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지대에 위치해 있는 연변은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풍경이 매혹적인 데다 짙은 변경소수민족풍토까지 생생히 살아있어서 매력적인 관광명소로 될 천부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지난 세기 80년대까지만 해도 연변에는 관광산업을 전문적으로 설계하고 기획하며 관리하는 실무부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연변전역에서 근사한 호텔마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관광산업의 흥기와 발전은 운운할 수도 없었다.
관광산업의 부흥에 필수적인 기반시설건설에는 의례 호텔이 망라된다 신중국이 창건된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연변에는 호텔이라고는 지은지 퍽 오래된 건물 한채 밖에 없었다. 이 호텔은 1958년 대약진 열기 속에서 지은 4층건물이였는데 4층마저도 객실 대신 회의실로 쓰고 있었다.
이 호텔은 너무 헐망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시설도 너무 초라하였다.
리덕수는 늘 이렇게 되풀이했다.
“연변은 반드시 장백산과 두만강을 둘러싸고 그림을 잘 그려야 합니다. 날마다 개혁개방을 담론하면서 두만강의 우세마저 충분히 파내지 않고 어떻게 대외개방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경제를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장백산의 관광자원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관광산업이 제절로 찾아오겠습니까? 앞으로 개혁개방의 보다 큰 열기를 맞이하고 관광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려면 연변에서는 반드시 그럴듯한 현대화 호텔을 하나 지어야 합니다. 호텔은 그 지방의 ‘명함장’일 뿐더러 그 지방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주당위와 주정부의 련석회의를 사회하면서 특별히 새 호텔을 지을 데 관한 의제를 토론에 내놓았다. “지금 대내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외로는 개방하는 흐름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연변은 매일 외지와 외국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우호인사, 상인, 정계요인 및 기타 다양한 인사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괜찮은 호텔이 하나도 없다면 연변의 형상이 구겨지게 됩니다.”
회의 참석자들은 토론을 거쳐 곧바로 현대화한 차원의 고급호텔을 짓기로 합의했다. 의견이 통일되자 곧 건설부지 선정에 들어갔다. 연길대교 북쪽교두 끝자락에는 연길시에서 노란자위라고 할 수 있는 부지가 있다. 주초대소와 옛 연변호텔이 바로 그 구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맞은켠 즉 지금의 백산호텔이 세워져있는 그 자리는 워낙 부대의 주둔지였다. 부대의 건물이라야 말짱 옛날부터 물려내려온 헐망한 단층집들이였고 텅 빈 뜨락에 흩어져있는 시뿌연 낡은 집들 사이 에 잡초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도심이라 할 수 있음에도 이처럼 초라하여 연길시의 도시형상을 퍼그나 흐리고 있었다. 주에서는 시내 안에서 다른 한곳을 선택하여주겠으니 그 자리에 큰 호텔을 하나 지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달라고 부대측과 교섭하였다. 부대측에서는 지방건설계획을 지지한다면서 상급에 보고서를 올려보냈다. 주정부에서는 부주장 한 사람을 지정하여 전문 이 일을 맡겼다. 주위와 주정부에서 이 일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일을 책임지게 된 부주장은 바로 장국근(张国勤)이였다. 장국근과 리덕수는 벽을 사이둔 이웃였다. 장국근은 리덕수보다 나이가 퍼그나 많은 년장자였지만 맡겨주는 일이라면 통쾌하게 받들어나섰다. 리덕수도 장국근을 극진히 공경하였다. 장국근은 새 호텔 건설주비사업을 책임진 후에 수시로 리덕수한테 호텔건설 진척 상황을 회보하였고 그 과정에 리덕수는 도면설계로부터 몇차례 설계변경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체크하면서 자기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 새 연변호텔이 건설된 후 여러 방면의 의견을 받아들인 기초 우에 명칭을 “백산호텔”이라고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이 명칭은 듣기에도 박력이 있거니와 지방특색까지 갖추었다는 평을 받게 되였다. 과연 국내외적으로 쟁쟁하게 불리워지게 되였다.
연길대교 아래쪽 로타리와 청년호 일대는 연길시의 중심지대라고 할 수 있었다. 청년호 서쪽으로 연집하 기슭에는 주당위 간부 주택구가 있었는데 초대주장인 주덕해를 비롯한 많은 주급 지도간부들이 과거엔 태반이 이 지대에 살고 있었다. 여기는 북적이는 연길에서도 고느적하다 할 수 있는 주택구였는데 고층건물은 한채도 없고 거의다 단층집들이였다. 제일 높아서 고작 2층집이였는데 게다가 이곳은 모두 한뜨락에 집 한채씩(혹은 한 뜨락에 집 두채씩) 설계되여 이곳에 거주하면 퍼그나 아늑하고 편안하면서 편리하였다. 강변에 위치해있은 만큼 이 주택구의 공기 또한 맑고 깨끗하였다. 그 때의 연집하나 부르하통하는 수면이 넓고 물도 넘치다싶이 흘렀다. 강에는 강물이 출렁출렁 흘러내리고 강변에는 록음이 우거져 그 경치가 그윽히 수려하였다. 연길시의 오랜 주민들은 이 주택구에 대해 모두 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원래 주당위 사무청사는 당시 청년호 길 건너편에 있던 지금의 농업은행청사자리였는데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3층건물로서 일제치하 위만주국시기의 건물이여서 퍼그나 낡아있었다. 리덕수는 이 건물을 보면서 진작 자기 나름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주농업은행 최행장을 찾았다. 최행장은 성품이 아주 부드러운 오랜 금융사업인원이였다. 리덕수는 농업은행에서 주당위 사무청사를 사서 은행건물로 쓰는 게 어떻겠는가고 상의하면서 한가지 부가조건을 내놓았다. 농업은행에서 주당위 사무청사를 사게 되더라도 이 건물에 그냥 그대로 들라는 게 아니라 반드시 새롭게 장식해서 연길시의 도시적 분위기를 돋구어줘야 한다는 조건은 리덕수의 심사숙고 끝에 나온 고안이였다. 농업은행에서는 이 건의를 시원스레 받아들이였다. 주당위에서는 농업은행에서 건물을 구입하고 보내온 돈을 받자 원래의 주초대소를 주당위 사무청사로 개축하였다. 이리하여 한꺼번에 건물 두채가 새 모습으로 단장하게 되였다. 그 때는 연길시에 다층건물이 몇 개 안되였으므로 이 작업은 상당히 큰 역사라 할 수 있었다. 금상첨화로 백산호텔이 준공되여 사용에 교부되면서 이 구간 길거리 환경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이제 이 구역에서 옛 호텔 하나만이 고스란히 남아있게 되였다. 리덕수는 옛 호텔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옛 호텔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이래의 력사적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 데다 신중국이 창건된 이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연변에 올 때마다 모두 묵어가던 정 서린 곳이였다. 경애하는 주은래 총리와 덕망 높은 주덕 위원장, 동필무 부위원장 그리고 호요방 총서기도 연변에 왔을 때 모두 이 옛 호텔에서 묵었다. 옛 호텔을 마땅히 력사유산, 력사문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력사적, 미래지향적 안목에서 나온 명지한 결책이였다. 발전에 론리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발전을 위해 자기의 력사마저 몽땅 다 버릴 수 없다. 하긴 옛 호텔은 무용지물이 아니였다. 비록 설계리념이 너무 전통적이고 한물 가긴 하였지만 건축물 구조가 매우 튼튼하였기에 특수한 손님이 오게 되면 그냥 거기에 묵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거기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거기서 벌어졌던 지나간 력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건 어쩌면 한결 더 특별한 의의가 있을 수도 있었다.
리덕수는 장백산관광업을 전 방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금을 쟁취하여 장백산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구간별로 다시 깔도록 추진하였으며 장백산 관광구에 여러가지 기능이 조합을 이루는 기반시설들을 마련함과 동시에 장백산 풍경구내 관광명소들을 하나하나 개발해나갔다. 따라서 건설대상들이 일사분란하게 진척되는 기꺼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였다.
그 때는 장백산 관광이 한창 첫발을 내딛는 시기여서 방치되였던 일들이 하도 많아 모든 것은 죄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였다. 장백산 관광사업에 착수하게 되자 맨먼저 걸리는 것이 장백산(북측) 관광 관리권한 문제였다. 그 당시 성에서는 전문적으로 장백산(북측) 관광 관리권한 문제를 연구하는 회의를 소집하기로 계획하고 리덕수와 손홍상을 회의에 불렀다.
회의에서 류희림(刘希林) 부성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성정부에서는 이미 장백산 관광 관리권한을 성으로 올려오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문건을 내려보내기에 앞서 먼저 연변 동지들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손홍상이 먼저 발언하면서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간부인 제가 보기에는 성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우선 연변 인민들이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손홍상은 장백산의 력사와 장백산을 지방에서 관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력설하였다.
“이 일은 연변의 일입니다. 연변에 위치해있는 만큼 연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성에서는 저희 연변에서 잘 관리할 수 있고 또 장백산관광시설을 잘 건설할 수 있다는 걸 믿어주십시오. 저희들은 보호국과 성림업청 등 관련 부문과 잘 협상하고 조률하여 이 관계를 잘 처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 손홍상은 앉아서 발언을 시작했는데 말을 할수록 점점 더 격앙되여 나중에는 일어서서 열변을 토하였다. 손홍상은 그가 한 이런 말은 그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주정부와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을 대표한 의견이라고 강조하여 밝혔다. 손홍상의 발언이 끝나자 류희림 부성장은 연변의 의견을 존중하여 관리권한을 성에서 떼가지 않기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연변의 회보를 듣고 나서 성의 지도자들이 원래의 생각을 바뀌게 된 대목이다.
손홍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장백산기슭의 안도현에 배치되여 사업해왔기에 장백산에 대해 남다른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리덕수는 손홍상보고 “손동무! 오늘 동무의 발언은 정말 멋졌습니다!”하고 독려하였다.
훈춘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어느 날 리덕수가 룡정으로 사업을 검사하러 내려갔는데 주당위 판공실에서 훈춘에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리덕수는 조금도 지체없이 차에 앉아 훈춘으로 달렸다. 룡정으로부터 도문까지의 구간은 그나마 순조로웠다. 그런데 도문에서 훈춘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금방 한 산굽이를 돌아서다가 한 초소에서 차가 막혔다. 동행하던 주당위 판공실 인원이 차에서 내려 변방초소 전사한테 이 차에 앉은 분이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 겸 주장 리덕수라고 알려주는데도 그 변방전사는 규정에 따라 자기는 증명서만 인정할 뿐이라면서 주당위 판공실 인원에게 깍듯이 경례까지 올리면서 해석했다.
“저희들은 통행증이 없이는 통과시키지 못한다는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리덕수는 차에서 내려와 친히 보초병한테 자신의 재직증명서를 보였다. 재직증명서에는 사진도 있고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이라는 직무도 똑똑히 밝혀져있었다. 그래도 보초병은 여전히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수장동지!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명령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그 보초병를 보고 임무를 에누리없이 집행하는 합격된 전사라고 칭찬해주는 여유도 보이면서 례절스레 물었다.
“보초병동무! 제가 동무들의 전화를 좀 써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보초병은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수장동지! 될 수 있습니다!”
판공실 인원은 초소의 전화로 군분구에 전화를 걸어 주당위 서기 리덕수가 지금 보초병한테 막혀 건너가지 못한다고 통보했다. 군분구 수장은 즉시 변방퇀 퇀부에 지시했고 그 지시가 초소에까지 내려가서야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었다. 도문으로부터 훈춘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두개의 초소는 모두 이렇게 지나갔다.
훈춘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리덕수는 내내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되였다. 훈춘을 개방하려면 이런 초소부터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 지금 같은 검사는 유야무야이다. 나쁜 놈, 파괴분자들이라면 어느 놈이 간덩이가 부어서 이런 큰길로 감히 다니겠는가? 틀림없이 산길이 아니면 두만강을 따라 강변으로 피해 다닐 게 아닌가. 리덕수는 성에 올라가서도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였고 심양군구 지도자들한테도 이렇게 회보했다. 만약 변방초소를 철거하지 않으면 훈춘의 개혁개방을 맞아오기 힘들 거라고 피력했다. 그렇더라도 막상 이런 변방검사소를 철거하자고 하니 힘들기로 산 넘어 산이였다.
그래도 리덕수는 자신의 의견을 지키면서 계속 끈질기게 상급 관련 부문과 지도자들한테 정황을 반영하였고 나중에 직접 성당위 서기와 성장한테도 회보했다. 성군구와 심양군구 그리고 각급 지도자들의 지지 하에 훈춘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놓여있던 두개 초소는 마침내 철거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훈춘시가 스스로 자기의 이미지를 개변하지 않으면 개혁개방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 당시 훈춘현 경내의 도로 량켠에는 도처에 개인들이 석탄을 채굴하는 작은 탄갱들이 널려있었다. 방천으로 가는 길 량켠에도 눈에 안겨오는 것은 온통 헐망하고 나지막한 초가집들이였는데 그 주변에서 초라하기 그지 없는 작은 탄갱들이 엉성하게 눈에 띄였다. 이런 탄갱들은 국가의 자원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예측불가의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어 훈춘의 대외개방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리덕수는 처음 훈춘으로 갔을 때 벌써 관련 부문과 이 문제의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나중에 여러 방면에서 힘을 모아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단호하게 이런 불법적인 탄갱들을 페기시키게 되였다.
1984년에 리덕수는 조사연구와 거듭되는 론증을 거쳐 연변이 발전하려면 훈춘건설을 두드러지게 강화해야 하고 훈춘의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여 훈춘으로 하여금 한걸음 먼저 발전하게 하여 연변의 전면적인 발전을 진일보 추진하여 나가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런 사유에 따라 훈춘의 개발과 개방의 전략적 구상의 제기로부터 건설계획을 온건하게 추진하고 실시하기에 이르기까지 리덕수는 끈질지게 간고하고도 복잡한 전기 준비작업과 대량의 기초적인 작업을 벌려나갔다.
훈춘을 개발하고 개방하는 전략적 계획의 전기 기반시설 건설에는 주로 에너지, 통신과 교통(철도와 공로)이 망라되여 있었다.
그 당시 연변 8개 현, 시 가운데 유독 훈춘에 철도가 통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최림 주장이 호요방 총서기한테 편지를 써보낸 적이 있었다. 호요방은 최림의 편지에 친히 회시를 하였고 그 회시는 국가계획위원회에 넘어가게 되였다. 그런데 최림이 성으로 돌아가게 되자 이 일에 살손을 붙이고 전문 추진하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에 돌아온 후 이 일을 자못 중대한 사안으로 판단하고 직접 추진하였다. 철도를 건설하려면 대량의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데 연변에는 그럴만한 자금이 없는 만큼 상급 관련 부문의 지지에 의지하는 게 지름길이라 할 수 있었다.
주에서 도문----훈춘철도 건설대상을 신청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주당위 상무위원회에서는 연구를 거쳐 이 일을 기본건설사업을 관장하고 있던 손홍상 부주장이 구체적으로 추진하도록 맡기였다.
도문----훈춘철도 건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총길이가 겨우 70여킬로메터 밖에 안되는 이 철도를 건설하는 데 국가 계획위원회, 석탄부, 철도부와 림업부 등 중앙 부처의 참여와 심사비준을 거쳐야 했다. 도문----훈춘철도로선은 비록 매우 짧지만 산간지대를 가로 지나는 지리적 특성으로 많은 턴넬을 뚫어야 하는 데다 텐넬 길이가 길어 시공난도가 크고 건설 원가도 몇배로 뛰여올랐다. 최초의 예산은 억 6천만원이였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억 6천만원이라면 사람들이 놀랄만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철도부에서는 건설원가가 너무 높아 수지가 맞지 않는 데다 미래의 경제적 효익성도 애매하다고 판단하고 이 일에 미지근하게 나왔다. 성에서도 연변에서 올려보낸 보고서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많은 예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송홍상이 한동안 북경으로 다니면서 끈질기게 교섭한 결과 국가계획위원회로부터 연변에서 타당성보고를 올려보내라는 회답을 받게 되였다. 뒤이어 송홍상은 두번째 공략대상으로 석탄공업부를 찾았다. 그 당시 확정된 훈춘탄광구역의 년간 석탄 생산량은 300만톤이고 탄광구역공사가 전부 완료되면 년간 석탄 생산량을 700만톤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230만톤은 훈춘화력발전소에서 발전용으로 소모한다 치더라도 그 나머지 470만톤은 밖으로 운송해 내가야 했다. 훈춘탄광에서 생산하는 석탄은 석탄공업부에서 관리하기에 석탄공업부에 자금을 신청하는 것은 관건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절차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송홍상은 그 해 석탄공업부를 제일 번다하다 할 만치 찾아다녔다. 송홍상은 석탄공업부의 관련 사급, 국급 부서로부터 시작해서 한층한층 상급부서로 올라가면서 정황을 회보하였다. 연변에서는 석탄공업부에 신청한 도문----훈춘철도 건설자금은 억원이였다.
그 당시 석탄공업부 부장은 우홍은(于洪恩)이였다. 그는 워낙 산동사람이였는데 1942년부터 흑룡강 학강 동산탄광의 갱부로부터 작업반장, 갱도작업반장, 부광산장, 광산장으로 성장한 광부출신의 지도자였다. 신중국이 창건된 이후에는 학강광무국 동산광산 부광산장을 맡았다가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학강광무국당위 서기에 이어 석탄공업부 부부장, 부장, 중앙위원을 력임하게 되였다. 우홍은은 기층으로부터 성장했기에 기층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고 기충에서 찾아온 동지들이라면 항상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우홍은은 손홍상을 만나서 직접 그의 회보를 듣고 나서 도문----훈춘철도 건설에 출자하는 데 동의했다. 다만 석탄부에서 억원이나 출자하는 것은 무리이기에 단독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출자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손홍상은 돌아와서 리덕수한테 이 정황을 회보했다. 리덕수는 잠간 생각을 더듬다가 이렇게 물었다.
“손동무! 우홍은 부장을 한번 연변에 모셔올 수 없겠습니까? 우부장이 오게 되면 우리가 모시고 훈춘광산구역 현지에 가서 돌아보게 하면 석탄공업부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결심이 더 커질 확률이 높을 수도 있잖겠습니까?”
“리서기! 제가 다시 가서 힘써 모셔보겠습니다.”
손홍상은 리덕수한테 신중하게 한마디 남기고 다시 길에 올랐다.
과연 우홍은 부장은 정말 아주 바삐 보내고 있었다. 연변에 가 볼 시간을 짜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래도 손홍상은 맥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삼고초려’의 인내성과 투지로 거듭 우부장을 청하였다.
한번은 우부장을 다시 만나게 되자 손홍상이 이렇게 건의했다.
“우부장동지! 제가 보건대 부장동지는 어차피 명절이고 휴일이고 다 없는 것 같은데 아예 명절이나 휴일을 리용해 스스로 자기한테 한번 말미를 주는 셈 치고 저희들 연변에 가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우부장은 손홍상의 이처럼 끈질긴 집념과 진정에 감동된듯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동무의 말대로 어디 한번 그렇게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 때라 하고 손홍상은 다그쳐 자기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우부장동지! 제가 부장동지를 위해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놓았습니다. 며칠 후면 양력설이 다가오는데 부장동지는 이 참에 저희들 연변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이 때는 바로 1984년 양력설을 지척에 두고 있었다.
리덕수는 우홍은 부장이 훈춘탄광에 내려가 현지를 고찰하는 전반 과정을 시종 대동하였다. 훈춘탄광에서 우홍은 부장은 한곳한곳 까근히 살펴보았고 광부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우부장은 훈춘현지 고찰을 거쳐 훈춘탄광의 전망에 대해 무척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날 저녁, 바로 새해 첫날 저녁에 연길에 돌아와 연변호텔에서 식사를 하면서 회보를 듣게 되였다. 연변측에서는 리덕수와 손홍상, 그리고 장국근 세 사람이 자리했다. 리덕수는 회보를 하면서 도문----훈춘철도 건설의 중요성과 절박성에 대해 거듭 천명하였다.
“이 철도는 빨리 건설해야 합니다. 이제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우부장께서도 보셨겠지만 훈춘에서 밖으로 석탄을 운송하려면 이 철도가 매우 절박합니다.”
리덕수는 실사구시적으로 우부장한테 이렇게 말했다.
“우부장동지! 제가 우부장께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희들 연변의 지방건설도 이 철도가 시급히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우홍은 부장은 석탄부에서 출자하여 도문----훈춘철도를 건설하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얼마를 출자할지에 대해선 최종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 날 분위기가 화애롭게 무르익어 나중에 회보회는 상호간에 교류하고 상담하는 자리로 바뀌여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자기의 감수를 구김없이 털어놓았다.
“우부장동지! 오늘 훈춘탄광에서 저희들은 석탄산업과 탄광로동자들에 대한 부장 동지의 그 심후한 감정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고 부장동지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리덕수의 이 말에 뭉클하게 감동을 받았는지 우부장은 리덕수의 손을 와락 끌어다가 꼭 잡았다.
“덕수동무! 해방 전에 난 갱도에서 석탄을 캐며 여러해 동안 탄광로동자로 일했고 그 후에도 한평생을 이 석탄산업에 몸 바쳐왔는데 어떻게 탄광로동자들한테 감정이 없고 석탄산업에 감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난 하루도 이 석탄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 이튿날 우홍은은 일정배치에 따라 렬차로 연변을 떠났다. 리덕수는 주의 주요 지도자들을 이끌고 렬차역에 나가 우부장을 배웅하였다. 플래트홈에서 우홍은은 리덕수의 손을 꼭 잡은 채 정겹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홍은은 리덕수보다 16년 년상이여서 세대별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우부장은 친절하고 너그럽게 친형님처럼 마음을 다 터놓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속에서는 소박한 친화력이 숨 쉬고 있었다. 렬차가 움직이자 리덕수의 가슴 속에도 련민의 정이 굽이쳐올랐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 양력설이 지나기 바쁘게 어느덧 음력설이 다가왔다. 리덕수는 우연하게 우부장의 일정배치를 미리 알아내고 손홍상을 불렀다.
“손동무! 듣자니 우부장이 올해는 고향에 돌아가 음력설을 쇤다고 합니다. 고생스럽겠지만 동무가 학강에 다녀와야하겠습니다. 이번에 가서 도문----훈춘철도 건설자금에 대해 기어코 확답을 받아내야 하겠습니다.”
손홍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손동무! 이 일은 지체할 수 없습니다. 듣자니 우부장이 이미 고향으로 출발했다고 하는데 동무는 누군가를 데리고 곧 우부장의 고향으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1984년 음력설은 양력으로는 2월 2일이였다. 1984년 1월말의 어느날, 손홍상은 최원근(崔元根), 정두남(郑斗男)과 함께 북경표 짚차를 타고 먼길에 올랐다. 주당위 차대 리동무가 핸들을 잡았다. 최원근은 당시 주통상구 판공실 주임이였고 정두남은 돈화현 부현장이였는데 주정부에 전근되여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 낮을 이어 질주하여 목단강, 계서, 칠대하, 쌍압산, 가목사를 지나 섣달 스므여드래 되는 날에 학강에 당도하였다. 이틀 후면 곧 섣달 그늠날이였다.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흑룡강의 엄동설한은 연변의 겨울보다도 엄청 더 추웠다. 게다가 그 때는 짚차의 난방시설도 그닥지 않아 손홍상이 학강에 도착했을 때는 추위에 부대끼다 나니 온몸이 뼈속까지 뻣뻣하게 얼어있었다.
학강은 오랜 탄광구역이였다. 우홍은은 15세 때부터 이곳에서 갱도에 내려가 석탄을 캐내는 광부로 일하다가 나중에 한걸음한걸음 성장하여 광산장까지 하게 되였고 그 만큼 학강탄광에 대해 남달리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학강탄광의 여러 세대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우홍은을 늘 가슴 속에 품고 각별히 그리워하였으며 우홍은을 학강탄광의 자랑으로 받들고 있었다. 손홍상은 학강에 도착하자마자 곧 우홍은에 대한 학강사람들의 이런 특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손홍상이 짚차로 연길에서 학강까지 눈보라길를 헤치며 1,000여킬로메터나 달려올 줄은 우홍은 부장으로서도 예상 밖이였다. 우홍은은 연변 사람들의 이 같은 끈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홍상동무! 솔직하게 말해서 난 동무가 여기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부장동지! 덕수 서기는 금년에 우부장동지께서 고향에 돌아와 음력설을 쇤다는 소식을 듣고 우부장동지를 찾아뵙고 오라고 우정 저희들을 보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우홍은은 미안쩍어하는 표정을 보이였다.
“하필 이럴 것까지야.”
이렇게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우홍은은 먼저 도문----훈춘철도의 화제를 꺼냈다. 그러자 손홍상은 제꺽 연변에서 작성하여 갖고 간 도문----훈춘철도 건설자금 신청보고서를 꺼내여 우홍은한테 건네였다. 우홍은은 보고서를 다 보고 나서 손홍상을 치하했다.
“이 보고서는 정말 잘 작성되였습니다. 빈틈없이 모두 써넣은 것 같습니다.”
“우부장동지! 부장동지가 보건대 별문제가 없으면 음력설 전에 이 보고서에 서명을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손홍상의 청에 우홍은은 보고서를 다시한번 진지하게 검토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여기로 오기 전에 이미 연구하여 결정했습니다. 다만 연변에서 요구한 이 억원을 그대로 다 준다는 건 어렵습니다. 9,000만원만 내려보내겠습니다!”
우홍은은 이렇게 말하면서 연변의 보고서에 서명을 하고 석탄공업부에서 9,000만원을 출자한다는 내용까지 명확히 밝히였다. 우부장이 서명한 보고서를 보고 손홍상 일행은 너무 기뻐서 얼굴이 함박꽃처럼 활짝 피여올랐다. 이렇게 큰 일을 성사시키고 나니 손홍상은 마치 자기의 가슴을 지지누르고 있던 큰 돌덩이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날 저녁에 우홍은은 학강탄광 탄광장 및 당위 서기와 함께 손홍상 일행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우부장은 한집식구처럼 손홍상 일행을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술좌석에서 훈춘의 미래 발전전망을 놓고 흥미진진하게 담론를 나누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니 시간이 퍼그나 흐른 뒤였지만 손홍상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리서기! 우부장은 이미 저희들이 갖고 온 보고서에 서명했습니다.”
흥분에 젖어있는 손홍상의 목소리에 뭔가 예감하면서도 리덕수는 궁금하여 다우쳐물었다.
“우부장이 얼마나 비준했습니까?”
송홍상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석쉼해있었다.
“9천만원!”
리덕수는 그 소리를 듣고 못내 흥분된 듯 이렇게 소리쳤다.
“손동무! 마침내 큰 일을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그 해 7,8월경에 송평(宋平)이 연변에 와서 사업시찰을 하게 되였다. 그 때는 마침 여름철이라 연변에서 가장 좋은 계절이였다. 도문----훈춘철도건을 회보해야 하므로 리덕수는 손홍상을 데리고 송평의 연변시찰을 안내하다가 나중에 장백산에 이르게 되였다. 송평은 그 때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이였는데 국가계획위원회 6,7명 국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 리덕수는 장백산 악화호텔에서 송평한테 도문----훈춘철도에 대해 회보하였다. 그 때 송평의 동행인 가운데는 석탄부와 림업부의 관계자들도 있었다. 리덕수의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송평은 시원하게 자기 생각을 내놓았다. “이 일은 이미 몇해 동안이나 끌어왔다. 호요방 총서기의 회시가 있었고 계획위원회 관 련 부문에서도 이미 모두 고찰을 마친 사안이다. 연변에서 매우 적극적인 데다 길림성에서도 지지하고 있으므로 나는 이 대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나중에 자금문제는 최종적으로 총예산은 억 6천만원으로 잡고서 석탄공업부에서 9,000만원, 국가계획위원회에서 5,000만원, 림업부에서 2,000만원을 출자하는 것으로 락착되였다.
처음 준비사업을 시작할 때 연변에서는 도문----훈춘철도 건설총지휘부를 설립하고 상무부주장 손홍상이 총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막상 자금이 조달되여 곧바로 착공에 들어가게 되자 사업의 수요로 말미암아 손홍상이 총지휘를 맡지 않고 주당위 부서기 김성화가 총지휘직무를 이어받게 되였다. 그 때 도문----훈춘철도 건설총지휘부에서는 확실히 많은 일들을 해냈다. 사람들은 열정이 한껏 끓어오르고 사기가 충천하여 거뜬거뜬하게 일들을 해제꼈다. 렬차의 첫 경적소리가 훈춘의 산골짜기에서 메아리치자 많은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도문----훈춘철도를 건설하는 동시에 연변에서는 자금을 유치해다가 도문----훈춘간 두만강 강변도로를 대규모적으로 정비하는 작업을 벌렸다. 원래의 모래흙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는데 이것은 그저 일반적인 건설이 아니라 거의 새로 갈아치우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도로를 곧게 펴나가고 턴넬까지 뚫었다. 이렇게 큰 역사를 벌렸더니 훈춘으로 통하는 길이 대뜸 순통하게 되였다. 오늘에 와서 훈춘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리 만치 새롭게 일신하게 되였다. 게다가 고속도도로에다 고속도철도까지 통하니 훈춘이란 이 자그마한 변경도시는 내지와도 거칠 게 없이 쭉쭉 이어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부동한 장소에서 여러번 이렇게 말했다.
“기반시설건설은 반드시 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많은 노력을 들이고도 성과가 적을 수 있지만 조합을 이루게 되면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훈춘을 개발하는 문제에서 리덕수는 특히 교통이 꼭 한발 먼저 앞서 가야 한다고 하면서 무엇보다도먼저 도로와 철도 건설을 다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훈춘에는 개발해야 할 대상이 이렇게 많은데 도로를 보면 도로가 말이 아니고 철도를 말하면 아직 철도도 없습니다. 밀강에 가로막힌 그 대반령고개를 보면 외지사람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돌아설 텐데 남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결심을 내리고 우선 훈춘에 철도를 건설하고 도로를 건설해야 합니다. 철도가 없으면 탄광과 발전소의 대형기계설비들도 운반해 들여올 수 없습니다. 앞으로 훈춘 탄광과 발전소가 제2기, 제3기 공사에 들어가면 더 많은 대형기계설비들을 훈춘으로 끌어들여와야 하겠는데 철도가 없이 무엇으로 나르겠습니까?”
도로를 건설하고 철도를 부설하려면 필연적으로 토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슨 견지에서 그랬는지 훈춘에 등급 이상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한사코 가로막았다. 언제인가 리덕수는 대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엄숙하게 비평했다. .
“우리가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는 게 그래 백성들의 리익에 손해를 끼친단 말입니까? 훈춘을 크게 개발하여야만 우리 백성들이 더욱 잘살아갈 게 아닙니까? 제가 보건대 우리의 어떤 간부들은 한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훈춘의 래일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거니와 훈춘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훈춘에 철도를 건설하지 않고 도로를 건설하지 않으면 훈춘은 희망이 없거니와 훈춘의 래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훈춘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집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빠는 민병련장이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여름철이 되면 일년 량식을 다 먹어버려 집에는 먹을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빠가 민병련장이여서 늘 민병들을 거느리고 훈련을 하고 각종 힘든 중로동에 참가해야 했는데 오누이 모두 식욕이 장난이 아니였다. 그들은 배고픈 걸 힘들게 견디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오빠는 누이동생이 풋옥수수를 삶아 놓은 것을 보고 이상쩍어 물었다.
“이 옥수수가 어디서 생긴 거니? 우리 집에서는 옥수수를 심지도 않았는데...”
누이동생은 그냥 속이고 넘어갈 수 없는지라 그대로 이실직고하였다.
“오빠가 민병련장까지 맡고 매일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는데 날마다 굶고다니는 걸 어떻게 그저 보고만 있겠소? 그래서 생산대밭에 들어가 몇 이삭 따왔어요.”
오빠는 그만 화가 치밀어 누이동생의 빰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래도 니가 어떻게 감히 생산대 옥수수를 흠쳐올 수 있단 말이냐?”
누이동생은 하도 억울해서 울면서 뛰쳐나갔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화김에 그길로 강를 건너갔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우리 이쪽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세월이 나아지자 그 누이동생은 다시 되돌아오게 되였다. 그 당시 리덕수는 이 사례를 들면서 대회에서 반문식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이래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이래도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이래도 농민들이 부유해지는 게 배아프단 말입니까? ‘문화대혁명’ 이전과 ‘문화대혁명’ 기간에 연변에서 저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한때는 퍼그나 많았는데 ‘문화대혁명’ 이후에 우리가 개혁개방을 하면서 경제가 발전하게 되자 저쪽에서 다시 건너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만약 경제를 잘 틀어쥐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이 유족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강이 안정해질 수 있겠습니까?”
훈춘은 매우 유리한 지역적 우세와 풍부한 자원적 우세를 가지고 있고 그 발전적 잠재력 또한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지난날 훈춘은 금산을 끼고 앉아서도 가난에 허덕이게 되였다. 그러므로 개혁개방의 새로운 형세하에서 하루빨리 가난하고 락후한 면모를 개변하려면 이러한 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자원을 개발하고 큰 프로젝트들을 많이 유치하여 닫는 말에 채찍질하듯이 경제를 내미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이른바 건설대상유치에서 무엇보다도먼저 그것을 찾아 뛰여다니는 것이 가장 요긴합니다. 찾아 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찾아 다니면서 당겨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찾아 다니지 않고 주동적으로 당겨오지 않으면 허다한 일들은 탁상공론에 그치게 되고 아무리 훌륭한 건설대상이라고 해도 나중엔 모두 물거픔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쟁취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없던 일로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훈춘탄광구역 화력발전소 제1기 공사는 훈춘의 전반 개발과 개방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전 연변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설대상였다. 이 제1기 공사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은 주로 국가의 심사비준을 받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훈춘 지하에는 엄청난 석탄자원이 매장되여 있으므로 탄광구역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게 되면 지척에 있는 석탄으로 전기를 발전할 수 있는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건설대상을 추진하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훈춘의 관련 일군들은 국가 관련 부문을 찾아 수없이 뛰였다.
훈춘화력발전소는 1983년 년말부터 건설계획에 들어갔다. 1984년 10월에 국가 계획위원회와 수리전력공업부에서 연변의 신청보고서에 정식회시를 내려보내면서 훈춘화력발전소를 건설할 데 관한 지령이 동시에 떨어졌다. 3년간의 전기작업을 거쳐 1987년 4월에 착공의 첫삽을 뜨면서 급믈살을 타 1988년10월에 첫번째 발전기세트가 발전을 시작했고 또 다른 발전기세트는 1989년 11월에 발전에 투입되였다. 이리하여 제1기 공사의 두대의 100조와트 발전기세트는 최종적으로 국가송전망에 련결되여 전기를 생산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 대상건설의 전반 과정에 다 참여하였다.
그 당시 연변에는 전력공급 부족상태가 심각하여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에서마저 송전중단사태에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공업생산과 각항 사회사업발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연변경제의 쾌속발전을 저애하는 걸림돌로 되였다. 그 시절에는 사람의 가슴을 잔뜩 조이게 하는 이런 사태들이 자주 터져나왔다. 병원에서 한창 수술중인데 갑자기 정전이 되면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받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환자의 생명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매몰리게 되는 사태도 있었다. 당시 길림성 전역이 전력공급에 목말라있었다. 이런 큰 배경 하에서 연변에서는 훈춘에 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 훈춘발전소는 성에서 추진하는 건설대상이기도 했기에 마국산(马国山)한테 총지휘를 맡겨 보내였다. 이에 앞서 그는 장춘제2 화력발전소 부공장장 겸 총공정사였는데 화력발전소 건설실무를 익숙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마국산과 손홍상이 동시에 훈춘발전소 건설공사 총지휘를 맡게 되였다. 연변쪽의 일은 손홍상이 구체적으로 추진하게 되였다. 공사 건설과정에 구체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대부분은 연변에서 협조하여 해결하였다.
훈춘화력발전소 건설대상은 그 규모가 엄청 크기에 애초 계획할 때부터 제1기와 제2기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기 공사는 20만킬로와트 발전기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 20만킬로와트 발전기가 다 설치되여 가동에 들어가면 연변에서 전력공급이 딸리는 상황이 크게 완화시킬 수 있는 건 물론 전 성 전력공급 부담도 크게 줄일 수 있었기에 실제적인 효과가 매우 가시적이라 할 수 있었다.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려면 토지를 징용해야 했다. 발전소에서 토지를 징용하는 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시끄러운 일이였다. 징용하는 토지가 한무, 두무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만큼 엉키는 문제들이 복잡다단하였다. 물론 그 때의 토지징용은 지금의 철거이주와는 동일시 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첫째로 그 당시 토지징용 가격이 매우 낮았다. 둘째, 훈춘 백성들은 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도 잘 헤아려주었다. 훈춘 백성들은 훈춘발전소가 국가의 큰 건설대상이고 이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당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연변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토지 징용에 긍정적으로 나왔다. 그렇게 많은 땅이 징용되면서 수많은 농가호와 주거호의 리익과 엉켜있었지만 가가호호 저마다 넓은 아량으로 큰 국면을 돌보면서 사리를 옴니암니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이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기만 하면 감개를 금치 못하고 있다.
훈춘발전소는 착공해서부터 첫번째 발전기가 가동에 들어가는 데 이르기까지 원래 계획보다 6개월이나 더 앞당겼다. 발전소 건설력사에서 그야말로 보기 드문 기록이였다.
나중에 성에서는 이 공사를 모범 공사로 평의하고 훈춘발전소 건설지휘부에 상금 30만원을 발급하였다. 주정부에서도 토의를 거쳐 지휘부에 상금 5만원을 발급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상금총액이 도합 35원에 달했다. 그 때는 아직 상금이란 것이 류행되던 시절이 아니라서 한꺼번에 이 많은 상금을 받게 되니 다들 기뻐는 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서 머밋거렸다. 지휘부에서는 이 35만원 상금을 몽땅 건설자들한테 나누어주었다. 손홍상이 이 일을 리덕수한테 회보하자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잘했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한 건설자들에게 보내는 일종 감사와 경의, 례의가 아니겠습니까.”
훈춘발전소 공사와 관련이 있는 건설대상에는 훈춘탄광 건설대상도 포함되여있었다. 이 건설대상을 추진하기 위해 리덕수는 또 동북내몽골석탄관리국에서 실무를 주관하는 한영(韩英) 부국장을 청해왔다. 한영은 원래 공청단중앙의 제1서기로서 당의 제10기, 11기 중앙위원이였는데 그 당시는 동북내몽골석탄관리국에서 부국장(부부장 대우)을 맡고 있었다. 한때는 다 같은 공청단간부였기에 리덕수는 한영을 익숙히 알고 있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도 매우 가까웠다. 리덕수는 한영을 찾아가 그한테 훈춘탄광건을 회보했다. 한영은 이 건설대상을 지지한다는 명확한 립장을 내놓았다. 나중에 한영은 훈춘의 이 건설대상을 추진하는 과정에 확실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보였는데 이로하여 리덕수는 내심 한영한테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영의 이와 같은 지지가 있었기에 동북내몽골석탄관리국에서는 훈춘탄광 건설을 중요한 건설대상으로 밀어주게 되였다.
리덕수는 한영을 청해오고 또 한영을 대동하여 훈춘에 가서 함께 갱도에까지 내려가 돌아보았다.
한영은 연변의 발전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면서 연거퍼 여러번이나 연변으로 찾아왔다. 그 때마다 리덕수는 그를 대동하여 함께 훈춘탄광에 내려가 돌아보고 연변탄광에도 가보았다.
훈춘발전소 제2기 공사를 가동할 때에 리덕수는 이미 북경에 전근되여 중공중앙 통전부 부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었다. 리덕수는 비록 몸은 북경에 가있었지만 늘 훈춘발전소 공사를 가슴에 두고 있었다.
훈춘발전소 제2기 공사의 두대의 33만킬로와트 발전기세트는 2004년 8월에 설치하기 시작하여 2006년 9월에 두 세트의 동시운행을 이뤄놓게 되였다. 매번 연변에서 북경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리덕수는 언제나 훈춘발전소의 건설 진척상황을 까근히 물어보았고 무슨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지 않았는가, 만약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으 면 어떻게 풀어나갔는가 하는 등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였다.
리경호의 회고이다.
“리덕수 서기는 참 실속있게 사업을 추진하는데 자기가 제대로 보았다고 판단되는 일은 꽉 잡고 끝까지 밀고나갔으며 성과를 보기 전에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훈춘의 개발과 개방은 리덕수 서기가 줄곧 고도의 관심을 보인 사업이였고 적잖은 일들은 그가 친히 추진한 대상들입니다. 그 당시는 계획경제가 금방 시장경제에로 전환하면서 두가지 경제체제가 마찰 속에서 적응되여가는 시점이였던 만큼 저희들은 천방백계로 끈질지게 상급부문으로 찾아 입이 마르도록 여러 관련 부문들을 설득시키면서 여러 부문에서 오는 각종 걸림돌을 일일이 타개하여야만 성사시키려는 건설대상을 쟁취해 올 수 있었습니다. 연변이 오늘과 같은 쾌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리덕수 서기가 주당위 서기를 맡은 기간에 전반적인 전략적 기획을 세우고 솔선수범하여 이끌어나간 지도력과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훈춘의 개발과 개방을 언급하면서 훈춘의 림업개발을 빠뜨릴 수 없다. 그 당시 연변으로 놓고 보면 삼림보호와 림목축적량보호가 가장 잘된 곳이 바로 훈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타 현시의 삼림구역과 비교해보면 훈춘삼림구역에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채벌현상이 없었으며 새로운 개발이 거의 없는 미개발상태였으므로 림산구역 환경보호가 매끄럽게 되여있었다. 훈춘이 연변의 기타 현, 시처럼 림업구경내에 대형삼림공업기업을 여러개 두지 않은 게 삼림을 고이 지켜낼 수 있게 된 강력한 카드였다. 훈춘에 린접해 있는 왕청현만 보더라도 왕청림업국, 대흥구림업국과 천교령림업국 등 3개 대형삼림공업국이 있었고 돈화에는 돈화림업국, 대석두림업국과 황니하림업국 등 3개 대형삼림공업국이 있었으며 화룡에도 화룡림업국과 팔가자림업국 등 두개의 대형삼림공업국이 있었다. 그런데 훈춘에는 나중에야 세워진 대형삼림공업국이 하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은 림산구역 자연환경보호와 림산구역 생태균형을 지켜주는 보호산이나 다름없었다. 훈춘 림업개발사업이 의사일정에 오른 다음 리덕수가 가지고 있는 많은 구상 속에서도 훈춘으로 하여금 다시는 기타 림산구역의 전철을 밟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지가 단연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훈춘에는 한폭의 그림과도 같고 시처럼 정서적인 전원풍경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삼림과 드넓은 습지가 있어 세계적으로도 이름있는 철새들이 잇따라 쉬여가고 있다. 해마다 두루미, 백조, 기러기를 포함한 수백만마리의 철새들이 훈춘에 와서 한숨 쉬고 각지로 날아간다. 훈춘의 삼림은 아름답고 울창하여 피복률이 87%에 달하고 있다. 훈춘시는 일본해와의 거리가 15킬로메터도 채 되지 않아 독특한 소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훈춘에서 출산되는 셀레니움사과는 달콤한 데다 아삭아삭하고 영양까지 풍부하여 훈춘에서 재배하기에 매우 적합한 과수로 몸값이 오르고 있다 리덕수는 훈춘에서 과일나무를 많이 심어 만무과원을 건설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때 리덕수는 친히 붓을 날려 ‘만무과원(万亩果园)’이란 네 글자를 써주었는데 다만 거기에 자기의 락관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네 글자를 써준 것은 훈춘의 간부와 군중들에게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보다 아름답게 건설하라는 격려의 마음을 전함과 아울러 훈춘의 만무과원 건설을 위해 여론을 조성하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사실 그 때로부터 리덕수의 머리속에는 대림업 개념의 륜곽이 그려지게 되였다
이른바 대림업 개념을 리덕수는 이렇게 풀이했다.
“전 방위적이고 전면적이며 립체적으로 림산구역의 산업을 개발하여 연변의 림산구역으로 하여금 생태가 균형을 이루고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며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록색 삶의 터전을 건설하여 후대들에게 대자연이 인류한테 하사한 록수청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리덕수는 과수재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훈춘의 림업개발에서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므로 기타 건설대상처럼 틀어쥐어야 그에 따른 성과와 효익을 거둘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10여년이 지난 후에도 리덕수는 과수원을 둘러보려고 북경에서 특별히 훈춘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리덕수는 훈춘에서 사과과수원이 크게 발전한 것을 보고 못내 기뻐하였다. 그는 훈춘의 과수원 건설대상에 그토록 심혈을 몰부었다. 리덕수는 북경에 가서 임직한 후에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 자금면에서 훈춘 과수원건설을 특별히 지지해주도록 배려하였는데 이것은 자금지원이 절실한 훈춘으로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가물에 단비나 다름없이 반가운 일이였다.
두만강에서 바다로의 출항
훈춘의 변경무역은 훈춘의 대개발과정에서 세인의 주목을 받는 초점이나 다름없었다. 리덕수는 훈춘의 변경무역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그는 변경무역이 없고 변경무역을 활성화시키지 못하면 훈춘은 활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일 때문에 리덕수는 여러번 훈춘에 내려가 변경무역 문제를 조사연구하였다.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거쳐 리덕수는 먼저 자금을 투입하여 이미 페기된 권하의 낡은 다리를 보수하고 리용해야 한다고 선참으로 제기했다.
“훈춘에서 변경무역을 하려면 꼭 그 낡은 다리를 보수하고 다시 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가장 간편하고 빠르면서도 가장 품이 적게 드는 방법입니다.”
오래 동안 보수하지 않았기에 이 낡은 다리는 중간이 끊어져 차량이 통과할 수 없었다, 이 다리가 군사방비구역내에 위치해있으므로 이 다리를 보수하는 문제를 가지고 리덕수는 친히 군부대를 찾아가 협상하였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두만강 강물의 침식으로 방천초소로 통하는 도로가 훼손되는 바람에 우리가 방천으로 건너가려면 쏘련의 도로를 한 구간 차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방천은 우리의 중요한 국경선 표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고장이다. 애초에 청나라 관원 오대정((吴大徵)이 몸소 훈춘 방천에까지 내려가 국경선 측량과 확정을 관여하면서 최종적으로 거기에 경계비를 세웠다. 경계비를 세우기에 앞서 오대정은 짜리로씨야와의 담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 구간의 중국----로씨야 동부변경선을 확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남의 길을 차용해야 비로소 우리의 국경선까지 갈수 있게 되였으니 감정적으로나 리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리덕수가 여러번 방천으로 건너갈 때도 모두 남의 나라 쏘련의 길을 차용하군 하였다. 이런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그는 반드시 우리 나라 자체의 통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히게 되였다. 이 일은 아주 간단해보였지만 막상 손을 대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중에 여러 부문의 협상으로 마침내 도로수축방안을 확정하게 되였다. 방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수축된 후 부대 장병들과 지방간부들도 시름놓고 안전하게 차를 몰고 방천으로 다닐 수 있게 된 건 물론 방천의 백성들도 우리가 마침내 애국의 통로를 수축했다고 기뻐해마지않았다.
방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수축된 다음 리덕수는 또 군부대에다 지방에 있는 백성들도 “토자비(土字碑)”가 세워진 경계비구역에 가서 참관할 수 있도록 받아줄 것을 건의했다. 리덕수는 이렇게 하면 하나는 여기에 와서 참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차례 생동한 애국주의교육을 받게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지방 백성들이 와서 참관하게 되면 이 초소를 지키는 부대 장병들도 한결 더 영예감과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 의미를 추려냈다. 나중에 부대에서는 리덕수의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백성들이 경계비가 세워진 곳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망해각(望海阁)’에도 올라가 망원경으로 눈앞에 펼쳐진 로씨야와 조선의 넓은 지역과 일망무제한 일본해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이곳은 변경선에서 자못 특색이 있는 애국주의교육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현재 훈춘에서 장령자 통상구로 통하는 도로도 리덕수가 연변에서 사업을 주관하는 기간에 건설되였다. 지금까지도 장령자는 길림성에서 유일한 대로씨야 륙로통상구로서 국가 1급 통상구로 몸값을 올리게 되였다. 그 때 훈춘시로부터 통상구에 이르는 이 14.6킬로메터 되는 구간의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주에서는 변경무역방안에 관련하여 사전 제안서를 작성하였다. 제안서에는 로씨야의 대형트럭이나 심지어 무한궤도차가 이곳을 통과할 수 있도록 내다보면서 단기행위에 묶이지 말아야 한다는 등 비중 있는 내용들이 들어있었기에 이 제안서를 바탕으로 하여 이 도로를 단번에 국가 2급 도로로 건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안서가 있었기에 철도도 곧추 통상구까지 깔게 되였다. 도로교통이 원활해지자 훈춘통상구를 통한 중국과 로씨야 량측 무역이 곧바로 활기를 띠게 된 건 물론 변경의 전반 기반시설건설도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였다.
훈춘은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훈춘의 발전을 연변이라는 이 거대한 지역의 구도 속에서 함께 그려나갔다. 리덕수의 안목에서 보면 훈춘의 일은 곧 연변의 일이였다. 그 만큼 권하대교 건설이나 대로씨야 무역 등에서 리덕수는 줄곧 깊은 관심을 돌리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
도문통상구의 국문(国门)은 그 웅위로운 모습을 자랑하며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아있다. 그 국문에 새겨진 큰 글자는 강택민이 연변을 시찰할 때에 친필로 쓴 것이였다. 이에 앞서 1988년에 길림성 성장 왕충우(王忠禹)가 도문통상구에 와서 고찰할 때 당시 주당위 서기였던 리덕수는 도문해관이라는 이 국문을 다시 수축해야 할 데 관한 문제를 회보하게 되였다. 성에서 전문자금을 내려보내면서 새롭게 웅위로운 국문을 수축할 수 있었다. 1991년에 강택민 총서기는 리덕수의 안내 하에 연변을 시찰할 때 “중국 도문통상구”란 이 제사를 남기였다.
통상구 기능이 날따라 완벽화되고 중국의 대로씨야 무역과 관광산업이 신속히 발전함에 따라 훈춘통상구의 통관인원수와 통관화물량이 몇배로 급증하게 되였고 통상구로 통하는 도로도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되였다. 2009년에 훈춘시에서는 또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여 이 구간의 도로를 2급 도로로부터 1급 도로로 확장건설하였다. 장(춘)길(림)도(문) 개발과 개방의 창구로서의 훈춘통상구는 국제통로 건설과 통상구 기반시설 건설을 다그치고 통관환경을 최적화하여 중국이 동북아시아 각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출입문으로 되였으며 두만강구역의 편리한 국제통로로 부상하였다.
“ 많은 일들이 다 그러하듯이 무슨 일이나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저 앉아서 기다리면 기회는 멀거니 기다려주는 게 아니라 곧 사라져 버린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추진하고 싶은 건설대상이 있으면 반드시 부지런히 뛰여다녀야 한다. 건설대상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뛰여다니지 않으면 어떻게 실적이 나올 수 있겠는가?” 실천 속에서 리덕수가 더듬어낸 체험이다.
연변의 개발과 개방을 두고 리덕수의 머리속에 형성된 구상은 연변은 두만강개발과 장백산개발이란 이 두 가지 개발을 견인차로 몰고 크게 일을 벌려야 한다는 것이였다. 두만강개발에는 당연히 두만강하구의 출항도 포함되여 있었다.
기실 두만강개발에서 가장 시급한 사안은 바로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일이였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은 줄곧 두만강하구의 출항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38년 7월, 일본과 쏘련사이에 ‘장고봉사건’이 터진 이후 쏘련군이 두만강 항로를 봉쇄하면서부터 중국어선들이 다시는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장고봉사건’의 최대 피해국으로 되였다. ‘장고봉사건’ 이전에는 몇십척 심지어 몇백척 되는 중국의 민간 어선들이 두만강 항로를 따라 바다로 나가 일본해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한 두만강하구를 통해 배를 타고 일본, 조선 그리고 중국의 남방 지역과 무역을 벌렸다는 상세한 문자자료도 있었다.
리덕수와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전력을 다해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사업을 추진하여왔는데 그 취지는 매우 명확했다. 첫째, 우리 나라 고유의 국가주권을 회복하여 행사하려는 것이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은 우리 중국의 국가주권인데 우리는 몇십년 동안 줄곧 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력사가 오늘까지 발전해온 이상 주권 행사를 회복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였다. 그저 내버려두고 장기적으로 행사하지 않으면 이 주권은 차츰 상실할 수도 있다. 둘째,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것은 연변 개혁개방의 수요이기도 하였다. 연변에 출항권이 있게 되면 그 의의는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었다. 중국이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 행사하게 되면 주변국가 특히는 주변국가의 경제발전에도 유조하게 되고 전반 동북아시아지역의 개발과 개방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셋째, 보다 장원한 시각에서 내다보면 중국이 두만강하구의 출항권을 회복하는 것은 쏘련(로씨야)과 조선과의 정치, 문화, 경제 합작을 강화하는 수요라고도 말할 수 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기하고 아울러 그 해결책을 탐색해나간 선도자는 바로 리덕수였다. 사실 두만강하구의 출항과 관련된 고찰을 조직하고 있을 때 리덕수는 이미 길림성 부성장(여전히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를 겸임)직을 맡고 있었다. 부성장이라는 직무를 가지고 있었기에 성의 지도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국가와 성의 관련 부문들을 설득하기에도 더욱 유리하였다. 그 당시 리덕수는 문화, 교육, 위생, 과학기술 등 분야를 분담하여 주관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성과학기술위원회와 성과학기술협회도 포함되여 있었다. 리덕수는 이 두개 부문으로 하여금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적극 참여하도록 동원하였다. 아울러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당시 국무위원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던 송건(宋健)의 전푝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리덕수가 송건한테 처음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대해 회보하자 송건은 대뜸 연변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태도를 밝혔다. 그 후 송건은 친히 연변에 와서 현지를 고찰하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권을 회복하려고 뜻과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줄곧 매우 중요한 력량으로 밀어주었다. 물론 국가발전 및 개혁 위원회와 상업부도 이 구상에 매우 적극적이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두개 부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는 외교부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군총참모부였다.
리덕수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고 과학고찰을 진행하던 그 나날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레이고 감개에 젖어들군 한다. 1990년 연변에서 시동을 걸기 시작한 두만강하구의 츙항을 회복하는 사업이 실제 실시단계에 들어서게 되였을 무렵 제일 먼저 외교적 문제와 부딪치게 되였다. 우리의 출항이 이웃나라인 쏘련과 조선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였다. 지방정부에서는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다. “주은래 총리께서는 일찍 ‘외교에는 작은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천만지당한 말씀이였습니다.”
리덕수의 체험담이였다.
무엇보다 직접 외교부에 가서 전기침 부장을 찾는 게 시급하였다.
외교부 판공청의 협조 하에 리덕수는 그 이튿날 오후 3시에 전기침 집무실에 들어서게 되였다. 전기침은 진지한 표정으로 리덕수의 회보를 청취했다. 리덕수는 회보할 때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나라 고유의 주권인데 몇십년 동안 우리 자신이 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으므로 지금 즉각 회복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각별히 힘 주어 말하였다. 국가의 주권과 관련된다는 리덕수의 회보는 곧바로 전기침의 중시를 받게 되였다. 전기침도 두만강하구의 출항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식한듯 리덕수를 보고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고 주문하였다. 전기침이 공간을 마련해주었기에 리덕수는 보다 상세하게 관련 정황들을 회보할 수 있게 되였다. 전기침은 말허리를 자르지 않고 귀를 가다듬은 채 리덕수의 회보를 들었다. 전기침이 리덕수의 회보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흥미를 가지고 이따금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대해 수시로 떠오르는 새로운 문제들을 물으면 리덕수는 아는 만큼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전기침이 제기한 문제들은 광범위하면서도 까근하였다. 리덕수의 회보도 그만큼 깊이 있고도 세분화되였다. 나중에 전기침과 리덕수 두 사람은 격이 없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 만치 가까워졌다. 리덕수는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주정부를 대표하여 전기침한테 길림성 그리고 연변에 와서 시찰할 것을 초청하였다. 전기침은 기꺼이 리덕수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덕수동무! 동무가 방금 소개한 두만강하구의 출항은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저도 무척 끌려들어가면서 정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서 전기침은 외교부가 나서서 쏘련과 조선 이 두 나라에 통보할 것이라고 명확히 태도를 표명했다.
그 이튿날 전기침의 비서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전외장께서는 리성장과 함께 길림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리덕수는 기쁘게 희소식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리덕수는 전기침을 안내하여 장춘에 당도하였다. 그 당시 성당위 서기 하죽강(何竹康)과 성장 왕충우는 리덕수가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크게 치하하였다. 왕충우는 우스개소리처럼 이렇게 말했다.
“덕수는 정말 여간내기가 아닙니다. 외교부장을 다 모셔 왔으니 말입니다.”
전기침은 장춘에 와서 길림성에 세가지를 대답했다. 첫째는 연변에 가서 두만강류역과 바다로 나가는 두만강하구를 현지답사하겠다. 둘째는 외사사업에 관한 길림성의 회보를 청취하겠다. 셋째는 길림성을 떠나기에 앞서 성당위와 성정부 간부들한테 당면의 국제 형세와 우리 나라 외교방침과 외교사업에 대한 보고를 진술하겠다.
리덕수는 전기침을 안내하여 승용차로 장춘에서 연변으로 떠났다. 그 때는 물론 지금처럼 고속도도로가 없었으므로 옛날식 흙모래길을 달려야 했다. 차 안에는 리덕수와 전기침 두 사람 뿐이였다. 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몇년이 지나 리덕수가 북경에 전근되여 임직하게 되면서 때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전기침을 만날 수 있었다. 전기침은 리덕수만 보면 언제나 반색을 하며 늘 먼저 리덕수한테 인사를 건넸다. 전기침은 그 때 이미 국무원 부총리에 정치국 위원이였는데 언제나 옛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떤 때 회의를 하게 되면 전기침은 주석대에 앉고 리덕수는 밑에 앉게 되였는데 전기침은 리덕수가 눈에 띄이면 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후 리덕수는 먼저 전기침을 안내하여 장백산으로 올라갔다. 전기침은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듯 맑디맑은 천지물과 가없이 펼쳐진 망망한 림해를 바라 보면서 깊은 사색에 빠진듯 한동안 아무 말없이 서있었다. 전기침은 전세계를 거의다 돌아보았음에도 장백산의 웅위롭고 아름다운 산천경개에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리덕수한테 여러번 자신의 감개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덕수동무! 이번에 정말 잘 왔습니다. 결코 헛걸음은 하지 않았습니다!”
장백산에서 내려온 후 전기침은 중점적으로 두만강하류 3개 나라 린접지대에 위치한 훈춘의 방천을 고찰하였다. 전기침은 리덕수의 안내 하에 바다로 들어가는 두만강 하구류역과 그 곳의 지리와 지모를 살펴보았다. 전기침은 그 곳을 살펴보면서 리덕수한테 여러가지 문제들도 제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중국과 로씨야가 변경선을 확정하게 된 그 전후의 경위와 관련된 력사적 측면의 문제들이였다. 그리고 우리측과 저쪽 변경지대 주민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량쪽 백성들 사이에 래왕이 있는가, 또 어떤 형식으로 래왕하는가 하는 이러루한 정황들을 일일이 물어보았다.
리덕수는 깊은 감개에 젖은 목소리로 전기침의 물음에 대답했다.
“전부장동지! 저희 연변에서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추진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였음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저희들은 이걸 통해 먼저 리득을 좀 챙겨보려는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개척자이지 향유자가 아니라는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장원한 안목에서 이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기침은 리덕수의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덕수동무! 이 며칠간의 접촉을 통해 저도 동무의 그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에서의 고찰과 리덕수의 상세한 소개를 다 듣고 나서 전기침은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대단히 긍정적인 립장을 보여주었다. 한편 외교적 측면에서는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외교부도 연변에서 추진하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지지한다고 명확히 밝히였다.
전기침은 연변을 떠나기에 앞서 다시한번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기 위한 연변의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국가 차원의 일들은 외교부가 나서서 린접국과 협상하고 조률하겠으니 구체적인 일들은 주당위와 주정부에서 직접 쏘련과 조선의 지방정부와 협상하고 조률해서 해결을 보기 바란다. 만약 그 과정에서 외교부가 나서야 할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곧 외교부가 나서서 해결해줄 것이다.”
전기침은 북경으로 돌아간 후 외교적 도경을 통해 연변에서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쏘련과 조선에 통보했다. 이어 연변에서는 쏘련의 변경대표를 연길에 초청하여 연변의 계획을 통보했다. 조선측은 훈춘시당위 부서기 리춘록(李春禄)이 변경을 건너가 면담하였다. 쏘련측에서나 조선측에서는 우리가 통보를 하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협의서 같은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도 연변이 두만강하구를 통한 출항이 가능해지게 되였다. 그 때 쏘련과 조선은 모두 연변의 계획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문제는 거의다 해결되였으므로 연변에서는 정식 출항을 서두르게 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즉 1990년 5월 28일 아침 5시 30분에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이 방천 주둔부대 운동장에서 성대하고 장중하게 치러졌다. 길림성 부성장 겸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이며 출항회복 총지휘인 리덕수가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에서 동원연설을 하였다. 이어 리덕수는 고찰대 대장인 성과학기술위원회 주임 정사성(丁士晟)한테 고찰대 대기를 넘겨주었다. 외교부, 국가해양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성, 주, 시정부 및 관련 부문 그리고 연변군분구 및 훈춘시 무장부의 대표와 방천촌 군중들이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을 지켜보았다.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이 끝난 다음 6시 정각에 우리의 선박들은 출항을 시작했다. 중국 국기를 나붓기는 9척의 고찰대 선박들은 62명의 고찰대원들을 싣고 ‘훈춘522호’ 선박의 인도 하에 방천 부두를 출발하여 호호탕탕하게 일본해를 향해 나아갔다. 이것은 장엄한 시각이였고 신성한 시각이였으며 중국 인민들이 몇십년 동안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던 시각이였고 중국이 두만강하구에서 우리의 주권 행사를 다시 회복하였음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시각이였다.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을 주최하는 전반 과정에 리덕수의 가슴은 마냥 한없이 설레이였다. 우람찬 목소리로 가지런히 늘어선 9척의 고찰대 선박들을 향해 “출발!”하고 선포할 때 리덕수의 가슴 속에서는 저도 모르게 열정이 굽이쳐올랐다. 배에 앉은 고찰대 대원들 가슴마다에도 감격의 물결이 흘러넘쳤다.
6시 30분 무렵에 선박들은 쏘련(로씨야)과 조선을 련결하는 철도대교를 지나 8시에는 드디어 바다로 들어가는 두만강하구에 이르렀다. 고찰대 대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일망무제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우리가 워낙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파아란 바다물을 살펴보면 어떤 수역은 하도 검푸른빛이여서 더구나 신비스러웠고 그 수심도 무척 깊어보였다. 해면의 파도는 그리 거세지 않았지만 바다 밑에서는 해류의 물살이 거세여 고찰대 선박을 마구 상하로 흔들어놓아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었다. 9척의 고찰대 선박들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의 해면에서 맘껏 달리였고 배에 앉은 고찰대 대원들은 가없이 드넓은 바다에서 설레이는 가슴을 안은 채 들떠있었다. 예정된 해역에 도착한 후 고찰대 대원들은 곧바로 계획 대로 일사분란하게 고찰에 들어갔다. 몇시간 후에 고찰대 선박들은 귀로에 올라 오후 14시 8분에 무사히 우리측 부두에 돌아왔다. 출항회복의 사전작업인 첫번째 고찰임무는 순리롭게 완성되였다.
고찰대 대원들이 돌아와서 바다로 흘러드는 두만강하구에는 물고기가 하도 많아 심지어 저절로 선박 안으로까지 뛰여든 고기를 사진 찍었다고 신나게 들려주었다. 고찰대 선박들이 오전에 나갈 때는 하늘에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였는데 오후에 고찰대 선박들이 돌아오자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치고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내리퍼부어 땅 우엔 짙은 안개가 꽉 덮허버렸다. 이미 뭍으로 돌아온 고찰대 대원들은 오늘은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고 다들 기뻐하였다.
억수로 퍼붓는 비줄기 속에서 리덕수는 더없이 격동된 정서를 가까스로 가라앉히면서 전보문을 작성해나갔다. 그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행사가 성공했다는 희소식을 한시바삐 국무원에 알리고 싶었다. 전보가 발송된 그 날 저녁 국무원에서는 축하문을 보내왔다. 그 이튿날 《인민일보》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이 회복되였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튿날 고찰대 대원들은 모두 연길로 돌아왔다.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연변예술극장에서 성대하고 장중하게 경축대회를 열고 중국인민이 52년 동안이나 중단되였던, 두만강하구로부터 출항하는 이 국가주권을 다시 행사하게 된 경사와 력사적인 중대한 돌파를 경축하였다.
국무원 지도자들은 이번에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한 데 대해 깊은 중시를 돌리였다. 리덕수는 국무원에 와서 전문 이 과정을 회보하였다. 국무원 관련 책임자가 친히 리덕수의 회보를 청취하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게 된 복잡다단하고 우여곡절도 많았던 전후 과정을 다 회보한 다음 리덕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은 장기적인 사업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견지하여야 합니다.”
리덕수는 관련 책임자한테 자신의 구상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해마다 출항하는 것을 견지하여 종당에는 출항의 정상화를 이뤄놓아야 합니다. 그 첫 보조로 우리는 먼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의 항도를 깨끗이 정리하는 게 우선적 절차입니다. 그 다음 훈춘에 부두를 건설하고 뒤이어 해운회사나 어업회사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야 어선이 일년 내내 출항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1938년 ‘장고봉사건’ 이전에는 중국어민들이 모두 두만강하구로부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게 되면 첫째, 이것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우리의 조상들이 물려준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 되고 둘째, 경제적으로 이것은 훈춘 더 나아가 전반 연변의 개발과 개방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길림성의 개발과 개방에도 유익하며 중국과 조선, 쏘련(로씨야), 한국, 일본 등 주변국가들간의 협력과 교류에도 유익할 전망입니다. 눈앞의 가장 가까운 직접적인 경제리익만 감안해도 만약 어민들이 경상적으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돈을 벌 수 있다면 바다로 나가는 적극성이 끓어오를 수 있으므로 민간출항이 정상적인 상태를 형성할 수 있고 관광업도 이끌 수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면이 형성된다면 정치, 군사, 외교 분야 나아가 경제면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회보에서 리덕수는 조선의 라진항을 임대하여 우리의 개발과 개방에 활용하자는 건의도 국무원에 내놓았다.
국무원 책임자는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연변이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기 위해 추진한 사업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면서 “길림성에서는 이 일을 꾸준히 견지해나감으로써 쏘련과 조선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우리의 출항활동을 정상적인 작업으로 받아들이게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당부하였다.
두만강개발의 영향은 날로 커져갔다. 연변에서는 성공적으로 두만강하구의 출항활동을 진행한 다음 뒤이어 북경에서 동북아시아 개발에 관한 소식공개회와 좌담회를 잇따라 소집하였다. 장춘에서 동북아시아 개발에 관한 제1차 국제포럼을 열 때 유엔에서도 관련 관원을 보내왔다. 미국의 10여명 대표단과 함께 일본, 몽골, 로씨야, 한국, 조선 등 11개 나라에서 온 대표가 포럼에 참가했다. 이것은 두만강(동북아시아) 개발에 관한 첫번째로 되는 국제적 포럼이였다. 리덕수가 주최국을 대표하여 주최하고 국무위원 송건이 포럼에서 연설을 발표하였다. 송건이 중국어와 영어 두가지 언어로 한 연설이 어찌나 멋진지 그 연설을 듣고 난 회의 참가가들 모두 정서가 북받치고 힘이 솟구치게 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감회를 털어놓았다는 후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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