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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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성의《토템문화론》을 론함
2007년 09월 06일 20시 27분  조회:4621  추천:84  작성자: 박문희


김월성의《토템문화론》을 론함

 
박문희

 

 
《문학과 예술》 2007년 제3기에서 남영전의 문장 《토템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계시》(이하 《계시》로 략칭함, 제목을 클릭하면 원문열독이 가능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정감과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이하《토템문화론》으로 략칭함, 제목 클릭하면 원문 열독 가능함)이란  비평문을 접하게 되여 전에 없던 흥미가 유발됐다. 그래서 지난 세기 서방 굴지의 비판적유심주의철학자 카시르의 명작《인론(人論)》까지 읽어보는 열성이 생기게 되여 스스로도 매우 놀랍다.
 
전에 없던 흥미가 유발됐다 함은 김월성이 남영전의 글 전문 18개 단락을 한단락도 빠트리지 않고 말 그대로 철두철미한 비판을 가했다는데 기인된다.  재미가 동한  김에 남영전의 《계시》도 두세번 더 읽어보는 시간도 가지게 되였다그러나 전혀 뜻밖에도 김월성의  글이 겉보기에서의 기세보다는 내용이 허하고 론리전개면에서도 자가당착적인 편파가 몇군데 보이여  전반 글의 설득력 나아가 비판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글은 서론, 본론, 결론 등을 겸비한 그 무슨 론문도 아니고 수감, 말하자면 김월성의 《토템문화론》 독후감일 뿐이다. 조금은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추려 솔직하게 적으면서 잘못된 부분, 경망(輕妄)한 부분에 대해서는 김월성, 남영전 두 선생으로부터 따뜻한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만약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합리한것이라면…”의 위험성

 
《토템문화론》에서 김월성은 시종 독일의 비판적유심주의 철학자 카시르의 《인론》에 나오는 대량의 론술을 론거로 삼아 《계시》의 거의 모든 관점과 제기법을 비판하고있다. 그는  만약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합리한것이라면 그의 주장은 매우 유치한 독단론일수밖에 없게 된다는 식으로 남영전의 주장을 재단하고 있는데 필자의 소견으로 이런 재단법은 상당히 큰 위험성을 안고있다. 왜냐 하면 카시르의 모든 리론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기때문이다.


례컨대 신화에 대한 비판적유심주의자로서의 카시르의 견해와 변증법적유물주의자로서의 맑스의 견해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있다.


신화의 산생에 대한 카시르의 견해는 매우 모호하며 부정적이다. 그는 정감의 산물로서의 신화는 이상야릇[i] 한 것이며 신화사상은 그 기원과 원칙으로 말하면 구습답습사상인바 그것은 신화는 아주 먼 옛날에로 거슬러 올라가는것 외에는 인류생활의 모든 현존형식을 리해, 해석하고 천명할만한 아무런 방법도 찾아낼수 없기 때문[ii]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와는 반대로 신화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아주 밝으며 긍정적이다. 맑스는, 신화란 조기의 인류가 강대하고 신비한 자연력을 실제적으로 지배할수 없는 조건하에서 상상으로, 혹은 상상을 빌어 자연력을 정복하고 자연력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창조해낸것이자 인민들의 환상을 통한 일종 비자각적인 예술방식에 의해 가공된 자연과 사회형식 그 자체이며 자연을 인격화하려는 원시인들의 욕망은 인간 자신의 생산을 목적으로 한것이다[iii] 고 하였다.


이 한가지 례만 보아도 카시르 한사람의 리론을 잣대로 다른 사람의 주장의 옳고그름을 함부로 재단한다는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수 있다.

 

생명일체화천인합일 사상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김월성이 《토템문화론》에서 비판한 중점은 생명일체화사상이다. 그는 카시르가 생명일체화인간의 자아의식(주로 륜리의식)의 생성과 함께 소실된 력사과정을 언급한 례를 적용하면서 카시르가 생명일체화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억측에 불과한 매우 유치한 독단론이라고 말한 이상 남영전의 주장도 필연코 철저히 실패할수밖에 없다고 못박는다.


여기서 생명일체화, 무아지경, 교감에 의한 합일식 등 몇가지 개념이 나오는데 우선 그 개념들간의 관계를 알고 넘어가야겠다. 김월성에 따르면 무아지경(無我之境)이란 교감(交感)에 의한 합일 즉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嬰兒)상태의 토템숭배식의 합일이며 생명일체화 및 그것에 바탕한 토템숭배관념은 원시인들의 무아지경의 생성물” 이라고 한다. 그럼 무아지경과 원초의 천인합일사상은 련계가 없는가? 김월성은 물론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과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고급적인 천인합일사상(망아지경) 사이에 상통성(相通性)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통성일뿐 결코 동일성인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과 동양원초의 저급적천인합일사상은 동일성을 가지고있다는 말로 통한다. 중국의 일부 철학가들은 동양 원초의 천인합일사상과 서양의 교감에 의한 합일식(合一式)사상을 모두 무아지경[iv]으로 비유하고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주체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계철학사의 3단계(무아, 유아, 망아)중 첫단계(김월성이 말하는 영아상태의 단계)에 발생한 관념들이라는 의미에서 상술한 몇가지 개념, 즉 원초적 천인합일사상, 생명일체화감정, 교감에 의한 합일사상, 토템숭배사상, 나이가 토템신화 사상 등의 내포는 본질적으로 일치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필자도 이런 철학사상 구분법에는 추호의 이의도 없이 수긍하는 바이다.


기실 동서양 철학사의 궤적도 이 점을 증언하고있다. 2000여년 전, 특히 소크라테스, 플라톤(기원전 5세기) 이전의 고대희랍철학(서방의 조기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지 않고 량자를 동일체로 간주한다. 이는 동양조기의 철학관(천인합일사상)과 완전히 일치한것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에 카시르가 만들어낸 생명일체화개념은 본질상 조기 서양철학의 주객합일설의 현대적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모르고 지내오면서 동양과 서양이 각기 자기의 력사를 만들기에 바삐 돌아치다보니 그 내용면에 차이가 많이 나는것이 사실이며 각자 력사단계의 지속시간이 크게 다른것도 아주 분명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상호간 대방의 력사경험에서 유익한 부분을 배우는것은 필요할수밖에 없는것이다. 김월성의 20세기 초엽부터 흥기하고있는 서방의 생태륜리학파는 동방의 천인합일사상을 수용할것을 주장하고있다는 서술이 만약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한것이라면 그것은 의미적으로나 시기적으로도 십분 적절한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말하자면 만약 김월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생명일체화나 원초적 천인합일사상이 일찌기 소실돼버린 무지몽매한 상고적 문화로서 오늘날 리용할만한 아무런 가치(영구한 가치원소란 더 어처구니 없는 말이고)도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살고있는 이 세상에 구경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싶이 모든 인류력사의 각 단계는 서로 끊어질수 없는 련관속에 놓이게 되며 모든 문화 역시 전승관계를 가진다. 이런 관계는 단절할래야 단절할수 없는것이다. 가장 간단한 례를 들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문자도 어느날 갑자기 생겨났다가 또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오랜 시일에 거쳐 만들었고 또한 후세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오늘의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는것이다. 세종대왕의 거룩한 공적은 오늘은 물론 후세 사람들도 영원히 기리게 될것임을 회의하는 사람은 없을줄로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모든 문화성과는 반드시 그 뿌리가 있는것이며 그 뿌리는 아무리 베여버릴래야 버릴수가 없는것이다.


동양고전으로서의 천인합일사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존재이며 우리 문화의 모든 령역에 침투되여 있는 사상이다. 철학사의 제3단계 즉 망아지경천인합일사상도 그 뿌리를 떠날수 없으며 단지 그 사상체계를 새롭게 해석(김월성 語)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수 있을뿐이다. 서양의 고전철학사상으로서의 교감에 의한 합일식(合一式)사상( 생명일체화사상 망라)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물론 소실론이 전혀 무근거하거나 도리가 없는것은 아니다. 모종 철학개념으로 말하면 생명일체화소실따라서 원초적 천인합일관념의 소실은 지어 필연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맑스가 천명했다싶이 과거에 인식하지 못했던 자연력이 실제상 지배됨에 따라 신화도 소실[v] 될수밖에 없는 것과 꼭같은 도리이다. 단 그것은 실재한다고 확신했던 환상이나 상상속의 실재가 아닌 허상이 인간의 자아의식의 각성으로 소실된것이지 특정 력사단계에서 원시인들의 세계관의 한부분으로 각인된 그런 관념문화 자체가 사라진것은 결코 아니며 인류가 최초에 창조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그 가치가 사라진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모두 김월성이 인정하는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소실되여버렸다면 력사가 철저히 단절되여 그 후의 문화는 존재할수도 없었을것이요 따라서 그것의 발전 운운은 더구나 불가능했을것이다 

 

인류 원초의 문화에 영원한 가치원소가 없는가?

 
우리 현시대 모든 문화가 뿌리가 있는것이고 그런 뿌리를 끊어버릴수 없는것이라 할 때 새로 제기되는것은 인류의 원초적문화에 영원한 가치원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김월성은 자연과 화해하고 사람사이에 형제적관계를 도모하는 원시인들의 착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고양해야 한다는 남영전의 주장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영원한 가치원소로 간주하는 그릇된 사유방식에서 비롯된것이며 그러한 사유방식이야말로 비행기는 원시사회에도 있었다는것과 같은 원형선온식가설에 다름 아닌것이며 이는 또 그의 사유가 아직도 원시인들의 신화와 종교의 사유 즉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언하고있다고 비판한다.


남영전의《계시》를 보면 그가 표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주 명확하다. 그는 현대의 인간이 원시 초민들의 소박하고 순진한 심성을 배워 자연을 자기의 생명으로 간주하여 사랑하고 인간지간에도 형제간처럼 화목하게 지내자는것이다. 그가 고양하고자 하는 토템문화의 영원한 가치원소란 바로 이점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김월성은 이를 매우 그릇된 사유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의 심각한 론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류최초의 원시인과 그들이 창조한 문화에 대해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시사회는 미래의 모든 사회에 대해 말할 때 어쨌든 가장 흥미로운 시대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그 후 전부의 보다 높은 단계의 발전에 토대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며 그 시대는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분리되여나옴을 출발점으로 장래 뭉친 사람들이 영원히 다시 겪지 않을 그런 곤난을 극복하는것을 내용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vi]우리는 이 론술을 원시인들이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독창적인 창조적활동으로 장래 문화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눈부신 문화도 있을수 없다는 의미로, 그리고 우리 원초의 조상들을 자기와 짐승도 구별못하는 깨지 못한 미개족속들 이라고 비난할수만은 없다는 말로 리해해도 될것이다


맑스는 인류의 조상들이 창조한 문화에 대해서도 높이 찬양하고 있다. 례컨대 고대의 희랍신화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에서 높이 평가하고있다. 희랍의 예술 나아가 서방예술에 가지는 희랍신화의 의의에 대해 그는 희랍신화는 단지 희랍예술의 무기고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희랍예술의 토양[vii]이라고 규정하고나서 력사와 시공을 초월한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희랍예술과 사시(史詩)에 내포된 신화는  영구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바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향수를 주고있으며 모종 방면으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일종 규범적인 그리고 초월할수 없는 본이기도 하다. [viii]


필자는 맑스의 이 론술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도 단연 알맞는다고 생각한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 신화의 원형으로서 우리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곰이 인간으로 화신했다는 모티브에서 우리는 원시적 토템사상의 흔적을 엿볼수 있으며 주제의식의 홍익인간이란 리념을 통해 신화적 보편성과 그것이 가지는 높은 가치도 확인할수 있다. 이 신화는 후대로 전승되면서 민족공동체의 결속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문학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다시 맑스의 론술에로 돌아가면, 희랍신화가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영구한 매력을 가질수 있는 원인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류의 동년시대희랍인은 정상적인 아동이였는데 아동의 천진함은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유쾌감을 느끼게 한다. 희랍신화의 가치중 하나는 바로 인류동년의 천진성을 진실하게 재현했다는데 있다. [ix]


맑스의 유물사관으로 이 말을 리해하면 희랍신화의 거대한 매력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런 정상적인 아동의 매력에서 온것이라 할수 있다. 맑스의 이 론술로부터 자연히 김월성의 교감(交感)에 의한 합일 즉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상태란 제기법을 련상하게 되는데, 토템신화를 망라한 최초의 문화를 창조한 우리의 조상을 주체와 객체도 구분못하는 영아로 표현하는것이 과연 합리한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


맑스는 희랍신화의 영구한 매력과 관련하여 《정치경제학비판대강(초고)》에서 다음과 같은 리론을 펴고있다. 인류의 력사는 바로 무제한적으로 인류의 창조적 천재를 발굴하는것이며 모종 특수한 방면에서만 인간을 재생산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을 생산하는것이다. 그러나 자산계급경제학과 그에 상당한 생산시대는 인류의 내재적본질에 대한 이런 철저한 발굴이 철저히 공허해지게 하고 사물의 보편적인 변화를 극단적으로 마비시키고있으며 고정적이고 일면적인것을 타파하는 모든것을 일종 순수한 외재적목적을 위해 인류자신을 희생하는 목적으로 바꿔놓고있다. 고대의 세계는 인간을 생산의 목적으로 삼았지만 현대세계는 언제나 생산을 인간의 목적으로 삼고있으며 또한 재부를 생산의 목적으로 삼고있다. 비교적측면에서 말할 때 고대 세계의 이런 견해(인간을 생산의 목적으로 삼는것을 말함필자)는 현대세계에 비해 훨씬 더 고명한것이며 때문에 그 유치한 고대세계는 일종 각별히 숭고한 세계처럼 보인다. [x]


이 론술은 맑스의 다른 한 저서인《정치경제학비판》도언의 론술과도 완전히 어울린다. 《도언》중 맨 마지막 한단락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한 어른이 다시 어린이로  돌아갈수는 없다그러나 어린이의 천진함은 어른에게 유쾌감을 주지 않는가? 어른이라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자기의 (소시적)진실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하나의 시대에 있어서 그 시대의 고유한 성격은 그것의 순진성으로 다시금 어린이의 천성속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때문에 력사상 인류의 동년시대는 그것이 가장 완미하게 발전된 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단계로서의 영구한 매력을 과시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거칠고 야한 어린이가 있고 조숙한 어린이도 있다. 고대민족중 많게는 이 부류에 속한다. 그리스인은 정상적인 아동이다. 그들의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은 그것이 성장했던 그 미발달사회와 결코 모순되는것이 아닌것이다. [xi]


맑스의 이 일련의 론술은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인간 고유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본성이 사라져가고 날로 경제의 노예가 되고있는 사회의 현실을 비판한것이다. 그는 인류의 동년시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상태가 아니라 성숙된 어린이인 인류의 원초 조상들의 천진성영구한 매력이 있음을 극명하게 시사하고있다.


여기서 남영전의 영원한 가치원소관점에 대한 김월성의 부정적견해가 재고돼야 할 가능성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토템문화는 철두철미한 서방문화인가?

 
《토템문화론》에서 김월성은 원시종교형태인 토템문화는 철두철미한 서방문화라고 하면서 20세기 초엽부터 흥기하고있는 서방의 생태륜리학파는 동방의 천인합일사상을 수용할것을 주장하고있는데 서방인도 아닌 남영전이 무엇때문에 토템숭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하고 의혹을 제기한다.


토템문화는 철두철미한 서방문화란 이 명제는 기실 이른바의 토템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만 명제풀이에 노력을 기울인다 할 때 전혀 문제시 될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토템문화가 세계 각지, 이를테면 아세아주의 아랍국가, 이스라엘, 일본과 중국을 망라한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있음은 전반 인류학계가 공인하는 사실이기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최삼룡에 의하면 인디안인들이 쓰던 토템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유럽의 학술문헌에 나타났기때문에 세계 학술계는 아주 자연스럽게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다른 단어를 밀어버리고 토템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토템을 중국의 어원크족은 칼부르라고 부르고 커무인들은 라고 부르며 중국에서 totem을 중국어로 제일 먼저 번역한 사람은 엄복(严复)이라는 사실도 제시했다. 보다싶이 단지 토템이란 명칭이 서방에서 들어왔다는 리유만으로 그것이 철두철미 서방문화라고 하는것은 도리가 없는것이며 따라서 서방인도 아닌 남영전이 무엇때문에 토템숭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하는 의혹도 자연히 풀릴수밖에 없게 된다.


이 문제가 확실히 풀렸으면 우리 민족의 선민들은 토템문화를 갖고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뒤따라 나선다. 한국 학자들의 현황을 보면 이 면의 연구가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닌것 같지만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만 봐도 토템문화단계는 분명 있었던것으로 파악된다. 례컨대 한국학자들은 선사시대의 토템신앙은 태양이나 거석, , 큰나무, 큰동물, 큰바다, 큰강 등 자연에 존재하는 큰것에 대한 숭배로부터 시작되였는데 《삼국유사》나  《제왕우기》 등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신화나 호랑이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볼수 있다고 하였다.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호랑이를 숭배하는 족속을 백성으로 삼았다거나 말이 울다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에서 발견된 알에서 혁거세가 나왔다거나 닭이 우는 곳에 있던 궤에서 알지가 발견되였다거나 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이 우물에서 나타난 룡의 오른쪽 갈비대에서 출생했다거나 금와왕의 모습이 개구리를 닮았다 함도 마찬가지로 토템숭배의 표현형태라고 한다. 그들은 《단군신화》에서 환인이 웅녀와 결혼했다 함은 선민사상을 지닌 부족과 곰토템을 갖고있던 부족과의 련합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후한서-고구려전》에는 "고구려는 본래 다섯 개의 족이 있는데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가 있다"고 기술되여있다. 고구려 5부족의 전신인 5(, ), 즉 우(), (), (), (), ()가도 역시 각 부족의 상징동물로 대신한 각 부족의 명칭이다. 오가의 역할은, 우가는 곡식을 주관했고 마가는 목숨을 주관했으며 저가는 병을 주관했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했고 양가는 선악을 주관 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소, , 돼지, , 양은 실은 당시 각 부족의 토템이였던 것이다.


현대과학의 발전이 토템신화연구에 힘을 실어주고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흥미롭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경에 단군에 의하여 건국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고려후기에 씌여졌을뿐만아니라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다수의 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근래 고조선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한서(漢書)-지리지》에는 기원전 1200년경 기자(箕子)시대 고조선에 8조 금법(禁法)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시기에 법률이 있었다면 고조선이 고대 국가체제를 갖춘것은 그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된다. 또 최근 고고학연구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가 기원전 2400년경으로 확인되였다. 이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의 고조선 건국시기와 비슷하며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국가사회단계에 진입하였다는 일반론을 따르면 기원전 2333년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였다는 기록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것이다.


현대인류의 조상문제연구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일치한 견해를 가져올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 과학자들은 최신기술의 DNA분석을 거쳐 상고시대 아프리카 동남부의 한 자그마한 부락에서 살았던 원주민이 현대인류의 공동한 선조임을 실증했다. 과학가들에 따르면 세계 각지에 널려있는 토착민들에 대한 DNA분석을 통해 현대인류의 공동한 조상이 어떻게 세계 각지에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전반 력사적 이동로선까지 멀지 않아 밝혀내게 된다고 한다. 그외 중국의 과학자들도 유전생물학연구를 거쳐 중국원인(猿人)이 중국인의 선조가 아님을 실증했다고 선포했다. 신기하고 놀라운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다.

 

김월성의 자가당착적인 사고에 대하여 몇마디

 

1) 장래에는 토템식 형제관계가 수립 가능한가?


《토템문화론》에서 김월성은 남영전은 《오늘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대담에서 토템식 형제관계가 수립되여야 한다는 싸르트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으로 자기의 토템문화론의 정당성을 립증하려고 했다고 전제하고 싸르트르는 인류의 요원한 미래를 념두에 두고 말한것이지 현실을 말한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월성의 말은 여기서 큰 모순을 자초하고 있다. 하나는, 싸르트르는 분명 오늘 우리는 반드시 이런 정신(즉 토템식 형제관계)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월성은 아니다라고 하며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사회의 희망사항일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 더 큰 모순이 나타난다. 김월성의 주장대로라면 토템식 형제관계는 오늘에도 성립될수 없을뿐만아니라 인류의 요원한 미래에는 더구나 허용되지 말아야 할것이기 때문이다.

 

2) 새로운 참조계하에서의 낡은 전통 해석평가 문제


지난해 《문학과 예술》제6기에 실린 김월성의 비평서 《전통과 민족문화의 발전에 대한 사고》의 결론부분에는 이런 몇단락의 말이 있다.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 토론은 무엇보다도 낡은 문화전통가운데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할것이다. 또한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려면 문화전통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참조계에 비추어 창조적이며 현실지향적인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여야 할것이다.


맑스는, 전통은 우리의 모든 언행의 시발점인 동시에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연구는 기정된 시발점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것을 통해 무한한 미래를 펼쳐보여야 한다. 전통이란 과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에 대해 말할 때에는 절대적으로 확정된것이며 이미 개변할수 없는 페쇄적인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와 장래에 속하는 문제인것이다.


관건은 새로운 참조계하에서 낡은 전통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문제이다. 그래야 전통은 굳어진 시체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력을 과시하는 살아있는 실체로 될수 있을것이다.

 
솔직히 김월성의 이 견해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 글의 앞에서 전개한 론증도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고있다. 원래 이런 견해를 적용하여 구체적인 문화현상인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새로운 참조계 오늘 날 인간이 실리추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자연에 대해서는 인류중심주의를, 타인에 대해서는 자기중심주의를 행하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파괴돼가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했더라면 그의 글은 완전히 다른 면모로 나타날수도 있었을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김월성은 매우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문화현상 앞에서는 참조계에 의한 평가와 해석력을 완전히 상실하고있으며 결국 자신이 제시한 정확한 론리를 철저히 뒤집어엎는 결과를 자초하고있다.

 

3) 민족문화다원화문제와 토템문화론배척의 모순


《토템문화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월성은 서방경제의 강세에 힘입어 서방중심주의가 팽창세를 보이고있는 형세에 맞서서 민족문화다원화구호가 제기되고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든 민족, 모든 나라는 자기 문화의 다양성, 차이성, 특수성으로 이미 확립된 세계체계에 참여해야 함을 제시하고있다. 그러나 그는 남영전의 토템문화론다원적민족문화에서 배제하고있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토템문화론민족문화다원화와 대립시키고있다. 남영전이 현단계에서 토템숭배관념으로 인류의 문화를 균질화해 보겠다고 시도한다는것이 그가 토템문화론민족문화다원화와 대립시키고있는 주요 리유이다. 김월성의 이런 견해는 나는 나의 매수의 토템시가 작디작은 호르래기로 되여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價値元素)를 부르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해를 부르고 세계의 융합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한 남영전의 말을 60여억 인구가 자기가 부는 호르래기 소리에 한사람같이 발맞추어 전진할것을 기대한 야심찬 포부로 착각한데서 생긴것이 분명하다.


종잡아보면 김월성의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독선적이다. 왜냐하면 남영전의 개성적인 토템문화론과 그의 시작품들은 분명 민족문화의 한 분자(分子)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기실 남영전에게는 토템시에 집착해서는 안될 그 어떤 리유도 없다. 일개 시인으로서 자기의 독자적인 표달령역을 개척하고 독자적인 정신추구를 하는것은 긍정해야 할 일이지 절대 비난할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자기의 정신추구, 시의 가치추구가 정확한것임을 확신하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자기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다. 목소리를 조금 높인다 해서 그것이 바로 인류문화를 균질화해보겠다는 야심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얘기다. 설령 시인들에게 그런 야심이 조금 혹은 많이 있다 해도 하늘이 당금 무너져내리는것이 아니다. 이른바 대정치가들과 대리론가들만 이 세상에서 거창한 치세지도(治世之道)를 담론할수 있고 보잘것 없고 자그마한 시인은 시단의 끝자락에서 풀피리나 호르래기도 불지 말고 그냥 풍월만 읊조리면서 죽은듯이 살아있어야 한다면 우리의 시단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황차 남영전은 그 무슨 전쟁, 반목, 무함, 음모, 빈궁, 사스와 황사바람을 부르려는것도 아니고 잊혀져가는 토템문화전통에 내재 가능한 영원한 가치원소를 살려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해를 부르고 세계의 융합을 부르려는것일 뿐인데 일개 시인의 이와 같은 참된 노력 하나도 허용할수 없다는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것이며 그것은 또한 세계문화다양성선언정신과  민족문화다원화원칙에도 배치되는것이다.

 
남영전이 금년도 《문학과 예술》 제1기에 발표한 《문단의 조화로운 학술토론분위기를 기대한다》(제목을 클릭하면 원문 열독 가능함)는 글은 아주 성근한 마음으로 쓴것임을 일단 읽어보면 충분히 감지할수 있다. 그러나 남영전의 이 글에 대한 김월성의 화답은 읽는 이들을 매우 당혹케 한다.   

 
“18년간 토템문화를 연구했다는 남영전은 단군신화의 곰이 자기의 토템조상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영전은 일상관념이 무너질 때 나 역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고 한다. 왜 남영전이 당혹감만 느꼈는가? 네발가진 암컷곰이 자기의 시조할머니이며 자기가 검은 곰과 전적으로 동일한것임을 알았을 때 남영전은 그야말로 경악했을것이다. 하지만 조선민족가운데 남영전처럼 네발가진 암컷곰이 자기의 시조할머니이며 곰과 자기가 전적으로 동일한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남영전 외에 또 몇이나 있는가? (물론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혹은 토템시의 몇몇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이 한단락의 글에서 남영전의 본의가 완전히 와전된건 차치하고 괄호안팎의 지극히 선의적이지 못한 언어(기실 다른 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저질언어가 처처에서 로출되고있다)가 과연 학문을 연구하는 글에서 나올수 있는것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남영전은 주로 한어로 창작하는 민족시인이다. 필자 개인의 생각에 시를 포함한 남영전의 일부 글은 한어 원문에 비해 손색이 있으며 오역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점을 가지고 남영전을 지나치게 나무랄수는 없다. 조선족문인이 전국적문단에 두각을 내밀어 조선족문학의 영향력을 과시하는것은 환영할바라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진정 전국 여러 민족과 세계 여러 민족의 수림속에서 자기의 영향력을 과시할 때 우리 문학은 비로소 세계앞에 떳떳해질수 있기 때문이다. 김월성이 《전통과 민족문화의 발전에 대한 사고》란 글에서 주장한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국조선족은 두 배에 다리를 올려놓은 어정쩡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중국조선족으로 거듭나야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에서 생각하는 바를 두서 없이 적었다. 개괄력이 약하다보니 글이 많이 길어져 우선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일면적이거나 틀리는 곳이 있을수 있으니 허물없는 지적을 바란다.

 

 

 

[i] 카시르의 인론7신화와 종교1.

[ii] 카시르의 인론12총화와 결론6.

[iii]맑스엥겔스선집2 113페지.

[iv] 장세영:《명징지경에로의 진입(Into the Clearing) 참조.

[v]맑스엥겔스선집2 113페지.

[vi] 엥겔스:《반듀링론》

[vii]맑스엥겔스선집2 113페지.

[viii]맑스엥겔스선집2 114페지.

[ix] 동상.

[x] 맑스: 《정치경제학비판대강(초안 ) 3분책 104~105페지.

[xi]맑스엥겔스선집2 114페지.

 

 <문학과 예술> 2007년 제4기


[부록]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정감과 남영전의《토템문화론》 

  

김월성


  1. 머리말

  남영전이 표방하고있는 <<토템문화론>>의 부당성(不當性)을 밝히려는것이 본고의 취지이다. 남영전은 <<토템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계시>>1)에서 자기의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문단의 자유로운 학술분위기를 기대한다>>2)는 글에서 자기의 토템문화론이 국내외 학술계에서 대환영을 받고있는 사실을 렬거하면서 이른바 토템문화론을 재언명했다.

  남영전의 이런 글들은 철두철미 원시인들의 정감을 바탕으로 작성된것이다. 원시적정감에서 생성된 생명일체화의 전형적인 표현형태인 원시인들의 토템숭배를 <<인류의 세계융합에 대한 부름>>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고있는 사실이 그 점을 증언하고있다. 남영전의 그러한 주장은 억설(臆說)에 다름 아니라는것이 본고의 립장이다.

  생명일체화는 독일철학가 카시르가 <<인론(人論)>> 제7장 <<신화와 종교>>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카시르에 따르면 생명일체화란 인간의 생명은 공간과 시간가운데서 확정적인 계선이 없는 무한대한것으로서 자연의 전부의 령역과 인간의 전부의 력사에 신장(伸張)되여 있는것으로 간주하는 원시인들의 정감인것이다. 동방의 <<만물유령론(萬物有靈論)>>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수 있다. 다만 <<인간의 생명>>과 <<령혼>>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를뿐이다. 생명일체화는 원시인들의 개인정감과 사회정감에 충만되여 있는것이였다. 카시르는 그것을 <<생명의 통일성에 대한 견정한 신앙>>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동시에 카시르는 생명일체화의 구체적표현형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주로 륜리의식)의 생성과 함께 그것이 소실(消失)된 력사적과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바로 카시르의 생명일체화론을 차용한것이다. 그런데 남영전은 카시르의 체계적인 론술에서 생명일체화라는 개념만을 잘라내여 카시르의 본의와는 전혀 달리 자기의 구미에 맞게 람용하고있다. 때문에 18개 단락으로 이루어진 남영전의 <<계시>>는 거의 모든 단락들마다에서 자체모순 내지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를 자초하고있다.

  이에 본고는 우선 카시르의 <<인론>> 제7장 <<신화와 종교>>3)를 텍스트로 삼고 생명일체화 및 토템숭배에 관한 카시르의 론술을 고찰하고자 한다. 동시에 남영전이 카시르의 그러한 론술을 어떻게 왜곡하고있는지를 살펴볼것이다. 그밖에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이 현실적으로 제기되고있는 민족문화다원화의 구호와 어떻게 배치되고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견을 피력할것이다.

  본고는 카시르의 론술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의 부당성을 밝히려고 한다. 때문에 독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겠지만 카시르의 말을 길게 인용하지 않을수 없다. 이 점을 미리 사과한다.

2. 생명일체화에 관한 카시르의 론술

론의의 편리를 위해 먼저 서방철학사의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이란 세계관 즉 세계에 대한 관점 혹은 태도문제인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전까지의 서방철학은 조기의 자연철학으로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은 주로 교감(交感)에 의한 합일식(合一式)이였다. 플라톤의 <<리념론>>은 객관리념을 인식의 목표로 삼고 주체(인간)와 객체(세계)를 량분(兩分)하는 주객관계의 철학 즉 서구의 근대철학의 시작인것이다. 그러한 주체성 철학은 헤겔에 의해 고봉을 이루었다. 헤겔 이후 서방의 대다수의 현당대철학가들은 주객관계의 철학을 폄하하거나 반대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합일을 주장하고있다. 물론 그러한 합일은 교감에 의한 합일 즉 남영전이 주장하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아(嬰兒)상태의 토템숭배식의 합일인것이 아니라 주객관계를 망라하면서도 그것을 릉가하는 초월상태에서의 합일인것이다.

  철학사흐름의 이같은 세개 단계를 중국의 일부 철학가들은 <<무아지경(無我之境)>>, <<유아지경(有我之境)>>, <<망아지경(忘我之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4) 여기에서의 <<무아지경>>이란 인간의 자아의식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한다. 생명일체화 및 그것에 바탕한 토탬숭배관념은 원시인들의 <<무아지경>>의 생성물인것이다. <<유아지경>>은 자아의식이 각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아의식에 의해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게 된다. 일신론 종교 혹은 륜리적종교의 출현이 자아의식의 각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카시르의 <<인론>> 제7장 <<신화와 종교>>는 카시르가 <<망아지경>>의 상태에서 원시인들의 <<무아지경>>으로부터 <<유아지경>>에의 일탈과정을 부감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아래에서 <<무아지경>>의 생성물인 생명일체화에 대한 카시르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정서>> 혹은 <<정감>>으로서의 생명일체화

카시르는 <<원시지력만이 특별하게 지니고있는것은 그것의 론리인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반적인 생활정서>>5)라고 지적했다. 원시인들은 사물을 분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감에 의한 <<생활적정서>>만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 점은 원시사유와 과학적사유가 구별되는 시발점이라고 할수 있다.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적사유가 실재를 기술하거나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의 일반적방법인 분류와 계통화방법을 활용하려고 한다. 생명을 독립적인 령역으로 획분하고 그것들 서로간의 구별을 분명히 한다. 식물, 동물, 인간의 령역간의 계선, 종(種), 과(科), 속(屬)간의 구별을 매우 중요시하며 그것을 제거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시인들은 그 모든것을 관계치 않는다. 그것의 생명관은 분석적이 아닌 종합적인것이다. 생명을 류와 아류로 나누지 않고 그것을 중단되지 않는 련속적인 전체로 간주하며 시비나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분명한것을 용납하지 못한다.>>6) 원시인들은 식물, 동물, 인간을 구별할줄 모르며 생명을 류와 아류로 획분할줄 모른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을 인간생명의 연장된것으로 간주할뿐이다. 카시르의 이와같은 분석은 기실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인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카시르의 론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원시인들에게는 사물의 경험적구별을 파악하는 능력이 결코 부족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연과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에는 모든 그러한 구별들이 더욱 강렬한 정감속에 인멸되여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일종 기본적인 마멸할수 없는 생명일체화가 다종다양한 형형색색의 개별적생명형식들에 소통되고있음을 깊이 믿었다. 원시인들은 자기들이 자연등급가운데서 유일무이한 특권적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명형식 모두가 친족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화사유의 보편적가설과도 같았다.>>7)

   카시르는 생명일체화는 론리가 아니라 정감의 생성물로서 생명체 모두가 일률로 평등하다고 생각했다고한다. 분석능력이 결여된 원시인들은 <<다종다양한 형형색색의 모든 생명형식>>들에 인간의 생명이 소통되여 있는것으로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래서 세상만물 이를테면 개나 뚜꺼비, 까마귀 모두가 인간과 친족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원시인들의 그러한 관념은 무지와 몽매에서 비롯된것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영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시인들은 자연계중의 모든 생명형식은 모두 친척관계라는 <<생명일체화>>의 관념을 믿음으로써 인류의 기     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했으며 이로써 자연계와 화해에 이르렀고 사람지간의 형제관계를 도모하였고 진정한 의     미에서의 세계융합을 실현하였다. 혹여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의 이러한 토템관념을 무지와 몽매의 사물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사실 현대인들의 현대병은 원시인들의 진실하고 착한 본성을 오진한데서 비롯된다.8)

  이것이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인용문에서 볼수 있듯이 남영전은 원시인들의 무지와 몽매에서 비롯된 생명일체화를 현대인들의 현대병을 치료할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한다. 카시르에 따르면 남영전의 이러한 주장은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억측에 불과한 <<매우 유치한 독단론>>인것이다. 왜 이러한 결론부터 내리는지를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카시르가 지적했듯이 생명일체화 및 그것의 표현형태인 토템숭배관념은 원시인들의 정감에서 비롯된 신화와 종교적감정인것이다. 론리적사유가 배제된 원시인들의 그러한 감정은 식물, 동물,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 식물과 동물에도 유일한 인간의 생명이 소통되여 있기 때문에 모두가 친족관계에 있다고 인정할뿐이다. 이러한 경향을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있다.

  <<생명을 가지고있는 모든 존재물들에게 동일하고 불변하는 실재물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것은 매우 유치한 독단론이다. 실재물은 유일하고 동질적인것이 아니라 무한히 다양한것이다. 몇종의 서로 다른 생물체가 있다면 실재물들도 몇가지 서로 다른 조합과 양식을 가지고있다. 생물체 모두가 하나의 단자식(單子式)존재물인것으로서 그것은 그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9)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합리한것이라면 생명일체화 및 모든 생명형식이 친족관계라는 원시인들의 사유에 경도된 남영전의 주장은 <<매우 유치한 독단론>>일수밖에 없게 된다.

  그밖에 남영전은 원시인들은 <<생명일체화의 관념을 믿음으로써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했으며 이로써 자연계와 화해에 이르렀고 사람지간의 형제관계를 도모하였고 진정한 의의에서 세계융합을 실현하였다.>>고 하면서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를 도덕적진리 내지 영원한 진리로 간주하고있다. 카시르는 그러한 경향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추호도 의심할바 없이 신화를 리지화하려는 시도(신화를 리론적진리 혹은 도덕적진리로 해석하는 우언적표달)는 철저히 실패할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은 신화의 기본적상황을 경시했다. 신화의 진정한 기질은 사유적기질이 아니라 정감적기질이다. 신화와 원시종교는 조리성이 전혀 없는것이 절대 아니다. 거기에 도리가 없고 원인이 없는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조리성은 많이는 정감적통일성에 의거하는것이지 론리법칙에 의거하는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감적통일성은 원시사유의 가장 강렬하고 가장 심각한 추동력의 하나인것이다.>>10)

  카시르의 론술에 따르면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것>>이다. 원시적정감을 일종 진리로 착각했기때문이다. 물론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과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고급적인 천일합일사상(망아지경) 사이에 상통성(相通性)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통성일뿐 결코 동일성인것은 아니다. 생명일체화를 현대병치료의 특효약으로 간주하는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철학상에서 이미 배격당한 오늘의 비행기는 원시시대에도 있었다는것과 같은 <<원형선온식가설(原型先蘊式假設)>>인것이다.11) 남영전은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2) 생명일체화에 대한 카시르의 구체적인 론술

   남영전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는 <<가장 완미하고 착한 인성>>, <<아름답고 착한 인성>>이기 때문에 <<숭경을 표시>>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주장 역시 카시르의 관점에 대한 왜곡인것이다. 카시르는 생명일체화의 구체적현상을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있다.

  <<생명의 훼멸할수 없는 통일성에 대한 감정은 그처럼 강렬하고 그처럼 동요할수 없는것이였기때문에 지어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멸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원시사유는 죽음이 일반적인 법칙에 복종하는 일종 자연적인 현상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의 발생은 필연적인것이 아니라 우연적인것이며 개별적이거나 우연적인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것으로서 무술(巫術), 마법(魔法) 혹은 타자의 불리한 영향에서 비롯되는것으로 인정했다. 스펜서와 길런이 오스트랄리야토착민부락을 기술할 때 지적한바와 같이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그러한 사실을 토착민들은 느끼지 못한다. 한 남자가 죽었다면 다른 남자 혹은 다른 녀자한테 죽임을 당한것으로 인정하는데 그 남자 혹은 그 녀자는 언제든 보응을 받아야 했다. 죽음은 불가피면적인것이 아니며 그것의 발생은 특수한 사건이나 인간의 소홀함 혹은 사고에 의해 발생되는것이다.>>12)

  카시르의 이같은 론술이 진실한것이라면 원시사회는 결코 남영전이 생각하고있는것처럼 <<사람지간의 형제적관계>>가 도모되였고 <<진정한 의의에서 세계적융합이 실현된>> 그러한 사회, 그러한 <<천국>>이 아니였을것이다. 경제와 의료보건수준이 원시사회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오늘의 사회에서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죽어가고있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자연현상이기때문이다. 원시사회의 렬악한 환경에서 기아와 질병 그리고 야수들의 습격으로 인해 죽어간 원시인들의 수자는 엄청난 정도였을것이다. 또한 죽어간 인원수에 상당한 무고한 원시인들이 살인자로 인정받고 보응받는 참극이 벌어졌을것이다. 이런 사실은 생명일체화에 의한 원시인들의 <<인성>>이 <<완미하고 착하며>> <<아름답다>>는 남영전의 주장을 반증(反證)하고있을뿐이다. 원시인들은 말 그대로 야만인들인것이다. 원시인들의 그러한 야만성은 생명일체화에서 유발된것이다. 카시르의 론술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그 어떤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불후의 사실인것이 아니라 죽음의 사실이다. 신화와 원시종교는 그러한 증명을 절대 승인하려고 하지 않으며 사상의 진실한 가능성을 단연코 부정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반 신화가 사망현상에 대한 견결하고도 완강한 부정이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생명의 중단되지 않는 통일성과 련속성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것이므로 신화는 반드시 그러한 현상을 제거해야 한다.>>13)

  카시르가 말하고있는 <<생명이 중단되지 않는 통일성과 련속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신념>>이 바로 남영전이 주장하고있는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인것이다. 남영전은 그것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이른바 토템시라는것까지 쓰면서 표방하고있지만 카시르는 <<그러한 현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남영전은 카시르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3) 생명일체화의 소실(消失)에 대한 카시르의 론술

   남영전은 원시인들의 토템문화가 <<미래에 대해서도 큰 영향과 작용을 일으킨다는것을 발견했다>>고 선포한다. 어떤 <<큰 영향과 작용>>을 어떻게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자기의 토템문화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으로 한 선포이지만 역시 카시르의 론술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있다.

  카시르는 륜리의식의 각성과 함께 생명일체화의 소실의 필연성을 거론하고있다. 카시르는 력사적관점으로 볼 때 종교와 도덕이 확보하고있는 뚜렷하고도 분명한 계선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인류학자들도 원시사회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은 담론할 여지가 없는것이라고 인정했다. 카시르는 그러한 현상을 원시사회의 생활에 대한 순수한 기계론이며 자발론적인 교조라고 지적했다. 물론 야만인들은 본부락의 습관과 전통을 매우 존중했을것이다. 하지만 습관과 전통의 힘이 원시생활가운데의 유일한 력량인것은 아니였다. 카시르는 매우 낮은 인류의 문화수준이였을지라도 여타의 력량이 존재했던 분명한 흔적들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어 카시르는 개별적인간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종교리상에 따라 종교사상이 진전되였음을 말하면서 1930년에 출간된 길버트. 뮤레이의 저작 <<희랍종교의 다섯개 단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그 다음이 바로 길버트. 뮤레이의 저작가운데서 지칭한 <오림피스의 정복>과정이다.   그러한 정복이후 인간은 일종 다른 관념으로 자연 및 자연에서의 자기들의 위치를 상상하게 된다. 생명일체화에 대한 일반적감정은 일종 새롭고 더욱 강렬한 취지인 인간의 개체성에 대한 특유의 의식에 양위(讓位)하게 되였다. 자연과의 친족관계는 더는 있을수 없게 되였고 인간과 식물 혹은 동물간의 혈연적련계가 더는 있을수 없게 되였다. 인간은 그의 인격화된 신(神)들가운데서 새로운 시각으로 그 자신의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은 최고의 신(오림피스산의 제우스)의 발전을 통해서도 넉넉히 보아낼수 있다. 제우스는 본래 자연신으로서 산의 정상을 차지하고있으면서 구름, 비, 우뢰, 번개를 주관하던 신이였다. 하지만 그는 점차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아스클라스 거기에서는 이미 최고의 륜리적리상의 대표로 되었으며 정의의 감독자와 보호자로 되였다.>>14)

  서방인으로서의 카시르는 서방문화의 중심인 종교적차원에서 륜리적종교의 생성과 함께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의 소실과정을 론의하고있다. 카시르의 이같은 론의가 현세주의가 주축을 이루고있는 우리의 동방문화의 실정에 완전히 부합되는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시인들의 무아지경으로부터 유아지경에로의 일탈과정에서 생명일체화의 소실은 일종 필연성을 띤 현상이라는 점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것이다. 카시르의 론술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대형적인 일신론 종교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한 종교는 도덕적력량의 생성물인것이다. 그러한 종교는 선과 악이라는 그 한점에만 힘을 기울인다. (중략) 원시종교는 일종 새로운 힘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일종 순수한 륜리적력량의 공격으로 인해 정복되지 않을수 없었다. (중략) 그러한 종교(륜리적종교를 가리킴- 필자)는 신화적상상이나 심미적상상의 생성물이 아니라 위대한 개인의 도덕적의지의 표현인것이다. 지어 자연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륜리생활의 거울속에서 자연을 관찰하게 되였기때문이다.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를 끊어놓거나 벌려놓으려는 그 어떤 종교도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륜리적종교에서는 그러한 련계가 새로운 의미상에서 이어지고 밀착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술이나 원시신화에서 본 그러한 교감적련계가 부정되였거나 파괴된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의 자연은 정감적방면에서가 아니라 리성적방면에서 탐구된다. 만일 자연이 신성한 요소를 포함하고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풍부성에서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질서의 단일성에서 나타나는것이다.>>15)

  카시르는 원시종교의 생명일체화가 일신론 종교의 륜리적의지에 의해 정복되였음을 말하고있다. 인간들은 륜리적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하게 되였고 리성적으로 자연을 탐구하게 되였다. 이상과 같은 론의에 근거하여 카시르는 <<바로 그러한 보편적인 륜리교감형식은 일신론 종교에서 자연적이며 무술적인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을 전승했다>>16)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남영전은 <<자연물을 자기의 친척으로 여기고 자연물을 자기 생명의 일부분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을 오늘도 주장하고있다. 남영전의 이러한 주장을 생태환경이라는 단순한 생물학적차원으로만 리해할수 없다. 카시르의 론술에서 보았듯이 생명일체화는 이미 력사발전과정에서 부당한 것으로 소실된 원시인들 감정이다. 또한 생태환경보호에서 성과를 보이고있는 일부 발전된 나라들의 경험은 자연법칙에 대한 심각한 파악이 선행되여야 함을 사실적으로 립증해주고있다. 때문에 원시적감정에 대한 남영전의 지나친 집착은 생명일체화 및 그것에 바탕한 토템숭배관념에 대한 몰리해에서 유발된것이라고 인정할수밖에 없다. 남영전의 <<계시>>가 생명일체화의 원시적감정에서 작성된것이라고 하는 주요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토템숭배관념에 대한 카시르의 론술    

  원시인들의 토템숭배관념에 대해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있다.

  <<토템숭배관념은 원시문화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 대다수의 원시부락(이를테면 스펜서와 길런이 자세하게 연구하고 기술한 오스트랄라아토착민부락)들의 전부의 종교와 사회생활은 모두 토템관념의 지배를 받고있다. 뿐만아니라 이미 대단히 발전된 단계에서 고도의 문명을 지니고있는 민족들의 종교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고도 세밀한 동물숭배체계를 볼수 있다. 토템숭배에서 인간은 자신을 그 어떤 동물의 후대로 간주할뿐만아니라 현존적인 동시에 유전학적인 뉴대로 그들의 전부의 물리적, 사회적 존재와 그들의 토템조상을 련계시킨다. 많은 상황에서 그러한 련계는 일종 동일성으로 간주된다. 인종학가 스테이넌은

인디안부락의 모종의 토템숭배씨족의 구성원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을 파생시킨 동물을 전적으로 동일한것이라고 단언한다고 말하고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바로 수서동물(水栖動物) 혹은 붉은 앵무새라고 언명한다. 프레이저도 비슷한 말을 했다. 오스트랄리아 디리부락중의 모종의 식물종자를 토템형상으로 간주하는 씨족의 두령은 백성들로부터 그 종자를 생산하는 식물 자체가 바로 두령이라는 말을 듣는다.>>1)

  인용문에서 볼수 있듯이 카시르는 토템숭배관념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자신을 그 어떤 동식물의 후대로 간주하는 점을 들고있다.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카시르는 인종학자, 인류학자들의 조사사실을 사례로 들기까지 했다. 또한 그 점이 바로 일반적인 자연물숭배와 토템숭배간의 구별점이기때문이다.

  18년간 토템문화를 연구했다는 남영전은 <<단군신화>>의 곰이 자기의 토템조상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영전은 <<일상 관념이 무너질 때 나 역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고 한다. 왜 남영전이 당혹감만 느꼈는가? 네 발 가진 암컷 곰이 자기의 시조 할머니이며 자기가 검은 곰과 <<전적으로 동일한것>>임을 알았을 때 남영전은 그야말로 경악했을것이다. 하지만 조선민족가운데 남영전처럼 네 발 가진 암컷 곰이 자기의 시조 할머니이며 곰과 자기가 <<전적으로 동일한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남영전외에 또 몇이나 있는가?(물론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혹은 토템시의 몇몇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남영전은 42수의 토템시2)라는것을 읊었다고 한다. 42종에 달하는 우리 민족의 토템을 시화했다는것이다. 우리민족이 42종의 동식물을 자기의 조상으로 간주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서울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옆에 외가닥으로 높이 솟은  바위산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 산을 <<좃대바위>>라고 부른다. 불임증에 걸렸거나 결혼후 오래도록 후대를 보지 못한 많은 부부들이 음식을 차려가지고 그 바위산 밑에 가서 아들딸을 점지해 달라고 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풍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바위산을 토템조상으로 간주하고 찾아가는것이 아니라 자연물숭배관념에서 찾아가는것이다. 남영전은 자연물숭배와 토템숭배를 구별할줄 알아야 할것이다.

  미개족속들의 토템숭배사례까지 렬거한 다음 카시르는 다음과 같이 론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생명의 통일성에 대한 견정한 신앙이 우리 관점으로 보면 틀릴수도 없고 말살할수도 없는 그러한 구별들을 어떻게 덮어감추고있는지를 보아낼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구별들이 완전히 무시되였다고 볼수는 없다. 그것은 경험적의미에서 부정된것이 아니라 종교적의미에서 중요하지 않은것으로 언명된것이다. 신화와 종교의 감정에서 말할 때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사회 즉 생명의 사회로 된다. (중략) 생명은 그것의 가장 낮은 형식과 가장 높은 형식 모두에서 마찬가지의 종교적존엄을 지니고있다.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 전부가 동일한 차원인것이다.>>3)

  카시르는 원시인들은 생명일체화에 의해 인간과 동물간의 구별점을 덮어감추고있지만 그것은 경험적의미에서 부정된것이 아니라 신화와 종교적의미에서 부정된것임을 말하고있다.토템관념 자체가 바로 신화와 종교의 파생물이기때문이다. 신화와 종교적시각으로 볼 때 인간, 동물, 식물 모두가 같은 차원에 놓이게 된다. 그것들 모두가 생명의 종교적존엄성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카시르는 그러한 생명일체화의 소실의 필연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남영전은 오늘도 토템은 <<하나의 기치이며 (중략) 형제와 같은 정이며 인류의 공동한 아름다운 리상>>임을 부르짖고있다. 남영전은 인간과 동물간의 <<틀릴수도 없고 말살할수도 없는 그러한 구별>>들을 <<덮어감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카시르의 론술에서 알수 있듯이 남영전의 이같은 엉뚱한 주장은 그의 사유가 아직도 원시인들의 신화와 종교의 사유 즉 생명일체화의 원시적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언하고있다. 
  
4. 남영전의 《토템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계시》를 분석함 
   
  아래에서 18개 단락으로 이루어진 남영전의 <<계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앞에서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보충하려고 한다.

  첫 단락에서 남영전은 18년간에 걸친 토템문화연구에서 자기의 두가지 <<발견>>을 선포하고있다. 토템문화가 민족문화심리의 <<원침적층>>임을 <<발견>>했고 현대인들은 <<자연과 대립되며 사람지간에 랭혹하여>> <<생존위기>>를 조성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두가지 모두가 남영전의 <<발견>>이라고 할수 없다.

  토템숭배관념이 일부 민족들의 원형심리임은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미 천명한바이다. 새로운것이라면 원시인들의 토템관념이 <<현대인들의 의식에 침투되였고 미래에 대해서도 큰 영향과 작용을 일으킨다>>는 주장인데 어떻게 침투되여 있고 또 어떤 영향과 작용을 어떻게 일으키는지에 대해 남영전은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니 그 내막은 알길이 없다. 다음 엥겔스는 남영전보다 백20여년 앞서 <<우리는 자연계에 대한 우리의 승리에 대해 지나치게 도취되지 말아야 한다. 매 차례의 그러한 승리에 대해 자연계는 우리에게 보복한다.>>4)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그러한 보복에 대처할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법칙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활용할것>>5)을 주장했다. 토템관념으로 <<현대병>>을 치료하자는 남영전의 주장과는 판판 다르다. 또한 남영전은 그러한 <<발견>>이 자기의 성과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것이다. 학문연구자세에서 남영전은 내것도 내것이요 네것도 내것이라는식으로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두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원시인들도 인류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했다고 하는데 원시인의 정신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전개한 이러한 론의는 적어도 무리한것이다. 카시르의 말대로 <<생활적정서>>만을 지니고있었던 원시인들에게는 무엇을 <<질문>>하고 <<탐구>>할 사유능력이 없었다.

  생명일체화를 집중적으로 론의한 세 번째 단락의 관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네 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인간과 자연계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연계를 <<모친>>이라고 한다. 남영전도 자연계의 공기나 물을 마시고 자연계의 고기나 쌀, 남새를 먹으면서 살아갈것이다. 그러한 자연계를 <<모친>>으로 간주한다면 남영전은 <<모친>>의 몸체를 뜯어먹으면서 살아가는 불효자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카시르는 원시종교와 륜리종교에서의 서로 다른 자연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자연은 다신론 종교(원시종교- 필자)에서처럼 위대하고 자상한 모친인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생성하는 양육지인것이다. 자연은 법칙과 합법칙성을 띤 령지로 간주될뿐만아니라 그러한 특징에 의거할 때만이 비로소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증명할수 있게 된다.>>6)

  남영전은 또 원시인들의 <<아름답고 착한 인성>>을 말하고있다. 남영전은 <<인성>>의 내포를 파악하지 못한채 <<인성>>을 거론하고있다. 인성이란 인간의 속성 혹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성인것이다. 인성은 두개 부분 즉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나뉘여진다. 보편성이 바로 생물체로서의 인간과 여타의 동물들간의 공통성이다. 이를테면 자유로운 활동, 식욕, 성욕 등등이다. 다른 한 부분은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특수성 즉 공구제조능력, 언어, 리성, 과학수준 등등이다. 본능에 의해 활동하는 원시인들인 경우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는 특수성만을 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원시인들을 야만인이라고 지칭한다. 야만인들의 이른바 <<인성>>을 <<아름답고 착하다.>>, <<가장 완미하고 착한 인성>>이라는 남영전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는것이다. 하지만 남영전에 대해 말할 때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일종 필연성을 띤것이다. 그의 모든 사유가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바탕으로 하고있는것이기때문이다.

  여섯번째 단락은 과도단락이다. 남영전은 이 단락에서도 토템씨족들의 형제적관계를 고양하고있다.

  일곱번째, 여덟 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인류의 조상의 발원지가 아프리카뿐이라고 하면서 <<여러 민족은 모두 아프리카조상들의 이민이고 아프리카조상들의 후예>>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제기하고있다. 그런데 지난해 년말에 북경에서 아프리카 여러 나라 수뇌들의 모임이 있었다. 호금도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여 그 모임에서 한 연설에서는 <<중국과 아프리카주는 마찬가지로 인류문명의 발원지>>7)라고 말했다. 남영전의 황당한 주장은 토론할 여지조차 없는것이다.

  아홉번째 단락에서는 단군신화를 말하면서 곰토템을 말하고있다. 남영전은 단군신화의 환인을 <<전설속의 황제>>라고 한다. 남영전이 과연 단군신화를 읽어보기나 하고 곰토템을 론의하는지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단군신화에 대한 남영전의 허황한 론의에 대해서는 지면제한으로 다른 글에서 분석할것이다.

  열번째 단락의 성씨분석은 토템숭배관념에 별의미가 없는것이라고 생각된다.

  열한번째, 열두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세계 60억 인구 모두가 아프리카조상들의 후대라는 허황한 론의를 전개하면서 새롭게 얻었다는 또 하나의 <<결론>>을 선포하고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는것이다. 남영전의 이런 결론 역시 대단한 <<발견>>도 아니고 또 다 맞는것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레닌도 일찍 <<민족은 사회발전의 자산계급시대의 필연적인 생성물이며 필연적인 형식>>8)이라고 지적했다. 민족은 자산계급문화의 생성물이라는 얘기일것이다.

  그런데 남영전이 말처럼 민족이란 혈통과는 전혀 무관한것인가? 물론 민족개념에는 광의적, 협의적인 방면이 있다. 중화민족이라고 하면 56개 민족이 망라된다. 그러나 한족인 경우 한족문화에 익숙한 조선족이라고 해도 한족의 구성원으로 되기는 어렵다. 반대로 조선족인 경우 한족을 망라시킬수 없다. 민족공동체뿐만아니라 그 개인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영전을 오르죤족 혹은 장족이라고 하면 대뜸 반발할것이다. 민족이란 동포의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기때문이다. 동포란 어원적으로 따지면 같은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여난 형제자매를 뜻한다. 혈통과 민족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남영전의 작법을 고명한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열세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전지구화시대에 각 민족들이 형제(토템식형제관계)와 같은 정을 가져야만 <<공동히 생존하고 발전할수 있다>>고 한다.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를 보배처럼 여기고있는 남영전의 생각은 그야말로 유치원생들처럼 천진한것이다. 다음 장절에서 남영전의 이런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열네번째 단락에서 남영전은 <<오늘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대담에서 토템식 <<형제관계>>가 수립되여야 한다는 싸르트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으로 자기의 토템문화론의 정당성을 립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싸르트르는 인류의 요원한 미래를 념두에 두고 말한것이지 현실을 말한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사회의 <<희망>>사항인것이다. 싸르트르는 그러한 희망을 현실로 전환시키자면 인류는 현단계에서 도덕적수양을 쌓아야 하며 <<부족함>>과의 투쟁을 진행하는 등 <<두가지 태도>>를 병행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싸르트르의 이같은 주장은 앞에서 말한 자연에 대한 엥겔스의 사상과 상통되는것이다. 남영전은 싸르트르의 말 역시 그 본의를 무시하면서 람용하고있다.

   마지막 세 단락에서 남영전은 자기의 야심찬 포부를 피로하고있다. 그는 자기의 이른바 토템시라는 것을 호르래기에 비유하고 있다. 60여억 인구가 자기가 불어대는 호르래기 소리에 한 사람같이 발맞추어 전진할것을 기대해서 한 비유일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전지구적인 일체화와 민족문화다원화의 모순이 날로 비화되고있는 오늘의 실정에서 남영전의 그러한 포부는 도연명이 구상했던 도화원보다도 더 유토피아적인 공상이 아닐수 없다. 아래에서 그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5. 민족문화다원화와 남영전의 《토템문화론》

모든 민족, 모든 나라는 경제가 일체를 지배하는 경제시대에 들어섰고 세계체계가 이미 기성사실로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현상은 서구자본주의경제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세계경제는 이미 자본주의경제로 일체화된 것이다. 서구자본주의강세에 힘입어 서방중심주의 즉 서방화구호가 제기되고있다. 서방경제의 그러한 강세에 힘입어 서방중심주의 즉 서방화구호가 제기되고있다. 그러한 구호에 맞서서 제기된것이 바로 민족문화다원화구호인것이다. 민족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해야 하며 문화의 차이성과 특수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것으로 민족문화다원화의 내포를 규정할수 있다.

  서방중심주의구호는 어제나 오늘에 제기된것이 아니다. 서방제국주의궐기의 총적인 도덕적구실이 바로 사회다윈주의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리론인것이다. 그것의 기본적리념이 바로 서방은 세계문명의 중심이며 서방인은 비서방인보다 더욱 리성적이고 더욱 높은 창조성을 지니고있다는것이다. 서방의 생존방식은 인류의 생존에 더욱 리로운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생존과 경제실체를 필연적으로 전승할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리념에 호응하는 서방문화패권의 핵심적내용이 바로 <<현대화>>구호인것이다.

  현대화구호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충격속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외교정책의 주요한 근거였다. 그래서 중국의 경제인류학 학자들은 <<현대화가 자칫하면 함정>>으로 될수 있음을 재삼 경고하고있다.1) 우리는 한국의 미술평론가 신항섭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들을 필요가 있다.

     어쩌면 전통문화예술이야말로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속에서 독립적인 민족 및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런지도 모른다.

    세계화가 예정대로 성공을 거둔다면 미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2)

   모든 민족, 모든 나라는 자기 문화의 다양성, 차이성, 특수성으로 이미 확립된 세계체계에 참여할수밖에 없다. 일체화, 국제화, 보편성만을 강조할 경우  신항섭의 말처럼 <<미국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되기때문이다. 물론 경제일체화에 의해 인류의 문화도 그 어느 날엔가는 융합될것이다. 싸르트르가 말한 <<형제관계>>가 확립될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융합은 반드시 여러 민족문화의 다양성, 차이성, 특수성의 충분할 발전을 전제로 하는것이여야 한다. 또한 그것만을 민족 서로의 생존과 발전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남영전은 이 점을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현단계에서 토템숭배관념으로 인류의 문화를 균질화해 보겠다는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은 허무맹랑한것일수밖에 없게 된다.

  원시종교형태인 토템문화는 철두철미 서방문화인것이다. 토템개념은 18, 19세기 서방 인류학계에서 많이 론의되던 토템문화론이 20세기에 이르러 서방문화의 충격속에서 동방문화에 류입된것이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서방인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서방문화중심주의를 부르짖고있는 오늘 서방인도 아닌 남영전이 무엇때문에 토템숭배에 관한 서방학자들의 본의를 무시하면서까지 그것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남영전과는 달리 20세기 초엽부터 흥기하고있는 서방의 생태륜리학파는 동방의 천일합일사상을 수용할것을 주장하고있다.

  그밖에 남영전은 <<자연을 숭경하고 애대하고 자연물을 자기의 친척으로 여기고 자연물을 자기의 생명의 일부분으로 여겨야 한다.>>는 자기의 토템문화론이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일률적인 등가물로 보고있는 서구의 극단신비주의자들의 관념과 일맥상통한것임을 알아야 한다. 극단신비주의자인 독일철학가이며 신학가인 알버트. 스웨트저르는 <<생명 자체가 신성한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합리적인 륜리학은 <<가장 저급적인 단계의 생명현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생물을 보살펴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원칙에 좇아 처사하는 사람은 <<무더운 여름밤 등불아래에서 일할 때에도 창문을 닫고 무더운 열기를 마실지언정 하나하나의 날벌레들의 날개가 등불에 타서 책상에 떨어져 죽는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3)고 했다. 스웨트저르의 이같은 관점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는 모두가 신성한것으로서 가치의 높고 낮음이 있을수 없는 등가물이라는 점에서 출발한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근대철학의 인류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만일 남영전이 말하는것처럼 자연계를 <<모친>>으로 간주하고 모든 자연물을 <<형제>> 혹은 <<자기의 생명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인간은 우선 자신의 생존을 확보할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주장하는 고급적인 천일합일사상은 극단신비주의자들이나 남영전처럼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를 일률적인 등가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자아의식과 도덕의식을 지닌 인간은 여타의 생명체와는 비교할수 없는 고급성을 지니고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존의 확보되여야 한다. 인간이 없으면 세계의 모든 존재가 무의미한것으로 되고만다. 그래서 싸르트르는 <<형제관계>>의 구축에 앞서 <<부족함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을것이다. 그러한 투쟁은 자연을 인식하고 개조하고 리용하는것일뿐 무자비한 정복이 아닌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이 여타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비도덕적인것으로 볼수가 없다.

6. 마무리

  
  이상에서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의 부당성을 론의했다.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이 부당한것이라고 하는 가장 주된 리유는 남영전이 토템숭배관념에 대한 원작자들의 본의를 무시하면서 자기의 구미에 맞게 그것을 람용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다음 원시인들의 생명일체화감정을 <<영원한 가치원소>>로 간주하고있는 남영전의 그릇된 사유방식이다. 그러한 사유방식이야말로 비행기는 원시사회에도 있었다는것과 같은 <<원형선온식가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남영전의 말처럼 생명일체화가 과연 <<영원한 가치원소>> 혹은 <<원형>> 집단무의식으로 되었다면 누가 떠들어서 고양할 하등의 필요도 없는것이다. 칼. 융의 신화 원형설에 따르면 원형 혹은 집단무의식은 선천적으로 유전되는것이기때문이다.4) 특히 세세대대로 현세주의적인 유가문화를 숭상해온 우리 민족에게 종교신앙형태인 토템숭배관념을 강요하는것은 력사실제를 무시한 일종 억설로서 무의미한것이다. 우리민족에 대해 말할 때 그 어떤 종교적형태도 원형심리로 전환될 여유가 없었다. 조선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곰을 자기의 조상으로 간주하거나 곰을 자기와 <<전적으로 동일한것>>으로 간주하고있는 사람이 수량적으로도 전무한 상태이다. 또한 우리는 자연물숭배와 토템숭배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그밖에 토템문화로 인류의 문화를 균질화하겠다는 남영전의 포부는 민족문화다원화라는 현실적구호에 배치되는것이다.

  남영전은 나에게 자기의 토템문화론에 대한 반론을 중문으로 작성해서 발표할것을 제안한다. 나는 호의에서 나온 제안이였을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물론 나는 남영전만큼 중문수준이 높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은 차요한 원인일뿐이다. 나는 아직 단군신화도 제대로 완전히 해독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수준에서 중국의 염황이나 황제시기의 토템숭배를 론하다가 웃음거리를 남기는것이 두렵다. 그리고 여기는 조선족토템문화를 론의하는 마당이다. 토템문화리론은 주로 인류학자들이 전야조사법으로 미개한 토착민들에 대한 현지답사에 대한 총화라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조선족은 그러한 미개족속들이 아니다. 조선족의 토템숭배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있는 타민족학자들을 우리의 토템문화론의에 반드시 모셔들여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된다.

  남영전의 토템문화론에서 단군신화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단군신화에 대한 그의 그릇된 관점에 대한 분석은 지면제한으로 인해 후일을 기약한다.  

2007년 5월 15일 연길에서 

 <문학과 예술> 2007년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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