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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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2007년 02월 21일 12시 51분  조회:2280  추천:77  작성자: 허동식
고향을 떠난지가 거의 20년이 되는것 같다 . 현성에 있는 고급중학을 다닐 때부터 마음을 미지의 지역에 두었던 기억으로서 내 마음이 고향마을을 떠난지는 어느덧 20년을 넘는다. 부끄러운 일이고 알수없는 일이지만 어려서는 고향마을에 별로 애착을 느끼지못했다.

나의 고향은 조양천에서 화룡으로 가는 철길 북쪽켠, 해란강 북안의 산아래에 자리잡은 작은 촌락이다. 주민은 대부분이 조선족이였고 몇호만이 한족이여서 한족들도 조선말을 잘 하였었다. 고향말로 <<버덕(벌)도 아니고 산골도 아닌>> 동네이다.

벼농사도 하고 밭농사도 하였는데 추억에 새록새록한 일은 여름철에 철뚝아래 개울에서 목욕하다가 객차가 지나가면 옷을 물에 적셔 객차 창구로 머리를 내민 사람들한테 물참봉을 시키고 손짓 발짓을 섞어서 <<먹어라 먹어라>> 소리지르던 일이다.

그적에 누나 또래네 처녀들은 나라 쌀을 먹는 공인한테 시집가는게 꿈이였고 형 또래네 총각들은 군대로 가는게 꿈이였다. 우리 또래의 꿈은 권투나 배워서 어디서 거들먹거리거나 무슨 맛있는 음식이나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일이였다. 그리고 아버지들의 꿈은 술이였고 엄마들의 꿈은 아버지가 술을 끊어버리는 일이였던가?

교통이 너무 불편한 동네가 아니였는데도 나는 소학교 3학년에야 처음으로 화룡에 영화구경 갔다가 영화관이라 부르는 건물에 들어가 보았고 고급중학 때에야 처음으로 연길행을 해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야 소위 <<안쪽>> 인 먼 동네로 다녀보았다.지금은 고향을 멀리 등진 동네에서 밥벌이를 하고있다.

가끔 지도를 들여다보면 내 고향은 아주 편벽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 그렇게 흔한 바다도 한조각 끼지못하고 넓은 중국땅의 자그마한 가장자리에 고독하게 표기된 고향, 어릴 때 <<산 좋고 물 좋고 살기 좋은 동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내 고향은 위도상으로나 지형적으로 볼 때에도 농경에 적합한 지대는 아니다.

그리고 지정학의 시각으로 보거나 현실적인 국제정치형세로 보면 로동력밀집형산업이든가 자본밀집형산업이 찾을 자리가 아니며 실력적으로도 과학기술산업을 키울 신세도 아니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모두가 한국으로 외국으로 떠나감이 오늘날의 삶의 길로 되여있다.

알건대로는 노무수출에서는 중국에서 아마 복건성 다음이 연변일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소규모의 농사를 해서는 먹고 살기에 힘겹고 그래서 삶을 찾아 자꾸만 떠나는것이다. 인터넷에는 조선족 인구의 마이너스성장, 농촌의 황페화, 농촌학교의 페교 등으로 여론을 끓이고 있다. 헌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는가? 우리의 피줄과 문화를 이어갈 대책을 대자 하는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는건 물론이고 현대사회 인구류동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감을 다시 한번 느끼게된다. 잘 살아야지 잘 살게 만들어야 떠나지 않을텐데 혼자말로 중얼거리기도 한다.

2003년 겨울에 고향마을로 한번 다녀왔다. 어릴 때에는 그렇게 높아보이던 산이 작은 둔덕처럼 보이고 꽤나 넓던 하곡평원이 너무나도 작은 뙈기논으로 널려있어 나의 눈에는 살풍경으로 보였다. 마을의 벽돌집은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마을내의 길이 꼬불꼬불 어지럽게 변해졌고 인구도 많이 감소되였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뿐이였다. 나는 철뚝길을 바라보면서 어릴 때 뉘집 아이가 밤에 도랑물에 고기잡이발을 놓고 레루를 베고 잠자다가 기차에 다쳐죽은 일과 나무숲이라곤 별로 없는 남산을 쳐다보며 겨울에는 온 동네 남자일군들이 남산탄광에서 도적석탄을 캐다가 가끔 사고를 당해 죽던 일들이 생각되였다. 아주 슬퍼졌다.

사람이 모여살면 어떠한 인간사회의 생태시스템을 이루기 마련이다. 현재 고향마을의 생태상황은 잘 알수는 없지만 70년대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중국의 시골은 모두가 그렇게 살았던 시대였으므로 고향 마을에서 일반적으로는 생산대장 정치대장 회계 창고보관원이나 괜찮게 살아가고 제일 불쌍한 인간은 부농이였다 .

마을에 지주급의 계급의 적은 없었고 부농이 최대의 계급의 적으로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많이 받았었다. 그때문에 고향 마을에 있는 새쓰개(정신병환자) 2명이 죄다 부농의 자식이였다. 말하자면 천성적인 정신병자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정신병자 2명을 창출했다는 이야기다.

로인들은 악한 일을 하면 죄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기는 하였지만, 부농들을 투쟁하던 일과 애들도 부농집 애들을 천대하던 일들이 나에게 많은 좋지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인간사회의 불평등에 대하여도 얼마간은 알게 된듯하였다.

말에 의하면 고향 마을은 습깨지(소택지)에 세운 마을로서 물도 별로 좋지않고 강북과 음지에 자리잡아 풍수가 나쁘다 하였다. 그래서였을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소궁둥이 때리기가 싫어서였을가 나는 언제든지 고향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 심리적인 현상으로 보면 그 누구나 적어도 순간적으로 탈출의 욕망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가. 나는 언제든지 시골호적을 버리고 싶었다.

어제는 <<공작새>>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70년대 도시빈곤인의 생활을 그린 영화였다 . 영화의 주인공 2명도 도시인임에도 불과하고 자꾸만 탈출의 꿈을 하고 있었다. 생각끝에 나는 나의 어릴적의 탈출심리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하나 얻었다 . 정상적이고 향상하는 사회는 매 인간에게 소위 신세를 개변할수 있는 여건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제도가 없거나 그 제도가 활성화되지를 못하면 사회는 창백해지고 인간의 심령세계가 아주 변형되는것이 아닐가?.

고향 사람들도 지금은 대규모의 산업류동과 인구류동에 지배되여 모두가 삶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매 개인에게는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족사회로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있다 . 못살더라도 버티고 앉아있을건가? 아니면 모든것을 팽개치고 잘 살기에 동분서주 할건가? 나로서는 정확한 답을 할수는 없지만 우리 조선족사회가 지금 그 답복을 하고있음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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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려호길
날자:2007-03-04 13:48:51
마을에 동씨들이 많이 살았지요. 옛날에는 괜찮은 동네였는데. 중학교 때 다본 영화보러 몇번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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