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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왜 서민들은 무술변법혁신파를 '반역자'로 알았나
2016년 09월 18일 20시 01분  조회:3364  추천:18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1)

왜 서민들은 무술변법혁신파를   “반역자”로 알았나

김문학

  
  력사를 해독할 때 우리는 왕왕 이런 굳어진 버릇이 있다. 즉 우리 현대인의 사유와 시각을 투영시켜 백년전의 우리의 선조를 바라보고 그것으로써 력사를 해석하며 착각에 빠지고있는것이다.

  이를테면 100년전의 조선사회나 중국(청국)사회가 지금같이 밝았고 좋았다는 막연한 인식을 갖고있으며 “이런 좋은 사회를 그 어떤 적 또는 반동파가 암흑으로 내몰고갔다”는 “암흑사관”.

그런데 아이러니컬한것은 이런 “암흑사관”은 단순히 우리 현대인 자신의 막연하고 근거없는 유치한 환상일뿐 력사를 바라보는데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시선을 흐리게 한다.

  이제 필자는 중국 근대의 처절했던 백일유신변법 혁명가에 대한 그때 당시 일반 백성들의 인식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왜냐면 당시 백성들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있는것과는 달리 강유위, 량계초나 “6군자”에 대한 인식은 전면 부정적이였기때문이다.

  북경의 선무문외(宣武門外) 차이스커우(菜市口). 근대 중국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명소이다. 금년 8월 북경 방문시 들른 차이스커우에서 필자는 살기등등한 피비린내를 분명 맡을수 있었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 이 자리에는 분명 음침하고 가슴을 억누르는 살기가 맴돌고있었다.

  1898년 9월 28일이다. 바로 이곳에서 무술변법의 혁명가들인 담사동을 위시로 양예, 임욱, 양심수, 류광제, 김광인 “6군자”가 머리를 잘리면서 선혈이 충천했다.

  바로 55초전에 담사동이 군기대신 강의(剛毅)에게 “할 말이 있다”고 웨쳤을 때 묵살당했다. 비분에 넘친 담사동은 앙천하며 한탄한다. “역적을 무찌를 마음만 있을뿐 무력회천(無力回天)이구나. 아아ㅡ죽어도 한이 없도다. 쾌재로다. 쾌재!”

  력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술6군자”가 목잘리는 날 차이스커우는 구경군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동명 영화에도 구경군이 물샐틈없이 둘러싼 어마어마한 장면이 보인다.

  륙군자의 “칸터우”장면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로만 간주한 시민백성들은 륙군자를 가리키며 “란신적자(亂臣賊子), 서생광도(書生狂徒)들아, 저놈들의 혀를 베라! 집안에서 책을 읽지 않고 뛰쳐나와 인심을 소란시키더니 싸다! 콱 썩어져라!” “어서 빨리 목을 베라. 꾸물대지 말구!” 라고 일제히 웨쳤다. 서민들에게 있어서 무순 6군자는 극악무도한 “간신(奸臣)”에 “반역자”였다.

  서민들에게 있어서 강유위를 위시로 한 무술변법의 혁명가들은 일말의 동정도 가지 않는 세상을 소란시키는 역적, 간신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가 위대한 변법혁명가로 높이 추앙하는것과 정반대였다.

  《경자기사(庚子記事)》의 기술에 따르면 무술변법 발발후 유신파혁명가들과 관계가 밀접했던 조정의 장음환(張蔭桓)이 체포, 투옥되였는데 영국공사의 간섭으로 죄를 면하고 신강으로 좌천을 당했다. 신강으로 압송하는 도중 구경군들은  “대간신을 봐라”고 쑥덕거리며 뭐가 모자라서 유신을 도모하는가고 비아냥거렸다. “강당(康黨)과 결탁했으니 간신역적이다”고 서민들은 쾌재를 불렀다.

  청일갑오전쟁실패후에도 북경시내의 서민들은 리홍장을 매도했는데 이번에는 또 강유위무리들까지 매국간적(賣國奸賊)으로 싸잡아 욕했다. 1900년 8국련합군이 북경성을 습격했을 무렵에도 강유위가 서양군대를 이끌고 진공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다.

  왜 유신변법을 주도했던 혁명가들은 머리를 잘리면서도 그들의 평가는 공정하지 못했을가? 왜 서민들은 그들을 모두 역적으로만 보았을가?

  조선의 근대 갑신경장을 창도했던 신예혁명가 김옥균, 박영효 등의 실패와 김옥균에 대한 릉지처참과 아울러 “친일파”반역자로 몰리였던 사례 역시 같은 맥락에서는 민족의 비극이였다.

  근본적 리유는 유교전통정치, 독재를 철저하게 실시해왔던 중국(조선도 포함)정치에서 서민백성들이 진상을 알기를 꺼렸던데 있다. “민은 사역할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알릴수는 없다.”란 말과 같이. 그러므로 서민은 늘 먹을거리, 입을거리 걱정만 하면 그만이였지 국가대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인민에게 알 권리”를 행사할 대신 철저하게 지적정보를 봉쇄해온 전제정권아래서 서민은 알아야 할것을 알수 없고 들어야 할것을 듣지 못한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 민족, 국민의 일개 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은 지극히 결여했으며 무술변법같은 혁명이 있을줄도 모르며 단지 우에서 주는 정보를 그대로 통채로 삼켜 혁명가를 단지 “역적”으로만 인식할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양인이 “중국을 국가가 아니라 흩어진 모래알의 사회”라고 비난한것 역시 이 상태를 두고한 말이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유신혁명의 참신한 주장을 알고 리해할수 없었으며 유신혁명가들도 광대한 서민을 향해 시선을 준적이 없었다. 위대한 유신혁명은 애초부터 대중적기반을 잃은 “모래성”에 불과했으며 그 빈약한 혁명은 따라서 대중의 호응을 획득하지 못한채 대중들(속히운 무지몽매한 대중)에 의해 혐오의 상대로 취급되는 비극에 조우하게 되였다. 조선의 갑신혁명도 이런 우를 범했던것이다. 유독 메이지유신이 성공할수 있은 리유는 광대한 대중의 호응을 얻은것도 큰 요소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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