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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3)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3)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
2009년 8월4일 나는 북경을 떠나 연변으로 갔다. 24일에 연변을 떠나기까지 20여일간 체류하면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고 연변각지를 여행했다.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한 후 연변으로 가끔 돌아갔어도 번마다 체류기간이 짧았기에 고향에 가서도 가고싶은 곳을 다 가지못하고 총총히 떠났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연변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연변의 변화도 컸다. 외국에 오래간 있다가 연변으로 가보면 몇가지 큰 변화가 눈에 띄운다.
수선 어느 도시에나 아파트가 많이 늘어났다. 이제는 어지간하면 아파트에서 사는 시대를 연변사람들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연변에서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아파트를 많이 산다고 들었다.
그 다음 도로가 좋아진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연변의 주요도로가 거의 다 아스팔트나 콩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우고 고속도로가 통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내가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면 언제나 제일 큰 변화를 느끼는것이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 고속도로망이 전국에 널리고 고속철도도 보급돼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차로 연변각지를 달리면서 느낀것이 국도에 콩크리트도로가 쾌 많은데 이런 길에서는 차가 상하로 털렁거리기에 승객들에게는 편하게 승차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콩크리트도로가 보수비용이 적게 들어 도로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경제적이겠지만 승객을 생각하면 아스팔트가 낫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연변의 큰 변화가 자가용차가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연변의 도시에서는 마이카시대가 급속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을 보니 아마 거의 절반은 마이카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의 산업화국가들에서는 마이카가 오래전에 보급되었기에 신선한 얘기가 아니지만 마이카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큰 변화가운데의 하나이다.
연변각지를 다녀보면 산림이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어 민둥산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들이 울창한 수림으로 덮어있어 좋았다. 듣자니 이제는 산림보호를 위하여 벽돌공장도 운영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연변지역만큼 전지역에 수림이 울창한
곳도 중국에서는 적기에 자신의 고향이 자랑스러웠다. 친척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에 들어있기에 찾아가봤는데 자녀가 없어 의지할 수 없는 노인들을 정부가 무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각지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이 설치되어 있다한다. 이런면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정책이 돋보였다.
그러나 연변도 잘 살펴보면 어두운 그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농촌마다 폐가가 눈에 띄고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줄어드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떠나면서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부재했다. 일본이나 한국을 봐도 산업화과정에서 이농(離農)현상은 다들 생기는 것이지만 문제는 소수민족지역에서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 민족의 공동체기반이 무너져내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연변내의 도시에서도 조선족이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조선족식당에 가봐도 젊은 조선족종업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체 젊은 사람들은 연변에 남아있지 않고 직장을 외지에 나가서 찾는 것이 이제는 사회의 추세처럼 되었다. 그러다나니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노인이나 어린이들만이라는 말이 너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백두산관광을 가면서 연길시 주변의 농촌을 통과했는데 한족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여기의 마을들에는 원래 조선족들이 살았는데 한국에 돈벌러 나가면서 이제는 별로 남아있지도 않다고 했는데 이것이 다른 민족의 눈으로 본 연변의 현실이었다. 원래는 외지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고향을 잘 발전시키고 고향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안착하여 사는 것이 이상적인데 오늘날의 조선족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유골마저 날려보내는 세태에 연변조선족의 애향심이 장구하게 남아있을련지. 부모의 산소라도 남아있어야 고향도 찾아가고 싶고 애착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의 형님집에 거주하면서 아침마다 연변텔레비의 조선말채널을 시청했는데 7시가 되면 아리랑곡이 흘러나와 그런때만큼 반가운 것이 없었다. 또 아침이면 형님네 아파트 밖에서 ‘두비(두부) 삽소’하는 고향 아줌마의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적인 것을 누리면서 사는 삶, 이것인즉 연변에 사는 조선족의 특권이고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연변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연변을 떠나기 직전 모아산(帽兒山)정상에 올라 고향땅을 바라봤다. 급속하게 현대도시로 탈바꿈해가는 연길, 백사장을 적시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 사과배 향기 풍기는 용정의 만무(萬畝)과원, 산마다 일직자로 늘어선 낙엽송과 솔나무, 다시 보니 고향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가 너무 제 고향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연변을 떠나는 날 연길공항은 몹씨 붐볐다. 나이든 조선족 분들이 짐을 가득 챙겨가지고 한국으로 돈벌이 떠나고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배웅을 하고 있었다. 한번 나가면 몇년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걸음이어서 가족 사이의 작별이 애틋했다. 한세기 이전에 찢어지듯한 가난과 망국의 설음을 안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오늘도 또 무거운 짐을 끌고 살길을 찾아 고국으로 향한다. 조선족에게 아리랑고개는 길고도 또 길다.
두만강과 백두산 그리고 용정의 유적
연변에서 두만강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용정시 삼합(三合)에서 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인적이 드문 구간을 통과하여 개산툰(開山屯)까지 달려봤다. 두만강폭이 너르지 않아 맞은편의 조선의 마을이 훤히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고 미역감는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두만강변에 가끔 나타나는 중국측의 마을도 대체 조선족마을이기에 서로 너무 비슷하여 국경이라는 의식이 없이 양측을 바라보면 똑같은 민족이 하나의 강을 사이두고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 개산툰에서 도문(圖們) 사이를 차로 달렸는데 이 구간은 두만강 양안의 산들이 험준하고 그 때문에 경작지가 많지 않았다. 조선의 산에는 최고지도자를 칭송하는 문구가 가끔 보이고 역전마다 김일성주석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이 강건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중국에서 60,70년대에 있던 지도자에 대한 극단적인 개인숭
배가 아직도 조선에 남아있는 것이 서글펐다. 중국측의 국경도시인 도문에서는 두만강변에 관광객이 많이 모이고 두만강에 들어가 배놀이도 많이 하는데 조선쪽은 조용하고 나다니는 사람도 그리 보이지 않았다.
도문에서 다시 차로 두만강을 따라 두만강의 최하류인 방천(防川)까지 갔다. 훈춘(琿春)시가지를 지나면서 보니 소문대로 훈춘시 개발이 많이 진척되어 연변의 도시중에서는 연길이외에 제일 번화한 모습이었다. 훈춘시의 권하(圈河)세관을 통하여 조선쪽으로 화물트럭이 건너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길이 600킬로에 이르는 두만강의 많은 구간을 답사하면서 연변의 조선족이 제 모국과 진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중국측도 대체 조선족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어 양측의 차이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이민한지 100여년이 지나도 언어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이 변화가 생기지 않은 근본원인이 바로 모국과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두만강 대안의 조선쪽이 너무 조용하고 활기가 보이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 쪽도 이제는 천지개벽이 일어나 두만강지역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떠오르는 날도 멀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연변에 체류하는 사이 백두산에도 두번 다녀왔다. 운 좋게 처음 갔을 때는 천지가 똑똑히 보였는데 두번째 가니 백두산 정상에 안개가 진하게 끼어 천지가 전혀 보일질 않았다. 날 개인 날 백두산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시야가 확 트이는 가운데 검푸른 수해(樹海)가 아득하게 펼쳐지고 연변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바로 이런 기상을 보면서 키워가는 것이겠다 생각됐다. 백두산을 관광하면서 보니 한글간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7년에 처음 백두산에 갔을 때는 한글간판이 꽤 보이던 생각이 났다. 들으라니 2005년에 백두산(장백산)관할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移管)되면서 한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관이 연변의 관광산업에 불리했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백두산관광을 활성화시켰는지 상세한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런나 중국의 조선족들이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경내에 있던 백두산에서 행정관리권의 이관에 따라 한글이 사라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용정에 새로 복원된 대성(大成)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도 방문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복원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자기의 고향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가슴뿌듯했다. 실지 연변지역은 오래동안 동북아시아의 변방이면서도 잘 알고 보면 유서가 깊은 곳이다. 발해왕국이 여기서 건국됐고, 조선왕조, 청나라의 시조(始祖)들이 여기서 일어섰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의민족의 투혼과 자존이 마지막까지 지켜진 곳도 여기이다.
남북의 만남의 장소
연길에서 체류하면서 연변대학교 근처에 있는 호텔앞을 지나는데 한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길시의 어느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줄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조선(북조선)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종업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조선식당으로 여러번 찾아갔다. 손님은 한국사람이 많은 편이고 그리 붐비는 식당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반식당에 비하면 종업원들의 태도가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했다. 의아스러운 것은 그 식당 입구에 일본식 등롱(燈籠)이 한줄로 쭉 걸려있었는데 이런 인터리어는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궁금했다. 혹시 일본식 등롱인 걸 모르고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에는 조선에서 경영하는 식당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어디나 한국손님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연길의 서점에 가보면 한국과 조선의 서적, 영상물, 음반들을 한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사실 해외에서 남북의 출판물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런면에서 연변에는 남북의 정보가 다 모이고 여러형태로 남북의 교류가 여기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10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학술희의에 참가했는데 이 회의는 연변대학교와 한국과 조선의 학술기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고 남북양측에서 학자들이 많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역시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남북을 이어놓는 가교적 역할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1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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