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http://www.zoglo.net/blog/jinwenxue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221 ]

221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하) 댓글:  조회:2953  추천:52  2019-09-26
 문화대담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하)   여추우(余秋雨 ) 김문학     14.  “진(真)”을 사랑하는 자는 “미”를 좋아한다.   여: 나는  어릴적부터 서예와 그림을 무척 좋아했어요. 지금까지 필로 글을 쓰고 컴퓨터를 사용 할줄 모릅니다. 출판계에서는 나를 “순수공 글쓰기 작가”라고 불러요.   김: (웃음)어쩜 저와 꼭 같이 육필을 고집하는 최후의 “21세기 수공업자”이십니까?   여: 김선생도 육필로 글을 쓴다구요?  90권 책을 다 육필로 쓰다니, 그래서 우린 동지를 넘어선 동필( 同笔 )이군요(웃음).   내가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2017년 5월에 중국미술관에서 “(  余秋雨翰墨展 )(중국예술연구원 주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중국미술관 건관 반세기 이래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킨 개인서예전이 되였어요!     김: 대단하십니다. 중국당대 문인중 최고의 서예가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지요. 선생님은 중국서예가중 누굴 좋아하며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요?   여: 王羲之, 欧阳询, 颜真卿,苏东坡를 좋아해요. 소동파는 문화대가로서 문인의 서예지요. 董其昌과 明代의 쌍벽을 이룬 王铎, 내가 만약 명시대에 살았다면 동기창보다 왕탁과 절친하게 사귀였을거예요! 왜냐면 그의 필묵에서 사나이의 대장부정신이 있고 인격의 호연한 기개가 슴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김: 아까 선생님이 제게 선물해준 두폭 묵보는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혼백이 담긴 글이니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여: 나는 사실 "높으신 분"이 날더러 써달래도 쉽게 안써드려요! 우리 김문학선생은 오랜 지우이고, “아시아의 문화귀재”니 내가 특히 아끼기 때문에 써주고 싶었어요   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 진( 真 )을 사랑하는 인간은 꼭 미를 사랑하게 되여 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가 다 서예나 그림을 좋아하는건 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구비돼 있기 때문이지요.   김: 저도 심히 동감입니다.   여: 나는 잘 몰렀었는데, 김선생의 서예도 보니까 고복(古朴)하고 고졸(高拙)한 문인서예의 풍격이 있어요. 서예도 그렇고 그림 재주도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원래 그림을 배웠나요?   김: 네, 어렸을 때부터 작가되는거 하고 화가 되는게 꿈이었어요. 74년 소학교 때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시기였는데 공자 만화를 60여 폭 그려서 개인전을 교실에서 한적이 있습니다. 심양시 소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관람하러 왔어요.(웃음)   여: 역시 귀재(鬼才)는 소시절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김선생과 나는 여러가지로 서예, 그림을 포괄해서 같은 취미, 애호가 있어서 정말 반갑고 더욱 친근감을 느껴요.   김: 저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대 중국문단에서는 여선생님 서예와 가평요( 贾平凹)의 서예를 최고의 백미로 치고 있는데, 선생님의 서예는 수려하고 유창하며 서예가로서의 서예풍격이 있어요. 그리고 가평요 선생도 다 친우사인데, 그의 서예는 졸고(拙古)하고 소박하지만 전형적 문인서로서 맛이 있습니다.   두분은 풍격이 이질되지만 중국문단 서예의 쌍벽을 이루고 있지요. 또한 두 문학거장이 다 저의 친구이니 저로선 영광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독서에 관한 화제로 바꿀까 생각하는데,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네요. 15.  독서는 생명의 질을 높인다.   여: 독서야 말로 평용(平庸 )을 이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의 성공이 사회관계, 기회, 방향의 정확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건 차선적이고, 가장 우선적인것이 독서, 우연하게 어떤 책을 만나서 책속에서 힘을 얻고 그것이 인간을 평용에서 끌어 내지요.   나는 절강성의 한 편벽한 산촌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이곳 사람들은 다 문맹이예요. 우리 어머니가 타향에서 시집왔는데 이 산촌의 첫번 째 글을 아는 사람이었답니다. 그 뒤 식자반, 학교를 꾸렸는데, 학교에 도서실이 있었어요. 책은 많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엄격한 제도를 세워서 매 사람마다 100자 붓글을 써야 책 한권을 빌려볼 수 있게끔 했습니다. 독서는 사람들에게 밖의 세상을 알게 했는데 지금 우리 고향의 촌민들은 다 부유하게 됐지요.   김: 네, 과연 독서는 역량과 지식과 부유의 길이기도 합니다. 나는 독서가 없는 인간의 생을 생각해본 적 없지요. 독서야말로 평용을 해탈하는 좋은 방법이라 하셨는데 정말 동감입니다.   여: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건 자신의 생명가치를 향상시키는 거예요. 세상에서 99%의 힘이 당신을 평용으로 끌어내린다면, 오로지 1%의 힘이 평용에서 해탈시키게 하는데, 이 1%의 힘은 바로 독서, 열독과 연관됩니다. 평용은 사람을 사악( 邪恶)으로 내밀수 있으니까요.   김: 선생님은 독서의 양과 질에 대에선 어떻게 생각하신가요?   여: 난 독서량이 중요한게 아니라 쾌락한, 유쾌한 독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하는건 필수이고, 많이 읽어야겠지만 나는 양보다도 질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독서에서 최대 문제는 무선택적으로 람독(滥读 )하는것인데, 이 점은 지식인이건 일반인이건 다 있는것 같습니다. 어떤 책이 유명하다면 무턱대고 찾아 읽어요. 더 문제되는 건 인터넷에서 열독을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요. 인터넷, 위챗에서 수 없이도 많은 뉴스, 정보의 포로가 되어 보귀한 생명을 허송합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정보가 다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김: 찬동입니다. 인터넷이나 위챗의 홍수같은 정보에 사로잡혀 서로 한집안 부부끼리도 대화없이 보내는 데, 사실 그런 정보는 얄팍한 지식, 뉴스는 되지만 사상이 없으니까요.   여: 그래요. 내 주장은 독서도 선택성 있게, 람독을 피하고 양서를 골라 읽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특히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많이 읽기를 권장하지만, 독서가들에겐 적게, 질높은 책을 읽기를 권장합니다.   김: 양보다 질이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만, 그래도 나는 양서를 많이 읽어야 하며, 독서량이 어느 정도 축적돼야 한다고 봐요. 세계각국, 민족의 독서량과 그 국민, 민족의 교양, 소질의 높이가 정비례 되거든요. 책 읽는 사람은 책 선택할 줄도  알게 됩니다.   여: 맞어요. 책을 통해 자신을 찾는 프로세스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책 몇권을 책을 읽다보면 만나게 되거든요. 독서는 자신을 되 찾는 정신적인 생명의 질을 높이는 방법으로 돼야 합니다.     16.  글쓰기의 비결, 어디에 있나?   김: 대문장가이신 선생님께 글 쓰기의 비결에 관해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여: 90권의 책을 내고 중일한 3국어로 집필 출판한 김문학선생이야말로 명문작가이지요? 오히려 이 질문을 내가 하고 싶은데요.(웃음)   김: (웃음) 당황해지네요. 대사(大师 )께서 질문하시니, 사실 매일 밥 먹지만 밥 먹는 비결이 어디 있냐 물으면 대답이 궁해지듯이, 매일 글쓰기를 하는 저에게도 비결을 물으면 확답을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제게 있어서 필로 쓰는것보다 두뇌로 사고하는 작업, 정신적 작업이기 때문에, 넓은 지견과 그것을 토대로 한 사고력, 발상력에 비결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사상(事象)이라도 그것을 사고하고 발견하는 남다른 자기의 독자적 발견, 사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글쓰기, 또는 글의 매력을 높이는 비결이라 생각합니다.   여: 좋은 말씀입니다. 나도 글쓰기에는 상법(常法)이 없다고 생각해요. 기본적 방법은 중학교 어문선생이 다 얘기 해주었거든요. 어떤 사람이 한 작가에게 왜 글을 쓰냐 고 물으니, 그 작가가 “글을 쓰고 싶으니까”하고 대답 했답니다. 굳이 글쓰기의 비결이 있다면 나는 나름대로 아래 몇 가지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글쓰는 사람은 가장 간단한 룰을 지켜야 하는데 이것은 나는 글쓰기의 “심리최저라인”이라 하고 싶어요. 또 하나는 내가 글쓰기 할 때 느낀 감수 입니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것으로 보편적 의미가 없을수도 있지요.   김: 구체적으로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 네, 1. 작가는 시시각각 성심으로 독자와 대면하는 기분으로 글을 써야 합니다. 창작충동이 있을 때 필을 들어야 하는데 이 충동은 작가의 평소의 축적과 영감의 불꽃과 동반됩니다. 한평생 글을 썻다해도 최후의 한편 글을 쓸때 독자를 념두에 두어야 하며, 독자가 실망하는 글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해요. 나와 독자는 계약을 맺은적 없으니까요!       2. 문장은 흡인력, 독자를 끄는 매력이 있는게 가장 중요해요. 문장 본신에 장력(张力)이 있어야 하는데, 장력은 격정으로 인해 생기는 거지요. 생명의 일종의 투입만이 격정이 생기고 거기서 장력이 생겨서 나오거든요. 기교도 필요하지만 문장의 최고 기교는 기교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역시 많이 훈련을 거쳐 기교를 연마해야 해요.      3. 언어감각이 문장을 구성하기 때문에 이게 중요합니다. 문학의 세계는 결국 언어로 영위하는 감각의 세계이거든요.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감각, 감정을 배설해버리면 왕왕 감각을 장송해 버려요. 독자의 감각을 유발하는게 중요한데, 서로 모르는 독자들의 감각을 유발하여 공명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진짜 명문은 독자의 이목(耳目)을 자극하는 이목충격력이 구비되여야 해요. 1.진실성, 진실한 감정을 투입하여 써야지, 감정 또한 남발해서도 안되지요. 2.상식기술을 되도록 피하고 생명내면의 것들을 써야 합니다. 3.화제보다도 神情이 더 중요합니다. 소재도 소재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자신의 신정으로, 맛 있게 쓰는 게 더 중요하지요. 소재는 누구나 모방할수 있지만 신정, 멋은 모방하기 어렵습니다.   김: 과연 여선생님만의 좋은 비결이군요! 선생님의 대산문이 그토록 전지구 화인의 심금을 울린 것은 역시 선생님의 이러한 글쓰기 비결이 믹스해 있기때문이겠습니다.     17.  문화 거인의 발자국 여: 김선생에게 이번에는 내가 한 가지 인터뷰해도 괜찮겠지요?   김: 네, 아무렴요.   여: 내가 우리 김문학 교수께 제일 탄복하는 건 3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또 3개국어로 모국어처럼 다 글쓸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나 국내의 이름있는 학자, 작가들도 다 중문 한 가지 밖에 모르고 중문사유자입니다. 그러나 김교수는 3국어학자, 비평가로서 문화의 경계를 뛰여넘는 활발한 문화활동, 글쓰기로서 “동아시아 귀재”로 불리게 되는 거물로 성장했는데, 조선족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알건대, 김문학 선생같은 기재(奇才)는 동아시아에서도 유일무이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3개국을 하다보면 경우에 따라 언어전환을 어떻게 컨트럴하는지 궁금합니다.   김: (웃음) 그건 컴퓨터 버튼을 누르듯 머리속에서 언어전환이 순식간에 됩니다.   여: 나는 절대로 김선생같은 기재를 소홀히 하고 박대해선 안된다고 절실히 느껴요.   김: 감사합니다. 선생님. 중국 당대 문화거인으로서 여선생님께서는 경계를 뛰어 넘는 답사, 고찰과 연구자원을 밑거름으로 “중국문맥””중국미학”과 “중국인격”의 계통적 서술을 완성함으로써 “문채, 학문, 철리적 사고, 강연이 모두 최고봉에 달한 당대의 거장”이라 공적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대 문학거장들도 여선생님에 대한 찬사와 정당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대만의 백선용은 “여추우선생은 당송8대가가 창립한 산문의 존엄을 또 한번 환기시켰다. 혹은 그는 다시금 당송8대가의 뒤를 이어 시화(诗化)적으로 천하의 혼을 사색했다”고 평가했지요.   당대 문학귀재 가평요(贾平凹)선생은 “이 시대는 큰 논쟁이 대성취를 이루게 하는 시대인바, 우리는 행운스럽게도 이런 인물들을 만나게 되였다. 여추우의 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저작이다. 그의 문화연구는 스케일이 방대하고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그는 당대 문학의 하늘을 넓혔으며 그 공헌은 거대하다. 이런 인재는 백년에도 얻기 어려운 바, 역사는 그를 경중(敬重)할것이다.”   여광중선생님도 “양실추, 전종서보다 30여년 후배인 여추우는 지성을 감성에 융합시켜 새 실적을 올렸다”고 격상했지요.   선생님에 대한 폄훼도 만만치 않지만 역시 거인, 거목이기 때문에 질투,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 주요원인입니다. 미움받을 만큼 기적을 쌓았기 때문이지요.   여: 고맙습니다.   김: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것은 문화거인으로서 여선생님은 어떤 모습으로 중국 문화사 문명사에 남고 싶습니까?   여: 한마디로 나는 “고독한 문화인”으로 그 어떤 체제나 직업에 예속되지도 않고 그 어떤 보평에도 아랑곳 않는 철저한 자기, “자기 독립”을 지킨 문화학자, 문명학자로 남고 싶습니다. 이거면 나는 만족합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나를 망각해도 나는 개의치 아니하니까요.(끝)                                                대담자소개   여추우(余秋雨)   1946년8월 23일 절강성 여요현 출생.중국 당대 저명한 문화학자,문화비평가,산문작가.   1966년 상해희극학원(대학)졸업.1980년에 “戏剧理论史稿”“中国戏剧文化史述” “戏剧审美 心理学“을 출판 .1985년 중국대륙의 최연소 문과교수로 승직.1986년 “상해10대학 학술엘리트”를 수여 받음.1987년 국가급돌출공헌 전문가의 칭호를 수여 받음.   여추우는 역사문화산문대가로서“文化苦旅”“ 山居笔记”“ 千年一叹” 등 20여 부가 있음. 당대 최고의 산문대가로 불리는 여추우에 대해 문학대가 가평요(贾平凹)는 "여추우는 당대문학의 영역을 넓혔는바 거대한 공헌을 했다.이런 인재는 100년에도 보기 드물며 역사가 그를 경중(敬重)할 것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근년래 대륙에서는 "가장 사랑받는 인기작가"제1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찬사와 폄훼를 가장 많이 받는 문인이기도 하다.  
220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상) 댓글:  조회:2519  추천:38  2019-08-24
 문화대담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상)     여추우(余秋雨 ) 김문학   0. 들어가면서   여추우( 余秋雨 ,1946년생)는 당대 중국 산문의 거봉이며, “문화대사(大师 )”로 존경과 흠모를 자아내는 거물이다. 전세계 화인, 중문작가중 최대의 문화거장으로 명성을 날린 여추우는 한편 가장 중상과 비방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970년대 이란 사계(斯界)의 권위적 교재를 써내어 당시 본보기극 ( 样板戏 )의 문화독재에 향해 반기를 들었다. 1990년대 상해희극대학 학장직을 사직하고 중국문명유적탐방을 쓴 《文化苦旅》로 전국 내지 세계 화인 독서계에서 열렬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문화대산문”이란 문체를 창립하였다.   나는 당시 히로시마대학원 박사생으로 있었는데, 《文化苦旅》를 《중국문화답사기》란 타이틀로 한국어로 번역, 감수를 받아 출간하는 계기로 여추의선생과 망년지교로 되였다.         2008년 8월 3~4일 강연차로 일본을 방문한 여추우와 초대면 하면서 긴 대화를 나누며 두터운 우정을 쌓게 되였다.     그뒤 여추우 선생은 "보행하는 문명행자"로 나서 바빌론, 아랍, 인도 등 세계 문명유적지를 답사하여 지금까지 세계최초로 이 문명답사를 완성한 인문학자로 되었다. 답사중,그는 당대 세계문명에 대하여 참신한 제언을 하여 국제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20여권의 저작은 장기간 전세계 중문서적의 베스트 원 위치를 차지하였다. 대만의 유명작가 백선용( 白先勇)은 “여추우 선생은 유일하게 전 지구 중문독자의 환영을 받으면서 인기가 식지 않는 대륙작가이다”고 격상하였다.     여추우 선생은 또 대륙에서 근년래 전국 고층독자앙케트조사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당대작가”에서 늘 제1위를 독차지했다.     여추우 선생은 수십년간 독립지식인의 자세로 중국문화를 "공간" "시간"  "인격"  "심미"등 "4차원의미의 중국"이란 과제로 나누어 독창적인 연구와 글쓰기 업적을 남겼다.     북경대학, 유엔 과학교육문화조직에서는 여추우를 “글쓰기, 학문, 철학적 사고와 강연 등 영역에서 높은 업적을 쌓은 당대의 거장”이라 높이 평가 했다.   그리고 상해시 교육위원회에서는 또 그를 위해 특별히 "余秋雨大师工作室"을 설립해 주고, 중국예술문화원에서는 "余秋雨书院"을 설립했다.   내가 여추우 선생과 18년만의 재회를 이루게 된것은 2018년 8월22일 상해의 아담한 다방에서였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통화를 하거나 조수를 통해 서로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우리의 대담은 일체 매스컴을 차단하고 비공개로 진행되었는바, 그뒤 작년 10월과 금년 3월에도 부부동반으로 회식을 하면서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은 서로의 글쓰기, 비교문화, 세계문명과 중국문화 인생살이 서예미술 등 다 분야에 걸쳐 구애없이 진행되었다. 우리의 대담은 마치 시나리오 각본을 써놓기라도 하듯이 서로 척척 대화가 맞아들어 통쾌하고 자유로웠다.   여추우 선생은 "우리는 서로 넘 통하는데가 많아서 기쁘다. 서로 미움받은 적수도 많고, 대응하는 방법도 유사하고 서예, 미술을 애호하는 공동언어도 많다”고 연속 말했다.   아래 우리의 수차례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하는 바이다.     1. "문화대산문"의 개척자   김:여서생님, 이렇게 18년만에 재회하니 감개무량합니다. 2000년 8월 초 히로시마서 선생님과 초대면 했을 때는 ,제가 만 37살이었고 선생님이 55세 연강역부한 중년이였는데, 벌써 제가 그 당시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고 선생님은 72세 고희의 줄기에 들어섰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지 연세보다 젊고 활기에 찬 선생님의 모습을 접할수있게 돼서 너무 반갑고 기쁩니다. 유명한 중년 학자, 작가로부터 이미 전세계 화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대사( 大师 ), 거장으로 되신 선생님, 오늘은 제가 많은 화두를 지니고 여러 분야에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벌써 18년이 흘렀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때 애송이 청년학자인 김선생도 이미 “동아시아 귀재”라 불릴 만큼, 동아시아 비교문화계의 제일인자로 성장했으니 대단하지요. 그 사이 나도 김선생의 중문학 책을 사서 읽었기 때문에 “이 친구 참 잘하는군”하고 속으로 언젠가는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오늘 상해서 이렇게 상봉하니 (웃음) 감회 새롭군요!   김: 고맙습니다! 대사께서 칭찬해주시니(웃음)   선생님, 그때 《文化苦旅》를 번역감수하면서 제가 감탄한 것은 정말 지금까지 중국산문사에서 없었던 미증유의 "문화대산문"을 개척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세계 화인세계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수 밖에 없었지요!   이 책에서 선생님 "답사 (旅)"를 통해 자연과 유적을 중국 인문, 역사의 신발전과 그것을 철학적 심미영역으로까지 확산시켰습니다.   여: 1986년 ~1991년 까지 나는 상해희극학원(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는데 전국에서 가장 젊은 학장으로 많은 영예를 안았어요. 그런데 나는 성격상 행정직에 매이는게 싫어서 1991년 사직을 하고 단신으로 서북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적으로 중국문화의 중요한 유적을 답사했습니다. 당시 나는 이국의 한 노교수의 계발을 받고 이 결정을 내리게 되었지요. 이 교수님은 연로한 체구를 끌고 중국서남 소수민족지역을 모험적으로 답사했어요.   여기서 힌트를 받은 나는 새롭게 중국 땅을 밟고 중국문화에 대한 사고와 추적을 노렸습니다.나의 문화고행(苦旅)은 이렇게 시작됐어요. 내가 답사주제를  "백년의 혈류를 답사하여 천년의 휘황을 찾아낸다”(穿越百年血泪,寻找千年辉煌 )고 했었지요.   김: 이로부터 "문화대산문"이 탄생되며 《文化苦旅》《山居笔记》등 책들이 전세계 중문독서계에서 "최대의 인쇄량을 자랑하는 문화서적"으로 부상했으며 선생님도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중문작가의 한사람으로 거듭났지요. 그리고  "문화행자( 文化苦旅 )"로서 사명감으로  세계문명유적지를 답사하게 되는데 언제 부터이시죠?       2 “문화행자”의 기나긴 노정   여: 1999년부터이지요. 《文化苦旅》는 초기작품이라서 답사연구의 요령은 있었으나, 구체적 행문에서는 글쓰기 흔적이 너무 많았어요.     《文化苦旅》는 내가 국내에서만 답사연구했는데 많은 문제에 봉착했기때문에, 이런 담벼락을 넘는 방법으로 중국문화권을 뛰어넘어서 세계로 나아가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이 익숙한 문화권을 벗어나서 세계의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야 자신이 몸 담근 중국문화에 대해 잘 파악할수있지 않겠습니까.   이 점은 유명한 비교문화 학자인 김선생도 너무 잘 알고있으리라 믿지요!   김: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25살때부터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동아시아 비교문화영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면서 심심히 느낀것은 타문화의 비교, 대조가 "문화의 거울"구실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거울을 통해 타문화만 인식할뿐만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수있게끔 하니까요.   선생님의 《文化苦旅》《山居笔记》가 중국 인문과 인격, 중국문화의 정신적 귀속과 사회적 재난등을 탐구했다면《千年一叹》《行者无疆》은 세계의 문화와 중국문화에 대해 이성적인 비교고찰을 했다는것이 돋보입니다.   여: 1999년부터 시작하여 홍콩의 봉황위성TV국에서 세계대문명유적에 대한 역사적 고찰하는 프로를 갖게 됐어요. 애급에서부터 출발하여 중동으로까지 수만 킬로미터를 보행하면서 촬영,보도, 관찰을 하고 중계하는거예요.     처음 우리 집사람 마란(马兰 )은 반대했어요. 중동지역에는 전쟁이 빈발하니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하두 굳세게 나오니까 동의를 하더라구요.   김: 그렇지요! 목숨을 걸고 하는 문화탐험이니까요!   여: 맞어요. 그 시기를 기록한게 《千年一叹》인데 이야말로  탐험하는 글쓰기였습니다.(웃음) 북아프리카, 중동, 중아시아에서 남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이 테러와 공포로 휩싸인 곳이였고 날마다 납치당할 위험성이 대단히컸지요! 매일 어디서 식사하고 주숙하는지조차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내 문장이 매일 한편씩 위성을 통해 세계각지 중요한 중문신문에 연재됐기에 중단을 할수 없었어요. 그래서 황야의 암석위에 엎드려 쓰거나 짚차 차륜에 엎드려 쓰군했는데 체크할 사이도 없이 발표해나가군 했습니다.   《行者无疆》은 유럽답사기록인데 테러위험은 없지만 글쓰기 상황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 한편씩 쓰면서 발표했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만킬로를 뛰면서 위험한 지구를 답사한 인문학자이기도 합니다.     3.중국 ,거대한 비만증과 같은 …   김: 일본《아사히 신문》에서 2000년 "세계를 뛰어넘은 10대국제인물"로 선정한것도 선생님의 업적을 평가 한것이지요.  일개 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로서 저는 선생님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화고찰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러벌 시대 중국에는 세계를 향해 이거라 할 만한 문화를 갖고 있나요?   여: 오늘의 중국에 대해서 나는 중국이 하두 비대하여져서 시장거리에 홀연 나타난 거대한 비만의 거인처럼 사람들에게 생소감과 긴장감을 주고있다고 봐요.   중국문화가 미국이란 대국처럼, 위압감을 주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의 매력도 발산하는 것과 같은 그런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과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비만의 거인처럼 체통은 웅장하지만, 세인을 감복시킬 가치관, 정신적 매력이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여: 그래요! 유감스럽게도 중국문화가 문화적 정신가치보다도 겉치례의 이벤트처럼 화려하고 방대하지만, 실속이 없고 지금 시체말로 하면 격(格局 )이 작다는 겁니다.   결과, 정신적 가치가 결여하고 얄팍한 세속의 가치관만 난무하게 됐어요.   자, 보세요. 민간에서 숭배하는것은 "성공"이고, 관계(官界 )에서는 민수( 民粹)이며, 학계에서는 "국학( 国学)"을 떠 받들고 있습니다.   이 삼자가 바로 중국이란 거인의 성격인바, 사실 이런 "성공"으로 인해 공리성만 따지고, "민수"로 인해 떠들고,"국학"으로 인해 진부합니다.   이런한 거인이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도 누구나 존경하고 매력을 느낄수 없지요!     4. "국학",여기가 문제다   김: 좋은 지적이십니다. 방금 얘기중에서 "국학"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십시요.   여: 나는 "국학"이란 말에 이의( 异议)를 갖고 있어요. "국학"을 만일 그냥 "중국학" "중국문화"등으로 부른다면 정상이지요. 그런데 굳이 학문을 "국기" "국가( 国歌)"와 같은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 담론하는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국가주의"가 "국학"이 추구하는 권위가 돼버렸다면 "배타주의"로 기울어지고 일련의 논리적인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김: "국학"이 배타적 "국가주의"의 장치로 된다면 그건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른바 국 ( 国 )자가 붙은 국어, 국문, 국학…등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시, 19세기 중후기 20세기 초에 유럽과 일본에서도 성행했는데 "국학"이 그런 맥락에서 발현된다면 문제이지요.   여: 그렇지요. 중국안에 많은 민족문화 일테면 선비문화, 돌궐문화, 서하문화, 만주족문화, 몽골문화도 있는데 이를 배척하는것도 문제지요.   그리고 이른바 "국학"이라고 떠드는 걸 보면 대개 복고문화( 复古文化 )이예요. 일체 문화의 생명력은 창조적인 창신문화에 있는데 그걸 방치하고 옛것에 집착하면 창발력이 방치됩니다. 요즘 TV도 그렇고 많은 분야에서 복고주의가 성행하고 있는데, 복고문화는 극도로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그 뒤에 은거하고 있는 것은 극도의 자신감 결여이지요!   여기에 매달려 세계의 기타문화와 대등한 대화의 가능성이 감퇴되고, 자신에 매달려 자미자취( 自美自醉 )된다면, 이것은 사실 개혁개방후 중국문화의 후퇴입니다. 그러니 이런 유치하고 우매한 행위나 사고방식은 사실 우리를 세계와의 교류를 차단시키는 함정을 판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5. 중국문화의 약점과 병페는 무엇인가?   김: 그럼 선생님은 중국문화에 존재하는 병페나 약점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여: 간략해서 말한다면 3가지 약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첫째, 공공공간 ( 公共空间 )의식이 결여하거나 생소한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보면, 외국에 여행간 중국인들이 도처에서 가래침을 뱉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호텔에서 마작을 놀거나 도박을 하는 등 저열한 행위는 외국인이 "도덕성이 없는 중국인"이다 비평을 하잖습니까!   외국인의 비평을 받아도 할말 없지요. 분명 공공공간의 룰을 모르기때문이지요. 사실 그 책임은 중국문화에 있지요.   김: 문화인류학에서 인간관계를 동심원(同心圆)으로 표시하는데 맨 안이 인정권, 중간이 의리권 맨 밖이 공공권입니다. 일본인이 공공권, 한국인이 의리권, 중국인이 인정권에 속해있는데, 이는 중국문화가 공공공간의식이 결여하고 아는 사람, 자족 등 자기인( 自己人)에 익숙돼 있고 이 안에서는 질서 도덕이 잘 유지되지만 밖에 나가면 공공권의 사람은 外人(외인)이고 질서유지가 엉망이지요. 공공권문화에 익숙돼 있지 않는건 그 만큼 현대화가 안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 재미난 말씀이네요. 두번째 약점은 실증의식(实证意识)이 결여 한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황인우(黄仁宇)교수가 지적하다시피 중국역사의 최대의 폐단은 "수자화 관리가 결핍한것"이지요. 우리 나라에서 한때 성행했던 "무당산량이 20만근"등 한 없이 부풀린 수자 통계가 어느 하나 실증 된거 있나요?(웃음)   김: (웃음)그렇지요!   여: 사실 실증의식의 결여는 과학의식의 결여를 의미합니다. 이런 경향은 중국문화로 하여금 줄곧 "충간만 따지고 진가를 불문하는 (只问忠奸,不问真假 )"진흙탕속에 빠지게 했습니다. 진가를 따지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건 다 기초를 상실하고 말지요!   가짜제품, 허위는 어느 나라나 있겠지만, 중국에서는 너무 창궐하고, 루머도 중국에 제일 빈번하지요. 이런 원인은 죄다 중국문화속에 진가를 가르고, 위조품을 제거하고 루머를 해제시키는 장치와 기능이 없기때문입니다.   김: 맞는 말씀이예요.   여: 세번째 약점은 법제관념이 결여한겁니다. 난 정치적 각도가 아닌 문화적 각도에서 이 문제를 말하고 싶어요. 법보다 주먹이라는《수호전》호걸에서 보여주다시피 "법외영웅"을 우리는 숭배하지요. "강호"는 법과 멀리있고 "양민"은 줄곧 고수를 하고, "청관(清官)"은 법외에서 호인역을 맡아요.   중국문화는 법률관념에 생소하고 이럼으로 중국의 여러 대중들이 현대화에 들어서는데 크나큰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김: 완전 동감입니다. 사실 중국문제는 본질적의미에서 "인간문제" 즉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교양, 소질문제에 귀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체제의 탓을 하는데 일리가 있지만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 국민의 소질, 교양이 체제를 결정하는 하나의 가장 굴직한 근간이지요. 국민의 소질, 교양이 상승되면 문화의 질, 삻의 질도 향상되고 중국문화의 질이 존경받을수 있는 쪽으로 상승할 것이라 믿습니다.     6. 당대 80년대 중국문학의 대기상( 大气象)     그럼 이번에는 중국문학, 특히 당대문학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여: 현대문학에 비해 나는 당대문학을 더 높이 평가해요. 내가 매번 뉴욕에가서 강연을 할 때면 하지청(夏志清 )교수님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강하러 오군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친구로 되었어요. 하선생이 내게 자기는 노사(老舍)의 소설을 싫어 한다는 고백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나는 하선생님이 《중국소설사》에서 극력 추천한 전종서(钱钟书 )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기지( 机智 )를 자랑하는것 같다고요. 그리고 하선생님이 추천한 장애령( 张爱玲)의 소설에는 너무 지나친 의도적인 자질구레함이 많아서 좋아하지 않습니다"고 말했어요.   그리곤 우리는 술잔을 들고 대소했습니다.       김: 저 역시 당대문학의 실적이 현대보다 크다고 봅니다.   여: 80년대 당대문학은 매우 중요한 황금시기라고 생각해요. 그 시기 중국의 문학예술은 대기상( 大气象)으로 박력있고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이 있었고 총제적으로 "5.4"시기를 훨씬 초월했습니다.   김: 지당한 말씀입니다. 전번에 제가 가평요(贾平凹 )선생과 만났을 때, 여선생님과 친하다고 하시던데, 중국문인, 작가들과 친교가 많으신가요?   여: 나는 사실 산문작가이지만, 문인들과 별로 사귀지 않아요. 그러나 당대소설가중에 가평요, 막언(莫言 ),풍기재(冯骥才),여화( 余华), 장위(张炜) 등 과는 친구이고, 연장자로서는 정현량(张贤亮),왕몽(王蒙)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행건(高行健 ), 류진운( 刘震云),마원(马原 )등 작가들과도 친교가 있지요.   산문계에서는 주도(周涛)와 친우이고, 해외에는 김용(金庸),백선용(白先勇 ),여광중(余光中) 등이 모두 친구입니다.  용응대(龙应台)와도 본래 친구였고 , 한때 가평요와 우리 삼인이 "풍격이 판이한 3문우"를 결성했었어요. 그런데 그녀가 교관이 되였으니 계속 친구로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웃음) 문학에서는 직위가 너무 높으면 우정에 장벽이 되니까요.     7. "문화차이를 기뻐하라"   김: 동아시아비교문화학자로서 저는 선생님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글쓰기를 해온 선생님의 주장과 지견에 동감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자 사무얼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이란 테제가 인구에 화자했습니다.   그러나 여선생님은 그의 "문명의 충돌"론에 반기를 들고 문화차이를 긍정하고 차이를 흠상하며 차이로 하여금 세계평화의 뿌리로 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 그래요! 2004년 유엔에서 발표한 "인류발전리포트"를 보면 "문명충돌론"을 부정했어요. 나는 유엔 개발기획부서의 초청으로 이 리포트에 관한 연구심퍼지엄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심퍼지엄중에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가 영어 difference (차이), diversity (다양성) 이 두개의 D에 또 하나의 D가 증가됐는데 남아프리카 대주교 투투의 그 유명한 말 “Delight in our differences”(우리는 차이를 기뻐한다)입니다.   자, 보세요, 투투의 말은 그냥 차이에 대한 관통이나 양해가 아니라 차이를 즐거워하고 향수하고 갈구하는 뉴앙스이지요.   김: 이 말에 인류문와의 포용성과 평화공생공존의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여: 문화의 다양성, 다원화는 목적이 아니지요. 목적은 선택의 자유를 주는것인데, 문화적 신분(아이텐티티)의 선택도 포괄돼있어요.   아무 문화든 자신의 우월성을 과장하거나 타문화의 위혐성을 과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 두가지 과장은 모두다 타문화의 생존권과 전파권을 박탈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람의 선택권을 박탈하는것과 같습니다.   기쁜마음으로 다원성을 향유하고, 소심하게 대립을 경계해야 만이 우리가 문화의 매력적인 정체적 생명을 파악할 수 있어요..   8. 왜 끊임없이 "탈출"하는가?   김: 대산문작가로서, 문명비평가로서 여선생님의 근원적인 특질의 하나는 "여행" "답사"를 통한 문화적 탈출(出走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出走를 통해 문명을 읽고 문화의 차이와 동질성을 발견하고 또 그 사색의 여과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명의 파중군"으로서 선생님의 중국문화사에서의 족적은 선명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 出走"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네요.     여: 좋은 화제를 꺼냈습니다.(웃음) 나는 답사, 여행을 일종의 철학적 고도에 끌어올려 "생명적 탈출" 또는 "탈출적 생명"으로 명명하고 싶어요.   김: 과연 좋은 명명이시군요.   여: 여행, 답사란 우리개인의 협애한 생명을 확대시키고 향상시킬수 있고, 또한 원생명에 대한 돌파와 초월이기때문에 나는 그것을 일종의 "생명의 탈출(出走)"이라고 불러주고 싶어요.   곰곰히 색각해보면, 우리의 생명상태가 겉보기엔 매우 멋있어 보이지만, 기실 매우 비좁고 작아요.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의 유능한 고전문학교수가 있다고 칩시다. 일반인에게서 그는 지위가 있는 "성공인사"이지만, 사실은 그의 평생의 생명적 스케일(格局 )은 점점 갈수록 축소되어 버리지요. 그가 대학입학후 이 전공을 선택한후,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종신직업을 한정해 버렸지요. 그후 그의 매차례 진급은 오히려 그의 한정된 범위를 점점 더 좁게 몰아버립니다. 박사 전공이 당나라문학이고 어느 당시인을 연구과제로 삼았다면 그 외에는 손을 대지 않고 무지하지요.   이런 "성공인사"는 너무나 일찍 생명의 범주를 틀에 박아 놓았고 이것으로 자신의 지위와 대우를 확립시겼습니다. 그 지위나 대우가 높다해도 그 생명의 스케일과 활력은 사실 너무 작은겁니다.   많은 공무원, 기업인, 직장인들도 별다름 없어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직업,직장,회사와 겹겹의 인관관계속에 예속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에는 이탈, 일탈, 자기 반역이 없으며, 정신적 자유의 공간이 적어지고 재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집니다.     김: "자기폐쇄" "자기답습"의 상태에서 생명을 태워버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그런 유열, 만열감 내지 행복감이 없습니다.   여: 그래서 이런 폐쇄와 답습을 해탈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出走(탈출)입니다. 내가 일생에서 거듭 끊임없이 탈출한 것은 자신의 사상, 의식 내지 생명력을 보전하고 세계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명의 의미를 실현하는것이지요.     내가 만일 번마다 "탈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원히 오만하고 실적을 별로 올리지 못한 문인이었을겁니다.     내가 "탈출"이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쇠사슬을 벗어나 여행하는 사나이, 국제교재편찬자, 대학학장, 문화유적지 현장해설자, 인류문명의 강연자…로 거듭 날수 있었지요.   김: 너무 잘 알만합니다. 저 역시 자기 탈출로 자신의 글쓰기, 사색과 독서, 그리고 국경을 ,경계를 뛰여넘는 학자로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근데 선생님 때로는 탈출 후 되돌아보면 탈출전의 자신이 생소한 감이 없지 않나요?   여: 물론 있지요. 매번 "탈출"은 바로 생소한 자신을 찾고 생소한 자신을 만들며 그러고나선 그 자신을 향수하는 겁니다.(웃음)   김: (웃음) 그렇네요. 탈출을 통해 경계를 넘는 길이야 말로 자기 진화의 길이라 생각해요. 죽은 물 같이 부동하는 인생, 사심과 생명은 협소한 틀안에서 자멸을 자초하기 십상이니까요.   여: 문화의 중대한 책임의 하나가 바로 자신과 타인을 협소한 틀속에서 경계속에서 탈출하도록 인솔하는 것입니다.       9. 도필문화 (刀笔文化 )   김: 여선생님은 당대 중국문화사에서 드높은 명성을 획득한 동시에 가장 찬반양론으로  펨훼당하고 중상,모독 당한 문인이기도 합니다.제가 수집한 여선생님에 대한 비판서적만 해도 20여종이나 되고 어느 통계데이터를 보면 여선생을 비판한 문장이 무려 1만 6천여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여선생님을 에워싼 중국 당대문화계의 살풍경이 아닌가 합니다.(웃음)   여: (웃음) 이게 다 어디서 비롯된지 아세요? 바로 중국문화속의 도필문화(  刀笔文化 )에서 기인된 거예요!   김: "도필문화"라면 필로 인신공격을 하는건가요?   여: 맞아요. "도필문화"는 또한 공간(攻奸)문화,비방문화, 참부(谗父)문화, 주심(诛心)문화, 비수(匕首)문화,정인(整人)문화라고도 칭할수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만하지요. 이런 문화는 전통적으로 고대로부터 형성됐는데, 근대에 와서 크게 대성합니다.     "도필문화의 요람은 근대 상해에서 출판편집된 잡지 신문이지요. 이로부터 개방된 소수 도시나 반 개방도시에 전파되였습니다. 도필이 문화로 될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의 논리를 구성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논리는 인간을 휘말려 들일 수 있어요.   첫째는 진공으로 정의를 자칭하는 겁니다. 무릇 도필은 자칭 정의( 正义 )라하고, "정의를 위해 진공한다"고 부르짖지만, 강도적 논리입니다. "너를 강탈하는데는 니가 강탈당한 자원이 구비됐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너는 강탈을 당해야 한다."   내가 장기간 관찰한데 의하면, 한 인간이 인신공격을 당했다면 평생 뒤집어 쓰게 되며 자신의 필생의 저주가 됩니다.   그리고 허위로 진공하고, 날조도 불사합니다. 도필문화가 사람들에게 용감한 인상을 주지만 큰 위험성은 없거든요. 중국 현재 상황하에서 "명예훼손침해"로 소송당했다 해도 인치사회에서 법적으로 가해자가 상당히 안전해요.   여하튼 도필문화는 중국문화의 현대적 재난입니다.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이 현저하고 잘 살게 되였지만, 사회문화풍기와 문화건설은 우려를 자아냅니다.   여기엔 절반은 "도필문화"와 관계있어요. 문명이란, 이러한 도필문화, 폭격 악투에서 해탈 되는 것입니다.   김: 사실 여선생님은 중국 "도필문화"의 큰 패해자이지요. 저도 조선족 100년사상 민족사회내부에서 가장 큰 "도필문화"의 피해자 입니다. 여선생님이 한문화권속에서의 큰 피해자이 듯이, 전 조선족문화안에서 가강 큰 피해자로서, 그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습니다.(웃음)   여: 내가 아는 김문학선생은 당대 조선족이 배출한 국제적 시야와 독립적 사고를 갖춘 초고의 기재(奇才)입니다. 그런 기재인만큼 "도필문화"의 공격은 받기 마련이지요.   김: (웃음)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가해자에게 한편 감사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나를 늘 의식하고 살고 있으니까 이런 마이너스 팬도 팬이 아닙니까?   18년전 히로시아에서 대담할 때 선생님은 사람이 유명해지면 공격을 받기 마련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저에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10. "천리마는 발목의 진사를 아니 싰는다"   여: (웃음) 많은 사람들이 인신공격을 대처하는 "호신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내 비결은 바로 "천리마가 달리는데 발목에 묻은 진사를 아니 싰는다"( 马行千里,不洗尘沙 )이예요.       이건 또한 선배로서 후배에 향한 조언이기도 합니다.   1.무함에 대해 절대로 반박, 해석, 권고하거나 거들떠 보지 말기. 일단 대응하면 상대가 반은 이긴 것이니까요.   2. 무함자와 대화, 화해 할 생각 말고 방관자의 동정, 연민을 살 생각 절대 마시길. 그런데 신경쓰면서 생명의 가치를 폄훼시킬 필요 없어요.   3. 만일 무함이 당신에게 손해를 주었다 해도 그냥 그대로 접수하기. 무함은 바로 당신의 "인생청결제"이기도 합니다.   4. 무함을 조우했다하여 절대로 자신의 창조적 활동을 멈추지 말것. 더구나 자신의 일이 무의식중 무함자에 대한 대꾸나 반박으로 되지말 것.   5. 그림자 없는 고층빌딩은 아직 채 짓지 못한 것이요. 등나무가 휘감지 않은 거목은 아직 기상이 모자란 거다. 이런 기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6. 무함을 받은 사람은 "해를 보배로 전화(化害为宝)”시키며, 내심속에 계율을 세워야 합니다. 일테면 필생에 선량에 대해 공격하지 않고, 미지에 대해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 과연, 구절마다 선생님의 실제적 체험속에서 걸러낸 대응법의 "좌우명"같은 말씀입니다.   저도 기실은 저를 십여년동안 무함, 공격하는 자에게 한 번도 곁눈판적 없어요. "만경창파를 가르는 바다의 고래가 언제 개울 물의 미꾸라지에 곁눈 판적있나?" 이게 저의 대응 방법입니다.   선생님, 한때 중국 사회와 언론계, 문화계에서 떠들썩 했던 여선생님의 문화대혁명시기 집필그룹 석일가(石一歌 )의 성원이었다는 비판, 일명 "석일가사건"에 대해 그 진상을 알고 싶습니다.           11. 석일가( 石一歌 )사건의 진상   여: (웃음)상세히 말하자면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해서 말씀드릴께요. 내가 쓴 《문공(门孔)》이란 책에 전문 이란 글이 있어요. 다음 번 그 책을 한 권 드릴꺼니까 한번 읽어보시면 알게 될겁니다.   1990년 12월 내가 동남아시아 고대문명 유적지를 답사할 때, 북경대학 학생 여걸( 余杰 )이 북경에서 "여추우, 당신은 대 참회를 안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내가 문혁시기 상해의 석일가(石一歌 )란 글쓰기 단체에 가담하여 수십편 정치문제가 있는 글을 발표했기 때문에 "문혁잔여" "문화망나니"라고 공격했어요.   김: 네, 그렇군요.  저도 그의 책을 읽은 적 있어요. 신예비평가, 수필가로서 대학가에서 이름이 나있었지요.   여: 그때 난 내일이 바빠서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가, 2000년 1월 네팔 경유하여 사천에 들어와서 한 기자한테 부탁하여 여걸씨한테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뒤 그 기자가 편지를 공개해 버렸네요. 나는 가벼운 심정으로 혈기왕성한 여걸에게 루머를 믿지 말고 진심을 알고 글을 써야 하며, 내 자신도 문혁시기 조난 당했던 일을 밝히면서 그 "석일가"의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김: 그렇군요. 문혁, 경험자가 아닌 70년대생 여걸이 선생님을 전문 연구한 적은 없으니, 일시 만용으로 그럴수도 있겠네요.   여: 1971년 10월 10일 주은래 총리의 지시로 상해에서 로신연구를 목적으로한 《로신전>》편찬소조와 각 대학에서 추천한 성원으로 구성된 “석일가(石一歌 )”글쓰기 소조가 탄생됐어요.   나는 《로신전》편찬소조에 가입했다가 중퇴했습니다."석일가"는 복단대학, 상해사범대 등 교원으로 구성된 교재편찬소조의 필명이었거든요.     김: 당시 선생님은 어떤 글을 쓰셨습니까?   여: 나는《새로 발견된 노신의 일문(佚文)을 읽기》 와 《호적전》의 첫머리만 썼습니다. 다 내 이름 "여추우"석자로 발표했는데 전혀 "정치문제"가 없지요(웃음)   여걸씨가 내게 쓴 사죄문을 공포하고 자신이 문혁식으로 현재의 지식인을 공격했다고 사죄하고 나의 관용한 아량에 탄복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뒤 무슨 이유인지 여걸이 또 나를 비난하고 고원청(古远清) ,손광선(孙光萱),여개위(余开伟)  등이 나름 집중포격했습니다. 그 중에 친구문인 사엽신도 들어있었어요.   그러나 난 한마디도 반격도, 변명도 안했어요! 그 땐 전국의 공공지식인들도 누구 하나 나를 위해 변명해 주는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 다수도 이 집중표격전에 가담하였으니, 이게 바로 중국의 일부 "공공지식인"의 생존지도(生存之道)이니까요.   김: 선생님이 쓰신 공개현상문(悬赏文)이 재미있던데요(웃음)   여: 결국 내가 한가지 방안을 고안해냈지요. 신문에다 당당히 "현상"문을 발표했어요.     "나를 공격하는 자 중에 증거를 내놓아, 내가 그때 “석일가”란 이름으로 문장 한편, 한 단락, 한 구절, 한 줄이라도 그대들이 비탄한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을 표명만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자신의 일년 수입, 인세를 지불할 것이며, 또한 그 증거들을 전국 매체에다 전부 공개 발표하겠습니다." 동시에 나는 이 "현상"을 처리하는 변호사의 성명까지 공개했어요.   이 "현상"책은 "석일가"성원에 해를 주지 않고, 공격자들도 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위해 난 정말 고심했답니다.(웃음)   12. 거목이 바람을 부른다.   김: 그러네요(웃음) 정말 많은 곤혹을 치르셨습니다.   여: 그 뒤 "석일가"사건이 종연됐고 그 누가 한마디 대꾸도 없었답니다.(웃음)   김: 무언의 사실은 소리높은 웅변보다 수백배 유력하지요! 저도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격자에게 "공로상"상패를 드린다고 공개 했어요. 물론 농담으로 한번 가볍게 웃겨본 것이지요(웃음)   여: 이제는 별로 나를 공개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자가 없습니다.물론 뒤에서 쉬쉬 하겠지만 , 아마 "여추우사건"은 종말됐나봐요(웃음)   김: 거목이 바람을 부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웃음)   미국의 예일대학 법학원의 로도(鲁淘)선생이 전문 이런말을 했어요. "(여추우사건)은 이대로 결속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집중적으로 중국의 공인 명예권, 인신권의 법적보호가 극도로 박약함을 노정시겼다. 이 사건의 수많은 참여자, 그들의 문장을 발표해준 신문잡지, 출판사도 포괄하여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모두 형사죄책을 져야 한다. 어떤 자는 매우 엄중한바 일테면 그 고원청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비교적 전면적인 반면교재로서 후세들에게 중국 당대 사법사의 매체사연구의 분석, 해주를 제공해준다.”   자, 그럼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의 가족얘기, 행복한 가정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사모님(16세연하) 마란(马兰)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황매극(黄梅戏)명배우고, 선생님과의 금슬이 좋기로 "잉꼬부부"로 소문났잖습니까?       여추우 부부(중간)와 김문학 부부(좌우)   13. 잉꼬부부   여: 김선생도 아시다 시피, 마란(1963년생)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황매극 배우지요. 18살에 홍콩에서 유명해지고 20살에 전국인민대표로 선출되고 신문매스컴에서 "사랑하는 배우" 전국앙케트조사중 번마다 1위를 차지했어요.   김: 사진에서도 보았지만, 오늘 실제로 만나보고 나니 미인이셔서 놀랐습니다. 두분은 남재여모(男才女貌))의 본보기가 아닐까요!   여: 그런 거대한 명성을 자랑하는 마란이 내게 경탄을 자아내게한 것은 우선 뛰여난 배우로서의 연기력이었어요. 내가 상해서 처음 그녀의 연극을 보았을때 느꼈지요. 나의 《예술창조공정》이란 책이 우리들의 인연을 맺어준 셈입니다.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예술 전문가의 말에 마란이 이 책을 읽고 나와 만나자 했습니다.   그녀의 연극을 보고 초대면 하게 되었고, 서로 상대의 인격, 재능에 매료되였습니다.   어느날 내가 그녀에게 "내 생각에 마란은 내 아내로 되는게 적합할 것 같아"고 말하자 그녀도 즉석에서 "내 생각에도 당신이 내 남편이 되는 게 좋다고 느껴요!"하고 대답했지요 .(웃음) 이게 프로포즈인 셈이지요.   김: (웃음) 간결한 프로포즈가 멋있네요!   여: 그녀는 명예, 성취, 지위를 아랑곳 않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어요. 그러나 한가지 용서하지 않는 건 인간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자, 아첨하여 득세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상견한만( 相见恨晚 )하게 느낀 건, 마란의 무사(无私)한 성품이었답니다. 무사함은 그녀의 본능인 것 같았어요. 이렇게 첫번 째 혼인에서 실패한 나에게 정말 지기를 찾게 했어요.   늘 기자의 인터뷰에서 "두분은 누가 먼저 따랐나요?"하고 물으면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해요. "그건 필요없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내게 명성이 따른 만큼 폄훼, 비방, 중상하는 자도 수 많이 따랐지요. 번 마다 마란이 위안해주고 나를 격려해 주었어요. 내가 마란에게 의존하는 의존도는 정말 높아요.    내 생활의 전부가 원고지, 여행답사, 마란 이 3자로 구성돼있지요.   김: 선생님은 휴대폰도 없으시고, 메일도 하지 않으시니 외계와의 연락은 부인이 맡으시지요.   여: 마란에게 의존하는 게 바로 일절 대외 연락은 그녀가 맡아서 하는거지요. 내게 있어서 그녀가 없으면 외계가 없지요. 이런 일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 못하겠다는데, 내 이유는 너무 간단하고 충분해요. 마치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편벽하고 고요한 작은 섬을 선택하여 사는데, 이따금 작은 배가 외부에서 음식물을 날라다 주면 되니까요. 이 하나만으로 족해요. 딴건 필요 없다니까요.(웃음)   (계속)
219    왜 중국 국민의 궐기를 이뤄야 하나? [진휘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054  추천:33  2018-11-11
(문화대담) 왜 중국 국민의 궐기를 이뤄야 하나? 진휘(秦晖)+ 김문학   들어가면서     진휘(秦晖)는 당대중국사상계의 대표적 인물이며 “당대 최대의 사상가”로 꼽히는 지성계의 기수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청화대학 인문사회학원의 교수로 있으며 역사학자, 경제사학자로서 “공공지식인”으로 지성계와 오피니언계에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진휘교수를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연줄이 닿지 않다가 인민대학 장명(张鸣)교수의 알선으로 예상밖으로 쉽게 연락이 되었다.   우리 일행이 청화대학 인근의 교수주택가에 있는 진교수의 자택을 방문한것은 녹음이 우거진 6월초의 어느 날 이었다. 자택이자 서재이기도 한 진휘의 집은 그야말로 집안이 책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손님 접대용 소파와 작은 탁상을 제외하고 그야말로 책이 산더미였다. 금방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진교수는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역시 저명한 동유럽사연구전문가로 소문난 부인 김안(金雁)교수는 아직 출근중이어서 집에 안 계셨다.   우리는 진교수가 따라 주는 녹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진교수는 연세보다 젊어 보이는 우렁찬 목소리였으며  유머적 센스도 이만저만이 아닌 유연한 학자적 기품이 있었다.   오른 눈이 실명하여  왼 눈으로만 독서하고 글 쓰고 살아간다고 직백한다. “그러나 맞은 켠에서 타인이 볼때는 왼쪽눈이 안질이 있는 거로 보이거든요. 오른쪽 눈은 성하고  그러니 나를 오른눈으로만 보는 우파지식인으로 인정하는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하고 대답하면서 나도 같이 웃었다. “당대 중국의 최대의 사상가” “종합적인 지식인”으로 불리우는 진휘교수. 그는 중국에 관해 어떤 사상과 견해를 지니고 있을까?    왜  “공동적 최저라인”인가?   김: 중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선생님은 역사학, 사회학,경제학,법학 등 여러 영역에 걸쳐서 중국현실문화에 관하여 연구와 발언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사상계, 이론계, 학술계 그리고 정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저작 «共同的底线» 을 잘 읽고 많은 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책에서 충격적인 말을 했어요. “우리의 공동적 바럼라인(底线)은, 좌우각파가 제각기 견지하는 “공평”과 “효율”의 절충도 아니며, 또 “넘치는 자유”와 “넘치는 복지"사이에 “자유방임도 아니고 복지국가도 아닌”  제3의 길을 가야 한다. 즉 “최저한의 자유와 사회보장을 획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고 갈파했습니다. 과연 현명한 사상기법이라고 보는데요.   진: 감사합니다. 이건 내가 2003년이전에 발표한 글들을 묶은 책인데 지금 와 봐도 여전히 효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살고있고 모택동시기보다는 큰 변화를 가져 왔지만 여전히, 자유권리와 사회보장(복지)이 제한성이 있는 결함을 노정하고 있는건 어쩔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 중대한 사상(事象)이 또한 현 체제하에서 어느 정도로 해결하는가가 우리나라의 발전에 관계되는 일이지요. 즉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는  자유의 폭을 넓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본을 늘리는 일입니다. 공민의 권리로 권세자의 권리 남용을 제지시키고 국민의 복지를 경제적으로 보장하게끔 하는것이 기본적인 “공동적 최저라인”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건 현재 중국의 국정에 맞는것이지요. 우리가 불평등하면서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서 국가의 권력이 지대하지만 책임이 적은 체제하에 살고 있는 이게 중국의 실제적 문제입니다. 중국 체제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이런 실정을 잘 알아야 우리가 공민의 권리와 복지를 추구하고 선진국같은 수준에 도달할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이는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공동적 체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는 포플러즘(民粹主义)과 전제주의를 반대하며, 좌우가 하나의 공동라인에서 서야 한다는 얘깁니다.    자벌레(尺蠖)효응   김:그러니 중국의 좌우가치관 문제나 사유화,국유화 등도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야 겠네요?   진:그래요.사유화,국유화 문제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복잡합니다.어떤 네티즌의 말을 빌면,국유자산은 본래 사유화 하지 못하지만,모두가 동의하면 사유화로 전환시킬수 있고,사유재산도 국유화도 안되지만,소유자가 동의하면 될수도 있는겁니다.이를테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자선공익으로 사유재산을 털어 내놓을수 있지요.이런걸 가지고 누구도 사유재산 침범이라 탓하지 않습니다.자원한거니까요.    그러나 중국에서는 웃기는게 이런 두개 논리가 다 꺼꾸로 된거예요.사유재산을 국유화 할수 있는데 소유자의 동의가 필요없이 국가에서 앗을수 있다는 겁니다.민가주택을 강제로 허물어 버리는것 같이 말입니다.국유재산을 사유로 변함에도 서민들의 찬동이 필요없이 쉽게 자기주머니에 넣을수 있지요.(웃음)   김:과연 그렇네요.(웃음)   진:내가 새로운 명사를 하나 창조해냈는데 “자벌레 효응”바로 이 뜻이예요.일반적으로 중국인에게 “좌”적 정책이라면 보수정책이고,”우”적 정책은 이른바 개방정책 이지요.그런데 중국의 개방이나 보수나 다 소수집안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가는거예요.마치 자벌레처럼 한걸음 수축하고 한걸음 신장하면서 하나의 고정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선진국과는 달리 중국 체제하에서 좌파냐 우파냐 하는 문제보다는 여기서 제일 실직적인 문제는 좌파도,우파도 다 좋지만,그 차이점은 영합파(乖派)냐 불영합파(不乖派)입니다.만약 영합파라면 좌파는 권력을 고취하고 권력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아도 되고 영합파중의 우파라면 책임을 문책할순 있으나 권력을 제한할순 없어요.이런 경우,정부는 둘다 좋아하지요.   김:불영합파라면 어떠하지요?   진:불영합파라면 좌우 양측에서 압력을 가해도 괜찮지요.좌파라면 문책을 할수 있고 서민들을 위해 질 책임을 추궁할수 있습니다.우파라면 권력제한을 요구 할수있지요.내 생각에 헌정으로 통하는 길은 이 두가지가 다 필유합니다.한편 정부의 권력을 제한시키고,또 한편으로 그의 책임을 추궁하는거지요.   김:문제는 중국 지식인의 좌우 양파가 다 자신의 사명을 할수 있을까요?   진:중국의 “자벌레 효응”으로 인해 전제체제하의 좌우가 다 체제에 발라 맞추는 역할만 하는데,좌파는 체제의 권력확대에 조력하고 우파는 체제의 책임회피에 도움을 줍니다.서양은 이와 정반대지요   “마이너스복지국가”로서의 중국   김:진선생은 최근에 중국을 “마이너스복지국가(负福利国家)”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해석 해 주시겠습니까?   진:아마 서양선진국,복지가 잘된 나라들에서는 미국,일본,유럽에서는 이런 개념이 없을겁니다.통상 복지국가는 가능한 평등을 추구합니다.시장에서 최초의 분배가 현저하게 공평성을 상실하면 이를테면 징세를 복지에 돌리는 등 2차분재로 상대적 평균화를 시도합니다.    복지정책이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킬경우 그것을 나는”마이너스복지”라 칭합니다.이런 시스템은 분배에 플러스 조절을 할 대신 오히려 마이너스 조절이 되버립니다.   김:그럼 결국 부자는 더 부자로 되고 빈곤자는 더 빈곤자로 되겠군요?   진:그래요!빈부의 차이가 더 넓어지고 강약의 차이가 더 커집니다.지금 중국이야 말로 “마이너스복지국가”입니다.나는 일관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적극적인 과정이라 보고 있고,예전보다 복지도 진보했다고 보고있어요.1978년 이전보다 어느정도 진보는 했지만 여전히 제로복지레벨에 달하지 못했다고 봅니다.지금 중국에서 “자유방임”이냐,”복지국가지향”이냐는 논쟁도 일고 있지만,그런 문제자체 존재하지 않으니 황당무계한 논쟁이지요.(웃음)   김:”플러스복지”가 요망 되겠네요?   진:그렇지요!이런 무용한 논쟁보다는 좀더 개혁을 통해 제로복지를 플러스복지(正福利)로 끌어올려야만 비로서 고복지냐 저복지냐,자유방임이냐 복지국가냐 하고 의논 할수있는 차원이 마련되지요.   중국모식(中国模式)은 무엇인가?   김:”중국모식”이란 용어가 세계적으로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데,진선생님은 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진:”중국모식”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습니다.이 모식을 정의하면 이렇지요.중국은 저인권(低人权)조건하,그리고 글로벌 경제배경하에서 서양과 유니크한 연결을 이루고 있는것입니다.내 말로 얘기하면,중국식”자벌레 효응”과 서양식의 꺼꾸로 된 자벌레 효응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것이지요.    중국의 궐기가 일종 18세기적 자본주의로 21세기형 자본주의를 전승하는 방식으로 실천한다면 서양 내지 세계에 대해서도 별 좋은 일은 아닐겁니다.그럼 중국 자신에 대해서도 좋겠나요?난 우리 현재의 경쟁력은 대부분 우리의 저인권우세로 발전시키고 실현시켰다고 봐요.    이 저인권우세의 전제는 무엇일까요?바로 서양세계가 향수하는 권리가 우리보다 높은것이고,우리에겐 기술적우세도 없습니다.    지금 글로벌배경하에서 우리가 기술,창신은 사올수 있지만 서양에서 우리같은 혈한(血汗)공장은 배우지 못할것 뻔합니다.그러니 우리는 그리 조급할 필요도 없어요.왜나면 우리는 실제로 또 다른 양상을 볼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가 중국을 개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세계가 중국을 개변시킨다구요?   진:네.오늘날 중국의 개혁이 취득한 무수한 성취는 GDP를 제외하고는 홀시할수 없는건 우리의 규칙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간단히 말해서,자유도나,복지면에서나 총적인 비교를 해보면 우리가 과거에 비해 큰 진보를 이루었단 것이예요.   김:그러나 저인권우세는 좀 아닌것 같은데요.   진:그래요.저인권우세는 횡적인비교,즉 서양과 비교하여 얘기한건데,이 비교도 관과해서는 안되지요.목하 상황을 글로벌경쟁의 배경아래서 우리가 여기에 궤도를 맞추지 않으면,그쪽이 이쪽으로 맞추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하여,서양의 노동조합(工会)은 예전에는 종래로 중국의 노동자권리를 관심하지 않았어요,미국을 보더라고 20세기 초두에 화인배척 열조를 일으켰는데 이건 자본가가 아니라 미국 노동조합이 한거예요.지금 미국 노동조합은 중국인이 미국 가는것을 반대 할수있으나 미국의 자본이 중국으로 넘어오는 길은 막을수 없습니다.그러니 지금 미국의 노동조합이 중국 노동자의 인권을 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나면 중국의 노동자 권리가 없으면 미국의 노동자도 재차권리를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이게 바로 글로벌이 조성한 현실이지요.   5.“중국기적” 있기나 하는가?   김: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국내 대부분 학자들이 해석하는 “중국모식”은 기본상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게 많은데 진선생님은 중국을 객관인지의 상대로 포착하여 해석한것이 돋보입니다.    “중국모식”은 저도 존재한다고 보면서 좀 더 역사적 시각에서 관찰 분석하는것이 좋다고 생각이 듭니다.그럼 다음 화제로 ”중국의 기적”에 대해서 여쭈어 볼까 합니다.”중국모델”과 셋트로 거론되는 말에 “중국기적” 이란게 있는데 이점에 대해서 말씀 해주십시오.   진:중국의 경제성장에 관하여 “중국붕괴론”이 있는가 하면 “중국성공론”과 ”중국기적론”이 난무하고 있어요.나는 이 3자에 대하여 모두 엄중한 편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중국의 경제발전이 지속적 성장이 글로벌시대 대응이 잘 된건 사실이지만,”붕괴론”은 사실에 어긋납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면 내 지론대로라면 중국은 ”저인권우세”로 4대요소(인력,토지,자금,비재생자원)가격을 압축시킴으로써  “교역성분”을 누르는 식으로 민주,참여,사상,신앙,공정을 억제하면서 물욕자극으로 인간의 에네르기를 신기루 같은 단순적 부유충동에 집중시키는 모식(양식)이었습니다.   김:그러니까 체제,사상,신앙,공정 등 인적인 정신적인 개혁을 방치하고 순전히 물질부유만 추구하는 저단계 발전이겠군요!   진:그렇지요.이렇게 함으로써 자유시장국가든 복지국가든 다 놀라운 경쟁력을 분출하게끔 했는데 “점진”적이든 “쇼크요법(休克疗法)적인 민주전형(转型)국가들이 다 놀라게끔 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서양식의 자유,결사,민주가 결핍하지만 “저인권우세”는 확실히 글로벌속의 “중국적 경쟁”을 파죽지세로 이끌었고 복지국가들로 하여금 복지수준을 하강시키게 하고 자유국가로 하여금 무역보루를 재건하고 발전도상, 낙후국가로 하여금 자금을 흡수하여 자금을 획득하는 등 더욱 큰 곤란에 직면하게끔 했지요.    흥미로운것은 지금 이런것을 두고 “중국기적” “중국성공”으로 경제학자들이 고취하고 있지요.중국경제의 비자유색채를 좌파가 흠상하고 비복지색채를 우파가 흠상하고 있으며 동시에 빠른속도로 후진국에 흠모를 자아내고 있어요.    아이러니하게 발전도상국과 발달국가에 대해 엄중한 도전을 거는 중국이 각 방면의 칭찬을 받는겁니다.(웃음)   김:그러니까.중국의”우세”란 결국 시장의 “자유”에도 복지국가적”복지”에 있는것이 아니라,그 제도적 “철밥통”에 있는 것이군요.   6.중국공민이 희망하는것은...   진:그렇지만 난 전체체제가 경제성장을 방해하는게 아니라 사실상 경제성장을 ”자극”한다고 봅니다.그러니 “고인권”국가의 산업이 ”저인권”국가체제의 지역으로 이전하고 경제이익을 얻게 됩니다.그런데 그것은 경제수준의 정치발전을 의미하는 동시에 체제상의 차성피쇠(此盛彼衰)를 의미하며,지어는 “열화가 양화를 구축하는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김:그러니까 프랑시스 후쿠야마가 제기한 자유민주의 승리와 ”역사의 종연”이 아니라,여기서는 민주복지제도,인류평등의 소망이 실패했다는것도 의미 할수 있겠네요.   진:그렇습니다.중국이 전제하에서 기형적인 효율로써 “저인권우세”로 글로벌 자금을 흡취하여 상품수출을 통한 경이로운 고액 “쌍순차(双顺差)는 타국을 괴롭 힐 뿐만아니라,일반 중국인에게 얼마만한 이익을 갖다 줄까요?초저렴한 노동력,땅,자원을 내놓아 효과적인 수입요구를 형성시키지 못하고 다만 거액의 딸러만 바꿔올뿐입니다.중국인은 미국이 돈으로 우리의 피땀을 끌어 모았다고 원망하고 미국인은 중국의 염가가 자신들의 밥통을 짓부셨다고 원망하지요.그런데 일단 미국 딸러가 내려가면 미국은 끝나는거고 중국인의 피땀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지요.(웃음)   김:이런 상황을 개변시키는게 순리겠습니다.   진:그래요,이런 상황을 개변시키고자 하는건 타국인 보다도 우리 중국국민이 더 희망하는 일입니다.중국 인민페가가 오른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 개변은 어려워요.오직 인권을 개선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수호해야만 이 상황을 개변시킬수 있지요.시장경제 글로벌을 이루었을 무렵에 인권의 글로벌화가 결여한다면 이 글로벌은 오히려 더욱 큰 페단과 재난을 가져 올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저인권우세”를 제거하면,중국은 원시누적방식을 유지 할수 없으며,관상(官商)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압제하여 투자를 흡수하여 염가상품을 수출하는것으로 ”쌍순차”적 경쟁력을 확대시킴을 제지시킬수 있어요.   7.국민의 궐기를 이룩해야   김:현재 중국 관민이 거국일치로 “중국의 궐기”를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대채 어떤,무엇으로 궐기를 이루어야 하는지요?   진:08년에《대국궐기》시리즈 TV기록영화가 예전의《河殇》만큼이나 히트했지요.여기에 대해서도 나는 여러번 글을 써서 의견을 발표했는데,문제는 우리 중국이 김선생말씀처럼 무엇으로,어떤 방식으로 궐기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궐기를 성취하려면 다른 모식으로 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이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우리의 경제적 GDP가 일본을 초월해 미국 버금의 제2경제대국으로 성장한건 좋지만,인구평군GDP는 아직 일본보다 아득히 후진이에요.그런데 인평군GDP가 껑충 뛰어 올라서 미국,일본과 같고,심지어는 군사상에서 상대방을 전승했다 한들 또 어쩌겠나요?    당년에 짜리러시아가 나폴레옹을 전승하고 러시아군이 파리를 점령했어요.그러나 러시아군중의 청년 엘리트들이 파리에서 보니 이건 아니란거에요! 프랑스인들은 매우 존엄있게 살고 있는데 우리 러시아인은 얼마나 존엄없이 살고 있는가? 우리 동포를 인간취급이나 했냐 이거죠.그리하여 승자가 패자를 흠모하게 된 나머지 그들이 러시아에 귀국한뒤 러시아 변혁과 자유의 길 12월당인을 창설하게 되지요.   김:(웃음)어쩐지 현재 중국의 경우와 흡사한데가 있어 보이네요.상대보다 우리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우린 상대를 따라배울수 밖에 없는...   진:우리가 현재 궐기하려면 두말 할 나위없이 우선 서양의 복지나 자유를 다 따라 배워야 합니다.정치적 자유는 물론 경제적 자유도 아직 대폭 증강해야 하고 독점을 반대하고 국진민퇴(国进民退)의 양식을 개변시켜야 하지요.국민의 궐기가 이루어지는지 급선무이라는 얘깁니다.국민,공민의 진정한 궐기를.   김: 공민사회가 형성되고 국민이 국민으로서의 궐기를 스스로 세우고 지킬수 있는 이런 공민의 사회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진:그래요 ,국민의 궐기없이 국가의 궐기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8.”정신귀족”보다 귀족정신이 필요한 이유   김:근년래 중국에서는 가난에서 해탈되어 나오자 “고귀” ”호화” ”사치 ””부호”등 거리의 광고 패말에서 보여주듯이,항간에서 “귀족”을 과시하려는 현상이 현저합니다.그러나 실속을 보면 겉치례에 불과하며 진정한 “귀족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진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진:좋은 화제를 꺼냈습니다.지금 중국에서는 “고귀한자가 가장 비천하다”는 모택동의 말은 무시되고 도처에서 귀족학교요,귀족클럽이요,”귀족”이 범람하고 있어요.    근데 문제는 자칭 고귀하다고 떠벌리는 국내 귀족의 실속은 어떠한가? 그 실질을 파고 보면 알수 있습니다.”귀족”이란 개념은 뭡니까? ”귀족(aristocrats)”은 고대 그리스에서 “최우수(aristos)”란 단어에서 파생된건데,그 뜻은 현인,대덕(大德)이란거지요.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귀족을 고상한 도덕,고매한 품격과 부유존귀를 갖춘 인간으로 정의했습니다.그러나 부유존귀하지만 도덕이 저열한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귀족이라 하지 않았습니다.대신 그들은 과두(寡头·oligarchs)로 불렀지요.   김:고귀,귀족이란 재물적 부유자이기 보다는 우선 정신력,품위적인 귀족을 가리키지요.   진:그래요.귀족이 고귀한것은 이들이 불행자를 돕고 사회부조리,불평등을 위해 항의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있어서,귀족과 과두는 준별되는데 전자는 사회의 정의를 수호하고 후자는 자기의 사리만 도모하는거지요.    사회불공평의 피해자가 항의를 하는건 당연지사이지요.그러나 피해자만 사회에 항의를 한다면 그건 약자의 소리로 큰 힘이 없을수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사회의 “귀족”이 불행한 약자를 위하여 납함할수 있어야만 사직(社稷)의 복이 되고 조민(兆民)의 경사가 되지요.   김:그렇습니다.인류문명사를 관찰해 보아도 교양과 품위를 갖춘 신사,귀족,현인들이 기득 이익의 담벼락을 뛰어넘어서 힘없는 백성서민을 위하여 통치배,기득권자들을 비판하고 질책하며 일종의 고귀한 정신을 과시했습니다.   진:귀족정신은 한 나라 민족의 귀감입니다.그러나 가증스러운것은 귀족인양 행세를 하는 그런 계층입니다.아Q와도 같은 존재지요.한 정상적 사회에서 아Q도 존재의 권리를 갖고,그러나 아Q들만 있으면 안되지요,특히 변혁시기에는,흔히 이런시대는 이익국면이 조정되는 시대라 공정이 제일 필요한 시대 입니다.그러므로 “정신귀족”보다 귀족정신이 필요하지요.우리 사회에 기득이익을 초월한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고귀한 품질을 갖춘 인간이 많이 육성되어야 합니다.물론 귀족정신은 귀족제도가 아니지요.   9.자유를 실천하기   김:진선생님의 연구영역이 학제적(学际的)이고 광범위하여 여러학문 영역에서 자신의 독특한 이론과 학설 내지,사상,사고를 현시하고 있는데.”실천자유(实践自由)” 즉 자유를 실천한다는 설법이 내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고로 보였습니다.진선생님의 사상은 독일 사회학자 denise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있는데,다른 국내의 자유주의 학자와는 다른데가 있다고 봅니다.    Denise가 제기한 ”공동체”개념은 사회군체주의의 핵심적인 개념인데,진선생님은 그중의 “소공동체”의 이해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개인주의에 대한 소공통체의 속박을 인정함과 아울러 공동체 내부의 멤버에 대해 보호하는 역할을 또 인정하고 있지요.진선생의 이런 견해는 사회군체주의의 색깔이 농후한데,라는 저작에서 진선생님은  자유주의사회를 실천하는 문제를 제시 했습니다.    중국에서 자유를 실천하는 사상은 현실적의의가 크다고 보는데 이점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2004년에 출간된 나의 저작 에서 나는 자유주의본신에 포용성과 제한된 도덕성,제한된 이성(理性)에서부터 자유주의 이념을 논증하려 했고 아울러 자유주의이념이 일반 대중에 대한 친화성(亲和性)이야기도 했어요.    나는 우선 Isaiah Berlin의 “네거티브한 자유”와 ”파지티브한 자유”에 대한 이해를 피력했는데,유행적인 의견은 흔히 “파지티브한 자유”와 복지국가와 연결하지만,나는 그것을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것”과 ”타인이 스스로 노예로 됨을 방지하는것”과 연결시켰습니다.   김:나도 동감입니다.저작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그의 “파지티브한 자유”는 “고급적 자아”와 ”저급적 자아”의 구별에 미치는데,실질상은 부권(父权)제도의 재현이지요.즉 다시 말하여 공동체가 개인생활에 대한 감독,발전적 지향의 감독이라 봅니다.   진:그렇지요.나는 이 두가지 자유와 달리 내 나름대로의 “제3의 자유”란 이론을 제기했습니다.쉽게 해석하면 비자유사회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이지요.자유란 공공물과 같은 바,선렬들이 건립한 자유사회의 좋은 점을 자기 혼자서 독차지 할수 없기 때문에 편승의 문제가 불가적으로 발생합니다.경제학 원리로 말하면 바로 “공지비극(公地悲剧)이지요.    이런 상황하에서 모두가 다만 자기자유만 보호하려 하고,”상호냉담”적인 “네거티브한 자유”에 만족 하는데 그치고 능동적으로 타인을 방조하여 노예에서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자유의 질서도 건립할수 없습니다.    비자유사회안의 인간들이 자유의 이상을 위하여 대공무사한 헌신정신이 필요하단걸 의미합니다.   김:그러니 진선생님의 의도는 “자유”를 말하기 보다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지요.입으로 부르짖는 자유가 아닌 실천하는 자유.진선생님의 이 이론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자유,적극적인 자유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떤것이 있습니까?   진:자유주의 실천에는 아래 세가지가 포괄됩니다.첫째,자신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노예로 되지 않는것). 둘째,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노예주로 되지 않는것), 셋째,타인사이의 강제를 반대 하는 것(노역제도가 존재하는 조건하에서) 이게 없으면 그냥 자유민이었지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10.우리에게 도덕위기가 존재한다   김:당대 유명한 역사가,사상가 고준(顾准)의 책 이름에 란 것이 있는데,자유를 위해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자유주의자의 선각자 모델은 보여주었습니다.중국이 자유주의를 입으로 외치는 자는 많지만 정작 자유를 실천하는 자는 너무 적은게 탈이지요.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요즘 중국인의 “도덕문제”가 클러즈업되고 있는데,이 점에 대한 진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진:좋은 화제입니다.현재 중국인의 최대의 문제중 하나가 “도덕위기”이지요.빈부차이가 엄중한것도 우리의 문제이지만,도덕위기가 너무 심각합니다.    도덕위기는 주로 일종의 최종라인이 없는 그런 위기를 말해요,알기 쉽게 말하면 비교적 고상한 도덕,이를테면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타인을 돕는 이런 걸 나는 자산(慈善)이라 하고,타인을 해치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을 얻는것은 강탈이라 하지요.한 사회는 강탈을 억제하고 평등교환을 진행하고 자선을 장려하는 이런 사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이런 겁탈에 대해 제지작용이 실효했고 고상한 도덕으로 사기위인(舍己为人)을 일종 강제적 규범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장려하기 보다는 강제하고 있으니 문제지요.   김:중국에서는 지금 기부로 핍박하는 핍견(逼捐)현상까지 심하다고 들었어요.   진:그래요.이를테면 어떤 상황하에서 늘 돈 있는 부자에게 기부금을 내라고 핍박하고 기부금이 적다면 많이 기부하라고 핍박합니다.사회적 자선사업이 저조인것도 문제이지만,억지로 기부금을 많이 기부하라고 강압하는것도 “자선”의 본의를 뒤엎은 것이지요.자선이란 그 자체는 일종의 애심으로 이뤄지는 건데,강압한다면 자선이 납세로 변질되고 마니까요!   김:그렇다면 일종 중국에서 등장하는 가렴잡세나 다름 없잖습니까.   진:그렇습니다.공민으로서 행해야 할 법적책임은 납세이지,강제적으로 가렴잡세를 내는게 아니라 봅니다.    결론적으로 도덕문제는 우선 도덕최종라인(底线)을 지키고 강탈하는것을 금지 해야 하며,가렴잡세 같은 기부를 핍박하는 일도 제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상한 도덕,이건 문제 없는데,개혁개방이래 우리는 줄곧 반유토피아를 호소했댔어요,무슨 유토피아를 작별해야 한다느니하지만,유토피아 본신은 재난을 가져오지 않아요! 유토피아란 일종의 이상향(理想国)으로서 이 고상한 이상향을 실현할수도 있고 실현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만일 실현 못했다해도 재난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요.   김:서양,이를테면 미국이 유토피아의 실험이 빈번했는데,공상적사회주의도 실험했지만 실패했다하여 미국에 재난을 초래한것도 아니었지요.   진:그래요.진정한 재난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강제하는 거지요.유토피아를 강제하지 않으면 재난을 조성하지 않습니다.반대로 실현못했다 하더라도 많은 정신적 도덕유산을 남겼다면 그건 좋은 것이지요.    강제가 가져오는건 정신적 곤혹이고 신앙이 상실될수도 있어요,신앙이 없으면 진실한 말을 할수 없게 되고,진실한 말을 못하는 데 어떻게 신앙이 있을수 있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무엇을 신앙한다 하지만 그건 가짜지요! 우리 사회 시장에 그렇게 많은 열악한 가짜 제품이 넘쳐 나는것이 다 도덕위기의 표징입니다.    이런 신앙위기,도덕위기를 극복하지 않는 한 사회나 국가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세계민족에서 존중 받을수 없습니다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화제는 많지만 다음 번 대담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것으로 맺겠습니다.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대담자 소개 진휘(秦晖).1953년생,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역사학자,경제사학자,농민연구자,평론가. 1981년 란주대학 석사 졸업,섬서사범대학을 걸쳐 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교수 주요저작으로《农村公社,改革与革命》《问题与争议》《共同的底线》《走出帝制》《南非之魂》《陕西通史》《田园诗与狂想曲》등 30여부가 있음.
218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사엽신 김문학] 댓글:  조회:3487  추천:45  2018-10-03
”33의 신사유”시리즈 대담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사엽신( 沙叶新)+김문학   사엽신( 沙叶新)     0.들어가면서       삶이란 아쉬움(유감)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만나고 싶은 사람과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나는 아쉬움, 회한 같은것이 그렇다.       내가 대륙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명사중에 사엽신(沙叶新 )선생이 그 중의 한 분이다. 서로 만나자고 수차례 별렀지만, 결국 전화에서 통화 몇 번으로 끝난 우리의 아쉬움은 과연 회한이 되여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2014년 봄 상해의 친구를 통해 작가 사엽신선생과 연줄이 닿았다. 우리는 전화를 통하여 서로의 정을 나누기도, 문화적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사엽신선생은 내가 80년대 일본 유학전부터 잡지를 통해 알고 있는 극작가, 수필가였다.       연극 《내가 만약 진짜라면》《진의 시장》《예수, 공자, 레농》등은 중국 문단과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 그는 《진짜 남자대장부를 찾아서》등이 영화, TV연속극으로 방영되면서 전국민의 마음을 진감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특히 내가 90년대 중반 그의 연극본 《예수, 공자, 레농》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오늘도 새롭기만하다.      반골정신, 기지로 번뜩이는 유머와 풍자, 그리고 많은 고정관념을 짓부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대륙의 일류 지식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재질은 물론, 진실을 말하는 지적 용사, 정의감으로 충만된 지식인의 양심적 본보기로 나는 사선생을 내심으로부터 숭경해왔다.      그런데 그의 암질환으로 수차례 수술과 입원, 통원을 거듭하면서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2018년 7월 26일 아침, 사선생은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못다 하신 일을 저 세상에 가셔서도 계속 하시리라 나는 믿고 싶다.      별세후, 장황한 추도회, 추모모임을 못하게끔 하시고, 그냥 일가 친족 8명으로 구성된 간단한 영결식으로 끝나게끔 자식들에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아들의 위챗을 보니 그렇게 간소하게 영결식을 차렸다고 한다.하늘나라로 가신길도 그렇게 사선생 다웠다.      이제 남은건 우리가 사선생의 유지를 이어 받아 어떻게 진실을 말하면서 정의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과제뿐인가 한다. 이 또한 모든 지식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지금 내곁에는 사선생의 사인이 박힌 저작이 남아있다. 요즘 그의 저작을 재다시 찾아 읽으면서 감회가 또한 새롭다.      쟁쟁한 철골(铁骨)의 문사 사엽신! 진실을 감히 말하고 권력과 고루한 관념과 맞서 저항한 코먼센스적인 정신은 우리의 귀감으로 남아 있을것이다.      불굴의 문사 사엽신, 그는 어떤 말을 남겼을까? 사성생에 대한 추모와 정을 안고 대담을 정리 해 본다. 이 대담은 2014년에서 2016년에 걸쳐 수차례의 전화대담을 간추려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1.당대 중국의 쉑스피어   김:서양문화의 쟝르로서 연극은 중국에서 뿌리박은지 약 100년이 좀 넘습니다. 연극 100년사에서 노사( 老舍),곽말약 등 거물이 나왔지만, 신시기(문혁이후)에 배출한 연극대가는 사선생과 고행건(高行健 )을 비롯한 극작가를 꼽을수 있습니다. 1980년 1월 당시의 현명한 지도자인 호요방은 선생님의 극본을 격찬하면서 “당대의 쉑스피어”라고 높이 평가했지요.   그럴만도 합니다. 선생님의 《진의 시장》은 중학교 교과서에 올랐고, 특히 그 걸작이라 불린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과연 중국인의 심금을 울린 메가톤급 문학미사일이었지요. 근데 그게 나중에 공연금지로 되고 그게 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잖습니까? 이 얘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사: 아마 《진의 시장》과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통해서 내가 전국적인 극작가로 선보인것 같습니다. 《진의 시장》은 유머스러운 진의 시장의 인간성을 표현했기에 정부로부터 “우수극본상”을 수상했지만,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반대로 불운했어요.(웃음)   1979년 상해에서 실지로 있은 청년 사기꾼이야기입니다. 이 사기꾼은 고위간부의 자제로 둔갑해서 교묘하게 사기를 쳤는데 이 소재로 내가 79년 여름에 연극대본을 창작했어요. 이건 특이한 연극이였어요. 문혁이후 최초로 간부의 특권을 폭로, 풍자한 연극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송가만 불러온 전통속에서 이런 신선한 풍자극이 나오니까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됐지요. 일단 상해에서 공연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공연이 파급되였는데, 치열한 평론이 벌어졌고 1981년에 상급으로부터 “공연금지”령을 받았습니다.   김: 자료를 보니까 호요방까지 이 쟁론에 뛰어들어, 사선생님을 긍정하셨습니다.   사: 그래요! 1980년 1월부터 2월까지 “극본창작좌담회”가 개최됐는데, 나의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첫머리로 토론이 전개됐습니다. 당시 화약냄새가 농후했는데, 2월 13일 호요방동지가 무려 6시간이나 장편 강화를 하셔서 작가에 대해 꼬깔모자를 씌우는 문혁식 작법을 금지하고 문예작품에 대해서도 예전같은 죄명을 덮어씌우지 않는다고 명언했습니다. 역시 현명한 호요방 동지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1984년에 중국작가협회 입회할 때, 일부 노년 우파세력의 극력적인 반대를 받았지만, 파금(巴金) 등 거물들의 추천으로 무사히 입회했고, 또 내가 입당할 때도 호요방동지의 “사동지는 입당조건에 부합되므로 입당해야 한다”는 친필추천으로 스무드하게 입당이 되였답니다.   김: 과연 호요방 총서기는 문혁이후 보기드문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명한 인물이 우리에겐 축복이지요, 2001년에 사실 저도 《조선족 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족 내부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문혁식의 중상과 비방을 받았어요! (웃음) 그러니 조선족의 의식은 중국 일반보다도 20년 낙후하다고 전 생각듭니다.   2.왜 시대의 양지(良知)가 필요하나? 사: 조선족 지식인에 그런 엉터리 지식인도 있나요?!(웃음) 그것도 문혁이 수십년이나 지난 지금에, 지식인이 정치 몽둥이를 휘두른다는건 문혁수준으로 회귀한거를 말하지요. 당정 간부가 그런 짓을 했다면 몰라도 지식인이 그런 우둔한 짓을 한다는건 시대의 비극이고 후퇴지요!   김: 그러게요! 그래서 전 그런 수준이하의 인간들을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자중균( 资中筠)선생도 사고차원이 다른 인간과는 아예 상종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사: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 보다는 그 시간으로 글쓰고 독서하는 일에 몰두하는게 퍽 현명한 처사지요.   김: 네, 《만약 내가 진짜라면》의 극본을 지금 다시 읽어 보았는데요. 여전히 지금의 시대에도 시효가 떨어지지 않았단 느낌입니다. 사기꾼의 행각을 통해 사기꾼에 편의를 도모해준 중국의 관료주의, 부패에 대해 79년에 이미 신랄한 비판, 풍자를 했네요.   사: 지금처럼 유행하는 “부패”란 단어는 안 썼지만, 내가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고관의 “특권”문제와 체제의 병폐에 대해서 풍자를 했어요. 물론 여전히 미숙한 점이 많지만, 난 지식인은 시대의 양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을 지니고 용감하게 문학예술을 영위해야 하는바, 이 용감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용감하게 광명을 구가하고 또 하나는 용감하게 시대의 폐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3.권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   김: 사선생님의 명언중에 “권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명구입니다. 아마 모든 비판정신과 독립품격이 있는 지식인, 작가라면 다 이 말씀에 공감할 겁니다.   사: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사람마다, 작가마다 답이 틀릴 겁니다. 명리, 금전 또는 교만으로 승급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그냥 낙으로, 또는 정서배설을 위해 글쓰는 자도 있을거지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젋었을 때는 중국 전통문예관의 영향으로 문장경국지대업(文章经国之大业 )이란 “숭고”한 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시기는 모택동의 문예사상인 정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도에서 모택동의 추수기의를 노래한 연극을 쓰기도 했어요.   그러나 개혁개방후, 나는 완전히 탈태환골을 했어요. 우리는 현재 모택동시기를 탈출하여 다원적인 전민주사회( 前民主社会)에서 살고 있지요.   문학예술이 정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시기는 지났고 현재는 권력에 대한 조롱, 풍자와 비판할 수있는 시대이지요.   물론 내가 여기서 얘기하는 권력이란 국가권력을 독점한 독재, 전제권력입니다. 중국은 바야흐로 문혁과 같은 전제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전제주의사회에 들어 섰으며, 글쓰기 역시 권력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김: 그렇지요! 정치와 권력에 곡학아세하는 지식인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인간이나 글쓰기는 만인이 침뱉는 존재로 된지도 오라지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권력의 폭력같은 지배에 맞서서 저항하는 인간이야 말로 진짜 인간이고 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 그래요. 권력이란 원체 부패, 우매, 잔인등으로 직결돼 있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럴진대, 한 작가가 권력을 위해 글쓰기를 한다면 그건 영낙없이 부패, 우매, 잔인을 위해 자원적으로 봉사하는거지요. 만약, 핍박에 못이겨 그렇게 했다면 리해할순 있지만, 자각적으로 그랬다면 그건 원흉을 방조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김: 지식인가운데도 아까 말씀 드렸지만 자각적으로 정치 몽둥이로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을 잡으려 하는건 더 추악하지요!   사: 그럼요! 그런 자가 더 잔인하고 우매하고 부패한 “권력의존”의 추악한 인간입니다. 중국에 이런 자가 너무 많아요. 문화대혁명 때 그런 지식인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권력에 아부하여 대신 사람잡고 밀고하고 온갖 추행을 맡아서 했잖습니까?   4.문혁전에 요문원을 질타한 청년   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해야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사선생님은 대학 졸업후인 1961년에 대좌파 문인으로 유명한 요문원( 姚文元)의 문장을 비탄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 때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사: 1957년에 화동사대 중문계에 입학하여 소설 둬편 써서 교내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더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1961년 대학 졸업후 상해 희극학원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 쓴 논문 《审美的鼻子如何伸向德彪西 - 和姚文元商榷》입니다.   그 때 당시 아직 ”4인방”이 형성되진 않았지만, 요문원은 지식계의 대좌파 인물이므로, 그와 맞서서 비판 한다는건 권세있는 유력자를 건드린 셈이 되지요.(웃음)   김: 대단하십니다. 젊은 나이에! (웃음) 두렵지 않았나요?   사: 두렵긴요! 학술적인 비판인데요 뭐, 그 뒤 문화대혁명중 요문원은 그야말로 청운직상(青云直上)으로 권세를 자랑했으니, 내가 그를 질타한 죄명도 갈수록 커졌지요. 날 보고 문화대혁명직전에 무산계급의 사령부를 포격했다는거예요.그때는 입이 열개 있어도 변명, 하소연 할 길이 없었습니다. “4인방”이 무너진 다음, 동일 사건이라도 평판이 전혀 달라졌지요. 삽시에 문화대혁명전에 벌써 “4인방”을 무찌른 영웅으로 되였습니다.(웃음)   김: 죄인에서 일약 영웅으로 되셨네요! (웃음)   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4인방”의 박해를 받은 것만 시인하고 자신을 “4인방”과 용맹히 싸운 영웅으로 분장시키지 않았어요.     5.가장 큰 고통은 거짓말을 한다는것 김: 문화대혁명시기 사선생의 극본 《边疆新苗》가 비판을 받았지요?   사: 당시 문화부 부장이였던 우회영(于会泳)과 상해시위 문교서기였던 서경현(徐景贤)이 직접 내 이름을 지명하여 ”3돌출(三突出)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판했어요. “사회주의 문예의 근본임무”를 위배했고 , “사엽신의 심미적 코(鼻子 )는 또 자산계급으로 향했다”고 질타하면서 상해문화계층의 비판대회를 소집하여 나를 비판했습니다.   시초에 나는 심중에 불복했고 변언문을 써가지고 반항하려고 작심했어요.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암석에 계란던지는 격이라 부질없다고 생각이 들어 자기 반성문을 써서 굴복하는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어요. 고통스러웠던 것은 반성문을 쓴 것이 아니라 핍박으로 가짜반성, 거짓말을 한거예요.   김: 이해할만 합니다. 반골정신의 덩어리인 사선생님의 인격이니까.   사: 난 고통스러워서 정신이 분렬되고 붕괴될 듯 했어요! 그때로부터 난 절대로 거짓 반성과 거짓말을 안하기로 결심했어요. 쉽지 않지만 나는 내 양심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고 지금도 그렇게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제하에서 물론 때로는 적당한 타협도 자기를 살리는 지혜이긴 하지만, 하나의 원칙, 하나의 라인이 있는데 절대 거짓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김: 카뮤의 말이 생각납니다. “작가는 지극히 고귀한 존재로서 영원히 두 가지 간난한 개입중에 서있다. 거짓말을 거절하든지 핍박에 반항하든지”.   사: 지식인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도록 핍박하는 겁니다. 과거 여러차례 정치운동 때 많은 지식인들이 그 고통에 못견뎌 자살한것은 육체적인 고통도 있겠지만 중요한 요인은 내심적 심리적 고통때문입니다. 이게 우리 나라 전국민, 전 사회가 거듭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무서운 일이 재발하지 못하게끔 하는겁니다.   6.왜 비판이야말로 지식인의 성스러운 사명인가?   김: 지식인이란 개념이 중국에서는 체제를 위하여 해석하고 사탕발린 소리를 하는 식으로 오해 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한데, 기실 “지식인”이란 그 체제를 비판하고 편달하는게 일입니다. 사선생님의 “지식인”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어요.   사: 김선생의 말에 나도 찬성입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진짜 “지식인”은 사상자에 비판자이고 또한 반역자, 반골자로서 과감히 체제에 NO라고 말할수 있는 인간이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류의 기본 준칙이고 정의, 민주, 자유, 독립을 수호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나라 일부 지식인, 작가, 학자를 포함해서 자신을 위하는 글쓰기를 하는데, 그건 마치도 여러사람앞에서 자위하고 섹스를 하는 추태와도 같아요.   작가가 대중의 속된 스타가 돼버리면 그냥 속물로 전락되고 맙니다!  TV 대중문화의 범람으로 지식인이 변두리로 밀려났다고 해도 나는 지식인의 성스러운 사명은 여전히 체제와 사회의 병페를 비판하고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김: 과연 탁견이십니다. 지식인이 권력과 금전에 곡학아세하고 나팔수로 된다면 지식인의 비극일 뿐만아니라 그 민족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사: 그래요. 지식인은 나발통, 거짓말쟁이가 아닌 쟁쟁한 철골(铁骨)을 갖추고 독립적인 품격과 자유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이란 풍격을 가리키는데, 천마가 하늘을 날듯 구애없이, 부귀와 권세에 의거하지 않고 노예나 도구로 되지 않는 것이지요. 자유란 사상을 가리키는데, 과감히 사고하고 말하고 과감히 사랑하고 증오하는 겁니다.   오늘의 지식인은 많이 추락되고 정신적 난골증에 걸렸어요. 우리 나라엔 로신도, 유고도, 채원배도 없습니다. 이런 쟁쟁한 지식인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 아쉽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7.낙화생 향기속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 김: 정말루 좋은 말씀이십니다.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사선생님의 가족과 교육환경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회족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어릴 때부터 문학을 즐기셨다고 알고있습니다.   사: 난 남경의 회족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문화정도가 낮았고 뭐  로동인민이라 해야 맞겠네요. 회민식당도 해보고 볶음음식( --호박씨, 땅콩, 해바라기씨 등을 볶은것)점도 차려보고 또 남경에서 좀 이름난 징반(京板)오리 회사도 경영했습니다. 그래서 2층짜리 집 두채도 갖고 있었으니, 중국사회 각계급의 분석리론에 따르면, 아마 소형자산계급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요(웃음). 지금 시체말로하면 사인기업이고 입당의 대상이 되겠습니다.   김: (웃음)그러네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네요.   사: 울 아버지는 내게 자유방치 정책을 실시했는데, 장차 커서 뭐가 되든 상관없다는거에요. 다만 성실한 인간이 돼야 하는바, 불의의 재산을 넘보거나 불의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교육하셨지요. 어머니는 전형적 현모양처로서 자상하고 착한 녀성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준 영향은 간고분투였고, 어머니가 준 영향은 착하게 모든 것을 리해해야 한다는 것이였어요. 난 지금도 울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이쁜 사진을 내 돈지갑에 소중히 간직하고 다닙니다.   김: (웃음)대단한 효자시군요! 근데 문학은 어떻게 좋아하게 됐습니까?   사: 우리집에서 경영하는 복음음식점에서는 낙화생, 해바라기씨를 포장하는 포장지는 거의다 낡은 책페이지나 신문지를 썼습니다. 그 포장지는 많은 고전적 작품이였어요. 보세요. 《鲁迅自选集》,《巴金自选集》이나, 현대 작가의 작품이였지요. 거기엔 심종문, 빙심, 영성도 등의 작품이 들어 있었거든요. 낙화생 향기가 풍기는 포장지를 나는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현대 문학명작들은 거이 다 볶음음식점에서 읽었답니다. 그러니 지금도 난 책만 보면 자연히 낙화생, 해바라기씨의 향기를 맡을수 있습니다(웃음)   김: (웃음)낙화생 향기속에서 탄생된 문학소년이시군요! 본격적으로 문학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8.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다.   사: 사실 난 좋은 학생이 아니였어요! 매우 까불고 장난끼가 심한 소년이였으나 악의는 없었어요. 초중에서도 난 역시 좋은 학생이 아니고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때 남경의 金陵饭店뒤에 난전시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헌 책도 팔고 사주팔자도 보고 만담도 하고 대중문화를 알수 있는 좋은 장소였습니다.   난 거길 자주 가보면서 기층 중국문화와 접촉하고 영양분을 섭취했어요. 초중졸업전에 내 생명사에서 큰 사건이 돌발했어요!   김: 큰 사건이라니요?   사: 뇌막염에 걸린 거예요(웃음) 여름에 나와 전혀 생면부지의 모기 한 마리가 물어서 급성뇌막염에 전염됐지요. 그뒤 내가 문화대혁명시기에 타격을 받을 때마다 난 그 얄미운, 나를 박해한 모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김:(웃음)모기가 인생의 첫 박해자군요!   사: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입원시 한 이쁘장한 간호원 누나가 나를 잘 보살펴 주었는데 그때 푸쉬킨의 동화시집을 선물해주었어요. 그때 나는 그녀에게 “난 살아서 책을 많이 읽을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병으로 하여 나는 생명의 진귀함을 깨달았습니다. 뇌염은 당시 99% 사망하고 생존율이 1%밖에 안되였으니     9.문학에 대한 긍지감 김: 그때의 병환으로 인해 살아서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겠다고 작심했군요.   사: 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게 된 것은 고중2학년 때 부터지요. 누구나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고중2학년 때 안휘성에서 오신 국어과 선생  무(武)선생을 만난게 내게 복이였어요. 무선생은 생동하게 가르쳤는데 중국문학, 특히 고전문학의 숭고함과 미를 우리에게 가르쳤어요.   난 그때 중국인으로서 행복감을 느꼈고 이처럼 풍부한 중국고전문학의 유산을 향유할 수있다는 데 긍지감을 느꼈어요.   김: 그때 사선생님 소설 쓰시지 않았나요!   사: 우리반에 그때 나이가 나보다 위인 두 동창이 있었는데 하나는 왕씨(현재 강소성화극단 편집)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웃음). 그때 왕씨가 북경의 《인민문학》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고 또 전국 아동문학 1등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극을 받은 나는 너희들이 하는데 내가 왜 못하겠냐는 배짱으로 소설을 습작했어요. 결국 《雨花》의 전신인 《江苏文艺》에 내 처녀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상해의 《萌芽》문학지에 시 두편을 발표했는데 그 때 내 나이가 15살이었지요. 나는 자신을 작가라 생각하고 스스로 뿌듯이 느꼈어요. 그런데 왼걸 작가의 길이 이리도 험난할 줄 뉘가 알았겠어요? 일생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줄. (웃음)   김: 대학에서도 계속 소설을 쓰셨지요?   사: 아까 말하다시피 화동사대에 입학하여 대학 2년생 때 《맹아》잡지에 소설 두편을 발표하고 화동사대에서 “유명인”이 돼버렸잖아요.(웃음)   10.왜 유머는 하나의 파워인가?   김: 사선생님의 극본이나 소설, 수필, 잡문에는 비판성, 풍자성과 아울러 도처에서 해학적인 유머가 매력적입니다. 중국문학사에서 로사의 작품이나, 진종서( 钱钟书)의 소설 《围城》에 늘 기지로 넘친 유머가 있는데, 사선생의 유머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어 독자의 웃음주머니를 풀어줍니다.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어러 번 해왔지만, 늘 전화에서도 순간순간 유머가 있어서 즐거웠지요. 유머는 일종의 기지와 재치, 지혜라고 보는데 서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 그래요. 유머는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는 능력인데, 사물본질의 모순을 통찰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희극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실현시킨 인간의 재질이고 파워입니다.   활달하고 흉금이 넓은 인간만이 유머, 고차원의 유머를 만들 수 있어요. 난 아직 익살(俏皮)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의 명함에 적혀 있는 문자가 넘 유머러스했어요.(웃음)   사: 아! 그 “ 少十斤“이란 문구요. 내 이름이 沙叶新이니까. 매 글자의 왼쪽 편만 따면, 少十斤이니까요!(웃음) 그러니 내 이 사람은 분량이 별로 없어요. 절반만 깎아버렸는데도 10근이나 축 났으니까요. 그러니 내 분량은 전부해야 20근밖에 안되요.   김: (웃음)오른편은 少十斤인데, 그럼 왼편은 어찌됩니까?   사: 그건 좀 쑥쓰럽내요. 亲三口이니까요! 그러므로 나란 사람은 성명에서 보면, 하나는 분량이 가벼운 거고, 중후하지 못하지요. 또 하나는 너무 친절하여 늘 사람과 대면하면 곧 세번이나 뽀뽀를 하니까, 물론 너무 뽀뽀해도 안 좋은거죠.(웃음)   김: 그러네요! 선생님의 《阅世戏言》을 읽으면 마치도 희극을 읽은 듯이 자꾸 웃어야 되는데, 선생님의 희극작가적 직업과 관계 되는건가요?     사: 나는 천생 희극을 좋아하고 내 극작에도 희극이 많지요. 《내가 만약 진짜라면》《남자 대장부를 찾아서》그리고 《공자, 예수, 레농》도 다 희극이 아닙니까. 정극을 쓴다해도 난 늘 해학과 유머를 자연 섞어요. 《진의 시장》에도 익살이 많이 들어있지요.   유머란 DNA와 괸계 되겠지만, 여전이 후천성적인 양성이 주되겠지요. 교양과 흉금이 있어야 하지요. 유머는 교양, 지혜,문화, 정신, 그리고 관용, 리해, 선량, 사랑 나무에서 꽃피고 맻히는 열매입니다.   협애, 자사자리, 잔폭, 독재한 사람은 유머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머의 소재로는 되겠지요.(웃음)   11.진실. 유머. 용감의 리정표   김: 선생님 극작가운데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공자, 예수, 레농》입니다. 이 작품은 대만의 거물작가 백양(柏杨 )선생님의 대륙기행에도 대서특필로 소개했는데 그 책을 읽고 다시 원문으로 읽었습니다.   과연 유머로 찬 희극이었어요. 황당한 형식으로 현대의 상황을 표현한 게 재미있었습니다. 고금동서의 유명인물들을 집합시켜서 서로 담론, 교류, 격돌시키면서 인류사회의 만연하는 배금주의, 독재주의를 풍자하였습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사악을 제거하고, 령혼을 순결화하며, 사상을 단정히 하는 “테제를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대 연극문학의 획기적인 거작이 아닐수 없어요!     사: 감사합니다. 내가 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극작품을 창작해왔지만, 역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공자, 예수, 레농》이예요.   80년대 말에 내가 이 극본을 몇년이나 집필했는데, 참 힘 들었어요. 그때 난 이 연극본을 완성할 수 있다면 암증에 걸려도 후회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08년에 위암이 발견되여 수술하기도 했으니  (웃음)   내가 위안을 받은건 08년에 나의 이 작품이 《중국당대문학선집》에 입선되고, 국가교육부 중점추천의 대학교중문전업교재로도 선정된 겁니다. 정말루 난 이 작품을 사랑합니다.   김: 선생님의 몸에서나 작품에서나 우리는 당대 중국지식인의 전범(典范 )을 보았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유머를 통해 사회인간의 폐단을 비판, 풍자하는 재질, 그리고 자신의 량심을 지키면서 과감히 사상을 실천하는 용감한 행동력, 이런 것들이 다 중국 지식인, 문학인의 하나의 리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사: 과찬입니다. 김선생도 비판성이 있고 비교문화론적 통찰력이 있는 젊은 지식인으로서 동아시아적 의미적 지식인이지요.   나는 지식인이란 본연적인 사상자, 비판자, 반골자로서 감히 NO라고 말하고 정의와 진리, 독립을 추구하는 실천자로서 조금이나마 중국사회에 힘을 보탠다면 한이 없겠습니다.   12.고독이란 이름의 행복한 길 김: 선생님은 중국 연극문학에 큰 공헌을 했을 뿐만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쉽게 할수 없는 양지(良知)를 공헌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우기 지식인의 본보기로서, 독자와 대중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는 유니크한 인물로 중국문학사에 명기 되었지요.   자신의 걸어온 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 난 다른 재간이 없습니다. 평생동안 필을 들고 평생동안 줄곧 사고를 해왔지요. 연극의 방식으로 진실을 남겨서 젋은 후대들에게 알려주는 게 내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안 하고 진실을 말하고 사회의 폐단을 비판하는것이 내 큰 사명이기도 했어요.   내가 이날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한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에 한평생 매달려 일에 쫓기는 인생도 많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망하던 작가로서 살아갈수 있었으니, 난 누구보다 행운이라고 느껴요.   내가 영화에도 출연해보고, 연극창작하면서 상해인민예술원 원장직까지 지녔지만, 탐관으로 변질하지 않고 퇴직할수 있어 다행이지요.   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사: 글쓰기로 평생 고독하지만 좋하서 하는 일을 할수 있는 자체에 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일이나 봉변에도 태연할 수 있었어요. 2008년 위암을 검출해내고 수술을 직면했을 때도 난 태연자약하게 롱담을 할 수 있었지요.   위제거 수술할때 의사에게 “게는 무장공자( 无肠公子)인데 내 위를 다 제거해버리면 난 무위문인(无胃文人)이 되고 마니까 웃끼지 않아요” 그래서 1/4위를 남겼어요.(웃음)   위가 거의 없지만 나는 두뇌와 두 손은 건전합니다. 사고하고 글쓰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요!   내는 다시 태어나도 작가를 택할 겁니다. 진실을 기록하고 세상의 병을 비판하는 필을 날릴 것입니다. 작가의 글쓰기, 행복한 인생길입니다. (끝)       대담자 소개 사엽신(沙叶新) 1939년 남경에서 출생, 회족. 중국 당대 가장 정의감과 비판성이 있는 연극작가, 수필가.   1957년 화동사범대 중문계 입학, 1963년 상해희극학원 대학원 졸업, 동년 상해인민예술극원 편집.1985년 ~1993년 동 원장, 주요 극작품으로 《假如我是真的》《陈毅市长》《孔子.耶稣.披头士列农》《寻找男子汉》.   “중국의 쉑스피어”라 불리면서, 늘 당대 연극사에서 실험적인 희극으로 연극문학계의 선봉으로 활약 함.그리고 비판성, 유머성으로 지식인 전범(典范)으로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거듭남.   2008년 위암 수술후 건강악화로 고생하다가 2018년 7월 26일 별세.  
217    초인적인 '이단자'는 어떻게 문학을 하나? [잔설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158  추천:42  2018-08-01
 문화대담  초인적인 “이단자”는 어떻게 문학을 하나?   잔설(残雪)+김문학     0.들어가면서   잔설(残雪)은 당대 중국문단의 빛나는 “이단자(异端者)”다. 그녀의 이름은 항상 카프카와 나란이 연결돼있으며, 중국 문학의 카프가, 또는 미술로 말하면 피카소와 비견되는 여류작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작품의 양과 질을 감안할 때, 단순히 중국의 “카프카”가 아닌, 카프카를 초월한 특이한 초인간적인 “이단자”로서 잔설을 평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985년 혜성같이 등장한 잔설의 기이한 소설을 접한 때로부터 나는 이내 그녀의 팬으로 돼버렸다. 당시 80년대 중국문화의 황금시기에 출발했던 그 많은 기라성 같은 작가, 문인들이 도중하차하고 잠적을 감춘자들도 부지기수지만, 그녀는 이 “기괴한 소설” 한 길만 지키며 어느새 대가로 돼 당대문학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다.   난삽하고 기괴하며 스토리도, 인물도, 공간도, 지어 시간마저도 애매한 잔설의 작품은 대부분 현실주의를 신봉하는 작가와 독자를 따돌리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젊은 층과 지식층에 그녀의 열성팬이 만만치 않으며, 특히 미국, 일본 등 해외에 팬층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여, 그 작품의 신기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세계에서도 좀처럼 없는 기재(奇才)"라고 격상한 왕몽(王蒙)의 말은 틀림없다.   그런 잔설은 중국 당대문단과 거래를 단절하고 매일매일 소설과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으며, 거이 외부인간과 만나지 않는걸로 알고 있다.   마침 잔설의 오빠 등효망교수(유명한 철학가)와 내가 친한 외우이기도 했던덕으로 잔설(본명 등소화,邓小华)과 이내 연락이 닿았고 또 재빨리 만나게 되였다.   2016년 12월17일 오전10시, 북경 밀운의 자택에서 잔설과 남편 노용(鲁庸)씨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63세(1953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잔설은 소녀같이 천진하고 솔직한 내면세계의 여성임을 알수있었다. 방안에는 난방이 잘되여 있어 훈훈했지만, 그녀는 외출용 다운재켓을 착용하고 있은것이 인상적이였다. 오랜풍습병 고질때문이라고 웃으며 해명해주었다.   오빠의 친구이기도하고 또한 내가 일본에서 온 친근감때문에 잔설은 첫 시작부터 정열적으로 자신의 문학체험과 문학관을 주저없이 이야기 했다.   “김선생도 아시겠지만 일본에서 가장 먼저 내 소설을 번역소개했고 또 내 작품 평론을 쓴것도 일본 대학교수였지요!” 나는 이내 그녀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수있었다.   “콘도나오코(近藤直子)선생이 거이 잔설선생의 소설과 평론집을 번역 출간했고, 잔설선생을 중국의 카프카라고 높이 평가 했지요!”   “맞아요! 김선생 잘 아시네요.” 잔설은 천진한 소녀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대담은 어느 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으며, 점심이 되자 노용씨는 우리에게 푸짐하게 야채위주의 건강음식을 차려주었다. 남편은 작가 부인의 믿음직한 내조자였다.    평소 술을 전혀 못 한다는 잔설은 우리와 함께 캔 맥주 한 통을 같이 마셨다. 빨갛게 상기된 홍조로 인해 더욱 소녀 같아 보였다.   호남 방언이 섞인 잔설의 말씨는 그래도 알아듣기 쉽기도 했는데, 그의 이성,정서 및 말할 때의 제스처는 나로 하여금 그녀가 신 내린 무녀(巫女)로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 잔설의 소설은 바로 그 영적세계에 있는 초인간적인 여성이 발산하는 불가시적인 내면 정신세계에 대한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럼 잔설 본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1.문학을 철학처럼 하기   김: 오늘 잔설여사님을 처음 뵙겠습니다만은, 전혀 낯설지 않네요. 1985년 제가 대학 4년생때부터 기괴하고 음울한 멋이 있는 여사님의 소설을 접하고 열성팬이 된것도 있고, 또 요즘 오빠되시는 철학가 등효망교수로부터 자주 잔설씨의 얘기를 들어서 구면인듯 옛친구로 느껴져서 기쁨니다. 오늘은 잔설 누님의 (여러가지 호칭을 엇바뀌어 쓰는 내가 좀 이상한가?) 소설과, 작품론, 창작과 일상에 관해 많은 소중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잔: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오빠 효망한테서 김선생의 “귀재”얘기를 늘 들어와서 한번 나도 언젠가 만나고 싶었지요. 정말 바다건너 우리 집에 오신 귀중한 손님이니, 오늘은 친구가 돼서 마음을 열어놓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호탕한 웃음)   김: 잔설씨의 소설은 중국 문단에는 그누구도 없는 "문학을 철학처럼 하는", 그런 "철학으로 문학을 하는"특징이 돋보입니다. 소녀때부터 철학을 좋아 했고 또 오빠의 영향도 많이 받았나요?   잔: 맞아요!난 문학을 철학으로 영위하고있어요. 소녀때부터 철학과 문학을 혹애했는데, 내게 영향을 준 사람은 두분 계셔요. 한 분은 울 아버님이시고 또 한 분은 오빠 효망이지요. 두 분 다 우수한 논리성적 두뇌를 갗춘 지식인이시지요. 잘아시다시피 효망오빠의 영향이 관건적 영향을 했어요.   김: ”철학”을 여기서 “영성”으로 바꿔도 될것 같은데요?   잔: 네, 쉽게 말해서 철학이지만, 내실은 “영성”이지요. 환상, 몽상, 팬터지 등 일반에서 보면 기괴하고 난해하고 몽경 같기도 한 그런 언어로 소설을 써내고 있습니다. 평론가 정덕배(程德培)씨가 내 소설을 “꿈(梦)”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현실과 상대한 세속의 대안(对岸)에 있는 몽환같은것들을 나열하여 쓰고 있는게 내 소설이지요.   2. 철학가 오빠와 소설가 누이동생   김: 그러네요. 내가 보건데 오빠 등효망과 여동생 잔설(등소화) 두 오누이는 정말 절묘한 문화콤비를 이루었다고 봐요. 서로 철학과 문학을 흡수하면서 상부상조를 이루고있는데, 아마 이는 당대 중국문화계에서는 유례를 볼수없는 “풍경”이라 생각합니다.   잔: 효망오빠는 나를 제일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지지자이고 사상적 동반자입니다.(웃음) 오빠의 철학적 이론이 내 창작에 영항을 주었다면, 나 또한 창작으로 그의 이론을 지지한다고 해야 하지요.   김: 두분이서 대담집도 내시고하셨는데 참 오누이가 전 부럽습니다. 등효망교수가 펴낸 《残雪:灵魂的历程五》에서 국내최초로 여동생의 작품을 높이 평가 해주고 “당대 작가중에서 가장 일찍 자아현신(自我现身)적 신형인격을 건립함을 의식하고 그것을 건립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작가”라고 평가 했습니다.   잔: 효망오빠는 문학을 최고로 철학의 시각으로 평론하는 문학평론가이지요. 국내에서도 이런 평론가는 전례가 없습니다. 나의 기괴한 영혼의 환상소설을 이해할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우리 오빠 같은 학자만이 내 소설을 이해하고 평론할수있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내 작품을 진짜로 파악하고 평론을 쓸 수 있는 평론가는 아직 국제적으로도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 효망오빠가 내 소설을 해독할수있는 소수자의 한사람이고 아마 제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웃음)   김: 오빠는 철학을,누이동생은 문학을 하지만 두분다 사유의 혁명을 통해 인생의 깊은 심층구조를 파헤치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3.왜 나의 소설은 난삽하고 기괴한가?   김:  1985년 처녀작 《山上的小屋》로 부터 시작된 단편이고 장편이고 잔설씨의 소설은 기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것으로 일관돼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잔설씨의 소설을 읽는 일 자체는 문학연구자나 학자나 또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누구나 용기가 필요하고 인내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 누추하고 조잡하고 기괴하고 난해한 소설을 언어, 구성,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오리무중에 빠뜨리기 십상인데 왜 이렇게 난삽하고 기괴합니까?   잔: (웃음)그건 내가 영혼을 쓰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그런데 이 본래 볼수없는 불가시적인 영혼을 가시화시킨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 날까요?   당연이 누구나가 다 놀랄거에요! 한 사람이 잘 살고 있는데 누가 그 사람의 영혼속의 것들을 영화로 촬영하여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면 경악 할 건 불보듯 뻔하지요. 그러니 이런 영혼을 보이게끔 소설로 써내면 기이하고 불가사이 할거예요. 어쩜 이럴수 있단 말인가고, 그리고 사람에 따라 본능적으로 불결하다고 느낄수 있어요.   그러니 이런 불결하다든가 누추하다든가 하는건 다 세속적 시각에 비낀것이지요. 영혼은 세속적 인소를 배제하고 있으니까요.   김: 그러니까 세속화에 절은 우리 독자들이 덜 세속화된 영성의 세계를 처음 보게 되니까 난삽하고 괴이하게 보일수 밖에 없단 말씀이네요.   잔: 그렇지요!   김: 결국 독자들이 이미 익숙될대로 익숙된 열독전통, 서술전통을 뒤엎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잔설씨의 세계관, 가치관에서 기인되는 문제겠습니다만, 즉 세속의 대안(对岸)에 있는거겠죠!   4.나의 세계는 세속적인 세계와 대립된다.   잔: 맞어요! 내 소설이 인성의 여러가지 암흑면과 기괴한 음울한 면이 많다고 독자들이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지적하지만, 사실 이런 인식은 죄다 그들의 무지, 또는 인식차원의 미달로 비롯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무엇을 묘사했다고 여기는 자는 전혀 내 소설을 해독할 자격이 없는거구요! (웃음)   사실 내가 “무엇을 묘사하는게”아니예요! 내 세계는 여러분의 세속적인 세계와 대립되는겁니다. 이게 포인트거든요. 내가 있는 세계란 내가 원고지와 마주하여 내 “야망의 역량”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신세계이니까요.   김: 그러니까 잔설씨의 소설은 또 하나의 세속적인 세계와 대치되는 창조된 세계, 세속에 없는 초탈한 “영성의 세계”라 해야 겠군요.   잔: 완전 그렇습니다. 나는 어릴적부터 내게만 속하는, 방금 문학씨가 말한 그 영성의 세계서 살아왔어요. 그러니 난 이 세상 인간들이 다 익숙한 세계, 거기서 전개되는 속된 말, 대화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고 있었답니다.   김: 역시 반골적 소녀셨군요!(웃음)   잔: 네, 어른들이 이렇다고 하면 나는 굳이 아니라고 했어요. 내가 영위하는 세계는 내가 창조해내서 세속세계를 저항하는 거지요. 내가 기왕 이 세속세계를 이탈하여 살수없는 만큼이나 이 세속과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내 세계를 만들어 내는것, 이게 내 소설창작입니다.   5.“잔설 서술양식”   김: 나는 잔설씨의 소설을 반복적으로 열독하면서 잔설씨는 중국문단에서 매우 기이하고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유니크한 소설쓰기 양식(모델)을 창립해냈단걸 발견했습니다. 물론 제 말씀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전통적 열독습관이나 경험으로 당신의 소설을 읽는다면 소설의 스토리 전개, 작중 인물의 발전 등이 추측 불가능일 뿐만이니라 소설 언어의 어휘, 구절등이 끊어지고 연결이 결핍된 고립성, 그리고 인물사이, 사건사이, 행동사이에도 고립, 단층이 있어 난삽함의 미궁입니다. 따라서 미궁의 구조는 특이한 텍스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현실의 장면같아보이지만, 세부에서는 또한 철학적 내면 심층의 테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 인성은 무엇인가? 어떻게 왜 살아야 하냐? 철학적사고를 구체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 서술양식으로 이런 상징적 세계를 표현하기 어려우니까 잔설만이 있는 특수한 서술모델을 고안해냈다고 봅니다.   잔: 아하! “잔설 서술양식”이란 개념이 좋은데요!(웃음) 내 소설이 재래식 전통소설 서사모델과 전혀 틀린 이야기 구성으로 돼있고, 카프카와 같은 텍스트가 난해한것과 같이 내 소설도 난해합니다.   사실 영혼에 관한 이야기는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면 전통소설이야기보다 더 재미난걸 발견할 수 있고 구조도 기이하여 미증유의 미(美 )를 발견 할수 있어요. 중국 소설가로서 내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해독한 책을 펴냈는데 내 평론집을 보면 카프카의 묘미(妙味)를 터득할수 있게 되고 따라서 전통적 추리소설보다도 더 절묘한 이야기와 만나게 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진감을 느낄수 있을꺼에요.   6.카프카를 무색케 하는 작가   김: 카프카를 해독한 책으로서는 정말 일류에 속하는 책이라 평가합니다. 잔설씨는 자신에게 큰 영향 준 작가를 우선 카프카를 꼽고 일본의 카와바타 야스나리 등을 지목하시는데, 카프카의 소설《성》《변신》등과 비교하여 볼때, 나는 본인 앞에서 칭찬하는게 아니라, 이미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리 잔설씨가 카프카를 초월했다고 진지하게 평가 하고 싶습니다.   잔: 사실 나도 동감이에요(웃음), 자화자찬이란 빈축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직언하자면, 카프카 소설의 영역이 나보다 훨씬 좁고 인간의 부조리에 관한 사색은 좋으나, 이미 인성, 인간의 자아 등 여러 영역에서 나는 그를 넘어섰다는 자신감이 들어요, 세계적으로 나와 같은 소설은 전례가 없지요!   김: 과연 그렇네요! 카프카는 소설에서 어떤 이념을 불어넣은 건 아닌가요?   잔: 그건 후세 평론가들이 억지 해석이구요, 카프카의 작품이 철학적이념의 고차에 달할수있는 이유는 그의 사고에서 나온게 아니라, 사실은 내심의 정서적 누적에서 온것입니다. 내 생각에 현대주의(모더니즘) 소설은 즉흥적으로 써낸거에요. 《성》역시 완전히 즉흥으로 씌여진것입니다.   《심판》《변신》역시 간단한 철리를 끄집어 내기위해 그렇게 긴 글로 쓴거지요.   김: 잔설씨는 카프카보다 더 전위적이고 그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지요. 카프카 서술양식은 연결성이 있지만 당신의 소설은 연결성이 결핍된 상태로 모든게 고립되고 점(点)으로 되여 있어서 조약성이 있지 않나 생각 됩니다. 어떤 서양의 평론가가 잔설씨의 소설을 보고 “중국인도 이렇게 쓸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고  절탄했지요. 카프카보다 더 전위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는 거에요.   잔: 사실 아까 문학씨가 내 소설에 연결성이 부족하다고 얘기했지만, 내 작품엔 일관적 정서가 연결돼 있고 내가 쓸 때도 정서적으로 수미일관 같았답니다. 고립돼보이지만 정서로 관통돼 있어요.   내용으로나 서사양식으로나 언어로 보나 정말 나같이 소설을 영위하는 작가는 세계적으로도 나밖에 없어요. 난 이 점에 대단히 자부심을 갖고 있답니다.(웃음)   7.”신실험문학”이란 무엇인가?   김: (웃음)동감입니다. 그리고 당대 중국문학의 여러가지 사조, 기법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나왔는데, 잔설씨의 약 10년전부터 스스로 제기한 “신실험(新实验)문학”이란 개념이 신선했어요. 그건 잔설씨의 창작충격 그 자체와 연관이 있다 보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 상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잔: 나는 친한 장소파(张小波)와도 “우리의 문학”에 관해 토론을 했지만, 장소파씨는 우리의 작품을 “본질을 묘사하는 문학”이라 칭했는데 나는 나같은 부류의 특이한 문학을 “신실험”이라 자칭하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의 특징이 우리 부류의 작품중에 관철돼 있는바, 하지만 우리의 실험은 서양의 신소설의 텍스트위주의 언어적 실험과 상당히 이질적이지요.   김: 오, 서양의 신소설과 틀리는군요.   잔: 네, 나같은 소수의 작가는 중국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고집하면서 외부적으로는 고전 문학언어에 대한 존중을 보류하고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문학은 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역적(力的)인 나선형의 폭발로 발육되는건데, 이 합리성은 반론의 여지가 없으며 생명력은 추측할수도 없이 강하답니다.      왜 이 실험문학을 하게 되었냐면, 우리 자신의 정신적 억압이 너무 오래고 본능적으로 보복의 충동이 우리더러 민족의 거대한 잠재의식의 보물고에 잠입하게 했는데, 또한 이 보물이 처음으로 우리 자신에게 소유하게끔 했습니다.   김: 그러니까 자아의식이 강한 잔설씨에게는 모든 “외부” “외계”가 다 자신적 경상(镜像)에 불과 하다는 거겠죠!   잔: 바로 그거에요! 물론 나의 글쓰기는 서양 고전문학을 배운 기이한 과실이지요. 중국 신문학에 대한 포위망을 격파하는 그런 노력입니다. 그러니까 이왕의 중국 주류문학이 인성의 옅은 표층위에서 오락가락하는 관성을 격파하는 “새로운 실험문학”이 노린것은 핵심,본질입니다. 또한  “신실험문학”이란 자아에 관한 문학입니다. 즉 자신을 실험품으로 생명력이 얼마만큼 진부한 통념, 관념의 질곡에서 폭발할 수 있냐 테스트하는거지요.   이런 문학의 전망은 무한히 넓은것으로 전통문학의 협애성과 유치성을 포기하고 직접 인간성으로 승화되여 자신을 구하는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도달한 보편적 의의는 전례없는것입니다.   이러자면 자신의 영혼속에 들어가 영계에서 피비린 싸움을 벌여 종극적인 미( 美)를 걸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을 제단에 올려 놓고 전인류에게 전시하는 장거이지요. 난 이것으로 자호감을 느낍니다!(웃음)   김:  (웃음) 대단한 장거네요! 영혼의 격투속에서 미의 극치가 생출하는 문학, 과연 영성의 문학이군요. 그러니까 “신실험문학”을 “영성의 문학”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8.“자동적 서사”혹은 무당 같은 글쓰기   잔: 무방하지요!   김: 나는 어쩐지 무당이 신이 내려 굿을 하듯이 잔설씨같은 작가는 신이 내린 그런 작가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웃음),아닌가요?   잔: 무당과 유사성이 있어요. 나처럼 고난도(高难度)적 글쓰기는 모든 작가와 이질적인데, 조상의 유전성을 의존하면서 무술(巫术)적인 자동서사(自动书写)와도 유사하지요.   그렇다고 무술은 아닙니다. 이건 강대한 합리성과 공모한, 잠재의식심처에서 유발한 봉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이게 쉽지 않아요. 신실험문학, 또는 아까 문학씨가 제기한 영성의 문학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지극히 민감한 감각과 천재적인 강철같은 논리사유력이 구비되여야 하지요.   김: 그러니 일반 한다하는 대가적인 작가들도 범접을 못할 영적세계의 글쓰기군요!(웃음)   잔: 그렇죠. 또한 여기다가 서양문화 핵심적 내재반성의 힘이 가미해야 됩니다. 영혼에 대한 격투도 옅은 표층차원의 “자기비판”따위가 아니라 명상중에 암흑의 통로를 진입하여 내심의 지옥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 이계(异界)에서 안깐힘을 다하여 인성의 퍼포먼스(Perfomance)를 통해서 인간자신의 여러가지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매번 창작은 번마다 낡은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신을 탄생시키는 실험이지요!   김: 참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런 자신의 죽음과 신생을 이룬다는게.   잔: 물론입니다. 이런 창작이 고난도라고 했던 까닭은, 머릿속에 텅 비어있어 의거할데가 없는상태에서, 무중생유(无中生有)로 폭발시켜 자신을 구원하는 빛발을 생산시켜야 하니까요. 일반인에게서는 이런 신비한 방식이 불가사의로 보이지만, 사실 이런 방식은 가장 자연적이고 인성이 부합되는 방법이에요.   김: 그러니까, 작가가 오랫동안 자각적으로 이런 레슨을 거쳐야 되겠네요.   잔: 네, 그런 훈련을 통해 일종 심층적 은밀생활(심상)이 인간의 일상생활과 동재해야 됩니다.   김: 이런 신실험문학은 일반 작가의 실험소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다른 차원의 얘기가 되겠네요.   잔: 그래요.马原、洪峰、王蒙、莫言등 신시기 소설의 선봉자와는 차원이 틀리지요. 이들은 표층인성에서 표유하지만, 나는 심층 인간의 내면 영혼을 쓰니까요. 내게 글쓰기는 예술지상의 경향이 있고, 예술에 대한 경민도는 중국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수도 없답니다.     9. 왜 중국문학에 고전적 명작이 못 나오나?   김: 어떤 외국 평론가가 지적하기를 “잔설에게는 두개 영혼이 있는데 문학적 영역에 나타난 귀신적인 영혼과 세속중의 일반인과 별 다른게 없는 영혼, 이 양자가 분리된 상태”라고. 이런 분리를 통해 영적인 글을 쓰는게 이해가 됩니다.   자, 그럼 화제를 돌려서 당대 중국문단, 문학에 관한 솔직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잔: 중국 당대 문학, 솔직이 고백하면 유치하고 자아가 결핍하고 공리성이 강하고 또한 정치색채가 많은게 흠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표층현실을 초월하여 심층의 내면세계,자아의 세계, 그 수수께끼같은 세계를 발굴하는 영혼의 문학, 심성의 문학이 순문학에조차도 보이지 않지요. 나같은 작가는 아직 극소수자이고 아직 이해자가 적습니다.   김:  이건 중국의 문화전통의 힘이 너무 강대하기 때문인가요?   잔: 그래요. 그런 전통의 토양에서 육성된 문학은 독자적으로 인간성탐색의 사명을 짊어지기엔 너무 역부족이고, 그런 힘이 모여도 결국 와야 할 이성의 광(理性之光)을 차단해버립니다.   그러니 당대 중국문단에서 미래에 영구히 남을 고전적명작이 나오기엔 너무 실망적이예요. 우리에겐 민족문화에 대한 교양이 부족하고 순문학이 박약하지요. 그런 “민족성”과 “세계성”에 관한 의논이 자주 나오지만, 이런 용속적인 테마자체가 하품이고 옹졸하게까지 느껴져요.   그러기에 이런 의논보다는 우리에게 필요한건 원대한 흉금과 기백, 생명,인성, 독립에 대한 집착과 문학자신에 대한 자신감이지요.   10.중국문학의 집단성 퇴보, 그리고 자비(自卑)감   김: 그래도 근대 《홍루몽》이나 당대의 가평요, 막언, 여화 같은 명작가들이 나타나지 않았나요?   잔: 예전에도 어느 글에서 언급 했지만 ,《홍루몽》이 삼라만상을 썼지만 인물의 자아의식은 여전히 표층적에 머물렀고 인간의 아동시대에서 답보하고있으니 서양과 같은 성숙과는 거리가 멀지요.   자아적 격투에 상승되지 못한채 아동적 유치성에 정지돼있어요. 그러니 이 문화속에서 자란 나는 이 문화의 결함을 비판하지요. 우리가 성숙해야 하니까요. 문학자들마저 아동기에 머물러있으면 말이 됩니까.   김: 잔설씨는 자아의 영혼의 시각에서 중국문화에 대한 비판도 잔설적입니다.   잔: 중국문학속에 잠재된 최대의 결함이 유치성, 아동성이예요. 아동의 경계에서 벗어나 성숙되어야 되는데 말이에요. 특히 남성작가들이 더 해요. 물론 내가 여성이니까 그게 보이지요. 거이 낭만주의, 현실주의 그런 수법으로는 자기반성이 높은 수준에 달하기 어럽지요.   김: 재밋는 지적이네요!   잔: 80년대 余华、苏童 등이 좋았지만 40이 넘으니까 후퇴해버려요. 莫言도 40살이 넘으니 신창작 그런 탐구보다도 자기 답습상태에서 정지됐어요.   말하자면 중국문단의 집단적 퇴보, 그런거지요! 그리고 모두가 중국전통문화에 회귀해야 유일한 출로라고 생각해요. 우리 중국것이 다 서양, 외국것보다 우수하다 이거예요. 우리 조상의 우수성을 발굴하여 발양광대(发扬光大)하면 세계문학을 다 정복한것처럼(웃음).   그러니 문단의 남성작가, 평론가들은 대부분, 나의 글쓰기에 대해 아니꼽게 보고 있습니다.(웃음)   서양문학의 그런 “인간”의 문학만이 문학이고 우리의 문학은 “아동적문학”이라 질타하니까. 그들이 반발하는거에요(웃음)   김: 내가 우리 조선족문학의 수준이 50점도 안된다고 꼬집었는데 그것과 유사하네요(웃음)!   잔: 그러니 결국 그들이 자비(自卑)하고, 흉금이 좁은거지요. 이 문화속에 안주하면서 뭘 수호한단말입니까! 지킬 수 있나요? 문화가 지킴으로써 신생을 얻을수있나요? 왕몽이 이런 선전을 잘하는데 뭘 수호하자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그의 관념중엔 진정한 반성이 없습니다.   김: 잔설씨가 중국 주류문단과 거래를 안하는것도 차원의 차이기 때문입니까?   진: 그래요. 주류가 어디 진짜 순문학을 하는겁니까? 난 중국작가협회주석이 큰 모임행사에 나와 달라고 초청한것도 한마디로 거절 했어요. 내가 왜 거기에 소속되고 나가야하나요! 난 내가 독립자유로 글쓰기만으로도 충분해요. 수준미달 작품을 갖고 서로 높이 올리추고, 굉장히 분식을 하는 그것도 자신감이 없는 표현이거든요(웃음)   11.초인적 “이단자”의 일상   김: 일상생활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천재적 “이단자”의 그게 궁금합니다.(웃음)   잔: 기실 내 글이 괴이해서 그러지 난 상당히 세족적인 인간이예요. 전형적 소시민이지요.(웃음)   지금 난 거의 세속적인것과 사귀지 못하고 있어요. 옛날과 많이 달라요. 20대에는 남편과 재봉일을 하면서 글을 썼지만 이젠 그것도 관둔지 오래고 남편이 다 가사를 하고 난 책읽고 글쓰기만 전념합니다.   김: 그러니 아까 노선생(남편)이 한 요리들이 정말루 맛있었어요. 전업주부(主夫)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으니 좋겠어요.   잔: 나는 매일 매일 365일이 독서와 글쓰기예요. 설날도 안쉬고, 멈출줄을 몰라요. 하루만 거르면 병에 걸릴것만 같아요.   김: 과연 글쓰기의 특급”프로패셔널”이시네요. 지금 거이 친구와 만나는 일도 안한다면서요!   잔: 네,절대루 없어요. 예전에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지만(웃음), 창작이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서서히 뒤로 물러서고 물러서서 이젠 두사람의 세계에요. 나와 남편의 세계, 난 지금 자신의 세속적 생활을 압축시키고 있어요.   김: 글쓰기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잔: 난 오전에 장거리로 달리기를 하고 와서 샤워하고 책상과 마주앉아 약 한시간 쯤 글을 써요. 원고지에 육필로 쓰지요. 컴퓨터로 타자를 안해요.    영어도 독학으로 배워서 글도 쓸수있어요. 영국, 미국에 짧은 글도 발표하기도 해요.(영문 글과 육필로 된 원고를 나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김: 정말 나와 유사한데가 많아요. 나도 육필로 쓰고 타자를 할 줄 몰라요(웃음)   잔: 난 구상도 사색도 안하고 그냥 원고지만 펴면 글이 술술 나와요. 그리고 수정도 안합니다.(从不构思,一笔下稿,也不改稿) 매일마다 글쓰기외에는 또 철학을 읽고, 철학분야의 글도 써서 몇권 냈어요. 북경대 철학교수 수준도 내 눈에는 유치해요(웃음)   12.암흑속의 인간을 광명으로 인솔하기 위하여   김: 과연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천재이시네요! 어느 학자가 지적하다시피 “잔설은 정신의 깊은 차원을 추구하면서 중국문학사에서 최초로 문학적방법으로 이 과정을 묘사해냈다”고 하면서 “잔설의 소설은 일종 즉물(即物)적이 아닌 정신의 유열(愉悦)이다”고 평가했어요.   잔: 감사합니다! 사실 암흑속에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암흑에 있는 줄 모르고 살지요. 우리가 문혁시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낙원이라고 느낀것 처럼 말입니다. 우리 나라 국민은 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요. 지어는 아주 병질이 골수까지 배인 그런 엄중한 상태거든요. 무슨 병이냐면, 노신선생이 쓴 ”아Q병”, 자아를 상실하고 생존의 낙을 잃어버린 그런 우매한 환자이지요.   자아를 보아낼수 있는건 소경이 앞을 보는거와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현재도 내일도 내게 주어진 재질을 활용하여 “자아”를 인식하는 어려운 글쓰기에서 극치까지 발휘할수 있는게 나의 유일한 낙이거든요.   나는 오로지 암흑의 심층에서 끊임없이 길을 개척하고 등불을 만들어 인간들을 광명으로 인솔하는 그런 성취감에서 살고 있어요. 물론 이런 글쓰기가 나와 국민들과 교류하는 특이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건강하게 80세까지 장수할수있다는 자신감이 있는데, 난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글쓰기를 견지 할것입니다.(웃음)                                                 (끝)   대담자 소개 잔설(残雪),본명 등소화(邓小华) 1953년 장사에서 태여남. 당대 중국 신실험문학의 기수.    1985년 처녀작 발표이래 700여만자에 이르는 신실험문학작품, 평론집을 발표하였음,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영어권,일어권문학계에서는 당대 중국 문단의 가장 창조성과 독창성이 있는 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苍老的浮云》《五香街》《最后的情人》등이 있다. 그중 장편소설《最后的情人》은 미국에서 최우수번역소설상을 수상했으며 영국 독립문학소설상 후보로 지명되였다.   2017년 미국에서 출판된 장편소설《边疆》은 문학계의 화제작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일본에서는 잔설의 소설은 문학계의 환영을 받고 있는바, 대량의 소설 문학평론이 번역 출판되였으며 2008년에는 《세계문학전집》대형시리즈에 잔설의 중편 2편과 단편 5편이 입선되였는데 이는 중국작가로서 유일 입선자이기도 하다. 일본의 변역가 콘도나오코(近虅直子)는 동경에서 “잔설연구회”를 창립하여 해마다 잔설을 소개평론하는 잡지 《잔설연구》를 정기로 펴내고 있다.  이밖에 미국,영국, 일본의 대학에서도 잔설과 그의 작품을 문학교과서로 사용하고 연구하고 있다.
216    [수필] 항아리, 어머니 그리고 재봉기 (김문학) 댓글:  조회:2589  추천:32  2018-04-14
(수필) 항아리, 어머니 그리고 재봉기   김문학     활력이 강하신 어미님이 우리를 떠나신지도 벌써 10년이 된다. 늙으신 아버님이 묵향이 배인 벼루로 방불하시더니, 어머니의 모습은 키낮은 우리 조선조의 백자 항아리로 보였다.   조선조의 백자 항아리, 우리 겨레의 반찬과 먹꺼리와 함께 겨레의 넋이 담긴 백자 항아리, 그 키낮은 소박한 항아리의 모습에서 나는 왠지 어머니의 질박하고 자애로운 기품을 읽을수 있었다.   어미님이 쓰시던 항아리는 남고, 이제 그것을 일본으로 갖고와 내집에서 소중히 쓰고있다. 이렇듯 어미님의 손때가 묻은 항아리가 아들이 물려받은것 역시 민족문화의 전승이겠지.   기실 이 항아리에는 우리 강릉김씨 가문의 가족사가 슴배어있다. 증조부때로부터 전래하는 이 백자 항아리는 말그대로 보물단지다. 일본식민지 통치시기 유학자인 할아버지는 안면이 있는 일본 지식인이 이 항아리를 꽃병으로 쓰겠다며 고가로 매입하겠다고 간청했지만, 단연코 거절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6세 연하의 할머니와 결혼 하여 강원도에서 만주봉천(심양)으로 이주하면서 항아리를 지니고 오셨다. 그뒤 봉천에서 “대성당”( 大成堂 )이란 유명한 한방약국을 경영하셨다.   1950년 약재 구입으로 개원시골에 하향하셨다가 홍수를 조우하여 돌아오지못한 수귀( 水鬼 )로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공부를 전 학년에서 항상 으뜸으로 하던 아버지는 13살 어린나이에 조실부친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장남으로서 일찍 가장의 직책을 떠매야했다.   약국경영은 어른들에게 맏기고 봉천교외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게 되였다. 그러다가 1959년 어머니와 맞선을 보고 결혼하셔,  1962년9월 장남인 내가 태어나게 된다.   내 기억속에 백자 항아리는 우아한 꽃병으로 보여진게 아니라, 집안의 고추장을 담은 고추장단지로 변신하였다.   이렇게 근대 몰락된 신사의 가문은 조부의 돌발적사망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꽃병을 고추장단지로 쓰는 신세로 전락되였다.   그래도 어린 나는 항아리에서 풍겨오는 어머님의 고추장향이 무척 좋았다. 그리 맵지도 짜지도 않은 안성맞춤한 고추장의 미미( 美味 ). 문화라는것은 이렇게 가족에서 풍습의 맛으로 전승되는것이 아닐까? 내가 9살이 되던그해라 기억된다. 그 키낮은 항아리에서 고추장을 꺼내시며 어머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자 항아리가 키는 작아도 속이 넓어 많이 담는단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작아도 키보다 수십배, 수백배 마음이 넓어야 한단다 …“ “네, 엄마, 알겠어요. 나 커서 우리 강릉김씨 가문을 물갈이 할꺼예요. 농민신세를 벗어난 증조부, 조부처럼 지식인, 존경받는 대학자로 돼서 가문을 바꿔 놓고야 말겠어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사실 나는 농꾼인 아버지가 시내 친적들에게 얕잡아 보이는게 무척 싫었던것이다.   “야~, 너 참 대견하구나, 그런 꿈이 있어야지!” 어머님은 내 머리를 애부해주셨다. “꼭 그렇게 할꺼예요!” 그 뒤 내가 성년이 되어 지식인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일본에서 일시 귀국할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자랑스러워 하셨다. “니가 어떻게 9살 어린나이에 강릉김씨 대를 가신다는 말을 할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되뇌이시곤 하셨다. 우리 삼남매중에서도 어머니는 맏자식인 나를 각별히 아끼셨다. 내가 천생 약골이고 병약했던 까닭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앞에서 이렇게 술회하셨다. “내가 우리  문학이를 임신했을 무렵, 삼년재해 막바라지시기라서 식량도 귀했을 뿐만아리라, 입덧이 하두 심해서 사과한알도 변변히 못먹었지, 그래서 영양부족으로 문학이가 약골로 태어난게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어, 지금도 너무 애처롭단다…”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셨다. 이래서 집의 가사를 누이동생(진옥)과 남동생(병학)에게만 시키고, 나에게는 시킬대신 집에서 책 읽고 공부만 시켰다. 지금도 공부만 줄곧 해온 나는 대학생의 아버지가 되였지만, 가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선비로 돼버렸다. 지금 아내역시 늘 “당신은 천생선비여서 눈에 책밖에 보이지 않고 일이 안보이는 우리집 황제, 선비예요. 이런 황제가 탄생한것엔 다 이유가 었었네요.” 하면서 핀잔인지 칭찬인지 내게 말한다.   사실 선비, 황제란 낱말들이 나는 싫지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늘 내 자신은 일반 애들과 같지 않은 비범한 인간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것도 사실이다.   우리 강릉김씨 가문의 족보를 보면, 조선시대의 천재 김시습이나 일제시대 요절한 귀재 이상(李箱=본명 김 해경)등 쟁쟁한 문화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런 천재, 기재, 귀재로 되여 우리 족보에 이름을 새기고 싶었다. 내 삶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보다도, 오히려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지대했던것이 사실이다.   아버지는 건강하시고 (현재 84세), 독서를 즐기고 과묵하셔서 변제는 무디셨으나 글씨도 달필이고 그림도 능하셨다. 그리고 관용적이여서 너그럽고 타인을 절대 욕하지 않는 성격이여서 누구나 좋아 하는 노호인 ( 老好人 )이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이었으며, 독서는 별로 하지않았지만,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이여서 똑똑하고 사리 밝았으며 비평가 다운 기질을 지니셨다. 그리고 아량이 있고 미래를 볼수있는 관찰력이 탁월하셨다.     내 기억속에서 어머니는 어릴적부터 한번도 “공부하라, 숙제하라”고 재촉 한적이 없엇다. 방과후 우리 세 남매는 귀가하면 무조건 당일 숙제를 다 마치고 노는게 습관이되였다.   어머니의 교육 스타일은 자식들을 무단으로 억압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와 독서의 낙을 찾게 하고, 흥취에 따라 공부하게끔 조언을 주는게 자신의 방법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공부와 함께 운동도 잘했는데, 봄 가을 학교운동회 날이면 어머니는 생산대의 노동도 관두시고 도시락을 싸들고 운동회 응원을 오시곤 하셨기에 다른 애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공부도 운동에도 더 잘하려고 애쓰군 하였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이 원하는대로 성장하게끔 항상 넓은 흉금으로 베풀어 주시고 응원해주셨다. 내가 대학을 가던해 “아무 여자든 니가 맘에 들면 난 다 반대 안 하겠다, 니가 좋은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유와 독립이란 낱말은 굳이 사용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런 개념마저도 모르셨겠지만, 어머니는 그 가치를 벌써 알고 계셨던것인 모양이다. 나는 이런 어머님께 감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엄마두, 흑인 여자야 아니지요. 이쁜 아가씨를 며느리로 데리고 올께요…” 하고 나는 웃었다. 어머니도 따라서 웃으셨다. 어머니나 우리 가족사에서 특기 해야 할 귀중한 기물이 한가지 있다. 60년대 중국산 재봉기다.   손재주가 좋으신 어머니는 우리 일가의 옷을 이 재봉기로 자작하여 입혔다. 원근에 소문이 자자하여 동네 이웃들이나 먼 친척들도 옷을 만들어 달라고 맡기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일절 삭전을 안받으시고 기꺼이 봉사를 해주셨다.   우리 삼남매의 등교복이나 여름셔츠까지 어머니가 재단을 하여 손수 만들어 입히는게 관래로 되였다. 매년 설 날이면 어머니가 재봉기로 만든 멋진 새옷을 입을수 있었기 때문에 설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동년시절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소학교 2학년 여름이였다. 그 때 나는 홍소병대표로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인민공사에서 열리는 모택동사상문예이벤트에 나가게 되였다. 그런데 맞춤한 흰 셔츠가 없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상점에 달려가서 흰 목당목(천)을 사가지고 와서 재단을 하여 만들었다.   목당목은 흰 눈처럼 하얀게 아니라, 누르므리한 색에 천 표면에 여기저기 풀벌레 똥 같은 조그마한 점들이 박혀있어 그리 미관은 아니였다. 그런대로 나는 어머니가 지어준 흰 목당목 셔츠를 착용하고 넥타이를 매고 그번 이벤트에 참가하여 씩씩하게 사낭송을 하였다.   귀가하는 길에 5학년의 어떤 선배 여학생이 “지금 누가 이런 누렁목당목 셔츠를 입는다냐? 히히 …”하면서 조롱하였다.   나는 그런 선배여학생이 아니꼬운대로 집에 와서 어머니께 금방있은 “옥당목사건”을 하소연 했다. 솔직히 목당목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서럽기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차곡차곡 타이르셨다. “그건 니 잘못이 아니라, 목당목셔츠입었다고 비난하는 선배애가 잘못이다.사실 넌 모를꺼야, 옥당목은 싰을수록 바래져서 백설처럼 하얗게 바래진단다. 근데 그 선배가 입은 흰 셔츠는 싰으면 싰을수록 누렇게 변색해버려, 사람도 마땅히 날이갈수록 마음이 깨끗한 인간으로 되여야 해, 이 옥당목셔츠처럼 말이야…”   나는 어머니에 대한 울분이 다시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힘으로 바뀌였다. 세월에 싰기고 바래워서 백설같이 결백하고 순결한 인간이 되는 꿈을 키우게 되였다. 내가 현지 그런 결백한 참인간으로 되었는지는 호언을 못하지만, 순수한 지식인, 학자로서 자신의 독립적 인격과 지조를 지키고 허위와 기만을 까발리며,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정신은 그래도 구비돼있어 자못 긍지심을 갖는다.   어머니는 재봉기로 내게 흰 셔츠를 만들어 주었을 뿐만아니가, 순결한 넋, 인간적 지성의 지조를 키워주신것이다. 그 뒤 내가 일본유학길에 올라 독립적 자유주의지식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동아시아에서 알려지면서 나에 대한 일부 동포 지식인의 비방과 인신모독이 심해졌다.   이 일을 알게된 어머니는 내가 심양에 귀가 했을 때 이렇게 직백하셨다. “참 나원, 지금은 21세기요 국경을 제집처럼 넘나들고 국적까지 바꾸는 시대인데, 무슨 ‘매국노’란 욕말이냐?! 문화대혁명도 아닌데, 그런 학자들이 이 무식한 시골 할매보다 낙후하니 내가 다 그런 학자땜에 부끄럽구나! 내가 네 문장 읽어 보니까 다 옳은 말을 했던데 뭐, 참 잘 썼구나. 몸은 왜소해도 온 민족사회를 문장으로 뒤흔들수있으니 사내 영웅이 아니냐! 거기 신경쓰지말고 니 글이나 더 잘 써라…”   이렇게 말하시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여유와 관용, 그리고 자식에 대한 자호감과 자신만만함이 충만돼 있었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거듭 수긍했다. 그때 나는 시골 농꾼인 소학5학년도 졸업하지못한 어머님이 어떻게 이토록 유식한 말씀과 근대적 오픈된 의식이 있었을까 감탄했다.   이렇게 어머니는 항상 내편에 서 계셨다. 잘해도 못해도 나를 무식하게 욕을 하거나 질타한번 아니하셨다. 대신 설복과 자애로운 마음으로 늘 성처받은 나를 보다듬어 주시고 고무격려 해 주셨다. 고상하고 자애롭고 재간이 있고 교양이 슴배인 여성, 어머니, 아내, 그리고 며느리.   며느리로서 김씨 가문에 시집와서 36세에 청상과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셨다. 할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시기심이 강한 시어머니로서 손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대신 며느리에 대한 천대가 월등 강했다.   기실 한 가족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투쟁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할머니의 천대를 견디지 못해 우리 삼남매가 어릴적에 어머니는 동네 서쪽의 큰 호수에 빠져 자살을 할 생각이 한두번이 아니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린 우리 삼남매를 두고 차마 떠날수가 없다고 하고, 훗엄마손에서 천대 받을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해가 뜰 날까지 살아야 한다고 견강히 버텨오신 어머님.   우리 형제가 마련해준 심양시내 고층 아파트에 이주 하면서 이제 살멋있는 만년을 즐기게 됐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이다. 2007년 여름 심양에 가서 한달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을때, 어머님이 재봉기에 마주앉아 일하시는 모습을 나는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이게 어머니의 마지막 유영이 될줄이야 뉘 알았으랴!   2008년 4월 10일 입원하여 병상에 계신 어머님은 국제전화에서 이제 퇴원하면 일본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입쌀송편을 만들어 주시겟다고 하시더니, 14일 심야 갑작스레 천국으로 가시고 말았다. 타계하시기 이틀전 꿈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는 내손을 잡으며 “얘야, 내가 옛날 널 임신 했을 때 꾼 태몽이 있잖아. 그때 내가 두레박안에든 큰 구렁이를 버리고 왔으니, 너와 멀리 사는구나, 근데 나 이제 멀리 길떠야 한다.”하고 말하신다.   나는 “아니, 여기가 좋은데 어디로 떠나신다고 그러세요,엄마!”하고묻자, “아니야, 내가 꼭 가야 할 떼가 있단다. 나 먼저 가니 몸 조심하고 잘 살어라…” 새벽에 깨여난 나는 몽중의 어머니의 “작별”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여 병실의 어머니께 국제전화를 걸어 한시간쯤 통화를 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였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신다는 “죽음”을 타곳으로 가서 산다는 “삶”으로 내게 고백하신 셈이다. 슬픔이란 말이 무력할 만큼 깊은 슬픔과 슬럼프에 빠진 나는 그 뒤 “죽음”에 대해 재다시 사고하게 되였다. 육체의 사라짐은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상념으로 연결해 주었다. 나는 늘 왠지 어머님의 영혼이 내 주위에서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네르기.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글도 더 열심히 쓰고 지속해가고 있는것이다.   아아! 어머님이 작고하신지도 꼭 10년이 된다.   나는 어머님을 위해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단 한번도 우리 자식곁을 떠나 셨다는 느낌이 없기때문이다.   그 키낮은 백자 항아리는 영원히 어머니의 모습처럼 내곁을 지키고 있다. 작지만 소박하지만 맑은 넋을 담은 마음, 자애롭고, 지혜롭고 사리밝고 마음또한 바다 같이 넓은 어머님.    어머니의 그 재봉기 역시 우리 가문의 정신적 대물림의 심벌이다. 그렇다. 이 재봉기로 어머니가 우리의 옷을 하나하나씩 만들어 주었듯이, 이제 어머니의 재봉기는 나의 겹겹 아이덴티티의 옷을 만들어주는 창조적 지성의 보물로 되어 나와 인생을 걷고 있다.   어머니는 영원한 존재적 영혼이다. 그리고 영원한 정신이다!    2018년 3월 길일  
215    중국지식인, 무엇이 문제인가? [뢰의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437  추천:67  2017-10-01
【문화대담】 《33의 신사유》   중국지식인, 무엇이 문제인가?   뢰의(雷颐)+金文学     0. 들어가면서   “근대 중국지식인연구”의 제일인자로서의 뢰의선생은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베테랑 연구원으로서 학계와 언설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비판적중국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오래전에 그의 저작에 소개된 사진을 보고 나이가 훨씬 연상의 대선배인줄 알았는데, 그는 나보다 근근히 6년 연상인 1956년 태생이었다. 문화학자 사중문(史仲文)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우리는 자주 국제통화를 하면서 서로 안부도 전하고 서로의 관점에 대하여 피력하면서 어느사이 친숙한 문우, 학우로 돼버렸다.   대담을 하기로 서로 예정은 오래전부터 해 왔으나 스케줄때문에 조정이 어려운 면도 있었다. 그러다가 3월 사중문선생과 대담을 이루게 되면서 뢰의선생과의 대담도 뜻밖에 쉽게 이루어 졌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는 법인가 보다.   우리가 대담장소로 정한 곳은 북경 중국사회과학원 근처의 아담한 커피숍이었다. 첫 대면에 조금은 냉철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뢰선생은 기품이 조용하고 예지에 찬 일류의 지성인임을 이내 알아 차릴수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늘 전화에서 처럼 담담히 조용하게 말을 엮어가는 뢰선생님은 “중국지식인” 문제에 대한 애착과 지식인이 살아가는 중국의 대환경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칼날처럼 서있었다. 그런 뢰선생은 신사중의 신사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학자였다. 《孤寂百年- 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등 무게있는 노작을 읽은 나는 크나큰 공명을 일으켰다. 胡适,容闳,梁启超등등 근대 지성사의 스타를 다룬 이 책에는 지식인이 왜 백년의 고독속에서 헤메였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지식인을 통해 그 시대와 함께 현대지식인의 사명, 역할과 운명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수 있지요.”   우리는 “중국지식인”이란 문제를 둘러싸고 긴 시간 대담을 나누었다.   1. “지식인”은 무엇인가?   김:  뢰선생님은 중국근대지식인 연구의 제일인자로서  《 孤寂百年 - 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 》이란 노작을 써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 12명을 통하여 그들의 운명과 사상맥락과 국가정치의 기본속에서 정치와 개인 전공발전사이에서의 모순을 기술했어요. 따라서 종당에는 국가정치속에서 점차 변두리로 밀린 “고독과 적막의 지식인”상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대한 현실적 의의을 갖는 연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뢰선생님은 “지식인”은 구경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으로 부터 우리의 대담을 시작할까 해요.   뢰: 좋습니다. 중국 지식인(知识分子)은 청조말기에 3천년의 황제통치가 붕괴되면서 전통적인 사대부(士大夫)로 불린 독서인으로부터 근대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되지요.      “지식인”을 정의하는데는 두가지 기준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직업적기준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기준입니다. 직업적으로 학자, 작가, 문인, 교수, 오피니언계, 예술인이 이에 속하고 정신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독립”되여 있어야 하는겁니다. 사이드가 지적하다시피 지식인은 으례 “보편적정의”를 대표해야 하며 또한 영원히 “비판”을 견지해야 한다는것이지요. 지식인의 “독립”은 인격, 정신과 관념에서 독립하며, 그속엔 경제적자급과 자신의 내재적 외재적 존엄이 포괄된다고 봐요.   김:  저도 동감입니다. 동양의 사대부, 독서인을 서양에서는 인텔리젠치아 (intelligentsia)나 인텔렉추얼(intellectual)로 칭해지며 시대를 리드해온 계층이었지요.  제정러시아 사회안의 지식인들로서 서구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노예제, 전체주의에서 인민해방과 정치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킨 지식인이 바로 전자이며, 근대 유럽에서 지식과 최고의 교양을 고안해냈고 발전, 확대시킨 자가 후자입니다. 저는 진정한 지식인은 “사회체제에 순응하기 보다는 변혁을 통한 발전을 시도하고, 그 방향을 지적하는 자이며, 사회의 폐단,약점을 지적, 해부, 비판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립적인 인격과 사상으로 체제에 “적응”을 꾀하더라도, 무절조의 곡학아세가 아닌 체제의 개혁, 진보를 위한 건설적 지적, 또는 비평을 하는게 지식인의 몫이라 봅니다.   뢰:  맞어요! “독립과 비판”이야 말로 지식인의 가장 뚜렷한 표징입니다. 진인각 (陈寅恪)선생이 강조한 “독립적 인격, 자유적인 사상”이란 격언처럼 지식인의 첫번째로 갖추어야 할 조건이지요. 공공사회에 대한 관심과 공공적 양지(良知)로 사회참여의식이 강한 문화인이 “지식인”이지요.   2.  백년의 고적(孤寂)   김:  그러니까 저는 “지식인”은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 기술전문가, 기술관료, 내지 직업성학자, 관료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중국어에서는 지식인(知识人)을 지식분자(知识分子)라 칭해요! 독립적인 무엇이 아닌 하나의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지요(웃음)     뢰선생님은 중국지식인 연구분야의 전문가이시니 선생님의 아까 그 저작과 관련하여 근대 중국지식인상에 대하여 우선 개략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뢰:  지식인 연구에 있어서 나는 두가지 방향이 있어요. 하나는 청말, 신해혁명과 이홍장등에 관한 연구이고 또 하나는 현대의 호적, 부사년(傅斯年)을 비롯한 지식인 연구입니다. 주로 개개인의 지식인의 운명과 사상을 통하여 지식인상을 축출해내고, 중국 국가, 정치와의 운명, 관계양상을 귀납분석했지요. 김:  뢰선생님은 굳이 “백년의 고적”이란 표현으로 중국지식인의 궤적을 형용했습니다.   뢰:  사실 나는 괴로움과 격투하면서 지식인 연구를 계속해왔음을 고백해야 겠어요. 국가와 개인의 명운사이에서 중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거나 모순, 대립의 구도에서 분투해왔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다면 오로지 “백년의 고독”이란 말로 형용할수 밖에 없었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지식인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 뒤로 지식인을 억누르니까 국가정권의 신임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계속 정치비평에 관심하면서 한편 학문도 하면서 자신의 일부 개성을 보존하려고 애썼어요….이러한 모순을 그들은 불가피적으로 십자가처럼 짊어져야 하는 비운에 처했지요.     이게 바로 근대 중국지식인의 운명이었습니다.   3. 덫에 걸린 운명인가?   김:  그러니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중국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사회적, 체제적 덫에 걸려야 하는 운명이겠네요?   뢰:  그래요! 개괄적으로 말하면, 중국 지식인은 첫째로 국가와 개인, 국가, 민족적 부강 국가적 이익과 개성사이에서 일종의 복잡한 계급모순이란 덫에 걸려있었어요.      두번째는 학술을 함에 있어서 순학술학문에 전념해야 되냐? 나라, 민족이 외래침략을 당했을때 자신의 학술을 견지해야 되냐 아니면 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정치적구조에 참가해야 하나? 정치와 학문사이에서 배회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거듭되는 대립, 모순의 괴로움속에서 때로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해야 했어요. “바로 학술과 정치사이에 있다고”말입니다.   김:  이런 의미에서 30~40년대의 거물 지성 호적(胡适)과 그 시대 지식인의 운명이 바로 전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정치와 개인의 학문사이에서 시계추처럼 배회하는 양상은…   뢰:  호적과 동시대의 정문강(丁文江)은 현대 중국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인물로서 30년대에 자신들의 글을 통해 자신의 사상체계을 구축합니다.      서양의 자유주의개인의 권리는 신성불가침범인데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더구나 자유주의의 중요한 두 리더인 호적과 정문강은 국가라는 대아(大我)를 위해 개인적 소아(小我)를 희생시킬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정씨나 호씨 역시 30년대에 한번쯤 스탈린의 공업화에 지대한 선망을 보이는데 잔혹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의 후진국 공업화 성공을 긍정하지요. 그래서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유주의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들은 국민당정치, 국민당의 독재을 비판합니다. 중국에는 좋은 정부냐 나쁜 정부냐 하기에 앞서 정부가 없다고 일침을 놓아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국가운명의 대과제를 논의합니다.      결국 정문강이 내린 결론은 “나는 스탈린통치하의 한명의 기사(工程师)로서 일할 지언정 해외에 망명하는 지식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김:  그렇지요. 1949년을 경계로 중국지식인은 이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는 운명에 처하지요. 국가건설, 민족의 부흥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다수 지식인은 후자를 택하게 되었지요.   뢰:  맞어요! 호적은 대만으로 가고 정문강은 대륙에 남았지요. 그때로부터 완전히 다른 운명이 전개되지요.   4.  “모래위에 세워진 상아탑”   김:  청말시기로부터 20세기중엽, 그리고 1949년이후 문화대혁명등 전례없는 문화의 수난속에서 지식인의 수난은 중국대륙에서 간단없이 이어졌지요.     지식인이 80년대부터 “수난시대”의 크라이막스를 넘어섰지만 독립적 계층으로서 현재 중국사회에서 홀로서기엔 너무나 그 기반이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나 구미사회의 지식인사회와 비교를 해도 이점은 일목요연이지요. 중국 지식인 자신들도 스스로 말하다시피 근대 “지식분자사회”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또한 “모래밭위에 세워진 상아탑”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당대 지식인계층의 괴로움 또는 곤난은 학원파이든 매스컴이든 체제성적 보장이 결핍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뢰선생님은 당대 지식인사회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뢰:  20세기 중국지식인은 한마디로 괴로움과 고적속에서 헤매왔다고 제가 늘 말하곤 합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지식인의 50~70년대 수난시대를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신계몽을 벌이기도 했어요.      지식인은 이런 와중에 사회의 전환점에서 정치환경과 충돌, 모순이 생길뿐만 아니라 지식인 스스로의 사상, 인격에도 모순이 존재했다고 말해야지요.      20세기 지식인은 1949년전후의 지식인을 구별하에 봐야 합니다. 49년 이후에도 17년세대 문혁세대, 그리고 포스트문혁(당대) 세대로 나누어 봐야 합니다.      20세기 최초의 엄복,양계초, 채원배등이 청말세대이고 1915년이후 호적, 진독수, 진인각, 노신등이 또 한세대이며, 풍우란 부사년, 주자청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949년이후는 17년(1949~1966)세대로 농후한 이데올로기색채를 띤 국가에 복종하는 세대였고 80년대 중기 “문화열”속에 궐기한 신세대 지식인이 탄생됩니다. 그리고 “포스트문혁” 세대로 1960년이후 출생한 신생지식인이 현재 활약하고 있지요.   5.  “변두리(边缘)” 로 몰리다   김:  좋은 귀납입니다.   제가 볼때 80년대 지식인은 사회의 중심에 서서 커다란 계몽과 호소력이 있었는데 90녀대부터 외부환경과 지식구조의 변화로 인해 지식인이 중국사회에서 “변연화”(边缘化)로 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네요. 90년대이후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진척되고 경제 고도성장을 이루어나가니 사회의 세속화가 박차를 가함에 따라 지식인은 시장사회 주도의 중국에서 “변연화”되었습니다. 여영시(余英时)선생이 이에 대해 전문 논한적이 있지요.     정치적 차원에서 뿐만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변두리고 밀려나지요. 사회가 고도로 분산화되고 계층이 다양화됨에 따라 다원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에 사회에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요.   뢰:  맞습니다. 이럴때 지식인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변연화로 몰렸지요. 이른바 중국사회에 새로 급등장한 억만장자, 벼락부자, 졸부등 새로운 형세하에서 나타난 사회기득이익층 그리고 매스컴과 연예계에서 현란하게 활개치는 여러가지의 스타들이 사회의 중심무대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새로운 사회속에 처해있는 지식인이 엄혹한 도전을 받기 마련이지요. 늘 계몽자로 자부해오던 지식인이 이른바 사회에 부자들이나 스타들의 등장에 밀려난 까닭에 지식인은 스스로 “변두리”화 문제를 열렬히 논의하고 인문정신에 관한 토론을 전개했지요. 이런 신환경하에서 지식인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키고 “안신임명”하겠는가? 구경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지식인이 사회 전체를 개변시킬수 없다면 자신의 정신,현실적 포지션을 되찾아야 한다고 분연히 사고하게 되였습니다.   김:  지식인에 대한 국내의 사회적 여론이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회에서 지식인에 대하여 폄훼절하하는 양상을 보고 놀랐습니다. 전문가 (专家)를 벽돌(砖家)로, 교수를 맹수(叫兽)로 매도하는 현상이 보편화 된 현상이 지식인의 “변연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사료하시는지요?   6.  왜 지식인은 매도당하나?   뢰:  김선생은 중국사회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웃음)   내 생각에 자매체(自媒体)의 발달로 인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식인도 당연히 뒤질리없지요. 이런 공공사무에 대한 관심과 의견은 전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으례 신중하게 자신이 파악한 상황하에서 발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지요.     예전에 이런 발표공간이 없다가 일거에 이런 표달공간이 생기니 여러수준의 의견과 지어 황당한 말이 횡행하지요. 이런 교수, 전문가를 두고 매도하거나 분개하는건 이해 가 갑니다.     또 하나는 해외에서는 자매체가 서로 사교를 하는것이 기본이지만. 중국에서는 사회, 공공사무, 정치에 대해 의논이 많은게 특점이지요. 왜냐하면 중국의 이른바 전통매체, 주류매체, 종이신문, 종이매체가 이런 기능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TV국, 신문이 여러 관념과 견해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할수 있다면, 사람들이 거기서 이성적으로 발언하고 토론할수 있습니다.   김:  중국에는 매체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뢰:  그렇지요. 그러니 당연히 대중들이 자매체 위챗을 이용하여 발언하게 되지요.   김:  지식인의 수준에 문제가 있고 대중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TV에서 봤는데 흑룡강성의 신축 육교가 무너지자 소위 전문가란 분이 나와서 해설 하는 말이 “육교가 약한게 아니라 통행하는 자동차무게가 너무 무거웠다는 거예요! 그 말 듣고 다들 앙천하지않을수 없지요(웃음) 뢰:  (웃음) 그리고 중국사회에는 서로 타자의 의견, 부동한 의견을 용납하고 들어 줄수있는 그런 환경이 있어야 되지만 중국은 여전히 “문혁”의 여파로 타인의 견해를 존중할줄 모르고 견해가 다르면 무조건 매도 중상하기가 일쑤이지요.   김:  저도 동감입니다. 위챗, 펑유췐에서 저도 문장을 발표했다가 일부 동포한테 쌍욕으로 매도, 중상당한적이 여러번 있거든요.(웃음) “당신의 관점은 찬성할수 없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는 보호해준다”는 고차의 경계가 결핍한게 탈입니다.   뢰:  어쩌겠어요? 그런 수준미달의 인간을 무시해야죠!(웃음)   7.  지식의 비극시대   김:  중국 지식인을 담론함에 있어서 해외 지식인과 “비교지식인론”의 시각에서 고찰해보면 중국 지식인의 하나의 결정적인 결함, 문제점은 지식인 자체가 지식에 대한 인정,공감과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기타 사물의 부속물로 되기를 원하는것에 있다고 봅니다.     어느 해외 중국인 학자가 이런 지적을 했어요. “지식의 비극화시대라 칭하는것은 권력, 금전과 대중이 지식에 대한 전례없는 멸시뿐만아니며, 또한 지식이 늘 장식용으로 있어도 없어도 되는 물건이 된게 아니라 지식은 종래로 비미(卑微)하고 비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뢰:  정말 그렇습니다. 대학에서도 학술연구와 교육 본원을 떠나서 무슨 ××× 공정이요, 기요요하면서 대학을 공원처럼 거대하게 부풀리고 확건하지만 관건적인 교육과 연구는 게을리 하고 있어요. 요즘 대학 백년창립기념의식이 성행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정치가를 얼마만큼 배출시키고 기업가, 부자를 얼마나 배양했다고 떠벌리지만 어느 대학에서도 유명한 학술거장 한사람을 배출시키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국내에서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여러가지 심포지움이나 세미나를 하지만 정계 대간부나 대부자를 초정하는것을 주목적으로 하지 요긴한 지식체계는 언제나 차요적이고 부속물로 밀리고 말지요.   김;  내가 이 “중국 일류지성과의 문화대담”시리즈를 진행하는 주목적이 지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동아시아에 향해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인은 누구인가?”란 테제를 발신하고 해석하자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현재 전례없는 경제성장과 사회전변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 격변의 시대에 대해 중국인 지식인 자신이 나서서 해석하고 분석, 제련하여 하나의 의식, 개념으로 이론화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 지식인은 이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더 비극적인것은 그것을 담당할 기력도  능력도 없이 “무기력의 상태”에 빠진 상태라고 봅니다.   8.  지식인은 사망했는가?   뢰:  지식인의 “변연화” 무기력에 따라서 “지식인의 사망”문제를 프랑스 포스트모더리즘의 사상가 리오타르가 지적했어요. 변연화와 다원화 사회속에서 지식인은 흔히 자신을 인민, 인류의 위치에 놓고 보편적 동일가치의 주체를 인정하고 사회를 향해 발언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축해 온 일련의 정체성적 언어 발설이 포스트모더니즘사회에서는 이미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는 거에요. 끊임없이 다원화, 세분화되는 사회에서 사회전체가 받아들이던 정체성적 언어발설 담당자로서의 지식인이 이미 존재감을 상실했다고.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사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미셸 푸코도 이런 맥락에서 유사한 말을 했지요. 그런데 영국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 지그먼트 바우맨(Bsuman)은 리오타르의 주장에 또 해석을 가했어요. 모더니즘사회에서 지식인은 여전히 사회의 “입법자(立法者)”구실을 하며, 지식정체성과 동일성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다고 중립적 객관적 지식규칙으로 사회의 지식적 재판자로 되었는데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을 그 누구도 대체 할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后现代) 사회에서는 사회의 다원화로 인해 지식계통이 해체되고 통일한 지식의 장 (场)이 상실한다는거예요.   뢰:  이런 의미에서 중국지식계층에 이미 통일된 지식계층이 여러가지 유파로 세분되고 이른바 국학파, 계몽파, 보수파, 자유주의파, 신우파, 후현대파등으로 나뉘어 통일된 사상, 지식계가 산산히 부서졌지요. 그러니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지적, 사상적 체계를 새로 재건립하고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이거죠!   9.  이중성격의 두뇌명석한 계층   김: 지식인은 대체로 “천성적으로 이중성격소유자”라는 말이 있지요. 학자들이 이에 대해 거론해왔습니다, 피얼 볼디어우(Pierre Bourdieu)가 갈파하다시피 지식인은 “통치자중 피통치자의 일부분”입니다. 즉 지식인이 그 문화자본으로 인해 통치적지위에 있고 동시에 정치와 경제권력을 장악한 자 앞에서는 또 피통치자로 전락된다는 거지요.     이런 모순이 지식인의 2중성격 내지 권위자, 권력자앞에서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순종으로 인해 얻는 거대한 이익과 반항으로 인해 얻는 비싼 대가를 고려하여 대부분 지식인은 현실중에서 흔히 권력과 타협을 이룩하게 됩”니다 ( 제롬 카라벨 Jerome Karabel)     중국의 지식인은 긴 황제제도와 현실체제의 체험속에서 이런 2중성격이 뚜렷하고 하나의 문제라고 보고 있는데. 뢰선생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뢰:  현실의 중국 지식인의 이런 2중성격은 현체제하에서 더욱 선명한건 강조할 나위도 없습니다.     지식인과 정치엘리트사이에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까닭에 이런 모순이 중국지식인의 2중성격을 유발한 최대의 근원이라 봅니다. 전목(钱穆 )이 풍우란( 冯友兰)에 관한 이런 일화를 어느 책에서 기술한적이 있어요. 어느날 두 학생이 연안으로 가게 되어 환송회를 소집했어요. 전목과 풍우란이 초청특강을 하게 되었는데, 풍은 연안에 가는 두 학생에 격상하는 말을 했고 전은 이와 상대로 학생이라면 우선 공부를 잘 하여야 장내 국가의 기둥으로 될수 있다고 연안에 갈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김:  전목은 풍우란과 전혀 반대의 말을 했네요!   뢰:  그래요! 회의가 끝난 뒤 풍이 전의 연구실에 찾아와서 아까 학생들에게 연안에 가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한 건 옳았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연안으로 가는 학생들에게 꾸지람한건 잘못이라고 했지요.      이에 대해 전목이 풍에게 당신은 두 학생이 연안에 가는것을 장려하면서도 또한 여러 학생에게 남아서 독서하라고 했는데 이는 전혀 상반되는 길이며,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인데 어찌 범벅으로 말할수 있는가고 질책했답니다.     두 사람이 상호 논쟁하다가 풍우란은 불쾌하여 자리를 떴지요. 여기서 볼수있는바와 같이 전목은 가치관이 매우 명석한 학자이고 풍우란은 늘 양가지견(两可之见)을 갖고 있는 학자였습니다. 전목같은 지식인은 흔치 않고 풍우란같은 두뇌는 명석하지만 “양가지견”의 모순에 있는 지식인은 현대 중국 지식인이 절대 다수입니다.     중국 지식인은 한편 도통(道统)이란 상징기호의 가면을 쓰고, 도덕, 양심 국가주의의 진리의 화신으로 자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권세와 체제에 아부하거나 보좌하여 권력통치 또는 의식형태의 교도원으로 되기를 즐기지요.     이중성격에서 하나는 “도통성”이고 또하나는 “의부성(依附性)인데, 이 2중성격때문에 왕왕 잃어버리는건 자기 자신의 진실한 개성이지요.   10.  비판적지성은 다 어디로 갔나?   김:  앞에서도 말한적 있지만, 지식인의 본질은 체제에 대한 비판에 있어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역설하다시피 지식인이 지식인인 까닭은 비판성에 있으며 권세에 대한 반항입니다. 전공적, 기술화된 전문화적 지식인이 중국에도 많이 증가되었지만 제가 늘 느끼는 점은 중국에 비판적 지식인, 공공지식인이 비례에 따라 너무 적은것입니다.     사이드, 사르트르, 카뮤, 촘스키같은 비판적 지식인이 중국에 너무 희소합니다, 제가 중국지성들과 대담하면서 발견한것도 현재 원로 지식인 80대이상에 모우식(茅于轼)  자중균(资中筠), 원위시(袁伟时)등 고령 지식인에 비판적 지식인이 있지만 그뒤에는 과감히 진실을 말하는 젊은 지식인이 비례적으로 적어서 큰 문제라고 봅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뢰: 지당한 말씀입니다.   지식인이 우리 시대에 할수 있는 사명은 두가지라 생각해요. 하나는 학자, 연구자이고 또 하나는 사상자(思想者)이라고 생각해요. 김선생이 나열한 사이드나 촘스키같은 비판적 지식인의 거물들이 세인의 존경과 각광을 받는 이유는 지식인의 양지( 良知)의 심벌이고 전문가, 학자이면서 도덕적으로 용기가 있는 부조리에 맹렬히 비판을 가할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기백과 실천이지요.    도덕자 사상자이고 지성으로 살아가는게 지식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중국지식인은 현 체제하에서 계몽과 주장이 좌절을 당하자 90년대부터 시장경제의 홍수에 밀려 세속화의 파도에 말려 들었어요.    금전, 마이홈, 가부…등 경제이익의 수익자로 된 지식엘리트들도 그 공리심에 의해 매우 현실적 세속적인 상태에 물젖었습니다.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투기적인 승관발재(升官发财)의 전통이 이들의 심령을 점거했지요.    그러니 도덕이니,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에 앞서 스스로 도덕을 버리고 학술에서도 표절하고 완전히 학자, 교수,전문가로서의 한계(底线)를 넘어서서 부패로 향했습니다.     학문은 할수 있더라도 도덕수준은 밑바닥이고 학문도 안되고 도덕도 엉망인 지식인이 아까 말한 叫兽, 砖家의 전형이 아닙니까. 현체제속에서 삶이 보장되고 윤택해지니까 대부분 젊은 지식인은 “지식인”이라는 의미와 사명감을 잊고 체제에 발라맞추거나 영합 또는 안주하면서 “비판”, ‘저항”을 깡그리 버리고 살게 된게 중국 대부분 지식인의 현상(现状)입니다.   11.  퇴영되고 부식된, 그리고 창조력이 없는…   김:  탁론이십니다. 제가 중국을 자주 오면서 발견된 지식사회의 모습은 80년대 보다도 오히려 물질면, 하드면에서는 진화됐지만, 지성과 사상교양은 더 퇴영되고 부패됐다는 점입니다. 자중균선생님도 이에 대해 이미 큰 소리로 지적했지요.     관원, 정치가들의 부패를 박멸하느라고 현재 야단법석인데 제가 볼때 중국 지식인의 부패도 뒤지지 않은 세계의 베스트원의 기록이라 봐요!(웃음) 이런 와중에 중국에는 자신의 지식체계가 엄중히 결핍한것을 “발견”했어요. 하나의 문명세계가 자신의 지식체계, 언설체계를 정립하지 못한다면 진화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양이나 일본의 지식체계를 흡취하여도 좋지만, 진정한 창조력은 자신의 지식체계가 뒷바침해주거든요. 사실 인문학영역만 보더라도 중국이 49년이후로 현재까지 일본의 인문학발견, 지식체계를 능가할수 있는 실적은 전혀 없습니다. 현실은 그냥 산채(山寨)학문, 산채이론, 개념이나 모조품따위가 범람하고 표절이 횡일할 뿐입니다. 베끼고 복제하고 별 가치없는 지식제품을 양산하는게 중국지식계의 현상이 아닙니까?   뢰:  예리한 지적입니다! 지식계, 학술계는 더 이상 정토(净土)가 아니지요. 학술부패는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으니 너무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학술부패에서도 베끼고 표절하고 하는일이 정상적 보편화로 됐으니까요!(웃음) 내 논문도 표절당한적이 있습니다.     2001년 1기 《社会科学论坛》에 발표한 《中国近代史上的张申府》는 완전히 제가 1998년 2기 《北京大学学报》에 발표한 《中国近代史上的张申府》 전면 표절한겁니다. 그것도 중앙이론연구직장의 박사연구생이 말이에요.     김선생 지적대로 보편적인건 무더기로 쏟아지는 소위 “학술성과”라는게 아무런 창의력도 없는 전인이 말한 복제품이지요!     그리고 대량의 관원들도 수중의 공권력과 공금을 이용하여 대학에서 학위,학력을 “구매”하고 있는데 지어 명문대학에서도 “수입”을 위해 소위 “실권인물”과 결탁하며 그런 부패자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습니다. 돈만 내면 증서를 남발하는바 학교의 명예도 전혀 상관치 않아요…     학술은 민족문화의 정수인데, 이런 식으로 학술을 한다면 그 후과는 엄중하지요. 나중에 “지식 창조력”은 마이너스로 추락되고 우리 사회의 발전과 민족문명의 발전에 엄중한 지장을 주기 마련입니다.     한심한건 학술표절, 부패를 적발해도 절대다수가 응징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그 대학이나 그 기관의 “수치” “오점”으로 된다 여겨서 처벌을 줄 대신 적발자를 비난하는 일도 비일비재입니다.   12. 중국 자신의 지식체계를 창립해야   김: 중국이 국민국가 건설에만 목표로 하지 않고 국제, 세계적 문명대국으로 거듭나면 초우선과제가 자신의 지식체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의 지식체계가 결핍한것은 중국지식계층의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되는데, 학술부패나 재부나 권력에 예속되기를 원한다면 그 자체가 중국지식계의 비극입니다.     서양 내지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일목요연한건 중국지식인의 창조력결핍과 독립인격 자유사상의 부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지식인은 우선 “독립”하고 “자주”하여 창조력을 발굴하여 자신의 지식체계를 정립하는 길이 급선무라고 생각이 되요.   뢰:  찬성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 지식인은 창조력이 매우 부족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현재 까지도 서양지식, 사상만 따라 모방하는 유치한 상테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수 없어요!     수천년이나 왕권의 지식체계에 의존하여 왔기때문에 기본상 “의존형”지식체계에 머물러 있을수밖에 없었습니다. 49년이후 정치의 예속물로 완전히 변질되었기에 지금까지 세계에 내놓을만한 인문학적 발견, 성과가 없는건 당연하지요. 지어 일본의 인문학에 뒤진것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입니다.   김: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 수천년중에 하나의 왕조가 붕괴될때나 황권이 사회를 장악하지 못할 무렵에 새로운 사상이나 사유가 발생했지요. 지식체계를 창발하고 정립하는 유일한 도경은 권력숭배와 권세통제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환경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뢰:  이데올로기의 관성사유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지식체계를 새롭게 창립하기엔 너무 곤란합니다. 인간의 사유를 공제하기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완전한 자유공간도 불가능 합니다. 적당하게 이에올로기의 공제로 마이너스적 사유를 규제하는것도 필요하지요. 그래서 지식인의 사회 책임을 정립해야 지식체계의 정립이 스무드하게 진행될수 있다고 봐요.   김:  서양의 사상가들이 지적하다시피, 사상, 지식이 물질이익이나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전락한다면 사상도 지식도 제 구실을 못하지요. 그런 덫에 걸려버리면 참신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제대로 클수 없을건 언급할 나위도 없으니까요.   뢰:  국가가 부유하고 금전이 많다고 하여 사상과 정비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유와 금전을 요긴한 사상, 지식개발에 유용하게 쓰지 못한다면 사상은 더 궁핍해지고 문명 역시 쇠락할수 있습니다.     지식인이 사명감으로 지식과 도덕에서 분발하여 중국자신의 지식체계를 확립하는 일이 중국의 문명대국건설을 보증할수 있습니다.       대담자 소개 뢰의 (雷颐)  중국 지식인연구영역의 제일인자.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연구원.   1956년 무한에서 태어남. 1978년 길림대학 역사학부 입학. 전공은 중국근대사상사, 근대지식인과 당대 중국사 연구. 주요저작으로 《取静集》 《被延误的现代化》 《历史的进退》《历史的裂缝》《百年孤寂-中国现代知识分子十二论》등 다수   
 비      범     평범한 일을 매일 평범한 기분으로 행하는것이 비범이다.       A. 지드가 한 말이다. 지속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견지하면 그것이 곧 결실을 이루고 그 결실이 곧 비범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다.           용      사       만약 전쟁터에다 내몬다면 나는 비겁한 도주병이 되기 쉽다. 그러나 학문이나 글쓰기의 정신적 전쟁터에서 나는 절대로 용사다. 그리고 관념의 선구자도 손색이 없는 존재다.            등      불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남자가 깜깜한 밤길을 걸어 가고 있는데, 맞은켠에서 소경이 등불을 들고 걸어 오고 있었다.     남자가 소경에게 물었다.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왜 등불을 들고 가시는가요?”      소경이 대답하기를     “난 비록 보지 못하지만, 눈 뜬 사람들은 소경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문장   완벽한 문장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한다. 세상에 완벽한 문장이 없다. 더구나 완벽한 사람도 없다.       칭      찬   타자에 대하여 칭찬에 인색한 자는 마음이 협소한 사람이고 타자에 대하여 칭송만 하는 자는 마음이 부실한 사람이다.   모난 사람   세상은 둥근데 나는 모났다. 28살 때 내가 한 말이다.   내 사유의 모난 창으로 이 세상의 둥근 부조리를 무찌르고 싶었다.     도 서 관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작가 볼게스(Borges)는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는 꼭 도서관처럼 생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의 향기가 풍기는 도서관이야말로 문명을 갈구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천국같은 곳이 아닌가!       고통과 환락   심장은 두칸의 침실이 있는 집이다. 한칸엔 고통이 살고 있고 한칸엔 환락이 살고 있다. 사람은 너무 크게 웃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옆칸의 고통을 깨워줄수 있으니까. 카프카의 명언이다.          사 설 가(邪说家)   인간은 제아무리 부자라 하여도 자신의 과거를 사올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스카 월드(oscar. wilde)가 남긴 말이다. 그는 19세기 영국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가, 예술가, 독설가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 많은 작품과 함께 촌철살인의 격언,명언,잠언들을 남겼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사설가”라는 직업이 있다면 오스카월드야 말로 그 명칭에 맞는 사람으로  본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이혼의 주요 원인은 어디 있을까? 바로 결혼에 있다.” “냉철함보다 더 번뇌스러운 일은 없다.”   “사악이야말로 선량한 사람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로 타인의 특이한 매력을 해석하고 있다.”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남자의 얼굴은 그의 자서전이요,여자의 얼글은 그녀의 공상적인 작품이다.”   “신문과 문학의 구별은, 신문은 읽을꺼리가 없고 문학은 읽는 사람이 없는것.”   그의 사언(邪言)중에 이런 재미난것도 있다.   “첫째. 나는 영원히 옳다.  둘째. 만약 내가 틀렸다면 첫째를 참조하라.”   “허영심은 젊은이가 앞가슴에 단 우아한 꽃송이다.”   “인생의 가장 큰 책임감은 허위함에 있다.  그 다음의 책임감에 대하여 인간은 아직 모른다.”   “성실하지 못한 자는 위험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성실한것은 치명적이다.”   “교양있는 자는 타인을 못살게 굴고 총명한 자는 자신을 못살게 군다.”   “매 한명의 성인(圣人)에게는 다 과거가 있고  매 한명의 죄인에게는 다 미래가 있다.”      “내가 천재인것을 내놓고 나는 아무것도 신고할게 없다.”   오스카는 많은 격언을 남겼으며 격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격언은 지혜의 내구성 대체품이다.”  
213    왜 계몽은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인가? [등효망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4510  추천:63  2017-07-20
왜 계몽은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인가? 邓晓芒(등효망)+ 김문학    0. 들어가면서     등효망은 당대 중국 인문학영역, 철학연구의 대표적 학자이며,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도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몇해전부터 전화로 자주 연락하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문우로 돼버렸다. 전화에서도 들려오는 등교수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교양이 높은 학자임을 알려주는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서로 만나서 대담을 나누자고 늘 별렀지만 여의치 않다가 2016년 11월22일 등호망교수가 계시는 무한의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로부터 나의 “중일한비교문화”주제 강연의 초청이 날아 온것이 계기가 되었다.   21일 고속철도로 무한으로 간 나는 화중과기대 국제센터에서, 그리고 등교수의 댁, 서재로 초대되어 긴 시간의 대담을 하였다. 등교수는 온화하고 겸허한 성품의 신사적학자였다. 그의 철학은 물론 미학, 동서양비교문화론, 국제국내시사비평에 이르는 다 분야의 연구와 학식은 정말 태산처럼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등교수가 창립한 “신비판주의” “신실천론미학” 이론은 중국학계에서도 주목받고 있으며 독일어로 쓴 철학 논문은 서양 철학계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독일 고전철학이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학식과 교양, 지견은 박식 할뿐만아니라 늘 정치(精致)롭고 독특한 견해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등교수의 말은 사실 굵은 말발이 서 있었으며 정채로운 격언같은 말들도 매력적이었다.   대담에 앞서 등교수의 《思辩的张力--黑格尔辩证法新探》 《人之境--中西文学形象的人格结构》 《灵之舞-中西人格的表演性》 《启蒙的进化》등 저작들을 읽어두었지만 그의 박람강기와 중후한 철학적 수양과 학식에 따라가기가 힘든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등교수와 나는 세대차가 있기는 했지만 초면치고는 너무나 의기투합하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은근한 정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게끔 하였다.   게다가 옆에서 등교수부인(역시 대학교수로, 일본어연구자)께서 우리를 잘 보살펴주어서 우리는 아무 허물없는 오랜 친구처럼 며칠동안 대담과 한담을 나눌수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   아래 수차례의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해본다. 1.  철학가의 탄생   김:    이렇게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대가인 등선생님과 마주 앉아 대담을 할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오늘은 “중국의 계몽이 왜 필요한가?” 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선생님의 철학전공과 개인적 편력, 그리고 중국사회, 문화와 교육에 관련시켜 여러모로 선생님의 탁견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등:    나야 말로 동아시아문화권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3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학문활동과 비평활동을 벌리는 “동아시아의 귀재” 김선생과 대담할수 있는것에 영광이고 또 연분이라 생각합니다.   김: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이름앞에 많은 수식어와 타이틀이 붙지만 제 생각에 우선 철학영역의 거목으로서 철학가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글쓰기, 문학과 문화비평은 죄다 본질적 의미에서 철학적소스가 농후하게 깔려있어서 선생님의 철학전공에서 연구하는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과 내재적 연관성이 있는듯합니다. 그러므로 흔히 일반 문화비평가나 문학평론가들에겐 없는 중후한 철학적 교양과 동서양문화비교의 방법에서 튕겨나는 탁발한 사고와 견식은 정말 일류입니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철학을 하게 되셨는지 이 화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등: (웃음)  이 말을 하자면 책 한권 분량이 되는데  1968년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으로 내려 간 제가 독서를 좋아 했기때문에 《레닌선집》《마르크스전기》를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게 되었어요.         나는 스스로 5년 학습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마르크스고전저작뿐만아니라 입수할수 있는 중,외 철학저작과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철학에 착안점을 둔 이유는 책을 구하기 쉬웠고 철학이 모든 인간의 내용을 포괄했기에 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철학”을 통해 나는 장차 주견이 있고 지식이 풍부한 “진정한 남아”로 성장하는것이 꿈이였지요. 1976년이후 정세가 바뀌면서 더 많은 책을 접하고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독서에 심취하였습니다. 77년 대학수험이 회복되자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사전공과 무한대학 철학계 서양철학전공 대학원 시험에 다 합격되었네요. 그러나 부모님의 “우파”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해 정치심사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김:    참 "문화대혁명"의 유독이 청년의 전도를 괴롭히네요.   등:    그러다 1979년에 이르러 무한대학 철학계 석사대학원에 다시 입학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철학전공을 택하여 철학교수로 승진하여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글을 쓸수 있는게 너무 행복해요. 나는 일찍부터 생활, 생명을 하나의 정체(整体)로 간주해왔고 그리고 부단히 반성하여 그 정체에 귀환시키는데 매 부분마다 다 소중하고 버릴수 없지요.           난 전부생명으로 철학을 하는데, 바꾸어 말하면 철학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내재적 생명이고 내 인격과 성격의 구현입니다. 인간이 어느 일에 종사하든 글 쓰든 쓰레기를 청소하든 자신이 하나의 인간이라 의식할때 진정한 인간이 될수 있으며 이런 의식은 이미 철학이 되어있지요.   2.  “나는 유가(儒家)를 비판하는 유가”   김:    유명철학가, 비판적 지식인의 일원으로서 선생님은 중국 전통적 유가(儒家), 유교문화에 대한 비판을 지금까지도 견지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방법이나 문체도 노신문체가 아닌 유교적신사의 느긋함이 있으니 유가적이라고 봅니다.(웃음)   등:    잘 보아내셨네요.(웃음) 내가 유교문화를 비판하는 이유는 유교문화가 오늘 날 자기부정의 도전에 들어서야 하며, 이 절차를 통해서만 그 자신이 계속 발전할수 있는 생명력을 보전할수 있기때문이지요.        난 늘 이런 말을 잘 해요. 오로지 전통문화를 비판해야만 진정하게 전통문화를 계승발양시킬수 있다고, 그러찮으면 결국 전통문화를 죽음으로 내 몰고 말지요.   김:   근 30년래 국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유교전통문화를 비판한 지식인중에서 문장이 가장 많고 가장 긴 시간을 격렬하게 진행한 분이 등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그래요. 그러니 학자들중에서 난 “서양화” “편파적이고 과격하다”는 레테르가 붙어다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난 어차피 대인 원칙이나 일상생활에서는 유교원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내가 유교문화를 대거 비판할때도 유교정신에 따라 중국 전통지식인의 직책을 다 할뿐입니다.   김:    이번에 만나서 보니까 선생님은 과연 유교적 신사란 느낌을 대번에 주었습니다. 그러니 더 친근감이 갔지요.(웃음)   등:  간추려서 말하면, 나는 유교를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주관적 안신입명 (安心立命)에서 나는 자기 부정, 자기반성의 유가이고, 유교를 비판하는 유가입니다. 유가사상에 대한 태도에서는 추상적인 계승법과 구체적 비판법을 갖출것을 주장하며, 유교사상과 현재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중국과 서양의 2중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3.  “ 신비판주의”는 무엇인가?   김:   알만합니다. 일테면 유교의 추상적 “인의예지신”등 보편적 정신은 계승하되, 구체적인 결함에 대해서는 부정, 비판하여 새로운 건설을 시도하는 것이겠네요. 그리고 자기비판, 부정을 통하여 서양의 보편적 가치관 등을 흡수하여 중국과 서양의 2중기준을 세운다는 방법론, 저도 찬성입니다.   등:   맞아요. 감사합니다.   김:  선생님의 학문적주장이나 사상의 저변에 깔린 기본바탕은 아무래도 “ 자기반성과 비판”이란 장대한 이념이라고 보는데요. “신비판주의” 테제를 들고 나오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등:   네. 지난 "5.4"와 80년대 “신계몽”에 이어서 90년대에는 주로 사상,문화계에서 반성과 함께 복고주의, 보수주의가 회복되고 냉정한 이성적 사고를 게을리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맞서서 “신비판주의”개념을 선언했습니다. 중국문화는 진통중에 있는데 전통문화에 대하여 자기반성과 자아비판은 어떤 문화든 다 필요한 태도이지요. 중국문화가 수천년 누적 되면서 자기비판, 자기반성이 없이 어찌 계승발전할수 있겠습니까! 진보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자기비판과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신비판주의”는 "5.4정신"중에서 아래 3가지를 계승발전하자는거지요.        첫째. 회의와 비판정신.  신비판주의의 “신”(新)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5.4"의 비판정신외에도 노신을 대표로 한 자아참회정신을 돌출화 시켰는데 이 정신은 기실 "5.4비판정신"의 내향화와 심화이지요. 셋째는 신비판주의의 또 하나의 사상 원천은 노신이 제공한것, 즉 진화론에 대한 초월이지요.        구체적 방법, 내용에 대해서는 약하겠으나, “자아반성, 자아비판”을 통해 새롭게 전통문화를 관망하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기하는것이 주목적입니다.   4.   사상이 없는 지식계   김:   “자기반성. 자기비판”이 결핍한 중국에서 볼때, 저는 오히려 대중을 견인해야 할 입장에 있는 지식계, 학계의 지식인들이 더  자기비판, 반성이 결여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 내야할 목소리도 못내고 위에서 주어진 윤택한 생활에 안주하여 지식인자신의 사명감을 잊은게 오늘 중국지식인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등:   지당한 말씀입니다. 90년대이래 중국지식계에 전환이 일어나 추락했다는 말도 있는데 추락이기 보다는 본성의 폭로이지요. 중국의 사대부, 독서인은 종래로 다 이랬어요. 그들은 모종의 상황하에서는 대단히 정의감을 갖고 늠름했지만, 또 모종상황에 닥치면 너무 비열하고 야비하며 곰상스럽지요.        이는 뿌리 깊은 열근성인데 개인의 독립의식과 개인의 인격존엄이 결핍하기 때문입니다.   김:   그럼 선생님은 오늘의 지식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등:   가장 주요한 결함은 사상이 없는겁니다. 사상하려고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뱅뱅 돌면서 어떻게 이름을 날리고 실이익을 얻고자만 하니 완전히 명예와 이익의 덫에 걸렸습니다.   김:  동감입니다. 학술체제가 확실히 오늘의 지식인에게 이런 명예와 이익을 제공하는것이 현실의 경우이지요. 마라(摩罗)의 경우 중국지식인의 현실축도라고 보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지식인의 “화려한 전환”   등:   마라는 《耻辱者手记》등으로 우리시대의 자기반성과 비판의 기치를 높이 든 소장 지식인이었으나 최근에  《중국인 일어서라(中国人站起来)》란 책으로 협애한 민족주의로 “세계 3분의 2의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인민을 구하는” 구세자인양 고취하고 있지요. 난 수년래 중국 지식인의 이런 “화려한 전변”에 대해 고민을 해왔습니다. 가장 근원적인것은 역시 전통중국지식인의 “열근성”과 갈라 놓을수 없다고 보지요. 유가 사대부의 이상적인 사상이든, "5.4시기"의 지식인이 유교를 비판했지만, 그 골수속에는 유교의 자아원융(自我圆融)의 고착심리에서 해탈할수 없습니다.   김:   왕소파(王小波)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식인의 최대의 죄악은 자신을 가두는 사상감옥을 짓는것이다”고. 국가나 민족의 발전이 모종의 의미에서 지식인, 엘리트계급과 사상자들이 역사조류에 따라 관성사유의 방식을 타파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립사고, 자유정신의 상징사인 지식인이 이렇게 추락됐으니…   등:   그래요. 현재 어떤 사조는 완전히 사상해방을 반대하는 거지요. 보편적 인성, 보편적 인권사상에 대해 혐오하고 “국정(国情)”이란 방패로 이런것은 죄다 서양의 패권이라 들고 있습니다. 진보는 무엇으로 이룩합니까? 유교로 합니까? 아니지요. 현대과학정신, 기술과 사회개방, 사상해방이지요!     우리가 현대과학기술이 있다고 하여 전통으로 복귀해야 합니까?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요. 이건 태평견(太平犬)의 비겁한 이상에 지나지 않아요.   6. 중국에 대학은 있기나 하나?   김:  중국에 자주 오면서 보니까 저는 예전에 백양(柏杨)선생이 “장독”이론이 연상되네요. 그 걸죽하고 오물로 가득찬 오래 침전된 거대한 장독사회에서 중국인은 하나의 생존기술을 고안해냈다고 봅니다. 문제삼아야 할 룰, 원칙문제도 여기서는 그냥 알고도 모르는척 범벅이가 되어 흐지부지 규명이나 대책도 없이 방치되고 있어요. 학계도 사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중국에 “학술계”가 없다고 지적하셨는데 정말로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등:   중국은 말그대로 혼돈의 “거대장독사회”입니다. 몇년전 청화대학 교수 왕휘(汪晖)의 저작 표절안(2010년, 남경대학 중문계 교수 왕빈빈(王彬彬)이 청화대학 중문계 교수 왕휘의 20년전의 저작 《反抗绝尘》이 표절작이라 지적하여 큰 쟁론이 일어난 사건) 역시 저자가 함구하고 의사를 표하지 않았기때문에 장화(酱化)되고 말았어요. 언설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자가 침묵하고 당사자가 말 안하면 여러사람이 말해도 결국 말하나마나? 이거예요!(웃음)         “학계에서 말해야지 매스컴이 떠들어봤자 소용없다”이거죠. 그럼 학계는 누굽니까? 중국에 학계는 있기나 하나요? 30년대 어떤 이가 중국에는 전혀 학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80년후인 지금 여전히 없는거지요! 중국에서 학술은 근본상 “계(界)”를 이룰수 없고 “계”가 있다면 중국에는 오직 하나 있는데 바로 “혼돈계(浑沌界)”뿐입니다!   김:  (웃음)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등:   중국의 대학도 학술계도 다 강호(江湖)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7.  오물로 가득찬 “상아탑”   김:    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가지 저의 체험을 말씀드리고 싶어지네요. 제가 상해 모대학 일어계 주임의 초빙으로 외교(外教)로 3달동안 일어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정말 대학내부의 심각한 체험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대학 일어계 주임이란 자는 지식인, 교원이란 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능도, 품위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가 나를 초빙한 목적도 오로지 나를 창수 (枪手)로 이용하려는 개인의 타산에 있어요. 그가 직접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김선생처럼 저작이 많은 학자는 정말 부러워요. 나는 아직 부교수에 머물러 있는데 아들 둘 키우는게 벅차요. 요 1년안으로 정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논문2편과 저작 한권내지 역서 한권이 필요하니 나 대신 써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속으로 앙천했어요. 지금 대학에 이런 저열한 인간도 있냐고 말입니다. 내가 완곡히 거절하니까 이 주임은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히고 배후에서 비방중상하여 참 이제 백일이 되어오는데 내게는 말그대로 “악몽의 백일”이지요! 그래서 곧 사직서를 내고 관둘 예정입니다.( 그후 나는 정말 사직했다. 그 주임도 자신의 비열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니까 앙심을 품고 나와의 “외교계약”을 일방적으로 중지하였다. 이 일은 일어계 교수들의 의분을 초래하여 집단적으로 그 주임을  학교규률위원회에 고소하였다…)   등:    아, 참 안됐네요. 그런 너절한 사람을 만나서 김교수같은 동아시아의 저명한 학자가 저열한 소인배를 조우했군요. 그래요. 일찍 관두시고 좋은 체험을 했다고 ,글쓰기의 소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웃음)   김:    정말 글쓰기의 좋은 소재를 무료로 제공해준 그 주임한테 감사를 드려야죠. (웃음)   등:    김선생은 일본이란 조용한 학술분위기속에서 오래 계시다 보니 중국의 대학 학술부패에 대해서 모를수 있지요. 중국대학에서 아까 그 계주임같은 인물은 너무 많아요. 우리 집사람도 역시 계주임에게는 늘 업신여김을 당하여 온 가슴 아픈 체험을 갖고 있어요.         저열하고 덕(德)도 능력도 없는 저열한 인간이 대학, 학술계에 비일비재예요.         중국의 대학이 진짜 대학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중국대학은 아문이고 기업이고 공장, 백화점, 도박장 그리고 “전선”, “토치까”이기도 해요. 물론 대학이긴 하지만 변증적으로 봐야 합니다. 대학교수는 정객같고 막료, 사장, 깡패두목같기도 하지요.(웃음)         그러니 중국의 “학계”는 오물로 찬 “상계”요 “정계”요 또한 “강호”세계이기도 합니다.   8. 조비화(粗鄙化)가 만연하는 사회   김: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상해대학 일어계 주임이란 인간같이 비열하고 악질인간이 대학에 버젓이 활개치며 발호하는 웃끼는 일에 이해가 갑니다.        제가 1985~1991년사이 중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을때만 해도 대학은 그래도 지성의 상아탑으로서 제구실을 했고 성스러운 배움의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학에는 물질면은 진화했지만 교수, 교육의 도덕, 품성은 오히려 퇴화 됐음을 발견했어요.        최근 중국에서 유행하는 단어에 “조비(粗鄙)"라는게 있는데 이는 중국인, 중국지식인의 집중적 추락을 나타내는 상징어라고 생각해요. 북경대의 전리군(钱理群)교수나 인민대학의 장명(张鸣)교수도 이 면에 깊은 우려를 자아 낸 말씀을 하셨지요. 어떤 의미에서 대중보다 글이나 읽었다는 지식인이 더 조비화로 타락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등:   (웃음) 맞는 지적입니다. 중국이란 이 신비한 땅위에서 불가사의한 희괴망칙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지요. 근년에 대학에서 선생이고 학생이고 논문, 저작을 표절하고 연구비 탐오하고… 학술부패는 정치부패에 뒤지지 않아요.   김:   (웃음)제가 상해대학의 체험을 통해《중국의 학술부패》를 주제로 책 한권 집필 예정입니다.   등:    아주 좋습니다. 중국에서 우선 출판발행하면 좋겠네요(웃음)     무한의 화중과기대학 동제병원의 소전국(肖传国)교수가 몇년전에 10만원으로 흉수를 사서 자신의 학술부정부패를 폭로한 방주자(方舟子)씨를 구타한 사건이 전국을 진감했습니다. 소씨는 그래서 “국가정상급 과학가로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하냐”고 입을 모아 질책을 받기도 했지요.        유명학자, 원사 후선인이 이런 골목 깡패들이 하는짓을 할수 있을까? 도덕차원에서 소씨를 질타한다면 너무 창백하지요. 중국에 학자교수들이 수중에 장악한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의 성과를 갈취하고 타인을 평가하고 자신을 높이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재질있는 인재를 압제하고 자신의 말만 듣는 친신만 발탁시키는 등등… 너무 흔해요.         그러나 소씨처럼 돈으로 흉수를 사서 야밤에 코추물과 망치로 라이벌을 대처하는 과학가는 처음이에요.   김:    학자이기에 앞서 우선 인격이 깡패군요!   등:  소씨는 뇌중에는 자신의 학술생애를 고귀한 정신노동이란 의식이 없는 강호세계의 저열한 인간이지요.   김:  그러니 제가 조우한 상해 모 대학의 계주임은 말단 소인에 불과하지요. 조비화가 지식인, 대학에도 만연하니 이게 큰 중국문제입니다. 그러니 등교수님이 늘 제창해온 “중국의 계몽”이 새로운 테제로 중국사회의 큰 과제가 되는건 언급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국의 계몽”을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자고 합니다. 9.  “계몽”이란 무엇인가?   등:   늘 하는 말이지만 중국현대사에서 두차례 대규모 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20세 초의 “5.4”운동이고 또 하나는 80년대의 “사상해방운동”입니다. 이를 또 “신계몽”이라고도 부르지요. “계몽”이란 개념자체 서양에서 수입한 것인데,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정의대로 한다면 “자신이 초래한 미숙( 不成熟)상태에서 해탈하는것”이지요. 여기서 미숙상태란 “미성년상태”라고도 번역하는데, 이 상태는 “자신이 조성한것이다”또는 자기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것입니다.        서양의 계몽을 두고 우리는 흔히 “자유, 평등, 박애, 민주, 공정, 개정해방”등 구호로만 보고 그 배후에 있는 심후한 토대 즉 이런 구호에 내재된 인류보편적본질의 인도주의신념을 이해하지못했습니다.   김:   미셀 푸코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하다싶이 계몽은 어느 한차례의 운동으로 한꺼번에 도달할수 있는 목표가 아니지요. 그것은 “일종 태도 정신기질이고 철학생활이며 이런 태도, 정신 기질 또는 철학생활속에서 인간에게 내함적비판, 우리에 강제된 한계있는 역사적고찰인바,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적 실험”이라 갈파했지요. 계몽이란 이런 실험으로서 자신의 미숙한 상태을 벗어나는 과정을 부단히 탐색하는 역사과정으로 끝없는 길이라고 푸코는 주장했지요.    등:   맞어요! 그러므로 아무리 서양의 계몽이념의 구호를 내걸고 줄기차게 운동을 해도 인류의 보편적 본질의식이 없는 한 지속될수 없습니다. 서양의 계몽운동은 이점을 첫시작부터 의식하고 실천해왔기때문에 성공할수 있었습니다.        계몽사상은 늘 이성(理性)을 하나의 큰 덕목으로 삼고 지성, 용기를 가미하여 실행한것이 특징적입니다.   10. 왜 20세기 두차례 “계몽”은 실패했을까?   김:   그러니까 서양의 계몽운동은 칸트 등이 제기한 것처럼 시종 일관하나 “자기자신의 미숙상태”를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정신상의 미숙,미개상태를 지성, 이성으로 과감히 타개하고 타인에 의거하거나 인솔하기를 기다리는 그런게 아니였지요.   등:   네. 그렇지요! 이것으로 중국 20세기 "5.4운동"이나 80년대 "신계몽운동"을 따져보면 하나의 선명한 특점이 있는데 이 두차례 계몽운동이 다 어떤 지도자, 인솔자 즉” 지식엘리트”들이 민중의 머리위에 군림하여 그들에 향해 “계몽” “발몽(发蒙)”한것입니다.        한자의 계몽은 아동들에게 점차 배양교육하는 뜻이 있지요. 그러므로 서양 영어의 Enlightenment(볏추다) 나 독일어의 (Aufklarung )(징명-澄明)과는 합당하지 않아요.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도 “계몽”을 사상가, 지식인들이 각종 방식으로 군중을 선전, 계발, 발동하고 인솔하여 따르는 군중이 많은걸로 계몽의 성취를 재는 기준으로 삼았어요.         중국의 계몽운동이 언제나 특별히 그 표면적인 “센세이션효과”만 중요시 하고 이론자체에 대한 심입은 없었습니다.   김:  그러니 이택후(李泽厚)선생이 지적하다싶이 20세기 "5.4운동"의 제1차 계몽운동은 “구국”(救亡)적 정치에 의해 눌리웠지요.   등:   그렇지요. 우선 계몽가치는 구국보다 응급가치가 떨어졌고 조속히 효력을 보는것이 아니였고 다음으로 일부 계몽사상가들이 동일 “계몽”논리에 따라 대중숭배 내지 대중우매숭배의 기로에 들어섰기때문입니다.        제2차 즉 80년대 계몽운동은 비록 “구국” 정치요무에서 해탈됐고, 역사문화 측면에서 제1차 계몽보다 더욱 광활한 시야와 깊는 사고가 있었지만 보편적 인성에 대한 반성면에서 여전히 서양 계몽운동의 심도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특히 계몽가치의 기본표준 즉 “이성(理性)적 사고는 여전히 표면적인 논리이성차원에 머물러있었지요.   11. 노신의 결함   김:   탁견이시군요! 서양의 계몽이 고차의 이성(理性)에 의해 성공했다면 중국의 두차레 계몽은 결국 계몽을 소리 높이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이란 문턱에서 서성거렸고, 80년대 신계몽도 역시 낡은 화제를 다시 건져올리고 번마다 빙 돌아서 원래지점으로 돌아왔으며 본질적 진척이 없었습니다.   등:   사실 중국의 계몽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아비판, 자아반성이 없이 그냥 자아전이 (转移) 자아도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중국의 계몽이 계몽의 문어귀에서 배회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가 언제나 자주적으로 계몽을 중국전통적 반역사상과 혼동했기때문이지요. 일테면 노장은사( 老庄隐士 ),위진명류 (魏晋名流),명청이단(明清异端)이런 오랜 사조와 서양근대 계몽사조가 좀 유사한데가 있는데 주류의식에 대항하여 개성을 주장하는것이 그것이죠.   김:   그러나 중국의 이런 흐름과 근대 서양계몽은 본질적으로 이질될텐데요!   등:   그래요. "5.4계몽사상"은 바로 이를 입각점으로 많은 “신청년”을 이끌었지요. 그러나 개성해방이나 독립이나 보편적 이성(理性)을 기초로 하지 않고 그냥 개인의 기질과 성정으로  또는 청춘기의 생리적소동으로 끝난다면 그대로 소실되거나 횡류하는 물욕에 의해 추락되고 맙니다. 이런 계몽은 확실히 출로가 없지요.        노신 작품중의 여위보(吕纬浦)를 보면 당년에 그도 한다하는 “신청년”으로 열광을 보였지만 열이 식자 점차 저조기와 퇴폐기로 가라앉아 생계을 위해 시골로 하향하여 《3자경》이나 가르치고 “무가무불가(无可无不可)”의 허무주의로 전락되고 말지요. 결국 이성(理性)이 결핍한거지요.!   김:   노신 자체도 그런 약점이 있은것 같은데요?   등:   네. 노신 본인도 이면에서 결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냉철한 이성으로 중국전통문화를 비판, 사고하는데는 최고차원에 도달했지만 이 무거운 전통에 대한 적개심은 늘 그냥 여조(女吊)식으로 복수단계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인적 고독, 분개와 일종의 성정으로 돼서 동류인간들의 공명을 일으킬수 있으나 보편적 사상으로 일반인의 두뇌를 무장시킬순 없었어요. 그러니 일단 시대의 풍향이 바뀌면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고 그냥 잔소리만 하는 귀찮은 영감으로 치기 일쑤였습니다.   12.  80년대의 향수   김:   좋은 말씀입니다. 기실 우리가 거듭 언급해온 이성(理性)이란 단어도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어이지요. 중국 철학에 고유한 개념은 아닙니다.   등:   그래요. 일본인이 reason 을 음역하여 한자어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웃끼는건 우리에게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사유, 즉 우리의 계몽을 반성하는 “계몽에 대한 반성”이 결핍합니다. 우리는 모든것을 회의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성을 제도로 감히 활동하지를 못하면서 이성을 가볍게 보는 그런 고약한 버릇이 있어요. 이게 전형적 아Q방식이 아닙니까?(웃음)   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선생님이나 저나 세대차이는 있지만 80년대 사상, 문화의 계몽기에 대한 공동한 문화체험을 갖고 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현대의 지식인 내지 대중들이 사상, 소질수준은 80년대보다 오히려 후퇴된것 같네요. 80년대에 대한 공동한 문화체험, 향수가 가끔 나를 유혹해요. 80년대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사상이 해방되고 활기를 띤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1984년은 조지 오웰이 동명소설에서 공포스러운 사회를 묘사했지만 중국에서는 신계몽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요. 사상계에서는 《미래을 향하여(走向未来)》 시리즈가 정식 간행. 중국문화서원이 설립되고 《독서》잡지의 주요독자는 청년지식인이 맡았지요.        그때 “문혁”이후 졸업한 대학생들이 독립적 표현을 하게 되고 역사무대로 진출했는바 문학, 영화, 인문연구 등 분야에서 전례없는 “신사조”가 출현되었으며 저도 늘 밤 늦에까지 책을 탐독하고 사고를 하였습니다.   등:   그래요! 정말로 80년대는 생기 발랄한 시대였고 모종의미에서 중국문화의 활성기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2010년대는 계몽과 모든 면에서 80년대와는 양상이 다르고 어떤면에서는 후퇴했다는 느낌이 드는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칸트, 푸코적의미의 계몽, 신계몽을 지속적으로 하는것이 우리 중국인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13.  지식인이여,  자신을 계몽하라   김:   저는 근년에 중국의 물질적진보와 인간소질이 퇴보를 “물진인퇴(物进人退)”란 4자로 표현하고 《중국인은 진화했는가?》한 일본어 저작을 출판했어요.        80년대이래  물질적부유와 함께 대중은 물론 지식인의 사상이 퇴보되었습니다. 80년대의 계몽이 실패한 이유의 하나가 지식인이 사상으로 정치를 개변하거나 또는 정치를 이용하여 계몽운동을 추진하려한 것이였습니다. 정치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큽니다.나는 정치나 타자에 의거하려는 독립성부재, 사상부재, 그리고 명예와 이익의 포로가 되어 사상도, 사명도 포기한 안일한 지식인이 중국에 너무 많은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계몽이란 타자를 강제적으로 하라고 구세주, 스승인듯 군림하기보다는 장기적 사상의 질곡속에서 자기 스스로 계몽을 하고 “이성”으로 사고를 하면서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봐요. 지식은 누굴 계몽하기전에 우선 자기 스스로를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웃음)        학술부패, 인격오염의 대학 지식인,교직원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어요.   등:   좋은 말씀이군요. 물질인퇴의 중국은 사실 지식인의 경우를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물질의 안락에 안주하여 사상을 하지 않고 명예나 이익을 갈취하고 수중의 작은 권리를 남용하여 행패를 부리는 지식인 (또는 그냥 교직생활자)이 중국에 어디 한둘입니까? 김선생이 상해대학에서 조우한 그런 주임도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고 너무 많지요. 그래서 내가 중국대학은 강호(江湖)이고 깡패무리라고 과격한 말을 했던겁니다.        우선 고차원의 계몽 운운하기전에 김선생의 지적대로 그런 비열한 후퇴한 지식인의 계몽이 필요하지요!         어제 김선생이 우리 철학계에서 한 《중일한 비교문화》강연은 정말 정채로웠습니다. 일본의 학술,청렴, 학자, 지식인들의 학술에만 정진하는 그런 학술을 할수 있는 자유, 독립의 분위기가 부럽기만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알면 알수록 따라 배울점이 많다는것을 정말 절실히 느꼈어요. 14. 시대는 변했다 그리고 계몽은 ….   김:   감사합니다. 여하튼 중국은 80년대 계몽이후 2000년대의 현재도 계몽이 자타로 절박히 필요한 시대라고 보는데요. 선생님은 신계몽을 어떻게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   20세기 두차례의 계몽은 사회구조와 경제기초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층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지요.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국정이 변하고 자연경제가 해체되고 도시화가 국민생활의 중심으로 되였습니다.       이런한 사회구조와 경제기초가 사상기초를 만들었고 이런 상황하에서 신계몽을 하면 효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럼 신계몽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요?   등:   제일 큰 특징은 소수의 지식엘리트들이 국외에서 신지식체계를 수입하여 사회문화를 개조하는게 아니라 중국사회 자체가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 지식인들께 강열한 질호를 발하는거지요. 지식인으로 하여금 신생활방식을 위하여 새로운 규범과 의식형태의 근거를 제공할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 두차례 계몽과 비교하여 순차가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일부 지식엘리트들이 높은 곳에서 군중을 동원하여 사회를 개변하려 했지만 오늘은 백성들이 문제를 보고 하층에서 지식엘리트들에게 호소하지요.   김:   꺼꾸로 하층 대중이 지식인에게 요구를 하겠군요.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대라고.   등:  그래요. 그러니 지식인이 이런 호소에 호응하지 못하면 실격이 되버리지요. 두번째 특징은 전번 두차례 계몽보다 이론적으로 중요한 추진을 하여 현실생활에 적응시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애국주의, 중화민족 진흥등 이념으로 지식인들이 호소를 했는데 오늘날 백성들에게 이런 공허한 이념이 안 먹히거든요. 그러니 지금의 계몽은 대중들의 생활과 밀접히 연결되고 일상화 계몽이 선양하는 내용이 밀착돼어야 합니다.   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등:  첫째. 신계몽의 특점은 과학으로부터 이성(理性)으로 심입해야 합니다. 이성정신에는 회의정신은 비판적 사유를 말하는데 이게 중국인에게 가장 부족하지요.  논리사고는 추리사유를 하는것인데 이러한 이성정신은 실용목적을 초월한것입니다.          두번째는 민주에서 인권으로 심입해야 하는데 이는 민중의 생활과 직접적 관계가 있고 실제에 부합되는것입니다.          세번째는 보편적가치에 대한 총체적 파악. 보편적가치 하면 서양의 개념이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무지한 생각이지요. 어떠한 보편적 가치도 모종의 문화가 승재(承载)하기 마련인데 서양문화가 승재했다하여 그것을 쉽게 부정해버리면 최종적으로 보편가치를 다 부정하게 돼버리지요.        서양의 보편적가치는 중국의 전통적 보편가치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중국전통적보편가치를 포괄한것은 사실입니다.   15.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는 무엇인가?   김:   계몽의 미래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등:   네. 우선 계몽이 해야할 일에 대해 말씀올리겠습니다. 첫째, 이성으로 천리(天理)를 대항하는겁니다. 중국전통의 천리와 이성는 판이한 개념으로서 천리는 일종 규칙인바 말로 표달하기 어려운 그런 비이성적 관습사유이지요. 이성으로 이런 천리를 타개하고 이성과 자유정신으로 천리의 “이리살인(以理杀人)”의 관습을 수습해야 해요.           두번째는 인권개념으로 자유를 재건해야 합니다. 법적으로 인간의 자유적의사와 인격의 존엄을 보호해야 하지요.                 세번째는 건전한 계몽상태를 수립하는겁니다. 백성들을 미숙한 아이로 보지 말고 건전한 심성으로 계몽에 투신해야 합니다. 만일 계몽사상가가 자신의 생각을 정치적 힘으로 변질시킨다면 계몽의 이질화(异化)가 생겨요.   김:   저도 완전 동감입니다. 요즘 국내에 자주 와서 보면 “국학열(国学热)”이 붐으로 되고 있으며 이런 국학열이 계몽을 뒤덮을 기세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이건 이상할것 없어요. 왜냐하면 중국 수천년의 관성이 바로 정체(停滞)와 후퇴를 초월로 보거나 지어는 썩고 낡은것을 신기한 보배로 여기니까요.   김:   중국의 미래에  대하여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장기적으로는 낙관적이지만 근기(近期)는 별로 희망을 안겁니다. 관용, 민주, 자유, 인권 이런 중요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팩터들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노신이 말했어요. “가장 무서운건 꿈에서 깨어나서 갈 길을 못찾는것”이라고. 오늘은 노신의 시대가 아니지요. 이미 역사환경이 거대한 변화가 생겼지요.         꿈에서 깬뒤 유일한 출로는 일상생활중 의식적으로 보편적가치를 관철하고 국제사회에 들어가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전통으로 복귀하는건 중국의 “출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죽음의 길이지요.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이 전례를 보여주었듯이 세계의 일원으로 변신하는것입니다.        결론은 계몽이야말로 현대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입니다!          (끝)   대담자 소개    등효망(邓晓芒)    저명한 철학가. 문화비평가.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 교수.  1948년생. 1979년 초중학력으로 무한대학 철학계 석사과정 입학. 1982년 석사학위 취득후 무한대 철학계 교수, 박사생지도교사, 서양철학연구소 소장 역임.       중화외국철학사학회 상무이사. 2009년 말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 교수.  주요연구영역은 독일 철학, 미학, 문화심리학, 중서비교문화등 중요저서로《思辨的张力》《冥河的摆渡者》《灵之舞》《人之境》《灵魂之旅》《新批判主意》《启蒙的进化》역서로 칸트의 《纯粹理性批判》등  
212    (91)조선 신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신약전서》 댓글:  조회:3343  추천:41  2017-07-1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91) 김문학   조선 신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신약전서》       1900년의 세계는 격동의 한해였다. 3~4월에 조선의 활빈당이 크게 출몰한다. 5월 1일 일본 도꾜에서 전차운행이 개시된다. 8월 청국 의화단운동으로 인해 8개국 련합군이 북경을 점령한다. 12월 오스트랄리아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을 간행한다.     또 하나 특기해야 할 일이 생긴다. 즉 그해 한글로 번역된 성경 《신약전서》가 처음으로 출간된다. 이는 그저 성경출판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분명히 중대한 의의를 갖춘 대사건이다.     개화기의 조선반도에 밀려온 “근대”는 낯설고 이상한 푸른 눈동자의 서양인, 서양인이라는 이름의 타자(他者)였다. “근대”란 문명은 아시아에 있어서 서양이란 타이틀로 나타나면서 위협적인, 때로는 매력적인 얼굴을 지니고있었다.     우리의 통념의 하나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있는 한글은 수백년전부터 보급되고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다는것이다. 그러나 이 통념이야말로 비상식적인 착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의 5백여년 이래 한글은 종주국 문명대국의 한문(漢文)의 정통성에 짓눌려 부녀자들만 사용하는 천대꾸러기 아웃사이더적 멸시의 상대였던것이다.     조선의 문자언어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준것은 조선인 자신이기보다는 새로 류입된 기독교였다. 서양에서 솔선 조선에 들어온 문명의 “근대”품목은 이데올로기, 사상, 신식무기 등 허다한것이였는데 기독교가 그중 중요한 품목이였다.     조선의 기독교전통은 임진왜란 당시 뽀루뚜갈의 세스페데스가 1594년 종군신부로 들어오면서 조선땅을 밟앗다.     한국의 문학비평가이며 시인이기도 한 장석주씨는 이렇게 지적하고있다. “두말할 나위없이 한글은 우리의 고유한 문자언어이다. 한국문학은 당연히 한국사람에 의해 한글로 씌여진 문학을 가리킨다. 19세기말 서구문물과 함께 들어온 개화기의 기독교는 이 땅의 낡은 전통과 유습, 페쇄적 성향을 깨뜨리고 새로운 문화를 일구던 첨병이였다.                                       그뿐아니라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쉽고 간결한 문자언어인 한글을 새로이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낳음으로써 20세기 한국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한다.”(《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1790년대에 조선에는 기독교신도 3만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실권자 대원군의 박해로 신도와 외국인 선교사가 참형당하는 사건이 빈발하며 1884년의 갑신혁명을 거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면서 기독교문화가 정착된다.     그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레 등 선교사들은 선교 및 의료교육을 보급하기 위해 서구문명을 갈망하는 조선에 신문화운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아펜젤레는 고종의 허락으로 배재학당을, 또 다른 선교사들도 학교와 교회를 륙속 설립한다.     언더우드는 기독교를 보급시키기 위해 고심한 끝에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것이 무엇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성경번역작업이 1887년에 시작되여 1900년에 《신약전서》의 한글판이 출간된다.     번역자의 한사람인 아펜젤레는 성경번역을 “두 나라를 잇는 철도부설과도 같다. 파나마운하의 개설공사가 이보다 더 어렵지 않았을것이다”고 평가한다.    문호 이광수 역시 이 업적에 대해 1917년 “예수교가 조선에 준 은혜”라는 글에서 이렇게 높이 평가한다. “아마 조선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시초일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문학이 건설된다하면 그 문학사의 제일면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것이다.”     1904년과 1906년에 또 《신약전서》는 부분적 개정을 하였으며 이어서 1938년에 개역이 다시 되고 1952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개정판이 나온다.     장석주씨의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와 한국문학의 관계에서 한국 근대시의 모태로 된 창가(唱歌) 장르의 발전에 개신교가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기독교의 “찬미가”, “찬송가” 등이 조선 근대의 창가를 낳는데 결정적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또한 한국 근대 신문과 잡지 발전에 기여하는바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나온 신문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등 신문이나 관련 성교원리 등 책자, 신문, 출판업에 추진작용을 한다.     기독교는 조선 근대 신문학의 탄생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데 그것은 한글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독교의 활약은 한글 사용, 한글로 된 근대 조선문학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공로를 부인할수 없다. 근대사에서 발견되는것은 이같이 외래문화에 따라 즉 타자가 우리자신의 문화를 추진시킨 작용을 과소평가할수 없다는 점이다. 인터넷료녕신문 2010-11-12
용서 남은 될수록 용서 해주고 자기 자신은 결코 용서 하지 말라. 푸블릴리우스 시루스의 격언이다.   신 어느 곳에서든지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신은 우리의 가슴에 머무를 것이다. L.N  톨스토이의 말이다.     천사와 악마 지옥마다 천사가 숨어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와 만나는 가에 있다. 천국마다 악마가 숨어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를 피하는 가에 있다.   대만의 산문작가 왕정균(王鼎钧)의 말이다 좋은 귀인을 만나기 쉽지 않다.그리고 나쁜 사람은 스스로 피해가야 한다     일무소유(一无所有) 문화대혁명의 유례없는 재난으로 중국 대륙은 80년대까지만하여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일무소유의 지경이었다. 더 참담한것은 이런 일무소유에 대한 진솔한 하소연조차도 금지했던 세월이다.   가수 최건의 록 “일무소유”는 중국국민의 가슴에 서린 한을 일거에 풀어주었다. 그때로부터 중국인은 부유와 자유를 향한 질주를 시작했다. 최건의 노랫소리는 욕망에 대한 중국인의 추구를 호소한 첫 스타트이다. 최건은 조선족이기도 하다.   도 (道) 중국 대륙의 엉터리 한자 간약화에 골탕을 먹은 지식인들이 많았다. 1977년 《제2차한자간화방안》에 따라, 지식인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한자 853자를 간약화했다. 가장 한심한것이 도리를 따지는 도(道)자였다. 그것은 “首”자를 빼버리고 칼 “刀”자를 넣었으니, “칼로 머리를 베고, 칼로 도리를 따지니, 그 누가 도리를 감히 따질수 있겠냐”고 지식인들이 불만이 컸다고 한다. 사실 그때도 칼을 들고 호시탐탐 도리를 따지는 살벌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개혁개방은 1년뒤 1978년부터니까. 본명 내 이름때문에 나는 늘 독자나 기자로부터 “이름이 본명인가? 필명인가?”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론 본명이다. 우리 형제는 학자돌림, 동생은 명학, 합치면 문명(文明)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공부를 많이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서 풀기 위해, 이름을 지었다고 하셨다. “문”도 공부고 “학”도 공부니 공부를 많이 하여 학자, 지식인이 되는것이 부모나 나 자신의 꿈이었다.   연령대 공자님 왈 30에 서고, 40이 불혹이라 했지만, 나는오히려 “불혹”을”유혹”이라 40대 들어서면서 생각 했다.     연령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기 보다는 계속 한틀에 고정시키지 말고 유연성 있는  역량으로 자기를 변화시키고 탈바꿈을 해서 스스로 진화시켜야 한다.     물리적 나이보다도 관념적으로 우선 굳어져 버리는것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나이보다 유치한 치기와 광기. 그리고 끊임없는 분기, 궐기, 나는 이런 인생을 추구한다.   타고난 아웃사이더 나는 타고난 아웃사이더이다. 여러 의미의 차원에서 이 말의 해석이 가능하다. 중국어,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중국문화, 한국문화와 일본문화,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의 경계선에 서서 방황하는 아웃사이더.   나는 언어, 민족, 문화, 국적 그리고 관념에서도 아웃사이더다. 그러면서 나는 내 몸을 감은 문화적, 관념적 옷을 한벌 한벌씩 벗기고 “조선족”이란 핵이 남아 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너그러움  “모든 도덕품성중에서도 선량과 관용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품성이다.”                               영국의 위대한 철학가 루소(RUSSEII)의 말이다.   고독한 늑대     나는 스스로 고독한 외톨박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어에 “잇피키 오오카미”(고독한 한마리 늑대)란 말이 있듯이 나는 그런 오오카미다.       소속된 조직, 집단에서는 늘 인정을 못 받고, 또 별로 받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다. 혼자서 하는게 즐겁고 자유롭다. 같이 하면 신이 나지않고 리더십도 모자라고 혼자해야 편하다.       학문은 사전을 편찬하거나 어떤 통사를 쓰는 집단행위이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의 정신과 육체적 활동이다.       나는 자신을 즐거운 오오카미라고 간주하고 살고 있다.     그 누구의 시선에나 평판에 신경이 무딘게 나다.   맥주     목이 컬컬해서, 고독해서 맥주를 마시는게 아니다.     내게 있어서는 고독이란 맥주를 마시는것이다. 여름날의 시원한 생맥주처럼 고독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고독속에서 학문의 실적, 글이 마신 맥주 만큼 쏟아 낸다.  
210    23. 간단 초타마 국가의 운명 목욕 대중목욕탕 진주 공포 댓글:  조회:3127  추천:36  2017-06-19
간  단 마음이 단순하면 일도 간단 해지고 심사가 복잡하면 일도 복잡해진다.   초 타 마 ( 草 他 妈 ) 2008년 중국을 진감한 3록(三鹿)분유사건이 터졌다. 석가장  3록 그룹에서 생산한 3록패 유아용분유에 유아의 건강을 엄중하게 해치는 독소가 첨가 되었던 것이 폭로되였다. 어떤 중국인이 이 사건을 풍자한 단문을 지었다.   3록분유사건이 터진뒤, 백성들은 유아들의 신장결석을 유발한 메라민이 어떻게 분유속에 섞이게 됐는가를 궁금해하였다. 3록회사가 핑계 돼기를 “이는 악질 유농들의 책임이다” 그러자 유농들이 반박하기를 “이는 소수의 저질 젖소들이 한짓이다”   젖소가 이말에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다가 왈 “풀(草)” 풀이 듣고 있다가 억울해서 눈물을 머금고 말하기를 “나도 우리 엄마 (妈)가 낳은것이니,우리 엄마 탓을 하세요!” 이쯤되어 진상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사건의 최후의 흑막은 원래 바로 초타마(草他妈)가 한 일이다!   치사하고 졸렬한 책임 회피행위를 비꼰 말이 “草他妈!”이다. 사실 아시다시피 온 사회에 草他妈는 어디 3록사건의 당사자뿐인가? 草他妈가 없으면 중국 현대의 허다한 현상도 없다.   국가의 운명 한 국가의 운명은 그 나라의 청년교육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이다   목   욕     백여년전 서양의 관찰가, 기자, 전도사, 여행가, 외교관 등이 중,일,한 동아시아 3국의 위생청결정도를 기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그중에서 목욕에 관한 기술이 흥미롭다.   “일본인은 목욕도 잘 하고 옷도 잘 갈아 입는다. 조선인은 목욕은 잘 안하지만 옷은 잘 갈아입는다. 그런데 중국인은 목욕도 잘 안하거니와 옷도 잘 안 갈아 입는다.”   백여년이 지난 현재 한국과 일본은 같은 수준의 청결도를 자랑하지만 중국인에 대해서는 쉽게 그 청결도를 칭찬할 여건이 못되니 안타깝다.   대 중 목 욕 탕 1950년대 신중국 건국초기 도시에서 아이들이 빨강 삼각기를 흔들며 외쳤다고 한다. “쑤수 아이 제말 좀 들어보세요. 제멋대로 아무데나 가래침 뱉지 마시길, 그렇잖으면 5십전 벌금이에요.”   1951년 7월20일 상해 《청년보》에 황승국(黄承国)의사의 《당신은 목욕했습니까?》란 글이 실렸다. 그 내용은 자주 목욕하지 않으면 몸이 땀 때문에 더러워지고 구린내가 나며 목욕해야만 피부청결, 혈액순환을 보장해 피부병을 감소하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증강할수 있다고 유치원아들에게 가르치는 어조로 쓰고 있어 흥미롭다.   1958년에 안휘성에 “농촌여성이 처음으로 공중욕탕에 들어가서 목욕한”일이 뉴스의 각광을 받기까지 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도시나 농촌에도 샤워시설이 구비돼있지만 여전히 일본인,한국인과 비교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믿기지 않으면 상해나 북경의 공공버스나 지하철을 승차해보시면, 그 체취나 옷 차림에서 금방 알아낼것이다.   역시, 그 말이다. 국민성, 민족성은 외곽에 있는 부분은 시대의 진화에 따라 변할수 있지만 내핵 관념적인 부분은 100년으로는 변하기는 모자라다. 300년은 필요하다고 예상된다.   진   주 (1)진주는 조개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그가 입을 열면 세상의 부인들이 즐거워 한다.   (2)귀한 진주를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는데  하찮은 양초가 사용된다.                                 --《탈무드》    공 포 인간의 마음에 오는 최초의 공포는 신에게서 버림받는 일이다.                                 --F. M. 뮐러의 말이다.  
209    (90) 애국지사 황현의 비장한 죽음 댓글:  조회:3263  추천:28  2017-04-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90) 김문학   애국지사 황현의 비장한 죽음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공포, 경술국치에 이기지 못해 자결한 우국지사 선비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글에서 말하려는 희대의 천재적지식인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이다.     당시의 여러 자료를 섭렵해보아도 경술국치에 비분하여 스스로 자살을 택한 우국지사는 그리 수적으로 많지 않았다.     하나의 왕조로서 조선왕조(500년 지속)는 하루 아침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망했다. 더구나 이는 왕조의 멸망과 함께 수많은 조선동포들에게는 나라의 멸망ㅡ망국과 고유한 언어, 문화를 가진 천수백만 인구의 겨레가 이민족지배의 굴욕적인 변화였다.     매천 황현의 죽음은 많은 겨레들의 굴욕적 심경을 대변하는 사건이기도 할것이다. 필자가 20년전 일본에 류학생으로 와서 춘원 이광수와 함께 대단히 숭경하는 민족의 문인이 황현이였다. 처음 황현의 저작 《매천야록》을 접하게 된것은 1990년 일본 국서간행회에서 출간한(박상득 역) 책이였다.     한문 원문을 일본어로 역술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황현의 고매한 선비적인 기풍과 유머스럽고 평명한 문체로 엮어나가는 조선 근대사의 뒤면을 읽을수가 있었다.     이광수의 장편소설을 읽은 감동만큼 필자는 매천의 텍스트에 깊숙이 빠져들어갔던 기억은 오늘도 뇌리속에 새롭다.     당시만 해도 우국지사의 수준을 초월하여 민족의 렬사적의미의 인물 매천에 대한 한국내에서의 조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곳저곳에서 나름대로 그에 관한 글이나 자료를 간신히 얻을수 있을뿐이였다.     갑오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과 동년인 1855년 출생인 황현은 호가 매천(梅泉)이며 전라도 구례사람이였다.     유년시절때부터 린근에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바 시와 글에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시절에는 서울에 상경하여 문명(文名)을 자랑하던 이건창(怏建昌)이나 김택영(金澤榮) 등 문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87년과 1888년에 두번씩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두번 다 최우수 성적을 따낸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경장을 겪은 국운이 기울어져가는데도 불구하고 민씨정권에 붙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정신없는 관료들의 극도의 부패타락상을 보고 그는 관직을 멀리하게 된다.     그후 곧 시골고향으로 하향하여 은둔생활을 보낸다. 벗들의 재삼 출세권고를 뿌리치고 독서와 글짓기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접하자 황현은 비분강개한 나머지 청나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려비부족으로 단념해버렸다.                                                    1910년 8월 일본제국의 한국합병에 56세의 황현은 이렇게 절명시를 남긴다. “나라를 위해 그 어느 누구도 순사(殉死)하는 자가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 절명시는 장지연의 《진주경남일보》에 게재되기도 한다. 그는 고향에서 대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죽음을 택한다. 그의 생애야말로 “조선 최후의 기개높은 선비”였다.     그가 남긴 유저로는 《매천집》, 《매천야록》이 있으나 전자는 친구 김택영에 의해 상해에서 간행되여 중국에서 그의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리고 《매천야록》에 대하여 생전에 황현은 바깥사람에게 보이지 말라고 자손에게 일렀다고 한다. 일제강점하에 용납될수 없는 기록임을 알았기때문일것이다. 1939년 일제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가 이 기록을 발견하지만 비밀에 붙여버린다. 광복후에 이 책은 해빛을 보게 되여 1955년 출판된 이래 줄곧 조선말기 력사, 인물연구의 기초자료로 지목되여왔다.     황현이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것은 그가 39세인 1894년이라 추정한다. 비록 제목에 야사라는 뜻의 “야록”이란 단어가 붙었으나 그 시대의 력사사건과 인물일화 등이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여있어 사학계에서는 야가사 아닌 실록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일본사학계에서도 이 책은 당시 조선 인물, 력사를 인식하는 중요한 자료로 거듭 인용, 고찰하기도 한다.     이 짧은 글에서 《매천야록》의 전부를 다 소개하기는 지난(至難)한 일이지만 간단하게 말하여 조선말기의 력사사건 이를테면 임오군란, 청일전쟁, 로일전쟁이나 중요한 력사사건, 일본인에 의한 지극히 야만적인 민비(명성황후)의 암살사건, 대원군 집권기에 대원군의 인물상과 그 주변의 인물들에 관한 일화, 조선조내부의 당쟁이나 권력투쟁, 을사오적, 고종일화 등이 수록되여있다. 이 책에는 조선말기와 일제의 침략력사가 엇갈리면서 속속 이어지는 격동의 근대사드라마를 보는듯 하다.     외국인이 근대 조선을 바라본 명저로는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새비지.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할버트의 《대한제국 멸망기》 그리고 메켄지의 《조선의 비극》 등이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조선인 자체가 쓴 당시의 조선지, 인물사적 가치로 《매천야록》은 두말할 나위없이 명저의 반렬에 올라야 한다.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죽으면서도 우리에게 위대한 로작을 남기고 갔다. 그런 그를 한국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구례의 황현 집터에는 유품과 같이 그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있다고 한다. 한번 꼭 찾아가 참배하고싶은 곳이다. 
208    (89)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또다른 모습 댓글:  조회:3679  추천:50  2017-04-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9) 김문학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또다른 모습     필자가 소장한 동아시아 근대 명사(名士)의 친필유묵에는 손문, 리홍장, 원세개, 이등박문,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족자도 2점 들어있다.       이완용의 글씨는 과연 명필이다. “명필”이라는 말이 가장 실감나는 이완용의 글씨는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룡비봉무(龍飛鳳舞)”의 경지에 달하고있다.   일제시기 명치천황도 그의 글씨에 매료되여 직접 본인에게 붓글씨를 써달라고 청했다는 일화는 또한 너무나 유명하다. 이런 희대의 명필가에게 또한 희대의 친일파 “매국노”라는 레테르가 붙어있다.   오늘날까지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이다. 학계에서나 민간에서나 그의 업적을 조금이나마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 당사자는 무조건 격심한 지탄을 받아 사회적으로 매장할 기세로 물매를 맞게 된다.   그런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1910년 8월 22일 당시의 총리로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선통감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위압으로 체결한 인물.   이에 앞서 1905년 일한보호조약(즉 일사보호조약)을 체결할 때도 학부대신(교육부 장관)으로서의 이완용은 조약에 찬동하였다. 그와 같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다른 4명도 악명자자한 “을사오적”으로 불리고 있다.   이완용의 “매국노”라는 고깔모자를 뒤집어보면 거기에는 또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이완용(1858~1926)은 자는 경덕, 호는 일당(一堂)으로 경기도 광주출신인데 유년시기부터 총명한 어린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10살 나던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여 이 집의 장손으로 된다. 1882년 특별 과거시험에 합격해 규장각, 사강원에서 관리로 있다가 1886년 신식학교 육영원에 입학하여 영어, 지리, 력사 등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부터 3년 동안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다. 1890 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거치며 관운이 형통해 189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된다. 1896년에는 외무대신 겸 농상공부대신의 요직에 앉는다. 그뒤 독립활동으로 좌천되였다가 1905년 다시 학부대신직을 복직하게 된다. 그해 11월 을사보호조약에 솔선 서명하여 앞서 진술한바와 같이 “을사오적”의 필두로 지목되였다.   1907년 그는 통감 이토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된다. 1907년말 헤이그밀사사건이 터지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하여 이완용을 통해 고종의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일에 분노한 서민들이 이완용자택에 불을 지르며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의 습격으로 이완용은 부상을 입게 된다.   이어서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일본의 강압하에서 한국병합조약을 체결한다.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 1920년에는 후작, 1927년 69세 때 이재명에게 습격당한 상처후유증으로 절명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완용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이며 그 인격은 대중들에게 흠모할바 많았는바 그의 사망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고 추모했다. 또한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후 최대의 규모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매국노”였던 그가 조선인민의 이같은 인기를 얻었다는것 자체는 어딘가 다른 무엇을 설명하는듯 하다. 이완용의 생애를 반추해보아 그가 지금껏 교과서에서까지 매도하는 “매국노”로 나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존재이다.   우선 그가 한국병합조약에 서명한것은 “조선의 전제왕조가 끝까지 문명개화를 거부하고 과도한 사치로 극빈과 기아로 허덕이는 민족을 방치한 상황을 감안해서 일본의 협력으로나마 민족의 재흥을 기하려는데서였다.” 명지대 교수이며 현재 가야대학 객원교수인 최기호씨는 《력사재검증.일한합병》에서 이렇게 언급하고있다. “그들이 당시의 조선국내의 상황에서 하는수 없이 정치선택을 한것이지, 오히려 정권담당자의 책임으로서 당연한 행동을 했을것이다”고 최교수는 덧붙인다.   필자가 섭렵한 력사자료에 따르면 친일파라는 이완용은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했으며 만족자존심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동양 최고의 명필로서 지금까지도 독립문이나 왕궁에 그의 필적이 남아있다. 그의 인격은 고매했으며 외무대신 재임중에도 로씨야의 조선병합정책을 중지시킨 공로를 세웠다.   또한 관직에 있은 그는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늘 거리를 두고 활동했다. 1896년 미국망명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모임에서 만난후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897년 1월 23일자 《독립신문》에는 이완용의 독립평화활동에 대해 “자기 힘껏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이씨가 갈리게 되면 이씨보다 나은이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고 격찬한다. 서재필 역시 1897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에서 이완용의 애국에 대해 칭찬을 하고있다.      1919년 3.1독립운동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였는데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것이라는 리유로 사양했다. 당시 이완용에 대해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선인에게 막대한 영향력과 존경을 받은 인물로 보인다. 그는 실력양성사상을 견지한 인물로서 계란에 돌 던지기식 무단행동을 삼가하자는 방침이였다.   그의 장례식에 조선의 추모객이 10리가 넘게 이어졌으니 그의 위망과 인기를 보아낼수 있다.  
207    (88) 조선의 3대 천재 댓글:  조회:3688  추천:23  2017-03-2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8) 김문학   조선의 3대 천재      1909년 11월, 일본에서 최남선은 홍명희의 주선으로 이광수와 초대면한다. 당시 최남선은 20세, 홍명희가 22세, 이광수가 18세. 모두 혈기왕성한 청년이였다. 이것이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린 최, 이, 홍의 3자의 첫 만남이였다.     조선 근대사의 특기해야 할 력사적인 상봉이였다. 일설은 1906년 3자가 동경에서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3대 천재의 만남은 그뒤 전개되는 근대 조선의 문학, 언론, 출판, 독립운동, 친일 등 령역을 통털어 3자의 동시대적 련결성이 있는 활동에서 잘 로정되고있다.     사실 1909년만 해도 18세의 이광수는 무명의 젊은 류학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듯이 최남선은 이광수와 첫 대면하면서 당장에서 조선문단의 첫손가락 꼽을수 있는 “천재”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당시 《소년》이란 한국 최초의 잡지를 창간한 최남선은 이광수와 홍명희에게 잡지를 같이 잘 운영해나가자고 기대를 건다. 1910년 3월호 《소년》에 글을 실어 최남선은 이광수와 홍명희가 금후 잡지발행에 참여하게 돼 《소년》의 전도는 광명이라고 흔연히 말한다.     필자의 책상머리에는 지금 이 3대 천재의 사진이 놓여있다. 최남선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문인이기보다는 투박한 농군같은 질박한 사나이의 이미지가 앞선다. 이광수는 대단한 미남이다. 36세에 《무정》집필시기 한복차림의 얼굴사진이나 상해림시정부 《독립신문》의 사장으로 있을 때 여럿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도 이목구비가 단정한 그는 1930년대 남자배우 뺨치는 흰물가리의 미남이다. 필자의 속단이지만 조선 근대의 문화사에서 이광수를 따를 미남형은 없을것이다. 총명하고 두뇌명석한 그 빛발이 얼굴에서 뿜는듯 하다. 대조적으로 대머리에 안경을 쓴 홍명희는 로학구적인 수척형 지식인의 전형적 얼굴을 하고있다.       이들은 각기 대조적인 얼굴모습을 하고있는 대지식인, 문인이였으나 그들의 큰 공통점은 하나 있는바 바로 일본 류학과 생활체험이 있는 당시로서는 일본을 통해 서양의 최선진문물을 수용한 천재들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조선의 근대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근대의 천재 역시 일본이란 영향하에서 탄생, 활약하게 된다.     최남선(1890~1957)과 이광수(1892~1950)는 필자가 최고로 추앙하는 근대 동포문인이다. 그중에서도 이광수에 대한 애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두분은 한국 신문학을 낳은 량대 거두로서 이들을 빼고 한국 근대문화사를 거론할수 없다.     최남선은 근대 한국의 문화령역에서 거의 “최초”라는 모든 일을 휩쓴 인물이다. 근대시인, 시조시인, 력사학가, 사상가, 계몽가, 출판가, 수필가, 실업자, 이 앞에 모두 “최초”가 붙는다.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가일뿐만아니라 시, 수필, 평론, 희곡 모든 분야에서 길을 개척한 문인이다. 그리고 사상가, 계몽가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박람강기, 해박한 지식, 예리한 통찰력, 선진적인 예지력, 언어적 천부 이 모든것은 조선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 탁월한 재능과 애국심까지 가진 이광수에 당시 질투, 시기의 화살을 던진 자가 많은것은 당연할것이다. 그에 대해 가십거리로 씹을순 있어도 그를 정면에서 대처할 문인은 유감이지만 아직 없었다.     춘원 이광수가 1922년 5월 《개벽》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은 최초로 조선인의 국민성의 결함을 분석한 명문으로서 우리 문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민족론이다. 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친일의 글로 매도하는 자는 다시 재독하기를 권유하고싶다.     육당 최남선이 1928년 발표한 “력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 역시 조선인의 민족성의 약점을 분석한 글로서 오늘 읽어도 공명하는 부분이 대다수이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모두 해방후 “친일”의 죄로써 동족의 질타와 매도를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민족의 보존을 위해서였다”고 떳떳이 주장한다. 이 한마디 말에 이광수의 “친일”을 푸는 공식같은것이 들어있지만 그 말에 우리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있으니 안타깝다. 좀더 침착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분별해서 들어야 하며 이것이 이광수를 대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여야 한다.     홍명희(1888~1968)는 1924년 최남선이 창간했던 《시대일보》를 인수받아 사장을 하면서 1928~1939년 조선일보에 유명한 장편소설 《림꺽정》을 련재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는 1945년 광복직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주요 책임자로 있었는데 월북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정권 수립에 참여하면서 부수상의 요직에 있었던것으로 알려지나 그뒤 1968년 80세를 일기로 숨진다.     1950년 조선전쟁와중에 7월 12일 효자동자택에서 납북된 이광수는 지병이 있는 상태로 10월 25일 자강도 만포시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춘원의 3남인 이영근씨가 1991년 7월 하순 평양을 방문, 이광수의 특설묘지를 참배했다고 한다. 최남선도 1957년 67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서거한다.     서울대의 교수 구인환은 “이광수의 몸은 갔어도 이광수는 이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살것이다”고 했다. 조선의 격동기를 주름잡던 3대 천재, 역시 같은 말로 그들은 “몸은 갔어도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강물 “도도한 강물에 제아무리 줄기차게 오줌을 싼다하여도 강물은 오줌으로 변할수 없다.”   프랑스 문호 대듀마가 자신을 비방, 중상하는 자들에 한 말이다.   잉크병 “글 쓰기는 내 버릇이거니와 나의 직업이다.”   사르트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말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그를 두고 한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르트르선생님은 외투를 쓴 잉크병이다.”   글쓰기 “나는 호흡처럼 글을 써간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나 방법이 아니라 생존 바로 그것이다.” “조금 슬프다는 이유로, 조금 괴롭다는 이유로, 조금 심심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가끔 흰종이위에 낙서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소설이 되고 시가 되기도 한다.”   문화거인 이어령선생의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공언했다. “모든 공공기물(법원, 시청, 병영등…)에 낙서 하는것이 나의 문학이다.”   감옥 인간에게 있어서 같은 환경에 같은 지식수준에 오래 습관이 되면, 그 자체가 사상을 죄이는 감옥이 된다. 흐르지 않는 썩은 물같이 온갖 병균을 발생시키는 온상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페인트 도배공 내게 있어서 글 쓰기는 세계지도에 색채를 칠 하는것과 같다. 이질된 타자의 인식과 세계관과의 대화로써 나자신의 세계관, 주의주장을 24색 또는 48색, 어쩌면 그 이상의 색갈로 하나 또 하나씩 색칠 해가는 수공업적 직업이다.   나는 지구위의 페인트 도배공이다.     색연필 세계의 지도에는 나의  색연필을 기다리고 있는 구석구석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펜은 쉬지 않는다. 이문화, 타자와의 대화의 방법으로서의 나의 글쓰기, 그것은 오색령롱한 색깔로 도배된 그림이고 싶다. 밥 먹는것과 같은, 숨 쉬는것과 같은, 심장이 박동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배설하는것과 같은 것이 나의 글쓰기다.     악문 (恶文)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금수문장을 써 내려간다해도, 그것이 거짓이고 모종 체제에 발라맞추기 위한 장치로서 작용했다면 그것은 죽은 글이다. 아니 살아서 독해를 뿌리는 최고의 악문이 된다.   낙타 “개들이 제 아무리 짖어도 낙타는 아랑곳 않고 제 갈길만 간다.”   몽골의 속담이다. 나는 그런 낙타이고 싶다. 주위에서 제아무리 개같이 짓어도 아랑곳 않고 내 길만 가는.   속담 독일의 역사학자 빅토르는 가장 간약한 말로 역사를 농축시켜달라는 칼 맑스 장녀 옌니의 인터뷰에 응해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마디 독일 속담이면 충분해요. 첫째. 하나님이 누굴 멸망시키려고 할때 언제나 그것을 팽창시킨다. 둘째. 시간은 채와 같아서 찌꺼기를 채어버린다. 셋째. 꿀벌이 꽃 도둑을 했지만, 꽃들은 더 무성하게 된다.  넷째. 철저하게 어두우면 밤하늘의 별이 더 잘 보인다.   소띠해 《소부》(笑府)에 나오는 이야기다. 쥐띠 해에 태어난 고관의 생일날에 부하들이 함께 돈을 모아서 황금쥐 조각상을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고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우리 집 사람 생일날도 머지 않았네. 집사람은 소띠해 생이라네.”   구두쇠 한 포수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끌려가고 있었다. 포수의 아들이 활을 꺼내들고 호랑이를 겨냥하자. 호랑이 입에 물려있는 포수가 말하기를  “얘야, 발목을 쏴라. 몸에 쏘면 호피를 다치니까 값이 반값으로 떨어진다.”   명명(이름짓기) 분만할때 아내가 하도 고통스러워 남편에게 투정했다. “이렇게 고생할바엔 차라리 그 일을 하지 말걸. 이젠 애기도 필요없어요.” 그런데 여자애가 태어났다. 애기 이름 짓기를 할때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초제(招弟)라고 이름지읍시다.”   엉덩이 하녀가 주인앞에서 방귀를 뀌었다. 화난 주인이 하녀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리려고 바지를 벗겼다. 그 하얀 엉덩이가 어찌나 요염하고 탐스럽던지 성욕이 불끈 솟은 주인은 그 자리서 하녀와 정을 나누고 말았다. 다음날 주인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하녀가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저 또 방귀 뀌었는데요!”   승벽심 장기가 장끼인 장삼이라는 남자가 상대방과 장기 뛰기를 하여 연속 3판이나 지고 말았다. 그의 친구가 다음날 장 띈 승부를 묻자 장삼 대답 왈 “첫판은 내가 이기질 못했네. 두번째판은 상대가 지질 않았고, 세번째판은 내가 이기는 걸 그쪽이 허락하지 않았네.”     자기비판 “중국인은 어떻게 자기예찬 할까를 고심하지만 자기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   16세기 중국이 낳은 탁월한 지식인 이탁오(李卓吾)의 명언이다.   과거지향 인류 문화의 시간적 가치지향에 대해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수 있다.   (1)과거지향 (2) 현재지향 (3) 미래지향   임어당은 이런 말을 했다. “구미인은 새것을 좋아하여 융성발전하지만, 중국인은 옛것을 탐하여 멸한다.” (《중국인》1937년 )   아편 중국인에게 있어서 종교는 아편이 아니다. “역사”야말로 종교 이상으로 중국인의 아편이다.
【문화대담】   왜 “은폐규칙(潜规则)”은 중국사회의 사각(死角)인가? 오사(吴思)+金文学   O.들어가면서   오사(1957년 생 )는 재야 학자로서 “潜规则”(은폐규칙), “血酬定律”(혈수법칙)을 발견한 유명지식인이다. 정규적 역사학전공코스를 밟지 않은 저널리스트출신의 역사학연구자로서 이러한 학문적발견은 한다하는 역사학 대가들도 미처 해내지 못한 업적이다.   오사는 중국현대사회와 역사의 터브를 과감히 깨고 있는 잡지 《염황춘추》(炎黄春秋)의 주필을 최근까지 맡았는데 요즘은 글쓰기와 강연으로 바삐 보내고 있다고 한다.   북경의 어느 한 호텔커피숍에서 첫 대면 했을때 오사의 인상은 조용한 기품에 신사의 풍채가 풍기는 사나이였다. 차분한 어조로 조리정연하게 말을 엮어가는 그는 허심하고 두뇌명석한 지식인이 틀림없었다. 의외로 오사씨도 나를 알고 있고 내책도 읽었던터라 우리의 대담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978년 오사는 중국인민대학 중문학부에 입학, 작가로 될 지향을 품고 입학했으나 개학 첫 날 선생님은 중문계는 작가를 육성하는 곳이 아니고 문학비평가를 육성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신문학부로 전학을 요구했지만, 아버지와 친구인 신문학부 주임이 신문학부에 와봤자 배울게 없으니 차라리 중문학부에서 공부하는게 낫다고 타일렀단다. 중문학부 졸업차로 《농민일보》기자로 입사했다. 그가 가장 숭배하는 기자는 유명한 류빈안(刘宾雁)이었다. 진실을 까발리는 용감한 기자의 사명감으로 오사는 현실생활을 반영하려 애썼다. 그러나 현실에서 오사는 은폐규칙(潜规则)에 조우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초래한 역사적 근원을 캐기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문기자라는 직업생활에서 봉착한 현실적 사례를 통해 역사를 결부하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은폐규칙”에서 “혈수법칙”(血酬定律)을 발견하여 일약 전국적으로 유명한 재야 역사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역사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짚어보는것이 오사의 글쓰기의 큰 특징이다. 오사는 대담에서 어떤 탁월한 견해를 얘기했을까? 자, 이제부터 대담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1. “은폐규칙”(潜规则)은 어떻게 발견했나?   김: 오선생님이 발견한“은폐규칙”(潜规则)은 현재 전중국인이 다 아는 명사로 보급되고 있습니다. 중국 현대사학자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중국역사의 하나의 숨은 법칙을 발견한 업적이라는 평도 있어요.      그렇다면 “은폐규칙”은 어떻게 발견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를 얘기해주시면 합니다.   오: 실례지만 김선생은 농촌으로 하향한적이 있으세요?   김: 없지만 농촌에서 태여나고 자랐습니다.   오: 그럼 이해하기가 쉽겠네요. 난 고등학교 1학년때 북경 창평현 농촌에 지식청년으로 하향갔어요. 농촌에서 노동에 시달리면서 세상에 내가 미처 모르는 암흑한 곳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두눈과 두뇌로 보고 사고하게 되었지요. 세상은 겉 말고도 뒤면에 또 다른 양상이 있다는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김: 그 뒤 기자로 뛰면서 농촌 취재중에 “은폐규칙”을 발견했다면서요?   오: 그래요. 내가 《은폐규칙(潜规则)》머리 말에서도 밝혔지만, 농촌에서 화학비료를 분배할 때, 그 분배규칙이 있어요. 서면으로 돼 있는 규칙이 있는데 사실 실제로 분배할 때는 또 다른게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명문화된 분배규칙을 한쪽으로 내세우면서 밑에서는 또 다른 규칙이 있어요. 누가 쪽지를 써주고 누가 쓴 쪽지가 쓸모 있고 또 얼마나 화학비료를 가져갈수 있도록 양까지도 규칙이 있습니다.      이런 규칙은 화학비료 분배결과 이를테면 천톤이라면 정식 서면규칙으로 분배된 양과 밑에서 슬쩍 은폐된 숨은 규칙으로 분배된 양이 얼마란걸 백분비로 계산해낼수 있지요.      내 발견에 따르면 화학비료분배문제에서 은폐규칙의 역할이 더 큰거지요. 그때는 “은폐규칙”이란 단어 말고 내부규칙(内部章程)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경에 역사를 읽으면서 특히 명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유사한 수평면하의 규칙이 큰 작용을 하고 있다는걸 알고 고민끝에 “潜规则”(은폐규칙)란 명사를 창안해냈습니다.   김: 중국 역사의 사회현상을 개괄해낸 낱말로서 의미심장한 용어이지요. 신문을 다루는 저널리스트로 어떻게 역사에 심취하게 됐습니까?   2. 명사(明史)에서 중국의 룰을 찾다   오: 현실은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명나라 역사에 관심을 둔 계기는 우리 현대사와 지근거리에 있고 또 청나라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 중국인의 참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김: 원나라처럼 이민족의 지배가 없기때문에 명료하고 사료도 복잡하지 않지요.   오: 그렇죠. 원조가 물러난 뒤 주원장이 창시한 명조는 당조의 정치규장제도를 도입하여 대명률을 제정하게 되는데 그 취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주원장의 개인숭배로 인해 그의 입법이 실제상 효과를 상실하게 됩니다.     주원장이 실시한 통치방식은 사실상 모택동시대의 정치운동과 유사했는바, 모택동시대 주원장을 답습한건 분명하지요.   김: 미국의 화교 학자 황인우(黄仁宇)의 《万历十五年》(만력15년)등 명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정말 개척적인 연구를 보여준 역작이지요. 황씨의 연구도 오선생의 연구에 참고가 되셨는지요?   오: 당연하지요. 1986년에 황씨의 이 책을 접하고 크게 개안(开眼)을 했습니다.    명나라를 쭉 보면 청렴한 관리를 도태시키거나 청렴한 관리가 추락부패하는 그런 양상을 그대로 현재 중국이 답습하고 있어요. 현재 중국의 현실은 역사를 캐보면 다 존재하고 있었지요. 황인우선생의 명나라연구를 보면 아주 뚜렷하게 우리 현실을 수백년전의 역사로 끌고가는 느낌입니다.     명나라의 은폐규칙을 보고 두터운 역사적 축적과 전통이 있는 중국현실의 은폐규칙이 얼마나 일맥상통한가를 인식하게 되었고 “은폐규칙”을 과감히 자신있게 쓰게 되었답니다.     현실을 인식하기 위하여 그 뿌리를 캐다 보니까 결국 역사를 캤고 역사와 현실을 다 어우러 썼습니다.   3. 은폐규칙의 위험성   김: “은폐규칙”이란 중국 사회현실에 뿌리깊은 객관적 구조라할까 그 존재양상이 사회나 사회도덕에 대한 어떤 악영향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오: 우리가 잘 아는 공식적인 도덕규칙을 실례로 들오봅시다. 예를 들어 군신부자(君臣父子)가 예의인데, 만일 서로 예의가 분수를 넘어서 군자를 신하가 범해도 안되고 반대로 군자가 신하에 대해 침범해도 안되지요. 만약 10%의 과세를 30~50%로 인상하면 그건 폭군이며 정책이 맹호처럼 사나운바, 이게 하나의 규칙이지요. 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진(秦)나라가 14.5년으로 망해버렸어요. 그러니 “인의 도덕” 이러한 체계는 모두가 서로 연결중 형성된 경계선(边界)이지요. 이건 백성이나 정부에 다 유리한 존재이지요.    그렇다면 “은폐규칙”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식적 공인하는 규칙,또는 도덕따위를 정의(正义)의 경계선이라고 치고 황제가 각 관리들에게 이 권리를 수여했다고 합시다. 여기엔 대리인, 대리인이 다 있지만 실제 수행할때 수하 사람들이 슬쩍 뽑아내고 갈취하고 하여 백성들을 업신여긴다면 이런것은 다 정의의 경계선을 이탈한것이고 불온정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정부가 신용없는 정부로 인식하게 되고 인심을 잃게 되죠.힘없는 개인들이 반항심이 있고 반항의 힘은 없다하더라도 나중에 결과는 사회토대가 불온해지고 극단에 이르면 사회는 붕괴되고 말지요.   김: 과연 살상력이 대단하군요! 오: 그렇죠. 은폐규칙이 있는한 매개 관원은 다 이 경계선을 침범할수 있기때문에 나는 거기에 “합법적상해권(合法伤害权)”이란 명칭을 덧붙였어요. 매 관원수중에 모두 이런 모호한 권한이 있어요.상황에 따라 당신에게 5년6년 징역이거나 벌금을 안기는 그런 모호한 권리, 그러나 아무 일이나 도가 있는 법이지요.     “은폐규칙”은 주로 관장(官场)에 유행범람하는 안보이는 규칙을 제시했는데 문제는 우리의 생활영역은 관장뿐이 아니지요. 선악응보사상이 있는데 현실은 또 다 그렇진 않죠.   김: 중국 현실의 관원의 부정부패도 다 이런 은폐규칙과 연관이 있겠군요? 그럼 오선생님은 기자생활중 은폐규칙에 따른 좌절과 곤란에 봉착한적도 있으시겠죠?   오: 당연하죠. 만약 농촌독자가 부정부패를 적발하는 고발편지가 왔을때 정말 하나 하나 실제로 처리를 하고 도와주지 못하는게 안타깝지요. 백성들이 밀고를 해도 관원은 “니들 암만 고발을 해봐, 날 어쩌질 못 할거야...”하면서 태연하게 있어요.백성들이 악한 관리를 고발해도 그 본전이 많이 들어도 별 효과를 못보는게 중국이잖습니까?     우리 기자, 편집자들도 우리 앞에 놓인 진실규칙이 무언가를 너무 잘 알지요. 헌법에 쓴거나 우리가 어떻게 보도를 해야하는가 완전 별 세계니까요. 우리 자신도 매일 갈등과 충돌속에서 헤매이고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 중국인은 매일 “은폐규칙”속에서 생활하고 있지요.(웃음)   4. “혈수법칙”이란 무엇인가?   김: 오선생님은 “은폐규칙”외에 또 “혈수법칙”이란 개념을 창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에 대해 말씀 해주시겠어요?   오: 이 두 개념은 다 중국역사를  관통한 법칙을 분석귀납한것이죠. 명문으로 명시한 법칙은 아니지만 현실사회에서 확실히 큰 작용을 일으키는 게임규칙입니다.     나는 《혈수법칙(血酬定律)》이란 저작에서 하나의 오래된 문제를 착중하여 답안을 찾으려 했어요. 즉 왜 어떤 사람은 폭력으로 임대료(租金)을 갈취하고 또한 사람들이 이에 협력하는가?      《은폐규칙(潜规则)》에서는 회색수입을 얘기했는데 더 심입하여 왜 어떤 사람은 이런 회색수입을 획득하는 자격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탐구해야 했지요.     “혈수법칙”은 바로 인간 심중에 깔린 모종의 계산방식을 탐지해내는 것입니다.노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노임(工资)이라면, 땅으로 환취하는 수익이 지세(地租)이고, 자본으로 얻는 수익이 이자(利息)라 한다면, 유혈과 목숨걸고 획득한 수익은 무엇이라 불러야 될까요? 난 이를 혈수(血酬)라고 정의 했어요.   김: 이 개념으로 비적, 강도, 깡패들이 금전재물을 갈취하는 본질을 규명 할수 있겠군요.   오: 그럼요. “혈수법칙”의 시각에서 역사를 개괄한다면, 역사를 엮어가는 과정이 바로 유혈과 생명으로 생존의 자원을 바꾸는 과정이고, 사회를 다스리는 제도가 바로 폭력으로 갈취한 생존자원을 합법화시키는 과정이지요. 김: 완전 동감입니다. 중국사를 관통한 룰이 바로 겉표면의 유교나 윤리도덕이고, 오선생님이 창안한 “은폐규칙”이나 “혈수법칙”이야 말로 중국사의 과거와 오늘날 면면이 이어진 폭력구조를 잘 체현했습니다. 왕학태선생이 제기한 “또 하나의 중국”과 잘 맞먹습니다.     왕학태선생의 또 하나의 중국이 “흑색의 사회”라면 오선생이 제기한건 “회색사회”이지요.   5. 회색지대에서 흑색사회로   오: 맞어요. 난 예전에 “회색사회”라는 용어로 설명한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각종 사회에서 “흑색”의 정도는 각기 구별이 있어요. 내 책이 혹시 독자들에게 모든 사회가 다 까마귀같이 검다는 인상을 줄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겁니다.   김: 그렇죠. 세부나 정도에서는 다 차이가 있으니까요.   오: 그래서 우리가 한가지 현대의 관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요. 즉 정부, 정권은 일방적으로 백성을 통제관리하는 기능만 있는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면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정부에 납세를 하는건 신복을 표하는게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획득한기위한 교역행위이지요.     이런 정부와 서민의 관계는 “흑사회화”(黑社会化)라고 절대 말할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공평한 교역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양자관계는 어떻게 회색 내지 흑색으로 변질 할까요?     하나의 전제정권이 있다고 칩시다. 폭력수단으로 정권을 잡은 이 집단이 정권을 수중에 장악한 뒤 절대권력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정권의 계승자들이 지적장애자거나 잔혹한 독재자거나를 막론하고 서민들은 정권을 선택할 권리가 없어요. 이렇게 정권이 회색, 지어 흑색으로 변질되고 서민들은 힘 없으니까 그냥 현실을 묵인할수 밖에 없습니다. 폭력, 무력으로 인민을 탄압하고 정권을 유지 하는게 특징입니다.   김: 문화대혁명시기의 중국정권이 그러했지요. 사실 중국의 역사도 쭉 고찰하면 하나의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6. 폭력원리의 원규칙 (元规则)   오: 그렇습니다. 양계초도 지적했지요. 중국의 역사를 펼치면 역사 자체가 곧 상작(相斫)사이라고,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모두 전쟁인바, 공개되거나 숨겨진 폭력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949-1976년의 중국 당대역사에서도 “혈수법칙”의 실례를 무수히도 찾아낼수 있지요. 토지개혁, 대약진,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거의다 폭력을 최종위협수단으로 제도를 변화하고 강제적으로 제도변경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반항능력이 없는 인민대중 개인들에게 폭력은 여지없이 탄압하는 무기였지요.     나는 이같은 폭력으로 제도를 결정하는 도리를 원규칙(元规则)이라고 명명했는데, 원규칙이란 바로 규칙을 결정 짓는 규칙을 가르키는거지요. 원규칙이란 바로 폭력이 강한자가 일체를 결정하는 규칙입니다.   김: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회학자 OISON(1932~1998)교수가 그의 저작 《권력과 번영》에서 중국의 비적을 실례로 폭력집단과 현지 시민들사이의 상호이익관계를 지적했는데 중국현실사회의 폭력원규칙이 이렇게 창궐할수 있는 이유는 그 전제적 권력정부와 함께 아래서 서민들의 “합작”을 누락시킬수 없다고 봅니다. 더 넓은 시야에서 고찰하면 중국의 폭력 원규칙은 말 잘 듣는 대다수 백성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 그렇죠. 이런 원규칙과 혈수법칙 그리고 은폐규칙이 하나같이 순순히 생기고 발전유지해온 근저에는 아무래도 사회, 역사, 대중의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중국은 여전히 “원규칙”권에서 살고 있다   김: 오선생님께 한가지 여쭙고 싶은 문제는 중국이 1976년 문화대혁명 또는 모택동시대가 종식된후 역시 이와 같은 원규칙- 은폐규칙-혈수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나요?   오: 물론 아직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혁이 종결된 표징이 바로 “4인방”의 분쇄인데, 그 뒤 개혁개방정책의 결책자들 역시 총을 지휘할수 있는 그런 권력자들이지요. 어디까지 개방하고 어디까지 개혁하냐? 이 경계선은 어떻게 설정하냐? 예를 들어 보면 결책자에 유리한 지도가가 꼭 농민의 치부(致富)에 유리하다고는 말할수 없어요. 만약 농민대중의 치부와 결책자의 지도자와 이익이 일치하다면 개방은 거기까지입니다.     만일 좀 더 심입하면 농민대중의 치부에는 유리하다하더라도 개방은 거기까지는 안 할수 있어요. 결책자의 차원에서 볼때, 의연히 우리가 말하는 “원규칙”의 작용을 받거든요.   김: 그렇다면 중국의 현실은 역시 원규칙, 은폐규칙권안에서 맴돌고 있다고 해야겠군요!   오: 그래요! 개혁개방 30여년을 쭉 보면 여러제도의 변천, 규칙변화, 개혁은 모두 규칙의 조정에 불과 한바, 사실 수평면하에서는 모두 이런 규칙(원규칙 등)의 테두리에서 이탈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종시 이런 원규칙의 지배하에서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그냥 그자리서 답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그래도 관념, 이데올로기차원에서는 많은 변용을 했을텐데요?   오: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 30여년전과 현저하게 다른건,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퇴색해가고 있는 점이지요.   8. 퇴색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   김: 이데올로기의 퇴색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얘기해주시겠어요?   오: 모택동시대에 생산성보다도 더 중요시한게 이상(理想)-공산주의를 조속히 건설하는것이었습니다. 모씨는 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수령으로 되려고 애썼는데 그는 명확히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군중노선을 걸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군중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농민의 자유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요망한다”고요.   김: 농민에게 자유를 안 준다는건 왜서이죠?   오: 왜냐면 공산주의와 충돌되기때문입니다. 모택동이후, 개혁개방시기에 이렇게 부르짓던 이데올로기도 점차 박약해졌지요. 대신에 핵심적 목표, 최대 가치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경제발전으로, 현대화 실현으로, 경제건설이 가장 큰 이념으로 전변되었습니다.그래서 이에 상응하게 경제적자유도 개방되고 우리 대중들도 확대된 자유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농민, 노동자, 상인, 자본가, 학자도 자유가 있게 되었는데 하지만 자유라해도 규칙경계선의 조정에 지나지 않지요!     최고 결책자 또는 지배자집단의 이런 조정은 농민의 이익에 부합될뿐만아니라 지배집단의 이익에도 부합되는 상부상조이지요.     개혁개방전과 개혁개방후의 제일 중대한 변화는 최고가치관의 변화지요. 이 변화로 인해 자신이익에 도움을 주는 변화가 생긴겁니다.   김: 그러니까 “원규칙”따위가 계속 작용을 하고 있다는 얘기겠군요.   오” 그렇죠! 권력에 제일 유리한 변화가 생기고 각종 조종도 따라 나선겁니다. 그러나 “원규칙”은 여전히 규칙을 결정하는 규칙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본원적인 규칙임은 변화가 없습니다.   9. 관가주의 (官家主义)라는 신개념   김: 오선생은 최근에 “관가주의”란 신개념을 제출했는데, 어떤 얘긴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오: 은폐규칙, 원규칙 및 혈수법칙의 시각으로 중국사를 관찰하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이는데 나는 “관가주의”라는 신개념으로 정의했어요. 교과서적 설법으로 말하면 진나라 한나라 이래 청조말기까지 줄곧 중국은 봉건사회라고 했지만 이건 틀린거지요. 왜냐하면 고대한어와 접목시켜 보아도 고대인들이 찬성할리 없죠. 왜냐하면 봉건제도는 진나라때 이미 “폐봉건, 입군헌”(废封建,立郡县)이란 제도와 같이 폐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봉건사회가 폐지된 군헌제에서 주인은 바로 관가 집단이니, 당연히 관가주의라 해야 타당하지요.   “관가(官家)”란 낱말은 고대한어에서 3가지 차원의 뜻이 있어요. 하나는 황제를 가리키고 두번째는 아문(衙门)이고 (현재의 공립,국립)과 같이 도로가 관가의 것이라면 관도(官道)라 했지요. 세번째는 관원 개인의 존칭이었습니다. 이 삼자가 다 주인으로 되고 법을 제정하고 규칙관념을 세울수 있었으니 “관가주의”입니다. 이런 중국사회를 나는 “관가주의 사회”라고 부릅니다. 이건 “봉건주의”나 “전제주의” “황권(皇权)전제주의”보다 더 적절하지요. 김: 관가주의가 봉건주의보다 더 적절하게 중국 역사의 사회특질을 규명하는 명칭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중국사회의 지배체제로 볼때도 이 개념은 더 정확한 제시를 했다고 보는데,관료주도의 사회인만큼 중국이 관가주의 체제하에서 은폐규칙, 원규칙 그리고 혈수의 룰이 더 스므드하게 범람할수 있는 환경과 토대가 된다고도 생각해요.   오: 맞는 말씀입니다.   10. 핵심구조변혁의 미완성   김: 중국은 30여년의 개혁개방으로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오선생의 지론대로 이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오: 생태학과 진화론의 시각에서 보아 개혁개방전의 중국사회는 물종이 희소했어요. 농민이 아닌 공사사원, 노동자가 아닌 관판기업 직공, 그리고 관료 이런건 모두 관가주의 체제에 예속된 물종이었지요. 그러나 개혁개방후 공사사원이 자작농으로 변신하고 개체호, 농촌기업가, 농촌기업자본가, 농민공... 등 물종이 풍부해졌으며, 이데올로기가 느슨해지고 경제건설을 첫자리에 놓고 하여 풍부하고 복잡하고 창조력이 있게 된 사회생태를 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관가주의의 핵심구조가 아직도 지속하고  진, 한시기이래의 2천년의 대구조가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김: 경제의 고도성장이 정치제도의 개혁을 환기시킬수 있을까요?   오: 서양에서 이런 관점이 유행했는데, 경제발전과 정치변혁 또는 헌정민주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는 타당성도 있어요. 그러나 한조목씩 검증한다면 반증도 나오지요. 인구당평균수입이 수천 수만달러의 중동석유국가중에도 여전히 정치변혁이 없지요. 인도는 인구딩평균수입이 현저하게 낮은데도 정치변혁은 얼마나 빠릅니까?     GDP나 중산계급의 비례를 들고 나와도 그 반증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 민주, 헌정이 어떻게 탄생할까를 강조하기 보다는 전제정권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얘기해야 할꺼 아닌가요? 전제권력은 꼭 무너지고 말아요. 왜냐하면 취약하기 때문에.     전제가 붕괴된담 새로운 민주정권을 수립할 개율이 높으며,또 하나의 전제정권이 일어설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나 더욱 큰 가능성은 아무래도 민주정권이지요.   11. “은폐규칙”이 소멸되는 길   김: “은폐규칙” “원규칙”등 중국의 암흑한 룰이 어떻게 소멸될수 있을까요?   오: 예를 들어서 현재 전국적으로 군체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다 제가    보건대 이익의 경계선을 조정하는 마찰이라고 생각해요. 농민의 토지권 경계선은 늘 모호했기때문에 최근 농민이 토지권익을 둘러싸고 항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권익은 농민의 소유가 아니라고도 안하고 그렇다고도 직설적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애매모호한 경계지대에서 트러불이 생기지요. 이런 쟁탈전와중에 맹 이익의 분계선이 뚜렷해지고 법규가 생기면 트러불도 적어집니다.   김: 중국 농민의 인내력 내지 감수력이 강한건 정부의 권력이 그만큼 강한 증명이 아닙니까?   오: 맞어요!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관과 민의 관계조정을 하고 은폐규칙중 피해자의 반항을 안무할수 있다면 이런 은폐규칙들도 대폭적으로 소실될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은폐규칙, 원규칙 이런 거는 다 사각(死角)이기도 해요. 쉽게 때려서 떨어뜨릴수 없는 존재이지요. 왜냐하면 법적으로 그 “사각”을 겨냥하여 청소할수 없기때문입니다.     김: 긴 대담 감사합니다. 오선생님의 말씀이 과연 중국 미래의 방향에 유익한 조언이 될것으로 믿습니다.   대담자 소개: 오사 (吴思) 저명한 역사평론가, 저널리스트  1957년 북경출생. 1982년 중국인민대학 중문계 졸업후 《농민일보》기자, 편집   1996년부터 《염황춘추》주필,사장 역임 2009년 《염황춘추》잡지 법인 대표 주요 저작으로 《潜规则》《血酬定律》등 다수    
204    (87)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은 댓글:  조회:3699  추천:25  2017-02-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7) 김문학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은 한일합병 100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한국지배 36년에 대한 력사적 기억.   식민지의 기나긴 경험은 당한 조선민족의 령혼에 지지리 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회억 자체도 피지배자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덧나는 상처처럼 꺼내기 싫은 과거일지도 모른다.   행, 불행을 떠나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 근대력사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닌 력사과정이였으며 조선의 그 이후의 력사를 규정짓는 큰 구실을 했던것 역시 사실일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근대사 100년의 수없이도 많은 자료문헌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일본식민통치를 당한 피식민지자의 후예로서 가슴아픈 대목들을 많이 조우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력사가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어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의 피와 살이 된것이니 무조건 덮어감추거나 왜곡, 무시할수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일본과 같이 무섭게 동질적 사회, 문화를 이룬 우리 민족은 유별나게 나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편에 선 적, 상대에 대해 비관용적이라고 한국의 석학 이어령선생도 필자와 대담할 때 지적한적이 있다.   증오의 감정 역시 늘 동질, 균질적이여서 우리 아닌 남, 타자, 특히 일제와 같은 대상은 무조건 증오의 타킷이 되며 그 시대에 대한 모든 력사적 해석 역시 “증오”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거의 어느 하나 누구의 이론(異論)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태세로 기세당당하다.   그런데 증오의 절대적 감정, “정의(正義)”에 눈가려 망각한것은 리성적인 자기 성찰과 반추라는 중요한 팩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제강점식민시기를 다룰 때 학문적인 접근이든 대중적인 언설이든 사석에서의 잡담이든 거개가 지극히 동질, 균질적 양상을 로정한다.   즉 일제통치의 력사적시간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피부로 느낀 감각이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풍화” 내지는 단순한 “관념화”란 려과장치를 거쳐 무조건 “저항사관” 아니면 “매국친일” 2항 대립구조로 일축해버린다   그런데 중요한것을 여기서 빼놓고야말았다. 무엇인가? 력사적 사실이 인간의 일상에 의해 지탱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을 담론할 여지가 우리 민족에게 없다.        식민지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꺼리고있다. 력사란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많은 력사 공간시간은 오히려 그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해온 보통 일반인의 “일상생활”에 의해 전개해온것이 아닌가.    최근 다행히도 일제식민시기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여 세상의 해빛을 보고있다.  《내가 조선반도에서 한 일》(마츠오 시게루), 《일본제국이 점지해준 아이들》(카터.엣커트), 《일본통치하의 조선 진북의 력사》(사카이 도시오), 《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오선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타카사키 소오지) 등 저작이 나타나면서 일제식민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에 대해 그 진실을 규명하고있다. 그것을 잠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서울의 일본인은 줄지어서 타타미를 깐 일식가옥의 거리를 형성하여 살고있으며 이런 일본인사회와는 거리를 둔 조선인의 집에서는 라지오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 중계를 듣고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는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빨래방망이질을 하면서 환담하고있다. 종로거리의 영화관앞에서는 신작 영화를 관람하고자 행렬을 지어있는 조선인들. 물만두를 열심히 파는 중국인의 모습도 보인다.   손님으로 만원을 이룬 신와(信和)백화점.   까페 녀급과 환담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남성취객.   사쿠라를 구경하는 덕수궁의 화창한 봄풍경.   학교에서 공부를 게을리해 버들회초리로 맞는 아이의 비명소리.   얼음이 석자두께로 언 한강우에서 썰매를 씽씽 타는 아이들.   길을 물어보는 일본인에게 친절히 가리키는 예쁜 조선아가씨.   이런것들이 식민지시기 당시의 하나하나의 풍경이다. 일제시기 일상생활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아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문화가 다른 민족이 같이 살다보면 알륵과 반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인류학이 이미 실증하고 있는것들이다.   그러나 특히 도시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반목이 심했던것 같다. 서울에서 배내밀고 딸깍딸깍 게다소리를 내며 으시대던 일본인을 조선인은 아마 덜 반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을것이다. 서로 아주 친한 사이의 일본인과 조선인도 있었다. 민족을 넘어선 우정이였다.    전후 “고향”을 찾은 식민지시대의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제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일제시대의 력사를 굳어진 이데올로기일식의 저항, 친일, 2항 대립구도도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 보다 생활 실제모습에 접근하는 인식방법이 필요하다고. 력사를 이룬 일상의 실상을 통해 우리와 타자의 과거를 알고 재인식하는것은 서로 유리하지 않을가. -료녕신문
학술자유 중국 대륙에서 자산계급반동학술권위 호적(胡适)을 비판하는 운동이 바야흐로 약기하고 있을 1955년, 북경 3련출판사에서 무려 8권에 이르는 《호적사상비판논문대집》을 출판하였다. 당시 미국에 있은 호적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 책 8권을 읽었다고 한다.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황당무계한 연극을 잠자코 관망하기만 했다. 대륙에서도 사실 이 8권의 거편을 다 완독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호적의 학생 당덕강(唐德刚)이 호적에게 물었다. “이 수백만자의 거작중에 진리와 학문이 하나도 안 들어 있단말입니까?” 호적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학술자유가 없는 나라인데 무슨 학문이 나올수 있겠나!” 중국문화의 거인 호적은 중국의 당시의 문화사막의 대륙을 불보듯 뻔하게 알고 있었다. 비난 받은 호적은 웃을수 있어도 대륙의 그때 학술사정은 웃지도 못하는 엄혹한 실정이었다.   재부와  정신 재물과 부유만으로 생활의 질을 따지면서 이것을 유일한 문화적 가치기준으로 여긴다면 이런 민족은 정신과 존엄을 깡그리 버린 슬픈 민족이 된다.     달필 심윤묵(沈尹默)은 현대 저명한 학자이면서도 최고 달필의 문인서예가로서 유명하다. 진독수가 심윤묵과 첫 대면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진독수라고 합니다. 어제 친구네 집에서 당신의 시를 읽었는데, 시는 과연 훌륭했어요. 그런데 그 붓글씨가 너무 속되기 짝이 없는지라…”   이 말을 들은 심윤묵은 학문과 함께 붓글씨쓰기를 분발하여 노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국 현대 문인의 최고수준의 서예가로 성장했다.   하나의 나라  네개의 사회 현재 중국은 “하나의 나라”에 “네개의 사회”다. 북상광(北上广),북경, 상해 광주 등 연해대도시가 제1세계 내륙지역이  제2세계 소수민족지역이 제3세계 광대한 농촌이 제4세계   종교  중국 국민의 종교는 마작이다. 13억인구에 12억5천만이 마작을 논다니   고양이  주인집에서 폭음폭식하면서 편안히 자란 고양이는 비만증, 고혈압, 고혈당 등 성인병으로 병원을 자주 찾았다. 의사가 이번에 무슨 병으로 왔냐고 묻자, 고양이가 대답하길 “선생님, 요즘은 심장이 자주 뜁니다. 특히 쥐를 보면 맥박이 미친듯이 뛰거든요. 그 뽀족한 주둥이가 내 아름다운 큰 눈을 갉아먹지 않을까 겁이 나서 온몸이 전률해요.”   의사 최종 진단하기를 “쥐공포증에 걸렸네.”   사퇴 10살의 상해 여자애가 견디다못해 경찰서에 신고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경찰이 물었다. “저기요. 우리 아빠가 맨날 나를 집에 두고 나가서 마작을 놀아요. 무서워요.” “그래서요?” “그래서 난 우리 아빠를 사퇴시키겠단 말예요. 이런 아빠 필요없어요.”   나귀 나폴레옹은 탁월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문화, 지식을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이집트(애급)를 향해 원정할때 175명의 학자와 수백 상자의 서적을 수행시켰다. 그는 학자와 나귀를 원정군 대렬의 맨 복판에 끼워 양자의 안전을 보호하게끔 했다. 학자는 문화재를 검정하고 나귀는 문화재를 싣고 오기 위해서 였다.   결혼공포증 독일 고전 철학의 시조 칸트는 “인생에 다만 두가지 나쁜일이 있다. 하나는 노쇠(늙음)이고 또 하나는 결혼이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을 두려워 했는바, 성교가 노쇠를 초래한다고 여겼던것이다. 그가 결혼을 안 한 또 다른 이유는 금전때문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내가 여자를 필요할때 부양할 형편이 안되였고, 내가 여자를 먹여 살릴수 있는 형편이 됐을 때는 여자가 필요없었다." 결국 둘다 핑계다.   암닭 암닭 왈 “소중한 생명의 알을 낳고 이 위대한 공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나는 꼬꼬댁 소리짖는다.”   수닭 수닭 왈  “암닭은 고까짓 조그마한 알 하나 낳고 세상에 제일 위대하다고 떠드는 꼴이 참 말이 아니야. 나는 지구위에다 우주의 알(태양)을 떠 올려놓고 보라고 짖는다.”   원숭이 곡마단에서 양복에 팬티를 입은 원숭이가 인기가 있었다. 그 원숭이가 자랑하기를 “난 양복을 입었기 때문에 일반 원숭이와 다르단 말이야. 인간에 가장 가까운 나니까.” 동물원에 취직한 원숭이가 지나가다 그 양복장이 원숭이를 보고 하는말이 “양복을 입든 치마저고리를 입든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한대?”   벼루 벼루는 전통사회 문인이 애지중지하는 문방4보의 첫 자리에 놓일 만큼 소중한 보물이었다. 문인 심중의 정신적 토템이기도 했다. 명나라의 대유가 진계유(陈继儒)가 말하기를 “문인에 있어서 벼루(砚)는 미인의 거울과 같다. 한평생 언제나 신변에 두고 있으니까!” 벼루는 남자의 거울이로다.   인생일락 문방사보, 특히 훌륭한 그것을 추구하고 고집하는것은 전통사회 우리 문인들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문인들 왈 “필연정량, 인생일락이라”( 笔砚精良, 人生一乐) 여기에 나는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박람군서, 인생대락이라”( 博览群书, 人生大乐 )   매도 현대 대만의 유명 문인 이오(李敖)는 그 솔직함과 비판성 있는 문장으로 인해 많은 “안티이오”파를 약 올리고 그들의 매도를 당했다. 그러나 아랑곳 않은 이오 왈 “입으로 나를 매도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는 다 나를 위해 칭송의 위패를 세워 주는거다."
인 (人) 사람, 또는 인간이라고 함. 절대 다수는 통치체제에 의해 유린당하는 양각양(两脚羊)   교육시스템 중국의 교육체계는 실질상 일종 금자탑구조의 슈퍼아문(衙门)이다. 중국에는 오로지 하나의 소학교, 하나의 중학교와 하나의 대학교가 있을뿐이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의 총교아래 무수히 많은 분교를 설치한것과 다름없다. 모두 교육부가 통일관할한다. 지어 학부의 교재, 통일편제교과서아래서 교수법, 평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양식,틀에 맞추어 통일시켜야 한다. 나는 교육부에 이런 건의를 한적이 있다. 차라리 교육부에서 대학교사를 다 내쫓고 통일적으로 수업软件 CD를 만들어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그걸 보여주면 얼마나 비용을 절약하겠는가고          중국인민대학의 교수 장명(张鸣)의 말이다. 당연히 교육부에서 장명교수의 건의를 접수할리 만무하다.     자 신 감 양실추(梁实秋)의 회억에 따르면, 양계초가 어느 강연의 첫머리에 이런 두마디 말을 했다. “이 계초는 별 학문이 없습니다.” 그 다음 이어진 말은 이러했다. “하지만 조금은 있긴 하지요!”   거물의 겸손은 사실 자신감에서 나온것이다.   비  서  현대 고관의 비서는 옛적 황제의 환관과 비슷하다고 한다. 고대 환관들이 황제의 위광을 입고 전제를 실시하던 그런 그로테스크한 모습. 그런 환관을 현대의 비서들이 닮았으니, 이 역시 중국문화전통 계승의 하나일까.   수 족 관 위대한 작가 카프카가 어느날 베를린의 해양수족관을 찾았다. 그는 거대한 유리함 속에서 자유롭게 헤염치고 있는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안심하고 나를 바라봐도 괜찮아. 내가 너희들을 잡아먹을리 없으니까.”   이 타 적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우리가 손을 들어 타인을 구타 할수도 있지만, 한편 그 손으로 타인의 눈물을 닦아줄수도 있다.   아웃사이더 카프카는 여러 의미에서 아웃사이더였다. 한 독일 비평가가 이렇게 카프카를 평했다.   “유태인으로서 카프카는 기독교신도들이 인정하는 자가 아니었다. 방회그룹에 가담하지 않은 유태인으로서 그는 유태인의 배척을 받았다. 그리고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중에서 그는 오지리인에 속한 것도 아니다. 노동보험회사 직원으로서 그는 또 자산자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산자의 아들로서 그 또한 순수한 노동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온 정력을 가정에 쏟았기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한것은 카프카는 가정안에서도 남보다 더 한 남이었다.”   이런 아웃사이더였기때문에 유니크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할수 있었다.   모  교 (母教) 3남매중에서도 우리 어머니는 장남인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셨다. 천생 약골인 나에게 집안의 일이나 심부름을 일절 시키지 않았으며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네 이름처럼 문학학문에만 열중하여 세상에 유익한 인물이 돼야 한다.”   지금 50이 넘었지만 나는 가정일 따위는 눈에 안 보이고 보이는 건 책과 볼펜, 붓뿐이다. 눈은 책을 위해 있고, 손은 펜을 위해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님의 모교의 덕인지 탓인지, 좌우간 이런 인물이 되었다.   쉰 (50살) “50에 지천명”이라는 말은 너무 소극적 정서의 말이다. 50은 인생의 반백이 아니라, 아직 반백번의 큰 기회가 남아있다는 말이다.   마  흔 (40살) “40 불혹”을 “40유혹(有惑)”이라 고쳐야 한다. 마흔은 한창 호랑이 같은 맹활약의 시기로서 모든데 도전하는 야망이 있어야 한다.   서  른  (30살) 공자님왈 ”30살에 서라”했거늘 30이면 너무 늦다. 20세에 무소의 뿔처럼 우뚝 서야 남아로 될수 있으니까.   스  물 (20살) 스스로 물정을 익히는 배움과 창업의 시기   예  쉰 (60살) 이순(耳顺)이 아니라, 제2의 사춘기다.   이  른 (70살) 아직 이른 인생, 고래희는 옛적이야기.   여  든 (80살) 진짜 염근 인생, 팔팔 뛰는 삶.   아  흔 (90살) 다시 아이로 활동하는 시기   백  살 백발 성성한 살기 좋은 시기    정신병환자 아돌프 히틀러가 어느 정신병원을 시찰했다. 그는 내가 누구냐고 한 환자에게 물었다. 환자가 머리를 젓자 히틀러는 대노하여 웨쳤다. “난 아돌프 히틀러야. 너희들의 수령! 내 힘은 하나님과 같거든! 이 자식들아.” 환자들은 미소하면서 연민의 눈길로 히틀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중 한 환자가 말하기를 “그래요. 우리도 병환초기에는 당신과 같았어요.”   반 숭 배 20세기 최대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개인숭배를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거직전에 자신이 살던 집을 수십년의 비서 듀게스여사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면서 “이 집은 절대 아인슈타인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이용하면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을 세인이 모여 오는 “성지”로 만드는것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은 개인 숭배를 기피했을뿐만아니라 세인들이 자신에 대한 숭배도 혐오했던것이다.   새  우 살아서는 수묵화의 소재 익어서는 붉은색의 미식   게 게가 하는 말 “인간은 직행 하지만 나는 횡행한다. 하지만 그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보법이 다를 뿐이다.”   기  린 기린이 말하기를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지만, 요즘 인간들은 고개 숙이고 핸드폰만 보더라.”     박  쥐 박쥐가 말하기를 “인간은 꼭 네편, 내편 판가르기를 하면서 상대방을 억누르고 이기려 하기때문에 평화를 잃어버리는거다. 나처럼 매부 좋고 누이 좋고 어울릴 줄 안다면 전쟁,  투쟁이 줄고  사랑과 평화가 많아질텐데”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