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속의 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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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7 ]

17    영화 <<밀정>>의 개봉을 기대하며... 댓글:  조회:1595  추천:0  2016-09-05
한국에서 영화 을 곧 개봉할거라기에 은근히 살짝 가슴을 설레이며 기대하고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엄청 좋아하는 송광호가 주역을 한다는것도 중요하겠지만 역사적인 실존인물을 배경으로 한다는것에 더 관심거리가 된다. 영화 에서 배우 이정재가 아주 생동하게 부각시킨 주인공 염석진이란 인물에 깊게 빠져서 지금도 시간만 나면 영화를 감상하면서 그 당시 특수한 시대적배경하에서 초반에는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심신적으로 상상할수 없는 역경을 겪으면서 나중에 스스로  일본군 밀정이나 첩자로 변신했던 그네들을 인간적으로 차차 이해하는 과정이다. 며칠전 우연하게 자료들을 뒤적거리다가 류순호가 쓴 전광 오성륜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오기에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그 시대의 비운의 인물들을 상상해 보았다. 한때는 상해 황포강 외탄에서, 또 한때는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또 한때는 광주 황포군관학교에서, 또 한때는 만주 첩첩산중에서 열정에 차넘쳐서 독립운동에 뛰여 들었지만 그 사이사이 수차에 걸친 부동한 인간 파벌들간의 처참한 투쟁을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으면서 또한 남들이 상상 못했던 고민도 많았으리라 믿는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또 인테넷으로 “반민특위 김일성 관련 증언---김창영”이란 내용을 접하면서 순간적으로나마 귀순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 인간 김일성에 대해 더 동정이 가는 순간이였다. 그 당시 김일성이 제안한 귀순 조건:  제1은 귀순공작의 책임자인 김창영(피의자)을 間島省 혹은 通化省의 省長으로 임명하여 귀순 후 장구히 一同의 신변을 보장할 것과 제2는 同省 내 적당한 지역을 택하여 귀농생활을 하되 일반 행정에 대하여는 만주국법에 전반적으로 순응하나 치안과 경비에 대하여서만은 정부에서 간섭치 말고 귀순부대에 일임하여 줄 것 나중에 귀순이 성사되지 못한 원인: 이종락 입산 翌日 마침 軍長 양정우가 약 400명 부하를 인솔하고 該 산중에 來到하여 이종락을 납치하고 김일성에게 대하여는 귀순공작원(前記 박차석, 이종락)과의 연락한 것을 大怒 문책하고, 즉시 김일성 부대의 全軍을 장백현으로 이동을 命하였다고 합니다. 만주땅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귀순한... 前 양정우 부하 제1사단장 최주봉[崔冑峯], 김일성의 상관이던 前 중대장 이종락[李宗洛], 김일성 친구 박차석[朴且石] 등 인물들도 있었으며,그밖에 귀순공작에 직접 참여한 조선인들로는; 吉林省 내 輝南縣 及 濛江縣 공작반장 조선인 안광훈[安光勳](독립군으로 귀순한 후 당시 省 경좌), 間島省 공작반 총지휘자 조선인 유홍순[劉鴻洵](간도성 차장), 同省 延吉縣 공작반장 조선인 김송렬[金松烈](정보 제공에 종사한 자), 同省 汪淸縣 공작반장 조선인 계난수[桂蘭秀](前 간도성 사무관), 등등 이 있다. 김창영 심문기록 일부 채취... 반민특위조사기록 > 김창영 > 피의자신문조서(제4회) : 단기 4282년[1949] 4월 30일 조사관 신정호[申政浩] 문: 그대는 당시 소위 대동아전쟁이 필승되리라고 생각하였던가. 답: 본인은 사실에 있어 일본이 패전될 줄은 짐작하였으나 그렇게 속히 항복할 줄은 몰랐습니다. 문: 일본이 패전될 줄을 알았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최후까지 倭政을 협조하였나. 답: 일본이 패전될 줄은 확실히 알았고 패전 전후의 조선인을 위하여는 관직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최후까지 그 職에 있었습니다. 문: 관직을 이용하여 조선인에게 이익을 준 일은 무엇이며, 소위 대동아전쟁에 害를 준 일은 무엇인가. 답: 본인이 만주국 독찰관 시대로부터 8년간에 亘하여 만주인 2,000여 명과 조선인 김일성[金日成] 부하 이외 간부급 5, 60명의 생명을 구하였고, 국내 전남 도참여관 당시에는 光州醫專을 설립하기 위하여 上海 군수공업가 손창식[孫昌植]에게서 일금 100만 원을 醵出케 하였으며, 전북 錦山군수 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 七百義士와 같이 순국하신 重峯 조헌[趙憲] 선생의 享祀 전답을 영구 보존키 위하여 재단법인을 조직하였으며, 소위 대동아전쟁에 害를 준 일은 없습니다. ............ 상기 심문기록을 통해서 그당시 일본군에 몸담고 있었던 소위 친일 조선군인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읽어낼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은 한낫 거세차게 흘러가는 역사란 강물위의 낙엽 하나에 불과한데, 이제와서 그 낙엽들의 잘잘못을 따져보았자 무었하랴???
16    우리 후세들,어떤 력사관을 가져야 할가 댓글:  조회:1629  추천:0  2016-09-05
요즘 항주는 서호 호반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관계(2016년 9월 4일~5일)로 벌써 분주하다. 항주 및 주변 지역의 도로 통제와 운전 제한을 시행하고 있고, 절강성도 항주시의 통제방침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 되었든 서호를 중심으로 사방 수 km가 비상통제구역 조치가 취해졌고, 일반인의 통행금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통에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책장 안에 꽂혀있는 케케묵은 책들을 두루두루 뒤적이며 망중한 즐기고 있다. 그러다가 어제 인터넷상에 고(故) 김학철 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필자 또한 간만에 컴퓨터 자판기에 손을 얹으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작년에 출간했던 연번작가협회 주석 최국철 선생님의 책《석정 평전 —최후의 결전가》에서 다음 한 구절을 이 지면에 옮겨 보겠다. 우리 후세들은 어떤 력사관을 가져야 할가를 잠간 고민해보고 있다. 들어가는 글 뜨거운 선렬의 피 천지간에 타오르고 절망과 어둠의 벽을 녹여내고 마침내 밝은 빛을 뿜어내니 아! 강산은 생명의 꽃 피여내고 슬픔은 피물 씻어 흘러갔다. 혼백은 한마리 새기 되여 영겁을 지켜본다. 잊지 말자. 칠흑같은 그 시절, 그 아픔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없으리라. 동방의 붉은 해살 인류 평화 선봉이 되여 무궁한 번영의 터전 이룰것을 마음 굳게 다짐한다. 이 문구는 석정 윤세주의 흉상을 모신 한국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 베껴온 현대판 “격문”으로 2007년12월, 한국의 한 미술대학 교수가 쓴것이다. 글쓰기가 전문직이 아닌듯한 이 교수의 글은 현재 우리들의 보편적인 감성과 잠재해있던 격앙을 드러낸 글이여서 첫 페지에 옮겨왔다. 몇년전 섬북의 황토고원에서 의용대가 남긴 족적을 답사하면서부터 교통도구도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의 렬악한 환경에서 우리 선인들이 어떻게 이런 오지까지 흘러들어왔을가 하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해보았고 이번에 석정의 초상을 찾아 동방의 “그랜드캐년”이라고 하는 태항산으로 들어가면서 우리의 선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가 하는 물음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졌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초라하게 만들어주는 태항산, 하늘을 찌를듯이 창검처럼 들쑹날쑹하게 치솟은 험산준령들과 기암괴석이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위압감이 아니라 태항산이 내포한 그 어떤 상징성을 풀어야 한다는 숙제가 압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숙제는 의용대와 우리들의 주인공인 석정의 초상을 태항산을 배경으로 잘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어졌다. 대륙을 주름잡았다는 비유는 이런 경우를 두고 생긴 말이다. 그러면서 “몇백명의 의용대가 그렇게 넓은 중국의 대륙에서 대체 무슨 작용을 했나?”라는 후세들의 물음에 어떻게 만족스러운 답을 줄가를 고심했다.《석정 윤세주 평전》을 쓰는 내내 이런 의문에 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고 그것이《석정 윤세주 평전》을 쓰게 되는 력동성을 바꾸어오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남경에서, 무한에서, 중경에서, 계림에서, 태항산에서 석정 윤세주의 초상을 찾았지만 현재 그 어디에도 렬사가 남긴 물리적인 자취는 없다. 중국측에 렬사에 대한 1차적인 자료가 없는 셈이다. 하기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보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평전을 구상할수 밖에 없었다. 석정은 꼭 써야 하는 위인이다. 그가 남긴 내셔널리즘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석정이라는 인간 자체를 조명하고 싶고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그리고 동족 항일단체들과 련대하는 과정에서 우화(羽化)되는 현상들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구체적으로 석정이라는 인간이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것이 필자의 욕심이고 후배로서의 의무이다. 한국에는 독립기념관이 세곳이 있는데 천안(국립), 안동(지방), 밀양(지방)이다. 필자는 선후로 이 세곳을 다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고 무슨 자료가 없을가 기웃거려보았다. 그러면서 은연중 참으로 묘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따져보면 묘하다는 언어로는 도저히 풀이가 안되지만 력사 사실과 기술에 대한 형평성 부재에 가슴이 저렸다. 정의와 공평을 추구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대하는 력사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에는 한국독립기념관(국립)이라는 그릇이 너무 작아보였다. 이데올로기문제라고 몰아가기에는 너무 모자가 큰것 같고 경향성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거워보였다. 한국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정성을 들였고 편폭 역시 그만큼 많이 차지한 반면 그 시대를 함께 한 조연의용군에 대한 소개는 초라한 몇장의 사진과 성의 없는 소개에 그친것이다. 그리고 한국사도 조선의용대에 관해 한쪽 분량을 다룬 반면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해서는 두쪽 분량으로 다루었다. 일본군과 총을 맞대고 싸워본적이 없는 광복군에 대한 편폭이 많은것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용대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있다는것에 질의하고 싶은것이다. 우리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로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외면하고있는 실정이다. 리념의 산물, 분단의 산물 등등 해석이 구구하지만 우리들은 분명 지속적으로 단추를 잘못 끼우고있다. 1993년, 항일투사 김학철옹이 한국정부에 조선의용대기념비라도 세워달라고 한 작은 건의도 묵살되였다. 특정한 력사에 리념이라는 옷을 입혀놓고 그 옷을 벗기는게 달갑지 않고 력사를 공유하고 싶지 않기때문일가. 평전을 쓰는 준비과정에서도 한국의 모 단체에서는 석정이 사회주의계렬에 엮이는것을 달갑지 않아했고 더구나 중국공산당과의 관계에 엮이는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했다. 분명 석정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말 달리”며 항일에 투신했고 태항산에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전선총사령부에 귀속되였으며 팔로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항전하다가 최후를 마쳤는데도 이런 객관화된 사실 관계를 외면하고 싶어했다. 석정은 중국 건국공신 28인중의 한분인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과 하북성 섭현 석문촌 련화산기슭에 나란히 안치되였다가 현재 하북성 한단시”진기로예렬사릉원”에 다시 이장되여 기녑비를 세워 모셔져있다. 그렇다고 볼 때 리념, 계렬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중국의 항전 시각에서도 석정이라는 인물을 얼마든지 재평가할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중국정부측에서 출판한《항일전쟁중의 국제우호인사》23명중에 석정이 있다. 이는 석정 윤세주에 대한 중국정부측의 최대의 평가이다. 김원봉은 없지만 석정은 있다. 석정은 우리들이 잊기 시작하고 기억에서 바야흐로 사리지는 항일의용대 전사이다. “석정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우에서 어떤 력사를 만들어내겠는가?”하는 물음은 우리들 자신이 이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스무살, 서른살, 마흔살의 석정의 초상에서 그가 만약 그후의 인생을 살아갔다면 과연 무었을 했을가 하는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물음은 어찌 보면 우문일수도 있다. 다행히 이 우문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우리들의 력사관에 대한 질책일수도 있다는 점이 의미가 심장하다. 우리들의 현실은 현문현답보다 번복해서 제기되는 우문현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세들의 력사관을 진실하게 정비시킬수도 있다는 아이로니를 경전처럼 의식해보아야 하지 않을가 생각해보게 한다. 이것이 렬사가 지킨 터전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후대들의 자세라고 인지한다. ◈ 江南行僧 연변통보 2016-08-25
15    고려사에 얽힌 인연들 댓글:  조회:1607  추천:0  2015-12-09
항주는 예로부터 《동남불국(东南佛国)》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는 송나라 황실이 수도를 하남개봉 (河南开封)에서 항주로 옮긴 후 항주의 크고작은 사찰이 480여 개에 달하였다. 그중에서 고려사(高丽寺)는 령은사(灵隐寺), 천축삼사(天竺三寺) 등과 함께 세세대대로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만사만물이 생겨나고 환멸되는 모든것이 인연(因缘) 때문이라고 한다. “前缘相生 因也: 现相助成 缘也.” 어찌보면 오늘날 항주서호변의 울창한 수림속 한가운데에《혜인고려사(慧因高丽寺)》라는 편액을 높이 걸고 조용하게 서있는 고려사(高丽寺)의 모든것도 다 인연(因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오늘 잠간 고려사(高丽寺)에 얽힌 그 인연(因缘)들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고려사는 기원 927년(后塘天成2년) 오월왕 전류(钱鏐)에 의해 최초로 세워졌으며 당시에는《헤인선원(慧因禅院)》라고 불리웠다. 고려사는 전류(钱鏐)가 오월국(吴越国)을 정식으로 창립하고 제일 처음으로 진행한 대규모적인 사찰공사였으니 뢰봉탑(雷峰塔)보다는 48년이 앞서였고 륙화탑(六和塔) 보다는 43년이 앞서였다. 사서(史书)의 기록들에 보면 오월국 왕실과 조선반도와의 인연(因缘)이 각별했는바 당시 조선반도 북쪽에 새로 나라를 세운 고려국(高丽国)과 조선반도 남쪽의 후백제 견훤왕 사이의 세력다툼 중재(仲裁)를 오월국에서 서주었다고 하니 서로간에 사절단 및 민간적인 교류는 더 말할나위 없이 빈번했을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원 1055년, 고려왕 문종왕휘(文宗王徽)의 넷째아들로 태여난 의천법사(义天法师)가 어려서부터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할것을 꿈꾸면서 당시 항주일대에서 유명했던 정원법사(净源法师) 등과 서신왕래를 해오다가 기원 1085년에 끝내 송나라 상인 고림녕(高林宁)의 상선에 몰래 올라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오게된다. 뒤늦게야 소식을 알게 된 고려왕실에서 왕자의 신분에 맞는 격을 차려서 사절단을 배동시켰는데 송나라 조정에서도 매우 큰 중시를 돌리고 특별 배동관원을 파견하여 의천법사가 중국에서 널리 불법을 구할것(游方求法)을 허락하였다. 중국과 조선반도사이의 불교교류는 당나라시기의 견당사를 포함하여 오래전부터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여 왔는데 그중에는 후세에 중국불교 4대보살 중의 하나인 지장보살(地藏菩萨)로 추대된 신라왕자 출신의 김교각(金乔觉)을 비롯하여 항주지역에 발자취를 남기고 간 고대한국의 유명한 승려들만도 근 30여 명에 이르른다. 송나라 황궁에서 철종(哲宗)황제를 배알한 의천법사는 이미전부터 서신왕래가 있던 정원법사(净源法师)를 찾아 항주 혜인사(慧因寺)에 와서 정중하게 제자례의(弟子礼仪)를 차리고 머물면서 본격적인 화엄경전(华严经典) 연구를 시작하고 정원법사(净源法师), 유성법사(有诚法师), 변재법사(辩才法师) 등 여러 종파 유명한 고승 50여 명과 친분을 쌓고 인연(因缘)을 맺었으며 나중에 고려국에 돌아가서 현재 한국불교의 중요한 한 교파인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게 된다. 혜인사(慧因寺)가 고려사(高丽寺)로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것이 바로 의천대사가 다녀간 후 의천대사와 고려왕실에서 선후로 《화엄경(华严经)》3부 170권을 혜인하사에 증송했고 또 백금 이천냥을 보내와 화엄경장경각(华严经藏经阁)과 보살상(菩萨像)을 세우도록 한 다음부터 이다. 중국 당조말년부터 시작된 전란으로 중국내의 불교경전들이 많이 소실되였었는데 의천대사가 증송한 불교경전으로 혜인사는 《화엄제일도장(华严第一道场)》으로 중국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점차적으로 고려사(高丽寺)로 널리 불리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려왕실과 왕자출신 의천법사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찰안에 특별히 고려왕사(高丽王祠)가 세워졌으며 그렇게 고려사는 송(宋) 원(元) 두 조대를 거치면서 근 300년동한 흥성기를 계속하다가 명(明) 청(清) 두 조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인연(因缘)으로 점차 몰락하게 된다. 항주의 향간(乡间)에서는 고려사가 점차 몰락하게 된것을 소동파(苏东坡)와의 인연(因缘)과 연관된다고 전해오고 있다. 기원 1089년 의천법사하고 친분이 깊었던 정원법사(净源法师)의 원적(圆寂) 1주년을 맞으며 의천대사가 특사를 파견하여 금탑2두개를 공납하면서 정원법사의 사리(舍利)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항주지사(杭州刺史)로 있던 소동파가 송나라 황실과 고려국과의 교류를 극구 반대하는 상서(上书)를 올리고 의천대사의 특사들을 억류하는 악연(恶缘)이 있었으며, 후에는 또 소동파가 서호보수공사를 하면서 호수바닥에 깔린 갯벌을 모아서 제방을 쌓으려고 하였는데 갯벌흙들이 너무 물렁하여 근본 제방을 쌓을수가 없었다. 소동파는 자신의 몸으로 고려사를 보호한다(以身护法) 약속을 하면서 고려사의 승려들이 사찰의 풍수(风水)를 파괴한다며 극구 말리는것도 마다하고 끝끝내 고려사앞의 적산(赤山)을 파내리고 그 흙으로 서호에 제방을 쌓은것이 바로 오늘날 항주서호의 소제(苏堤)이다. 불교에서 윤회(轮回)를 많이 말하는것처럼 당년에 소동파와 고려사 사이에 악연(恶缘)이 맺어졌다면 지난 구십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고려사 옛터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현대식호텔이 지어지기까지 하였다가 결국엔 또 그 소동파와의 인연(因缘)으로 인하여 고려사가 세상사람들 앞에 선듯 다시 다가서게 된다. 1996년 2월 초에 고려사옛터에 세워진 화가산장(花家山庄)호텔 시공과정에서 큰 석상(石像)이 출토되였는데 나중에 고고학자들의 검증을 거쳐 그것이 바로 당년에 소동파가 이신호법(以身护法)할것을 약속하며 고려사에 만들어졌던 소동파의 호법상(护法像)이 였음이 확인되였다. 그때가 한창 항주시정부에서 서호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준비사업을 의사일정에 놓고 서호의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서호에 관련된 모든 역사문화유산도 재발굴하고 보호하는것을 중요시 할 때 였으니 당년에 항주시시장으로 있으며 서호의 복구사업에 큰 심혈을 기울였던 소동파와 그와 연관된 고려사 또한 정부에서 큰 중시를 돌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밖에도 고려사의 복구사업에 은근히 큰 힘을 기울인 또 다른 인연(因缘)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의천대사의 고향땅으로부터 온 한국 사회과확원 고(故)김준엽(金俊烨) 원장을 비롯한 인연(因缘)들이다. 김준엽선생은 젊은시절 일본군에 징병되여 중국에 왔다가 산동전선(山东战线)에서 탈출한 후 천신만고를 거쳐 중경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은후 한국광복군총사령관 리청천(李青天)의 부관으로 임명된다. 그곳에서 어려서부터 항주에서 성장한 민영주(闵泳珠) 여사와 결혼하게 되는데, 민여사의 부친이면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민필호(闵弼镐) 선생이고 민필호선생의 장인이면 중국 신해혁명시기부터 손중산(孙中山) 진기미(陈其美) 등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오던 신규식(申奎植) 선생이다. 당년에 신규식선생은 “고려사류제(高丽寺留题)”란 시까지 쓰고 모금운동을 하면서 고려사복구에 노력하였다가 전란으로 어쩔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한국에 돌아간 김준엽선생은 후에 고려대학 제9대 총장까지 지내면서 한국에서 많은 사회활동과 학술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며 직접 《한국중국학회》,《한국공산권연구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지녔으며 《한국국제정치학회》명예이사장,《한국사회과학원》원장 등을 력임하였다. 그러다가 한중수교가 이루어지자마 곧바로 중국의 북경대학 남경대학을 비롯한 십여개 대학교에 한국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을 추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1993년 항주대학(현 절강대학)에 한국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절강성과 항주시의 유관 정부관계자들하고 고려사복구사업,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기념관설립 및 당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부부장까지 지냈던 민제호(김준엽선생 부인 민여사의 큰아버지)선생의 항주서호변의 묘지를 찾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수많은 인연(因缘)들로 오늘의 고려사는 근근히 사찰만이 아닌 중한 정치, 문화, 종교 교류의 장으로 이곳 강남땅에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가고 있으며 또 새롭게 항주땅에서 생활의 터전을 다져가고 있는 우리 민족 후세들의 긍지와 자랑으로 세세대대로 이어져 갈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2013년 5월 항주서호가에서 강남행자 정리
14    카톨릭교황과 불교지장왕(地藏王) 댓글:  조회:1539  추천:0  2015-12-09
그저께가 음력으로 7월 30일이라며 이곳 강남시골의 동네골목골목마다 촛불과 향불을 훤하게 밝히고 지장왕절(地藏王節)을 성황리에 치럿다. 향간에서는 지장왕절을 지장왕열반득도일이라고 하고 지장왕보살생일이라고 한다. 20여년전 내가 처음으로 강남에 왔을적에서는 간간이 이루어지던 행사가 최근 몇년전부터 점점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다. 불교에서의 지장보살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한후 오십륙억칠천륙백만년이란 세월후에 미륵보살이 성불하고 이세상에 출세하기까지의 오랜 기간동안의 암흑기간에 부처님을 대신해서 중생을 교화하게 되는 중임을 책임진 보살이다. 그런 지장보살이 중국불교에서는 역사에 실존하는 인물로 존재하는데 그가 바로 신라왕자의 신분으로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 와서 수련하고 득도한 김교각스님이다. 김교각스님이 구화산에서 75년간 수련하고 당개원(唐開元)26년 7월30일에 99세로 원적해서 육신보살로 된후부터 중국에서 김교각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모시고 구화산이 중국불교 4대명산중의 하나로 되였다. 그렇게 오랜세월을 흐르며 중국에서는 특히 절강 강소 안휘 지역에서는 지장보살이 바로 김교각스님이고, 김교각스님이 바로 지장보살로 자리매김을 하였으며 김지장 또는 김지장왕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크고작은 사찰마다 모두 지장전(地藏殿)을 세우고 지장왕을 깎듯이 모시고 있다. 얼마전 한국에서 대통령까지 공항에 마중나가 깍듯이 교황을 마중하고 또 서울한복판 광화문광장에서 수십만명이 모여서 성황리에 교황을 모시고 미사행사까지 하는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되였다. 정작 본토배기출신으로 그것도 신라왕실출신으로 중국대륙에 와서 대륙 억만중생들로부터 지장보살로 추대되는 김교각스님에 대해 잘 아는 한국인은 얼마 안되고, 반대로 저멀로 유럽대륙에서 온 카톨릭교황을 영접하기위해 온 나라가 떠들썩하는 모습이 참으로 너무나도 대조되게 느껴졌다. 단군을 민족의 조상이라하며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이라 하는 이 민족의 정신줄은 구경 무었인가 하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하는 순간이다. ◈ 江南行僧 연변통보 2014-08-26
13    혜인고려사의 소동파 호법상과 적산 댓글:  조회:1735  추천:0  2015-11-30
慧因高丽寺的苏东坡“护法像”与赤山 ——再论苏东坡的宋丽外交思想及实际行动                 目    录 前言 慧因高丽寺与苏东坡的因缘 北宋晚期东北亚的国际局势 苏东坡的高丽观及宋丽外交思想 赤山、赤山神和新罗神——“海上王”张保皋 结语 参考文献   关键词:慧因高丽寺、苏东坡、赤山、赤山神、张保皋、宋丽关系           前言   1996年,在杭州高丽寺遗址中,出土了一尊高2.3米的文官石雕像。1997年经过全国30多位专家考证,一致鉴定认为该石像是苏东坡。传说苏东坡曾是高丽寺的珈蓝神护法,但在史书上记载,苏东坡当太守时,却一直反对宋朝和高丽的佛教交流,并曾经引起一场规模不小的涉外纠纷。 那么,他的石像为什么会出现在高丽寺的遗址上?他为什么要反对宋朝和高丽的交流?他所引起的那场涉外纠纷的真相究竟如何?开浚西湖时,西湖边的众多山麓中,苏轼为什么偏偏选定慧因高丽寺的风水宝地—赤山?从慧因高丽寺的风水宝地赤山,联想到山东石岛的赤山及与其相关的“赤山神”乃至“新罗神”——“海上王”张保皋,难道只是凭空瞎想的吗?   慧因高丽寺与苏东坡的因缘   杭州佛教文献丛刊 19慧因寺志 (明)李翥 杭州出版社; 〖序〗  高丽慧因寺,盛于晋水禅师,名于三韩弟子,而韵于东坡居士。居士取赤山土,以实六桥之堤。形家言断其左臂,不利于寺,誓身为伽蓝神以护之。 〖慧因寺志卷之四 檀那〗 苏文忠公轼 据文忠《却贡疏》云:“自熙宁以来,高丽屡如朝贡,两浙骚然。皆因奸民徐戬等。交通诱引,妄谈庸僧净源,通晓佛法。以致义天羡慕来朝,从源讲解。源死,其徒复持真影舍利,违禁过海,以致义天差人祭奠,兼进金塔探瞰。朝廷受之,则以贪示外夷,计构纷然,朝贡踵接。夷使所至,图画山川,购买书籍。不惟中国受疲,而边防亦疏。乞却金塔勿受,绝其来意。”云云。则是文忠目晋水为庸僧矣。何以伽蓝之誓护持茲寺如此,其大且久也。大都文忠此时,护国之心甚于护法。因晋水之名高且远,恐以一高丽为诸岛夷倡,县官费且不赀,终酿祸衅,不得不加“庸”之一字,以杜夷使之来耳。若曰源非中国所尊,而远夷向往如此,不几贻笑中国耶!然玩其《疏》中云“从源讲解”,非善知识,何由得讲解?又云持源舍利过海,非真罗汉,何由得舍利?既已善知识,真罗汉矣,尚得谓之庸乎?是文忠故矛盾己说,以示此僧之不庸。而姑借一字之贬,以距外夷而安中国也。欲示中国之尊,即佛印之据座,以为得体;欲弥中国之衅,即晋水之方来,以为生事。总文忠护国之心,甚于护法耳。异日伽蓝之誓,不独补赤山,亦以谢晋水也。赘言以识观者之惑。 苏东坡的石质雕像的碑文记载,苏东坡为政杭州时,为开浚西湖,令匠作掘慧因高丽寺旁赤山以筑湖堤。此举,遭到寺僧们的强烈反对,理由是:赤山乃风水宝地,掘土将致祸患。面对跪成一地的僧人,匠作头目一筹莫展,工程被迫搁置下来。苏东坡闻讯,亲自来到施工现场。道理讲了再讲,可寺僧们丝毫不退让,理由还是那条:破坏风水,天降灾祸谁担当? 在苏东坡生活的年代,佛教盛行。得罪僧众,绝不是件小事。此外,这件事发生在苏东坡身上,有着更深一层的意思:受佛教家庭影响,苏东坡早年“喜佛”,中年“近禅”,“抄经追思荐亡亲,与友谈禅悟佛道”,可见,佛在他心中有着非常重要的位置。在处理这件事时,他一定反复掂量了心中的天平该怎样倾斜。孰轻孰重?最终,他选择了生民百姓。他凛然告诉僧众:事由我起,上天若降灾祸,就冲着我来,但筑堤之事绝不能延耽。愿舍身护法。   北宋时期东北亚的国际局势   唐朝灭亡以后,中国呈现了一片割据之势,宋代虽然出现了统一的国家,但宋的实力欠缺及先天不足,其所面临的环境一直是强敌压境,契丹与西夏都对等的与宋同称皇帝。宋在与辽国的交锋中不仅处于下风,而且还要对其“每岁纳币”,与西夏也一直保持着战争状态。北宋时期,是中国中央集权时代国家安全面临威胁的典型时期,是中国古代中原王朝国家安全受到威胁最为强烈的时代。维护国家安全是北宋统治者的头等大事。残酷的现实毕竟比传统的观念更能移人心神,宋朝士大夫感受到了从未有过的压力,终北宋一朝,从最高统治者到士大夫阶层,所忧所虑最多的,就是国家的安危和强盛。从而衍生了在异域强大对照下的自我忧患意识,以及由此产生的焦虑和危机感。这就促使着宋朝士人增添了使命感和责任感,更加注重思考、研究现实问题。     苏东坡的高丽观及宋丽外交思想   历史上的杭州处于浙江富庶地区,东临大海,与登州、明州、泉州等合称“吴越七州”,优越的地理位置,使其在对外交往尤其是对高丽的交往中起着举足轻重的作用。由于北方辽国的阻隔,高丽从海上开辟了一条对北宋的朝贡与贸易路径,与宋朝的交往便改由水路进行。双方使者往来主要是通过登州、明州、杭州等城市,吴越七州成为高丽人活动的主要地区。宋神宗熙宁二年(1069),由于反对王安石的变法,苏轼请求外任,出任杭州通判。因此,苏轼有幸成为宋朝直接处理宋与高丽事务的高管之一。前后20多年与高丽人打交道的经历,使苏轼的外交理念逐渐明朗¸清晰¸成熟,形成了完整而连贯的外交思想。   宋丽外交关系的演变过程改变了宋朝士大夫们的传统天朝上国的处邻心态,也直接导致了苏轼高丽观的形成。这其中,辽国的因素占据了最主要的位置。由于辽国的强大压力,使得宋与高丽的交往并不是传统意义上的朝贡关系,与高丽交往的一举一动,都有可能招致辽国而引来对宋的不利,而高丽态度暧昧,游离于宋辽之间,其与宋交往的目的,也在苏轼的怀疑之内。另外,与高丽的交往,在客观上会造成失密、资助敌国等等不利于宋的结果,也都是苏轼反对结交高丽的最主要原因。联丽制辽的战略思路一直落实不到现实的层面上,针对这种战略思路,苏轼得出的结论就是:“高丽必听命于契丹,并且终必为北虏用。”这就是提到高丽这个对宋看似构不成威胁的弹丸之国,苏轼这个封建大国的官员所表现出紧张、焦虑和抵触的根本之所在。苏轼曾先后在山东密州、登州、浙江杭州为官,这些地方也是通舶高丽的主要地区,他深刻体会不加节制厚待高丽的政策对沿线百姓造成的负担,对承办丽务官员狐假虎威、收受贿赂、中饱私囊所产生的吏治腐败,以及对缺少警惕产生的军事机密外泄会造成国家的安全问题等,忧国忧民。 苏轼任杭州时发生的“促使年号”、“却施金塔”、“不许高丽购书”三案,充分说明他的严厉反对宋朝亲丽政策的态度。   后人对苏轼的外交思想尤其是苏轼的高丽观的研究上,不仅涉猎不多,而且结论差距很大,各执一端。归纳起来主要有:杨渭生所著的《宋丽关系史研究》中关于宋朝名臣士大夫对两国关系的态度的论述,主要观点是以苏轼¸ 苏辙为代表的士大夫对高丽交往多持苛论,他们的论点多半难以成立,苏轼的观点有些是很敏锐的,但苏轼过于偏激,走向极端,实无济于事。“根本点在于他们得了一种‘恐辽病’,非常害怕得罪契丹,又恐高丽为‘契丹耳目’。因而画地自窂,倾向于消极防御。从政治上看,这也是中期以来变法图强¸ 要求富强强兵的革新运动的一种保守的回应”;王水照所著的《苏轼研究》中的《论苏轼的高丽观》主要观点是通过考察宋所奉行的联丽制辽的政策的可行性及其所得结果,认为苏轼对高丽的态度在政治 军事 外交上确有偏颇之处,但又有其历史的正当性;黄约琴 林天蔚主编的《古代中韩日关系研究》中所受录的申探湜的《宋代官人的高丽观》,主要观点是苏轼之所以“提出反高丽论之背景,首先在政治上他属旧法党,意图全面性的否定新法党之联丽制辽策。在文化上他虽具中华主义思想,却流于偏激的华夷论,有低看小国之倾向”;刘素琴所著的《试论苏轼的高丽观》,主要观点是苏轼的外交主张在宋丽关系中曾产生了一定的负面影响,他的七篇奏议对宋丽关系的记载及推论颇多臆测。原因是一方面因为苏轼“视野狭窄,不能宏观上把握国际间互相制约 互相依存的关系;再一方面是他从保守立场出发,对新法深恶痛觉之,凡涉及新法者都要推翻。”苏轼单单对高丽的待遇挑刺,重要原因是“他指导思想的偏差及反对变法派的感情因素”;张玄平所著的《如何看待苏东坡在高丽国问题上的外交观点》,主要观点是苏轼对在高丽外交上的保守思想,是以忠臣为目的的忧国忧民思想为背景的。   赤山、赤山禅和新罗神---“海上王”张保皋 山东石岛镇北部的赤山南麓有赤山法华院,始建于唐代,是唐代胶东规模最大的佛教寺院之一。据史书记载,赤山法华院原为新罗人(今韩国)张保皋所建,大唐盛期,新罗人张保皋应征入唐,曾任武宁(今徐州)军小将。他武艺超群,作战勇敢,深受大唐将士的爱戴。后回归新罗,任清海大使,在此期间,他积极从事中韩两国间的贸易往来,为中韩两国人民铺设了一条“海上丝绸之路”,成为当时著名的海上贸易家,被称为“海上王”。他为了保佑其海运事业的昌盛,慕名来赤山建起了当地第一座大庙宇,并请来僧人诵经。首批僧人属天台宗派,读诵经典《法华经》,故此院命名为“赤山法华院”。 新罗人除去赤山法华院参拜佛祖,祈求保佑外,也去红门参拜赤山神。尤其在赤山法华院建立之前和拆毁之后,主要参拜的是赤山神,赤山神也就不分国界施恩于新罗,因此新罗人就把他当作自己的神,称之为“新罗神”。大韩民国文化部、海运航海厅、全罗南道韩国文化艺术振兴院编著的《张保皋》一书中说:“有关日本九州博多太守府的史书记载,圆仁弟子按照宗师遗嘱建立的比睿山赤山禅院里绘制的‘新罗神’临近寺刹(例:围城寺和三井寺)里供奉的新罗国的‘大明神’等有关记载,都明确无误地说明了新罗人把日本比睿山赤山禅院里供奉的‘赤山神’当作自己的神——‘新罗神’了。该书还说:“在博多太守府内,常驻有许多从事贸易的新罗人,而在此之前,就定居在九州一带的新罗人,也多从事贸易业。”张保皋对日本的影响,在其后日益明显,如前所述的赤山禅院比睿山周围的寺刹里,供奉的象征着保护财富,带来运气,保护航海安全的“新罗神”(赤山神),说明新罗人以及张保皋所组织国防贸易船队,是把“赤山神”当作自己神了。 苏轼为官时期,北宋的主要外交政策是宋金订立“海上之盟”。宋的外交思想主线是以宋辽关系为基轴,大国和平相处的思想。元祐五年(1090)七月十七日,任杭州知州的苏轼捉住了“冒请往高丽国公凭,却发船入辽国买卖”的商客王应昇等二十人。同年八月初十,高丽户部尚书李资义¸礼部侍郎魏继廷等二百六十九人如宋谢恩兼进奉,到达杭州。苏轼认为,这“显是客人李球因往彼国交构密热,为之乡导,以希厚礼”。对这两件事件的发生,苏轼的观点是因为元丰八年九月十七日救“惟禁往大辽及登¸莱州,其余皆不禁”以及“《元祐编敇》亦只禁往新罗”的规定造成的,并说;“若不严厉约束,则奸民滑商,往来无穷,必为意外之患”。正是因为“不惟公私劳费,深可痛惜,而交通契丹之患,其渐可忧”,“不惟免使高丽因缘滑商时来朝贡,骚扰中国,实免中国奸细,因往高丽,逐通契丹之患”,才使得苏轼对此类事件如此的紧张。苏轼把元丰¸元祐时期的规定同庆历¸嘉佑年间《编敇》想比较,认为“堪会元丰九年十七日指挥,最为害事,将祖宗以来禁人往高丽¸新罗条贯,一时削去,又许商贾得擅带诸藩附船入贡。……今来不可不改”。并奏请朝廷仍按照庆历¸嘉佑《编敇》施行。由此可见,苏轼从以忠臣为目的的忧国忧民思想出发,坚决执行宋金订立的“海上之盟”政策,从政治外交的高度上,很是明白宋丽“海上违禁”政策的重要性,应该早已心知肚明“此赤山,亦是彼赤山”。 结语   身为宋朝命官的苏轼,处在敏感而复杂的国内政治斗争及东北亚国际局势,完全可以从当时士大夫阶层的“华夏宗主国、华夷有别”情结及当朝新旧政治势力的博弈中,难免会出现过激言辞、举措,于情于理充分理解、谅解。但是,苏轼在为杭州百姓开浚西湖的“民生工程”中,终究实现了对国家安全忧国忧民的“华夷有防”夙愿。也就是说,同时实现了“舍身济民”和“以身护法”的目的。 参考文献: 《浅论苏轼的外交思想——基于苏轼关于高丽的“状”文》 冒志  祥 河南师范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第35卷 第4期 《宋代外交思想研究》张云筝 河南大学博士论文 《宋丽政治关系演变与苏轼的高丽观》张翚 山东大学硕士论文 《略论地缘政治与北宋外交》吴晓萍 安徽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第28卷 第3期 《宋代明州与高丽》 王力军 著 科学出版社 《高丽寺重建与中韩文化交流》 金健人 林阅春 《杭州佛教文献丛刊 19慧因寺志》 (明)李翥 杭州出版社            
12    오월불교와 고려불교 및 혜인고려사의 상호영향력 댓글:  조회:1474  추천:0  2015-11-30
吴越佛教与高丽佛教及慧因高丽寺的相互影响   玄忠赫 韩国临时政府杭州纪念馆 特聘研究员 吴贤姬 韩国临时政府杭州纪念馆 助理研究员     目     录 前言 吴越佛教的概念及其影响力 吴越文化跟朝鲜半岛文化的渊源 高丽佛教与吴越佛教的交流 慧因高丽寺的概况及其对吴越佛教和高丽佛教的影响 吴越佛教之“人间佛教”思想与近代中韩佛教交流 结语 参考文献   关键词: 吴越佛教、 高丽佛教、 慧因高丽寺、 人间佛教   前言   中国与朝鲜半岛陆地相连、隔海相望,自古以来,关系密切,政治、经济、宗教、文化诸方面交流源远流长。最近,中韩两国不仅在经济交流上取得了前所未有的发展,在政治、外交、文化方面的交流也取得的突飞猛进的发展。前不久,中国国家主席习近平访韩期间,在首尔大学的以《共创中韩合作未来同襄亚洲振兴繁荣》为题的演讲中,回顾了中韩人民友好交往的历史,称赞多位为中韩友好做出贡献的历史人物,包括来自韩国最终成为中国佛教中四大菩萨之一的地藏菩萨化身金乔觉。中韩两国的佛教有着同源一体的血肉联系,并在两国的文化交往中一直起着黄金纽带的作用。吴越地处中韩贸易与文化交流的中转站,其发达的佛教文化更是成为中韩文化交流的一环。   吴越佛教的概念及其影响力   有关本章节的吴越佛教的概念及其影响力的内容是引用了杭州商学院王仲尧老师的《吴越佛教与当代世界佛教——谈吴越佛教之三大特质与一大贡献,及若干述评》文章中的观点。 吴越佛教是一特定概念。唐末五代时期,因受南方各国帝王保护,佛教在江南尤其吴越地区稳定传播。禅宗五家除临济宗创立于北方,其余四家皆在南方,临济宗后继者不久也渡江南下,标志着中国佛教中心往南方转移。南方吴越、闽、南唐诸国佛教皆兴盛,其中吴越佛教尤为代表。后梁太祖开平元年(907年)钱镠被封吴越王,后历五世七十二年,至宋太宗太平兴国三年(978年)钱弘俶归顺北宋,吴越境内始终维持和平稳定,未如全国其他地区一样受战乱扰苦。吴越诸王皆力扶佛教,使杭州地区渐成全国佛教中心。钱镠晚年深信佛教,吸引各地高僧来杭州,广建寺塔,乃“倍于九国”;吴越诸王奉佛最诚者忠懿王钱俶,曾制八万四千铜塔,封藏《宝箧印陀罗尼经》刻印卷子颁发境内,并以杭州为中心兴建大型寺院数百,招揽全国佛教精英莅杭,如德韶、义寂、延寿等皆一时英秀;德韶是法眼宗创立者文益法嗣,钱俶早年刺台州时已“延请问道”,嗣王位后更“遣使迎之,申弟子之礼”,尊为国师;义寂是天台宗名僧,钱俶请至金门建讲,并特为其在天台山建螺溪道场;延寿是德韶法嗣,也深受钱俶优礼,北宋建隆元年(960年)钱俶重建灵隐寺请延寿住持,次年又请住持永明寺(净慈寺)。从吴越国至两宋,杭州地区佛教隆盛,“五大丛林”皆在杭州地区或附近,实际上成为全国佛教中心。这是“吴越佛教”之名的由来。      吴越佛教对此后中国佛教发展产生很大影响,如永明延寿的佛教思想、宋代天台宗“山家山外”之争、天水子睿对华严宗的贡献等都具极高文化价值,但是吴越佛教概念所以成立不仅因此,更重要的是在于其发展历史中形成一些特定质素,近代以来,表现突出。      故中国佛协会长赵朴初居士曾概括中国佛教三大传统,其一曰注重学术研究,其二曰农禅并重,其三曰国际友好交流。从传统看吴越佛教三者皆备,而近代以来由于历史地理及政治经济等原因,吴越佛教又更突出了自身鲜明特色,现概括为如下三个方面:   (一)   注重学术思想之研究与传播,契合时代,吸收新文化营养,与时俱进    这个特质在吴越佛教传统中本有之。如延寿《宗镜录》中保存大量唐代各宗思想资料并展开研究,以“心”为宗,调和禅教二家,鼓吹三教合一。钱俶《宗镜录》序曰:“详天域中之教者三:正君臣、亲父子、厚人伦。儒,吾之师也,寂兮寥兮,视听无碍,自微妙升虚无,以止乎乘风驭景,君得之则善建不拔,人得之则延贶无穷;道,儒之师也,四谛十二因缘,三明八解脱,时习不忘,日修以得,一登果地,永达真常;释,道之宗也。唯此三教,并自心修。”乃是强调了吴越佛教因其学术思想的研究传播而具备的较强的教化作用,有一定代表性。延寿为代表的吴越佛教的注重学术的传统,是中国思想文化史上学理深化的一个表现,对此后中国佛教乃至中国文化的面貌都有影响。    如何结合传统文化资源是中国佛教的发展始终要面对的问题,而注重与时代精神融会贯通,则既是佛教生存的立足点亦是前进的出发地。 近代以来长江三角洲地区社会变化复杂,各种矛盾交错,社会政治和经济文化的始终处于不稳定状态。而吴越佛教在组织结构上、社会活动形式上、思想理论的研究传播方法上,开始向现代宗教转化。 (二)具有开明开放的大气度,积极发展中外佛教文化交流    吴越佛教在历史上就注重发展推动中外佛教交流。如五代时高僧义寂为寻找国内散佚殆尽的天台宗论疏而上奏请,钱俶乃遣使往高丽、日本等国。后高丽僧谛观携大量天台诸部论疏来华,宋初“天台中兴”斯由于此。近代吴越佛教大力推动和开展有组织、有规模的国际佛教文化交流,乃属当时中国各地佛教所仅见。 (三)居士佛教表现突出,成为吴越佛教显著特色    学界认为,“将近两千年的中国佛教史表明,如果没有居士佛教的活动,寺院的僧侣佛教的开展几乎是不可能的。在某些特定的历史时期,居士佛教不仅保证了中国佛教的存在,而且还决定了中国佛教的繁荣。如清末和近代,基本上居士佛教在维持着佛教的生命,使之不至于消亡。”这是中国佛教重要传统之一。佛法博大精深,儒、道皆融,历代文人学士、官宦商贾等深入经藏,或直接或协助弘法工作,形成中国居士佛教传统。两宋以下,吴越佛教的繁荣局面更在很大程度上依赖居士佛教,如宋代在杭州地区从事佛教活动的有宋真宗时宰相向敏中、宋真宗工部侍郎大名士钱若水、宋真宗时同中书门下平章事王旦、刑部侍郎吕祐之、宋神宗时以太子少保在杭州致仕的赵抃、两度守杭的著名文学家苏轼、南宋礼部侍郎张九成、南宋尚书右丞李邴、永嘉知府刘彦修,以及名士吴伟明、黄彦节等。这些都是历史上有名的人物,一般居士可想而知当更多。    近代以来,吴越佛教这个特色进一步突出,如上海居士致力佛教复兴,南京居士侧重佛学研究,杭州居士则厕于两间。当时活跃于吴越佛教圈内的著名居士有一批工商界人士,以雄厚资财襄助佛教事业,如王一亭等,有人谓上海总商会董事半数以上为佛教居士当不为过。有些居士是重要学者,如章太炎、马一浮、蒋维乔、丁福保、范古农、黄涵之、江味农、聂云台、夏丐尊、谢无量等;有些居士是民国名人,如康有为,晚年定居杭西湖州康庄研究佛学。有些居士原是政、军界人物,如程德全(曾任南京临时政府内务总长)、叶恭绰(曾任北洋政府交通总长)、屈映光(民国建立后任浙江巡按史,浙江独立时被推举为浙江都督)、关絅之(辛亥革命革命前曾任南通直隶州知州,后在民国政府中任职)、施省之(施氏钱塘望族,民国初年曾任交通总长、驻英公使和驻美公使等)等。又如杭州居士有林宋恕、夏曾佑、吴壁华、武仲英、黄元秀等。这些居士社会活动能力甚强,与政界、商界、学界联系紧密,捐资出智,弘法护教,开展佛学研究,举办各项佛教文化事业,出版佛教典籍刊物,从事慈善公益活动,成为近代弘传佛教的中坚力量。故中国佛教协会会长赵朴初居士亦吴越居士之杰出代表。近代吴越佛教中的居士佛教活动,是值得继续深入研究的问题。      吴越文化跟朝鲜半岛文化的渊源   20世纪70年代发现的河姆渡文化,无疑是20世纪中国乃至世界最重大的考古发现之一。吴越地区的余姚江流域是该考古学文化的核心,迄今发现的河姆渡文化遗址大多分布于这一地区。河姆渡文化是与良渚文化、跨湖桥文化一道成为吴越文化深层次的堆积和探索本地区文明的源头。河姆渡文化的的发现与确立,打破了长期以来黄河流域单一中华文明起源地的学说,证明长江流域也是中华民族的摇篮与文明发祥地,其人工栽培水稻遗址的发现,为世界水稻起源问题的研究带来革命性的突破,影响深远。随着考古发现及研究的进一步深入,特别是对朝鲜半岛和日本列岛早期遗址发现的稻谷遗存在时间早晚及植物学上的遗传特征等研究,目前中、日、韩三国绝大多数学者基本认为:稻作农业在中国长江中下游地区产生后,不仅向中国大陆其他地方传播,也传播到朝鲜半岛和日本列岛,韩日两国的稻作文化都渊源于中国稻作文化的东传。吴越地处东南沿海,早在春秋战国时期其造船业就处于太平洋地区的领先地位,这里的先民是世界上最早尝试去征服海洋的民族之一。在中外文化交流史上,这里是“海上丝绸之路”的起点之一。吴越地区自古与朝鲜半岛、日本列岛以及沿“海上丝绸之路”的东南亚、南亚地区有着密切的经济文化交往。 中国社会科学院研究员苑利在《朝鲜半岛南方文化与中国长江下游百越文化的关系问题》中提到如下观点:在韩民族中,人名、地名的前面经常使用“高”这个冠词。如高丽、高朱蒙等等。日语中,这个冠词的使用频率也非常高。使用频率最高的还有一个地区,这就是中国东南沿海长江下游的吴越地区。据史料记载,这里的人在人名、地名前面也经常加上这样一个冠词。人名如“勾践”,地名如“姑苏”等等,从史料记录看,中国南方的这种用法是比较早的。我们从人名、地名、族名的地理移动,即可判断出中国吴越文化的走向以及它与韩日文化的关系问题。再如从稻作文化称谓看,中国吴越地区将大米叫“稌”,发音与韩语的“쌀”基本相同,野生稻叫“秜”,与韩国将混在大米中的带皮的稻子叫“뉘”,发音也大体相同;吴越民族把水田叫“那”,而韩语叫“논”,发音也大体相同。在青铜文化上,《越绝书》中将炼制铜剑的地方叫“姑渎”,而韩语将灶叫“부뚜막”;中国南方将刀叫“葛党”,韩语叫“칼”,发音也大致相同;中国南方将铜矛叫“物卢之矛”,这“物卢”到底是什么意思,学者一直搞不清楚,其实,物卢的古音就是“구리”,所谓的“物卢之矛”就是铜矛。   高丽佛教与吴越佛教的交流   在韩国历史上高丽诸王都信奉佛法,常设斋饭僧 设道场办法会,还规定儿子多的家庭必须有一子出家,靖宗规定有4个儿子、文宗规定有3个儿子者就得有一个儿子出家的政策,其他王室也不例外。因此,高丽历代王子出家从没间断,佛教在高丽诸王室的大力护持下,得到长足发展达到极盛,并成为国教。为了深究佛理,许多僧侣不远万里纷纷入宋求法,其中就有与吴越佛教深缘的义通和谛观两名代表人物。 义通(927—988)字惟远,高丽国人,出身王族,从小乐道,出家受戒后,曾学《华严》《起心论》,频有造诣。20岁后来中国学习佛法,“初访云居,契悟南宗”,后又跟着螺溪义寂学习天台之教,闻一心三观之旨。得法后至四明(今宁波)创宝云禅院,后世尊为天台宗十六祖。天台宗自创立起主要弘法于相对安定的天台山一带为中心。唐朝中后期的社会动荡给天台宗造成极大冲击,至钱氏建国,天台宗在天台一带的弘法在义寂的努力下再度中兴。与此同时,得法于义寂的义通至四明弘法天台教法,使四明成为继天台之后的又一弘法中心。 谛观(?--970),高丽国人,也是与义通同时受学于义寂座下的10位外国僧人之一。谛观入宋是与吴越王钱俶有着密切因缘的,谛观是高丽王派遣携带天台教典来中国请益求法,学习交流天台佛理的僧人,他的入宋之举,使“一宗教文,复还中国”,从而使这里成为中兴天台的中心基地。谛观随义寂深研天台之学期间整理撰写了《天台四教仪》一书,该书深入浅出地阐述了智者大师五时八教的判教理论,被誉为“天台四书”,为研究天台教义大纲与观心(实践修行)要略之入门书。   慧因高丽寺的概况及其对吴越佛教和高丽佛教的影响   慧因高丽寺最早建于后唐天成二年(927),由吴越王钱镠建造,最初名慧因禅院,坐落于杭州玉岑山西北。从有关记载来看,慧因禅院在初建后规模扩大很快,特别从高丽王子义天与该寺结缘,奉经捐资,建阁藏经之后。从北宋神宗到元末顺帝间的三百多年间,除南宋初年曾一度被征用为两浙大试院,后由宋孝宗旨免官司侵占外,高丽寺一直是颇为兴盛,可谓备受恩宠,香火不断,屡有扩建,成为华严第一讲席,并且也是宋元与高丽之间邦交往来和佛教交流的一个中心。 慧因高丽寺的出名,和高丽国王子僧统义天有密切关系。北宋元丰八年(1085),义天远涉重洋入住慧因寺求法。后义天归国,将《华严经》三部170卷送与慧因寺,并捐资建造华严经藏经阁及菩萨像等,使慧因寺名声大振,被誉为"华严第一道场",俗称高丽寺,慧因高丽寺具有超越一般寺院的特殊意义与价值。一方面,由于北宋时期净源法师的大力弘扬与海东法子义天的捐资献经,使得它成为华严宗的中兴重地和教藏中心,对中国佛教史和对朝鲜半岛佛教有着重要的影响;另一方面,它也是中国大陆与朝鲜半岛长久的友好历史的见证。因此,慧因高丽寺蕴藏着极丰富的文化内涵,承担着以当代精神继续发扬佛教文化,持续见证佛教文化交流的历史的使命。   吴越佛教之“人间佛教”思想与近代中韩佛教交流   近代吴越佛教的一个最大贡献,就是“人间佛教”思想之提出。 中国佛教在整个20世纪里从厄难中图振兴,沿着一条崎岖道路行进,从适应后期封建社会的明清佛教传统模式向适应近现代社会的新模式转型。面对种种挑战,为适应时代机宜,大德们主动作出多种回应,举措主要有四:(1)力振祖风,(2)学习外求,(3)返本归源,(4)改革鼎新;营造适应现代人需要的佛教新模式。陈兵提出,这种新模式可用“多元一体”四字概括,多元,谓适应人们多元的宗教需求而有多方面的内容,即传续、重振传统佛教诸宗,继承传统教义教制的基本内容,同时逐步改革传统教义教制中不合时宜的部分,吸取、移植藏传、南传、日本佛教,使中国佛教呈现出较传统面貌更丰富多彩的内容;一体,谓佛教各宗大体都认同、趋归于一种共认为应时契机而又符合佛陀本旨的现代佛教模式——“人间佛教”。 “人间佛教”亦是基于对明清佛教模式非人间化的弊端之反省批判。佛教革新运动领袖太虚针对传统佛教“重死度鬼”、忽视现实人生建设的偏弊,于20世纪20年代初提出“人生佛教”口号,为“教理革命”纲宗,旨在将佛教从“神本鬼本”、“重求后世之胜进或无生之寂灭”的传统转到佛陀本有的以地球人类、现实人生为本位上来,教人以佛教的精神将生活合理化、道德化,发达物质、伦理、精神生活,完美人格,服务人群,在社会生活中修学“即人乘行而趋佛果”的“今菩萨行”。后又提出“以佛教的道理改良社会,使人类进步,把世界改善”为旨的“人间佛教”。 近代吴越佛教的一个最大贡献之“人间佛教”思想的实践活动与慧因高丽寺的重建有着密不可分的因缘。“以佛教的道理改良社会,使人类进步,把世界改善”为旨的“人间佛教”思想影响下,30年代佛教刊物《海潮音》出过“人间佛教号”专辑,慈航法师在星洲创办过《人间》佛刊,抗战中四川缙云县出过《人间佛教月刊》,可知“人间佛教”思想当时就得到了社会回应。正是在“人间佛教”思想指导下,广大佛教徒积极投入慈善救济、抗战救国,关心国家建设,热情服务众生,使佛教发挥出积极的社会功能。期间,曾经担任中国佛教会会刊《海潮音》的社董的玉慧观(一名出生在朝鲜的中国人。因为他从小在朝鲜长大,所以以韩侨自居。他亲眼目睹了朝鲜在日本帝国主义统治下的残忍情况,朝鲜人民过着非人的生活,因此激起了他反日活动。他早年积极参与了当时韩国独立党领袖安昌浩同志领导的革命活动,力图恢复民族自决,恢复朝鲜人民的自由。回到中国以后,他仍然积极参加中国民族的解放运动,反对日本帝国主义侵略是他一生的理想与行动。)自归依太虚大师之后,就致力于中韩两国佛教间的友好与交流,他长期在上海,目睹了大批韩国抗日义士在沪的爱国革命运动。他在力促恢复高丽义天在杭州建立的道场——高丽寺,担任了高丽寺重建筹备委员会委员,亲自撰写《中韩佛教纪念道场:西湖高丽寺中韩佛教纪念道场筹备启》,表示“现今韩国佛教徒,谨承大觉先师报恩弘法之遗绪,拟重建高丽寺。藉中韩佛教传授源流之纪念道场起见,特派慧观在沪筹备,一俟有绪,着手起工。伏愿中韩两国诸大善士信女,时赐惠教,是所馨祷。”以此为契机,之后的不同历史时期中韩两国政府和社会各界一直不懈地努力慧因高丽寺的重建事业,直到2005年正式破土动工。   结语   杭州素有“东南佛国”之称,又是作为吴越佛教之中心,继承和发扬吴越佛教所崇尚的“人间佛教”精神方面应该充分发挥其现有的所有有效资源。在当今社会上,随着人们生活工作压力的增大,开始流行“禅修”之风,同时逐渐盛行“体验寺院生活”特色旅游。作为吴越佛教和高丽佛教文化交流乃至中韩佛教文化交流的历史见证者的《慧因高丽寺》蕴藏着极丰富的文化内涵,承担着以当代精神继续发扬佛教文化,持续见证佛教文化交流的历史的使命,应该发挥其应有的功效。   参考文献   《吴越佛教与当代世界佛教——谈吴越佛教之三大特质与一大贡献,及若干述评》  王仲尧 《吴越佛教》第一卷 杭州佛学院 编 九州出版社 《吴越佛教》第八卷 杭州佛学院 编 宗教文化出版社 《宋代明州与高丽》 王力军 著 科学出版社 《高丽寺重建与中韩文化交流》 金健人 林阅春 《高丽僧义通与天台佛教在四明的开展》 秦 瑜 《吴越与高丽的佛教交流使者—谛观》  李海涛 《宋代吴越与高丽佛教文化交流》  周祝英 《朝鲜半岛南方文化与中国长江下游百越文化的关系问题》  苑 利 《民国佛教刊物所见当代韩国佛教史料摭议》  黄心川    
11    항주고려사가 오월불교에 준 영향력 댓글:  조회:1277  추천:0  2015-11-30
항주고려사는 기원 927년(后塘天成2년) 오월왕 전류(钱鏐)에 의해 최초로 세워졌으며 당시에는 《헤인선원(慧因禅院)》라고 불리웠다. 고려사는 항주의 정자사(净慈寺)보다 27년 뢰봉탑보다 48년 륙화탑과 개화사(开化寺)보다 43년 앞선 오월왕실의 최초로 되는 불교공사였으니 이는 고려사가 나중에 화엄종제일산(华严宗第一山)이란 중요한 위치에서 교종중흥(教宗中兴)의 중심이 될수 있는 기반이였다. 당조말년으로부터 시작한 전란 및 회창법난(会昌法难) 등 불교말살정책으로 중국에서의 불교경전들이 회멸성적인 파손을 당했다. 그때 항주에 수도를 두고 세력을 확장하게 된 오월국왕실에서는 불교를 대대적으로 숭상하고 불교발전에 큰 중시를 돌렸으며 중국에서 소실된 불교경전들을 복구할려고 왕실에서 직접 고려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서 경전들을 요구한다. 오월지역은 동남연해에 위치해있으며 춘추전국시기에 벌써 조선업이 태평양지역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여 이 지역 선민들은 세계적으로 제일 처음으로 해양을 정복한 민족중의 하나이고 중외문화교류력사상 이 지역은 "해상실크로드"의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월지역은 고대로부터 조선반도 일본 및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동남아 남아세아지역과 밀접한 경제문화교류가 있었다. 불교적인 측면에서 볼때 오월불교는 줄곳 대외문화교류활동을 중시하였으며 력사적으로 오월지역과 해외불교문화교류는 매우 활발하였으며 오월불교자신은 이러한 문화교류과정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오월국과 조선반도의 교류상황을 잠간 살표보기로 하자. 〖절강성외사지-浙江省外事志 중화서국-中华书局〗 ●정명사년-贞明四年(918) 十一月 百济(在今朝鲜半岛中南部)王派使臣来吴越国通好到杭州。 ●후당동광삼년-后唐同光三年(925) 吴越国王钱鏐遣使赴新罗,“海外诸国,皆封其君长”。 ●천성이년-天成二年(927) 十一月 吴越国应高句丽、百济使臣请求遣班尚书为通和使前往调节两国战事。 ●청태이년-清泰二年(935) 四明(今宁波)僧子麟到高丽、百济访求天台教籍后,高丽国使陪同返回明州。 ●후진천복년간-后晋天福年间(936~943) 高丽僧义通到天台山学天台教观。 ●후한견우원년-后汉乾祐元年(948) 高丽派36名高僧来杭州净慈寺求法。 ●건륭원년-建隆元年(960) 吴越王遣使致书高丽求取天台教典。次年,高丽遣高僧谛观奉教典至天台。 상술 기록에서부터 중국대륙 동남연해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인 유리한 우세를 빌어 오월국은 조선반도하고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는 정경을 보아낼수 있는데 그중에서 주로 오월지역에 정착생활을 하고 생을 마감하면서 오월불교 및 중국불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제관과 의통의 행적을 례로 들면서 조선반도의 불교문화발전이 일방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흡수가 아니라 중국불교문화를 흡수 발전시킨후 다시 중국불교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점도 있다는것을 강조하고 싶다. 력사상 대부분의 중한불교의 교류는 주로 한국승려들이 개인적인 신분으로 중국에 와서 불법을 구하고 공부한후 본국에 돌아가 불법을 전파하는 것이였지만 이와 달리 제관의 중국행은 오월왕의 요청에 의해 당시 중국에서 류실되고 조선반도에 보존된 천태경전을 다시 중국에 보내오는 즉 고려불교가 중국불교에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국가적인 행위란것이 중요하다. 제관의 중국행은 중국불교력사상 중흥천태(中兴天台)에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제관의 중국행이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중국불교제일종(中国佛教第一宗)으로 알려진 천태종력사 및 천태종의 중한불교교류력사를 간략하게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중국력사상 진수시기(陈隋之际) 남북조불교(南北朝佛教)의 충돌과 융합을 거친후 불교사상리론의 통합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기초상에서 최초의 중국불교종파인 천태종이 형성 되였다. 천태종사상의 근원은 룡수(龙树)의 대승중관사상(大乘中观思想)인데 혜문(慧文)이 처음으로 창립하고 남악혜사(南岳慧思)의 발전을 거쳐 최종에 지자대사(智者大师) 지이(智顗)에 의해 확립 되였다. 지이(538—597)는 《법화경(法华经)》을 중심으로 남북조불교의 의학(义学)에 근거하여 특별히 혜문의 “일심삼관(一心三观)”및 그 은사인 혜사의 “십여사(十如是)”설과 “선의쌍수(禅义双修)”의 주장을 발전하면서 “원융삼제(圆融三谛)” “일념삼천(一念三千)” “성구선악(性具善恶)” “지관쌍수(止观双修)”등 사상을 제출하고 천태종의 불학리론기초를 확립 하였다. 지이가 확립한 지관병중(止观并重)의 천태종리론체계는 리론사유방명에서 당시 철학사상계의 최고수준에 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실천방면에서도 탄탄한 실력과 온건함을 보존하였기에 천태종의 수당시기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후로 꾸준한 발전을 거쳐 오다가 당말오대(唐末五代)에 와서 중국불교의 한차례의 회멸성적인 타격인 회창법난(会昌法难)을 겪고 쇄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북송초에 들어서서 비록 천태승 의적(义寂)이 천태종을 계승받았지만 경전의 대량류실로 정상적인 교리전습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이것이 바로 제관이 중국에 오기전의 중국천태종의 상황이다. 중국에서 류실된 천태종경전을 해동고려국에 가서 찾을수밖에 없는 원인은 바로 조선반도는 오래전부터 중국천태종과 교류가 있었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서 천태사상을 배우고 또 그 경전들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현광(玄光)법사를 비롯해서 수십명에 달하는 승려들의 끊임없는 구법(求法) 학법(学法) 전법(传法)활동의 주도하에 중한불교의 빈번한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 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천태법화(天台法华)사상의 발전도 가속화 하였다. 통일신라시기의 원효(元晓) 등의 천태법화사상의 연구기초상에서 자린(子麟)이 전달한 지자대사의 천대경전과 더불어 고려시기에 천태교리는 큰 발전을 가져왔으며 제관 의통 덕선 지종 의천 교웅 등 인물들을 배출할수가 있었다. 제관이 중국에 오면서 많은 중요한 경전들을 들고 왔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중요한것은 지론소(智论疏) 인왕소(仁王疏) 화엄골목(华严骨目)과 오백문(五百门) 4부 경전이다. 고려왕은 제관한테 만약 중국에서 제관의 의문에 해답할수 있는 인물이 없으면 경전들을 다시 고려에 들고 오라는 밀령까지 내렸을 상황이다. 제관이 들고 온 4부의 경전은 아주 높은 가치가 있었는바 바로 그 경전들이 돌아옴으로 하여 중국천태종은 비로서 다시 흥성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관은 천태산에 머무는 동안 의적과 함께 천태종교리에 관해 많은 공부를 하면서 그 자신이 일생동안 정통한 천태사상을 반영한《천태사교의(天台四教仪)》란 저서를 남기면서 후세의 천태종 승려들한테 아주 좋은 종파입문서(宗派入门书)가 된다. 의통(927—988)은 제관과 동시대의 인물이고 비슷한 시간대에 오월지역에서 활동하고 오월불교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끼친 또 다른 고려승이다. 의통의 중국행은 비록 제관처럼 국가적 측면의 불교교류행사는 아니였지만 그가 중국에 머물은 시간이 제관보다 길고 나중에 녕파에 보은선사(宝云禅寺)를 창시하고 천태종16조세존(世尊)으로 되는 점에서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력의 중요성을 알아볼수가 있다. 또 제관이 의적과 함께 천태산에서 천태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면 의통은 천태종이 천태산를 벗어나 타지역으로 확장하는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개보원년开宝元年(968)년 의통이 사명(지금의 녕파)에 정착해서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선후로 태평흥국사년太平兴国四年(979)에 지례(知礼)를, 옹희원년雍熙元年(984)에 준식(遵式)을 제자로 받아 들이는데 이들이 바로 후세에 천태종명맥을 계승해 내려간 중요한 인물들이 였던것이다. 그뒤로 백여년후 또 한명의 고려승이 오월지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천태종을 고려에 창립하는데에 중요한 공헌을 할뿐더러 당시 경전 소실이 아주 엄중한 중국불교 화엄종《华严宗》이 다시 부흥할수 있도록 중요하고 관건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의천 이다. 기원 1055년, 고려왕 문종왕휘(文宗王徽)의 넷째아들로 태여난 의천법사(义天法师)가 어려서부터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할것을 꿈꾸면서 당시 항주일대에서 유명했던 정원법사(净源法师) 등과 서신왕래를 해오다가 기원 1085년에 끝내 송나라 상인의 상선에 몰래 올라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오게된다. 뒤늦게야 소식을 알게 된 고려왕실에서 왕자의 신분에 맞는 격을 차려서 사절단을 배동시켰는데 송나라 조정에서도 매우 큰 중시를 돌리고 특별배동관원을 파견하여 의천법사가 중국에서 널리 불법을 구할것(游方求法)을 허락하였다. 의천대사의 구법활동은 송나라 국경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관청 즉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송나라 조정에서는 의천의 구법활동을 하나의 외교사절활동으로 대하였다. 송나라 건국초반 “선남후북”의 정책원인으로 북방의 거란 료나라는 세력을 키우면서 나중에 송나라의 큰 우환이 된다. 순화오년(994)과 함평륙년(1003) 고려국은 료나라의 침략을 걱정하여 두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서 송나라 조정에서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켜 료나라를 견제해줄것을 요청하였지만 송나라 조정에서 아무런 군사행동도 없는것에 크게 실망하고 송나라와의 조공관계를 중단하게 된다. 료나라의 도종(1055-1101)통치시기 료나라 국운의 쇠퇘로 고려왕실과 송조정이 다시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회복할것을 도모하던 시점에서 이천의 구법활동을 빌어 순수한 종교적 색채를 초월한 서로간에 “량국우호와 량국관계의 정상화를 희망한다는 태도”를 보여줄려는 의도가 명확하였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 의천의 구법활동은 아주 효율적으로 진행될수가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원만한 성과를 거둘수가 있었다. “四海同一家,何此亦何彼”이는 이천의 구법활동이 객관적으로 조성한 사회 영향력이였으며 구법활동의 정치적 목적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천태종을 창시한 의천이 출가해서 처음 접한것은 사실 화엄종계렬이였으며 출가한후 줄곳 란원(烂圆)법사를 모시면서 화엄경전을 공부하다가 문종삼십년(1076) 경덕왕사란원이 입적한후 그뒤를 이어 독립적으로 화엄강좌를 하게 된다. 의천은 화엄가로 출가하였고 그의 전 생애를 화엄과는 분리할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여 있었다. 하지만 그어게 있어 교와 관을 함께 닦는 법화천태학은 또 하나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의천은 성상의 겸학과 교관의 병수를 강조하여 겸과 병을 그의 사상적 과녁으로 삼았다. 그가 둘 이상을 겸 혹은 병하고 모든 방면에 통하려고 했던것은 고려 당시 불교의 자종 우월주의 혹은 자종 중심주의 벽을 허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엄가였던 그를 화엄종에 가둘 필요는 없으며 동시에 천태종을 창시했다고 해서 그를 천태종에 가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의천은 입송구법이전에 이미 많은 경전들을 탐독하고 그 연구가 정통하였을 뿐만아니라 유가 도가를 비롯한 중국백가지설에 대해서도 깊게 리해를 하였는바 그의 학술은 화엄 천태에만 국한 된것이고 아니고 그의 입송구법은 근근한 문학(问学)이 아니고 발전과 전파라고 할수 있다. 이런점에서 바로 의천이 정원법사하고 항주고려사에서 화엄경전을 연구하는 동시에 유성법사 자변법사 등과 천태경론을 연구하게 됨을 충분이 리해 할수 있으며 항주고려사가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치문화종교교류와 불교종파적인 화엄 천태 사상의 교류와 통합의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수 있다. 항주고려사를 비롯해서 제관 의통 의천 등이 오월지역의 종교신앙과 중국불교의 변화와 발전에 적극이고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듯이 오늘날 동아세아의 중일한 3국뿐만 아니라 세계여러나라에서 학문을 닦은 여러분야의 조선족 학자들도 우리 조상들의 행적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더 적극적인 자세로 학술연구와 생활에 노력하면서 우리 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큰 기여가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10    새벽명상---2 댓글:  조회:887  추천:0  2015-11-30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나? 上古시대부터 灵性이 부여 된 생명체라면 항상 고민해오던 물음이거늘...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에 나의 것이 아닌 헛된것에 욕심을 부리며 고민에 고민을 연속하며 고통속에서 부대끼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를 모르기에 머리 짤린 오리처럼 온몸의 피를 꿈어대며 허공을 향해 열심이 뛰여가다 지쳐서 쓰러진다. 삼라만상이 고요함에 빠져든 이른 새벽에 콧구멍으로 드나드는 숨소리에 귀울이고 몸속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각을 느끼면서 오늘도 명상속에 잠겨본다. 그렇게 언젠가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를 깨닳을... 그날이 올지니라.
9    새벽명상---1 댓글:  조회:876  추천:0  2015-11-30
삼라만상이 깊은 잠에 빠져 든 이른 새벽 처마에서 절주있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중간중간 주르륵 촐랑촐랑 화음도 들린다. 언제나 들어도 들어도 끝없는 우주의 이야기들... 비가 많은 강남의 사시장철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지긋지긋하고 처량하고 을씨년스럽던 그 비가 언젠가부터 그런 비에 도취 되여 즐기고 있다. 찬바람과 더운바람의 부대낌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한송이 구름으로 태여나서... 정처없이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울퉁불퉁 수없이 모양새를 바꾸며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았지... 그렇게 모여졌던 이야기들이 비가 되여 방울방울 빗방울을 떨어뜨리며 나한테 속삭인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새벽명상에 잠겨서... 그 이야기들을 열심이 열심이 귀담아 듣고 있다.  
8    천년고찰과 현대커피숍 댓글:  조회:2611  추천:0  2012-10-12
▲ (상) 령은사 스타벅스 체인점 ▲ (하) 령은사 정문 요즘 항주에서는 천년고찰 령은사와 미국 커피숍체인점인 스타벅스를 두고 여론들이다. 처음엔 “천년고찰 령은사에 스타벅스란 서방현대식 커피숍이 영업을 시작한다”는것으로 소문이 퍼뜨러졌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은 령은사관광지 주차장 옆에 미국 커피숍체인점인 스타벅스가 령은사분점을 개업한것이였다. 몇년전에 북경 고궁안에 분점을 개업하였다가 사회여론때문에 부득불 문을 닫을수밖에 없었던 스타벅스가 이번엔 인간천당이라고 불리우는 항주의 유서깊은 천년고찰 령은사의 이름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사회여론을 통하여 무료로 “상업광고”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것이다. 령은사관광지에는 이미 언녕 령은사 산문 정면 50메터도 안되는 위치에 미국 닭튀김 체인점인 KFC가 개업을 하였으며 항주의 다른 유명한 식당들도 그 부근에 분점을 개업하고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식당들에 비하면 이번에 개업한 스타벅스는 그 위치나 규모면에서 한창 불리하였는데 이번 사회여론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그쪽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몇일전 궁금해서 새로 개업했다는 스타벅스도 구경할겸 겸사겸사 오랜만에 령은사주변을 슬슬 산책하면서 잠간 사색에 잠겼었다. 령은사가 비록 천년고찰이라 하지만 지금 사람들앞에 보여지는 사찰 모습은 기껏해야 150년전의것이고 대부분은 현대에 새롭게 세워진것들이다. 1600여년의 세월이 흘러오면서 령은사 사찰은 전란 또는 이런저런 원인으로 여러번이나 완전 파괴되였다가 다시 지어졌는데 지금하고 제일 가깝게는 문혁시기 홍위병들의 “破四舊”운동으로 대재앙을 당했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정부의 종교문화정책의 변화와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통신앙숭배 등등 원인으로 령은사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풍파를 거치면서도 령은사가 오늘같이 또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된것은 령은사가 1600여년의 세월과 더불어 쌓아 온 무형의 정신적이고 靈적인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령은사 사찰을 처음으로 세운 인도의 혜리스님으로 시작해서 중국의 민간에 널리 알려진 제공스님, 그리고 침략지역을 잘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령은사 비래봉에 수만은 불상들을 만들어 놓은 원나라의 몽고족황실과 령은사에 직접 편액까지 써준 청나라의 만주족건륭황제를 비롯해서 령은사에는 수많은 인물들에 그들과 엮인 일화들로 그 무게가 더 가는지도 모른다. 그런 전설들과 일화들을 증명해주는 혜리스님 사리탑과 제공스님 손자욱이 박힌 바위돌에 제공스님이 개고기를 삶아먹었다는 부엌돌과 비래봉 여기저기 또는 웅장하게 또는 정교하게 새겨진 마암석불상들을 구경할려고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밀려든다. ▲ (상) 령은사 KFC 체인점 잠간 이야기를 고향 연변으로 돌려 볼려 한다. 올 여름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고향에서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자치주6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며 연길시전체를 새롭게 단장하고 있었는데 시내 주요도로 량옆 건물외벽을 유럽풍으로 조선민속풍으로 단장하고 있었으며 모아산기슭에는 어마어마한 투자를 들여(소문에는 수십억이라 하는데) 민속촌을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연길시내나 룡정시내의 유서깊은 건물들은 언녕 지난 팔구십년대의 도시건설시기에 흔적없이 사리지고 이제와서 그 팔구십년대에 세워진 건물들 외벽에 또 확불면 날려갈 날라리 화학품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것단장을 한들 아무런 의미도 부여될리 없을건 당연한게 아닐가 생각한다. 연변이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자치주라 하지만 진정 연변 땅에서 지금까지 잘 보존된 조선민족의 유서깊은 건물이나 유적지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말못할 아쉬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지난세기 팔십년대 중반의 룡정시 중심거리(그시절 우린 삼백화거리라 불렀다)건설장면이다. 조선전통의 팔간기와집들이 통째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그자리에 들어서는 현대식 층집건물들이 그렇게 징그러울수가 없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의 모든 추억을 깡그리 빼앗긴다는 분노의 감정만 살아날뿐이였다. 그후로 그 거리를 의식적으로 피해다녔으며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다가 가끔씩 고향에 들르면서 지금 또 다시 점점 낡아빠져가는 그 “현대식건물”들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중국 각지역 유명관광지로 소문나는 옜동네나 고풍골목들이 수없이 많다. 산서의 핑요나 강소 주장과 절강 오진 등등은 바로 온 동네와 골목 전체가 거의 완벽하게 옜날 모습을 잘 보존하여 온 그것때문으로 오히려 관광산업을 발전시킬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말로만 유서깊고 전통이 잘 보존된 연변이라 하지만 오히려 시대가 바뀔때마다 그 누구보다 급급하게 상급의 지시정신을 높이 받들고 앞장서서 모든걸 새롭게 바꿀려고 애를 태웠던 연변이 아니였던가 생각해본다. 고향에 갓던김에 성수나고 구수한 연변민요와 타령들을 묶은 CD를 사서 운전중에 기분을 돋구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노래가사에 실성을 하고 말았다. 연변타령 작사/임효원 작곡/정진욱 노래/김순희 동풍이 불어 온다 세월이 좋을시구 도문강 칠백리에 경치도 좋지마는 쇠돌을 캐여내는 남포소리가 더 좋구나 총로선 눈부시다 세월이 좋을시구 장백산 밀림속에 산삼도 좋지마는 목재를 베여내는 전기톱 소리 더 좋구나 자동차 내달린다 속력도 좋을시구 해란강 넓은 벌에 안개도 좋지마는 제련소 하늘가에 검은 연기가 더 좋구나 아름다운 고향의 산천을 파괴하는 “남포소리、 전기톱소리、 제련소 검은연기”가 더 좋다고 노래까지 지어서 성수나게 불렀으니 더 할말이 없다. 지금의 항주는 천년고찰 령은사에 서방현대식 커피숍이 들어서는걸로 여론이지만 “유서깊고 전통깊은 연변”에선 시대의 발전에 너무나 잘 발걸음을 맞추어 왔으니 그런 여론들이 없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江南行僧 2012-09-28  
7    출근길 단상 댓글:  조회:1747  추천:0  2012-01-28
  출근길 단상   요즘은 시내에 있는 집에서 개발구에 있는 회사로 출근을 하는것이 점점 고역으로 느껴진다.   작년까지만 해도 출근시간대에 엄청 밀리는 교통체증을 감안해서 아침일찍 집에서 출발하면 약 사십분정도만 길에서 시간을 빼앗기는데 지금은 소학교에 다니는 딸애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출근을 할라니 마침 그 시간대가 제일로 막히는 때인지라 길에서 소모하는 시간이 적어도 한시간 반은 걸리고 혹간 중간중간 교통사고같은것이 발생하면 두시간씩 걸리니 그 고역이 이루다 한입으로 말할수 없다.   그러나 정작 또 출근시간이 고역이라고 말하고, 정말 그렇게 고역스러운가고 곰곰이 따져보니 너무 그렇지만도 아닌것 같으다. 그것도 아마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고역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고역으로 느껴지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사실 내가 하는 일이 꼭 출퇴근시간을 정각으로 맞추는 그런 일도 아니기에 구지 출근시간에 목매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심리라는것이 일단 회사에 간다고 떠나면 무작정 한시라도 빨리 회사에 도착하고 싶은것이 보편적인 마음가짐인것 같으다.   그러기에 길에서 앞차가 차량흐름을 맞추지 못하고 굼벵이걸음을 하면 괜스레 역정부터 앞서면서 빵빵 경적을 높이 울리거나 헤드라이트를 깜짝거리며 엄청 불만을 표시하는가 하면, 잽싸게 옆차도에 들어서서 그 차를 초월하면서 은근슬쩍 그쪽으로 휙 핸들을 꺾어대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씩, 아니 자주 나타나는 웃기는 현상이 뭐나 하면…그렇게 제딴에는 “굼벵이”를 앞질러서 빨리 달린다고 하는데 금방 또 신호등때문에 앞에 길다랗게 늘어선 줄에 끼여들수밖에 없고 바로 옆줄로 방금 초월했던 그 “굼벵이”가 나란히 섯다가 그만 그줄이 먼저 움직이면서 그 “굼벵이”가 저 앞으로 하염없이 달려나가는것이다. 그때 그 순간에 터지는 울화통은 정말 이루다 뭐라 형용할수 없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잘 알것이다.   그러한 순간순간을 너무나 여러번 경험하다보면 으레 그렇거니 무덤덤해지기도 할런만 유독 핸들만 잡앗다하면 도무지 마음의 평온을 잡기가 어려워지는것이 참 이상하다. 아마도 그래서 목사나 스님들도 핸들을 잡으면 욕소리가 저절로 나간다고 하는 모양이다.   사실 현재 중국사회에서 그나마 자가용 혹은 회사차로 출퇴근을 하는 수준이면 구지 정각에 출퇴근을 할 필요도 없고 사무실에 나가서도 그렇게 다람쥐가 채바퀴를 돌듯이 눈코뜰새없이 바삐돌아칠 사무도 많은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길에 나선 차량들을 보면 저저마다 승냥이에 쫏기우는 양떼들처럼 허겁지겁 남들보다 앞서간다고 안달들이다.   중국사람들은 일상에서 속도위반까지 하면서 질풍같이 달리는 차를 보면서는 “赶着去投胎啊?/너 급하게 환생할 일이라도 있나?”하거나 또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굼벵이 걸음을하는 걸보면서는 “等着雷劈死啊?/번개에 맞아 죽길 기달려?”한다.   인생나이 불혹에 이르고 보니 가끔씩은 인간들의 생사가 다 하늘에 정해진거라는 숙명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앞만 바라보고 누구보다 한시래도 빨리 갈려고 아득바득 한생을 보내는 인간이나 세월아네월아 차레지는 인생을 마음껏 즐기다가 한생을 보내는 인간이나 결국 땅속에 묻히는 그 신세는 똑같은데…   죽어서 땅에 묻혀 수천수만년을 보내는 시간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빨리 달린다고 아득바득하는 수십년의 시간은 정말로 그냥 눈깜빡하는 순간에 불과한데,  그 가운데의 한두시간의 출근길도 고역이라고 투덜대는 이 순간의 나를 생각하니 저절로도 한심하다는 생각뿐이다.   2010년6월4일 천당항주에서
6    대만의 ‘마잉쥬 연임을 보면서 떠오른 단상’ 댓글:  조회:1939  추천:0  2012-01-28
어제저녁에 대만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소속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주석을 따돌리고 연임에 성공했다. 더불어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집권 국민당이 압승했는데 대만 유권자들은 불안한 개혁의 대만보다는 안정의 대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친중국 성향의 마잉주(馬英九)가 연임에 성공함에 따라 중국과 대만은 기존의 우호적 관계는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듯싶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번 대만의 총통 선거에 마잉주(馬英九)의 당선을 지지해 온 중국과 미국이 ‘보이지 않는 승리자’란 말도 있다. 그만큼 미국과 중국은 마잉주(馬英九)가 당선되기를 학수고대했음을 짚을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 되었거나 마잉주(馬英九)의 당선에는 대륙 쪽이나 미국 쪽의 은근한 지지가 있었던 듯싶은데, 친 중국정책을 펴는 마잉주(馬英九)가 대만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모양이다. 각설하고 국민당 마잉주(馬英九)의 연임을 보다가 문득, 왜서 그 옛날 엄청난 적대 세력인 대륙의 중국 공산당을 지척에 두고서도 대만의 장개석은 미군의 실질적인 대만주둔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매우 궁금해서 두루두루 유관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훑어보니――대만에 ‘주둔’했던 미군도 고작 고문단 정도였으며 그것도, 조선전쟁이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실시했다가 1978년 즈음에 거의 철수했고, 지금은 고작 AIT(America In Taiwan) 정도의 문관들뿐이라 하는데…. 즉 다시 말하자면 대만의 장개석도 좋고, 공산 세력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한다는 미국도 좋고, 왜서 그렇게 유리한 전략적 위치에 있는 대만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왜, 거대한 군사세력을 대만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자못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구글 지도를 보면서 여러 지역을 뒤적거리다가 온주 복건지역 앞바다의 자그마한 섬들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특이점을 발견했는데, 아직도 바로 온주나 복건지역 지척에 잇는 섬들에 국민당 군대들이 주둔해 있다는 점이다. 저 머나먼 소말리아 앞바다에서까지 해군을 파견할 수 있는 대륙의 군대가 바로 코앞에 있는 섬들에 대만군대들이 주둔해 있는 것을 왜서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일까. 그와 다르게 수만 명의 미군이 주둔해있는 한반도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남북 사이의 ‘군사충돌 위험성’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는 점에 비하면, 대륙하고 현저한 군사 열세의 차이를 두고서도 미군의 실질적인 주둔을 원하지 않는 대만의 정치가들이나 지척에 국민당 군대들이 있는 것도 가만히 놔두는 대륙 정치가들이나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걸 두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你中有我,我中有你"의 진수라고 하는지도~~~  
5    "静"与"净"的区别 댓글:  조회:1832  추천:0  2012-01-05
静与净的区别   于波永     安静、纯净听起来好像很接近,但是差别很远。 我认为... 安静的人,在外表。 纯净的人,在内心。    扩展开来,静是根本,而净是根原,争是源动力. 从汉字本身来看,jing两个字都和争有关系。 没有争论、争吵、挣扎、挣脱就静不下来,静反而像是一个结果。 净呢?反而像是什么也没有,好像是原点一样。 如果按照用数学矢量的方式来解释,反而能够解释很多的事情。 依次类推,净是原点,或者起点; 而静是结果,那么我们处在两个点之间,中间就是浮躁的。 就是我们的人生过程。     老年人喜欢安静,或者不喜欢安静也要安静,因为可以明哲保身、独善其身。 而,小孩子,纯净,毫无知识能力可言, 那么我们人生的中间状态就是浮躁的,起起落落,难得求一个安静。 同样道理,我们做事情,刚开始就是o,纯净的有动力, 然后有了追求,有了需求,有了要求,有了目标,有了目地,有了很多的东西, 物质、财富、精神、感触等等,一直到事情的最终破裂,我们重新回到安静的状态。 我们的中间无论结果是输还是赢,都归于安静。   同样道理,用数学的方法来讨论人生的的一些事情, 包括工作、感情、生活等等,我们以净为原点、以静为终点,在归于静和净的转化的时候, 我们就会产生新的故事, 新的工作, 新的感情,新的生活。 无论我们冲破或者绕过去,都是两种方式能够通透明理的。 但是,我们的痛苦就在于不能通透或者绕过去。 两种基本方法迫使我们要走弯路,要走冒险的路,要走绝路,要走不寻常的路。      
4    한국 출장 중 얽힌 에피소드 둘 댓글:  조회:2702  추천:1  2011-12-19
“하나, 똑같은 사건으로 느끼는 부동한 감정” 우연한 일인지 모르나 이상하게 한국에 출장 갈 때마다 긴장감 도는 사건이 터지곤 한다. 예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이 터지더니, 올해에는 또 한국 해경사망 사건으로 한국사회가 들끓는 분위기라 묘한 느낌이다. 이번 한국 출장 기간 중 많은 한국 TV 방송에는 ‘주중 韓 대사관, 공기총 추정 쇠구슬 피격’이니, 중국어선들의 상습적인 ‘폭행’ 장면이나 지난날의 사건 일지를 끄집어 내고…… 한편, 한국정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무척 애쓰는 모습이 확연히 보이는 듯싶다. 이런 한국 내 분위기에 편승한 탓일까. 모 중화요릿집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중국사람들끼리 한국 해경사망 사건을 두고 이야기하다가 남방계열 한족들과 북방계열 한족들이 하마터면 큰 싸움이 날뻔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한 좌석에서 남방계열의 한족 한 사람이 “남방사람들은 유순한 편이라서 이런 폭행사건은 있을 수 없고, 무조건 성격이 거친 북방사람들이라 했을 것이다”라고 불쑥 말했는데, 옆좌석에서 식사하던 산동 한족들이 그 말을 듣고 좌석에서 우당탕 일어나고 급기야 일발 촉발의 사태가 일어날 뻔한 촌극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 출장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 후 기내석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탑승객들의 화제 또한 한국 해경사망 사건에 대한 잡담이 많았다. 한국에서 쇼핑한 후 화장품, 고급옷을 양손에 가득 들고 비행기에 탑승하는 중국 관광객들은 제각각 여러 가지 전망을 쏟아냈다. 어디선가 “뭐니뭐니해도 씀씀이가 큰 손인 중국 관광객들을 봐서라도 한국정부나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금방 잠잠해질 것이다”라는 말도 언뜻 들렸다. 이렇게 비행기 기내에서도 이번 사건이 민감한 이슈였다는 것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임에도 처한 환경이 일순간 변하면 감정도 조금씩은 변하는 듯싶다. 이번 해경사건으로 한국에서는 온통 한국해경을 추모하는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탓에 필자도 모르게 ‘참으로 안됐구나’ 하는 안타까운 감정이 들곤 했는데, 중국에 돌아온 후 감정은 한국에서 느꼈던 감정과 또 약간 다르니……. 이렇게 인간은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위환경에 의해서 스스로 다른 영향도 받을 수 있나 보다.   “둘, 한국에서 생활하는 신화교의 고민거리” 이번 한국 출장을 나가기 전, 한족 친구(길림에서 학교 다닐 때 가깝게 지내던 한족 친구)로부터 “한국에 나가면 자신의 남동생을 만나고 왔으면 한다”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어느 날 친구 남동생과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만났다. 한족 동생은 한국에서 석사 공부를 마치고 한국 모 회사에 취직해서 생활하고 있었다. 친구 동생은 근 3여 년간 중국에 귀국하지 않고, 줄곧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그 나름대로 한국생활에 적응하려고 김치도 즐기고 한국어와 한국문화, 그리고 소소한 한국인의 일상적인 생활 습관까지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족 동생도 말 못할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제 딴에는 열심히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가끔 주위의 한국사람들이 중국에 관련한 새로운 이슈를 질문하곤 한다는데, 그 질문에 동생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어리둥절하는데, 한국인들은 동생의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반응이 열이면 열 “당신은 도대체 중국 사람이 맞는가?”하면서 확인하고, 그러다 보면 동생은 감정이 상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3년간 생활하는 한족 동생에게 중국 국내에서 발생하는 최근 이슈를 종종 질문하는 한국사람들이 있다곤 하는데 솔직 그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생활하는 한족 동생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즉 중국 사람이라고 중국에서 발생하는 최근의 모든 이슈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물음이다. 悠悠玄冥 연변통보 2011-12-19
3    가슬기분에 취해서... 댓글:  조회:1846  추천:2  2011-09-08
9월달에 들어서니 슬슬 가슬기분이 짙어오고 있는데... 어제저녁엔 시원하게 불어오는 호수바람을 쏘이면서... 저멀리 빨강불이 반짝대는 뢰봉탑과 성황각을 바라보며... 서호가에 혼자앉아 깡통맥주를 홀짝댔는데... 그 기부이 참으로 유별낫다 아이가.... 오라재믄 추석도 다가오는데... 고향 친인들 산소에 못가는걸 안타깝게 생각하며... 뭘 바라고 타향에서 이렇게 사노... 잠간 인생타령도 불러봣다 아이가... 몇년전에 조선말만 짹짹대며 항주에 왔던 딸애가 지금은 조선말이 아닌 항주말로 솰솰대니... 은근이 정내미 뚝뚝 떨어질가 하다가도... 울 부부간끼리 뭐라고 조선말로 쑥덕대는건... 귀신같이 묘하게 다 알아듣고 능글스럽게 지껄여 온다 아이가...참ㅎㅎ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추석날 둥근달도 몇번이고 뜨고지고 대갈통에 돋아난 머리카락도 한오리 두오리 하애만 지는데 애새끼도 허리통을 지나서 이제는 어깨겨름 해오건만... 타향살이에 찌들은 얼굴엔 주름살만 늘어나누만....음~~~~~~~~~~~  
2    氣.勢에 대해 횡설수설 댓글:  조회:1828  추천:0  2011-07-25
어제 저녁 한동안 사납게 우뢰울고 번개치고 하던 하늘이 오늘 아침엔 구름한점없이 화창하게 개이며 한여름의 무더위를 확확 뿜어대고 있다. 울창한 수림속에 뭍혀 사는 동네다 보니 어제 동네 한가운데로 면바로 내리친 번개로 동네 수많은 가전제품이 날려가버리고 TV인테넷 케블선 등도 완전 먹통이 되여 버렸다. 저번에 온주에서 발생한 특대사고도 우뢰번개 때문이라고는 하는데… 요근래는 해가 난다 하면 가뭄이요 비가 내린다 하면 폭우에 물피해이고 바람이 인다하면 강풍인데…그 옜날의 風調雨順의 天氣를 근본 찾아 보기가 힘들어 졌다. 매일같이 TV화면 일기예보에 생동하게 보여주듯이 구름이 끼고 눈비가 내리는것이 모두가 북방의 찬 氣운과 남방의 더운 氣운이 힘겨루기 즉 勢력다툼을 하면서 밀치닥닥치닥 거리며 여거저기에 바람도 일구고 눈비도 내리게 한다는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그런 氣싸움이 옜날에는 그나마 유順했는데 요근래에 점점 험惡해 졌다는 뜻으로 해석되겠다. 바둑을 좀 둘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둑판의 氣 와 勢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것이다. 바둑을 둠에 있어서 바둑알 한두개를 먹고 따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氣와 勢의 흐름을 장악하고 命脈을 先手로 잡는것이 승부를 두는 관건이니…. 그리하여 바둑을 둠에도 처음부터 딱 몸을 맞부치고 두눈을 부릅뜨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밀치닥 거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슬슬 차나 한잔 마시며 부채질 건들건들 해가면서 서로간에 안전거리를 두고 슬슬 기와 세를 장악하다가 명맥을 바로 잡아 치면 허허 호탕하게 웃고 판을 접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기와 세를 장악하기 위한 기초로 바둑알로 어떻게 陣을 치는가의 요령을 장악하는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낫 陣을 치고 부수고 하는것에만 재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기도 하다. 내가 언제부터 자장가를 부르듯이 귀곡자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귀곡자도 앞부분에서 실컷 자연의 흐름과 인간세태의 흐름를 어찌 장악하는가를 말하다가 결국 마지막 부분의 本經陰部에서 최종적으로 “盛神 養志 實意 分威 散勢 轉圓 損奐”로 어찌 하면 자신의 氣와 勢를 조절할것인가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요즘 인간들이 자신들의 氣와 勢의 조절을 홀시하고 눈앞의 사리사욕에 물들고 욕심이 하늘을 치솟아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연이 조용하게 养精蓄锐 즉 기를 숨쉬게 할수 있는 기회를 안 만들어 주니, 자연도 겻달아 虛氣만 가득 차서 음양이 맞 붙었다하면 너무나 격렬하게 세력 다툼을 치를수밖에 없고 결국 그 재앙을 인간들이 그대로 다 돌려 받는것이다. 
1    하늘 구중천에서의 명상 댓글:  조회:2438  추천:0  2007-06-13
  연통에서 어느 논객과 인간들의 사유의 장벽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비행기를 타면서 창밖의 구름바다를 흔상하는 재미를 잠간 말하였다.   나이는 한해한해 먹어 가건만 마음은 언제나 童心인걸…   내가 세상을 알기시작하기는 연길시 의란진에서였다.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있는 골짜기속에서 산너머의 세상으로 향한 동경은 그렇게 강렬할수가 없었다.   하여 방학만 되면 뻐스타고 기차타고 외가집으로 가는 여정은 언제나 즐겁고 즐겁기만 하였다.차창으로 언뜻언뜻 뒤로 밀려가는 풍경은 언제봐도 신기하기만 하였고 사이사이 마을들을 지나칠때면 그곳 사람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살아갈건가 무척 의문스러웠다.   그것이 습관으로 되여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꼭 창문옆의 자리를 찾이하고 하염없이 창밖의 구름바다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것을 즐기고 있다.   비행기가 대가리를 건뜻 쳐들고 공중에 오르면서 도시와 산천을 발아래로 아득하게 밀어버리고 파란 하늘아래의 천태만상의 구름층을 밟고 유유히 날아갈때는 진짜 신선이 따로 없다는 기분이다.그러면서 저 여러층의 구름아래 콩알만한 마을마을속에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다.마치 석가모니나 여호와 옥황상제가 된것같은…    이우에 있을적에 즐겨찾았던 사찰들 중 산정에 자리잡은 瑞峰寺란 작으마한 사찰이 있었다.   시내에서 교외뻐스를 타고 시골길을 한창달려 산기슭의 마을까지 도착해서 다시 가파로운 돌계단을 따라 힘겹게 사찰에 이르러 시원한 약수 한모금 꿀꺽 마이고 고개를 돌려 산아래 동네와 올라온 길을 바라보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음미하는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그러나 누구나 손오공처럼 근두운을 타고다니는 재간이 없듯이 언젠가는 다시 땅에 내려가서 좋거나굿거나 생계를 위해 솰라솰라 인해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것이다.   산속의 조용한 암자도 좋건만 인간생활의 고달픔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또 암자의 조용함도 즐길수가 없듯이.. 내내 하늘 구중천에서 허무한 구름바다만 바라보는것도 결코 즐거운 일만이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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