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金文學主義
1. 김문학 주의(主義)
인간은 누구나 독립적인 “나”이다.
아니, 독립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로서 살아가는 데는 나름대로 “나”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 삶의 스타일과 세계관, 가치관이라 칭해지는 신조, 주의주장이 있는 법이다.
이 졸문은 내가 살아가는 주의 주장이 있는 “풍경화”이다. 파스켈로 그려진 마음의 풍경화 스케치는 내가 “나”로서 독립할 수 있는 나만의 유니크한 “김문학 主義”에 관한 간악한 連 일 것이다.
대저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흉금)은 커야 한다” 라는 작고하신 어머님의 母敎가 그대로 내생에 관통된 신조의 굵은 아이템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갓 출생시 매우 약소한 영아였다고 한다. 현대의 건강한 아기와 같이 거의 3000g 넘는 복상스러운 돼지 같은 아기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약골로 태어났기 때문에 심히 가엽게 여겼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를 회임하셨을 때 공교롭게도 3년 재해의 피크에 달한 시기라서 식량, 먹을거리가 없는데다가 또한 본디 허약체질인 어머니는 입덧이 과히 심해서 음식을 변변히 드시지 못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드신 것이 능금 한 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남인 내가 이렇게 시대의 산물 “약골아”로 태어난데 대해 늘 가슴 아파하시고 나를 3남매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셨다. 어머니는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시켰지 나에겐 마치 “큰 도련님”으로 아무것도 시키지 아니하시고 공부만 하게 두었다.
내가 나이를 들자 어머닌, 늘 상 “사람은 작아도 통은 커야 한다” 라고 가르쳤다.
이래서 나는 학년 전 때부터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이 지고무상의 인간사라고 알았다. 학교가기 전 집에서 숙부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글을 마치고 한어병음과 한자를 많이 익혔으며 짧은 작문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신의 신체적으로 ‘왜소’ 함에 대해서 크나큰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또 한편 나는 오기가 발끈 불어나서 내가 무엇이던지 이 작은 체구로나마 나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유년의 반발심은 엄청난 용수철같이 나의 분발을 지탱해주었다. 나는 병약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머님의 유전인지 나는 병약해서 유년 때부터 위장이 몹시 약한 터라. 늘 설사를 하곤 했다. 할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 는 중얼거림 가운데서 그렇게 나는 자랐다. 그리고 나는 근시에, 중이염에, 시력이 나쁜데다 청력이 나쁘고 또 간장까지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왜소한 몸은 역시 “병약”으로 전신 무장되어 있는 “병문학”이다.
왜소하고 병약한 내가 무엇으로 내 신체적 역량을 보일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소학교 첫 체육 시간에 60M 달리기를 하였는데, 그날 반 전체 아이들과 체육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내가 반 전체에서 속력이 제일 빨랐던 것이다. 나 자신의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10여년전 제67회 아카데미 영화수상작 (중국어로 )의 주인공 소년이 신체적 핸디캡을 박차고 달리기와 뭇볼 선수로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천진난만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공명을 일으키고 숱한 눈물을 흘렸다. 주인공 검푸는 신체적 핸디가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파워를 낳는다는 점을 과시하는 감동적 인물이었다.
그 뒤로 나는 전교 60M, 100M 단거리 선수로 선발돼 5학년까지 같은 학년조의 단거리 기록을 세우면서 구 대표, 시 대표 선수로 뛰기도 했다. 또한 육상의 속력을 살려서 축구도 좋아 했는데 많은 드리블 테크닉을 시와 구 소녀업여체육 학교에서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약골 신체로도 운동선수가 되어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첫 학생으로 전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지금도 소학교 모교의 스승님과 만나면 “우리는 언제나 자네이름을 거론하면서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잘 한 학교의 모범생으로 기억하며 자랑하고 있다네” 라고 싱글벙글 말씀하신다.
소학교 때 나는 흔히 “신동”이라 불렀다. 나는 2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3학년 때 쓴 작문들이 늘 5학년의 작문 범문으로 얽히기도 하여 “문학신동”으로 불렀다. “김문학 모르면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다” 라고.
그림에도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나는 미술과는 항상 만점이었으며 1975년 가을 “批林批孔” 운동이 일고 있을 무렵, 공자의 인생에 관한 만화를 50여장 그려 전시하였고 소학생을 상대로 “개인 그림전”을 펼쳐 이름을 날렸다.
그해 전시 소학생 統一考試에서 5과목 500점의 점수로 조선족 소학생의 스타로 다시 유명해졌다. 우리 반의 한어 교원이 당시(군에서 재대한) 민영교원이었는데 국영교원이 되려는 문화시험이 있었다. 그중에 한어 작문이 있었는데 미리 제목을 주고 기한 내에 제출하면 되었다고 한다.
그 한어선생님은 “한어 작문이라면 네가 더 잘 쓰니 써달라” 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틀 후에 명제작문을 탈고하여 드렸다.
이 일이 언제 있었나 하듯 싶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 선생님이 나를 찾는 것이었다. “아, 문학이 너 너무 대단한 놈이다. 네가 쓴 작문이 초고 우를 맞았단다. 네 덕분에 내가 진짜 나라 봉급 타먹는 선생이 됐다. 너무 고맙구나....”
나는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 그럼 정말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근데 밀크사탕이래든가 뭐 장려 같은 거 없습니까?”
선생님도 웃었다. “짜식, 밀크사탕이 대수냐? 저기 시내 환뗀(판점)에 가서 꿔뽀우러우(튀긴 고기만두의 일종) 사주마,”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꿔뽀우러우는 고사하고 개 눈깔사탕 한 알 얻어먹지 못했다. 핫하하...
꿔뽀우러우 보다 더 반가운 희사가 생겼다. 이는 처음 공개하는 소학시절의 에피소드이다. 나의 습작이 시에서 인정받아 향토교재 독물로 시와 학교에서 을 책자로 출간해 주었다.
이것이 13세인 나의 첫 처녀작 출판이다. 그런데 너무 유감스러운 것은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한권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 전 선생님께서 나의 일기책 몇 권과 같이 이 작문 집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행방이 깜깜하다. 전 선생님께서 내가 성인이 된 다음 반환한다고 약속했으나 그 분께서 돌발의 병으로 작고하셨다. 그 뒤 사모님을 찾아가 수소문해 보았지만, 사모님 역시 모르고 계셨다. 아, 내 13살의 처녀작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소실됐단 말인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그때 내가 표지 디자인을 했다. 거대한 대포 같은 붓을 오른손에 쥔 소년인 나 자신의 모습을 만화로 그린 것이었다.
아마 당시 문혁(文革)시기의 선전화 포스타를 모방하여 “글 쓰는 문인”이랍시고 표상화 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가끔 그 그림을 떠올리면서 지구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붓을 들고 “월경하는 지식인”이랍시고 곧 잘 희화하고 있다. 3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이는 28세인 내가 발표한 에세이다. 흑룡강 신문 진달래부 간에 1990년인가 일본 오기 직전에 쓴 내 포부를 이야기 한 글이다. 내가 원래 시대를 거스르는 반골적인 반항아적 기질이 있음을 발견, 이제부터 모난 사나이로 화살같이 뾰족한 날로 이 사회, 문화의 부조리에 용감히 저항하는 젊은이,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주의주장을 펼치겠다는 20대의 팡세였다. 아니 20대의 “성언” 그 자체였으리라.
내가 소학교 때 그려낸 자신의 미래성은 (1) 글 쓰는 작가, (2) 그림 그리는 화가, (3) 운동하는 운동선수였다. 이 3글자를 다 겨냥했으며 다 어우른 욕심쟁이 야심소년.
약골의 신체적 조건으로 아무리 운동신경이 발달했다 해도 (3)은 아니라고 나는 13살에 깨우친 것 같다. 결과 남은 것은 (1)작가냐 (2)화가냐의 양자택일이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거듭 이라면, 선택 앞에서 왕왕 우유부단은 금물이다. 결과 내가 (1) 글쓰기의 지식인으로 택한 것은 초종3학년의 비오는 여름날이었다.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나는 미술전문학교에 수험할 결심으로 내가 소학교 때부터 사사해오던 미술스승을 찾아 갔다. 미술 선생의 “추천장”이 수험생의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스승은 뜻밖에 솔직한 말씀을 터놓았다.
“자네는 그림보다 글재주가 더 좋으니까 그 방향으로 선택 하는 게 무척 좋겠다. 노신이나 파금 같은 그런 글쓰기에 더 자네 적성이 맞네. 소학생으로서 이미 ‘개인전’도 하고 ‘개인 작품집’도 냈을 정도니, 그림을 부업으로 공부를 주업으로 하길 권장하네. 글로써 이 어지러운 세상을 깨우쳐주게.......”
나는 스승의 권장에 깊이 동감을 느끼며, 이날까지 흔들린 선택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선택의 길을 찾았다는 희열이 팽배 히 치밀었다.
귀로에 여전히 폭풍우가 쏟아졌다. 천둥 속에서 나는 저 미래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붓을 쥐고 지구를 밟고 선 자신의 “문인상”이었다.
그 뒤 나는 내가 가장 숭경하는 파금(巴金)과 沈從文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스승으로 모시고 문학 공부,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조선족 소년의 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한어 편지였다.
그러나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에게서부터 일일3추로 고대하는 답장은 오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많은 글을 쓰고 또 썼다. 1978년에 나는 십만자 분량의 중편소설 을 탈고했다. 이것 또한 학교의 뉴스로 되었다. 1979년에 신문에 육속 발표된 산문으로 인해 학교에서는 나를 “문학가”로 불렀다. “문학소년”에서 “문학청년”으로의 성장이었다.
파금과 심종문 대가들의 편지 대신, 나는 동년 급이나 아래반의 팬들의 편지를 십 여 통이나 받았다. 길림성 흑룡강 성에서 날아온 편지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지금도 文友로 사귀는 펜팔이 있다.
1979년 신문에 발표된 산문작품의 원고료가 10원이었다. 그 무렵 교원 월급이 38원 이었으니 당시의 시가로 따지면 학생인 나에게 있어서 거액의 돈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약을 사드리고 책 몇 권을 산후 친구들과 식당에서 외식을 하였다.
그리고 꿔뽀우러우 사주시겠다는 소학교 한어 선생님을 찾아가 내가 선생님께 식당가서 꿔뽀우러우를 사드렸다.
그 뒤 요녕민족출판에서 처음으로 츨간 하는 에 내 글이 3편이나 실렸다.
그때 나는 노트장에다 “나는 장래 중국 조선족 최고봉의 작가로 되겠다” 라는 문구를 적었는데, 그 뒤 이 노트를 문학을 즐기는 후배 여학생이 몰래 보고 나에게 심심히 감복했다면서 나를 따랐다. 바로 그 여학생이 나의 첫 연인으로 첫 아내가 되었다.
“조선족 최고봉의 작가”를 놓칠 수가 없었다고 그녀가 훗날 고백한다. 말수가 적었던 나는 젊은 청춘의 광기와 패기로 “청운”을 품었다. 나는 조선족의 호적과 임어당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노신을 숭경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히려 유연한 자유주의자 호적, 임어당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
첫 연인의 말을 마저 하자., 그녀 덕분으로 나는 대학 4년을 애정의 꿀을 만끽하면서 지식의 감노수를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녀는 나의 심심에 靑春의 자극과 흥분을 준 여인이었다. 얼굴이 백설같이 하얗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백설희라 닉네임을 지어 주었다.
그녀는 백설희가 난장이와 연애한다고 곧잘 나를 익살로 놀려대곤 했다. 치정이다 시피 내게 심취했던 그녀는 생활에서 하도 “도련님”식의 자립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마지막 황제 부의보다 좀 낫다면 신 끈을 맬 줄 아는 것 뿐 이예요” 했다 그래서 생활상에서는 자모와 같이, 알뜰한 누님같이 모든 걸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원고의 첫 번째 독자로서 언제나 중문학부 전공생답게 비평을 해 주었다.
대학교 때 길림성 대학생 산문부분에서 내가 길림대나 동북사대 수많은 중문학계 문학 지망생을 누르고 최우수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뒷바라지의 공이 컸다.
라일락향기가 물씬 풍기는 4월에 시작된 우리의 애정이 10여년 후 일본 쿄토에서 사쿠라가 우수수 지는 같은 4월에 막을 내릴 때, 우리는 서로 울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랑도 인연도 수명이 있으니 그 수명이 다 하는 운명 앞에서 우린들 무엇으로 당해내랴!
그녀와 갈라질 무렵에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미안해. 내가 조선족의 최고봉 작가가 된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어서 말이다. 난 거짓말쟁이야. 이제 더 이상 이런 말을 믿을 네가 사라지니 가슴 아프다” 라고. 그 말에 그녀는 흐느끼며 울었다. 내 빈약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하지만 당신은 이제 조선족이란 테두리를 벗어난 지식인으로 성공했잖아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 한 약속 보다 수백 배 큰 인물로 성장되고 있잖은 가요!”
핑크빛 눈꽃같이 산산이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은 우리의 영구한 이별을 축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랑의 나무에 목을 메여 죽고 싶다” 라고 나는 그 시구를 그녀에게 써준 적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아마 우리 애정의 사정(射程)은 애 언약을 기다릴 만큼 짧은 것이었나 보다.
당시 우리 애정의 종식은 나에게 지대한 충격을 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서 하는 사랑마저도 우리는 스스로 지배 해 나갈 힘이 없다. 운명의 女神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말이다. 20세기 희대의 독재자 모택동도 그 자신의 운명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강청과 왜 이혼을 안 하는가” 라고 한 측근의 물음에 그는 “낸들 어디 가서 법적으로 기소하겠냐!”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운명의 女神앞에서 절대적으로 굴종하지 않는 습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失望속에서도 希望을 품고 분투하는가 하면, 가령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지푸라기도 부여잡고 사신의 운명과 치열한 고투를 벌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운명과 싸우는 일은 기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운명과 격투, 운명을 애어 싼 주의, 사회 환경과 격투, 그런 도전은 인간이 살아가는 주어진 환경에 대한 최적의 적응상태로 삶의 양식을 창조해나간다.
이 삶의 양식에서 걸러낸 지대한 지성의 감노주(甘露酒)가 곧 “주의주장”이다.
나는 내가 삶의 양식(문화)에서 나를 정신적으로 컨트럴하는 주의(主義)가 있다면 그것을 차라리 “金文學主義”로 표현, 명명하고자 한다.
獨立的 “人”으로서의 김문학, 그가 내거는,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정표처럼, 깃발처럼 내걸고 실천의 지침 같은 그것.
“것”이라고 굳이 표현한 까닭은 수학공식이나, 헌법의 조목처럼 표현의 불가능한 내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실을 진술하기에 앞서 서두에서 얘기하던 어머님의 이야기를 그 전제적 조건으로 해야겠다. 어머님께서 자주 들려주던 胎夢에 관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를 회임하시기 직전 태몽을 꾸셨다. 마을 중앙의 古木밑에 우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건져 올렸다. 그런데 그 속에 물이 아닌 엄청나게 거대한 구렁이가 반거하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어머니는 그 두레박을 버리고 어머나! 하면서 비명 지르며 집으로 뛰어 왔다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그 태몽을 이렇게 해몽하셨다. “동네 유식한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그 구렁이는 용인데 장차 출세할 남자애란다. 그 구렁이가 담긴 두레박을 집으로 갖고 왔다면 어머니 신변에서 늘 살 수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밖으로 버렸기 때문에 너는 나를 떠나 멀리 날아가 산다더구나. 참 지금 보면 그 해몽이 신통하잖니. 네가 세 나라에서 날아다니면서 지식인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태몽의 해몽대로 나는 나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 수험시 문학청년으로서 의례 지망해야할 중문계를 선택지에서 탈락시키고 스스로 일본문학부를 지망했던 것이다. 당시 담당의 중국어 선생님, 조선어 선생님과 일본어 선생님은 나의 지망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 자기의 언어 쪽으로 전공해야한다고 다투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으로 일본어를 택했다. 언어를 하나 더 아는 것은 문화를 하나 더 아는 것이다. 장래 일본 유학과 일본에서의 비교 문화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주의”는 이렇게 태몽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본을 활동거점으로 삼아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월경의 글쓰기를 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고 싶었다.
지금 나 자신의 월경의 글쓰기가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란 가테고리를 넘어서 “공공지식인”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니까 그만큼 찬반양론의 시비도 많은 것이다. 자, 수자풀이 노래로 엮어보자.
1,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2, 이상하게 생긴 김문학이 3, 삼국문화 비교를 4, 사시장철 써내는데 5, 오해 곡해 받으면서 6, 육십 권을 펴내고 7, 칠전팔기 주의 주장 굽힘없이 8, 팔굉(八紘)에 팔뚝 걷고 격투하니 9, 구나방은 구리 텁텁 구각춘풍(口角春風)이요 10, 십만억토 신나는 신바람 일으키네.
여기서 나는 7의 “칠전팔기 주의 주장 굽힘없이”란 문구에서 나의 모습이 그대로 노정됐다고 생각한다. 7이 럭키숫자이다 라고 하는바, 칠전팔기해도 주위와 주장을 굽힘없이 견지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나는 20대 “모난 사나이”의 화살을 들고 세상과 도전하는 반시류적 표상을 보는 듯하다.
나는 스스로 “조선족”의 “좁은문”에서 빠져나와 팔굉(八紘)이라는 국제적 무대에서 월경을 하면서 드넓은 시야에서의 연구와 글쓰기를 벌이기를 대학 때 이미 결의 했다.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흉금은 넓고 커야 한다” 라는 母敎를 실천으로 보이고 싶었다. 어머님은 생전에 늘 16층 아파트의 창가에 서서 언제면 해외에 있는 아들 녀석이 집에 돌아올까 바라면서도, 그럼에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우리걱정은 말고” 라고 하셨다. 아마 어머님은 하늘나라에서도 혼이 되셔서 나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어머님은 늘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러면 된다. 앞뒤 너무 재는 것도 안 좋다. 할 때 하면 그것이 곧 좋은 일이다. 네가 혼인에서도 일본여자와 살든 조선족 여자와 살든 좋을 대로 하라” 라고 말씀 하셨다. 이 같은 개명한 어머님이 등 뒤에 계셨기에 나는 늘 행복했다. 어머님의 육신은 갔지만 그 모교는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신문기자들이 언젠가 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취재시 질문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口吐三國語言, 脚踏三國大地, 手書三國文化”
동아시아 3국을 조국으로 간주하고 3국 문화를 읽으며 3국 문화를 쓰는 것, 이것은 또 나의 주의속의 “3국 文化主義”이다.
자주 거론 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 있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모든 나라들 다 자기 조국같이 좋아하는 사람은 강한 어른과도 같다. 하지만 세상전체를 다 자기 조국같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聖) 비터휴고가 남긴 명언이다. 자신의 민족, 자신의 나라만 최고로 간주함이 아니라,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문화처럼 기꺼이 포용하는 자야 말로 성숙된 어른이라는 뜻이다.
그 옛날 12세기에 이미 이런 세계적 시야의 수용력과 통찰력을 갖춘 사상가가 있었다니 놀라울 일이다.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자기민족, 자기 지방, 자기나라에만 국한돼 그 같은 “좁은문” 속에 갇혀 타자를 경시하는 개방된 시기의 중세기식 사고양식의 인간이 어디 한 둘인가.
따라서 나는 방편을 위해 “3국”이란 표현을 쓰지만, 나는 시야를 동아시아를 넘어서 지구촌 규모로 확대시킨다.
현재 내가 연구의 사정(射程)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며, 우선 여기서 주의 주장대로 활동하노라면 언젠가 그 사정은 유럽, 서양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한중일 언어적 우세와 활동적 우세를 우선 활용하여 우리의 선대들이 못 미친 영역에서 보습을 박고 있다는 자부심은 다 나의 “주의”를 실천하는 에너지로 되고 있다. 이래서 나는 자신을 “新 조선족”으로 자부한다.
누가 우리 조선족의 文化風土가 이다지 척박하다 했나? 그것을 말로만 지탄하기보다 우선 행동으로 뭔가 해나 가 는 것, 일을 하는 것이 나의 행동적主義이다.
2000년 중국인 노벨문학상 최초의 수상자 高行健 (1940-)은 “중국현대 문학예술의 탁월한 대표인물”로 꼽힌다. 그의 수상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