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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5)
나의 체험을 통해 본 일본과 미국의 조선족
전체 인구가200만명 미만인 중국의 조선족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전통적인 삶의 터전인 동북지역을 떠나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지역, 그리고 해외로 이주하는 현상이 뚜렸하게 나타났다. 중국속에서 대도시나 연해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족이 수십만명이 되고 모국인 한국에 30여만명이 나가있다는 것이 통계자료로 확인된다. 그외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 많이 나가있는데 각각 수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외의 다른 해외에서 조선족의 인구를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중국여권에 조선족이라는 민족명까지 표시하지 않기에 해외에 나가있는 조선족의 정확인 수자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추산에 의하면 일본과 미국에는 틀림없이 각각 수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일본과 미국에서 체험한데 의하면, 일본의 상당히 많은 대학교나 일본어학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볼 수있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국적상으로는 중국인이지만 조선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민족집단의 존재를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일본사람들은 대체 알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본처럼 조선족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뉴욕과 LA의 코리아타운에 가보면 많은 조선족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 나가 있는 조선족들은 한국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고 조사와 연구가 진척되기에 비교적 실체가 파악되고 있다. 일본의 조선족에 대해서는 《조선족연구학회》가 설립되고 《천지협회》《쉼터》같은 조선족의 단체와 인터넷사이트가 있기에 대체적인 상황은 알 수 있다. 미국에서의 조선족은 이주의 역사가 짧고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았기에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행히 미국의 여러지역에서 조선족의 단체가 성립되고 있고, 《조선투데이》라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사이트가 있기에 이 사이트에 조선족의 활동소식이나 조선족의 인물정보,업소정보같은 것이 나와있어 어느 정도 미국의 조선족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나는 1988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에 21년간 거주하면서 수많은 조선족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도쿄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단체의 활동에 많이 참가했다. 그러기에 일본에서의 조선족의 활동에 대해서는 생생한 체험이 많다. 2009년 8월부터 미국에 와서 서부의 버클리와 동부의 보스턴에 각각 1년씩 거주하면서 미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과도 접촉을 가지게 되고《조선투데이》라는 인터넷사이트를 통하여 조선족의 활동을 관찰하고 뉴욕의 프러싱과 맨하탄의 코리아타운에 찾아가서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에도 들러봤다.
이 글에서 나는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신의 실제체험과 관찰,해외에서의 조선족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속의 조선족
나는 1988년 10월에 일본에 유학가서 처음 1년반을 도쿄외곽에 있는 쓰쿠바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다. 그 때 쓰쿠바대학에는 4, 5명 정도의 조선족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신기스럽게도 서로 누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재빨리 확인하게 되고 같이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해외에 나오게 되면 조선족 사이의 연대감이 강화되어 서로 모르던 사이에도 인츰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1990년4월부터 도쿄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도쿄에 이주했는데 거기서 정말이지 많은 조선족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학자모임이 결성되고 정기적으로 친목적인 활동을 하고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고 견학회도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후에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라고 명칭을 바꾸어 지금까지 활동을 해오고 있다. 나로 말하면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이 1990년 여름에 30여명이 같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모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아침녁에 부산항에 도착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하고 모국체험을 깊이 했다. 그 때 같이 한모임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들중에서 중국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인구가 그리 많이 않은 조선족에 인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됐다.
나는 1998년부터 도쿄에서 설립된 조선족단체인 《천지클럽》(후에《천지협회》로 이름이 봐뀌었다)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이 모임은 1995년에 도쿄의 중국 유학생숙사에서 서로 알게 된 조선족 유학생들이 동족모임으로 발족한 것인데 98년부터 조선족의 공식단체를 지향하면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교류, 협력, 공동발전>을 슬로건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교류회, 포럼, 조선족체육대회, 송년회, 댄스파티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한동안《천지인문》이라는 잡지도 간행했다. 그리고 천지장학금을 설립하여 중국내의 조선족청소년지원사업을 진행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젋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대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1999년에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중국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고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쉼터》를 비롯하여 조선족 인터넷사이트가 여러개 개설되고 조선족여성회, 조선족축구동호회 등 단체가 새로 많이 생겨났고, 조선족에 관한 중요한 행사를 할 때는 여러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내가 일본에서 20여년 사이에 관찰해본데 의하면, 일본에 중국 조선족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인데 초기에는 중국정부에서 파견하는 학자나 유학생, 주재원들이었고 수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90년대 부터 조선족 유학생, 학자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90년부 후반부터 일본어학원에 조선족 어학연수생이 많이 오게되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의 인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눈에 뛰게 보이는 변화가 일본내에서의 조선족의 정착이 가속화되고 영주권이나 일본시민권을 취득하는 조선족이 많이 늘어난 점이다. 90년대까지만도 일본의 조선족은 유학생, 학자가 중심이 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회사에 취직하고 자체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아주 많아졌다. 도쿄에서 나와 같이 어울리던 조선족중에서 건축설계, IT, 무역업으로 사업에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쿄에는 조선족이 경영하는 식당도 이제는 적지 않고 그런 식당에 가면 조선족들이 모여서 회식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일본의 조선족들이 현재 비교적 많이 경영하는 사업이 미용원이거나 마사지업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족이 정착하기 쉬운 점은 수선 일본어의 언어습득이 빨라서 언어장애가 적기때문이다. 거기다 일본이 중국과 한국과 관계가 밀접하기에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가 다 통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에 일본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폭이 너르다. 그 때문에 일본의 조선족은 이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데도 정착을 빨리하고 있다. 미국에 이주한 중국의 조선족이 대체 재미한국인들과 교류가 많고 한인사회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은데 비하면 일본의 조선족은 일본사회에서의 자체적인 적응이 가능하기에 재일한국인들과의 교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조선족
나는 2009년8월에 미국에 와서도 여러 곳에서 조선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 1년간 UC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주변의 한국식당에 가니 주방에서 일하는 조선족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온지 10년 정도가 되고 중국에 있는 가족과 갈라져 있는 고생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미국에서 불법적인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어 마음놓고 사회에 나가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을 만나러 중국에도 가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는 듯 했다. 중국에서는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미국에 와서 막노동으로 살아간다는 후회스러운 얘기도 했다. 그 분의 얘기에 의하면 주변에 한국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후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나갔더니 거기에도 여러명의 조선족이 교회에 나오고 있었다. 한 조선족 가족은 부부가 중국에서 북경대학교의 박사,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을 하여 버클리에 정착했던 것이다. 슬하에 딸애를 둘 키우고 있었는데 애들은 영어가 완벽하고 거의다 미국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부부는 버클리의 고급주택가에서 주택을 새로 구입하였는데 집이 비교적 크기에 한인교회의 교우들의 모임에는 그 집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교회의 교우들중에서 제일 큰 집에 살고 있다고 다들 부러워했다. 이 가족은 미국에서 영주권도 취득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10여년만에 이 정도로 정착을 이루었으니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이 가족의 부부가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는 점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장했는데도 이미 중국에서 기독교신자가 되고 미국에 와서도 빠짐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뉴욕에 있을 때에는 차를 여러번 갈아타면서 교회에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 교회에는 재미한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한 조선족 여성도 있었는데 그 분은 한국에 유학갔다가 다시 미국에 어학연수와서 현재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교회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비교적 미국사회에 정착했고 교회활동을 통하여 한인사회와 관계를 깊게 맺고 있었다.
2010년 7월에 미국 서부의 버클리에서 동부의 보스턴에 옮겨오면서 여기서도 여러 조선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연구활동을 하게 된 관계로 자연히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자로 있는 조선족들과의 접촉이 이어졌다. 알고보니 하버드대학교에는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자들이 여러명 있었다. 그들과 같이 여러번 친목모임을 하면서 알아보니 중국에서 일본과 한국에 유학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연구로 왔던 것이다. 《조선투데이》라는 미국내의 조선족 사이트의 인물소개를 보아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지식인들을 대부분 이공계열이고 의학연구자가 특히 많다. 반면에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는 아주 드물다.
일본에서는 대학교 교수로 취직해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은데 미국에 와 보니 보통 포스터닥을 수년이상씩 하는 경우가 많고 정규교수직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미국에서 교수로 취직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나는《조선투데이》라는 미국내의 조선족 인터넷사이트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족의 정보를 자주 알아보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조선족의 인물소개, 업소소개, 단체활동소식이 꽤 나와있다. 인물소개에는 학자, 가수, 연주자, 목사, 사업가 등 소개가 보이는데 미군에 가입하여 2005년에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조선족 여성의 소개도 나와있어 놀라왔다. 미군에 가입했으면 이미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을 것이니 이런 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족과 다른 이민사회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한 조선족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업소소개를 보면 식당, 네일가게, 미용원, 싸우나, 철공소, 택시회사, 여행사, 한의원 등이 보이는데 서비스업종이 많고 대체 재미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많다. 한의원을 경영하는 분이 중국 연변대학교에 기금을 낸 기사도 나왔는데 그만큼 사업에서 성공을 이루는 분들이 나오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내에는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 《전미조선족동포회》《뉴욕조선족동포회》《가주조선족연합회》《펜실바니아조선족동포회》《워싱턴조선족총연합회》《싸이판조선족협회》《재미연변대학학우회》등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족들이 미국에 이주한 기간이 일본에 이주한 조선족들보다 짧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별로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는데는 더 열성스러워보인다. 이것은 언어의 장벽이 높고 사회관습이 많이 다른 사회에서 단체활동의 필요성이 그만큼 생기기 때문이고 이민사회인 미국에서는 각 민족별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경향이 강한 것과 관계이 있다.
금년 3월에 나는 뉴욕에서 조선족이 약 5천명이 모여산다고 하는 프러싱에 찾아가봤다. 프러싱은 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이민들이 많이 모여와서 미국내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을 형성했던 곳인데 9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에서 이민들이 많이 몰려오면서 코리안타운이 차이나타운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한국인들의 상가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주변의 코리아타운에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몰려있었는데 연변식식당, 꼬치구이집 등에는 조선족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프러싱에서 보면 조선족들은 코리아타운에서 일하거나 코리아타운에 가게를 차려놓은 경우가 많아 보이고 일부가 차우나타운에서 일하거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내의 조선족은 미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부터 해외한국인들의 네트워크를 많이 이용하고, 미국에 와서도 한국인들의 업소에서 일하거나 한국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중국에서 성장했고 중국어가 잘 통하기에 미국의 중국인사회와 접촉하고 활동반경을 넓혀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미국에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인 것 같고 아직 미국내에서의 기반이 아주 강한 것이 아닌 것 같다. 합법적인 신분이 없이 불법체류자로 있는 조선족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필경 미국은 이민이 많이 모여오는 사회이고 조선족의 해외진출의 의지가 강하기에 금후에도 미국에서 조선족의 수자는 계속 늘어날 것 같고, 미국에서의 조선족의 정착도 빨리 진행될 것 같다.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서 조선족은 유난히 생명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디에 나가도 적응을 잘 하는편이고 뿌리를 잘 내린다. 미국같이 산설고 물설고 언어장애가 큰 사회에 와서 단기간에 정착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감탄하고 싶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국인 가게에서 중국의 조선족을 화제로 얘기를 했는데 가게주인이 중국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고보면 세상 어디에 가서 살 수 없겠는가 하면서 조선족의 생명력을 높이 평가했다. 잘 생각해보면 조선족은 진짜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2011년4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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