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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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가죽도 없는데 터럭이 어디 붙을소냐 댓글:  조회:5667  추천:55  2009-03-06
가죽도 없는데 터럭이 어디 붙을소냐             --조선족문학인들에게 조언한다   시장경제의 심입에 따라 우리민족의 문학사업은 점점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있다. 그의 해결책으로 국가의 예산, 한국인의 찬조, 독지가의 도움 등에 신경을 쓰기 일쑤다. 그러나 필자는 별개의 문제-조선족문학인의 사명감문제를 운운해 보련다. 1995년 여름, 필자가 심양회의에 참석할 때 당시 <연변문학> 사장 L이 필자를 찾았다. <연변문학>은 해마다 문학상금을 발급하며 소설, 시가, 수필 상 각각 천원씩 도합 3천원이 수요되는데 필자더러 그 후원을 맡으라는 부탁을 하였다. 필자 왈: “연변작가협회 회원중 돈 많고 능력있으며 안면 넓은 사람이 많은데 그들에게 책임지우면 더 좋을듯 하다. 나는 돈도 없고 작가도, 회원도 아니니 이를 책임지기 어려우며 좀 싱겁게 보이지 않나.” L 답: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에게 부탁해 보았는데 다 거절당하였다. 당신이 책임지는데 왜 싱겁게 보이겠나! 당신더러 돈 내라는것이 아니라 이 일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다.” 필자 왈: “보통 이런 일을 돈 많은 한국사람에게 맡기던데.” L답: “한국사람에게 맡겨보았다. <연변문학>상이 존재하는 한 줄곧 책임지겠노라 계약까지 체결하고 한번쯤(인민폐 3천원) 낸후, 한국 언론에 미화 3천 달러를 냈다 자랑하고는 사라져버린다. 한국사람을 찾고싶지 않다.” 필자는 L과 친한 사이이며 <연변문학>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L의 책임감에 감동되여 맡겠노라 하였다. 약 10분 지나자 L은 원고지 몇장을 들고와 당장 계약서를 체결하자는것이였다. 아마 필자가 번복할가봐 소뿔을 단번에 빼려는 모양이였다. 필자는 계약을 체결하고 고향(무순) 농촌에서 어렵게 사는 형님에게 드리려고 가져간 3천원을 당장 내놓았다. 그때 필자의 월봉이 600원 가량이니 5개월 월봉에 해당되는 돈이였다. 꽤나 아까운 돈이며 이 때문에게 부인에게서 호되게 욕까지 먹었지만 민족문학사업에 보태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만은 뿌듯하였다. 또한 돈 비락질하기 싫어 필자의 돈으로 3년간 부담하였다. 1998년 필자의 아들이 한국 고려대학에 입학하였다. 년당 8만원이 들며 집을 팔았지만 2년 비용도 모자라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에 의뢰하였다. 연구소 L소장은 당장 연변작가협회 모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필자의 말을 확인한후 욕설을 퍼부었다: “한심한 놈들, 연변작가협회에 능자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북경 젊은 봉급쟁이의 돈을 받아써? 금년부터 내가 내마!” 그로부터 지금까지 해외한민족연구소 에서 10년간 부담하였으며 “윤동주문학상”으로 개명하고 종목도 늘이고 상금도 올리는 등 잘 하고있다. 역시 필자의 후원책임안에서 진행된다고 볼수 있겠다. 2004년 어느날 필자는 북경에서 영문 모르게 “연사모”라는 회의에 참석한적이 있다. “<연변문학>을 사랑하는 모임”의 준말이라고 하며 북경시 조선족 작가들을 주축으로 약 30명이 모였고 잡지사측에서는 전 K사장 등 세 사람이 참석하였다. 사전편찬이 업인 필자는 눈을 지긋이 감고 “연사모”라는 단어를 음미하며, 우리말 어휘의 구성원리와는 좀 어긋나는듯 하지만 이런 묘한 방법으로 말을 만들수도 있겠구나 하며 도취되여있다가 K 사장의 난데없는 발언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 주재정국에서 <연변문학>의 경비를 취소하려 하므로 곧 폐간의 위험에 봉착하였다. 광범위한 조선족군중의 도움을 바라며 특히 북경조선족의 도움을 받으려 이렇게 찾아왔다…. 1년에 30만원 가량이면 운영이 가능하다….” 장내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연변문학>을 살려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아마 필자가 다른 사람보다 목소리도 크고 정서도 격양되였던지 필자를 <연변문학>후원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북경에서 1년에 15만원씩 후원하기로 약속하였다. 필자는 쾌히 받아들였다. 필자가 주먹국으로 대충 짐작해본 바로는, 북경시에 조선족이 약 7만명 되며 그중 지성인만 해도 현직자, 은퇴자를 합치면 민족대학사생 약 500명, 민족출판사, 번역국, 두 방송국, 민족가무단 등에 약 200명 되니 고까지것 500부정도는 쉽게 나간다. 그러면 5만원이다. 게다가 찬조금을 만원짜리 1인, 5천원짜리 10인, 2천원짜리 20인만 해도 15만원은 되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운영하는 학교학부모와 필자가 이끄는 중장년협회에서 <연변문학>을 주문하라고 호소하니 “한족학교에 다녔기에 조선글을 모른다” “문학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 “<연변문학>은 재미 없으므로 싫다” 등으로 거절당하였다. 이에 필자는 “조선족 사회상을 몰라도 조선족이냐, <연변문학>을 보면 알수 있다” “한 달에 짜장면 한그릇 먹은셈 치고 주문하라” “조선글을 모르면 조선글을 아는 친지에게 선물하면 될거 아니냐” “조선족 문학잔치에 부조 좀 하라는데 왜 말썽이 많느냐”라는 식으로 설득시켜 200부를 주문받았다. 문제는 조선족작가와 지성인들이다. 상기 각 조선족단위는 단위명의로 둬 부씩만 주문하고 개개인은 거의 주문하지 않았다. 필자는 연사모에서 조선족단위 개개인의 주문일을 맡은 S에게 문책하였다. S답: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 필자 문: “그런데 왜 연사모에서 하겠다 했나?” S 답: “그때는 낯이 간지러워 동의했다.” 필자 문: “<연변문학>을 돕지 않겠다는 말인가?” S 답: “<연변문학>에 글을 쓰는것으로 돕겠다.” 아하, 하느님 맙시사! 이것도 말이라고 하나! <연변문학>의 폐간을 막기 위해 하는 일인데 <연변문학>에 글을 쓰다니! 가죽도 없는데 터럭이 어디 붙을소냐 (皮之不存, 毛將焉附)! 아마 연사모에 참석한 30명이 한사함도 주문하지 않은듯 하다. 필자는 어이없어 한심만 났다. 찬조금을 받어려고 사람들을 불러봤다. 그중 사업가 K녀사가 이미 찬조금을 낸 사람이 있느냐, 그 명단을 좀 보자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건 왜 묻느냐고 하니, 자기의 경험에 따르면(그는 경제력이 있기에 이런 일을 많이 겪은듯) 이런 일에 마땅히 열성적으로 나서야 할 조선족문학인, 지성인들은 발뺌하더라, 만약 그들이 나서지 않으면 나는 절대 찬조하지 않을것이다 라고 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할수 없이 사실대로 알렸다-이 일에 찬조한 조선족문학인이나 지성인이 아직 없다고. K녀사 왈: “그것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나! 한푼도 내기 싫지만 정교수의 안면을 봐서 한번만은 내겠다. 2천원만 내겠다. 그러나 경고하노니 이 일로 다시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거두지 말라. 목마른놈(문학인)이 우물팔 궁리도 안하는데 우리가 왜 싱겁게 물을 퍼다 그들에게 먹이겠나!” 필자는 200부 주문비 2만원에 찬조금 만원(그중 필자의 돈이 5천원), 도합 3만원을 <연변문학>사에 바치고 사표를 냈다. 이 일에 조선족문학인과 지성인들이 소극적이므로 힘들었으며 실망감밖에 안 남았다라며. 필자는 조선족문화이벤트에서 조선족지성인들이 일반 군중보다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것을 많이 경험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문학관계만 운운하려하므로 할애한다. 혹자 왈: “우리 문학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는데 당연 국가에서 돈을 내거나 조선족 군중들이 받들어야 하지 않나. 왜 우리 문학가들이 돈을 내야 하나?” 맞는 말이다. 나라나 민족의 문학사업의 발전은 당연 국가 예산으로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심입에 따라 경제수익성이 없거나 심지어 엄청난 적자를 빚어내는 일이라고 할 때 국가에서 책임지지 않을수도 있다. 지금 중국 전역의 모든 출판물이 젖줄이 끊기고 시장화로 변하고 있다. 그래도 유지하려면 물론 민간의 힘으로 해야 하며 우선 문학인들이 솔선적으로 나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료녕성내에 성과가 있어 작가로 인정받을만한 사람이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60년간에 얼마나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더니 약 80명쯤 된다고 한다. 료녕성의 인구가 4천만이니까 이 비례대로면 우리 조선족은 4명밖에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선진민족”, “문학에 앞장선 민족”이므로 료녕성의 10배로 불구어도 40명꼴이다. 작가로 자칭하는 조선족의 대부분은 시 둬수, 수필 둬편밖에 못쓴, 아직 아마추어 단계의 문학애호자, 문학도 내지 문학인이지 작가가 아니다. <연변문학>에 문장을 발표하는 대부분이 필자를 포함해서 이런 부류의 “작가”가 아닌가. 그런 처지에 “우리는 작가이다, 당신네 돈을 내여 우리를 도와야 한다”라고 할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흑룡강성 수화시 북성촌 조선족 청년농민들이 자기 지갑을 털어 문학창작 서클활동을 한 상황을 소개한 문장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다. 듣는바로는 옛날 흑룡강 농촌에 이런 서클이 여러개 있었다고 한다. 필자는 또 한국에서 자기 지갑을 털어 꾸리는 한시(漢詩) 동호회를 많이 보았다. 우리보다 더 가난하던 1950년대부터 꾸려왔으며 한시시집도 많이 내였다. 중국조선족 문학인들에게 바로 이런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혹자 재왈: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내겠는가?” 연변작가협회는 회원이 650명가량 된다고 한다. 최근 몇달간 <연변문학>의 발행부수가 200부라는 설이 있다. 회원이 아닌 사람도 주문한자가 많다고 감안하면 대부분의 회원이 <연변문학>을 주문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정가를 보니 16원이니 냉면 둬그릇 값에 불과하며 술추렴 한번 또는 군일집에 부조 한번 하는 돈이면 1년 주문값이 나온다. 그래 이만한 돈도 없단 말인가? 너무나 한심하다. 가죽과 터럭은 상부상조의 변증관계이다. 가죽이 있어야 터럭이 생존할수 있고 터럭이 나야 가죽이 단단해질것이다. 문학인, 문학지, 문학, 언어, 민족 및 국가 등은 같지 않은 급에서 서로 가죽과 터럭의 관계이다. 문학인이 터럭이면 문학지가 가죽이고, 문학지가 터럭이면 문학이 가죽이고, 문학이 터럭이면 언어가 가죽이고, 언어가 터럭이면 민족이 가죽이고, 민족이 터럭이면 국가가 가죽이고…. 사실 언어와 민족의 관계를 바꾸어 민족이 터럭이고 언어가 가죽이라고 하여야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언어는 민족생존의 최고 표징이겠다. 언어가 없어지면 그 민족은 망한다. 우리민족 언어보존의 가장 기초적인 활동은 소학교부터 시작되는 조선어교육이고 최고의 경계(境界)는 조선어로 구사한 문학이다. 이렇게 볼 때 조선어 교사와 조선어 문학인들은 우리민족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전초병들이다. 그들은 우리민족을 위해 많은 일 많은 수고를 하였다. 마땅히 전민족이 그들을 존경하고 관심하며 도와야 한다. 민족문학을 살리는사업은 범민족적인 일이다. 그러나 실제 진행과정은 정반대이다. 이는 인간 활동의 기본이 생존투쟁(먹고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문학을 지키는 일은 민족문학 내지 민족문화의 일을 밥통으로 하는 사람(생존의 제1수요자), 또 이를 대단히 즐기는 사람(생존의 제2수요자)들의 임무로 된다. 그들이야말로 민족문학의 직접적인 주인들이다. 200만 우리동포의 대부분에게 민족문학은 먹고사는 일과 별 관계가 없으므로 생존의 제1, 제2 수요도 아니며 제3, 제4수요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더러 우리민족의 문학사업에 일조하라고 하면 당연 소극[1]적일수밖에 없다. 우리민족의 문학인들은 마땅히 자기를 터럭으로 보고 가죽-문학지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관념과 사명감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 금전을 포함해 자기를 희생하며 솔선적으로 앞장서야 한다: 작가협회의 주석, 주석단, 리사 및 회원들의 회비도 대폭 올리고 회원들은 의무적으로 <연변문학>을 2부정도 주문하여야 하고(한부는 친지에게 선물), 또 강력한 여론조성을 하여 모든 조선어 교사가 의무적으로 <연변문학>을 주문하게끔 하고…등. 이렇게 하면 우리민족의 문학지는 생존의 공간이 넓어지며 민족의 문학은 발전할수 있다. 또한 지성이 감천이라고 문학인들의 이런 노력이 보이면 우리민족의 독지가 및 광범위한 군중들이 감동되여 도와나서게 될것이다. ------------------------------------------------- [1] 이 문장은 2년전에 쓴것이지만 자기자랑을 한것 같기도 하고 광범위한 조선족 문학인과 지성인들의 반발을 초래할것 같기도 하여 지금까지 주저하며 내놓지 못하였다. 횡설수설한다는 지탄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도 우리민족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것인가를 재삼 심사숙고하다가 다시 수정하여 내놓는다.  
78    "화장化粧"그리고... (정인갑) 댓글:  조회:6520  추천:51  2008-11-24
“화장化妆″그리고…   정인갑   洞房昨夜停红烛,신방의 초불이 밤새 켜져있었다. 待晓堂前拜舅姑。시부모 뵈려고 날밝기 기다린다. 妆罢低声问夫媳,화장을 끝내고 신랑에게 살며시 画眉深浅入时无?눈섭의 색갈이 류행에 맞아요?   당나라 시인 주경여(朱庆余)의 신부의 화장을 묘사한 시다. 신방은 밤새 초불이 꺼지기 만무하다.신혼초야(洞房花烛夜)의 천륜지락이겠다.그러나 새벽녘이 되여도 초불을 끌수 없는 다른 한 원인은 화장때문이다.시집온 며느리로서 시부모의 환심을 끄는가,끌지 못하는가는 그의 평생 운명과 관계된다.시부모의 환심을 끄는 첫 고험이 바로 신혼초야후 시부모와의 만남이며 그것도 첫인상이 아주 중요하다. 때문에 일찍 일어나 품을 꽤나 들여 화장을 한것이다. 남편은 당연히 부인편이다.그러므로 먼저 남편에게 화장한 자태가 마음에 드는가를 문의한다.그러나 남편도 너무 티나게 부인의 편에서면 실례이다.그러므로 귀속말로 묻고 답하여야 한다.녀자 용모의 관건은 눈이며 눈의 관건은 눈썹화장이다.그래서 여기서도 눈썹화장에 대한 말이 오간다.하긴 중국에서는 눈썹화장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전통이 예전부터 있었다. 한무제(汉武帝)때 대신 장창(张敞)이 부인의 눈썹을 그려줘 말썽을 일으킨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화장을 화제로 하였지만 무슨 화장품으로 어떻게 화장하였나 하는,말하자면 화장의 보이는 며을 쓴것이 아니라 화장하는이의 심리상태만 썼다.신부의 처지,신부와 시부모,남편과의 같지 않은 관계,신부의 근심어린 초조한 심정 등을 섬세하게 각색하였다.실로 잘 씌여진 시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 정도의 해설은 아직 시평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다.사실 이시는 화장을 묘사한 시가 아니라 과거시험에 참가할 한 선비가 성망 높은 스승에게 청탁을 기한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 제목에 인용부호를 단 "화장"을 썼다.주경여는 자작시 100수를 가지고 장안으로 과거시험을 치르러 갔다.먼저 20수를 뽑아 후배 배려로 이름난 문호 장적(张籍)에게 선을 보여 이미 절찬ㅇ르 받았다.그러나 시험에 림박하여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장적에게 도와달라고 쓴 편지가 바로 이 시다. 시인 주경여는 자신을 신부로,시험관을 시부모로,스승 장적을 신랑으로 자신의 학업을 화장으로,자기의 학업수준을 “입시무(入时无)”로 비유하였다.이 시를 받은 장적은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이내 주경여의 본의를 알아차리고 “수주경여(酬朱庆余)”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답시를 써보냈다.      越女新装出镜心,월녀 화장하고 경호안에 나타났다. 自知明艳更沉吟。예쁘다 자부하면서도 걱정어렸다. 齐纨未足时人贵,제나라 비단 단장한들 귀하다 하랴. 一曲菱歌敌万金。채릉가 한곡조가 만금을 이기리라.     여기서 장적은 주경여를 예쁘게 화장하고 경호안에 나타난 월녀로 비유했다.주격여의 고향이 소흥,고대월국지역이고 고대월국은 미녀가 많기로 이름난 고장이다.경호(镜湖)는 소흥의 호수이름이다.또한 주경여의 시를 마름을 채집하며 부르는 채릉가에 비겼고 다른 선비들을 제나라 비단으로 단장한 사람으로 비유했으며 채릉가(采菱歌)를 부르는 월녀만 못하다고 하였다.주경여의 수준을 충분히 긍정하고 힘써 도와주겠다는 태도표시?한 셈이다. 이상의 시 두수는 절묘한 비유 ,특이한 구상 및 기발한 엄페식전달 등 예술수법으로 천여년간 많은 문학인들의 절찬을 받아왔다.내용표달면에서도 전후가 련관되고 구조가 엄밀하며 맥락이 선명하고 음미할수록 취미를 북돋는다.실로 문인,특히 시인들이 배울만한 본보기이다. 두수의 시가 제시하는 순결하고 고상한 청탁문화도 우리가 배워야 할 본보기이다.입시시험에 참가한 학생이나 학부모,출판사나 잡지사에 투고한 문인들,어떻게 도움을 청구할것인가? 또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것인가?"같이 밥이나 한끼 먹자","술 한잔 살게!"또는 돈 봉투가 오가는 속된 관습을 버리고 이상의 주경여와 장적처럼 군자의 자태로 담담하게(君子之交谈如水),고상한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사회풍기를 맑게 하여야 하지 않을가. 그럼 말 낸 김에 화장문화에 대해 몇가지 말해보자. 우선,물질문명수준이 비교적 높아진 지금 여자의 화장은 단순히 남편과 시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는것을 알아둘 피룡가 있다. 화장은 이미 사회생활의 필수요인으로 되었다.남녀간 교제할때는 더구나 화장에 소홀하면 안된다.보통 남자들이 화장에 게으르며 봉두란발에 수염이 거무틱틱한 모습으로 여자들앞에 나타는데 이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표현이므로 큰 실수다. 다음은 화장에 신경을 많이 쓰는 여자들의 화장욕에 대해 충분히 리해해주며 지지하여야 한다.남편은 부인에게 화장품을 마련해주는 일에 명심하고 돈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녀성이 예뻐야 가정이나 사회가 아름답고 환희의 정에 넘친다.전통사회에서는 남편의 옷차림이 시원치 않으면 그 부인이 욕먹었지만 지금은 부인이 저질화장품을 쓰거나 화장을 제대로 못했으면 남편이 우습게 보이는데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사족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에게 화장할 시간을 충분히 주기 바란다.례하면 녀성과 서로 만날 약속을 할때 꼭 1시간 좌우의 여유를 두는 매너를 갖추었으면 하는것이다."엎드리면 코 닿을 곳인데 10분내로 화!"하고 강요하거나 약속하자마자 여자네 집에 도착해 노크하는것은 대단한 실례이다.한번은 필자가 모 단체의 리사회를 소집하였는데 녀성리사 한분이 몸이 불편해 참석하지 않았다.회의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사전통보도 없이 그 리사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아 집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그때 당시는 병석에 누워있으므로 손님을 만나기 불편하다고 하였지만 후에 안바로는 그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그 여자는 화장에 대단히 신경을 쓰는 사람임)우리를 만나주지 않았던것이다. "녀자는 자기를 고와하는이를 위해 화장한다(女为悦己者容)"는 격언도 있지만 보통 여자들이 화장에 품을 들이는 시간은 그를 고와하는 남자에 대한 호감과 정비례된다.당산은 약속한 어느 여자와 만날 때 그 여자의 마음속에 당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그 여자의 화장정도를 통해 가늠해본경험이 있는가? 시인은 마지막 수정을 거치치 않은 시를 다르 사람이 보는것을 싫어한다.한두 단어가 다름에 따라 전반 시의 맛이 확 바뀌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녀자들도 완벽한 화장을 하기전에 다른 사람이 보는것을 꺼려한다.특히 눈썹의 너비,길이,모양 및 빛깔 정도의 섬세한 차별에 따라 그의 인물모습이 확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그러므로 화장을 채 하기전에 여자의 신변에 나타나는것은 미완성작의 시를 훔쳐보는것과 다를바없다. 한국 SBS가 이번 북경올림픽 리허설을 촬영해 사전에 방송해버렸다.마지막 화장을 끝내지 않은 여자의 얼굴을 세상에 공개한 셈이다.동업자들의 야유,중국측의 혐오(嫌恶)를 받아 당연하다.
77    모택동 신격화는 안돼 댓글:  조회:8447  추천:109  2008-10-22
모택동 아무리 위대해도 신격화는 안돼정인갑    여러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모택동’의 글을 사회의 면, 주로 관광코스에서 나타나는 부정 현상에만 국한시키려 하였다. 허나 많은 독자들이 ‘모택동’ 글에 결여된 정치-문화 면의 내용을 더욱 절박히 바라고있다. 하여 이 글을 쓰지만 이런 중대한 화제에 대하여 중문학전공인 필자의 능력으로서는 만족스러운 답복을 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학이나 사회학에 유능한 어느 분께서 앞으로 ‘모택동’이란 이 특수한 인물을 제재로 박사논문 같은 걸작을 내놨으면 하는 바람이다.    얼마전 필자는 북경대학의 한 학자와 자리를 같이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소산에서 경험한 ‘모택동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토로하였더니 그 학자는 ‘모택동은 신격화하할만 하다. 북경대학 도서관 자리를 버리고 정강산 산속, 장정의 설산 소택지(沼泽地), 연안동굴에서 누더기옷 입고 못먹으며 반평생을 바친 모택동을 일반 사람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미친 사람이 아니면 신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택동을 신격화하는데는 정치, 사상, 사회, 민심 등 여러면에서 보편적인 기초가 있으며 앞으로 이런 사조가 점점 더 심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그 원인을 대충 캐 본다.    1. 모택동은 확실히 신격화할 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모택동은 <신민주주의론>을 대표로 하는 일련의 저서로 신민주주의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창립한 장본인이다. 뿐만 아니라 반평생을 분투하여 자기의 정치 이념을 몸소 실천하여 에누리없이 성공하였다. 晩年에 착오(무산계급독재하의 부단혁명론)를 범했지만 그의 업적을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심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실로 신격화할만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다.    2. 모택동에 대한 숭배는 현체제에 이롭다. 1978년부터 개혁개방을 창도한 중공은 두 가지 걸림돌에 부딪쳤다. 하나는 모택동사상을 수호한다며 개혁개방을 반대하는 좌적인 세력이고 다른하나는 정치개혁을 하여 자본주의로 가야 한다는 우적인 세력이다. 人事 문제에서는 모택동-호남 파워와 등소평-사천파워간의 투쟁이기도 하였다. 즉 두가지 정치 견해간의 이념싸움과 두개 정치파워간의 권력투쟁이 한데 엉킨 복잡한 국면이었다.    이 복잡한 모순을 무력적 방법과 평화적 방법을 병용하여 다행히 해결하였다. 1976년 4인방 구속과 1989년 천안문 단식농성의 해결은 무력적 방법이고 화국봉과 호요방을 실각시킨것은 평화적 방법이겠다. 1989년의 천안문 사태는 영문 없이 실각된 호요방에게 사면복권을 해주자는 슬로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전반 투쟁중에서 모택동은 아주 민감한 존재였다. 너무 긍정하면 모택동-호남 파워를 제거하며 개혁개방하는데 불리하고, 너무 부정하면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될 위험이 있다. 개혁개방이 대성과를 거둠에 따라 좌적인 걸림돌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정치개혁을 실행하여 자본주의 체제로 가자는, 특히 공산당 일당독제를 부정하려는 우적인 세력의 걸림돌은 지금도 의연히 존재하며 중국공산당을 위협하고있다.    이런 정치형세하에 모택동을 긍정, 찬양, 숭배하고, 심지어 신격화하는 것은 체제 유지에 아주 이롭다. 개혁개방의 초기에 중공중앙은 홍두문건(红头文件)을 반포하여 개인숭배를 엄금하고 영수의 초상화 현괘(悬挂)까지도 엄금하였지만 사실은 모택동과 화국봉의 영향력 제거가 주요 목적이었다. 지금은 중국 도처에서 모택동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모택동 초상화뿐만아니라 모택동 조각상도 마음대로 만들어 팔아도 당국에서 제지시키지 않는다. 물론 모택동을 신격화하는 것도 방임할 것은 당연하다.    3. 향수주의(乡愁主义) 전통문화의 반영. 중화민족은 이미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사상이 짙은 민족이다. 이는 정치상 현 제도를 부정하는 반동, 보수 및 복고가 아니라 사상상 옛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므로 필자는 이를 향수주의라고 이름짓는다. 그토록 미워하던 인민공적장개석(人民公敌蒋介石)도 지금은 그리 밉지 않은 사람이 됐고 장개석의 항일을 각색한 영화도 인민들이 꽤나 선호한다. 이는 모두 중화민족의 향수주의 전통문화의 반영이겠다. 가장 동경하는 시대가 상고시대--삼황오제 또는 하상주 삼대의 大同世界이다.    개혁개방한지 30년이 됐으니 이제는 이미 지나간 시대를 동경할 때도 된 셈이다. 특히 개혁개방중 큰 덕을 보지 못했거나 소외된 계층은 더욱 향수주의 사상에 빠지기 마련이다. 좀 못살긴 해도 부자, 빈자, 강자, 약자의 구별이 없고 부화, 타락, 부정, 부패도 적으며 잘 살아보려고 아글타글 바삐 돌지도 않았던 그 때가 그립다(허나 그때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그 시대의 창조자이며 대표인물인 모택동을 그리워하며 심지어 신격화 하게 된다.    4. 민족자존심 고양의 수요. 중국은 인류 4대문명고국 중의 하나이며 중화민족은 중화문명을 창조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2,000여년의 봉건제도의 桎梏 및 근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낙오했으며 심지어 동아병부로 전락되었다. 개혁개방은 중국의 위상을 높혔으며 중국은 바야흐로 세계 버금, 으뜸의 강국으로 뜨고있다. 하여 중화민족도 세계 버금, 으뜸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욕망이 점점 강해지고있으며 이를 위해 일련의 작업에 착수하고있다.    전형적인 예로 200여명의 학자로 된 팀으로 5년간이라는 노력을 거쳐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断代工程)에 착수하여 기원전 841년부터 시작되는 중국의 신사(信史)를 기원전 2070년(하대 성립)까지 앞당겨 놓았다(그래도 기원전 2870년부터 시작되는 중동-이집트의 信史보다 800년이나 늦다). 또 이번 올림픽 개막식 출연에 4대발명에 중요한 비중을 두었다.    문제는 내놓을만한 인물이 없다. 4대발명도 발명자가 없다. 노벨상 수상자도 한사람도 없다(외국에 귀화한 화교는 있지만 별거). 문화인으로 겨우 공자를 내세우는 정도에 그친다, 정치인으로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칭키스칸 등을 거론하려 해도 영국의 크롬웰, 러시아의 뻬쩨황제, 미국의 워싱턴대통령 등에 비교도 안된다. 모택동이야말로 세계 위인으로 떳떳히 내놓을만한 자격이 있다. 민족자존심 고양이란 저의(底意)가 깔려있는 한 모택동을 신격화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5. 중국 현 문화, 민주주의 수준의 반영. 중국에는 문맹, 반문맹이 2억이나 된다. 중국은 또한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도 매우 박약한 나라다. 이런 인간일수록 개인숭배, 개인미신, 미신이 잘 먹힌다. 단적인 예로 법륜공 (法论功)과 ‘교주’ 리홍지 (李宏志)를 들수 있다. 군부대 문공단에 있던 리홍지가 제대후 사업해 돈을 벌수 없어 행여나 하여 태국에 시집간 누이를 찾아가 몇달 있다가 돌아와 법륜공을 내놓았다. 그의 감언리설(약 안 쓰고 병이 낳을수 있다는 말)에 유혹되어 불과 7년 사이에 ‘신자’ 몇천만명이나 운집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이 제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여도 그를 신격화하면 절대 안된다. 이는 과학에 대한 반동이고, 유물주의에 대한 반동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모택동신을 빙자해 금전을 챙기는 것은 또한 윤리상의 타락이다. 중국공산당은 절대 공식적으로 모택동의 신격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모택동 자신도 구천하에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1960~70 년대 중국에서 모택동을 신격화했기 때문에 망당망국(亡党亡国)할번 하였으며 우리는 이 교훈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보편적 의의가 있는 피의 교훈이다.
76    모택동,다시 인간에서 신으로? 댓글:  조회:7866  추천:94  2008-10-11
모택동,다시 인간에서 신으로?정인갑모택동이 중국혁명의 탁월한 수령이며 중국력사상의 위인임은 누구나 다 공인하리라 본다. 그러나 신(神)으로부터 인(人)으로 변한 모택동이 다시 신으로 변하고 있다는 화제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모택동은 1921년 창당 멤버로 중국공산당 보통 당원이 되였고, 1935년 준의회의를 거쳐 중국공산당과 중국공농홍군의 최고지도자 지위에 올랐으며 1949년에 중국의 일인자가 되였다. 1951년 진백달 저《모택동사상을 론함(论毛泽东思想)》 으로부터 이대올로기의 도사(導師)로 승급되였고 1959년부터 림표의 설교와 고취 (鼓吹) 및 인민들의 종교광적인 개인숭배와 미신으로 점점 신으로 되였다.    ‘모택동사상은 당대 맑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다(毛泽东思想是当代马列主义的顶 峰)’‘모 주석의 말은 한마디가 만마디에 해당된다(毛主席的话一句顶一万句)’‘모 주석은 세계 몇백년 , 중국 몇천년 동안에 나타난 유일한 위인이다(毛主席是世界几 百年、中国几千年只出现一个的伟人)’‘모주석의 말은 리해되도 집행하고 리해되지 않아도 집행해야 한다(毛主席的话理解的要执行,不理解的也要执行)’…. 모택동을 신으로 만든 림표의 언론들이다.    신격적인 모택동 때문에 중국력사상 전례없는, 10억 인민의 대동란 문화대혁명비극이 빚어졌다. 1976년 모택동이 서거된후 당시 중국의 일인자 화국봉은 모택동을 계속 신으로 모시려 하였으며 ‘두가지 무릇’을 내놨다: “무릇 모택동의 결책이면 단호히 수호해야 하며 무릇 모택동의 지시면 시종 어김없이 따라야 한다(凡是毛主席 作出的决策,我们都坚决维护,凡是毛主席的指示,我们都始终不渝地遵循).”    1978년 10월 행해진 중앙회의 및 이어 거행한 중공 11기 3차 전원회의에서 등소평을 수반으로 하는 중공 지도자들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은 실천이다’ 라는 철학론단을 재확인하고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범한 과오를 청산하였으며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다. 회의기간 북경시민들은 서단민주벽(西單民主墻)에 ‘모택동은 인이지 신이 아니다(毛泽东是人,不是神)’라는 집채만큼 큰 대자보를 써붙혔다. 이렇게 모택동은 신으로부터 인으로 되돌아왔다.    모택동 서거 20주년인 1996년 북경시 모 기자가 소중고교학생들(모택동이 서거한 후 출생한 사람들)을 상대로 모택동의 사진을 보이며 ‘이 사람이 누군가?’라는 질문을 하니 약 절반이 잘 모르겠다고 답복하였다고 한다. 모택동이 오른손을 처들고 있는, 중국인민을 호소하는 상징의 사진을 보이며 ‘이 사람 지금 무엇 하나?’라는 질문을 하니 적지 않은 소학생들이 ‘택시를 부르고 있는것이 아닐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듯 신화의 존재였던 모택동 신이 이젠 정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보통 사람이 됐구나 하며 필자는 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모택동이 다시 신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필자는 경악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 9월중순 필자는 모택동의 고향 소산(韶山)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모택동을 신으로 만드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지 않겠는가!    신A. 모택동 동상을 관광할 때 가이드 왈: 1997년 동상건립 4주년을 기념해 心连心 예술단이 연출을 하러 왔는데 비가 그냥 오다가 연출 시작을 선포하자마자 이내 비가 멎고 날이 개였다. 모택동이 우리를 돕고 있다. 모택동은 정말 신격적인 존재다.    신B. 모택동 가족 사당을 관람할 때 가이드 왈: 모택동은 1927년 9월 9일에 남창기의군을 거느리고 정강산에 갔고 1949년 9월 9일에 중남해에 입주하였으며 1976년 9월 9일에 서거했다. 그래 모택동이 신이 아니란 말인가!    신 C. 소산 뒷산위에 ‘干石娘(돌수양어미)’이란 곳이 있다. 모택동이 청년시절에 암석 하나를 수양어미로 모시고 때때로 찾아가 행운을 빌었다는 곳이다. 지금 그 옆에 사당 같은것을 하나 지어놓고 관광객들이 들어가 빌게 한다. 가이드 왈: 모택동이 위인으로 되는데는 이 돌수양어미의 공로가 클것이다. 자! 여러분 자기의 운명을 빨리 이 돌수양어미에게 기탁하라!    신D. 식당에서 가이드 왈: 모택동이 즐겨먹고 출세한 음식 尖椒炒肉丝、红焖肉이다. 이 곳에서 이 음식을 먹고 출세해 보자(먹어보니 값은 비싸고 맛이 없다).    이런 선전만 하는것이 아니다. 사당과 돌수양어미의 경우 관광객들로 하여금 먼저 모택동초상화에게 절을 세번 하게 한후 꿇어앉히고 갖은 푸념을 한다. 이런 와중에 농민, 학생이나 돈이 없어보이는 자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데려나간다. 나머지 사람에게 누런 부적을 나누어 주며 모택동에게 성의것 돈을 내고 행운을 빌라고 유인한다. 그러면서 장내를 신격적인 분위기에 휩사이도록 바람잡으며 마치 한국 교회의 부흥설교에 빠진 기분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갑짜기 정신이 몽롱해지며 지갑에 있는 돈을 털어내 부적을 가진다. 적어서 200~300원, 많으면 1,000원이상이다. 개중에는 맑은 정신으로 ‘이렇게 돈을 갉아먹는 수작을 피우다니’하며 피할 생각을 하는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어귀에는 몇 사람이 버티고 서서 나갈 틈을 주지 않고 가이드와 사당 운영자가 짜증을 낸다. ‘아따! 이사람, 모택동에게 복을 비는데 그렇게 아깝나?’모택동은 확실히 신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신이 1960~70년대의 신과 다르다면 전자는 산 신이고 후자는 죽은 신이다. 전자는 정치신이고 후자는 재물신(财神)이다. 전자는 중공 령혼의 신이고 후자는 소산 인민의 신이다….     소산은 농업지역의 조그마한 읍이며 찌들게 가난하다. 모택동이 생전일 때는 중국이 아주 어려웠으므로 돈을 들여 어쩔 여지가 없었다. 모택동이 사망된 후 국가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거금을 들일리도 만무하다. 장사에서 불과 100여킬로밖에 안 되지만 기차를 타면 株州를 거쳐 돌아가기 때문에 2시간반정도 걸린다. 자금 부족으로 10년가량 건설했다는 고속도로를 아직 20킬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고속버스를 타도 2시간 걸린다.    필자가 소산에 간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1992년 10월경 필자는 한국 기자와 같이 소산을 취재한적이 있다. 우리가 탄 택시가 소산에 거의 도달할 무렵 경찰 한사람이 불쑥 나타나 택시를 세웠다. 다짜고짜로 택시를 낱낱히 수색하더니 한달에 한번씩 검사를 받은 서류 한장이 모자람을 발견하고 택시를 못가게 하였다. 택시 기사가 중화(中华)표 담배를 련속 권하며 놓아달라고 애걸한다. 그는 담배를 받아 피우면서도 놓아주지 않는다. 약 40분이 지나자 조급해진 한국기자가 돈 100원을 기사에게 주며 눈짓하였다. 그 돈을 경찰에게 주자 서슴없이 지갑에 넣더니 ‘앞으로 주의해’라는 말 한마디 던지며 놓아주었다.    모택동이 人인 시절, 돈을 챙기는 방법이 아마 이런식인가 보다. 40분에 겨우 100원밖에 못 챙기는, 꾀나 힘겨운 방법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모택동을 신으로 만들어 돈을 챙기는 방법, 잘하면 한시간에 1만원이상도 챙길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소산이 많이 세련되여가고 있다. 모택동 동상앞의 광장도 지금의  몇배 크기로 증축하고있다. 몇천명이 꿇어업딜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있다.    신을 빙자해야 돈을 가장 쉽게 모으는듯 하다. 몇년전 필자는 해남도 동산(东山)의 동묘(东庙)를 관광한적이 있다. 가이드는 우리를 안내하며 부지런히 푸념을 하였다: ‘애국명장 악비의 스승 리강(李纲)이 해남도에 류배돼 왔을 때 중이 되려고 동묘에 찾아갔다. 그런데 절의 주지가 점을 쳐주며 당신은 아직 운이 귀한데 왜 중이 되려고 하느냐 하며 말렸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후 그는 조정에 불리워가 재상이 되였다. 한어 “동산재기(东山再起)” 성구의 출처가 바로 이 장고 (掌故)이다.’    동묘에 들어가니 스님 8명이 점을 쳐주는데 가이드의 말에 홀깃한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점을 친다. 스님은 상대방의 경제력에 따라 160원짜리 향을 두개 피우라(최하 표준), 천원짜리 부적을 받아라, 4천원짜리 부적함을 받아다 집에 놓아 보라라는 건의를 한다. 우리 일행 12명은 최소 천원, 최고 4천원정도의 돈을 탕진하였다(유독 필자만이 응하지 않았다).    돌아와 력사재료를 낱낱히 훑어보았으나 리강은 악비의 스승도 아니고 해남도에 류배간적도 없다. 또한‘东山再起’의 출처도 해남도 동산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 중국 대륙의 방방곡곡에서 이런식으로 금전을 긁어모으는 바람이 불고 있다. 상기는 그중 한가지 례에 불과하다. 관광지와 가이드의 비렬한 작태에 격분하며 이런 병폐를 방임하는 당국을 리해할수 없다.    빙자한 신은 대개 석가보니(불교), 로자(도교), 모함모데(이슬람교)나 예수(기독교) 등이고 이 외에 일부 토착종교나 미신이 섬기는 신들이다. 바야흐로 이에 모택동도 끼워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소산에서 섬기고있는 모택동 신이 불원간 모택동이 생전에 활동한적이 있는 기타 지역으로 확산될것이다. 또한 모택동을 신으로 만드는 스토리가 점점 많아질것도 당연하다.
75    "정치군" 댓글:  조회:5891  추천:74  2008-09-30
"정치군" 정인갑‘-군’이라 쓰고 ‘-꾼’으로 발음하는 접미사가 있다. ‘길군(꾼)’의 준말로 놀음 또는 어떤 일에 길이 익어 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도박군, 술군, 일군, 사냥군, 농사군, 나무군, 장사군, 사기군, 협잡군…’등이다. ‘정치군’이라는 단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냥군은 산속에 들어가 멧돼지나 노루나 산토끼 몇 마리쯤을 여사로 잡아온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산속에 들어가 하루종일 헤매도 짐승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자도 있다. 사냥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군은 술을 많이 마시고도 재미있게 수다를 떤다. 주량이 꽤 있지만 건배 몇잔에 녹아나 벌렁 자빠지거나 토하는자도 있다. 술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이 되려면 우선 어릴 때부터 그 일에 종사해야 한다. 한국의 례로 병역필하고 대학, 대학원 나오고 업체의 종업원 몇년 한후 30대후반부터 개인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은데 성공하기 어렵다. 나이를 지긋이 먹고 시작하면 장사군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살 좌우에 개인사업을 시작한 향항사람에게 이기기 힘들다. 둘째는 그 일을 장기적으로 한 경험이 있어 길이 들어야 한다. 정치는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가? 농예가, 농업가와 농사군간의 차별처럼 정치도 분공별 할 일이 제가끔이다. 리론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정치학자가 하고 정치 리념과 주의(主義)를 내오고 정치주장을 고취하고 정치이벤트를 조직하는 일은 정치가나 정객이 한다. 정치리념이나 정치활동과 큰 관계 없이 정치단체나 행정기관의 간부직에서 실천적으로 복잡한 내외모순을 해결하며 특히 사람을 다루는 일은 정치군이 해야 한다. 이런 일을 정치학자, 정치가 또는 정객에게 시키면 잘 할수 없다. 물론 모택동과 같이 정치가와 정치군을 한몸에 지닌 사람도 있지만. 정치군도 어릴 때부터 장기적으로 해야 고수(高手)가 될수 있다. 중국국가주석 호금도를 살펴보자.1965년 대졸후 최말단 정치보도원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올라가 2004년에 국가 1인자가 되였다. 장장 40년이 결렸다. 중국의 간부들은 거의 기층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고위층까지 20~30년 걸리며 천에 한사람정도밖에 못 올라가고 중앙급까지 30~40년이 걸리며 만에 한사람정도 밖에 못 올라간다. 20~40년간 온갖 정치풍파를 겪었고 문혁때 심지어 군중의 투쟁도 받고 옥살이를 한자도 허다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으로 양으로 그를 배격하거나 심지어 모해 했을 것이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아첨했겠는가! 금전과 미녀의 유혹도 여간했겠는가! 인맥에 잘못 서도 단번에 관로가 끊어지기 일쑤다. 이런 시련을 거치고 올라간자들은 실로 모두 9단급 고수 정치군들이다. 정당도 정치군급 정당과 정치군급이 안 되는 정당이 있다. 중국공산당을 례로 들면 1919년 공산주의소조로부터 1949년까지 30년에 거쳐 성숙된 반체제, 반정부의 야당정치군이 되였고 1978년까지 유치한 여당으로부터 정치군여당이 되는데 30년이 걸렸으며 2008년까지 나라의 건설과 현대화를 할줄 아는 정치군으로 되는데 30년이 걸린 셈이다. 야당의 반대를 허용하고 자기비판에 성숙된-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처럼 여당과 야당을 각각 수없이 한-고수 정치군급 정당이 되려면 아직 길이 멀다. 한국의 상황을 보자. 리승만은 정치가이고, 박정희, 전두환과 로태우는 군인이다. 모두 정치군이 아니므로 대권 운영에 실수를 너무 많이 하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정치군으로서 여당노릇을 하려니 잘하기 만무하다. 리명박도 장사군으로부터 정치군이 되자면 아직 멀었다. 대권을 쥔지 반년이 넘었지만 실수를 거듭하는 원인이 장사군기질로 정치군이 할 일을 하는데서 생긴것도 많다. 한국은 쩍하면 대학교수나 대학총장을 국무총리나 장차관에 올려놓는다. 이번 리명박은 심지어 고수 정치군도 해내기 어려운 인수위 책임자도 대학총장에게 맡겼다. 또한 총리나 장차관은 임기도 없으며 심심하면 한번씩 바꾼다. 길어서 1년정도, 짧으면 몇달, 심지어 몇주안에 바꾼다. 그들이 얼굴마담에 불과하지 어디 국무총리, 장차관인가! 한국의 정당은 더 황당하다. 정치군급정당이 하나도 없다. 정당이 領袖(대권자)를 키우는것이 아니라 령수(대권자)를 만들기 위해 정당을 만들며 대권자가 하차하면 정당도 없어진다. 리승만/자유당, 전두환/민정당, 로태우/민자당, 김영삼/신한국당,   로무현/열우당 등 주마등식으로 하나하나 없어졌다. 한국은 정치군은 적지만 정치가와 정객이 많은것이 흠이고 중국은 정치군은 많지만 정치가나 정객이 거의 없는것이 흠이다.
74    중국인들의 혐한 감정,왜 생겼을가 댓글:  조회:6081  추천:102  2008-09-02
중국인들의 혐한 감정,왜 생겼을가정인갑이번 북경올림픽 때 중국인들이 혐한(嫌韓) 감정을 노골적으로 발사하였다. 한국팀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팀간 경기할 때 중국인들이 무조건 상대팀을 응원하며 한국팀에게는 야유의 정서를 내뿜었다. 심지어 한국팀과 일본팀간에 경기할 때도 일본팀을 응원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마음이 불안하며 중국조선족들도 속이 개원치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에게 중국인들의 혐한 감정이 생긴 원인을 문의하지만 필자도 그 원인을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단 아래의 다섯가지 사건과 관계될것이라고 보며 한국인들이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1, 한국이 단오절을 인류문화재로 인정해줄것을 유네스코에 신청한 일.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이 중국문화를 훔쳐다가 자기의것으로 둔갑시켰다고 항의하고 있다. 2, 한국이 침구술(針灸術)을 인류문화재로 인정해줄것을 유네스코에 신청한 일.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이 중국문화를 훔쳐다가 자개의것으로 둔갑시켰다고 항의하고 있다. 필자 왈: 중국인들이 필자를 한국과 사촌쯤 되는 관계로 보고 상기 두 가지 문제로 필자를 야유할 때 필자는 이렇게 변명하곤 하였다: “상고시기 조선반도도 중화문화권에 속한다. 즉 단오절, 침구술을 포함한 중화문화의 창조에 같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유야무야된 단오절을 한국에서는 진일보 발전시켰으니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재로 신청할만도 하지 않는가?” 필자의 이런 해석에 중국인들중 일리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한국은 한국의 상고문화를 중화문화권으로 보지 않고 독자적인 주체문화로 보고있다. 즉 인류의 4대문명고국, 4대문화권이 5대문명고국, 5대문화권으로 되는 셈이다(말도 안된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한국이 단오절이나 침구술을 '훔쳤다'고 볼수밖에 없다. 3, 한국이 중국이 장족(티베트족)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으므로 올림픽을 개최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한 일.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본노하며 심지어 서울 성화봉송 때 중국류학생이 한국시민단체를 구타한 비극도 발생했다. 4, 당나(唐娜, 한국명 唐藝序)가 중국선수와 한판 겨루려고 한국국적에 가입하고 올림픽 탁구경기에 참전한 일. 많은 중국인들이 당나는 매국적이고 한국이 마땅치 않다고 보고있다. 필자 왈: 많은 사람들은 중국탁구선수가 세계 허다한 국가 팀에 들어가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므로 당나가 문제될것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첫째, 중국과 한국은 같은 유교문화권의 나라이고, 둘째, 다른 나라는 대개 탁구의 불모지이지만 한국탁구는 중국탁구의 가장 강한 라이벌이다. 5, SBS가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을 훔쳐촬영하여 텔레비전 방송에 공개한 일, 중국인, 중국 당국, 심지어 국제 여론은 이를 상식이하의 졸렬한 행위로 보고있다. 6, 한국 텔레비전의 중국을 너무 터무니없이 헐뜯는 보도로 인하여(사천 지진 건, 서장 건, 올림픽 건 등)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과 정이 멀어진다고 한다. 상기의 6가지 건과 문제가 중국인이 한국을 혐오하는 원인으로 됐을 가는성이 많다고 필자는 본다.
73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댓글:  조회:5846  추천:93  2008-07-3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정인갑1979년인지 연길에서 수학경기를 치르고 23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에게 우수상을 발급한 일이 있었다. 22등까지는 모두 조선족이고 23등에 한족이 1명나타났으므로 민족단결의 의미에서 그렇게 한것이란다. 조선족의 교육수준은 이렇듯 높았다. 그러므로 옛날 한어로 대입시험을 치러도 한족을 포함한 다른 민족보다 대학에 훨씬 많이 붙었다. 즉 자기가 먹어야 할 몫보다 훨씬 많은 량을 찾아먹은셈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필자는 천만 한어로 대입시험을 치르자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대입시험을 한어로만 치러도 안 된다. 그러면 중소학교 학생들이 조선어를 포기할 것이며 조선족의 생사존망에 위기가 온다. 다른 과목은 한어로 치르고 어문만은 한어문과 조선어문을 모두 치른후 평균점수를 내야 한다. 조선어문 90점, 한어문 66점을 맞았다면 (90+66)/2=78 점이다. 대입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한어와 조선어를 모두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한어성적과 조선어 성적의 비례를 5:5로 례를 들었지만 상황에 따라 그 비례를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족학생의 조선어 수준이 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는 민족발전을 도모하는 途程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13억안의 200만이라는 조선족을 말할때 민족성의 固守와 개개인의 발전은 대립통일체이다. 민족성의 고수만 강조하면—조선족마을에 묻혀있는 것이 선처이고—개개인의 발전에 불리하고, 개개인의 발전만 강조하면—內地 또는 국외로 진출하게 되고—민족성의 고수에 불리하다. 이 량자를 잘 통일시켜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선 개개인의 발전, 후 민족성의 고수여야 한다. 인류의 가장 기초적 활동은 의식주의 개선을 위한 생존 투쟁이지 민족성의 고수나 다른 무엇이 아니다. 만약 민족성의 고수가 의식주조건 개선의 생존투쟁과 엄중히 저촉된다면 부득불 민족성의 고수를 포기하게 된다. 이는 어떤 주관의지로도 개변시킬 수 없는 객관적인 철의 規律이다. 조선족이 조선어 수준은 좀 떨어지더라도 한어수준을 높이고 개개인의 충분한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개혁개방이래 조선족이 중국내지, 외국으로 밀물처럼 흘려나가 많은 조선족 마을이 해체되고 학교가 폐교된다. 이런 시점에서 볼때 조선족에게 한어 수준을 높이는것이 조선어 수준을 높이는것보다 급선무다. 한어를 희생하면서까지 조선어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더욱 의미가 없다. 어떤 개혁이든 사회의 어떤계층은 득이 차려지므로 옹호할 것이고 어떤계층은 실이 생기므로 비난할 것이다. 1960년대 필자가 사는 마을 생산대에서 뜨락또르를 사는가 마는가를 운운할때 가장 반대하는자가 마차부였다. 1960년대 말부터 중국은 로어 교육을 점점 영어교육으로 교체하였다. 당연 로어 교원들의 불만이 가장 컸다. 필자의 주장대로면 아무래도 한어의 지위가 올라가고 조선어의 지위가 떨어지기마련이다. 조선어밥을 먹는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일으킬것은 당연하다. 조선어밥을 먹는 사람들이 조선족에 관한 정책결정에 주요한 작용을 하므로 ≪제도≫의 개혁은 쉽지 않으리라 본다. 필자는 중문밥을 먹는 사람이므로 필자의 주장에도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관건은 조문밥을 먹는자 또는 중문밥을 먹는자의 편견을 떠나 민족의 발전과 흥망을 위하는 객관적인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선 아래와 같은 필요한 조사연구를 할수도 있겠다. A 1979~2008학번에 붙은 조선족 대학생은 모두 얼마나 되는가? 한족에 비해 인구비례당 승학률이 얼마 높은가? B 그중 대학원에 진학하였거나 대학교수, 국가급 연구기관 연구원으로 있는자는 얼마나 되는가? C 조선족 대학생 학습성적이 학급의 상위, 중위, 하위에 속하는 백분비는? D 대학에서 영어과목을 배워 4급이상을 딴 조선족 대학생은 얼마인가? E 대학 재학시 보충시험을 치른자, 졸업장을 받지 못한자, 락제과목이 많아 제명당한자가 얼마인가? F 조선족 대졸생(졸업 5년, 10년, 15년, 20년, 25년별)들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타인의 손을 빌지 않고 자신의 저서나 역작을 출판할 능력이 있는자가 얼만가? G 조선족 교수, 연구원, 처급이상 국가간부중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자가 얼마인가? 그 원인은? H 각급 민족사무위원회 조선족간부, 교육을 책임진 조선족간부, 교육학원 조선족 교원, 소중고교 조선족 교원의 자제가 한족학교에 다니는자가 얼마인가? 그 원인은? I 조선족학교에 보낼 조건이 구비된 조선족으로서 한족학교에 다니는자는 얼마나 되나? 그들의 지력수준은 상위, 중위, 하위 어느 부류에 속하는 학생이 많은가? J 조선족학교 교원과 한족학교 교원간 수준상의 차이는 얼마나 되나? 그중 한어교원의 수준 차이는 어떤 정도인가? K 한족촌장, 향장과 대등한 수준의 조선족 촌장, 향장은 얼마나 되는가? …. 지금 우리 민족은 시대의 전환기에 처해 있다. 새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많은것을 개혁하여 그에 적응해야 한다. 100여년간 유지해온 조선족 공동체의 모든것에 대해 재조명을 한 후 계승할것은 계승하고 개혁할것은 개혁해야 한다. 본문에서 필자는 조선족교육공동체 대한 개혁 견해를 피력하였다. 국가 각 기관에서 일하는 조선족간부, 민족정책에 參政議政權이 있는 조선족 어르신들께서 민족의 대계를 위해 많이 참고해주시기 바란다. 광대한 조선족 군중들도 이 문제에 관한 토론에 용약 참여해주시기 바란다.(끝)《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  글 싣는 순서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2.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72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댓글:  조회:5603  추천:73  2008-07-29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정인갑A, 조선어문을 조선어로 개혁해야 한다. 어문교육에는 “어”교육과 “문”교육 두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어”는 발음, 철자, 단어나 문장의 뜻, 문법… 등이다. “문”은 작품의 저자, 시대배경, 주제사상, 단락의 구분, 각 단락의 주제, 서술방법…등을 일컫는다. 그중 “문”은 조선말 구사능력제고와 큰 관계가 없다. 현행 교육을 보면 “문”을 조선어와 한어에서 이중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시간랑비이다. “문”을 일원화하여 한어과목에서만 취급하고 조선어 과목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선어와 한어에서 적지 않게 같은 작품을 취급하므로 일원화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조선어와 한어에서 다 취급되는 작품 로신의 ≪사소한 사건≫,모순의 ≪백양례찬≫을 례로 들면,. 현행 교육은 먼저 조선어과목에서 이 작품들의 “문”을 취급하고 몇년후 한어과목에서 또 똑같이 취급하게 된다. 만약 어문교재를 한어교재로 사용하면(본문 B 참조)심지어 오전에 조선어과목에서 취급한 “문” 내용을 오후에 한어과목에서 다시 취급하게 될수도 있다. 현행 조선어과목은 “어”와 “문”이 각각 절반 정도 점한다. 만약 “문”을 취급하지 않으면 절반 시간만으로도 현유 조선어 수준을 보지할 수 있다. 조선어를 1년에 320시간 정도 수업하는데 그중 “문”을 취급한 시간 160시간을 떼내여 약 80시간정도는 한어과목에 쓰고 약 80시간 정도는 조선어 “어”에 돌리면(조선어 과목이나 과외도서를 많이 읽고 외우고 옛말, 웅변 등 콩믈을 하는 등)조선어 수준도 한어 수준도 다 현재 수준보다 퍽 높아질수 있다.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어교원 교학참고서에 “문”의 내용이 대량이고, 조선어 우수교원의 강의를 견학해보면 “문” 교육으로 장끼를 부리기 일쑤다. 조선말 수준 제고에 큰 작용을 할수 없는데 말이다. B, 한족학교의 어문교재를 우리 같은 학년의 한어교재로 써야 한다.한어교육을 강화하여 한족과 대등한 한어수준이 되여야 한다는것이니까 한족과 같은 교재를 써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대등한 교재를 쓸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필자를 반박하는 어떤 분들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어문 교재를 우리의 한어교재로 쓸수 없다고 한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1963년 필자가 무순시조선중학교 고중 1학년때 한족학교 고중 1학년의 어문교재를 한어교재로 썼다. 료녕성교육학원과 료녕성교육국에서는 연변교육출판사의 교재를 써야 한다는 명령을 우리학교에 거듭 내렸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자 료녕성교육학원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우리학교에 와 1개월간 조사하였다. 결과 쓸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우리는 3년간 줄곧 어문교재를 한어교재로 채용하였다. 지금 필자의 괜찮은 한어수준이 거기에서 기인되였을지도 모른다. 그때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 조선족의 한어수준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연변 각 학교의 한어수준도 1963년 무순시조선중학교의 한어수준을 훨씬 초월한 상황이다. 그런데 어문교재를 한어교재로 쓸 수 없단 말인가! 지금 적지 않은 조선족이 한족학교에 다니는데 어문 과목을 어려워 못배우겠다는자가 없지 않은가! 중국에 류학온 한국 소중고교 학생들도 어문교재로 한어를 배우는데 처음에는 어려워하지만 한동안 지나면 다 대충 따라간다. 그들보다 수준이 퍽 높은 조선족이 어문교재를 어려워 쓸 수 없다는것은 말도 안 된다. 필자가 조사해본데 따르면 학생들이 배워낼수 없는것이 아니라 한어교원의 수준이 미달이다. 어문교재중의 고한어를 가르칠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수준이 낮다고 밀어붙인다. 사실 한어교원의 수준을 제고시키는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쉽게 해결할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려하지 않고 천천 만만 우리 자녀들의 한어수준 제고를 제한시키는것은 너무나 어불성설이다. C, 3년×4=12년의 방법을 실시하자. 즉 소학교 1~3학년 3년은 재래식 전통방법으로 수업하고, 4~6학년 3년은 한어만을 한어로 수업하며, 초중 3년은 조선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은 한어로 수업하고, 고중 3년은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하는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소학교 4학년 이상의 한어교원은 적어도 한 학교에 1명 이상의 한족 교원을 영입할 필요가 있다. 대입시험을 한어로 치르고 한어수업시간을 늘이며 방법C까지 채용하면 조선족 고졸생의 한어수준은 엄청나게 제고될 것이다. 심지어 한어로 사고하는 능력를 갖추거나 그에 거의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  글 싣는 순서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2.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71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댓글:  조회:5631  추천:113  2008-07-28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정인갑 조선족은 100여년이라는 이민 력사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문화수준이 주위의 다른 민족보다 높았고, 농경민족으로 90%이상이 조선족공동체의 특수한 범위안과 계획경제속에서 활동하였으므로 한어수준이 낮아도 큰 애로 없이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체제 수립후 상황이 달라졌다. 90%이상의 젊은 세대들이 민족공동체를 떠나 중국內地, 국외로 확산되고 있다. 새 시대는 조선족의 한어수준을 급속히 제고시킬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시작되는 1978년 같은 해에 한어수준 제고에 역행하는 ≪제도≫가 출범하였다. 이는 조선족의 출로에 큰 음영을 끼쳤다. 어떤 사람은 “많은 조선족이 언어 우세로 한-중간의 가교역할을 하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은 통역을 담당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라며 필자를 반박할것이다. 만약 조선어를 잘한다는 타민족이 “식사를 먹고(하고)”, “직장일이(을) 끝내고”, “나에게 책을 주라(달라)”라는 식으로 말하면 웃음거리다. 한번은 조선 피바다극단이 북경중조우호농장을 견학할때 한족 통역의 입에서 “어머니돼지(굴암퇘지)”, “아버지돼지(씨돼지)”라는 말이 튕겨나와 연예인들이 배를 끌어안고 한참 폭소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조선족이 한다는 한어에도 이런 오류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한족이 조선어를 잘봇 하는 것보다 더 문제가 된다. 조선족이 하는 한어는 어디까지나 마땅히 잘 하여야 할 국어(보통화/공동어)이고 한족이 하는 조선어는 외국어이므로 량해를 받을 수 있기때문이다. 언어는 미묘하고 예민한 존재이다. 말하는 사람은 작은 흠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큰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조선족의 한어 약점은 자기의 이미지, 사업상의 성과, 간부 승진 등에 큰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조선어의 중요성을 력설하는자들은 한국과의 경제거래, 한국기업에 취직 등 출로를 대서특필하는데 사실은 별거 아니다. 북경의 경우 미국, 일본, 유럽, 심지어 국내 무역에 종사한 사람보다 오히려 돈을 못 번다.  조선족이 한국기업에 많이 취업하고 있는것 같지만 문제점이 많다. 보따리장사꾼이나 령세업체에 취직하는자가 대부분인데 임금을 제대로 못 받는자, 사기당하는자가 많고 쩍하면 한국사장이 증발해버리므로 실직 당하기 일쑤다. 실력회사, 특히 재벌그룹들은 조선족을 되도록 적게 쓰려고 애쓴다. 그 주요 원인이 한어, 중국문화, 인맥에 약하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족의 조선어 수준은 좀 낮더라도 한어수준이 높으면 한국재벌그룹에 취직하는 자가 몇배로 늘어날것이다. 1993년 왕진(王震) 부총리가 사망되였을때의 일이다. 한국 모 재벌그룹의 사장이 왕진의 아들 왕군(王軍)에게 보낼 조문(弔文) 원고를 해당그룹 중국지사에 의뢰하였다. 중국지사에 명문대를 졸업한 조선족이 수두룩한데 누구에게 시켜도 쓰지 못해 필자의 손을 빌은 적이 있다. 한국경제의 침체, 중국경제의 급성장, 한어를 아는 한국인과 한국어를 아는 한족의 급속한 팽창 등으로 조선족은 이내 각광을 잃게 된다. 몇년안으로 한국과 경제거래하거나 한국기업에 취직하는 조선족은 기하급수로 내리막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한국만을 바라보며 조선어 교육을 중요시하고 한어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실로 원견이 없는 처사다. 그러면 조선어 자체로 출세한자는 대체 얼마나 됨즉한가? 1948년부터 지금까지 60년간에 출세한자를 대충 헤아려보자. 문학가로 인정받은 자를 누계 120명으로 봐도 1년에 평균 2명꼴, 대학 조선어교수가 된자를 누계 300명으로 봐도 1년에 5명꼴, 출판, 방송분야의 조선어편집으로 된자를 누계 900으로 봐도 1년에 15명꼴…. 년 평균 22명정도, 그것도 좀 과장된 숫자이다. 이 22명을 위해 수천, 수만의 조선족이 한어를 희생하는 대가로 조선어에 몰두할 필요가 있겠는가? 외국에 진출한 조선족의 매너는 영어와 한어를 잘 하면서 조선어를 알아야 하는데 있을것이다. 연변대학 조문계를 졸업하고 북경에서 활약하다가 한국 대학원에 류학간 한 친구의 말이다. 조선어 전공을 졸업했다고 하니 한국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조선어를 배웠댔자 얼마 배웠겠느냐—한국에서 국어를 배운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고—라는 눈길로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중국 어느 대학의 중문계 또는 다른 계의 졸업장, 하다못해 말단 대학의 졸업장이라도 하나 만들어 줄 수 없느냐, 그러면 자기는 한국에서 허리를 좀 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는 한국 대학의 중문계를 졸업한 대만인이 대륙에서 한어 인재로, 일본 조총련계통 학교만 다닌 조선인이 한국에서 조선어 인재로 대접받기는 만무한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족이 한국, 미국, 일본…등 나라에 가서 중국과 관계있는 회사나 기관에 취직하였다고 하자. 만약 해당 회사나 기관에서 그더러 중요한 공식 문서를 주며 중국어로 번역하라고 할 때 “나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한어에 약하므로 이 일을 원만히 완수할 수 없다”고 하면 이내 그를 중국관계 고급 인재에서 배제해버릴 것이 아닌가! “중국 조선족은 한어수준이 한족들 못지 않게 높다. 또한 조선어도 괜찮다.” 만약 조선족에게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면 국제사회에서 조선족의 이미지는 대단히 좋아질 것이다.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  글 싣는 순서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2.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70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댓글:  조회:6244  추천:79  2008-07-27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정인갑조선족의 한어 수준이 정말 낮은가? 정말 절음발이 인재라고까지 할수 있는가? 필자는 확실히 그렇다고 긍정하련다. 단 다시한번 강조할 것은 필자가 말하는 조선족은 소중고교를 조선족학교에 다녔거나 조선어로 대입시험을 치른자만을 일컫는다. 몇해전 북경에서 행해진 어느 세미나에서 필자가 조선족의 한어수준이 낮다고 말하였다가 모 조선족 교수로부터 반박당한 적이 있다: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 연변 아줌마들이 “니디(你的), 워디(我的)“ 하며 상해, 광주 등으로 드나들며 보따리 장사로 돈을 잘 버는데 그들보다 배운것이 많은 우리의 한어수준을 낮다고 평가할수 있을소냐!” 높고 낮음은 물론 상대적이므로 그 교수의 말에 일리가 있음즉도 하다. 그러나 조선족의 한어 수준이 재미 동포의 영어수준, 재일동포의 일어수준, 재로동포의 로시아어 수준보다 낮은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또한 지성인의 경우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보다 낮다. 1982년 1월 상해문예출판사에서 ≪朝鮮族民間故事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한적이 있다. 조선족과 한족이 함께 번역에 참가하였으며 필자도 10편 번역하였다. 그런데 조선족이 번역한 작품 대부분이 수준미달로 출판사로부터 “퇴”짜맞아 다시 한족들의 손을 빌어야 했다. 물론 조선어식 한어가 주된 문제점이였다. ≪제도≫를 실행한지22년이 된 1999년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에서 한국 모 유명한 재벌그룹 사장의 회고록이 번역 출판되였는데 오역 또는 적절치 못한 번역이 수없이 많다. 아래에 그 일부를 렬거한다. ( )안의 것은 번역 원문이고 [ ]안의 것은 그에 대한 필자의 수정문이다. 再走一个半小时,就到了(柑树)[柿子树]成林的峨山里…P1 我(活)[长]这么大,无论做什么事情,总是听到…P32 …以避免因缺水泥而导致的(误工)[窝工]现象。P48 (军纳公司)[军工企业]市场逐渐萎缩。P64 已征购蔚山市杨亭洞七百番地一带(土地)[地皮]…P95 我忙碌于汉城和蔚山之间,一半时间(睡)在汉城[过夜],一半时间(睡)在蔚山[过夜]。P140 朱拜勒工程按1976年(换率)[汇率]计算…P156 当时现代建设是各(业体)[企业]中收益率最高、最有影响力的一个。P167 …所谓国保委时代是许多企业趁新政权上台而(跃跃欲试)[蠢蠢欲动]的经济混乱时代。P181 即使申办成功,也不能保证北韩对此不做妨碍(工作)[手脚]。P202 …一年增产50万石粮食,这恰是50万人一年的(食粮)[口粮]。P217 围海造田…自然会引起靠捕鱼维持(生命)[生计]的渔民们的不满。P219 我似乎成了(榨取劳动者)[剥削工人]血汗的恶毒的企业家。P226 …西伯利亚资源将为(活化)[搞活]我们的经济提供有力的保障。253  “(指示)[指令性]经济”在启动经济开发时期做出过贡献…P271 美国的一个社会学(者)[家]说过…P272 穿的也只有一身[儿](春秋)内衣…P287 尽管尝到了(苦酒)[苦果],遭到了打击报复…P306 본 책은 약 21만자 300페이지 남짓한데 오역, 타당치 못한 번역이 300여 곳이나 된다. 출판사 편집의 가공을 거친 것이라고 감안하면 오역이 더 많았을 것이다. 역시 조선어식 한어가 주된 문제점이다. 200만 조선족중 번역을 괜찮게 한다는 사람이 10명 정도밖에 없다. 상기의 두 책도 다 그 안의 지성인들이 번역한것이다. 그들의 수준이 이러하니 200만 조선족의 평균수준을 가히 짐작할수 있겠다. 조선족의 이름에 “鎬(호)”자가 많이 쓰이는데 한어로 “가우(gao)”라 읽고 있다. 마땅히 “하우(hao)”로 발음하여야 한다. “hao”로 읽으면 “빛나다” 또는 “西周의 수도 호경”이라는 뜻이며 “호”음과도 맞물린다. “gao”로 읽으면 “곡굉이”라는 뜻이며 이 음이 생긴지 불과 몇십년밖에 안 됐다. 자기 자식이 곡굉이로 땅을 파먹으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줄 부모는 없을 것이다. 어느 한족이 “조선족들은 왜 이름자에 쓰이는 '鎬'자를 'hao'로 읽지 않고 틀리게 'gao'로 발음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조선족들이 틀리게 발음한다치고 당신네 한족들은 왜 틀리게 발음하느냐”고 반문했더니 “이름은 주인을 따르는 법인데 당신네가 'gao'로 발음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hao'로 불러줄 수 있느냐?”고 반박하지 않겠는가! 실로 우리 조선족의 망신이다. 조선족은 대졸(조선어 전공이 아닌 전공도 포함)후 15년 전에는 표준적인 한어로 교제할 능력이 약하며 문장을 쓸 능력은 더욱 없다. 그러므로 공식 문서를 작성하거나, 한어로 쓴 저서를 발표, 출판할때, 또는 조선어로 된 저서를 한어로 번역출판할때 할수 없이 남의 손을 빌어야 한다. 말하자면 적어도 15년간 절름발이 신세를 면할 수 없다. 필자의 말을 듣고 이미 별세한 원 북경대학 안태상 교수는 “15년으로 어떻게 되나. 나는 40년이 지나도 자신감이 없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15년이면 40세에 접근하고 40년이면 은퇴나이를 넘어선때이다. 이만하면 조선족의 한어 수준이 높은가, 낮은가 정답이 나온셈이다.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  글 싣는 순서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2.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69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댓글:  조회:6268  추천:83  2008-07-26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2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정인갑≪제도≫가 금방 나올때 우리의 생각은 단순했다. 소수민족은 한어수준이 낮기때문에 대입시험에서 손해본다.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제도≫의 혜택을 받아 이 손해를 미봉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상상밖의 다른 치명적인 약점이 생길줄을 몰랐다. 중국 대입시험제도의 원 뿌히는 隋, 唐때의 과거시험인바 이미 1400년의 력사를 가진다. 1400년의 력사를 縱覽하여보면 시험 방식이 온 나라 청소년들의 학습 방향을 결정하는 작용을 하였다. 詩文을 치르면 문학 소질이 높아지고, 策論을 치르면 정치 수준과 론설문을 짓는 재주가 늘고, 八股文을 치르면 무의미한 문자유희에 몰두하게 되고….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기때문에 당연 조선어 교육은 중시하고 한어 교육을 소홀히 한다. 한어로 치르면 한족학생의 평균 수준이 80점이라면 조선족 학생이 60점 정도는 될수 있다. 더 노력하면 그 차이를  줄일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어로 치르기 때문에 오히려 40점 정도로 떨어진다. 한어를 주당 5시간 배우고 한어로 대입시험을 치러도 주당 10시간 배우고 조선어로 대입시험을 치르는것 보다 한어 수준이 높을것이다. 이런 후과를 빚어내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길할, 우선 대학에 붙고볼 판이지, 한어 수준은 대학에 붙은 다음 올리지 라며. 그러나 이는 아주 어리석은 착각이였다. 어떤 언어를 장악하는데는 크게 A, 그 언어의 단어를 익히는것과 B, 그 언어의 사고능력을 키우는것 두 가지로 나뉜다. A는 나이를 많이 먹고도 되지만 B는 어릴때 배워야 한다. 어릴때 한어를 잘 배우면 한어로 사고하고 한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된후 배우면 조선어로 사고하고 한어로 표현하는, 즉 조선어식 한어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 조선족의 한어수준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B와 거리가 먼데 있다. 연구에 따르면 B의 계선은 15세라고 한다. 즉 15세 이전에 모종 언어를 잘 배우면 그 언어로 사고할수 있지만 15세 이후에 배우면 그 언어로 사고하기 불가능해진다. 15세면 초중졸업의 나이다. 필자는 옛날 연변에 살며 이런 현상을 자주 목격하곤 하였다. 50대 이상의 어떤 조선족 로인들이 산수계산을 할때, 이를테면 23×3할때 “산산 쥬, 산니 로꾸”한다. 어릴때 구구단을 일본어로 배웠기때문에 일본어로 사고할수 있다. 필자도 한어수준이 대단히 높지만 “三三得九, 三二得六”하지 않고 “삼삼은 구, 삼이는 륙”한다. 만약 어릴때, 즉 소학부터 초중까지, 하다못해 초중 3년만이라도  한어 교육을 강화하면 B에 쉽게 도달하거나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소중고교 단계의 한어교육을 소홀히 하기때문에 B에 영원히 못 미치는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다. 3년안에 해결할 난제를 그 시기를 놓치면 30년을 노력해도 잘 안 된다. 필자가 군에 있을때의 일이다.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열린 창문으로부터 쌀쌀한 바람이 불어들어, “小劉,關門!(류군, 문닫아)”하며 전사에게 시켰는데 그는 꿈쩍도 않는다. 화를 내며 욕하니 그는 “門不是關着嘛! (문이 닫겨있는데요)”라며 변명하였다. 필자는 “앗!”하며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다. 조선어에서 “창문”과 “출입문”은 다 “문”이다. 그러나 한어에서는 “窗户 (창문)”와 ”門 (출입 문)”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필자가 잠결의 몽롱한 정신에 이런 실수를 한것이다. 지금 필자는 한어수준이 꾀나 높으므로 조선족을 상대할때는 조선어로, 한족을 상대할때는 한어로 사고한다. 그러나 조선어 사고능력이 더욱 직감적이고 우세다. 지금까지 필자는 잠꼬대를 한어로 한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므로 한어로 말할 때 가끔 실수하곤 한다. 이를테면 “舅舅(외숙부)”를 “叔叔(숙부)”라 한다던가, “飯館(영업성 식당)”을 “食堂 (구내식당)”으로 말하는 등이다. 어릴때 배우지 못했기때문에 40여년 노력해도 잘 안 된다. 100℃로 10여분간 끓이면 익을 고기를 99℃이하로 몇년 끓여도 안 익는다. 사막 입구에서 몇십원하는 물을 사막 오지에서 몇천원을 주어야 살수도 있다. 우리의 한어교육은 99℃이하로 고기를 끓이거나 몇십원하는 물을 몇천원을 주고 사는 격의 어리석은 짓을 하고있다. B에 도달, 접근하지 못하는이상 표준적인 한어로 교제할수 없으며 그가 지은 중문 문장은 공식발표나 출판을 하려면 에누리없이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야 한다. 즉 절음발이 인재의 신세를 면할수 없다. 또한 수십년간 노력해도 절음발이 신세를 고치기 어렵다. 대학에 붙은 자체가1980년대까지는 출세를 한셈일지도 모르나 1990 년대부터는 출세의 시작에 불과하다. 조선족의 경우 더욱 그렇다. 절음발이로 출세의 려정을 시작하는것이 바람직한가?《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  글 싣는 순서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2.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68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제도》의 득과 실 댓글:  조회:5947  추천:91  2008-07-23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제도》의 득과 실 정인갑 1978년 상반년의 어느 날, 당시 민족출판사 부사장이며 북경시 정협위원인 韓壽山이 필자를 불러 아래와 같은 도움을 청구했다. “소수민족이 자기민족어로 대입시험을 치르는 제도(이하 ≪제도≫로 략칭함)를 내오는데 민족어로 수업하는 대학이나 전공밖에 갈수 없다는 단서가 달려 있다. 조선어로 시험을 치른 조선족은 연변대학이나 민족대학 조선어전공밖에 붙을수 없다는 말이다. 이번 정협회의때 이 단서를 반대하는 발언을 하려는데 당신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없는냐?” 필자는 기뻐 흥분된 마음을 억제하며 이내 “뾰족한 수”를 제시해 드렸다: “지금 북경대학 영어계 교원중 약 1/3이 영어 원판 영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조선족 고중생은 한어 원판 영화를 거의 다 알아듣는다. 너네 한족은 영어 원판 영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해도 명문대 영어교수가 될수 있고, 한어 원판 영화를 다 알아들을수 있는 조선족은 일반 대학의 학생이 될 자격도 없단 말인가?” 한수산은 기뻐 싱글벙글 웃으며 필자의 손을 꽉 쥐였다: “됐다! 당신의 말로만도 이번 회의에서 그 단서를 뒤엎을 리유가 충분하다.” 그 단서는 당연 없어졌으며 ≪제도≫의 혜택으로 많은 조선족이 전국 각 대학에 붙어 공부하게 되였다. 31년전 필자는 ≪제도≫에 대해 이렇듯 실제 행동으로 열광적으로 지지하였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1년이 지났다. 한 세대 이상의 시대가 흘러간 셈이다. 31년간 ≪제도≫가 우리에게 준 得과 失을 세심히 재조명해보면 다른 소수민족은 몰라도 조선족의 경우  무작정 지지할만한 제도가 못 됨을 실감하게 된다. 대입시험을 한어로 치르거나, 한어와 조선어를 겸해 치르는 방법이 더 좋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도≫가 우리에게 준 득은 현저하다. A, 우선 더 많은 조선족이 대학과 명문대학에 붙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조선족은 조선족 소중고교를 다녔고 조선어로 대입시험을 치른자만 일컫는다.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의 본과생은 해마다 지방학생을 1,600명정도 모집한다. 즉 인구 100만명당 1.3명정도밖에 모집하지 않는다. 이 비례에 따르면 조선족이 해마다 이 두 명문대에 각각 2~3명 붙으면 제 몫을 한 셈이다. 사실 1977학번까지 시험으로 이 두 명문대에 붙은 조선족 학생수는 대충 이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각각 20~30명이나 붙는다. 1980년 북경시 조선족 대학재학생 숫자는 400명 정도였는데(78~80학번이 ≪제도≫ 때문에 많이 붙은 상황하에서) 1995년에는 800명 정도로 많아졌고 지금은 확실한 통계는 아니지만 전문대까지 합쳐 1,500명정도 된다. 한어로 대입시험을 치러 붙는 학생수의 2~3배정도는 될것이다. B, 조선족 중소학교 학생들의 조선어 수준이 높아졌다. 이에 반해 ≪제도≫ 때문에 우리가 본 손해도 적지 않다. A, 조선족 학생의 한어 수준이 31년 전에 비해 낮아졌다. 원래 조선족은 한어에 약한 민족이였다. 문혁, 텔레비전의 보급 및 개혁개방후 조선족 전반의 한어수준이 비상히 제고되였으나 고졸, 대졸생의 한어수준은 오히려 낮아졌거나 적어도 높아지지 못하였다. 조선족의 더 높은 단계로의 진출과 승진에 많이 불리해졌다. B, 조선족 대학생의 '함금량(含金量)'이 줄어들었다. ≪제도≫의 혜택으로 성적은 높지만 거품이 많이 섞였으며 같은 성적의 한족보다 수준이 퍽 낮다. 놀음만 일삼는 대학생이 적지 않으며 조선족학생의 대부분이 학급안의 하위성적이다. 학기마다 보충시험을 치러야 하는자, 졸업장을 받지 못하는자, 락제점수가 많아 제명당한자도 비일비재하다. 대학원으로 진학하는자는 아주 적고 졸업후 려행사 가이드가 되도 만족해 한다. C, 조선족 소중고교 교원의 수준이 낮아졌다. 각 대학에 붙는자가 너무 많으므로 연변대학, 중앙민족대학에 붙는자의 성적이 많이 낮아졌고 조선족 사범전문대에 붙는자의 수준은 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족 소중고교 교원의 수준이 웬만한 한족학교 교원보다 퍽 낮다. 해마다 대학에 붙은자가 몇백명 많아졌지만 그 대가로 수천 수만을 가르치는 소중고교 교원의 수준이 낮아졌다고 할 때 그것은 실로 봐야 한다.. D, 본과대, 전문대에 붙는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나머지 조선족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아졌다. 농촌에서는 향장감은 더 말할것도 없고 촌장감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위와 같이 ≪제도≫의 득과 실을 대조해보면 득이 우세인지 실이 우세인지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다. 필자가 보건데는 우리가 ≪제도≫로부터 잃은 것이 얻은것보다 더 많다. 이 견해의 정확성을 객관적으로 립증하기 위하여 다음 문장에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련다.《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재조명  글 싣는 순서1.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2.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3.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4.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5.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6.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
67    한국 언론 및 기자에게 진언한다 댓글:  조회:5490  추천:110  2008-05-03
한국 언론 및 기자에게 진언한다 정인갑한국의 언론 및 기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 답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아래의 한 가지 례를 들고자 한다. 1997년 2월 19일 새벽 3시경, 필자는 꿈나라에서 헤매다가 불시에 당시 한국 경향신문사 북경특파원인 신영수 씨의 전화를 받았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빨리 자기의 사무실로 오라는 ‘호령’이였다. 필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허둥지둥 찾아갔다. 송대수(한국일보), 황의봉(동아일보) 등 한국 신문사 특파원 대여섯이 앉아있었다. “등소평이 오늘 새벽에 사망되였는데 쿨쿨 잠자서 되겠느냐?” 라며 다짜고짜로 필자를 꾸짖는 것이었다. “등소평이 사망되였는데−죽을 때가 되여서 죽었는데−나와 무슨 상관이냐?” 라며 필자는 변명하였다. “중앙일보가 이미 이 기사를 냈으니 우리는 물먹은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쓸만한 기사거리를 좀 들춰서 본사로 보내야겠다”며 필자를 내세우는 것이였다. 필자는 그들을 인솔하여 북경병원, 협화병원, 301병원 등을 훑었고 사무실에 돌아와 CCTV, CNN, NHK등을 몇 시간 추적했어도 아무런 거리를 건지지 못하였다. 아침 7시가 되여 출근길에 오른 북경시민 10명에게 ‘등소평의 건강 상태가 어떠냐?’라는 질문을 하였더니 9명이 ‘괜찮다’라고 답하였고, 한 명만이 ‘글쎄, 아마 사망되였을 걸’하는 것이였다. 9시경에 기자직에 있는 필자의 동창 둬 사람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역시 등소평의 건강 상태가 괜찮다는 것이였다. “이놈아, 오늘 새벽에 등소평이 사망됐다. 기자라는 놈이 뭐야? 나는 한국 기자들과 밤을 새웠는데”라며 핀잔을 주니 “나 아직 직장에 가고 있는 중이니 모를 수 밖에. 한국기자들 제길할, 皇帝不急太監急(황제도 가만 있는데 태감이 설친다/상주도 제상 차릴 궁리를 안 하는데 엉뚱한 놈이 설친다)”라며 언짢아하는 것이였다. 이만하면 정답이 나온 셈이다. 한국 기자들은 중국 기자들에 비해 자기의 본직에 충성하며 진실한 기사를 가장 빠른 속도로 국민에게 알리려 노력한다. 자질도 중국기자에 비해 높은 것 같다. 또한 한국의 매체도 중국의 매체에 비해 그 소식이 빠르고 정확하며 공정하고 투명하다. 문제는 국제 정치와 관련되는 문제에서 한국 언론은 너무나 편협적이고 우매하다. 그토록 ‘똑똑하고 능력 있는’ 한국 기자들도 바보로 밖에 안 보인다. 필자는 많은 한국 기자들과 접촉하며 항상 이런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역시 몇 가지 례를 들고자 한다. 1980년대 말 한국 기자들은 일제히 중국은 오라지 않아−빠르면 몇 년 내로, 늦어도 10년 안에−적어도 5~6개 나라로 분렬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였다. 필자가 아무리 그럴 수 없다고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베이징저널’에 ‘중국인의 통일사상’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20년이 지났다. 중국이 분렬되였는가? 분렬되지 않았다. 력사 사실은 한국 기자들의 견해가 오류임을 증명하였다. 1998년 나토가 코소보를 폭격할 때−인권이 주권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폭격의 리유−한국 언론은 한결같이 잘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이에 필자는 어느 한국 기자와 변론을 한 적이 있다. “인권이 주권보다 중요하다. 만약 그렇다면 1980년 한국이 광주사태를 진압할 때 미국이 대한민국을 무차별, 무자비하게 폭격해도 당연하다는 말이 아닌가?” 필자의 이 한마디 말에 그 한국 기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코소보 폭격 전쟁은 어디까지나 국제 사회의 기본 룰을 유린하고 유엔의 헌장을 무시한 비정의의 죄행이다. 한국 언론이 지지하고 있는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지만 편폭 관계로 할애하련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국 서장(티베트) 사태도 한국 언론에서는 일제히 중국이 장족의 정당한 요구를 무력진압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중국 팽창주의 야망의 표현’이요, 앞으로 치러질 북경 올림픽은 ‘1936년 나치스 치하의 올림픽 분위기’요 하는 말도 꺼리낌 없이 람용하고 있다. 중국의 5천년 력사는 수십가지 민족(먼 옛날에는 100가지도 넘었을 것임)이 공동히 창조한 력사이며 장족도 그중의 한 성원이였다. 서장이 행정적으로 확고히 중국에 귀속된지도 700년에 가깝다. 1949년 중공정부가 수립될 때 서장은 가장 야만적이고 암혹한 政敎 一體의 농노제사회였다. 농노주는 농노의 눈알을 파내고 생매장하는 형벌도 마다했고 어린 노예의 살가죽을 벳겨 사치품을 만들었으며 농노를 살해한 후 그 해골을 그릇으로 쓰는 등 말이 아니다. 세계 웬만한 나라의 력사를 500~1000년 뒤걸음시켜도 서장처럼 야만은 아니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공정부는 서장에 군대만 주둔하였을 뿐 내부제도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지역의 민족문제, 종교문제 등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내부로부터 서서히 변화하기를 기다리려 하였다. 극도의 인내와 자비를 베푼 셈이다. 그런데 1959년 달라이라마는 외세와 결탁하여 중앙정부를 반대하고 독립하려는 무장반란을 책동하였다. 하여 중앙 정부는 그 반란을 진압하고 민주주의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절대다수의 장족 인민들의 옹호를 받았다. 지난 50년간 서장은 정치, 경제, 문화, 인민의 생활 등 면에서 천지개벽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서장의 분렬주의 자들을 두둔할수 있단 말인가? 한국기자들의 두뇌와 수준으로 중국의 분렬여부 문제, 코소보 문제, 이라크 문제 등의 시비를 모를리 없다. 세계에서 중국력사를 가장 잘 아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장문제의 내막을 모를리 없다. 한국 언론이 그토록 황당한 오류를 범하는 원인은 몰라서가 아니라 미국을 수반으로 하는 서방 언론을 망종하기 때문이다. 종주국을 추종하는 식민지 문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한국은 친일파 명단 때문에 떠들썩하고 있다. 옛날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 아부한 친일파, 적어도 영광스럽지못하다. 지금 국제 사회의 정의를 짓밟고 약소국을 침략, 도살하는 미국의 행위에 아부하거나 추종하는 것 역시 영광스럽지 못하다. 인류사회에 정의가 확고히 정착될 때 친미파로 수치를 느껴야 할 앞날을 생각해 봤나? 한국과 중국은 같은 수난국이다. 근대사의 근 백년간 렬강의 침략으로 같이 신음하였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해국을 추종하며 같은 難兄難弟를 궁지에로 몰 수 있단 말인가! 개구리 올챙이 때를 잊어서 되겠는가! 중국이 팽창주의를 꿈꾼다고 비난하면서(팽창주의냐 아니냐도 앞으로 두고보아야 할 문제) 어떻게 팽창주의 이상의 패권주의 미국을 망종할 수 있단 말인가! 한국 정부나 한국 언론 및 기자들은 부자 나라인 미국에 아부하고 난형난제를 궁지에로 몰면 자기에게 이득이 차려지겠거니 한다. 사실은 착각이다. 그럴수록 양쪽에서 다 자기의 무게를 잃고 외교적으로 무능국으로밖에 될 것 없다.
66    ‘宣讐式 반일 선전’이라니? (정인갑66) 댓글:  조회:5528  추천:97  2008-03-30
‘宣讐式 반일 선전’이라니? 정인갑허동식 군의 역고 ‘중국은 선수식 반일선전을 그만두어야 한다’를 읽고(이하 ‘선수식’으로 략칭한다)  내키지 않는 데가 있어서 이 글을 쓴다. 지금 중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죄행에 대한 교육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런 교육의 의의를 ‘력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하여’, ‘前事不忘, 後事之師’ 등으로 표현한다. 이를 ‘선수식(복수심을 선동하는 방식)’이라 이름짓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여진다. 물론 어떻게 이름짓는가는 본문과 큰 관계가 없으므로 방치해 두고, 필자는 이런 교육이 아직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리유는? 첫째, 일본이 아직 침략 죄행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을 ‘구미 렬국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막기 위한 진출’이라 표현하며 극력 침략을 미화한다. 일본의 극소수 우익만 이런 망상을 한다고 볼 수 없다. 여러 일본 수상들이 아시아 각 국과 세계 여론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침략의 원흉, 일급전쟁범죄분자를 ‘모신’ 靖國神社를 자주 참배하고 있지 않는가! 前 중국침략군의 일원인 東史郞이 량심의 가책을 받고 남경대학살의 일각을 폭로한 일기를 출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익 세력의 반발과 송사를 당하였으며 법정에서 우익에게 참패당하고 말았다! 몇 년전 CCTV의 ‘實話實說’ 프로에서 東史郞을 모신 적이 있으며 필자도 그번 프로에 참가하였었다. 그때 필자의 주위에 10여명의 일본 류학생이 앉았었는데 한결같이 東史郞을 나쁜놈이라고 욕하는 것이였다(그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일본말을 모르겠거니 하고 한 말이지만 필자는 다 알아들었다). 일본의 우익(필자가 보건대는 우익도 극소수가 아님), 수상, 법조계, 많은 류학생…이만하면 일본인은 전 국민적으로 침략 죄행에 대한 반성 의식이 결여돼 있음을 증명하고도 충분하다. 죄를 진 가해자가 잘했다고 우기는데 피해자가 가만 있을소냐! 만약 일본이 심각하게 뉘우치고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일본침략자의 죄행을 폭로하는 영화, 드라마, 박물관, 교과서 등을 일본인 자체가 제작하면 어떤 효과일까? 아마 이때 중국인은 ‘그건 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무 캐지 말고 앞으로 잘 지내자’라며 오히려 일본인들을 위로할 것이다. ‘선수식’의 저자는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이런 짓을 하지 않으니 마땅히 따라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천만에! 독일은 주동적으로 침략 죄행을 철저히 부정하고 ‘脫胎換骨’한 나라이다. 즉 지금의 독일은 침략을 감행한 독일과 리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나라이다. 정치상에서 독일은 거인이고 일본은 소인이다. 둘째, 일본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데는 피해자 중국이 너무 관대한 원인도 있다.  2차대전이 끝나자 국민당은 앞날의 반공을 념두에 두고 ‘以德報怨’  구호를 내걸며  일본의 침략 죄행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다. 심지어 반공에 리용할만한 많은 친일파와 漢奸을 암암리에 중용하였다. 대만에서 국민당의 주석까지 지낸 李登輝가 그 정형적인 례이다. 셋째, 중국공산당도 그사이 특수한 원인 때문에 일본에 그리 강격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1991~1995년간 북경에서 조선족대학생 체육운동회를 조직한 적이 있다. 1995년 가을의 어느 날, 결승전을 끝내고 대형 오락만찬을 하려고 하는데 당국으로부터 제지당하였다. 일본 천황이 중국을 방문하는 비상시기라며 제지하는 것이였다. 너무나 리해되지 않아 특수 루트를 통하여 중앙에 ‘그잘난 일본 천황이 뭔데 우리의 만찬회까지 막느냐’고 문의한 적이 있다. 그때의 대답은 이러했다: "만약 대학생 중 누가 갑자기 '일본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자' 라고 외치고 많은 학생들이 그에 호응하여 시위를 감행하면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일본 천황이 중국에 머무르는 기간 5인 이상의 대학생 모임을 제지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사이 중국 근대화 자금의 대부분이 일본으로부터 온다. 일본을 너무 자극하면 큰 일 난다.’ 한번은 한국 모 연구소의 이런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다: "일본의 력사교과서 외곡 행위에 대해 한국은 온 국민이 격분해 하는데 왜 중국은 조용한가?" 필자는 이렇게 답복하였다: "중국의 력사교과서는 다 맞는가? 그런데 왜 한국국민은 천안문에 와서 손가락을 끊으며 농성을 하지 않고 일본에만 가서 하는가? 중국이 한국에게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말문이 막히고 돌아갔다. 이젠 중국도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일본의 자금이 그렇듯 요긴하지 않은 때가 왔다. 즉 2차대전 후 청산해야 할 일본의 침략 죄행을 마음놓고 청산할 때가 60년이 지난 지금에야 온 셈이다. 게다가 일본이 아직 죄행을 뉘우치니 않고 까불며 심지어 미국의 삽살개 짓을 하며 중국을 가상적으로 하는 ‘彈道導彈防衛 시스템’까지 획책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죄행을 철저히 청산하고 그들이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게 하여야 한다. 일급전쟁범죄분자의 이름도 靖國神社에서 빼내고, 력사교과서도 바로잡고, 남경대학살도 승인하고, 정신대 잘못도 뉘우치고 …이런 연후에야 일본에 ‘아량’을 베풀 수 있다. ‘선수식’ 저자의 소개를 찬찬히 보니 문학인에 불과하다. 일개 문학인이 무슨 정치를 안다고 왈가왈부하는가? 손을 댄 김에 역시 허동식 군의 역작 ‘김문학 현상 初探’에 관하여서도 몇 마디 하고 싶다. 그는 김문학 현상의 산생원인을 1)그는 조선족이며 조선족의 國族認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고, 2)중국의 민족 정책에 문제 있기 때문이며, 3)중국의 력사교육에 문제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김문학의 죄증을 김문학 개인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북경인 ‘왕동’이 무엇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한심하다. 중국 조선족이 중화민족의 한 성원이라는 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친일본적이고 일본침략 죄행에 미련을 가질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이는 중국 조선족에 대한 모욕이다. 중국 조선족이 중국의 다른 민족보다 일본침략자를 더 미워했으면 미워했지 미련을 가진다는 것이 된 말이냐! 김문학 현상은 중국의 민족정책 때문도 아니고, 력사교육 문제 때문도 아니다. 완전히 그 개인의 세계관, 정치관, 도덕관에 있으며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타락 원인도 그 개인에게 있다고 본다. (본 문장을 출장길에서 급히 썼기 때문에 ‘靖國神社’, ‘東史郞’, ‘彈道導彈防衛 시스템’ 등 명사를 조선어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독자들의 량해를 바란다.)
65    우리 민족 력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 댓글:  조회:5664  추천:96  2008-03-08
우리 민족 력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 정인갑근래 동북아신문(www.dbanews.com)과 조글로(www.zglo.com)에서 《우리 민족 력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이하《없었다》로 략칭함)라는 글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는 상식 이하의 견해다. 단어 ‘봉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일종 정치제도. 군주가 토지를 종실이나 공신에게 나누어 주어 그곳에 나라를 세우게 하는 제도—원시 의미. ② 일종 사회형태. 봉건사회의 략칭, 지주가 토지로 소작농을 지배하는 것이 생산관계의 주축인 사회—지금 쓰이는 보편적 의미. 의미①의 ‘봉건’제도가 중세기의 유럽과 일본에 존재했다. 중국 주나라가 이런 제도였으며 ‘분봉제(分封制)’라고 통칭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중앙집권의 군현제 (郡縣制)를 실시한 후부터 분봉제는 점점 쇠퇴되었다. 의미②의 ‘봉건’사회는 인류 력사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중국어나 한국어에서 말하는 ‘봉건’은 단서를 달지 않은 이상 보통 의미 ②를 일컫는다. ‘봉건사회’는 상기 두 가지 의미중 의미 ②를 일컫는다. 이렇게 볼 때 조선의 고대사에 물론 ‘봉건사회’가 있었다. 조선왕조 500년의 력사가 지주가 토지로 소작농을 지배한 력사가 아니고 노예주가 노예, 또는 자본가가 근로자를 지배한 력사란 말인가? 단 필자는 력사학 전공이 아니므로 조선력사는 어느 때부터 봉건사회였는지 잘 모를 뿐이다. 허나 늦어도 통일신라부터는 봉건사회였을 것이다. 중국은 어느시대부터 봉건사회였는가? 春秋봉건설, 戰國봉건설, 魏晉봉건설 여러가지 설로 반세기간 쟁론하였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였다. 할 수 없어 곽말약의 전국봉건설을 잠시 따르고 새로운 재료가 더 나타나지 않는 이상 쟁론을 하지 말기로 약속하였다. 기원전 594년(魯宣公15년)부터 로나라에서 초세무(初稅畝: 토지 면적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기원전 453년부터 기원전376년 사이에 삼가분진(三家分晉)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왕조는 유명무실되였다. 이때가 전국시대의 시작이며(기원전 476년) 또한 이때를 중국봉건사회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없었다》의 견해대로면 중국의 봉건사회는 전국시대 시작 때 이미 끝났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청조까지의 중국사회는 봉건사회가 아니고 무슨 사회인가? ‘신해혁명이2,000여년의 중국 봉건사회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거나 아편전쟁부터 1949년 중공정부가 성립되기까지를 ‘반봉건사화’라 하는 1만 명을 헤아리는 중국 사학자들이 다 추호의 상식도 모르는 바보란 말인가? 《없었다》에 이런 황당한 견해가 생긴 근본 원인은 ‘봉건’ 및 ‘봉건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기본 개념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류사한 다른 한 가지 례를 들어보자. ‘혁명’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천명을 탄 임금의 목을 베다—원시 의미(벨 혁, 목숨 명). ② 피압박계급, 선진계급이 폭력수단으로 낡은 사회제도를 뒤엎고 새 제도를 세우다—지금 쓰이는 보편적 의미. 《없었다》처럼 ‘혁명’의 보편적 의미를 배제해 버리면 어떤 결론이 생기는가? 조선조 고종을 죽인 일본인 또는 친일파나는 혁명을 한 셈이다.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혁명은 끝났다. 중국공산당이 근 90년 동안 한 행위는 혁명이 아니다. 물론 황당하기 그지 없다. 이중천(易中天) 교수가 전통문화에 대한 강좌를 하고 있지만 봉건사회를 부정한 적이 없다. 오히려 중국의 봉건사회를 ‘士族지주의 봉건사회’와 ‘庶族지주의 봉건사회’로 나누어 전통문화의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정채롭게 서술하였을 따름이다. 맑스주의가 주장하는 인류사회 형태의 단계론—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이는 인류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론단이다. 사회제도, 사회문화, 의식형태는 생산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경제기초 위에 건립된 상층건축에 속한다. 어떤 사회던 ‘필터의 려과장치로 걸’면 걸수록 남는 것은 ‘지주가 토지로 농민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자본가가 자본으로 근로자를 지배하는가’ 등밖에 남을 것 없다. 《없었다》는 ‘봉건이란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조선족 학자들을 여지없이 야유하였지만 우리민족의 문화사, 민속사, 문학사…를 운운할 때 ‘봉건’이란 단어를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력사학을 전공한 많은 조선족 학자들의 견해가 필자와 일치하리라 믿는다. 단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너무 상식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문장을  쓰지 않을 따름이다. 필자는 력사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즉 력사학의 문외한이므로 자존심문제가 없다고 생각돼 간단히 적어본다.
64    ‘불민한 당나에게 충고하고 싶다’ 재론 댓글:  조회:6477  추천:95  2008-02-22
‘불민한 당나에게 충고하고 싶다’ 재론 정인갑필자의 글 ‘불민한 당나에게 충고하고 싶다’에 적지 않은 댓글이 올랐으며 대부분 필자의 견해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필자의 졸작을 읽어주신데 대하여, 또한 필자가 론한 화제에 대하여 관심을 표시한 댓글에 우선 감사 드린다. 동시에 짚고 넘어야 할 말이 있으며 댓글로 표현하기는 편폭상 너무 아름차기 때문에 ‘재론’을 쓴다. ○ 스포츠경기는 정치를 떠난 순수 스포츠 정신을 추구한다지만, 또한 언젠가는 인류의 스포츠가 이렇게 될 날이 올 것이지만 현 단계는 그렇지 않다. 세계성적 경기에서 우승을 취득하였다고 하면 그 영예가 선수 본인, 그 선수가 속한 국가 및 민족에게로 3분된다. 지금까지 선수가 개인 신분으로, 즉 무국적, 무소속으로 행해지는 국제경기는 없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일 때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이 일본臣民의 신분으로 국제 경기에서 우승한 후 ‘나는 조선사람이다’라고 외친 원인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 기독교문화는 天緣문화이고 儒家문화는 血緣문화이다. 전자는 하느님 밑에 ‘나’라는 의식이 강하므로 ‘내’가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인가의 의식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 그러나 유가문화에서 ‘나’는 어느 가족, 민족 및 나라 사람인가 하는 의식이 강하다. 우리 조선민족은 세계에서 혈연의식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필자의 가족은 1918년에 중국에 이주하여 이미 90년이 지났지만 필자는 아직도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한국이 이기기를 바란다. 唐娜가 원래 한국사람이고, 한국국가팀의 선수였는데 중국에 입적하여 한국팀과 힘을 겨루게 됐다고 할 때 당신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역시 기뻐하고 찬양할 자신감이 있는가? 약 10년전 연변축구팀의 리홍군 선수가 북경팀에 입적할 때 ‘연변팀과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다’를 전제로 하였다고 한다. 우리민족이 너무 협애하여서인가, 아니면 리홍군이 너무 보수적이어선가? 다 아니다. 민족 감정이라는 현실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무릇 현존하는 것은 다 합리한 것이다(헷켈의 명언)’. 리홍군은 처사를 잘 하였다. 그러므로 리홍군은 우리민족과 북경시민의 사랑을 다 받고 있다. ○ 민족감정을 운운할 때 축구와 탁구는 질적으로 다르다. 만약 중국의 어느 축구 선수가 영국 국가팀에 입적하였다고 하자. 그가 월드컵 32강 경기에서 중국과 붙을 가능성 확률은 1/31=3.2%다. 만약 출전한 선수가 16명이라면 그의 발로 중국 골문에 슛할 확율은 1/16=6.3%다. 즉 그가 월드컵경기에 참가하여 중국팀과 붙어 중국 골문의 슛에 성공해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확율은 2‰(천분의2)다. 그러나 중국의 탁구선수가 외국국가팀에 참가하여 국제경기에 참가하면, 만약 그의 수준이 괜찮다고 할 때 그가 중국팀과 붙을 확율은 100%다. ○ 중국팀에서 국제 경기에 밀려나 외국팀에 참가한 탁구선수는 거의 다 2류 선수들이다. 중국에서 밀려난 주요 원인은 본인의 수준문제이지 억울하게 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했다며 앙갚음하려고(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외국팀에 참가하는 자체에 도덕적으로 문제된다. 체육인생은 짧고 나머지 인생이 훨씬 길다. 일시적인 분풀이나 욕구 발설을 위해 父老鄕親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인격적으로 손해볼 필요가 있을까? 금메달을 딸 파악이 있다 하더라도 심사숙고할 일이다. 하물며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랴!(필자가 전문가에게 알아본데 의하면 唐娜는 올림픽이나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4~8등 밖에 못할 할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당나를 매국역적으로 보지 않는다. 법률적으로 한국팀에 참가하여 국제 경기에 참가하는 것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도덕면에서 문제가 좀 되며 본인의 이미지 관리에 주의하라고 충고할 따름이다. 한번 반짝하고(그것도 그리 빛나지 못한 반짝) 반평생을 부담스럽게 살 필요가 있겠는가? 당나 본인과 할 이야기를 사이트에 올렸을 따름이다. ○ 체육사업의 근본 목적은 개인 또는 전 민족, 전 국민의 신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體育雇傭兵 제도는, 개별 우수 선수를 초빙하여 해당 지역 체육 사업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은 몰라도 그 선수에 의지하여 우승을 따낸다는 것은 스포츠의 근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본다 연변 조선족의 1/5인구가 축구와 관련된다는 설이 있다(본인이 축구를 한 경력이 있거나 그의 부모형제자제 중 어느 누가 학교, 직장, 시, 성, 국가 급의 축구선수). 그러나 북경시민중 축구와 관련이 있는 인구는 1/200도 안 된다. 북경시 중소학교에 축구장이 제대로 돼 있는 학교는 5%도 되나마나 하다. 북경은 축구의 반 불모지다. 그러나 돈으로 국내외의 축구고용병을 사들여 연변팀을 이긴다. 체육고용병제도가 제창할만한 제도인가? 이 화제는 필자의 ‘충고’문과 별문제이므로 약간 언급한다.       
63    不敏한 唐娜에게 충고하고 싶다 댓글:  조회:5973  추천:94  2008-02-14
不敏한 唐娜에게 충고하고 싶다 정인갑한국에 귀화한 중국 탁구선수 당나가 북경 올림픽(아직 미정)과 09년 광주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련다는 소식, 이에 대한 중국 네티즌들의 반발 및 범송군의 견해를 듣고 나도 몇 마디 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며 이 글을 쓴다. 결과부터 말하면 필자는 당나의 처사가 불민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필자의 중매와 도움으로 한국에 시집간 중국탁구선수 초지민(焦志敏)의 일을 회고해 본다. 1986년 초, 초지민은 필자에게 자기의 고충을 이야기하였다: 한국의 안재형과 같은 탁구 선수로서 대충 아는 사이이며 안재형의 운동복을 빌려입고 찍은 사진을 편지로 부쳐준 일밖에 없는데 일본과 한국의 언론에서 안재형과 연애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중국 당국의 警告를 받았으며 이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필자 문:“앞으로 둘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져 연애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나?” 초지민 답:“글쎄! 그렇게 될런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필자 왈:“관계를 끊지 말고 계속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나중에 연애로 발전해도 괜찮을거다.” 초지민 왈:“안 된다. 양국 세관에서 편지를 뜯어보고(그때는 중국과 한국이 적성국가 관계이므로 세관에서 편지를 검사한 듯), 그렇지 않다 해도 나의 중문 편지를 한국 화교(대만인)를 통해 해독하므로 이내 소문이 퍼진다.” 필자 왈:“내가 번역해서 인편으로 보내줄 테니 염려 말고 계속 관계를 추진해 보라.” 둘은 약 1년 반 편지가 오갔으며 사이가 점점 두터워졌다. 1987년 10월 필자가 한국에 방문가게 되자 초지민은 필자에게 이런 의뢰를 하였다: a, 한국은 반공국가인데 공산당원인 내가 살 수 있을까? b, 대남자주의가 엄중한 한국에서 중국 여자가 생활할 수 있을까? c, 안재형의 가정배경은 어떠한지? 한 달 후 초지민은 제10차 아시아 탁구선수권 대회 참가 차 서울에 왔다. 필자는 ‘a, 한국은 반공국가라고 하지만 사실은 反北이며 정도 이상의 친 중국 분위기고; b, 대남자주의는 확실한데 지금 젊은 층은 그리 엄중하지 않으며; c, 안재형은 가난한 서민의 자식이더라’ 고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가난한 집 자식이라니 더 마음에 든다. 난 부자집 자식이 싫다.”라며 초지민은 이내 안재형과 연해할 결심을 내렸다. 또한 비밀리에 안재형의 가족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1989년 제11차 아시아타구선수권대회(북경) 때 안재형과 약혼을 하였으며 그해 12월(세계 여자탁구선수 랭킹1위)에 은퇴하고 서울에서 안재형과 결혼식을 올렸다. 3년 반에 거쳐 필자는 초지민에게 이런 관념을 반복 주입시켰다: 당신은 부자동네 (구미 선진국), 부자집에 시집간 것이 아니라 일반 동네, 가난한 집에 시집갔고, 돈 많은 늙으대기에게 이혼(二婚)으로 ‘팔려’간 것이 아니라 돈 없는 젊은이(안재형은 초지민보다 2살 아래)와 숭고한 사랑을 이룩하려 갔다. 이 얼마나 보기 좋나! 이런 이미지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필자의 코치 하에 결혼식을 올리기 전 초지민은 한국 언론에 이런 태도를 표시하였다. a, 한국 팀에 가입하여 탁구를 치지 않는다. b, 한국 탁구팀의 코치를 담임하지 않는다. c, 서뿔리 한국 국적에 가입하지 않는다(몇 년 후 세금 관계 때문에 한국국적에 가입하였음). d, 공부를 하며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련다 (필자의 추천으로 한양대 중문학과에 입학). 필자가 이렇게 시킨데는 리유가 있다. 한국팀에 들어가 국제 대회에 출전하면 필연코 중국팀과 붙게 되는데 이기면 10억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지면 4천만 한국국민이 실망하게된다. 이겨도, 져도 다 난처하다. 또한 중국에서 월봉 1천원을 받다가 한국팀에 들어가 2만원을 받으면 결국 돈 때문에 시집간 것으로 되며 숭고한 애정에 먹칠하게 되지 않느냐! 초지민은 지금까지 상기의 초지(初志)를 지켜왔다. 필자는 초지민에게 코치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초지민도 필자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초지민은 한국, 중국 양국에서 모두 사랑받는다. 물론 필자도 중국, 한국 양국에서 다 존경 받는다. 좋은 이미지 때문에 초지민은 돈도 탁구선수하는 것 못지 않게 벌었다. 중국에서 밀리운 선수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자기의 수평이 대단하지만 인간관계상 총애를 받지 못하여 억울하게 밀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중국 국가 체육위원회에서 과학적인 분석을 거쳐—해당인의 수준, 그와 맞붙을 상대방의 상황 등—선발하며 절대대부분이 아주 합리하다. 중국에서 밀려 외국팀에 참가한 선수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 성적이 거의 시원치가 않다. 훌륭한 팀 안의 선수는 용광로 속의 한개 불덩이와 같다. 그 용광로 속에 있으면 뜨거운 불덩이지만 용광로를 떠나면 식어버린다. 연변 축구팀이 항주로 팔려갈 때 필자가 이 비유를 한 적이 있다. 그 좋은 팀이 축구 용광로인 연변을 떠나 축구 불모지 항주로 가니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중국국가탁구팀은 해외군단(海外軍團: 외국팀에 가입한 중국탁구선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초지민과 같은 해에 중국국가탁구팀 선수 하지려(何智麗)는 일본에 시집갔으며 일본국가팀에 가입하여 세계대회에 출전하였다. 중국팀과의 경기에도 참전하였다. 결국 10억 중국인의 저주대상이 되였고 일본인들도 그를 시원치 않게 본다. 초지민은 성공적인 해외 진출이고, 하지려는 실패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당나에게 충고하노니, 한국팀에 참가하여 활약하는 것은 좋다. 중국의 탁구 정수를 한국에 전파하고 한중 양국의 체육교류에 공헌하는 것 역시 좋다. 한국 국내 경기에 참가하여 훌륭한 성적을 내는 것까지도 좋다. 그러나 한국국가팀에 들어가 국제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삼가하기 바란다. 초지민의 경험을 배우고 하지려의 교훈을 섭취하라. 한국 체육위에 충고하노니, 당나를 국제 경기에 출전시키지 말라. 그 리유는 우선은 출전시켜도 금메달을 따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음은 따낸다 한들, 중국에서 이미 아주 우수했던 선수를 끌어다 중국을 이기는 것이 돋보일 소냐! 중국선수의 도움이 없이도 세계 탁구계에서 伯仲을 다투는 한국탁구에 중국선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루명을 씌울 소냐! 한국의 처지에서 생각해도 무언가 좀 찜찜하지 않느냐!
62    한국 드라마의 생명력은? (정인갑63) 댓글:  조회:10987  추천:113  2007-12-30
한국 드라마의 생명력은? 정인갑약 6년 전 한국 모 재벌 그룹으로부터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가 곧 죽는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보는가?’ 라는 부탁을 받고 글을 써준적이 있다. ‘10년쯤은 문제 없으며 그 후에도 이럭 저럭 괜찮게 팔릴 것이다’가 필자의 견해였다. 아래에 그 글을 요약해 본다. 한국 드라마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는가? 문학성, 사상성, 상품성 3가지로 나누어 말하련다. 1. 중국 대중문학의 원 뿌리는 宋代 話本문학이다: 거리 복판에 상을 놓고, 부채를 휘저으며 ‘화설 제갈량…’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한다. 관건적인 대목에 ‘필경 어떻게 됐는가? 다음 회에 알려주마 (畢竟事後如何, 且聽下回分解)’로 끝낸다. 그리고는 청중들이 주는 돈을 거두어 들인다. 재미없으면 청중이 듣지도 않으려니와 모이지도 않고 화술자도 돈을 못 번다. 그러므로 중국대중들의 기호는 이야기꺼리의 굴곡성, 취미성, 렵기성 (獵奇性)…이 위주다. 중국 대중들이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은 잘 보지만 ≪홍류몽≫은 졸려서 못 보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대중문학은 이야기의 취미성에 각별히 신경을 쓰므로 인물 형상에 대한 부각은 게을리 하며 심지어 인물의 外貌로 대체한다. 흉하게 생긴 배우가 나쁜놈의 배역을 담당하고, 교활하게 생긴 배우가 간사한 인물을 담당하고…. 별로 부각을 안 해도 그 인물의 특징이 대충 알린다. 그러므로 중국 배우는 인물이 천차만별하다.   그러나 문학의 참 뜻은 이야기꺼리의 취미성이 아니다. 특정 인물의 내심세계를 특정 시대에 놓고 전형적인 事件, 情節로 부각하는 것이다. 事件, 情節은 취미성이 있느냐가 아니라 인물의 내심세계를 부각하는데 적절한가 이다. 이 면에서 한국 드라마는 중국 대중문학보다 후자에 치우친다. 그토록 예쁘게 생겨 호감이 가는 여자도 정신 세계가 더럽게 부각되므로(아주 섬세하게 부각되므로) 나중에는 생김새도 미워만 보인다. 한국 드라마는 참 문학에 더 접근하며 중국 대중문학에 결여된 그 무엇을 중국 관중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문학적 차원에서 본 한국드라마의 생명력이다. 1989년 필자는 한국 공보처의 부탁을 받고 23편의 중문자막이 있는 한국영화 테이프를 중국影視進出口公司에 가져다주며 수입을 권한 적이 있다. “졸려서 못 보겠다”가 그들의 답복이었다. 사실 개혁개방이래 중국이 수입한 세계 각 국의 영화는 거의 다 이야기꺼리에 취미성이 강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1997년경, 렵기적인 대중문학만 너무 봐서 질려서인지 중국 대중들의 기호가 좀 바뀐 듯하다. 아니, 이야기의 취미성도 좋지만 인물 성격에 대한 섬세한 부각도 볼만 하구나 하는 관념이 생긴듯 하다. ≪사랑이 뭐길래≫가 일거에 성공하였으니 말이다.   2. 중국 대중이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두번째 리유는 유교문화에 대한 鄕愁 이다. 부인이 남편을 잘 섬기고, 젊은이가 로인을,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고, 그토록 화목한 가정분위기…한국 드라마에 반영된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미풍양속은 중국 대중에게, 특히 50대 이상의 관중에게 큰 감화력이 있다.   한 번은 필자 동료께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인들, 참 코막고 답답하다. ≪사랑이 뭐길래≫에 로인이 시집간 딸이 보고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대목이 있는데 냉큼 사돈집에 찾아가 보면 될 것이 아니야!” 하여 필자는 사돈간은 서로 어려운 사이이며 시고 때고 없이 사돈집에 드나드는 것은 유교 례의에 맞지 않음을 피력한 바 있다.   유교문화의 발상지인 중국은 유교문화가 거의 없어져가고 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담배불 좀 붙이자고 접어드는 것, 타지방에 출장가서 사돈집에 며칠 묵으며 일보는 것은 흠이 아니다. 여편네가 남편보고, 자식이 부모보고 ‘입닥쳐! (住嘴!)’라며 호통치는 것도 보통이다. 조선족 집에 시집온 한족며느리, 온돌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발가락이 시어머니 턱밑에 닿을 정도여도 흠인줄 모른다.   이런 면에서 한국드라마는 중국에 모자라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사상적 차원에서 본 한국 드라마의 생명력이다.   3. 사람들은 배고프면 음식을, 추우면 옷을, 병나면 약을…사게 된다. 심심할 때 소일(消遣)할 꺼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사야 하는가? 중국에는 아직 이런 상품이 거의 결여돼 있다. 마작을 노는 것이 주요 소일수단이다. 한국 드라마는 중국인들에게 소일에 필요한 상품을 제공하여주고 있다.   중국제 드라마도 소일의 상품으로 충당될 수 있지 않느냐? 천만에. 중국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에 비교도 않된다. 우선 시간성에서 안 된다.   필자는 1989년 한국 대하 드라마 ≪손자병법≫ 제작팀을 안내한 적이 있다. 이 팀은 작가 1명, 감독 1명, 배우 6명, 촬영사 3명,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였다. 작가가 매일 저녁 7시부터 이틑날 아침 7시까지 드라마의 한 회를 창작해내면 감독(導演)은 그날 내로 한회를 제작한후 저녁에 KBS본사로 보내 편집시킨다. 약 10일 후에 제작된 드라마가 KBS에서 상영이 된다.   본 제작팀은 북경, 연길(장백산 포함), 할빈, 상해를 돌며 약 10일간에 드라마 3회를 제작했다. 제작비용 수십만원을 스폰서가 댔고. 제작팀이 쓰는 의복, 핸드폰, 심지어 컵까지 모두 한국 특정 회사의 제품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 스폰서가 서브해주며 광고비의 일부를 제작비용으로 선대해 준다.   그러나 중국은 어떠한가? 대형 드라마라면 창작팀을 뭇는데만 몇 달이 결린다. 선전부장이 명예팀장, 문화국장이 팀장을 담당하고 집필하는 사람은 나부래기 직밖에 얻어걸리지 못한다. 시나리오를 창작하는데 몇달, 심지어 몇 년이 걸린다.   창작이 끝나면 적어도 성급 검사를 받아야 하며 필요시에는 중앙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공식적으로 받는 심열비만도 십만원 이상이 든다. ‘심열해 줍소서’ 하며 올려 바쳤지만 몇달, 심지어 몇년을 질질 끌며 심열해주지 않으면 갖은 방법과 수단을 써야 하며 심지어 뭉체기 돈을 뒷거래로 주어야 한다.   허가를 받은 다음 제작비를 구하는데 몇달 심지어 몇년, 제작하는데도 몇달 심지어 1~2년이 걸린다. 제작이 끝난다음 한번 더 검사받아야 하며 그런 연후에야 상영이 가능하다. 해당 대형 드라마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와서 상영할 때까지 보통 5~10년이 걸린다.   중국드라마를 보면, 삐삐가 없어진지 10년이 넘었는데 삐삐가 등장하고, 손바닥 보다 작은 핸드폰이 유행된지 10년이 되오지만 베개만한 핸드폰이 등장하는 장면을 종좀 볼 수 있는데 다 상기의 원인 때문이다. 이렇듯 시세에 떨어진 드라마가 청중의 호감을 자아내기는 만무하다.   젊은 관중, 특히 젊은 여자 관중이라면 드라마 인물에 나타나는 패션, 헤어 스타일(髮型), 핸드백, 화장한 얼굴모양, 등을 눈여겨보며 이내 모방하기를 좋아한다. 시세에 너무 뒤떨어진 것들이 등장하면 젊은 관중에게 실망만 주게 된다. 먹고 싶은 음식, 입고 싶은 패션, 먹어야할 약이 없으면 당연 수입제를 사기마련이다.   필자는 한국 드라마들이 문학적으로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문학사에 오를만한 명작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중의 소일에 적합한 상품으로서는 괜찮으며 중국보다 퍽 앞섰다고 본다. 이것이 한국 SBS방송국이 피타는 노력을 한 공로이겠다.   지금 한국에는 인기 드라마 시나리오를 창작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가 1,000명 정도 된다는 설이 있다. 같은 인구의 료녕성에 이런 사람이 몇십명이나 될지, 아니, 13억 중국 전역에 몇백명이나 될지 의문이다. 드라마 상품 제작에서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으며 따라잡지 못하는 한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여전히 소실되지 않을 것이다.   총괄적으로 말해 한국 드라마에 중국 드라마에 미비한 상기 3가지 장점이 있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의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10년 쯤은 문제 없으며(≪사랑이 뭐길래≫부터 지금까지 이미 10년이 지났슴) 그 후에도 이럭저럭 괜찮게 팔릴 것’으로 보고 있다.
61    우리 민족의 간부들에게 진언한다 (정인갑62) 댓글:  조회:6335  추천:102  2007-12-18
우리 민족의 간부들에게 진언한다 정인갑 지금 중국공산당의 올바른 민족 정책의 혜택으로 많은 조선족들이 기층으로부터 중앙에 이르는 국가 기관의 간부를 하고 있다. 이는 칭송할만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이 조선족의 리익을 잘 대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약 1980년 경, 필자가 대학생일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에 집에 와 식량배급을 타 왔는데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돈을 더 내였다. 배급소(糧站)에 찾아가 문의하니 입쌀 한 근에 50여전이였다. 입쌀 한 근에 18~20전일 때이므로 왜 이렇게 비싼가 하니 연변의 입쌀이 부족하므로 타지방의 쌀을 구입해 왔으며 그 비용을 첨가하여 비싸졌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왈카닥 성을 내며 항의하였다: 1, 몇년전 중국이 카나다의 밀을 많이 수입해 먹었다. 성본으로 따지면 한근에 2원 이상이지만 20전 좌우에 배급주었다. 한족이 즐겨먹는 밀가루는 2원짜리도 20전에 배급주고, 조선족이 즐겨먹는 입쌀은 50여전을 받아먹는 것이 맞느냐? 2, 국가 정책에 식량값을 올리면 오른 만큼 월급에 량유보첩(糧油補貼)을 가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왜 월급에 그 돈을 붙여주지 않느냐? 배금소 종업원은 주임을 불러왔다. 조선족이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한어로 필자와 접어드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족이며 한어를 잘 모르니 조선말로 하깁소”라고 해도 “니디—워디—’ 삿대질을 하며  잘 되지도 않는 한어로 필자를 훈계하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연변주 령도들이 조선족을 관심하여 타지방의 입쌀을 구해다 줬으면 감지 덕지하게 생각해야지 왜 까부느냐였다. 할수 없어 당시 주장을 찾아갔으며. 며칠 후 약 한시간의 접견을 받았다. ‘당신의 의견이 맞긴 다 맞는데—나도 이 문제로 만리(萬里) 부총리에게 의견 제출을 한 적이 있으며—내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주장의 답변이였다. 식량배급소 조선족 주임은 사실은 한족 종업원이 들으라는 쇼였다: ‘봐라, 나는 조선족을 두둔하는 주임이 아니다. 행패부리는 조선족을 여지없이 족쳤다.’  주장도 갈비를 들이댈 배짱이 없는것 같고 만약 우리민족의 리익을 대변하기 위해 이런 문제로 배짱을 부렸으면 그의 관로도 그것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중앙민족대학의 다른 소수민족들은 다 자기민족의 명절이 있으며 1년에 한번씩 잘 얻어먹고 얼굴이 뻘개서 우쭐대나 유독 조선족만은 자기의 명절이 없다. 하여 필자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써 ‘우리민족도 9∙3절(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일)을 쇠게 해달라, 좋기는 그날 체육운동회를 조직해 달라’는 요구를 강력히 제출하였다. 드디어 수십명의 조선족 대학생들이 합심하여 북경시 정부에 여러차례의 편지를 썼다. 1981년 상반년에 중공북경시위원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한 결과 그해 9∙3에 북경시 조선족 운동회를 조직해줄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2,000원의 경비까지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어느 조선족 지성인들의 모임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책임자가 이 결정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다른 한 조선족 사(司)급 간부가 기분을 깨였다:  “9∙3은 연변의 지역명절이지 조선족 명절이 아니다. 북경에서 9∙3을 쇠는 것은 불법이다.” 장내 사람들은 이내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그 운동회가 무산될뻔 하다가 치러지긴 하였지만 이름을 ‘북경시조선족운동회’가 아닌 ‘북경시 민족운동회’로 고치고 날짜도 9월 3일이 아닌 9월 14일에 치렀다. 금년에 치러진 한국방문취업제에 응한 한국어수평고시를 음미해 보자. 전국에 시험장을 10곳이나 설치하며 연변대학과 연변지역을 빼놨다. 조선어 전공을 말하면 연변대학이 조상이고 북경대학 조선어 전공은 연변대학이 낳은 새끼이고 다른 대학의 조선어 전공은 새끼의 새끼, 또는 새끼의 새끼의 새끼들이다. 자식, 손자, 증손자, 현손자의 전공학교는 시험장을 설치할 자격이 있고, 원 조상의 전공학교는 없다. 말이 되는가! 또 응시자의 약 40%가 연변사람인데 연변에 시험장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분명 우리민족에 대한 무시이고 연변대학에 대한 모욕이며 우리 겨레의 민고를 갉가먹는 행위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이 근 5,000만원의 손해를 보았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위아래로 많은 조선족들이 현직에 있으며 각급 교육 기관에도 조선족 간부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황당한 일이 끝내 벌어지고 말았다. 묻노니 상기의 어르신님들, 이에 대한 항의를 해봤나? 관계 기관에 가서 농성이라도 해봤나? 울분에 못 이겨 사표라도 내봤나? 참 한심한 일이다. 각급 기관에 왜 일정한 비례의 조선족 간부를 두는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조선족의 리익을 대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물론 조선족의 무리한 요구를 대변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단한 요구는 마땅히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촌장까지는 잘 대변하고 있다. 향장 나부래기만 되여도 주춤한다. 위로 올라갈 수록 외면하며 주변과 상급의 눈치만 슬슬 살피며 심지어 조선족의 정당한 요구를 무마시키는 일에 적극 나선다. 은퇴할 나이가 됐고, 더 승진할 가망성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좀 나서는 듯 하다가 옷을 벗는다. 조선족 간부들이어, 앞으로는 이런 간부가 되지 말자. 조선족의 리익을 대변하는 일에 적극 나서는 자야말로 훌륭한 우리민족의 간부이라는 사명감을 가져라! 물론 이렇게 되려면 우리민족의 간부에 대한 감독 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 상급과 주변의 눈치보다 조선족의 눈치를 잘 살피지 않으면 관직에서 쫓겨날 위험이 더 크게 되는 풍기를 조성해야 한다.  200만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60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管見 (정인갑61) 댓글:  조회:7420  추천:119  2007-11-16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管見 정인갑  최근 토템 문화에 대한 쟁론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뿌리(發祥地)가 언급되고 있다. 필자는 門外漢이므로 이 쟁론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단 우리 민족의 뿌리에 관하여 管見을 몇 마디 말해볼가 한다.   동아시아 上古의 민족은 대체로 東夷, 西戎, 北狄, 南蠻, 中夏로 구분된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우리민족의 뿌리가 동이로 돼 있으나 최근 감숙 돈황설, 즉 西戎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였다. 너무 큰 모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우리민족의 뿌리를 여전히 동이로 보아야 지당하다고 본다. 1. 우리민족은 商민족과 같은 동이민족   夏는 중원 민족이 세운 나라이고, 商은 동이민족, 周는 서융 민족이 세운 나라임은 정설이다. 우리민족의 조상은 상민족의 범주에 속하며 심지어 상민족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필자는 피력한 바 있다. 아래에 다시 그 증거를 요약하면—   ① ‘상이 망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다.’ 이 말의 진실성을 고증할 길은 없지만 상이 망한 후 그 유민이 조선으로 피난간 역사 사실의 반영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하다. 기자는 피난민의 대표인물이고. 한 민족이 遠征을 거쳐 중원에 들어가 통치하다가 망하면 어디로 피난갈 것인가? 당연 고향쪽으로 돌아가지 그 반대쪽으로 돌아가기는 만무하다. 원정 전 상민족이 집거한 위치가 딱 조선반도일지는 몰라도, 망할 때는 자기의 고향 쪽이면서도 周의 힘이 미치기 어려운 곳이 조선반도였을 것이다. ② 상나라 왕족은 거북의 뼈로 점을 치는 풍속이 있는데—점 괘 내용을 적은 글이 갑골문—우리 민족은 점 치는데 사용되는 이 동물의 이름을 아예 ‘점— 복(卜)’자를 붙여 龜卜(구복→거북)이라 부른다. 그 당시 거북의 뼈로 점을 치는 민족은 상나라 왕족뿐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갑골문 비밀이 상이 망한 후 3,000년이 지난 1898년에야 세상에 알려지기 만무하다. 또한 지금까지 중국의 어느 방언에도 그 동물의 이름에 ‘卜’자를 붙여 부르는 말이 없다. 이렇게 볼 때 ‘거북’이라는 명사를 쓰는 우리민족과 상민족 간의 관계가 없을리 만무하다. ③ 어학적인 증거는 너무나 많다. a, 지금 쓰이고 있는 한어는 고립어이지만 고대한어에는 교착어의 흔적이 보인다. 우리말의 종결토가 고대한어에 거의 다 있다: 다(也, ‘也’의 고대한어 발음은 ‘다’), 야(也), 디→지(矣, ‘矣’의 고대한어 발음은 ‘디’), 가∙ 까∙오∙고(乎), 여∙요(歟)…. b, 상고 한어의 인칭대명사에 격의 흔적이 보인다: 汝(주어, 목적어 기능이 위주)/乃(한정어로만 쓰임), 발음이나 문법적 기능이나 우리말 2인칭 대명사 ‘너’ ‘네’와 비슷하다. 我/吾도 우리말의 ‘나’ ‘내’처럼 문법 기능상의 차별이 있다. c, 우리말 고유어에 상고한어와 대응되는 어휘가 적지 않다: 짐승/衆生 (상고한어에서 ‘衆生’을 ‘짐승’처럼 읽었음), 섣∙설/歲(‘歲’를 ‘셛’처럼 읽었음), 좀/蟲(‘蟲’을 ‘좀’처럼 읽었음, 우리말 ‘좀벌레’ 참조), 되놈/ 夷戎 (‘夷戎’을 ‘되놈’처럼 읽었음), 듣→들/等(‘等’을 ‘듣’처럼 읽었음, 한자의 ‘ㄷ’받침을 우리말에서는 ‘ㄹ’받침으로 읽어짐)… 상기 a, b, c 는 무슨 계시를 주는가? a', 遠古 시대의 중국어는 원래 교착어이던 것이 점점 고립어로 바뀐 듯 하다. 상나라 말은 거의 우리말과 같은 교착어였는데 고립어를 쓰는 주나라 민족이 통치민족으로 되고, 기초 방언도 중원에서 서쪽(섬서)으로 옮겨지며 서서히 고립어로 변하였다는, 그러므로 고대한어는 옛날로 올라갈수록 우리말과 닮은데가 많다는 분석이 맞을 듯 하다. b', 만약 우리민족이 후세에(이를테면 한나라 때부터) 한자문화를 접수하였다면 우리말의 고유어에 한자와 관계되는 ‘짐승, 섣, 설, 좀, 되놈, 들’과 같은 어휘들이 있기 만무하다. 漢 후부터 이런 글자를 ‘짐승, 섣, 설, 좀, 되놈, 들’ 등으로 읽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상민족으로서 중원에서 쓰던 말을 조선반도로 가지고 가서 계속 썼다고 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④ 갑골문에 개고기로 제사지내는 기록이 적지 않게 나온다(개고기로만 제사 지낸 것은 아니지만). 자기 조상이나 하느님에게 시시한 음식으로 제사 지낼 수는 없다. 그러나 주나라로 진입한 후 개고기가 각광을 잃었으며 소, 양, 돼지 고기로 바귀었다. 세상에서 우리 민족만치 개고기를 선호하는 민족이 없음즉 하다. 이 역시 우리민족과 상민족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 4가지 증거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상나라 동이민족과 우리민족의 조상을 연결시키는데는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우리민족이 西戎이 아님이 뚜렸하다. 2. 主와 次를 구분하여야 한다   우리민족이 요녕, 길림으로부터 조선반도에 분포돼 있던 동이민족에 속하는 민족이며 이 민족은—언어학적으로 볼 때—알타이산맥으로부터 동쪽으로 확장돼 온 퉁구스민족과 밀접히 관계된다고 보는데는 큰 애로가 없다. 그러나 중국 내지로부터 이민온 다른 민족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관계를 어느 정도로 보아야 하는가이다. 일반적으로 인구나 영토가 점점 확장된 민족은 뿌리가 여러 갈래이며 복잡하고 심지어 교체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중화민족은 하나라 때는 주체민족이 夏민족이고, 상나라 때는 동이민족이었으며 주나라 때는 서융민족이었고, 그후 북방 지역은 北狄 민족이 주체민족이었던 역사도 짧지 않다. 그러나 령토나 인구가 점점 위축된 민족은 퍽 단순하다. 우리민족은 몇천년 전부터, 적어도 2천년 전부터 인구나 영토가 점점 위축되여 변방 벽지로 밀려나간 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뿌리가 타지역으로부터 이민온 민족에 의해 흔들렸거나 바뀌였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한나라 초기 燕의 장군 衛滿이 조선으로 망명 가서 조선왕이 되었지만 그가 거느리고 간 사람은 천여 명밖에 안 되였으며 머리나 衣裳을 변방종족으로 가장하고 갔다(<史記•朝鮮列傳>: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 夷服而走東塞’). 위씨 조선 퍽 후의 辰韓은 중원에서 간 秦의 피난민이라고 하지만 三韓 중 작은 나라였고 馬韓의 겯방살이를 하였으며 마한의 통치를 받았다 (<後漢書•東夷列傳>: ’馬韓最大…盡王三韓之地…辰韓…適韓國, 馬韓割東界地 與之.’). 위만이 고조선의 왕을 하였지만 寡頭 통치자에 불과하였을 것이고 진한도 인구로 보나 그 지위로 보나 보잘 것 없었다. 위만과 진한민이 중원인이라고 하지만 모두 우리민족의 뿌리를 흔들거나 심지어 우리민족의 주체로 되여 뿌리를 교체하였을 가능성은 근본 없다. 이상 두 차례가 역사적으로 고증할만한 우리민족 안으로 들어온 규모가 가장 큰 타민족 이민이다. 이 두번 보다 규모가 작은 이민이 끊임 없었겠지만 그들이 우리민족의 뿌리로는 더더욱 못 된다. 楊萬娟의 <韓國文化與中國楚文化近源初探>에서 마치 진한을 수반으로 신라가 생겼고, 또한 우리민족의 뿌리로 되였고, 초나라의 羅씨, 盧씨를 수반으로 하는 중국 이민이 한국의 주체민족, 결정적 문화로 된 듯이 이야기 하였지만 모두 穿鑿附會로 보아야 한다. 감숙 돈황, 신강 천산, 옛 초나라 등에서 조선반도로 이민간 중국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수량상 매우 적어 당시 조선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숫자와 대비할 때 창해일속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가 처한 지역에서 문화적으로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영혼을 흔들고 뿌리를 교체할 정도에는 어림도 없다. 그들은 한동안 존속하다가 이내 우리민족에 동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3. 과학적 근거만이 설득력이 있다 우리민족의 뿌리를 동이로부터 서융으로 교체시킬려면 무엇보다도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몇 개의 고유명사가가 같다고 하여 돈황이다, 천산이다, 옛 초나라다 라고 마구 가져다 붙이는 것은 모험적인 발상이다. 얼마전 한국의 모 교수가 滿族의 황족 성씨를 일컫는 ‘愛新覺羅’를 ‘신라를 사랑하는…’으로 풀이하고 만족을 신라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글을 내놓았다. 필자는 만족어를 1년간 배운 적이 있다. 만족어에서 ‘愛新覺羅’ 를 ‘아이신궤로’로 읽으며 ‘아이 신’은 ‘황금’이라는 뜻이고, ‘궤로’는 ‘모자의 술’이라는 뜻이다. ‘아이신 궤로’는 ‘금실로 만든 모자의 술’이다. 신라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필자는 조선 평안남도 중화군의 三井里에 우연히 들린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저희 동네 이름이 ‘세우물리’이며 자기네는 예로부터 이렇게 불렀지 삼정리로 부른 적이 없다고 한다. 조선반도의 지명은 거의 다 옛날에는 고유어로 부르다가 후세에 점점 한자로 교체하였다. 교체하는 와중에 중국의 모 지명들과 우연히 같아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위(三危)’요, ‘太白’이요, ‘漢陽’이요 하는 지명이 중국에도 있다고 하여 같이 보며 심지어 이민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다. 사실 한강은 큰 강(한, 고유어 크다의 뜻. 큰아버지→한아버지 →할아버지, 큰어머니→한어머니→할머니 참조)이지 ‘漢’자와 관계가 없다. 또한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사대주의에 너무 물젖어 중국 지명을 퍼다가 한국 지명에 썼거나, 중국 성씨를 퍼다가 자기의 성씨로 만들었거나, 자기 조상의 발원지를 중국의 어디어디라고 족보를 위조하는 병폐가 많았다. 이런 것들을 걸러버리려면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서북 돈황은 사막지대여서 몹시 무덥기에 그곳 사람들은 흰옷을 선호하였으며 이것이 우리민족이 흰옷을 선호하는 유래라고 하였는데 역시 穿鑿附會이다. 필자는 돈황지역에 여러번 가 보았지만 그곳이 그리 덥지 않으며(적어도 요녕, 길림, 조선반도보다는 안 덥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색깔이 진한(검은 색, 곤색) 옷을 많이 입는다. 이상의 방법은 모두 과학적이 못 된다. 만족어와 우리말 간에는 어원이 같은 말이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코(물도랑. 우리말 ‘논의 물고 보다’ 참조), 아시(새롭다. 우리 말의 ‘아시어머니’, ‘아이[시]김을 매다’, 동북지명에 많은 아지푸자 ‘阿及堡子=새마을’ 참조),  안(긴 시간. 함경도 방언의 ‘안새[긴시간]’ 참 조), 서러머(말하다. 평안도 방언의 ‘그래 서라머니[그래서 말이야] 참조)…. 만족어와 몽고어 간에 어원이 같은 어휘는 더욱 많다. 이상은 우리말, 만족어, 몽고어는 모두 알타이어, 같은 퉁구스 민족임을 말해준다. 감숙 돈황-신강 천산에서 온 민족이 아님이 역시 분명하다. 조선 사회과학원 편집, 1970년대에 完刊된 <조선전사>는 우리민족의 뿌리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제시하였다. 본 책에서는 같지 않은 인종, 같지 않은 지역 인간 피부의 黑白度, 머리칼의 曲直度, 眼球의 색갈, 광대뼈의 高度∙寬度, 평균 身長 등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후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동북아시아에서 거주하여 온 인종임을 피력하였다(<조선전사> 제1책 참 조). 중국 역사는 기원전 841년부터만 정확히 연대를 표시할 수 있고 그 위는 대충 짐작만 하여 왔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 ‘夏商周 斷代工程’ 이라는 이름을 걸고 200명의 학자(력사학, 고고학, 언어학, 문헌학, 천문학, 물리학 등 여러분야의 학자)를 동원하여 5년간 연구하였다. 그런 연후에 하상주의 비교적 정확한 년대를 발표하였다. 그것도 조심스럽게 발표하며  相對 오차가 30년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우리민족의 뿌리를 동에서 서로 옮기려면 적어도 하상주 단대공정 못지 않은 학자를 동원하여 5년보다 더 긴 시간을 리용하여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의 뿌리에 관하여 새로운 관점을 내놓는 사람들이 아직 이런 연구를 거치지 않은 것 같으며 앞으로 이런 연구가 실행될 수 있겠는지 근심이 간다.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빠른 방법은 유전자 학설을 리용하는 것이다. 유전자 전문가를 조직하여 감숙 돈황지역, 신강 천산지역 및 우리민족의 발상지라 추측되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의 유전자를 측정하여 우리민족의 유전자와 대비해보면 된다.(2007년 9월 23일)문학과 예술 2007년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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