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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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적 시각으로 본 조선족 역사의 새로운 해석
2013년 08월 26일 08시 57분  조회:2353  추천:4  작성자: 권혁수
diaspora적 시각으로 본 중국조선족 역사의 새로운 해석

권혁수


1. 들어가는 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흔히 “離散”으로 불리는 “diaspora”는 그리스어의 “diasperie”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중 “dia”는 (경계를)넘나 든다는 뜻이고 “sperien”는 종자를 뿌리는 뜻이며 히브리어의 “galut”에 해당한다고 한다. 요컨대 diaspora의 본뜻은 자연의 식물들이 바람을 이용해 종자와 꽃가루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번식시키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것이었는데, 서기 70년 이래 유대왕국의 유민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원 거주지역에서 쫓겨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유대민족 특유의 비극적 운명을 일컫는 특정용어인 “Diaspora”로 “승격”되었으며 그 속에는 유대민족 특유의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나아가서 종말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diaspora는 이미 위와 같은 유대민족 특유의 역사 문화적 context를 벗어나 국외 또는 해외 이민 및 그 현상에 대한 泛稱的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diaspora의 주체와 그들의 모국(원 거주지역) 및 거주국(현 거주지역)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관계로 말미암은 긴장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본고 역시 위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diaspora를 사용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을 통해 지금까지 중국 소수민족 역사 및 중국 동북지역사 등 협소한 틀에서 전개되어온 중국 조선족 역사를 동아시아 나아가서 global history의 보다 넓은 차원에서 해석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의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 한민족의 diaspora는 동아시아 근대사의 중요한 구성부분

반만년을 넘는 한민족의 역사상 삼국시기 唐나라에 의한 高句麗, 百濟 遺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壬辰倭亂 당시 일본에 의한 조선왕조 軍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丁卯 및 丙子胡亂 당시 조선왕조 官民들의 대량 被拉사례 등이 적지 않았지만, 그 지속된 시기와 규모 및 영향에 있어서 모두 2000년 전 유대민족의 Diaspora와 비교가 되지 않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한민족의 diaspora적 현실은 대체로 근대적 역사시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현상으로서 요컨대 동아시아 역사 특정단계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한민족의 diaspora와 관련된 동아시아 근대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본다.

표1. 한민족의 diaspora와 관련된 동아시아 근대역사 年表

1842년, 중국 淸政府 阿片戰爭에서 패한 뒤 영국과『南京條約』체결하고 개항.
1857년, 일본 德川幕府 미국과『下田條約』체결하고 개항.
1860~1863년, 조선 함경도지역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조선인의 중국 만주지역 및 러
시아 연해주 이주 시작.
1868년, 일본 明治維新.
1876년, 조선왕조 일본과『朝日修好條規』(『江華條約』) 체결하고 개항.
1882년, 조선 서울에 壬午軍亂 일어남, 淸軍 조선으로 출동한 뒤 서울 상주.
같은 해, 조선 청정부와『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체결.
1884년, 조선 러시아와『朝露修好通商條約』체결.
같은 해 12월, 조선 甲申政變 “三一天下”로 실패.
1885년, 청정부 일본과『天津條約』체결.
1888년, 조선 러시아와『天津會議專條』(『天津條約』)체결.
1894년3월, 조선 전라도에서 동학농민봉기.
6월, 청일전쟁 조선에서 勃發.
1895년 4월, 청정부 일본과『馬關條約』(『下關條約』)체결.
10월, 일본 조선 서울에서 乙未事變 일으켜 조선왕비 閔妃 살해.
1899년, 청정부 대한제국과『中韓通商條約』체결, 公使級 외교관계 수립.
1900년, 義和團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 중국 침략.
1901년, 청정부 열강과『辛丑條約』체결.
1904년 2월, 러일전쟁 한국 인천에서 발발.
6월, 청정부 및 대한제국 지방관원『會議中韓邊界善後章程』체결.
1905년 9월, 러시아와 일본『포츠머스 평화조약』체결.
11월, 일본 대한제국과 제2차『日韓協約』(『乙巳保護條約』)체결.
    1909년 9월, 청정부 일본과『圖們江中韓界務條款』(『間島條約』)체결.
1910년 8월, 일본 대한제국과『日韓合邦條約』체결, 대한제국 일본에 강제병합 됨.
1911년 10월, 중국 辛亥革命 일어남, 이듬해 청정부 멸망, 中華民國 수립.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일어남.
1917년 11월, 러시아 10월혁명 일어나 소비에트 정권 수립.
1919년 3월, 한국에 3.1운동 일어남.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수립.
5월, 중국에 5.4운동 일어남.
1920년 6~10월, 한국독립군 중국 延邊지역에서 鳳梧洞 및 靑山里 大捷.
1923년 9월, 일본 關東대지진, 6000명 넘는 在日 한국인 피살.
1931년 7월, 중국 吉林省 長春縣에서 萬寶山事件 일어남.
9월, 일본 관동군 9.18사변 일으킴.
1932년 3월, 만주국 “新京”(오늘의 長春)에서 수립.
1937년 7월, 일본군 盧溝橋事變 일으켜 中日 全面戰爭 발발.
9월, 소련정부 극동지역의 한국인 20여 만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발발.
10월, 일본『國民徵用令』실시, 1945년까지 한국인 45만 여명 강제징용.
1943년 8월, 조선총독부『朝鮮徵兵制』실시.
1945년 8월, 미군 일본의 廣島 및 長崎에 원자폭탄 투하, 피해자 중 한국인 7만여 명
포함.
8월 15일, 일본 천황 항복 선언.
당시 일본에 200만 명 넘는 한국인 , 1946년 12월까지 140만 명 남짓한 한
국인 일본에서 남북한으로 귀환.
1948년 8~9월, 대한민국(ROK)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선후로 서울과 평
양서 수립.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PRC)북경서 수립.
1945년 8월 당시 중국 동북지역에 한국인 200만 명 거주, 1953년까지
100만 명 정도의 한국인 남북한으로 귀환.

위와 같은 간략한 연대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diaspora는 사실상 동아시아 역사의 특정시기 즉 근대시기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의 한 연구에서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동아시아 역사를 근대화의 공통 基調 아래 분열과 와해 및 관계와 연동이라는 두 개의 變奏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요컨대 漢字, 儒敎 및 조공관계를 유대를 하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문화권 그리고 중국 중심의 閉鎖型 동아시아국제관계체제가 와해 및 분열되면서 한중일 세 나라가 심지어 상호 충돌과 적대관계로 발전하면서 드디어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되고 중국마저 침략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날로 밀접하고 광범위한 관계와 연동(connection and interaction)을 경험하게 되면서 근대동아시아 세계를 낳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는 대체로 세계적(global), 지역적(regional) 그리고 국가적(national) 세 가지 차원의 내용을 포함하게 되는데 한민족의 diaspora는 바로 위와 같은 3중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역사시기에 있어서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국권을 잃어버렸는데 따라서 한민족 역시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diaspora적(?)인 모습을 지닌 국제적 또는 동아시아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diaspora 과정 역시 동아시아 근대역사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 실례로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된 뒤 일본 및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가로 이주한 한국인의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 후의 괴뢰 만주국 시절 한국인의 만주 이주가 종전의 두 배가 넘는 200만 명에 달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의 전면적으로 전개된 뒤 소련정부는 극동지역의 조선인 20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뒤 각각 140만 및 100만 정도의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조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민족의 diaspora는 이미 민족역사의 차원을 떠나 동아시아적인 국제성격을 갖게 되면서 동아시아 근대역사의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널리 흩어져 있으면서 가장 국제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을 결국 근대 이래 한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이 남겨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0년 말까지 한민족의 해외동포는 총 7,268,771명에 달하는데 그중 중국에 2, 704, 994명, 미국에 2, 176, 998명, 일본에 904,806명, CIT국가에 535, 679명이 있으며 해외동포 인구의 61%가 해당국가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위와 같은 해외동포 인구는 당연히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의 결과물이었다.

3. 한민족의 diaspora는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적 원인일 뿐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기원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대체로 古朝鮮 및 高句麗遺民說, 遼金元 및 明初說, 明末淸初說, 19世紀後半說 등 다양한 견해가 說往說來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 과정으로 살펴 볼 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인식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의 민족집단(ethnic group)으로서의 중국 조선족은 결국 근대 이래 한민족 diaspora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일찍부터 역사적 기원의 논쟁과 관련 없이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는 무엇보다도 국제적 이민(international migr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제이민의 정의와 관련하여 일찍 1922년의 제4회 국제노동자대회(The Fourth Session of the 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부터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관한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되어왔는데. 1998년 유엔 경제사회사무통계국(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Statistics Division, UN)에서 발표한 관련문서(Recommendation on Statistics of International Migration)에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제이민이란 상주 국가를 바꾼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데, 다만 레이저, 휴가, 비즈니스 및 의료 또는 종교적 원인으로 단기 출국한 사람은 제외한다.”

그리고 국제이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Migration, IOM)에서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제이민이란 자신의 조국 또는 상주 국가를 떠나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정주목적으로 영구적 또는 상당한 기간 동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위와 같은 현대적 국제이민의 개념에 비추어보더라도 근대 이래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가 국제이민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학계의 일부 연구에서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를 “遷入” 또는 “遷移”라고 지칭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위와 같은 국제이민의 성격을 간과 심지어 부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조선족 이민역사의 시대적 구분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많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일찍 1932년에 조선인학자로서 최초로 만주 조선이민을 연구한 李勳求는 이주의 目的國 및 受容國家인 중국 측의 수용정책 차원에서 鎖國時代, 黙許時代, 移民歡迎時代 및 彈壓時代로 조선인의 만주이주역사를 정리하였다. 사실 이민 수용국가인 중국 측의 역사적 시대구분에 따라 청왕조시기, 중화민국시기 및 만주국 시기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중국조선족 이주역사와 관련하여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시기구분에 관한 견해가 아직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학자 朴昌昱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가 1620년의 청왕조 초기에 시작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1931년까지의 중국조선족 역사를 다음과 같은 4단계로 구분하였다. 그중 1620년부터 1670년의 청왕조 초기가 제1단계이고 1670년대부터 1880년대가 “冒禁潛耕”시기, 1885년부터 1910년대가 “移民實邊”시기,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가 “自由移民”시기였다. 그리고 중국학자 黃有福은 중국조선족 이민역사를 한민족의 미국이주역사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4단계를 제시하였다. 17세기 후반의 “古代移民”을 “戰爭移民(war migration)”으로 간주하고, 19세기 후반의 이민은 “自由移民(free migration)”, 1910년대의 이민은 “亡命移民(exiled migration)” 그리고 1920~1945년의 이민을 “被植民移民(impelled migration)” 또는 “被管理移民(controlled migration)”으로 간주하였다.

한국학자 김기훈은 최근의 연구에서 1932년 만주국 수립 후 일본의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향한 조선이민은 그 성격상 일반적인 “국제이민(international migration)”과 다른 소위 “帝國內移民(intra-colonial migration)”으로서 그 역사적 과정을 구체적으로 방임정책시기(1932~1936)과 통제정책시기(1937~1945)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하튼 한국인의 중국이주 역사는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는 1945년의 8.15광복을 계기로 종결되었으며 따라서 적어도 100년이 넘는 한국인들의 중국(만주지방을 중심으로)을 목적지로 한 diaspora 역시 종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내외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1943년 당시 조선인은 만주국 총인구의 41%를 차지하였고 1945년 광복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총인구는 200만에 달하였다. 요컨대 중국 동북지역은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는 주요 목적지이자 집결지로서 19세기 후반부터 중국동북지역 조선인 인구 총수의 변화와 관련하여 일본학계의 다음과 같은 집계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표2: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인구의 변화(1881~1949)

연도 해당연도 인구총수 연도 해당연도 인구총수
1881 10,000 1925 513,973
1894 65,000 1930 607,119
1904 78,000 1935 826,570
1910 202,070 1940 1,450,384
1915 282,070 1944 1,658,572
1920 459,427 1945 1,110,657


한편 중국학자 金炳鎬의 연구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100만 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귀환하였고 그후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차 인구조사결과 당시 조선족 인구총수는 1, 120, 405명에 달하였다. 요컨대 1953년 당시 112만 명 남짓한 조선족 인구는 바로 근대 이래 한민족의 diaspora가 중국대륙에 남긴 역사적 결과로서 바로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온 조선인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조선으로의 쌍방향적 유동(stream and counter-stream)과정의 최종 결과물로서 즉 오늘날 중국 조선족 인구의 직접적인 起源이 되었다.

둘째, 중국으로 이주 해온 조선인들이 중국 조선족으로 형성된 것은 나름대로 뚜렷한 중국적 특색을 갖춘 역사적 과정이었다, 국제이민에 관한 추진력과 흡인력 이론(push-pull theory)에 의하면 이주민의 생성과정에는 원 거주지의 추진력(push factors)과 더불어 이주 목적지의 흡인력(pull factors)도 있어야 한다. 조선인들의 중국이주 특히 만주국시기 조선“開拓民”들의 만주이주사례는 바로 위와 같은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단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후 국제적 이주민 집단으로서의 조선인들이 이주 목적국가인 중국에서 한 소수민족으로 형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역사적 변화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민 수용국가인 중국정부의 경우 20세기 초의 청왕조 말기에 이미 국적가입의 방식으로 조선이주민들을 중국국민으로 편입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만주국 시기의 소위 “五族協和”를 거쳐 1949년에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시기에 들어서 드디어 중국 국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중국사회의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이주민들의 경우 동북지방의 개발 및 중국의 민족독립과 해방투쟁에 적극 가담하는 방식으로 중국정부 및 국민들의 인정과 존경을 취득하였고 아울러 중국 사회 새로운 구성원으로서의 자신과 자아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결국 이른바 中華民族 大家庭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

요컨대 조선인 이주민들이 중국에서 중국사회의 새로운 소수민족 즉 중국조선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결국 외부의 타자(중국정부 및 국민)로부터 민족 집단 자체에서 정체성을 이중적으로 확보 및 형성하는 역사적 과정으로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의 형성과정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지역 한민족 공동체의 형편과 분명 많은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953년 후 중국조선족 인구의 변화과정과 관련하여 중국정부 인구조사자료를 이용한 중국학자 김병호의 연구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


표3: 1953~2000년 중국조선족 인구의 변화

지역
연도

전국

吉林省

黑龍江省

遼寧省

內蒙古

기타 지역
1953 1,120,405 756,026 231,510 132,869    
1964 1,339,569 866,627 307,591 146,513 18,838  
1982 1,765,204 1,104,074 431,664 198,252 17,580 13,654
1990 1,923,361 1,181,964 452,398 230,378 22,641 33,216
2000 1,928,842 1,145,688 388,458 241,052 21,052 126,785

위 표3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조선족의 인구가 1953년의 112만 명에서 21세기 초의 192만까지 성장한 것은 조선족이 현대중국의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발전해온 결과로서 앞서 살펴본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온 한민족의 diaspora와 사실상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일찍 “조선반도의 남과 북 주민들을 포함한 조선민족 전체의 초국가(경/계)적 diaspora 현상은 오로지 중국조선족이 형성할 수 있는 역사적 원인으로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사회가 여전히 갖고 있는 현실적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해왔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학자 崔佑吉 역시 최근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중국 조선족이 동북의 다른 민족(특히 한족)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l‘우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최근 한국과의 교류를 거치면서 한반도에 사는 한인들과는 구별되는 ‘우리의식’을 형성해 가고 있음이 관찰된다......이제 그들은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중국 공민이라는 의미로 ‘중국의 조선족’임을 자각하면서, 조선족 농촌 공동체의 해체위기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중국학자 김병호의 주장은 한층 더 간결하고 명확하였다.“(중국의)조선족들은 반드시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조선족은 한민족에 속하지만 결국 중국의 조선족으로서 한국의 조선족도 아니며 조선의 조선족도 아니다.”

4. 나가는 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diaspora가 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에서 유대민족 특유의 비극적 역사운명을 가리키는 특정용어로 굳어지고 나아가서 국제적 이민현상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로 통용되면서 무엇보다도 diaspora의 주체(개인 또는 집단)와 본 거주지 및 현재 거주지 사이의 지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거리감과 긴장관계를 표출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diaspora적 시각으로 한국인들의 중국이주 역사를 조명하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출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중국조선족 사회가 여전히 그러한 diaspora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조선족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diaspora적 시각을 원활하게 적용하기에는 아직도 실증적 차원과 이론적 차원에서 적지 않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해외 한민족연구의 권위자인 한국학자 李光奎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은 혈연적으로 한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법적으로 중국공민이고, 문화적으로 이미 많은 영역이 중국화 된 특수한 조건을 갖고 있는 한민족이다. 중국조선족은 음식, 주택 등 일상생활에서, 명절 등의 세시풍속에서, 결혼,장례 등의 의례문화에서, 그리고 의식구조와 가치관에서 이미 중국화 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중국인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중국조선족 나름의 특이한 생활양식을 갖고 중국조선족 나름의 특이한 가치관을 형성해 왔다. 따라서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세계의 해외한민족이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중국인도 아니지만 한국인도 아닌 중국조선족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민족이면서,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는 한민족이면서, 또한 미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민족이 아니라 중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으로서의 입장이라면, 그 환경과 조건에 합당한 중국조선족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나름의 삶의 지혜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의식개혁을 통해 중국조선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국조선족과 같은 입장은 자기의 주관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이중적 가치관에서 방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민의식과 정착의식, 한국의 꿈과 중국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의 기원에 관한 논쟁과 상관없이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조선족의 역사는 적어도 두 세기를 넘었고 중국조선족 역사에 관한 연구 역시 1930년대 초 李勳求의 연구 및 1950년대 중국조선족 역사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비롯해 적어도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조선족 역사의 연구는 실증적 연구와 이론적 해석 등 모든 분야에서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실정인데 중국 국내의 경우 만주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른 소수민족의 역사연구업적에 비해 크게 못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일본, 미국 및 CIT국가 등 지역의 한민족 그룹의 연구에 비해 역시 많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도 있겠지만 연구이론과 연구방법의 빈곤 역시 위와 같은 현상의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21세기 초의 오늘날 학문적 연구 역시 세계화(globalization)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역사 및 지방역사의 협소한 연구시야를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사(global history)차원에서 중국조선족역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노력은 분명 향후 중국조선족 역사의 수준을 향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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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8 ]

8   작성자 : 너무 속보인다..
날자:2013-12-15 17:48:28
중국공산당의 녹을 먹고 살고있는 이들은 어쩔수 없이 자기네들의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족들의 유실이 없기를 바라겠지..

조글로에 올라오는 글들 대부분의 논조가 공통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저들이 조선족 전체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
오히려 자기네들 살길이 더 바쁘니..

한-중 수교 초기에는 저런 중국공산당 나팔수 글들이 어느정도 심리적으로
조선족 군체들에게 먹혀 들었으나..

현재는 그렇지가 않다..
한미디로 어설픈 민족관과 조국관등의 합리화성 논조들은 벌써 전에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오히려 이런 글들이 대부분을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일상 생활을 하는 조선족 군체들
에게는 불편할 뿐이다..

그냥 자유롭게 내 버려 두면 될텐데 뭐가 그리도 조바심이 날까??
중국이 무슨 북한 처럼 인간의 행동을 제약을 하는것도 아니고..

많지도 않는 군체들 판단에 맞기는게 현명하다 하겠다..
조선족이 무슨 독립된 나라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분란을 만드는가??
어차피 중국인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북한,남한인으로 살아가느냐의 선택은 개인들의
판단의 몫이다...
7   작성자 : 이해를 잘 합시다
날자:2013-08-30 02:40:42
조심스러운 얘깁니다만 우린 늘 상대방에게 그 어떤 껄끄스럼 얘길할때 그 장본인은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인간의 룰이란 절대적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고금동서로 왕조체제,독재체제 지탱한 국가가 몇이 됩니까?그래도 조선은 이조 오백년사입니다.중국의 가장 오랜 역사는 청나라 즉 이백칩여년인 걸올 알고 있는데 자 좋습니다.미국이라는 국가는 모르기는 하겠지만 영원히 그 국가가 미국이라는 즉 아메리카합중국이라고 나갈 것입니다.왜 그렇게 영원히 나갈 거예요?
6   작성자 : 1번 님의
날자:2013-08-29 21:11:53
견해가 제일 정확한것 같군요...
한국인-조선족간 갈등의 원인을 제일 정확하게 진단 한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르니 뭐니 하며 주절거려바야 소용없는 핑게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대부분 님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조선족들은 알면서도 애써 부인할 뿐이지요...
5   작성자 : 저러니
날자:2013-08-29 21:06:24
한국인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원이면 당연히 중국의 편에 서서 합리화성 글을 올린다..
그래야 먹고 살수 있으니..
그러나 일반 농공민들이야 구태여 저렇게 억지스럽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이 가는데로 움직이면 된다..
저런 부류들도 다들 자기 개인및 가족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니 어쩌겠나..
그런데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는 사실 불편한 면이 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고..
쓸데 없는 오해나 사며 갈등을 유발할 필요가 뭐가 있나??
제발 너네들만 살려고 하지말고 전체 조선족들도 생각좀 하며 살아라...
4   작성자 : 한국적딴조선족
날자:2013-08-26 19:22:45
자기절로 조선족 이중성을 말하여놓구??!
중국의꿈과 한국의꿈에서 방황하지말라구하구있으니
한심하구먼
이봅소 권혁수동지 동지땜에
조선족이 한국서 욕질당하고있소.
동북공정 압재비라구....휴~
3   작성자 : 글쎄
날자:2013-08-26 12:39:56
많은 한국인들이 조선족을 박쥐족으로 보는데는 도리가 있다.
대부분의 조선족은 중국과 한국 양쪽으로부터 최대한 이득을 취하려 한다.
근데 아시다시피 중한양국은 친구가 아니며 대부분 한국인은 중국을 싫어하고 중국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중국 소수민족으로 되여 있는 조선족이 중한양국에서 줄타기하면서 이득을 취할려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한민족이라고 외치지만 한국인이라고는 할수 없고
중국 소수민족신분이니 중화민족에 속하지 않는다고 안말할수도 없고..

한국인으로 살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족으로 동화되기는 싫고...
와중에 조선족사회가 급속도로 붕괴되고 객관적으로 어쩔수 없이 한족으로 동화되여 가는 추세이고...
바로 이러한 현실이 조선족의 이른바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고 많은 문제와 시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2   작성자 : 글쎄
날자:2013-08-26 12:18:24
한국이란 나라를 남조선으로 부르고 남조선을 잘 모를때는 정체성이요 조선민족이요 뭐요 하는데 별로 고민이 없이 우리는 조선족, 조선사람으로 오손도손 살았다. 너는 조선인이냐 조선족이냐 조선민족이냐 중화민족이냐에 대해 근본 생각해보지 않았다.
근데 왜 남조선을 한국으로 부르고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고 조선족사회에 한국바람이 불면서 정체성이니 뭐니, 너는 한민족이니 중화민족이니? 너는 한국인이니 아니면 조선족이니? 하는 문제가 불거졌을까? 과거 북조선과 조선족들이 교류와 친척방문이 있었지만 이러한 시비나 문제가 제기된적이 있는가?

왜 그럴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익 때문이다.
과거 물론 북조선도 한때는 중국보다 조금 더 잘 산적은 있었지만,중한수교전후의 한국과 중국사이 정도의 큰 경제적 격차는 아니였다. 그저 북조선이 중국보다 일부 경공업품방면에서 조금 더 발전했구나 하는 정도... 먹는 문제 등 면에서는 중국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이정도의 격차로는 조선족을 크게 흡인할수 없었다.

하지만 중한수교전후 남조선으로 불리우던 한국이 중국보다 엄청 발전한 모습을 보고 또 일부 친척나들이를 갔다온 사람과 불체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습을 보고서 조선족사회는 오직 한마음 한국으로 한국으로~ 묻지마세요 한국행... 목숨을 건 밀입국,가짜 여권,가짜 결혼 등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행....국적회복운동이니,우리도 돌아와 살 권리가 있다느니... 아, 대한민국 고국이여, 내 사랑 고국이여.. 우리는 한민족, 심지어 나는 한국인 하면서 아부하고 아양을 떨고 별아별 지랄네굽을 다 떨면서 한국으로 한국으로~

1   작성자 : 조선족의 지리적 입장
날자:2013-08-26 11:33:41
중국조선족이 타지역의 한인 디아스포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지리적 입장이었다. 연길과 북조선 국경과의 직선거리는 50킬로가 안되고 자치구는 북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떠나온 조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는 데는 이점으로 작용했으나 중국의 의심을 안받고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극단적으로 흘러서 자연스럽지 않은 과도한 충성심을 보이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념적으로 같았던 북조선에 기우는 친북인사가 많았던 것도 북조선 출신도 많았지만 북조선을 지지하는 것이 바로 중국에 충성을 보이는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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