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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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웅변고
2013년 11월 21일 17시 41분  조회:8460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소의 웅변고
 
                                                 ㅡ 너무 충직하지 말라 ㅡ   

    우리 소족속에는 여러종류가 있다. 중국소, 서반아소, 인도소, 조선소 등. 소는 매개 나라에서 부동한 지위를 가지고있으며 부동한 생존상태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인류에 마주하여서도 우리는 부동한 신분을 가지며 생존상태가 부동함에 따라 서 우리의 숙명속에 결정된 결과에로 나가면서 이 세계를 떠난다.
    기실 부동한 소들은 부동한 인류의 생존생태를 대표하고있다. 인류와 동물들은 많은 공동성을 가지고있지만 인류가 특유한 성질을 스스로 결정한것에 불과하다. 스페인소는 용사이며 역시 용사와 대결하는 적수이기도하다. 이 각투장에서 각투사와의 박투속에서 결과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결과라해도 싸워야 하는것이 소의 운명이다. 무수한 박투속에서 무수한 상처를 입고 다시 아물어가는 과정에서 소들은 자기들에게 속한 빛나는 생명의 종점에로 나가서 머리를 건뜻 쳐들고 이 세계를 도고하게 떠나간다. 혹시 이것이 용사들의 생존생태일수 있다.
    각투장에는 구경군들이 있기마련이다. 그들은 용사들이 죽기내기로 분투하는것도 아랑곳없이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만난듯이 히히닥거리며 생명대 생명의 박투를 흔상한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관심밖인듯싶다. 이런 구경심리는 아마도 중국사람들이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로신선생은 몇십년전에 중국인들의 렬근성인 구경심리를 질타하였다.
    인도의 소들은 신의 신분으로 인도사람들의 심목속에 존재한다. 인도인들은 동물숭배심리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에게 부복하면서 저마다 준비한 풍성한 례물을 신우에게 바치면서 영원히 함께 하면서 자기들을 보살펴달라고 빈다. 그들은 언제 어디 서나 신우를 경건한 마음으로 례절스럽게 대한다. 이런 생존환경에서 인도소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큰 거리라도 제멋대로 굼닐고 잠을 자면서 달콤한 꿈을 꾼다. 인도주민들은 감히 소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우리 소들은 어떠한 생존상태에서 서식하고있는가? 젖을 공헌하는 젖소나 살을 공헌하는 고기소들이나 밭에서 힘겨운 고역을 치르는 부림소들이나 모도 일종 노예신분으로 존재할뿐이다.
    일컬어 대가를 지불하면 되돌려 받는다고 하지만 우리 소들은 자기 힘에부친 수많은 대가를 지불하지만 얻는것은 오히려 잔인한 학대와 시달림뿐이고 마지막엔 고기를 먹히우고 골수까지 빨리우고만다. 중국의 소로 태여나면 우리의 운명은 이렇 게밖에 더 될수 없는것인가?
    전통적인 민속습관에 의해 더 부려먹을수 없을정도로 로쇠해진 소들은 도살장의 소백정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여있다. 중국농민들은 자기들이 애지중지 하던 소의 후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금도 모르고있다. 물론 그들을 탓할바는 아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우둔한 사람을 우리에게 비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실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우리는 늙으면 자기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으며 백정의 손에 끌려갈 때 눈물을 흘린다. 농촌에서 소와 함께 동무해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모를것이다. 우리는 자기 형제자매가 도살된 자리를 지나게 되면 울부짖고 앞발로 땅을 허비며 항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도끼에 머리를 강타당할 때 자기 생명이 끝난다는것을 알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한소리 길게 영각하여 주인과 고별한다. 그리고 최후의 눈물을 땅에 남기고 간다.
    중국소들의 정신에 당신들은 감동되지 않는단말인가? 몇천년을 내려오며 숙명을 개변하지 않으며 운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반항하지도 않았고 순순히 자기 운명에 순종한다. 그렇게 인류의 죄악에 종용한다. 모든 동물들이 오늘같은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되고 물종의 쾌속절멸이 이런 종용의 결과일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각은 인류의 극도로 치달은 리기와 포학성을 드러내는것만은 사실이다. 언젠가 인류가 훼멸된다면 자기들이 도살한 수많은 동물들의 최후를 련상할것인가?
    큰길에 한대의 자동차가 서있었다. 수소는 소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영각한다. 그러나 암소는 오히려 수소더러 빨리 도망가라고 음머!한다. 《저 사람들은 너의 그 힘센 좆을 빼먹으려 왔단말이다. 이 바보야, 그들이 나를 보는건 근근히 젖을 두어근 짜서 먹을 궁리를 하는거다. 빨리 도망쳐,》
    알다싶이 우리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때문에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회피하지 않고 죽기전날까지 근로하고 성실하게 해낸다. 이런 황소정신은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있다. 농경사회에서 우리 소들의 작용은 모두 공인하는바이다. 봉건사회에서도 소도적은 중형으로 처벌했다. 소는 농민들의 목숨줄이였기때문이다. 로신선생이 먹는것은 풀이지만 짜내는것은 젖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다.
    후기공업사회에 진입해서 우리들의 지위는 내려가고 운명은 참혹하게 되였다. 우리의 영광의 력사는 이미 력사의 한페지로 넘어갔다. 지금의 아이들, 특히는 성시의 아이들은 밭을 가는 소의 모습을 드믈게 본다. 다만 우리의 젖을 마시고 우리의 고기를 먹고 갈비뼈를 먹고 소가죽구두를 신으면 좋다는것만 알고있다.
    누가 력사가 롱담을 할줄 알았으랴!사람들은 갈수록 우리를 잊어버리고 우리에 대해 랭담한 시대가 도래했다. 당신들은 소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수 있는가? 혹간씩 교외의 강가에서나 풀을 뜯을때도 늘 머리를 수그리고 그 순진해빠진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람들은 명리의 싱싱한 풀을 보면 대뜸 눈에 피발이 서서 네죽고 내살고한다. 우리 소들에 비하면 얼마나 포용력이 결핍한가? 우리는 미식을 다투지 않는바 이는 인간들이 미치지 못할바이다. 우리 소들은 수천년을 온순한 동물로 번식해왔다. 우리 는 우둔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사람들에게 지혜의 게발을 주기도 한다. 옛글에《늙은 소는 날이 저믄것을 알거니 채찍으로 때리지 않아도 걸음을 다그친다》는 말이 공연히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우리의 총명에 대한 미담은 많고많다.
    우리 소들의 선조들속에서 류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밤새도록 내린 눈이 그치지않고 그냥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 화룡의 신흥동에서 류동이라는 마을로 벼짚을 사려갔던 한 농부가 잔뜩 취해서 발구에 가득실은 벼짚우에 곯아떨어졌다. 그 소는 제오던 길로 고스란히 걷고있었다. 그런데 내리막길에서 주인이 그만 소궁둥이와 발구채사이에 떨어졌다.
    그것을 감촉한 소는 걸음을 딱 멈추고나서 뒤발로 주인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앞에 놓고 앞발로 슬슬 밀면서 그 먼길을 걸어왔다. 집대문가에 와서 소는 음머!하고 영각을 하여 안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였다. 남편이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아 근심 하고 앉아있던 안주인이 소의 영각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내달았다.
    그런데 짚을 가득실은 발구앞에 소만 눈이 둥그래서 서있을뿐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황황하던 안주인은 그제야 소앞에 눈사람이 누워있는것을 발견했다. 후에 안일이지만 소가 곤죽이된 주인을 앞발로 밀고왔던것이다. 소가 주인을 그냥 깔고넘어가지 않은것은 인성과 통하는 본성이 있었기때문이다. 소들이 죽을 때 눈물을 흘리는것도 인성과 통하는 표현이지만 그것을 류의한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신은 소의 그 맑은 눈물을 본적이 있는가?
    우리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본사람은 언제나 촉촉히 젖어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우리는 평생 눈물을 흘리며 사는지 모른다. 바람따라 끝없이 떠다니는 구름도 우리의 속상한 마음을 씻어준적이 없다. 뜨개질하기 좋아하는 찬구들을 내놓고는 절대 대부분의 우리의 눈빛은 성실하다. 아마 이 생명계에서 우리의 눈만이 가장 악의가 없는 눈일것이다. 누군가 소의 눈은 아름다운 눈이라고 감탄했다. 암소이든 수소이든 늙은소이든 햇송아지이든 다 쌍겹눈을 하고 길고 멋진 속눈섭을 껌벅거린다. 세상에는 추녀와 추남은 있어도 추우는 없다. 우리의 정기는 천생 크고 검은 눈동자속에 담겨있다.
    우리의 처세철학의 정수는 끝까지 참고 견뎌내는 인내성이다. 이런 고매한 품질 을 인간들은 마구 악용해먹으며 학대하고 지쳐서 쓰러질때까지 부려먹는다. 느러진것은 우리 소들의 타고난 성격이다. 주인이 아무리 급해해도 그냥 그 절주로서 느러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조급함의 의미를 모른다. 우리는 죽는 최후의 시각까지 당당한 모습을 흐트러 뜨리지 않고 뒤걸음치는 실태를 범하지 않는다.
    그것을 두고 소들은 이미 마비되였다고 여긴다. 가죽이 두터워서 그렇게 굴뱀이 지도록 아프게 맞아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무반응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은 그저 그렇게 자주맞아서 습관된것도 있지만 맞아도 당연한 동물 이라고 여기는 인간이 우리보다 못한 동물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다.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연약하면 얻어맞고 잡혀죽는것은 동물세계의 영원한 생존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특히 가축으로 길들인 인류의 걸작일뿐이다. 산야에서 자유자재로 사는 들소형제를 감히 깔보고 학대할 용사는 아마 없을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동물들속에서 배제된 특유의 존재로 생각하면서 다른 동물들을 기탄없이 학대하고 희롱질하며 나중에 잔인하게 잡아먹어버린다.
    우리의 순결무후함에서 연약하면 얻어맞는다는 인간사회의 도리를 끌어내려는것은 무모한 짓이고 유치한 사유방식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황소정신을 민족정신의 모범으로 삼는것은 백해무익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의 뼈속에 유전된 연약성이 동물 중에 강자로 될수 없도록 결정하였을것이다. 무릇 초식동물은 선량하고 연약하며 육식동물은 포악하고 흉맹스럽다는것을 말해서 알겠는가?
    세계 다른 나라 민족들은 범이나. 사자, 표범의 정신을 민족정신으로 표방하고있다. 사자나 표범은 동물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이다. 하다면 그것들 처럼 민족지림에서 제일 강자로 된다음 할일이 무엇인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기 의지대로 지휘하고 략탈하는 일밖에 더 할일이 있는가? 코끼리는 호랑이나 늑대나 악어처럼 전문 다른 동물을 침해하지 않고도 위엄있게 평화롭게 살고있지 않는가?
    전하는데 의하면 우리 선조는 원래 천상에 하나의 별로서 옥황대제의 신변의 한 장군이였다고 한다. 반고의 천지개벽이후 대지는 황막하여 아무것도 없었다. 옥황상 제는 소를 파견하여 동서남북방에 각기 한포기의 풀을 심으라고 명령하였다. 우장군 은 풀을 네포기만 심으면 너무 적은것같아서 몇그루 더 심었다. 그런데 풀이 그렇게 빨리 무성해질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우장군이 하늘에 올라가 복명할 때에는 온 천지에 풀로 휘덮혔다. 대노한 옥황대제는 우장군더러 하계에 내려가 무성한 풀을 다 뜯어먹고야 하늘에 올라와 복직할수 있다고 엄명하였다.
    왕모랑랑이 그를 불쌍하게 여기여 많은 만두를 아래에 내려뜨려 풀잎에 이슬이 되게 하였다. 소가 아침이면 이슬이 맺힌 신선한 풀을 뜯어먹고 살이 찌라고 돌보아 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소가 앞에 풀을 다 뜯어먹으면 뒤에 풀이 뒤미처 자라나서 영원히 다 먹어치울수 없었다. 후에 한 농부가 풀을 없애자면 아예 뿌리를 뽑아야 후환이 없다고 알려주면서 앞에서 쟁기를 끌어 땅을 갈아엎으면 풀이 절대 다시 자라지 못할것이니 합작하자고 제의했다. 그것도 상책이라고 생각한 우장군은 흔연히 응낙했다. 그렇게 소는 인간세상에 하강하여 인류의 충실한 벗으로 되였다.
    그러나 인류의 고도로 발전한 물질문명이 우리 소족속들에게 가져다준것은 무엇이였던가? 살륙과 탐식이다. 우리의 자랑찬 모습은 저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속에서만 볼수 있다. 사람들은 무슨일을 하기싫어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같다고 비아냥거린다. 묻노니 사형장에 끌려나가는 죄인들이 기꺼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는가?
    밤낮 지줄대는 실개천에서 얼룩배기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을음 우는것을 보면 산촌의 평화를 표징한다고 감상적으로 말할것이다. 그러나 저기 연집강기슭의 도살장에 한번 와보라. 거기서 터지는 우리 형제동포들의 울음은 영각이 아니라 최후의 시각을 예감하고 하늘 우러러 호소하는 아비규환이다. 참으로 사이비한 동물이 그래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아, 여기까지 설토하고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워 더 말을 이어갈수 없다. 다정다감한 제군들이여, 체대값을 못하고 훌쩍거린다고 비웃지야 않겠지? 죽음처럼 강하다는 인간언어가 만들어졌지만 그말을 만든 사람에게 고역과 죽음을 선물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연극이 벌어질줄 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수천년 인류의 칭송을 받으며 살아온것은 결코 허영심때문이 아니였다는것을 선언한면서 이만 연단을 내리려 한다.
 
                                          2007 년 9 월 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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