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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는 도전 영원한 젊음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9월11일 10시23분    조회:1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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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강순화




아름다운 녀성리더 강순화 그는 누구인가?
 
헌신과 책임감으로 "생명의 열선"상담소를 이끌어온 소장 강순화 

오늘날 복잡한 삶의 과정에서 심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따라서 상담활동은 개인의 일만이 아닌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홀시못할 하나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변생명열선, 녀성열선(273-9595, 296-1004)"은 바로 이러한 취지로 하여 1995년 연변대학 민족교육원에 개통되였고 녀성학 연구원인 강순화선생이 이 상담소 소장직을 겸직으로 맡아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년간 이 상담열선은 사회 방방곳곳에서 걸려오는 수천여통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들을 보면 주요하게 청소년교육문제, 혼인가정문제, 법률상담문제, 취업문제, 정보교류와 성상담 등등 이였는데 래담자의 80% 이상이 녀성들이였다. 이만큼 녀성들의 문제가 절실한 것이 현실이다.

  "녀성이 밝아야 사회가 밝다"고 하지 않는가? 녀성을 일컷는 "안해"란 말은 어쩌면 집안의 해(태양)라는 말인듯 싶다. 집안의 해가 빛나면 사회도 환히 밝아지지 않겠는가?! 강순화소장의 이끄는 생명열선, 녀성열선은 언제나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는 어머니처럼, 항상 그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오랜 친구처럼 그 누구의 그 어떤 문제든지 래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과 래담자의 아픔을 나누려는 뜨거운 가슴으로 귀를 기울리고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상담원들의 따뜻한 목소리는 래담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정시하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가질수 있게 하였다.

 가정의 행복을 찾고 인간관계가 더 밝아지게 하는 일에 좀 더 전문적인 지식과 사랑을 불어 넣어 온 사회가 조화롭고 안정되게 함에 자신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저 하는 것이 강순화소장의 소망이라고 한다.

소리없이 빛나는 사회의 한 일각에서 자신의 정열과 마음을 몰부으면서 고민에 울고 상처에 아파하고 갈등에 신음하는 수많은 사회의 약자들을 도와 희망의 앞길을 밝혀주는 “열선전화” 상담소의 중심에는 언제나 강순화소장의 끈질긴 노력과 심열이 슴배여 있었다.


 1995년 "생명열선" 상담소가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할때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 유용성과 효률성을 념려하였다. 무료자원봉사로 어떻게 그 일을 할수 있을까? 심리자문이나 면접전문가의 립장에서는 더더욱 긍정적인 시각만이 아니였다. 그러나 연변생명의전화, 녀성의 전화는 18년간 강순화소장을 중심으로 한 전체 상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사랑으로 오늘날까지 견지되여 왔고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연변대학에서는 "뛰어다니며 일하는 녀성"으로 불리는 강순화소장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휴식일이 따로없이 상담소 회원들을 조직하여 부단히 전문지식을 배우고 상담사례들을 연구하며 상담원들의 자질제고를 위해 힘쓰고 있다. 상담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사랑”임을 강조하는 강순화소장은 늘 래담자의 목소리를 내심히 경청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래담자와 고민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립장에 서서 그들의 아픔과 고통, 방황과 갈등을 함께 헤아리면서 그들 하나하나의 애로를 해결함에 늘 최선을 다해왔다.



어제는 일본땅에서 방황하는 조선족 류학생 친구와 고민을 나누었고 오늘은 마작판에서 세월을 보내는 젊은 애기엄마와 인생선배로서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했으며 련 몇일은 또 차마 말못할 성 침해의 악연으로 하루속히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한 청년의 기막힌 사연도 함께 헤아려 나가야 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힘이 되고 그 말의 참뜻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하는 것이 이들 상담원의 지혜이고 기쁨이며 그것이 바로 강순화소장이 바라는 “아름다운 삶”이자 하나의 “작은소망”이라고 한다.

 
“소화룡촌 집체호”의 따뜻한 식구 -- 인간 강순화

  매주 일요일 아침 여덟시반이면 하남시장 앞 뻐스역에서 어김없이 14선공공뻐스를 기다리는 강순화 소장과 “집체호” 성원들을 볼수 있다. 울긋불긋 산뜻한 캐주얼차림으로 맛있는 과일과 반찬들을 멜가방에 둘러메고 젊은이들처럼 신나게 웃고 떠드는 그녀들은 바로 “소하룡 집체호”로 향하는 식구같은 멤버들이다. 뻐스에 올라 즐겁게 이야기꽃 피우며 달려가는 연길시교 동쪽 소하룡촌 그곳에는 십여명의 “집체호”식구들이 주일마다 친 자매마냥 모여서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따뜻한 대 가정을 이루고 있다.

 "집체호를 꾸리게 된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집체호는 바로 저 산너머에 두고 온 우리들의 “청춘”이지요. 청춘...그 청춘을 지금 이 이순의 나이에 다시 즐기고 있는거랍니다. 철모르던 그 젊은시절의 청춘과는 다른, 년륜과 여유로움이 넘치는 로련한 “청춘”이지요. 그냥 “집체호”라는 이 이름자체가 젊음이고 즐거운 거지요. 특히 집체호 식구들의 실천활동과 단련에는 최고의 환경이구요. 마음맞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도 재미나고 남다른 생활체험이지요. 봄이면 농민아저씨들의 지도를 받으며 기와집 앞뒤의 넓은 터밭에 채소와 곡식을 심고 여름이면 불볓에서 땀흘리며 기음을 매고 가을이면 그 열매와 수확에 환희와 기쁨을 만끽하지요. 여가에는 뒷산에 올라 “야—호”를 부르며 등산도 하고 강변에 뛰여가 미나리도 캐고 … …  주일마다 복잡한 도시의 소음을 멀리 떠나 푸르른 산촌마을 오붓한 “집체호”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유쾌한 하루를 보낸다는 것에 특이한 쾌락을 느끼고 있는거죠." 강순화 소장의 신나는 대답이다.

 1968년 가을, “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대로 강순화학생도 광활한 천지 -- 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려 떠났었다. 당시 전국의66, 67, 68년급 3기의 초,고중졸업생 8천만 학생들은 이렇게 청춘의 아름다운 추억을 광활한 천지라는 “저 산너머”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고3 학급의 공청단서기로 대학에도 추천되였고 학교에서 유일한 학생당원 발전대상이 되여 입당비준도 눈앞에 두었던 그 황홀한 시각, “문화대혁명”이라는 먹장구름은 그녀의 모든 희망과 꿈을 흔적없이 파묻어 버렸다. 선택도 농촌이요, 희망도 미래도 광활한 그 대지-- 농촌에 두어야 했다.



7년반이라는 기나긴 그 춘하추동을 함께 했었던 그 산간마을, 저 산너머에 아픔과 방황만 있었던 건 아닌것 같다고 그녀는 담담히 말한다.
“지식청년 회고록”에 담겨진 강순화소장의 글 한구절을 옮겨 본다.

“한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당년의 지식청년답게 씩씩하고 후회없이 인생의 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40여년 전의 그 하향지식청년 집체호의 생활을 추억에 남기며 당년의 그 집체호 식구들이 이제 만년에 다시 모여서 밭에 나가 농사도 짓고 부엌에 불지핀 온돌구들에 모여 앉아 여러가지 학습자료로 공부의 시간도 가지면서 세상만사도 담론하고 생활의 지혜와 건강상식도 교류한다. 지나간 옛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내여 "아~ 그때는 정말 철이 없었지"하면서 솔직하게 친구들께 속내를 터놓는 그냥 그 녀자, 인간 강순화였다. 학술계에서나 녀성계에서의 그 리더쉽, 그 카리스마 넘치는 당찬 모습과는 달리 순진하면서 어리숙한 그냥 그 녀자였다.

 밭에서 우리 손으로 농사지은 월빙이라면서 가지, 고추, 옥수수와 단호박을 한가방 챙겨주는 친정 엄마같은 그냥 따듯한 분, 김 매고 고추따고, 밥 푸고 … … 집체호에서의 강순화소장의 그 모습은  푸근하고 편안한 시골 고향집 이모같은 그 모습이였다.

 금년이면 이 소하룡 “집체호”생활도 어느덧 삼년째라 인젠 식구들 모두 농사 경험도 쌓고 농촌 생활에도 잘 적응되여 간다면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배우며 집체호친구들 모두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램이였다.


“중국조선족문화와 녀성문제연구” 저자 강순화 이제는 숨쉬는 프리랜서로

얼마전에 프랑스에 류학한 한 한국 녀학생이 찾아왔었다. 한국학술정보(주)에서 펴낸 강순화교수님의 “중국 조선족 문화와 녀성문제 연구”라는 저서를 보고 자신의 “조선민족연구” 석사론문 집필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존경과 믿음의 마음으로 만리길을 멀다 않고 직접 만나 뵙고싶고 지도를 받으려고 찾아 온 것이다.

“문화대혁명” 광란의 시기를 거친 녀성들 중에서는 연구원, 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분이 많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특정된 환경이 그 시대의 녀성들을 피해자의 장본인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역경속에서도 강순화교수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성법관이 되는것이 꿈이였다는 그녀는 “배움에는 년령도 정해진 시기도 없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출산하고 두달도 되지 않는 몸으로 당년 로3계 (66,67,68년급) 학생들에게 어렵게 주어진 1978년의 대학입시에 응시할수 있었다. 시험장에서 산후로 인해 퉁퉁 부은 얼굴에 반나절이나 수유를 못한 탓에 터질듯 뿔어 오른 젖가슴으로 웃옷 앞섭이 몽땅 적셔 버리자 시험감독관은 련속 휴지를 날라주며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고 한다. 그런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뒤늦게나마 대학본과를 마치고 그후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드팀없이 사업할수 있었고 맡은 바의 연구과제와 각종 학술활동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룩할수 있은 것이다.

 1989년,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중심의 초창기부터 중국의 석학 정판룡교수를 보좌하면서 여려차례 한국학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성황리에 개최하였을 뿐만아니라 “조선-한국학총서”, “간명한국백과전서”, “21세기와 중국조선족”,”정판룡 세계를 가다” 등 무게있는 학술저작과 기행문들을 편찬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억센 사나이”(중문 상,하), “중국조선족문화와 녀성문제연구” , “중국조선민족 민속연구”, “중국조선족 녀성연구” 등 저서들을 중국과 한국에서 출판하였으며 50여편의 무게있는 론문들을 국내외 각종 학술간물에 발표하였는데 “직업녀성의 이중 배역 충돌” 론문은 학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재직시 몰입했던 학술연구의 그 기분 그 열정 그대로 퇴직후에는 짬짬이 쓰고싶은 글들을 쓰면서 살아움직이는 프리랜서로 활약하고 있다.

“미국에 갔을 때, 우리 조선족들의 그 감명깊은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필을 들지 않을수가 없더구만. 밤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벽이 될때까지 컴푸터 앞에 앉아 키버드를 두드렸지. 인물취재나 인터뷰를 마치고 글 한편을 마무리하면 마치 나에게 맡겨진 새로운 임무 하나를 완성한듯 가슴이 뿌듯하고 성취감에 도취되거든 … …”

이렇게 미국에 가면 미국에서, 연길에 있으면 또 일상생활과 삶의 주변에서의 인물실화들을 열심히 써서 수차 매체에 발표하였다. "연변녀성"에 실렸던 “미국 땅에서 만난 연길아줌마’, “로스안젤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 녀인’”, '장백산'잡지와 "중국민족", '로인세계"등에 발표했던 “미국서부 기행”, “대학가에 피여난 사랑 이야기”,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등 문장들은 해내외 우리 동포들의 생활과 우리들의 일상속에서 걸러낸 아름다운 실화들이다.

강순화녀사와 같은 이런 정열에 넘치는 칼럼니스트들이 없었더라면 그같이 감명깊은 이국땅에서의 우리민족 이야기들과 우리 주변의 삶의 이야기들을 누가 우리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을까 하고 반문하게 된다.

그녀의 학구열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배움의 좋은 시기란 따로없다는 강순화교수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하면 된다”가 자신의 인생 좌우명이라고 하면서 오직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꿈”은 언제인가 꼭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젠 출근족 행렬에서도 벗어 났으니 여유가 있어 나름대로 꾸준히 삶의 이야기들을 써볼 것이요… …" 하면서 넌지시 미소를 보이는 강순화교수의 알찬 계획은 언젠가 꼭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리라 믿는다.



 
마무리를 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부단히 창조하는 녀인 강순화! 그 이름 앞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너무 많다. 녀성계의 리더이자 상담소 소장, 집체호의 코기러기, 퇴직 녀교수협회 책임일군이며 녀성학연구원인 강순화교수, 그 어느 일에서도 정열과 지혜를 몰붓는 그녀, 지금은 또 무명의 프리랜서로 뛰고 있다. 2의 인생 길에서 쉼없이 도전하며 삶을 충실히 가꾸고 있는 그녀를 두고 모두들 “젊음을 창조하는 우리의 녀성리더” 라고 자랑스레 부른다.


조글로미디어(www.zoglo.net)
김성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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