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댁호가 <<모의집>>이였으므로 아버지의 태생지를 함경도 길주의 모의(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화로 다시 확인해보니 어머니의 이야기는 아버지는 룡정 신화촌에서 출생하셨다 하신다. 작은 키에 조금 수척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르기는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란 유년시절의것은 기억에 남은것이 아주 없고 또 열여섯살부터 학교를 다니느라고 방학에만 집에 돌아갔으니 기억속의 아버지는 고작해야 십년으로 환산이 될가?.
나는 아버지께서 나이 50에 본 <<늙으막 자식>>이다. 누나들 이야기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젖먹아들이 태어났다고 아주 기뻐하시며 해란강변에 나가 뙈기논도 풀었고 나는 어머니 젖 대신 아버지가 탄광에 다니시면서 하루에 2냥씩 배급받는 쌀을 가루내여 지은 죽을 먹었다 한다. 동년의 기억에는 아버지는 일만 수걱수걱 하시였지 나하고는 아무런 소통도 없었던 같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는 옛날 사람들은 생활난으로 하여 자식을 귀여워할 시간도 기교도 없었나? 하는 우둔한 생각마저 했었다. 요즘에는 밭에 갔다 오시면서 개암과 같은 산열매를 챙겨다주시던 아버지가 가끔 생각힌다. 마흔살에야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의 진미를 터득하는상싶다.
아버지는 귀가 많이 가셔서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반드시 목소리를 높혀야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청년시절에 룡정에서 반일구호를 외치다가 일본인순경한테 구타당한것이 아주 고질로 변했다 하시였다. 우리집은 성분이 중농이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부지런하여서 괜찮게 살았는데 장남인 아버지는 동네에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탄 청년으로서 학교인지 서당인지 공부하러도 다니셨다 한다.
아버지는 <<죽은 공부>>를 한 덕택으로 내 고향마을에서는 거의 수재역을 하시였다. 누가 세상뜨면 弔文을 쓰셨고 친척들 애기이름을 많이 지어주시였다. 아버지는 붓으로 넙덕글자(한자)를 잘 쓰시였고 어느 밤이면 책을 중얼중얼 소리내여 읽으셨다. 내가 소학교 3학년 때에 <<수호전>>과 <<삼국연의>> 소설책을 빌어다 읽으면 아버지도 가끔 읽으셨는데 꼭 운문을 외우듯이 소리를 내시니 산수풀이가 지장을 받아 내가 아니좋게 생각하던 일은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첫 부인과 딸 하나 아들 둘을 보았는데 나에게 큰 누나로 되는 딸은 내가 태여나기전에 시집가서 난산으로 죽었다. 아버지는 상처한후에 남편을 잃고 조선전쟁시기에 딸 둘을 데리고 조선 청진에서 연변으로 돌아온 나의 어머니와 재혼하셔서 새 가정을 이루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적에 어머니한테 구혼인이 두사람 나졌는데 점쟁이한테 가니깐 나의 아버지가 귀는 갔지만 마음이 좋아서 괜찮다는 권고를 받아 아버지를 선택하셨다 하신다.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10년 아래이기는 하지만 어릴때 아버지 고향 룡정 신화촌에서 같이 살았고 마을 서당에서 훈장인 아버지한테 글을 배운적도 있듯이 서로간에 잘 아는 사이였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보 대신 바울라(어머니의 천주교교명)라고도 부르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총각일 때 어머니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내 고모랑 같이 놀던 이야기도 자주 하시였다. 인연이 만들어준 새 가정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계셨고 삼촌도 장가전이였으며 아버지 자식 셋에 어머니 자식 둘, 그리고 두분이 자식을 다섯이나 주렁주렁 또 낳았으니 (둘은 요절하고 셋만 남았음) 두분이 겪은 생활난과 마음고생은 나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내가 소학교 1학년을 다닐때라 생각되느데 하루는 집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점심밥을 먹는데 대들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남긴 큰 집은 큰형이 공부를 할때 차지를 받고 작은 집으로 바꾸었느데 빈대가 낄 정도로 헐망하였다. 그해에 아버지는 집식구들과 의논하고 새집을 짖는다 하시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아버지는 거의 날마다 내 셋째 누나와(큰형과 둘째 형은 장가들고 큰누나와 둘째 누나도 이미 결혼했음) 함께 소수레를 몰고 산에 가서 나무도 베어오고 생산대 빚도 내여 집지을 준비를 하셨다.
다음해 낡은 집터에 아담스런 새집이 일어서고 온돌을 놓고 벽과 온돌을 건조하려고 불을 지핀 아궁이앞에 앉아 내가 감자를 구워먹던 늦가을에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는데 집에서는 <<개도 먹지않는 돈>>때문에 나와 잘 친하던 우리집 황둥개를 전공들에게 팔아버려 내가 울었더니 아버한테서 크게 꾸중을 받았다.
생산대 일은 아주 힘들었지만 아버지는 해마다 자류지 근처에 황무지를 일구었다. 그래서 고추라던가 호박을 심으면 어머니는 여름 가을내로 장마당에 이고가 팔았고 겨울에는 또 자류지에 심었던 박과 비자루수수로 만든 바가지와 비자루도 가져다 팔았다. 장마당수입이 주요한 생활래원으로 되여던것 같다. 어느 해인가 <<자본주의 꼬리>>를 자르는 바람에 아버지의 고추밭이 민병들의 낫에 거덜이 난 일도 있었다.
내가 소학교 5학년이 되는 때든가? 아버지는 삼촌과 상논하고 청명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를 룡정 신화촌으로 <<멜레>>(이장)하였다. 조상의 묘소는 마음대로 옮기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권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꿈에 할아버지가 자꾸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고집을 부려 끝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뼈를 룡정 신화촌에 이장했다. 미신인지는 모르지만 그해로부터 집일이 별로 순조롭지못했다. 삼촌네 집에서는 나와 거의 동갑이던 사촌동생이 연길 어느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빠져죽었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주정하기 시작하였으며 건강상태가 많이 나쁘게 변해갔다. 술 한잔에도 말씀이 많았고 누구도 응대가 없으면 밤이면 넉두리를 하시였다. 인생을 많이 한탄하고 사는 재미가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누구는 신선님처럼 사는가 모두가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하고 집식구들이 권해보기는 했지만 별로 효력을 보지못했다. 아버지는 대학공부까지 한 큰형에게 희망을 두었던것이지만 큰형은 멀리 중경에서 살았었고 얼굴보기마저도 힘들었으니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낙망감을 그렇게 표현하시였는지? 아니면 회갑까지 쉰 년세에 코흘리개 자식까지 먹여살리려니 너무나도 힘에 부치여서 그래셨는지? 주변 로인들은 그렇게 말씀하는 분들도 있었다.
마음이 무너지면 사람은 빨리 로쇠한다 한다. 그때로부터 아버지는 늘 침상에 누워계셨고 어머니와 셋째형은 로인치매증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거의 십년간을 별라별 고생을 다 하였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공부를 잘 해서 박사가 되라는 농담까지 하시던 분이 방학에 집에 가면 <<애들이 잘 크오?>> 물으실 정도로 로망을 하시다가 아버지는 1988년에 끝내는 저 세상으로 가시였다.
아버지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아버지의 삶은 땅과 가정에 응고된 평범한 인생이다. 아무리 작고 번거로운 삶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도 인간으로서의 꿈은 많았을건데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꿈으로 인생을 살았을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어도 틀림없이 자신의 인생과 자식들의 인생의 풍만한 결실을 바라는 꿈이였을거다. 하지만 세월은 무정하여 아버지께서는 자신도 꿈을 이루지 못했고 자식들의 <<번한 날>> 구경도 못하시고 인생을 마치시였다.
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드릴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가 떠나가신 그해 대학교 정원에서 높고 맑은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쓴 <<碧空傳奇>> 를 다시 조용히 읽어본다.
아버지 당신을 죽이던 가을이 다시 오고 있습니다 하늘하늘 나붓기는 락엽 사이로 껑충 높아간 벽공이 보입니다
학교 갔다 배고프던 그 가을날 저의 더벅머리를 어루쓸고는 당신은 허구픈 웃음만 지으셨지요
그러나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겠지 하던 의문은 소슬한 명상속에 끝내는 풀리고 그 웃음이 울음이고 통곡이였음을 파란 벽공이 알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의 마음은 신들메 조이고 당신의 생명을 속이던 그런 가을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풍작의 인생을 주는 아름다운 가을을 찾아 떠나갑니다 당신의 벽공전기는 영원히 가버리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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