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언과 노벨문학상 (3)
노벨상과 어깨를 스친 중국의 작가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 계속으로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이신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 세 번째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막언은 중국공민으로는 노벨문학상을 처음 수상한 사람이지만 막언에 앞서 중국문단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문호들이 적지 않은걸로 알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 김: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리스트에는 중국의 적지 않은 작가들이 유력한 후보로 그 이름이 물망에 올라 있었습니다. 대문호였던 로신(魯迅)과 로사(老舍), 심종문(沈從文), 전종서 등입니다.
- 신: 로신은 중국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작가이지만 그의 문학생애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 않습니까?
= 김: 문학가 겸 사상가로서 "중국문학의 대부"로 대접을 받고있는 로신은 "광인일기","아큐정전(阿Q正传)"등의 명저로 그 이름이 해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신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며, 로신 이후 중국문학은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중국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될 정도의 강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왜 아직도 로신일까?" 하는 물음에 문학계에서는 “로신은 이미 인류의 고전이고 그가 없이 중국 현대혁명사와 문학사, 학술사를 론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왜서? 로신은 지난세기초, 중국의 근대이행기의 암흑과 민족적 절망속에서 끊임없이 "신"과 "구"의 갈등을 몸으로 겪어왔기때문입니다. 문학을 통해 봉건례교를 비판하고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인간의 참다운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로신은 문학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항상 고민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를 거듭하면서 1936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로신의 본명은 주수인(周树人)으로 1881년 절강성 소흥에서 태여났습니다. 주씨네 집안은 그 지역에서 웬만큼 산다는 집안이였으나 조부가 과거시험에서 부정을 꾀하다가 투옥됐고 조부의 관직 외에는 생활수단이 없었던 집안은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부친의 약값을 대느라 재산은 탕진되였습니다. 집안의 장남인 로신은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한약방에 가서 부친의 약에 쓰일 희한한 약재들을 사는 일을 도맡아야 했습니다. 14살의 소년은 재산과 권세가 기울자 차갑게 돌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의 인정세태를 깨달았습니다.
1902년 로신은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고 의학은 중국을 구해줄 과학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여지없이 깨집니다. 수업시간 일본선생들은 틈틈이 환등을 돌려주었는데 그가 본 환등은 로일전쟁 당시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이였습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 일본인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있는데 멍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머리를 땋아내린 중국인들이였습니다. 동족의 처형을 구경거리인양 멍하니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무감각한 모습앞에서 로신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로신은 의대를 그만뒀다. 그가 저서 "납합"에서 갈파했듯이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신이 다음에 구한 행동반경의 답은 문학이였습니다. 어리석은 국민을 치료하는 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학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였습니다. 펜으로 "중국인의 렬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고 로신은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로신이 중국문학사에서 그처럼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1918년에 발표한 단편 "광인일기(狂人日记)"가 있습니다. 한 정신병자의 이야기를 그린 "광인일기"는 평범한 구어체를 사용하면서, 중국의 낡은 전통을 철저히 공박하는 내용을 담은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로 "아큐정전"과 함께 "낡은 유교관념을 버리자"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문학혁명"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 신: 소설외에도 후에는 잡문이 로신의 문학적 인생을 더욱 승화시켰다고 생각되는데요?
= 김: 로신을 세상에 알린것은 또한 그가 애용하는 쟝르인 잡문이였습니다. 우리에게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는듯하지만 기실 그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만을 남겼을뿐입니다. 소설 창작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되여 있고 그 이후부터 세상뜰때까지는 잡문쓰기에만 치중했습니다. 그의 잡문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군벌들의 폭정, 권력에 굴복하면서도 정인군자인 체하는 하는 지식인. 로신의 붓끝은 그 모두를 까발려 놓았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김학철 선생이 경모해 마지않으면서 역시 많은 필봉을 돌렸던 쟝르였던 그의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과 아큐식의 정신승리법을 비판하면서 시대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로신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그의 잡문을 통해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외세와 봉건세력과 마주했습니다. 그의 잡문은 말 그대로 "시대를 향한 비수이자 투창"이였습니다.
이렇듯 로신은 일생동안을 봉건의식에 젖어 있던 무지한 중국인을 일깨우기 위해 로심초사했습니다. 그러한 그이의 학문과 정신을 높이 기리여 그가 타계했을때 중국인들은 그의 시신을 "민족혼"이라고 쓴 비단으로 감싸 깊은 추모의 뜻을 표했습니다.
- 신: 로신의 이와 같은 문학적 공로가 당시에는 세계적인 인정도 받았는데 그는 왜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는가요?
= 김: 1930년대까지 노벨문학상은 영어권에만 돌아갔습니다. 우선 심사위원들이 각국의 언어를 리해하기 어려워 영어나 스웨덴어로 번역된 작품을 검토해서 심사하기 때문에 영어권이 아니면 정당한 평가를 받기가 힘든 상태였지요.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이에 미안했던지 1930년대 초, 동양권 나라의 작가에게 주기로 작정하고 수상자를 물색해 보았다. 마침내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로신에게 주기로 결정하여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신은 "서양 놈들의 상을 내가 왜 받나?"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사실 로신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안된다"며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로신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중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당시 서구인들은 로신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로신의 위대한 작품들은 양헌익(杨憲益)의 주옥같은 번역에 의해 로신 사후에 서구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양헌익은 "홍루몽"을 영어로 번역한 학자였습니다.
- 신: 로신외에도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익숙히 알고 있는 로사 역시 노벨문학상에 접근한 작가였습니다고 들었는데 로사의 경우는 어떠한지요?
= 김: 극작가인 로사(老舍)는 1899년 2월 북경에서 가난한 만주 기인(滿洲旗人)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본명은 서경춘(舒庆春)입니다. 해학적 풍자소설과 단편소설 작가로 등단했으나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애국적이며 선전적인 풍의 희곡과 소설들을 썼습니다. 로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하층 서민에 대해 동정의 시각을 키웠다. 1917년 북경 사범학교를 졸업한후 한동안 교직생활을 했으며 5•4신문화운동때부터 백화문(白話)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 동양대학에서 표준중국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때 5년 동안 명청시기의 소설 "금병매 (金甁梅)"의 공동번역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영어실력을 키우기 위해 읽게 된 찰스 디켄즈의 소설로부터 자극을 받아 첫번째 소설 "장선생의 철학 (老张的哲學)"을 "소설월보(小说月報)"에 발표해서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6년간의 류학생활중에 "이마 (二马)" 등 지식인의 생활상을 씁쓸한 유머로 묘사한 장편들을 계속 발표하여 문단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1931년 귀국후 제남의 제로대학과 청도의 산동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계속해서 희극적이고 행동성이 강한 작품들을 써나갔습니다.
1936년 로사는 대표작인 "락타상자(骆驼祥子)"를 발표합니다. 군벌 통치하의 북평(북경)을 배경으로 인력거꾼으로나마 생활을 개선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상자(詳子)의 비극적 운명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구사회를 고발, 단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북경에 사는 가난한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하층 서민의 애환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방향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는 평을 받습니다. "락타상자"는 5.4 이래로 도시 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우수한 장편소설로서 그 주제사상의 깊이와 폭에서나 인물형상의 창조에서 모두 이전에 쓴 작품을 훨씬 릉가합니다. "락타상자"는 그후 1945년 미국에서도 영문으로 출판되였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여 로사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떨치게 됩니다.
1946년 문화보조금을 받아 미국을 려행하면서 강의를 하고 작품의 번역본을 검토했습니다. 미국에 머물러있는 기간, 100만 자가 넘는 3부작 "사세동당(四世同堂)"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 점령하의 북경에서의 4대가 함께 살고 있는 대가족 식구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세세하게 그려내고있습니다.
새중국이 성립되고 중국으로 돌아와 그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북경시 문련 주석 등의 요직을 계속해서 력임했습니다. 그때 선전적인 희곡들을 계속 써나갔습니다. 이 가운데 "룡수구" 등은 북경의 변한 모습과 새로운 생활을 묘사하여 새 중국을 칭송한 희곡작품입니다. 이외에도 연극명작 "차집 (茶馆)"을 비롯해서 20여 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하면서 민간대중예술의 부흥과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시달림에 못이겨 늪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채 로사는 1978년 6월에 복권, 명예회복이 되였습니다.
- 신: 로사의 문학활동은 국제적인 인정도 받았고 노벨문학상과 아주 가깝게 접근했던 경력과 자격이 있었는데 왜서 수상자의 반렬에 오르지 못했는지요?
= 김: 그동안에도 노벨문학상은 그냥 서양 문학가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다 1968년,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다시 동양권에 문학상을 주기로 내정하고 중국의 소설가이자 학자에게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의 아비규환에 시달리고있었습니다. 우리의 노벨상 후보는 "미국간첩"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홍위병들에게 매일이고 끌려 다니면서 구타를 당하고 강압에 못이겨 자아비판을 하면서 고통을 겪고있었습니다. 노벨상 후보소식에 관련부문에서는 그냥 "그런 사람 찾을수 없다”며 이 소식을 일축해 버렸습니다. 이에 스웨덴에서는 문학상을 동양권의 문학가에게 주기로 한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가 로사 대신으로 "설국(雪国)"을 쓴 일본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시상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노벨문학상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쳐가게 된거지요.
- 신: 로사의 경우는 문화대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아픔이였습니다. 다음은 중국에서 최고로 장수한 작가인 파금도 노벨문학상에 접근한 작가라고 들었는데 파금의 경우에 대해 소개주시지요.
= 김: 파금은 중국 문단에서 로신,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로사 등과 함께 "현대문학의 6대 거장(大師)"으로 손꼽힌다. 파금(巴金)은 본명이 리요당(李堯棠)입니다. 자는 불감(芾甘)으로 1904년 11월 25일에 삼국시대 촉나라의 수도였던 사천성의 성도시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프랑스 류학을 마치고 돌아와 20년대부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여기 그의 창작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반일활동가이고 또한 이름난 농학자였던 류자명과의 교분입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고 류연산선생이 평전을 쓴 바로 그 류자명입니다.
50년대 호남성에서 조선교민으로서 농업연구를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던 류자명은 1970년대에 북경 주재 조선대사관에 가서 국가훈장을 받았다. 몇 해전에 그의 무덤은 호남성에서 한국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사람의 절친한 중국친구가 바로 파금이였습니다. 파금문학활동초기의 단편소설 대표작 "머리카락의 이야기"는 젊은 나이에 머리카락이 새하얘진 류자명의 모습을 보고 령감을 얻어 쓴것입니다. 류자명은 어릴적부터 흰 머리카락이 많았는데 파금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반일투쟁속에서 분노와 고민 때문에 흰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생겨났습니다고 그렸습니다.
파금의 작품은 "힘과 정(情)과 열기가 종이를 뚫는다"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의 분량이 방대한 작품 중에서 첫 손 꼽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있는 장편소설 3부작인 "격류 3부곡(激流三部曲)"- "집(家)", "봄(春)", "가을(秋)"입니다. 성도시의 방대한 고(高)씨가문을 무대로 하여 봉건가정의 암흑한 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작품은 현대중국문학사의 걸작중 걸작으로 인정된다. 지난세기 30~40년대에 이 책을 통해 봉건사회의 부패성을 인식하고 낡아빠진 가부장제도를 뒤엎어야 합니다고 깨달아 공산주의혁명에 참가한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파금의 장편 "집"은 중국 언론이 뽑은 "20세기의 100대 예술작품"에 들어갑니다.
파금은 1983년부터 중국작가협회 주석 직을 맡게됩니다.
파금은 빈번히 일어나는 정치운동에서 고초를 겪곤 했는데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그는 하루에 3, 400자씩 쓰는 속도로 꾸준히 글을 써서 8년만에 150여 편의 글이 담긴 5권으로 된 "수상록(隨想录)"을 내놓았다. 파금은 당시 수상록 집필을 앞두고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것, 뜨뜨미지근한것, 남이 말하니 나도 따라서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쓰나마나 한 글이 결코 아니다"라며" 소리없고 힘없는 하나의 절규로서 위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에 참여하고자 합니다"고 집필 방향을 밝혔다. 파금은 말년에 파킨슨병 등을 앓아 상해에서 6년간 식물인 상태로 병마와 싸우다가 101세에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파금은 17세인 1921년에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1999년에 옛 친구를 추억하는 글을 발표하기까지 그의 문학생애는 장장 79년에 이른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으나 받지는 못했습니다. 노벨상 평심단은 파금의 작품에 대해 "아주 좋은 소설들입니다. 미래의 중국 연구자들이 지난 세기 사천인들의 생활상을 알려면 꼭 파금의 작품을 읽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대신 2004년 11월 25일 100돌 생일에 국무원에서는 그에게 "인민작가"라는 큰 칭호를 주었습니다. 우리 작가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입니다.
- 신: 중국문단 더욱이 해외에서는 심종문에 대해서도 많이 거론하고 있는데요, 그 역시 노벨문학상과는 거리가 가까웠던 작가의 한분이지 않습니까?
= 김: 고대문화 연구가이자 작가인 심종문은 호남성 봉황현(鳳凰)에서 묘족의 혈통을 지니고 태여났습니다. 중국 농민들의 투쟁과 승리를 주제로 하여 35권 이상의 소설을 썼습니다. 소년시절을 군대에서 보냈는데 그의 부대의 지휘관은 고적과 고서화를 좋아했습니다. 글을 아는 심종문에게 분류와 관리를 맡겼는데 이때 심종문은 적지않은 력사서적을 읽었습니다. 군복을 벗고 심종문은 북경으로 갔습니다. 겨우 푼돈만 남았지만 대학생이 되고자 했지만 시골 청년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학 주변을 맴돌고 해가 지면 석탄 창고를 찾아갔습니다. 고도인 북경은 거대한 박물관이였습니다. 온종일 책방에 서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프고 몰골은 말이 아니였지만 심종문은 그책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간 굶어죽거나 얼어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기적이였습니다. 그는 글로만 접했던 욱달부(郁達夫)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북경대학 통계학과 강사 욱달부는 낯선 청년의 편지를 받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발신자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욱달부는 신보부간(晨报副刊)의 새로운 편집인이였던 서지마(徐志摩)에게 심종문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총명해 보이는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서지마는 채택되지 않았던 심종문의 원고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욱달부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서지마는 심종문의 글을 연달아 독자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심종문은 하루아침에 호적(胡適), 량계초(梁启超), 문일다(聞一多) 등 당대의 명류(名流)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후 그에게 북경을 대표하는 "경파(京派)문학의 령수"라는 명칭이 씌워졌습니다. 그는 번역문으로 읽은 서구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은 자유스럽고 통속적인 문체에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단편•중편•장편 소설들을 발표했습니다. 장편소설 가운데 대표적인것은 항일전쟁중에 쓴 "장하(长河)"이며, 단편소설로는 "춘등기 (春灯记)"•"흑봉기 (黑鳳记)"등입니다.
문혁기간에 그역시 박해를 받고 문단과 북경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대륙과 대만 량쪽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였습니다. "분홍작가", "립장이 없는 기녀작가"로 비판당하며 고초를 겪었던 그는 "4인방"이 거꾸러지고 개혁개방과 함께 복권되였고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의 독자들은 "심종문 신드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대표작 "변성"은 풍경 수려한 향촌에서의 삶과 인정을 서정적 필치로 그려내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걸작입니다. 담담한 수채빛으로 그려지는 세 남녀의 사랑만큼이나 인상적인것은 중국의 전통사회와 중국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입니다. 서구렬강들의 침탈에서 비롯된 20세기초 중국사의 격변기에 로신같은 작가가 중국인을 "아큐"라고 꾸짖으며 계몽의 목소리를 드높일때 심종문은 "남을 어려움에서 구해내는 일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여들어들어야 합니다"며 중국인들의 본성적 휴머니즘에 주목했습니다. 한소공같은 중견작가들은 바로 심종문의 향토주의적 미학의 계승자로 꼽힙니다.
- 신: 심종문은 무슨 원인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가요?
=김: 1988년에 심종문은 후보는 물론 초기 선정에 포함됐으며 5명의 최종 후보에 올라 선정위원으로부터 가장 호감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기 5개월전에 사망해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종문 소설 3권의 완역본을 번역, 출간한 노벨상평심위원 말름크비스트는 신문학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작가로 심종문을 꼽습니다. 2007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그는 다시 심종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발표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것이 아직도 애석하다. 88년 10월의 노벨 문학상은 당연히 심종문의 것이였다."고 애석해 했습니다.
- 신: 유감스럽게 노벨문학상을 스쳐지났던 중국문단의 문호들이였지요. 그 가운데는 전종서도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김: 중국과 서양의 학문에 능통하고 뛰여난 재능과 풍부한 감성을 지닌 학자인 전종서는 1910년 강소성 무석에서 태여났습니다. 19세에 청화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1932년부터 상해 광화(光华)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35년 전종서는 양강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류학을 떠났습니다. 2년후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빠리대학으로 가서 연구활동을 하였습니다. 1938년 청화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였습니다. 항전이 끝나고 그는 상해 제남대학교 외문과 교수 겸 남경중앙도서관 영문관이 출판하는 "서림계간(書林季刊)"의 편집인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동안 작품집인 "인수귀(人兽鬼)", 소설 "포위된 성(围城)"등을 련이어 내놓아 문단과 학술계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53년부터 문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송시역주(宋诗译主)"를 완성하였고 "중국문학사" (당, 송 부분) 공저 작업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중에 부인과 함께 하남성의 "5.7간부학교"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1972년 3월 북경으로 돌아와서 계속 연구에 종사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특별고문을 력임하였습니다. 1998년 12월 19일 북경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전종서의 "포위된 성"은 중국 현대문학사상 독특한 풍격을 지닌 풍자소설입니다. "포위된 성"은 1944년에 집필이 시작되여 1946년에 탈고되였습니다. 당시 작자는 상해에 칩거중이였는데 일본 침략군의 만행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전종서는 철저하고 꼼꼼한 자세로 인생의 깨달음과 학문의 사유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입하면서 소설 "포위된 성"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포위된 성" 초판의 머리말에서 "현대 사회의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부류의 인물을 쓰려고 하였습니다."고 자신의 창작 의도를 자술하였습니다. 소설은 지식인 계층의 청년 남녀의 애정 갈등속에서 포위되고 탈출하는 과정을 엮으면서 함몰된 지식인의 정신세계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심각한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포위된 성"은 세태와 인심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고도의 심리 묘사를 표현해 내고 있으며 그 묘사는 시종 조롱과 풍자라는 희극적인 문체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곳곳에서 올곧기도 하고 삐뚤어지기도 하며 고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으며 신기한 비유와 각종 경구가 점차적으로 등장하고 반복하여 나타게 하여 언어를 더욱 풍부하고 지적으로 만들어 내였습니다.
- 신: 전종서는 왜서 노벨문학상과 인연이 없게 되었는지요?
= 김: 전종서는 중국문화계에서 문화곤륜(文化崑崙)"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전종서는 1988년에 노벨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피선되였습니다. 전종서를 떠올리는 중국인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종서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자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 노벨이라는 사람은 화약보다도 노벨상을 만들어 인류에 더 큰 해를 끼쳤다”며 불쾌해했습니다.
- 신: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스쳐지났던 중국문호들의 개별적 사안들에 대해 말씀 주셨습니다. 통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중국작가들이 지금껏 노벨문학상과 그렇게도 접근했으면서도 받지 못했던 리유를 주객관적으로 어떻게 볼수 있습니까?
= 김: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노벨문학상 선정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1938년까지 아시아 작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학계와 세계문단은 분석하고있습니다. 그래서 노벨상 위원회는 1960년대에 "아시아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주기로 내부방침을 정한뒤 6,7년 동안 치렬한 토론을 벌렸다”고 합니다.
17번이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주임을 맡았던 스웨덴의 유명한 시인, 셸 에스마크(82)가 로신과 로사, 심종문 등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수 있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본인의 사양(로신)과 죽음(로사, 심종문)으로 수상하지 못했습니다고 밝혔다. 중국의 현대문학에서 그 선두주자로 달리면서 노벨문학상의 문턱까지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로신, 로사, 심종문, 파금 등 이들은 작가마다 작풍(作风)이 다르기 때문에 우렬을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히 수준 높은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올해 문학상을 받은 막언은 이들의 영향아래 중국의 고대 민간 서사(敍事)에 서구의 근대성을 융합시킨 작품으로 세계로 나아가는데 성공하게 된것입니다.
-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노벨문학상과 아쉽게 연이 닿지 않았던 중국의 문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 약속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서 접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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