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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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학습필기-8
2019년 10월 12일 15시 50분  조회:1905  추천:0  작성자: 박문희
다양체 관련.

다양체란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으로 점 · 직선 · 평면 · 원 · 삼각형 · 입체 · 구(球)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의 집합을 일개 공간으로 보았을 때의 공간을 말한다.

자연이 대표적 다양체라고. 다양체에는 고정된 중심이 없고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는 운동이 멈추지 않는데, 자연이 바로 그렇다는 것. 개개의 자연사물은 모두가 외부성을 갖는다.

책도 하나의 다양체이다. 세상에 대한 반영이자 반사물인 책도 외부성을 갖는다. 즉 그것은 어떤 다양체에 다른 것이 접속되면서 그 성질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된다. 접속되는 항에 따라 차원수가 달라진다.

어떤 개념들을 어떤 문제의식에 연결시키면서 강조하거나 제거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되는 것이다. 낫이 어떤 외부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농사-기계도 되고, 살인-기계도 되고, 혁명-기계도 되는 것처럼.

자연만물은 모두가 리좀적 다양체다. 외부성을 띈 모든 리좀적 다양체들의 상호간 연결접속은 시시각각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면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마련인 것처럼 자연을 보호하면 반드시 그 덕을 입게 마련이다.

무의식도 리좀적 다양체다.

무의식이란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이고 그것의 변형이다. 욕망이란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가족적이고 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다.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으며, 무의식은 고아다.

무의식 나아가 우리들의 삶 전체는 무리지어 움직이는 다양한 욕망의 집합이란 점에서 리좀적 다양체를 이룬다. 무의식의 문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증상이나 비현실적인 공상 내지 환상으로만 해석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생성하고 변혁하는 문제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변환하는 문제다.

인간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삶이 리좀적 다양체이기 때문이라고 클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그들은 슬픔, 기쁨, 증오, 분노, 행복 등의 힘이 출렁이는 자신의 무의식을 자신과 바깥 세계(외부성과 관련됨) 사이에 다양체가 만들어진다는 신호로 풀이한다. 다양체는 바깥과의 접속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기에 그런 접속이 새롭고 낯설수록 에로스(性本能)도 훨씬 더 강렬해진다는 것.

이런 판단들에 대한 이해는 독자 자신의 독자적인 독서와 심사숙고에 맡긴다.

아래 《최룡관시선집》에 수록된 시 <가을들판> 전문을 감상한다. 아주 기묘하게 씌어진 특이한 시다. 가을의 들판을 쓴 시들을 두루 보아왔는데, 솔직히 <가을들판>처럼 씌어진 시는 본 기억이 없다. 물론 내가 본 시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양체를 논의하면서 이 시를 감상하는 것은 “자연만물은 모두가 리좀적 다양체”라는 명제 때문이다.

바람독침을 맞아
떼주검이 더덕더덕 매달렸다
풀꽃, 옥수수, 콩, 조
긴긴 상여대오가
흔들린다

소조한 장송곡의 주악속에서
시체속의 노란자위들만
꿈을 베고

뜬다

2개 연에 10행 짜리 짧은 영물시자 하이퍼시다. 웅장하면서도 정교하게 되었다. 웅장하다 해서 정교할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도리를 잘 보여준다.

바람독침을 맞아
떼주검이 더덕더덕 매달렸다
풀꽃, 옥수수, 콩, 조
긴긴 상여대오가
흔들린다

바람이 봄과 접속하면 약침이 되겠지만 가을과 접속하면 독침이 된다. 자연의 한 품종으로서의 바람은 다양체이며 외부성을 가진다. 봄이라는 외부와 접속하면 약침이 되고 가을이라는 외부와 접속하면 독침이 된다. 바람의 성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약침을 맞으면 만물이 소생하지만 독침을 맞으면 만물이 죽음을 맞는다.

가없는 가을들판이 전부 상여대오의 흔들림으로 설레인다. 정말 근사한 이미지단위(환유)다.

소조한 장송곡의 주악 속에서
시체속의 노란 자위들만
꿈을 베고

뜬다

쓸쓸하지만 장엄한 장송곡의 주악소리 속에서 눈부신 새 생명(노란 자위)들이 죽음을 딛고 탄생한다. 다양체의 접속을 통해 바람소리가 장송곡의 주악소리로 변신했다. 이런 변신은 무죄일뿐더러 유공(有功)이다.

‘시체속의 노란 자위들만/꿈을 베고/눈/뜬다’

시체속 노란 자위들이 꿈 (베개 베듯)베고 눈 뜨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새김질 할수록 맛 나는 시행들이다.
언어의 파격적 결합(접속)이 명구를 낳는다.

가을들판이 말한다--

이 들판에는 아직도 캐낼 수 있는 보물이 무진장 많다.
서두르지 말고 슬슬 캐내라.
뜻밖의 광상(鑛床)과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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