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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 ABC
2008년 07월 24일 14시 57분  조회:2587  추천:95  작성자: 윤운걸
윤운걸기자문집

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 ABC


윤운걸


1992년도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인과 조선족들 사이에 접촉이 빈번해 지기 시작했다. 서로간에 힌 피줄이였지만 처음에는 신비한 눈길로 조심스레 접촉하면서 상호간의 신뢰도를 쌓으려 노력했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갈등씨앗이 점차적으로 자라 다른 민족들도 경멸의 눈길를 보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필자는 다년간 한국을 다녀 오면서 느낀 점과 조선족동포사회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을 요약해서 정리하오니 이 글이 한국인과 조선족동포사회의 갈등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생각한다.

갈등A:고국인과 이주민으로서의 갈등씨앗

조선족의 이민사를 간략해보면 1627년부터 1867년 사이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실시하다보니 대량의 조선(한)인들은 “간도”땅에 오지 못했다. 하여 이 시기의 이민은 목숨을 걸고 들어온 시기라 볼 수 있다.1869년과 1870년의 대기황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에서 봉금령을 페지하는 바람에 1910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기내기로 “간도”땅에 건너왔다.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망국의 설음을 안은 조선(한)이들이 또 수없이“간도”땅을 찾아왔고 일제와 싸우기 위해 많은 항일투사들도 “간도”땅을 찾아왔다.1945년도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지역(주로 동북3성)에 찾아온 조선(한)인은 216만여 명으로서 지금의 조선족인구보다 더 많았었다.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땅에 찾아온 절대다수의 조선(한)인은 기황과 일제의 침략에 견디지 못해 삶을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

1921년도에 중국공산당은 설립된 날부터 무산계급로고대중을 위하여 군벌과 싸우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기치를 내들었다. 이 기치가 중국땅에 이주한 조선(한)인들의 투쟁목표와 공통점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수한 조선(한)인들은 중국공산당과 어깨겯고 전장에서 피를 흘렸고 또한 조선(한)인들은 해방전쟁시기에 국민당을 쳐부수는 전장에서도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팔로군은 동족으로서의 대립인 국민당의 간첩들이 요새에 잠복해 있을가봐 될 수만 있으면 조선(한)인 투사들을 요직에 두었다 한다.

1945년도에 광복이 되면서 중국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나라를 잃었던 조선(한)인들도 중국땅에서 토지를 분여받게 되었으니 이만큼 더 큰 희열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여 조선(한)인 청장년들은 또 중국해방전쟁에도 용약 참가했다.통계에 따르면 중국해방전쟁시기에만 해도 조선(한)인들이 6만 3000여명이나 해방군에 가입했는데 이는 여기 조선(한)인 인구의 5%도 넘으며 목숨을 잃은 조선(한)인은 길림성 렬사의 93%를 차지했다.이로해 조선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니였던 조선(한)인들은 1953년도에야 비로소 연변조선족자치구(현재는 주)가 설립되면서 중국정부로부터 법적으로 승인받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명칭을 달게 되었다. 하여 조선족은 사회주의체제하에서의 사회주의 리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족은 점차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배타성을 갖게 되었는바 이것이 한국인과의 원천적인 갈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원천적인 갈등으로 하여 조선족은 조선과는 친혈육처럼 지냈지만 한국과는 자본주의국가라는 시점에서 배타적으로 지내왔다.

갈등B:문화적인 차이

1989년도 최초로 한국에 다녀갔을 때 한국인들과의 접촉 중에서 공동점이라면 공산당은 “폭군”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였다. 이로 보아서 그제날 한국의 교육체제는 철저하게 사회주의배척체제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당시에 내가 접촉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하는데 정말인가”고 롱담절반, 진담절반으로 문의했다. 그리하여 중국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고 여차여차하게 설명해서야“그럼 그렇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 같지 않는냐”라고 개탄했다. 따라서 조선족들도 그제날에는 “자본주의나라는 거지가 욱실거리는 나라,깡통을 차고 빌어먹다가 숨진 암흑사회”라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다. 이러할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활해온 한국인들이 사회주의체제에서 생활해온 조선족을 불신할 수 있을 수 있고 또 조선족들이 한국인을 불신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사회체제교육시각의 엄청난 차이점으로 하여 한국인과 조선족사이에는 심리상의 갈등과 오해가 자연히 생겨난 것이다.

다음 력사문화에 대한 인식차이를 살펴보자.

지금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청소년들은 물론 50대 지어는 60대에 이른 사람들도 우리 민족의 력사를 거의 모르고있다. 지어는 우리 글을 창제한 사람(세종대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않다. 이는 우리의 민족교육체제에서의 엄청난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자기 민족의 력사를 모른다면 고국인들과의 융합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여기 조선족들을 만나서 이러저러한 력사를 되풀이하면 모르고 모르다 보니 크게 관심을 돌리지 않고 또 이러저러한 력사를 알고 있느냐 하고 문의하면 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조선족이 많지 못하다. 이에 한국인들은 한탄을 금치 못할 수 밖에 없다. 지어는 자기 민족의 력사도 모르니 어찌 한피줄이겠는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제날의 중국조선족은 망국의 설음을 안아오던 나머지 조선(한국)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닌 정체가 상당히 불투명해진 존재였다. 허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중국에 살고 있던 조선(한)인들은 자기의 피땀과 신근한 노력으로 떳떳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탈바꿈했다.그래도 조선족들에게 조상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조선 혹은 한국의 어느 도,어느 군 어느 면,어느 리라고 대답하지 중국의 어느 고장이라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허나 일부 조선족은 조상의 고향을 모르고 있고 지어는 자기의 성씨 족보관계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않다.한국에서는 자기의 족보를 모르는 사람을 “상놈”으로 취급한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학교시절에는 부친이 족보관계를 가르쳐주지않았고 (주;혹시 너무 어려서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중학교 1학년때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아버지가 력사반혁명으로 몰리고 어머니가 조교(조선교민)라는 리유로 집이 풍지박산 되다보니 집에  간직해 뒀던 족보마저 반란파들에 의해 불타버렸으니 어떻게 족보를 알겠는가? 다행히도 공부를 하면서 또 한국에 갔을 때 족보관계를 알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조선족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력차의 중국의 정치운동 그리고 교육체제에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례를 들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의 세시문화이다, 설명절이 돌아오면 차례를 지낸다든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들, 며느리가 부모에게 이침인사를 한다든가...등등의 세시문화는 지금 조선족동포사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의학계의 학자들은 한개민족이 이역에 50년이상 거주하게 되면 그 나라의 정치,교육,문화 등 제반 요소에 의해 유전인자까지 변이한다는 설을 제기하고있다.이 설이 성립되면 중국의 조선족은 분명히 한족들에게 상당한 면에서 동화되어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싶다. 한족들의 “만만디”기질이 조선족의 심령에 싹트기 시작했고 어떤 부분들에서는 한족들보다 더 “만만디”기질로 발전하고있다. 허나 조선족의 정체적인 문화심리를 분석하면 조선(한)도는 분명히 “친부모”이고 중국은 분명히 “양부모”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망국의 설음을 안은 중국조선족은 그 어느 민족과 달리 이중성을 띤 민족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조선족은 언제나 “친부모”와 대화하려 하고 “친부모”에게 그제날의 설음을 토로하고 싶어한다.

갈등C:시장경제에서의 갈등

1953년도에 조선(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한)인들이 조선족이라는 법적인 지위가 차례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양부모”의 집에 와서 이름을 새로 지었다는 얘기로 된다. 지위가 확정되면서 조선족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즉 계획경제속에서 세월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경제도약에 대한 개념도 점차적으로 희박해지게 되고 또 수십년 동안 언론매체에서도 한목소리로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게 사는 사회주의나라로 선전하다보니 자본주의 발전형태는 알 길이 없었다. 또 가만히 자본주의국가 방송을 듣거나 언론을 퍼뜨린다면 대뜸 “반혁명”이요,“반사회주의 분자”라는 모자를 들씌워 놓으니 워낙 민감해진 조선족들은 감히 자본주의경제를 연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헌데 서울에서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또 1992년도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두려움과 신비감으로 가득찬 눈길로 “쪽문”을 슬그머니 열고 바깥세상을 보기 시작했다.그제날 토막나무를 때면서 이밥을 먹으면 대만족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180도로 바뀌여지기 시작했다. 그제날에는 자전거도 없어 몇십리 지어는 몇백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소수레를 주요교통도구로 쓰고있는 조선족은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보건체육용으로 리용하고 소는 식용으로 하기 위해 기르며 수레는 “골동품”으로 취급되여 박물관에서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우기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만딸라,중국의 일인당 소득이 몇백딸라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족사회는 마른 장작개비에 불이 확 달린셈이 되었다.일확천금 “한국꿈”이 조선족사회에 온역처럼 퍼져나가면서 한국에 가면 길바닥에 딸라가 널려져있어 허리 아파 줏지 못할 정도라고 착각까지 했다. 그제날 교육에서 파생된 경제창조가치개념에 큰 오차가 생긴 것이다. 그제날 계획경제모식속에서 수십년동안 살아온 조선족은 로동재부창조성군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의존성군단으로 자리매김을 했다.이런 와중에 한국초청사기,한국인랍치사건들도 빈번하게 생기고 있다.아직까지도 1만6000여 가구의 한국초청사기피해자들이 눈물을 휘뿌리며 떠돌이생활을 하고있다. 또한 한국에 간 조선족들도 불법체류란 딱지를 쓰고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이른바 “3D업종”에서 일하면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족들이 기수부지이고 사고로 사망하고 병들어 사망한 사람들의 골회함이 아직도 재대로 구중천에 가지 못하고 영안실에 그대로 방치돼있다고 한다.또한 불법체류라는 리유로 숱한 돈을 쓰고 한국에 갔다가 쫓기워 온 사람이 그 얼마인가?

료해한데 의하면 일본은 자기 민족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관용정책을 실시하고 그제날 중국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몽땅 본국에 데려갔을 뿐만아니라 중국땅에 묻혔던 일본인들의 뼈까지도 파갔다고 한다.(필자의 대학 동창생 한 사람도 아버지가 일본인이여서 일본으로 귀화해 갔음)물론 나라와 나라와의 외교문제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조선족도 하루속히 경제의존성군단으로부터 로동재부창조성군단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어느 한 교육심리학자는 “조선족교육은 민족의 주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인 것이 아니라 일군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다”라고 첨예하게 지적했다.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은 창조성의식이 없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일군의식이라는 것은 의존성의식 즉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의식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해방된지 50여년이 흘러도 중국의 조선족은 노래나 잘 부르고 춤이나 잘 추는 민족으로 불리웠지 경제의식이 삐여진 민족으로는 인식되지 못했다. 물론 그제날 우리의 조상들은 근로하고 용감한 민족으로 각광받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 경제의식 정체가 상당히 희미해졌다. 이는 시장경제론리로 볼 때 아주 위험한 민족의식이라 하겠다.이런 의식으로 하여 조선족은 궁극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업심을 당하게 될 것은 물론 동족인 한국인에게도 업심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사이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지나온 력사배경, 교육, 문화, 체제의 차이, 경제가치관념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특정된 시기에서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그러므로 이런 갈등해소는 제반 조선족사회와 한국인사회에서 공동히 풀어나가야 할 중대한 과제도 되고 있다.

(본문은 2000년 5월25일자 흑룡강신문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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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일천
날자:2008-07-27 06:49:36
조선족과 한국인은 한반도에 뿌리를 둔 한겨레 동포입니다. 갈등은 반드시 해소해야 하며, 미래지향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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