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mengyingxiu 블로그홈 | 로그인
맹영수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25 ]

5    부르는게 값인가? 댓글:  조회:1191  추천:1  2013-02-25
부르는게 값인가? 맹영수 연길시 물가가 기타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많이 높다는것은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때론 그 지수가 말이 아니다. 오늘 설준비로 필자는 연길시 하남시장을 찾았다가 너무도 엄청난 물가지수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고기값과 채소값이 하늘을 치솟듯 치솟고있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30원을 하던 소고기를 한근에 33원내지 35원으로 부르는가 하면 채소가게에서는 네개씩 한단으로 묶어 5원씩 하던 파 한단을 8원으로, 집미나리 한단을 8원으로, 10원씩 하던 오이 한근을 15원으로 부르고있었다... 말 그대로 두눈이 빠져나올듯 너무도 엄청난 값이였다. 감당키 어려운 그 값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뒤걸음 치고있었지만 미처 설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로 사고있었다. 장사군들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주츰하는 사람들에게 사지않겠으면 군소리말라고 배짱을 부리고있었다… 지금은 시장경제인만큼 완전하게 물가를 통제하기는 어딘가 어렵다고 본다. 그만큼 설을 맞으면서 적당히 물가가 상승하는것은 어쩔수 없는 상황이여서 적지 않은 사람들도 당연지사로 그점을 받아들이고있다. 하지만 뭐든 한도가 있듯이 시장경제라고 해서 마구 물가를 올리는것은 시장법칙에도 맞지않다고 본다. 솔직히 상대적으로 기타 도시들에 비해 로임수준이 낮은 연길시에서 한근에 15원짜리 오이와 35원씩 하는 소고기를 사먹을 시민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장사군눈에는 모든것이 돈으로 보일수도 있다. 허나 맹목적인 리윤추구에만 매달린다면 언젠가는 불경기도 도래할수가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아무리 횡재하는 그믐날이더라도 장사군들은 량심적으로 장사를 하고 관계부문에서도 마지막 날까지 적당한 관리를 멈추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무튼 설이라고 해서 마구 값을 올리는 행위는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아야 한다! 2013년 2월 9일
4    맞춤한 간격 댓글:  조회:1176  추천:9  2013-01-14
맞춤한 간격 맹영수 등산을 하다보면 빽빽이 들어선 나무보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자라는 나무들이 사름률도 더 높고 더 칠칠한것을 어렵잖게 발견할수 있었다. 그것은 간격을 두고 자란 나무는 빽빽한 나무들에 비하여 산소와 해빛의 광합작용을 충족히 받고 자란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둥말둥 재미있는것은 비둘기나 참새들마저도 전선줄 같은데에 앉을 때면 누구의 지휘나 받는것처럼 약속하듯 간격을 유지하는 그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미국 서부의 “세시부래쉬”란 풀도 바람과 비에 의해 어디론가 날아다니다가 한 곳에 자리잡으면 심어놓은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자라나고 태아도 7개월 혹은 8개월이 되면 배속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딸꾹질을 하면서 커간다는 상식을 나는 어느 한 문장에서 더 알게 되였다. 어쩌면 아이러니하고 불가사이도 했지만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세상 많은 생명체가 맞춤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는게 그대로 사실이였다. 다시말하면 적지 않은 생명체들이 맞춤한 간격을 유지해 가고있기에 나름대로 유연성과 안전성이 더 담보되고있었다. 달리는 자동차가 맞춤한 간격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즉각 접촉사고를 내고 망가질수가 있고 집과 집사이에도 간격이 없다면 충족한 해빛을 볼수 없듯이. 그러고 보니 맞춤한 간격을 유지하면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편리한 점들이 많은것 같다. 알고보면 우리의 인간관계 역시 그렇지 않나 싶다. 사실 너무 친근하면 쉽게 피곤과 싫증을 느끼게 되고 너무 멀리 있으면 자칫 망각으로 번져가는것이 우리 인간들이 아니던가? 그만큼 인간의 삶도 꼭 맞춤한 간격과 룰이 필요되고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늘 살아오면서 일방적으로 간격을 없애라는 교육을 많이 받아왔고 또 그렇게들 노력하고있다. 그러나 노력을 들인다고 해서 무조건 설계했던 일을 성사 할수 없듯이 그것이 생각대로 별로 잘 되여가지 못하고있다. 왠지 사람들은 친근한 사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자꾸 허물을 들추고 약점을 들추면서 그로해서 자주 실망과 원망을 느껴가고있다. 솔직히 밀착할수록 상처를 더 받고 배신감도 더 느껴가는것이 현존 우리 인간 관계의 한 측면으로 선명하게 부각되고있다. 언젠가 영국류학을 하고 있는 친척벌 되는 조카한테서 그 나라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듣고 다소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알고보니 영국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유럽의 사람들은 밀접한 사이에도 나름대로의 비밀을 갖고 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가고있다고 한다. 지어는 함께 사는 부부사이에도 저만의 “멘트”와 사생활의 공간이 있다고 한다. 동양인으로써 나는 처음엔 어딘가 잘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조카애의 구구한 설득을 듣고 다시금 생각을 해보니 어단가 수긍되기도 했다. 조금 야박하긴 해도 상호에 대한 불간섭과 불침범, 어쩌면 이 역시 상대방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고 례절이고 사랑이 아닐가?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무관심” 과 “노코멘트”가 때론 세상 편하고 자유로와 텔레파시를 생성하고 좀더 쉽게 다가갈수 있는 인간사이를 만드는것이 아닐가? 어떤 물체를 볼 때 때론 가까운 거리보다는 조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보면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다. 그만큼 세상 사물은 상대적이라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늘 베일과 같은 신비스런 효과를 갖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는 맞춤한 거리에서 들을 때가 제격이고 선인들이 말처럼 거문고소리와 대금소리 역시 그러하다. 지척에서보다는 그림자가 비친 창호지 저쪽에서 들려오거나 아니면 저만치 떨어진 정자에서 달빛을 타고 들려올 때가 훨씬 은은한 맛을 풍겨 더 듣기 좋고 약간의 거리에선 살짝 얽은 녀자가 때론 미녀처럼 느껴지고 성에장 부서지는 소리도 강중심에서 보다는 강기슭에서 그 울림이 더 둥글지 않던가? 하기에 나는 여기서 나름대로 밀착 그 뜻을 다른 한 “뉘앙스’로 느껴 보고 싶다. 누군가 온수도 급하게 마시다 보면 자칫 혀바닥을 데우거나 혹은 그 물에 체한다고 했다. 그만큼 세상 사물들이 모두 자체의 룰을 갖고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도 맞춤한 간격을 두고 회전하고 있으며 봄을 알리는 종다리도 맞춤한 간격으로 목청을 돋구고 있기에 아름다운 목청으로 사랑받고있다. 사람사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바늘마저 끼여들 사이 없이 밀착된 사이는 얼핏보면 세상 제일 가까운 사이인것 같지만 분명 거기엔 수분, 산소와 해빛…등 수많은 요소들이 결핍되여있어 수시로 질식의 위험을 방출하고있다. 누군가 현미경아래서 보면 미녀의 피부도 숭숭 구멍천지라고 사람을 봄에 있어서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우점보다 단점들이 더 쉽게 보여진다고 했다. 그래서 옥에도 티가 있고 깨끗한 옷도 털면 먼지가 있다고 하잖는가. 맞춤한 간격을 두면 그런 요소들이 쉽게 용해되고 시야도 변하고 리해면도 넓어지면서 미운 사람이 별로 없거나 적어질것이다. 하기에 맞춤한 간격이야말로 인생길에 있어서 보다 적절하고 아름다운 간격이고 나아가서는 우리들이 꼭 습득해야 할 삶의 “테크닉”이고 예술이 아닐가 라고 나름대로 한번 더 구상 해보는 바이다.
3    배려와 믿음 댓글:  조회:1218  추천:2  2012-12-27
배려와 믿음 맹영수 얼마전 친척 누님과 함께 화룡으로 갔다오던중 길에서 다이야가 터져 애간장을 태우다가 한 운전수로부터 무상 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기고 그렇게 훈훈한 인간정을 안고 재차 귀로에 올랐던 우리는 길에서 어린애손목을 잡은 녀인을 만났다. 좋은 마음에서 무작정 자가용을 세웠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어둑어둑 땅거미가 기여들건만 녀인은 머리를 살래살래 젓기만 했다. 녀인은 아마도 우리를 기름값이라도 뽑으려는 그런 소인쯤으로 알고있는것 같았다. 녀인을 떠나 한 백메터쯤 가니 한 로인이 손을 흔들기에 차를 세웠더니 로인의 단마디 역시 차비가 얼마인가였다. 그냥 타시라고 해서야 로인은 반신반의 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로인의 요구대로 룡문교부근에서 차를 세웠다. 로인의 고마운 시선속에는 여전히 약간의 의혹이 가셔지지 않고있었다. 때론 좋은 일도 눈치보기를 해야 한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놓고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숨막히게 갑옷을 꽁꽁 껴입고 각박하게 살고있다. 도움을 바라지도 않고 더우기는 도움은 더 주려하지 않고 저만의 공간에서만 살아가고있다. 류행어처럼 돈앞에서는 군자가 없다고 모든걸 돈으로만 계산하면서 의심스런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있다. 하지만 분명 말하고 싶은것은 한때 우리들에겐 정으로 살아가던 그런 세월도 있었다는것이다. 비록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날마다 전전근근하면서 살았어도 당시 사람들은 서로 술잔을 돌리고 명태국이나 김치마저도 돌리면서 달빛아래 오손도손 모여앉아 스토리를 풀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는 그것이다. 뉘집에 밥공기가 몇개고 지어는 뉘집 각시의 해산할 날자마저 손금보듯 했다면 지금 세대들은 한낱 유치하다고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때는 자르르 정이 흐르고 사랑이 넘쳐 가난했지만 그만큼 또한 행복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조금 잘 산다고 개구리 올챙이시절 잊듯 시뚝해 하면서 육친을 모르고 배려를 모르고 믿음과 성의를 모른다면 사는 멋이 무엇에 있으랴? 간디는 세계가 공인하는 인도의 정신 수령이다. 청년시절 간디는 어느 한번 기차를 급하게 타다보니 신 한짝을 창밖에 떨어뜨렸었다. 당시 가난한 인도에서는 신발이 거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다. 하건만 간디는 서슴없이 나머지 신발마저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사람들이 알수 없는 표정으로 그 연유를 물으니 간디는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짝을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 쓸모가 없을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라는 대답을 주어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그야말로 간디만의 신사적인 도량이고 배려였다. 아마 간디의 그런 언행에서 계시를 받았는지 언제부터인가 인도의 거지들도 내놓고 당당하게도 곧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고 한다. “저한테 좀 베푸세요. 진정 당신이 없으면 주고 싶어도 줄수가 없으니 그때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냥 조금은 렴치가 없고 황당한 말이여서 어쩌면 무시하기도 싶지만 그렇다고 좀만 다시 생각을 돌리면 물먹듯 그냥 슴슴히 지나칠 말이 아닌듯 싶기도 하다. 말속에 말이 있듯 그냥 거지철학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변명만 구차해 진다. 둥근 세상이다. 원숭이도 너무 모가 난 나무에서는 오래 배기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은 절대 절벽강산에서 오래 살수가 없다. 술 한잔을 들어도 누군가와 건배해야 그 맛도 좋고 산책해도 누군가와 손잡고 걸으면 가슴에 물보라가 더 곱게 일고 잠을 자도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안전감이 더 드는 법이다. 그만큼 우리 사는 세상은 만나고 스치고 부딪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거지가 없으면 신사가 없고 학생이 없으면 선생님도 없다고 했다. 사랑과 정이란 받기보단 주는데서 더 생기는 법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꼭 신장이나 각막을 기증해서 누군가를 구하란 말은 아니다. 정이란 꼭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이나 세레나데가 느껴지는 소야곡속에만 흐르는것이 아니라 밥 한공기와 그 눈표정에서도 흐른다고 했다. 아무튼 천사란 별게 아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하고 아파할때 손을 꼬옥 잡아주고 안아주는 그런 사람이 천사인가 아닐가 싶다. 조각달보다는 둥근 달이 더 보기 좋다고 했다. 있을때 잘해란 노래가 있듯이 조금이라도 있을때 서로 베풀고 다독여가면서 둥글게 살아간다면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도 사람사는 냄새로 하여 그로서의 사는 멋 또한 따로 있지 않겠는가?!
2    바보와 그 세월이 그립다 댓글:  조회:1247  추천:4  2012-12-04
바보와 그 세월이 그립다 맹영수 맹바보                           바보란 상식적으로 말하면 아이큐가 모자란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제노릇”을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도 그렇게 부르고들있다. 사실 지금 사람들은 제노릇을 너무 잘해 탓이지만 예전 사람들은 실권을 갖고도 쓸줄 몰랐었다. 나의 아버지도 바로 그중의 한분이였다.     나의 아버지는 보통키를 가졌으나 반양머리를 가진 미남이셨다. 비록 아버지는 농민의 자식이였으나 자신의 총명자질로 하여 농회주석과 인민경찰… 등을 거쳐 나중에는 한 대형기업에서 인사과장으로 인생을 살아오셨다.     아버지가 농회간부로 있었을때 일이였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사업에 참가했던 처녀가 아버지께 사랑을 고백했었다. 이쁘고 착한 처녀앞에서 아버지맘은 갈대처럼 약간 흔들리긴 했어도 아버지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와 혼약을 기약했던 사이였다. 결혼도 아니고 그냥 구두상의 언약이였는데도 아버지는 차마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생중기에 인사과장으로 있은 아버지는 이런저런 면목도 많았으나 여전히 그렇게 고정불변이였다. 당시 6섯자식에 어머니마저 고정 직업이 없다보니 우리집 생활은 말그대로 털면 먼지밖에 없듯 그렇게 째지게 가난했었다. 어머니만 고정 로동자로 만들어도 생활은 얼마간 피여났으련만 아버지의 무정으로 하여 어머니는 늘 림시공으로 힘든 일을 하다가 자신의 노력으로 대집체기업에서 겨우 정식공이 되여 퇴직을 할수가 있었다. 솔직히 국영과 집체는 당시로 놓고 말하면 천양지차의 대우를 갖고있었다. 아무튼 아버지를 비롯하여 당시 사람들은 직권을 권력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천직으로만 생각하였다. 하기에 못사는 세월이였으나 당시엔 비리가 별로 없었고 사람들 사이도 순치사이로 되여 그렇듯 가까웠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늘 달밤이면 옹기종기 모여앉아 구애없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뉘집에서 닭 한마리라도 잡으면 국물이라도 놓고 술 한잔으로 회포도 나누면서 콩기름 한냥, 소금 몇숟가락도 허물없이 빌리고 갚기도 했었다. 지금도 내 동년의 기억에는 큰 누님이 출가할때 온동네 사람들이 제집일이듯 떨쳐나서 엄마를 도와주던 정경이 뚜렸이 자리잡고있다. 친척이란 별로 없는 우리집을 위해 동네 사람들은 한푼두푼 모아 어머니손에 쥐여주고 또 (우시)상빈으로도 되여주기도 했다. 실로 동네 사람들의 인정이 없었더면 누님은 아마 이불 한채도 변변히 못갖추고 시집문턱을 넘어섰을것이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풍경이 멀어지는 렬차마냥 까마아득한 추억으로만 안겨와서 어딘가 서글프기만하다.    언제부터인가 돈과 권력이면 귀신도 부릴수 있다는 굴절된 사유로 해서 우리 신변에서는 일본렬도의 쓰나미 현상이 무시로 일어나고있다. 더는 물처럼 깨끗한 한세대의 바보들을 별로 볼수가 없고 가슴이 꺽 맻히는 정을 느낄수가 없다. 늘어나는 탐관들과 무너지는 정으로 해서 우리의 도덕과 인성은 오염되여가고 사람과 사람사이는 갑옷을 입은듯 불편하기 그지없다. 해당 자료에 의하면 작년 한해사이에만 각종 직무범죄사건 3만 2567만건을 립안정찰했는데 성(부) 청(국) 등 국가사업일군 2524명을 포함하여 그에 관련된 인원이 4만 4506명이나 되고 그리고 직무범죄혐의를 받은 행정집법일군과 사법일군은 각각 7366명과 2395명인데 그중 4217명이 형사책임을 받았다고 했다. 하늘이 돈다고 할가. 너무도 엄청난 수자앞이라 마지막 길을 가는 로인처럼 입마저 다물수가 없다. 책임감이 무디여지고 비리가 성행하는 준엄한 현실에서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함이 옳을가?   어쩌면 답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듯싶다. 누군가 사람인생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결국 알고보면 부자도 빈자도 갈때면 모두 빈손으로 가는것이 인생인것이다. 많이 가졌다고 천당으로 가는것도 아니고 적게 가졌다고 지옥으로 가는것도 아니다. 지나친 사욕은 타인을 해치고 자기마저 해치고 마는것이다. 그만큼 적당이 갖고 적당이 향수하면서 서로가 사랑의 맘으로 바보로 된다면 편한 인생이 만들어지고 우리 사회도 보다 조화롭게 구축될게 아닐까?      가난했지만 정직이 있고 인정이 넘치던 그 세월, 언제면 그런 풍경이 다시금 재현될지? 참으로 너무도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1    실수와 아름다운 용서 댓글:  조회:1466  추천:5  2012-11-28
실수와 아름다운 용서 맹영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실수에 대해 화등잔처럼 눈을 밝히고있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인간이란 신이 아닌만큼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실수를 범하게 되는것이 아닐까 내가 알고있는 한 남자의 사실이다. 일찍 출국길에 오른 남자는 이국생활에서 적막을 못이겨 이성을 사귀였다. 허나 그건 잠간 감정상의 의탁이였지 원 혼인에 대한 부정은 아니였다. 일정하게 돈을 번 남자는 집으로 돌아온후 여전히 안해를 잘대해주고있었다. 허나 우연하게 그동안 안해에게도 다른 이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남자는 리성을 잃고 길길히 뛰더니 끝내 안해에게 리혼을 선고하고 말았다. 알고보면 피장파장이였으나 남자는 도저히 안해를 용서 할수가 없었다. 한때 단란하던 가정은 가을의 낙엽처럼 쓸쓸하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기에 또다른 실례도 있다. 한 계부가 늘 말썽을 일으키는 후처 아들에게 엉결에 귀쌈 한매를 때린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매로 하여 후처 아들은 집을 나갔고 부부간은 서로 얼굴을 붉히더니 결국 또 남남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두루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이런 실례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엔 서로 알륵과 오해가 생기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반목으로 번져지면서 고양이와 쥐 같은 관계로 되고만다. 그만큼 용서와 사랑이 멀리 머리 풀고 달아나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갑속에 든 사람처럼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은 실수로 인정하지만 대방의 실수는 실수로가 아니라 치명적인 결점으로 받아들이고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늘 마음을 떠나서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고 자기 감정을 단속하고 통제하고 숨겨야 하는것이다. 물론 미물과 달라 자아통제능력이 강한 인간인만큼 늘 체신에 맞게 행동해야 하지만 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어찌 책대로만 살수가 있고 금안에서만 살수가 있겠는가? 가끔은 금밖을 벗어나 실수도 하고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고 가끔은 그로해서 망신도 당하고 질책도 면치 못하는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삶인것이다. 바다는 매력적이지만 가끔은 잔잔한 흐름도 있고 가끔은 노한 물결도 있고 또 가끔은 재해도 조성하고있다. 어찌보면 우리 삶도 바다와 마찬가지인것이다.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며 때론 그로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도 주게 된다. 바다가 재해를 조성했다고 버릴수 없듯이 실수를 했다고 해서 한 사람을 군체에서 배척할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호수처럼 고정불변하는게 아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거듭되는 실수속에서 살아가고있는것이다. 실수가 없으면 깨우침이 없고 발전이 없고 성숙도 없는것이다. 그만큼 건전한 삶이란 실수속에서 만들어지는것이 아닐가?. 인간은 목석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감정앞에선 늘 약자이다. 하기에 때론 실수를 하면서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볼수 있기에 사람들은 더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면서 가꿈에 게을리지 않고있다. 얼굴에 잠간 흙물이 묻었다고 해서 다 추한 몰골은 아닌것이다. 맑은 물에 깨끗히 씻으면 고운 얼굴은 여전히 고운 얼굴로 되는것이다. 늘 추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 가려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을 봄에 있어서 그의 단점보다 우점을 더 보아야 하고 겉 보다는 내심세계를 더 보아야 한다. 그만큼 말이나 행위가 위선적이 아니고 악의적이 아니라면 관용과 포용으로 감싸줄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감정동물인만큼 늘 순간적인 감정폭발에 의하여 본의 아니게 잘못이나 실수 그리고 결점을 범할수도 있으니 말이다. 너무 깊고 맑은 물에는 고기가 없고 너무 아름다운 꽃은 잠간밖에 피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솔직히 완벽한 인생보다는 80점짜리 인생이 더 편하고 아름다운것이다. 완벽한 사람은 존경의 대상은 되여도 친구로는 합당하다고 할수가 없다. 사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사랑을 알면 얼마 알고 타인을 용서하면 얼마나 용서하고 포용하면 얼마나 포용할가? 희노애락이 인간의 진실한 삶일진대 굳이 그것을 감추려 할 필요가 있을가? 우리말에 허리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키고 못생긴 락타가 사막을 건넌다는 말도 있다. 자연이 천태만상인것처럼 사람도 천층만층 구만층이다. 그만큼 나를 홍보하기 앞서 누군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한문에서는 사람 (人)자를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또는 이마를 맞대고 또는 등을 맞대고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힘을 합해 살아가야 한다고, 다시말하면 사람은 태여나면서부터 홀로 살아 갈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한치의 실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부정이고 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되여 비방과 질투만 유발하게 될것이다. 사실 피를 머금었다가 뿜으면 먼저 자신의 입부터 더러워지고 하늘에 침을 뱉으면 내 얼굴로 떨어진다는 당연한 도리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하기에 어느 한 명인이 고 말했을것이다. 여기에 아주 좋은 실례가 있다. 한국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호를 가진 손양원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했을 뿐만아니라 그를 자기 아들로 삼아 키웠었다. 물론 누구도 그처럼 대범한 사랑을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의 행위에서 자아반성은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온 뒤에 하늘을 올려다 보면 무지개가 비껴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그것은 비를 만든 바람과 구름에 대한 하늘의 축복이다. 우리는 그 하늘과 바다를 본받아 마음의 강에 용서와 사랑의 쪽배를 띄우면서 누군가를 질책하기 앞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면 어떨가?...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강아지도 도랑에 빠질라니 오정칠욕을 갖고있는 인간이 어찌 한치의 실수와 드놀림 그리고 착오가 없이 인생을 마감할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뭐 자주 실수를 하란 말은 아니다. 실수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고 그리고 한번 범한 실수는 기왕이면 다시 범하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실수 또는 결점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용서한다는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한 사람을 미워한다는것은 평생의 상처고 슬픈 일이다. 한 사람의 이쁜 모습은 용모보다도 곱게 웃는 눈모습에 더 있다고 했다. 하물며 베풀며 사랑하며 살아도 한정있는 인생에 궂히 마음속에 증오와 배척이란 십자가를 메고 힘겹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한치의 앞도 모르는게 인간의 삶이라고 했고 입안의 혀도 깨물때가 있다고 했다. 어쩌면 삶이란 징검다리우에서 눌 불온전한 걸음을 걷는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일수도 있다. 하기에 살다보면 누구도 감히 완벽한 삶을 산다고 말할수가 없는것이다. 배려가 사랑의 시작이라면 용서는 사랑의 완성인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 나고 미움을 심으면 미움이 나는것이다. 솔직히 세상은 두부 한모금만큼의 사랑과 용서가 있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좀더 편하게 삶을 즐길수가 있는것이다. 아무튼 고운 시선으로 둘러보면 모든게 곱게 보이는 법이다. 그만큼 좀더 생각을 달리 하고 좀더 리지적이고 좀더 객관보다는 주관에서 문제를 찾는다면 사람과 사람사이는 언제나 용서라는 그 향기로 해서 개울물처럼 돌돌 흘러갈것이다.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