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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속의 고향마을
2021년 10월 29일 10시 23분  조회:3304  추천:0  작성자: 오기활
                                               안개속의 고향마을
                                                  손홍범

내가 살던 고향인 도문시 량수벌은 좀 특이하게 생겼다. 조선족 부락은 거개가 북쪽으로는 산기슭에 남쪽으로는 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량수마을은 북쪽은 높이 쳐다보이는 언덕이고 언덕에 올라서면 넓은 벌이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 그제야 산이 나타난다.
 
 
교원사업을 할 때 유람으로 장백산아래 첫 동네란 숭선으로 간적이 있는데 그곳 지형이 량수와 같았다. 그러고 보면 량수지형은 장백산천지 주위의 마을 지형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언덕에 올라서면 량수벌 풍경 한눈에 안겨온다.
 
동쪽은 살구꽃에 잠겨있는 신흥동 마을인데(지금 영화촌이라고 부른다) 경치로 인기를 끌어 연변의 유명한 화가 임천의 작품에도 많이 오른 곳이다.
 
남쪽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위에는 허리가 동강난 커다란 다리가 엎드려 있다.
 
왜놈들이 동북의 자원을 수탈해가려고 엄청 크고 견고하게 지었다. 2차대전후기 왜놈들은 도망갈 때 쏘련홍군의 추격을 막으려고 폭파해 끊어 버렸는데 그 소리와 진동에 멀리 마을의 돼지굴(돼지우리)의 돼지도 놀라서 한길 솟더란다. 지금은 관광유적지로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만경대벌과 하서마을, 좀 뒤로는 하서4대마을이 있다. 이전엔 술을 빚는 집이 있었다하여 술칸부락이라고 불렀다.
 
량수마을 풍경은 또 어떠하더냐!
 
이른 아침 언덕위에 높이 솟은 새하얀 열사기념비 앞에 올라서면 연안보탑산에 오른 심경인데 언덕 아래로는 넘실거리는 흰 안개바다가 펼쳐진다. 량수마을과 마을 앞 푸른 논 어디라 없이 흰 비단 같은 안개에 잠겨 보일 듯 말듯하다.
 
그 무엇으로 형용하랴. 몽롱미를 자랑하는 그 모습, 너울 쓴 첫날각시마냥 어여쁘기만 하여라!
 
안개속의 집집마다 울바자엔 나팔꽃이 만발하고 열콩이 주렁졌으리라. 뜨락마다 노란 호박꽃 피고 파란오이 드리웠고 푸른 파 이슬에 젖었으리. 또 밤새 익은 토마토는 포기마다 매달려 빨간 얼굴 자랑하며 코흘리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한집, 두 집 굴뚝엔 파란연기 피어오를 때 마당에서도 풍노불 피기 시작하리라. 강아지는 허리 늘구며 채석에서 내려오고 병아리들은 울바자 밑에서 벌레 찾아 삐약 거리리.
 
아. 안개 덮은 고향마을아. 너는 기지개 켜며 잠을 깨는 내 사랑의 여인이 아닌가!
 
고향마을. 안개속의 고향마을아.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여쁘더냐!?
 
나는 스피노자(구라파 철학가. 엥겔스는 그의 책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며 즐겼다고 한다)가 쓴 윤리학이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책에는 사람의 정감에 관해서도 기하학적공식으로 수십 개 종목으로 나누어 언급 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공식이 있다
 
ㅡ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 나에 대한 맘속에 품은 사랑의 이유를 모를 때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 내 연인의 깊은 맘속이 똑똑히 보일 때 보다 알릴 듯 말듯 희미하게 몽롱히 보이면 상상의 꽃 너울에 감겨 더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안개속의 고향마을도 그와 같으리로다.
 
그럼. 연애중인 그대가 더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좋아 하는가 묻는다면 내 심정을 안개로 덮어두고 알려주지 말라. 미루면 더 좋으리라
 
ㅡ결혼식을 올린 후 알려드리겠어요
 
ㅡ아이를 낳은 후 이야기 하지요
 
ㅡ아이가 대학간 후 보자요
 
ㅡ아이가 결혼한 후 말하겠어요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ㅡ이 못난 나만 믿고 끝까지 살아온 바보같은 사람아. 내가 어디가 좋았어?
 
라고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나.
 
ㅡ모르겠어요. 그냥 좋았어요. 저 세상 가서도 우리 함께 있자요.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면
 
아.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을 두고 목석인들 그 어찌 마음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말했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아. 고향마을아. 너는 내 사랑. 내 여인. 부디 길이길이 예뻐다오. 꿈에만 보이지 말고 내 앞에 신기루로 나타나 다오. 그러면 이 내 마음 천방지축 달려가 네 품에 안기리라. 그리고 오래오래 흐느끼리라. 가슴 후련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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