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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프롤로그-5] 데라우치문고와 나의 아버지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
2006년 5월 13일, 우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예술의 전당은 마치 연두빛 치마폭을 몸에 두르고 한가롭게 가로 누워있는 듯했다. 눈부신 5월의 신록이 어느 때보다 싱그럽게 느껴졌던 그 날,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있었다. 당시 예술의 전당에선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테라우치 문고> 유물들을 특별전시하면서 관련 학술세미나가 열리게 돼 있었다. 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김 용배 예술의 전당 사장이 개회사를 마치자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사람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었다. 유청장은 <테라우치 문고> 소장유물 환수는 그동안 성사된 해외유출유물 환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으며 유물환수를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순간 내 가슴 한 켠이 뭉클해져왔다. 유물 환수의 공로자 중 맨 먼저 거론되는 이름.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테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맨 먼저 확인하고 그 유물을 고국으로 되찾아오기까지 6년 여 동안이나 오직 한 마음으로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 이 종영, 그는 바로 돌아가신 내 선친이시다.
아버지께서 처음 <테라우치 문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건 1990년경이었다. 평생 교육공무원으로 일해오신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신 뒤 문중 종친회(고성 이씨)의 일을 맡아보고 계셨다. 자연히 문중관련 기록과 문건들을 정리하시게 됐는데, 우연히 1974년 9월호 <월간서예지>속에서 고려시대 송설체의 대가인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선생의 진적 중 2점이 <테라우치 문고>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조이신 행촌 선생의 글씨는 비명 등을 통해 더러 확인된 경우는 있으나, 진적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2점의 진적이 선조의 행적을 밝히는 데 중요한 문건이 되리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이 사실을 종친회에 알린 뒤, 종친회의 관심과 지원 속에 행촌 선생의 진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직후 일본으로 건너간 <테라우치 문고>의 소장유물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어 애를 태우다가 7개월여 가 지난 뒤에야 겨우 <테라우치 문고> 유물들이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야마구치여자대학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일본 야마구치여자대학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아버지는 <데라우치 문고>와 조우하게 되었고, 그 만남은 이후 아버지의 후반 생애를 관통하는 전환점이 됐다.
원래 목적은 <테라우치 문고> 유물속에 행촌 이암선생의 진적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선조의 유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자와 시문(詩文)의 대가, 임진·병자 양란의 명장, 충신들의 육필시고가 수백 점이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문화재강탈이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했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드러난 실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 날 아버지가 받은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그 억울하게 포로된 우리 유물을 어두운 이국의 창고 속에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그리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인 국사편찬위원장 박 영석 위원장에게 알렸다. 깜짝 놀란 박위원장이 일본으로 달려갔다. 빛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어두운 창고 한 켠에서 백년 가까운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좀이 먹어들어간 흔적이 역력한 유물을 본 박 위원장은 ‘포로로 잡혀온 것도 억울한테 암까지 걸려 죽어가고 있다‘며 통탄해마지 않았다.
이후 박 위원장과 아버지는 이 유물 환수에 뜻을 같이 하고 국회 한일친선협회와 의원연맹 등을 통해 공식적인 반환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과거에 약탈해 간 문화재를 본국에 반환한 예는 거의 없다. 때문에 반환작업은 처음부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야마구치대학과 기증자인 테라우치가(家)를 설득하는 게 급선무였다. 한 두점이 아니라 천 점이 넘는 막대한 수량의 역사적, 문헌적 고증가치가 뛰어난 유물을 쉽게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 즈음 결정적인 협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경남대학교였다. 당시 경남대학교는 개교 50주년(1996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의 환수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재규 총장을 비롯해 학교 관계자들이 해외로 그 대상유물을 물색하러 다니던 중, <테라우치 문고>에 대해 듣고 민간교류차원에서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마침 경남대학교는 우리나라와 최단 거리에 위치한 야마구치대학과 학술교류를 추진하고 있던 중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경남대학교가 전면에 나서서 야마구치대학 측과 반환교섭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는 조건없는 기증의사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1995년 11월 11일 기증각서 조인식을 하기로 했다. 몇 년간 노심초사하며 매진해온 환수작업이 거의 성공했다 싶었는데 급기야 염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유물환수단은 조인식을 하러 떠나면서 이 사실을 각 언론사에 알렸다. 사실 그동안 해외 유출 문화재가 공공기관끼리의 정식 기증절차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온 예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런 탓에 각 언론사에서 앞 다투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는데 논조가 대부분 ‘총독 테라우치가 강탈한 약탈문화재 반환’이라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에서는 이 점을 가장 염려했었다. 그들이 선의로 그 유물을 내어준다 해도 그것이 한국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가를 그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여지없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본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가 대경실색을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직후 양측에서는 ‘유물을 못 주겠다.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내용을 통고해왔다.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환수단은 포기하지 않고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를 상대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행히 ‘당일 오후 5시까지 ’강탈‘이 아닌 ’수집‘으로 바꾼 정정기사를 내 주면 협상에 응할 수 있다고 양보해왔다. 이후 환수단 측에서는 전화통을 붙잡고 주요언론사와 피말리는 입씨름을 했고, 그 결과로 한 신문사가 ‘경남대학교 총장의 말에 의하면 테라우치 총독이 수집, 일부 사가지고 갔던 유물’이라는 정정 기사를 짤막하게 써주었다. 환수단은 그 지면을 크게 확대해 야마구치대학과 일본 언론사에 보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그렇게 극적인 기부증서 조인서약을 이루어냈고 마침내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1월 24일, 기증각서에 의거한 97종 134점이 경남대학교 인수인단의 손에 의해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나의 선친께서는 70세 되던 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즈음에, 당신 생애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여쭤 보았다. 그러자 선친은 서슴없이 <테라우치 문고> 유물반환에 기여한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선친이 <테라우치 문고> 속에서 선조 이암선생의 유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자와 시문(詩文)의 대가, 임진·병자 양란의 명장, 충신들의 육필시고가 잔뜩 소장되어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오셨을 때 좋아하시던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찍어온 사진들을 방바닥에 잔뜩 늘어놓고 밤새도록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껄껄 웃으시면서 기쁨에 겨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지금도 순수한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위하여 헌신했던 이름없는 한 민간인의 눈물어린 집념과 수고를 기억한다.
나는 이렇게 뜻 깊은 생애를 살다 가신 선친이 무척 자랑스럽다.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사심도 없이 당신 앞에 주어진 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마치 적진 탈환을 위해 산화한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탑처럼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 조용히 외롭게 서 계신 것이다. 그러나 자식 된 내 마음속에는, 그 분이 걸어가신 길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어떤 위인이 걸어갔던 흔적보다도 더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그래서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내가 18년이 넘도록 아무 대가 없이 오직 민족사랑으로 연변과기대 사역을 위해 쫓아다니고, 또한 평양 과기대 건립을 위해 의로운 동역자를 찾고자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니는 동안에, 더러는 지치고 또한 남이 몰라준다 싶어 섭섭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이 외롭거나 슬프지 않은 것은, 나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 마침내 귀중한 내 민족의 유물을 되찾아 오신 아버지의 덕행과 겸손이 나에게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도 이제 환갑에 이르렀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 나는 조국과 민족의 역사앞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연변과기대를 통해서 중국 조선족사회의 고난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애환 속에 묻혀 있는 「독립의지와 개척정신의 문고」라도 찾아 나설 것인가?
아니면 평양과기대를 통해서 그 땅 속 깊이 붉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피와 눈물의 「혈류대하문고」라도 찾아 나설 것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지금 떠나고 있는가? 5월의 푸른 숲으로 난 길은 정녕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가? (2008.11월 수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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