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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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2017년 02월 11일 09시 42분  조회:3622  추천:1  작성자: 김정룡
인문학이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선생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에 대립되는 영역으로 자연과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데 반하여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한다. 광범위한 학문영역이 인문학에 포함되는데 미국 국회법에 의해서 규정된 것을 따르면 언어, 언어학, 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비평, 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 기준을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역사와 예술이 인문학에 포함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론(異論)들이 있기도 하다.

너무 잡다하다. 해석이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위 해석대로라면 마치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대비되고 인문학이 자연과학과 구분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어 굉장한 오류를 안고 있다. 사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의 구분을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의 중심문화에서 탈피하고자 생겨난 하나의 학설이고 학문이다.

서양에서 인문학이 생겨난 것은 역시 근대화시기에 들어섬에 따라 나타났다. 근대화시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하면 기계문명의 탄생을 근대화시기 진입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지만, 막스 베버는 ‘탈주술시대의 개시가 바로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무슨 말이냐? 서양은 신이 통치하는 암흑기를 천여 년이나 지속해왔다. 이 시기를 중세기라 표현하는데 서양의 중세기 문화는 인간중심의 문화가 아니라 신의 중심 문화시대였다는 것이다. 즉 신 중심 문화에서 인간중심문화시대로의 진입이 바로 인문학의 시대 진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양의 인문학시대 진입은 기껏해야 3백여 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의 인문학시대는 이미 3천여 년 전에 개시 되었으니 서양에 비해 역사가 거의 3천년 앞서고 있다.

중국역사를 돌아보면 夏나라 때는 ‘천명’을 중시했다. 지상의 모든 존재와 인간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천명사상이다. 천명사상이 그 시대 종교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지만 너무 추상적이어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은나라에 들어서면 좀 더 구체적인 숭배대상을 지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이다.

귀신이란 ‘귀’와 ‘신’이 합쳐진 개념이다. 원시인류는 낮과 밤이 바뀌고 사계절이 바뀌고 땅에서 식물이 생겨 자라고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데는 필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 힘이 바로 신이다. 그런데 신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힘을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귀’이다. 추상적인 신과 구체적인 귀를 합쳐놓은 것이 바로 귀신이다.

은나라 때 인류는 귀신이 모든 세상만사를 지배한다고 여기고 길흉화복을 전부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점을 쳐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래서 은나라를 ‘숭귀문화(崇鬼文化)’시대였다고 말한다.

‘숭귀문화’의 핵심은 제사였다.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이른바 ‘제정일치’시대였다. 제사는 제물이 필요하다. 그 제물로서 여러 가지 음식이 있을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희생이란 말이 제사에서 생겨난 것이다. 천지종묘(天地宗廟) 제사(祭祀)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일컫는 말로, 희는 색이 순수한 것, 생은 길함을 얻지 못해 죽이는 것 을 뜻한다. 희생양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태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쳤던 사실(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았지만)이 그 시대 사람도 제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좋은 증거이다. 그리고 왕이 죽으면 왕비와 후궁들 및 내시들을 따라서 생매장하는 이른바 ‘순장’제도가 있었다.

제사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제도는 사람보다 귀신을 더 중히 여기는, 즉 사람 위에 귀신이 있고 귀신을 사람보다 더 중히 여기는 문화, 이것이 바로 귀신의 중심문화였다.

이와 같은 ‘숭귀문화’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섬에 따라 타파된다. 주나라에 진입하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제도를 없애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 중심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숭귀문화’를 타파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문학을 창조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사람중심문화를 구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이었을까?

주나라 초기 주공이 예악(禮樂)제도를 지어냈다. 예는 명분이고 등급질서이다. 예하면 천자는 여자를 72명 소유할 수 있고 제후와 대부 및 사는 내리 차등으로 여자를 소유하고 백성은 여자 하나만 거느릴 수 있다는 제도가 바로 예이다. 제나라 재상 관중은 ‘사농공상’ 등급 제도를 실시하여 사회질서를 구축하였다. 이런 식으로 전체 사회는 등급과 질서에 따라 움직였다.

주나라 예악제도는 어떻게 실시가 가능했을까?

은나라가 상공중심시대였다면 주나라는 농경중심시대였다. 상공시대 인간관계는 횡적인 패턴이 강했던데 비해 농경시대 인간관계는 수직적인 패턴이 강했다. 즉 농경은 경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경험이 많고 그래서 연장자들이 받들리게 되는 데서 예가 생겨나고 실시되었던 것이다. 효는 예의 실시에 의해 자연적으로 따라서 실시되기로 되어 있다. 농경문화에서 예와 효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이블이다.

주나라 초기 주공이 구축했던 예악제도는 대략 300년 지나자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소문난 춘추시대에 진입하였다. 당시 주요한 학파로서 공자를 위수로 하는 유가, 묵적을 두목으로 하는 묵가, 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가 등 세 학파가 가장 두각을 드러냈다.

공자는 주나라 예악제도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체적인 처방으로 ‘인애’를 내세웠다. 공자의 인애는 부모를 효도하고 형제우애가 좋아야 하고 가족의 화목이 사회에 전파되면 나라는 잘 다스려 지고 그러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본문의 주제와 연관시켜 말하자면 우리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중시를 돌릴 필요가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 이것이 바로 인문학사회로 진입했음을 말해주는 가장 유력한 징표이다.

묵자는 등급질서를 반대하고 사람마다 평등하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을 주장하였다.

노자는 인위적인 예악제도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 폐지해야 하고 따라서 사람을 속박하는 모든 법과 제도를 없애고 사람은 본능에 따라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행위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무위’사상을 주장하였다. 춘추시대 이 세 학파는 나름대로 중시를 받았으나 천하를 구하는 처방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래서 천하는 더 복잡하고 혼란한 전국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서로 패주가 되어 ‘칭패(稱覇)’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전국시대 전쟁은 서로 먹어치우는 ‘겸병(兼竝)’이 목적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수요에 의해 오기와 손빈을 위수로 하는 병가들이 중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가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를 얻는 전쟁에는 도움이 컸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평화 시기에 진입하면 금세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병가는 인문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국시대 ‘겸병’의 맹주가 되려면 부국강병을 이뤄야 했는데 현실을 떠난 이상만을 주장하는 유가, 묵가, 도가는 환영 받지 못하고 새로운 학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법가이다.

법가는 상앙의 법, 신불해의 술(術), 신도의 세(勢) 등 세 가지 파를 한비가 하나로 집대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이뤘다. 이 가운데서 가장 역할이 지대했던 것은 상앙이다.

상앙이 처음 진효공을 찾아 유세할 때 오제의 帝道를 말했더니 진효공은 끄덕끄덕 졸았다. 다음번에 요순의 왕도를 이야기 했더니 진효공은 여전히 아무 취미를 느끼지 못하고 졸고 있었다. 세 번째는 춘추오패의 패도를 말했더니 진효공의 눈이 금세 황소눈이 되고 두 귀를 바짝 세우고 서로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해서 경청했다고 한다. 상앙이 진효공의 마음에 들어 재상이 되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뤄냈고 후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있어 한비의 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한비의 책『한비자』를 읽은 진시황은 한비를 얻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다. 물론 한비는 이사의 음모술수에 걸려들어 모함당해 살해되었으나 진시황은 한비의 사상과 책략을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하였던 것이다.

법가는 이렇게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너무 각박하여 민심을 얻지 못해 천만년 가리라던 진왕조는 15년 만에 가장 단명으로 끝났고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앙과 한비 및 송나라 왕안석 등 모두 비명으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역중천 교수는 “법가는 피로 물든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진왕조의 패망을 지켜본 유방은 한나라 초기에 노자의 무위사상으로 천하를 다스려 성공한다. 그러나 한무제에 이르러 유가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2천년 제국의 역사는 겉으로는 유가로 다스리고 암암리에는 법가로 다스리는 이중적인 ‘명유암법(明儒暗法)’으로 천하를 통치해왔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의 인문학은 3천 년 전 주나라시기부터 시작되었고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와 법가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어 현재까지도 중국사회제도를 지배하고 있다. 한편 중국인의 사상을 지배해온 학파로서는 유가와 도가 양대 산맥이다. 이에 대해 임어당 선생은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가를 숭상하고 본능적으로는 도가를 받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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