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문학> 편집자의 말: <리덕수의 고향사랑>은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이 써낸 실화문학작품이다. 작품은 진실하면서도 생동한 필치로 리덕수동지가 연변에서 사업, 생활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남긴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리덕수동지가 고향에 쏟은 절절한 정감에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게 된다. 이번 호부터 본지는 이 작품의 부분적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아름찬 중임 앞에서
1983년 11월 11일,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에서는 성당위로부터 주당위 상무위원 전원과 전인영(田仁永), 조룡호 등 일부 로간부들이 함께 성에 와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화통지를 받았다. 그중에는 주당위 상무위원도, 로간부도 아닌 룡정현당위 서기 리덕수도 들어있었다.
그 날 리덕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부터 의란향의 어느 마을 소형저수지건설현장에서 향촌간부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한테 기층에 내려와 로동에 참가하는 것은 이미 습관으로 굳어져있었다 그 때까지 리덕수는 그 날 주에서 진종일 현에 전화를 걸어 그를 찾았고 또 현에서도 빈번히 사처에 전화를 걸어 그를 찾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때는 현당위 서기, 현장이 어디로 가나 지금처럼 항상 비서가 따라 다니지 않았고 어느 향진, 어느 마을, 어느 농호에 가려 하든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물론 그 때는 그 후에 나온 휴대폰과 같은 기타 이동통신수단 같은 건 구경할 수도 없었다. 그 날 현에서는 해질 무렵에야 겨우 그들의 현당위 서기가 의란향에서 사원들과 함께 저수지건설로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전화를 통해 리덕수를 찾아낸 현에서는 그더러 반드시 그 날 저녁에 렬차편으로 성에 올라가 긴급회의에 참가하라는 주의 긴급통지를 전달하였다. 저녁에 장춘으로 들어가는 렬차편이 한번 밖에 없었으므로 그 때 출발하여 연길역에 가서 기차에 오르자면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리덕수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 옷도 갈아 입지 못한 채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 짚차에 올랐다. 짚차는 조양천역 쪽으로 질주했다.
조양천역은 연변 경내에서의 중요한 렬차환승역이다. 장춘발 도문행렬차와 도문발 장춘행렬차에 탑승한 려객들은 조양천을 경유하면서 차를 갈아타야 룡정이나 화룡 쪽으로 갈 수 있었으므로 정차시간이 그만큼 비교적 긴 편이였다. 그리고 조양천은 또 연길에서 장춘 쪽으로 떠난 렬차가 정차하게 되는 첫번째 역이였다. 리덕수를 태운 짚차가 직접 조양천으로 달려 갔기에 도문발 장춘행렬차에 아슬아슬하게 오를 수 있었다.
그 때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金东基)는 리덕수가 이미 조양천에서 렬차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차안을 누비며 리덕수를 찾았다.
리덕수는 그 때에야 비로소 김동기한테서 주당위 상무위원 전원이 모두 장춘으로 회의에 참석하러 떠났고 조룡호, 전인영 두분의 로동지도 함께 간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리덕수는 김동기한테 이렇게 물었다.
”비서장동무, 그럼 우린 장춘에 가서 무슨 회의에 참가하게 되는 겁니까? 저는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이렇게 차에 올랐습니다.”
“덕수동무, 솔직히 말해서 그건 저도 모릅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김동기의 말에 리덕수는 또 이렇게 물었다.
“그럼 조(남기)서기는?”
김동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서기는 요즘 줄곧 장춘에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아무런 정황도 듣지 못했습니다.”
리덕수한테는 궁금해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럼 최림 주장은?”
“최림 주장도 지금 장춘에 계십니다. 차에 앉은 주당위 지도부의 그 누구도 이번에 장춘에 가서 무슨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미안하게도 저는 지금 동무한테 이것 밖에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김동기의 대답이였다.
이들은 11월 11일 저녁에 차에 올라 그 이튿날 아침, 즉 11월 12일 아침에 장춘에 도착했다. 성당위 곁에 위치한 1호 초대소에 가서 등록하니 관련 책임자는 하루밤 기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터니 모두 하루 푹 쉬라는 성 지도일군의 분부를 전하면서 정식 회의는 래일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때 리덕수의 자택은 그냥 장춘 남호 부근에 위치한 성직속기관 간부주택구역에 있었다. 리덕수는 일단 집에 가서 하루저녁을 보내고 그 이튿날, 다시 말하면 13일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서들러 1호 초대소로 찾아갔다.
리덕수가 당도하고 보니 주의 지도자들은 벌써 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리덕수는 조용히 뒤켠 줄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 때 조남기가 들어섰다. 조남기는 여러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중에 뒤에 앉아 있는 리덕수와 악수를 하면서 느닷없이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덕수동무, 잠간 나와 함께 밖에 나가 산책이나 좀 할가?”
리덕수는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그러는지 몰라 그저 조남기를 따라 회의실을 나와 초대소 정원으로 들어갔다. 1호 초대소 정원은 경치가 참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아 절기가 이미 립동을 바랬는데도 정원에는 의연히 푸른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공기는 한결 청신했다. 정원에는 오불꼬불 산책길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고 정원은 유난히 고느적하였다. 그야말로 우아하면서도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조남기는 리덕수와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수동무, 동무는 성에서 오늘 동무들을 여기다 불러놓고 무슨 회의를 하는지 알고 있소?”
“조서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김동기 비서장한테 물어보았더니 그 분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리덕수의 말에 조남기는 또 이렇게 물었다.
“혹 최림동지는 동무한테 무슨 얘기를 하지 않던가?”
“아무 얘기도 없었습니다. 저는 여직 최림 주장을 만나 뵙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조남기는 빙긋 웃었다.
“그럼 동무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만. 오늘 주당위 상무위원 전원은 강효초동지로부터 중요한 결정을 전달받게 되오.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의 지도부에 곧 중대한 조절이 있게 되오.”
조남기는 성당위 부서기이므로 연변에서 지도자 직무를 겸임하지 않고 성에 올라와 성당위 부서기, 성군구 정치위원을 담임하게 될 거 라는 말을 리덕수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리덕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조서기, 그럼 조서기는 이제 정말 떠나게 되는 겁니까?”
“그렇소. 나는 이젠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를 더는 맡지 않게 되오.”
조남기의 이 말을 듣고 나서 리덕수는 가슴이 텅 비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허전하여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미처 뒤말을 잇지 못했다.
조남기는 리덕수를 한참 그윽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만 떠나는 게 아니라 최림동지도 함께 떠나게 되오.”
최림 주장도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가? 이건 리덕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사변동이였다.
“뭐라구요? 최주장도 전근하여 가신다구요?”
“그렇소. 최림동지도 성으로 돌아 오게 되오.”
“그럼 최주장이 성에 돌아와 무슨 직무를 맡게 됩니까?”
“최림동지는 성에 돌아와 성정부 고문직을 맡게 될거요.”
이 모든 것은 리덕수에게 있어서 천만뜻밖의 일이였다. 일반적으로 주당위 서기가 연변을 떠나게 되면 의례 주장이 주당위 서기 직위를 인계받아 주당위 서기를 맡게 되고 나중에 다시 신임 주장을 선출하게 된다. 그런데 이젠 최림 주장도 조남기동와 함께 연변을 떠난다고 하니 리덕수로서는 모든 게 예상 밖의 변화였다.
이 때 조남기가 갑자기 다시금 리덕수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덕수동무, 성당위에서는 이미 결정했소.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와 주장을 동무 한 사람이 맡게 되였소!”
이 말에 리덕수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멍해지고 어리벙벙해졌다.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배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이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1임 서기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걸출한 무산계급혁명전사인 주덕해동지였다. 주덕해동지는 1929년에 혁명에 참가하여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연안 출신의 로간부였다. 1936년, 그는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모쓰크바 동방대학에 가서 류학하고 귀국한 후 여러가지 중요한 직무를 력임해왔다. 1949년 3월, 주덕해동지는 당중앙의 지시에 좇아 할빈시민족사무처, 민주일보사, 민족가문단, 민족간부학교 등 단위의 전체 인원을 거느리고 중국조선족의 최대 집거지인 연변에 와서 연변의 전반 상부구조 조직건설에 착수하였다. 신중국이 창건되여서부터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주덕해동지는 줄곧 연변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사업을 줄기차게 이끌어나갔다. 전쟁년대에 주덕해동지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피어린 투쟁에 나서서 신중국의 창건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주은래 총리 등 중앙의 주요 지도자들은 주덕해동지한테 모두 매우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만큼 주덕해는 중국조선족 간부와 군중들 속에서 그 누구도 비길 수 없는 숭고한 위망을 누리고 있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2임 서기는 길림성의 당과 정부, 군부대 내에서 높은 성망을 갖고 있는 있는 조남기동지였다. 조남기동지의 혁명생애는 전기적인 색채가 다분했다. 물론 항미원조 때 조선전장에서 겪은 경력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조남기동지는 줄곧 군부대에서 사업했다.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여러 민족 인민들의 기대 대로 연변에 돌아와 연변의 전반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 조남기는 여러 민족 간부와 군중들의 광범위한 옹호와 애대를 받았다. 조남기는 과감하면서도 실사구시적으로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아나가 ‘문화대혁명’ 이후 연변의 각항 사업을 신속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
요컨대 신중국이 창건된 이래 연변의 주당위 서기 두분은 선후하여 모두 당내에서 덕망이 높은 고위급 지도간부들이 맡아왔다. 그런데 지금 성당위에서는 갑자기 나젊은 리덕수더러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으라고 한다니 리덕수한테는 아름찬 중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직무를, 그것도 이렇게 무거운 두가지 중책을 한 사람의 어깨에 떠메운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사전에 정말 아무런 심리적 준비도 가지지 못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더구나 그가 룡정현 당위 서기로 부임된지 8개월 밖에 안되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리덕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 조남기한테 또 물었다.
“조서기, 이게 다 정말입니까?”
조남기는 피끗 리덕수를 쳐다 볼 뿐 그의 이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묻고 보니 리덕수 스스로 이 물음이 조금은 우스워났다 그는 조금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조서기, 저는 그저 성당위의 이 결정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너무나 뜻밖이라서 … ”
조남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덕수동무, 동무의 임용에 관한 결정은 이번에 북경에서 회의할 때 성의 주요 지도자들이 진지한 연구 끝에 내린 것이오. 동무에 대한 배치를 토론할 때 중앙 조직부 동지들도 자리를 같이 하였소. 성당위의 이 결정은 매우 신중하게 내렸소.”
리덕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조서기, 이 일은 확실히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룡정현에 와서 현당위 서기로 일한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고 시간이 너무 짧은데 이렇게 빨리 주에 올라 간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제 오라지 않아 회의가 곧 시작될 것 같아 리덕수는 조남기와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현에서 몇해 더 일하면서 보다 많은 실제적인 경험을 쌓고 싶다는 속심을 터놓았다.
조남기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젠 그런 말을 더 하지 마오. 우린 북경에서 연구하고 돌아와 또 정식으로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였소. 보다싶이 성당위에서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내린 결정이란 말이요!”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리덕수는 진심으로 한번 더 청들었다.
“조서기, 만약 정 어쩔수 없다면 주당위 서기와 주장 이 두 가지 직무 가운데서 제가 주장을 맡고 다른 분이 서기를 맡으면 안되겠습니까?”
이 청에 조남기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동무가 주당위 서기를 맡는 것은 이미 다 결정된 사안이요. 주장은 당분간 적임자가 없기에 동무가 먼저 같이 맡아서 하다가 앞으로 주장 적임자가 생기면 그 때 가서 다시 보기로 하기오. 난 동무가 잘 해내리라고 믿소. 그리고 성당위에서도 동무를 전폭적으로 밀어줄 거요.”
시간이 없었다. 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리덕수는 착잡한 심정으로 회의장에 돌아왔다. 조남기는 회의장 문밖에서 성당위 기타 지도자들이 회의장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리덕수가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최림 주장이 이미 와있었다. 그는 최림 주장한테로 다가가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또 아무거나 얘기하는 자리가 아닌 만큼 다른 말은 더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성당위 지도자들이 다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성당위 제1서기 강효초가 친히 회의를 사회했다.
“오늘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상무위원들과 주의 로동지들을 다 여기에 오시게 하여 회의를 하게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성당위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 지도부에 대해 중대한 조절을 하기로 한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조남기동지가 성당위에 올라와 사업하게 된 실제상황에 따라 성당위에서는 신중한 연구를 거쳐 조남기동지가 주당위 서기를 더는 겸임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심양군구에서는 또 조남기동지를 성군구 정치위원을 맡도록 따로 배치하였습니다. 한편 사업의 수요에 따라 최림동지도 연변에서 주장직무를 맡지 않고 성에 올라와 성정부 고문을 맡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당위에서는 리덕수동지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강효초는 중요한 결정을 전달하고 조남기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남기동지, 할 얘기가 없습니까?”
이 물음에 조남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연변의 로동지들의 얘기를 좀 들어보는 게 어떨가요?”
전인영이 발언을 하겠다고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전인영의 발언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했다.
“저는 성당위의 결정을 완전히 찬동하며 견결히 옹호합니다. 덕수동지는 능력이 있고 인품이 훌륭한 데다 매우 젊은 간부입니다. 덕수동지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도록 한 성당위의 결정은 정확하고도 원견성이 있습니다!”
전인영은 뒤이어 몇마디 더 했다. 그 주요한 의미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덕수동지는 룡정현에서 현당위 서기를 맡게 된 이 기간에 단련을 거쳐 좋은 경험을 쌓게 되였다. 룡정현의 사업성과는 누구나 다 주지하는 사실이다. 덕수동지가 새로운 직무를 맡은 이후에도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더욱 큰 성과를 이뤄내리라고 믿는다.
전인영의 말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태도가 분명하고 적극적이였고 성근하였으며 리덕수한테 지극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리덕수는 마음속으로부터 큰 감동과 힘을 받게 되였다.
뒤이어 조룡호도 발언했다. 오랜 상급이자 년장자인 조룡호의 발언에는 나젊은 간부를 아끼고 깊이 사랑하는 정감이 물씬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리덕수의 가슴을 뜨겁게 덥혀주었다.
기실 이 두분의 발언은 모든 사람들 맘속의 말을 대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도 매우 간결했으나 다들 성당위의 결정을 견결히 옹호한다는 뜻은 하나같이 분명했다. 모두의 말이 크게 길지는 않더라도 리덕수는 그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신임, 더구나 그들의 따뜻하고 간절한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맨 마지막에 강효초는 리덕수한테 발언기회를 넘겼다.
리덕수는 말문을 떼자마자 조금도 숨김없이 속심말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성당위의 이 결정에 대해 저는 정말 아무런 사상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의 머리 속은 텅 비여있습니다.”
소박하고 정직하며 벼슬티를 낼 줄 모르는 분이 바로 우리가 익숙한 리덕수였다.
회의장에 앉아 있던 적잖은 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 지도일군들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자연히 회의장의 분위기는 한결 홀가분해졌다.
리덕수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정서를 안정시킨 다음 사색을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당위에서 이처럼 무거운 두 개의 큰 짐을 그것도 한꺼번에 저 한사람의 어깨 우에 짊어지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저의 능력과 경륜으로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이란 이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기가 정말 벅찹니다. 하지만 저는 당의 양성을 받고 자라난 소수민족간부인 만큼 성당위에서 이미 정식으로 내린 결정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자리에서 저의 태도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앞으로 성당위의 정확한 지도 하에서,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오랜 지도자동지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서 저는 동지들과 일심단결하여 모든 력량을 하나로 묶어 확고한 신심과 결심을 갖고 기어코 연변의 사업을 잘 해나갈 것이며 연변의 일을 잘 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조남기는 리덕수한테 자기는 잠시 연변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리덕수더러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주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주관하되 룡정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리덕수는 조남기한테 이렇게 말했다.
“조서기, 조서기는 저의 오랜 서기이고 오랜 지도자인데 조서기가 친히 한번 돌아와 들여다보아야지 안 그러면 저로서는 정말 두서를 잡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리고 조서기가 돌아오셔서 여러 사람들한테 한말씀 하시는 게 우리 주나 저한테 사업을 인수인계하는 절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조남기는 빙긋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오. 얼마간 지나서 성당위 지도자들과 주직부 부장이 내려가게 되오. 그 때 정식으로 대회를 열고 성당위의 결정을 선포할 것이오. 오늘은 이미 회의를 했고 주의 주요 지도자들도 다 알게 되였으므로 동무는 돌아가서 직접 대담하게 사업을 틀어쥐어야겠소.”
회의가 끝나자 모두들 건너와 리덕수와 악수를 나누면서 축하해주었다. 사전에 그 누구도 성당위의 이런 결정을 예상치 못했지만 일단 결정이 선포되자 리덕수에 대한 그들의 축하는 모두 내심에서 우러 나오는 기대였다. 그들은 리덕수란 이 사람을 알고 있었거니와 리덕수의 덕목도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리덕수의 부인 박춘자가 다가와 정겹게 맞아주었다. 박춘자는 물론 이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젼혀 모르고 있었다. 박춘자는 선량하고 소박한 전형적인 조선족녀성이였다. 1978년에 리덕수를 따라 장춘에 전근되여온 후 줄곧 성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박춘자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박동무, 우린 아무래도 또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소!”
박춘자는 깜작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또 이사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 아무래도 오래동안 연변에 남아서 사업해야 할 것 같소. 아마 성으로는 다시 돌아올 것 같지 못하오.”
이 말을 듣고 박춘자는 의아쩍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미 연변에서 사업하고 있기에 난 당신이 성으로 돌아 오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이사란 말씀인가요? 애초에 당신은 룡정에서 사업하고 난 계속 장춘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것도 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였어요? 두 아이가 지금 모두 장춘에서 학교를 다니고 걔들이 갓 전학해 와서 이제 금방 이곳 환경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또다시 왔다갔다한다면 …”
안해의 말에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한테 다 털어놓고 말을 해야 하겠소. 내 일자리가 또 변동되였단 말이요!”
그래도 박춘자는 그저 리덕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변동은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 례사롭고 잦은 일이였다. 리덕수는 더 이상 빙빙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 성당위의 결정을 박춘자한테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박춘자는 대뜸 남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당연히 다시 연변으로 이사를 가야지요.”
1983년 11월 14일 아침, 리덕수네 일행은 연변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리덕수는 렬차에서 잠을 자려고 여러번 잠을 청했지만 단 1분 동안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겠는가. 그저께 저녁에 이 렬차를 타고 들어올 때만 해도 그는 현당위 서기였는데 이틀이 지난 오늘 다시 이 렬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이미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았으니 말이다. 절주 있게 달리는 렬차의 가벼운 률동과 흔들림 속에서 리덕수는 자신의 감정을 가눌 수 없어 성장해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게 되였다. 그는 장백산 아래 한 두메산골에서 태여나 더없이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성장하였다.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게 되였다. 소학교에서부터 중학교, 중학교에서부터 대학교, 대학교에서부터 사업일터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일편단심 그의 성장에 로심초사해온 수많은 선생님들, 그와 함께 어려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고동락하였던 현과 향촌의 수많은 기층간부들, 그리고 성과 주의 지도자들과 그와 함께 일했던 수많은 동료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인생의 려정에서 그한테 도움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한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자신의 진정 어린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더라도 리덕수의 머리는 매우 명석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지금껏 온갖 심혈을 쏟아 그를 키워준 당조직과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이 위대한 시대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의 운명은 바로 이 시대와 하나로 끈끈히 이어져있었다. 시대의 발걸음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성장해오면서 오늘 이 시대에서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게 되였다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였다.
렬차가 돈화역에 들어서자 온밤을 지새우며 한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면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이 말짱하게 맑아졌다. 돈화는 연변땅을 밟게 되는 첫번째 현이였다. 그 때는 돈화현을 돈화시로 고치기 전이였다. 돈화현은 1985년에 돈화시로 고치게 되였다.
돈화역 플래트홈 불빛은 어둑시그레하였다. 그래도 리덕수는 마음을 걷잡기 어려워 차창가로 다가섰다. 캄캄한 밤의 장막이 내리드리운 어스름한 플래트홈에는 차에 오르내리는 손님이 두서넛 밖에 눈에 띄지 않아 똑 마치 옛날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리덕수의 가슴속에서는 이름할 수 없는 일종의 충동, 일종의 갈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냉큼 새로운 사업에 뛰여들고 싶었다.
날이 훤히 밝아오면서 렬차는 서서히 연길역에 들어섰다.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이면서 전 주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생활의 중심지였다. 또한 연길은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풍토와 인정, 그리고 민족문화를 가장 집중적으로 펼쳐보이는 고장이였다. 그만큼 리덕수는 연길이란 이 변경도시에 대해 남다른 특수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1962년 가을 연변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리덕수는 연길이라는 이 도시와 도무지 떼여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 도시를 반기였고 이 도시를 사랑했다. 이 도시에는 그의 여러 민족 동포들과 여러 민족 부모, 형제자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그에게 있어서 뿌리와도 같은 존재였다.
연길에 돌아온 이튿날, 즉 1983년 11월 15일, 그 날 따라 눈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그 날 리덕수는 진종일 바쁘게 보내다가 저녁이 다되어서 주당위 상무위원 장덕강(张德江)과 함께 리정문(李政文)의 집으로 찾아갔다. 리정문에 대한 성당위의 임명결정을 알리려는 길이였다. 그 당시 리정문은 연변대학 당위 선전부장이였다. 리덕수와 장덕강 그리고 리정문은 모두 연변대학 졸업생이였는데 그들은 모두 학생당원이면서 또 학생회 간부들이였다. 30년이 지난 후 리정문이 그 때의 감회를 회고한 말이다.
“그 날 저녁은 저의 일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한때였습니다. 집이 너무 추워서 아예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책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노크소리가 들리기에 내려가 문을 열었더니 리덕수와 장덕강이 서있었습니다. 리덕수는 성당위에서 저를 주당위에 전근시켜 주당위 상무위원 겸 비서장을 맡도록 한 성당위의 결정을 전달하였습니다.”
리덕수의 말을 듣고 성당위의 이와 같은 결정을 알게 된 리정문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정문을 바라보는 리덕수의 표정은 근엄했다.
“정문동무, 지금 우리 주의 수많은 사업이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그러므로 동무는 하루도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 연변대학 쪽 사업을 인계하고 빨리 주당위에 건너와 사업해야겠소.”
리정문은 지체할세라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연변대학당위 서기 리희일의 집무실로 찾아 갔다. 뜻밖에도 주당위 조직부 부장 조봉명이 벌써 그보다 한발 앞서 와있었다. 주당위 상무위원인 조봉명은 주당위를 대표하여 리정문을 맞아가려고 찾아온 것이였다.
나중에 리정문은 리덕수와 그 당시 주당위 제2책임자였던 장홍규(张洪奎) 서기를 찾아가 주동적으로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저한테 오랜 본업을 맡겨줄 수 없겠습니까? 아무래도 주당위 선전부장을 맡는 게 저의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김동기동지는 주당위의 오랜 비서장이고 경험이 풍부하므로 그가 비서장을 맡는게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곁에서 리정문을 일별하면서 리덕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사업에서 사심이라곤 꼬물도 없는 데다 사상각오가 매우 높은 선전지도사업의 적임자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정문동무, 동무의 소원이 이러하다면 제가 성당위에 보고해 보겠습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위의 회시가 곧바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리정문은 주당위 선전부장을, 김동기는 주당위 비서장을 맡게 되였다.
이리하여 한지도부에서 6년 동안 함께 일했던 리정문은 30년이 지난 후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리덕수를 이렇게 평가했다.
“리덕수는 큰 국면을 관리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갖춘 수준 높은 지도간부였습니다. 그 당시 주당위 새 지도부가 갓 출범했을 때 지도부 내부에는 새로 발탁된 젊은 간부도 있고 류임한 로간부들도 더러 있었는데 리덕수는 재빨리 여러 사람들을 하나같이 단합해놓았습니다. 리덕수는 지도부 성원들을 튼튼히 묶어세우고 정치적 분위기와 인심을 잘 조화시키면서 각자 나름 대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리행하도록 공간을 내주었기에 누구나 다 사업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습니다. 리덕수의 지도사상은 매우 명확했습니다. 그한테는 오로지 전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 빨리 유족하게 살수 있게 하자는 일념 뿐이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시종일관 이 주제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1983년 11월 28일, 리덕수가 연변에 돌아와 정식으로 사업을 주관하기 시작해서 반달이 지났을 즈음 성당위 부서기 겸 조직부장 왕선진(王先进)과 성당위의 기타 지도자 몇분이 조남기동지와 함께 연변으로 내려왔다. 간부대회를 열고 성당위의 결정을 선포해야 하므로 이번에 성당위에서는 지도자 여러분이 함께 연변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 이튿날인 1983년 11월 29일,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주직속기관간부대회를 소집하였다. 간부대회를 소집하기에 앞서 주당위 상무위원회는 먼저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그 회의에서 리덕수를 연변주위 서기, 주장으로 임명할 떼 관한 성당위의 결정을 선고하였다. 상무위원회 확대회의가 결속되자 회의 참석자들은 뒤이어 직접 로동자문화궁에서 열리는 주직속기관간부대회장으로 들어갔다.
대회의 시작을 선포하자 성당위 부서기 겸 조직부장인 왕선진이 성당위를 대표하여 정식으로 리덕수 등 주당위 새 지도부 성원들에 대한 임명결정을 선포했다.
성당위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지도부를 아래와 같이 조절하고 배치하기로 결정한다.
주당위 서기에 리덕수(주장 겸임), 장홍규
부서기에 장진발, 김성화
상무위원에 마서정, 조봉명, 김동기, 정세창, 장덕강, 리정문
왕선진이 성당위의 결정을 선포한 다음 리덕수의 연설이 있었다. 리덕수는 지금도 그 때의 연설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다섯 가지에 의지하려 한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강조했다. 첫째, 전임 서기 조남기동지가 다져놓은 훌륭한 토대에 의지하려 한다. 둘째, 로동지들의 지지와 방조에 의지하려 한다. 셋째,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는 사상로선에 의지하려 한다. 넷째, 당중앙 제11기 제 3차 전원회의 이래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로선에 의지하려 한다. 다섯째,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의 단합과 협력에 의지하려 한다. 이 몇가지 “의지하려 한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연변의 각항 사업을 전면적으로 추진해 나가 성당위 지도부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고향 여러 민족 인민들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사업하겠다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으며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으면서 한편으로는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는 사업을 계속 깊이있게 추진하고 개혁개방을 줄기차게 이끌고 나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고부동하게 경제사업을 중심으로 틀어쥐고 경제사업을 착실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막중한 짐을 어깨에 떠메게 되였다. 시시각각 두개 측면의 사업을 단단히 틀어쥐고 개혁개방으로 전반 국면을 총괄함으로써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미래를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과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따라 리덕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칠 새 없었는가 하면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산적해있었다. 밤과 낮이 따로 없는가 하면 일요일이나 명절, 휴일도 례외일 수 없었다. 연길시나 다른 현, 시를 막론하고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는데 리덕수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찾아온 사람들을 접대하면서 그들의 하소연을 참을성 있게 듣고 성근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이럴듯 힘겨운 나날에 리덕수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이 드바삐 내면서도 시종 매우 명석한 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이런저런 오유가 많고 많았다 하더라도 만약 또다시 그릇된 방법으로 이런 오유들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설상가상의 후과를 빚을 수 있다. 아무리 실타래가 천만갈래 뒤엉켰다 하더라도 꼭 실사구시 사업태도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리덕수는 이 원칙을 드팀없이 지켜나갔다.
10년에 걸친 대동란은 연변의 변강 안정과 민족단결의 량호한 사회적 토대를 형편없이 파괴해놓았다. 이런 토대는 일조일석에 다시 복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초적인 사업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했다. 이러한 정황은 주당위 지도부 앞에 반드시 고도의 정책수준과 강력한 정책집행능력 그리고 강력한 국면통제능력을 갖춰야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거니와 어느 쪽에도 기울지 말고 실사구시적으로 간부와 군중들의 사상사업을 잘 하여야만 연변의 정치적 국면과 제반 국면의 안정을 확보하고 여러 민족 인민들 사이의 단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연변의 민족구성특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문제를 관찰하고 문제를 분석하며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 최종 지향점은 항상 변강의 안정과 조화롭고 화목한 민족관계를 구축하는 큰 목표에 두고 있었다. 그는 연변의 조화로운 민족관계는 우량한 력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비록 ’문화대혁명’의 엄중한 파괴로 말미암아 큰 역경을 겪었지만 력사라는 이 대하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것은 한낱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리덕수는 늘 간부와 대중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는 자기의 눈동자를 아끼듯이 연변의 민족단결을 아껴야 합니다. 민족단결에 불리한 말은 견결히 외우지 말아야 하며 민족단결에 불리한 일에는 견결히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리덕수는 또 한족간부와 조선족간부의 사용문제에도 각별히 중시를 돌렸다. 그는 연변의 실제로부터 공정하고 합리하게 여러 민족 간부들을 잘 등용하고 배비하였다.
그 당시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조직부장이였던 조봉명은 이렇게 그 때의 정황을 회억했다. 리덕수는 간부등용에서 조선족간부를 중시하면서 한족간부와 기타 소수민족간부에 대해서도 각별한 중시를 돌렸다. 비금성(费金成)은 원래 주당위 통전부 부부장이였는데 당시 부장은 김성우(金圣友)였다. 비금성은 통전부에서 사업한지 퍼그나 오랜 로부부장이였다. 김성우는 ’문화대혁명’ 이전의 공청단 주위 서기였고 비금성은 부서기였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족간부인 비금성이 승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리덕수는 주당위 기타 지도자들과 토의하고 비금성을 계속 주당위 통전부 부부장을 맡게 하면서도 정현급 대우를 주기로 결정했다. 이것도 그 당시로 말하면 파격적이였고 매우 조련찮은 결정이였다.
조봉명은 이렇게 말했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여러 민족 간부들의 배비와 등용에서 또 하나의 대담한 돌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당시 연길시, 룡정시, 화룡시와 도문시의 당위와 정부 측 ‘제1책임자’는 모두 조선족간부였다. 이런 상황은 이 몇개 현, 시 한족간부의 등용과 급별대우에 련관될 뿐더러 그보다도 이 몇개 현, 시 한족간부와 기타 소수민족간부들의 적극성을 움직이는 문제와도 직결되여있었다. 리덕수는 조사연구를 거쳐 이 몇개 현, 시 한족 부서기를 정현급으로 조절하고 서렬상 서기의 뒤, 현장, 시장의 앞에 배치하도록 할 데 관한 그림을 구상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맨처음으로 주당위 상무위원회 석상에서 이 제안을 내놓았다. 대담한 발기였고 연변 력사에서 종래로 없었던 대담한 혁신이라 할 수 있었다. 리덕수가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적으로 대담하게 내린 조절결책은 성당위 조직부와 성당위 지도부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 지금까지도 상기 현, 시의 지도부는 여전히 이런 구도로 이뤄지고 있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여러 민족 간부들을 합리하게 배치하고 사용하는 정확한 간부로선이면서 연변의 실제에도 부합되였다.
조봉명은 이렇게 말했다.
“리덕수 자신이 바로 민족단결모범이였기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라는 중임을 능란하게 맡아나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연변이라는 이 소수민족지역에서 태여나고 성장하면서 민족단결의 의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소수민족지역에서 사업하는 과정에 대담하게 개척하고 혁신하여 풍부한 민족사업경험을 쌓게 되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우리 나라와 같은 다민족국가의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기에 퍼그나 리상적인 적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연변사업을 주관하는 시기에 시종일관 민족단결을 자치주의 생명선으로 중시하면서 크고작은 많은 회의에서 늘 이렇게 강조했다.
“민족단결이 없으면 연변의 안정이 있을 수 없으며 연변의 안정이 없으면 경제발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민족단결이 없으면 모든 게 없게 됩니다.”
리덕수가 평상시에 늘 “쌍방이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는 것, 즉 조선족은 한족을 떨어질 수 없고 한족도 조선족을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을 가는 곳마다에서 되풀이하군 하였다.
리덕수는 단합할 수 있는 모든 력량을 다 단합하고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적극적인 요소들을 다 움직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신심 가득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그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게 되면서 내디디는 관건적 첫걸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 시기에 리덕수는 침식을 잊어가면서 보냈고 끊임없이 사색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발생했던 일들을 지나치게 추궁하게 되면 필연코 새로운 분쟁이 벌어져 안정단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혼란한 국면을 참답게 바로잡지 않거나 사람들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지 않으면 광범위한 간부와 대중들 마음속의 상처를 씻어버릴 수 없는 만큼 여러 민족 인민들의 적극성을 진정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새로운 장애에 부딪칠 수 있었다. 리덕수가 회의와 같은 공식적인 석상이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처리할 때 갈등을 큰 틀에서 보아야지 너무 세부적인 것을 파고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흔들림없이 지켜왔다. 한편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고 지나간 일들을 총화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을 다같이 단합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수요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지도사상이 있었기에 구체적인 문제들을 처리할 때 큰 편차가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길림성당위 제1서기였던 강효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새 지도부의 사업을 충분히 긍정하면서 더욱 단합하여 연변의 사업을 잘 밀고나가라고 고무격려하였다. 성당위의 이와 같은 적시적인 긍정에 리덕수와 주당위 지도부 성원들을 깊은 고무를 받았다.
혼란스러운 국면을 바로잡으면서 력사상에서 남아내려온 문제들을 시정하고 바로잡아야 할 과제들도 봉착하게 되였다. 그중에서도 ‘인민군’문제와 ‘민생단’문제가 비교적 뾰족하게 제기되였다.
이른바 ‘인민군’문제의 실제 정황은 이러했다. 1950년, 그 당시 맞띄운 특수한 력사적 환경에 근거하여 중, 조 두 나라 지도자들은 협상을 거쳐 재편성된 중국인민해방군 3개 사단의 조선족 지휘관과 병사들, 그리고 전군 군수산업분야에서 선출한 조선족 각 기술 병종의 군인들을 조선인민군에 합류시켜 조선측의 지휘를 받게 하기로 결정하게 되였다. 그 당시 조선인민군 속에서 련대장, 사단장 이상급 지휘관은 기본상 원 동북항일련군, 혹은 연안의용군 출신들이였다. 중국의 남과 북의 전쟁터를 넘나들며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아온 이 특수한 대오는 곧바로 조선인민군의 절대적 주력으로 활약하게 되였으며 조선전쟁에서 거듭 큰 전공을 세우며 아주 막강한 역할을 일으키였다 조선전쟁이 결속된 후 이들중 귀국한 절대다수는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을 선택하여 정착하게 되였다. 그들은 모두 농촌에 돌아가 농민으로 되였기에 상응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고 생활형편도 그만큼 어려워졌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자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게 되였다. 그들은 주당위 리덕수를 찾아 자기들한테도 귀국한 지원군과 똑같은 대우를 해 달라고 강력히 청구했다. 그들은 사람을 조직하여 장춘, 북경 등 지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리덕수는 이들 로군인들의 심정을 어디까지나 리해할 수 있었거니와 이들 로군인들의 고충을 충분히 헤아릴 수도 있었다. 리덕수는 여러 차례나 이들 로군인 대표들을 열정적이면서도 인내심 있게 접대해주었으며 그들의 설음과 요구를 참답게 귀담아들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리덕수는 허심탄회하게 그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조선부대에 귀속된 후 결연히 조선의 전쟁 마당으로 내달려간 여러분이야말로 그 시대의 영웅이고 인민의 공신이고 나라의 자랑으로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신들의 력사적 공적은 그 누구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전쟁 가운데서 여러분은 수많은 형제와 훌륭한 전우들을 잃게 되였습니다. 연변에는 거의 마을마다 그들한테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생활도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리덕수는 로군인들한테 이렇게 약속했다.
“첫째, 주당위에서는 여러분들을 도와 문제가 해결되도록 전폭적으로 정성을 쏟겠습니다. 주당위에서는 꼭 책임지고 적극적으로 상급에 정황을 반영함과 아울러 적극적으로 관련 사업을 밀고나가겠습니다. 둘째, 여러분들은 절차에 따라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 각급 당위와 정부를 믿어주십시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그 무슨 새로운 문제가 있으면 곧바로 우리 주당위에 와서 저 리덕수를 찾아주십시오.”
리덕수의 말에 로군인들은 격앙된 정서를 퍼그나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후 리덕수는 수차례에 걸쳐 주당위와 주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을 불러 전문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연구하였다. 나중에 주당위의 의견을 형성하고 나아가 주당위에서 연구한 해결방안을 성당위와 중앙에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주당위의 의견은 성당위와 중앙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받게 되였다. 나중에 전국 각지에도 산재해있던 이런 로군인들도 ‘연변의 처리방식’에서 열쇠를 찾아 해결받을 수 있었다.
이른바 ‘민생단’문제도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굉장히 억울한 사건이였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 중공동만특위의 령도 하에 동만지구 당내부, 항일부대내부와 항일근거지 대중들 속에서는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을 벌리게 되였다. 사후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 이른바 ‘민생단분자’ 속에는 ‘민생단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전부 다 항일투쟁 속에서 활약해온 골간분자들이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억울한 사건이 빚어지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반 세기란 세월이 흘러간 후 리덕수는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광범위한 간부와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실사구시해야 하고 오유가 있으면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는 원칙에 좇아 주당위의 명의로 성당위와 중앙에 력사상에서 남겨진 ‘민생단’문제를 보고하고 주당위에서 마련한 ‘민생단’ 문제에 련루되여 박해를 받은 인원과 그 가족들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 데 관한 방안을 보고하였다. 성당위와 중앙에서는 곧 주당위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회시를 내려보냈다. 주당위에서는 성당위와 중앙의 회시 그리고 관련 정책규정에 따라 이 문제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던 로군인과 오랜 동지들에게 도시호적을 바꿔주고 경제대우를 해결해주었다.
문제가 다 해결 된 후 ‘인민군’ 로군인들과 ‘민생단’문제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오랜 동지들이 잇달아 주당위 리덕수의 집무실에 찾아와 주당위와 리덕수본인에게 사의를 전하였다. 결과가 보여주다싶이 오로지 사상관념상에서도 이같이 실사구시적인 과학적 사업방식으로 사업하여야만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아 놓을 수 있고 나아가 진정으로 사상을 해방하고 개혁개방에서도 시장경제의 발전을 저애하는 걸림돌을 밀어버릴 수 있다.
연길시에서 건설한 서시장은 두말할것없이 시장경제의 동력이 낳은 산물이였다. 그러더라도 막상 서시장을 건설하려고 하니 예상 밖으로 거대한 벽에 부딪쳤다. 그럼 그 저항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였을가? 그 저항력은 바로 우리의 일부 관리부문에 있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은 지 얼마 안되여서였다. 한번은 연길시 10여명 조선족녀성들이 리덕수네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들은 남방에 가서 상품을 구입해다가 연길시 서시장에 와서 팔고 있었는데 유관 부문에서 그들이 ‘투기모리’를 한다고 몰아붙이면서 상품을 몽땅 몰수해가고도 성차지 않아 벌금까지 안긴 설음을 리덕수한테 하소연하였다.
리덕수는 몇번 연길 서시장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서시장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리덕수는 퍼그나 가슴이 쓰리고 서글퍼났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라도 장사군들은 난전에 펼쳐놓고 팔고 있던 물건들을 비닐천으로 덮어놓고 기운내여 싸구려를 불렀고 비가 억수로 마구 퍼부으면 저마다 부랴부랴 자기의 물건들을 손에 들거나 옆꾸리에 끼거나 한아름 부둥켜안거나 한 채로 비를 피할 구석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도 무풍지대는 아니였다. 뙤약볕이 내리쬐면 어떤 이들은 우산으로, 어떤 이들은 돛천으로 해볕을 가리우고 또 어떤 이들은 옷을 머리 우에 쓰고 해볕을 피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어지럽고 란잡하고 지저분한 서시장의 렬악한 위생환경은 눈으로 보아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서시장을 현장에서 둘러보면서 리덕수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추위와 무더위도 피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실내시장을 짓는다면 파는 사람이고 사는 사람이고 모두다 편리하여 그야말로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일이 될 수 있겠다는 밑그림을 그리게 되였다.
그 몇년 사이에 연변의 일부 녀성들, 주로는 조선족녀성들이 남방 연해지구의 도시에 가서 옷감, 의상, 신발 모자 등 상품들을 가져다가 연길에 와서 팔게 되면서 서서장 구역에는 차츰 맞춤한 상품집산지가 형성되였다. 이 잡다하고 방대한 상품소매시장은 완전히 자발적으로 형성된 만큼 기획과 관리에서 외면되여있었다. 이런 상품시장을 건설하고 관리하여 연길시 주민들의 생활을 위해 보다 더 잘 봉사해야 할 책임이 바로 정부에 있었다,
그런데 일부 간부들의 사상관념은 한심하게도 형세의 흐름에 뒤떨어져 있는가 하면 상품류통을 활성화하느라고 일년 내내 밖에 나가 동분서주하고 있는 조선족녀성들을 무턱대고 “투기모리군”이라고 몰아세우면서 그들의 상업활동을 “투기매매” 행위로 매도하고 항상 그녀들과 떵떵거리고 눈초리를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물건을 몰수하고 심지어 벌금까지 안기고 있으니 가만 놔둘 수 없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들의 하소연을 다 듣고 나니 리덕수의 가슴은 너무도 무거워났다. ‘좌’적인 사상이 이미 우리의 적지 않은 동지들의 머리 속에 굳어져버렸으므로 사상해방사업은 그야말로 복잡한 종합공정이라는 현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신주대 지에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치는데도 관련 부문 집법인원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따위 극’좌’적인 사유로 시장경제를 주물럭거리는 현실이 참담해났다. 리덕수는 이 사건을 돌파구로 삼아 모두의 사상해방과 관념갱신을 촉구하고 전 주적으로 시장경제의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히였다.
리덕수의 눈에는 용감하게 집문을 뛰쳐나와 자발적으로 상품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연길시의 조선족녀성들이야말로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들이며 상품경제의 물결 속에 뛰여든 용감무쌍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이 군체에 힘을 실어주고 이 군체를 잘 보호해주어야 하는 게 절실했다. 보다 대담하게 밖에 뛰쳐나가 남방 연해지역의 복장 등 상품들을 들여오면서 남방 연해지역 시장경제의 봄바람을 몰아오게 하면 일거량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리덕수는 간부대회에서 여러번 특별히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연길 서시장을 건설하기 전에 리덕수는 한 회의에서 이렇게 모질기게 발언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 누가 눈치를 보며 자리만 지키면서 개혁을 탐색하지 않고 시장경제발전의 흐름을 가로막는다면 저는 가차없이 그를 갈아치우겠습니다.”
당시 연길시 시장은 최봉련 (崔凤莲) 이였다. 일주일 쯤 지나서 최봉련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리서기께서 친히 사람을 갈아치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벌써 리서기를 대신해서 그 사람들을 갈아치웠습니다!”
“당신들이 누구를 갈아치웠단 말입니까?” 리덕수가 묻자 최봉련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리서기께서 찍은 그런 사람들을 면직시켰습니다.”
이 말을 듣고 리덕수는 최봉련 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면직시켰습니다. 저는 동무를 지지합니다. 앞으로도 그 누가 언감 개혁개방을 가로막으려 하면 곧바로 그를 면직시켜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누가 감히 대중들이 치부의 길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곧바로 그를 면직시켜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겠습니다!”
개혁개방 초기에 최봉련 시장은 시장경제를 밀고나가고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아나가면서 많은 일들을 해놓았다. 광명거리 확장공사도 바로 그의 재임시절에 추진되였다. 착공에 들어가자 의론이 분분하고 부정적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최봉련은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광명거리 확장공사를 마침내 마무리해내고야 말았다. 광명거리를 넓혀놓으니 길이 널직하고 시야가 탁 틔여서 다들 신난다고 입을 모았다. 연길시 서시장 건설도 그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그렇게 큰 규모의 상품소매시장을 건설한 것은 전 성적으로도 전례가 없었다. 리덕수는 언제나 최봉련을 실속있게 일하는 훌륭한 간부라고 긍정해주었다. 연길시 서시장이 건설되자 정부의 진심어린 지지를 마음 속으로 읽게 된 연길시 개체소상인들은 물론 전 주 개인장사군들이 경제활성화에 합류하려는 열정이 전에 없이 달아올랐다.
서시장이 다 건설되였을 때 마침 성당위 서기 고적이 연길에 와서 사업을 검사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일부러 고적 서기를 서시장으로 모시고 갔다. 서시장을 둘러보고 몹시 흥분된 고적 서기는 즉각 상업을 주관하는 부성장 고문(高文)한테 전화를 걸어 연길시에 와서 현지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아침, 고문 부성장은 성상업청, 성재정청 등 성정부 8개 관련 부문 책임자들을 인솔하고 연길로 떠났다. 주정부에서 재정무역사업을 주관하는 오장숙(吴长淑) 부주장이 역에 나가 그들을 맞아왔다. 그 날 연길시에서 열린 현장회의에 전 주 8개 현, 시의 재정무역 주관 현장과 시장들도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연길시 최봉련 시장이 경험을 소개한 뒤 고문 부성장과 오장숙 부주장은 각기 성, 주 정부를 대표한 연설에서 연길시의 경험을 전면적으로 널리 일반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후 전 성 각 지역에서는 연길시를 본받아 분분히 상품소매시장을 건설하게 되였다. 장춘시와 길림시의 상품소매시장도 연길 서시장 이후에 건설되였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전 주 8개현, 시에서도 신속히 발빠르게 움직여 규범화된 종합성적인 농산품시장을 잇따라 건설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은 이후에 착실하게 인민대중들한테 실제적인 일과 훌륭한 일들을 수두룩이 해놓았다. 그는 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렇게 타이르군 한다. 한 인간이라면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반드시 어깨를 낮추어야 하고 매사에 되도록이면 말은 적게 하고 솔선수범하여야 하며 일단 약속했다면 꼭 그대로 옮겨야 하고 심지어 입은 꾹 다물더라도 꾸준히 일하는 본령을 지켜야 한다. 간추리면 모든 것은 다 사실로써 약속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였다. 인간으로서의 이와 같은 인격과 사업작풍을 갖추었기에 리덕수는 간부와 대줄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를 맡은 이후에 오랜 지도간부들을 일일이 찾아 담화를 나누었고 단독으로 련계할 수 있는 라인까지 마련해놓았다. 리덕수한테는 특별한 전화번호수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는 전문적으로 최채, 전인영, 최림 등 많은 오랜 지도간부들의 련계전화번호를 메모해두고 있었다. 리직휴양한 지 10여년, 20여년이 지난 오랜 지도자나 로간부라 해도 리덕수는 늘 그들의 련계번호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누구든지 가장 빠른 시간내에 찾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리덕수의 비서였던 조현인은 그 때의 경력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저는 로간부들의 련계번호가 적혀있는 그 수첩을 늘 갖고 다녔습니다. 리서기가 언제 누구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리서기는 평상시에 오랜 지도자와 로간부들의 생활에 깊이 관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기 사업의 훌륭한 선배로 모시고 사업상의 일들을 놓고 늘 조언을 받군 하였습니다. ”
주의 오랜 지도자와 로간부들은 모두 리덕수의 사업을 무던히도 받들어주었다. 장홍규는 원래 백성지구의 제2책임자였는데 연변의 지도부를 강화하기 위한 수요로 전근해 오게 되였다. 조남기가 주당위 서기를 맡고 있을 때 주당위의 일상 사업은 주로 장홍규가 맡아왔 다. 조남기와 최림이 성으로 전근되여 올라가고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으면서 장홍규는 주의 제2책임자로 되였다. 장홍규는 일을 매우 까근하게 하였고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는가 하면 문제를 조리정연하게 귀납하는 스타일을 가진 지도일군이였다.
리덕수도 마음속으로부터 장홍규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이 같은 리덕수의 평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장홍규동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도부의 단합, 신로간부 사이의 단합, 민족간부 사이의 단합에서 장홍규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1987년에 장홍규는 다시 백성으로 전근되여 돌아갔다가 나중에 성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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