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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박규식 편

3.일터에서
2020년 10월 20일 21시 20분  조회:381  추천:0  작성자: 기록
3.일터에서

나는 1960년 8월에 사업에 참가하여 1998년 7월에 퇴직하기까지 옹근 38년간 사업했다.

국가 최고 과학연구기관에서

4년간의 대학생활을 거쳐 나는 1960년 7월에 오옥장 교장의 손도장이 찍힌 졸업장을 받았다. 그때 졸업생들은 통일분배를 실시하였지만 매개 졸업생들은 자기의 일생에 관련되는 졸업분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졸업분배 전에 학부(系)에서 한 달 동안 '하나의 붉은 마음으로 두가지 준비를 하고 기층으로 가고 조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자'는 사상교육이 있었다. 학부의 령도는 매개 학생들을 찾아 개별담화로 졸업생의 사상과 희망을 료해하고 졸업배치표를 학생 자기가 쓰기로 하였다. 학부의 령도는 학생들이 작성한 지원서를 종합적으로 균형을 잡아 매개 학생이 가야하는 곳을 정하고 대회에서 통일적으로 공포하였다.

나와 상해에서 온 동창 서경생(徐更生)이 중국과학연구원 경제연구소 세계경제연구실(1964년 세계경제연구소로 고쳤음, 세계경제 연구실을 간칭으로 세경실<世经室>이라 하겠음)에 배치 받았다. 서경생은 선후로 세계경제연구소 소장, 전국정협 상무위원으로 되였다.

연구소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나의 졸업분배가 반년 전에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당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 외사계통(外事系统)은 졸업 전에 수선 먼저 각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을 선발할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연구소는 비록 중국과학원의 소속 부문이었지만 외사부문에도 속했었다. 때문에 반년 전에 나의 당안을 연구소로 가져간 것이다. 나는 내가 세경실에 선출된 것은 정치적 조건외에 학습성적이 비교적 돌출하고 조선문을 잘 알며 자전을 통해 로씨야와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과학원 세계경제연구실 문 앞에서

중국과학연구원 세경실은 같은 업종 중 국가 최고의 연구기관이며 그때 중국과학원의 원장은 덕망이 높은 곽말약이었고 경제연구소 소장은 저명한 경제학자 손야방(孙冶方)이었다. 이곳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학술적으로 조예가 깊고 우리 나라 학술 권위자들이 대부분 여기에 모여있었다.
세계경제연구에 종사한 동지들은 대부분이 귀국 류학생이다. 그들은 하나의 외국어에 능통하며 그 외도 두세개의 외국어를 장악한 지식분자들이다. 세경실은 사회제도에 따라 조를 나누었는데 나는 사회주의조에 분배받았다. 연구업무를 잘하기 위해 나는 매일 맑스-레닌의 저작을 학습했으며 또 대량의 해외 신문과 론문재료를 읽고 급히 수요될 때를 대비해 찾기 편리하도록 카드를 만들었다. 이곳의 사업은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머리를 써야하지만 비교적 지루하고 무미건조하였다.

내가 세경실에서 첫 번째로 작성한 자료는 통과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사민(史敏)조장이 나에게 재료제목과 원고 바칠 시간을 교대하였다. 나는 내가 장악하고 있는 재료에 대해 정력을 몰두하여 자료를 준비해 사전에 보냈지만 이튿날 연구실 주임 학일진(郝一真)이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당신이 쓴 재료는 불합격이요. 돌아가서 새로 쓰시오. 재목과 완성시간은 변동 없소.”하면서 내 앞에서 나의 원고를 찢어 버렸고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돌아온 나는 조장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조장은 “이 제목은 한 중앙 령도가 제출한 것인데 이런 제목은 론문과 달라 정확성, 시기성과 문자가 간결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내가 준 재료는 경제론문형식으로 쓴 것인데 문장이 길고 의론도 많이 했다. 뚜렷한 일은 중앙 령도가 시간을 할애하며 길고도 터무니 없는 문장을 볼 리 없었다. 나는 조장의 지시대로 새로 쓴 문장은 제때에 바쳐 첫 관을 넘게 되었다.

세경실에서 사업하는 기간 이러한 임무는 거의 절반 일을 차지하였다. 그후 이런 문제를 만나면 모두 요구에 따라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내가 연구실에 쓴 적지 않은 론문은《광명일보》, 《대공보(大公报)》,《경제연구》,《세계지식》,《시사수첩(时事手册)》 등 신문 잡지에 실려 우리 나라의 경제건설과 수많은 독자를 위해 자신의 마땅한 공헌을 했다.
내가 세경실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1961년 8월 24일, 25세에 나는 영광스럽게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것은 나의 정치생활 중 극히 중대한 일이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나의 다년간의 추구와 소원이었고 내가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바라고 바라던 꿈이었다. 그 시대에 지식인들에 대한 당의 정책은 “단결, 교육, 개조”였다. 특히 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 지식인들의 입당은 상당히 엄격했다. 세경실에는 다년간의 적극분자가 있었지만 반우파투쟁후 한명도 발전하지 않아 반우파 투쟁후 나는 세경실에서 처음으로 입당한 사람이다. 지부서기인 왕화염(王火炎, 나의 입당 소개자 중 한 사람)이 나더러 입당지원서를 써라 할 때 나는 정말 생각 밖이었다.

지부 대회에서 나의 입당 지원서는 통과하였지만 두 달이 넘도록 상급 당조직의 비준이 내려오지 않아 나는 답답하고 괴로웠으나 또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급 당조직이 나의 입당지원서를 심사할 때 나의 국적은 중국인가 아니면 한국인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조직에서 대량적인 조사를 거쳐 나의 국적을 밝혔고 지부대회에서 통과한 날짜로 나의 입당을 비준하였다.

3년 경제곤난시기, 도시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경실의 일부분 간부들이 기층으로 내려가 단련하라는 상급의 정신이 있었다. 금방 입당한 나도 그 명단에 올랐다. 나에게도 기층에서 단련하고 시련을 겪을 기회가 주어졌다.

1961년 초겨울, 나와 기관의 몇 동료들은 하북 창려현(河北昌黎县) 인민정부에서 1년 동안 단련을 받았다. 나는 쏘련에서 류학한 양미렴(杨美廉)과 함께 현통계과(县统计科)에 배치 받았다. 과장은 고금명(高金明)이고 모두 6 명이 있었다. 창려는 각종 과일과 해산물이 많이 나지만 곤난한 시기여서 맛도 보지 못 했다. 자주 먹은 것은 과채대(瓜菜带)이고 좀 좋다는 음식은 고구마 떡이지만 공급하는 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인차 배가 꺼져 기아로 허덕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난처한 감을 느꼈다. 판공실에는 계산기와 현대화한 수단이 없어 그 많은 통계수자를 모두 주산으로 튕겨야 했다. 나는 대학에서 통계학을 배운 적이 있어 통계표 설계와 통계수자 분석에는 숙련하지만 수판에는 깜깜 무지였다. 숫자를 통계할 때면 나는 손을 댈 수 없어 한과의 동지들이 수판을 칠 때 나는 숫자만 읽고 통계숫자가 나오면 베껴 쓰거나 통계분석을 하는 것뿐이었다.

1961년 말 현에서는 당년의 경제 형세를 종합분석하고 1962년의 경제 예측을 하라고 했다. 고(高)씨 과장은 사업경험은 풍부하지만 지식수준과 문자수준이 높지 않아 매우 난처해하였다. 고 과장은 나와 양동무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임무를 접수한 우리는 기업과 공사에 깊이 내려가 대량의 조사연구를 하였고, 과에서 장악한 통계숫자로《1961년 창려현 국민경제 형세와 1962년의 전망》이란 제목으로 약 만자를 썼다. 현정부에 보고한 후 현장은 이 보고를 보고 높이 평가하였고 또 하북성 정부에 추천하여 성 지도자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1961년 하북성 사회과학류의 론문 일등상으로 표창과 장려를 받았다. 1년간의 기층단련은 사상상에서 단련과 제고를 받았으며 실천과정에서 사업경험을 쌓았고 업무도 많이 제고되었다.

나는 1960년부터 과학연구기관에 근무했다가 1973년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13년간 사업했다. 그간 경제리론과 지식을 배워 경제현상과 경제를 분석하는 방법을 장악하였고 실천사업기초를 닦았다.

계획전선에서

나의 업무경력 중 길림시계획위원회에서 근무한 시간이 가장 길었다. 1973년 봄부터 1993년 초까지 도합 20년간 사업했기 때문이다. 또한 10년간의 길림시계획위원회(市计委,간결하게 <시계위>라 하겠음) 령도직무를 맡았다.

계획경제시기 계획위원회사업은 아주 중요하며 임무가 중하고 책임도 아주 컸다. 그는 정부의 중요한 기능부문으로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의 종합부문이고 정부의 중요한 참모부였다. 시(市)의 인력, 자금, 외화(外汇), 물자 등 4대균형을 통해 원경계획을 기획하고 계획을 통해 년도원경계획을 실시하는 것이다.

시계위의 업무는 다종다양하여 전시의 경제발전과 사회사업의 모든 방면을 포함한다. 로동자 모집, 학생 모집, 대학과 중등전문학교 졸업생 분배, 제대군인의 배치와 분배, 은행 대출, 시 재정자주기금(财政自筹基金)의 사용과 배치, 공업, 농업과 도시건설, 에너지 건설, 교통운수, 교육, 과학, 문화, 위생사업 등에 대한 배치, 외환의 사용과 배치, 강철, 세멘트, 목재 등 3대건축재료의 생산과 분배 및 유색금속, 페품 금속재료의 분배와 자동차의 갱신… 그리고 공업의 생산과 공급, 판매, 농업과 목축업의 생산과 공급, 판매, 에너지 산품과 광산품의 생산, 공급, 판매, 생육 계획과 인구발전 등이다.

계획은 정부에서 제출하고 인민대표대회에서 심사, 비준하여 계위에서 계획을 각 부문으로 시달한다. 계위가 내린 계획은 지령성적 계획이어서 어떠한 지방과 부문을 막론하고 모두 계획내에서 활동하고 노력하여 계획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으로 보아 계위사업이 얼마나 번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사업의 수요로 계위에는 필요한 기관이 많았고 인원이 많았다. 계위에는 비서, 종합, 공업, 에너지, 농림수(农林水), 기초건설(고정자산 투자), 재무(财贸), 사회사업, 물자, 절약, 투자유치(招商引资, 광고와 선전으로 상가들의 경영을 흡인하고 외지역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일), 국토, 광산, 제3산업 등의 처실(处室) 및 정보센터(信息中心) 등 16개의 부문으로서 인원은 100여명이나 되였다.

계위의 업무를 잘 처리하려면 반드시 당의 방침 정책과 상급 의도를 파악하는 것 외에 하급부문의 상황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상급의 상황이란 주요하게 성과 국가의 계획부문을 말한다. 오직 상급기관의 계획동향을 똑똑히 파악하면 우리 시를 위해 더 많은 항목, 자금과 계획을 쟁취할 수 있다. 나의 노력과 국가계위에서 근무하는 대학교목동반 동창인 왕춘정(王春正, 료양 사람, 선후로 국가계위의 상무부주임, 중앙재경 판공실주임을 담임했음)의 방조로 우리 시는 매년 국가로부터 몇억원의 자금을 얻어왔다. 내가 계위의 령도 직무를 담임한 이래 국가로부터 도합 수십억원의 자금을 지급받아 우리 시의 경제와 사회사업의 발전에 사용했다. 상급 계위부문의 사업을 잘하기 위해 나는 매년 상급기관에서 활동한 시간이 적어도 두달이 넘었다.

아래의 상황이란 시(市)의 상황을 정확히 장악하는 것이다. 시의 상황을 정확히 장악해야만 자신이 있고 계획이 객관에 부합될 수 있다. 나는 자주 기업과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에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계위업무를 잘하려면 성실해야 하며 덤비지 말고 가짜를 조작하지 말고 실사구실하여야 한다. 과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원칙을 견지해야 하며 시기를 다투고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어떤 때는 개별적 령도가 결정했거나 교대한 문제가 합리하지 않고 과학적이 못된다고 판단되면 나는 절대 그의 의사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하여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일하기 힘든 사람(难办事), 로팔판(老八板), 혹은 상급에 대항(抗上)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계위사업의 성질과 특점을 모르고 하는 말이였다. 일단 계위의 실제상황을 알게 되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행동이 옳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계위의 일은 너무 힘이 들어 재간이 있는 사람은 하지 않고 능력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말은 도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리붕, 추가화, 고디 등 령도와 함께

나는 계위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동안, 길림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의〈6.5〉계획과〈7.5〉계획을 주최하여 제정하고 실시하였다. 주요 대상으로는 길림섬유공장(化纤厂)과 반도체공장의 확대와 개조, 화단맥주와 점분공장의 새 대상 건설과 확대, 길림제지공장 개조와 오프세프 신문지 대상의 기술 도입, 소형자동차공장 확충 건설, 기술 도입과 제1자동차공장과의 련합 회담, 분진(奋进)기계, 동풍화공, 영녕선반기수리공장 등 작은 3선 기업의 이사(搬迁)와 계획, 성시 내의 강(江) 구역의 홍수 제방 건설, 대중형 땜의 새 항목 건설과 개조, 기본 농전건설, 길림대가(吉林大街)를 개통하고, 길풍(吉丰) 동선을 건설하고, 길림1중, 5중, 시 실험소학교 등 일부 중소학교의 새 항목 건설과 재건 개조, 서관호텔, 강성호텔 등 관광호텔의 건설, 중심병원, 중서의결합병원 등 병원 확대와 개조… 이런 대상건설은 내가 모두 직접 주체했으나 사업 중에서 예상 치도 않은 각종 곤난을 극복하며 심혈을 기울여서 실현한 것이다. 이런 대상들은 지금도 길림시 경제건설과 사회사업 중에서 여전히 역할을 발휘하고 있음에 기쁘고 위로로 되니 바친 로동과 심혈은 지당한 것이다.

그리고 계위는 시위, 시정부가 제출한 경제정책과 경제조치 등 경제면에서 참모역할을 잘해야 한다. 례하면 권리를 하급기관에 부여해 기업의 생기를 쟁취할 정책, 경제개발구의 건설과 시계획구조 조절, 송화강물을 장춘으로 끌어올리는 등 중대한 경제문제상의 조치는 내가 주도하여 쓴 것이다. 그 외에 정부에서 맡긴 응급사무도 제때에 완성하였다.

1987년 여름, 길림이 큰 홍수로 풍만수력발전소는 긴급경보를 울렸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인 리붕(李鹏)동지가 길림으로 시찰온다는 소식은 그가 출발하기 전날에 통지한 것이다. 회보보고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시 간부와 명필들이 서관호텔에 모여 바삐 서둘렀다. 그러나 경제문제를 작성할 때 난처했다. 리붕동지가 도착하려던 날 새벽 3시에 나는 집에서 서관호텔로 불려갔다. 나는 호텔의 메모지(便笺)로 경제문제에 대한 보고요점을 완성했다. 오광재 시장이 내가 쓴 보고의 요점대로 리붕 동지에게 보고했을 때 부총리의 긍정을 받았다.

1990년 가을, 시인민대표대회에서는 오광재 시장의 경제에 관련된 문제를 들으려 했다. 보고 작성 임무가 계위에 떨어졌다. 당시 나는 출장을 가서 기관에 있지 않아 집에 있는 동지가 보고원고를 작성하였다. 나는 돌아와 정부상무회의에서 원고대로 보고하였다. 이 원고는 주제에 어긋나서 전혀 쓸 수 없었으나 시인대가 요구하는 시간은 하루 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광재 시장은 조바심으로 랭정하지 못하였다. 나의 회보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오시장은 듣기 거북한 말로 나에게 퍼부었다. 방금 북경에서 돌아와 아무런 상황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했다. 회의에서 오시장이 한마디 하면 나도 한마디로 대꾸하다 화가 나서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날 시정부상무회의는 그만 아무런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말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 오시장은 전화로 오후 1시에 그의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내가 제때에 도착하니 오시장은 사무실 입구에서 친절하게 나를 마중하였고 또 나의 어깨를 도닥이며 "오전에는 너무 랭정하지 못해 죄송하오. 마음에 담아두지 마오.” 그의 주동적인 사과에 나의 화는 반으로 가라앉았고 나도 나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오시장은 회보재료의 전후 사연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재료는 인대상무위원회에서 제출한 제목으로서 인대상무위원회가 회보를 받은 기초하에 심사, 결의를 거쳐야 하는 매우 엄숙한 일이었다. 약간의 착오도 허용되지 않는다. 임무는 중요하지만 원고를 바칠 시간이 촉박했다. 그리고 이 재료는 계위에서만 완성할 수 있고 다른 부문에서는 아무른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오시장이 조급하고도 애타하는 심정을 보고 그 자리에서 오시장에게 질을 보증하면서 제 시간에 임무를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시장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임무를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담화가 끝난 후, 나는 오후부터 집에서 재료를 쓰기에 서둘러 밤새도록 재료를 작성하여 이튿날 출근하여 오시장에게 재료를 바쳤다. 오시장은 자세히 원고를 보고 전화로 “재료를 참 잘 썼소, 한마디도 보충하지 않고 수개하지도 않았소. 이미 인쇄공장에 보냈소.” 우리 둘은 전화에서 즐겁고 통쾌하게 크게 웃었다. 그때 나의 웃음은 나의 심혈로 이루어진 성과에 대한 자호감과 긍지였지만 대방의 웃음은 나에 대한 리해와 믿음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이 재료는 내가 계위에서 사업한 기간에 걸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원만하고 심혈을 기울인 일이었다. 이런 긴급한 임무는 경상적이어서 나의 사상은 언제나 전쟁준비상태에 처해 있었고 고도의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계위 령도로 부임한 것은 어느 정도로 희극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급의 지시에 따르면 1983년 상반기에 우리 시에서 정치체제 개혁을 실시하고 간부의 4화(四化)정책을 실행하며 자격과 서열을 따져 등급, 대우 등의 고저를 결정하는 일을 타파하여 능력에 따라 간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내가 계위 부주임으로 부임되였고, 계위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가 계위 령도로 될 수 있는 것은 당시 계위 당조 한부(韩斧) 주임의 역할이 컸다. 한부 주임은 항일 간부로서 20세에 퇀장, 28세에 심양군구 공군작전부장 대령이었다. 그는 애매한 사건으로 제대하여 길림에서 사업하였다. 정책을 락실한 후 1983년에 시정협 부주석으로 임명된 덕망이 높은 혁명가였다.
1981년 계위당조에서 나를 부처장으로 임명하기로 상급에 올렸으나 초령관계로 시위는(계위는 큰 부문으로 처장은 반드시 시당위상무위원회에서 심사하고 비준함) 비준하지 않았다. 1983년, 47세인 나는 시계위 부주임으로 제발할 년령을 초과하였다. 현(퇀)급 간부 제발의 한계 나이는 45세다. 처장을 거치지 않고 나이가 넘는 사람을 제발한다면 자연적으로 심사와 평가가 엄격하였다. 나를 평가하기 위해 시평가조는 한달기간에 계위에 3진 3출하였으며 내가 사업했던 북경에 가서 조사도 하였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시위 제1서기 리진강과 제2서기 원추(原秋)는 단독적으로 나와 담화하면서 문제를 제출하고 나의 견해를 료해했다. 담화과정에 우리는 부동한 의견에 대해 론쟁을 하였고 어떤 문제에 한해서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쟁론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지식분자와 친구를 사귄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를 평가하고 면접시험을 하는 것으로 마지막 최후의 평가였다. 누가 말하 듯이 정말로 사위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나는 로켓식으로 승진한 간부이기에 기관 내부에서 경력이 깊고 경험이 풍부한 로동지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얕잡아 보았으며 관망하는 사람, 라태한 사람, 지어 나를 실각시키려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난제를 만들어 웃음거리를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리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 없었다. 나는 줄곧 공평하고도 내심적으로 청백하며 사업을 참답게 하는 것을 나의 인간도덕원칙으로 삼아왔기에 조금도 꿀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업 중에서 나는 나를 반대했거나 지지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대했으며 간부를 임명하는 기준을 견지하고 원칙을 견지했다. 특히 감정적인 색채를 뒤섞지 않았고 공정하게 처사했다. 그리고 대외적인 일이나 계획 배치, 대상과 자금의 배치를 과학적으로 공평을 견지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다.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청렴결백에 주의를 돌렸다.

계위는 실권부문이다. 특히 가격에 대해 두가지 제도를 병행하는 시기여서(双轨) 만약 내가 조그마한 암시가 있었다면 정책에 어긋나지 않고도 빨리 “치부”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사업을 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장춘을 두번이나 뛰였으며(그때 한 번 가는데 기차가 빨라도 2시간이 넘게 소요되였다) 북대하에 휴양할 기회도 포기하였고, 완전한 공휴일과 명절도 쉰 적이 없었다. 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노는 데만 정신을 돌리는 사람을 멸시한다. 오직 사업에 열중하고 성적을 내야만 상급을 대할 면목이 있으며 동지들에게도 떳떳이 설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나의 이 선택은 옳았으며 상급과 동지들의 믿음과 존중을 받았다. 령도의 틀로, 권력으로 사람들을 굴복시켜 권위를 가지려 한다면 절대 사람을 탄복시킬 수 없고 오래 갈 수도 없다. 이는 지도간부가 드팀없이 견지해야 할 원칙이다.

총적으로 내가 계위에서 일한 기간에 비록 힘은 들었지만 마음은 유쾌하고 순리로웠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과 난감한 일도 있었다. 내가 계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문화대혁명에서 표현이 “좋지 않다”는 아주 나쁘게 쓴 감정(鉴定)으로 몇달 동안 당비만 내고 당의 조직생활에는 참여시키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1976 년에 주총리의 “유언”을 추궁하는 중점심사대상이었고 시공안국에 가서 “자수”도 하였고 기관지부 서기가 나를 찾아 담화를 하며 나의 당적을 제명하겠다는 등 이는 특수한 년대에 발생한 불쾌한 일이지만 내가 20년간 계위 사업 중 자그마한 에피소드(插曲)일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계획위원회에의 사업이 아직도 나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며 잊혀지지 않고 계위의 모든 동료들도 나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계위의 매 한가지의 일을 회억하면 오늘까지도 회상할 가치가 있다.

지방기관에서

내가 시계위에서 20년 사업한 후 지방 최고 권력기관인 길림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사업을 했다. 이곳은 1993년 1 월부터 1998년까지 5년간 나의 사업 경력 중 마지막이자 가장 짧은 기관이였다. 시인민대표대회 11차 제1회 전원회의 차액(差额) 투표에서 나는 높은 표수로 시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선거되었다. 주요 원인은 내가 시계위 주임의 신분으로 매년 인민대표대회에서 길림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계획보고를 하여 많은 대표들이 나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어 어느 정도로 인지가 있었다는 것이였다고 보아진다.



시인대대표대회에서


중국인대 고수련 부주임과 함께

시인대상무위원회는 시인민대표대회가 페회기간에 그 기능을 행사하는 지방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그 곳의 사업방법은 행정기관과 달라 명령을 내려 직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1부 2원” 즉 정부, 검찰원과 법원에 대한 감독과 지방법규(法规)를 제정하고, “1부 2원”의 구성인원에 대해 인사면제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한다.

인대(人大)상무위원회의 일상업무는 주로 각 전문위원회를 통해 실현한다. 전문위원회에는 내무사법(内务司法)위원회, 재정경제위원회, 농업위원회, 도시건설환경위원회, 교육과학문화(教科文)위원회, 민족교무외사(民侨外)위원회와 인사대표선거위원회 등이 있다. 나는 인대상무위원회에서 도시건설환경보호전문위원회와 민족교무외사전문위원회를 맡았다.

몇년간, 나는 인대상무위원회에서 지방법률규칙을 제정하고 “1부 2원”에 대해 법적 감독을 실시했다.

지방법률규칙을 제정하는 것은 시인대상무위원회의 중요한 기능이고 극히 중요한 일이다.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시장경제가 지속적으로 개선될 때 특히 박절하고 중요하다. 지방의 법률규칙을 세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시인대상무위원회의 립법(立法)계획에 따라 시인대전문위원회와 정부 관련부문이 공동립법을 진행하기 전의 각종 조사연구, 그리고 선진지역에 가서 고찰하며 정부가 이미 내놓은 행정규칙과 각종 자료를 열독하고 참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상에서 정부 관련 부문에서 법규(法规) 초안을 작성하고 정부에서 심사한 뒤 정부의 명분으로 인대상무위원회에 립법을 제기한다.

인대상무위원회는 정부의 요청을 받고 수선 전문위원회가 관련되는 전문가와 학자, 정부 관련부문이 참여하는 전문위원회의 첫 심의(初审)를 진행한다. 첫 심의를 진행할 때 전문위원회를 주관하는 인대 상무위원회의 부주임이 참석하여 참석자들과 함께 심의(审议)한다. 그후 관련 전문위원회는 인대상무위원회에 첫 심의한 법규와 상무위원회 분관 부주임의 설명을 심의해 줄 것을 제출한다.

인대상무위원회는 전체 인대상무위원이 참석한 상무위원회에서 심의를 하고 투표하여 통과한 다음 성인대상무위원회에서 비준을 받아 실시한다. 보다시피 립법절차는 치밀하고 과학적이다. 지방의 법규의 립법을 위해 나는 경제특구와 경제가 발전한 연해지역을 고찰하여 보귀한 경험을 얻었다. 동시에 관련되는 부문과 기업에 가서 조사하였으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시장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몇년간 내가 주장하여 새롭게 제정했거나 수개를 거친 지방성 법규가 13부에 달하여 해마다 평균 두부가 넘는다. 주요한 법규로는 도시전망계획(城市规划), 시정설비 관리, 열공급(供热)관리, 파가이주(拆迁) 및 관리, 환경보호, 원림록화 및 시정 환경위생관리 등이다. 이런 지방적 법규는 정부가 법적 행정에 따라 우리 시의 도시건설과 법적 관리를 궤도에 올려 놓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 나는 기타 전문위원회가 인대상무위원회에게 심의를 신청하여 각종 지방성 법규를 제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응분의 작용을 발휘하였다.

“1부 2원”의 법적 감독은 주요하게 두 가지 방면에서 체현된다. 하나는 매년 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의 정부사업보고를 심의, 비준하고, 계획과 재정부문의 보고를 심의, 비준하며, 검찰원, 법원의 업무 보고를 심의하고 이에 상응되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 인대대표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법규를 집행하는 검사조를 구성하여 “1부 2원”에 대해 법적으로 법규를 실행한 상황을 검사하여 법에 의거해 위법하면 반드시 다스려 법률의 존엄과 권위를 지켰다.

몇년간 내가 참가하여 법규를 집행하고 검사한 방면은 도시전망계획, 환경보호, 파가이주(拆迁), 도시환경위생, 관광과 종교 등 계렬적인 법률과 법규들로서 유력하게 "1부 2원"의 법률과 법규로 행정 수준을 높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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