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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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 배려함과 고마움 댓글:  조회:2894  추천:72  2006-07-07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배려함과 고마움허명철 연변대학 교수한 사회가 문명하고 발달한 선진 사회이냐 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사회공공복지시설의 설치 및 보급정도와 사회성원 공공질서를 지켜가는 도덕의식수준은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특이 어린이, 노약자, 장애자들이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삶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는 것은 선진사회의 중요한 징표로 된다고 보아진다. 현재 국경도 무의미해지고 있는 열린 세상에서 교통수단은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로 되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공공복지시설은 대중교통수단에서도 많이 반영되어지고 있다. 서울의 경우를 놓고 보면, 지하철역마다 노약자와 지체장애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엘레베이트가 설치되어 있고 지하철 바구니마다 노약자, 장애인, 임신부 보호석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공공복지시설들이 진정 사회의 따사로움을 그대로 전하고 활용대상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어딘가 허점이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설들은 아무리 선진적인 것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물리적 장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장치들이 자기의 가치를 충분히 나타내고 사회 모든 성원들이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하려면 우리 모두가 배려하는 자세를 키우고 동시에 받는 자의 입장에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마음을 키워야 하며 “배려”함과 “고마”움이 서로 어울리는 문화적 풍토를 키워가야 한다. 지난번 지하철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한 젊은 여성이 돌이 금방 지난 애기를 품에 안고 네댓살 되어 보이는 딸애와 함께 노약자 보호석을 이용하고 있는데 한 건장한 노인이 오시더니 노인을 보고도 노약자석을 양보하지 않는다고 야단치더니 끝내 어린이를 일켜 세우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양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계속해서 예절 없다는 등, 애를 핑겨로 노약자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둥 훈계를 그칠 줄 모르고 어린애 엄마 또한 참지 못하고 자기가 임신중이니 노약자석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맞불질한다. 다만 자리를 양보한 어린애만 몸을 가누지 못하며 휘청거리고 있을 뿐이다. (지하철 승객용 손잡이는 키가 1메테도 안되는 어린이에게 있어서 너무나 높이 매달려 있다)만약 그 어린애가 자기 손자라면.... 혹은 저 노인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라고 한다면....이런 생각을 굴리다가 기분 잡쳐 그 자리를 떠나 다른 바구니를 이동한 순간 또 다른 광경에 경악하고 말았다. 한 할아버지가 문어귀에 쭈크리고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다. 최소 내가 아홉 정거장을 지나 내릴 때까지도 노인은 그냥 그 자세로 책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할 말을 잃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또 필요하겠는가? 사실 무엇이 필요한가를 누구나 다 알고 있건만....
17    듣는 것도 일종 수준 댓글:  조회:2693  추천:81  2006-07-07
듣는 것도 일종 수준허명철 연변대학 교수누군가 “음식은 정성이고 마음이다”고 했다. 하지만 정성을 바쳐 만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아서 고객의 불만을 자아내는 경우가 가끔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접한 고객 또한 상이한 태도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수저를 놓고 조용히 나가고, 어떤 사람은 그런대로 식사를 마치고, 또 어떤 사람은 주인을 불러 야단친다.우리들이 사회생활에서 주고받는 대화도 어쩜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는 사람은 혹간 본의 아니게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혹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해서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 대화가 계속 유지되느냐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그 사람이 화를 내거나 또는 떠나 가버리면 대화는 끝난다. 반면 그냥 참아가면서 대화를 이어간다면 말을 실수한 사람이 사과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고 나아가서 인간적 유대관계를 계속 끈끈이 이어갈 수도 있다.그래서 우리는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수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 해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접수하지 못한다면 진짜 “소귀에 경 읽기”가 된다. 반면 질서 없고 논리가 떨어진 이야기라 해도 듣는 사람이 수준이 있으면 금방 상대의 의도를 포착한다. 갓난 애기들이 울면 어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쉽게 짜증을 낸다. 따지고 보면 말할 줄 모르는 애기는 울음이란 자신의 대화방식으로 어른들과 대화를 요청했고 자기의 요구를 제기 한 것인데 어른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더 큰소리(울음)로 호소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애기의 메시지를 독해 못한 자신을 탓하기에 앞서 애기한테 짜증을 내기가 일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기를 잘 본다는 보모는 따지고 보면 애기의 울음을 독해 잘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울음이란 대화방식에 비교적 익숙하기에 쉽게 애기를 달래고 애기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뿐이다.그러므로 보다 윤활한 인적관계를 유지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자기 의사를 알기 쉽게 조리 있게 표현하는 능력도 키워야 하지만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능력도 키워야 한다. 즉 자신의 듣는 수준을 제고하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16    견학문화에 대한 유감 댓글:  조회:2478  추천:91  2006-07-05
얼마 전 한국뉴스채널인 YTN에서 “중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한국에 35만 명을 파견”한다는 뉴스(2006-06-12)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35만 명 연수단, 13억을 웃도는 인구대국으로서는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내 연수도 아닌 국외 연수단이라고 할 때 이는 엄청 방대한 대오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중국정부에서 현재 3농문제(농촌, 농업, 농민)의 철저한 해결을 위한 굳은 의지와 그 대안으로 내놓은 향진도시화방안에 대해서도 긍정하고 싶다. 하지만 굳이 35만 명이란 방대한 대오를 한국으로 연수를 보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은 가셔버릴 수 없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우리들의 농촌건설에 있어서 하나의 모델로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농촌의 지역적 분포, 농촌산업경제구조, 농촌인구의 기본소질과 자원우세 등등의 구체 실정을 고려해 볼 때 새마을운동은 유일한 대안이 아닌 단지 하나의 선택 가능한 성공사례일 뿐인데 과연 이처럼 방대한 연수단을 파견할 필요성 내지 효과성이 있는지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 35만 대오에 합류할 연수단 성원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이 선발될지도 걱정스럽다. 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열린 천문학방면의 국제학술회의에 중국에서는 10여명의 대표단을 파견했지만 결국 학자는 고작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시청의 행정 관료들이 학자로 변신해서 국내 한 유명학자가 분노를 터뜨린 적 있었다. 이번 연수단은 비록 농업공무원으로 구성한다고 하지만 국내 위탁 여행사를 통해 순번으로 한국에 나간다고 할 때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또한 비록 같은 동양권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은 나름대로의 민족적인 정서와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도 못한 연수단성원이 단지 통역에 의해서 7일 연수와 3일 견학이란 짧은 시간 내에 진정 새마을운동의 성공비결을 전체적으로 소화해낼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북경시위 모 영도가 어느 한 대회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용인즉 유고슬라비아의 한 젖소농장을 참관방문 갔더니 그 농장 일군들이 하는 이야기가 “농장의 젖소들도 인젠 중국손님들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대표단이 참관방문을 갔었으면 농장의 젖소들마저 중국방문단을 알아본다고 하겠는가? 물론 타인의 성공경험을 허심히 배우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필요하고 몸소 현지에 가서 성공담을 겸허히 배우는 것도 비난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견학이나 연수를 명목으로 국비관광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젖소마저 알아볼 정도로 방문단은 그칠 새 없었지만 국내 젖소산업에 과연 얼마나 큰 비전을 가져왔는지 그 견학결과에 대한 평가를 한번 묻고 싶다. 사실 우리 자체발전에 유익한 것이라면 견학뿐만 아니라 전문가를 초청해 지도를 받을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16차 당대표대회에서도 누차 강조했던 창신의식이며 이러한 창신력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현실에 알맞은 原創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특색을 강조하는 우리가 왜서 구체사업에 있어서는 자기의 특색을 띤 개혁방안과 원창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가? 특색이 단지 우리의 과실을 변명하는 방편으로만 된다면 이는 특색이 아닌 “특색”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중국특색의 새농촌건설을 위해서 우리의 견학문화도 좀 더 실제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한가지 부언한다며 진정 새마을운동을 할려면 禁書로 된 “중국농촌조사”부터 광명을 보게 해야 하며 찬송가가 아닌 진실한 농촌의 어려운 사정을 전국민이 알게 하여야 하며 또한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이 과연 무엇인가도 알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국민의 주인다운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고 새마을운동도 성공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15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댓글:  조회:2604  추천:95  2006-07-05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우리는 매일 매일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와 교제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친다. 그런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 만나게 되고 원하던 원치 않던 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니 대체 무엇이 소중한 존재이고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도 가지지 못한 채 채바퀴 돌듯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런 삶을 습관적으로 되풀이 하고 당연시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서로의 따뜻한 인정도 가꾸지 아니하여 점점 메마르게 되며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즉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매 순간과 매 사람, 그리고 내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망각한 채 뭔가에 끌려다니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실 우리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순간순간들이 아닐까. 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이며, 인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바로 이 시각 나의 옆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이 순간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귀중한 시간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하여 응당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 또한 가장 현명한 것이며 이 또한 인생의 낙을 즐기고 인생을 가치 있고 의의 있게 장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4    11.돌발사태 발생시 영도들의 역할 댓글:  조회:3161  추천:93  2006-03-22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1돌발사태 발생시 영도들의 역할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 연길시 모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등개서기 김진길주장 진화작업 지휘”란 관련 기사제목을 보고 돌발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지도자들은 구경 어떤 배역을 맡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기사를 포함해서 매번 중대사고 발생 당시 관련기사들을 살펴 보다 모름지기 보이지 않는 룰이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주 당위 서기, 주장, 시 지도자들이 현장에 와서 지휘부를 설치한다든가, 구조상황에 대한 상세한 회보를 청취한다든가, 구조작업에 대한 중요 지시를 내린다든가 하는 내용으로 일괄되어 있다는 것이다. TV화면에도 영도들의 현장지휘하는 모습은 반복해 담고 있지만 일선에서 구조작업을 벌리고 있는 구조대원들의 모습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이번 화재사고를 예로 든다면 화재발생시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구조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가는 소방대 장병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전문 훈련을 받은 이들은 굳이 주와 시 당, 정 영도들의 현장지휘에 따라 구조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한발 물러나서 현장에서 내린 영도들의 지시를 들어봐도 거의 모두가 천평일률적이지 않는가. “모든 대가를 아끼지 말고 사람을 구하라”, “재산피해를 최대로 줄이라”든지, 혹은 “사후처리를 잘 하라”라는 부탁들이 고작이다. 인명재산이 경각을 다투고 있는 마당에 영도가 와서 일선 지휘관을 불러 상황을 요해하고 지시를 내리고 한다면 일사물란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구조작업이 오히려 지장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인본정치, 친민정치를 표방하는 시점에서 영도자가 사고현장에 나타나는 것 자체에 대해 비난할 바는 아니다. 다만 영도들이 사고현장에 와서 어떠한 배역을 맡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관료적인 자태로 일선 지휘자를 불러 상황보고를 듣는다든가 혹은 감정충동에 의한 즉흥적인 현장지시는 마땅히 삼가 할 바라고 생각된다. 진정 “현장지휘”를 하고 “권력행사”를 하고 싶다면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서 구조작업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보장해 주거나 관계부문의 상호협력을 감독한다면 백성들은 진정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공 많은 배 산으로 간다”고 영도가 많은 구조작업도 필경 효율적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13    34. 벨. 게이츠의 눈물 댓글:  조회:2650  추천:54  2006-01-31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4벨. 게이츠의 눈물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우연하게 벨.게이츠가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읽어보고 느낀바가 있어서 적어본다. 내용인 즉 지난번 사스가 우리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을 때 대륙의 부자들 중 10만 이상 헌금한 사람이 몇 명 안된다는 소식을 듣고 벨.게이츠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사회에 보답할 줄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보면서도 끄떡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부자가 된다한들 사회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벨.게이츠가 눈물을 흘린만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조선족사회를 돕고 있는 고마운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을 하지 않았는지를 한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사실 현재 200만 조선족들 중 생활여건이 어려운 분들이 많다. 주변의 학교들을 살펴보아도 경제난으로 학업에 영향 받는 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행이도 우리는 한국의 일부 단체와 개인들의 고마운 소행으로 이들에게 얼마간이라도 장학금을 조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이 여기에 어느 정도 동참하고 있는가? 남들의 후원한 장학금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때 한번쯤 나도 학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는지? [물론 신문기사화 할 수 있는 불치병학생을 위한 전교적인 행위를 제외하고] 간단한 실례지만 매번 학부모회의가 끝나면 관례대로 돈을 거두어 선생님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하군 하지만 이 돈으로 자기 반급의 어려운 학생을 돕고자 한 반주임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어려우면 습관적으로 정부에 손을 내밀고 기업에 도움을 청하지만 항상 자기 자신은 소외시킨다. 항상 뢰봉식 봉사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자기는 소속시키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고 자기도 참여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공익사업에 동참하는 것은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풍족해서가 아니다. 성경의 한 구절 인용해 본다면 “백만을 내놓은 부자와 1전을 내놓은 거지가 누가 더 성의가 있을까? 분명 거지가 더 성의가 있는 것이다. 필경 그는 자기의 전부 재산을 내놓기 때문이다.” 많고 적음은 단지 화페로 환산되는 것만 아니다. 화페의 뒷면에는 맑고 깨끗한 심령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심령으로 우리들이 구호가 아닌 실천하는 배려의 문화, 베푸는 문화를 형성해 나간다면 우리는 정녕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하게 될 것이며 벨.게이츠도 눈물이 아닌 환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12    가난에 대하여 댓글:  조회:2256  추천:84  2006-01-26
오늘날 우리 민족사회를 둘러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빈곤에서의 해탈은 이들의 소박한 념원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기 나타난 우리 민족의 인구이동은 말 그대로 가난에 대한 반항이었다.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이들은 쪽지게 아닌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정든 고향의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흙토를 떠나 멀리 엔징 소리 요란한 도시로, 해외로 떠난다.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자랑거리도 아니다. 가난을 직시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발하는 이들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가난에 대해 너무나 경제적인 시각에서만 고민해왔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신의 신근한 노동으로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향수하게 되는 순간 인생의 십자로에서 오히려 갈팡질팡하게 된다. 인생에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동반하듯이 가난에도 물질(경제)적인 가난과 정신적인 가난이 있는바 모종 의미에서 경제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가난, 인격적인 가난이야 말로 진정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강인한 의지와 분발하려는 욕구마저 없다면 결과적으로 가난에 매몰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자식들에게 우월한 생활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도 자식의 정신적 기둥이 되고 인격적 거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매일 매끼마다 좋은 음식을 자식들에게 주지 못할지언정 풍요로운 정신적인 식량으로 자식들은 키워나간다면, 자식들에게 분발할 수 있는 정신력을 보여준다면 자식들은 그로서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며 이러한 부모님의 존재로 하여 긍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18세기 말, 한 독일인은 자식들에게 매끼마다 빵과 우유를 제공해 주지 못했지만 자신의 강인한 의지력으로 풍요로운 정신식량을 제공해 주었고 인생의 계몽자로 되었다. 이분이 바로 세계적인 철학가 칸트의 부친이시다.
11    12. 안중근의사 동상 제막식 사진을 보면서 댓글:  조회:2800  추천:70  2006-01-18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2안중근의사 동상 제막식 사진을 보면서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할빈에 있는 동생이 보내온 안중근의사동상 사진을 보면서 연변에서는 이런 문화재발굴을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연변에서 관광산업을 6대기둥산업으로 설정한지도 벌써 여러해 지났건만 백두산과 두만강변경관광과 같은 자연자원을 활용하는 관광이 주된 내용으로 될 뿐 연변지역문화탐방이나 답사와 같은 관광프로젝트개발을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다. 때문에 해마다 연변을 경유한 백두산관광객들이 많다고 하지만 이들이 진정 연변에 애정을 갖고 돌아가는 경우가 드물며 연변에 심은 정을 못이겨 투자하는 경우는 더욱 희소하다. 사실 연변에는 현재 병환에 계시는 김진할머니와 같은 인간문화재를 비롯하여 고구려, 발해유적지, 항일투쟁전적지와 윤동주생가를 비롯한 유명인사들의 거처지와 같은 문화재가 많다. 이번에 할빈에 동상이 세워졌지만 안중근의사도 연변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한바 있다. 만약 이러한 문화재를 개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연변의 관광산업은 진정한 기둥산업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며 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연변의 역사와 문화에 애틋한 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앞으로 할빈에서는 안중근의사의 동상 하나만으로도 한국관광객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들을 흡인하기에는 충분하다. 같은 중국땅에서 할빈에서 가능한 일들은 왜서 연변만 아니되는지? 일송정에 선구자탑을 세운지 얼마 안되여 폭파시키 버리고 민속촌의 조상 단군할아버지 동상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사이섬 돌비석도 쪼각나야만 하는 비운을 면치못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미약한 노력도 물거품으로 되고 있는 반면 다른 동네에서는 이미 집안에 있는 고구려유적도 관광코스에 담고 있다. 연변은 도대체 무엇이 근심스러워 자체의 지역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지? 남들이 부러워 할 훌륭한 자원이 연변에서 개발되지 못하고 빛을 바래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 없어서 그냥 넉두리해볼 뿐이다.
10    조선족사회 미래에 대하여 댓글:  조회:2318  추천:78  2006-01-18
이미 오래전부터 간간히 흘러나오긴 했었지만 최근들어 조선족사회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논조가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인구감소로부터 교육문제, 농촌집거구 해체, 민족간부비례 감소 등 현실상황은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기에는 충분하다. 반면 국경을 넘나드는 인구이동, 도시에 새롭게 일떠서는 코리안타운, 사이버공간에서 충분히 진행될 수 있는 민족교육,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교류, 정부공직 아닌 민간단체에서 두각을 내밀고 있는 지성인들의 등장은 조선족사회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판단은 아직 너무 이르다는 근거를 제시해준다.비관이든 낙관이든 문제는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 개변시킬 수 있는 사회적인 룰 혹은 환경, 민족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에 걸림돌로 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 및 그 극복 대안을 올바른 자세와 냉철한 시각에서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너무 사치스럽게 낭비해 왔었고 깨뜨릴 수 있는 장벽 앞에서 너무나 소심했었으며 삶의 기본터전인 중국의 제도적, 정책적, 법률적 환경에 대한 연구도 등한시 했었으며 합법화한 공민권을 행사하여 자기의 권익을 정당화하는데 게을리 하였다. 뿐만 아니라 걸림돌에 대한 극복에 있어서도 메마른 “구호”차원에 멈추어 있었으며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 못했거나 혹은 실시하지 못했다. 조선족사회의 밝은 미래를 창조할려면 여러가지 도경과 대안이 있겠지만 최소 우리는 두 가지 동시적인 작업을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요청된다. 하나는 자연적 제도적 문화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자기의 권익을 지켜가고 대변할 수 있는 실천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자체민족에 대한 순수 학문적 차원 아닌 계몽적 차원의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민족이란 이 상상의 공동체에 애착을 가질 수 있는 문화적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교육시스템을 가동하여 개체성원들이 조선족이란 이 공동체에 애정을 갖게 함으로써 스스로 조선족구성원이란 긍지를 갖도록 해야 한다. 민족에 대한 애정과 민족구성원으로서의 긍지를 바탕으로 인생이 설계된다면 당연 민족을 위한 사명의식이 키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항은 우리들이 조선족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문제이다.조선족사회의 진로를 탐색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대상을 200만에 한정하고 중국사회란 닫힌 차원을 그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조선족사회의 존재는 한반도와 갈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200만 조선족뿐만 아닌 한국과 조선국적 소유한 동포도 있다. 이들과의 연대, 한반도와 연대라는 열린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세계화시대에 살아가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이러한 열린 시각으로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전망해 볼 때 200만 중국국적 소유한 동포들이 단순 혈통이나 호적등록 차원을 벗어나 진정한 조선민족성원이라는 의식을 안고 살아간다면, 또한 이 200만이 중국 경내에 있는 30만을 넘는 한국인, 그리고 통계적인 수자가 불확실하지만 분명이 주변에 살고 있는 조선인(조교)과 민족을 바탕으로 한 연대성을 지켜간다면, 나아가서 이 200만이 7000만과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그 에너지는 무궁한 것이며 이 거대한 에너지가 방출한다면 조선족사회의 미래는 역시 찬란할 것이다.뿐만 아니라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개척해 나감에 있어서 어느 특정시기 일시적인 방편을 위해 취했던 조치들은 적당한 조정도 필요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살기에 중국어를 잘 해야 한다는 논리의 지배하에 일가에서는 이중언어교육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중언어교육실시를 위해 조선족학교들에서도 상당수의 한족교원을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한족교원들이 조선족학교에 취직하게 될 경우 그만큼 조선족교원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조선족사범교육도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기필코 제반 조선족교육에 상당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사실 언어습득은 학교뿐만 아닌 텔레비나 만화영화와 같은 기타 도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발 물러나서 우리가 중국에서 과연 언어장애 때문에 승진을 못하고 개인의 영달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법적인 평등이 보장되었다 해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룰을 깨뜨리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무리 중국어에 능숙해도 주류사회 진출은 여전히 쉽지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생존무대가 중국경내뿐 아닌 전체 지구촌임에야.한 세기 넘게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청정부의 봉건통치하에서도 일제치하에서도 민족의 얼을 지켜온 우리가 오늘날 세계화시대에 자기를 잃어간다는 것은 진정 조상에게 미안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9    17. 오아시스와 생존 댓글:  조회:3121  추천:71  2005-06-07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7오아시스와 생존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사막에서 길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아시스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이며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오아시스를 일컬어 인생의 위안소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오아시스는 사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생존의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생명에 대한 애착을 키워주기는 하지만 오아시스 자체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안정된 삶의 터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오아시스의 존재와 그 가치를 착각하고 오아시스에 의지하면서 자기의 삶을 영위해 가고자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오아시스와 함께 사막에 묻히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오아시스에 삶을 기탁하고 오아시스만을 지켜 가면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오히려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은 하나 또 하나의 오아시스를 창조하면서 공동체적인 삶의 터전을 가꾸어 왔으며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해 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기존의 오아시스에 만족감을 느끼었고 내실없는 통계수치에 도취되어 창조와 개척이 아닌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아세아에서 버금가는 만무과원을 자랑하고 있을 때 타지방에서도 사과배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우리 앞서 시장개척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과일박람회에서 우리는 만무과원에서 따낸 사과배 대신 산동산 사과배를 맛보아야 했고 남들이 계약을 맺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시장판로가 없는 만무과원은 인젠 자랑 아닌 부담으로 될 수밖에 없다. 어쩌다 발견한 오아시스만 붙들고 살아가려고 했던 안일한 생활자세, 그리고 시장정보에 대한 무지는 우리들로 하여금 치열한 시장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점차 밀려나게 하였으며 경제적 가난뿐만 아닌 정신적인 빈곤에서 허덕이게 하였던 것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에 있어서 오아시스는 단지 생명의 여정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힘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주유소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희망찬 내일, 아름다운 미래는 오로지 오아시스에 머물지 않고 오아시스를 떠나는 자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개척은 꼭 출국하거나 도시로 진출하는 것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오늘의 삶은 내일의 삶을 개척하는 받침목에 불과한데 그 받침목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거기에 머물게 되면 사막의 오아시스에 의지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발상과 다를바 없으며 따라서 그 결과도 달리되지 않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역적, 혈연적, 정책적 우세를 충분히 활용하여 부단히 새로운 오아시스를 개척해 나가면서 자체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8    18. 나체와 예술 댓글:  조회:5156  추천:76  2005-05-18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8오아시스와 생존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얼마전 중앙텔레비죤에서 소련의 명작 <여기의 여명은 고요하여라>를 각색한 드라마를 방송하였다. 이 드라마가 방송되기에 앞서 사람들은 관심의 초점을 지난 80년대 중반 중국에서 영화로 상영될 당시 삭제되었던 부분, 즉 홍군 여전사들이 강가에서 목욕하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맞추었다. 결국 일단은 그 장면들은 그대로 보존해 두기로 결정을 지었다고 하지만 이 대목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관심사로 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사실 80년대 중반 중국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상영할 때 바로 이 부분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은 삭제하는 것으로 결과를 보았다. “라체=음란=색정” 이런 논리에 충성해야 했던 당시 예술은 소수의 권위인사에 의해 강간당하기에 충분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같은 주제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타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해 본다면 쉽사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 장면을 삭제한 자체가 얼마나 몰상식적인 행위인가를 알 수 있다.사실 서양문화의 원류로 되고 있는 고대 희랍문화에서 말하면 기독교문화(성경이야기)에서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되듯이 나체는 일종의 평화와 자유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상징적 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소련인민들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여전사들이 강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으로서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자식이 보고 싶어 기률도 위반할 수 있는 모성애를 지닌 여성들, 자기 상급과도 과감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꽃다운 청춘 여성들은 그렇게도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하지만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마저 바치는 작품의 주제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는 부분을 단순 음란적인 것과 연관시켜 급급히 삭제하다보니 전반 작품의 주제를 말살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유와 논리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타문화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진행할 수 있고 타문화의 우수한 영양분을 섭취하여 자체문화의 현대적 이행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7    19. 배움의 자세에 대하여 댓글:  조회:3236  추천:65  2005-05-06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9배움의 자세에 대하여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인생은 배움에서 시작되고 또 배움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인류가 창조한 문화에 대한 공부와 답습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기타 동물의 類가 아닌 인간이란 특정 類에 귀속시키며 인간으로서의 類의 본질을 소지하게 된다. 인간 개체의 형성과 완성에서 배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서 평생교육을 도입하고 있으며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는 모두가 공인하는 하나의 인생좌우명으로 받아지고 있다.문제는 우리가 제창해야 할 바는 배움을 위한 배움이냐 아니면 창조를 위한 배움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움도 무엇을 위한 배움이냐 하는 목적성과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선택성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선택성 없는 무차별의 습득과 배움은 진실과 거짓,선과 악의 혼돈으로 인생을 갈팡질팡하게 할 수 있으며 단순한 배움을 위한 배움은 결과적으로 배움에 그치게 될 뿐이고 자기의 인생을 과거의 재현으로 장식하게 될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모름지기 타인의 삶의 방식과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는 보여주고 있다. 예하면 자녀교육에 있어서 흔히 "누구는 과외를 하는데.." "누구는 저녁 몇시까지 공부하는데.."하면서 자녀교육에서 항상 "누구"를 기준으로 하고 그대로 하기를 원할뿐 그 "누구"의 학습방식이 자기자식한테 어울리는지, 자식의 취미와 성격특징 및 생활절주와 맞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타인의 인생경험에 자기를 예속시키지 않고 자기에게 속하는 나만의 인생, 자주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창조와 혁신이다. (창신=창조+혁신) 개개인의 창조와 혁신으로 얼룩진 인생의 보귀한 유산들이 있기에 세상은 보다 다채롭고 매력적인 것이 아니겠는가.특히 오늘과 같은 지식경쟁의 시대에 생존해 가려면 과거의 답습을 위한 공부보다 미래의 창조를 위한 공부를 시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한 배움의 자세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자세로 인생을 임한다면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설계하고 장식하게 될 것이다.
6    20. 꿈과 인생 댓글:  조회:2752  추천:51  2005-04-29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15꿈과 인생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인간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상상과 꿈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꿈이 있기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 어떤 역경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의 인생살이에 있어서 희망사항이 되고 동력의 원천으로 되고 있는 꿈은 비록 아름답고 황홀한 존재이겠지만 이러한 꿈에 다가설 수 있게 하는 현실은 항상 만족스러운 결실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자칫 치명적인 타격사항으로 되어 나의 삶의 희망을 앗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라든지 혹은 “정성이면 돌위에도 꽃이 핀다”든지 하는 소박한 신념을 안고 깨뜨러지지 않은 꿈에서 위안을 느끼면서 내일을 맞이하고 운명에 대한 도전을 계속한다. 문제는 "고생끝에 과연 낙"이 오느냐 하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사회는 냉혹한 것이다. 노력만 한다 해서 그 만큼한 보상이 꼭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고생끝에 낙이 아닌 고생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물론 살다 보면 "돌위에도 꽃이 필" 그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꽃은 원체 땅에서 피는 것이지 돌위에서 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명히 땅에서 필 수 있는 꽃을 돌위에다 피워 순간의 쾌락을 즐기는 것보담은 그 아름다운 꽃을 땅에서 피게 하여 영원한 즐거움을 향수할 수 있는 방법과 도경을 모색하여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우리는 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럼 왜서 누구나 직시하기 싫어하는 실패가 어머니로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실패에서 뭔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번 실패에서 교훈은 찾지 않고 원인을 총화하지 않는다면 실패은 계속 실패로 이어질 뿐 성공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꿈에 대한 집착도 좋지만 이러한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그런 길을 모색하는 것도 어찌보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오늘을 재현시키는 내일보담도 오늘을 뒤엎는 내일을 시도해보는 것도 일종의 낭만이고 멋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5    문화전통에 대한 사고 댓글:  조회:2718  추천:82  2005-04-21
한국 교보문고에 가보면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참 옳은 말이다. 인간과 동물간의 삶의 질적인 차이는 바로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했고 또한 조상들이 창조한 문화적인 풍토에서 후세들이 자라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숙명적으로 특정된 사회문화 환경에서 자라게 되고 조상들이 창조한 생활방식과 지혜, 나아가 처세술까지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조상들의 생활지혜를 자각적으로 주체적으로 현실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무거운 십자가로 될 수 있다. 간단하게 조상들의 생활지혜의 소산인 성구 혹은 격언들을 예를 들어보자. " 아는 길도 물어가라" --- 아는 길이면 그냥 곧추 가면 될거지 왜 물어보아야 하나? " 돌다리도 두드리며 가라" --- 그 튼튼한 돌다리도 왜 두드리며 가야 하나요? 돌다리마저도 믿음이 가지 않아 두드려 보아야 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 --- 혼자 들 수 있는 종이장을 왜서 굳이 같이 들어야 할까? 가벼운 종이장도 맞들고 다닐려면 오히려 찌여질 확률이 높지 않는가? "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 --- 오르지 못한다고 쳐다볼 자유도 없는가. 쳐다보다 나면 사다리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조상들의 생활지혜는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될 수 있지만 거기에 만족을 느껴서는 안된다. 즉 답습과 계승만이 아닌 창조와 발전이 없다면 오늘의 승자로 될 수 없지 않는가
4    27. 본능과 윤리 댓글:  조회:2701  추천:76  2005-04-17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27본능과 윤리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원시림에서 길 잃었던 오누이가 몇년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그냥 두 사람이 돌아왔다면 인간의 도덕을 지켰다고 평가받게 될 것이고 만약 자식까지 이끌고 돌아왔다면 자연적 본능을 따랐다고 평가받게 될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인 인간은 확실히 자연적인 속성과 사회적인 속성을 띠고 있으며 본능적인 충동과 욕구에 대한 자제를 리성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이성과 본능의 충돌은 인간의 삶을 모순 속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모순으로 하여 인생은 더욱 이채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인생의 좌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지향성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인간은 일차적으로 선택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즉 인생의 좌표를 본능에 두어야 할 지 아니면 리성에 두어야 할지? 자연성과 사회성에서 어느 것을 더 충실히 해야 할지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여직껏 우리는 감성과 리성 즉 본능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을 대립시켜 왔고 리성의 중요한 직책으로 본능의 욕구에 대한 억제를 강요해왔다. 그러나 리성의 직책은 단순 억제를 위한 억제가 아니다. 본능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본능의 욕구를 더 멋있게 더 아름다운 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하면 우리의 음식생활, 지어 남녀 성생활도 단순 동물단계의 그런 본능적 욕구에 대한 만족과는 다르다. 우리는 이미 본능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을 문화적 단계로 승화시켰으며 이러한 승화과정에서 리성은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집행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개 인간의 욕구에 대한 만족에 서로 지장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제도를 만들었고 도덕적 룰을 지켜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나 도덕이 일단 무거운 십자가처럼 도덕을 위한 도덕, 즉 도덕자체가 수단에서 목적으로 된다면 인간의 삶은 오히려 피곤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물질적 삶의 풍요로움을 추구하기에 앞서 목적과 수단이 엇갈리는 그러한 삶에서 해탈되어야 하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그러한 삶의 윤리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3    허명철 프로필 댓글:  조회:3489  추천:122  2005-04-12
성 명: 허 명철 ( 漢字: 許 明 哲, 英文: XU MING ZHE)성 별: 남생년월일: 1963년 10월 4일근 무 처: 中國 延邊大學 未來硏究所통신주소: 中國 吉林省 延吉市 公園路 105號延邊大學 未來硏究所우편번호: 133002연계전화: 0433-273-2493(직장) E - mail: xuming@hanmail.net yjmingzhe@msn.com經歷 및 學歷 事項:1986. 7. - 1994. 2. 연변대학 정치학부 전임강사1996. 3. - 2001. 1. 연변대학 정치학부 부교수 2001. 1. - 현재 연변대학 미래연구소 소장2001. 9. - 현재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비서장1982. 9. - 1986. 7. 중국 길림대학 철학과 졸업 (철학학사)1994. 3. - 1996. 2. 한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한국철학 전공 (석사수료)1999. 9. - 2002. 7. 중국 연변대학 동양철학연구소 석사학위취득2003. 9. - 현재 중국 연변대학 조선어어문학과 한국문학 박사과정최근 연구실적:저서:『당대연변조선족사회발전대책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1『전환기의 연변조선족』, 요녕민족출판사, 2003『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연변조선족교육실태조사와 대안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3논문:『네트워크시대의 중국조선족문화』『중국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간의 문화교류 현황 및 그 대안』『중국조선족문화가치의식 연구』 『사이버시대 민족교육의 이념과 실천』외 20여편 발표
2    25. 사과배와 조선족문화 댓글:  조회:2978  추천:75  2005-04-12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25사과배와 조선족문화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사과배는 연변의 특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조선족농예인이 조선에서 갖고 온 사과묘목을 당지의 돌배와 접목시켜 배양해낸 새로운 품종---사과배는 자체의 잡종우세를 발휘하여 사과나 배가 지니지 않는 특유의 맛과 향기를 뿜고 있다. 반면 대련산 궈광처럼 모양새가 가쭌하게 잘 다듬어지지 않았고 또한 오래 저장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재미나는 것은 사과배와 조선족문화의 유사성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특산으로 자랑떨치고 있는 사과배는 어찌 보면 조선족문화의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체의 특유의 생존이념을 토대로 대대로 내려오면서 이미 체질화 되어 있던 조선문화를 중국이란 새로운 사회적문화와 접목(융합)시켜 형성한 조선족문화 또한 중국문화도 조선족문화도 아닌 새로운 문화형태로서 민족문화사에서 특유의 멋을 피우고 있다. 다만 사과배가 깔끔하게 자기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족문화도 현재로서 자기의 리론적 기틀과 기본성격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잡히지 못하고 있으며 사과배가 오래 저장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중국문화의 대환경 속에서, 또는 세계화의 충격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계속 보존해 가면서 존속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연변의 사과배 시장을 개척해야 하듯이 우리도 조선족문화의 새로운 생존공간을 부단히 확장해 나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특히 오늘날 조선족인구가 날따라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물론 민족에 대한 귀속을 떠나서도 개개의 생명체로는 존재할 수 있겠지만 기왕에 우리가 숙명적으로 조선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나의 존재에는 조선족다운 그 무엇이 체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조선족다운 것이 바로 우리의 문화가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전 민족을 결속시킬 수 있는 종교도, 우리 민족만이 즐길 수 있는 명절도 없다. 지난 20세기 90년대 전 중국 200만 조선족이 하나로 되어 고락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족의 브랜드였던 연변오동축구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즐기는 우리민족은 자기의 축구팀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공동한 언어가 생기게 되었고 축구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공동체의 존재를 위해서 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브랜드전략을 펼쳐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우리의 명함과 같은 조선족문화가 하나 둘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온돌문화를 아파트문화와 결합시켜 도시에서 향수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온돌문화를 형성하듯이 우리들이 합심하여 자기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또한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간다면 비록 약소할지라도 우리는 그 문화에 힘입어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25. 연꽃의 단상 댓글:  조회:2622  추천:63  2005-04-12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25연꽃의 단상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세상에 아름다운 꽃들이 많고 많지만 어쩐지 늪에서나 호수에서 피는 연꽃이 제일 인상이 깊다. 연꽃에 대한 깊은 인상은 나름대로의 우아한 모습에서 비롯되기도 하겠지만 주변의 환경에 물젖지 않고 자기의 순결함을 지켜가는 그 품격에 더 매혹된것 같다. 현재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것은 단순 경제적 풍요로움이 결핍하기 때문만 아니라고 생각된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시대에 쫓겨 사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쫓겨사는 인생이 실제상 피곤한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쫓겨가는 인생을 선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지금 세월이 이런데..." 이로부터 인생에 대한 체념이 시작되고 쫓겨다니는 삶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자기의 피곤한 인생의 책임을 시대에, 주변환경에 돌린다. 여기에서 연꽃의 풍격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어지러운 흙탕물 속에 삶의 터전을 잡고 있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자기의 성장에 가치있는 영양분만 충분히 흡수하고 그 어지러움에 물젖지 않고 자기의 순결을 지켜가는 연꽃의 풍격, 연꽃과 같이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젖지 않고 또한 세속을 초탈하는 그 초연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 연꽃정좌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 역시 연꽃의 이러한 풍격때문이 아니겠는가. (연꽃정좌의 한개 특성이 바로 외부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아도 그 앉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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