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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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이색적인 수필과 소설 읽기
2019년 07월 18일 09시 55분  조회:157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이색적인 수필과 소설 읽기

우상렬

 

필자가 여기서 이색적이라 함은 적어도 우리 조선족 문단에서 허련순의 수필 <산 자의 고별식>과 단편소설 <그가 가는 곳> 같은 작품들이 적기 때문이다. 물론 이색적이라 해서 꼭 가치를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색적이면서 우리를 깨도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개별적이면서 전형성을 확보하는 예술로 승화되여 그 가치가 빛나기 때문이다. 그럼 아래에 그 가치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인간은 지극히 의식적이고 리성적인 존재다. 이런 의식과 리성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것 같다. 아는 것이 힘, 인간은 바로 이 아는 것의 의식과 리성의 힘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여 ‘우주의 정화, 만물의 령장’이 된 줄로 안다.

인생은 더없이 복잡하고 헛갈리는 듯하다. 그런데 결국 따져보면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한 카테고리로 정리해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인간은 삶에 대해 많이 담론해왔고 죽음에 대해 많이 소홀했던 것 같다. 아니 소홀했다기보다는 많이 피해왔다. 죽음은 무서운 존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서운 존재인 만큼 허황하나마 인간의 종교의식은 발전해왔다. 그래 죽음을 갈무리할 천국, 천당이 없는 종교가 있단 말인가.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죽음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음을 우리의 무의식 심처에 처박아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병원에 가기 싫어하고 화장터에 가기 싫어하고 죽은 사람을 보기 싫어한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의 무의식 속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분명 동물과 다른 자의식을 갖고 있다. 이런 자의식은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되돌아보고 직시하는 것이다. 죽음도 례외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식, 죽음학이라는 것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죽음은 삶에 못지 않게 중요하고 또한 그것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자유의지에 따른 자살이나 안락사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담론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준비하고 마련하는 지극히 의식적이고 리성적인 존재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사실 전통적으로 놓고 볼 때 우리 민족의 무속신앙은 이런 죽음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다 만족받으며 원과 한이 없이 살다가 저세상으로 가야 혼이 떠돌며 해코지를 하지 않는 옳바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나 이 세상에서 잘살기를 위해 노력해왔다. 오늘날 현대라는 현 시점에 있어서 특정 민족이나 신앙을 떠나서 인간은 다시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허련순의 수필 <산 자의 고별식>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이 수필의 제목이 시사하다 싶이 이 수필은 산 자 스스로의 죽음 고별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 고별식은 일반적으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하는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보통 죽으면 다인 것으로 여겨왔다. 죽은 후의 모든 것은 오롯이 산 자의 몫으로 남는 듯했다. 죽은 자에 대한 인간적 례우나 배려 및 장례식, 고별식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죽은 자는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는가. 산 사람만이 안다. 따라서 이것은 어쩌면 산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산 사람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 부모가 살았을 때는 불효를 하다가도 죽게 되면 ‘효’의 극치를 연출하는 것, 죽은 자의 위망을 빌어 조의금을 알뜰히 챙기기가 그 보기가 되겠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산 자가 자의식이 있을 때 스스로 자기의 죽음을 의식하고 장례식이나 고별식을 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자’ 중심이 되지 않겠는가. 사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스스로의 생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내가 언제 태여나고 죽을지… 우리는 이 세상에 전혀 무의지적으로 오고 간다. 나는 이 점에서 우리는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는 자기의 죽을 때를 안다. 그래서 고양이는 스스로 자기가 살던 곳을 멀리 떠나 자기의 무덤자리를 파고 조용히 운명을 맞이한다고 한다. 인간은 이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죽음은 산 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의식적이고 리성적인 존재로 자기의 죽음을 정시하고 맞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인간의 유서문화 및 자살, 안락사 등 죽음의 선택 그리고 단절의 죽음보다는 순환의 ‘돌아가다’의 론리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허련순의 <산 자의 고별식>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죽음을 의식세계로 끌어올려 철학적인 담론을 한 수필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 때까지 사는 것에만 련련하고 삶을 많이 이야기해왔고 죽음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왔고 담론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왔다. 특히 우리 민족은 죽음을 이야기하면 얄궂고 방정맞은 것으로 여겨왔다. 사실 삶과 죽음은 같이 가는 것이다. 상반상생의 변증법적 론리를 가지고 있다. 삶이 있어 죽음이 더 돋보이고 죽음이 있어 삶이 더 돋보이는 형국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 삶보다도 죽음이 더 중요하다. 죽음이 있어,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의식, 리성적인 의식이 있어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죽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삶을 잘살았다는 증거’가 아니더냐.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산 자의 고별식’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에 대한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일지라도 그것은 현 단계에 있어서는 아직 전위적인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미리 치른 장례식’의 전례를 보면 기껏해야 북미에서 두차례 그리고 김현철이 세번째인 셈이 아닌가. 죽음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공공연한 담론의 거리로 만든 사람들, 분명 인간의 새로운 죽음문화를 창출하는 선구자들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이들은 죽음을 알고 죽음을 초탈한 사람들”, “죽음을 삶으로 살아냈으며 죽음을 아름다운 삶으로 완성시킨”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죽음문화가 우리들에게 낯설고 충격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도 생일파티와 함께 하는 죽음의 고별식. <산 자의 고별식>의 저자도 마찬가지. “나로서는 너무 충격적이였고 생소하고 낯설었다. 한편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왠지 가슴에 총을 맞은듯 먹먹해났다. 경이로움과 처연함, 그리고 짠한 슬픔과 이름할 수 없는 쓸쓸함까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찬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드려야 할지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것일가?” 이것이 우리 모두의 느낌이였을 것이다. <산 자의 고별식>은 이런 충격적인 사실이 충격적인 만큼 ‘낯설기’에 성공하고 또한 사색의 여지를 주어 성공적이다. 나는 이 순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려본다. “생각한다. 고로 인간은 존재한다.” 그래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했을가? ‘지옥의 문’ 우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하는 것을 봐서는 영낙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을 했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의 하나의 영원한 명제이니 사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산 자의 고별식>도 <생각하는 사람>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죽음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단순히 자연스러운 생리적인 죽음만으로 보지 않고 인생관과 련계되고 죽음의식이나 자세와 련계된다 할 때 그것은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산 자의 고별식’-‘미리 치른 장례식’일진대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죽음문화이고 죽음철학임에 틀림없다.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충격에서 벗어나 올똘한 의식과 리성을 회복할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산 자의 고별이 합리하고 필요하며 미리 치른 장례식이 합리하고 필요한가고? <산 자의 고별식>의 저자는 여기에 손을 드는 듯하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서 인간의 권리로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마지막 례의이고 또한 자기 죽음에 대한 신고식이 된다는 의미로 더없이 멋진 일이 될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충격적인 사실에 림해 ‘경이로움과 처연함 그리고 짠한 슬픔과 이름할 수 없는 쓸쓸함’, ‘찬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드려야 할지’와 같은 복잡한 사상감정의 파노로마를 거쳐 죽음을 령혼승화로 보면서 자연스럽게 도출한 결론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충분히 우리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석연치 못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 우리의 무의식적인 자자연연自自然然한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전통적인 죽음의식이나 장례식이 전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한 존재인가. 하물며 현단계 인간은 너무 로고스-의식적이고 성적으로 살기만 하여 무미건조하고 피곤하며 힘들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명제 하나가 이 로고스해체가 아니던가. 그러니 굳이 죽음까지도 산 자 스스로 미리 직시하며 의식적이고 리성적으로 처리해야만 하는가. 적어도 감정상에서나 무의식상에서 죽음이 싫고 불행하고 무서운 존재일진대 이것은 너무 잔혹하다. <산 자의 고별식>의 주인공처럼 자기의 생일파티와 더불어 죽음의 고별식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느낌일가.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축하? 비애? 참, 난감하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순식간에 두 극단을 달리기가 힘들다. 그럼 축하도 아니고 비애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감정… 그래 굳이 인위적으로 이렇게 난감하고 어정쩡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가. 이른바 올똘한 의식과 리성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식으로 우리를 또 피곤하게 만드는 하나의 케이스가 아니겠는가… 여하튼 <산 자의 고별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켜 좋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던가.

허련순의 단편소설 <그가 가는 곳>은 현단계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화제인 소통과 치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이러저러한 상처를 안고 살기가 십상이다. 인간은 어떤 때 자기도 모르게 자기 혀를 깨물듯이 자기 스스로와도 부딪치며 자기 스스로가 미워날 때가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사는 세상에서야 더 말해 뭐 필요하겠는가. 물론 눈에 보이는 육체적 상처도 상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더 큰 문제가 된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마음의 상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돋보인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것이 무슨 심리상담이요, 정신분석이요, 신경과요 하는 것들이다. 일심동체라는 부부간도 마찬가지다. <그가 가는 곳>을 보면 녀주인공은 ‘이미 원상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다. 어떤 결과이든 그녀한테는 일방적인 상처일 뿐’이지 않은가. 사실 이 작품에서 녀주인공보다는 남주인공 준이의 상처가 더 심각하다. 준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남자가 방황하는 것은 어릴 적에 받은 상처가 깊어서 그러는 것’이지 않던가. 정신분석학에서 놓고 보면 이런 ‘어릴 적에 받은 상처’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아 그 사람이 성년이 된 마당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작품에서 보면 ‘배 다르고 성이 다른 네 아이들이 싸우거나 말썽을 일으킬 때마다 시어미 역정에 개 옆구리를 찬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쩍하면 막내인 준이한테 분풀이를 했다. 상대방이 데리고 들어온 자식을 욕하고 때리면 구설수에 오르고 마을에서 손가락질 당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친자식인 준이한테는 함부로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였던 모양이다.’ ‘형제들 역시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준이한테 풀기가 일쑤였다. 이런 이률배반적인 갈등 속에서 준이는 자신에게만 가해지는 폭력과 불평등을 겪으며 점차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고 형제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늘 혼자이고 외로웠다.’ 소설에서 이런 애정결핍증은 남주인공이 어릴 때 형이 가출하고 아버지가 나를 멀리하면서 더해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래동안 아버지를 원망했어.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들은 형 뿐이라고 말이야.”하고 늘 원망 속에 살아갔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듯한 형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남주인공 준이는 전형적으로 어릴 때 애정결핍증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어른이 된 마당에 ‘남자는 유난히 친구를 좋아했다. 단 하루라도 친구를 만나지 못하면 금단 증세를 보일 정도였다.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면 한밤중이라도 친구들을 불러냈고 심지어는 부부가 간만에 외식하는 자리에도 친구들을 불러내여 동석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남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였다. 밤중에 불리워나오거나 남의 부부 사이에 끼워 식사를 하는 것이 좋기만 하겠는가. 그들은 눈쌀을 찌프리거나 끊임없이 하품을 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썩 달갑지 않음을 나타내군 했다. 남자는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늦은 시간까지 지루하게 친구들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혹여 중간에 누가 먼저 자리를 뜨면 기어이 쫓아가서 데려오군 하였다.’ ‘그래서 친구를 많이 사귀였고 친구가 없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들어했는지도 모른다.’ 이상하고 병적인 데가 있다. 

소설에서 이런 애증결핍증도 결핍증이겠지만 남주인공 준이의 형에 대한 죄책감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이 죄책감이 이 소설의 기본 포인트가 되기 때문이다. 준이는 형의 가출이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의 가출에서 단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다. ‘형이 잘못되면 자신의 탓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린 시절부터 늘 불안했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이란 있을 수 없었다. 깨여있는 시간 뿐만 아니라 잠든 시간에도 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형이 돌아오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될 것이고 집안의 평화도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한 인간이 이런 죄책감에 매몰될 때 그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제정신이 아니다. 온 넋을 다 빼앗기는 마조히즘적이 되기 쉽다. 독실한 카톨릭신자가 신부 앞에서 고해성소를 할 때의 심정이라 할가. 어쩌면 준이가 바로 이렇다. 어른이 되여 결혼을 한 마당에도 마찬가지. 그는 자기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지 않는가. 형의 돌아옴이 그의 구세주에 다름 아니였다. 형은 결국 돌아왔다. 그런데 ‘희열이나 기쁨과 같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였다. 원망과 미움이 희열과 혼재하여 어떤 것이 진실한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실로 그것은 애증의 감정이리라! 일단 학수고대하던 형이 돌아왔으니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의식 차원의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자신의 지난 세월을 송두리채 빼앗아가버린’ ‘억울’함이 북받칠 때 ‘원망과 미움’이 자기도 모르게 휩쓸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무의식 차원의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형의 가출이 결국 형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기된 것임을 상기할 때 ‘형의 책임을 따지고’ 싶기도 하다. 이것 또한 또렷한 의식의 추궁이기도 하다. 의식과 무의식이 헛갈리는 애증의 감정,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실한 내면풍경이다. 사실 소설에서 ‘그가 가는 곳’은 바로 형이 있는 곳이다. 형이 돌아옴으로, 형을 만남으로 그는 자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정리하며 령혼은 평온을 찾는다.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여 그 형이 정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마음이 정리되고 령혼이 평온을 찾는 대로 그 형을 떠나고 싶고 잊고 싶다. 그 형은 주체적인 자아상실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이는 매번 형을 만나고 와서는 여느때와는 다르게 열심히 샤와를 한다. ‘조금 후 빠른 손놀림으로 온몸에 비누칠하는 소리가 매끄럽게 철버덕거렸다. 평소에는 한번의 비누칠로 끝났는데 웬 일인지 세번 네번을 덧칠하며 오래오래 씻었다. 꼼꼼하게 씻어내야 할 리유라도 생긴 것일가? 남자는 가죽이라도 벗겨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멎을듯 멎지 않고 끊임없이 질척거리던 물소리가 드디여 멎고 살갗을 쥐여짜듯 빠드득 빠드득 살을 털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샤와실에서 거듭 비누칠을 해가면서 빡빡 씻어내려고 했던 것은 구경 무엇이였을가.’ 사실 그가 씻어내려고 했던 것은 자기 령혼에 파고든 형의 모습이였을 것이다. 준이가 마지막에 운명하는 ‘형의 귀가에 대고 절규하듯 소리’친 ‘형! 우리 곁으로 돌아와줘서 고마워!… 잘 가!’는 그간의 사정을 집약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형이 돌아옴으로써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형이 세상뜸으로써 그의 음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한테로 가는 것이 그에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형, 아버지 사이에서 얽히고 맺힌 애증결핍증이나 죄책감 같은 무의식적 마이나스감정응어리가 풀린다. 보다 싶이 이 소설은 남주인공 준이의 차원에서 놓고 보면 애증결핍증과 죄책감에 부대끼는 한 인간이 자기를 찾고 ‘자신을 돌려받고 싶’은 령혼구제 과정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의 세월이 덜 억울할 것 같’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소통과 치유가 되겠다.

녀주인공 차원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 남녀 주인공은 이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혼이건만 트러블이 생긴다. 문제는 주로 남주인공한테 있는 듯하다. 그런데 녀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끊임없이 알아가고 리해해가면서 트러블은 해소된다. 처음 ‘녀자는 자신의 남자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러다가 ‘남자가 녀자한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처음 있는 일이였다.’ 리해의 실마리는 바로 이런 들려주고 들어주며 소통하는 데 있다. 이런 소통을 통해 서로 리해를 하게 되고 리해를 하게 되면 서로 치유가 되는 법이다. 여기서 리해가 관건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조화로움을 추구하며 ‘리해만세!’라는 말을 잘하는 듯하다. 리해를 하고 나면 인간적 동정이 앞서게 되니 치유가 쉽게 되는 것이다. “그 친구도 많이 외롭고 불쌍한 놈입니다…” ‘송의 말을 들으면서 잠간이지만 녀자는 마중물처럼 눈물이 고이’지 않던가. “그런 소리 여직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처음으로 남자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이 남자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오래도록 기다리며 방황한 것처럼 어쩌면 남자 역시 그녀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에게 자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기에 남자의 방황을 부추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소설에서 남녀주인공 사이 소통하고 리해하고 치유하는 데 녀주인공이 주동적이다. 녀성의 부드러움과 따뜻한 모성이 넘치는 소통과 치유의 퍼포먼스를 보자. ‘녀자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런 말을 왜 나한테 하지 않았어요?” ‘녀자는 가슴 끝이 시리고 아렸다. 아픔에서 그를 조금이라도 끌어내고 싶었다. 녀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며 하늘을 가리켰다.’ ‘녀자는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 들려 남자가 좋아하는 금잔화 한묶음을 샀다.’ 그러니 남주인공은 ‘참으로 오랜만에 환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는가. 그는 ‘금잔화를 사온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싶이 이 소설은 남녀주인공이 처음에 소통을 하지 않아 불리해로부터 오는 트러블로부터 마지막에 소통하고 리해하는 과정을 통해 화해의 하모니 속에 치유를 이끌어내고 있다. 소설에서 “아직도 부부의 진실이 뭔지 모르겠어…”라고 되뇌이고 있지만 실은 이런 소통과 치유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남녀주인공의 소통과 치유의 과정을 서로를 리해해가는 내면풍경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소설은 전형적인 심리소설이 되기에 충분하다. 남주인공의 애정결핍증과 죄책감을 둘러싼 무의식적인 표현 및 녀주인공의 사랑을 둘러싼 의식무의식적인 녀심, 그리고 남녀주인공의 호상 리해의 과정 등이 돋보인다. 우리 문단에 흔치 않은 심리소설임에 또한 <그가 가는 곳>은 충분한 값어치를 확보하고 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많다. 그것은 현대인간들이 세계화요, 국제화요 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개방화 시대에 살면서도 오히려 무슨 개성이요 자아중심이요 하며 리해득실에 얽힌 에고이즘 마음의 울타리를 쌓고 소통과 치유를 하지 않는 데 있다. 그래서 현재 소통과 치유는 범세계적인 문학주제의 하나로 되고 있다. 허련순은 우리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일찍 장편소설 《바람꽃》,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로 디아스포라문학, 장편소설 <중국색시>로 바로 소통과 치유의 문학을 개척하여 세계문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며 조선족문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단편소설 <그가 가는 곳>은 <중국색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중국색시>가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소통과 치유를 보여주었다면 <그가 가는 곳>은 부부 사이 소통과 치유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전형화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인류 보편의 소통과 치유 문제로 리해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처음 읽으면 삼각련애를 기본 틀로 한 전형적인 3류 대중소설을 보는 듯한 감을 준다. 점입가경으로 남자의 외도에 대한 의심이 녀주인공과 더불어 더 깊어간다. 남자의 늦은 귀가 및 이상한 행동, 안마원에서의 긴가민가, 남편의 동기를 만나 기막힌 사연을 얻어듣기, 남편의 숨겨놓은 계정에서 ‘선이란 녀자’의 메일 확인, 남편의 절친 송을 통한 ‘완벽한 복수와 일탈’… 남자의 사생활을 은밀히 보는 듯한 관음증에 만족을 주면서 말이다. 작가는 성동격서声东击西식으로 끊임없이 연막탄을 치면서 이런 의심과 관음증적인 만족을 최고도로 끌어올리다가 남자의 어릴 때 가정 내 불편한 사연을 드러내면서 그 의심과 만족을 고무풍선 터뜨리듯이 터뜨린다. 그제야 독자들은 정신이 확 들며 깨도가 되면서 3류 대중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특히 무의식적인 내면풍경을 추구하며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담론인 소통과 치유의 문제를 풀이하고 있어 가볍게 다룰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을 읽는 묘미 또한 여기에 있는 줄로 안다.

모두 모아 <산 자의 고별식>과 <그가 가는 곳>은 ‘나’도 한번 ‘고별식’을 해보고 싶고 ‘그 곳’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출처:<장백산>2017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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