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춘식
http://www.zoglo.net/blog/liangchunzhi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 기타

나의카테고리 : 단편소설

[단편소설] 눈이 내리네
2007년 10월 14일 22시 03분  조회:2149  추천:65  작성자: 량춘식
[단편소설]
눈 이   내 리 네
line

량춘식 (연변)

된눈이 터지려나 눈이 꺼매서  플래트홈을 나서니 희끗희끗 눈발이 날린다. 지도에서도 마지막 현성이라서 객들이 많이 내린 탓이던지 렬차안은 헐렁하니 빈자리가 많아졌다. 

다리를 뻗고 편히 앉아갈 자리가 있음에도 찬수는 마지막 차바곤에서도 맨 구석쪽일 자리에 반쯤 엉뎅일 붙 였다. 출입구때문에 소란스럽고 그보다는 곁에 달린 변기실문이 한번씩 여닫힐 때마다 악취가 진동했지만 그에게는 그것마저 다행으로 느껴진지 오래다. 

기차는 그의 생활에 쭈욱― 련결돼온것이다. 한주일에 한번, 많아서 세번씩은 기차를 타야 그 담배의 니꼬찐 같은《앤돌핀》이 풀리군 하였다. 오직 저 파란렬차, 오전 일곱시 반에 상행하여 단 한정거장만인 현성으로 갔다가 다시 오후 네시면 하행선으로 귀가하는 그런 왕복의《기차 타기》만이 유일한 생명연장의 유습 같은거랄가… 어쨌든 찬수는 정신이 기차에 실려있었다. 한밤중 깜깜한 집안에서 잠을 깨고는 이것이 긴 턴넬속을 지나는 기차안이겠거니 여기거나 한여름날 밭에서 길게도 뻗어간 호박넝쿨을 보아도 저건 칙칙폭폭 달리는 파란렬차로 착각을 해버리는수가 보통이였다. 그만큼 그는 기차를 수없이 탔다. 너무 타서 렬차원들을 다 안다. 렬차원들은 이젠 못본척 혹은 아예 그 존재가치를 부정해버린듯 그런 눈치들이다. 그러니 차표는 뗄 필요가 없는거였다. 《뢰물》을 먹이기도 했다. 기름개구리 두마리씩 준적도 있고 겨울에 언 참새 두마리씩, 여름엔 닭고기버섯을 조금씩 준 일도 있었다. 

찬수는 《기차장수》였다. 그만큼 부지런했다. 산에 올라 참버섯, 싸리버섯, 소나무버섯, 닭고기버섯을 뜯어들였고 호수를 누비며 물고기도 잘 잡아들였다. 겨울이면 마을사람들 모두다 현성 올라가 살아 포수 없는 계절에 번식도 빠른 산토끼요, 여우, 너구리, 황가리, 족제비를 잡아들이고 기름개구리, 참새, 꿩들을 잡아 얼구기도 잘한다. 그런것들이 기차 타고 갔다오면 다 돈이 되는것이다. 

찬수는 삼등렬차의 딴딴한 등받이의자에 벌 받은 소학생처럼 앉아있었다. 오늘 얼마를 벌었다거나 그런데에 머리를 쓰지 않는다. 가끔씩 그런 기분도 들었다. 껌을 씹을 때처럼 코끝까지 싸아한 냄새라거나 크레용구름 같은 냄새, 그리고 사랑하던 그녀의 목덜미에서 맡던 그런 아릿하고 코끝이 맹맹한 기분에 흠뻑 취하군 하였다. 그런 니꼬찐 같은 발효는 차창을 줄줄 적시는 몽몽한 비살이거나 눈꽃이 날릴 때면 아주 묘하게 집착이 되군 하였다. 

찬수의 눈길이 부지중 그쪽으로 가 멎을 때,
《덜컹, 덜커덕.》
하고 육중한 차바곤들이 당겨가는 소리와 함께 렬차는 드디여 쭉―  레루우로 끌려가기 시작을 하고있었다. 

그녀는 몹시나 붐비는 어느 역에서 올랐던지 찬수로부터 한좌석 건너 마주앉아있었다. 어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사랑했던 숙이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귀부인차림이였다. 수달피로 지은 외투와 수박색비단으로 지은 블라우스가 그녀의 풍만한 몸매를 장식하고있었는데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는 고향을 떠나 팔자를 고쳐보고저 애쓴 흔적이랄가 옷매무시보다는 주름과 얼굴색이 잘 어울리지 않는듯했다. 

가락맞게 달리는 차체의 흔들림속에 그녀는 턱을 고인채 하염없이 차창가를 응시하고있다. 차창으로 휙휙 안겨오고 스쳐가버리는것은 적설과 드러난 벼랑뿐이건만 경치보다는 세월 같이 빠른 속력에 아픈 추억을 맡겨버렸다고나 할가 그런 모습에서 찬수는 새삼스레 숙이를 읽고있었다. 

그시적 숙이의 모습은 꼭 저랬다. 꿈, 리상, 쾌락, 행복 이 모든것들이 저 창가로 들어온다고 여겼을가, 그의 전신은 언제나 차창가로 향해있었다. 

쏘강기슭을 따라 원두막이 띠염띠염 보이고 팔월의 낚시군들이 밤낚시에 제 정신이 아닐 때, 찬수의 생활에는 그녀, 버들치 같이 말쑥한 숙이가 뛰여들었다. 

온 여름 밤낚시에 얼이 쑥 나갔다가 강건너 철길을 따라 시오리길을 달려 현성고중문에 들어서던 그날, 찬수는 억이 막히고 슬펐다. 초중까지 무리지어 학교 다녔던 한마을 애들이 엄청난 학비때문에 모두 중퇴해버린것이다… 그날, 하학하고 어느 골목의 으슥한 술집에 처박혀 술을 기껏 퍼마시고 곤죽이 되여 밤중까지 뽕짝을 불렀고… 그렇게 실망하여 방황하는 이튿날아침이였다. 놀랍게도 줄배로 강 건너 철길따라 학교 가고저 하다가 강나루터에서 문득 책보를 멘 한 녀학생을 발견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다고 말할수가 없게 기뻤다. 총명하고 섹시한때문에 접근이 자신이 없다가 부모의 리혼때문에 한 마을에 사는 이모집에 와 얹혀살며 학교 다니게 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흥분했고 갑자기 거리가 가까와지고있음을 느꼈다. 

찬수는 당황했고 주저했다. 했건만 유혹은 물리칠수가 없었다. 해는 차츰 짧아지다가 초겨울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하학종소리가 나기 바쁘게 어두워졌다. 

첫눈이 터지던 날, 찬수는 드디여 그 녀고생을 기다렸다. 학교정문어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조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채 허겁지겁 달려나오는 녀학생을 가로막고 말을 꺽꺽 먹으며 겨우 자기를 소개했을 때 쩔쩔매던 녀학생답잖게 까르르 웃고 박수까지 쳐대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초면강산의 남학생앞이란 느낌이 불쑥 들었던지 입을 막고 눈이 동그래지기까지 했다. 다른 녀학생들처럼 분망하게 기숙생활할수도 없는 처지가 그를 이런 난국에 떠민게 아니란 말인가. 어쨌건 어둠과 눈보라를 헤치는 길동무가 생겨난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리기적인 느낌이 앞서는것은 당연했다. 그담은 근심되고 조금은 무섬증까지 들기도 했지만…
찬수는 그녀가 얹혀사는 이모네 집 생활이 어느 정도 가난하다는 점을 잘 알고있었다. 일하기는 싫어하고 술만 죽여내는 이모부네 집에 더부살이 신세로 공부하는 숙이가 얼마나 견딜가 괜히 근심되기도 했다. 거기다 대하면 찬수는 다행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처럼 맞들고 벌어내는통에 남 부럽잖게 살고있었다. 무엇보다 누구네는 은행대부금도 못물고 또… 그런 외국바람에 물젖지 않고도 자기 집은 자기 공부에 근심없게 살림을 굳건히 하잖는가. 부모님이 고마웠다. 

숙이는 꼭 다문 입술 같이 학습에 참다운 애였다. 찬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몸매가 너무 쪽 빠져서 길가 행인들의 눈길이 미친듯 와 멎는 흔상터, 교실에서는 어중이떠중이 남학생들의 이성에 대한 환상늪이 파지군 하는 일이였다. 

날이 저물어 어깨 나란히 철길의 침목들을 밟을 때는 이게 꿈이 아니냐 할 정도로 흥분하군 한다. 그러나 어깨는 서로 사이를 뜨고있었다. 녀자쪽에서 경계하기때문이였다. 얼마 안가 찬수는 감각으로 숙이의 심상을 알수가 있었다. 자기가 한낮 숙이의 학교로 오가는《경위》, 《말동무》에 불과하다는것을. 찬수는 저으기 실망했지만 또 더 이상 탐닉하려는 짓이 야비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때론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다. 숙이의 꿈이 얼마나 크고 눈이 얼마나 높은지 알바 없었다. 아예 넘보지 말자고 단념하려 했다. 괜히 깊숙이 짝사랑에 빠지거나 실련의 고통을 겪는다면 그 후과는 상상도 못하리라 생각했다.
 
어느날부터 찬수는 더는 숙이를 기다리지 않았다. 홀로 학교를 다니는 편이 퍽 편함을 느끼고있을무렵, 숙이가 철길어구에 서서 기다리고있을줄이야.

《우리 그냥 같이 다니자. 혼자 다니기가 무섭고 외롭잖아.》
찬수는 확 숨이 가빠남을 느꼈다. 뜻밖이고 반가왔다. 

흰눈이 갈꽃처럼 날리던 어느날, 찬수는 어두워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차 타본 일 있냐고 숙이와 물었다. 숙이는 없다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날 둘은 저녁렬차를 탔다. 현성에서 단 한정거장만에 내리는 짧은 순간의 려정이라도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모른다. 둘은 약속이나 한듯 가지런히 가락맞는 피스톤들의 굴림소리속에 몸도 마음도 함께 어데론가 날고 나는듯싶었다. 숙이는 찬수의 덕분으로 타보는 기차라서 그런지 홍조어린 얼굴로 눈길을 차창으로 향하고있었다. 어둠이 군림하기 직전의 차창가로 꿈과 희망이 그를 향하여 손젓고있는듯 크게 뜬 눈망울로 정열이 반짝이고 입가로 미소가 간지럽게 어리는걸 찬수는 보았다… 숙이는 웬만해서는 말하지 않는 애였다. 그러나 꼭 다물었던 입술이 보일락말락 벌어져 백옥 같은 이가 드러나뵈고 속눈섭 긴 까만 커다란 눈빛이 락조 비낀 차창가에 물들 때만큼 찬수는 행복해본적이 없었다. 숙이로부터 이성의 체온을 감촉받고 체향에 취해 어지럽기까지 해나는 련쇄반응이 오렌지빛 앞날로 기탁되는걸 어쩔수 없었다. 때문에 찬수는 기를 쓰고 숙이를 끌고 하학하는 길로 기차역을 향하군 하였다. 숙이도 마다하지 않았고 끄는대로 끌려서 기차에 오르군 하였다…

궁궁쿵, 궁궁쿵. 렬차는 산굽이를 따라 칙칙폭폭 달리고있다. 차창밖으로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어스름이 차창가마다 잉크빛 물감을 칠하고있었다. 

수박색블라우스를 입은 저 녀인은 아까보다 더 가까이 차창가를 마주하고있었다. 눈 내리는 바깥풍경에 넋이라도 뺏기고싶은 그 모습, 창테이블에 턱을 고인 손마디에서 푸른 보석반지가 빛나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들이 앵두빛으로 탐스럽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름과 쇠잔을 가진 눈확과 입술에마저 올린 루즈의 세계와는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듯싶었다. 열손마디가 주는 느낌은《돈》을 의미하나 얼굴이 알려주는것은 《위선》과《추락》과 《애잔》일뿐이란 느낌이였다. 하긴 그랬다. 네가 뭔데 초면강산의 녀자를 아무렇게나 자기나름대로 느껴보며 괜한 스트레스를 푸느냐, 이건 순 심리희롱이 아니냐는 자책이 들지만 어찌하든 자기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못뗐다. 어쩌겠소, 용서하오, 한평생 장가 못들고 늙어버릴 이 놈에게 시각으로나마 녀자를 만끽해볼수 있도록 해주오, 이랬다. 

기차는 흰 연기를 아름아름 부려놓으면서 길게 드러누운 산굽이를 에돌고있었다. 씩씨익, 하고 열기를 뽑아던지기도 하고 꽥꽥, 하는 짧은 고동을 뽑아대기도 하면서 기관사는 눈 내리는 날 갈무리해오는 무아몽경의 자신의 기분대로 기차노래를 속력의 안성맞춤으로 리드해가고있었다. 

겨울날의 짧은 해걸음이 몰아오는 어둠속을 그들은 쩍하면 기차《려행》으로 즐기군 했던것이다. 어머니가 한여름동안 짬짬히 버섯 뜯어 판 돈과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아 판 돈까지 기차타는데 날린것이다. 숙이는 숙이대로 찬수는 돈이 많은 애로, 《려행》돈이야 한낮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는게라고 여겼던 모양이였다. 

저 수박색블라우스 녀인처럼 숙이는 얼굴을 차창가로 향하고있었고 그러면 찬수는 바싹 몸을 그녀의 잔등께로 갖다붙여서 밀착시키고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럴수록 숙이는 얼굴이 거의 차창유리께로 붙는데 바깥풍경에 깜빡 취한듯, 찬수는 그 틈에 숙이의 허리에 손이 감기곤 그랬다… 찬수는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녀자를 알아가고있는걸 느꼈다. 아버지가 스물일곱살에 련애란걸 해보았다던 말이 생각나며 피씩 코웃음이 나갔다. 또 지금 숱한 로총각들이 장가 못들고 송아지무리떼처럼 동구밖 우물가에 모여들어 두눈만 둥그래서 허송세월 보내고 지내는게 못미덥게 우스웠다. 공부하면서 련애하고 아니, 련애하면서 공부한다? 것참 시대감 나는 새맛인것 같다가《아니야, 이건 너무 보통현상이구말구》그랬다. 그런데 숙이가 괴의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수 없게 곁을 주지 않던 그가 자기한테는《고독하고 외롭다》며 찾아주었고 슬그머니 옆구리에 손이 가는것도 모른척해준다. 요즘은 막 여위는게 알린다. 그 옆구리에 손이 가닿을 때 심장이 정상을 훨씬 초월하도록 고동을 쳐대니 이건 심장병에 걸릴 징조가 아닌가. 저녁에 자리에 누워 사정을 해버리군 하여 팬티를 자주 바꾸어 어머니 보기가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장미의 아름다움은 그 예쁜 꽃보다 가시에 있다는데… 숙이의 생각으로 되는《접수》가 되려 슬그머니 두려워남도 례외일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정열은 그예 숙이에게로 향함은 어쩔수 없었다. 이런걸 두고 인연이라는걸가, 숙명이라는걸가, 찬수는 끝없이 배회하면서 숙이를 가까이 더 가까이 하고있었다. 

다시 여름은 왔다. 기차에서 내리면 어둠에 먹혀버리던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냈고 봄물에 넘실넘실 줄배 타고 강 건느던 파릇파릇한 봄이 언제 흘러갔냐싶게 옥수수밭이 윙크하는 짙은 계절을 맞은것이다. 
어느날, 숙이가 그런 말을 했다. 
《난 나를 실망하구있어. 내가 이런 애일줄은 몰랐다구.》
《그건 무슨 말이야?》
《이 악물구 아득바득 대학입시를 겨냥하구 밤낮을 패야 할 시기에 이게 뭐지? 아니, 나 말야…》
《조기련애란 말이지? 우린 나이가 그런 나이거든. 왜? 그런 실례가 많잖아. 부부처럼 함께 세집 차리구 생활하면서도 대학 간다던데.》
《아무리 어째도 난 이런 애가 아닌데.》
《그럼 누구 탓이라도 된단 말이니?》
《내 량심, 내 맘 탓이지. 누굴 탓하겠니.》
《량심? 맘?》
《그래, 총적으루 가난 탓이거든. 내가 돈이 없으니깐 너의 신셀 졌구, 신셀 지니까 갚는다는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잖아. 불쌍한 내 마음. 난 왜 맘이 너무 선량하지? 선량은 언제나 손핼 앞세우거든, 참.》
《아니, 그럼 내가 억지루 사랑을 강요했다는거니? 나 억울하잖아. 내가 비루한 놈이구나.》
찬수는 발딱했다. 
《아니야. 그저 내 설음에서 해보는 말이지. 어쩐지 앞이 막막해나는거 말야.》
숙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내 눈물을 닦고는 해쭉 웃어보이며《그래도 난 후회 안해. 찬수 네가 젤 좋아.》또는 《찬수, 난 널 떠나지 않을거야.》라고 종알거리군 했다. 

찬수는 이른아침마다 마을 옆구리를 빠져 강나루에서 숙이를 기다리곤 했다. 숙이를 배 태우고 시커멓게 용용한 물결을 거슬러 강을 건넌 다음 철길을 따라 난 길을 걸어서 학교로 향한다. 하루 학과를 마치고 둘은 다시 어깨나란히 귀로에 오른다. 철길이 다하는 로타리를 내려서면 저앞에 마을로 들어서는 강나루가 보이고… 둘은 철길아래 시커멓게 무성한 옥수수밭에 뛰여든다. 누가 누구를 끌고가는게 아니라 둘 다 마음이, 그들의 발길이 약속이나 한듯 그리로 향한다. 옥수수밭은 구름도 가다가 내려서 쉬여가도록 철길을 따라 우불꾸불 길기도 길다… 옥수수숲속에서 찬수는 책보에서 미리 준비해온 비닐을 꺼내 땅에 깐다. 둘은 끌어안고 미친듯이 빨고 애무하고 즐거운 비명을 내여지르기도 한다. 그 시간이였다. 멘스가 와도 그 시간이였다… 그렇게 격렬한 성행위를 겪고나서도 즐거움은 계속되군 한다. 강나루에서 줄배에 오른다. 줄배를 몰아 강심에 이른다. 배는 강심에서 멈추고 둘은 배에 가지런히 앉아 요람인양 향수를 누린다. 강바람이 불어오고 강물이 배전을 쳐댄다. 

《찬수야, 날 버리믄 안돼. 나 처녀를 너에게 바쳤잖아.》
《강물이 마르지 않는한 너에 대한 사랑은 영원할거야.》
《만약 너의 배반을 받는다면…》
《어떡할거야?》
《널 죽이고 나도 죽을거야!》
죽인다는 말에 찬수는 만족한 나머지 웃기만 한다. 
《너 전번 시험에 총점 오백 칠십점을 맞았다며?》
찬수가 물었다. 
《그랬어, 넌?》
《난 점수가 좀 내려갔어. 뭐, 오백 오십점인걸.》
숙이는 손벽을 쳤다. 
《우리 함께 대련리공대학엘 가?》
찬수는 숙이의 입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며 다시 한몸이 돼버린다. 달이 내려다본다. 대안에서 저녁렬차를 타러 나오는 려객이 소리를 질러서야 둘은 아쉽게 배를 몰아 기슭에 대인다.

《뽕―》기적이 운다. 렬차는 산굽이를 저만치 휘뿌리며 일사천리로 내달린다. 수박색블라우스 녀인은 어둠이 바득바득 매여달리는 차창가로 눈길을 열고있다. 한여름 푸르렀던 옥수수밭을 덮으며 흰눈은 소리없이 내리고있었다. 문득 찬수는 턱을 고인 그녀의 눈확이 붉어있고 눈가로 이슬이 반짝이는걸 발견한다. 그럴거였다. 사람이 태여나서 고통이 없고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하염없이 내리고 내려 쌓이는 눈발속으로 녀인은 아팠던 지난날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며 지어 그립고 소중했다고까지 느끼고있을테지… 뭘가? 부모님이나 형제 아니면 남편에게까지 뭔가 한생을 두고도 잊을수 없고 물수 없는 빚을 진 일때문일가,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일이란 추억으로 눈확까지 붉어질수가 있을건가. 그렇다고 치자. 사람이란 감정동물이 아닌가… 어쩜 숙이도 지금쯤 저 녀인처럼 어느 창가를 마주하고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혹은 턱을 고인채 추억속에 깊이 빠져있을는지, 아릿하고 짜릿하며 온몸이 전률하도록이나 추억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할는지도 모른다고. 그래, 거기도 지금쯤 흰눈이 내리고 또 내리고있을거야… 찬수는 쿵쿵 달리는 렬차와 함께 심장이 뛰고있었고 내리는 흰눈들을 감싸며 싸아― 허공을 비행하는 차연기와 같이 가슴 설레고있다. 그때였다. 찬수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수박색블라우스 녀인이 금방전의 눈확이 붓도록 눈물 짓던 애절한 모습과는 달리 피씩 웃고 고개를 젓기까지 하는게 아닌가. 오기와 번열과 랭소와 교만으로 찬 모습이였다. 오, 지난 일이야 너무 루추하지 않느냐, 그저 즐겁다고 치부해두자. 중요한건 미래가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녀인들의 추억이란 애짭짤한 지난날, 어느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그런것들이리라. 때려치워라 고만. 남자들이란 진짜 백치들이고말고. 세상에 젤 잘 얼리우는게 남자들이라고, 그저 녀자들의 눈물만 보면 속이 무너지고 그대만을 사랑해요, 하면 항복해서 절벽에라도 뛰여내릴수 있는게 남자들이란다. 불쌍하고 둔한것도 남자들이다. 녀자들이야 시집 하나 제대로 가면 한평생 성사를 한 셈이지만 남자들이야 어디 그런가, 고달프고 눈코 뜰 사이 없이 뛰고 분투해야 하나니…

찬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찬수는 그렇게 사랑하고 따르던, 한몸이 되여 뒹굴던 숙이가 대학입시 한학기를 앞두고 불쑥 사라질줄이야. 눈향기처럼 신기루처럼 어느 철길어구 로타리를 에돌아 바람 같이 숨어버린것이다. 

선생님도 모른다고 그랬고 동학들도 알리 없었다. 그렇다고 냉큼 숙이 이모네 집을 찾아갈수도 없어서 달포째나 꿍꿍 속만 썩이다가 그예 결심하고 그 이모를 찾았을 때 하는 말은 무엇이였던가.

《친자식 공부시킬 돈도 없는데. 그리구 녀자들이란 말여 얼굴이 반반하게 생겼으믄 그게 곧 전도구 출세지. 안그래?》
《지금 숙이는 어데 있어요?》
《숙이가 어데 있든 네게 뭔 상관여. 이젠 걀 상관말어. 넌 학생이구 갼 사회사람이니깐.》

미칠것만 같았다. 펑펑 내리는 눈무더기속에 머리를 틀어박고 죽어버릴것만 같았다. 숙이야, 숙이야, 왜 그리 무정하단 말여. 말 한마디 없이 어델 가 숨어있어. 나 한번만 보자꾸나. 한번만… 울다가 울다가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던 날은 길게 며칠 밤이나 이어졌었다. 

《세상에 그런 녀자들이 있단다. 불여우 같이 사내를 꼬시다가 더 먹을게 없으믄 꼬리로 낯판대기를 가리고 홀짝 사라지는 나쁜 년. 돈이면 오금을 못쓰고 리익이 될 일이면 량심도 도덕도 개 떼줘버리지. 그런 년을 사랑하다간 코 깨지고 자기만 망치는 법이야. 사내란게 뭐냐, 넘어졌다도 우뚝 일어서서 다시 기운차게 걷는게란 말여.》
아버지의 말씀이 결국 용기가 되였다. 

그러나 난 이미 벌레먹고 구부정한 나무의 꼴이 되였던지 좀체로 정신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자나깨나 숙이 생각에 지쳐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날, 하학하고 막 저녁렬차에 올랐을 때, 결국 눈에 띄지 말았어야 할 장면에 맞띄고말줄이야. 책보를 아무렇게나 낀채 흩어진 머리를 추스를 새도 없는 내 시야로 파마머리까지 지진 화려한 숙이가 키가 껑충한 나이 듬직한 사내의 팔을 낀채 차창테이블아래 행복하게 앉아 아양을 떨고있는게 아닌가.

심장이 튀여나올것만 같았고 눈앞에 현기증이 이는듯했지만 찬수는 용케도 참아내고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줄을 미리 짐작해온터였고 지난날을 철저히 단념하리라 마음을 모질게 다스려온터였는데도 울분과 모욕감에 견딜수가 없었다. 밸대로라면 숙이와 함께 있는 그 사내놈을 죽게 패주고싶었다. 

눈길이 맞띄우는 순간, 숙이는 흠칠 놀라며 얼굴이 해쓱해났고 몸둘바를 몰라하고있었다. 

그래, 보지 않는게 나을테지. 찬수는 마음을 독하게 먹으며 맨마지막 차바곤으로 자리를 떴다. 차창밖으로 하늘이 무너지게 눈이 펑펑 터지고있는걸 바라보고있으려니 숙이가 어느결에 다가와 툭 건드리고 말하는것이였다. 

《미안해. 다 나 탓이야. 날 저주해줘. 가난이 날 이런 인간으루 만들었어. 그리구 한가지 부탁이 있어. 남자는 녀자와는 달러. 젊었을 때 이 악물고 분투하는 정신이 있어야 해. 모든 기회와 운수는 그런 노력속에서만 오는 법이니깐. 공부 잘해 꼭 대학 가, 안녕.》

머리가 윙윙 운다. 눈앞이 새까매났다. 숙이가 언제 돌아섰는지도 몰랐다… 뭐라고? 남자는 녀자와 다르다고? 그런줄 번연히 알면서 뒤늦게야 돌덩이처럼 날 내던지고 뭇사내 품에 안겨버린 네 년은 녀자란 말이지. 녀자는 반반한 얼굴이 벼슬이요 출세구 남자란 나서부터 어궤조산의 팔자란 말이지… 너무나 깊숙이 빠져서 정력이 분산되는걸 어쩔수 없어하는 자기가 한스럽고 애처로왔다. 기차에서 뛰여내려 죽고만싶었고 아니라면 숙이를 목 조여 죽이고만싶은 심정이였다… 숙이는 갔다. 나이도 고치고 타국으로 시집 가버렸다. 

그래도 찬수는 추운 겨울 학교 다녔다. 저녁렬차를 타군 했다. 기차를 타면 언제나 숙이가 찬수곁에 있는듯한 아릿한 느낌이였다. 숙이의 목덜미에서 살내음이 샴푸보다 더 향기롭고 커피향보다 진한 흥분을 가해왔었다… 그렇게 찬수는 기차인이 박히며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있었다. 찬수는 차츰 고집스러운 멍청이로 전락돼가고있었다. 

누군가 그랬듯, 기쁨은 아주 멀리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오지만 불행은 눈섭에서 련달아 떨어진다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뛰여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찬수는 이제 모든게 다 공식적이 돼가고있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사가지고 떵떵 언 강을 건느고 철길을 따라 현성학교로 향한다. 학교에서 그 누구와도 교제하기 싫어한다. 시간에도 기계사람처럼 두눈만 퀭하니 뜨고 앉아 공불 하는지 마는지 모든 소리가 마이동풍이다. 그러다가도 오후 마지막 하학종소리만 울리면 부리나케 역전으로 내닫는다. 단 15분나마 걸리는 렬차안에서의《려행》이란 온 하루 기다려오던 즐거운 추억의 세계요, 행복한 순간일것이였다. 

찬수에게 있어서 하나의 근심이란 부모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그 점뿐이였다고나 할가. 돼지를 치고 소를 먹이고 십여헥타르도 넘게 수전을 부치며 뼈휘게 일하는 부모앞에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출세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너만 보면 힘이 난단다.》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면서 출세한 사람 있었느냐. 우린 너 하나만 믿는단다.》
때때로 하시던 그 부탁을 어찌한단 말인가. 찬수는 글이 되여주지 않는 머리만 쾅쾅 쥐여박군 했다. 3년에 학비만도 만원돈을 처넣고 이꼴로 공부해왔다니 그저 지나온 일이 꿈만 같았다. 

끝내 대학입시가 닥쳐왔다. 어머니는 이른아침에 찰떡을 쳐 현성 학교대문에다 붙여놓았고 아기의 옷고름을 모르게 아들의 옷곁을 따고 넣어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게 허사였다. 본과는커녕 일반 전과학교 입학통지서도 오질 않았다. 

찬수는 다행이였다. 지극한 부모를 만난때문이였다. 
학교 선생님들과 동학들을 두루 찾아 알아보고 자식에 대한 새로운 유도를 꿈꾼것이다. 그건 실로 피고름이 터지는 아픔을 포섭한 결과라는걸 찬수가 알턱이 없었다. 

《찬수야, 대학에 못간다고 한 인간의 앞날이 끝난다는 도리는 없어. 인간 나름대로의 살길이 열려있는게란다. 네가 지금 가장 하고픈 일이 무엇이니?》
《네?!》

찬수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그 말은 너무나 뜻밖이였다. 그건 그야말로 실망이라거나 탓이라거나 유감이 아니였다. 자식에 대한 최고의 배려요, 크낙한 희망과 기대였고 은혜와 사랑이였다. 찬수는 더 억제하지 못하고 황소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암처럼 지니고 키워오던 멍든 가슴속의 말 못할 사연의 터뜨림이였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의 모든것을 다 아는 백분의 일만큼을 자식된 도리로서는 알지 못하는것일가. 자식의 실련의 깊은 칼자욱에 새살이 돋고 그 새살로 비바람 눈보라를 맞아갈 때를 기다리는 그 통절한 사랑의 깊은 호흡이라니…

《난… 난 왜 그런지 자꾸 기차를 타고싶습니다.》하던 제 정신 같잖은 유치원아이 같은 꼴을 보였을 때 부모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가. 다 큰 놈이 대학공부는 줴 팽개치고 매일과 같이 기차를 타겠다니 이건 웬 짐조이뇨? 그러나 아버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도 보이는 대신 껄껄 웃어보이며,

《암, 기차를 타야지. 그런데 그저 타는것보담은 뭔가 지향이 있구 타야겠는데. 기래, 내가 잡은 물고기를 현성 가져다 넘겨팔려무나. 그걸로 네가 좋아하는 랭면도 사먹고.》

찬수의 일상은 그렇게 새로워졌다. 차마 하는 일 없이 차비를 팔며 상행선, 하행선을《려행》할수는 없는  그런 《장사려행이》 되였다. 처음에는 당당하던 고중생이 일약 장사아치꼴이 된게 아니냐고 수치감을 느꼈댔으나 시간이 흐르며 그것은 인으로 번져갔다. 인, 렬차에 오르면 한가득 이름할수 없게 가슴벅차오르고 설레는 맘, 그리고 물고기나 기름개구리, 버섯따위를 제꺽 넘겨팔아 손에 돈을 쥐는 짭짤한 재미는 별것이였다. 꼬빡 두해나 그렇게 아침차로 현성 갔다가 저녁차로 내려오기를 반복하였다. 숙이는 꼭 올거야, 꼭 내게로 돌아올게야. 그런 간절한 기대로 찬 커만 가던 믿음도 이젠 차츰씩 차츰씩 의심되고 줄어들고있었다. 그러며 가끔씩은 집앞 돼지굴뒤에서 두눈이 퉁퉁 붓겨서 나오군 하던 어머니와 나이보다 열살은 더 겉늙어뵈는 아버지의 주름살과 강마름이 찬수 자기때문이라는 섬찍한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 부모가 불쌍하다는 효도가 생겨났다. 어느날이던가 아마 한 열흘전에 불쑥 한 말이 생각난다. 무슨 생각으로 다 그런 말이 입밖으로 튀여나갔던지.

《아버지, 어머니, 난 이제 기차타기 싫어져요. 뭔가 공부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가끔씩 드는게잖아요.》

《뭐야? 그랬구나. 금방 스무살이니까 한번 해볼만허지. 예순에 대학공부를 하는 늙은이 대학생도 다 있다던데, 아하, 이건 좋은 징조야.》
아버지는 펄쩍 뛰며 주름살을 펴보였다. 엄마도 좔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등을 어루쓸어주시던 그날을 찬수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학교에 다시 다니고싶다는것은 대학생이 되겠다는 야심이 살아났다는것이고 야심이 살았다는것은 자존심이 있다는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싱싱한 사유를 되찾았다는 표징이 아니란 말인가!

렬차는 씩씩 흰김을 내뿜으며 전속력으로 달리고있었다. 지난 일은 한낱 즐겁던 텍스트의 한단락에 불과할뿐이며 그담엔 교만과 야유로 금의환향을 뽐내던 수박색블라우스 그녀― 어쩜, 숙이도 저 같이 부럼없이 사는 귀부인이 되여 하이야 몰고 동해바다 구경 드나들며 푸른 해수를 자유로이 나래스치는 갈매기처럼 살거라는 추측에 괜한 증오가 서리며 찬수는 눈길을 수박색블라우스 그녀에게로 보내고있었다. 그런데 저게 뭐란 말인가? 창가 테이블에 이마를 부린채 잠든 그녀의 가발이 삐뚜름히 벗겨져내린게 눈에 띈것이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것은 왼손의 식지와 중지가 뭉청 잘린것이였다. 30대의 녀인이, 한창 아름다움으로 풍선 같이 발랄할 나이에 저건 또 뭘 의미하는걸가, 그저 놀라웠다. 수달털외투, 보석반지, 실한 금목걸이, 오만한 기상… 그것들은 금의환향이라 해야 할지 금의야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랬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고향앞에 마주설적엔 뭔가 단 얼마간이라도 성공이라거나 하다못해 그럴듯한 자호거리를 만들어온다는걸 뉘 모르랴. 인간은 그렇게 성실하지 못하며 비루하기까지 한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런걸 리해해야 할것이며 또 리해해준다. 고향앞에 누더기차림이라거나 외람된 꼴로 나선다면 그만큼 불효가 어데 있단 말인가. 하긴 고향이란 별꼴을 다 품어주긴 해도.

그렇겠지. 수박색블라우스 녀인이야 그 반반하고 말쑥한 인물값을 하느라고 스무살에 아주 잘 산다는 외국총각에게로 시집을 간걸거야. 그게 출세라고. 웬간한 대학졸업생보다 낫다고 자랑했을거였다. 

은익을 반짝이며 날아가는 비행기에 앉아서 천국의 꿈을 꾸었겠지. 그러나 산다는게 쉬운건 아니였겠지. 어쩌면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고 기가 찬 산골로 끌려갔겠지. 남편이란것도 자기보다 열다섯살이나 더 많은 홀애비께루 간거겠지. 몇번이나 달아나려다가 붙잡히고 병신이 되도록 두들겨맞기도 하면서 감자 심고 벼모하고 쌔가 빠지게 일했으리라. 그러다가 끝내는 도망을 쳐 서울에 몸을 잠그게 된 행운을 지닌거겠지. 서울에서도 몇년을 두고 벼라별 일을 다했을거였다. 때밀이, 꽁치장사, 전복이나 소라껍데길 주어 파는 일도 했을거였다. 그러다가 끝내는 기계일에 시달리다가 손가락을 잃은것일게고… 어떻게 살아갈가, 살기가 이토록이나 힘들다니. 내가 낳아놓은 딸앤지 아들앤지는 잘 크고있는지, 그런 그리움과 아픔에 모대기는 가운데 머리는 모지라져 빠져버리고… 숙이는 어떨가, 서울서 큰 기업을 차리고 사장질을 해먹는다는 숙이의 신랑이 서울태생이고 사장이란 말이 새빨간 거짓일수도 있잖은가. 병신이나 병달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 사는 사장님이 어찌 이런 시골에 와 아득바득 숙이를 안해로 맞아간단 말인가. 아하, 이런 생각 집어치우자 그만. 숙이는 잘 살고있겠지. 그래, 잘 살아라… 찬수는 지쳐가는 관찰과 의심, 추측과 상상, 분노, 동정 같은 일체 사유가 들추는 차바곤과 함께 이상한감이란 느낄수 없게 의례 그렇듯 평범하게 느껴지고있었다. 그랬다. 산다는게 원래 그런게 아니란 말인가. 울고 웃고 후회하고 의심하고 질투하고 야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실망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슬쩍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헛소리도 쳐보고 잘난척도 해보고 실은 빈 껍데기뿐인… 아, 인간이란 너무 바쁘게 사는구나. 숙이는… 이것 봐, 못난 놈 같으니라구. 또 그녀야. 이제 더는 숙이를 생각하지 말자는데, 찬수는 드디여 자기의 머리통을 쾅, 쥐여박았다. 어찌나 드센 강타였던지 곁에 앉은 고객이 눈이 둥그래지더니 이내 푸르륵, 하고 웃는다. 정신병자가 아닌가 의심이 든 모양이였다. 

《궁궁쿵, 궁궁쿵, 떨꺼덕. 궁궁쿵, 궁궁쿵, 떨꺼덕…》렬차는 온통 눈발 날리는 속을 가락맞게 달리고있다. 혼곤히 잠들었는가, 수박색블라우스 녀인의 눈귀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교만과 야유로 찬 녀인이 더는 아니였다. 실속이 없이 텅 빈 허상의 녀잔 더 아닐것이였다. 부모형제와 친척들을 위해 또 고향사람들앞에 돈을 벌었다는, 가난을 털었다는 그리고 뭔가를 성공했다는 떳떳함을 보여주기 위해 고생한것, 그 《고생》만이라도 얼마나 고상한것인지 모른다. 하기야 량심적으로 가책받을 한가지 일이야 있겠지만은… 그런데 거기까지 그녀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하고있던 찬수는 갑자기 자기가 미친개몽둥이에 한매 호되게 얻어맞은듯 머리가 뗑해나고 휘청거리기까지 해났다. 숙이가 차창가에 선채 손가락질로 질책해오는게 아닌가.

―난 저주받을 인간이야. 가난을 턱대고 아예 주저앉아버렸잖아. 총명한 머리로 대부금을 내여 공부하는 어떤 애들처럼 한학기만 견지했더라도 중점대학에 얼마든지 갔을수 있었겠는데 난 그렇지 못했어. 난 반반한 얼굴만이라도 녀잔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다고 여겼어. 그런데 현실은 불보듯 뻔하잖아. 인생이란 앉아서 척척 생각대로 되는게 단 한가지라도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있잖아. 가령 내가 행복하다더라도 내가 뒤돌아보는 추억은 항시 날 저주하고 후회하게 할거란걸 난 지금도 믿고있어.

― 그런데 나보다 더욱 약자이며 백치 같은 너, 찬수야, 난 녀자니까 그래도 이만큼 남자가 번 돈으로 먹고 누릴수야 있겠지만 넌 갈수록 말이 아니잖니. 넌 사내대장부야. 이제 스무살이잖아. 일어서. 일어서라니까. 한나무에 목매 죽는 인간이라니, 그깟 년, 정조도 량심도 도덕도 누더기 대하듯 한 나 같은 년을 잊지 못하다니… 백치 친구야, 더는 기차장수 되지 말어. 이제 눈 질끈 감구 이 악물고 한해를 공부해보려무나. 그게 너의 됨됨이구말구…

《뽕―》기적이 울렸다. 찬수는 머리를 번쩍 들고 정신을 차렸다. 숙이는 없었다. 수박색블라우스 그녀가 가치담배를 맛나게 빨아대고있었다. 그 꼬락서니가 역겨웠다. 어느 시내 구석에서 기생이나 창녀질로 남자들을 사기해먹는 년이나 아닌지… 에익. 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차창가로부터 금방 곁의 차창가로 눈길을 걸었다. 완연한 어둠이 물들기전인 차창밖에선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있었다. 내려서 옥수수밭을 덮고 겨울 강언덕에 거꾸로 엎어진 줄배를 덮고 저기 숙이를 기다리며 담배질하던 마을 옆구리 뉘네 돼지굴가를 덮고 내 맘속 깊이 자리잡았던 첫사랑 무덤을 덮고… 이제《렬차장수》도 졸업이라고 생각하니 《마른 메사구 같은 녀석》하고 심심풀이로 놀려대기도 했던 렬차장이 차표 같은《졸업증》하나를 내게 발급하려나 다가오고있었고 렬차안의 숱한 고객들이 동학들인양 리별을 아쉬워하듯 애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래, 한번씩 문을 열 때마다 변기냄새가 역한 구석에 쭈크리고앉아있지 말고 이젠 저 깨끗하고 공기 맑은 편한 자리로 옮겨앉아볼가부다, 나도 랠부턴 당당하고 고교생이 될텐데 말이다…
차창가로 어렴풋이 고향마을이 안겨온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있었다. 

(연변문학 2007년 제3호)
 

첨부이미지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8 (단편) 붉은 고추밭 2023-09-07 0 532
7 [단편] 삼원나루 2019-07-11 0 633
6 [단편] 산빛 자물쇠 (량춘식) 2017-05-27 0 982
5 [단편소설] 이 풍요한 고장을 2012-12-26 0 1969
4 [단편소설] 먼 불빛 2010-03-24 33 2312
3 [단편소설] 삼평의 노을 2009-05-02 56 2560
2 [단편소설] 푸른강은 흘러라 2008-11-11 51 3446
1 [단편소설] 눈이 내리네 2007-10-14 65 214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