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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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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랄곳 없는 외지인 댓글:  조회:1068  추천:19  2016-11-07
        바랄곳 없는 외지인            ㅡ 한 영웅의 수난사   2016년 8월24일, 15년년말부터 일 없어 속타던 김만진은 밤중에 친구를 불러 북경조양구왕징남호중원 에 가서 술마이며 마음속고통을 털어 놓았다. 1995년설밑에 만진이가5살나던해, 아바지가 고향서 산에가 땔나무를 하다 목뼈등서너곳을 몹시 다쳐 186일간 목아래는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다. 강익한성격의 아버지는 모진공통을 이기고 악전분투하여 근1년만에 겨우일어나 걸어 다닐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그후유증으로 근육위축이생겼고  체력로동을 못하게 되였을뿐만아니라 앉아서도 7,8분 목을 돌리지 않고 있으면 쓰러지려 한다. 장춘길림성제1인민병원에 가 검진결과 3,4년후는 전신근육수축으로 들어누우며 실명이 될거라 하고 남경의유명한 골과병원의 전문의는 검사를 마치고는 치료도 거절하며 집에 돌아가 잘먹고 살아가라 한다. 아버지병치료로 그들은 살던 작은 벽돌집도 팔았다. 그들은 할수없이 할아버지집에 얺혀 살게 되였고 어머니가 도시에 들어가 남의집의가정부로 일하며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여 갔다. 그렇게 곤난하게 살며 초중에 진학한 만진이는 항상 어떻게하면 가정생활에 도움이 될가 고민하였고 그로 공부는 뒤전에 두었다. 항상 몸도 좋지않은 어머니가 혼자 힘겹게 일하며 돈버는게 불쌍하고 안쓰럽게 마음에 걸려 던 김만진이는 15살나던 2005년늦은 여름에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나이에 짐 싸들고 돈벌어 가정에 보탬하려고 북경으로 떠났다. 친척의 알선으로 2튼날부터 해정구 5도구에서 한국인이 꾸리는 작은 실내골프장에서 복무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천성이 활발하고 씨원씨원하며 거기에 엉치까지가벼워 열심히 뛰여다녀 사장님과 골프치러 오는 손님들로부터 아낌없는 호평과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북경들어와 짐풀어 여때까지 열심히 일하며 살아오던 그에게 근년의 전사회적경제난으로 많은 골프장들도 문닫게 되였고 그가 몸담아 일하던 련습장도 손님하객으로 페하게 되여 김만진도 실업하게 되였다. 근일년간 직업소개소, 취업전다지, 사이트등에 다니고 이력서도 보냈지만 학력없고 기술재간도 없는 그에게는 일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300여일의 뛰여다닌과 기달림은 혈기왕성한 젊음나이의 김만진에게는 큰 시달림이였고 아주 견디기 힘든 나날이였다. 와중에 사고로 근육위축으로 고통받으며 고생하는 아버지는 원체 137근되던체중이 이젠 96근이 되게 수축하여 뼈만 앙상하게 되였고 병증으로 조금만 걸어다녀도 무릅,다리특히골반과목이 불이 날듯 아파 힘겨워한다. 거기에 목부위의 근육위축으로 시신경이 압박받아 백내장,특히는 록내장이 심히 발병하여 실명할가는성이 높아 수술하라는 병원의사님의 진단에도 돈없어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얘기나누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진 만진이는 이튼날, 25일 새벽 1시반경에 식사마치고 친구와같이 식당을 나왔다. 김만진이가 문곁에 세워두었던 전동모터를 돌리는데 문곁에서 술마이던 20대한족젊은애들이 만진을 보면서: 现在骑电动车地 都是些穷鬼。란 비꼬는 소리를 내뱉는다 만진이 가 움직임을 멈추고 찔러보자 3애들은 눈길을 돌렸다. 둬발작 걸은 만진이는 생각해도 속이내려안가 친구보고 저애들이 나를 욕한다 며 돌아섰다  바로 그때 3애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김만진은 다가 온 그들을 보고 문책했고 쌍방이 오가는 말이 곱지않아 몇마디 안가 서로 맞붙어 싸움이 벌어졌다. 혼자서 3사람을 대하느라  힘이 부친 김만진은 전동차의 座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张昊를 쳤고 그애들은 달려들어 만진의 손에서 座垫을 빼앗아 만진이를 내려쳐 김만지도  쓰러졌다. 그렇게 싸움은 1분도 채 안걸려 끝났다. 만진친구는 말리는것처럼 하면서 拉偏战을 조금씩하였다. 싸움소리에 달려나와 현장을 목격한 식당의2한족복무원애들도 싸움은 크지 않았고 1분도 못 되여 끝났다 한다. 한족애들이 报警하고 맞은 张昊는 자기아버지까지 불러왔다. 보니 3애는 당지 南湖中园에 사는 이였다. 현장에서 직선으로 300메터안되고 돌아 온돼도 500메터도 안되는 거리를 경찰들은 25분이 넘도록 안 나타났다. 중에 친구가 몇번이고 만진이를 끌고 달아나려고 해도 만진이는; 나는 잘 못이 없는데 왜 달아나겠느냐? 경찰이 오면 리론해 볼것이다며 눌러 있었다. 报警하여 근 30분만에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대강 상황을 차문하고 그들(张昊父까지)을 구급차로 跨区海淀区清河999救护中心으로 실고가 진단검사하였다. 검사결과 张昊가 코왼쪽싹뼈가 손상이 가고 오른쪽손 엄지3번째뼈가 금이 갖다. 검사후 담당의사는; 没什么大碍。不用住院  不用吃药 回家养几天就好的. 라고 얘기했다. 김만진이는 검진하지 않았다. 소식접하고 김만진의 여자친구는 먼곳을 택시타고 달려왔다. 오전10반경 경찰들은 만진친구와짱호,짱호아버지를 경찰차로 남호파출소로 실어갔고(여기에 의혹 ㅡ왜 지정자인김만진이를 데려 안가고 간접인인 그친구인가?!)오후 2시경 2경찰은 짱호를 데리고 구급센터에 돌아와 김만진과 여자친구를 파출소로 실어갔다. 3시넘어 경찰들은 다시 짱호와김만진이를 안으로 录口供하러 들어갔다. 그후로는 만진이는 못 나왔다. 파출소에서 짱호는 만진친구를 보고 자기삼촌이 경찰이라 한다. 오후 5시에 짱호의 法医鉴定书가 나왔다.  6시경에 경찰들은 구급쎈터로가 나머지 두애를 실어와 8시에 录口供하고 9시넘어 나왔다. 밤 10시에 한경찰이 나와 여때 자리에 앉아있는 김만진의 여자친구를 보고 만진이는 잡혀 갔다. 집에 돌아가 돈 준비하란 말 두고는 안으로 들어 갔다. 후 张昊는 김만진여자친구보고 치료비,배상비를 달라하여 2천원 받아갔다. 27일 소식을 접한 김만진아버지는 급히 북경으로 달려왔다. 차에서 내려 만진의여자친구와싸움에 참여했던 만진친구를 만나 사건의 시말을 알아보고 만진여자친구와같이 사건접수남호파출소로 찾아가 당당경찰을 찾아 사건상황을 문의하려 했다. 그런데 경찰이 아주 언짢게 눈을 흘기며; 네아들이 법을 어겨 잡아 看守所넣었다고 말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식의 신심이 념려된 김만진아버지는 그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아들여자친구와같이 看守所로 달려 갔다. 도중에 전화로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看押期间는 누구도 면접볼수 없다하여 돌아섰다. 3흘후 김만진아버지는 다시 파출소로 찾아가 소장을 만나려 하니 만날수 없다하여 사건담당경찰을 찾아; 아이는 무슨죄명으로 잡아나? 왜서 그렇게 빨리 상해검진서가 나오고? 왜서 아이를 파출소로 데려와 문찰한다고는 그렇게 빨리 7시간도 못되여 잡아갔느냐? 왜서 아이를 잡아갈때 가속에도 알리지 않고 가속의 련락주소와전화도 남기지 않았느냐? 물으니 경찰은 제대로 답하지도 않고 瞪着眼睛蛮横的说;不负就上告吧。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후 김만진아버지는 법률를 아는 친구를 찾아 알아보고 전문형사안건을 접수하는 변호사를 만나 문의하니; 큰 일은 아니다. 고작 아이들의 싸움이 아니냐. 크게 다치거나 터진것도 아닌데. 며칠지나 나올것이다. 그런데 반날도 못걸려 상해검진서가 나오고 (정상적으로 5~7간) 7시간도 안돼 사람을 잡아 갔는가?! 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대방이 검찰원을 대신하여 래일 조양구검찰원에 가 협상하라더라는 소리에 놀라며; 아닌데, 지금은 아직 협상기간이 아니고 예심계단인데. 하면서 검찰원에서 통지한건가고 반문한다. 그렇다는 답복에 그는 아주 의아해 한다. 기간 대방애들은 연방 김만진여자친구를 찾아 돈달라, 협상하자며 말을 걸어 7천원어치를 받아갔다. 9월6일오후 1시반 김만진아버지와그여자친구가 조양구간수소로가 만진에게 옷과돈을 넣어준후 예심경찰에게; 만진이는 무슨죄로 구류됬는가? 물으니 그는 컴퓨터로 검색하더니寻衅滋事로 구류돼다. 사건이 중한가는 물음에; 엄중하지 않을거다. 중상안도 아닌데 혹 예심이 끝나면 나올수 있을거다 한다. 곧 검찰원으로 협상하러 간다는 소리에 경찰은 의아해하며; 모를일이다. 蹊跷,지금은 응당 예심계단이여서 안되는데. 안건은 먼저 정찰,다음 예심, 3계단이 판결인데 판결기간에만 협상할수있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蹊跷중얼거린다. 그들이 검찰원에 도착하여 调解室에 들어가니 앞에는 검찰복을 입은 검찰원이 서있고 좌측에는 20대젊은이 2사람과40대 여성이 앉아 있었다. 검찰원은 그들에게 대방을 소개한후 김만진아버지를 바라보며; 오늘은 협상의 마지막날이다. 오늘 협상서를 체결 못하면 5시에 나는 서류를 원장님께올려야 한다. 그러면 안건이 가중해지고 배상금이 높아가 너네에게 불리하다 액세스를 박아 말한다 만진아버지는 그소리를 응하지 않고; 당신이 오늘협상을 주최하는가 물으니 그는 옳다한다. 그럼 당신이 검찰원을 대표하여 이번협상을 주최하는가 바투들이대니 그는 멈칙하더니 얼굴이 벌개지며 조금있다. 며 급히 서기원을 데리고 나갔다. 검찰원이 나간후 얘기를 시작하는데 코뼈가상한张昊가 자기는 코가심해상해20만원을 요구하려했는데 들을라니 당신네가정이 곤난하여 현재8만원을 받겠다. 두번째애는자기도 몇곳근육이 상해7만원요구한다. 그러면서 제3자를 대시하여 말한다며 제3자도 여러곳상하여 치료비 1만원에 정신손상비 해당수를 요구한단다. 코웃음이 났다. 만진아버지가; 니 짱호가 그건 비밀이여서 안된다 한다. 고 만진아버지가 결연히 말하자 짱호는 엄마와 눈길을 마주치더니 3사람이 모두 핸드폰을 꺼내들며; 여기에 사진이 있다. 며 핸드폰을 내민다. 만진아버지가; 사진을 보지않겠다. 원본을 보겠다 하니 짱호가 집에 있는데 친구보고 얼른차로 갖다 달라하겠다며 일어나 전화치려 한다. 하니 짱호가 아까 있던 검찰원에게 전화걸어 몇마디 하고는 만진아버지에게 건네주며 전화를 받아보라 한다. 전화를 받으니 검찰원이 상해검진서는 비밀에 속해서 볼수없다 해; 내가 볼수있는 권한이 있는거 아니야?! 큰소리로 물으니 검찰원은 낮은소리로 할수없이; 검진서는 많은 서류봉투속에 묻혀있어 찾기 힘들다. 하여
2    부민관의 폭파 댓글:  조회:1716  추천:19  2014-12-24
        부민관의 폭파           ㅡ汉子 유만수 1945년7월24일 밤 9시지나 패망에 다 달은 일제의 잔인적인 수탈과 가혹한 탄압이 극에 달하며 그에 재조선친일파 거두박춘금을 위수로 하는 자들이 모여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이른바 "아세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리던 서울의 중심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당)에서 요란한 폭발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폭발로 1명이 폭사하고 여러 명이 상하였다. 이 소리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천하에 알리고 조선민족독립항일투쟁사에 빛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 빛나는 의거를 거행한 주인공들은 한국경기도안성시 출신인 유만수(柳万秀,1923-1975)선생이 조직하고 임시의장으로 활동한 대한애국청년단성원 조문기, 강윤기선생 3사람이 시행한 것이다. 유만수선생은 1923년안성시금광면개산리 유원이(柳远移)선생의 4남1여중 3남으로 태 여나 안성소학교(현재안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한영중학교를 다녔다.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교장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면서 공부했다. 교장의 심부름을 중 교장선생으로부터 조선독립의 필연성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독립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신장이 180cm 장신인 유만수선생은 독립운동하기 위해 유도도 배웠고 만주로 가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21세인 4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에 들어가 조선인노동자들을 멸시하는 책자를 발행하며 민족차별을 자행하는 회사에 맞서 1000여명 조선인노동자들이 참여한 3일간의 파업농성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회사에서 강제수용생활을 하던 중 탈출해 나와 일본내의 조선인노동자 단체들에서 활동하며 강제로 징용 온 조선인들을 빼내서 고향에 보내주는 일을 하다 본격적으로 동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1945년3월 유만수선생은 일본에서 함께 활동했던 조문기,강윤국,권주,우동학,박호영등과 함께 서울관수동 자신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하고 임시의장으로 되였으며 친일파거두들을 처단하고 중국으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러던 중 친일파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여 많은 조선남아들을 모집해 전방에 내보 내여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세아민족의 전쟁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를 무산시켜 많은 조선남아들이 일본침략자들의 대포 밥으로 되여 회생되는 것을 막고 친일파들을 처단하기로 거사를 계획했다. 폭탄을 만들기 위해 유만수선생은 당시 수색에 있던 변전소 이전 작업공사장에 잠입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 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 내여 그것을 일본운동화 밑창 속에 이겨 넣어 매일 조금씩 빼돌렸다. 손재주 좋은 유만수선생은 빼돌린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폭탄을 만들고 실오리만큼 심지를 만들어 실험도 했다. 거사일인 7월24일 밤,유만수선생과 조문기,강윤국선생은 행사장에 무사히 들어갔다. 당시부민관에서는 조선총독, 조선 군 사령관, 왕자오밍(汪兆銘])의 괴뢰중국 대표 정위안간(丁元幹), 만주 국 대표 탕춘톈(唐春田),일본대표다카야마,도라오(高山虎雄) 등이 연사로 참가해 미국·영국을 규탄하는 일종의 선전 극을 벌이였고 9시 무렵 박춘금이 단상에 오를 차례가 되자, 유만수와 조문기 등은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인 뒤 계단 옆과 복도, 화장실에 장치해 놓고 안전하게 빠져 나왔다. 정절을 향해 치닫던 친일파들의 충성서약 행사장은 천둥 벼락같은 폭발이 연이어 터지는 속에 아수라장으로 되여 파산 되였다. 이 거사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는지 일제는 발표하지 않았다. 일제 총독부는 주모자를 잡기 위해 당시 쌀 한 섬에 100엔이었던 시절 5만 엔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친일파 박춘금은 별도로 2만 엔의 현상금 더 걸었으나 끝내 거사를 실행한 독립투사들은 잡지 못했다. 부 민관의거는 광복 후 1945년11월 당시 자유신문의 보도로 그제야 세상에 알려졌다. 광복 후에도 유만수 선생은 거사를 입밖에 내지 않고 독립유공자 신청도 하지 않았으며 이승만,박 정회정권하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동아 일보 1964년 기사에 의하면 유만수선생은 손재주로 판자촌이었던 이문동에 작은 철공소를 경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고 강윤국선생은 행상으로 ,조문기선생은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했다.*조문기선생은 후에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부민관의거를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ㅡ2014, 11.19
1    “鲜族”称呼,终结篇?!! 댓글:  조회:6106  추천:521  2011-08-03
      “鲜族”称呼 ㅡ 终结篇?!! ㅡ“선족”칭호 이대로는 안된다ㅡ종결편 유서   나는 2009년 10월12일저녁 중앙텔레비죤방송에서 조선족칭호를 잘못 잉용한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로써 일을 벌려 중앙정부에 반영하여 끈질긴 노력끝에2010년1월5일 중앙텔레비죤영화채널에서 우리에게 사과하고 그뒤 절차의 절목협상이 되지않아 4월15일 일을 파하고 마무리 지었다.  연후 중앙텔레비죤방송에서는 계속 “선족”단어가 나오고 정부 매체、사이트에서도 모두“선족”칭호를 사용하고 심지어 조선족을 비방, 모욕하는 문장, 언사들이 제멋대로 뜨는데 대하여 중앙정부유관부서, 나라령도자들한테 반영하며 씨엉한지 가 일년반이 되여 가고있다. 그런데 일의 진전은 없고 매체, 출간들에서 조선족에 불존한 글들이 련이어 나타나고 있다. 이 일로 2010년8월9일 처음으로 국무원인민래방접대처로 같다 등기 못하고 돌아온후 11월5일 여러방법 다쓰고 할짓 다 해도 안되자 다시 한번 국무원접대처로 갖다 받은 대접이 《去,联合国反映去!》란 어이맞힌 공작원의 조소적인 답변이 였다.   거기에 더욱 결나 꼭 일을 결말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접어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민족각계의 만나야 할 분들을 다 만나 뵙고 전화련계 문의도 했으며 나라의 유관정책과 법규로 다스려 볼 작정으로 북경에서 법률부문에 일하는 조선족분들도 반 다 만나 보았다... 한 조선족변호사를 만나 이문제는 엄숙하고 민간한 문제로서 한두사람이 뛰여다닐 일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각계조선족지명인사들이 모여 착실히 토의하여 결재를 내리려 한 일도 무산되였다. 연변주전국인민대표대회주요책임분에게도 등기서한으로 자료들을 보내면서 그분의 지도와 그분이 전국인대조선족대표들을 련계하여 전국인대상무위원회에 공식서한을 발송하여 문제를 반영, 해결할수 있기를 바랐다.--- 유관조선족단체나 주도부문에서 공식서한으로 중앙에 문제를 반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일이 제대로 정중하고 빨리 될것으로 알고 ... ...   그후로는 다시는 조선족분들 찾지 않고 련계하지 않았다. 와중에 한 친지로부터 어떤부문에서 胡耀邦탄생기념행사를 가지는데 중앙의 몇명령도들도 참석한다 가보지 않겠는가며 련계전화를 알려왔다. 혹시 중앙령도를 만나 반영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여 그 전화로 통화했더니 받는 사람이 차근히 자기가 령도들하고 문의하여 다시 전화주겠다며 이튼후에 전화온게 령도들하고 얘기해봤는데 자리가 없어 안된다며 미안하다고 하였다.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을 한족변호사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아주 놀라하며 이런 일들이 다 있나며  “이는형법에 위반되는 짓이고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나쁜 자들이 안정한 사회질서를  파괴하려는 짓이다.”고 규탄하며 상소하면 꼭 승소한다는데 맡는것은 불편하다고 하였다. 겨우 한 조선족변호사(련계는 특수한 경로로)가 가르켜준 상소문 框架에 맞춰 나절로 기소서를 작성하였다. 변호사와 상의한 대로 문제점의 전체를 기소하기는 그렇고 먼저 投石问路하는 격으로 이속에서 중추역활 작용을 하는 百度网과凤凰网을 기소하기로 하고 기소서와유관자료들을 갖고2010년11 월 23일아침 일찍 中关村南大街甲에 위치한 해전구 제1초급법원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10시가 되여 가고 있었다. 길손들에 물어 법원에 가니 입구에서 몸에 갖춘 위험성물품들은 모두 꺼내 놓게 하고  몸도 다 수색하고 나서 안으로 들여 놓았다.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법원놀음 할 일들이 그렇게 많은지ㅡ 안내자의 지시대로 순서번호를 뽑아 들고 기달렸다. 내 차례가 되여 접대처에 다가가 钢化玻璃창을 사이두고 그밑에 난 조금마한 구멍으로 번호지,신분증,기소서와자료들을  들이 밀었다. 자료들을 들이미는 순간 머리속에는; 내가 법원놀음을 하다니 하는 생각이 불현듯 퇴여 오르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를  맞은 법관은 정복을 한 웃음기라고는 없는26,7세 되여 보이는 처녀같았다. 처음에는 그닥잖은 티로 문서를 둬장되지다 얼굴에 준엄한 기색이 돌며 얼굴들고 나를 열처리한 유리창 넘어로 넘겨다 보았다. 그래 나도 얇은 웃음기찬 얼굴로 맞받아 건너 보았다. 그녀는 인츰 눈길을 내리 깔며 한장,한장 자세히 보며 손으로 내가 붉은줄 친 부분들을 다독였다. 그러다 마지막 서너페지는 보지 않고 자료들을 정리하며 그제사 웃음기한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보며; 미안해요, 이일은 엄숙한 일이라서 내가 접수결론내리기는  어려우니 조금만 기달려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직일원장에게 문의하고 올게요. 미안해요!  조금만 기달려주세요.ㅡ하며  자료들을 갖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머리를 기지할수 있는 의자께로 물러나 앉았다. 시계를 보니 11 시가 넘어 있었다.  한참 후 그녀가 잰 걸음으로 내 곁에 오더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한 접수창앞에 갔다. 그녀가 나를 의자에 앉으라며 안에 앉아있는 40대 넘어 보이는 중년녀인을 직일원장이라하고는 원장곁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직일원장은 내가 받친 자료들을 보고 있었다. 처녀법관이 그녀귀에 대고 뭐어라 하자 그때야 직일원장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더니 책상에서 내 신분증을 들고 보고는 내려 놓으며 돌연히; 이런 일 가지고 기소하려는가? 이런건 접수못한다며 이러쿵 저러쿵 벌컥 화 내며 소리치는 것이였다. 아마 내 신분증을 보니 어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산골에서 온 촌놈이고 신체를 보니 왜소한게 몇마디 소리치며 후닥손 메기면 주눅이 들어 물러 가겠지 생각했던 모양이다. 금방 놀란 나는 와닥닥 일어나며; 너 이거 무슨 소리야!   왜, 화내며 소리치는 거냐, 왜, 우리조선족이 너네 한족들한테기시당해 상소하려는데 네가 왜 이렇게 짜증내여 화내는거냐? 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직일원장은 아까보다는 소리를 낮춰지만 계속 화내며 말하는 것이다; 이런 안건은 립안하기 힘들고 상소했자 승소 못하 길래 상소할 필요가 없다며 말하는 것이였다. 결이 날때로 난 나는 창문앞의 석판을 주먹으로 치며; 너 나라의 법률을 집행한다는 수도북경법원원장이 이런 근무태도냐? 너 직업교육을 어떻게 받았고 아래 사람들에게 도 이렇게 교육하냐? 너이거 작은 일이라고 치냐, 그런데 왜1994년6달 7일에                                           国家民委、中共中央宣传部、中共中央统战部、文化部、广播电影电视部、新闻出版署、国务院宗教局에서는 련합으로关于严禁在新闻出版和文艺作品中出现损害民族团结内容的通知란 문건을 발부하고2008년 8월달에 국무원에서는《民族问题是极其严肃的问题》란 문건을 발표했냐?! 이것이 민족기시가 아닌가? 민족기시가 작은 문제냐? 네가 이렇게 화내는 것도 우리조선족에 대한 민족기시의 표현이 아닌가? 한족이 우리조선족에 기시당해 상소하면 네가 이럴수 있느냐? 며 소리높이 딱딱들이 대여 따졌다. 때는 정심시간이 림박했는지라 홀에는 몇 사람이 없어는데 모두 눈이 둥그라니 나를 바라보고 젊은 처녀법관은 멍하니 내 입만 건너다 보았다. 그제사 직일원장이 주눅이 든 소리로 얼굴에 약간 웃음을 발으며; 내가 금방 앞 사람한테서 화 받은것이 식지 않아 말소리가 높아 진것 같은데 량해해달라, 미안하다.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안건은 주체가 그리 명확하지 않아 립안하기 쉽지않고 립안하더래도 령도들하고 토의하여 접수하며 시간도 오래 걸릴것이니, 내가 이제 百度网에 전화쳐서 당금 이런 글들을 삭제하라 하는것이 어떻냐, 며 물어 왔다. 어물어물 슬쩍넘기고 흔적을 지우려는 심사였다. 그 말기에 내가 제꺽; 전화치지 말라. 절대 전화치지 말라, 너 네가 접수 안해주면 내가 공증해갖고 중급법원으로 갈것이고 그래도 안되면 최고인민법원까지 가서라도 끝을 볼것이다. 일단 百度网에서 이런 글들이 사라지면 네 작간이줄로 알겠으니 그리알라! 쐐기를 박고는 그곳을 나왔다. 며칠후 자료들을 재 정리하여 가지고 그변호사께 물어  공증비를 싸게(안해가 한국집에 다니며 일하여2천원 남게 버는 돈으로 생활해 가는 살림에 몇천원의 돈을 일시에 낸다는 것은 알찼다.) 받을수 있다는 丰台区首佳公证处로 가 변호사가 소개한 yl공증원을 찾았다 .40대 좌우의 잠잠한 얼굴의 yl공증원은 미소 지으며 맞아 주었다. 변호사가 먼저 말이 있은것 같았다. 내가 건네준 자료들을 살펴보고 놀라며 이것이 진짜인가? 언제 입수한것인가 물으더니 내가 언제 몇시, 몇분에 사이트에서 다운한것이라고 하니 직접 그사이트에 올라 몇편 검색하고 사이트에서 빠지며 라 며 지금 아마 이런글을  쓰는势潮가 류행되는 것 같다며 이런 일은 정부에서 제때에 제지하지 않으면 사건이 터질수 있다면서 공증에 대해서는 립안할 주제를 확립하길 곤난할것 같다면서 밀막았다. 그렇게 빵 맞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10시 되여 가고 있었다. 밖에서는 아침부터 불기 시작한 먼지바람이 지랄나게 되게 몰아 불고 있었다. 한참 먼지바람을 헤치고 분주히 오고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다 꼭 일을 해내야 한다는 마음을 살리며 핸드폰을 꺼내들고 아는 조선족변호사한테 전화(전화는 단독쓰는 전화)쳤다. 변호사는 东直门부근에 괜찮은 공증처가 있다며 확실한 주소는 모르고 전화번호만 알려주었다. 그래 차타고 떠나면서 그 전화로 전화치니东直门부근에 위치해 있으니 지하철타고 东直门에 와서 다시 전화를 하라며 통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 바삐 바삐 차들을 갈아타며 东直门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빠져나와  급차게 전화하니 朝阳门内서남쪽中国银行大厦 근처에 있으니 돌아 지하철타고朝阳门으로 오라 한다. 미칠것! 시계를 보니 금방 11시반이 되여 가고 있었다. 그래 길손에 물어 공공뻐스타고 바삐 공증처로 달려가 北京市方园公证处간판을 건 문앞에 가니 中午11时30分至下午1时30分休息란  게시판이 잠겨 진 문안에 걸려 있었다. 시계를 보니 11시39분이였다. 기차고 꼴지 었다. 그래도 온바하고는 기달린다고 부근을 돌아 작은 음식점에 찾아 들어가 8원짜리 덥밥을 한분 청해 먹고 나와 먼지바람의 세레를 받으며 한시반을 기달리여 골목을 누볐다. 한시반에 공증처앞으로 가니 벌써 사람들이 줄지어 기달리고 있었다. 줄서 차레로 들어가 순서표를 뽑아 들고 기달렸다. 옆의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흘려 들으니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한 공증처고 이름있는 공증처의 하나라고 한다. 차레가 되여 카운터에 다가가니 웃음기 없는 정복한 처녀애가 신분증을 출시하라 하였다. 그래 지갑을 여니 환나게도 신분증을 안갖고 왔다. 정말 미칠지경이였다! 처녀애는 신분증이 없으면 접수할수 없다며 대신 어떤자료를 공증하려 하는가며 물어 왔다. 어떤자료들이다 하니 자료도 보지 않고 그건 힘들거라고 하며 뒤사람을 불렀다. 그렇게 밀려 모쓸 바람이 휘몰아치는 밖으로 나온 나는 마음이 허탈하여 입을 다시니 입안에서는 모래가 씹이고 먼지 냄새가 코로 페부에 까지 스며들었다... ... 공증일도 이렇게 끝났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그날저녁, 자리에 누운 나는 다른날보다 마음이 더욱 무겁고 캅캅하였으며 몸도 땅에 잦아들게 나른하였다. 일을 시작한이래 내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마음또한 1월5일 빼놓고 가벼운날 며칠 없었다. 그 미열로 가족들도 괴롭히고 지치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에게 미안하였다... ... 안해의 말대로 남들이 안하고 피하는 일, 누구도 알아 못 주는 일을 내가 무엇이 길래 이렇게 발벗고 나서고 제 돈파며 힘겹게 뛰여 다닌지... ... !! 그후로 며칠휴식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짬짬히 사이트에 올라 새로운 자료들을 점검하고 유관자료들을 수집,재정리 하였다. 그러면서 결정내린게; 1)계속 다른 사람들에 영향가지 않게 나혼자 밀고 나간다. 2)최후의 행각을 취할때가 된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회망버리지 않고 끝으로 북경시 중급법원과최고인민법원까지 뛰여 본다. 3)그래도 안되면 비정상적激进행동을 취한다. 결론을 내린 그후로는 마음 가벼워 지고 잠도 어떤땐 수면제 없이 조금잘수 있었다. 그리하여 12월 초순에 마지막 한번이라 고향에 돌아가서 부친의 생신일도 잘 축하해드리고 떠나올땐 부모님들께 심심히 큰절 올리며 며 속으로 불초죄를 빌었다. 원단엔 아들들과도 같이 즐겁게 보냈다. 설은 혹 마지막으로 안해와 지내는 설이라 안해을 도와 집안청소, 장보기, 음식장만에도 함께 하여 주었다. 오란만에 안해에게 웃음을 날리며... ... 그동안 자료정리를 끝내고 기소서도 새로 만들고 법원에서 접수하던 안 하던 정법부문과 정부에 알리기가 선차적인 목적으로 규격에 맞든 안맞든 3장 기소장을 만들었다. 1, 국가 민족사무위원를 기소한다; 조선족이 엄중하게 정부주요매체에 의하여 기시, 비방, 모욕당한 사실을 제때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여러가지 형식과 경로로 반영 하였는데 나라의 소수민족사무를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바로 제지, 관활못하여 조선족존엄에 큰손상 끼치였기 때문에 회피할수 없는 책임이 있다. 그리하여 그책임을 지어야 한다. 2,中央电视台,新华网,人民网,中华网,中国网,新浪网,环球网,谷歌网,中国yahoo网, 中国msn网,163网을 기소한다; 이상 피고들이 정부의 유관정책, 법규를 무시하고 조선족에게 무단적 기시를 실시하여 조선족명예와존엄에 엄중히 손상주어 그 책임을 담당하여야 한다. 3,百度网,凤凰网사이트를 기소한다; 이두사이트에서는 이번 조선족기시건에서 중추역활의 작용을 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이 더욱 엄중함으로 옳바르고 정중하게 사죄하고 조선족에 끼친 영향을 착실히 책임지고 미봉하여야 한다.   2011년2월23일 아침 일찍먹고 사이트에서 검색한 丰台区方庄路10号에 위치한 北京市第二中级人民法院(왕징에서 가까운 곳이라 우선 그 쪽을 선택)갔다. 순차적으로 위험품검사, 몸 수색하고 신분증들고 홀에 들어서니 젊은 법관이 그래도 웃으며 순서표를 뽑아 주고 저쪽창으로 가보라 안내 하였주었다. 그 쪽으로 가니 중년의 정복한 사나이가 아무기색도 없이 어떤일로 왔나 물어 민족기시에 대한 일로 기소하려 왔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법관은 그런 안건은 자기네가 관활안하고 제1중급법원에서 접수한다며 그쪽으로 가보라 한다. 일이 또 꼬이였다. 어느쪽에 위치해 있고, 어떻게 가야하냐 물으니 아까 그 안내원한테 물어 보라며 얼굴을 돌린다. 급히 그 안내원한테가니 위치를 적은 쪽지를 넘겨주며 어떻게 차타고 가라고 알려 준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 또 급히 뛰여 다니며 차 갈아타고 石景山区石景山路에 위치한北京市第1中级人民法院에 도착하니 11시반이 넘었었다. 혹시나 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보안이 점심휴식시간이였어 사무를 안본다 한다. 몇시에 문여나 물으니 오후 한시반이 란다. 후 한숨이 절로 나갔다. 이때 문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정복을 한 중년사나이가 어떤 일을 기소하려는가 물어 왔다. 바라보니 가슴에 국회를 달고 있어; 중앙매체가 소수민족기시에  대한 기소장이라 하니 자기가 먼저 기소할수 있느지,없는지 보고 할수 없는 일이면 괜히 오후에 까지 기달려 당신의 시간을 그저 보낼수 없지 않느냐 하여 그것 좋을것 같아서 자료들을 보였다. 한참 보던 그의 기색이 변하며 자료를 덮고 나보며; 이것은 엄숙한 문제였어 내가 우리원장에게 보이고 결재를 알려 줄게 여기서 좀 기달리라며 자료들을 갖고 안으로 들어 갔다. 한참 후 나온 그는 나보고 이안건은 중앙정책과 긴밀이 련관되는 일이라서 자기네 중급법원에서는 판법할권리가 없다면서 자료를 건네 주었다. 그럼 어떤부문에서 결재를 내릴수 있느냐의 나의 물음에 최고인민법원만이 결재를 할수 있다고 하였다. 또 한번 벽에 막혀 돌아선 마음은 그리 무겁지가 않았다. 원래 이렇게 될거라는 상상이 있었음으로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될것이라는 속산이 맞선것이라 마음쓸쓸히 허기진 마음과배를 달래며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몸을 맡겼다. 이제 최고인민법원으로 가도 결과는 이럴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 매김되였다. 이러는중에 해마다 있는 两会가 시작되였고 新华网과 人民网에서 两会기간 하고 이란 창을 꾸렸다. 어쩌다 직접 국가령도들하고 대화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것으로 여겨 기뻐 이란 아이디로 등록하고 먼저 북경의 조선족로인들이 활동장소 없이 고생하며 활동하는 일를 반영하는 글을 써 올렸더니 금방 올랐다. 그래 힘 얻고, 회망가지고 호금도주석, 우방국위원장, 온가보총리에게 일을 반영하는 글을 올렸다; 您好; 打搅您繁忙地工作了。 我是生活在北京的朝鲜族国民。 在您和党中央的正确领导指引下,中央提倡构建和谐社会的进程在全国人们的齐心努力下稳健发展,大多数的全国人民在此温馨的氛围里健康、快乐的生活着。这些都是您和党中央倡导和领导的英明决策的结果。 可在这和谐氛围的大势中也有不和谐地因素蠢蠢欲动。 很多中央政府的媒体登载、转载,违背国家禁止发表地歧视少数民族的文章。一些不坏好意的汉族学者,学生,平民(包括中央政府的工作人员及政法部们的执法者)在媒体上和民间,大从公共场所普遍使用对我朝鲜民族侮辱性的贬称和无端地用贬低,歧视,诽谤,侮辱,辱骂的文章及言论,严重损伤,我朝鲜民族的感情和尊严。 说我们朝鲜族在抗战时期只做日本侵略者的走狗和大量屠杀中国人,挑起了抗战前的《万宝山事件》,甚至朝鲜族制造了《9,18事件》,有的文章还扬言要抹杀我们朝鲜族的语言,同化我朝鲜民族,甚至让朝鲜族滚出中国的狂言。 我们认为他们的这种行为是;破坏民族团结,搞乱国家的安定,分裂国家的极其挑衅,攻击性地反和平、反社会谬论。(在这些文章的后面有些有正义感的汉族人士和不少少数民族的有识之士对于这种搞民族分化、破坏国家安定、民族团结的行径发表反驳和谴责之声。) 让其继续放纵必定给国家和社会带来严重的社会动荡。 更气愤、愤慨地是对此我们的反映中央政府的有关部门和领导以及国家政法部门人员的反应和态度。 近一年来我们通过各种渠道给中央领导和有关部门多次反映过此事,但始终没有消息。也到有关政府接待处反映过,但都碰上冷冰冰的麻木不仁地脸面和回答。 去年11月5日上午我到国务院人民来访接待处反映的结果是;一句,“去,联合国反映去!”的 工作人员的冷冰冰地嘲笑答复。去年年底到海淀区某法院依据国家有关法规递交起诉书,遭遇地是;当日值班厅长的不耐烦的发火。 这好使孩子在外面被人受欺负回到家给父母诉委屈得到一记耳光地感受。收到的冲击和激愤更大!!! 中国是领土之广阔,民族从多地国家。特别要注意正确使用他民族的名称和各民族间地团结,尊重他民族的尊严及风俗习惯。 前苏联、东欧和世界各地的好多国家、地区,因民族间的不和和冲突,战火纷飞、国家分裂、亲人分离、互相残杀地情形,我们是有目共睹,令人心痛和痛惜的事情!!!也是我们的前车之鉴和值得我们深思和担忧地。 现在我们国家也不少少数民族地区屡次因政府工作人员的不当言论和处置,以及有些不负责任人人的言行因素频频发生民族冲突的事情。 这种事情多、积怨大,终久会导致大的民族流血冲突,乃至闹分裂现象。 就这次我们朝鲜族为了申诉、找回,被中央、政府媒体实施地对我朝鲜民族尊严地损伤,侮辱的事情来说,从中央政府的工作人员、到媒体、以及国家政法部门的执法者,面对我们的申诉、反映,都是旁落无人、冷嘲热讽、麻木不仁冷冰冰的面孔! 就此,我们很伤火!也很伤感情和愤慨!! 希望党中央和中央政府主正!依法法办发表;歧视、诽谤、搞扰乱地反社会分子,严肃追究登载、转载这些违法扰乱国家安定、破坏民族团结文章的媒体地责任,问罪对我们的反映无动于衷、麻木不仁、冷嘲热讽的政府工作人员职责。还我朝鲜民族被中央媒体及大汉族主义思想潮流带给地损伤、侮辱地民族尊严。 希望我们社会不要出现“歌声高处,怨声高”的 局面。 我们净心关注中央的决策! 此致   敬礼 打扰您繁忙地工作了 2011年3月4日 朝鲜族同胞敬上 그런데 이글은 뜨지 않았다. 혹 안전부나 공안인원이 IP주소로 문죄하러 오지 않으면 잡으러 올것이라는 생각에 집에서 조용히 기달렸다. 그런데 며칠기달려도 조용하였다. 그후로는 즘즘히 보내며 최후행각의 준비를 하였다. 먼저 남호종합시장에 가서 길이1.5메터에 넓이 0.38메터되는 힌천(글을 써도 피지않은)을 사고 9원주고 칼날 길이가 길고 끝이 빼족한 과일칼을 하나 샀으며 마트에 가서 글체가 굵게 쓰여지는 사무용 검은 필을 두개사고 5원주고 작은 국기도 하나 샀다. 안해가 출근후에 집에서 힌천에 《政府媒体实施对朝鲜族的歧视行径,对此反映中央无动未动,国务院工作员嘲笑说;去,联合国反映》란 표어를 써 프란카드를 만드고, 작년 1월5일 영화채널에서 좌담회후 선물로 준 달력 뒤면에 《反对民族歧视,还朝鲜族尊严》란 굵다락게 쓴 간판을 만들었다.        이런 행각 준비하는 나의 모습이 웃읍고 쓴 웃음이 귀가로 흘렀다. 나라에서는 모범으로 치지않을 거고 민족에서도 영웅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문둥병병환자 피할듯 멀리 할것이다(안해의말)ㅡ 혹, 가정에 난을 가져올수 있는 화약통을 나절로 준비한다는 생각이 돌며 눈에 찔끔 눈물이 돌았다. 나같은 남편을 만나서 여때 고생해온 안해가 수갑차고 감방으로 끌려가고 남부럽게 자라지 못한 아들들이 불명한 자들에 맞아 피못에 쓰러지는 모습이 눈앞에 영화필림처럼 펼쳐간다. 있을수 없는 일이 아니다. 지금 중국사회에서 정의를 지켜 정부에 관원들과 큰세력을 고소했다 죽고, 실종되고, 가족이 망하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 머리속에 조선영화에서 의사가 의거후 일본순경들이 그집에 들이 닥쳐 그 가족을 흑타하는 모습이 머리속에 떠오르며 그당시 의사의 안해와 자식들이 남편과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속에 떠올랐다 ... ... 그러고는 일을 벌릴 위치를 확정하였다.  이전에 다니며 봐둬던 자리를 사이트로 점검하고 초보로,建国门外,天安门,국무원사무처인府右街(중앙령동들이 9시에 경찰보안차들의 호송하에 출근한다.ㅡ이곳에서 일을 벌리시 경우 직접국무원과선전부에 금방 전달될수 있는데 행인과차량들이 적은 이곳은 일단 일이 터져면 수시로대기하고있는 경찰, 무장경찰, 특경들이 량쪽을 차단하면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밖에서는 절대 모른다.  ), 国家民族事务委员会,故宫北门 (중앙사무처와가까움)등5,6곳을 지정하고 이튼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눈 살펴보았다. 결과 建国门外는 외국인들이 많히 들락날락 하여 일이 벌어지면 국제영향이 클것으로 좋지않고 故宫北门은 사람들이 작고 편벽하여 파동이 작을 것으로 회생이 물거품으로 될것같아 포기하였다. 그래서 일이 벌여지면 빨리 중앙에 알려질수 있는 천안문과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최종확인고 3월11일 정심 11시반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앞 대회대표들이 정심휴식시간에 나오는 시각에 일을 벌리기로 결정 했다. 그간 안해한테 암시적으로 내가 나다니다 혹시 의외로 사고 쳐 죽을수 있는데ㅡ섭해 하지말고 건강히 잘살라! 남한테 경제적으로 진 빚은 없으며 집에 은행저금은 얼마고 해마다 아이들보험금 지납일을 어기지 말고 제때에 넣어주어야 한다는것과 일단 내가 잘못 되더라도 될수있으면 화장말고 집뒤 북산에 묻어 달라 은근히 말해 뒀다. 길에 오르기전 친지들도 만나 보고 식사도 같이 하였다. 평상시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 그러면서 남한테 약속어긴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양광로인회 활동장소로 코리안잡지에 실린 로인회글이 실린 잡지를 들고 갔더니 문이 잠겨 있어 정수덕회장께 전화하려고 통신부를 펼치니 회장의 전화번호가 등록되여 있지 않아 련계못하여 전하지 못하고, 조문판에2008년년말에 나오기로 한  북경조선족로인회(주 아리랑로인회 소개) 활동소개편이 여러가지 일로 뒤로 미루어져 아직 출간 안되여 조문실 리옥화주임에게 전화쳐 문의 했더니 이러저런 사연으로 편집은 다 해 놓고 아직 못 출간 되였다 한다. 참, 아쉬운 일이다. 남한테 다른 빚은 진 일은 없는데 길 떠나면서  이 두약속 어기고 가야하니 마음이 어쩐지 영 괘운치 않다... ... 3월10일 안해가 한국집에 일이 있어서 집에서 휴식하였다. 근면한 안해가 집안을 거두다 침대밑에서 내가 감춰둔 물건들을 발견하고 한참 잠잠하던것이 발칵 용 쓰며 기장돌이 하기 시작하였다. 여때 잠잠히 지켜보며 말 없던것이 시동도 없이 팍 터지였다. 나도 지금껏 외롭게 뛰여다니며 받았던 스트레스, 울분과괴로움이 말할곳 없고 토할데가  없어 마음속깊이 막혀있던 것이 왈칵 터지며 같이 닥치는 대로 죄 뿌렸다. 핸드폰이 날려가고 밥솔이 바닥에 딩굴고  텔레비죤이 바닥에 박살나 버렸으며 보온병이 벽에 날려 터져 더운물이 안해에게 덮씌웠졌다. 둘다 미쳐 돌아쳤다. 합숙하는 한족처녀애가 놀라 그러지 말라 소리치면서도 무서워 집안으로는 들어 못왔다. 그래놓고 떠거운 물을 듸집어 쓴 안해를 그대로 두고 나는 문차고 밖으로 나왔다. 아들들이 출근 안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어데있나 전화오고 받지 않으니 련거퍼 메시지를 날렸다. 아예 빠떼리를 뽑아 버렸다. 자식들도 놀랐을것이다. 집안이 어쩌다 이렇게 되고 다정하던 부모들이 왜서 이지경으로 싸워는지?! 그날저녁 혼자서 술을 얼마나 마이였는지 모른다. 밤이 깊어 겨우 몸을 지탱하며 집문을 떼고 들어서니 아들둘이 제 엄마하고 퀜히 나의 얼굴을 쳐다보는것이 였다. “별일 없으니 너회들 집에 가.” 조용히 말하고 는 침대에 쓰러졌다. 흐리터분한속에 안해의 목소리가 귀가로 흘렀다. “별일 없을거다, 근심말고 돌아 들 가거라.” 새벽에 목이 말라 일어나니 안해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없었다. 하루동안 밥 안먹었다. 저녁녘에야 들어 온 안해는 친구집에 처음으로 밖에 나가 잤다, 이제는 한국집 일도 모두 그만 두었다며 말하고는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후로는 안해와는 련며칠 랭전상태에 들어갔다. 안해와 싸운 이튼날 점심에 两会기간 新华网과人民网에서 꾸리는 向总理提希望, 给国家领导人留言란에; 오늘 3월11일 정심 11시 30분경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앞에서 중국정부매체의 민족기시와 정부의 랭담한 무책임에 자살로 항의하려는 사건이 여의치 못했던 일로 파하였다.고 올리고 나의 거주지,련계 전화까지 다 발켜 발송하였다. 생각에는 이번엔 국가 안전부와 경찰들이 금방들이 닥쳐 나를 잡아 갈것이라 여기였다. 나를 잡아 가더라도 좋다. 능히 중앙과 대화하고 반영할수만 있으면 되는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달렸다. 내가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기였기에 쉽게 찾아 올것이다. 그런데 며칠기달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안해는 진짜 한국집일들을 다 밀어 버렸는지 아무데도 나 안가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때시걱은 제때에 차려서 올려 놓으며 “밥들라” 그 한마디만은 하였다. 항상 그랬다. 내가 불쾌해 하거나 싸웠어도 때시것만은 제때에 꼭 차려주었다. 그런데 진정 한국집일들은 그만둔것 같고 날마다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 있는것이 내가 어디로 가는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며칠지났다. 무 반응이고 조용하였다. 그래 생각한것이 정상적경로로 다시 한번 더 뛰여 마지막으로 최고인민법원까지 간다고 3기소문을 정리하여 사이트에서 점검한 천안문광장력사박문관동쪽正义路에 위치한 最高人民法院으로 3월18일 갔다. 그런데 대문앞의 무장경찰이 이곳에서는 립안접수 안 한다며 프린트한 글쪽지를 건네주며 前门쪽에 가 71路선을 타고 双庙东站 朝阳区小红门乡红寺村40号에 위치한 最高人民法院来访接待处로 가보라 한다. 그래前门쪽으로 나가며 보니 이젠两会가 끝난는 데도 전번에 자리를 보느라 왔을 때보다 경찰들이 더 많고 무장경찰과특경들이 줄지어 분주히 오갔다. 천안문관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입구마다 무장경찰이 지키고 공작원들이 모든 유람객들의 유효신분증을 밣히고 가방을 비롯한 모든 물품들을 세세히 검사며 몸을 쌑쌑히 수색하였다. 웃음이 나왔다. ㅡ여기이 지나갑니다.ㅡ 속으로 웨치며 입귀에 웃음을 날리며 버젓이 천안문광장을 지나 前门에 갔다. 쪽지를 들고 그곳으로 가니 문앞法警이 신분증과 판결서를 제출하라 한다. 몸을 둘처보니 신경나게도 또 신분증을 안 갖고 나왔다. 무뚝뚝한 法警과몇마디 씨루다 그만 돌아섰다. 그다음주 월요일아침 일찍 떠나 다시 双庙에 갔다. 울며불며 하는 사람들속을 비집고 문앞까지 가니 法警이 신분증부터 검사하였다. 판결서를 내놓으라 하여 없다고 하니 판결서가 없으면 아무리 큰안건이라도 접수안한다며 무뚝뚝히 말한다. 그래 내가 초급법원과 중급법원까지 다녀오며 여기까지 온 경과를 차근히 말해도 안된다며 화내며 물러서라 한다.그리하여 나도 성나 달려붙자 책임자인듯한  法警이 나오며; 당신 심정도 알고 일의 엄중성도 알게는데 程序가 이러니 어찌할수 없다며 량해해달라 하여 에라! 끝이다. 며 돌아섰다. 이렇게 정상적인 경로로 해결해 보려는 회망은 철저히 막히 였다. 예견했던 대로 였다. 진짜 올것이 왔다는 것에 마음이 잦아들며 喜多郎의 졸졸 흐르는 시내물을 떠오르게 하는 음률이 귀전에 울렸다. 다시 안해 모르게 슬슬 준비작업을 하며 안해와도 살갑게 보냈다. ㅡ나한테 시집와서 27년간 하루도 손놀새 없이 고생 많았는데 참 미안하구려! 못난 남편을 욕해다오, 원래는 남 부럽잖은 행복을 안겨 준다는게 어찌 일이 이렇게 되네, 부디 복 받기를 참으로 기원하니ㅡ!  아들들아 엄마를 받들어 모셔라 ... ... 3워 23일과24일 일루의 회망걸고 人大常务委员会接待办公室, 人民日报张延农社长办公室, 中央纪委驻人民日报督查组,新华社办公厅등부문에 30여통 전화를 치며 어쩜일이 통하고 대화델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노력해 보았는데 안되였다. 대부분은 미통이고 다행이 中央纪委驻人民日报督察组사무실하고 통화되여 사실을 얘기하니 자기네는 인민일보사지도자들이 규률위반 감독职能부문이지 그런일 관계안한다며 통화를 끊었다. 24오전 어쩌다张延农社长办公室하고 통화되였는데 사장은 회의가 있어 나가고 없다고 하는 여성하고 사실을 얘기하니 그런일이 있냐며 어떻게 들어가면 볼수 있나 하여 人民网首页搜索处에 鲜族를 입렵하고 검색하면鲜族칭호로 된 몇십편의 글들이 나오고 거기에 조선글로 된 鲜族는 조선족의 贬称이라는 글의 목록이 있고 그 글을 인민망에서는 屏蔽하였다. 하니 조금 후 자기가 들어가 보았는데 그런글들이 없다하여; 내가 현재 人民网에 올라 그창들을 펼쳐 보고 있다하니 자기는 안 보이고 손님이 와 그만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24일 오후 겨우 新华社党组和总社的办事机构이고 총사의 사무를 총괄하며 督查落实和信息反馈等工作을 주 임무로하는 新华社办公厅高欣주임(여.전화;63072019)하고 전화통되였는데 사근하게 그런일이 있으면 전화로 얘기하지 말고 서한으로 재료들을 보내면 자기네가 집적 나서 상부에 반영하겠다고 하여 고맙게 생각되여 감사하다고 말하며 통신주소와 우편번호를 물으니 겉봉에 新华通讯社라 쓰고 부치면 된다고 하여 그래도 주소와우편번호는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의 물음에 그저 新华通讯社라고 쓰면 되니 그렇게 써보내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최후 회망도 거품으로 되였다. 일을 벌리시 만약 특경들이 접근할 경우를 생각해서 차모는 친구에게서 포도주병에 휴발유 한병을 구해놨다. 포도주병은 목지가 짤룩하여 불 달면 열량이 새 나올새 없이 즉시 폭발할수 있다. 때는 两会가 끝난지라 3월25일 다시 한번 자전거 타고 다니며 장소를 살피고 예전대로 첫점, 민족사무위원회앞이고(천안문광장은 외국인들이 있어 국제영향고려) 안대면 천안문앞 동쪽으로 터를 정하고 3월 28일에 일을 벌리기로 했다. 사실경과를 줄여서 만든 삐라를 7백부 찍어 두었다. 금요일저녁 안해는 그래도 먹구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집들에 말하니 계속오라 한다 (안해는 그렇게 인품과일손씨가 주인집들에서 인정해준다.)며 월요일부터는 다시 일하러 나간다고 한다. 내가 이젠 일을 그만 둔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동포여러분; 나도 이길을 가기는 싫은거여! 살뜰한 안해와 가정을 버리고 이 길을 택하기는 싫은거여! 바보같이!본시 바보지! 안해의 말처럼; 나라에서는 불법자로, 사회에서는 불량자로, 민족에서는 하찮은 일 가지고 제절로 사 하는짓이라고 인정할짓을!!! 그런데 말이다. 우리민족의 칭호가 “선족”아니고, ”몽둥”이가 아니며 “얼귀즈”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민족이 만들고, 사건을 조작한것이 아니며 는 청일색의 조선인이 비저낸 일이 아니기 때문에,ㅡ이것들은 한족들에게 조선족에 대한 무한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심어 줄것이며 그것이 앞으로 우리후손들에 루가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네들이 다른 민족은 말 못하고 우리민족만은 문자를 없애고, 동화하며 중국이 인간이 많은이 조선족은 한국으로 가라고 하는것은 반사회언론이고 그것도 중앙정부매체에 그런 단어,문장이 사용되고 오르며 그런 반영에 중앙정부에서는 덤덤히 침묵만 지키고 그렇지 않으면 하라 것은 우리민족에 대한 경멸이고 멸시기 때문에 ... ... 동포여러분;  건강하시고 우리 후손들이 이땅떵어리에서 당당히 살아갈수 있게 진영을 굳건히 하시고 존엄을 지켜주십시오, 여보, 원래는 원래는 내가 당신보다 단 하루라도 더 살아 당신의 후사를 남들이 손 안 대게 깔끔히 처리하고 뒤 따라 간다고 약속하였는데 내가 내가 일이 이렇게 되여 약속어기고 먼저 가네! 섭해 말고 슬퍼말고말고 건강히 굳건히 살아가게! 당금 보게될 우리손군들을 내 앞까지의 사랑을 주면서 말이야! 하 하 하 웃으며 말이야! 그래야 건강해져 자식들에게도 부담이 안되지! 밤에 잘대 꼭 이불을 잘 여미고 자오요! 우리 약속대로 다음세상에서도 계속 부부가 되자고! 내가 기달리게! 다음세상에서는 내가 헛짓은 안고 돈 많히 벌어 남부럽잖게 당신을 행복하게 할게! 약속하요! 잘, 살고, 안녕!! 여보!!! 1!! 동포여러분; 如果,我在战斗中牺牲,请,把我埋在故乡的北山上 保重 기원; 2011년 3월 27일                    못난인간; 김인철 소천이 웃음ㅡㅡ을 날리며 길에 오름니다.....................................................................................................         결말   28일새벽,5시 45분에 안해는 또 일찍 일어나 한국집으로 아침밥 하러 나갔다.   슬그머니 뒤따라 나가 총망히 자전거 타고 떠나가는 그 뒤모습을 서글피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와 바삐 준비를 다그쳤다. 세수하고 수염깍고(모욕은 전날저녁에 하였다.) 전날오후에 마트에서 사놓았던 우유한통을 그대로 마이고 안에는 깨끗한 옷으로 겉은 정복을 하고 그안가슴에다 불달면 즉시 붙어 터질수 있게 만든 휴발유를 넣은 포도주병을 동여 착용하고 밖에다는 넗직한 겉옷을 입었다. 그리고 수시로 꺼낼수 쉽게 밖아 옷 주머니에 칼과 라이타를 넣었다. 그리고; 여보, 나 먼길을 떠나가니 기달리지 말고, 찾지를 마오, 잘있소! 글쪽지를 안해에게 남겼다. 집안을 쓸어보는 마음이 슬퍼다. 그러다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전날저녁에 착실히 준비하여 둔 물품들을 갖고 나왔다. 몸에 내 신분을 나타낼수 있는 일체물품(돈 일전도 없이)은 안갖고 휴대폰도 지니지 않고 자전거에 올라 타고 이태리 민요을  높이 부르며 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시 행동을 검토해 보았다. ㅡㅡ1, 먼저 민족사무위원회앞에서 준비하였다 일군들이 출근할때를 기달려 매체들에 통보하고 프랑카들을 들고 시위한다. 형편이 그르면 빨른속도로 太平桥路로 해서 몇골목빠져나와 천안문에 접근하며 삐라를 뿌린다.(쉽지 않을 것이다.) 2,둘째, 눈치봐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안될것 같으면 소리없이 천안문앞동쪽으로 옮긴다.(그러면서 입수한 매체들에 통보한다.) 그쪽에 인류가 많고 상대적으로 경비가 뜨음하며 경찰과특경들이 접근하려해도 좌우량쪽으로만 가능하지 앞뒤쪽은 힘들다. 그러면 나의 경계의 시야범위를 쫍히고 신경덜고 편히 움직일수 있다.   삐라를 뿌리며 매체들에서 달려오기를 벝이며 경찰에 중앙령도들과의 대화를 요청한다. 경찰들이 바싹 달라붙으면 뒤로물러서 견지하다 안될땐 라이타를 꺼내 휴발유병에 불 달 준비로 경찰들의 접근을 저지한다. 그래도 곤난할땐 칼을 뽑는 동시에 주머니에서 국기를 꺼내들고 웨치며 칼로 배를 찌른다. 그칼을 뽑아 피를 국기에 뭍치고 다시 칼로 가슴을 찌른다ㅡㅡ 처음엔 길에는 사람과차량들이 많치 않았다. 3环근처에 도착하니 월요일 출근 고봉이라 사람과차량들이 많아 지면서 길이 막히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붐비는 차량과사람들을 뚷고 민족사무위원회문앞까지 가니 모두 출근 다 하였는지 문앞에 민족사무위원회란 판을 단 대형뻐스만 문옆에 서있고 滑门은 꼭 닫겨 있었다. 조금 늦은겄 같다. 속이 꼴리며 신경났다. 대문좌측옆 직일실 같은 앞에 신강위글족 힌모자를 눌러 쓴 위글족 두로인이 공작인원같은 젊은이하고 무슨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곁에 다가가 자전거를 길 옆에 세워놓고 그들에게로 돌아섰다. 젊은이가 글쪽지를 두로인에게 넘겨 주며 여기서는 지금 사무를 안보니 이곳으로 가보라 한다. 두로인이 막연해 하니 젊은이가 그들의 등을 떠 밀며 빨리 그쪽으로 가보라 한다.  로인들이 자리뜨고 젊은이가 집안으로 돌아 들어가려 할때 다가서며; 이곳이 국가민족사무위원회가 옳은가? 물으니 젊으니가 돌아서며 무뚝뚝이; 옳다. 그런데 현재 여기서는 사무를 보지 않는다며 의아히 나를 아래우로 뜯어 보고 자전거에 동여맨 각목들을 살펴 본다. 어디에서 보는가 내가 결나 물으니; 현재 이곳은 장식중이였어 림시 XXXX곳에서 사무를 본다며 일이 있으면 저로인들을 따라 가라며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두위글족로인한테 눈길 주는 것이다. 신경이 곤두선 내가 알아 못듣고 눈살살려 되 물으니; 젊은이는; 현재 여기서는 어떤 사무도 보지 않으니 저로인들을 따라 가라며 집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妈了个巴子”,쉬틀려 결이 날때로 난 내가 자전거 다리를 풀고 장안거리쪽으로 떠나는데 등뒤에서;你有什么事啊!하는 소리가 난다. 뒤도 돌아 안 보며; 民族歧视问题하며 자전거에 올라타려는데 무엇이 걸리는듯 발이 떨어지어 뒤돌아 보니 그젊은이가 내뒤에 붙어 서있다. 干哈?!하며 내가 언짠게 물으니; 有什么事 下来 好好说好吗                  웃으며 말한다. 너는 누구냐의 물음에 그는 계속 웃는 얼굴을 띄우며; 我是民委办公厅的,现留守在这里的工作人员하며 你有什么事啊? 한다.   政府和媒体对我民族的歧视问题라 하니 당신은 어느민족인가 한다. 내가 아니꼽게 찔려 보다 朝鲜族 하며 급히 돌아 떠나려는데 뒤에서 你是金先生吧 하며 그가 물어 온다. 깜짝놀란(속으로 내 행동이 폭로되였나 속이 띄음하였다.) 내가 움쯜 돌아보며 네가 어떻게 아는가? 의아히 물으니 당신이 작년에 중앙텔레비죤방송에서 선족칭호 오용일을 반영했지 않은가? 그일을 우리가 广电总局에 보고 하고 방송국에 통보하여 사과하게 했다며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네 하고 얘기 하면 잘 해결된다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끈다. 하여튼 이날 일은 잘 생각떠오르지 않다. 제정신이 아니였언지! 어떻든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 갔고, 그와 대화하게 댔다. 안 될때는 방법을 취하기로 하며... ...머리속에 뜨는 흐리터분한 사색을 더듬으면; 그는 민족사무는 자기네가 다 관활하며 엄중한 문제는 자기네가 직접 중앙유관부서와 령도에 통보하여 해결된다며 작년 중앙텔레비죤에서 칭호사건도 자기네가 广电总局에 반영하여 해결되지 않아는가며 성근히 자리를 권한다. 어떤 큰 일이라도 자기네가 접수하면 빠르고 정상적인 경로로 정확히 유관부서에 반영되여 해결된다고 한다. 여기 시간은 늦은것 같고 천안문 쪽 시간은 아직 일찍하여 내색 안고 먼저 하회를 들어 보자는 심산으로 그의 얘기를 들어 보았다. 항상 웃으며 얘기하는 张씨인 그는 령도들의 경위원으로 있다 이곳에 배치되여 일하게 됐다며 자기는 중국혁명에 많히 공헌한 우수한 조선족들을 존중한다며 특히 리영태장군을 더욱 우러러 존중한다 한다. 리영태장군은  항미원조에서 미국비행기를 3대 떨러 뜨린 대영웅이라 한다. 그러면서 어떤일로 그러는가? 중앙텔레비의 칭호 일은 끊났지 않느가며 물어왔다. 그일은 끝났고 어떤어떤일이다 대략 말하니 자료들이 있는가 물어 내가 갖고 들어갔던 자료를 보였다. 소리없이 보던 그는 이런 나쁜자식들 하며 얼굴을 찦으리며 정식등록 해야 되겠다 며 내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 내가 안갖고 왔다고 하니 원래는 신분증이 있어야 접수하는데 오늘은 특수 정황이라 접수한다 며 등록하였다. 문제가 엄중하니 자기네가 인츰 상급부문에 통보해야 되겠다며 이일은 중앙에서 중시할것이라 하며 자초지종을 상세히 물어왔다. 믿어도 될것같아 밖에 나가 준비했던 삐라등물건들을 들여 와 책상우에 펼쳐 놓았다. 칼도 뽑아 놓았다. 그러나 휴발유병만은 꺼내놓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입 벌여지게 놀란 그는 한참은 말 못하며 있다 우리 격한 행동은 삼가하고 좋게 차근차근 얘기 하자며 내가 얘기하는 사실의 경과를 들으면서 등록지에 기록하는 얼굴에 웃음을 잊지 않았다. 얘기중인데 옆칸으로 50대넘은 사나이가 들어왔다. 책상우에 놓여있는 문건들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장공작원(그때까지 이곳이 어떤부서이고 그는 무슨 직무인지 몰랐다.)은 일어서며 들어온 분은 자기네 处长이고 이분은 작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칭호를 사용하여 문제를 반영한 김선생이라며 나를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계속 선족칭호가 나오고 新华网,人民网을 비롯한 많은 사이트에서도 칭호들이 사용되고 조선족을 비하,모욕하는 문장들이 올라 여러부문에 아무리 반영하여도 안되여 오늘 민족사무위원회로 찾아 왔다고 얘기했다. 오늘도 일이 안되면 김선생이 극단행동을 취하려 준비하고 왔다고 보충해 말한다. 그때에야 웃음을 지으며 처장은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해오고 그런 행동은 절대 취하지 말아야 한다며 민족사무를 총괄하는 자기네가 제때에 정확히 해결하니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자며 일어선 나를 자리에 권하면서 자기는 双口씨라며 환영한다 한다. 몸이 편치않아 금방 병원에 갔다 온다며 장공작원이 내준 자리에 앉는다. 자료들을 보며 내게 중앙텔레비죤의 칭호일은 끝났지 않았는가며 일의 시말을 물어온다. 내가 다시 일의 시말을 중복해 얘기하고 吕처장은 한편으로 드르며 자료들을 보았다. 그날은 그들이 이사건은 중대한 일이니 자기네가 꼭 책임지고 처리,해결하니 절대 격한 행동은 삼가하고 집에 돌아가 마음눕잡히고 휴식하며 다음날에 수집한 자료들을 모두 가져오라 하여 힌종이에 쓴 이란 글판은 남기고 돌아왔다. 게림하게 돌아오는 마음은 어떻다 표현할 글발이 떠오르지 않은다..... ...... 밤새, 잠 못자며 오늘에 내가 행동접은 것 맞는지, 그들이 진정 책임지고 철저히 해결해줄수 있는지 뒤척이 였다. 이튼날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을 포함하여,新华网,人民网,中国网,中华网,新浪网등 12개언론,사이트에서수집,다운한글들과 당과정부의 유관민족정책,법류문서들을 갖고 민족사무위원회로 갖다. 이날은 장공작원은 보이지 않고 吕처장이 나를 접대했다. 내가 내놓은 자료들을 보고 그중 화면과 문자자료에서 모두 여려차례 “선족” 칭호를 사용한걸 보고 “중앙텔레비죤에서 말이 아니구만,”하며 나보고 웃는다. 그말에 “작년 1월5일 우리에게 사과한후로도 “선족”칭호가 계속 나와 내가 반영하니 자기네는 관활못한다며 짜쯩내며 전화끊고 이젠 받지도 않는다고” 말하자 “중국 언론계에서 老大라 그렇겠지!” 하며 웃는다. 내가 갖고온 유관정책법규를 보고는 “이것이 유력한 증명이다.”며 이일은 꼭 잘 해결될수 있을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인민망의 칭호 목록자료를 들어보이며; 여기 빈칸들에 조선족이 칭호는 멸칭이다 썼다는데 왜 글들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물어 3월24일 인민일보张延农社长사무실로 전화쳐 반영하니 그쪽에서 자기네 컴퓨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내 컴퓨터로 다운하여 中文复印社에 가서 프린트한건데 그네들의 컴퓨터가 중문시스템이였어 조선글은 나타안나고 그렇게 빈칸만 생겼다. 믿지 않으면 당신들이 인민망사이트에 올라 검색하면 알수있다. 말하니 알았다며 이만한 자료,증거만으로도 일를 충분히 해결할수 있다며 이제 청구서(请求书)만 제출하면 되니 래일 청구서를 작성하여 가져오라 한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접수하여 결론나오는 기한이 보통 60일인데 이일은 엄숙한 큰문제라 빠르게 해결될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날의 대화에서吕처장의 태도와 말순은 어제와 좀 다른데가 있었다. 큰 문제는 회피하고 밀어치려는 뜻... 자기를 찾아오는 조선족들도 자신을 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아 자기가 대신 시정해 준다고 자주 말하는 것이다. 避重就轻   그날오후에 집에 돌아와 나절로 청구서를 작성하였다. 请求书 1,请各网站(包括中央电视台)依照国家有关政策法规立即停止侵害朝鲜民族名誉权和尊严的行为。 2, 请各网站(包括中央电视台)依照国家有关政策法规消除影响、恢复朝鲜族的名誉;立即删除侵害朝鲜民族尊严的信息。      3,请各网站(包括中央电视台)依照国家有关政策法规诚恳请以我为代表的朝鲜族有识之士在郑重地场合给朝鲜族赔礼道歉。并在其网站和主要节目、主要版面显著位置登载道歉信息。 4,请求促成法院立案审理裁决,以示中央政策和法律的严肃性。 5,中央电视台知错仍犯,我认为这是藐视我朝鲜民族的行为,请中央电视台认真检讨。   *希望中央电视台最近在适当节目中,在收视率高的时间段里就这次事件做专题节目; 1)告示全国国民;民族尊严,民族问题是极其严肃的。党中央和中央政府是很重视民族问题的,也重视少数民族反映地问题的。借此,很好地体现党中央提倡地和谐社会的氛围。 2)告慰;名誉、尊严受到严重伤害的朝鲜族。并以此,也给其他少数民族安心信息。 3)告示全国国民;少数民族的名誉和尊严是不可侵犯地,并以此契机警示制造、挑起事端,搞民族激化地扰乱分子和起到中介作用地媒介。   从2009年10月12日事发开始,对朝鲜族的反映,中央电视台的傲慢到政府有关部门的怠慢,国务院接待处工作员的对朝鲜族的歧视、蔑视,海淀某法院厅长的不耐烦发火。统战部接待处工作员的蛮横 ... … 我们以平静心情正常渠道解决问题的想法彻底破灭了。我们想这事不是小事,一个民族的尊严是不可忽视、戏弄地,更不可侵犯地。这是关系到国家的安定和社会的和平地。 恳请中央政府,国家民族事务委员会 尊严被政府媒介受到严重损伤地朝鲜族主正,维护国家的安定、社会的稳定。 此致   敬礼 2011年3月30日星期三 朝鲜族同胞敬上 그런데 저녁에 일찍 퇴근한 안해가 프린트해온 청구서를 보고 내가 컴퓨터로 자료들을 정리하는 걸 보더니 두말없이 컴퓨터를 들어 땅에 메쳤다. 또 둘이서 한바탕 해 재꼈다. 왜 이렇게 되는지 생각하며 장방 뜬눈으로 날을 샌 이튼날 아침도 먹지 않고 민족산무위원회로 떠났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吕처장은 놀라며; 这么啦?!하며 물어왔다. 눈과 얼굴색이 좋지 않았던것이다. 별일아니라고 말하며 청구서와 모학원국제부(한 조선글글잡지사에 가서 사실을 얘기하며 프린트 몇장하자니 바쁘다며 핑게를 대며 않해 주었다.)에가서 프린트한 人民网首页에서 로 검색한 목록을 보였다. 내가 제출한 청구서를 보며 吕처장은 얼굴을 찡그리였다. 나는 알은체 않고 어디에 받쳐야 할지 몰라 台头는 쓰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건 괜찬다고 하여 그말에 내가 반영한 사실이 없는일이 아니고 내가 이러는것이 반국가, 반사회행동이 아니지 하고 물으니 그는 절대 아니라며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人民网목록에 찍힌 조선글로 된 칭호유래에 관한 목록을 보며 제대로 찍혀 다며 나보고 인민일보사에 찾아가 말하고 자기가 신화사등 부문들을 찾아보는게 어떤냐고 물어 내가 좋지 않게; 내가 이많치 확실한 근거와 자료,유관당과정부의정책,법규를 제공하였으면 응당 국가의 민족사무를 총괄하는 당신네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지 않게는가? 빡 들이대 물으며; 어제 또 나 한개인, 한가정의 일이 아닌일로 안해와 싸우고 그가 컴퓨터까지 깨버렸다. 내가 처음에는 그저 손상받은 조선족의 존엄을 찾기 위하여 뛰여 다녔는데 현재 중앙의 반응과 정부일군들의 이일에 대한 태도에 요즘 많히 생각해보니 이것이 단순히 조선족의 존엄을 찾고 수호는 문제가 아니다, 한공증원이 말한것처럼 현재 중국에는 확실히 민족기시현상이 니타나고 있으며 조선족을 경멸하는 증상도 있다. 그렇지 않는가? 만약 서장의 좡족이나, 신강의 위글족, 회족들이 이런일 반영하면 중앙정부에서 이럴수 있겠는가?! 내가 첫날에 말했듯이 사이트에 올른 조선족을 비방, 모욕하는 글들을 보라, 그런 문장을 쓴 작자들이 그런 민족기시의 사상,경향이 있을 뿐만아니라 그영향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시겨 불안의 불씨를 뿌리고 있다. 그로써 전민에 민족기시의 사향을 심어주고 한족들에게 우리조선족의 명예,존엄에 먹칠하며 조선족에 대한 깊은 원한을 심어준다. 이러다는 나라에 큰 민족분화가 생기고 큰 파동이 생길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도 금방 말했지 않은가, 내가 이러는 일은 반나라, 반사회에 행동이 아니고 남들이 꺼려하는 애국행동이라고, 그런데 누가 알아주고 지지하여 주는가, 얼마나 힘들고, 고독하고 압력이 큰지 아는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년남짓한 동안 십여통의 수면제를 먹으며 잠들수 있었겠는가, 정 좋던 안해와도 여러번 싸움하면서 말이다. 어제 안해가 컴퓨터를 깨버린것까지 하면 내 혼자일도 아닌 일로 내 한개인의 만여원 돈을 썼다. 그러니 일이 여기까지 왔으면 응당 당신네가 전부 알아서 해야하지 않겠냐ㅡ며 흥분하니 빈속이 메스꺼워나서 돌아섰다. 내 얼굴색이 말이 아니였던지 吕처장은 바로 일어서며; 내 알아서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푹 휴식하라며 당신안해의 전화번호가 얼마인가며 자기가 전화쳐 설복, 위안하겠다고 하는것을 우리가정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깐 많히 수고해 달라며 문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몇발작 못걸고 와하고 나무등거리에 맨 물을 토해버렸다. 따라나온 吕처장이 다가오려는 것을 말리며 일어서서 입을 닦고 吕처장을 보고; 이번 일에 조선족령도들이 참여하는 것을 삼가해 달라 부탁하고 좋은 소식 기달린다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며칠기달려도 소식없어 4월15일 아침 일찍먹고 거처에서 왕복 50리 좌우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또 자전거 타고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사무실에 손님이 있어 들어 안가고 밖에서 기달렸다. 얼마후 손님들이 간 다음 노크하고 들어가니 혼자 있는 장공작원이 반갑게 맞으며; 给你好消息,您反映的事, 我们已反映到中央了,中央很重视,已惊动了中央六部委和北京市委刘琪书记하며 소식알려 준다. 정말 좋은 소식이였다. 오랜만에 환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또 이상하여; 이일은 북경시위하고 무슨관계가 있길래 북경시위에서 까지 介入하는가 의문하니 上述部门都是驻京单位吗,며 말해온다. 하여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감사하다. 수고 많히 했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족령도들이 이번 일에 참여하는것을 삼가해 달라며 그들은 모종인소로 철저히 우리조선족의 리익을 대표하여 이번 일을 확실하게 볼수 없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바래려 밖으로 따라나온 장공작원을 보며; 일이 제대로 잘 끊나면 잘 감사를 드리겠다. 말하니 장공작원은 웃으며; 不用,送一副敬旗就行啊,하길래; 心中早有数, 辛苦了! 再见! 하며 손저어 인사하고 자전거에 올라 경쾌히 회바람날리며 페달을 밟아 집으로 돌아 왔다. 한달넘어도 감감무소식이였어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45일인 5월11일 또 자전거타고 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사무실에는 吕처장만 있었다. 그는 지금 小金가 일을 맡아 보고 있고 민족대학의 조선족어떤학술단체에서 칭호멸칭에 대한 확실한 증거자료를 정리하는 중이라 한다. 민족대학 조선족학술단체라 짚이는 데가 있었고 속으로는ㅡ그단체에서 모르는척, 처음으로 이일을 접수하는척 격분하며 공식서한을 띄우며 같이 거세게 항의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나오고 함께 단합하여 중앙에 반영해주길 그렇게 바랬다. 그러면 중앙,정부에서 도 즉시 중시를 가지고 처리하며 일도 쉽게 끝을 보리라 생각하였다.ㅡ꿈속의 떡이였다. 小金가 宣传司의 김성화인가고 물으니 아니 政法司의 小金子라고 하며 어제 사무위원회의 班车에서 小金를 만나 물어보니 오라지 않아 일이 바로 될것이라 한다 더라고 한다. 그말에 왜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계속 맡아 하는가? 전번 4월15일에 와서 장공작원 말이 일이 중앙六部委하고 북경시위까지 반영되였다고 하던데 하고 물으니, 그건 그가 모르고 한 소리라고 한다.  이들이 하나는 唱白脸하고 하나는唱红脸하며 일을 얼버무리려 하는 것 같다. 일이 또 꼬이는 듯 하여 그의 정확한 직책은 무어고 이곳의 준확한 명칭은 무언가고 물었다. 吕처장은 이곳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반공청信访接待处이고 쑈장은 이곳의 일반 공작원이라 한다. 돌연히 마음의 힘이 쭉 빠지며 물러 앉을것 같다. 나의 신경변화를 모르고 려처장은; 정상적으로 반영된 일은 보통60일을 한 기한으로 하여 결과가 나오는데 이일은 특수하여 좀 빨르게 결재가 될것이라며 마음놓고 집에 가서 기달리라며 나의 등을 밀며 다른일이 있는지 바쁘기색을 띄운다. 밖으로 나와 따라나온 려처장을 보며; 지금이라도 조선족령도들이 이번일에 참여하는 것을 삼가해 달라, 다시 한번 나의 주장을 밣히고 전번에 당신도 말했지 않은가, 동족의 한령도가 자리에 있을때는 꼼짝않고 아무런 말 없다가 퇴직하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라고ㅡ하고는 자전거에 올라 집으로 향하였다. 돌연간 마음의 지탱과 몸의 힘이 싹 빠져 이날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왔다. 二环雍和宫 다리밑 십자로를 빠져 나오는데 앞의 신호등 파란불이 노란불로 변하는 것이 피뜩눈에 띄였다. 그래 급히 페달을 밟아 가속하여 나가는데 맞은켠에서 거먼오띠찦차가 죄우전하며 쌩하여 마주오는 것이였다. 길복판에 도착한 내가 그놈이 좀 속도를 죽이면 건너가려 했는데 속도를 죽이지 않고 더욱 쌩하게 맞받아 왔다. 너무 바빠 급히 자전거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 뒤로 돌아서는데 공공뻐스가 내 옷자락과자전거핸들을 잡은 팔을 쓰쳐 쑥 지나간다. 哥们儿, 这么骑车啊!운전수가 차창으로 건너다 소리쳤다. 금방 식은땀이 등뒤와이마에 죽 배였다. 그자리에 물 앉고 싶었다. 겨우 지탱하며 자전거를 밀고 인행도에 나와 주저앉았다... ...(나를 암살하려는 짓인가? ) 그날 아주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근처까지와서 백마강음식점 부근에 도착했을 때 음식점에 들어가 속이 후하게 개고기국이라도 한그릇 먹고 싶었다. 주저한참 서있다 에라! 집에 가자며 마음다지고 집에 돌아와 명태대가리에 술둬잔마이고 마른만투에 정수기물로 허기진배와 마음을 달래고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5월20일 오전10시50에 인민망에는 선족칭호를 입력하고 검색하면 안뜬다 계속 서너번 검색하면 힘겹게 페지를 열고(이전엔 인츰들어 갔음, 5월12일오후부터 힘들었음)新华网은 완전히 안되였다. 5월23일 인민망新华网계속 나타남.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자료를 접수하여 결론내린다는60일이 지난64일인 5월30일 아침일찍 일어나 차타고 또 민족사무위원회로 결과를 알아보러 갔다. 8시42분에 사무위원회 문앞에 도착하여 9시를 기달려 9시부터 9시30분 넘어까지 문별을 눌러도 안에서는 감감무소식이 였다. 9시반이지나 처음보는 어떤50넘은 사나이가 문열고 출입하며 걸레를 쥐고 출입문을 닦고 있었다. 곁에 다가가; 당신은 민족사무위원회공작인원인가 물으니 옳다, 그런데 이부문일군은 아니고 여기 사람들이 출장가서 임시 대신 일본다고 하며 일이 있는가 며 물어 그렇다 하니 그럼 안으로 들어가 애기하자며 안으로 청하며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 권한다. 그러면서 무슨일로 왔는가며 물을 따라준다. 내가 먼저 그의 직무를 물으니, 자기는 성이이고 이곳에서 6년 일하다 09년에 다른 부서로 이동하여 갔다면서 이곳의 일군들이 외지로 출장가서 자기가 원래 이부서에서 일했던 사람이라 교제도없이 오늘부터 일주일은 자기가 여기서 그들을 대신하여 일 본다고 한다. 그리하여 내가 여차여차 일이라 얘기하니 그런일은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지말고 信息产业部로 찾아가 반영해야 한다 한다. 그말에 내가 갈야할 데는 다가보았다. 그래 할수없어 마지막으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찾아왔다.  민족사무위원회 직능은  나라의 민족사무를 총괄하는 부서가 아닌가 그러니 응당 이런 일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맡아 해결하여 줘야지 않겠는가 되물으니 말이없는지 그럼 자료를 갖고 왔나 하여 민족사무위원회에 반영한지 이미 64일되여 오늘 일이 어떻게 되여는가 알아보러 왔다고 말하니 그럼 자기가 등록지를 찾아 알아 보겠다며 2층으로 올랐갔다. 등록지를 갖고 내려와 기록을 보던 그는 놀라며; 당신이 칼을 가지고 오고 삐라를 만들고 이건 격한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절대 삼가하여야 한다. 며 나를 살펴 본다. 내가 안그렇게 됐는가?! 하며 내가 여때 뛰여온 경과를 추려서 말하며 서장의 쫭족이나, 싱강의 위글족, 서부의 회족들이 이런일에 부닥치여 반영하면 민족사무위원회와 중앙정부에는 이렇게 태만하고 무시하게 처리할수 있겠는가?  2009년 2월달 잡지 李麦가 쓴에 대한 묘족들의 반영을 중앙정부에서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며 바투들이 대 물으니 그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이러는 중에 70좌우된 신강위글족 로인셋(남1, 녀2)이 문 열고 들어왔다. 공작원이 자리권하자 그들은 우리가 얘기중인데도 우리앞 책상우에 붉은색글체로 제목을 단 중문의 공식서한을 올려놓았다. 피끗보니 지방에서 자기네를 따돌린다는 반영문인것 같았다. 그와(뽀)말해야 쓸떼 없고 하여 일어서 나왔다. 나오는 나를 보며 공작원은 다음주에 그들이 오니 그들보고 나에게 전화하여 일의 진정을 알려 주겠다 하는것을 필요없다 내절로 와서 물어보겠다며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나 왔다. 단오 국가휴정일이 지나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74일인 6월7일 또 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땀 흘리며 나를 맞은 吕처장은 출장갔다 금방 돌아와 지금 참관단을 배동하여 천안문에 갔다 일이 있어 잠깐 왔다면서 6월13일다음주 월요일에 진행상황을 전화로 알려 주겠다하여 별소리 없이 돌아왔다. 오늘(6월14일 민위에서 일을 접수한지 78일) 오전 8번째로 또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일찍 떠나 8시반에 도착하니 출근안했서 인행도애 앉아 지하철에서 받은 신문을 보는데 신강위글족 남,여로인이 허술한 짐을 들고 사무실앞에 와 기달린다. 9시가 조금지나 그들이 문을 노크하고 먼저 들어갔다. 장공작원이 그들을 문열어 주었다. 인츰 끝나겠거니 하고 열시가 되도로 기달리는데 전번에 만났던 뽀공작원이 지나다 나를 알아보고 어떻게 되였는가 물어 아직 소식없고 오늘 알아보려 왔는데 안에 손님이 있어 기달리는 중이라 하니 문앞에 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고 나서 기달리지 말고 들어가보라 하며 자기가 금방 吕처장하고 전화통하였는데 吕처장은 전번에 출장같다 와 참관단을 거느리고 다니느라 감기와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라 한다. 실증났던김에 노크하고 들어가니 담화 중이 였다. 장공작원이 반갑게 맞으며 저쪽에 앉아 조금 기달리라 하였다. 신강喀什에서 왔다는 60세좌우의 로인과 30여세 딸이 였다. 딸이 강간당해는데 지방에서 제대로 처리하여 주지않아 어제 북경으로 국가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아 왔단다. 신강에는 공산당은 없고 국민당만 있다는 로인은 장공작원이 아무리 설명하고 해석하여도 외고집이고 너무 안먹어 장공작원이 자기는 이만큼 해석해도 안되니 나를 가리키며 우리둘이 할얘기가 있으니 밖에 나가 기달리라고 해도 안되여 우리는 부득히 밖에 나와 일의 상황을 얘기했다. 장공원은 일은 상급에 반영되였는데 아직 결론이 내려 안왔다면서 더 기달려 보라고 한다. 당신이 반영한 일은 누구도 생각못했던 좋은 일이고 이일로 혹 새로운 정책이 나올수 있다고 한다. 그러는데 바로 吕처장이 장공원께로 전화와 신강위글족부녀의 처리상황을 묻는다. 장공작원은 어떻다 회보끝나고 김선생이 왔다고 하니 나를 받으라 하여 내가 받았다. 기침하며 하는말이 자기가 어제 쑈진하고 전화로 물어보았는데 아직 중앙민족대학조선학연구센터에서 일을 끝맺지 못하여 결론이 안났다며 쑈진이 나에게 전화치겠다는 것을 자기가 일이 끝난다음에 전화치라고 말렸다며 얘기한다. 기침을 너무 하여 우리는 긴말않고 통화를 끊었다. 더 있어자 별얘기 없어 돌아서며 장공작원보고 我的等待不是无限期的 액세스를 박아말하며 자리를 떴다.   내가 친구하고 고향압록강변을 거닐고 있는데 웬 낯선 50대 사나이가 앞을 막으며 나보고 你是,金仁哲吗?물어 옳다 대답하니 자기는 국가안전부에서 왔으며 나라에서 체포령이 내렸다며 자기를 따라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장부책같은 책자를 번지며 여기에 서명하라 한다. 친구가 급히 앞을 막아서며 나보고 빨리 뛰라 한다. 내가; 뭘, 뛰게 있냐? 며 필을 쥐면서 이일을 민족사무위원회 양징주임이 아는가? 물으니 사나이는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호금도 주석은? 하고 내가 따져물으니 사나이는 다 모른다며 我,想一想!하더니 조금후 책장을 뜨더 버리며; 好吧! 你跑吧한다. 내가 무엇때문에 뛰야 하는가? 나는 나쁜일도 아니하고 제민족의 우롱당한 존엄을 수호하자는 것이고,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인데!ㅡ하며 높은 소리로 말하자 친구는 무작정 내팔을 끌고 뒤돌아 뛰는것이다. “跑的,越远越好!” 뒤에서 사나이의 웨침소리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를 뚫고 귀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친구에게 끌려 뒤집에 뛰여 들어가니 집이 비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러는게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한사코 말리는 친구를 뿌리 치고 밖으로 나와 바라보니 집대문앞에 낯선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붙잡는 친구의 손을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동창들이 길옆에 모여서서 계속 앞으로 나가면 죽는다 피하라고 손짓하며 소리친다. 그러는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발길을 다그치니; 그앞에는 너를 암살하려는 작탄이 있다.ㅡ며 동창들이 조급하여 발을 굴으며 웨친다. 에라! 시작할적에 이런 결과 있을 줄 알았다.며 발을 떼는데 앞에 가느다란 철사줄이 가로 노여있는것이 눈에 보였다. 손으로 살짝들고 지나려니 안되여 둬발작 물러섰다 힘내여 몸을 솟구쳐 뛰니 아싸! 하게 건너갔다. 계속 앞으로 전진하는데 앞에 가로세로 보일락말락한 철사줄들이 눈에 띄였다. 동학들과 친구가; 더 나가면 진짜 죽는다. 이번것은 위력이 크고 령민한 작탄이라고 하며 손흔들며 긴장히 웨치고 녀동창들은 눈굽을 손등으로 찍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판인데, 전진이다. 온 힘다내 눈감고 백미리 속도로 내달려 철사줄들을 걷어 차고 나갔다. 작탄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화포가 하늘에 터지고 동창들과 친구들의 함성이 하늘을 진동한다. 더는 지탱못하고 그자리에 나른히 쓰러졌다. 친구와 동창들의 부름소리에 눈을 뜨니 회미한 집안이 였다. 일어나 곁을 보니 안해가 쪼골뜨리고 자고 있었다. 그렇게 자는 안해가 안스레 보였다. 곁에 이불로 살며시 덮어주었다.   6월21일오전 9번째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吕처장이 나를 맞았다. 오늘까지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86일이니 기정한 날자 60일보다 26일이나 더 지났는데 오늘 나에게 확실한 진행상황을 알려달라 딱딱하게 말하니 웃으면서; 어제 월요일아침에 출근하여 곧 바로  政法司小金子에게 전화쳐 물어보았는데 민족대학조선족학술단체에서 인젠 증실자료준비를 끝맞치고 민족대학 민족학연구부문과함께 중앙선전부등 유관부서에 제출할 이에 대처할 새로운 정책출시 준비사업 착수중이라 한다. 단시일내에 결과가 있겠으니 조급해 말고 기달리라 며 김선생이 나라를 위하고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좋은일을 하는데 우리도 자주 차문하여 결과가 나오는 즉시로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하여 더 말치않고 돌아 섰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92일인 6월27일월요일 10번째로 이른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서 早点사먹고 사무위원회로 갔다. 太平桥에 위치한 민위에 도착하니 8시가 금방 넘었다. 맞은켠 인행도옆 바자에 앉아 시간을 기달리였다. 8덟시반에 사무위원회 셔틀뻐스가 대문에 와 대이자 위원회 일군들이 줄줄이 내려 사무청으로 들어갔다. 9시15분에 信访处의 장공작원이 자전거 타고 출근하여 접대실로 들어가고 9시34분에 吕처장이 차몰고 출근하였다. 조금 기달려 9시57분에 접대실에 다가가 두번노크하니 吕처장이 문열고 맞았다. 그일때문에 왔는가 물어; 민위에서 일을 접수한지 오늘까지92일인데 오늘 나에게 어떤답안을 주겠는가 물으니ㅡ자기도 자주 알아보고 재촉한다. 전번주말에 政法处小金子에게 전화쳐 물어보니 이번주 금요일이면 결과가 나오게 된다고 한다. 바빠하는 눈치를 보이는것을 묵과하고 웃음과분노표정을 섞어가며 체면도 보지않고 딱딱들이대고 그러다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말하며; 당신들이 혹 한족들의 慢慢地의 일처리 습성과 大事化小,小事化了의 풍습으로 일을 얼버무리려 하지 않는가며 쓸쩍 옆을 찔렀다. 吕처장은 바삐 아니라며 변명하였다.  얘기중에 吕처장이 둘레를 치며 남의 추동에 놀지말라 얘기하여 그의 눈을 직시하며; 당신이 보건대 내가 그런사람으로 보이는가?!  쓴웃음을 지으니, 웃으며 김선생을 말하는 얘기가 아니다.며 말투를 돌린다. 10시50분까지 얘기나눈 吕처장은 이번 금요일에 결과나온 즉시로 전화로 알려주겠으니깐 이젠 힘들게 찾아 오지 말라하여, 좋은결과겠는가 물으니 결정코 좋은 결과라는 약속을 받고 돌아 나왔다. 4일간 지루하게 기달려 금요일 오전 9시반부텨 핸드폰을 켜고 민족사무위원회에 전화치며 탐문하려 하였다. 오후 3시반까지 9홃번쳤는데 신호는가는데 걸리지 않았다. 또한번 부품회망을 포기하고 마음을 풀려 탁구치려 나갔다. 땀 줄줄흘리며 열심히 뽈치는데 옆에서 老金你的电话하여 다가가며 들으니 常用전화가 아니고 전용전화소리여서 바삐달려가 벨을 누르니 吕처장의 웃음기어린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金先生,您好!告诉您好消息,刚刚接到的通知,您所反映的包括中央电视台和人民网,新华社等媒体称朝鲜族《鲜族》的称呼和登载诽谤,侮辱朝鲜族文章的情况已被中央民族大学朝鲜文学术会确认有错,并跟中央民族大学民族政策研究所共同研究提出提案上交中央宣传部准备提出对此事件的新政策하며 통지서문을 요약 읽어준다. 눈물이 나도록 기쁜소식이였다. 일을 벌려 근2년 뒤도록 모진신고끝에 듣는 울고 싶고 높이높이 웨치고 싶은 기쁜 소식이였다. 인생에 이보다 더 기쁜소식 또 어디있으랴?! 련발,谢谢!辛苦了를 란발하니 吕처장은; 아니,우리는 직무내 일을 한것뿐이고 당신이 민족과 나라의 평화,안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며 수고 많히 했다 한다. 내가 당장 택시타고 문건을 가지려 가겠다하니 그렇것 없고 자기도 5시면 퇴근하니 다음주월요일에 왔어 보고 상세한것 얘기하자 하며 통화를 맞쳤다. 시계를 보니 4시02분이였다. 옆에서; 老金,什么好事,这么兴奋那?하며 물어; 没事 하며 옆으로 나와 안해에게 기쁜소식 알렸다. 핸드폰수확기에서 안해의 촉촉한 목소리가 전파를 통해 귀전에 울려왔다. 저녁에 안해가하여 백마강음식점에가 내가 좋와하는 개고기탕 한그릇에 맥주한병 했다. 7월3일 일요일 오랜만에 몇사람 조선족령도하고 언론계분들에게 전화하여 일을 알리며 어떻게 할지 문의 하였다. ... ... ... ... ... ... 7월4일월요일 아침일찍 일어나 식은밥 먹고 정복하고 넷타이매고 구두싣고 민족사무위원회로 지하철타고 떠났다. 8시에 도착하여 报亭에서 신문한분을 사서보며 9시를 기달렸다. 9시정각에 민위사무실문을 노크하니 吕처장이 웃으며 반겨맞았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공사로 인해 민족사무위원회 청사 전체가 전기끈기여 휴가하는데 김선생일때문에 특별히 오늘나와 오전까지 전기안끈게 하고 사무본다고 하며 자리를 권한다. 그러면서 나의 앞에 민족사무위원회 붉은도장이 찍힌 문건을 내놓으며 먼저 보라한다. 문서의 전문은 아래에 본체를 복사하여 올린다.     金仁哲先生; 您好。     您来反映的关于有些媒体和互联网上不正确使用朝鲜族称谓、甚至带有侮辱性称呼的情况,我办已于3月28日把材料转给我委政策法规司处理。经政策法规司认真研究,并向有关研究朝鲜族称谓的专家咨询了解,并请示委领导同意后,已于近日以我委办公厅名义向中央负责宣传工作的部门去函,要求规范有关新闻媒体和相关部门正确使用朝鲜族族称。今后,我委还会与相关部门沟通,进一步加强对贯彻落实民族政策法规的监督检查工作,维护少数民族合法权益。   特此告知。                                           国家民委信访处                                       二0一一年七月一日 (본체를 올리려 했는데 내가 컴퓨터에 익숙지 않아 못올리고 본문 그대로 타자해 올린다.) 내가 본후 吕처장은 역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붉은도장이 찍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6원29일 작성하여 중앙선전부에 제출한 相关红头文件(간단히 내용을 피력하면 현재 중앙텔레비죤을 포함한, 매체,사이트들에서 조선족칭호를 멸칭인,등 단어들을 사용하고, 조선족을 비방,모욕하는 문장들이 올라 조선족들이 반영하여 오니 중앙선전부등유관부서에서 중시를 돌리고 매체들에서 다시는 이런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제지,단속처치를 바란다, 는 내용이다.)를 보이며 중앙선전부의 처리,결재를 기달리는 중이라며 중앙선전부에서도 중시하고 빠른 시일내에 상응한 문건,정책이 시달될것이라 한다.  내가 3월29일 두번째로 민위에 모든 자료를 갖고 왔으때 당신이 나보고 청구서请求书를 작성하여 제출하라 하여 이튼날에 당신에게 받쳤는데 내가 제기한 5가지请求는? 언제면 그런 단어들과문장들이 정부언론에서 사라질것이가? 그런글을 쓴 작자와 올려준 매개媒介, 책임자들의 정책,법률위반책임의 추구는? 그로써 조선족명와존엄에 준 손상의 사과는등의 나의 물음에 여기에 대하여서는 자기는 대답할수 없다 말하며 조선족존엄에 끼친 손상에 대하여서는; 먼저 그만두고 이제 다시 그럴때는 엄격히 처분, 사죄해야 한다 한다. 그러면서 김선생이 모든 곤난과 큰압력을 극복하며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고 나라의 평화와안정을 위하여 수고 많히 했으며 일이 김선생의 执着의 노력으로 비교적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니 마음놀고 좋은 소식기달리며 집에 돌아가 힘들고 괴롭게한 가정성원들 한테 자기의 위안을 전해 달라 말하였다. 돌아서 나오는 나의 손을 잡고 吕처장은 중앙선전부에서 문건이 하달되는 대로 나에게 알려주겠다며 문밖까지 나와 바래며 약속하였다. 이렇게 근2년동안 나 개인의 만여원 돈을 쓰고 가속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 나의 경기 겨룸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3월28일 일을 접수하여 99일만에 일단 한 막을 내렸다. 달콤한지! 쓴지,!! 시쿰한지!!1 감이 없다.   내가 일을 버무려 만들어 이렇게 접는게 옳은지? 동포사회에서 진맥해주기 바란다.   2011년07월4일 월요일 정오12시17분 지칠대로 지친 김인철이 수도 북경에서   l  려처장은; 자기를 찾아오는 조선족들도 자신을 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아 제가 시정해 준다고 자주 말한다.  뜻 ... ... ... l  일이 여기까지 일으러 희망컨대 우리의 신문,잡지,방송등 언론에서 많히, 자주 우리민족에 대한 지식과력사를 동포사회에 선전하고 특히는 우리학교(유치원부터)들에서 우리아이들에게 우리민족칭호,력사,문화를 전수하여 떨어져가는 조선족위상과 희미해져가는 우리문화되살리기에 전력해 주었으면 좋겠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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