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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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서예작품[1] 댓글:  조회:14581  추천:0  2018-04-22
121    “犯罪警示系列电影”之《空城记》在上饶开机 댓글:  조회:14105  추천:0  2018-04-22
  “犯罪警示系列电影”之《空城记》在上饶开机 2018-04-20 中国娱乐网   (上饶市政协副主席程观焰等领导和电影主创开机揭幕)   2018年4月19日上午九点半,由浙江魔幻公园影视娱乐有限公司出品、北京星池文化传媒有限公司摄制的院线电影《空城记》开机新闻发布会在上饶县公安局三楼多功能厅举行。上饶市政协副主席程观焰、上饶市委宣传部副部长叶红艳、上饶市委组织部副部长程德冰、上饶市政协办公厅主任熊也林、上饶市政协文史委主任艾涛、上饶饶商联合总会秘书长毛通水、以及电影《空城记》总监制时银钢、制片人程家兴、导演朴俊熙、女主角王艺颖、男主角李延桢、张嘉文、杜杜等全体摄制组人员和各大媒体的朋友出席了开机仪式。   (上饶市政协副主席程观焰等领导与主创合影)   电影《空城记》是浙江魔幻公园影视娱乐公司推出的“犯罪警示系列作品”之首部影片。电影用被金钱所诱惑而最终悲剧收场的人物故事来告诫世人不要去犯罪,是具有警示意义的商业片。简洁的故事,扣人心弦的悬念,个性化的摄影风格,演员的风格化表演等,都是本片的不同亮点,目的是吸引不同阶层的广大观众走进影院。     (电影制片人和主要演员亮相)   《空城记》一句话故事:阿南被同乡牛二所骗倾家荡产,他追寻牛二来到茂山城偶遇青梅竹马的梅青,她把他带到正在建设中的夕照街空城。是爱情,还是阴谋,阿南在迷茫中徘徊,与此同时,一桩六年前的谋杀案渐渐浮出了水面……   (上饶市委宣传部副部长叶红艳致辞)   开机仪式上,上饶市委宣传部副部长叶红艳致辞、电影总监制时银钢介绍了电影的筹备情况、导演朴俊熙先生对电影创作进行了阐述。叶红艳部长在讲话中表示,上饶不仅是经济繁荣之地和红色宣传基地,更是文化意蕴浓厚的优秀旅游城市,非常适合电影的取景拍摄,影视文化产业也是市委市政府高度重视的产业,支持和协助影视拍摄工作是应尽的责任,希望艺术家们多拍出符合时代精神的好作品。电影出品单位浙江魔幻公园影视公司董事长、电影总监制时银钢在讲话中说,经过团队的不懈努力,警示三部曲的首部影片顺利开机,第二部、第三部电影将陆续拍摄并进入全国院线公映。他同时向支持和协助电影拍摄的上饶各级领导、上饶县公安局、上饶师范学院、上饶市第三人民医院、上饶饶商联合总会、上饶市徐氏中医百灵草养生山庄、江西建亨实业公司、江西远鸿文化发展公司等单位及广大群众表示由衷的感谢。电影编剧兼导演朴俊熙表示满意目前整个创作团队的临战态势,美术、服化道等各部门满负荷工作在短时间内完成了任务,摄影、灯光部门深入研究剧本并设计出相应的方案,演员已从剧本研究进入到创作状态,他认为临阵兴奋状态是必备条件,他将带领团队进入愉快而紧张的拍摄期,希望团队始终保持活力。   (电影总监制时银钢接受媒体采访)   最后,上饶市政协副主席程观焰、上饶市委宣传部副部长叶红艳、上饶市委组织部副部长程德冰、上饶饶商联合总会秘书长毛通水等领导与电影总监制时银钢、制片人程家兴、导演朴俊熙及各位主演共同举行了电影开机揭幕仪式。简短的仪式结束后,领导和来宾在拍摄现场观看了拍摄一场戏的过程。据悉,影片总监制时银钢、制片人程家兴均是在北京工作、创业的上饶人,这也是制片人程家兴继电影《爱的钟声》在上饶玉山拍摄之后的又一部全部在上饶取景拍摄的院线电影,目的是给全国观众带来好看的电影作品的同时宣传美丽的家乡上饶,相信影片在全国上映后,定会成为大美上饶的又一张靓丽的文化名片。    
120    [장시] 강천 여행 떠난 바람 이야기 댓글:  조회:1858  추천:0  2018-03-17
[장시]         강천 여행 떠난 바람 이야기         초장 무지개 우거진 이 땅 위에   억겁 묵은 바람 등에 우주가 실려 간다. 해토머리 채운 편대 넘고 있는 수림 건너 설산이 막아도 날아 넘었던 곳 양떼가 흘러가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노루, 사슴 뛰놀던 곳 멸종된 지도 까마득한 태곳적 공룡, 공룡 꿈속 후예가 갑자기 들이닥쳤나? 이 땅 산허리에 감도는 구름 가지 잡아타고 강천 여행 떠난 바람 이야기……       제1장 아리랑의 향연           가슴 뛰는 고향 빨간 상처 아릿한 꽃으로 피어오를 때 강바닥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 쓰린 발자국 지우면서 머나먼 길 굽이돌아 이곳까지 애련한 슬픔으로 파랗게 돋아났다네. 나뭇잎 자는 뿌리마다에 태를 묻은 언덕 꼬리표 달려 있었고 모래알 하나하나에는 꽃들이며 곤충이며 그 이름들 또렷이 새겨져 있었네.   마가을 날 풀메뚜기 이른 봄날 개불알꽃 앞산 동대 개살구 뒷산 마루 멧돼지 흰 자갈밭 꽃배암 노들강수 버들치   ……   열린 거미발에 스며든 가냘픈 명주실 바람 타고 구름 타고 수륙만리 배부른 아지랑이 만나면 노래 한 곡에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고 굶은 벼락 만나면 꼬리 베어 주고 젖가슴 건졌네. 이 세상 개미와 꿀벌들 머리와 손과 발과 꼬리와 볏과 부리와 날개로 꿀물 흐르는 큰 나무 보듬어 키우고 있었네.    ——용이 날아올랐다는 우물에선 다발 꿈 보여주더군요. 열두 색 꿈 사 가지고 실컷 놀다 왔지요.    ——정수리 빠개고 보세요. 할아버지 발자취와 숨결 두개골 안쪽에 넓적 글로 새겨져 있죠? 보이죠? 정수리 위로 항상 기회의 태양 빛나고 있잖아요?   ——방금 전 바람이 풍향기에 전하더군요. 시간, 공간 고루 쪼개서 한 잎은 산과 물 등에 얹어 주고 한 잎은 제비 부리에 물려 주고 한 잎은 개미 허리에 동여매 주고 한 잎은 붕어 꼬리에 달아 주고 한 잎은 나리꽃 머리에 꽂아 주라고요.    머릿속에 잠자던 해맑은 사색 잣송이 색동별로 빛나는 아침 강변 자갈밭에는 마흔 가지 색 쓴 기역, 니은, 디귿 옥돌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네. 모래 속으로부터 삐어진 돌 하나 홀연 날개 돋치더니 하늘로 솟구치며 날아올랐네. 궁전 기둥 석순으로 솟고 아치는 사슴뿔로 퍼져 올랐네. 아리랑 명창으로 아롱진 두루미 상모 돌리는 해와 달 사랑에 취했는데 눈부신 진달래 요정 조각달에 걸터앉아 유유히 거문고를 타고 있었네.   잔디밭 상공에 걸린 야명주 노려 호랑이와 독수리 벌인 피비린 전쟁. 휘몰아치는 발톱과 깃털 즐거운 비명 속에 교향악 연주할 때 백산 호랑이 청산 독수리 한쪽 날개 꺾어 활활 저으며 가파른 태산 위로 뗏목 저어 가고 있었네.    누에는 거룩한 입으로 시상 깃든 색실 뽑아 내며 햇빛 밝은 마을 짜기 시작했다네. 아침노을에 밤하늘 달빛 띄우고 바다의 하얀 파도 소리 북방의 눈꽃 진달래 내음도 두툼하게 따다 넣고 여름밤 반딧불 가을 새벽 찬이슬 노고지리 지저귀는 노들강변 봄노래 범바위 쿵쿵 찧는 폭포수꺼정 집어 넣고 왁자지껄 온 동네 웃음꽃 짜 넣었네.    하이퍼시 뒤질세라 목청을 세웠네. 엉덩이에 솟은 꼬랑이 ‘모험 여행’ 깃발 나부끼며 싱싱한 아치 쳐 가는 목청 맑은 우물에서 이파리 피우고 시어 길어 올렸네.   자 이제 타임머신 잡아타고 청룡이 쩌―억 입 벌린 까마아득한 옛 우주에로 불굴의 탐험 떠난다네. 블랙홀 할아버지 암흑 에너지 움켜쥐고 신비한 우주 서사시 캐러 가네.      제2장 물레방아와 부엉이의 대화   구름 꽃바람 타고 흐르던 날 기린 앞에서 얼굴이 가마우리해지면서 고래 보이지 않는 자기 목 자랑 늘어놨다네. ——당신과 꼭 같이 내 목뼈도 일곱 개라오.    왜가리 흐르는 내 밟고 서서 다리 없는 물고기 한 마리 잡아먹고 흰자위로 개구리 째려봤다네. 개구리 혀초리 기다랗게 쏘아 왜가리 콧등에 앉은 파리 귀뺨 후려쳤네. 머리 받쳐 주는 개구리 목 안에서 제1목뼈 뒷다리 도와 쉼 없이 도약 준비하고 있었네.    보이지 않는 목 안 웅숭깊은 터널 하늘땅 돌아가는 웅글진 소리들. 저 하늘에 떠도는 뿌리 없는 섬 바다에 뜬 별들 그림자 주무르며 눈에다 세계를 새겨 넣는 위대한 방랑. 이제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은 먹장구름에서 뛰어내린 우박과 쑥대밭 대결이요 하늘가에 펼치는 오색구름 대안 두드리려는 질주라네. 미지의 선지자들 뇌까리는 대재앙 예언에 배에 오른 신자들 흰 토끼 따라 청림 도사 찾아가더라.    뿌리와 잎 달걀과 암탉 중심은 노상 주변 돌아치며 위와 아래 물과 불에 구멍을 빼고 쐐기 박는 일에 땀 동이 쏟았네.    ——뿌리는 이 세상 초석이요 뿌리가 없으면 하늘도 땅도 없노라.    빨간 벌레 선생 토하는 열변에 까만 벌레 선생 머리를 절레절레.    ——하늘 날면서 바다 안으면 우주 자궁 보이니라! 잎 한 방울로 녹음방초 깨워 하늘도 땅도 물들일 수 있거늘  임자는 어이하여 뿌리만 뿌리라 고집하는고? 바람 불어 바다 낳고 시간, 공간 부챗살로 휘저으면 손톱눈만한 씨 갈아 줄기세포에……    저 수평선과 지평선 경계에서 별안간 기린과 고래 길길이 날치며 서로 면상 치고 박고 야단법석. 기우뚱한 학술 논쟁 서까래 꽈배기로 비틀리며 증발하고 가람과 불 난투극에 하얀 피 꽃불처럼 터지며  바람벽은 한 폭의 수채화 되었네. 물과 불의 불행한 혼인 영원한 동거로 막을 열고 닫기를 거듭했다네.    숲의 깡마른 볼에 키스하며 블랙홀에 함몰하는 성좌의 손사래는 난바다에 뛰어드는 별찌의 유언! 출렁이는 젊음이 잔솔밭 샘물로 갈한 목 축일 때 그 위를 스치는 거친 바람에도 가지와 이파리는 피어올랐네.      제3장 추락하는 복숭아   불타는 집안에서 즐거운 공간 찾는 행복한 미소 윤회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짓궂은 퐁퐁 뜀으로 건너온 유년 그림자 긁어모아 저울판에 뭉뚱그려 올려 놓고 바람의 무게 떠 본다.    하늘 감싸고 돌아가는 바람 시대, 할아버지 손자 되고 손자가 할아버지 되다. 말쑥한 벽에 내쏜 침방울 막말덩이 돌아온 부메랑에 낯가죽이 벗겨져 엉덩이 오려다 기워 매는.    아 거미, 알 주머니에서 깨어난 아기 거미들에게 제 몸 찢어 먹이며 숨 꼴깍 넘기는 엄마 거미. 등때기에 암컷이 낳아 준 알집 멍에처럼 짊어지고 끝까지 가는 아빠 물자라!    천사 날갯짓에 악마의 심성 캡슐 먹인 메리야스 죽간과 붓 자루로 살가죽 찢고 기우며 혈관 속에 흐르는 금맥 찾아 오불꼬불 밤길 헤쳐 온 하얀 사포 천사.   아스라하니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는 세기 양심!   바다 위 빙산 뿌리 면사포 쪼르륵 찢어발기고 밑굽 나간 욕망 항아리에 꽃불 지펴 눈부시게 터뜨린다. 밤 언덕에서 굴러내린 저울추 종추(鐘錘) 되어 이 넓고 환한 개활지 천년 거목의 팔 받쳐든 눈 뜬 대문 탕탕 두드린다.       제4장 물욕의 계절   아직 개구리, 배암 통잠에 빠져 있을 무렵 파랗게 물 오른 물욕이 먼저 깨어나 꿈틀거리며 활화산으로 타오른다.   천도(天道)의 도마 위에 물고기와 지갑 몇 마리 비장하게 누워 있다. 잉어 배 짜개니 삭은 금덩이 쉰 소금 쏟아져 나오고 붕어 배 짜개니 남산더기 세기 낙원 굴러 나온다. 초어는 칼 대기도 전에 노을 동산 한 채 왈칵 게운다.   지하 세계 비쳐 주는 까만 신호등 메뚜기 대군 틈새로 쏟아지는 낯선 바람 쑥대밭으로 향한 표식 없는 길 어귀에서 갈팡질팡하는 송충이 무리 흐름 시간 비에 씻겨 색 바래진 입김 아픈 발자국에 주사바늘 꽂고 꿈 시궁창 빠져나온 겨울밤 날카로운 절벽 아래 혼불 빨간 혀 휘두른다.    감자 싹눈 거슴츠레 열고 혼돈의 지하 세계 내다보고 있다. 깊은 잠에서 깬 배암 두 가닥 혀로 이빨 감빨며 미소 짓는데 ‘첩자방범(諜者防犯)’ 네 글자 새겨진 시퍼런 두 발톱눈으로 두더지, 지렁이 꼬리마디 짚어 본다. 나무뿌리 건너 너럭바위 건너 진흙탕 건너 호수 밑에서 야명주 반짝인다. 호수와 핏줄 통하는 지하수 그 새까만 빛깔 읽어 낸다.    쿵―!     지상의 햇빛 밝은 도시 미래 그룹에 일대 소동 벌어졌다.    뻥―!     지도에 구멍 뚫리고 도시 하나 구멍 아가리로 사라졌다. 뼉다구도 지푸라기도 남기지 않고!    도시 실종에 대하여 착한 단풍은 계절이 흘린 바람쯤으로 착각하는가?       제5장 침묵하는 나팔꽃   나팔꽃 나팔소리 저당 잡히고 파리 씨 홍보에 나섰다. 황제 옷 걸친 알몸 마네킹들 몽환의 기억 풀어 개울물에 띄운다. 매미 그룹 구름 꽁무니에 밧줄 드리우고 뫼 허리 억겁 동굴에 새어들어 파르르 떨고 인공 지능 장착한 달변 두뇌는 겨울 서정 쪼아 먹기에 뇌즙 짜 붓더라.    완강한 침묵이 하품하는 틈에 집채 바위 여러 덩이 던졌건만 작은 물방울 하나 튕기지 아니하고 얄팍한 입술 통째로 뜯어다 생돌솥에 구겨 넣고 석 달 열흘 삶았어도 뜬김 한 오리 서리지 않더라. 그렇거나 말거나   침묵 속에 얼어붙은 둥지에서도 복숭아는 복숭아대로 만발하더라.     뿌―웅―     자기 부리 깔고 앉아 고약한 냄새 먹이는 엉덩이 횡포에도 옴폭한 보조개 가여운 홍조 띠우며 ‘무향은 호소식’이라 읊조리더라. 신종 곤충 챠챠족은 때묻은 ‘오늘 날씨 하하하’를 몽둥이 한매로 뒷간에 처넣고 ‘물불 결혼 챠챠챠’란 눈부신 신조어를 깃발에 새겨 높이높이 추켜들더라.   개척의 용사 스포트라이트(聚光灯) 아래 내세우고 꽃 달아 주며 짓패 준 논자들 새 이야기도 한창 구수하게 구워지고 있었더니라. 산불 무리 향해 오연히 나래치는 오동나무 잎사귀 발언에 솔개천 은하수 값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더라. 맑은 소리 달여서 약에 쓰고자 온 세상 휘저으며 소리 동냥 다녔거늘 얻은 것이란 고양이 짝짓기 울음소리뿐……    자 이제 꿈결의 지층에서 푸른 횃불 추켜들고 먼 하늘 깊은 지심 울리는 신비한 소리에 귀 기울이라. 그림 속에 갇혀 있는 토끼나무 가지에 조약돌도 깨물어 먹는 꿈을 피우라. 사품치며 불타는 장마철 강물에 저 썩은 언어를 가차 없이 띄워 보내라.      종장 봄은 가을 꼬리 물고 찾아온다   이른 아침 구름 넘어온 설산기슭에 하얀 양떼 흐른다. 동충하초 숨 쉬는 언덕 납작 엎드린 물안개 속을 뚫고 작은 산새들 이름 모를 풀잎 위로 찬이슬 맺힌 하루 시작을 지저귀누나.  구겨진 햇살 살며시 들고 종알대는 개울물 들여다보는데 사시 윤회의 동음이 치마폭 날리며 달려오누나.  
119    [시평]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 댓글:  조회:1602  추천:0  2018-03-16
[시평]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 ☐ 최 흔   필자는 박문희 시인과 일 년 동안 시를 함께 학습하였다. 그는 근 100수의 시를 썼는데 오늘 82수의 시로 시집 ≪강천 여행 떠난 바람 이야기≫(아래는 ≪강천≫으로 약칭)를 내놓는다. 이 시집은 우리 문단에서 나온 다섯 번째 하이퍼 시집이다. 한마디로 귀결해서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로 독자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시적 작업을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방법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탑식 구성을 허물고 평행 나열식 횡적 구성을 우린 수백 년 동안 탑식 구성의 시를 써 왔다. 인젠 탑식 구성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다. 그런 뾰족한 탑을 쌓는 종적 구성을 뿌리치고 평행 나열식 횡적 구성을 창도하고 있는 시집이 박문희 시인의 시집 ≪강천≫이다. 허공을 정처 없이 맴도는 왕잠자리 까맣게 탄 기다림에 날갯짓 짙붉다.   팔매질에 수면을 뛰어가는 조약돌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간다.   이제 바람의 등에 실려 온 낙엽 창턱에 살포시 쪽잠이 든다.   발밑으로 맨발 밑으로 보랏빛 그리움이 한길 반 높이로 쌓였는데 왜가리 유리병 깡마른 꽃가지 초리 끝에 가녀린 상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다.   —— 전문 는 시집의 첫 수이다. 네 개 연으로 되었는데 앞의 세 개 연이 각각 한 가지 내용이고 마지막 연은 두 가지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란 이미지 단위이다. 이 다섯 개의 이미지들은 각자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것들은 어느 것도 어느 것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다. 다시 말해 연관성이 없다. 이러한 이미지 나열은 ‘그러므로’나 ‘그래서’의 대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나 ‘또 또’의 대답으로 되는 이미지들이다. 모두가 어떤 사물의 중간을 뽑아내어 쓴 것으로서 연과 연을 바꾸어 놓아도 무리가 없다. 이것이 하이퍼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시인은 이 특점을 잘 살리고 있다 하겠다. 박문희 시인은 에서는 연과 연을 가지고 평행적 나열을 하였지만 에서는 줄과 줄을 가지고도 평행적 나열을 하고 있다. 빗소리 나팔소리 휘파람 소리 횃소리 영각 소리 돼지 웃는 소리 벼랑 가에 쥐 탄 놈 노 젓는 소리 얼음에 튀긴 잡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기름진 엉덩이 두드려 주는 소리 가렵지 않은 넓적 배 긁어 주는 소리 찢어진 상처에 소금 치는 소리 소금 친 상처를 기워 매는 소리 고속철 맨드라미 기어가는 소리 인공위성 꽁지에 별빛 스치는 소리 고무줄 탄 소똥이 하품하는 소리 종이배 위 말똥(馬糞)이 잠꼬대하는 소리   —— 전문 보는 바와 같이 시가 모두 열두 줄이다. 기본적으로 줄을 단위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쌓아 가고 있는 셈이다. 왜 ‘셈’인가? 첫 두 줄은 명사들로 된 이미지 나열이고, 7, 8행은 중뿔나게 하나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성질이 다른 사물을 한 시에다 나열하고 있으면서 ‘소리’라는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 이 ‘소리’가 바로 링크(연결) 작용을 한다. 에는 이런 연결 작용을 하는 언어가 없다. 그런 시는 초(超)링크라고 하겠다. 행마다 다른 이미지를 쓰는 것은 연마다 다른 이미지를 쓰는 것보다 더 강렬하다고 하겠다. 박 시인은 때론 한 개 연 속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의 나열을 하기도 한다. 산문적으로 쓴 시에서도, 운을 밟은 시에서도 그런 경향들이 보인다. 하이퍼시는 어떤 방법으로 이미지를 나열하든 관계가 없다. 그 방법이 여러 가지일수록 좋다 하겠다. 하이퍼시란 한 수의 시에 이질적인 이미지가 여러 개 모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질적인 이미지란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운동이란 말이겠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어느 것이라도 똑같은 성분으로 구성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무 하면 뿌리, 줄기, 가지, 잎, 꽃으로 구성되었고, 돌 하면 철, 불소, 불…… 등등에 의하여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고, 사람 하면 뼈, 피, 살, 똥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사물들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풀은 흙과 개미와 뱀과 햇빛과 달빛과 짐승……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물들도 다 마찬가지다. 사물들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의 구성이 횡적으로 되는 것은 사물들의 구성에 순응하는 일이며, 자연계의 사물들 관계에 순응하는 일이라 하겠다. 박문희 시인의 시집 ≪강천≫에서 평행적 나열의 시들은 중심적인 이미지가 따로 없다. 모두가 밖이고 겉이고 곁이다. 그래서 시가 자연적으로 여러 가지 주제를 내포하게 되고 여러 가지 해석으로 풀이하게 될 것 같다.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다른 이미지들이 한 수의 시에 있기에 이미지가 활기를 띠게 된다. 이런 시를 다선 시 혹은 다양체라고도 한다. 형상적으로 말하면 한 수의 시가 작은 강물이라면 거기에 여러 개의 징검돌이 놓여 있는 것과 같다. 이 징검돌들은 풀로 된 것도 있고, 돌로 된 것도 있고, 범으로 된 것도 있고, 나비로 된 것도 있고, 새로 된 것도 있고, 구름으로 된 것도 있다. 이 징검돌을 건너가는 녀석들은 지렁이도 있고, 진달래도 있고, 꽹과리도 있고, 귀뚜라미도 있고, 번개도 있다. 이러한 사물들은 모두가 변형되어 등장하고 운동한다.   2. 상상 속에서 환각 잡기 상상은 시를 쓰는 동력이다. 시가 어떠한가를 보는 기준의 주요한 한 가지는 상상이 어떠한가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 짓기는 상상 속의 사물을 쓰는 작업이지 현실 사물을 쓰는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자고로 심상(영어로는 ‘image’, 한어로는 ‘意像’)이라고 하였다. 마음속의 사물이란 말이겠다. 시는 현실 사물을 직접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떠오르는 사물들의 환각이다. 이 환각은 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시인은 이 환각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문자로 고정하여 영원을 기하려고 꿈꾸는 사람이다. 박문희 시인은 이런 시를 쓰기 위하여 심혈을 몰붓고 있는 것 같다. 박문희 시인의 시집 ≪강천≫ 마지막 시에 이런 시구들이 있다. ① 배부른 아지랑이 만나면   ② 굶은 벼락을 만나면    꼬리 베어 주고 젖가슴 건졌네.   ③ 싱싱한 아치 쳐 가는 목청 맑은 우물에서    이파리 피우고 시어 길어 올렸네.   ④ 맑은 소리 달여서 약에 쓰고자   ⑤ 머릿속에 잠자던 해맑은 사색    잣송이 색동별로 빛나는 아침 ①에서는 ‘배부른 아지랑이’라고 하는데 아지랑이에겐 배가 없지만 배가 있다고 하고 그것도 무엇을 많이 먹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현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환각 속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②에서는 ‘굶은 벼락’이라고 하는데 ①과는 반대다. 벼락이 굶었다고 하는 것은 현실로 보이는 벼락이 아니라 상상 속의 환각이겠다. ③에서는 ‘싱싱한 아치 쳐 가는 목청’은 ‘맑은 우물’이라며 그 우물에서 ‘이파리 피우고 시어 길어 올린다’고 한다. 어느 것이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에서 오는 환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④에서는 ‘맑은 소리 달여서 약에 쓰고자’ 한다. 소리는 달일 수 있는 물이 아니다. 상상의 환각으로 떠올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시구가 나오겠는가! ⑤에서도 그렇다. ‘해맑은 사색 잣송이 색동별로 빛난다’고 한다. 과히 명창이라 하겠다. 이것도 환각이라는 이름밖에 더 붙일 것이 없다. 환각! 시는 환각을 요구하고 환각은 새롭고도 참신한 이미지로 가상현실을 만들어 놓는다. 가상현실이란 상상으로 창출한 현실이라는 이름이겠다. 이런 가상현실이 시적 현실이며, 시적 현실이 없으면 좋은 시가 아니 되고, 이런 가상현실을 창출하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고 생각된다. 가상현실 창출에 매료되었을 때에는 시인 자신도 식별할 사이가 없고, 지각할 사이가 없게 되어 이미지가 주문처럼 흘러나오게 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영혼 속에 떠오르는 환각 상태의 것이지 눈을 뜨고 바라보는 현실적인 사물들이 아니다. 박문희 시인의 시는 가상현실에 모를 박은 것이기에 시의 새로움과 야릇함과 기이함과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성역 깨기로 가상현실을 살찌웠다 위에서 환각으로 가상현실을 만들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성역 깨기로 가상현실을 만든 박문희 시인의 작법을 보기로 하자. 박 시인의 성역 깨기는 주요하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한 가지는 언어의 성역을 깨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물의 성역을 깨는 일인 것 같다. 언어의 성역 깨기와 사물의 성역 깨기는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진행된다고 하겠다. 언어의 성역 깨기는 사물의 성역 깨기이고 사물의 성역 깨기는 언어의 성역 깨기이다. 소위 성역 깨기란 것은 일상적인 사유의 규례를 타파하는 것으로서 언어들의 새로운 조합과 사물들의 새로운 전이를 야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먼저 언어의 성역을 깬 실례들을 보자. ① 동그란 네모꼴과 네모난 동그라미      ——   ② 여우 그림자 둘둘 말아     ——   ③ 낮달 발뒤축에 매달린 오솔길    팔자걸음으로 걸어온다.     ——   ④ 공기 부스러기로 뜨개를 뜨고 있다.     ——   ⑤ 다년초 목에 두른 그린벨트    번개 날개 자르느라 분주하다.     ——   ⑥ 남새 방목 지켜본 시간의 뜨거운 이빨     ——   ⑦ 춤사위에 방울져 토실한 젖가슴    기름진 대지 고름 서서히 풀며     ——   ⑧ 티끌의 숨결에    태산으로 우거진다.     —— 상기한 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네모꼴이 동그라미가 되기도 하고, 여우의 그림자를 방석처럼 둘둘 말기도 하고, 낮달의 발뒤축에 오솔길이 매달려 팔자걸음을 걷기도 하고, 공기 부스러기로 뜨개를 뜨기도 하고, 그린벨트가 번개의 날개를 자르기도 하고, 시간의 뜨거운 이빨이 나타나기도 하고, 춤사위에 나타난 젖가슴이 대지의 고름을 풀기도 하고, 티끌의 숨결에 태산이 우거지기도 한다. 모두가 일상적인 언어(사물)들의 영역을 벗어나서 당치도 않은 언어(사물)들의 관계를 발생하며 서로 어울려 쟁쟁한 시구들로 사무쳐 오른다. 필자는 이런 수법들을 성역 깨기라 한다. 성역을 깨는 일은 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겠다. 성역을 깨는 시구가 없으면 시는 고리타분하게 될 것이다. 언어들이 서로서로 성역을 깨며 이미지를 새롭게 돋보이게 하는 수법은 참신하고 신비한 가상현실을 창출하는 핵심적인 시의 기교가 아닐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언어의 성역과 사물의 성역을 깨는 자체가 새로운 이미지 창출의 기본 경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성역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초롱 속에 갇혀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물은 부단히 변화 발전하기에 시의 성역도 부단히 변화 발전하게 된다. 현실을 부단히 깨지 않으면 안 된다. 깬다는 것은 일상적인 관념으로 보면 맞지 않는 언어들을 맞추는 일이고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서로 전이한다는 말이겠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이런 조각상을 보았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사자 여자 조각상이 있었고, 범 남자 조각상도 있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의 바닷가에는 인어공주 조각상이 있었다. 이러한 조각상들은 사람과 짐승 및 물고기가 서로 전이되어 통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동물은 모두 머리에 눈, 코, 입, 귀가 있다. 시라는 것은 반짝하는 찰나의 상상 속에서 번개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사물의 형상에 착안하므로 범 남자, 사자 여자, 인어공주들은 모두 통하게 되는 것이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으며 산다고 할 수 있다. 잎이나 줄기나 가지나 다 햇빛과 달빛을 먹고 비를 먹고 바람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으며, 모두가 태어났다가 죽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과 식물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게 된다. 황차 동물도 식물도 짝짓기를 하여 후대를 번식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 사물이 천만 가지여도 모두가 비슷한 점들이나 같은 점이 있고, 동일성과 통일성이 있어서 서로 통하게 되어 있고, 자유로운 전이를 할 수 있다. 세상의 언어들은 서로 자유로이 결합될 수 있는 기능이 있듯이. 시에서 사물을 쓴다는 것도 실제 사물인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된 사물이며 사물의 상징이며 허상을 떠올리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이다. 실제 사물 자체가 서로 통하는데 언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사물의 이러저러한 전이나 언어의 이러저러한 변화를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 공간이 너무 작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라고 하겠다. 박문희 시인은 이러한 세계관으로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하겠다. 박문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어디서 오는 소리인지 모르는 생신한 소리가 들리고,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는 뜻밖의 사물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새로운 감각을 투영시키고 있다. 시의 언어들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활발하고도 자유로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 부르기도 하면서 드라마를 공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질 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784쪽)에서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문제는 이러한 번역(사물의 변화—필자 주)이 개념적으로 정당한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어떠한 직관이 사라지느냐를 아는 것이다.” 박문희 시인의 시집 ≪강천≫에서 시들이 이미지가 참신하고 신비하고 돌연적이어서 독자들을 아찔하게 자극하기도 하고, 감탄하게도 하고, 탄복하게도 하는 것은 언어들의 자유로운 결합 때문이며, 사물들의 자유로운 결합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것들이 박문희 시인의 시집 ≪강천≫이 우리에게 주는 가상현실의 작용이라 할 것이다. 가상현실은 시의 주체이며 주제이다.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주제는 독자들 나름에 따라 ‘1+1=1’일 수도 있고, ‘1+1=5’일 수도 있다. 독자들 나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박문희 시인의 시집 ≪강천≫은 약점이 있기도 하다. 때론 큰소리로 말하여 언어의 섬세성이 약화되기도 하고, 고유어 살리기를 무시하고 한자어를 심하게 아끼기도 하고, ‘‒가, ‒이, ‒는, ‒은, ‒의, ‒을, ‒를’의 토들이 절제되지 못한 구석들도 보인다. 앞으로 초링크만 쓰지 말고 링크가 시 속에 직접 작용하는 시들을 더 많이 썼으면 좋겠다.
118    박문희 하이퍼시집 《강천려행 떠난 바람이야기》출간 댓글:  조회:1541  추천:2  2018-03-16
최근 연변대학출판사에서 박문희 하이퍼시집 《강천려행 떠난 바람이야기》를 펴냈다. 이 시집에는 82수의 시가 제1부-제4부와 장시에 나뉘여 수록되였다. 제1부는 〈풍구의 바퀴가 서면 수펄은 죽는다〉, 제2부 〈꿈지럭 꿈지럭 확대경 속으로〉, 제3부 〈다사한 허공에 말뚝을 박고〉, 제4부 〈하늘을 위하여 종이 울린다〉, 그 외 340행의 장시 〈강천려행 떠난 바람이야기〉로 시집을 마무리고 있다. 이 시집은 박시인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시 창작을 시작해서 내놓은 첫 시집으로 본인은 자서(自序)에서 자신은 “우연한 기회에 우리 문단의 하이퍼시 주창자 최룡관 시인과 두차례의 진지한 토론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시흥이 유발되였고 종당에는 시 창작을 시작하여 첫 시집을 내기에 이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룡관 시인이 시집에 시평을 썼다. 그는 박문희 시인의 시적 작업을 ▲탑식 구성을 허물고 평행 라렬식 횡적 구성을 창도. ▲가상현실에 모를 박고 시에 새로움과 야릇함과 기이함과 아름다움을 부여. ▲ 언어와 사물의 성역 깨기로 가상현실을 살찌우면서 쟁쟁한 시구 창출 등 몇가지로 귀납하면서 시인이 창조해낸 시어들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활발하고도 자유로이 뛰여다니면서 한편 또 한편의 드라마를 공연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길림신문사 정년퇴직 간부로 2016년 《연변일보》에 처녀작 〈말똥거르기〉 를 발표한 박시인은 지난해 시 〈우주의 방언〉 으로 제4회 윤동주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월 15일  길림신문 최화 기자  http://www.zoglo.net/board/read/m_shu/348895 http://kr.chinajilin.com.cn/sports/content/2018-03/15/content_199611.htm
117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 댓글:  조회:3059  추천:1  2018-02-12
남북 정상회담을 기대한다   남과 북이 국제대회에서 공동입장한 건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인 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 이후 11년 만, 참으로 감격에 목 메이는 만남의 장면들이었다.    "불과 40여일 전만 해도 이렇게 감동적인 분위기가 되리라 생각조차 못했는데 개회식 때 북남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 한 핏줄이라는 기쁨을 느꼈다".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을 지켜보며 울먹이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도평화에 남북공감대는 분명 존재한다. 남북관계 역사상 분단 이후 최초로 조선 헌법상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직계 친족(여동생 김여정)이 한국을 방문,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북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필요시에는 전례 없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구두로 전달된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제안에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서 성사시켜나가자"고 뜻을 밝혔다. 하여 여건(비핵화문제 관련 朝美 공조 추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냐가 숙제로 남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이산가족 상봉, 군사회담, 비핵화 논의 등 이후의 발걸음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북수뇌들의 정치적 용기와 지혜가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어렵지만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슬기롭게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116    폭풍취우(외 1수) 댓글:  조회:1530  추천:0  2018-02-07
폭풍취우   모기 고래의 분수구멍에 주둥이 박고 내장 몽땅 빨아먹은 사건이 터졌다. 오늘은 빈대가 토성에서 구워낸 황금 천오백 톤과 신도시를 꿀꺽 삼킨 일 드러나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납작한 빈대 대번에 명물이 됐다. 빈대가죽 비싼 값에 거래되면서 모기주둥이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빈대가죽 모기주둥이 연구소가 하룻밤 새 삼만 오천 개나 태어났다.    주식시장에 비바람 몰아친다. 도회지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고 뫼 가람 타고 둥둥 떠내려 간다. 켜켜이 쌓인 주름살 무늬 위로 하얀 물보라 별빛으로 부서진다.    거룩한 식객   어제 이빨 좋으신 손님 한 분 찾아와 에덴동네를 잡수셨다. 은빛 번뜩이는 귀중한 이빨로 앞동산 큰키나무밭과 뒷동산 작은키나무밭을 차례로 다 잡수시고 고소한 흑토 짭짤한 백사장은 복판으로 흐르는 강물에 말아 맛나게 잡수셨다.    이마의 땀 훔치시며 소발굽산을 잡수실 때 곰바위가 이빨에 끼었다. 미인송 뿌리째 훌렁 뽑아 쑤시니 뻥! 이빨에 구멍 뚫렸다.   에덴동네 돌고래 호랑나비와 고추잠자리네 가족이 마른 개암나무에 목을 맸다.    개암나무가지가  황사바람에 곡을 하자 파랑새 부부가 멀리 알섬으로 날아갔다. 다람쥐 형제도 시월산으로 이사를 했다.    (《도라지》잡지 2017년 제6기)  
115    아득한 편지 (외 6수) 댓글:  조회:1843  추천:0  2018-01-24
  아득한 편지 (외 6수)   허공을 정처 없이 맴도는 왕잠자리 까맣게 탄 기다림에 날갯짓 짙붉다.   팔매질에 수면을 뛰어가는 조약돌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간다.   이제 바람의 등에 실려 온 낙엽 창턱에 살포시 쪽잠이 든다.   발밑으로 맨발 밑으로 보랏빛 그리움이 한길 반 높이로 쌓였는데 왜가리 유리병 깡마른 꽃가지 초리 끝에 가녀린 상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다.     중국화    개나리 화사한 선경대 벼랑 가에서 붓대 타고 계곡 내리다가 머루넝쿨에 걸렸다. 머루 한 알 따먹고 잎 한 잎 머리에 쓰고 넝쿨에 퍼더버리고 앉아 주르륵 미끄럼질 했다. 빠알간 노을을 등에 업고 코스모스와 들국화 길섶에서 놀고 있었다.   붓 자루 마디에 빨간 잎이 생긋 피어난다.     딸내미의 피아노   아기자기 울긋불긋한 꽃밭에서 백조 한 쌍 유유히 헤엄치며 사랑을 지저귀고 있다.   정답게 도란거리는 예쁜 침묵 불처럼 타오르는 빨간 다리야 귀맛 좋게 찰랑이는 꾀꼬리 나비춤 담장 기어오르는 나팔꽃 열띤 강연.   검푸른 바다 하얀 물 바래 딛고 꽃사슴이 바람 속을 질주한다. 정원에 흐드러진 향연에 천년폭포 왕림하여 은쟁반에 살포시 옥구슬 한잔 따른다.   하아얀 백조 한 쌍 천지간에 가로걸린 무지개 넘나들며 은빛 영롱한 무아의 경지를 주름잡는다.      천년의 위기   천년을 내처 걷던 강물이 걷지를 아니하다. 의족을 만들어 신겨주었지만 이제 걸으면 죽는다고 딱 버티다.   천년 잠잔 바위 여전히 깨지를 아니하다. 물로 잠그고 불로 지졌건만 꿀꿈 세월 좀 좋으냐고 잠에서 깰 염 않고 딱 버티다.   묘 자리 봐달라고 하다. 묘 자리가 좋으면 한걸음 걷겠다고 하다. 기념비 세워달라고 하다. 기념비 세워주면 하루만 깨겠다고 딱 버티다.   만년소나무에 매달린 풍경(風磬)이 울다.     아 침   강아지 품은 달걀에서 번개 태어나 기지개 켠다. 낮달 발뒤축에 매달린 오솔길 팔자걸음으로 걸어온다. 달걀껍질 구름을 몰고 다니며 번개 길이를 잰다.   구렁이 고슴도치 먹고 민들레 홀씨 날려 까맣게 하늘 칠하는 사이 냉장고에서 불에 구운 시간 꺼내 앞산 벼랑 젖꼭지에 양자우편으로 부친다.   창가에서 서성이던 오솔길 꼬리를 사리더니 슬쩍 구름위로 뛰어오른다.     세 상   삼베 무명 모시 명주 씨줄과 날실 강산을 짜고 우주 그물에 걸린 모루위에서 꺼이꺼이 함마가 운다.   살진 줄기에서 건진 지평선 멀리 흔들리는 작은 배 갑자기 가라앉은 바다 섬 선인장 가시에 나부끼는 빨간 피 소라나팔 되어 화톳불로 타오른다.   실북 뛰는 그물구멍에서 청룡이 웃으며 달려 나온다. 허리 잘록한 개미 태산을 밀고 간다.     천당의 문   벼랑 한 꺼풀 뜯어내고 모래톱 한 장 벗겨내고 번개 아지 한대 잘라내고 구름장 한 송이 꺾어들고 화과산 수렴동에서 물 한바가지 떠다가   하늘에 궁전 짓는다.   봉황이 예쁜 주둥이로 산호의 비취빛 보석 갈고 닦는다. 음양이 빙글빙글 도나니 풍진세월 꾸역꾸역 모여든다. 백마 탄 꿀벌 장미꽃 꼬나들고 보석 대청으로 돌진하다가 눈부신 벽에 수염 들이 받는다.   오리산에서 고개 갸웃하며 구조주의자 수석제자 왈--- 영, 혼, 육이 온전한 모든 생령의 거처는 속이 비어야 실용 가능하거늘.   구조주의자 큰 형 보완조로 가로되--- 속만 비면 약에 쓰나? 숨막혀 죽느니라. 물방울형, 라운드형, 다각형 빈 구멍을 벽에도 많이 뚫어야 하는 법이거늘......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문고(5) 2018.1           
114    무의식과 하이퍼시 창작 댓글:  조회:2226  추천:0  2017-08-13
무의식과 하이퍼시 창작   □박문희      "하이퍼시 창작론 간담회 및 하이퍼시 세미나"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주최로 연길에서 열렸습니다. 최룡관선생의 은 에 이은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현재 한국 지에서 연재중입니다.   최선생은 의 머리글에서“하이퍼시는 서양시문학의 최신 조류”이며 “하이퍼시를 하는것은 국제적인 시와 연변의 시를 접목하는 대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 시문학전통(중국시 문학전통은 우리 시 문학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대사”이기도 하다면서“21세기의 시문학은 무의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것이며 시문학에서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며 시문학발전을 이끌고 나갈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나는 시 쓰기를 시작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공부를 하면서 최선생의 주장에 상당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시쓰기를 하면서 과 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최룡관선생은 에서“시는 무의식으로 쓴다. 하이퍼시는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하이퍼시의 산모이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이 주장은 피뜩 보기에 리해가 잘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이란 개념으로부터 깊이 파고들면서 시창작 실천과 결부시켜 해득을 한 결과 이 주장에 도리가 있으며 실제 창작에서도 막대한 도움을 받을수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이퍼시 창작론 간담회 및 하이퍼시 세미나"에 참가하여 나의 학습체득을 발표했는데 원래 계획했던 학습을 잠시 뒤로 미루고 학습체득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학습속도가 매우 늦으므로 체득발표 시간간격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점에 널리 양해 바라며 기탄없는 비평(부동한 견해 포함) 을 기대합니다. ------ 발문     시는 무의식으로 쓴다. 하이퍼시는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하이퍼시의 산모이다.                                                 -----최룡관의 에서   무의식----깊은 바닷물속의 거대빙산   프로이트 이전의 서구적 사고방식은 의식중심으로 특히 이성(理性)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의식에서 벗어난 모든 요소는 망상이나 광기로서 비정상적 영역에 불과했고 연구 대상이기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배제 대상이었다. 모든 인간 행위는 의식에 따른 계획적 성격을 지녀야 했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발견은 당시에, 인간이 모든 행동을 자신의 의지와 의식 하에 한다는 기존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려, 철학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버렸다. 특히 우리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대개의 모든 상념과 기억들은 저 깊은 바닷물 속의 빙산처럼 무의식 속에 깊이깊이 내장되어 있으며 그러나 '무의식'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임상사례를 통해 증명되었을 때 그것이 서방철학계와 기타 모든 학술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과시 원자탄 폭발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무의식이 의식과 갈등하면서 사고와 행위를 규정한다는 문제의식은 인간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는바 철학을 비롯하여 학문 활동 전 영역에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고 또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표현 욕구와 표현 방법을 자극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여기서 각별히 특기할 것은 무의식이 의식의 자아와는 다른, 자율성과 창조적 조정능력을 가진 완전한“객체정신”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 학설의 제창은 수년간 프로이드와 함께 연구 활동을 하다가 프로이드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칼 융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융의 분석심리학의 가장 큰 특징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칼 융은 경험론자로서 다 같이 살아 있는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내용과 작용에 대하여 상당히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무의식이란 융에 의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의 정신의 모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그것이 무의식이다.   융의 정신분석학에“무의식의 발견”이란 개념이 있는데, 뜻인즉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즉 발견)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무의식의 두 가지 층----“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   융은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층이 있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개인 생활에서의 체험 내용 가운데서 무슨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 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억압된 여러 가지 내용으로서 반드시 성적(性的)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 밖의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눌러버린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그 자극의 강도가 미약한 문턱 및 지각의 내용 등의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이 태어난 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들을 융은“개인적 무의식”이라 하였다.    융은 더 나아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원초적인 무의식이 심층에 깔려있다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융은“집단적 무의식”이라 했다.   의식의 뿌리, 정신생활의 원천, 창조의 샘   이 “두 가지 층의 무의식”에 언급하면서 융은, 무의식은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녔으며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는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무의식은 충동의 창고, 의식에서 쓸어낸 쓰레기장이거나 병적인 유아기 욕구로 가득 찬 웅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성숙케 하는 창조의 샘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학설을 말하는 마당에 주로 칼 융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은 그의 주장에하이퍼시의 창작에 직접 관련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무의식이 개발되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임을 알았다. 그러한 무의식을 하이퍼시창작의 대상으로 하면, 우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理性), 도덕 등에 억눌린 욕망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겠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맹목낙관을 가로막는 언덕   하지만 이점을 앎으로 해서 오는 맹목낙관은 절대 취할 바가 못 된다. 일단 창작과 연계시키면 수많은 실제 문제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무의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말하자면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이라는 언덕이 금방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창작에 이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앞에는 개발되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인 무의식을 창조에 도입하자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나서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1. 시창작의 원천으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인식작업   우선 무의식은 창조의 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강대한 무의식의 지배 앞에서 시인은 피동에 처하게 되어 그것을 활용할 수가 없게 될 터이니.   무의식은 개인생활의 경험자료 뿐 아니라 인류의 태곳적부터 끝없이 반복되어 경험되는 일정한 인간적 체험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은 수많은 신화적 상징으로 표현되고 경험된다. 이 모든 것은 무진장한 창조의 원천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인지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인지하는 그 순간, 무의식은 바로 의식으로 전환되는 길 어구에 서게 된다. 이때 깨어난 무의식은 원동력으로 되어 모든 의식된 마음에 활력을 주고 그 기능을 조절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통일을 완성하는 작업에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지어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여전히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뿐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2. 무의식 세계의 발굴 작업   바로 상기의 문제가 제기되는 까닭에 무의식이 의식으로 전환되는 길 어구에 서게 되었을 때, 시인은 반드시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발굴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소에 무심코 나타나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번뜩이는 계시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꾸준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발굴시의 무의식은 몽롱한 상태일 수가 있다. 이를 테면 영감(靈感) 같은 것이다.   ● 영감과 주의력   [영감]  영감(靈感)이란?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번득이는 착상이나 자극이며, 무의식중에 갑자기 일어난 신묘한 능력이다.   ▲영감은 초의식(超意識) 또는 무의식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감이 자의식(自我意識)의 반대라는 것이다. -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영감은 완강한 노동으로 얻어진 포상이다.--바딤 레핀 ▲영감은 게으름뱅이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손님이다.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  ▲영감은 무의식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영감의 기회는 적어진다.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항상 의식하고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 모기 켄이치로   고로 영감은 의식적인 노력을 행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으로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수련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소리”를 계시 받게 되는 것이다.   [주의력]  위에서 언급된 의식적인 노력이 바로 주의력이다.   하이퍼시의 창작은 실제로 봐서 영감과 주의력을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는 것, 이 두 가지가 혼연일체로 이루어져야 훌륭한 시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날마다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에 대한 이러한 평범하고 세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모든 것에 미치는 '창조적 발견'을 할 수 있는 마음눈(心眼)과 신비한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3.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적 창작의 세계로 비약시키는 작업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시종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지어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며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의 무한정한 확장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의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이 각기 독립성을 가지며 그런 이미지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어 하이퍼시의 전체적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 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는 것이다. 시인이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지만, 가상현실은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상상력,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운동   “'영감'과 '주의력'이 협동하는 창조적 무의식”을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은 심상(心象)을 의식 위에 비추는 작용, 다시 말하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기능”이다. 눈앞에 없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드는 정신 능력, 즉 상상력은 하이퍼시를 창조하는 근원적 능력이다. 여기서 수동적 상상력이 능동적 상상력에 포섭되고 언어를 빌어 소생할 때 영감과 주의력은 일체를 이루고 상상력이 실현되어 우리는 비로소 한수의 하이퍼시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 바의 합리적인 사고체계와 자아의식 범람의 거세 ​  이성(理性)과 자아의식의 범람을 막아야 시 창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머릿속에서 자아의식이 지나치게 살판 치면 그를 지배하는 뇌리 속에는 합리적인 사고체계 이외의 다른 어떤 특권도 들어앉을 수가 없게 된다. 이 경우 그가 관심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이 시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혹은 없는 것인가? --이 시는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 --이 시에 반영된 현상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이 시는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무슨 깊이라는 것이 없다.   “죽은 개가 짖어댔다.”   이른바 의식(意識), 이성(理性)의 눈빛으로 보면, 이런 묘사는 어처구니없는 병문(病文)일 것이다. 그 눈빛에 죽은 개는 죽은 개일 뿐일 것이다. 그런 고로 어떤 의식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이 갖는 자체내의 의미를 통해서 의식의 권한을 몰수해야만 하이퍼시 창작의 길은 비로소 트이게 되는 것이다. ♣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문고(5) 2018.1    
113    [시] 우주의 방언 댓글:  조회:4242  추천:0  2017-05-18
우주의 방언   □박문희   상오 열한시가 넘었는데도 기어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피후(皮候)의 정곡(正鵠)을 향해 돌진하는 화살 자체가 공중분해 된 바람의 뿌리를 스치는 순간 어지럼증을 느낀 까닭이다. 화살과 시위는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빛의 뒷문이요 복제된 개기월식이다. 시위 떠난 화살이 되돌아올 수 없다고들 하지만 이미 길에 오른 화살에 대한 설득반송, 혹은 강제반송은 근자에 언론에도 꾸준히 회자되는 사건이다.   유령의 마구간에서 신기루와 혈투를 벌린 도리깨의 어깨 죽지는 호수위에 둥둥 떠도는 달의 그림자, 아울러 그것이 낳은 부드러운 능선은 다정다감하면서도 능갈친 우주의 방언이다. 바람의 뒤통수를 쥐어 당기는 안장형의 긴 하품은 잔디밭에 피어난 평면형의 짧은 잠꼬대와 더불어 운명의 동일선상에서 안으로 혹은 밖으로 열심히 튀는 방언속의 돌꽃이다.   염소를 몰고 블랙홀을 방문한 방울새의 발에는 장수(長壽)의 뼈와 살을 만드는 식수(食水)가 시계추로 매달렸다. 홀의 문턱과 한정거장 거리에서 시동을 멈추고 배꼽에 눈이 달린 블랙홀 홀장의 환영연에 초대된 방울새일행의 귀환보고서에 따르면 생명폭포의 질주속도는 제백석이 낳은 만추의 낙엽과 궤를 같이한다. 불타는 단풍은 귀뚜라미를 베개 삼아 영원히 투명한 허공에 평화롭게 누워있다.    《송화강》2017년 제2기  
112    [시] 고향 외 2수 댓글:  조회:1868  추천:0  2017-05-18
[시] 고향(외 2수)   ■박문희    4월을 머금은 살진 단비 비암산 너머로 달려가고 산허리를 칭칭 감은 안개 용드레우물가에  칠색무지개로 피여난다 세전이벌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금슬 좋은 꿩부부 장끼 까투리 해란강 맑은 물에 하얀 쪽배 띄워놓고 허공에 비낀 멍든 락서를 비누물로 마알갛게 닦아내고 있다   새벽을 깨우는 닭울음소리 다독이며 반쯤 열린 삽작문을 두드리는 순간 잠옷 바람에 머리 엉성한 내가 문밖에 섰는 나를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     과원   파랑새 방울새의 우짖음이 하얀 구름산자락에서 풀색으로 피여날 때 생생한 구름 한쪼각이 우주의 소리 맛 풍기는 아침빛 한줄기를 훔쳐먹고 빨간 노을에 흠뻑 취해 별무리 흐르는 산정호수의 시원 달콤한 달덩이로 불끈 떠오른다   천길 폭포에 풍운조화 인다 쏟아지는 서기(瑞氣)에 비단결로 가로걸린 쌍무지개 벼랑 탄 송학(松鶴)에 아리랑 명창으로 아롱진다 용드레 천하 소나무가지는 늘찬 가람으로 눕고 하늘과 땅 사이 두루미 날개는 만무과원으로 눕는다   소나무 두루미 너울너울 향무(香舞)를 춘다     춤노래 익는 마을   도라지뿌리에 매달린 초롱불이 밤의 까만 벼랑길을 톺는 하얀 두루미의 치정을 따갑게 비춰주고 있다   천지에서 미역 감고 상모 돌리는 해와 달의 사랑 꽃사슴의 머리 우에 타오르는 빨간 뿔을 아름다운 선녀가 널뛰는 바람결로 어루만져준다   꽃노을이 출렁이는 아침 쿵쿵 찧는 만화방초의 합창속에서 눈부신 진달래요정이 거문고를 탄다   [길림신문] 2017-05-18  
111    [시] 덜기의 철학 (외 4수) 댓글:  조회:2387  추천:1  2016-12-13
덜기의 철학 (외 4수) ■박문희   등짝의 지게에 텅빈 동굴 하나 비끌어매고 괴춤에는 헌 메투리 헌 보선 헌바지 잡동사니 허덕간 하나 둘둘 말아 차고 겨드랑이에는 부러진 날개와 무슨 젝트라고 하는 개인의 미래비젼을 고전명작인양 끼고 먼길을 떠난다.   가물가물한 빨간 꿈속에서 새파란 병아리가 한창 샛노란 고래를 낳고있다.   개화장을 짚고 일어서다가 눈을 뜨니 등짝은 무지 버겁고 거시기는 여섯시 반이다. 처분권장 신호가 가끔 뜨지만 당신이 전당포로 직행을 할지언정 문물급의 보선은 버릴수 없어.   봉황 깃털의 화석같은 침묵이 약 삼년간 흘렀다. 별안간 조막손이 앙가슴을 호쾌하게 탕탕 쳤다. 훌러덩 벗었다 동굴도 허덕간도! 온 몸이 구름 되여 둥둥 뜬다.     핸드폰    우리 동네에 호수가 숱해 생겼다 호수에는 잉어 붕어 초어와 정의의 비수, 간교한 사기술 그리고 우주의 게임과 재밌는 현대신화들이 홀딱 벗고 자맥질한다 미니드론 타고 바다의 자궁도 구경하고 은하수에 가서 별낚시도 한다   그만 호수에 풍덩 빠졌다 돌고래와 함께 헤엄을 쳤다 은하수에서 별도 줍고 삼족오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상냥한 상어를 데리고 놀았다 코와 귀와 고추를 먹혔다 도망을 치다가 발가락을 뜯겼다 엉덩이 반쪽을 상납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구명대 하나 사가지고 야반도주했다 쑤욱 시원히 빠져나왔다     수상한 그림자    해를 등지고 걷는 님의 앞에는 그림자가 항상 딱 붙어다녔다 그러던 그림자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먼 발치에서 뒤태 어여쁜 여우 한 마리가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며 꼬랭이를 깃발처럼 나부끼며 섹시하게 걸어가고있다. 그 곁에 찰떡처럼 붙어가는 님을 딱 빼닮은 그림자가 길쭉하다   토성밖의 삼일장에 여우의 그림자를 둘둘말아 헐값에 팔아먹는 상인들이 두루 생겨났다     섹스    바이올린과 얼후가 쓰나미 춤추는 고공에서 얼싸안고 돌며 저공 행진을 한다.   무성한 수풀 속에 입을 꾹 다문 호랑이 누에가 뒷골목으로 빠지자 하얀 잠태(蚕蛻) 풀잎을 타고 까맣게 타버린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다.    물독에 쏟아 부은 아침 해가 벼린 깊은 뿌리에 꿈에 익은 저녁달 살진 줄기를 참빗질하고   휘파람 휙 불자 추억이 가득 묻은 구운 감자 참나무 옹이 숯 빨간 불속에서 화려하게 작열한다.     인간세상(2)    인터넷이 지구를 거미줄로 칭칭 동여맨다. 만리를 비행한 대형유도탄의 착지오차는 반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잔디밭 풀밑을 살금살금 기어가는 불개미간첩의 수염을 사정거리 팔만리의 유도탄으로 노랗게 구워버린다.   고로 전쟁발발의 위험은 사라지는 중이나 전쟁은 오늘밤 12시 정각에 터질수도 있다. 평화는 영원히 태양의 발톱에다 둥지를 틀고있다. 그래도 석양이 꼴깍 질 무렵이면 간드러진 악마의 시커먼 웃음이 간담을 찢을 때가 가끔 있다.   동두성에 따르면 방금 전 원자탄 수소탄 증폭핵분열탄은 물론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질자탄까지 제3차 세계대전 차비에 동원됐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그것을 용케 제지한 이가 있었으니 기이하게도 유엔사무실에 잠복해있던 파리였다고. 해당문서에 똥을 한무더기 싸놓는 바람에 인터넷문서의 집행에 기묘한 오차가 생겼다는 것.   토성지방 조간신문의 톱자리에는 사흘이 멀다하게 “민주 자유”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실려나간다. 노란 좀벌레 만여마리가 새까만 백성 “민”자 하나를 갉아먹는데 이미 반년이란 시간을 허비했고 나머지 글자 몇개를 씹어먹는데도 십년이상 걸릴것이라 한다.   
110    [시] 말똥 거르기 댓글:  조회:2312  추천:0  2016-12-13
말똥 거르기   (1) 비소리 나팔소리 휘파람소리 홰소리 영각소리 돼지 웃는 소리 벼랑가에 쥐 탄 놈 노 젓는 소리 불에 튀긴 잡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기름진 엉덩이 두드려주는 소리 가렵지 않은 넓적 배 긁어주는 소리 찢어진 상처에 소금치는 소리 소금 친 상처를 기워매는 소리 고속철 맨드라미 기여가는 소리 인공위성 꽁지에 별빛 스치는 소리 고무줄 탄 소똥이 하품하는 소리 종이배위 말똥이 재채기하는 소리.   (2) 귀구멍안에서 뿌지직뿌지직 말똥(语屎)이 서말닷되 밀밀 나온다 대나무속대 얼궈 뽑은 새파란 숯불 얼음쪼각 구워빚은 빨간 탕후루 모난 가루 묽은 돌 동글납작 빈대떡 짭잘한 들깨참깨 시고 떫은 산수유 우수수 쏟아져 고분처럼 쌓인다 돌절구에 털어넣고 쇠공이로 빻아서 까만 말총얼개미로 대충대충 거른다 말똥가루 한잔에서 벼룩이 논다 팔딱팔딱 곤두박질 재주 넘는다. 연변일보(2016.9.22)
109    <수석송> ----노산 이은상의 시 댓글:  조회:3040  추천:0  2016-04-12
수석송    -노산 이은상의 시   太古를 숨 쉬는 너 風雨를 비웃는 너 다만 침묵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너 오늘은 너 앞에 서서 나도 수석이 된다.  
108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아문다 댓글:  조회:6096  추천:5  2015-12-31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아문다 -“두가지 사건”으로 조선족사회가 불안정하던 나날에   우리 길림신문사가 성소재지 장춘으로 이전한 이듬해인 1996년, 그러니까 중한수교 4년이 되던 그해 중한간에 두가지 큰 사건이 터졌다. 하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엇바뀐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조선족가정을 파멸에로 몰아갔던“한국초청사기사건”이였다.   1996년 여름, 어선 페스카마호에서 일어난 가공의 반란사건은 그 살해수법과 피해규모도 끔찍했지만 사건을 유발한 조선족선원 상대의 선상폭력도 세상을 경악케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조선족사회에 극통을 안겨준 일부 한국인들의 대규모 초청사기사건이 그해 11월 18일, 한국언론에 의해 만천하에 들통나자 전반 조선족사회는 엄청난 충격속에 빠져들었다. 실제로도 가해자가 피해조선족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랍치, 살해 사건이 중국 북경과 천진 등지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한국인과 중국조선족간의 상호 불신과 갈등으로 당시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약고에 불똥이 튀기 일보직전처럼 팽팽했다. 언제 어떤 돌발사태를 터뜨릴지 모를 위험을 안고있는 이런 중대 사안에 직면하여 우리 신문사앞에는 이 사안들을 주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취급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나서고있었다.   1995년 4월, 장춘에 들어온 신문사의 상황은 그 당시 성위에서 신문사의 간부관리를 여전히 연변주위에 위탁하는 등 사정에 따른 사장 겸 주필 리금남의 계획과 포치에 의해 지도부 3명 성원중 나만 장춘에 들어와 조선족사회와 대내외 관련 부서와의 련계, 신문출판 등 장춘본부의 일상사업을 떠메게 되였다. 편집부에는 총편집판공실 김영규주임이 편집과 출판 업무를 맡아보고 한정일부주임이 취재와 기획을 관할하고있었다. 아울러 갓 입성한 장춘본부의 전체 임직원들은 “제2차 창업”의 열정과 감정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신문을 꾸리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성과 장춘시 기관의 조선족간부, 조선족기업이나 학교, 사업단위의 일군들, 대학, 과학기술부문의 엘리트들, 농촌의 서기, 주임 그리고 농민들도 우리 신문을 민족의 대변인이라고 부르며 일만 있으면 신문사를 찾아왔다. 장춘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길림신문》은 장기간 구심점이 없던 조선족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에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과 “한국초청사기사건”이 발발하자 그들은 당연히 신문사에서 나서줄것을 희망했다.   당의 보도기관으로서 외사에 관련되는 중대한 민감사안은 일반적으로 신화사소식에 준하는것이 상례였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의 권익과 직접 관련되는 이 두가지 중대사안에 대해서만은 우리가 함구할수도 피해갈수도 없었다. 페스카마호사건의 주인공 6명이 모두 우리 길림성사람들이고 한국초청사기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받은 지역도 연변을 비롯한 우리 길림성이였으니 말이다. 민족의 리익을 대변하는 언론사로서 피해의 통증을 하소연할 합법적인 분출구를 찾아주지 않고 옳바르게 인도하지 않는다면 조선족사회에서 언제 무슨 돌발사태가 터질지 예측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였다. 우리가 성기관의 관련 부서에 이런 상황을 반영했지만 실상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모두가 조심성을 보이면서 명확한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   상황은 우리에게 “지시”를 기다릴 시간적여유마저 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피해자들이 울분과 분노를 토하는데 합법적분출구를 틔여주고 조선족사회의 대표들을 통해 여론을 정확히 인도하는 길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 주저없이 행동에 돌입했다. 이 문제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바로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내무사법위원회에 재직중이였던 윤수범부주임을 비롯한 조선족사회 각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기대와 신임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등을 떠밀어주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언론의 사명감을 안고 “주동적인 개입과 정확한 여론인도”라는 큰 모험에 나서게 된것이다.     “한국초청사기사건”   우선 부딪친 사건이 “한국초청사기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중한수교후 수년간에 걸쳐 중국의 수많은 조선족가정을 경제파탄의 불구덩이에 밀어넣었던 사건이였다. 당시 한국초청비용 수만원이란 천문수자와도 같은 거금이라서 동북3성의 수많은 조선족가정이 한줌도 안되는 한국사기군들의 사기협잡에 녹아나면서 리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의 폭발시점은 한국의 외국인로동자피난소 등 민간단체들이 기자초대회를 가지고 중국 현지에서의 수만명 조선족의 피눈물의 피해사례 조사결과를 언론에 터뜨렸던 1996년 11월 18일에 준한다. 그날을 시점으로 한국 전역이 경악의 충격속에 빠져들고 그때까지도 행여나 하고 기다려오던 피해자들이 드디여 일말의 희망마저 잃은채 철저히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었던 바로 그 무렵이였다.   그러나 실상 우리 《길림신문》 은 11월 18일에 앞서 10월말에 이미 보도했다. 당시 우리 신문은 총편집판공실 한정일부주임의 발의로 1면에 “해외로무기별”전문란을 내오고 당시 중국조선족의 중요관심사인 해외로무와 관련된 소식들을 싣기 시작했는데 “해외로무기별”전문란이 태여난지 며칠 안되여 한국민간단체가 연변에 와서 “한국초청사기사건” 피해자 조사를 하고있다는 기별이 왔다.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해외로무보도를 직접 주관하던 한정일부주임이 직접 취재하여 드디여 1996년 10월 31일, “우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란 제목으로 “해외로무기별”전문란에 발표했던것이다. 당시 이 기사는 정치적민감성이 큰 두 나라 외교적문제와 관련된 중대사안이지만 나는 이렇게 엄청난 피해상황에서 우리 나라 공민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는것은 정당한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담히 발표를 결정했던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층층이 상급에 보고한다면 발표가 가능할지, 발표를 허용한다 해도 언제 허용할지 모를 일이였다.   이 기사는 초청사기사건의 실질과 엄중성을 중국조선족사회에서 맨처음으로 까밝힌 중요기사로서 중국조선족사회에서 큰 반향과 관심을 자아냈었다. 그럼에도 이 기사가 한국사회에 강렬한 효과를 일으킬수 없었던것은 우리 《길림신문》 의 소식이 당시 한국국민들에 게 읽힐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런 와중에 11월 18일, 한국의 기자초대회에서 한국인 사기행각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자 한국 전역이 경악한것은 물론 전반 조선족사회도 그때에야 경악, 분노, 허탈감과 절망으로 뒤엉킨 충격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던것이다.   우리는 “한국초청사기사건”을 중대보도로 기획하고 전반 피해사건 조사 및 사건해결진척을 추종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때 우리의 결책은 실사구시적이였고 과감했다. 당시 실정에서 장춘에서의 독립적사업추진이 상대적으로 가능한 시스템이였기에 때론 연길에 있는 사지도부에 일일이 반영할 새 없이 일을 밀고나가는 형국이였다. 나는 초청사기건 기획보도를 담당한 한정일부주임의 대담한 취재방안을 적극 수용하면서 뒤근심을 말고 대담하게 보도를 추진하라고 격려하고 함께 방안을 연구하고 확정하였다. 일단 방향이 결정되면 한정일부주임은 주동적이고도 대범하게 팀을 이끌고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 시기 한국의 지성인들은 중국조선족사회를 파탄의 나락에 밀어넣었다는 죄책감에 분분히 모금운동 등으로 중국조선족피해자들을 도와나섰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한국정부도 대책마련에 고심했고 민간에서도 새롭게 조사단을 무어 중국 현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해(1996년) 12월초, “한국초청사기사건”을 추적하던 한국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서 민간단체조사방문단을 중국 현지에 파견하여 “한국인초청사기사건” 피해사례 조사를 하게 되였는데 이번 보도를 처음부터 이끌어온 우리 신문사에 조사와 사건해결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외사에 대한 당보의 보도는 일반적으로 신화사에 기준하며 지방 당보가 자의로 타국의 정책이나 문제를 비평하거나 또한 신문사가 직접 외사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여있다. 외국인의 공식적인 방문을 취급하거나 그들과 공동행사를 치를 경우 관련 부서에 청시받는것은 필수적이다. 하여 나는 “1. 중국조선족의 한국초청사기피해상황, 2. 사기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최근 반향, 3. 한국민간단체조사방문단소개,4. 본사의 대책” 이런 4개의 소제목으로 한국방문단의 조사에 협력할데 관한 보고를 써가지고 선전부 신문처 강봉국처장에게 찾아가 청시를 했다. 결국 강처장은 주관부 부장인 양해천에게 보고를 올렸고 양부부장은 이 일을 길림성위 대외선전판공실에 돌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였다. 대외선전판공실에서 고금엽은 우리 신문을 주관하는 처장이였는데 경색된 사고방식에서 많이 탈피한 친구였다. 사연을 자세히 듣더니 알았으니 보고를 두고 돌아가 회시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마 하고 대답은 했지만 워낙 시간이 긴박한지라 하회를 기다릴 새가 없었다. 우선 장춘시조선족중학교의 박동남교장과 학교강당을 모임장소로 빌려쓰기로 결정한 다음 조사단이 온다는 소식과 모임통지를 신문 톱자리에 내고나서 이틀을 기다렸지만 해당 부문은 그냥 무기별이였다. 피해를 심하게 받은 중국공민의 권익을 수호하는 정당한 일일진대 후에 조사추궁을 받는다 해도 두려울게 무엇인가. 우선 하고보자! 하는 배짱에 전화문의도 하지 않고 계획대로 일처리를 해나갔다.   결국 조사단이 와서 이틀간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지 한달이 넘어서야 3개 조목으로 된 회시가 내려왔는데 결론인즉 언론기관으로서 여차여차한 원인으로 외교사무에 직접 개입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오호라, 이런 묵허법도 있구나 하고 고처장의 대처방법에 속으로 못내 탄복해마지않았다.     그 일로 하여 고금엽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져 그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졌다. 《길림신문》 산하신문(子报) 《동북저널》창간을 신청할 때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을 대상한 신문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고금엽처장은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찬성하면서 결정적인 지지를 주었다. 이렇게 태여난 《동북저널》 은 《길림신문》 의 산하신문으로 한동안 출간되다가 길림성신문출판국 신문처 리립후(李立厚)처장의 제안으로 우리 신문을 매주 3호(周三刊) 꾸리던것을 매주 4호(周四刊)로 확대하고 그중 1호를 전문 《동북저널》 부간으로 삼아 출판하게 됐다. 이로서 《동북저널》 은 《길림신문》 의 산하신문(子报)이 아닌 《길림신문》 본지(本纸)의 당당한 한 부분이 된것이다. 만약 시초에 고금엽처장의 결정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당시 상황에서 《동북저널》 의 창간은 복안에 그치고말았을 소지가 매우 높았다.   결국 이런 묵허하에 12월 14일과 15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시민대책위원회의 강영식사무국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일행은 계획한대로 우리 신문사 10여명 자원봉사자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근 1000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피해상황등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취재팀은 계속 추종보도를 통해 피해구제와 해결에 대한 보도를 하고 한국정부에 해결책을 촉구했다. 이런 활동은 봄바람마냥 피해자들의 언 가슴을 녹여주었고 녹은 가슴에 희망도 심어주었다. 또 그들에게 사기군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한국국민과 한국정부는 문제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있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량국 국민간의 불신과 갈등을 풀어나갔다.   한정일 등이 쓴 “우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1996. 10. 31), “한국초청사기건해결 전면작동”(1996. 12. 7), “정부에 의거 합법적경로 통해 해결함이 바람직, 중국정부의 립장과 태도”(1997. 6. 12) 등 기사를 비롯하여 “한국인 사기부분 한국정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1997. 6. 12), “중국조선족 사기피해문제해결을 위한 한국정부의 립장”(1997. 6. 19), “한국, 외국인 연수취업제 도입”(1997. 9. 23),“서로간 리해와 대책마련 시급-한국민간조사단 및 성과 장춘시 유지인사 좌담회 요지”(1996. 12. 15), “사건해결과 우리의 자세”(본사론평원의 문장, 1996. 6. 12) 등 당시 김철룡, 김정애, 박명화 등 여러 기자들이 취재한 통신, 뉴스와 론평은 40여편에 달한다.   이런 영향력 있는 대량의 기사를 통해 피해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는외 중국정부와 한국정부의 립장과 태도, 대책마련 현황을 적시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알려주고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한국민간단체들의 적극적인 움직임도 통보함으로써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사회안정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의 추적보도는 초청사기피해자와 가족이 모두 한국에 취업비자로 초청되여 로무로 피해보상을 받으면서 최종해결을 볼 때까지 수년간 계속되였다. 그번의 보도이벤트는 중대한 섭외사건에서 《길림신문》 이 중국조선족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하고 정확한 여론인도와 문제해결로 사회안정을 수호한 전형사례로 된다.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한 우리 신문의 보도는 한국의 소수 악덕업주들에 대한 폭로비판으로 시작되였다. 통례에 따르면 외사보도에 대한 통제가 상당히 엄격한 우리의 국정에서 우리 나라와 국교를 수립한지 오래지 않은 한국에서 발생한 중대사안을 두고 꾸준히 폭로비판해나가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그번 “량대 사건”을 언론사에서 직접 취급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 내부와 형제신문사들간의 일부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독자적으로라도 좌담회를 조직하고 독점보도도 전면적으로 내밀기로 분명히 결단을 내렸다.   보도의 구체추진방안은 주로 당시 총편집판공실에서 취재분야를 담당한 한정일부주임과 늘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연구하였다. 본사에서는 저돌적인 박명화기자에게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한 전문보도과업을 맡기고 점차 사건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페스카마호사건 피고의 고향인 통화지구 기자소 리창근소장에게도 전문과업을 주었다. 큰 좌담회를 소집할 때는 10여명의 편집기자들이 전부 동원되였는데 밤도와 기사를 쓰고 수정을 하고 판면을 짜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입력을 하고 3차의 교정까지 끝내고 필림을 떠 인쇄에 교부할 때는 항상 새날이 훤히 밝은 때였다.   페스카마호사건의 공정한 해결을 추진해나가는 행정에 《길림신문》 은 점차 문제해결의 “중국본부”가 되였다. 와중에 6명 피고인의 소송대리를 결심하고 본사를 찾은 료녕성공안사법관리간부학원의 법학교수 조봉(赵峰)씨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4월 9일, 페스카마호사건 2심판결을 앞두고 조선족사회에 이 사건의 전모를 알리고 조봉변호사를 성원함과 아울러 중국조선족사회의 목소리를 한국에도 전하기 위해 장춘시 각계 16명 지명인사좌담회를 소집했다. 좌담회 참석자들은 페스카마호사건의 성격규제, 피고인에 대한 형벌의 오유와 불공정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이 향후 중한관계에 미칠 영향에 엄중한 우려를 표시하였으며 동시에 페스카마호사건에 대해 공정하게 처리할것을 한국정부에 강력히 희망했다.   “장춘시 지명인사들 좌담 페스카마호사건 공정처리 희망”이란 제목으로 1997년 4월 5일, 좌담회 요지를 발표한 그날 나는 페스카마호사건 2심 제3차 공개심리에 참가코저 한국행을 하는 조봉씨를 배웅하기 위해 장백산잡지사 남영전사장,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리학수처장과 함께 심양으로 향발, 저녁에 료녕신문사와 심양의 조선족엘리트들과 조봉씨를 위한 송별모임을 가졌다.     이번 만남에서는 김봉(장춘시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리금남(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남영전(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주필), 리학수(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대표) 등 길림성 조선족사회의 유지인사대표와 료녕성조선족부녀협회 등 료녕성사회단체의 대표들이 이번 사건의 공정한 처리를 촉구하며 김영삼대통령 앞으로 련명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러 지역,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합심이 되여 마치 생사를 건 전쟁터에 친인을 보내는 심정으로 절절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당시 준엄한 얼굴들을 10수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해남을 금할수 없다.   2심판결은 6인 사형수중 전재천외 5명의 무기형전환의 성과를 올렸다. 이는 중국조선족사회가 자기의 목소리를 내서 거둔 제1차승리였다. 이는 중국의 4대조선족언론사가 한목소리를 내는 계기로도 되었다.   조봉변호사는 귀국후 심양유지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5월 7일에는 우리의 초청을 받고 장춘에 왕림, 장춘 각계의 유지인사대표들을 만났다. 5월 8일, 그는 선후로 길림성외사판공실 책임자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규속(奎速)주임의 접견을 받았다. 그들은 페스카마호사건의 공정한 판결을 위해 한국법정에 떳떳이 나선 조봉변호사에게 뜨거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제3차 심리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정부와 사회의 지지, 성원 밑에 계속 노력을 기울여줄것을 당부했다. 이는 길림성이 정부차원에서 처음으로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5월 9일, 길림신문사, 흑룡강신문사, 연변일보사, 장백산잡지사의 공동주최로 길림,흑룡강 두 성 각계의 48명 대표가 합석한 조봉변호사환영좌담회가 마련됐다.   이제 남은 과업은 여전히 사형수로 남아있는 전재천에 대한 구명운동과 중한관계 및 중한동족관계를 정상궤도에로 끌어올리는 일과 관련된 언론사들의 여론인도작업이였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해결이 단순히 피고인들에 대한 감형이나 구명을 위한것이 아니며 사건 자체가 일반적인 형사사건이 아니라 력사적으로 형성된 동족간의 뿌리 깊은 문화적갈등의 소산임에 각별히 류의하여 보도기획의 목표를 시종 사건해결을 통해 그동안 쌓여왔던 상호 불신의 뿌리를 뽑는 계기를 만드는데 두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듯이 나쁜 일도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수 있는것이다.   전재천의 고향인 휘남현과 매하구, 통화 등지에서 전재천구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더불어 사재를 털어 무료변호에 나선 조봉변호사를 후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이 벌어졌다. 이는 정귀순(“외국인로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민병렬(전국련합 부산본부) 등 한국사회단체들의 전재천구명운동과 기타 피고인들에 대한 감형활동과 서로 호응되면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에 적극적인 영향을 전했다.   최초의 보도기사 “한국원양어선 참살사건 발발”[한국 특약기자 편영우(片永宇), 1996. 8. 29]로부터 시작해서 전재천의 진정서 “우리는 강도살인범이 아니다”(1996. 12. 10), 페스카마호사건 2심 제3차 심리에서 진술한 조봉고급변호사의 변호의견 전문(1997. 4. 15) 등 만자 이상 되는 장편기사를 편폭에 구애없이 우리는 파격적으로 전문을 게재했다. 독자들이 관심하는 페스카마호사건판결에 관련되는 전 과정을 상세히 추종보도했다. 또 “장춘시 지명인사들 좌담, 페사건 공정처리 희망” (1997. 4. 5), “공정한 판결로 사건의 량성전환 맞아야”(1997. 4. 15), “우리의 자존 찾아 만리길-길, 흑 조선족여론계 유지인사 조봉환영모임 좌담요지”(1997. 4. 27) 등 장편 좌담회요지를 발표, 중국조선족사회의 지적인 목소리를 내여 정확한 여론인도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다.     총목표는 문제해결과 신뢰, 화합 재구축   두가지 사건에 대한 보도를 다룸에 있어서 합법적경로를 통해 정서의 분출구를 마련함으로써 분노해소의 물곬을 틔여주는 한편 모든 문제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해결해야 한다는 법률의식을 심어주기에 특별히 류의했다. 한국과 한국인을 무작정 미워하는 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초청사기피해자들을 물심량면으로 돕고저 힘쓰고있는 “외국인로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정귀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외국인로동자피난처 등 한국민간단체들에서 벌이는 전재천 등 구명운동에 대해 다각적으로 소개했다. 한편 당시 한국인 류재복특약기자를 통해 “중국인을 위해 뛰고있는 한국인” 계렬탐방보도도 수개월간 끌고나가면서 상호 리해와 화해의 밑거름을 뿌려가는 시도도 했다.   1997년 8월 24일, 중한수교 5주년에 즈음하여 《길림신문》 의 명의로 길림성주재 강원도사무소 대표, 한국기업인 대표와 길림성인대내무사법위원회, 성위대외선전판공실, 성공안청, 성대외경제무역청, 장춘시세관 등 성, 시 기관의 관련 부서 일군들이 참가한 중한교류좌담회를 조직, 상호간의 우호적관계를 확인하고 진일보의 구체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소식에 배합하여 좌담회요지를 큰 편폭으로 싣고 아울러 “밝은 앞날을 함께 만들자”는 제목으로 사설을 발표,전반 조선족사회와 재중한인사회에 중한관계전망에 대한 적극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상과 같은 다방면의 노력은 문제의 해결에 좋은 밑거름이 되여주었고 응분의 결실을 맺었다. 홀로 사형수로 남았던 전재천은 상황에 의해 즉시 해결은 안되였지만 2006년, 한국 로무현대통령 대사령에 의해 마침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였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고선원에 대한 구제절차 등을 담은 선원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했다.   그후 비록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한국정부에서 조선족들이 연수하여 피해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대책을 대는 등으로 시급한 문제들을 풀어나갔으며 따라서 대부분 피해자들이 한국에 입국 취업하여 생존상황이 개선되는 결과도 안아왔다.   전반 과정에 민족의 대변지로서의 우리 《길림신문》 은 시종 주동적자세와 적극적인 독점보도로 중국조선족사회의 여론을 리드해나갔으며 위험수위로 치닫던 불안정요소를 점차 해소하고 중한간의 리해와 화목을 회복, 발전시키는데 대체할수 없는 독특한 역할을 해왔던것이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107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댓글:  조회:5511  추천:2  2015-12-31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1. 감구지회   1983년 봄부터 《길림신문》 창간에 대한 보고얘기가 나오더니 이듬해 8월에는 길림성위에서 정식 비준했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나는 《연변일보》 총편집판공실 편집으로 있었는데 그때 주임은 남인순, 부주임은 윤효식이였다. 그러다가 또 몇달이 지나 그해도 막가는 12월의 어느날 윤효식부주임이 《길림신문》 창간주비소조 조장의 신분으로 2층짜리 옛 신문사 자리의 한 자그마한 사무실에 김경욱, 림웅길, 김영오 등 예닐곱 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전반 길림성 조선족을 대상한 《길림신문》 이 나오게 됐는데 이미 길림성위에서 비준이 내렸고 주비사업을 우리가 해야 하며 시간이 긴급하니 서둘러야 한다고 력설했다. 비준된 시간은 1984년 8월 7일인데 몇달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시급하게 움직이게 된것은 길림성 관련 부서와 운영자금 등 구체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였기때문이라고 했다. 실지로 신문허가증도 이듬해(1985년) 1월 15일에 받아 그날로부터 불과 보름만인 2월 1일에 첫 시험호를 냈고 그뒤로 보름에 한호씩 시험호를 도합 4호 출간했다. 《길림신문》 창간호는 1985년 4월 1일, 드디여 발간됐다.   그때 연변울타리를 벗어난 신문의 창간에 직접 참가한다니 자랑과 긍지를 느꼈었고 그게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을 넘겼다. 감구지회에 젖어 자칫 잊혀질 옛 기억을 되살려본다.   2.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일 자체가 대단한 거요.”   《길림신문》 의 창간작업은 처음부터 《연변일보》 의 오태호총편집이 맡아 추진했다. 길림성위에서 연변주위에 위탁한 일을 연변주위에서 다시 《연변일보》 에 책임지웠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시초에 리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산재지구를 대상한 신문인데 왜 연변에서 출판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길림신문》 창간시 발행과업을 수행했던 《연변일보》 의 김주철선배님(길동군정대학 출신으로 《동북조선인민보》 창간이나 조선문 《참고소식》 창간에 두루 참가했던분임)은 길림에서 발행회의를 열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 시말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선배는 발행회의에서 반영된 그런 의견을 못들은척 묵과해 넘길수 없었던지라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부주임이자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던 옛 상급인 최채(최채가《연변일보》 초대사장을 지낼 때 김주철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공청단 선전위원이였음)를 곧바로 찾아가 반영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최채주임이 하는 말씀이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현재 산재지구에서 직접 꾸리기는 여건상 시기상조이니 우선 신문을 잘만 꾸려라. 그러면 신문사는 아무때건 장춘에 들어오게 돼있다.”고 하시더라는것이다.   실지로 《길림신문》 은 전 성 120여만 조선족군중, 특히 산재지구 40여만명 조선족군중의 강렬한 요구와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최채, 길림성위 부서기 겸 길림성군구 정위 조남기, 길림성정부 고문 최림 등의 강력한 유세하에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중공길림성위에서 마침내 비준하였던것이다. 길림성위에서 우선 연변에 이 일을 맡기게 된것은 당시 관리나 경제 등에서의 막부득이한 사정이였다. 사실 최채주임의 말은 조금도 그른데가 없었다. 신문이 생기고보면 명색이 《길림신문》 인 이상 성소재지에 들어가게 되는건 시간상 문제라는것이다.   어쨌거나 중공연변주위에서 과업을 《연변일보》 에 일임한후 당시 《연변일보》 총책임자이자 중국조선문신문의 권위자인 오태호총편집이 모든 일을 맡아 추진했는데 이는 어느모로 보나 당연한 일이였다. 더군다나 《길림신문》 의 창간은 1979년에 길림성 6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됐던 오태호선생이 대표임직기간 장춘조선족중학교의 최일교장 등 동기(同届) 조선족대표들과 함께 거의 매년 련명으로 《길림신문》 창간을 제안한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바 오태호총편집은 깊은 감정과 드높은 열성으로 이 작업을 추진해왔던것이다.   3. 신문풍격의 민족성 주창자 오태호총편집님   돌이켜보면 시험호를 구상할 때부터 오총편집은 이 신문에 민족적독창성을 부여하고저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것이다.   《길림신문》 창간을 전후해서 개추렴이요 하는 명목의 모임이 여러번 있었다. 그런 모임에는 꼭 이야기판이 벌어지군 했으니 화자는 항상 오총편집이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김삿갓, 론개, 서산대사 등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으면서 우리가 탄복했던것은 그의 이야기재주와 비상한 기억력이였다. 례컨대 김삿갓이야기를 한다 하면 김삿갓의 풍자시가 빠질수 없었는데 “일출원생원(日出猿生原) 묘과서진사(猫过鼠尽死) 황혼문첨지(黃昏蚊簷至) 야출조석사(夜出蚤席射)” 등 풍자한시 여러수를 거침없이 외우면서 풀이해나가는 재주에 우리는 이야기에 끌려들어가는 한편 탄복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고 게다가 웃지도 않고 “서당내조지(书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생도제미십(生徒诸未十) 선생래불알(先生來不谒)”을 외우는 대목에 들어가서는 우리는 배를 끌어안고 웃어제꼈다.     오총편집은 좌중을 웃겨 환심이나 사자고 이런 이야기를 한것이 결코 아니였다. 그 리면에는 《길림신문》 의 짙은 민족성구현을 위한 구상의 한 부분으로 신문을 산재지구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게 꾸리자는 깊은 속셈이 깔려있었던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중 일부는 바로 우리 신문의 련재물로 실려나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산재지구 독자들이 애독하는 우리 신문의 갈피갈피에는 분명 오총편집님의 고심과 땀이 녹아들어있는것이다.   산재지구에 취재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한 부탁에서도 그의 당시 생각이 더듬어진다. 통화지구로 가게 된 나에게 오총편집은 통화지구에서 이 몇년 사이에 고구려문물이 꽤 출토되였다던데 이번 기회에 알아보라고 했다. 통화현에 취재를 간 나는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김춘삼을 만나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근년에 들어 특히 올해 이 지역에서 고구려무덤이 여러기 발굴되였다면서 현문화관의 한 관원을 소개해주는것이였다. 당시 지식이 짧아 취재를 깊이 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정황은 파악하였고 옛무덤과 발굴된 문물의 사진도 몇장 얻어왔다. 연길로 돌아와서 원고를 바친 그날 오총편집은 나를 이층 사무실로 불러 고적발굴 상황을 묻고 원고와 사진 배치를 직접 하면서 이렇게 배치하는게 어떤가고 했다. 나는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취재를 잘하지 못했다고, 후에 기회를 봐서 보충하겠다고 결심발표를 했다. 그후 수차에 걸쳐 리원철, 허철룡 등과도 취재차로 통화현에 간적이 있으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적당한 취재기회를 내내 찾지 못하고있다가 사학계에서 분규가 생기는 통에 종당에는 원래의 계획을 접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많은 사연을 통해 민족의 뿌리와 전통에 대한 오총편집님의 진정을 통감함과 아울러 우리 신문에 짙은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는 깊은 속심도 읽을수 있었다. 《길림신문》 으로 볼 때 짙은 민족성을 주창한 첫 사람으로 우리는 오태호총편집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말은 오태호총편집이 당보의 당성원칙을 불문에 부쳤다는 얘기가 아니다. 민족특성의 구현이 잘되지 않던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한 첫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4. 창간대회의 취재이야기   《길림신문》의 창간대회는 1985년 3월 30일, 당시 연변주위 소속인 문화극장에서 열렸다. 이날의 창간소식보도조에는 문상호주임, 촬영부 전창식과 내가 배정이 됐는데 보도조의 조장은 내가 상당히 흠모하던 문상호선생이였다.   내가 농촌부에 있을 때 한번은 우리 부의 부주임이였던 문상호선생을 따라 삼합관개수로공정성과 보도취재를 내려간적이 있었다. 오전 내내 취재를 하고 오후에 보도기사를 쓰는데 쓰는 방식이 놀라왔다. 문주임은 팔짱을 끼고 방가운데에 앉아서 자기가 기사를 부를테니 나더러 받아쓰라는것이였다. 그는 취재수첩을 들고 가끔 들여다보면서 내가 받아적을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불렀는데 중간에 쉼이 없었다. 원고 받아쓰기를 끝내고보니 자그만치 4000자도 넘는 장편통신이였다. 용어나 철자가 틀리는데 있으면 고치면서 한번 정서해서 래일 직접 홍춘식주임에게 갖다바치라는것이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장편기사가 어떻게 기성된 문장을 읽듯 한번 불러서 완성되는지를 물었더니 취재준비를 할 때부터 전반 취재과정에 시종 기사를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목적성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되는 문제의 답이 완성되면 취재도 끝나는 셈이라는것이다. 그만큼 취재의 목적성이 뚜렷하게 벼려져야 하며 맹목성은 삼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후 문선생의 취재방법론을 조금씩 터득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취재를 끝내는 때이자 기사가 완성되는 시간”이란 경지에는 시종 이르지 못했다. 아니, 여러번 고쳐쓰며 발표한 기사도 항상 유감을 남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삼합에서의 그 체험을 《길림신문》창간대회기사를 쓰면서 다시한번 겪게 될줄은 몰랐다. 그날도 그렇게 원고를 베껴서 그대로 오태호총편집에게 바쳤고 오총편집은 원고를 고치고나서 (아마 오총편집 자신의 연설 한토막을 잘라냈던것 같다) 리덕수서기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해서 리서기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연변주당위는 신문사 바로 서쪽의 농업은행자리에 있었고 리덕수서기는 2층에서 사무를 보고있었다. 나는 문상호스승외에도 복잡한 일도 재치 있게 개괄해내는 뛰여난 함축력의 소유자 박경섭선생, 취재대상이 누구든 취재중 주요단서만 쥐면 대방이 진땀을 뺄 정도로 깡치를 내려 드는 남민옥녀사 등 스승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했다.   5. 《길림신문》의 “인쇄공장”   신문이 창간된후 새 사원을 매일같이 받아들이는 형편에서 우리는 연변군분구 초대소로 이사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사옥자리에 있었던 원《연변일보》사옥은 사무실과 복도 바닥에 널판자를 깐 제정때의 2층짜리 낡은 건물로서 그러찮아도 비좁던터라 도무지 새로 나온 우리 신문사를 용납할 상황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비여있던 2층짜리 연변군분구 초대소(지금의 백산호텔 자리)의 웃층을 빌려들었는데 싸리나무 등 땔나무를 사다 난로불을 피워 겨울을 났다. 초대소 옥상은 평평한 세멘트바닥으로 되였는데 쉼터나 소풍장소로 딱 안성맞춤이였다. 편집을 하다 손이 저리면 줄레줄레 올라가서 담배도 피우고 해빛쪼임도 했으며 어느해 봄에는 가무단의 어느 무용선생을 모셔다 한 보름가량 사교무도 배웠다.     지금은 상상도 잘 안 가는 일이지만 신생한 《길림신문》은 가족의 직업문제도 해결할겸 길림성에서 주는 제한된 돈을 좀더 유용하게 쓸 료량으로 인쇄공장도 자체로 꾸렸다. 신문사 마당 동쪽켠에 줄 지어선 막사나 다름없던 좁고도 낮은 가건물의 한칸을 차지하고서는 “우리 인쇄창(공장)”이라고 불렀는데 말이 인쇄공장이지 기실은 2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조판실이였다. 그처럼 작은 칸을 또 문선실과 식자실로 나누었다. 문선공이 원고를 보면서 활자케이스에서 활자를 뽑아 손바닥만한 문선상자에 순서대로 배렬해 담은 뒤 그것을 식자공에게 넘기면 식자공은 원고배치도에 따라 판을 짜 맞추군 했다. 이렇게 조판의 교정까지 끝마치면 우리측의 일은 다 끝나는 셈이였다.   《연변일보》인쇄공장측에서 그 완성된 식자판을 넘겨받아 지형 뜨고 연물을 부어 연판을 뽑고 그것을 륜전기에 걸어 신문을 찍어냈다. 그다음 절차는 당연히 발행이였다. 창간된 첫해 우리 《길림신문》은 발행도 자체로 했는데 발행원들이 여간 수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 신문사의 김영오, 김규범 등 선배님들외에도 김경욱, 김주철, 김수국 등 림시로 우리 신문에 배치된《연변일보》의 선배님들이 새벽에 나와서 신문을 지역별로 나누어 묶어서는 전문 기차역에 내다 부쳤는데 기차역과의 관계처리 등 일들이 겹치여 그 사업량이 만만치 않았다. 드높은 책임감으로 열심히 《길림신문》발행을 위해 땀을 흘리던 그분들을 생각하면 고마웠던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아무튼 자체로 활자조판을 하던 일은 1989년 7월 중순까지 몇년간 지속되다가 문선식자실은 인쇄공장에 돌려주고 인원들도 모두《연변일보》복무공사에 넘김으로써 인쇄업무는 전부 《연변일보》공장에 위탁하게 되였다. 어찌 보면 《길림신문》은 초창기에 중국의 모든 구식신문이 걸어왔던 길을 모조리 경험해본 격이였다.   6. 《길림신문》의 “문풍백성티” 와 윤효식선생님   화룡현 서성 태생인 윤효식선생은 1951년에 사업수요로 연변일보사에 배치받은 뒤 근 40년간 조선족 번역계와 신문편집계에서 굴지의 성과를 쌓아올린분이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취재와 집필에 참여할수 있게 된것은 개혁개방을 맞아서부터였다. 그것은 윤효식선생이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인해 “통제사용인물”로 지목받고 탐구열에 들끓던 열혈청년시절, 그처럼 쓰고싶었던 자기의 글도 쓰지 못하고 근 10년간 시사번역만 해오다가 1963년에 비록 지방원고편집을 하게 되였지만 원고를 편집만 할수 있었을뿐 직접 취재해서 글을 쓸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선생은 조금도 의기소침하거나 일에서 탕개를 늦춘적이 없이 자기에게 부과된 과업에 시종 충직하고 편집에 진력하는 한편 체계적인 자습으로 실제상 언어의 대가로 되여 후일의 집필사업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는 그를 조직에서는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조직의 의도된 지지밑에 그는 《붉은 해》, 《찬란한 길》, 《룡담의 물결》등 여러부의 장편소설, “변형기”, “가정문제”, “1918년의 레닌”,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등 소설, 산문, 씨나리오와 같은 다양한 체재의 국내외 단편명작 수백편, 그외 대량의 시사번역작품까지 무려 1000여만자에 달하는 번역작업을 수행하여 번역계의 선두주자로 활약해왔던것이다.   이러한분이였으니 개혁개방을 맞으며 선생의 보도열정은 분수처럼 터져나오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구나 때를 맞추어 태여난 《길림신문》은 그로 놓고 말하면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아 새롭게 꽃피우는 활무대에 다름아닌것이였다.     《길림신문》을 초창기부터 맡아 책임지고 꾸려오면서 윤효식선생이 시도한것은 독자가 읽어주는 신문을 만들자는것이였다. 이를 위해 주창한 구호는 “우리 신문을 백성티가 물씬 풍기게!”였다. 조선족의 주류문화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있었던 산재지구 조선족독자들에게 이것으로 가깝게 다가가자는것이였다.   우선 개혁한것이 회의소식이였다. “회의취재를 가면 회의재료만 베끼지 말고 눈에 쌍불을 켜고 새로운 정보를 파내라.” 이것이 그의 당부였다. 한 회의에서 유용한 정보를 한가지씩만 추려내서 발굴해도 값이 있는 성과라고 기자들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했다. 그렇게 깊이 파서 쓴 소식은 신문 가치가 있는 톱소식이 되군 했다. 결국신생한 우리 《길림신문》 에서는 당팔고식 장편회의소식과 지방지도자들의 연설로 판면을 도배하던 일이 기본상 사라지고 필요한 회의보도는 짧게 알맹이만 다루었다. 지어 제목뉴스란것을 만들어 제목한줄로 회의소식을 전하는 때도 있었다. 당시 그것은 실로 파격적인것이였고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신문은 내용과 형식의 결합체인바 좋은 내용이라 해도 좋은 형식의 맛갈진 표달방식이 없다면 효과를 최대한 낼수 없다면서 보도내용들은 되도록 조선족의 생활을 조선족의 마음에 드는 형식에 담아 보도하였다. “농가보감”, “흥부박”, “노다지곬”, “우리 마을”, “인생의 꽃철”, “주부생활”, “이 얘기 저 얘기”, “아리아리랑”, “60청춘닐리리”, “장백의 메아리”, “장생불로 원하시면”, “오는 말 가는 말”, “반디불”, “진담록”, “회초리”, “꽃망울”, “산들산들 보슬보슬” 등 다양한 코너를 개발했는데 이런 코너들은 모두 짙은 민족적정서를 담고있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창간 5주년을 맞아 그간의 코너를 통계낸적이 있는데 각종 전문란과 부간이 50여가지나 되었다.     사설, 론평원의 문장이나 단평 등 신문평론은 불가결의 신문쟝르이다. 이런 쟝르의 글이 농민, 시민과 기층간부 등 《길림신문》의 독자층에 잘 읽힐수 있게 하고저 윤효식선생은 역시 개혁을 시도했다. “오늘의 화제”가 그 실험의 하나였다. 가급적으로 알기 쉽고 생동한 언어로 당의 주장과 지침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군 했는데 심지어 시의 형식과 언어로 언론을 쓸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독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그의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창간때부터 민족성, 지방성 특성을 선명하게 살린 풍부한 내용과 생동활발한 문풍을 바탕으로 하나의 독특한 신문 문풍을 형성하였고 와중에 편집기자대오를 키워내여 특유의 《길림신문》풍격과《길림신문》정신을 창조해냈다. 그 정신과 풍격의 영향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길림신문》초창기에 신문의 백성티를 주창한 윤효식선생의 동기와 실험정신을 높이 사야 할것이며 그를 《길림신문》풍격개혁의 개척자, 나아가 《길림신문》풍격의 정초자라고 평가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것이다.   7. 《길림신문》 의 일터책임제   초창기에 편집기자들에게 고무와 편달이 되는것은 평보(评报)였다. 복도에 평보란을 만들어 걸어놓고 책임평보원이 평보를 하군 했는데 모든 편집기자가 자유로 평보를 할수 있고 반론도 허용되여 평보활동이 꽤 활약적이였다. 그러나 그러는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년말장려에 우수원고 몇건씩 표창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을 일상화하지는 못하고있었다.   당시 전국보도계에서 솔선적으로 대담하게 신문개혁을 하여 소문을 크게 놓은 신문이 있었다. 호북성 효감지구의 《효감보(孝感报)》였다.     1989년 3월 중순경 나와 림웅길은 윤효식선생과 함께 무한으로 《효감보》고찰을 떠났다. 주로 《효감보》에서 일터책임제를 제정,실시한 내부관리경험을 배웠는데 그들의 생신한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계발을 주었다. 내친 걸음에 우리는 무한의 《장강일보》와 기자협회도 순방했다. 그들도 《효감보》의 관리방법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많이 듣고 감정교류를 했으며 가끔 책임제의 일부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순방을 끝내고 돌아온후 윤효식은 나더러 “길림신문사 취재편집, 행정인원 일터책임제” 초안을 짜보라고 했다. 《효감보》의 책임제도는 매우 세밀하게 제정됐으나 우리는 자체의 실제에 비추어 되도록 중점을 살리고 실제 락착에 편리토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렇게 기본임무, 상벌규정 등을 내용으로 책임제를 성문화한 다음 의견청취를 하고 몇번 수정을 거쳐 그해 6월부터 2개월간 시험실시하고 8월부터 정식 실시에 들어갔다. 그때를 시점으로 다달이 원고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시초에는 년간 원고료 합계가 2~3만원 좌우 되던것이 그후 매 2~3년에 책임제를 원래의 토대우에서 점차 조정을 하고 한번씩 수정하면서 원고료가 갈수록 늘어나 신문사본부가 장춘에 들어온 뒤에는 년간 7~8만원 선에서 여러해 지급되였던것 같다.   이 조치는 전체 임직원, 특히 편집기자들의 사업열성 향상에 유조했다. 질을 따져 우수한 원고에 대한 원고료를 후하게 책정했으므로 보도질을 높일수 있었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106    희로애락이 엉킨 로인세계 댓글:  조회:5530  추천:3  2015-03-10
    희로애락이 엉킨 로인세계      사회의 중심에서 사업과 삶의 주력으로 살고있는 청장년들의 세계도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사회의 변두리에 밀려나 비주력의 삶을 살고있는 로인세계 역시 다양하고 다채롭다. 사회로부터 소외되기 십상인 그들의 삶이 사회의 보다 깊은 주의와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희로애락이 엉켜있는 로인세계를 초보적이나마 들여다보기로 한다.                                                                     ---편집자   리영(60세):   지금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해서 다섯 식솔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나이 이젠 예순이라 로년기에 들어섰어요. 젊을 적 시집가서 6~7년을 재미있게 살아봤어요. 그러나 자식을 낳고나니 살림살이도 복잡해지더군요. 출근을 해야지, 아이를 키워야지. 그래도 덩덩 철이 없이 그게 재민가구 살아왔어요.   철을 알고 나니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86년도에 세상 떴습니다. 중년에 탑이 무너지니 앞이 캄캄해납디다. 자식 다섯을 두고 떠나간 남편이 야속하구 살길도 막막해 몇 번 통곡도 쳐보고 했어요. 안도 송강서 살다가 밥벌이 하려고 딸 둘 데리고 명월진으루 나왔지요. 제집도 없이 8년이나 떠돌이 셋집살이를 하면서 헤맸어요.   이루다 말 못할 고충을 겪으며 아이들을 성가시키고, 맏딸도 날 따라다니며 고생 많이 했지요. 나그네 없이 혼자 살자니 별 생각 다 듭디다. 물가가 자꾸 올리뛰는  통에 어디 셋집살이를 할수 있어야죠? 하는 수없이 아들 집에 들어갔지요. 그러니 다른 방향으루 심리고통이 생겨납디다. 신경이 약해 잠두 잘 안와요.   가운데 풍 하나 치고 사는 쬐꼬만 살림이라 한숨을 지어도 기침이 나와도, 오줌이 마려워도 밤 잘 때 조심성 없을 수 있나요? 시집살이죠. 아들도 맘 고와 역시 시집살이고, 애 에미의 눈치를 봐야 하니깐. 젊은 세월 꿈 같이 지나가고 남들 부부간이 몹시 부러워요.   옛날에는 부모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기에 로인들은 밥 안 짓고 빨래 안하고도 호령 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공대사상이 아주 적어졌거든요. 그래 로인들은 하루도 맘 편히 살려고 로인활동실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지는 석양 늘그막에 맘편히 살 살아보자 마음 먹구 곁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활동실로 춤 추러도 다니면서 하루하루 지우고 있어요. 밤 열시까지 춤추고 돌아오면 배가 고프지만 아들집이니 떨거덕거리며 맘대로 들춰먹고 끓여먹을 수도 없고, 시걱 때도 음식 습관들이 서로 다르니 입에 잘 맞지 않지만 어디 타발하게 됐나요?   원숙자(61세):   그러길래 난 자식과 갈라져 사는 게 좋다는 주장입니다. 왜? 서로 자유롭기 위해서죠. 자식들은 명일이면 부모생각 하지만 그저 그때뿐이죠. 평소에는 다 자기 일에 바삐 보내다 보니 부모들이란 건 있으나 마나한 존재죠.   옛날에는 부모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기에 로인들은 밥 안 짓고 빨래 안하고도 호령 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 젊은이들은 부모공대사상이 아주 적어졌거든요. 그래 노인들은 하루도 맘 편히 살려고 노인활동실을 찾습니다. 내나 령감이나 아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어요. 내 21살에 시집가서 30여년 서로 아끼고 고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인젠 살만하니까 5년 전 령감이 병으루 돌아갔어요.   령감 항미원조 나가 고생하구 돌아와 공안사업을 37년 하면서 내내 바삐 보냈어요. 교통대 일을 보면서 한밤중에 술 마시고 돌아오면 나하구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난 공장일 보구 피곤해서 돌아눕기 마련이였습니다. 우리 령감 한뉠 복 못 누려 보셨지요.   아이 넷을 나아 중도에 하나 죽이고 둘이서 아끼고 모아 아이들을 출세시켰는데 그러고 나니 령감이 병 걸려 세상 떴지 뭡니까. 령감은 세상 뜰 때 병원에서 내손을 잡고 “노친과 같이 유람 한번 못 다닌 게 죄송하고 원통하고 유감스럽다”고 울면서 말합디다. 리직휴양해서 반년도 안 돼 사망한 게 아깝기 그지없어요.   지금 월급만 받아서는 살기가 안돼요. 후에 장사를 좀해서 늘그막에 쓸 돈을 벌어놓으니 등아바이 노선이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내같은 신세도 몇 만원 저금해 놓구 살 수 있으니, 자다가도 내 신세 좋게 된게 감개무량해서 잠 못들 때 많아요. 그래도 그냥 사회무도 활동엔 참가 안했어요   옛날 생각 오늘 생각 끝없이 하면서 집에서 홀로 울 때가 많았지만 사회활동생각 못했어요. 그러다가 재작년 아들집에 바람쐬러 갔다가 산에 올라가보니 농민들이 농사짓는 게 보입디다. 그때 무슨 생각 했겟어요? 애초에 농민령감을  얻었더면 매일매일 함께 농사를 짓구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나는 사회사업에 바삐 보내는 시내간부를 얻어 함께 있는 시간도 없이 일생을 외롭게 보냈지 뭡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에서 혼자 실컷 울었어요. 이런 걸 누구와 말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혼자 살다보니 록음기나 방송이나 텔레비가 동무 됩데다. 그러다가 어느 동무가 꼬시는 바람에 예라 무도장에나 다녀보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됐어요.   원래는 무도장 다니는 사람 은 다 작풍이 나쁜가 했어요. 한번은 동무와 함께 무도장엘 가보니 이상하게도 그 무도곡에 심정이 유쾌해지더군요. 60살 먹도록 무도장 못 와봤는데 듣기와는 달리 무도 추는 사람들이 다 작풍이 나쁜 게 아닙디다. 처음 아바이들 손을 쥐니 막 몸이 떨리지 않겠어요?    원래는 무도장 다니는 사람은 다 작풍이 나쁜가 했어요. 한번은 동무와 함께 무도장엘 가보니 이상하게도 그 무도곡에 심정이 유쾌해지더군요. 60살 먹도록 무도장 못 와봤는데 듣기와는 달리 무도 추는 사람들이 다 작풍이 나쁜 게 아닙디다. 처음 아바이들 손을 쥐니 막 몸이 떨리지 않겠어요?   그 아바이 하는 말이“아, 이 동무 떨긴 왜 이리 떠우?”그래 내 “처음 손을 쥐여보니 그런가 봅꾸마, 많이 량해합소.”했습니다. 춤을 자주 추니 지금은 안 떨립니다. 작년부터 이런 활동에 참가하니 자연 몸을 거두게 되고 옷도 사 입고 싶어요. 누가“어째 아매는 점점 젊어짐둥?”하길래 “무도장에 댕겨 그렇다이”하구 대답했지요.   그전엔 “로년에 내 팔자 기구하다. 자식들두 등한하다”는 생각에 옛날 생각 자꾸 떠올리며 밤잠 설치는 일이 많았는데 집울타리 떠나 무도장 다니면서부터 잠 잘 자고 마음 상 해방 받은 느낌이예요. 매일 안 빼 놓구 다니는데 하루라도 안가면 허전감이 들 정도죠. 내 기분이 늘 좋아있으니 며느리도 좋아하는 눈칩디다.   “어머니 어떻게 무도장 선택하셨습니까?”하길래 “친구들이 가자구 해서”했더니 “참 잘 선택하셨습니다. 늘 아바이 생각에 울고 하시더니 정말 잘 선택하셨어요.”하더군요. 령감이 무도장 하번 못 다니고 돌아간 게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지금 노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는게 재미있으니 죽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저 오래 살구 싶어요.   오정옥(62세):   사회가 아무리 좋아도 내 좋아야 좋겠는데 사는게 어려우니 죽고 싶은 생각이 들때 있습니다. 자식 손구들을 키우느라니 우리 좋은 세월 다 갔어요. 늦은 거죠.   허금선(59세):   나는 농촌처녀로 신봉쟁이 남편한테 시집갔는데 그땐 그게 어찌도 자랑스럽던지 남편을 도끼 한번 안 들리고 몸 보양도 열심히 시켰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몸도 나고 젖통도 여자 것 만큼이나 컸지요. 그렇게 생때같던 남편이 남매 셋을 남겨놓고 갑자기 급병으로 사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스물일곱에 남편 여의니 남편생각보다도 4남매 키울 걱정 더 커 그 부담에 눈물도 안 나데요. 너와 나 만들어놓은 새끼를 다 내버려두고 왜 혼자 갔어? 고생이 막심하니 설음만 북받치겠지요. 내가 울면 아이들이 따라 울가 봐 내놓고 울지도 못하구. 아무커나 그러다가 도시에 들어왔구 쏘련 가 1년 벌어 집도 한 채 사놨구요. 아이들두 성가시켜놨어요.   지금은 자식들 덕에 사는데 늘 아이들한테서 받아쓰는 게 그냥 안쓰러워요. 내가 자식들에게 줄때면 통쾌하지만 자식들이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나를 섬기니 고맙긴 해도 마음이 내내 무겁습니다. 한국 가서 내 힘으로 벌어다가라도 썼으면 유쾌하겠는데 지금 그게 안 돼요.   난 소갈비 먹길 좋아하는데 아들은 직방 녀편네하고 어머니한테 소갈비 사다 대접하라고는 못하고 “오늘 구추한데 소갈비나 사다 끓이오.”그럽니다..... 우에 셋은 제 에미 고생을 아는데 아래 셋은 뭐라는지 압니까? “엄마, 그런 말 맙소, 누가 그렇게 많이 낳으랍데?”   아들며느린 “어마이, 우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슴둥. 그렇게 생각 맙소!”하구 날 위안하지만 어려운데서 갖다 쓰니 내 심정 가벼울 리 있나요? 자식들 일을 힘자라는 대루 해주어야 시름도 좀 놓이죠. 그래서 지금 셋집 맡고 따로 나가  살면서도 아침이면 아들집에 가서 서둘러 손자 애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구 낮엔 친구들과 놀다가도 저녁때만 되면 허둥대며 또 손자 데리러 가요.   리옥금(62세):   자식들두 답답할 때가 많아요. 저녁이면 짜개바지손자를 이 늙은것한테 확 밀어 맡기고는 아무 관계도 안 해요. 그리고는 늘 한밤중까지 놀다 오는데 이 에민 아주 종노릇이나 하는 셈이죠.   오영금(66세):   49년도에 결혼을 해서 6남매를 낳고 64년도 큰 것이 열여섯 살, 막내 놈이 세 살 먹었을 때 남편을 여의고 “파밭”을 매며 이악스레 살아왔어요. 오죽하면 동네사람들이 날 보구 꽁지 없는 소라 했겠습니까. 고생 끝에 락이라구 몹시 어려웠지만 아이들을 다 공부시키고 큰 아들은 출세를 해서 지금 자치주무역공사에서 일보고 있어요.   나는 농민이기에 퇴직금 같은 건 없어도 별로 속태우는 일은 없어요. 오늘 행복하니 죽은 남편 더 생각나요. 연길에 와서 오리알 장사를 3년 해서 돈 좀 벌었어요. 좀 살만하게 되니 동무들과 같이 춤 추러도 다니고 싶어집디다만 아이들이 성가를 해서 손자를 보니 그것들을 봐줘야지요. 손자가 유치원에 가니 친구들이 무도장에 다니자고 해서 춤을 배웠지요.   배우고 나서 한 5년 안다니다가 재작년 5월부터 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 아글타글 벌어 재산 늘구자 들었는데 집금은 사상이 변해서 곱게 입고 바르고, 사상 점점 틀려가요, 호호...3년 춤추러 다니면서 집에 령감 없다는 소리 안했어요. 령감이 없다면 아바이들이 막 끌어안고 손도 더 꽉 잡고 하니까 그냥 집에 령감이 계신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그 아바이들이 마음대로 못하니까요.   설이랑 되면 손주 놈들한테 돈을 10원씩 5원씩 쥐어주는데 그럼 할머니 제일이라고 찧고 까불고 좋아해요. 할머니도 돈이 있어야 값이 있는가 봐요.   전영실:   남편 집은 8남매로 살림이 구차했습니다. 난 어려 공불 잘했는데 일본 류학도 희망있었지요. 그런데 19살 시집을 와서 식솔 많은 가문에서 남편 공부시키고 난 시형네와 같이 농사질 했지요. 남편은 고중마치고 현총사에 배치 받아 일을 보았습니다. 아이 4남매를 낳아 셋을 대학 보내고 졸업까지 시켜놨어요.   그 돈 대느라 10년 동안 여자 몸으로 동불사역에서 석탄목도, 벽돌공장일, 막노동, 페물수매......못해 본 일 없어요. 령감노임으로 턱도 없어요. 령감은 병퇴를 해서 딸을 대신 직장에 들여보내고, 지금 자식들 다 제절루 나가살아요.   맏아들은 대학 마치구 대경유전에서 간부노릇 하고 있고 막내아들놈은 장춘설계학원 공부를 하다 병으루 중퇴했습니다. 맏이, 둘째네는 다 잘 사는데 막내아들이 제 노릇을 못해 잘못 사니 노상 가슴 아픕디다. 막내 놈 때문에 애도 많이 태웠어요.   다른 놈들은 다 일하러들 다니는데 막내 놈은 타락해서 집에서 술 먹구 주정하구. 그러니 머릿속에 그냥 그놈밖에 없구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그러다 한국 가서 1년 연수받고 돌아와 지금 대련의 한국회사에서 엘리베이터가설수리를 하는데 처자까지 다 데려다 살구 있어요. 인젠 만 시름 다 놨어요.   조순애(63세):   스무살에 시집와서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는데 딸들이 지금 내 생활비를 대요. 아들은 장사를 한답시고 돈 꾸고 집 2만 여원짜리 까지 다 말아먹고 피신을 하니 빚군들이 막 쓸어들지 뭡니까. 세집 맡고나오니 집세 잇기 힘들어요. 며느리가 아이 열 살 먹도록 일할 생각 안하니 답답해요.    그전에 아글타글 벌어 재산 늘구자 들었는데 집금은 사상이 변해서 곱게 입고 바르고, 사상 점점 틀려가요, 호호...3년 춤추러 다니면서 집에 령감 없다는 소리 안했어요. 령감이 없다면 아바이들이 막 끌어안고 손도 더 꽉 잡고 하니까 그냥 집에 령감이 계신다고 하는 거죠. 그래야 그 아바이들이 마음대로 못하니까요.   일은 안하고 외지에 갈 소리, 손자 봐달라는 소리밖에 없어요. 딸들이 내 생활비를 대는데 야금야금 그 속에서 아들네를 빼준 돈을 합치면 3000원 잘 될 거래요. 딸에게서 돈을 받아서 아들을 주니 도리 상 안됐지만 어쩌겠습니까. 딸은 내 낳은 새끼니까 내 마음대로 욕해도 일없지만 며느린 안 그래요.   난 딸 생일엔 10원도 안내놓다가도 며느리생일엔 차마 10원은 못 내고 100원 내놓는데 내 어망결에 한말에 그게 딸한테 탄로나 딸이 워라겠습니까. 딸 생일엔 10원도 아까워하다 며느리한테는 100원씩 척척 내미니 엄마 돈이 있소 양?   아들놈은 돈 꿔 쓰는 주제에 할 말은 그냥 있어요. 엄마, 내 돈 벌면 엄마 집 한채 사 낫을게. 그럼 엄마, 무도장 다니겠으면 무도장 다니구 맘대루 합소. 그 말 한마디에 내 속이 싹 녹아나서 그래 그냥 얼리워 삽니다.   리영금:   아들며느리 다투면 속이 번져져요. 아이 하나 줴박아도 속이 번져지고 아들도 제 에미와 네편네 사이에서 속 태우고 눈치놀음 놀 때 많아요. 그래서 나도 눈물 흘릴 때가 있어요. 난 소갈비 먹길 좋아하는데 아들은 직방 녀편네하고 어머니한테 소갈비 사다 대접하라고는 못하고 “오늘 구추한데 소갈비나 사다 끓이오.”그럽니다.   때론 며느리 모르게 나한테 소비돈도 쥐어주지요. 우에 셋은 제에미 고생을 아는데 아래 셋은 뭐라는지 압니까? “엄마, 그런 말 마오, 누가 그렇게 많이 낳으랍데?”   김성혜(62):   자식많은 분들이 이것저것 다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요. 로인들은 자기로 자기마음 달랠 줄도 알아야 해요. 령감이 사망한 뒤 의지할 곳 없어 자식들 집을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어렵게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렵게 살면서 자기를 달랠 줄 모르면 그 마음고생에 못살아요.   젊은이들한테 부모모시는 문제가 있는데 지금 자식들은 옛날 부모공대전통을 거의 잊고 있는 것 같애요. 지금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는데 관건은 아마 경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돈이 있으면 서로 모시려 하고 돈이 없으면 천대하지요.   자식들의 마음씨 곱고 밉고가  주요한게 아니고 돈 없는 부모를 모시면 제 살림 차리기가 그만큼 힘들 테니까 자식 립장을 생각해서라도 부모들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요즘 기풍이 이렇게 돼가고 있으니 우리 로인들의 신세가 가긍하고 불쌍해서 섭섭하기를 이를 데 없어요. 사실 돈 없는 부모를 모시려는 자식 극히 드물어요.   령감은 번 돈을 아이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지만 내 의견은 안 그래요. 나눠줄게 아니라 다짐받고 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랭장고, 텔레비 같은 건 사줄 수 있지만 돈은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요. 돈을 세워놨다가 주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긴 힘들어요.   로인활동도 돈 없인 참가하기 힘들지요. 돈이 없으면 구경만 해야 하니까 멋없는 거죠. 자식들이 부모들의 심정 헤아려 소비돈이라도 드려야 할텐데 그렇지를 못하니 그럴 땐 부모들이 한쪽 날개가 축 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벌면 어떻겠는지? 그런데 돈 많이 번다 했자 그것도 소수일 뿐이죠.   딱 로임을 가지고 사는 자식들이 소비돈 쑥 쑥 내놓기도 어려울 테죠. 그렇기에 로인들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 돈만 바랄 수 없지요. 명절에 돈이 없어 손자들에게 5원,10원씩밖에 못주면 좋아안하고 100원, 200원씩 쥐여 주면 아들도 며느리도 다 좋아하지요.   지금 로인소비도 실은 대단히 많습니다. 퇴직노인들이 활동에 한번 참가하려 해도 수백원씩 써야 하는데 명절에 손주들한테 쑥쑥 내밀 돈이 어디 그렇게 많겠습니까?   최송죽(62세):   확실히 늙은이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난 로씨야에 가 보짐장사도 하고 상점도 꾸리고 해서 돈 좀 벌었는데 돈이 있으니 속이 든든합니다. 령감은 번 돈을 아이들한테 나눠주라고 하지만 내 의견은 안 그래요. 나눠줄게 아니라 다짐받고 꾸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랭장고, 텔레비 같은 건 사줄 수 있지만 돈은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요.   돈을 세워놨다가 주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긴 힘들어요. 령감이 병 보이러 북경갈 때 돈 1000원,2000원 내미는 자식 없습디다. 자식들 다 잘살지만 말입니다. 주긴 쉽지만 그때 뿐이죠. 버릇도 잘못 궂히구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돈을 꾸어는 주지만 나눠주지는 않아요.   고복순(65세):   서른 댓에 남편을 잃고 여때껏 과부로 늙어왔어요. 내 37살 먹던 해 시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젊은 나이에 어찌 생과부로 늙겠소. 아직 늦질 않으니 자리를 옮겨 앉게나  하겠지요.   그날 저녁 시누이가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석유등불아래 어슴푸레한데서 서로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내 했다는 소리가“전 새끼도 가득하고 시집은 안가겠으니까 다신 찾지 마세요.”지금 보면 그때 머저리짓 했지요. 그 후 길에서 그 사람 똑똑히 봤는데 아주 잘 생겼습디다. 서로 다 후회했지만 후회한들 엎지른 물이지요.   59살 때 또 좋은 자리 있었는데 아직 안 늦으니 만나보라는 권고가 들어왔을 때도 늙은게 사람 웃기겠다 두려워 대바람 거절해버렸지요. 그때라도 갔더면 한번 화끈히 살아봤겠는데......지금은 싫어요. 살다가 령감이 풍이라도 맞으면 그 시중 어떻게 합니까. 아무튼 내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어요.   지금은 행복합니다. 등소평아바이 덕분에 우리 잘 살고 있어요. 그저 고독한 게 문제지요. 그전엔 집 없는 게 걱정이였는데 지금 집이 있으니 고독한 게 큰 걱정이이지요. 자식한테 얹혀살면 자유가 없고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요. 친구들끼리 어울려 자유롭게 살고싶어요.   김성혜:   로인들의 혼인문제도 살펴보면 간단하지는 않습디다. 서로 맞아 잘 사는 분들도 있지만 갈라지는 일도 많아요. 실제 문제는 자식과 관계돼요. 서로 좋다가 자식문제 때문에 갈라지는 거죠. 시초에 자식들이 다 동의해서 결합하구 또 서로 마음 맞아 살지만 살다보면 서로 대방의 자식들을 홀대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왜 제자식만 관심하구 내 자식은 관심 않나? 대방의 손군이 와있으면 이쪽에서 찡내고 하니 모순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서로 대방의 자식, 손군들을 생각 못해주니까 자연 불화가 일어나는 거지요. 재혼해서 살다가 갈라지는 건 대부분 원인이 자손문제와 관계돼요. 이 문제에서 넓게 생각하는 분들이 적어요.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늘그막에 결합하면 마음고생만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의 살림에 가서 남의 령감 옷 빨아줄게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옷 빨고 밥 짓는 게 큰 문제 아니라 치고 아무튼 부담이고 자유롭지 못할거라는 겁니다. 지금 어떤 젊은이들은 정부를 두고 있다는데 로인들도 결혼 안하구 사는법이 없을까요?   있는 것 같애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춤을 추다가도 맞갖지 않으면 안 추면 되는 거지요. 로인들도 그저 마구 춤추는 게 아니라요. 늘 춤추러 다니는 로인들은 서로를 잘 알고있어요. 서로 거래하면서 고독이나 말리고 말동무가 있고 같이 춤이나 추면 돼요.   혼자 살면서 보니 외로움이 너무 어렵습니다. 식솔 여섯이 있다가 왜 이렇게 혼자 있냐? 밥 끓여놓고 혼자 먹자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이 솟구쳐서 밥도 못 먹고...... 늙은이들두 친구가 있어야 해요. 부모들에게나 자식들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게는 하지요. 친구에게는 속심 말을 다 할 수 있어요.   로인들도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요. 어떤 사람은 혼자 다니기 좋아하고 집에 홀로 조용히 있기를 원하지요.   나는 친구 대여섯이 모여 먹고 얘기도 나누고 싶어하는 성민데 제일 유쾌할 때는 무도장에서 춤출 때이고 그 외 마작도 놀구 문구도 칩니다. 마작을 놀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좋아요. 마작을 놀면서 롱담도 하고 별 얘기 많아요. 그리고 텔레비를 틀어놓고 가무도 보고 련속드라마도 보고 노래 감상도 즐깁니다.   오정옥:   5년 혼자 살면서 보니 고독이 너무 어렵습니다. 식솔 여섯이 있다가 왜 이렇게 혼자 있냐? 밥 끓여놓고 혼자 먹자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이 솟구쳐서 밥도 못 먹고......   조순애:   늙은이들두 친구가 있어야 해요. 부모들에게나 자식들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게는 하지요. 친구에게는 속심 말을 다 할 수 있어요. 령감한테도 안할 말이 있어요. 동무도 늘그막 동무가 좋아요. 서로 믿어주고 호흡이 통하고, 친구를 사귀면 진정한 친구를 사귀여야 하지요. 그래야 서로 리해하고 도울수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서로 의탁하게도 되는 거죠. 여러 날 못 만나면 만나고 싶고 소식 알고 싶고 서로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겁니다. 마음속 고통도 서로 털어놓고 나누고 위로하고 좋은 일 있어도 기쁨 서로 나누면서 마음이 즐거워지는 거죠. 외로움도 그러는 가운데 풀어지는 거죠.   1997년 5월 6일   
105    홍보시대 간판아리아【3】 댓글:  조회:6739  추천:17  2015-01-22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박문희      (전호의 계속)   (5)    “호잉래잉영”?    이런 간판어도 있나? 그밑에“好孕来孕婴”이란 한자가 병기돼있으니 망정이지 조선어글씨만 보고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수 없다. 이처럼 연변의 간판은 조선어표기야 틀리든 말든 병기된 한자표기덕에 그 가게가 무슨 가겐지 알아보지 못해 안달 떨어야 하는 고충은 없다.   언론에서 시때없이 암만 떠들어도 흐르는 강물에 칼질하는 격이 되고마는것도 아마 이런 상황때문이리라. 어디선가“한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조선어는 저리 가라”는 괴음이 지동치듯 울려오는것 같다. 소름이 끼친다.   조선어와 한어를 반드시 병용하게 돼있는 연변의 간판문화. 있는듯 없는듯 몽롱한“대등번역론리”......   간판번역은 소설번역과 달라서 쉽다면 너무 쉽고 어렵다면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다. 간판번역에서“대등번역론리”가 법적으로 채택된 일은 없다.“好孕来孕婴”은 그 업소의 뜻을 고객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어의 특수한 표달방식에 구애를 받음이 없이 순 조선말로 된 자체의 표달방식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 한어 몇글자에서 탈피하지 못한 결과 “호잉래잉영”이란 같잖은 직역으로 얼렁뚱땅 뭉때버린것이다.   이와 같은 례가 한두가지도 아니고 기수부지다. 때문에 이른바의“대등번역론리”를 깨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현재 한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고객을 사로잡을수있는 그런 조선말간판어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好孕来孕婴”을 그냥 물고늘어지자. “호잉래잉영”이란 직역이 별로라면 대관절 뭐라면 좋을가? “好孕来”는 “孕婴”의 수식어에 불과하니 내버려두고 “孕婴”은 임부와 영아를 뜻하니 간판명을 “xxx 임부와 영아”로 해볼가? 아니 잠간! 연길시내에 걸린 孕婴 관련 간판은 한두개가 아니라 십수개도 넘는다. 그런것을 모조리 “xxx임부영아”라고 해달수는 없다. 그럼“마미와 베이비”? 아니면 "임신부와 영아" 혹은“엄마와 아기”? 어느것을 취하든 “호잉래잉영”에 뒤질일은 없어보인다.    연변은 민족자치주지만 필경은 중국의 한 개 지역이므로 정식 간판등록은 한어로 하게 돼있다. 조선말로 가게이름을 지었다 해도 한역을 해서 신청해야 등록이 가능하다. “덕분”에 민족특색이 자못 짙은 간판어가 한무더기 생겨났다.   “놀러와bar/闹乐哇吧”•“나들이김밥집/拿得利紫菜饭”•“마시자/玛喜扎”•“푸름이독서사/璞润读书社”•“하나로마트/哈那露玛特”•“피자나라/比萨拿啦”•“데이트맥주옥/贴伊特啤酒屋”•“부뚜막/富多满”......    모두가 조선말을 한어로 번역해서 간판에 병기한 것, 그런 번역어가 연변 간판문화의 일대경관을 이루고있다. “누나국밥집”의 경우 “姐姐汤饭屋”이라 해도 안될것 없다. 그럼에도 기어이“努拿汤饭屋”라 음역해 올린것은 특정의 민족지역에서“努拿”란 언어 자체가 가지는 특수한 매력때문일 것이다.   “努拿汤饭屋”처럼 조선어를 한어로 음역하는 일은 허다한데 반해 한어에 대한 조선말음역의 활용이 실제수요를 따르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은 심사숙고해야 할바다. 한어로 된 간판어에서“鑫(흠)”자는“鑫欣•鑫鑫•鑫丰•鑫红•宏鑫”등으로 아주 흔하게 쓰이는 글이고 그 발음도 쉽고 편하다. 그런데“한자어음독법”에 의한 조선어발음은 “흠흔•흠흠•흠풍•흠홍•굉흠”등으로 굉장히 힘들고 말째다. 간판에 “흠홍신발/鑫红鞋店” 이라고 씌여있지만 “흠홍”두 글자는 극상해야 눈요기나 하는데 그칠뿐 입에 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눙신발”이라고 발음되는대로 적으면 입에 담을 것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조선족의 번역수준을 론하는건 무리다. 조선어를 한어로 번역해 올리는 이가 누군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 아닌가. 조, 한 “쌍어”에 막힘이 없는 조선족은 실상 두가지 번역의 대부분작업을 다 떠메고있다.   때문에 새로 등록하는 타민족가게들에서는 조선족 하면 모두가 번역의 달인인줄 알고 후한 번역료를 내걸고 점포의 작명에 이름번역까지 아무에게나 청탁을 해오는데 청을 받은 사람은 호기있게“즉시번역”을 해 주지만 가끔 본의 아니게 번역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한때는 시중에 새로 개발돼나왔다는 이른바의 “번역어플(软件)”을 맹신한 나머지 조선어를 모르는 일부에서 그런 “어플”로 번역한 점포이름을 간판에 새겨올리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져 사람들을 웃긴 일도 생겼었다. 그런데 근간에는 그런 일이 많이 준것 같다. 봄에 피는 꽃도 한철이라더니 “‘어플’맹신”풍조 역시 “한철”을 넘기기 어려운가보다.   (6)    점포이름을 잘 달면 수익성을 높일수 있다고들 한다. 그래선지 연길의 거리에 나서서 일부의 잘된 간판들을 보면 어쩐지 좋아지는 게 나의 기분이다.   “진달래마을아파트분양센터/金达莱小区售楼处”•“아기사랑/爱婴宝孕婴”•“뉴타운포장마차/新城布帐马车” • “사랑의 카페/爱心咖啡/Coffee in love” • “별이 빛나는 밤/星夜” • “양춘가절/艶阳天”...이런 간판들은 그속에서 좋은 어감이나 말맛을 느낄수 있어 좋다.   간판이라면 어감이 좋아야 한다. 연변의 간판에는 “鸭脖”이 “오리목” 지어는 “압발”로 올려지기 일쑤인데 어감상 별로 신통치가 않다. “압발”은 “앞발”과 발음이 같아 거부감부터 앞서고 “오리목”은 “가늘고 길게 켠 목재”의 의미라서 싫다. 그렇다고 “오리모가지”는 더욱 아니다. “猪头”를 “돼지머리”라 높여 쓰면서 오리한테는 “모가지”라고 낮추어야 할 하등의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오리목살전문”이라고 하든지 “오리목뼈구이” 혹은 “오리목덜미료리”로 하든지 하면 어감도 개선되고 말맛도 좀 살아나지 않을가?   다른 점포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해 “나만의 간판”을 만들어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연길에 죽가게가 자그만치 수십집이 있다. 그런데 가게이름들이 별로 신통치 않다. “죽집”이나 “팥죽” 또 간혹 “죽이야기”와 같은 색다른 이름도 있긴 하지만 어감상 따분해보이고 말맛같은걸 느낄수 없는 경우가 많다.   “죽락떡집/粥乐馅饼”이란 간판을 봐도 그렇다. 한어쪽은 그런대로 말맛이 있어보이지만 조선어쪽은 말맛의 냄새조차 없다. 한어를 보면 죽과 떡이 두루 다 주인공인줄 알겠는데 조선어를 보면 떡만 주인공이다. 이름을 “맛죽과호떡전문”이라 달았어도 “죽락떡집” 처럼은 싱겁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경우에 따라 죽가게 이름은 훨씬 더 다양할수 있다. “죽마을/맛죽고을/맛갈죽/ 맛갈참죽/미음전문/새우죽/소고기죽/죽전문점/죽배달전문점” 등등...   언젠가 한국의 어느 미식거리에서 “맛이 죽여줍니다”라는 명칭의 죽가게를 본적이 있다. 일곱글자에서 “죽 ”자 하나만 크고 유표하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 글씨로 썼는데 발상이 기발한 그 간판이 나한테는 식상한 내용의 간판과 차별화된 신선함을 안겨주는 충격적인 것이여서 지금까지 잊지를 못하고있다. 듣자니 “뒤죽박죽”이란 죽가게도 있다고 한다.   연길시 서시장 근처의 한 침실용품가게에 “따스안/达丝安”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따스한 느낌”이 든건 나만의 감각이였을가? “따스안”의 “모본”이 “따스한”임은 회의의 여지도 없고 “达丝安” 또한 당연히 “따스안”의 음역이다. “따스안”명칭 작명자의 고명한 점은 “한”을 “안”으로 바꾼데 있다. 별 볼일 없던 일개 규정어를 고유명사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따스안”이란 품위있고 근사한 침실용품 가게이름을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간판작명의 례로 “조은맥주옥/卓恩啤酒屋”, “몬니저맥주옥/勿忘啤酒屋” 등을 더 들수 있다.   이런 조선말간판의 이름이 좋다 함은 읽기에 편하고 거부감이 안들고 그속에 점포의 목표를 겨냥한 묘한 뉘앙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글자 하나 속에 깔린 티끌같은 묘한 뉘앙스와 지극히 미세한 어감의 차별이 아주 다정다감하게 안겨오는 좋은 간판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    조금 잘됐다는 느낌이 드는 간판 몇가지만 더 들어보자.   “삼일에 살 까기/伊姿美体瘦身”--이 간판을 보면 조, 한 두가지 문자의 글자 수는 같으나 내용은 판이하다. 사흘에 효과를 본다니 살까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것이다.   “구들박사/电热板”--“전열판”이 아닌 “구들박사”!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박사의 매력, 얼마나 좋은가.   “웰빙!멸치국수/大家快餐”--역시 제마끔인 조,한 명칭. 만약 “1 대 1의 대등번역”을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가? “대가속성음식점”? “따쟈스낵”? 그래도 “웰빙!멸치국수”가 월등히 우수해보인다. 연변이란 특정된 민족지역에서 “대가속성음식점/大家快餐” 하면 따분한 “동어반복”에 불과하겠지만 “웰빙!멸치국수/大家快餐” 하면 적어도 정보량이 배이상 증대(웰빙•멸치•국수)되는데다 생동성에 차별화된 독특미가 있다.   상기 실례는 “별도명명법”의 가능성 지어 필요성을 보여주고있다. 말하자면 공상부문에 등록된 “한어간판어”에 구애됨이 없이 점포의 자체수요에 따라 조선어간판명을 별도로 만들어올림을 허용하자는 것, 아니 허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대대적으로 제창하자는 것이다.   이를 관념적, 실천적으로 끈질기고 확실하게 밀어부친다면 연변 간판문화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발할수도 있겠다는것, 그러면 종당에 조선말같지 않은 조선어간판어를 모든 간판에서 몰아낼수도 있겠다는것이다.   [끝]    《문화시대》2014년 제6기  
104    홍보시대 간판아리아【2】 댓글:  조회:6881  추천:21  2014-11-05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박문희    (전호의 계속) (3)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저급적인 오류도 없고 억지번역으로 생기는 딱딱함과 어색함도 없어 친절하고도 자연스럽게 안겨오는 그런 생동하고도 창의적인 간판이 우리 도시의 모든 거리를 밝게 메웠으면! 이것이 시민들의 소망일것이다.   연변의 간판은 국내 다수지역과 달리 번역작업이 필수다.“번역”이라 하면 직역(直译), 음역(音译), 의역(意译) 등 수단이 동원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먼저 “직역”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古术点穴院”같은것은 “고술점혈원”으로 직역이 제격이며 그 근거도 찾아볼수 있다. “牛肉面”은 “우육면”으로 중국조선어사정위에서 만든 한조대역법에도 이미 규범화돼 올라있다.“都市驿站”,“松林阁”은 간판에 “도시쉼터”,“솔밭집”으로 씌여져 보기에 아주 정답게 안겨오지만 실은“도시역참”,“송림각”으로 직역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卫浴",“佳音发艺”,"日杂店",“供求世界”,"肥牛城"의 경우 그것을“위욕”, “가음발예”등으로 직역하는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卫浴”은 상황에 따라 “욕실설비/욕실용품/욕조”로, “肥牛城”은 “신선로/소고기신선로/샤브샤브”로, “劳保日杂”은 “로동보호용품일용잡화”로, “佳音发艺”는 “쟈인뷰티헤어/가음머리방” 등으로 조선말규범에도 맞고 발음도 편하게 풀어쓸 여유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许黑鸭”이란 료리는 2005년도 연길에서 탄생한 브랜드인데 “허흑압”이란 조선말 직역명칭을 입에 올리기가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그 맛에 대한 관심조차 별로 일으키지 못한듯하다. 만약“허씨네 깜장오리 특별메뉴”라든가 “연길브랜드—-까만오리”이런 식으로 했다면 어땠을가? 하다못해 음역을 취해 "쉬헤이야 특별료리전문"이라고 했어도 말번지기가 “허흑압”보다는 덜 어려웠을것이다.   “早敎中心-조교쎈터”. 여기서 "조교"는 분명 틀리는 “직역”이다. 대학에서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학술연구와 사무를 돕는 직위로“조교”가 있고 중국에서 영주권을 갖고 있는 조선교민도“조교”이다. 이런 상황에서 “早期敎育”의 준말인 “早敎”를 “조교”로 직역할수 없다.“早敎中心”은 “조기교육쎈터”로 돼야 한다.   실상 우리가 보다 자주 접하는 문제는 “사이비직역현상”이다. "검패(箭牌) 주방가구", "문봉(文风)서점", "리침(利晨)리발점", "돈화로명(鹿鸣)산장", "소군(晓军)부품" “소동 (晓东)특색구이”,“연화(艳花)보신탕”,“운룡(运隆)식당”,“가화(家合)식품”,“만국첨(万果甜)슈퍼”,“전구(站久)꼬치집”,“명사테마객전(客栈)”,...뭐 이런게 수두룩한데 피끗보면 문제가 별로 있어보이지 않지만 기실 모두가 오역이다. 모르긴 해도 箭(전)은 剑(검)과 한어발음이 같으니 당연히“검”일 것으로 착각했을수 있겠고, 같은 리유로 风(풍)은 峰(봉)과, 晨(신)은 钱其琛(전기침)의 琛자와, 鹿(록)은 路(로)와, 晓(효)는 小(소)와, 艳(염)은 宴(연)과, 隆(륭)은 龙(룡)과, 合(합)은 和(화)와, 果(과)는 国(국)과, 站(참)은 战(전), 栈(잔) 역시 战과 한어발음이 같으니 우에서 보는 간판어처럼 쓰는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을수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게 아닌것이다. 조선어는 필경 한어와는 별개의 언어체계인만큼 한어발음이 같다고 해서 한자어발음도 반드시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것이다. 더도 말고 “站,占,战” 세글자를 보자. 이 세 글자의 발음은 한어로는 똑같지만 조선어 한자음은 “참, 점, 전”으로 모두 다르다.   이제 상기문제를 산생시키는 뿌리요인을 따져보자. 이는 분명 조선어교육 부재의 필연적악과라고 생각한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아니, 조금도 심하지 않다. 우리 조선말어휘는 약 70%가 한자어로 되여있다. 한자를 바탕으로 조선말 한자음독법을 리용해 만들어낸 우리말낱말이 한자어다. 또한 한자를 주어진 위치에서 글자의 뜻과 일치하게 해석해 읽는 법이 훈독법이다. 한자어의 음독법으로“한래서왕(寒来暑往)”하면 훈독법으로 찰 한(寒), 올 래(来), 더울 서(暑), 갈 왕(往)이 되는데, 만약 2천자 가량 되는 상용한자어의 음독법을 모르면서도 문제가 안 생긴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한자어의 음과 훈을 익히면 평생 그 득을 보게 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조선어학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문제는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교수대강에 의한 한자어교육이 빠져있다는것이다. 바꾸어말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자음독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니 적지 않은 학부형들은 비싼 값을 치러가며 자식들에게 과외로 한자어공부(례컨대 천자문학습)를 시키기도 하지만 그게 필경은 제한적일수밖에 없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간판어를 정확하게 쓰라고 하면 못배운 사람들만 힘들뿐이다.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결국 못배운 사람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니 간판용어에 이런 문제가 많이 생기만 자연히 자학 등으로 한자어를 배워 언어학자로 된 이들과 번역관련실무를 맡은 공무원이나 전문가들만 욕을 도맡아먹게 돼있는것이다.   (4)    연길의 약방, 아니 중국 전역의 약방간판은 덮어놓고 모두 “대약방”이다. 크면 물론 대약방, 작아도 대약방이다. 약방처럼 평등한 업종이 약방말고 또 있을가 의심될 정도다. 기실 연길의 약방치고 진짜 큰 약방이 있기나 한가? 대부분 작은것 같고 중등정도의 약방도 별로 있는것 같지를 아니하다. 그래도 간판에는 큰“大”자가 약방의 감초처럼 붙어다니는데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글자랑비다. 모든 약방에 다 큰“대”자가 붙는다 할때 사실 그“대”자는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전국 각지 모든 약방의 “대”자를 가차없이 없애라고 호소하고 싶다. 물론 호소하나마나 한 일이겠지만.   한데, 모든 약방들을 분별없이 다 대약방이라고 이름 달아주는것도 그렇지만 성곽 성(城)자를 쓰지 않으면 마치나 간판이 안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城)자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문제다. 한족들은 워낙 집주변에 성을 잘 쌓으니까 리해되는 점이 있지만 그옛날 쪽박차고 살길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조선족은 집주변에 싸리나 옥수수대로 울타리나 두르는데 습관되여 성(城)하고는 분명 거리가 있는데도 누구한테 뒤질세라 간판에 성을 쌓으니 참 기분이 어수선하다. 鞋城-신성, 串城-뀀성, 红酒城-와인성, 台球城-당구성, 电子城-전자성, 批发城-도매성, 饺子城-물만두성...말짱 이런 식이다. 그래 “성”자를 모조리 뽑아던지고 “모카와인, 신주물만두, 양고기꼬치, 신사당구, 아리랑전자, 신발도매” 이런 알맹이만 남겨두면 정말 간판이 안된다는 말인가?   한어간판어가 조선말로 이상하게 “번역”되는 상황을 흔히 볼수 있다. “日月红”이 “해달홍”으로,“一口香”이“한입향”으로,“异火香”이“이불향”으로,“碳烤家”가 “구이가”로, "鲜鱼馆"이 "선물고기집"으로,"梦乡园" 이 "꿈향원"으로 번역된 례가 그렇다. 여기서 日月红이나 一口香 등은 가게의 명칭으로 명사화된것인데 간판은 그것을 마음대로 의역(“日月红”의 “해달”,“一口香”의 “한입”)혹은 직역(“日月红”의 “홍”,“一口香”의 “향”) 을 해서 “해달홍”, “한입향”으로 합성했다. “이불향”, “구이가”, "선물고기집"이나 "꿈향원"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는 번역이 아니다. 우리말을 어지럽혀 웃음거리를 빚어내는것이다.   의역어와 직역어의 합성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간판어“骨汤米粉”을 골탕쌀국수로 번역하면 큰일난다. “그집으로 골탕먹으러 가자!” 하면 말이 되겠는가? 국수집의 립장에서도 손님에게 “골탕을 먹인다”면 죄되는 일밖에 없을것이다. 때문에 점포이름을 “뼈탕쌀국수집”으로 하는게 비교적 안전하다. 그런데 실제 "뼈탕집에 가서 골탕먹었다"는 말은 없지만 "골탕집에 가서 뼈탕 먹었다"는 식의 말은 있다고 한다.   “달리쿨문신(跑酷刺青)”이란 간판어에서“刺青”과 “문신”은 정확히 대응되는 언어지만 “달리쿨”은 역시 웃음거리다. “달리쿨”이란 대체 어디서 온 이름일가?“달리다(跑)”와 “쿨하다(酷)”에서 왔을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사 “달리다”의 어근 “달리”와 형용사“쿨하다(酷)”의 어근 “쿨”자만 따다가 한데 붙이는 식의 이런 고유명사 합성법은 있을수 없다. 실제로 "跑酷刺青"의 업소주인은 업체이름을 체육종목의 일종인 "跑酷(영어표기 Parkour)"에서 따왔을수 있다. 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업소의 조선말명칭은 “파쿠르문신”이여야 맞다.   간판어를 취급할 때 정말 주의해야 할점이 있다. 원 간판어의 뜻이 뭔지를 똑똑히 알고 번역을 해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名花串城/명꽃뀀성”이란 간판을 보면 명꽃이란 말이 이상하다. 명화면 명화지 명꽃이라니? 인터넷검색을 해보면 한국의 진도지방 말로 면화를 명꽃이라 한다는 것이 바로 나타난다. 그러니“名花”는 의례 “명화”로 바뀌여야 한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串城”도 “뀀성”으로 할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양고기/소고기)꼬치”,“꼬치전문점”아니면“꼬치구이” 혹은 “꼬치맛집”과 같은 정갈한 우리말로 새겨올려야 하는것이다.   “索菲亚衣柜/쏘베야옷궤”에도 문제가 있다. 옷 의(衣)에 궤 궤(柜)이니 당연히 “옷궤”겠거니 하고 “쏘베야옷궤”라고 했는데 “衣柜”란 실상“옷장, 장롱”, 말하자면 한어의 立柜,衣橱를 두고하는 말이고 “옷궤”란 “옷을 넣어 두는 나무상자”, 즉 한어의 “箱笼”, 우리말의 휴대용 옷궤나 트렁크를 일컬음이다. 그러니 홍보물의 원뜻과는 거리가 먼것이다. “索菲亚(Sophia) ”도 “쏘베야”가 아니라“소피아”로 해야 옳다.   서시장에 “土家酱香饼”이란 음식가게가 있는데 조선말간판어는 “토집장향병”이다. 한데  가게명칭중의 “土家”란 사실“흙집”이나 “토집”이 아니라 우리나라 56개 민족의 하나인 “투쟈족”을 일컫는다. 따라서 “酱香饼”이란 투쟈족의“전통맛떡”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런데 “土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은채 성급하게 “번역”을 해 올리다보니 이런 웃도울도 못할 문제가 빚어진것이다. 투쟈족관련자가 이런 사실을 아는 나들에는 모종의 불쾌한 일도 생길만 하다. 이런 의미불명의 간판어가 지금도 장마당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하고있으니 투쟈족형제들과 매일 그 간판을 보는 손님들에게는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다음 호에 이음) 《문화시대》2014년 제5기  
103    홍보시대 간판아리아【1】 댓글:  조회:6980  추천:25  2014-10-04
         홍보시대 간판아리아           (1)  오늘 시대는 홍보시대다. 홍보를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나라든 기업이든 개개인이든 막론하고)를 세상에,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시대다. 모든 업체에 걸려있는 간판은 바로 그 업체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런 간판들이 모이면 도시의 얼굴이 된다.   30년 전 연변의 거리를 처음 와 보는 한국 손님들이“우리나라(한국) 70년대 초반의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시장경제가 갓 도입될 무렵 길가의 낮고 꾀죄죄한 점포들 이마에 초라한 간판들이 무질서하게 달려서 호객하던 때를 련상하면 참말 격세지감이 드는 오늘이다.   간판문화가 무질서에서 유질서로 급격히 전환하는 요즘인지라 물론 꼬집을 점이 수두룩하지만 모든 일에 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단술에 배부르기를 바라겠는가? 금년 초인가 연길공원 입구쪽에서 큰길 건너 20층도 더 돼보이는 건물의 앞면에 다닥다닥 (그러나 질서있게) 붙어있는 간판들을 한참씩이나 바라보면서 퍽이나 감개무량해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몹시 뜻밖의 일이였던 까닭에 그 일로부터 받은 충격이 꽤나 컸던것 같다. 그날 나는 인터넷사이트를 유람하던중 吉林边务督办公署에 대한 글제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 내용물을 읽고있었는데 무심중 잘못 번역이 된 간판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吉林边务督办公署를 소개한 글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연길시 하남가두 광화로 서광골목 7-17번지. 고층건물속에 포위되여있는 자그마하고 낡은 2층건물, 이 건물이 바로 연길에서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청조시기의 유일한 건축물이며 길림성중점보호문화재인 길림변무독판공서—일명 수변루(吉林边务督办公署楼--戍边楼, 도윤루라고도 한다)이다...그런데 지금은 현판 사진에 보듯이 (‘吉林边务督办公署’가) ‘길림변무독사무서’라고 되여있다. ”   사진을 보니 현판이 두개가 가지런히 걸렸는데 왼쪽은 한어원문이고 오른쪽은 조선어 번역문이였다. 원문은“吉林省重点文物保护单位 吉林边务督办公署吉林省人民政府 1999年2月26日公布”인데 번역문에는 “吉林边务督办公署”가 “길림변무독사무서” 로 되여있고 락관의 “公布”는 “공보”로 되여있었다.   “길림변무독사무서”라, 그러니 督办公署의 督이 앞의 边务에 붙어 边务督이 되고 나머지 办公署가“사무서”로 번역된 결과 督办과 公署가 아주 엉뚱한 언어로 바뀌고만것이다. 그리고 “公布 (공포)”도 의미가 완전히 다른 언어인 “공보(公报)”로 탈바꿈해 결국 성인민정부의 엄숙한 의도가 번역문에서는 완전히 왜곡돼 전달된것이였다.   필자는1999년도에 걸린 이 현판이 자그만치 15년이나 흘러가는 사이 혹시 시정이 됐을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에 바로 그 이튿날 수변루를 직방 찾아갔었다. 섭섭하게도 실망이였다. 15년전에 걸린 현판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본 자리에 견결히 붙어있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간판문제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야기했던가보다. 나에게는 진짜 필요이상인 스마트폰까지 하나 사가지고 기회만 생기면 간판찍어모으기를 했으니말이다. 한데 그러다보니 간판모양뿐 아니라 간판의 내용에 대해서까지 관찰하게 되였는데 와중에 일련의 문제를 두루 발견하면서 그것이 이 칼럼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됐던 것이다.   (2)    연변의 간판문화의 력사는 기실 아주 짧다. 외계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언어도 엄청난 변화를 겪고있으며 그런 변화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현재 우리의 간판문화는 기실 외적이미지의 정돈미화에 꾸준히 성과를 올리는 한편 내용물의 혼돈상황개선에 박차를 가하는 시초단계라고 봐도 무방할것이다.   이런 형편에서도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간판어는 다양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조,한 두가지 문자는 법적으로 병용하도록 돼있는것인데 그중 조선어는 또 실질상 대한민국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어, 중국조선어가 혼용중인 상태이며 동시에 한국으로부터 외래어도 대거 수입되고있다. 그 외 영어, 일어, 로씨야어, 회족어 지어 윁남어까지도  적게많게 간판언어들의 향연에 끼여들고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연변의 간판은 아직 “전국시대”에 처해있다고 볼수 있다. 아래의 례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간판에는 “소고기국”이 있는가 하면 “수육국밥”,“우육탕”,“소탕”이 있으며 “전골”,“신선로”가 있는가 하면“샤브샤브”가 있으며“천층떡(千层酥餠)”이 있는가 하면“바삭떡(酥餠)”이 있으며“뀀점”,“뀀성”, “뀀왕”,“대뀀”,“대뀀왕”이 있는가 하면“미친꼬치(味亲串)집”이 있으며 “담배술전매점”이 있느냐 하면“담배술점”,“담배술행”,“연주행(烟酒行)”이 있으며“구두전문”,“신발나라”가 있는가 하면“신성(鞋城)”,“신점(鞋店)”도 있으며 “머리방”,“머리마당”,“미발”,“발예(发艺)”가 있는가 하면 “헤어클럽”,“헤어컨디션”,“헤어스타일”,“헤어시티”,“헤어뷰티샵”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麻辣香锅”하나가 “매운요리”,“매운료리”,“마라료리”,“마라볶음”으로, 지어“마라향솥”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같은 “疯狂烤翅”도 점포나름대로 “뢰지핫닭날개”혹은 “미더닭날개”가 되기도 한다. “疯狂”이 “狂疯”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狂疯鸡”가 그것이다. 여기에 붙은 조선어간판어는 “매드후라이치킨”이다.   등록상표가“瘦猴”인 瘦猴麻辣烫은 연길시민 류청송씨가 지난세기 90년대에 창출한 브랜드인데 아주 잘 나가는 모양, 전국 각지에 체인점도 두고있다. 그런데 그 간판이 이상하다. “瘦猴”가 “원숭이”,“여윈원숭이”로 된것이 있느냐 하면 “말라꽹이”로 된것도 있다.   이런 례는 얼마든지 들수 있다. 만일 우리의 간판어에 오류가 많거나 또는 그 언어가 어느것이 옳은지 가려내기 힘들거나 사람을 많이 웃길 정도로 추락되여있다면 그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이런 언어들을 모종 규칙에 맞게 규제한다는게 쉬울리 만무하며 하루한시의 해결은 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일부에 존재하는 혼란상일지라도 너무 오래 방치해두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그 영향을 과소평가할수는 없으니까.   어쨌거나 문제의 시정을 위해서는 간판문화현황을 잘 파악하는것이 우선일것이다. 이른바의 현황이라야 한어로 작성된 간판어를 조선어로 번역(汉译朝)해서 병기한 것, 조선어로 작성이 된것을 한어로 번역(朝译汉)해서 병기한 것, 병용한 조, 한 두가지 언어가 직접 대응되지는 않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동일한 홍보목표를 노린것, 세가지 혹은 그이상의 언어(이미지언어 망라)를 “짬뽕”시켜 하나의 홍보목표를 노린것 등등 뭐 이런 것들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제 상기 몇가지 현상의 범위내에서 일부 두드러진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해 자유롭게 의논해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 이음) 《문화시대》2014년 제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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