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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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두가지 의문으로부터 떠올리는 생각 댓글:  조회:9515  추천:101  2007-12-24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2)                            두가지 의문으로부터 떠올리는 생각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을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두가지 의문이 머리속에 항상 있었다. 한가지는 우리 민족은 몽골인과 별로 가까이에서 아기자기하게 지내지도 않으면서 그들에 대해 감정상 동질감을 많이 가지고있는것 같고 중국의 한족들과는 한데 어울려 살거나 혹은 가까이에서 접촉이 매우 잦으면서도 이질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느끼며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무슨 까닭일가? 하는 것이였다. 력사상 우리 민족이 중국 고대의 한나라나 당나라 등 력대왕조들과 빚었던 갈등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것일가? 그렇다면 몽골인정권인 원나라에 근 백년간 통치받았던 력사는 어떻게 해석할가? 이것이 안 통한다면 “우리는 몽골계”라는 혈통사상이 작용한것일가? 이것일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흔히 우리는 몽골인과 한 계통이며 심지어 고대몽골인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도 우리 글에 한자어가 60퍼센트 이상 들어있으며 력사상 두 나라가 서로 비비며 살아온 력사가 엄청 긴데도, 불행한 과거가 물론  있었지만 친화적 관계의 지속시간도 훨씬 더 길었음에도, 심지어 두 민족이 같은 성씨를 많이 쓰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무엇때문에 한족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것일가? 우리 민족은 과연 중국의 한족과 혈연적 관계가 없는것일가? 이상이 한가지 의문이였고, 다른 하나는 얽히고 설킨 우리 민족과 중국 나아가 이웃 나라 여러 민족까지의 력사를 서로 떼여놓고 고립적으로 생각할수 있을가? 하는 문제였다. 두번째 생각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례에서 비롯된다. 20세기 초 현대考古學이 건립된 이래 중국의 학자들은 왕조중심이란 전통사학의 영향을 받아 줄곧 중원의 한족사를 중국 력사(전사시기의 력사를 포함해서)의 정사로 여겨 왔었다. 그러나 1979년 료녕성 서부의 시라무렌강 류역에서 기원전 4천년 경부터 꽃핀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이런 사학사상은 크게 흔들리게 되였다. 그러나 그 영향이 아주 없어진것은 아니였다. 오르도스청동기(기원전4200년~기원전3500년 사이)의 기원문제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중원전래설을 고집하고있었다. 일찍 1980년에 중국의 학자 夏宿白선생이 吉林大學에 와서 “考古學發見으로부터 본 中西文化交流”란 제목으로 강의를 할 때 오르도스에서 발견된 청동단검이 중국에 훨씬 앞서 中亞와 西亞에 있었다고 발표했었음에도 이에 주의를 돌리는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발굴된 椭方口의 北方系구리솥이나 호랑이 모양의 금장신구나 모두 황토고원과 상간하 구간에서만 발견되였을 뿐 내지에서 전래됐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진나라에서 전래됐다고 여겨온 이른 바 “진식검(秦式剑)”도 언녕 문제가 되여 이름을 “적식검(狄式剑)”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하여 마침내 중원전래설은 부정되고 현재는 “북방장성지대(北方長城地帶)발생설”과 “서부전래설”이 병존하고있는 상황이다. 4000 여년 전 감숙성 중부지역에서 발생한 찬란한 제가문화(齊家文化)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중원영향설”을 주장하다가 여기서 출토된 중국최초의 금기명, 구리장신구와 청동조각품들이 중아시아와 남시베리아의 동류제품들과 모양이 기본상 일치하다는것이 밝혀지자 “제가문화를 서부와 련계시켜볼수 있다”는 정도로 태도를 표시했다. 그런데 재미나는것은 여기서 출토된 도기이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중 새를 새겨넣은 도기그릇이 가장 많았는데 거기에 삼족오(三足烏)도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2006년 10월 30일 중앙TV는 《초원의 석인(石人)--초원대통로의 독특한 풍경》이란 제목으로 몽골고원에서 우리나라 신강의 천산, 알타이산 지역을 가로질러 중아시아복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처처에 배포되여있는 각이한 조형의 석조인간상과 고분(墓葬)에 대해 보도했다. 그 해설사의 한단락을 아래에 옮긴다. 고분의 형태에 대한 연구로부터 보면 알타이산맥 아래의 무수한 석조고분은 겉보기엔  그저 아무렇게나 쌓아놓는 돌무지 같지만 실은 돌로 된 디딜방아(石碓)를 둘러싼 동심원(同心圓) 형태를 이루고있으며 둘레의 원형과 중심의 디딜방아는 방사형의 선으로 련결되여있다. 이것은 멀리 길림성 장백산 일대의 고구려왕릉과 거의 꼭같은 형태이다. 다르다면 석질(石質)과 디딜방아의 색갈이 다를뿐이다. 이외 동이족의 원시문화에서 보여주는 암각화가 동북, 내몽골, 신강, 광서지역, 러시아의 레나강 일대에서도 발견되였다는 연구론문도 있다. 그리고 집안의 고구려 벽화가 보여주는 종교 및 문화 요소들도 서역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련계시킬수 있다. 하늘을 떠받치는  우주력사의 생김새 전체에도 서역인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지고있다. 하다면 홍산문화를 대표로 하는 동북원시문화, 河洛文化를 대표로 한 中原원시文化, 良渚文化를 대표로 하는 東南原始文化와 甘肅, 靑海, 寧夏, 新疆에 널리 분포된 제가문화를 대표로 하는 西北原始文化간에 무슨 관련되는 점이 없을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巖刻畵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있을가? 서북지역에 나타난 三足烏가 길림성 집안과 한국의 씨름무덤,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는 삼족오와 무슨 관련이 없을가? 그리고 알타이산맥 아래의 무수한 석조고분은 부여국이나 고구려왕국과 깊은 내적 관련이 있는것은 아닐가? 여러 가지 현상을 모종의 련계속에서 고찰한다면 혹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낼수 있지 않을가?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족적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시야를 보다 광활한 지역에로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일정한 여건이 마련된 경우 모종 사실, 신화, 고전기록과 추론 등에 근거한 새로운 가설의 제기도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계속)
44    [칼럼시리즈]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1) 댓글:  조회:5144  추천:127  2007-12-18
                                      들어가는 말   최근에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에 대한 토론이 진전됨에 따라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가 주요한 문제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가 평소 범상하게 여기는 것과는 달리 이 문제는 확실히 의론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진로탐구(례컨대 우리 민족과 타민족간의 관계 확인과 태도, 방향 설정문제 등)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근년에 과학적가설과 최신기술수단에 의한 과학연구결과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주기원설이 다수 과학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현생인류다원발생설(혹은 우리 민족 본토발생설)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 바의 “정설론”이 이한 주장을 받쳐주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건대 정설은 없다. 굳이 정설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구구히 례를 들 필요는 없지만 사회와 과학기술 각 분야가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이른 바의 “定說”이 깨지고 만 사례는 기수부지다. 우리 민족이 東夷에서 왔다는 견해는 필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며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바로 여기서 무수한 리론들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이 동이에서 왔으면 동이는 어디서 왔는가? 동이의 대표적 토템으로 곰과 새가 있는데 이 량자는 서로 무슨 관계인가? 이런 문제들 중에는 견해가 완전히 상반되는 것도 있고 지어 전혀 연구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서래설, 본토설, 동이설 문제 외에도 夏商周문제, 商 민족과 우리 민족 간의 관계, 이와 관련해서 귀복(龜卜)의 비밀문제,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 문제, 우리 민족의 토템과 현실의 련계성 문제, 민족의 개념 문제, 우리 민족의 혈통문제, 민족의 융합, 혹은 동화문제, 中朝(韓)日 관계문제, 漢族과 우리 민족 성씨의 관계문제 등 수두룩한데 그중 일부는 알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따져보면 알 수 없는 것들이고 심지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도 결코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어느 하나 정설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변화와 발견으로 가득 차있는 시대이며 무수한 리론과 주장이 공존하는 시대이며 서로 상대방의 주장에서 합리한 부분을 수용하면서 간단없이 접근을 시도해야 하는 시대이다. 과거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한가지 주장이 다른 한가지 주장을 異端邪說로 몰아부쳐 단매에, 혹은 짜고들어 무자비하게 족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지 한참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력사적 교훈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무슨 문제를 가지고 서로간에 대화를 해도 견해 차이를 좁히는 결과를 도출해내기가 과연 힘들며 서로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설탕과 우유의 결합처럼 생산적이고 친화적인 분위기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토론에 림하는 진지한 태도가 십분 중요함은 바로 이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실제 토론현장을 봐도 그렇다. 일부 론자들은 토론에 림할 때 유물론자로 자처하면서도 유물론자답지 않게 토론상대가 제기한 모든 핵심문제들에 대해서 철저히 외면하는 반면 이미 거론된 문제를 이상한 각도에서 끄집어 내여 부각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시각을 흐리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겁한 태도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없을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도 초라해지는 건 그 자신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꾼다 할 때 안팎의 사정도 확 바뀔 수 있음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오늘부터 필자는 우에 언급한 몇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개인의 견해를 시리즈형식으로 피력하고자 한다. 이 일을 먼 앞날로 미루기보다는 지금 의론하는 것이 나 자신의 혼돈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토론을 통해 서로 간에 생각의 차이를 좁힐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익무해하리라는 것, 이것이 나의 소신이다. 생각을 되도록 자유롭게 표달하고자 특별히 선후순서를 합리하게 짜느라 신경을 쓰지 않고 필자 자신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글을 올릴가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반드시 맞으리라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재료의 국한성은 말 말고라도 사고방식이나 사고방향에도 문제가 수시로 생길 수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모든 비평을 환영한다. 특히 중심문제에서 사실과 리치에 어긋나는 경우 매몰차게 꼬집거나 적당히 풍자하는 것도 기꺼이 접수할 것이다. 비평문장은 물론 도리에 의한 설득이 우선이다. 하지만 글의 생동성을 기해서도 대방의 인격이나 자신의 품위에 손상주지 않는 한 적절한 타매와 알맞는 풍자수법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아주 정상적인 표현으로, 지어 그것을 상대를 높여주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아가 독자들도 그것에서 미적감수를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니전투구(泥田鬪狗)식이 아닌 그런 생동하는 비평이 솔직히 매우 그립다. 목적은 단 하나다. 영양가가 있는 토론을 통해 불분명한 문제를 좀더 분명히 하고 그 행정에 사상문화의 수준도 어느 정도 제고할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단에 정상적인 비평문화의 풍토가 정착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2007년 12월 18일 장춘에서
43    "암"자랑과 "영웅"소위 댓글:  조회:4523  추천:70  2007-12-06
                   "암"자랑과 "영웅"소위"그치들은 별별 천한 노릇을 다 해가면서 벌긴 잘 벌어들이지만 그저 모을 줄만 알았지 어디 쓸줄이야 아나? 우리네야 벌줄은 잘 몰라두 쓰는데 들어가선 절대 그치들처럼 쬐쬐하게 노는 법이 없지. 빚을 석짐 짊어져두 우선 먹구 쓰는게 영웅이야 영웅..."  모종 탄식끝의 자기 풍자인지 아니면 진짜 굳어진 일종 "세계관"인지 말만 들어봐선 알바 없어 "영웅타령" 부르는 이의 얼굴표정을 자세히 연구해 보았더니 그 말은 결코 무슨 자기풍자가 아니라 조금도 가식이 없는 자랑담이였다.   느닷없이 쏘련 작가 죠친꼬의 작품에 있는 대화 줄거리가 생각났다.   "...뭐라오? 내 병은 신염이요!" 하고 자기의 병이 대단한 듯이 떠드는 아무개의 말에 제2 아무개가 도고히 면박을 주었다. "신염? 흥! 신염이 뭐가 대단하오? 내 병은 암이란 말요. 암! 알겠소?!" "암이면 단가? 암이래두 무슨 암인가 봐야지. 어떤 암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요. 칼로썩둑 베여버리면 씻은 듯이 나으니까. 뻐기긴, 주제 넘게!" 이런 수모를 받아 본적 없는 제2 아무개는 부아통이 치민 나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발끈했다. "뭐뭐? 썩둑하면 아무렇지도 않다구? 이 사람이 어디서 같잖은 소릴 듣고 와서 아는척 하는겐가? 아주 멀쩡한 량반이 그따위 신염이 다 큰 병이라구 예 와서 우쭐하다니? 내 원 쓰거워서! "   아아...병집을 자랑거리로 삼는 일만치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리지적으로 살펴보면 "암"이든 "신염"이든 다 큰 자랑감은 못된다. 이른 바 "우리네"의 "모을 줄은 몰라도 쓸줄만은 잘 안다"는 것이 과연 자랑거리로 되겠는가? "빚더미"는 자꾸 높아져도 생기는 족족 모조리 써버리는 것이 과연 "영웅"소위겠는가? 아직도 알거지가 “빈하중농대표”로 되는 세월인줄 아는가? 또 이른 바 "그치들"은 "자금을 모을 줄 아는 것"이 죄가 되여 야유를 받고 비난을 받아야 하겠는가?   얼마전 중한 량국을 뛰여다니며 조선족동포들을 위해 로심초사하고있는 재한동포회장단의 한 회장이 들려주는 말 가운데 우리 조선족 친구들의 “병자랑” 비슷한 얘기가 몇건 있어서 기분이 자못 찝찝했었다. 마누라(혹은 남편)가 한국에 나가 뼈빠지게 일해 번 돈을 가지고 다른 녀자(남자)를 차고다니다가 상심, 혹은 절망한 마누라(남편)에게 리혼을 당하고도 영웅(녀걸)이나 된듯 큰소리(야무진 소리)를 빵빵 치고 다닌다는것 쯤은 나 역시 한두번만 들어온 얘기가 아니여서 “영웅시대” 인간세태의 다채로움을 다시 한번 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연 배신을 당한 쪽에 측은해지는 마음과 동정심이 가게 되면서 혹여 이런 불행한 가정들이 “구조조정”이라도 되면 세상이 훨씬 밝아질려나? 하는 망연한 상상을 굴려보게도 되는것이였다. 그러나 이런 고질들이 가정들의 재조직에 저절로 치유될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부를 크게 달지 않을수 없다.   몹쓸 “병집”을 무슨 보물단지인줄로 착각하고 “영웅(녀걸)”然 하는 작태를 언제면 다시 듣고보지 않게 될가. 너무 들을수 없어 그런 옛말을 듣고싶어지기까지 하는 세월이 왔으면 좋겠다.
42    이쑤시개, 금속사수세미와 의우사람 댓글:  조회:4559  추천:66  2007-11-15
 이쑤시개, 금속사수세미와 의우사람 “높은 산은 한줌의 흙도 싫다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높아질수 있고 넓은 바다는 한방울의 물도 마다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깊어질수 있다. (山不辭土,故能成其高;海不辭水,故能成其深)”는 말이 있다. 절강의 의우사람들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절강의 의우라면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 아니다. 유엔과 세계은행이 공인하는 세계 최대의 소상품시장으로 떠오른 의우는 우리의 생활과도 밀착된지 오래다. 그러나 밥먹고 의우산(産)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면서도 입안이 편안한 느낌외 다른 감수는 별로 없는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의우는 어떤 곳인가? 자연부원이 없고 공업토대도 없고 외자의 추동력이 없어 정책적 혜택도 받지 못하던 그런 고장이다. 이러한 곳에서 학력도 졸업증도 없는 농민들이 어떻게 세계최대의 소상품시장을 일으켜 세웠을가? 몇전이나 몇리, 지어 1리어치도 안되는 작은 돈도 작다 아니하고 부지런히 번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다.   중원연필유한공사 종원 리사장은 젖산음료도매로 장사를 시작한 사람이다. 음료도매를 하다가 60만원을 밑지고 나앉은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장인이 꾸리는 연필공장에 들어가 일했다. 근데 나무 한그루를 연필로 만들자면 300여개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연필 한대의 리윤은 5리도 안된다. 연필을 팔아 어느 천년에 빚을 다 갚는단 말인가? 거의 절망에 빠진 종원에게 장인은 이런 충고를 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하잖는가? 한술에 배를 불릴 생각은 아예 말게.”   종원은 장인에게서 기계 석대를 빌려다 10여 평방메터짜리 앉히고 밤에는 연필을 만들고 낮에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1년후 그는 은행에서 대부금 3만원을 내다가 연필속대를 장치해 쓰는 신식연필을 만들었다. 한 대에 남보다 1전 5리씩 값을 낮게 불렀더니 하루에 10여 만대나 팔려나갔다. 1998년 7월 인도네시아의 상인이 종원의 연필을 욕심내서 한꺼번에 660상자를 주문했다. 행운이란 천신만고끝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것인가? 지금 종원은 한해에 수억대의 연필을 생산하여 수백만원의 리익금을 올리고 있는데 제품은 세계각지에 팔려나간다. 종원은 지금도 장인어른의 당초의 충고에 감사한다.   의우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종원과 같은 전기적인 창업경력을 가지고있다. 황리군이란 사람은 금속사로 만든 수세미(“금속구-金屬球”라 이르는 이 수세미를 조선족 아낙네들도 즐겨 쓰고있다)를 생산해 하나에 몇십전씩 받고 팔았는데 지금 국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쓰이고있는건 말말고 세계 20여개 나라에 나가서도 불티나게 팔리고있다.   이쑤시개 100개에 리윤이 얼마나 날가? 1전이 난다. 의우 사람들은 매일 이쑤시개 몇십톤(이쑤시개 수십억개)을 만들어 일당 수만원의 수익을 올린다. 가느다란 비닐흡관 한개의 리윤은 0.5리로 2000개를 팔아야 2원 번다. 이런 흡관을 가지고 의우사람들은 온 세상을 다 “흡인”해 버렸다. 현재 의우시 20개 비닐흡관 생산업체의 세계시장점유률은 60%라 한다.   의우사람들은 소상품을 전국, 전 세계의 상인들에게 팔아넘기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직접 세계시장에 진출하고있다. 2006년1월 한국에서 “서울의우상품시티”를 개장한 유한평이 그중의 한사람이다. 한국 최대의 중국투자기업인 “서울의우상품시티”는 작년 6월 경 매상고를 매일 80만원 정도 올리다가 년말에는 일약 250만원까지 올렸는데 거의 한해가 다 돼가는 지금은 모르긴 해도 이 수자를 훨씬 초월했을것으로 짐작된다.    세계 최대의 소상품시장으로 떠오른 의우이니만큼 외국자본에 대한 흡인력도 그만큼 클수밖에 없다. 의우에 진출한 외국업체중에서도 한국기업이 신예군으로 맹활약중이다. 의우에 정착한 한국인을 2000명으로 헤아리고 있는데 국제무역시티의 한상관(韓商館)에만도 한국상가 근 백개가 성업중이라 한다.     푼돈을 벌어 큰 재부를 만드는 의우사람들의 정신을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다.  //길림신문
41    어미오리, 민족정신 그리고… 댓글:  조회:4699  추천:86  2007-10-17
       어미오리, 민족정신 그리고… 한국작가 강준희선생의 작품집에서 기행문 <옥스나드 가는 길>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강선생은 그 글에서 미국 려행차 로스안젤스에서 옥스나드로 가는 길에 겪은 일을 썼다.  그 사연인즉 이러했다. 로스안젤스에서 출발해서 한 40분 가량 달렸을 때 앞서 가던 차들이 일제히 멈춰서는 통에 영문도 모른 채 차를 세웠다. 멈춰선 차량의 행렬은 순식간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되였다. 궁금해서 리유나 알아볼 요량으로 아득히 보이는 맨 앞으로 스적스적 걸어가 보았더니 이게 웬 일이냐? 첫 차가 멈춰선 바로 그 앞에 오리 한떼가 꽥꽥거리며 뒤뚱뒤뚱 길을 건너고있었던것이다. 오리는 모두 여섯마리였는데 다섯마리는 새끼였고 한 마리는 어미인듯 했다. 어미는 새끼들이 다치기라도 할가봐 몸이 부쩍 달아 연신 길건너쪽으로 새끼들을 몰았지만 철부지들은 들은체도 않고 오던 길을 다시 가고 가던 길을 다시 오고 하며 말썽을 부리고있었다. 놀라고 불안해서 표정이 사색이 된 어미오리(적어도 저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는 뭐라고 꽥꽥거리며 새끼고집불통들을 한마리씩 길 건너로 물어다놓기 시작했는데 7, 8분 좋이 걸려서 다섯마리 새끼를 물어나르는데 성공했다. 경적소리도 말소리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그 진귀한 광경을 웃음띈 얼굴로 지켜보던 수백명 사람들이 “오! 오!” 하고 감탄사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이 글을 읽으며 필자도 괜시리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어미오리한테 감동되였던것만이 아니였다. 한갓 미물에 불과한 오리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세에서 대수롭지 않게 보아서는 결코 안될 위대한 정신을 느낌과 아울러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들과 비교할 때 우리 자신이 어딘가 초라하고 작아보이는것이였다. 우리 중국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가를 가정해 보자. 과연 미국인과 같은 평화롭고 감동적인 장면이 출연될수 있었을가? 재미나는 볼거리가 생겼다고 차를 세워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을테지만 이거 오리 몇마리 뭐 볼게 있다구 숱한 차를 막아놓고 야단들이야? 경적을 빵빵 요란스레 울리며 그놈들 아주 깔아뭉개구 가지 뭣들하고있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야단법석을 떨었을수도 있었을게다. 오리와 관련된 재미나는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다. 그 이야기는 명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운이 다한 원나라의 뒤를 이어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와 장사성이 이끄는 오나라가 세력 다툼을 벌릴 때였다. 하루는 주원장이 양자강하류에 있는 강소성에서 장사성의 부대를 격파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그는 겨우 말 한마리만 통과할 정도로 좁은 협곡으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장사성의 부대를 치기 위해 좁은 협곡을 지나는데 좁은 협곡길 복판에 오리 한마리가 버들잎을 입에 물고 알을 품고있는것이 보였다. 주원장은 어미오리가 전쟁터  한복판인 줄도 모르고 알을 품었을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진격을 계속할수 없었다. 그는 병사들의 행진을 멈추게 한뒤 오리가  알을 품고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수십일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전쟁을 늦추게 한 버들잎을 문 오리는 당시 주원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힘이 되였다. 작은 미물마져 사랑한 그의 자비심이 장사성의 병사들 사이에 퍼져 주원장에게로 끊임없이 항복해온것이다. 결국 주원장은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참, 미물인 오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일개 인간의 마음, 나아가 일개 민족의 정신을 본다. 
40    친화적 “노크정신”의 승리 댓글:  조회:4718  추천:89  2007-10-12
                                                            친화적 “노크정신”의 승리   프랑스에 어른들도 좋아한다는 동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왕국에서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그 나라 공주를 주겠다고 선포했다. 여러 왕자가 마녀의 성에 들어가겠다고 나섰다. 첫번째 왕자는 말뚝으로 성문을 부시려 했다. 그러나 실패한다. 두번째 왕자는 더 큰 말뚝을 동원하지만 소용없다. 세번째 왕자는 대포를 동원하고, 네번째 왕자는 사다리를 이용하며, 다섯번째 왕자는 불화살로 공략을 시도하나 죄다 실패한다. 그런데 공격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청년은 우선 무기를 버린다. 그리고 성문께로 다가가 노크를 하며 “들어가도 될가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굳게 닫힌 성문이 열리고 마녀가 나와 그를 맞아들인다. “성에 들어오기 위해 허락을 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환영합니다.”   앞의 다섯 왕자의 참패는 무력만이 성문을 열어제낄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빚어낸 필연적악과다. 그러나 마지막 그 청년은 다르다. 치밀한 관찰과 사고, 분석을 통해 무력공격만이 능사가 아님을 간파하고 “노크전술”을 펴내여 성공한다.   고정관념에 대한 열린 사고의 승리를 보여준다.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는 설도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 말일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상황반전이 완전히 가능해지는것이다.   남북의 7년전 정상회담과 이번 제2차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많이 감동했었다.   나라가 발전하자면 조화로운 사회 환경구축이 필수적이다. 세계가 안정과 번영을 실현하려면 역시 나라들 간의 조화적인 관계수립이 필요하다. 본 지역과 타 지역, 본 민족과 타 민족, 부동한 국적의 동족간도 마찬가지다.   무슨 세(勢)로보다는 마음의 교류가 절실히 필요하다. 국제관계나 학술문제 등의 토론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이비주장도 여러 사람이 그게 정말 맞는 주장입니다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면 그 주장의 조정시간만 지체시킬 뿐 아무런 도움도 안되며 결국 맞장구쟁이의 계산된 얄팍한 내속만 내비쳐지게 될 따름이다. 수령님들이나 거물급 인물들이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경우 그 파괴력은 우리 초민들에 비길바가 아니다. 물론 잠시겠지만 력사적 안목으로 수년, 지어 수십년 수백년도 잠시라고 볼수 있다 할때 그 손실을 과소평가할수만은 없다. 그러나 수령님들이나 거물급 인물들이 그 누가 뭐라든 민족의 대의와 인류의 큰 리익에 부응해서 정확한 결책을 하고 행동한다 할때 력사를 앞으로 미는 그 힘 역시 대단한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있지만 인류의 불행은 계속되고있고 세상은 태평치를 못하다. 농경사회에 있어서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관계가 그래도 친화적이였던데 반해 공업사회에 들어와서는 그 관계가 갈수록 소원해지고있으며 반목과 갈등이 우심하다. 물론 그것이 비관적이기만 한것이 아니다. 단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마당에 그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일층 두드러지게 드러났을뿐이다. 력사의 바퀴가 거꾸로 굴러갈수는 없으며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이 분명 좋은 방향으로 가고있음도 기쁘게 보고있다.   중국고전에 “례의의 적용은 친화를 귀중히 여긴다. 선왕은 친화를 미덕이라 가르쳤다(禮之用,和爲貴,先王之道斯爲美)”고 했다. 동진(東晋)때 시인 도잠은 《形影神贈答詩》에서 “천지간의 거대한 변화속에서 보잘것 없는 일로 크게 기뻐하거나 전전긍긍할것 없도다. 해야 할 일이면 반드시 할것이요 개인의 득실을 옴니암니 캐여선 무엇하리. (縱浪大化中,不喜亦不懼. 應盡便須盡,無復獨多慮)”라고 했다. 얼마전에 중국 서안에서 열린 국제도덕경론단에서는 중국문화의 정수는 “화목(和諧)”이라고 지적했다.  노크로 성문을 열어제낀 청년의 “노크정신”이 특히 고양돼야 할 오늘이다.
39    소비자의 푸념과 창업기회 댓글:  조회:4064  추천:54  2007-10-09
소비자의 푸념과 창업기회 장사를 하는 이들 치고 장사가 잘된다는 사람을 요즘 못 봤다.   사실 시장에 나가 봐도 20여년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지금은 그 어데나 꽉 넘치는게 상품인데 뭐 있어야 할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없어야 할것도 있는게 요즘 세상이다. 그 어떤 제품이나 양식으로부터 기능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춰 품종이 지극히 다양한데 이런 상품의 망망대해에서 고객들에게  결여되는 부분을 찾아 장사를 한다는것이 어찌 쉬울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 해서 시장에 정말 기회가 아주 사라진것일가?  소비자들의 모든 수요가  그럼 확실하게 해결되고  만족이 되였을가? 만족이 되였다면 대관절 어느정도로?  이렇게 바투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누구도 나서서 딱 부러지게 이젠 기회는 없다라고 말할 사람은  분명 없을것이다. 실상 시장이나 상품에 대하여 우리는 소비자들로부터 불평,  불만족이나 푸념의 소리도 자주 들을수 있기 때문이다. 불만스럽다는것은 곧 만족이 안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부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개발해내야 함을 의미하는것이다. 물론 이곳에 없는것을 다른 곳에서 가져다 공급하는것도 역시 개발의 한 측면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고객들의 불만이나 푸념소리가 창업아이템을 깨우는  신호로도 될것이라는 얘기다.   고객은 천차만별인데다가 변화무상한 존재여서 생산자는 영원히 소비자의 모든 구미와 기호를 철저히 맞추어내는 재간이 없다. 음식업을 례로 들면 지금  다수 음식업체의 경기가 그닥 좋지 못한데 원인인즉 그런 식당들이 고객들의 간단없이 변화하고있는 수요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있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조용하고 깨끗한 곳(혹은 품위 있는 곳)에서 값싸고 맛좋은 음식(혹은 비싸도 먹어본적 없는 맛좋은 음식)을 먹을수 있기를  희망하는데 식당의 음식은 값이나 맛이나 서비스나 다 맘에  안든다. 푸념은 약과고 당연히 불만족도 생길수밖에 없다.   하이얼회사에 훌륭한 사례가 하나 있다. 사천 성도에 고구마가 많이 나는데 고구마철이 되면 이곳 농민들은 그것을 대부분 날것대로 파는 외 일부는 물에 깨끗이 씻어가지고 고구마깡 따위를 만들어 팔아 짭짤한 수입을 보았다. 일일이 고구마를 손으로 씻자니 품이 너무 들어 어느 량반이 고구마를  하이얼표 세탁기에 넣어 씻어봤다. 그런데 고구마에 붙어있던 흙과 잡물질들이  배수관과 세탁기 틈사리에 끼우고  막혀 세탁기가 쩍하면 고장이 났다. 하여 하이얼세탁기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쯤 말하면 듣는 이는 “뭐라? 세탁기에 고구마가 잘 씻어 안진다고 불만? 그 친구 머리가 돈게 아니야?” 하고 그 농민을 나무랄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얼의 서비스일군의 반응은 어떤가?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그 농민고객을 도와 흙이 잘 빠지도록 배수관을 굵은것으로 바꿔주었다. 하이얼회사의 총재는 한술을 더 떴다. 그는 농민들의 불만과 푸념에서 큰 계발을 받고 연구원 4인으로 전문 연구개발팀을 묶어 수개월내에 고무마도 씻을수 있는 세탁기를  개발해내는데 성공했다. 얼마 안돼 신상품을 대량 생산해서 시장에 내놓았는데 내놓자바람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한다.   소비자가 불만족스러워 푸념을 늘어놓는 그런 틈사리에 창업기회가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비자들의 시기시기에 따른 부동한 욕구와 푸념의 기미를 먼저 알아차리는 안목이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십분 필요하다. 모종 미해결의 욕구를 제때에포착하고 그런 문제에 보다 빨리 접근하여 절실하게 해결한다면 필시 상업기회를 선점하여 효과적으로 상응한 리익을 창출할수 있을것이다.//길림신문
38    [창업칼럼]색갈중시와 고객배려정신 댓글:  조회:3942  추천:70  2007-10-05
색갈중시와 고객배려정신 미국의 한 레스토랑은 번화가에 위치한데다가 아주 좋은 장식에 음식도 아주 잘 만들었고 서비스질도 상당히 높았는데 웬일인지 오픈한 뒤 손님이 잘 들지 않았다. 사장이 암만 생각해 봤지만 그 원인을 알수 없었던 모양, 스미스라고 부르는 한 교수를 모셔다 조언을 받으려 했다.  교수는 현장관찰을 자세히 하고 나서 레스토랑의 벽이며 식탁이며 마루청이며를 모두 불색으로 칠한것이 문제가 되는것 같다고 했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투우를 보신적 있나요? 소는 천성적으로 온화한 동물인데 왜 투우장에 들어만 가면 미친듯이 투우사를 덮칠가요? 시뻘건 망토를 휘저어 소를 불안해지게 하고 격노시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사장은 “아 그런 일이였구나”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즉시 영업을 중지하고 “벽색갈을 담록색으로 고치면 좋겠다”는 교수의 건의대로 벽색갈을 바꾼 외 스스로 한수 더 떠 식탁과 마루까지 담록색으로 칠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놓은 결과 전혀 뜻밖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인젠 이전과 정반대로 손님들은 찾아드는데 문제는 그들이 식사를 긑내고 나서도 떠날념을 하지 않아 레스토랑의 리용률이 크게 영향받았던것이다.  사장이 다시 스미스교수를 찾았더니 교수님 왈, “아하 참 나원, 내가 벽색갈만 고치라고 했지 언제 식탁이며 마루며를 다 고치라 했습니까?” 그래서 교수의 말대로 식탁 등을 다시 불색으로 고쳐놨더니 과연 손님들이 식사후 너무 오래 머무는 현상이 없어지고 장사가 그냥 흥성해졌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일본 도꾜의 한 커피숍 주인이 30여명 친구를 불러다 놓고 네가지 부동한 색갈(커피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잔으로 꼭같은 커피를 4잔씩 맛보게 했다. 결과 꼭같은 커피에 대한 평판이 저마끔 달랐다. 커피색잔의 커피에 대해서는 3분의 2의 친구가 “맛이 너무 진하다”고 했고 파란잔의 커피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딱 좋다”고 했고 빨간잔의 커피에 대해서는 열에 아홉이 “너무 진하다”고 했다. 그 후 이 커피숍에서는 커피잔을 몽땅 빨간걸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 한 조치로 하여 주인은 커피원료를 절약했을 뿐만 아니라 손님들에게 각별히 좋은 인상을 남겼고 아울러 아주 좋은 판매실적을 올렸다 한다.   이러고 보면 색갈의 작용이란 참 묘한데가 있는것 같다. 그리고 장사를 잘하려면 아마 색갈에 대한 손님들의 느낌에 대해서도 잘 연구할 필요가 있나보다.  그 어떤 영업점에 가든 문전에서부터 우선 눈에 띄이는것이 아마 색갈일것이다. 그 색갈부터 뭔가 불쾌감 혹은 불안감 같은것을 안겨준다면 고객은 추호의 주춤거림도  없이 그곳을 지나쳐 다음 영업점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일것이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실내장식의 색갈이 있음은 항상 손님에게 만족감을 시사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어쩐지 불편한 느낌을 주는 색상의 장식도 분명 흔히 보는 풍경으로 때론 손님의 기분을 잡치게도 한다. 뭐 의식적으로 각별한 시선을 집중하는것은 아닐테지만 복무원 제복의 색갈과 양식 역시 손님을 불편하게 굴거나 즐겁게 하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수 있을것이다.  색갈중시는 고객에 대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를 반영한다 하겠다. 커피잔이나 종이냅킨이나제복의 색갈같은것에도 “고객만족”에 립각해서 일일이 신경을 쓰는 세심함을 보인다면, 그런 세심함은 필시 냄새(이를테면 화장실냄새)중시, 얼굴빛(이를테면 복무원의 따뜻한 미소봉사)중시...와 같은 면에서도 행해질것이며 결과 얻는것도 고객들에게 선물하는 배려만큼 혹은 배려에 비교가 안될만큼 훨씬 더 풍성할것이라고 믿는다.   //길림신문 
37    [칼럼]행군대렬속의 핸드폰 벨소리 댓글:  조회:4211  추천:59  2007-10-02
행군대렬속의 핸드폰 벨소리 박문희  2004년 여름, 중, 일, 한 3국 청소년으로 구성된 초원탐험하계학교(夏令營)이벤트가 내몽골에서 개최됐었다.  찌더운 날씨에 매일 30킬로메터 "행군"을 해야 하는 전반 려정은 십분 간거했다.   10여 킬로메터 행군했을 때 대렬속 한곳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더니 그 소리는 전염이나 된듯 확산되여 삽시에 대렬 처처에서 벨소리가 요란했다. 알고 본즉 모두가 중국애들이 부모한테 행군의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전화였다.  이런 고생은 죽기보다 못하다느니 이럴줄 알았더면 안 올걸 그랬다느니 불평이 많았다.   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것은 일본 소년들의 표현이였다. 일본애들은 야외 생존조건하에서 부딪칠수 있는 극한(極限)상황에 대처할 만단의 준비로 다들 등에 중국애들보다 훨씬 큰 행낭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모두를 놀래웠던것은 당지 수행일군들이 기중 작고 여윈 애를 도와 짐을 들어주려 했을 때 그애한테 즉각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그 일본 꼬마는 이런 때 남의 방조를 받는것을 치욕으로 간주하고 있는것이였다. 이벤트를 마감 지을 무렵 일본과 한국의 아이들은 내몽골의 독특한 민족문화와 풍부한 관광자원에 대해 몹시 부러워하면서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정말 대단해요.  우리가 살고있는 땅이 엄청 넓다는걸 진짜 첨 알게 되였다구요. 지구가 크다는걸 우린 여태 책에서만 읽었지 직접 눈으로 본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애들은 그런데는 흥취가 전혀 없는것 같았다.  그들의 머리속에 뱅뱅 돌고있는것은 오로지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일념뿐이였다.     2년 전에 보도되여 대토론을 인기했던 사실이다. 국제망신이라느니 중국애들이 일본애들만 못하다느니 이런 평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물론 이 한 차례의 활동을 가지고 이처럼 중국 아이들 전반에 대해 분별없이 혹평을 하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일을 거울로 삼아 우리가 자성해 봐야 할 필요는 분명 있다.   상기 일본 아이의 표현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견디여 내는 그 애의 강한 의지가 결코 하루한시에 형성된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그 소년의 뒤에 자식을 익애(溺愛) 하지 않고 커서 완전 자립을 할수 있도록 생활능력을 키워주는 부모가 있음을 미루어 확인할수 있다.   한편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리는,  --중국애들이 부모한테 하소연전화를 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어린것을 짐을 지워 먼길에 내놓고 가슴 아파하는 부모들을 떠올리게 됨과 동시에 부모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본의 아니게 해치고 있지는 않는지 하는 의구심이 드는것을 떨쳐 버릴수 없다. 우리는 아마 자식에 대한 보호와 과잉보호,  기대와 과잉기대,  관리와 자유방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자식사랑에 상당정도 눈이 멀어 있는것 같다.   무엇이 자식에 대한 참사랑일가? 자녀를 온실속의 화초처럼 키우는게 참사랑일가?  아이가 하자는대로 다 들어주는것이 참사랑일가? 자녀들에게 일도 좀 가르치고 고생도 좀 시키면서 어려서부터 조금씩 자립적인 품질과 독립적 생활능력을 키워주는것이 참사랑일가?  어느것이 깊은 사랑일가?   익애로 표현되는 과잉보호(過剩保護)는 아이를 심신이 허약하고 자립심이 없으며 비사교적이고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과잉보호의 리면에는 체면과 욕심으로 인한 부모의 과잉기대와 지나친 간섭(주로 공부에 대한 강요)이 다분히 깔려 있는것 같다.  돈도 달라는대로 쥐여주는 자유방임, 정말 고쳐야 할 사랑방법이다.   실상 자녀들에게 스스로 성장하려는 충동과 성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게 아니다.문제는 부모가 아이의 그런 정당한 의욕을 믿어주고 북돋아주며 하려는 일에 필요한 요청을 받아 줄 대신 그런 의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아이를 공부에만 가두어 두는데 있다.  그것이 최고사랑이라고 믿는데 있다.   핸드폰의 벨소리! 그것이 우리에게 천둥처럼 들려 시시로 경종이 됐으면!   길림신문/2006.7.13    
36    '권위적 해석'과 관련하여 곰아지 선생과 상론함/박문희 댓글:  조회:4274  추천:61  2007-09-17
  <권위적 해석>과 관련하여 곰아지 선생과 상론함   박문희   곰아지선생의 토론성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곰아지선생은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권위적 해석>에서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적인 기록으로부터 ‘단군의 중국 감숙 돈황 기원설’이나 ‘중국 신강 천산 산맥 기원설’은 아무런 력사․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일부 호사자들의 낭설임을 말해주고 있다”면서  “三危”라는 지명을 “중국문화나 불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후에 기록된 『삼국유사』중의 기록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렇게나 해석될”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런데 필자의 소견에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성과들을 보면 이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볼 일만은 아닌것 같다.   곰아지선생이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에서 발취하여 제시한 문장중 “중국 동북부의 민족으로서 肅愼 ․ 朝鮮 ․ 韓 ․ 濊 ․ 貊 ․ 東夷 등이 주나라 초기부터 중국문헌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란 기술은 내가 보기엔 과학적이 못된다. 례컨대 東夷가 우리 민족과 일정한 관계가 있는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중국고전이 제시하는 허다한 자료를 보면 그 속의 부족들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고있으며 그것을 통털어 우리 민족을 가리킨다기엔 문헌적인 기록이 받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우리 민족의 력사연구에서 문제로 되는것은 자체의 문헌자료가 턱없이 부족한것이다. 제일 오랜 자료래야 단군신화를 담고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정도다. <세종실록>에도 <古朝鮮秘詞>, <朝代記>, <三聖密記>, <三聖記>와 같은 한국史書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조때까지만 해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외에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었을것으로 보이지만 왜란으로 다 분실되고 지금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결국 지금 우리는 자기의 력사를 잃어버리고 만 형국이 되고말았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모르고있는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도 아직 이 주요한 문제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고있는게 현재 실정이다.   부득이 신화로부터 뿌리를 찾지 않을수가 없는데 이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력사가 아닌 신화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증거가 신화의 진실성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다. 문제는 신화가 너무 간략하게 씌여져 많은 문제를 오리무중에 빠뜨리고있다는것이다. 이제 연구의 길을 넓히는 방법은 중국고전을 리용하는것 밖에 없을것 같다.   중국의 고전총서 <四庫全書>는 청나라 乾隆때 천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편찬한 무려 7만 9000여권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방대한 史書다. 그 중에는 東夷사료를 망라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을수 있는 자료가 반드시 있을것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중시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간혹 생길때가 있다.   물론 한국의 학자들이 이 작업에 손을 댄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일부 연구에서 “내것은 물론 내것이요 네것도 역시 내것”이란 태도는 좀 지나친것 같다.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도 알고보니 우리 민족의 선인”이라는 견해는 바로 “동이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라는 견해에서 비롯된것이다. 방대한 고전을 련계속에서 보지 않고 고립적으로 연구하면 연구가 필시 기로에 빠지게 될것이다.   중국고전과 현대 중국의 무수한 연구론문을 거침없이 읽을수 있는 한국학자가 너무 적은것도 문제로 될수 있다.   최근 중남민족대 남방소수민족연구중심의 연구원 楊萬娟이 2005년 1월에 발표한 론문 <韓國文化與中國楚文化近源初探>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게 되였는데 상당히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어보인다. 이 글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어디서부터 떠나서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과정을 영화처럼 생동하게 보는것 같다.   楊萬娟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초나라의 羅國과 盧國은 한국의 新羅, 辰韓과 밀접한 력사적 淵源관계가 있다. 한국 삼한시기의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주민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초나라에서 건너간 초나라 유민 羅씨족와 盧씨족이다. 그들은 모두 묘족의 후예(시조는 蚩尤)로서 방사(方士) 한종(韓終)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간것이다. 단군신화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 생겨난것인데 한종이 가능하게 신화에 나오는 환웅의 원형일수 있다는게 그의 견해다. 신라는 한자를 익숙히 구사하는 우세를 빌어 건국신화를 창조, 기록했으며 신화속에 초나라문화의 색채를 부여했다는것이다. 초나라와 한국 문화의 관계에 대해 楊萬娟은 전부 고전을 인용하여 설명을 했는데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초나라의 대 시인 굴원이 <楚辭>에서 “三危” , “風伯”, “雨師” 등 용어를 사용했다는 례를 비롯하여 楊萬娟은 신빙성이 있는 례를 매우 많이 들고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원전 7세기에 중국 한강 중류의 초나라복지에 묘씨부족의 두개 작은 나라 羅國과 盧國이 있었다. 두 나라는 다 묘씨부족이였지만 갈래는 달랐다. 羅氏族은 중원에서 왔고 盧氏族은 岷山과 岷水 일대에서 왔다. 그런데 민산과 민수 일대가 바로 감숙성 남부와 사천성의 린접부에 위치한 古三危지역이다.   秦漢시기와 그 이전의 戰國시대에 方術(신선, 도사의 술법)에 능하고 천문지리와 의술, 그리고 농업과 항해 등 지식도 숙달한 方士들이 제왕의 신임을 몹시 받았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방사로 徐福을 꼽는데 그는 진시황의 령에 의해 선약을 구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그와 동시대 사람인 韓終은 선약을 캤지만 임금이 복용하려 하지 않아 자기가 그 선약을 먹고 신선이 되였다 한다. 바로 이 한종이 초나라가 망한 후 8년에 羅氏와 虜氏 등 楚나라의 나라 잃은 씨족 삼천을 거느리고 기원전 215년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동남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자가 한국으로 들어간 시기는 대략 전국시기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2세기로 잡고있는데 이는 한종이 한국으로 건너간 시간과 기본상 일치하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평양을 망라한 대동강 이남지구를 차지한 후 원유의 부락수령 이야기를 토대로 새로운 통치자에게 유리한 건국전설을 보태여 단군신화를 창조한것이다. 이로부터 추론하면 韓終이 단군신화에 기술된 환웅의 원형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사서에 한종은 이미 수련을 거쳐 신선이 되였다고 기재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완전히 그를 천신으로 떠받들수 있는것이다.   三危와 太白의 위치문제에서 楊萬娟은 자기의 견해를 내놓고있다. 三危에 대해 한국학자들중에는 白岳山설과 감숙 敦煌남부 三危山說이 있고 三危太白을 통털어 조선평안북도의 묘향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학자들의 견해도 각각인데 돈황 부근 三危山說, 감숙 天水(오늘의 천수시)부근 鳥鼠山說, 陝甘川三省접경 가릉강부근설, 川甘접경 岷江, 岷山 一帶說 네가지가 있는데, 楊萬娟은 가릉강부근설, 岷江, 岷山 一帶說이 비교적 합리하다고 보고있다. 太白에 대해서는 장백산과 묘향산 두가지 설이 있으나 楊萬娟은 두가지를 다 부정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접경의 태백산을 짚고있다. 음미해볼만한 자료가 있다. 《魏书·志第七·地形二下》에 따르면 중국 漢江(즉 漢水)의 발원지인 감숙의 天水는 東漢시기 永平17년에 漢陽郡으로 개칭한적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한국 漢江 끝부분의 서울도 명칭이 漢陽이였다는 점이다.   중국 한강의 발원지에 “태백”과 “삼위”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 초나라의 盧氏族이 “삼위”출신이라는 점 등 적지 않은 자료들이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중국문자를 통달하고 연박한 지식을 가지고있는 韓終方士가 령솔한 盧씨족과 羅씨족의 한개 지류(삼천)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진입, 드디여 新羅가 辰韓을 토대로 나라를 세우고 따라서 신라문화는 한국문화의 주류를 형성했음이 모든 력사문헌자료를 통해 증명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찾았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것을 중한간의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자들이 분명 알고있으면서도 왜 함구무언인가 하는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한국학자들의 자존심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 아닐가고 생각한다. 만약 “자존심”이 과연 문제로 되였다면 이것은 우리가 자기의 뿌리를 찾는 시간을 지체시킬 뿐이지 아무런 도움도 없을 줄 안다.   마지막으로 만약 楊萬娟의 연구가 진일보의 고증을 거쳐 진실성이 확인된다면(이는 물론 나의 가설이다) 뒤미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것이다. 우리의 조상의 한 지류가 三危의 三苗부족에서 왔는데 그 선인은 가능하게 蚩尤일수도(가능하게 아닐수도 있고) 있다. 그런데 치우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렇게 거슬러올라가다보면 약 6~7만년전(혹은 그 이전) 현대인류의 공동조상인 아프리카 동남부의 최초의 아담과 이브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것이다.   그러면 그전에는 원시인류가 없었는가? 있었다. 고고학발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빙하기(제4 빙하기)에 다 얼어죽고 굶어죽었거나 다른 알지 못할 원인으로 멸종됐다. 아프리카에서도 킬리만자로산과 케냐산 등의 6천메터 좌우되는 고산에 빙하가 형성되였고 지금도 채 녹지 않은것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의 동남부는 적도위치여서 현대인류의 조상들이 살아남을수 있었겠다고 사료된다. 그들이 서와 북으로, 혹은 얼어붙은 바다를 거쳐 호주로 서서히 이동, 수만년에 걸쳐 각 대륙으로 퍼진것이 아닐가 싶다.   나는 인류학자나 고고학자나 력사학자도 아니므로 우리 민족의 연원을 망라한 상기의 모든 “엉뚱한 궁리”들이 완전히 빗나간 생각일수도 있으니 그냥 공개발표가 아닌 수필이나 잡문정도로 여기고  서로 부담없이 의견을 교환했으면 한다. 아울러 엄중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너그럽게 량해하기를 바란다. 9월 16일 장춘에서                                      *     *     *     *   아래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데 관계되는 연구자료를 공유하고 서로의 리해를 돕고자 楊萬娟의 론문 <韩国文化与中国楚文化近源初探> 全文을 아래에 참고로 옮긴다--     韩国文化与中国楚文化近源初探                     中南民族大学学报,2005.1   作者:杨万娟 中南民族大学南方少数民族研究中心 研究员  (本文引用大量中韩文献史料试图说明:韩国古辰韩和弁韩居民来自被秦灭国的楚国,和楚国的罗氏、卢氏一样均为苗裔,罗、卢氏族是跟随着方士韩终到的韩国。檀君神话是在新罗统一朝鲜半岛后出现的,韩终可能就是檀君神话中桓雄的原形。新罗以熟练使用汉字的优势,创造并记录下来了开国神话,神话中融进了中国楚文化的色彩。辰韩和新罗的历史将会为我们提供极好的楚史研究新线索。)     今年(估计是2004年,转载者注)6月中旬笔者到韩国江陵参加国际亚细亚民俗学会第7次学术会议,并应邀和乌丙安先生、陶立璠先生等中国学者一道参观考察了江陵端午祭。主会场设在江陵市政大厅,市政府门前不远处的一块巨石上刻着“第一江陵”几个大字,在端午祭场“第一江陵”这几个字也随处可见。问其故,韩国学者告知是历史悠久之意。笔者来自中国湖北,从而引发了中国江陵与韩国江陵之间有无联系的兴趣。回国后翻阅大量有关文献,一条令人震惊的线索越来越清晰地浮现出来,即:韩国文化主流与中国楚文化休戚相关。     一、韩国地名与楚国地名的相似之处     按照史学界通行的说法,在公元前的古朝鲜时期,半岛北部先后出现檀君朝鲜、箕子朝鲜和卫满朝鲜3个王朝,南半部则有马韩、辰韩、弃韩(合称三韩)等部族国家。公元前后(~676年),半岛进入新罗、高句丽、百济三国鼎立时期,史称三国时代。公元7世纪,新罗(676~935年)灭高句丽、百济两国,统一了半岛。公元10世纪新罗王朝衰微,高丽王朝(918~1392年)取而代之。后李氏朝鲜(1392~1910年)又取代高丽。1910年日本吞并朝鲜,李氏朝鲜亡。1945年日本战败,朝鲜独立。1948年大韩民国成立,建都汉城;同年朝鲜民主主义共和国成立,建都平壤。     在韩国,除江陵外,还有丹阳、襄阳、汉阳(今汉城)、汉江、洞庭湖等地名。     韩国江陵在三国时代称“阿瑟罗”,高丽时代称“东原京”,在李氏朝鲜时代改称“江陵大都护府”,也称“江陵府”,历史的确不短,距今已600多年。与此同时,1397年新罗的翼岭县改为“襄阳府”,后为“襄阳郡”,江陵郡和襄阳郡均属江原道。韩国的首都汉城在高丽时代(1308年)称为“汉阳府”,差不多同期,新罗的赤山县改为了“丹阳郡”,[1]洞庭湖位于江原道通川郡,是江原道最大的自然湖,另有因太白山而名的太白市,三韩时曾属于辰韩的悉直国领域,于102年编进新罗。[2]从时间上看,韩国的江陵、丹阳、襄阳、汉阳、汉江、洞庭等地名和两千多年前就存在的楚国地名好象没有什么可比性,但我看了石泉先生近期出版的《古代荆楚地理新探·续集》一书,很受启发,认为它们之间有着某种联系。     石泉先生用了60年的时间研究古代荆楚地理,考证出齐梁以前楚国古郢都江陵并不是在定论了一千多年的长江中游,而是在汉水(又名汉江)中游的湖北宜城。[3]古郢都江陵的地望问题是楚国历史地理的核心,牵一发而动全身,江陵的移位意味着楚国其他地名都需要重新定位,这是一个非常艰辛的论证过程,好在越来越多的考古资料证实这一观点的正确,也有越来越多的学者开始认同。     按照石泉先生的地理新论:楚国的政治文化中心在汉江中游的襄宜平原,中心地带为江陵(宜城)、襄阳。古洞庭也在汉江中游,今湖北钟祥市西北境。丹阳这一地名更是具有代表性,丹阳是周末、春秋早期楚国发源地,也是楚早期的都城,楚国在不断地发展壮大中多次迁徙,但丹阳这个地名始终伴随在楚人左右,给后人留下许多的疑惑,有关丹阳地望的研究众说纷纭,张正明先生列举丹阳城址,有二论十四说之多,大体在荆山、秭归、枝江、当阳、当涂、丹淅等地。[4]在这里我采用张正明先生等学者的说法,即古丹阳在今河南淅川县境,丹、淅二水会流附近。[5]丹阳随楚人不断转移,但初期丹阳在丹江的中下游是大多数学者的共识。丹江是汉江上游的重要支流,汉阳是汉江下游著名的古城。这就是说楚人建国初期在汉江上游的丹阳,发展成熟时期则在汉江中游的江陵、襄阳、洞庭湖(今钟祥)一带。另外追寻中国汉江的源头,可以看到汉江的主要源头在陕西秦岭的太白山下,尽头则在下游的汉阳。     再看看韩国几个地名的分布情况:属于忠清北道的丹阳在汉江的上游,汉阳(今汉城)在汉江的下游,属于江原道的江陵和襄阳均在汉江上游不远处,洞庭湖也在江原道,最重要的是韩国汉江发源于江原道和庆尚北道连接处的太白山下,几乎和楚国地名新论同出一辙,不由得令人遐想。     二、韩国开国神话中的楚文化遗迹    檀君是韩国和朝鲜共同的开国始祖,在韩国和朝鲜人民心目中占有至高无上的地位。正如韩国学者所说:“檀君神话是我们民族创造的最根本之神话,其中包含着韩民族超越的宇宙观、人学观、历史观、宗教观、国家观、伦理观之象征。” 。[6]在此,笔者不揣冒昧,试图给世界学者们提供一个研究韩国古代史全新的思路。     檀君建国的传说,也是最古老的韩国族源图腾神话。最早见于《古记》(失传)和《魏书》等,后收于13世纪末的高丽僧人一然编写的《三国遗事》中,原文如下:     “晋有桓因(谓帝释也)庶子桓雄,数意天下,贪求人世,父知子意,下视三危太伯,可以弘益人间,乃授天符印三个,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于太伯山顶(即太伯今妙香山)神檀树下,谓之神市,是谓桓雄天王也,将风伯雨师云师,而主谷主命主病主刑主善恶,凡主人间三百六十余事,在世理化。时有一熊一虎同穴而居,常祈神雄,愿化为人。时神遗灵艾一炷,蒜二十枚,曰:尔辈食之,不见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虎不能忌,而不得人身,熊女者无与为婚,故每于檀树下,咒愿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号曰壇君王俭。”[7]     与此相似的故事还记载在韩国古籍《三国史记》、《帝王韻记》、《燃藜室记叙》、《东国通鉴》、《眉叟记言》、《高丽史·地理志》、《世宗实录·地理志》等书中。     在《三国史记》中,天神之子叫桓熊,桓熊和熊女所生之子叫檀君,“太伯山”为太白山,檀君后在平壤建立了国家,名为古朝鲜。     其他史籍中的檀君神话也有一些变异,但主体不变。中国学者认为檀君神话反映了古人敬天思想和先民的一支曾把作为熊图腾。[8]韩国历史学家分析:“桓雄”是指移居太白山的一带的天神崇拜部落,熊女则指以熊为图腾崇拜的土著部落。桓雄和熊女联姻生檀君,檀君成为朝鲜的始祖指的是移居来的天神崇拜部落和以熊为图腾崇拜的土著部落联合,组成了新的部落。[9]我比较赞同的观点是:所谓熊、虎相处于一个洞穴,可能反映了以熊和虎为图腾的氏族或部落的关系。熊女与桓雄成婚而虎未能变成人,是指两个血缘相近的氏族在合并为一个部落的过程中所产生的地位变化。以熊为图腾的氏族取得了主导地位,而部落的酋长则来自这个氏族。[10]     楚国人的图腾崇拜中国学者们历来也是说法各异,但不少学者认为楚人的图腾是熊。楚人是黄帝之后,黄帝血缘体内就有以熊和罴为图腾的氏族部落,又因楚人姓芈氏熊,在鬻熊之后,历代有三十多位国君以熊为姓,《史记·楚世家》云:“周文王之时,季连之苗裔曰鬻熊……其子曰熊丽,熊丽生熊狂,熊狂生熊绎。”其最早居地又以熊命名,如“有熊”、“熊山”、“穴熊”等。罗香林先生在《中夏系统中之百越》一文中说:“楚人首领,世世冠以熊字,似熊为在楚人原所氏,亦即以熊为图腾祖遗影”。可见楚人是以熊为图腾崇拜的部落之一。     关于“三危”、“太白”所指,韩国学者的解释不尽相同,有的说“三危太白”共指朝鲜平安道境内的妙香山;有的“三危”不论,说“太白”既妙香山;有的说三危指白岳山;另一说,“三危”指甘肃敦煌南部,“太白”指长白山。中国学者对古三危的地望说法也不一致,一说是今甘肃敦隍附近的三危山;二说是甘肃天水附近的鸟鼠山;三说在今陕甘川三省交界嘉陵江附近;四说在川甘交界岷江、岷山一带。后两种说法地理位置比较接近。《诗地理考》曰:“羌本姜姓,三苗之后,居三危,今叠、宕、松诸州皆羌地。”叠山:甘肃南部,与岷山相接;宕:今甘南宕昌,与岷江相近。我在几种三危地望探讨中择其一种,选择古三危在川甘交界处,岷江、岷山一带,这里距离陕西秦岭太白山只有几百公里,没有甘肃敦煌三危那么遥远,便于上古时期视野并不容易非常开阔的天神“下视三危太白”。我认为檀君神话中的“三危”是指中国古三危,“太白”应该指江原道和庆尚道交界处的太白山,而不是韩国古籍中记载的妙香山。     中国史籍中有关三危记载最多的是公元前二千多年尧舜将三苗逐放到三危。《史记·五帝本纪》云:“迁三苗于三危,以变西戎。”《尚书·尧典》说舜“窜三苗于三危”。《地道记》曰:“鸟鼠同穴西有三危山,三苗所处是也。”等等,总之,三危曾是三苗的一支部落所在地。因为荆楚腹地在上古时曾属三苗地,楚国史研究的学者们在楚苗同源观点上是一致的。许多学者考证认为蚩尤是三苗最早的先民,最早的史籍《山海经·大荒北经》中记载:“蚩尤作兵伐黄帝,黄帝使应龙攻之冀州之野。应龙畜水,蚩尤请风伯雨师以从,大风雨”。《韩非子·十过》曾云:“昔者黄帝合鬼神于泰山之上……蚩尤居前,风伯进扫,雨师洒道。”可见苗祖蚩尤和“风伯”、“雨师”关系密切。在中国湖南、贵州,一支操东部方言的苗族今仍以熊为族称,自称为“仡熊”、“果熊”、“果雄”,各地的苗族都有关于蚩尤的古歌传说,将蚩尤视为始祖。     楚国大诗人屈原在《离骚》中也自称是“帝高阳之苗裔”。在楚辞中屈原提到了“三危”和“风伯”、“雨师”、“雷公”(也称“云中君”、既“云师”)。[11]《九叹·远游》云:“ 驰六龙於三危兮,朝西灵於九滨。…… 鞭风伯使先驱兮,囚灵玄於虞渊。……左雨师使径侍兮,右雷公以为卫。” 请注意楚辞中的天神是驾御六龙车到三危的,而韩国的《三国遗事》中引〈古记〉云:“天帝降于訖升骨城乘五龙车。立都称王。”天帝也是乘龙车降于人间的。楚辞中的“风伯”、“雨师”、“雷公”(云师)和檀君神话中的“风伯”、“雨师”、“云师”一样,都是天神可以左右、可以驱使的对象。风伯、雨师、云师协助桓雄主理人间三百六十余事,已经具有了开国性质,到了檀君时代原始部落国家形成。     在檀君神话中天神授予桓雄三个天符印,中韩都有学者认为这天符印是巫师做法的法器。史学诸书记载,在中国古代巫风一度盛行,而以春秋战国时期的楚苗为甚,甚至巫史不分,史俗并载。范文澜先生在《中国通史》中说:黄炎族掌文化的人叫做史,苗黎族掌文化的人叫做巫。《汉书·地理志》云:“楚人信巫鬼,重淫祀”。学者认为楚人的始祖鬻熊还有屈原就是楚国的大巫,开创一代文风的《楚辞》也多取材于楚地之巫鬼风俗。现在苗族地区仍有几千巫师,他们做法时使用面饰、摇铃、木鼓、芭茅杆、弓箭、刀、剑等法器和鬼神进行沟通。[12]而在朝鲜半岛,较为普遍的说法认为:古代巫俗现象最早产生于“檀君时代”,甚至认为最初建国的檀君本人就是巫人。[13]     神话里天神之子桓雄给熊和虎“灵艾一炷,蒜二十枚”让它们变人形,这在楚俗里也有反映。端午时挂艾草、蒜头以僻邪驱瘴,是历史远久的楚国风俗,至今也还存在。成书于公元六世纪的《荆楚岁时记》,其作者宗懔出身并长期生活在原楚郢都江陵,他忠实地记载了古代楚人生活图景。书云:“五月五日……采艾以为人,悬门户上,以禳毒气。按:宗测字文度,尝以五月五日鸡未鸣时采艾,见似人处,揽而取之,用灸有验。” 按语说测字先生曾在鸡鸣以前去采摘艾草,看见有象人形的,就采摘下来,用艾炙治病很有效。这里记录的艾草有的具有人形,是否和神话中吃了灵艾容易变成人有关系呢?测字先生应该是巫师,古时巫医是相通的,所以艾也用来治病。在中国古老的艾灸法中艾炷和大蒜是主要的药物,疗法之一是将蒜头切成片或捣成蒜汁,放于压痛点上,然后用火点燃艾炷施灸,其方法沿用至今。段宝林先生认为母熊在桓熊天王的指点下用艾、蒜等灵异植物,并百日不见阳光,才能变人,这已有着巫术做法的的幻变意识。[14]     如果读者根据上述史料分析判断,开始认可檀君神话中确实存在浓厚的楚文化痕迹,接下来会出现巨大的疑问:檀君神话在韩国和朝鲜无论是民间口头流传、史籍记载还是考古资料都证明檀君存在了四、五千年,(史籍记载檀君在公元前2333年开国;历史学界发掘平壤市江东邑的檀君陵,证明檀君的遗骨是距今5,011年前的。)而楚国从在丹阳建国到被秦灭国的800年间,最长时段也只有3000年的历史,时间上仍然说不通。     毋庸置疑,韩国是一个历史非常悠久的国家和民族,分布在朝鲜半岛海岸地区的新石器时代贝冢遗址和内陆地区房屋遗址出土的历史文物,说明当地很早就有居民在此过着定居生活。我的看法是:古朝鲜时,在平壤一带就有长期统治半岛西北地区的部落首领,汉字出现以前韩国没有文字,所以有关他们的故事并没有被史籍记录下来。韩国的汉字传入时间大约在公元前2世纪,新罗统一半岛并占据整个大同江以南地区(包括平壤)之后,在原有部落首领故事的基础上,增添了对新的统治者有利的开国传说,创造出了檀君神话。    三、楚罗国、卢国与韩新罗、辰韩的渊源关系     在此先回顾一下楚国历史。     约公元前11世纪中期,季连之苗裔鬻熊被周王室授予“子”的封号,封于楚,居丹阳,以此开篇拓土。公元前706年,楚国征讨随国获胜后,熊通自称楚武王,成为天下诸侯中第一个自己称王的国君。随后几年里,熊通先后征服了罗国、卢国等周围小国,以扩疆土。楚文王继立,迁都于郢(今湖北宜城境内),打通了前往中原的道路。楚成王时,楚国的大国声威真正建立起来。到了庄王,他励精图治,终成霸业,楚国出现了经济繁荣、文化灿烂的鼎盛局面。庄王之后楚国开始走向衰微。公元前506年,吴、蔡、唐三国合兵攻楚,并陷落郢都,秦王发兵,秦楚联军击败吴军。休养生息后,公元前400年,楚悼王谋求富国强兵之道,开始变法,并取得了成效,此时,楚国兵强马壮,横归中原,初露称雄之势。威王后期,楚国成了七雄中唯一能与秦国抗衡的大国,进入了最鼎盛的时期。到怀王时楚国又开始走下坡路,公元前278年,秦军对楚国国都发起进攻,并很快占领了郢,楚国诗人屈原愤世投江,顷襄王东逃至今河南淮阳,建立新都陈郢。考烈王时,迁都寿郢(今安徽寿县)。后秦王政即位,开始统—全国的进程,公元前223年秦军大举伐楚,攻陷寿郢,绵延800年的楚国就此灭亡。     公元前7世纪,在汉江中游荆楚腹地有两个苗蛮小国,罗国(也称罗子国)和卢国(也称卢戎、卢子国)。对这两古国的具体方位历代学者有几种看法:或在湖北襄阳、或南漳或宜城。我倾向罗国在襄阳西南、南漳东北交界之处。[15]罗,熊姓,与楚有共同渊源,据《左传·桓公十二年》杜预注:“罗,熊姓国。”《世说新语·方正》注引《罗府君别传》曰:“罗,楚熊姓之后,启土罗国,遂氏姓焉。是则熊姓又似出芈姓也。” 公元前690年楚武王并吞罗国,子孙便由熊姓改为罗姓。国亡,以国名为姓,是周秦时代所惯行的通例。罗被楚灭后,楚王把罗国迁到枝江(古枝江在今宜城南境),成为楚国的附庸国,《汉书·地理志》有“楚文王徙罗子国自枝江居此”的记载,《水经注·江水》中有枝江为“故罗国”之记。尔后楚师扩境江南,再迁其罗国遗民至洞庭以南的长沙。秦汉时,罗人有的留居长沙,有的东迁豫章(今江西南昌),《广韵》云:“本自颛顼末裔,受封罗国。子孙以为氏,望出豫章、长沙。”《太平寰宇记》载,豫章郡五姓中就有熊、罗二姓。所以在中国的三国、南北朝时期,史书上记载的罗姓名人,多为襄阳、长沙、豫章三个地方的人。罗国和卢国同属苗蛮但来源却不相同,罗人和楚人一起来自中原,而卢戎则来自岷山、岷水之地。[16]      卢国(也称卢戎)的地理位置在今湖北襄阳县西,也有说在南漳东北,《后汉书·郡国志·南郡》中卢侯国条注引《襄阳耆旧传》说:“古卢戎也”。卢国和罗国距离非常相近,犹如唇齿相依。楚人入侵,唇寒齿亡,所以抵抗楚国的侵略,罗、卢两国一向是同仇敌忾的。历史上罗卢联军曾打败过楚国,《左传》、《后汉书》都记载公元前699年楚武王四十二年,屈瑕伐罗, 至罗境,遭到罗与卢戎两军夹击,楚师大败。卢国和罗国同时灭国后,一起被迁到枝江然后又迁到长沙。到长沙后,卢戎的一支往西到了的辰州,在辰溪和泸溪一带安营扎寨。《后汉书·马援列传》:“郦元注水经云:‘武陵有五溪,谓雄溪、樠溪、酉溪、潕溪、辰溪,悉是蛮夷所居,故谓五溪蛮’皆盘瓠之子孙也。土俗‘雄’作‘熊’,……在今辰州界”。五溪蛮为苗蛮,可见辰州有苗民。     这里探讨一下卢戎的始末,便于下面对韩国辰韩的分析。     卢戎,系炎帝姜姓戎族,源于卢水上游,故名卢戎。姜姓属古羌人亦称氐羌、羌戎。学者们考证卢水即今四川岷江。一般认为,从春秋战国至秦汉,氐羌人活动在西起陇西,东至略阳,南达岷山以北的地区,即今甘肃省东南、陕西省西南、四川省东北交界处,包括渭水、汉水、嘉陵江、岷江、涪江诸水源头。而这一带也正是古三危之地,正如《诗地理考》所云:“羌本姜姓,三苗之后,居三危”。三苗被迁到三危去之后,一部分融入了西戎,还有一些继续以苗存在。氐羌与西南土著部落不断融合,形成了的彝族、白族、纳西族、土家族等以虎为图腾崇拜的民族,这些民族在语言上均属藏缅语系、藏缅语族、彝语支。中国民族史学家林惠祥在《中国民族史》一书中说“鹿卢(古代彝族的称谓之一),即卢戎的对音。”彝族今仍自称罗罗、倮倮,彝语“罗罗”为老虎之意。而白族也保存了许多和虎有关的称谓,怒江沿岸许多白族人都自称是虎的子孙。[17]在湘、鄂西聚居的土家族,至今仍尊虎为祖。《中国古代及中世纪史地图》上,有苗氏出现在公元前11-前8世纪的西周王国的地图上,以“矛”的部落形式被标定在岷江及嘉陵江之间,我推断这些有苗氏就是来自三危的三苗,他们顺着离嘉陵江不远的汉水上游朝南迁徙,在公元前7世纪到达汉江中游,建立了卢国。这些逾越千年后从三危迁回到故地的苗裔,已经浓浓的融入了西戎氐羌的诸多习俗,他们和彝族、白族、土家族一样尊虎崇虎。巫瑞书先生考证,现今湘西辰水中游凤凰县苗族仍然存在客教白虎的信仰,[18]有部分湘西苗族自称为卢(苗语为deb longl),他们可能就是卢戎后裔。     辰韩,中国史书《三国志·魏书》和《后汉书·东夷列传》都有这样的记载: “辰韩者,古之辰国也,……辰韩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适韩国,马韩割东界地与之,其名国为郡,弓为弧、贼为寇,有似秦语,故或名之秦韩、有城栅屋室,土地肥美,宜五谷,知蚕桑,作缣布,乘驾牛车。始有六国,稍分为十二国。”李延寿《北史》列传第八十二中记录:“新罗者,其先本辰韩种也。地在高丽东南,居汉时乐浪地。辰韩亦曰秦韩。相传言秦世亡人避役来适,马韩割其东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韩。其言语名物,有似中国人。”这些有关辰韩的史籍在韩国《三国遗事》等古籍中有转载:“〈后汉书〉云:辰韩耆老自言,秦之亡人來适韩国,马韩割东界地与之,相呼为徒,有似秦語,故或名之为秦韩。” 大量的历史资料说辰韩是秦朝时逃亡过来的中国人,对这一点中韩学者是一致认同的。《三国志·魏书》云:“弁辰亦十二国……弁辰韩合二十四国,大国四五千家,小国六七百家,总四五万户。其十二国属辰王。” 从中韩史籍中可见古朝鲜半岛东南部的三韩部落,马韩为原住民,辰韩、弁韩来自中国,弁韩臣属辰韩。     陈寿在《三国志·魏书》里忠实的记录了辰韩大大小小的部落国家,有许多是以卢为国名,如:速卢不斯国、咨离牟卢国、莫卢国、狗卢国、驷卢国、万卢国、捷卢国、牟卢卑离国等,甚至有的直接以楚为国名,如楚山涂卑离国、楚离国等。     在韩国史籍中,我找到了辰韩、弁韩是苗裔的记载,如《三国遗事》:“〈新旧唐书〉云。卞韩苗裔在乐浪之地。” 韩国野史《桓檀古记》等书籍中说倍达国 (韩国人自称为倍达民族) 是第14代蚩尤之后。根据《三圣记全》下篇〈神史历代记〉记载,“蚩尤即14世慈乌支桓雄,是中国和韩国军神的象征”,目前韩国保存有很多祭祀蚩尤的祠堂遗址。这就说明辰韩和弁韩和楚国的罗氏、卢氏一样均为苗裔,同样以蚩尤为始祖。韩国有学者也认为韩国和苗族的创世神话很相象,与其他民族的创世神话大不相同。[19]     韩国的新罗也称斯罗、斯卢,公元前57年古新罗建国,古新罗是由辰韩部落联盟中斯卢部落所建,在徐罗伐(庆州旧称)建都,统治地区先在朝鲜半岛东南部,直到公元三世纪,新罗仍只占据庆尚南北道东部和江原道一部分地区,地盘狭小。四世纪后,开始征服周围部落,成为半岛东南部的强国,继与百济、高句丽形成鼎足,互相争霸。新罗在唐朝的配合下,于660年灭百济,再于 668年灭高句丽。后唐朝试图占领百济、高句丽故地,新罗奋力反抗,在公元676年新罗首次统一了大同江以南的朝鲜半岛。新罗在统一后的两个多世纪内,出现和平、繁荣景象,农业、商业、手工业、艺术、教育、宗教等都得到蓬勃发展,这时是新罗文化的最盛时期,独具特色的新罗文化在统治者的倡导下广为传播,最终成为韩国主流文化之一。     以此而推论:辰韩和弁韩来自被秦灭国的楚国,是罗和卢戎之后,既有以熊为图腾的罗氏族,也有以虎为崇拜的卢氏族,这就是新罗为什么也称斯罗、斯卢之原因。罗、卢一起迁到了韩国,初期以虎为崇拜的卢氏族势力强大,于是国名以来自楚地辰州的卢氏族命名为辰韩。之后以熊为图腾罗氏族日益强大,在领土扩张中占了上风,国名更改为新罗国,这也许是和原在楚国的故罗国以示区别。了解了卢、罗关系的变化,我们就不难理解檀君神话中反映以熊和虎为图腾的氏族的关系,在部落合并过程中,最终以熊为图腾的罗氏族取得了主导地位,新罗之名由此而来。     往下的问题是,罗、卢怎样从中国而来?为什么两千年多来在中韩的史籍中都没有明确的记载?我的看法是:罗、卢氏族是跟随着一个名叫韩终的方士在公元前215年渡海到的韩国。  四、韩终其人及韩国罗、卢氏族    秦汉及以前的战国时代,方士得到帝王的青睐,他们不仅通晓方术,而且熟知天文地理、医术、农业及航海等知识。徐福作为方士中最著名的一个,为秦始皇入海求药,最后到达日本。与徐福同时代的方士,还有韩终、卢生、侯公等,他们也先后为秦始皇访求仙药,《史记·秦始皇本纪》记载,始皇“三十五年,侯生和卢生相与谋曰:‘始皇……贪于权势至如此,未可为求仙药’于是乃亡去”。而“韩众(终)去不报”。可见在始皇三十五年时,卢生、侯生、韩终等都已相继逃亡了。《汉书·郊祀志》云:“秦始皇初并天下,甘心于神仙之道,遣徐福、韩终之属多赍童男女人海,求神采药,因逃不还,天下怨恨。”这里把韩终和徐福连在一起,徐福之属到了日本,这是现在中日学者基本统一了的认识,韩终之属出海后到了哪里呢? 秦皇岛市徐福研究会原会长郭继汾先生认为韩终是到了朝鲜半岛东南部的辰韩国,他认为“辰(秦)韩这个名称也正是对它的创业者秦人韩终的纪念。”我同意这一说法。     查找韩终的有关史籍可见,韩终乃齐国方士,炼丹采药,修炼成仙。《后汉书·张衡列传》(第四十九)“韩谓齐仙人韩终也。为王采药,王不肯服,终自服之,遂得仙。”晋代葛洪所著《抱朴子内篇卷之四·金丹》“韩终丹法:漆蜜和丹煎之,服可延年久视,立日中无影”。《广弘名集卷第九》“服丹成金色者,……昔韩终服之。面作金色又佛身黄金色者。” 《抱朴子·内篇卷之十一·仙药》:     “韩终服菖蒲十三年身生毛。”不论韩终炼丹也好、服药也好、成仙也好,关键的问题在于,韩终修炼的地方是楚国境内的长沙。唐·司马承祯《洞天福地记》:记载:“第二十三洞真墟——在潭州长沙县,西岳真人韩终所治之处。”修炼成仙并非一日之工,必须长期呆在所治之处,可推想韩终在长沙时与罗氏、卢氏交往密切。在秦灭楚后8年,韩终带着罗氏、卢氏等楚国亡民有准备地逃离了秦国,渡海到了朝鲜半岛东南部。中外学者们认为,韩国的汉字传入时间大约在战国到汉初,[20]这和韩终之属到韩国的时间吻合。至于渡海路线我认为不会是在秦皇岛,尽管有明宪宗成化13年立的“秦皇求仙入海处”石碑,但不太符合迁徙规律。鉴于长江下游的安徽、江苏都有过丹阳地名出现,而且在东海普陀山至今有海礁被称做“新罗礁”,[21]我推测韩终所属是从长江口渡东海,经过济州岛到日本海西岸的朝鲜半岛东南部登岸,在庆州一带重建家园,以纪念韩终和卢氏原籍辰州的辰韩就此出现。     推论:韩终可能就是檀君神话中桓雄的原形,史籍中记载韩终已经修炼成仙,完全有可能被后人奉为天神,他带领以罗氏族、卢氏族为主的三千臣民,选择适合居住的太白山下落户(太白市一直属于辰韩、新罗的领地)。而神话中桓雄与熊女所生的檀君,应该是以熊为图腾的新罗首领。新罗率先统一了半岛,并以熟练使用汉字的优势,创造并记录下来了开国神话。     再来看看韩国罗氏、卢氏的宗谱。     韩国罗氏被分为罗州罗氏和锦城罗氏。韩国1982年版《罗州罗氏大同谱》卷一《姓原考》说,“罗氏为伯益后裔,世代在虞国为官,周代成王因大罗氏有功封罗国,为楚附庸,后被楚屈氏所灭,是为豫章罗氏”。关于锦城罗氏的姓氏,1987年版《锦城罗氏大同谱》卷一《姓原考》引辛卯科举人罗甫芳所记,说“罗氏本祝融氏后裔郧姓,春秋时周平王十二年封罗国。又传至九十世学公,国被吞并,止存一人。传至百零二世,珠公在汉初事高祖有功,封于豫章郡,是为豫章罗氏。” 韩国罗氏宗谱非常明确地记载着罗氏是“楚附庸罗国”、“祝融(楚人先祖)氏后裔”,由此可见,罗州罗氏和锦城罗氏同出一宗,都是楚国之地的罗国人。      韩国卢姓一直认为出自山东,但究其卢姓历史却不尽其然。卢戎,系姜姓戎族,在商代已发展为强大的部族,曾从周武王灭商,周封功臣姜族首领姜尚(即姜子牙)到营丘(山东临淄县)为齐侯,于是有一部分卢人也随着同族到山东建立了卢子国(今山东长清县西南)。《通志氏族略》、《新唐书宰相世系》和《元和姓篡》均如此记载:“姜姓济太之后也。齐文公之子高,高之孙溪,食采于卢,今济北卢县是也。因邑为氏。”因此山东长清是卢氏之主体。但是有另外一部分卢人辗转南迁到了湖北襄阳,也建立了卢子国。《风俗通义》云:“古芦子国,后有芦氏。芦子国(古芦戎地,春秋时庐子戢黎所在国)其后人以封国为姓。”这就是和罗氏一起迁到韩国的卢氏祖先。据 2000年6月19日的《淄博日报》报道:“韩国前总统卢泰愚山东寻根,说姜子牙是他的祖先。”从而在韩国引发了卢姓到山东寻根的热潮。笔者认为,韩国卢氏应是从楚国来的卢戎之后裔(也就是从古三危迁回的苗裔)。     最后再回味一下韩国地名的分布,我们可以看到和楚国一样的地名主要集中在韩国东部海岸的江原道,这里有江陵、襄阳、洞庭湖。江原道地理位置比较特殊,它三面环山,一面临海,太白山脉由北向南纵贯全道,形成了一个封闭的包围圈,使它与外界相对隔离,许多古风古俗得以完整的保存下来。江原道的中心江陵曾是濊貊族居住地,是濊国的都城,但辰韩的位置与江陵接壤,江陵很早就和辰韩有所交流,所以历史上曾叫阿瑟罗、何瑟罗。我推测有关楚国的地名在韩国出现,主要是依据江原道的巫师世代口头传承下来的罗、卢历史传说而命名,如罗国和卢国的原地在襄阳,灭国后一起迁到洞庭湖附近的长沙,而江陵则是楚国的都城,和楚发源地丹阳同样重要。我在江陵时得知,江原道的巫俗是韩国保留最多、最完整的地方,由巫师主持的巫祭在被世人关注的“端午祭”中,是重要内容之一,韩半岛南部巫俗带有许多楚苗巫俗的色彩。当今苗族是世界上保留族源古歌最多的民族之一,几乎所有的古歌都是巫师传唱下来的,这也是巫师在少数民族中威望很高的重要因素。     在研究罗国、卢国迁徙动向时,我真切感到,按照古代和近现代大多数学者的地名说法很多地方解释不了,而用石泉先生的楚地理新论却能够说通。比如辰州的位置,如果在湖南西部则无法说通史籍中辰州有包茅山的记载,包茅的产地一向认为在湖北中部荆山一带,而且湘西辰州与长沙距离甚远,不便于古时罗氏和卢氏结伴出海远行。楚国地理位置的变更是让人难以接受的地名变化。其实早在20世纪30年代钱穆先生就提出:先秦的湘、沅、澧诸水都在今湖北省境、分布于汉水流域一带,以后楚人南迁、地名随迁。[22]石泉先生继钱穆先生之后对此研究了几十年,认为长江中游地区的巨大变化集中发生在公元555~561年间,主要是一大批原在汉水中游两岸的古地名向南迁移到了长江中游两岸。[3]由于一千多年来地名的错乱,史籍中也有许多自相矛盾的地方,我寻找理论依据时,在众多的线头中择其主线,得益于韩国江原道的古地名和民俗现象,使主线研究越来越清晰。     我认为辰韩和新罗的历史将会为我们提供了极好的楚史研究新线索。      五 、古老的楚俗惊现韩国    楚国重要的习俗之一是用苞茅来进行缩酒。     荆楚盛产菁茅(也称之为苞茅),《禹贡》、《汉书·地理志》等就有“包匦菁茅”的记载。这种茅草盛产于荆山山麓南漳、保康、谷城一带。楚王在这一带立国之初,周天子让楚人上缴的贡品,就有这种廉价的茅草,主要用于缩酒祭祀。初期楚国国君地位不高,但在缩酒祭祀上却享有特权,这可能与楚地独产苞茅和楚人传统的掌天人相通的职责有关。所以菁茅或苞茅也被尊为灵茅。《史记·孝武本纪》说:“江淮间一茅三脊,以为神藉”。“三脊”, 有三条脊棱的茅草。“藉”,祭神时用的草垫子。《集解》引孟康语说:“所谓灵茅也。”    关于“缩酒”,杜预曾解释说:“包,裹束也。茅,菁茅也。束矛而灌之以酒为缩酒”。缩酒的“缩”字,本作“莤”。《说文解字》解释“莤”字为:“礼祭束茅加于裸圭,而灌[凶匕]酒,是为莤,象神歆之也”。“莤”字,上为茅,下为酒,恰是缩酒仪式的写照。[23]缩酒方法是用成束的灵茅来过滤酒中的糟粕,使之成为飨神的清酒。   “苞茅缩酒”是楚人最为重要的祭祀仪式,甚至可以成为引发战争的理由。《左传·僖公四年》记载,齐桓公纠合诸侯借伐蔡为名,南下攻楚。楚使质问:“君处北海,寡人南海,唯是风马牛不相及也,不虞君之涉吾地也。何故?”齐国的相国管仲在答复楚使时说:“尔贡苞茅不入,王祭不共,无以缩酒,寡人是征。”问罪的理由之一就是楚人不向周天子贡奉苞茅,周天子不能缩酒。《韩非子·外储说左上》也说:“楚之菁茅不贡于天子三年矣。”看来,周王室一直是依靠楚国进贡苞茅来进行祭祀的。     楚人主管缩酒祭祀,并对此亦极为重视,引以自豪。楚人姓芈,历代楚国国君都冠以“熊”字,“熊”在金文中写作“[今]酉]”,“[今/酉]”即“莤”。“莤”,像神饮酒;“[今/酉]”像人饮酒,是“莤”的人格化,“熊读入喻纽,[今/酉]读入影纽,古清浊不分,于声至近” 。[24][今/酉]、熊通假,后来一律把“[今/酉]”写作“熊”字了。[25]所以楚人姓芈氏熊,即以缩酒祭天(神)为氏。这在“天人合一”的氛围下,楚人进贡苞茅、主管缩酒祭祀,是极其荣尊的职责。     “苞茅缩酒”遗风今在湖北南漳的端公舞中有所表现,在湖北襄阳和湘鄂西的苗寨也有变异的缩酒遗俗存在。没有想到在韩国,笔者却看到了几乎和几千年前楚人祭祀完全一致的苞茅缩酒全过程。     那是一组笔者在韩国江陵参观考察端午祭时所得的图片资料。江陵端午祭是从农历的四月五日酿制神酒开始的,酿制神酒仪式在江陵旧官府“七事堂”由江陵市长主持,做祭酒的大米和酒曲是市民们捐献的,图片显示在准备做神酒的大米上,还有十小捆裹束整齐的菁茅与酒曲并放一起。在蒸煮发酵好了的米酒时,蒸锅上倒扣着一个大瓦缸,蒸煮完后,主持把菁茅铺垫在像葫芦瓢一样的容器里,用菁茅过滤掉酒糟,然后把酒浆装进大瓦缸,沾过灵茅的酒成为神酒。最后将神酒装进小土陶瓶子里,在瓶口系上一束茅草,以备用于祭奠山神、城隍等巫祝祭祀。[26]惟楚人独有的用苞茅缩酒祭祀神灵之俗,在韩国江陵原原本本的保存着,由此可见楚文化对韩国文化的深远影响。     同样在韩国端午祭的图片资料上,由巫师主持的龙船巫祭也让我为之振奋。在端午祭期间,用竹木纸布等材料扎成龙舟,龙舟上系上一条十多米长的白布,女巫拿着白布作摇船状并唱着神歌,“这是旨在端午祭期间入座祭堂之上的诸神乘坐龙船平安回归的送神巫祭。”祭祀完后,龙船和其他神位、神木、纸花、灯等端午祭的祭品送到大关岭火化烧祭,称为“还于巫祭”,还于意味着神灵上天。[26]    在楚国的神话与宗教中,人和神分别处在两个隔离的世界,人和神的沟通是由巫师来完成的,沟通人神是楚国巫师最基本的职能。屈原《九章·惜诵》云:“昔余梦登天兮,魂中道而无杭。”王逸注:“杭,渡也。一作航。”在楚人看来人间和天界的隔离正如河水两岸的隔离一样,需要有舟船航渡。魂舟可以载负人的灵魂升入天国。用魂舟为亡灵送驾引航、只能靠巫师,常人无法感知它的存在。     引魂升天的画像题材在楚国丧礼中是一项重要内容。湖南长沙楚墓出土的《人物龙凤帛画》中的女子站立在一“半弯月状物”上,有学者认为,这“半弯月状物”正是“代表灵魂所乘坐的舟船,应该称为‘魂舟’”。[27]根据画面分析,帛画表现的是女巫在引魂升天的主题,脚下的魂舟起着载负女巫灵魂升天的作用。另一幅长沙楚墓出土《人物御龙帛画》,图中绘一危冠长袍的男子,手持长剑立于龙舟之上,衣饰飘向右方,表示龙舟在迎风前进。类似这种引魂升天的画像在楚墓中有许多完整地保存下来,而韩国江陵传承至今的龙船巫祭简直就像鲜活的楚风楚俗。      韩国南部的还有不少习俗与楚俗相似,限于篇幅这里不一一列举。最近乌丙安先生送给我一本苑利所著《韩民族文化源流》,苑利先生认为韩文化的主体部分是中国南方的百越文化,这在众多的韩文化北来说中独树一帜,我也赞同韩文化的主体部分是中国南方文化,有百越文化的影响,但我认为受楚文化影响更直接一些。朝鲜古籍《东国岁时记》中就有韩国饮食习俗源于楚俗的记录:“望前煮赤小豆粥食之。按《荆楚岁时记》:‘州里风俗,正月望日祭门,先以柳枝插门,乃以豆粥插箸而祭之’。今俗说食,似沿与此。”苑利先生也认为韩半岛与荆楚饮食文化相似点很多,他说“韩民族与作为楚国主体民族的苗族似乎没有什么文化联系,但事实上,它们的文化在许多方面都很相似,这一点应引起我们的足够重视。” [28]      值得我们重视的不仅仅是韩国文化与楚文化的相似,而且在日本和台湾地区也有许多和荆楚相象的风俗,中日韩等世界各国都有学者认为东亚的稻作文化与中国南方民族有直接联系。韩国文化和楚文化的关系研究,可以开阔东亚文化同生共荣的研究思路,这对于东亚地区形成文化集合优势,扩大文化国际影响,开辟广阔的文化合作道路,具有极为深刻的意义。     注释    [1] 魏嵩山:三千里江山回顾——朝鲜王朝政区建置沿革[M].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97. 93-95.    [2] 顾铭学:朝鲜知识手册[M]. 沈阳 : 辽宁民族出版社, 1985, 50.    [3] 石泉:古代荆楚地理新探·续集[M]. 武汉: 武汉大学出版社. 2004 . 16, 17.    [4] 张正明:楚文化志[M]. 武汉: 湖北人民出版社 1988. 124.    [5] 张正明:楚文化史[M]. 上海: 上海人民出版社1987. 18.    [6] [韩国]李铉中:韩国上古思想与先秦儒家思想关系的易学考察[A].亚文·第二辑[C].北京:中国社会科学出版社.1997.27.    [7][高丽]一然:三国遗事·卷一·纪异第二·古朝鲜[M].瑞文文化社.1993.   [8] 牟元圭:韩国民俗文化的历史渊源及其特征 [A].韩国学论文集·第八辑[C]. 北京:民族出版社.2000.13.    [9] [韩国]金贞培:韩国民族文化的起源[M].汉城:高丽大学出版社.1973.    [10] 韦旭升:朝鲜文学史[M]. 北京:北京大学出版社.1986.5.    [11] 罗义群:苗族文化与屈赋[M].北京:中央民族大学出版社.1997.162.    [12] 李廷贵:苗族历史与文化[M]. 北京:中央民族大学出版社.1996.193.    [13] 乌丙安:朝鲜巫俗与满蒙巫俗比较研究[A].民俗研究1996.3期[C].    [14] 段宝林:中韩开国神话比较研究[A].东方民间文学比较研究[M].北京:北京大学出版社2003.20.   [15] 何浩:楚灭国研究[M]. 武汉:武汉出版社1989.154.    [16] 何光岳:楚国灭国考[M]. 上海:上海人民出版社1990.47.    [17] 张旭:大理白族史探索[M].昆明:云南人民出版社.1990.59.    [18] 巫瑞书:南方传统节日与楚文化[M]].武汉:湖北教育出版社.1999 .12.   [19] [韩国]金仁喜:韩·苗族创世神话中的巨人神话特[A].亚细亚民俗研究·第二集[M].北京:民族出版社.1999.193.    [20] 赵润济:韩国文学史[M]. 北京:社会科学文献出版社.1998 .2.    [21] 金健人:浙江与韩国的历史交往[A].韩国学论文集·第八辑[M].北京:民族出版社.2000.29.      [22] 钱穆:楚辞地名考[A].古史地理论丛[C]    [23] 张正明:楚文化史[M]]. 上海:上海人民出版社.1987.19.    [24] 商承祚:寿县新出土楚王鼎考释[A].国风·第4卷.第3期[C]    [25] 张正明:楚文化史[M]. 上海:上海人民出版社.1987.19页.    [26][韩国]江陵的无形文物[M].江陵市文化观光福祉局.2004.28,29,36,61.   [27] 萧兵:楚辞与神话[M].江苏古籍出版社.1987.15.    [28] 苑利:韩民族文化源流[M]. 北京:学苑出版社.2003.105.  
35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권위적 해석 /곰 아 지 댓글:  조회:4799  추천:58  2007-09-17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권위적 해석 -박문희 씨에게 답함 곰 아 지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해석은 잡다하다. 그러나 학술계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그 가장 권위적인 해석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편찬으로 된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제24권)중의 “한민족” 조목중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중요한 부분만 초록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여러 인종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피부색깔, 골통의 모양, 머리칼의 색깔과 조직 등 형질적 특징에 따라 몽고종 ․ 코카서스종 ․ 니그로종 등 세 인종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서 본래 제4빙하기,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 후기에 시베리아의 추운 지방에서 기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몽고종의 형질적인 특징으로서 얼굴에 광대뼈가 나온 것이나 눈꺼풀이 겹쳐진 것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우리 한민족도 이러한 형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그런데 시베리아의 몽고종은 옛시베리아족 또는 옛아시아족 ․ 옛몽고족과 새시베리아족 또는 새몽고족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이는 옛시베리아족이나 새시베리아족 모두 몽고종의 형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뒤에 부족적 이동에 따른 형질적 ․ 문화적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두 그룹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늘날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옛아시아족은 축치족 ․ 코리약족 ․ 길리약족 ․ 캄차달족 ․ 유카기르족 등이다. 그리고 이들의 한 갈래가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고, 다른 한 갈래는 사할린과 북해도로 이동하여 아이누족의 조상이 되었다. 한편,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새시베리아족에는 터키족 ․ 몽고족 ․ 퉁구스족 ․ 사모예드족 ․ 위구르족 ․ 핀족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터키족 ․ 몽고족 ․ 퉁구스족의 언어에는 문법구조 ․ 음운법칙 ․ 공통조어 등에서 서로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이를 알타이어족이라 한다. 반면, 사모예드족 ․ 위구르족 ․ 핀족은 다른 하나의 어족을 이루어 이를 우랄어족이라 한다. 한국어는 이가운데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은 본래 예니세이강 상류지방고ㅘ 알타이산 기슭에서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삼림 및 ㅊ원지대로서 주민들은 일찍부터 목축을 주로하고 농경을 부업으로 하는 생산경제 단계로 들어갔으며, 또한 알타이 산지에서는 구리와 주석이 많아 청동기문화의 발달에 유리하였으므로 안드로노보문화 ․ 카라수크문화 ․ 타가르문화 등 독특한 시베리아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동유럽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문화의 전파에 따라 유럽 인종과 원주민인 몽고족사이에 혼혈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방 아시아 몽고종계통의 민족에게서 가끔 유럽종의 형질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제4빙하기에 시베리아 지방에서 형질적 특성이 완성된 몽고종은 제4빙하기 후기에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옛시베리아족이 시베리아의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서 후기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전파되였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였지만, 아직 그 인종의 형질적 특성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석기문화는 몽고 ․ 만주 ․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쪽으로는 사할린 ․ 북해도를 거쳐 아메리카대륙에까지 전파되였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신석기문화가 모두 같은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 토기의 경우, 半卵型의 토기 표면에 직선이나 점으로 구성된 기하문 장식을 한 것이 시베리아 ․ 만주 ․ 한반도 지역과 북아메리카 및 일본열도의 북부에 분포되여 있어 그것이 모두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베리아의 신석기문화는 이들 여러 지역에서 각기 변화하여 발달하였으므로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이들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아직 수렵과 어로의 채집경제 단계에 있어서 농경문화가 시작되지 못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만주나 한반도의 신석기 유적에서도 역시 인골이 발견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주민의 인종적 특성을 알기는 어렵다. 알타이산지와 바아칼호수의 남쪽지대에 살고 있던 알타이족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은 옛시베리아족의 이동에 뒤이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원주지의 초원지대에 이어져 있는 초원지대로 이동하였으며, 유목 ․ 기마 민족이였으므로 이동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초원이 펼쳐진 한계까지, 즉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남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몽고를 거쳐 중국 장성지대까지, 남동쪽으로는 흑룡강 유역에서 만주 북부까지 이동하였다. 그 결과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쪽에, 몽고어족은 지금의 외몽고를 거쳐 중국 장성지대와 만주 북부에, 퉁구스어족은 흑룡강 유역에 각각 분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알타이족과 함께 시베리아에 살던 한민족도 이동의 물결을 따라 몽고를 거쳐 중국 장성지대의 동북부와 만주 서남부에 이르러 정착하였던 것이다. 단, 오늘날 알타이족이라 하면 터키족 ․ 몽고족 ․ 퉁구스족을 가리키고 한민족은 포함시키지 않는데, 이는 한민족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알타이족에서 갈라져 만주 서남부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하나의 민족단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알타이족에 의해서 중국 북부에 전파된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는 오르도스 ․ 내몽고지방과 만주 서남지방, 즉 요령지방에서 각각 꽃 피였는데, 전자는 내몽고족이 발달시킨 것이고 후자는 한민족의 조상들이 발달시킨 것이다. 이 두 청동기문화는 모두 시베리아 청동기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요령의 청동기문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비파형의 단검이나 기하문경 등 고고학적 유물에 의하여 확인되며, 이로부터 한민족의 조상들이 遼寧 지방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알타이족이 다른 민족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헌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장성지대 깊숙이 침입한 樓煩이나 林胡, 그리고 만주북부의 東胡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들이 곧 알타이족 중의 몽고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장성지대 서북쪽의 흉노는 터키족 또는 몽고족을 가리킨다. 터키족이나 몽고족에 비하여 중국 동북부의 민족으로서 肅愼 ․ 朝鮮 ․ 韓 ․ 濊 ․ 貊 ․ 東夷 등이 주나라 초기부터 중국문헌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肅愼과 朝鮮은 중국 고대음으로는 같은 것이고, “韓”은 “khan>han”에 대한 표기로서 “크다”, “높은 이 ”등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다. “貊”의 “ ”는 중국인들이 다른 민족을 금수로 보아 붙인 것이고, “百”이 음을 나타내는데, “百”의 중국 상고음은 “pak”으로서 이는 우리의 고대어 “밝” 또는 “박”에 해당하며, 광명이나 태양을 뜻한다. 한민족에 의하여 발달한 遼寧 청동기문화는 대체로 대흥안령의 산줄기를 경계로 중원문화와 접하였다. 그런데 遼寧 지방은 북으로는 삼림 ․ 초원을 이루고, 남으로는 난하 ․ 대릉하 ․ 요하의 하류지역에 농경에 적합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遼寧 지방의 조선족은 본래 시베리아에서는 목축을 주로 하고 농경을 부업으로 하였지만, 遼寧 지방에 정착한 뒤로는 그 환경에 적응하여 농경을 주로 하면서 목축을 부업으로 하는 종경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한반ㄷ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환경에 따라 목축은 거의 잊어버리고 오로지 농경을 하는 민족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앞선 청동기문화와 농경문화를 가진 조선족이 한반도에 들어와 선주민인 옛시베리아족을 정복, 동화시켰음은 고고학적 유물뿐 아니라 신화 ․ 언어 등의 연구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이와 같이 한민족은 몽고종에 속하며, 그 가운데서도 새시베리아족의 알타이족에 속한다. 그러나 한민족은 알타이족의 이동과정에서 일찍부터 갈라져 나와 滿洲의 서남부(지금 중국 동북의 서남부), 遼寧지방에 정착하여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으며, 그 가운데 한 갈래가 한반도에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인 옛시베리아족을 정복, 동화시켜 오늘의 한민족이 형성되였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서 여러 읍락국가가 형성되고 나아가서 읍락국가의 연맹체가 성립되였으며, 고조선이 바로 그 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치적 ․ 사회적 공동체를 이룩함으로써 하나의 민족단위로 성립되였다. 또한, 이러한 민족공동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여러 집단의 언어가 통일되여 한국어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단위로 성립된 것은 지방에서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달시킨 때부터이다. 그것은 단군신화에서 전하는 r조선의 건국연대와 대체로 부합되는 서기전 2000년대로 볼 수 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제24권 「한민족」, 204-205쪽)                                *     *     * 조선민족의 발상지는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 특히 중국 동북지구 서남부(遼西. 遼東 지역)라는 것이 한국과 조선 학술계의 일반적인 견해로서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여기서 조선민족의 기원과 연계시켜서 볼 때, 특히 주목되는 것은 료동, 로서 및 연산 남북의 신석기문화로서 1970년대로부터  날로 중시를 일으키고 있다. 일찍 1935년 지금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시 紅山에서 발굴된 신석기문화는 당시에 “적봉 제1기 문화”라고 명명되였다가 1954년에는 홍산문화라고 명명되었는데, 기원전 3500년의 문화라고 추정했다. 1970년대로부터 시라무른하, 로합하, 대릉하 류역의 적잖은 고장들에서 선후로 홍산문화의 건축유적과 묘지들을 발견하였고, 상당한 수량의 옥기(玉器)들을 발국하게 되었다. 특히는 1983년-1985년 료녕 건평, 릉원 사이의 우하량에서 홍산문화에 속하는 赤石冢과 女神廟를 발견하였는데, 중국의 사학계에서는 이를 商族의 기원과 연계시켜 고찰하게 되었다.(비효통의  『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 중국민족대학출판사, 1999년, 56-57쪽을 참고하라)사실 商族과 조선민족은 상당한 혈연관계를 가졌다고 추정되며 후일 상족의 귀족인 기자가 무리를 이끌고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은 어쩌면 무근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량하의 女神廟에서 당시 홍산문화를 창조한 원시인들이 암콤을 녀신으로 숭배하면서 사당에 모셨다는 것은 더욱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는 료녕성 서부 牛河梁의 女神廟에 모셔졌던 熊女神에서 檀君神話의 현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북 경내의 시베리아 경내의 많은 소수민족과 만족, 어른춘, 허저족, 일본의 아니누족 등의 곰토템 숭배는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곰토테숭배가 만퉁구스제민족의 보편적인 토템숭배물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민족의 발상지는 중국의 서북지역이아니라 중국의 동북지역과 조선반도였음을 다시한번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 후의 遼東과 조선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들인 비파형 단검 등은 모두 동일한 류형의 것으로 판정됨으로써 고조선의 활동지역이 료동과 조선반도 지역이었음이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그리고 서주시기로부터 중국의 문헌에는 지금의  료서 ․ 로동 지역에 있는 고조선과의 교류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가록되어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적인 기록으로부터 “단군의 중국 감숙 돈황 기원설”이나 “중국 신강 천산 산맥 기원설”은 아무런 력사 ․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일부 호사자들의 낭설임을 해 주고 있다. 三危라는 지명이 신강천산산맥과 련관되어 있다고 단군성조의 발상지을 중국서북지역의 신강 천산산맥에 비정할 수 없다. 중국문화나 불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후에 기록된 『삼국유사』중의 기록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렇게나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단군은 제석 환인의 아들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서 암콤과 살아서 조선 민족의 조상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불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불교 승려 일연이 기록자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불교승려 일연의 기록을 따른다면 조선민족은 마땅히 히말아야산맥 너머에 있는 네팔사람이여야 한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네팔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백산이리는 것은  특정한 산을 가리키는 것 일수도 있고 밝은 것을 숭상하는 조선민족의 조상이 밝은 산이라는 뜻으로 상징적으로 사용한 이름일 수도 있다. 백두산의 옛 이름 不咸山도, 녀진족기원 신화에서 나오는 부쿠리산(布庫里山)도 모두 밝은 산이라는 뜻이다. 단군이 내렸다는 태백산과 그 뜻은 통하는 것이다.  신화는 일부 역사적인 요소가  개재해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원시인들의 상상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화를 몇 천 뒤의 후세사람들이 기록해놓은 텍스트에 있는 지명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해석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2007년 9월 16일 연길에서  [우리동네 문학동네]
34    김월성에게 화답함/박문희 댓글:  조회:4855  추천:77  2007-09-15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을 조작한 실상>과관련하여 김월성에게 화답함                                       박문희김월성은 14일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을 조작한 실상(實狀)>이란 글에서 처음으로 <김월성의 <토템문화론>을 평함>이란 나의 글에 반응을 보였다. 글이 아주 정채롭고 재미나서 나는 매우 즐겁게 음미하면서 보았다. 앞으로도 이런 글을 많이 써서 나의 마음을 더 즐겁게 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다.김월성은 <실상>에서 “박문희는 남영전의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을 바탕으로 삼고있는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비호하기 위해 맑스의 론술을 조작, 왜곡하는 방법으로 맑스의 본의까지 탈바꿈시키고있다”면서 “다른것은 모두 제쳐놓고 이 한 점("희랍예술과 사시"에 대한 맑스의 평가는 거기에 "내포된 신화"에 대한 평가로 탈바꿈)만으로도 토템문화론을 비호하는 박문희의 주장은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듯 저절로 주저앉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맑스의 론술을 조작해내고 왜곡까지 하면서라도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 립각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반드시 비호해야만 했던 당위성이 도대체 무엇이였던지를  박문희에게 묻지 않을수 없다”고 한다. 기왕 물음을 물어온 이상 도의상 간단히나마 답복을 해야겠다. 그런데 별로 급한 일은 없으니까 본론에 들어가기전에 우선 재미나는 언어관람을 하기로 하자. 나의 이른바 “탈바꿈”에 대한 김월성의 다양한 언어구사력을 대강 추려보면—“엉뚱한 개념들을 허위조작”,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평가를 희랍신화에 대입시키는 작법”, “맑스의 본의를 완전히 변형”, “자의대로 뜯어고치고 조작”, “박문희의 조작품”, “바꿔치기 작법”, “권위성을 띤 맑스의 높은 평가를 신화에 도용(盜用)”, “조작해낸 가짜 맑스의 론술” , “저질언어(박문희의 말을 교묘히 인용) 혹은 저질행위일뿐만 아니라 사기적 행각”(!!ㅎㅎ),  “예술과 신화를 바꿔치기를 한 자신의 작법을 기상천외한 묘법으로 간주”, “터무니없는(제멋대로) 조작해낸 거짓말”, “종이장으로는 불덩이를 쌀수 없고 사실은 언제나 사실대로 밝혀지기 마련”,  “소의 머리를 잘라다가 말의 몸체에 붙여주려는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행”, “사실무근인 허황한 론리 혹은 자가당착의 편파”(역시 박문희의 말을 교묘히 리용하여 도로 후려치기—필자ㅎㅎ)… 그외에도 있지만 생동감이 많이 떨어져 여기에 인용하지 않는다.“박문희가 왜 이런 작법을 썼을가?”김월성은 나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있다--“남영전이 주장하고있는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의 영속성 혹은 영원성의 근거를 마련”,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비호”, “인류의 원초문화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의 영속성을 립증하려는 의도”,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 대한 애착심”…박문희의 “바꿔치기” 등 작법이 의도적인 “사기행각”일수밖에 없는 리유--“일반인들은 아직 구경도 하지 못했을 <후한서. 고구려전>이나 <한서. 지리지>의 내용까지 거론할수 있을 정도의 깊은 학문”(ㅎㅎ감사!!!)을 쌓은 그러한 “박문희가 자신의 론지의 근거로 삼고있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 도언> 마지막 부분의 그처럼 통속적인 론술을 오독(汚瀆)했거나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고 하면 아마 믿을 사람이 없을것”. 희랍신화와 호메로스사시에 대한 김월성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맑스는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 "토양", "전제", "소재"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맑스는 "신화"를 사람들의 "환상"을 통한, 그리고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만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맑스에 따르면 "환상"과 "비자각적인 예술방식에 의해 가공된 자연과 사회 자체"로서의 "신화"인 까닭에 "신화"는 희랍예술의 토양이나 소재로만 될수 있었을뿐 "영구한 매력"을 지닌 예술의 높이에까지는 이를수 없는것이다. 맑스가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을 말했다면 "영구한 매력"을 지닌 "신화"는 "소실"될수가 없는것이다. 말 그대로 "영구한 매력"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아래 나의 “조작실상”을 “고백”하겠다—나는 맑스의 원 저작을 모조리 읽어볼수가 없어서 사이트를 통해 <맑스>와 <신화>란 두 단어를 검색했다. 거기에 <영구한 매력>이란 맑스의 말이 묻어나왔다. <영구한 매력>을 검색했더니 맑스의 신화리론에 대한 거의 모든 연구결과가 <신화>와 <영구한 매력>을 련계시키고 있었다. 맑스의 신화리론연구에서 <영구한 매력>을 <신화>에서 분리시키거나 아예 탈락시킨 연구론문은 아직 보지 못했다. 보았다면 김월성의 글에서 보았을뿐이다. 나로 놓고 말하면 전무후무한 일일것이다. 맑스의 원문을 본 뒤의 나의 리해도 <신화>와 <영구한 매력>은 분리되는것이 아니였다. 인류의 동년시대(유년기라고도 번역되는 듯)에 대한 맑스의 론설도 원시시대를 말한것이지 김월성이 말한것처럼 노예제시대를 말한것이 아니다. 엥겔스도 <가족,사유제 및 국가의 기원>에서 <...호메로스의 력사시와 모든 신화-바로 이러한것이 희랍인이 미개시대에서 문명시대에 넘겨준 주요한 유산이다>(맑스엥겔스선집 한문판 제4권 上 22페지)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미개시대는 한어에서의 야만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한어에서의 몽매시대가 조선어에서 야만시대로 번역된다.)때문에 김월성의 <"신화"는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이고 맑스가 "영구한 매력"을 지니고있다고 격찬한 "희랍예술"은 희랍노예제의 결과물인것이다.>라는 관점은 맞는것 같지 않다. 맑스의 신화리론에 대한 무수한 연구론문중 나는 중국사화과학원 민족문학연구소 사이트(http://iel.cass.cn/news_show.asp?newsid=1211)에 올려진 <맑스의 신화리론—겸하여 신화학연구중의 몇가지 관념을 평함>이 비교적 중요하고 정확하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김월성이 꼬집는 이른바의 "내포된 신화"나 “성숙된 어린이”는 그 론문의 관점과 해석을 취한것(례컨대 “내포된 신화”의 원문은 이렇다—马克思高度评价了希腊神话所具有的超越历史时空的巨大魅力。马克思说:希腊艺术和史诗中所包含的神话具有“永久的魅力”,至今“仍然能够给我们以艺术享受,而且就某方面说还是一种规范和高不可及的范本”。这一评价,主要肯定了希腊神话所具有的巨大的给人以艺术享受的美学价值。)이지 내가 딴 심보를 품고 <제멋대로 조작해낸 거짓말>이 아니다. 흥취가 있다면 그 사이트에 들어가 보기 바란다. 혹시 의외의 소득이 생길수도 있으니까. 김월성의 주장과 대조해 보면서 어느것이 맞는지 판단하기 바란다. 그리고 필요하면 당연히 다른 좋은 론문들도 찾아볼수 있을것이다.9월 15일장춘에서(부록: 차후에 점검해 보니 "성숙된 어린이"에 관한 나의 리해에 차도가 생긴것 같다. 좀 더 심사숙고해볼가 한다.--필자)//[문학산맥]CC론단
33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을 조작한 실상(實狀) /김월성 댓글:  조회:4457  추천:56  2007-09-15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을 조작한 실상(實狀)  김 월 성 박문희의 글은 주로 세번째 장절인 <<인류 원초의 문화에 영원한 가치원소가 없는가?( 이하 <<영원한 가치원소>>로 략칭함)에서 맑스의 론술을 인용하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했다. 박문희는 "맑스, 엥겔스의 심각한 론술을 살펴본다"고 했지만 기실 원시인들의 생명일체감정을 바탕으로 삼고있는 남영전의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변호하기 위해 이른바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 이른바 "희랍신화의 '천진성'", 이른바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이라는 엉뚱한 개념들을 허위조작해 가지고 그것으로써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평가를 "희랍신화"에 대입시는 작법으로 희랍신화와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본의를 완전히 변형시켜 버리고있다. 그 점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신화와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 엥겔스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맑스의 다음과 같은 론술에서 우리는 신화의 생성 년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야만시대의 저급단계에서 인류의 고급적인 속성이 발전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존엄, 웅     변, 종교적 감정, 정직, 강인, 용감성이 이 시기에 이미 품격(品格)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잔혹, 간험(奸險)과 열광도 뒤따랐다. 종교령역에서의 자연숭배와 인격화에  관한 신령(神靈) 및 대지배자에 대한 모호한 개념들이 발생했다. (중략) 상상이라는 인     류의 발전에 그처럼 큰 기능을 일으키는 것이 이 시기의 신화, 전기(傳記)와 전설을 비롯    한 미기재(未記載)의 문학을 생성시키기 시작했고 또 이미 인류에게 강력한 영향을 일    으켰다.(馬克思. <<摩爾根<古代社會>一書摘要>>. 人民出版社. 1965. 54-55페지.) 맑스는 신화가 인류의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있다. 야만시대의 저급단계가 바로 원시사회인 것이다.(맑스와 엥겔스는 원시사회를 몽매시대, 야만시대로 나누고 시대마다 저급, 중급, 고급단계로 각각 나누었다.) 엥겔스의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을 참조. 그런가하면 엥겔스는 희랍예술은 원시사회가 해체되고 성숙된 노예제사회의 상승기 즉 인간의 문명시대의 제작물임을 지적했다. 엥겔스는 노예제가 사회생산로동에 더욱 큰 규모의 분공이 있게 했음을 지적하면서 희랍예술은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임을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있다.   ... ... 그리하여 고대문화의 번영 즉 희랍문화를 위해 조건을 마련했다. 노예제가 없으     면 희랍국가가 없었으며 희랍의 예술과 과학이 없었을 것이다.(趙常林, 林婭. <<馬克思主義文化學>>. 中國文化書院. 1988. 387. 재인용). 맑스, 엥겔스의 상기의 론술에서 우리는 "신화"는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이며 "희랍예술"은 문명시대 즉 희랍의 노예사회의 더욱 큰 분공(分工)의 생성물임을 분명히 확인할수 있다. 그리고 박문희가 주요한 근거로 삼고있는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에서는 "희랍신화"와 "희랍예술"간의 관계를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일뿐만아니라 그것의 토양이다."라고 분명하고도 통속하게 해명했다. 맑스에 따르면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나 "토양"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것이다.    이 점을 확인한 다음 박문희가 맑스, 엥겔스의 그러한 론술들을 어떻게 자의대로 뜯어고치고 조작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박문희는 <<영원한 가치원소>>의 장절의 4, 6, 7, 8 단락들에서 이른바 "희랍신화"를 무려 일곱번이나 반복하고있다. 그중 4째 단락에서 처음 인용한 "희랍신화"만이 맑스의 본의일뿐 나머지는 모두가 박희문이 조작해낸것이다. 박문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희랍의 예술 나아가 서방예술에 가지는 희랍신화의 의의에 대해 그는(맑스를 가리킴-     필자) "희랍신화는 단지 희랍예술의 무기고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희랍예술의 토양"이라     고 규정하고나서 "력사와 시공(時空)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희랍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영구한 매력"을 가지고있     는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향수를 주고있으며 모종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일종 규범적인 그리고 초월할수 없는 보기이기도 하다."(박문희. <<김월성의 <토템문화론>을 론함>>. <<문학과 예술>>. 2007. 4호.) 바로 이 부분이다. 처음에 인용한 "희랍신화"는 맑스의 말을 인용한것이다. 그러나 련속이어지는 "력사와 시공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은 박문희가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때문에 찾아볼수도 없고 확인할수도 없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맑스의 관점을 총적으로 고찰해보면 맑스가 이른바 "력사와 시공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을 이야기할수가 없다고 판단된다. 앞의 인용문에서도 볼수 있듯이 맑스는 신화를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로 간주했다. 그리고 박문희가 근거로 삼고있는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의 론술을 보면 희랍신화를 희랍예술의 "토양", "희랍예술의 전제", "희랍예술의 소재" 혹은 "희랍예술의 토양과 모태(母胎)"의 정도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1) <<馬克思, 恩格斯選集>> 二券. 人民出版社. 1974. 113페지. 참조. 또한 맑스는 "자연력이 실제적으로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신화도 역시 소실된다."(동상서. 같은 곳)고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한 립장에 있었던 맑스가 "력사와 시공간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을 담론했다는 박문희의 론술에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맑스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박문희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잇달아 박문희는 맑스의 론술을 인용하면서 "희랍의 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영구한 매력'을 가지고있는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향수를 주고있으며 모종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일종 규범적인 그리고 초월할수 없는 보기이기도 하다.'"( 박문희의 글.)라고 기술하고있다. 여기에서 이른바 "희랍의 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박문희가 자의적으로 조작해낸것임이 틀림없다.   맑스의 원문에는 "희랍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가 아니라 "희랍예술과 사시"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馬克思, 恩格斯選集>> 二卷. 114페지. 참조.) 그러나 박문희는 "희랍예술과 사시"라는 맑스의 론술에 난데없는<<... ... 에 내포된 신화>>를 억지로 덧붙여넣었다. 그러한 작법으로 박문희는 "희랍예술과 사시"에 대한 맑스의 높은 평가를 "희랍예술과 사시에 내포된 신화"에 대한 평가로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희랍예술과 사시"에 대한 맑스의 평가는 거기에 "내포된 신화"에 대한 평가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박문희가 왜 이런 작법을 썼을가?   남영전의 토템문화를 비호하려는 박문희에게 대해 말할 때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높은 평가는 별 의미가 없는것이였다. 앞에서 이미 확인했듯이 "희랍예술"은 인류의 원초문화인것이 아니라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이였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원시인들의 상상의 생성물이라고 하는 신화를 선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신화를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로 인정했던 맑스가 박문희의 구미에 맞도록 신화를 높이 평가할 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희랍예술과 사시"라는 맑스의 론술에 "...에 내포된 신화"를 덧붙여넣음으로써 "희랍예술"에 대한 권위성을 띤 맑스의 높은 평가를 신화에 도용(盜用)했던것이다. 그 결과 "희랍신화"와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론술은 완전히 변형되고 말았다. 박문희는 나의 이러한 판단도 "저질언어"로 인정하는지?    박문희는 6, 7, 8단락들에서도 이른바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 이른바 "희랍신화의 '천진성'", 이른바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이라는것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있다. 박문희는 맑스의 론술인것처럼 인용부호까지 달고있지만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이나 희랍신화의 "천진성"은 원문(原文)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말그대로 박문희의 조작품인것이다.   이와같이 박문희는 맑스가 말한 "희랍예술과 사시"에 억지로 "신화"를 덧붙여 넣음으로써 맑스의 본의를 완전히 탈바꿈시켰고 또 맑스가 지적한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인 "신화"와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인 "희랍예술"에서의 "예술"을 바꿔치기를 하는 작법으로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론술을 "희랍신화"에 대한 론술로 완전히 왜곡하고있다.   물론 박문희는 남영전이 주장하고있는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의 영속성 혹은 영원성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맑스의 론술까지 조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작법이야말로 박문희 자신도 타매하고 있는 "저질언어" 혹은 저질행위일 뿐만 아니라 사기적 행각이라고 인정한다. 나는 남영전 본인도 박문희의 이러한 작법에는 부정적일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러한 사기적 행각은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비호할 대신 그것을 궁지에로만 몰아갈 것임을 박문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조작과 왜곡을 통해 박문희는 신화에 대한 맑스의 론술을 완전히 "자가당착적인 편파"(박문희의 말)로 만들어 버리고말았다. 왜냐하면 박문희도 인용하고있듯이 맑스는 "신화는 소실"되는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그런데 박문희의 말대로 맑스가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을 말했다면 "영구한 매력"을 지닌 "신화"는 "소실"될수가 없는것이다. 말 그대로 "영구한 매력"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쯤은 우리가 다 알고있는 일반 상식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신화가 소실"된다는 맑스의 론술과 박문희가 맑스의 론술이라고 조작해낸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은 서로간에 엄청난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맑스의 론술은 박문희가 질타하고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가당착적인 편파"가 되어버리고 만것이다.   혹자는 "신화"와 "예술"이라는 두 글자 차이를 가지고 뭘 떠들어대느냐고 힐책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두 글자 차이만이 문제인가? 앞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론술을 통해 이미 확인했듯이 "신화"는 야만시대 저급단계의 생성물이고 맑스가 "영구한 매력"을 지니고있다고 격찬한 "희랍예술"은 희랍노예제의 결과물인것이다. 그러므로 "희랍예술"에 대한 맑스의 평가를 "희랍신화"에 대입시키려는 작법은 그 발상부터가 소의 머리를 잘라다가 말의 몸체에 붙여주려는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행일수밖에 없다. 박문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론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인 착각이 없을수는 없다. 그리고 전공자가 아닌 우리가 그처럼 방대한 맑스, 엥겔스의 저작들을 일일이 다 접촉할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박문희인 경우, 맑스의 론술에 대한 그러한 조작이나 바꿔치기는 순간적인 착각에서거나 몰리해에서 비롯된것일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박문희는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의 마지막 부분을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자기의 론의를 전개했다. 두 페지 정도의 분량밖에 안되는 그 부분에서 맑스는 "희랍예술"과 "희랍신화"와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고도 통속하게 론술했다. 박문희는 또 카시르의 <<인론>>도 읽었다고 한다. 카시르도 예술과 신화의 구별점을 담론했다. 특히 박문희는 일반인들은 아직 구경도 하지 못했을 <<후한서. 고구려전>>이나 <<한서. 지리지>>의 내용까지 거론할수 있을 정도의 깊은 학문을 쌓았다. 그러한 박문희가 자신의 론지의 근거로 삼고있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 도언>> 마지막 부분의 그처럼 통속적인 론술을 오독(汚瀆)했거나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고 하면 아마 믿을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러면 맑스의 그 부분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일 뿐만아니라 그것의 토양이다.     희랍예술의 전제는 희랍신화이다. 말하자면 이미 인민들의 환상을 통한 일종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이다. 그것이 희랍예술의 소재인 것이다.2) 매우 통속적인 론술이다. 첫 번째 어록은 박문희도 인용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맑스는 "희랍신화"는 "희랍예술"의 "무기고", "토양", "전제", "소재"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맑스는 "신화"를 사람들의 "환상"을 통한, 그리고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만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맑스에 따르면 "환상"과 "비자각적인 예술방식(인간의 자각적인 예술방식이 아닌 - 필자)에 의해 가공된 자연과 사회 자체"로서의 "신화"인 까닭에 "신화"는 희랍예술의 토양이나 소재로만 될수 있었을뿐 "영구한 매력"을 지닌 예술의 높이에까지는 이를수 없는 것이다. 맑스가 그러한 "비자각적인 예술적가공을 거친 자연과 사회형식 자체"에 "영구한 매력"이 있다고 말했을 리가 없다. 맑스의 상기의 론술들을 통해서도 비록 "예술"과 "신화"라는 두 글자 차이이지만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이라는 박문희가 조작해낸 가짜 맑스의 론술이 얼마나 황당한것인지를 감지할수 있다.    박문희는 이른바 인류의 원초문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의 영속성을 립증하려는 의도에서 신화의 가치만을 높이기에 몰두하다보니 론리적 오유까지 범하고있다. "희랍신화"가 "희랍예술의 토양"이라는 맑스의 론술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생활은 문학예술의 토양"이라는 개념과 같은 론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이 문학예술의 토양이기는 하지만 생활자체가 문학예술인것은 아니다. 같은 리치로 희랍신화가 희랍예술의 토양이기는 하지만 희랍신화자체가 희랍예술인 것은 아닐 것이다. 희랍예술 속에 망라되였거나 반영되여 있는 신화를 희랍예술의 "영구한 매력"으로 풀이하려는 시도는 론리적으로도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그밖에 박문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 도언>>의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고나서 "그는(맑스를 가리킴- 필자 주) 인류의 '동년시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상태'가 아니라 '성숙된 어린이'인 인류의 원초 조상들의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극명하게 시사하고있다."라는 론의를 전개하고있다.   어법이 잘 맞지 않는데다가 "성숙된 어린이"라는 개념의 뜻을 리해할수가 없어서 이러한 론의의 확실한 취지가 무엇인지를 딱히 파악할수는 없지만 아마 박문희는 인류의 원초 조상들인 원시인들은 "영아"가 아니라 "성숙된 어린이"이며 그들이 지니고있는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주장하고있는것 같다. 나름대로의 판단이 허용되고있는 오늘과 같은 자유로운 학술분위기속에서 자아의식이 결여된 원시인들의 사유를 "영아상태"에 비유했던 자신의 관점을 누구에게 강요해야 할 그 어떤 리유도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맑스가 그 점을 "극명하게 시사했다"는 론의만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우선 "성숙된 어린이"가 어디에서 온것인지를 알수 없다. 맑스는 희랍예술의 "영구한 매력"을 담론하면서 "조야(粗野)한 어린이", "조숙한 어린이", "정상적인 어린이"를 말했을뿐이다. 맑스는 "희랍인을 정상적인 어린이"이라고 지적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천진성", "영원한 매력" 모두가 희랍예술에 대한 평가인것이다. 박문희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 대한 애착심으로부터 "야만인" 혹은 "무지몽매한 미개족속"이라는 원시인들에 대한 나의 지칭에 대단히 불만스러워하는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의 저작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家庭, 私有制和國家的起源)>>에서도 볼수 있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인류사회를 몽매시대, 야만시대, 문명시대로 획분했다. 그리고 앞에서 엥겔스의 론술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듯이 희랍예술은 문명시대 즉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이였다. 맑스의 "천진성", "영구한 매력"은 바로 희랍노예제의 생성물인 "희랍예술"에 대한 평가인것이다. 맑스의 그러한 평가를 몽매시대나 야만시대의 "원초 조상"들인 원시인들과 련계시키는 시도 역시 사실무근인 허황한 론리 혹은 "자가당착의 편파"가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맑스가 "원초 인류의 조상들의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극명하게 시사하고있다."는 박문희의 론술 역시 남영전의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비호하기 위해 제멋대로 조작해낸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예술"과 "신화"를 바꿔치기를 한 자신의 작법을 기상천외한 묘법으로 간주했기에 박문희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마음놓고 할수 있었을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박문희의 생각과는 달리 종이장으로는 불덩이를 쌀수 없고 사실은 언제나 사실대로 밝혀지기 마련이다.    총적으로 박문희는 남영전의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을 바탕으로 삼고있는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비호하기 위해 맑스의 론술을 조작, 왜곡하는 방법으로 맑스의 본의까지 탈바꿈시키고있다. 다른것은 모두 제쳐놓고 이 한 점만으로도 토템문화론을 비호하는 박문희의 주장은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듯 저절로 주저앉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밖에 박문희는 "비판적유심론철학자로서의 카시르의" "모든 리론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박문희의 관점에 반론을 전개하고있는 나의 립장에서는 "정확하다는 보장이 그 어디에도 없는" "비판적유심주의철학자 카시르"가 제기한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인정할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속성까지 주장하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였으며 맑스의 론술을 조작해내고 왜곡까지 하면서라도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 립각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반드시 비호해야만 했던 당위성이 도대체 무엇이였던지를  박문희에게 묻지 않을수 없다.//[문화산맥]CC론단/9월 14일
32    [창업칼럼] 공수창업자 선언 댓글:  조회:4395  추천:73  2007-09-12
공수창업자 선언   나는 성스러운 공수(空手)창업자이다. 돈은 없지만 나에겐 끓는 피가 있고 아울러 힘과 용기와 뭔가를 해내려는 드팀없는 결심이 있다. 나에겐 각별히 두려운것이 따로 없으며 이제부터 시간을 금싸락처럼 아끼면서 과감히 리상실현에 헌신할것이다. 계획서 열부보다 행동 한가지가 백배 낫다. 오늘 오후 공상국에 가서 바로 회사등록을 할것이다.   적수공권인 나에게는 부(富)로부터 오는 부담이 없다. 할리우드는 새로 찍은 영화 한부에 매표수입 수억딸라를 올리지 않으면 단연 밑질터이지만 나로 보면 한시간에 10원만 벌어도 대단한 수입이다. 내가 지금 쓰고있는 방이 바로 나의 사무실이다. 전용승용차도 필요없고 전화 한부면 회사가 아주 무난히 돌아갈수 있을터이다.   초지일관 기정의 전략목표를 바라고 뛸것이지만 그러나 그 어떤 기성책략에 결코 얽매우지는 않을것이다. 기회의 태양이 항상 머리우에서 빛나고있는만큼 적시적판단으로 내 귀뿌리를 스쳐지나려는 반짝기회를 놓지지않고 잡을것이다.   나는 총경리이자 결책자이며 실무대표이자 또한 실무원이다. 엄격한 재무관리목표를 설정해놓고 나 자신의 표현에 대한 스스로평가를 성실하게 리행할것이다.   나한테 “관료주의”나 “형식주의”같은 시시콜콜한 관념따위는 붙지 않을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할것이며 그들을 친형 혹은 친동생으로 대할것이다. 경영에서의 중대사항(때론 중대사항이 아니더라도)은 자주 직원들과 의논할것이며 고객들과도 매일 얼굴을 마주할것이다.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할것이며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할것이다.   작은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큰것을 탐닉하지도 않을것이다. 작은것의 루적이 없다면 큰것의 이룸도 없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나의 회사, 이 자그마한 집단을 내 눈처럼 아끼고 사랑할것이다. 녀자 열이라도 한달 사이에 아이 하나를 생산해 낼수 없을 터이고 천재 열이 모여도 우리 둘이나 셋보다 별로 나은데가 없을것이다. 천재들만 모이면 서로 제가 잘났다고 티격태격하면서 대사를 그르치기 마련일터이다. 그러나 우리 이 자그마한 집단은 극히 사소한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매우 중요한 그런 조그마한 일들을 매일 반개 혹은 하나씩 이루어갈것이다.   일류의 봉사를 생명으로 간주할것이다. 겉치례보다는 실속있는 봉사로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것이다. 박경림의 노래가사에 나오듯 나의 회사를 찾는 모든 고객들은 이제 틀림없이 나와 우리 직원들의 피할수 없는 매력속으로 깊숙히 빠져버리게 될것이다. 그 매력은 다름아니라 고객을 자기 집 식구처럼 대하는 따뜻한 마음가짐일것이다.   나는 용감하고 엄숙하면서도 쾌활한 사나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모든 일을 대담하고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행해나갈것이다. 물론 고생을 밥먹듯 하고 쓰리고 아픈 일들도 많을테지만 나는 그것을 오히려 즐거운 일로 간주할것이며 그런 시련을 나를 강하게 벼리는데 있어서의 불가결의 요인으로 삼을것이다. 그 어떤 역경이나 실패에도 질겁하지 않을것이요 락담하여 쓰러지는 일은 더욱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 대비해 나는 내가 하는 일에서만큼은 최고의 실무지식과 기능을 갈고닦을것이요 시종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을것이다.   원래 홀몸에 빈손인 나에게는 잃을만한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잃을것이라면 무지와 빈궁뿐일것이요 얻는것은 내가 얻고자하는 모든것일터이다.//길림신문
31    김월성의《토템문화론》을 론함 댓글:  조회:4619  추천:84  2007-09-06
김월성의《토템문화론》을 론함   박문희     《문학과 예술》 2007년 제3기에서 남영전의 문장 《토템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계시》(이하 《계시》로 략칭함, 제목을 클릭하면 원문열독이 가능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정감과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이하《토템문화론》으로 략칭함, 제목 클릭하면 원문 열독 가능함)이란  비평문을 접하게 되여 전에 없던 흥미가 유발됐다. 그래서 지난 세기 서방 굴지의 비판적유심주의철학자 카시르의 명작《인론(人論)》까지 읽어보는 열성이 생기게 되여 스스로도 매우 놀랍다.   전에 없던 흥미가 유발됐다 함은 김월성이 남영전의 글 전문 18개 단락을 한단락도 빠트리지 않고 말 그대로 “철두철미”한 비판을 가했다는데 기인된다.  재미가 동한  김에 남영전의 《계시》도 두세번 더 읽어보는 시간도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도 김월성의  글이 겉보기에서의 기세보다는 내용이 허하고 론리전개면에서도 자가당착적인 편파가 몇군데 보이여  전반 글의 설득력 나아가 비판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글은 서론, 본론, 결론 등을 겸비한 그 무슨 론문도 아니고 수감, 말하자면 김월성의 《토템문화론》 독후감일 뿐이다. 조금은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추려 솔직하게 적으면서 잘못된 부분, 경망(輕妄)한 부분에 대해서는 김월성, 남영전 두 선생으로부터 따뜻한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만약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합리한것이라면…”의 위험성   《토템문화론》에서 김월성은 시종 독일의 비판적유심주의 철학자 카시르의 《인론》에 나오는 대량의 론술을 론거로 삼아 《계시》의 거의 모든 관점과 제기법을 비판하고있다. 그는  “만약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합리한것이라면… 그의 주장은 ‘매우 유치한 독단론’일수밖에 없게 된다”는 식으로 남영전의 주장을 재단하고 있는데 필자의 소견으로 이런 재단법은 상당히 큰 위험성을 안고있다. 왜냐 하면 카시르의 모든 리론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기때문이다. 례컨대 “신화”에 대한 비판적유심주의자로서의 카시르의 견해와 변증법적유물주의자로서의 맑스의 견해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있다. 신화의 산생에 대한 카시르의 견해는 매우 모호하며 부정적이다. 그는 “정감의 산물”로서의 신화는 “이상야릇”[i] 한 것이며 “신화사상은 그 기원과 원칙으로 말하면 구습답습사상”인바 그것은 “신화는 아주 먼 옛날에로 거슬러 올라가는것 외에는 인류생활의 모든 현존형식을 리해, 해석하고 천명할만한 아무런 방법도 찾아낼수 없기 때문”[ii]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와는 반대로 “신화”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아주 밝으며 긍정적이다. 맑스는, 신화란 조기의 인류가 강대하고 신비한 자연력을 실제적으로 지배할수 없는 조건하에서 “상상으로, 혹은 상상을 빌어 자연력을 정복하고 자연력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창조해낸것이자 “인민들의 환상을 통한 일종 비자각적인 예술방식에 의해 가공된 자연과 사회형식 그 자체”이며 자연을 “인격화”하려는 원시인들의 욕망은 “인간 자신의 생산을 목적으로 한것이다”[iii] 고 하였다. 이 한가지 례만 보아도 카시르 한사람의 리론을 잣대로 다른 사람의 주장의 옳고그름을 함부로 재단한다는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수 있다.   “생명일체화”와 “천인합일” 사상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김월성이 《토템문화론》에서 비판한 중점은 “생명일체화”사상이다. 그는 카시르가 “생명일체화”가 “인간의 자아의식(주로 륜리의식)의 생성과 함께 소실”된 력사과정을 언급한 례를 적용하면서 카시르가 “생명일체화”는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억측에 불과한 “매우 유치한 독단론”이라고 말한 이상 남영전의 주장도 필연코 “철저히 실패할수밖에 없다”고 못박는다. 여기서 “생명일체화”, “무아지경”, “교감에 의한 합일식” 등 몇가지 개념이 나오는데 우선 그 개념들간의 관계를 알고 넘어가야겠다. 김월성에 따르면 “무아지경(無我之境)”이란 “ ‘교감(交感)에 의한 합일’ 즉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嬰兒)상태의 토템숭배식의 합일”이며 “‘생명일체화’ 및 그것에 바탕한 ‘토템숭배관념’은 원시인들의 ‘무아지경’의 생성물” 이라고 한다. 그럼 “무아지경”과 원초의 “천인합일”사상은 련계가 없는가? 김월성은 “물론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과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고급적인 천인합일사상(망아지경) 사이에 상통성(相通性)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통성일뿐 결코 동일성인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과 동양원초의 “저급적”인 ‘천인합일사상”은 동일성을 가지고있다는 말로 통한다. 중국의 일부 철학가들은 동양 원초의 “천인합일”사상과 서양의 “교감에 의한 합일식(合一式)”사상을 모두 “무아지경”[iv]으로 비유하고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계철학사의 3단계(무아, 유아, 망아)중 첫단계(김월성이 말하는 “영아상태의 단계”)에 발생한 관념들이라는 의미에서 상술한 몇가지 개념, 즉 원초적 “천인합일”사상, “생명일체화”감정, “교감에 의한 합일”사상, “토템숭배사상”, 나이가 “토템신화” 사상 등의 내포는 본질적으로 일치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필자도 이런 철학사상 구분법에는 추호의 이의도 없이 수긍하는 바이다. 기실 동서양 철학사의 궤적도 이 점을 증언하고있다. 2000여년 전, 특히 소크라테스, 플라톤(기원전 5세기) 이전의 고대희랍철학(서방의 조기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지 않고 량자를 동일체로 간주한다. 이는 동양조기의 철학관(천인합일사상)과 완전히 일치한것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에 카시르가 만들어낸 “생명일체화”개념은 본질상 조기 서양철학의 “주객합일설”의 현대적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모르고 지내오면서 동양과 서양이 각기 자기의 력사를 만들기에 바삐 돌아치다보니 그 내용면에 차이가 많이 나는것이 사실이며 각자 력사단계의 지속시간이 크게 다른것도 아주 분명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상호간 대방의 력사경험에서 유익한 부분을 배우는것은 필요할수밖에 없는것이다. 김월성의 “20세기 초엽부터 흥기하고있는 서방의 생태륜리학파는 동방의 천인합일사상을 수용할것을 주장하고있다”는 서술이 만약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한것이라면 그것은 의미적으로나 시기적으로도 십분 적절한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말하자면 만약 김월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생명일체화”나 원초적 “천인합일”사상이 일찌기 “소실”돼버린 “무지몽매”한 상고적 문화로서 오늘날 리용할만한 아무런 가치(“영구한 가치원소”란 더 “어처구니 없는” 말이고)도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살고있는 이 세상에 구경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싶이 모든 인류력사의 각 단계는 서로 끊어질수 없는 련관속에 놓이게 되며 모든 문화 역시 전승관계를 가진다. 이런 관계는 단절할래야 단절할수 없는것이다. 가장 간단한 례를 들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문자도 어느날 갑자기 생겨났다가 또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오랜 시일에 거쳐 만들었고 또한 후세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오늘의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는것이다. 세종대왕의 거룩한 공적은 오늘은 물론 후세 사람들도 영원히 기리게 될것임을 회의하는 사람은 없을줄로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모든 문화성과는 반드시 그 뿌리가 있는것이며 그 뿌리는 아무리 베여버릴래야 버릴수가 없는것이다. 동양고전으로서의 “천인합일”사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존재이며 우리 문화의 모든 령역에 침투되여 있는 사상이다. 철학사의 제3단계 즉 “망아지경”의 “천인합일”사상도 그 뿌리를 떠날수 없으며 단지 그 사상체계를 “새롭게 해석”(김월성 語)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수 있을뿐이다. 서양의 고전철학사상으로서의 “교감에 의한 합일식(合一式)”사상( “생명일체화”사상 망라)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물론 “소실론”이 전혀 무근거하거나 도리가 없는것은 아니다. 모종 철학개념으로 말하면 “생명일체화”의 “소실”, 따라서 원초적 “천인합일”관념의 “소실”은 지어 필연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맑스가 천명했다싶이 과거에 인식하지 못했던 “자연력이 실제상 지배됨에 따라 신화도 소실”[v] 될수밖에 없는 것과 꼭같은 도리이다. 단 그것은 실재한다고 확신했던 환상이나 상상속의 실재가 아닌 허상이 인간의 자아의식의 각성으로 소실된것이지 특정 력사단계에서 원시인들의 세계관의 한부분으로 각인된 그런 관념문화 자체가 사라진것은 결코 아니며 인류가 최초에 창조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그 가치가 사라진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모두 김월성이 인정하는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소실”되여버렸다면 력사가 철저히 단절되여 그 후의 문화는 존재할수도 없었을것이요 따라서 그것의 발전 운운은 더구나 불가능했을것이다.     인류 원초의 문화에 영원한 가치원소가 없는가?   우리 현시대 모든 문화가 뿌리가 있는것이고 그런 뿌리를 끊어버릴수 없는것이라 할 때 새로 제기되는것은 인류의 원초적문화에 “영원한 가치원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김월성은 “자연과 화해하고 사람사이에 형제적관계를 도모”하는 원시인들의 “착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고양해야 한다는 남영전의 주장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영원한 가치원소’로 간주”하는 “그릇된 사유방식”에서 비롯된것이며 그러한 사유방식이야말로 “비행기는 원시사회에도 있었다는것과 같은 ‘원형선온식가설’에 다름 아닌것”이며 이는 또 “그의 사유가 아직도 원시인들의 신화와 종교의 사유 즉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언하고있다”고 비판한다. 남영전의《계시》를 보면 그가 표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주 명확하다. 그는 현대의 인간이 원시 초민들의 소박하고 순진한 심성을 배워 자연을 자기의 생명으로 간주하여 사랑하고 인간지간에도 형제간처럼 화목하게 지내자는것이다. 그가 고양하고자 하는 토템문화의 “영원한 가치원소”란 바로 이점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김월성은 이를 매우 “그릇된 사유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의 심각한 론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류최초의 원시인과 그들이 창조한 문화에 대해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시사회는 “미래의 모든 사회에 대해 말할 때 어쨌든 가장 흥미로운 시대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그 후 전부의 보다 높은 단계의 발전에 토대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며 그 시대는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분리되여나옴을 출발점으로 장래 뭉친 사람들이 영원히 다시 겪지 않을 그런 곤난을 극복하는것을 내용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vi]우리는 이 론술을 원시인들이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독창적인 창조적활동으로 장래 문화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눈부신 문화도 있을수 없다는 의미로, 그리고 우리 원초의 조상들을 “자기와 짐승도 구별못하는 깨지 못한 미개족속들” 이라고 비난할수만은 없다는 말로 리해해도 될것이다.  맑스는 인류의 조상들이 창조한 문화에 대해서도 높이 찬양하고 있다. 례컨대 고대의 희랍신화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에서 높이 평가하고있다. 희랍의 예술 나아가 서방예술에 가지는 희랍신화의 의의에 대해 그는 “희랍신화는 단지 희랍예술의 무기고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희랍예술의 토양”[vii]이라고 규정하고나서 “력사와 시공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희랍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영구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향수를 주고있으며 모종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일종 규범적인 그리고 초월할수 없는 본이기도 하다.” [viii] 필자는 맑스의 이 론술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도 단연 알맞는다고 생각한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 신화의 원형으로서 우리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곰이 인간으로 화신했다는 모티브에서 우리는 원시적 토템사상의 흔적을 엿볼수 있으며 주제의식의 “홍익인간”이란 리념을 통해 신화적 보편성과 그것이 가지는 높은 가치도 확인할수 있다. 이 신화는 후대로 전승되면서 민족공동체의 결속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문학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다시 맑스의 론술에로 돌아가면, 희랍신화가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영구한 매력”을 가질수 있는 원인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류의 동년시대”에 “희랍인은 정상적인 아동”이였는데 아동의 천진함은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유쾌감을 느끼게” 한다. 희랍신화의 가치중 하나는 바로 인류동년의 천진성을 “진실하게 재현”했다는데 있다. [ix] 맑스의 유물사관으로 이 말을 리해하면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런 “정상적인 아동”의 매력에서 온것이라 할수 있다. 맑스의 이 론술로부터 자연히 김월성의 “ ‘교감(交感)에 의한 합일’ 즉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상태”란 제기법을 련상하게 되는데, 토템신화를 망라한 최초의 문화를 창조한 우리의 조상을 “주체와 객체도 구분못하는 영아”로 표현하는것이 과연 합리한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 맑스는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과 관련하여 《정치경제학비판대강(초고)》에서 다음과 같은 리론을 펴고있다. 인류의 력사는 “바로 무제한적으로 인류의 창조적 천재를 발굴하는것이며 모종 특수한 방면에서만 인간을 재생산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을 생산하는것이다”. 그러나 “자산계급경제학과 그에 상당한 생산시대는 인류의 내재적본질에 대한 이런 철저한 발굴이 철저히 공허해지게 하고 사물의 보편적인 변화를 극단적으로 마비시키고있으며 고정적이고 일면적인것을 타파하는 모든것을 일종 순수한 외재적목적을 위해 인류자신을 희생하는 목적으로 바꿔놓고있다”. 고대의 세계는 “인간을 생산의 목적으로 삼았”지만 “현대세계는 언제나 생산을 인간의 목적으로 삼고있으며 또한 재부를 생산의 목적으로 삼고있다”. 비교적측면에서 말할 때 고대 세계의 “이런 견해(인간을 생산의 목적으로 삼는것을 말함—필자)는 현대세계에 비해 훨씬 더 고명한것”이며 때문에 “그 유치한 고대세계는 일종 각별히 숭고한 세계처럼 보인다”. [x] 이 론술은 맑스의 다른 한 저서인《정치경제학비판》도언의 론술과도 완전히 어울린다. 《도언》중 맨 마지막 한단락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한 어른이 다시 어린이로  돌아갈수는 없다…그러나 어린이의 천진함은 어른에게 유쾌감을 주지 않는가? 어른이라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자기의 (소시적)진실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하나의 시대에 있어서 그 시대의 고유한 성격은 그것의 순진성으로 다시금 어린이의 천성속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때문에 력사상 인류의 동년시대는 그것이 가장 완미하게 발전된 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단계로서의 영구한 매력을 과시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거칠고 야한 어린이가 있고 조숙한 어린이도 있다. 고대민족중 많게는 이 부류에 속한다. 그리스인은 정상적인 아동이다. 그들의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은 그것이 성장했던 그 미발달사회와 결코 모순되는것이 아닌것이다. ” [xi] 맑스의 이 일련의 론술은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인간 고유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본성이 사라져가고 날로 경제의 노예가 되고있는 사회의 현실을 비판한것이다. 그는 인류의 “동년시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상태”가 아니라 “성숙된 어린이”인 인류의 원초 조상들의 “천진성”에 “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극명하게 시사하고있다. 여기서 남영전의 “영원한 가치원소”관점에 대한 김월성의 부정적견해가 재고돼야 할 가능성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토템문화는 “철두철미”한 서방문화인가?   《토템문화론》에서 김월성은 “원시종교형태인 토템문화는 철두철미한 서방문화”라고 하면서 20세기 초엽부터 흥기하고있는 서방의 생태륜리학파는 동방의 천인합일사상을 수용할것을 주장하고있”는데 “서방인도 아닌 남영전이 무엇때문에 토템숭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하고 의혹을 제기한다. “토템문화는 철두철미한 서방문화”란 이 명제는 기실 이른바의 “토템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만 명제풀이에 노력을 기울인다 할 때 전혀 문제시 될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토템문화”가 세계 각지, 이를테면 아세아주의 아랍국가, 이스라엘, 일본과 중국을 망라한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있음은 전반 인류학계가 공인하는 사실이기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최삼룡에 의하면 인디안인들이 쓰던 “토템”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유럽의 학술문헌에 나타났기때문에 세계 학술계는 아주 자연스럽게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다른 단어를 밀어버리고 “토템”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토템”을 중국의 어원크족은 “칼부르”라고 부르고 커무인들은 “다”라고 부르며 중국에서 “totem”을 중국어로 제일 먼저 번역한 사람은 엄복(严复)이라는 사실도 제시했다. 보다싶이 단지 “토템”이란 명칭이 서방에서 들어왔다는 리유만으로 그것이 “철두철미 서방문화”라고 하는것은 도리가 없는것이며 따라서 “서방인도 아닌 남영전이 무엇때문에 토템숭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하는 의혹도 자연히 풀릴수밖에 없게 된다. 이 문제가 확실히 풀렸으면 “우리 민족의 선민들은 토템문화를 갖고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뒤따라 나선다. 한국 학자들의 현황을 보면 이 면의 연구가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닌것 같지만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만 봐도 토템문화단계는 분명 있었던것으로 파악된다. 례컨대 한국학자들은 “선사시대의 토템신앙은 태양이나 거석, 달, 큰나무, 큰동물, 큰바다, 큰강 등 자연에 존재하는 큰것에 대한 숭배로부터 시작”되였는데 “《삼국유사》나  《제왕우기》 등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신화나 호랑이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볼수 있다”고 하였다.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호랑이를 숭배하는 족속을 백성으로 삼았다거나 말이 울다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에서 발견된 알에서 혁거세가 나왔다거나 닭이 우는 곳에 있던 궤에서 알지가 발견되였다거나 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이 우물에서 나타난 룡의 오른쪽 갈비대에서 출생했다거나 금와왕의 모습이 개구리를 닮았다 함도 마찬가지로 토템숭배의 표현형태라고 한다. 그들은 《단군신화》에서 환인이 웅녀와 결혼했다 함은 선민사상을 지닌 부족과 곰토템을 갖고있던 부족과의 련합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후한서-고구려전》에는 "고구려는 본래 다섯 개의 족이 있는데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있다"고 기술되여있다. 고구려 5부족의 전신인 5가(家, 加), 즉 우(牛)가, (馬)가, 저(猪)가, 구(狗)가, 양(羊)가도 역시 각 부족의 상징동물로 대신한 각 부족의 명칭이다. 오가의 역할은, 우가는 곡식을 주관했고 마가는 목숨을 주관했으며 저가는 병을 주관했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했고 양가는 선악을 주관 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소, 말, 돼지, 개, 양은 실은 당시 각 부족의 토템이였던 것이다. 현대과학의 발전이 토템신화연구에 힘을 실어주고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흥미롭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경에 단군에 의하여 건국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고려후기에 씌여졌을뿐만아니라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다수의 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근래 고조선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한서(漢書)-지리지》에는 기원전 1200년경 기자(箕子)시대 고조선에 “8조 금법(禁法)”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시기에 법률이 있었다면 고조선이 고대 국가체제를 갖춘것은 그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된다. 또 최근 고고학연구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가 기원전 2400년경으로 확인되였다. 이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의 고조선 건국시기와 비슷하며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국가사회단계에 진입하였다는 일반론을 따르면 기원전 2333년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였다는 기록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것이다. 현대인류의 조상문제연구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일치한 견해를 가져올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 과학자들은 최신기술의 DNA분석을 거쳐 상고시대 아프리카 동남부의 한 자그마한 부락에서 살았던 원주민이 현대인류의 공동한 선조임을 실증했다. 과학가들에 따르면 세계 각지에 널려있는 토착민들에 대한 DNA분석을 통해 현대인류의 공동한 조상이 어떻게 세계 각지에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전반 력사적 이동로선까지 멀지 않아 밝혀내게 된다고 한다. 그외 중국의 과학자들도 유전생물학연구를 거쳐 중국원인(猿人)이 중국인의 선조가 아님을 실증했다고 선포했다. 신기하고 놀라운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다.   김월성의 자가당착적인 사고에 대하여 몇마디   1) 장래에는 토템식 “형제관계”가 수립 가능한가? 《토템문화론》에서 김월성은 “남영전은 《오늘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대담에서 토템식 ‘형제관계’가 수립되여야 한다는 싸르트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으로 자기의 토템문화론의 정당성을 립증하려고 했다”고 전제하고 “싸르트르는 인류의 요원한 미래를 념두에 두고 말한것이지 현실을 말한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월성의 말은 여기서 큰 모순을 자초하고 있다. 하나는, 싸르트르는 분명 “오늘 우리는 반드시 이런 정신(즉 토템식 ‘형제관계’)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월성은 “아니다”라고 하며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사회의 ‘희망’사항”일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 더 큰 모순이 나타난다. 김월성의 주장대로라면 토템식 “형제관계”는 오늘에도 성립될수 없을뿐만아니라 인류의 요원한 미래에는 더구나 허용되지 말아야 할것이기 때문이다.   2) 새로운 참조계하에서의 낡은 전통 해석평가 문제 지난해 《문학과 예술》제6기에 실린 김월성의 비평서 《전통과 민족문화의 발전에 대한 사고》의 결론부분에는 이런 몇단락의 말이 있다.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 토론은 무엇보다도 낡은 문화전통가운데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할것이다. 또한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려면 문화전통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참조계에 비추어 창조적이며 현실지향적인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여야 할것이다. 맑스는, 전통은 우리의 모든 언행의 시발점인 동시에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연구는 기정된 시발점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것을 통해 무한한 미래를 펼쳐보여야 한다. 전통이란 과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에 대해 말할 때에는 절대적으로 확정된것이며 이미 개변할수 없는 페쇄적인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와 장래에 속하는 문제인것이다. 관건은 새로운 참조계하에서 낡은 전통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문제이다. 그래야 전통은 굳어진 시체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력을 과시하는 살아있는 실체로 될수 있을것이다.   솔직히 김월성의 이 견해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 글의 앞에서 전개한 론증도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고있다. 원래 이런 견해를 적용하여 “구체적인 문화현상”인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새로운 참조계” 즉 “오늘 날 인간이 실리추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자연에 대해서는 인류중심주의를, 타인에 대해서는 자기중심주의를 행하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파괴돼가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했더라면 그의 글은 완전히 다른 면모로 나타날수도 있었을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김월성은 매우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문화현상 앞에서는 참조계에 의한 평가와 해석력을 완전히 상실하고있으며 결국 자신이 제시한 정확한 론리를 철저히 뒤집어엎는 결과를 자초하고있다.   3) “민족문화다원화”문제와 “토템문화론”배척의 모순 《토템문화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월성은 서방경제의 강세에 힘입어 서방중심주의가 팽창세를 보이고있는 형세에 맞서서 “민족문화다원화구호”가 제기되고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든 민족, 모든 나라는 자기 문화의 다양성, 차이성, 특수성으로 이미 확립된 세계체계에 참여해야 함”을 제시하고있다. 그러나 그는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을 “다원적민족문화”에서 배제하고있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토템문화론”을 “민족문화다원화”와 대립시키고있다. 남영전이 “현단계에서 토템숭배관념으로 인류의 문화를 균질화해 보겠다”고 시도한다는것이 그가 “토템문화론”을 “민족문화다원화”와 대립시키고있는 주요 리유이다. 김월성의 이런 견해는 “나는 나의 매수의 토템시가 작디작은 호르래기로 되여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價値元素)를 부르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해를 부르고 세계의 융합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한 남영전의 말을 “60여억 인구가 자기가 부는 호르래기 소리에 한사람같이 발맞추어 전진할것을 기대한 야심찬 포부”로 착각한데서 생긴것이 분명하다. 종잡아보면 김월성의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독선적이다. 왜냐하면 남영전의 개성적인 “토템문화론”과 그의 시작품들은 분명 민족문화의 한 “분자(分子)”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기실 남영전에게는 토템시에 “집착”해서는 안될 그 어떤 리유도 없다. 일개 시인으로서 자기의 독자적인 표달령역을 개척하고 독자적인 정신추구를 하는것은 긍정해야 할 일이지 절대 비난할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자기의 정신추구, 시의 가치추구가 정확한것임을 확신하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자기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다. 목소리를 조금 높인다 해서 그것이 바로 “인류문화를 균질화해보겠다는 야심”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얘기다. 설령 시인들에게 그런 “야심”이 조금 혹은 많이 있다 해도 하늘이 당금 무너져내리는것이 아니다. 이른바 대정치가들과 대리론가들만 이 세상에서 거창한 “치세지도(治世之道)”를 담론할수 있고 보잘것 없고 자그마한 시인은 시단의 끝자락에서 풀피리나 호르래기도 불지 말고 그냥 풍월만 읊조리면서 죽은듯이 살아있어야 한다면 우리의 시단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황차 남영전은 그 무슨 전쟁, 반목, 무함, 음모, 빈궁, 사스와 황사바람을 부르려는것도 아니고 잊혀져가는 토템문화전통에 내재 가능한 “영원한 가치원소”를 살려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해를 부르고 세계의 융합을 부르”려는것일 뿐인데 일개 시인의 이와 같은 참된 노력 하나도 허용할수 없다는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것이며 그것은 또한 “세계문화다양성선언”정신과  “민족문화다원화”원칙에도 배치되는것이다.   남영전이 금년도 《문학과 예술》 제1기에 발표한 《문단의 조화로운 학술토론분위기를 기대한다》(제목을 클릭하면 원문 열독 가능함)는 글은 아주 성근한 마음으로 쓴것임을 일단 읽어보면 충분히 감지할수 있다. 그러나 남영전의 이 글에 대한 김월성의 “화답”은 읽는 이들을 매우 당혹케 한다.      “18년간 토템문화를 연구했다는 남영전은 ‘단군신화’의 곰이 자기의 토템조상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영전은 ‘일상관념이 무너질 때 나 역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고 한다. 왜 남영전이 당혹감만 느꼈는가? 네발가진 암컷곰이 자기의 시조할머니이며 자기가 검은 곰과 ‘전적으로 동일한것’임을 알았을 때 남영전은 그야말로 경악했을것이다. 하지만 조선민족가운데 남영전처럼 네발가진 암컷곰이 자기의 시조할머니이며 곰과 자기가 ‘전적으로 동일한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남영전 외에 또 몇이나 있는가? (물론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혹은 토템시의 몇몇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이 한단락의 글에서 남영전의 본의가 완전히 와전된건 차치하고 괄호안팎의 지극히 선의적이지 못한 언어(기실 다른 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저질언어가 처처에서 로출되고있다)가 과연 학문을 연구하는 글에서 나올수 있는것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남영전은 주로 한어로 창작하는 민족시인이다. 필자 개인의 생각에 시를 포함한 남영전의 일부 글은 한어 원문에 비해 손색이 있으며 오역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점을 가지고 남영전을 지나치게 나무랄수는 없다. 조선족문인이 전국적문단에 두각을 내밀어 조선족문학의 영향력을 과시하는것은 환영할바라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진정 전국 여러 민족과 세계 여러 민족의 수림속에서 자기의 영향력을 과시할 때 우리 문학은 비로소 세계앞에 떳떳해질수 있기 때문이다. 김월성이 《전통과 민족문화의 발전에 대한 사고》란 글에서 주장한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국조선족은 두 배에 다리를 올려놓은 어정쩡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중국조선족으로 거듭나야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에서 생각하는 바를 두서 없이 적었다. 개괄력이 약하다보니 글이 많이 길어져 우선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일면적이거나 틀리는 곳이 있을수 있으니 허물없는 지적을 바란다.       [i] 카시르의 《인론》 제7장 《신화와 종교》 제1단. [ii] 카시르의 《인론》 제12장 《총화와 결론》 제6단. [iii]《맑스엥겔스선집》제2권 113페지. [iv] 장세영:《명징지경에로의 진입》(Into the Clearing) 참조. [v]《맑스엥겔스선집》제2권 113페지. [vi] 엥겔스:《반듀링론》 [vii]《맑스엥겔스선집》제2권 113페지. [viii]《맑스엥겔스선집》제2권 114페지. [ix] 동상. [x] 맑스: 《정치경제학비판대강》(초안 ) 제3분책 104~105페지. [xi]《맑스엥겔스선집》제2권 114페지.     2007년 제4기 [부록]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정감과 남영전의《토템문화론》     김월성   1. 머리말   남영전이 표방하고있는 의 부당성(不當性)을 밝히려는것이 본고의 취지이다. 남영전은 1)에서 자기의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2)는 글에서 자기의 토템문화론이 국내외 학술계에서 대환영을 받고있는 사실을 렬거하면서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재언명했다.   남영전의 이런 글들은 철두철미 원시인들의 정감을 바탕으로 작성된것이다. 원시적정감에서 생성된 생명일체화의 전형적인 표현형태인 원시인들의 토템숭배를 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고있는 사실이 그 점을 증언하고있다. 남영전의 그러한 주장은 억설(臆說)에 다름 아니라는것이 본고의 립장이다.   생명일체화는 독일철학가 카시르가 제7장 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카시르에 따르면 생명일체화란 인간의 생명은 공간과 시간가운데서 확정적인 계선이 없는 무한대한것으로서 자연의 전부의 령역과 인간의 전부의 력사에 신장(伸張)되여 있는것으로 간주하는 원시인들의 정감인것이다. 동방의 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수 있다. 다만 과 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를뿐이다. 생명일체화는 원시인들의 개인정감과 사회정감에 충만되여 있는것이였다. 카시르는 그것을 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동시에 카시르는 생명일체화의 구체적표현형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주로 륜리의식)의 생성과 함께 그것이 소실(消失)된 력사적과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바로 카시르의 생명일체화론을 차용한것이다. 그런데 남영전은 카시르의 체계적인 론술에서 생명일체화라는 개념만을 잘라내여 카시르의 본의와는 전혀 달리 자기의 구미에 맞게 람용하고있다. 때문에 18개 단락으로 이루어진 남영전의 는 거의 모든 단락들마다에서 자체모순 내지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를 자초하고있다.   이에 본고는 우선 카시르의 제7장 3)를 텍스트로 삼고 생명일체화 및 토템숭배에 관한 카시르의 론술을 고찰하고자 한다. 동시에 남영전이 카시르의 그러한 론술을 어떻게 왜곡하고있는지를 살펴볼것이다. 그밖에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이 현실적으로 제기되고있는 민족문화다원화의 구호와 어떻게 배치되고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견을 피력할것이다.   본고는 카시르의 론술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의 부당성을 밝히려고 한다. 때문에 독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겠지만 카시르의 말을 길게 인용하지 않을수 없다. 이 점을 미리 사과한다. 2. 생명일체화에 관한 카시르의 론술 론의의 편리를 위해 먼저 서방철학사의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이란 세계관 즉 세계에 대한 관점 혹은 태도문제인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전까지의 서방철학은 조기의 자연철학으로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은 주로 교감(交感)에 의한 합일식(合一式)이였다. 플라톤의 은 객관리념을 인식의 목표로 삼고 주체(인간)와 객체(세계)를 량분(兩分)하는 주객관계의 철학 즉 서구의 근대철학의 시작인것이다. 그러한 주체성 철학은 헤겔에 의해 고봉을 이루었다. 헤겔 이후 서방의 대다수의 현당대철학가들은 주객관계의 철학을 폄하하거나 반대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합일을 주장하고있다. 물론 그러한 합일은 교감에 의한 합일 즉 남영전이 주장하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嬰兒)상태의 토템숭배식의 합일인것이 아니라 주객관계를 망라하면서도 그것을 릉가하는 초월상태에서의 합일인것이다.   철학사흐름의 이같은 세개 단계를 중국의 일부 철학가들은 , , 으로 비유하기도 한다.4) 여기에서의 이란 인간의 자아의식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한다. 생명일체화 및 그것에 바탕한 토탬숭배관념은 원시인들의 의 생성물인것이다. 은 자아의식이 각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아의식에 의해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게 된다. 일신론 종교 혹은 륜리적종교의 출현이 자아의식의 각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카시르의 제7장 는 카시르가 의 상태에서 원시인들의 으로부터 에의 일탈과정을 부감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아래에서 의 생성물인 생명일체화에 대한 카시르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혹은 으로서의 생명일체화 카시르는 5)라고 지적했다. 원시인들은 사물을 분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감에 의한 만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 점은 원시사유와 과학적사유가 구별되는 시발점이라고 할수 있다.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6) 원시인들은 식물, 동물, 인간을 구별할줄 모르며 생명을 류와 아류로 획분할줄 모른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을 인간생명의 연장된것으로 간주할뿐이다. 카시르의 이와같은 분석은 기실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인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카시르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7)    카시르는 생명일체화는 론리가 아니라 정감의 생성물로서 생명체 모두가 일률로 평등하다고 생각했다고한다. 분석능력이 결여된 원시인들은 들에 인간의 생명이 소통되여 있는것으로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래서 세상만물 이를테면 개나 뚜꺼비, 까마귀 모두가 인간과 친족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원시인들의 그러한 관념은 무지와 몽매에서 비롯된것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영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시인들은 자연계중의 모든 생명형식은 모두 친척관계라는 의 관념을 믿음으로써 인류의 기     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했으며 이로써 자연계와 화해에 이르렀고 사람지간의 형제관계를 도모하였고 진정한 의     미에서의 세계융합을 실현하였다. 혹여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의 이러한 토템관념을 무지와 몽매의 사물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사실 현대인들의 현대병은 원시인들의 진실하고 착한 본성을 오진한데서 비롯된다.8)   이것이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인용문에서 볼수 있듯이 남영전은 원시인들의 무지와 몽매에서 비롯된 생명일체화를 현대인들의 현대병을 치료할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한다. 카시르에 따르면 남영전의 이러한 주장은 억측에 불과한 인것이다. 왜 이러한 결론부터 내리는지를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카시르가 지적했듯이 생명일체화 및 그것의 표현형태인 토템숭배관념은 원시인들의 정감에서 비롯된 신화와 종교적감정인것이다. 론리적사유가 배제된 원시인들의 그러한 감정은 식물, 동물,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 식물과 동물에도 유일한 인간의 생명이 소통되여 있기 때문에 모두가 친족관계에 있다고 인정할뿐이다. 이러한 경향을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있다.   9)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합리한것이라면 생명일체화 및 모든 생명형식이 친족관계라는 원시인들의 사유에 경도된 남영전의 주장은 일수밖에 없게 된다.   그밖에 남영전은 원시인들은 고 하면서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를 도덕적진리 내지 영원한 진리로 간주하고있다. 카시르는 그러한 경향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10)   카시르의 론술에 따르면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이다. 원시적정감을 일종 진리로 착각했기때문이다. 물론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과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고급적인 천일합일사상(망아지경) 사이에 상통성(相通性)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통성일뿐 결코 동일성인것은 아니다. 생명일체화를 현대병치료의 특효약으로 간주하는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철학상에서 이미 배격당한 오늘의 비행기는 원시시대에도 있었다는것과 같은 인것이다.11) 남영전은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2) 생명일체화에 대한 카시르의 구체적인 론술    남영전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는 , 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주장 역시 카시르의 관점에 대한 왜곡인것이다. 카시르는 생명일체화의 구체적현상을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있다.   12)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진실한것이라면 원시사회는 결코 남영전이 생각하고있는것처럼 가 도모되였고 그러한 사회, 그러한 이 아니였을것이다. 경제와 의료보건수준이 원시사회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오늘의 사회에서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죽어가고있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자연현상이기때문이다. 원시사회의 렬악한 환경에서 기아와 질병 그리고 야수들의 습격으로 인해 죽어간 원시인들의 수자는 엄청난 정도였을것이다. 또한 죽어간 인원수에 상당한 무고한 원시인들이 살인자로 인정받고 보응받는 참극이 벌어졌을것이다. 이런 사실은 생명일체화에 의한 원시인들의 이 는 남영전의 주장을 반증(反證)하고있을뿐이다. 원시인들은 말 그대로 야만인들인것이다. 원시인들의 그러한 야만성은 생명일체화에서 유발된것이다. 카시르의 론술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13)   카시르가 말하고있는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 바로 남영전이 주장하고있는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인것이다. 남영전은 그것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이른바 토템시라는것까지 쓰면서 표방하고있지만 카시르는 고 주장하고있다. 남영전은 카시르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3) 생명일체화의 소실(消失)에 대한 카시르의 론술    남영전은 원시인들의 토템문화가 고 선포한다. 어떤 을 어떻게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자기의 토템문화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으로 한 선포이지만 역시 카시르의 론술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있다.   카시르는 륜리의식의 각성과 함께 생명일체화의 소실의 필연성을 거론하고있다. 카시르는 력사적관점으로 볼 때 종교와 도덕이 확보하고있는 뚜렷하고도 분명한 계선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인류학자들도 원시사회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은 담론할 여지가 없는것이라고 인정했다. 카시르는 그러한 현상을 원시사회의 생활에 대한 순수한 기계론이며 자발론적인 교조라고 지적했다. 물론 야만인들은 본부락의 습관과 전통을 매우 존중했을것이다. 하지만 습관과 전통의 힘이 원시생활가운데의 유일한 력량인것은 아니였다. 카시르는 매우 낮은 인류의 문화수준이였을지라도 여타의 력량이 존재했던 분명한 흔적들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어 카시르는 개별적인간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종교리상에 따라 종교사상이 진전되였음을 말하면서 1930년에 출간된 길버트. 뮤레이의 저작 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14)   서방인으로서의 카시르는 서방문화의 중심인 종교적차원에서 륜리적종교의 생성과 함께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의 소실과정을 론의하고있다. 카시르의 이같은 론의가 현세주의가 주축을 이루고있는 우리의 동방문화의 실정에 완전히 부합되는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시인들의 무아지경으로부터 유아지경에로의 일탈과정에서 생명일체화의 소실은 일종 필연성을 띤 현상이라는 점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것이다. 카시르의 론술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15)   카시르는 원시종교의 생명일체화가 일신론 종교의 륜리적의지에 의해 정복되였음을 말하고있다. 인간들은 륜리적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하게 되였고 리성적으로 자연을 탐구하게 되였다. 이상과 같은 론의에 근거하여 카시르는 16)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남영전은 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을 오늘도 주장하고있다. 남영전의 이러한 주장을 생태환경이라는 단순한 생물학적차원으로만 리해할수 없다. 카시르의 론술에서 보았듯이 생명일체화는 이미 력사발전과정에서 부당한 것으로 소실된 원시인들 감정이다. 또한 생태환경보호에서 성과를 보이고있는 일부 발전된 나라들의 경험은 자연법칙에 대한 심각한 파악이 선행되여야 함을 사실적으로 립증해주고있다. 때문에 원시적감정에 대한 남영전의 지나친 집착은 생명일체화 및 그것에 바탕한 토템숭배관념에 대한 몰리해에서 유발된것이라고 인정할수밖에 없다. 남영전의 가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서 작성된것이라고 하는 주요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토템숭배관념에 대한 카시르의 론술       원시인들의 토템숭배관념에 대해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있다.   1)   인용문에서 볼수 있듯이 카시르는 토템숭배관념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자신을 그 어떤 동식물의 후대로 간주하는 점을 들고있다.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카시르는 인종학자, 인류학자들의 조사사실을 사례로 들기까지 했다. 또한 그 점이 바로 일반적인 자연물숭배와 토템숭배간의 구별점이기때문이다.   18년간 토템문화를 연구했다는 남영전은 의 곰이 자기의 토템조상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영전은 고 한다. 왜 남영전이 당혹감만 느꼈는가? 네 발 가진 암컷 곰이 자기의 시조 할머니이며 자기가 검은 곰과 임을 알았을 때 남영전은 그야말로 경악했을것이다. 하지만 조선민족가운데 남영전처럼 네 발 가진 암컷 곰이 자기의 시조 할머니이며 곰과 자기가 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남영전외에 또 몇이나 있는가?(물론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혹은 토템시의 몇몇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남영전은 42수의 토템시2)라는것을 읊었다고 한다. 42종에 달하는 우리 민족의 토템을 시화했다는것이다. 우리민족이 42종의 동식물을 자기의 조상으로 간주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서울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옆에 외가닥으로 높이 솟은  바위산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 산을 라고 부른다. 불임증에 걸렸거나 결혼후 오래도록 후대를 보지 못한 많은 부부들이 음식을 차려가지고 그 바위산 밑에 가서 아들딸을 점지해 달라고 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풍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바위산을 토템조상으로 간주하고 찾아가는것이 아니라 자연물숭배관념에서 찾아가는것이다. 남영전은 자연물숭배와 토템숭배를 구별할줄 알아야 할것이다.   미개족속들의 토템숭배사례까지 렬거한 다음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론평하고 있다.   3)   카시르는 원시인들은 생명일체화에 의해 인간과 동물간의 구별점을 덮어감추고있지만 그것은 경험적의미에서 부정된것이 아니라 신화와 종교적의미에서 부정된것임을 말하고있다.토템관념 자체가 바로 신화와 종교의 파생물이기때문이다. 신화와 종교적시각으로 볼 때 인간, 동물, 식물 모두가 같은 차원에 놓이게 된다. 그것들 모두가 생명의 종교적존엄성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카시르는 그러한 생명일체화의 소실의 필연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남영전은 오늘도 토템은 임을 부르짖고있다. 남영전은 인간과 동물간의 들을 말아야 할 것이다. 카시르의 론술에서 알수 있듯이 남영전의 이같은 엉뚱한 주장은 그의 사유가 아직도 원시인들의 신화와 종교의 사유 즉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언하고있다.     4. 남영전의 《토템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계시》를 분석함        아래에서 18개 단락으로 이루어진 남영전의 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앞에서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보충하려고 한다.   첫 단락에서 남영전은 18년간에 걸친 토템문화연구에서 자기의 두가지 을 선포하고있다. 토템문화가 민족문화심리의 임을 했고 현대인들은 를 조성했음을 했다고 한다. 이 두가지 모두가 남영전의 이라고 할수 없다.   토템숭배관념이 일부 민족들의 원형심리임은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미 천명한바이다. 새로운것이라면 원시인들의 토템관념이 는 주장인데 어떻게 침투되여 있고 또 어떤 영향과 작용을 어떻게 일으키는지에 대해 남영전은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니 그 내막은 알길이 없다. 다음 엥겔스는 남영전보다 백20여년 앞서 4)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그러한 보복에 대처할수 있는 방법으로 5)을 주장했다. 토템관념으로 을 치료하자는 남영전의 주장과는 판판 다르다. 또한 남영전은 그러한 이 자기의 성과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것이다. 학문연구자세에서 남영전은 내것도 내것이요 네것도 내것이라는식으로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두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원시인들도 인류의 기원에 대해 하고 했다고 하는데 원시인의 정신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전개한 이러한 론의는 적어도 무리한것이다. 카시르의 말대로 만을 지니고있었던 원시인들에게는 무엇을 하고 할 사유능력이 없었다.   생명일체화를 집중적으로 론의한 세 번째 단락의 관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네 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인간과 자연계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연계를 이라고 한다. 남영전도 자연계의 공기나 물을 마시고 자연계의 고기나 쌀, 남새를 먹으면서 살아갈것이다. 그러한 자연계를 으로 간주한다면 남영전은 의 몸체를 뜯어먹으면서 살아가는 불효자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카시르는 원시종교와 륜리종교에서의 서로 다른 자연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6)   남영전은 또 원시인들의 을 말하고있다. 남영전은 의 내포를 파악하지 못한채 을 거론하고있다. 인성이란 인간의 속성 혹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성인것이다. 인성은 두개 부분 즉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나뉘여진다. 보편성이 바로 생물체로서의 인간과 여타의 동물들간의 공통성이다. 이를테면 자유로운 활동, 식욕, 성욕 등등이다. 다른 한 부분은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특수성 즉 공구제조능력, 언어, 리성, 과학수준 등등이다. 본능에 의해 활동하는 원시인들인 경우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는 특수성만을 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원시인들을 야만인이라고 지칭한다. 야만인들의 이른바 을 , 이라는 남영전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는것이다. 하지만 남영전에 대해 말할 때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일종 필연성을 띤것이다. 그의 모든 사유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바탕으로 하고있는것이기때문이다.   여섯번째 단락은 과도단락이다. 남영전은 이 단락에서도 토템씨족들의 형제적관계를 고양하고있다.   일곱번째, 여덟 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인류의 조상의 발원지가 아프리카뿐이라고 하면서 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제기하고있다. 그런데 지난해 년말에 북경에서 아프리카 여러 나라 수뇌들의 모임이 있었다. 호금도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여 그 모임에서 한 연설에서는 7)라고 말했다. 남영전의 황당한 주장은 토론할 여지조차 없는것이다.   아홉번째 단락에서는 단군신화를 말하면서 곰토템을 말하고있다. 남영전은 단군신화의 환인을 라고 한다. 남영전이 과연 단군신화를 읽어보기나 하고 곰토템을 론의하는지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단군신화에 대한 남영전의 허황한 론의에 대해서는 지면제한으로 다른 글에서 분석할것이다.   열번째 단락의 성씨분석은 토템숭배관념에 별의미가 없는것이라고 생각된다.   열한번째, 열두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세계 60억 인구 모두가 아프리카조상들의 후대라는 허황한 론의를 전개하면서 새롭게 얻었다는 또 하나의 을 선포하고있다. 그것이 바로 라는것이다. 남영전의 이런 결론 역시 대단한 도 아니고 또 다 맞는것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레닌도 일찍 8)이라고 지적했다. 민족은 자산계급문화의 생성물이라는 얘기일것이다.   그런데 남영전이 말처럼 민족이란 혈통과는 전혀 무관한것인가? 물론 민족개념에는 광의적, 협의적인 방면이 있다. 중화민족이라고 하면 56개 민족이 망라된다. 그러나 한족인 경우 한족문화에 익숙한 조선족이라고 해도 한족의 구성원으로 되기는 어렵다. 반대로 조선족인 경우 한족을 망라시킬수 없다. 민족공동체뿐만아니라 그 개인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영전을 오르죤족 혹은 장족이라고 하면 대뜸 반발할것이다. 민족이란 동포의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기때문이다. 동포란 어원적으로 따지면 같은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여난 형제자매를 뜻한다. 혈통과 민족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남영전의 작법을 고명한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열세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전지구화시대에 각 민족들이 형제(토템식형제관계)와 같은 정을 가져야만 고 한다.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를 보배처럼 여기고있는 남영전의 생각은 그야말로 유치원생들처럼 천진한것이다. 다음 장절에서 남영전의 이런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열네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대담에서 토템식 가 수립되여야 한다는 싸르트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으로 자기의 토템문화론의 정당성을 립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싸르트르는 인류의 요원한 미래를 념두에 두고 말한것이지 현실을 말한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사회의 사항인것이다. 싸르트르는 그러한 희망을 현실로 전환시키자면 인류는 현단계에서 도덕적수양을 쌓아야 하며 과의 투쟁을 진행하는 등 를 병행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싸르트르의 이같은 주장은 앞에서 말한 자연에 대한 엥겔스의 사상과 상통되는것이다. 남영전은 싸르트르의 말 역시 그 본의를 무시하면서 람용하고있다.    마지막 세 단락에서 남영전은 자기의 야심찬 포부를 피로하고있다. 그는 자기의 이른바 토템시라는 것을 호르래기에 비유하고 있다. 60여억 인구가 자기가 불어대는 호르래기 소리에 한 사람같이 발맞추어 전진할것을 기대해서 한 비유일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전지구적인 일체화와 민족문화다원화의 모순이 날로 비화되고있는 오늘의 실정에서 남영전의 그러한 포부는 도연명이 구상했던 도화원보다도 더 유토피아적인 공상이 아닐수 없다. 아래에서 그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5. 민족문화다원화와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모든 민족, 모든 나라는 경제가 일체를 지배하는 경제시대에 들어섰고 세계체계가 이미 기성사실로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현상은 서구자본주의경제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세계경제는 이미 자본주의경제로 일체화된 것이다. 서구자본주의강세에 힘입어 서방중심주의 즉 서방화구호가 제기되고있다. 서방경제의 그러한 강세에 힘입어 서방중심주의 즉 서방화구호가 제기되고있다. 그러한 구호에 맞서서 제기된것이 바로 민족문화다원화구호인것이다. 민족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해야 하며 문화의 차이성과 특수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것으로 민족문화다원화의 내포를 규정할수 있다.   서방중심주의구호는 어제나 오늘에 제기된것이 아니다. 서방제국주의궐기의 총적인 도덕적구실이 바로 사회다윈주의의 의 리론인것이다. 그것의 기본적리념이 바로 서방은 세계문명의 중심이며 서방인은 비서방인보다 더욱 리성적이고 더욱 높은 창조성을 지니고있다는것이다. 서방의 생존방식은 인류의 생존에 더욱 리로운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생존과 경제실체를 필연적으로 전승할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리념에 호응하는 서방문화패권의 핵심적내용이 바로 구호인것이다.   현대화구호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충격속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외교정책의 주요한 근거였다. 그래서 중국의 경제인류학 학자들은 으로 될수 있음을 재삼 경고하고있다.1) 우리는 한국의 미술평론가 신항섭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들을 필요가 있다.      어쩌면 전통문화예술이야말로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속에서 독립적인 민족 및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런지도 모른다.     세계화가 예정대로 성공을 거둔다면 미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2)    모든 민족, 모든 나라는 자기 문화의 다양성, 차이성, 특수성으로 이미 확립된 세계체계에 참여할수밖에 없다. 일체화, 국제화, 보편성만을 강조할 경우  신항섭의 말처럼 결과만을 초래하게 되기때문이다. 물론 경제일체화에 의해 인류의 문화도 그 어느 날엔가는 융합될것이다. 싸르트르가 말한 가 확립될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융합은 반드시 여러 민족문화의 다양성, 차이성, 특수성의 충분할 발전을 전제로 하는것이여야 한다. 또한 그것만을 민족 서로의 생존과 발전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남영전은 이 점을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현단계에서 토템숭배관념으로 인류의 문화를 균질화해 보겠다는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허무맹랑한것일수밖에 없게 된다.   원시종교형태인 토템문화는 철두철미 서방문화인것이다. 토템개념은 18, 19세기 서방 인류학계에서 많이 론의되던 토템문화론이 20세기에 이르러 서방문화의 충격속에서 동방문화에 류입된것이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서방인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문화중심주의를 부르짖고있는 오늘 서방인도 아닌 남영전이 무엇때문에 토템숭배에 관한 서방학자들의 본의를 무시하면서까지 그것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남영전과는 달리 20세기 초엽부터 흥기하고있는 서방의 생태륜리학파는 동방의 천일합일사상을 수용할것을 주장하고있다.   그밖에 남영전은 는 자기의 토템문화론이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일률적인 등가물로 보고있는 서구의 극단신비주의자들의 관념과 일맥상통한것임을 알아야 한다. 극단신비주의자인 독일철학가이며 신학가인 알버트. 스웨트저르는 이라고 주장하면서 합리적인 륜리학은 을 주장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원칙에 좇아 처사하는 사람은 3)고 했다. 스웨트저르의 이같은 관점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는 모두가 신성한것으로서 가치의 높고 낮음이 있을수 없는 등가물이라는 점에서 출발한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근대철학의 인류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만일 남영전이 말하는것처럼 자연계를 으로 간주하고 모든 자연물을 혹은 으로 간주하고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인간은 우선 자신의 생존을 확보할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주장하는 고급적인 천일합일사상은 극단신비주의자들이나 남영전처럼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를 일률적인 등가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자아의식과 도덕의식을 지닌 인간은 여타의 생명체와는 비교할수 없는 고급성을 지니고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존의 확보되여야 한다. 인간이 없으면 세계의 모든 존재가 무의미한것으로 되고만다. 그래서 싸르트르는 의 구축에 앞서 이라고 했을것이다. 그러한 투쟁은 자연을 인식하고 개조하고 리용하는것일뿐 무자비한 정복이 아닌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이 여타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비도덕적인것으로 볼수가 없다. 6. 마무리      이상에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의 부당성을 론의했다.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이 부당한것이라고 하는 가장 주된 리유는 남영전이 토템숭배관념에 대한 원작자들의 본의를 무시하면서 자기의 구미에 맞게 그것을 람용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다음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로 간주하고있는 남영전의 그릇된 사유방식이다. 그러한 사유방식이야말로 비행기는 원시사회에도 있었다는것과 같은 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남영전의 말처럼 생명일체화가 과연 혹은 집단무의식으로 되었다면 누가 떠들어서 고양할 하등의 필요도 없는것이다. 칼. 융의 신화 원형설에 따르면 원형 혹은 집단무의식은 선천적으로 유전되는것이기때문이다.4) 특히 세세대대로 현세주의적인 유가문화를 숭상해온 우리 민족에게 종교신앙형태인 토템숭배관념을 강요하는것은 력사실제를 무시한 일종 억설로서 무의미한것이다. 우리민족에 대해 말할 때 그 어떤 종교적형태도 원형심리로 전환될 여유가 없었다. 조선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곰을 자기의 조상으로 간주하거나 곰을 자기와 으로 간주하고있는 사람이 수량적으로도 전무한 상태이다. 또한 우리는 자연물숭배와 토템숭배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그밖에 토템문화로 인류의 문화를 균질화하겠다는 남영전의 포부는 민족문화다원화라는 현실적구호에 배치되는것이다.   남영전은 나에게 자기의 토템문화론에 대한 반론을 중문으로 작성해서 발표할것을 제안한다. 나는 호의에서 나온 제안이였을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물론 나는 남영전만큼 중문수준이 높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은 차요한 원인일뿐이다. 나는 아직 단군신화도 제대로 완전히 해독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수준에서 중국의 염황이나 황제시기의 토템숭배를 론하다가 웃음거리를 남기는것이 두렵다. 그리고 여기는 조선족토템문화를 론의하는 마당이다. 토템문화리론은 주로 인류학자들이 전야조사법으로 미개한 토착민들에 대한 현지답사에 대한 총화라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조선족은 그러한 미개족속들이 아니다. 조선족의 토템숭배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있는 타민족학자들을 우리의 토템문화론의에 반드시 모셔들여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된다.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에서 단군신화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단군신화에 대한 그의 그릇된 관점에 대한 분석은 지면제한으로 인해 후일을 기약한다.   2007년 5월 15일 연길에서    2007년 제3기    
30    [창업칼럼] "빠져빠져 나의 매력속으로" 댓글:  조회:3940  추천:84  2007-09-04
 (음악이 시끄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                    "빠져빠져 나의 매력속으로"점포를 찾으면 가끔 불쾌할 정도로 불친절한 종업원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종업원을 대할 때면 자연 다시는 그곳을 찾고싶은 마음이 없어지는게 통례이다. 왜 좋은 제 돈을 팔면서 불쾌감을 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물론 대부분 손님들은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말해봤댔자 쓸데 없겠고 정면으로 말하기도 싫고 나가면 다른 점포가 얼마든지 있으니 그곳을 훌적 떠나면 그뿐이니까. 그렇게 떠난 손님이 다시 그곳을 찾아오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데서 자초한 필연적 결과다. 대체로 창업강좌를 많이 듣고도 실패하는 사람, 심지어 전문가로 인정받는데도 실패하는 경우는 대체로 고객에게 겸손할줄 몰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지극히 간단한것처럼 보이는 이 일이 창업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고객은 언제나 대접받은 싶은 마음,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심리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상점을 찾는 고객들은 그집 주인이 어떤 동기에서 상점을 차렸고 경영상 어떤 애로점이 있으며 그의 창업에 어떤 고충이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가 자신이 비용을 지불한 대가에 대해서 얼마나 만족시켜줄 수 있는가만 따질 뿐이다.   고객들은 흔히 가장 저렴한 비용에 최상의 만족을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창업자들은 왕왕 이와 정반대이다. 가급적이면 적은 돈을 들이고 최대의 리익을 얻기를 원한다.   돈을 벌려는 창업자의 욕구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돈을 벌기 위해 아이템을 찾고 장소를 구하고 자본을 투자했으니 돈도 자연히 벌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아마 벌려는 생각이 간절할수록 더 벌어지지 않는게 돈일 것이다.   돈을 벌자면 반드시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자면 고객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며 고객이 뭘 원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상점 주인이라면 손님이 무엇을 가장 수요하는지를 알고 상품을 들여와야 하며 식당 주인이라면 고객이 어떤 메뉴를 선호하는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뇌즙을 쥐여짜며 조리법을 연구해야 한다.   점포주인이 된 창업자에게 있어서 대관절 무슨 마음으로 경영에 림하느냐가 시종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왕왕 “어떻게 하면 물건을 많이 빨리 팔수 있을가?”를 앞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만족을 줄수 있을가?”를 앞세우게 된다.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첫째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우선 팔아야 돈이 생기지”를 앞세우게 되면 결국 고객을 위한 진정한 서비스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고객이 만족할가”는 마음을 앞세우고 고객이 물건을 잘 고를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든지 고객에게 차 한잔을 대접한다든지 하는 고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신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고객이 저절로 모여 들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고객을 기분좋게, 편하게 해주는 걸 철칙으로 여기고 고객이 가장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혼신을 다한다면 어디다 무슨 일을 벌리든 고객만족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것이다. 남들은 좋은 조건에서도 잘 안되는 일을 흔한 아이템에다 자금도 많지 않은 사람이 별로 그닥잖은 장소에서 돈만 잘 버는 사례를 심심치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이 가진 비결인즉 특별한게 아니고 바로 고객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인것이다. 고객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그게 바로 매력이다.   한국의 개그우먼 박경림이 부른 노래 <착각의 늪>의 가사에 “나에게 빠져빠져 모두 빠져버려/ 피할 수 없는 나의 매력속으로”란 구절이 있다. 창업청년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만들어 보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선물하고 싶다.  //길림신문
29    비평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4511  추천:105  2007-08-11
비평에 대한 단상   이 글은 이전에 우리 문단의 비평풍토에 느끼는 바가 있어 가끔 생각이 날때마다 적어 모아둔것이다. 단상이지만 한데 묶어놓으니 너무 길어졌다. 그런대로 여기 옮겨놓으니 읽는 이들의 량지를 구하는바이다. * 누구나 장점이 있는 동시에 부족점이 있기 마련이며 아름다운 일면이 있는 반면에 추악함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누구나 찬양이나 아부의 대상이 될수 있으며 동시에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수도 있음을 의미하며 그 누구든 일정한 목표를 상대로 찬양 혹은 비판을 실시할 자유를 가질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리유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나 찬양이나 비평 앞에서 자유로울수 없는것이다.    * 나에게는 남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불쾌한 기억도 있지만 남한테 상처를 입혔던 아픈 기억도 있다. 상처받았던 일은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좋고 상처를 입혔던 일은 되도록 기억에 남겨두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수시로 자기에게 경종을 울려주는것이 좋다. 왕왕 우리는 이와 반대로 상처받은 일은 기억에 새겨두고 상처를 입힌 일은 흔적없이 지워버리기 일쑤다. 더욱 문제로 되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나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경우다. 상처받은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영원히 잊지 않는다면 그 인생이 내내 고달플수 밖에 없을 것이다.   * 고로 어떤 필요에 의해 누군가를 비평해야 할 때 자기반성을 반드시 곁들여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글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수 있다. 비평의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비평의 글을 쓸때 자기 반성이 글에 드러나지 않아도 별문제지만 쓰는 이에게 있어서 그런 속마음이 안받침돼 있어야 비평의 글에 타인에 대한 리해, 사랑과 관심 혹은 동정과 같은 따뜻한 마음, 모종의 바람직한 일을 촉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비평의 대상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 인간존중, 여기에는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 잘 사는 자가 못사는 자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잘생긴 자가 못생긴 자를, 자신감에 넘친 자가 움츠린 자를, 신체가 온전한 자가 신체장애자를, 용감한 자가 겁많은 자를, 권세 있는 자가 권세가 없는 자를, 고귀한 자가 비천한 자를,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잘 나가는 자가 일마다 막히는 자를, 총명한 자가 좀 모자라는 자를, 밝은 곳에서 활개치는 자가 어두운 곳의 매춘녀를  아무런 사려도 없이 함부로 비웃거나 비하하거나 괄시하거나 박대하거나 등쳐먹거나 타매할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제각기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평등원칙은 어느 때나 지켜져야 한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수 있겠는가.   * 비평, 비평의 비평과 비평의 비평에 대한 재비평. 무슨 비평이든 목적은 어디까지나 글의 생각이나 방법의 부족점을 극복하여 변화 발전 제고시키려는데 있다. 그런만큼 비평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예리한 비평이라고 해도 그 속에 따뜻한 감정이 내포돼 있어야 한다. 암만 말로 우리 민족을 걱정하고, 예리한 비평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의중”을 밝힌다  해도 글속에 야유와 조롱만 있고 민족의 아픔과 진로를 걱정하는 깊고 따뜻한 속마음(때론 예리한 메스에서도 가슴이 뭉클하는 따뜻함이 묻어난다)이 없다면 그 글을 민족을 걱정하는 글이라고 볼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서 그 글이 반드시 사랑의 글이 되는게  아니며 글에서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낱말에서보다는 그 글줄 사이에 슴배여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쓰지 않는 글에서 아주 깊고 큰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리치에서이다.* 비평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좋다. 고깝게 생각한 결과 복수 비슷한 감정이 글에 반영되여 대방에게는 비수가 되여 날아간다. 날아갔던 비수는 본인이 바랐던 바와는 다르게 도로 날아와 자기 가슴에 꽂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문단에 부당한 비평으로 앙숙이 져 문단의 건전한 발전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있는지 자성해 보고 만약 있다면 매듭을 푸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 흔히 글로 모종 현상에 대해 비평할 때가 있다. 그러나 비평은 타인에 대한 비평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평 혹은 반성이기도 해야 한다. 도리를 따져서 리해가 돼야 반성이 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주로 리치를 캐며 자기를 미루어 타인을 리해해주는 노력도 기울여야 할것이다. 비평에는 따뜻한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비평은 의사가 환자의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날카롭고 사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평에서는 진정 우리 사회, 우리 교육, 우리 경제, 우리 문단, 그리고 그 비평대상자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그 속에서 솔솔 풍겨나온다.    * 비평의 겉과 속. “나는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민족의 허물에 날카로운 메스를 대는데 비평이 과하더라도 리해해 달라.”고 초고층빌딩처럼 거창한 비평문의 서언에서 이렇게 “초심”을 밝히는 비평자들이 있다. 이렇게 할수 없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고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평문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 여부는 비평 자체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 비판동기에 대한 장황한 해석에서 표현되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권의 비평서에 민족사랑이란 말 한마디 없어도 민족사랑을 표현하는데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을수 있다. 사랑은 글줄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솔솔 풍겨 나오는 것이지 한편의 겉바른 성명발표에 있지 않다. 날카로운 비평에서도 사랑을 감지할수 있다. 반대로 민족사랑을 표방한 이른 바의 일부 거창한 비평서에서는 사랑보다는 민족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처처에서 로출되여 읽는 사람을 자극한다. 환자의 썩고 있는 환부에 예리한 메스를 들이 대는것과 스스로 시술에 능하다고 자처하면서 제멋대로 행하는 란도질은 성격과 개념이 하늘과 땅만큼 동이 닿지 않는다. 유효처방이 전무한 란도질은 병의 치유에 도움이 별로 안될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부정적 측면으로부터 좋은 처방을 유발해낼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 원래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칭찬도 안 하지만 욕도 안 하는 법이다. 비판을 한다는 것은 애정과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을 받게 되면 울컥할 게 아니라 감사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설혹 오해에서 비롯된 비평일지라도.   * 비평을 받고도 고맙게 생각되고, 비평자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비평에 내재한 관심이 따뜻이 안겨오는 원인 외 주로 그 비평에 감복이 되고 그 비평을 통해 자신을 제고 할 수 있는 영양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몰랐던 자기의 부족점을 깨치여 한 시기, 지어 평생 혜택을 볼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비평을 두리뭉실하게 하는 일이 현재 조금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비평에 꿀을 발라 읽는 사람은 그것이 비평인지 칭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문제가 곪아 터질 정도로 쌓이는 것은 이런 온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가? 비판의 내용과 방향은 항상 분명해야 한다. 때로는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로 매몰차게 비판해야 서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있다. 비평의 필봉은 늘 문제의 변두리에서 어물거리지 말고 문제의 요해처, 급소와 핵심을 건드려야 할것이다. * 싸움끝에 정이 든다는 말이 있다. 칼날과 칼날이 마주치면 불꽃이 튕기기 마련이다. 아주 정상적이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는데도 불꽃이 튕기지 않으면 자연 그 칼이 진짜 칼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잘 단조된 칼과 그렇지 못한 칼은 암만 마주쳐도 불꽃이 튕기지 않을수 있다. 아무튼 공방전을 펼치면서 싸우다 보면 서로 대방을 알게 되고 대방의 "공격"을 통해 자기의 허점도 알게 된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던 허점을 알도록 해준 "적수"에 고마운 마음이 생기면, "적수"가 친구로, 그것도 절친한 친구로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물론 그것이 고맙지 않으면 친구 운운은 비교적 어려울것이다. 그러니까 싸움끝에 반드시 정이 드는건 결코 아닐것이다.* 칼을 들자마자 아무곳에나 대고 마구 찌르고 쑤시고 하여 상처만 가득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건설적이지 못하다. 기실 그것은 자기에게 상처를 내는 무모한 짓이나 다름없다. 겉보기엔 남을 찌른 것 같지만 기실은 자기를 찌른 것이다. * 비평의 유머. 로신선생의 비평이 사무치게 그립다.   * 지금 문단에 주문비평(혹은 주문평론)이라는것이 있다는데, 그중의 일부 평론은 작품의 내재적 가치평가를 통한 문학창작활동의 진보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작가의 얼굴에 분칠, 혹은 먹칠을 하기 위한데 있다고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예비평이 되는지에 대해 깊이, 적어도 두번 쯤은 생각해 볼바 아닐가 생각된다.   * 비평을 정확한 동기에서 했지만 틀리는 경우도 있다. 의사가 사람을 구하려는 동기에서 시술을 했지만 실수로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쳤을 때와 비슷하다. 그 비평이 잘못임이 드러났거나 지적됐을 경우 용감히 허심히 접수하고 사과하고 시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물론 사과의 글을 장황히 늘여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분명히 보여주기만 하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만 가지면 나머지는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문단에 떳떳이 나설수 있겠다는 것이다.   * 문화혁명 전에 모택동이 팽덕회를 중대사안과 관련해서 호된 비평을 한 적이 있었다 한다(그런 비평이 실지로 있었는지는 필자로서는 고증할 바 없고, 혹은 그 비평이 옳았는지는 이 글에서 관계할 바가 아니다. 여기서는 단지 그 뜻만 취할 뿐이다). 팽덕회가 검토서를 썼는데, 32절지에 절반도 안 되는 분량으로 써 바쳤다 한다. 아마  “분명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다” 정도로 자기 검사를 했을 것이다. 모택동의 비준지시는 뭔가?  “비교호(比較好, 자기검토가 비교적 잘 됐소)” 세 글자였다고 한다. 잘못을 안 게 중요하니 그럼 다 된거 아니야? 이런 뜻이 아닌가 생각한다. 팽덕회와 같은 호걸남아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시인하면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이다. 네가 시인한다면 나한테 진거다, 모택동이 이처럼 졸장부나 소인배들처럼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우리 생각이 가까워 졌으니 앞으로 단결해서 나라 일을 잘 볼수 있겠다, 정말 잘 생각했다. 고맙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자기비평과 자기비평에 대한 평어를 오늘 다시 가설해 본다면-- --어제 밤 생각해 보니 형님의 말에 일리가 있소. --형의 말을 리해해 주니 무척 고맙네, 아우.   * 암만 비평과 반비평에서 “졌다” (기실 결과적으로 다 승자여야 마땅하다)고 해도 승복했다는 자체를 승리로 봐야 할것이다. 이것을 로신선생이 지적한 “아큐정신”, 말하자면 이른바 중국인의 “정신승리법”과 혼동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신승리법은 승산이나 대안이 없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의 자아도취법 혹은 자기위안법이지만 승복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의 부족점을 극복할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됐는데 이것이 승리가 아닌가? 내심으로는 승복하면서도 쪽바가지만한 얼굴 때문에 이러저러한 변명으로 얼렁뚱땅 굼때려든다면 량자(비평을 하는 자와 비평을 받는 자)가 다 개운치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만다. 말하자면 통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잘못할 때는 있게 마련이다. 잘못을 용감히 시인하고 고치려는 노력만 있다면 그 어느 때든 떳떳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이 가게 되고 존중스러워지는것이다.   *  동기불명의 비평, 목표(과녁)불명의 비평같은것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비평을 화풀이나 공격무기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비평이 아니라 비난이다. 비난은 미운 감정의 발산이거나 상대방을 깔아뭉개기 위해 하는 것인만큼 사실 듣는 사람의 립장에서는 얼른 감을 잡는다. 하기에 비판의 탈을 쓰고 비난을 퍼붓게 되면 설사 일리가 있는 얘기라도 서로의 사이는 더욱 벌어질 뿐이다. 설령 비평의 대상이 원쑤라 하더라도 사실을 밝히고 도리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다.   * 한 작품에 대한 비평이 공개적인 간행물에서나 회의석상에서 행해질 때는 문우에 대해 당면에서, 사석에서 하는 비평과 경우에 따라서는 구별이 돼야 한다. 사석에서, 혹은 내부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수 있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해결하려 들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이 되기는 고사하고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있다.   * 영화에서 일본 사람들이 중국의 무덕을 가진 무인에 탄복하고 승복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아 왔다. 사실 여하를 떠나 덕으로 뭔가를 해내는 이런 풍토는 이뤄져야 한다. 비평에도 덕성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뭐라 하는가? “평덕”이라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그리고 비평을 받음에도 덕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다. 비평을 받는것은 기실 따지고 보면 아주 감사한 일이다. 진심으로 하는 예리한 비평이 좋은 것은 말 말고 보복으로 오는, 혹은 무지막지한 비평도 받아들일수 있는 자세를 갖춰야 할것이다. 물론 영양가가 없는 비평은 침묵이 제일 좋은 답복일 것이고, “無中生有”로 없는 죄를 들씌우고 하는 비평(실은 비난, 혹음 무함)에 대해서는 적당히 사실을 규명하는 반비평도 필요할 것이다. 비난자를 일깨워 줄 책임도 있으니까. 어떤 무함은 극히 악렬한 영향을 일으킬수도 있으며 무함당한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필요에 따라 법정놀음도 불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끝-  
28    [칼럼] 사랑스런 “구두쇠” 댓글:  조회:3868  추천:66  2007-08-05
“깍쟁이”, “구두쇠”라 하면 린색하고 좀스럽고 째째하고 인정도 도리도 없이 자기 돈만 아까워하는 수전노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보면 이른바의  “깍쟁이”,  “구두쇠”를 꼭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일은 아닐것이다. 근검, 검소, 절약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와 련계시켜 볼수도 있다. 돈을 함부로 써서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을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절약과 근검정신 없이 성공을 기대할수 있을가?  세계적인 갑부들을 두루 봐도 “깍쟁이”로 불릴만한 사람이 적지 않다.   스웨덴 이케아매장의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가 바로 “구두쇠”로 유명하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자전거를 타고다니며 이웃집들에 성냥을 팔다가 1943년 17세 때 작은 점포를 만들고 만년필, 가죽지갑, 손목시계, 나이론양말, 크리스마스기념카드와 같은 눅거리상품을 팔았다. 그러나  60여년의 발전을 거쳐 이케아는 30여개 나라와 지구에 200여개 체인점을 둔 세계 가구 소매업의 거두로 됐다. 그는 금년도 “포브스”지에 의해 280억 딸라의 재산을 가진  “세계의 부호”  제4위에 선정됐다.   세계적 부호임에도 그의 생활은 검소하다. 15년 된 낡은 볼보를 몰고 다니는가 하면  비행기로 출장 나갈 때에도 제일 값싼 좌석에 앉는다. 슈퍼마켓에서도 주말 특별할인 행사 때 쇼핑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양복을 입지 않으며 밖에서 식사를 해도 늘 싸구려 식당을 찾는다. 좀 비싼 목도리 하나를 사거나 비싼 료리 한가지를 먹고서는 반나절 가슴이 아파하는 정도다. 집에 놓았다는 가구도 대부분 눅거리라 한다. 회사 직원들이 용지를 써도 앞뒤쪽에 다 글을 쓰도록 요구한다.   “1원 절약하면 1원 번것이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말한다. “나를 구두쇠라 하는데 그런 평판이 나는 자랑스럽다.”   그러나 그가 단지 “린색”하기만 한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스위스 로잔예술 학교에 50만 스위스프랑을 기증하는 등 사회복지에도 관심을  많이 보여주었다.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에 있는 지주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의 버핏회장도 월가에서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사람으로 “포브스”지가 지난  2월 발표한 2006년도 “세계의 부호” 순위에서 2위를 기록한 부자이다. 그 역시 오래된 중고차를 직접 몰고 다닌다. 그런 생활태도가 50년 동안 그의 다른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것이고 지금의 성공을 가능하게 해주었을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성공적인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스티브 코비박사는 큰 컨설팅 회사를 갖고있는 거부이지만 아주 작은 집에서 살고있다고 알려져 있다.      상술한 이들에 반해 우리는 빚은 가득 짊어지고 회사는 망쳐먹으면서도 고급승용차를 타고  호화주택에 살면서 온갖 사치를 다 부리고 있는 알량한 양반들을 심심찮게 접하게 되는데 표면적인 호화로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속된 내속이 환히 들여다 보여 씁쓸해질 때가 있다.   근검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사람들이 갖춰야 할 미덕일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시 사업이나 인생려로의 성패에 깊은 영향을 끼칠것이라는 점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중요한것은 검소함이 성공을 기하는 창업자에게 있어서는 불가결의 요소라는 점이다.   창업 세대에 지나치게 검소할것을 강요하는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검소함이란 청교도적인 근검, 절약을 뜻하는것이 아니고 남들의 눈에 거슬릴 정도의 화려한 생활은 삼가하는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일 뿐이다. 한편 직원을 둔 창업자들이 경계해야 할것은 자신에게는 후하면서 남에게, 특히 종업원들에게는 박한 생활태도일것이다. 설사 종업원들을 자신보다 더 후하게 대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경영자 자신과의 형평과 격에 맞게 례우하는 자세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길림신문
27    [창업칼럼] "시장쪼개기"와 "틈새시장찾기" 댓글:  조회:3884  추천:100  2007-08-02
창업자에게는 공략할 시장을 세분하고 "틈새시장"을 찾아내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이 포화상태에 처해 있어 취업, 창업이 어렵다는 여론이 팽배할때일수록 그러하다. 대학에서 기업관리를 전공한 한 젊은이는  졸업 후 한 자문회사에 들어가 몇년간 자문봉사를 하다가 "동아리"를 몇몇 묶어가지고 새로운 창업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자기의 적성에 맞는 어린이소비분야에서 창업실험을 하기로 하고 관련산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시장을 옷이나 신 같은 기본생활소비, 완구와 같은 향수형소비, 성장형소비 등 세가지로 세분, 그중 성장형소비를 "실험모델"로 정했다. 성장형소비에서 또 "어린이열독"을 최종 선택했다. 허나 그의 세분화작업은 이것으로 끝난게 아니였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소비대상을 3살부터 6살까지의 어린이로 정하고 또 그들을 12개 열독급으로 나눈 다음 매 급에 읽을 책을 12권씩 배당했다. 이 서비스의 이름은 "함께 독서 즐기기"로 달았는데 부모와 선생님이 어린이와 함께 독서를 즐기면서 종당에 어린이가 가급적 빨리 독립적으로 독서할수 있게끔 한다는 의미이다. 중요한것은 그의 회사가 "계렬도서"를 파는데 그친것이 아니고 보다 과학적인 열독방법지도와 보조적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아주 체계적인 교육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교육관련이지만 서비스를 파는 이상 상업행위이니 판로구축은 필수이다. "계렬도서"와 "열독지도방안"을 각지의 대리상을 통해 유치원, 탁아소와 관련 훈련기구에 제공하고 리윤은 합리하게 나누는 방법을 취했다.   이 서비스를 사회에 선보이자 어린이 부모들의 대환영을 받았고  아울러 "계렬도서"도 인기리에 수백만권이 팔려나갔다. 그는 한해에 투자 본전 600만원을 뽑아내고 리윤까지 올리는 기적을 창조했다. 이처럼 그는 판매상, 유치원, 탁아소와 관련 훈련소는 자기의 봉사팀으로, 어린이, 학부모와 선생님들은 대번에 저들의 소비대상으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고명하지 않은가?   기실 우리가 매일 대하고 있는 시장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욕구가 똑같은 소비자란 찾기 힘들며 따라서 모든 소비자의 세부욕구까지 철저히 만족시킬만한 상업서비스는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수 있다. 다만 욕구가 류사한 그룹에 대한 서비스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류사한 욕구를 가진 그룹 역시 무한히 다양하며 기존 소비그룹 외에  새로운 소비그룹도 부단히 산생한다는 사실에 류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장을 세분화하여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리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장을 세분화해야 하는 다른 하나의 리유는 라이벌(경쟁자)의 존재 때문이다. 주지하다싶이 라이벌이 없는 시장이란 존재할수 없다. 경영자가 일정한 자원으로 경영범위나 내역을 확장하려 하면 투입된 인원이나 자원의 밀도도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경영에 자연 허점이나 위험이 생기기 쉽다. 라이벌은 당연히 그의 허점을 노리다가 공략을 하여 그를 궁지에 몰아넣을수 있다. 이런 위험을 막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바로 시장세분화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라이벌이 전혀 상상 못했던 "곳"에다 "진"을 쳐놓고 아주 멋드러진 "전역"을 펼칠수 있는것이다.  상기 사례의 주인공이 고명하다고 말하는것도 그가 시장세분화를 통해 새로운 소비그룹을 발굴해냄으로써 사회에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했다는데 있다. //길림신문
26    [칼럼] 창업과 역발상 댓글:  조회:4009  추천:70  2007-07-30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전란으로 금값이 폭등하고 곡식 값이 폭락했을 때 금이나 패물을 사들이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곡식을 사들이는 이가 있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식량이 바닥나자 자연 량곡값이 폭등하고 금값이 떨어져 그는 손쉽게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오늘의 말로 하면 역발상방식을 구사해 성공한것이다. 자전거를 지키는 상해의 한 할머니가 주식거래에서 놀라운 수완을 보여 소문난 적이 있다. 어느 증권회사의 숱한 투자자들이 주식을 다투어 샀다가 어쩌구러 쫄딱 밑졌는데 오직 회사 문전에서 자전거를 보던 그 할머니만은 엄청 벌었다. 모두들 할머니한테 우르르 몰려가 주식거래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할머니 말씀인즉 <뭐, 별거 없어유, 내가 자전거 보지 않아요?여기 세워놓은 자전거가 바루 주가지수라요. 주식세가 불황이어서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적으면 나는 주식을 사들이고 다투어 주식을 사느라고 자전거가 마구 몰려들 때면 난 일괄 출하했지 뭡니까.> 이거였다. 남들이 열을 올릴 때 한데 따라 휩쓸리면 밑지기 십상이고 역으로 하면 목돈을 쥘수 있다는 도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의 유명한 층집 엘레베이터 문전광고업의 창시자인 강남춘에게 이런 명언이 있다. <창업의 근본은 창신이다. 창신이란 무엇인가?역발상방식으로 문제를 사고하는것이다.> 사실 그가 창의한 층집광고도 그의 역발상적 사유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람들이 TV앞에 앉으면 TV프로를 보는가 아니면 광고를 보는가? 당연히 TV프로를 보게 마련이다. 그것은 광고가 다른 프로보다 재미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고보다 더 재미없는 시간이나 공간에 처하면 부득이 광고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엘레베이터 입구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바로 아주 심심하고 재미없는 시공간이다. 이럴 때 사람들의 주의력은 자연 광고에 쏠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강남춘의 전부 리론이다. 이 역발상적 리론에 근거하여 2003년 강남춘은 층집 엘레베이터 문전광고란 참신한 매스미디어를 창설했다. 4년도 안돼 그는 이런 상업용 층집광고를 전국 100여개 도시, 나아가 싱가포르, 향항, 대만 등 나라와 지역에로 확장했고 광고현상스크린은 8만 여개로 늘였으며 따라서 2006년도 총 영업수입을 근 1억 달러에 이르게 한다. 역발상의 성공사례는 농촌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다투어 도시로 국외에로 진출할 때 그 버린 땅을 수백무 지어 수천무씩 청부맡아 다루어 성공한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농업부로부터 <전국10대량곡재배기준병>으로 표창받은 이들이 바로 그 성공자들중의 대표인물이다. 여기서 역발상 사례를 구구히 늘여놓는것은 우에 렬거한 구체 인물들의 본을 무작정 그대로 떠다 옮기자는것이 아니다. <역발상>이란 그들의 <거꾸로 사고방식>을 연구, 습득하고 자기가 처한 환경과 자기의 구체실정에 맞추어 성공의 문을 여는 키로 활용하자는 뜻에서다. <역발상>이란 개념에는 창업이나 경영에 관계되는 사물에 대해 항상 의문의 시선을 던질줄 알며 상식 혹은 고정관념을 깰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러니까 창업을 하거나 경영을 함에 있어서 늘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고 계속 변화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진대 창업자나 경영자에게는 상식을 깨고 지우는 마치나 지우개가 반드시 필요할것 같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남들도 할 만큼은 다 하는 오늘이 아닌가? 그러니 이제 똑같은 방식으로 남을 이기기가 과연 쉬울수 있겠는가? 그런 고로 승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남다른 역발상기법이 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가 생각해 본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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