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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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생존이냐, 법이냐? 댓글:  조회:6313  추천:4  2013-02-19
  생존이냐, 법이냐? 본래 조선족은 재외동포에서 제외되어 있다가 2008년 1월부터 재외동포비자를 부여받게 되었고 불과 5년 가까운 사이 고무적인 수치로 늘었다. 법무부의 2012년 11월 통계에 의하면 재외동포비자(F-4)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이 11만5천583 명이다. 하지만 이 중에 수많은 조선족이 수난을 겪고 있다. F-4비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한국정부의 규제 때문이다.  장모씨(64세)는 3년 전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딸애의 초청에 의해 재외동포비자(F-4)로 입국했다. 2012년 5월부터 양주소재 00제조회사에 근무하던 중 다쳤다. 산재보상은 받았으나 그것이 문제였다. 재외동포비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정책이 있다. 법을 어겼으니 벌금 200만원 납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외국인이 벌금 200만원이상 납부하면 체류연장이 불가능해진다. 아내와 딸 한가족이 한국에 있는데 장모씨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렵사리 합쳐진 가족이 또 이산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F-4를 소지하고 있는 조선족 중에 중국에서 의사, 교사, 변호사, 심지어 교수 등 직종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많다. 연변대학출신만 2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 와서 전공과 직종에 맞게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중국에서 교사생활 했다고 해서 한국에 와서 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가 단순노무에 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때 유학생 부모, 본과졸업생 부모, 공무원가족에게도 F-4비자를 부여하여 수많은 조선족이 혜택을 받아 한국에 왔다. 이들은 한국에 오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한 것은 불 보듯 빤하다. 역시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2012년 4월 11일 법무부는 국가공인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자에게 F-4비자를 부여한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때마침 H-2 5년 만기가 맞물려 수많은 조선족이 한국인도 따기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F-4비자를 부여받았다. 문제는 단순노무이다.    신모(45세) 여인은 2012년 10월 위험물처리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여 F-4로 변경되었다. 기쁨도 잠시, 강남소재 00음식점에 근무하던 중 단속에 걸려 벌금 100만원을 납부했다. F-4는 단순노무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정책 때문이다. 재차 걸리면 강제퇴거 될까봐 두려워 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 한숨만 짓고 있다.  한국정부는 F-4비자소지자는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규제를 제정했고 기능사자격증 취득자가 F-4로 변경 시 ‘단순노무 비취업 각서’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한다. 하지만 본래 단순노무에 종사했던 그 많은 조선족이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여 맞는 해당직종을 찾는다는 것 또한 하늘의 별따기이다. 예를 들어 한식자격증을 취득하면 반드시 주방장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족출신을 주방장으로 채용할 한국음식점들이 몇이나 될까?  수만 명에 이르는 자격증 취득자들의 실질적인 형편을 감안하여 이들에게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정책을 하루속히 펼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을 위한 노동이 죄가 되어 범죄자가 무더기로 양산될 수 있다.  할아버지 고향을 찾아 생존을 위한 단순노무가 죄가 된다면 한국역사에 불미스런 사건으로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될 것이다.  
285    커피 없이 못 사는 한국인 댓글:  조회:5856  추천:3  2013-02-18
커피 없이 못 사는 한국인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 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속을 태우는 구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내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속을 태우는 구려   오~그대여 왜 안 오시나 아~내사랑아 오~기다려요~~ 오~기다려요~~ 오~기다려요~~~   1968년 발표된 김추자의 노래이다. 당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현재까지도 줄곧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가설을 해보자. 당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를 ‘차 한잔을 시켜놓고’로 바꿔 불렀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말하노라. “인기는 고사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일까? 차는 한반도에서 1300년 역사가 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차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반도사람들은 냉수를 즐겨 마시기에 뜨거운 찻물은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고 차를 마시려면 번거로워 복잡한 과정을 시끄럽게 여기는 한반도사람들은 다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커피는 한반도에서 역사가 극히 짧기 때문에 신생사물(新生事物)에 반하는 민중 심리가 있을뿐더러 차는 동양의 고유문화인데 비해 커피는 한국인이 동경하는 서양(실제로 미국)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커피가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896년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러시아공관에서 마셔보았다는 주장이 있고, 그 이전에 중국을 통해 이미 커피가 조선에 있었다는 유길준의 말도 전해오고 있다. 매체 보도 자료에 의하면 최초의 커피로 1923년 명동의 후타미(二見) 다방을 꼽지만, 실제 구한(舊韓)말의 역사 자료에는 1913년 남대문역에서 문을 연 ‘남대문역 다방’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커피가 시중에 나왔다는 증거이고 최초의 커피전파가 다방을 통해서였다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극소수의 ‘귀족’들만 커피를 접할 수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커피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당시 미군을 통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 시기 한국인은 미군한테 두 가지를 몹시 부러워했는데 쵸콜렛과 커피였다. “우린 언제 쵸콜렛을 맘대로 먹을 수 있고 커피를 맘대로 마실 수 있을까?”가 꿈이었다. 한편 커피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고급스런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화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가 민중의 꿈을 담은 노래로서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한국인의 ‘커피꿈’이 산업화 후기인 1980년대부터 실현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는 커피가 거의 대중화 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커피 없이는 못 사는 나라로 되어버렸다. 현재 한국엔 2000개 업소의 커피숍이 있고 직장마다 커피가 유행이고 거리마다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다. 한국인은 매일 평균 3~6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한국인이 커피에 열광하는 이유는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을 현실화시키는 욕망이 강한 것도 있고 또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민족으로서 세계적으로 유행을 가장 잘 타는 특징 때문인 것도 크게 한 몫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이 커피에 열광하다 보니 다방이 찬밥신세로 되어버렸다. 최초 커피가 다방에서 판매되었으나 현재 한국 다방은 고급차를 맛보기 위한 장소나 커피의 향수를 즐기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동네 못 사는 아저씨들이 혹은 중년 최하층 블루칼라들이 마담과 시중드는 아가씨들과 걸쭉한 농담이나 하는 장소로 전락되었다. 때론 아가씨를 사는 티켓다방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동네 사무실 아저씨들이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들의 젊고 야들야들한 손을 만져보고 야한 엉덩이나 건드려보기 위해 커피를 주문받는 다방도 많다. 다방이라 하면 퇴폐업소가 떠오르고 있다. 물론 한국 다방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차는 촌스럽고 커피가 세련되고 ‘멋’져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차 한잔 시켜놓고 연인을 기다리면 촌스러워 보인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연인을 기다려야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인다. ‘멋진’ 인간이다. 차 한잔 시켜놓으면 마치 연인이 도망가고 커피 한잔 시켜놓아야 연애가 잘 되는 것처럼. 이것이 현재 한국인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직장에서 점심 먹고 차 한잔 마시면 촌스럽고 키피를 손에 들고 있어야 ‘멋’져 보인다. 그래서 점심 후 커피 한잔이 기본생활규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이 더욱 그렇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연인과 몇 시간 동안 연애했다는 이야기, 커피 한잔 시켜놓고 5시간 동안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는 이야기, 커피 한잔 시켜놓고 숙제를 할 겸 인터넷게임을 수 시간 동안 했다는 이야기, 네이버에 커피 한잔을 클릭하면 벼라 별 이야기가 다 뜬다. 유럽 커피숍 같았으면 진즉에 쫓겨 날 고객들이다. 그건 그렇고 커피는 보통 2~3분이 지나면 식어 ‘맛’이 간다. 아이스커피도 몇 분 지나면 ‘맛’이 간다. 그런데도 몇 시간 동안을 어떻게?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국인이 커피의 ‘맛’을 즐기거나 커피를 마시는 묘미를 즐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커피 한잔의 ‘멋’을 지나치게 추구하는데서 빚어지는 결과라 볼 수 있다. 요즘 언론매체에서 커피가 건강에 해롭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차는 커피보다 건강에 여러모로 이롭다. 중국인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도 비만이 적고 고혈압이 적은 이유가 바로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이런 도리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음식이 20년 전보다 엄청 담백해졌다. 간혹 한국인집에 초대받으면 싱거워 먹지 못할 지경이다. 음식이 싱거워야 건강에 이롭다는 논리이고 실천이다. 음식은 이렇게 바꾼다. 그렇지만 차는 촌스럽기 때문에 마시려 하지 않거나 아주 적게 마시고 커피는 ‘멋’이 있기 때문에 많이 마시는 버릇을 버리기 어려운 것이 현주소이다. 며칠 전 한국에서 2년간 방문교수로 있던 중국인 학자가 한국인이 커피를 잘 마시는 현상을 ‘소국의식’이라 꼬집은 글을 읽었다. 물론 그 분의 시각에 의해 그런 식으로도 풀이할 수 있겠으나 나는 한국인이 커피를 잘 마시는 현상은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 심리에 의해 생겨난 유행이고 ‘멋’을 지나치게 추구하는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지적하고 싶다.
284    '멋'과 백의민족 댓글:  조회:5345  추천:5  2013-02-14
‘멋’과 백의민족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 조선학교 아닌 중국학교를 다녔는데 중국아이들이 나보고 “너희들 민족은 늙으면 늙을수록 새하얀 옷을 입어 참 깨끗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했다. 확실히 그 시절 조선족노인들은 늙을수록 하얀 한복을 많이 입었다. 우리시골마을에 80세 훨씬 넘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해마다 연세를 물으면 여든이라고 대답해 ‘여든 노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여튼 80세 훨씬 넘었는데도 아주 건강했다. 건강하다 못해 산 넘어 환갑 지난 딸이 살고 있었는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딸 생각이 나 보따리를 이고 해발 500M 고개를 거뜬히 넘나들었다. 고갯마루에 올라 있을 때면 바람에 하얀 한복자락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신선을 보는 것 같았다. 노인의 모습이 그렇게 ‘멋’이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민족이 백의를 선호해 입었던 이유 중 신선을 숭상하는 풍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최치원은 에서 풍류를 말하고 조선의 역사를 ‘선사(仙史)’라고 표현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나라에 현묘한 진리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이미 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풍류와 선사는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중국에서 풍교가 발전하여 풍류도로 진화했고 풍류도는 도교로 승화되었고 도교 수도의 최고 경지가 바로 득도성선(得道成仙)이다. 우리민족은 역사기재가 부실해 그렇지 사실 신선숭상사상이 중국보다 더 강했다. 풍교를 중국보다 더 숭배해왔기 때문이다. 신라는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씨풍교(釋氏風敎)’라 불렀고,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禮儀風敎)’라 부를 만큼 풍교를 송상했다. 우리민족이 현재까지도 세상에서 일상생활에 ‘바람’이란 어휘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역시 신라풍교의 영향 때문이다. 신선은 인간이 최고 경지에 이른 가장 ‘멋’이 있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선조들은 자민족역사를 ‘신선의 역사’로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복장만 백색이었던 것이 아니라 세수수건도 하얀색이었고 특히 이불안감은 가가호호 전부 백색이었다. 중앙과 성의 간부들이 조선족마을 시찰할 때 흰옷에 흰이불, 흰수건을 목격하고 “조선족은 정말 깨끗한 민족”이라고 칭찬하였다. 흰옷, 흰이불, 흰수건들은 쉽게 어지러워진다. 조선족부녀들은 흰 것들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깔끔하게 빨래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더욱이 조선족부녀들의 부지런함에 탄복해마지 않았다. 조선족부녀들은 빨래할 때면 방치로 자꾸 두드린다. 강가에서 모여 빨래할 때면 방치소리가 진짜 가관이었다. 빨래들이 마르면 또 방치로 두드린다. 특히 베갯잇과 이불안감은 풀을 바르고 말리고 마르면 또 방치로 두드린다. 어릴 적 방치소리를 지겹게 들어 싫던 기억이 생생하다. 방치로 두드리는 것은 부드럽게 하려는 목적이 있을뿐더러 ‘멋’을 내기 위해서였다. 조선족부녀들이 방치를 잘 써 한족은 우리를 ‘까오리빵즈(高麗捧子:고려몽둥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283    中GDP성장과 민생 엇박자 댓글:  조회:5110  추천:22  2013-01-29
中GDP성장과 민생 엇박자   중국이 건국 후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 끝임 없는 시행착오 때문에 경제가 파탄의 변두리에 몰리게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매년 GDP9%~10%의 급속한 성장을 거쳐 G2로 부상했으나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 받기에는 아직 거리가 매우 멀다. 한 나라가 살기 좋다는 기준으로 흔히 정치안정, 과학기술발달, 높은 국민소득, 높은 국민의식, 인권보장, 풍부한 문화생활, 풍부한 물질, 교통발달, 청정한 기후 등등을 거론 한다. 하지만 필자는 한 나라가 살기 좋다는 기준은 민생이 가장 관건적인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인이 아직도 출국바람이 심한 것은 민생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연변의 민생시장상황을 반영한 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다. 2012년 연변의 민생시장 물가가 전년에 비해 평균 11%증가했다는 것이다. 월급인상은 기고 물가상승이 날고 있는 상황은 비단 연변만의 일이 아니고 아마 중국 절대다수의 현실일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에서 일반월급쟁이 한 사람이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은 일반월급쟁이 아내와 아이 일가족을 먹여 살린다(물론 적금여유가 없이 그달 그달 빠듯하게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 월세방 잡고 중고가전제품과 그릇 및 생활도구를 갖추려면 한 달 월급이 채 안 든다. 냉장고, TV 등은 중고가격이 보통 5~10만원이기에 가능하다. 중국에서 중고를 갖춰도 한 달 월급으로는 어림없다. 한국에서 이혼 같은 민사사건(재산분할이 없고, 위자료청구액이 아주 적을 경우) 법인세가 2만원이다. 법원이 2만원만 받고 사건을 진행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이혼한 공문서를 번역, 공증·인증 절차를 거쳐 중국법원(연변)에 가면 를 발급하는데 인민폐 500원을 받는다. 한국은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공문서를 발급하는데 민원서류 건당 600~1000원을 받는다. 중국공공기관(연변)은 공문서 한 장 복사하고 도장을 찍는데 인민폐 54원(2009년 기준) 받는다. 양쪽 월급수입과 물가를 따지면 중국이 한국보다 20배 혹은 더 이상 비싸다는 말이 되겠다. 영화 관람 같은 문화생활이 민생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중국 영화표 값이 지구상에서 가장 비싸다. 한 장의 영화표 값이 평균 50~80원인데 중국인 1인 평균월수입의 3~5%이다. 요 몇 년래 중국영화산업 연 수입이 인민폐 100억원을 웃돈다고 한다. 얼핏 보면 경이로운 수치이다. 그런데 내막을 들여 보면 경축할 일이 못된다. 왜냐? 일인당 1원이면 13억 인구라 130억원이 된다. 이렇게 계산하면 중국인 100명 중 80명은 영화관에 가보지 않았고 근근이 20%만이 영화를 보았다는 결론이다(영화 본 사람이 달랑 1회만 관람했을 경우를 가정한 비율, 가령 한 사람이 여려 차례 영화를 보았고 수회 본 비례가 많아지면 중국에서 영화를 관람한 실제 사람은 5%정도밖에 안 된다). 1980년대 중국 영화표 값은 2~3角이었는데 당시 월급의 0.5%였다. 이 수치가 바로 세계 평균에 도달한다. 그때 무료로 볼 수 있는 노천관람 영화가 많았으니 평균 영화표 값이 0.5% 훨씬 미만이었고 백성 전체가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터 영화표 값이 급격히 오르더니 2000년대 초반부터 월급의 5%까지 치솟고 있다. 이젠 영화가 민중의 문화오락이 아니라 소수 ‘귀족’만이 즐길 수 있는 특수오락으로 전락되었다. 홍콩은 영화표 값이 50~70홍콩달러, 구미 선진국도 평균 7~10달러, 한국은 평균 8000~9000원이며 2012년 기준으로 영화관 관객수는 1억9천489만2천244명으로서 국민 1인당 3.8회 영화관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구미·홍콩 및 한국의 영화표 값은 일반백성의 월수입의 0.5%인데 중국은 3~5%이니 6배내지 10배나 비싸다는 얘기이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일본을 앞질러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국제적인 파워도 커져 목소리도 높아졌다. 중국00학자는 2050년이면 중국이 전방위적으로 미국을 초월할 것이란 주장을 내놓았다. 민생이 중요한 요소이므로 전방위적인이란 용어에 민생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과연 2050년이면 중국민생이 미국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인가?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시도할 때 일부 사람들과 일부지역이 먼저 부유하라고 했다. 30여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등소평의 말대로 일부 사람들과 일부지역이 엄청나게 부를 쌓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각해졌다. 부유층에 드러나지 않는 부정축재가 심각한데 이들은 공직자이거나 국유기업 간부들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물가가 얼마 상승되던 집값이 얼마 오르던 민생이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일반백성들은 살기 점점 어렵고 힘들다. 중국에서 대학본과 혹은 석·박사를 졸업하고 웬만큼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인민폐 10만원, 근사한 직장을 구하려면 20만원 내지 30만원을 내야 한다(중국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님). 권력층이나 자영업으로 부를 쌓은 일부 부모들은 부담이 되지 않겠으나 일반백성 가문은 평생을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모아도 모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자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쓰고는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 해외에 나간 사람들이 귀국을 꺼려하는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거주국의 민생문제가 편안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체류하고 싶을 것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벌어서 중국에 가서 소비하면 좋다고 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한국에서 벌어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중국에 가서 소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혹자는 10년 후면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따궁(打工)하러 간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민생문제 차원에서 볼 때 과연 그러한 반전이 가능할까? 삼림만 보고 삼림을 이루는 나무 구조를 모르고 어설프게 하는 말이다. 2020년이면 중국에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 홀아비가 4,5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가장 주요 이유는 역시 민생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중국 현상황에서 슈퍼스타 미국과 비교하고 견줄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한발 앞선 아세아 네 마리 용한테서 민생해결을 차근차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중국국정에 맞게.      
282    외국인등록증발급 너무 늦다 댓글:  조회:5294  추천:1  2013-01-28
한국에 처음 입국하거나 3년 만기되어 재입국한 동포들이 외국인등록증발급을 신청할 시 본인이 직접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방문하면 3주정도 걸리고 행정사 대행으로 맡기면 보통 4~6주 걸린다.  동포들이 지리를 잘 모르고 또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늘 붐비기 때문에 행정사대행으로 맡긴다. 행정사대행제도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번중한 업무량 해소와 동포들의 편리를 위해 마련되었으면 마땅히 개인접수보다 시간이 더 단축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겠으나 현재 거꾸로 되어 있어 유감이다. 한국 현행법상 일반 민원접수는 늦어도 통상 14일 이내 처리된다. 왜 동포들의 외국인등록증발급 민원접수처리가 그토록 늦어지는 건지? 외국인등록증발급이 늦으니 잇따라 생기는 부작용이 많다. 동포들이 방문취업비자(H-2)로 한국에 입국하면 3일취업교육을 받게끔 되어 있다. 만약 교육받지 않고 일을 하면 불법취업이다. 2012년 7월 1일 전에는 여권만 갖고 교육신청이 가능했지만 그 이후로는 반드시 외국인등록증이 있어야 교육신청이 가능하다. 교육신청을 하면 곧바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1주내지 10일 기다려야 한다. 교육을 받고 취업하려면 고용안전센터에 구직신청을 제출하고 적어도 1주 기다려야 한다. 입국하여 취직하기까지 적어도 1개월 반 혹은 2개월이 걸려야 되니 정신상 지친다. 6주기술교육생의 경우 교육수료증을 발급받아야 외국인등록증신청이 가능하고 취업하기까지 아무리 빨라도 3개월 넘게 걸린다. 학비 내고 생활하고 이 비용, 저 비용을 따지면 돈을 벌기 전에 약 300만 원쯤 있어야 한다. 6개월 교육 시에는 평일엔 일을 하고 주말에만 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반공반독이 가능하여 정신적으로는 힘들어도 경제적인 부담은 없었다. 그래서 일부동포들은 현행 6주교육이 과거 6개월 교육보다 못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북아신문
281    박근혜 대통령당선은 천지개벽 댓글:  조회:12267  추천:17  2012-12-24
박근혜 대통령당선은 천지개벽   지난 12월 19일 한국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보수진영의 재집권이란 의미보다 여성대통령이 탄생되었다는 것이 더 큰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같은 전통유교국가에서 여성대통령의 탄생은 4년 전 미국에서 첫 흑인대통령이 나왔던 만큼이나 천지개벽의 의미가 크다. 한반도역사를 돌아보면 2천 년 전 삼국건립을 계기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과도되었다. 하지만 모계사회의 잔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천년동안 드러나고 있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자면 남자의 결혼을 ‘장가를 간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남자가 결혼하면 먼저 여자의 집에 가서 살면서 아이를 낳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다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남자의 집에 돌아와 정착하여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남자가 ‘丈家’에 가는 혼인관습이 조선조 초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개국은 유교이념을 통치무기로 삼았고 518년 동안 유교는 모든 종교를 밀어내고 우리선조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유교는 여성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남자 중심사회를 구축하는 이른바 남존여비사회의 핵심종교이다. 이런 풍토에서 여왕의 탄생은 아라비안나이트(天方夜談)와 같은 이야기였다. 유교국가관은 다른 문화권의 국가관에 비해 천양지차이다. 다른 문화권에는 ‘국’이지 ‘국가’가 아니다. 중국도 주공시대까지는 ‘국’이지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공자가 주공의 혼인 제도를 높은 단계로 승화시키고 ‘국’은 ‘가’를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국가관’을 설파했다. 즉 유고의 핵심이념인 ‘仁’은 먼저 ‘가’ 내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다음 사회에 전파되고 종국적으로 ‘국’에 널리 퍼지면 천하는 태평성세가 된다는 것이다. 또 공자의 국가관에 있어서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들 수 있다. 소인이 군자가 되는 길은 공부인데 공부하는 목적은 우선 몸을 다스리는 것(수양을 쌓는 것)이며, 몸을 잘 다스리는 것은 가정을 고르게(가족의 화목)하는 것이며, 가정이 고르게 되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나라가 잘 다스려져야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가’의 주체는 남자이고 여자는 그저 남자들의 의도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피동적인 존재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주체도 남자이지 여자는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교적인 국가관 조선조사회에서 어떻게 여왕이 탄생될 수 있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유교의 본산지는 중국이지만 조선조 518년을 통해 한반도는 중국보다 훨씬 더 유교적인 이념과 사상이 강했다. 필자는 유교가 동양3국에 미친 영향의 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중국유교는 ‘근육유교’, 일본유교는 ‘피부유교’, 조선유교는 ‘뼛속유교’이다. 동양3국은 과거도 그러했거니와 현재도 유교이념과 사상의 영향이 지대하다. 현재 한국은 불교신자가 26%, 기독교신자가 19%, 유교신자는 2%밖에 되지 않지만 어떤 종교 신자를 막론하고 한국인의 사회생활과 가족생활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유교이념과 유교사상이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피부유교’인 일본도 ‘근육유교’인 중국도 아직 정치권은 남자의 세상이지 결코 여성의 세상이 아니다. 중국은 공처가가 많으며 한반도에 비해 남존여비가 심하지 않다. 특히 모택동이 ‘여성은 하늘의 절반’이라고 표현한 이후, 더욱이 문화혁명시기 여자홍위병의 탄생에 의해 중국여성은 남성화가 강해 중국은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고(男不男) 여자는 여자답지 못한(女不女)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회로 되어버렸다. 세상에서 중국이 남녀평등이 잘 실천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가주석이나 총리자리에 여성이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거니와 정치국상무위원 7명 가운데 여성이 단 한명도 없는 실정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유교적인 이념과 사상이 훨씬 짙은 한국에서 여성대통령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성대통령이 현실로 되었다. 박근혜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었던 어쨌든 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는 했지만 앞으로 남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시각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갈 지가 자못 궁금하다. 한편 한반도역사에서 부계사회에 진입한 이래 신라시기 선덕여왕(632~647 집정, 제27대), 진덕여왕(647~654 집정, 제28대), 진성여왕(887~897 집정, 제51대)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은 진성여왕이후 1015년 만에 탄생한 ‘여왕’으로서 하늘땅이 뒤바뀔 정도의 천지개벽이다.    
280    재한 동포교육 동포출신이 맡는게 더 효율적이다 댓글:  조회:5396  추천:7  2012-12-01
동포교육 강의는 동포출신이 맡는 것이 효율적이다   현재 다문화교육프로그램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다종다양하게 활성화 되어 있다. 이에 비해 동포교육 프로그램으로서 방문취업(H-2)비자 소지자 입국 후 3일 취업교육과 기술교육이수자격(C-3)으로 입국하여 6주(처음에는 1년, 점차 9개월로 축소되었다가 6개월 현재는 6주)동안 교육받고 H-2로 변경 받는 것 외에 동포교육이 활성화 되지 못했다. 2012년 들어 법무부가 국가 공인 기술자격증을 취득한 동포들에 한해 재외동포(F-4)자격을 부여하기로 하여 이미 수천 명에 이르는 동포들이 자격증을 취득하여 혜택을 받았고 다가오는 12월 초 있을 금속창호기능사 시험 신청자만 8천여 명이고 정보처리기능사, 미용, 요리 등 다양한 기능사공부를 하고 있는 동포 합치면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다문화교육은 절대다수가 무료교육인데 비해 동포교육은 (사)이주·동포정책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무료교육 외에 절대다수가 동포들이 학비를 부담하는 유료교육인 것이 큰 차이점이다. 다문화교육은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원어민 강사들이 많은데 비해 동포교육은 한국인 강사 일색이다. 원어민 강사는 자국문화와 한국문화의 비교를 통해 강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수강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효율이 굉장히 높다. 반면에 동포교육은 한국인 강사 일색이다 보니 비교문화강의가 이뤄지지 못해 일방적인 이론교육으로 끝나 교육효과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주민교육프로그램은 법률과목이 빠지지 않는다. 3일 취업교육프로그램에도 한국법률과목이 필수이다. 그런데 아무리 한국의 유명 변호사 혹은 유명법률 교수가 강의해도 일방적인 이론 강의에 지나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 이주민은 한국법을 잘 몰라 자국의 법처럼 믿고 행위를 취하면 쉽게 사건에 휘말린다. 그러므로 동포의 경우 중국법과 한국법이 다른 점을 짚어 강의한다면 범죄율을 많이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당방위는 중국법에도 있고 한국법에도 있다. 그러나 중국법은 정당방위가 사건처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비중 있게 작용하지만 한국법은 정당방위가 실제사건처리에 있어서 있으나 마나다. 한국경찰은 사건수사 시 절대다수가 같이 때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열 매 맡고 한 매를 반격해도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중국법은 원인 조성 자를 엄중 처벌하는데 한국에서는 원인 조성이 뒤로 밀리고 결과만 중시한다. 중국에서는 살인미수의 개념이 상대방을 죽일 의도가 있어 흉기로 가격했는데 죽지 않을 경우 살인미수죄인데 비해 한국에서는 무릇 흉기로서 상대의 위험부위를 가격하면 살인미수죄를 적용한다. 한국에서는 도둑놈이 집에 뛰어들어 주인이 도둑놈을 때리면 오히려 주인이 폭행죄에 걸려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국법은 원인 조성 자를 엄중 처벌하는 일방통행식 법이라면 한국법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책임을 고루 추구하는 쌍방향식 법이다. 이것이 민주국가의 법률 특징인데 동포들은 이러한 한국법을 모르고 있어 범죄율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만약 동포출신이 법률과목을 강의한다면 이러한 실제 사례를 들어 진행하기 때문에 동포들이 한국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동포소양교육에 쓰레기처리문제를 언급하는데 중국에서는 검은 비닐봉투든 아무 비닐봉투에 쓰레기를 넣어 아파트 자기 집 입구에 내놓으면 청소부가 알아서 가져간다. 한국에서는 일반쓰레기, 음식쓰레기, 재활용쓰레기를 분류하여 규격봉투를 사서 처리해야 한다. 이런 상식을 몰라 쓰레기무단투기 현상이 많아 한국사회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 정보처리기능사를 비롯해 많은 기능사공부는 외래어가 굉장히 많은데 동포출신 강사는 중국어로 번역하여 설명하면 동포들이 습득이 빠르다. 유기농기능사공부는 용어90%이상이 한자어인데 동포출신 강사가 한자판서로 설명하면 효과가 굉장히 좋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동포교육 강의는 동포출신이 맡아서 진행하는 것이 굉장히 효과적이다.    
279    중국동포 무질서한 지하철이용 댓글:  조회:8782  추천:40  2012-11-01
중국동포 무질서한 지하철이용   한국에 온 중국동포는 절대다수가 동북삼성출신이다. 동북삼성은 지하철이 별로 없는 지역으로서 중국에서 지하철을 접해보지 못하다가 한국에 와서 지하철을 타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하철이용이 서투르고 무질서하다는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중국에서 몸에 배인 소질이 낮은 시민의식을 한국에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ㄱ. 부정승차 2호선과 7호선이 교차하는 대림역은 동포들의 이용률이 가장 높다. 7호선대림역의 경우 하루 평균 부정승차 적발건수가 1명이 된다. 만약 단속을 가강한다면 적발건수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것이 역장의 말이다. 문제는 적발된 건수 중 열에 여덟은 중국동포라는 것이다. 사회공공질서를 교란하고 유료 이용자에게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고 운임원가를 증가시킨다. ㄴ. 무질서한 출구이용 2호선 대림역 여러 출구는 밖에서 이용이 편리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중국동포가 운임구역에 침입하여 출구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럴 경우 진짜 지리를 잘 몰라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부정승차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가려내기 어렵다는 것이 역 직원들의 고충이다. ㄷ. 쓰레기 무단투기 밖에서 피던 담배를 역내까지 와 꽁초를 이리저리 버리는가 하면 역사 안의 도처에 담배곽을 버리고 또 휴지를 버려 쓰레기가 널린다. 출구 밖의 담뱃재털이와 휴지통은 더욱 가관이다. 통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마구 버려 환경이 어지럽기 말이 아니다. ㄹ. 무절제한 주정행위 주말이나 굳은 날씨를 만나면 대림역은 주정뱅이들 때문에 소란스럽고 곤혹을 치른다. 아침부터 술에 만취해 역내 벤치에 누워 코 고르며 잠을 자거나 지나가는 손님과 시비를 걸고 다투거나 자기네끼리 싸우는 경우도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리저리 음식물을 토해내 역내 환경을 어지럽히고 있다. ㅁ. 화장실이용이 어지럽다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중국동포는 양변기와 좌변기 사용이 서툴러 변기 밖에 대변을 누는 사례도 있고 휴지를 휴지통에 넣지 않고 대변이 묻은 휴지를 아무렇게 버려 기타 고객사용에 지장을 주고 청소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ㅂ. 역내 직원을 믿지 못한다. 일부 중국동포는 안내원에게 말을 묻는다. 모르면 묻는 것이 당연하지만 두세 번 돌아서서 묻고 또 묻는다고 한다. 안내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여 재차 삼차 묻는다면 힘들다. 한국의 직원들은 서비스정신이 투철하다. 그러므로 안내원의 말을 믿고 따르면 낭패를 보지 않는다. ㅅ. 행동이 과격하다 한국 공무원은 법집행에 있어서 내국인이든 외국이든 공정하게 대한다. 부정승차가 적발되면 승차요금의 30배 되는 부과금을 안긴다. 독일은 100배, 홍콩은 60배이니 한국은 경한 편이다. 물론 내국인도 적발되면 어김없이 부과금을 안긴다. 그러나 일부중국동포가 적발되면 중국에서 왔다고 부과금을 안긴다면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한국인의 경우 잘못을 지적하면 금세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이에 비해 일부 중국동포는 잘못을 지적하면 사과는 고사하고 “네가 뭔데!”하면서 과격하게 대응한다. 중국동포밀집지역 지하철역의 직원들은 다른 기타 지하철역의 직원들에 비해 상기 원인에 의해 여러모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 중국동포가 한국 사회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상기 여러 가지 폐단이 한국인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비례로 따지면 중국동포가 훨씬 많고 따라서 이주민으로서 불량한 행위를 하면 쉽게 표적이 되고 더욱 비판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라는 도리를 명심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라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중국동포들은 중국에 있을 때 낙후된 공공질서문화를 한국에서 답습하지 말고 한국질서를 잘 지켜 한국 사회에 피해가 되지 않는 모범시민이 되기를 바란다.        
278    칠월칠석과 음양사상 댓글:  조회:12021  추천:1  2012-09-04
음력 7월 7일은 중국 전통명절 중 하나인 칠월칠석이다. 칠월칠석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 궁전의 은하수 건너에 부지런한 목동 견우가 살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부지런하고 착한 견우와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도록 했다. 그런데 결혼한 견우와 직녀는 결혼 후 사이가 너무 좋아 견우는 농사일을 게을리 하고 직녀는 베 짜는 일을 게을리 했다. 이렇게 되니, 하늘나라가 혼란에 빠져 지상의 사람들이 천재와 기근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견우와 직녀를 은하수의 양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게 되었는데 이를 '오작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칠석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일 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져야했다. 칠석 다음날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가 모두 벗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오작교를 놓기 위해 머리에 돌을 이고 다녔기 때문이다. 칠석날에 비가 내리는데 하루 전에 내리는 비는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 다음날 내리는 비는 헤어지면서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다. 이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진 전설이다. 그런데 이팔청춘의 남녀가 왜 하필이면 음력 칠월칠석에 만나게 하였을까?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중국문화는 세상만물을 음양 사상으로 풀이하는 것이 주류로 흘러왔다. 본 이야기와 연관 지어 말하자면 1년 중 양이 왕성하던 여름이 가고 음을 만나는 날이 곧 음력 7월 7일이며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며 인간을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맥락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을 곧 자연의 양과 음이 만나는 날로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이란 ‘婚’은 본래 女변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붙여놓은 것이다. 즉 결혼이란 ‘혼’은 본래 어슬녘을 뜻하는 황혼의 ‘昏’이었다. 그것은 ‘昏’은 하루 낮의 양기가 쇠하고 음을 만나는 시각이 곧 어슬녘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러한 음양 사상에 의해 양인 남자가 음인 여자와 결합하는 시점도 역시 어슬녘으로 맞추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결혼식은 햇볕이 짱짱 내리비추는 한낮이 아니라 어슬녘에 거행한다고 해서 ‘結昏’이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전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춘향전’은 곧바로 이러한 음양 사상과 그에 따른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라 필자는 판단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춘향전’을 권선징악 관념으로만 평가하고 있으니 고대문화의 정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중국학자 조국화 선생이 그의 《생식숭배문화사상》에서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문화를 핵심으로 형성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현재 중국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극심하게 받아온 한반도 문화도 생식숭배문화로 풀이하면 진정한 문화의 정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하면 본래 달의 숭배는 생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고 따라서 ‘강강술래’와 같은 민속이 생겨난 것인데 우습게도 400년 전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한국의 민속학자들이 도대체 뭘 연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동양의 고유문화본질을 파악하고 우리의 옛것을 찾아내 현재 우리문화로 만드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요, 발렌타인데이요, 화이트데이요 하는 서양명절에 열광하고 있으니 참말로 아이러니다. 중국에선 ‘애인절’을 2월 14일이 아닌 중국고유 민속을 상징하는 칠월칠석으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성공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를 회복하려는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것이다. 한국은 자체 고유전통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중국과 같은 전통회복움직임이 미약해 보인다.  
277    한국을 바라보는 조선족의 시각 댓글:  조회:14062  추천:7  2012-08-22
냉전시대 조선족이 바라보는 한국은 미제국주의의 수하에 있는 헐벗고 굶주리고 못사는 막연한 남조선이었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굳게 닫혔던 국문이 빠금히 열려 한국 소식을 풍월로 들을 수 있어 조금 잘사는 나라로 인식되었으나 여전히 막연한 남조선이란 시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60·70년대 가만가만 라디오를 듣던 시절 한국이란 나라는 말투가 부드럽고 간을 녹일 듯 고운 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부러울 뿐이었다.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가짜초청이 성황을 이루며 많은 조선족이 한국나들이를 하게 됨에 따라 막연했던 남조선은 점차 ‘한국’으로 변하면서 조선족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다.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처음 접촉할 초창기엔 이념과 사상의 갈등이 큰 작용을 하지 않았고 서로 간에 동족의 입장에서 기대치가 컸었다. 그런데 희망이 크면 실망이 큰 법, 한국인은 조선족을 재미 혹은 재일 교포가 갖고 있는 고국관으로 조선족을 바랐으나 그것이 영 빗나갔다. 이를테면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조선족이 중국을 응원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실망감이 컸다.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한국인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만 알뿐 이 세상엔 난 정보다 키운 정이 더 크다는 또 다른 하나의 진리를 알 수가 없어 더욱 서운해 하였다. 조선족이 한국 나들이가 엄청 늘어나고 세월이 흐르고 한국에 정착하는 수가 대폭 증가되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뀔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바람이 20년이 넘었고 한국에 장기체류하는 조선족이 50만 명(국적 취득자 포함)이 되지만 한국을 바라보는 조선족의 시각이 큰 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한국 측의 이유를 살펴보자. 이른바 한국인이 조선족을 상대로 벌인 초청사기는 전반 조선족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조선족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영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숱한 돈을 팔고 어렵사리 한국 땅을 밟았으나 불법체류라는 딱지를 쓰고 인권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길가에서 경찰이 눈에 띠여도 일제시대 조선인이 일본순사를 만나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삶을 보내게 되어 한국이란 나라를 믿지 못할 나라로 각인되었다. 김해성 목사의 지적에 따르면 “고국에 찾아온 동포를 불법체류라는 이유로 강제로 추방시키는 나라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한국뿐이다.” 그리고 10년 동안 동포를 불법체류로 방치한 나라는 아마 한국뿐일 것이다. 재외동포비자를 부여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채택한 방문취업비자(H-2)가 실시되어 자유왕래가 이뤄졌으나 노동부는 조선족을 백 프로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2008년 1월부터 재외동포비자(F-4)가 실시되어 조선족유학생출신이 한국에 체류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엔 석·박사를 졸업해도 전부 중국에 돌아가야 했으니 아마 동포인재를 체류문제로 본국에 돌려보낸 나라도 한국뿐일 것이다. 요 몇 년래 체류가 조금 안정되어 한국에서 가게도 운영하고, 전세도 근사한 집을 구하고, 한국체류가 오래되어 중국에 가족이 없거나 삶의 터전이 없는 자, 한국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사는 등 뿌리내리고 정착해보려던 동포들이 10여 년 전 위명여권이 문제가 되어 강제퇴거 조치를 받고 있으니 한국이란 나라에 도저히 정을 붙이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스나미에 밀려가듯 사라지고 만다. 한편 한국만 탓하지 말고 조선족자체가 스스로 반성해 볼 문제도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체류가 10년이 되고 20년이 넘어도 조선족이 진정 한국을 고국, 한국인을 동족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중국인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다 보니 친근감보다 오히려 한국을 폄하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이 쩍하면 중국과 비교하면서 한국을 하찮은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돈도 벌고 삶의 질을 추구하며 잘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대한 흉을 지나치게 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을 이러쿵저러쿵 흉보지만 정작 본국에 돌아가라면 갈 생각이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가서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재한조선족의 올바른 한국정착은 갈 길이 멀고도 멀다.      
276    살인사건에 대한 한국의 두 얼굴 댓글:  조회:6515  추천:3  2012-08-02
살인사건에 대한 한국의 두 얼굴     지난 7월 18일 12시,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이주여성 추모집회가 대한문 앞(덕수궁)에서 열렸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열린 추모집회의 슬로건은 “이주여성들이 죽지 않을 권리”였다. 참으로 몸이 오싹해나는 비장하고 처절한 슬로건이다. 한국에 시집오는 외국여성들은 한국이 본국에 비해 여러모로 발전하여 좋다는 동경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낼 부푼 꿈을 안고 입국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상당수가 결혼생활이 행복하기는커녕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소수이긴 하지만 한국인남편들의 경제수입이 없다든가, 알코올중독자이든가, 정신이 이상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비인간적인 삶을 보내고 있다. 남존여비관념이 뼛속까지 스며든 전통유교국가에서 살아온 외국인여성과 결혼한 일부 한국인 남편들이 자신의 주제가 말이 아니면서도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로 아내를 무시하고 폭력을 밥 먹듯 한다. 폭력이 심하면 살인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올 한해만 보아도 3월 7일 베트남 여성이 강원도 정선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남편에게 살해당했고, 6월 30일 강원도 철원에서 조선족 결혼이민자(김영분, 81년생)가 남편에게 맞아 4일 동안이나 뇌사상태로 있다가 7월4일에 사망했고, 7월 2일 또 다른 조선족 여성(강동구 리선옥씨 53년생)이 남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 이날 추모집회에서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이주여성 리스트” 10명의 사연을 공개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결혼이민자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추모집회에서 있었던 연설문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우리 이주여성들의 두려움과 다르게 한국 사회는 너무나 조용합니다. 이주여성이 남편에 의한 폭력으로 죽어갈 때마다 남편의 도움 없이 이주여성 스스로 체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고, 국제결혼 하는 남성들의 신원을 확실히 하여 위험할 수 있는 남성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한조선족이 한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체 대한민국이 시끌벅적하게 떠든다. 물론 한국 언론이 선두에 서서 마치 조선족을 하나의 무시무시한 범죄 집단으로 몰아가고 네트진들이 추방하라는 목소리를 높이며 그야말로 난리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마저 오원춘의 살인사건을 정쟁에 써먹는다.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언론이나 단체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신분이면 조선족이 한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화통이 불이 나고 인터뷰에 응하느라 그야말로 난리법석이다. 이와 정반대로 한국인이 조선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아주 조용하다. 조용할 뿐 아니라 인터뷰하겠다고 찾아오는 기자가 없고 아예 전화 한 통도 걸려오지 않는다. 인간이 사는 동네는 범죄가 있기 마련이고 살인사건도 발생할 수 있다. 같은 살인사건이지만 한국인이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즉 조선족이 살인하면 조선족집단이 범죄의 소굴로 둔갑되고 한국인이 조선족을 살해하면 떠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조선족한테 살해되면 큰 난리가 나고 야단법석을 떨고 조선족이 한국인한테 살해되는 것은 그저 그렇거니 넘어가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약자인 외국인이주여성들의 법적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이른 것 같다. 한국 언론들이 조선족이 한국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기울인다면 법적보호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275    아름다운 도전, 꿈은 이뤄진다 댓글:  조회:5309  추천:2  2012-07-31
아름다운 도전, 꿈은 이뤄진다   “합격이란 소식을 듣고 너무 흥분되어 아이처럼 펑펑 울었어요.” “꿈인지, 생신지. 어리벙벙해 아무 생각도 안 나네요.” “나 같은 사람은 무조건 불합격일 것이라 생각하고 귀국 비행기티켓까지 샀는데 의외로 합격되어 요즘 드라마틱한 삶을 보내고 있어요.” “이번 기회를 통해 앞으로 한국생활에서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이젠 자녀들한테 큰소리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합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평생교육원에서 정보처리 교육받고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동포들의 폐부지언(肺腑之言)이다. 지난 4월 10일 한국 내 공인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동포들에게 재외동포비자(F-4)를 부여한다는 법무부의 정책이 발표된 지 단 3개월이란 짧은 시간이 경과된 지금 아름다운 결실을 보고 있다. 한국의 각종 기능사자격증은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동포들이 취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외래어가 많은 종목이라 동포들한테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동포들은 단 3개월 만에 기능사자격증을 받아 안았다. 대졸은 고사하고 고중(고등학교)학력도 미달인 자가 다수. 초중(중학교)학력, 게다가 수십 년 책을 놓았던 동포들이 한국에서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방야담(天方夜談:아라비안나이트)과 같은 드라마였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 연변 훈춘에서 온 안병일씨는 1955년생이다. 문화혁명 때 초중 학력이고 직장의 추천에 의해 기술전문학교를 다닌 것이 그의 전부 학력이다. 58세 나이에 컴퓨터를 다루는 정보처리기능사에 도전한다는 것은 정말 무리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저와 같이 공부에 전혀 노하우가 없는 사람이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저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지요.” 소감을 묻자, 그는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애한테 부끄럽지 않는 아빠가 되어 가슴이 뿌듯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수준을 테스트(검증) 해보고 싶었어요. 이번 교육에 참여한 동포들이 전부 체류만기일을 눈앞에 두고 비자변경 목적으로 공부에 뛰어들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착각이다. 흑룡강성 오상시가 고향인 심계화씨(47세)는 H-2 3년 만기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공부에 누구보다 열정히 굉장했다. 그녀에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나 경제난으로 고중을 중퇴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공부하려던 꿈이 무산되어 가슴에 한을 묻고 살아왔다. 법무부 정책에 의해 스스로 자신을 테스트 해 볼 기회가 왔다. 그녀는 주저 없이 도전했다. 끈질긴 노력에 의해 합격했다. 합격소감발표 시 그녀는 너무 흥분되어 눈물이 나고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감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 보람이 크다. 기자가 만나본 30대 합격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어려운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앞으로 한국생활에서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을 것 같아요. 자신감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 보람이 있네요.” 당당하게 속심을 털어놓았다. H-2소지자 부모초청으로 한국에 온 25세 이하 동포젊은이들이 단 45일 만에 정보기기처리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자가 수 명 된다. 그들은 한국에서 노무에 종사한 부모들이 넉넉히 송금해준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세월을 보내왔다. 중국에서 대학에 못 가 부모에게 미안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부모에게 뭔가 보답할 수 있어 홀가분한 심정이라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나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가치가 크다고 말한다.   재한중국동포사회가치 상승 한국에 온 동포들은 지금까지 자녀들한테 학비 대고, 생활비 대고, 시집 장가보내고, 집 사 주고 하는 돈 버는 기계에 불과했다. 공부는 지적인 활동이다. 한국에서 공인 기능사자격증 공부는 동포사회의 가치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지적 활동이다.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동포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자녀에게 큰소리 칠 수 있는 당당한 부모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눈시울을 적신다.
274    식민지 영향이 큰 한국 댓글:  조회:6246  추천:0  2012-07-21
식민지 영향이 큰 한국 유기농기능사교재를 보고서   한국어 어휘 중 70%가량이 한자어에서 유래되었으니 한반도는 중국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는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게다가 36년 의 일제 치하에서 긴 세월을 보냈으니 현재까지도 식민지 영향이 크다는 것을 필자는 유기농기능사교재를 보고 절실하게 느꼈다. 지난 4월 10일 한국에서 국가 공인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한 동포는 재외동포비자(F-4)로 변경해준다는 법무부 공지가 발표된 이후 현재까지 수만 명의 동포들이 기능사자격증을 따려고 교육받고 있다. 기능사자격증엔 대략 120여 가지 종목이 있는데 동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처리, 한식요리, 미용, 세탁, 오염물처리, 유기농, 금속창호 등등이다. 동포들에게 있어서 기능사자격증 종목들이 외래어가 많지 않으면 화학용어가 많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문명이 서양에서 옮겨왔으니 그럴 수밖에. 유기농만은 예외다. 동양의 농업역사가 적어도 7·8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즉 유기농기능사교재엔 서양식물과 일부 비료명칭 및 화학적 토양분석용어를 제외하고는 외래어가 아주 적어 동포들이 승산이 많다. 그런데 한자어가 90%이상을 차지해 동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 한자어가 그토록 많은가? 답은 간단하다. 한국은 법전을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가 일본의 것을 베껴 쓰고 있는 상황이다. 유기농교재도 마찬가지. 일본에서 쓰고 있는 한자어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동포들이 중국에서 왔으니 한자어가 쉽지 않겠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으나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농사에서 상용 비료인 인산, 요소 등은 한자어이지만 두음법칙에 의해 본래 린산(燐酸)을 인산, 뇨소(尿素)를 요소라 부르니 동포들의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필자는 강의하면서 린산이나 뇨소라 알려주고 한문을 써주면 이해가 아주 쉽다는 반응이다. 한국어에 논과 밭이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교재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하고 일본식으로 거의 답과 전으로 표현한다. 이 일본식 표현은 중국에 비해 선진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조선족 포함)에서는 논을 수전, 밭을 한전이라 표현한다. 조선족은 논과 밭을 혼동한다. 수전을 논밭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일본식으로 논의 토양성격에 따라 분류되는 논은 사질답, 추락답, 천수답, 누수답, 노후답 등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답’에 대해 한국강사들이 당연히 알겠거니 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조선족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답’은 한문으로 ‘畓’이므로 판서하면 아주 쉽게 이해한다. 풀기가 있는 토지를 점토라 하는데 한문으로 粘土, 성분이 다른 흙을 옮겨다 덮는 것을 객토라 하는데 한문으로 客土, 퇴비는 堆肥 등등의 용어들이 한문으로는 쉽지만 우리말로는 매우 어렵다. 광복이후 이북에서는 이남에서 말하는 두음법칙이 없다. 예하면 이남에서는 리씨 성을 이씨, 로씨를 노씨라 발음하는데 이북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없다. 한문음독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북에선 한국에서 말하는 한자어 어휘, 牽引車를 끌차로 우리말식으로 풀어서 표현한다. 또 외래어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핸드폰을 손전화로 순수 우리말로 한다. 일제잔재청산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남에서는 두음법칙에다 일본어와 일본식한자어에 외래어까지 가세해 실로 장마당이다. 혹자는 장마당식 언어를 사용해도 한국은 너무나 잘살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273    여자는 벗고 남자는 입고 댓글:  조회:7157  추천:3  2012-07-14
여자는 벗고 남자는 입고   요즘 날씨가 무척 무덥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절로 난다. 사우나가 따로 없다. 옷을 벗고 싶지만 벗지 못한다. 한즈봉이나 런닝 차림으로 출근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 남자라서. 더욱이 행사에 갈 때면 양복에 넥타이까지, 더워 미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자라서. 그럼 여자는 어떨까? 밖에 돌아다니는 여자는 물론이고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마저 가슴라인이 파인 아주 가벼운 옷, 아래는 팬틴지, 한즈봉인지 허벅지가 다 들어나는 걸 입어도 상관없다. 한여름에 양말을 신고 다니는 여자를 본 기억이 없다. 신발도 다종다양하게 아무 신발을 신고 다녀도 무방하다. 이에 비해 남자는 한여름 무더위에도 양말을 꽁꽁 신어야 하고 사무실에 근무하면 신발도 반드시 답답하기 짝이 없는 구두. 필자는 요즘의 이런 세태를 ‘여자는 벗고 남자는 입는다.’로 표현하고 싶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세태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 유교적인 정조관념과 관련지어 풀이하자면 본래 여자는 입고 남자가 벗는 것이 말이 될 터인데 요즘 세태는 왜 상반되고 있는 걸까? 복식문화의 유래와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원시인류가 옷을 발명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인류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인류가 신분과시를 위해, 정조관념의 생성에 의해 등등이다. 필자는 원시인류가 옷을 발명한 것은 일차적으로 정조관념의 생성과 큰 관련이 있다고 본다. 원시사회에서 우선 여러 남자가 한 여자를 탐하면 여자는 자기 음부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따라서 마음에 없는 사내한테 귀중한 음부를 드러내기를 꺼려 가리기 시작했다. 일정 세월이 흘러 남자도 자기 음부가 귀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남녀가 음부를 가리기 시작한데서 점차 복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분사회에 들어서 인류는 옷으로 신분을 구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양한 계층의 남녀가 옷을 신분장식용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종교문화의 보편화에 따라 옷은 인간을 속박하는 도구로 사용된 역사도 있었다. 이를테면 신이 통치하던 암흑의 세계였던 중세기서양에서는 여자를 불결한 존재로 여기고 성행위를 추접스런 짓거리로 보고 단순히 후대번식목적의 의미에서 옷을 입은 채 여성의 음부부위에 구멍을 내고 그 짓거리를 하였다. 바꿔 말하자면 옷을 ‘남녀격리’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서양의 역사를 돌아보면 중세기 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복식문화가 발달(이슬람지역은 현재도 마찬가지)하였고 근대사회에 진입하면서 여성들의 사교계진출에 의해 미인계역할을 함에 따라 점차 가슴라인이 파인 윗도리를 입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유명 디자인 샤넬이란 여성에 의해 육체윤곽이 드러나는 현대적 바지문화가 인류사회에 출현했던 것이다. 1920년 미국대선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이후 이른바 여성해방이 이뤄짐에 따라 치마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하였는데 일명 미니스커트가 유행되었고 따라서 바지 길이가 짧아지다 못해 팬틴지, 한즈봉인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더 이상 짧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동양에서는 당나라 때 상층가문의 여성들의 복식을 보면 가슴라인이 파인 옷을 입었고 청나라에 이르러 양 허벅지를 터놓은 만주족복장인 치포가 전국에 유행되었다.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신라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상층가문의 여성들은 역시 가슴라인이 파인 唐服이 유행이었다. 그러다가 유교를 뼈가 절게 받아들이던 조선조 5백년 시대엔 여성들의 정조를 강구함에 따라 다시 꽁꽁 싸는 복식을 입었다. 현대에 들어 서양의 개방적인 복식문화가 유행되었지만 한국에서는 1980년대까지 치마길이가 무릎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세위 놓았고 단속을 강화하였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나 한국이나 여자들이 더 이상 벗을 수 없을 정도로 벗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필자는 여성의 정조관념은 복식문화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허황한 얘기인지 모르겠으나 중국조선족을 보면 개혁개방 전에는 여성들의 바지가 옆구리에 지퍼가 달려 있었는데 그 시절엔 불륜이 잘 가꿔진 논의 돌피처럼 아주 드물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더니 여성들의 바지지퍼가 앞에 달렸다. 지퍼가 옆으로부터 앞에로 이동하게 된 것은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편리해진 것이지만 문화적인 차원으로 접근하면 큰 변혁이고 혁명이었다. 이른바 성해방이다. 불륜이 많아졌고 지금은 불륜하지 않는 자가 오히려 돌피신세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문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왜 여성은 벗고 남자는 입는가는 것이다. 여자가 살판 치던 모계사회에서 남자가 득세하는 부계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 되었고 그때부터 여자는 남자한테 잘 보여야 하는 강박관념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여성의 화장 문화가 그러한 사회배경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여자가 얼굴을 화장하듯이 남자한테 잘 보이려면 머리모양과 복식문화도 다양해져야 했다. 여성을 속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정조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현대 여성들은 어떻게 하나 자신의 성적매력을 마음껏 뽐내고 싶어진다. 화장은 진하게 하면 할수록 좋고 옷은 벗을 수 있을 만큼 벗는 것이 좋다. 호주의 이슬람출신 국회의원이 현대여성의 복식문화를 두고 “생선을 건사하지 않고 고양이가 먹었다고 고양이를 처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성희롱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벗지 못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남자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옷을 못 벗는다. 만약 남자가, 특히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남자가, 더 말할 것 없고 한 나라 대통령이 런닝바람에 한즈봉을 입고 맨발바람에 산다루를 신고 대국민연설을 한다고 치자 그럼 권위가 서겠는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남자는 권위를 지키려면 반드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어야 한다. 그것이 질질 끓는 삼복철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룰이다.      
272    안쪽(비연변)이 왜 안쪽인가? 댓글:  조회:8364  추천:6  2012-07-07
안쪽(비연변)이 왜 안쪽인가?   수년 전 CCTV춘절만회에서 조본산과 송단단의 소품이 인기가 좋았는데 조본산이 秋波를 가을의 시금치라고 말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웃음보가 터지게 했다. 개그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秋波를 가을의 시금치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풀이해도 무방하다. 개그의 기교는 어찌 보면 짖굳은 말장난으로 본래의 뜻을 벗어나 엉뚱하게 표현하면 할수록 매력이 넘친다. 칼럼은 개그가 아니다. 엉뚱하게 풀이하는 것은 절대 금물인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개그와 같은 칼럼을 접하게 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요즘 동북아신문 온라인에 이란 제목으로 된 칼럼이 올라 있는데 한 편의 개그를 보는 것 같았다. 이란 칼럼의 서두를 보자. “우리 연변사람들은 연변 밖의 쪽을 ‘안쪽’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 스스로 ‘바깥쪽’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에게는 변두리의식 내지는 소외의식이 앙금처럼 서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나는 우리 ‘연변’의 한자어새김을 음미해보며 이런 앙금을 녹여본다. 연변(延边)—변두리를 넓힌다, 어쩌면 우리는 확장주의. 사실 우리의 꿈은 저 푸른 하늘로 나래치거늘.” 저자는 안쪽과 연변을 主와 外, 중심과 변두리란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완전히 개그다. 1860년대부터 함경도 조선인들이 먼저 두만강을 건너 희망의 땅에서 자리 잡은 곳이 곧 연변이다. 그 뒤로 황해도 평안도 조선인이 처음에 두만강을 건너왔으나 워낙 연변이란 곳은 산이 많고 개간할 땅이 적어 조선과 더 먼 곳, 이른바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내 타지방과 요녕성 일부 지역이다. 1930·40년대 경상도 조선인이 뒤늦게 만주진출하다 보니 연변과 길림성 내 타지방과 요녕성 일부 지역에 발붙일 곳이 여의치 않아 더 안쪽인 흑룡강성의 허허벌판에 짐을 풀었다. 연변사람들이 연변을 제외한 타지방을 안쪽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친정과 가깝고 타지역은 친정과 거리가 멀며 중국지리를 따지면 연변에 비해 안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안쪽이라 불렀던 것이다. 안쪽이란 개념이 처음엔 순수하게 지정학적 논리에서 생겨났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의식상 이질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변과 비연변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연변사람들은 안쪽사람들에 비해 우월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친정과 가까워 민족문화 차원에서 우월의식을 갖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후 정부의 정책혜택에 의해 연변은 대학, 출판사, 방송국, 극단 등 민족문화의 본산지로 자리매김하면서 우월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지정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구비례를 따질 때 연변은 조선족이 많아 한어를 모르고도 삶을 영위할 있어 민족적인 자부심도 강했다. 안쪽은 친정과 거리가 멀고 또 인구비례를 따질 때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다 보니 본토민의 문화에 많이 물 젖었는데 연변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질적인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연변사람들은 한족과의 통혼을 마치 집안이 태풍을 맞는 것처럼 강력하게 거부했다. 심지어 한족학교를 다닌 조선족처녀를 며느리 삼기를 꺼려했다. 한족학교를 다닌 처녀애들이 예모예절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연변과 비연의 이질점을 이런데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말하자면 연변사람들이 칼럼의 저자가 지적한바와 같이 스스로 바깥이라고 인식한 것이 아니라 민족문화본산지이자 조선족의 중심이란 인식과 이에 따른 우월의식이 강열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연변의 지식인 수명이 한국에 왔는데 근사한 음식점에서 식사했고 그 때 그들이 서빙아가씨 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흑룡강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후진 곳에서 왔구먼.”라는 비하식의 말을 던졌다. 즉 안쪽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찮게 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사건을 보면 연변사람들이 자신을 밖이거나 변두리의식이 아니라 스스로 主와 중심의 우월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민족 한 인간집단을 짚을 때 물론 다양한 시각으로 풀이가 가능할 수 있으나 인류문화학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필자는 수년 전 연변대학을 포함한 조선족문화인들의 인문학적 지식이 딸린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여 되지게 욕을 먹었는데 요즘 이란 칼럼을 보고 저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271    19. 素女著書(황제와 소녀연재) 댓글:  조회:6149  추천:0  2012-07-02
19. 素女著書: 소녀저서 소녀, 을 짓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 손자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전욱(典頊)이다. 전욱은 아들 궁선(窮蟬)을 낳았다. 전욱이 세상을 떠나자 현효의 손자인 고신(高辛)이 제위에 올랐다. 그는 황제의 증손자다. 고신의 아버지는 교극(蛟極)이며 교극의 아버지가 현효, 현효의 아버지가 헌원이다. 현효와 교극은 모두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며 고신이 제위에 올랐다. 고신은 전욱의 족자(簇子)이다. 고신이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방훈(放勳)을 낳았다. 또 추자씨(娵訾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지(摯)를 낳았다. 고신이 세상을 떠나자 지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동생인 방훈이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요(堯)다. 요는 인자함이 하늘처럼 넓었고 지혜로움이 신과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구름처럼 미묘하고 존귀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희(羲)와 화(和)에게 명하여 하늘의 뜻을 공손하게 따라 일월성신의 운행 궤적을 관찰해 법칙으로 삼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간을 신중하게 이끌었다. 우순(虞舜)은 중화(重華)라고 했다. 중화의 아버지는 고수(瞽叟), 고수의 아버지는 교우(橋牛), 교우의 아버지는 구망(句望)이며 구망의 아버지는 경강(敬康)이다. 경강의 아버지는 궁선이며 궁선의 아버지는 전욱,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이다. 이렇게 순에 이르기까지 7대였다. 일설에 의하면 헌원의 25명의 자녀 중 어떤 아들은 화하로 가고 어떤 아들은 변방으로 갔다. 창의의 어떤 아들이 북쪽 땅에 봉해져 대선비산(大鮮卑山)에 나라를 세웠다. 그 후손이 왕이 되어 유도(幽都)의 북쪽과 드넓은 사막 지역을 통일했다. 헌원은 토덕의 왕인데 북쪽의 습속에 따르면 토는 ‘탁(拓)’, 후는 ‘발(拔)’이라 부르니 ‘탁발’이란 바로 황제의 덕을 성씨로 삼은 것이다. 그 후손인 시균(始均)이 요임금에게 벼슬을 하사받고 발을 약수의 북쪽으로 쫓아냈다. 백성들이 그의 부지런함을 신뢰했고 순임금은 그를 어여삐 여겨 전조(田租)로 임명했다. 황제가 남긴 족적이 하도 굉장해 하(夏), 상(商)나라를 거쳐 주나라에 널리 전해졌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가 헌원에 대해 궁금증이 많아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은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대답하였다. 재아가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제가 영이에게 듣기로 황제가 삼백 년을 살았다 하던데 황제는 사람인가요, 사람이 아닌가요? 어떻게 삼백 년이나 살 수 있나요?” “우, 탕, 문, 무, 성왕, 주공의 사적(史迹)은 이미 충분히 보았다. 황제의 시대는 참으로 오래되었는데 너는 왜 이런 걸 묻는 것이냐? 옛사람들이라 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주기가 힘든 것이란다.” 재아가 재차 물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은미한 이야기들의 사적이 논쟁적이며 아득하고 불명확한 것이라 해서 경시해버리는데 그것은 군자의 태도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황제는 소전씨의 아들인데 헌원이라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아기 때부터 벌써 말을 할 줄 알았고 어린이가 되었을 즈음에는 세상 이치를 대부분 알았고 민첩했다. 자라면서 성품이 진득하니 아주 부지런했고 어른이 되자 총명해졌다. 음양오행에 밝았고 약(龠), 합(合), 승(升), 두(斗), 곡(斛)의 오량을 세워 백성을 위로하고 사방을 관측했다. 곰, 큰곰, 비휴, 표범, 호랑이 등을 길들여 판천의 들판에서 적제와 전쟁을 벌였는데 세 번 싸우고 나서야 뜻을 얻었다. 황제는 수를 놓은 옷을 입었고 큰 허리띠를 둘렀으며 흰 실과 검은 실로 도끼 모양의 수를 놓은 하의를 입었다. 용을 타고 구름 뒤로 올라가 천지의 질서와 음양의 연유, 삶과 죽음의 논설과 존망의 어려움 등을 따랐다. 때가 되면 온갖 곡식과 초목을 심어 조수 곤충까지 그 덕으로 교화했고 일월성신을 변별하고 토석금옥을 모두 다스리느라 수고했으며 백성들에게 시절에 따라 물과 불과 재물을 아껴 쓸 것을 가르쳤다. 그가 살아있을 때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백 년이나 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그의 신령함을 백 년이나 경외했고 또 그의 가르침을 백 년이나 따랐기 때문에 삼백 년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노라.” 평생의 동반자를 잃은 아소는 황제가 죽자 따라 저승길에 오르려 했으나 그가 승천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살아갔다. 그러나 백세가 넘는 할머니가 산다는 것은 생명을 겨우 연명해가는 것이기에 무의미했다. 아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후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기기로 했다. 헌원과 옥녀, 헌원과 아소의 정사(情事)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세련되고 가장 풍부한 교합이었다. 그리하여 아소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 집필에 들어갔다. 그녀는 책의 머리말을 이렇게 장식했다. 행복한 성생활을 위해 세상 모든 연인과 부부에게 드리는 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은 너무 많지만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의 삶은 모래밭을 걷는 고행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하게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다만 인간은 고급 동물이기 때문에 교합에 임할 때 본능에 충실함과 아울러 머리를 써야 합니다. 동물은 발정기라는 것이 있어 교합이 계절적이고 시간이 제한적입니다. 이에 비해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아무 때나 교합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권이어서 복을 받은 것이지만 한편 인간을 해치기 쉬운 요소이기도 합니다. 과거 한때 사내들이 여성의 생리기간에 교합을 하면 아기를 쉽게 밸 수 있다고 여겨 발광적으로 성교를 했습니다. 매우 어리석인 짓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성은 생리 전과 후의 1주 동안 회임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생리기간엔 절대 회임이 될 수 없습니다. 여성이 생리가 오면 자궁막이 부드러워져 심하게 건드리면 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교합을 회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리기간이라 해서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위생을 잘 지키고 격렬하지 않게 방사를 나누면 남녀 모두 즐겁습니다.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난륜과 군혼의 형태로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 시기엔 지정된 남편이나 고정된 아내가 없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많아 교합의 도를 몰라도 교합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이런 세월이 막을 내리고 혼인제도가 인류사회에 등장함에 따라 사내든 여자든 교합 상대를 고르는 폭이 좁아졌습니다. 가령 권세 있고 재물이 풍부한 사내는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릴 수 있으나 절대다수의 사내는 한 여자를 상대로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혼인은 당사자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므로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아기자기 화목하게 살아야 다른 가족들도 모두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요?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부부란 흔히 난생 모를 남과 여가 만나 삶을 꾸려가기 때문에 다툼은 불가피합니다. 가령 당신이 부부싸움을 했다면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성격이 너그러운 쪽에서 먼저 화해를 요청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격이 좁은 상대가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행복이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내가 말이 없이 실제 행동으로 화해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실제 행동이 바로 교합입니다. 교합은 남녀가 알몸으로 엉키기 때문에 마음이 스르르 녹습니다. 게다가 여자는 교합을 통해 쾌감과 짜릿함을 맛보기에 화해가 쉽게 이뤄집니다. 부부싸움이 있은 후 가령 사내가 여자를 만지면 여자는 처음엔 뿌리칩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에서 오는 반사 동작입니다. 때문에 한두 번 뿌리치더라도 집요하게 만지고 흥분시키면 거부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양물을 빼고 박는 동작을 거듭하면 여자는 짜릿함을 만끽하느라 맺혔던 옹이 풀어지고 나빴던 일이 구중천으로 날아갑니다. 이렇게 화해는 말이 없이 교합하는 실제 행동에 의해 이뤄집니다. 아무리 법으로 한 사내 한 여자가 혼인하여 살아가게끔 규정한다 해도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흔히 다른 사내 다른 여자의 유혹을 못 이겨 외도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원망하기에 앞서 내가 무엇이 부족한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얼굴은 타고난 것이기에 개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평생 얼굴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이 잘 생긴 것은 혼인 초에는 매력이 있으나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후천적인 요소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간은 남녀를 불문하고 배우지 않고도 성인이 되면 교합을 합니다. 그것은 타고난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합이란 그저 애무하고 사내의 양물을 여자의 음도에 박아 넣고 비비고 쑤시면 다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고정적인 한두 가지 동작으로 교합을 하면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사내든 여자든 큰 불행입니다. 사내는 아내가 외간남자를 탐내지 않게 하려면 자주 몸을 애무해주고 교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교가 없이 따분하게 한두 가지 체위만을 반복하면 아내는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음양교합의 도를 익혀야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사내가 하는 대로 가랑이를 벌리고 가만히 대주고 있으면 교합인 줄로 착각합니다. 실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도 교합의 도를 잘 수련하여 사내를 즐겁게 해주어야 모두가 행복합니다. 행복한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은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모두의 책임임을 통감하고 그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내와 여자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마칩니다. 모든 사람마다 음양교합의 도를 잘 터득하여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기를 바랍니다.
270    지저분한 동포들의 쓰레기처리 댓글:  조회:6771  추천:7  2012-06-23
지저분한 동포들의 쓰레기처리   “동포 여러분, 여러분들이 쓰레기처리가 지저분하여 지역민(한국주민)과 갈등을 빚고 있는데 제발 쓰레기를 잘 처리해 주세요. 두 손 모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난 4월 21일 이주동포정책연구소가(소장 곽재석) 주관하고, 서울구로구청의 주최로 열린 회의에서 이성 구로구청장의 축사내용 중 한 대목이다. 구로구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절대다수가 동포이고 그 회의주제에서 말이 외국인이지 실제로 참석자 300여 명이 전부 동포일색이었다. 동포들이 얼마나 쓰레기처리가 지저분했으면 구청장이 세 번이나 반복하여 부탁했을까? 실제로 동포밀집지역인 가리봉시장 골목과 남구로역 부근 여기저기서 검은 비닐봉투 혹은 아무 봉투에 넣은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파리가 날아다니고 악취가 풍겨지고 있다. 대림동을 비롯해 기타 동포밀집지역도 지저분한 쓰레기처리사정은 비슷한 상황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전날 오전 9:30 가리봉2동에서 규격외의 아무 봉투에 아무렇게 넣은 쓰레기를 전문 실어가는 구로구청의 트럭을 만났다. 공무원의 말에 의하면 가리봉1·2동, 구로2동과 4동·6동이 가장 심각한데 매일 평균 한 차 내지 두 차씩 가져간다고 한다. 한 차에 네 사람씩 붙어 있었다. 인건비도 그렇거니와 별도로 가져가는 쓰레기 소각에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 서울에서 새로운 동포밀집지역이 생겨날 때면 지역민들이 거세게 반발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반발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중국인(한국인은 동포들을 중국인이라 표현함)이 지저분하여 환경을 어지럽힌다는 것인데 지저분한 쓰레기처리가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중국에선 쓰레기를 검은 봉투든 무슨 봉투든 아무봉투에 넣어 아파트 자기 집 입구에 내놓으면 청소부가 알아서 가져간다. 한국은 일반쓰레기, 음식물쓰레기, 재활용쓰레기 등 세 가지로 분리한다. 동네슈퍼에서 여러 가지 표준(종량제)쓰레기봉투를 판매한다. 지역주민들은 반드시 표준(종량제)쓰레기봉투를 구매하여 분리에 따라 처리하고 월·수·금 혹은 화·목·토로 나눠 가져간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말로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뜻이겠다. 동포들은 고국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준수하고 한국사회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중국에서 하던 생활습관을 한국에 와서 그대로 답습한다면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에서 동포들이 지저분하게 던진 쓰레기를 처리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 혈세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왜 불만이 없겠는가? 동포밀집지역 한국지역민들 말하기를 “쓰레기 때문에 이러저러하게 동포들한테 가르쳐도 보고 충고도 해보고 심지어 야단도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동포들은 고국 한국에 이런저런 서운한 감정을 갖기 앞서 내가 진정 고국을 사랑하거나 존중하고 있는 걸까? 이런 반성부터 선행되어야 옳지 않을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고국만을 탓하는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269    18. 晩年黃帝(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5987  추천:0  2012-06-13
晩年黃帝: 만년황제 헌원, 천하를 통일하다 한 세기를 살아온 신농씨는 늙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코가 냄새를 잃어 맛을 모르고 눈이 침침해 산나물의 생김새와 색을 분간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산마늘을 캐 먹는다는 것이 그만 비슷하게 생긴 박새를 먹어버렸다. 산마늘은 마늘 냄새가 강하게 나며 하나의 비늘줄기에 두세 장의 잎이 달린다. 박새는 여러 장의 잎이 촘촘히 어긋나 있으며 잎맥이 많고 주름이 뚜렷하다. 그는 박새를 먹고 나서 위에 머물던 음식물은 물론이고 소장과 대장에 썩어 있던 부식물마저 다 토해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예전에도 산나물이나 약초로 사용할 수 있는 풀을 먹어본다는 것이 그만 독풀을 먹은 적이 많았으나 그땐 젊은 시절이라 금세 몸이 회복되었다. 허나 지금은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신진대사 기능이 부실해 몸이 전혀 회복되지를 않았다. 그는 박새를 먹은 후 위로 토하고 아래로 쏟아내는 고통에 시달리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두머리가 죽자 그의 무리는 곧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때를 호시탐탐 노리던 치우가 신농씨의 무리를 먹어치우려 들었다. 헌원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형의 부족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반백을 넘긴 헌원이 비록 힘은 예전 같지 않지만 성욕은 여전히 왕성했다. 전쟁을 앞둔 전날 아소를 찾아가 한바탕 교합을 즐기면 그 쾌락이 싸움에 보탬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영리한 아소는 교합을 거절했다. 두 사람 사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은 내가 싫어진 것이오?” “아닙니다. 천만에 말씀인 걸요. 소녀가 감히 싫어할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사내가 큰일을 하기 전날 계집을 접하면 재수가 달아나 일을 그르칠 수 있어 거절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미 몸이 후끈 달아오른 헌원이 아소의 설득을 귓등으로 흘러버리고 달려들었다. 아소는 이게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헌원이 거세게 밀어붙여 어쩔 수 없이 음문을 열고 말았다. “기왕에 하는 것이면 이 소녀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대하듯 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내 사랑하는 그대를 어찌 하찮은 돌멩이 다루듯 한단 말이오.” “전쟁을 앞두고 상대를 하찮은 물건으로 대하듯 하라는 뜻이옵니다.” 그 간언에 따라 헌원은 이제까지의 체위와 달리 아주 거칠게 아소를 다루었다. 마치 천한 계집을 상대하는 것처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었다. 그럼에도 아소는 뜨거운 쾌감을 느끼었고 이는 헌원도 마찬가지였다. 헌원은 이 통쾌함의 기를 이어받아 내일의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헌원과 치우가 기주(冀州)의 판천(阪泉)에서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치우는 본래 용맹하고 날렵한데다 철갑모를 쓰고 나타나 헌원이 그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전쟁의 결과는 헌원의 예측과 달리 참담한 패배였다. 반년 뒤에 두 무리는 탁록(卓鹿)에서 다시 싸움이 붙었다. 그동안 헌원이 밤잠을 자지 않고 치우를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또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철갑모를 부술 방법만 찾는다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헌원은 아소를 찾아가 답을 구했다. “간단하옵니다. 자석 전차를 만드십시오. 그러면 치우의 철갑모가 자석에 끌려들어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석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오?” “음극과 양극의 원리로 철을 흡인하는 물건입니다.” “듣고 보니 암수의 원리이구만.” 헌원이 기분 좋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에서 승자가 되려면 군사적으로 강해야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장을 잘해야 합니다.” “정신적 무장은 투지가 아니요?” “물론 투지가 중요하죠. 그 외에도 정신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요?” “큰일을 앞둔 전날, 아니 3일 전부터 절대 계집을 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1차 전투에서 패한 원인이 아무래도 전날 아소와 방사를 나눈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밤을 새워 아소와 전투의 승리 기술에 대해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교접을 하지 않았다. 기주의 들판에서 한원과 치우가 또 다시 한판 전쟁에 들어갔다. 푸른 옷을 입은 헌원의 딸 발(魃)은 풍백과 우사가 불러일으킨 비바람을 멈추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응룡(應龍)은 물을 모아 치우를 공격했다. 마지막으로 자석전차를 몰아 치우를 생포했다. 두 부족의 우두머리는 모두 서쪽에서 온 이주민으로서 맹수처럼 용맹하고 패기가 넘쳤다. 그러므로 승패의 관건은 머리싸움이었다. 결국 헌원이 치우보다 머리가 더 총명하고, 영리한 아소 덕분에 최후 승자가 되었다. 헌원이 중원에서 가장 강한 군사를 자랑하는 치우를 굴복시키고 그의 무리는 물론 형인 신농씨의 부족까지 순조롭게 복속시켰다. 그날 이후 크고 작은 부족 무리들이 신하를 자칭하고 귀순해왔다. 이렇듯 헌원이 지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중원을 제패하고 패자가 되었다. 중원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면 도읍을 옮겨야 했다. 헌원이 처음 중원에 발을 붙일 때 도읍은 황릉이었다. 황릉은 지리적으로 편벽해 통일된 나라의 도읍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헌원은 이곳저곳을 둘러본 끝에 치우를 물리친 탁록을 국도(國都)로 정하기로 했다. 탁록은 중원의 중심지이다. 중원을 동서남북으로 나누고 방위론에 의해 동은 적색, 남은 청색, 서는 백색, 북은 흑색이고 가운데 중앙은 토(土)이며 황색이다. 헌원은 중원의 패자 ‘제(帝)’가 되었고 방위론에 의해 토덕의 상서로움이 있어 ‘황제(黃帝)’로 칭해졌다. 황제는 탁록에 도읍하고 관직의 명칭에는 모두 구름 운자를 썼다. 좌우 정승을 두어 만국을 감독하게 했고 만국이 평화로워지자 귀신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 일이 많아졌다. 또한 통일국가 황제가 된 헌원은 예전보다 할 일이 엄청 많아졌다. 수인씨가 발명한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먹는 화식(火食)을 널리 보급시켰다. 신하인 사황(史皇)이 그림을, 백여(伯余)가 의상을, 옹부(雍父)가 절구를, 공고(共敲)와 화적(化狄)이 배를, 휘(揮)가 화살을, 사관인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이 글씨를 만드는 것을 담당케 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옷을 발명하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는 옷이 사람의 몸에 딱 맞아야 안온하고 포근하며 행동이 자유롭다고 믿었다. 백여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딱 맞는 옷을 입으면 남녀의 생식기가 숨을 쉬지 못해 생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후대 번식이 가장 주요한 과제인데 생식력이 떨어지면 큰일이다. 그리하여 옷의 설계를 통풍이 잘 되게끔 헐렁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비록 천하지존의 신분이지만 신하들의 옳은 의견이라면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현명한 왕이었다. 따라서 신하들은 생각을 주저 없이 황제에게 진언했다. 백여는 왜 황제가 발명한 옷이 생식력에 지장이 있는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올렸다. 태초에 박씨 부부가 실 한 가닥 걸치지 않고 암수를 드러내 바람과 교감하여 천지를 창조하였다. 아득히 먼 옛날 인류 조상들이 여자의 임신이 사내의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바람을 맞으면 애를 밸 수 있다고 인식했다. 여인국에는 오로지 여자만 살지만 그녀들이 아기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여자들이 홀딱 벗은 채 남풍(봄바람)을 맞으면 잉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식은 필시 바람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옷도 남녀의 생식기가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 널찍하게 만들어야 했다. 황제는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을 만들어 음악을 바로잡고 오관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위계를 바로잡았다. 그가 이렇게 사람과 하늘의 관계를 조화롭게 한 덕분에 천지간의 아름다움이 생겨났다. 또 치우와 대성, 사룡, 축융, 대붕, 후토 등 여섯 신하를 얻어 천하를 다스리니 성스러운 밝음이 지극하게 되었다. 천도에 밝은 치우는 황제에게 복속한 후 시간을 관리했으며 군신 상하의 도리와 부자·형제간의 예의, 부부가 짝짓는 도리를 널리 보급시키고 안으로는 형벌을 엄히 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일으켜 강토를 넓혔다. 남녀, 자웅, 상하, 귀천을 구분하여 질서 있는 세상을 만들었고 관리들은 아첨하지 않고 청렴하며 공정했다. 모든 백성은 사사로운 욕심 없이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았고 도둑이 없었으며 늘 풍년이 들고 맹수들조차 사납게 굴지 않았다. 나아가 주변의 부족들까지 모두 공물을 바쳐오는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세월은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규칙적으로 흐른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장마가 쏟아지면 이어 햇빛이 든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아소는 춘추를 60번 넘게 맞이했다. 환갑이 지난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꽃처럼 곱던 얼굴이 할미꽃이 되었고, 백옥 같던 피부도 거칠어졌다. 낭창낭창하던 허리는 통살이 커져 예전에는 엉덩이의 칠할이었으나 이제는 구할이 되어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오십 초반엔 홍목단이 그나마 촉촉한 습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물기가 하나 없는 사막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면서 한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사내는 계집과 달랐다. 비록 젊었을 때의 멋진 모습은 사라졌으나 환갑이 넘은 황제는 여전히 성적으로 강했다. 가끔 그가 소녀를 덮칠 때면 사막이 되어버린 음문은 양물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고통스러웠다. 이미 교합에서 멀어진 아소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황제보다 수십년 더 젊다면 얼마나 좋으랴! 허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망상이다. 다만 자신이 사내를 받쳐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는 참으로 공평하지 못하다. 왜 계집의 생리구조를 든든하게 오래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사내에 비해 일찍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는가? 똑같은 나이의 남녀가 짝을 지으면 사내는 여전히 팔팔한데 비해 계집은 피하느라 쩔쩔 맨다. 아소는 이러한 차이를 감안하여 혼인을 할 때 사내가 적어도 여자보다 다섯 살 차이가 나도록 했다. 한편 황제가 성적 욕구가 여전하다는 것을 아는 아소는 대책을 세워주었다. 해가 저문 자신이 받쳐주지 못해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의 정력을 여전히 강하게 만들려 애썼다. 사내는 일단 정력이 세야 모든 일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었다. 통일제국의 황제로서 큰일을 해내야 할 황제가 정력이 쇠약해지면 국사를 망칠 수 있었다. 아소는 부지런히 옥즙을 다리고 산수유를 끓여 황제에게 바쳤다. 양물이 소처럼 힘을 쓰라고 우변(소의 성기)을 삶아 대접하고 해구변(물개 성기)처럼 강하라고 신하들을 풀어 구해들이게 했다. 기백에게 부탁해 정력에 좋은 보약을 지어 바치게 했다. 그러면서 회춘을 돕기 위해 인물이 반반하게 생긴 수많은 홍상미판의 소녀들을 뽑아 황제에게 바쳤다. 황혼에 접어든 황제는 성교의 재미는 어린 계집들과의 농탕질을 통해 맛보고 국사는 아소를 찾아 의논하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황제는 그만큼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가 이룬 업적의 절반은 아소가 기여한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였으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멋지게 산 인간은 죽음이 임박하면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더욱이 평생지기인 아소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홀로 저승으로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자식들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평생지기인 아소와 함께 수양산(首楊山)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구리를 캐내 보정(寶鼎: 보배롭고 귀중한 솥)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8개라 하여 무엇을 만들던 기둥을 8개로 했다. 그러나 헌원은 이러한 관례를 버리고 다리 3개만을 만들어 보정을 받치게 했다. 3개 다리로 물건을 떠받치는 것은 삼각형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헌원은 만년에 보정을 만들려는 꿈을 실현하게 되어 몹시 흥분되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심장이 멈추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쳤다. 네 부인 중 마지막 아내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었다. 헌원은 막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어미로서의 권위로 자녀들을 살필 것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아소를 안아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 같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만 흘러내렸다. 중원을 통일한 황제는 6마리 교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서태산에서 귀신들을 불러모았다.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팔방조가 비녀장을 잡았고 치우가 앞섰으며 풍백이 길을 닦고 우사가 비를 뿌렸다. 호랑이와 이리가 앞에 섰고 귀신이 뒤따랐으며 등사(螣蛇)가 땅에 엎드리고 봉황이 날아다녔다. 귀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청각(靑角)이란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인 헌원은 이승을 떠나 저승길에 올랐다. 곤륜산의 장례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토막을 내 큰 나무 위에 걸어놓아 까마귀가 뜯어먹게 했다. 까마귀가 죽은 시체를 뜯어먹고 산 사람이 그 까마귀를 잡아먹으면 생명의 순환이 이뤄진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강물에 밀어넣는다. 물고기가 시체를 뜯어먹고 산 사람이 그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역시 생명의 순환이 이뤄진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파묻었다. 황제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시비가 붙은 끝에 그의 시체를 교산(嬌山)에 묻기로 했다. 그의 무덤은 높이 백 길이나 되는 거대의 뾰족산을 이뤘다. 황제의 위엄을 죽어서도 세상만방에 과시하기 위함도 있거니와 황제가 양물의 원리로 천하를 얻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상징물로서 거대한 묘를 만들었다. 그런데 3일이 되는 날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거대한 무덤이 내려앉아 버렸다. 그리고 황제의 시체가 사라졌다. 아소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동방삭이 나타났다. 그는 슬퍼하지도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는 흉사가 아니라 길사요.” “시체가 사라지는 큰 변이 생겼는데도 길사라니요?” “그렇소. 길사라도 이런 굉장한 길사가 없습니다. 황제께서 부활하여 승천했소이다.” “네? 정말입니까?” “황제께서 지상의 주인 역할을 다 마치고 이젠 하늘에 계시기 위해 훨훨 날아올랐소.” 아소는 황제의 승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생명 순환의 원리에 의해 땅에 묻혀 있어야 새생명을 얻는데, 하늘나라로 가버리다니. 그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인가. 동방삭이 아소가 당황해 하는 이유를 알고는 위로를 했다. “인간이 죽어서 땅에 돌아가야 생명의 순환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나 황제만은 예외입니다.” “예외라니요?” “황제께서 생전에 땅을 딛고 인간 무리를 교화하는 지대한 기여를 했지요. 그 업적은 천추만대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분은 사후에 땅에 묻혀 계실 순 없지요. 마땅히 천령(天靈)이 되어 인간들을 계속 사랑하고 보듬고 가르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비록 대지에 육체를 남기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야 합니다.” 사당을 세우는 목적은 ‘조(祖)’를 수립하기 위함이다. 여왕이 판을 치던 시절에는 동식물을 조상으로 모시는 토템문화가 성행했다. 긴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역사는 개변이 없었다. 여인은 생리적으로 ‘무’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상징하는 젖가슴은 비록 밖에 드러나 있으나 그것은 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을 개변하는 힘이 없었다. 이에 비해 남근은 세상을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남근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 동방삭의 생각이었다. 동방삭이 창힐을 불러 ‘조’의 의미를 설명하고 글자를 지으라고 명했다. 창힐은 3일 동안 머리를 굴려 남근을 나타내는 문자 ‘且’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示’를 앞에 붙여 ‘祖’를 만들었다. 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부계사회의 성립을 나타내는 ‘조’가 생겨났다. 그날 이후 하나의 새로운 씨족이 출현하면 가장 중요한 일이 조상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며, 이 사당을 중심으로 족장이 씨족을 거느렸다. 이 주거지를 ‘籍(적)’이라 하며 조상을 기리어 ‘祖籍’이라 했다. 또 사당을 중심으로 군주가 백성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형태를 ‘國’이라 했다. ‘국’은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이란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268    기술교육생들의 빛과 그늘 댓글:  조회:5270  추천:2  2012-05-31
기술교육생의 빛과 그늘   법무부가 동포신규입국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2011년 11월 15일부터 12월 15일 한 달 사이 24만 명의 조선족이 신청했고 1차 추첨에 의해 방문취업(H-2) 3만 명, 기술교육생 1만2천 명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기술교육추첨에 있어서 나이를 만48세로 제한하여 평균연령이 젊어졌고 실제로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중반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한국에 많이 입국함에 따라 재한조선족사회가 한층 젊어지고 있다. 모택동은 젊은이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했다. 젊은이들은 앞으로 재한조선족사회를 이끌어 갈 주력이다. 젊은 기술교육생들을 보면 희망이 보인다. 긍정적인 면이 많다는 뜻이다. 동시에 어두운 면도 있다. 그것을 빛과 그늘로 표현하고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기술교육생으로 한국에 온 젊은이들은 외모가 세련되었다. 한국드라마가 중국조선족 안방에 진입된 지가 20년이 흘렀다. 현재 20대중후반부터 30대초중반 조선족젊은이들은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성장해왔고 알게 모르게 한국드라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그들 중 일부는 어릴 때 HOT를 비롯한 한류스타들의 사진을 집에 모셔놓는 등 한류에 대해 굉장한 동경을 안고 성장해왔다. 따라서 지금 조선족젊은이들은 패션이 세련되고 언어도 기성세대들과 달리 방언이 적고 한국어표준어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한국에 오자마자 다수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세련되어 보인다. 부모형제자매 및 삼촌고모이모들의 후광을 업고 있어 경제난에 쪼들리지 않아 외모가 더욱 세련되어 보이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 버스, 길거리 등 공공장소에 나타난 조선족은 한눈에 알아볼 만큼 촌스런 ‘티’가 물씬 났다. 이에 비해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은 공공장소에 나타나도 한국인인지, 조선족인지? 티가 나지 않는다. 세상이 그만큼 재빨리 변화되고 있고 젊은이들은 그만큼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다. 외모와 언어 면에서 한국에 빨리 적응해가고 있고 세련된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속이 여물지 못한 어두운 폐단도 있다. 기술교육생 중 2/3의 수는 열심히 수업을 들으면서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 이에 비해 1/3의 수는 수업에 굉장히 게으르다. 아예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 소질도 큰 문제이다.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끄지 않고 볼펜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스마트폰을 갖고 노는 등 영 말이 아니다. 강의 도중에 들락거리거나 지문을 먼저 찍으려고 수업이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맘대로 뛰쳐나가는 등 소질이 형편없다. 소수이긴 하지만 점심이면 술을 잔뜩 마시고 교실에서 헛소리 하는 자도 드문드문 있다. 6주라는 아까운 시간을 중이 종 치듯 아무 의미가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안타깝다. 수업에 있어서 사회통합프로그램이 한국생활에 도움이 크다. 하지만 1/3의 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리 강의가 재미있어도 강의자체를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학원생들이 과연 한국생활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개개인의 자아소개 프로그램을 실시하면 1/4의 수가 밖으로 뛰쳐나가기 바쁘다. 사람이 사람 앞에 선다는 것은 큰 단련의 기회가 된다. 그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면 회피한다. 이런 소질을 갖고 앞으로 취직하여 일정시간 경과 후 하다못해 팀장, 반장, 등 어떻게 ‘장’노릇 하겠는가? 한평생 ‘머슴’으로 살 수밖에 없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약 1/4의 수가 조선족가문전통으로 이어온 ‘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본’도 모르고 있는 젊은이들한테 과연 정체성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본’도 모르고 있는 젊은이들은 과연 조선족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젊은이들의 탓만 아니고 조선족부모들의 자녀교육이 따라 가지 못한 것이 큰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족부모들이 자녀를 한국에 보내는 것이, 혹은 한국에 있으면서 자녀를 데려오는 것이 돈 벌 목적도 좋지만 고국에 보내면서 혹은 데려오면서 최저한도로 ‘본’을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얼굴이 고와야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노래 가사가 있듯이 외모가 세련되면 사람이냐? 속이 여물어야 사람이지. 한국에 입국하는 조선족젊은이들은 ‘表’를 가꾸는 동시에 ‘里’도 채우기를 바란다. 그래야 앞으로 재한조선족사회를 짊어지고 갈 수 있지 않겠는가!
267    17.勢力擴大(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6364  추천:1  2012-05-26
17. 勢力擴大: 세력확대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은 영원하리 아소는 이 세상 모든 여인에 비해 아름답고 도도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독을 품은 악녀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소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사내처럼 의리를 지키는 여인이다. 순진무구한 마음 씀씀이로 헌원을 대할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대하고 처신해왔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이 사내를 즐겁게 해주는 교합의 도를 고안하고 전수하려고 애썼다. 아소는 같은 여인으로서 누조의 마음을 쏙쏙 꿰뚫었다. 누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뱃속에 들어가 본 것처럼 알고 있었다. “마마께서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으로 짐작하옵니다.” 아소는 누조에게 예의를 갖추고 마주했다. 그러나 현효를 빼앗겼던 상처가 있는 누조는 그녀를 쌀쌀맞게 대했다. “마음고생은요? 그런데 어인 바람이 일었사옵니까?” “이 소녀가 그간 태자를 키운 것은 저의 자녀로 만들려는 욕심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였죠. 제가 갖고 있는 세상만사 지식을 전수하여 장차 아비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키우려는 욕심 외에 아무것도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이젠 태자가 다 장성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낭군님도 완전히 돌려드리겠사옵니다.” 한바탕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난리를 피워볼 심산이었던 누조가 아소의 너그러운 말에 머쓱해졌다. 누조는 속으로 ‘역시 천하 사내 중 으뜸 사나이인 헌원이 사랑하는 여인이라 그릇이 다르군’라고 생각했다. 아소는 누조의 손을 잡으며 당부했다. “앞으로 낭군님이 천하를 도모하는데 많은 참모가 필요하니 적극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간 아소의 훈련으로 현효와 창의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와 군자가 되는 도를 익히게 되었다. 천하를 품고자 하는 포부가 여느 부족 두령의 자식들에 비해 컸고 심지어 신농씨의 자녀들과 복희씨의 자식들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현효가 16세가 되자 아소의 의도에 따라 강수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으로 간 이유는 신농씨의 터전에 깊숙이 침투하여 선진문화를 익히려는 목적이었다.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를 알아야 했다. 이것이 아소의 계책이었다. 이듬해 창의가 16세가 되자 역시 타지로 보냈다. 그곳은 치우가 세력을 뻗히고 있는 약수였다. 치우는 곰을 조상으로 모시는 묘(苗) 부족이 살고 있는 중원에서 한참 서쪽에 위치한 곳에서 나고 자랐다. 무릇 중원의 서쪽은 험악한 산이 많고 낙차가 심한 폭포가 많고 굽이굽이 치는 강물이 많고 계곡이 많았다. 그런고로 인간의 성격이 중원 사람들에 비해 몹시 거칠었다. 중원에 진출한 치우는 신농씨와 다르게 우락부락하고 거친 사나이다. 헌원이 장차 치우 무리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큰 고민거리였다. 헌원이 두 아들이 태어난 이후로 동방에 위치한 부족 두령의 딸, 남방에 위치한 부족 두령의 딸, 북방에 위치한 부족 두령의 딸과 연이어 혼인하여 17명의 자녀를 보았다. 누조가 낳은 8명의 자녀를 합쳐 모두 25명의 자녀를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모계 풍속이 강한 중원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어미의 성을 따랐다. 아무리 천하의 헌원이라 할지라도 그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성이 같은 자는 둘뿐이었다. 청양(靑陽)과 이고(夷鼓)는 모두 기(己)씨이다. 청양은 뇌(雷)씨의 조카이고 이고는 동어(彤魚)씨의 조카다. 함께 태어났어도 성이 다른 자는 네 어머니의 아들로 각각 12성이다. 25명 중 성을 얻은 자는 14명이다. 12개의 성은 희(姬), 유(酉), 기(祁), 기(己), 잠(簪), 임(任), 등(藤), 순(荀), 희(僖), 길(姞), 환(懁), 의(依)다. 청양과 창림(蒼林)씨는 모두 헌원에게서 나왔고 희성(姬姓)이다. 헌원이 여러 무리와 혼인을 맺어 그 관계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아비는 하나이나 어미가 다른 25명의 자녀들도 무척이나 다사롭다. “인간이 무리를 짓는 까닭은 마음속에 맺는 바가 있고 밖으로는 배척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족이 경계가 생기는 연유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족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가족을 배척하게 되고 이어 향족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향족을, 부족이 되면 다른 부족을, 국족이 되면 다른 국족을 배척하게 됩니다. 무리와 무리 사이는 서로 배척하는 관계지 결코 대동태평의 상대가 아니옵니다.” 아소가 인간사회의 질서를 정리해야 한다고 헌원에게 설득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과 방식을 통해 정리한단 말이오?” “남을 배척하는 자는 자기 종족을 확장시켜 다른 종족을 침략하기 쉽습니다. 남에게 배척당하는 자는 자기 종족을 약하게 하여 세력을 확장시킬 수 없어 남에게 점령당합니다. 이 이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헌원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종족을 다스리기로 했으나 무작정 전쟁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먼저 천하 사람들에게 왕으로서의 위엄과 놀라움을 보여줘 제 발로 찾아오게끔 만들었다. 그에 따라 25명의 자식들을 앞세우고 숱한 일꾼들을 동원해 사통팔달의 길을 닦았다. 산길이 막히면 뚫고 물길이 막히면 다리를 놓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러 환산(丸山)에 올랐고 동악 태산까지 갔다. 서로는 공동(崆峒)에 이르러 계두산(鷄頭山)에 올랐다. 남으로는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러 웅이산(熊耳山)과 상산(湘山)에 올랐고 북으로는 흉노 땅에 이르러 부산(釜山)에서 동맹을 맺었다. 장년에 접어든 헌원이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하느라 노쇠해졌다. 그 멋지던 소년 헌원이 세파에 부대끼어 얼굴이 너덜너덜 거칠어졌다. 윤기가 가득 찼던 얼굴에 잔주름이 생기고 손으로 만지면 푸석거린다. 게다가 검정버섯까지 생겨나 나이를 속일 수 없었다. 천하 변강쇠였던 헌원이 부인 넷을 취하고 25명의 자식들을 이끌고 몸소 천하를 주유하면서 일을 거듭하느라 교합의 힘도 예전 같지 않았다. 헌원보다 2살 아래인 아소도 어느덧 칠칠은 49세가 되어 폐경기에 접어들었다. 사내는 팔팔 64세에 곡정이 말라버리지만 일부 사내들은 70이 넘어서도 호미자루를 들 힘만 있으면 성교를 할 수 있는데 비해 여인은 폐경을 맞으면 분비물이 사라져 교합을 원만하게 치를 수 없다. 젊은 남녀는 혈기가 왕성하고 분비물이 풍부하고 회복력이 빨라 아무렇게나 교합을 해도 잘되는데 비해 장년에 들어서 교합하고자 하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말고 기교를 연마하여 교합하는 것이 좋다. 이를 잘 아는 아소가 새로운 체위로 헌원을 이끌어 장년의 즐거운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몸의 여러 부위가 상함((機關厥傷: 기관궐상) 체력 소모를 당한 후에 기력이 회복되기 전에 억지로 사랑을 하면 간장에 해가 되고 대소변의 배설이 곤란해진다. 완급의 적당한 도수를 조절하지 못해 근골피로가 생긴다. 눈동자가 빛을 잃고 순환계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오래되면 악성 종기가 나고 음위(陰痿)가 함께 발생해 일어서지 못한다. 사내는 정면으로 눕고 여자가 얼굴을 마주하고 사내의 양 다리 위에 걸터앉는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져 향하고 천천히 양물을 들이민다. 동시에 여자는 허리에 힘을 주어 상하운동을 하고 만족되면 곧 정지한다. 모든 것이 닫힘(百閉: 백폐) 백폐는 나이 든 사내가 여자에게 음탕한 마음이 넘쳐 자제력을 잃어 생기는 병이다. 교합을 수차례 행하고도 절도가 없어 사내의 정기가 고갈된 상태에서 여전히 배설하려 하면 정액이 나오지 않는다. 이로 인해 모든 병이 발생할 수 있다. 우선 목구멍이 숯처럼 마르고 오줌이 통하지 않고 두 눈이 침침해진다. 사내가 정면으로 눕고 여자는 사내의 다리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앞으로 향해 엎드려 숙이고 두 손을 바닥에 붙여 몸을 지탱한다. 여자가 음도로 양물을 잡고 빨아들여 수축시킨다. 여자가 요동치고 만족되면 곧 정지한다. 사내가 배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혈이 메마름(血竭: 혈갈) 노동으로 몹시 피로한 상태에서 교합을 강행군하고 포악하게 진퇴운동을 하여 정원(精元)을 다 소모시켜 질병이 폭발하여 혈액이 고갈된다. 정기가 거의 상실되고 피부가 변색하고 요도에 통증이 생기고 음낭이 습윤하고 정액에 혈뇨가 생긴다. 여자가 정면으로 반듯하게 누워 엉덩이에 베개를 받쳐 음부를 높이고 양 다리를 뻗어 벌린다. 사내가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양물을 삽입하여 여자로 하여금 허리 부위를 요동치게 하고 만족하면 정지한다. 헌원의 네 부인은 이러한 교합 기교를 모르고 있어 낭군님이 찾아오면 의무적으로 가랑이를 벌리고 죽은 듯 들이대면 그만이었다. 오로지 아소만이 사내로 하여금 기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세월이 유수라더니 우리도 어느덧 장년이 되었네요. 해가 서산을 향해 서서히 기울고 있을 때이니 몸을 살펴 일하는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됩니다.” 헌원도 예전에 비해 힘이 딸리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녀의 생각으로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밭을 개간하는 등 일을 자제하고 자녀들과 신하들에게 맡기십시오. 대신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시고 성과가 쌓이면 천하 제패에 큰 도움이 되리라 짐작되옵니다.” 곤륜산은 산이 좋고 물이 좋은 고장이다. 게다가 산림이 많아 늘 청정한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곤륜산은 질병이 아주 적다. 반면 중원은 산이라 해야 야산이 조금 있을 뿐이고 산림이 아주 드물어 공기가 정화되지 못했다. 물은 모래 성분이 많아 늘 누렇게 흐리고 수질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쩍하면 황사가 바람을 타고 덮쳐와 공기가 흐리터분하다. 환경이 열악한 탓에 질병이 심하게 퍼졌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사람들이 죽어간다. 어느 해 여름 악성 이질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중 아소가 가장 아끼는 시녀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아소는 그때부터 의학을 발명해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지 않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의학을 발명하십시오.” 아소가 헌원에게 건의했으나 헌원은 쉬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농씨가 이미 의학에 밝지 않소?” “아닙니다. 신농씨는 사람이 배탈을 만나 설사하면 앵속을 다려 먹이고 사기(邪氣)가 몸에 침입하여 감기에 걸리면 녹두를 끓여 그 물을 마시게 하는 등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의학이란 과연 무엇이오?” “인체구조를 연구하여 병이 생기는 원인을 찾고 치표(治標)가 아닌 치본(治本)을 하는 것이 의학입니다. 소녀가 궁리해보니 기백과 손잡고 해낸다면 훌륭한 의학을 만들어낼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소의 제안에 의해 헌원과 기백이 머리를 맞대고 인체의 해부, 생리, 병리, 진단, 치료원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은 음양오행설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진리를 토대로 했다. 천인합일이란,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이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반영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또 경락을 연구하고 혈을 찾아내 침구(鍼灸)와 도인(導引) 등 물리요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의학을 발명하였다. 진단은 보고(望), 듣고(聞), 묻고(問), 진맥(切)하는 4가지에 의거하는데 그중 망진(望診)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이를테면 눈은 오장 정기의 자윤(滋潤: 음기를 길러 윤택하게 하는 효능)에 의지하므로 지나친 성교로 신장이 훼손되면 눈빛이 흐리고 눈 주위가 검게 된다. 성생활을 절제하고 음식과 운동 조섭(調攝)에 주의하면 흑안권(黑眼圈: 다크서클)이 개선된다. 인중이 특히 짧고 골이 평평하며 골의 가장자리가 선명하지 않고 색이 엷다면 자궁이 작고 자궁경관이 짧으며 발육이 부진해 자궁내막이 성장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궁경관이 느슨해 임신 후 누태(漏胎: 유산)되기 쉽다. 사내라면 음경이 작고 고환은 선천적으로 발육 불량이다. 성욕이 비교적 약하고 불임증인 경우가 많다. 여성은 초경이 늦고 양이 적다. 발기부전이나 유정(遺精: 성교를 하지 아니하고 무의식중에 정액이 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있으며, 정자의 활동성이 절반 이하이거나 정자의 수가 극히 적은 남성이 많다. 장수 노인의 이륜(耳輪: 귓바퀴)은 담홍색이고 부드러운 광택이 나며 살이 두툼하고 풍만하다. 이륜과 이수(耳垂: 귓볼)가 길고 폭에는 뚜렷한 변화가 없다. 단명한 사람의 이륜은 어둡고 창백하며 거칠고 윤기가 없다. 이곽(耳郭: 귓바퀴)은 살이 없고 얇으며 이륜과 이수는 짧다. 이곽의 두께와 길이가 신정(腎精)과 경맥기혈(硬脈氣血)의 성쇠뿐 아니라 장수단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발 바닥의 엄지쪽 마모가 심한 사람은 간장병을 잘 앓는다. 새끼쪽이 많이 닳았다면 심장, 특히 심실(心室)에 병이 많다. 왼쪽 새끼발가락의 마모가 뚜렷하면 좌심실, 반대라면 우심실에 병이 있다. 뒤꿈치의 마모가 심하면 수뇨관과 방광벽에 병이 있다. 좌우 신발 바닥과 좌우 수뇨관, 방광벽의 병변은 대응한다. 똑바로 누울 수 없고 밤에 소변을 자주 보며 야뇨증에 잘 걸린다. 뒤꿈치 외측 마모가 심하면 신장에 병이 있다. 왼발 뒤꿈치 외측이 많이 닳았다면 왼쪽 신장, 오른발이 그렇다면 오른쪽 신장에 병이 있다. 오장육부와 조직기관은 경락을 매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 등 6음(六淫), 즉 자연계가 인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환경적, 물리적 요인 탓에 기혈 흐름에 이상이 생기면 장부조직에 병리 변화가 발생한다. 이 병리정보는 음양(陰陽) 한열(寒熱) 허실(虛實) 표리(表裏)로 장부와 상응하는 외부 조직과 기관에 드러난다. 헌원과 기백의 연구에 의해 인류 사상 처음으로 의학다운 의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헌원의 새로운 발명은 끊임이 없었다. 그는 세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지었다. 육십간지(六十干支) 혹은 육갑이라고도 한다. 육십갑자는 십간과 십이지의 결합에 의해 만들었다. 십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이고, 십이지는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이다. 결합 방법은 처음에 십간의 첫째인 갑과 십이지의 첫째인 자를 붙여서 갑자를 얻고, 다음에 그 둘째인 을과 축을 결합하여 을축을 얻는다.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하나씩의 간지를 구해나가 60개의 간지를 얻은 후, 다시 갑자로 되돌아온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간(干)에 6개의 지(支)가 배당되는 셈이다. 육십갑자는 원래 날짜를 세기 위해 썼다. 육십 주기는 두 달쯤에 해당하는 적당한 주기이다. 또 십간십이지는 음양오행설과 결합하여 만물의 길흉을 판단하는 데 쓰였다. 사람의 성질과 운세를 점치기도 하고, 나날의 길흉과 방위의 선택 등을 살펴보기도 했다. 범띠인 사람은 성질이 거칠다 하고, 소띠는 느긋하다 했다. 또 병오생(丙午生)인 여성에 대해서는, 오행설에 의하면 병(丙)은 화(火)이고 오(午)도 화이므로 화에 화가 겹쳤으니 이 여성은 불에 불이 겹쳤다 하여 성격이 거칠어 남편을 짓밟는다는 속신(俗信)이 생겨났다. 간지를 매일 하나씩 배당한 것을 일진(日辰), 매월 하나씩 배당한 것을 월건(月建), 해마다 하나씩 배당한 것을 태세(太歲)라 했다. 사주팔자도 육십갑자를 토대로 생겨났다. 헌원이 꾸준히 새로운 발명을 세상에 내놓자 신농씨 무리가 질투심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태자 현효가 신농씨 무리에 깊숙이 잠입하여 생활하면서 그곳 돌아가는 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신농씨는 어느덧 백세를 넘겼다. 너무 연로한 탓에 새로운 발명이 없었다. 새로운 발명이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부족 우두머리가 노쇠해지자 정치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우두머리가 통제력을 잃자 각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곧 귀신이 될 신농씨는 망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느 날 아소가 헌원에게 진언했다.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통일할 적기라 여겨집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농씨의 무리가 내분에 휩싸여 오합지졸이 되어 힘을 잃은 것이고, 둘째 님이 더 늙기 전에 천하를 평정하여 통일된 국가를 수립해 만백성을 평화롭게 살아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헌원이 아소의 조언에 동감이 가지만 신농씨를 무너뜨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농씨는 덕망이 높은 분인데 그를 해친다는 것은 어쩐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는 기분이 드오.” “아닙니다. 신농씨는 힘을 잃었으니 이미 제왕이 아닙니다. 님이 자비롭게 대한다고 해서 그 무리가 장차 좋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백성만 고달파집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고민에서 벗어나 우리 무리에 귀속시키는 것이 그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옵니다.” 큰집이 기울어도 3년은 간다. 겉보기에 신농씨 무리가 오합지졸 같으나 그 부족은 적어도 반세기의 역사를 갖고 있어 뿌리가 튼튼하다. 현효의 말에 의하면 신농씨의 신하들이 헌원과 기백이 심혈을 기울여 발명한 의학을 자기네 주인의 발명품으로 도둑질해 퍼뜨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농기구의 발명, 달력의 발명, 불의 발명 등등 많은 것들이 신농씨가 발명한 것이냐, 헌원이 발명한 것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여 시끌시끌했다. 그 과정에서 신농씨의 무리들은 헌원 무리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판이 심상치 않자 헌원이 아소의 건의에 따라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동방삭이 찾아왔다. “자네가 지금 신농씨의 무리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시기상조일세.” 헌원은 곤륜산에 있을 때부터 동방삭을 스승으로 모셔왔고 현재까지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내 말을 들으면 크게 놀랄 것이네. 신농씨는 자네와 동부이모(同父異母) 형제라네.” 헌원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면 그 말을 왜 이제야 하시는 것입니까?” “예전부터 자네에게 말을 하려다 참고 있었네. 자네가 알면 득보다 실이 더 클 것 같아 그랬지.” 신농씨와 헌원의 아버지는 옥황상제의 서자인 소전이다. 옥황상제는 소전을 용의 화신으로 변신시켜 중원에 보내 아들을 보게 했다. 그 아이가 바로 신농씨였다. 만약 그에게 무슨 변이라도 생기면 천하대업을 완수하는데 차질이 생길 우려 때문에 곤륜산에 들어가 아들 하나를 더 본 것이 곧 헌원이다. 헌원의 세력이 커지자 왕모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가 아신에게 살해당하자 동방삭은 그가 신농씨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감춰왔던 것이다. “자네가 친형을 직접 죽일 수는 없지 않는가, 조금만 기다리면 신농씨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네. 또한 자네 형의 무리가 비록 힘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전통 있는 부족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을 걸세. 큰 희생을 치러야 하지. 그렇게 되면 구려족(九藜族)의 우두머리인 치우가 어부지리를 얻어 천하의 주인이 될지 모르네. 때문에 신농씨 부족을 무너뜨리려 서두르지 말고 차라리 지금부터 치우와의 전쟁 준비에 몰두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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