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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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 댓글:  조회:10012  추천:77  2011-04-25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 2011년 04월 21일 어느 분인가의 “탈북시인 장진성이 6일 동안 본 중국 강연이 재미있으니 시청해 보세요”라는 요청(왜서 이런 요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에 호기심이 동해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8087&C_CC=AZ를 방문했더니 4월18일 오후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홀에서 ‘제168회 趙甲濟 기자의 現代史 강좌’가 개최됐다는 조갑제닷컴의 “최신정보”였다. 일면식도 없지만 내가 상당히 존중하는 조갑제선생의 강좌내용을 보니 사뭇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한데 정작 나의 흥미를 유발했던 장진성 脫北시인의 ‘6일 동안 본 중국’이란 제목의 강연내용을 보고서는 비교적 어리둥절해졌다. --- “중국에 있는 동안 느낀 것은 公安(공안)의 권위주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지배한다는 그들의 통치철학을 공안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물어봐도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일반 주민들에게도 권위주의가 드러납니다. 밥을 먹을 때 접시를 높이 쌓는 것, 호화로운 집에서 살려고 하는 것 등 스스로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론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시인은 중국사회에 배려문화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 인구가 너무 많고 ▲ 1가구 1자녀 정책 ▲ 소수민족이 섞여 있다는 것 ▲ 文化(문화)대혁명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文化대혁명 때 많은 사람들이 연좌제 형식으로 숙청돼 서로간의 소통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 국가경제를 두가지로 분석했는데 하나는 글로벌경제, 다른 하나는 위조경제라고 했다. 중국이 가짜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대해 장시인은“중국 사람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은‘기업보다 공민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위조경제를 오히려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을‘인류 근현대 100년의 進化(진화)과정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낙후된 모습과 가장 선진화 된 모습이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장 시인은 “중국에 머무는 6일 동안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참 재미있는 뉴스이다. “장시인은 중국사회에 배려문화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담략”에 상당히 놀랐다. 6년이나 16년도 아니고 단 6일 중국에 머물었던 기간 이런 중대한 결론을 얻어내고 그것을 한국청중들에게 강연까지 했다니...... 그런데 경탄한 나머지 한가지 의혹, 한가지 우려와 한가지 건의가 있다 --- 한가지 의혹: “중국에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공안의 권위주의였습니다.”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혹시 중국에 6일간 머물면서 시종 신변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왜 불안했을까? 한가지 우려: “중국에 머무는 6일 동안 대한민국의 자부심...” 어쩐지 중국비하로 한국청중에 아부하려는 무슨 냄새가 풍기는데, 그런데 그게 진짜 먹힐까? 한가지 건의: “중국이 위조경제를 장려하고 있는 실정...” 이런 이상한 사실들을 만들어내느라 고생하지 말고 남북간, 그리고 이웃간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 다소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64    영화 <황해>에 대하여 나도 몇마디 댓글:  조회:8771  추천:102  2011-03-19
  영화 <황해>에 대하여 나도 몇마디 조글로포럼 홈페이지 톱자리에 한국 영화평론가 이안씨의 <타자화된 조선족, 이탈리아계 마피아 묘사하듯>이 석달이 넘도록 그냥 걸려서 “문근영에서 '살인자'로…나는 황해가 불편하다”고 토로한다. 며칠전에야 나홍진감독의 영화 <황해>와 그의 데뷔작 <추격자>를 보았다. 아마 상당수 논자들은 <황해>를 단지 일확천금의 상업성효과만 꾀한, 또한 그것을 위해 조선족을 이용하고, 따라서 사람을 불안해지게 하거나 분노를 느끼게 할수밖에 없는, 그런 무책임한 영화로만 보는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본 <황해>는 그게 아니다. 엇갈리는 평가 이 영화에 대해 다양한 평가들이 있다. 조선족들중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족의 현실을 엄중히 왜곡하고 조선족이미지를 엄중히 해쳤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런 견해에는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을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페단이 있다. 그외 이 영화는 단지 영화일뿐이므로 너무 현실에 가져다 맞추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인들의 반향을 보면 대체로 복잡하게 얽힌 영화의 스토리와 인물관계의 이해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영화의 의미도 잘 풀어내고 있는데, 영화를 재미와 자극으로 보면서 거기서 뭔가 계발도 얻는 이런 감상법에 대해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영화평론가들의 시각은 물론 조금 깊다. 영화가 내포한 의미에 대해서, 이안은 이 영화를 통해 보는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병에 걸려들게 한건 한국사회다”라는 심각한 논점을 펴내기도 하지만, 웬일인지 “폭력에 의한 ‘떼죽음의 배경’이 고작 ‘치정문제’”라며 “칼깨나 쓰는 작자들을 줄줄이 거느렸으면서 굳이 연변까지 가서 목돈들여 살인청부할 대상을 찾는다는것은 너무 부도덕하거니와 설득력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이끌어내지도 못한다”면서 논리의 전개를 접어버린다. 상업성영화를 두고 혹평이 아닌가 싶다.  장르문제 이안씨는 나아가 영화평에서 “불과 5년전만 하더라도 <댄서의 순정>에서 자본의 힘에 팔려와 공권력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꿈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우리사회가 잃어버린 가치를 돌이켜보게하는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던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제 <황해>를 통해 “소름끼치게 무시무시한 살인자무리”로 바뀌었다면서 역시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전체”를 구별하기를 거부한다. 영화의 장르를 말해야 한다. 장르면에서 <댄서의 순정>은 사랑주제의 영화이고 <황해>는 범죄영화에 속한다. 두 영화를 억지로 연계시키는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거니와 여론을 이상하게 오도할수 있다.  영화 <황해>는 장르로 말하면 범죄영화로 분류되는 비극과 스릴러사이 영화라고 볼수있다. 범죄영화의 하위분류로 범죄드라마영화, 범죄미스테리영화, 범죄스릴러영화, 범죄코미디영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영화는 주로 범죄스릴러영화의 범주에 속하며, 그러나 상당히 잘 짜인 드라마요소와 미스테리요소도 가지고있다. 범죄문제를 취급한 스릴러영화를 사랑영화 찍듯 찍을수는 없는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 그리고 “조선족 비하”문제 영화 <황해>의 이야기는 조선족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선 주인공 김구남을 비롯해 사건에 조선족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조폭두목 면정학과 그의 패거리들, 한국 조폭두목 김태원의 운전수에 고용된 2명, HK은행 김정환과장에 이용된 몇명, 그외에도 가리봉동의 이른바의 “불체자”들 등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조선족은 범법의 성격과 정도가 부동하지만 “불체자”들을 망라해서 대부분 범법자들이다. 조선족이 다수 등장하기에 “조선족 범죄집단”과 “조선족전체”를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반드시 철저히 갈라보아야 할 개념이다. 안 그러면 실제로 조선족전체를 범죄집단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되기때문이다. 조선족조폭의 잔인성에 대한 묘사를 조선족에 대한 비하로 보는것은 무리다. 조폭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다 사회음지의 독버섯같은 존재로서 현실에서의 그들의 잔인성이 결코 영화에서 표현되는 잔인성에 떨어진다고 볼수 없다. 영화에서 아무런 저항수단도 없는 불쌍한 “불체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한국조폭은 조선족조폭만 만나면 쩔쩔매는 비겁한 무리로 둔갑한다. 이에 반해 조선족조폭은 잔혹은 할지라도 항상 당당하게 그려지고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이다. 실제 이 영화에서 비하한것은 한국의 공권력이다. 비하라는 낱말을 조폭무리에 가져다 붙일수는 없다. 조폭무리에는 폭로만이 어울릴뿐이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상업효과만 노렸나? 범죄영화로 분류되는 비극과 스릴러 사이 영화로서의 이 영화가 상업효과를 노린것은 두말할것 없다. 데뷔작 <추격자>와 그를 이은 영화 <황해>는 모두 강자극적수법을 구사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문제를 진실하게 다뤘다고 본다. 중한양국의 범죄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한국과 중국조선족 조폭사회가 결탁해 저지르는 대표적 범죄사건의 연관성을 극명하게 보여줬기때문이다. 그 진실은 예술의 진실에만 그치는것이 아니고,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어두운면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고있다. 이 영화에서 보면 청부살인사건의 단초제공자는 피살자와 형제관계이던 한국 조폭두목 김태원과 은행직원 김정환과장이고 중국의 조선족조폭두목 면정학은 돈을 위해, 김구남이는 면정학에 이용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오기 위해 살인청부를 받고 한국행을 한 범행자이다. “조선족들에게 뿌려진 폭력의 근원은 아주 분명하다...병에 걸려들게 한건 한국사회다”라는 이안평론가의 말을 새삼 되새겨보게하는 구도이다. “실화”에 근거 나홍진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의 범죄는 모두 금세기 초에 발생한 “실화”에 근거했다고 매스컴에 전한다. 나감독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건발생 당시에서 여러 해 지난 2011년 오늘현재와는 거리감이 있을수 있지만, 실제로 중한수교후 조선족의 이민붐이 일면서 점차 불거진 각종 모순이 보다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인 시점이 바로 그 시기다.   한국 악덕고용주의 만행을 도화선으로 조선족 6인이 한국인을 포함한 선원 11인을 무자비하게 죽여 바다에 던진, 세상을 경악케 한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사업알선의 명의로 농민위주의 18만 가난한 조선족을 사기쳐 그들을 죽음의 나락에로 밀어넣었던 “한국초청사기사건” 등으로 조선족의 반한감정을 비롯해 중한 동족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도 바로 그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조선족일부에서 표현된 반한감정의 소산이었던것은 아니다. 중한조폭의 결탁범행도 양국 동족간 갈등을 부추긴 요소로 작용했기때문이다. 조폭문제 한국진출붐이 일기전 중국 동북3성에서 조폭집단이 이미 활동하고있었다. 2003년 3월 20일자 한국 “시사저널”은 “한·중 조폭, 손잡고 날뛴다”는 제하의 뉴스에서 “국내에 밀입국한 조선족 조직폭력단이 한국 조직폭력단과 손잡고 마약·밀수·살인청부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범죄세계에서 한·중국경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그러니 중한수교후 몇년 안되어 중국경내에서 활동하던 조폭들이 하나 둘 한국에 진출해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내 조폭세력과 각종 연계를 맺었는데, 그들은 한국내 조선족 밀집거주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조선족타운과 안산 원곡동·원산동에 자리한 조선족타운을 근거지로 평소에는 조선족을 상대로 금품갈취를 일삼는 등 범죄를 저지르다가, 한국인이 의뢰해오는 청부폭력을 수행하고 뒷돈을 받기도 한다는것이다. 당시 서울 가리봉동, 대림동, 가산동, 봉천동, 신림동 일대와 경기도 안산시에도 생겨난 조선족타운에 자리잡은 조선족조폭은 중국조선족사회에서 10여개 파벌을 형성하며 활동해 왔던 이들이며, 잔인함으로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서울 가리봉동 일대는 연변의 용정 등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일명 “뱀파”, “호박파”, “승리파” 조직이 장악했으며 안산시의 조선족타운은 흑룡강성과 상해 출신 두 분파의 주된 활동무대라는것이다. 중국내 한국행사기행각을 살펴보면 연수생초청사기, 친지방문초청사기 및 유학생명의의 초청사기, 위장결혼사기, 한국방취제를 빙자한 사기행각이 다년간 살판쳐왔는데, 그 이면의 진실은 한국조폭과 조선족조폭의 결탁이었던것이다. 한국경찰은 “한국내 조폭과 조선족조폭은 줄곧 조선족불법송출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면서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피한 조폭출신들이 현지 조선족조폭과 손잡고 서류를 위조해 대규모 초청사기를 벌인다”고 했다. 한국경찰은 “한국인 범죄조직이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구실로 조선족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조선족을 상대로 고리대부업, 인신매매, 성매매나 살인폭행 등 청부업무를 맡겨왔는데, 그 원인은 조선족이 범행을 저질러도 지문감식이 불가능한데다,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종적을 감추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것이다. 한국사회와 중국사회의 음지에 기생하는 독버섯같은 조폭사회의 존재는 회의의 여지도 없는 현실이며 따라서 우리는 <황해>의 스토리가 현실과는 무관한 허구가 아님을 알수 있다. “영화의 본질은 조선족에 대한 애정” 나홍진감독은 <황해>시사회에서 중국조선족 비하논란에 대해 “다소 과격하게 비쳐지는 부분이 있겠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조선족에 대한 애정”이라고 했다. 영화를 본뒤 나는 이 말의 진정성을 실감할수 있었다. 그 “애정”은 주로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주인공 김구남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조선족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삽입적묘사를 통해 표현되고있다.  주인공 김구남을 통해--- 이 영화의 주인공 김구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택시운전수이다. 힘도, 돈도, 빽도 없는 그는 이 사회의 소외계층에 속한 인물이다.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흔히 범죄의 어두운 구석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의 관심과 사랑이 이 계층에 특별히 기울여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부각한 김구남은 우선 시종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며, 그가 살인청부를 맡은것도 애오라지 잃어버린 가정을 되찾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스릴러영화이지만, 어찌보면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 사랑을 찾아 떠난 피눈물의 사랑영화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한국에 돈벌러 간 아내는 기별이 없다. 소식이 없으면 무조건 다른 남자와 눈맞아 돌아간게라는 여론이 돌고 어머니도 며느리를 갈보라고 욕하며 면가도 아내에 대해 모욕적언사를 던지지만, 그리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몸섞는 환각에도 여러번 빠지지만, 이 모든것은 아내를 찾아와야겠다는 그의 결심만 더욱 굳혀줄뿐이다. 살인피의자로 경찰에 쫓기면서 비참한 자신의 신세에 혼자 서럽게 우는 구남, 자신이 실제 살인자는 아니지만 살인청부를 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구남, 자신을 살인범죄의 심연속에 몰아넣고 목적을 달성하자 자신을 “토사구팽”하려드는 조폭두목 면정학에 이를 갈며 절규하는 구남, 피튕기는 사투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구남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관계로 귀국선에서 “아내”의 유골함을 껴안은채 고달픈 인생을 마감하고 차디찬 황해바다에 던져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관중들은 솟구치는 동정심을 금치 못한다.   한편 주인공 김구남은 죄인임을 떠나서 “영웅”으로 부각된다. 종종 서로 겹치는 다양한 하위장르를 거느리고있는 스릴러영화는 일반적으로 빠른 전개, 빈발하는 액션, 재능있는 영웅이 대결하는 강력한 악당을 갖게 되는데, 김구남의 상대는 공권력의 경찰에 강력한 조폭무리까지 가세한다. 면정학과의 피비린 대결에서 도끼를 들고 까맣게 달려드는 조폭무리를 따돌릴뿐만아니라 근 100명 되는 한국경찰의 삼엄한 포위까지 유유히 뚫고나온다. 거의 불사신에 가깝다. 한국경찰은 영화에서 더 이상 무능할수 없는 “밥통”들로 그려지고있다. 철통같은 버스안 뒷자리에 앉은 구남도 놓치고 마는데, 경황망조한 경찰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남에게 총겨누던 손을 덜덜 떨다가 동료경관을 쏘아죽이고는 대성통곡하는 장면, 신랄한 풍자를 넘어 매도수준이다. 나감독의 데뷔작 <추격자>에 나오는 경찰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나홍진감독은 "살인자들이 활개치고 살인이 일어나게 방치한 사회에 대한 분노때문에 <추격자>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하다면 <황해>를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한 조선족의 불우처지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을 조선족으로 내세운 영화답게, 이 영화에서는 처처에서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묘사를 접할 수 있다. 가리봉동 “불체자”들이 한국조폭들에게 이유없이 당하는 처참한 장면, 구남이 양꼬치집에서 "괜히 사고치면 바로 쫓겨나니 그냥 돈이나 벌다가라"고 귀띔받는 장면, 수산물유통업자에 의해 조선족여성이 토막살해 당했다는 뉴스보도, 구남이 아내의 사체확인과정에 자기가 의뢰한 흥신소 직원에게 사기를 당하는 모습...등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같은 동포사회의 일원으로 한국에 가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범죄에 노출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는 조선족들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감독의 시선을 느낄수 있다. 맺는 말 오늘 세상은 금전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풍조에 깊이 물들어있다. 돈때문에 웃고울고 돈때문에 서로 속이고 이용하며 돈때문에 살인도 저지른다. 한국사회와 중국조선족사회가 서로 얽힌 거의 전부의 범죄사건에서 “금전”은 마귀와도 같은 존재라 할수 있다. 그것은 항상 여자, 지위, 권력과도 연관되는데, 영화 <황해>속의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피비린 사투를 금전과 권력,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악성사건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안될것 없다. 영화 속의 “여자”는 상징물일뿐이다. 우리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조폭들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그 세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실 조폭세계는 결코 우리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며 그 세계의 어두운 그림자는 연수생초청사기, 친지방문초청사기 및 유학생명의의 초청사기, 위장결혼사기, 한국방취제를 빙자한 사기행각 등 한국행사기행각에서도 드러나듯이 늘 우리 주변에 드리워져있는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결코 선량한 사람들의 의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 그림자가 드리운 처처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비일비재로 유린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너무도 무감각하다. 기실 두려운것은 어두운 그림자 자체보다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불감증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황해>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고 보는것이다.
63    된장술, 들어본적 있습니까 댓글:  조회:7535  추천:61  2010-07-05
  된장술, 들어본적 있습니까 연변민들레 리동춘회장,“술의 역사 다시 쓰련다”   "된장술"이란 낱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보도듣도 못한 된장술이 태어났으니 바로 연변민들레생태 산업연구유한회사의 최신양조제품 "장로주(醬露酒)"이다. 과연 된장으로 술을 빚어낼 수 있을까? 의문을 풀고자 이 회사의 리동춘회장을 찾았다.   전통된장의 심오한 "오덕문화   “된장처럼 살아라!”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리동춘의 좌우명.   그에 따르면 전통된장이야말로 신이 인간에 내린 최고의 선물이란다. 하긴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서 “전통된장”을 클릭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전통된장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영양가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기능은 이 세상 그 어느 식품도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    리동춘은 전통된장 속에 "오덕문화(五德文化)"가 살아 숨 쉰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전통된장의 “오덕”이란 단심(丹心), 화심(和心), 항심(恒心), 선심(善心), 불심(佛心)을 말한다. 그가 일컫는 된장의 “오덕문화”를 풀이하면--   丹心이란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서 다른 음식물과 화합을 잘하면서도 자기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이고 和心이란 “구동존이(求同存異)”로서 자기 맛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음식물의 맛도 살려주는 것이며 恒心이란 “항구불변(恒久不變)”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맛과 기능을 배로 증식시키는 것이고 善心이란 “동화열성(同化烈性)”으로 된장국에 매운 고추를 넣으면 그 매운맛을 순화시켜주는 것이며 佛心이란 “구성제유(驅腥除油)”를 의미하니 물고기의 비린맛과 육류의 기름기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수한 전통제품이 오히려 이른 바의 현대과학수단에 의해 변형되고 기형적으로 만들어진 개량된장에 의해 대체되면서 쇠망의 위기를 맞고 있으니 이를 통탄하여 리동춘씨는 생태문화를 선도하고 민족전통산업의 정수를 이어나가기 위한 취지로 련 5년간 해마다 "세계연변전통된장축제"와 "생태문화예술제"를 개최해왔다. 5회째 수많은 연변문화인들이 응모작으로 신곡가요 근 4천여 편, 그 외에도 많은 소설, 수필, 시 작품과 미술, 촬영 작품을 창출하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배태하고 있다. 금년 8월 "전통된장오덕문화축제"개최도 준비 중에 있다.   된장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 과학자의 아이디어   문화가 살아숨쉬는 전통발효식품을 세계인의 식단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리동춘의 지론이다. 이 목표과제를 스스로 안고 전통식품의 세계화 시장을 고안하여 부단하게 페스티벌을 개최해온 그다. 뚜렷한 목표는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는데 기폭제로 작용했다.     페스티벌에 참석한 연변의 한 지성인이 된장술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 지성인이 연변에서 개최된 한차례의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 로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온 로 과학자는 우리민족의 음식 중에서 두가지 식품이 오래 두어도 영원히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맛과 기능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발효식품인 전통된장과 술이라는 것. 이 두 가지 제품을 결합시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다면 과히 세계적인 제품이 될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은 아직 구상에 그칠 뿐이니 전통식품의 오리지널(原型)이 살아있는 연변에서 한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이디어 하나로 개발에 착수,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오늘의 장로주(醬露酒)가 태어날 수 있었다. 술의 수천 년 역사를 바꾸는 작업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해장국기능과 나노기술의 도입--술의 역사를 바꾸는 작업   자고이래 술에 콩발효성분(된장)과 그 발효공법을 활용하여 술을 숙성시킨 사례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발효된 콩에는 아미노산과 같은 인체에 필수적인 단백질영양소가 있으며 인체에 유익한 수많은 미생물이 있다. 과학적으로 권장하는 술의 섭취량은 극히 미소하다. 과음하면 건강에 해롭고 인체 내에서 숙취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그러나 된장술은 마시는 순간부터 위와 장에 단백질 영양가를 제공하게 되므로 위장이 윤활해지면서 위장과 간이 보호를 받게 된다고 한다.   조선민족은 술을 비교적 많이 섭취하는 민족이다. 이튿날까지 풀리지 않는 숙취현상을 된장국으로 해소시켜왔다. 해장국의 기능이 고스란히 된장술 속에 녹아있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 나노기술(納米技術)로 술의 물 분자 클러스터(群)를 최소화시켜 충분히 희석된 체내의 알코올이 수분과 함께 빠른 시간 내에 체외로 배출되게 함으로써 숙취해소에 도움을 주게 된다고 한다.     과식은 불여불식이라 하지만 막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과음 욕이다. 술로 인해 얻는 병이 과연 적은가? 문제해소의 유효처방이 된장술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된장술 양조기술은 이미 발명특허 출원 중에 있다"고 하는 리동춘회장은 "하지만 이 기술은 나 개인의 발명이 아니므로 앞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들, 그리고 무 숙취 건강주를 제조하여 인류건강에 기여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 기술을 공유하고 개발할 것"이라고 밝힌다.                                                                     *     *     * 일찍 흑룡강성 해림시 서부에 조선족신도시를 건설하여 농촌경제공동체발전에 크게 기여한 리동춘, 5년 전 민족의 문화와 전통산업의 정수가 고스란히 보존돼있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전통집거지 연변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이 땅에서 전통발효식품을 세계인의 식단에 올리기 위한 개발 작업에 혼신을 쏟아 불철주야 뛰어온 리동춘.   7월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개최되는 이번 "심양한국주--글로벌 한상대회"에 "길림성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전통된장과 그 계열제품, 새 상품 장로주(된장술)도 올린 리동춘회장은 이번 대회가 자신이 끔찍이도 애지중지하는 최신작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라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관련보도] [길림신문 박문희기자] 2010-07-06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62    아름다운 발 댓글:  조회:9066  추천:98  2010-03-01
아름다운 발   한국 피겨 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金姸兒, 1990년 9월 5일 출생)가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그의 발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김연아의 상처투성인 발을 보여준 사진--       그의 발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박지성(朴智星, 1981년 2월 25일 생)의 발사진을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인터넷 검색을 하여 그 사진을 찾아냈다. 그 발 사진은 지금 보아도 충격 그 자체였다.   상처투성이인 박지성의 발등, 굳은살이 박인 발가락 등이 자세히 나와 있어 박지성선수의 노력과 고통의 흔적을 알 수 있다. 갈라진 발톱과 가장자리를 따라 딱딱하게 뭉쳐있는 굳은살, 수많은 상처.     위 이미지를 본 네티즌들은 “여기저기 굳은살로 가득한 발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발이다”고 말한다.   박지성을 검색하는 중 또 하나의 발을 알게 되었으니 바로 한국의 발레리나 강수진(1967년 4월 24일 생)의 발이었다. 그녀는 현재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발레리나.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발레리노들도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작가 고은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답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툭툭 떨굴뻔 하였지요. 감동이란...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저를 들여다봅니다. 너는 무엇을...대체 얼마나...했느냐...그녀의 발이 저를 나무랍니다. 인정합니다. 엄살만 심했습니다. 욕심만 많았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는 발들이다. 그들의 발 사진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린 이들이 절대 소수가 아니며 그 발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도 많다.   세상을 주름잡는 성공의 주역들이지만 그들의 언행은 한결같이 평범하다. 2009년 4월 의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조사에서 박지성은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등을 따돌리고 5위에 올랐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박지성의 입은 어눌하고 태도는 투박했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을 요약하면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팀이 우승해 기쁘다”는 것이다.   2007년 5월 초인가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이 김연아 선수를 찾았다.   강천석: 김연아양, 반갑습니다. 먼저 지난 3월 세계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동메달 받은 것을 축하해요. 누구나 금메달이 탐나기 마련인데 “동메달이 더 좋다”고 한 수상소감이 유별나던데….   김연아: 한 번 출전으로 금메달을 땄다면 앞으로 계속 누군가에게 쫓길 것만 같아서요. 아직 어리니까 쫓기는 것보다 쫓아가는 게 마음이 더 편해요. 한꺼번에 많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조금씩 올라가는 게 좋잖아요. 처음부터 1등을 하면 언론의 눈길에서 더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거고요. 강천석: 여자 피겨스케이팅 랭킹 세계 10위 안에 일본인이 5명이나 있다고 들었어요. 한국인으로는 김연아 선수가 유일한데, 혹시 쓸쓸하지 않나요. 함께 연습하고 경쟁할 동료가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김연아: 저는 누군가를 이기려고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하면 좋은 점수를 받고 못하면 나쁜 점수를 받는 것이니까, 결국 제 자신과의 싸움이죠. 그러니 동료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허전하지는 않아요.   발레리나 강수진의 말을 들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하고 반성하게 돼요.   “저는 발레를 하면서 경쟁자를 생각한 적도 어떤 목표를 가져본 적도 사실 없습니다. 모든 작품, 모든 동작, 모든 연습에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예요.   “전 발레의 테크닉은 두 번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레리나의 길은 아픔을 일상으로 껴안아야 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고단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견디게 하는 것은 발레에 대한, 예술에 대한 사랑입니다.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삶을 동경해본 적이 없습니다. 발레에 인생을 바쳤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발레를 해왔고, 그래서 내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한다--   “발레는 다른 예술들 보다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 죽을 때까지 하기 힘들다. 그래서 연습은 필수다. 나는 3시간만 자고 연습에 몰두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연습했고, 밤12시가 넘어도 연습실로 늘 향했다. 시간은 사람이 만든 개념 아닌가. 시간을 안 보면 시간 가는지도 모르겠더라. 나는 한번 쉬면 회복기가 더 길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상당했을 때도 연습은 계속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한이 아니면 계속 연습실로 향했다. 나는 우리 발레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깨어있는 사람이다. 물론, 부상 때문에 팔이나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거나 구부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서 흥분하면 내 몸의 아드레날린이 활성화 되었고 몸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게으른 사람은 무엇인가 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저 사람보다 부족하다’라는 사실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된다. 하면 할수록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재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연습이다. 같은 동작도 계속 해서 연습하면 다른 의미를 읽을 수도 있다.   “나는 발레를 다른 사람들 보다 늦게 시작했다. 말 그대로 늦둥이인 셈이다. 요즘은 발레단에서 군무에서 바로 주역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군무에서 하프솔로, 솔로, 마돈나의 단계를 다 거쳤다. 즉, 주연이 되는데 7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내가 늦었기에 감사하다. 요즘은 솔로가 되어도 못하면 다시 군무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나는 늦게 발레를 시작했지만 차근차근 밟아 갔기에 다시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61    호랑이 해에 호랑이의 생존을 말한다 댓글:  조회:4996  추천:49  2010-02-16
  호랑이 해에 호랑이의 생존을 말한다 박문희   경인년 첫날 아침 호랑이 얘기를 한다. 우리의 조상들과 후세 사람들은 내내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호랑이의 보호를 받으려 했는가 하면 호랑이 정신을 배워서 만방에 위용을 떨치려고 기를 써왔다. 하지만 자고이래 생물사슬에서 최정상급 패자로만 계셨던 신격존재의 호랑이가 오늘처럼 애절한 동정의 대상이 돼버린 적은 일찌기 없었다. 우리가 애정을 갖는 동북호랑이 총 수량은 현재 500마리에도 못 미치는 정도, 우리 나라 경내에는 고작 20마리밖에 없다고 한다. 그중 훈춘지역에 다행히 5~6마리 있어서 재작년 국내로서는 유일하게  《동북호랑이의 고향》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소시적 기억에는 산골 어디를 가나 호랑이가 없다는 마을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중국 《동북호랑이의 고향》 훈춘에서 호랑이가 배가 너무 고파서 마을에 내려와 소를 잡아먹었다는 소식을 가끔 신문의 요란스런 보도를 통해서 즐겁게 접할뿐이다. 농민의 소를 잡아먹었는데도 즐거워지는것은 수년전 제정된《길림성중점보호륙생야생동물로 인한 인신재산피해 손해보상방법》에 의해 피해자가 성, 시(현) 급재정에서 각각 50%씩 보상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야생생물보호학회(WCS)등 국제조직의 지원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면 옛날에는 영웅호걸로 떠받들렸으나 오늘은 큰 경을 치른다. 작년에 운남의 농민 몇몇이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먹고 옥살이는 물론 48만원 배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포살도 포살이지만 문제는 호랑이의 생존기반과 먹이래원이 대책없이 줄어드는것이다. 호랑이 한마리가 자그만치 100평방킬로메터의 령지를 독차지하고 그 안에 득실거리는 메돼지, 사슴, 노루와 같은 짐승을 생각만 나면 골라먹을수 있어야 제격일텐데 그게 안되니 말이다. 길림성에서 야생동물 포획금지조치를 취한 10여년래 토끼, 메돼지, 꽃사슴도 조금씩 늘고있고 동북호랑이도 몇마리 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대책이 모자라 보인다. 현행 《손해보상방법》에서 한술 더 떠 보상외에 묵직한 상금을 내여 먹음직한 소를 호랑이에게 기꺼이 바칠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도 만들어졌으면 좀 좋을가? 호랑이의 씩씩한 기상이 인간과 자연에 차넘치기를 기원해본다. [길림신문] 2010-02-14
60    유순호작가를 말한다 댓글:  조회:9089  추천:79  2009-09-07
  유순호작가를 말한다   --칼럼집 에 부쳐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유순호 작가의 칼럼집 "사람살이 때맛나는 세상"이 출간된다면서 서문을 몇자 적어달라는 부탁을 직접 유순호 작가로부터 받았다. 내가 쓰는게 적합하겠냐고 했더니 "선생님에게는 저그만치 30년이라는 기자생활을 해온 경력이 있지않는가"면서 재차 요청해왔다.    그런데 30년 기자경력보다는 이제 사귄지 겨우 얼마 안되는 유순호 작가, 그것도 인터넷상으로 만났고, 인터넷상으로 유순호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오면서 나는 유순호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짬짬의 시간을 타내어 그의 대량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그만큼 유순호 작가의 작품들은 매력적이며 특히 중국의 조선족 출신 작가들속에서는 독특하게 빼여난 작가임을 나름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음을 먼저 밝히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내가 읽은 유순호 작가의 작품은 소설, 수필, 칼럼을 포함해서 다양하다. 특별히 이번에 계열로 출판되는 "유순호문학전집"중 칼럼집에 실리게 되는 50여편의 칼럼속에는 내가 공개 마당에서 긍정적인 인상담을 발표한바 있는 글도 여러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이 칼럼집에 서문을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미 인터넷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순호 작가의 칼럼에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인 나라에서 수많은 사상문제점들을 야기시킬수 있는 글들이 적지 않으며 실상 중국의 조선족 독자들은 유순호 작가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순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나를 포함해 다수인 반면에 유순호 작가를 상당하게 미워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은바, 그들은 주로 중국 조선족 문화분야의 기득권세력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최근 몇 달사이에만도 유순호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죄목들을 선사받았는데 그런 죄목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무슨 "악질반화세력"이니 "미국망명작가"니 그 외에도 수두룩한 "반화작가", "반중국작가", "반체제작가", "반혁명분자", "달레라마를 두둔한 작가", "경외불순세력", "공산당을 반대하는 작가" 등 죄목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열 두번도 더 기절초풍할만한 것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죄목들이 생겨나게 된 문제의 칼럼들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주고싶었다. 그것이 다년간 기자생활을 해온 나의 직업적 의무이기도 하겠지만,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절대로 집단적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싶어서였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유순호 작가는 중국 조선족 출신 작가로 2002년에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미국에서 지내는 지난 7년동안 그의 문학작품에서는 일대 비약이 일어났다. 특히 생계수단으로 신문사에 몸 담고 지내면서 수량상 적지만은 않게 써온 1천여편의 신문기사, 칼럼, 인터뷰, 기행, 논문 등 여러 가지 장르의 글에서 선정한 이 50편의 칼럼은 현재 변화중에 있는 중국 전역의 문화환경속에서도 여전히 고집스레 변화를 거부하고있는 조선족문단의 기득권세력이 저들의 기득이익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저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되는 유순호 작가를 사경으로 몰아가기에 좋을듯싶은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유순호 작가의 칼럼, 말하자면 본 칼럼집에 수록된 이 50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수량의 칼럼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경향은 결코 반중국이 아닌 짙은 친중국 성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른바 유순호 작가를 "반중국, 반체제작가"로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글들로 "티베트사태 유감" , "정치는 야누스의 얼굴" , "베이징 올림픽을 결산한다"와 같은 글속에서도 대부분 유순호 작가의 자기 조국과 고향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사랑을 읽을수 있었다.    예컨대 제목만 읽어도 느낌이 섬뜩해보이는 "중국공산당은 개혁을 다시 개혁해야 한다"는 칼럼에서도 유순호 작가는 공산당의 일부 시책을 비판하지만 공산당이 집정하고 있는 중국정부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넘쳐있는바, 정부를 이끌고 정부를 감시해야 하는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숨기기만 하고 감추기만 하는 언론이 항상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했는데, 남도 아닌 자기의 상황과 문제점도 과감하게 드러내놓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도 아닌 남과 싸워서 이길수 있겠는가"고 묻고 있다.    또 유순호 작가는 중국공산당은 일찍 2002년 제 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할데 관한 몇 가지 중대한 결정"을 지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나, 입 가진 당 간부들이 회의 때마다, 연설 때마다 입만 열면 부르짖는 소리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가 되었지만, 진정으로 무엇이 조화로운 사회인지를 많은 공산당원들이 아직 제대로 터득한 것 같지않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정강이 태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오히려 중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그리고 인간, 자연과 정권이 얼마나 서로 조화롭지 못하고 불편하며 서로를 적대시하고 서로를 기시하게 되었는가를 여실하게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유순호 작가는 이렇게 된 원인을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찾고있다.    유순호 작가의 이 칼럼속의 몇 단락을 돌아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에 의해 집필되어 23쪽 짜리 정치팸플릿에 담겨 이 세상으로 나올 때의 세계가 바로 그랬다. 산업혁명 후 자본가들에 의해 생산수단이 독점되면서 노동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모두 독식하여버리고 말았다. 굶주림과 압제에 시달리다가 죽느니 몸부림이라도 쳐보고 죽겠다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심정을 이 ‘공산당선언’이 대변하였고, 이 선언을 품에 안고 싸워왔던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무산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자본가도 때려잡고 국가도 전복시켜야 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이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거짓말이나 방화를 불사하였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념을 철저하게 실천으로 옮겨갔다. 1956년 2월 소비에트 전당대회에서 소련공산당의 새 지도자 후루시쵸프가 폭로한바에 의하더라도 스탈린은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은 50%를, 군 장성급 60%를 처형시켰다고 하니, 이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압박과 착취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와 후과를 초래하게 되었던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칼럼에서 소련에 이어 신흥공산대국이었던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철두철미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숭배자였던 모택동은 역시 공산주의 혁명을 핑계로 중국인민들을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만들었고 자신의 가장 절친한 동지였던 류소기를 비롯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핍박한다. 이와 같은 전제와 폭력하에서도 죽지 않고 오또기마냥 살아남았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하에서도 계급없는 사회, 모든 소유를 골고루 나눠가지고 평등하게 잘사는 지상천국 유토피아는 없었다. 그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자본가를 때려잡고 노동자, 농민, 무산 대중이 주인이 되어 돈과 재물을 공동 분배하자던 생산력의 모든 시스템이 다시 자본가의 손으로 슬슬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들 자본가, 기업가들에 대한 명칭도 중국 공산당의 당장속에서는 ‘선진생산력’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등소평과 강택민, 호금도 등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인간은 생태적으로 "소유욕"을 가지고 태어났고  "내 것"을 갖기 원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것"이 안 되고 "소유욕"을 만족시킬수 없을 때 누구도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지 않으며 누구도 창의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르조아가 권력을 잡으나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으나 인간의 탐욕은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탐욕들이 한 때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퇴치되는듯도 했으나, 사상운동만 하다보니 아무리 인민공사를 만들고 대약진운동을 하고 강제 노동을 시켜도 생산력은 올라갈 리가 없었다는 것이며, 결과 순수했던 공산주의는 모욕되었고 경제는 바닥이 났으며,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거대국가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던가고 반문하고 있다.    이런 나라를 불과 30여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미국과도 능히 대적할만큼의 위대한 경제강국으로 다시 부흥시킨 중국 공산당에 대하여 충분하게 긍정하기도 한다. 이 칼럼에서 작가는 중국의 13억 인구중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못사는 가운데 잘사는 선진생산력이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노동생산력의 잉여가치를 너무 많이 독식하는데서 그 어떤 강대한 파괴력을 가진 보다 무서운 사상이 새로 생겨날가봐 우려하면서 중국공산당에 바란다. 많이 가진자가 자각적으로 못 가진자에게 내놓지 않으니 이럴 때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전통을 발휘하여 강압적으로라도 잘사는 자들의 세금을 많이 징수하여 못사는 농민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때가 왔으며, 그냥 나눠만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절로 부유해질수 있게끔 돈도 주고 또 땅도 팔고살수 있게끔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개혁개방 이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중국의 일부 조선족 지성들은 극좌사상의 復古主義에 깊이 물젖어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이 없이 모든 현존 질서를 미신하며 이미 중공의 개명정책에 의해 관후한 언론환경이 상당정도 마련되어있음에도 낡은 사유방식에다 자신을 꽁꽁 묶어놓고 하고싶은 말과,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도 진실한 말을 할수 없게 구박한다. 말을 하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고 소통해야 관계도 원활해지고 사상도 원활해진다는 것이 이 칼럼집에 담겨있는 모든 칼럼들의 주장이다.    세상과 부딪치는 유순호 작가의 감히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면서 보면 한편한편 자기 조국과 자기의 고향, 그리고 자기의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을 읽을수 있게되어 감동을 받는다.    그는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일부 시책에 대하여 비판할 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이 몸 담고 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강도같은 나라", "도둑놈 같은 나라"라고 거침없이 매도한다. 바로 칼럼집 제목으로 선정된 "사람살이 때맛나는 세상"에서 미국식의 민주주의라는 것도 알고보니 "천박하다 못해 비속하기까지 하다"고 한탄한다. 또 "미국은 다극화 시대를 새롭게 대비해야 한다"는 칼럼에서는 미국이 "강압적인군사력은 뒤로 숨기고 강대한 경제력으로 ‘하드 파워’와 더불어 세계적인 인적교류 확대를 강화하고 일본이나 영국 독일 같은 잘 사는 나라들보다 저개발국지원을 대대적으로 늘이면서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적어도 가난한 북한을 독려할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풍요로운 미국 땅에 남아도는 쌀과 기름과 고기를 그대로 썩이지 말고 없는 자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등 유토피아적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시종 중국 국내에 몸을 담고 장기간 중국공산당의 언론사에서 평기자로부터 시작하여 부주필, 부사장으로,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있는 나는 유순호 작가의 칼럼들을 읽으면서 간단없이 충격을 느껴온것이 사실임을 고백한다. 중국체제의 입장에서, 그리고 중공당원이란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유순호의 칼럼들에 문제점이 없는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바깥세상에 별로 습관되지 않은 우리가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작가의 글 한두편으로 또는 한 두 단락으로 문장 전체를 쉽게 부정해버리는 나쁜 습성이다. 이런 악성종양과도 같은 폐습에서 헤어나오면 우리는 한발 앞서 세상밖으로 나가 있는 유순호 작가의 보다 넓은 시각을 볼수 있게 된다. 활짝 트여있는 시각에서 자기 조국이 좀 더 잘하여 세계무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리더국가로 성장하여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읽게될 때 어쩔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남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유순호 작가는 분명하게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순호 작가를 반공산주의 작가, 반사회주의 작가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목표가 미국에서 10년동안만 살면서, 서구문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나에게 고백한바 있는 유순호 작가는 아마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때문에 10년 뒤에는 또 어디서 무슨 일로 살아가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에도 여전히 유순호 작가의 매력적이면서도 시원한 칼럼을 계속 읽을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때 가서도 유순호 작가의 자기 고향과 자기 조국,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은 여전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온갖 유혹과 풍파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문학정신에 충직하고 자신만의 삶의 원칙에 충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그의 내일에 계속 쏟아져나오게 될 또 다른 칼럼들에서 작가의 한 길로 평생을 살아갈수 있는 바른 비결이 구경 무엇인지를 독자들과 함께 읽어낼수 있을 날이 이제 바로 눈앞에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국무원의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비준소식을 보고서 박문희 1. 8월 30일 길림성의 “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計劃”을 국무원에서 비준했다. 두만강류역을 동북아물류의 前陣기지로 개발하기 위한 거창한 사업이 본격 가동되였음을 의미한다. 구역면적이 7만3000평방킬로메터로 전 성의 39%를 차지하고 인구가 1090만으로 전 성의 40%를 차지하는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를 건설하면 일본, 한국의 자본을 크게 흡인하게 될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및 내지와의 협력을 촉진하고 동북지구 대외개방 새 문호를 구축할수 있다. 중국에서 이러한 선도지역을 세우기는 길림성이 처음이며 동북아의 바둑판으로 말하면 중국의 先手라고 볼수 있다. 2. 동북아 지역의 기하중심에 위치해 있는 두만강지역은 중국 내륙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水上通路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조선과 로씨야 정부와 오랜 시일 담판을 했지만 아직 두만강出海權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로씨야와 슬라브얀카 등 항구를 빌려쓸데 대한 협의를 달성하여 그나마 동해진출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중국-몽골 대통로 건설도 의사일정에 올라 목전 초기계획을 작성중이다. 자료에 의하면 목전 몽골국에서 조사확인한 80여종의 광산자원가운데 석탄은 1520억 톤, 철은 20억톤, 린은 2억톤, 동은 800만톤이라 한다. 수송력이 문제로 나서고있는데 중국이 中蒙大通路건설의 주체로 될것이며 몽골국에서도 그럴것을 희망하고있다고 중국 관련부문에서 피로했다. 실제로 중국 국가 철도부에서 현재 이 일을 기획중이라고 공영매체에서 이미 보도했다. 주지하다시피 연변에서는 延龍圖一體化를 여태 적극 추진해왔고 동시에 변경개항지 훈춘시를 통해 중-로항구, 중-조항구 항목건설도 추진하고있다. 로씨야의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지개발과 조선의 라진선봉경제특구 설립 추진, 한국의 속초항에 대한 동북아 물류항 육성계획과 맞물려 추진되는 훈춘변경경제합작구 동북아변경무역센터의 8월 16일 착공으로 2016년에 이르러 이 무역센터는 두만강 국제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훈춘에서 출발하는 중-로철도가 올 년말 개통되고 이어 훈춘-도문고속도로가 명년에 완공되며 길림-훈춘간 고속도로도 곧 국가사업으로 추진되는데 황금의 삼각주에 위치한 훈춘은 두만강개발의 핵심축이 될수 있는 기반을 다져가고있다. 훈춘을 窓口로, 연길-룡정-도문을 最前方으로, 장춘-길림을 엔진으로, 동북後背地를 버팀목으로 하는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 구도안에서 延龍圖를 核으로 한 연변은 말그대로 이 거대계획의 최전방이다. 3. 先導지역의 8大 중점공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두만강 지역 국제자유무역지대 건설 2) 長吉圖 국제 내륙항구 건설 3) 과학기술 창조지역 건설 4) 국제협력 산업지역 건설 5) 현대 物流지역 건설 6) 생태려행지 건설 7)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 8) 현대 농업모범지역 건설 여기서 생태려행지 건설이란 장백산의 생태자원과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는 여건優位를 기반으로 이 지역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국적 생태계 려행 및 人文려행, 그리고 특색있는 휴가, 휴양의 생태지역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최첨단 서비스업 집중지역 건설의 내용에는 금융보험, 서비스아웃소싱(外购服务), 비즈니스展示, 문화創意 등 분야를 기반으로 동북지역 자본시장을 건설하고 東北亞指向의 현대서비스업 체계수립 등이 들어있다. 그 외 현대농업 모범지역 건설에는 토지의 集約的경영과 적당한 규모경영, 그리고 농업의 전반적 기계화 실현 및 시설농업, 우수농업 창출 등 내용이 망라된다. 보다싶이 향후 이 지역에 상업기회가 무한정 늘어나게 될것이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러나 단지 상업기회만 늘어난다고 보면 절대 안된다. 문화, 교육 등 모든 사회분야에도 수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봐야 할것이다. 4. 우에다 周知의 사실을 이처럼 장황히 늘여놓는것은 우리 길림성 全域, 그리고 동북지역과 內地의 상관 협력관련지역,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참여하고 연구하고 관심하는 이 중차대한 대사를 앞에 두고 우리 연변, 나아가 전국 각지 지어 세계 각국에 진출해있는 우리 조선족들은 구경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이와 같은 변화를 맞이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의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計劃”은 중국 동북지역의 개발개방과 동북아개발의 거시적안목, 목표와 구도에서 치밀한 가능성연구와 檢證을 거쳐 내놓은 전략적계획으로 이제 5년 내지 10여년의 계획실시과정에 이와 련결되는 수많은 사업이 새로이 창출될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것이다. 대관절 어떤 사업들이 앞으로 창출될것이며 그런 사업들은 어떻게 전개될것인가? 이런 사업들은 예견된것들도 있지만 예견되지 않은것들도 필시 있으며 예견됐다 해도 아직 구체적 실시안이 연구되지 않은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족들에게 “평시불소향, 급래포불각(平時不燒香,急來抱佛腳)”이란 속담이 있다. 만약 앞으로의 실시행정에 모종 항목이 즉시 필요하다는것이 실증되여 그때 비로소 필요한 항목준비에 착수한다면 성복후 약방문식으로 기회를 놓지게 되거나 적어도 일이 크게 遲滯될것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장래에 對備하여 미리 예측을 하고 일찍 손써 준비작업을 시작하는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할수없다. 6. 례컨대 5년 내지 10년 사이,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지역에 로어번역인재, 몽골어 번역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리라는것은 누구나 예견할수 있는 일이다. 중국에 로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대학에 로어학부가 있으며 장춘에도 길림로어학원에 중등로어전문학교도 있다. 그러나 對 로씨야무역이 증대됨에 따라 로씨야어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제 중국과 로씨야의 국경무역이 급류를 타게 되면 이런 상황이 더 뚜렷하게 나타날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더구나 이 지역에 한국인이 대거 들어오면서 중국어, 한국어와 로씨야어를 동시에 구사할수 있는 인재가 반드시 대량 수요될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놀수 있는 적임자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로어를 배운 조선족만이 제격인것이다. 몽골어의 경우도 이와 다를바 없다. 이는 우리 연변에 초급, 중급, 고급 로어학교를 세우거나 연변대학에 로어학부를 설치하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로부터 착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것이다. 7. 그러나 언어문제가 전부인 것은 아니며 또 가장 중요한것도 아니다. 우리 조선족은 선도지역의 8大 중점공정을 망라한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과 관련된 전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극 연구하고 장래를 예견해야 하며 우리의 실정에 따라 상당수의 대응책과 실시안을 내오고 정부에 제안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실시하여야 하는것이다. 정부 상관 부처, 기업소, 사업단위나 대학의 연구부문은 물론, 나아가 사회단체나 개인도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방안을 연구함에 있어서 협소한 민족주의시각에서가 아니라 동북지역개발개방과 동북아경제의 엔진역할 증대의 큰 시각으로 출발해야 하지만 이 지역 개발에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충분한 자기인식과 자신심을 반드시 가지고 이 작업을 주동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8. 우리 조선족은 거개 연변이 중국조선족의 首府이자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연변이 없으면 중국조선족공동체가 없다고 여긴다. 우선 이런 생각이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성급히 따질 필요는 없다. 중요한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연변을 지켜내야 한다는것이다. 연변을 지켜낸다는 개념은 결코 추상적인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개발에서 우리 조선족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고 행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제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이 전면적으로 가동되면 참여자가 얼마일지 모른다. 장춘, 길림, 나아가 전 동북의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건 차치하고 내지에서도 直, 間接的으로 참여하게 되며 국제적인 참여자도 많을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 도전을 맞받아 적극 응전하면 다시 없는 기회로 될것이고 도전 앞에서 無준비로 손을 놓고있으면 주도권을 상실하게 됨과 아울러 모든 기회를 남에게 고스란히 받쳐주고말것이다.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적극 행동하고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에만 의뢰해서는 결코 이 일을 잘 해낼수 없다.  9. 조선족사회에서 국내외적으로 대대적인 여론을 조성하여 보다 많은 조선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하며 연구기관이나 학술계 등에서 관련 포럼이나 세미나(국내 혹은 국제)를 가지고 衆智를 모아 정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허락까지 받아내여 실행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하는것이 우리 연변을 지켜낼수 있는 방도중의 하나가 아닐가 생각한다. 10. 국무원의 비준을 받은 길림성 “장길도개발개방선도구계획”의 실시로 앞으로 5~10년 사이 이 지역의 엄청난 可視的 변화가 예상되는데, 이 지역의 最前方인 조선족자치주 연변에서 조선족선줄군들의 유력한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2009.9.4 장춘에서
최삼룡 편찬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한국 문화관광부 2009년 우수도서로 선정   2007년 한국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 초청으로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 진행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 창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정리 출판   기자가 최근 입수한데 따르면 한국 도서출판 보고사에서 2008년 8월에 출판한 중국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의 편찬도서《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이 2009년 7월  한국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로 평정되였다.  확인한데 의하면 중국조선족 작가나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학술저작이 한국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수도서로 선정되면 재판을 할 때에 책표지에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라는 마크를 달아주고 국가에서 몇권을 구입해서 여러 도서관에 기증한다.   무려 827페이지, 80여만자 되는  《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에는 시 38수, 소설 8편, 수필 22편, 희곡 1편과  편저자가 쓴 해제ㅡ《재만조선인문학의 친일작가와 작품에 대하여》라고 제목한 5만여자의 론문이  수록되였다.   평론가 최삼룡은 정년퇴직한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대학 조선-한국문학연구소의 요청으로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을 발굴, 정리, 연구하는 작업에 정진하고있는데 현대시권,  항일문학권은 이미 출판되였고 민요권과 산문권(백만자, 상, 하권)이 인쇄중에 있다.   친일문학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200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그 첫 결실이 2002년 5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자료전집 제6집》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연길에서 구독할수 있는 도서와 재료에만 의거하다 보니 많은 재료가 루락되였고 일부 재료는 여러가지 외적인 원인으로 수록하지 못하였었다.   이 책의 미흡한 점을 통절히 느낀 최삼룡평론가는  여러차례 한국으로  출국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연세대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들어가 유관재료를 발굴하였는데 그 자료를 복사하는데만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2007년 초 최삼룡평론가는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를 하게 되였는데 그 결실로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8만자)가 창출되였고 그 부산물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이 정리, 출판되였는데 이번에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친일문학연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성과물로 평가를 받는다.   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악독한 친일연극《김동한》의 작자가 김우석이 아니라 김영팔(金永八)이라는것, 박팔양의 창씨개명한 이름이『靑木一夫』외에『水原一夫』라는 이름이 더 있었다는것, 그리고《만선일보》에서 1942년 1~2월 사이에 조직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같은 제목으로 쓴 11명 문인들의 친일문장 11편도 이 책에 처음으로 수록되였으며 또 안수길(安壽吉)이 만주제국협화회 룡정분회의 상무원이였다는것도 이 책에서 처음 밝혀졌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만주 조선인 친일문학에 대한 편찬자나름의  일부 새로운 견해도 있는데 례하면 친일작품을 썼다고 하여 모두 친일분자로 결론할수 없으며 작자의 주도적이고 일관적인 표현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작품을 평가할 때에도 친일작품과 친일성향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야 한다는 등 견해가 그렇다.   (박문희[인터넷 길림신문]2009.8.27 )
57    중·한 언론의 초여름 읽기 댓글:  조회:4245  추천:65  2009-06-13
중·한 언론의 초여름이 뒤늦게나마 찾아왔다. 중·한 언론의 봄은 중·한 언론인이 약속에 따라 만난 그 무슨 "언론포럼”같은 데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88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면서 얼음이 풀리고 1992년도 중·한 수교가 되면서 완연한 봄빛을 맞아온 것 같다.   그런데, 봄을 맞아서 초여름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저그만치 17년이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최로 지난 11일 북경에서 열린 언론인 포럼. 중국과 한국의 주요 언론사 고위 언론인들이 참가한 사상 첫 “중·한 고위급 언론포럼”. 17년 만에 만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량국 언론의 역할, 언론을 통한 량국 국민간 리해 증진 방안, 량국 언론교류 및 협력 채널 확대 방안 등에 대해 논의를 한 이번 포럼을 나는 나름대로 중·한 언론의 초여름으로 상정(想定)해 본다. 중·한 고위급 언론인들이 사상 "첫 번째 교류의 장"을 량국 수교 17년 만에 만들었다면, 봄과 초여름의 거리가 이 정도로 멀다면, 누가 봐도 “적시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더 늦기보다는 그래도 일찍한 셈이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밖에.  어쨌거나 이런 포럼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무를 받는다. 그 17년 간 이른 바 동북공정, 올림픽 성화 봉송, 서장, 로무송출 등 적지 않은 문제로 음으로 양으로 티격태격 해오면서 “혐한론”이나 “반중론”까지 불거져 나오고 량국 국민의 감정도 상당히 다친 터라 량국 고위언론인들이 고민도 많이 한 끝에 서로간 해해년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게 그래도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다림에 조금 지치긴 했지만도. 실상 이와 같은 고위층 언론인의 만남의 필요성은 그간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경제 교류에 비해 문화나 교육 등 면의 협력이 너무 부진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럼에서의 발언을 통해서도 량국 국민들 간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파생된 반한, 반중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언론이 정확한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는 데 대해 양국 언론인들이 심히 공감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발언 속에 더러 각자 자국 언론을 점검해보는 의식도 진하게 배여있고 서로 대방 국가를 더 깊이 알아야 하겠다는 의중도 보이고 자주 합동취재도 하면서 대방 나라의 실정을 자국 내에 제대로 알리자는 의지도 보이여 기분이 괜찮다.    중국이 세계와 함께 올림픽을 치르고 또 이번 금융위기도 함께 겪는 사이, 그리고 양국이 제마끔 자기의 골칫거리들을 가지고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중·한 양국 국민간의 갈등도 퍽이나 갈아앉은 이때 이와 같은 포럼이 열렸으니 모임의 분위기도 엄숙하고 평화롭기만 할 뿐 아주 화끈하거나 격동적이지 못할 건 당연하다. 늦겨울은 진작 옛날 일이고 그렇다고 땡볕이 지지는 한여름은 아직 아니니까. 하지만 발언 내용을 보면 모두가 따뜻하고 조금 따갑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이를 일컬어 초여름이라고 한다. 물론 양국 국민들 간 감정이 한참 격화되고 있을 때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라도 량국 고위층 언론인들이 오늘처럼 이렇게 모여 앉았더라면 문제 해결이 더 적시적이어서 훨씬 좋았을 것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매년 한차례씩 모여 앉을 계획이라니, 량국 국민들한테 무슨 “민감한 일”이 생긴다 해도 이번에 자리를 같이 한 근 30명 되는 고위층 언론인들이 이전처럼 나 몰라라 외면할까봐, 더구나 언론인 자체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마른 나무에 불이라도 달까봐 혹은 붙는 불에 키질이라도 할까봐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번 포럼에 대한 감상을 말하라면 논문이나 발언 내용의 중요성보다는 이른 바 고위 언론인들이 17년 만에 처음으로 코를 맞대고 앉아 얼굴을 익히고 친구를 사귀였다는데 의미의 비중을 더 두는 게 좋을 상 싶다. 일단 만나면 아무래도 말을 하기 마련인데, 말을 서로 주고받다 보면 아무래도 감정이 통하게 될 터이요, 그러다 가끔 삿대짓을 하고 침을 튕기며 다투더라도 싸움 끝에는 분명 정이 들게 될 거니까. 알륵이 있어도 끙끙거리며 5년이고 10년이고 곪아터질 때까지 묵새겨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보다 행동일터이다. 중·한 양국은 리념과 제도도 다르고 문화차이도 작지 않아 언론이 그 제약에서 벗어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례컨대, 중국의 주류언론더러 한국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국 측에서 봐도 유익한 비판, 이런 비판도 중국은 감히 못한다, 흔히.)하라면 한국의 주류언론더러 중국의 문제점을 비판하지 말라(기실 정확한 비판은 중국도 필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 할 상황이니.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우선 중국이나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중요한 사실과 그 사실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포착과 그것에 토대한 책임성 있는 보도일 것이다. 이 점에 류의치 않는다면 사달은 아무 때든 불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량국 고위 언론인들의 책임성 있는 약속 리행으로 이런 생각이 부질없는 걱정으로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언론인들이 자주 소통을 하다보면 서로 대방의 생각을 정확히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양국 국민이 서로 오해를 하더라도 그런 오해를 언론인이 나서서 풀어주는 그런 바람직한 언론으로 거듭나겠지. 아래 중·한 량국 11명 대회발언자들의 발언에서 몇 마디 추려 본다. --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진정한 이웃이 돼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소통에 량국의 책임 있는 언론들이 나서자.” “량국이 문화 사대주의와 자기 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문화를 편견 없이 인정하는 문화 상대주의로 나아가자.” “량국 국민 간에 감정 문제가 생길 경우 정확히 주시하고 신속하게 해법을 찾자.” “량국 언론이 서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보도하자.” "량국 관계 발전과 교류의 방향을 잘 파악해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자." 보다시피 무슨 대단한 말들인 건 아니다. 이런 말쯤이야 할 줄 몰라 못하겠는가. 이런 말을 하려고 언녕부터 별러온 사람들이 과연 적었겠는가. 암만 별렀댔자 그게 무슨 소용 닿겠는가. 하지만 별로 대단치 않는 이런 말들이 오늘 조금 대단하게 여겨지는 건 그런 말들이 양국 고위언론인 포럼석상에 올려졌고 아울러 서로에게 뜨겁게 안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중·한 언론의 초여름”이 늦게나마 찾아왔다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욕하게도 화끈한 여름이 기다려지게 되는 것이다.
56    나의 집 사랑 이야기 댓글:  조회:5003  추천:59  2009-01-31
나의 집 사랑 이야기 ○ 중국 길림성 화룡시 희망복리원 원장 리 문 철 나는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나와 누나도 몸이 허약하여 늘 시름시름 앓곤 했다. 일가 일곱 식솔의 생계는 어머니 한 사람에 달려있었다. 어머니는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거나 강변에서 모래를 쳐 얻은 수입으로 온 집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나는 새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원족도 딱 한번밖에 가본 적이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 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은 한 가지 일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때 내가 쓰는 공책이란 형편없는 저질이었는데 그런 것마저 살 돈이 없어 정면을 쓰고 나서는 뒤 면에도 글을 써야 했다. 몇 푼 안 되는 연필도 없어 연필 끄트머리를 나무 가지에 동여매여 썼다. 그런 연필로 공책 뒷면에 숙제를 하려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우리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내가 쓰고 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 다니니? 너 아빠엄마는 이런 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나의 공책을 빼앗아 와락와락 찢어 바닥에 동댕이치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널려진 공책을 보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어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랫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열이 몹시 나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마음 아파하시면서 강변에 모래 치러도 나가지 않고 나를 간호하셨다. 그런데 토요일 날 저녁인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날 보러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 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우리 반 학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내가 앓는것을 보고 선생님한테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나를 호되게 비평하시고 그래서 내가 앓는것이나 아닌지 하여 몹시 걱정하셨던것 같다. 우리 집을 찾으시어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우리 집의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 난 선생님은 자식공부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 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었다. 선생님은 그날 눈이 퀭해진 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었다. "내가 너를 잘못 꾸지람 했구나. 어린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마음 아팠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그 후 선생님은 자주 우리 집으로 찾아오셔 나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나한테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한다. 가난했던 가계, 암울했던 동년은 나에게 간고소박하고 고생과 노고에 견디는 품성을 키워주었으며 자상하신 아버지, 근로하신 어머니와 따뜻하신 선생님의 사랑은 나의 어린 가슴에 맑고 밝은 마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아마 그 마음의 씨앗이 눈을 틔고 그 눈이 작은 줄기로 자라 점차 아치를 치고 열매를 맺게 되었을게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가난한 아이들과 사회의 최하층에 처해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뜻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고 종당에는 자기의 필생의 사업으로 삼게 된것이다. 30여년 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문화혁명 후기였던 그때는 전반 사회가 말 그대로 침체상태였는데 그러던 중 수년 전에 타도되었던 등소평이 다시 정치무대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보이는 듯 했다. 그때 나는 갓 스무살이었는데 농촌에서 뽑혀 와 화룡시 부동산관리소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 숙소가 없어 나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어 들었다. 그 집 방에 들고 나서야 그 집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 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내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그렇다 할만한 수입 내원도 없이 여섯 식솔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몇은 당연히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동년을 만끽해야 할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다니? 그 광경을 보는 나는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나의 앞에는 두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눈을 질끈 감고 그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세내어 드는 길과 이 집에 그냥 눌러 있으며 그들과 고생을 함께 하는 길 이 두가지었다. 이 집을 떠나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양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릴 때 고생하던 생각이 되살아 나면서 동정심이 괴어 올라와 이 집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나한테 무슨 도울 힘이 크게 있으랴만 그래도 나는 사업이 있는 한창 나이 아닌가?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아이들까지 죄를 받아야 하나? 이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장차 커서 무용지물이 될게 아닌가? 고민끝에 나는 결국 이 집에 눌러 앉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선 나는 매달 39원 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그리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들과 연통을 해서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학과지도를 해주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나는 봄에는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그리고 짬을 내여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때 복직을 한 등소평이 나라가 잘 되려면 계급투쟁도 계급투쟁이지만 우선 경제를 춰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한창 철도수송 분야로부터 정돈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가서 계급투쟁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등소평을 다시 권좌에서 몰아내고 전국적으로 그를 재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다시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갔다. 이런 판국에 나는 뭘 하고 있었는가? "나쁜 사람의 가정"과 계선을 나눌 대신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심지어 감옥을 찾아가 “나쁜 사람”을 면회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러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나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면서 수차 나를 찾아 “교육”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왜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무척 곤혹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계선”을 나눌 수 없어 남이야 뭐라 하든 나는 그냥 나대로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기본 도리”를 깨닫지 못하니 우리 회사에서도 더는 못본 척 그대로 놔둘 수 없었던지 대회에서 수차 나를 공개 비판을 했다. 당시 계급투쟁을 부르짖던 살벌한 환경에서 회사의 책임자들도 아래 직원이 “검은 오류(黑五類)”와 휩쓸리는 것을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책임 추궁을 받을 소지가 있었던만큼 나를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주 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었다. 그래도 결국 나는 머리를 시종 “깨치지” 못하고 그냥 그집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4인방”이 잡혀 나오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어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게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 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었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었으며 넷째는 전국 소학생 스케이트시 게임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 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었다. 그들 온 집 식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마음도 말할 것 없이 개운하고 후련해졌다. 그리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보람을 처음으로 가슴 뿌듯하게 받아 안았다. 그 때를 시작으로 해서 나는 의지가지 없는 고아, 가정 살림 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 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노동 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락한 집은 행복의 일대 근원이다. 그것은 바로 착한 양심 다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집은 모든 사람이 자라는 요람이다. 정다운 내 집이 없으면 내가 대하고 있는 것이 비록 온 세상일지라도 역시 커다란 감방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과 궁전 속을 지날지라도 언제나 초라하지만 내 집만 한 곳은 없다. 한 사람은 그 나이가 얼마든 사업에서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를 막론하고 아무리 수고하거나 천애지각 그 어디를 방랑할지라도 우리의 피로한 희망은 평온을 찾아 역시 가정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갈 곳이 없고 가정의 따사로움을 누릴 수 없는 그들은 약세 군체로서 사회에서 소외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1982년이었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 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 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 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아내와 그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상의를 했다. 아내는 얼굴에 난색을 띠었다. 1979년에 결혼한 나에게는 그때까지 아직 아이가 없었다. 그때 나의 누나가 장기환자로 앓다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다. 누나가 사망한 후의탁할 곳이 없는 두 외조카를 내가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네 식솔이 18평방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집에서 붐비는 삶이 원래 기막힌데다 16살 나는 고중 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 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었다. 난색을 짓던 아내는 끝내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러는 아내가 나는 너무도 고마왔다.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 와서 보름만인가 나의 아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한 병실에 김해연이란 여자애가 입원해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 있었다. 여러 번 캐물어서야 그 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자기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고 아버지도 얼마 전에 자기 하나를 남겨놓고 사망했다고 했다. 아내가 출원하자 우리는 그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하여 우리 집 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우리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도 시키고 병 치료도 해주었으며 또 늘 영양식품을 사다 먹이고 입에 맞게 전문 밥과 요리를 해주어 점차 건강이 회복되게 했다. 아이들이 미안해 하니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여기가 바로 너희들 집이고 나는 너희 엄마다. 마음 놓고 있으면서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아이 둘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는데 그 후 우리가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노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정말 굶기를 밥먹듯 했다. 하루에 끼니 두 때를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그건 아주 정상 생활을 하는 거였다. 1988년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석탄을 때본 적이 없었다. 돈이 안 드는 땔감이란 저목장이나 기차역 목재적재장의 나무껍질부스러기를 주어다 때는 것이었다. 경비원들은 안전 책임 사고가 날까 봐 저목장이나 적재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긴 겨울을 나려면 그것을 줍는 길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용케 적재장에 들어가 한 마대씩 나무껍질을 긁어 담아 짐으로 메여 오군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이었던지? 그러나 불을 때면 추운 겨울은 날 수 있었지만 다섯 식솔의 배가 저절로 불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밥을 먹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당시 아내는 양식 창고에 출근하고 있었고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수업을 마치고 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노임만 가지고서는 다섯 식솔이 먹고 살기도 힘들었으므로 돈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부는 출근을 하는 한편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돼지치기 등 가축사양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을 만들기 위해 먹이는 돼지한테도 돈은 들여야 했다. 먹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와 아내는 쓰레기무지를 뒤지며 넝마주이 하듯 남들이 버린 감자껍질과 배추 잎을 주어다 얼리어서는 돼지를 먹이거나 닭 먹이로 했다. 때는 맏이가 갓 태어났을 때어서 아내는 애기를 업고서 짐승먹이 주이를 다녔다. 밀차에 뜨물통을 싣고 식당을 돌아다니며 뜨물 한통에 2원이나 5원씩 주고 사다가 돼지를 먹였다. 골목길에 뜨물을 쏟뜨려 길바닥이 어지럽혀지면 멀리 가서 펌프 물을 길어다 골목길을 청소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끼니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그러면 외상으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고 나중에 돼지도 팔고 달걀도 팔고 하여 그 돈으로 쌀값을 갚기도 하였다. 처음 데려다 키운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3년만에 대학에 시험 쳐 붙었다. 이는 그때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있은 큰 경사였다. 나는 아이가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좁은 집에 친구들을 몇몇 불러다 “축하연”을 차렸다. 친구들은 저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기념품을 하나씩 들고 와 춤노래로 방이 떠나갈 듯 우리 집에 새로 난 대학생을 요란스레 축하해주었다. 그날 밤 새 대학생은 우리 부부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내도 그 애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사내답지 않게 울긴!” 이렇게 그애를 나무람 했지만 나도 그만 눈물 두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다. 우리 민족이 자식교육을 중히 여기고 문화를 중히 여기는 우량한 전통을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그러나 실 생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도 늘 목격하게 된다. 적지 않은 가정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허리띠를 암만 졸라매도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가계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들이 돈을 댈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대학시험에 높은 점수로 합격되었지만 농민이나 도시 빈곤층 부모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학비 때문에 대학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나라를 잃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건너온 할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아버지를 공부시켜 중학교를 마치게 했다. 중학교 졸업생이라면 그 당시 큰 인테리였는데 그 보람으로 아버지는 화룡시예술단 창시자로 활약할 수 있었고 전직 연출(감독)로 되어 장막극 로 전국 우수연출상을 수상하고 등 유명한 노래가사들을 많이 창작해 낼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3년 대기황 때 심한 병환에 시달리면서 우리 가정은 몹시 어려운 나날을 이어왔었다. 아버지가 장기환자인데다 누나까지 지병이 도지다보니 아버지의 노임은 병구완에 다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모진 고생을 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문화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대학공부를 할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5년간 중앙농업학교 통신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한창 나이에 공부할 기회를 놓쳤던 일은 내 가슴에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고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할수 없었던 이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빈곤한 가정의 학생들을 보면 도시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눈에 고아나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이 발견되거나 그런 애들이 있다는 말을 얻어 들으면 무작정 그 애들을 찾아 우리 집에 데려오거나 무슨 방법을 대서든 도와주곤 했다. 아이들이 늘어나니 나의 39원 노임만 가지고서는 아이들을 학교공부를 시키기는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때 마침 개혁개방이 갓 시작되어 개인 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그때 나는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개인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 먹고 아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 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내 기대 이상으로 짭짤했다. 나는 그 수입을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썼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미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시 교외에 땅을 얻어 66 평방미터 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었다. 이 집을 지을 때 임시 셋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막막 텐트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전기도 물도 공급이 안 되는 텐트 속에서 지내는 생활이란 정든 연인들이 경치 좋는 강가에 멋진 텐트를 쳐 놓고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엮어가는 그런 낭만과는 하늘과 땅만큼 동이 뜬 것이었다. 친척 친구들이 이러는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자기들 집에 임시 들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게 싫어 내가 데리고 있던 고아들만 그들에게 잠시 돌봐달라 부탁하고 우리 부부는 딸 아이를 데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옹근 7개월을 텐트 속에서 지냈다. 집을 짓는데 돈이 딸려 재료를 이어대기 어려웠던 까닭에 집 짓는 일은 자꾸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빗바람 몰아치는 장마철이 견디기 어려웠다. 비가 주룩주룩 새는 캄캄한 텐트안에서 뜬 눈으로 날을 지새우는 고생이란 말 그대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무슨 짓을 못해서 이처럼 말도 못할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여러 가지로 자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간이었다. 그러다가 새날이 밝으면 모든 잡념을 다 뒤로 하고 다시 힘을 내서 집짓는 일에 뛰어들곤 했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미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우리는 드디어 새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친척 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겠지?” 김은실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다병한 아버지가 80여세의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집에 은실 아래로 초중에 다니는 여동생까지 달려 있어 수입 내원이 없는 집에 생활형편이란 말이 아니었다. 이제 바로 고중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김은실은 앞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앞에 길이 있기나 한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이 일을 알게 된 나는 주동적으로 은실을 찾아가 그를 우리 집에 데려왔고 학비를 대주어 계속 고중공부를 하게 했다. 은실이는 우리 집에서 4년을 있으면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하여 작년에 북경교통대학에 붙었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은실이는 기뻐할 대신 여전히 수심어린 얼굴빛이었다. "너 웬일이냐? 오늘 같은 날 너 의례 기뻐해야 할 거 아니야? 전업이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러냐?” 머리를 가로 젓는 은실이는 무슨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냐? 가타부타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내처 따져 물어서야 은실이는 자기의 걱정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런 게 다 아니에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병이 중하지 집은 찌그러져 금방 허물어질 것 같고 동생도 중학교에 들어갔지 하니 대학을 가도 공부가 머리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아요. 대학공부고 뭐고 아예 집어치우겠어요." 4년간 피타게 공부를 해서 어렵사리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중점대학에 붙었는데 그걸 포기하겠다니? 은실이는 두고 가는 아버지와 동생이 걱정되어 그러지만 나로서는 그러는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와 상의하고 은실이가 북경에 가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그의 다병한 아버지와 초중 공부를 하는 동생을 함께 우리 집에 옮겨 오게 했다. 김은실은 드디어 마음을 놓고 북경으로 떠났다. 은실이 아버지와 동생은 지금도 우리 집의 성원으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최광일은 내가 다년간 후원해준 특곤생이다. 나는 줄곧 "양민"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돈을 부쳐주었었다. 내가 이 일을 극비에 부쳤으므로 그는 "양민"이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사처에 수소문하면서 "양민"을 찾았다. 그가 많은 사람을 통해 수소문하는 과정에 점차 "의혹"의 눈길이 나한테로 집중되면서 1997년 어느 날 어느 우연한 일로 나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긴 시일 끝에 요행 나를 만나게 된 광일이는 이런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저는 ‘양민’이 나한테 부친 소유의 송금 통지서를 모두 복제하여 보관해 뒀어요. 저는 제가 ‘양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찾지 못한다 해도 저는 저도 역시 ‘양민’ 과 같은 사람으로 되려고 작심했습니다." 1998년 최광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우전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북경에서 학습하는 기간에 나는 그에게 컴퓨터가 급히 수요 된다는 사실을 알고 컴퓨터를 사도록 5000원 돈을 부쳐주어 그의 학습이 영향을 받지 않게 했다. 2000년 그는 북경시 20개소 중점대학의 일본어경연에서 단연 1등을 하였으며 2002년에는 일본에 가 연구생공부를 하게 되었다. 용화향 신안촌에 사는 차영옥은 진취심이 있고 학습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가정환경은 너무도 불행했다.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장기 환자로 병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빠 또한 정신병환자였다. 불쌍한 어린 영옥이의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나는 그를 여러 모로 살뜰히 도와주었다. 1998년 그는 길림농학원에 시험 쳐 들어갔다. 대학에 보낼 때 나는 학교에 영옥이의 특수정황을 소개해주었다. 나의 소개를 들은 학교에서는 그의 학비를 면제해주는데 동의했다. 작년에 영옥이는 학업을 순조롭게 완성하고 졸업 후 한 제약공장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출근한지 한 달 만에 그는 나에게 노임과 함께 편액 한 틀을 보내왔다.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학문탐구는 저의 꿈이었습니다. 저의 꿈이 우리 집의 불행으로 수포로 돌아갈 때 아버지가 다함없는 사랑으로 저의 꿈이 활짝 피어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 하늘같은 은혜를 어디 간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우리 글 신문인 에 나의 사적이 크게 실리었고 그 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나의 사적을 취재해 갔다. 얼마 후 이란 제하에 나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크게 보도되었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 간부들이 이 보도를 보고 감동된 나머지 모금을 해가지고 쌀, 기름을 사들고 돈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 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너희들의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자라서 … 그날 우리는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울었다. 나의 사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내가 아이들의 곤난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 부문의 일군들도 나를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연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우리 부부는 개체의 명의로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대문 기둥에 간판을 거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특수한 가정의 설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나를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을 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 그리고 공안부문에서는 우리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어 고아나 출옥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호적등록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정 자기의 안신처가 있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경제내원이 없어 공부를 할수 없는 애들을 부조하고 출옥인원들을 안치하는 일은 명실공히 나의 사업으로 되었다. 나는 그 전보다 더 바삐 돌아쳐야 했다. 고아를 수양하고 빈곤층 아이들을 도와줌에 있어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를 대주는 일만 해주면 일이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도와주면서 내가 갈수록 깊이 느끼게 되는 일이었다. 김일은 고아로서 거리를 떠돌며 걸식하던 유랑아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자 어디론가 가버렸고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농사를 짓다가 그를 더 키울 힘이 없게 되자 그를 집에서 내쫓았다. 어린 김일이는 거리를 누비며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느 해 어느 달에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민정부문에서는 그에게 출생증명서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수용할 수가 없다면서 나더러 그를 키울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나는 이미 9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고 있었으니 하나쯤 더 데려다 키우는 건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민정부문의 관련일꾼들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마음을 먹고 하는 일이니 망정이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속 태울 일이 많고 돈도 엄청 들었다. 이제 한사람 더 받아 키운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당분간 대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때가 다닥다닥한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을 한 어린이가 불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아려오며 거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수용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또다시 유랑걸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받았다. 이 아이가 방금 왔을 때 한 가지 모병이 있었는데 저녁에 잘 때가 되면 언제나 상의로 머리를 감싸고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꼬부리고 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전등만 켜지면 발딱 일어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거리에서 유랑 걸식하던 그가 그 어떤 불의의 습격에 마주치었을 때 이를테면 한밤중 길가의 집 모퉁이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불안한 쪽잠을 자다가 난데없는 발길과 주먹세례를 받을 때 무의식 중 그것에 저항하는 습관적 동작임을 나는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명치끝이 아파왔다. 이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려져 있는 여린 심령을 제때에 교정하지 않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커감에 따라 비틀린 마음도 교정 없이 자랄 것인데 그러면 그때 그의 눈에 이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 것인가? 기왕 아이를 수용한 이상 나는 반드시 아이에게 가장 깊은 정과 사랑을 주어야 하며 그로 하여금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한다. 하여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지게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매일 저녁 그와 함께 보내면서 잠을 자도 그가 안전감을 가지도록 품에 꼭 그러안고 잤다. 6개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잤다. 아이가 자기 나이를 모르지만 그러나 키가 겅충하게 커서 나는 그를 직접 2학년에 붙였다. 그리고 낮에 학교를 보낼 때에는 용돈을 조금씩 쥐어주어 차를 타거나 점심을 사먹게 했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또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주어 먹게 했다. 아무튼 일반 가정의 아이들이 누리는 삶을 그도 되도록 누리게 하려고 안간 힘을 다 넣었다. 석 달이 지나갔다. 이 아이는 점차 심리상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해탈되어 잠잘 때의 그 버릇을 고쳐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여 다른 아이들처럼 뛰놀며 유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김일이한테는 유랑생활을 할 때부터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을 때면 나의 방에 들어와 나의 호주머니도 들췄고 다른 애들의 방에 들어가 호주머니를 들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사탕이나 과자를 사다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어느 학부형이 내가 고아라고 불쌍하다면서 돈을 주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줄을 감감 모르고 나는 김일이를 도와주는 이들이 하도 고마와 학교에 선생님을 찾아 감사를 드리러 갔는데 선생님은 그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자극을 받을가봐 기회를 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전혀 뜻하지 않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김일이가 다른 아이의 방에 들어가 한 아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다가 그 방에서 자는 아이가 밖에서 돌아오는 통에 그만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삽시에 온 집안의 기운이 팽팽해졌다. 나이가 많고 주먹이 센 애가 그 일을 알고 김일을 쪼지었다. 열 살도 안되는 어린 김일이는 잔뜩 겁이 나서 또 다른 애 누구누구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다 실토했다. 김일이 이 정도로 “탄백”을 했는데도 주먹이 센 아이는 쪼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뿐이야? 아버지가 널 울집에 데려 오기 전에도 남의 돈을 훔쳤지?” 김일이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너무 배고파서…” 그러다나니 나중에 어린 김일이는 나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 다른 애들의 호주머니를 턴 일까지는 애들이 분한대로 넘길수 있었지만 나의 호주머니를 털었다는 말에 애들은 치를 떨었다. “이 새꺄! 너도 사람새끼냐? 개만도 못한 놈.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 “형, 누나. 나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제발 안 그러겠어. 엉엉…” 김일이가 손이야 발이야 비는 데도 애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런 새끼와 한집에 살자니 낯이 뜨거워 못살겠다.” “이런 새끼는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 야 당장 여기서 꺼져라!” 불쌍한 어린 김일이는 그말에 그만 잔뜩 겁이 나서 형이야 누나야 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 다시 안그럴게. 나를 쫓아내지 마! 엉엉엉!...” 이 일을 나는 그날 연길에 회의를 갔다 오다나니 그 이틑날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식구로 살고 있는 10여 명의 애들이 이구동성으로 분개를 표시했다. 만장일치로 이런 은덕도 모르고 패가망신하는 애를 어떻게 남겨둘 수 있느냐며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원래 김일에 대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라 이번에 터진 일이 너무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이들의 말을 내심하게 다 듣고 나서 그들을 차분히 타일렀다. “김일이를 쫓아내자구? 너들 생각해 봐라. 걔를 쫓아내면 걔가 어디로 가겠니? 김일이는 아직 어리다. 어린 아이가 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없겠느냐. 너희들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아이들을 꾹 눌러 놓고 내 방으로 돌아 왔는데 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나의 아들이 뒤따라 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손버릇 나쁘고 양심도 없는 아이를 왜 그냥 남겨두려고 합니까? 이 애를 남겨두면 다른 애들도 얼굴이 깎인다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다 벼르고 있어요.”라고 나를 설복하러 들었다. 다른 애들이 김일이를 쫓아버리자고 할 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친 아들이란 놈이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천둥같이 화를 내었다. “너희들은 양심들을 어디다 내팽겨 버렸니? 너는 애비에미 다 해주는 밥을 먹고 근심걱정 없이 자랐지만 김일이는 아버지 어머니 다 없는 고아다. 이제 열살도 안되는 걔를 내쫓으면 걔는 어디로 가야 하냐? 너 인정머리 있는 놈이냐? 너한테 걔를 쫓아 낼 권리가 있냐? 나가겠으면 네가 나가라! ” 내가 화를 몹시 내는 바람에 아이들 열몇이 문밖에 와서 무슨 일이 생길가봐 조마조마해서 모여서 있었다. 그 기척을 알고 나는 아이들을 모두 들어와 앉으라 하고 김일이도 불러오게 하였다.아이들이 분개해서 쏘아보는 가운데 김일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얼굴은 언녕 눈물 범벅이 되었다. 나는 기일이를 나의 옆에 끌어다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딱 그쳐. 남자애라는게 울면 못쓴다. ” 그러면서 그 애를 비평할 대신 칭찬을 해줬다. “내가 보기엔 너에게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 너는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들처럼 맛있는 걸 사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던거지?” 김일이는 내 말이 너무 뜻밖이었던지 더 크게 흐느끼며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래, 그게 너에게는 큰 쾌락이었지. 넌 종래로 혼자 사먹는 법이 없이 그냥 다른 애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잖아?” 김일이는 더욱 크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런데 어느 애가 갑자기 큰소리로 “걔는 훔친 돈으로 산거에요. 아버지 호주머니까지 털어낸 양심없는 나쁜 애에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써. 김일이는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자랐고 자기가 어느 날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의지 가지 없이 불행하게 자란 애들이다. 배가 하도 고프니까 물건을 훔쳐 먹을 수 있지 않니? 그러다 그것이 버릇이 될 수도 있지. 그게 어디 아이들 탓 뿐이겠냐? 우리 어른들한테도 책임이 있다. 물론 훔치는건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어린 애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함부로 쫓아내야 한다면 얘가 정말 나쁜 아이가 될 수 있잖겠니? 너희들 정말 김일이를 나쁜 아이로 만들고 싶니? ”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쯤 되자 나는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시켜볼 요량으로 한마디 농담을 했다. “수호전 너들 봤지? 양산백 호걸들이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 김일이가 그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양산백 호걸들처럼… ” 그런데, 나는 아이들의 기분 전환을 시키려고 농담삼아 한 말인데, 그만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어느 앤가 나의 말을 중단시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진 부자가 아니잖아요? 돈을 벌어도 다 우리를 위한 거잖아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애들도 다투어 말했다. “아버진 택시 타는 돈도 아까워 그냥 삼륜차를 타시지 않아요? 돈을 절약하느라고 술담배도 다 끊으시고 어머니 병치료를 위해 상해에 가실 때도 그 먼 길을 침대차도 안 타시고…식사 때도 늘 우리가 다 먹은 다음 어머니와 함께 우리가 남긴 밥과 채를 자시지 않아요? 우리가 다 먹어 남은 밥이 없으면 라면도 끓여 자시고 때론 굶기도 하시잖아요?...그러면서도 우리한테는 소비로 하라고 달마다 소비돈을 주시지 않아요?... ” 이 애는 말을 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방안의 애들이 모두 엉엉 울어대서 방안이 그만 울음바다가 돼버렸다. 그 통에 나도 그만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 날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서로간에 더욱 관심하고 아껴주면서 사이가 훨씬 가까와졌다. 김일의 진보는 더욱 눈에 띄게 알리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었다. 아이들에게 먹고 잘 곳이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것은 절대 아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참된 인간으로 키우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돈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돈을 잘 못 쓰다가는 오히려 아이들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자면 진정 아이들을 사랑하는 뜨겁고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시시각각으로, 처처에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장차 사회건설에 적응할 수 있는, 이상이 있고 삶의 올바른 목표가 있는, 도덕적 자각이 있고 진취심과 밝은 꿈이 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 적어도 그 기초 작업을 잘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은 아이들의 실정에 맞게 해야지 처음부터 요구를 너무 높여도 안 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나의 사업에서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일이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이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한 데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 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고 과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 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의 학습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학교를 찾아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습을 열심히 하는 아이는 제때에 칭찬을 해주고 고무를 해주었으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서는 제때에 타일러 잘못을 깨닫고 고치도록 했다. 김철희는 두도진 신민촌의 장애인가정에서 온 애인데 내가 수양하여 공부시키는 애이다. 이 애가 한번은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철희더러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검사를 하도록 요구했다. 철희는 전교 사생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는 일을 받아 당할 수가 없어 집으로 도망쳐와 행장을 꾸려가지고 농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는 철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네가 고중공부를 할수 있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몸이 불편하신 너의 부모님들은 네가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출세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계신다. 네가 이 꼴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 부모님들이 얼마나 실망하시겠냐? 요만한 좌절도 이겨나가지 못하는 애가 당당한 남자라고 자부할 수 있니? 이래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부모에 효도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여러 모로 리치를 따져주자 드디어 철희는 자기 잘못을 느끼고 학교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철희가 마음을 돌려먹자 나는 즉시로 학교 당국을 찾아가 철희의 가정상황을 소개하고 학교에서 철희에게 관심을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이때에야 내가 철희의 친부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내가 철희에 대해 이처럼 관심하는데 몹시 감동되어 했다. 결국 학교에서는 철희에게 주려던 처분결정을 철회했다. 철희는 학교에 돌아간 후 학습에 열중하여 종당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춘외국어학원에 붙는데 성공했다. 지금 철희는 이미 대학을 마치고 안휘성 황산시의 한 여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화룡시내에서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PC방 중독에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요.”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간 뒤 곧바로 지하 PC방에 가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퀭한 눈동자로 몇 시간씩 게임에 빠지는 자녀들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진 애를 다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나는 우리 집에는 PC방에 다니는 애들이 없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우리 집 몇몇 애들도 밤마다 PC방에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무척 놀란 나는 즉시 그 애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다짐을 땄다. 그 아이들은 이제부터는 PC방에 가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아이들을 매일 저녁 열시 전에 자도록 하고 열두시 쯤 아이들의 신발이 제대로 있나 검사를 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시름을 놓았었는데, 어느 날 열두 시에 아이들이 자는 방을 일일이 돌며 검사했더니 웬걸, 두 녀석이나 자리에 없지 않는가? 신발은 분명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데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지? 그날 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PC방을 한집한집 참빗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두시간 만에 찾아 들어간 담배연기 자욱한 한 PC방에서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며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우리 집 녀석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녀석들은 내가 매일 신발검사를 한다는 것을 어느 결에 눈치를 채고 신발을 제 자리에 얌전하게 앉혀 놓는것으로 나를 속여넘기고 창문으로 해서 감쪽같이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녀석들을 집까지 끌어다 놓은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녀석들더러 우선 제 방에 가서 자게 했다. 이틑날 저녁 나는 PC방 출입이 잦은 녀석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교육을 했다. --너들 생각해 봐라. 애비를 속이고 밤 열두시에 창문으로 빠져 세시, 지어 네시까지 담배연기가 매캐한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정신 없다. 매일 이렇게 몸이 혹사당하니 이틑날 공부에 정신집중이 되겠냐? 그래 일단 PC방 중독에 걸리면 심신이 다 망가지는 걸 몰라? --친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쌍히 자란 너희들이 자기 운명을 자기로 개척해야 할거 아니냐? 공부란 단순히 공부하기 위해 하는거 아니야. 자기 운명을 앞으로 자기로 열어나갈 수 있는 기능을 닦아 사회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당당한 이 사회의 주인으로 자라나자면 오늘 어릴 때부터 해로운 유혹을 스스로 물리칠 줄 알아야지. --너희들이 잘 자라줘야 이 아버지도 기쁜거다. 너희들 잘 자라주지 않고 하나하나 심신이 망가진다면 내가 그래 시름을 놓을 수 있겠니? 나는 녀석들더러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속으로 우러나오는 반성을 해야지, 맘에도 없는 반성으로 또 한번 아버지를 속여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하고 두 녀석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알고 있다니 시름을 놨다.” 나는 왜 목소리가 그리 낮으냐고 녀석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고 웃음띤 얼굴로 녀석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전체 모임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이상, 전도와 운명에 대한 교육을 하고 모두들 결심서를 쓰도록 했다. 전반 교육과정에 나는 위협과 공갈 같은 저질적인 교육방법은 쓰지 않았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나는 PC방 출입이 비교적 잦았던 녀석을 내방에 데려다 같이 잤다. 그 후 우리 집 아이들은 다시는 PC방 출입을 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공부에 더 열중을 하였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 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나와 아내는 매년 청명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열사비 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노인들을 찾아가 마당 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아이들에게 우리 말 예절과 한어예절도 가르쳐 아침 저녁으로 집안 어른들과 동네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줄도 알게 하였다. 사스로 온 나라가 바짝 긴장하던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닥쳤을 때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관심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스로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내놓고 집안에서 토론을 벌였다. “우리도 사랑의 헌금을 해야죠.” 형기가 차서 우리 집에 와 있는 청년이 자기의 소비돈에서 선참 50원을 내놓았다. 그가 솔선수범을 하자 너도 나도 다투어 호주머니를 털었다. 5원, 10원, 20원…이렇게 모은 성금이 800원 되었다. 우리 구역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도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우리 애들은 쓰지 않고 모여두었던 소비돈을 모아 모두 280원을 만들어 의연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우썩우썩 키워갔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 날이나 설날이면 집안에서 송구영신행사를 가지곤 했다. 그해 성탄절에도 우리 집 10여명 식구들은 선물들을 준비해놓고 오락활동을 벌이고 잛은 글짓기 시합도 가졌다. 과거, 현재, 장래란 세 단어를 가지고 짧은 글 짓기를 하였는데 김일이가 글 두개를 지어 단연 1등을 했다. 그가 지은 글은 이러했다 과거 나는 집도 없이 떠도는 유랑아였어요. 그러나 현재 나는 따듯한 가정이 있는 학생이예요. 장래 나는 훌륭한 경찰이 되어 나쁜 사람과 맞서 용감히 싸우겠어요. 그리고 한어로도 글을 하나 지었다 去我有家,在我有)暖的家,e我要孝敬88和。(과거 나에게는 집이 없었어요. 현재 나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어요. 장래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할래요.) 이런 스스로 교육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레 밝은 마음을 갖추게 되었다. 올해 소학교 5학년생인 김일은 지금 반급의 중대장이고 남을 잘 돕고 노동 잘하고 하여 작년에 학교에서 최우수 진보상과 노동열애상을 탔다. 6.1국제아동절 날에는 자기도 불우한 학생이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가 입던 옷도 벗어주고 내가 준 소비돈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학교선생님을 통해 아이들이 셈이 다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매양 격동되곤 한다. 나는 많은 고생을 감내하면서 밤낮 그들을 위해 쏟은 심혈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너희들은 마침내 앞으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너희들에게 마침내 자기의 인생 이상과 삶의 목표가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보람감에 기쁜 감정과 더불어 가슴이 후련하고 뿌듯해났다. 이처럼 다년래 나는 선후로 고아 10여명을 수양하면서 그들더러 가정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였으며 그들의 건전한 성장에 평탄한 길을 깔아주었다. 30여 년래 학생후원에 돈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나 자신도 계산해낼 방법이 없다. 매번 학교에서 개학을 할 때면 아이들의 학비문제가 나의 주요한 걱정거리로 된다. 아이들을 위해 정부 관련부처와 학교를 뛰어다니며 학비감면문제로 해당일군들과 상의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신경이 여간 씌우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매번 아이들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을 때면 나와 아내는 친자식이 대학에 붙었을 때와 꼭 같은 희열에 푹 잠기게 되는데 이 때면 노고로 인한 모든 고달픔과 번뇌가 씻은 듯 말끔히 가시어지고 모종의 성취감으로 정신이 부쩍 난다. 1998년 10월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목으로 밥을 넘기지 못했다. 병원에 가 검사를 해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간암후기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른 하늘에 생벼락을 맞은 듯 앞이 캄캄해났다. 과로로 인해 아내를 이 지경이 되게 만든 내가 용서 못할 죄인으로 느껴졌다. 1979년 나와 채명자는 결혼해서 18평방미터짜리 집에서 지극히 어렵게 살아왔다.아이를 낳기도 전에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돼지를 먹여 판 돈으로 아이들을 학교공부 시켰다. 첫 아이를 낳을 때 나는 30원 되는 병원 주원비도 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우리는 자기 집을 출옥한 인원이 사회로 진입하는 중계소로 삼고 그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 이러는 나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내 신랑”이라고 하면서 불평 하나 없이 나와 모든 고락을 같이 해온 아내!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생계를 돌보느라, 내가 하는 일을 돕느라 과로로 불치병에 걸린 아내!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내만은 살려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즉시 상해 병원에 가 확진을 하고 시급히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상해로 떠나는 날 내가 수양했던 고아들과 학생들이 모두 우리를 바래러 왔다. 그 애들에게 무슨 돈이 있으랴? 하지만 그들은 우러나오는 진심에서 자기 몸에 있는 돈을 다 털어냈다. 10원이 있는 애는 10원을, 5원이 있는 애는 5원을, 2원이 있는 애는 2원을 내놓았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꼭 병 치료를 잘해서 빨리 돌아와야 돼요.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한번 잃었는데 또 잃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거예요."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모자간이 아니면서도 모자간을 초월하는 사랑만큼 가슴 치는 정이 또 있을까? 아내는 떨리는 손으로 병 치료에 쓰려고 준비했던 만원 돈에서 천원을 내여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의 정과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우리는 상해에 도착했다. 하늘도 눈이 있는가 보다. 진일보의 검사를 거쳐 아내의 암증의혹은 배제되고 종양으로 확진이 내렸다. 몸속에 지금도 종기가 6, 7개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와 우리 아이들은 모두가 일장 악몽에서 깨어난 심정이었다.0 아내에 대해 조금 시름을 놓게 된 나는 내가 이미 푹 빠진지 오래인 사업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갔다. 한번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맞닥쳤다. 진래감옥의 초청을 받고 가 감옥수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30년 전에 후원해주었던 주인집 박씨의 맏아들을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안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 박씨는 출옥후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미얘기를 한 바이지만 그때 맏이는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했었는데 졸업 후 어쩌구러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감옥수의 아들로 고생스레 자라온 그였지만 평생 농촌에서 땅을 뚜지며 묵묵히 살아나가야 할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기의 기막힌 신세를 한탄하며 모대기던 그는 시내에 들어가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혈혈 단신으로 어느 큰 도시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남의 돈을 아주 쉽게 자기 손에 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단지부서기를 할 때 노래처럼 부르던 이상과 인생목표는 이미 그의머리속에서 까맣게 사라져버린지도 오랬다. 그는 쉽게 훔친 돈뭉치의 유혹을 부리치지 못하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훔친 다음 손을 씻고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범죄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이런 마음을 사려먹었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얼마 안 돼 그는 절도죄를 짓고 진래감옥에 들어갔다. 진래감옥에서 강연을 하는 나를 알아본 박모는 몹시 놀랐다고 했다. 이삼십년 전 자기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을 강산이 몇 번 변한 오늘 자랑스러운 곳도 아닌 감옥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부끄러워 나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실토정했다. 그런데 부끄러운대로 나의 도움을 받고 싶더라면서 주동적으로 나를 찾은 경위를 나중에 내가 그와의 면회를 마치는 순간에 밝히는 것이었다. 면회실에서 우멍한 눈으로 나를 일별하고는 참괴스레 머리를 돌리고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은 끝이 없었다. 그 눈물은 감동의 눈물이기에 앞서 부끄러움의 눈물이자 자기를 도와준 사람의 희망을 저버리고 굽은 길에 들어선 못난 자기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이요 회한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도 한때는 학급을 이끄는 학생대표였지 않았는가? 그때 그 열정과 호기는 어디로 갔어? 대관절 무슨 유혹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무슨 유혹이? 배우기 싫어서? 일하기 싫어서?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난 20여년간 그에게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는 불현듯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리에서 그는 그 이상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도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낱낱이 읽고 있었다. 작별하면서 나는 "새 출발 준비를 열심히 해! " 하고 한마디를 했다. 그는 말은 없이 그저 머리만 거듭 힘 있게 끄덕여 보였다. 그 후에 나는 수차례 그를 면회하러 갔다. 그도 감옥에서 열심히 노동개조를 했다. 개조 표현이 좋아 1998년 그는 드디어 2년 앞당겨 출옥하였다. 하지만 40을 바라보는 그는 어디 갈 곳마저 없었다. 나는 그를 우리 집에 데려다 잡일을 시켰다. 그 후 나는 그에게 대상도 소개해주고 혼례식도 치러주었다. 하여 그에게는 포근한 가정이 있게 되었다. 그 후에는 외국노무를 나가겠다고 하여 수속을 해주었다. 한번은 그한테 돈이 급히 수요 되었다. 갑자기 어디 가 꾸려 해도 꿀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남몰래 아내의 의약비용에서 2000원을 잘라내어 그에게 주었다. 얼마 전 나의 아내가 한국으로 갈 때 그는 2000원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면서 "이전에 아저씨가 저한테 뀌어준 거래요."라고 했다. 아내는 "아저씨가 뀌어준 돈은 지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우선 조카 살림을 춰 세우고 나중에 봐." 아주머니의 이해와 지지 앞에서 아주머니의 몸속 간장에 아직 혈관종기가 다섯 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감동된 나머지 아주머니를 덥석 그러안고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좔좔 흘렸다. 지금 그는 연길시의 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가 세 식구가 본분을 지키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몇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 잘 있느냐 무슨 어려움은 없느냐고 문안을 한다. 남윤송은 타인상해죄로 17년 유기형을 언도받았는데 나의 도움 밑에 개조에 노력하여 2003년 2월 앞당겨 풀려나왔다. 출옥 후 일시 거처할 곳이 없자 나는 그더러 우리 집에 와 있게 하였다. 그는 심한 폐결핵으로 앓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 집에는 내가 데려온 가난한 애들이 6명이 들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감염이 될까봐 걱정이었다. 생각 끝에 그에게 단독 방을 하나 내주었고 아내도 따로 그에게 식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매번 식사를 끝내면 식기를 끓여서 소독을 했다. 그의 병이 깨끗이 완치 될 때까지 견지했다. 그러나 생활상의 관심과 병에 대한 치료만으로는 남윤송의 "사상병"을 퇴치하기에 부족했다. 사회상에서 기시를 받는 일이 내키지 않아 그는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하루는 남몰래 애꿎은 술만 축내면서 한밤중이 되도록 자지 않고 속에 가득 깔려있는 울분을 쉼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타이르고 말렸으나 그는 듣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나를 쥐어흔들면서 내가 자기의 고충을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는 키꼴이 1.93미터나 되는 헌걸찬 사내인데 반해 나는 키가 1.58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몸이어서 근본상 힘센 그를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그한테 이리저리 밀치어 내 몸 여러 곳에 멍이 들었고 다리는 어디에 다쳤는지 피까지 흘렀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설득작업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우선 네가 사회를 위해 해놓은 일이 뭔가를 생각해야지.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루기 마련 아니야? 남들이 왜 너를 차별시 하겠냐? 우선 남들이 널 차별시하고 깔본다고 탓하기에 앞서 네 자신이 차별시 당한 짓을 한 게 아니야? 네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자기절로 꿋꿋이 일어나야 한다. 너 오늘 이런 꼴로는 백년가도 사람들에게 존중 받을 수 없다. " 그날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는 나를 붙들고 울면서 "나는 정말 무용지물입니다. 나에게 과연 차별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날이 안 올 리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는 자기의 삶에 비관하지 않고 일마다 열심히 했다. 병이 완치되자 그는 천진에 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얼마 전에 그는 천진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회사에서의 사업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몸은 여기 천진에 살고 있지만 화룡의 나의 집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화룡의 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는 집입니다. " 그의 전화로부터 나는 그의 꽁꽁 얼었던 마음이 완전히 풀렸음을 폐부로 느끼었고 그의 앞날이 창창하기를 기원해마지 않았다. 이씨는 상해죄로 8년 유기형에 언도된 사람으로 돈화시 추리구 감옥에서 복역했었다. 그더러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사회에 돌아오도록 나는 늘 감옥에 가서 그를 면회하군 했다. 면회 때마다 마음속 얘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개조를 하라고 고무 격려해 줬고 과학기술 도서와 문화서적도 자주 보내주어 장래 출옥한 후 사회에서 일을 찾는데 기초를 닦게 했다. 이씨가 향기가 차 석방된 후 경제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나는 만원을 내서 목기공장을 꾸리도록 도와주었다. 몇 년간 경영을 열심히 잘한 보람으로 공장은 경기가 갈수록 좋아져 지금 이씨는 이미 백만 자산을 갖춘 민영기업가로 되었다. 장청학이란 청년은 상해죄로 유기형 7년에 언도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감옥에 가 보고를 할 때 특히 그를 보러 간적이 있다. 그 때 장청학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세상을 떴지 내가 이 모양이지 삶이란 것이 이제 나에겐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 범인이 앞으로의 생활에 신심을 잃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며 새 출발을 할 결심과 용기마저 잃게 된다. 복형인원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낙망할 이유가 없어. 신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개조를 해. 너 원하기만 한다면 출옥 후 나를 찾아와라.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나의 말을 들은 그는 삶의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다듬었다. 그는 마침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감옥에서 열심히 일하며 개조의 노력을 기울였다. 개조 표현이 아주 돌출했으므로 그는 2년 앞당겨 석방되었다. 그가 출옥하는 날 나와 아내는 새 옷을 사가지고 감옥으로 그를 마중 갔다. 식당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택시를 내서 그를 데리고 연길시내를 한 바퀴 구경시키면서 그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느껴보게 했다. 그는 감동되어 이렇게 말했다. "저를 믿는다면 저더러 이 경리 집에 남아 일하게 해주세요." 나는 정말 그를 우리 집에 남겨 매달 600원 노임을 주면서 그에게 할 만한 일을 맡겼다. 감옥에서 나오면 어떻게 살아나갈까 무슨 나에게 차례질 일감이나 있을까 걱정이 많았던 그는 일감이 생기고 생활이 보장되자 정서도 매우 좋아졌고 일을 해도 자신감에 넘쳐했다. 어느 한번 나는 연길감옥에서 보고를 할 때 형기가 거의 끝나가고는 있으나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왕모가 석방되는 날에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와서 왕모를 나의 집에 입적시켰다. 또한 왕모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왕모의 생계문제도 해결해주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 된 후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나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또 주모에게 여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나는 또 3명의 형기가 차 출옥한 석방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었다. 그중의 둘은 갈 곳이 없는 무의탁자이다. 그들에게 장사를 해보라고 돈 만원을 뀌어주면서 "바른 길만 걷는다면 어느 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장사가 꽤 잘 되고 있다. 이처럼 30여 년래 나는 시종 변함 없이 이른 바의 많은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는 사업에 많은 심혈을 기울려왔으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점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 몇 년래 나는 초청을 받고 여러 번 연변 자치주내 각지를 돌면서 사적보고를 하였다. 작년에 연길감옥의 초청을 받고 곧 출옥하게 될 석방인원들에게 강연을 한차례 하였는데, 그들은 나의 보고를 듣고 모두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어느 하루는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우리 집에 찾아 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 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나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에서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 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이 세상에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오늘 이 집을 찾아온 겁니다. "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 수 있다고 지금 감히 답복 줄 수 있습니까? " 나는 주저 없이 말을 받았다. "안 될 거 없소.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 집에 머무르오. " 그는 말한 대로 우리 집에 머물러 살았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무른 시간은 십여 일간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보고 이런 말을 했다. "이 원장님, 이 원장님한테 두 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 것에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 눈으로 보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나는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고 훌륭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시피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히 이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 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방탕한 아이의 개심은 금주고도 못 바꾼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박문길과 내가 도와주었던 모든 "방탕아", "문제아"들이 꼭 자기의 앞길을 잘 헤쳐 나가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들에게 대량의 심혈을 몰부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자금도 쏟아 부었다.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문철은 돈 많은 부자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확실히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74년부터 경제적으로 고아와 빈곤학생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들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자금이 있어야 했으므로 나는 이 문제의 해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나는 1985년에 회사의 직을 보류한 채 노임도 받지 않고 나와 자체로 돈이 될 만한 일들을 여러 가지 벌렸다. 돼지사양도 하고 점포도 차리고 식당도 경영하면서 자금누적도 얼마간 했었다. 2001년에는 종자공사 경리 직을 그만두었다. 후에 나는 곰 20여 마리를 치고 샤워실도 경영하여 해마다 근 1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간 내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지 않고 빈곤한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석방해제인원들을 여러모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는 100만원을 웃도는 자금이 있을 것이며 이미 큰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전히 비교적 가난한 상태에 있다. 그것은 내가 다년간에 걸쳐 번 돈을 모두 고아, 빈곤학생, 장애인, 그리고 석방해제인원들을 돕는데 썼기 때문이다. 한번은 아내가 감개에 젖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양주가 긴긴 세월 적어도 별장 한 채와 고급승용차 한대는 잃어버린 것 같네요." 그러는 아내를 보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물한 것’이요. ‘잃어버렸다’와 ‘선물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제대로 지키지 못해 누군가가 우리 몰래 가져갔다는 것이고 ‘선물했다’는 것은 우리가 자원해서 내놓은 것이고 기여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명세를 구구히 따질 필요야 없지. 물론 이런 일들을 하노라니 우리에게 희생이 있게 되고 우리 살림이 조금 고달파진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오. 우리는 조금 고달프지만 그 대신 의지 가지 없는 고아들이 의탁이 있게 되고 돈 없는 학생들이 대학 꿈을 이루고 방탕아 문제아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되지 않았소? 이 큰 명세는 따져야 하오. 세상에 이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데 있소?" 나는 아내에게 또 이런 말을 했다. "기왕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이 길이 아주 어렵다 해도 후회 없이 끝까지 걸어 나가야 하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나는 어려서 모진 고생을 다하며 자랐다. 오늘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지지리도 못살던 지난 날을 깡그리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나에게 능력이 있다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이것은 철칙으로 우리에게는 개인의 이익을 옴니암니 따져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상당히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 가정 식구들은 늘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딸이 고중을 다닐 때도 매 주 돈 5원씩만 소비돈으로 주었고 아들이 소학교를 다닐때도 이틀에 50전 주었을 뿐이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담배와 술을 끊어버렸고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다.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우리 집은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고 나서야 우리 어른들이 비로소 밥술을 든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나면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어른이 좀 굶더라도 친부모의 사랑을 너무 일찍 잃고 자란 이 애들을 굶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종 나의 생각이었다. 20여 년래 우리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 적이 없으며 우리 집 식구끼리 명절을 쇤 적도 없다. 우리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나도 물론 이 제도를 준수한다. 한번은 시에서 회의를 하다가 집에 급한 손님이 와서 급히 귀가해야 하였다. 택시를 타면 5원이 들었고 3륜차를 타면 1원이면 집까지 갈수 있었다. 하여 삼륜차를 불러 탔는데 마침 그 인력거군은 용정에서 온 사람으로 본지에서 인력거를 몰려니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꺼림칙해서 우리 화룡으로 와서 인력거를 모는 거였다. 그런데 이 분은 아마 텔레비전에서 나의 사적을 본 모양,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온 분 아닙니까? 참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어찌 이런 초라한 차를 타시는지요? 좋은 일을 말하기야 뭐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집에 이르러 돈 1원을 내니 그분은 "선생님이 저의 차에 앉으신 것만 해도 너무 영광스러운 일인데 어찌 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기어이 받지 않으려 했다. 기차를 타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는 침대차에 앉지 않는다. 북경, 장춘, 상해,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좌석 표를 끊어가지고 앉은 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때때로 조용히 생각을 하다보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감을 느끼게 된다. 나의 아내는 중병이 있는 몸임에도 훌륭한 치료를 받을 대신 종일 나와 함께 고아들과 빈곤한 학생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나의 두 자식도 자랄 때 우유 한통 못먹고 자랐다. 좀 큰 뒤에는 나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때로는 나도 어떤 억울함을 당하여 마음의 고통에 모대기고 분하고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못하고 자기 자식에게 화풀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의 자식들은 용케도 참아내고 묵묵히 견뎌 내었다. 나의 딸 이춘이는 올해 23 살이다. 춘이는 어릴 때부터 줄곧 내가 수양하는 아이들, 빈곤한 아이들과 생활을 함께 했으며 나를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매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도와 곰을 먹이고 상점경영을 돕곤 했다. 말하자면 나의 사업에서 좌우 팔이 되어주었다. 작년에 그가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떠나갈 때 춘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아빠, 나한테 기념품을 사주지 않을래요?" 하고 물었다. "너 가지고 싶은 게 뭐지?" "MP3. 사주실래요?" "그거 하나에 얼마씩 하는데?" "600원 하는 것도 있고 1000원씩 하는 것도 있어요. " 나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얘야, 우리 집은 오랫동안 간고분투 정신을 버리지 않고 이어왔다. 이 전통을 잊어서야 되겠니? 너 우선 한국에 가서 공부를 시작해라. 그러다 그것이 정말 수요되거든 자기 절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나 사든지 하는 게 좋지 않겠니? " 딸은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유감을 남긴 채 한국으로 떠나갔다. 기실, 나의 딸은 나를 따라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는데 출국을 하면서 기념으로 MP3 한대 사달라는 건 조금도 분에 넘치는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아직 돌봐줘야 할 어려운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가계계산을 꼼꼼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각박하면서도 의지 가지 없는 고아나 가정 살림이 어려운 학생들이나 석방해제인원들이나 홀로 사는 노인, 지체장애인과 같은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씀씀이가 대범했다. 장홍란은 내가 수양한 빈곤학생인데 작년에 동북사범대에 시험 쳐 붙었다. 그를 대학에 보낼 때 나는 그에게 CD기 한대를 사주었다. 그의 언니가 출국유학을 갈 때 돈이 모자라니 나는 비싼 이식으로 돈 3만원을 꾸어 그를 출국유학 시켰다. 매년 설이 되면 나와 아내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노인, 지체장애자와 곤란 호들을 한 집 한 집 방문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수년래 나는 선후로 여러 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었으며 석방해제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평균 해마다 만 여원어치 되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친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하는 데는 나로서의 도리가 있다.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서 MP3을 선물 받지 못한데 대해 조금은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복을 누릴 수 있다. 그중 최고의 복은 아마 친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이 의미에서 말하면 나의 딸은 분명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그 무슨 방법을 대든 미봉할 수가 없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 것은 미봉하기 어려운 그 유감을 단 얼마만큼이라도 줄여주어야겠다는 마음에서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그 아픈 상처를 다문 얼마라도 무마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애들도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 하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 말하면 결코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나라고 왜 편한 삶을 살고 싶지 않겠으며 늘 고달픈 삶을 살고 싶겠는가? 지금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식솔들이 지금은 23명 대가정과 한데 섞이어 먹고살고 있지만 어느 땐가는 우리 네 식솔에게만 속하는 공간을 마련해 가지고 단란하게 모여 살면서 가정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우리 식솔들을 태워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함께 구경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외상으로 26만원짜리 포크리프트 한대를 사서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희망복리원을 자기 힘으로 잘 꾸려나가자면 경제내원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0여 년래 내가 수양한 고아, 경제지원을 해준 빈곤학생, 석방해제인원은 모두 70명에 이른다. 그중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간 아이가 33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한 학생은 졸업후 연변과기대 에서 근무하고 있고 몇몇은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은 남방의 한국 기업에 취직했다. 개인으로 창업을 한 아이들도 많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 , , , 국무원에서 수여한 등 여러 가지 영예를 받았고 사적이 , , , 연변TV방송 등 많은 신문간행물과 기타 매체에 보도됐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영예를 단지 나의 전진의 동력으로 간주할 따름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명예가 중요한게 아니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 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한 가지 소망뿐이다. __끝__
55    소띠의 해,고향의 진흥을 기원하며 댓글:  조회:4155  추천:63  2009-01-27
소띠의 해, 고향의 진흥을 기원하며   대희대비가 엇갈린 쥐의 해 무자년이 저물고 세계경제의 중대한 변화를 예시하는 소의 해 기축년을 알리는 종소리가 “뗑~~!” 하고 울렸다. 그 소리가 인간의 심령을 울릴만큼 자못 웅숭깊고 우렁차다.    소의 덕성에 대해 인간의 평가는 종래로 대단하여 소를 “짐승 중의 군자”로, 지어 “동물 중의 부처요, 성자”라고 떠받들 정도다. 특히 소의 조건타발없는 봉사성, 근면성과 철저한 자기희생정신에 경복해 마지 않으며 흔히 경건한 마음으로 그러한 소의 정신을 배우겠다고들 발표를 한다.   명인들도 례외가 아니다. 로신선생은 <자조(自嘲)>라는 시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라고 했다. 곽말약선생은 자기는 몸집이 우람진 소가 아니라 “소의 꼬리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고 모순선생은 소꼬리도 아니고 소의 몸에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달려드는 파리와 모기를 쫓는 “소꼬리의 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인민의 황소(노복)란 허울을 쓰고 오히려 주인행세를 하면서 깍듯이 모셔야 할 주인(인민)을 괴롭히는 사람들, “닭의 대가리가 될지언정 절대 소꼬리로는 되지 않겠다”면서 벼슬자리만 노리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될수 있는 거룩한 심령의 고백에 머리가 깊숙이 숙여지지 않을수 없다.   세계가 금융위기로 심한 몸살을 앓고있다. 이러한 때 황소처럼 끄떡없는 우리 중국의 온건한 걸음새가 너무나도 듬직해보인다.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1%로 전망한 것과는 달리 올해 중국이7.0~8.9%의 경제성장을 이룩해낼것이며 세계 경기 침체를 완충하는 “기관차”구실을 할 것이라는 국제기구의 분석이 나왔다.   우리 길림성도 근년들어 발전을 재촉하는 움직임이 평범치만은 않다. 지난해 GDP, 고정자산 투자 증장폭 등 주요경제지표가 모두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했는데 올해도 이런 태세를 그냥 유지할 잡도리다. 3000만원 이상규모의 신규항목을 1500개나 새로 가동시킨다는 점만 봐도 여간 간단치 않은게 아니다.    연변의 잡도리도 만만치 않다. 올해 황소 등 7대산업 프로젝트를 계속 실시하며 고정자산 투자도 지난해보다 35% 나 더 많은 567억원에 도달시키려 계획하고있지 않는가!    국가 종합경제실력이 크게 강화됨에 따라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전략중심은 이미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졌으며 “3농”에 대한 국가의 투자도 아주 적극적이다. 농촌개혁에 대한 당의 17기 3차전원회의의 최신결정과 국제금융위기의 배경하에 4만억을 쏟아부은 중앙정부의 내수진작책, 그리고 농촌토지류전정책과 관련, 농민리익보장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속속 마련중인 각종 제도적장치 등은 최근년간 지지부진하던 농촌개혁을 자극하여 신농촌건설을 크게 밀어주게 될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국 등 나라에 진출했던 조선족농민들이 대거 귀국붐을 일으키고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주었던 토지를 도로 찾아오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지고있다. 안정된 삶의 보장인 고향땅의 중요성을 그 어느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피부로 느낄수 있는 오늘이다.     조선족농민들의 대도시 및 외국에로의 대량진출로 농촌인구가 크게 류실됨에 따라 장기간 인재결핍으로 시달리는 위기의 농촌상황이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우리의 농촌에 촌민들을 진정 대표할 수 있는 간부가 있어야 농민들을 이끌어가지고 토지합작사를 꾸리든 농산물판매합작사를 꾸리든 합작기금을 세우든 하나하나 중대한 일들을 해낼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촌간부를 할만한 적임자도 찾기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문제들이 한국진출농민들의 대거 귀국으로 잘 풀렸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또 이 문제가 조만간 잘 풀릴것이라고 믿는다. 우선 바깥세상에 나가 눈뜨고 돌아온 이들이 고향에 대한 애정과 피땀흘려 벌어온 돈으로 고향건설에 반드시 한몫 크게 할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촌간부의 원천은 환고향한 로무일군들속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대학교 졸업생들도 원천의 하나일수 있다. 우선 그들중 단 10여명이라도 농촌개혁과 고향건설에 큰 뜻을 품고 나서서 인재난을 혹심하게 겪고있는 우리 고향에 희망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물론 큰 포부와 상당한 준비가 없이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중앙으로부터 정책적으로 적극 밀어줄 조치를 대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정치가적 두뇌와 총명재질을 갖춘 청년들이 반드시 나타나 수많은 청년들에게 훌륭한 본을 보여주게 될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우리 농촌의 밝은 희망을 저 푸른 하늘에 띄워보고싶은 소띠의 해다.   근면과 유유자적의 미덕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소, 우직한 품성에 “황소고집” 으로 항상 굳건히 제 자리를 지켜온 소,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고 할 정도로 농업에 치중했던 력대 경제생활에서 거의 우리 인간과 한 가족이라고 봐도 될만큼 귀하게 대접받아왔던 소, 정말 우직하고 순박한 소의 본성을 본받아 여유와 평화를 누리며 새해부터는 우리 고향에 복된 삶을 부르고 영위하는 그런 힘센 존재로 우뚝 서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길림신문]
54    조선어의 능률적학습과 漢字교육 댓글:  조회:6067  추천:115  2008-09-30
조선어의 능률적학습과 漢字교육   □ 박 문 희   1, 문제의 제기   중국 경내조선족의 조선어서사생활에서 한자를 페지한지 50 년도 넘는 오늘 한자혼용문제가 의연히 거듭 거론되는 까닭은 조선어에서의 한자페지가 조선어의 학습과 활용에 시종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움에 있어서 조선어한자교육이 필요한가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것이 한자혼용문제의 본질이자 요해처이다. 조선어를 효률적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조선어한자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 아울러 한자교육을 거세해 버린 조선글전용정책은 조선어언어발전법칙을 어긴 것으로 우리 말의 발전제고에 걸림돌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페지해야 한다는게 본고의 주장이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 말 조선어를 배움에 있어서 근본으로 되는 법칙이 있다는 점에 대해 주의를 돌리지 않고있다. 표음문자이면서도 대부분 어휘가 한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조선어는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자체의 특수한 발전법칙을 태성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법칙이란 무엇인가?   우리말 한자어 (례를 들어 “표음문자”)가 우리 조선어 표기법으로 표기되였을 때 “표, 음, 문, 자” 이 네 글자가 겉보기엔 아무런 뜻도 없는것 같지만 기실은 각기 자기의 뜻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여기의 “표”자의 뜻은 바로 “表” 이며 그 외의 다른 뜻(이를테면 彪나 瓢 등)이 아니다. “음(音)”, “문(文)”, “자(字)”도 마찬가지로 다 자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 그것이 조선어표기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조선어 글자는 한자어휘를 형성하지 않았을 때는 개개의 글자가 무의미 철자에 불과하지만 일단 한자단어로 구성됐을 때는 그 한자들의 원뜻이 표층에 로출됐든 로출되지 않았든 개개의 글자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얘기다. 그 의미는 외부에서 부여한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다.   문제는 조선어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런 의미가 머리속에 떠오를수 없다는데 있다. 그것을 눈에 보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자를 가르치고 필요한 경우에 그것을 로출시키는것이다. 우리 말 한자를 가르치면 그것이 머리속에 떠오르고 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것이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 이것이 바로 영어와 같은 다른 알파베트문자와 구별되는 우리 글 공부의 본연의 법칙이다. (기실 영어도 몇개 안되는 자모로 복잡한 언어를 표기하는데서 오는 리해의 혼란을 피면하기 위한 자기 특유의 해결방법이 있다.) 우리글 공부는 이 본연의 법칙을 떠날수 없는것이다.   이 법칙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조선어공부에 필연코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을수 없다. 이런 대가치르기는 력사발전의 굴곡성에 의해 때론 굴곡적으로 표현될수도 있다.   이를테면 50년대 초기 중국조선족 언어문자정책이 “조선어전용”방침을 채택하여 실시한 례가 그것이다. 당시 우리 조선족가운데는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문맹이 많았다. 전 인민적 문맹퇴치 운동가운데서 우리 조선족은 우리 말 병음문자의 우세에 힘입어 문맹을 재빨리 퇴치하고 문화를 전면에 보급할수 있었다. 우리 민족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 문화를 보급한다는 의미에서 조선어전용정책의 제정은 대다수 조선족군중의 념원을 반영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조선어 자체의 학습법칙이 무효로 된것은 결코 아니였다. 단지 특수한 력사시기에 군중들의 문맹퇴치열망, 민족자주의식의 고조로 그 법칙이 잠시 은페되였을 뿐이였다.   결국 전 사회적 문화가 낮은 수준에서 탈피하면서 “조선어전용”정책은 그 한계를 드러냈고 따라서 “조한혼용”주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론쟁은 불가피한것이였다.   필연적 결과로 1953년도 “조선글전용”정책이 실시되여서부터 장장 50여년간 이 문제를 두고 론쟁은 그치지 않았다. 그중 일부 토론은 학계나 여론 기구에서 주도했고 일부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토론때마다 “두가지 의견”이 팽팽히 대립되였지만 시종 일치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데 기인된다고 볼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토론의 근본과 목표가 시종 분명치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 토론 각방이 각기 자기의 론점 론거를 제시했으나 누구도 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짚고지나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십수차례에 걸친 전용이냐 혼용이냐 하는 토론이 겉으로 보기엔 두가지 의견이 대립하는듯한 양상을 보였지만 기실 따져보면 적어도 네가지 의견이 교차혼선을 빚은 상태였다는것이다.   례컨대 “조한혼용”회복주장은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치한것이 아니고 대체로 두가지 견해였다. 즉 “한자어의 정확한 리해를 위해서는 한자어를 가르치고 적당히 신문간행물에 혼용해야 한다”(잠시 “리해론”으로 략칭함)는 견해와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 조한혼용을 하면 한어학습에 리롭다”(잠시 “방편론”으로 략칭함)는 견해 이런 두가지였다.   “조선어전용”주장 역시 견해가 두가지로 갈린다. 한가지는 “한자어를 가르치지 않고 순 조선어만 가르쳐도 조선어리해에 아무런 불편도 없다”, “혹은 우리 민족언어를 발전시키는 장원한 관점으로 볼 때 이렇게 하는것이 더 리롭다”(잠시 “전용론”으로 략칭함)는 견해였고 다른 한가지는 “조선어전용을 하되 한자어도 별도로 가르쳐야 한다”(잠시 “별도론”으로 략칭함)는 견해였다(여기서 말하는 “별도”란 한자교육을 학교 교육내용에 넣지 않고 과외를 리용, 자원원칙에 따라 별도로 가르칠수 있다는것이다).   이 네가지 견해는 실상 모두가 독자적인 견해들인데 아마 토론목표의 불명으로 크게 두가지 주장(전용론과 혼용론)으로 나뉘여 교차혼선을 빚은것 같다.   례컨대 “리해론”과 “방편론”은 련계가 거의 없는, 그리고 “조한혼용”에 대한 리해와 풀이가 완전히 다른 견해다. 그럼에도 일치하게 “한자혼용”을 주장한다는 리유때문에 다 같은 “혼용론자”로 되여버렸다. 한편 “전용론”과 “별도론”도 기실 판판 다른 견해지만 “조선글전용”이란 측면에서 주장이 일치하기에 함께 “조선글전용론자”로 돼버린것이다.   몇가지 견해중 “방편론”은 “전용론”의 강한 반발을 부르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조한혼용”주장의 첫번째 견해 즉 “혼용론”은 본질적으로는 정확한 것이였지만 론점을 받쳐주는 론거와 문제해결의 대안제시가 미흡했고 그 론점에 대한 리해에 따른 동조자도 적어 결국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조선글전용”주장은 강력했다. 기성 “조선글전용정책”의 후광도 후광이였겠지만 그 정책을 지키려는 의지와 결의가 확고했고 “內外의 추세”도 이 주장을 뒤받침해주는 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의 “방편론”에 대해서도 “리론우위”를 점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미 말했지만 “조선글전용”주장중의 두가지 견해(“전용론”과 “별도론”)는 실질적으로 다른 견해다. 일치하다면 이 두가지 견해가 모두 “민족언어의 자주성원칙”, “민족언어 수호”, “언어순결성 고수”란 이름으로 “민족의 감정과 大義”를 내세우고있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문제를 본다면 “한자혼용”주장중 “리해론”과 “조선글전용”주장중 “별도론”이 오히려 핵심문제에서 일치한 점이 있다고 볼수 있다. 왜냐하면 “별도론”은 “전용론”과는 달리 조선어공부에 대한 조선말한자어의 유용성을 인정하고있기때문이다.   원래 “조한혼용”이냐 “조선글전용”이냐 하는 토론은 의당 “우리글을 효률적으로 습득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한자교육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토론은 이 근원적인  핵심문제는 별로 건드리지 않고 단 “우리글의 순수성을 확고히 지키느냐 아니면 섞어쓰기로 우리글에 흠집을 내느냐” 하는쪽으로 번졌는데 그 결과 토론은 학술의 범위를 떠나 마치  “민족문화지키기”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공방전인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는 후과가 초래됐다. 이런 토론풍토에서 “조한혼용”을 주장하는 론자에게는 자칫 복고주의자, 민족언어말살론자 등의 감투가 날아들기 십상이였고 그들은 또 “조선어”의 “자주적발전”과 “순결성확보”를 방해하는 “위험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과거의 토론이 시종 문제의 근본과 핵심을 분명히 짚지 못했다고 하는것은 바로 이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언어를 어떻게 효률적으로 배우고 가르치고 발전시킬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떠나 이른바 “민족언어의 자주성원칙”, “민족언어 수호”, “언어순결성 고수”란 명분을 내걸고 민족정감을 내세우는데 지나치게 치우침으로써 토론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술성연구와는 거리가 먼, 거의 “정치적 리념가르기”에 가까운 기로에 빠져들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리념화”한 토론방법에서 뛰쳐나와 진정한 학술토론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고찰한다면 기실 “한자교육”, 나아가 “조한혼용”의 필요성, 합리성을 보아내기 어렵지 않은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조한혼용”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움에 있어서 조선어한자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이다. 바로 이런 취지에서 아래에 “조한혼용”(“한자교육”필수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의 합리성과 필요성을 몇가지로 나누어 규명하고자 한다.   우선 조선글의 한계와 조선어한자의 효용 문제를 말하겠다.     2. 조선글의 한계   조선글은 글획이 적고 표기법이 간단하여 문자를 익히기가 쉬운 반면에 표음문자로서 개개의 글이 독립적의미를 갖고있지 않기에 새로 접하는 신출한자어의 경우에 그 단어의 뜻이 일목료연히 안겨오지 않는 페단이 있다.   원인은 우리의 말과 글이 청각성 어휘와 시각성 어휘로 나뉘여진다는데 있다. “아버지, 어머니, 하늘”과 같은 청각성어휘는 귀로 듣는 즉시 뜻이 리해되는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말로 배워익혀 이미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수”나 “배식”이라 하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듣는 것만으로는 그 뜻을 분명히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수” 에 “配水, 排水, 倍數, 陪隨, 拜手, 拜受” 등 여러가지 의미가, “배식”엔 “配食, 陪食, 培植, 倍殖”등 각종 의미가 있어 뜻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휘들을 한자로 표기해 놓으면 그 뜻들이 보는 즉시 명료해진다(물론 배우지 않으면 봐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적 언어를 조선글로만 표기해도 개념을 리해할수 있다고 하는것이 “조선글전용”이 안고있는 모순이다. 필경 읽을 줄 안다는것과 그 뜻을 안다는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문분야용어의 경우 조선글의 한계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례: “증기타빈이란 汽罐에서 발생된 고압증기를 低壓力부분으로 引渡하여 軸車주위에 부설된 回轉翼을 고속으로 회전시키는 機關이다.” 이 문장에서 한자를 모두 조선글로 바꾸어 넣는다고 하자. 한자어의 뜻들이 확연히 안겨올 것인가? “기관”이란 두 동음어는 또 어떻게 리해하겠는가? 순 조선글로 표기된 이런 단어들을 한두개만 정확히 리해하자 해도 피곤할텐데 이런 전문 용어들로 꽉 차 있는 두툼한 기술서적을 읽어 내려 가자면 그 고초가 얼마나 막심할것인가 ?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풀어 쓰면 해결이 된다는 론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론리에도 무리가 있다.   례: “그의 작시금비론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가령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하자. “작시금비론” 이란 말은 “초면상태” 에서 그 뜻을 바로 리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어려운 한자어”로 치부해서 “과거를 긍정하고 현실을 비난하는 론조” 따위 “쉬운 말”로 바꿔 쓸 것인가? 답안은 매우 간단하다. “쉬운 말”로 바꿀 것 없이 그것을 “昨是今非論”이라고 한자로 표기해 놓으면 된다. 보는 사람은 보는 즉시 그 뜻을 알고 또 쉽사리 잊지도 않을 것이다. 그 다음번엔 “작시금비론”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 볼수가 있는 것이다.   력사적으로 형성되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여 온 생명력 있는 말들을 필요 이상으로 이른바 “알기 쉬운” 새로운 고유어합성이나 새로운 한자어로 “다듬는”다면 오히려 력사와 전통을 단절시키고 언어의 천박성만 증대시키는 언어혼란을 빚어낼수 있다. 조선말한자가 완전히 페기처분당한 오늘 현실에서 우리 조상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신고스레 다듬고 벼려온 맛갈지고 아름답고 짜임새 좋은 한자어들이 무참히 배격당할 위험은 항상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 글이 배우기가 쉽다는 말은 이미 正說로 굳어진듯하다. 그러나 이 說이 자칫 우리 글을 해치는 함정이 될수 있다는데 류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글이 선진적이고 한자가 락후한 문자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 론자들은 “한자는 한뉘를 배워도 다 못배워내는 반면에 조선글은 몇년 지어 몇달이면 다 배워낼 수 있다”는 극언도 서슴치 않고 한다. 이와 같은 오도로 하여 많은 학생들이 조선글을 읽을 줄만 알면 다 배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조선어는 배울게 없다고 여기는 학생도 결코 소수가 아니다.   기실 세계상의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조선어 역시 한 평생 배워도 다 배워낼수 없다. 1996년에 출판된 엣센스국어사전에는 우리 글 어휘가 15만어가 수록되여 있다. 근 50년간 조선글을 읽어왔고 20여년간 신문사 편집으로 일해온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리 글이 결코 쉬운 글만은 아니라는것이다. 내심 두려운 일이 한가지 있다. 한자교육을 계속 지금처럼 배격해 나간다면 우리 글이 세상에서 배우기가 가장 힘든 글로 전락되지 않을가 걱정이다. 아니, 이미 전락된지가 오래되여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심각한 불감증을 앓고 있는 그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글이 안고 있는 한계를 의도적으로 인정치 않고 조선어를 세계적으로 가장 뛰여난 글이라고 극찬만 하는 것은 설사 그 동기가 뜨거운 민족애와 민족적 긍지감으로부터 출발한 것일지라도 실질상 리론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미흡한 점이 많으며 실천적으로도 해로울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 공부가 조선글 전용으로 인해 비능률적으로 진행된다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전반 교육수준향상에 계속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3 . 조선어한자의 효용   표음문자인 조선글에 대비해 표의문자인 한자의 가장 큰 우점은 바로 그것의 “表意性”에 있다. 글자마다 뜻을 가짐으로써 글자와 글자를 련결해서 새말을 지어내는 강력한 造語力을 지니고 있다는것이 바로 한자의 妙所다. 新出 한자어의 경우, 각 한자의 訓과 音을 익히고 그 훈들의 결합인즉 그 한자어의 뜻이란 점을 발견하면 그 단어의 뜻을 똑바로 리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 배운 한자와 이미 배운 한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의 일차적인 뜻은 자동적으로 리해되여 어휘확장이 아주 능률적으로 이루어진다. 리해에 토대한 학습능률의 제고로 어휘습득량이 확장됨에 따라 일부 한자의 파생적의미도 어렵잖게 파악하게 되여 어휘의 2차적 뜻 리해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한자어 해득효과는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된다.   례를 들어 訓에서 제시한 “천(天)”자의 뜻은 “하늘”로 되여 있다. 여기에 새로 익힌 한자를 결합시키면서 “天地”, “天宮” 등으로 어휘를 확장해 나가다 보면 “天”字가 “하늘”이란 뜻 외에도 “자연의, 천연적인, 타고난, 선천적인, 임금, 하느님” 등 파생적 의미도 지니며 또 그것을 토대로 다른 추상적의미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알게 된다. 하여 “天理, 天生, 天命, 天性, 天成, 天賦, 天子…”의 뜻을 쉽게 파악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나아 가 “天長地久, 天藏地秘” 등이 가지는 추상적 의미까지 류추해내는 추리력과 창의력도 스스로 키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 文理가 확 트이게 되여 學力은 급속도로 제고될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자교육을 완전히 배격해 버린 상태에서의 조선말 한자어는 무의미철자의 집합체와 다름이 없어서 상기한 바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동참”을 “같이 참가함”이라고만 해석해 놓으면 학생은 ”동”자의 뜻이 뭔지 “참”자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그 뜻을 암기해야 한다. 그러나 “同(같이할 동)”자와 “參(참여할 참)”자를 각각 가르치면 선생이 해석할 필요 없이 학생은 자동적으로 “동참”의 뜻을 알고 기억하게 된다.   리해된 것이라야 빨리 기억할수 있다는것은 정한 리치다. 반대로 리해되지 않은 것은 왕왕 여러차례의 반복을 거쳐야 비로소 기억이 가능하다. 바로 우리의 학생들은 조선글로 표기된 한자어에서 뜻감을 잡을만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수한 무의미철자묶음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느라 기막힌 고역들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한자어의 리해를 돕는것은 한자교육일뿐이다.   한편 한자는 글획이 많고 복잡하며 글자수가 너무 많아 평생을 배워도 그 일부분을 겨우 배워내나마나 한 기막힌 약점도 가지고 있다. 3000년 전 한자의 자종은 3500자가량이었는데 2000년 전에는 약 1만자, 한자가 조선반도에 들어갔던 1500년 전 삼국시대에는 약 2만6000자가 됐고 오늘날 큰 자전에는 약 5만자가 실려 있다. 만약 이 5만자를 다 배워야 문자생활이 가능하다면 한자는 언녕 도태돼 버린지도 옛날이였을것이다.   그러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학술연구를 포함한 일반적인 문자생활에 있어 5만자의 한자 자종이 모두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글자만 2 ~ 3천자 정도 골라 배워도 조선어학습에 충분하다. 한국의 比峰출판사에서 동양고전을 번역하면서 분석해 보니 에 등장하는 漢字는 1500여자,  에는 1800여자 정도였다. 일본에서 상용한자로 쓰고 있는 것이 현재 1945자다. 일본은 한국보다 한자를 훨씬 많이 혼용하고 있음에도 1945자의 상용한자를 사용하면서 아무런 불편이 없다한다.   전문 한자만 사용하는 우리 나라의 경우 현대의 각종 출판물에 쓰이는 한자를 사용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통계를 낸 결과 950자가 90%, 2400자가 99%, 3800자가 99.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경대 언어학과 연구팀은 漢字 3000자만 알면 나머지 한자는 저절로 리해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988년 국가교육위원회와 국가어언문자공작위원회가 공동으로 ‘현대한어상용자표(現代漢語常用字表)’를 발표했는데 상용자 2500자와 차상용자 1000자 등 합계 3500자였다. 이 3500자만 알면 중국 모든 출판물의 99.48%를 커버한다고 한다. 이 정도의 한자는 학습에 큰 어려움도 없고 오히려 청소년의 뇌력강화 훈련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이미 과학적으로 립증된 상태다.   “전용론”은 대개 조선글에 대비해 한자가 락후하다는 설을 많이 편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 학생들 경우 소학교 때부터 한어를 主과목으로 배우는 상황에서 한자가 락후하고 배우기 힘들다는 리유를 내세워 조선어한자를 배격하는것은 무리하다.   한어한자와 조선어한자의 관계 등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래 “한자교육의 방법론”에서  좀 더 설명할가 한다.     4 . 한자교육의 당위성   우에서 언급한 리유로부터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조선글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메울수 있는것이 漢字일진대 굳이 그것을 배우지 말아야 할 리유가 없는것이다.   한자교육은 “조선어학습의 능률제고”외 다음과 같은 리유에서도 당위성을 가진다. 한자교육은 민족전통교양에 유리하다. 례컨대 우수한 우리 민족전통으로서의 륜리도덕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마당에 한자교육을 전통교양에 효과적으로 활용할수 있다. 한자안에 인성교육의 모든 요소, 충과 효의 도리, 옳바른 국가관, 보편적인 인류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교육은 모든 사회분야의 진보에 유리하다. 한자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한자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과 능력으로 사회에 보다 훌륭히 봉사할 수 있다. 언어학 연구분야를 보자.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어학연구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한자어학습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 풍성할 수 있는 문화적유산으로부터 멀어지게 됨으로써 놓치는것도 많을것이다.   우리는, 만약 한자사용을 완전히 페기한다면? 이런 문제를 스스로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한자사용이 완전히 페기된다면 그에 따라 사라지게 될 단어도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단어들은 한자에서 떨어져 나와서 의미와 소리로만 존재하다가 점차 기억에서 잊혀지게 될것이다.   우리 민족이 수천년간 사용해온 한자를 기반으로 한 지적사유의 령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한자공부문제를 간단히 대할수 없는것이다. 다른 건 제쳐놓고라도 우리말 사전에서 한자어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한자표기를 전부 없애버린다고 가정해보자. 우리의 언어문자생활이 과연 어떤 경난을 치를것인가 하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어느 분이 “한자혼용은 취할바가 못된다”면서 “우리 말의 페단에 대한 해결을 한자에 국한시키는것은 과학적이지 못하며 우리는 한자 없이도 독자적으로 우리 글을 더 합리하게 더 효률적으로 만들수 없겠는가에 연구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자 없이도 독자적으로 우리 글을 더 합리하게 더 효률적으로 만들려는 그 “량호한 념원”은 십분 가상치만 그러나 이 말은 아주 훌륭한 우리 말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 만들자는 주장에 가까운 것으로 가능성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발상 자체가 언어발전법칙과는 전혀 동이 닿지 않는것이다.   부대적으로 언급할 말이 있다. 필자의 짧은 관찰(일면적일수도 있으니 연구의 참고로만 삼아주기를 바란다)에 따르면 조선글전용주장은 대체로 두가지 부류에서 온다. 한 부류는 조선어를 쉽게 배우려는 이들이다. 리해가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필자는 조선어를 쉽게 배우려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코 조선어를 제대로 배워낼수 없다고 귀띔하고 싶다. 다음 한 부류는 한자교육을 받은 일부 학자들이다. 이미 漢字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직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조선말漢字를 가르쳐줄 대신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 底意를 도저히 알수 없고 리해가 되지 않는다.     5. 한자교육의 방법론   한어를 배우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실정에서 한자교육을 실시하면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날가봐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일각에서 “한어한자와 조선어한자 사이에는 차이가 적잖이 존재하는데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 한자어를 가르치면 학생들의 학습상 혼란이 조성되지 않겠는가?”하고 우려하는것이 그것이다. 이런 우려는 아주 현실적으로 제기되였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사고해보면 이 문제가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기실 모든 언어간에 차이가 없을수 없듯이 조선어한자와 한어한자 사이의 差異의 존재도 필연적이다. 이를테면 “입찰계약(入札契約)”, “입찰매매(入札買賣)”와 같은 한자어는 한어에서 “投標合同”, “投標交易”으로 표시되는데 그것은 필경 두가지 부동한 언어체계인만큼 차이의 존재는 확실하다. 한편 대량 엄존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실 조선어가 오랜 세월 자체의 언어발전법칙에 의해 발전해왔다는 유력한 근거로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자교육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리유로 될수는 없다. “혼란”이 올수 있다는 리유로 한자교육을 포기하는것은 조선어를 보다 높은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포기하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조한혼용”을 실시한다면”百聞不如一見”을 한어발음으로 읽거나 인명 “金鑫”이나 “盧春艶”을 “김신”, ”로춘연” 등으로 잘못 발음하는 현상이 생길가봐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지금 바로 시험적으로라도 신문 간행물에서 “조한혼용”을 실시한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필연적으로 대량 나타나게 될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출현은 결코 선생이 둔재이거나 학생이 저능아여서가 아니라 50여년간 한자교육을 페지하고 조선글전용 정책을 실시한 필연적악과이다. 訓과 音을 제대로 가르친다면 이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 “한자어音讀法”을 가르치지도 않고 한자를 “음독법”대로 읽으라고 요구할수 있단 말인가?   한어 한자와 조선어 한자의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교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는것은 언어공부의 좋은 방법이다. 옅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으로 점차 배워 나가다 보면 학생들은 자연히 두가지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지하게 될것이며 언어의 비교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될것이다. 이른 바의 혼란이란 배우지 않아 모르는데서 생기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자의 뜻, 훈과 음독법을 가르치면 배운 학생이 평생 활용할수 있다. 가르치지 않으면 학생이 평생 혜택을 볼 수 있는 엄청 큰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한자교육은 한어과에서 해도 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두말할것 없이 한자교육은 조선어과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한어과의 교수목적은 학생들의 한어 열독, 서사, 회화 능력을 키워 주는데 있지만 조선어과의 한자교수목적은 우리 말 한자어에 대한 학생들의 인지, 식별 능력과 서사능력을 높여 조선어 학습효률을 극대화하기 위한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어과에서는 한어병음으로 한자를 가르치고 조선어문에서는 訓과 조선말 音讀法으로 한자를 가르친다. 그러나 량자의 교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면 상호보완의 효과를 볼수도 있다. 이는 조선어 한자교수의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이 가능할것이다. 그리고 한자교육은 가급적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것이 좋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경험있는 전문가들의 공통한 주장이다. 이 점을 리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그외 “조선어한자는 번체자인데 그대로 배워야 하는가?”하는 물음도 제기된다. 필자의 소견엔 중국 조선족의 실정에서는 간체자로 배워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한자를 배우는 것은 선차적으로 한자어에 대한 리해를 도움으로써 조선어를 능률적으로 배우자는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번체자를 꼭 배워야 할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간체자를 배움으로 해서 생기는 일부 구체 문제는 전문가들이 공동연구를 해서 결정을 짓던지 하는 특수방법을 대서 해결하면 그만이다. 솔직히 한국 학생들이 한자를 배우기 어려워 하는 주요한 원인중 하나가 바로 번체자를 가르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중국의 간체자를 채용하지 않는데는 나라와 민족의 체면문제가 깔려 있겠지만 그러나 결과 혹사당하는것은 한자사용자와 학생들뿐인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선어전용”을 하는 전제하에서 한자교육을 학교 교육계획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런 견해는 조선어한자교육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합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요점을 말하면, 한자교육을 진행하면서도 학교 교재, 사회 신문간행물과 도서출판물들에서 혼용 혹은 병용을 하지 않고 조선어전용만 한다면 한자교육의 효과를 半減시키는 효과만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한자교육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역할 외 아무런 리점도 없는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교 교장들과 교원들이 “조한혼용”이나 한자교육문제에 대해 저촉적인 경향을 보이는것은 주로 학생부담과 교원들의 부담이 큰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어과에서 한자교육을 한다고 하면 원래의 교수내용에 한자교육내용을 가첨해서 그만한 부담이 액외로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무튼 조선어 한자를 더 배워야 하니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더 중해질건 뻔한 일이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실 불필요한 것이다. 만약 정부 차원에서 한자교육을 학교교육에 정식 도입한다면 이것은 조선어교육의 중대한 개혁으로 되는만큼 적어도 수년간(례컨대 3년 내지 5년 지어 더 긴 시간)의 준비과정과 시험과정이 있게 된다. 50여년간 실시해온 조선어전용정책으로 인해 조선족 소학교와 중학교 지어 대학교의 관련 학과는 전부 조선어전용일체화로 돼 있으므로 우선 교재가 재편찬돼야 하며 그에 따라 교원양성도 해야 한다. 그외 보도출판 분야 편집일군 양성, 사회에로의 조선어한자 보급, 여러 경로를 통한 한자혼용실험, 한자혼용실정에서의 언어규범화 후속조치 제정 등 代案들도 필연적으로 따라세우게 된다. 말하자면 한자교육정책은 정부 차원에서 상당시일을 두고 계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펴내여 실행하게 되는것이다.   이런 장원한 목표하에 계획적으로 편찬된 교재는 결코 학생들에게나 교원들에게 액외의 부담으로 되지 않으며 반대로 한자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해득력과 학습효률이 현저히 높아짐으로 해서 궁국적으로는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되며 조선족교육의 전반 소질이 크게 향상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한자교육, 나아가 “조한혼용”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6. 결론   표음문자이면서도 대부분 어휘가 한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조선어는 자체의 천성적 발전법칙을 가지고 있다. 表意문자인 漢字는 조선어 한자어휘 리해에 큰 도움을 주기에 학생의 학습능률제고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자교육이 거세된 조선말한자어는 무의미철자의 집합체와 다름이 없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암기하자면 기막힌 고역들을 치러야 하며 따라서 학생들의 학습취미를 크게 떨어뜨릴수밖에 없다. 이로 하여 우리의 조선어는 쇠퇴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미 엄청 큰 대가를 치렀음에도 여전히 불감증을 앓고있는 상태다. “조선글전용”정책은 우리 말의 발전제고에 걸림돌로 작용하므로 반드시 페지해야 한다.   “한자교육”과 “조한혼용”정책은 정부차원에서 중대한 개혁내용으로 연구, 제정되여야 하며 학교교육에 정식 도입되여야 할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에 일반화되여야 한다. 수년간의 준비과정(교재편찬, 교원과 편집일군 양성, 제도 제정 등)을 거쳐 점차 완정한 정책으로 정착시키고 실시중 부단히 정비보완한다면 조선어학과의 발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할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족교육의 전반 질을 크게 향상시킬수 있는것이다.   [2007년 8월 중국조선어학회 제15차학술토론회(장춘)에서 발표]  
53    귀중한 선물 댓글:  조회:5068  추천:97  2008-09-02
귀중한 선물--서언을 대신하여 박문희    사석에서 나는 신승우선생을 로형, 혹은 신형이라 부르고 승우선생은 나를 아우라고 부른다. 풍운세월을 적잖이 겪은 나이지만 우리만이 조용히 마주 앉으면 둘다 순진무구한 동년시대로 돌아간듯한 기분까지 든다. 한없이 편하고 부담감이 없다.    신형의 《렌즈와 붓끝에 세월을 담아》는 이순을 맞아 정년퇴직을 하면서《신승우 촬영미술전각작품집(辛承佑摄影美术篆刻作品集)》,《남영전토템시자구인(南永前图腾诗字句印)》에 이어 내놓는 또 하나의 작품집이다. 신문보도사업에 종사해온 20년간 사회발전궤적의 단편들을 기록한 이 작품집은 신승우에게 있어서 첫 두 작품집과는 다른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신형이 신문사에 몸담근 20여년은 중국 개혁개방시대가 열려서 파죽지세로 변화를 거듭해온 가슴벅찬 세월이였다. 격정시대에 살면서 신형 역시 시대에 걸맞는 촬영기자의 보람찬 삶을 살아왔다. 20여년간 열근도 더 되는 카메라가방은 항상 그의 어께에 강력점착제처럼 붙어다녔다. 독실한 서예전각미술애호가였던 그의 붓과 전각칼은 이 20년간 서랍속에 깊숙히 묻혀서 한번도 빛을 보인적이 없었다. 판화나 전각예술에 대한 신형의 애정이 신문사에 들어온 그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던것은 아니다. 신문사치고 전업촬영기자는 신형 한 사람뿐이였던지라 전 성 각지를 골고루 누벼야 하는 상황에서 신문취재외 그 어떤 개인의 애호를 아쉬워하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개인적인 애호를 아쉬워하기엔 하루 다르게 변하는 세월과 그 세월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호소와 부름이 너무 강하고 절박한것이였다.    설령 그렇다 쳐도 그가 만약 업간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해서 서예창작을 하려고 맘먹었더라면 본부에서 떨어져있는 지역의 기자로서 그만한 “자유의 시간”을 트텨낼수 없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간뿐만 아니라 의당 가정과 개인에게 돌려야 할 휴일마저도 깡그리 신문보도에서의 “자유의 왕국” 만들기에 돌렸다. 다른건 제쳐놓고 지방 선전부문에서 주로 촬영미술창작사업에 종사하면서 조선글을 단 한쪽도 써본적이 없었던 그가 각종 쟝르의 보도문을 조선어로 아무런 구애없이 구사하게 된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본직사업에 대한 그의 드높은 책임감을 충분히 감지할수 있다.    그는 말그대로 혼신의 정열과 심혈을 다 쏟아 만폭으로 헤아리는 사진보도와 대량의 문자보도에 시대의 창상지변과 인간의 온정을 담아낸것이다. 이러한 신형이였으니 신문사 직원들이 거의 해마다 만장일치 그를 선진일군으로 선거한것은 전혀 이상할것 없는것이다.   정년퇴직후에야 그는 비로소 시간을 조그만큼이나마 자기에게 드텨낼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였다. 아주 짧은 시간내에 촬영작품집을 묶어내고 이어 만강의 열정으로 전각작품을 창작하여《자구인》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의 성과를 단지 자기 개인의 노력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몸을 담그고 있는 신문사가 아니였다면 자기의 성과도 있을수 없는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작품은 취재대상자, 독자, 신문사 동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파되는것임을 강조하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이것이 정년 후 그가 가정 경제상황이 아직 궁핍한 형편임에도 책 3권을 륙속 자비로 출판하게 된 주요 동기이다. 그는 이 책들을 도서시장에 내다 팔려는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안해와 자식, 그리고 손자에게 기념으로 선물하고 고마운 이들, 동료와 벗들에게 선물하려는 것이다. 승우형의 깊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이 선물들은 참으로 귀중하다 아니 할수 없다.    명리에는 취미가 없고 평생동안 책 수백권을 새겨 세상에 내놓은 청나라 때 문인 장해붕(張海鵬)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장서(藏書)는 불여 독서요 독서는 불여 각서(刻書)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각서”란 오늘에서의 책출판을 일컫는다. 그의 뜻인즉 이러하다. “독서”는 자기 한사람만을 위한것이지만 “각서”는 남을 위한것이다. “독서”는 저자의 정신수명이 그것을 읽는 자기의 몸에서 연장되게 할수 있지만 “각서”는 후대들이 그 혜택을 누리게 할수 있으니 그 용처가 훨씬 더 많지 아니한가?    이미 출판한 《신승우촬영미술전각작품집》, 《남영전토템시자구인(字句印) 》과 지금 펴내는 이 책자는 정년퇴직(동시에 환갑)의 기념이기도 하고 다년간의 업무와 창작에 대한 한차례 총화이기도 하다. 그중 《촬영미술전각작품집》은 전 10권으로 된 《중국예술가총서》의 한권으로 그 예술수준이 중국의 유명한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으며 시대문예출판사에 의해 최근 출판된《자구인》은 또 하나의 서예정품으로 갑골문체와 전서체를 자유자재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구사하면서 고대 씨족의 동물에 빙자한 징표도형을 훌륭히 활용하여 평론가 주정(朱晶)씨도 그 재간이 너무 부럽다고 할 정도로 성과작이다. 개혁 개방의 력사현장사진을 대량 곁들인 본 작품집도 우리가 방금 겪어온 유정세월을 되새기는데 감흥깊은 자료로 될것이다. 물론 이 몇권의 책은 신형으로 말하면 창작의 마감인 것이 아니라 인제 시작일뿐이다.    신형은 퇴직한 후에도 신문보도 사업을 위해 두발이 다슬게 뛰여다니고있다. 이순을 제2 인생의 시작이라고들 하는데 신형이 바로 새 인생을 초시작부터 멋지게 장식하고있는것이다. 형수님과 더불어 인생을 좀 더 다양하게 살면서 그속에서 풍만한 각서(刻書)를 잉태하고 출산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 바이다. 2007년 10월 1일 장춘에서박문희: 현임 부사장, 고급편집<신승우신문작품집>(연변출판사)에서
52    한국언론의 중국보도에 몇마디(박문희) 댓글:  조회:4688  추천:132  2008-06-13
 한국언론의 중국보도에 몇마디     박문희     [글 앞에 쓰는 말: 정인갑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주류매체의 중국보도에 대한 비판은 요즘 들어 깊이있게 거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고무적이다. 어느때부턴가 한국의 중국보도는 일반적인 왜곡보도의 차원이 아니라 중한관계파괴의 위험수위를 넘어서 더는 참을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원래 한국에 호감을 갖고있던 중국인(당연히 우리 조선족을 포함한)들이 서서히 원유의 호감을 거두어들이는 상황이 빚어지고있다. 누구의 문제인가? 중국의 실상을 모르는 한국 일반인들을 나무릴 일이 아니다. 언론이 문제다. 개별적 한국인들(절대 다수가 아니다)에게서 표현되는, 중국조선족, 나아가 중국 전체 국민들의 감정에 서슴치 핞고 칼질하는 몰지각한 언행은 한국언론이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눈을 멀군 결과이다. 현재 한국언론의 중국관련 보도와 관련하여 철저한 변화를 촉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나도 주저없이 이 한 촉구의 대열에 서려 한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우리 중국 조선족은 자신의 특수한 신분으로서라도 모국의 그릇된 중국관련언론을 비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한관계가 해를 입으면 조선족들에게도 해만 돌아올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것만이 진정 모국의 언론을 관심하는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 필자가 "뉴욕조선족통신"의 글에 달았던 리플(파란 글을 클릭하시면 원문을 보실수 있습니다)에서 관련되는 부분을 뽑아 올린다.]     (1)    한국언론에 하고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중국언론은 시종 한국에 우호적이고 선의적인데 반해 한국언론은 중국에 선의적이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올림픽은 중국만의 행사가 아니고 세계가 맡겨준 우리 모두의 행사입니다. 그런데도 이른 바 서방의 일부 발달국이나 한국언론은 올림픽의 입장이 아니라 이상한 입장(시각)에서 올림픽 방해자들을 저지할 대신 부추기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중국유학생들은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갔다가 한국의 언론과 그 언론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국민(당연히 일부겠죠)들의 반향에 실망, 지어 분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쪽 네티즌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한국언론의 무책임한 "자유보도" 가 무수한 문제를 야기하고있는겁니다. 장본인이 누군가를 알면 우리가 여기서 싸울 필요가 없을겁니다. 우리가 분열로 나가면 티베트독립파들만 좋아하겠죠.   여기서도 인신공격적인 글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품위를 낮추는것으로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2)   협애한 민족주의와 “붉은 깃대를 총대처럼 휘두르는 것”은 당연히 반대해야 합니다.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유해하니까요. 중국정부는 아마 이에 충분한 경각성을 가지고있을것으로 보며, 중국 국민들도 반드시 이에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할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서방의 일부 언론들의 문제점을 덮어감출수는 없습니다. 서방의 일부 영향력이 있는 언론은 이번 성화봉송을 중국에 강대한 압력을 가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티베트독립을 부추기고 돌발사태를 유발하고있으며 지어 달라이라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거짓말이 다 드러난 뒤에도 16억달러짜리 언론은 그런 거짓말을 꾸짓지 않고있습니다. 과연 16억달러가 진리를 대표한다고 할수 있을까요?  적어도 그것이 진실을 재는 잣대가 될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화세력의 비열한 추태가 좋은점도 있습니다. 그들의 추태를 지켜보고 대처하는 과정에 지혜를 키우고 그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될것입니다. 그런 세력은 항상 있을것이지만, 잠시 득세할수 있을뿐 대세를 이루지는 못할것으로 봅니다.    미국언론은 강세를 턱대고 비록 낙후하고 아직 약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대단한 결심으로 고속발전을 추진중인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있습니다. 중국에 혼란이 일어나면 그들은 날듯이 좋아할것입니다. 중국 정권이 무너지길 바라는 그들이니까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것은 미국 국민들이 아닙니다.   한국의 주류언론도 중국의 놀라운 발전을 빤히 들여다 보고있으면서도 부정적인 면에다만 렌즈와 확대경을 들이대고있습니다. 중국의 보도와는 정 상반댑니다. 중국의 보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것을 좋게만 보도하는것이 문젭니다. 결과 중국유학생들은 한국 언론과 일부 국민들의 우호적이지 못한 작태를 보고 실망하지 않을수 없죠. 이건 나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내가 접촉한 적지 않은 한국의 지성인들도 이렇게 보고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국 언론을 말한다 해서 다 부정하는것은 아니고,사회주의 잣대를 적용하는것이 아닙니다. 중국관련 보도의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함의 필요성을 강조했을뿐입니다.   그리고 ***님의 말씀이 선의적이고 대부분 받아들일수 있는 좋은 건의와 우리가 반드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점들임을 느끼면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3)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며 심히 불안하고 안타깝습니다. 세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이성 잃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극복은 당면 중국 유학생들에게 있어서 급선무입니다. 중국 정부에서 일찍부터 이른바 비이성적애국주의 문제에 주의를 돌리고 조치를 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올림픽을 앞둔 현시점에서 극복이 시급할 뿐 아니라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극복의 노력은 계속돼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어떠한 도전에 직면해서도 이성을 잃고 설친다면 중국과 올림픽에 아무런 도움도 줄수 없고 중국과 중국인들의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 조선족유학생들의 얼굴에도 당연히 먹물이 튀게 됩니다.   위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극히 개별적인 유학생이 “소림사무술동작”을 했다고 해도 마치 전 중국 유학생이 “소림사무술동작”을 한 것처럼 한국인과 세계인들의 눈에 비치게 됩니다. 자국 국민(그분이 먼저 어떤 동작을 했던 지를 막론하고)에게 행한 중국유학생의 이런 무술동작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한국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서 중국유학생들을 어케 자극했기에 그 애들이 저렇게 까지 무술동작을 했을까 하고 속으로 생각할 분들이 없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대해,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 행사에 대해 선의를 품지 않은 “개별적 한국인”(그들은 절대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이 어떻게 도전해왔든 중국 개별적 유학생이 그 사람에 행한 폭력은 전체 한국인을 상대로 한 무시와 폭력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한국과 세계 언론계의 선의적이지 못하거나 파렴치하거나 적어도 이성적이지 못한 언론사와 언론인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음을 충분히 알아두어야 할것입니다.   때문에 이 글이 호소하는 “협애한 민족주의와 '붉은 깃대를 총대처럼 휘두르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시적이며 필요합니다. 이런 글의 이면에는 민족 사랑과 한국 사랑과 중국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유학생들은 이면에서 반드시 충분한 인식을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대학생들이 이에 앞장서서 본을 보여주고 모든 중국인의 모범으로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둘째,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찾아내고 문제의 발생을 근원적인 면에서 막고 치유해야 합니다. 원인을 찾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번 일이 까닭 없이 생긴 일입니까? 중국유학생들이 까닭 없이 생사람을 잡아 팰 정도로 무지막지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생사람이든 생사람이 아니던 “소림사무술동작”으로 사람을 잡아 팼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찾아 해결하지 않고 그 원인으로 되는 문제가 장기적으로 쌓인다면 앞으로는 “소림사무술동작”을 찜쪄먹는 작탄테러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만이 극대화되면 이지를 잃게 된다는 것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한국의 일부 언론인들의 일방적인 매도와 모든 원인을 불문에 붙이는 작법이 과연 이지적인지 생각해 볼 바가 아닙니까? 사태발생의 근원을 캐는 노력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이라크에서 왜 자살성 테러가 빈발합니까? 분노가 극에 달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원인을 반드시 캐여서 해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원인을 열거한다고 해서, 그러는 말에 과격한 점과 감정적인 요소가 조금 섞였다 해서 그에게 맹비난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격한 점은 지적해주되 무책임한 언론의 악영향 등 원인은 우리 다 함께 사고해봐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셋째, 지금 발생한 문제는 우리의 토론이 상기 두 가지 문제의 한 방면에만 치우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가지에만 치우친다면 의견대립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의 양면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도립니다. 한 면만 있는 동전을 본적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한 면만 말하고 다른 면은 말하지 말아야 합니까? 어떻게 한 면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면의 문제를 아주 덮어감추어야 합니까? 이런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사람을 다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기를 아주 작살내고 싶을 때 이런 방식을 쓰면 그 효과가 아주 만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분열을 원치 않는다면 두 가지 문제가 다 깊이 토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직접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 님께서 언급하신 저의 두 번째 문제는 원래 여기에 한국 분들이 적지 않게 다니고 계시므로 그중 일부 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이 글은 중국유학생(조선족을 포함한)의 자성을 촉구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글입니다. 역시 전 중국 국민들의 자성을 희망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필요하고 앞으로도 이 노력은 계속돼야 합니다. 이점은 이미 앞글에 분명히 말했으므로 구태여 더 말치 않겠습니다.   이 와중에 부동한 견해들이 양산됐고,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 가운데는 극히 개별적으로 악의적인 비방 중상의 글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부동한 견해의 대부분은 악의적이 아니고 진심의 글입니다. 편집진의 진실한 의도를 보아내지 못하고 쓴 글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진심을 표달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중국 유학생들의 내심을 대표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태를 지켜보는 중국 국내 상당수 대학생들의 정서를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무시해서는 좋은 점이 없습니다. 일부 한국 분들은 중국의 입장에서 말하는 중국조선족 학생들의 현재 정서나 감정이나 심정 같은 건 아예 무시, 그들이 지금 어떤 상처를 받고 있는지 하는데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의 진실한 감정에 서슴없이 칼질하고 계십니다. 조선족 청년들이 자신을 중국인이라 하면 우리 민족 자격이 없다고 감히 말씀하십니다. 그럼 그들이 중국인이 아니면 한국인이란 말입니까? 한국에서 국적을 주었습니까? 주지 않았다면 그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당한 중국 조선족 청년으로서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 자존심과 자부심은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말고 치욕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함부로 그들의 가슴에 칼을 박아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이 왜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한국 분들에게 그들이 뭔가를 호소할 때, 적어도 그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무작정 “저 애가 우리 민족 맞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우리의 젊은이들은 모두 우리의 고국인 한국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중국에서 이제 개최할 올림픽을 방해하고, 티베트독립을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을 무작정 차별시하고 쩍하면 “너 가만 보니 우리 민족이 아니고 중국 사람이구나.” 하고 함부로 말을 내뱉는 개별적 한국 분들의 몰지각한 태도입니다. 중국 조선족 청년들은 그런 자그마한 불만을 토로할 자격마저 없는가요? 민족의 고향, 우리의 모국에 계신 분들이라면 적어도 중국에 살고 있는 한 민족 청년들을 이해해주고 그들의 애국감정(중국사랑)을 존중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존중해주고 아껴주어야 서로 더 마음 상 가까워지고 모국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생각은 중국의 조선족은 보다 선진적인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깊이 자성을 하고, 한국의 분들은 중국 조선족 청년들을 꾸짖기에 앞서 역시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로 자기를 찾아 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한국 국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중국에 사는 너희들만 잘못했으니 자성해라. 일부 중국 청년들이 접수할 수 있겠습니까? 북경올림픽을 방해하는 게 잘됐다는 말씀일 수야 없겠지요? 우리도 이런 거 잘못된 게 있는데, 양해를 좀 해 달라, 이렇게 나오면 중국 청년들이 그 한마디에 감동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지 않고 오히려 너 우리 민족 자격이 있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젊은 혈기에 자손심이 허락하겠습니까?    한국 언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매일 한국 티비 프로를 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뉴스는 많이 열린 보도입니다. 그러나 중국 관련 보도에는 반감이 많습니다. 중국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많지만 뉴스는 거의 다 부정적인 것입니다. 저의 마누라는 한국 드라마가 없으면 살 것 같지 못합니다. 그런데 뉴스는 절대 안봅니다. 중국관련 보도는 보나마나 부정이니 기분이 상해서 안 본다는 겁니다. 저는 그나마 참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이 그런 보도를 보고 중국을 어떤 시각으로 볼가는 불 보듯 한 일이겠죠.   저는 한국 언론인들도 많이 접촉하고 있는데, 친구도 많구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 한 십년 전 그분들은 우리 중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중국을 더 잘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중국에 내처 살아온 나도 중국을 조꼼 밖에 모르는데, 당신이 중국을 며칠 와보더니 벌써 다 알고 있구만? 했더니 얼굴이 아주 붉어지더라구요. 그 후부턴 그럼 말을 안 합디다. 지금은 좋은 말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좋은 말만 하지 말고 나쁜 얘기도 하라고 그럽니다. 우리는 줄곧 좋은 친굽니다.    한마디만 보충하겠습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모국인 한국을 사랑하고 있으며 한국의 존재로 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안고 있습니다. 사실 한반도가 없으면 중국 조선족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다른 민족에 동화돼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훨씬 발달한 선진국으로 중국은 한국에 많은 호감을 갖고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워져야지 서로 자극하면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두 나라가 멀어지면 서로에게 이익이 없고, 조선족이 가운데서 당하게 됩니다. 서로 이해해주는 아량을 보이면서 특히 젊은 청년들에 대해서는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감싸주면서 안아줍시다.   아래 참고로 한국 언론에 대한 중국 북경의 정인갑 선생님께서 최근 동북아신문 에 올리신 글을 첨부하겠습니다. 본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올리는데, 혹시 잘못됐다면 정 선생님에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사후 정인갑 선생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5)   *** 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사회주의 언론과 자본주의 언론의 구별 점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국정도 서로 다르죠. 중국의 민주정치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 되게 큰 진척을 가져왔지만 한국을 따라가자면 아직 멀었고, 그렇다고 해서 조급하게 급진적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13억 인구의 낙후한 대국이 민주정치를 급진적으로 내 밀면 하루 사이에 수습할 수 없는 대란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이미 몇 번 겪었습니다. 문화혁명을 하면서 한 가지 자유도 아니고 “4대 자유”까지 해봤습니다. 영국을 15년 내에 따라잡는다고 설쳤던 적까지 있습니다. 빨리 하기는커녕 오히려 몇 십 년 지연시켰지요. 너무 유치했지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세계 1/4 인구를 가진 중국에 혼란이 빚어지면 주변국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겠죠. 중국의 1/10 인구가 주변국으로 피란 간다고 한번 가정해보세요. 그 나라들이 편하겠습니까?   한국의 언론은 저도 좋아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국제관련 뉴스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이 문제에서 정 반댑니다. 다 문제가 있어요. 좋은 것만 말하는 것도 문제지요. 중국은 자국의 발전이 시급하고 타국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되도록 자극을 피면하고 좋은 관계를 확보하려는 반면 한국은 국제적 행사를 앞둔 마당에도 티베트사태를 제멋대로 왜곡 보도함으로써 독자와 시청자들의 반화감정을 유발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있어요.   그게 어떻게 대중의 목소립니까? 대중은 시사보도를 통해 중국과 티베트를 알게 됩니다. 왜곡보도를 해도 그런가 하고 믿게 되죠. 이번에도 중국에서 서방매체에 왜 왜곡보도를 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비로소 보도태도를 바꿨지 않았습니까? 한국 언론도 이 점에서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찬송가만 부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라는 겁니다. 직업도덕을 지키라는 얘기죠. 해야 할 보도를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시 되지만 거짓보도를 하는 것은 더 문제가 된다는 얘깁니다. 티베트독립주장시위가 왜 생깁니까? 사실을 거꾸로 보도하니까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한국도 참가하는 올림픽을 방해하고 전체 중국인의 자존심이 손상 받고 조급해서 안달 떨고 심지어 분노하는 결과까지 빚어지지 않았습니까? 무슨 좋은 점이 있습니까?   제가 무슨 중국정부를 "두둔"해서 어쩐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세요. 중한 양국에 다 불리하고 우리 민족에게도 좋은 점이 없고 해만 되니까 말하는 겁니다.   --"뉴욕조선족통신"의 글 “美 조선족 올림픽성공 바라지만 폭력시위는 반대!” 에 단 리플중에서 (2008/04/30)    
51    “학술의 벽을 넘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읽고서 댓글:  조회:6786  추천:75  2008-04-03
   “학술의 벽을 넘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읽고서 박문희 오늘 [문화산맥]의 “열린마당”에서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의 글 “학술의 벽을 넘은《중국조선족대개조론》”(제목을 클릭하면 원문을 보실수 있습니다)을 읽었다. 조성일선생은 김문학이《대개조론》에서 “조선족사회 특히 연변 조선족의 문화, 의식구조, 생활양식, 행동양식 등을 폭넓게 다루면서 전면 부정의 메스를 댔다”면서 김문학의 언론 16條를 수집해 렬거했다. 두번은 빠른 속도로, 한번은 천천히 생각을 해보면서 16조를 모두 세번 읽었는데, 웬 일인지 나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김문학이 제시한 문제가 대부분 정확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생각을 검증해보기 위해 그 16조를 원문 그대로 옮기고 나의 판단을 한마디식으로 첨부하니, 여러분께서 검증,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  우리의 조선족사회가 너무 추락되였기때문입니다. 이건 롱담이 아닙니다. 추락돼도 너무 추락되고 체질내부구조가 썩어도 한창 썩은게 아닙니다. 판단: 정확하다. (2) 흔들리다 흔들리다 남은건 우리 자신과 함께 바람과 같이 군무를 추고 우수수 노래하는 “가무의 민족”이란 텅빈 이미지뿐이다. 우리가 지금껏 창출한 문화, 새로운 문화는 갈대속같이 텅빈 외화내빈의 실속없는 제로상태다. 판단: 표현상 과분한데가 있지만 기본상 정확하다. (3) 조선족 사회의 우물안 개구리(사실은 올챙이)명창을 수집해 보았다. 나는 일시 귀국할 때마다 주위 조선족사회에서 들려오는 이런 왕나발소리를 대하면서 《20세기 조선족의 개구리명창》이란 책으로 편찬하면 재미있을거라는 아이디어까지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여가가 없으니까 혹시 독자 제현씨 가운데서 흥미있으면 한번 해보시는것도 어떨가 한다….공부 많이 못한 배속에 먹물이 없는 이 무지한 농민 아저씨는 그래도 한번쯤 그 욱하는 성격때문이라고 리해해주고 눈감아주고 용서해주자. 그리고 그 무지에 동정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도대체 먹물 많이 먹었다는 우리의 엘리트 지식인, 문화인들이 오히려 더 우물안 개구리 명창의 달인들이다. 판단: 정확하다. (4)  중국에서 인정받는 남영전, 한국에서 인정받는 김학철, 일본에서 인정받는 김문학과 같이 우리는 좀더 “우리”라는 울타리, 우물을 넘어서 보편적인 가치, 의식의 인물과 작품을 많이 키워야 한다. 하나 기이한 현상은 우리는 늘 “우리 조선족”이라는 울타리의식, “우물안 개구리”구조에서 리탈하지 못하는것이다. 우리문단의 작가, 문인들은 대부분 시야가 좁고 의식구조가 류사하다. 출신도 대부분 연변이며 대학도 연변대학 조문학부나 중앙민족대 조문학부라는 동일한 출신이 많다. 판단: 첫마디가 적절치 못한 외 나머지는 다 맞다. (5)  최근에 변경지역의 한 조선족대학 학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 대학의 학생들의 시대적 감수성이나 정보의식은 북경시내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파는 로파만큼도 못하다.” 판단: 문장 발표당시 기본상 정확했을 것으로 보며 지금도 이런 현상이 있을 것으로 본다. (6) 중국인(한족)들이 조선족을 무어라고 비아냥거리는줄 아는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 공헌한 것은 랭면, 김치에 구육(狗肉), 인육(人肉)”이란다. 랭면과 김치, 개고기를 대표로 하는 음식문화는 알만한데 “인육(사람고기)”이란 웬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릴가? 좀 더 로골적으로 “조선족은 개고기와 사람고기를 함께 판다”고 비아냥거린다. 이래도 사람고기 판다는 얘기를 모른단 말인가? 바로 다른아닌 조선족의 녀성의 범람하는 매춘과 창녀를 빗댄 말이다. 판단: 과격한 표현이지만,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다. (7) 호스티스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내에서 매일 벌어지는 스캔들, 추한 뉴스들이다. 한집에 남편이 아니면 아내가 한국에 건너가 돈벌이하는 가정이 수백세대 되는데 바로 아빠트에 남은 조선족남녀들이 고독에 못이겨 회식을 하고 파티를 벌이다가 화통을 하고 불륜을 일삼듯하여 나중에는 집단 프리섹스까지 벌였다고 한다. 외국의 포르노 비디오를 같이 보면서 그 장면의 체위대로 프리섹스파티를 즐기면서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스캔들을 두고 한족들은 또 뭐라고 비아냥거리는줄 아는가? 초우센주(肏鮮族)라고 한다. 아침이라는 그 “朝”자가 어느새 섹스한다는 “肏”자로 바뀐것이다. 과연 남도녀창(男盜女娼)의 조선족사회다. 옛날에 중국인들이 함께 배신하지 않음을 맹세할 때 “천주지멸(天誅地灭) 남도녀창(男盜女娼)”이라고 외웠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이 언제 남자는 남의 녀자를 도둑질하고 녀자는 서슴없이 벗어주는 창녀가 돼버린걸가. 판단: 과격하고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잘못 지적한 말은 아니다. (8) 지금 조선족사회가 번영창성(繁榮昌盛)시대라고 누군가 롱담으로 말하듯이,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성적써비스를 하면서 매춘부나 창녀로 일하는 조선족녀자들이 조선족의 기반인 동북3성은 물론, 중국 남부지역으로, 연해도시에 대거 진출하여 북경에서 상해, 광주, 심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의 최남단인 해남도에까지 승승장구로 진출하고 있다. 상해에는 조선족호스티스만 해도 2000명은 충분히 된다는 말이 있다. 전국 대도시에 널린 호수티스군단은 수만명은 된다는 짐작도 있다. 이래서 조선족호스티스, 창녀군단을 중국사회에서는 “20세기 조선족의 위안부”라고도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해남도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한족동창에게 들은 얘기지만 해남도에서도 조선족호스티스를 만났는데 서슴없이 매춘까지 강요했다면서 예전에 있던 조선족녀성의 이미지가 떨어졌어도 이렇게까지 떨어진줄은 몰랐다고 술회하는것이였다. 판단: 이 문장 발표당시 조선족녀성의 이미지 추락문제는 확실히 심각했었다. 그러나 외지에 진출한 우리의 일부 녀성들을 “창녀군단”으로 묘사하는데 대해서는 견결히 반대한다.    (9) 연변문단도 시기와 질투와 내홍이 심하다고 들었다. 손바닥만한 연변땅에서, 그것도 얼마 되지 않는 문인들끼리 단합해도 시원치 않겠는데 무슨 파요, 무슨 패요 하면서 끼리끼리 질시와 반목이 거듭된다고 한다. 한 유명한 산재지구의 문인은 “연변에 가면 어느 쪽과 어느 누구와 술 한잔 마셔도 서로 라이벌이 심하니까 조심스럽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나는 연변밖의 문인들로부터 수많이 이런 고백을 들어왔고 내가 연변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문인들의 이런 추악한 근성은 지어 해외에 나가서까지도 그 악마 같은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내가 일본에서 살면서 주위에 연변출신의 조선족이 모이고부터는 나의 조용한 삶을 깼다. 문인으로서의 나는 내 일에도 바빠서 숨을 못돌리겠는데 언제 누구하고 싸울 여가가 있겠는가! 또 내가 누구를 시기하고 미워할 추호의 리유도 없으며 내가 질투할만큼 재질있고 실적올린 문인은 적어도 내가 사는 주변에는 없다. 박사생이 석사도 못따낸 약자에게 배아플 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야말로 수양버들은 조용히 살고싶은데 괜히 옆에서 바람만 분주히 부는격이랄가. 그래서 덕분으로 나는 그 악명자한 “연변식내홍”을 실체험할수 있었다. 판단: 완전히 정확하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문단은 희망이 없다. (10) 친애하는 조선족청중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김문학방송국 KMH입니다. 주파 0000KH로 일본에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연변극좌소아병원에 대한 체험리포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변극좌소아마비병원을 잘 아시겠죠. 예예, 바로 연변극좌소아병원말입니다. 략칭으로 “연변극좌병원”이라고 하지요. 바로 연길시내의 극좌가 식인 1동10번지에 있는 건물입니다. 아직 한번도 안가보셨다구요? 물론 저도 오랫동안 해외서 살면서 소문은 좀씩 들었습니다만, 아직 가본적은 없어요.제가 뭐 거길 특별히 갈 일도 없고한데 왜 가겠습니까. 판단: 정확하다. 레닌이 비판한 “좌익소아병”이 우리 문단에 분명 존재한다. (11) 나는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에서 한국인의 유치함을 빗대여 “9살짜리 미숙아”라고 혹평을 한적이 있다. 일찍 맥아더장군이 일본인의 유치성을 보고 일본인의 정신년령은 12살이라고 갈파한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의 정신년령은 얼마냐면 나는 7살반이라고 하고싶다.그것은 우리가 아직 한국인보다 많이 유치하고 또 유치하기때문이다. 7살반, 그래도 유치원수준은 넘어서지 않았는가! 소학교 1학년생의 정도는 되니까말이다. 판단: 기본상 정확하다. 그러나 평가가 너무 높다. 내보기엔 5살 반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다. (12) 조선족의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민의 촌닭의식을 리탈하지 못했다는것이다. 판단: 비슷하다고 본다. (13) 전국 제일의 문화수준이 높은 민족하는 식으로 수십년을 자랑했지만, 실제 주위의 평가는 정말 낮다. 그리고 해외동포사회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평가도 솔직히 고백하여 조선족이 스스로 아주 높은것으로 착각하는 수평치 이하라는 것이 결론이다. 내가 보아도 재일 동포사회나 재미 동포사회에 비해도 그 갭은 100년은 잡아야 할것이다. 판단: 정확하다. 단 마지막 한마디는 지나친 것 같다. (14) 국제망신은 우리 조선족이 맡아놓고 한다. 왼팔에는 한국, 오른팔에는 조선, 고국의 동포를 다 팔아먹는건 조선족밖에 있을가? 그러고 보면 우린 약소민족이 아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고상하고 인도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고국에서도 못해낸 사상공전의 추악의 기록의 영광을 따내고있다. 판단: 완전히 정확하다. (15) 흥미로운 작은 “발견”이다. 팬티입은 원숭이는 엄청난 눈치의 천재라는것이다. 항상 두눈이 팽글팽글 돌고 두 귀를 세우고 주인과 주위의 구경군의 눈치를 살피면서 연기를 해간다. 세상만물가운데서 원숭이만큼 눈치의 “센스”가 고도로 발달된 족속은 없을것이라고 나는 늘 혀를 찼다. 어쩐지 아이러니컬하게 나는 팬티입은 원숭이의 모습에서 우리 조선족의 모습을 보는듯했다. 조선민족만큼 눈치빠른 민족이 더 있을가? 판단: 옳고그름을 떠나 속된 말이여서 비판가치마저 없다. (16) 우리는 100년동안 한번도 공동체의 일체감을 이룩한적 없이 흩어진 모래의 상태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결국 여전히 우리는 몸에 배인 고추장같이 매운 개인적 리기주의와 돈을 추구하는것밖에 없는 민족이 된것이다. 판단: 지나친 말이지만 충분한 주의를 돌려야 할 바이다. 조성일회장은 김문학의 언론을 렬거하고나서 “김문학이 고백하기를 ‘나는 부득이하게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렇게 조선족을 비판한 글을 쓰게 되였다’고 하는데 본의 아니라면 누구의 ‘지령’인가?”고 질문하면서 비판의 예봉을 슬쩍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 하고있다. 우리 민족의 휘황한 성과를 칭송하는 글도 아니고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비평문에서 무엇때문에 상술한 문제들을 꼬집어서는 안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4월3일)
50    [칼럼시리즈]《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 댓글:  조회:4949  추천:90  2008-03-13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6) 《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 《단군신화》를 보면 460여자 되는 짧은 글속에 수천년간에 걸친 아름찬 력사내용을 압축해 담고있다. 환웅의 삼위태백 강림, 단군의 탄생, 조선국 창설, 백악산아사달 천도, 장당경 은둔...하다면 환웅이 내렸다는 삼위 태백은 진실일가, 허구일가? 아니면 태백의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가? 진실이라면 그 위치는? 《尚書·舜典》에 “三危”란 지명이 追記된 이래 력대의 문헌기록과 후세 사람들의 연구자료를 보면 “고삼위”의 존재는 확실하며 위치도 서북지역임이 분명하다. 北魏의 酈道元 등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水經注》)고, 唐의 리태 등은 “삼위산은 沙州(돈황)의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括地志》)고,《한서》,《후한서》,《상서정의》,《상서법》,《태평어람》등은 “三危가 감숙과 청해성 경내에 있다"고 기술했고 동한시기 마융의 《상서주》와《한서·공안국전》, 唐나라 공영달의《尚書正義》등 史籍은 “三危”가 서부지역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중 “대삼위”, “대돈황”설과 최신판《辭海》력사지리 분책에 올린 감숙성 롱서현(隴西縣) 서북부 지역설 등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얻고있다. 봉우리가 세개 있는 산을 삼위산이라고 한다는 설을 망라해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난것은 옛날의 방위측정이나 거리 계산방법 등에 변화가 많고 분명치 못한 점이 있어 그 구체적인 위치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삼위산이 서북지역에 있는건 틀림없지만, 구체적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각종 설이 병존상태이며 최종 결론은 아직 없다. 《단군신화》연구의 경우, “삼위”의 구체적 위치보다는 우선 “삼위”가 “태백”의 수식어인가? 아니면 중국 고전에 나오는 “삼위산”인가? 그것도 아니면 묘향산이나 한반도의 다른 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것부터 갈라야 한다. 구체 위치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삼위산”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 이는 실상《단군신화》의 발상지가 한반도 안이냐 동북지역이냐 서북지역이냐 한마디로 이런 문제이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 력사에 대한 일부 해석은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다. 한반도로 보는것과 서북쪽으로 보는것, 이 량자가 가져다 주는 결과가 같을수는 없는것이다. 례를 들어 보자. 삼위태백을 묘향산에 비정한다면 단군조선의 력사는 조선 본토로부터 주변국(중국 대륙, 시베리야, 일본 등)으로 부단히 확장해 나간 력사로 해석될수 있다. 사실 이런 시각에 의해 기술된 력사론저들이 여러 권 있는데, 그 가운데는 력사상의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단군신화》의 삼위를 중국 서북부지역의 삼위산에 비정한다 할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대이동의 선상에서 우리 선인들의 력사를 고찰해야만 하는것이다. 바로 이런 리유 때문에 삼위에 대한 연구는 결과를 볼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이 작업이 중요하고 또 여전히 진행형인것만금 문헌자료와 고고학성과에 대한 면밀한 주의를 필요로 하며 “확인가능성”에 대해 경연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것이다. 먼저 우리 민족과 관련시켜 삼위를 연구한 중남민족대 남방소수민족연구중심의 연구원 楊萬娟의 말을 들어본다-- 양만연은 三危의 위치문제에 대해 “한국 학자들 중에는 백악산설과 감숙 돈황 남부 삼위산설이 있고 삼위태백을 통털어 조선 평안북도의 묘향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중국 학자들 중에는 돈황 부근 삼위산설 등 네가지가 있다”면서 그 자신은 “川甘 접경지역의 민강, 민산 일대설에 동감한다”고 했다. 양만연의 이런 주장은 조선민족은 동이족에서 나온 민족으로서 蚩尤, 三苗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삼묘족이 거주했던 삼위와도 깊은 련계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에 한국학자들의 견해를 알아본다-- 한국 효성녀대 박은용교수는 중국 淸나라 乾隆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欽定西域同文志》에서《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三危” 관련 기록을 발견하여 공개했는데《흠정서역동문지》4권(卷之四) “天山南北路山名”에 적힌 삼위에 대한 설명은 “古天山東盡境(山海經)三危山西三百五十裏曰天山…(一統志)天山一名白山 自哈密東北境綿亙而西…” 등으로, 三危山의 위치와 삼위산이 곧 天山이며 이를 白山이라고도 한다고 “산해경”과《大明一統志》등의 고서를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흠정서역동문지》는 박교수가 30년 전 일본 도꾜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입수한 지리서로 漢字와 만주어, 몽골어, 아라비아어, 타밀어, 서장문자 등으로 된 희귀본이며 “삼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 유일의 고서라 한다. 그는 또 “우리 학계가 현재 민족의 기원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天山 일대의 위글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류사점도 많아 력사, 언어, 문화인류 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용교수가 제시한 자료는 민족의 유래를 중국의 西域으로 확대시키면서 신강위글족자치구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의 동진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한국 상고사학회 회장 율곤 이중재선생은 2002년 3월 “下視三危太白 三危山名 非今外興安嶺也 叉非今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燉煌縣所在地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初降之地 是也” 등 삼위의 위치와 관련된 옛기록이 있는 력사희귀본《神市開天經》을 입수, 공개해 력사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중재선생은 저서《한민족사》에서 이 자료를 포함한 대량의 자료를 근거로 삼위산이《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북아 전체를 놓고 삼위산이 중국의 서북지역에 한곳 밖에 없는 이상《삼국유사》가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삼위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수 없는 사안이며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조선의 유명한 학자 리지린의 말을 들어본다-- 리지린은 저서《고조선연구》에서 삼위산의 위치에 대한《尙書》舜典·禹貢의 기술과 고힐강(顧頡剛) 등 중국학자들의 고증자료를 대량 인용, 분석한 뒤 “삼위산이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아직 딱히 말할수 없”지만 “현 중국 서북방의 산인 것만은 틀림없다”면서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여 있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고 했다. 리지린은 “《단군신화》에 어찌하여 삼위산이 관계되여 있을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古記》의 편찬자들이 三危를 고대 중국의 유명한 산임을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곤난하다. 기원전 1세기 초 樂浪사람들이《서경》을 통달했다는 것이 확증되니 고조선인들이 ‘삼위’가《서경》에 보이는 山名임을 알았을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고기》의 편찬자들이 어찌하여 그 먼 곳에 있는 산 이름을 단군신화와 결부시켰는가? 이것을《고기》편자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이라고 지적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단군을 고조선의 창건자로 인정한 것이며 결코 그가 한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였다. 단 고조선족의 선조가 삼위산과 관련되고 있었다는 것을《고기》편찬자들이 인정했다고 볼수 있다. ” 《동국여지승람》의 저자가 삼위 태백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한데 대해서와《삼국유사》에서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쓰고있는데 대해 리지린은 “삼위라는 지명을 우리 나라 지리 문헌들에서 찾아볼수 없음”을 리유로 들면서 “이러한 설”은 “후세 사람들의 부회에 불과한 것”이며 “(묘향산을) 고조선 국가 형성시의 명칭이라고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의 어떤 史家”가 “삼위산을 알타이산으로 비정”한데 대해서는 “일본 사가의 설은 부정확하기는 하나 삼위산을 대체로 알타이산과 련계되는 현 중국 서북방의 산으로 비정한것은 틀림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P119~122. 조선과학원출판사, 1963년.) 그러나 우리 민족의 학자들 중《단군신화》의 탄생과 관련해서 삼위를 해석할 때 이상의 관점들과 다르게 풀이하는 사례도 있다. 례컨대《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단군신화》원문을 번역할 때 아예 三危를 빼놓고 太伯만 넣어가지고 해석하거나 심지어 “下視三危太伯”을 “가장 큰 산들을 내려다 보니”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의 소산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아득히 먼 서쪽 땅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에 대한 몰리해, 혹은 우리 민족 “본토발생설”을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음으로 해서 초래된 필연적 결과라고 볼수 있다.   만약 “본토발생설”을 연구의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허다한 의문이 설명불가능한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인류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에 들어왔다는 관점으로 문제를 본다면 우리 민족 조상들의 서부로부터의 동진은 절대로 리해불능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이어진 환인, 환웅과 단군의 존재는 아프리카주에서 발생한 천손집단의 북상 동진을 의미하는 신화적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천산산맥을 지나온 선인들이 하서주랑을 거쳐 남하, 渭水와 황하를 따라 동으로 산동지역에 이르렀다고 할 때《단군신화》에 나오는 “三危”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지역으로까지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력사연구의 시야는 오래동안 한반도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년래 조금씩 원 울타리를 벗어나 타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현재 문헌 및 고고자료의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우리 력사 탐구시야의 폭은 한반도와 길림성 지역으로부터 료동, 료서, 내몽골, 산동, 하북, 강소, 산서, 섬서 등지로 무한정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앞에서 말했지만《단군신화》는 460여자의 짧은 글속에 수천년 간에 걸친 력사내용을 압축해 기록했는데, 환웅이 삼위 태백에 내리자마자 “평양성”에 “조선국”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수천년 간《단군신화》에 언급된 력사는 적어도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전개됐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찮아도《단군신화》를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리해한 견해들이 있다. 례를 들면《단군신화》를 4단계의 력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는 견해, 말하자면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련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력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그중의 하나이고, 또, 4단계가 아니라  3단계가 압축돼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것인즉 최초의 단순한 씨족토템사회 단계, 그후 “군사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하는 단계, 계급국가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하는 단계로 보는 견해이다. (《한국사사전》: “단군신화에 관한 여러가지 학설들” 참조) 이러한 견해는 물론 보다 철저한 검증이 요구되겠지만 그래도 일정한 타당성이 있으며 적어도 우리에게 흥미로운 의문과 계발을 준다. 이 3단계 혹은 4단계의 거창한 력사창조활동이 구경 어떠한 범위에서 벌어졌을가? 우리 민족 발생발전의 시발점이 절대 한반도나 그 북쪽의 한 모퉁이였을 수는 없다. 중국 서북지역으로부터 중원을 거쳐 산동, 동북과 한반도에 이르기까지의 민족 선인들의 족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게 무얼가? 우리 민족의 선인들은 삼위지역과 동진연도에 대관절 어떠한 족적들을 남겼을가? (계속)
49    《단군신화》의 신빙성문제 댓글:  조회:5188  추천:82  2008-03-12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5)《단군신화》의 신빙성문제 앞에서 아프리카주에서 탄생한 현생인류가 어떻게 수만년전부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북상동진하여 동방의 나라들에 널리 퍼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이 동방의 땅에서 우리 민족의 선인들이 어디다 첫짐(짐이 별로 없었을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을 풀어놓았는가로부터 시작해서 그 동진로선을 좀 더 구체적으로 토론하고자 하는데, 이 문제를 푸는 첫 단서는 당연히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단군신화》밖에 없을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려면 우선 신화전설의 력사신빙성문제가 반드시 풀려야 한다. 신화나 전설이 허황하다 하여 믿지 않으면《단군신화》를 암만 토론해봤자 결과가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전설의 력사적가치 문제 염제, 황제, 치우, 소호, 태호가 신화인물이며 서왕모, 마고, 노아, 셈이 신화인물이다. 그들이 과연 실재했던 력사인물들인가? 그들에 대한 전설속에 력사적 요소가 깃들어 있는가 없는가? 중국의 학자들은 염황치, 소호태호, 서왕모 등은 실재한 구체적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씨족의 이름이라고 보고있다. 그러나 그들을 력사와는 무관한 신적존재, 또는 완전히 조작된 허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례컨대 少昊(일명 少皞)에 대해서 袁珂는 조신(鳥神)으로 보고있으며 何新은 太陽神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더욱 많은 학자들은 李白鳳의 다음과 같은 말에 찬동하고있다. “초보적인 탐구에 의하면 황제, 태호, 소호와 같은 고대의 씨족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태호와 소호가 동이족의 대표인물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부족의 성이다.”(리백봉:《東夷雜考》, P9. 齊魯書社, 1981年.) 그러니 소전, 축융, 염제, 황제, 치우, 태호, 소호 등 “신화인물”들은 모두 실재했던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력사인물의 전칭인것이 아니라 부락집단의 “세습성 칭호”(李學勤主編:《中國古代文明起源》, P83.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7年4月, 第1版)라는 것이다. 이런 신화적 인물들은 대부분 나이가 백살 이상, 지어 수백살, 천살이 넘기도 한다. 례컨대 “단군신화”의 단군은 년세가 1,908세이며 통치경력만 해도 1500년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西王母는 중국 서방의 玉山이라는 산에 살며 疫病神의 단속을 임무로 하는 신비적이고 기품이 높은 怪獸같은 녀신인데 黃帝, 堯舜, 大禹, 周나라의 穆王, 지어 《漢武帝內傳》에 의하면 漢나라의 武帝와도 교왕이 있었다는 인물이다. 일대 文史大師인 顧頡剛은《穆天子傳》을 론할 때 “서왕모는 가능하게 일개 국가일수 있다”(李曉偉:《破解西王母之謎》,《雪蓮》2004年第1期)고까지 말한적이 있다. 중국 력대명인들로부터 상고시대에 실재한 인물로 평가받은 이 녀신의 년세는 자그만치 3000살이다. 그런데 3000살 정도면 아주 새파랗게 젊은 셈이다. 중국과 한국의 전설에 내용은 다르지만 다 麻姑란 녀신이 등장하는데, 중국의 마고전설은 “상전벽해(滄海桑田)”와 “마고헌수(麻姑獻壽)”로 유명하다. 이른 바 “상전벽해”란 마고가 동해가 뽕밭으로 된것을 세번 보았다고 해서 생긴 말인데 신기하기 짝이 없는것은 오늘 第四紀學, 古地理學, 考古學 등 학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최근 10만년 사이에 중국의 동부지역은 확실히 桑田碧海의 거대한 변천을 세차례 겪었다는 사실이다. 이른 바 “麻姑獻壽”란 마고가 곤유산(昆崳山)에서 修煉得道한 뒤 三月 초사흗날 天桃복숭아를 따다가 西王母에게 生辰禮物로 드렸다는 이야기이고 그녀의 유적은 江西, 安徽, 山東, 四川, 湖南 등지에 널리 퍼져있다고 하는데 이야기 내용을 봐서는 옛날 과수재배의 시조나 음식조리의 능수 정도로 되여 보인다. 그녀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10만살은 넘는다. 한국 신화에서 창세신이라고도 할수 있는 麻姑城의 녀왕 麻姑氏는 아마 10만살도 넘을 것이다. 물론 마고의 전설과 같은 신화에 력사적 진실이 어느 정도 반영되여 있을가는 별도의 연구가 수요되는 문제다.  서왕모의 경우 그의 초시공적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할가? 앞에 언급됐던 이른 바 “세습성 칭호”란 말을 상기할 때 아마 진실한 정황은 이럴것이다. 력대로 서왕모의 人選은 여러번 갈렸는데 서왕모국의 존재와 서왕모녀왕의 尊號만은 바뀌지 않고 줄창 그대로 보존돼 내려왔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판첸라마나 달레라마의 “活佛還生”과 똑같은 리치일것이다. 서장 라마교(불교)의 “活佛還生”제도는 明淸 兩代에 이르러 서장 전래불교 각파의 습속으로 형성되였는데 이 제도는 ‘활불’로 여겨지는 지도자가 入寂(사망)한 뒤 그의 ‘환생자’로 인정되는 어린이를 후계자로 삼는 서장불교의 전통이다. 지난 1989년 서장 불교 판첸라마 10세의 입적후 판첸라마 11세(16)가 즉위했다. “活佛還生”제도의 리론적 의거인즉 불교 교의와 신학가운데 있는 “佛有三身”說과 “靈魂不滅”說이다. 三身이란 三世를 일컫는 말로서 과거, 현재와 미래세상은 모두 최고의 부처가 主宰하는데 그 주재하의 모든 생령은 六道의 輪回중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한다는것이다. 우리는 서장 활불과 서왕모의 사례에 대한 고찰을 통해 활불환생제도를 옛날 일부 특정 신화인물들의 현상과 련계지을수 있으며 서기 13세기에 탄생한 “活佛還生”제도도 “서왕모현상” 등에서 유래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왕모가 한 개인의 명칭이 아니며 그 집단의 "세습성 칭호"라고 볼수 있다. 따라서 황제 이래 력대의 몇몇 제왕이 서왕모를 만나봤다는 전설이 믿음성이 없다고 단언할수 없는것이다. 조기문화의 상징성표기로서의 상고적신화는 매개 민족의 력사문화원천의 하나이다. 그중에는 민족의 철학, 예술, 종교, 풍속습관 나아가 모든 가치체계의 기원이 내재해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상고적 인류경험의 일종이라 볼수 있을것이다. 물론 신화자체가 正史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력사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것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상고 시대 매우 오랜 세월 인류는 서로간에 말을 쓰면서도 문자가 없어 당시에 발생한 많은 중대한 사건을 기록해 둘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문자는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말과 노래로 서로간에 의사를 주고받을수 있었기에 부족내의 교류에 별로 어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부족집단 내에는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였다. 본 부족집단과 다른 부족집단 간에 지반을 빼앗는 전쟁이 발생하면 그 가운데 생긴 일들이 경험자 혹은 목격자를 통해 전해지군 했는데 이야기군들은 그런 전설을 수집해서 완정한 이야기로 엮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군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실재인물과 실제 발생한 사실을 엮은 것이였는데 인물들은 오랜 세월 전해지는 과정에 갈수록 신비한 인물로 비쳐져 나중에는 완전히 신으로 둔갑하군 했다. 신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것은 사실에 대한 과장수법이다. 례컨대 사서에는 상고시대 염제집단과 치우집단간의 전쟁, 염제집단과 황제집단간의 전쟁, 염황련합군과 치우집단 간의 전쟁을 마치 현대전쟁 지어 미래 세계의 전쟁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건대 그때의 전쟁은 극상해야 농기구, 몽둥이, 돌멩이 혹은 활이나 창 같은 무기(불도 리용 가능)를 동원한 전쟁이며 지어 빈주먹의 육박전이였을수도 있다. 왜냐 하면 夏왕조 이전의 신석기 시대에는 기병이나 戰車 따위가 있었을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농경민이나 유목민들로서 먼 훗날 칭키스칸의 형상처럼 일거에 수백리 지어 수천리를 주름잡는 그런 장거리추격의 전쟁형태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최초의 충돌은 아마 서북부로부터 먼저 남방의 일부 지역과 중원땅에 이동해 와 농경문화를 창출한 씨족의 한 부락과 그 후에 역시 삶터를 개척하며 들어온 유목민 씨족집단 간에 생겼을수 있다. 원래는 後進 유목민들이 몰고 들어온 소나 양이 정착농경민들이 가꾸는 밭에 마구 들어가 곡식을 해침으로 해서 초래된 분쟁(곡식밭을 침범한 유목민들의 소나 양을 때려 죽였거나 잡아 먹었다든지 하는)이였지만 결국 선진 부락과 후진 부족 간의 싸움으로 번져져버린 것인데, 그 싸움이 다른 복합적 사태와 서로 작용하면서 점차 걷잡을수 없이 두 씨족집단간의 대형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유명한 阪泉之戰과 涿鹿之戰을 바로 그 대표적인 례로 꼽을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판천대전은 원시사회가 노예사회에로 이행하는 시기의 한차례 치렬한 충돌일수 있으며 탁록대전은 炎黃 二帝를 대표로 한 華夏부족과  蚩尤를 대표로 한 東夷부족의 각자의 문화를 대외로 확장발전시키는 행정에 행해진 맹렬한 부딪침일수 있다. 이는 염황이 련합하여 천하대권을 쟁탈하고 異己세력을 몰아낸 력사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戰後에 염황련합세력은 蚩尤(東夷)의 문화성과를 흡수하여 화하문화를 공동히 발전시켰다. 탁록지전에서 치우는 비록 염황련합세력에 졌지만 그러나 그가 대표한 동이족이 소멸된것은 아니였다. 동이족의 일부는 중원의 화하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蠻夷의 여러 민족으로 거듭났으며 일부는 북상하여 東北夷(濊, 貊과 夫餘 등이 이에 속한다)로 되였고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런 전쟁의 발동은 “씨족부락의 안정된 생산과 삶의 평화를 찾자면 대방을 굴복시켜 복속시키거나 소멸해치우거나 쫓아버려야 한다”는 씨족수령들의 공통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그것은 령토확장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에서 산생한 포로가 노예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사유재산의 산생과 더불어 계급모순이 생기고 통치자계급이 피통치자를 제멋대로 유린하자 영웅이 나타나 통치계급을 견제했다. 지금은 다른 나라의 땅을 반치만 밀고나가도 온 세계가 규탄하지만 그때 제왕들은 다른 나라 땅을 많이 침략해서 제 땅으로 만들면 절세의 통일공신과 영웅위인으로 영명을 길이 남겼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그마한 땅에 나라가 너무 많은데다 관리가 엉망이여서 누군가 강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전쟁방법으로 통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서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국제법 같은 것이나 세상사무를 관리하는 유엔식의 국제기구도 없었고 누구나 지반을 일정하게 차지하면 왕으로 자처할수 있는 세상이였다. 그때 싸움에서 진 자는 이긴 자들, 그리고 후세의 정통 계승자(통치자)들과 어용 사가들에 의해 아주 惡神으로 부각되군 했는데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오도된 문제가 많다. 오늘 炎, 黃, 蚩의 蚩尤에 대한 재평가가 거론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간이 수백년 수천년 흘러가면서 여러 제왕이나 영웅인물들의 사적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일도 매우 흔히 볼수 있다. 력대 위인과 거인들의 거창하고 방대한 이야기를 일일이 기억해서 전하기가 심히 어려웠고 청중들도 되도록 알아듣기 쉽고 재미도 느끼게 해야 했으므로 이야기군들은 왕왕 무수한 여러 제왕이나 영웅인물들의 사적을 따로따로 상세히 엮을 필요가 없이 여러 사적을 한사람 몸에 집중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업으로 먹고살았다. 산해경속의 신화나 삼황오제의 전설이나 단군신화도 모두 상술한 바와 같은 과정을 거쳐 구전되여 온 것을 후세 사람들이 수집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아무런 력사사실의 바탕이 없이 마음대로 허구해낸것이 절대 아니다. 신화와 전설의 진실성문제와 관련하여 錢穆선생이 한 말이 유명하다. “여러 민족의 최초의 력사는 전부가 기억을 통해 전해져내려온 것이 아닐수 없다. 그중에 전설과 신화의 부분이 많지만 그러나 전설을 엄격히 배격해 버린다면 上古史연구는 운운할 여지도 없게 될것이다. ”(錢穆:《國史大綱》P8~9,商務印書館,1996年6月,第三版. 李學勤 主編:《中國古代文明起源》P53.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7年4月) 사실 그렇다. 중국의 하왕조와 상왕조, 심지어 주왕조까지도 이전에는 전설로 취급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사로 자리잡았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을 봐도 원래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전설로만 여겼었으나 후에 영국인 아서 에반스가 전설에 근거하여 궁전의 진실한 유적을 찾아냈지 않았는가.  “전설에 의해 신화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신화로 해서 전설을 말살해서도 안된다. 후세에 사서가 친히 겪은 듯이 묘사한 기재들에 조작된 부분이 없을수 없지만 당시 전설과 여러 책에 단편적으로 씌여진 전설토막들에서 온 부분은 후세의 어느 한두 사람이나 한두 집단이 마음대로 위조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때문에 모종의 전설을 부정하려면 그런 전설과 상반되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전설이 확실히 력사사실에 대한 위조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전설이 반드시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되는것이다.” (同上書) 한국의 학자들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많다. ” 그러나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력사성을 중시하여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李弼永: 《단군신화의 의미와 특징》) 매우 깊숙이 받아들여져야 할 중요한 관점인것 같다. 단군의 전설 산생시간에 대한 의혹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는 관점에 립각해서《단군신화》에 제기되는 몇가지 의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보도록 하자. 오래 동안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료가 거의 없다는 기본적인 한계에다 민족주의 사학과 식민사관의 대립, 사료의 진위여부에 대한 재야사학자와 주류사학자의 인식차이, 민족정체성 고양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의도, 단군신화를 둘러싼 종교적 론쟁 등으로 혼란에 빠졌던것이 사실이였다. 그러다가 1993년 조선의 단군릉 발굴과 최근 청동기 유물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고고학적 측면과 기타 일부 정치적 문제로 인해 고조선과 단군, 기자를 망라한 고조선에 대한 론의가 새롭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존재하던 일부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새삼 제기되기도 한다.《단군신화》의 산생시간에 대한 의혹이 그것이다. 례를 들면《三國遺事》,《帝王韻紀》등 단군신화가 수록된 사서들이 13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일찍부터 단군신화의 후대창작설을 제기해왔다. 중국인민대학의 林堅은 陳壽가 편찬한《三國志》의《魏志》와 北齊의 魏收가 편찬한《魏書》에 다 檀君朝鮮에 대한 기술이 없다는 점을 들면서  王建이 고려국을 세울 때 단군전설이 나타난걸 봐서 檀君신화는 왕건이 고려국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여론의 일부 내용에 불과한게 아니냐는 의혹을 내비쳤다. (林堅:《古朝鮮若幹問題》) 일각에서는 또 현존《위서》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대해서 뿐 아니라 정사인《삼국사기》에 단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여 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회의하고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단군신화》는 그 전설의 산생시간문제와 더불어 그것이 “고조선 건국과는 무관하게 고려나 혹은 다른 어느 왕조 통치자들에 의해 터무니없이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을 소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의혹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아보면 풀릴수 있으며 나아가 이 전설의 산생시간도 추정할수 있다. 오늘의《魏書》에 기록이 없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이른 바의《魏書》는 오늘 볼수 있는 魏收(公元506年~公元572年)의《魏書》(北朝史書의 第一部)뿐이 아니고 여러 종이 있다. 西晉시기 陳壽가 쓴《三國志》가 나오기 전에 이미 魏나라와 吳나라의 력사를 기록한 사서가 나왔는데 王沈(?-266年)이 편찬한《魏書》와 陳壽와 한 시대 사람인 夏侯湛이 쓴 《魏書》등이 바로 그것이다. 《三國志》중의《魏書》는 주로 이런 史書들의 자료를 취한것이다. 그 외에도 隋나라 魏澹이 편찬한《魏書》와 唐나라 張太素의《後魏書》도 있다. 이런 《위서》들은 오늘 모두 전래되지 않고 있다. 책의 이름만 전해지고 내용이 失傳된 사서 등 典籍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다. 王沈, 夏侯湛 등의 사서는 말말고라도 그 유명했던 魏收의 방대한 저서도《魏書》(기실 魏書도 傳, 紀, 志가 26권이 없어졌다)말고는 詩文集 70여권이 다 사라지고 없다. 이런 자료를 보면 일연이 魏書에서 인용했다는 기술은 분명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一然이 구경 어느 魏書에서 단군신화 내용을 인용했을가? 우에 렬거한 자료중 後魏시기, 즉 拓跋魏 시기의 력사를 기록한《後魏書》등은 당연히《삼국유사》가 인용한 기록의 出自가 될수 없다. 왜냐하면《삼국유사》에서는《魏書》의 기록과《後魏書》의 기록을 분명히 구분하여 썼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은 晉나라 때 王沈과 夏侯湛의 魏書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이런 자료를 분석하면 우리는《삼국유사》에 인용된《위서》가《삼국지》이전의 魏書임이 분명하니 적어도 3세기 초에는 단군신화가 중국의 史書에 기록돼 있었음을 알수 있으며 그것이 신생 통치자들에 의해 허위조작된 망설이 아님을 알수 있다. 따라서 이 전설의 산생시간은 최소한 천년을 앞당길수 있다. 《단군전설》의 산생시간에 대해 우리는 조선사료에 기재된 여러 가지 단군전설에 대한 비교와 분석을 거쳐 진일보의 추정을 이끌어 낼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조선의 학자 리지린은《고조선 연구》에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는 “《魏書》의 단군전설의 자료가 혹시 曹魏때에 고구려에서 얻어간 것일지는 모르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료는 고구려 통치계급이 단군을 자기 계보와 직접 련결시키기 전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조선 인민들 간에 있었던 구비전설이였거나 혹은 문헌자료에 근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또 好太王碑文에 단군에 대해 언급되지 않은 사실과 곰을 단군의 토템으로 한 단군신화에 부여, 고구려시기 란생신화의 요소가 전혀 반영되여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단군의 전설이 부여국 건국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보았다. 리지린은 이어 “또한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자가 조선인이며 殷人인 箕子의 선조도 아니고 위만의 선조도 아님을 명백히 말하고있으니 역시 기자전설이 조작되기 전이거나 또는 衛滿조선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魏書》의 단군신화에 단군은 조선의 개국자이며 그 수도를 평양이나 王儉城이라 하지 않고 아사달이라 하였으니 이것(즉 아사달)은 분명히 王否나 準시대 고조선의 수도가 아님이 명백하다”면서 따라서 “《魏書》에 기록된 단군전설은 否, 準 시대 이전 즉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추론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서《단군전설》의 산생시간은 또 크게 한발 앞당겨졌다. 단군전설이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또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생겨날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전설의 최초의 형성시간은 당연히 훨씬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구전되여 왔거나 여러 옛 문헌들에 기록되여 온《단군신화》가 시종 최초 전설의 형성시기의 원 모양을 그대로 간직해 왔을수는 없다.《삼국유사》에 인용된《고기》의 단군신화 내용과《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과 동시대인인 리승휴의《제왕운기》이후에 인용되고 있는 고기록들의 단군신화 내용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단적으로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신화들은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와중에 후세의 통치계급과 그들의 御用史官들에 의해 수정되고 조작되기도 했으며 그들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지어 삭제되기도 했다. 일부 신화자료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 일부 사가들이 정사에 올리지 않은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단군신화》가 오르지 않은것이 그 사례에 속한다. 때문에 여러 가지 신화와 전설을 자료로 세심한 연구를 해야 그 속에 숨어있는 력사의 진실을 복원해 낼수 있는것이다. “불교영향설”과 관련하여 《三國遺事》에 인용한《古記》는 첫머리에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 遣往理之” 이라고 적고 있다. 이 記事는 단군의 조상에 대한 계보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편찬자로서의 一然은 桓因 名下에 “謂帝釋也”라고 주를 달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민족문화연구원의 沈伯綱원장은 “一然은 그의 신분이 僧侶였으므로 佛經中에 釋提桓因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아 古記中의 桓因을 佛經의 帝釋으로 리해하였을 것”으로 보고 “그러나 一然의 이 해석은 객관적, 력사적 해석이 결여된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 리유인즉 “檀君시대가 중국의 帝堯시대라면 桓因, 桓雄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顓頊,帝嚳의 시대인데...(그것은) 黃帝시대보다도 훨씬 후기이며 따라서 桓因과 桓雄을 실재 인물이 아닌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신을 가리키는 帝釋으로 본다는 것은 당시의 주변 력사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승려로서의 주관적, 종교적 견해가 개입된 해석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러면서 심원장은 桓因과 桓雄이란 이름에 나타나는 桓은 예로부터 桓水, 桓氏 등 물 이름이나 혹은 姓氏로 씌여지기도 하고 또는 烏桓國과 같이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씌여졌다는 의미에서 桓族이라는 씨족을 가리키는 씨족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 리유는 무엇인가? 심백강은 “春秋시대 宋나라 大夫였던 환추(桓魋)가 바로 桓族이였고 그는 바로 宋桓公의 후예였는데 春秋시대까지만 해도 桓族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특히 春秋시대 宋나라는 東夷의 先民이 세웠던 殷의 후예로서 동이족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桓因, 桓雄의 桓族과 春秋시대 宋桓公, 桓魋의 桓族을 서로 련계선상에서 생각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고만 말할수 없다”고 상당히 계발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桓자를 韓國의 크고 밝다는 韓자와도 련계시키고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는 또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太伯山 꼭대기[지금의 묘향산]의 神壇樹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天王이라 한다. )라고 기록했는데 편찬자 일연은 여기서 태백산을 묘향산에 비정하고있다. 이에 대해서 심백강은 “환웅이 ‘太伯山꼭대기 神壇樹 아래에 내려 왔다’고 한것은  桓雄이 자기 아버지 桓因이 다스리던 옛 고장을 떠나 새로운 고장으로 이동하여 와서 살았음을 말한 것”이라면서 “여기서 말하는 太伯山은 중국대륙의 고조선 발상지에 있었던 산을 가리킨 것인데 이 山을 一然이 북한(조선)에 있는 妙香山으로 주해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조선의 리지린선생은 “觀佛三昧海經”등 佛典자료의 “旃檀妙香” 관련 기록을 통해 전단(旃檀)이란 나무가 불교에서 신성한 수목으로 인정되여 있음을 볼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太伯山頂(卽 太伯 今 妙香山) 神壇樹下”라는 표현에 대해 “불교사상으로 꾸며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불경자료를 보면 “전단묘향(旃檀妙香)”이란 표현이 확실히 자주 쓰이고 있는데, 례컨대《禮佛懺悔》“五十三佛”에 “전단목가루를 약에 섞어 중생을 치료한다. 묘향(신묘한 향기)이 고루 풍기면 모두의 심신이 안정을 찾고 맑아질수 있다(旃檀翻與藥 能除衆病 妙香普熏 衆生離垢淸淨)”라든가 “부처 신상의 팔만사천 모공에서 단향목의 묘향이 흘러나와 피안을 고루 적신다(佛身八萬四千毛孔 皆出旃檀妙香 普熏法界)”라는 글귀가 보이고《法華經》卷十九《法師功德品》에는《法華經》을 랑독하는 자는 鼻根功德의 증서를 얻어 天香, 旃檀, 沈水 등의 여러 가지 妙香을 맡아 분별할줄 알게 된다고 한것 등이 그것이다. 이로서 리지린선생은 승려로서의 일연이 불교사상의 지배하에 “神壇樹”란 낱말을 신화속에 집어넣은 것으로 리해하고 있는것 같다. 리지린선생의 말대로 일연이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原典에 없었던 “신단수”란 낱말을 일연이 자의로 집어넣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단《古記》에 전하는 “神檀樹”를 旃檀樹로 리해하고 거기에 불교에서 旃檀과 늘 함께 하는 妙香을 조선의 妙香山과 련계시킴으로써 결국 태백산을 묘향산에 비정하게 된것이라고 본다. (계속) 
48    연변전통된장과 “귀향아리랑” 댓글:  조회:6694  추천:116  2008-01-10
연변전통된장과 “귀향아리랑”   “연변민들레” 리동춘리사장의 연변사랑행진곡     돌아가노라 돌아가노라 이 아들이 돌아가노라 고향산천 부모처자 그리워서 령을 넘어 돌아가노라 --《귀향아리랑》(리동춘, 허동규 작사, 허동규 작곡)에서     “연변민들레마을”  힘찬 스타트   작년 12월 15일, 대련의 수출대리회사를 통해 이 해의 마감차 “민들레와 순창두레 마을”표 전통된장을 한국행 화물선에 실어보낸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리동춘 리사장(52)은 어쩌다가 즐거이 쇠게 될 새해 설을 떠올리며 금시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연변을 조선족전통된장의 세계적생산류통중심으로 부상시킬 구상을 안고  3년 전 연변에 진출한 리동춘은 각고의 준비끝에 2006년 9월 초순 연변된장의 첫수출을 시도했다가 실패, 이어 작년 5월과 7월에도 역시 검사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크게 좌절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설명절인들 가슴에 얹힌 그 무거운 고뇌를 털어버릴수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좋은 날은 찾아오게 마련인가보다. 작년 9월 드디여 수출에 성공했다. 그것은 “전통된장의 현대화생산조건은 유일하게 연변만 가지고있다”는 리동춘의 확고한 신념 덕분이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집스레 애써온 결과였다.   상품이 번번이 퇴짜를 맞았던것은 다른 원인이 아니였다. 전통생산방식에서 필시 나타나는 불미스런 세균 아플라톡신이 기준치를 넘는것이 문제였다. 북경대학생명 과학원의 저명한 전문가, 교수를 모셔왔다. 여러 가지 방안을 동원한 십수차례의 실험 끝에 고안해낸 새로운 발효공법으로 끝끝내 골머리 아픈 문제를 풀어냈다.   그것이 첫실패로부터 딱 1년만인 작년 9월 22일의 첫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때 내보낸 제품은 한국식품약품안전청의 정밀검사를 거쳐 공식 통관, 뒤미처 합작업체로부터 최고급품질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12월까지 세차례에 걸쳐 순조롭게 수출된 19톤의 원조전통된장은 한국시장 류통과정에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리동춘은 한국의 전통장류 브랜드기업 “순창진미식품주식회사”와 전통장류생산의 최적청정지인 “연변두레마을”과의 “3자합작”을 이끌어내고 따라서 “민들레와 순창두레마을”이란 통일브랜드로 매월 100톤 수출계약의 체결을 최종 성사시켰다.   꿈을 현실로 바꾸는 첫 걸음을 힘있게 내디딘것이다.   격변의 시대 “민들레고개”      민들레!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하여 지구촌 방방곡곡에 민들레홀씨들이 흩날려가 갖은 시련과 수난의 발자취를 남기고 새로운 공동체로 정착하면서 글로벌시대 창조적민족으로 거듭나는 우리 민족!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 봄바람을 타고 조선족들이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또는 한국으로 빠져 나가면서부터 조선족 마을들은 해체의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룡강성 해림시 신합촌은 여느 촌과는 달랐다. 다른 촌의 학교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아걸었지만 신합촌의 학교는 오히려 학생수가 늘었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한국으로 떠나가는 현실에서 신합촌에는 역으로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   이곳을 변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오늘 “민들레마을”의 리동춘이다. 그는 조선족기업의 신화로 불리는 “백두산그룹”을 창설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가 백두산기업을 만든건 그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그는 기업에서 나는 리익금을 고스란히 조선족을 위해 재투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것이 신합촌 신도시 즉 “백두산타운”이다. 신합촌은 흑룡강성 조선족촌 중의 제1촌으로 떠올라 흑룡강성 당위서기가 점을 잡고 경험을 탐구하는 모델촌으로 되였다. 유명해진 리동춘은 제 9기 전국인대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이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이때 북경에 있는 우리 민족의 엘리트들이 유명짜한 해림시 백두산타운으로 수차 드나들면서 강력한 “유세”를 펼친 끝에 매여끌다싶이 리동춘을 북경으로 모셔들인다. 애지중지 가꿔온 기업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북경에 들어간 리동춘은 “중국조선족코리안닷컴” 을 세우고 중국 조선족의 우수한 젊은이들을 발견해서 키우는 “미래양성”사업에 동참하고 “중국조선족발전을 위한 심포지움”의 집행위원장도 력임, 몇 년간 동북 3성 조선족 새농촌건설 관련 학술세미나를 수차례 벌려왔다. 그 행정에 조선족사회의 발전은 말로만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를 잇는 실제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통감하고 결연히 연변진출을 결심한다.   “외딴 섬”으로의  “귀향아리랑”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청신한 연변의 깊은 산중에 “연변민들레전통장류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길가에 우뚝 솟은 1메터 직경에 6메터 높이의 통나무간판이 름름하다. 꼭대기에 앉아있는 전통장독이 살아있는 간판처럼 손 흔들어 길손을 맞이하는듯 싶다.   인적기 드문 초시작 단계의 작업현장이라 아직은 고즈넉하고 한산하기까지 하다. 전기도 들어가지 않은 야산기슭에 황토벽과 통나무구조로 된 한옥 한 채, 그리고 몇백개의 장독대가 고작 눈에 뜨이는 실물 전체이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현대기업의 경영론리로는 도저히 해득할수 없는 거창한 일들을 리동춘을 비롯한 “민들레마을”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는것이다. 그것도 한국기업 진출 십수년에 300만 딸라를 집어넣고도 여봐라 할만한 항목을 개발해내지 못해 아직 그냥 대기상태인 이 “외딴 섬”에서 그는 대관절 무슨 수로 생태산업이라든가 농가기업육성 이라든가 세계최대 조선민족전통장류단지 조성이라든가 문화와 산업의 융합이라든가 하는 “거창한 꿈”을 이룬다고 하는것일가?   아래 이 몇 년간 리동춘네의 행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2004년, 연변 최초의 “록색경제문화학술세미나” 개최 -2005년 5월 8일, 서울 “귀향아리랑문화예술절”에 이어 “제1회 귀향절”, 연변최초 “생태가요창작발표대회” 개최, 12월,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설립 -2006년 8월, “민들레생태연수원” 개원, “제2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귀향절)”개최,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와 조선족문인사회 최초의 “토템문화현상학술세미나” 공동개최 -2007년 8월, “제3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 행사 개최.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연변일보, 길림신문, 료녕신문, 연변《생활안내》의 공동주최로 생태소설, 시, 수필, 가요, 미술, 촬영작품현상공모 및 시상식, “제1회 세계연변민들레전통된장축제와 생태쌀, 생태꿀축제” 치름. 중국, 한국, 일본 등 각계 인사 1,000여명 참여, 500여명 현장 참석   기자: 왜 기업을 설립해놓고 기업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보이는 문화행사만 벌리는가? 실속 없이 명예만 추구하는것이 아닌가? 리동춘: 경제란 인간활동의 산물인만큼 경제에 앞서 인간이 우선이다. 기업제품의 존재는 시장배육의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문화인재가 많은 연변은 인재의 보고(寶庫)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문화인들과의 련대로 시장을 개척할수 없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일반 통념을 깨는 역발상에 토대한 문화적 투자에 성의를 넣은것이다.   기자: “민들레”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리동춘: 생태인간, 생태기업, 생태제품이다. 21세기는 생명산업의 시대이자 인류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건강기능식품의 시장예비가 무진장할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민족의 명맥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없어서는 안될 전통발효식품과 무공해 생태농산물을 기능성제품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인류건강증진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기자: 훌륭한 발상이고 계획이라 생각되지만 리상주의적 색채가 짙은것 같은데? 리동춘: 현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에 집착하면 다른 기업들과의 무한경쟁속에 깊이 빠지게 된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거기까지 가는데 현실과의 접합점이 어디인가 그 과제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제는 우리 삶의 밑바닥에 있다고 본다. 남들이 다 회피하지만 꼭 해야 할 과제인 농촌경제와 전통산업에서 풀어가자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수한 전통문화, 전통산업을 살려가면서 문화와 산업 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리자는 것이다.   생태산업 공동체  “전통된장련합국”   리동춘은 연변전통장류 생산공급시스템의 량성순환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세계인의 식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마케팅전략으로 "된장련합국"을 창설하련다는 괴짜구상을 내놓았다.   기자: “된장련합국”? 참으로 기발하고 거창한 착상이다. 그런데 왜 하필 된장인가? 리동춘: 된장의 물리적 기능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단지 강조하고싶은 것은 된장문화다. 우리 민족의 문화는 된장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된장에는 아주 깊이 있는 령성(靈性)문화가 있는데 그것을 5덕(五德)이라 한다. 즉 단심, 화심, 항심, 선심, 불심이다.   기자: 금시초문이다. 무슨 뜻인가? 리동춘: 단심(丹心)은 일편단심, 다른 음식속에 섞여도 자기의 맛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고  화심(和心)은 다른 음시과 잘 조화하면서 자기 맛을 낸다는 것이다. 항심(恒心)은 오래 두어도 변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기능으로 승화한다는 뜻이고 선심(善心)이란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의미, 불심(佛心)은 기름기와 비린내를 제거해 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령적기능을 가지고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민족의 특성과 비슷하지 않은가? 인간이 갖추어야할 문화라 생각한다.   된장은 우리민족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해온 가장 기본적인 기초식품이다. 전통된장은 식품이면서도 항암, 고혈압 억제, 간기능 강화, 해독, 소화 등 작용과 당뇨병, 비만증, 심장병, 뇌출혈 등 질병 예방치료기능까지 겸비하여 이미 과학적으로 약식동원(藥食同源)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우수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아직까지 100% 콩을 원료로, 아무런 화학첨가제도 쓰지 않고 순수 전통된장을 제품화한 기업은 조사에서 발견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통적(正統的) 된장제조방법은 가정집에서 메주를 빚어 발효시킨 후 장독에 담아 최소 6개월 이상 발효, 숙성시키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된장의 기업에서 그 과정을 거치면 리윤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밑지기 십상이란다. 지금 있다면 배양종균을 밀가루 등 기타 곡물에 넣어 만든 개량된장이 있는데 이런 된장은 영양가와 기능면에서 정통된장과 비교가 안될만큼 큰 차이가 난다는것이다.   리동춘이 연변된장을 선택한 리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아직 세계적으로 전통된장을 생산하는 기업이 없는데 반해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생산기술을 가지고 있다는것, 말하자면 수많은 농가를 기업화시키는 최적의 여건이 오직 연변조선족자치주에만 주어져있다는 것이다.   물론 애로사항이 없는것이 아니다. 하나는 집집마다 다른 장맛을 한가지 맛으로 통일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공해식품으로 수출의 길을 여는것이다.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장장 3년의 시간을 준비해왔으며 수많은 학비와 비용을 지불하였다.   수출을 거듭 시도해서 네번째만에 성공시킨 리동춘은 향후 매월 100톤(물론 2~3년 후엔 100톤만이 아니다)이란 수출의 길을 열어놨다.   리동춘의 "된장련합국"창설구상은 바로 이 과정에 싹이 터서 무르익은 것이다.   이 구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본 지역에서 무상으로 공장, 집터와 농경지 일부를 제공하고 요구표준에 따라 만든 제품 전체를 수매하는 조건으로 80호 좌우의 농가기업을 육성하는 동시에 한국, 조선, 미국, 일본 등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있는 나라와 지역의 기업을 유치하거나 회원기업으로 받아들여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 21세기적 생태기업리념의 산업공동체를 만들어간다. 또한 수익금의 최저 3% 이상을 “생태문화경제산업발전기금”으로 기부키로 확정, 또 민족을 사랑하는 NGO(엔지오, 국제비정부기구)단체들과도 널리 교류하면서 전통산업으로 민족의 발전을 돕는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실제로 이 구상은 계획단계를 넘어 이미 실시에 들어갔다. 전화문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10여개 기업이 이미 동참을 선언했고 그 기업들에 줄을 다는 숱한 농가들도 앞이 보이는 희망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다.   만질듯이 다가온 “된장아리랑”   기자: 세간에서 연변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도 있다. 특히 연변에서 기업을 한다는것은 호박 쓰고 돼지우리에 뛰여드는 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연변을 선택한 다른 리유가 있다면? 리동춘: 연변사람은 밖에 나가서 취직을 할 때도 자기가 연변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두려워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똑같은 피가 흐르는 아리랑민족으로서 사람들이 나쁜것이 아니며 더욱이 누구의 탓으로 생각할수 없다. 단지 지역마다 문화적인 차이는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민족은 왕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잘 어울리는 우수한 공동체문화가 있다. 강자 앞에 머리 숙일줄 모르고 약자는 베풀어 주는, 모두가 왕이 되는 그런 문화특성이 짙은 민족이다. 특히 연변지역은 전통집거구역으로서 그 뿌리가 더 깊다고 생각한다. 외지 사람들을 잘 인정해주지 않는 연변의 인정세태를 직접체험으로 맛본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연변사람들을 사랑한다. 우리가 멀지 않아 혼연일체를 이루게 될것임은 틀림 없다. 연변은 때묻지 않은 전통문화와 전통기술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민족전통산업과 문화산업을 발굴하고 계승발전시킬수 있는 큰 예비를 가지고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연변을 선택하게 된 원인중의 하나다.   기자: 연변발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있다면? 리동춘: 21세기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문화의 창달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생태자치주로 건설한다는 정부의 취지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단, 이것이 공무원사회에서 부르짖는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정부와 서민 사이에서 역할하는 민간단체의 육성에 무게를 실어 고향살리기, 민족살리기, 연변살리기, 자연살리기, 환경살리기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귀향아리랑”들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제정이 필요하겠다.   기자: 전통장류단지조성이 연변에 주는 의미는? 리동춘: 일을 금방 실행해나가는 시점에서 결론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꿈만큼은 뚜렷하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전통된장의 본연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민족식품의 위용을 세상에 떨쳐보자는 것, 농가기업의 신개념 기업리론을 현실화시켜 “3농문제” 해결에 참고가 될만한 경험을 더듬어 내고 아이디어경제(策劃經濟)의 모델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적은 돈이나 지어 빈손으로도, 그리고 같은 제품의 생산자들과 사활적인 경쟁을 벌리지 않고 오히려 단합하면서 함께 창업할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자는 것, 연변민들레생태문화 예술절을 특색짙은 생태문화브랜드로 키움과 아울러 국내(한족지역 망라)와 국외에 널리 된장문화를 홍보하며 이로써 연변을 명실공히 “세계속의 최대전통장류집산지”로 부상시키 자는것이다. 금년 제4기 이벤트는 씨름, 그네, 널뛰기 등 전통체육항목을 포괄한 대회로 치를 계획도 짜놓았고 생태가요응모는 이미 시작했다.     리동춘은 이렇게 말한다. 총명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앞만 보고 나갈 때 좀 바보스럽게 되돌아가는 것도 기회로 될수 있다. 지금 세계 500강 기업시대는 지나가고 500대 기업시대가 시작되였다. 500강은 경제실력으로만 평가하는데 반해 500대는 환경개선 등 시회기여도를 종합평가한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민들레”의 경영리념은 “엔지오정신”에 립각한 리타적 경영이다.    취재수첩을 접으며   오십대 사나이의 가슴속에서 굽이쳐흐르는 “귀향아리랑”노래, 아리랑 고개넘어 연변의 심산벽곡에서 “된장아리랑” 새노래 창작에 여념이 없는 리동춘! 그의 웅숭깊은 눈길에서 우리는 세계최대된장집산지로 떠오르는 연변을 본다.   //길림신문/박문희   【李东春相关文章】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059/0/8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06/0/4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64127/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93635/0/0  http://www.zoglo.net/blog/read/piaowenxi/202732/0/0  
47    [칼럼시리즈] ➀ 토템과 신화 댓글:  조회:5756  추천:107  2008-01-04
 [칼럼시리즈]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4)    ➀ 토템과 신화   얼마 전 토템과 신화 문제를 가지고 중국과 한국의 사이버공간이 조금은 시끌벅적했다. 지난해 10월 31일 한국 梨花女大 중문과의 정재서(鄭在書)교수가 론문《중국신화속의 한국신화》를 발표한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정교수는 론문에서  “산해경중 염제, 치우, 과보, 풍백 등 동이계 신들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출현함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한국신화에 한발 접근할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됐다”며 “공간적 차원에서 중국신화는 한 민족, 한 국가의 신화라고 할수 없으며 중국신화는 사실상 아시아의 다양한 신화를 뭉뚱그린 ‘동양신화’다”1)라고 주장했다.   이 론문 발표에 앞서 정재서교수는 《한국신화의 원형을 찾아서》란 글에서 “우리 민족은 지금의 한반도에서만이 아니라 드넓은 대륙을 무대로 살아온만큼 진정한 한국신화의 원형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빈약한 국내 문헌자료에 구애되지 말고 자료분석의 시야를 중국의 다양한 신화자료에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는 의론을 편적도 있다.   그의 론문이 공개되자 중국의 일부 매체들은 당일로 “정재수가 한국의 신화가 중국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고 발표하여 중국 네티즌들의 강한 반발을 유발, 정교수를 비꼬는 글들이 넷사이트에 빗발쳤다. 이에 대해 정재수교수는 중국언론의 “왜곡보도”로 중국네티즌들이 그의 론문내용을 오해하고 있음에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공교롭게도 작년 7월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중국신화학회 회장 엽서헌(葉舒憲)이 새책 《곰토템—중국 선조신화의 뿌리를 찾아서》를 발표, “황제집단곰토템설”을 펴면서 “곰토템은 동북아지역의 공동한 현상”이라며 나아가 “단군신화는 황제족과 한민족의 연결고리”이며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곰토템 신앙과 신화의 기술내용은 황제-화하(華夏)민족을 조선-한민족의 상고시대 문화기억과 연결시켜 주는 공동의 끈”2)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책이 나온지 4개월 만에 한국의 매체가 “단군신화의뿌리가 황제집단의 곰토템이라는 주장이 중국 연구기관의 한 신화학자에 의해 제기됐다”며  葉舒憲의 주장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신화를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응’으로 폄하하고 신화, 전설시대를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매도했다. 그러자 한국의 네티즌들도 엽서헌의 주장에 강렬히 반발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일부 매체는 한국이 중국의 조상신화연구를 공격하고 있다고 받아쳤다.   그럼 정재서와 엽서헌의 학술주장이 과연 중국과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의 강한 반발을 살만큼 잘못된 것인가? 그들의 론문과 저서를 들여다 보면 저자들의 의도와 저서의 실질적인 내용이 매체들에 의해 상당정도 오해 혹은 왜곡되고 있으며 설사 각자의 견해표달에 일부 토론해야 할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주장에 뚜렷이 드러난 중요한 공통점에 대해서는 매체들이 완전히 간과하고 있음을 금방 알수 있다.   공통점이란 무엇인가? 신화연구의 시야를 자국내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국외, 나아가 동북아, 유러시아까지 넓히고 있다는 점, 또는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정재서교수는 “한국신화연구도 한반도 혹은 국내 자료에 국한하지 않고 아시아적 범주에서 다양하고 풍부하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엽서헌도 “곰토템은 유라시아대륙 및 북아메라카 전사시기 종교신앙의 공동한 주제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글에서 대방 민족과 국가에 대한 비하나 불존중의 의도를 찾아볼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간의 련결고리를 찾으려는 뜻깊은 노력을 감지할수 있다.   기실 현재 두나라와 민족과 민족간에 아직 불신감과 일부 감정의 장벽이 놓여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련결고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매우 귀중한것이라고 봐야 한다.   일이 이쯤 벌어진 이상 우리는 이 토템과 신화문제를 그저 간단히 지나칠수만은 없다. 여기서 토템과 신화를 동시에 제기하는 것은 이 량자를 떼여놓고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토템과 신화의 관계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천명한 사람으로는 아마 프랑스의 사회학파 창시자 E. 뒤르켐(涂尔干)을 짚을수 있을것 같다.    뒤르켐에 따르면 토템이란 바로 부족 각계통의 표징이자 사회의 상징물이다. 토템의 神聖性은 토템동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시인류의 자연에 대한 무지와 위구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그것은 개체에 대한 사회의 초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는 성스럽고도 신비한 힘이다. 토템에 관한 이야기자 바로 신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인데, 결국 그것은 사회에 대한 서술에 다름 아니다.3)   물론 뒤르켐의 견해와 다른 견해도 있다. 토템문화 연구는 1791년에 시작되여 지금까지 200년 남짓한 력사를 가지고 있지만 여러 학자들이 근거로 삼은 자료가 다르고 연구의 각도가 같지 않으므로 각자가 얻어낸 결론에 차이가 생기는것은 조금치도 이상할것 없다. 토템문화가 발생한 시간이 아득히 먼 옛날인데다가 사회의 발전에 따라 토템도 많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뒤르켐의 론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리해에 커다란 흥취를 갖는다.   “사회의 상징물로서의 토템은 피부와 눈으로 느낄수 있는 형상으로 씨족군체내의 동질감을 제시하여 군체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공동한 문화혈맥을 이어가며 공동한 문화기억을 보존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따라서 토템동물(조상)의 사적을 서사화(敍事化)한 신화는 사회문화기억을 유지하는 사회적기능을 가짐으로써 부족군체가 세세대대로 전하는 공동한 신앙으로 승화되는것이다.” 4)   신화는 허황한 것이라서 믿을수 없다는 과거의 생각은 오늘 많이 바뀌여 있다. 이전에는 하왕조와 상왕조까지도 신화시대로 취급되였었는데 그런 견해는 언녕 뒤집히고 지금은 염제, 황제, 치우 지어 그 전의 인물들도 실재인물(여러 사람의 사적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사례를 포함해서)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신화가 아주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고 력사사실을 상당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고고학발견으로도 많이 증명된 터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에서 관심이 쏠리게 되는것은 단순히 우리 민족 조상들의 토템이나 신화 그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것을 오늘날 부득이 련계시켜 보지 않으면 안되는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우리 민족 자체의 현실문제와 련계시켜 생각해 봄으로써 오래 동안 우리를 곤혹케 해온 일부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것이다. 토템과 신화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가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될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상고시대 우리 민족 선인들의 행적을 추적함에 있어서 우리는 토템과 자주 만나지 않을수 없으며 그것이 때론 추적의 관건적 고리로도 된다. 토템에 대해 여기서 장황한 해석은 면하고 필요시에만 구체문제와 결부해서 토론하려 하며 단 근래에 자주 거론된 토템의 품종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실상 한국의 연구교수들이 토템의 범위는 대체로 그려 놓았으므로 우리의 인식에 별 무리는 없다.    례컨대 한국 梨花女大의 허흥식교수는 “한국 고대신화의 토템은 범, 곰, 사슴, 고니 등 야생동물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북극성 등 천체를 내포한 천신이 있고 말과 소, 돼지 등 가축과 산천과 바위와 고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포함되였다. 이 가운데서 맹수인 곰과 범은 불교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은 대표적인 토템이고 그 가운데서 범은 곰보다 실제로 우세한 토템이였을 가능성이 크다.”5)고 하였고,   죽계선생은 《한국신화의 체계화방안 연구》란 글에서 “마을을 지켜줄수 있다고 믿어서 숭배하는 부락신의 형태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산, 바위, 연못 등의 자연물이나 나무, 바위, 뱀, 호랑이, 두꺼비 등의 동식물이 있는가 하면 상상의 동물에서부터 산신령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양상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락신화들은 신계에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늘신이거나 강림한 신이 아닌 토템적인 성향을 지닌 신이라고 할수 있다”고 하였다.   송기정교수는 “또한 의자왕 20년(660년)에 땅속에서 거북이 나와 그 등을 보니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씌여 있었는데 이것은 곧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는 뜻으로 그 해에 라당(羅唐)련합군에 의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중 《백제본기(百濟本紀)》의 거북점기록을 볼 때 거북토템의 존재도 예상해 볼수 있다”6)고 하였다.   삼족오를 우리 민족의 토템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여러 사서의 기재로 미루어보아 그것이 우리 민족만의 토템인것 같지는 않다. 기실 집안의 고구려 고분벽화나 한국의 씨름무덤,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시대 고분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는 삼족오(三足烏)를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동히 태양의 신으로 널리 숭배한 전설의 새라는 견해도 많다. 삼족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한시대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책이며 《산해경》에도 “태양가운데 까마귀가 있으니 세발달린 까마귀이다(日中有烏謂三足烏也)”`  `라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의 앙소문화 유적지의 토기에서 처음으로 삼족오가 발견된 뒤 감숙성의 제가문화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였으며 료녕성 조양지구 원태자 벽화묘에도 삼족오문양이 있다. 삼족오가 중국의 신화가 만들어낸 산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삼족오는 그 형태가 중국과는 달리  단순한 까마귀라기보다는 봉황의 모습과 합쳐진 것 같이 독자적으로 진화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이제 고대 여러 민족(이 가운데는 아직 분명치는 않지만 우리 민족의 선인들도 섞여있을 것으로 본다)의 토템을 간략해서 살펴보면, 하족(夏族)의 토템으로는 돌, 곰, 물고기, 룡 등 다수가 있고 화족(華族)의 토템으로는 꽃, 상족(商族)의 토템으로는 현조(玄鳥) 등 새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족(周族)은 룡, 새, 거북, 기린, 개, 곰, 자라, 벼, 호랑이 등, 진족(秦族)은 현조(玄鳥), 초족(楚族)은 곰, 자라, 양, 봉황, 물고기, 룡, 호랑이 등을 토템으로 했다. 북방의 고대민족중 흥안령 서쪽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의 유목민들은 곰, 사슴, 개, 이리, 뱀과 새 등을 토템으로 숭배하였고 선비족의 토템은 일반적으로 사슴이라고 알려져있으며 거란인의 토템은 청우(靑牛)와 백마, 돌궐족계의 토템은 암이리, 흰매, 수리, 사냥매, 새매, 산양, 청응(靑鷹), 눈(雪), 사자, 수락타 등이 있으며 고대 강인(羌人)토템으로는 양, 호랑이, 모우, 백마, 삼랑(參狼), 원숭이 등이 있고 남방의 고대민족중 월인(越人)들은 주로 새와 뱀을 토템으로 삼았다 하며 남만(南蠻)민족은 주로 개를 숭배하였고 야랑인(夜郞人)들은 대나무, 파인(巴人)은 호랑이, 남조인(南詔人)들은 호랑이를 숭배하였다 한다.   이런 토템들이 거개가 신화를 산생했으며 그중에는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들도 많다. 《산해경》에 기록되여 전해진 신화만도 그 수가 적지 않은것이다.   고대부족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토템신앙현상을 통해 우리는 각 부족 토템물의 상이(相異)함과는 무관하게 여러 부족 모두는 부동한 지역에서 역시 같거나 다른 동물 혹은 기타 자연물을 토템으로 삼으며 비슷한 방식으로 삶을 살았었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하지만 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것은 두말할것없이 우리의 직계 조상과는 다른 부족이 우리의 조상과 동일한 토템을 가지고있는 경우이다. 특히 대표적인, 혹은 중요한 토템이 동일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토템으로는 아마 곰과 새를 들수 있을 것이다. 새를 대표적토템의 하나로 보는것은 새를 토템으로 한 蚩尤, 少昊가 우리 민족이 속하는 동이족의 수령이라는 견해에서 비롯된다.   지금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중국의 사학계에서 炎帝, 黃帝, 蚩尤를 중화민족의 3조(三祖)로 취급하고 있고 우리 민족의 상당수 학자들도 염제, 치우를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간주하고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엽서헌씨는 유웅씨 황제의 영향이 심어준 상고적 기억이 동아시아의 가장 완벽한 곰토템신화인 단군신화를 산생시켰을수 있음을 암시하고있다. 그러나 이로 해서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이에 대한 역발상적 해석이 가능하기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분명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의문을 던져주고있다--   “炎, 黃, 蚩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   (계속) --------------------------------------- 1) 한국 梨花女大 정재서,《중국신화속의 한국신화》, 한국 비교민속학회《한국신화의 정체성을 밝힌다》학술대회 발표,  2007, 11, 1 2) 葉舒憲:《熊圖騰-中國祖先神話探源》, 上海文艺出版总社,  2007, 8 3) 刘宗迪:《图腾、族群和神话─涂尔干图腾理论述评》,《民族文学研究》,2006年第4期 4) 同上 5)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 범의 위상》, 만주학회 제11차 학술대회 발표 론문집, 2005년 9월 6) 한국 리화녀대 송기정,《신화의 상상력과 문화-한국문화속 동양신화》  
46    인류조상의 개척사적 이동 댓글:  조회:8541  추천:105  2007-12-25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3)   인류조상의 개척사적 이동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족적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시야를 보다 광활한 지역에로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유전인자검사에 의한 과학자들의 현생인류기원연구의 결과는 이 문제의 풀이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주고있다.   인류기원연구프로젝트 총지휘인 스펜서·웰즈(미국)의 저서《인류전사(人類前史)》(東方出版社2006年版)가 바로 그 장려한 개척사적 려정을 묘사한 인류의 유전인자보고서이다. 간단히 사람의 남자한테만 유전되는 Y 유전자의 타입을 연구하여 인류가 어떻게 전세계로 퍼졌는지를 밝혀낸 성과서인것이다.   이 책에서 스펜서·웰즈는 현생인류의 기원문제에 대해 아주 선명한 견해를 제기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약 4만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와 형성된것으로 최첨단 DNA 분석결과를 통해 밝히고있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인류가 중앙아시아 일대에 옮겨와 살다가 3~4만년 전에 갈라진 원주민 가운데 서북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유라시아인종이 됐고 동으로 몽골을 지나간 일파는 중국 북부, 한국 등에 퍼졌으며 또 한 일파는 남쪽으로 해서 중국 남부과 동남아로 퍼졌다는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지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동한 조상을 갖고있는데 바로 6만년전 아프리카주에 살던 한 남자라는것이다. 5만년 전 장시간에 걸쳐 가물과 기황이 계속되면서 그들중 한무리가 고향을 떠나 모험적이동을 시작, 수만년에 걸쳐 사람이 살만한 지구우의 거의 모든 곳을 차지한다. 현재 지구상 모든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문화, 체형, 생김새, 피부색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그러나 과학연구결과가 표명하다싶이 85%의 유전인자변이는 전반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것이며 그외 약 8%만이 인종획분의 의거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인종의 차별은 8%에 그칠 뿐이라는것이다. 인류는 공동한 생물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종에는 우렬의 구분이 없다는것이다. 종족주의자들의 종족기시는 리유가 없다는 단적인 증거를 제시한 셈이다. 유전자연구의 결과로 말미암아 인류의 기원연구에 부정적 영향을 장기간 끼쳐왔던 “혈형론”과 “인종결정론”의 대부분의 오유를 극복하게 되였다.   스펜서·웰즈는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합동연구를 진행한 결과 오늘의 세계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왔으며 중국에 살았던 藍田人, 元謀人, 北京人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인류가 도착하기전에 멸종됐음을 밝혀냈다.   유전학자들에 의하면 인류의 이동은 한번에 실시된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시돼왔다. 스펜서·웰즈의 저서와 중국의 중국의 유전학자 金力교수의 연구팀, 한국 단국대학의 김욱교수 연구팀, 일본 돗토리대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팀 등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에 관계되는 인류의 이동로선을 다음과 같이 귀납분석해보았다.   아담 남성 유전자로부터 M168 코드를 포함한 남성 유전자를 가진 그룹이 약 4만 5000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형성되였다. 이들은 인도 서부까지 이동했는데 그중의 한 계통인 M89그룹으로부터 약 4만년 전에 M9그룹이 생겨났고 M9그룹은 약 3만 5000년 전 중앙아시아의 한갈래 통로를 따라 이동, 천산과 알타이산맥 일대에 이르러 거기서 M175그룹을 낳는다.   M175은 다시 동아시아의 세 방향으로 퍼지는데 한갈래는 동으로 이동하여 동북땅에서 자리를 잡고 그중 일부는 한반도에까지 들어간다. 다른 한갈래는 남방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M122그룹을 생성하는데 이 그룹은 장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하던 중국인집단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M122그룹은 한국인집단에서도 비교적 높은 빈도(약 30%)를 보이는데 이 계통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내로 이주했다고 볼수 있다.   M122에서 한족의 염색체계통은 주로 O3, O3e과 O3e1 이 세가지 류형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중국 남부에서 동북부 방향으로 전파되였다. O3은 남아시아 군체와 묘족들에게서도 나타나지만 O3e1만은 한족이 단독으로 갖고있다. 이 류형이 원시한인(즉 화하족)으로 황토고원(섬감녕지역)에서 발생하여 일부는 적인(翟人)부족을 형성하고 일부는 중원방향으로 이동한다.   연구결과로 보아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북방한족과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일본, 몽골, 남방 한족 순으로 가깝다는것이 한국 김욱교수의 견해다. 카톨릭대학의 한훈교수가 한국인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항원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들은 일본인, 비르마인, 인도 동북부의 소수민족, 운남성 주민, 화북 한족, 동북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실험결과가 확인되였다.   M175와 그 하위그룹 M122 계통의 분포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이 한줄기에서 뻗어나와 친연관계가 기실 매우 가깝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한국 교양국사연구회의 1994년 개정신판 <이야기 한국사>의 다음과 같은 서술의 성립이 가능한것이다.   “원래 동이족의 거주지는 중국 서북부 섬서성 기산(岐山)의 서쪽지방이라고 전하고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주변의 여러 나라를 습격하는 북방계 유목민족의 압력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섬서성 한성현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북경지방인 하북성 고안현을 거쳐 한갈래는 산동반도쪽으로 내려가 회하(淮河)이남까지 널리 퍼져 살기 시작했다. 이른 바의 구이나 우이(嵎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및 서이(徐夷)가 바로 그들이다.” (17~18쪽)   몇년전에 나온 한국 최양현희의 <초중고 학습자료>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동이족은 중국 북서지역에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남동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하북, 산동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산동 방면의 동이는 은대(殷代)로부터 漢族과 끊임없는 접촉과 투쟁을 벌였고 周代에는 회하 류역까지 진출하여 대련합세력을 이룬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 동이족은 秦始皇의 통일정책에 따라 한족에게 점차 동화, 정복되거나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이족은 한(韓), 예맥족으로 일컬어졌고 몇 차례 민족이동을 계속하면서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 등지에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그외 한국 경희대 최진교수는 맥족의 무덤군이 중국내몽골 남동부지역에서 발견됐다는 1997년 3월 26일 신화통신을 인용하면서 맥족은 고조선시대의 어느때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기원전 10세기 내지 기원전 7세기 전후에 서역으로부터 이동해온 후기 이민이였을것으로 보고있다. (<다시 쓰는 한일고대사> 제26쪽)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력사학계에서 수년전부터 이미 동이족이 본토에서 발생한것이 아니라 서쪽에서부터 동으로 이동하여온 부족임에 주의를 돌렸음을 알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할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아프리카주에서 출발하여 중아아시아에서 머무른 뒤 일부는 북으로 올라가 유러시아민족을 형성하고 그 외 일부는 또 두갈래로 나뉘는데 한갈래는 동으로 흘러 천산일대와 몽골지역을 경유, 동북지역에 이르며 한갈래는 중국서북부로부터 남하하여 남방민족(남방계)을 구성한다. 남하하는 행정에 한 갈래는 따로 떨어져나와 섬서성을 거쳐 황하 하류에 이르는데 그들이 바로 우이, 래이, 회이 및 서이이다. 동북지구에 이른 한갈래는 예족과 맥족을 형성하며 한갈래는 한반도로 들어가고 또 다른 한 갈래는 해안선을 따라 황하하류방향으로 이동한다. 서북에서 남하하여 남방계를 구성한 민족(벼농사를 맨처음 시작한 민족으로 남방계 한족도 포함함)중 일부는 농경문화의 발전으로 인구폭발이 생기자 해안선을 따라 동부 연해지역으로 이동, 일부는 벼농사기술을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가고 일부는 九夷族을 형성하는데 그들이 서에서 온 嵎夷 등 부족과 동북에서 내려온 부족들과 함께 후에 동이족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우리 민족의 선인들인것만은 아니다. 한족의 선인이기도 하다. 한줄기로부터 뻗어나왔고 또 그들이 화하족의 중요한 래원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현재 현생인류 아프리카주기원설이 서방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있는 반면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일부 권위인사들이 아직 부동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인류의 이동로선 도감프로젝트가 지금 한창 실시중이므로 이미 최후 결론이 난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이미 확실하게 증명된 실험결과만으로도 현생인류 아프리카주기원설을 뒤엎을만한 증거를 제시하기는 아마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 최초의 조상이 짜장 아프리카주에서 온것이 맞다면 그들의 새로운 삶을 위한 모험의 행군이 결국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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