을 례찬한 시라고 본다.   제비 한마리 치마폭을 감싼다 제비 새끼가 첫 고고성을 울리며 얼굴을 뾰족히 내민다   우물가 수양버들에서 회색강아지들이 먹거리 찾아 우물에 뛰든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달님은 별아가들을 업고 앞마당에 내린다   자고 일어난  소녀의 침대머리에 장미꽃이 피여난다 어두운 협곡을 뚫고 13년만에 답은 선물   ㅡ«초경» 전문 초경을 장미꽃에 비기고 그것이 “어두운 협곡을 뚫고/ 13년만에 찾아온 선물”이라는 표현은 칭찬을 받을만한 시구다. 시인은 초경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장미꽃향기로 승화시키고있다. 더욱 눈박아 보아야 할것은 인간과 자연의 화합하고 인간과 자연이 동격을 이룬다는 점이다.  시인은 갓 태여난 제비새끼와 버들개지, 별아가, 초경을 맞은 소녀 등을 한줄에 세워놓고 함께 탄생을 축하해주고있다. 우리는 «용광로에 빠진다»에서 생명의 과정을 묘사한  새로운  신선한 시를 만나게 된다.   코가 바람을 잘근잘근 씹어삼킨다 인후바위를 비비며 호수들은 계곡을 가득 채우고 갑문을 연다   동그란 바람호수들이 낭떨어지로 미끌어떨어지며 붉게 달아오르는 용광로에 빠진다   심장펌프가 물을 퍼낸다 물은 도랑을 따라 전야를 적시며 점점 검푸른 옷을 입는다   강물은 새길 찾아 돌아오며 검푸른 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붉은 옷과 푸른 옷은 뱅글뱅글 옷만 갈아입다가 동년의 꿈을 꾸며 잠든다   ㅡ“용광로에 빠진다” 전문   제1련은 코로부터 호흡을 하여 산소가 페에 들어가는 현상을 말하고 2련은 산소가 심장에 이름을 말한다. 시인은 심장의 박동을 “심장펌프가  물을 퍼낸다”에 견주고있으며 수많은 모세혈관이 온 몸에  펴지는 현상을  «물은 도랑을 따라 전야를 적신다”고 묘사하고있다.   동맥을 “붉은 옷”으로, 정맥을 “푸른 옷”으로, 그리고 동맥과 정맥의 순환현상을 “붉은 옷과 푸른 옷은 /뱅글뱅글 옷만 돌려입다가/동년의 꿈을 꾸며 잔다”라고 노래부르고있다. 생명의 과정을 의학적도리로 설명했으나 이미지가 생신하고 선명하기에 읽으면 재미가 돋아난다. 이외도 의학적사유로 생명의 탄생과 환희를 읊조린 시들이 아주 많다. 례하면 “언덕에서 목을 쭉 빼든 민들레가/노란 꽃망울진 유방과 속삭일 때마다/젖무덤에서 한잎한잎 꽃잎이 피여난다” «처방전1» ,“침들을 한줌 쥔 손바닥은/침모내기에 구슬따 흘린다/ 땀방울은 파란 잔디밭을 키우고/벼꽃을 만발시킨다”«침모내기»,“올챙이들이 갤갤/새들이 짹짹/산에서 목탁이 딱딱딱/계곡에 노래를 심습니다”«옥문». 방산옥시인은 신선한 이미지창출에서도 재기를 보인다. “빨간 청각 파란 미각,투명한 시각”,“우뢰가 우주의 귀뺌을 치다”,“글자가 삐뚤삐뚤 길을 닦고/길은 모양을 조각하며 소리를 낳는다”주문의 마디마디가 /푸른 잎에서 쫑쫑 뛰여내린다”. “우주핸들”,“침모내기”.이런 잘 구사된 이미지조합들은 시를 시로 만드는데서 관건적인 구실을 하고있다. 방산옥시인이 열심스레 탁마해낸 이미지에 대해 할말이 퍼그나 있으나 편폭을 고려하여  더이상 론의하지 않기로 한다.                   3.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하이퍼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 시단에서  하이퍼시를 두고 엇갈리는 견해들이 상충하고 있어 약간의 조률과 해석이  필요하기때문이다. 하이퍼시에 너무 매료된 어떤 사람들은 하이퍼시가 가장 우수한 시고 여타의 시들은 시가 아니거나 한층 낮은 수준의 시라고 하고 반대로  하이퍼시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은 하이퍼시는 인간과 세상을 등진 무의미한 동화적장난이라고 폄한다. 필자는 하이퍼시는 시대가 낳은 문학사조의 하나라고 본다. 그러나 하이퍼시가 최고의 시형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이퍼시는 그로서의    강점과 단점을 모두 갖고있다. 그러므로 강점은 배우고 단점은 삼가해야  한다는 립장이다. 언젠가 김철호시인이 자기가 하이퍼시를 공부하는것은   하이퍼시를 쓰기 위함보다는 자기의 시를 더 풍부히 하기 위한데 있다고 했는데 필자는 이러한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학사조는 모두 저마다의 강단점이 있으므로 서로가 대방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걸러내여 자신을 더 충실히 하는것이이 참다운 문인이 걸어가야 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공생공존(共生共存),  호경호존(互敬互爱)의  정신은 문학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와 견해가 같지 않다고 하여 무조건 대방을 비방하거나 폄하는 일은 부디 삼가해야 한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데가주망과 앙가주망을 두고 끊임없이 론의가 계속되고있는데 그것을 화두에 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 아다싶히  간단하게 정의하면  데가주망은 절대적자유,자기해방, 현실도피 등을 의미하고 앙가주망은 현실과 어떤 인연이나 관계를 맺는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참여와 통하기도 한다. 시문학에서는 순수시와 참여시로 구분된다. 사르르트의 앙가주망개념이 가장 대표적이다. “작가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상에 나서서 [나는 세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수 없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이는 이상 작가는 말할줄 모른느척 할수는 절대로 없는것이다. 의미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것이다.”(사르르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두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다시말해서 문학은 문학을 위해서도 존재하고 사회를 위해서도 존재한다. 괴테는 “시는 남자가 세계에 하는 키스이다. 그러나 빈 키스에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갈파한바 있다. 아내가 아니라 연인에게 하는 키스는 단순히 애정의 표현일뿐이여서 연인은 아내처럼 아이를 낳거나 생활계획과 같은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된다. 괴테의 말은 서정시의 무목적성 즉 순수성을 지적한 말이다. 에드리 앨렌포도 “시는 시이고 그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놓았는데 역시 같은 맥락에 선다. 그러나 시는 이들이 말하는것처럼 단순한 감성의 표출로 끝날수는 없다. 시는 모종 의미에서 사회와 력사, 사상과 인식의 거울이 되여야 하다. 그렇다고 하여 시가 정치의 노예가 되야야 한다는것은 아니다. 순수와 참여, 시의 이러한 량면적속성에  주목하여 토마스 엘리엣은 “사상을 한다발 장미의 향기로 표현하라”는 주문을 내세운바 있다. 사상을 전하되 아름다운 장미의 향훈으로 감싸라는 뜻이다. 사상을 사상으로 전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정치나 철학으로 될것이다. 어떤 사상도 예술의 옷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라늘레르 역시 시에서 사상을 과일의 영양소처럼 숨겨놓으라고 권고하고있다. 사과의 아름다운 향기와 맛에 끌려 한줌 베어먹는 순간, 사과의 영양소도 함께 흡수되는것이다. 지금 우리 시단의 경우 순수와 참여(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세상과의 교류와 인연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일체, 비희고락, 분노, 사랑 등을 모두 아우른다)의 대립이  상충상태로 존재하고있다. 그중 제일 많이 의론되고있는것이 하이퍼시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순수와 참여의 대립을 넘어서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는 소통과 화홥의 지형도를 국축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드러나는 시도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실과 너무나나 동떨어진 시도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사료된다. 하이퍼시는 초월과 건너뜀의 기교를 통해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을 제공하고 사유의 비약을 도모하며 생신한 이미지창출을 꾀하고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의미를 뜻하는 랭혹한 탈관념과 지나친 언어폭력조합은 커다란 난해의 미궁을 만들어 세상과 독자와의 고립이거나 소외, 단절의 위험이 초래될수 있을것이다.  독자가 외면하는 시집을 찍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이퍼시가 안고있는 가장 큰 위험은 까딱하면 문자유희나 장난 그 자체에  머무르고만다는데 있다.  시가 아무리 순수를 겨냥한다 해도 시인이 세상밖이나 진공상태에서 살수는 없는 이상 현실과 교감하는 어느정도의 삶의 숨결은 있어야 한다는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오늘 필자가 례문에 올린 방산옥의 시들은 정도부동하게  관념이 슴배여있는 숨쉬는 시들이였다. 례문에 올리지 않은 시들중에서도 «오염된 부르하통하»,«어둠이 산문을 삼킨다» 등 시들은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자연의 파괴,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를 고발한  시들이였다. 그리고 김파시인이 장백산집지에 발표한 디지털하이퍼시에도 «안개 낀 미로»를 비롯하여 옅은 관념의 옷을 걸친 시들이 몇수 보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하이퍼시에도 어느정도의 관념을 집어넣을수 있다는 도리를 립증해주고있다. 필자가 절대적인  탈관념에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부딪치고있는 현실상황때문이다. 멀리로는 서아프리카에 무서운 전염병인 에블라 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수천명이 죽어가고있으며 그것이 미국과 구라파까지 확산하여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있다. 중동에서는 전쟁과 폭란으로 수많은 인생이 살륙되고있어 세상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이다. 시인들이 이런 현실을 모르는척 할수 있겠는가. 가까이로는 중국의 고위급간부들이 수십억, 수백원의 나라돈을 탐오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사무친다. 문인들이 이런 현싱에 눈 감은채 그냥   음풍영월만 할수 있겠는가. 더 가까이로는 한반도가 매일 갈등으로 으르릉거리고 있으며 중국조선족은 해외진출로 부를 창조하였지만 그 대가로 교육위기, 가정파탄 등 위기도 함께 겪고있다.  이런것도 우리가 그냥 못본척 할수 있겠는가. 더 더 가까운 례를 들어 나의 누이나 어머니나 딸이 괴한에게 강간당할 때 그 광경을 보면서도 그 곁에서 그냥 수수께끼같은 시를 읊을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결코 구호식이나 탄원식의 정치시를 쓰라는것은 아니다. 엘리옷의 말처럼 사상을 예술적으로 장미의 향기처럼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이퍼시에서도 일정한 정도의 관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연구하고 하이퍼시를 쓰고있는 한국의 최진연시인의 말에  큰 공감을 갖고있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문학의 량대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심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같은 관념 ”을 쓰려고 한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것이 더 좋으리라고 생각해서이다.”(최진연 [하이퍼시의 리해]) 하이퍼시가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한다면 세상과의 화합도 이루어지고 따라서 독자층확보도 가능해질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폭력조합에 대해서 몇마디 덪붙히려고 한다. 신비평에서는 언어의 폭력조합을 아이러니견제와 균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적당한  견제와 균형은 시 앙금을 증강시키고 사색의 심도와 광도를 확대하여 시의 품위를 높이지만 지나치면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일반적인 시도 읽이지 않는 시대인데  하물며 수수께끼같은 시야 더 말할나뉘가 있겠는가. 독자층의 외면은 너무나 당연할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폭력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무릇 세상일이란 모두 적당하면 좋다. 과하면 탈이 생긴다. 하이퍼시는 21세기에 군림한   문학의 한 사조로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 탈관념과 언어의 조합에서 조금 더 유연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하이퍼시가 많은 사람들의 긍정을 받을거이며 미래가 양양하고 창창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퍼시의 존재가치와 이후의 운명은 어느 한두사람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력사에 의해 증명될것이다. 하이퍼시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방산옥  시인의 시집출간에 다시한번 뜨거운 축하를 보낸다. 금후 더 훌륭하고 예쁘고 멋진 하이퍼시를 낳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2014년 10월 18일 연길에서   방산옥의 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세미나에서 발표한 론문          
5    살아있는 시, 그리고 머물러있는 시 댓글:  조회:986  추천:2  2014-10-27
평론       살아있는 시, 그리고 머물러있는 시 ㅡ 김학송의 기행조시에 붙혀                                         김몽 김학송의 기행조시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이 두 형태는 아무런 관계없이 각기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참된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문학이다. 참된 문학은 영원히 지속하는 문학이다. 그것은 학문을 위해 또는 시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고 조용히 엄숙히 걸어간다. 가짜문학을 흘러가는 문학이라고 부르고  참된문학을 머물러있는 문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문학을 살아있는 문학이라고 할수 있고 가짜문학을 죽은 문학이라고  할수 있다. 시의 경우 많은 시들이 세상에 태여나지만 태여나자마자 요절하여 화장터로 향하는  시들이 수두룩하다. 이 말인즉 비록 시라는 이름을 띠고 세상에 나왔지만 겨우 한번 정도 읽히우거나 혹은 한번도 읽히우지 못한채  휴지통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하다면 어떤 시들을 일컬어 살아있는 시라고 할수 있겠는가. 생각컨대 그러한 시들이란 바로 오래오래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으면서  찬연한 원광을 뿜기는 시들일것이다. 례하면 김소월의 «진달래»나 윤동주의 «서시» 같은 시들말이다. 시의 밑바닥으로부터 삶을 응시하고 가드듬게 하고 휘우뚱거리는 몸체를 곧게 세우게 하는 장중한 목탁소리가 은은히 흘러나오는 시, 그리하여 마침내는 인생에 관한 어떤 계시거나 법열을 줏게 하는 시, 이런 시야말로 과시 살아 숨 쉬는  시, 흘러가지 않고  가슴속에 머물러있는 시가 아닐가. 생명이 있는 시로 되자면 시의 외곽만 하려해서는 안되는바 그 외곽안에 인간의 말씀과 인간의 냄새와 인간의 숨결이 있어야 한다. 인생의 비희고락을 다독여주며 존조리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야 하고 무언가를 시사해주는 은근하고도 묵직한 성성(圣声)이 들려야 한다. 채 여물지 못한 어설픈 생각과 경박스런 감성으로 속된 감각을 아무데나 사정하는 시, 값싼 자아위안거리 시,그리고  자아과대망상증에 걸려 횡설수설하는 시들은 결국은 요절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졸평에서는 최근에 창작한 김학송의 기행조시를 살핌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학송의 시들은 단지 풍물기행시로서  망막에 안겨드는 경물들을 손쉽게 즉흥적으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바다밑까지 깊숙히 하강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사랑과 슬픔을 개성적인 호흡과 맥박으로 형상해 가려는 제스처가 보인다는데서  주목을 끌었다. 김학송의 기행조시들을 보면 거개가 시의 숨소리가 들리고 말소리가 들리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다. 즉 생명이 각인되고 확실시 되는것 같다.   산자락에  웅크린 삶들은 멀리 도회지를 바라보다가 날이 어두워 돌아선다 고독을 지팽이 삼아 산을 넘는 꿈들 꿈은 산처럼 깊어가고 야윈 노을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산을 넘는다   ㅡ«꿈은 산처럼 깊어가고» 일부   시인이 기차에서 바라보는 황혼 무렵의 시골모습인데 어쩐지 추연한 감정을 자아낸다. 시인의 마음은 시골의 황혼과 교감하고있으며 시골의 경관과 교감하고있으며 시골사람들의 마음과 교감하고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잔잔한 시적전률이 생겨난다. 시인은 황혼무렵의 시골모습에서 창백하고 야윈 시골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보아내고 감상에 갈마든다. “웅크린 삶”, “고독을 지팽이 삼아”, “야윈 노을” 등등의 회색빛이 짙은 시어들이 자연스럽게 시골삶의 하모니로 울리면서 여윈 삶을 살찌우려고 아글타글하는 시골사람들의 내면세계를 핍진하게 그려내고있다. 산처럼 깊어가는 시골사람들의 꿈이 과연 현실로 될것인가. 그것은 숙제로 남는다. “야윈 노을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산을 넘는 ” 순간,  우리의 마음에도 정감의 황혼이 깃을 펴면서 사색의 호수에 잠기게 된다. 김학송시인은 북대하유람차 23수의 기행조시를 썼는데 필자가 그중에서 8수를 선정하여 화두에 올렸다. 기행조시 대부분이 바다를 소재로 하고있다. 시인은 광대무변한 바다에 사색의 낚시를 드리우고 펄떡거리는 싱싱한 시들을 낚아올리고있다. 그러되 그 모양새는 각각이다. 바다는 하나의 단순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로  둔갑하면서 여러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있다. “눈물의 바다”에서의 바다는 “고열에 몸을 떨며 눈부신 절망 부르짖는 바다”이며  “죽음의 예감으로”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바다”이며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 /찢어지며 펄럭이는  바다”이다. 한마디로 어떤 옥죄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이며 무엇인가 새롭게 태여나려고 광란의 춤을 추는 바다이다. 이 시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구가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찢어지며 펄럭인다”이다. 이것은 화려한 절망이다.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성공  모두를 아우르는 예쁘면서도 숨가쁜 절망이다. “내 마지막 녀인”이 구경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것은 파도가 표효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짜릿한 파괴의 감각이며 그 감각이 빚어내는 별미에 있는것이다.이 시는 이렇듯 생생히 살아 숨쉬는 시라는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면서도 한편 간결미의 소홀이라는 지적에서도 자유로와질수 없는것 같다. 서두의 3행과 결말의 두행은 어쩐지  군더더기로 보이는바 차라리  다 없애고 “가시 돋힌 강물들이 바다의 살속에 곤두박힌다/천만갈래 검은 손이 바다의 목을 옥죄인다/고열에 몸을 떨며 눈부신 절망을 울부짖는 바다/죽음의 예감으로 바다는 /쓰러지며 일어선다/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찢어지며 펄럭인다”로 하였다면 함축성이 획득되고 더 미끈하게 되지 않았을가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일가견이다. “파도의 언어”에서는 파도가 시인이 되여 수줍고 웅굴진 목소리를 시를 읊는 가관이 벌어진다. 시의 뜻은 수수억년 다져온 속내를 담은것이기에 너무나 깊고 너무나 무거워 파도가 쓰는 시는 그 기상이 “깊어진만큼 더 높이 치솟는다” «파도»가 사용하고있는 시어는 “하늘의 언어”이다. “하늘의 언어”란 도대체 무엇일가.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있는 인어일것이다. 그것은 또 추호도 가공하지 않은, 추호도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의 최고의 록색의 언어일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거창하고 위대한 언어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왜소하고  인간이 쓰고있는 시는 너무나 무기력할것이다. 하기에 바다를 마주한 시인은 커다란 외경심을 갖고   너의 앞에서 시인의 언어는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구나   하고 고백하고있다. 시 “파도의 언어”는 파도가 수수억년 다져온 우주의 력사를 “하늘의 언어”를 대신해 신비무궁한 시를 쓰고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깔끔한 형상의 옷을 입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시로,  우리의 내면에 머무는 시로 된다. 김학송시인은 북대하유람에서 수확이 적지  않았는바 파도에서 하늘의언어를 발견할뿐  아니라 나무에서도 하늘의 언어를 발견하고 제 멋에 취해 무등 즐거워 한다. 시인은 대자연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시어를 본다. 시인의 발견한 «나무의 언어에»는 온도가 있고 표정이 있고 바람의 매듭이 숨어있다. 더더욱 가관인것은 «나무의 언어»에는  희한하게도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이 고여있다”.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 세상에 이보다 더 예쁘고 더 숭엄하고 더 구슬프고 더 귀중한 눈물이 또 어디에 있으랴.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 ”에는 너무나 많은 애틋한 사연이 깔려있고 너무나 많은 고운 비밀이 숨겨져있다. 그 사연,그 비밀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즐기는것이 곧 시읽기의 재미일것이다. 시 «나무의 언어»는 대자연의 언어에 찬사를 하는 한편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제스처를 보내고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고뇌거나 고통에 빠질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의 가치를 획득하고 생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 까닭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젊어있는” “나무의 언어”,“하늘의 언어»가 항시 인간세상과 대화하고있기때문이다. 바다는 언제나 고요하고 유순하고 얌전한것만은 아니다. 때론 “악마”로 둔갑하여 세상을 소란시키고 재앙을 낳는다. 시 «악마»는 폭풍우가 휘물아치는 바다를 묘사하고있다. 천길만길 솟구치며 표효하는 파도가 검은 상복을 입고 큰칼을 휘두르며 해변의 노래를 찍어넘기고 어선의 꿈을 베어버리며 사람과 선박을 닥치는대로 집어삼킨다. 시인은 거역할수 없는 대자연의  무서운 힘을 묘사하고있다. 이 시에서 눈박아볼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능청맞은 해학이다. 처참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악마»의 무서운 행패를 이야기 하다가  느닺없이 슬그머니 “드디어 계절을 놓쳐버린 /지각한 내 사랑도 삼켜버린다”를 끼워놓음으로써 팽팽하던 분위기를 역전시키며 순간에 해학미를 얻고있다. “드디어 계절을 놓쳐버린 /지각한 내 사랑도 삼켜버린다”라는 이 구절이 이 시를 산 시로 만드는데서 커다란 구실을 하고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싶다. 우에서 김학송의 기행조시에서 바다가 여러가지 이미지로 작동한다고 말했거니와 «바다일기»에 와서 바다는 또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바다일기»에서는 바다가 «우물»이 되기도 하고 바다의 변형으로 된 «시»가 하늘이 되기도 하고 «내»가 시의 품에 안기기도 한다.   마실수록 갈증나는 저 우물 시의 하늘속에 내가 안긴다 흘러가고 흘러오며 눈물짓는 바다여 “랑도사”에 목메여 너울치는 바다여 파도는 해변에   남겨진  무수한 발자국을 지우지만 지울수 없는건 시의  해살우에 남아있는 따사로운 령혼의 발자취로다   ㅡ«바다일기» 전문    바다는 거창함과 무궁함의 극치이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보다 더 커서 광활한 바다가 다만  “마실수록 갈증나는 저 우물”에 불과하다. 시인은 “시의 하늘속”에 안기고 싶어한다. “시의 하늘속”이란 인간과 우주의 모든것을 갖고있는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이다. 그 신비의 세계에서 영원히살고싶은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하기에 시인은 “시의 하늘속에 내가 안긴다”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의 포옹이며 인간과 시의 포옹이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짝짓기가 이루어져 아름다운 시가 태여난다. 이 시는  또 추억의 영원성 내지 시의 영원한  생명력도 제시되고있다. 파도가 해변가에 남겨진 무수한 발자국을 지울수 있지만 “시의 해살우에  남아있는/ 따사로운 령혼의 발자취만은 지울수 없다” 상상해보라. 해살우에 오렷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곱게 미소 짓고잇는 시의 모습을!  아름다운 시는 영원히 살아있다. «남대하»는 눈물을 감추고 속으로 울고있는 바다의 이야기를 묘사하고있다. 바다가 울고있는 까닭은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연들이 /머물다가 떠나”갔기때문이며 “옛 꿈을 철썩이던 돛배와 목선이” 호객하다가 지쳐서 잠들었기때문이며 “해물행상객의 조각난 흥정이/안타까운 바위로 굳어진 곳”이기때문이다. 아무튼 불만족스러운 기억들이 많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밤에도 바다는 /젖은 날개를 감추며 /울고있다” 시인은 «남대하»에 서러움에 젖은 옛 사연들이  많이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목격자인 «돛배”와 “목선”, “임자없는 바람”과 “달빛”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결국 종당엔 “남대하는 슬프다”라는 [판결]이 내려지게 된다. «북대하의 여름»은 아름다운 꿈을 보듬어주는 살틀한 애무와 세상을 따스하게 만드는 시의 울림으로 유표하다. «북대하의 여름»은 시원한 샘물이 되여 “물의 혀로 너럭암반에/만고의 시편 새기며//갈한 청춘들을 불러/현실의옷 벗게 하며//다심하고 살틀한 손으로/객손들의 마음의 비상 풀어주며//낮이면 사향가를 밤이면 자장가를푸른 목소리로 소근거리며//예고없이 피고 지는 물꽃처럼 땀에 젖은 중국의 무더위를 녹이며//북대하의 여름은 슬그니/우리 모두의 꿈속으로 걸어온다”  «북대하의 여름»을 읽노라면 유정하고 다정한 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김학송은 다산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5월 22일부터 5월30일,8일사이에  사이에 무려 23수의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수가 시의 기품을 갖춘 괜찮은 시들이다. 화두에 올린 8수의 시들은 기본상 살아 숨쉬는 시들이며 우리의 가슴에 머물며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들이다.  우리 시인들은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21세기의 문명적지각변동 앞에서 우리 시인들은 개인적자아의 탐색과 더불어 인류공동체의 운명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새로운 출구전략을 세우자면 겸허한 자기점검과 더불어 치렬한 자기갱신의 의지를 가다듬어야 할것이다. 그래야만 영원히 살아있는 시,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물수  있는 시를 창출해낼수 있을것이다.    
4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댓글:  조회:1384  추천:8  2014-06-27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               ㅡ김파의 디지털하이퍼시 경우                                           김몽   중구조선족시단에서 줄곧 시혁신과 시갱신에 몰두하여 온 시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중에 김파신인도 있다. 80년대중기부터 김파시인은 새로운 시탐구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물로 립체시론을 내놓기도 했다. 70이 넘은 오늘도 김파시인은 혈기왕성한 심신으로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줄기차게 달리고있으며 그 와중에 디지털하이퍼시를  만나 사귀게 된다.  요지음 한국에서 이백여수의 시로 묶은 디지털하이퍼시집을 펴낸다고  하니 그 왕성한 창작력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이번호 에 선보이는 10수의 시도 모두 디지털하이퍼시이다. 사실 김파시인은 이전에도 알게 모르게 사물시나 디지털시, 하이퍼시와 류사한 시들을 써왔다. 다만 리론적으로 정립이 되지 않았고 명확하게 지칭을 하지 않았을뿐이다. 이전에  비자각적으로 하이퍼시를 썼다면 얼마전부터는 하이퍼시의 리론을 접수하고 자각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와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국가들에서  하이퍼텍스트문학이 발걸음을 뗐고 그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10여년전부터 신상운, 문덕수, 최진연, 오진연 등에 의해 하이퍼문학열기가 일기 시작했고 중국조선족시단에서도 한국의 영향을 받아 금방 하이퍼시운동이 머리 들기 시작했다. 그 운동의 앞장에 김파,최룡관 등이 서있으며 김파는 창작에서 성과가 돌출한 시인중의 한사람에 속한다.   김파의 시세계를 들여다보자면 우선 얼마간이라도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를 전제로 하여야 할것 같다. 하이퍼의 영어 원뜻은 암소, 계집애, 젊은 녀자를 지칭하는데 거기에 시라는 말이 가첨되여 하이퍼시라는 신조어로 되면서 과도, 초월, 건너뜀,  최고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사로 둔갑하였다. 하이퍼시에서는 탈관념(무의미)을 선언하며 초월,건너뜀의 기법을 제창한다. 련과 련,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인과적관계가 없으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다. 한국에서 하이퍼시의 선두주자인 심상운은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나아가는것이 하이퍼시라고 했고 문덕수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관계를 결합하여 완성하는것이 하이퍼시라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의 고창자들은 하이퍼시의 배경이 첫째로는 탈구조주의와 포스터구조주의라고 보고있으며  둘째로는 21세기의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페러다임아라고  인정하고있다. 디지털은 0과  1로 이루어지는 이진법 론리를 사용해 0과 1의 각종 조합을 만든후 그것의 조작과 처리를 통해 여러기지 정보를 생산, 류통, 전달할수 있도록 하는데 아날로그가 련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나타내는 반면에 디지털은 비련속적이고 단속적이다. 하이퍼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이다 이 리론은 문덕수가 내놓은것으로 풀이하면 행과 행, 련과 련 사에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수의 시를 구성한다. 한마디로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련속적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특성이다.   다음으로 심상운에 의하면 하이퍼시는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인것이 아니라 다선구조라고 말한다. 최진연은 또 아예 뚜렷한 선이 없으므로 비선(非线)、무선(无线)구조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론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고있기때문에 련과 련, 행과 행을 바꿔놓아도 상관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정신적 통일성을 찾을수 없는것도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세번째특징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공간의 확장이다.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극대의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된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디지털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것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류사한 동적, 립체성특징을 갖는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사유의 사물이지만 다지털은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인 사유이다. 하이퍼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탈관념이다.  이것은 무의미하고도 통한다. 추상적관념이란 바로 사랑, 증오, 분노, 폭로, 비판, 찬양 등등인데 하이퍼시에서는 이런 관념을 배제하고 추방한다. 심상운은 “시인의 주관적생각 (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사실 자체에 그치면 탈관념”이라고 말하였다. «최지연, » 심상운의 하이퍼시 한수를 보자. “앉아있는 그녀를 한야 구름이 휩싸고/빨간 뻐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뻐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야 바다위를 달린다(후략)” 이 시를 보고 최지연은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시사(诗史)에서 처음”이라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에 대한 이와같은 소개를 전제로 김파시를 살펴볼수 있다. 10수의 시는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을 종횡무진하면서 다감각, 다정서, 의미지다층차구조로 의미망을 구축하고있으며 독자들에게 무변의 다공간속에서  다감각세계를  맛보게 해주려 하고있다.   «발자국» 은  각 시구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시스템속에서 상호보완적 생산기능을 한다.  ,
3    모천회귀(母川回归)ㅡ 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댓글:  조회:1292  추천:1  2014-06-24
 모천회귀(母川回归)ㅡ 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ㅡ 김학송의 최근시를 보면서                             김몽   김학송은 시인이다.    바야흐로 몸이 무르녹고있다. 살구꽃이 연분홍 미소를 흩날리고 민들레가 파란 노래를 부르고 종달새가 하늘가에 춘향(春香)을 수놓고 아지랑이가 요염한 자태로 만물을 현혹한다.  이런 유정한 봄날, 나는 지금 김학송의 최근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이야기속에서 향내가 묻어난다. 그것은 김학송의 시가 과연 시이며 김학송은 과연 시인이기때문이다. 시라고 하여 모두가 시인것은 아니며 시인이라는 패쪽을 달고있다고 하여 모두가 시인인것은 아니다. 시향이 묻어나는 시라야 시라고 할수 있으며 그러한 시다운  시를 써야 비로소 시인이라고 할수 있다. 김학송은 우리 시단에서 명망있는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숲에는 사람이 없다»,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를 미롯하여 무려 20여권의 시집을 산출하여 량적으로 가장 많은 시집을 펴낸 시인이며 «해외 동포상»,  «준마상 »등 굵직한 상을 받은 시인이며 많으 평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아온 시인이다.     황금찬은 “김학송의 시는 읽을수록 정이 가는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시세계가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생명을 절대시하고 우주를 시인의 가슴에 품어주는 높은 시상을 갖고있으며 고도의 상징적기법으로 조용히 구름이 장미를  빚듯이 빚어내고있다.”고 말했고 신동욱은 “평범한 체험속에서 근원적인 님을 탐구하는 감격적인 서정을 보여주었는바 시적감수력이 뛰여나며 서정시편의 질감높은 기량을 느꼈다. 상업주의가 넘치는 시대에 가치의 안정성과 정체성의 인식방식으로 님을 탐구하는 서정시인의 령혼이야말로 고귀한 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했고 임헌영은 “김학송의 시는 이제 연변의 울타리를 벗어나 한국의 독자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서게 된다. 그것은 주제와 소재의 기법에서 충분히 오늘의 한국시에 새로운 충격을 줄수 있기때문이다.”고 평가했다.  물론 평론가들의 말이 모든것을 결정하는것이 아니며  그것이 한 시인의 가치척도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평자들로부터 이만큼한 평가를 받는 시인이라면 적어도 자격이 있는 시인라는 점만은 부인할수 없다.   엎딘김에 절이라고 이 기회에 우리 시단을 살펴보면 중국조선족시단이라는 이 시동네에 시인협회에 가입하여 시인이라는 칭호를 달고다니는 사람이 몇백명이 되지만 진정으로 시인라고고 할만한 명실상부한 시인은 크게 잡아도 몇십명밖에 되지 않는다. 까딱하면 시인들한테   를 맞을 소리같지만 필자의 생각이 이러하니 를  맞더라도 할말은 해야겠다.  우리의 시동네에 말썽이 꽤나 많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시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앞에서는 사뭇 겸손한체 점잖은체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 흉보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문인상경( 文人相敬)의 풍조 대신 유감스럽게도 응당 멀리 하여야 할  문인상경(文人相轻)의 페단이 형성되고있다. 과연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나쁜 시일가.     필자는 이에 답으로 간단히 아래와 같이 분류를 해본다. 첫째,읽기 쉬우면서도 시인  시. 둘째,  읽기 쉬운데 시가 아닌 시  셋째, 읽기 어려운데 시인  시.  넷째. 읽기 어려우면서 시가 아닌 시.        손오공이 여불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듯 모든 시는 이 네가지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상술한 네가지 부류중에서 첫번째와 세번째가 쓰기가 가장 어렵고 두번째와 네번째가 쓰기가 가장 쉽다.  지금 우리에게는 첫번째 부류와 세번째 부류의 시들이 적고 반면에 두번째 부류와 네번째 부류의 시들이 많다. 너무 알기 쉬워 벌거벗은 시들이 적지 않고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시 같은 경우, 세계를 망각한 자의식이 잡음이 많고 너무 두터운 옷을 입어 아무리 하여도 그 속을 전혀 들여다 볼수 없는 시, 시인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시이비한 시들이 적지 않다. 이런 시들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당한다.  미국의한 평론가는 “오늘의 시는 이민선의 3등선실에 탄 가난뱅이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도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닌것 같다. 시인의 가치하락에서 시인도 자유롭지 못한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것이다. 시인이 자기 위상을 높이자면 오로지 좋은 시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   좋은 시가 되자면 알기 쉽든 알기 어렵든간에 결국엔 시 밑바닥에 삶에 도움이 되는, 또는  귀중한 어떤 계시를 주는 묵직한 철리가 웅크리고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다면 독자는 시를 외면할것이며 시는 독자가 없는 울타리안에서 저희들끼리 좋다고 떠들썩할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삶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을 시로 육화하는 작업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이며 현상의 배후에 있는 시대의 혈색과 호흡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의 유무를 묻는것이 시인의 옳바른 자세이며 이런 자세하에서만이 좋은 시가 탄생한다. 그리고 자격이 있는 시인이 되자면 타인의 마음에도 깃들줄 아는 존재로 되여야 한다. 세계, 내적존재로서의 세상 사람들의 체취를 끊임없이 자아화 함으로써, 그리하여 더더욱 자기 자신을 고양하거나 지양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이 움크게 하야야 한다. 삶과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릴줄 알 때만이 누구 아닌 바로 그 시인으로 영생할수 있다. 김소월이나 윤동주, 정지용 등을 비롯한 많은 명시인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시인으로 살아있는 까닭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주요하게는 다름아닌 그들의 시가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을 움크게 하는 힘”을 갖고있고 “삶과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릴줄 ”알기때문이다.   필자는 김학송을 알기 쉬운 표현으로 상당히  무거운 시를 쓰는 시인으로 보고있다.  최근의 그의 시들을 보면 대개  민족성에 뿌리를 내리고 인생과 세상을 깊이 있게 투사하고있으며 그 와중에 시의 무늬가 수놓아진다.   모색이  이우는 버드나무강변에서 한줄기 우환을 깔고앉아 로인은 퉁소를 분다 마을을 향해 한곡조 강물을 향하여 한곡조 배부른, 할일 없는 소들을 바라보며 또 한곡조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신나는 가락에 어깨를 들썩인다 로인은 분다 저무는 황혼의 비애를 분다 먼저간 이들이 채 못부른 노래 그리고 수천년 이 민족의 가슴에 자리잡은 깊은 한과 고독을 분다   ㅡ«퉁소와 로인» 전문   시를 읊어보면 힘든 낱말이 기본상 없다. 하지만 뇌리에 박혀드는  사연은 결코 적지 않다.  퉁소소리의 울림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안고있는 비희고락의 력사와 현재가 애환의 가락에 앉아 흔들거리며 춤을 추고있는 정경을 보게 된다. 퉁소의 주인인 은  우환을 반석처럼 깔고앉아 불고  과 를 불로 마지막에는 < 이 민족의 가슴에 자리잡은 깊은 한과 고독을 분다> 시적주인공인 은 민족의 대변이이자 민족의 혼이다. 시인이 노래하고있는것은 민족의 오늘과  수쳔년의 력사를 아우르는  민족의 아픔이다. 고뇌와 비애속에서 빚어지는 령혼의 직조( 织造)가 곧 살아서 퍼덕이는 혼의 울림, 시로 탄생하며 아울러 김학송은 시인으로 된다.     모천회귀 ㅡ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김학송의 시를 보면서 문득 모천회귀를 떠올리는 까닭은 김학송의 시가 존재의 시원(始源)을 찾는 언어의 본능을 시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인의 인간적욕망으로 정화시키고있기때문이며 최후의 목적지 내지 정착지가 고향(어머니,민족)이기때문이다.  시원은 시인마다 제마끔 달라 모두에게 그 특유의 시원이 있다. 시원을 찾는 과정이 곧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어떤 시인들에게는 시원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 어떤 시인들에게는 대단히 고달프고  때론 비장하면서도 성스럽기도 하다. 诗자를 보면 말씀 言자와 절  寺자로 구성되여있다. 절(寺) 은 성당(圣堂)을 의미하며 석가모니, 하느님 등 지고무상의 성스러운 존재를 상징한다. 이렇듯 시란 성스러운 존재와의 대화(言)이므로  결국 시도 성스럽게 되니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움을 빚어내자면  구도자(求道者)와 같은  인내와 고뇌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을수 없다.     김학송의 많은 시들이  시원을 고향, 어머니 내지 민족의 뿌리에 두고있다. 연어는 태여난 강이나 하천으로 돌아가는 모천회귀본능( 母川回归本能)을 갖고있다. 강이나 하천에서 태여난 연어는 바다에 나가 성어가 된다. 성어가 된 9개월 뒤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여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란하고 최후를 마친다. 강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있어 치렬한 박투를 하면서 목슴을 내걸고 처절한 행군을 계속한다. 그만큼 고향이라는것은 무서울 정도의 마력적인 힘을 갖고있는것이다. 중국성구에 락엽귀근( 落叶归根)이라는 말과   토끼는 죽을 때 제굴에 가서 죽고 여우는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을 바라본다(兔走旧窟,狐死首丘)는 속담이 이 있다.   식물이나 짐승마저 고향에 대한 사랑이 이렇듯 사무치거늘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기에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고향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많으며 우리 조선족시단에도 고향을 쓴 시들이 수두룩하다. 고향은 흔히 민족이라는 개념과 동일시되여 쓰이는 경우가 많다. 김학송도 고향주제를 많이 다루고있는 시인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되 그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치렬할만큼 고향애착이 집요하다. 하기에 그의 시는 그만큼  민족정서, 고향정서, 노스탤지어정서가 농후하다. 이는 그의 의식적인 시추구에서 비롯된것이다. 시인의 고백이 그의 시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있다. “민족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나선 정신궤적을 두루 다루었다. 어디에서 살든 나는 조선족이다. 이것이 자랑스럽다. 다시 태여나도 나는 조선사람으로 살고싶다.” 김학송의 이러한 진실한 고백이 이번에 에 발표된 시들에서  명백히 드러나고있다. 고향과 민족에 뿌리 내린 그의 시의 정신을 완벽하게 알아보기 위해 먼저 최근에 발표한 시집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 중에서 한수를   골라본다.   바람이 희다 바람이 달다 바람이 맛있다 바람이 길다 바람이 둥글다 바람이 깊다    김치냄새가 난다 청국장냄새가 난다 막걸리냄새가 난다   바람이 삼배저고리 같다 바람이 행주치마 같다 바람이 두루마기 같다   바람이 퉁소를 분다 바람이 묵장구 틴다 바람이 가야금 탄다 바람이 둘래춤 추며 강강수월래를 부른다   옛성터에 부는 바람은 늙어도 늙지 않는 뿌리 깊은 바람이다   ㅡ«옛성터에서 5» 전문   이 시는 우리 민족에 대한 대찬가이다. 이 시의 내용의 깊이와 넓이에 앞서 우선 말짱 고유어로 된 시어가 주목된다. 전편시에 한자 한마디도 끼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는 민족어의 고유성과 지킴이라는 이 한가지에서도 큰 점수를  따고있다. 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을 통해 민족의 형상, 민족의 특징, 민족의 영원성,창창한 미래까지 현시한 시인의 자태가 돋보인다. 1련에서는 , ,로 우리 민족의  깨끗히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2련에서는 , , 로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단결심을, 3련에서는 , ,로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의 특색을, 4련에서는 , , 로 우리 민족의 복장특색을,   5련에서는 , , , 로 춤과노래를 즐기는 우리 민족의  기질을 노래부르고있으며 마지막 련에서는 “옛성터에 부는 바람은/늙어도 늙지 않는/뿌리 깊은 바람이다”고 하면서 민족의 영원한 창성과 번영발전을 기원하고있다. 한수의 짧은 시에 알기 쉬운 표현으로 민족의 모든것을 일목료연하게 다져놓고있는데 시 전편에 민족정서의 가락이 은은히 울리고있어 사뭇 정겹다. 11수의 시에서 고향애착이 가장 선명한것이 이다. 우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이 시는 고향의 령락과 피페에서 비롯된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과  이로부터 인기된 암울한 정서를 읊은것인데 범용한 서정시의 얼개를 뛰여넘고있다는데서 주목된다. 이미 우에서 간단히 언급했기에 구체적인 살핌을 하지 않는다. 모천회귀성은 모성회귀성과 통하고 모성회귀성은 또 고향회귀성과 민족회귀성으로 통하기도 한다. «어떤 귀향>이 그러한 경우이다.   16년전에 객지에서 떠돌던 사나이는 머리 허연 로인이 되였네 떠날 대는 호기롭게 검은 머리 흔들며 사라졌지만 병든 로구 간신히 이끌고 동구앞에 찬바라 휘몰고 나타난 모습은 그젯날의 그 사람이 아니라네 얼니 냇물에 절을 올리고  늙은 당수목에 머리를 조아려도 그때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고 이 모든걸 헤아려주는 향풍(乡风)만이 너른 품으로 해일처럼 무너지는 육신 안아주네   ㅡ«어떤 귀향» 전문  은 고향의 품일수도 있고 어머니의 품일수도 있고 민족의 품일수도 있다. 16년전에 건장한 몸으로 고향을 떠났던 사나이가  백발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객지에 돈벌이를 나갔다가 망한것이 분명하다. 하기에 시인은 이라고 묘사한다. 또한 망함의 강도를 강조하기 위해 이라고 말한다. 떠돌이인생에서 망그러진 육체, 해일처럼 무너지는 육체, 하지만 향풍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모든걸 헤아려주는 향풍(乡风)은 한마디 원망도 꾸지람도 없이 그 을 따스하게 안아준다. 은 어머니의 품으로 볼수도 있고 고향의 품으로 볼수도 있고 민족공동체의 품으로 볼수도 있다. 연어가 알밴 배를 터트리려는 욕망에서 고행을 찾아가듯 시인 역시 생명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시의 근원을 탐색한다. 결국 시인은 가장 믿을만 하고 가장 너그럽고 가장 따사로운 곳이 고향이라는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시 에 이르러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고향에는 가장 순정한 향음(乡音)이 있고 가장 편한 휴식이 있다 고향에는 가장 따스한 온기가 있고 가장 애절한 눈물이 있다 고향에는 늙을수록 아름다운 인생이 있고 부를수록 새로운 노래가 있다 고향에는 나의 실패마저 안아주는 손길과 나의 흠결마저 곱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다   ㅡ«고향에는» 전문   이 시는 «어떤 귀향»에 비해 울리는 빛갈이 맑고 흔들리는 가락이 따사롭다. 세상(고향)과 만나는 시인의 력사인식은 유충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완전변태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에 푹 젖어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그런 인식이다. 김학송은 도시에 오기전의 도문의 한 시골에서 흙냄새와 소동냄새를 맡으며 농촌과 인연을 맺었다. 아마도 그러한 삶의 력사가 시인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발효되여있다가 저도몰래 시라는 젖으로 흘러나오은것 같다. 시인의 고향은   모든 소중한것들이 다  있는 유정한 보금자리이며  어머니의 다스한 품이다. 거기에는 , , , , , 심지어  . 고향은 아름다움이고 인정이고 따스함이고  노래이고 춤이고 사랑이고 너그러움이이다. 모천회귀로서의 김학송의 시는 고향을 찬미하는 맑진 목소리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울림이 회색적인데 그것은 민족의 우환의식에서 비롯된것이다. 에서도 그러한 침울한 숨결이 들린다. 개혁개방후 국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연해지구로 해외로 돈벌이 나갔다. 그 와중에  돈은 벌었지만 많은 페단과 비극도 초래되였다. 떠나고싶어 떠난것이 아니고 보내고싶어 보낸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 핍박에 못이겨 떠나고 보낸것이다.   기차는 산해관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기차의 속도로 달리는 마음은 뒤켠에 고향을 부려놓고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간다 친지들의 부름소리가 따라오지만 앞개울을 넘지 못하고 산에 막혀 돌아간다 깊이를 알수 없는 호수가 나그네의 꿈을 삼켜버리고 가도가도 생소한 풍경만이 구름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갈것들이 다 가버린 부락에선 올것들이 오지 못해 울고있다   ㅡ«나그네는 구름 되여» 전문   살아 생생한, 오늘의 조선족  농촌마을의 축도가 아닐가. 언제부턴가 연길역전과 연길공황은 눈물과 웃음으로 반죽된 조선족들의 리별과 만남의 현장으로 되여버렸다. 우의 시는 그 현장속에서 눈물쪽에 렌즈를 돌리고있다.  시에 등장하는 나그네는  돈이라는 꿈을 위해 에 뛰여든다. 떠나가는 나그네의 등뒤에서  “친지들의 부름소리가 따라오지만/앞개울을 넘지 못하고 산에 막혀 돌아온다”. 은 떠남을 유발한,  떠나지 않으면 아니될 , 떠남을 핍박하는 현실상항이다. 즉 가난에서 탈출하려는,물질적욕구를 만족하려는 갈증이다. 하여 을 넘어 뛰여든 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결국 “갈것들이 다 가버린 동네에서/올것들이 오지 못해 울고있다” «정거장소나무»는 고향의 스산함과 쓸슬함을 고독과 외로움의 무늬로 수놓고있는 시다. 은 현실부재로서의 고향이고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고향의 혼이며 은 고향의 혼을 달래주는 민족의 혼이다. 이 시는 고향은 사라진것 같지만 결국은 미구에 재생할것이며 영원히 소실되지 않을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있다. 그 리유는 장수를 의미하는 가 고향을 지키고있기때문이며 민족의 얼인 이 때문이다. 우리는 를 민족의 자긍과 민족의 정기를 일깨워주고 불어놓어준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 김학송은 때론 다른 방식으로, 시골을 신비화 하는 방식으로 고향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표현하기도 한다. 에서 시인은 사고 , 산다고 말하며 있기때문에 수천년동안 향촌의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왔다고 말한다. 는 것은 가능하게 민족을 민족으로 남게 하는 모든 귀중한것들을 지칭하는것이라고 보아진다. 하기에 시인은 시골의 달빛마저도 사랑스럽고 귀중하여 고 독백한다. 참 정답고 재미있는 시구다. 김학송은 고향과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기때문에 민족이 민족으로 남지 못하고 동화될까바 걱정하기도 한다. 가 그러하다. 민족의 동화를예방하고 민족성을 고수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가상하나 표현이 직설적이여서 재미가 슬하다. 필자는 이 시를 라고 본다. 그래도 건질만한 시구가  하나 있다. 총체적으로 모천회귀과정에서 은은한 령혼의 가락으로 울리고 있는 김학송의 시는 고향과 민족의 뿌리에 파고들어 민족의 혈색과 호흡에 대해 사명감 높은 투시와  천착을 하고있으며 민족의 체취를 자아화하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을 움트게 하며 삶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리려고 하고있다. 김학송시인이 이후에도 더 시인다운 시인이 되여 더 시다운 시를 쓰기를 기대해본다.   2014년 연길에서 씀    
2    우리 시단의 怪事,奇事,庆事 댓글:  조회:1741  추천:2  2014-03-06
우리 시단의 怪事,奇事 ,庆事    박운호의 시집를 두고   창의성과 초월성으로 살펴보는 우리 시단의 그라프   시인 박운호가 2000년1월에 첫시집 을 내놓은지 꼭 10년만에 두번째시집 를 내놓았다. 이 시집은  오래간만에 우리 조선족시단에 던진 어벌큰 도전장으로 주목된다. 시집의 표제를 풀이하면 죽었던 혼이 환생하여 꿈에서 본 일들을 적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꿈에서 한번 죽은후 이 세상의 희노애락과  시시비비,진진허허를 자세히 관찰하고 드디어 깨도의 대문을 노크한다. 시인은 꿈꾸는 동안  육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수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인생감오와 시적감오를 얻으며 종당엔 홍진세계의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고 나름대로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 의 탄생은 우리들에게  우리  시단의 모습을 새로이 성찰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는 오래동안 고요하고 잠잠하던 우리 시단에 충격을 준 례사롭지 않는 시집이기때문이다. 우리 시단은 해방후 몇차례의 진통과 탈피의 행로를 밟으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사실 알고보면 중국조선족시단은 시의 혁신과 창의성, 혁명성에서  전통이 있다. 일찍 일제시기 만주에  만주조선인 문학이라는것이  있었다.   1936년7월 부터 8월 사이에   리상이 에 라는 쉐르일리즘 시를 련재하여  한때 큰 센세인숀을 일으켰다. 리상의 오감도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 파격적인 이단으로 문단의 공격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상은 전위적인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허나 현실보다 너무 앞선 이상의 시는 반역으로 이단으로 몰려 9호까지 내고 발표를 단념할수밖에 없었다. 리상의 영향을 받아 당시  시현실동인으로 활약하던 함형수, 이수성,김북원 신동철 등이 1939년과 1940년도에 에 ,,, 등 파격적인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시들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의 조선족시의 첫 혁명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1945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조선족시단에는 력사의 원인으로 하여 이렇다고 할만한 새로운 시혁신운동이 없이 줄곧 사회주의사실주의시가 통치적지위에 있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의 훈풍이 불어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도 시가혁명의 기회가 오게 되었다. 1980년대초에 한춘시인이 현대파시의 기치를 추켜들었고 거기에 호응하여 김정호가 상징주의 시 을 발표화여 40년간 잠자던 시단에 한차례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어 시혁명 비슷한 창작이 이어가기 시작하여 90년대초에 김혁이 22수를 실험하였고  조광명이 불교시를 선보였으며 김파가 립체시를 들고 나오고 최룡관이 이미지시론을 들고 나오고 남영전이 1980년대 중기부터 토템시의 기치를  추켜들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새로운 리론 창조가 아니라 서방기성리론에 대한 선양작업과 답습에 그치고말았다. 오래동안 사실주의시만 보아오던 그들이 갑자기 어느날 서방현대리론을 접촉하게 되자 마치도 콜롬보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를때처럼  격동하고 흥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콜롬보스가 지브랄타르해협의 한섬에 도착했을 때 그 섬에는  “세상은 여기에서 끝난다”는 패말이 꽃혀있었는데 콜롬보스는 그 패말을 뽑아버리고 대신 “세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패쪽을 세웠다. 우리의 대다수 실험시들은 콜롬보스와 같은 전위성, 창조성, 모험성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다만 “세상은 여기서 끝난다”는 패말앞에서 흥분하는데 그치고말았다. 그것을 본것만 해도 너무나 경의롭고 신선했던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시혁명은 서방현대문학리론이 이미 만들어놓은 기성품을 선양하고 옯겨오는   작업, 그것에 다름아니였다. 그러나 설령 이렇다 할지라도 우리문학사에 남겨놓는 공적은  거대하다. 가령 그들의 시혁신운동이 없었더라면  침체되고 고갈되고 진부하던 시단에 활역소가 생길수 없었을것이며 다원화창작과 백화반발의 경상이 나타날수 없었을것이며  시의 개성이나 시의  질의 향상 등을 운운할수 없었을것이다. 오늘 우리 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있는데 이는 모두 시혁신운동과 시혁명운동의 결과물이다. 이들 혁신파들중에서 가장 떳떳하게 나의것으로 인정받은 것이 남영전의 토템시이다. 남영전은 조선족시단은 물론 전 중국시단에서 처음으로 토템시리론을 제기하고 체계화하고 완선화시킨 시인이다. 그는 또 자기의 리론을 립증하는 54수의 토테시를 중문으로 창작하여  전반 중국시단을 놀래웠으며 이른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문화현상을 만들어내게 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시단의 분위기가 오래동안 잠잠하다가 박운호의 출현으로 다시금 새로운 화제거라가 생겨나게 되였다. 즉 가로세로보기 시가 탄생하여 물의을 일으키고있다.   인생은가고오고 생활은고독만이 은은히 오다담는 가고오는해식고 고독다해뜸뜸해 오만담식뜸들인 고이는 고해인가     ㅡ«만가»(시인과 성녀와 대화 )   위의 시는 가로 읽으나 새로 읽으나 똑 같다. 첫행 첫글자에서 시작하여 가로 읽으면 로 되고 첫행 첫글자로부터 내리 읽어도   인 생 은 가 고 오 고   로 된다. 두번째 행에서 첫글자로부터 가로 읽으면 < 생활은고독만이 >로 되고 내리 읽어도   생 활 은 고 독 만 이     로 된다. 모든것이 이와 같다. 마방진에서 가로 보나 세로 보나 똑같은 것과 같은 도리이다. 지금 박운호의 가로세로 시읽기를 두고  우리 조선족문단에 시비가 엇갈리는 찬반의 론조가 있는것 같은데 무척 좋는 현상이라고 보아진다. 박운호시인이 만들고있는것은 루빅큐브식시로서 그 발상이 기상천외이고 아주 어벌이 크고 모험적인 창작이라고 할수 있다.  루빅큐브식은 일명 마방진(魔方陈) 혹은 (魔方)마방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은 영어의 magicspuare에서 온것이다. 마방진의 형식은 1에서 n2까지 정수를 n형 n렬의 정사각형모양으로 라렬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전부 같아지도록 한것이다. 박운호시인이   우리의 훈민정음을 가지고 립체적인 마방을 고안해냈다는것이야말로 실로 칭찬을 받을만한 장거라고 할만하다. 우리 민족언어는 자모결합의 문자로서 한자처럼 글자 하나가 나하 내지 몇개의 뜻을 안고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 상형문자이고 뜻글자인 한자를 리용하여 마방진시를 만들기는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기타 게르만어, 라틴어,슬바브어, 아랍어 등 자모문자를 가지고 루빅큐브식시를 쓴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일이다.  우리 글도 자모음절결함의 문자이지만 천,지,인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우리글의 우수성으로 하여 마방진시가 가능하다. 오늘 박운호시인이 그 가능성을 가능성이 아닌 현실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초월의식이요 전위의식이요, 창조의식이다.  박운호시인은 사각형의 소우주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념주를 세고 좌선(坐禪)을 하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나름대로의 인생감오를 읊조리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글자유희가 아니고 수련을 동반한 고행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말하자면 단순히 가로세로 글을 읽는 무의미한 놀이가 아니라 철리와 사색을 전제로   시혁신과 시혁명을 꾀하고있다. 박운호의 시가 이제껏 창출된  조선족의 시 중에서 동양적숨결이 가장 다분하다는것도 특징의 하나라 되고있다.   2.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거듭나기    는 , ,,, , 등 모두 6개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이들중에서 시적으로 가장 성공하고있는 부분은 와 과 이며 시혁신에서 크게 괄목하만한것은 이다. 와 ,는 개성이 뚜렷하고 심오하고 철리적이고 함축성이 다분하다. 그외 민족의 우환의식을 다룬 와 시조를 다룬 은 어딘가 평범무의한 인상을 준다.  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과 설음이 진하게 내비치고있으나 어지간히 시재가 있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수 있는 그런 시들로서 여지껏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시들을 릉가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시조인  은 현대판  이라고 할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친구의 도리, 삶의 참자세 등을 주로 쓰고있는데 인생에 주는 계시가 적지 않다. 헌데 형식탐구에서 새로운 노림이 없어 아쉽다. 모든 시조가 단순하고 단일한 평시조의 옷을 입고 있어 신선한 맛이 나지 않는다. 좀 파격적인 형식으로  현대시조를 썼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그런 연유로 이 글에서 시조도 살핌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는 와 ,   중에서 일부 시들을 선택하여   옅은 소견을 피력코저 한다. 박운호의 시들을 일별하면 담담한 어조속에  고행의 흔적이 력력하며 그리고 그 고행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거듭나기로 일관되여있다. 시인은 크게 떠들지 않으면서 세상을 말하고 자신을 말한다. 는 시인이 이 세상을 랭철하게 관조하고 그 느낌을 쓴것이다.  인간의 거듭나기는 고통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인은 거듭나기 위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한다.   꿈속 떠돌던 마을어귀 숨죽은듯 고요한 내 무덤앞에는 자그마한 반듯한 비돌이 나지막히 세워져있었다 묵묵히 장사를 치르고 망종을 하면서 굳이 사람 사는 내막을 조금씩알게 되였다 …….. 사람은 한번 죽어보아야 사는 진상이 어렴풋이 짚이였다   ㅡ -   한다는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성찰이며 는것이 바로 거듭나기의 시작이다. 그러되 박운호의 시들은 기본상 불교를 핵심으로 동양사상에 뿌리내리고있다. “동양사상은 가치를 외부에 두지 않는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인간을 배타적인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나 장(場)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로서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있다.”(신영복,[강의] 54쪽) 박운호의 시들은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자신을 수련하고있다.   하늘을 우러르면서 하늘을 속이고 다소나마 알듯하면 부모를 속이고 나름대로 저도몰래 친구를 속이고 괜한걸 가지고 부부간에 속이고 아래도 속이고 우로 속이고   『하계단상』일부   한번 저승에 갔다가 인간세상에 돌아온 후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세상의 한 모퉁이이다. 속임과 속히움이 반복되는 인간세상, 이런 나쁜 근성을 고칠 처방은 없을가. “어쩌면 속아사는게 더 편할수도 있지 않는가/더러는 모르는것이 오히려 부처니까 말이다” 이것이 처방이다. 다음 시인은 의 병인을 밝힌다. “모든 음페된 절차속에는  질서가 있었고/모든 엄연한 사실은 감추어진 결과이다” 음페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감추어진 사실을 까밝아놓는것이 세상을 강건하게하는 방법이다. 시인은 이 세상의 온갖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있다.   지금 세상은 미상불 등불이 휘황하여 밤도 낮같아 가까스로 신변엔 모든것이 마법같은존재 까닭모를 징조는  떠도는 스캔들뿐 고조된 변형, 고조된 갈등 고조된 고민 고조된 불양   『스캔들』일부분    이 세상을 직시하면 수많은 추문들이 란무한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그 안에서 갖가지 추문들이 활보한다. 시인은 마법과 같은 스캔들이 살판치는 현실을 두고 서글프게 넉두리한다. “등불은 지금 고조로 난연하고/덩덩한 이 밤은 저조로 짙어간다”     시인은  인성의 자유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고있다. 시인은 제 나름대로 제 생긴대로 자유롭게 사는것도 재미라는것을 발견한다. 기지와 해학성분이 약간 가미된 『재미있는 세상』은  철리성이 다분하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장자의 『변무(辯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장자는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것이 자연이며 자유이며 도의세계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세상』은 장자의 사상이 어지간히 녹아있는듯 하다. 시인은 『재미있는 세상』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내가 재미있다고 남이 재미있는것은 아니다      내 재미로 남의 재미를 재지 말고  남의 재미대로 꼭 부러워할것까진 없을것 같으니 재미있는 세상에서 한껏 재미를 느끼며 재미있게 사는것이 재미가  아니겠는가   『재미있잇는 세상』 성찰과 거듭나기에서 극치를 이루는것이 『불당에 들어』와 『심성정곡』과 『관음당에 들려 향을 스르다』인것 같다.  시이은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끔하기 위하여 불당에 들어가서 친견한다.     번뇌도 고통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 탄식도 회포도 없는 선경에 닿으려면 거치른 마음에 가득하게 들어있는 거치장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느꼈을때 불당에는 향내가 저으기 진동하고 불상은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있다   『불당에 들어』   거듭나기란 결국은 참삶에 위배되는 모든 비정한 것들을 버리는것을 의미한다. 그러할 때 인간은 이 세상의 축복을 받고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는다. 시에 언급되는 와 는 바로 축복과 찬양 그것에 다름아니다.    『관음당에 들려 향을 스르다』도 우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시이다.   모처럼 마음을 비운 거기가 바로 오매불방 그리던 심령읭 정토이고 모처럼 비워진 거기가 바로 억조창생 극치가 왕생하는 극락정터가 아니가싶었다 영생토록 비우면 비울수록 거기가 바로 령혼이 환생하는 드넓은 왕국이고 령과 혼이 깃든 거기가 바로 왕국이 들어앉을 명당지인가싶었다   -『관음당에  들려 향을 사르며』 우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에게 불리한 모든 나쁜것들을 버려야만 비로소 극락정토에 이를수 있고 심령의 왕국에 도달할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의 철학이다. 시적주인공은 비움의 철학을 실현한다. 그래서 축복을 받아 “향연은 언제 보나 모락모락 피여나고/ 향내는 늘쌍 코앞에서 향긋하게 맴돈다” 마지막으로  『심성정곡』을 살펴보자.   무언한 자연속에  넉넉히 안겨 무명이 없고 망집도 망탄도 없는 무심한 심성을 무념으로 정화하면 무료한 집탈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무아경에 도취하여 신신이 되는듯 무상한 느낌속에   한번쯤 부처가 된다   -『심성정곡』 표제를 풀이하면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망집,망탄, 집탈이 인간을 해치는 잡물들로서 이런것들을 없애면  무아경에 도취하고 한번쯤 부처가 된다. 부처는 모든 깨끗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이름의 상징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경지이다.  박운호는 이 세상을 깊이 통찰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작업에 혼신을 다하는 시인이다.       2.소우주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목탁소리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인생의 고개길을 톺아오르던 시인이 마침내 오도의 대문에 들어서서 자신만의 소우주를 만들어놓고  경건한 자세로 좌선을 하고 념불을 하고있다. 시인은 자기 특유의 집을 짓는다. 건축모양은 마방진식이고 사용한 재료는 대부분 불문에서 가져온것이다. 시인은 불학을 포함해 공자, 맹자, 장자, 묵자 등 동양철학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갖고있다. 가령 동양철학에 대한 연박한  학식이 없었더라면 불교적,유가적냄사가 물씬 풍기는   마방진식의 시를 창출할수 없었을것이다. 보건대 시인은 가로세로세를 쓴느데 엄청난 대가를 치룬것 같다. 박운호시인은 무려 16수의 마방진시를 창작하였다. 이 세상에 없는 을 짓자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한채를 짓자해도 지난하고 아름찬 작업인데 무려16채나 지었으니 실로 놀라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박운호시인의 마방시를 주목하지 않을수 없는 리유는 시인이 만들어놓은 괴상하고 경이로운 소우주가 결코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지은 집이 아니라는 점이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무심히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인은 자기가 안주하고있는 절간을 인생도리를 낳는 요람으로 만들고있으며 하나하나의 목탁소리에다 인간세상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철리적이면서도 유정한 말씀들을 얹어주고있다. 또 하나 주목할것은 시인이 소우주안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대상들이 말짱 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이 동양적사상과 동양적철학에 시핵심을 두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사실상 가로세로보기시  이외의 기타 대부분의 시들에서도 동양철학의 숨결을 다분히느낄수 있다.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것이 인성이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잇는 여러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채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혀나가는 어떤능력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것이다. 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邻) 이라는 구절이 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덕성이 곧 인성이다. 인간이란 존재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동양적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존재에서 구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있는 관계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이다.”(신영복,[강의],41쪽) 여기에 비추어보면 박운호의 시핵심이 동양철학의 인성고양에  뿌리내리고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마방진시들을 보면 모두 , 즉 인간관계로 되여있다. 례하면 , , 등등. 한마디로 인성에 초점을 두고있다. 례문과 마주앉아본다.   천성   -시인과 수녀의 대화   안빈락도성한삶   빈한막심한생엔 락막한자과도견 도심자는시심마 성한과시행이지 한생도심이자성 삶엔견마지성을   위의 시를 전통시 형식으로 고치면 아래와 같다.     安貧樂道 성한 삶 貧寒莫甚한 생엔 樂莫한자 果盜見   道甚者는 是甚麽 聖汗과  施行이지   한생 道心이 資性 삶엔 犬馬之誠을       이 시를 풀이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가난을 즐겁게 여기며 이룩한 삶이요 극빈으로 구차하게 살아온 삶이라  실패한 자는 수행을 착실하게 못했기때문 불문에 들어선자는 마땅히 항상 깊히 사고하며 언제나 땀으로 시행할지어다 참다운 도심이 인간을 만들거늘 자기의 삶에 견마지성을 다해야 하리   이 시는 인간으로 되는 도리를 이야기하고있다. 자신을 항상 돌이켜보고 자기   삶에 충성하라고 귀띰한다.     도의 - -시인과 승녀의 대화   지덕은감여령고 덕성은여실수행 은은한종지론가 감여종성자은한 여실지자심감계 령수론은감계시 고행가한계시록   이 시를 전통시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지덕(智德)은 감여령고(堪輿 靈告) 덕행(德行)은 여실수행(如实修行)   은은한 종지(種智)론가 감여(堪輿) 종성(終成) 자은(自隠)한      여실지자심( 如實知自心 ) 감계 (鍳 戒 ) …. 령수론( 靈遂 ) 은감( 殷鍳)계시 고행( 苦行 )가한 계시록( 启示录 )   이 시의 내용을 풀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지와 덕은 하늘이 내리는것이요 덕성은 참다운 수행끝에 이루어지는것이노라. 부처님이 지혜로우매 하늘과 땅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나니 자신을 참답게 알면 교훈이 될것이로다. 하(夏)나라의 멸망의 력사를  깊이 통찰하고 스스로 고행을 행할지라. 이것이 곧 인생을 살아가는 계시록이니라. 이 시는 자신을 참답게 알면 실수가 없으므로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읽을수 있다..     귀속 -시인과 식차마니의 대화     꽃이이제그유정한옛삶후회없이지네 이젠제법저금은에적이회심어르던맘 이제곷은말없이피다말없이진다해도 제법은광을기리고나없이도진느거야 그저말을속에품지오이제질해거름속 유감없기에꽃으고스락갈때가든타네 정은이리품은듯이품인데시현한네맘 한에피고지고이젠성해가든히그넋은 옛적다나오스품성속여도넌피다지지 삶이말없이락인하여향가고다시지자 후회없이제갈데가도가지고가지않는 회심이도질때시든넌고고히지새는꽃 없어진지해가현히피다가지려는꽃의 이르다는거든한그다지지새는귀의소 지던해거름타네넋지지않는꽃의섭리 네맘도야속네맘은지자는꽃의소리네       이 시를 전통형식으로 고치면 아래와 같다.     꽃이 이제  그 유정한 옛 삶 버리고 후회없이 지네 이젠 제법 저 금은에 적이 회심(會心) 어르던 맘 이제 꽃은 말없이 피다 말없이 진다 해도 제법 은광(恩光)을 기리고 나 없이도 지는거야   그저 말을 속에 품지요 이제 질 해걸은 유감 없기에 꽃은 고스락 갈 때 가는거라네 시현(示顯)한 네 맘 한에 피고지고 이젠 성해 가든이 그 넋은   옛적 다나오스(Danaos) 품성 속여도 넌 피다 지지 삶이 말없이 락인(烙印)해 여향(餘香) 가고 다시 지자 후회없이 제 갈데 가도 가지고  가지 않는 회심이 도질 때 시든 넌 고고히 지새는 꽃   없어 진지(振摯)해 가현(假顯)히 피다가 지려는 꽃의 이르다는 거든한 그 다시 지새는 귀의소(歸依所) 지던 해거름 타네 넋 지지않는 꽃의 섭리 네 맘도 야속해 맘은 지자는 꽃의 소리에       동양의 미덕중에서 남을 위해 무수히 좋은 일을 하였으되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것이 가장 향기롭고 가장 값나가는 미덕이다. 이 시에서는 바로 유정한 삶을 살았지만 후회없이 지는 꽃을 통해 즉 비록 사라졌으되 결코 사라지지 않은 꽃의 섭리를 통해 불현(不顯)의 미덕을 칭송하고있다.  이제까지 살펴보았지만 박운호의 가로세로보기시는 마치 리상의 처럼 난해하여 제대로 해독을 하자면 품이 많이 들고 숨이 차다. 그  까닭은 첫째 정연한 마방진틀에 치중하다보니 띄여쓰기가 무시되였기때문이고 둘째 일반인들에게는 생경한 불교용어가 허다히 사용되였기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문법규정에 어긋나는 토가 사용되였기때문이다. 그외 틀짜기에 신경을 쓰다보니 행과 행사이에서의 의미련결이 불확실한 점도 적지 않다. 이런 제반 리유로 하여 박운호의 실험시 가로세로보기시는 시해독에서 정력을 많이 허비해야 하는  약점을 드러내고있다.  많은 품을 들여야 대략적인 의미는 파악이 가능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평자들도 이러할진대 일반 문인들이나 백성들이야 더 말할것이 있겠는가.  필자의 일가견이지만 시인은 이쯤에서 발걸음을 멈추는것이 좋을듯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난해한 형식의 시는 시의 대중성과 보편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따라서 대중의 호응이나 찬양을 받을 확률이 대단히 적기 때문이다. 물론 금후 시인이 난해성을 피면하고 대중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전제하에서 마방진시를 계속 쓰겠다면 그것은 별문제로서 필자의 권고는 근근히 로파심에 불과할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는 하나의 귀중한 시혁신이고 시혁명임에는  틀림없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특별한 형식에다 동양철학을 다져넣었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래간만에 우리 시단에 괴상하고도 신기한 선물을 안겨준 는 우리 시단의 경사이다.    의 출간에 진심으로 되는 축하를 보낸다.
1    한석윤론ㅡ<6월을 위한 5월의 노래>출간 댓글:  조회:1349  추천:0  2014-01-08
한석윤론ㅡ출간      최근 연변교육출판사에 의해 한석윤론 가 출간되였다. 원래는 3년전에 기획된것이였지만 본인이 “나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어떻게 나의 작품론이 먼저 나갈수 있냐”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오늘에야 비로소 모습을 보이게 되였다.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는 중국조선족아동작가를 다룬 첫 단행본작가론이라는데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될것이다. 본서는 제1부 작품론-『연필끝에 아롱진 칠색의 세계』, 제2부 인간론-『몸으로 그려내는 동심의 나라』,제3부 『한석윤작품선』으로 엮어졌다. 27편의 문학평론과9편의 인간론으로 꾸며진 한석윤론을 읽노라면 우리는 동시인으로서의 한석윤, 인간으로서의 한석윤, 아동교육가,사회활동가로서의 한석윤을 일목료연하게 알수 있게 될것이다. 한석윤 선생의  좌우명은 “후대를 길러가는 길에 은행나무처럼 깨끗이 살고 초불처럼 몸과 마음 다해 가리 ”이다. 그는 이 좌우명을 인생의 락으로, 분투목표로 삼고 오늘까지 동시창작과 어린이들을 위한 힘겹고도 아름찬 고행의 길을 걸어왔다. 제1부에서는 한석윤선생이 동시창작에서 이룩한 혁혁한 성과를 집중조명였다. 비록 늦깎이로 동시창작에 몰입하였지만 1980년대초에 김득만, 최문섭 등과 함께 동시혁명의 홰불을 높이 추켜들고 동시혁명에 투신하면서 중국조선족동시문학창작의 세 지평을 열었다. 그는 동시는 우선 시로 되여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동시에서의 이미지창출에 혼신을 쏟아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시에서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주장은 황당하고 불가능한것으로 치부되여 반발도 적지 않았지만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으로 증명하여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결과 늦깎이로 동시창작에 뛰여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시간내에 알찬 현대동시들을 륙속 창작하여 동시단을 경악케 했으며 일약 동시단의 선두자로, 거목으로 급부상하였다. 한속윤선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 등 11권의 동시집을 펴냈고 그 보상으로 선후하여 , , , ,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받아안았다. 제2부에서는 아동교육가, 사회활동가로서의 한석윤선생의 업적을 소개하였다. 한석윤선생은 어린이신문사업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석윤선생의 피타는 노력으로 가 로 승격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으며  그후 그 기세를 타고 중국소년아동간행물협회로부터 일류신문으로, 국가신문출판총서로부터 우수신문으로, 길림성신문출판국으로부터 성1급신문으로 평정되였다. 한석윤선생은 청소년문화사업에서도 커다란 업적을 쌓았다. 1982년에 우리 말, 우리 글을 빛내기 위해 행사를 11회 조직하였고  1987년에 창조형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를 발기하고 행사룰 12회조직하였다. 1993년에 청소년들에게 시대적전형을 수립해주기 위해 를 발기하고 행사를 10회  조직하였으며 1994년에 『신동컵수학경연대회 』를 발기하고 한국과 교류하여 학생들을 국제수학경색대회에 출전시켰다. 1998년에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사랑의 일기쓰기공모전』을 발기하고 행사를 10회 조직하였으며1998년에  『중국조선족장학금상』을 제정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을 8차 지원하였다. 한석윤선생은,  2003년에 퇴직한 후에도 조선족청소년사업을 위해 불후의 업적을 창출하였다. 자기돈 4만원을 기초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청소년문화진흥회』를 발족하고 법인대표를 맡았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력사에 기록될만한 수많은 일들을 해냈다.  2006년에 어려움속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청소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초록장학상』을 제정하고 14회에 걸쳐 장학금을 전달하였으며 2007년에 아동문인들이 훌륭한 아동문학작품을 쓰도록 격려하기 위해 『윤정식아동문학상』을 성립하였다. 2008년에 조선족청소년들속에 독서열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변조선족독서사와 함께 『엄마랑 함께 하는 독후감쓰기대회』를 발기하고 5회 조직하였으며 그해에 또  사랑의 동시가 아기들 가슴속에 가 닿도록 하기 위해 『엄마랑 함께 하는 동시랑송대회』를 발기하고 두차례 개최하였다. 역시 같은  해에 조선족유명동시인들을 기리고 민족혼을 고양하기 위해 동시동네를 마련하고 동시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5개의 동시비를 완성하였다. 2009년에는 중한문화교류를 추진하기 위하여 연길, 도문, 안도에서  『시민들과 한께 하는 시화전을 』 두차례 열었으며 2011년에 동시동네에 윤동주시비를 세우고  윤동주포럼을 조직하였고 2012년에  자치주성립60주년을  맞으며 진달래광장에다  『자치주성립경국의 노래』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 축성에 한석윤선생은 자기의 사재 만원을 희사하였다. 제3부분에는 한석윤선생의 대표동시 30수와 한편의 수필, 두편의 칼럼, 두편의 평론이 실려 있어 금후 한석윤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한석윤론 는 한권의 책이라기보다는 한석윤선생이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생총화요, 인생찬가이다. 아동작가치고 어느 누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련만 어린이들에 대한 한석윤선생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넓고 진지하여 실로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있다. “아이들이 좋아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아이들이 귀여워서 함께 뛰놀고 노래 부르며 살아온 20년, 그 시시각각은 정말 너무나 행복한 순간들이였다. ”그렇다. 한석윤선생은 일생을 바로 이렇게 살아왔다. 한석윤 선생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자신의 삶의 전부요, 행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기에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이기도 하다. 미래보도 더 큰 재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한것윤선생의 지나온 발자국을 돌이켜보면 실로 우리 어린애들과 우리 민족을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하여 감탄과 고마음을 금할수 없다.   어떻에 한 사람이 평생에 이토록 많은 일을 할수 있을가. 그 까닭이 무엇일가.  사랑, 사랑이다. 어린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꽃으로 피여 한것윤선생의 삶은 언제나  싱그럽고 향기롭다. 로목개화심불로(老木開畵心不老)란 말이 있다. 아마도 한것윤선생을 두고 한 말인것  같다. 나이가 70이지만 마음속에 항상 사랑의 꽃이 피고있으니 한석윤선생은 늙지 않았다.  일년4계절 꽃을 피우고있는 큰 나무, 언제 어디서나 황금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있는 큰 나무,  그리하여 영원히 늙지 않고 어린애로   살고있는 큰나무,이것이 한것윤선생이다. 한석윤론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가 우리 민족의 문학고(文學庫)에 소중한 보배로 소장되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