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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2013년 05월 06일 10시 58분  조회:8119  추천:44  작성자: 김정룡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만약 대청제국이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아편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8국 연합국의 침략도 없었을 것이며, 원명원이 약탈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국운명은 중국인이 스스로 빚어낸 결과였다.

중국, 중국이란 개념은 이렇다. 주나라 초기 중국이란 국호가 잠깐 등장했다가 그 후 청나라 말기까지 줄곧 중국, 중국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왕조호칭을 나라호칭으로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 서양이 중국을 침략하고 보니 역사와 문화가 유구하고 과거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데서 중국, 중국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면서 중국, 중국인이란 호칭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때론 이민족이 통치하던 위진·남북조시대와 몽골족이 통치하던 원나라 및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나라시기 모두 자신들이 중국을 차지하고 있다는 관념이 강했다.

중국이란 말 그 대로 세게 중심이라는 뜻인데 본래 “중원을 차지하면 천하를 얻는다.”는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어느 역사조대에서든 자신을 중국이라 여겼던 건만은 사실이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중심 국가, 또 문화가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에 주변 이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원을 기준으로 동쪽 이민족을 ‘동이(東夷)’, 남쪽 이민족을 ‘남만(南蠻)’, 서쪽 이민족을 ‘서융(西戎)’, 북쪽 이민족을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주나라 시기부터 중원의 천자를 중심으로 주변이민족과의 외교관계는 조공과 책봉의 패턴으로 굳어져왔다. 즉 주변 이민족은 중원조정에 특산물을 바치고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의 통치자를 00상장군, 00대장군, 00중장군, 00소장군 혹은 00왕의 식으로 책봉하였다.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과 단순한 조공과 책봉의 외교관계를 뛰어넘어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주변국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수양제(隋煬帝)는 정월 대보름이 오면 주변국의 사신들을 불러들여 대형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의 규모는 악사만 8천 명, 횃불을 든 자가 만여 명이었다. 음악소리가 사방 십리에 울려 퍼졌고 불빛이 사방 십리를 비추었다고 한다. 연회 기타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연회에 참석했던 외국 사신들은 아마 대제국의 스케일에 기가 죽어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 유학생이 2만여 명이나 장안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국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가서 배운 학문은 주로 사서오경, 노자철학, 주역 등이었으며 과목이 단조로웠다. 지금처럼 학과가 세분화된 시대라라고 가정하면 유학생의 숫자는 아마 20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당시는 현시대처럼 국가 간 서로 유학생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서 일방적으로 당나라로 몰려들기만 하였다.

당나라시기 때론 주변국에 유명 인사를 파견하여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 도사(導師)를 파견하여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특강을 진행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실세였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을 올렸다. “폐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셋이듯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세 개여야 마땅하오나 우리 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있으나 도교가 없어 기둥이 두 개이니 온전치 못하옵니다. 그래서 당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지당할 것이옵니다.” 허수아비인 보장왕은 실세 막리지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윤허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도사의 강의를 보장왕이 직접 경청하였다고 적고 있다.

주변국 유학생이 장안에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또 도사를 파견하여 자기네 문화를 주변국에 전수하고 있었으니 중화사상의 우월성에 들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청나라는 비록 만주족이 통치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한문화 중심 국가였으며 여전히 한·당·송·명의 중화사상의 우월성을 물려받았다.

서구는 그리스 도시국가시대부터 무역을 중시해왔다. 그들이 무역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여 농경에 의해 생계가 곤란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무역에 의지하여 생존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무역은 전체 서구에 전파되었고 따라서 서구의 무역은 점차 자유무역, 평등무역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한나라시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해외(중국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해외라고 표현함) 국가들과 무역을 많이 해왔으나 관방주도의 무역이었을 뿐 자유무역, 평등무역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 길을 열려고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영국의 왕은 “하느님이 중국 인구를 4억으로 만든 것은 우리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무역을 하여 부를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기뻐했다.

당시 영국의 복장 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중국을 고찰하고 나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중국인은 수의(睡衣 : 잠옷)을 입지 않고 있다. 만약 중국인에게 수의를 입는 법을 가르치고 일인당 한 벌씩만 사도 4억 벌을 팔 수 있지 않는가! 당장 인도의 수의옷감을 독점할 것이다.”라고 몹시 들떠 있었다. 마치 한국인이 수년 전에 중국에 진출하면서 “13억 인구의 중국시장은 우리한테 기회이다. 일인당 칫솔 하나씩 사도 13억 개의 칫솔을 팔 수 있으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도 돈을 산더미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자만에 찬 어리석은 판단과도 똑 같았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200년 전 영국인이 겪었던 착오적 판단을 한국인이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청나라 무역은 역시 관방의 주도로 통제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려면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했다. 그래서 황제를 찾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삼구구배(三叩九拜)’였다. 영국인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예의가 없다. 그것도 한 번 아니고 세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리다니! 게다가 아홉 번씩이나 인사를 올린다는 것은 영국인에게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무역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뭔 뚱딴지같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아홉 번 인사를 올리다니 말이다. 영국 상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기 서양은 바티칸의 교황이 천하 중심이었듯이 중국은 중국의 천자가 세계 중심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이 결국 중국인의 중화사상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 상인은 절대 ‘삼구구배’를 올릴 수 없다고 뻗히고 중국 관리들은 만약 ‘삼구구배’를 거절하면 당신들이 바라는 무역은 죽었다 깨도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양쪽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하는 ‘국제관례’의 정상 무역은 깨지고 남은 것은 영국인이 무력으로 중국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이렇듯 청나라 말기의 중국이 결국 중화사상 때문에 당하지 않을 침략을 당했고 결과는 참담하게 패배하여 반식민지국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정확히 말하면 통상전쟁이지 아편전쟁이 아니다. 통상전쟁을 아편전쟁이라 표현한 것은 당시 영국의회 전쟁결의안에서 전쟁반대파들(262표)이 전쟁옹호론자들(271표)을 공격하며 비난조로 들먹인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남경조약을 살펴보면 오구(五口)통상, 홍콩 할양, 관세체결, 자유무역 등 거의가 경제에 관한 것들이다. 통상전쟁이든 아편전쟁이든 중국이 패배한 것은 서구의 선진과학기술과 민주정치에 무너졌고 그 전쟁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중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시 조정에 여전히 예부(禮部)가 존재해 있었고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동아세아 조공책봉의 외교질서를 서구인에게 적용하려고 들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외교부에서 담당하는 국제관계 사무도 예부에서 취급하였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관의 관계는 평등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외교관례에 따라 움직이려 들었기 때문에 서구세력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청국 조정의 규정에 따르면 영국 관원들이 청 조정에 보내는 문건은 ‘품첩(稟帖 : 관청에 내는 신고서)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사태는 바람 앞에 등화처럼 위태로웠으나 여전히 중화사상으로 무장된 수구파들에 의해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 엄복(嚴復)은 저서 《원강(原强)》에서 수구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과거에 밝고 현재에 어두운 자는 하나는 얻고 둘을 잃은 것이다. 이들은 인류발전진화의 법칙과 서양 각국의 구체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외국과 중국의 우열에 대해 세상 사람과 다른 고상한 견해나 내놓으면서 예의가 바른 백성이고 우수한 민족이며 주공과 공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고 예의로 다스려진다고 뽐낸다. 그들은 청일전쟁에서 여지없이 패하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러한 형세를 낳은 근본원인은 백성의 힘이 이미 약해졌고 백성의 지혜가 이미 낮아졌으며 백성의 덕이 이미 엷어진데 있는 것이지 결코 중국민족의 본바탕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수천 년 동안의 중국의 전제정치와 사회풍속에 의해 조성되어 결국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엄복,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을 비롯한 진보학자들이 서양의 자유와 민주, 데모크라시(민주)와 과학(사이언스)로 중국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들은 중국역사는 문화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밝히는 ‘의고풍(擬古風)’을 일으키고 서양문화를 따라 배울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과 반대로 어릴 적에 영국 유학을 다녀왔고 9개 나라 언어를 마스터한 인문학자인 고홍명(睾鴻銘)은 수구파의 입장에서 서서 공자의 인의예지야말로 인류역사 이래 가장 지극한 윤리도덕이며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최고 가치라고 주장하고 중국문화야말로 서양인이 배워야하는 모델이라고 역설하며 심지어 일부다처제를 찬양하고 부녀의 전족문화마저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중국인의 정신》이란 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먹은 진보파들이 아무리 목이 쉬도록 떠들어대도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굳어진 수구파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보파는 재야인사들이고 수구파는 권력자들이었다. 전제국가에서 당연히 힘의 균형은 권력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보파의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보파들의 노력에 의해 서구의 민주와 공화제가 폭 넓게 홍보되어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군대는 더는 희망이 없는 청조정을 위해 싸울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의 한 방의 총소리가 268년 통치했던 대청제국을 무너뜨린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진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의 제국역사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참으로 비극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2천년 제국역사의 키잡이는 중화사상이었고 이 튼튼하고 견고한 키잡이로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제국역사를 창조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키잡이로 세상에서 가정 먼저 부유한 나라로 되었으나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손을 보지 않고 사용해온 키잡이가 고장 나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다. 먼 바다건너에서 밀려오는 ‘덕선생(데모크라시)’과 ‘사선생(사이언스)’의 파워에 밀려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사라졌으나 강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친 바다에서 훌륭한 뱃사공이 탄생한다는 속담이 있다. 5천년의 문명에 2천년의 제국역사는 거친 파도와 같았다. 중화사상이 독이 되어 2132년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중화사상은 필경 신주인(중국인)의 귀중한 재부이다. 다시 재정비하여 신주대륙(중국)을 이끄는 처방으로 활용한다면 보약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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