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zhengyinwenahua 블로그홈 | 로그인
정음문화칼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68 ]

108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사이(허연화) 댓글:  조회:2013  추천:3  2019-01-31
디즈니 애니메이션 에서 주인공 엘사가 부른 'Let it Go'라는 노래는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번역되여 불리우고 있다. 일본에서는 'Let it Go'를 ‘ありのままで’ 즉 ‘있는 그대로’로 번역하여 부르고 있다. 사역동사로 된 문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전체 이야기의 리해에 편리한 뜻풀이로 후렴부분을 “ありのままの 姿見せるのよ、ありのままの 自分になるの…(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거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거야…”로 번역하였다. 나는 여기서 어느 영어가사의 번역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절묘한 일본식 뜻풀이가 마음에 와닿아서 ‘있는 그대로’란 말로 우리 조선족과 한국의 사이를 풀이해보고저 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 우리 조선족은 한국과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이 더 많다는것을 느낄 수 있다. 중국에 뿌리박은 력사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생존과 적응의 필수 결과로 남과 북이 없는 부분들이 많이 생겼다. 해외의 다른 조선민족에 비해 중국의 조선족이 우리글을 읽고 우리말을 하고 우리습관을 더 많이 유지해왔다 하지만 중국적인 것도 많이 접수하며 살아온 지역의 특징적인 중국조선족만의 변이를 거쳤다. 이것은 타향에 뿌리 잡은 모든 사람들의 필수 결과이기도 하다.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동포. 그래서 한국에서는 '재미교포', '재일교포', '중국동포'라 갈라부른다. 동포끼리도 많이 다르다. '미국동포'는 많은 부분에서 미국식 사고를 하고, '재일교포'는 일본식, '중국동포'는 중국식으로 편향하는 건 불가피한것이다. 우리가 흩어져 살면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츄럴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다르다는 것은 남이라는 것이고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같은 편’ 의식을 느끼는 집단에는 호의적이지만 ‘같은 편’이 아니라고 느끼는 집단에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즉 사람들은 ‘같은 편’이 아니라고 느끼면 그냥 ‘같지않구나’, ‘다르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입견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얻어들은 소문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정보를 눈앞에 접해도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또한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에 대해 공평하게 대할 것을 거부한다고 한다. 하기에 한국사람도 중국조선족도 다르다는 걸 싫어한다. 한국사람들이 우리가 ‘중국조선족’이라고 자칭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 또한 ‘중국조선족’이라는 호칭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같은 편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조선족도 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에 포함되는 것이 싫다.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특유의 사용제한성으로 ‘다문화가정’이라고 하면 ‘일반 한국가정’과 다르다는 것이 강조되기에 조선족은 다문화라고 불리우는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니기에 접수가 안되는 것이다. ‘우리’인지 ‘남’인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할가? 이 세상에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함에 있어서 혈통, 력사, 조상, 국적, 언어, 습관, 외모, 가치관 등등 여러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립장에서 보면 조선족과 한국사람들은 엄연히 남이 아니라 우리일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다 조선사람들이고 백의동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혈통이 달라도 우리일 때가 있다. 요즘 일본의 탁구계에서 최연소 우수선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하리모토 토모카즈(張本智和) 선수는 본이 장씨인 중국 탁구선수출신의 부모를 둔 혈통이 중국이지만 국적이 일본인 사람이다. 국제경기가 펼쳐지면 일본대표로서 많은 일본국민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있다. 단일민족을 자칭하는 일본사회에서 ‘순수한’ 중국혈통을 가진 사람을 자기 나라 대표로 의식했다는 것이다.  국적을 기준으로 하는 사람들의 립장에서 보면 일본국적인 하리모토는 일본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습관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해도 일본에서 태여나서 자라고 일본의 교육을 받은 하리모토는 뭐라 해도 일본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사는 중국사람들은 하리모토가 국적은 일본이지만 실은 중국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중국계 출신의 탁구선수가 일본의 가장 최고선수라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중국사람들도 있다.  국적, 습관, 가치관을 기준으로 보면 조선족은 대부분 중국국적이고 중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았기에 습관과 가치관에서 한국의 것과 많이 다르기에 ‘남’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은 만나면 나이부터 묻고 아래우를 정돈하려 하는 한국식 인간관계방식도 유지하고 있고 우리말을 하고 김치와 된장을 먹는데 어찌 남이냐 하고 웨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머리가 막 복잡해질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질 정도로 답하기 어려운것이 정답이다. 한국친구들이 흔히 우리한테 이런 질문을 한다. “너는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하고 . 이 문제 자체가 제한성이 있는 것이다. 단일민족국가에서 자란 한국인과 일본인이 흔히 하는 질문이다. 미국, 카나다,중국 등 다민족국가에서 자란 사람들은 하지않는 질문이다. 이중, 다중 정체성이 당연한 사회와 그렇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의 차이인 것이다.  애초에 왜 반드시 ‘우리’와 ‘남’을 구분해야만 하는가?! 문제는 ‘같은가 다른가’가 아니다. 다르다는 리유로 사회적 배제를 당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 배제에는 로동시장, 교육, 건강, 사회복지, 법적 평등 등등으로부터의 배제가 있다. ‘남’이 두려운 것은 모르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하기에, 사회질서안정이 위협받을 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범죄와 사회적 배제의 상관성 연구에 따르면 범죄률은 사회적 배제를 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살고 있는 사회에 열애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야말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질성이 우리를 더 가깝게 한다면 이질성이 우리를 더 깊이 리해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두가지를 갈라 생각하지 말고 복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대가 지금의 글로벌시대가 아닌가 싶다. 인민넷 조문판
107    신시대 조선족 녀성의 성장에 관하여(김화선) 댓글:  조회:2174  추천:0  2018-12-27
2018년은 우리 나라 개혁개방 40주년을 맞는 해라 각계에서는 지난 40년간의 발전성과를 총화짓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예측하는 많은 담론을 쏟아냈다. 정부에서는 지난 12월 18일, 개혁개방 40주년 경축대회를 열어 개혁개방선봉자 100명을 표창했다. 그중 11명의 녀선봉자들은 자신의 전문성으로 인정받은 직업녀성의 대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 40년 이래 중국 조선족녀성들도 대거 공적 령역에 진출하여 개혁개방 시대의 참여자, 증인 및 수혜자로 되였다. 개혁개방 초기, 도시의 조선족 기혼 녀성들에게 직장일과 가사일의 평형을 유지해가야 하는 당위성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고 녀성의 직업발전을 억제한다는 연구보고들이 나온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많은 조선족 녀성들이 직장일을 통한 경제적 소득을 갈망하고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면서 녀성들이 직장일과 가사일의 평형을 잘 유지해간다는 신화가 깨지는 많은 사례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992년, 중한 수교를 계기로 지난 20여년간 수십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기혼 녀성들이 전통적인 주요활동공간이였던 가족 공간을 떠나 대도시나 외국에 이주취업을 떠나자 이들 녀성들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많은 조선족 기혼 녀성들은 외지에서 아기나 로인, 환자를 돌보는 돌봄로동 령역에 취업하여 관련 전문기술이나 지식을 쌓고 경제적 소득을 창출하면서 전문직으로서의 돌봄로동에 관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였다. 특히 기존의 가족내에서 무보수로 행해졌던 주부의 가사로동에 대한 가치절하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면서 가족내에 돌봄수요가 있을 때 녀성개인과 가족성원, 시장인력 사이에서 어떻게 평형을 잡아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제이주취업을 경험한 조선족 녀성집단이 생산해내는 돌봄로동에 대한 다양한 담론은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12월 23일,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제1대 회장 장명숙, 제2대 회장 박매화, 제3대회장 리경자) 설립 30주년 경축대회가 심양에서 거행되였다. 1988년 3월에 설립된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는 중국 조선족 녀성사회단체중 가장 일찍 설립된 단체이다. 340명에 달하는 협회 회원들은 심양시 공무원, 교사, 기업가, 전문직 등 진취심 있는 직장녀성들로 구성되였다. 대회에서는 30년간 사랑과 열성으로 협회를 위해 봉사해 온 장명숙, 강옥금, 김동화, 김정자, 리운애, 장신옥 6명의 원로회원에게 ‘평생회원상’을 수여했다. 또한 심양시조선족련의회,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 심양시조선족부녀협회가 《료녕신문》과 함께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녀성’ 9명을 표창했다.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상은 정춘자, 최봉순, ‘가장 아름다운 시어머니’상은 리련호, ‘가장 아름다운 며느리’상은 김춘화, 강화, 정경자, 라분선, ‘가장 아름다운 딸’상은 리미자, 류춘화 등이 수상했다. 이들 9명의 아름다운 녀성들은 질병이나 나이듦, 혹은 민족차이 등에 의해 힘들어야 했던 가족관계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일생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긍정에너지를 전달하며 가족성원에 대한 돌봄로동을 장기적으로 수행해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사실 중국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녀성단체에서 스스로 우수하고 훌륭한 녀성을 발굴하여 표창한 력사는 1997년에 시작되였다. 제1회 중국조선족 장한 녀성, 훌륭한 어머니 표창대회가 1997년12월 20일에 심양시에서 처음 열렸고 1999년1월에 연길시에서 제2회, 2001년 9월에 장춘시에서 제3회, 2003년 8월에 연길시에서 제4회 장한 녀성, 장한 어머니, 장한 안해 표창대회를 했었다. 그때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 장춘시조선족녀성협회,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등 동북지역의 조선족녀성단체가 합동으로 주최했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조선족가족에도 고령화, 질병과 사고 등 각종 원인으로 고령 로인에 대한 돌봄로동, 장애인에 대한 돌봄로동의 수요가 더 많아지고 있으며 치렬하게 직장일을 하는 자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손자녀 돌봄로동을 책임져야 하는 조부모들의 돌봄기간도 줄어들지는 않는 모습이다. 아직까지도 녀성이 가족내 돌봄로동의 주요 책임자로 당연시되는 성별역할문화가 사그러지지 않고 있다. 사회가 진보하면서 정부에서는 공공정책 제정을 통해 돌봄로동에 대한 남성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사회복지를 강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공업화, 정보화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시대에는 많은 중복성을 띤 체력로동, 정신로동이 대체될 가능성이 많지만 녀성들의 애심, 돌봄, 상상력, 창조력, 소통능력 등 면에서의 창조력, 리더십과 특장은 전례없이 강화될 것이며 미래는 녀성 개개인의 자신의 잠재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개혁개방 40년간 조선족 녀성들의 잠재력은 아직 진정으로 활짝 발산되지 못했다. 수많은 조선족녀성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에 참여하여 자아가치를 창조하려는 내적 동력을 품고 있으며 세상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조선족 기혼 녀성들은 자신의 학습과 성장을 완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기 위해 쉼없는 노력과 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조선족 녀성들의 몸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 성장을 이끌 거대한 잠재력을 잉태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우리 사회도 녀성들의 몸에 내재해있는 생기발랄한 힘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족관계 속에서 조선족남성들은 사회적 진보에 따라서 녀성을 존중하고 량성평등을 추구하는 언어와 태도, 실천을 일상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인민넷조문판
106    한국에서 소담히 핀 진달래꽃 여덟송이(최유학) 댓글:  조회:2127  추천:0  2018-12-12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꽃으로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자연스레 우리 민족 상징물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진달래꽃이 곱게 피는 자연환경에서 살아온 데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인문환경 특히 문학의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본다. 주지하다 싶이 여기에는 민족 최고의 시인 김소월의 이 크게 기여한 면도 있을 테고 중국의 하경지 시인이 남긴 유명한 시구 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 렬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우리 조선족문학의 꽃을 피워낸 문학단체-재한동포문인협회와 관련된 고무적인 이야기이다. 국내외 각 지역의 중국조선족문단이 활성화되고 있는 전반적인 고무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 서울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문인들은 재한동포문인협회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자신들의 문학지 《동포문학》을 총 8호 출간했다.   필자는 지난달(11월)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제7회 한중지성인들과 함께 하는 문화교류의 밤’ 행사에 참가했는데 그 모임을 통해 재한동포문인협회라는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주축이 되여 운영되여온 문학단체를 알게 되였으며 이 문학단체에서 주최한 동포문학 8호 출간‧시상식 및 '중국동포지성인상' 등 시싱식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게 되였다. 낮에는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밤 늦게 창작의 필을 놓지 않는 재한 조선족문인들의 창작열기와 기세충천한 모습에 필자는 흠모 반 찬탄 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장 자리를 쭉 지키면서 힘찬 박수를 보냈다.    재한동포문인협회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70만 중국조선족들 가운데 문학활동을 하고 있는 중국조선족들이 주축이 된 문학단체이다. 2012년 초대회장 리동렬 동북아신문 대표가 재한 문인들과 함께 창립한 이 단체는 재한중국조선족문학인이 국내외 문단에 등단하고 주류문단으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유능한 조선족문학인의 배출과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한동포문인협회는 현재 류재순 작가님이 회장을 맡고 있고 초대회장 리동렬 작가님이 대표를 맡아 협회를 이끌고 있으며 아래 시분과, 수필분과, 소설분과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정회원수가 60여명에 이른다.   이 협회는 비영리 민간단체로서 해마다 문학지 《동포문학》을 발행하고, 회원들의 작품집 출간을 지원하며, 재한조선족 작가들의 등단 및 발표 지면 제공, 문학 관련 세미나와 행사 개최,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국내외의 문학단체들과의 상호교류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 '협회' 동인지인 《동포문학》은 해마다 약 1~2회를 발행해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 8호의 《동포문학》문학지를 발간하였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회원들중 변창렬 등 일부 중견 회원작가들은 국내외의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단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조선족문단에 튼튼히 발을 붙이고 중국과 한국의 주류문단을 지향하여 많은 국내외 문학단체들과 잦은 교류와 협력을 진행하면서 끈끈한 련대와 친목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동포문학》 8호 시상식에서는, 시부문에서 림금철 시인이 로 대상을, 홍연숙 시인이 , 리명철 시인이 로 우수상을 수상했고 특별상에 강효삼 시인의 시 이 당선됐다. 수필부문에서는 배영춘 수필가가 으로 최우수상을, 곽미란 수필가가 , 박영진 수필가가 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 대부분은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70만 조선족의 삶의 애환이 잘 그려졌으며 삶에 대한 성찰이 깊이있게 잘 다루어진 작품들이다.   동포문학 8호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재한동포문인협회의 조선족 회원과 작가들의 작품들이지만 뒤부분에 특별히 ‘한국 문인 시•수필선’이라는 란으로 일부 한국 문인들의 시와 수필 등 작품도 실었으며 또한 ‘중국작가작품선’이라는 란으로 일부 중국 한족 등 기타 민족 작가들의 시, 수필, 소설 등 작품들도 실었다.   약 180만명의 조선족인구중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인구는 약 70만명이며 그들은 어떻게 보면 중국 국내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들이며 조선족사회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둥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피와 땀으로 이룩한 성과와 축적한 부는 국내 조선족 거주지역의 경제발전과 가족들의 삶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그들의 애환을 그리는 작품들은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많이 창작돼왔지만 이렇게 한국에서 단체를 구성해 해마다 문학지를 출간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것도 한국의 문단과 중국내의 문단과도 교류와 소통을 밀접히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여 일정한 규모와 성과를 이룩해낸 그들의 활약상에 필자는 마음속 깊이 그들의 성원자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재한동포문인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동포문학》이 해가 갈수록 그 내실이 더 잘 다져져 더욱더 아름다운 진달래꽃으로 한국에서 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민넷 조문판  
105    한국에서 소담히 핀 진달래꽃 여덟송이(최유학) 댓글:  조회:2049  추천:4  2018-12-12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꽃으로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자연스레 우리 민족 상징물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진달래꽃이 곱게 피는 자연환경에서 살아온 데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인문환경 특히 문학의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본다. 주지하다 싶이 여기에는 민족 최고의 시인 김소월의 이 크게 기여한 면도 있을 테고 중국의 하경지 시인이 남긴 유명한 시구 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 렬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우리 조선족문학의 꽃을 피워낸 문학단체-재한동포문인협회와 관련된 고무적인 이야기이다. 국내외 각 지역의 중국조선족문단이 활성화되고 있는 전반적인 고무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 서울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문인들은 재한동포문인협회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자신들의 문학지 《동포문학》을 총 8호 출간했다.   필자는 지난달(11월)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제7회 한중지성인들과 함께 하는 문화교류의 밤’ 행사에 참가했는데 그 모임을 통해 재한동포문인협회라는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주축이 되여 운영되여온 문학단체를 알게 되였으며 이 문학단체에서 주최한 동포문학 8호 출간‧시상식 및 '중국동포지성인상' 등 시싱식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게 되였다. 낮에는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밤 늦게 창작의 필을 놓지 않는 재한 조선족문인들의 창작열기와 기세충천한 모습에 필자는 흠모 반 찬탄 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장 자리를 쭉 지키면서 힘찬 박수를 보냈다.    재한동포문인협회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70만 중국조선족들 가운데 문학활동을 하고 있는 중국조선족들이 주축이 된 문학단체이다. 2012년 초대회장 리동렬 동북아신문 대표가 재한 문인들과 함께 창립한 이 단체는 재한중국조선족문학인이 국내외 문단에 등단하고 주류문단으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유능한 조선족문학인의 배출과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한동포문인협회는 현재 류재순 작가님이 회장을 맡고 있고 초대회장 리동렬 작가님이 대표를 맡아 협회를 이끌고 있으며 아래 시분과, 수필분과, 소설분과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정회원수가 60여명에 이른다.   이 협회는 비영리 민간단체로서 해마다 문학지 《동포문학》을 발행하고, 회원들의 작품집 출간을 지원하며, 재한조선족 작가들의 등단 및 발표 지면 제공, 문학 관련 세미나와 행사 개최,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국내외의 문학단체들과의 상호교류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 '협회' 동인지인 《동포문학》은 해마다 약 1~2회를 발행해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 8호의 《동포문학》문학지를 발간하였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회원들중 변창렬 등 일부 중견 회원작가들은 국내외의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단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조선족문단에 튼튼히 발을 붙이고 중국과 한국의 주류문단을 지향하여 많은 국내외 문학단체들과 잦은 교류와 협력을 진행하면서 끈끈한 련대와 친목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동포문학》 8호 시상식에서는, 시부문에서 림금철 시인이 로 대상을, 홍연숙 시인이 , 리명철 시인이 로 우수상을 수상했고 특별상에 강효삼 시인의 시 이 당선됐다. 수필부문에서는 배영춘 수필가가 으로 최우수상을, 곽미란 수필가가 , 박영진 수필가가 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 대부분은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70만 조선족의 삶의 애환이 잘 그려졌으며 삶에 대한 성찰이 깊이있게 잘 다루어진 작품들이다.   동포문학 8호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재한동포문인협회의 조선족 회원과 작가들의 작품들이지만 뒤부분에 특별히 ‘한국 문인 시•수필선’이라는 란으로 일부 한국 문인들의 시와 수필 등 작품도 실었으며 또한 ‘중국작가작품선’이라는 란으로 일부 중국 한족 등 기타 민족 작가들의 시, 수필, 소설 등 작품들도 실었다.   약 180만명의 조선족인구중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인구는 약 70만명이며 그들은 어떻게 보면 중국 국내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들이며 조선족사회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둥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피와 땀으로 이룩한 성과와 축적한 부는 국내 조선족 거주지역의 경제발전과 가족들의 삶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그들의 애환을 그리는 작품들은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많이 창작돼왔지만 이렇게 한국에서 단체를 구성해 해마다 문학지를 출간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것도 한국의 문단과 중국내의 문단과도 교류와 소통을 밀접히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여 일정한 규모와 성과를 이룩해낸 그들의 활약상에 필자는 마음속 깊이 그들의 성원자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재한동포문인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동포문학》이 해가 갈수록 그 내실이 더 잘 다져져 더욱더 아름다운 진달래꽃으로 한국에서 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민넷 조문판  
104    해외에서 바라보는 개혁개방 40주년(예동근) 댓글:  조회:2014  추천:0  2018-11-23
  여러차례 ‘개혁개방 40주년 기념’관련 학술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중국 내부의 기념방식을 경험해보고 해외의 평가도 들어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해외언론들은 ‘기념’이 아니라, ‘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개혁개방을 바라볼가? 매우 편협적일 수 있지만, 단지 개인적으로 느낀 것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다. ‘개혁개방’이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전환이다. 즉 세계질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는 과정이다. 또한 중국 내부로 볼 때 이는 새로운 출발이다. 그중 가장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즉 ‘의식주문제 해결’로 실용, 경제 중심으로의 전환이다. 모든 것을 집중하여, 모든 것을 동원하여 다양한 차원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거나 확산시키는 것이다. 농촌에서 ‘소강촌(小岗村)’의 모델을 확산하고, 도시에서 ‘경제특구’를 만드는 것이다.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쪽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당시 대부분 서구의 국가들은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지만 그래도 그 용기, 결단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세계질서’에 편입하는 것을 박수치며 ‘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현재 개혁개방 40주년이다. 한편으로 ‘일대일로’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미무역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40년 전에 ‘쪽배’로 출발한 중국이 아니다. 거대한 ‘항공모함’으로 변하여 움직이고 있다. 더 체계적이고, 정비하면서 정확하게 방향을 찾아가며 움직이고 있다. 서구의 국가들은 이런 급변한 중국에 대하여 한편으로 박수치며, 중국이 세계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대한 중국의 변화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미국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새로운 도전자로 생각하고 주변국가의 안정과 번영에 대한 중국의 역할에 대하여 우려와 희망이 섞여있다. 특히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프로젝트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 중국은 더 치밀하고 정확하게 상대국가의 경제발전과 사회안정에 도움이 되는 ‘일대일로’의 하위프로젝트를 점진적으로 추진하면서 상대방의 신뢰와 인정을 얻어야 한다. 개혁개방 40년을 돌이켜보면, 매우 큰 성과를 얻었지만, 지속적인 성장 및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도전도 함께 나타났다. 개혁개방 초창기에 전체 인민들이 ‘의식주문제 해결’에 공감을 하고, 열심히 함께 달렸고 노력하였다. 현재 훌쩍 커진 중국은 내부의 지역, 업종 사이 격차가 벌어져있고, 성장방식도 질적인 성장, 내부소비 주도의 성장으로 바뀌여지고 있으며, 주변국가들에 대하여 ‘친선, 포용’의 외교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인류운명공동체’구축을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 내부로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인민들의 수요가 날로 늘어나고 있고, ‘창조적 경제’로의 전환을 진행해야 하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있다. 외부적으로는 주변국가와 함께 ‘평화, 발전, 행복’의 ‘일대일로’공동건설을 통해 안정적인 지역환경을 만들어가면서 주변국가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더 좋은 세계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가?” 란 질문에 모든 국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더욱 큰 련대를 만들어가면서 대답을 찾을 때 중국의 개혁개방이 더욱 큰 박수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민넷 조문판
103    이우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안성호) 댓글:  조회:2047  추천:0  2018-11-07
이우(义乌)시 하면 혹 잘 모르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우시는 절강성 중부에 위치해있으며 항주 이남 130km 떨어져있는 현급시이다. 워낙 절강성 내륙에 위치하여있어 조선민족과의 유서도 그다지 깊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절강성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거하여있는 지역이다. 이우시의 호적인구는 71.6만명이지만 외지 류동인구가 백만명을 초과하여 현지인을 초월하고 있다. 이우시에 이렇게 많은 외지인들이 모여들게 된 것은 이우시가 세계에서 가장 큰 소상품도매시장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이우시 조선족사회 형성도 이러한 도매시장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우시는 워낙 절강성에서도 자원이 결핍하고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다. 경제를 발전시킬 자원이 없는 상황하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1970년대에 이미 현지에서 닭털로 사탕 바꾸기(鸡毛换糖) 업이 성행하였다. 사탕수수즙으로 홍탕 등 사탕제품을 만들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닭털과 바꾸었다고 한다. 닭털을 염색하여 공예품으로 가공하여 팔아 수익을 올렸다. 간단한 상업으로부터 시작한 닭털로 사탕 바꾸기 업이 소상품판매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개인 상업행위를 허용하지 않았던 1970년대 중엽에 이우에는 이미 몇백개의 소상품가게가 암암리에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이는 이우 소상품시장의 기원이기도 하다.    1982년,이우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상품시장을 개발하고 또 ‘경제를 중심으로 한 현건설(興商建縣)’의 발전전략을 모색해냈다. 26년래, 이우시 소상품시장은 다섯번 자리를 바꾸고 아홉번 증축하였으며 최초의 ‘재래시장, 붕가(棚架)시장’으로부터 현대화된 대형 실내 무역시장으로의 비약을 실현하였다. 현재, 이우시의 시장경영면적은 260만평방메터에 달하는데 경영하는 상품진렬소가 5.8만개, 43개 령역과1900개 부류, 40만가지를 넘는 제품을 포함하고 있으며 시장거래액은 련속 17년 전국1위를 차지했다.    이우시의 상품은 전세계215개 나라와 지구에 수출되고 있는데 외국 수출수치가 55% 이상을 넘고 있다. 100여개의 국가와 지구로부터 온 1만여명의 외국상인들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국제물품 구매를 하고 있다. 이우시에는 외국회사 대표기구가 1340여개가 있는데 이는 절강성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이우 조선족사회의 형성은 소상품무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1996년부터 한국인들이 소상품, 잡화 장사를 위해 이우에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현지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한국, 미국, 남미, 일본, 동남아 등 지역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개인장사를 위주로 진행되였지만 액세서리 작업장, 조립장 등 가공공장을 운영하는 등록기업도 2011년에는 이미 100개 정도 되였다.   한국 상인, 회사들의 이우 진출과 함께 조선족들도 이우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우의 조선족사회는 한국인 진출에 따른 통역, 무역보조 등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확인에 제일 일찍 이우에 도착한 조선족은 1996년 12월 한국회사의 파견을 받고 이우로 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JSH씨는 청도에서 근무하다가 회사 사장의 부탁으로 지명도 들어보지 못한 이우로 오게 되였고 생소한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였다고 한다. 업무에 익숙하게 되면서 점차 독립하여 현재 개인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회사의 파견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족들의 이우 진출은 그후 조선족네트워트에 의하여 지인의 소개로 오는 비률도 점점 높아지게 되였다. 2000년말 이우시 한국인, 조선족을 포함하여 500명 정도 밖에 안되였지만 2004년에 이르러 이우시 조선족인구만 이미 3000여명에 달하게 되였고 2010년경에는 2만명을 초과하였다. 2008년 경제위기로 기타 지역 조선족사회가 위축될 때 이우시의 조선족 인구는 오히려 청도, 광주 등 지역으로부터의 류입으로 증가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우의 소상품무역이 큰 초기비용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점이 경제위기하에 타지역보다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무역업에 익숙하게 되고 한국, 일본의 바이어들과 신뢰관계가 구축됨에 따라 독립적으로 무역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였다. 경제형태도 사업가, 회사직원, 민박, 도우미 등 다양하게 구분되여있다. 현재 이우시는 3만여명의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절강지역 최대의 조선족집거지로 부상되였으며 동주화원, 강남중구 등을 중심으로 조선족상권도 여러 구역에 형성되였다.    네트워크와 정보력은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원이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바드민톤, 축구, 골프, 산악회 등 수많은 동호회들이 주말마다 다양한 친목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축구협회에는 열여개의 축구팀이 가입하여 주말마다 축구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기타 지역 조선족사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계모임도 이우에서는 2006년경부터 시작하여 매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동호회, 계모임 등을 통하여 정보교류를 함으로써 장사에 유리한 정보를 공유하고 급히 소요되는 경영자금난을 해결할 수 있다. 조선족, 한족, 한국인의 구분없이 마음 맞는 지인사이의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활성화되여있으며 더불어 함께 사는 지연네트워크가 형성되여가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트는 이우 현지에만 제한되여있지 않으며 비지니스에 따라 중국 각지와 한국, 일본, 미국 등을 포함한 세계 각지로 이어지고 있다. 2006년 월드옥타 이우지회가 설립되여 경제계 인사들의 정보교류와 친목을 돈둑히 함과 동시에 월드옥타 여러 지회들과 교류함으로써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차세대 통합 글로벌 창업무역스쿨 등을 개최함으로 하여 차세대 경제인재 양성에도 힘을 다하고 있다. 2018년 6월15일부터 17일까지 이우에서 개최된 제4기 화동-화남 차세대 통합 글로벌 창업무역스쿨에는 상해, 이우, 소주, 남경, 광주, 심천 지역 차세대 100여명이 참가했다.    이우 조선족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민족문화 전승을 위한 많은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말학교, 경로행사, 민족문화체험 등 민족문화 전승을 위한 행사들이 이우 조선족단체들의 주최로 진행되고 있다. 최대 이벤트는 2003년부터 시작된 조선족운동회로서 해마다 10월 연휴기간에 이루어지고 있는바 축구팀만 12개 팀이 참가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2008년3월 이우시조선족 유치원이 설립되여 우리말과 글을 배워주고 있다. 2012 년에는 새로운 유치원 청사로 이전되여 보다 훌륭한 환경에서 차세대 민족문화 교육에 진력하고 있다. 유치원 재원 어린이는 초창기의 30여명으로부터 지금은 12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주말한글학교 학생도 40명쯤 된다.   이우 조선족 사회의 형성과 발전은 20년이란 시간 밖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기업과 상인들의 진출과 함께 시작된 조선족들의 이우진출은 짧은 기간내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우에 왔다가 떠나는 조선족도 적지 않지만 새로 이주하여오는 조선족들이 빈 자리를 메우면서 조선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적인 안정과 함께 현지에 정착하고 부모님을 모셔오는 사례가2004년경부터 늘어나고 있다. 초기에는 단순히 돈벌이로 이우에 오게 되였고 돈을 벌고 나면 항주 등 보다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착경향이 늘어나고 있으며 집을 사고 호구를 옮기는 조선족들이 엄청 많아졌다. 이우시는 조선족이 전무하던 지역으로부터 절강지역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모여살고 민족음식, 민족문화가 꽃피는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무역으로 인하여 형성되고 무역으로 인하여 발전한 이우 조선족사회는 페쇄적인 조선족만의 울타리가 아니라 한족, 기타 소수민족, 한국인이 더불어 함께 사는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며 호혜의 기초상에서 공존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인구이동이 보다 가속화되고 이주방식이 다양화되고 있는 글로벌시대에 이우의 조선족사회 형성과 발전 특성은 글로벌 생활방식의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될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인민넷 조문판
102    소비 속에 숨어있는 경기의 변화(리천국) 댓글:  조회:2050  추천:0  2018-10-24
       녀성의 치마길이만으로도 경기가 불황인지 호황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약간 엉뚱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녀성의 치마길이는 그 당시의 경제상황과 직장인들의 취업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26년에 미국의 경제학자 죠지 테일러는 “경기가 호황일 때 녀성은 짧은 치마를 선호하게 되는데 이는 본인이 입은 새 스타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고 경기가 불황일 때 녀성은 스타킹을 자주 사기 어려워 긴 치마를 입어 오래된 스타킹을 감추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리론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치마길이로 경기변동을 판단하는 헴라인 지수(Hemline Index)까지 만들어 발표하였다.   20세기2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스타킹이 비싸고 귀하였던 시절이여서 헴라인지수가 더욱 의미를 가지게 되였다. 실제로 20세기초, 경기가 호황일 때 녀성의 치마길이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짧아졌고 20세기 2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시기에는 긴 치마가 갑자기 류행되였었다.   이런 상관관계는 이 때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1987년에 미국에서 미니스커트가 한참 류행이였지만 그해 10월부터 백화점에서 미니스커트가 갑자기 팔리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얼마 안지나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든 1987년 주식시장의 재난이 일어났다. 미국 뉴욕 주식시장에서 일어난 이번 위기는 전 세계를 휩쓸었고 현재까지 파괴력이 가장 강한 세계적인 주식시장위기로 불리우고 있다. 심지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시기에 뉴욕의 가을 패션쇼에서 일부 세계 저명한 브랜드는 모두 하나같이 무릎을 덮는 긴 치마를 디자인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 경제발전수준이 이미 많이 향상되였고 개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패션들이 세상에 나오고 있다. 스타킹 가격도 이제는 하락하여 이미 그 때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치마길이와 경기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비자의 소비행위를 통하여 경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어떤 경제학자도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치마길이 대신 이제는 다른 기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련방준비위원회 주석이였던 그린스펀은 미국의 화페정책을 제정하기 전에 지역주민들의 쓰레기통을 관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사용하는 상품의 소비량이 많아지면 쓰레기도 자연스레 많아지게 되고 이는 경기가 좋아지고 있는 신호로 판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리유로 현재 중국에서 류행하고 있는 인터넷거래 상품의 쇼핑목록은 중국의 경제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신호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일부 인터넷거래 플랫홈 업체에서 거금을 들여가면서 매일마다 인터넷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소비 데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도 가장 빠르게 중국 소비자의 실용적인 소비정보를 얻어내고 소비자들의 소비 성향과 추세,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경제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기 흐름의 정보는 기업의 생산과 확대재생산에 유용하게 사용될 뿐 만아니라 자산시장에서의 금융투자정책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여 기업에 거대한 비즈니스기회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의 정부도 자국 소비자들의 소비상태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소비 데터로 경제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소비 물가지수인데 많은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면서 이들의 소득과 소비능력 상황을 정리하여 만들어낸 지수이다. 이런 소비물가지수는 정부가 여러가지 세수정책, 화페정책, 취업정책 등을 통해서 거시경제를 조절하고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가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소비형태와 소비성향이 계속 나타나고 있기에 더는 단순한 방법으로 경기를 판단하기 어려운 만큼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특징에 맞추어 보다 복합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경기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다. 인민넷 조문판
101    '개체화'에서 신형의 '합작경제'로(박광성) 댓글:  조회:3354  추천:2  2018-10-16
근대 시장경제발전과 더불어 제기된 경제리론이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를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경제리론이였다. 그들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시장’이라는 ‘손’이 경제운영을 효률적으로 관리하여 경제균형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야경군’의 역할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들의 ‘시장만능론’은 20세기 30년대의 세계적 경제공황으로 그 한계를 드러냈고, 그를 대신한 것이 영국이 경제학자 케인즈의 ‘수요리론’이였다. 그에 의하면, 시장경제하에서 늘 유효적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 나타나기 때문에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효적 수요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대두된 것이 ‘복지국가론’이였고, 정부는 재정적 수단을 통하여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재부 재분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를 이끈 이 정책은 지난세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의 재정적 한계와 비효률성 등 문제에 봉착하여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다시 경제정책의 주요 패러다임으로 등극하였다. 이로 하여 각국의 복지정책이 축소되였고 량극화가 또다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였다. ‘시장만능론’과 ‘정부개입론’이 다 한계를 드러낸 상황에서 사회불평등 등 시장경제가 빚어내는 일련의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가가 큰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 바로 ‘사회적 경제’였다. ‘사회적 경제’란 민중 스스로가 힘을 합쳐 ‘합작경제’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하여 경제효익을 창출하는 동시에 공동체 와해, 실업, 빈곤 등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방식을 말한다. 마을협동기업, 사회적 기업, 각종 경제합작사 등을 주요 방식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는 지난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부터 발전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합작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최근에 개최된 ‘향촌진흥’에 관한 중공중앙 정치국 제8차 집체학습에서 습근평 총서기는 ‘농민합작사’와 ‘가정농장’을 새로운 농업경영의 주체로 힘써 육성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신형의 ‘집체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맑스는 생산력발전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 생산력발전이 제한된 상황에서 ‘집체경제’를 발전시키려다 한계에 봉착한 경험도 있지만, 현재는 생산력발전이 소규모 ‘개체경제’를 도태시키고 있으며, ‘협동’을 통한 새로운 ‘합작경제’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민족도 현재 ‘합작경제’ 발전이 더없이 시급한 시점이다. 지난 20여년간 우리는 유례없는 급속한 사회적 변혁을 겪으면서 ‘농민위주’에서 ‘대도시 시민’ 위주의 집단으로 변신하였다. 큰 도약의 과정이기는 했지만, 이 과정 또한 기존의 ‘집단’, ‘집체’,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체화’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대도시 시민이 된 동시에 우리는 공동체의 힘을 떠나 모든 것을 돈과 시장에 의거하여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이 치렬한 대도시 경쟁사회에서 개인이란 ‘개미’와 같은 것으로, 이제 미래를 위해서는 또다시 합작하여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신형의 ‘합작경제’를 발전시킬 시점에 와있다. 국외의 사례들을 보면, ‘합작경제’란 힘이 제한된 개인들이 힘을 합쳐 공동사업을 진행하면서 거기에서 발생하는 리윤 일부분을 적립하여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거나 혹은 서로 다른 자원과 우세를 가진 사람들이 협업하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가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시장경제제도 혁신의 꽃이라고 볼 수 있는 ‘주식제’의 경우 ‘작은 돈’을 ‘큰 돈’으로 만들어 ‘리윤’을 창출하는 데 목적을 두지만, 현재의 ‘합작경제’의 경우 각자의 가지고 있는 ‘작은 힘’을 합쳐 생존에 필수적인 ‘규모화된 힘’을 만들고, 더 나아가 자신들에 봉착한 사회적 문제를 이러한 공동체의 힘에 의거하여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를 시장경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새로운 대안으로 보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런 일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회혁신가’, ‘사회기업가’로 호칭하면서 그 성장을 독려하고 있다. 력사를 뒤돌아 보면, 우리 민족에게는 이미 강한 합작경제의 DNA가 내재되여있다. 근세 혹한의 력사 비바람 속에서 험한 이민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었고, 서로 의지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혈연과 지연을 초월한 강한 공동체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부상조의 공동체정신이 형성되였기 때문에 해방 초기에 조선족은 전국 농업의 집체화과정에서 가장 선두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연변지역의 김시룡농업합작사는 당시 전국 집체화 운동의 본보기로 되여 전국적인 학습의 대상으로 되였었다.  이런 강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민족은 대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잊지 않고 그것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도처에서 활발히 벌리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주의 시간과 시장경제로 진입한 시간이 짧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하고 옛방식을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를 인식하고 도처에서 새로운 합작의 방식들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 문화우세를 ‘합작경제’ 발전의 에너지로 전환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공동체는 ‘정의 단위’지만, 대도시 사회에서 공동체는 ‘합작의 단위’이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꼭 그러한 진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맑스는 앎은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우리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실천에 매진한다면 꼭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합작방식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인민넷조문판
100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권진홍) 댓글:  조회:4005  추천:2  2018-09-19
              2018년 8월, 여름방학이 거의 마감될 쯤, 북경정음우리말학교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비록 함께 간 건 아니지만 워낙 인터넷이 발달하고 위챗사용이 활발한지라 거의 실시간 뉴스처럼 화면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유쾌한 모습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던 중 프랑카드 표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정음우리말학교 고국탐방”…   처음 기획 시에는 ‘모국탐방’이라고 했다가 여러 선생님들이 ‘모국’이라는 용어는 타당치 않은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아서 쓰지 않았는데 최종에는 ‘고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단체방문일 경우에는 개인적인 방문에 비해 표어도 있고, 공식적인 행사도 있기 때문에 용어사용에 여러 면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단체들에서 크게 중시를 하지 않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쓰고 있는 현상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이 ‘모국’과 ‘고국’에 대해 좀 알아보고 싶다. 그래야 앞으로 사용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모국: 1. 자기가 태여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쓰는 말. 2. 따로 떨어져나간 나라에서 그 본국을 이르는 말.   고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사전해석이 알려주듯이 현재 중국에서 중국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한국을 ‘모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용법이다. 한국이 일부 이민 1세의 모국이였겠지만 3대 4대에 걸치는 우리가 태여난 나라는 아니다. ‘고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더더욱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보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면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자세이다.   가끔 조선족을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자처하는 글들을 본다. 같은 피가 흐른다고 친절한 대우를 받을 줄로만 예상하고 있던 한국에서 차별대우를 받을 뿐더러 원래 쓰던 한글 이름마저 그대로 기입하지 못하게 하는 취급을 받는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한다.   억울함이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 처신이 맞았는지부터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 가서 무작정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만 믿고 다른 면들도 다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수는 없는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에, 이방인취급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나 자신이 잘 처신했는지부터 돌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비록 간단한 하나의 어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언어가 지니는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사표명이고, 보고 듣는 사람이 리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매체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어휘 하나 사용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지금 민족언어를 유지해나가고, 민족 례의범절을 몸에 익혀 민족특색을 오래오래 이어나가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고 앞으로도 기성세대들이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명확히 해야 할 부분도 꼭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단단하고 성숙된 문화를 만들고 숙성시켜가는 과정에 우리부터 먼저 분명한 의식세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아직 사유능력이 여물지 않은 아이들도 우리말, 우리문화를 정확하게 배우고 수용하면서 우리만의 우세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전통을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작정 주입시켜 혼란을 주는 것보다는 차츰차츰 혼자의 인지능력으로 판단해나가고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어휘를 사용하든, 어떤 판단기준을 가지든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선택하자는 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2018.9.18
99    인생에도 작전타임이 필요하다(김부용) 댓글:  조회:2094  추천:1  2018-09-04
인생에도 작전타임이 필요하다   인천대학교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조교수 김부용 어제 한국은 아시안게임 축구 한일전으로 뜨거웠다. 다른 나라들과의 경기에 비해 유난히 한일전은 늘 서로가 신경을 곤두세우며 치렬하게 싸우는 느낌이다. 결국 팽팽하게 싸우다 연장전까지 갔고 한국이 2:1로 우승을 거머쥐게 되였다. 돌이켜보면 올해는 유난히 스포츠행사가 많은 한해다. 2월의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시작해 6~7월에는 월드컵이, 그리고 8월에는 아시안게임이 치러졌다. 많은 경기들을 보면서 한가지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바로 작전타임이다. 작전타임은 말 그대로 경기 도중에 작전을 위해 요구할 수 있는 타임아웃이다. 농구, 배구, 축구 등 구기 종목의 규칙으로 규정되여있다. 회수는 종목에 따라 다르며 전반, 후반 혹은 세트마다 필요시 요구할 수 있다. 시간은 약 30초간으로 선수들은 경기장 밖에서 감독과 작전을 토의할 수 있다. 이 작전타임은 상대방의 전략이나 실력을 보며 작전을 토의하는 매우 유익한 시간으로, 전체 경기의 성공 여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경기와 중간중간의 작전타임을 보며 사실 우리네 인생도 이러한 작전타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속에서, 요즘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린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닌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인지 등을 미처 점검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잠간 멈춰 생각을 정리하고 전략을 고민하는 작전타임을 갖는 것이 방향을 잃지 않고, 더 빨리 갈수 있는 지름길이란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찌 우리네 인생뿐이랴. 국가도 마찬가지다. 요즘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베네수엘라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매장량을 가진 나라, 20세기 후반 수천명의 난민을 수용할 정도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했던 나라, 그렇던 나라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였을가? 베네수엘라가 현재의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화와 가격 시스템, 최저임금, 불균형 등 여러 면에서 제대로 된 작전타임을 가져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기술패러다임이 바뀌는 현재, 경제 또한 작전타임이 필요하다. 한국은 대기업과 조선, 철강, IT, 자동차 등의 주력산업을 바탕으로 제조업 강국의 대렬에 합류했지만 4차 산업혁명에는 늦장 대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 대기업의 락수효과 부재, 혁신동력 부족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중국 경제 또한 2008년의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소비주도 성장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지만 민간소비의 엔진역할이 아직도 약한 편이다. 국유기업 개혁이나 자본시장 개방 등도 아직 할 일이 많다. 최근 몇년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BAT를 필두로 한 거대 공룡기업이 혁신을 이끌면서 중국이 혁신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30여년간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작정 달려온 나, 정작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 나부터 당장 작전타임을 가져야겠다. 인민넷조문판
98    [리성일]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이야기(1) 댓글:  조회:2443  추천:3  2018-08-14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이래, 북경대학 조선족 졸업생 및 재학생들은 7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외에 재직 교원이 22명, 퇴직 교원이 11명이 있으며, 이미 작고한 교원도 10명이나 된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1950년에 수학과에 리증숙(연변대학 수학학부에 배치), 법학과에 최병석(중국정법대학 형법학과 교수) 두명이 처음 입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구생으로는 1951년에 물리학부에 리원백, 정철수 두명이 입학했다고 한다. 당시 학위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연구생과정도 학부과정과 마찬가지로 4년 동안 공부하게 되였다. 1957년에 북경대학 유기화학전공 연구생과정을 졸업한 강귀길 교수는 연변대학 화학학부에 배치되였으며, 후에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초대 리사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전의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상황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1935년에 서울 세브란스의학원(현 한국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부터 북경대학 의학원 미생물교연실에서 교직을 맡은 방량(方亮) 교수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방량 교수는 194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북경대학 의학원 최초로 입당한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1958년까지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8년부터 1996년까지 서안의학원(현 서안교통대학 의학부)에서 부원장, 교무장 등 요직을 맡아왔다. 2015년에 102세 일기를 세상을 마감하였지만, 그는 중국의 저명한 의학미생물학자, 국가1급교수, 걸출한 사회활동가였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는 매우 적게 알려져있다. 이미 작고한 교수들중에서, 북경대학 지질학과의 안태상 교수는 1983년에 일찍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였으며, 아형석, 삼엽충 등 고고학분야에서 걸출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외에도 북경대학 화학과의 김천주, 리근배, 생물학과의 전호석, 전자학과의 김동한, 기술물리학과의 장영협, 북경대학 병원의 김동민 등 교수들도 맡은 바 연구분야에서 국내의 인정을 받는 높은 성과를 이룩해냈다. 북경대학 조선어학과는 그야말로 조선족 교원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연변대학 조선어학부를 제1기로 졸업한 박충록 교수와 안병호 교수, 리귀배 교수는 1950년대부터 빈 터전에서 당시 북경에서 제일 먼저 조선어학과를 창설했다. 지난세기 60년대에 최응구 교수, 70년대에 리선한 교수와 90년대에 김경일교수 등 우수한 교원들이 활약했으며, 1988년에는 조선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 연구소는 북경대학에서 가장 일찍 세운 국가별 연구소이다. 오늘날 ‘일대일로’ 건설이 추진됨에 따라 여러 대학에서 국가별, 지역별 연구소를 설립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는 가장 선구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 리정애, 김순금, 리선죽, 현영자, 박혜숙 등 퇴직 교원들은80 고령에 달하지만 만년에도 재학생의 발전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1966년부터 1976년 사이에는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북경대학 입학수가 크게 감소되였는데 지금까지 최태호(동방학), 강귀선(일어), 김례곤(동방학), 박진옥(영어) 등 네명의 졸업생들만이 알려지고 있다. 1977년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여서부터 그해에 정인갑(중문학과), 최진하(물리학과), 김용헌(지질학과) 등 세명이 북경대학에 입학하였다. 후에 조선족학생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가장 많은 해인 2002년에는 학부생 35명이 입학했다고 한다. 개혁개방 이후에 대학생들의 친목활동이 조직되고 점차 활성화됨에 따라 신입생 환영회, 졸업생 환송회 등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됨으로써 학생 명부도 만들어지게 되였다.  북경대학 첫 문과 조선족 박사로는 1995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김훈 교수(현 북경대학 일본어학부 주임)이며, 첫 리과 박사로는 1999년에 생명공정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전철현 박사(현 북경대학 생명공정학원)가 있다. 현재 북경대학 뿐만 아니라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인원수는 80여 명이 넘게 추정되고 있으며, 여러 학계 및 연구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표적인 졸업생들로는 중앙미술학원 인문학원 윤길남 원장(78학급 력사학부), 조선족 첫 녀장군인 리현옥 소장(82학급 무선전학부), 중앙당학교의 조호길 교수, 조선반도문제 전문가 김경일교수(북경대학 조선어학과), 유명한 종교철학연구자 김훈 교수(북경대학 일본어학과), 북경대외경제무역대학 외국어학원 서영빈 원장, 중조국경사 전문가인 중국사회과학원 리화자 연구원 등이 있으며 이 뒤를 이어 제3세계과학원 학술상을 수여받은 박세룡 교수(북경대학 성시환경확원), 서울대 강광문 교수 등 젊은 세대들도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국이나 일본, 한국 등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거나 연구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졸업생들도 많다. 이외에도 정계(국가지진국 리유철 사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제연구센터 리홍걸 부주임), 기업계(산동랍봉패션유한회사 리상철 리사장), 법조계(한춘녕 변호사, 홍송봉 변호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2015년 9월에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산하 단체로서 북경대학조선족동문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여 선후배 친목을 도모하고 있고 나아가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이야기》를 집필, 출판하기 위해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북경대학도 수도에 있는 기타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신입생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문과와 리과생 비례가 엄중하게 균형을 잃고 있으며, 그 상황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오늘날 빅데터, IoT(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및 고급 로보트, 3D 프린팅 등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에 리과생들의 엄중한 부족은 우리 민족 사회가 고도로 중시하고 시정해야 할 교육의 불균형, 인재의 불균형 문제이며, 나아가 심각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제는 우리사회도 대학 입학수치만을 추구하기보다도 구조적 균형을 도모하며, 나아가 중국의 거대한 발전 흐름을 파악하고 편승해야 한다. 따라서 북경대학을 비롯한 조선족대학생들은 자기의 대학과 민족의 력사를 알고 뿌리를 깊게 내려야만이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고 발전해나갈 수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의 대학이야기, 고향이야기, 인물이야기는 우리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고 널리 전해져야 할 것이며, 나아가 우리 세대가 후대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고 마땅히 리행해야 할 신성한 의무이기도 하다. 인민넷조문판
97    한국의 핀테크 모바일결제방식은 왜 중국에 뒤쳐졌는가? 댓글:  조회:2014  추천:1  2018-08-01
핀테크(Fintech)는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전자상거래에서 IT와 금융이 결합해서 지급(인터넷 or 모바일) 결제, 이체, 개인금융자산관리, 크라우드 펀딩, 데터 분석 등 다양한 기술이 도입된 네트워크 플랫폼이다. 이중에서도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간편 결제서비스가 핀테크 서비스 산업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O2O(Online to Offline) 방식은 오프라인의 소비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리용해 결제가 이뤄지고 있기에 발달국과 발전도상국을 망라한 전 세계 금융결제시장의 큰 변화를 계속 촉구하고 있다.  글로벌시장에서 핀테크 모바일지급결제서비스의 경우, 미국과 중국을 선두로 글로벌시장에서 활발히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2017년에 들어서서 대내적으로는 ‘무 현금사회’진입의 목표를 지향, 대외적으로는 전 세계 지급결제시장의 ‘생태환경’네트워크 조성 등 여러 측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폰의 보급률이 날로 향상하고 있는 환경여건의 변화 역시 결국 핀테크 모바일결제수단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문턱이 높았던 신용카드위주의 결제시스템에게는 위협과 도전이 될 수 밖에 없다. 한국은 중국보다 먼저 신용사회로 진입한 상황이기에 신용카드에 대한 신뢰도 휠씬 높아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 다소 뒤쳐진 부분이 아쉬운 대목이다. 2018년에 들어 한국의 핀테크 모바일지급결제시장도 비록 빠르게 성장과 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전체적인 시장은 여전히 신용카드위주의 지급결제수단의 판도가 우위이고, 또한 여러 복잡한 핀테크 규제 등으로 인해 핀테크 서비스의 발전이 국외에 비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스마트폰보급률과 우수한 IT기술 및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핀테크 업체는 세계 100대 기업 순위에 겨우 1개 기업만이 들어가는 등 아직 저조한 상황이다.  중국과 미국 등 핀테크 모바일지급결제시장이 발달된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전체 모바일결제시장은 약 3~4년 뒤쳐져있다. 2017년 한국의 모바일 결제시장의 빠른 성장도 괄목할 수 있고, 아직 카드결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잠재력이 큰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6년 말까지 한국 모바일 간편결제 시장은 약 7조 6000억원(한화) 규모였다. 2017년 1분기 간편결제서비스 리용실적은 하루 평균 133만건으로 전년대비 202.86% 증가, 하루 평균 거래액도 230.34% 늘어난 447억 원이였다. 2017년에 한국의 모바일 간편결제시장의 판도는 삼성페이와 네이버페이 ‘빅2’로 굳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카카오페이, SSG페이, 엘페이 등 후발주자들이 따라오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2017년 1분기 기준으로 삼성페이의 루적결제금액은 6조 5000억(한화) 규모로 추정되고 있고, 네이버페이도 약 4조 8000억(한화) 규모로 예측되고 있다. 한국이 사용하고 있는 모바일결제 방식은 주로 근접무선통신(NFC)나 바코드 방식이기에 단말기를 설치해야 결제가 가능하기에 오프라인시장에서 경쟁력이 부족한 단점이 있다. 이는 소비자에게 편리성, 비용절감, 결제 병목현상 해소 등의 장점이 있어 결제기술중 유독 QR코드 결제가 중국 전역을 장악한 부분과 가장 대조된 부분이고, 또한 한중간에 모바일결제의 기술적인 격차가 큰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의 모바일결제기술은 처리기술의 미비점 개선 등 리용의 편의성 증진 노력이 더욱 강화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아직 모바일거래에 대한 불안감과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고, 카드결제에 대해 상대적 큰 불편함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2017년 8월에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를 실시한 결과를 보면, 최근 6개월 내에 모바일결제를 리용한 비률은 모바일뱅킹보다 낮은 수준인 25.2%로 나타났다 30~50대에서의 리용비률은 전년보다 크게 상승하였으나, 60대 이상의 리용비률은 5.0%로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다. 모바일금융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리유로 ‘개인정보 류출 우려’(72.0점), ‘안전장치에 대한 불신’(69.8점) 등이 높게 나타나 안전에 대한 우려가 미리용의 주요인으로 판단된다. 핀테크 혁신 가속화에 따라 다양한 고객층의 수요에 맞춘 비대면 인증의 편의성과 안전성 제고 및 다변화에 대응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둘째로는 온라인 ‘생태환경’의 미비, 즉 ‘한국형 알리바바’의 부재이다. 간편결제시장에서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과 실버세대보다는 젊은 세대에 집중되여 사용되다 보니 기존 오프라인중심의 사업자는 다소 불리한 측면이 있다. 온라인 시장과 오프라인 시장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면, 온라인시장에서는 사실상 온라인쇼핑몰시장을 석권한 네이버의 영향으로 네이버페이가 사실상 강자라고 볼 수 있고, 카카오페이는 카카오톡 기반의 결제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카카오페이와 페이코는 아직 오프라인에 진출하지 않은 상황이고, LG페이는 아직 온라인에 진출하지 않은 상황이다. 절대강자인 삼성페이도 알리바바처럼 쇼핑몰을 운영하지 못하고 있기에 사실상 ‘한국형 알라바바’가 존재하지 않는 구도이다. 셋째로는 금융권이 전통적인 신용카드결제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관행이 여전하다. 한국내에서 리용비률이 가장 높은 지급수단은 단연 신용카드다. 2017년 3월 발표된 한국은행에 발표된 에 따르면, 건수 기준 지급수단별 리용비중은 신용카드 (50.6%)가 현금(26.0%)의 2배 가까운 수준을 보였으며, 다음으로는 체크•직불카드(15.6%), 계좌이체 (5.3%) 및 선불카드•전자화폐(2.4%) 순이였다. 금액기준으로는 신용카드(54.8%), 체크•직불카드(16.2%), 계좌이체(15.2%) 및 현금(13.6%) 순으로 조사되였다. 한편, 년령대별로는 현금의 리용비중이 60세 이상에서 큰 반면, 체크•직불카드 및 선불카드•전자화페는 20대의 리용비중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소득수준별로는 고소득일수록 신용카드, 체크•직불카드의 리용비중이 높았다. 지급결제카드 보유률의 경우 신용카드는 93.3%, 체크•직불카드가 98.3%에 달하는 반면 선불카드• 전자화페 및 모바일카드는 26.2% 및 12.1%에 그쳤다. 이는 한국사회가 현금 리용 감소 및 비현금 지급 수단 리용 증가가 지속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급결제수단에서 신용카드가 아직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로는 한국정부 금융당국의 초점이 ‘동전 없는 사회’구축정책에 한정되여있었다. 2016년부터 한국의 ‘무현금’사회의 추진도 계속 진전되고 있다. 글로벌 지급결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행도 2016년 1월 을 선포하고 2017년 4월부터 ‘동전 없는 사회’구축정책을 시행중이다. 한국의 지급결제수단방식은 신용카드, 직불카드, 모바일결제, 현금 등 4가지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계좌이체와 선불카드 및 전자화페까지 더하면 비 현금 지급수단 리용률은 86.7%까지 늘어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과 중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비현금 리용비률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기에 현실에 다소 안주하는 경향이 있어보인다.  2018년들어서 한국도 중국처럼 QR코드 방식으로 모바일결제방식이 보다 활성화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체들은 바로 카카오페이, BC카드 등이다. 이러한 기업체들의 배후에는 모두 중국업체와의 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기인된다. 중국의 텐센트(腾讯)는 카카오톡의 지분의 13%를 차지하는 제2대 주주이기에 중국의 모바일결제방식을 그대로 한국시장에서 적용시키기 용이하고, BC카드는 중국의 은련(银联)과 제휴를 맺고 향후 QR코드 결제서비스를 한국시장에 확대하여 편리하고 안전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향후에 중국과 한국의 모바일 결제시장에 대한 협력은 더욱 커질 전망으로 보인다. 4차 산업의 경쟁시대에 들어서 기술적인 우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것 만큼, 특히 핀테크 관련 배경지식과 경험, 능력을 갖춘 우수한 인재수요도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의 핀테크시장을 모두 잘 리해하는 유능한 글로벌 젊은 인재들을 많이 발굴 및 육성하여 한중 경제협력에 적극 동참하길 기대한다. 인민넷 조문판 
96    정보화 시대와 평생학습사회(최선향) 댓글:  조회:1895  추천:0  2018-07-10
오늘날 우리는 탈공업화의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통신과 첨단기술, 디지털 등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정보화 시대에 관한 사전적 해석을 보면, 정보화 시대란 정보로 가공된 지식과 자료 따위가 사회구조나 습관, 인간의 가치관 따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를 뜻한다. 이러한 정보화 시대와 인생 백세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평생을 살아가는 데 역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지식의 폭발적인 생산, 새로운 사물과 급변하는 우리의 삶, 조금만 정신줄을 놓아도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다. 몇년간 한국에 나가 박사공부를 하다 올해 중국의 모 대학에 교수로 취직이 되며 귀국한 한 지인이 생활상의 어려움을 호소해왔다. 채소나 과일을 살 때도, 핸드폰비용을 지불할 때도, 항공권을 예매할 때도 현금이 필요 없이 위챗과 알리페이(支付宝) 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할줄 몰라 한동안 버벅거렸다는 것이다. 젊고 배울 대로 배운 그에게도 새롭게 적응하고 새롭게 배워야 할 게 많은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늘 뭔가를 배워야 하고 이주하는 삶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사람들이 이주를 많이 하며 노마디즘적(유목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배움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학교교육만으로는 정보화 시대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으며,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평생학습사회를 요구받고 있다.  평생학습사회라는 개념은 미국의 교육학자 R.H.Hutchins가 1968년에 그의 저서 《평생학습사회》(The Learning Society)에서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그는 전체 사회가 ‘학교화 사회’에서 ‘평생학습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 평생학습사회란 어떤 사회일가? 우선 학자들의 연구를 요약해보면, 평생학습사회란 삶의 특정시기에만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반을 통하여 학습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하며, 또한 그것이 특정분야에 국한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평생학습을 누구나 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보장해주는 사회가 평생학습사회다. 평생학습사회는 개인이 학습을 통해 자신이 이루고 싶어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며,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사회의 련대감 내지 공동체의 발전을 꾀하도록 하며, 결과적으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한다. 중국에서도 평생학습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특히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모든 사람이 평생학습을 하는 평생학습사회를 건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교육을 중시하는 조선족들 역시 평생교육, 평생학습열이 대단하다. 조선족언론의 보도를 보면 전국 각지에서 독서회 같은 모임이 많이 이어져오고 있다. 조선족이 많이 집거해 사는 연길을 비롯한 연변지역에는 정부차원에서 벌이는 독서절 이벤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나 직장에서 조직하는 독서모임도 있고 멤버는 많지 않지만 꾸준히 독서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독서동아리들이 적지 않다. 례하면 매주 토요일 아침에 소집되는 이레원음식유한회사의 독서회의, 올해 4월에 갓 시작된 연변인민출판사의 ‘어깨동무’독서회와 ‘책 마니아’독서회, ‘이룸’독서동호회, ‘함께독서회’ 등 독서동아리가 있다. 산해관 이남 지역에 이주해 살고 있는 조선족들도 이주지에서 독서모임 등을 많이 조직해 평생학습을 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든든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서로 교류하고 서로 격려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례로 2007년 설립된 북경애심여성네트워크를 들 수 있다. 북경애심여성네트워크는 전문강좌, 초청강연, 독서회, 무료영어학습반, 조선족자녀들을 위한 우리글반과 같은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면서 북경조선족사회의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치는 전국애심여성포럼 워크숍 및 차세대리더양성 프로그람 행사를 벌이며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로 거듭나고 있다. 북경조선족로인협회의 로인들 역시 무용대 등의 활동을 통해 민족의 전통악기와 무용 학습 뿐만 아니라 시사학습 등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족이 두번째로 많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청도에서도 녀성협회가 설립되여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오며 조선족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례하면 청도녀성협회 산하에 독서동호회가 있어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함께독서회’ 역시 70여차례에 걸치는 독서모임을 이어오며 평생학습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오고 있다.  상해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 역시 삼수학당독서회 등 독서모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해룡정고중동창회의 위챗강좌, 독서모임 등을 비롯한 많은 모임들이 이어져오며 함께 책을 읽고 함께 토론을 하며 현대화된 대도시 상해에서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다.  흔히 학자들은 평생학습은 학습자들의 삶의 변화를 위한 동력을 확보해주며, 심리적 충실감과 학습의 즐거움, 공동체성 회복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평생학습 공동체 멤버들의 만족감이나 자아실현, 공동체의식 등은 개인적인 삶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조선족의 경우 개혁개방 이후 동북3성의 집거지역으로부터 산해관 이남 지역과 한국, 일본 등 해외로의 이주로 인하여 많이 흩어져 살게 된 오늘, 지역공동체가 해체되여가고 있는 현실에서 학습공동체의 수립과 발전은 지역공동체 해체과정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평생학습 공동체는 평생학습이 멤버들의 교양이나 취미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평생학습과정에서의 토론, 의견교환, 공동결정 등의 과정을 거쳐 공동체의식 함양과 지속적인 성장 가능한 학습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맞는 다양한 교육문화활동, 즉 좋은 아빠, 서예교실, 다문화언어 교실, 공동육아, 방학 교실, 전래놀이 마당, 음식문화축제, 생태경제 워크숍 등 여러가지 내용과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멤버로서 공동체 문제에 대한 리해와 관심, 다른 멤버들과의 련계와 삶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리더십 양성과 파트너십 양성을 하다보면 새로운 리상적인 학습공동체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바꾸어놓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평생학습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족 기업가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각 지역의 녀성들이 평생학습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해왔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경제적 지원과 재능기부를 하는 단체와 개인이 늘어나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더욱 많은 이들—특히 농촌지역과 산해관 이남 지역의 조선족로인들을 포함한 소외계층이 평생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 공간을 제공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민넷 조문판 2018.7.9
95    천진지역 조선인의 력사와 조선족사회의 현황(전월매) 댓글:  조회:2081  추천:0  2018-06-29
천진은 중국 륙상 해상 교통의 요지로서 오래동안 수도 북경의 문호역할을 해왔다. 수나라의 운하개발로부터 천진의 중요성이 주목받기 시작해 당나라 이후에는 강남의 곡식과 비단을 북방으로 운송하는 수륙교통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1860년, 천진이 개항하자 서양렬강은 앞다투어 조계를 설립했고 1902년 직례총독아문이 천진으로 이전된 후 중국북방 개항의 최전방으로서 중국의 양무운동을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천진은 우리 나라와 각국 간 교역의 관문이자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했다. 조선반도와 천진은 청나라 초기부터 근현대, 당대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관계와 교류가 있었다. 천진은 청나라 초기에는 조선에서 건너와 관직을 맡은 관원이나 장사를 하는 상인, 농사를 짓는 조선인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이였고 근대에는 조선인애국자들이 활동하는 항일독립운동의 관문이였으며 당대에는 조선족공동체사회가 새롭게 형성되여있는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청나라 초기에 조선인 안씨부자(安氏父子)가 일가의 재력으로 천진의 상징인 성벽을 쌓아올린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천진이란 도시 명칭은 ‘천자가 지나는 나루터’(天子渡津)란 뜻으로 명나라 황제 주체가 고하(沽河)를 건느면서 출병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위찬탈에 성공하여 1404년 12월 23일 영락제 2년에 “성을 쌓고 강을 만드는데 이름을 천진이라 하사한다”는 유지를 내리면서 생긴 것이다. 천진은 성을 쌓고 방위를 실시하여 군사요충지가 되여 천진위라 불리긴 했지만 흙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매년 홍수가 지면 허물어져서 물란리를 일으켰고 도시에 재난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옹정(雍正)황제 3년 즉 1725년에 천진은 대홍수가 들어 천진도성 전체가 물에 잠겼다. 그해 9월, 천진에서 소금장사를 하여 대단한 부를 축적한 조선상인 안상의(安尙義, 또는 安尙仁)와 그의 아들 안기(安岐) 부자는 자신들이 새로 성벽을 쌓겠다고 조정에 신청하였고 이는 황제의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어가를 받은 후 자신들의 재력과 로동력을 전부 동원해 한편으로는 낡은 성벽을 허물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고 튼튼한 새 성벽을 쌓아갔다. 6년간 이어지는 성벽 쌓는 고된 로동과 피로로 아버지 안상의는 세상을 떠났고 안기의 형 안도(安圖)는 조정의 년갱요(年更尧),룽커둬(隆科多) 사건에 련루되여 사형당하였다. 가족에 닥쳐온 일련의 불행과 어려움 속에서 안기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새롭고도 견고한 푸른 기와로 된 성벽을 완성하였다. 황제는 친히 성벽의 동문을 '진해(鎭海)'로 남문은 '귀극(歸極)', 북문은 '대하(帶河)', 서문은 '위안(衛安)'으로 특별히 안자를 넣어 이들 부자를 장려하였다. 현재 천진 옛거리에는 '위안리(衛安里)' 혹은 '위안남리(衛安南里)'의 지명이 남아있다. 청나라시기 전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공사를 진행하곤 했는데 대부분이 여러 부자들이 재력을 합하여 한 것이지 안씨부자처럼 일가의 재산을 쏟아부어 거대한 공사를 완성한 것은 유일무일하다.  그 뿐만 아니라 안씨부자는 자연재해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굶어죽는 모습을 보고 죽공장을 세워 매일 대량의 죽을 끓여 무료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대신이며 저명한 시인인 전진군(錢陳群)은 라는 글에서 "안기는 6년간의 공을 들여 거대한 공사를 완성하였는데 은 십만을 썼고 가난한 백성 수천인을 살려냈다"고 썼다. 권21 에서도 안씨가문이 남문에 죽공장을 세워 10여년 가난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랬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안기는 또한 력대 서예와 그림의 수집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수집한 국보급 수집품들은 북경국가박물관, 천진박물관, 대만고궁박물원에 소장되여있다고 한다. 근대에 천진은 양무운동을 이끈 도시로서 무기제조기지이기도 하다. 1881년, 조선은 천진에 령선사를 파견해 근대 무기체제와 제조법을 배우도록 하는 중국식 개화를 추진하였다. 1894년, 조선의 종속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는 종결되고 대등한 근대적 관계가 맺어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계는 1910년 망국으로 곧 단절되였다. 이후 천진은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집결해 대일투쟁을 전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20세기 초,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많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항일독립운동단체를 만들어 나라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특히 천진은 국제교류가 활발해 중국의 근대화를 이끈 도시로, 학교가 많아 류학하기 좋았고 서양렬강의 조계지를 리용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기에 많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천진에서 활동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천진조선족은 조선반도로 귀환하지 않고 남은 일부 조선인과 일자리 전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 일자리를 찾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였다.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동북삼성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은 농촌을 떠나 대거 해외나 연해도시로 진출하였다. 1992년, 중한수교 이후 삼성, 엘지, 현대, 대우, 금호 등 한국대기업들이 천진으로 진출함과 더불어 만여 명의 조선족들이 이런 회사들에 취직하면서 그들의 가족들까지 합하여 조선족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2010년, 제6차 인구조사에 의하면 천진조선족 호적인구는 18,464명인데 2018년 현재 호적이 없는 상주인구까지 합치면 천진조선족인구는 약 5~6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진조선족사회는 1988년 11월에 민족사무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정식 성립된 천진조선족친목회(일명 련의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천진조선족친목회는 1993년 11월에 에 근거하여 법인사회단체로 정식 등록되여 일체 행사는 법적관리궤도로 진입하였다. 친목회산하 소속협회에는 천진조선족상회(2006), 천진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천진조선족로인협회(1995), 천진조선족배구협회, 천진조선족축구협회(2006), 천진조선족녀성협회(2016), 천진조선족산악회(2016) 등 단체들이 있다. 그리고 천진조선족상회 산하에는 골프협회, 요식업회(2015)와 천진조선족주말학교(2016)가 있다. 그외에도 천진조선족자녀교육사랑회(2012), 메이쟝정음우리말학교(2017), 벌리향우회, 성화배구팀 등이 있다. 천진조선족사회는 매년마다 각종 민족문화행사들이 펼친다. 전반 천진조선족사회의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규모가 가장 큰 민족문화행사로는 2년에 한번씩 주최하는 단오운동축제, 천진시조선족노래자랑대회를 꼽을 수 있다. 그외에도 천진조선족로인대잔치, 6.1어린이축제, 각 협회에서 정기, 비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화행사들이 있다.  이러한 문화행사들은 조선족공동체의 성원들이 자기 확인과 자기 인식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식을 고양하고 사회적 결속력 강화와 통합을 도모하며 무엇보다 민족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확립시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자긍심 내지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사회적 기능과 전통문화교육의 교양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끝으로 천진조선족사회가 존재하는 문제점 가운데서 정보의 부진, 특색의 부진을 말하고자 한다. 정보부진은 언론매체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언론매체는 민족사회정보의 교두보이고 교류장의 활력소이다. 천진조선족사회의 경우, 언론매체의 부재는 민족사회의 응집력, 정보의 홍보력을 약화시킨다. 북경이나 동북삼성 조선어언론매체를 리용한 천진조선족사회 홍보가 시급히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하나는 특색의 부진인데 천진조선족으로서의 특색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천진이란 지정학적 특색을 리용한 특색 있는 천진조선족브랜드의 발굴과 창출, 경제활성화를 위한 콘텐츠의 모색, 브랜드로서의 문화 조성 등이 필요하다. 안씨부자의 이야기 등은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천진조선족만이 아닌 중국조선족이 공동으로 모색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이다. 인민넷
94    조선족마을의 앞날은?(허명철) 댓글:  조회:2024  추천:1  2018-06-13
  개혁개방이래 조선족마을은 경제적인 성장에 따른 물질생활수준의 향상은 물론 마을공동체적 사회구조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일명 ‘공동화’현상이라 불리우는 인구의 대량류실은 기존의 문화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조선족마을을 보여줄 수 있는 문화기호들을 지켜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정도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80년대에 시작된 농촌경제체제개혁은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농촌잉여로동력 해소라는 새로운 문제를 생성했다. 하여 정부에서는 ‘불꽃계획(星火计划)’을 실시함으로써 향진기업을 대대적으로 제창했으며 "공장에 들어가더라도 마을은 떠나지 않는다(进厂不离乡)"는 원칙으로 농촌잉여로동력이 도시진출을 통하지 않고 당지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 농민들은 향진기업에서 경제적 수익을 높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공동체 또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련속되는 농업의 대풍작은 시장원리에 따른 량식가격절하를 유발했으며 이로 하여 농민들의 량식생산 적극성이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였다. 시장경쟁론리에 따라 향진기업도 하나둘 문을 닫게 된 상황에서 선행개혁의 혜택으로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던 도농생활수준의 격차는 또 다시 늘어나게 되었으며 많은 농촌잉여로동력은 도시진출을 통해 소화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조선족은 중한수교라는 또 하나의 찬스가 주어지면서 한국기업들이 진출한 연해지역으로, 한국으로 이동하게 되였으며 조선족마을의 인구는 점차 줄어들게 되였다. 인구의 감소는 농촌학교의 페쇄를 야기시켰고 이에 따라 젊은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빌미로 농촌을 떠나는 악순환을 낳게 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조선족마을의 ‘공동화’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선족마을의 ‘공동화’에 못지 않게 우려되는 것이 로령화현상이라 하겠다.  연변에서 처음으로 로인협회도 내오고 로인절을 쇨 때만 해도 로인협회에 가입할 수 있는 후진으로 중장년층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지금 중장년층의 대량적인 농촌일탈로 하여 로인협회마저도 생존위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과거 로인협회하면 당연히 련상되여오던 문구(門球)도 팀을 조직할 수 없어 문구장이 풀밭이 되고 있으며 오늘은 넷이 모여 화투를 놀 수 있었지만 래일도 함께 놀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게 된다. 현재 정부차원에서 새농촌건설 및 향진진흥전략을 실시하면서 농촌마을들의 기초시설은 크게 개선되였으며 마을마다 운동시설이 갖추어져있고 독서열람실도 세워져있으며 문화관리부문에서도 ‘문화하향’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농촌에 내려가 영화도 돌리고 문예공연도 조직한다. 하지만 대부분 의무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기에 농민들 자신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촌장 역시 관중동원에 난감해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아도 상당한 조선족마을은 산재구조를 갖고 있다. 일부 촌민소조는 촌 본부와 멀리는 5리 정도 떨어져있는데 중국어 영화대사도 알아듣지 못하는 형편에서 불편한 몸으로 5리 길을 걸어서 갈 수도 없고 촌민위원회에서 차량을 동원해 모셔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 독서열람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상급단위에서 기증한 도서들이라 중국어로 된 책자가 절대다수인데 촌장의 말을 빌린다면 "한족학교를 다닌 학생들도 읽기 바쁜 번자체로 된 수호전을 한어수준이 낮은 로인네들이 어떻게 보겠느냐?" 하는 것도 문제점이다.  솔직히 마을에 독서열람실을 세우는 것은 문화생활을 위한 조치임을 알 수 있지만 그 생활을 누려야 하는 마을사람들의 취향이나 수요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아닐가. 현재 대부분 조선족마을의 촌민들은 외지로 돈벌이 나가있고 토지는 타인에게 양도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있기에 일 년내내 자유롭게 여가생활을 누릴 수 있는데 이들이 만년에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조선족마을을 지켜가는 의미도 담겨져있다.  지금 조선족마을이 ‘공동화’되여있다는 평판을 많이 받고 있지만 이 추세가 지속되여 현재 마을에 남아있는 로인들마저 그 어떤 항거할 수 없는 사유에 의해 하나둘 마을을 떠나게 된다면 이 마을들은 과연 조선족마을이라 할 수 있을가? 이를 위해 우리는 랭정하게 조선족마을 출로를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이러한 모색에 있어서 물론 경제적 생활수준의 향상도 중요하지만 현존해있는 로인들의 정신적 문화적 향수 만족도 고려해야 하며 나아가 조선족마을이라는 문화기호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단순히 조선족전통가옥을 즐비하게 지어줬다 해서 조선족마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을의 얼이 빠지고 혼이 나가있다면 타민족들이 이것을 조선족마을이라고 인정해줄가. 우리 스스로도 이것이 조선족마을이라고 공감할 수 있을가. 인민넷 조문판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과정에서 가장 먼저 반일혁명에 참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지역 총 항일렬사중 조선족이 무려 3,204명을 차지하며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녀성 항일렬사는 338명에 달하여 조선족렬사의 10.54%를 차지한다(《중국공산당연변력사대사》, 2002).  현재까지 조선족 항일전사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남성전사에게 집중되였다. 설사 조선족 항일 녀전사에 대한 자료라 해도 그들의 항일에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는 공헌사, 보충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일활동 속에서의 결혼, 출산, 자녀양육 등을 둘러싼 그들의 처우에 대한 녀성학적인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녀성주의시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녀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녀성해방의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녀전사들은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들은 렬악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릴 적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가무를 담당함으로써 힘들었던 로동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 이후에도 힘들게항일운동 농사짓고 각종 생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들은 혁명에 참가하기 이전 자신들을 둘러싼 가부장적 문화와 가정 안팎에서 녀성들의 희생만 요구받는 현실 때문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것이, 그들에게 의식전환의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당시 연변지역에서의 민족주의계렬의 녀성계몽운동, 공산주의 계렬에서의 남녀평등과 녀성해방 사상 전파 등 사상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불공평한 사회적 현실로 자각하면서 그러한 가난은 일제 침략,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뿐만 아니라, 봉건적 남존녀비사상에 얽매인 전통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글을 배우고 사회에 눈을 떠야만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의식의 변화 및 감정의 풍파 등의 경험 속에서 부모, 형제, 남편, 친인척, 야학, 학교, 혁명지사, 진보적 서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조선족 녀성 항일렬사중에는 전장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녀성들도 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 의료대에서 활동함으로써 전투력을 재생산하는 임무를 완수한 녀성들도 있다. 항일련군 제2군의 최희숙 등 8명의 재봉대원들은은 한달 동안 600건 군복을 만들어내라는 긴급통지를 받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삼림 속에 들어가 낡은 재봉기로 낮과 밤을 이어가며 끝내 한달이 되기 전에 600건의 군복을 재봉하였고, 작식대 리신금 녀전사 역시 한차례 습격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우들이 한주일 굶은 상태에서 행군할 힘을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주일이나 먹지 못했지만, 전우들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사처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함으로써 전우들로 하여금 행군을 지속하도록 하였다(《연변녀성운동사》,1991). 특히 직접 전투에 참가한 조선족 항일 녀전사들은 전장에서 남성전사 못지 않은 용맹함과 전투능력을 보이면서 전우를 엄호하기 위해,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투쟁중 일본군 앞에서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혀를 깨문 녀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열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은 전사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두 눈알이 빠져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녀전사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항일에서의 행동은 대단히 용맹하고 헌신적이였다. 때문에 현재까지 여러 자료와 회억록 등에서도 그들의 헌신정신과 용맹함에 대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항일전장에서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면하고 또한 감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에 대해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전장에서 그들은 신체적 조건의 취약함을 극복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생리적 고충, 생육의 고통도 극복해야 했다. 녀성들에게 있어 전장에서의 가장 큰 고통은 달거리 임신과 해산이였다. 달거리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신하면 대개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치되는데, 임신해서도 그들은 대원들의 식량을 장만하고 해진 옷을 깁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쉴새 없이 보내기가 일쑤다. 해산시의 조건도 말이 아니였다. 옥중해산한 녀전사가 몇몇 있는가 하면 해산시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젖도 나오지 않아 아이를 낳자마자 5일만에 잃은 녀전사도 있다. 이러한 견정한 혁명정신으로 인한 친육의 상실 뒤에 오는 고통은 그들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였다. 또한 가정과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도 견뎌내야 했다. 녀전사들은 항일을 위해 전장에 나간 뒤, 대개 1년 내지 2년에 한번 남편과 상봉하거나 더욱 긴 경우도 있으며, 자식을 키울 수가 없어 다른 집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 녀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녀성해방의 의미는 또한 무엇일가. 먼저, 녀전사들은 확실히 항일운동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 진출했으며,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신분전환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그들은 남성과 똑같은 전사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역할 전환을 부분적으로 실현하였다. 그들은 전장에서 남성들과 똑같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여러 가지 칭호와 명예를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항일근거지에서 조선족 녀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각급 당정기관의 중요한 직위 례하면, 부녀위원, 쏘베트정부의 회장, 현아동국 국장, 부국장 등에 임용되여 정치방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실현하였다. 경제방면에서도 남자와 똑같이 땅을 분배받음으로써 경제적 독립권을 향유하게 되였으며, 교육방면에서도 중점적으로 녀성간부를 양성하는 원칙에 의해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조선족 녀성해방의 리더들이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안해, 어머니, 며느리, 전사, 부녀회원 등 다중 역할을 동시에 행사하는 행위주체였다.  요컨대, 녀전사들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에서 우리는 해방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견강한 의지, 전쟁과정에서 들이닥친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또한 목숨도 아끼지 않는 헌신정신과 희생정신 등에서 우리는 그들의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철같이 강한 의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조선족 녀전사들과 같이 빛을 보려는 의지, 그 의지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고, 미지의 세계, 창조적인 세계로 이끄는 통로이자 희망으로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민넷조문판
92    김치를 못먹으면 조선족이 아닌가?!(허연화) 댓글:  조회:2564  추천:1  2018-05-16
  “김치가 없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가?… 김치 없인 못 살아 정말 못살아…”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김치주제가’. ‘조선족’하면 ‘김치’를 련상할 정도로 김치는 우리민족의 상징이며 세상이 우리민족을 인식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필자도 일본에 10여년 살아왔지만 김치없는 밥상은 뭔가 모자란 것 같고 허전하기에 정기적으로 김치를 주문하군 한다. 최근에는 일본의 일반 슈퍼에서도 배추김치를 포함한 다양한 김치를 팔고 있지만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단맛이 많고 매운 맛, 쨍한 맛이 적다. 하여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이나 중국의 수입김치를 주문하군 한다. 배추김치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특색이 있기에 바꿔바꿔 주문해 먹지만 영채김치, 도라미무침, 소힘줄무침 같은 종류는 중국물산 쪽에서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폴터사이트에 한국과 중국 물산을 동시에 주문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일본에 있는 중국조선족녀성이 개인적으로 김치를 만들어서 위챗판매를 하는 형식도 생겼다. 좋은 재료를 쓰고 손맛을 자랑하고 있기에 값이 상대적으로 비싸더라도 사먹는 고객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요즘은 일본 타향에서도 코리안타운과 멀리 떨어져 살아도 우리맛을 즐기기 매우 편리한 세상이 되였다. 한편, 일본에서 교육받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김치를 못먹거나 안먹는 애들도 많다. 못먹는 리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매워서”, “마늘 냄새가 싫어서”, “ 냄새가 난다고 친구가 얘기해서” 등이 흔히 김치를 못먹거나 안먹는 아이들의 리유이다. 필자가 잘 아는 조선족 지인부부의 부모님이 요즘 일본에 오셨는데 식탁에 모여앉아 식사를 하시면서 필자한테 “애들이 조선말도 잘 못하지, 김치도 안 먹지… 이젠 일본사람 다 됐다”며 서운해하시는 것이였다. 우리 어르신들의 립장에서는 서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손자손녀와 공통으로 느낄수 있는 것들이 너무 적어지고 거리감을 느끼셨을터니 말이다. 문득 재일교포 지인이 한 김치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재일교포 지인은 일본에서 사는 교포 3세이며 교포집중구역이 아닌 일반지역의 출신이다. 그는 처음으로 오사카의 교포집중거주지역인 츠루하시에 갔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에도 재일교포들이 집중해서 거주하는 대표적인 코리안타운들이 몇곳이 있다. 오사카의 츠루하시도 일본에서 유명한 코리안타운이다. 코리안타운에서는 우리민족의 다양한 김치는 물론 기타 음식재료, 한복, 전통이불, 전통그릇 등을 구매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이 지인이 츠루하시 코리안타운의 교포와의 식사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치를 먹어본다고 한마디를 한 것이 폭탄반응을 일으켰다고 한다. “어찌 조선족이 김치를 이제야 먹어볼 수 있는가”하면서 의심, 의아함, 서운함을 보여주는 것이 대다수의 반응이 였고 심지어 질책하는 분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직 대학생이였던 지인은 그래도 코리안타운이라고 찾았는데 김치 하나에 졸지에 마치 민족의 배신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김치를 안 먹어도 나는 조선족이다”고 했던 지인의 말이 깊이 마음에 와닿았다. 필자도 연변출신이기에 민족집중구역 출신으로서 흔히 범할 법한 일이였기에 마음속으로 반성해봤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연변 이외의 조선족친구들한테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나 하고. 전통적인 것과 정체성은 흔히 련관하여 거론할 때가 많다. 하여 우리는 흔히 민족집중구역을 벗어나서 생활하는 우리 후세들의 정체성위기를 느끼군 한다. 우리말을 하고 우리 음식을 먹고 우리 전통옷을 입는 것으로 우리를 지켜나간다는 생각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변화가 없는 굳어진 개념인 것이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나서 자란 우리 아이들한테 김치를 굳이 강요할 필요가 있을가 생각해본다. 김치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다른 음식 된장이라든지, 우리민족 복장 한복, 사물놀이, 이런 것들에 대해 모르거나 흥미가 없다 하여 비난을 하기 전에 먼저 리해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언젠가는 어른이 되여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흥미를 가지거나 어떤 계기에 의해 민족의 전통적인 것을 접하게 되면서 차차 흥미를 가지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국에서도 음식문화의 서양화에 의해 젊은층의 김치소비가 감소되여서 사회이슈가 되고 있다. 우리의 식탁은 중식, 한식,일식, 타이음식 등으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선택이 다양해진 현시대 아이들이 전통적인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전세계의 공통한 현상이다. 자기 전통적인 것과는 멀어지지만 더 많은 타문화와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처럼 글로벌화한 사회에선 정체성도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유연한 생각방식이야말로 현시대에 필요한 것이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인민넷 조문판 2018.5.15
91    우리네 부모님들과 황혼의 재혼이야기(리화) 댓글:  조회:1942  추천:3  2018-05-03
아래 층 85세 할아버지가 부인이 세상 뜬 지 불과 몇달만에 새장가 드셨다. 결혼등기는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지내는 조건으로. 상대는 퇴직금도 없고 집도 없이 형편이 어려운 아들만 둘을 둔 76세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녀 8남매에 퇴직간부라 집도 있고 돈도 좀 있는 것 같다. 자녀들은 만장일치 찬성이란다. 필자의 76세 친정엄마. 어쩌다 한번 불참하면 큰일이라도 생기듯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동창모임. 무뚝뚝하고 애교 없고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래서 혹시라도 방애될가 전화 한통 하기도 주저되는 딸보다 허물없는 60년지기 친구들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즐거워서 매주 일요일마다 한달음에 달려가시는 그 모임에는 할머니 여섯분과 할아버지 네분이 계신다. 그중 부부이신 두 분을 빼면 할머니들은 모두 혼자 살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세 분은 똑같이 상처후 재혼했다.  그 밖에 얼핏 둘러보아도 쉽게 잡히는 주위의 친구, 동료, 이웃, 친척지인 1, 2, 3… 그 부모님들의 재혼이야기.  1980년대 중반 딸 넷만 내리 낳은 ‘죄’로 남편앞에서, 그리고 시집에서 평생 기를 펴지 못하고 사셨던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아들 맞잡이로, 문화혁명전 대학생으로 출세시킨 둘째딸 집에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기셨던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직설적이고 빠른 경상도 사투리만큼이나 성격 또한 강직하고 불 같았던 외할아버지셨지만 사위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누웠다가도 황급히 일어나셔서 맞이할 정도로 당신께는 더없이 죄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던 몇개월의 동거생활. 그런 외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새 로친을 해서 원래 살던 촌으로 돌아가겠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엄마의 애원 섞인 '포효'. 딸 망신시킨다고, 남사스럽다고, 절대 안 된다고… 결국 일년뒤 외할아버지의 의사대로 새 외할머니를 맞아서 떠나가셨지만 우리 집만 유별난 게 아니고 그때는 다 그랬던 것 같았다. 혼자 남으신 부모님을 한 집에 살면서 모시는 것만이 효도하는 것이며 년로하신 부모님의 재혼은 자식 망신이요, 불효이며 부모님 자신에게도 체신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완연히 달라진 우리네 인생황혼기 재혼풍속도. 배우자를 먼저 잃은 남성로인은 당연히 새로운 배우자를 찾을 것이라는/찾아드려야 한다는 이 분위기는 무엇이며 과연 그냥 그것 뿐인 것일가. 섣부른 한두마디로 뭉그려서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사연과 모양새를 갖춘 우리네 부모님들의 저마다 색다른 재혼이야기들이지만 지금은 대개 이런 것 같다.  "열 효자보다 악처"라고 거동에 큰 불편함이 없고 일정한 경제력을 지닌 남성로인들은 배우자와 사별할 경우 재혼을 선택하는 비률이 높은 반면 “늘그막에 제 한몸 거두기도 귀찮은데 무슨 눼 영감 뒤치닥거리까지…”라며 자유로운 혼자의 삶을 고수하는 녀성로인들. 그리고 부모로서 별로 해준 게 없는 것만 해도 미안한데 여러모로 여유가 없는 자식들의 짐까지 돼버리면 더구나 랑패라는 마음에 마지못해 재혼을 선택하는 녀성로인들. 남성에 비해 긴 녀성의 평균수명 때문에 녀성로인의 수가 더 많아서인지 우리가 체감하는 대다수 남성로인의 재혼과 그에 대조되는 많은 녀성로인의 혼자살이. 그만큼 오늘날 우리네 황혼재혼의 상당수는 신체적인 보살핌을 수요로 하는 남성로인과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추지 못한 녀성로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교환관계이기도 하다. 어쩌면 당장 죽고 못사는 젊은이들의 렬화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덤덤하면서도 편안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동무'로 서로 의지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각자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생'과 '호혜'의 원칙이 작동하는 우리네 부모님들의 담담한 재혼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혼의 재혼은 필경 그 이전의 수십년이라는 긴 세월 각자 다른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고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결합인 만큼 감정의 련결고리가 지극히 취약하며 량쪽의 자녀를 비롯한 복잡한 인간관계 및 전 배우자와 함께 쌓은 소중한 추억과 재산 등 풀어나가야 할 유형/무형의 과제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서두의 아래층 할아버지처럼 법적인 등기를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생활하거나 집, 현금 등 재산을 미리 자녀 앞으로 돌려놓는 등 방식으로 재산분쟁의 소지를 아예 제거해버리는 사례들이 적지 않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녀들로부터 부모의 재혼에 대한 저애나 반대를 불러오기 일쑤다. 이와 같이 젊은날의 초혼과 달리 황혼의 재혼은 성인자녀가 막강한 결정권자로 작용한다. 황혼재혼이 더 이상 허물이 되지 않는 오늘날, 막무가내의 반대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사별한 부모에 대한 애달픈 추억 혹은 재혼상대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으로부터 부모의 재혼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자녀들이 적지 않은 만큼 그들과의 관계처리 여하가 행복한 재혼의 중요한 변수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물학적 부모자녀관계에 동등한 친밀감 혹은 책임/의무감을 막연하게 기대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 실제로 자녀들의 지나친 간섭이나 부모의 허망한 기대로 인해 심각한 모순과 갈등을 겪고 심지어 파탄으로 종결짓는 황혼재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황혼의 재혼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못이기는 척’ 묻어가면서 '효도'도 할 겸 ‘거추장스럽고’ 힘든 신체적 보살핌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부모님 특히 아버님의 재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고약한’ 자녀들도 적지 않은 현실이다. 자식으로서의 권리와 리익을 챙기는 데만 눈이 먼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황혼의 재혼은 부모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부터 요령껏 도피하는 일개 수단으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재혼생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당사자간의 정서적 뉴대와 신뢰관계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결혼은 인생대사다.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의 주위를 살펴볼 때 재혼 특히 황혼의 재혼에 있어서 초혼만큼의 신중함과 진지함 그리고 도덕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거나 크게 결여되여있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재혼부부 특히 남성로인과 자녀들은 경제력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부터 재혼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생략한 채 그냥 '보모'정도로 취급하고 조금만 내키지 않거나 '보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경우 일방적으로 재혼의 종결을 선언한다. 그래서 몇번이고 너무 쉽게 '새장가'를 드는 남성로인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존경해야 할/존경할 만한 할아버지들이여야 하기에 그런 모습들이 더 슬프고 아프다. 꽃다운 청춘시절 처녀총각으로 만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알콩달콩 살다가 ‘남편 먼저, 안해가 뒤따라’ 지는 만큼 아름다운 결말은 없겠지만 인생의 끝은 사람의 의지만으로 안되는 것.  조선족사회에서 황혼의 재혼이 떳떳해지고 급속한 증가세를 보인 지 이제 얼마 안된 만큼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역시 많이 서툴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이 아프면 가족이 아프고 가족이 아프면 사회가 아프다. 하루 빨리 성숙한 황혼재혼의 바람직한 모델구축을 실현함으로써 우리네 부모님들이 행복하고 우리네 가족이 건강하고 우리 조선족사회가 건전한 모습을 보고 싶다.            인민넷 2018.5.2  
90    연변조선족녀성들의 경제활동 변화(김화선) 댓글:  조회:2359  추천:0  2018-04-17
연변조선족녀성들의 경제활동 변화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김화선   올해는 우리 나라 개혁개방 40주년이 되는 해다. 중국 학계에서는 개혁개방 40년 이래 각 학과의 리론적, 실천적 성과에 대해 돌이켜보고 총화하는 학술대회 소집이 붐을 이루고 있다. 중국녀성학계도 례외는 아니다. 하여 필자는 개혁개방 40년 이래 연변조선족녀성발전에 관한 리론과 실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였다.   맑스주의 녀성해방리론은 녀성의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물질적 기초는 녀성의 사회경제관계에서의 지위에 있다고 말한다. 녀성과 남성들 사이의 경제지위의 차이는 주로 각자가 사회생산과 사회분배체계 속에 위치한 지위와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 세가지 지표, 즉 사회로동참여률, 사회로동참여수준(사회로동조직 내에서의 지위) , 그리고 경제소득의 량에 의해 녀성들의 경제적 지위를 평가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발표된 첫번째 법률인 의 실시와 더불어 당의 녀성해방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연변조선족녀성들은 녀성이 사회경제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참여해야 하는 법적 당위성을 가지고 사회주의건설시대의 ‘해방된’ 녀성으로 거듭나게 되였다.    개혁개방 초기, 연변 조선족 녀성들은 새롭게 일떠서는 도시의 시장공간에서 자영업 위주의 시장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이 인정받으면서 처음으로 경제적 령역에서 역할을 과시하였다. 개혁개방의 발전과 더불어 상품도매, 음식업, 복장업, 미용업 등 업종에서 소규모로 활약하던 조선족 녀성 경영인들이 각종 업종 단체를 만들고 서로 교류하고 지지하면서 점차 대형체인업, 제조업, 수출입업, 가공업 등 령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연변조선족녀성들은 민족경제사회발전의 ‘반쪽 하늘’을 떠멘 사회의 중견력량으로 자라났다.    1990년대부터 대량의 조선족 녀성들, 특히 농촌 녀성과 도시의 정리실업자 녀성들이 국제이주를 통한 취업활동에 활발하게 참가해온 것은 개혁개방 이후 연변조선족 녀성 경제활동의 한갈래 주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이주 취업을 통해 농촌녀성들은 탈농화를 실현했으며 도시 정리실업자 녀성들은 재취업을 실현했다. 국제이주 취업 경험을 축적한 조선족 녀성들은 귀국하여 도시공간에서 창업에 뛰여들고 악전고투하면서 경력을 쌓아 가고 자신들의 브랜드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귀국 창업 조선족 녀성 경영인들이 조선족녀성경영인협회에 동참하면서 협회 문화를 더 다양하고 알차게 만들어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연변조선족녀성들은 상업 보험업이나 암웨이, 뉴스킨 등 ‘다단계판매’, ‘직접판매’라는 새로운 방식의 경제활동에 참가하면서 긍정적, 부정적 경험들을 쌓아왔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 사회가 제창하는 전민창업의 시대, 인터넷대중화 시대에 조선족 녀성들의 경제활동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젊은 녀성들이 ‘위챗상인’대렬에 대거 참여하고 있으며 50대에 퇴직하는 중년 녀성들은 커넥티드 카 대시대(车联网大时代)를 만나 새로운 상업발전기회를 쫓아가고 있는 현상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연변조선족녀성들의 이러한 경제활동 변화는 녀성들의 사회적 네트워크에도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족 녀성들은 전통적인 직장 공간에서 주로 남성 상사를 중심으로 한 직장 내 인간 관계를 경험했으나 ‘직접판매’, ‘위챗상인’ 등 새 시대 경제 공간에서는 다양한 녀성소비자들과의 관계를 발달시켜나가게 된다. 녀성들이 서로 사업파트너가 되여가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면서 육아기에 있는 젊은 엄마들을 배려하는 직장문화, 녀성들의 건강을 배려하는 상품문화 등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새 시대 녀성들이 추구하는 행복한 인생을 위한 경제활동스타일, 생활스타일, 소비스타일이 서로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들이 조선족 녀성들의 발전에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민넷 조문판 
89    색채의 경제학-눈(雪)의 자원 활성화에 대한 소고(예동근) 댓글:  조회:1751  추천:0  2018-04-03
완연한 봄이다. 한국 부산 부근 진해에 벚꽃보러 온 중국관광객이 전체 관광객의 1/3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대만, 향항과 내지에서 진해 벚꽃축제를 보러 온다는 것이다. 벚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커피도 마시고, 팥빙수도 마신다. 아이스커피와 팥빙수는 여름철에 가장 잘 나가는 음료수이다. 무더운 여름에 하얀 색의 얼음이 동동 떠있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시원하다. 흰색의 보슬보슬한 눈에 보라색의 팥이 덮여있는데 사각사각 씹히면서 입안에서 호르르 녹는 것이 오감을 녹여서 백색세계로 이끈다. 여름철의 눈은 이처럼 귀하고, 눈을 만들어내는 기술도 차이가 크다. 물과 기술에 따라 미각적 차이는 엄청 크며, 가격도 다르다. 2천원짜리 팥빙수가 있는가 하면, 만원짜리 팥빙수도 있다. 당연 임대료의 가격이 결정적인 가격차이로 이어지겠지만 빙설을 담는 접시, 재료, 서비스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 겨울철의 눈은 어떠 하는가? 눈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로씨야의 소치는 동계올림픽을 통하여 세계적인 유명도시로 부각되였고, 한국의 평창은 2018년도 올림픽을 통해 세계적인 겨울도시로 부상되였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아시아국가에서 ‘눈’하면 떠오르는 지역이 일본의 흑까이도이며, 삿뽀로이다. 여름이면 시원해서 찾아가고, 겨울이면 겨울 같아서 찾아간다. 삿뽀로는 동계아시아게임, 동계올림픽게임을 통하여, 그리고 다양한 영화, 드라마를 거쳐 ‘눈’의 도시로 그 브랜드를 구축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눈(雪)’,’얼음(冰)’하면 1인자는 당연 할빈이다. 1996년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동계아시아게임을 개최하여 국제동계스포츠의 서막을 연 상징적인 도시이다. 그후 얼음축제 등을 통하여 ‘얼음의 도시’로 이미지를 부단히 구축하였다. 동북에서 일등, 이등이면 전국에서 일등, 이등인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장춘은 2007년에 동계아시안게임을 통하여 국제적인 동계올림픽선수들이 많이 나왔다. 아시아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개최할 때는 1위를 하였지만 2006년까지 국제올림픽에서 항상 10위권 밖이다. 장춘아시안게임을 통해 2010년 동계올림픽에서 금 5개를 받고 7위를 기록하였는데 지금까지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다.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여전히 동북출신의 선수들이 활약할 것으로 기대하며 동북지역이 동계스포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동계스포츠 발전력사를 돌이켜보면 동북이 강해지면 중국이 강해진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동북지역은 이처럼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활약적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제가 신속하게 성장하면서 ‘눈’의 산업도 신속하게 성장하여 지역적인 천연자원의 우세가 상실되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스링크는 실내에서 만들 수 있기에 북경과 상해 등 도시에서 더 크게 발전하고 있다. 심지어 남방도시들이 아이스링크 등 스케이트장이 우후죽순마냥 솟아나면서 ‘동북독점’을 분산화시켰고, ‘동북’은 점점 과거화로 변화되고 있다.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우리 나라는 금메달 한개 밖에 따지 못하고 종합 16위를 하였다. 재판 등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동북선수들의 부진’과 관련이 있다. 더 거시적으로 얘기하면 하계올림픽은 중국의 ‘남방올림픽’이라면, 동계올림픽은 중국의 ‘동북올림픽’이라고 볼 수 있다. 북경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빙설경제’의 거대한 전략은 동북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기회에 어떻게 국가의 거대한 전략을 어떻게 최대한으로 동북자원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이것은 매우 큰 숙제이다. 중국은 동계스포츠인구 3억명 육성이란 거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 2017년 중국의 동계스포츠 시장규모는 3970억원(인민페), 중앙정부는 2020년까지 이를 6000억원, 2025년까지 1조원대로 키워 전체 스포츠시장의 20% 규모로 육성하겠다는 복안이다. 글로벌 컨설팅사인 맥킨지에 따르면 2000년 불과 200만명이던 중국의 중산층은 지난해 무려 1억 1600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단 한번의 대회만으로 중국의 동계스포츠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확보한 것이다. 중국정부가 동계올림픽 개최지 후보 신청 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3억명이 빙설스포츠를 즐기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건 것도 중국의 경제성장, 중산층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동북으로 눈길을 돌리면, 동북은 아직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두번의 동계아시안게임을 개최한 지역이고, 중국의 거대한 부동산 대기업인 완다와 완커는 장백산과 송화강 지역에 각각 200억, 400억의 투자를 하여 최고급 스키스포츠의 대중화공간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흑룡강성은 122개의 스키장을 갖고 있고 길림성과 료녕성도 각각 38개와 35개의 스키장을 갖고 확보함으로써 전국에서 ‘초일류스키장’을 확보한 것이다. 북방의 신장이 57개, 내몽골 33개, 하북성 46개를 합하면 가장 강한 ‘빙설도시’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 비록 절강성이 18개, 산동이 58개, 북경이 24개, 사천성이 11개로 쫓아오고 있지만, 동북지역 스키장은 ‘자연설’을 확보할 수 있는 우세, 겨울다운 ‘겨울문화’, 등 다양한 ‘빙설문화’를 개발한다면 새로운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북지역은 국가적 차원에서 비전, 천연자원을 리용한 거대 시장자본의 투입으로 이끄는 빙설경제모델이 형성되고 있는가 하면,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눈의 경제’에도 주목해야 한다. 일전에 중국의 CCTV에서 길림성 서란현 이합촌의 ‘겨울경제’를 소개하였다. 인구가 100가구 정도인데, 이 지역은 길림성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동북의 대표성이 있는 옥수수로 집을 디자인하였고, 사진작가동호회가 아름다운 풍경을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였다. 2011년부터 시정부는 이런 발전에 눈길을 돌려 4000만원의 기초시설을 투자하여 이합촌이 ‘눈의 경제’의 상징적 촌락이 되였다.  어릴 때 동북촌락의 문화를 볼 수 있고, 뛰는 노루와 놀 수 있고, 탕후루란 어릴적 추억을 맛볼 수 있고, 질서정연한 겨울철에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연기는 아름다운 마을풍경을 만들어 자연과 인간의 미를 체험할 수 있다. 동북의 겨울경관이 뻬여날 뿐만 아니라 동북사람의 정과 의리가 담겨있고, 그리고 독특한 조선족민족문화가 겨울철의 진달래처럼 진미를 보태주고 있기에 ‘눈의 경제’에 눈길을 돌리고 문화와 경제가 결합된 다양한 발전모델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인민넷 조문판 2018.4.2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