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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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개 팔자와 인간다움 댓글:  조회:685  추천:0  2024-03-08
사람들이 분주하고 고생스런 삶을 살 때 그 고달픔을 넋두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 팔자가 상팔자’란 말입니다. 바쁘고 고달픈 일을 하고 있는 인간과 달리 아무 일 안하고 돌아다니는 개의 삶이 인간보다 낫다는 말이지요. 노동하는 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썰매 개나 사냥개, 그리고 안내 견, 마약탐지 견, 수사 견 등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개들입니다. 거기다 인간의 취미에 동원되는 개까지 있습니다. 경주 견, 싸움을 목적으로 키우는 투견도 있습니다. 인간들은 개를 이렇게 부려먹고 삽니다. 약 60년 전만 해도 농가에서는 보리타작과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고된 노동으로 녹초 상태에 이릅니다. 이때를 겨냥해서 미리 키워온 개를 잡아 동네잔치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개는 가축이고 고단백 섭취를 위한 비상식량이었던 셈입니다. 세상이 바뀌어 개가 반려 동물로 등극하자 주인 잘 만난 개는 굶주림의 걱정이 없고, 실내에서 주인과 동거하니 추위에 떨 필요도 없고, 병들면 치료까지 해주고, 목욕이나 털 손질 등 미용에까지 주인이 배려해주니 개는 짐승이라기보다 인격화된 식구로 격상한 셈입니다. 솔직한 말이지만 이럴 때의 개는 인간의 위로를 주는 살아있는 장난감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개가 이렇게 사는 것이 상팔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어떠했든 예전대로의 개 팔자가 아니라 상팔자 개 세상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 이같은 개 팔자 닮아 세상 잘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모 잘 만나 엄청난 상속을 받아 걱정 없이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땀 흘려 일할 필요가 없고, 재산 전담 관리자에게서 금전출납의 보고만 받으면 됩니다. 아무 때나 여행하고, 먹고 싶은 것 역시 요리솜씨가 좋은 식모를 두거나 유명 식당을 찾아가면 됩니다. 철 따라 옷이나 갈아입고 손톱 소제, 머리 손질이나 하고, 골프나 치고,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다니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개 팔자 닮은 상팔자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을 쌓기 위해 분주해야 할 필요를 안 느끼겠지요. 힘든 공부를 왜 해? 과연 이런 태도가 맞을까요. 지식은 습득해야 할 삶의 기술이고, 삶을 보람 있게 잘 살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재능 역시 슬기롭게 삶을 사는 능력이지요. 지식이나 재능은 그것의 쓰임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활용됩니다. 칼이 요리를 하거나 생활의 편리에 쓰일 때는 선한 도구이지만 타인에게 위해하는 데 쓰일 때는 악한 도구가 되는 거와 같습니다. 인간행위의 고귀한 품성을 발휘할 때 그를 두고 인간답다고 말합니다. 지식과 재능을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쓴다면 그를 인간답다고 하지 않지요. 내 삶이 중요하듯이 타인의 삶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할 때, 그를 두고 인간답다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행복 추구에 몰두하여 돈을 쓰거나 자신의 과오를 위선으로 포장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동물답다(이 말이 잘 쓰이진 않지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앉을 수 있어야 의자라 합니다. 인간도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인간답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로 pity, compassion, sympathy 등이 있습니다. 모두다 상대방의 곤란한 상태에 인간적 마음가짐을 나타낸 말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고통을 공감하면서 그 고통을 내 것인 양 아파하는 것, 여기서 더 나아가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가짐은 사람으로서 행사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이것을 compassion, sympathy라 합니다. 예고 없는 삶의 재난 때문에, 운명의 그릇된 진행 때문에 선한 상대방이 불행에 빠져 고통 받을 때에 등장하는 인간다운 마음씨 이것이 compassion, sympathy입니다. 삶을 잘 사는 사람은 이런 마음씨를 배운 사람, 그리고 배운 이걸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삶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보유자이고 인간다운 재능의 보유자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동물과 크게 다른 것은 자유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법의 범위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의 강요 없이 인간다움의 행사를 선택하여 펼치는 것, 이것은 훌륭한 자유 행사입니다. 불행한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는 이것은 인간다운 자유를 향해 걸어가는 보행자입니다.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임종찬(연변대학객원교수로 지냈음)
459    개팔자 상팔자 댓글:  조회:652  추천:0  2024-03-08
도라지 뿌리는 절대로 산삼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이제는 도라지가 산삼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龍)이 나오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개(犬)’라는 동물은 지금이야말로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키우는 개는 분명 네발짐승인데, 사람이 받들어주는 대접을 받으니, 이놈은 용이 된 게 분명합니다.   걷기 싫다는 시늉을 하면, 달랑 안아 가슴에 품고 이놈을 대접합니다. 이놈을 발로 찼다간 ‘학대했다’는 죄목으로, 벌을 받거나 벌금을 내야 합니다.   옛날에 이놈은 섬돌까지만 올라올 수 있었지, 마루까지 올랐다간 빗자루로 사정없이 얻어맞고,  마루 밑이나 마당으로 내쫓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놈이 사람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가, 사람 자는 침대를 자기 잠자리로 차지하고, 안아주지 않으면 안달을 합니다.   이놈은 이제 반려동물이라고 하여 인권에 버금가는 법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놈은 무엇인가? 뽕밭이 상전벽해가 된다한들, 개라는 짐승은 분명 ‘네발 짐승’입니다.   닭은 고기와 달걀을 얻기 위해서 키웠고, 돼지는 시장에 내다팔거나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 키웠으며, 소는 논밭갈이 시켜서 농사짓기 위하여 키웠습니다.   그리고 개는 집을 지키라고 키웠지만, 사실 놀고먹는 놈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를 두고 ‘개 팔자 상팔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유난스레 대접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네발짐승이었고,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만 얻어 먹었습니다.   오죽하면, ‘개밥신세’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이처럼, 집 짐승이었던 개가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대접을 한 몸에 받는 견공(犬公)이 되어, 그야말로 ‘개 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사람은 인권(人權)을 얻기 위하여 수백 년간 투쟁해 왔지만, 개는 네발 하나 까딱 않고 견권(犬權)을 확보한 셈이니, 그야말로 ‘개 팔자 상팔자’라는 옛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개 같은 놈’이니 ‘개자식’이니, 이런 욕지거리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은 낱말 앞에 ‘개’가 붙으면 나쁜 말이 되었습니다. 먹는 꽃이 참꽃이고, 못 먹는 꽃이면 개꽃이었습니다.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살구는 못 먹는 살구였고, 못 먹는 버섯이면 개버섯이라 불렀습니다.   망신 중에도 제일가는 망신을 두고 ‘개망신’이라 했습니다. 제일 못나고 나쁜 사람을 ‘개자식’이라 했고, 못된 짓거리를 하면 ‘개 같은 놈’이라는 욕을 먹었습니다.   이제는 개의 신분이 높을 대로 높아져 ‘사람이 개를 모시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똑똑’ ‘개이뻐’ ‘개쩔어’처럼, ‘개’자(字)마저도 좋은 뜻을 얻었으니, 노인의 귀를 어리둥절케 합니다.   아무튼, ‘개 팔자 상팔자’라는 옛말이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출처; 월간 에세이, 윤재근/한양대 명예교수)
458    매력있는 녀성 댓글:  조회:674  추천:0  2024-03-01
매력있는 녀성 매력있는 녀성은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 가정이나 사회의 설계자이며 건설자이다. 가정에서 매력있는 녀성은 남편의 온몸에서 뜨거운 활력이 생기게 하는 신비의 여울이며 자녀들에게 풍부한 령감(灵(感)을 불어넣으며 어디서나 필요한 인간을 창조하는 대지이다.,  “녀자는 태여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고 한다. 보석도 갈고 닦음으로서 광채가 나듯이 녀자의 매력도 얼마나 갈고 닦았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관리에서 성취할 수 있다. 미모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것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예쁠 수 있지만 매력은 후천적으로 가꾸기에 나름이 간다. 그냥 얼굴만이 예뿐  녀자는 향기없는 꽃 마냥 천박하지만 매력있는 녀자는 언제 보아도 싫증이 안나고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매력있는 녀자로 될수 있을가? 첫째: 내면의 미를 가꾸어야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수반되여야 실현될 수 있다. 내면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해야 한다. 학교만 졸업하면 책을 놓는 녀성이 많은데 자기의 교양을 위해서 항상 책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둘째: 개성있는 아름다움이여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들이 각기 모양이 다르고 색갈이 다르고 향기가 다르듯이 사람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향기나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고 그 개성적인 아름다움에 자신감을 가질 때 티없이 아름다워진다. 유명한 것이 개성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옷차림, 머리모양, 액세서리가 남의 눈에 띄기는 하지만 개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셋째: 친절하고 상냥해야 한다.  남성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녀성의 조건으로 80 프로의 남성들이 친절하고 상냥한 녀성을 꼽았다. 들에 피는 꽃들이나 집안의 화분이 햇살이 비치는 쪽을 향해 핀다. 이렇게 식물까지 밝은 것을 좋아하는데 하물며 인간으로 누구든지 보다는 쪽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우 같은 녀자와는 살아도 곰같이 무뚝뚝한 녀자와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넷째: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 외모가 아름다운 녀자는 눈이 즐겁고 마음씨가 비단같고 아름다운 녀자는 만나면 즐겁고 헤여지면 또 만나고 싶어진다. 아무리 박색한 녀자라도 마음속에 선성(善性)을 갖추면 매력을 느끼게 된다. 다섯째;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한다. 녀자의 가장 큰 무기는 미소라고 한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랴는 말이 있듯이 웃음은 상대방에게 친근감을 갖게 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미소는 힘들지 않으면서 상대방에 무한한 감동과 친근감을 주는 무기이다. 여섯째; 례의가 밝아야 한다.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호감을 주는 것은 례의바른 행동이다. 얼굴이 아무리 아름다운 녀성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언제나 공손하고 례절밝은 녀성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는다. 례절의 가장 기본은 인사례절이다. 정중하고 공손한 인사를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나태낸다. 인사는 언제나 남보다 먼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가 있는 인사여야 한다. 체면적이나 형식적인 인사는 받은 사람도 기분이 좋지 않다. 매력있는 녀성, 호감받는 녀성이 되기란 어찌 보면 그렇게 어러운 것도 아니다. 일상에서 조금만 신경을 쓰고 실천하다 보면 누구나 매력이 있고 인기 있는 녀성이될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오기활          2024년 2월 22일.      
457    덕을 파는 사람들 댓글:  조회:925  추천:0  2024-02-15
복을 짓는다는 말이나 덕을 쌓는다는 말은 다 같은 의미다. 남에게 복을 주면 그 복(덕)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복이나 도가나 유가에서 말하는 덕은 매양 같다. 왜 같은가? 그것은 복과 덕은 모두 남을 리롭게 하기 때문에서다. 내가 나를 리롭게 하면 불의에 빠지기 쉽지만 남을 리롭게 하면 그것은 의로 통한다. 그래서 덕은 만물을 리롭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면 부덕한 짓을 범한 다음 덕을 앞세워 용서나 리해를 비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범한 다음 불민하고 부덕해서 일이 그렇게 되였노라고 사과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덕은 두 번에 걸쳐 상처를 입는다. 왜냐면 덕을 어겨 잘못을 범한 다음 덕을 팔아서 그 잘못을 넘겨 버리려는 심사를 부리기 때문에서다 덕을 짓는 사람은 마음이 성실하다. 성실한 마음은 허튼 짓이나 어긋나는 짓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설령 과실을 범했다 할지라도 둘러쳐서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진실하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믿음을 나누게 된다. 덕을 높이는 것은 성실한 마음(忠)과 믿음(信)을 삼아야 한다. 딴 생각을 품고 의심을 하기 좋아하면 마음이 총명을 잃어버리고 혹하게 된다. 깨우치지 못해 어긋난 짓을 행하는 사람은 혹을 떼려다 혹을 달게 되는 랑패를 당한다. 그러한 랑패는 부덕이 가져다 주는 뒤탈이요 벌이다. 그렇게 벌을 받아 투옥된 사람들을 보면 낯가죽이 두꺼워 뉘우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철면피요 덕이 무엇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를 부끄러워할 줄 알고 뉘우칠 줄을 알면 이미 덕은 그의 가까이에 있는 셈이다. 오기활
456    기(氣)를 살리자 댓글:  조회:793  추천:0  2024-02-01
기(氣)란 인체는 물론 우주에까지 존재의 자리에서 빈틈없이 작용하는 존재의 작용체며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되는 기운, 즉 우주의 원기로서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존재이다. 육체의 기를 정기, 마음의 기를 심기, 혈액의 기를 혈기, 근육의 기를 근기, 뼈의 기를 골기, 땅의 기를 지기, 하늘의 기를 천기, ….정기, 용기, 사기,…등등 기의 작용을 기운, 기질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기를 내뿜는다.   사기꾼과 사기꾼이 만나면 손을 잡고 건달과 건달이 만나면 건달패가 되며 기가 주먹으로 모이면 싸움꾼이 되고 손가락으로 모이면 노름꾼이 되며 발끝으로 모이면 춤꾼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의 말이 “기가 부족하다”며 원기를 살리는 약을 처방해 준다. 우리 몸이 기가 부족하면 신체의 면역력이 약화 되여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고 원기가 부족한 사람은 질병이 쉽게 낫지도 않는다. 그래서 기를 살리기 위해 기분이 좋은 상태를 만들면 육체의 질병 따위는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호전될 수 있다. 그래서 기치료나 기공치료 등 기의 원리를 리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 성업중이다. 미국의 어느 정신과 의사가 위장병환자를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든 다음 밀가루를 소화제에 혼합하여 위장병을 치료하는 약으로투여하여 환자들을 모두 치료했다는 사례가 있었다. 특히 기분이 나쁘면 소화가 안되고 몸이 찌뿌듯하고 찜찜하고 발 걸음이 무겁지만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가 나오고 발걸음이 가볍 고 심신이 경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기를 발산한다. 닭이 솔개나 독수리를 만나면 기를 못 펴고 개도 낯선 사람을 만나면 짖고 공격자세를 취하지만 백정을 만나면 기가 죽어 꼼짝 못한다. 우리 말에 “기뚝(똑)차게 예쁘다, 기뚝차게 맛있다”는 말이 있다. 기뚝차다는 말은 “기뚝차게”의 센말로 욕망의 기가 통해서 아주 예쁘고 맛있다는 말이다. 이하는 기를 살리고 기를 북돋아 주는 방법으로 항상 마음에 두고 실천해보자. 1, 표정으로 기를 넣어 주라: 밝은 표정, 따스힌 표정, 부드러운 표정, 반가운 표정, 그윽한 표정, 사려 깊은 표정, 편안한 표정으로 상대를 대하라 2, 항상 봐주라: 봐주지 않는 것은 몰라보는 것이며 이 세상에 몰라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항상 들어주라: 사람은 누구든 자기 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4,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지 말라. 5, 항상 격려해 주라. 6, 칭찬해 주라, 7, 감사하다는 말을 하라. 오기활                  
455    제일 값진 유산 댓글:  조회:860  추천:0  2024-01-18
"나에게는 자식들에게 물려 줄 만한 유산이 없다. 있다면 나의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궤짝에 있는 내가 편집한 도서, 신문, 잡지 그리고 신문잡지에 실린 나의 론문들이다. 나는 그중 일부를 책으로 묶어서 자식들에게 물려 주련다. 나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가장 값진 유산이 자식들의 기억에 남는 부모들의 생활습관과 부모들에 대한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암부자”장봉화가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출판한 책 의 머리글이다. 실로 집채보다 무겁고 금덩이 보다 값진 유산이라 하겠다. 삶은 습관의 련속이다. ”세살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과 같이 습관은 제2천성이다. 그러므로 자식들에게 좋은 습관을 양성시켜주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고 후대들에게 물려주는 가장 값진 유산이라 하겠다. 자녀교육은 관심만으로는 안된다. 그 관심을 전달하는 “지도” 필요하다. 자식들 앞에서 부모가 투명해지려면 자식들에게 좋은 생활, 사업습관을 보여줘야 한다. 부모가 거울이 되여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자식들은 그 부모를 따라배우지 않을수 없다. 부모의 삶, 그 자체가 교육이다.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공짜로 준 것은 생명의 기본을 보증하는 빛, 물, 공기뿐이다. 그런데 가마목에 있는 소금도 떠서 넣어야 맛이 되듯이 곁에 있는 물도 내가 떠서 마셔야 한다. 인간이 살아 남자면 노력해야 한다. 노력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열매를 맺는다. 부모들의 훌륭한 습관이 자식들에게  본보기로 되며 그 본보기가 기억으로 남아 추억이 되고 그 기억과 추억이 자식들의 “살”로 된다. “부모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가를 자식들이 늘 알고 있는 가정은 특별한 자녀교육이 필요없다”고 한다. 떳떳한 부모는 도박을 놀거나 무도장을 다니는 것이 아닌 생산적인 일을 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을하면 자식들은 그부모를 따라배운다. 그런데 현실은 자식의 립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꽤나 있다. 당신이 어렸을 때 잘 못 먹고 잘 못 입은것을 한풀이 하는듯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마구 퍼붓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가슴으로 부모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자식은 부모 삶의 연장이다.    2009.2.17.
454    [수기] 나에게 간보란 댓글:  조회:900  추천:0  2024-01-09
내가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툰)에서 백부님이 “문화혁명”때에 억울한 루명을 쓰고 타살된 것으로 생산대 정치대장직무에서 물러나20대 나이에 5년간 생산대 돼지사양원으로 일하다가 사래사거(社来社去)로 초생한 연변농학원입학하였다. 학교에서 입당까지하고 1974년에 졸업하니 도문시 홍광공사 당위에서 농민신분인 나를 홍광공사수의소 소장으로 배치하였다. 그때 홍광공사수의소의 재직원들로 일본류학생 ‘아바이', 토배기 수의 ‘전문가', 길림농업대학생이 있었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막내(26살)인 내가 농민신분으로 소장을 한다는 것은 실로 큰 압력이였다. 그때 홍광공사수의소는 진찰실도 없이 공사정부 청사에서 단칸 사무실을 차지하고 어디에 앓는 가축가금이 있으면 달려가서 치료를 하였다. 홍광공사는 1965년 5월 1일에 도문시가 건립될 때 도문시의 유일한 공사였는데 후에 연길현 월청공사와 왕청현 신농공사를 도문시에 편입시켰다. 내가 홍광공사수의소에 배치받고 얼마 안되여 인사를 하려  도문시축목국에 갔더니 국장이 하는 말이 3개 공사수의소 중 월청공사수의소가 1류이고 홍광수의소가 2류이고 다음이 신농공사수의소(수의 1명)라고 소개하였다. 소개를 받고 나서 나는 속으로 붉은 홍, 빛날 광에 걸맞게 홍광공사수의소를 1류의 수의소로 만들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로부터 나는 ‘야심'을 실현 할 경로를 찾다가 공사와 대대 수의들의 사업 관념을 ‘혁명'해야 한다는데 모를 박고 정치상에서 믿어주고 경제상에서는 돌봐주면서 수의들의 사업 열정을 분발시켰다. 그래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1974년 8월 1일부터 라는 간보를 직접 꾸리고 적극 활용하였다.  나는 간보를 꾸리면서 취재, 강판글쓰기, 등사, 18개 대대 발행까지 혼자서 했는데 과연 날이 갈수록 간보의 인기가 높았다. 내가 간보를 잘 꾸리니 공사당위에서는 해마다 모내기대전 회전때마다 나를 대회전지휘부에서 일하게 하다가 후에는 공사당위 선전위원, 2년 후에는 조직위원으로 배치하였다. 그때 나는 수의소를 떠나지 않겠다고 당위 서기인 강기관 앞에서 울고 불면서 떼를 쓰다가 “당원이 조직의 분배에 복종하는 것은 조직 원칙이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1979년 9월에 수의소를 떠났다. 나는 홍광공사에서 사업한 10년간에 수의소에서 7년, 당위와 경제위원회에서 3년을 지내며 , ,  , , ,, , 등 간보100여 기를 열심히 꾸렸다. 나는 지금까지 《红光间报汇集》을 나의 열정의 “혼”이 슴배인 30대 “자서전”으로 정히 수장한다. 내가 수의소 소장을 맡고 “정치상에서 믿어주고 경제상에서 돌봐주니”열의가 충천되여 일심으로 일했다.  로 중심사업을 포치하고 분공하여 기층수의들을 책임맡고 “류동홍기”활동으로 “비기고 배우며 따라잡고 릉가하는” 경쟁을 벌였더니  눈이 확트일 정도로 사업이 변화였다. 한번은 우리들이 교통이 편벽하고 산등성이에 자리한 후안산 마을의 소를 치료하면서 시간적으로 정맥주사를 놓는데 밤에 놓을 정맥주사를 내가 책임지고 밤에 걸어서 현장에 도착하니 수의소의 다른 두 명도 서로 약속없이 따로따로  왔었다. 실로 감동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제일 막내로 소장을 지내며 속심나누기 활동을 벌려 부인의 지주성분으로 입당을 꿈도 못 꾸던  손덕충(조선귀국화교,토배기수의), 귀국화교가 성분이 없어 입당이 곤난하다던 팽작성이 입당했고 외지에서 전근해온 오혁근(후에 시축목국 국장으로 승진)까지  3명의 입당이 홍광공사수의소의 정치력사에서 입당이 처음이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했다. 를 통해 선진수의, 우수사양원을 제때에 발견하고 제때에 표창하였다.  대대수의들을 대상한 를 류동시켰더니 18개 대대의 수의들이 뽑기에 정신없었다. 도문서 30여리 떨어진 산골에 자리한 흥진대대는 정치, 생산 등 면에서 락후하기로 공사에서 손꼽힌다. 그런데 대대수의(김봉룡)이 1977년에 을 뽑자 온 대대농민들이 경사가 났다며 야단이였다. 며칠후 대대당지부서기(리룡철)가 나를 찾아와 “돼지를 잡아서 대접하겠으니 오짬장이 흥진에서 와서 대대수의 회의를 하오”라는 청구하였다. 그래서 흥진대대에서 전공사 수의들의 회의를 했더니 “흥진대대 력사에서 공사급회의가 처음이다”며 돼지를 잡고 온 동네가 큰잔치를 벌렸다.   한번은 리서기가 흥진서 다종경영을발전시킬려니 흥진대대수의를 배양해 달라고 청구하기에 나는 연변농학원과 련계하여 김봉룡을 반년간 연변농학원에가서  학습하게 하였다.  1983년 호도거리생산책임제를 실시하자 흥진촌에서 서른살을 갓넘긴 봉룡이를 촌민주임으로 선거, 김봉룡이 몇년간의 알찬 노력으로 촌모를 변화시킨데서 1985년 12월 19일 톱기사에 “오로지 고향건설 위해 신화를 엮는 세대주”란 제목으로 김봉룡의 사적을 소개했다. 1978년에 홍광공사수의소가  “주선진수의소”로 평의되였을 때 발생한 어처구가 없는 일다.  주축목국에서 조직한 년말총화대회때 나의 아들이  급성 간염으로 내가 참가할수 없어서 팽작성(한족)을  주총결회의에 참가시켰다. 그런데 도문시축목국의 책임자가 팽작성이 발언하면 인기가 없다며 우리의 발언자료를 월청공사수의소 소장을 발언하게 하여 월청공사수의소가 “주선진단위”로 상장을 팄다. 며칠후에 내막을 알게된 나는 대대수의들게 교대할수 없다며  억울하여 에 “선진영예를 도적 맡혔다”는 제목의 원고를 투고했더니 편집부에서 조사일꾼을 파견한후 시정부 부시장(남현후)게 정황을 반영한데서 시축목국잭임자가 큰 욕을 당하고 주축목국에서 다시 홍광공사수의소에 영예증서를 발급했다. 이를 계기로 홍광공사당위서기(강기관)가 전공사 당원대회에서 “전공사 대대당지부서기들이 대대수의들의 시업열정과 조직성을 따라 배우라”고 했다. 간보를 꾸리니 18개 대대의 정황을 손급보듯 하였다.  1981년도에 내가 당위선전위원으로 지낼때 사 도문시 주재기자(리금석)가 홍광향글쓰기 열성자 학급반을 조직하였다. 제일 마지막 날에 보도선색을 제공할때 내가 18개 대대의 신문선색을 하나하나씩 제공하였는데 그때 12개 기사가 신문에 발표되여  이번 학습반이 수확이 대단하다며 리금석기자가 기뻐했다. 1982년 제 1기에 “들긇는 흥진골”이라는 제목으로 호도거리농사후의 흥진촌변화를 소개하였다.    흥진촌은 집체농사때 해마다 국가의 반소량(反銷粮)에 의거했는데 어느해에 상급에서 온 공작대가 “흥진에서 단 한 알의 량식이라도 나라에 바쳐야는 한다.”고 강요하기에 할수없이 촌에서 개인집들의 팥을 30근을 모아서 처음으로 나라에 바친 웃음거리 있었다.  그런데 호도거리 농사후 어느 날 흥진촌의 당지부서기(리종철)가 집체로 곡식뒤주를 지을 나무를 비준 받겠다며 향정부를 찾아왔다. 나는 “이것이 신문이다”며 흥진촌에 내려가 심도있게 조사한후 “곡식뒤주를 마련하는 희열”이란 제목으로 연변일보에 투고했더니 1982년 10월1일 2면 톱기사에 발표, 이 원고가 연변일보 년말평비에서 우수원고로 평의되여  30원의 상금을 탔다.    홍광향당위의 촌문화실건설이  길림성선진단위로 평의되고 홍광향당위의 예비당원교육경험이 전 주조직공작사업회에서 소개되였다. 모든 간보에 라는 전란을 설치해 큰 효과를 보았다. 1. 1982년에 도문시에서 부문마다 참관을 조직하는 것에 농민들이 원성이 많아 에  연변일보에 “참관유람바람을 막아주시요”라는 원고를 보내 82년 10월 9일 1면에 이 원고를 실은 뒤 계속하여 편집자의 말과 함께 “참관유람 바람을 견결히 막아버리자”라는 전문란을 꾸렸는데 그 전문란에 중공도문시반공실의 반성과 함께 “참관유람을 막을 대책”까지 실었다. 2. 연변의 첫 “텔리비죤”마을의 중학생들이 돈에 물들어 학교를 중퇴하는 실정을 조사하여 길림일보 报 올려 1983년 3월5일 1면 报 톱기사에 단평까지 배합하여 발표하였다. … … 지금 간보늘 펼쳐보니 마음에 가책되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말하자면 간보에 “비법결혼명단”, “다섯이상 호주명단”등 전문란,   ”전란에 “오공 5대에서 개인과 집체에서 껌 하나에 3전씩 사다가 10전씩 판문제 합당한가?, 집중3대 모사원이 9월 3일부터 다섯마리의 소를 사다가 팔아서 돈을 벌었는데 합당한가?” 하가남새대, 집중남새대 모 사원이 지난해부터 집체일을 하지않고 개인 돈벌이를 하는데 응당한가? 등 내용을 보면 너무나 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에 반성이 앞선다. 모두어 말하면 간보는 내가 30대에 쓴 “자서전”으로 나에게 사업방법, 사업책임감, 사업열정, 신문령감을 키워준 명실공한 문자기록으로 나의 앞길을 밝혀주고 때때로 자신을 성찰하고 앞길을 비쳐주는 손색없는 거울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3년 11;월 19일
453    [좋은 글] 아리랑과 진리 (VERITAS) 의 사이 댓글:  조회:833  추천:0  2024-01-01
2023 년 11 월 18 일, 와세다대학지역・지역간연구기구 일미연구소와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의 공동주체로 열린 국제포럼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졌다. 정치학이 전공인 필자는 와세다대학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로 국가를 주제로 여러차례 발표,발언을 했었다. 하지만 필자한테 가장 가까운 언어로 자기 민족을 담론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주최측 관계자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용기를 내어 라는 추상적이고 큰 주제로 발언을 준비했다. 를 논의하는 국제포럼의 주제에 맞추어, 필자는 재일본중국조선족의 일원으로 조선족의 현재를 사색하며 미래도 지향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우리한테 비판적이며 건설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제일 마지막 발언자의 책임이라고 정리하였다. 제목에 담긴 “진리”란 단어가 당돌하게 느껴질 수 도 있지만, 문학, 예술을 포함한 문화의 토론에 있어 진리는 회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꼭 의식해야 할 가치이고, 논의해야 할 주제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는 인류의 보편적인 진취의 자세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진리란 영어로 TRUTH 이고, 라틴어의 VERITAS 에서 왔다. 하버드대학의 로고에 베리타스(VERITAS)를 담았고, 서울대학교 로고에도 베리타스(VERITAS)에 광명(LUXMEA)을 적었다.  이렇게 세계 일류의 대학, 우리 민족의 최고의 대학교에서 진리를 로고에 찍었다는 자체가 지식과 지혜의 창조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추구가 얼마나 필수적이고 궁극적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하버드 대학의 로고라는 하나의 거울/참조치에 조선족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와 진리의 사이, 더 나가서 아리랑과 진리의 사이에 관해서 사색하고자 한다. 하버드대학의 로고와 그 거울에 비춰보는 우리의 모습 하버드대학교 로고 서울대학교 로고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현재 하버드대학 공식적인 로고는 “VERITAS”를 VE, RI, TAS 로 나누어 펼쳐진 세권의 책에 담았다. 이 세권의 책에 찍힌 문자를 합해야만, 진리라는 단어가 성립되며, 진리란 한권의 책에는 담을 수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하버드대학교 방문학자로 소속된 시절, 하버드 야드를 산책하면서 로고에 담긴 하나의 비밀을 발견 했다. 하버드 야드에 있는 대학 창시자 죤 하버드(John Harvard)의 동상 오른쪽에 박혀 있는 원초의 로고를 보면 우에는 펼쳐진 두권의 책이 놓여져 있고 아래에는 펼쳐진 책을 덮어놓은 위에 TAS가 적혀 있다. 대학내의 몇개 건물과 입구엔 지금도 원초의 로고가 남아 있다. 필자가 궁금했던 점은 왜 아래의 세번째 책은 펼쳐서 엎어 놓았을 가였다. 호기심 때문에 여러 교수님들과 직원들한테 세번째 책을 엎어 놓은 이유와 상징적인 의미를 문의했는데, 원초와 현재의 로고의 다른 점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두 로고의 차이에 대한 호기심과 문헌조사의 흥취의 차원에서 필자가 찾아보니 여러가지 해석이 있었다. 하버드대학은 교회 배경이 있는 대학인지라, 진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부분은 전제였다. 허나 역사가 있는 교육 연구의 권위적인 대학교로서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의 필요한 자세를 강조했던 원 제안자의 발상이 담겨져 있었다. 여러가지 설법에 대해서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세번째 책을 펼쳐서 엎어 놓은 이유는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1) 신의 절대성(THE ALMIGHTY)과 이성(REASON)에 대한 회의와 응시 자세의 필요성 2) 모든 질문에 대해서 두가지 측면에서 고려해야 함에 대한 지지 3) 책에 담긴 이미 발견된 이성의 한계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진리의 잠재성에 대한 열린 자세 4) 책에서만 습득할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체득하며, 책에 담긴 지식과 실천의 지혜를 융합해야 한다는 점. 반대로 일부 지혜는 책 속에서는 습득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필자가 하버드대학의 로고에 깃든 의미를 찾고, 정리하는 과정은 진리의 다면성과 다양한 접근방법을 후세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로고의 상징적인 힘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로고에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은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하버드대학 로고라는 거울에 필자를 포함한 조선족을 비추면 어떤 모습일가? 진리의 추구에서 강조한 실천성에 조회하면 적응력이 강한 조선족의 하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가 싶다. 우리 선조들은 조선족이란 명칭을 갖기 전부터 반도에서 대륙에 넘어와, 대륙에 퍼져, 그리고 현재는 섬나라에까지 와서, 이향의 설음을 이기고 미지의 환경에 적응, 생존, 정착, 창조를 하면서 강한 적응력과 실천성을 과시해왔다. 다만 본문에서는 선조들을 포함한 우리의 적응성과 실천성에 대한 우월감이 아닌 미래 지향에 있어서 우리가 꼭 직면해야 할 다음의 두개의 과제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1) 조선인/족들이 실천 속의 갈등, 체득한 경험과 교훈 등을 문학 지식의 가치차원으로 승화시켜 인류의 공공자원으로 책에 담는 일. 2) 인류가 남겨 놓은 책에 담긴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고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조선인/족들이 남겨놓은 지식과 지혜를 융합시켜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이번 국제포럼이 조선인/족들의 실천경험, 교훈과 감정을 문학으로, 예술로, 문화로 다루려 하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필자는 하나의 질적인 변화와 진보라고 평가하고 응원한다. 허나 현단계에서는 책 속의 이론에만 집착하는 소위 연구자들과, 실천을 선호하는 실업가들, 활동가들이 상호간의 대화와  학습이 아닌, 상호 경시의 현상이 우리 주변에 너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면을 꼭 직시하고 넘어 가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주동적인 인식과 따르는 개선이 없다면 조선인/족 문화와 진리 사이의 거리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우려 사항 중의 하나이다. 아리랑의 고개를 넘어서 어디로 가냐? 여기에서 필자는 우리가 체득한 경험과 교훈, 그 속에서 키워온 감정을 지식과 지혜의 차원으로 순화, 부화시켜, 우리들이 집요해온 공감대, 공동체 의식만이 아닌, 다양하고 다원화하며 타자와 대화할 수 있는 보편성을 모색할 시기가 됐다는 하나의 소견을 공유하고 싶다. 마음으로 불러온 은 우리 민족의 숙명의 노래이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면서 고향을 떠나는 이별의 아픔과 향수가 근저에 깔린 주제의 노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젠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어디로 가나를 생각하는 출발점에 서야 한다. 필자는 공동성에서 공공성으로, 감정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 바로 우리가 넘어가야 할 고개라고 판단한다. ☑共同性에서 公共性으로 본문에서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특수성에서 이탈하여 보편성을 모색하고, 공동성에서 해탈하여 공공성의 씨앗을 찾아 심자는 제안이다. 우리는 조선인/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사고의 관성을 타파하고 이젠 인류 보편적인 가치 차원에서의 공공성을 봐야 한다. 우리들 만의 공감대를 근저로 하는 공동성에만 집착하면, 이동과 거주의 개인/집단적인 추억, 고통, 향수의 반면에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 당분간의 성공에 대한 여운과 그 반추에만 멈추어 있을 수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중복되는 우리만의 특수성과 고유성에 대한 집요의 연장선에는 절대적인 자아긍정과 편의적인 선민의식에 빠질 위험성이 따른다.  타자와의 대비 속에서 나오는 탁월감(Distinction)에 대해 상대화할 수 있는 자아 검증의 자세는, 타자의 비판과 지적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갖추어야 하지 않나 싶다. 조선인/족의 문화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고 타자의 문명과 대화할 수 있도록, 나중에 인류문명의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공공성의 씨앗을 품고 문화를 키울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 지극히 필요하다. 언제까지 우리끼리 놀고 그 흥과 향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겠는가!  이젠 도취에서 눈뜨고 싶다. ☑감성에서 이성으로 우리들의 몸에 배인 세련되고 정서적인 감성은 조선인/족 문학과 예술을 풍부하게 지켜 온 소중한 자원이였다. 다만 지금부터는 이성 (REASON)도 의식할 시기가 되였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감성 뿐이 아닌 이성을 무기로 비판적인 검증과 이성적인 분석이 있어야, 우리들이 체득한 경험과 교훈을 흔들리지 않는 지식, 지혜로 남겨둘 수 있다. 이는 진리의 탐구에서 회피할 수 없이 꼭 넘어야 할 고개라고 필자는 본다.  합리적인 태도를 표현한 중국어의 通情達理(통정달리) 에 조회하면 우리는 통하는 정을 우선하고 그 정에 집착한다. 허나 정을 떠난 합리적인 도리를 외면하려는 경향이 보일 때가 많다. 진리란 좋고 싫다가 아닌, 합리성과 도덕성의 논의의 대상이다. 감정적인 갈등이 있더라도 도리와 도덕의 차원에서 함께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늘 자신한테 경고한다.  때로는 도리가 통해야 정도 통한다는 관계상도 그려보고 싶다. 합리적으로 우리의 감성을 이성으로 순화시켜, 즉 自己愛를 自己知로 순화시켜, 우리들의 근/현대성(Mordenity)을 스스로 찾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꼭 넘어야 할 아리랑의 고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후세에 우리의 기억과 문화자원의 하나인 아리랑을 꼭 이어 줘야 하지만, 아리랑의 아픔과 망설임이 아닌, 아리랑 고개를 이성으로 넘어가 새로운 세계를 보고 느끼고 개척하면서 체득하여 남겨 놓은 우리의 지혜도 함께 남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 작업을 게을리하면 후대들의 방황도 지속되고 반복될 것 같아서 필자는 안타까울 때가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근대성을 스스로 찾아서 정리하고, 타자의 문명과 대화하여, 타자들한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진리를 만들어야 만이 세계적인 예술가, 글로벌 기업가, 나아가 노벨상도 바라는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어마지 않는다. 우리도 이젠 공공성에 대한 사색을 할 때가 되였다. 비록 크고 추상적인 제안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기업가들이 만들어낸 상품을 작품으로 재인식하고, 우리의 흥을 예술로 이해하면서, 우리의 주위에 있는 예술, 문학을 지향하는 분들을 소중한 씨앗처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소중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문학을 키우고, 예술을 키우는, 성숙된 자세이다. 이런 씨앗을 키우는 자세를 갖추고 계승해야 만이 우리의 미래가 문학으로 예술로, 문화로 다채로워 질 수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의 미래를 그려보았나? 필자는 상상력이 풍부한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며, 강한 민족이라고 본다. 그럼 우리는 스스로의 미래를 언제까지 내다 보았을가?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射程은 얼마나 길 가를 가끔씩 연상해본다. 재일본 중국 조선족들의 발자취를 찾아 보다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필적인 담긴 자료를 발견했다. 1990 년대 후반에 조선족 출신들의 유학생들이, 일본사회 정착과정에 따르는 고민과 사고를 기록하여 제 31 기 까지 발행한 이라 하는 뉴스레터이다. 제일 마지막호 1999년12월호의 序文-- 을 여기에서 소개한다. 이 탄생하여 3 년이 좀 더 되였다. 재일 중국 조선족들의 모임인 천지구락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이 잡지는, 잡지라는 이름에 부끄러울 정도로 아직 너무나 미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일 중국 조선족 여러분, 조선족에 관심과 애정을 주시는 일본사회의 여러분들의 지지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고 있고, 행운스럽게 20세기부터 21세기를 넘어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다. 작지만, 이상이 있고, 기개가 있고, 특색이 있는 잡지로 만들고 싶다. 민족에서 민족을 넘어, 국가를 의식하면서 국가를 초월하여, 글로벌한 지구촌의 자유로운 매체로 되고 싶다. 21 세기말에도 은 발행 될가? 3000 년이라는 밀레니엄에도 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게 될지? 우리들의 노력에 달려있다. 『天池人文』のミレニアム 『天池人文』が誕生して3 年あまりになる。在日中国朝鮮族の集まりである天池倶楽部を中心に運営しているこの雑誌は、雑誌という名に恥ずかしいくらい未だに極めて未熟なものである。それでも在日中国朝鮮族の皆様、朝鮮族に関心と愛情を示している日本社会の皆様に支えられながら、前に向かって進んでいるし、幸運にも20世紀から21世紀を跨り、新しい千年を迎えようとしている。 小さくても、理想があり、気概があり、特色のある雑誌に創り上げたいものである。民族から民族を乗り越え、国家を意識しながら国家を超越する、グローバルな地球村の自由なメディアになりたいものである。21世紀末にも『天池人文』は発行されるだろうか。3000年のミレニアムにも『天池人文』は人々の記憶に残るだろうか。 我々の努力次第である。 필자는 여태껏 100 년 단위인 세기(Century)로 사물, 역사와 미래에 대해 사고해 왔다. 하지만 조선족 출신 선배들이 1000 년을 단위인 밀레니엄(Millennium)을 단위로 3000 년 후까지 상상해보았다는 필적에 놀라웠다. 그 기를 받아 3000 년 후를 상상해 본다면 우리는 인류문명에  어떤 史跡이 되어 있을까? 이번 국제포럼의 공동주최자인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의 동인지로 출간되는
452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댓글:  조회:780  추천:0  2023-12-30
2012년 01월 29일 11시 17분  조회:6259  추천:0  작성자: 오기활 언젠가 렬차에서 동행자들이 무엇이 《5복》이냐를 화제에 올리고 열띤 시비를 벌렸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초복, 중복, 말복까지 집다가 더는 뒤를 맺지 못하는 사람, 부부, 자식, 재물, 형제, 사람(人福)을 《5복》이라고 하는 사람, 건강, 부부, 재산, 일거리(事), 친구를 《5복》이라고 우겨대는 50대... 아무튼 각자의 우격으로 화제는 점점 달아올랐다. 중국 서경(書經, 洪笵編)에서 말한 《5복》은 수(寿), 부(富), 강녕(康寧)(몸과 마음의 건강), 유호덕(攸好德, 남에게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는것), 고종명(考終命, 고통이 없이 제명에 죽는것)이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5복》도 변하는가 본다. 지난 50-60년대에 모두가 말하는 《5복》은 수(寿), 부(富), 강(康), 치(齿), 다자손(多子孫)이라 기억된다. 유호덕(攸好德) 대신 치(齿)를, 고종명(考終命)대신 다자손(多子孫)을《5복》에 올린것을 보아 치료약이 별로 없던 당년에 이앓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대대로 내려온 농경시대에 다자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수 있었다. 필자는 시대에 따라 《5복》이 바뀌고 《5복》이 《6복》이나 《7복》…으로 되든 유호덕(攸好德)만은 빼놓지 말자는 주장이다. 미국 스테폰드대학 케네스펠레티교수(의학)의 건강조사에 따르면 처음엔 돈, 식습관, 운동 등 물질적인것이 건강조건이였는데 총적결과를 보면 건강의 핵심요소는 마음가짐(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섬기는것)으로 밝혀졌다. 언젠가 한국KBS방송국 아침마당프로에 출연한 리명박대통령이 타계한 어머님을 회고하며 《어머니는 항상 나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 친척 등 가족이외의 일과 사람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고 맨 마지막에 가족에 대한 기도를 하였는데 어릴 때는 리해가 가지 않았다. 왜 소중한 우리 가족부터 잘 되기를 기도하지 않고 국가, 이웃, 친척부터 걱정하며 잘 되여달라고 먼저 기도를 하는것이 서운했는데 지금 보면 그런 어머니 덕분에 내가 나라를 운영하는 대통령이 된것 같다》며 어머님의 후덕에 감사를 드렸다. 덕담 중에서 가장 많은 덕담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다. 유호덕(攸好德)에 따르면 덕복은 하늘로부터 받는것보다는 본인 스스로의 노력과 개발, 관리에 따라 만들어진다. 세상사는 뿌린대로 거둔다. 그래서 필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새해 복을 많이 만드세요!》로 갱신한다. 복은 닦은 것만큼 자기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필자는 복을 베풀줄 모르면서 복권으로 부자를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면 "복을 얼마나 베풀었습니까? 복권을 쥐려면 먼저 복을 베푸세요"라고 권장한다. 오기활
451    지난해를 돌아보기 댓글:  조회:793  추천:0  2023-12-17
.필자는 이 몇 년간 해마다 년말이면 “가족 10대뉴스”를 선정하여 친족모임에서 회보하는 습관을 양성했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건전한 년말 총화문화의 중요성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은 보내는 해를 자상히 반성하고 오는 해에 짊어져야 할 가정,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맘속에 간직하면서 모두가 “함부로 살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올해의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은 반성하며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해를 돌아보는  몇가지내용이다.   첫째는 보내는 해에 대한 점검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일에 대해 점검하고 반성이 있어야만이 그 일의 옳고 그름을 가르고 개변, 보완할수 있다. 흐지부지하거나 잘못한 일은 그대로 넘겨버릴 것이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고 새해에 반드시 그것을 시정하여 성공으로 이끌어줄 수 있도록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는 지난해에 좋은 사람을 얼마나 만나고 사귀였는가를 돌아본다. 사람만큼 큰 자산이 없다. 지난해가 좋은 사람을 많이 알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해가되였다면 진정 부자가 된 한해라 하겠다. 반면에 그 반대인 경우라면 새해에 보다 더 발전된 인간관계형성을 계획하고 다짐해야 한다. 필자는 올해도 훌륭한 두 분을 얻은 것으로 만족한다. 셋째로 마음의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주변사람들과의 무거웠던 관계를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대신 따뜻한 사랑,배려를 통해 서로 리해하고 인정하고 도우며 사랑하는 인간관계를 최저로 90점이상을 맞도록 새해를 준비해야 한다. 넷째로 내 맘속에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있었는 가를 돌아본다. 긍정적인 명확한목표가 있다면 이를 향해 나가려는 목적의식이 생겨나고 어떠한 장애물 앞에서도 희망, 열정, 용기, 도전을 잊지 않는 인생의 지남침이 될것이다. 올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한해였다면 내 맘속에서 긍정의 단어들이 어느 순간에 사라졌는가를 반성해 보라. 그리고 다기 오는 새해를 꼭 괜찮을 해로 만들고 싶다면 부정적인 마음가짐을 버리고 “된다”, “한다”로 꽉 채워 넣으라. 한해가 지나가면 또 다른 새해가 다가온다. 다가오는 새해를 특별한 해, 나만의 한 해로 만들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맘속으로 웨치는 자기만의 몇 마디 구호가 필요하다. 례하며 매일마다 맘속으로 “나는 40대다, 튼튼한 몸이 있고 늘 푸른 꿈이 있어 뭐든지 할 수 있다”를 웨우든지 말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1년 1월 7일
450    들깨잎 례찬 댓글:  조회:899  추천:0  2023-12-04
인간은 수천만년 동안 한 지역에서 살면서 어느 특정한 꽃이나 잎애 변질이 있을 때마다 같은 종의 재변들이 일어나서 그 어떤 재난을 예감하는 지헤가 형성되였다.  특정한 어떤 식물의 식생(植生)은 그 지역에서 사는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식생으로 소중한 식생이 아닐 수 없다. 례하면 고개를 늘 숙이는 것이 마련인 할미꽃이 고개를 쳐들면 그 지역에 가뭄이 든다고 했고 맨드래미(닭볓풀)붉은 잎에 노란빛이 진하면 홍수가 든다고 했고 뽕잎에 하얀 반점이 생기면 전염병이 돈다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가뭄, 홍수, 전염병등의 재난을 어느만큼 예감할 수 없는 가장 큰 위난은 일산하탄소 등 공기 오염이다. 이 위난을 미리 예고해 주는 특유의 식생으로 미국은 알팔파라는 꽃이 대기오염의 위험도를 예고하는 지표식물이고 일본은 나팔꽃, 한국은 들깨잎이라고 한다.  어찌보면 들깨는 우리에게 가장 고마운 식생이 아닐 수 없다. 들기름은 전통적인 살균제로 우리 민족은  어린애가 태여나면 먼저 잔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들기름을 흠뻑 묻힌 솜으로 어린애의 입안을 닦아낸다. 에 뜰깨잎이 물고기독성을 죽인다고 했다. 이로 보아 우리가 고기를 구워 먹을 때 들깨잎에 싸서 먹는 것이나 생선찌개에 깨잎을 넣는것은 단 들깨의 향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국제 영양학술회의에서 10대 자연식품열 개를 선정했는데 그중 한국의 식품으로 꿀, 마늘, 들깨가 들어 있다. 들깨잎은 인류에게 대기오염까지 고발해 준다니 감사하기로 뜰깨는 우리 민족의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는 식생이라 하겠다. 오기활
449    김은철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953  추천:0  2023-12-01
                             84세 고령에 첫 한문소설 《醉中无天子》을 출간 11월 25일, 연변단풍수필회는 연길 황관호텔에서 창회25돐기념의 일환으로 김은철(84)의 《醉中无天子》(취중무천자)출판식을 거행하였다. 출판식에 김문원(金文元)대좌(연변군분구 선임 참모장, 부사령원), 소설가 허련순, 김은철선생님 제자와 동료 약간명이 특별 래빈으로 초대되였다. 본서의 서문을 한족작가 于雷가 썼다.                          김은철 그는 누구인가?  이날 주류문단이 작가들과 김은철 옹의 친지들이 에 답하고 김은철이 부언했다.   김은철은 1940년 5월 6일, 흑룡강성 화남현 다발령향 부흥촌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으로 소설, 수필, 평론, 노래, 가사 등 다산작가로 《고향의 느릎나무》( 1996년), 《민들레꽃무덤》(2015년), 첫 중문작품집《醉中无天子》(2023년) 를 출판했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농사꾼의 자식 김은철은 독학으로 북방의 한산한 시골학교 음악민영교사로부터 시작하여  초급중학교 조선어문교원, 고급중학교 대학입시생 조선어문교원, 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로 멋진 삶을 살던 와중에 업여로 소설창작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발행식에서 수필작가 김광현이 선참으로 란 독후감을 발표하였다. ㅡ 김은철은 독학으로 성공한 문학계의 거물이다. 그는 민반교원으로 3년만에 조선문법을 숙달한데서 전현 교원들 중에서 문법을 전공한 전형으로 부상되였다. ㅡ 그는 57세에 한어공부를 시작하여 3년 사이에 과 씽갱이질한데서 2권을 “파지”로 만들어 세번째로 새 사전을 샀다. ㅡ 김은철은 중편소설을 쓸수있는 수준을 가추었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들은 생활속의 전형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모두어 말하면 그의 소설은 력사의 현장이며 그가 쓴 한어소설은 한어수준이 높다고는 말할수는 없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조선족작가들의 “한어작품문체”로 될수 있다고 본다. 김문원, 김정일, 태산의 평가발언을 이어 김은철저자가 에 부언 하였다. ㅡ 나는 열혈청년때 음악을 기대하고 성공하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한일 농촌서 어떻게 살겠는가를 우려하다가 두번째로 문학으로 성공하려고 시도하면서 60ㅡ80년대 까지 무엇이 생각나면 무엇을 쓰다가 80년대 말기부터 무엇을, 어떻게 쓰겠는가에 어느 정도 머리가 트게 되였다. ㅡ 나는 로신을 모델로 하다가 살펴보니 로신이 쓴  작품의 주인공(아큐, 공을기, 샹린아주머니 등)들이 당대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니였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쓰려면 정면 주인공들의 아름다움, 믿음, 인성을 쓰고 창조해야 함을 체득했다. ㅡ 나는 1994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문학창작에서 손을 뗐다. 원인은 1980년중기부터 한국의 현대파문학창작의 수법이 조선족문단에 범란되여 현실주의를 쓰는 나의 작품이 발표가 힘들어 창작적극성이 저락된 때문이다. ㅡ 2010년에  70에 연변에 와서 서점에 다녀 보니 많은 현실주의 작품이 발표된것을 보고 창작의 욕구가 다시 불타 2014년부터 한어작품을 쓰기에 필을 들었다.  《醉中无天子》에 실은29편은 2010년 후의 소설이 다수로 차원이 그리 높지않다.  나는 1981년도에 수상한 “헛소리”작품을 이 책에 실지 않았다. ㅡ 나는 나의 글을 아들처럼 생각한다. 돌아 보니 나의 인생은 눈물의 삶이고 애를 쓴 삶으로   “애쓴 것이 혼”이다. 오기활                              흑룡강신문 2023년 11월 29일  
448    [수기] 그날 나는 깜짝 놀랐다 댓글:  조회:978  추천:0  2023-11-16
필자는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님의 1970년대의 제자로서 필자로 말하면 김수철(99)교수님의 가슴 뛰는 사업과 값진 삶은 필자의 모델로 거룩한 우상이시다. 2020년 12월 29일, 우리 일행이 연길시 조양천진 삼성촌 5소조에 삶터를 잡고 홀로 자취하면서 《길림성 식물지》(총4권)의 출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수철교수(95세)을 방문 갔을 때이다.   서로 간의 수인사를 나눈 후 필자가 “지금 연변미술관에서 연변 제1회 예술작품박람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고 말했더니 김교수님이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묵직한 사진기를 챙겨 들고 “우리 지금 당장 가서 보고 옵시다”며 우리를 재촉했다. 연길로 가는 길에서 김교수가 하는 말씀이다. ㅡ 그림은 번역이 필요 없는 세계 공통어입니다, 화가는 독자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서 옛날을 재생기키고 래일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나는 좋은 그림을 볼때마다 행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내다 봅니다... 전시장에 도착하자 김교수님은 전시장을 돌아보고나서 1, 2번 전시장의 작품 거의 모두를 렌즈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서 교수님이 하는 말씀이다. ㅡ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의 말씀인데 스승님은 우리 더러 평범한 생활속에서 기적을 발견하면서 매일매일 놀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ㅡ나는 오늘 석희만화백의 명작을 보면서 행복했고 놀랐습니다. 우리가 오늘 끝도 시작도 없는 대우주의 수십억의 인구들 속에서 우리 넷이 한자리에 앉았으니 얼마나 기적입니까! 나는 오늘 놀랐습니다!” 필자는 그 후부터 평범한 매일에서 놀람을 만들고 놀람을 찾기에 노력하였다. 일은 생각한 대로 된다더니 최근에 나는 두 번 크게 놀랐다. 한번은 도문시 석현진 송림촌에서 사는 소학교 친구 리봉근이 몇년전에 부인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혼자서 지낸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바로 이틑날에 위문차로 봉근네집에 갔다 십 여년 만에 만난 우리는 기쁨의 술잔을 부딪치고 또 부딪치면서 60년전 옛일을 회포 하면서 서로가 권커니 작커니 하는데 봉근씨가 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한 것 처럼 정서를 살려가며 “정삼이 동생 멋있다…”를 읊고나서 “이는 소학교 2,3학년때 네가 지은 시다. 네가 지금도 이 시를 기억하나?”고 니에게 물었다. 이에 나는 한참이나 놀라 했다. 이는 내가 소학교때 지은 것인데 그네들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수남소학교 학생들이 교가인냥 “정삼이 동생 멋있다” 를 읖조리며 다녔다... 나는 또 지난 7월에 한번 놀랐다.. 어느 날, 왕청현 석현진 수남소학교 동창인 최금선씨가 내가 뇌출혈을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병문안을 하려고 우리 집에 왔다. 역시 십 여년 만의 만남이라 늘 웃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반나절이나 동년의 옛말들로 웃음꽃을 피우는데 금선씨가 불시에 “이돌이 죽었다…”를 읊더니 “이는 오동무가 소학교때 지은 시인데 지금 기억하고 있소?”, “그때 수남학교에서 기활이를 옛말쟁이라고 불렀지무”하면서 나를 잔뜩 춰올렸다.   나는 이렇게 두 소학생 친구의 기억력에 실로 놀랐다. 필자는 그후부터 “정삼이 동생 멋있다”와 “이돌이 죽었다”에 슴배여 있는 눈물겨운 력사를 회포하게 되였다.   그때 왕청현 석현진 수남소학교의 학구는 7개 자연툰(수남, 송림, 토성, 고려, 남양, 달라자, 하가툰)으로   인구가 많고 학생수도 많았다. 그때 우리 반의 학생은 52명으로   송림마을의 남자들만해도 8명이였다. 그때는 생활이 매우 가난하였는데 나는 소학교에 다닐 때 속옷은 물론 팬티마저 입어본적이 없다.  어느 한번 여름철 체육시간에 두 팔을 펴고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두 팔을 편 대로 허리를 굽히는 체조를 하는데 그만 내가 입은 검은색 낡은 바지의 엉덩이 천이 째져 엉덩이가 그대로 로출되였다. 나는 너무나도 황당해 별수 없이 슬그머니 힉생줄에서 나와 학교 주변의 산기슭에 있는 비술나무를 찾아가 나뭇가지를 꺽어 껍질을 버껴서 째진 바지를 졸라매고 돌아와서 계속하여 체육시간을 보는데 그만 나의 뒤줄에 선 리춘애가 이를 발견하고 “기활이 바지엉치를 나무껍질로 동여맸다.”고 소리를 질러  많은 애들이 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골려주기에 나는 리춘희가 얼마나 밉었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화가난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집체로 도문영화관의 영화구경을 조직했는데 나는 영화표 값을 낼 돈이 없어서 반주임선생(허은금)님에게 생닭알 한개를 바치고 영화구경을 따라 갔다. 그때는 모든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책보는 스산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거의 모든 책보가 여러가지 낡은 천쪼각을 무어서 만들었는데 송림마을의 한정삼은 천쪼각끈으로 책을 묶어서 들고 다녔고 나는 마르지도 않은 젖은 세수수건에 책을 싸서 들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날에 송림서 가난하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든 한정삼의 녀동생이 검은색 새책보를 허리에 띠고 학교에 와 닭무리 속의 공작새마냥 돋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정삼의 동생이 너무나도 멋스러워  를 지은 것 같다.   지난 50년대는 “배고픈’년대”였다. 3학년때 늦의 봄의 어느날 오후에 우리반에서 집체로 산나물을 캐려 송림마을 뒤산에 갔는데 고려툰(지금의 흥진툰)의 박영일이 배고픈김에 우둥치뿌리라고 파서 먹은 것이 우둥치가 아닌 독활(毒活)뿌리여서 영일이가 배가 아파서 끌어안고 죽는다며 나뒹굴었다. 하여 급해 난 허은금선생은 남자애들을 조직하여 서로 업어서 마을의 중심에 있는 촌위생소에 가서 제때에 구급치료를 받고  구급하였다. 또 어느 날 오후에 수남마을에서 “이돌이네 형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썽했다. 우리 아래 학년을 다니던 수남마을의 박이돌이 남동생과 함께 집에서 불시에 죽었다는 것이다. 박이돌네 가정은 수남에서 특별히 가난하기로 우리들의 기억에 이돌이네 4형제(2넘2녀)가 여름에 신을 신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학교측의 조사에 따르면 그날 오전에 박이돌과 그의 남동생이  수남농업중학교를 다니는 학생을 따라 산에 가서 개살구씨를 주어서 먹었는데 이돌네 형제는 집에 돌아와서 또 생파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살꾸씨를 함께 먹은 농중학생은 별탈이 없었는데 식욕이 좋은 이돌네 형제만 죽었으니 그들이 죽은 원인이 개살구씨를 먹고 또 생파를 먹은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죽음을 사람들게 교훈으로 남기고저 “이돌이 죽었다”를 지어서 거기에 강약을 달아서 외우며 다닌 것이 전교 학생들의 구전으로 전 학구에 보급 되였던 것이다. 그때 내가 이런 문답형식으로 구전말을 만든 것은 조선어문 과문에서 배운 이라는 제목의 시를 본땃기 때문이다.  “종달이” 전문이다    종달이 종달아 종달아 어디에 갔더랬니 수풀에 갔더랬다 뭘하려 갔더랬니 새끼치려 갔더랬다 몇마리 쳤니 다섯마리 쳤다 나 하나 주렴 널 왜 주겠니 고운 것도 내 새끼 미운 것도 내 새끼 쫑 쫑 쪼로롱 그때 나는 이 과문에 마음이 빠졌다. 왜냐면 엄마종달이는 다섯마리 새끼를 까고 남들이 한마리릘 달라는 것도 “고운것도 내새끼 미운것도 내새끼”라며 주지 않았는데 우리의 부모들은 왜서 자식 5형제를 낳아놓고 자기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갔는가 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때가 너무나 천진해서 랭웃음이 따른다. 나는 누님들 앞에서 “종달이”를 시도 때도 없이 외우고 또 외웠다. 그때 나는 구전말을 “종달이”를 본 따서 문답형식으로 지은 것 같다. 나는 60년 전의 나의 “작품”이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정말 기쁘고 다행스럽다. 왜냐면 두 친구들의 기억력 때문에 오늘에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이 글이  말로만 구전되던 구설사가 문자기록으로 력사에 남겠으니 말이다. 이밖에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시에는 령점이다. 단 몇년전에 는 공자의 글을 읽고 “말(言)이 시(詩) 가 되고 시가 노래로 되고 노래가 춤으로 되였다. 사람은 시, 노래, 춤이라는 흥으로 살아야 한다”는 공자의 말을 기억에 남겼을 뿐이다. 공자는 “시(詩)는 절 사(寺)와 말씀 언(言)의 합자(合字)로서 절(寺)에서 들리는 스님들의 말(言)이 곧 시(詩)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김학송선생은 최근의 글에서 박하 시인의 이라는 한줄 시(아차하면 깨여지는 비여있는 유리잔!)를 곁들면서 “이 주지시는 감각적인 언어로, 단 한마디의 말로 행복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녹여낸 재밋는 시다.”고 평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내가  만든 구전말을 시로 지어도 되겠다는 신심을 얻게 되였다. 하여 60여년을 구전해온 무제(無題)”시”를 유제(有題)시로 제목을 달아서 력사에 남긴다. 검은 책보 정삼이 동생 멋있다 어째서 멋있나 검은 책보 띠고서 멋있다 멋있다  어째서 죽었나 이돌형제 죽었다 어째서 죽었나 살구씨 먹고 생파를 먹고 죽었다 죽었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3-11-14
447    편하게 사는 법 댓글:  조회:1944  추천:0  2023-11-01
일전에 한국 KBS아침마당 “부부탐구”프로에 14년간 출연했던 정신과 전문의사 송수식박사는 한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법”을 “거짓말을 안하기”로 정리했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처럼 꾸며 하는 말이다. 거짓말밖에 모르는 자를 허줄한 사기꾼이라 하고 거짓절반, 진담절반으로 그 참과 거짓을 가릴수 없게 하는 자를 한수 높은 사기꾼이라 한다. 그리고 평소에는 대부분을 진담하다가 관건적인 시각에 거짓말을 하는데 평소의 진담으로 그 거짓말에 신뢰성을 담보받는자를 모략가라 한다. 사기꾼은 상습적으로 남을 속여 리득을 꾀하는 자를 말하고 모략가는 사실을 외곡하고 속임수를 써 남을 해롭게 하는 자를 말한다. 사기에는 정치사기, 금전사기, 사랑사기 등등이 있는데 사람이 사람을 못 믿게 만드는, 사회를 불신으로 만드는 사기가 금전사기피해보다 더 큰 범죄라고 한다. 거짓의 반의어는 실사구시, 성실이다. 실사구시는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추호의 확대도 축소도 없이 문제를 정확히 바르게 처리한다. 성실은 사실을 존중하고 솔직하며 언행이 일치하고 안팎이 똑 같다. 실사구시는 인격의 근본수양이고 성실성은 아름다운 마음의 핵심이다. 미국 제 1임 대통령 워싱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사람은 바로 성실한 사람이다”고 했다. 진소민은 대가 바르고 실사구시한 로혁명가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인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12차 전원회의(1968년)에서 류소기동지의 당적을 영원히 제명할데 관한 결의안을 통과할 때 진소민은 손을 들지 않았다. 모략가 강생이 그를 찾아 왜 손을 들지 않았는가는 물음에 진소민은 “이는 내 권리다”는 떳떳한 대답에 강생은 말문이 막혔다. 이로 하여 진소민은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연골병에 걸려서는 안된다. 진리를 견지하고 실사구시하며 인민과 나라와 당에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견정히 말했다. 1980년에 당중앙에서 류소기동지에 대한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그의 모든 명예를 회복한다는 결의를 통과하던 그 시각에 아마도 진소민의 마음이 누구보다도 편안했을것이다. 진소민의 인생이 “거짓없는 인생”, 해살처럼 구김없는 “솔직한 인생”, “편안한 인생”이다. 오기활                                                         《길림신문》2009.5.26.    
446    [수기]“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댓글:  조회:1132  추천:0  2023-10-13
2007년 5월 9일(음력), 나의 환갑수연례 때 아들이 하객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오호준의 아들이고 나는 오기활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같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나의 가장 구별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돌연적인 아들의 물음에 당황해난 나는 평상시의 말대로 “나는 ‘아들을 못 지낸 아들’이고 너는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이다.”고 했더니 아들이 “정답입니다”고 했다.   아버지 오호준(40)은 내가 10살이 되던 해에 돌아갔다.(아버지가 입음 외투는 어느 친적의 결혼때 대반으로 가면서 이 외투를 빌어 입었다고 한다.)   나는 2살에 어머니를, 열살에 아버지를 잃은 조실부모한 고아로 부모들의 사랑을 못 받고 부모들의 교육이 없이 자랐다. 나는 엄마의 얼굴조차 기억에 없고 아버지는 돌아가던 날에 나에게 공책과 싸리연필을 사주던 기억밖에 없다. 부모들이 돌아간 후 우리는 5남매(2남3녀)가 살다가 이상 누님들이 결혼하자 나와 동생이 15년간이나 큰집에 얹혀살면서 뼈를 굳혔다. 내가 날이 갈수록 부모의 필요성을 갈망하게 된 것은 결혼 후부터였다. 말하자면 내가 세대주로서 가정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고 자식들에게 어떤 ‘부친상'(父亲像)을 남겨야 하는 것이 늘 앞서는 고민이였다. 결혼 후 나의 앞에 놓인 첫 과제로 아들을 본후 아들 이름을 어떻게 짓겠는가 하는 것이였다. ‘무지하면 대담하다'고 한다. 나는 1975년에 결혼하고 1976년에 아들을 본 후 며칠간 밤낮이 따로 없이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가를 고민하던 끝에 “내가 낳은 아들 이름을 내가 짓는다.”며 아들의 이름으로 친척이나 동네 로인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작명전문가'를 찾지 않았다. 나는 아들을 늘 푸른 소나무처럼 키우리라는 욕심으로 이름을 오무송(吴茂松)이라고 짓고 계속하여 동생네 두 아들을 오무성(吴茂成), 오무림(吴茂林)이라고 지어 3형제의 이름 막자로 “松成林”,  후대들이 ‘소나무가 자라서 수림을 이루듯' 되기를 이름에 담아서 기대했다. 다음은 평생과제로 ‘아들을 못 지낸 아버지'가 어떻게 자녀교육을 잘 할 것인가였다. 나는 반복적인 추고 끝에 ‘책속에 길이 있다'고 책에서 아버지 모델을 찾아서 내가 ‘책아버지'로 되는 것이였다. 그래서 서점에 다니며 아무튼 책표지에 ‘아버지' 석자가 담긴 책이면 거의 다 사서 열독하였다. 지금 나의 책장에는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와 아들》 《아들에게 가르켜 주고 싶은 모든 것》, 《아들아, 그것 말이야》, 《아들을 성공시킨 아버지 편지》, 《내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 《미래에 대응하는 자녀교육》 등 많은 책들이 소장되여 있다.   궁핍한 년대에 아버지는 나의 왼손에 만년필을 쥐여주고 돌사진(?)을 찍어주었다 . 십수년간의 독서에서 나는 한국 신재용선생의 를 읽고 이를 나의 평생지도 교재로 정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부지런히 ‘늘 해야 할 일'을 하려고 작심했다. 이하는 는 글의 일부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을 큰 바다처럼, 몸은 큰 산처럼 하라셨건만 내 마음은 내 스스로 갉아먹어 좁쌀만 해졌습니다. 내 몸은 즐거움을 쫓느라 허물어져만 갑니다. 바다는 커녕, 산은 커녕, 거품처럼, 티끌처럼 살아갑니다.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가진 것에 집착하지 말며, 가져서는 안될 것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셨건만 갖고 싶은 것은 갖고 싶고 가지면 더 갖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지면 더 갖고 싶어 안달아합니다. 안달로, 들뜸으로, 미련으로 거짓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난 이'를 축복하고 ‘늙은이'를 돌보고 ‘아픈 이'를 위로하고 ‘죽은 이'를 잊지 말라고 했지만 ‘난 이'을 위한 빎도, ‘늙은이'를 위한 보살핌도 ‘아픈 이'를 고치려는 의술도 턱없이 부족해 좌절합니다...” 그리고 또 어느 책에서 읽은 아들의 글이다. “7살인 어린 시절에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17살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알고 계시지 않는다. 21살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모른다. 35살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생각보다는 많이 알고 계셨다. 50살 된 지금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상 옳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글 속의 아들이 100세 시대의 아버지를 쓴다면 70살 때 생각, 90살 때 생각을 어떻게 썼을 가가 궁금하다. 필자는 나의 아버지, 나, 그리고 나의 아들을 곁들며 이 글을 맺는다. 아버지(오호준) ㅡ내가 10살을 먹어 15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다 보니 먼저 글 속의 아들이 7살에 “나는 생각했습니다.”로 나를 대신한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다음은 아버지의 선경지명 두가지에 감사를 올린다. 하나는 나의 이름을 잘 지은 것에 감사하다. 나의 이름을 풀이하면 ‘나라 오(吴), 터 기 (基), 살 활(活)'이다. 나는 내 이름의 뜻을 ‘오나라에서 기본상 살아간다'로 풀이한다.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덕으로 고아신세에 오늘까지 무탈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특히 금년 4월에 뇌출혈로 시술까지 하였지만 지금은 큰 후유증이 없이 기본상 종전의 건강상태로 회복하였다. 다음은 그렇게 궁핍한 년대에 나의 왼손에 만년필을 쥐여주고 돌사진(?)을 찍어 준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선견지명'으로 기자, 작가로 되였으니 말이다. 나(오기활) 아들이 소학교부터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아들과 함께 반급의 흑판보를 전담하여 꾸렸다. 아들에게 서예공부를 시켰다. 하여 아들의 만년필 글쓰기 작품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서예》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글쓰기를 지도하였다. 하여 중학생 때 《연변일보》에서 조직한 응모 작품에 아들의 작품 가 입선되였다. 아들에게 가문의 계주봉을 넘겨 주었다. 아들이 동북사범대학에 입학한 축하연에서 내가 5년간 돼지사양원을 하면서 쓰던 ‘멜대'를 가문의 대물림 계주봉으로 아들에게 넘겨주며 가문의 본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아들이 일본류학을 갈 때는 오성붉은기와 나폴레온 힐이 쓴 책 《성공의 13단계ㅡ어디서나 할 수 있다》를 주면서 애국심을 간직한 성공자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아들(오무송) 아들은 일본 케이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교의 평생교수로 취직하였고 학교의 파견으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2년동안 연수를 하였다. 아들은 우리 가문의 장손으로 ‘정, 지, 검, 관, 강'(正智俭宽康)이라는 가훈을 기초하였다. 나에게 재일본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쓰도록 건의하고 내가 쓴 《왜 갔느냐면 일본에, 왜 사느냐면 일본서》책에 서언과 후기를 썼다. 아들은 미국에서 이라는 시를 지어 자기의 앞길을 확고히 하였다. 민들레홀씨가 태평양을 날아넘어 책갈피에 묻힌 채 고금을 잇는데 창밖의 풍경도 춘하추동 비껴간다 창문에 비친 제 모습 용기 내여 직시하며 다원속의 그 진리에 눈 떠보련다 향수의 숙명을 이 몸에 지니고 방종이 아닌 자유를 사랑하노라 봄을 품은 씨앗 하나 허영을 등지고 풍설에 버티며 땅에 내린다 깊숙히 뿌리 박고 고혼의 열매 맺어 산벼랑 광야에서 새 생명 키우리라 오늘도 무지 벅차다. 나의 딸 오염희는 현재 한국에서 산모건강관리사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책속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했기에” 훌륭한 아들로, 훌륭한 아버지로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된 사람’이 되려는 노력으로 사회와 자식들에게 부끄럽게는 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자신한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3-10-12  
445    잘 물든 단풍잎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댓글:  조회:1508  추천:0  2023-10-02
인생 닐리리 □ 해마다 봄이면 산과 들에 철꽃이 피고 새싹들이 움튼다. 봄철이 가고 여름철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철꽃들은 땅에 떨어지면서 아름답던 화기를 마감하지만 봄에 움튼 새싹들은 여름철에 한껏 푸르싱싱하다가 가을철이 익어가면 잘 물든 단풍잎으로 땅에 떨어진다. 이런 자연 모습에 혹자들은 “떨어지는 가랑잎이 쓸쓸하구나.” 하고 말한다. 떨어지는 단풍잎이 과연 쓸쓸한걸가? 결코 쓸쓸하지 않다. 쓸쓸한 것은 떨어지는 가랑잎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찬란했던 나의 젊음이 저 가랑잎처럼 쓰러지는구나.” 하며 쓸쓸한 것이다. 잘 물든 단풍잎은 정말 아름답고 자랑스럽다.  우리는 아름다운 봄꽃놀이만 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단풍놀이도 가지 않는가.   꽃은 아무리 예뻐도 떨어지면 줏지 않지만 잘 물든 단풍잎은 소중히 주어서 책장 속에 끼워놓고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또 해빛 좋은 가을에 새로 바르는 창호지에 아름다운 단풍잎을 붙혀놓고 단풍잎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마음을 즐기지 않는가. 우리는 세상에 태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잘 물든 단풍잎처럼 늙으면결코 서글프지 않다. 주름살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머리가 희여지면 희여지는 대로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 주어진 현실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의 얼굴은 무척 편안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분은 나이 들어도 참 밝고 당당하게 사는구나!” 하며 부러워한다. 바로 그 모습이 늙음에 비참하지 않고 초라하지 않는, 잘 물든 단풍잎 인생이다. 잘 물든 단풍잎 인생을 살려면 지나침을 경계하고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어 지나친 과욕을 부리면 부작용이 따른다. 인간은 일생 동안 먹을 음식이 한정량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니 아무리 맛이 있어도 적당히 먹어야 한다. 많이 먹으면 굵고 짧게 살고 소식하면 가늘고 길게 산다. 과음도 안된다. 과음하면 가을비가 온 뒤에 기온이 떨어지듯 늙은 몸에 과음하면 기온이 떨어져 몸이 망가진다. 나이 들어 뭐든지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는 과정이므로 잔가지들을 치면서 인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100세로 보면서 50세까지는 전반생, 50세후는 후반생, 60세를 후반생시작이라고 한다. 전반생이 가정, 사업을 위해 분투한 올리막길이였다면 후반생은 페달을 별로 밟지 않아도 되는 내리막길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생은 전반생 저축을 토대로 사회적인 직위나 재산을 모으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기력, 체력이 충분한 인생이다. 승부는 후반전에 있고 멋진 꼴은 거의가 후반전에서 나온다. 85세에 28번째의 책 《락엽으로 가는 길》을 출간한 김영금 작가는 출간식에서 “다른 건 다 버리면서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글이고 책이였다.”고 하면서 “그래도 지나온 인생길에서 느낀 깨달음을 자식들과 후배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힘들게 이 책을 썼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연변농학원의 김수철교수는 식물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으로 길림성의 공백인 《길림성식물지》를 보수도 없이 출판하겠다고 하면서 본인이 채집한 수만종의 식물표본을 93세인 2013년부터 정리, 집필하여 2022년까지 영어, 한어, 조선어, 라틴어 등 4종 문자로 된 《길림성식물지(1, 2집)》을 출판하였고 지금은 98세 고령에 제3집과 제4집을 편집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분들이야말로 참 잘 물든 아름다운 단풍잎의 엘리트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후반생을 잘 물들게 하는 무지개 단풍론으로 이 글을 맺는다. 1. 신념을 갖자. 그러면 큰 힘이 생긴다.  2. 책을 읽자. 그러면 지혜의 샘물이 솟는다. 3. 나누며 살자. 그러면 삶이 풍요롭다.  4. 웃음을 갖자. 그러면 령혼의 음악이 들린다. 5. 친구를 갖자. 그러면 행복한 시간이 마련된다.  6. 좋아하는 일에 미치자. 그러면 늙지 않는다. 7. 사랑을 갖자. 그러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보인다. 오기활                               2023년 제 9 기
444    조상님게 감사를 댓글:  조회:1376  추천:0  2023-09-15
설 명절을 앞두고 술상에서 차례를 론하니 “지금은 골회도 날라 버리는데 차례라니?”라며 말 빠른 리씨가 초풍할 지경이다. 그럴만도 하다. 부모가 사망하자바람으로 화장터에 모셔 연기와 함께 유골을 날려 보내고는 “시름을 놓았다”는 상주들이 한둘만이 아니니 말이다. 기제사는 물론 3년 제도 지내지 안는다는 자랑까지 하니 말이다. 이들에게 지난 12월 14일에 주문화국, 주무형문화재보호중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 련합으로 “조선족장례풍속보호연구토론회”를 했고 토론쩨마가 조선족장례문화를 어떻게 보호할가였다면 진정 초풍기절할것이다. 물론 생활절주가 빠르고 일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실정을 모르거나 리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예 살아계시는 부모도 일년에 한두 번을 겨우 찾는다는 정도니 사망자의 유골을 버리고 제를 안 지내는것이 더는 이상할것이 없다. “선배은공을 안 잊으면 자손이 빛난다(不忘先辈恩 子孙齐光辉)”는 비문이 인상깊다. “나를 이세상에 태여 나게 한것만으로도 부모들에게 감사하다.” 이는 눈먼 량부모를 효성스레 모시는 훈춘시 양포향동아리촌 주우(훈춘시 제5기10대걸출청년)의 말이다. 27살 농촌청년의 말이라고 믿기 어렵다. 우리의 몸은 나 한 사람의 외딴 개체가 아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엽이고 련결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유훈을 받들어 근간(根干)을 깊이박고 지엽을 바로 키워 보람있는 결실을 맺어야 한다. 조상들에게 제례를 올림은 돌아가신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몸과 마음을 바로잡고 정성이 담긴 의식으로 자자손손 효심을 이으려는데 있다. 묘지나 골회함은 주택의 연장이다. 제례의 마음자세는 돌아가신 분을 살아계실 때 모시듯 하는것, 검소하지만 정성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민족의 참된 모습이다. 솔직히 말하면 제례를 기피하고 조상묘를 버림은 단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례를 멀리한다고 해서 사업에 더 열정하고 마음이 편해지고 유골을 날려보낸다고 해서 조상에 대한 마음까지 날려보내는것이 아니다. 아무튼 인간이기 때문에 어째든 그로인해 마음속에 항상 죄책감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필자는 오는 음력설을 시작으로 그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조상생각을 해보라고 권고한다. 차례를 기회로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께 작은 정성이나마 올려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을 버렸으니 새해의 일도 잘 풀릴것 같다. 일전에 회혼례를 지낸 박룡수, 전보옥 로부가 자식들의 “효심은?” 물음에 “늘 곁에 와준다”는 단마디 대답에서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바람과 효심욕을 터득하였다    . 오기활                                《길림신문》2010.12.31.        
443    정인갑교수와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 댓글:  조회:1364  추천:0  2023-09-01
지난 2월 21일 필자는  연변일보 사우인 장경률씨가 한국에서 보내온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번영에서 조선족의 역할”이란 주제의 “삼강포럼” 세미나소식을 받고 경룰씨더러 나와 정인갑교수의 위챗련계를 부탁하여 정교수와 위챗을 련계하였다. 나와 정교수와의 인연은 아마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였다. 필자가 정인갑을 만남은 조글로사이트였다. 정교수님의 글을 읽어보면 그의 기질이 거의 나와 같았다. 우리는 김학철선생님의“ 인간답게 살려면 불의와 도전하고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라”를 좌우명, 삶의 가치관으로 하고 언론인은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로천로 우리가 진찰한 사회의“병”이 거의 같았고 그 “병”에 대한 치료처방도 거의 같았다. 뿐만이 아니였다. 우연하게도 나와 정교수의 출생은 동년 띠동갑이고(나는 1947년 음력 5월 출생, 정교수는 1947년 8월 출생) 결혼한 해도 같았고(1975년)였고 심지어 결혼식날에 부른 노래마저 같았다.(소근장대대를 따라 배우자) “옛 조상의 삶풀이”(흑룡강 초선민족 출판사,2003년 출판)에 따르면 돼지띠생은 성격이 “천성적인 유물론 자로서 정직하고 단순하며 아주 강인하다. 그들의 최고의 재산은 신뢰성, 성실성, 견강성이며 주어진 임무에 온갖 힘을 이울려 몰두하는 열정가이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보면 우리는 명실공한 돼지띠생으로 책임감이 강하고 속심이 자상하였다. 이밖에도 우연하게 정교수가 나보다 하루 먼저 “연변단풍수필협회”에 입회하였다. 정교수의 책임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2011년에 동북3성 4개 조선문언론사에서 벌린 “원사보”컵 (건강한 술문화만들기)응모활동 때 내가 “50년 주사(酒史)와 나만의 주도酒道)”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나는 이 글에서 애주가의 괴변인 술의 주정을 바를 正으로 풀이하며 “酒正”이라고 썼더니 정교수가 댓글로 “주정의 한자는 酒酲”입니다”로 바로잡아 주었다. 또 지난 70년대에 필자가 대채참관단으로 대채를 다녀올 때 애주가인 필자가 국가명주로 “분주”를 마시려니 돈지갑이 엷어서 술을 병채로는  사지는 못하고 생떼를 써서 잔으로 (한잔에 70전) 한 잔을 사서 마셨다는 글에 정교수가 댓글로 “'분주(汾酒)'를 분주(芬酒)'로  잘못 썼습니다”고  바로 잡아 주었다.  이렇게 지나온 와중에 필자는 2014년 1월 6일 서울에서 치른 우리 손녀의 돌 생일잔치 때  정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 때 나의 아들의 지인들로 한국에 있는 조선족명교수(박사)들로 예동근씨, 정인갑씨,강광문씨가 참석하여 하였다. 그 며칠후 때 필자가 정교수를 인터뷰를 했는데 그번 인터뷰에서 정교수가 “연변에서 조선족의 발전을 위해 한족들을 동원 해야 한다”는 견해가 인상이 깊었다.  필자가 듣기로는 연변의 지도자들이 “연변발전의 도움을 위하여 조남기, 문정일, 리덕수 등 동족의 ‘령수’들을 찾는다는데 정교수에 따르면 연변에서 될수록 한족 간부들을 내세워 연변의 한족지도자들이 국가급 한족어른들을 찾아 다니며 “조선족을 도웁시다”고 한다면 효과가 빠르고도 계속될 것임을 심심히 느끼였다. 인터뷰를 끝내고 필자가 정교수에게 나의 저서(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를 증송하였더니 며칠후에 “요사이 우리 집(부인)에서 오선생님의 책을 열심히 읽으며 감동을 먹습니다”는 감사의 전화를 보내왔다..   아래는 그때 필자가 발표한 기사이다.   《괴짜학자》가 보는 조선족발전의 몇가지 해법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12 15:11:36 ]   -조선족을 위한 정인갑교수의 일가견                  열변을 토하는 정인갑교수   지난 1월 24일 오후 기자는 서울의 모 커피점에서 정인갑교수를 인터뷰를 했다. 정교수는 1982년에 북경대학중문학부를 졸업하고 중화서국에서 편집부 주임을 사업하다가 퇴직후 현재 청화대학 중문학부 객좌교수, 한국 황하문화원 원장, 한국 한중미래재단 리사장, 중국음운학연구회 리사, 중국사서(辭書)학회 회원 등 많은 직무를 맡고있었다. 정인갑교수는 학식은 물론 활동범위가 넓고 국경이 따로 없는 마당발이였다. 정교수는 특히 조선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발벗고 나선다고 하는데 그는 연변의 문화사업은 물론 경제발전을 위하여 많은 조언을 해왔다. 례하면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을 위하여 북경시삼강(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을 뜻함)소학교를 설립하고 10년간 운영하면서 북경에 진출한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조선인 자녀들을 받아들였다. 우리 민족의 민족사와 세계사를 곁들며 연변과 조선족의 오늘과 래일을 담론하는 정교수의 주장은 긍정적이고 랑만적이였다. 《로총각공정》을 벌리자 《현재 조선족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중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조선족농촌의 많은 로총각과 〈외톨이>들이 많은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떼는 정교수는 몇년전부터《로총각공정》을 구상하여왔다. 조선족녀성들의 출국과 내지 진출로 농촌 총각(외톨이)들이 결혼을 못하는 현상을 초래하였고 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성장 위기를 조성했다. 당년에는 재해가 들면 정부나 해당 부문에서 외지의 쌀을 사들이고 심지어 고추흉년이 들어도 타지방의 고추를 사들이느라 야단법석이였다. 그런데 지금 숱한 조선족총각들이 결혼을 못해도 정부측에서 나서지 않는다. 하여 정교수는 중국 극빈지역의 타민족녀성을 영입하는《로총각공정》을 구상했던것이다. 《로총각공정》은 정교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어느 간부한테서 계발을 받았단다. 그에 따르면 중국 강절(강소성, 절강성) 등 지역의 농촌에도 로총각문제가 존재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극빈지역 처녀들을 대량 영입하였다고 한다. 정교수는 연변의 모모한 조선족간부를 만나 이 방법을 제의하며 인식을 통일하고 정부와 민간을 동원할것을 제의했고 달마다 사업추진여하를 차문하였다. 심지어 국영기업과 사영기업가들을 찾아서 변통적으로 이 일을 추진해볼것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주선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첫발만 떼면 극빈지역에 소문이 퍼지면서 서로 소개를 할것이며 잇달아 효과가 나타날것이다. 《〈로총각공정〉에 사업자금이 필요하면 내가 첫사람으로 몇천원을 후원하겠습니다.》 정교수는 하면 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며 퍽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족명절을 만들자 명절이란 국가나 사회적으로 정하여 경축하는 기념일이다. 대학생시절에 정인갑은 북경시조선족대학생활동을 조직하느라 중앙민족대학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다른 민족학생들은 국가에서 민족명절을 쇠주었는데 조선족들은 민족명절이 따로 없다보니 국가의 대접을 받지 못하여 서운해하였단다. 이에 정교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써 북경시에서《9•3》명절을 쇨것과 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조직해 줄것을 간곡히 제기했다. 1981년 5월 스웨덴의 한국인교수(조승복)가 북경대학을 방문할 때 많은 조선족유지인사들이 모였다. 그 모임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萨空廖)이《좋은 소식을 알린다.》며 올《9•3》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거행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해당부문의 어느 조선족분이  다른 관점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러번의 조률끝에 끝내 9월 14일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가 아닌《북경시민족운동회》로 거행하였다고 한다. 명절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성탄절, 구얼방절(古尔邦节)은 종교적 명절이고 물뿌리절(泼水节)과 나달묵(那达慕)절은 타이족과 몽고족의 명절이며 8.15는 연변의 로인절이고 9.3은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절이다. 물뿌리기절(泼水节)과 나달묵절은 시쐉반나와 내몽고는 물론 기타 지역의 타이족과 몽고족도 함께 쇤다. 하지만 9.3은 지역명절이므로 연변의 기타 민족들은 함께 쇨수 있지만 타지역의 조선족들은 함께 쇨수 없다. 정교수는 하루속히 연변조선족명절만이 아닌 200만 조선족의 명절을 내와 전 중국의 조선족들이 해마다 유쾌히 조선족명절을 함께 쇨수 있기를 기대했다. 조선족을 위해 주류민족들이 나서게 하라 필자가 최근 연길에서 진행한《감동중국걸출조선족》시상식을 곁들이니 정교수는 참 좋은 일을 했다고 치하를 하였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조선족을 위한 행사에 주류민족들을 동참시켜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었다. 정교수는 총 15권에 달하는《중화민족백과전서(中華民族百科全書》출판 최종심열을 맡고 몇년전부터 전국적인 사회조사를 하였다. 2008년 8월,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허저족(赫哲族)자치향인 가진구향(街津口乡)에 가니 가진구향을 위해 시와 향의 한족간부들이 허저족보다 더 열심히 뛰여다녔다고 한다. 필자가 민족자치지역에서 한족들이 더 열심히 뛰여다닌다는것에 리해가 안 되여하자 정교수는《소수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것은 한족들의 당연한 의무다. 사(私)적으로 봐도 한족들도 소수민족들에게 차례지는 덕을 함께 향수한다. 동강시는 성이나 중앙에 가서 손을 내밀만한 여건이 전혀 없다. 그러나 허저족자치향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달라진다. 동강시가 발전할수 있은것은 많이는 허저족자치향이라는 카드를 활용한데 있다.》고 설명했다. 정교수는 내몽골, 신강, 운남 등 소수민족 지구에서도 소수민족의 일을 위하여 한족간부들이 북경나들이를 많이 한다고 한다. 력사적으로 보면 장춘은 오랜 수부도시이고 연길(연변)은 문화도시이다. 북경에는 장춘, 연변에서 진출한 훌륭한 한족인재들이 많다. 한때는 돈화시 출신의 한족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국장을 담임했고 연길시북산가 출신의 한족이 중앙선전부 부장을 담임했다. 만약 연변에서 언녕부터 한족들이 그들을 찾아가서 연변을 도와달라고 했더라면 모르는척은 안했을것이란다. 기자는 정교수의 엉뚱한(독특한) 사로(思路)에 완전히 매료되였다. 정교수를《괴짜학자》라고나 할가? 그의 주장과 관점은 조선족들의 앞길에 너무나 훌륭한 조언을 남겨주고있었다. / 오기활기자   한마디로 나와 정교수와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라고 하겠다. 나와 정교수는 “연변단풍수필협회”창회 25주년을 맞으며 함께 입회한 회원로서 서로가 제자리를 참담게 지키며“연변단풍수필협회”성립 25주년을 맞이하여 황유복고문님이 올린 글(수필문학의 더나은 내일을 그리며)을 명기하고  황교수님이“중국조선족문단에는 해마다 회원문집을 출판해내고 달마다 문필활동을 진행해 온 ‘연변단풍잎수필회’가 명실공히 중국조선족문학인단체들의 맏형벌이 되라”는 기대에 따라 정교수더러 ‘연변단풍수필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갖고 있는 자본을 무헌이 활용하십소”를 부탁하고 큰 기대를 한다. 그리고 우리 협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정교수의 언론집“정인갑의 횡설수설”(민족출판사. 2013년)을 읽어 볼것을 건의한다.  오기활 (2023년 3월 3일 도문서)
442    국문관리는 엄숙해야 댓글:  조회:1357  추천:0  2023-08-17
최근 도문시는 “두만강반의 제1도시”라는 슬로건으로 “두만강문화”를 주제로 한 여러가지 홍보전을 대폭 벌리고있다. 그에 따라 많은 국내외관광객들이 도문의 두만강, 두만강광장을 찾아 휴식과 즐거움의 한때를 보낸다. 그런데 그에 따라야 할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또 엄격해야 할 여러가지 관리사업이 구석구석 느슨한것이 가슴이 아프다. 례하면 탑이란 종교, 기념, 군사, 전망, 관광, 관측, 방송통신 등의 목적으로 건조된 건축물인데 중국 도문통상구(국문)남쪽 두만강유보도에는 사진업자들이 헌 널판자와 엷은 철판으로 만든 “중조우의 탑”이 두개나 번듯이 서있다. 그것도 조선 평양의 “중조우의탑”을 본따 만든 “중조우의탑”이 아닌 평양의 “천리마탑”을 본따 만든 “중조우의탑”이다. 국내외 관광객이나 외빈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이렇게 엄숙하지 못한 황당한 “탑”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해당 부문의 책임자들은 추궁을 받아야 할것이다. 또 문이란 부지내의 시설을 보호하는 방어적 목적과 시설을 표현하는 의장적(意匠的)목적, 때로는 기념적목적(례하면 독립문)을 가진다. 국문은 나라를 지키고 국가의 존엄을 상징하는 문이다. 그런데 조국의 동대문인 중국 은 돈별이를 목적으로 나라의 존엄도 없이 국문을 관광명소로 만든데서 많은 관광객들이 국문에 올라 국문을 마구 짓밟는것이 필자로서는 가슴아픈 국치로 느껴진다. 외국의 한 인터넷매체는 도문의 국문을 글에 올리고 “국문이냐? 전망대냐?”며 풍자하였다.  오기활                                                              2011.10.3.
441    올바른 부조문화 기대된다 댓글:  조회:1250  추천:0  2023-08-01
해마다 이쯤이면 성행하는 를 두고 후론이 많다. 지난 세기 90년대까지만도 대학문턱이 높아서 자식이 대학에 입학하면 부모들이 >며 자녀대학입학잔치를 차렸다. 그리고 누구나 대학입학잔치에 초대되면 신나서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런데 는 지금은 는 불만들이 뒤따른다. 이런 대학입학잔치현실에 비춰 도문교원연수학교 오해선(정년퇴직교원), 리문준부부가 딸애의 대학입학를 잔치대신 딸애를 관광을 보내여 돋보인다. 기실은 딸(리채유)이 리과생 중 길림성에서 단 1명을 모집하는 연변대학미술학원에 제 1 지망대로 입학했으니 축하잔치를 베풀만도 했다. 지금 보면 사회적으로 백일잔치, 생일잔치, 대학입학잔치, 집들이잔치, 출국잔치… 등등의 잔치가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잔치를 화제로 시야비야 한다. 잔치화제의 대개는 삐뚤어진 잔치에 따르는 부조때문이다. 지금 시세에 부르는 잔치에 가려면 최저로 가 100원이 돼야 하니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며 난감해 한다. 살펴보면 적지 않는 잔치들의 목적은 돈벌이였다. 60대의 모모는 3번째나 되는 재혼에 번마다 많은 손님을 청해 말밥에 올랐고 누구는 이미 손녀애까지 본 아들의 결혼잔치 끝에 현수막까지 바꿔 걸고 손녀생일잔치를 차리다 보니 하객들이 며 두덜대더란다. 이런 반면에 도문의 김영덕옹이 회혼례에 며 손님을 청하지 않았고 흑룡강성 정금화의 진갑잔치는 손님들의 축의금을 받지 않았단다. 어느 중학생동창회는 서로간의 군일에 부조를 20원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제정했고 룡정시 개산툰진의 한화석네 자식 4 남매는 아버지의 7순 수연을 잔치대신 량친부모를 한국에 1개월간의 배낭려행을 보냈고 아버지(농민작가)의 저서(못 말리는 개산툰)를 출간하게 하였다. 상기의 이 실례는 삐뚤어진 잔치문화의 개혁으로 크게 제창할바다. 우리가 무엇을 개혁하려면 필경은 앞장서는 선각자가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 앞장서나가는 소수의 선각(선구)자들은 언제나 처음은 외롭다지만 선각하고 남먼저 행하는 그 일이 의미가 깊고 가치가 크다면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야만 사회가 변화되고 발전된다. 아니면 모두가 며 자기가 따르려는 일의 의미나 가치를 가늠하지 않고 늘, 그저 그대로 남들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사회는 아무런 변화와 발전이 있을수 없다. 필자는 오늘의 삐뚤어가는 잔치현실과 그에 따르는 부조문화현실에 비춰 김영덕, 정금화,오해선, 한화석 자녀들 등 앞장선 사람들의 선동으로 살맛나는 훈훈한 잔치부조문화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한다.   오기활                      201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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