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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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전체 [ 35 ]

35    5-4. 나는 왜 반론을 안 하는가? 댓글:  조회:7997  추천:55  2013-08-17
준비중
34    5-3. 내 손이 말 한다 댓글:  조회:5401  추천:6  2013-08-11
3. 내 손이 말 한다   나는 손이 유달리 작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은 것과 손이 작은 것은 나의 신체적 양대 콤플렉스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핸디캡으로 내 생에 따라다닌 그림자와도 같았다. 여성들까지도 내 손을 보기만 하면 “아이고, 손이 참 작기도 하네요! 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 한 것처럼 탄성을 지른다. 누구 말마따나 옛적부터 남자들은 “기생의 손을 쥔다”는데, 나는 오히려 “기생한테 손을 잡히운다”. 실제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빠 같은데 가면 호스티스들은 나의 손을 보고 귀엽다고 하며 자기의 손보다도 야들야들 하다고 감탄한다. 나의 손을 본 여성은 나의 “닭도 잡을 힘이 없는 손으로부터 결코 강탈할 위협이 없으니 안심 한다” 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심하고 내 손을 누구에게 맡길 수 없다. 세상사람 들은 수상(手相)을 잘 보는데 나는 상대의 손금은 잘 보아주지만, 내 손금은 보여주기 꺼려한다. 이유는 작은 손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작은 손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가 따로 있다. “남자는 손이 작으면 보배를 잡고, 손이 크면 풀을 쥔 다” 라는 중국의 속담이 그렇게 감미롭게 들릴 수가 없다. 우리의 속담에도 “남자는 손이 고우면 귀하고 여자는 손이 고우면 천하다” 라는 말이 있다. 아마 손이 고운 여자가 천하다는 얘기는 옛날부터 화류계의 기생이나 또는 창녀를 가리키는 전통적 조선의 가치관에서 온 말 일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매일 노동과 가사에 시달려 소나무껍질같이 투박한 손을 한 농민의 여자가 귀하다는 逆說이 될 터 인데, 그렇다면 찬성하기 어렵다. 전통적 관념으로 말하면 내 작은 고운 손은 샌님(先員)의 손이다. 망치와 괭이나 삽 따위를 쥐지 않고 붓을 쥐고 부채를 쥔 문장과 풍류를 일삼는 “고귀”한 선비의 손이다. 그러니 나의 손은 으레 미수(美手 )요, 귀수(貴手)일 것이다. 이렇게라도 한번 내 작은 손을 위해 옹호하는 예찬을 해야 내 손에 위안을 줄 것이 아닐까. 손은 무엇인가? “그대는 그곳에서 귀한 손으로 저희를 이끌고 오른손으로 저희를 잡아주십니다.“ (시편) 139의 시구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손을 의미하는 단어는 기둥을 가리켜 말하는 언어와 관련돼있으며 지지, 힘, 강함을 나타냈다. 로마에서는 손은 보호, 권위의 상징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도들은 神 의 모습을 구름 속에서 내민 손으로 그렸다고 한다. 상징으로서의 손은 언어의 대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언어장애자는 손짓의 수화(手話)로 말을 하고, 맹인은 손으로 점자를 통해 글을 읽었다. 손은 말이고, 손은 눈이다.--- 나는 이것이 손의 무엇이냐? 에 대한 가장 함축적이고 실질적인 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손은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나? 하는 연구는 생물진화론,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생리학 등 여러 연구 분야에서 해답이 속출하고 있다. 나는 손은 생리적인 역할(도구)의 뿐만 아니라 그 집단 인간의 문화자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자체가 그의 손안에 축소돼 있어 손이 인간의 대변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手)자로 인간의 하는 일, 직업을 말한다. 가수(歌手)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어에는 聞き 手 , ヤリ 手, 買い手, 賣手, 相手.... 차례로 듣는 사람, 하는 사람, 사는 사람 파는 사람, 상대의 사람이라는 뜻을 이렇게 수(手)롤 표현한다. 수당手當, 打手, 견본이란 뜻의 手本, 그리고 스스로 하는 일을 勝手(손이 이긴다)고 표현한다. 손이 이긴다. “손은 밖으로 튀어나온 뇌”라고 하니 손은 인간 신체의 최고 신기수(神技手)가 아닌가! 손재주, 말재주란 말은 있어도 발재주란 말은 없다. 나는 발재주라면 축구를 드리불 하는 것 밖에 모른다. 기실 손재주 하면 나는 별 신통한 재주가 모자란다. Aㆍ비어스는 에서 손은 “인간의 팔 끝에 달린 통상 타인의 포켓에 들어갔다 나오는 기묘한 도구”라고 그 스리의 신기를 야유하고 있으나 그러한 신기는 물론, 나는 컴퓨터의 건판을 치는 가장 쉬운 일도 못하며 자동차 운전은 고사하고 주방의 가스 불 점화기 켤 줄도 모른다. 어이없다고 친구는 “손이 발에 붙었냐?” 라고 조롱하는 말에 나는 “아니 사타구니에 달렸어”하고 자조한다. 나는 또 흔한 젓가락질도 잘못하여 늘 음식물을 떨 군다. 내 손이 단 하나 중요한 일을 해주는 것은 내 두뇌 속에 사유를 펜으로 써 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내 손이 내손일수 있는 가장 큰 까닭은 육필로 글쓰기를 하는 것인가 한다. 내 손은 내 입보다 더 말을 한다. 입도 못 하는 말을 내 손이 척척 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내 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마 내 육신에서 제일 작고 귀여운 내 손가락들이 필을 잘 쥐고 글을 줄줄 써내려가는 재간이 유일한 자랑거리일까? 눈, 귀, 코, 위장, 간장, 그리고 대장, 소장, 어디하나 자랑할 만한 데 없는 내 병신 같은 육체에서 작은 손이 나를 대변해준다. 심리학자 융의 지론대로 “창조와 생산의 힘의 상징”인 손만은 작으나 건강하고 아무리 부려 먹어도 고달프단 말 한마디 쉬자는 말 원성 없이 수걱수걱 움직여준다. 누가 나를 귀재라 하는가? 나는 귀재(鬼才)도 기재(奇才)도 아닌 수재(手才)다. 수재인 만큼 손으로 글을 쓰는 컴퓨터 기계문명의 복을 누릴 자격도 없는 나이다. 유년기부터 병약한 나는 신체의 모든 부위가 작고 약하여 타자와 나와의 접촉에서 매우 민감 체질의 인간이었다. 이를테면 음식물 반응이 예민하여 먹고 마시는데서 맞지 않으면 곧 설사를 하곤 했다. 그래서 주위 어른들의 보육과 관심을 많이 받아오면서 민감한 체질적 감수성을 키운 것 같다. 내가 곰 같이 터프한 체질, 건강한 아이였다면 주위의 배려는 적었을 것이며, 민감한 감수성이 훈육되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감수성은 사유하고 글 쓰는 것으로 집중된 것 같다. 공자진(龔自珍)이 노래했던 병신의 病梅병매가 더 아릿다운 것은 그 病態 때문이다. 병태 적으로 작거나 이상하거나 하는 것이 때로는 아름다움으로 되는 것이다. 작아도 자기 구실을 하는 것이 좋다. 연장만 대자로 크고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은 오히려 큰 것이 비난의 상대로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자신의 몸의 핸디캡이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면 창조적 에너지로 변신하는 힘이 있는 법이다. 오른손에는 학문, 왼손에는 문학을, 나는 내 이름을 이렇게 해석 하고 싶다. 관념적으로 좌우의 손의 중요함의 차이가 거의 문제시 되지 않는 오늘날, 오른손도 이성(理性), 사유를, 왼손은 신비, 감성의 상징체이기도 하다, 서양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왼손으로 쥐고 고환을 나꿔챘다는 것에서 왼손은 불길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좌우의 양손이 합치면 큰 역량이 되며, 타자와 손과 손을 잡는 것은 결속과 강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악수와 같이 신임과 평화를 상징한다. 아무튼 ‘학문’과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연구와 글쓰기, 이것은 내 작은 손이 다 해주니 너무 고마운 존재이다. 이 손에 대해 나는 거수경례로 가장 큰 경의를 표하고 싶다. 며칠 전 12살의 아들 녀석이 내손을 보고 “아빠 손은 내 손 만큼 작아요” 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빠보다 키도 크고 손도 큰 남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나는 희열을 느꼈다. 나의 후대는 나만큼 되지 말고 부디 큰손, 큰 키의 사나이로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필을 쥐든, 화필을 쥐든 아니면 무엇을 하든 큰 손만큼 마음이 큰 사나이로 성장했으면 한다. 어쨌거나 나는 내 작은 손을 아프리카 땅덩이를 준대도 바꾸고 싶지 않다. 말하는 내 손을 말이다.
33    5-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댓글:  조회:5859  추천:28  2013-07-28
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이글은 일본과 나의 만남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다. 솔직히 고백하여 나와 일본, 일본문화와의 만남은 일종 “운명적인” 만남의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만남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惡緣)의 만남이 있고, 반드시 만나야 할 길연 (吉緣)의 만남이 있다면, 나와 일본은 후자이다. “운명적”이란 것은 필연적인 것과 동연(同然)인바, 나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으로, 또는 생리적으로 일본, 일본문화가 좋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개인과 일본과의 만남의 레슨은 유년시절부터 일찍이 시작된 것 같다. 모든 만남(사랑 미움도)은 추상적인 것이기 보다는 구상적인 것에서 싹이 트는 법이다. 우리 집에는 값진 가보(家寶)라 할 만한 골동품은 없었지만 할머님의 장롱에는 두 가지 추억이 슴배인 “보배”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아껴 쓰시던 단계 벼루(端硯)이고, 또 하나는 곤 색에 은회색 무늬가 디자인 돼 있는 일본제 넥타이였다. 그 넥타이는 일제식민지시기 지식인 (한방의이며, 선비)이었던 조부님과 친하게 사귀던 일본인 지식인 나카무리씨에게서 받은 선물이라 하신다. 넥타이는 우리 가족과 일본과 연결된 이야기(역사)의 심벌이었다. 어린 내게 있어서 그것은 처음 느낀 일본의 향기였다. 조모님과 백 조부모님들은 모두 일본식민지의 체험자였기 때문에 늘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인 (병사?)에게 처음으로 “미깡”(귤)을 선물로 받았던 일화, 당시 아는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던 우정의 에피소드를 얘기하시면서, 일본인은 전부다 악인(惡人)이 아니었다고 가르쳐주었다. 향기 그윽한 일본인의 이미지, 이는 당시 모택동시기 항일영화에 꼭 많이 등장하는 “바카야로” 를 연발하는 콧수염의 일본군인의 추한 이미지와 오버럽되면서 기묘한 엇갈림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모든 일본인은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게 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적어도 “나쁜 일본인”중에 “좋은 일본인”도 있었다는 인식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어린 나에게 일본인은 좋고도 나쁜 양이미지가 동시에 기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한 것일 것이다. 소학교시절 숙부의 서가에서 들춰낸 일본어판 인지 하는 잡지의 페이지를 번지면서 최초로 접하는 가나문자에서 나는 신비스러운 묘한 감각을 느꼈다. 한자도 아니고 우리 한글도 아닌 기묘한 생김새에서 미적(美的) 妙味를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 읽고 뜻을 내는가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안게 되었다. 중고교에 들어가자, 홍수같이 유입되는 일본영화, 애니메이션에 매혹되었다. (중국명은 ‘추적(追捕)’)의 다카쿠라켄(高倉健)이 맡은 남자주인공과, 나카노 요시코(中野良子)가 맡은 순정아가씨 마유미의 생머리의 표탕하는 美에 짐대하게 매료되었다. 잇따라 쇼오와(昭和)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 주연의 영화, 드라마에서 청초하고 순진무구한 여성미에 또 깊이 침혹되었다. 나는 속으로 주제넘게 야마구치 모모에와 똑같은 여성과 만나서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결국 40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 관한 서적, 소설도 읽게 되었으며 일본문화에 포로 된 고교생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학수험전년인 고교 2학년 때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나는 일본어가 좋아서 일 년도 안 되어 제법 숙달하고 마스터 하여 당시 유명한 동북사대의 일본문학과에 합격했다. 소학 때부터 “문학소년”으로서 문학이 좋아서 장내 작가나 학자로 되려는 꿈을 꾸고 있던 나는 대학 전공을 일본어과로 선택했던 것도, 생각하면 모종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때 수험 전에 지망대학 원서를 제출하는데 중국문학부, 조선문학부와 일본문학부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 망설이던 끝에 최종적으로 일본문학부를 동북사대 제일지망으로 택했다. “외국어를 아는 것은 또 하나의 文化를 아는 것이다”는 일본어 교사의 말씀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의 일어일문과 입학으로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일종의 “국내 유학”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어 교수님을 거의 일본문부성에서 파견되어 온 대하국문과 교수나 고교 국문교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일본인 교수님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본문화를 접촉하고 섭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독특한 청결함, 깔끔하고 스머트한 몸매나 친절성.... 이런 것들에서 나는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항일영화에 익숙히 보아오던 콧수염에 바카야로를 외치는 조폭스러운 “왜놈”, “日本鬼子”의 이미지와는 전혀 운니의 차이였다. 조모님께서 들려주던 “좋은 일본인”의 이미지가 눈앞에 현실로 생신으로 나타난 셈이다. 일본어 반은 외국문학부에서 하나밖에 없었는데 전원 20명이었다. 급우는 동급생인 만 17세, 18세와 사회인에서 입학한 25세, 26세 정도의 ‘어른’들도 있었다. 그때는 문화대혁명후 회복한 대학수험제도라서 사회인도 많이 수용했던 것이다. 그 ‘어른’들은 나를 “小日本”(꼬마일본인)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나를 일본식 이름으로 “小金井(코가네이)”로 불렀는데, 나는 별 반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 중국식으로 나를 부를 때 ‘小金’(꼬마김씨)라서 그 “金”씨에 유사한 ‘小金井’이란 일본성씨를 붙힌것 같다. 내가 반감하지 않는 이유는 이름이나 별명을 내가 부르는 게 아니라 타자가 부르는 他者用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나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한 그들의 自由이니까. ‘小金井’은 일본 근대 문호의 작품(나츠메소세키 아니면 누구인지 기억은 잘 안난다)중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과 왜소한 체구인 나의 이미지를 오버럽 한 것일까? 나는 그때 이미 대단히 일본을 즐기는 일본애호가, 지금 식으로 말하면 ‘哈日族’(대만 젊은 작가가 창안해낸 명칭, 일본을 좋아하는 젊은이를 이르는 말)에 속했다. 1982년 경이니까 교과서문제로 일본과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상황 속에 반일감정이 유행했던 시기였다. 그것을 감안 하면 나의 “哈日”은 ‘이단’적이였다. 대학 4년 동안 일본 교수님들의 일본어 특훈을 통해 덕분으로 나는 오리지널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학부도서관에 소장된 일본 직수입 도서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은 것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었다. 그중에는 중국에서 공개 번역 출간되지 못한 세계명작, 사상서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일본어로 그런 서적을 많이 탐독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일본서적은 정신의 식량으로 되어 배고픈 나의 정신세계를 채워주었으며, 나의 가치관, 세계관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일본 펜 벗들이 우송해주는 일본어책들을 통해서 일본 文化의 레슨은 쌓이기 시작했다. 1983년 인가 처음 읽은 동포문인 이어령 선생의 을 통해 일본에 대한 동경은 더 한층 중대되었다. 그리고 이어령선생에 대한 개인적 숭배의 싹도 트기 시작했다. 일본, 일본인 그리고 일본문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폭됨에 따라서 나는 왜 동양에서 그 작은 섬나라가 솔선하여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세계 경제, 문화의 대국이란 기적을 창조해낼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강렬히 매혹되어갔다. 나는 고교 때부터 싹텄던 동일한자문화권인 중, 일 ,한 3국의 문화비교분야에서 탐구를 할 결의를 남몰래 내렸다. 그래서 나는 미구한 장래에 일본유학을 노렸으며 중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포기 해버렸다. 대학 근무 6년후 일본유학의 찬스가 나에게 지구에 떨어진 어린왕자같이 나타났다. 재일 한국인 비교문화학자 김양기(金 兩基)교수님의 알선으로 도시샤(同志社)대학의 니이지마(新島)장학금을 운 좋게 획득하게 되어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에 별 따기”라는 니이지마 장학금은 내 운명을 바꾼 일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일본 땅에 발을 내 드릴 때부터 일본 녹차의 청향이 공항의 로비에 물씬 풍기던 일은 오늘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있다. 중국 공항에는 중국요리의 기름 냄새가 나고 한국 공항에는 김치의 냄새가 나는 것은 그대로 3국 비교문화의 상징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처음인데도 어쩐지 낯익다”는 일본의 한국관광에 대한 광고용어가 유명하다. 이 말과 같이 처음 와보는 일본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했고 익숙한 고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항일영화에 나오는 잔혹하고 하품(下品)의 일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 가든 질서정연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일본이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서 일본에서 지내는 삶이 오히려 중국내에서 보다 내 개인적으로 행복한 기분인 것은 나로서도 불가사이 했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이 심경을 토로하자 “그러세요” 하면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표정의 이면에는 어딘가 석연치 못하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 했다. 아마 그 친구들이 외국생활 경험이 없었던 탓으로 나의 이국생활감각에 대해서 미처 이해를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 뒤 프랑스에서 십여년동안 생활 해온 일본인은 나의 체험담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異文化체험이 있냐 없냐에 따라 이문화 이해 정도는 물론 그 생활자체에 대한 감각도 판이 한 양상을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생활이 일점의 불편 없이 다 완미한 것은 아니었다. 순풍 만범한 것도 아니었다. 타민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얕잡아 보거나 경제적 수준이 나린 국가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에 대해 차별시 하는 일본인도 주변에서 만났다. 속으로 기분 나빴으며, 특히 입국관리의 그런 노골적인 외국인 차별 직원과도 나는 패스포트를 집어 뿌리면서 싸운 적 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他文化이해의 절박성에 대해 더 깊이 몸과 피부로 느꼈으며 비교문화를 통한 상호문화이해, 인식의 중요성을 터득하기도 했다. 학문을 하고 표현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학자, 작가, 오피니언)에 있어서 그 언론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회, 일본은 그런 자유가 발달된 나라였다. 이 자유의 공간, 서로 간섭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분위기와 그 사회적, 학문적 자유의 바람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고  선렬한 자유로 와 닿았다. 대학원 연구공부와 함께 독서의 자유로운 세계. 그것이 나에게는 말 그대로 최고 지복(至福)의 자유였다. 자유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비교문화의 탐구는 박차를 가 할 수 있었다. “박차에 박차를 가한다” 라는 말과 같이 일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것, 따라서 중국과 한국에 관한 문제도 더 알아야 한다는 구지욕으로 나는 “탐욕” 하다시피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문화, 일본인론에 관한 연구에 도취된 동시에 福澤論吉, 內藤湖南, 水井荷風, 谷崎潤一郞, 涉澤龍彦, 坂口安語, 安部公房, 村上春樹, 梅原 猛, 中西進, 梅棹忠夫, 加藤周一, 鳥居龍藏...등의 책에 심취했다. 도시샤대학시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강연을 처음 청강하던 광경은 생애 망각할 수 없는 감동적인 한 광경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나는 도시샤 대학이 또한 우리 민족의 탁월한 문인을 배출한 모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지용, 오상순, 그리고 윤동주, 이들의 족적을 따라 나는 도시샤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역시 여기서 나는 이들 선각자들과 또 다른 만남을 이룩했다. 28세 청년의 만용으로 나를 이들의 뒤를 이어 문화사에 남기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거창한 목표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도시샤에서 공부하던 족적을 추적가하기도 하면서 또 세상이 모르는 “발견”도 하기도 했다. (특히 윤동주에 대한 나의 연구작업도 이때 싹이 텄다. 앞으로 윤동주 인물에 관한 다른 시각에서 밝히는 작업을 책으로 낼 예정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일본학계의 비교문화영역에서 보수적 체질을 느끼게 되었다. 즉 일본문화를 항상 서구와의 비교만을 통한 것으로 시도하는 편향성을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좋으나, 동일 한자문화권에서 유사한자끼리의 비교를 통하여 각국의 문화특징을 보다 정확히 석출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나는 이 비교원리를 자칭 “近色비교원리”로 이름 짓고 서양과의 비교보다도 같은 동색계열의 비교가 오히려 더 극명하게 그들의 차이점을 분석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일테면 “황색”이라면 “담황” “심황” “주황”.... 등 미묘한 차이를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인종, 문화상 비슷한 한중일의 비교가 더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이 원리에 따라 나는 나름대로 한중일 3국 비교문화론을 전개시켰다. 그리하여 비교문화론, 문명비평 등 집필과 강연이 일본에서 먹히게되었으며, 잇따라 중국과 한국에도 파급되어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많은 팬의 옹호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속속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면서 동아시아의 주목을 받으며 조선족의 글쓰기의 가능성을 알리고자 했던 나의 꿈을 이룬 셈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문화 활동을 두고 같은 조선족의 어떤 연변 지식인이 나를 “매국노” “친일파”로 격렬히 왜곡중상하기도 했다. 나에게 팬들은 반론을 안 한다고 야단법석이었으나, 나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나의 국경을 넘어선 모스코폴지탄적인 사상경계나 월경하는 글쓰기의 진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론을 해도 그들이 이해할 수 없으며 가치 없는 내부소모전으로 되기 십상이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연변의 어떤 학자가 나를 “매국노”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세월에 무슨 친일파고 매국노고 야단인가? 어디에 매국노가 있나? 외국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하는 시대에, 거 참 나 시골 할매 보담 생각이 짧은 학자도 있단 말이냐?!” 그러시면서 어머님을 웃으셨다. “괜히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니 하고픈대로 하라. 사내가 작게 태어나도 맘은 넓어야 한다. 내 보건데 네 글이 바른 소릴 하던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무식자 어머님 역시 나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나의 월경적 문화적 코스모폴리탄적 사상에 이해 해 달라고는 하고 싶진 않다. 사람은 다 자신의 수준과 시야에서 말을 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자신을 “친일파”를 넘어선 “애일가”, 아니 “知日家” 로 본다. 정치이념을 넘어서 생리적으로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그리고 일본도 중국과 한국같이 문화적 고향과 조국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인이라 생각한다. 나는 타인에게 일본을 무리하게 좋아하라, 사랑하라 권유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단 타자와 비교에서 타자의 결함을 비웃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결함을 끄집어내고 비판하여 자기성찰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사탕발린 찬미가를 부를게 아니라 앎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이야기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애초에도 지금도 나의 글쓰기를 이룬 큰 기둥의 하나이다. 따라서 자기와 타자, 타문화의 배척, 배제보다는 나는 상호의 대화, 이해와 융합을 주장하는 인간이다. 21세기는 그러한 대화와 공존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기실 일본에서 내가 발견한 일본문화의 경계성, 복합성 등에는 일본형의 공존, 융합의 미학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을 과거의 역사체험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비하하며 경멸하기는 쉬우나, 그보다도 생산적 인 것은 그들을 이해하고 일본문화 속에 숨겨진 장점들을 찾아내서 연구, 습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본의 외국학습에 대한 방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문화, 문명을 학습하는 학습의 우등생적인 체질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리하고, 상호인식에도 유익하며 공존공생의 기반을 구축해 주는 구체적 작업이 된다. 앞으로도 나는 체질적으로 맞는 일본문화를 한국, 중국문화와 함께 계속하여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기에 나는 그에 대한 결함, 약점을 비판, 성찰하는 연구, 비평의 글쓰기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美)의 나라 일본, 문(文)의 나라 중국, 그리고 정(情)의 나라 한국- 3개의 조국과 문화의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을 글쓰기로 향수하면서 만끽하고 있다. 간략하게 쓴다던 것이 또 길어졌다. 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문학연구자이며 일본을 사랑한 미국학자 도널드 킨(Donald Keene)의 말로서 이글을 접으련다. “나와 일본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 기묘한 운명에, 나는 장래에도 계속 감사해나갈 것이라는 것만은 지금 너무 명백히 잘 알고 있다.”  
32    5-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6228  추천:26  2013-07-21
제5장 월경ㆍ자유ㆍ비판 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아침 식사는 북경의 레스토랑에서 우롱차에다 기름 빵을 먹는다. 그리고 정오에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서울 시내로 달려가서 삼계탕에 들큰한 동동주 한 사발을, 저녁은 어느새 도쿄에 날아와서 신선한 생선회에 기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런 3국의 동시 체험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된 지도 오래다. 도쿄의 아담한 선술집에 홀로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어떤 기묘한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1998년 6월 나의 장남 철야가 태어났을 때 중국에 계신 어머님을 초청하여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3개월의 간의 일본 체류 기간에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기만하다. “얘야, 넌 꿈속에서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하는 거냐?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지껄이지, 또 이따금 우리말을 하다가도 일본말로 중얼거리기도 하니 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어머니와 함께 나도 무심결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자신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꿈에서까지 세 나라 말을 쓰다 보니 사람까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게 도대체 뭔가? 나에게는 이런 ‘혼란상태’가 오히려 하나의 낙이다. 나는 스스로 자신을 일종의 ‘분열 인간’이라고 부른다. 내가 감히 ‘분열인간’이라고 자랑삼아 큰소리칠 수 있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항로와 밀착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국어와 중국어을 동시에 구사하며 2중 언어의 문화생활을 해온 내가 20대가 끝나는 무렵에 일본으로 유학 와 일본 문화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한지도 벌써 20년이 된다. 그리고 또 모국인 한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모국 문화를 거듭거듭 체험해 왔다. 게다가 해마다 중국에는 두세 번꼴로 돌아가서 현지 생활을 느끼고 온다. 내 가슴속에는 중국 문화와 일본 문화, 그리고 한국 문화라는 동양 세 나라의 문화에다 조선족 문화까지 비빔밥같이 온통 엉키고 뒤섞여 내 입에는 가장 맛있는 문화 비빔밥이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고 복합화 시키는 체험 없이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향하는 것은 허위적인 슬로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벌써 50여년 전에 미국의 사회학자 E, V. 스통키스가 그의 저서 에서 경계인(境界人)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경계인이라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복수의 집단에 소속되긴 하나 어느 한 집단에도 완전히 빠져 버리지 않으며 그 귀속이 분명하지 않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경계선,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경계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최근 문화인류학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디아스포라가 이에 해당된다. 원래 유태인이 이산이라는 뜻에서 온 것인데, 자기 문화에도 이문화에도 소속되지 않고 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창조의 에너지로 삼는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동과 이산을 뜻하던 네거티브 개념이 국제화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없이 소중한 포지티브 개념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타향에서 사는 사람, 월경 인간은 어둡고 슬프고 가련하다는 이미지가 다분히 농후하며, 향수에 젖어 망향의 안타까움으로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가는 존재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가요만 보아도 타향살이와 고향 떠나 사는 사람의 슬픔과 망향의 절절한 감정을 담은 노래가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문학 작품에도 이 같은 테마의 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늘 보아 오던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는 타향에서 온 경계 인간이나 월경 인간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짙다. 내 친구 중에 해외에서 장기간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한국에 간 중국인 가족이 있는데, 아들이 중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에게 심한 차별을 받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한국어를 잘 모른다고 욕을 하고 따돌려 아들이 등교 공포증에 걸렸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내에 살고 있는 이국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중국 교포에 대한 멸시와 학대는 한두 마디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족은 한국에서는 경계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껏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국 문화와 중국말에 익숙해 살다가 말로만 들어서 알고 있던 한국 문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심각한 갭이 생기며 커다란 컬쳐 쇼크를 받는다. 그러나 월경 인간을 못마땅하게 보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엾기만 하다. 월경 인간은 사실 네커티브한 이미지와는 달리 포지티브하게 문화 모험을 감행하는 시대의 용사라고 할 수 있다. 둘 또는 그 이상 복수의 문화와 사회에 소속하면서 그 모두와 거리를 둔 채 여러 개의 가치관을 갖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의 이들에게는 있다. 나 같은 월경 인간의 눈에는 오히려 하나의 문화에 푹 빠져 그 테두리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같이 하나의 사고밖에 할 수 없는 단일 문화의 인간이 안 되어 보인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를 긍지로 삼고 있는 한국인의 단일한 발상, 단일한 스케일, 단일한 스타일은 너무 편협하고 근시안적이고 촌스럽기만 하다. 늘 이런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해 온 한국인은 여기에 푹 절어 해외에 나가지 않고는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는 세계화 국제화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데, ‘국제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당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우리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에게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깨지는 날 국제화도 성큼 다가설 테지만 지금의 민족의식, 나라의식, 우리나라 최고라는 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터이다. 한국의 겉모습을 보면 지극히 국제적 색체를 띠고 있지만, 그 내실은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다. 겉치레만 국제화지 그 껍질을 벗기면 온통 국수주의뿐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특히 과격하다는 정평이 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국수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많기 때문이다. 편협한 나라 사랑, 애국심, 우리나라최고라는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깨어나 광대한 세계 지향의 안목을 키우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내가 말하는 월경 인간은 꼭 해외에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월경 인간에는 경계를 넘는다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국경은 지구위에 이데올로기나 체제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계선에 불과하다. 사실 이런 경계선은 국경 말고도 지구 전체에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지방별, 직업별, 성별, 학력별, 연령별, 계급별, 민족별로 수많은 경계선이 한국 사회에 엄연히 살아 있다. 이런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인간이 되면 그 역시 월경 인간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한국 남자들이 가장 꺼리는 집안일을 하며 여자로, 주부로 변신해 주부의 경계선을 넘어본다. 남녀 차별의 틀을 깨보라. 그럼 당신도 당당한 주부(主夫)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경상도, 전라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어울려서 지내보라. 지역 경계선을 넘은 월경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모든 차별과 고정 관념의 경계를 초월한 월경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국내 월경인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국내 월경 인간과 해외 월경 인간이 많아지는 것이 바로 세계화와 국제화로 달리는 첩경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가 의식이나 민족의식에서 벗어나 ‘무국적인’ ‘세계인’ ‘지구촌민’의 의식을 키워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이의 공동 발전만이 인류의 행복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도 월경인은 즐겁다.
31    4-6.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 방법 댓글:  조회:6392  추천:19  2013-07-14
6.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 방법 “신조선족”이 국내 대도시 공간, 특히 海外로의 월경은 異文化와의 빈번한 만남을 의미한다. 異文化와의 만남은 또한 異文化에서 오는 “異文化偏見,偏向”이 반드시 동반되는 법이다. 알기 쉽게 실례를 들어 얘기하면 조선족이 고국(조국)인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노동력 수출자로서 살면서 현지 한국인과의 갈등, 한국인으로부터 받는 편견, 차별, 멸시 등은 같은 겨레에 대한 일종의 “異文化偏見, 偏向”인 것이다. 이럴 경우, 하나 망각해서는 안 될 특기의 사항이 있다. 즉 “한국”대 “조선족”은 기실 “異文化”대 異文化“의 조우인 것이다. 서로 100년의 各自生活圈에서 獨自的으로 形成된 思考樣式이나 文化자체가 상당히 이질성을 띠고 있었다. ”한겨레“ ”핏줄“이란 막연한 동질감, 유대는 이 異文化의 허들을 넘어서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異文化의 허들과 담 벽은 높고도 경고하다. 따라서 異文化에 대한 무지, 몰리해로 인해 처음부터 자기문화 우위의 시각에 서서 異文化를 폄하, 경멸하는 태도는 매우 강한 경향성으로 노정된다. 이문화에 대한 타 집단에 대한 편견, 편향을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트”는 “서양”에서 바라본 “동양(동방)”을 의미한다. 팔레스티나 출신의 미국 비교문학가,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said Edward W)가 1978년 출간한 (Orientalism)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문화를 표상할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을 책에서 던진다. 그의 물음은 지구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인간, 문건, 문화, 경제의 직접 간접적 교류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 인류사회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발견”은 지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이드는 여직껏 단순히 을 의미했던 오리엔탈리즘을 “과이라 칭해지는 것 사이에 설정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별을 바탕으로 한 사고방식”이라고 재정의 한다. 여기서 “오리엔트”는 협의적으로는 중동지역을 칭하지만 광의적으로는 지역과 상관없이 사용되며 그것에 동반되는 또는 “구종주국”대 “구식민지” “선진국”대 “발전도상국”이라는 양자관계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에 대한 잠재적 우월의식이나 편견, 편향을 가리킨다. 사이드는 이 책에서 푸코의 언설적 개념을 원용하여 서양지식인, 서양인이 비서양 지역에 대해 산출시킨 “후진성, 정체성, 적대성, 비합리성..... ”등 마이너스적 표상으로 획일하게 맞추어 평가절하 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가 우월주의에 안주한 서양이 비 서양에 대한 획일적인 편견, 평향 그것이었다. 사이드는 그 후에도 서양지식인의 같은 맥락의 잠재된, 편견 설을 대위법적 해독(對位法的解讀)으로 알려진 (1993)에서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늘 현대 세계사상을 리드해왔다. 사이드는 이문화의 월경적 글쓰기를 구사한 경계를 넘은 위대한 지식인으로서 세계정신사에 남을 것이다. 물론 異文化,他者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 완벽한 표상이 이론적으로 至難이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 편향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상호이해, 존중의 대안이 열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오리엔탈이즘”은 서양, 서양인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 동양내부, 즉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서양이 우리에게 행사했던 동류의 “오리엔탈리즘”이 엄연히 존재해왔으며 또 지금도 농후한 색채로 우리의 교류를 먹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최근 문화인류학자들은 “역광(逆光)의 오리엔탈리즘” (아오키 타모츠)으로 지칭한다. 필자는 그것을 원용하여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일본이 과거 대만을 위시로 조선반도, 만주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행사한 것은 그 슬로건이나 발상이 그 얼마나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피식민지 민족에게 남긴 상처, 민족의 드라우마와 함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고루하고 후발적인 정체성, 비합리성, 우매성, 미개성...”등 일본지식인과 대중의 표상으로 점 찍혔던 “조선”과 “지나(중국)”를 그들은 그대로 서양인이 동양인에게 행사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답습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의 만남은 또 비슷한 편견, 편향으로 노정되었는데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후발성, 미개성, 비위생성...”등 일본인이 과거 조선인에게 표상했던 같은 표상으로 “조선족”을 폄하,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과 조선족의 갈등은 사실 이문화에 대한 몰이해, 편견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팩터적 비중이 큰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인에게 행사하는 이문화 편격 역시 똑같은 “역발적 오리엔타리즘”이란 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인에 대한 조선족의 표상은 대개 “깍쟁이, 인심 박하고 인정사정없다. 같은 겨레, 민족인데도 정을 느낄 수 없다...”와 같은 부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 것은 결국 한국인에게 향해진 조선족의 역발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의 김용택교수의 담론에 의하면 조선어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해”란 제목의 글을 쓰게 한 결과 2/3학생이 한국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2009년 9월) 10년전 조선족이 한국의 차별대우 속에서 “옛날 일본왜놈보다 더 고약한 한국놈”하는 표상이 있었는데 필자는 에서 그 표상에 대해 이문화 이해의 시각에서 비판은 가창력이 있다. 비판하기는 쉬우나 이해하기는 어려울까? 조선족이 이제 세계의 이문화 지역공간으로 침투하면서 비판도 좋지만 안일한 비판을 속으로 삭혀 하나의 이문화이해의 “청명한 청주”로서 걸러내는 방법도 습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방법이다.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方法”으로 필자는 한국인과 조선족은 상호인식에서 同一性, 같은 民族-겨레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이란 안일한 관념에 안주하여 모종의 “응석부리기”로 조선족은 한국에 대한 기대가 지대했다. 기대가 큰 만큼 돌려받는 失望도 큰 법이다. “통일 민족, 겨레”에서 되돌아오는 컬쳐쇼크도 컸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일한 인식에서 오는 “응석부리기”는 다시금 “공격하기” 또는 “반발하기”로 전환된다. 한국인측도 마찬가지다. 반세기, 백년이나 이산돼 중국에서 살아온 동일민족, 겨레의 2,3세를 안일하게 여전히 “동포”,“교포”라고 생각하여 상대해오다가 이질성 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차별로 편향화 되어버리는 성향이 강하다. 한국인의 혈연지역주의적 사고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까지 “한국인”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작년 한국에서 초청강연을 했을 때 주최 측이 필자에 대한 연사소개를 “김문학선생님은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교수입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에서 “한국인 교수가 아니라. 재일 조선족 출신입니다.” 라고 소개자의 표현을 정정해주었다. 조선족은 중국에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한국이란 모국, “同一民族”이라고 인식했던 한국인과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자기 동일 지속성, 즉 아이덴티티를 “중국조선족”으로 다시 귀추 하고자 한다. 그 사실을 “감자”라는 식물을 동원하여 관찰하기로 하자. 소년시절에는 필자의 할머니가 가꾸던 채마밭에서 감자를 캐던 먼 기억을 되살려 본다. 할머니의 감자 농사는 진정 “석과누누(碩果累累)”라는 四字成語로 표현할 만큼 언제나 풍작이었다. 그래서 감자수확 철이면 할머니를 도와 감자 캐는 일이 즐거웠다. 가지 과의 다년초요 塊狀의 지하경이 감자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크고 작은 감자알로 “주렁주렁”달려있었다. 그런데 지상경에는 잎이 자라고 꽃이 피는데 꽃에서 감자열매가 열린다. 청포도 알만한 연두색 색깔에다가 익으면 황금빛에 가까운 황금열매로 변하는데 그 맛은 좀 떫은 감미에 달콤한 맛이어서 별맛이었다. 지하괴상의 감자와는 同根이지만 이 청포도알 형태의 열매는 모양도 맛도 전연 이질적이다. 말 그대로 “同根異果”의 양상이다. 필자는 이 감자와 감자의 지상경에 열린 同根異果의 異質性으로 한국인 “감자”에서 열린 조선족의 “청포도열매”로 인식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고 본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이렇게 이미 “우리”로 이름 짓는 “民族”은 엄연한 “他者”로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民族”을 바라보는 정의의 기준은 많이 변하고 있다. 사실 “民族”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창조된 단어로서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민족”이 전파 수용되어 정착된 것이다. 영어에는“民族(민족)”에 완전히 상당한 단어는 없고 people, nation, ethnicgroup, ethnics 등과 문맥에 의해 나뉘어 사용된다. 현재 세계에는 191개 국가가 존재하며 민족은 4000-5000종, 언어는 약 7000종 존재한다는 통계가 있다. 민족이란 보통 일정한 양식화된 민족문화라고 불리는 文化를 共有한 인간의 집단을 말한다. 民族을 인접하는 他民族과의 상대적 독립성을 문화인류학에서는 지금까지 (1)객관적 기준 (2)주관적 기준 (3)객관적 기준+주관적 기준 (4)3세대 경과설이란 이 4개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었다. 좀 더 전개하면 (1)의 경우에는 언어, 종교, 예술 등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문화를 공유함에 포인트를 둘 것이다. (2)의 기준은 그 집단의 성원들의 귀속의식, 정체성 등 아이덴티티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3)은 (1)과 (2)를 통합시키는 정의 법 (4)는 한 집단의 적어도 3세대이상의 지속성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조선족은 이미 4세 5세까지 왔으므로 엄연히 하나의 “民族”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전까지 만해도 “민족”은 인류학에서 고정된 객관실체로서 포착하는 사고가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을 고정불변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착화시키고 변모, 변용하는 그 내실을 외면해왔다. 또한 고정된 “민족”관념은 내셜내리즘에 이용당하는 면이 컸던 것이다. 이 같은 폐단을 간파한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은 “민족”에 대한 재정의의 필요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캐나다의 우크라이나계 사회학자 lsajiw. w. w.(이사제프)는 민족 집단을 27종의 定義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민족 집단의 객관성 속성 중 제1위가 지리적 출자 또는 공통적 조상을 들고 있다. 그리고 언어는 제5위로 허락되는데 우리의 상식에서 좀 일탈된다. 특히 아이덴티티(정체성)인 민족의 중요한 팩터인데 제6위에 머물러 있다. 민족에 대한 연구는 “民族學 ”이라고도 자칭하는데 문화인류학 연구에서도 주요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현재 “민족”은 고정된 정태(靜態)적인 것 이 아니라 늘 유동하고 있는 動態的프로세스속에서 사고해야 할 실체라고 인식하고 있다. 어떤 민족의 특징이라고 보이는 것도 그 민족내부에서는 지역 차이에 의해 농담(濃淡)이 생기며 계층차도 보인다. 민족주의 역시, 어떤 민족이 자신이 민족문화의 중심부분을 자기 칭찬함으로써 민족단합에 이용하면서 때로는 그것이 거세찬 사회운동으로 편항 되기도 한다. (아야베츠네오2006) 이러한 “민족”의 변천의 추세에서 맞추어 보아도 한국인과 조선족의 그 “民族”동일성의 內實은 이미 분화되어 상당히 이질적 “민족”으로, “他者”로 변모를 이른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질성을 인식하는 것은 分裂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갈등, 이문화 갭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찾는 길을 의미한다. 요컨대 한국과 조선족이 안이한 “동일민족”의 스테레오잎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상대를 서로 이질 된 “他者”로서 인식하고 바라보는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가장 아는 것도 아마 자기 자신일 것이며, 그러나 자신이 가장 보아낼 수 없는 것 역시 자기이다. 그러므로 이질 된 가치관과 문화로 “우리들”이라 불리 우는 “他者”를 인식함으로써 자기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의 긴장감이 풀리고 편안해지면서 상호인식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타자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30    4-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댓글:  조회:5729  추천:37  2013-07-03
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필자는 2006-08년 사이이란 저작을 집필 하면서 중국 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비적”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다수 섭렵했다. 중국 “正統”사회라는 표면의 사회 외에 裏面에는 또 하나의 “비정통”사회로서의 인간 층이 중국사에 존재해 왔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비정통”이라 일컬어지는 良面의 인간 층, 즉 正統社會의 表面의 인간 층의 대극에 존재한 그들이야 말로 表面인간층을 뒤엎고 새로운 正統사회의 주인으로 되는 중국사회의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 구조를 이룬 중대한 팩터가 곧 “비적원리”임을 깨달았다. 물론 “비적원리”라는 용어는 필자의 조어이다. 중국 사회를 지배해온 수많은 원리 중에서 우리가 홀시했거나 간과했던 덧이 이 “비적원리”였다. 흔히 중국을 지배한 유연한 원리로 “유교원리”로 포착하지만, 그것을 지배계급이나 위정자의 장식물로서의 典雅한 간판이며, 이 이면에 반거해 있는 것은 어느 조대나 공포 스러운 “비적원리”였던 것이다. 100년전인 1900년대 초기 신해혁명 1911년을 거쳐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될 때까지 중국역사에서도 비적이 창궐의 극성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근대사에서는 흔히 “혁명사”, “반제, 반봉건, 반식지투쟁사”로 만 기술에 편향하면서 이시기의 비적, 비밀결사, 유민(遊民)의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위정자들은 의도적으로 이들에 대한 기술을 은폐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에는 중국의 정통적인 혁명과 이들의 밀접한 관계성을 되도록 회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서구나 일본의 근대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1911년의 전후의 백년전 중국은 “그대로 거대한 비적의 공동체(4억의 무법체)”이므로 “이시기의 비적 연구에 따라 중국의 국민성이 규명 될 수 있다” 라고 단언한다. 근대 중국의 裏 사회의 주종을 이룬 비적을 다각적 시각으로 해부한 훌륭한 노작이 있다. 영국학자 Philp Richard Billingsley의 (1988년간행)사회학자인 저자는 근대 중국의 귀중한 사료를 구사하여 중국의 비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참신한 시점으로 근대중국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 농민들은 생활이 궁핍해지면 왕왕 비적으로 전향하는 역사 룰을 지닌다. 전설적 도적이었던 도척(盜跖)은 비적의 “수호신”이었으며 도교의 유토피아 사상 중에도 분명히 무법자와 공존이 혼효되어있다. 그러므로 중국사에서 주기적으로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해온 배경에는 모택동이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다” 라고 지적 한 것 같이, 농민의 반란이 규칙적으로 반복된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이 역대의 농민반란, 비적원리를 스스로 중국을 구제하는 방침으로 삼았다. 문약한 근대 중국 지식인의 “사대부원리士大夫原理”에 반기를 든 모택동의 폭력적이고도 획기적인 혁명방침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농촌의 최하층 유민, 무산자, 룸펜(모택동 자신의 말대로 병사, 비적, 도둑, 걸인, 매춘부)들에게는 투쟁력이 왕성하므로 그들을 교육, 조직해 중국혁명의 주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거듭 고백하듯이 자신은 “녹림대학(綠林大學)” 졸업생이며 중국 문제의 해결은 “양산박 영웅을 배우는 것”이었다. 을 애독한 모택동은 양산박녹림대학원리의 충실한 실천자였다. 문화대혁명의 원리는 사실“계급투쟁” “조반유리(造反有理)”의 간판을 건 폭력원리(비적원리)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1910년대의 중국의 신문, 잡지를 통해 내륙부에서 비적으로 인한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자의 잠언대로 “법의 숫자가 증폭되는 만큼 도적의 숫자가 늘어난다” 라는 상태였다. 1930년 비적의 총 숫자는 적게 치고서도 2000만에 달했다고 朱新繁의 글이 전한다. 신해혁명후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중국 신문은 중국을 “民國”이라 칭하는 대신 “匪國”이라 야유한다. “민국이 시작된 무렵 비적이 안 나타난 곳이 없었으며 비적이 소란피우지 않은 해가 없었다” 라고 載玄之는 그의 저서 에서 술회한다. 이런 비적, 의적은 그 신비성으로 인해 근대 중국 지식인, 문인사회에도 매료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무협소설, 같은 의적 문예의 계보가 중국 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왕왕히 비적을 영웅시 했던 것이며, 비적의 심정에 본능적인 이해를 표시하기도 했다. 일종 비적집단의 형식인 “비밀결사”가 근대 중국 혁명과 밀접히 연관된 것은 근대 중국사의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黃建遠의 에 따르면, 청말 민초시기 天地會, 靑帮,紅帮 등 폭력적 비밀결사가 전국각지에 대두하며 지배층까지 영향력이 미친다. 민국의 총통이나 총리로부터 군, 경찰, 금융, 상공계, 매스컴, 문예계, 서비스업, 산업계 및 최하층 쿠리(苦力)까지 침투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손문의 신해혁명 자금은 일본의 지원 외에도 洪門天地會에 속한 비밀결사가 致公當의 지원이 지대했으며, 손문 본인 역시 하와이 치공당 당주이기도 했다. 장개석 역시 상해 靑帮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중국 뒷거리를 장악한 청방의 두목 황금영의 제자인 장개석은 1920년대 주가후정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을 때 황금영의 추천으로 손문에게 기대게 된다. 장개석은 그 뒤 총통이 되었어도 청방과 늘 동맹관계를 보전하고 있었다. 민국의 대군벌인 吳佩孚, 張宗昌 역시 청․홍방의 멤버이기도 했으며 경극 스타 梅蘭芳, 周信帮 도 황금영문하생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1927년 지식인형의 도시점령방침을 포기하고 강서의 비적 文才등과 동맹을 결성하여 정강산 근거지를 개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택동의 혁명이념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자신의 혁명원리인 비적원리를 근대식 투쟁원리로 승화시킨 것이며, 이것으로 그가 중국 해방에 성공한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이며 독자적인 “혁명원리”를 발안한 희대의 혁명가로서 손색이 없는 근대 거물이다. 근대 중국인식에서 망각했거나 누락한 것은 이 같은 “유교원리”아래에 연면히 맥을 잇고 있고 있는 비적원리를 바탕으로 한 폭력, 투쟁원리이다. 그것을 신사와 유민이 공동으로 중국사회를 이룬 것과 같은 이치로, 중국 지배의 또 하나의 굵직한 원리이다. 그리고 중국 국민성의 하나의 구성구분이기도 하며, 근대 중국이 오히려 화려한 유교간판을 걸고 행해진 지배원리는 그 국민성의 뒷받침으로 가능해진 “폭력원리”이다.
29    4-4.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댓글:  조회:5477  추천:43  2013-06-26
4.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식민지 체험은 피식민 민족에게 기나긴 어둠의 회한을 낳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만큼 내면의 양태로 풀기 어려운 숙제들을 남기기도 한다. 필자가 근대 아시아를 재조명 하는 동기의 하나가 이런 풀지 못한 숙제를 풀어보자는 소박한 의도에서 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은 “반일”의 음지에 있는, 우리 민족의 치욕이자 통한의 주제로서 항상 우리의 가슴을 비분하게 만든다. 이렇듯 우리 민족 사회의 덧나는 상처처럼 괴롭히는 “친일파”문제, 그에 대한 처우 문제에 대해 필자는 근대 100여년을 읽으면서 다시금 재고하게 되었다. “친일파=매국노”, “친일파를 처벌주고 척결해야 된다” 라는 주장이 지금까지 성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의식 주장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일 수 있는가?, 과거 역사의 진실에 얼마나 접근한 발산인가? 하는 반추와 반문조차 제기 되지 않은 채 무조건 맹종하고 있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재 발전되는 역사사실(史實)에서 “친일”행위 보다도 오히려 “친일”에 대한 인식, 반성에 대한 현대인의 문제도 문제 삼아 타당하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의 그 건물을 기억에서 영구히 지우려고 인공적으로 철폐하는 한편, 독립기념관을 세워 일제의 만행을 또 영구히 기억하려는 단순한 모순. 누구나 이 모순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 모순적 사실에서 현대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의 “모순”을 읽는 듯 했다. “친일파=매국노”의 등식의 대극에 있는 우리의 최대의 민족 영웅 안중근 의사. 그의 양상은 “친일파”의 모습을 다시 조명하는 거울 내지, 지금까지 미처 하지 못한 “발견”을 하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는다. 필자는 “국제안중근 기념협회” 일본지회장으로 수년 동안 그의 사상을 비롯해 이등박문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안중근이 왜 우리에겐 위대한 영웅인가? 이등박문은 1905년-1909년 일제의 대표로 한국정부에 임한 침략자로서, 한국의 최대의 침략자의 원흉, 상징이었다. 따라서 이등 저격, 말살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 반일을 상징한다. 필자는 또 이런 “발견”을 했다. 안의사가 그렇게도 많은 한국독립 투쟁사의 김구, 안창호, 박은식, 여운영, 이승만, 서재필 등 쟁쟁한 인물을 누르고 최정상의 영웅지위를 획득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한국 근대사에 답안이 있다. 19세기 후반, 말기와 20세기 한국 식민지 시기 1945년까지 통 털어 개화파와 보수파, 저항파와 친중파, 친러파 및 친일파가 역동의 드라마를 펼쳤다. 특히 3.1운동의 민족 운동가, 독립운동가 들이 그 후에는 일본제국 통치에 적극 내지 소극적 협력, 이른바 “부일협력”으로 전락 해버린다. 그래서 김옥균으로부터 김성수, 이승만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운동가 들에게는 기필코 “더럽힌 과거”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와 지극히 대조적인 것이 바로 안중근이다. 그가 우선 일제 침략의 세계사인 이등을 처단한 것이고, 이는 최대의 독립의 심벌적 행동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가 불과 5개월의 짧은 투옥생활을 거쳐 깨끗하게 순국한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쟁쟁한 독립운동가 들에게 있는 “더럽힌” 과거 같은 것이 일말도 없다. 그러므로 안중근이 근대 반일독립의 최고의 영웅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리라.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사상가였다. 이 의미는 지대하다. 그런데 냉철히 말해, 그렇게 아름다운 “동양평화론”이 권총 탄환의 형태로 밖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 안중근에게도, 이등에게도, 그리고 모두 조선인과 일본인에게도 비극이었다. (김기협《망국의 역사 조선을 말하다》) 그리고 문제는 “친일파”가 왜 “친일파”로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상황, 이유를 따져야 한다. 1860년대 이후 명치유신을 거친 근대 일본과 양무운동을 겪은 청국에 뒤진 조선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에 미처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많은 내부 문제를 내포하게 만든다. 또한 조선 조정의 재정은 일본이나 청국 조정에 비해 취약했으며 자신들이 스스로 의도했던 개혁도 일본이나 러시아 또는 청국에 의지해야 할 만큼 역량이 빈약했던 절박성을 알고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친일파”로 된 데는 그 역사적 배경에서 오는 심각한 번뇌를 안고 있었다. 이를 외면하고 단순히 “친일파=매국노”로 지탄해도 의미가 없다. 더욱이 동일맥락에서 한일 병합 이후 이 문제는 더 두드러진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상해에서 망명 독립가들이 만든 임시정부는 불행하게 국제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일제의 통치 또한 갱연 양면으로 교묘해져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적응시켜 “친일파”로 전향해야 한다. 당시 “친일”은 숱한 독립운동가, 지식인 엘리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3.1독립선언문의 기초자 최남선이 그랬고 근대문학의 대부 춘원 이광수, 그리고 백철, 김동리, 모윤숙, 노천명, 이병도 역시 그랬다. 왜 독립운동가 들이 자치운동, 최종적으로 전쟁 시기에 대일 협력자로 전향해야 했을까?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들로서 최고의 국제적 시야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들이 한 부일협력을 무엇을 의미할까? 이광수가 훗날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는 변언에 그 누구도 외면하고 그 말의 진의를 부정하기만 한다. 사실 이 한마디에 이광수 같은 당대 최고 엘리트들의 “열길 물속”의 속궁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친일파”를 매국노로 이제 추세가 된 우리가 비판, 지탄함은 너무도 쉽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 추세의 현재의 심정을 그대로 역사의 과거에 투영시켜 버린 그 우(愚)가 남을 뿐이다. 인간의 문화사가 입증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은 현실과 타협하여 적응시키는 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그 어떤 민족적 이상주의나 고상한 이념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존할 줄 모르고 어찌 다시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역사가 거울이고, 앞으로의 지침서라 외치기를 즐기는데, 그 시대의 역사 인물들이 어떻게 현실과 격투하여 적응하면서 지혜롭게 살아왔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지금도 “친일파”의 무덤에는 차디찬 겨울의 엄동설한이 맴돌며, 무덤에 침 뱉고 채찍으로 타매하기에 여념이 없다. 실로 슬픈 일이다. 이제 역사에 대해 좀 더 현명하고 이분법적(二分法的) 편협한 인식에서 탈피하는 날, 필자는 믿는다. 그러면 얼어붙은 삭막한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올 것이라고. 그리고 진달래가 만발 할 것이라고.  
28    4-3. 魯迅과 李光洙 댓글:  조회:5511  추천:20  2013-06-17
4. 魯迅과 李光洙 노신과 동일문맥에서 비견되는 조선의 인물은 조선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春園 李光洙이다. 일본 유학 경험, 자국국민성 비판과 개조사상, 그리고 세계적인 월경의 시야 등 측면에서 노신보다 11세 연하인 이광수는 매우 유사한 相似性을 띄고 있다. 단지 死後 최고의 위대한 文學家의 표상으로 낙인 된 노신에 비해,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최고봉인 반면 민족의 반역자의 대명사인 “친일문학의 거두”라는 치욕스런 렛텔이 붙여있는 것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식민지로 전략된 조선의 비극 자체가 李光洙의 표상에 투영된 것으로 인식할 때 중국은 겨우 일제의 식민지전략까지는 면했지만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 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 형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 있다.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노신은 1920년 梁白畢,柳樹人및 申彦後, 李陸史등 文人에 의해 속속 조선에 소개되면서 이광수에게 수용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의 「개조」잡지에 “조선의 阿鬼 ”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萬爺의 死」를 집필하는데 「아Q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이광수는 친하게 지낸 후배 문인 金素雲에게 “나는 아Q와 같이 바보다”고 고백, 자신을 “아Q형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일제식민지속에서 적응과 저항의 구도에서 자신들을 두고 향해진 쓸쓸한 야유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노신보다도 월등 다층다각의 얼굴을 보인 이광수는 안일하게 “친일반역적문인”으로서 일축하기엔 무리한 인물이다. 사실 지금껏 한국이나 우리 민족이 이광수를 재는 척도는 “민족”이란 바러미터 밖에 없었다. 1940년 이후의 이광수의 “부일협력”의 언행은 그의 모든 평가를 집약시킨 “표상”으로 고정시켰다. 이 표상 역시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많이 일그러진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의 주장은 이문화의 경계를 살아간 이광수의 “월경적 삶”을 하나의 척도로 제단하면 그 표상은 오히려 다른 양상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서울대의 유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는 1400매의 상하권 이광수 평전 (1999 도서출판 솔)에서 이광수의 일찍 부모를 상실하는 삶을 “내면 풍경의 발견”으로서 “고아의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여윈 아비를 일본제국주의에서 찾아 헤맸다는 “표상”을 제작해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표상”에 “완전동감”하지 못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여기에 결여된 것은 이광수를 이광수이게끔 한 그의 이 문화체험, 간단없는 월경하는 방랑에서 생성되는 경계의 지(知)적 思想을 평가의 잣대에서 빼버린 것이다. 이광수 자신이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 시각이 언제나 “민족” “민족의 반역”이란 고정 틀에 맞춰 넣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으로 이광수의 “표상”을 재생산 하는 것이다. 오늘도 한국지식인의 이런 재생산은 정치적 이용자(노무현 정부 친일파 청산정책)들에 영합하여 자기성찰과 반추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친일파”의 생산 공장은 “친일파”인물, 죽은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후세 정치가와 그 수하의 체제적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소수의 반역자는 어느 나라든지 다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역자 말고 문제는 후세들이 자진해서 “친일파”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이광수의 경계를 넘은 삶을 다시 바라보자. 그의 삶을 이끄는 큰 테제의 하나는 월경과 그에 따른 방랑이다. 11살에 고아가 된 그는 1906년 13세에 일본 유학자의 길에 오른다. 철학자 지명관 선생은 “그의 조선적인 유교영향이 적었다”고 지적한다. 그 반면 그는 다감한 소년시절 일본의 명치중학에서 일본의 근대 문명개화에 일찍 개안한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 귀국하여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1916년 와세대대학에 유학하여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소세키(夏目瀨石)와 영국의 바이런 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 무렵 「매일신문」에 「동경잡신」을 발표하는데 일본의 선진성 근대화에 대해 선망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카치의 무덤을 찾아 “경모와 감개”를 표하기도 하는 그는 소년기에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을 한국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인식하고 있다. 소년시기 모든 조선인보다 일찍 문명개화에 開眼한 그는 자신만만한 확신을 갖고 있는 패기로 넘친 청년지식인으로 변용한다. 그가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天才”라 불린데 는 그 이유가 있다. 그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재능과 지견과 사상이 있은 까닭이다. 국민적 시인 서정주가 그의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 이광수의 삶의 8할의 경계를 넘는 “월경”이다. 노신은 절강-남경-동경-센타이-동경-절강-북경-광주-상해로 인생의 월경을 거듭하지만 이광수의 월경은 초원을 찾는 양과 같이 시공 적으로 일본의 츠시마-러시아 바이칼호-상해-만주해삼위로 地珠적인 월경이다. 월경의 문인, 사상가로서 이광수, 그는 비평가들이 흑백논리와 선입견의 고정관념에 포로가 되어 무조건 친일 문인 반역자로 왜곡 중상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존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인「민족개조론」을 위시한 고백 작품「나의 고백」「나의 자서전」등 주요 저작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오 이광수, 친일한 작가”하고 안일하게 일축하려 든다. 「민족개조론」(1992년「개벽」)은 세계인, 월경하는 코스모폴던적인 시각에서 러시아 유랑시절에 태어난 아이디어이다. 정신적 아버지인 안창호의 영향으로 생긴 것으로, “일제 총독부의 사촉”으로 집필됐다는 망언은 무근무실하다. 필자가 10여년전, 그리고 최근 또 정독한「민족개조론」은 조선민족의 결함을 시리어스하게 비판하고 새 시대에 맞게 개조함으로써 재생을 기하자는 위대한 사상이 담긴 명문이었다. 오늘날 재독해도 여전히 그에 관통된 사상은 유효하며 그를 산출한 저자야 말로 우리 민족의 탁월한 사상가. 지성인이라는데 탄복할만한 걸작이다. 저자가 서문인 “변언”에서 밝히다시피 “이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며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구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 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시피 이 사상은 해외동포 월경하는 민족 지성의 사상임이 엄연하다. 이광수는 조선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박애, 예의, 염결, 자존, 무용, 쾌할”이며, 반면 결함으로 “허식, 나태, 비사회성, 경제성 쇠약, 과학의 부진”등을 열거한다. 그리고 그는 민족성 개조의 비전을 8항목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한다. 우리 민족이 이광수의 개조사상 비전을 진지하게 성찰, 수용했으면 오늘 우리 민족의 양상은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일본에 후쿠자와 유키치의「학문의 권장」이 있다면 조선에는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경계성에서 생성된 민족사상은 아이러니하게 그 민족 억압의 피식민지화 앞에서 “굴절된 지혜”로 나타난다. 한국 단국대 김원모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춘원은 항일 운동을 벌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만큼 표면적으로만 거짓으로 친일 행동을 했을 뿐, 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춘원은 그 자신의 친일 행위를 민족정신 보존운동으로 역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일협력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친일을 위장한 민족보존운동”은 바로 그의 작품 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춘원의 친일과 민족 보존론」) 춘원은「나의 고백」에서 한마디로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풍부한 월경으로서 경계를 넘는 실천 속에서 걸러낸 “사상”을 몰이해하고 단순하게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것은 자신의 “우(愚)”이다. 춘원에 대한 고정적 표상은 상당히 일그러진 면을 노정하고 있다. 이 같이 죽어서도 지탄 받는 그의 비극은 사실 식민지를 체험한 우리 민족 모두의 “비극”그 자체인 것이 아닐까?  
27    4-2. 백년의 눈물 댓글:  조회:6737  추천:10  2013-06-05
2. 백년의 눈물 (중략) 나는 조선족을 한해 얘기 한다면, 적이나 라이벌로 간주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나를 적으로 보고 경계하는 라이벌로 삼는 자는 숱하다. 그들에게 내가 “적”, “라이벌”로 위구심을 느끼게 한 것은, 그만큼 내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실제적으로 별 일을 하지 않고, 나만 폄훼, 왜곡, 중상하는 그들에게서 덕이나 지(知)적 수준에서 정색해서 대꾸할 만큼의 필요나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정면에서 정색하여 반론하지 않았다. 요즘 두 번 글을 쓴 것은 그냥 그들을 익살로 조롱(嘲弄)하는 장난끼에서 생긴 글이다. 웃고 지나면 그만이다. 나는 아직 소년 같은 장난끼, 유치한 면이 많은 천진난만한 인간이다. 그래서 나를 잘 아는 주위 사람이나 여성 팬들로부터 “글쓰기와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치기가 있어서 귀엽다”고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평을 곧잘 듣곤 한다. 그러니 항상 안티파들을 나는 사랑으로 품어주고 싶다. “敬天愛人”의 사상으로 그들을 대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대할 것이다. 김소월의 시에 “사노라면 잊을 날이”하고 읊었는데, “그러노라면 이해할 날이”라고 읊고 싶다. 이해 받지 못하면 말고, 구태여 이해 해 달라고 무리한 주문 역시 안하리다. 그래서 나는 이해보다 더 좋은 약은 “용인(容忍)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일은 이해 할 수 없는 사물이 많지만 용인 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해도 못하면서 용인도 못한다면 자신을 괴롭힐 뿐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노신, 호적 두 분다 좋아하지만 “갱골두(硬骨頭)”의 노신선생보다도 “和派”의 호적선생을 더 좋아한다. 죽을때까지 “一個都不能寬怒”라고 외운 노신에 비해, 호적은 “容忍比自由 更重要”라고 강조했다. 실생활에서도 신변에 적이 많았던 노신에 비해 호적은 적보다 벗이 더 많았다. 노신의 후반인생은 거의 잡문이 문필생활의 주요 아이템인바, 그 잡문은 또 거의 적, 라이벌에 대한 공격이 주종을 이룬다. 대조적으로 호적은 유연한 의식과 관용, 용인의 아량으로 주위가 모든 “적”이나 라이벌을 품어서 “자유”를 선물했으며, 그 자신도 유유자적 자유를 즐기면서 일을 했다. 임어당 역시 동일 유형의 문인으로서 “용인”이 아닌 “유모아”란 깃발을 내걸었으며 언어학, 문학 및 인생철학에서 실천하면서 일을 한 문호이다. 이렇듯 근대중국의 대문호들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3대 국제파 문호”중에서 인생후반의 실적이나 해놓은 일에서 보아도, 노신은 “인신공격”의 잡문으로 점철 돼 있는바, 점수를 매기면 가장 하위점수를 주고 싶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그는 “갱골두” 체질성격에 의한 적을 공격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다 보니 지신이 피로했던 것이다. 그런 노신을 나는 본받지 못하겠다. 차라리 “푸접좋은 ” 호적의 “용인”정신과 임어당의 “유머아” 지혜로 인생을 살고 글을 쓰고 싶다. 안티파 지식인 중에 이 시각에도 나는 “반공, 반화....”라고 아주 대단한 硬骨頭型 반역의 투사처럼 분에 넘친 모자를 씌우는 양반이 있다. 사실 이런 양반들은 나를 너무 올려 추키고 있다. 너무 과분한 “영예”다. 기실 나는 그렇게 한시도 간단없이 땅땅하게 서 있는 남자는 아니다. 평시에는 말랑말랑 유연하며, 꼭 필요할 때만 땅땅하게 선다. 찰떡처럼 말랑말랑 하다가도 무쇠 亞鈴처럼 땅땅하게 말이다. 솔직히 고백해, 나는 “반공”도 “반화”도 아니다. 또한 “반체제”지식인도 아니고, 나는 노신형의 반체제 지식인이기 보다는 호적형의 자유주의 지식인이고 싶다. “문제를 많이 연구하되, 주의(主義)를 작작 담론하자” “대담하게 가설을 제기하되, 소심하게 실증을 하자” “실천은 진리를 경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는 호적의 많은 이론, 주장에서 나는 심대한 공감을 하고 있다. 이런 이론은 오늘도 내일도 유효하다. 호적은 1917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차,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장훈 복벽의 뉴스를 접한다. 그때 그는 감개무량하여 한탄했다. “중국의 근본적 문제는 제도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소질(素質)의 문제이다. 즉 문화 관념의 문제이다.” 라고 이렇게 그는 귀국한 뒤 20년 동안 정치를 불문하고 문예로 국민의 넋을 개조하는 것만 담론하기로 결심했다. 방향은 노신과 비슷했으나, 그가 택한 방법은 노신과 다른 유용한 관용, 주의를 넘은 길이었다. 호적은 반체제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국민당 장개석을 비판, 수용하면서 언설활동을 벌인다. 유연한 그의 실적은 국민당체제개혁에도 유익한 일을 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급진파 지식인 보다 유연파 지식인, 자유지식인이 되었다. 체제 안에 있을 때도 밖에 있을 때도 나는 종시일관 “자유파”였다. 나의 안티파 지식인들처럼 체제에 무조건 곡학아세 하고 뭔가 학계, 문단에서 관리직함을 쟁취하자고 옥신각신 하는 그런 인물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도 일체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또 정치적 出世欲따위는 더구나 기피했다. 지금 역시 해외에서 살면서 활발한 문필, 연구 활동을 벌이지만, 일체 정치에는 무관하다. 안티파들은 “우익”이니 “매국노”이니 상투적으로 왜곡하기를 즐기는데 그런 中世紀적 사고를 갖고 혁명의 정치적 투쟁심이 가미된 자들은 “우익”이 그렇게 좋고 “매국노”가 그렇게 좋은가? 2009년 북경 정부기구의 초청으로 동아시아 이해에 관한 강연을 했을 때, 많은 당간부와 고위급 지식인들도 나의 중일한 문화, 역사의 담론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2010년 8월에도 북경대, 인민대 및 국가 일류급 출판사의 간부, 학자, 언론인들과 수차례 환담을 하면서 느낀 곳은 많이 “변한” 그들의 수준과 사고 양식이었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중략) 등소평이 유소기의 유지를 이어서 “개혁, 개방”의 국책으로, 모택동시대의 “階級仇ㆍ民族恨”의 내홍투쟁을 종식시키고 경제, 산업의 근대화에 성공시켰으며 정치적 환경 역시 관용과 자유로 크게 변해가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등소평의 개혁개방선의 수혜자로서, 등소평 할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등할아버지처럼 키가 작은 것도 나 역시 긍지감을 느낀다. 등할아버지, 강택민 큰아버지도 그리고 호금도 작은아버지도 나를 귀여워 하셔서 한 번도 나를 “반공” “매국노”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중공 및 위정자는 현재는 지식 엘리트로 구성되었으며 정치체제개혁의 절박성,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는듯하다. 온화한 온가보 큰아버지도 최근에 항상 “정치체제 개혁의 보장이 없이 현대화건설의 목표 실현을 불가능하다” 라고 하시며 “사상해방 대담 탐색하여 정체함 없이 뒤로 후퇴해서는 더구나 아니 된다” 라고 거듭 강조하신다. 얼마나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셨는가! 과연 이 말씀대로 정작 안 해서 그렇지 실현만 되면 참 미국을 능가한 인민의 “제국”이 탄생할 것이다. “제국”이란 말이 나온 김에 좀 부언하자면, 냉전체제 붕괴 후 미국 같은 포스트근대의 거대한 제국은 글러벌속에서 “국민국가”의 질이 변하고 있다. 즉 국가가 통치대상 국민에 대해 마크로(거시적)적이 아닌 미크로(미시적)적으로 포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주 섬세한 정책 수단을 구사해, 국민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격리시킨 개인으로 분해시키고 있는 것으로 노정된다. 고전적(전통적)제국 모델은 그 원리가 황제가 천자라고 해 절대적 권리를 행사하며 중앙 집중 형으로 인민을 통치 해왔다. 현재 중국의“제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성장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중국을 빈번히 방문할 때 마다 나는 그 일사천리의 급속한 변화, 대도시의 숲 풀 같이 일어서는 빌딩에서 보아가며 압도적인 근대성의 역량을 실감하곤 한다. 변하는 중국에 대한 나의 견해도 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외견상의 硬件(하드)이라면, 내가 또 실감을 느끼는 것은 이에 상응되지 않은 모습이다 곧 軟件(소프트) 국민성, 인간의 소질, 정치체제의 개혁 면에서는 여전히 답보하고 있거나 오히려 경제적 수준, 하이데크적 첨단기술의 재생으로 더욱 세속화, 공리화, 실리화를 추구해온 중국인의 實利志向의 근성을 추구 가능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나는 (2008)이란 책에서 중국국민성을 실리추구, 공리성 “民以食爲天”의 “食”만 해결 되면 기타 사회문제, 정신성에 대한 추구는 게을리 한 “실리민족”의 양상에서 규정지었다. 문화인류학적 이론을 구사하여 걸러낸 “신중국이론”이어서 이 책을 조선족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노신이 지적 비판했던 것과 같이, 또한 호적이 앞서 말한 “제도문제가 아닌 인간 소질, 물화관념의 문제”에서 나는 중국인을 오늘 21세기의 문에 들어서서 역시 답보하고 있다고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통치는 고전적 전통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면이 많은 것은 그 자체의 특질이기도 하며 역시 약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통치수단의 “독재”는 전통에서 탈피하지 못했으나, 또한 미국 등 선진제국의 하이테크적 첨단기술을 구사하며 전통적 통치를 일층 공고시킨 양상으로 노정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특기해야 할 것은, 이미 중공은 ‘경직된 독재’가 아니다. ‘유연한 독재’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역시 여기서 유추해 나오는 테제이지만, 유연한 독재, 중국에 있어서 방법이 아닌 방법이다는 것이다. 이 말에 나를 지탄하는 지식인도 있을 법 하지만 나는 다만 객관적으로 체제와의 자유자로서 관찰을 할 뿐이다. 중국시민의 지적 수준, 계몽에는 내가 아는 만큼 글쓰기로 힘을 보태고 싶다. “유연한 독재”, 이는 나의 신조어인바, 이 뜻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강압적인 탄압적인 독재가 아닌 국민 공제를 하면서, 체제에 대한 비판도 허용하고 언론, 출판, 데모의 자유도 주면서 대중의 소질이 향상되기를 기다림과 동시에 체제내부 자신들의 의식도 변혁시키는 것이다.     (중략) 국민국가에서 근대국민은 단합성과 근대적 기준에 맞먹는 문화소질이 구비되어야 하며 거국일치하게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로 진척 할 수 있으나 중국은 그 부분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매일 핏대 세우고 “애국심”을 외친다. 중국이 100년전 일본과 동일 스타트지점에서 근대화를 바라고 달렸으나 겨우 백년이 지난 21세기에 근대화 국가로 성장되었거나 (내륙부분은 아직 거리가 있다) 성장 돼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민주화 역시 백년전에 외친 스타트지점에 되돌아와 다시 담론해야하는 현실이니 참 답답하다. 민주화를 지탱해주는 튼튼한 기반은 그 나라 국민의 근대적 소질이다. 현재 중국 농민을 위시로 한 국민의 대다수가 민주화를 지탱해 주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이 점은 인국 한국과 일본과의 비교에서도 역역히 드러내고 있는 사정이다. 광범한 중국 대중은 이직도 “먹고사는데 걱정해야 할” 눈앞의 “식민성 (食民性)”에서 탈피하지 못 한 것이 귀 아프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이며, 또한 실리성이 대단히 강한 중국인이 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해도, 고차의 정신추구는 방치하고 향수, 향락으로 편향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 중국 연해도시의 일부 벼락부자들이 이런 인간의 전형이다. 이런 자들이 해외 관광에 나오면 위생, 질서 등 면에서 많은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다. “돈 있는 바보”들의 행진곡을 펼친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失望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국민성, 소질역시 환경의 변함에 따라 변하고 향상 하는 시대적 특징도 있기 때문이다. 이 변함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좀 너무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속수무책이나 수수방관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비판적, 도전적 지식인의 “계몽”은 아직도 필요하며 유효 적이다.   (중략) (중략-편집부)  
26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댓글:  조회:5274  추천:15  2013-05-27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8. 이토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란 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그 주위에 안중근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인이 안중근을 숭경하고 감동을 느끼고 공명하며 감회될 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의 인격과 함께 그의 견식, 사상이 일본의 원훈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포들은 그 점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의 안중근숭모의 미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앞에서 러시아검사의 증언에도 등장하는 타나카 세이지로의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하다. 남만철도주식회사의 이사로 있던 그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당시 이토곁에 있다가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인물이다. 그 뒤 안중근이란 인물을 알게 되면 될수록 타나카는 그 위대한 성품과 견식에 빨려들어 팬이 되어버린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만난 인물 중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물가운데서 누가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중근입니다.” 하고 타나카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자신을 총탄으로 쏘아 부상까지 입힌 철천지원수를 감히, 솔직히 위대한 인물의 제일인자로 칭송하는 그 담력 뒤에는 역시 안중근의사의 감화력의 파워가 있기 때문이란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미담을 소개하자. 당시 여순감옥에서 헌병상등병으로 안중근의 감방 간수 역을 맡았던 치바토시치(千葉十七)라는 젊은이 역시 안중근의 극렬 팬 이었다. 직책상관계로 안중근과 일상적 접촉이 잦았던 치바는 당시 25세. 안중근보다 6살 연하였다. 그는 안중근을 처음에는 명치의 원훈 지도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여기고 경계했지만 차츰 접촉이 깊어지면서 안중근의 깊은 교양과 고고한 인격적 포용력, 활달하고 효자다운 효도성, 그리고 일당백의 당당한 태도에 점차 감복되고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 당하게 된다. 치바의 친척이 되는 변호사 가노씨의 저술에 의하면 어느 날 치바가 안중근에게 “왜 꼭 이토공을 저격해야만 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독립은 물론 일본과 청국(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평화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토공이 추진하고 있는 병합정책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이토공의 정책은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나는 자신을 조국에 바치는 몸이라 죽을 각오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뒤를 이을 우국지사들이 궐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토공에 대한 개인적 원한 같은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한일 두 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 것도 이토공 한 인물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역사란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게 아니니까요. 내 거사가 장차 우리 동포들의 독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만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편판단은 후세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소중히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국을 위해 이슬로 사라질 것을 결의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준 이 목숨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돼 있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건 하나님께 맡기고 유구한 한국역사에 하나의 조약돌로 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이런 고결한 생각을 품은 안중근이였기에 사형선고를 받고도 상급법원에 상소를 포기하고 그 대신 법원 원장에게 사형기일을 한 달 미루어 자기가 지향한 동양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저술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그 뒤 치바 청년은 안중근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더 살수만 있다면 기필코 한국을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거물이 되기에 틀림없겠구나. 이런 인물이 사형당하여 한 점의 찬이슬로 돌아가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9. 1910년 3월 26일. 작년 10얼 26일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거사 날부터 옹근 다섯 달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지으신 결백한 명주 한복정장을 차려입고 기도를 하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장으로 나아갈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감방 옆에 서 있는 치바를 불렀다. “치바상, 전번에 부탁받은 글을 써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하면서 치바는 부랴부랴 흰 비단 천과 필묵을 갖고 왔다. 안중근은 자세를 바르게 취하고 단숨에 붓을 날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로다” 그리고는 숨을 죽여 약지가 절단된 왼손에 먹을 듬뿍 묻혀 이름석자 밑에 힘 있게 찍었다. 치바는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대례를 올렸다. 안중근의 최후의 사형장면은 어떤 모습 이였을까? 10시 정각. 미조부치검찰관, 구리하라전옥. 그리고 소노기 통역이 여순감옥 형장감시실에 착석했다. “사형을 집행한다. 남길 유언은 없는가?” 라는 구리하라전옥의 질문에 안중근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단지 동양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동양평화 만세’ 3창을 부르고자 합니다. 결국 “동양평화 만세”가 안중근의 유언으로 되었다. 오전 10시 20분. 교수형으로 안의사는 숨을 거둔다. 그날 소노기 통역은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 안중근은 어제 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웃옷은 백색, 바지는 검은색)을 입고 가슴엔 성화를 품고 있었는데 그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여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태연자약하게,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장한 우리 영웅의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휘호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계속하여 치바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 뒤 치바는 제대되어 고향 미야기(똫냘)에 있는 시골로 귀향하였다. 그는 54세로 죽는 날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불단에 정중히 모셔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일양국의 영원한 평화친선을 빌었다고 한다. 치바씨가 사망된 뒤에도 부인은 97세의 고령으로 세상 뜨기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 안중근과 치바를 같이 기렸다고 한다. 1979년 안중근의 탄신 100돐 기념에 치바씨의 후손들이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선생을 통해 서울안중근기념관에 유묵을 기증했다. 안중근과 치바부부의 한일우호를 상징하는 미거를 표창하기 위해 1981년 치바의 유골이 잠든 대림사(大林寺)에 안중근, 치바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대림사주지와 함께 일한 인사들이 한일평화를 기리는 합동추도법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야말로 안중근과 이토의 원한구도를 넘어선 한일양국의 경하할만한 생동한 평화도가 아닌가! 10. 시다라씨네와 작별을 고하고 나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JR전차에 몸을 실은 나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오늘은 내 생에서 그야말로 뜻 깊은 하루가 된다. 안중근의 친필유묵. 그것은 내게 있어선 안중근 본인이었다. 이제 돌아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돌 기념일이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독립--동양평화--투사 - 문인 - 천주교도 - 사상가…이런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둠이 잠기기 시작한 차창에는 붉은 노을이 비낀다. 창가에 문득 안중근의 얼굴이 나타났다. 31세의 청년이 아닌 131세의 백발이 성성한 노숙한 성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 성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자네가 내 유묵을 보았다니 반갑네. 이렇게 우리 후예들이 일본에도 마음대로 유학하고 거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구만. 허허…” “반갑습니다. 안 할아버지는 금년 벌써 131세지요. 할아버지의 유지는 우리 세대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깍듯이 대답했다. “며칠전 하늘나라에서 말이지. 글쎄 이토와 만났구나. 여전히 옛날 모습이여서 놀랐지만 우리는 화해를 했단다. 그래야 우리가 쌓았던 원념들이 담벼락이 돼서 자네 세대가 동양평화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뭇는데 지장이 아니되니까.” “역시 안 할아버지의 탁견이십니다.” “뭐. 그런 건 아니고 하루 빨리 EU보다 앞선 동아시아공동체를 뭇기를 바란다네. 허허허…” 성자 안중근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공〜”내가 다급히 불렀으나, 안의사는 벌써 하늘나라로 행적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다. 꿈인지 생신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 했다. 나는 생각한다. 안중근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신이 요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안공의 기념활동도 좋지만 형식차원을 능가한 실천적, 건설적 차원으로 그의 사상을 활용하고 실현해야 한다. 천부적 인권론, 개화사상, 기독교사상, 유교, 불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안공의 사상체계는 21세기형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중근은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그의 세계적 보편가치성을 갖고 있는 사상체계가 그것을 확보해준다.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은 우리보다 100년 앞을 달리는 열차에 탄 유일무이의 사상가이다. 이제 동양평화 실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사상가 안중근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 크나큰 과제다.
25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댓글:  조회:5033  추천:11  2013-05-19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5. 이제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할빈역 플래트홈에서 발발한 역사적인 의거 장면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안중근의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난 다음 이토의 시신을 밟고 “코리아 우라(한국만세)”를 세 번 목 놓아 부른다. 그리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결박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간결하고 판에 박은 묘사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어딘가 조잡하고 사살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 이제 그날 의거에 대해서 한번 객관적으로 기술해보자. 안중근에 대한 일본 측의 취조기록, 로씨아 측의 증언기록이 다수 있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쓰자면 적어도 단행본 한권의 분량이 된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그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여기다 제시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는 제3자 즉 일본 측도 한국 측도 아닌 로씨아 측의 보고를 중심으로 서술키로 한다. 이토가 1909년 6월 1일 한국통감을 사양한 뒤 추밀원의장을 맡았는데 원래 대만 식민지경영 경험이 있는 현 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고토신페이의 권유로 만주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씨아의 대장상 코코프체프와 면담하기 위해서 만주를 일주, 할빈으로 왔던 것이다. 10월 26일 아침 9시에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자 코코프체프, 콘스탄티 미텔등 로씨아측 일행이 이토가 있는 귀빈차량에 올라 인사를 나누고 20분정도 회담을 했다. 그런 후 코코체프가 플래트홈에서 로씨야 철도수비군의 의장대의 열병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토는 정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상대의 간청에 이기지 못해 응하여 9시 25분쯤 차에서 내렸다. 그때 동석했던 로씨아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안의사의 의거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토공이 로씨아의장병을 사열하고 5보내지 7보 걸어서 일본인 집단 환영대열에 다가갔을 때 로씨아의 장병 사이에서 몇 차례나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두 차례 발사소리가 난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총을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범인으로 보여 지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쳐 들고 의장병 앞을 지나가는 이토공을 향해 또 한발 쏘았다. 그리고는 급히 뒤돌아서서 이토공을 뒤따르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발사했는데 아마 3,4발인가 발사했다. 마지막 발사는 땅을 향해 쏟 것 같은데 생각건대 이 총알이 타나카 세이조(만주철도 이사)를 맞혀 부상시킨 것 같다. (중략) 발사가 끝나자마자 동청철도회사 철도경찰서장대리 기병대위 니키트로프가 2회 발사때 범인에게 덮쳐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하도 강해 쓰러뜨릴 수 없었다. 격투 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그때 범인은 로씨야어로 “코리아 우라”하고 세 번이나 외쳤다. 범인의 발사 시간은 30-40초가 넘지 않았다. 정거장에 있는 철도경찰의 숙직실에서 안정을 되찾은 범인은 자신의 흉행에 대한 동기를 진술했다. 약 20분 뒤에 이토공의 사망을 알려주자 범인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숙직실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편 이토는 어떻게 되었는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은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무로다 요시아야등에 의해 부추 켜 열차 안으로 운송되었다. 급기야 이토를 쏘파에 눕힌 후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에 응급처치를 강행했다. 당시 수행의원으로 처치를 했던 코야마 의사 (小山)의 증언에 따르면 피탄 된 흉부와 복부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했으며 이미 치명적인 상임을 즉각 알았다고 한다. 정신이 좀 들라고 코야마가 전해주는 브랜드 두 컵을 마시고 난 뒤 혈색을 잃고 안색이 종이 장 같이 창백해진 이토는 3번째 컵은 끝내 들이마실 기력 마져 없었다. 통역한테서 한국청년이 저격자라는 말을 듣고 이토는 “바보 같은 자식”하고 한마디 뱉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그리고 피탄 30분만인 10시에 절명했다. 6.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결코 이토가 숨지기 직전에 남긴 “바보”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근대 일본의 건국원훈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이며 “바보”같이 용맹한 적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사의 일면만 알았지 그 이면에 있는 문인, 선비, 지식인다운 인물상에 대해서는 아직 깊은 인식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인만 탓 할 바가 못 된다. 우리 자신도 사실 안중근의 “투사”를 넘은 위대한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번 3월의 나의 특강은 안중근의 평화사상 및 사상가적인 심층의 안중근을 알리고자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금년 안으로 이란 제목의 책을 펴낼 예정으로 지금 일본어로 집필 중에 있다. 한마디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 쯤 표면적인식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문인이자 사상의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단선적이면서도 피상적인 이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독립” 유목과의 만남을 통하여 단순히 만용만 자랑하는 투사 안중근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독립자주지향으로 내세웠던 사상가 안중근 선각자와 만나는 실감을 느꼈다. 사상가 안중근, 그는 구경 누구인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모르고 있던 안중근의 이면, 심층에 대해 재 이해를 해야 할 사정에 와있지 않은가. 나의 이 졸고에서 안중근의 위대한 사상가의 전체상을 다 표현하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나 총체적,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31년의 짧은 인생은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간 공판투쟁 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 했을 뿐 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그는 려순감옥의 심문에서 “한 나라라도 독립자주하지 못하면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두가 독립하는 것이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라고 소리 높이 주장한다. 독립자주평화는 안중근의 유일한 화두이며 그가 평생 겨냥했던 이상이다. 그의 사상이 가장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발로한 것이 바로 이 “독립”유묵이 아니였던가! 안중근은 또 일본검사의 취조 중 한중일 동양 3국을 세형제로 비유한 우화를 술회하면서 셋째동생 일본이 둘째아우 한국을 향해 악행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비유하면서 지금 동양의 평화가 깨어진 결과는 이토의 강제정책이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또 이토 본인을 간웅(姦雄)이라고 자탄, 그를 제거한 것은 동양평화실현을 위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더욱이 1909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당시까지 그는 개인 전기인 와 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사상을 구상화한 후자 저술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난것이 너무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다. 결국 3월 25일까지 써서 서문부분에만 그쳤는데 고등법원원장 하라이시와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등을 종합하면 그 전면모를 대강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안중근의 사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동아시아의 최대 분쟁의 중심인 려순을 중립지대로 개방하고, 한 중(청), 일이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리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을 아시아평화의 근거지로 만드는 것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의 재정확보책으로 원만한 금융을 위해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 공통유통의 공용화폐를 발행 하는 것. 그리고 3국의 청년들이 2개국 3개국 언어를 배우게 하고 우방, 형제적 제휴연맹관념을 형성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3개국 공동시술개발센터와 동아시아 동양평화군대를 창설 할 것까지 제안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지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서양의 로마교황청에 각국 대표를 파견하여 서양과의 협력관계를 도모할 것을 권유한다. 이래서 세계적 시야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고 평화의 유지를 이룩 할수 있다는 신념을 수립한다. 그는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일국(一國)중심의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의 동아시아평화정책의 제한성을 간파하고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를 파괴하고 로씨야, 미국으로 전쟁을 확장시킨다면 일본 자신의 괴멸을 기필코 초래한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한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예언은 너무나 적중하지 않았던가! 안중근은 사상뿐 만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탁월한 예견적 안목을 갖춘 예지에 찬 예언가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연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폐제도 이 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식견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본은 동아시아공영권을 소리높이 주장했지만 일본 중심의 일국내셔널리즘적인 강제적 정책이었기에 동아시아의 공명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 결국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무산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의 EU연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 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등 세계적인 공동체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중근은 유럽공동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모네보다, 중국근대의 국부로 추대된 손중산보다, 그리고 아시아 평화의 리더였던 칸트보다 더 선구적인 대사상가. 대정략가임이 틀림없다. 안중근, 그는 100년 앞을 내다 본(英知)의 사나이였다. 7. 정오가 되자 아시마루회장은 시다라로인과 나를 위해 일본요리점에다 푸짐한 오찬을 마련했다. 식사중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안중근에 관련된 내용으로 꽉 차있었다. “왜 안중근이 일본의 원훈을 암살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려순감옥에서 그렇게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을까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당당한 신앙심에 매료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원과 감옥, 통역사 그리고 일반 관리들께서도 다 일본인인데 안중근에게 글을 써 달라고 요구했답니다. 려순감옥에서도 안중근에게 상등백미 밥에다 끼니마다 반찬에 맛있는 과일이 배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에 한 번씩 목욕도 시키고 이발도 해주고-- 일본의 최고실력자 원로를 죽인 범인에 대한 존경이 이렇듯 깍듯했다는 것은 정말 경탄할 일이지요.” 화제는 또 다시 안중근의 품위 있는 유목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2월 사형판결이 난 뒤, 주의의 일본인중 비단이나 일본 화지를 지참하여 안중근에게 휘호를 요구한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안중근은 번마다 상대를 고려하여 어구를 선택하고 정성껏 써주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일본인에게 자신의 품은 뜻을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 모른다.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박학어문, 약지이례 (博學於文, 約之以禮 널리 학문을 배우고 례로써 단속한다)라는 (논어)〔옹야편〕의 문구를 한 일본인 관리에 써 준적이 있는데 기하게도 이토히로부미의 이름 ‘박문’도 이 논어 옹야편에서 두 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토는 유교의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시에 능했으며 서예가로서도 일본 근대예사에서 능서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몇 점의 이토 유묵을 보면 그는 행서나 초서에 능했는데 성격같이 활달한 글씨를 썼다. 한국통감, 인감이 찍힌 그의 유묵은 또한 일본식민지화의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조선의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당시 일본의 어느 정치가보다 깊었으며 조선유교 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앞섰다고 거듭 말했다.그의 여러 종류 전기를 섭렵해보면 그는 한복을 즐겨 입고 한복차림으로 공식장소에 나타나는 등 행동으로 “한국통”을 자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조선식민지통치정책을 스스로 미화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감화시킬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토의 이름과 그의 유묵, 또한 한학의 교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는 원래 유교, 한자문화 등으로 공유 할수 있는 부분이 너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일국의 식민통치책으로 인해 그 끈끈한 유대성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한국 계명대 이성환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이토 역시 안중근과 같은 “동양평화를 제창했으나 그 행동양식으로서 정반대의 지향성을 실천으로 행하고 있었다. 이토는 동양평화를 위한 명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필요성을 주장했고, 안중근은 이런 이토를 한국침략자로서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입장의 다름에 따라 두 인물의 사상과 행동은 천양지별의 양상을 보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당시 양국의 입장을 극명히 상징함과 아울러 두 인물의 양립할 수 없는 사상적 대립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동양평화는 동양제패의 꿈에 불과했으며 안중근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던가!
24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댓글:  조회:5328  추천:19  2013-05-11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1. 2010년 2월 20일 새벽 4시경에 깨어난 나는 유난히 흥분돼있었다. 40대에 들어서서 10대같은 마음의 설레임을 느끼기는 처음이다.그럴만한 큰 이유가 있다. 왜냐면 오늘 나는 우리 민족의 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진 영웅 안중근의사의 친필 유묵과 곧 대면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본서 살아 온지 벌써 20년이 된 나는 “국제안중근기념협회” 총회 부회장 겸 일본 지회장직을 맡은 지도 어언 수년이 된다. 이 같은 영광스러운 사회직을 맡으면서 나는 나름대로 일본에 있는 안중근 관계 자료를 발굴, 수집하면서 안중근사상연구를 해오고 있는 중이였다. 원래 고서수집과 서화괴집벽이 있는 나는 동아시아비교연구와 함께 관련 역사인물 서화자료를 꽤 많이 수집했는데 근대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같은 개화파리더나 중국의 손문, 리홍장, 원세개나 일본의 이토ㆍ히로부미, 타나카 카쿠에이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명 인사들의 유묵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금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100주년기념활동의 일환으로 우리 “국제안중근기념협회”에서 최고로 완성도가 높은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화첩편집위원회의 멤버로서 나는 일본에 산재돼있는 안중근 관련 사진, 자료를 적극 발굴, 수집하여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이번 안중근의 유묵친필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유묵은 일본인이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사진이나 화첩에서나 보았지 한 번도 친필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나에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몇 시간 후면 소중한 안의사의 친필유묵과 대면하게 되니 어찌 가슴이 설레이지 아니하랴! 그리고 안의사 순국 100주년기념으로 나는 이곳 히로시마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동아평화를 기원하여”라는 주제로 곧 특별강연을 갖게 된다. 주최 측의 강연광고가 나가자마자 일본인들의 반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 나의 책을 애독하고 있다는 히로시마 모 중소기업의 회장인 이시마루(石丸)씨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사는 집 근처에 간센지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그 절의 주지 시다라씨가 안중근의 친필유묵 “독립”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와는 친한 사이여서 유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시다라씨 역시 내 책을 읽었고 수년전 히로시마시내 호텔서 나의 비교문화특강을 청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도 간센지에 유묵이 소장돼있다는 정보는 오래전부터 입수했지만 무슨 방법으로 주지와 접촉할까 하고 고민 중이었다. 나는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2. 아침식사를 대충 끝낸 나는 10시 JR히로시마역에서 미요시행 열차를 잡아탔다. 10시 55분경 무카이하라(向原)역에 하차하니 이시마루회장이 자가용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간센지는 역에서도 승용차로 20분 달려 아주 한적한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토진종파에 속한 8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란다. 주지 시다라 사미즈(設樂)씨는 82세의 고령 이였지만 60대쯤으로 보이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반기면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전에 김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나이 드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40대 젊은 분이시네요. ”하면서 시다라씨는 부인이 내놓은 오차를 권했다. 이어서 시다라씨는 곧장 안의사의 유묵으로 화제를 옮겼다. 그가 간직해온 유묵은 약 10년전에 논픽션작가 사이토씨의 권유로 매스컴에 사진으로 공개한 적 있지만 한국에서 전시되기는 한번뿐이라고 한다. 안중근의 유묵은 전부 려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게 휘호를 해준 것 인데 그 수자가 근 200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독립”이란 글이 있는 유묵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한다. 두말 할 것 없이 한국에 반환되면 국보급 문화재다. 한국정부는 이 귀중한 유묵을 긴 시간 소중히 보관해온 시다라씨에게 감사의 뜻으로 한국 서울에 초대하여 안중근기념식전에 참석시키기도 하고 국빈처럼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 생전에 시다라씨를 한번 뵙자고 초청 한 적이 있는데 시다라씨는 완곡히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를 피력했다. 왜냐면 안중근을 숭모하여 우리 집의 가보를 소중히 모시는 것은 우리 집안의 범사(凡事)이므로 대통령의 접견을 받을 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다라씨는 겸손한 인품이었다. “어떻게 안중근의 유묵이 이곳 간센지에 남아있게 됐습니까?” 나의 새삼스런 질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의 작은 할아버지 시다라 마사유키가 당시 대련구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안중근의사와 동년 동월 생 이였다고 합니다. 두 분은 잦은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백년전의 지금쯤이 됩니다. 안중근이 사형당하기전인 1910년 2월 려순감옥에서 이 ”독립“ 두글자를 써서 저의 작은 할아버지께 주셨습니다. 나는 또 궁금했다. “왜 독립”이란 휘호를 한국인이 아닌 일본에게 써주었을 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역시“하면서 대답했다. “한국인들로부터 늘 받는 질문입니다. 일본인에게 주면 안중근님의 본인의 뜻이 일본인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아닐까요.” “독립이야말로 안중근의사의 절절한 소원이 푹 슴배인 글자니까요.” 나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의사의 일본인에 대한 유언 그 자체라고 생각이 되었다. 시다라씨는 또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은 이토를 격살하고 이 '독립'이란 글발을 통해서 이토의 직접적인 상전인 천황에게 조선독립을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인물이지요. 31살의 청년이 이런 장대한 스케일과 예지와 용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존경스럽지요.” 실제로 안중근과 접촉이 있은 일본인들이나 지금의 일본인들 속에서도 안중근의사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이 있다. “우리는 원수가 쓴 것이라면 피하거나 버리고 싶어 한다. 안중근은 일본의 적 일터 이므로 그것이 버려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 많은 것이 남아있고 또 대접받고 있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안중근은 일본을 좋아한 것 같다.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가려다 갑신정변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을 만큼 일본의 신문화에 흥미가 컸다. 그러나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까지 하는 극력한 반일투사가 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조선 독립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이며 안중근 자료 발굴 및 연구의 제일인자인 최서면선생이 최근 “안중근의사의 유물전시회에 붙여”에서 쓴 말이다. 노숙한 연구자다운 의미심장한 말이다. 3. 어느새 시다라부인이 “유묵이 준비 되었습니다”.하고 우리를 불렀다. 최고급 일본견사로 특제한 포장 커버 속에서 시다라부인은 조심스럽게 안중근의 유묵액자를 꺼냈다. 사진에서 익히 보아왔던 “獨立”이란 박력 있는 두 글자가 한눈에 확 안겨왔다. 종횡 33X66센치의 일본화지에 박아쓴 글씨였다.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감옥에서” 화지는 열화 되어 시누렇게 변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먹 글씨나 장인은 너무나 선명히 박혀있었다. 안중근의 유묵 중에서 이 손 바닥 인이 가장 뚜렷하다고 한다. 나는 방안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위에 유묵액자를 정중히 모셔놓고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형언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물결이 팽배하면서 어느새 눈물이 앞을 흐리였다. 나는 유묵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유묵으로부터 받는 특유의 기(氣)에 나는 무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였다. 유묵은 나에게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다. 절절히 또한 침통하게. “독립” 두 글자는 순간 안중근의사의 얼굴모습으로 변하여 다가왔다. 순국 당시 31세의 청년의 안중근. 얼굴은 대형 영사막의 영상처럼 클로즈업된다. 독립자주 평화사상을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과 함께 자여기인(字如其人)이라 글씨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듯이 이 글씨자체가 안중근의 인격의 결정체이며 등신대(等身大)의 안중근 그 자신인 것이다. 침착하고 육중한 그 글씨의 뿌리는 아마 한국 근대유학자 선비들의 기풍이 슴배여있다고 본다. 어디 그뿐이랴. 단정하고 명쾌하고 중후한 본인의 인격을 남김없이 발로하고 있는 것이다. 4. 문득 나는 안중근의 그 선명한 먹으로 찍은 장인에 네 손바닥을 갖다 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910년 6월, 12인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으로 왼손의 약지를 절단했기에 새끼손가락 사이즈와 같다. 천생 여자의 손같이 작은 내 손이였지만 안의사의 손은 의외로 내손만큼이나 섬세하고 작았다는 발견에 나는 다시금 놀랐다. 163센치의 신장인 안의사가 손이 항우의 왕손만큼 클 리는 만무했다. 그의 손은 분명 크고 투박한 무인(武人)의 손이기보다는 작고 섬세한 선비, 문인의 손 이였을 것을 나는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 역시 피아니스트나 화가의 손처럼 가늘고 긴 편이였다.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의 유학경전을 익혔던 그가 붓을 쥐였어야 할 손에 총을 쥐고 적장을 저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시대배경에는 바로 그 참담했던 역사와 민족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안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역시 161센치의 왜소한 체구였다. 며칠 전 야마구치의 이토기념관에 전시된, 그가 입었던 조선통감복이나 속내의 실물을 보면서 그가 몸이 작았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기(奇)하게도 안중근과 이토의 생일은 모두 9월2일 똑같은 날 이였다. 이토는 1841년 9월 2일, 야마구치현(山口) 하야시(林)씨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뒤 이토가문의 양자로 되어 성이 이토로 됨)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순흥(順興)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했다. 할빈에서 사망 당시 이토는 만 68세노인, 안중근은 만 30세 청년 이였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결은 한일양국 민족의 대결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생일을 같이 공유했을 뿐 만 아니라 서로 원수이긴 했지만 그 인물의 성품 면에서는 모두가 양국의 위인으로서 공통점이 많았다고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일본의 지한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교토대학 이토 유키오교수(이토 히로부미와 아무런 친척관계가 없음)는 작년 11월 600페이지의 대형전기(코단샤 간행)를 집필했는데 그는 이토와 함께 안중근연구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이토와 안중근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기묘한 느낌이지만 이토의 전기를 집필하는 작업과정에서 안중근의 성품을 알게 되면서 입장이야 달리 하지만 강한 정의감, 의지 등 면에 있어서 이토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토 암살자인 안중근에게는 굳은 신념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토와 공통한 친절감 마저 들었다. 그렇다. 후세의 일본인 학자들까지 안중근에게서 자신들의 위인과 같이 동일한 위치에 높이 올려놓고 높이 평가하고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확고한 신조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23    3-7. 100년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댓글:  조회:5392  추천:21  2013-05-06
7. 100년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1910년 “한국병합” 선후의 100여년전의 평가를 보면, 제 3자의 시각에서 한국, 한국인 및 그 국민성, 사회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좋은 소재로 된다. 또한 억울한 “한국병합” 역시 우리 민족자신의 결함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기도 한다. 당시 서양인 관찰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충전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the Moming Clam)로 아직은 전 근대의 잠자는 나라로 보았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대체로 “부패와 착취로 점철된 사회”이며 “애국심이 결핍하며 더럽고 무례하고 게으른”표상이 주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이자벨라 버드숍(1831~1904), 조지 커즌(1859~1925), 헐리어(초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웨브 부인, 구빈스, 존 조든(주한영국 공사) 등 여러 서양인들 눈에 비쳐진 한국은 대체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다. 필자도 그들의 한국기록을 읽으면서 경악함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일본에 대한 긍정과 한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서도 대조적 구도를 이루었던 것이다. 1876년 헐리어는 서양인이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근대 중국”에서 갑자기 “근세 중국”으로 옮겨 온 곳으로 착각 할 만큼 “빈곳이 편재하고 게으름이 국민적 특성인 나라”로 모사했다고 말한다. 중국과도 비교해도 한국은 후진의 나라란 것을 그들은 발견한다. 그러므로 한국은 “문명퇴화”의 모델이었다. 1911년 한국에 왔던 웨브 부부는 “무지하고 미개한”,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문명개화가 안 된 농부의 나라”가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한다. 1893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 정치가 커즌은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엔 너무나 쇄약했다” 라고 판단하며 “한국은 가장 잘 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한국 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지적한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주한 총영사로 부임한 헨리 코번은 고종을 비판하면서 성격적으로 우왕좌왕하는 약점이 있으며 많은 영국인들은 한국이 한마디로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고 자력 할 수도 개척 할 수도 없다면 외부로부터라도 개척해야 된다고 결론 내린다. 영국인 매크리비 브라운은 당시 저명한 애국자 관료 민영환에게도 공공정신이 결여하며 일본 지도자들과의 헌신적 희생과 대표적이라고 한다. 전봉준이 동학 농민 전쟁에서 체포된 다음 심문 받는 당시 중앙 정부의 탐관오리로 민영준과 함께 민영환을 꼽았다. 일제 침략에 목숨을 바쳐 반항한 애국자에게도 이런 숨겨진 ‘악’이 있었던 것은 충격적이다. 동경 주재 영국 영사 구빈스도 1902년 서울에 있는 적 이 있는데 그는 한국을 “완전 붕괴상태에 있는 동양 국가”로 묘사 하였으며, 동아시아 정세에 투철한 관찰가 새토우는 “한국을 에워싼 국제적 모순은 한국 정부의 허약함과 부패, 당쟁 싸움에 의해 조장되었다” 라고 지탄하면서 “터키가 유럽의 환자”라면 한국은 “동양의 환자”라고 표현한다. 1880년대 초에 일본을 방문한 적 있는 비숍여사는 한국인의 특성의 하나로 “시간관념이 박약하여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다” 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쇠락하고 죽어가는 나라이며, 황궁에서 최하층 빈민에 이르기까지 개혁에 집요하게 저항하는 보수주의 나라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한 한국의 모습은 서양문명의 “청결”이 결여된 “더러움”이었다. 북경을 보기 전 까지 서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비숍은 고백했다. 서양인들은 “서울은 눈과 코가 다 괴로운 장소”라고 했으며 반면 일본은 “거지도 더러움도 없는 근대성을 나타낸 곳”이라고 예찬했다. 따라서 “일본인은 몸과 옷이 다 청결하고, 한국인은 옷은 청결하나 몸에는 관심 없는데 중국인은 둘 다 청결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서양인이 본 동아시아 3국 청결 문명 비교론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한국을 “3천마리의 소를 기르면서도 30년 동안 한 번도 외양간을 청소한 적이 없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아우게이아스담의 마구간’”에 빗대며, 이것을 “청소 할 수 있는 자는 일본인뿐”이라고 판단했다.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인의 국민성을 대체로 “간교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고집이 세고 도덕심이 부족하며”, “남녀가 다 더럽고 씻기를 싫어하고 단정치 못하며”, “누워서 빈둥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사색을 즐기는 민족”이며, 공통적 특성은 “게으름”이라고 지적한다. 백년전 민족의 성격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표상과는 너무나 괴리된 모습들이다. 비숍은 만약 한국인의 정직한 정부에 의해 산업이 흥하고 생계를 보호 받을 수만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성장 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국내 정치의 부패와 착취가 원인이라고 한다. 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주재한 언론인 매켄지도 한국인의 사랑스러운 면을 발견하면서 동정적이고 일본의 진면목을 알자 반일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에 비친 한국인은 “세상의 채찍 아래서 침묵의 무관심을 고집하는, 건강하지만 무관심한 양들의 나라”로 비유한다. 따라서 특기할 것을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정이 없고 국가나 집에 대해 자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영국인 관찰자들은 “한국이 어차피 독립국 자질을 가지지 않았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백년전 우리에게 발견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히 강조할 만큼 민족심이 의외로 결여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이란 말이 백년 내지 80년전에 만들어진 단어이듯이 한국민족주의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형성, 보급된 것으로 이제 다시 봐야할 것이다. “한국병합”에 대해 결론은 “왕의 무능과 부패, 일반 국민의 무지와 무관심에 일관해있기에 자립이 어려우며 따라서 외부로부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10년 영국의 여론은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계몽의 스승으로 한국을 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1928년 한국 경성제국대학에 와서 영어교수로 있던 영국 소설가 드레이크의 발언을 보자. “어떤 민족이 강압적 통치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양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 서양인의 평가, 지적은 귀 아픈 소리이지만, 또한 “한국평화”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혼재 되어있으나, 100여년전의 국민성, 사회실정, 정치, 경제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 매우 지대한 의미를 지닌 지적이다. 남의 탓, 비판도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자기 성찰은 그 이상으로 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2    3-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댓글:  조회:5424  추천:12  2013-04-29
  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1. 일본에 2. 이등박문이란 사람이 3. 삼천리 금수강산을 4. 사방에서 바라보고 5. 오적을 매수하여 나라를 앗아 갔기에 6. 육연발 권총으로 7. 칠발 쏘아서 8. 팔도 강산을 다시 찾으니 9. 구사일생의 왜놈들은 10. 십만리 밖으로 뺑소니치네.    한국 통감으로 사실상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할빈역두에서 조선 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조선인들이 지어 불렀던 숫자풀이 노래였다. 한국 통감 이토의 지배에서 받았던 그 울분의 한을 이렇게 민중들을 풀었던 것이다.    에서 기술했듯이 1905년 제2차 日韓協約(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한다. 당시 초대통감인 이토히로부미에 의한 보호정치가 시작된다.    최근 한국과 일본 및 서양학자들의 연구 (한명근, 이토 유키오, Beasley)에 따르면 이토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여 “자치 육성 정책”을 실시하며 일본이 실권을 쥔 지배방식을 시도했다. 따라서 그는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親韓 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大邱物語》(가와이(河井朝雄)1929)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일본정권대사로 한국에 온 그는 한성근처의 농민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천진난만하게 담화를 즐겼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 같이 한복차림으로 노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 행동에는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일본과 한국은 한집안이라는 정치적 은유가 숨어있다.(최재묵)”    《伊藤博文傳》(春畝公追頌會1940)에 그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1906년 1월 이지용, 박희병과 그들의 부인들과 나란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이토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서 이토의 왼쪽 앞줄에 앉은 여성이 이토의 부인 우메코(梅子)인데 역시 한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복이 한민족 전통의 상징이며 민족의 심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토는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표상을 적극 자작하였다.    그의 각종 전기, 회상기를 섭렵해 보면 이토는 명예욕과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자기 현실욕과 그 표현력의 강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금전욕에는 담박했으나 색욕과 현시욕에는 출중했다고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자연히 그런 이토가 한복차림으로 자신의 “親韓ㆍ知韓ㆍ愛韓” 표상 수립에 적극 자작자연 했을 것이리라.    영남대학 최재묵 교수의 말을 빌면 “한복을 입는 이토의 행위는 한국의 제도나 전통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시늉)였다. 그것은 한국 민심 향배(向背)에 부심한 일종의 계산된 정치적 연기이기도 했다.”    “한복차림의 이토”, 문인답고 선비다운 풍모를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느낄 수 있는 사진이다. “한국 침투의 선두주자”란 한국교과서의 기술은 맞다. 그런데 침범하여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호하다. 그리고 “극악무도”의 인물이란 평은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속속 등장되는 이토 연구서나 전기에 의하면, 필자는 우리 동포가 표상으로 막연히 인식하고 있는 이토의 인물상은 너무나 조잡하고 편향적이다 라는 것이다.    이토가 중요한 것은 한국식민의 설계자적인 위치의 대극에 있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 교육의 “신성한”차원에서 이토는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 평가 절하해야 되고, 지어 왜곡해도 무관하다는 태세다. 이런 문화상태주의가 결핍한 민적정서의 “유치성”이 곧 우리 민족의 이토관 내지는 한일역사에 투영된 한계이기도 하다. 역사는 단순히 민족 정서와, 민족의 뜻으로 풀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룰을 우리는 짓밟고 있다.    필자가 새로 발견한 이토의 인물상, 한일관계에서 노정된 이토는 “극악무도”로 일축한 인물이 아니며 안중근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듯, 그 역시 일본의 근대를 만든 영웅적 거물이며, 또한 일류의 정치가, 사상가, 정략가란 당대의 대표적 인물이란 것이다.    이토의 이름 博文은《論語》의 “君子博 學於文, 約之以禮”에서 따 온 것이며, 文을 숭상한 문인, 시인형 정치인이었다. “文明”, “立憲國家”, “國民政治” 가 그가 노린 평생의 이상이었으며, 한국 통치의 정치적 철학은 “일본국민을 문명의 인으로 계몽하듯이 문명정치를 한국에서 실시하고 싶은 것”이였다.  1906년 그는 니이토베 이나조(新戶渡)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은 대단하다. 이 나라 역사를 보아도 그 진보는 일본보다 월등 앞선다. 이런 민족이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 때문이다. 나라만 잘 되면 인민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부족한 점은 없다.”(《니이토베전집5권》)    이토는 한국의 기존 질서, 가치관을 되도록 존중하며 점진적 문명국으로 전환 시킬 꿈을 안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 유교 소양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유림을 활용하려 했으나, 한국 유교적 사상이 하나의 보수 사상으로 한국의 개혁을 막고 있는 보수파라는 것을 실감한다. 마치 중국 무술변법시 유교적인 보수파층과 같이 한국에도 중압적인 존재가 되었다. 유교에 대한 회유책을 시도했으나 드디어 실패한다. 그의 “문명화”는 유교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 채 흐지브지 해진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 전통과 민족성에 대해 관심을 돌려 한국에서 교육에 종사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국민성 존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통치구상에서 새로 발견된 메모에 다음과 같은 플랭이 보인다. “①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한다. ②한국 문무양반 중에서 각 50명 원로를 호상 선출하여 上院 을 조직한다. ③한국 정부대신(大臣)은 한인으로 조직하고 책임내각을 구성시킨다. ④정부는 부왕의 수하에 속 한다”. ( 堀口修等編)    이토는 1909년 4월에야 한국병합을 인정하며 병합 후에도 한국의 정치자치를 주장했으며 의회 정치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실현하여 장래 한일 동맹을 구상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이토의 암살로 그의 플랭은 편의 종이조각으로 남고 말았다. 이토가 자신을 저격한 인물이 조선청년이라는 것을 알고 절명직전에 남긴 “바보 같은 자식”이란 말의 뒤에는 자신의 진의를 모르고 자신을 원수로 저격 했다는 뜻이였을까? 그 뒤 합방이 정식 이뤄지고 이토의 구상과는 달리 데라우치(寺內)초대 조선 총독의 가혹하고 강압적인 무단(武斷)정치에 들어선다. 이토가 살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으로 그 공백을 매울 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토의 진의를 몰랐다 해도 그의 죄가 아니다. 죄는 수단의 이하를 불문하고 이 민족을 지배하려 했던 이토와 일본제국주의에게 문책해야 한다.  
21    3-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댓글:  조회:5222  추천:10  2013-04-20
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백여년전 한중일 근대사 궤적을 조감하면 3국의 근대화 성공여부의 선로가 선명히 부상한다. 중국과 한국은 늘 자부감을 느낄 정도로 ‘문’의 사회 였고, 일본은 반대로 ‘무’의 사회였다는 점이 일목 요연히 알린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핵으로 구성된 “문인”에 의한 문치 사회와 전통적 상무정신의 핵으로 이뤄진 일본의 무치사회는 지극히 대조적인 사회 및 문화패턴이었으며, 그 가치관, 행동양식은 역시 대조적으로 이질적 양상을 노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불가사이하게 느낀 것이라면, 지금 껏 중한일의 이 대조적인 문, 무 세계에 대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이 한수 위이고, 우수한 반면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문화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열세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중국과 한국이 야만의 무사에 일시 패배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오만해지며 문의 문화가 왜 무의 문화에 패배했는가 그 원인규명의 자아성찰은 거의 누락돼있다 필자가 동아시아 근대사 해독 작업에서 재발견 된 것은 우리가 일본무사문화를 그냥 “야만, 잔혹, 폭력”이라고 냉소적인 경멸로 일축할 사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언이폐지 하면, 근대 조선, 청국이 경시하던(지금도 변함없음) 무사 문화의 그 실속을 모른다면 그것에 패북당할  가능성이 없지않다. 이것은 근대 중, 한이 일본에 근대화 경쟁에서 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100여년이 지난 오늘 날 현대 21세기의 진로에도 이 원인에 의해 중한일의 미래가 규정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의 행동양식, 가치관은 무엇일까? 역사에서 노정된 그 양상을 정리하면 그것은 “실무성”과 “혁명성”으로 귀추 할 수 있다. 우리가 늘 얕잡아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낱말로만 일축 할 수 없는 근대적 원리가 일본의 무사 문화 속에 내재해 있다. 이에 비교해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유교정신을 토대로 한 독서인, 지식인 즉 文人문화의 “공론성(空論性)”과 “문약성”으로 귀추 되는 행동양식, 가치관이며, 항상 앉아서 쉽게 안이하게 이루려는 비생산적인 발상이다. 일본 무사가 늘 칼을 거머쥐고 생활의 현장에서 행동적인 것에 반해, 중, 한의 유교 신사, 선비는 늘 붓을 쥐고 탁상에 앉아 논쟁을 즐기며 생의 현장에서 행동, 실천을 기피해왔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결여했던 치명적인 결점, 즉 행동력과 혁명력의 결여 그것이었다. 상대로 일본의 무사계급은 사고 한 뒤 그 플랭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이 신속히 따랐던 것이다. 상징적인 역사 인물을 들어 보자.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개국을 하게 되는 데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 행동양식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 타카스기신사쿠(高杉晉作)등 지식인이며 무사인 그들은 당시 서양 열강에 통용된 국제법 저작 《만국공법》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권총사격술도 익숙했다. 이렇게 국제 지식과 실용적인 무기사용을 직접 장악 할 만큼 실무정신이 뛰어났다. 그러나 청국의 지식인들, 즉 문인들은 책만 붙들고 탐독하면서 논쟁 설전을 벌이기를 즐겼다. 위원, 엄복, 강유위 누구하나 실무적인 권총을 손에 쥘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의 선비들 박규수, 김윤식 당대 일류의 지식인 역시 사대주의적 공론에 치우쳐 두 번의 양유체험을 거치면서도 실용적인 “무”가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누구하나 제기하지 못했다. 과거(科擧) 제도의 시스템에 의해 문화력을 과시해온 문인 지배인 중국에서는 정말 문인 관료가 2만명, 무관 7000명이었으며 총 지방관원수가 200만도 안되었으나, 이 소수의 문인 엘리트 사회가 4억 남짓한 인구를 지배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3300만 인구에 무사계급 189만의 방대한 체계로 일본 전체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인 관료계급은 상대적으로 작은 숫자였지만 독립자주 할 필요 없이, 매판 무역에 의해, 국가의 봉록으로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만으로 전무사계급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사들은 경제, 산업 개혁에 지대한 열성을 보이며 서양의 모방과 함께 “물건 만들기” 제조업에 힘을 기울인다. 원래 실무정신이 강한 그들은 부국을 강병의 토대를 하여 식산흥업에 혼신을 다한다. 1892년 일본 산업 기업 수는 3065개, 총 투자 수는 1억 6371만원에 달한다. 그런데 청국의 “양무운동”은 1860년에 시작해 산업의 수나 투자 수에서나 일본의 규모에 비교가 안 된다. 1894년 통계에 따르면 제조 기업이 15개, 총 투자수가 2796,6만원이다. 양무파와 민간기업 수나 투자액에서 일본과 전혀 견주지 못할 저수준에 머물렀다. 문인 계층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대 중국의 유신은 실무정신과 혁명성에서 모두 일본을 뒤따를 수 없을 만큼 박약했다. 일본의 근대공업이 “물건 만들기” 제조업적인 실무 형에 비해 중국의 경제모델은 과잉노동력, 인재, 기술 부족 하에서 “배를 만들기보다 배를 사는 편이 낫고, 배를 사기보다 빌리기가 낫다”는 안이한 쉬운 산업원리를 고안 해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기간산업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경제 산업의 근대화는 “그림의 떡”에 그쳤다. 사실 따져보면, 백년이 지난 오늘도 이 같은 기업원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개혁개방 40년이 되어 오도록 방대한 민족 기간산업이 축적, 형성되지 못하고 세계의 기업을 위해 알바를 하는 “세계 공장”이란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근대 문인계급의 혁명, 개혁에서도 혁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귀족계급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일본의 무사들은 새로운 서양 관념과 기술에 그 실무성과 혁명성을 발휘하여 익숙히 수용하여 과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근대화 모델을 터득한다. 그들이 우선 목을 벤 것은 자신들의 목이었다. 혁명의 목표도 뚜렷했다. 중국과 조선은 다 같이 문인계급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근대혁명은 산업면이나 사상면 사회면에서도 성사 시킬 수 없었다. 근대 한중일의 성공여부는 사실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가지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비교, 분석, 성찰할 의미는 매우 크다.  
20    3-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 지도 댓글:  조회:5665  추천:13  2013-04-02
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 지도   1910년 8월 29일 이 발표되면서 일본 관인이 환희의 광란 드라마 벌이며 그것을 찬미하고 있을 때, 단 한명의 일본인이 한국병합에 대해 비판했다. 그가 바로 그 당시 일본의 국민적 시인이었던 25세의 젊은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琢木 1885~1912년)였다. 8월 29일 직후의 시점에서 매스컴을 통해 한국병합을 비판하면서 조선민족에 지대한 동정을 보인 인물은 단 이사카와 한명이었다.   지도위의 조선국에 검디검은 먹으로 칠하니 쓸쓸한 추풍이 들린다 1910년 9월 9일에 읊은 이사카와의 단시(短詩)였다. 조선 지도를 흉사에 사용하는 먹으로 검게 칠하면서 가을바람의 쓸쓸하고 매서운 오한을 느끼는 심정을 남김없이 표현한다. 일본제국의 침략에 반대하고 망국의 민이 된 조선 민중에 대한 뜨거운 동정과 연민의 눈물을 타쿠보쿠는 쏟고 있었다. 일본전체가 꽃전차를 타고 초롱불을 들고 희열의 극치에 달한 그 상황에서 정면에서 이의(异意)를 표하고 과감히 제국을 비판한 그 담량과 시적 기량은 모두 최일급적이었다. 사실 1년전인 1909년 10월 할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 했을 때, 타쿠보쿠는 안중근을 영웅다운 행위로 예찬하는 시구를 썼다. “영웅답게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의 소문 항간에 널리 퍼지네.” “그 누가 나를 권총으로 쏘아보라, 이토같이 달갑게 죽여 줄테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중근을 “영웅답게도” 순국한 의사로 존경했으며, 이토를 그토록 존경한 타쿠보쿠였지만, 역시 한국의 영웅에게도 존경의 념을 표했던 것이다. 당시 타쿠보쿠는 이토의 죽음을 “위대한 정치가의 위대한 심장은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고동을 멈추었다”고 가슴아파하면서도 이토를 쏜 “한인”에 대해 “아직도 진짜로 증오해야 할 까닭을 모른다” 라고 고백한다. 패자, 약자에 대하여 응시해왔던 타쿠보쿠는 강자 일본의 강폭한 소행이 안중근과 같은 약자들의 의거를 초래했다고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인”을 증오해야 할 까닭이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일본인으로서의 자기가 피지배자인 그 누구가 권총으로 쏘아도 기꺼이 죽여 줄테다고 죄책감을 솔직히 고백한다. 타쿠보쿠는 메이지 시대를 한 복판에서 살아온 견증인으로서 그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침략, 팽창한 국가주의에 인식을 가하면서 약자에 대해 강렬한 동정을 품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국가주의에 의해 팽창된 식민확장, 지배에 대해서 그는 과감히 비판하는 인물이었다. 1910년 8월 29일 관보 号外에 메이지 천황의 한국병합에 관한 조서(詔書)가 공표되는데 그것은 그 어떤 국민의 비판과 발발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절대다수의 국민과 지식인들마저도 국가주의에 팽배한 동조와 영합을 보인 상황 하에서 타쿠보쿠와 같은 일본 국가주의의 제국주의와의 서어(齟齬) 및 정면대결은 너무 쉽지 않았다. 일본을 “시대의 폐색(閉塞)”의 나라라고 29일 그늘 비판하는 글을 쓰며, 메이지 천황의 그 에서 언급한 “조선총독을 설치하여 육해군을 통솔하여 제반 정무를 출발한다.”는 군정을 실시하려는 신언에 혐오감을 느낀다. 8월 30일 에 “大日本帝國의 전 ”와 “新版圖조선”지도가 게재되었다. 일본지도와 조선지도가 한 가지 빨간색으로 되어있었다. 일본판도에 들어온 잃어버린 조선지도였다. 곤도(近藤典彦)의 논고에 따르면 실제로 타쿠보쿠가 조선지도를 펼치고 그 위에 검은 먹으로 칠하면서 시구를 썼다고 한다. 일본제국에 의해 삼켜버린 조선의 불행을 “지옥”으로 보면서 다쿠보쿠는 그 어설픈 가을바람을 들었다. 이어 다쿠보쿠는 으로 제목한 단시 전제 345의 시에서 한국병합의 비참한 단시 몇 수를 또 써내려간다. “메이지 43(1910년)의 가을 내 마음은 더없이 참말로 구슬프구나” “어쩐지 야비해 보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 위로 가을바람 스친다” “가을바람은 우리 메이지 청년의 위기를 슬퍼하는 얼굴 애무하며 불어온다” 다쿠보쿠는 쓸쓸한 추풍과 비애를 모티브로 일본제국, 국자주의의 비애와 함께 일본제국주의 팽창으로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인의 비애를 읊는다. 1906년 사회주의자 코도쿠슈스이(幸德秋水)의 영향으로 다쿠보쿠는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국자주의를 비탄하고 조선 경멸론을 지탄하게 된다. 1911년 6월에 남긴 “코코아의 한술”이란 시에서 다쿠보쿠는 “나는 알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하고 읊고 있는데 여기서 “테러리스트”란 이토를 쏜 안중근을 칭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적인 안중근에게 깊은 이해와 동정을 표했다. 그것은 전 조선민족에 대한 이해이기도 했다. 일본 현대 저명한 지식인 츠루미(鶴見俊輔)는《현대 일본 사상사》에서 이렇게 타쿠보쿠를 높이 평가 하고 있다. “이 한일 병합이라는 정부의 행동이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해 어떻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 상상을 여러모로 구사한 역량을 갖춘 일본인은 당시 흔치 않았다. 이사카와타쿠보쿠라는 시인은 그 흔치 않은 한사람이었다.” 이런 일본 시인에 대해 한국에서도 일찍 숭모한 지식인, 시인들이 있었다. 저명한 문학자 김기진(金基鎭)(팔봉)은 1920년 일본 유학당시 타쿠보쿠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932년 김상회(金相回)가 타쿠보쿠의 시집 를 에 변역하기도 한다. 1960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전에 시인 김룡제(金龍濟)에 의해《타쿠보쿠 시집》이 한국에서 정식 번역 출간되며 그 뒤로도 대역형식으로 다수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타쿠보쿠의 사상과 인물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미개척지에 속한다. 일본의 강제병합에 대해 비판하지만, 우리는 일본인 중에서도 우리 같이 일본제국을 비판한 천재(天才)적 시인이 있었던 것에 너무 어둡다. 타쿠보쿠는 조선인과 피압박 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하고 이해해야할 일본인의 양지를 갖춘 희소적 가치의 인물이다.  
19    3-3.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 댓글:  조회:5219  추천:20  2013-03-26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역사란 何오 3.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   한일 병합 10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지배 36년에 대한 역사적 기억. 식민지의 기나긴 경험은 당한 조선민족의 영혼에 지지리 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회억 자체도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덧나는 상처처럼 꺼내기 싫은 과거 일지도 모른다. 행, 불행을 떠나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 근대 역사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닌 역사 과정이었으며, 조선의 그 이후의 역사를 규정짓는 큰 구실을 했던 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근대사 100년의 수없이도 많은 자료 문헌을 섭력하는 과정, 일본 식민통치를 당한 피식민지자의 후예로서 가슴 아픈 대목들을 많이 조우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역사가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어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의 피와 살이 된 것이니, 무조건 덮어 감추거나 왜곡, 무시 할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일본과 같이 무섭게 동질적 사회, 문화를 이룬 우리 민족은 나 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편에선 적, 상대에 대해 비관용적이다 라고 한국의 석학 이어령 선생도 필자와 대담할 때 지적한적 이 있다. 증오의 감정 역시 늘 동질, 균질적이어서 우리 아닌 남, 타자, 특히 일제와 같은 대상은 무조건 증오의 타깃이되어, 그 시대에 대한 모든 역사적 해석 역시 “증오”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거의 어느 하나 누구의 이론(異論)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태세로 기세당당하다. 그런데 증오의 절대적 감정, “정의(正義)”에 눈가려 망각할 것은 이성적인 자기 성찰과 반추라는 중요한 팩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제감강정식민시기를 다룰때, 학문적인 접근이든, 대중적인 언설이든 사석에서의 잡담이든 대개가 지극히 동질, 균질적 양상을 노정한다. 즉 일제통치의 역사적 시간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피부로 느낀 감각이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풍화”내지는 단순한 “관념화”란 여과장치를 거쳐 무조건 “저항사관”아니면 “매국친일” 2항 대립구조로 일축해버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여기서 빼놓고야 말았다.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 인간의 일상에 의해 지탱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을 담론한 여지가 우리 민족에게 없다.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 하지 않고 꺼리고 있다. 역사란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많은 역사 공간 시간은 오히려 그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해온 보통일반인의 “일상생활”에 의해 전개해온 것이 아닌가. 최근 다행히도 일제식민시기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어 세상의 햇빛을 보고 있다. 《내가 조선반도에서 한 일》(마츠오 시게루),《일본제국이 점지해준 아이들》(카터 엣커트),《일본 통치하의 조선진북의 역사》(사카이 도시오),《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오선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타카사키 소오지) 등 저작이 나타나면서 일제식민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에 대해 그 진실을 규명하고 있다. 그것을 잠깐 들여 다 보기로 하자. 서울의 일본인은 줄지어서 다다미를 깐 일식가옥의 거리를 형성하여 살고 있으며, 이런 일본인 사회와는 거리를 둔 조선인의 집에서는 라디오 제2방송(조선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 중계를 듣고 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는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빨래 방망이질을 하면서 환담하고 있다. 종로거리의 영화관 앞에서는 신작 영화를 관람하고자 행렬을 지어 있는 조선인들. 물만두를 열심히 파는 중국인의 모습도 보인다. 손님으로 만원을 이룬 화신(和信)백화점. 카페 여급과 환담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남성 취객. 사쿠라를 꽃구경하는 덕수궁의 화창한 봄 풍경. 학교에서 공부를 게을리 해 버들 회초리로 맞는 아이의 비명 소리. 얼음이 석자 두께로 언 한강위에서 썰매를 씽씽타는 아이들. 길을 물어보는 일본인에게 친절히 가르치는 예쁜 조선 아가씨. 이런 것들이 식민지 시기 당시의 하나하나의 풍경이다. 일제시기 일상생활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아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문화가 다른 민족이 같이 살다보면 알륵과 반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인류학이 이미 실증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특히 도시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반목이 심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배 내밀고 딸깍 딸깍 게다 소리를 내며 으스대던 일본인을 조선인은 아마 덜 반기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전후, “고향”을 찾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제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일제시대의 역사를 굳어진 이데올로기 일색의 저항, 친일, 2항 대립구도도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 보다 생활, 실제 모습에 접근하는 인식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사를 이룬 일상의 실상을 통해 우리와 타자의 과거를 알고 재인식 하는 것은 서로 유리하지 않을까.  
18    3-2. 조선말기 사회 진상은 어떠했는가 댓글:  조회:5061  추천:16  2013-03-18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역사란 何오 2. 조선말기 사회 진상은 어떠했는가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으로 조선은 망국한다. 물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이미 실질적으로 조선조의 망국은 시작되었다고 해야 한다. 500여년간 우리 민족의 “국가”로 구실을 해오던 조선조는 철저히 사라져 버렸다. ‘조선왕국의 망국, 왜 조선이 망했는가?’의 진짜 원인을 인식하려면 우선 몇 가지 막연한 통념에서 탈피해야 하며, 그 당시 조선조말기의 사회와 삶의 진상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통념의 하나가 식민지 되기 전의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상 조선 왕조는 대부분 시간 명, 청의 조공관계 시스템에 의한 예속국이었다. 형식적으로 독립된 모양새만 갖추었을 뿐 외교국제법의 기준으로 조준해 보면 “비독립국"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중국대륙을 중심, 정점으로 한 동아시적 천하 체제(天下体制)에 예속된 속국으로서, 1904~05년 청일 전쟁을 계기로 이 체제가 붕괴된다.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이 1905년인 것은 바로 중국의 예속에서 이탈된 때를 같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우리의 통념의 하나는 일제 식민지로 되기 전 조선은 매우 좋은 사회였으며 민족주의라는 관점을 투영시켜 조선의 일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타자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부정하려는 점이다. 또한 이런 통념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이 통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가령 이 통념을 뒤집는 증거, 사실이 눈앞에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조선조, 특히 그 말기 진상은 어떠했을까? 이런 물음에 준비된 답은 결코 긍정적이고 좋다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 지배 시스템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 특질로서 노예제도가 엄연히 존속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조선왕조 시초부터 말기까지 노예제도는 조선 사회 지배 및 구성 원리의 중추였다. 조선 말기 외국인 관찰가들의 조선 방문기, 조선인론의 숱한 저작, 저술 중에도 조선의 노비라 칭해진 노예가 대단히 많았으며, 그 노예들이 피땀 흘린 노동으로 조선 통치, 사회가 움직이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고려조 초기부터 전해온 노예제도는 500년이 아닌 1000년을 유지해왔다. 15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사회지배원지를 제공한《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아도 노비들을 인간이하 가축식 재산처럼 취급한 비참한 현실을 발견 할 수 있다. 1894년~95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은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조선인들이 모두 평등한 인간으로 되도록 한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일본의 압력, 또는 협력으로 성공한 이 혁명이 일본인 타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사실은 명치 혁명에 성공한 일본인의 경험이 갑오경장의 성공을 보장해주었다. 다음으로 근대의 큰 표징인 교통도로사정을 살펴보자. 조선왕조 500년간 조선에는 사람이 통과한 안전한 길이 없었다는 증언이 많다. 그래서 새로운 관리가 부임되면, “이번 오시는 길에 진흙탕에 몇 번 빠졌습니까?” 라는 것이 인사말이었다. 간선도로도 우마차, 인력거가 겨우 지날 정도로 대부분 논두렁길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요간선도로인 서울과 의주를 이은 도로는 종주국 청국의 사신이 왕래한 까닭에 유일 도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중요도로도 보완공사가 필요할 때가 많아서 보수경비를 현지에 보내면 3/4은 도중에서 지방 관리들이 횡령했다고 한다. 결국 경비는 상민, 천민, 노비들에서 가렴주구로 거두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모든 하천에 거의 다 다리가 없었으며, 조선왕조 이전에 있던 다리도 부스고 말았다. 이씨 조선이 고려를 반역하여 탈취한 정권이므로 그들의 역습을 경계하여 군대가 진군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셔버렸다. 가령 다리가 있다 해도 여기저기 구멍이 있어서 현지 사정을 모르는 자가 밤길에 그 다리를 건너다가 구멍에 빠져 떨어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때문에 다리(足)와 다리(橋)의 발음이 동음이라고 한다. 매년 강 건너다가 죽은 사람이 많아서 각지에서 진혼제를 지냈다고 한다. 도로사정 하나만 보아도 당시 우리 선조들은 지극히 궁핍하고 빈약한 경제사정하에 “근대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영위했다. 인류생활의 근대화의 표징인 교통이 좋아진 때는 1894년 일청갑오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철도가 생기고 1896년 경인선 38.9km를 일본기업이 미국인으로부터 매수 한 뒤 1900년 7월 8일 전선이 개통된다. 서울-인천간 5,6일 걸린 것이 2,3시간으로 통했다. 서울 양반들은 처음 보는 기차를 철마(鐵馬)라 불렀으며 별 목적 없이 하루 종일 기차 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은 양반들도 많았다고 한다. 경제, 정치의 근대적 혁명, 개혁을 조선조 정부는 끝내 자주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복거일씨의 말을 빌면 “조선정부에 대해서 실망한 지식인들이 눈길을 돌린 곳은 일본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조선이 저항할 만한 전범을 보았다.” 출판된《윤치호 일기》를 읽으면 조선조 말기가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며 부패했고, 현명하지 못하였으며 스스로 자기개혁을 못했다는 사실이 재발견 된다. 조선 말기의 가장 탁월한 개혁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윤치호는그때의 조선을 두고 “아아 슬프다, 조선의 현상이여. 남의 노예노릇 하는 것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어찌 떨쳐 일어나려 하지 않는가!” (《윤치호 일기》송병기역, 1883년 1월 2일자) 라고 통탄한다. 또 일제시기 최일류의 민족 독립가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 역시 “조선의 실태와 일본의 성공을 보면서 조선에 실망, 체념을 일본에 대해선 우려와 기대를 아울러 갖게 했다.” (복거일) 조선조의 망국은 근대화 조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진 그 자신의 원인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일본이 조선조의  근대화를 도와준다는 구실을 준 것 역시 조선조 정부였다.
17    3-1. 역사란 何오 댓글:  조회:5724  추천:24  2013-03-05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 역사란 何오 1. 역사란 何오 - 내가 중일한 근현대사에 집착하는 이유 0. 우선 제목의 해석으로 부터 글의 서두를 시작한다. 이 타이틀은 내가 가장 숭경하는 근대 조선의 최고 지식인 춘원 李光洙 선생의 명문 를 본 따서 지은 것이다. “문학”이 지식인(작가, 시인, 평론가 등)에 의해서 발설, 전개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역시 많은 지식인에 의해서 기술, 해석, 계승 되는 것이다. 역사를 쓰고, “창조”, 해석, 전승 시키는 것은 주역은 어느 시대든 그 나라, 사회, 집단의 엘리트들인 지식인의 몫이다. 역사가 고전적 의미의 “히스토리(이야기)”, 그리스어에서 “조사, 탐구”의 의미를 내포한 “서술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의 서술의 주역은 항상 서민, 대중이 아닌 지식인(학자, 문학자 등)이다. 그런 “이야기”를 고급스러운 이야기라 직언한 인물은 저명한 역사학자 E.H 카아(Carr)이다. “역사란 과거가 현대의 들려주는 이야기, 고급스런 이야기”라고 찍어 말한다. 역사,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적 영역으로서의 “역사학”이 지식인에 의해 창발, 진행, 전승한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역사”, “문명사”이기도 하다. 항상 역사의 주역을 담당해 시대를 리드한 엘리트 지식인. 1. 과연 지식인은 누구인가? 역사 속에서 동양사에서는 사대부(士大夫), 독서인(讀書人)으로 칭했고, 서양에서는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및 인텔렉추얼(intellectual)로 시대를 리드 해온 계층이다. 제정 러시아 사회 안의 지식인들로서 서구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노예제, 전체주의에서 인민 해방과 정치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킨 지식인이 바로 인텔리겐치아라 일컬어진 지식인이다. 근대 유럽에서 지식과 최고의 교양을 고안해냈고 발전, 확대시킨 자가 인텔렉추얼이라 칭해진 지식인이다. 필자의 이해로서 “진정한 지식인은 사회 체제에 적응, 순응하기 보다는 변혁을 통한 발전을 시도하고 그 방향을 지적하는 것이어야 하며, 사회의 경향, 약점을 지적, 해부, 비판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체제나 권력에 곡학아세 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사명감으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며 사회의 암 따위를 제거하기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체제와 기성권력에서 꺼리는 인물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이 나라나 소속집단, 민족을 위해서 진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장악한 지식, 정보를 모르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며, 진실을 말하는 장악한 지식, 정보를 모르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며, 역사, 특히 다치면 터질 것만 같은 민감한 역사의 판도라 함을 열고 진실을 감히 파헤치는 의식과 용기, 그리고 대담한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 비록 체제 내에 살아 남기위한 “적응”을 꾀하더라도 환관 같은 무절조의 곡학아세 보다, 체제의 개혁, 진보를 위한 건설적 지적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것에 지식인의 사명의 큰 아이템이라고 여긴다. 나는 조선족 지식인에 두 부류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침묵하는 연구자, 행동자와 말하는 비연구, 비행동자. 전자는 실제로 묵묵히 자신의 신조에 따라 창조적, 생산적인 연구, 글쓰기에 전념하는 지식인. 후자는 실제로 말수는 많고 잡 글은 많이 쓰지만, 일관성이 없이 창조적, 생산적 연구, 글쓰기가 아닌 어떤 “특정적 지식인의 창조적 생산적 연구, 글쓰기”에 매달려 흥분하고 비난 하는 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는다. 나는 후자로부터 수많은 비난의 화살을 맞아온 전형모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필자는 성격상 초식동물이어서 제 풀만 먹고 그런 자질구레한 데 신경 안 쓰는 타입이다. 내가 가장 기피하고 경멸하는 것이 아무런 창조적, 생산적 활동과 글쓰기가 아닌 비창조적, 비생산적인 타인 공격의 소모전이다. 필자는 그런 에네르기를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조에 따라,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슬로건이 아닌 실제로 지식인의 사명감(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 국가 및 사회에 유익한)을 무언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에서 생의 보람을 느끼는 지식인이다. 또한 그런 자부심을 상실하지 않고서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제 갈 길을 나갈 터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흑싸리 껍데기를 벗어 던진 진정한 지식인의 지조, 산앙, 의지에 필자는 스스로 충실하면서 껍데기를 탈피시킨 가장 진실을 말하는 자유의 지식인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구가 있다. 우리 겨레의 당대 지식인, 시인 신동엽의 명시이다. 여기서 전 시를 인용하면서 독자 제현과 共賞하고 싶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일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거추장스러운 허위, 이념의 “껍데기”. 그런 모든 “껍데기”를 백안시 하는 나의 신조와 태도를 잘 대변했다. 그래서 이 땅위의 모든 “껍데기”를 제거하는 글쓰기가 필자의 국경을 초월 하면서 진행하는 실천인 것이다. 2. 이 같은 나 자신의 지적(知的)실천을 지탱하는 지조를 언명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조선족의 척박한 지적 토양을 두고 객관화 시키면서 항상 슬픔 따위에 가까운 비애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역설(逆說)적 의미에서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해외나 국내에서 활발한 지(知)적 창조, 글쓰기, 연구 활동으로 불언실행(不言實行)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정신사적으로 족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거만한 소리라는 빈축을 살 위구를 무릅쓰고 라서도 명언하고 싶은 사연이 있다. 즉, 현재 21세기에 접어들어, 나를 포함해서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펼치고 있는 모든 지적활동은 척박하고 빈약한 조선족의 정신사(문화사)에 거의 다 “최초”라는 숙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사료된다. 어쩌겠나, 워낙 우리의 지적 풍토가 그토록 박약하고 미개척지의 처녀지가 많으니 말이다. 100년전 최남선, 이광수 등 우리 겨레의 선각자들이 진행했던 모든 문학적 활동, 글쓰기가 죄다 처녀지를 개간했다는 의미에서 우리 겨레 근대의 정신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정비(里程碑)적인 족적을 남기었다. 당시의 정신사를 펼치면 이광수, 최남선들이 동족의 타매와 찬성을 동시에 받았다는 양상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지금도 그 타매는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 자신의 정신을 흐리우기도 한다. 모든 선각자는 타매 당하기 마련이다.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현재 펼치고 있는 왕성한 미증유의 지적 모험은, 역시 선구적인 성격을 불가피적으로 띠고 있기에 수구파 조선족 지식인의 비난과 중상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3. 이제 드디어 내가 왜 한중일 근현대사에 매달리는가? 하는 졸문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우선 당연히 “역사”담론으로 시작된다. 나는 전공학문 영역이 역사학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에 매우 심취해 있다. 문화인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한중일 비교문화를 하다 보니, 역시 “문화로서의 역사”가 꼭 문화자체를 영향주고 지탱하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옛날의 학교 교육에서 받았던 역사 교육과 역사의 진실이 너무나 상이(相異)하다는 “발견”에 항상 충격을 받곤 했다. 지금도 그런 역사 진상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지적 흥분은 여전히 20대 연애 하는 심정에 못지않다. 이렇듯 역사의 진실을 하나 또 하나씩 캐나 가는 것은 마치도 금 노다지를 캐고 산에서 산삼을 캐는듯한 희열, 경이, 흥분, 감개의 지적(知的) 쇼크의 연속이다. 따라서 나는 늘 “역사란 무엇일까?” 하는 자문자답 해보곤 하는 버릇이 있다. 이글의 제목이 가 곧 현대 우리말로 풀이하면 “역사란 무엇일까? 이다 “역사”개념자체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다양하고 잡다하다. “문화”의 개념해석만큼이나 다양한 기술로 돼 있다. 호적이 말했던가, “역사란 임의로 분장시킬 수 있는 아가씨”라고. “아빠, 역사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 좀 나한테 설명해줘요.” 한 소년의 소박한 질문에 유럽 사회경제가 연구의 권위자인 마르크 블록(1886-1944)이 명저 을 집필하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일본의 중국사 연구에 큰 실적을 남긴 미야자기 이치사다(宮 市定)(1901-95)는 “역사학은 인간의 본능에 뿌리박은 학문이다.”라고 했다. 내가 또 상기되는 유명한 말은, 앞서 말한 영국의 위대한 사학자 E.H 카아(1892-1982)의 말이다. “역사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과정이며, 역사가도 이 과정을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백종을 넘는 개념정의에 관해,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가장 알기 쉽게 평명한 언어로 해석한 것은 일본 동양사 연구의 제일인자로 불리는 전 동경외대의 사학교수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1931~)교수이다. 그는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역사란 인간이 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 이 양자의 축에 따라서 그것도 한 개인이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척도로 파악, 해석, 이해, 설명, 서술하는 행위이다.” (오카다 히데히로 ) 이 해석에 따르면, “한 개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타인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의미가 없어진다. 즉 역사의 본질은 “인식”으로서, 그것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선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는 인간이 사는 세계와 관련된 것이다’라는 것. 인간이 존재 아니 한 곳에는 역사는 존재할리 없다. “인류의 발생이전의 지구사”라든가 “은하계 생성되기까지의 우주사”라든가 하는 것은 지구나 우주를 인간으로 견주어, 인간이라면 역사에 해당됨직한 것을 비유로서 “역사”라고 칭할 따름이며, 이런 것은 본래 역사가 아니다. 오카다 교수는 이렇게 평명한 언어로 “역사”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4. 시공간에서 담론하여 역사는 마르크스즘이 발설한 “진보사관”에 공감을 느끼기보다 나는 오히려 진보가 아닌 “변화사관”에 찬동한다. 역사는 변화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진보”로 포착 할 수는 없다. “진보사관”의 대치에 또 “하강사관”이, “정체사관” 있는바 이 역시 공감 할 수 없다. 역사에 관한 학문인 역사학이 “인간에 관한 학문”이며, 또한 “인간의 세계를 해석, 인식”하는 인문 과학이라면 서술법에서는 “문학”에 끝없이 가깝다. 이른바 “과학”과 “문학”의 양극을 오가는 역사학에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한 것은 20세기 서양 역사학자들이다. 환언하여 “사실·진실”과 “문학·레토릭”이 양자는 대립되기 보다는 “同 의 惡友”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격이다. 미국의 사학자 피터 게이(1923~)가 역사학에 있어서 예술과 과학이 준별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흥미롭다. “이 양자는 기나긴 세월 굴절된 경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학문적 교역 내지 문학적 거래를 아무런 지장 없이 또한 정식 수속도 없이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 (). 중국을 위시로 한 동아시아 역사학, 내지 역사의 해석 본질은 사마천의 식의 정통(正統)관념이며, 중국 문명의 역사관은 “정통”사관 지배아래 위정자, 통치계층이 절대적 옹호, 유리로운 봉사체계로서의 작용을 해 왔으며 또 지금도 이는 부동의 자세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사마천이 쓴 는 지배계층의 정상 황제의 정통의 역사일분 세계사도, 중국사도 아니다.” 라고 오카다교수는 지적했다. 통치자, 위정자의 “정통성을 성립, 유지하기 위한 인문학적 장치로서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이는 결국 레토릭, 상상력과 같은 맞은 문학적 서술수법이 동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가 황제를 쓴 이야기로서 재미있는 스토리로 구성된 것도 이런 연우에서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정통”의 정사에 불복하거나, 그 허위성 레토릭에 도전한 재야 지식인들이 쓴 또는 광범히 유전해 내려오는 야사(野史)가 병존하고 있다. 왕왕히 아이러니 하게도 “정사”보다도 “야사”가 더 史實에 접근 하거나, 문학적 접근이라 해도 더 사실의 진실에 핍근한 점이 발전된다. 그래서 정. 야사를 병행 연구를 하는 역사 연구방법은 늘 근대사학자나 지식인들이 흥미진진하게 행해온 연구법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말해, 동아시아의 정통적인 정사, 그 연장선에서 오늘 교육용 교과서로서의 “역사”교육은 야사적, 즉 서민, 대중의 실제적 삶의 양상과 질 생활양식으로서의 인간의 문화 그 자체가 많이 결락되어 있는 지대한 흥을 안고 있다. 단순히 현대사에서 “정설”로 되듯이 “과거(1949년전) 중국은 암흑한 사회였고 노동인민이 헐벗고 굶주린 一 二自의 사회”였다고 기술 하고 또 이런 “정설”이 일점의 회의도 허용치 않는 관념 내지 통념으로 중국인의 뇌리 속에 각인 되어 있어 털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정설”을 지탱 할 수 있는 史實적 근거, 실증적 데이터, 수자 등 사료는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은채 누락시켰다. 그리고 그 누락시킨 공백에 발호, 횡일 하는 것은 프로파간다 적인 위정자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과대 포장, 허위, 날조, 왜곡 등 모든 레토릭, 문학 수법이 동원 된다. 5. 그래서 “역사는 이야기이며 문학”이라고 직언하는 역사학자가 많다. 앞서 본 오카다 교수에 의하면 즉, “역사는 과학이 아닌 것으로 본다. 왜냐면 과학은 거듭 실험 할 수 있는 성질이 있지만 역사는 단 한번 밖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대상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 가의 문제.” 즉, “과학에서는 입자(粒子)의 상이점은 문제시 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다고 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한사람, 한사람 매개 개인이 다르다. 그것이 타인에 미치는 기능 역시 다르다. 이를 기술 하는 역사를 쓰는 사람도, 역사를 읽는 사람도 모두 다 같은 인간이다.” 이런 원인으로 역사가 과학이 아닌 문학이라는 것이다. 문학으로서의 역사가 하나하나의 “작품”에는 그것이 구비된 기능이란 것이 있다. 역사를 쓰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에서 역사자가 노린 목표, 효과가 있기 마련이며, 한편 역사를 읽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가 갖춘 요구나 애호, 이해력 등 조건이 따른다. 역사를 사색할 때 이 양자를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고 오카다교수는 지적한다. “정통성”을 지니고 강조시키기 위한 위정자의 수요에서 역사는 엄청난 조작, 작위성을 띄게 된다. 그러므로 “신화”를 간단히 역사사실로 바꾸는 기술도 있으며, “없는 사실”을 그대로 “역사 사실”로 창작하여 만드는 것은 오히려 상투적 역사 작법이다. 일본의 《일본서기》의 천황이란 군주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조작이었다. 그리고 《고사기》 역시 에도시대에 이르러 국학자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 長~)가 새롭게 개찬한 것이다. 많은 일본 사학자들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압력으로 개국했을 때, 서양 문명에 수용, 대치하기 위해 일본인의 콤플렉스에서부터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축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완전히 공상적 모이역사”가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1911년 《세계적 연구에 비롯된 일본태고사》(기무라 다케타로)에서는 일본인의 조상이 이집트인과 그리스 인이라 했다. 1924년 오야베젠이치로가 쓴 《칭키스칸은 源義經世》라는 대베스트셀러 저작에서 칭키스칸은 몽골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외쳤다. 유명한《다케우치문서》(1928)에서 저자 다케우치는 천무천함보다 더 이른 시대에 “일본초고대왕조”의 천황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칸 대륙까지 통치했다는 기발한 상상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1950년대, 또 오늘까지도 奇想을 동원해 쓴 “일본역사서”가 대거 쏟아지고 있다. 자유로운 일본의 언론, 출판 사정을 설명하는 사연이기는 하나, 이처럼 공상과학소설 같은 奇書가 위정자가 아닌 민간 지식인 중에서 산출되는 것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1950년대 전후 일본에서는 에가미(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설”(騎馬民族整服設)이 일세를 풍미했다. 일본 황실은 북아시아 기마민족 출신인데, 기마민족이 조선반도를 종횡하고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일본 황실의 조상이 되었다는 학설이다. 오카다 교수나 많은 사학자들이 이 학설은 완전히 판타지 공상이며 그 어떤 사실적 근거가 없는 에가미의 창작이고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고 지적, 비판했다. 결국 이 학설은 현재 완전히 뒤엎어지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6. 문제는 일본의 역사 조작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의 왜곡, 작위성이 격심한 것이다. 타자의 결함, 오류를 비판, 공격하기는 쉬운 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허위성, 결점에 대한 비판, 성찰은 왕왕 어려운 것이다. 타자 비판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은 우선 자기에 대한 비판, 반성이야 한다. 모두 불행과 악을 타자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나 자신에 있는 이유, 원인 규명을 하는 것이 월등히 현명한 처사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그것이 성숙한 이성적인 행동으로서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도 다 유리한 쪽으로 흐른다. 나는 이데올리기를 초월한 일개 자유주의 지식인이다. 이 자유주의가 나의 정신을 반거하고 있는 신앙이며 나를 나이게끔 한 정신적 최대의 요소일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자신의 허위성, 결함을 지적 하는데 주위와 동족으로부터의 타매를 맞을 각오 없이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체제와 민족, 애국이 등호를 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내가 “정통적” 역사관을 짖 부수고 진실을 밝히는 행위는 그 자체가 민족의 터브, 우리 역사의 터브를 깨는 것으로 직결되어있다. 그만한 용기와 담력과 함께 학문적 사료의 접근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불가사이하게도 조선족 지성사에서 조선족 역사, 이민사 및 문학사에 관한 연구나 그 접근은 많지만(또는 있지만), 역사의 터브에 정면에서 도전한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는 제로 상태다. 결국 나의 한중일 근대사 연구, 글쓰기는 뜻하지도 않게 탐험 같은 선구적 작업이 되었다. 나는 우리의 조선족 사학자, 역사 프로패셔널들이 이 작업을 해야 된다고 기다렸으나 누구하나 이 분야에서 외면할 뿐이었다.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없는가는 불평불만의 석연치 않은 심경으로 나는 십년이나 고투해왔다. 내가 하는 작업이 우리 조선족에서는 항상 첫 번째 적 일이며, 이런 작업에서 반영되는 내용과 질에 대해 조선족에서 오늘 반발, 비난은 엄청나다. 그런 비난, 반발은 작업의 내용 실체에 대한 이성적,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이 작업을 짊어진 주인공인 나 개인의 인신공격으로 점철된다. “계란의 맛을 품평하는 일에서 계란은 외면해버리고, 계란 낳은 암탉 잡이”로 편향된다. 암탉을 죽이면 계란은 누가 낳는가? 이런 암탉 잡이가 금방  문화대혁명, 대자보의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그 우리의 최근과거의 살벌한 계급투쟁의 광란극, 그 자체로 재연하고 있다. 소리놀이, “민족상잔의 내홍으로 비극을 빚은 역사의 교훈”을 삼는다고 하면서 역사교훈을 포기하고 피비린 역사극을 다시 스스로 재연하는 그 우(愚)를 왜 모르는가? 가장 역사, 역사를 외우고 역사를 거울로 삼자는 우리가 또한 가장 역사를 초개시 하고 역사를 망각하는 아이러니, 그래서 타자를 비난, 중상할 자격이나 있는가? 나는 “오늘도 연변이 문혁을 끝내지 않았다” 라고 한 내 말이 과히 적중한 명단(明斷)이라 자신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이 이 명단을 앞 다투어 입증해주고 있잖은가? 물론 이 같은 명단은 더 이상 없어졌으면 나는 바란다. 한 가지 중요한 연구 과제를 독자제현께 아뢰고 싶다. “왜 연변은 문화대혁명을 계속 하는가”의 테마는 매우 멋있는, 현실적 중대한 의의를 지닌 연구과제이다. 이를테면《연변 문화대혁명 연구》또는《연변문혁의 역사적 규명》등 이런 것을 누가 한번 착수하시길 바란다. 누가 한번 곰곰이 생각하면 좋겠다. 말이 약간 새어나가서 죄송하다. 다시 본제로 돌아가자. 7. 사실 유순호씨가 최근(2010년 10월 8일자 조글로, 니카댓글, 김광림에 대한 발언) 예리하게 지적하다시피 “역사에 대한 무지한 교수, 박사와 정면에서 토론을 해도 상대가 안 되는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소모전에 이어질 것이라.” 하며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고 조선족에게 메시지를 발했다. 이 메시지의 의미를 아마 지금 조선족 지식인의 다수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고학력자일수록 경직된 사고방식과 역사인식에서 답보하고 있는 양상을 그 자신들이 스스로 나와 유순호씨, 김정룡씨 등에 대한 비난에서 폭로시켰다. 그래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순호씨가 “김광림 박사가 역사공부부터 하고 뉴욕에서 더 체험하고 공부하신 다음 다시 토론을 벌이자.” 라고 한 안타까움, 무위의 막무가내, 이것이야 말로 나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어느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의 비난자, 반대파와 정면 학술토론을 벌일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상대의 수준이하의 지적수준, 문혁시의 사고체계 탓이다. 그럴진대 이들과 어찌 정색해서 역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들은 현재 나의 이 말에 대해서도 이해 할 능력이 없는 것은 뻔하다. 그래서 “거만하다, 잘난채 한다.”는 넌센스의 언어로 일축하게 된다. 나는 이런 상대와 대화를 할 수 없는 일이 막무가내지만 이것 또한 눈앞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수준 치에 도달하면 오히려 반대파들은 나보다 더 억척스럽게, 나보다 더 심한 “진상 규명”의 글을 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좀 좋겠다. 근대의 변법 지식인의 거물 강유위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들겠다. 강유위에게 어느 날 요평(廖平)이란 젊은 지식인이 “중국의 6경(六經)중에 하나가 위조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노발대발 한 강유위는 죽일 놈 이라고 요평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다가 흐지부지 헤어졌다. 그런데 수개월이 안 지나서 강유위는 말했다. “6경 중에 하나가 아니라 전부다 가짜외다.”라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新學僞經孝》,《孔子改制孝》등 명작이다. 일설에 따르면 강유위의 이런 명작은 결국 나중에 요평의 글을 표절했다고 한다. 연변 조선족의 안티 김문학파가 6개월 후 아니 6년 후라도 유위와 같은 변모가 일어 나겠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나는 같은 겨려 지식인으로서 정녕 이들의 변화를 기다리며, 그때가 오면 기꺼이 두손들어 포옹하겠다. 아버지 죽인 원수도 아닌데 원수인양 암탉 잡이 “동족상잔”을 할 필요가 있을까. 8. 그리고 미래의 화합을 위해서라도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있다. 즉 안티 김문학파 제현이 이구동성으로 내가 진술한 역사 사료에 대해 완전히 일본의 “우익”, “극우”와 등호를 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관한 사연. 아마 분명히 그들에게 있어서 내가 기술한 역사자료(근현대, 만주국 등)에 대한 서술을 다 “일본 우익의 언론과 동일하다.” 라는 틀에 박은 듯 인식하고 있는데, 사실 내가 구사하고 인용한 자료는 대부분이 중국학자, 해외 중국학자의 내 책을 진지하게 정독하지 않고 “오, 자식 나쁜 반역자구나.”하는 선입견에 치달아 학자가 갖춘 이성을 흥분으로 대체한 우를 범했다. 그래서 “우익”의 말과 내가 사용한 사료 및 서술에서 일치 또는 유사한 부분만을 단장취의해서 그 선입견을 급급히 입증하려는데 활용, 과장시킨 것이다. 나 자신은 우익의 “우”자가 어디로 향해있는지도 모를 일이며, 일본의 우익들과 어울려 글 쓸 하등의 이유도 필요도 못 느꼈다. 나를 “우”자로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들의 소행이었지, 나와 상관 되지 않는 사실이다. 그래, 내가 우익단체에 가입해서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외쳤나? 그들에게 돈을 받아서 우익들 위해 활동하고 글 썼나? 왜 그들은 그렇게 “우익”에 연연하며 거기에 걸고 드는 걸까? 오히려 그러는 그들이 우익의 조폭 같은 狂信적 사고와 몽둥이를 휘두르는 면에서는 우익과 꼭 닮았지 않았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본은 미국과 같이 역사 기술, 역사이해에서는 다양한 견해를 허용, 존중하는 사회이다. 일본의 역사관에서도 정·반, 좌·우, 친중, 반중, 친한, 반한, 친일, 반일…. 그리고 또 아무데나 귀속하지 않는 제 3자의 의견. 이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문화, 정치 풍토는 중국내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다. 실제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하는 일본인이 있는 동시에 한국영토라고 소리높이 주장하는 일본인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일본인을 “매국노”라고 일축하지 않은 언론자유의 세계이다. 유순호씨의 변모는 바로 미국에서 이 같은 자유의 풍토 속 에서 그 지적 자유를 향유하면서 태어난 것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유순호씨 같은 인물이 많이 배출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런 유연한 사고를 지닌 조선족 지식인이 많이 나올수록 경직된 사고를 깨고 조선족의 개방, 개화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직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관웅씨의 나의 “우익”론에서 노정된 것은, 위정자가 일본을 비판할 때, 특히 역사인식에서 판에 박은 듯 사용하는 최대 무기 “일본 우익”을 그대로 교조적으로 원용한 것이다. 이 때 그들은 “반체제”가 아닌 “체제 옹호”, “추종자”, “맹신자”로 변해 있다. 대중을 설복시키기 위해, 나를 비난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이 “우익”내지 “우익”과 동급의 “배족”, “매국노” 같은 동족 잡기의 고깔모자가 무엇보다 효력이 클 것이라는 점을 김관웅씨는 숙지하고 있는 터다. 그러나 아이러니 할 것은 중국 위정자들이 말하는 “우익”의 개념 역시 꼭 진실성, 유효성이 구비 됐는가 하면 그렇지 만도 않다. 위정자의 “역사 정통성”에 위구심을 주는 역사관, 역사 인식 내지 역사사료, 문헌을 흔히 일본에 대해서는 “우익, 극우”라 칭하고 일축한다. “우익”이 무섭기 보다는 근현대사에 베일에 감춰진 그 “치부”가 탄로날까봐, 또는 “정통성”에 위협 주는 역사관 자체가 무섭고 반갑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 한 것은 근대, 현대사의 진실을 캐면 캘수록, 속속 발견 되는 것은 오히려 “우익”의 사관과 일치 또는 비슷한 모습들이다. 해외에서 공간되는 사료, 역사서를 차치하고서라도 중국내에서 공간되는 근현대사의 역사서, 역사비평, 사료, 문헌은 오히려 위정자가 가장 기피하는 이른바 “우익”의 언론과 일치, 유사한 史實을 밝히고 있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의 관리들이 이런 “우익”을 운운하면 그런 것은 그들의 일이니까 이해가 되지만, 학자라는 지식인이 같은 언론으로 소리 높이 떠든 다면 학문적 접근을 표기한 위학자라는 것을 자인 할 것 밖에 안 된다. 세계화, 글로벌 및 세계와 “제꾸이(接軌)”한다고 외치면서도 하는 행동은 완전히 국제 상실을 무시한 언어도단적인 논리의 노예로 전락된 것이다. 역사관, 역사인식이 역사학의 범주에서 학문적으로 다루어야 할 일이나, 그것이 정치의 하수가 되는 것을 역사, 역사학이란 학문의 비극이다. 지식인이라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부조리에 도전하고 변혁을 통한 역사 감각으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체제나 권력에 곡학아세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행복 할 수 있으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으로는 절대 아니다. 중국에서  하루속히 다양한 언론이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싶다. 진짜 그런 날이 오면 김관웅님들은 아마 나나 유순호님 이상으로 “자유지식인”으로 변신 할 것으로 믿는다. 김관웅님들과 나의 갭은 모종의 의미에서 민주화 나라와 비민주화 나라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9. 그럼 이번에는 좀 구체적 사례를 들어서 역사문제를 담론 하겠다. 우선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과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되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기로 하자. 조선민족의 근대사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가장 큰 사건, 史實이며 양국에 모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기나긴 그림자 같이 조선민족의 정신에 따라다닌다. “조선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가는 따라서 식민지 사실만큼 중요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한국, 조선족 측에서는 대부분 부정적, “악”으로 평가되기 일쑤이며, 객관적 평가를 하는 의식이 박약하다. 최근 객관적 평가를 하는 한국 학자들에게는 세찬 비난의 화살이 몰리기도 한다. 또한 일본의 학자 중에도 객관적 평가를 하는 학자도 많으나, 오히려 ‘제 3자 서양인의 평가는 어떨까?’ 하는 의문에서 나는 10년 전부터 이 방면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연구를 해왔다. 만약 역사 연구의 작법(作法)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자신의 作法을 표명한다. “서술의작업(narration)과 문헌정보 자료 실증 작업(documentaion)이라는 관계를 그대로 연구의 현장에 가져가는 서양사학자의 작법이다. 거기다 또 보태자면 이 기초위에서 실제 생긴 일, 그 일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란 문제의식을 안고 상상을 발휘하거나 비교사학을 원통하게 평가를 내리든지, 자신의 사색을 그대로 진솔하게 적는 것이다. 이런 작법대로 진행하다 보면, “조선식민지배”에 대한 평가에서 의외로 제 3자인 서양인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리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 나는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 영국의 신문기자 아서 매켄지《조선의 비극》, 미국 사학자 Edwin o. Reischauer의《Japan: The stry of a Nation》등 등, 많은 역사 서술을 보면 여기서 상세히 열거, 서술한 자리가 없어서 유감이나, 우리가 상상이상으로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좋게 평가한다. 사실, 계량적 통계, 경제수치, 인구증장, 인플레 건설, 교육, 학교, 조선어 보급 등에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 인식과 정반대인 역사를 노정하고 있어, 이 그대로 적으면 한국 근대사에 상당히 거북함을 제공하게 된다. 현재 나는 이 주제를 한권의 단행본으로 정리하려고 준비 중이다. 유순호씨가 댓글에서 언급한, 북한 현재의 독재정치의 횡포아래 인민대중의 기아와 생활의 질이 1960년 내지 65년(일제 식민지배 36년)에 비해 형편없는 저질, 최하위의 양상을 노정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하나, 하나씩 실증을 획득하게 된다. 이와 밀접히 연관된 “친일 문제”에 대한 접근 역시 많은 함정을 안고 있다. 현재 한국이나 우리가 행해지는 “친일”에 대한 접근은 윤리적, 도덕적 비판, 민족이란 척도를 구사하여 진행되는 비판적 접근은 사실 “역사 평가”가 아니다. 역사로서의 친일을 우리는 감정, 민족정서를 그대로 투영시켜 “정치투쟁”으로 오버되어 버리고, 오히려 역사 사실. 역사에 환원시켜 평가를 하는 요긴한 작업을 방치한대로 있다. 이런 면에서 노출되는 것은 역사를 그렇게 소중히 한다는 우리가 기실은 역사를 외면하고 너무 소홀히 대하는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역사로서의 일본 식민지 지배라는 환경을 주제로 친일을 접근해야 한다. 왜냐면 친일이든 반일이든 다 일본식민지 지배의 역사의 조선인이 취한 당연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친일”, “반일”, 검은 양복 아니면 흰 드레스 식의 2분법 아닌 다양한 조선인이 일제 식민지시기에 실존 한 것을 무시 할 수 없다. 오히려 역사에서 노정되는 모습은 친일에 가까운 적일(適日), 순응 자로서 대다수 조선인은 일본 통치에 순순히 적응하면서 삶을 영위 해온 것이 진실이다. 다 민족 저항파였다면 일본의 총칼에 누가 살아남았겠는가? 문화란 한 민족 집단이나 사회가 그 환경에 적응하는 최적의 적응방법으로서 창출해낸 생활양식 그 자체인데, 그 식민지 지배하의 우리 선조의 삶이 문화, 그 자체였다면 살아남기 위해 친일, 순응 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문화, 그 자체의 관성이 아닌가. 식민지배가 후진국에게 문명, 근대화를 가져 온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 이론의 상식이다. Rupert Emerson이 “좋든 나쁘든 식민주의는 사교양식과 기술이, 즉 서양의 정신적 및 물질적 역량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작용한 주요한 경로였다.” 조선은 서양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조선말기의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변했다. 진보가 아닌 크나큰 변화였다. 이 말에 잘 납득이 안가고 무조건 반발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 점을 충분히 예견한다. 왜냐면 나 역시 미처 몰랐을 때는 이에 반발이 컸었기 때문이다. 반발하는 최대의 원인은 우리가 100여년전 조선말기의 사회 상황 현실에 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다, 아주 좋은 사회였는데 일본이 침략해서 엉망으로 짓니겨 놨다고 착각하는 것이 일종의 민족적 통념이 굳게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가 실제 살아보지도 못한 조선조말기의 상황은 현재 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배로 비참하고 낙후한 중세적인 사회였다. 이 실상은 서양인 관찰가, 지식인, 여행가의 기록에서 에누리 없이 실증되고 있다. 노예, 노비제도, 경제의 극빈, 정치의 부패와 가렴주구…. 지어 당시 교통수단의 교량도 변변이 없어서 강을 다 인간의 다리로 건넜기에 다리와 교량이 다리로 불러진 형편이었다. 교량을 다리라 부르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참담하고 극빈한 조선조말기의 사회실상의 사료, 문헌을 읽으면서 나는 지대한 충격을 거듭 받았다. 부패 무능한 고종에게 실망한 조선의 엘리트 정치인, 지식인들이 근대화에 앞선 일본에 시선을 주고 일부에 더 기대를 걸었던 것은 당연하겠다. 계명대 사회교수로 조선 근대사에 대해 신선한 시점에서 연구하고 있는 김기협씨는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펼치게 된 사실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측면이 많이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문학적 비유법으로 얘기하자. 한국은 여성이고 일본은 남성이다. 그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강간을 했다. 미구하여 이 사이에 아들이 생겨났다. 일본이란 남자는 싫어도 생겨서 난 아들은 여자가 사랑하는건 당연하다. 이아들이 곧 “근대화”이다. 아들이 크면 클수록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누군가라는 것을 알려고 캐묻는다. 지난날의 강간당한 치욕을 어머니는 덮어 감추거나, 깊은 증오, 또는 어떤 미묘한 추억, 이런 복잡한 감정이 동반된다. 피식민자의 우리 겨레의 일본에 대한 심정은 이 어머니의 심정 마냥 착잡할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의 과거를 점검 하는 일은 과거의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작업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일본이란 他者에 의해 수동적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판단자체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조선 병합은 공식적 행위였고 국제적으로도 서양 및 타국의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하고 싶든, 잘 모르든 실제적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제 통치를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것들은 역사 사료, 기록에서 다 실증이 되고 있다. 결코 “일본 우익의 지론은 앵무새 같이 외우는 것”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지면의 관계로 역사 사실의 일단을 요만큼 선보인다. 착수중인 역사 연구서《세계에서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했나》를 단행본으로 준비 중이다. 상세한 것은 그 책이 간행 되면 일독하시길 바란다. 10. 다음으로는 중국 근대사의 사례를 들기로 하겠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족, 국가, 사회 및 입장에 따라 다르다. 같은 민족성원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객관, 주관적, 원인으로 개인의 사관도 또 다를 수 있다. 문학이 한 민족 집단의 정서적, 감성적 심층을 대변한다면, 역사는 문학보다 더 근엄한 의미로 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에 관계되는 거울, 교과서로서 다루어지는 측면이 크다. 또한 역사관을 국가나 정부차원에서 다양성이 아닌 모종의 틀 속에 규정시킨다면, 역사관의 다양성과 자유는 곧 차단되고 말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현재 정부의 “국정교과서”에서 통일적인 기술체계를 확보하고 있는데서 보이듯이, 그것은 중국민족(중화민족)이란 공통분모를 토대로, 당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유력한 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의문할 나위도 없다. 2005년 나는 일본의 저명한 역사비평가와 중국 교정교과서를 검증하는 대담집을 간행했다. 그 대담 중에서는 나는 “일본인이 역사교육이 일반적 교양으로서 취급하는데 반해, 중국은 당체제의 교육프로그램의 하나로서 중공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세뇌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 직언한 적이 있다. 즉 애국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교육이 전개되는 특징을 갖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와 일당 전제의 국가의 역사교육 현주소의 본질적 구별이다. 나는 중공정부를 평가 절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양자의 이질성을 준별하자는 문제의식을 전제조건으로 제기 하고서, 현행 역사교육 및 양구의 역사관, 역사인식의 비교고찰의 기점을 밝히자는 학문적 의미에서였다. 실제로 남경대학살기념관이나 9.18기념박물관 등 전국에 수백개 “전국애구주의 교육기지”가 있어, 역사를 애국주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중국이 아닌가. 고향 심양에 갈 적마다 나는 소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9.18기념박물관을 방문하여 관람하곤 했다. 아들 녀석은 제가 전반에서 처음으로 이런 항일기념관을 관람했다면서 과거 이런 전쟁이 있는 것은 알았다고, 다시 이런 불행한 과거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감상을 말했다. 대조적으로 일본은 역사명승은 수없이 많아도 그 자체를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이용하는 발상은 통하지 않으며, 실제로 정부나 대중의 통념에서 “애국” 이마저도 사갈시하는 실정이다. 여러 의미에서 중일의 문화를 비롯해 역사교육, 역사인식, 역사관 자체에는 심대한 격차가 실존한다. 이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중국과 같이 교과서도 단 일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중학 역사교과서도 8종이나 되며,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여 교육기관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교육자유주의 통념이 일반화 된지도 오래다. 일본이 다 “우익”의 교과서를 배우고 “우익적”이라고 착각 하는 것은 웃기는 비상실이다. 할 말은 많으나 각설하고, 중국 근대사 인식에 관한 실례를 들어 이야기를 끌고 가자. 중국 근대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거쳐 명랑한 근대강국으로 성장한 것과는 반대로, 피해자 이미지로 관통되어 있다. 아편전쟁이래의 근대사는 서양열강의 침략의 역사이며 근대화가 자연 된 최대의 원인도 열강의 침략으로 돌리는 인식이 보통이다. 당연히 침략과 피침럄,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는 옳다. 그러나 이 시점만으로는 타자와 자신으로 착종하게 얽힌 근대 중국사나 관계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엔 역부족이다. 민족이나 개인이 역사에서 교훈을 섭취하고 거울로 활용하려면, 자신의 실패원인을 역사상에서 토털적으로 검증, 반성하는 것을 결락시킬 수 없다. 중국에서 근대, 현대사를 치중하는 것은 열강의 침략을 철저히 규탄하고, 그런 침략에서 대중을 구원, 해방했다는 위정자의 정통성을 돌출히 하기 위해서 인듯하다. 따라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서 찾는 것은 외면했으며,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他者를 악자로 내몰고 애국심을 환기시큰 장치로 활용했던 것이다. 즉 근현대사에 일관된 축은 침략과 저항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사실 이 2항대립(二項對立)구도 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다원 해석이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일테면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이 청일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북한 뒤 타협의 “마관조약”을 체결 시 모두 그를 “매국노”라 매도했다. 외국열강과의 타협, 화해는 언제나 “매국노”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독일의 피스마르크,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세계3대 정치인”으로 불린 개방된 정치가였다. 매국노 운운을 어불성설! 역사의 해석은 적어도 다양한 시각에서의 해석을 허용할만큼의 드넓은 좌표축을 필요로 한다. 항일전쟁시기의 일본 괴뢰정권으로서 왕조명(왕정위)정권을 위정부라 하고 왕정위 본인을 최대의 “한간=매국노”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를 재검증해보면 일본 유학의 경험자이며 손문의 우수한 제일 제자였던 왕정위는 “일면 저항, 일면 교섭”방침을 산출시킨다. 그는 미남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지식, 필력, 담용에서 탁월한 문인형 정치가였다. 물론 장개석보다 수준이 한 급 위였다. 여기서 자상한 서술을 할 여유가 없으나(사실, 책 한권의 분량이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 부딪치는 무모의 저항보다도 “평화공존”을 하면서 역량을 키워서 일본에 대적하자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1938년 그는 “君爲其易 我任其難”(그대는 쉬운 길을 가라, 나는 가난의 길을 가겠다)고 장개석에게 말을 남기고 일본과 평화타협의 길을 택한다. 애국적 저항은 쉬웠으며, 영웅시 되었으나, 평화타협은 “매국행위”로 규탄당한 실로 험난한 길이었다. 국내 사학계와 대만에서도 현재 왕조명을 새로 재조명하면서 “친일적 애국영웅”으로 재평가 하는 기운이 팽배하게 일고 있다. 항일전쟁 당시의 중일관계사를 전반적 시야에 넣고 이 문제를 보면, 중일관계의 새로운 양상이 노출되며, 따라서 왕씨가 간단히 “한간 매국노”로 일축할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임을 재인식하게 된다. 동일맥락에서 근대, 현대를 중·일·한의 토탈적(total) 시야와 당시의 국제적 시야에서 재검토, 검증하면 역사의 많은 맹점, 허위성, 조작성이 드러나게 된다. 사실 나의 저작《반일에 열광하는 중국, 우호로 영합하는 일본》(2004년)은 바로 중일 근현대사의 허위성을 논한 저작이었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아무리 이 책을 빌미로 나를 “매국노”로 내모는 것은 일말의 힘도 없는 무지자들의 광대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가 무지를 낳고 왜곡이 왜곡을 재생산한다. 참으로 참혹한 21세기 조선족 지성계의 일면을 말해주는 대목이어서 가슴이 쓰리다. 그럴수록 나는 역사재조명의 사명감을 절박히 실감하고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결의가 굳세어진다. 인간은 다 자기의 수준대로 발언하는 고급영장류이다. 언설을 생업으로 하는 지식인이 토로하는 말에는 그 자신의 지적 수준이 극명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조선족의 고루한 지식인이 꼭 나의 지견의 수준으로 통일시켜 얘기하자고 강압하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 수준에서 각자 적극 발언하는 것 역시 그의 자유이다. 다만 역사를 담론할 때, 한 인물이 밉다고 무조건 감정적인 대응은 쉽게 인신공격으로 직결되기 십상이니, 그런 저질 공격은 삼사이후행(三思而後行)하는 것이 他者에게도 자신에게도 유리할 수 있다. 결국 선대의 역사가 가르치듯이, 무지에서 오는 他者에 대한 공격 타매는 다 유턴하여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11. 이제 “역사란 何(하)오”에서 “역사를 하오”로 들어간다. 역사란 무엇일까 에서 역사를 연구, 재조명하는 일, 실천으로의 이행. “나는 왜 중한일 근현대사에 집착하는가?”란 부제목에 대한 답을 마침내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질문의 행간에서 산발적으로 이 문제의 답은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다. 근년에 들어 조선족과 일본, 중국, 한국의 독자들 가운데서 “왜 위험하고 민감한 역사문제에 대해 쓰게 되었나?”라고 관심어린 어조로 말씀하는 분들이 많아진다. 자주 걱정 어린 애독자 팬들의 질문을 받으니, 그에 대한 답을 내는 것도 예의이고, 나 자신 역시 이 기회에 역사인식, 역사관에 관해서 세상에 피력하고 싶다. 이래서 나의 찬성파이든, 안티파이든 통 털어서 내 개인의 역사인식의 내실을 알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표현하게 되었다. 역사, 역사인식, 역사관에 대한 나의 태도, 작법(作法)은 다음과 같다. ○ 한 민족, 집단의 문화로서의 역사는 자신의 과거인 동시에 오늘을 직결하고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정체성)의 정합성(整合性)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환언하면 역사 자체가 자기와 정체성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그러기에 역사는 해석이며, 승자와 위정자가 자신의 정통성, 정체성을 만드는데 이용당한다. 따라서 역사는 가장 “작위성”과 “허위성”으로 분식 당하는 객관체이며 주관체이기도한 “문학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 역사에서의 주인은 항상 자기와 他者이다. 착종한 관계 넷트속에서 여러 가지 양식, 수단으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서 움직일 수도 있으며, 전혀 예상치 않은 方向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역사속의 자기인식은 결국 他者인식을 통해 행해지어야 하며 타자와 직결된 자신을 일방적으로 美化하거나 또한 他者를 일방적으로 丑 하는 것은 愚이다. 왜냐면 그때의 他者는 자신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他者否定은 즉 자기否定의 愚를 범하며, 역사의 어느 시기에 대한 자기 美化나, 허위적 조작은 결국 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왜곡하는 격이 된다. ○ 역사에서 교훈을 섭취하고 교과서나 거울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실패 원인을 규명, 인식, 성찰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他者에게 피억압, 피지배 당했다고 해서 피해자, 피정복자의 의식만 강조하고 상대에 탓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영원히 자신의 실패원인을 호도 하기 때문이다. 타자 탓도 필요하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에서 원인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작업이다. 물론 쉽지 않으나 이는 꼭 실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간력한다면 역사는 다만 “이야기”일 뿐 거울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 ○ 이 우주의 체계, 세상의 체계가 열린 것과 같이, 모든 세상, 사회, 인간, 그룹 역시 인과율에 의해 돌아가고 그 내실 역시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와 일개인이나 오늘은 곧 과거의 산물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숙명이기 때문이다. 운명도 아니다. 運命은 글 그대로 움직일 수도 있으나 숙명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과거를 자기 자신의 전체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라는 인식하에 그것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통한다. ○ 따라서 우리에겐(누구나가) 어떤 역사적 체험(식민지, 침략 등)의 치부 같은 불쾌한 과거를 안고 있다고 해서 치부, 터브로 간주하고 외면하거나 그 자체를 전면 부정한다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깎아버리는 것이다. 역사가 숙명체(宿命体)일진대, 자신이 못나서 식민지, 침략을 당했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정해진 숙명의 과거이다. 가해자를 비판하고 혐오하는 것은 감성적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역사를 대하고 이해하는 것을 대체해버리면 그것은 유치함으로 끝난다. 좀 더 성숙한 차원은 가해자 vs 피해자란 二項對立積國를 탈피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넓은 시야에서 객관化시켜 인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 이런 유치한 二項對立 구도는 오늘도 우리 겨레 자신들을 스스로 괴롭히는 망령이 되고 있다. 일제 식민지가 종식 된지도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이 대립의 함정을 파고 빠지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는 이 대립구도가 “친일 vs 반일”의 단순 구도로 전개되며, 일본이란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재생산하여 내부 소모전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이 “친일파” 척결은 정치에 이용당한 책략적 성분이 농후하기도 하다. 결국 정녕 민족애의 넓은 시야에서 보면, 자기 민족치기의 내홍을 일제 강압 아닌 자신의 정치의 체제의 강압으로 전개되니,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일본이 없는데 “친일파”를 잡는다’, 이런 발상, 사고 자체가 일제 식민지의 망령에서 탈피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 “친일”은 사실 당시 일제식민지하에서 지극히 당연한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것은 도덕, 윤리의 차원에서 지금 현대인의 의식(민족애 따위의 간판을 들고)을 과거에 투영시켜 행해지는 희극에 불과하다. 식민지 과거의 “청산”이란 미명을 걸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기억”, “망령”에 스스로 빠져들어 일본인 대신 자신의 “적”을 만들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 “역사를 바로 잡는다.”, “청산”한다는 슬로건은 유치한 동족잡기가 아닌 역사 자체에 대한 일그러진, 왜곡, 허위, 거짓 그 자체를 발굴, 연구 하여 “바로 잡는 것이다.” 우리의 감성적인 차원에서 혐오한 他者 비난, 친일파 재생산은 결국 더욱더 우리 자신의 역사, 과거를 비틀어지게 할 뿐이다. ○ 따라서 나는 중국과 한국 및 이것을 다 우리라고 칭하며, 우리 안의 역사왜곡, 날조, 작위성에 대해 새롭게 조명, 발굴, 인식, 해석, 평가하는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틀린 역사관으로는 비틀린 아이덴티티를 재생산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10년전부터 “문화로서의 역사 인식, 이해”라는 의식의 깃발을 들고 혼자서 不言實行의 역사연구, 재조명 탐험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 동포들 속에서 거론되고 비난 받은 책들이 그 초기 작업이었다. 이제 10년 계획으로 “한국, 중국 역사 재조명”연구의 구체적 아이템으로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사상가 안중근》, 이광수, 윤동주나 “세계는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했는가” 등 등 착수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때로는 손오공 같이 分身이 생겨 동시에 연구 작업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어제 한일 보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또 본업인 3국비교문화연구도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 “하면 된다.”는 말보다 나에게는 “안하면 안된다”다. 중국의 유명한 현대파 시인 베이도우(北鳥)가 말했던가, “영웅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이 말을 패러디 해서 표현한다면 “누가 하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그저 하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사람은 항상 안하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다. 이는 역사가 가르친 “인간의 법칙”의 하나이다. 좋든 나쁘든 선구자는 모험자이다. 모험은 하는 일 자체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주위에서 모험자에 대한 비난으로 수시로 날아들기 마련이다. ○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내가 실제로 뭔가 “인류를 위해서, 민족이나 아시아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 조금이라도 상호 이해 인식에 일조라도 된다면 그것으로 무한의 보람을 느낀다. 나는 ,가끔 자신의 소년 같이 유치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노회한 세속인과 달리 실 이익을 요것조것 재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지식 소년이고 싶다. 나무배에 전동기를 달아 호수에 띄우며 바다를 향한 꿈을 키우던 소년. 이 지식소년, 이 영원한 월경하는 탐험가는 오늘도 즐겁다. 나 자신은 이렇게 일종의 “역사”를 “하고”있다!
16    2-7. ‘죽음’에 대한 명상 댓글:  조회:5368  추천:19  2013-02-13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7. ‘죽음’에 대한 명상 -----나의 死生觀 1. 삶이 무어냐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더욱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그것은 사랑과 미움 같이 우리 인간이 항구히 직면하고 있는 테제이며 숙명이다. 죽음과 삶만큼 인간을 희로애락으로 괴롭히는 게 더 있을까? 살만큼 살았으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삶에 대해 이해하고 터득 할 것이며, 나름대로의 “인생관”도 정비될 것이다. 기실 나는 삶에 대해서 특별히 목적이나 의의 같은 따위가 있는가하면 회의적이다. 우연히 이 땅위에 태어났으며, 왜 태어났냐 해도 그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 사느냐 하면 태어났으니까 산다는 것뿐인가 한다. 인간이 사는 데는 목적이기 보다는 방식이라고 인식한다. 왜냐면 목적은 달라도 살아가는 방식은 생물, 동물학적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 같이 의,식,주, 행의 방식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이라면 삶의 방식의 질(質)일 뿐이다. 강자와 약자, 부유한자와 빈곤한자, 권력자와 비권력자, 남자와 여자, 지식인과 무식자..... 뭐 이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억만장자라 해도 하루 5식 10식을 먹는 것도 아니며, 돈을 베게로 삼고 사후에도 관속에 넣고 가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굳이 인생관, 삶의 의의가 있다고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한다. 일 할 수 있는 자유, 적당한 물질적생활 이것이면 너무 충분하다. 2. “인생관”이란 말은 있어도 “人死觀”이란 말은 없다. 우리는, 특히 동양인은 너무 사는 데는 치중하여 열중하고 삶의 現世 즉 “지금, 이것 여기”에만 집착하는 인생관으로 편향 돼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거의 현세를 살아가는 방식, 기술에 그친 교시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공자는 화를 냈다. “우리가 현세의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하여 죽음을 알려고 하느냐?” 라고 그는 아예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중국 고려의 유교나, 도교의 원리는 형태는 달라보여도 거의 인간의 현세, 지금 인생을 살아가고 즐기는, 그리고 장수, 쾌락의 방식과 미학에 관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엘리트 지식인의 삶을 출세(出世)해서는 유교적 방식을, 입세(入世)해서는 도교의 도술을 실천하는 두 가지로 삶을 산다.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죽음도 나쁜 삶보다 못하다(好死不如 賴活)” 그러니 살아야 한다. 아무리 곤란해도 살아 뻐쳐야 한다”는 것이 서민들의 인생관이다. “삶은 행복하고 아름답다”는 인생가치관일 뿐, 죽음은 무조건 마이너스적, 惡으로 취급한다. 특히 유교적 현세가치관에 침혹된 우리는 自殺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하며, 부모 보다 미리 떠난 자살 따위는 지탄받을 不孝로 간주한다. 따라서 현세의 삶으로서 대를 잇지 못한 무후(無後)야 말로 최대의 不孝가 된다. 아무튼 이 현세를 살아가는 삶만이 최고의 행복이다. 아니 삶 자체가 전부이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대극에 있는 것, 삶의 마감, 종식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은 美化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속에서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3. 다만 죽음의 미화되는 경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모종의 일데올로기, 정권체제를 위한 프로패건더로 이용되는 때 만이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을 초개같이 취급하는 사상이다. 바로 머지않은 文化革命때, 매우 유명한 청년영웅 김훈화(金訓華)의 佳話가 있었다. 그가 왜 목숨을 잃었는가? 공공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슴없이 생명을 바쳤다고 하는데, 그 재산이라야 홍수에 떠내려가는 하우스 비닐막 한 장이었다. 죽은 본인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고작 하여 비닐막 한 장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그 자체가 비극이다. 비닐막 한장이 생명의 가치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죽음을 두고 부풀려서 시대의 본보기 “영웅”으로 만드는 국가적 기구의 프로퍼건다이다. 인명을 초개시하는 국가의 선전, 죽음을 현 체제의 미화, 복종에 이용하는 생명관, 이러한 “인명경시” “체제중시”의 사관(死觀)은 바로 비극을 낳는 장본인이 아닐까. 중국에는 이러한 프러퍼건다에 의해 작위된 영웅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초유록, 유문학, 문합, 왕걸.... 등등. 유호란의 생각난다. 모택동은 작두에 목이 날아난 그녀의 죽음을 두고 “위대한 삶, 영광의 죽음”이라고 휘호했다. 국가, 체제, 정권 모든 국가적 이후에 죽음도 불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세뇌교육이 유별나게 강조 되어 왔다. 옛 소련과 현 북한에서도 지금 이런 인명경시의 “영웅”을 간단없이 만들어 내고 있으니 인간의 희극이지 비극인지? 모택동이 자주 인용하던 사마천 발명의 사생관을 벌어 혁명을 위하여 죽으면 “태산보다 무겁고, 연하지 않으면 홍모나 가볍다”고 한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과연 그럴싸한 명구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생관은 진실이 아니라 다만 관념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인다. 혁명, 공산주의 사업자체도 “가설”이거니와, 진짜 죽음이 태산보다 무거운가 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 것은 차치하고서라고 관념적 가설이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의식에 불과하다. 포퍼가 갈파한 것처럼, 공산주의사상이 과학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설”, “강박관념”을 뒤집어 보면 裏面에는 수많은 “호위”이고 “인명경시”의 기만적 레토릭이 반거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유년시절에 이런 프로패건더에 매혹 된 나는 한때, 고추밭에서 고추도둑을 잡다가 그 악한 도둑에게 피살된 유문학(劉文學)이란 同名의 소년영웅을 선망한 적이 있었다. 고추 몇 개 때문에 아까운 생명을 끊인 그, 국가의 화려한 “세뇌교육”에 넘어간 소년의 비극이 아닐까! 4. 결국 죽음마저도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현실 이익을 위하여 그 가치를 부여해지는 사실, 모종의 국체, 집단사회의 이념에 이용, 프로패건더의 소재로 전락되면 그 죽음은 무엇이 될까? 죽음에 아무리 인공적, 이념적 의의나 가치를 불어 넣어도 죽음은 그냥 죽음 일뿐이다. 하물며 삶과 함께 죽음까지도 어떤 이념에 이용당하는 그것이야 말로 직언하여 인간의 일대 비극일 것이다. 푸코의 말과 같이 살아서 인간 개인의 신체가 국가 지구에 통제 당하는 것도 비운이나, 죽어서 죽음까지도 국가의 통제에 이용당하는 것은 더구나 큰 비운이 아닐까! 옛날 “대일본제국”이 국민을 전쟁의 희생으로 내몰았던 역사체험은 결국 그것을 “대일본 死國”으로 변형시켰다. 마찬가지로 국가 이념에 이용당해 해방 후에도 수많은 국민이 죽은 대한민국 역시 좌파 지식인들의 지적대로 “죽음의 무덤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그리고 신중국의 많은 국민이 내부의 내홍에서 계급투쟁의 이념으로 수천만 생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현대사는 모택동의 어록에 등장하는 “수천만의 선열의 피”라는 말과 같이 피로 도배 돼 있다. 죽음을 강요하는 허위 장치로 이 나라는 많은 “영웅”을 만들어 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말과 같이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이다.” 불행이라 하면 나는 일개의 죽음까지도 국가가 통제, 필요 하는 그것이 더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5. 삶에도 이렇다 할 의의가 없는데 죽음에 무순 대단한 의의가 있을까? 개인의 삶과 함께 죽음도 그냥 죽음 자체로 내두는 사회야 말로 정녕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인간세상일 것이다. 나에게 생사관이란 게 있다면, 나는 삶과 죽음은 흑과 백처럼 준별되는 二分法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 돼 있다고 믿는다. 삶의 延長이 곧 죽음인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말로 “삶”보다 한 글자 더 많다. 한자어로 표현해도 生과 死는 다 같은 한글자로 똑같은 길이이며 박자이다. 삶의 길이와 같이 죽음은 같이 길 것이며, 어쩌면 보이는 삶보다 안 보이는 죽음의 세계가 훨씬 추측할 길 없이 길고 또 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흔히 유심론자 아니면 유물론자로 인간자체를 규정, 구별하기를 즐긴다. 그렇다면 나는 유심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양자의 경계에서 오가는 세계관, 아니 우주관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인간 자신의 사상과 모든 자유를 강제로 구속하는 이데올로기, 이념의 속박에서 해탈해야 한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 넓고 매력적인 미지의 사상(事象)으로 충만 되어 있다. 이 10년래 나는 우주학 내지 천문학이란 학문에 도취되었다. 우주를 아는 것이란 지구를 넘어 우주를 통해 우리 자신의 앎으로 이어진다. 공자님의 말씀한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아야 하나?”란 난폭한 현세욕의 중국인적인 인생관을 우주학의 지(知)적 세계에서 볼 때 얼마나 옹졸한 것인가 알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하다못해 삶을 위해 먹는 쌀 한 알에도 무한한 우주와 연결돼 있지 않은가! 이를 정성스럽게 가꾼 농군의 농사일, 씨를 수용하고 키운 땅, 그리고 물, 햇빛, 공기.... 이 쌀알을 먹어서 살아가는 자기의 생명, 육신의 존재는 집이 있고 대지가 있고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고 은하계가 있고 많은 행성과 항성, 혹성이 있다. 137억 년 전의 빅뱅에서 탄생 된 우주가 이후 부단히 팽창을 거듭하고 매초 30만Km의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해도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전체에서 별 등 눈에 보이는 물질은 겨우 4%에 불과하여, 보이지 않는 96%에 대해서도, 비록 보이는 물질에 대해서라도 그 정체를 아는 것 역시 근소(僅少)에 지나지 않는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96%중에 23%가 중력(重力)을 일으키는 “암흑물질”이라 칭하는 정체불명의 물질이라고 한다. 나머지 73%기 우주를 팽창시키는 “암흑에네르기”, 미지의 열량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세계를 3차원이라 보는데, 우주학에서는 진짜 시공은 4차원이 아니라, “양자론 차원(量子論的次元)”에서 일어나는 초대칭성 입자(超對称性粒子)가 존재하여, 이 가벼운 초대칭성입자가 그 “암흑물질”의 유력후보의 하나라 한다. 따라서 시공은 4차원을 넘어 5차원, 6차원 아니 진짜 시공은 10차원까지 있다고 한다.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4차원시공” 마저 어려운데, 그보다 6차원이나 많은 것이니 머리가 아찔해져도 모를 상상의 범위를 절하나는 시공의 세계이다. 5차원이상의 공간에서 운동하는 입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에네르기라고 한다. 그러니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5관 감각을 훨씬 초월한 별(別)세계이다. 6. 내가 우주의 5차원 6차원, 10차원의 현혹 스러운 미지의 화제를 꺼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죽음과 직결된 차원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그의 명작 에서 제시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마치 코끼리의 피부의 주름 안에 기생하는 기생충처럼 그 벌레들이 보이는 세계는 주름살이 전부이며 거대한 코끼리의 형태전체를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도 기생충마냥 5관으로 보이는 세계만 “세계”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은 필경 기생충에 아니기에 스스로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 우주를 날려고 하는 구지욕으로 “세계내 존재” 범위를 탈출하여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세계적으로 연구가 가속되고 있는 임사체험(臨死体驗)의 연구, 최민법 연구로 죽음을 체험하는 심리학적 분석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사후의 세계에는 인체를 떠난 영혼이 존재 한다는 보고가 무수히도 있다. 이를테면 죽은 뒤 인간은 육체에서 이탈하여 부유(浮遊)하여 둥둥 떠 있으며, 어떤 광(빛)에 의해 (물론 태양이나 전등광 같은 빛이 아니다.) 유혹되기도 하면서 정신, 의식체로 되어 천정에서 자신의 시신을 바라본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병원에서 죽었다 깨어난 일본인의 체험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부유한 자신의 의식이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결국 빛의 세계에서 “아직 오지 마세요, 어서 돌아가세요” 하는 가르침대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죽음에서 깨어났다고 술회한다. occult, 즉 신비한 초자연사상(事象)에 눈을 뜨고 4차원 6차원의 세계를 안다는 초능력자라 칭하는 인간도 있다. 순식간에 자신의 혼(정신)이 육체에서 이탈해 오사카 동경의 거리를 갔다 오는 초능력자도 있다고 한다. 한 의학교수가 나에게 내 전세(前世)가 누구인지 안다고도 했다. 그는 나의 영혼은 김시습이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니 기쁘지만 또 100%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의식 수준은 아직 인간의 의식을 넘은 5차원 6차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 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칼은 에서 인간의 의식 수준을 넘은 고수준의 차원에서 직접적 간섭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 본인 역시 실험물리학자의 시조의 한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대물리학자 뉴톤도 초자연사상에 흥미를 갖고 만년에는 그 영역에 연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노벨생리학 ㆍ의학상(1912년) 수상자 아렉시스 가레르는 영혼을 갖춘 인간을 목격했으며 인간의 “세계내존재”에서 탈출 할 수 있음을 실중한 과학자, 의사이기도 하다. 7. 요컨대 “인간은 물질로서의 자신을 초월하는 정신적 존재이다” 라는 근년의 심리학, 인간학 가설에 대해 나는 차츰 믿게 되었다. 비록 신비체험은 없지만, 잠재의식은 체험하곤 한다. 일테면 “오늘 혹시 내가 찾는 고서가 그 책방에 가면 있겠지”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헌책서점에 가보면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은 듯 나를 보고 미소하고 있는 그책. 옛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을 만난 기쁜 기분이다. 이때의 그 감은 전세의 혼, 또는 정신이 먼저 그 고서점에 가서 보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영적세계, 초자연능력의 세계에서 육체의 사라짐(죽음)에 따라 정신(혼)이 인른 차원의 세계로 이행 하여 생(삶)이 연속한다고 한다.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이나 초능력자는 이것을 잘 안다고 한다. 즉 죽음-삶-앎의 연결고리인 듯 하다. 나의 한 80 넘은 독자는 자신은 현재 노후이지만, 연금도, 저축도 보험도 일절 없이 그 어떤 대책도 구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한다. 지극히 비상식적인 삶을 해왔지만,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그는 웃으면서 답한다. 젊었을 적에 노후의 그 다음만 걱정해왔기 때문에 그 근심을 해결하고 나니 노후의 근심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그 뜻을 몰라서 내가 또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구극의 진실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노후의 근심을 하는데, 노후의 그 다음은 근심 하지 않는다. 초 상식적 진리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니고 있다. 육체는 생명이지만 정신은 아니다. 의식생명이다. 인간은 정신생명이다. 육체는 늙지만 정신은 늙지도 죽지도 안한다. 따라서 나 자신을 무한한 것이며, 무한히 젊다는 것이 곧 해결이다” “육체는 죽어도 정신을 죽지 아니 한다”가 그 노인의 지론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참 부러웠다. 인간의 “죽음”을 일찍 알아버린 “앎”이 있기에 그에게는 “죽음”도 “삶”이었던 것이다. 8. 내가 “죽음”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지하게 사고 한 것은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타계로부터였다. 2008년 4월 14일 심야 2시경, 심양에서 동생이 국제전화로 부고를 전했다. 찰라 나는 머릿속이 온통 흰 색으로 공백을 이룬 자신의 의식을 의식 했다. 그 다음 한참 지나자 집의 천정이 무너지듯 내 머리를 압박해왔다. 시야도 좁아지고 집안이 흰 거대한 암석판 같이 지지 눌렀다. 전화를 놓고 한 식경 지나서야 나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3일 전만해도 입원중인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퇴원하시면 봄에 일본에 오시겠다고 하시던 어머니시다. 부랴부랴 귀국한 내가 어머님의 영결식에서 본 어머님의 용안은 마치 평온하게 깊은 잠에 드신 것만 같았다. 영면(永眠)이란 단어는 고인의 잠든 것과 같은 모습에서 생긴 말일 것이다 며칠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날 12시경에 취침한 나는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얘야, 내가 옛날 널 임신할 때 꾼 태몽이 있잖아. 그때 내가 두레밖에 든 큰 뱀을 버리고 왔길래 너와 멀리 떨어져 사누나. 나 멀리 길 떠나야 한다” 라고 내 손을 잡고 말하신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아니”, 여기가 좋은데 갑자기 어디로 떠나신다고 그러세요?“ “아니다, 내가 꼭 갈 때가 있단다. 나 먼저 가니 몸조심하고 잘 살아야 한다.....” 아침에 깨어난 나는 꿈에서 어머님의 “작별”이 심상치 않다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어머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다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죽음”을 타곳으로 가서 산다는 “삶”으로 이미 나에게 고백했던 셈이다. 슬프다는 말이 너무 무력한 만큼, 깊은 슬픔에 빠진 나는 일본에 돌아온 뒤에도 일 년 동안은 거의 3일이 멀다하게 홀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뒤 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에 대해 늘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육체의 사라짐은 어머님에 대한 무한한 상념으로 연결해 주었다. 그 뒤 나는 왠지 늘 어머님이 영혼이 늘 나의 주위에 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네르기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슬픔의 슬럼프에서 이탈하여, 어머니와 항상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늘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어머니는 “죽음”이라는 육신의 사라짐을 통해 영원한 정신의 삶을 지속해가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냐면 살아계시는 분을 위해 제사 따위를 지낸다는 것을 불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육체가 사라지면 아마 혼의 에네르기로 되어 어머니와 같이 살 것이다. 그리고 이상 선배, 이광수선생, 김시습 할아버님과도 만나야겠다. 9. 누구는 영원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시신을 수정관에 넣어 영생을 시도한다고 하는데, 참 어리석은 골계의 풍경이 아닌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죽음”이라면 그까짓 육체가 뭐 길래 썩은 시체를 그대로 두고 우러러 첨앙(瞻仰)한단 말인가? 결국은 영원한 육체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유물론자들의 썩은 발상방법엔 정년함구하게 된다. 죽은 시체가, 영혼이 다 날아간 시체를 “영생물멸”연하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에라, 그런데 신경 쓰기보단 그냥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명상하는 편이 퍽 즐겁다. “소장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떼벡페리의 은 별나라에서 온 작은 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잃어버린 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서양의 종교는 몰론 말 할 나위도 없으나, 서양의 회화에도 언제나 “죽음”의 테마가 대거 등장한다. 일테면 1517년에 한스 바르동의 명작 , 사신(死神 )과 쾌락의 원천인 소녀가 같이 있는 그림, 백골의 사신이 아릿다운 나체의 소녀에게 키스를 하는 광경에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깔려있다. “삶과 죽음은 표리의 일체이다”라는 메시지를 발하여 오늘까지 충격을 주고 있다. “즉음을 잊지마라”는 서양의 “죽음의 영생” 테제는 미술, 문학, 음악예술에 관통한 굵은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한다는 신조에서 서양인들은 죽음을 삶의 연쇄로 보았다는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동양의 불교에서도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프로세스에 있는 하나의 통과점이라고 간주한다. 무식한 어머니도 빌기도 하셨다. “죽어서 극락정토에 가서 너희들 행복을 빌겠다” 라고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만 68세에 타계 하신 어머님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않고 더 좋은 하늘나라로 가서 자식들을 위해 정성을 다 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셨으니 고맙기만 하다. 10.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작품엔 항상 “죽음”의 향기가 풍긴다. 왜 그가 세계적으로 그렇게 애독 되냐고 하면 그의 작품에는 국경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근원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치다(內田樹)교수의 말에 따르면, 무라카미는 인간의 창조족인 근원인 어둠의 장소에 추를 곧추 내리 드리우고, 그 속에 있는 현실세계가 아닌 이계(異界) 즉 “죽음”을 깊숙이 조명하고 자 한다. “현실세계”와 “현실이 아닌 세계”가 교착하는 문학을 통해 죽음에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해 사고를 하고 있다. 에서 무라카미를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 그 일부분으로서 존재 한다”는 메시지를 발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통해 언어, 국경, 종교를 넘어 세계 만민이 공유하는 상징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또 하나의 참신한 모델을 고안하고 있으므로 나는 몇 년 안으로 그가 기필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리라 확신한다. 11. 죽음은 무엇인가? 해도 나는 확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죽음은 도착점이 아니라 인간의 또 하나의 생의 스타크지점 이라는 것. 인간은 부모님의 선택에 의해 우연히 태어나고, 우연이란 것들이 집합하여 삶을 살고 어느 날 우연히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이라는 가설에 나는 매력을 느낀다. 그러므로 유물질적론적인 물질 편향의 인생론보다도 나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찾는데서 더 보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자신의 삶의 종식이 아니라 정신적 자기가 항원히 존재 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 삶에서 나는 내가 살았고 웃었고 울었다는 표식을 남기고저 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자식인 나의 글쓰기로 얻어지는 책들이다. 나는 육신은 죽지만 책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욕심 하나 더 있다. 저 세상에 가서도 될 수 있다면 책을 많이 쓰고 싶다. 욕심이라면 공자님과 석가님과 예수님 더불어 노자, 장자와 만나 논쟁을 하고 싶다. 또한 플라톤, 칸트, 세익스피어, 괴테를 만나고 싶고 김시습, 이광수, 이상을 뵙고 그들의 신변에서 살고 싶다. 결국 나는 죽음을 위해서 삶을 행하고 있는 것 같다. 다 죽음을 위한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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