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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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적 해석'과 관련하여 곰아지 선생과 상론함/박문희
2007년 09월 17일 14시 53분  조회:4277  추천:61  작성자: 박문희

 

<권위적 해석>과 관련하여

곰아지 선생과 상론함

 

박문희

 

곰아지선생의 토론성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곰아지선생은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권위적 해석>에서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적인 기록으로부터 단군의 중국 감숙 돈황 기원설이나 중국 신강 천산 산맥 기원설은 아무런 력사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일부 호사자들의 낭설임을 말해주고 있다면서  “三危라는 지명을 중국문화나 불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후에 기록된 『삼국유사』중의 기록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렇게나 해석될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런데 필자의 소견에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성과들을 보면 이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볼 일만은 아닌것 같다.

 

곰아지선생이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에서 발취하여 제시한 문장중 중국 동북부의 민족으로서 肅愼 朝鮮 東夷 등이 주나라 초기부터 중국문헌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란 기술은 내가 보기엔 과학적이 못된다. 례컨대 東夷가 우리 민족과 일정한 관계가 있는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중국고전이 제시하는 허다한 자료를 보면 그 속의 부족들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고있으며 그것을 통털어 우리 민족을 가리킨다기엔 문헌적인 기록이 받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우리 민족의 력사연구에서 문제로 되는것은 자체의 문헌자료가 턱없이 부족한것이다. 제일 오랜 자료래야 단군신화를 담고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다. <세종실록>에도 <古朝鮮秘詞>, <朝代記>, <三聖密記>, <三聖記>와 같은 한국史書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조때까지만 해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이외에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었을것으로 보이지만 왜란으로 다 분실되고 지금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결국 지금 우리는 자기의 력사를 잃어버리고 만 형국이 되고말았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모르고있는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도 아직 이 주요한 문제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고있는게 현재 실정이다.

 

부득이 신화로부터 뿌리를 찾지 않을수가 없는데 이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력사가 아닌 신화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증거가 신화의 진실성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다. 문제는 신화가 너무 간략하게 씌여져 많은 문제를 오리무중에 빠뜨리고있다는것이다. 이제 연구의 길을 넓히는 방법은 중국고전을 리용하는것 밖에 없을것 같다.

 

중국의 고전총서 <四庫全書>는 청나라 乾隆때 천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편찬한 무려 79000여권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방대한 史書다. 그 중에는 東夷사료를 망라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을수 있는 자료가 반드시 있을것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중시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간혹 생길때가 있다.

 

물론 한국의 학자들이 이 작업에 손을 댄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일부 연구에서 내것은 물론 내것이요 네것도 역시 내것이란 태도는 좀 지나친것 같다.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도 알고보니 우리 민족의 선인이라는 견해는 바로 동이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라는 견해에서 비롯된것이다. 방대한 고전을 련계속에서 보지 않고 고립적으로 연구하면 연구가 필시 기로에 빠지게 될것이다.

 

중국고전과 현대 중국의 무수한 연구론문을 거침없이 읽을수 있는 한국학자가 너무 적은것도 문제로 될수 있다.

 

최근 중남민족대 남방소수민족연구중심의 연구원 楊萬娟이 2005 1월에 발표한 론문 <韓國文化與中國楚文化近源初探>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게 되였는데 상당히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어보인다. 이 글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어디서부터 떠나서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과정을 영화처럼 생동하게 보는것 같다.

 

楊萬娟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초나라의 羅國과 盧國은 한국의 新羅, 辰韓과 밀접한 력사적 淵源관계가 있다. 한국 삼한시기의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주민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초나라에서 건너간 초나라 유민 羅씨족와 盧씨족이다. 그들은 모두 묘족의 후예(시조는 蚩尤)로서 방사(方士) 한종(韓終)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간것이다. 단군신화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 생겨난것인데 한종이 가능하게 신화에 나오는 환웅의 원형일수 있다는게 그의 견해다. 신라는 한자를 익숙히 구사하는 우세를 빌어 건국신화를 창조, 기록했으며 신화속에 초나라문화의 색채를 부여했다는것이다. 초나라와 한국 문화의 관계에 대해 楊萬娟은 전부 고전을 인용하여 설명을 했는데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초나라의 대 시인 굴원이 <楚辭>에서 三危 , 風伯, 雨師 등 용어를 사용했다는 례를 비롯하여 楊萬娟은 신빙성이 있는 례를 매우 많이 들고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원전 7세기에 중국 한강 중류의 초나라복지에 묘씨부족의 두개 작은 나라 羅國과 盧國이 있었다. 두 나라는 다 묘씨부족이였지만 갈래는 달랐다. 羅氏族은 중원에서 왔고 盧氏族은 岷山과 岷水 일대에서 왔다. 그런데 민산과 민수 일대가 바로 감숙성 남부와 사천성의 린접부에 위치한 古三危지역이다.

 

秦漢시기와 그 이전의 戰國시대에 方術(신선, 도사의 술법)에 능하고 천문지리와 의술, 그리고 농업과 항해 등 지식도 숙달한 方士들이 제왕의 신임을 몹시 받았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방사로 徐福을 꼽는데 그는 진시황의 령에 의해 선약을 구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그와 동시대 사람인 韓終은 선약을 캤지만 임금이 복용하려 하지 않아 자기가 그 선약을 먹고 신선이 되였다 한다. 바로 이 한종이 초나라가 망한 후 8년에 羅氏와 虜氏 등 楚나라의 나라 잃은 씨족 삼천을 거느리고 기원전 215년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동남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자가 한국으로 들어간 시기는 대략 전국시기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2세기로 잡고있는데 이는 한종이 한국으로 건너간 시간과 기본상 일치하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평양을 망라한 대동강 이남지구를 차지한 후 원유의 부락수령 이야기를 토대로 새로운 통치자에게 유리한 건국전설을 보태여 단군신화를 창조한것이다. 이로부터 추론하면 韓終이 단군신화에 기술된 환웅의 원형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사서에 한종은 이미 수련을 거쳐 신선이 되였다고 기재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완전히 그를 천신으로 떠받들수 있는것이다.

 

三危와 太白의 위치문제에서 楊萬娟은 자기의 견해를 내놓고있다. 三危에 대해 한국학자들중에는 白岳山설과 감숙 敦煌남부 三危山說이 있고 三危太白을 통털어 조선평안북도의 묘향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학자들의 견해도 각각인데 돈황 부근 三危山說, 감숙 天水(오늘의 천수시)부근 鳥鼠山說, 陝甘川三省접경 가릉강부근설, 川甘접경 岷江, 岷山 一帶說 네가지가 있는데, 楊萬娟은 가릉강부근설, 岷江, 岷山 一帶說이 비교적 합리하다고 보고있다. 太白에 대해서는 장백산과 묘향산 두가지 설이 있으나 楊萬娟은 두가지를 다 부정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접경의 태백산을 짚고있다.


음미해볼만한 자료가 있다. 《魏·志第七·地形二下》에 따르면 중국 漢江(즉 漢水)의 발원지인 감숙의 天水는 東漢시기 永平17년에 漢陽郡으로 개칭한적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한국 漢江 끝부분의 서울도 명칭이 漢陽이였다는 점이다.

 

중국 한강의 발원지에 태백삼위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 초나라의 盧氏族이 삼위출신이라는 점 등 적지 않은 자료들이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중국문자를 통달하고 연박한 지식을 가지고있는 韓終方士가 령솔한 盧씨족과 羅씨족의 한개 지류(삼천)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진입, 드디여 新羅가 辰韓을 토대로 나라를 세우고 따라서 신라문화는 한국문화의 주류를 형성했음이 모든 력사문헌자료를 통해 증명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찾았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것을 중한간의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자들이 분명 알고있으면서도 왜 함구무언인가 하는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한국학자들의 자존심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 아닐가고 생각한다. 만약 자존심이 과연 문제로 되였다면 이것은 우리가 자기의 뿌리를 찾는 시간을 지체시킬 뿐이지 아무런 도움도 없을 줄 안다.

 

마지막으로 만약 楊萬娟의 연구가 진일보의 고증을 거쳐 진실성이 확인된다면(이는 물론 나의 가설이다) 뒤미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것이다. 우리의 조상의 한 지류가 三危의 三苗부족에서 왔는데 그 선인은 가능하게 蚩尤일수도(가능하게 아닐수도 있고) 있다. 그런데 치우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렇게 거슬러올라가다보면 약 6~7만년전(혹은 그 이전) 현대인류의 공동조상인 아프리카 동남부의 최초의 아담과 이브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것이다.

 

그러면 그전에는 원시인류가 없었는가? 있었다. 고고학발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빙하기(4 빙하기)에 다 얼어죽고 굶어죽었거나 다른 알지 못할 원인으로 멸종됐다. 아프리카에서도 킬리만자로산과 케냐산 등의 6천메터 좌우되는 고산에 빙하가 형성되였고 지금도 녹지 않은것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의 동남부는 적도위치여서 현대인류의 조상들이 살아남을수 있었겠다고 사료된다. 그들이 서와 북으로, 혹은 얼어붙은 바다를 거쳐 호주로 서서히 이동, 수만년에 걸쳐 대륙으로 퍼진것이 아닐가 싶다.

 

나는 인류학자나 고고학자나 력사학자도 아니므로 우리 민족의 연원을 망라한 상기의 모든 엉뚱한 궁리들이 완전히 빗나간 생각일수도 있으니 그냥 공개발표가 아닌 수필이나 잡문정도로 여기고  서로 부담없이 의견을 교환했으면 한다. 아울러 엄중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너그럽게 량해하기를 바란다.


9월 16일 
장춘에서

                                      *     *     *     *  


아래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데 관계되는 연구자료를 공유하고 서로의 리해를 돕고자 楊萬娟의 론문 <
韩国文化与中国楚文化近源初探> 全文을 아래에 참고로 옮긴다-- 
 

 

韩国文化与中国楚文化近源初探

                    
中南民族大学学报,2005.1
  
作者:杨万娟 中南民族大学南方少数民族研究中心 研究员

  (本文引用大量中韩文献史料试图说明:韩国古辰韩和弁韩居民来自被秦灭国的楚国,和楚国的罗氏、卢氏一样均为苗裔,罗、卢氏族是跟随着方士韩终到的韩国。檀君神话是在新罗统一朝鲜半岛后出现的,韩终可能就是檀君神话中桓雄的原形。新罗以熟练使用汉字的优势,创造并记录下来了开国神话,神话中融进了中国楚文化的色彩。辰韩和新罗的历史将会为我们提供极好的楚史研究新线索。)
  
  今年(估计是2004年,转载者注)6月中旬笔者到韩国江陵参加国际亚细亚民俗学会第7次学术会议,并应邀和乌丙安先生、陶立璠先生等中国学者一道参观考察了江陵端午祭。主会场设在江陵市政大厅,市政府门前不远处的一块巨石上刻着“第一江陵”几个大字,在端午祭场“第一江陵”这几个字也随处可见。问其故,韩国学者告知是历史悠久之意。笔者来自中国湖北,从而引发了中国江陵与韩国江陵之间有无联系的兴趣。回国后翻阅大量有关文献,一条令人震惊的线索越来越清晰地浮现出来,即:韩国文化主流与中国楚文化休戚相关。  
  
一、韩国地名与楚国地名的相似之处
  
  按照史学界通行的说法,在公元前的古朝鲜时期,半岛北部先后出现檀君朝鲜、箕子朝鲜和卫满朝鲜3个王朝,南半部则有马韩、辰韩、弃韩(合称三韩)等部族国家。公元前后(~676年),半岛进入新罗、高句丽、百济三国鼎立时期,史称三国时代。公元7世纪,新罗(676935年)灭高句丽、百济两国,统一了半岛。公元10世纪新罗王朝衰微,高丽王朝(9181392年)取而代之。后李氏朝鲜(13921910年)又取代高丽。1910年日本吞并朝鲜,李氏朝鲜亡。1945年日本战败,朝鲜独立。1948年大韩民国成立,建都汉城;同年朝鲜民主主义共和国成立,建都平壤。
  
  在韩国,除江陵外,还有丹阳、襄阳、汉阳(今汉城)、汉江、洞庭湖等地名。
  
  韩国江陵在三国时代称“阿瑟罗”,高丽时代称“东原京”,在李氏朝鲜时代改称“江陵大都护府”,也称“江陵府”,历史的确不短,距今已600多年。与此同时,1397年新罗的翼岭县改为“襄阳府”,后为“襄阳郡”,江陵郡和襄阳郡均属江原道。韩国的首都汉城在高丽时代(1308年)称为“汉阳府”,差不多同期,新罗的赤山县改为了“丹阳郡”,[1]洞庭湖位于江原道通川郡,是江原道最大的自然湖,另有因太白山而名的太白市,三韩时曾属于辰韩的悉直国领域,于102年编进新罗。[2]从时间上看,韩国的江陵、丹阳、襄阳、汉阳、汉江、洞庭等地名和两千多年前就存在的楚国地名好象没有什么可比性,但我看了石泉先生近期出版的《古代荆楚地理新探·续集》一书,很受启发,认为它们之间有着某种联系。
  
  石泉先生用了60年的时间研究古代荆楚地理,考证出齐梁以前楚国古郢都江陵并不是在定论了一千多年的长江中游,而是在汉水(又名汉江)中游的湖北宜城。[3]古郢都江陵的地望问题是楚国历史地理的核心,牵一发而动全身,江陵的移位意味着楚国其他地名都需要重新定位,这是一个非常艰辛的论证过程,好在越来越多的考古资料证实这一观点的正确,也有越来越多的学者开始认同。
  
  按照石泉先生的地理新论:楚国的政治文化中心在汉江中游的襄宜平原,中心地带为江陵(宜城)、襄阳。古洞庭也在汉江中游,今湖北钟祥市西北境。丹阳这一地名更是具有代表性,丹阳是周末、春秋早期楚国发源地,也是楚早期的都城,楚国在不断地发展壮大中多次迁徙,但丹阳这个地名始终伴随在楚人左右,给后人留下许多的疑惑,有关丹阳地望的研究众说纷纭,张正明先生列举丹阳城址,有二论十四说之多,大体在荆山、秭归、枝江、当阳、当涂、丹淅等地。[4]在这里我采用张正明先生等学者的说法,即古丹阳在今河南淅川县境,丹、淅二水会流附近。[5]丹阳随楚人不断转移,但初期丹阳在丹江的中下游是大多数学者的共识。丹江是汉江上游的重要支流,汉阳是汉江下游著名的古城。这就是说楚人建国初期在汉江上游的丹阳,发展成熟时期则在汉江中游的江陵、襄阳、洞庭湖(今钟祥)一带。另外追寻中国汉江的源头,可以看到汉江的主要源头在陕西秦岭的太白山下,尽头则在下游的汉阳。
  
  再看看韩国几个地名的分布情况:属于忠清北道的丹阳在汉江的上游,汉阳(今汉城)在汉江的下游,属于江原道的江陵和襄阳均在汉江上游不远处,洞庭湖也在江原道,最重要的是韩国汉江发源于江原道和庆尚北道连接处的太白山下,几乎和楚国地名新论同出一辙,不由得令人遐想。  
  
二、韩国开国神话中的楚文化遗迹
  
  檀君是韩国和朝鲜共同的开国始祖,在韩国和朝鲜人民心目中占有至高无上的地位。正如韩国学者所说:“檀君神话是我们民族创造的最根本之神话,其中包含着韩民族超越的宇宙观、人学观、历史观、宗教观、国家观、伦理观之象征。” 。[6]在此,笔者不揣冒昧,试图给世界学者们提供一个研究韩国古代史全新的思路。
  
  檀君建国的传说,也是最古老的韩国族源图腾神话。最早见于《古记》(失传)和《魏书》等,后收于13世纪末的高丽僧人一然编写的《三国遗事》中,原文如下:
  
  “晋有桓因(谓帝释也)庶子桓雄,数意天下,贪求人世,父知子意,下视三危太伯,可以弘益人间,乃授天符印三个,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于太伯山顶(即太伯今妙香山)神檀树下,谓之神市,是谓桓雄天王也,将风伯雨师云师,而主谷主命主病主刑主善恶,凡主人间三百六十余事,在世理化。时有一熊一虎同穴而居,常祈神雄,愿化为人。时神遗灵艾一炷,蒜二十枚,曰:尔辈食之,不见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虎不能忌,而不得人身,熊女者无与为婚,故每于檀树下,咒愿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号曰壇君王俭。”[7]
  
  与此相似的故事还记载在韩国古籍《三国史记》、《帝王韻记》、《燃藜室记叙》、《东国通鉴》、《眉叟记言》、《高丽史·地理志》、《世宗实录·地理志》等书中。
  
  在《三国史记》中,天神之子叫桓熊,桓熊和熊女所生之子叫檀君,“太伯山”为太白山,檀君后在平壤建立了国家,名为古朝鲜。
  
  其他史籍中的檀君神话也有一些变异,但主体不变。中国学者认为檀君神话反映了古人敬天思想和先民的一支曾把作为熊图腾。[8]韩国历史学家分析:“桓雄”是指移居太白山的一带的天神崇拜部落,熊女则指以熊为图腾崇拜的土著部落。桓雄和熊女联姻生檀君,檀君成为朝鲜的始祖指的是移居来的天神崇拜部落和以熊为图腾崇拜的土著部落联合,组成了新的部落。[9]我比较赞同的观点是:所谓熊、虎相处于一个洞穴,可能反映了以熊和虎为图腾的氏族或部落的关系。熊女与桓雄成婚而虎未能变成人,是指两个血缘相近的氏族在合并为一个部落的过程中所产生的地位变化。以熊为图腾的氏族取得了主导地位,而部落的酋长则来自这个氏族。[10]
  
  楚国人的图腾崇拜中国学者们历来也是说法各异,但不少学者认为楚人的图腾是熊。楚人是黄帝之后,黄帝血缘体内就有以熊和罴为图腾的氏族部落,又因楚人姓芈氏熊,在鬻熊之后,历代有三十多位君以熊为姓,《史记·楚世家》云:“周文王之时,季连之苗裔曰鬻熊……其子曰熊丽,熊丽生熊狂,熊狂生熊绎。”其最早居地又以熊命名,如“有熊”、“熊山”、“穴熊”等。罗香林先生在《中夏系统中之百越》一文中说:“楚人首领,世世冠以熊字,似熊为在楚人原所氏,亦即以熊为图腾祖遗影”。可见楚人是以熊为图腾崇拜的部落之一。
  
  关于“三危”、“太白”所指,韩国学者的解释不尽相同,有的说“三危太白”共指朝鲜平安道境内的妙香山;有的“三危”不论,说“太白”既妙香山;有的说三危指白岳山;另一说,“三危”指甘肃敦煌南部,“太白”指长白山。中国学者对古三危的地望说法也不一致,一说是今甘肃敦隍附近的三危山;二说是甘肃天水附近的鸟鼠山;三说在今陕甘川三省交界嘉陵江附近;四说在川甘交界岷江、岷山一带。后两种说法地理位置比较接近。《诗地理考》曰:“羌本姜姓,三苗之后,居三危,今叠、宕、松诸州皆羌地。”叠山:甘肃南部,与岷山相接;宕:今甘南宕昌,与岷江相近。我在几种三危地望探讨中择其一种,选择古三危在川甘交界处,岷江、岷山一带,这里距离陕西秦岭太白山只有几百公里,没有甘肃敦煌三危那么遥远,便于上古时期视野并不容易非常开阔的天神“下视三危太白”。我认为檀君神话中的“三危”是指中国古三危,“太白”应该指江原道和庆尚道交界处的太白山,而不是韩国古籍中记载的妙香山。
  
  中国史籍中有关三危记载最多的是公元前二千多年尧舜将三苗逐放到三危。《史记·五帝本纪》云:“迁三苗于三危,以变西戎。”《尚书·尧典》说舜“窜三苗于三危”。《地道记》曰:“鸟鼠同穴西有三危山,三苗所处是也。”等等,总之,三危曾是三苗的一支部落所在地。因为荆楚腹地在上古时曾属三苗地,楚国史研究的学者们在楚苗同源观点上是一致的。许多学者考证认为蚩尤是三苗最早的先民,最早的史籍《山海经·大荒北经》中记载:“蚩尤作兵伐黄帝,黄帝使应龙攻之冀州之野。应龙畜水,蚩尤请风伯雨师以从,大风雨”。《韩非子·十过》曾云:“昔者黄帝合鬼神于泰山之上……蚩尤居前,风伯进扫,雨师洒道。”可见苗祖蚩尤和“风伯”、“雨师”关系密切。在中国湖南、贵州,一支操东部方言的苗族今仍以熊为族称,自称为“仡熊”、“果熊”、“果雄”,各地的苗族都有关于蚩尤的古歌传说,将蚩尤视为始祖。
  
  楚国大诗人屈原在《离骚》中也自称是“帝高阳之苗裔”。在楚辞中屈原提到了“三危”和“风伯”、“雨师”、“雷公”(也称“云中君”、既“云师”)。[11]《九叹·远游》云:“ 驰六龙於三危兮,朝西灵於九滨。…… 鞭风伯使先驱兮,囚灵玄於虞渊。……左雨师使径侍兮,右雷公以为卫。” 请注意楚辞中的天神是驾御六龙车到三危的,而韩国的《三国遗事》中引〈古记〉云:“天帝降于訖升骨城乘五龙车。立都称王。”天帝也是乘龙车降于人间的。楚辞中的“风伯”、“雨师”、“雷公”(云师)和檀君神话中的“风伯”、“雨师”、“云师”一样,都是天神可以左右、可以驱使的对象。风伯、雨师、云师协助桓雄主理人间三百六十余事,已经具有了开国性质,到了檀君时代原始部落国家形成。
  
  在檀君神话中天神授予桓雄三个天符印,中韩都有学者认为这天符印是巫师做法的法器。史学诸书记载,在中国古代巫风一度盛行,而以春秋战国时期的楚苗为甚,甚至巫史不分,史俗并载。范文澜先生在《中国通史》中说:黄炎族掌文化的人叫做史,苗黎族掌文化的人叫做巫。《汉书·地理志》云:“楚人信巫鬼,重淫祀”。学者认为楚人的始祖鬻熊还有屈原就是楚国的大巫,开创一代文风的《楚辞》也多取材于楚地之巫鬼风俗。现在苗族地区仍有几千巫师,他们做法时使用面饰、摇铃、木鼓、芭茅杆、弓箭、刀、剑等法器和鬼神进行沟通。[12]而在朝鲜半岛,较为普遍的说法认为:古代巫俗现象最早产生于“檀君时代”,甚至认为最初建国的檀君本人就是巫人。[13]
  
  神话里天神之子桓雄给熊和虎“灵艾一炷,蒜二十枚”让它们变人形,这在楚俗里也有反映。端午时挂艾草、蒜头以僻邪驱瘴,是历史远久的楚国风俗,至今也还存在。成书于公元六世纪的《荆楚岁时记》,其作者宗懔出身并长期生活在原楚郢都江陵,他忠实地记载了古代楚人生活图景。书云:“五月五日……采艾以为人,悬门户上,以禳毒气。按:宗测字文度,尝以五月五日鸡未鸣时采艾,见似人处,揽而取之,用灸有验。” 按语说测字先生曾在鸡鸣以前去采摘艾草,看见有象人形的,就采摘下来,用艾炙治病很有效。这里记录的艾草有的具有人形,是否和神话中吃了灵艾容易变成人有关系呢?测字先生应该是巫师,古时巫医是相通的,所以艾也用来治病。在中国古老的艾灸法中艾炷和大蒜是主要的药物,疗法之一是将蒜头切成片或捣成蒜汁,放于压痛点上,然后用火点燃艾炷施灸,其方法沿用至今。段宝林先生认为母熊在桓熊天王的指点下用艾、蒜等灵异植物,并百日不见阳光,才能变人,这已有着巫术做法的的幻变意识。[14]
  
  如果读者根据上述史料分析判断,开始认可檀君神话中确实存在浓厚的楚文化痕迹,接下来会出现巨大的疑问:檀君神话在韩国和朝鲜无论是民间口头流传、史籍记载还是考古资料都证明檀君存在了四、五千年,(史籍记载檀君在公元前2333年开国;历史学界发掘平壤市江东邑的檀君陵,证明檀君的遗骨是距今5011年前的。)而楚国从在丹阳建国到被秦灭国的800年间,最长时段也只有3000年的历史,时间上仍然说不通。
  
  毋庸置疑,韩国是一个历史非常悠久的国家和民族,分布在朝鲜半岛海岸地区的新石器时代贝冢遗址和内陆地区房屋遗址出土的历史文物,说明当地很早就有居民在此过着定居生活。我的看法是:古朝鲜时,在平壤一带就有长期统治半岛西北地区的部落首领,汉字出现以前韩国没有文字,所以有关他们的故事并没有被史籍记录下来。韩国的汉字传入时间大约在公元前2世纪,新罗统一半岛并占据整个大同江以南地区(包括平壤)之后,在原有部落首领故事的基础上,增添了对新的统治者有利的开国传说,创造出了檀君神话。
  
三、楚罗国、卢国与韩新罗、辰韩的渊源关系
  
  在此先回顾一下楚国历史。
  
  约公元前11世纪中期,季连之苗裔鬻熊被周王室授予“子”的封号,封于楚,居丹阳,以此开篇拓土。公元前706年,楚国征讨随国获胜后,熊通自称楚武王,成为天下诸侯中第一个自己称王的国君。随后几年里,熊通先后征服了罗国、卢国等周围小国,以扩疆土。楚文王继立,迁都于郢(今湖北宜城境内),打通了前往中原的道路。楚成王时,楚国的大国声威真正建立起来。到了庄王,他励精图治,终成霸业,楚国出现了经济繁荣、文化灿烂的鼎盛局面。庄王之后楚国开始走向衰微。公元前506年,吴、蔡、唐三国合兵攻楚,并陷落郢都,秦王发兵,秦楚联军击败吴军。休养生息后,公元前400年,楚悼王谋求富国强兵之道,开始变法,并取得了成效,此时,楚国兵强马壮,横归中原,初露称雄之势。威王后期,楚国成了七雄中唯一能与秦国抗衡的大国,进入了最鼎盛的时期。到怀王时楚国又开始走下坡路,公元前278年,秦军对楚国国都发起进攻,并很快占领了郢,楚国诗人屈原愤世投江,顷襄王东逃至今河南淮阳,建立新都陈郢。考烈王时,迁都寿郢(今安徽寿县)。后秦王政即位,开始统—全国的进程,公元前223年秦军大举伐楚,攻陷寿郢,绵延800年的楚国就此灭亡。
  
  公元前7世纪,在汉江中游荆楚腹地有两个苗蛮小国,罗国(也称罗子国)和卢国(也称卢戎、卢子国)。对这两古国的具体方位历代学者有几种看法:或在湖北襄阳、或南漳或宜城。我倾向罗国在襄阳西南、南漳东北交界之处。[15]罗,熊姓,与楚有共同渊源,据《左传·桓公十二年》杜预注:“罗,熊姓国。”《世说新语·方正》注引《罗府君别传》曰:“罗,楚熊姓之后,启土罗国,遂氏姓焉。是则熊姓又似出芈姓也。” 公元前690年楚武王并吞罗国,子孙便由熊姓改为罗姓。国亡,以国名为姓,是周秦时代所惯行的通例。罗被楚灭后,楚王把罗国迁到枝江(古枝江在今宜城南境),成为楚国的附庸国,《汉书·地理志》有“楚文王徙罗子国自枝江居此”的记载,《水经注·江水》中有枝江为“故罗国”之记。尔后楚师扩境江南,再迁其罗国遗民至洞庭以南的长沙。秦汉时,罗人有的留居长沙,有的东迁豫章(今江西南昌),《广韵》云:“本自颛顼末裔,受封罗国。子孙以为氏,望出豫章、长沙。”《太平寰宇记》载,豫章郡五姓中就有熊、罗二姓。所以在中国的三国、南北朝时期,史书上记载的罗姓名人,多为襄阳、长沙、豫章三个地方的人。罗国和卢国同属苗蛮但来源却不相同,罗人和楚人一起来自中原,而卢戎则来自岷山、岷水之地。[16]
  
   卢国(也称卢戎)的地理位置在今湖北襄阳县西,也有说在南漳东北,《后汉书·郡国志·南郡》中卢侯国条注引《襄阳耆旧传》说:“古卢戎也”。卢国和罗国距离非常相近,犹如唇齿相依。楚人入侵,唇寒齿亡,所以抵抗楚国的侵略,罗、卢两国一向是同仇敌忾的。历史上罗卢联军曾打败过楚国,《左传》、《后汉书》都记载公元前699年楚武王四十二年,屈瑕伐罗, 至罗境,遭到罗与卢戎两军夹击,楚师大败。卢国和罗国同时灭国后,一起被迁到枝江然后又迁到长沙。到长沙后,卢戎的一支往西到了的辰州,在辰溪和泸溪一带安营扎寨。《后汉书·马援列传》:“郦元注水经云:‘武陵有五溪,谓雄溪、樠溪、酉溪、潕溪、辰溪,悉是蛮夷所居,故谓五溪蛮’皆盘瓠之子孙也。土俗‘雄’作‘熊’,……在今辰州界”。五溪蛮为苗蛮,可见辰州有苗民。
  
  这里探讨一下卢戎的始末,便于下面对韩国辰韩的分析。
  
  卢戎,系炎帝姜姓戎族,源于卢水上游,故名卢戎。姜姓属古羌人亦称氐羌、羌戎。学者们考证卢水即今四川岷江。一般认为,从春秋战国至秦汉,氐羌人活动在西起陇西,东至略阳,南达岷山以北的地区,即今甘肃省东南、陕西省西南、四川省东北交界处,包括渭水、汉水、嘉陵江、岷江、涪江诸水源头。而这一带也正是古三危之地,正如《诗地理考》所云:“羌本姜姓,三苗之后,居三危”。三苗被迁到三危去之后,一部分融入了西戎,还有一些继续以苗存在。氐羌与西南土著部落不断融合,形成了的彝族、白族、纳西族、土家族等以虎为图腾崇拜的民族,这些民族在语言上均属藏缅语系、藏缅语族、彝语支。中国民族史学家林惠祥在《中国民族史》一书中说“鹿卢(古代彝族的称谓之一),即卢戎的对音。”彝族今仍自称罗罗、倮倮,彝语“罗罗”为老虎之意。而白族也保存了许多和虎有关的称谓,怒江沿岸许多白族人都自称是虎的子孙。[17]在湘、鄂西聚居的土家族,至今仍尊虎为祖。《中国古代及中世纪史地图》上,有苗氏出现在公元前11-前8世纪的西周王国的地图上,以“矛”的部落形式被标定在岷江及嘉陵江之间,我推断这些有苗氏就是来自三危的三苗,他们顺着离嘉陵江不远的汉水上游朝南迁徙,在公元前7世纪到达汉江中游,建立了卢国。这些逾越千年后从三危迁回到故地的苗裔,已经浓浓的融入了西戎氐羌的诸多习俗,他们和彝族、白族、土家族一样尊虎崇虎。巫瑞书先生考证,现今湘西辰水中游凤凰县苗族仍然存在客教白虎的信仰,[18]有部分湘西苗族自称为卢(苗语为deb longl),他们可能就是卢戎后裔。
  
  辰韩,中国史书《三国志·魏书》和《后汉书·东夷列传》都有这样的记载: “辰韩者,古之辰国也,……辰韩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适韩国,马韩割东界地与之,其名国为郡,弓为弧、贼为寇,有似秦语,故或名之秦韩、有城栅屋室,土地肥美,宜五谷,知蚕桑,作缣布,乘驾牛车。始有六国,稍分为十二国。”李延寿《北史》列传第八十二中记录:“新罗者,其先本辰韩种也。地在高丽东南,居汉时乐浪地。辰韩亦曰秦韩。相传言秦世亡人避役来适,马韩割其东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韩。其言语名物,有似中国人。”这些有关辰韩的史籍在韩国《三国遗事》等古籍中有转载:“〈后汉书〉云:辰韩耆老自言,秦之亡人來适韩国,马韩割东界地与之,相呼为徒,有似秦語,故或名之为秦韩。” 大量的历史资料说辰韩是秦朝时逃亡过来的中国人,对这一点中韩学者是一致认同的。《三国志·魏书》云:“弁辰亦十二国……弁辰韩合二十四国,大国四五千家,小国六七百家,总四五万户。其十二国属辰王。” 从中韩史籍中可见古朝鲜半岛东南部的三韩部落,马韩为原住民,辰韩、弁韩来自中国,弁韩臣属辰韩。
  
  陈寿在《三国志·魏书》里忠实的记录了辰韩大大小小的部落国家,有许多是以卢为国名,如:速卢不斯国、咨离牟卢国、莫卢国、狗卢国、驷卢国、万卢国、捷卢国、牟卢卑离国等,甚至有的直接以楚为国名,如楚山涂卑离国、楚离国等。
  
  在韩国史籍中,我找到了辰韩、弁韩是苗裔的记载,如《三国遗事》:“〈新旧唐书〉云。卞韩苗裔在乐浪之地。” 韩国野史《桓檀古记》等书籍中说倍达国 (韩国人自称为倍达民族) 是第14代蚩尤之后。根据《三圣记全》下篇〈神史历代记〉记载,“蚩尤即14世慈乌支桓雄,是中国和韩国军神的象征”,目前韩国保存有很多祭祀蚩尤的祠堂遗址。这就说明辰韩和弁韩和楚国的罗氏、卢氏一样均为苗裔,同样以蚩尤为始祖。韩国有学者也认为韩国和苗族的创世神话很相象,与其他民族的创世神话大不相同。[19]
  
  韩国的新罗也称斯罗、斯卢,公元前57年古新罗建国,古新罗是由辰韩部落联盟中斯卢部落所建,在徐罗伐(庆州旧称)建都,统治地区先在朝鲜半岛东南部,直到公元三世纪,新罗仍只占据庆尚南北道东部和江原道一部分地区,地盘狭小。四世纪后,开始征服周围部落,成为半岛东南部的强国,继与百济、高句丽形成鼎足,互相争霸。新罗在唐朝的配合下,于660年灭百济,再于 668年灭高句丽。后唐朝试图占领百济、高句丽故地,新罗奋力反抗,在公元676年新罗首次统一了大同江以南的朝鲜半岛。新罗在统一后的两个多世纪内,出现和平、繁荣景象,农业、商业、手工业、艺术、教育、宗教等都得到蓬勃发展,这时是新罗文化的最盛时期,独具特色的新罗文化在统治者的倡导下广为传播,最终成为韩国主流文化之一。
  
  以此而推论:辰韩和弁韩来自被秦灭国的楚国,是罗和卢戎之后,既有以熊为图腾的罗氏族,也有以虎为崇拜的卢氏族,这就是新罗为什么也称斯罗、斯卢之原因。罗、卢一起迁到了韩国,初期以虎为崇拜的卢氏族势力强大,于是国名以来自楚地辰州的卢氏族命名为辰韩。之后以熊为图腾罗氏族日益强大,在领土扩张中占了上风,国名更改为新罗国,这也许是和原在楚国的故罗国以示区别。了解了卢、罗关系的变化,我们就不难理解檀君神话中反映以熊和虎为图腾的氏族的关系,在部落合并过程中,最终以熊为图腾的罗氏族取得了主导地位,新罗之名由此而来。
  
  往下的问题是,罗、卢怎样从中国而来?为什么两千年多来在中韩的史籍中都没有明确的记载?我的看法是:罗、卢氏族是跟随着一个名叫韩终的方士在公元前215年渡海到的韩国。
 
四、韩终其人及韩国罗、卢氏族
  
  秦汉及以前的战国时代,方士得到帝王的青睐,他们不仅通晓方术,而且熟知天文地理、医术、农业及航海等知识。徐福作为方士中最著名的一个,为秦始皇入海求药,最后到达日本。与徐福同时代的方士,还有韩终、卢生、侯公等,他们也先后为秦始皇访求仙药,《史记·秦始皇本纪》记载,始皇“三十五年,侯生和卢生相与谋曰:‘始皇……贪于权势至如此,未可为求仙药’于是乃亡去”。而“韩众()去不报”。可见在始皇三十五年时,卢生、侯生、韩终等都已相继逃亡了。《汉书·郊祀志》云:“秦始皇初并天下,甘心于神仙之道,遣徐福、韩终之属多赍童男女人海,求神采药,因逃不还,天下怨恨。”这里把韩终和徐福连在一起,徐福之属到了日本,这是现在中日学者基本统一了的认识,韩终之属出海后到了哪里呢? 秦皇岛市徐福研究会原会长郭继汾先生认为韩终是到了朝鲜半岛东南部的辰韩国,他认为“辰()韩这个名称也正是对它的创业者秦人韩终的纪念。”我同意这一说法。
  
  查找韩终的有关史籍可见,韩终乃齐国方士,炼丹采药,修炼成仙。《后汉书·张衡列传》(第四十九)“韩谓齐仙人韩终也。为王采药,王不肯服,终自服之,遂得仙。”晋代葛洪所著《抱朴子内篇卷之四·金丹》“韩终丹法:漆蜜和丹煎之,服可延年久视,立日中无影”。《广弘名集卷第九》“服丹成金色者,……昔韩终服之。面作金色又佛身黄金色者。” 《抱朴子·内篇卷之十一·仙药》:
  
  “韩终服菖蒲十三年身生毛。”不论韩终炼丹也好、服药也好、成仙也好,关键的问题在于,韩终修炼的地方是楚国境内的长沙。唐·司马承祯《洞天福地记》:记载:“第二十三洞真墟——在潭州长沙县,西岳真人韩终所治之处。”修炼成仙并非一日之工,必须长期呆在所治之处,可推想韩终在长沙时与罗氏、卢氏交往密切。在秦灭楚后8年,韩终带着罗氏、卢氏等楚国亡民有准备地逃离了秦国,渡海到了朝鲜半岛东南部。中外学者们认为,韩国的汉字传入时间大约在战国到汉初,[20]这和韩终之属到韩国的时间吻合。至于渡海路线我认为不会是在秦皇岛,尽管有明宪宗成化13年立的“秦皇求仙入海处”石碑,但不太符合迁徙规律。鉴于长江下游的安徽、江苏都有过丹阳地名出现,而且在东海普陀山至今有海礁被称做“新罗礁”,[21]我推测韩终所属是从长江口渡东海,经过济州岛到日本海西岸的朝鲜半岛东南部登岸,在庆州一带重建家园,以纪念韩终和卢氏原籍辰州的辰韩就此出现。
  
  推论:韩终可能就是檀君神话中桓雄的原形,史籍中记载韩终已经修炼成仙,完全有可能被后人奉为天神,他带领以罗氏族、卢氏族为主的三千臣民,选择适合居住的太白山下落户(太白市一直属于辰韩、新罗的领地)。而神话中桓雄与熊女所生的檀君,应该是以熊为图腾的新罗首领。新罗率先统一了半岛,并以熟练使用汉字的优势,创造并记录下来了开国神话。
  
  再来看看韩国罗氏、卢氏的宗谱。
  
  韩国罗氏被分为罗州罗氏和锦城罗氏。韩国1982年版《罗州罗氏大同谱》卷一《姓原考》说,“罗氏为伯益后裔,世代在虞国为官,周代成王因大罗氏有功封罗国,为楚附庸,后被楚屈氏所灭,是为豫章罗氏”。关于锦城罗氏的姓氏,1987年版《锦城罗氏大同谱》卷一《姓原考》引辛卯科举人罗甫芳所记,说“罗氏本祝融氏后裔郧姓,春秋时周平王十二年封罗国。又传至九十世学公,国被吞并,止存一人。传至百零二世,珠公在汉初事高祖有功,封于豫章郡,是为豫章罗氏。” 韩国罗氏宗谱非常明确地记载着罗氏是“楚附庸罗国”、“祝融(楚人先祖)氏后裔”,由此可见,罗州罗氏和锦城罗氏同出一宗,都是楚国之地的罗国人。
  
   韩国卢姓一直认为出自山东,但究其卢姓历史却不尽其然。卢戎,系姜姓戎族,在商代已发展为强大的部族,曾从周武王灭商,周封功臣姜族首领姜尚(即姜子牙)到营丘(山东临淄县)为齐侯,于是有一部分卢人也随着同族到山东建立了卢子国(今山东长清县西南)。《通志氏族略》、《新唐书宰相世系》和《元和姓篡》均如此记载:“姜姓济太之后也。齐文公之子高,高之孙溪,食采于卢,今济北卢县是也。因邑为氏。”因此山东长清是卢氏之主体。但是有另外一部分卢人辗转南迁到了湖北襄阳,也建立了卢子国。《风俗通义》云:“古芦子国,后有芦氏。芦子国(古芦戎地,春秋时庐子戢黎所在国)其后人以封国为姓。”这就是和罗氏一起迁到韩国的卢氏祖先。据 2000619的《淄博日报》报道:“韩国前总统卢泰愚山东寻根,说姜子牙是他的祖先。”从而在韩国引发了卢姓到山东寻根的热潮。笔者认为,韩国卢氏应是从楚国来的卢戎之后裔(也就是从古三危迁回的苗裔)。
  
  最后再回味一下韩国地名的分布,我们可以看到和楚国一样的地名主要集中在韩国东部海岸的江原道,这里有江陵、襄阳、洞庭湖。江原道地理位置比较特殊,它三面环山,一面临海,太白山脉由北向南纵贯全道,形成了一个封闭的包围圈,使它与外界相对隔离,许多古风古俗得以完整的保存下来。江原道的中心江陵曾是濊貊族居住地,是濊国的都城,但辰韩的位置与江陵接壤,江陵很早就和辰韩有所交流,所以历史上曾叫阿瑟罗、何瑟罗。我推测有关楚国的地名在韩国出现,主要是依据江原道的巫师世代口头传承下来的罗、卢历史传说而命名,如罗国和卢国的原地在襄阳,灭国后一起迁到洞庭湖附近的长沙,而江陵则是楚国的都城,和楚发源地丹阳同样重要。我在江陵时得知,江原道的巫俗是韩国保留最多、最完整的地方,由巫师主持的巫祭在被世人关注的“端午祭”中,是重要内容之一,韩半岛南部巫俗带有许多楚苗巫俗的色彩。当今苗族是世界上保留族源古歌最多的民族之一,几乎所有的古歌都是巫师传唱下来的,这也是巫师在少数民族中威望很高的重要因素。
  
  在研究罗国、卢国迁徙动向时,我真切感到,按照古代和近现代大多数学者的地名说法很多地方解释不了,而用石泉先生的楚地理新论却能够说通。比如辰州的位置,如果在湖南西部则无法说通史籍中辰州有包茅山的记载,包茅的产地一向认为在湖北中部荆山一带,而且湘西辰州与长沙距离甚远,不便于古时罗氏和卢氏结伴出海远行。楚国地理位置的变更是让人难以接受的地名变化。其实早在20世纪30年代钱穆先生就提出:先秦的湘、沅、澧诸水都在今湖北省境、分布于汉水流域一带,以后楚人南迁、地名随迁。[22]石泉先生继钱穆先生之后对此研究了几十年,认为长江中游地区的巨大变化集中发生在公元555~561年间,主要是一大批原在汉水中游两岸的古地名向南迁移到了长江中游两岸。[3]由于一千多年来地名的错乱,史籍中也有许多自相矛盾的地方,我寻找理论依据时,在众多的线头中择其主线,得益于韩国江原道的古地名和民俗现象,使主线研究越来越清晰。
  
  我认为辰韩和新罗的历史将会为我们提供了极好的楚史研究新线索。   
  
五 、古老的楚俗惊现韩国
  
  楚国重要的习俗之一是用苞茅来进行缩酒。
  
  荆楚盛产菁茅(也称之为苞茅),《禹贡》、《汉书·地理志》等就有“包匦菁茅”的记载。这种茅草盛产于荆山山麓南漳、保康、谷城一带。楚王在这一带立国之初,周天子让楚人上缴的贡品,就有这种廉价的茅草,主要用于缩酒祭祀。初期楚国国君地位不高,但在缩酒祭祀上却享有特权,这可能与楚地独产苞茅和楚人传统的掌天人相通的职责有关。所以菁茅或苞茅也被尊为灵茅。《史记·孝武本纪》说:“江淮间一茅三脊,以为神藉”。“三脊”, 有三条脊棱的茅草。“藉”,祭神时用的草垫子。《集解》引孟康语说:“所谓灵茅也。”
  
  关于“缩酒”,杜预曾解释说:“包,裹束也。茅,菁茅也。束矛而灌之以酒为缩酒”。缩酒的“缩”字,本作“莤”。《说文解字》解释“莤”字为:“礼祭束茅加于裸圭,而灌[凶匕]酒,是为莤,象神歆之也”。“莤”字,上为茅,下为酒,恰是缩酒仪式的写照。[23]缩酒方法是用成束的灵茅来过滤酒中的糟粕,使之成为飨神的清酒。
   “苞茅缩酒”是楚人最为重要的祭祀仪式,甚至可以成为引发战争的理由。《左传·僖公四年》记载,齐桓公纠合诸侯借伐蔡为名,南下攻楚。楚使质问:“君处北海,寡人南海,唯是风马牛不相及也,君之涉吾地也。何故?”齐国的相国管仲在答复楚使时说:“尔贡苞茅不入,王祭不共,无以缩酒,寡人是征。”问罪的理由之一就是楚人不向周天子贡奉苞茅,周天子不能缩酒。《韩非子·外储说左上》也说:“楚之菁茅不贡于天子三年矣。”看来,周王室一直是依靠楚国进贡苞茅来进行祭祀的。
  
  楚人主管缩酒祭祀,并对此亦极为重视,引以自豪。楚人姓芈,历代楚国国君都冠以“熊”字,“熊”在金文中写作“[]]”,“[/]”即“莤”。“莤”,像神饮酒;“[/]”像人饮酒,是“莤”的人格化,“熊读入喻纽,[/]读入影纽,古清浊不分,于声至近” 。[24][/]、熊通假,后来一律把“[/]”写作“熊”字了。[25]所以楚人姓芈氏熊,即以缩酒祭天()为氏。这在“天人合一”的氛围下,楚人进贡苞茅、主管缩酒祭祀,是极其荣尊的职责。
  
  “苞茅缩酒”遗风今在湖北南漳的端公舞中有所表现,在湖北襄阳和湘鄂西的苗寨也有变异的缩酒遗俗存在。没有想到在韩国,笔者却看到了几乎和几千年前楚人祭祀完全一致的苞茅缩酒全过程。
  
  那是一组笔者在韩国江陵参观考察端午祭时所得的图片资料。江陵端午祭是从农历的四月五日酿制神酒开始的,酿制神酒仪式在江陵旧官府“七事堂”由江陵市长主持,做祭酒的大米和酒曲是市民们捐献的,图片显示在准备做神酒的大米上,还有十小捆裹束整齐的菁茅与酒曲并放一起。在蒸煮发酵好了的米酒时,蒸锅上倒扣着一个大瓦缸,蒸煮完后,主持把菁茅铺垫在像葫芦瓢一样的容器里,用菁茅过滤掉酒糟,然后把酒浆装进大瓦缸,沾过灵茅的酒成为神酒。最后将神酒装进小土陶瓶子里,在瓶口系上一束茅草,以备用于祭奠山神、城隍等巫祝祭祀。[26]惟楚人独有的用苞茅缩酒祭祀神灵之俗,在韩国江陵原原本本的保存着,由此可见楚文化对韩国文化的深远影响。
  
  同样在韩国端午祭的图片资料上,由巫师主持的龙船巫祭也让我为之振奋。在端午祭期间,用竹木纸布等材料扎成龙舟,龙舟上系上一条十多米长的白布,女巫拿着白布作摇船状并唱着神歌,“这是旨在端午祭期间入座祭堂之上的诸神乘坐龙船平安回归的送神巫祭。”祭祀完后,龙船和其他神位、神木、纸花、灯等端午祭的祭品送到大关岭火化烧祭,称为“还于巫祭”,还于意味着神灵上天。[26]
  
  在楚国的神话与宗教中,人和神分别处在两个隔离的世界,人和神的沟通是由巫师来完成的,沟通人神是楚国巫师最基本的职能。屈原《九章·惜诵》云:“昔余梦登天兮,魂中道而无杭。”王逸注:“杭,渡也。一作航。”在楚人看来人间和天界的隔离正如河水两岸的隔离一样,需要有舟船航渡。魂舟可以载负人的灵魂升入天国。用魂舟为亡灵送驾引航、只能靠巫师,常人无法感知它的存在。
  
  引魂升天的画像题材在楚国丧礼中是一项重要内容。湖南长沙楚墓出土的《人物龙凤帛画》中的女子站立在一“半弯月状物”上,有学者认为,这“半弯月状物”正是“代表灵魂所乘坐的舟船,应该称为‘魂舟’”。[27]根据画面分析,帛画表现的是女巫在引魂升天的主题,脚下的魂舟起着载负女巫灵魂升天的作用。另一幅长沙楚墓出土《人物御龙帛画》,图中绘一危冠长袍的男子,手持长剑立于龙舟之上,衣饰飘向右方,表示龙舟在迎风前进。类似这种引魂升天的画像在楚墓中有许多完整地保存下来,而韩国江陵传承至今的龙船巫祭简直就像鲜活的楚风楚俗。
  
   韩国南部的还有不少习俗与楚俗相似,限于篇幅这里不一一列举。最近乌丙安先生送给我一本苑利所著《韩民族文化源流》,苑先生认为韩文化的主体部分是中国南方的百越文化,这在众多的韩文化北来说中独树一帜,我也赞同韩文化的主体部分是中国南方文化,有百越文化的影响,但我认为受楚文化影响更直接一些。朝鲜古籍《东国岁时记》中就有韩国饮食习俗源于楚俗的记录:“望前煮赤小豆粥食之。按《荆楚岁时记》:‘州里风俗,正月望日祭门,先以柳枝插门,乃以豆粥插箸而祭之’。今俗说食,似沿与此。”苑先生也认为韩半岛与荆楚饮食文化相似点很多,他说“韩民族与作为楚国主体民族的苗族似乎没有什么文化联系,但事实上,它们的文化在许多方面都很相似,这一点应引起我们的足够重视。” [28]
  
   值得我们重视的不仅仅是韩国文化与楚文化的相似,而且在日本和台湾地区也有许多和荆楚相象的风俗,中日韩等世界各国都有学者认为东亚的稻作文化与中国南方民族有直接联系。韩国文化和楚文化的关系研究,可以开阔东亚文化同生共荣的研究思路,这对于东亚地区形成文化集合优势,扩大文化国际影响,开辟广阔的文化合作道路,具有极为深刻的意义。
  
  注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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