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국경서 생사 넘나들던 보따리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2월20일 14시11분    조회:872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춘학
국경서 생사 넘나들던 보따리상 조선족 최고 기업가의 하나로
21C한중교류협회 ‘자랑스런 한중인상’ 수상, 김춘학中 금약그룹 회장



김춘학 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 흑룡강성 목단강시 녕안시. 조선족 2세인 소년은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했지만 친구들은 ‘조선족’이라며 무시하고 놀렸다. 한국 전라도가 고향인 어머니는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공산당원이 됐다. 당시 목단강시는 독립투사들의 근거지였다. 아버지는 조선 평양 출신으로 도로 기술자였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소년의 눈에 조선족 남자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이 싫었다. 이불 속에서 몰래 한국 방송을 들으며 조국을 그리워하던 어머니도 아들에게 집 밖에서는 한국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소년에게 조선족은 자신의 인생을 고달프게 하는 멍에일 뿐이었다. 200만 조선족 중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히는 김춘학(49) 중국 금약(金躍)그룹 회장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제 조선족임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흑룡강성의 입지전적 인물

  김 회장은 흑룡강성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2001년 부동산회사로 출발한 금약그룹은 한국과 중국에 IT·태양광발전 등 16개의 자회사를 가지고 있고 김 회장의 재산은 3000억원(한화 이하)이 넘는다. 흑룡강성에 가장 먼저 아파트를 건설한 것도 김 회장이다. 베이징, 해난도를 비롯해 현재도 상하이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 회장이 중국 전역에 개발한 땅이 330만여㎡에 이른다. 올해는 한국에 30M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 건설을 추진한다. 총 900억원이 들어가는 발전소 건설을 위해 한국에 100만㎡의 부지를 이미 확보해 놓았다. 금약그룹은 10년 동안 초고속 성장을 했다. 2009년에는 흑룡강성기업연합회와 기업인협회 공동주최로 선정하는 ‘흑룡강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인’에 꼽혔다.

  그동안 김 회장은 조선족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흑룡강성에 조선족 학교를 지어주고, 조선족 대학생 200명에게 매년 2억원씩 장학금을 주고 있다. 현재는 2선째 흑룡강성 인민대표직도 맡고 있다. 사업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국을 찾는 김 회장은 조선족 대표로 한·중 교류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21C한중교류협회(회장 김한규)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 김춘학 회장을 ‘자랑스런 한중인’으로 선정했다. 사단법인 21C한중교류협회는 한·중 리더들의 교류를 위해 2001년 설립, 중국인민외교학회와 자매결연을 하고 민간외교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월 8일 ‘자랑스런 한중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김 회장을 서울 중구 을지로1가 21C한중교류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단신인 김 회장은 다부져 보였고 눈빛이 살아 있었다. 한국어는 다소 어눌했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조선족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족들은 생활력이 아주 강인합니다. 제가 조선족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조선족을 무시하던 한족들이 이젠 저한테 꼼짝 못합니다."

  중국·러시아 조선족이 나를 살렸다

  그는 앉자마자 자신의 성공은 조선족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20년 전, 그는 맨주먹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혈기뿐인 보따리상이었다. 가난한 보따리상이 어떻게 수천억 거부가 됐는지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표가 없던 그를 일으킨 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병원에서 몇 달 동안 아들의 대소변 시중을 받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대학을 꼭 가서 열심히 공부할 것,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척은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조선족들이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막 찾기 시작할 때였는데 어머니는 고향이 어디인지도 안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도 친척들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요. 그래서 전라도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어머니 상을 치르고 딱 보름 후가 대학입시였어요. 밤낮없이 죽어라고 공부했습니다. 목단강시에서 1등을 했어요."

  목단강시상업간부학교에서 유통을 전공하고 중국 국영기업인 연료공사의 공무원이 됐다. 중국에 막 시장경제가 시작되던 때였다. "자리에 앉아 숫자놀음이나 하고 있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밀매가 성행하던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갔습니다. 중국 옷·장갑 등의 물건을 떼다 러시아 우스리스크 쪽에 넘기는 보따리상을 시작했어요. 당시 러시아는 물자가 부족했어요. 중국에서 물건을 떼다 팔면 10배가 남는 장사였습니다. 저와 같은 보따리상들이 중국과 러시아 쪽에 몇천 명이 있었는데 90%가 조선족이었습니다. 다들 컨테이너에서 살며 목숨 걸고 국경을 넘나들었습니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조선족의 생활력은 어떤 민족보다 강했습니다. 그 피가 내게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업가로서의 수완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무거운 보따리 메고 힘들게 다닐 것이 아니라 보따리상들의 물건을 배달해주면 돈이 되겠다 싶었다. 통관·배달 업무를 대행해주는 일종의 해외택배 물류회사였던 셈이다. 당연히 밀매였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경은 살벌했지만 뒷돈이면 다 통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온갖 불법과 뒷거래가 활개를 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동업을 하던 사업 파트너는 러시아 마피아의 총에 죽었다. 겁 없이 제 집 드나들 듯 국경을 넘나든 덕분에 10년간 물류사업과 무역으로 50여억원을 벌었다. 중국산 주철을 러시아에 팔고 구리, 목재, 자동차 등을 들여오는 등 통 큰 무역도 함께 했다. 그가 러시아에서 어려움 없이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조선족들 덕분이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이 큰 힘이었습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말도 하나, 문화도 하나, 조선족은 하나라는 것을요. 시베리아 쪽에 갔을 때였습니다.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시장을 헤매고 다니다 보니 조선족 할머니가 길에 앉아 김치를 팔더라고요. 너무 반가워했더니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 데려가서 밥상을 차려줬어요. 마치 가족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생각도 나고 '이것이 한 핏줄이구나'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 우리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공로패를 받고있는 김춘학 회장 (좌)

  "큰일 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죠."

  ▲ 지난 2월 8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린 21C한중교류협회·주한중국대사관 신년인사회에서 김춘학 회장(왼쪽)이 '자랑스런 한중인상'을 수상했다. photo 21C한중교류협회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에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사업 촉수가 재빨리 움직였다. 무역으로 번 돈을 들고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목단강시를 비롯해 중국 곳곳에 아파트, 상가, 지하상가, 백화점, 빌딩 등을 지어 팔았다. 국경 무역을 하던 시절, 관계를 잘 맺어 두었던 공무원들이 도움이 많이 됐다. 사업은 불같이 일어났다. 그는 첨단산업 쪽으로 눈을 돌렸다. 2006년 한국의 '주식회사 셀루온'을 인수하고 미국이 특허를 갖고 있는 컴퓨터 레이저키보드 기술을 사들였다. 베이징, 서울,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신제품연구개발기지도 설립했다. 2008년엔 한국의 '주식회사 레테크'를 인수,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2010년엔 LED용 기초소재인 사파이어 잉곳을 생산하는 '흑룡강금우신에너지유한회사'도 설립했다.

  김 회장에게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에 대해 물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먼저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기업은 준비가 돼 있지만 중소기업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뭘 할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중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중국인들을 의심합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인들에게 많이 속지 않습니까? 중국을 제대로 모르니 중국인에 대한 판단도 잘못하는 겁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중국인들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요즘엔 죽을 둥 살 둥 일합니다. 한국 기업이 더 긴장하지 않으면 앞으로 첨단기술 시장도 중국에 다 뺏길 수 있습니다."

  그는 최근에 중국 유학이 늘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조언을 했다. "졸업 후에 한국 기업보다 중국 기업에 들어갈 것을 권합니다. 월급은 적지만 몇 년간 일하다 보면 중국이 제대로 보일 겁니다. 그 후에 자기사업을 하면 훨씬 잘할 수 있습니다."

  김 회장은 한·중 교류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은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고 중국은 시장이 무궁무진하게 넓습니다. 한국과 중국 문화를 모두 잘 알고 있는 제가 한·중 교류의 기초가 되고 싶습니다. 큰일을 많이 하려면 회사도 더 키우고 돈도 많이 벌어야죠."

  할 일이 많은 만큼 김 회장의 포부도 크다. "IT 사업은 연내 미국 상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태양광은 한국 1위, 사파이어 잉곳은 중국 1위가 목표입니다. 5년 내 연매출 100억위안, 중국 민영기업 500위에 이름을 올리고 싶습니다."

  김 회장은 공부도 열심이다. 8년째 칭화대 대학원에 적을 두고 한 달에 이틀은 꼬박꼬박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는다.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려면 충전이 필요하단다. 어린 시절 조선족으로 살지 않는 것이 목표였던 그는 이제 조선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 목표가 됐다. 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띄우던 청국장 냄새에 질려 '제발 한국음식 좀 안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가 김치와 된장찌개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 덕분에 만족 아내는 물론 장모님까지 한식 요리법을 배워야 했다. 그에게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자신의 뿌리를 확인시키고,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다. 그가 직접 이름을 지은 금약그룹은 '김씨가 일어난다' '조선족이 도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뿌리가 단단한 만큼 그의 도약은 힘찰 것이다. /주간조선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12월 11일 오전, 2012년 연변TV 양력설특집 촬영차로 연변을 찾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정원수씨를 만났다. 엔티테인먼트 소속 명휘씨(가수)도 동행했다.   정원수 그는 누구인가   정원수씨는 노래 “북경아가씨”, “로무현 추모곡”’등 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1960년, 한...
  • 2011-12-12
  • [료녕조선문보 2011-12-09 김룡호기자  ]특별기획-중국조선족기업인(25) -대련선성물류 엄광철리사장을 만나다 엄광철(厳光鉄)프로필   1975년 5월 길림성 훈춘시 출생 1995년 7월 연변대학 졸업 1995년 8월-2003년 12월 한국우진글로벌로지스틱스(주)대련사무소 대표 2000년 9월-2002년 12월 청화대학 EMB...
  • 2011-12-09
  • 연변가무단 가수 겸 타악기연주원 김상운의 이야기       둥근 달님이 떠오르면 어머님 얼굴 보고싶소       밝은 별빛이 반짝이면 어머님 말씀 듣고싶소       세월이 흘러흘러서 이 몸은 자랐어도       어머님 무...
  • 2011-12-09
  • 연변대학 예술학원 리훈박사의 이야기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표현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고있는 리훈은 연박한 지식과 과학적인 방법론, 끈질기게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 그리고 강인한 의력과 분투정신을 가진 학자이다. 그가 박사학위론문으로 내놓은 학술저서 《중국조선족공연단체에...
  • 2011-12-07
  • 새농촌건설에서의 통화현 조선족농촌 현황(2) 지난 세기 50년대 량질입쌀생산으로 주은래총리로부터 상장 수여받아 서선촌 리경수서기. [길림신문 2011-12-06 장춘영 홍옥 기자 ]서선촌은 통화현 강전진의 소속으로서 통화현의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통화현 소재지인 쾌대무진과 31킬로메터 떨어져 있다. 통...
  • 2011-12-07
  •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 박자윤교장   료녕성내에서 유일한 조선족사범전문학교인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가 건교 60주년을 눈앞에 두고 교원학력을 대학본과 100%, 석사과정 30%, 박사 및 박사과정 3명, 교수직함 4명을 실현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날로 어려워지고있는 환경조건에서 학교의 발전 전망과 수요에 근거하여...
  • 2011-12-06
  • [인터넷료녕신문 2011-12-06 김룡 호기자]  지난 4월 최무삼(조선족)씨가 심양시군중예술관 신임관장으로 취임하여 예술관은 전례없는 변화와 주렁진 성과를 이룩한것으로 알려졌다.   1956년에 설립된 심양시군중예술관은 정부의 공공문화사업의 직능기관으로, 심양시 800여만 군중을 대상으로 문화사업의 번영을...
  • 2011-12-06
  • 흑룡강성교육학원 김동규씨 흑룡강성 조선어전업 연구원으로  조선어분야서 두터운 실력으로 주렁진 성과   (흑룡강신문=하얼빈2011-12-05) 흑룡강성교육학원의 김동규선생이 조선어전업 연구원(정교수)으로 진급하였다. 이는 흑룡강성 조선어문분야에서 정만석, 류남현에 이어 세번째로 정교수가 출현한것이다.  ...
  • 2011-12-06
  •   중한 수교 20주년 기획-《고마운 한국인들》(1) 40명 중국 선천성심장병어린이들에게 재생의 은혜 베푼 이기영사장 [편집자의 말] 래년은 중한 수교 20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중국과 한국은 제 분야에서 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현재 중국상주 한국인 60여만명, 중국에 다녀오는 한국인은 해마다 300만명을 초과하...
  • 2011-12-05
  • [길신 2011-12-02 종합]최승희는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 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8.15해방이전의 한국무용계를 주도했다. 1911년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두번이나 월반하여 1925년 숙명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숙명여고에 다닐 때 졸업후 동경[東京] 음악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 2011-12-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