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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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땀
2016년 08월 23일 19시 30분  조회:4306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문학과 땀
 
     
      문인이란 무엇인가? 문인은 지식인들중에서 인문과학분야의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하다면 나는 문인인가? 근 삼십년간 교단에서 일했고 또 이런 글 저런 글을 드문 드문 발표했으나 문인의 행렬에 껴준다면 그 이상 긍지를 느낄 일이 또 있으랴만 내 야망속의자아(문인)에 비기면 결국 되다가 만 문인이라고 자인하는게 솔직할것 같다.
    문학지향자로 말하면 문학은 곧 그 사람의 인생의 궤적이 될것이다. 허나 각자 인생행보가 다르기에 문학과인연이 맺어지고 문학의 길에서 성장해온 과정도 다르기 마련이다. 내 문학의 꿈은 이 필연과 우연의 왕국에서 수동적이기도 했고 주동적이기도 했다.
    아마 소학교 3학년 후학기부터였을것이다. 나는 숙명같이 너무 일찍 소설책에 혹하여 학업마저 페할 지경이였다. 나에게는 다섯살 이상인 쌍둥이형이 있었는데 시를 쓰고 랑송하는 멋진 큰형 균설이와 열일곱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신춘문예상을 탔던 둘째형 균필의 서가에는 새록새록 새 책들이 꽂혔다가 사라지군 하였다. 아마도 어데서 며칠간씩 빌려다가 읽는 모양같았다.
    처음에는 소년의 일종 유치한 호기심과 허영심때문에 멋도 모르고 대구 읽어보았고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차차 저도 모르게 책에 흥미를 가지게 되였다. 주제넘게 논다는 형들의 지청구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 어떤 반발심으로 더구나 당길심과 긴박감을 가지고 기를 쓰고 읽었는지도 모른다.《단검》,《참된 사람의 이야기》,《벚나무》,《어머니》,《철의 흐름》등과 같은 장편소설도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 책장을 훌훌 넘기며 억척스레 읽었다.
    그러고보면 자초에 나의 어린가슴에 문학의 씨앗을 심어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두 형님들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글짓기에 직접 흥취를 가직하고 자아표현에 힘을 불어넣어준 분은 내가 룡정중심소학교를 다닐 때 6학년 전학기까지 줄곧 담임을 맡으셨었고 작문써클을 지도하셨던 아동문학 작가 고 남춘우선생님이시다. 그분은 후에 연변일보사에 전근되여 다시 만나뵙지 못했지만 내 가슴에 이름이 새겨진 분이시다.
    남선생님은 나의 담임만이 아니라 부형같은 분이기도 했다. 소학교 5학년에 진급하던 그해, 나는 10월이 다되도록 신발이 없어 학교로 못가고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했다. 어느날 엄마를 따라 밭에 가서 노는데 남선생님이 일송정기슭에 있는 밭머리까지 찾아오실줄이야, 어머니에게 무어라 말씀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선생님은 그길로 나를 데리고 시내에 들어가서 신발을 사주었고 며칠간은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재우면서 보충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때 선생님은 총각의 몸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조촐하게 살고계셨다. 선생님의 집에서 숙식하던 그 며칠 나는 정말 행복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서가에 꽂힌《이른 해돋이》,《단검》,《찌무르와 그으 부대》등 책을 몰래 다 읽어버렸다. 하지만 그때는 물론 작가의 꿈과는 인연이 먼 호기심많은 말썽꾸러기 시골애였을뿐이였다.
    막연하게나마 시인의 이미지를 가슴에 새기게 된것은 룡정현 동성중하교에 올라가서였다. 우리의 어문을 가르치셨던 다재다능한 신학철선생님은 시랑송으로부터 시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고 교내연극조에서 공연할 재담이나 단막극 창작같은 임무도 나에 주면서 힘껏 밀어주셨다. 그때로부터 내가 문학지망생이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때로부터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와 이름이 뜨르르한 작가가 되는것이 나의 숨은 꿈이 되였는데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게 인생이였다. 어떠한 사연으로 그만 고중도 못가고 청춘을 한탄하다가 한번 크게 문학공부를 해본답시고 외국에 나가려고 시도해보기도 하였으나 그 역시 운명의 배치였던지 물거품이 되였다.
    내가 무엇을 좀 알고 검질긴 책벌레가 된것은 호미자루를 잡고 지구수리를 시작해서부터였다. 농촌사회주의교육이 터지면서부터 못생긴 새끼오리로 되여 사회의 괄호밖에 격리당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책이 유일한 정신기둥이였고 독서가 곧 내 정신기둥이였고 독서가 곧 나의 정신가원의 오아시스였다.
    농촌에는 “먹은 소 똥눈다는”는 야한 잠언이 있다. 조금 읽었으니 무언가 배설하고 싶은것이 인간본성이였던가? 그래서 게으른 하마가 고니고기를 먹을 엉뚱한 생각을 가지듯 언감생심 “붓”을 들었다. 문학도들이면 거개 그랬겠지만 나도 습작으로 시작한것이 시였다. 시인은 령혼의 화가라는데 매료되여 그랬는지, 작가라는 이름보다 시인이라는 이름이 더 멋져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과학은 배우는 사람을 위해 존재 하지만 시는 알고있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다”던 누군가의 말이 얼마나 멋진 말이였던지 스스로 시인이나 된듯이 제멋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의 초행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했다. 제딴에; 독특한 개성적감수로 썼다고 느껴져서 한수 또 한수 신문사에 보내고 잡지사에도 보냈건만 그냥 퇴고만 당하군하였다. 나는 감대기도 아닌것을 가지고 공연히 시간과 정력을 랑비하지 않나 하고 락망을 앞세우면서 편집선생들의 매정함을 욕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내게는 인연이 없는 문학을 아예 포기하려고 작심하기까지 하였다.
    살벌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이였던지 소설가 민학송선생이 강건너로 가면서 한마디 충고하였다. 발표에 조급해 하지 말고 적어도 십년은 묵묵히 책이나 읽으면서 많이 배우라고,
    먼 후날 내가 명동산골에서 교편을 잡고있을 때 우연히 안면을 익히게 된 고 최현숙선생님에게서 나의 작품들이 왜 지면에 못나갔가 하는 원인을 알게 되였고 회심의 쓰디쓴 미소를 짓게 되였다. 당시는 통신원원고뿐만아니라 문예작품도 기층에 내려와 조사하고 확증할 때였다. 내가 살던 룡산대대 당지부에서 가정출신이 명랑 하지 못한 나에게 붉은등을 켜놓더라고 하는것이였다.
    농촌구석에 “황색소설”타도바람이 불기전까지만 해도 내 서가에는 두 형님이 타향으로 떠나며 물려준 세계명작들과 자비로 사들인 책들이 꽤 되게 있었다. 시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세계명작들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인간본성의 온갖 변화에 대한 그럴듯한 묘사들로 세상과 대화하는 소설에 감탄하면서 스스로 실락감을 보듬어주군했다.
    나는 농군으로는 상농군에 속했지만 결코 부지런한 사원은 못되였고 책읽기에만 정신이 팔려있은 귀찮은 존재였다. 삼도만으로 풀베기부업을 갈 때에도 책을 이불짐 속에 넣어었고 고동하목재판의 긴긴 겨울밤 등잔불밑에도 졸리는 눈을 잡아뜯었으며 아동저수지공정에서 마차몰이를 하면서도 책을 넣고 다니는것을 잊지 않았다.
    “공든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이 내개 맞아떨어졌는가? 모질기도 했던 세월이 마침내 물러가고 새봄이 오는 발자국소리와 더불어 쥐구멍에도 볕이 들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가는 봄은 구름이요 오는 봄은 기쁨일세”라고나 할가? 1974년 1월, 나의 처 녀작이 끝내《연변일보》문예부간에 발표되였다.
    시는 순전히 우연하고 회색적인 기분에서 씌여진것이였다. 그날도 따뜻한 구들에 배를 붙이고 무슨 책인가 뒤적이고있는데 듣기만해도 지긋지긋한 종소리가 울렸다.  이어 논코를 끄러 나오라는 생산대장의 명령이 귀청을 때렸다. 때는 신주대지 곳곳마다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열조가 들끓던 비상시국이였다. 그러나 설전부터 일재촉하니 속에서 “제길할”이 꿈틀거렸다. 함께 논으로 나가던 청년들속에서 출신이 좋은 한 친구가 입에서 구렝이 나가는지 뱀이 나가는지 모르고 게두덜거렸다. “개×같이…이눔의 농민들에게는 겨울이 따로 없다니까…”
    그 말이 우습게도 내 녹쓴 머리속에서 어떤 령감으로 변할줄이야, 나는 심드렁하니 괭이를 휘두르면서 그 친구의 말을 계속 짓씹었다. 확실히 농민들에겐 사계절이 따로 없다. 일하고 또 일해야 한다. 무엇때문이냐? 밭고랑타고 세계를 내다보며 혁명을 위해 농사짓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휘두르는 괭이끝에 떨어져나간것은 논코의 흙덩이만이 아니라 겨울이 동강나는것으로 생각이 비약했다. 남들은 한창 대채를 따라배울 때 우리는 벌써 따라잡았다고 호언장담한다면 “혁명적랑만주의”수법으로 쓴 “명시”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엮어지 시 “호두산이 보인다!”를 막연한 마음으로 우체통에 넣었는데 며칠후 시편집이셨던 김경석선생의 손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져 지면에 번듯하게 발표되였던것이다. 돌이켜보면 회심의 미소가 나오지만 당시로서는 승천한것이나 다름없었 다.
   그날 마침 집에서 걸상을 만들다가 신문을 들고왔던 마을친구의 입에서 발표라는 말이 나오자 어찌나 격동되였던지 들었던 망치로 엄지손가락을 호되게 내리치는줄도 몰랐다. 피흐르는 손으로 신문을 받아들이고 읽어보는 순간 아픔도 금시 잊혀졌고 첫사랑을 고백하던 그 시각처럼 가슴이 마구 쿵덕거렸다.
    시작이 절반이라더니 그다음부터 잘 나갔다. 그때 시들을 지금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김경석선생님의 사랑은 한 농촌문학도에게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였다. 사실 그후 발표된 변변찮은 몇수의 시작품들이 나를 무난히 교단에로 떠밀어주었던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문학의 길에서 손잡아 이끌어주신 김경석선생님이 무던히도 고맙다.
    그리고 내가 아직 농민이였던 때 또 한번의 굽이였다. 내가 되지도 않는 시를 쓴 답시고 끙끙거릴 금방 해방을 맞은 김철선생님과의 해후는 내 문학의 길에서 또 한번 의 굽이였다. 내가 되지 않는 시를 쓴답시고 끙끙거릴 때 김철선생님은 “균선이는 아무래도 시가 잘될것 같지 않구만. 내가 산문편집을 맡았으니 줄글나 써보지. 거기에 김시룡도 있고 리옥금도 있으니 좋은 소재를 발굴할수 있지 않겠소? 보고문학을 한번 써보오.”라고 하던 충고가 내 문학에 일종 승화의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지 않아도 잘 되지 않는 시때문에 가슴을 앓던차 김선생님의 말씀은 자치 말라버릴번한 나의 가슴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하여 김시룡과 리옥금이를 채방하고 보고문학 “위대한 진군길에서”와 “해란강반에 울리는 종소리”, 산문 “그가 가는 길” 등을 륙속 쓰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또 김철선생님을 내내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교편을 잡아서 5년이 되던 해 전근해갔던 명동(부유)산골은 내가 제2의 인생고를 겪은 곳이고 인생수련을 톡톡하게 한 곳이였다. 도거리농사가 시작되여 논밭을 분배받았으나 농기구도 있어야 했고 소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학교지도부의 눈총을 받으면서 두부방을 제 손으로 짓고 대부금을 내여 황소를 사서 농사도 하고 두부방에 쓸 나무도 해왔다. 본의 아니게 본직사업에 충직하지 않는 불합격선생이 된것이다.
   그대신 새로운 생활체험을 하면서 “탈출기”에 나오는 박군의 가슴에 한으로 새겨진 인생고가 무엇인지 더 투철히 깨닫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 로작가 리홍규, 최현숙 부부가 산좋고 물맑은 명동에 창작활동을 하러 왔다면서 내가 도거리맡은 공소사의 려관에 체류하였다. 명망있는 로작가들과 안면을 익힐수 있는 좋은 기회여서 넉살좋게 자아소개를 하였다. 지인지감이 있는분들이였는지라 우리는 인차 친숙해졌고 좋은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
     최현숙선생님은 내가 일요일마다 소수레를 몰고 산에 나무하러 가고 퇴근해서는 소여물을 끓인다, 돼지죽을 퍼준다, 개를 먹인다(그때 돼지 여덟마리, 개 여여라문마리를 기르고있었다. )하며 다사분주한것을 보고 보기 민망했던지 산골의 만원호도 좋겠지만 아이들을 구하고 자신이 안계가 넓은 작가로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시골을 떠나라고 충고하셨다.
    사실 그즈음 아들애가 엄청 비뚤게 나가고있었고 나 자신이 또 시골훈장생활에 회의를 가지고있던지라 그 말이 가슴에 깊숙이 새겨졌다. 마침내 나는 시골아이들을 배반하고 천방백계로 “모략”을 꾸몄다. 결국 천신만고끝에 도시로 나오게 되였고 나의 인생궤적은 또 한번 바뀌게 되였다.
    어찌보면 문학은 내게 “출세의 길”을 틔워준 돌파구였다. 몇편 안되는 작품과 학생작문지도에서 받은 영예증서들이 나를 도시학교에 추천했고 담보를 서주었던것이 다. 해볕이 꽃을 키우듯이 문학은 내 인생을 가꾸어주었다. 철저히 버림받고 기시당 하던 천덕꾸러기 농부로부터 연변대학 사범분원(원 연변제1사업학교)의 교단에 서기까지 나를 실질적으로 부상시켜준것이 바로 고마운 문학이다.
    열쇠가 상자를 열듯이 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연다. 문학은 나에게 있어서 자신을 표현하고저 하는 허영이라기보다 이 세상에 살며 느끼고 생각한 나름대로의 기록이요 내 심령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절절한 호소의 메아리였다.
    도시는 나에게 락원이 아니였다. 1987년 나에게 있어서 고난의 한해였다. 세집을 찾아 한달에 세번이나 밀차에 가장집물을 싣고 이사해야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확실히 세집을 맡을 돈이 없어서 안해가 잠시 일을 하던 도문시유치원의 보이라 실에 살림을 차렸다가 가을에 보이라를 운행하게 되자 쫓겨나와 내가 사업하던 시교원연수학교의 강당을 책걸상으로 간막이하고 살기도 했다. 나는 지아비로서 다 커가는 아이들과 안해에게 미안했다. 내 가슴에 엉키고 서린 정한이 어찌 나 혼자의것만 이랴!그래서 사회를 향해 고발하고싶었다.
    불행이 작가를 낳는다던가? 내 불행이 결코 명작을 낳을 불행은 아니였지만 소설을 낳은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내 사정이 하도 절박하고 감수가 절절해서 생활의 진실대로 쓴것이 첫소설 “번지없는 집”이였다. 그렇게 나는 소설창작에 손을 대게 되였다. 나의 서투른 첫소설을 알심들여 편집해주신 리영애, 김창석선생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해야겠다.
    그후 소설이 몇편 잘 나가다가 또 잘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발심 비슷한 심정으로 넓은 마당 쓸기를 작심했다. 평론이면 평론, 동시면 동시, 민담이면 민담 등 닥치는대로 끄적거리다보니 발표량은 늘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의 문학은 길을 외낀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딱 소리나는 작품을 내놓지 못한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새 내 인생의 막바지에 석양이 비꼈다. 이제 내가 할수 있는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매달린것이 아프고 쓰린 내 마음을 곧이곧대로 쏟아내고픈 잡문과 일컬어 자기 성찰의 문학이요 세상과 직접 대화하는 문학이라는 수필이였다. 나는 아기자기한 감정의 여울을 담은 자세로 이 사회를 대하고 미소로써만 인생을 포옹할수 없게 만들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 졸작들을 늘 잘 보아주는 조성희, 리영애와 같은 여러 선생님들에 대해 늘 고마움을 되새기고있다.
    문학을 강렬한 령혼의 사상이라 한다. 누구나 스스로 느끼고 있는만큼의 인생을 살고있다. 하지만 작가가 되려면 지성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용기이다. 자기가 믿고있는 그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으면 아무도 원고지에 무엇을 써내려갈수 없을것이요 더구나 대중을 위해 글을 쓸수 없을것이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가는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것보다 중요하지 않기때문이다. 내가 바로 문인으로서의 용기를 지니고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용기를 가지고 글을 쓰고싶다.
    옛글에 “큰 그릇은 천천히 이루어지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큰 그릇이 되기는 백번도 틀린것같다. 하지만 이 길에 나선만큼 그냥 걸어야 함은 자연적인 리치요 남보다 많이 뒤떨어졌으면 그만큼 땀동이를 흘려야 할줄 안다. 오늘도 나는 황소의 정신으로 내 낡은 문학의 수레를 내 마음의 정상으로 끌어올리려고 허위단심 하고있다.
    문학에서 “가장 큰 황소가 천재들이였다. 지치지 않고 하루에 18시간씩 애쓰는 자들이였다.”고 누가 말했던지… 이 말은 내 고군분투의 길에서 좌우명으로 된다. 나의 문학의 길은 땀으로 짓이겨진 비탈길이다.하지만 나는 분투의 희열로 늙음을 즐긴다. 문학은 영원히 적막한 작업이며 고독한자의 생명촉구가 수요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가장 크고 가장 따사로운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바로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연변문학》이다. 이 늙은소가 끈덕지게 끌고가는 하잘것없는 문학의 수레를 더 높은 언덕에 오를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힘을 실어주는《연변문학》의 편집선생님들에게 다시한번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2006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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