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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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1-4. ‘고완’주의 댓글:  조회:4974  추천:21  2012-10-21
4. ‘고완’주의   고전(古典)주의는 아니다. 더구나 고환(睾丸)주의는 아니다. 새것에서는 卽今적인 젊음의 감흥을 느끼지만, 옛것에서는 시간이 침전된 古遠의 역사 감을 느낀다. 그래서 새로운 新香도 좋지만 나는 오래된 古香이 좋다. “옷은 새것이 좋고 벗은 오래된 것이 좋다”라는 말과 같이. 새 옷은 새로 돈 주고 사면되지만, 옛 벗은 돈 주고 못 산다. 옛 물건도 그러하다. 옛 물건이 옛 물건다운 것은 그 옛 사람들과 함께 같이 숨 쉬고 손때가 묻은 시공의 중후(重厚)가 축적 돼 있고, 거기에 배인 것은 윤택 나는 인간의 덕성과 지성 그것이다. 내게 있어서 이것이 고완(古玩)의 낙취(樂趣)일 것이다. 나의 고완 이력은 어언 25년이 가까워 온다. 30대에는 광기(狂氣)이다시피 고완 에 심취돼 있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당시 별로 고완 의 낙을 여의케 하는 사회적 풍토나 여건이 결여 했으나 일본에 와 보니 고완 의 문화 분위기가 매우 농후해 있었다. 일본에서의 신발견은 고완 의 옛 발견에 이어진 묘미가 있었다. 명문장가 주작인(周作人)은 일본에서 중국 唐風의 옛 문화를 발견 했다고 쾌재를 불렀으나, 나는 중국 뿐 만 아닌 옛 조선의 고완 을 즐길 수 있는 보지(宝地)여서 무등 희열했고 열광했었다. 골동(骨董)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다. 알고 보니 “골동”이란 어원이 중국어의 “古董”이라 했는데 뼈자 붙은 것보다 나는 고색창연, 역사의 옛 정취가 묻은 “古”자가 더 좋았다. “古董”은 “古銅”의 음전이라 하니, 중국 문명의 기물은 뭐니 해도 古銅으로 주조된 것들이 도자기 이상으로 옛 됨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적으로 나는 古銅器의 청동녹이 쓴 창연한 모습에서 어떤 육중한 문명의 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도자기에서 감지되는 옛 사람의 그런 따스한 숨결과 체온이 감지된 온기(溫氣)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화려하고 사치의 극을 나타낸 중국의 명청의 도자기보다도 나는 송나라의 비취색의 자그마한 화병과 연병(硯屛)에서 더 잔잔하고 은은한 부드러운 정취의 미를 느낀다. 그러나 중국 도자기보다도 나는 감정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 인지 우리 겨레의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에서 인간의 정과 옛 선조들의 땀 냄새와 따사로운 몸의 체온을 느껴서 너무 좋다. 하다못해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이조(李朝)의 난초가 그려진 연적(硯滴)이라도 좋다. 막 청색이 괴어오르는 듯 한 흰 색이에 또는 계란껍질 바탕에 청색으로 그려진 심플한 아름다움, 여백의 미! 균형을 잃은 일그러진 조선항아리에서 우리 할머니들의 등급은 키 낮은 모습을 방불케 함, 그것이 나는 너무 좋다. 이들이야말로 만날 수도 없는 몇 세대 몇 십 세대의 옛 겨레들과 만나는 대체물인 것이다. 내가 고완 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전적으로 우리 집에 “가보(家寶)로 전해 내려오던 조부의 애용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단계(端溪)벼루이다. 유학자로서의 조부는 한(漢) 의학자(醫學者)이기도 했는데, 31세에 16세의 조모를 만났으며 43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조부님의 얼굴은 사진에서나 보아온 나였지만, 백의의 두루마기를 입으신 조부님은 오세창의 풍모가 풍기는 선비였다. 만주 봉천에 건너온 강릉출신의 이민 1세로 해방 전에 봉천에서 약국을 경영하기도 하다 시골로 내려갔다가 집중 호우를 만나 洪水에 떠내려가셔 水鬼로 돌아가셨다. 못 다하신 많은 일들을 두고 무한의 限을 안고 돌아가셨을 것이다. 할머님께서 장롱에서 조심스레 보자기로 싼 벼루를 꺼내 보이시며 “니 할배가 쓰던 것으로는 이것과 넥타이 밖에 없다” 라고 하신다. 넥타이는 일본의 식민지시절 벗으로부터 받은 줄무늬의 모양이 멋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유학으로 올 때 그것을 소중히 지니고 왔다. 강릉김씨의 장손인 내가 이 家寶들을 일본에서 특별히 오동나무 함을 얻어서 잘 소장하고 있다. 古人의 苦樂과 땀띠와 숨결이 숭배인 것이 어찌 내 선조의 한 개 벼루뿐이랴! 나는 그래서 대학 졸업 후 부터 古人들의 물건을 존경하게 되었다. 유학생으로 수입이란 장학금이었다. 행운스럽게 얻은 20여만 엔의 장학금은 많은 액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서도 제법 유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대신 다신 京都의 고사찰, 정원을 배낭 메고 답사하였다. 만약 내 발자국이 도장이라면 온 쿄토시내의 구석구석에 내 신발자국의 붉은 도장으로 도배했을 것이다. 또 짬이 나면 古書街와 골동 가를 돌아다니면서 사냥물을 노리는 사냥꾼 같이 맘에 드는 것들을 사들여서 수집하곤 했다. 특히 書畵(서화)에 애착을 느낀 나는 근대 조선 인물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서화 족자를 많이 보고 때로는 사들이기도 했다. 고완 의 공부는 진짜 진품이나 명품 또는 명진품이 아니더라도 진짜를 사놓고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직접 느껴야 마음에서 느끼는 법이다. 삶의 모든 것은 상응한 대가를 안 치르고 쉽게 얻으려는 요행은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얻은 만큼 지불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고완 은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묘미가 있다. 나는 이중에서 또 많은 것을 배웠다. 고완 의 길은 기실 배웅의 길이었다. 나는 서울 인사동의 고색창연한 옛 거리와 청계천의 먼지 묻은 고서들에 풍기는 책장의 냄새가 좋았다. 북경의 유리창의 영보재나 중국서점의 화려하고도 중후 장대한 文化의 그 古色이 좋았다. 그리고 동경의 간다(神田)의 고서점가를 거니는 문화의 길이 좋았다. 노신과 곽말약과 근대의 중국 문화거인들이 거닐었던 그 발자취를 느낄 수 있어서 또 유쾌했다. 육당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발자취를 느껴서 좋았다. 누가 지식인, 학자가 가난하다고 했는가? 나는 이 모든 문화의 옛 재부들은 한꺼번에 마음에 담은 듯 하여 좋다. 억만장자의 거액도 어찌 이런 문화재부에 비길 수 있으랴?! “學富5車(학부5거)”란 말이 너무 좋다. 책이 지루해질 때 필이 막힐 때, 신심이 고단할 때, 고서화와 연적, 벼루와 연병을 바라보거나 닦아주는 것이 가장 유쾌하다. 부부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나에게는 벼루를 닦아주고 연병(硯屛)의 먼지를 터는 일이 더 좋겠다. 아글타글 안 되는 일을 궁리하기 보다는 차라리 서화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기는 멋이 더 좋다. 안 되는 글을 억지로 짜내기 보다는 차라리 고묵(古墨)의 묵향을 맡는 것이 더 좋다. 한밤중 뗠쳐 버릴 수 없는 고뇌에 불면하기보다는 차라리 고서의 책장을 번지는 일이 더 좋다. 2005년 11월 나는 위독한 간염질환에 걸린 것을 건강진단 때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입원, 약물치료로 나는 2006년 봄부터 수개월간 격심한 약물반응에 고생하게 되었다. 체중 12kg감량, 모발이 탈락하고 전신(全身)이 끔찍한 두드러기가 나고 또 나고... 부작용은 나를 오히려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견지했다. 물론 주위 독자들의 성원과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 참 고마웠다. 나는 병상에 누워서도 수집해온 고완(古玩)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면서 힘을 얻었다. 지루하게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고완(古玩)은 나에게 빛살 같은 밝음을 선물해 주었다. 지금도 피골상접 동연의 나의 체중은 2005년의 수준으로 돌아서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여유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체중이나 그런데 신경을 덜 쓰고 나를 자신하는 연구와 일에 몰두하게끔 하는 마음의 여유, 나는 그것을 고완 을 통해 얻은 것만 같다. “筆量精良 人生一樂”라는 말이 있다 거기다 나는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博覽群書 人生大福”라고 하는 말이다. 나는 늘 자신이 21세기를 살지만 시대와 어울리지 않은 전통적인 文人趣味의 남자라고 느낀다. 나는 문인취미로 서재를 꾸려 놓기도 하고, 아호(雅號)도 몇 개 갖고 있다. 일테면 海東(해동) 怪人(괴인), 曉靜(효정) 居士(거사), 무한(無澣) 老師, 秋月堂主人 등등. 그리고 장서, 印章, 閑章(한장) 등 만해도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른 30여개를 갖고 있다. 책의 사이즈, 내용에 따라 자서장을 박는 재미는 별미다. 요전번에 히로시마의 한 문화재단에서 내가 소장한 유묵으로 명사 유묵 전을 열자는 제안이 들어왔는데 나는 완연히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나중에 공개해도 좋으니, 지금은 역시 나의 취미의 “비밀보고(宝庫)”로서 고이 지킬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누구나 자가 자신에만 속한 비밀은 있어야 한다. 마음을 키우는 지성의 샘물 같은, 비밀의 화원 같은. 지난 9월에 나의 애독자가 “고완 이 왜 그렇게 좋은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고인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 라고. 그렇다. 고완 은 내게 있어서 취미를 넘어, 수집벽을 넘어선 일종 옛 문화와의 만남이다. 만남이란 것은 연인이나 아는 친지들과 얼굴 맞대고 오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그런 생신(生身)의 만남만은 아니라. 만나지도 못한, 아예 생각지도 못한 옛 물건, 그리고 그를 곁에 두고 애용하던 옛 사람과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을 고완 의 몫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의 고인의 넋과 호흡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상심열목(賞心悅目)인가! 그러나 완물상지(玩物喪志)란 말과 같이 너무 탐닉하여 스스로 품은 바 뜻을 잃어버리면 본말전도의 “우(愚)” 가 아닌가! 우리의 선대들은 이미 완물상지의 교훈을 남겼으며, 그를 “완물생지(玩物生志 )”의 에너지로 바꾸는 지혜를 또 가르쳐 준다. 아무리 제언(贅言)을 늘어놓아도 고완 이라 “상심열목” 과 “상심생지” 의 즐거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리하여 재력에 넘치는 진품명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허영심을 채워주는 고완 은 나는 싫다. 그보다 賞心悅目과 賞心生志의 “以堂主義”가 내가 추구하는 고완 의 진가이다. 이런 고완 주의는, 내게 있어도 글쓰기와 또 다른 知的축적과 머나먼 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知的方法의 하나이기도 하다. 고완 에 흥취가 없으신 이들은 아마 나의 이런 “고완 주의” 를 잘 체감 할 수 없을 것이다. 고완 주의 때문에 나와 생활, 지적 창조의 삶은 나름대로 윤택이 난다. 고전문화를 사랑하듯 나는 고완 을 사랑한다. “고(古)는 역사 문화의 古이기도 하며, 또 考,故,高,孤,唐,稿,鼓,苦와 이어져 있다. “玩”은 完,緩,浣,頑, 라도 통한다. 이 모든 글자의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지적 세계, 정신적 세계, 時空의 세계를 이룬 것이 곧 古玩의 美이다. 고완 을 통해 나는 또 時空을 넘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80    1-3. 나의 수공업주의 댓글:  조회:4200  추천:20  2012-10-16
3. 나의 수공업주의   나는 컴퓨터가 아닌 육필로 원고를 쓴다.   “21세기 최후의 手工業者”라고 자조 할 만큼 나는 수공업주의를 철저하게 견지한다. “왜 컴퓨터로 쓰지 않느냐?” 라고 수도 없이 많은 물음에 나는 이런 반문을 준비해 놓았다. “왜 내가 꼭 컴퓨터로 써야만 하냐?” 라고.   지금껏 나는 작가가 파소콤(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기실 원고가 탈고 되면 편집부를 거쳐 인쇄소에 가면 곧장 활자로 변신한다. 컴퓨터로 타자하면 작가 자신이 인쇄소를 경영하는 것과 같아서, 뭐 자비로 지하 출판사를 경영할 작정도 아닌 데야 왜 컴퓨터로 타자할 이유가 있는가? 나는 글쓰기의 프로패셔널로서 자기 자신, 즉 작가가 발표를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은 그 글 자체 내용이지, 꼭 활자체로 입력해서 써야 한다든가, 입력하여 편집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이유가 없다.   책 제작의 프로세스를 간략화 하기 위해 작가가 편집 일까지 거들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작가가 다 편집해 주면 편집은 뭘 하는가? 실제로 내가 하루 글 쓰는 속도는 컴퓨터로 타자하는 속도에 뒤지지 않는다. 나는 하루에 적어도 만자 내지 2만자는 쉽게 써 내려간다. 게다가 나는 단숨에 써내려감으로써 삭제하거나 보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글쓰기의 프로라면 적어도 이런 내공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 를 미리 구상해 놓으면, 구체적 언어사요, 단어선택, 문장구성, 글의 흐름은 내 두뇌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동으로 도도히 흐르고 흐르는 강물마냥 쏟아져 흐른다. 그래서 중국어로 인간의 두뇌를 모방했다고 컴퓨터를 ‘전기두뇌’로 칭하지 않는가, 내 머리가 곧 전기두뇌와 같은데 왜 하필이면 컴퓨터를 사용하여야 하는가? 황차 전기도 절약 하는데 말이다.   누구한테서 들은 에피소드인데, 어떤 컴퓨터 연구에 몰두 하는 호사가 있었다. 이 양반은 컴퓨터에 인간의 방귀(소리와 냄새)를 저장, 재생산 하는 연구를 하다가 결국 숱한 컴퓨터를 폭발시키고 방귀냄새(폭발로 인한 악취)를 맡고서야 질려서 관두었다고 한다. 컴퓨터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관념의 노예로 된 그 호사가 취미는 방귀의 악취보다 더 구린 것이 아닐까?   나 같으면 차라리 비닐 봉 다리를 특제해서 거기에 엉덩이를 대고 바지를 벗고 쏜 다음 0.3초 내에 밀봉해 버리겠다. 그런 단순한 수공업이 오히려 더 생산적이 아닐까? 어쩌다 말이 새서 구린 “방귀소리”가 나왔네. 그럼 방귀소리 그만 스톱하고 다시 본제로 돌아서자. 컴퓨터로 타자하는 기계문명의 우월성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쓰기 쉽고 고치기 쉽고 저장하기 쉬운.... 천 가지의 우월성을 강조해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거기엔 천편일률의 차가운 컴퓨터 활자가 그냥 재생산될 뿐, 나 자신만의 글줄, 그 행간 속에서 발산하는 잉크의 향은 코에 확대경을 써도 안 보인다. 근대 문명의 승리에도 도취된 대다수는 나의 이런 행위나 변명자체가, “눈에서 고기비늘이 나온다” 라는 격이 될 만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나는 그런 웃기는 내가 좋다. 전기적(電氣的)인 기계의 처리로 내 개성의 향기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이처럼 기계문명을 창조해 놓고 오히려 자신이 만든 기계 문명의 노예로 되는 것을 망각한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닐까.   1999년 20세기를 마감하는 해 영화 가 우리의 안구(眼球)를 자극하여 세계를 석권했다. 이 영화는 근 미래 인류문명의 암담을 암시한 것으로, 인간이 만든 기계는 결국 인간을 통제하고 육성하고 있다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이상적인 가상현실을 설정해 놓고 인간들로 하여금 그것에 빠지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조종, 통제하는 아이러니.   미국 작가 파츠제럴드의 소설 에도 인간의 여러 주제와 함께 순수한 녹색의 꿈을 꾸던 주인공 개츠비가 인간의 기계주의, 상업주의에 의해 희생당하는 비극을 반영하고 있다. 순수한 인간 개츠비는 꿈도 이루기 전에 기계(자동차)로 인해 사고를 당하며 또 기계(총탄)에 의해 살해된다. 기계문명주의에 빠진 인류에 경종을 소설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기계가 의지를 지닌 인간에 적대하는 테마로서란 영화 역시 “기계가 인류를 멸망시키는 적”이 된 근 미래를 명시해주고 있다. 이런 기계 문명, 컴퓨터, 휴대폰을 주무르는 모습이 유난이 우습꽝스러운 광경으로 내 시야에 안겨온다. 한시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못살 것만 같이 안절부절 못하는 젊은이들, 누군가가 그런 일본인을 “휴대폰을 든 원숭이”로 야유한 지식인이 있다.   수업 시간에서 보면 나의 학생들 속에도 휴대폰을 주무르는 모습이 유난이 우습꽝스러운 광경으로 내 시야에 안겨온다. 한시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못살 것만 간이 안절부절 못하는 젊은이들, 누군가가 그런 일본인을 “휴대폰을 든 원숭이”로 야유한 지식인이 있다. 휴대폰이 그런 젊은이들을 조종하는 것이 분명하다. 마치 신(神)이 인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떠날 수 없어 하는 관념과 같이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꼭 컴퓨터로 써야 한다는 관념에 너무 익숙해져 육필로 글을 쓸 수 없다는 인간이 대다수다. 기계 의존 중에 걸려, 실제로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글을 써주는 격이 되었다. 결국 또 하나의 기계문명의 노예로 돼서 본말전도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원고지와 펜으로 작문, 리포토를 써내려가 는 지 작업을 잘 시킨다. 연필을 쥐는 자세도 (컴퓨터 건판을 치는 식으로)이상한 학생들까지 속출하니 말이다.   반시류적 기질이 농후한 나는 글 쓰는 내용만이 아니라 글 쓰는 스타일 역시 반시류적이다. 나는 컴퓨터로 때리면 글이 안 나올 것 같다. 글은 써서 나오는 것이지, 때려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릴 줄 모르지만, 컴퓨터를 치는 이는 打家(타가)이지, 손으로 손수 쓰는 作家(작가)는 아니다. 굳이 작가라는 명칭을 붙이자면 그 앞에 “타가적”이라는 3자를 부착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컴퓨터로 쓰시는 제현들을 아유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명을 향유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적 인물인 나 자신의 자조적 익살이다. 일개 헨진(戀人)의 타령 일뿐이다. 그래도 내겐 동조자가 예나 지금이나 숱하게 많아서 위안을 느낀다. 내가 숭경하는 소설가 헤밍웨이는 “연필 두 자루 정도는 닮아 없어져야 하루 일을 충분히 다 한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글을 써왔다.   존 스타인백은 하루 종일 글 쓰는 연필을 깎는 시간을 절약하려고 자동연필깎이 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수십 개의 연필을 두고 그날그날의 기분과 천기에 따라 다른 연필을 골라 썼다는 에피소드 또한 유명하다.   붓, 펜, 연필, 만년필, 볼펜... 이것이 있어서 “펜은 검보다 강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건판이 검보다 강하다고” 하면 감동이 안 온다. 차라리 건판이 “정치판보다 강하다”로 해야 할 것인가.   세계의 무라카리 하루키도 여전히 몽브랑 만년필로 소설을 쓴다. 그리고 요시모토 바나나도 도 그리고.... 나도 역시 수성볼펜으로 쓴다. 그것도 나만 쓰는 일본제 uniball.sig NO GP의 0,5미리 직경 수성 펜이다. 원고지도 횡선 35행간의 A4사이즈의 것이다.   나는 고려 최고의 문호이며 안빈낙도의 삶을 즐긴 이규보(李奎報)의《슬견설》에 나오는 “벼루에 부치는 글(小硯銘)이 좋다. ”벼루여! 벼루여! 나의 무진장한 뜻을 쓰게 했으니, 나는 그대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 하리오.“ 그리고 천재 이상과 절친했던 당대 일류의 문인 이태준(李泰俊)이 만년필을 “만세필”롤 부르며. “촉긴 붓과 향기로운 먹만 있으면 어디든 정토(淨土)일 수 있다” 라는 말이 좋다. 이 선각자들의 말 한마디에 나의 뜻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계 문명의 노예를 거부하는 나는 여전히 수공업주의를 견지한다. 내 손때 묻은 펜으로 잉크 향 그윽한 나만의 글을 쓴다.   수공업주의의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육필로 쓴다.
79    1-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댓글:  조회:4837  추천:22  2012-10-10
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왜 밥을 먹는가?”와 같이 나에게 있어서 이는 지극히 우문(愚問)이다. 밥 먹고 술 마시고 배설하고 자고 일어나고 걸어가고 말하고 호흡하는 것 같이 글쓰기는 나 자신의 삶의 방식이다.   살아가는 생 그 자체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왜 글 쓰는가? 반문자체가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은 쓰는 것이고, 써내려가야 하므로 왜 쓰는가? 의 허들은 판터지 소설속의 무명의 요괴같이 불현듯 튀어나와 가끔 나의 사색을 유혹할 때가 있다.   나의 글쓰기의 사숙 스승 이어령 선생님은 옛날에 이미 정채로운 명언을 남겼다. “나는 호흡처럼 글을 써 간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나 방법이 아니라 생존 바로 그것이다.” (1969년)   그리고 이 선생님은 (1996)의 서문에서 글쓰기를 낙서에도 비유하기도 하면서 글쓰기를 설명한다. “조금 슬프다는 이유로, 조금 괴롭다는 이유로, 조금 심심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가끔 흰 종이 위에 낙서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소설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한다.”   “그저 하나의 통곡처럼, 분노처럼 쓰기만 했다.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좋았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이 선생님은 자신은 계속 “생각하고 그리고 쓸 것이다.”라고 명언한다. “모든 공공기물(법원, 시청, 병영등...)에 낙서하는 것이 나의 문학이다”라고 이어령 선생님은 공언한다. 그러면서 “문학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저울 질 하는 ”오늘의 한국에서 “비평가들은 문학자체의 그 창조적 의미를 제거해 버린다”라고 침을 놓는다. 경계를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어 글쓰기를 호흡처럼, 낙서처럼 해 오신 이어령 선생님은 모종의 의미에서 나 자신 글쓰기의 귀감이다. 이런 “당대동아시아의 지적거인”을 사숙한 나는 행운아라고 간주한다.   나는 가끔 홀로 있으면서 이런 사색에 빠져보곤 한다.   글쓰기를 생활 그 자체로 하고 있는 내가 만일 아무도 없는 외딴 무인도 같은데서 살게 된다면 그래도 그냥 글을 쓸 것인가? 라고 대답부터 말하면 yes다. 물론 조건이 하나 딸린다. 그것은 무인도에 생활의 식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이와 팬도 있어야 하고, 원시인처럼 식량획득과 야생과일 채집과정을 나는 운명으로 감수하고서 즐기면서 그 실 체험을 짬짬이 써 내려갈 것이다. 세상과 격리된 이곳은 자연의 “감옥”이거니와 “낙원”이다. “감옥으로 생각하는 의식을 나는 우선 뇌리 속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 누구의 감시도 간섭도 관심도 모든 거추장스러운 인간문명의 장치를 제거 해 버린 ”낙원“에서 나는 글쓰기생활을 즐기겠다.   나의 “낙서”같은 글을 읽어주는 사람도 없다. 나의 “배설”같은 작품을 관심하는 그 누구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 그 “나”가 나의 유일한 충실한 독자가 되어준다. 물론 이 독자가 읽어주지 아니해도 상관없다. 있어 주는 것만으로 괜찮으니까.   차라리 근대적 모던에서의 도피로 인해 나는 지고 무상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사상가, 철학자 푸코를 연상한다. 만년의 푸코는 모던의 테크놀로지의 발달, 증대와 권력관계의 강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살아가 는 것의 위험성을 자각했다. 그 대처의 처방으로 “자기의 통치”“자기에 향한 배려”를 깃발로 들었다. 자신에 향한 배려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언어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언어”는 감옥도 없고 법원도 없고 타자도 없는 “무인도”의 지경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알몸 같은 뇌리 속 을 바라보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또 이런 상념을 하기에 이른다. “무인도” 적 절대적 “낙원”은 그 역설적 의미에서 결국은 너무 자유로워서 두려운 자유로운 “감옥”이라고. 역시 내면의 진실함을 추구하는 언어를 찾은 다음 해야 할 일은, 이 “무인도”의 낙원을 탈출하여 자신이 아닌 수 많은 타자들이 있는 인간사회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절박감, 그것을 이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같은 환경에 오래 눌러 있으면 그 자체가 사상을 죄이는 “감옥”이 된다. 흐르지 않는 썩은 물같이 온갖 해로운 병균을 발생시키는 온상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무인도를 탈출하는 이유는 충분히 주어져있다. 수많은 타자들이 사는 인간의 사회에서 타자와 대화를 나누며 나를 개변시키고 또 사회에 무언가 흔적을 남긴다.   내가 글 쓰는 것은 타자와의 대화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나의 정신적 구원, 변함의 방식을 추구 하고자 한다. 따라서 화자로서의 내가 던진 글들이 타자의 반응이 있으면, 그것만으로 나는 의식했던, 또는 무의식했던 “모종의 것”이란 단어를 쓰고, “목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나는 굳이 “목적”을 필요하기 보다는 이 자체가 모종의 생활방식인 까닭에서였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나는 글쓰기를 일개인의 언설적(言說的) 발설이라 생각한다. 그 글이 타자가 읽어도 안 읽어도 상관없다. 나는 글쓰기가 어떤 나라나 민족을 위한 영웅이요, 전투요 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관념, 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이 읽히고 많은 독자의 공명을 일으키거나 매료 된다면 글쓰기의 망외(望外)의 희사 일뿐이다.   그렇다고 글 쓰는 사람을 우상화 하거나 정치적 적, 반역자로 내모는 것도 다 아니다. 작가가 늘 수난 당함은 작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타자의 모종의 욕망과 의도에서 빚어지는 비운이다. 정치적인 수요로 작가, 지식인의 글을 모독, 왜곡하고 정치의 제사상에 제삿물로 올리는 비극은 오늘도 번번히 생기고 있다. 정면이든 반면이든 제삿물로 전략되는 것은 지식인의 최대의 비극이고 치욕이기도 하다.   이런 “감옥”-- 정치기구의 인간의 자유, 인권을 말살하는-- 푸코가 언급한 정치장치가 작가, 지식인은 물론 전 대중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의 지적(知的) 글쓰기로 이 정치적 감옥을 부수고 급속히 다수 대중을 계몽하는 작업은 “상미기한이 지난”것이 아니라 여전히 필요, 유효하다고 사료된다. 물론 내가 쓰는 글, 그 많은 글들은 사회를 향한 나 자신의 넋두리, 타령이고 낙서로 양산 한다. 좀 문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知的)생산의 글이 대중에게 수용되든 안 되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나는 글쓰기만 하는 정신제품의 생산자이다. 계란을 낳는 암탉이다. 계란이 맛있으면 잡수시고 맛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독자들의 평판은 자유이지만, 저자를 과도하게 탓하여 암탉 잡는 일은 독자의 권한을 벗어난 “광기”이다. 이 “광기”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시 정치적 탄압의 마살 행위에 가세하는 격이 되고 만다.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고행건(高行建.1940년--)은 자신의 문학관, 글쓰기에 관해서 “냉문학(冷文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자신의 ”냉문학“을 이렇게 해석 했다. ”냉문학은 일종의 도망이며 그것으로 생존을 구하는 문학이다. 사회의 말살을 피한 정신적 자기구원의 문학이다. 체제의 정치적 박해를 받아온 그가 “비공리성 문학” “비정치성, 이념성문학”을 추구하는 심경은 너무나 납득이 간다. 나 역시 그의 수상작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위구하는 것은 고행건의 “냉문학”은 자칫하면 “냉소주의”에 빠져 극단적으로 네거티브한 “사소설”의 취미에 편향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사소설”, “비공리성 문학”마저 용인되지 아니하는 사회는 절대로 정상적인 문화의 나라가 아닐 것이다. 나는 고행건의 “주의가 없는 주의”에 깊은 동감을 느끼면서도 한편 좀 더 밝은 문학, 항상 하는 포지티브의 문학관이 더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싶다.   문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지식인의 폭넓은 글쓰기에 대해서 담론 할 때, 왜 글 쓰는가? 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금수문장(錦수文章)을 써 내려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모종 체제에 발라맞추기 위한 장치로서 작용했다면 그것은 죽은 글이다. 아니 살아서 독해를 뿌리는 최고의 악문이 된다. 지식인의 사명이 있다하면 나는 진실을 쓰고 진실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참된 사명의 제1위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진실을 포장한 모든 허위의 포장지를 째버리거나 불살라 버리는 글쓰기를 한다. 나는 늘 자신을 엷은 포장지에 쌓인 검으로 생각한다. 언제라도 기필코 포장지를 뚫고 나올 것 이라고 믿어 왔고 또 믿고 있다. 이 검에 대해 “귀재”라는 높은 평가를 내린 이들도 있고 반대로 “매국노”로 매도한 이도 있다. 이런 찬반 양면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는 것은 내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글을 써 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여 나는 그런 평가들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다. 왜냐면 나는 오로지 독서하고 사색하고 글쓰기로 꽉 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세상이 많은 거짓으로 포위된 사회라면 나는 사회의 모든 티브에 도전을 걸 수밖에 없다. “팬을 검으로 삼는다” 라는 말이 이때같이 유용한 일은 없다. 역사의 허위성, 민족, 국가에 관한 거짓, 티브 이런 것들이 내 글쓰기의 반경(半徑)안으로 많이 들어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날 내가 아니다.   왜 글을 쓰는가? 의 물음에 준비된 답은 “월경하는 글쓰기”이다. 나는 이 7글자의 말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나의 주의는 어쩌면 “월경하는 글쓰기 主義” 9자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비좁은 조선족만이 아닌, 동아시아 (한, 중, 일) 3국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비교문화론의 깃발을 내걸고 행해지는 “김문학주의”라는 글쓰기. 이는 나의 숙명이다. 한중일 3국어, 3국 문화 그리고 3국을 통 털어 바라 볼 수 있는 시야, 누구도 할 생각은 있으나 하지 못한 글쓰기를 나는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마냥 바쁘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꼭 조선족이 했을 것이다. 조선족만 가능한 동아시아적 시야의 월경하는 글쓰기. 그 글쓰기에 나는 생의 가장 큰 보람을 느끼며, 또 비장한 “사명감”같은 느낌마저 들어서 좋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나 내가 하는 일은 한중일을 통 털어 첫 번째 일일뿐만 아니라, 조선족의 척박한 문화 풍토 속에서 항상 거의 첫 보습을 들이대는 작업이 된다. 나는 이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글을 쓰고 또 쓰게 지탱해 준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는다. 욕먹는 일도 이제는 즐겁기만 하다. 농담이지만 오히려 욕하는 사람이 없어질 까봐 우려 할 때도 있다. 욕도 일종의 타자와의 대화이다. 좋든 나쁘든 그 욕이 내 심성에 퇴적비료같이 지성과 품성을 키우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배짱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내게 있어서 글쓰기는 세계지도에 색채를 칠하는 것과 같다. 이질 된 他者의 인식과 세계관과의 대화로써, 나 자신의 세계관 주의주장을 24色, 또는 48색, 또는 그 이상의 색깔도 하나 또 하나씩 색칠해가는 手工業적인 작업이다. 나는 지구위에 페인트 도배공이다.   세계의 지도에는 나의 색 연필이 기다리고 있는 구석구석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펜은 쉬지 않는다. 이 문화, 타자와의 대화의 방법으로서의 나의 글쓰기, 그것은 오색영롱한 색깔로 도배돼 있는 그림이고 싶다.   밥 먹는 것과 같은, 숨 쉬는 것과 같은, 심장이 박동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배설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 나의 글쓰기이다.  
78    1-1. 김문학 주의(主義) 댓글:  조회:5870  추천:47  2012-10-05
    제1장 金文學主義     1. 김문학 주의(主義)   인간은 누구나 독립적인 “나”이다.   아니, 독립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로서 살아가는 데는 나름대로 “나”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 삶의 스타일과 세계관, 가치관이라 칭해지는 신조, 주의주장이 있는 법이다.   이 졸문은 내가 살아가는 주의 주장이 있는 “풍경화”이다. 파스켈로 그려진 마음의 풍경화 스케치는 내가 “나”로서 독립할 수 있는 나만의 유니크한 “김문학 主義”에 관한 간악한 連 일 것이다.   대저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흉금)은 커야 한다” 라는 작고하신 어머님의 母敎가 그대로 내생에 관통된 신조의 굵은 아이템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갓 출생시 매우 약소한 영아였다고 한다. 현대의 건강한 아기와 같이 거의 3000g 넘는 복상스러운 돼지 같은 아기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약골로 태어났기 때문에 심히 가엽게 여겼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를 회임하셨을 때 공교롭게도 3년 재해의 피크에 달한 시기라서 식량, 먹을거리가 없는데다가 또한 본디 허약체질인 어머니는 입덧이 과히 심해서 음식을 변변히 드시지 못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드신 것이 능금 한 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남인 내가 이렇게 시대의 산물 “약골아”로 태어난데 대해 늘 가슴 아파하시고 나를 3남매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셨다. 어머니는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시켰지 나에겐 마치 “큰 도련님”으로 아무것도 시키지 아니하시고 공부만 하게 두었다.   내가 나이를 들자 어머닌, 늘 상 “사람은 작아도 통은 커야 한다” 라고 가르쳤다.   이래서 나는 학년 전 때부터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이 지고무상의 인간사라고 알았다. 학교가기 전 집에서 숙부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글을 마치고 한어병음과 한자를 많이 익혔으며 짧은 작문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신의 신체적으로 ‘왜소’ 함에 대해서 크나큰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또 한편 나는 오기가 발끈 불어나서 내가 무엇이던지 이 작은 체구로나마 나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유년의 반발심은 엄청난 용수철같이 나의 분발을 지탱해주었다. 나는 병약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머님의 유전인지 나는 병약해서 유년 때부터 위장이 몹시 약한 터라. 늘 설사를 하곤 했다. 할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 는 중얼거림 가운데서 그렇게 나는 자랐다. 그리고 나는 근시에, 중이염에, 시력이 나쁜데다 청력이 나쁘고 또 간장까지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왜소한 몸은 역시 “병약”으로 전신 무장되어 있는 “병문학”이다. 왜소하고 병약한 내가 무엇으로 내 신체적 역량을 보일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소학교 첫 체육 시간에 60M 달리기를 하였는데, 그날 반 전체 아이들과 체육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내가 반 전체에서 속력이 제일 빨랐던 것이다. 나 자신의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10여년전 제67회 아카데미 영화수상작 (중국어로 )의 주인공 소년이 신체적 핸디캡을 박차고 달리기와 뭇볼 선수로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천진난만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공명을 일으키고 숱한 눈물을 흘렸다. 주인공 검푸는 신체적 핸디가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파워를 낳는다는 점을 과시하는 감동적 인물이었다. 그 뒤로 나는 전교 60M, 100M 단거리 선수로 선발돼 5학년까지 같은 학년조의 단거리 기록을 세우면서 구 대표, 시 대표 선수로 뛰기도 했다. 또한 육상의 속력을 살려서 축구도 좋아 했는데 많은 드리블 테크닉을 시와 구 소녀업여체육 학교에서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약골 신체로도 운동선수가 되어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첫 학생으로 전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지금도 소학교 모교의 스승님과 만나면 “우리는 언제나 자네이름을 거론하면서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잘 한 학교의 모범생으로 기억하며 자랑하고 있다네” 라고 싱글벙글 말씀하신다. 소학교 때 나는 흔히 “신동”이라 불렀다. 나는 2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3학년 때 쓴 작문들이 늘 5학년의 작문 범문으로 얽히기도 하여 “문학신동”으로 불렀다. “김문학 모르면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다” 라고. 그림에도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나는 미술과는 항상 만점이었으며 1975년 가을 “批林批孔” 운동이 일고 있을 무렵, 공자의 인생에 관한 만화를 50여장 그려 전시하였고 소학생을 상대로 “개인 그림전”을 펼쳐 이름을 날렸다. 그해 전시 소학생 統一考試에서 5과목 500점의 점수로 조선족 소학생의 스타로 다시 유명해졌다. 우리 반의 한어 교원이 당시(군에서 재대한) 민영교원이었는데 국영교원이 되려는 문화시험이 있었다. 그중에 한어 작문이 있었는데 미리 제목을 주고 기한 내에 제출하면 되었다고 한다. 그 한어선생님은 “한어 작문이라면 네가 더 잘 쓰니 써달라” 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틀 후에 명제작문을 탈고하여 드렸다.   이 일이 언제 있었나 하듯 싶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 선생님이 나를 찾는 것이었다. “아, 문학이 너 너무 대단한 놈이다. 네가 쓴 작문이 초고 우를 맞았단다. 네 덕분에 내가 진짜 나라 봉급 타먹는 선생이 됐다. 너무 고맙구나....” 나는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 그럼 정말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근데 밀크사탕이래든가 뭐 장려 같은 거 없습니까?” 선생님도 웃었다. “짜식, 밀크사탕이 대수냐? 저기 시내 환뗀(판점)에 가서 꿔뽀우러우(튀긴 고기만두의 일종) 사주마,”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꿔뽀우러우는 고사하고 개 눈깔사탕 한 알 얻어먹지 못했다. 핫하하...   꿔뽀우러우 보다 더 반가운 희사가 생겼다. 이는 처음 공개하는 소학시절의 에피소드이다. 나의 습작이 시에서 인정받아 향토교재 독물로 시와 학교에서 을 책자로 출간해 주었다.   이것이 13세인 나의 첫 처녀작 출판이다. 그런데 너무 유감스러운 것은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한권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 전 선생님께서 나의 일기책 몇 권과 같이 이 작문 집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행방이 깜깜하다. 전 선생님께서 내가 성인이 된 다음 반환한다고 약속했으나 그 분께서 돌발의 병으로 작고하셨다. 그 뒤 사모님을 찾아가 수소문해 보았지만, 사모님 역시 모르고 계셨다. 아, 내 13살의 처녀작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소실됐단 말인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그때 내가 표지 디자인을 했다. 거대한 대포 같은 붓을 오른손에 쥔 소년인 나 자신의 모습을 만화로 그린 것이었다. 아마 당시 문혁(文革)시기의 선전화 포스타를 모방하여 “글 쓰는 문인”이랍시고 표상화 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가끔 그 그림을 떠올리면서 지구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붓을 들고 “월경하는 지식인”이랍시고 곧 잘 희화하고 있다. 3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이는 28세인 내가 발표한 에세이다. 흑룡강 신문 진달래부 간에 1990년인가 일본 오기 직전에 쓴 내 포부를 이야기 한 글이다. 내가 원래 시대를 거스르는 반골적인 반항아적 기질이 있음을 발견, 이제부터 모난 사나이로 화살같이 뾰족한 날로 이 사회, 문화의 부조리에 용감히 저항하는 젊은이,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주의주장을 펼치겠다는 20대의 팡세였다. 아니 20대의 “성언” 그 자체였으리라.   내가 소학교 때 그려낸 자신의 미래성은 (1) 글 쓰는 작가, (2) 그림 그리는 화가, (3) 운동하는 운동선수였다. 이 3글자를 다 겨냥했으며 다 어우른 욕심쟁이 야심소년.   약골의 신체적 조건으로 아무리 운동신경이 발달했다 해도 (3)은 아니라고 나는 13살에 깨우친 것 같다. 결과 남은 것은 (1)작가냐 (2)화가냐의 양자택일이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거듭 이라면, 선택 앞에서 왕왕 우유부단은 금물이다. 결과 내가 (1) 글쓰기의 지식인으로 택한 것은 초종3학년의 비오는 여름날이었다.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나는 미술전문학교에 수험할 결심으로 내가 소학교 때부터 사사해오던 미술스승을 찾아 갔다. 미술 선생의 “추천장”이 수험생의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스승은 뜻밖에 솔직한 말씀을 터놓았다. “자네는 그림보다 글재주가 더 좋으니까 그 방향으로 선택 하는 게 무척 좋겠다. 노신이나 파금 같은 그런 글쓰기에 더 자네 적성이 맞네. 소학생으로서 이미 ‘개인전’도 하고 ‘개인 작품집’도 냈을 정도니, 그림을 부업으로 공부를 주업으로 하길 권장하네. 글로써 이 어지러운 세상을 깨우쳐주게.......” 나는 스승의 권장에 깊이 동감을 느끼며, 이날까지 흔들린 선택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선택의 길을 찾았다는 희열이 팽배 히 치밀었다.   귀로에 여전히 폭풍우가 쏟아졌다. 천둥 속에서 나는 저 미래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붓을 쥐고 지구를 밟고 선 자신의 “문인상”이었다.   그 뒤 나는 내가 가장 숭경하는 파금(巴金)과 沈從文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스승으로 모시고 문학 공부,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조선족 소년의 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한어 편지였다. 그러나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에게서부터 일일3추로 고대하는 답장은 오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많은 글을 쓰고 또 썼다. 1978년에 나는 십만자 분량의 중편소설 을 탈고했다. 이것 또한 학교의 뉴스로 되었다. 1979년에 신문에 육속 발표된 산문으로 인해 학교에서는 나를 “문학가”로 불렀다. “문학소년”에서 “문학청년”으로의 성장이었다.   파금과 심종문 대가들의 편지 대신, 나는 동년 급이나 아래반의 팬들의 편지를 십 여 통이나 받았다. 길림성 흑룡강 성에서 날아온 편지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지금도 文友로 사귀는 펜팔이 있다. 1979년 신문에 발표된 산문작품의 원고료가 10원이었다. 그 무렵 교원 월급이 38원 이었으니 당시의 시가로 따지면 학생인 나에게 있어서 거액의 돈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약을 사드리고 책 몇 권을 산후 친구들과 식당에서 외식을 하였다. 그리고 꿔뽀우러우 사주시겠다는 소학교 한어 선생님을 찾아가 내가 선생님께 식당가서 꿔뽀우러우를 사드렸다.   그 뒤 요녕민족출판에서 처음으로 츨간 하는 에 내 글이 3편이나 실렸다. 그때 나는 노트장에다 “나는 장래 중국 조선족 최고봉의 작가로 되겠다” 라는 문구를 적었는데, 그 뒤 이 노트를 문학을 즐기는 후배 여학생이 몰래 보고 나에게 심심히 감복했다면서 나를 따랐다. 바로 그 여학생이 나의 첫 연인으로 첫 아내가 되었다. “조선족 최고봉의 작가”를 놓칠 수가 없었다고 그녀가 훗날 고백한다. 말수가 적었던 나는 젊은 청춘의 광기와 패기로 “청운”을 품었다. 나는 조선족의 호적과 임어당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노신을 숭경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히려 유연한 자유주의자 호적, 임어당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   첫 연인의 말을 마저 하자., 그녀 덕분으로 나는 대학 4년을 애정의 꿀을 만끽하면서 지식의 감노수를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녀는 나의 심심에 靑春의 자극과 흥분을 준 여인이었다. 얼굴이 백설같이 하얗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백설희라 닉네임을 지어 주었다. 그녀는 백설희가 난장이와 연애한다고 곧잘 나를 익살로 놀려대곤 했다. 치정이다 시피 내게 심취했던 그녀는 생활에서 하도 “도련님”식의 자립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마지막 황제 부의보다 좀 낫다면 신 끈을 맬 줄 아는 것 뿐 이예요” 했다 그래서 생활상에서는 자모와 같이, 알뜰한 누님같이 모든 걸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원고의 첫 번째 독자로서 언제나 중문학부 전공생답게 비평을 해 주었다.   대학교 때 길림성 대학생 산문부분에서 내가 길림대나 동북사대 수많은 중문학계 문학 지망생을 누르고 최우수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뒷바라지의 공이 컸다.   라일락향기가 물씬 풍기는 4월에 시작된 우리의 애정이 10여년 후 일본 쿄토에서 사쿠라가 우수수 지는 같은 4월에 막을 내릴 때, 우리는 서로 울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랑도 인연도 수명이 있으니 그 수명이 다 하는 운명 앞에서 우린들 무엇으로 당해내랴! 그녀와 갈라질 무렵에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미안해. 내가 조선족의 최고봉 작가가 된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어서 말이다. 난 거짓말쟁이야. 이제 더 이상 이런 말을 믿을 네가 사라지니 가슴 아프다” 라고. 그 말에 그녀는 흐느끼며 울었다. 내 빈약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하지만 당신은 이제 조선족이란 테두리를 벗어난 지식인으로 성공했잖아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 한 약속 보다 수백 배 큰 인물로 성장되고 있잖은 가요!” 핑크빛 눈꽃같이 산산이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은 우리의 영구한 이별을 축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랑의 나무에 목을 메여 죽고 싶다” 라고 나는 그 시구를 그녀에게 써준 적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아마 우리 애정의 사정(射程)은 애 언약을 기다릴 만큼 짧은 것이었나 보다.   당시 우리 애정의 종식은 나에게 지대한 충격을 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서 하는 사랑마저도 우리는 스스로 지배 해 나갈 힘이 없다. 운명의 女神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말이다. 20세기 희대의 독재자 모택동도 그 자신의 운명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강청과 왜 이혼을 안 하는가” 라고 한 측근의 물음에 그는 “낸들 어디 가서 법적으로 기소하겠냐!”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운명의 女神앞에서 절대적으로 굴종하지 않는 습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失望속에서도 希望을 품고 분투하는가 하면, 가령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지푸라기도 부여잡고 사신의 운명과 치열한 고투를 벌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운명과 싸우는 일은 기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운명과 격투, 운명을 애어 싼 주의, 사회 환경과 격투, 그런 도전은 인간이 살아가는 주어진 환경에 대한 최적의 적응상태로 삶의 양식을 창조해나간다. 이 삶의 양식에서 걸러낸 지대한 지성의 감노주(甘露酒)가 곧 “주의주장”이다.   나는 내가 삶의 양식(문화)에서 나를 정신적으로 컨트럴하는 주의(主義)가 있다면 그것을 차라리 “金文學主義”로 표현, 명명하고자 한다.   獨立的 “人”으로서의 김문학, 그가 내거는,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정표처럼, 깃발처럼 내걸고 실천의 지침 같은 그것.   “것”이라고 굳이 표현한 까닭은 수학공식이나, 헌법의 조목처럼 표현의 불가능한 내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실을 진술하기에 앞서 서두에서 얘기하던 어머님의 이야기를 그 전제적 조건으로 해야겠다. 어머님께서 자주 들려주던 胎夢에 관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를 회임하시기 직전 태몽을 꾸셨다. 마을 중앙의 古木밑에 우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건져 올렸다. 그런데 그 속에 물이 아닌 엄청나게 거대한 구렁이가 반거하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어머니는 그 두레박을 버리고 어머나! 하면서 비명 지르며 집으로 뛰어 왔다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그 태몽을 이렇게 해몽하셨다. “동네 유식한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그 구렁이는 용인데 장차 출세할 남자애란다. 그 구렁이가 담긴 두레박을 집으로 갖고 왔다면 어머니 신변에서 늘 살 수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밖으로 버렸기 때문에 너는 나를 떠나 멀리 날아가 산다더구나. 참 지금 보면 그 해몽이 신통하잖니. 네가 세 나라에서 날아다니면서 지식인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태몽의 해몽대로 나는 나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 수험시 문학청년으로서 의례 지망해야할 중문계를 선택지에서 탈락시키고 스스로 일본문학부를 지망했던 것이다. 당시 담당의 중국어 선생님, 조선어 선생님과 일본어 선생님은 나의 지망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 자기의 언어 쪽으로 전공해야한다고 다투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으로 일본어를 택했다. 언어를 하나 더 아는 것은 문화를 하나 더 아는 것이다. 장래 일본 유학과 일본에서의 비교 문화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주의”는 이렇게 태몽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본을 활동거점으로 삼아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월경의 글쓰기를 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고 싶었다. 지금 나 자신의 월경의 글쓰기가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란 가테고리를 넘어서 “공공지식인”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니까 그만큼 찬반양론의 시비도 많은 것이다. 자, 수자풀이 노래로 엮어보자.   1,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2, 이상하게 생긴 김문학이 3, 삼국문화 비교를 4, 사시장철 써내는데 5, 오해 곡해 받으면서 6, 육십 권을 펴내고 7, 칠전팔기 주의 주장 굽힘없이 8, 팔굉(八紘)에 팔뚝 걷고 격투하니 9, 구나방은 구리 텁텁 구각춘풍(口角春風)이요 10, 십만억토 신나는 신바람 일으키네.   여기서 나는 7의 “칠전팔기 주의 주장 굽힘없이”란 문구에서 나의 모습이 그대로 노정됐다고 생각한다. 7이 럭키숫자이다 라고 하는바, 칠전팔기해도 주위와 주장을 굽힘없이 견지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나는 20대 “모난 사나이”의 화살을 들고 세상과 도전하는 반시류적 표상을 보는 듯하다. 나는 스스로 “조선족”의 “좁은문”에서 빠져나와 팔굉(八紘)이라는 국제적 무대에서 월경을 하면서 드넓은 시야에서의 연구와 글쓰기를 벌이기를 대학 때 이미 결의 했다.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흉금은 넓고 커야 한다” 라는 母敎를 실천으로 보이고 싶었다. 어머님은 생전에 늘 16층 아파트의 창가에 서서 언제면 해외에 있는 아들 녀석이 집에 돌아올까 바라면서도, 그럼에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우리걱정은 말고” 라고 하셨다. 아마 어머님은 하늘나라에서도 혼이 되셔서 나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어머님은 늘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러면 된다. 앞뒤 너무 재는 것도 안 좋다. 할 때 하면 그것이 곧 좋은 일이다. 네가 혼인에서도 일본여자와 살든 조선족 여자와 살든 좋을 대로 하라” 라고 말씀 하셨다. 이 같은 개명한 어머님이 등 뒤에 계셨기에 나는 늘 행복했다. 어머님의 육신은 갔지만 그 모교는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신문기자들이 언젠가 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취재시 질문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口吐三國語言, 脚踏三國大地, 手書三國文化”   동아시아 3국을 조국으로 간주하고 3국 문화를 읽으며 3국 문화를 쓰는 것, 이것은 또 나의 주의속의 “3국 文化主義”이다.   자주 거론 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 있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모든 나라들 다 자기 조국같이 좋아하는 사람은 강한 어른과도 같다. 하지만 세상전체를 다 자기 조국같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聖) 비터휴고가 남긴 명언이다. 자신의 민족, 자신의 나라만 최고로 간주함이 아니라,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문화처럼 기꺼이 포용하는 자야 말로 성숙된 어른이라는 뜻이다. 그 옛날 12세기에 이미 이런 세계적 시야의 수용력과 통찰력을 갖춘 사상가가 있었다니 놀라울 일이다.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자기민족, 자기 지방, 자기나라에만 국한돼 그 같은 “좁은문” 속에 갇혀 타자를 경시하는 개방된 시기의 중세기식 사고양식의 인간이 어디 한 둘인가. 따라서 나는 방편을 위해 “3국”이란 표현을 쓰지만, 나는 시야를 동아시아를 넘어서 지구촌 규모로 확대시킨다. 현재 내가 연구의 사정(射程)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며, 우선 여기서 주의 주장대로 활동하노라면 언젠가 그 사정은 유럽, 서양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한중일 언어적 우세와 활동적 우세를 우선 활용하여 우리의 선대들이 못 미친 영역에서 보습을 박고 있다는 자부심은 다 나의 “주의”를 실천하는 에너지로 되고 있다. 이래서 나는 자신을 “新 조선족”으로 자부한다. 누가 우리 조선족의 文化風土가 이다지 척박하다 했나? 그것을 말로만 지탄하기보다 우선 행동으로 뭔가 해나 가 는 것, 일을 하는 것이 나의 행동적主義이다.   2000년 중국인 노벨문학상 최초의 수상자 高行健 (1940-)은 “중국현대 문학예술의 탁월한 대표인물”로 꼽힌다. 그의 수상작 ,
77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차례 댓글:  조회:3390  추천:15  2012-10-05
차 례     머리말   제1장 김문학 主義   1. 김문학 主義 / 12 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 30 3. 나의 수공업주의 / 36 4. ‘고완’ 주의 / 41 5. 致福의 독서편력 / 46 6. 나의 독서방법 / 54 7. 나의 여성관 연애론 / 60   제2장 내 사상의 계보   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 74 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 91 3. 反컴퓨터론 / 98 4. ‘미완’의 思想 / 105 5. 서의 사상 서의 정신 / 110 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 115 7. ‘죽음’에 관한 명상 / 121   제3장 역사란 何오   1. 역사란 何오? / 136 2. 조선 말기 사회진상은 어떠했는가? / 162 3. 일제식민시기 조선의 일상생활 / 165 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지도 /168 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비교 / 171 6. 한복을 입은 이토히로부미 / 174 7. 100년 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나? / 177   제4장 민족ㆍ 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 / 182 2. 백년의 눈물 / 201 3. 反애국론 / 213 4. 노신과 이광수 / 234 5.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 239 6.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 242 7.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방법 / 245   제5장 월경ㆍ자유ㆍ비판ㆍ문명   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 254 2. 나와 일본 문화와의 만남 / 257 3. 내 손이 말한다 / 266 4. 나는 왜 반론을 안 하는가? / 270 5. 鬼才는 누구인가? / 283 6. 이어령과의 대담 : 동아시아 문화, 융합과 미래의 방정식 / 289
76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머리말 댓글:  조회:3648  추천:16  2012-10-05
머리말      우선 이 책에 대하여 몇 마디 설명하고 싶다. 이 책은 자유주의 지식인, 그리고 월경하는 지식인, 모든 이데올로기를 冷策적으로 관망, 또는 넘어서면서 살아가는 나 자신의 정신적 세계에 대한 고백서이다. 회화의 장르로 말하면 아마 섬세하고 리얼리한 유화나 소묘(素描) 보다도 만화, 또는 스케치(速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나의 내면세계, 나의 생활양식, 글쓰기로부터 독서, 역사관, 사상에 관한 개인의 정신사적인 작은 반추이다. 개중에는 내 사고속의 편견과 독단으로 충만 된 숙아 같은 것들도 드러내 놓고 있다. 나 자산의 벌거숭이 稞身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를 벗 길수 있는 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파스칼은 에서 “인간은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갈대”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의 존엄은 사고에 있다고 갈파했다. 내가 내 자신 일수 있음을 지탱해주는 가장 큰 요소는 아무래도 내 정신적 사고의 내면세계가 아닐까 한다. 나의 내면세계의 알몸을 벗겨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온 것에 나는 만열한다. 이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 서울에 있는 열성팬들은 내가 이 글을 쓴다는 말을 듣고 빨리 보고 싶다고 재촉이다. 마치 원고마감일을 지키지 않을까봐 작가에 대한 편집의 사랑어린 독촉같이. 이 보잘것없는 책을 흔쾌히 출간해 주시는 백암출판사의 정문식 사장님 배려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다. 한국 출판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개 학자에 대한 사심 없는 물심양면의 성원에 감격한다. 한중일 국제 감각이 뛰어나신 정 사장님의 출판문화의식에 늘 공감하며, 이런 외우(畏友)가 무척 자랑스럽다. 나는 유연한 “草食動物”이라고 자신을 즐겨 비유한다. 그래서 사고방식이 다른 타자(他者)의 공격마저도 풀 먹는 소와 같이 수용해서는 서서히 저작하고 소화시켜 버린다. 지적 세계의 초원을 찾아 어디든지 달려가는 방랑의 소와 말이다. 思想하는 우마, 환언하여 “자기주장을 하는 자신”을 이야기함으로써 세상의 타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 모든 누구와는 다른 나 자신만의 사상, 방법, 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그러면서 이런 주의주장을 통해 他者와의 상호 이해, 인식을 기하며 더불어 살고 싶다. 나는 나에게는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욕하는 자 일지라도, 단지 나와 견해나 입장이 다른 他者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러는 他者를 거울로 삼아 나 자신을 비추어 보련다. 이 책을 이 세상의 나를 사랑해주는 독자와 나를 비판하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낯선 유럽의 독자들에게 드린다. 세계를 살아가는 인식의 방법이나 인생의 의미에 조금이나마 일조가 되었다면 나는 다행으로 간주한다.     2011年 7月 5日 일본에서 金 文學 謹識
75    김문학저작 70권 출판기념회 댓글:  조회:6972  추천:75  201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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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49. 越境과 月經(김문학) 댓글:  조회:10610  추천:45  2010-10-15
《신조선족》월경론 49. 越境과 月經김문학越境이 모두다 밝고 명쾌하고 즐겁고 스브드한것만은 아니다. 생소하고 이질된 他者의 세계속으로 진입하는 越境에는 반드시 月經같은 流血이란 통과의 례를 경험해야만 한다. 기묘하게도 “월경”의 同音인 이 두 단어를 연결시킴으로써 필자는 越境의 月經性的인 피를 동반된다는 고통, 고뇌, 負的面 등을 레토릭으로 구사했다.  女性의 生에 있어서 정기적인 出血을 통하여 성숙되고 완숙을 이루는 하나의 프로세스라 한다면 한개인 및 민족집단에서도 越境하는 月經을 통하여 한층 또 한층 변해가는 모습은 슬픈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사상(事象)이 아닐까.  작년 여름 중국을 방문했을때 조선족 지식인들과의 회식환담중 필자가 “우리 조선족에는 아직 ‘월경문학’이 없다”는 말에 한 기자가 “여성의 生理的月經文學인가?”고 우스개소리로  反問했다. 우리 여럿은 생맥주를 들이키며 킬킬 웃었다.  그뒤 필자는 越境과 月經의 同音語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다시 반추하면서 그 사이의 흥미로운 연결성을 “발견”했다.  사실 필자는 2001년 여름방학, 연변의 일부 지식인들이 “김문학성토전”을 대거 전개하고 있을때 서재에 두문불출하고 일본어로 《天馬의 크로니클(연대기)》란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주제는 “월경”이다.   越境하는 조선족지식인의 생태를 묘사한 장편소설이다. 400字 원고지 1200매의 분량을 써내려가면서 필자는 글쓰기의 배설적 쾌감을 만끽하였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건실한 두 다리와 성기(性器)입니다!”고 소설의 주인공은 호언을 서슴치 않는다.  이 호언의 주인공은 조선족 청년 작가이며 대학교수이기도 한 《馬文海》青年 마문해는 “무국적””세계인””문화박쥐”로 자칭하면서 일본을 거점으로 중국, 한국을 넘나들면서 서양에도 빈번히 출강하러 간다.  그는 이문화의 킬쳐 쇼크를 조우하면서 가슴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경의 식당이 되어 포지티브한 요소로 전환시키며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  소설의 전편에는 성애묘사가 매우 빈번히 나타나는데 그 표현은 감미로운 관능적 묘사로 돼있기도 하다. 지어는 생리월경중인 이성과도 화려한 성애전을 펼치기도 했다.  주인공은 최애(最愛)의 연인 마유미기 자살한뒤 미국에서 온 유대인 유학생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르트르와 버브월과 같은 계약동거였다. 그리고 그의 여성편력은 범지구적 스케일로 전개된다. 여러 종류의 인종, 각양각색의 여자들… 주인공의 손꼽은 여성만해도 26명이나 된다.  평론가 하츠시카세는 이렇게 평한다. “하지만 여기서 ‘성(性)’은 20세기말”에 유행했던 문학의 모험도 아니며 사회적 통념에 대한 안티테제도 아니며 또한 그에 대한 도발과 구제적 장치는 더구나 아니다. 《천마의 크로니콜》에 있어서의 《성애》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의 상징인 동시에 異文化와의 접촉과 지구인으로서의 의식을 상징하는 콘텐츠다. 거기에는 異民族,異文化와의 文化交涉의 쾌감, 流血,위안, 경계를 초월하는 자유와 무위자연이 숨쉬고 있다. 이외에도 소설은 제반 각도에서 일본사회의 편형성과 일본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변인, 디아스포라들의 생활상황과 그들의 희로애락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필자는 “소설은 아마 저자의 반자서전적인 작품일것이다”고 덧붙힌다.   필자의 “반자서전”은 필자에 대한 과찬이다. 90%의 픽션과 10%의 사실을 믹스시켜 만들어낸것이다. 그리고 조선족 작가가 쓴 최초의 일본어 장편소설이다.  필자가 여기서 표현하고 싶었던 욕심은 두가지 動機가 잠재되어있었다. 하나는 조선족의 “越境”소설의 空白을 메운다는 자부심, 또하나는 월경하는 조선족의 생활, 생태, 변용을 文學化해보고 싶었기때문이었다.  필자 자신의 체험 (기쁨 또는 슬픔)에서 出發하여 많은 조선족의 월경생태를 조합시켜 본것이 이 장편소설이었다.  주위에 많은 조선족의 越境에서 산출되는 아픔, 또는 땀흘리기, 피흘리기 눈물흘리기에서 힌트를 받고 우리 조선족의 월경의 프로세스를 形象化했다.  그리고 이제 이 책 《신조선족월경론》은 조선족의 월경을 정면에서 관찰하면서 월경으로 동반되는 조선족의 심각한 변동, 변용 등 영역을 알기쉬운 이론과 字體로 정리하고 싶은 목적에서였다.  기실 조선족을 포함한 인류의 월경은 소설에서 허구화한 주인공같이 그렇게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체험하는 유쾌함뿐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고통과 피눈물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주기적으로 유혈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완숙해가는 여성의 일생 프로세스와 같이 우리 조선족은 이같은 月經의 規境속에서 점차 성숙돼간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越境 이동과 함께 이동의 프로세스에 있는 조선족은 이 越境적 이동, 流動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완성돼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조선족은 완숙한 만족이 아니라 아직도 발전도상민족(물론 발전도상국적 출발성 민족이란 의미가 아니다) 즉 생성과정에 있는 민족, 떨린 민족, 중층적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오늘날 우리 조선족의 특색이다.   월경으로 말미맘은 조선족은 아직 미완성, 不定型이다.  조선족이란 “民族”이 獨自的集團으로서 존재할수 있는것은 이 유동성, 不定型의 특색이 있기때문이다. “신조선족”은 바로 이 不定型에서 생긴 참신한 조선족의 새로운 집단인것이다.     
73    45. “우리”는 엄연한 “他者”-한국과 조선족 댓글:  조회:7069  추천:38  2010-10-14
《신조선족》월경론 45. “우리”는 엄연한 “他者”-한국과 조선족의 “民族”적 상호인식 문제 김문학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方法”으로 필자는 한국인과 조선족은 상호인식에서 同壹屬性,같은 民族-겨레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이란 안일한 관념에 안주하여 모종의 “응석부리기”로 조선족은 한국에 대한 기대가 지대했다. 기대가 큰만큼 돌려받는 失望도 큰 법이다. “통일민족, 겨레”에서 되돌아오는 컬쳐쇼크도 컸을뿐만아니라 그 안일한 인식에서 오는 “응석부리기”는 다시금 “공격하기” 또는 “반발하기”로 전환된다. 한국인측도 마찬가지다. 반세기, 백년이나 이산돼 중국에서 살아온 동일민족, 겨레의 2,3세를 안일하게 여전히 “동포, 교포”라고 생각하여 상대해오다가 이질성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차별로 편향화 되버리는 성향이 강하다. 한국인의 혈연지역주의적 사고는 외국에서 살고있는 조선족까지 “한국인”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작년 한국에서 초청강연을 했을 때 주최측이 필자에 대한 연사소개를 “김문학선생님을 일본에서 살고있는 한국인 교수입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에서 “한국인 교수가 아니라, 재일 조선족 출신입니다”고 소개자의 표현을 정정해주었다. 조선족은 중국에 있을때 보다도 오히려 한국이란 모국, “同壹民族”이라고 인식했던 한국인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자기통일지속성, 즉 아이덴티티를 “중국조선족”으로 다시 귀추하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조선족과 한국인은 동일”민족”으로 안일하게 기성인식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성을 갖고있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것이다. 그 사실을 “감자”라는 식물을 동원하여 관찰하기로 하자. 소년시절에 필자의 할머니가 가꾸던 채마밭에서 감자를 캐던 먼 기억을 되살려 본다. 할머니의 감자농사는 진정 “석과누누(碩果累累)”라는 四字成語로 표현할만큼 언제나 풍작이었다. 그래서 감자수곡철이면 할머니를 도와 감자캐는 일이 즐거웠다. 가지과의 다년초요  塊狀의 지화경이 감자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크고작은 감자 알로 “주렁주렁”달려있다. 그런데 지상경에는 잎이 자라고 꽃이 피는데 꽃에서 감자열매가 열린다. 청포알만한 같이 연두색 색갈이다가 익으면 황금빛에 가까운 황금열매로 변하는데 그 맛은 좀 떫은 감맛에 달콤한 맛이어서 별맛이었다. 지하괴상의 감자와는 同根이지만 이 청포도알 형태의 열매는 모양도 맛도 전연 이질적이다. 말그대로 “同根異果”의 양상이다. 필자는 이 감자와 감자의 지상경에 열린 同根異果의 異質性으로 한국인 “감자”에서 열린 조선족의 “청포도열매”로 인식하는것이 매우 타탕하다고 본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이렇게 이미 “우리”로 이름짓는 “民族”은 엄연한 “他者”로 되어버린것이다. 최근 “民族”을 바라보는 정의의 기준은 많이 변하고 있다. 사실 “民族”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창조된 단어로서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민족”이 전파수용되어 정착된것이다. 영어에는 “민족”에 완전히 상당한 단어는 없고 people, nation, ethnicgroup, ethnics 등과 문맥에 의해 나뉘어 사용된다. 현재 세계에는 191개 국가가 존재하며 민족은 4000~5000종, 언어는 약 7000종 존재한다는 통계가 있다. 민족이랑 보통 일정한 양식화된 민족문화라고 불리는 文化를 共有한 인간의 집단을 말한다. 民族을 인접하는 他民族과의 상대적 독립성을 문화인류학에서는 지금까지 (1)객관적 기준 (2)주관적 기준 (3)객관적 기준+주관적 기준 (4)3세대 경과설이란 이 4개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었다. 좀 더 전개하면 (1)의 경우에는 언어, 종교, 예술 등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문화를 공유함에 포인트를 둘것이다 (2)의 기준은 그 집단의 성원들의 귀속의식, 정체성등 아이덴티티를 중요시 하는것이다 (3)은 (1)과 (2)를 통합시키는 정의법 (4)는 한 집단이 적어도 3세대이상의 지속성을 중요시 하는것이다. 조선족은 이미 4세 5세까지 왔으므로 엄연히 하나의 “民族”으로 볼수 있다. 1980년대전까지만해도 “민족”은 인류학에서 고정된 객관실체로서 포착하는 사고가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을 고정불변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착화시키고 변모, 변용하는 그 내실을 외면해왔다. 또한 고정된 “민족”관념은 내셜내리즘에 이용당하는 면이 컸던것이다. 이같은 폐단을 간파한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은 “민족”에 대한 재정의의 필요성을 감지했던것이다. 캐나다의 우크라이나계 사회학자 Isajiw, w.w.(이사제프)는 민족집단을 27종의 定義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의 리론에 따르면 민족집단의 객관성 속성중 제1위가 지리적 출자 또는 공통적 조상을 들고 있다. 그리고 언어는 제5위로 하락되는데 우리의 상식에서 좀 일탈된다. 특히 아이덴티티(정체성)인 민족의 중요한 팩터인데 제6위에 머물러 있다. 민족에 대한 연구는 “民族學”이라고도 자칭하는데 문화인류학 연구에서도 주요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현재 “민족”은 고정된 정태적인것이 아니라 늘 유동하고 있는 動能的프로세스속에서 사고해야 할 실체라고 인식하고 있다. 어떤 민족의 특징이라고 보이는것도 그 민족재부에서는 지역차에 의해 농담(濃談)이 생기며 계층차도 보인다. 민족주의 역시, 어떤 민족이 자신의 민족문화의 중심부분을 자기칭찬함으로써 민족단합에 이용하면서 때로는 그것이 거세찬 사회운동으로 편항되기도 한다. (아야베 츠네오 《알기 쉬운 文化大類學》2006) 이러한 “민족”의 변천의 추세에서 맞추어 보아도 한국인과 조선족의 그 “民族”동일성의 內實은 이미 분화되어 상당히 이질적 “민족”으로, “他者”로 변모를 이른것임을 인식해야 할것이다. 이질성을 인식하는것은 分裂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갈등, 이문화 갭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찾는 길을 의미한다. 요컨데 한국과 조선족이 안일한 “동일민족”의 스테레오타잎의 고정관에서 탈피하여 상대를 서로 이질된 “他者”로서 인식하고 바라보는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가장 아는것도 아마 자기 자신일것이며 그러나 자신이 가장 보아낼수 없는것 역시 자기이다. 그러므로 이질된 가치관과 문화로 “우리들”이라 불리우는 “他者”를 인식함으로써 자기인식으로 전환하는것이다. 그러면 서로의 긴장감이 풀리고 편안해지면서 상호인식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행할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타자를 존중하게 될것이다.    
72    44.“逆發”적 오리엔탈리즘(김문학) 댓글:  조회:5978  추천:56  2010-10-13
《신조선족》월경론44.“逆發”적 오리엔탈리즘김문학“신조선족”이 국내 대도시공간, 특히 海外로의 월경은 異文化와의 빈번한 만남을 의미한다. 異文化와의 만남은 또한 異文化에서 오는 “異文化偏見,偏向”이 반드시 동반되는 법이다. 알기쉽게 실례를 들어 얘기하면 조선족이 고국(조국)인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노동력 수출자로서 살면서 현지 한국인과의 갈등, 한국인으로부터 받는 편견, 차별, 멸시 등은 같은 겨레에 대한 일종의 “異文化偏見,偏向”인것이다. 이럴경우,하나 망각해서는 안될 측기의 사항이 있다. 즉 “한국”대 “조선족”은 기실 “異文化”대 “異文化”의 조우인것이다. 서로 100년의 各自生活圈子에서 獨自的으로 形成된 思考洋式이나 文化자체가 상당히 이질성을 띠고 있었다. “한겨레””핏줄”이란 막연한 동질감, 유대는 이 異文化의 허들을 넘어서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異文化의 허들과 담벽을 놓고도 경고하다. 따라서 異文化에 대한 무지, 몰이해로 인해 처음부터 자기문화 우위의 시각에 서서 異文化를 평하, 경멸하는 태도는 매우 강한 경향성으로 노정된다. 이문화에 대한 타집단에 대한 편견, 편향을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트”는 “서양”에서 바라본 “동양 (동방) ”을 의미한다. 팔레스티나 출신의 미국 비교문학가, 문화비평가 에드워드•사이드(said, Edward W)가 1978년 출간한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문화를 이해할수 있을까? 어떻게 이문화를 표상할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을 책에서 던진다. 그의 물음은 지구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인간, 문건, 문화, 경제의 직접 간접적 교류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 인류사회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띄고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발견”은 지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이드는 여직껏 단순히 《동양학》을 의미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과 (늘)《서양》이라 칭해지는것 사이에 설정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별을 바탕으로 한 사고방식”이라고 재정의 한다. 여기서 “오리엔트”는 협의적으로는 중동지역을 칭하지만 광의적으로는 지역과 상관없이 사용되며 그것에 동반되는 《오리엔탈리즘》 또는 “구종주국” 대 “구식민지”  ”선진국”대 “발전도상국”이라는 양자관계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에 대한 잠재적 우월의식이나 편견, 편향을 가리킨다. 사이드는 이 책에서 푸코의 언설적 개념을 원용하여 서양지식인, 서양인이 비서양지역에 대해 산출시킨 “추진성, 정제성, 적대성, 비합지성…”등 마이너스적 표상으로 획일하게 맞추어 평가절하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기 우월주위에 안주한 서양이 비서양에 대한 획실적인 편견, 평향 그것이었다. 사이드는 그후에도 서양지식인의 같은 맥락의 잠재된 기만, 편견설을 대위법적해독(對位法的解讀)으로 알려진 《문화와 제국주의》(1993)에서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늘 현대 세계사상을 리드해왔다. 사이드는 이문화의 월경적 글쓰기를 구사한 경계를 넘은 위대한 지식인으로서 세계정신사에 남을것이다. 물론 異文化,他者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 완벽한 표상이 이론적으로 至難이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 편향을 없애는것이야말로 상호 이해, 존중의 대안이 열리는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서양인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것은 우리 동양내부,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서양이 우리에게 행사했던 동류의 “오리엔탈리즘”이 엄연히 존재해왔으며 또 지금도 농후한 생채로 우리의 교류를 먹칠하고 있다는것이다. 그것을 최근 문화인류학들은 “역광(逆光)의 오리엔탈리즘”(아오키 타모츠)으로 지칭한다. 필자는 그것을 원용하여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일본이 과거 대만을 위시로 조선반도, 만주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행사한것은 그 슬러건이나 발상이 그 얼마나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피식민지 민족에게 남긴 상처, 민족의 드라우마와 함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었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고루하고 후발적인 정체성, 비합리성, 우매성, 미개성…”등 일본지식인과 대중의 표상으로 점찍혔던 “조선”과 “지나(중국)”을, 그들은 그대로 서양인이 동양인에게 행사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답습했던것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의 만남은 또 비슷한 편견, 편향으로 노정되었는데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후발성, 미개성, 비위생성…”등 일본인이 과거 조선인에게 표상했던 같은 표상으로 “조선족”을 평하,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과 조선족의 갈등은 사실 이문화에 대한 몰이해, 편견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팩터적 비중이 큰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인에게 행사하는 이문화 편격 역시 똑같은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이란 리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한국인에 대한 조선족의 표상은 대게 ”깍쟁이, 인심 박하고 인정 사정 없다. 같은 겨레. 민족인데도 정을 느낄수 없다…”와 같은 부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것은 결국 한국인에 향해진 조선족의 역발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의 김용택교수의 담론에 의하면 조선어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해”란 제목의 글을 쓰게 한 결과 2/3학생이 한국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2009년 9월) 10년전 조선족이 한국의 차별대우속에서 “옛날 일본왜놈보다 더 고약한 한국놈”하는 표상이 있었는데 필자는 《조선족개조론》에서 그 표상에 대해 이문화이해의 시각에서 비판은 가창력이 있다. 비판하기는 쉬우나 이해하기는 어려울까? 조선족이 이제 세계의 이문화지역공간으로 침투하면서 비판도 좋지만 안일한 비판을 속으로 삭혀 하나의 이문화이해의 “청명한 청주”로서 걸러내는 방법도 습득해야 할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방법이다.
71    43. 고래싸움에 새우등은 안터진다(김문학) 댓글:  조회:6548  추천:57  2010-10-12
《신조선족》월경론43. 고래싸움에 새우등은 안터진다김문학우리말 속담에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것이 있다. “남의 싸움에 제3자가 피해를 입는다”는 뜻으로 서로 문화가 다른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싸움에 중간에 낀 조선반도가 피해를 입은 비유구로도 사용된다. 이제 시각을 달리해서 이 속담의 고래를 異文化와 自文化로 설정하고 새우를 우리 자신의 개인으로 가정한다면 自他文化속에 끼인 개인의 상황적인 체험을 적극적으로 평가할수 있다. 개인은 누구나 自文化 말고도 많은 他文化의 고래들에 포위되어 살고 잇는것이 오늘 글러벌 21세기의 역사적 상황이다. 신조선족이 국내 생소했던 관내, 연해지구, 또는 남방文化속으로 들어가서 삶을 영위하는것 그리고 해외에서 생활하는것 또는 관광여행일지라도 주위에는 이미 異文化의 고래들과 맞서서 “격투”해야 하는 경우에 조우하게 되는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에전같은 발상이라면 이 고래와의 “격투”는 부정적 의미로 규정되었으며 그속에서 개개인을 새우같이 등이 갈라터지는 피해를 입는다고만 생각했을것이다. 고향을 떠나 조국을 떠나 “고래”싸움에 돌진하는 異文化체험을 冒險과 함께 슬픈 이미지로 각인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인간이 오늘같이 自文化와 異文化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강도가 높아진것은 전례없는 글로벌 세계의 文化現象이기때문이다. 文化가 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 환경일뿐만아니라 하나의 가치관체계이기도 하기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나서 자란 익숙한 자문화의 틀을 벗어난다는것은 그만큼 쉽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알수 있는 自文化를 깡그리 떨쳐버릴수 없는것은 그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 역시 비슷한 향수를 안고 살고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대학교수로 학자로 문명비평가의 얼굴로 생활한지도 20년이 되었다. 제아무리 異文化속에서 몸을 깊숙히 담그고 “세계인””코스모폴리탄”으로 자처한다하더래도 그 다나네기(양파)같은 중층의 피상을 박취하면 역시 중책에는 자신이 한국인도, 일본인도 중국인과도 異質된 “조선족”의 원초적인 아이덴티티가 반거하고 있는것이다. 아마 이같은 이문화의 경계로 살아본적이 없는 인간은 필자의 체험적, 文化적 아이텐티티와 향수에 대해 몰이해 할것은 뻔하다. 제아무리 일본요리요, 프랑스요리요 하면서 그속에 익숙됐다하더라도 필자는 역시 가끔 먹고싶은것이 바로 할머니가 끓여주던 추어탕에 어머니의 손맛인 감자장조림이고 연변의 아릿다운 아줌마가 따스한 손으로 전해주던 그 감자떡이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시합에 어느쪽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을 잘 받군하는데 그 질문조차 필자에게는 우습꽝스럽다. 왜냐면 필자는 무조건 한국을 응원하기때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팀을 그토록 침식을 잊고 응원에 열올리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당신은 ‘친일파’자격이 없네요.”하면서 농을 걸군 했다. 인간은 나서자란 익숙한 자문화에서 빠져나오기도 어렵거니와 또한 異文化와 간단없이 조우하고 격투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多重적 운명에서 빠져나오기는 더구나 어려운것이 아닐까? 이문화 자문화의 고래싸움에 우리의 등은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문화의 “충동”. “격투”를 통해 완성되는것은 새우가 고래로 변모되는것이다. 자문화와 이문화의 방대한 물을 흡수하는 거대한 문화의 고래로, 망명 작가 에리히 아우얼바는 “미숙한 인간은 한곳만 사랑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전 세계를 다 사랑하며 완숙한 인간은 아예 사랑의 불을 끈다”라고 말했다. 자타문화속에서 바야흐로 形成되는 신조선족의 이같은 완숙한 “인간상”은 기대하고 싶다. 그러자면 신변의 이문화속에 적극 침투하여 들어가서 이문화를 발견하고 체험하고 우수한것들은 수용해야 한다. 해외에 와서도 “고래싸움”을 피하고 이문화를 외면하고 “우리끼리”만 돌돌 뭉쳐다닌다면 이문화체험의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것이 된다. 일본에 사는 신조선족을 보면 물론 아직 計量的 통계는 없지만 중국에서 온 한족이나 한국인들보다 일본사회에 더 근접거리에서 침투하면서 살고있는 양상이 실감난다. 본디 “월경”민족으로서 월경 레슨에 익숙한 연유에서 보다 적극적인 적응상태를 노정하는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의미 중대하다. 신조선족의 우수한 일본어 역시 문화접촉을 스무드하게 보장할수 있는 文化武器이며 일본의 우수 문명을 흡수하는데 同時性팩터를 제공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70    42.”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 댓글:  조회:7659  추천:60  2010-10-11
《신조선족》월경론 42.”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1) 김문학 조선족 지식인으로 최초로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지역감정문제를 공론화한것은 필자가 “조선족개조론”에서 였다. 조선족 사회안의 “이질성 요소를 문화적 통합의 시점에서 조선족을 활성화시키자”는 합리적인 제언을 했는데도 연변 일부의 지시인들의 반발은 필자를 적대시하는 적개심으로 에스컬레일트했다. 필자의 뜻을 오독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감정적 반발의 빌미로 삼으려 했는지 알바없지만 역시 조선족 일부의 사고의 고루성과 시야의 폐쇄성을 노정한 대목이기도 하다. 하여 저자로서는 본의가 왜곡당한것과 연변의 현실은 예상했던것보다 더 참혹하다는 점을 재발견돼 마음이 무척 아팠다. 10년후 다시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것은 조선족사회내부구조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연변과 안쪽의 조선족 집단사회의 이질성인식은 미결된 인식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기때문이다. 재차 言明해두지만 필자는 그어떤 연변에 대한 추호의 혐오나 폄하의 뜻이 있는것이 아니며 안쪽 출신이라해서 안쪽만 예찬, 두둔하는 편향적 사고의 지식인이 아니다. 단지 조선족 공간을 이탈하여 해외에서 오랫동안 他者化시켜 바라본 우리의 모습을 인식 규명하자는 일념뿐이다. 이점을 부디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연변인”과 “안쪽인”의 異質性의 규명은 우선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연변사람은 어떤 성격이고 안쪽사람은 어떤 기질이고 하는 이미지는 상당히 일반인들속에 형성되고 있는것은 기성 사실이다. 물론 일반론적인 이미지는 실체험속에서 걸러낸것과 또는 사실과는 어긋나는것들도 옥석혼효의 양상을 나타낸다.  문화인류학에서 국민성, 민족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하는 연구영역으로 “심리인류학” 및 “문화와 퍼서 널리리”에 관한 연구방법이 있다. 결국 연변인과 안쪽인의 성격연구는 국민성이나 민족성의 하속영역에 속하는 도민성(道民性=조선 팔도 도민의 성격기질)과 직결돼 있으므로 그 도민성과 견부시켜 관찰해야 한다. 즉 연변사람은 다수가 조선 함경도(함경북도) 출신의 후손이며 안쪽사람은 더 광범위하다.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소수의 경기도와 강원도)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연변사람들의 함경도측에서 보면 이 여러 도는 모두 안쪽에 위치하고있기에 “안쪽사람”으로 불리운다. 실제로 연변의 변경오지에서 보아도 안쪽사람들은 중국대륙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것이다. 그럼 조선족의 水源인 조선8도 道民性으로부터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의 국민성(민족성)에 있어서의 지역차, 조선반도속의 문화구조나 민속 및 사고양식의 지방差를 “道民性”이라 칭하고자 한다. 道民性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은 國民性 또는 民族性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 문제와 동일하기에 동일方法으로 사고하는것이 타당하다. 흔히 선천적 인자와 후천적인 환경이 국민성 형성에 영향주는 인소라 하는데 결국 이 양자가 복잡하게 얽히여 개개인의 성격을 형성시킨적은 자명하다. 그러나 무수한 개인으로 이뤄진 집단, 민족을 비교할때 개인차는 서로 상살(相殺)돼버리는 까닭으로 각 집단, 민족사이의 선천전 차이는 묵살되고 오히려 후천적인 문화나 사회적 영향의 차이쪽이 더 압도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는것이 문화인류학자들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方法에 따르면 조선반도의 (한국•조선인)과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족 2,3,4세의 사고양식이나 행동양식은 조선인이란 유전인자를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이질적인 양상을 노정한다. 또한 엄밀히 말하여 같은 조선족이라해도 연변과 안쪽사이에도 여러가지 양상의 이질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편 인류학자들은 “민족과 국민간에 있어서 선천적 인자의 차이에 대하여 그 선천적 이질성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인류학자 W•코털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생후 1개월의 신생아를 미국과 일본의 비교관찰한 결과, 그 행동차이가 보이는데 미국 영아가 잘 울고 잘 움직이는데 반해 일본 영아는 줄곧 비교적 얌전하고 온순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후천적 영향이 거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선천적인 차이가 이처럼 미일 양국간에 존재한다는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1946년 미국의 유명한 문화인류 학자이며 《국화의 칼》의 저자인 루즈베네딕트가 동아시아 국민성 연구를 진행하는 “현대문화연구”프로젝트를 무어 “문화성격설(cultur-and-personality) ”이론을 구사했다. 프로이트의 리비드 발달단계의 의거로 연구한 결과 중국인은 토이렛트 트레닝(排便訓練)양식에 있어서 미국인과 달리 엄격한 훈련이 결여했다. 즉 “開裆褲”로 불리는 “짜개바지”을 입혀 언제 어디서를 불문하고 멋대로 배설행위를 방종시키는 양식이 정착돼있다는것이다. 이렇게 “독립자족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때문에”중국인은 언제나 성인이 되어서도 가래침을 맘대로 배설하는 비위생적, 비신자적 비근대적 습관이 보전됐다고 해독했다. 대만의 유명한 문명비평가이며 역사학자인 손융기(孫隆基)의 《中國文化的深層結構》는 미국 인류학자들의 이 중국문화성격설을 원용하게 전개한것이다. 이같이 유년기의 훈련, 환경이 국민성, 민족성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고 소중한 연구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국민성, 민족성 형성에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있은 “문화-퍼서낼리티론”또는 “심리학적인류학”영역에 있어서 기후, 풍토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 대표적 인류학자인 크라이드•글랙크 혼(Clyde Kluckhohn)은 “기후, 지형, 천연자원””물질文化가 획득하기 쉬운 상황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이 성격 형성에 큰 인자(因子)로 들고 있다.( Kluckhohn&Mowrer 1944) 동아시아에서 문화인류학연구는 미국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류학연구가 최고수준과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미국보다 월등 유니크한 “기후풍토론”을 활발히 전개한다. 유명한 철학자 문화연구자인 와츠지테츠로(和辻哲郞)의 명작 《風土》(1935)는 세계적 사이즈에서 풍토를 (1)몬슨형 (2)사막형 (3)목장형으로 유형화하여 문화양식과 민족성격의 이질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壹郞)도 풍토와 국민성에 관한 연구를 펼쳤으며 사바다 토요유키(鲭田豊之)는 《육식과 사상과 草食의 사상》에서 동서양문명의 이질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 소후에 다카오(祖父江孝男)교수는 《문화와 패서널리티》《현민(縣民)성》등 저서에서 국민성과 현민성에 관해 기후풍토의 연관성을 전문 연구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특히 일본 국민성의 지역차를 현민성으로 논술한 그 업적은 특기 할만하다.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2) 한국인의 성격기질=국민성을 최초로 분석한 인물은 그 유명한 춘원 李光洙의 《민족개조론》(1922년)이다. 그뒤 1960년대 윤태림이 《한국인의 성격》,1965년 최재석의 《한국인의 사회와 성격》 1987년 김재은의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양식》과 에세이 형식으로 쓴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1963)와 김용운, 김열규, 이규태, 최봉영, 최준식 등의 한국인 국민성론도 흥미롭다. 심리인류학, 서양의 심리학이나 비교문화론, 민속학 등 분야에서 한국인론 내지는 국민성론 文化論이 전개되었으나 여전히 공백영역이 남아있어 이 공백을 후학들이 메우는 연구작업을 지속해야할 사명은 중대하다. 한국 인류학계에서나 논단, 문단에서 퐁토와 국민성을 밀착시킨 연구는 산발적이며 미약한것은 유감이다. 더구나 국민성의 차이를 “道民性”으로 연구하거나 논하는것 역시 지극히 산발적인 형태로 흔적을 보이지만 너무 박약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 8道의 “도민성”이 최초로 탄생된것은 필자의 지견으로는 1925년 7월호 《개벽》잡지에 게재된 《各道人의 心性(적성)》이라는 글이 아닐까 한다. 함경• 평안도 사람은 성질이 強硬勇悍하여 軍人에 적합하다 전라도 사람은 技術에 장하여 美術工業에 적합하다 충청• 경기도사람은 智諜辯才에 長하여 政治에 적합하다 경상• 강원도 사람은 淳厚質樸하여 文學의 재능이 있다 황해도 사람은 理材에 秀하여 商業에 這하다 이 8도 道民性 이미지는 4字表現으로 표상화되어 고착화 된다. 平安道-猛虎出林(맹호출림) 鹹鏡道-泥田鬪狗(이전투구) 黃海道-石田耕牛(석전경우) 江原道-岩下老佛(임하노불) 慶尚道-泰山橋嶽(태산교악) 全邏道-風前細柳(풍전세류) 忠清道-清風明月(청풍명월) 京機道-鏡中美人(경중미인) 필자는 이 도민성 표상은 조선조시기(1413~1895) 500년에 가까운 시일에 전래한 八道制를 단위로 지역성을 징표화했다고 추찰한다. 특히 조선조시대 중,후기의 성행해온 풍수지리사상 함께 결합되어 형성된 “조선지리인문사상”에서 이 도민성 표상이 축출된것으로 본다. 이같은 지식을 집대성한것이 李重煥(1690~1751)의 《擇裏志(택리지)》이다. 李瀷(이익)과 혈연관계가 있는 이중환은 24세에 과거급제하여 병조좌랑의 벼슬에 오르는 지식인이었으나 당쟁에 말려들어 유배생활후 방랑생활을 보낸다. 책제목이 말하듯이 사대부가 진정 살만한 곳(可居地)을 찾아 방랑했던것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인문지리서로 추앙받는 이책은 별명《조선八域志》인데 8도의 지리, 생리(生利),인심(심성) 산수설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생리와 인심은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도민성 입지를 말하기도 한다. 그는 정치, 경제와 문화 제영역에서 많은 유니크한 지견을 피력하였으며 인간은 지리적 환경의 제한을 받으므로 그 지리적 환경을 잘이용하는것이 그의 기본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발로된 “조선지리인문사상”은 오늘의 시대에도 역시 유효한 팩터들이 많이 존재한다. 다양한 지리환경에 따른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가거지가 존재할수 있다는 이궁환은 모종의 의미에서 풍토론적인 “도민성”론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라고도 볼수 있다. 이제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道民性을 좀 구체적으로 지리풍토와 연결시켜 관찰해보자. 먼저 함경도의 《泥田鬪狗》를 보면 문자 그대로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열악한 지리환경에서 억척스럽게 불요불굴의 투지로 투쟁하는 완강한 투쟁정신을 말한다. 마이너스적으로 표현하면 기가 세고 내부의 내홍(內讧)적인 싸움이 잦다는것이다. 토지의 대부분이 고원이나 산지여서 산악지방의 완강한 투쟁력과 생활력이 이같은 악렬한 환경을 배경으로 자연히 생성된것이리라. 李朝의 시조인 李成桂 역시 함경도 출신으로서 고향사람들의 성격을 숙지하고 있는데에서 자신의 부하에 함경도사람은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지방은 또한 조선시대 조선의 범죄자들을 정배시키고 이수시킨탓으로 도민의 民度가 상대적으로 저하하며 지식수준이 낮은 농민의 지역이었다. “맹호출림”으로 불린 평안도 호방한 기질과 신출귀몰의 행동력이 높이 평가된다. 압록강의 남측, 대동강 유역 이북, 서측은 황해에 향한 지역으로 역사상 단군신화 강림한 지역이기도 하여 지리풍선적으로도 평양은 현대 조선의 “성지”이기도 하다. 또한 압록강을 사이두고 대륙과 인접해있어 대륙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여 외래문명을 먼저 접하군 했다. “南男北女”란 말에서 북녀는 평안도 여성을 가리키는데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았으며 강계미인, 평양기생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석전경우”자갈밭에서 땅을 경작하는 소로 비유된 황해도는 인내성, 근기가 강한 기질로 유명하다. 황하에 연하에 황해도가 아니라 황주와 해주라는 두 도시이름 복합시킨 이름이다.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그 字결합에서 온것이다. 경상도는 “태산교악”으로서 큰 산에 높은 봉우리를 상징적으로 경상도의 도민성을 나타낸다. 낙동강지역은 곡창이기도하다. 신과의 발상지인 경주, 또 하나의 중심이었던 상주가 합하여 “경상”을 이룬다.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그 자신들도 서로 “문둥이”로 칭하며 타도인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권력지향이 강했다. 자존심 강하고 문화의식도 강하다. “풍전세류”의 전라도는 바람앞의 버들같이 처세에 능하여 “머리좋고 성격나쁘다”는 이미지 또한 강하다. 앞에서 말한것과 뒤에서 행동하는것이 다르다는 자기방위술이 뛰어났다고도 평한다. 기름진 땅으로 말미암아 중앙의 수탈도 빈번했으며 “한(恨)”이 유달리 발달된 도민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는 위에서 든 4자표현으로 맡기면서 여기서는 약하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족을 도민별로 分類하면 주로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와 황해도가 주종을 이루고 그외는 산발적으로 좀씩 혼재해 있기때문이다.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3) 위의 문화인류학적 “도민성”을 배경적 이해로 하여 이제 연변인과 안쪽인의 성격기질과 文化적 異質性에 대하여 관찰分析하기로 하자. 우선 注目해야 할것은 “연변”과 “안쪽”이라는 구별화로 사용하는 단어와 같이 그의 발상, 이해에는 연변은 함경도 출신이고 그들이 시점에서 조선의 여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 등이 안쪽(즉 지리적으로 남쪽)이라는것이다. 그 지리적 인식은 그대로 중국에 월경하여 정착하면서 적용된다. 함경도가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변의 변경을 택한것은 지리적 조건의 요소가 무엇보다 지대했듯이 평안도인이 요녕성을 택한것도 역시 그 같은 상황에서였다. 경상도의 출신이 요녕과 길림, 그리고 흑룡강의 평원 기름진 땅을 선탁한것도 본국에서의 지리환경적 경험을 그대로 적응시켜 택했다고 이해해야 할것이다. 조선족이 대체로 개혁개방전에는 요녕성, 길림성, 연변, 흑룡강성 이 4지역에 집합공간을 이룬 배경에는 본국에서의 “도민”별로 고향의식으로 형성된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대로 본국의 도민성과 직결된 형태를 노정하기마련이었다. 이민초기 “경상도촌과 평안도촌을 통혼, 통상은 물론이요, 통행까지도 불능했던 유혈의 창사가 끊이지 않았다”(《東光》1931년 25호)는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강열한 지역관념으로 결속된 조선족 문화의 여러공간의 이질성을 자연히 보전해왔다. 함경도 출신위주인 연변인들은 보통 기타 도민을 “안쪽사람”이라 칭하고 또는 평안, 경상, 전라 할것없이 함경도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조선족을 통칭 “남선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북선”인 자신들과 “남선”지역의 사람들과는 통혼불허로까지 상식적으로 행사하면서 철저하게 “이질성”을 고집해 왔다. “우리”와 다른 “그들”로서 서로 담을 쌓고 그 他者를 순전히 他者로만 보고 모종의 편견, 편파적 성향으로 타자를 차별화한것은 중국에 이민, 정착하는 과정에 강열한 “도민성”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시킨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도 유전된 “연변사람””안쪽삶”의 대조적인 지역문화가 남아있으며 나름대로 연변같은 소분지文化안에서는 그 토착적 도민성을 동질된 함경도가 집단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고착화시킨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족 안쪽, 즉 산재지구의 마을을 보아도 그 지명, 출명은 조선반도 출신 “도”의 명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테면 안도현에는 강원툰,  전북촌, 경남촌이 실재하며 강원도 원주군에서 온 원주툰, 그리고 매하구지역의 경기도촌등 등이 그렇다.(김경일《중국조선족문화론》1994) 그리고 또 한가지 注目해야 할 사항은 조선족은 그 월경초기부터 거이 知識계층이 아닌 순농민위주였다. 그들이 찾은것은 땅을 개간할수 있는 농경지였지, 도시가 아니었다. 고차의 지식인같이 필담으로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들과 대담을 하면서 교류할수 있는 수준도 능력도 그리고 발상도 있을수 없었다. 토지, 농경지를 찾아 같은 도민출신끼리 군집해 살면서 농사를 짓는것이 그의 전부 생활양식=문화였다. 이질된것은 연변지역의 산악지역 위주의 척박한 땅인데 비해 안쪽사람들은 흑룡강의 동북부의 평원, 요녕은 요동, 요남평원 등 기름진 평야의 땅을 택한것 따름이다. 연변의 함경도 사람들이 척박한 연변땅을 개척하는데 동원된 에네르기는 당연히 그 “이전투구”의 완강한 투쟁력이었다. 연변인에 대한 연변외의 조선족들에게 각인된 표상은 “깍쟁이에다 억척스럽다”는것이다. 생산량이 빈약한 경제조건하에서 “깍쟁이”나 “인심의 박함”은 그 당연한 현현일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포지티브하게 해석하면 “억척스러운 완강한 생활력”일것이다. 그것은 연변인의 최대의 특징적 장점이다. “이전투구”의 해석대로 따르면 그들에게는 진흙밭에서 싸우는 투쟁심을 인간에게 행사했을때는 무비의 개싸움, 소모전이 전개된다. 戰時에 혁명정신이 강한 반면 평상시에는 그런 인간의 내홍에 집작하는 면이 문화대혁명이나 최근까지 진행되온 문단, 논단 내부의 전근대적 방식의 투쟁이 그것을 극명적으로 노정시켰다. 한국에서 신조선족 칼럼니스트로 월경의 글쓰기를 벌이고 있는 김정룡씨는 연변출신으로서 “연변사람, 안쪽사람 뭐가 다를까?”등 “延邊人論”과 니카 유순호씨의 “연변인론”은 연변사람의 ”전근대적 투쟁기질”을 까밝히고 있는것은 흥미롭다. 조선족사회를 이질성으로 他者化시켜 보는 관점은 필자와도 어딘가 통하는데도 있다. “안쪽사람”의 문화, 성격기질을 좀 더 多洋하게 노정된다. “안쪽사람”이라 통괄하는 명칭에는 경상도 위주의 흑룡강성, 평안도 위주의 요녕성과 또 경상도+평안도+전라도+황해도+경기도 등 형태의 다양성을 노정하기 때문이다. 진취심이 강하고 강력한 독자적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흑룡강성 조선족은 경상도의 “태산교악”기질답게 개방성으로 국내의 월경,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신문 역시 “흑룡강신문”이 가장 개방의식을 뜬 조선족의 최전선을 질주한다는 평이 있다. 문단에서도 그들은 개방성을 바탕으로 조선족 文壇의 최전선에서 개혁의 깃발을 들고 있다. 요녕성 조선족들은 “맹호출림”의  성격기질로 모험하는 정신을 발양하여 조선족기업을 제일 많이 개척형성하면서 “대륙문화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한족과의 처세와도 능하며 그 맹호적 파워”를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요녕성은 문화적인 영역에서는 그 정보적 입지적 우세가 있음에도 큰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것은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키는 성향이 강하여 문학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숫적으로 적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연변에 비해 요녕성이나 흑룡강성 출신은 실질적 실리 중시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전공을 文理別로 보아도 연변출신이 文科人文科學을 선택연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반해 안쪽출신은 理工科,經濟상학전공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안쪽사람의 진취심, 행동력의 그림자로서는 성급하고 계획성과 원견력이 좀 결여된 단점도 안고 있다. “하면 된다”는 좋으나 “어떻게 할것인가”하는 소심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는 연변을 “小盆地형 文化”란 표상으로 규정지었는데 좀 더 전개시키면 연변 소분지의 사고, 또는 “泥田思考”로 칭하고자 한다. 소분지속의 흙밭에서 왕성한 생활력과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고패턴이다. 좁은 공간에서 그이전(泥田)에  초점을 맞추어 내부에서 행사하는 사고양식과 생활방식이다. 대조적으로 안쪽은 “平原형문화”, 즉 “平野思考”고 칭하고자 한다. 분지나 이전보다 월등 넓은 공간에서 시야도, 사고도 넓은 공간으로 향하며 비교적 개방성을 띤 사고양식, 생활양식이다. 이 같은 조선족이 海外로 나가면서 다시금 “海洋型문화”,즉 “해양성思考”로 또 탈바꿈을 하게 된다. 물론 海洋성은 비유의 명칭으로서 더 넓은 개방성 사고와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21세기의 조선족은 이 3가지 文化型을 이루며 전례없는 生活文化圈을 형성하고 있다. 또 하나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것은 조선족은 두가지 패턴의 “소용돌이사회”로서  특징 지을수 있다고 본다. 미국 정치사회학자이며 대사관 직원으로서 한국에 20년 체류한 경험을 갖고있는 G•헨더슨은 그의 저서 《조선정치사회》에서 한국사회를 “소용돌이사회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는 자세한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필자는 조선족사회에는 특히 연변에는 인구이동에 있어서 연길을 중심으로 주변농촌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중에 중심과 농촌을 연결하는 중간항이 결여돼있으며 그 공백을 보인다. 무슨 얘기냐 하면, 연길과  농촌지방의 사이에 중간도시가 없으며 농촌의 농민이 단순한 이동을 통해 “나도 해냈다”는 식의 단순한 “역콤플렉스”적 반발식으로 충만돼있을뿐 무조건 중심지향의 수단이 돼버리는 약점을 안고있다. 아마 이것은 연길에만 존재하는 현상이기보다는 전국의 중국인에게도 이같은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小城鎮,小縣城이라는 중간단계가 있기도 하여 도시와 농촌사이의 중간상태는 엄연히 존재한다. 연변의 “소용돌이”는 농촌에서 연길로 흐르는 內向性이 지극히 강열하며 그 흐름은 外向性과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小盆地內에서 이런 內向性 경향은 돌돌 돌면서 시야가 점점 좁아지거나 거기서 정체하거나 하는 현상을 보인다. 연변조선족 지식인의 이른바 일류라고 자찬하는 일부에서 보인 이같은 內向性思考는 그것을 잘 입증해준다. 즉 환언하여 소용돌이속에 자신을 뱅뱅 돌리며 세상을 우습게 보다가 그 향심력에 스스로 혼미되어 빠져 “침몰”당하고 만다. 연변외의 안쪽, 산재지구의 소용돌이는 이와 반대로 外向性을 보이고 있다. 즉 이 도면에서 일목요연하게 보아낼수 있듯이 평원에서 또는 큰 호수에서 흐름은 外向性으로 보다 넓은 사고나 시야의 특징을 보인다. 평야라면 보다 넓은 평야로 도시라면 보다 개방성적 도시로, 강이하면 넓은 해양으로 향심력은 外向적으로 개방성을 보인다. 연변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유는 그 지리적 풍토에서 오는 기질성격과 함께 사고방식의 내향성적인 성향에서도 현현하고 있다. 요컨대 본국의 “도민성”으로 형성된 조선족의 多洋한 성격기질은 그대로 조선족文化群의 바리에션을 노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공간을 유지하면서 보전해온 이런 “도민성격”은 많이 근대화된 한국과도 이질된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이제 조선족이 도시공간에서 재편성되는 문화권은 이같은 기질의 용광로로 된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이같은 성격기질이 경계를 넘으면서 융합되고 조화를 이룬 새로운 도시민적인 문화속에서 새로운 변웅을 보이게 된다.  
69    (24)근대의 신체는 어떻게 단련되였는가(김문학) 댓글:  조회:7327  추천:35  2010-10-1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4) 근대의 신체는 어떻게 단련되였는가김문학근대를 이룩한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의 확답은 바로 인간이다. 좀 더 정확히 정곡을 찌르자면 인간의 “사상”,  “의식”,  “정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인간은 “근대”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사상의 실체인 육체, 신체의 근대화로 단련시킨것이다. 전근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신체에는 터브가 너무 많았으며 신체는 자유를 상실한 매인 몸이였다.  이를테면 전족, 거세, 왼손잡이의 교정 등등 신체에 대한 加工은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인간을 괴롭혔다.  사실 동아시아의 신체가 “근대”로 교육받고 단련되는 역사는 100년밖에 안된다. 역시 근대사시간과 거이 맞먹는다.    솔선으로 근대화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메이지이래 교육칙어와 제국헌법에 의해 1890년대부터 국민교육체제가 정비되면서 근대화에 안성맞춤한 “신체”의 형성에 힘을 모은다. 국민일치단합을 강조한 집단적 신체의 기민성을 강요하였다. “앞으로 나란히”하는 집단성 행진이나 운동회 등이 성행하면서 집단적 통일적 신체성이 전례없이 이룩된다.   중국에서도 서구의 열강에게 지속된 패배로 인해 강한 신체의 인민을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1900년 산동을 중심으로 반발했던 의화단은 의화권이란 권술과 기공으로 몸을 단련하면 적들의 총칼을 막을수 있는 강력한 신체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던것이다.   1898년 일본에 망명한 계몽사상가 양계초는 러일전쟁때 일본에서 강조되는 “상무정신(尚武精神)”의 애국주의교육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따라배우자고 절절히 호소한다. 일본의 상무정신과 군국화적 애국심은 청국의 체육에 직접적인 지대한 영향을 준다. 1905년 청국학부가 발표한 “학부진정선시교육종지”에 “상무”를 교육방침의 하나로 주입시키면서 중국 근대교육이데올로기의 큰 줄기로 형성된다.   1905년 4월 京師大學堂에서 제1차 운동회를 개최하고 “학교 교육목표는 꼭 도덕과 체육교육을 겸한것으로 되여야 한다”고 선고하였다. 그에 앞서 일본인의 교육을 받은 대학자 왕국유는 1903년에 교육에 있어서 “지육, 미육, 덕육을 병행하며 거기에 신체훈련을 가하면 완벽한 인재를 양성할수 있다”고 력설했다.   중국의 근대 “신체”, 체육 형성에 직접 영향준 요소는 일본말고도 서양 조계의 운동회경기가 있었다. 《女界鐘》에는 조계에서 외국인들의 운동을 보면서 이해할수 없었던 중국인들의 모습이 진술된다.   “이전에 중국인이 외국녀성들이 공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슬쩍 자신의 마부에게 물었다. ‘이런 녀자가 공을 차면 임금을 얼마나 받기에 매일 땀 흘리며 저런짓 하느냐?’고.”   그러나 서구인들의 스포츠가 중국인에게 근대 스포츠경기를 낳는 산파역할을 한다. 1890년 상해성요한대학에서 중국 최초의 육상운동회가 열렸는데 보통 이를 중국 근대 최초의 운동회로 보고있다. 중국인이 축구를 접하게 된 시간은 대체로 1902년부터라고 하며 농구, 배구도 그무렵에 서양인의 지도로 시작한다.   《중국체육사》(사사지마 츠네스케)에 의하면 근대의 중국 신체는 군사적인 공적(公的)차원에서 훈련받기 시작한것이 돋보이는데 그 리유는 서양렬강의 침탈을 막아야 하는 우국의 상황에서였다. 청나라는 서양군대의 이론과 훈련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독일과 일본 교습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체육수업을 진행하였다. 일테면 천진수사학당에서 체육과목으로 “축구, 허들, 멀리뛰기, 수영, 스케이트, 평행봉, 등산” 등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신체가 근대교육의 대상으로 보급화되는데는 청국이 1903년 《주정학당장정》을 발표한 뒤였다. 이 《장정》에서 각급 학교에 “체조과”설치를 요구하였는데 그에 따라 체육전문학과도 생긴다. 《중국체육사》의 기술에 따르면 1904년 일본에서 유학했던 학생들이 상해에 중국체조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민국초기때 전국 각지에 설립한 체육학교의 창시자들이 대부분 이 학교 졸업생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체조과목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교육방식이 청조의 교육방침으로 중국으로 전파된것이다.   오늘날까지 “앞으로 나란히” 하는 식의 대열방식 역시 일본교육의 답습이다. 특히 조선반도는 일제시기 36년의 강점을 통해 수많은 일본식 교육방식이 이식되였는데 지금도 그 잔재가 구석구석 남아있다.   교육받는 신체는 체육과, 운동회, 스포츠로 변용하면서 국민자질의 향상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근대의 신체”로 승화해간다. 1907년, 근대 최대의 운동회인 남경 제1회 련합운동회가 열린다.  전국 80여개의 학교가 참가하였으며 경기종목도 구기, 무술, 기마술, 체조, 경주 등 69종목에 달했다.   중화민국시대에 들어서서  “국민교육”의 일환으로 체육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1912년이후 절강체육전문학교, 북경사범학교 체육전공과 등 근대 체육 학교와 전공이 설립, 설치되였고 1915년에는 체육수업외에도 봄, 가을 학교운동회의 개최를 보급시킨다. 오늘날까지 진행되고있는 학교체육운동회는 여기서 비롯된것이다.   “신체” 하면 우리는 인간 본래의 육체라고 착각하지만 기실 근대문명이라는 장치에 의해 가공, 훈련, 교육된 육체인것이다. 그것은 또한 “근대적신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근대는 인간의 신체를 이데올로기의 실체로 만들었을뿐만아니라 100년후인 현대는 올림픽 등 스포츠축전에서도 그 맥은 국가단위로 연연이 이어가고있다. “신체의 탈이데올로기”로서 현대인은 신체의 표현을 슬로건으로 신체를 자유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신체표현”의 근대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스포츠, 무용, 미술에까지 확산되고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표현대로 “신체의 탈근대성”이라 해야 하겠다.    
68    41. 상실의 시대(김문학) 댓글:  조회:5629  추천:34  2010-10-09
《신조선족》월경론 41. 상실의 시대 김문학 “월경”에 동반되는 조선족의 “월경의 明暗”에 대해서 논술하련다.세상의 일체 事物, 삼라만상에 그 明과 暗이 존재하듯이 월경에 따른 “明暗”의 양상을 필자는 한마디로 “상실의 시대”로 부른다.땅의 상실, 고향의 상실, 편부모의 상실, 학교의 상실… “상실”의 단어는 배알처럼 생긴 쇠사슬 같이 조선족사회에 연쇄적으로 핍박해온다.대저 인구 이동의 월경에는 빈구석이 생기며 이산(離散)과 상실의 아픔을 겪는것은 必至의 文化現象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아픔은 과거형인 동시에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아픔에 연연하고 통탄하며 아픔을 그냥 고통으로 삭이기보다는 아문 상처자국에서 새로운 생이 탄생하는 현실을 포지티브하게 인식하는 사고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실제로 시야를 세계로 넓혀서 바라보면 근 20년의 세계는 지구적 규모의 “상실의 시대”인것이다. 모든 “상실”은 “변화”하는데서 동반대는 빈 공백, 또는 명암의 暗을 말하는것이기도 하다.작년 미국 오바마대통령의 선별한 데뷰는 “change!”라는 변하는 교체, 바꿈을 슬로건으로 행사한 미국 정권의 탈바꿈이었다. 일부에서도 하토야마 내각의 신선한 등장으로 장기간 정권의 헤게모니를 독차지했던 자민당으로부터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이루었던것이다.“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의식이 전세계의 규모로, 세계적 흐름의 중대한 팩터로 나서고 있다. 1989년 베틀린의 장벽이 무너진뒤 20년이 되는 해에 이런 “교체”의 변화가 이룩된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첫째는 이데올리적인 적(敵), 상대를 상실한것이다. 냉전시기 서양과 동양의 자유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의 대적관계가 소련의 붕괴로 대결의 상대, 적이 상실했거나 그 대결의식이 매우 히약해진것이다. 극단적 2분법사고가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다.두번째는 경계선의 상실, 적아의 경계선, 세계의 경제적 경계선 등이 “월경”의 마술같은 힘에 의해 없어지거나 존재감이 희미하게 됐다는것. 자원, 환경, 인구, 금전 정보가 너무 용이하게 국경, 경계를 넘어서 전달, 전파 수용되고 있는 글러벌 사상(事象)이 그것이다.세번째는 “권위”의 상실, 월경적인 文化,文明의 이동, 수용과정에서 그 나라나 민족집단에 있던 전통직 권위, 상징적인 권유의식, 인물까지 포함하여 짓부수었다는것이다.“조선족개조론”에서 필자가 “이제 우상은 없다”라고 역설한것도 우리 조선족의 권위와 우상, 그 고루한 의식을 파괴를 노린것이였는데 그 의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해독의 문제인지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했다.이상 3종의 측면에서의 “상실시대”를 바러미터로 조선족의 “상실”을 바라보면 사실 조선족의 “상실”은 모두가 이 세계적 “상실의 시대”와 同步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奇하게도 작년 2009년 니카의 “6적”비판사건은 베를린 담벽 붕괴 20주년의 해에 발발하게 된다. 근 10년동안 연변 조선족 문단과 논단의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조선족개조론”을 빌미로 전조선족지식계와 사회를 적아관계, 계급투쟁의 수준으로 설정해놓은 일부 조선족 극과 지식인들(”6적”이란 라벨붙은 지식인).이들이 미꾸라지같이 온 연변의 물바닥을 흙탕물로 짓이기면서 살벌한 적아판가름의 필사적 투쟁을 전개할때 “적”이 존재했기때문에 “단합”을 이루었고 “끼리끼리”의 “집합”으로 전례없는 에네르기를 동원할수 있었다.그런데 같은 에네르기로 반발해온 “6적”비판은 6적이 행사했던 힘만큼이나 용수철같이 “6적”으로 연습을 이루며 전설미담의 역량을 발산한다. 물론 니카 US ”6적”의 공방전은 인신공격, 프라이버시 하반신스캔들 등 저차원의 요소도 가미되긴 하지만 “6적”의 완패로 종결된다.“6적”이란 명칭 자체에 대하여 필자 개인적으로는 과대하게 “적”(괄호친 ”적”이긴 하지만)으로 핍축하는 방법에도 전면 찬성은 안하지만 그러나 역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바로 “6적”자신들의 과격하게 살벌했던 발호(跋扈)가 자초한것이 아닐까.결과 “6적”의 붕괴로 그들 자신에게 “적”은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다. 그후 그들이 적을 상실하고 “단합”의 원동력이 상실됨으로 말미앎아 그 허상적인 “단합”도 아마 필자의 추측으로는 오래가지 못할것은 불보듯 뻔하다. 상실감과 무력감, 그리고 절망감과 허탈감에서 일종의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의 심연에 빠질 가능성도 십분 예견된다. 그런데 또 한가지 우려는 그런 DNA의 유전자 인소가 본래부터 존재한 인물이라면 연변의 소분지식 문화환경이나 정치의식속에서 지금은 도사리고 있지만 또 적당히 시기를 노렸다가 재발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을가 하는것이다.필자로서는 “그들”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적아관계로 생각한적이 없으며 우리속의 “그들”로서 사고와 지견의 차이라고만 본다. 작년 니카의 인터뷰에서도 “그들과 친구로도 될수있다”고 했는데 그 귀절이 빠져서 유감스럽다. 흑백의 경계를 넘어 공론, 공생만이 우리 조선족의 방향인 까닭이다.또하나 필자가 발견한것은 조선족의 탈중심, 탈경계에서 생긴 우상, 권위의 타개로 의한 상실은 사상 최초의 “대중의 탄생”이다.중국 정치시스템하에서 “조선족” 문화를 유지해온 우리에게 지금까지 한번도 권위를 넘어선 “대중”을 독자적 사고와 지견을 바탕으로 한 “대중성”을 이룬적이 없었다.그러나 근 10년래 “조선족개조론”의 포스트현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중이 깃발을 들고 제분야에서 “반역”하는 현대적 의의의 대중이 등장한다.  
67    (23)중국에 고용된 일본지성들(김문학) 댓글:  조회:6148  추천:38  2010-10-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3) 중국에 고용된 일본지성들김문학“일청전쟁후 일본인이 교사로서 중국인을 가르친데 대해 일본인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당연한 이치로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굴욕적인 일이기도 했다. 옛날 일본인이 제자였던 기억이 중국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는 까닭이다. 특히 師弟관계를 따지는 중국인이였기에 그 굴욕감은 일본인의 상상을 추월할것이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대변신을 아무렇지도 않은듯(중국인의 눈에서 볼 때) 이룩한 일본은 확실히 믿을만한 하나의 기적이였다. ㅡ이대로 나아간다면 중국은 구제불능이다. 19세기말 중국의 식자는 누구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같은 시대에 일본의 선례는 큰 마음의 지주로 된것이다.” 저명한 재일 화교작가이며 문명비평가인 진순신(陳舜臣)(《일본적인것 중국적인것》)의 말이다.19세기말, 20세기초, 100여년전 청국이 근대화 추진의 일환으로 서양문물을 흡수한 방책에는 일본유학생 파견과 일본인 교사 초빙고용의 두가지를 병용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는 기술이 있으나 일본인 교사초빙에 대해서는 거의 누락돼있다. 그런데 역사는 흔히 그 누락됀 공백의 구석에 수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1901년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는것도 좋지만 일본인 교사를 청국으로 초빙, 고용하여 청국 청년들을 교육하는게 더 재정적으로도 효율적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한것이 당시 일본 문부대신 키구이케(菊池)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였다. 그리하여 1904년부터 다수의 일본교습(教習)을 중국 본토에 파견하는데 통계상 그 수자가 2천명에 이른다. 파견된 지역도 중국대도시뿐만아니라 몽골의 칼라친 등 전 중국지역에 파급된다. 유치원선생에서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학자, 지식인에다 군인까지 포괄되었다.일본 근대 문학거장으로 알려진 후타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迷), 사상가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 하버드대 교수 경력자이며 동양학 거장인 핫토리 우노키치(田岡嶺雲) 등 쟁쟁한 인물도 그속에 있었던것이다.      당시 교습(敎習)이라 불린 일본인 전문가들은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강의하였으며 교과서, 교재도 중국 학생들을 위해 그 수준에 맞추어 편찬, 자작한것이 많았다고 한다. 북경 경사법정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마츠모토(松本龜次郎)은 훗날 1905년에 近代 여류혁명가 추근(秋謹)을 가르친 중요한 교습이기도 했다. 그가 편찬한 《일본어교과서》나 이노우에(井上翠)가 편집한 《東語會話大成》은 중국전국의 학교에서 보편적으로 교재로 채용되며 중국 젊은이들의 일본어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북경대학 왕향영교수의 《청국에 고용된 일본인》에 따르면 많은 교습들은 초빙기한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좋아서 재임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법학사 이마이(今井嘉幸)는 (그뒤 일본국회의원이 됨) 청국이 멸망한뒤에도 중국에 남아서 교수에 전념했다고 한다. 구국열에 부푼 젊은 중국 청년의 가슴에 지식과 근대화를 가르친 일본인 교습들의 기여는 괄목할만 하다.핫토리(服部宇之吉)교수는 1900년 의화단운동에 조우한 인물이기도한데 그는 1902년 북경대학당 속성사범에 총교습(교장)으로 초빙된다. 그는 사범관, 사학관 컬리큐럼(課程), 규칙제정에 참여하고 교실, 실험실, 기숙사 등 설비, 도서구입 등에도 주도하게 배려를 한다. 핫토리 등 일본인 교습이 중국의 북경대학 창설에 큰 기여를 한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뒤 1909년 일본으로 귀국한 핫토리교수는 동경재국대학 교수로 취임되며 “중국철학”의 제1인자로 대활약한다. 일본의 교수와 중국의 제자의 훌륭한 심벌적인 존재는 타오카와 왕국유를 들어야 한다. 근대 중국의 대학자 나진옥이 상해에서 설립한  “동문학사”라는 학교에서 당시 동서양교류사학계의 태두인 후지타(藤田豊八)와 타오카를 초빙하였다. “세계 인류로서 인간은 천하의 인도(人道)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품은 타오카는 중국에 대한 깊은 리해와 애정을 품고있는 지성이였다. 타오카가 지대한 영향을 준 중국의 젊은이가 바로 왕국유이다.왕국유하면 중국 근대의 학술거장으로서 문학, 미학, 사학, 철학, 고문학, 고고학 등 제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세계적 거물이다. 1911년 신해혁명후 일본에 망명하는 친일적인 지식인이기도 한 그는 일본과 깊은 인연을 갖고있었다. 귀국후 1927년 북경의 의화원 곤명호에 투신자살한 기인으로서도 유명하다.그런 왕씨가 쇼펜하우어적 철학사상을 갖게 되고 서양철학에 심취하게 된데는 타오카스승의 가르침으로 기인된다. 그는 《靜庵文學續編》의 서문에서 타오카의 문집을 통해 쇼펜아우어철학을 습득하고 심취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타오카라는 일본의 奇才는 린국 중국의 기재 왕국유의 생애를 관철할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작가 진순신은 깊은 감명을 토로한다.이밖에 원세개의 군사고문 아오키(靑木官純), 그 후임으로 청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된 시바고로(柴五郞)는 의화단사건시기 세계에 이름을 날리며 청국의 경찰교습소를 창설하고 중국 근대 경찰학교의 기초를 닦아놓았다.근대 백년을 조감할 때 발견되는 새로운 사실은 일본은 사제관계에서 역전시켜 중국인의 근대화로정에 길잡이가 되였다는것이다. 근 백년래 중국이 가장 많이 배우고 흡취한 상대가 바로 “원쑤” 일본이였다.중국 학자 호평(胡平)은 그의 저작 《100가지 리유. 일본과 중국》(2006년)에서 이렇게 갈파한다. “근대의 일본이 없었다면 근현대의 중국도 없었을것이다”고.
66    (22)근대 일본인은 어떻게 중국어를 학습했나? 댓글:  조회:7079  추천:36  2010-10-0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2) 근대 일본인은 어떻게 중국어를 학습했나?김문학근대 아시아의 력사는 모종의 의미에서 말하면 외래문명의 학습의 역사였다. 외래문명의 학습은 결국 외국서적의 번역과 외국어의 학습으로 직결돼있는것은 자명한 일이다.                              100년전 일본인들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서구언어를 열심히 습득했는데 그것은 주로 상대방의 문화를 배우기 위한 수단이였다. 그러나 중국어학습은 문화적배경을 누락시킨 실용회화를 중심으로 전개시킨것이 특징적이다. 즉 외교나 무역에 관한 실무지식으로서 간주하고 학습해온것이다. 일본인이 배운 외국어중에서도 중국어만큼 명칭이 자주 바뀐 케이스도 드물다. 옛날에는 당화(唐話), 메이지시대에는 한어, 청어(淸語), 청국어(淸國語)로 불리기도 했으며 그뒤로는 지나어, 화어(華語), 중국어(中國語)로 명칭이 빈번히 바뀐다. 오늘날 “중국어”로서 정착되여 한어란 말은 거의 새용돼지 않는다. 중국어의 호칭이 이같이 빈번히 바뀐 배경에는 그만큼 중일관계의 복잡한 역사상을 입증하고 있다.    일본의 대학 엘리트 코스에서는 중국어를 정식 교양과목으로 설치한적이 전전(戰前)에는 없었다. 중국어가 대학의 제1외국어 또는 제2외국어로 정식 설치되는 때는 1946년 현재의 동경대학 등 몇개 대학뿐이였다. 물론 “지나문학”과목은 있었으나 중국고전을 한문훈독한것이여서 직접 중국어와는 관계가 없었다. 일본에서 중국어를 정규학교에서 최초로 가르치기 시작한것은 1871년에 창설된 한어학소(漢語學所)에서였다. 이 해는 청일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일본과 청나라가 처음으로 정식 국교를 수립한 해이기도 하다. 외무성 관할의 한어학소는 문부성(교육부) 직할이 아닌 통역양성의 목적으로 설치됐던것이다. 청일갑오전쟁후인 1896년, 일본에서는 중국어인재가 몹시 결핍한 실정을 고려하여 제국의회에서 “로어, 지나어(한어), 한국어 등은 장래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을것이므로 현재 그 언어를 교수하는 학교가 없으므로 외교, 상업도 지장이 많다... 고로 이런 어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업”과 “외교”의 실용면에서 그 절박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수단으로 활용하려한것이 당시 일본인의 중국어학습의 주목적이였다. 일중관계사학자 안도 히코타로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어를 특수어학으로서 실용면에서 언급한데는 전전에 일본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한 두가지 측면에 대한 대응이다. 즉 ‘상무’와 ‘군사’ 량면이였다.” 중국연구가로 저명한 다케우치 요시미씨는 “행상지나어(行商支那語)”와 “병대지나어” 두가지 종류라고 직설적으로 설파한다. 일본인의 근대 중국어학습을 “상무”와 “군사”에 편향했던 리면에는 역시 메이지유신이래 일본인사회에 흐르고있던 “탈아(脫亞)”와 “흥아(興亞)”라는 정반대되는 조류가 있은 까닭이다. 기실 “탈아”와 “흥아”는 코인의 양면과 같았다. “탈아”를 통해 선진국행열에 뛰여든 일본인은 구미선진국에서 받는 압력으로 아시아세력과 단합하여 서구의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입(入)아시아적 “흥아”사상이 생성되였다. “흥아”사상은 주로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 등 재야인사들속에서 주가를 높였는데 그런 까닭으로 재야의 민간사학(私學)에서 중국어교육이 흥하게 된다. 1875년 히로베 구와시(廣部精)가 창설한 일청사(日淸社)가 중국어교육의 첫 사학이다. 그뒤 振亞社로 개칭되였는데 대아시아주의단체이기도 했다. 히로베가 편찬한 교재 《아시아언어집. 支那官話之部)》(1879년 간행)이 유명하다. 일본의 중국어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미야지마(宮島大八)가 남긴 공적은 누락시킬수 없다. 중국의 동성파학자 장렴경(張廉卿)에게 중국어를 배운 그는 일본에서 선린서원(善隣書院)을 설립하여 그것이 일본의 중국어 교육의 중추적구실을 한다. 그리고 1898년 고노에 (近衛篤磨)가 東亞同方會를 설립, 민권론, 국권론을 전파하면서 중국 아시아관계의 단체가 많이 생긴다. 그것은 1901년 상해에 동아동문서원이란 학교로 발전되며 1938년에는 대학으로 변신하고 일본패전후 그것은 사립 아이치(愛知)대학으로 되여 중국연구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100년전 일본에서 편찬한 중국어교과서는 수백종에 달하는데 비교적 유명한것으로 《관화지남(官話指南)》(1882년),《화어규보(華語跬步)》(1886년), 《急就篇 급취편》(1904년) 등이 있는데 그중 《급취편》이 가장 보급되였다. 1933년 다시 개정판을 내는데 전전 일본의 중국어교육의 상징적 서적으로서 1945년까지 무려 170여판을 중판한다. 문답회화체로 된 회화문은 일본인의 중국어 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테면 “這是候有什麽魚?””差不多的魚都有。鯉魚,唧魚,花唧魚什麽的。””華唧魚好釣麽?””那哥得碰巧了。”등 일문일답 회화용어들은 매우 실용적이다.   《중국어관계서목》(1968)에 의하면 명치초기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이 계 1,368책이나 되는데 506책이 1937년 중일전쟁(항일전쟁)이후 출판된다. 불행하게도 “상업”과 “군사”의 실용목적으로 출발한 일본의 중국어학습은 1932년 만주국설립을 걸쳐 1930년대는 본격적인 중일전쟁으로 승격하면서 “전쟁어학”으로 급변한다. 《兵要支那語》,《日淸會話》가 《連成滿州語自修》,《兵隊支那語》로 분장되여 등장한다. 말그대로 전쟁의 병사용어다.     근대 일본인의 중국어학습, 여기서 발견되는것은 근대 중일관계 그 자체이며 중국을 동경에서 멸시, 억압의 상대로 간주했던 일본 국가주의적 또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적인 조류가 살벌한 양상이다. 그리고 전쟁에 이용당한 외국어학습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했고 앙상했던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것이다.  
65    40. 近色比較原理(김문학) 댓글:  조회:5732  추천:42  2010-10-08
《신조선족》월경론 40.近色比較原理 김문학 인간은 “比较”하는 文化生物이다. 사물을 “비교”하는것은 인간의 숙명이기때문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두 눈과 두 귀와 두뇌를 끊임없이 동원하여 자신과 주위의 타자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比较를 하면서 “자신”이라는 존재 또는 아이덴티티 같은것들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 오늘날 월경을 통한 이문화와의 용이한 조우는 같은 연장선에서 自己와 他者와의 比较를 더더욱 돌출하게 현현시키는것이 아닌가. 신조선족이 현재 국내 연해도시와 해외 여러나라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누구나가  이 “비교”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꼭 인류학자나 문화연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글러벌화시대의 인간은 이렇게 자연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을 “비교”하면서 그 누구라 할것없이 실체험론적인 “비교문화학자”  또는 “비교문화인”의 역을 자연하게 된다. 그런데 비교, 비교문화하면 동아시아 文化圈에서 그 비교에 적성이 가장 큰 담당자는 중국, 일본, 한국 동양 3국어를 도탈적으로 구사하고 바라볼수 있는 우세를 갖춘 우리 신조선족의 몫이다. 본디 이날까지 동아시아권에서 “비교”하면 중국과 서양, 아니면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하는 식으론 일대일의 비교가 하나의 고정패던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3국문화 사회를 토탈,종합적 시점으로 비교인식하는 비교문화론적 연구나 인식작업은 지극히 빈약했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영역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젊음의 만용으로 돌진해온 체험을 갖고 있다. 3국의 사회무놔를 하나의 시각에 넣어 조감함으로써 동아시아 한문화권안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이해하여 상호 이해와 인식에 중대한 방향과 지침을 제시할수있는 기본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기반이 마련되면 현재 동아시아 사회가 연대하여 EU간은 “동아시아공동체”를 구성하는데 문화적 기반이 구축된다. 그런데 문화와 문화사이의 “비교”라 해도 결여될수 없는 것이 “비교의 원리”이다.원리라는 단어를 다시 “방법적 원리”나 “수단적 원리”로 환언할수 있다. 필자가 비교연구작업가운데서 제시해온 원리는 독자적인 “近色原理”이다.그렇다면 그 내실은 무엇일까? 이날까지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한국의 비교문화는 다수가 동양의 자국과 서양과 비교하는 동서양비교의 일환으로서 전개해온것이 주종이었다. 문화평론가,번역가 하치스카씨는 이렇게 지적한다. “일본학계의 비교문화연구의 전통적인 고집과 보수적 체질에 대하여 그(필자)는 비판을 시도,일본의 그것이 구미와의 비교만으로 편향돼있는 페해에 경종을 울렸다. 즉 한자문화권내의 비교하는것이야 말로 각국의 문화 특질을 분석해낼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비교원리는 ‘근색비교원리’로 지칭되는바, 동일문화계열의 비교를 통하여 비로서 그 황색의 “淡黄”, “深黄”, ”朱黄”등 미묘한 색상의 차이를 발견할수 잇다는 이치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근색비교원리’를 무기로 그 자신의 풍부한 문화체험을 토대로 하여 다른 학자들이 도저히 할수 없었던 3국 비교문화의 영역을 독보적으로 개척하였다.” 좀더 전개시키자면, 동서양의 문화는 그 인간의 피부색,콧등의 높이,눈동자의 색깔만으로도 이색계열로서 비교가 대조적이며 그만큼 이질된다.그러기에 이질된것을 그냥 이질됐다는 비교도 좋지만 되려 동색계렬인 동아시아문화권의, 일견 유사해보이나 그 가운데서 이질성을 탬색하는 비교연구야말로 그 차이를 극명하게 색출하는 방법인것이다. 필자의 이와 같은 비교원리는 일본학계나 대중들속에서도 많은 공명을 획득하고 잇어서 뒷심이 든든해진다. 필자는 자신의 “근색비교원리”를 구사하여 흔히 동아시아를 “汉字文化圈”으로 通称하는 설법의 구조를 깨고, 异说을 제기했다.사실 한자를 공유하고 사용한다하더라도 한자표현의 내실,문화적 내용은 이질적이며 한자로 표현되는 단어에도 뜻이 이질되는 요소가 많이 편재한다.그 한자에 의해 표현되는 문화내용을 무시하는것은 위험하다.그래서 필자가 새로 창안한것이 중국,대만같은 “한자전용문화권”과 일본,한국(조선반도),조선족같은 “汉字借用文化圈”이란 개념을 분화시킨것이다. 이런 인식은 서로 이질된 문화권으로서 포착함으로써 그 동질성과 이질성을 극명하게 재인식 할수 있는 까닭에서였다.이 역시 신선한 개념으로 학계와 논단의 주목을 받고있다. 사실 “원리”하면 몹시나 고명한 아카데믹한 경지로 보이지만, 대중들은 특히 광범한 위 신조선족은 한중일 3국을 그 언어적 우세로 넘나들면서 자기나름대로 실체험적 비교문화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실천해왔던것이다. 이같은 신조선족의 전례없는 월경의 다아스포라적 신事象들은 그 디아스포라적 가능성을 이미 可视化状态로 끌어올리고 있다. 국내 연변같은 비교적 단일성지향의 고착된 디아스포라집단이 불가능했던 일을 월경의 디아스포라 조선족들이 지금 그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물론 방법으로서의 비교원리를 적용시켜서 그 속에서 부상되는 요소들을 캡쳐하여 우리의 언어적 우세를 거기에 조준하여 활성화시키고 적응시키는 능력과 수준에 우리가 이제 더 고심해야 할것이다. 즉 원리자체가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원리를 활용하여 우리 신조선족만의 독자적 우세,능력을 실천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말한다.    
64    (21)시모노세끼에서 부산항까지 (김문학) 댓글:  조회:7053  추천:31  2010-10-0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1) 시모노세끼에서  부산항까지김문학 시모노세끼(下關)는 한중일 근대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地名이다. 1895년 청일갑오전쟁으로 인한 청일“마관조약”이 맺어진 곳이 바로 마관이라 불리기도 했던 시모노세끼의 춘범루(春帆樓)였다. 청나라가 이로하여 대만과 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은 2억냥 배상 및 중경, 소주, 항주를 개방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모노세끼항은 식민지 조선과 종주국 일본의 네트워크의 스타트지점으로서 지대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던 1905년 9월, 시모노세끼와 부산항을 연결하는 관부연락선이 출항하여 식민지시대 수백만을 넘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 항구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때 관부연락선으로 처음으로 일본땅을 밟는 조선인들은 시모노세끼가 “이놈의 새끼”로 들렸다고 한다. 지금도 시모노세끼에 살고있는 조선동포들은 식민지시대 선조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군 한다. 일본 본토 혼슈(本州) 육지와 일본 최대의 섬으로 구성된 큐슈(九州=후쿠오카 지역)사이의 좁은 협곡으로 센 물살이 흐른다. 시모노세끼는 바로 이 간몬(關門)해협에 자리잡고있다. 그 물살이 닿는 북쪽은 대마도, 제주도로 이어진다.   제주도에서는 근세까지만 해도 일본어가 통용됐다는 역사기술이 나온다. 조선어통역으로서 대마번수하에서 있던 마츠하라(松原新右衛門)의 1723년 조선체류경험담에는 “조선에는 사탕이 없다. 조선에는 지나(중국)의 년호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아이들이 까불면 ‘왜놈이 온다’고 말하며 혼내준다” 등 대목이 나온다. 토요토미의 조선침략전쟁때 겪은 그 공포가 여전히 많이 잔재해있는 사실을 립증해주고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주민들이 대체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어노래를 부르고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같은 기술로 미루어보아 역사상 일본과 조선의 인적왕래가 잦았으며 상호간의 밀접한 영향관계를 추찰할수 있다. 물론 그때는 영해(領海)라는 관념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섬의 지배권도 근대적의미의 영토로서 확립되지 못한 부분들도 많았던것이다.        시모노세끼가 속한 아먀구치(山口)지역은 옛적부터 쵸슈(長州)로 불렸으며 조선반도와의 인연이 깊었다.   청일전쟁직후 일본의 전권공사로 조선에 주재한, 그 민비암살사건의 지휘자로 소문난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바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의 “기병대” 출신, 야마구치사람이다.   초대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는 물론, 제2대 통감 소네아라스케(曾彌荒助), 한일합방후 초대 조선통독 테라우치(寺內正毅), 근대 일본군대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며 이토의 후임으로 총리대신을 지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역시 쵸슈 출신이다.   그리고 전후 한일관계정상화에 큰 관심을 보인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에이사쿠(佐藤榮作) 형제도 쵸슈출신으로서 유명하며 한국계 일본인이기도 하다.   근, 현대 일본의 총리대신이 무려 8명이나 이 쵸슈, (야마구치)지역에서 탄생된것은 이 지역인의 지도자적인 자질이 있었던것과 어딘가 조선인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한국을 정벌, 정복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은 거의 쵸슈출신의 정치가, 군인들이다. 사이고(西鄕)의 정한론의 원조는 기실 쵸슈의 기도(木護充允)이며 한국병합에 노력을 기울였던 이노우에 가오로(井上馨), 미우라고로, 가츠라 다로오(桂太郞), 테라우치,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기나긴 조선정복자의 계보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중요한 인물을 빼놓을수 없다. 바로 시모노세끼에 자주 나타났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료마는 “메이지유신 일등공신”으로서 오늘날까지 일본인에게 절대적 일위의 인기를 확보하고있는 근대 인물이다.   쵸슈사람은 지략에 뛰여나 여우에 비유되고 사츠마사람은 전략에 능하여 너구리로, 도사사람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개에 비유된다. 료마는 바로 도사출신으로 쵸슈와 사츠마를 련결시킨 인물로서 여우와 너구리의 모든 장점을 겸비한 뛰여난 재사였다.   “일본의 100년을 바꿔놓은 영웅”이라고 국민적소설가 시바료타로에게 칭송된 료마는 1866년 사츠마와 쵸슈의 련맹 즉 사쵸동맹을 달성하여 1868년의 메이지유신의 기반을 마련한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이 성급한 근대화를 이루고 마침내 예전부터 노려온 “정한론”을 보호국의 이름으로, 조선반도를 갑오청일전쟁을 통해 수중에 장악하게 된다.   한국초대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남다른 감정을 품고 조선을 자신이 일본에서 성공시킨 근대화국가처럼 만들려고 한다는 야망의 상대로 삼은것도 우연이 아니다.    “정한론”의 고향이 동경도, 요코하마도 아니고 바로 일본 서부의 조선을 바라보는 바다가의 쵸슈, 큐슈였다는 점은 결코 홀시할수 없는 사연이다.   시모노세끼에서 출항하여 부산에 이른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다시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관부련락선으로 끊임없이 연결됐던 네트워크.   세계 근대의 전쟁, 식민지 침략정복의 계보는 흔히 바다의 항구에서 시작된다. 시모노세끼항에서 부산항까지, 그리고 조선 8도를 누비던 일본제국의 야망은 마침내 대련항에 그 발톱을 뻗친다. 대련항은 그뒤 명실공히 일본제국지배의 만주(滿州)식민지의 열린 창구구실을 하게 된다.
63    39,체험으로서의 “한중일비교문화론” (김문학) 댓글:  조회:6146  추천:37  2010-10-05
《신조선족》월경론39,체험으로서의 “한중일비교문화론”김문학 일부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 “한중일비교문화”영역을 개척한 필자가 그 전개에서 일본을 높이 올리추고 중, 한국은 상대적으로 내리깎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고 오독이다. 필자는 신조선족의 일원으로서 한중일 그어디에 귀속시키지 않은 문화의 척도를 쥐고 있다. 개념적 관념적인 비교이기보다 월경을 통한 이문화체험을 바탕으로 한 “比较文化论”의 깃발을 내걸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것이다. 동아시아의 문화비교, 이는 한중일 3국어를 장악하고 있는 우리 “신조선족”만이 해낼수 있는 영역이다. 필자가 아니더라도 조선족의 그누군가가 시도했을것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일, 한 문화를 공시적으로 체험할수 있는 오늘 “신조선족”이 꼭 비교문화학자나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그 대중들은 이미 그 풍부한 감수성으로 실체험으로 无言적 형식으로 실행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벌거숭이 3국지》를 위시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반도성, 대륙성, 도국성》등 한중일 비교문화 저작들이 3국어로 간행되면서 “조선족 출신의 지식인이 쓴 작품으로서는 3국과 대만, 홍콩 등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베스트셀러”라고 비평계와 독서계의 평가가 있다. 현재까지 이 비교계열책만 3국어로 동아시아권에서 45만부이상 발배되었으며  영어권, 폴란드어로도 번역되기도 했다. 3국에서나 대만에서도 대학 및 대학원의 비교문화 교과서로 읽히우기도 한다. 수년전 일본 TV방송국의 인터뷰를 받을때 기자의 “3국비교론 저서의 인기 이유?”에 대한 질문에 필자는 “아마 실체험, 이문화의 실체험적인 원액(源液)이 많이 깔려 있기때문이 아닐까”고 응답했다. 필자의 비교문화계열 서적이 3국에서 3국어로 번역 발간되는 현상에 대해 연변의 어떤 지식인은 “3탕, 재탕론”을 펼치면서 지극히 부정적 언설을 발설했는데 그 의도가 알수 없다.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여 월경함으로써 문화가 전파수용되는 “文化의 번역”의 상식을 부정하는 그의 태도에 필자는 그 “상식이하”의 지식수준에 폐구하고 말았다. 앞서 말한 “오해”에 대해서 마저 얘기하겠다. 그 오해는 어디에서 생길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문화에 대한 깊은 체험이 결여된 까닭에서 유발될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自己文化와 异文化를 비교할때 자신이 체험, 이해한 선발성 문화(이것은 근대화를 기준으로 그것이 선발적으로 이룬 나라나 민족의 문화와 그에 후발된 나라나 민족의 문화를 지칭하는 개념)의 높이에서 비교의 상태를 조감하게 되기 마련이다. 왜냐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은 고개들어 앙시할수는 있으나 그 내실에 대한 관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鲁迅이 중일문화를 바라보는 비교의 척도나 이광수가 바라본 한일문화의 잣대 역시 동질적이다. 일본의 높이에서 나름대로 중, 한을 조망하는 방법을 행사했던것이다. 필자 역시 한중일 3국중, 최선발성 문화나라인 일본의 높이에서 한, 중을 바라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비교문화의 불가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높은곳에서 낮은곳을 바라볼 수 있으나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기때문에 필연적 인소를 띈다. 선발과 후발성 지역의 문화를 비교함에 있어서 선발성에 조준하여 자신의 후발성 모습을 거울로 비쳐보는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 비교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후발성 문화를 경멸, 폄하하는것은 문화상대주의의 잣대앞에서는 통과되기 어렵다. 이것을 통과된다면 남는것은 선발문화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사람과 후발문화속에서 살아서 선발문화에 대한 실체험이 없는 사람의 갭뿐이다. 즉 선발문화의 그 높이의 내실을 미처 모르기때문에, 그것을 비교전달하는 화자에게 흔히 후발문화를 폄하, 평가절하시킨다고 보일수가 있으며 그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필자가 일본문화의 경계에서 살면서 느낀 또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즉 이문화이해에서 “졸속함은 금물”이라는것이다. 이문화의 지식,정보에는 빠른것과 늦은것으로 구분된다. TV에서 방영되는 동시적인 정보, 뉴스페이퍼의 정보는 떠있는 빠른 정보다. 실제로 그 이문화를 표징하는 상징으로서의 정보는 늦은것 즉 밑바닥속에 침전된 것이다. 이런 상징적 문화를 아는데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 나라의 문학, 사상, 철학 등 숙성된 문화콘텐츠를 시간을 들여 읽는것, 그 사회안에서  컬쳐쇼크를 감내하면서 문화를 실체험 하는것, 이런 축적, 知的축적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이문화의 심층을 해독할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 필자가 이문화이해에서 拙速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짧은 체험을 통해 일본 스케치식의 인상기를 쓰거나 한국 체험기를 쓴 조선족 작가들도 있는데 빠른 정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것이 많아 아쉽다. 그럼데도 거기엔 일본과 한국을 이해할수 있는 소스가 있으며 아직 실체험이 없는 우리 조선족에겐 빠른 정보 입수에 일조가 되는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필자가 누누히 지적해 온 바이지만 중국에 있어서 일본문화의 이해는 아직도 빠른 정보에 바탕을 둔 졸속주의 인식이 주종을 이룬다. 한국 역시 비슷한 실정이다. “신조선족”이 이때 나서야 할 대목이다. 他文化속에서 깊이 침투하여 느긋하게 이문화를 체험, 인식, 저작을 반복하면서 “이해의 충적”을 쌓는것이 중요하다. “신조선족”은 한중일 文化理解의 발랜스적 역할의 담당자이기도 하다.  
62    37.일그러진 李光洙 표상 (김문학) 댓글:  조회:7062  추천:27  2010-10-02
《신조선족》월경론 37.일그러진 李光洙 표상 김문학  이제 이광수의 경계를 넘은 삶을 다시 바라보자. 그의 삶을 이끄는 큰 테제의 하나는 월경과 그에 따른 방랑이다. 11살에 고아로 된 그는 1906년 13세에 일본유학의 길에 오른다. 철학자 지명관선생은 “그의 조선적인 유교영향이 적었다”고 지적한다. 그 반면 그는 다감한 소년시절 일본의 명치중학에서 일본의 근대문명개화에 일찍 개안한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 귀국하여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1916년 와세대대학에 유학하여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소세키(夏目漱石)와 영국의 바이런 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무렵 「매일신보」에 「동경잡신」을 발표하는데 일본의 선진성 근대화에 대해 선망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무덤을 찾아 “경모와 감개”를 표하기도 하는 그는 소년기에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을 한국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인식하고 있다.  소년시기 모든 조선인보다 일찍 문명개화에 开眼한 그는 자신만만한 확신을 갖고있는 패기로 넘친 청년지식인으로 변용한다. 그가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天才”라 불린데는 그 이유가 있다. 그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재능과 지견과 사상이 있은 까닭이다.   국민적 시인 서정주가 그의 시에서 “나를 키운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 이광수의 삶의 8할은 경계를 넘는 “월경”이다. 노신은 절강-남경-동경-센타이-동경-절강-북정-광주-상해로 인생의 월경을 거듭하지만 이광수의 월경은 초원을 찾는 양과 같이 시공적으로는 일본의 츠시마-러시아 바이칼호-상해-해삼위로 地球적인 월경이다.  월경의 문인, 사상가로서의 이광수, 그는 비평가들이 흑백논리와 선입견의 고정관념에 포로가 되어 무조건 친일 문인으로 반역자로 왜곡중상하는것은 허용치 않는 존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인「민족개조론」을 위시한 고백작품 「나의 고백」「나의 자서전」 등 주요 저작을 변변이 읽어보지도 않고 “오, 이광수, 친일한 작가”하고 안일하게 일축하려 든다.  「민족개조론」(1922년「개벽」)은 세계인, 월경하는 코스모폴리던적인 시각에서 러시아 류랑시절에 태어난 아이디어이다. 정신적 아버지인 안창호의 영향으로 생긴것으로, “일제 총독부의 사촉”으로 집필됐다는 망언은 무근무실하다.  필자가 10여년전, 그리고 최근 또 정독한「민족개조론」은 조선민족의 결함을 시리어스하게 비판하고 새시대에 맞게 개조함으로써 재생을 기하자는 위대한 사상이 담긴 명문이었다. 오늘날 재독해도 여전히 그에 관통된 사상은 유효하며 그를 산출한 저자야 말로 우리 민족의 탁월한 사상가, 지성인이라는데 탐복할만한 걸작이다.  저자가 서문인 “변언”에서 밝히다싶이 “이 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중에서 발생한것으로서 내것과 일치하여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나는 조선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구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번 존경과 감사를 드림니다”  보다싶이 이 사상은 해외동포 월경하는 민족 지성의 사상임이 엄연하다.  이광수는 조선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관대, 박애, 예의, 렴결, 자존, 무용, 쾌활”이며, 반면 결함으로 “허식, 나태, 비사회성, 경제성 쇠약, 과학의 부진”등을 열거한다.   그리고 그는 민족성 개조의 비전을 8항목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한다. 우리 민족이 이광수의 개조사상 비전을 진지하게 성찰, 수용했으면 오늘 우리 민족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것이다.  일본에 후쿠자와 유키치의「학문의 권장」이 있다면 조선에는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경계성에서 생성된 민족사상은 아이러니하게 그 민족 억압의 피식민지화 앞에서 “굴절된 지혜”로 나타난다. 한국 단국대 김원모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춘원은 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만큼 표면적으로만 거짓으로 친일 행동을 했을뿐, 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있다는것이다. 그러기에 춘원은 그 자신의 친일 행위를 민족정신 보존운동으로 역이용했다고 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일협력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친일을 위장한 민족보존운동’은 바로 그의 작품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기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춘원의 친일과 민족 보존론」  춘원은「나의 고백」에서 한마디로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풍부한 월경으로서 경계를 넘는 실천속에서 걸러낸 “사상”을 몰이해하고 단순하게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것은 우리 자신의 “愚”이다.  춘원에 대한 고정적 표상은 상당히 일그러진 면을 노정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죽어서도 지탄받는 비극은 사실 식민지를 체험한 우리 민족 모두의 “비극” 그 자체인것이 아닐까?  2001년「조선족 개조론」의 논쟁이 백열화되던 당시 한국과 일본, 조선족의 지식인들은 필자에게 “조선족의 李光洙”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산재지구 한 지식인은 “이광수를 받아들이지 못한것은 일제식민지라는 비운의 역사때문이지만 21세기의 조선족에게 김문학을 친일반역으로 내모는것은 그만큼 우리 자신의 비극이다. 왜나면 여전히 조선시대의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했기때문이다”고 2001년 12월 장춘에서 개최된 <김문학 작품세미나>에서 발언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신조선족의 등장으로 같은 월경의 경계를 넘은 사고와 개방성으로 우리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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